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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1997)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촛불에 덴 보수언론

안티조선운동 몇년이 하지 못한 일을 촛불은 단 며칠 만에 이루어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미국산 쇠고기에 섞여 들어온 뼈 조각 하나에도 호들갑을 떨던 조중동. 갑자기 논조를 180도로 바꾸어 미국산 쇠고기가 안전하다고 떠들어대다가 본색을 들켜버렸다. 촛불집회의 배후에 선동세력이 있다는 보도에 자발적으로 집회에 참여한 시민들은 ‘애먼 사람도 졸지에 빨갱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번 촛불집회가 보수언론의 본색과 행태를 직접 몸으로 체험하는 귀한 기회가 되었던 것이다. 대중이 갑자기 등을 돌리자 심각한 위기감을 느낀 모양이다. 조중동의 지면은 온통 촛불에 대한 원한으로 넘쳐흐른다. 그중의 어떤 기사는 마치 한여름 텔레비전의 납량특집을 보는 듯하다. 특히 공영방송을 겨냥한 <조선일보>의 사설에서는 어떤 섬뜩함마저 느껴진다. “KBS, MBC가 전경 어머니들 마음을 매일 밤 인두로 지져댄다.” 21세기 디지털 시대에 기껏 조선시대의 고문방법을 끄집어내는 이 몰취향한 수사학은 그들이 이 정국에서 얼마나 불안감을 느끼는지 보여줄 뿐이다. <중앙일보>에서는 사진 연출까지 했다. 식당에서 미국산 쇠고기를 구워먹는 시민은 <중앙일보>의 기자들로 드러났다. 에는 검사 다섯명. 그럼 이 뻔뻔한 조작에는 검사가 몇명이나 붙어야 할까? 해명에 따르면, 식당에 다른 손님들도 있었으나 촬영을 거부하는 바람에 그랬단다. 하지만 손님 중에 촬영에 응할 사람이 없다는 것 자체가 이미 뭔가 말해주는 게 아닐까? 기사를 쓰는 대신 콘티를 짜는 이 해프닝에서 우리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되도록 빨리 기정사실화하고 싶어하는 그들의 조급함을 본다. 압권은 어느 <조선일보> 꼬마 기자의 기사다. 어느 인터넷 카페에 ‘집안의 쥐XX를 잡고 싶다’는 농담 글이 올라오자, 그것을 ‘이명박 대통령 암살 기도’로 규정했다. 이 기사는 충분히 나의 흥미를 끌었다. 촛불집회를 테러리즘으로 낙인 찍으려는 데서 확인되는 거시정치적 의지. 그리고 이런 막장 크리를 통해서라도 사내에서 인정받으려는 젊은 기자의 푸르른 미시정치적 야망. 아마도 이 두 가지가 합쳐져 농담을 농담으로 알아듣지 못하는 이 꼬붕 기자의 과도한 해석학적 진지함을 낳은 것이리라. 네티즌은 즉각 ‘쥐XX=이명박’이라는 공식을 제공해준 <조선일보> 조백건 기자의 해석학적 친절함에 감사를 표했다. 이 해프닝은 이렇게 폭소로 끝났어야 한다. 황당한 것은 그 다음. 그 농담 글을 올린 네티즌에게 경찰에서 수사를 나왔다고 한다. 하니 청와대에서 수사를 지시했다나? 이렇게 농담을 농담으로 알아듣지 못하는 청와대라면, 앞으로 쥐약 파는 동네 약국을 모두 압수수색할지도 모르겠다. ‘쥐를 잡자’ 티셔츠를 입고 다니는 시민들은 암호로 암살지령을 내린 게 되나? 시청광장에 다시 수십만의 시민이 모였던 지난 7월5일. 광화문에 있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사옥은 수십대의 경찰차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시민과 독자로부터 버림받고 검찰과 경찰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언론사의 몰골. 경찰 버스의 바리케이드 뒤로 숨은 보수언론의 사옥은 내게 깊은 시각적 인상을 주었다. 어느 여당 인사가 ‘보수언론이 사회에 기여한 것은 없느냐?’고 했던가? 세상의 미물도 다 존재이유가 있을 터, 보수언론이라고 사회에 기여한 게 왜 없겠는가. 솔직히 고백하건대 나도 촛불집회 중에 동아일보 사옥에 달린 화장실을 두 차례, 조선일보가 있는 코리아나 호텔의 화장실을 한 차례 사용한 바 있다. ‘사회의 공기’(公器)가 되기를 거부한다면, 최소한 이렇게 사회의 변기(便器)라도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바지의 지퍼를 올리며, 나는 드디어 보수언론에 제 몫을 찾아주었다는 뿌듯함을 느꼈다.

[존 셰인필드, 데이비드 리프] “오노 요코가 개인 소장품을 기꺼이 공개한 것에 감사한다”

비틀스 이후 솔로로 활동하던 시절 존 레넌에 관한 다큐멘터리 <존 레논 컨피덴셜>의 공동감독인 존 셰인필드, 데이비드 리프와 서면으로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비틀스에 관한 기록 필름이 이미 다량 공개된 마당에, 사후 30년이 다 되어가는 음악가를 이제 와 영화로 다루려는 이유가 뭘까 궁금했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 이런 궁금증이 풀린다. 세상에는 잘 아는 것 같은데 실상은 모르는 것들이 많다. 영원한 팝의 전설 비틀스 시절 이후 40살의 나이로 요절하기까지 존 레넌의 삶도 그런 종류인 것 같다. 더불어 그가 고민했고 겪었던 사회현상들이 결코 과거의 일만은 아니라는 점도 알게 된다. 존과 데이비드 감독은 자신들의 작품에 대한 애정과 다큐 작업에 대한 열정이 묻어나는 매우 성실한 답변을 보내주었다. -존 레넌에 대한 다큐를 만들려는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 존 셰인필드: 존 레넌만큼 유명한 사람에게 잘 알려지지 않는 이야기를 찾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다. 비틀스와 존 레넌의 팬으로서만 흥미를 느낀 것이 아니라 표현의 자유, 정부의 권력 남용, 숱한 장애를 이겨내는 용기, 혼자서도 변화를 이룰 수 있다는 신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로웠다. 데이비드 리프: 비틀스를 찬양하며 십대 시절을 보냈다. 닉슨이 대통령이던 시절, 열일곱살 때 워싱턴DC에 있는 조지 워싱턴 대학에 입학했는데 그곳은 당시 수백, 수천명의 시위대가 몰리는 중심지였다. <존 레논 컨피덴셜>의 주제를 관통하는 사건의 최전선에서 학생 시절을 보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영화에는 닉슨 정부 인사부터 좌파운동가까지 다양한 사람들의 인터뷰가 들어 있다. 이들을 인터뷰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는지. 데이비드 리프: 닉슨 수뇌부였던 G. 고든 리디와의 인터뷰가 가장 도발적인 작업이 아니었을까. 그는 닉슨 정부가 내렸던 모든 결정이 당시 상황을 고려하여 반드시 필요하고 적절한 조치들이었다고 했고 정말로 그렇게 믿는 것 같았다. 그 결과 법적으로 처벌을 받고 수감생활을 했음에도 말이다. 인터뷰 도중 서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존 레넌에 관한 새로운 자료들이 많이 보인다. 자료를 모으는 데 어려움은 없었나. 존 셰인필드: 이전 다큐멘터리에서 사용되었거나 사람들이 이미 본 영상에 안주하고 싶지 않아서 전세계를 다녔다. 존과 요코가 1969년 비엔나에서 벌인 자루 이벤트나 비틀스 화형식 장면, 존이 마침내 영주권을 받는 뉴스 필름 등은 그런 고생 끝에 얻은 것이다. 데이비드 리프: 전세계를 통틀어 도움을 준 훌륭한 친구들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오노 요코가 개인적으로 소장하던 기록물을 기꺼이 공개해주었던 것에 감사를 표하고 싶다. -새삼스럽게 존 레넌을 조명하는 것은 시대를 초월한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목적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를 통해 전달하려는 가장 핵심적인 메시지는 무엇인가. 존 셰인필드: 이 영화의 주제는 한 사람이 변화를 이끌 수 있고 모두가 그것을 진심으로 믿고 노력해서 세상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데이비드 리프: 미국 시민들의 책무는 바뀌지 않았다. 분노를 표현해야 하고 이 거대한 민주주의의 실험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민주주의란 정부가 사람들의 의지를 꺾도록 그저 내버려두지 않는 것이란 사실을 관객이 이 영화를 통해서 받아들였으면 한다. -과거 자료와 현재의 인터뷰 내용을 섞어 편집하는 과정이 쉽지 않았을 것 같다. 편집 과정에서 아깝게 버린 내용이 있는지. 존 셰인필드: 일명 ‘존의 잃어버린 주말’라고도 불리는 여러 가지 장면을 편집해놓았는데, 전기영화였다면 너무나 꼭 맞는 장면이었겠지만 우리가 다루고 있는 주제와는 맞지 않아서 포기했다. 예술과 상업성 사이의 줄다리기는 다큐멘터리 감독에게 늘 있는 일이다. 데이비드 리프: 탁월한 편집자 피터 린치가 있어 가능했다. DVD라는 매체가 생겨나면서 편집하는 일이 훨씬 수월해졌다. 편집에서 잘려나간 장면이나 에피소드가 재활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수십 시간에 달하는 인터뷰 영상은 사료로 가치가 있으므로 적절한 아카이브에 보관하면 좋을 것 같다. -앞으로도 둘이 함께 작업할 계획이 있나. 존 셰인필드: 현재 미국 텔레비전 역사상 가장 전설적인 프로듀서였던 노만 리어에 대한 회고 다큐멘터리를 함께 만들고 있는데 제목이 <모두 한 가족>(All in the Family)이다. 그외에도 각자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최근에 <천국>(Heaven)이라는 영화를 거의 끝마쳐가고 있는데 세계의 종교가 천국을 어떻게 생각하고 특정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천국에 가기 위해 어떠한 삶을 사는지를 다루는 작품이다. 또한 야구를 소재로 하는 다큐멘터리를 작업 중이다. 두편 다 2009년 봄쯤이면 선보일 수 있을 것 같다. 데이비드 리프: 노만 리어에 관한 프로젝트를 마치면 각자의 관심사로 돌아가게 될 것 같다. 요즘 다큐멘터리 구성안을 짜는 한편, 다큐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

<엑스파일: 나는 믿고 싶다> 멀더는 왜 믿고 싶은가, 스컬리는 왜 믿지 않는가

익숙한 멜로디와 함께 <엑스파일: 나는 믿고 싶다>는 눈으로 덮인 미국의 한적한 도로와 그 위를 헤드라이트를 켠 채 지나가는 자동차를 따라가며 시작한다. 텔레비전 시리즈의 분위기 그대로 조용하고, 스산하고, 불길하다. 자동차에서 내린 여인은 곧 정체불명의 괴한에게 쫓기기 시작하고 다음날 환영을 통해 여인이 공격당하는 것을 목격했다는 신부를 따라 FBI 요원들이 그녀의 시체를 찾아 눈 위를 수색하는 장면이 교차편집된다. 그리고 신부가 가리키는 곳을 파서 발견하는 것은 잘린 누군가의 팔. 지난 2002년 시즌9를 마지막으로 시리즈의 막을 내린 <엑스파일>의 두 번째 극장판인 <엑스파일: 나는 믿고 싶다>는 ‘그리고 그 이후, 멀더와 스컬리의 이야기’이다. 텔레비전 시리즈가 ‘저 너머에 있는 진실’을 찾아 나서는 이야기였다면 ‘나는 믿고 싶다’라고 이야기하는 이번 작품에서는 이제 외부가 아닌 두 캐릭터의 복잡한 내면에 집중한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난 뒤의 두 사람. 스컬리는 가톨릭 교회가 경영하는 병원에서 의사로 일하고 있고, 멀더는 세상과 격리되어 자신의 조그마한 방에 갇혀 살아가고 있다.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같은 공간에서 살아가는 두 사람. 같은 침대에 누워 있지만 더이상 같이 일하지 않기 때문일까, 둘 사이는 오히려 더 소원해 보인다. 외계인에 납치된 여동생에게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멀더만큼이나 스컬리 역시 아들 윌리엄이 남기고 간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던 차에 사라진 FBI 요원을 찾는 데 협조해 달라는 요청이 스컬리를 통해 멀더에게 들어온다. 사라진 요원을 찾아낼 수 있는 유일한 단서인 환영을 본다는 조셉 신부 때문이다. 엑스파일이라는 어둠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스컬리와 여전히 그 어둠을 거부할 수 없는 멀더는 그렇게 한 발자국 더 멀어지기 시작한다. 엑스파일 특유의 외계 존재를 포함한 초자연적인 현상과 그를 둘러싼 음모론을 상당히 희석시킨 이번 극장판에서는 미스터리 그 자체보다는 그를 바라보는 해석의 문제, 맥락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되는 언어의 다의성을 탄탄하게 드라마화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믿음과 과학 사이의 서로 한치의 물러섬도 없는 오랜 논쟁에서 결국 공감하고 동의하게 되는 부분은 무엇이 진실이냐가 아니라 결국 모든 것은 개인의 선택이라는 데 있다. 그리고 그 선택의 과정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조리한 것이다. 나는 믿는다가 아닌 나는 믿고 싶다라는 말은 참 가장 보편적인 바람이지 않을까. 그렇다면 멀더는 왜 믿고 싶은 것일까. 스컬리는 왜 믿지 않은 것일까. PS. 멀더와 스컬리 커플의 팬이라면 영화가 끝나고 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기다려야 할 듯.

[크리스 카터, 프랭크 스파니츠] “우린 둘 다 워터게이트 사건을 보며 자란 세대다.”

지난 7월20일, 베벌리힐스의 포시즌 호텔에서 데이비드 듀코브니, 질리언 앤더슨과 시리즈 원작자이자, 감독 및 각본을 맡은 크리스 카터와 함께 각본을 맡은 프랭크 스파니츠와의 라운드테이블이 이루어졌다. 크리스 카터 감독, 프랭크 스파니츠 공동 각본가 인터뷰 -당신도 믿고 싶은가. 크리스 카터: 그렇다. 믿고 싶다. ‘나는 믿고 싶다’는 시리즈 처음부터의 슬로건이기도 했고 믿음의, 믿음을 둘러싼 인간의 고뇌를 잘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무엇을 믿느냐라는 것, 믿고 있는가라는 것은 내게 무척 개인적인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그건 캐릭터에게도 마찬가지고. 프랭크가 회의하는 사람이라면, 나는 믿는 사람이다. 신이라든가, 영적인 무엇인가와 같은 더 큰 어떤 존재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93년에 첫 방영되기 시작했던 텔레비전 시리즈에는 정부와 권위에 대한 불신이 아래에 흐르고 있었다. 이번 작품에서도 여전한데 두 사람 중 누구의 시각에 기반한 것인가. 크리스 카터: 우리 둘 다 워터게이트 사건을 보며 자란 세대이다. 파일럿을 썼던 90년대 초반에도 그 시각이 여전히 유효했다. 우리 두 사람의 공통된 시각이라고 보면 되겠다. -영화와 텔레비젼 시리즈의 방향이 다르다. 프랭크 스파니츠: 텔레비전 시리즈에서 파생되었지만, 그 연장선상에서 존재하는 영화가 아니라 그 자체로 완결성이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기존의 마니아 팬뿐만이 아니라 <엑스파일>을 모르는 관객에게까지 소구력을 가지고 싶었다. 그게 스튜디오의 요구사항이기도 했고. 그래서 초과학적인 현상을 다루는 것을 누구보다 좋아하지만 이번에는 멀더와 스컬리의 관계에 더 집중했다. 이번 작품이 잘되면 다음 편에서는 또 다른 시도가 가능하지 않을까. 윌리엄에 대해 다루기 시작하면 외계인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에 그 부분은 가능한 한 건드리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두 사람에게 윌리엄이라는 존재는 이미 너무나 크기 때문에 그 부재를 느끼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크리스 카터: 그래서 두 사람의 대화에 윌리엄이 나온다. 스컬리의 환자인 크리스천 이야기는 어떤 의미에서 윌리엄의 변형된 이야기이기도 하다. 윌리엄 없이 윌리엄 이야기를 하는 식이니까. 프랭크가 잠시 언급했듯이 스튜디오가 마니아뿐만이 아니라 일반 관객도 고려한 작품을 원했기 때문에 윌리엄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면 시리즈를 보지 못한 관객이 따라가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로스트>와 같은 이후 드라마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알려져 있다. 텔레비전 시리즈가 가지는 위상을 의식하면 영화화가 부담스럽지 않았나. 프랭크 스파니츠: 다 합하면 202시간 길이의 시리즈다. 언제나 지난 에피소드에 했던 이야기를 반복하지 않으려 하다보니 이 복잡하고 다양한 이야기들 속에서 대체 어떤 이야기를 골라서 어떻게 풀어나갈 지 정하는 데만 해도 고민스러웠다. 어느 이야기를 끄집어내더라도 다양한 기대들을 모두 만족시킬 수는 없는 법이지 않나. 그래서 시나리오 작업 들어가기 전에 둘이 앉아서 그냥 마음 가는 대로 끝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이 어디로 흘러가고 싶은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싶은지라고 생각했으니까. -외계인을 배제한 이야기는 어떻게 보면 상당히 과감한 결정이다. 프랭크 스파니츠: <엑스파일>의 팬이라면, 우리가 선택한 이야기가 사실은 <엑스파일>의 가장 근본적인 이야기라는 것을 받아들일 것이다. <엑스파일>은 처음부터 멀더와 스컬리의 이야기였다. 멀더와 스컬리가 어떤 사람이냐라는 것을 시리즈를 통해 겪어오지 않았나. 팬들이 분명히 이번 이야기에 반응할 것이라고 믿는다. -시리즈가 종영한 지 6년이 지나서 다시 그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 낯설지 않았나. 크리스 카터: 시리즈가 끝나고 나니까 질리언이 자신이 얼마나 지쳤는지 모를 정도로 지쳐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하더라. 우리 모두는 그때 몹시 지쳐 있었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고 어느 정도 거리를 두게 되고 나니 이제야 그간의 쌓인 경험을 바탕으로 제대로, 좀더 세련되게 접근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코미디 배우로 알려져 있는 영국 출신 빌리 커놀리를 어떻게 아동성학대 혐의를 받고 있는 신부 역으로 캐스팅하게 되었나. 크리스 카터: 그가 출연한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는데, 그냥 감이 왔다. 로스앤젤레스로 불러서 시나리오를 건네줬더니, 읽고 나서 단 한줄 적어놓았더라. “언제 촬영 들어가나요?”라고. -프로젝트 내용과 관련해 스포일러가 유출되지 않도록 모든 것이 극비로 진행되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에 대해 이야기해달라. 크리스 카터: (프랭크를 보며 씨익 웃으며) 꽤나 애를 먹었지 아마? 프랭크 스파니츠: 웹에 스포일러가 떴다는 것이 확인되면 6시간 이내에 그를 상쇄할 만한 가짜 정보를 만들어내야 했다. 가짜 스크립트 페이지를 몇장 슬쩍 올려두기도 하고, 가짜 사진도 만들어 흘리고, 가짜 촬영 메모도 올리고, 스포일러도 흘리고. -가짜 스포일러가 뭐였나. 크리스 카터: 늑대인간이 나온다는 것이었다. (웃음) 프랭크 스파니츠: 늑대인간이라면 스포일러가 거짓으로 밝혀지더라도 팬들이 별로 아쉬워하지 않을 것 같으니까. -프랑켄슈타인과 같은 초창기 SF에 대한 오마주가 느껴진다. 크리스 카터: 그렇다. 개인적으로 손에 꼽는 작품이다. 특히 제임스 웨일의 <프랑켄슈타인>은 대단하다. 단순히 충격을 주기 위한 장치로서 SF적 요소를 넘어서 일종의 시의 수준으로까지 끌어올린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멀더와 스컬리가 왜 서로 어울린다고 생각하나. 크리스 카터: 그러게. 내게도 미스터리다. (웃음) 그 둘은 서로 너무나 판이하게 다르다. 어느 한쪽의 치우침도 없이 둘 다 너무나 강한 캐릭터이다. 그래서 둘이 어울린다라기보다 서로 충돌하는 상반되는 두 에너지의 극렬한 대비에서 아름다움을 느낀다고나 할까. 서로 대등하게 맞서는 분명한 색깔의 두 에너지, 그게 멀더와 스컬리의 관계를 정의한다고 생각한다.

[데이비드 듀코브니] “6년 전의 나는 무척 지쳐 있었다.”

-피곤해 보인다. 홍보 일정이 빡빡한 모양이다. =이 작품 홍보와 별도로 <캘리포니케이션>도 찍고 있어서 한달 이상 하루도 쉬지 못하다보니 피로가 쌓이는 것 같다. (혼잣말로) 이러다가는 미쳐버릴지도…. -<엑스파일>에 다시 복귀하게 된 계기는. =시리즈에서 빠지게 된 이유는 <엑스파일>이 싫어서라거나 같이 일하는 사람이 싫어서가 아니었다. 매년 10개월을 쏟아부어야 하는 스케줄이었기 때문에 <엑스파일>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쯤에서 잠시 휴식도 취하고 내 경력에도 변화를 줄 때가 되지 않았나라는 생각에서 내린 결정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지쳐 있었으니까. 그러나 근본적으로 우리 모두가 가진 바람 중 하나가 <엑스파일>을 프랜차이즈 영화로까지 이끌어나가고 싶다였다. <엑스파일>의 캐릭터들이나 <엑스파일>의 팬들을 생각하면 그냥 끝내버리고 싶지 않았다. -초과학적인 현상을 경험한 적이 있나. =(단호하게) 전혀. -초과학적인 현상을 믿나. =(무심한 듯 간단하게) 그렇다. -멀더와 스컬리가 함께 산다는 설정이 연기하기 낯설지 않았나. =글쎄. 오히려 시리즈 때보다 실제적인 육체적 접촉은 덜한 편이라고 보는데. 시리즈에서는 멀더가 스컬리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다거나, 이마에 키스한다거나…. 그러고보니 진짜 키스를 몇번 하기도 했지만, 이번 작품에서는 직접적으로 보여준다라기보다 다 암시되어 있는 쪽이니까. -이번 작품은 멀더와 스컬리의 관계, 그 둘 사이의 감정에 집중하고 있다. 그 변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는데, 처음 시나리오를 읽고 내가 소감을 말했더니 크리스와 프랭크가 말하길, “이 영화는 멀더와 스컬리의 사랑 이야기다”라고 하더라. 그래서 “나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당신들 의도에 맞추도록 노력은 해보겠다”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질리언과는 자주 연락하나. =(무심히) 그다지 별로. 이메일로 가끔 연락하긴 한다. -6년 만에 다시 멀더와 스컬리로 돌아가기가 어렵지 않았나. =의외로 쉬웠다. 둘 다 그다지 접촉이 없다보니 예전이 그립기도 했고. 연기 궁합이라는 게 예전에 있었다면, 지금도 있을 것이라고 믿고 그냥 연기하는 수밖에 없다. 그게 없는데 따로 노력한다고 생기는 것은 아니지 않나. 노력한다고 사랑에 빠지는 것은 아니니까. 뭐, 시도를 해볼 수야 있겠지만. -오랜 기간 동안 잡혀 있어야 하는 시즌형 텔레비전 시리즈에서 벗어나고 싶어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캘리포니케이션>으로 골든글로브상을 수상했는데, 다시 텔레비전으로 돌아간 소감이 어떤가. =6년 전의 나는 무척 지쳐 있었다. 그동안 하고 싶었던 다양한 역도 해보았고, 그때와는 상황이 달라졌으니까. 케이블 채널이 등장하면서 네트워크에서 다루지 못했던 다양한 소재들이 가능해지면서 텔레비전 드라마의 질이 놀랍게 향상되었다. 모두를 만족시켜야 하는 영화나 네트워크와는 달리 특정 취향의 시청자를 대상으로 기획되는 드라마가 더 흥미로운 것은 당연하지 않나. 13살부터 80살까지, 남성 관객과 여성 관객의 구미에 다 맞추려면 뻔한 이야기밖에 만들어낼 수 없지 않나. <아이언맨>이나 <다크 나이트>는 그중 나은 버전일 뿐이지 모두를 만족시켜야 한다는 점에서 그다지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래서 좀더 개인적인 이야기, 작은 이야기, 인간에게 다가가는 이야기가 줄어들고 있다.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려는 기자의 말을 끊고는) 케이블 드라마는 독립영화 같다. 뭐, 요즘 독립영화라는 말은, 단지 자본의 규모만 지칭하지 실제 내용이나 스타일에서의 독립성을 표방하지는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긴 하지만… 그런 면에서 케이블 드라마가 더 독립적이라고 할까. 70년대 미국이나 유럽영화들, 아니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독립영화를 12주를 한 시즌으로 제작되는 케이블 드라마에 끌리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6년 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안 그래도 어제 질리언과 함께 인터뷰에 임했는데, 그 질문이 나왔다. 그때 질리언 왈, “데이비드는 이제는 <엑스파일>과 함께하고 싶어한다는 게 달라진 점이에요”라고 하더라.

[전영객잔] 순이가 상길의 뺨을 때린 까닭은? [1]

설마 여기서 엔딩을?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시계를 보았다. 약속된 시간은 다 지나갔다. 베트남전쟁 중의 한복판에서 천리 만길 우여곡절을 거쳐 순이(수애)는 남편 상길(엄태웅)을 마침내 만났다. 그리고는 뺨을 때린다. 또 때린다. 그리고 또 때린다. 순이는 왜 뺨을 때리는 것일까? 상길은 왜 우는 것일까? 아니, 상길은 순이를 알아보기는 하는 것일까? 하지만 거기서 아무것도 대답되지 않았다. 아니, 차라리 그러고 난 다음에 어떻게 할 건데, 라는 난처한 질문이 기다리고 있다. 영화는 거의 종잡을 수 없는 줄거리로 치달리다가 수습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갑자기 두 사람을 나눠 찍던 카메라가 뒤로 물러나서 순이와 상길을 무심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엔딩을 알리는 구도. 이제 더이상의 행동은 없을 것이라는 정보를 줄 만큼 인물로부터 멀리 떨어져나간 카메라. 감정을 가라앉히는 음악. 놀랍게도 영화는 정말 거기서 그냥 끝났다. 나는 자막이 올라올 때 일어설 수가 없었다. 그냥 멍한 상태가 되었다. 어쩌자고 이렇게 끝을 내버린 것일까? 이준익의 여섯 번째 영화 <님은 먼곳에>는 마치 부르다가 만 노래처럼 보였다. 실제로 영화에서 이 영화의 제목인 노래 <님은 먼곳에>는 부르다가 중단된다. 그것도 세번이나. 나는 무언가 엔딩을 찾지 못한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음날 이준익은 정반대로 대답했다. “마지막 장면이 다 설명한다. 마지막을 정해놓고 계단식으로 쌓아올렸다. 영화에서 상길은 20세기 남성성의 은유이고, 순이는 20세기 여성성의 대표이다. 20세기에 남성이 저질러놓은 전쟁이라는 부조리의 현장에서 여성성의 대표가 따귀를 갈기는 얘기다.”(<한겨레> 7월14일자 인터뷰, ‘부조리한 남성성 반성하고 싶었다’) 이준익은 김지운의 반대말이다 영화에서 활동하는 세개의 선, 시선, 동선, 그리고 감정선. 결국 영화는 선의 연결이다. 종종 이준익을 비평적으로 다룰 때 그의 미장센이 만족스럽지 않거나 혹은 신의 내용이 ‘섬세하지 않다’고 말한다. 당연하다. 왜냐하면 그는 그런 문제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이준익은 신 안에서 오로지 감정선만을 따라간다. 종종 그것이 등장인물의 행위와 사건에 집중됨으로써 단순하게 보이지만(실제로 단순해지기도 하지만) 하여튼 이준익은 거의 필사적으로 그 선을 놓치지 않기 위해 다른 문제를 포기하기조차 한다. 열 번째 신이 눈물을 목표로 한다면 그 앞의 아홉개의 신은 눈물을 위해서 봉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그를 신파로 몰고 가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감정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며 오로지 인물의 내면 속 시간 안에서만 잠재적으로 연결되고 결합하기 때문이다. 좀더 간단한 설명. 나는 여기서 잠시 (올 여름에 거의 동시에 도착한) 이준익과 김지운을 비교하려고 한다(게다가 <님은 먼곳에>와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은 하루 걸쳐 연이어 시사회를 가졌다). 이준익은 감정선의 블록을 만들고 그것을 넘어트리면서 드라마를 만든다. <님은 먼곳에>는 시작하면 엔딩을 보아야 한다. 그 반대의 예. 하지만 김지운은 영화가 시퀀스 단위로 이루어진 집합이라고 생각한다. 어디서 시작해도 상관없고, 어디서 끝나도 괜찮다. 다만 하나가 끝나면 다른 하나가 다시 시작된다. 그는 매번 시퀀스 안의 그림, 인물들의 활동, 작은 제스처, 즉각적으로 지각되는 소리들(과 음악)의 효과, 이 모든 것들의 상황에 집중한다. 그러나 그것들이 한편의 영화에서조차 각자 자기 완결적인 형식을 보존하기 위해서 다른 시퀀스를 침해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김지운은 열개의 신이 있다면 그것들은 각자 활동하면서 자기 안에서 만족을 찾는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은 (다소 극단적으로 말하면) 첫 시퀀스를 본 다음 중간을 생략하고 마지막 세명의 총격전을 그냥 이어붙여도 아무 문제가 벌어지지 않는다. 종종 김지운의 영화가 (<장화, 홍련> 이후부터) 멈칫거리거나 주변 인물들이 아무 말 없이 사라지는 것은 이유가 있다. 김지운은 그게 다 설명되었다고 생각하지만, 보는 사람은 어리둥절해진다. 그는 영화의 기계적인 지각효과에 매혹된 사람이다. 그래서 영화의 지각요소들이 다가오거나 멀어지고 혹은 제때 부딪치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한다. 말하자면 콘티의 연속적인 활동. 이미지의 과장. 사운드의 봉사. 그때 영화의 세개의 선은 개별 원 안에서만 활동할 뿐이다. 김지운의 영화는 전람회를 관람하듯이 보아야 한다. 하지만 줄거리를 포기하고 ‘컨셉’만으로 한편의 영화를 묶을 수 있을까? 반대로 이준익은 ‘캐릭터’와 ‘플롯’만으로 영화를 진행시킨다. 그의 영화를 본 다음 ‘볼 게 없다’고 말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는 지각효과를 믿지 않는다. 그 대신 드라마 안의 감정이 진행될 때 일어나는 긴장과 이완에 점점 능수능란해지고 있다. 이준익은 지루하지만 종종 그 다음 신을 기다리게 만든다. 김지운은 그 순간 재미있지만 그럴수록 때로 점점 지루해지기도 한다. 대중은 아이러니하게 불평을 늘어놓는다. 재미없어서 짜증나요. 그런데 재미있어서 더 짜증나요. 나는 둘 중 누가 옳으냐는 문제를 따지는 것이 아니다. 이준익은 신마다 왜, 라고 질문한다. 김지운은 똑같은 자리에서 어떻게, 라고 대답한다. 이준익이 목표를 향해서 직선을 그릴 때 김지운은 집합을 만들어내고 그 안에서 몇개의 원을 그린다. 두개의 하여튼. 이준익이 ‘하여튼’ 앞으로 나아가지만 단조롭게 느껴진다면 김지운은 ‘하여튼’ 카메라의 구도와 기계적인 움직임, 효과들, 시각적인 충격, 예쁜 취향, 다양한 인용으로 신의 여기저기를 둘러보게 되지만 같은 자리에서 계속 맴돈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한국영화에서) 이준익의 반대말은 김지운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준익과 김지운은 정확하게 상대방이 갖지 못한 것을 서로가 나눠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올 여름 두개의 스펙터클. 두개의 사례. 목표와 집합. 원형과 직선. 만주의 광야에 그려넣은 두개의 큰 원과 세개의 작은 원. 목표를 향해 정글을 지나 능선으로 가는 직선. 나는 지금 직선에 대해서 생각하는 중이다. 그러므로 다시 <님은 먼곳에>로. ‘따귀를 갈기는’ 것은 감정선의 결과이다. 여기서 영화는 끝난다. 동선이 등장인물을 따라간다면 감정선은 등장인물을 이끄는 것이다. 힘의 한 모멘트가 신을 넘어트리면 차례로 넘어지기 시작한다. 그때 이 운동은 무언가를 목표로 한다. 종종 눈물(멜로드라마). 혹은 총을 꺼내 드는 행위(서부극, 혹은 갱스터영화들). 말하자면 도미노. <님은 먼곳에>라는 도미노의 최종목표는 ‘따귀를 갈기는’ 행동이다. 만일 내가 ‘따귀를 갈기는’ 행동만을 보고 감정선을 놓쳤다면 남은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다. 차례로 쓰러진 신들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그것을 일으켜 세워야 한다. 그리고 앞에 선 면들의 어느 부분이 뒤에 선 면의 어디를 넘어트리는지를 살펴야 한다. 면으로서의 신. 그때 그 면은 감정의 힘들 사이의 집합이다. 말하자면 힘의 선. 나는 그냥 순진한 척하면서 이준익의 말을 믿기로 했다. 어쩌면 정말로 <님은 먼곳에>는 마지막 장면을 먼저 떠올린 다음 거슬러 올라가면서 구성된 이야기일지 모른다. 그 대신 나도 거슬러 올라가면서 물어보고 싶어졌다. 역순으로 따라가는 이야기. 순이는 베트남전에 가서 남편 상길을 만나 뺨을 때린다. 매우 극적이고 멋진 장면.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 순이는 베트남에 가야 한다. 어떻게?) 순이는 ‘써니’가 되어 정만 일행과 위문공연단을 꾸려 베트남에 온다. 처음에는 잘 안 되지만 점점 순이는 ‘써니’가 된다. 하지만 순이는 일편단심 상길을 만나고 싶어한다. (그런데 왜 순이는 베트남에 왔을까?) 순이는 삼대독자 외아들 상길에게 시집을 왔다. 시어머니는 아들을 고대하고 있고, 아들 상길은 베트남에 갔다. 순이는 아이를 갖기 위해, 시어머니의 소원을 풀어주기 위해, 혹은 남편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 베트남에 가기로 결심한다. 하여튼 왜 순이가 베트남에 갔는지는 모호하다. 그러므로 뺨을 때리는 이유도 모호하다. (그런데 왜 순이는 아이를 갖지 못했을까?) 군대에 입대한 상길은 결혼하기 전 ‘대학생 애인’이 있었으며,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순이에게 관심이 없다. 면회를 와도 등을 돌리고 잔다. 그런데 상길에게 옛 애인으로부터 편지가 온 것을 고참 김상병이 공개해서 소대원들에게 읽자 화가 난 상길은 그와 크게 싸우고, 하극상의 죄를 물어 군에서는 두 사람에게 영창과 베트남 중 선택하라고 한다. 두 사람은 베트남에 간다. 그들은 왜 베트남에 가야 했는가? 마지막 장면이 다 설명하기는커녕 그 반대로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고 있었다. 도대체 왜 뺨을 때리는 것일까? 그게 사랑의 확인인지, 아니면 참을 수 없는 분노인지, 혹은 비로소 목적지에 도착한 것에 대한 만족인지, 그녀 자신에 대한 회한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내가 너무 사소하게 생각하는 것일까? 내 의문에 대해서 이준익은 어마어마하게 대답했다. “부조리의 현장인 전쟁에 대해서 책임자인 남성성의 은유에게 여자의 대표가 때리는 따귀.” 물론 이준익의 대답에 반론을 제기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다. 상길은 20세기 남성의 은유일 수가 없다. 20세기 남성이라는 말은 그렇게 간단하게 비유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그저 단순하게 (<님은 먼곳에>의 배경이 된) 1971년 베트남에 와 있는 한국 남자와 미국 남자는 얼마나 다른가? 대학생으로 베트남전에 사병으로 온 크리스(<플래툰>)와 상길의 차이. 그런 다음 순이는 어떻게 20세기 여성성의 대표가 될 수 있는가? 20세기의 여성들은 얼마나 서로 다른 계급과 국가와 인신의 차이 속에서 각기 다른 여성의 인권을 쟁취하였는가? 순이가 20세기는커녕 1971년 한국 여성의 대표성조차 가질 수 있는가? 이를테면 <영자의 전성시대> 혹은 <별들의 고향>으로 설명되는 근대화 과정 속에서 부서져간 여성의 육신들과 그 소비의 과정들. 돈 벌기 위해 ‘고향을 떠나’ 서울에 올라와 시내버스 차장을 하다가 한쪽 손이 잘려나간 다음 몸을 팔러 전전하는 영자와 남편 만나기 위해 ‘고향을 떠나’ 위문공연단과 베트남까지 가는 순이. 두 여자의 고향을 떠나는 행위. 그때 순이는 영자로부터 얼마나 멀리 있는가. 혹은 애인으로부터 버림받은 다음 차례로 남자들에게 육신을 망가트리고 결국 한강에 한줌의 재가 되어 흩날리는 경아와 남편으로부터 버림받은 다음 베트남까지 찾아가는 순이. 남자로부터 버림받기와 그 이후, 그때 순이는 경아와 얼마나 다른가. 순이는 1971년의 여자들 사이에서도 매우 특별한 선택을 한다. 그 다음 상길의 책임. 베트남전은 20세기 남성이 저질러놓은 전쟁이라기보다는 미국이라는 제국주의 열강이 아시아 사회주의 블록의 약한 고리를 끊기 위해 시작된 침공이었다. 하지만 미국은 호치민이 이끄는 공산당과 농민들이 얼마나 끈끈한 유대관계 아래 놓여 있었으며, 민족사회주의가 무엇인지 잘 알지 못했다. 이준익은 이 전쟁에 한국 이외에는 어떤 다른 나라도 참전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환기해야 했다. 여기에는 20세기를 대표할 만한 어떤 정황도 없다. 말하자면 베트남은 1942년 유럽이 아니었으며, 호치민은 히틀러가 아니었다. 베트남전은 시작부터 미국의 패배가 예상된 전쟁이었다. 유럽의 미국 동맹국은 누구도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부대를 파견하지 않았고, 심지어 소련조차 이 전쟁의 무의미를 경고했다. 닉슨은 전쟁이 수렁에 빠지는 것을 임기 내내 지켜보다가 워터게이트 스캔들로 자기의 경력을 파국으로 몰고 갔다. 텔레비전은 정글을 생방송으로 중계했고, 대학생들과 대중문화의 스타들은 이 전쟁을 반대했다. 만일 이준익이 정말 그런 의도로 <님은 먼곳에>를 찍기를 원했다면 멀리 베트남의 정글까지 갈 필요없이 그저 한반도에서 벌어진 1950년 그해 여름의 전쟁을 찍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러므로 내 첫 번째 질문은 왜 <님은 먼곳에>가 한반도가 아니라 베트남에 가야만 했을까, 라는 것이다. 첫 번째, 바보 같은 대답. 그렇게 되면 영화 제목으로 <님은 먼곳에>를 쓸 수가 없다. 왜냐하면 1970년에 김추자가 불러서 히트한 이 곡을 한국전쟁을 무대로 부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대답이 바보 같긴 하지만 이 질문마저 의미없는 것은 아니다. <님은 먼곳에>라는 제목을 들었을 때 이 영화는 ‘노래에 바쳐진’ 이야기라는 것을 누구라도 알 수밖에 없다. 만일 <님은 먼곳에>를 보았는데 끝내 <님은 먼곳에>가 흘러나오지 않았다면 당신은 영화가 끝난 다음 어떤 기분이 되었을까? 물론 베트남전을 다룬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리고 베트남전에서 노래가 흘러나오는 것이 문제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노래와 역사가 도착적인 관계를 이룰 때, 전쟁이 노래를 위해서 존재할 때, <님은 먼곳에>를 가장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베트남전이 거기 있을 때, 이 로맨스는 우리에게 이상한 질문과 대답의 관계를 상기시켜준다. 나는 이준익에게 왜 <님은 먼곳에>를 위해서 베트남전이 거기 있어야 하나요, 라고 질문하고 싶다. 영화의 대답은 왜 하필이면 그때 베트남전이 <님은 먼곳에>에 가장 좋은 장소가 되었느냐는 것이다. 물론 그럴 리야 없겠지만 나는 자꾸만 순이가 남편을 찾으러 베트남에 간다기보다는 ‘수애’가 노래를 부르기 위해서 1971년의 베트남에 가는 것처럼 보인다는 착시를 멈출 수 없다. 순이와 ‘수애’ 사이의 숨바꼭질. 왜 하필이면 <님은 먼곳에>를 이준익의 <라디오 스타> <즐거운 인생>에 이어지는 ‘음악 삼부작’이라고 불렀을까? 다른 두편과의 관계 속에서 <님은 먼곳에>는 노래를 부른다는 사실 말고는 어떤 유사성도 없다. 그런데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주제도 아니고 테마도 아니다. 간단하게 박찬욱의 ‘복수’ 삼부작과 비교해보라. 그렇다고 이 세편의 영화가 가수를 모델로 한 것도 아니다. 오로지 노래를 부른다는 행위만 공통점이 있다. 그때 베트남이라는 전쟁의 자리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님은 먼곳에>에서 과잉한 것은 노래가 아니라 베트남전이라는 전쟁이다. 베트남은 노래를 위해서 무대를 제공하고, 그런 다음 발정난 군인들이라는 관객을 동원하고, 그 앞에서 노래는 특별한 전시성을 과시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똑같은 노래가 라이브에서 불릴 때와 나이트클럽에서 불릴 때 이상하게도 전혀 다른 감흥을 전해 받는다. 물론 그것을 이준익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는 순이의 라이브로 시작한다. 그녀는 동네 아주머니들 앞에서 마치 공연을 하듯이 잔뜩 감정을 잡은 다음 <늦기 전에>를 부른다. 노래 <늦기 전에>의 가사는 순이가 호소하는 것처럼 들린다. ‘늦기 전에/ 늦기 전에 빨리 돌아와주오/ 내 마음 모두 그대 생각 넘칠 때/ 내 마음 모두 그대에게 드리리/ 그대가 늦어지면 내 마음도 다시는 찾을 수 없어요/ 늦기 전에/ 늦기 전에 빨리 돌아와 주오.’ 누구에게? 애인에게. 하지만 우리는 곧 그런 호소가 완전히 오해이거나 아니면 잘못된 가정이라는 걸 알게 된다. 순이는 이미 결혼을 했으며, 그녀의 남편 상길은 군대에 있으며, 그녀에게 시집오기 전 애인이 있었던 것은 아니며(그래서 ‘이미 늦은 것’은 아니며), 오히려 그녀의 남편에게는 마음속의 다른 애인이 있다(하지만 구태여 순이의 마음이 떠나가기 전에 남편에게 돌아와 달라는 호소로 들을 수도 있다). 물론 이 노래 부르는 행위를 가사로부터 떼어내서 완전히 순이의 사회적 상상으로 읽을 수도 있다. 그녀는 혼자 부르지 않고 동네 아줌마들을 앞에 앉혀놓고 부른다. 말하자면 순이의 꿈은 가수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님은 먼곳에>를 <즐거운 인생>의 여성판 솔로 가수 데뷔 버전으로 읽는 것이다. 이 영화의 시어머니, 남편, 베트남전, 1971년은 모두 핑계이며, 시골 아낙 순이가 ‘하여튼’ 가수로 무대에 서는 이야기로만 설명하는 것이다. 나는 이 해석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준익이 베트남을 이야기할 때 그것은 실재의 장소라기보다는 ‘캐릭터’와 ‘플롯’ 사이의 상호주관성이라고 부를 만한 서로의 요구에 대한 대답의 장소처럼 다루어진다. 베트남전쟁은 적당하게 순이와 위문공연단을 괴롭히고, 그런 다음 그들이 완전히 포기하지 않도록 적당한 시점에 그들을 도와준다. 이때 베트남전은 역사 속에서 불가능한 것을 영화에서 가능하도록 ‘마술처럼’ 응답한다. 말하자면 동일한 사건이 실재에서는 가능한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지만 <님은 먼곳에>에서는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들도록 돕는다. 물구나무 선 가능성. 그러나 베트남전 자체가 그들에게 근본적인 외상을 입히거나 혹은 태도를 바꾸게 만들지는 않는다. 이를테면 베트남전을 다룬 다른 영화들과 비교해보자. 이때 이 영화들에서 신기한 점은 베트남에서 대부분 누군가를 찾아간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마이클 치미노의 <디어 헌터>,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지옥의 묵시록>. 심지어 <람보2>. 혹은 공수창의 <알포인트>. 이때 베트남은 어떤 형식으로건 등장인물에게 깊은 트라우마를 남긴다(람보에게조차!). 왜냐하면 그것이 베트남전이 미국과 한국의 근대사 안에 자리잡은 방식이다. 그러나 순이는 베트남에 가서 전쟁 한복판을 통과하면서 ‘자기 안에 있는 자기 이상의 것’을 얻지 못한다. 물론 베트남에 가서 순이는 두개의 인물로 분화된다. 하나는 남편을 찾으러 호이안으로 가는 순이이고, 다른 하나는 무대에 서는 ‘써니’이다. 하지만 이것이 새로운 인물에로 도약할 수 있는 둘 사이의 변증법적 성찰의 기회를 얻지 못한다. 그 둘은 끝내 세 번째 인물로 거듭나지 못하고 계속해서 목표를 향해, 남편을 만나기 위해,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다. 그러므로 이준익이 <님은 먼곳에>를 단지 베트남을 무대로 한 ‘음악영화’ 삼부작 중 하나로 기획했다 할지라도 내가 궁금한 질문에는 대답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순이는 결국 ‘써니’가 되지 못하고 마지막 장면에서 다시 ‘순이’로 돌아오느냐는 것이다. 순이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알고 있나? 이준익은 “모든 대답이 마지막에” 있다고 말했다. 순이는 원하는 행동을 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마지막’ 대답이다. 하지만 나는 행위를 대답 대신 질문으로 읽고 싶다. 순이는 무엇을 원하는가? 자, 대답과 질문을 잘 구별해주기 바란다. 먼저 이준익의 ‘대답’으로 따라가기. 이준익은 자기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순이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녀는 원하는 행동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순이는 자기가 무엇을 바라는지 정말 잘 알고 있을까? 그렇게 되면 <님은 먼곳에>는 매우 끔찍한 요구의 판본이 된다. 왜냐하면 순이가 자기의 목표에 대해서 잘 알고 있을 때 그녀의 행위는 주관적 요구로 위장된 객관적 희생이 되기 때문이다. 그녀의 요구는 무엇인가? 그녀가 목표를 잘 알고 있을 때 자기의 행위에 대해서 그녀가 기대는 진지한 믿음이란 무엇인가? 잠시만 마지막으로부터 처음으로 뒤집어서 소급해보자. <님은 먼곳에>를 요구와 대답으로 읽으면 슬프다기보다 기괴하게 느껴지는 것은 순이의 목표 때문이다. 왜냐하면 순이의 목표는 사랑이 아니라 섹스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대가를 얻으려고 한다.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순이는 베트남에 가서 남편 상길과 섹스를 한 다음 임신을 하려고 그 전쟁터에 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시어머니가 삼대독자 외아들의 대를 이어야 한다고 요구하기 때문에 거기에 응하는 것이다. 21세기에 유교의 남아선호사상이라는 전근대적 봉건제 이데올로기가 명령을 요구할 때 당신이 보기에 그것이 우스꽝스럽게 느껴질지 모른다. 하지만 어떤 이데올로기도 현실 속에서 수행을 시작하면 더이상 웃을 수 없다. 이데올로기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할 수 없을 때, 그 제도의 네트워크 안에서 그것을 행해야 할 때, (이것이 핵심인데) 그래서 그것을 실제로 해야 할 때, <님은 먼곳에>는 오늘날 우리가 보기에 익살맞은 상황이지만 그 무대를 1971년 한국의 시골 마을로 옮겼을 때 이 요구는 시골 아내 순이의 육신을 둘러싼 참담한 수난의 드라마가 된다. 결국 ‘따귀를 갈기는’ 행위가 유교의 남아선호사상에 대해서 순이가 내리는 대답이라면 그녀는 자기가 원하는 행동에 대해서 비로소 비판적 거리를 얻게 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 해석은 <님은 먼곳에>가 원하는 것이 아니다. 나에게 모호하게 보이는 것은 순이를 따라 베트남의 호이안까지 가면서 단 한번도 이 영화는 유교의 남아선호사상에 대해서 비난하지 않기 때문이다. 분명히 순이를 집 바깥으로 내몰아 베트남까지 보내는 전근대적 요구에 대한 복종에 대해서 <님은 먼곳에>는 그 명령을 방해하는 근대적인 장애를 제시하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조건만을 열거한다. 그런 다음 순이는 이 조건을 내면화하고 행동으로 옮긴다. 그러므로 나는 정말 순이가 자기의 요구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전체 108신 중에서 시골집을 떠나는 16신 이후 두번 다시 시어머니는 영화에 등장하지 않으며, 순이 자신도 시댁을 떠난 다음 두번 다시 연락하지 않는다. 순이가 서울에 올라간 다음, 좀더 정확하게 육군본부 앞에서 위병소를 지키는 군인에게 “아저씨, 저 월남 꼭 가야 돼요”라고 말한 다음, 순이는 마치 자발적인 의지로 남편을 만나러 가는 것처럼 자기의 목표를 향해서 다가간다. 좀더 인상적인 순간은 신83에서이다. 베트콩에 붙들린 땅굴 안. 용득이 순이에게 “근데 남편 왜 만나러가요?”라고 물었을 때 순이는 대답하지 않고(못하고?) 그냥 고개를 돌려 웃음짓는다. 순이는 바보가 아니다. 그녀가 대답 대신 웃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답은 네 가지이다. 하나는 잘 알고 있지만 차마 용득에게 대답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는 그녀 자신도 모르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좀 다르다. 그 질문을 듣자 비로소 잊고 있던 그 질문을 떠올린 것이다. 순이는 내내 남편을 만나러 가고 싶다고 말했지 단 한번도 왜 만나러 가는지에 대해서 말한 적이 없다. 물론 네 번째도 있다. 그 질문을 듣자 남편을 만나러 가는 자기 자신의 모습이 용득(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받은 것에 대해서 기뻐하는 것이다. 나는 순이의 대답이 세 번째와 네 번째 그 둘 사이에 놓여 있다고 생각한다. 왜 그 둘 중 하나가 아니라 그 둘 사이에 걸쳐져 있는지가 <님은 먼곳에>를 모호하게 만든다. 우리는 이야기 전체의 진행 과정 안에서 순이의 요구를 추론한 것이지 순이의 행동을 통해서 왜 베트남에 가려고 하는지의 대답을 구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준익은 그 대답이 ‘따귀를 갈기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용득에게 웃음으로 대답한 것을 왜 상길에게는 ‘따귀를 갈기는’ 행동으로 대답했는지의 차이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차라리 나는 남편을 만나러 가는 순이의 행위가 일신의 인정투쟁이 아닌가, 라는 의심을 멈출 수 없다. 말하자면 그녀가 확인하고 싶은 것은 사랑이 아니라 그녀가 상길의 아내라는 사실이다. 상길의 애인도 하지 못하는 행위, 오로지 그의 아내만이 할 수 있는 행위. 이때 이 행위는 목표와 아주 가까이 있다. 상길의 애인은 두려워하지만 그의 아내 순이는 간절하게 원하는 목표. 말 그대로 임신이라는 목표. 육신 없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결과. 비로소 그녀는 용득의 질문을 받은 다음 의심한 적이 없는 자기의 행동에 대해서 대답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나는 이 질문이 매우 이상한 장소에서 던져졌다는 사실을 일깨우고 싶다. 그녀는 다른 위문공연단 남자들과 함께 베트콩의 땅굴에 잡혀 있다. 그런데 <님은 먼곳에>는 한국군과 미군에 대해서 거의 무관심하거나 종종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지만 (마치 정치적 교정을 하기라도 하듯이) 베트콩들의 땅굴 속 삶에 대해서는 매우 친밀하고 따뜻하게 그리고 있다. 그래서 단 한 순간도 우리는 그들이 베트콩들에 처형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는다. 나는 순이가 여기서 베트남전의 역사적 의미를 깨달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는 처음으로 평등한 공동체 삶을 본다. 그녀가 이 질문을 받았을 때 문득 깨달은 것은 사이공의 노천식당에서 미군이 모이는 극장에 폭탄을 던진 다음 도망치다가 미군의 총에 맞아 죽는 소녀와의 동병상련일 것이다. 순이는 미군 부대에서 공연을 실패하고 난 다음 노천식당에 앉아 있다가 폭탄을 던진 다음 미처 도망치지 못하고 총에 맞아 죽어가는 베트콩 소녀를 본다. 이 장면은 거의 유일하게 베트남 인민과 순이 사이의 나눠찍기로 서로 시선을 주고받는다. 그녀는 베트콩 소녀의 죽음에 매우 큰 충격을 받는다(S# 56). 그녀는 왜 이 어린 소녀가 죽음을 마다지 않고 이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 다음 위문공연단은 한국 부대를 전전하기 때문에 베트남 사람들과의 어떤 접촉도 없다. 공연이 끝나고 떠나는 이들은 베트콩들에게 억류된다(S# 78). 공동체의 삶. 그리고 여기서 순이는 베트콩 소녀의 죽음에 대한 어떤 대답 같은 것을 얻는다. 그때 그 대답은 동시에 순이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것이다. 물론 순이와 베트콩 소녀의 행위는 동일한 차원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두 행동은 일신의 자살적 제스처이다. 그녀들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공동체가 명령하는 요구에 대해서 각자의 방식으로 대답하는 중이다. 시어머니는 자기 삼대외독자 상길이 베트남에 가서 죽을지도 모른다고 당신께서 직접 가겠다고 나서면서 정작 자기 며느리가 베트남에 갈 때는 말리지 않는다. 순이의 웃음은 자신의 운명에 관한 처량한 대답이다. 여기에는 전근대적 봉건제의 몰상식한 요구와 민족사회주의 공동체의 제국주의 투쟁에 관한 임무의 무자비한 요구가 동일한 제스처로 겹친다. 그것이 이 질문이 이 장소에서 던져진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이 웃음 이후 순이의 어떤 변화도 그녀의 행동에서 감지되지 않는다. 혹은 이준익은 이 두개의 까다로운 문제를 더이상 발전시키지 않는다. 대신 재빨리 땅굴로부터 그녀와 위문공연단을 빼낸 다음 다시 원래의 목표를 향해서 전진시킨다. 순이는 상길 어머니의 분신 하지만 도미노를 가로막는 것은 장애물이 아니라 역설이다. 여기에 다소 음란한 아이러니가 개입한다. 베트남의 전쟁터 한복판 남편이 있는 장소까지 가기 위해서 순이가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도구는 그녀 자신의 육신뿐이다. 남 앞에서 말도 잘 못할 만큼 수줍은 그녀는 목표에 이르기 위해서 오로지 섹스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힌 병사들의 시선 앞에 자기 육신을 전시해야만 한다. 순이는 김추자가 아니며, 병사들은 ‘써니’의 노래에 열광하는 것이 아니다. 공연을 성사시키기 위해서 정만이 순이의 치마를 들어올리고, 무대에서 그녀의 옷을 벗기듯이 짧게 자르는 것은 오로지 육신을 전시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순이의 육신을 갈망하는 그 수많은 병사 중에서 오로지 상길만이 그녀와 섹스하기를 원치 않는다. 순이는 그 수많은 병사 중 누구와도 섹스하기를 원치 않으며 오로지 남편과만 섹스하기를 원한다. 이 극단적인 대칭의 관계 속에서 순이는 행위의 모순 속에 던져진다. 난 섹스를 할 준비가 되어 있어요, 라고 병사들 앞에서 자기 육신을 전시한다. 다만 조건이 있다. 오로지 내 남편하고만. 그러나 그녀의 남편 상길은 순이와 할 생각이 없다. 순이는 언제든지 성공적인 행위를 할 수 있다. 상대만 가리지 않는다면. 이때 이들 병사들과 상길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는가? 단 한 가지 차이. 상길은 그녀의 남편이다. 이때 순이가 섹스하기를 바라는 상대는 남편이지 상길이 아니라는 것을 환기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만 상길이 남편의 자리에 있기 때문에 그를 찾아 베트남에 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수난은 임신을 하기 위한 것이지 사랑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상길은 마음속에 둔 다른 애인이 있고, 순이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적어도 ‘남편’ 상길에게 ‘아내’ 순이는 결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처녀이다. 순이가 잘 알고 있는 것은 자기의 요구뿐일 때 그녀는 오로지 섹스를 한 다음 임신하는 것이 목표가 된다. 요구와 목표 사이의 불협화음, 혹은 도착적인 관계. 말하자면 임신이라는 결과를 기대하는 남편과의 섹스라는 행위. 나를 더 놀라게 만든 것은 이 결정이 그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시어머니의 명령에 대한 복종임에도 불구하고 단 한 순간도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고, 질문하지 않고, 저항하지 않고, 망설이지 않고, 오직 목표만을 향해서 거의 일직선을 그리듯이 나아간다는 사실이다. 임신을 해서 박씨 가문의 삼대독자의 대를 잇게 만드는 일은 순이에게 믿음을 지키거나 환상에 빠졌다기보다 무언가 법을 수행하려는 행위처럼 보인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이다). 그녀는 거기에 대해서 판단하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의지한다. 순이는 자기의 행동에 대해서 이익과 손해에 관한 어떤 셈도 하지 않는다. 이 이야기의 비극은 목표에 가닿는 것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정작 그 목표가 순이가 다가오는 것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다는 데 있다. 말하자면 순이는 목표를 향해 간다기보다 붙잡으러 가는 것이다. 이준익이 원하는 대답은 어떤 판본인가? 순이가 ‘따귀를 갈기는’ 행위를 그녀 스스로 잘 알고 있을 때 사실상 그것이 그녀를 베트남전쟁의 한복판으로 내몬 시어머니의 명령이 내면화된 것이 아니고 다른 무엇이겠는가? 그때 여기에는 순이의 행위가 환상의 전이라는 무아지경 속에 던져지는 것이라는 걸 놓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순이가 자기의 행동에 대한 손해와 이익을 따지는 셈을 못하는 것은 이유가 있다. 그녀는 자기의 행동이 이미 자기의 계산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나는 이 마지막 장면에서 아내가 남편을 만났다기보다는 어딘가 어머니가 아들을 만났다는 느낌을 받았다. 차라리 <님은 먼곳에>를 어머니가 아들을 면회하러 가는 이야기로 설정했다면 얼마나 설득하기 쉬운가? 나는 여기에 내기를 걸고 싶어진다. 이를테면 시어머니와 순이의 마지막 대사를 떠올려보라(S# 16). 시어머니는 순이에게 “앞장서라, 월남 가자”라고 말한다. 그러자 순이가 “월남 간다고 다 죽는 거 아닙니다”라고 대답한다. 시어머니가 반문한다. “니 전쟁 겪어봤나? 니 시아버지 전쟁 나가 죽은 거 모르나?” 약간의 셈. 상길의 아버지는 한국전쟁에서 죽었을 것이다. 그때 시어머니는 상길을 임신하고 있었을 것이다(혹은 막 출산한 다음이었을 것이다). 상길의 나이의 역산. 1971년으로부터 1950년으로. 순이가 “월남이 어딘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갑니까?”라고 묻자 시어머니는 “내 혼자라도 갈끼다”라고 대답한다. 그런 다음 “마누라 싫어 도망간 놈이 살 것 같나? 비켜라”라고 말하며 대문을 열자 순이가 대답한다. “어머니 제가 갑니다.” 이때 시어머니가 순이에게 하는 요구는 정확하게 자기의 행동의 반복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희생을 공유하려는 것이다. 그것이 이 공동체의 채무를 나누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매우 비합리적이고 전근대적인 방식이다. 하지만 그 내면에 좀 더 복잡한 계산이 들어 있다. 세 가지 경우가 있다. 하나, 말 그대로 시어머니만 베트남에 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현실적으로 시어머니가 목표에 도달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게다가 순이는 이 공동체 안에서 ‘상징적’으로 살해될 것이다(좀 우스꽝스러운 상황은 그렇게 되면 영화는 시어머니와 순이 둘 중 누구를 따라가야 하는가, 라는 난처한 질문과 만나게 된다). 두 번째 경우. 시어머니와 순이가 함께 가는 것이다. 그때 이 상황은 고스란히 연장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실상 아무것도 해결되는 것 없이 무대만을 바꾼 게 될 것이다. 이것은 순이가 가장 피하고 싶은 상황이다. 마지막 남은 경우. 순이가 혼자 가는 것이다. 이때 순이는 사실상 시어머니의 ‘상상적’ 분신이 되어서 그 자리에 가는 것이다. 이것이 이 가혹한 비합리성 안에서의 수동적 합리성이다. 물론 네 번째 선택이 있다. 순이가 서울로 가출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 네트워크는 완전히 무너질 것이다. 이것은 이준익이 가장 피하고 싶은 버전이다. 그는 베트남에 가는 편이 서울로 가출하는 것보다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되면 적어도 여전히 공동체 안에 머무를 수 있기 때문이다. 순이는 네트워크를 끝장내는 것보다는 차라리 공동체 안에 머물면서 그 안에서 분신이 되는 것을 떠안는다. 그러므로 마지막 장면에서 순이는 동시에 상길의 어머니이기도 한 것이다.

[전영객잔] 순이가 상길의 뺨을 때린 까닭은? [2]

이번에는 질문으로 따라가보자. 순이는 무엇을 원하는 것일까? 천신만고 끝에 베트남 최전선인 호이안 능선까지 가서 ‘따귀를 갈기는’ 것이 최종 목표라면 순이의 행동은 희극적이 된다. 나는 질문을 약간 비틀고 싶다. 이준익은 순이에게서 무엇을 원하는가? 차라리 이쪽이 질문의 핵심이 아닐까? 우선 나는 이준익이 단 한번도 여자에 관한 영화를 찍지 않았음을 환기하고 싶다. 그는 언제나 남자를 중심에 둔 다음 진행하였다. 심지어 종종 그 사이에 여자가 끼어드는 것을 차단하기까지 하였다. 계백은 아내를 죽인 다음 전쟁터에 나간다(<황산벌>). 광대 공길과 장생 사이에 여자가 끼어들 틈은 없다. 심지어 연산조차 장록수를 밀쳐내고 공길에게 이끌린다(<왕의 남자>). 가수 최곤과 매니저 박만수는 지방 방송국까지 함께 좌천된다. 심지어 서울로 돌아온 박만수에게 아내조차 자기보다 최곤을 챙기라고 충고한다(<라디오 스타>). 4인조 ‘아저씨’ 밴드는 단 한명의 여성 게스트도 영입하지 않는다. 그럴 바엔 차라리 ‘꽃미남’ 미소년에게 마이크를 넘긴다(<즐거운 인생>). 나는 이준익이 퀴어(-야오이- BL?)영화와 마초영화 사이에서 모호하게 오가면서 남성성에 거의 경도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님은 먼곳에>는 ‘여자’ 순이가 주연인 영화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이준익의 새로운 시작일까?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님은 먼곳에>는 그 이전의 어떤 영화보다도 여자가 바깥에 있는 영화이다. 설명은 간단하다. 순이는 본질적으로 이준익 영화의 ‘남자들’의 환상이다. 이 말을 잘 읽어주기 바란다. 순이는 어떻게 영화 안에서 존재하는 대신 이야기 안으로 들어오는가? 그녀는 상길의 아내로 이야기 안으로 들어온다. 그런 다음 ‘써니’가 되어서 무대 위의 ‘남자들의’ 구경거리가 된다. 약간 우스꽝스러운 표현이지만 순이는 이 영화의 유일한 여자이다. 그런데 그녀는 단 한 순간도 주체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항상 대상으로 다루어지고, 그런 다음 남편과의 관계 안에서만 자기 의미를 찾는다. 다소 삭막할 정도로 여자들이 화면에서 사라진 <님은 먼곳에>에서 ‘유일한 여자’ 순이는 남편에게 다가가려는 그 활동 안에서만 의미를 얻고, 주변 ‘남자들’뿐만 아니라 영화를 보는 우리에게도 거기에 기대어서 감정적인 호소를 한다. 몇번이고 순이는 ‘남자들’에게 다짐하듯이 말한다. “저 민간인 아니구 그 사람 부인이에요.”(육군본부 정문 앞) 정만을 처음 만났을 때 그가 묻는다. “월남 가면 한몫 잡는다는 이야기 어디서 들었어?” 순이는 그냥 말을 돌리지 않고 대답한다. “남편이 월남에 참전했어요.” (식당) 베트콩들에 붙잡혀 머리에 총구가 겨눠질 때도 대장에게 말한다. “남편 만나러 왔어요.” (베트콩 땅굴) 그녀는 자신이 상길의 부인이라는 것을 매번 새로운 상황이 주어질 때마다 확인시키다시피 한다. 그것은 주변 남자들에게 확인시키는 행위일 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환기하는 행동처럼 보이기도 한다. 말하자면 베트남에 와서조차 시어머니의 요구는 단 한 순간도 중단되지 않는다. 영화의 가장 강력한 명령. 혹은 공동체의 법. 그때 순이에게 자유의 행위는 허락되지 않는다. 자유의 의지가 없는 텅 빈 행위. 그런데 영화는 내내 그것을 순이의 의지로 보고 싶어한다. 공동체의 요구를 따르는 수동적 행위와 오로지 행위의 능동적 활동만을 보고 싶어하는 감정선의 체현. 나는 이 불일치를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님은 먼곳에>에서 가장 기이하게 여겨지는 것은 순이가 이 힘겨운 임무를 단 한 순간도 포기할 생각은 엄두도 내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그녀는 포기할 수 있는 가장 결정적인 순간, 아니 차라리 포기할 수 있는 알리바이를 댈 수 있는 가장 좋은 순간, 그러니까 그녀의 남편 상길이 실종되었으며 정만과 그의 위문공연단 동료들이 모두 한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을 때 그녀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 오로지 남편 상길만을 위해서 간직해왔던 순결을 미군 장교에게 바치기로 결심한다. 그것을 포기했을 때 순이가 남편을 만나서 내줄 수 있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나는 미군 캠프에서 순이가 용득을 내보내고 결심한 듯이 그녀 혼자 남아 미군 중령의 숙소 방문을 닫을 때 이준익, 당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라고 물어보고 싶어졌다. <님은 먼곳에>에 결정적으로 없는 것은 여주인공 순이의 구원이라는 해결이다. 이 악순환의 구조 안에서 순이의 진정한 구원은 무엇인가? 그것은 당연히 이 희생의 구조를 탈출하는 것이다. 그러나 순이는 홀린 듯이 희생의 유혹에 저항하기를 포기한다. <님은 먼곳에>가 감정적으로 다소 둔하게 여겨지는 것은 순이가 이 유혹을 어떻게 포기하는지를 다루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감정적으로 지나치게 불편해진다고 생각해서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 대신 순이는 거의 영웅적으로 이 모험담을 수행한다. 그렇다면 순이의 행위는 모든 고난을 무릅쓰고 결국 원하는 것을 얻는 영웅적 제스처인가?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대답하려면 우리는 순이가 무엇을 포기했는지를 셈해야 한다. 대답은 참으로 가련하다. 순이는 단 한 순간도 사랑받지 못하는 자리에서 내내 사랑하는 행위만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준익은 자살적 제스처에 만족하는 것은 아닐까? 나는 이 문제를 좀더 확장하고 싶다. 이준익은 여자에게 환상을 갖기보다는 차라리 자살적 제스처에 만족하는 것은 아닐까, 라는 반문을 하게 만든다. 이를테면 계백의 선택(<황산벌>). 공길과 장생의 마지막 광대놀음(<왕의 남자>). 둘의 우정을 위해서 그냥 시골 방송국에 남기로 한 결정. 말하자면 ‘상징적’ 자살의 제스처(<라디오 스타>). 친구의 장례식에 다녀온 다음 ‘사회적’ 자살을 결심하는 밴드 결성(<즐거운 인생>). 그리고 베트남에 있는 남편을 만나러 가는 순이의 결심. 그들은 거의 일제히 어떤 자살의 제스처를 선택한다. 그 행동이 이준익을 감동시킨다. 그런 다음 이준익은 단 한 순간도 자신의 결정에 대해서 후회하지 않는 등장인물들을 보면서 무언가 약속이 지켜졌다고 생각한다. 어떤 약속? 희생이라는 환상. 손해라는 만족. 이 역설적인 계산법을 지켰다는 약속. 이때 환상은 주인공들을 잡아먹는다. 그런 다음 환상의 목표가 요구하는 것이 자기가 바라는 것이라는 알리바이에 굴복한다. 이때 희생은 모든 계산을 교란에 빠트린다. 모두에게 사랑받는다는 환상보다 모두를 사랑하는 환상이 훨씬 더 고상하게 보이는 이유는 무엇보다 그것이 희생적이기 때문이다. 왜 희생이 우리를 감동시키는가? 그것은 현실의 약속보다 더 큰 무엇이 지켜졌다는 믿음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희생은 사랑을 하는 자리가 주는 자리보다 언제나 우위를 점하게 만든다. 이때 핵심은 둘 사이의 대가의 교환이 불가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준익이 자신의 등장인물들에게 반복해서 희생을 강요하는 것을 단지 관념적이라고 비판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 영화의 목표는 그 희생을 자발적으로 행하고 있다는 믿음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믿음? 나는 사랑받지 못하지만 목숨을 걸고 사랑을 베풀고 있어요. 나는 그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어요. <님은 먼곳에>의 환상은 오로지 사랑을 베푸는 것만으로 충분히 만족한다는 요구 위에 서 있다. 하지만 여기 예기치 않은 난관이 기다리고 있다. 이준익이 이 환상의 공식을 남자들 사이의 문제로 다룰 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남자와 여자 사이가 되자 갑자기 공식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남자와 여자는 남편과 아내가 되었고, 여기에 매개자로서 시어머니가 동원되고, 그런 다음 그녀에게 전근대적 봉건제의 유교에 따른 ‘가문을 잇는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명령이 주어진다. 물론 당신은 이게 웃긴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녀가 속해 있는 공동체 안에서 그녀에게 그것을 요구할 때, 게다가 그것을 거절할 수 없을 때(친정아버지는 출가외인이라고 집에 돌아온 그녀를 쫓아낸다), 그래서 그것이 공동체의 법이 되었을 때(그녀는 달리 갈 데가 없다), 그런 다음 당신이 그 법을 수행해야 하는 자리에 갈 때, 당신은 더이상 웃지 못할 것이다. 사실상 그녀가 호이안의 능선에서 남편 상길을 만날 때 결국 그 기회는 그녀의 두 번째 ‘상징적’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이 사랑의 불가능한 교환관계를 바탕으로 한 희생을 건드릴 때 이준익이 순이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에 대해서 대답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님은 먼곳에>를 보면서 이 질문이 모호하게 느껴진 것은 사랑이 끼어들 구석이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 영화의 감정선 모멘트의 희극적 비극성이다. 이 이야기의 조건의 복기. 상길은 아내 순이 말고 다른 마음속 애인이 있다. 아마도 순이는 시골 동네에서 배운 것 없이 자라서 아버지의 요구로 상길에게 시집왔을 것이다. 게다가 그녀는 시집살이에서 쫓겨나면 친정 말고는 갈 데도 없다. 상길이 마음에 둔 상대는 서울에서 대학 다닐 때 사귄 여자이다. 그걸 순이도 알고 있다(시어머니가 “니가 우엣으면 서방이 결혼하자마자 군대로 내빼더니 전쟁통엘 갔나 말이다”라고 다그치자 순이는 “그이 애인이 따로 있다 아닙니까?”라고 대답한다). 말하자면 상길과 순이 사이에는 감정의 끈이 없다. 상길의 마음은 서울에 두고 온 애인에게 향한다. 그가 고참 김 상병을 때린 것은 그가 서울에서 온 애인의 편지를 읽었기 때문이다. 아마 그 이전에는 순이로부터 편지가 왔을 것이다. 그래서 김 상병은 내무반 부대원들에게 “주목, 박상길 일병의 마누라께서 오늘도 불철주야 조국수호에 여념이 없는 서방님께 편지를 보내왔다”라고 소개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편지는 서울에서 온 애인의 편지였다. 순이에게서 편지가 왔을 때는 참았던 상길은 이번에는 참지 않는다. 그런 다음 둘이서 외박을 나가 여인숙에서 술을 마시면서 순이에게 상길은 묻는다. “니 내 사랑하나?” 순이는 대답하지 않는다. (혹은 못한다) 상길은 말한다. “니 이제 면회 오지 마라” 그런 다음 마지막으로 질문한다. “니 사랑이 뭔지 아나?” 이 말은 상길이 영화 전체에서 순이에게 한 마지막 대사이다. 이 말의 순서는 음미해볼 만하다. 만일 이 말이 반대의 순서로 진행되었다고 가정해보자. “니 사랑이 뭔지 아나?”라고 먼저 물었을 때 그 말의 뜻은 순이가 사랑이 ‘뭔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런 다음 “니 내 사랑하나?”라고 물을 때 사랑이 ‘뭔지 모르는’ 순이가 사랑을 어떻게 할 수 있겠냐고 물어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희망이 있다. 만일 사랑이 무엇인지 안다면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말의 순서를 바꾸면 단지 질문의 순서가 바뀌는 것이 아니다. “니 내 사랑하나?”라고 먼저 물었을 때 질문의 뜻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정말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이다. 다른 하나는 나를 사랑할 리가 없지 않느냐는 반어법이다. 그런 다음 “니 사랑이 뭔지 아나?”라고 물을 때 이 질문은 비참하게도 두 개의 뜻을 모두 무효화시킨다.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할 때 “니 내 사랑하나”라는 질문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더이상 상길이 순이에게 한 말은 없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 장면 다음에 우여곡절 끝에 베트남 정글의 능선에서 만나는 마지막 장면까지 순이는 상길을 만나지 못한다. 순이가 ‘따귀를 갈기는’ 행위를 “니 사랑이 뭔지 아나?”에 대한 대답으로 읽는다면 우리는 이준익의 설명과 정반대로 해석할 수도 있다. 내가 이렇게 고생을 해서라도 당신을 만나러 오는 행위, 이래도 내가 사랑이 뭔지 모른다고 당신은 말할 수 있습니까, 라는 앎의 제스처라고도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여인숙에서 호이안의 능선까지의 우여곡절은 그렇게 간단하게 뛰어넘을 수 있는 주름이 아니다. 앎과 무효의 관계. 두번의 질문과 침묵. 나는 이준익이 이 사랑의 무효 관계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잔인하기 짝이 없는 대사의 순서는 단지 어떤 한 장면의 문제가 아니라 영화 전체를 통해서 같은 방식으로 되풀이되고 있기 때문이다. <님은 먼곳에>는 얼핏 보기에는 순이와 상길 사이의 평행편집처럼 보이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 장면에서 순이가 <늦기 전에>를 부른(S# 1) 신의 다음 신은 바로 남편 상길의 군대 생활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S# 2) 이 도입부의 편집은 좀 이상한 방식으로 중복되어 있다. ‘상식적으로’ 다음 장면은 순이가 부대에 면회를 오면 된다. 그런데 장면은(S# 3) 다시 시어머니와 순이의 집으로 되돌아가서 “다녀오겠습니다”라는 인사로 이어진다. 그리고 다시 상길의 내무반으로 돌아온다(S# 4). 김 상병은 상길의 서울 애인으로부터 온 편지를 읽다가 둘 사이의 큰 싸움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다음 신은 둘 사이의 싸움의 결과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순이가 버스를 타고 면회 오는 장면이다(S# 5). 다음 장면은 중대장실에서 둘이 질문을 받는다. “니네 영창 갈래 월남 갈래?”(S# 6) 그런 다음 순이는 부대 위병소에 도착해서(S# 7) 상길의 면회를 신청한다. 그리고 난 다음 여인숙에서 순이는 상길로부터 ‘사랑에 관한’ 질문을 받는다. 이 도입부의 신은 홀수(순이)와 짝수(상길)의 순서로 오간다. 이게 너무 기계적이어서 어떤 규칙이 거기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앞의 신은 다음 신의 원인이 아니며, 다음 신은 앞의 신의 결과가 아니다. 그 둘은 자기의 모멘트를 갖고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순이는 시어머니의 요구로 상길을 면회 가고, 상길은 순이가 아니라 서울에서 온 애인의 편지 때문에 베트남에 간다. 말하자면 여기에는 이별의 고통이 없다. 나는 그런 다음 상길이 영화에서 사라지고 맨 마지막 장면에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생각은 틀렸다. 그 둘이 만나지 못하긴 하지만 상길이 영화에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순이가 베트남에 가는 갑판 위에서 “월남에 있는 용호부대 29연대가 어딨어요?”라고 묻자 군인이 지도를 꺼내보면서 “호이안에 있는데요”라고 말한 다음 위치를 설명해준다. 순이는 “이거 저 주시면 안 돼요?”라고 묻는다.(S# 34) 다음 신은 호이안에서 김 상병과 함께 참호를 파고 있는 상길을 보여준다. <님은 먼곳에>는 순이가 남편 상길을 찾으러 베트남에 가는 과정에서 겪는 고통에 관한 이야기이지 상길이 베트남에 가서 겪는 고통에 관한 영화가 아니다. 그러나 이준익은 순이만큼 상길이 수난을 겪는 과정을 보여주려고 한다. 왜 이 장면이 필요해진 것일까? 그건 상길의 고통만이 순이의 수난을 구체적으로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상길은 순이의 행위를 보충설명하고 있는가? 결과는 반대이다. 상길과 순이의 차이는 서로의 수난에 대해서 서로가 서로를 보충해주지 않는 데서 생긴다. 순이의 수난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많은 보충이 필요하지만 상길을 위해서는 설명의 프로그램이 필요없다는 것이 핵심이다. 왜냐하면 상길은 베트남전의 일부이지만 순이는 베트남전의 얼룩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순이가 베트남전으로부터 지나치게 현실성을 상실하고 이야기가 요구하는 환상 안으로 이탈할 때 상길은 그것을 원래의 자리에 되돌려주기 위해 돌아온다. 말하자면 상길은 순이가 만들어내는 환상의 무효 선언이라는 방식으로 끼어든다. 순이가 군인으로부터 지도를 전해받을 때, 그래서 상길의 위치를 상상 속에서가 아니라 지리적으로 고정지을 때, 그런 다음 두 사람 사이를 연결지을 때, <님은 먼곳에>가 단지 베트남전에 대한 낭만화뿐만 아니라(그 이상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만큼의 수난을 다루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였다. 좀더 분명한 모습은 베트남전에서 상길의 모습을 두 번째 보여줄 때이다. 순이는 미군 부대에서의 첫 번째 공연을 완전히 실패하고 좌절해서 앉아 있다. 그때 갑자기 이야기를 둘러싼 평화로운 분위기를 찢듯이 갑자기 상길의 부대가 전투 중인 고지로 옮겨간다(S# 55). 그리고 다시 노천식당으로 돌아온다(S# 56). 여기서 순이는 폭탄 테러를 하는 베트콩 소녀의 죽음을 목격한다. 말하자면 낭만과 수난의 동거. 혹은 환상과 역사의 평행편집. 그런 다음 낭만 속의 현실의 한 조각. 나는 이것이 이준익의 알리바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순이의 환상이 도착적인 만큼 상길의 수난은 단조롭기 짝이 없다. 아마도 <님은 먼곳에>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라면 순이가 한국 군부대에서 공연을 끝내고 헬리콥터로 이동하면서 <님은 먼곳에>를 부르는 장면일 것이다(S# 72). 정글 위로 날아가면서 순이는 노래를 부른다. “사랑한다고 말할걸 그랬지/ 님이 아니면/ 못산다 할 것을/ 사랑한다고 말할걸 그랬지.” <님은 먼곳에>라는 이 영화의 제목과 동명의 곡. 순이가 노래를 부르는 행위는 대답에 대한 요구이다. 노래를 부를 때 가장 절망적인 반응은 상대방이 아무런 감정적 동요를 일으키지 않을 때이다. 그때 노래를 부르는 것은 바로 눈앞에 있는 상대에게 대답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차라리 노래를 부를 때 그것은 자기 자신을 향해서 요구하는 행위이다. 노래를 듣는 우리는 그 노래가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거기에 감정적으로 대답한다. 그때 대답은 정확하게 대답이라기보다는 내 마음속의 상대에게 마치 내가 그 목소리의 주인공인 것처럼 슬그머니 호소하는 행위에 기대는 것이다. 가수들이 노래를 부르기 전에 감정을 잡는 것은 그 노래를 들을 자기 자신을 불러내기 위한 것이다. 종종 가수들이 많은 관객 앞에서 공연을 실패하거나 반대로 텅 빈 객석 앞에서도 성공적인 라이브를 하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 자신은 자기의 노래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자신은 자기 자신에게 간절하게 호소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렇다면 순이는 지금 누구를 위해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가? 이 장면의 이상한 점. 첫째, 이 노래는 순이가 갑자기 정글 위에서 남편 상길을 생각하면서 부르는 노래가 아니다. 헬리콥터 비행사의 “노래 한곡만 불러주실래요”라는 요청에 대한 대답이다. 물론 그 요청을 따르기는 했지만 정글 어딘가에 있을 상길을 부르는 호소일 수 있다(이 장면은 말이 안 된다. 왜냐하면 헬리콥터에서 마이크도 없이 부르는 노래가 들릴 리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적 설정이 <님은 먼곳에>를 잘 요약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둘째, 그렇다면 그 다음 장면에 이어 붙여놓은 상길의 신(S# 73), 베트남의 어느 마을에 수색을 나갔다가 베트콩과 교전을 벌이는 이 장면 위에 노래가 (물론 들리지는 않겠지만) 마치 텔레파시처럼 이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상길의 신이 시작되자마자 노래는 즉시 중단된다. 마치 두개의 신은 결코 하나로 묶여서는 안 되는 것처럼 순이의 노래는 여기까지 전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노래는 도대체 누구를 위해서 부르는 것인가? 나는 이 노래가 그런 다음 그들이 베트콩에 붙잡혔을 때, 그래서 순이와 위문공연단 동료들에게 총이 겨눠졌을 때, 정만이 “She is a singer, 써니야, 노래해”라고 말할 때, 그들 앞에서 다시 <님은 먼곳에>를 부를 때 어리둥절해졌다(S# 78). 이 노래는 순이의 18번이 아니다. 그녀의 애창곡은 <늦기 전에>다. 게다가 가사의 내용도 이 자리에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 베트콩 사령관은 한국말을 알아들을 리 없다. 순이는 이 노래를 베트콩의 땅굴 속에 붙잡혀 있을 때 베트남 어린아이들을 위해서 한번 더 부른다(S# 85). 이 노래는 어떤 응답도 얻지 못할 것이다. 그걸 순이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 노래를 부를 때에만 순이는 이 수동적인 행위의 수행에 대한 목적을 낭만적으로 만들 수 있다. 지금 무언가를 행하고 있는데 그 의미를 알 수 없을 때 유일하게 남은 방법은 목적을 위장하는 것이다. 이것이 헬리콥터를 타고 가면서 순이가 <님은 먼곳에>를 부를 때 이상할 정도로 낭만적으로 보이는 까닭이다. 낭만적으로? 그렇다. 지금은 불행하지만 앞으로는 행복할 것이라는 무책임한 희망의 사악한 유혹. 순이가 노래를 부르는 것은 슬프게도 한번도 가져본 적이 없는 ‘사랑하는’ 남편을 위해서이다. 가장 비참한 진실은 상길은 그녀를 사랑하지 않지만 남편은 그를 사랑할 것이라는 기대가 거기에 있다. 만일 남편의 실체를 지울 수만 있다면 아내는 남편의 사랑받는 존재라는 일반론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남편이라는 텅 빈 이름. 순이의 환상을 상길은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니 내 사랑하나?”라고 물은 다음 “니 사랑이 뭔지 아나?”라고 (그 반대가 아니라) 질문한 것이다. 순이가 부르는 <님은 먼곳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니다. 이 불가능한 관계를 순이는 포기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는 중이다. 약간 짓궂게 가정해보자. 여인숙에서 상길이 질문을 한다. “니 내 사랑하나”라고 물었을 때(‘사랑한다고 말할걸 그랬지’) 순이가 “네”라고 대답한다면 상길은 뒤이어 “니 사랑이 뭔지 아나?”라고 비웃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니 내 사랑하나”라고 물었을 때 침묵을 지키다가 뒤이어 “니 사랑이 뭔지 아나?”라고 물었을 때(‘사랑하다고 말할걸 그랬지’) “네,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신을) 사랑해요”라고 대답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그때 사랑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상길이 된다. 그러므로 이 노래는 상길이 바보라는 것을 가리키는 것일까? 하지만 순이는 사랑에 관한 두번의 질문을 받는 동안 한번도 대답하지 못했다. 그런 다음 다른 장소에서 <님은 먼곳에>를 부른다. 그리고 ‘사랑한다고 말할걸 그랬지’라고 노래한다. 순이가 부르는 노래 <님은 먼곳에>는 그녀 자신을 수수께끼에 던져넣을 뿐만 아니라 사랑과의 관계에서 그녀 안의 무엇이 작동하고 있는지를 모호하게 남겨놓는다. 그때 우리는 노래를 불러달라고 요청한 사람이 두번 모두 (헬리콥터 비행사와 정만) 그녀를 순이가 아니라 ‘써니’라고 불렀음을 놓쳐서는 안 된다. 요청과 대답의 불일치. 노래를 청한 이들은 질문을 알지 못하고, 질문을 한 사람은 노래를 듣지 못한다. 말 그대로 노래는 그저 허공을 떠돈다. 순이는 자기의 목표에 도착할 수 없다 자, 여기까지 검토한 사실로부터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 순이는 어떻게 해서도 자기의 목표에 도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상길에게 다가갈수록 남편은 점점 더 멀리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마지막에 순이가 ‘따귀를 갈기는’ 장면은 도대체 무엇인가? 나는 “모든 대답이 마지막에 있다”는 이준익의 말을 문자 그대로 따를 생각이다. 그 대신 나의 방점은 대답이 아니라 마지막에 있다. 이 장면 ‘이후’가 없는 마지막 장면으로서 ‘따귀를 갈기는’ 행위는 단지 역설인가? 아니, 그렇지 않다. 두개의 해석. 하나는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순이 앞에 전투에서 금방 빠져나온 상길이 서 있다. 그는 김 상병의 죽음을 본 다음 반쯤 넋이 나갔다. 그런 다음 그의 앞에 순이가 선다. 순이는 뺨을 때린다. 그때 그 행위는 상길이 아니라 그녀의 남편을 일깨우기 위해서 ‘따귀를 갈기는’ 것이다. 제발 정신을 차리세요, 당신 앞에 당신의 아내가 와서 서 있답니다. 만일 그 자리에 넋이 나간 박상길 일병만이 있다면 순이의 존재는 아무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순이가 자기의 존재를 확인받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이다. 그러나 상길이 정신을 차릴 때, 그의 아내를 알아볼 때, 사실상 순이는 다시 환상의 구조 안으로 스스로 걸어들어가는 것이다. 말하자면 자신의 주체에 대한 존재론적 자살의 제스처. 다른 하나의 해석은 다소 음산하다. 만일 그 자리에 순이가 남편의 ‘상징적’ 존재만을 원하고 상길의 실체가 폐지되기를 확인하기 위해서 그렇게 안간힘을 써서 온 것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녀를 참을 수 있게 만들어준 유일한 희망. 남편이 영원히 자신을 사랑하지 않아도 모두에게 허락되는 그 자리, 하지만 오로지 자신만이 그를 사랑하는 자리, 마치 자기 안의 자기를 위해 노래 부르듯이, 상실을 통해서만 획득될 수 있는 소유의 자리. 순이는 시어머니가 “월남 가자, 앞장서라”라고 짐을 싸들고 나오자 대답한다. “월남 간다고 다 죽는 거 아닙니다” 물론이다. 하지만 이 말의 절반의 진실은 그 반어법에 있다. 베트남에서는 정말로 많은 병사들이 죽었다. 적어도 그녀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그렇게 대답할 수 있었겠는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순이가 베트남에서 기대하는 것은 물론 ‘남편 상길’을 만나는 것이다. 나는 ‘남편’ ‘상길’이라는 호명이 하나가 아니라 둘을 하나로 묶은 것이라는 사실을 환기시키고 싶다. 그때 상길과 남편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는 없을까? 왜냐하면 그것만이 여인숙에서 던진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니 내 사랑하나?” 그런데 누구를? “니 사랑이 뭔지 아나?” 순이는 대답할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랑의 대상이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에게서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순이가 베트남에 가는 것이 그 질문에 대답하기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대상을 결정하기 위한 행동이다. 그때 그 노력은 동시에 순이의 희망의 가면을 뒤집어쓴 환상이다. 그런데 호이안의 능선에서 ‘남편’ ‘상길’과 마주칠 때 순이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확인하게 된다. 말 그대로 환상의 무효화. 여기가 마지막 장면이라면, 그래서 더이상 진행할 어떤 이야기도 남아 있지 않다면, 오로지 ‘따귀를 갈기는’ 행위 이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순이에게 이 시간은 상길을 삭제하고 남편만을 남기기 위한 은밀한 소망의 노력이 좌절되는 순간이라고 가정할 수는 없을까? 그냥 간단하게 순이가 이 악순환의 구조를 끝장내기 위해서, 그래서 박상길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도착했는데 살아 있는 박상길을 만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일까? 그때 ‘따귀를 갈기는’ 행위는 아직도 살아 있습니까, 라는 확인이다. 박상길은 살아남았고 순이는 그가 원하는 남편을 얻지 못할 것이다. 순이는 비로소 상길과 남편의 분리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이걸 인정하는 것은 자신의 환상에 대한 자살의 제스처가 될 것이다. 결국은 어떻게 해도 같은 결론. 세상의 중심에서 역사의 주변으로 그러므로 ‘하여튼’ <님은 먼곳에>는 여기서 끝난다. 그때 카메라는 그냥 우두커니 서 있는 것처럼 바라본다. 그들은 베트남전의 일부일 뿐이다. 그것이 이준익이 이야기를 끝내는 방식이다. 이준익 영화의 엔딩의 특징은 세상의 중심에서 시작한 다음 역사의 주변으로 사라져가는 인물들이다. 계백과 김유신의 그 유명한 역사적인 전투로 시작했지만 <황산벌>의 마지막 장면은 여기가 백제의 땅이건 신라의 땅이건 아무 관심없이 모내기를 하고 있는 농촌의 논밭을 보여주면서 끝난다. 백제의 병졸 거시기(이문식)는 어머니를 찾아서 조국의 몰락은 벌써 잊어버린 듯 신나게 뛰어온다. 광대 장생과 공길은 마지막에 외줄 위에서 목숨을 건 멋진 공연을 펼친다. 하지만 거기에 어떤 관객도 없다. 연산군의 폭정을 쓰러트리기 위해서 저 멀리 궁궐의 문이 열린다. 광대의 자리. 역사의 무관심(<왕의 남자>). 두편의 음악영화(<라디오 스타>와 <즐거운 인생>)는 그냥 허접하게 마무리를 짓는다. 거기서 무언가 심금을 울리거나 어떤 대단한 깨달음을 주지는 않는다. 나는 그것이 이준익 영화가 지닌 세상에 대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그는 세계에 중심 따위가 있을 리 없다고 생각한다. 그저 자기가 붙잡은 등장인물의 감정선을 따라서 거의 일직선을 그으면서 종종 사례들에 역량을 부여하고, 사건들에서 의미를 찾고, 장애물을 넘어설 수 있는 묘수를 찾고, 그들을 둘러싼 세계를 돌아보고, 더이상 진행할 수 없을 때 이제 그 선을 인물들에게 넘겨주고 갑자기 뒤로 물러난다. 그러면 우리는 이 직선이 세상의 수많은 선 중 하나였다는 것을 보게 된다. 종종 털실처럼 뒤엉킨 실타래. 아니, 차라리 실타래라는 세상. 실이 끝날 때 세상이 시작된다. 이준익은 세상이 시작될 때 영화를 끝낸다. 1971년 12월, 그러니까 순이가 베트남 공연을 하던 그 다음달. 박정희는 비상사태를 선포했고, 베트남 파병 ‘이후’ 첫 부대가 철수하여 부산항에 도착했다. 그 배에 순이와 상길이 타고 있었을까?

올림픽 특수 노린 지상파 3사의 결전

“베이징 환잉 니(베이징은 당신을 환영합니다)!” ‘2008 베이징올림픽’이 8월8일 오후 8시8분에 열리는 개막식을 시작으로 17일간의 대장정을 시작한다. 중국 당국이 철저히 비밀에 부쳤던 개막식 내용도 개최일이 다가오면서 조금씩 공개되고 있다. 지난 7월29일 SBS 뉴스를 통해 단독 공개된 개막식 리허설 장면은 궁금증을 기대감으로 바꾸기에 충분했다. 중국 5천년의 역사와 개혁 개방 이후의 발전을 표현한 매스게임은 컴퓨터그래픽으로 만든 정교한 그림 같았다. 일사불란한 동작으로 움직이는 수천명의 무용수들이 하늘을 날고, 바다를 헤엄쳤다. 개막 카운트다운을 알리는 우렁찬 북소리는 새둥지 모양을 본뜬 올림픽 주경기장을 가득 채웠다. 지구촌 최대의 스포츠 축제, 올림픽을 앞두고 지상파 방송 3사도 바빠졌다. 결전을 중계하는 또 다른 결전을 위해 다양한 특집방송과 경기 중계 준비에 한창이다. 특히 올림픽이 열리는 중국과의 시차가 한 시간이어서 세 방송사는 주요 경기 대부분을 생중계로 방송할 예정이다. KBS는 주중에는 2TV, 주말에는 1TV에서 올림픽 방송을 집중 중계한다. 올림픽 기간에 2TV에서는 오전 7시30분부터 전날 경기를 다시 정리해 보여주는 <베이징 리포트>를, 밤 12시45분에는 그날의 주요 경기 하이라이트를 묶은 <베이징 24>를 편성해 방송한다. 영화감독 장이모의 총연출로 준비기간만 3년, 투입된 인원만 2만여명으로 알려진 화려한 개막식과 축제의 뒤풀이인 폐막식은 1TV에서 밤 9시부터 생중계한다. 개막식 당일에는 주경기장 인근 공개 스튜디오에서 <9시 뉴스>도 전한다. MBC는 비보이를 활용한 브리지, 만화로 보는 올림픽 소사, 사자성어를 이용한 경기 정리 등으로 시선을 붙들 예정이다. 이를 위해 현지 중계단에 처음으로 작가와 음악·컴퓨터그래픽 담당자가 동행한다. 베이징 현지에서는 <2008 베이징 올림픽>(낮 12시), 서울 스튜디오에서는 <니하오 베이징>(밤 12시)을 통해 올림픽 주요경기와 하이라이트를 정리한다. SBS는 매체 접근 방식을 넓혀 KBS와 MBC를 견제할 예정이다. 내셔널지오그래픽과 협약을 맺어 중국 문화 관련 다큐멘터리를 올림픽 기간 내내 다양하게 펼쳐놓는 한편 SBS 홈페이지에서도 올림픽 개막식과 주요 경기들을 실시간 중계한다. <금메달을 부르는 과학>(8월5일 오후 8시50분), <마린보이 박태환을 만나다>(8월5일 밤 11시5분) 등 특집 프로그램으로 한국선수들의 선전도 기원한다. 올림픽은 지상파 방송 3사가 같은 화면을 공유하는 특성상 생중계 시 캐스터와 해설자의 능력이 시청률을 좌우한다. 세계 각국 스포츠 선수들이 만들어내는 감동의 드라마를 전달하기 위해 방송 3사는 앞다퉈 전 국가대표 선수들을 해설자로 영입했다. MBC는 김수녕(양궁)·임오경(핸드볼)·방수현(배드민턴) 등 여성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를, KBS는 김광선(복싱)·여홍철(기계체조)·전병관(역도) 등을 전면에 내세웠다. SBS도 전주원(농구)·황영조(마라톤)·문대성(태권도) 등이 시청자를 생생한 올림픽 현장으로 이끈다. 한국이 금빛 영광을 기대하고 있는 양궁, 태권도, 역도, 수영은 주요 중계 종목이다. 특히 국민들의 관심이 많이 쏠리는 야구와 축구는 방송 3사가 각각 1경기 1개사, 1경기 2개사가 중계하기로 합의하면서 전파 낭비로 지적받던 중복 중계의 여지도 없앴다. 이렇듯 방송 3사가 서로를 경계하며 중계에 매달리는 이유는 ‘올림픽 특수’를 기대해서다. 그 어떤 프로그램보다 강력하게 시청자를 텔레비전 앞으로 불러모을 수 있는 올림픽 중계엔 상상을 초월할 중계권료와 광고시장이 따라오기 때문이다. ‘올림픽 중계 수맥’을 잘 짚어 ‘돈맥’도 흐르게 할 요량이다.

[런던] 엄마의 옛 남친들, 뒷심을 발휘하다

영화 <맘마미아!>가 뮤지컬의 도시 런던에서 선전하고 있다. <맘마미아!>는 결혼식을 앞둔 소피가 한번도 만난 적 없는 친아버지를 찾기 위해 엄마의 옛 남자친구를 몰래 초대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다. 지난 7월11일 개봉한 이 영화는 총 496개 스크린에서 1만3294파운드를 벌어들이며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고, 7월25일 전세계를 강타한 블록버스터 <다크 나이트>가 개봉하기 전까지 1위 자리를 고수했다. 하지만 8월1일, <다크 나이트>가 개봉 2주차에 접어들면서 상황이 조금 바뀌기 시작했다. <다크 나이트>가 개봉 2주차까지 박스오피스 1위 자리를 고수했지만, 흥행수입이 절반으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평단과 관객의 고른 호평에도, 스크린 수도 502개로 줄었다. 반면 <맘마미아!>의 상황은 호전됐다. 흥행수입은 1천파운드가량이 늘었고, 스크린 수는 개봉 첫주보다 무려 22개가 많은 519개로 늘었다. 이를 두고 런던의 공연·예술 전문지 <타임아웃>은 “<맘마미아!>로 장편 상업영화에 데뷔한 감독 필리다 로이드는 1970년대의 향수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제대로 아는 것 같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디자인과 로케이션, 캐스팅, 안무는 70년대의 감성을 제대로 차용했지만, 당시의 다소 무거운 냉소와 풍자, 반어적인 분위기는 적절히 걷어냈다는 것. <가디언>과 <미러> <타임스> 등 영국 주요 언론의 영화에 대한 평가는 다소 엇갈렸지만, 소피의 엄마인 도나 역을 맡은 메릴 스트립의 연기에 대해서만큼은 모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메릴 스트립과 소피의 아버지로 ‘의심되는’ 샘과 해리 역을 맡은 콜린 퍼스, 피어스 브로스넌은 지난 8월4일 발표된 2008 ‘내셔널 무비 어워즈’(National Movie Awards) 남녀 주연상 후보에도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 <맘마미아!>는 <스위니 토트: 어느 잔혹한 이발사 이야기> 등과 함께 뮤지컬 부문에 노미네이트됐다. ‘내셔널 무비 어워즈는 평단이 아닌 오직 대중의 투표만으로 수상자를 가리는 영화제로, ‘내셔널 텔레비전 어워즈’(National Television Awards)의 성공에 힘입어 비슷한 컨셉으로 2007년부터 시작된 영화제다. 오는 9월 런던의 로열페스티벌홀에서 열릴 계획인 이 시상식은 를 통해 TV로도 중계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