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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1997)

[오픈칼럼] 시간은 언제나 슬프다

한 박스는 족히 넘을 일들이 짧은 시간 동안 일어났다. 밀린 일들이 다 소화되기도 전에 다음 일이 터지는 기분이었다. 아직 다 정리하지 못한 잡동사니들은 여기저기 뒹굴고 있었고 심지어 텔레비전 한대는 현관에 내앉았다. 꼼꼼히 정리해서 되새겨야만 마음이 편했던지라 쉽게 적응이 안 됐다. 갑작스런 노출에 황급해진 기분을 추스를 여유도 없었다. 그냥 흘러가는 대로 방치된 꼬라지였다. 그렇게 대충 20일이 지났다. 이사를 했고, 아빠를 보냈고, 생일을 맞았고, 회사에 앉아 있을 겨를도 없이 부천에서 일주일을 지냈다. 아직 이사한 집엔 실감도 없다. 어정쩡한 기쁨인지, 조금은 좋은 누군가의 비밀도 알아버렸다. 역시 정리할 기분은 되지 않았다. 원래 놓여 있던 위치를 잃은 물건들은 어떻게 재배치를 해도 어색하다. 그냥 몰려오는 시간에 찡기듯 사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조금은 스펙터클하지 않은 사건들로 꾸며졌다면 즐길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결국 밤을 새워야만 여유가 가능했다. 언젠가부터 25살이 되면 나는 안심할 수 있는 어떤 모습이 될 거라 생각했다. 막연한 희망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그때는 25란 나이가 성장해야 할 일종의 데드라인처럼 느껴졌다. 10cm씩 자라던 키가 멈추기 시작했을때, 괜찮아 대학생 때까지는, 군대에 갈 때까지는 더 자랄 수 있을 거라며 위로했던 것처럼 그때는 아직 25살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심했다. 하지만 25살이 돼도 변한 건 없었다. 오히려 25에 그려 놓았던 그림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주어진 것도, 놓여진 것도 없어 막막했다. 시간은 계속 아무런 의미없이 지나갔고 어느새 27이 되었다. 오늘같은 내일이 쌓여 만들어낸 25살은 시시하고 재미없었다. 막연하게 희망차 보이지만 미래는 결국 코앞의 일을 수백번 반복하면 찾아오는 허무한 것이었다. 스펙터클한 사건의 연속이 아니라면 과연 시간을 실감할 때가 있을까 싶었다. 키 따위는 잊어버리자며 포기했던 것처럼 나이 따위 잊어버리자고 체념했다. 호소다 마모루가 그린 애니메이션영화 <시간을 달리는 소녀>에서 소녀 마코토는 자꾸만 과거로 뒷걸음질을 친다. 아프게 쨍 하고 지나가려는 여름의 뒤꿈치를 잡고 소녀는 자신도 잘 모를 칭얼거림을 늘어놓는다. 그래서 소녀가 “여름이 갔다”고 말하는 순간 스크린은 그 어느 때보다 아프게 울렸다. 아침에 일어나 밥을 먹고 가방을 들고 학교에 갔으며 당연스레 수업을 듣고 집으로 돌아오던 일상에서 어느 순간 시간이란 게 느껴졌을 때, 그건 겁이었다. 마코토는 아무렇지 않게 왔다갔다 하며 보고 지났던 것들이 이젠 돌아볼 수 없는 어떤 것이 되어버린다는 상실감 앞에 망연자실했다. 그리고 그때 나도 덩달아 겁을 먹었다. 시간은 그리고 칠하며 손가락으로 세서 계획할 수 있는 아름다운 미래의 대상이 아니었다. 25가 돼도 느끼지 못했던 어떤 실감을 27이 되던 날 불쑥 내미는 불친절한 선언 같은 것이었다. 다시 한번 밤을 빌려 여유를 부려보려 했지만 이미 지나간 시간은 꼬랑지도 없이 달아나 있었다. 마코토의 여름처럼 나의 7월이 불쑥 나타나 가슴을 찌르고 도망갔다. 시간은 언제나 슬픈 법이다.

[김혜리가 만난 사람] 무술감독 정두홍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시사회에서 정두홍 무술감독을 보았다. 5시 방향 뒤쪽에서 비스듬히. 나의 자리는 극장의 맨 뒷줄, 그는 바로 앞줄 왼쪽이었다. 속눈썹이 참 길다고 생각했다. 김지운 감독과 세 배우가 입장하자 정두홍 감독은 열렬히 박수를 쳤다. 마이크를 잡은 김지운 감독은 무대인사를 하고 정두홍 무술감독이 이 자리에 있다고 알렸다. 관객이 두리번거렸다. 벌떡 일어나 목례라도 하면 분위기가 화목할 텐데, 정두홍 감독은 질색하며 좌석 깊이 몸을 파묻었다. 수줍은 사람이네. 설마. 그 날의 잔상이 인터뷰를 감행하게 했다고는 차마 말 못하지만, 정두홍 무술감독이라면 야전에서 만나야만 할 것 같은 강박이 있었다. 한끼 식사나 몇잔의 커피로는 도저히 답이 안 나올 사람, 어깨를 부대끼고 넘어지며 무엇인가를 함께 만든 다음에야 간신히 첫 문장을 쓸 수 있을 것 같은 대상. 정두홍은 액션 연기자로서 무술감독으로서 싸우듯 일을 해왔지만, 우선 무술감독이기 위해서도 싸워야했다. 무술 연기자 선배들이 좋았던 시절을 안주삼아 이야기하고 영화 크레딧에 무술감독 대신 무술지도라는 직함이 오르던 1990년대 초 과도기의 충무로에 착지한 그는, 자기의 길을 닦아가며 걸어야 했다. 1990년 <장군의 아들>에서 배우 이일재의 대역으로 영화계에 점을 찍은 이래, 무술감독으로 성장해 급속히 산업화한 한국영화가 필요로 하는 크고 작은 몸싸움을 만들어냈다. 액션 장르영화의 전통이 단절된 상태에서 선봉에 선 정두홍의 작업은 행운인지 불운인지 실전이 곧 학습이었다. <명성황후> 뮤직비디오에서 와이어 액션을 처음 체험했고, <쉬리>의 시가전은 그가 최초로 시도한 총기 액션이었으며, <태양은 없다>와 <반칙왕>은 권투와 레슬링 액션에 대한 첫 도전이었다. 정두홍은 누울 자리를 스스로 만들어가야 하는 팔자다. 액션 연기자들의 ‘집’이 간절해서 동료 넷과 함께 1998년 보라매공원 체육관 한구석을 빌려 설립한 공동체 서울액션스쿨은 체육관에서 출발해 스턴트맨들의 학교가 됐고 <짝패> 이후로는 제작사 성격도 띠고 있다. 액션 연기의 맥을 이어갈 수 있는 안정적 텃밭을 한국영화산업 안에서 사수하는 문제도 정두홍의 현안이다. 뜻 맞는 감독들과 시도하는 액션배우 공모 프로젝트는 그런 고심의 결과다. 말이 좋아 ‘국가대표’지, 장르영화 시장이 허약한 충무로에서 정두홍 감독의 고민은 여전히 사활의 차원이다. 그래서 그는 여태 뜨겁다. 정두홍의 액션이 우아하다는 평을 들었던 기억은 많지 않다. 그가 디자인한 싸움은 살아 있음을 확인하기 위한 몸부림의 냄새로 진동한다. 정두홍을 누구보다 먼저 알아준 김성수 감독의 <비트>를 다시 보다가 문득 깨달았다. 당대의 청춘을 전율케 한 교무실 액션의 시동은 그제껏 묵묵하던 민이(정우성)가 친구를 패는 교사의 몽둥이를 움켜쥐고 낮게 내뱉은 대사였다.“때리지 마세요.” 지긋지긋하게 세상의 주먹에 두들겨 맞은 자의 항변. 그 한마디는 정두홍표 액션의 정서를 꿰뚫는다. 당신이 정두홍과 대화하며 가장 자주 듣게 될 단어는‘미치다’,‘부딪히다’,‘아프다’다. 위기가 왔을 때 이 내향적인 남자가 취하는 유일한 전술은 본인의 몸을 들들 볶는 것이다. 슬럼프에 빠진 2004년 겨울에는 계절이 바뀔 때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술을 마시기도 했고, 서른여덟살이 된 이듬해 여름에는 코뼈를 부러뜨려가며 프로 복서로 데뷔전을 치렀다.“이러다 죽겠구나”라고 체감하는 점에 도달하면 그는 죽지 않기 위해 다시 운동화 끈을 매고 달린다. 기체가 되어 자유를 얻는 비등점에 이르기 위해 자신을 지글대는 탄불 위에 올려놓는 형국이다. 정두홍의 동지이자 천적(?)인 류승완 감독은 “딱 <삼국지>의 조자룡”이라고 잘라 말한다. 과연 정두홍은 <칼의 노래>를 보고 울었다고 했다. 그것도 부록을 읽고. 장수들의 인명록에 모함과 누명으로 죽은 영웅이 하도 많아 분을 가누지 못한 것이다. <너는 내 운명>을 보며 오열을 참느라 온몸의 잔근육이 다 불거진 사건은 류승완이 정두홍을 놀릴 때 애용하는 일화다. 강하지만 안타까운 사람, 그는 우리가 파주 액션스쿨에 도착했을 때 땀에 절어 주먹을 날리고 있었다. -실베스터 스탤론이 쓴‘몸만들기’에 관한 책을 읽었어요. 과거에는 운동을 몇 시간 했느냐에 집착했지만 나이 드니 일주일에 단 몇 시간이라도 즐겁게 운동하는 쪽이 몸에 이롭다는 걸 알았다고 썼던데요. 감독님에겐 아직 그런 여유를 부릴 시점이 안 왔나요? =이미 왔죠. 지금 제가 마흔셋인데 서른아홉 무렵 왔어요. 그 다음부턴 내 몸이 이기는지 내가 이기는지 싸우는 건데 결국은 바보짓이죠. 밤 되면 아프니까. 전에는 작품 회의가 있어도 운동이 미치게 하고 싶어서 핑계를 대고 빠질 정도였어요. 요즘도 파주에 있으면 종일 운동하지만 집중적인 개인 운동은 하루에 평균 네댓 시간 정도? -평생 육체를 쓰면서 살아온 사람에게 나이 먹는다는 사실은 보통 사람들보다 무겁게 다가오겠죠? =슬프죠. 겁난다는 말도 자주 써요. 촬영현장에서도 몸을 다 못 풀고 살짝 시범을 보여주면 “오, 맛이 갔는데?”라고 놀리잖아요? 무심코 던진 농담이지만 속으로 철렁하죠. (웃음) 서울액션스쿨에는 20대, 30대 펄펄 나는 애들이 있잖아요. 부러우면 부러운 걸로 끝내야 하는데 단원들 다 보낸 다음에 그 애들이 했던 걸 저 혼자 한번 그대로 해봐요. (웃음) 축구를 즐겨요. 20대들과 뛰어도 몸으로 들이받으며 서로 사정 봐주지 않는 신선한 경쟁의 느낌이 좋아요. 체력은 질 수밖에 없지만 이겨보려고 애쓸 때 제 속에서 올라오는 에너지가 좋거든요. 악을 써서 계속 운동을 하는 것은 꼭 한창때만큼 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러지 않으면 정신력까지 약해지기 때문이에요. -관객이 극장에서 확인한 정두홍 감독님의 최근작은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하 <놈놈놈>)입니다. 김지운 감독과는 세 번째 작업인데요. =누군가가 영화계에서 제가 대화할 때 가장 아이디어가 잘 떠오르는 상대를 딱 집으라고 한다면 김지운 감독이에요. 이 양반이 자기가 원하는 정서를 말해주면 제 머릿속에 그림이 딱 떠올라요. 근데 제가 흥분하면 남들이 제 말을 못 알아듣는 경향이 있거든요? (웃음) 김지운 감독님한테 “아하! 그러니까 이렇게 해서 저렇게 하라는 거지?”라고 떠들면, 그냥 넘어가질 않고 “뭐? 못 알아듣겠어”라고 꼭 반문을 해요. “감독님만 내 이야기 못 알아들어”라고 투덜거리면“뭐 나만? 다들 못 알아들어”그러죠. (좌중 폭소) <반칙왕>에서 처음 만났을 때는 불편했어요. 사람이 눈으로 말을 해야 하는데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서 짜증났어요. 말도 작게 자분자분 해서 잘 안 들려서 일단 “알겠습니다” 하고 나중에 스탭한테 확인하곤 했죠. 그러다 <달콤한 인생>을 하면서 편해지더라고요. 원하는 정서를 분명히 말해주니까. 류승완 감독 같으면 여기서 돌아서 발을 몇번 차고 하는 식으로 자세히 들어가니까 정서는 저쪽에 두고 동선만 쫓아가기 쉽거든요. (웃음) -<놈놈놈>에서 재미있는 요소는 주요 인물의 성격과 액션 스타일이 이루는 조화였어요. 그런데 도원과 창이에 비해 상대적으로 태구의 액션 스타일이 모호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태구는 알고 보면 운이라고 보인 것이 다 내공과 타이밍인 인물인데 그런 절묘함을 내비치는 액션이 좀 부족하지 않았나요? =감독도 나도 태구에게 액션을 더 주는 건 부담스러웠어요. 태구는 옷에서 철판 빼내고 잠수헬멧으로 총탄 튕겨낼 때가 제일 태구스러운 거죠. 뭔가 액션을 줘서 잠재력을 암시하기보다 그냥 무한정 정이 가는 인물이길 바랐어요. 귀여움이 최강이에요. 아무리 우성이와 병헌이가 기막히게 액션을 해도 태구의 귀여움과 사랑스러움은 따라갈 수 없어요. 현장에서 보다가 태구라는 인물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저도 모르게 송강호 방에 가서 맥주를 마셨다니까요. (웃음) 에, 사실 송강호씨 본인 얼굴이 귀엽지는 않잖아요? 근데 태구는 깨물어주고 싶더라고요. -스턴트와 대역 연기를 하면서 많이 다치셨던 걸로 알아요. 거의 죽다 살아난 경험도 있을 텐데, 죽음의 근처에 가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가 뭐라고 보세요? =죽음 근처에 가면 오히려 두려움을 알게 돼요.이런 게 죽는 거구나 알고 나면 도리어 침착해지고 고개를 숙이게 되죠. 부모님들이 자식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고 하는데 전 여기(가슴을 가리키며) 너무 많이 묻었어요. 처음 보낸 분은 선배였는데 제가 무술감독을 맡았던 드라마에서 서강대교 투신장면을 찍다가 사고가 났어요. 10월의 새벽이었는데 너무 추워서 선배가 물에서 나오면 같이 뼈다귀해장국 먹으러 가야지, 온통 그 생각뿐이었어요. 첫번에 잘 뛰어내렸는데 촬영감독님이 한번 더 가재요. 헤엄쳐 나오는 선배한테 “형, 다시 한번 가야 한다는대?” 했더니 “응, 그래? 그럼 가야지” 하면서도 선뜻 몸이 안 움직였어요.“형, 농담 아냐. 진짜야”라고 보내고 두 번째 뛰어내렸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형이 안 나왔어요. 그 뒤 일을 그만두려고 했어요. 그때 제 위에 있던 회장님이 “네가 떠나는 건 좋은데 하던 작품은 책임지고 끝내는 게 맞지 않겠냐”고 해서 알겠다고 했어요. 작품을 마친 뒤 회장님이 무술감독 시절 팀원을 잃은 경험을 들려주시더군요. 저는 그 어떤 종교보다 돌아가신 제 아버지를 믿어요 -종교를 갖고 계신가요? =저는 부처님이나 하나님보다 돌아가신 제 아버지를 더 믿어요. 아버지가 절 살려줘서 지금까지 살아 있다고 생각해요. 원래는 아버지와 사이가 안 좋았어요. 많이 맞으며 자라서 무섭기도 했어요. 농사일하기 싫어하고 말썽을 많이 피웠거든요. 농약 치라고 하면 오기로 일부러 바람을 맞으며 거꾸로 뿌려서 다 얼굴에 쐬고 중독돼서 쓰러져버렸죠. 하하. 그런데 군대에 입대하는 날 아침밥을 먹으며 이별하는데 아버지가 우셨어요. 그러니 아들은 얼마나 눈물이 났겠어요. -형제 중 막내인 걸로 알아요. 막내라서 사는 게 힘든 쪽이었나요? =힘들었죠. 4남3녀의 막내예요. 형, 누나들은 나이 차가 많이 나서 일찌감치 산업전선으로 나갔기 때문에 외동처럼 자랐죠. 집에 돈도 없고 공부도 타고나지 않았으니 얼른 졸업해 농사지으라는 말만 들었어요. 중학교도 안 보내려고 하셨는데 누님들이 고집 피워서 겨우 갈 수 있었고 고등학교 갈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공부에 목표도 없으니 정말 할 일이 없어서 겨울방학 동안 도서관에 있는 책을 다 읽어버렸어요. 제가 유일하게 받은 상이 다독상이죠. (웃음) 그 시간이 없었다면 사람이 지금보다 더 휑했을 거예요. 한달 동안 책 빌리러 갈 때만 빼면 이불 속에서 나오지도 않고 읽었어요. 그게 몇 학년 때였더라? 이거 직업병이야. 기절을 많이 해서 기억력이 없어요. 하하, 웃다가 미안해지죠? -외람되지만 아버님이 많이 때리고 진학도 말리셨는데 그토록 열렬히 사랑하시는 이유를 여쭤봐도 될까요? 게다가 감독 데뷔작으로 준비하신다는 <데어 스토리>(Their Story)라는 영화도 자전적인 부자관계 이야기라고 들었는데요. =<데어 스토리>는 제작자가 액션이 들어가길 원해서 3인칭의 시대극으로 만들까 싶어요. 아버지는 당신이 돈이 없으니까 저를 학교 보내려면 큰 자식들한테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자신이 자식을 돕진 못할망정 도움을 받아서 막내를 교육시키고 싶진 않다는 생각이었어요. 아버지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던 거죠. 그걸 저는 나중에야 이해했죠. 아버지가 돌아가신 건 명절 다음날이었고 저는 군대에 있었어요. 형제들이 하고 싶은 말씀 다 하시고 돌아가시라고 청했는데 아무 할 말 없다면서 벽에 걸린 달력과 시계에 세번 번갈아 시선을 던지다 임종하셨대요. 어머닌 이유를 아셨죠. 달력에 막내 제대하는 날을 표시해놓았던 거예요. -너무 늦게 화해해서 더욱 애틋하신 거네요. 보통 남자애들이 레슬링이든 태권도든 TV로 보고 흉내내다가 운동을 시작하잖아요? =동네에서 두 번째로 우리 집에 텔레비전이 들어왔어요. 큰형이 폼 잡느라 월급까지 가불해서 장만해준 거죠. 어린이 태권왕 대회를 보고 너무나 태권도가 하고 싶었지만 시골이라 도장이 없었어요. 그래서 산에 가서 혼자 타잔놀이하고 동네 골목대장했죠. 심심한 형들이 아이들 데려다 싸움 붙이면 거기서도 승승장구하고. 하지만 옥녀봉파니, 촛불파니 하는 ‘조직’에는 들어가지 않았어요. 실망스런 모습을 봤거든요. 그러다 고등학생 때 처음 이각수 관장님의 도장이 동네에 생긴 거예요. -운동을 통해 자기의 몸이 변화하고 못했던 것을 할 수 있는 즐거움이 컸나요? 아니면 TV에서 본 멋진 장면을 재현하는 기쁨이 컸나요? =그보다 무엇인가에 내가 열중할 수 있다는 사실이 좋았어요. 친구들 몰래 다녔죠. 창피하기도 하고, 운동한다고 소문나면 촛불파에서 더 데려가려고 할 테고. (웃음) 누나들이 명절 때 준 용돈을 모아서 관비를 냈는데 몇달씩 밀려서 엄마한테 고백을 했더니 긴장하시더라고요. 옛날 사람들은 태권도 배운다면 깡패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체육관에 가서 돈 없어서 못 가르치니 못 나오게 해달라고 부탁하셨는데 관장님이 공짜로 다니게 해주셨어요. 제가 은인이 많아요. -태권도 시범단으로 대학 시절 해외 여행도 많이 하셨는데요. 무술 시범이라는 것도 보여주는 액션에 속하니까 실제로 어떻게 하느냐 못지않게 어떻게 보이느냐를 염두에 두셨을 것 같습니다. =쇼맨십이 필요했죠. 내성적이고 수줍었지만 무대에 올라가면 변했어요. 주인공을 맡은 내가 적극적으로 안 하면 팀워크가 깨지니까요. 멕시코시티에서 보인 시범이 기억에 강하게 남아 있어요. 마이크도 없이 고산지대에서 기합을 지르며 했는데 커다란 체육관이 열광으로 진동했어요. 한국에선 시범을 보여도 좀 시니컬하잖아요? 쟤네들 약 파는가보다 그러고. (웃음) -영화와 드라마 일을 하게 된 데에도 그 짜릿한 경험이 은연중에 영향을 끼친 걸까요? =그렇죠. 두 번째 짜릿함은 <테러리스트>에서 최민수씨 대역을 할 때 왔어요. 패션쇼 장면에서 가죽점퍼에 모자를 쓰고 양복 입은 수십명 패거리들과 맞서는데 내 안에서 뭔가가 쫙 올라오는 거예요. 아, 이게 무슨 힘일까. 당시 현장에서 정강이가 찍히고 깨져도 괜찮다고 다시 가자고 그랬어요. 선배들은 방금 비명도 지르고 눈도 풀렸던 애가 그러니 너 마약했냐고 물었어요. 그렇게 영화에 미쳐간 거죠. <본투킬>을 하면서는 쇄골이 부러졌는데 그 이튿날이 <런어웨이>에서 대역을 하기로 한 날이었어요. 그냥 붕대를 감고 현장에 가서 일곱번 차창에 부딪혔어요. 사람이라 아픔은 어쩔 수 없어서 멈칫거렸는지 여섯 번째는 유리창이 깨지지 않았어요. 그래서 일곱 번째는 유리창이 다가오는 걸 보면서 뒷머리를 의식적으로 내둘러 깨고 떨어졌어요. 몸에 힘을 주면 기절을 하다가도 피가 머리에 쏠려 기절을 안 할 수 있다는 걸 그때 배웠죠. (좌중 탄식) 지금도 전 대역하고 싶어요. -<태양은 없다> 촬영 당시 현장을 취재한 선배기자가 말하길 정두홍 무술감독의 첫인상이 “한이 많아 보였다”고 해요. 그 무렵에는 무술팀이 스탭의 일원으로 간주되지 않고 밥도 따로 먹고 했다고 들었어요. 언제부터 그런 분위기가 달라졌나요? 아니면 지금도 그런 경계를 느끼시나요? =지금은 다른 한이 있고요. 당시에는 스스로 백정이라고 불렀어요. 그 정도로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고 공깃밥 하나를 먹어도 제작부에서 눈치를 줬어요. 제작비가 빠듯했고, 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하는 스탭이 아니니까요. 물론 액션팀도 잘못한 게 있어요. 거칠고 못 배운 것 같은 태도를 보여줬거든요. 그것이 몹시 싫어서 술 먹으면 실수할까봐 회식자리에도 안 갔어요. 선배들이 술자리에서 활황기 추억담하면 제가 선배들이 이렇게 만들어놓은 거 아니냐고 화내다가 맞기도 했어요. 저는 지금도 현장이 어렵지만 액션스쿨 젊은 친구들은 스탭들과 너무나 빨리 친해지고 어울리더라고요. 부러워요. 저로선 <짝패>가 처음부터 끝까지 스탭들과 함께한 첫 경험이어서 그때 많이 친해졌습니다. -펀치나 킥에 감정을 실어보내는 게 액션이라고 생각하시는 걸로 압니다. 그런데 배우에게 액션 연기를 지도할 때 결과적으로 그의 감정이 좋다 나쁘다는 판단할 수 있지만, 구체적으로 왜 좋고 나쁜지를 배우와 이야기하다보면 월권처럼 느껴지는 부분도 있지 않을까요? =‘쟤가 감독이냐?’ 하는 눈총도 많이 받았죠. 그런데 액션을 하다보면 감정이 보여요. 태권도 시범은 테크닉을 보이는 것이지만 영화 액션은 왜 때리는 건지 정서가 보여야죠. 폼나게 주먹질만 하면 그가 분노한 건지 질투하는 건지, 당황해서 저도 모르게 때린 건지 알 수 없거든요. 그래서 시나리오를 잘 봐야 해요. 모니터를 보면서 앞숏의 감정이 어떻게 끝났나를 보죠. “으아아” 하면서 감정이 격하게 끓어올랐는데 다음에 발로 때리면 이상해요. 멀어 보이거든요. -확실히 발차기는 상대방과 접촉하기 싫어하는 느낌이 있죠. 그래서 <달콤한 인생>의 도입부 액션이 좋았어요. 한강 다리에서 시비거는 패거리들을 선우(이병헌)가 제압하는 장면에서도 스스로에 대한 짜증과 상대에 대한 경멸이 표현되어 좋았어요. 회자되는 액션은 불각목 싸움입니다만. =<달콤한 인생>의 불각목 장면도 따지면 개싸움에 속해요. 아름다운 합의 형식과 동작은 없잖아요. 살아남아야 한다는 몸부림인 거죠. 그것도 장점이 있지만 액션의 양식으로서 감상해주지는 않거든요. 저 역시 한강 다리 장면 같은 액션이 좋아요. 준비한 콘티를 한컷도 안 바꿨는데 숙제검사해서 칭찬받은 기분이었죠. -촬영현장에서 감독은 사실감을 위해 다소 위험한 몸 연기를 배우가 해주길 바라고, 배우는 내심 안전을 염려하는 상황이 잦을 텐데요. 그때 무술감독이 중재하는 경우도 많을 듯합니다. =주연배우가 다치면 전체 프로덕션이 멈추니까 안전이 우선이죠. 요즘 배우들은 카메라 방향이나 편집을 너무나 잘 알아서 이럴 때는 대역 써야 하는 것 아니냐고 똑 부러지게 요구해요. 모든 감독은 기본적으로 잔인해요. 당신들이 직접 극한 상황을 겪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몰아붙이죠. 편집 다 된 외국영화를 보고 와서 “외화에선 다 하던데?”라고 말하기도 하고요. 예전에 제게 “63빌딩에서 뛰어내려서 착지할 수 있냐?”고 진지하게 물어본 TV 감독이 있었어요. (좌중 경악) 흠칫 당황했죠. 그러면서 한국 스턴트가 무술사범이지 스턴트라고 할 수 있냐고 하더라고요. 어디 해보자는 마음으로 오토바이 점프 액션을 했는데 그분이 감탄하는 순간 “이겼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인정받아 기뻤죠. 평소에 선하다가 촬영만 들어가면 악마로 변하는 스타일이셨는데 뭔가 위험한 걸 하려고 하면 또 갑자기 “기도합시다” 그랬던 기억이 나요. (일동 폭소) -감독님 스스로 가장 두려운 부상은 무엇인가요? =척추가 협착된 상태라 인공관절을 다섯개 넣어야 한대요. 근육의 힘으로 버티고 있는 건데 마비가 오는 게 무섭죠. 항상 고통을 안고 살아와서 그런지 통증에는 면역이 됐는데 역시 심하게 아플 때는 힘들어요. <서울의 달>에서 한석규씨 대역할 때는 진통제에 의지하다가 아침이 되면 약기운이 떨어져 기어가다시피 귀가했죠. 진통제에 의존하는 것이 싫어서, 무술감독 일을 하면서는 끊었어요. -스턴트맨으로 활동하실 때에는 무조건 몸을 던진다는 전설이 있었잖아요. 그간 자기 관리하는 태도에 변화가 있었다면 언제인가요? =제작 환경이 나빠서 그럴 수밖에 없던 시절이 있었어요. 카 스턴트를 할 때 안전롤바라는 장비가 있어요. 차의 천장에 파이프를 대서 충돌했을 때도 쭈그러들지 않게 보호하는 150만∼200만원 하는 그 장비가 없어서 알아서 살아남아야 했어요. 아마 현장에서 보는 그림은 우리나라만큼 박력있는 나라가 없을 텐데 화면에는 잘 안 나와요. 반면 할리우드는 우리처럼 격하게 하지 않는데 화면을 보면 힘이 느껴지죠. 나이를 먹어가며 현장에서 몸을 던지는 일은 줄었어요. (건너편 액션스쿨에서 운동하는 단원들을 가리키며) 우리 애들이 비애가 있어요. 저렇게 발차기 하루 500번 연습해도 주인공이 한방 차면 발 한번 못 써보고 끝이니까. 하지만 대역을 하면 적어도 공격을 할 수 있잖아요? 신이 나고 몸의 느낌도 살아나죠. 지금도 전 대역하고 싶어요. ‘정두홍표 무술’이 생긴다면 그 성분은 한(恨)이겠죠, 하하 -얼마 전 좌담에서 보니까 류승완 감독님은 정두홍 무술감독님이 옆에 있으면 자꾸 놀리고 싶은 충동이 솟는 것 같습니다. =‘톰과 제리’죠. (웃음) 류 감독도 변화해가는 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보아온 사이예요. 처음 만났을 때는 나한테 의리 찾는 사람들은 다 가식덩어리라고 했거든요? 그런데 얼마 전 <적벽대전: 거대한 전쟁의 시작>을 보고 “정서가 죽인다”고 전화를 했더라고요. 양조위가 누군가를 위해 화살을 막으면서 대신 맞아주는 장면에 열광하던데요. 옛날 같으면, 그렇게 막을 정신 있으면 칼로 쳐내면 되지 않냐고 따졌을 사람이. (일동 폭소) 멋을 알아가는 거지. -영화 속 액션을 볼 때 관객이 국적을 나누어서 평가하지는 않아요. 한국영화 액션을 <와호장룡>이니 <매트릭스>니 동시대 할리우드나 홍콩영화의 액션과 수평적으로 비교하게 마련인데요. 트렌드에 대한 부담도 있을 것 같습니다. =국내 액션에 대해서는 좀더 엄격하게들 보죠. 한국 액션은 왠지 기승전결이 없는 것 같고 싸우나 싶으면 빨리 끝나버리고 합 자체가 상세하지 않은데 할리우드나 홍콩은 동작이 잘 보이니까요. 과거에는 우리 관객이 스케일만 재미있어했는데 이제는 정확하게 동작을 읽는 눈이 발달했어요. 솔직히 액션이 길고 정확해야 드라마와 액션이 같이 나아갈 수 있는데 감독님이나 스탭들은 액션을 길게 찍는 걸 본능적으로 꺼리다보니 현장에서 저와 많이 부딪히죠. 류승완 영화의 액션이 길어 보여도 실상 외화에 비하면 그리 긴 편이 아니에요. 저도 류승완 감독과 찍다보니 기술이 발전했지, 다른 감독들과 드라마에 부속되는 작은 액션만 찍어봤다면 이 정도나 됐을까 자신이 없거든요. 그런 면에서 <비열한 거리>와 <말죽거리 잔혹사>를 부럽게 봤어요. 액션이 길지만 길다는 말이 안 나오고 드라마와 서로 상승효과를 냈죠. 아무리 액션스쿨에서 백날 비디오를 들고 편집을 해도 현장에서 35mm카메라로 뭘 해보지 않으면 소용없어요. 현장에서 액션을 할 시간을 조금만 더 준다면 우리 무술감독들도 홍콩처럼 본인들의 아이디어를 확장시킬 수 있을 거예요. -이미 한국 영화계에서 ‘정두홍표 액션’이라는 용어는 통용되고 있어요. 언젠가 ‘정두홍표 무술’이라도 만들어야 하나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요. 그 무술의 성분은 무엇일까요? =한(恨)이겠죠? 하하. 기술적으로는 고민중이에요. 이소룡의 절권도처럼 저만의 특화된 무술을 만들고 싶은데 지혜가 모자라요. <본 얼티메이텀>을 보면 액션은 간단명료한데 그렇게 안 보이잖아요? 카메라 메커니즘과 관련된 문제는 나중이고 저는 일단 무술 부분을 연구해야죠. 그런데 영화액션은 워낙 세계화가 돼버렸어요. 이소룡 시대에 비해 영화액션에서‘히트 상품’ 만들기가 어려워진 거예요. -아시아의 영화액션을 누구보다 유심히 관찰하셨을 텐데요. 신체조건이 그닥 다르지 않은데도 각국의 스타일이 확연히 차이나는 이유를 생각해보셨을 것 같습니다. =역사와 민족정서, 문화가 완벽히 다르기 때문이죠. 상대적으로 우리 문화 색깔이 불분명해서 속상해요. 중국은 쿵후, 일본은 사무라이 검도와 가라테가 있죠. 우리에겐 태껸이 있지만 무술 스타일상 <다찌마와리>에서 보신 대로 웃음부터 나잖아요. 긴장하고 싸움 시작하려는데 갑자기 흔들거리면서 “이크, 이크” 하니까. -한국의 영화액션 하면 생존형 막싸움이 대표적인 이미지잖아요. 한국의 문화와 품성의 어떤 점 때문에 이런 액션이 주류가 된 걸까요? 중국이라고 거리에서 평소에 쿵후로 싸우진 않을 텐데요. =막싸움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실생활이잖아요. 실제 역사 말고 영화의 역사만 따지면 중국과 일본은 무술의 문화가 단절이 없었죠. 반면 우리는 액션영화가 10여년간 에로 장르에 시장을 내주면서 딱 끊어졌거든요. 제가 그 과도기에 일을 시작했어요. 방송사에 일하러 가서 돌려차기를 하니까 홍콩 액션을 흉내낸다고 싫어하더라고요. 우리 선배들은 사실 일본영화가 수입되지 않은 환경에서 홍콩식 무술과 카메라 테크닉이 유일한 교과서였거든요. 그런데 저는 홍콩 액션에 대한 거부감을 접하고 나서 일부러 실베스터 스탤론을 좋아하고 개싸움 스타일로 가버린 점이 있어요. 그러다보니 단출한 장비만 쓰고 확연히 피아가 식별되지 않는 액션만 익숙해졌어요. 제 선배 세대가 계속 일을 하셨다면 홍콩, 일본, 타이처럼 세계화된 액션을 만들어내지 않았을까 안타까워요. -액션 스타가 배출되지 않은 데에는 한국식 액션 스타일의 영향도 있을 것 같네요. 그런 화면에서는 주연 외 배우들은 무리지어 싸우고 있다는 정도로 인지되니까요. 한국 배우 가운데 액션 연기에 재능이 있는 배우들을 무술감독의 관점에서 바라본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최민수씨는 감정을 수반한 액션에서 100년에 한번 나올까말까한 배우예요. 몰입도가 뛰어나죠. <테러리스트> 이후로 액션의 맛을 알고 확 변했어요. 권상우씨와 송승헌씨도 액션이 짧은 시간에 발전했어요. 정우성씨도 그런 예지만 본인이 즐기는 거죠. 류승범씨는 액션하기를 싫어하는데 하면 굉장히 잘해요. 연기를 본능적으로 하듯 액션도 마찬가지예요. 이병헌씨는 이번에 할리우드 가서도 대역이 오히려 더 못하는 바람에 본인이 많이 했다고 해요. 설경구씨, 정재영씨도 잘하고 송강호씨도 감정 표현이 좋죠. <살인의 추억>의 두발 모아차기는 <반칙왕>에서 익힌 건데 <놈놈놈>에도 나오죠. <전우치>의 강동원씨는 요새 액션스쿨에서 훈련 중인데 운동신경이 좋은데다가 <형사 Duelist> 때 춤을 배웠대요. 사흘째부터 와이어를 나보다 더 예쁘게 타더라고요. -정우성씨와 각별하시죠? 관우가 장비 대하듯 아끼신다고 들었습니다. =전 우성이 형이라고 불러요. 혼자 있기를 좋아해서 그런지 애어른 같은 동생이에요. <비트>부터 점점 스타가 아니라 인간이 되어가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이에요. <무사>의 여솔이 역부터 창술을 충분히 보여주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많았어요. 그래서 <중천>에서도 본래 없던 창 액션을 만들어 넣었죠. 정우성의 창술을 누구도 흉내내지 못하는 무엇으로 굳히고 싶었어요. 그런데 <놈놈놈>은 서부극이니까 장총을 쓴 거고, 총을 쏘는 멋보다 돌려서 총집에 꽂는 쾌감이 크다는 데에 착안했죠. 사실, 초반에 많은 사람들이 우성이를 걱정했어요. 창이는 기막히게 멋있고 태구도 포스가 느껴지는데 도원은 가끔만 등장하는 것 같아서. 우성이한테 가서 감독님하고 대화 좀 해야 하지 않냐고 했더니, 감독님한테 문제를 들고 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나까지 그러면 머리아파서 쓰겠냐고 하더라고요. 본인이 태평하니까 옆에 있는 사람들이 챙기게 되죠. 귀시장 장면부터 우성이가 편안해졌죠. -개인적으로 홍콩식의 과장된 코미디와 액션보다 할리우드의 사실적 액션을 선호하시는 걸로 알아요. 그런데 <와호장룡>이나 <매트릭스> 이후 쿵후가 할리우드 액션을 지배하게 됐으니 조금 허전했겠어요. =프랑스영화도 미국영화도 모두 우슈가 집어삼킨 것 같았죠. 그런데 이른바 중국 무술에는 우리 고유의 발차기가 합성돼 있어요. 성룡의 액션도 쿵후와 태권도 발차기의 합성이죠. 원래 중국 무술에는 직선적 발차기가 없어요. 그런데 중국에서 자신들의 것으로 특화해 선점한 거죠. 한국인들은 발차기를 잘하는데 영화로 볼 때 하체만 갖고 싸우면 그림이 빈약해요. 앵글이 비슷하고 단조롭거든요. 반면 중국인들은 상체 동작이 발달해서 우아하죠. 탁탁 내지르다가 큰 발차기를 한번 하면 시원스럽죠. -특별히 선호하는 무기가 있습니까? =심플한 거요. (테이블 위를 살피며) 이 빨대도 무기가 돼요. 상대 눈을 툭 찌르면 손가락으로 찌르는 것보다 거리가 단축되어 시간을 벌 수 있죠. 여기 있는 물건 중 제일 흉악한 건 쓰고 계신 볼펜이죠. 제가 좋아하는 조 페시 형이 쓰셨던 만년필이라든가, 하하 그런 사실적인 호신 무기를 좋아해요. 인물이 늘 쌍절곤을 휴대하거나 칼을 찰 순 없잖아요? -근년 들어서는 인터뷰에서 할리우드 진출의 소망을 전만큼 자주 언급하지 않으시던데요. = 예전에는 진짜 목표가 “타도 홍콩, 고 투 할리우드”였는데 물 건너갔는지도 몰라요. 하지만 조금은 남아 있는 희망이 있고, 사람이 몸이 잘 움직이지 않아도 가야 할 목표가 있으면 힘을 낼 수 있잖아요. 반드시 갈 수 있다는 생각은 지웠지만, 힘을 내기 위해 무형의 목표를 세워놓은 거죠. 남들은 저더러 운동에 미쳤다지만 저는 영화에 미친 거예요 -영화에서 서로 치고받는 격투장면을 볼 때면 “저 사람이 내 남자친구가 아니라서 다행이다”라고 엉뚱한 생각을 해요. 액션배우란, 주변 사람들한테도 견디기 쉬운 직업이 아닐 텐데요. =일단 액션스쿨에 지망생이 오면 제 첫 마디도 만류예요. 멋있어서 하려고 왔다는 말을 들으면 “임마, 여기 사람들 현장에서 대우 못 받고 그전에 일단 정두홍이한테 욕먹으면서 해야 돼”라고 말하죠. 따뜻하게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어요. “너, 어디 아프니? 어떡하냐. 저기 가서 쉬어라”, 이래서는 촬영을 못해요. 아이들이 힘들고 분노할 때 에너지의 150%, 200%가 나오고 그래야만 비로소 화면에 에너지가 꽉 차요. 그게 슬프면 이 직업을 갖지 말아야죠. 아마 지금 <무사> 찍으라면 못할 거예요. 당시 단원들 앉혀놓고 “이 작품으로 꼭 인정받고 할리우드로 가고 싶다. 여기서 너희들이 다쳐도 난 영화 끝날 때까지는 눈 깜짝 않겠다”고 다짐을 했어요. 낮 촬영분이 미흡해 보이면 사막에 집합시켜서 선착순까지 시켰어요. 그러던 어느 날 촬영하다 점심 휴식이었는데 애들이 칼을 안 놓고 덜렁덜렁 들고다녀요. 어서 풀고 쉬라고 했더니 녀석들이 칼을 놓는 게 아니라 손에서 풀어놓는 거예요. 알고 보니 손가락을 맞아 뼈마디가 부어서 칼을 못 잡고 손에다 칭칭 묶어서 연기를 한 거예요. 그때 많이 울컥했어요. 그런 고통과 분노가 <무사>에 들어 있는 거죠. -요즘도 액션스쿨 훈련생들이 부모의 반대로 도중하차하는 예가 많다고 들었습니다. =제일 안타까운 경우는 힘든 시기 다 보내고 무술감독으로 데뷔할 시점이 된 친구들이 떠날 때예요. 부모님이 연로하셔서 돼지농장을 물려받아야 한다거나 하는 경우는 그래도 괜찮아요. 막연히 대안도 없이 반대를 못 이겨 나가는 아이들이 가슴 아프죠. 스턴트라고 하면 부모님들은 “죽을 수도 있다”가 아니라 “저러다 언젠가 죽는다”는 생각을 하게 마련이에요. <놈놈놈>을 하다가 잃은 중현이(故 지중현 무술감독)의 부모님도 그렇게 말리셨대요. 제가 다시 눈물을 흘린 건 아버님 말씀 때문이었어요. 언젠가 중현이가 집에 와서 “아버지 술 한잔 사주세요” 하더래요. 안 그러던 놈이 왜 그러나 했더니 “정두홍 감독님이 오늘 처음으로 제 이름을 불러주셨어요” 하더래요. (침묵) -액션의 진정성이라는 말을 가끔 쓰십니다. 정확히 어떤 의미인가요? 이를테면 연기자도 고통을 느끼는 액션이라거나 하는 단순한 뜻은 아닐 것 같은데요. =그건 아니죠. 시나리오를 따라가는 진정성을 말하는 거예요. <아라한 장풍대작전>의 경우는 와이어를 타도 되지만, 조폭영화에서 와이어를 타고 날아가서 때리면 어색하다는 거예요. 진짜 치고받아서 진정한 액션이 아니라 극화된 액션 안에 감정이 살아 있을 때 진정한 액션이죠. 맥락없는 액션을 위한 액션은 에너지 낭비일 뿐이에요. 외국 관객은 오히려 한국영화 액션 특유의 감정에 민감해요. 제일 가슴 아픈 경우가 영화를 보고난 사람들이 “액션만 돋보인다”고 말할 때예요. 이런 말을 할 때는 분명 뭔가 문제가 있죠. -정두홍 감독님의 무술팀이 특정한 특수효과팀이나 특수분장팀과 함께 움직이기 때문에 일 기회가 공평히 돌아가지 않는다는 불평의 목소리도 있다고 합니다. 들어보셨나요? =가슴이 너무 아파요. 영화도 프로들의 세계잖아요. 한국영화계가 실력도 없는데 가엾다거나 친분이 있다고 일을 시켜주는 여유가 있는 곳이 아니에요. 나를 써달라고 로비한 적도 없고 우리 아이들 다치고 죽어가면서 뼈아프게 열심히 노력해왔어요. 그것과 별도로 특수효과팀과 무술팀의 호흡은 확실히 중요해요. <여명의 눈동자>에서 수류탄 터지는 장면을 찍을 때 특효팀에서 기름을 묻어놓고 시멘트라고 거짓말하는 바람에 화상을 입은 적이 있어요. 저는 특수효과회사 데몰리션과 일을 많이 해왔는데, 이분들은 손가락 태워가면서 화약 개발하는 사람들이에요.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배우 원빈 눈에 폭약이 터져서 들어갔는데 망막 손상을 안 입었어요. 그런 폭약을 만든 거죠. 가보면 다른 곳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돈 벌어서 다시 투자를 해요. 액션스쿨의 스턴트 장비도 마찬가지예요. <씨네21>에서도 ‘정두홍 1인체제’라는 말을 쓴 적이 있는데 액션스쿨에만 무술감독 직함을 가진 사람이 열명이 넘고 다른 무술팀도 많아요. 제조업도 아니고 문화를 만들어내는데 시장 독점이란 말이 적당한가요? 매니지먼트사처럼 끼워팔기를 하는 것도 아니고 계약에서도 약자의 입장인데 더구나 제작자들이 그런 말을 했다는 소릴 들으면 기가 막혀요. -무술연기자협회 회장이기도 합니다. 윗세대 무술연기자와 후배 무술연기자들에 대해 어떤 책임감을 느끼시나요? =사람은 저도 모르게 발을 담그고 있는 공간이 있어요. 거기서 발을 빼는 건 자유지만 일단 담그면 뭔가 책임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가장 중요한 건 먹는 걸 해결하는 거죠. 2002년에 영양실조로 낙향한 애도 봤고 가슴에 묻은 연기자들도 있어요. 20년 동안 그런 일을 겪다보면 부지중에 소명의식이 생겨요. 저도 모아놓은 돈이 없고, 액션스쿨도 단원들이 지분을 나눠갖고 있어요. 내년 봄이면 액션스쿨로 인해 진 은행 빚을 원금까지 한달에 4350만원씩 갚아야 하는데 여기서 쫓겨날 각오도 하고 있어요. 손 안에는 힘이 없는데 이뤄야 할 일은 많아요. 제가 못하면 후배들이 이어받아야죠. 스턴트맨들이 모여 사는 마을을 만들고 싶은 꿈도 있어요. 다들 월세 살고 뼈 부러뜨리며 일해도 제대로 돈을 못 버니까 어울려 사는 단지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어요. 제가 한국영화를 이끄는 사람은 아니지만 이 세계에서 밥만 축내고 싶지는 않아요. 한편으로는 힘있는 제작자들이 본인의 회사만 생각지 말고 조금씩 힘을 모으면 저보다는 훨씬 일이 쉬울 것 같아요. 두 사람이 손잡으면 원이 작지만 여러 사람이 잡으면 둘레가 커지잖아요. -감독님은 마음속에 좁은 방이 있어서 몇 사람만 들여놓고 애지중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조금만 외면받아도 상처를 받을 것 같고요. =사람들은 애정을 다 주면 그 사람을 무시하고 반대로 말 안 하고 삐쳐 있으면 다가와서 위해주죠. (웃음) 류승완 감독도 같이 영화 만들고 나면 몇달씩 안 만나고 일부러 거리를 두려고 해요. 질릴까봐, 더 오래 관계를 지속하고 싶어서죠. 한국 액션영화에서 중요한 인물로 내가 찍어놨기 때문에 어떤 상처를 줘도 감내할 수 있어요.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저를 남이라고 여기겠지만 전 가족과 다름없이 생각해요. 짝사랑을 너무 치밀하게 하는 거죠. (웃음) 예전 여자친구가 “너 자신을 사랑하고 지키는 데에 우선 힘을 쓰라”고 타박하기도 했죠. 지금은 담담해지려고 노력 많이 해요. -다음에 달려갈 목표가 없으면 시들어져 죽을 것 같은 불안이 몸에 밴 것처럼 보입니다. 움직이고 뭔가를 도모해야만 살아 있다고 실감하시나요? =요즘은 허수아비처럼 껍데기만 움직이지 영혼은 움직이지 않고 있어요. 중현이를 잃고 나서부터 그래요. 사고가 있고나서 액션스쿨 사람들도 열명 정도 떠났어요. 누가 그만둔다고 해도 이유를 물은 적이 없는데 처음으로 물어봤어요. 무서워서 그러냐고. 그랬더니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더 많이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하더라고요. 고생한 것 아깝지 않느냐고 잡고 싶지만, 이 직업이 위험한데 어떻게 잡아요? 그래서 더욱 괴롭습니다. -경력이 20년에 가까우니 그래도 예전처럼 “내가 가진 것은 몸밖에 없다”는 생각은 하지 않으실 것 같은데요. 다른 것이 생겼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그것이 지혜여야 할 텐데, 지혜롭지 못하다는 것이 제 콤플렉스예요. 운동능력이 떨어지면 현명함이 늘어서 보완해야 하는데, 정신능력도 약해지니 불안해요. 축적된 노하우야 현장에서 순발력으로 발휘되지만요. 그것마저 없다면 은퇴해야죠. 은퇴해서 시골로 내려가면 TV고 뭐고 아무것도 놓지 않을 생각이에요. 남들은 저더러 운동에 미쳤다지만 저는 영화에 미친 거예요. 영화가 저를 살려줬고 스턴트와 액션을 카메라에 담는 작업이 너무나 좋아 지금까지 버틴 거예요. 그런데 나이들어 일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TV나 스크린에서 남이 한 액션장면을 본다면 미쳐버릴 것 같아요. 追伸 인터뷰 도중 전화가 울렸다. 시카고에서 온 미국인 영화학도였다. 촬영감독 지망생인 청년은 정두홍 감독을 만나기 위해 인천에서 서울로, 다시 파주로 다섯 시간을 헤매서 도착했노라 말했다. 막 배우기 시작한 한국어로 빼곡히 적은 꼬깃한 한국영화 베스트 목록을 펼쳐 보이고는 견자단과 정두홍이 주연한 영화를 꼭 보고 싶다고 청했다. 정두홍은 지친 팬을 쉬게 하고, 한국영화를 찍고 싶다는 그를 위해 홍경표 촬영감독에게 선뜻 전화를 걸었다. 청년을 배웅한 정두홍 감독은 말했다.“내가 할리우드에 가면 저렇겠죠.”난생처음 만난 말이 잘 통하지 않는 이국의 영화 지망생에게 그는 대뜸 감정을 이입하고 있었다. 청년의 열띤 말투와 간절한 눈빛, 이마에 맺힌 땀, 몸의 언어만으로 소통은 충분했던 모양이다. 아, 그리고 이 말은 반드시 보태고 싶다. 정두홍 감독은 내가 아는 한, 어머니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제일 다정하게 받는 남자였다.

거장의 영화 속에서 빛나는 소시민들의 일상

오즈 야스지로의 회고전이 9월2일부터 21일까지 시네마테크 부산에서 열린다. 이번에 상영될 총 17편의 영화는 1930년대부터 1960년대 작품까지 고루 선정되었다. 무성영화 <태어나기는 했지만>(1932)을 비롯해 <동경이야기>(1953)를 포함한 40, 50년대 흑백영화, <피안화>(1958) 이후의 컬러영화까지 그가 작업한 영화의 다양한 형식도 비교할 수 있다. 흔히 가장 일본적인 감독이자 할리우드식 고전적 영화문법과 대비되는 동양적인 숏을 창안한 감독으로 일컬어지는 오즈는 이 같은 한정된 수식어에 가두기에는 훨씬 더 깊은 세계를 지니고 있는 것 같다. 이 점에 대해 하스미 시게히코는 “돈가스와 두부”의 비유를 들어 설명한 바 있다. 비슷비슷한 영화를 만든다는 지적에 대해 오즈 자신은 “두부가게 주인이므로 두부밖에 만들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실제 그의 영화에 두부만 있는 건 아니라는 설명이다. 주로 가족멜로드라마의 틀 안에서 오즈는 “인생은 결국 혼자”라는 씁쓸한 성찰을 보여준다. 하지만 오즈의 영화가 이런 결론을 위해 존재하는 건 아니다. 그의 영화는, 비록 마지막 결론은 같을지라도 반복되는 일상을 최선을 다해 살 수밖에 없는 인간조건을 예의 바르게 관찰하고 있다. 1927년 <참회의 칼>을 시작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오즈의 작품목록에서 <태어나기는 했지만>은 앞으로 전개될 그의 영화 세계를 예시하는 영화다. 아버지가 가장 훌륭한 사람인 줄 알고 있었던 아이들은 상사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하는 아버지를 보고 실망한다. 소시민 가정의 부모와 아이들이라는 소재는 나중에 <안녕하세요>(1959)에서 다시 다루어진다. 여기서는 텔레비전을 사달라고 시위하는 아이들과 부모의 갈등이 중심이 된다. 오즈의 첫 발성영화 <외아들>(1936)은 일본의 산업화로 야기되는 가족의 문제를 어머니와 아들의 이야기로 보여준다. <도다가의 형제 자매들>(1941)은 흥행과 비평 양쪽에서 성공한 초기작으로 여백 숏이나 정적인 카메라 등 오즈 후기 양식의 토대가 마련된 작품으로 평가된다. <셋방살이의 기억>(1947)은 패전 뒤 일본의 피폐한 풍경이 생생하게 반영된 영화로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를 양육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인정’에 대해 그린다. 역시 전후의 힘든 생활을 보여주는 <바람 속의 암탉>(1948)은 독특하게 매춘문제가 다뤄진다. 생활고 때문에 매춘에 나선 젊은 주부가 겪는 고난과 이로 인한 가족간의 갈등을 그린 이 작품은 과도기적 오즈의 영화미학을 보여준다. 오즈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전성기에 해당되는 시기에 만들어진 계절 시리즈 <늦봄>(1949), <초여름>(1951), <이른 봄>(1956)은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 <동경이야기>와 더불어 오즈의 형식미를 잘 보여주는 대표작들이다. 딸의 혼사문제는 오즈가 즐겨 다루는 소재로 <늦봄>은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와 단둘이 사는 딸 노리코의 결혼 이야기가 중심이다. 편부모와 사는 딸의 결혼은 후기작 <가을 햇살>(1960)에서 다시 변주되고, 딸을 시집보내는 아버지의 심정은 오즈의 첫 컬러영화 <피안화>와 그의 유작 <꽁치의 맛>(1962)에서 다시 다루어진다. <꽁치의 맛>은 어린 시절부터 친구였던 장년 남자들의 일상과 이들의 영락해버린 은사에 대한 묘사가 인상적이다. 노년의 삶, 늙는다는 문제는 바로 전 작품 <고하야가와가의 가을>(1961)의 주제이기도 하다. <초여름> 역시 대가족의 막내딸 혼사가 중심이 되는 영화이나 스토리보다는 ‘윤회’나 ‘무상’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감독의 말처럼 반복되는 일상과 행동의 변화를 세밀하게 그렸다. <이른 봄>은 권태기를 맞은 부부의 문제를 다룬 멜로드라마로 외도를 다루고 있어 오즈 작품 중에는 다소 이색적이다. 부부 이야기에 초점을 맞춘 오즈의 작품은 많지 않지만, 그중에서 <오차즈케의 맛>(1952)은 결혼생활이나 부부애에 대한 오즈식의 답변을 엿볼 수 있다. 이외로 유랑극단의 배우가 주인공인 <부초>(1959)나 아내가 가출한 가정의 풍경을 그린 <동경의 황혼>(1957)은 가족의 결손문제를 다룬다.

이번 영화는 어떤 텔레파시가 통하는 작업이었다

이케와키 치즈루의 한국 나들이는 잦은 편이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로 한국의 영화팬들에게 얼굴을 알린 그녀는 이후 자신의 영화가 상영되는 자리라면 빼놓지 않고 한국을 찾았다. 그녀의 신작 <음표와 다시마>가 초청된 서울충무로국제영화제 역시 마다할 수는 없는 자리였을 것이다. “이제는 낯선 구석이 없다. 서울에 오면 숙소도 거의 비슷한 곳에서 있고, 밥도 주로 먹던 곳에서 먹는다. 마치 옆동네로 놀러온 기분이다.”(웃음) 게다가 최근에는 한일합작영화인 <오이시맨>에 출연하기도 했다. 그녀의 이번 한국 나들이에는 <음표와 다시마>를 연출한 이노우에 하루오 감독이 동행했다. - <음표와 다시마>의 이야기는 어떻게 구상한 건가. 이노우에 하루오| <음표와 다시마>는 지난 2006년 에픽레코드재팬이 설립한 시네뮤지카의 4번째 작품이다. 영화를 통해서 음악을 알리고 음악을 통해서 영화를 표하는 시도라고 보면 된다. 일단 ‘음표’라는 것을 떠올렸고, 이걸 가지고 만들 수 있는 이야기를 구상했다. 언니가 한동안 잊고 있던 음표를 찾아 동생에게 자장가를 들려주는 설정이 마음에 들었다. - 영화와 음악을 공동프로모션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어떤 룰이 있을 것 같은데. 이노우에 하루오| 그렇다. 영화의 한장면은 무조건 그 자체로 뮤직비디오가 되어야 한다. 이건 너무나 프로듀서의 입장에서 말하는 건데, 그 장면은 예고편으로도 그대로 쓰인다.(웃음) - 이케와키 치즈루가 연기한 가린은 아스페루가 증후군이라는 걸 앓고 있다. 가린의 어떤 점이 마음에 들었나 이케와키 치즈루| 가린은 매사에 열정적인 여자다. 물론 여동생 모모에게 엉뚱한 행동을 하고 상처를 주기도 하지만, 그녀가 하는 모든 행동은 오로지 여동생을 위해서 이루어진다. 그런 에너지가 마음에 들었다. 이노우에 하루오| 가린이 앓고 있는 아스페루가 증후군은 남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은 게 특징이다. 그래서 가린에게는 여동생에게 마음을 전달하는 게 하나의 모험이다. 그런 도전의 이야기라고 보면된다. 당연히 열심일 수 밖에.(웃음) - 이케와키 치즈루의 어떤 점을 보고 캐스팅했나. 이노우에 하루오| 그건 직감 같은 거다. 영화의 여러 이미지를 간직하던 중, 문득 이케와키 치즈루가 떠올랐다. 사실 그렇게 영화를 만들면 부담되는 게 너무도 많은 데, 이번에는 그녀의 연기 덕분에 영화에 깊이가 더해진 것 같다. 그녀는 크랭크인 전부터 가린이 되어 있었다. 누가 준비하기도 전에, 먼저 양손에 큰 트렁크를 들고와서는 “가린은 이런 모습으로 모모를 찾아왔겠죠?”라고 말하더라. 이번 영화는 그처럼 뭔가 텔레파시가 통하는 작업이었다. - 가린은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조제와 비슷해 보였다. 조제는 몸이 불편하지만, 사실상 그 때문에 다른 이들과의 관계에서 벽을 쌓고 있지 않나. 그것도 자폐증과 다름없는 증상이지 않을까? 이케와키 치즈루| 사실 나에게 있어서 그들은 별개의 인물이다. 하지만 말씀하셨듯이, 조제는 몸 뿐만 아니라 마음에도 상처를 안고 있다. 그런 걸로 봤을 때, 가린이나 조제나 몸과 마음을 일치시킬 수 없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런 아픔을 혼자 안고 살아가야한다는 점에서 비슷한 여자일 수도 있다. -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한국에 수입한 스폰지의 조성규 대표가 ‘조제’라는 이름의 와인바를 만든 걸 알고 있나? 이케와키 치즈루| 아, 알고 있다. 그 가게가 오픈하던 날 갔었다. 나로서는 굉장히 기쁜일이었는 데, 마치 그 와인바가 내 가게 같더라.(웃음) - 조성규 대표가 혹시 수익배분을 해준다고 하지는 않았나. 이케와키 치즈루| 그런 건 안했는 데, 혹시 주시지 않을까? (웃음) 한국에 와서 그 가게를 가봤다는 사람들을 종종 봤는데, 그러면 마치 내가 감사해야 할 것 같더라.(웃음) - 한일합작 영화인 <오이시맨>은 얼마나 작업했나 이케와키 치즈루| 거의 완성단계다. 그 영화를 찍으면서 정유미를 만난 게 가장 인상적이었다. 너무 귀엽더라. 영화 속에서는 직접 만나는 장면은 없는데. 같이 식사를 한적이 있다. 예쁘고, 겸손하고, 털털한 사람이었다. 감독님도 정유미는 공주가 아니라서 좋다고 하더라. (웃음)

[이주의 추천프로] 주말엔 요것들과 노세요

<뉴 핑크팬더> 투니버스 금요일 오전 1시 <심슨네 가족> 투니버스 토요일 밤 12시 잠만 자기엔 아까운 주말 새벽, 못 말리는 심슨 가족과 정의의 표범 핑크팬더를 만나보자. 애니메이션 채널 투니버스는 9월5일부터 한달 동안 금요일 오전 1∼5시에 <뉴 핑크팬더>를, 토요일 밤 12시∼일요일 오전 5시에 <심슨네 가족>을 방영하는 ‘올나잇 특집 방송’을 마련했다. 1964년 개봉한 영화 <핑크팬더>의 오프닝에 등장하면서 인기를 모은 분홍색 표범 ‘핑크팬더’는 오리지널 단편만 140여편에 이르는 매력만점 캐릭터다. 주도면밀하고 약삭빠른 핑크팬더와 어눌하고 어수룩한 크루즈 경감의 대결이 시리즈의 가장 큰 재미. 헨리 맨시니가 작곡한 오프닝 음악은 <핑크팬더>를 모르는 이들에게도 친숙할 정도로 유명하다. 미국 텔레비전 방송 역사상 최장수 애니메이션 시리즈인 <심슨네 가족>은 스프링필드 마을을 배경으로 게으른 가장 호머와 남편 뒷수습을 도맡는 마지, 그리고 둘 사이에서 태어난 바트·리사·매기 3남매가 펼치는 좌충우돌 일상을 그린다. 주류를 향한 통렬한 풍자와 유머가 심슨 가족의 필살기. 에미상을 10번이나 받았고 세계 60여개 나라에서 방영됐으며 미국에서는 현재 시즌19가 방영되고 있다.

다큐로 보는 일본의 삶, 예술 그리고 사회

9월20일부터 10월2일까지 독립영화전용관 인디스페이스에서 ‘일본 다큐멘터리 특별전’이 열린다. 이 프로그램은 ‘아시아 독립영화 교류 상영 및 아시아 다큐멘터리 초정 상영’의 첫 번째 행사로 기획되었다. 총 19편이 상영되는 이번 기획전에는 일본의 거장 다큐멘터리 감독들의 작품이 아니라 국내에 거의 소개되지 않았던 젊은 감독들의 작품이 선정되었다. 극영화를 통해 알 수 있었던 동시대 일본과는 또 다른 모습을 다양한 스펙트럼 안에서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상영작은 총 3개의 섹션으로 나뉘는데 각각의 주제는 ‘삶’, ‘예술’, ‘사회’로, 이들 작품 안에 현재의 일본이 거의 다 담겨 있다 할 수 있겠다. 일본 젊은이들의 고민, 당면한 사회문제, 예술가들의 발자취, 세계 속의 일본의 모습, 일본의 미래 전망, 과거사에 대한 성찰 등 다큐멘터리가 기록할 수 있는 무한한 영역을 탐사한 결과들이 모여 있다. ‘삶’을 다루는 첫 번째 섹션에 준비된 6편의 작품은 성장과 죽음, 가족 관계에 대한 이야기들이고, ‘예술’을 주제로 한 두 번째 섹션에 상영될 5편의 작품은 앞선 세대 사상가, 예술가들의 업적과 삶의 궤적을 따라가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 소개되는 인물들은 팔레스타인 출신 학자 에드워드 사이드에서 다큐 감독 야마기시 다쓰지와 쓰치모토 노리야키, 포크 가수 다카다 와타루, 음악비평가 간장에 이르기까지 여러 분야를 아우르고 있다. 현 일본 ‘사회’를 보여주는 세 번째 섹션에는 8편의 다큐가 준비되었다. 임시직을 전전하는 일본의 청년, 과거 피폭 피해자, 터키에서 온 난민 등 일본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각계각층의 모습과 환경, 이데올로기 등 첨예한 사회 이슈들이 고루 카메라에 담겨 있는 섹션이다. <미운오리새끼> 오노 사야카/ 2006년/ 75분 1984년생인 오노 사야카 감독 자신과 가족의 이야기를 기록한 다큐이다. 아무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살 이유가 없다는 자기 비하감에 고통받는 사야카 감독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족을 만나기로 결심한다. 가족은 어린 시절 그녀에게 치유하기 어려운 트라우마를 안겨준 장본인이므로 용기를 내어 가족 구성원들과 대화를 시도한다. 사야카가 생각할 때 가장 큰 상처는 5살 때 경험이다. 그때 그녀는 가족과 떨어져 생활하는 야마기시 유치원에 보내져 일년간 지냈는데, 그 기간 동안 자신이 버려졌다는 공포를 느꼈기 때문에 집으로 돌아온 다음부터는 “착한 딸”이 되려고 애써야 했다. 그 다음으로 큰 상처는 4학년 때 큰오빠로부터 얻은 것이다. 성적 호기심이 왕성한 사춘기 소년이었던 큰오빠는 사야키가 성적 수치심을 느낄 수 있는 행동을 했고 이로 인해 그녀는 자신의 몸을 불결하다고 느끼며 살게 된다. 사야키는 가족들과 유치원 동급생들을 만나 그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과거 흔적들을 재구성하면서 점차 스스로를 옥죄었던 고통에서 조금씩 빠져나온다. 이 영화는 감독이 의도한 것은 아닐지 모르지만 유아의 훈육방식에 대해 돌아보게 해주는 면도 있다. 15년 전 야마기시에서 생활했던 대부분의 아이들은 현재 크고 작은 상처를 갖고 있었다. <치즈와 구더기> 가토 하루요/ 2005년/ 98분 이 제목은 16세기 이탈리아 방앗간 주인 메노치오의 우주관에서 따온 것이다. 우유에서 치즈가 나오고 거기서 다시 벌레가 생겨나는 신비한 일상에 대한 성찰을 축약한 말이 ‘치즈와 구더기’로 미시사가 진즈부르그의 책 제목이기도 하다. 이 다큐의 출발은 암에 걸려 죽어가는 가토 하루요 감독 엄마의 일상을 기록하려는 것이었다. 아마도 감독은 “죽으면 우주의 먼지가 되겠다”는 엄마의 말에서 이 제목을 떠올렸을 것 같다. 비디오카메라로 촬영을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감독은 엄마가 치유되는 기적을 소망했다고 한다. 그러나 현실은 기대와 달리 냉정하게 진행되었고 마침내 엄마가 눈을 감는 날이 찾아온다. 소소한 엄마의 일상과 가족들의 모습을 기록하던 카메라지만 엄마의 마지막 순간만은 차마 담지 못한다. 필름은 이미 장례의식에 따라 염을 마친 엄마의 얼굴 클로즈업에서 다시 시작되는데, 철없는 조카는 엄마의 시신 옆에서 과자를 먹으며 장난을 친다. 장례를 마친 뒤, 감독과 딸을 먼저 보낸 나이 드신 할머니는 비디오테이프 안에 담긴 엄마의 생전 모습을 보며 함께했던 시간들을 추억한다. 비디오테이프에는 치료를 위해 머리를 짧게 깎은 엄마와 새 텔레비전을 사서 기뻐하는 오빠 가족의 모습이 묘한 조화를 이루며 함께 담겨 있다. 가족의 이야기를 담는 다큐가 많지만 삶의 바로 옆자리에 놓인 죽음을 일기처럼 기록한 이 영화의 담담함이 인상적이다. <쓰치모토 노리야키의 다큐멘터리와 삶> 후지와라 도시/ 2006년/ 93분 쓰치모토 노리야키는 1970년대 화학공장에서 흘려보낸 수은 때문에 생긴 “미나마타병”으로 일본사회를 충격에 빠뜨린 미나마타 지역에 관한 17편의 다큐를 찍은 감독이다. 젊은 감독 후지와라 도시는 쓰치모토 노리야키의 삶과 그가 제작한 다큐들에 관한 영화를 찍기 위해 그의 작업실을 방문한다. 이 영화에는 쓰치모토 노리야키가 미나마타 지역을 찍은 유명한 다큐 <미나마타: 희생자들과 그들의 세계>(1971), <시라누이-바다>(1975)의 장면들이 중간중간 삽입되어 있다. 감독은 쓰치모토 노리야키와 함께 2004년 미나마타를 방문하여 과거 필름 속에 찍혔던 인물을 찾아가기도 하고 촬영에 얽힌 이야기도 듣는다. 쓰치모토 노리야기라는 거장이 들려주는 다큐멘터리스트로서의 삶과 다큐에 대한 철학, 작품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는 의미 있는 영화다. 1960년대 그가 만든 <길 위에서>(1964), <기관사 조수>(1963) 같은 작품도 영화에 등장한다. 안전을 홍보하기 위해 철도청에서 제작 의뢰한 <기관사 조수>를 보고, 미국 평론가가 안전과 거리가 먼 모습을 지적했다는 에피소드를 들으며 다큐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상실의 파편> 기무라 다쿠로, 미요시 히로키/ 2008년/ 10분 이번에 상영되는 작품 중에서 가장 짧은 다큐이다. 장편 위주로 기획된 이번 특별전에서 생부를 찾아가는 가와세 나오미 감독의 <그림자>와 <상실의 파편>만이 단편이다. 이 영화는 443분의 상영시간을 갖고 있는 야오야마 신지 감독의 의 반대편에 놓일 수 있겠다. 단지 10분에 불과한 이 영화에 대사는 없다. 한편의 영상시처럼 느낌으로 우리에게 전달되는 영화다. 피아노 선율이 흐르는 푸르스름한 화면에 비추는 것은 적막한 섬의 모습이 전부이다. 인구가 줄어들고 있는 외딴섬의 풍경을 아무 설명 없이 보여주는 이 영화에 대해 감독은 주제를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 혼자 노래를 부르는 할머니, 섬을 배회하는 고양이들, 녹슨 자물쇠, 허공에 매달린 빈 빨래집게 같은 이미지들이 조합되었다. 도시 집중화라든지 노인문제 같은 사회적인 이슈는 전혀 언급되지 않지만 우리 주위에서 벌어지는 쓸쓸한 현상에 대해 깊은 각인을 남긴다. ‘로보-코보’라는 독특한 감독의 이름은 두명의 감독이 모여 만든 팀 이름이다. 기무라 다쿠로와 미요시 히로키 감독은 2006년부터 팀을 꾸려 함께 활동하고 있다. <조난백수> 히로키 이와부치/ 2007년/ 10분 어느 사회나 청년실업 문제는 가장 민감한 이슈일 수밖에 없다. 그 사회의 안정과 성장을 보여주는 지표이기 때문이다. 흔히 뉴스를 통해 통계 수치로 제공되는 실업률이나 비정규직 노동자 비율 같은 문제는 개개인의 차원이 아니라 사회 시스템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 영화는 캐논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감독 히로키 이와부치 자신의 이야기다. 잉크 카트리지를 분리하는 일을 하는 히로키는 한 시간당 1250엔을 받고 있지만 비정규직으로 계속 있다면 30년이 지나도 그의 급여는 달라지지 않는다. 캐논은 지난해 엄청난 이익을 냈지만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의 수는 같다. 일하는 기쁨을 느낄 수 없이 빚 때문에 할 수 없이 일하는 히로키는 도쿄에서 벌어지는 비정규직 노동자 시위에 참여한다. 그런 과정에서 는 그에게 출연을 제의한다.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촬영을 마친 히로키는 사실을 왜곡한 방송을 보게 된다. 실업이 줄어들고 있다는 진행자의 말로 시작되는 이 프로그램에서 히로키는 마치 범죄자처럼 취급되는 자신의 모습에 화가 난다. 봄부터 겨울까지 히로키의 생활을 담은 이 영화는 일본의 노동 현실을 개인을 일상을 통해 조망하고 있다. 결국 일년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히로키는 새로운 시작을 다짐하며 기록을 마친다. <배, 산에 오르다> 혼다 다카요시/ 2007년/ 88분 히로시마현 북동부 하이쓰카 지역에는 산꼭대기에 커다란 뗏목형 배가 놓여 있다. 현대판 노아의 방주라고 할 수 있는 이 기이한 사건의 시작은 4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댐 건설 계획이 세워지고 오랜 기간 반대운동이 벌어진 끝에 댐 건설이 착수되고 미로사키, 기소, 소료 마을이 물에 잠긴다. 이로 인해 20만 그루의 나무가 물에 잠기게 되자 PH스튜디오 그룹은 그 나무를 이용해 배를 만들 프로젝트를 설계한다. PH스튜디오는 건축가, 미술가, 사진가가 모인 그룹으로 다양한 작업들을 해왔는데 나무를 배로 만들어 산으로 보내는 이 작업에 12년의 시간을 투자했다. 1999년부터 나무를 모으고 시행착오를 거치며 배를 만들어 마침내 2005년 댐에 물을 채우는 날 배를 띄운다. 2006년 시험 담수가 끝나면 다시 물이 빠지고 배는 산 정상에 홀로 남게 된다. 혼다 다카요시 감독은 처음에 이 프로젝트의 전시용 영상 제작을 맡았다가 다큐 제작까지 하게 되었다. 감독은 왜 이런 일을 하는지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그것을 이해하고 싶은 마음은 촬영을 진행시킬 동력이 되었고 이제는 알 것 같다고 말한다. 영화의 마지막, 산 정상에 놓인 거대한 나무배를 항공 촬영한 장면을 보면 감독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짐작된다. 중간에 나오는 ‘에미키’라는 별칭을 갖고 있는 500년 된 푸조나무의 이사장면도 흥미롭다.

호그와 소년들이 가족이 되어가는 과정 <황시>

감동 지수 ★★☆ 로맨스 지수 ★★☆ 조너선 리스 메이어스의 외국어 구사 능력 지수 ★★★★ 일본의 침략에 국민당과 공산당의 대립으로 혼돈에 놓였던 1938년의 중국, 외국인 기자로 상하이에 머물던 영국인 조지 호그(조너선 리스 메이어스)는 전쟁이 끝난 뒤에도 고국으로 영원히 돌아오지 못했다. 중국식으로 ‘허커’라고 불렸던 그의 이름은 비석에 새겨져 중국 땅에 세워졌는데, 그 이야기를 담은 영화가 <황시>다. 난징 대학살 뒤 일본은 철저하게 언론을 통제했고, 23살의 의욕 넘치던 호그는 적십자 약품 운송원으로 위장해 난징에 잠입한다. 모두 죽이고 모두 태우고 모두 빼앗는, 이른바 삼광정책의 현장을 목격한 그는 일본군에 발각돼 처형당할 위기에 놓였다가 공산당원 잭(주윤발)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하고, 잭은 사경을 헤매다 살아난 호그를 황시라는 작은 마을로 데려가 전쟁 고아들을 돌보고 상처도 치료하도록 한다. 펜을 무기 삼아 일제와 싸우려던 청년은 졸지에 고아들의 보모가 되지만,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은 인간애는 그들을 한 가족으로 만든다. 국민당이 소년들을 징병하려고 하자 호그는 황시에서 1126km나 떨어진 샨단으로 이동할 계획을 세우는데, 호그 일행은 초반 900km를 걸어서 이동했고 란저우에서부터는 트럭을 빌려 타고 갔다. 를 통해 세상에 알려진 호그의 이야기가 영화로 만들어지는 데는 20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1985년 술집에서 귀동냥으로 들은 이야기를 기사화한 <데일리 텔레그래프>의 베이징 통신원 제임스 맥마누스는 영화의 각본에도 참여했는데, 2007년 <타임스>에 기고한 글에 의하면 영화는 호그에게 초점을 맞추고 많은 이야기를 생략했다. 호그의 삶이 조명받은 이유는 샨단으로 향했던 ‘작은 대장정’ 때문이지만, 영화는 설산을 지난 고단한 발걸음보다는 호그와 소년들이 야만에서 문명을 세우고 가족이 되어간 과정에 주목한다. 그리고 전쟁을 다룬 휴먼드라마가 그러하듯 총포와 군화가 남긴 상흔에 대해 호소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소년들을 끌어안는 메이어스의 연기는 진실되며, 아역배우들의 검은 눈동자는 그에 호응한다. <연인> <황후花>의 촬영감독 자오샤오딩이 담아낸 야간이동 장면은 그림자극처럼 아름답고, 학살장면에서 스크린이 멈출 때는 숨이 멎을 것 같다. 하지만 뜨거운 가슴을 가졌던 벽안의 성자를 기억하는, 이제는 노인이 된 생존 고아들의 회상이 채우는 결말은 너무 착하다. 어떤 이가 기억되려면 그를 기억해주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라는 과도한 배려가 실화가 지녔던 울림을 반감시켰다. Tip/ 영화가 생략한 이야기 중에는 뉴질랜드에서 태어난 작가이자 교육가인 르위 앨리의 삶이 있다. 앨리는 조지 호그와 함께 샨단에서 아이들을 돌보았으며, 제임스 맥마누스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준 주인공이다.

[듀나의 배우스케치] 봉태규

요새 봉태규를 보면 한대 치고 싶습니다. <워킹맘>나 <애정결핍이 두 남자에게 미치는 영향> 같은 작품들에서 찌질한 젊은 남자 역을 그럴싸하게 소화해내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면 편하겠죠. 사실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그것과는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봉태규가 늘 이런 역만 맡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가족의 탄생>의 경석이나 <두 얼굴의 여친>의 구창은 어떻습니까? 모두 그 정도면 준수한 청년들이죠. 경석의 경우는 조금 옹졸한 구석이 있긴 하지만 오지랖의 여신과도 같은 여자친구의 캐릭터를 생각해보면 그 정도 반응은 이해가 가요. 그런데도 저는 여전히 이 두 영화에서 봉태규가 여자친구들에게 학대당하는 걸 보면서 변태적인 쾌락을 느끼는 것입니다. 심지어 전 간담회나 발표회에서 자연인 봉태규를 봐도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저절로 손이 올라가요. 쓰윽. 여기서 재미있는 건, 봉태규에 대한 이런 감정이 캐릭터에 대한 혐오나 멸시와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감정과는 거리가 멀어요. 단지 전 봉태규의 캐릭터들이 영화나 텔레비전 시리즈에서 박해를 당하는 걸 보면 아래로 흐르는 물을 볼 때처럼 안도하게 됩니다. 자연의 법칙이 실현된 것 같아요. 봉태규 캐릭터는 수난을 당하는 게 정상이고 그가 실수로라도 그런 정상성에서 벗어나면 한대 쳐서라도 그 상태를 복원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연인 봉태규씨에게 진심으로 사과의 말씀. 저는 그가 관객의 존중을 받아 마땅한 영리하고 재능있는 젊은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봉태규가 낮은 승률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꾸준히 주연배우 자리를 유지해온 것에 대해 궁금해합니다. 하지만 이건 그렇게 신기한 현상은 아닙니다. 이 나라에서 영화는 대부분 남자들이 만들고 그들은 대부분 자신의 모습을 영화의 주인공에 투영합니다. 그리고 영화쟁이들 중 장동건이나 조인성처럼 생긴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단 말이죠. 그들에게 양심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주인공 역을 봉태규에게 주려고 할 겁니다. 일단 연기가 되고 대한민국 남자들의 찌질함에 대한 묘사라면 이미 도가 튼 배우이니 가장 안정된 선택이지요. 봉태규가 한예슬, 차예련, 염정아, 정려원과 같은 후리후리하고 급수가 다른 미인들과 꾸준히 파트너가 되는 것도 역시 당연한 일. 아무리 봉태규를 캐스팅한다고 해도 자신의 욕망까지 하향조절할 필요는 없을 테니까요. 그런 그들이 봉태규에게 온갖 종류의 육체적/정신적 폭력을 휘두르는 것도 당연한 일이니, 양심있는 예술가라면 욕망을 충족하는 것에만 집착하지 않고 자신을 둘러싼 현실을 똑바로 직시하는 용기를 가져야 하기 때문이지요. 감독이나 작가가 여자라면? 역시 그들이 직접 현실세계에서 경험한 남자들을 그리기 위해 봉태규가 필요합니다. 그들이 장동건이나 조인성 같은 남자들을 현실세계에서 만났을 가능성도 얼마 안 될 테니 말이죠. 근데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밀어붙이는 건 좀 박한 것 같습니다. 봉태규는 사실 로맨스의 감이 꽤 좋은 배우입니다. 표현력도 좋고요. 우리나라 남자배우들은 (특히 잘생긴 부류일수록) 자기도취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경향이 강한데, 봉태규는 정반대입니다. 자기 이미지를 망가뜨리더라도 속내를 감추지 않고 감정의 흐름을 정확하게 타지요. 저는 여전히 한예슬과의 로맨스가 무르익으려던 바로 그 순간, 정극배우가 되겠다고 <논스톱>을 떠난 그의 결정에 화가 납니다. 그 뒤에 대타로 등장한 현빈 캐릭터에 특별한 유감이 있는 건 아니지만, 한예슬/봉태규 콤비가 그 시리즈에서 보여주었던 화학반응은 최고였단 말이에요.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전 그가 어느 정도 나이를 먹으면 (지금의 스티븐 카렐이 그런 것처럼) 안 그런 것 같으면서도 은근히 로맨스영화에 잘 적응하는 중년의 배우가 되어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정지우] 사랑은 사람에게 새로운 세계를 선물할 수 있다

<모던보이>가 재현해낸 1930년대의 경성은 과거의 죽은 시간이 아니라 눈앞에 타오르는 현실처럼 생생하다. 오랜 시간 CG와 색보정에 공을 들인 영화답게, 명동성당과 미쯔비시 백화점 옥상, 경성역, 숭례문, 경회루 등지를 가로지르는 도시의 밤과 낮은 눈이 부시게 매혹적이다. 당대를 다룬 기존의 영화들과 비교했을 때, <모던보이>의 기술적 성취는 뛰어나다(자세한 내용은 <씨네21> 670호 참고). 하지만 시사회 다음날 진행된 인터뷰는 경성의 재현이나 기술적인 문제보다는 불운한 시대 속, 두 남녀의 사랑 이야기에 대한 여러 질문과 답들로 채워졌다. 정지우 감독에게서는 <사랑니>의 흥행실패 이후, 대중과의 교감 지점에 대해 오랜 시간 고심한 티가 역력했을 뿐만 아니라, 일제시대와 개인의 욕망이라는 민감한 주제를 풀어가면서 겪은 내적 갈등과 부담 또한 느껴졌다. 하지만 민감하고 공격적인 질문들 앞에서도 그는 열정적으로 조목조목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영화의 서사적 틈을 묻기 위해 원작 소설과의 차이를 종종 언급한 질문자에게 그는 수차례 매체의 차이를 강조하며 영화를 그 자체로 읽어줄 것을 당부했다. -개봉을 몇 차례 미루고 6개월간 편집에 매달렸는데, 결과는 만족스러운가. =나는 정해진 동선으로 합을 맞추어 촬영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자유롭게 움직이는 배우들을 전제로 찍기 때문에 조합의 경우의 수가 많다. 현장에서 영화를 완성하는 타입이 있다면, 나는 편집실에서 완성하는 타입이다. 게다가 핸드헬드로 촬영을 했는데 이 정도 분량의 합성이 있는 CG를 핸드헬드로 촬영하는 건 전례가 없었던 일이라서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다. 개인적으로는 충무로에서 상업영화들에 주어지는 편집시간이 너무 짧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끝까지 최선을 다해서 고치고 수정했기 때문에 만족스럽다. 처음에 생각했던 대로 영화가 나왔는가의 여부를 묻는다면, 글쎄…. 그건 구체적인 내러티브처럼 표면적인 문제가 아니라 정서적인 차원의 문제인 것 같다. 정서적인 차원에서 어떤 쪽으로 가고 싶다는 바람이 있는데, 그걸 끝까지 유지해서 최종적으로 관객에게 전달하는 데 성공했느냐의 문제 말이다. 물론 생각보다 간단하지 않다. 시나리오를 중심으로 단순히 이야기를 맞추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소설 <망하거나 죽지 않고 살 수 있겠니>의 어떤 점에 매력을 느껴서 영화화를 결심했나. =원래 1930년대에 대한 매혹이 있었다. 당시의 음침한 이야기와 무드에 관심이 있었고 꼭 해보고 싶은 이야기도 있었다. 그에 비해 소설은 유쾌한 편이었지만, 작가가 당대를 바라보는 시각과 통찰이 새로웠다. -각색, 촬영, 연기지도, 편집 등에서 기존에 고수했던 작업방식과 차이점이 있다면. =돈의 압박 수준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커서 늘 마음이 쪼들리고 뭔가 쫓아온다는 느낌으로 찍었다. 그런 점이 괴로웠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다른 건 없었던 것 같다. -단지 시대적 배경의 차이뿐만 아니라 이야기의 구조나 캐릭터를 형상화하는 방식에서 <사랑니>와의 거리가 큰 영화다. <사랑니> 때는 마치 우물물이 퍼져나가듯이 인물들의 미세한 마음의 떨림에서 시작해서 인물 밖 프레임까지 정서가 퍼져나간다면, 이 영화는 반대로 인물들의 대사나 행동 자체는 일면 전형적인 구석이 있지만, 빛이나 공간의 공기와 같은 인물 외부의 뭔가가 인물 안으로 스며드는 느낌이 있다. =공간이 네 번째나 다섯 번째 주인공이라고 생각하고 시작했다. 당대의 경성을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이전의 시대극에 비해 새로운 공간의 느낌이 묻어난다면 그건 과거에 비해 제작상의 현실적 어려움이 많이 해결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영화의 서사가 일본의 공간으로 들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당대의 일본인 주류사회 안으로 캐릭터들이 들어왔기 때문에 예전 영화들이 보여주는 형태의 공간 안에서는 이 시대의 특수성을 정확히 보여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영화 속 공간에 매번 스며드는 뽀얗고 화사한 빛이 인상적이다. 이 시대를 반어적으로 형상화하는 방식 같기도 하고 현실을 지운다는 지적을 받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이건 사실 고증에 입각한 굉장히 현실적인 설정이다. 당대에도 전기 수급은 이루어졌지만, 도시 전체에 전기가 있던 시기가 아니었고 형광등이나 간접조명은 없었다. 광량이 부족했을 텐데, 그래서 오히려 직접적인 백열등의 느낌이 강했을 것 같다. 물론 조명이 주는 정서적인 상태를 무시할 수는 없다. 촬영을 하며 그런 부분이 관계의 내면을 반영할 수 있겠다는 느낌도 받았을 테고. -영화가 그리는 경성은 일면 무국적적이고 초현실적이고 몽환적이다. 당대에 대한 사료들도 많이 찾아보았을 텐데, 30년대 경성을 어떤 모습으로 형상화하고 싶었나. =현재 유행하는 근현대에 대한 각종 사료들을 보면, 아무리 과거지만, 참으로 동세대적 감성이구나, 이미 이 시대는 현대구나, 라고 느낀다. 실제 30년대의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놀란 건 근대 경성이 완전히 현대화된 근대도시라는 거다. 그런 다큐들은 대부분 관광홍보를 위한 것이었다. 그런 화려함에도 자극을 받았지만, 당대에 대한 여러 사례들이 파편적으로 나열됨에도 그 이면의 구조, 어떤 구조가 그런 사건들을 발생시켰는지에 대한 접근이 없다는 사실은 문제라고 생각했다. 경성의 현대성을 보면서 식민지 근대화론에 입각해 경성이 발전했다고 볼 수는 없지 않은가. 나는 경성이 다양한 공간이었다는 점에 초점을 두고 싶었다. 이를테면 경성은 일본인의 공간이자 최상의 계층에는 향유의 공간이지만 자본주의의 발전과정에서 농촌에서 유입된 엄청난 인구가 토막촌을 구성하고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이 모든 것이 한데 있었던 공간이 경성이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입체적인 경성을 드러내지 못한 것 같아 아쉽다. 사실 전체 이야기 속에 토막촌 같은 곳의 촬영분도 있었지만 결국 영화 전반의 균형에 맞지 않는 것 같아서 들어냈다. -원작 소설과 비교하자면 신스케의 캐릭터가 눈에 띄게 달라졌다. 신스케의 캐릭터와 그와 해명의 관계를 설명해주는 유키코라는 인물도 부재하고. 캐릭터들이 단순해졌다고 할까. =매체를 옮겨오면서 생기는 변화다. 영화의 결말 경우에 원작자가 시나리오 최종본을 보기 전에, ‘영화가 어떻게 끝을 맺을지 궁금한데, 소설처럼 끝맺으면 안 되는 거 아시죠’라는 농담을 했다. 말하자면 영화라는 매체가 가지는 결말과 소설의 결말은 달라야 하는 것 같다. 전체 분량으로 봤을 때, 신스케라는 캐릭터는 지금 정도의 정리가 맞는 것 같다. 유키코의 분량도 있었지만, 전체 균형상 지금과 같은 결과를 선택했다. <사랑니>를 봐서 알겠지만, 나는 영화를 복잡하게 만들라치면 그럴 수 있는 감독이다. 하지만 현재의 관객이 그런 복잡함을 이해해주는 수준은 문득문득 공포를 느끼게 한다. (웃음) 이 영화에 대해서도 누군가는 너무 단순하게 정리한 게 아니냐고 물을 텐데, 여타의 영화들과 비교한다면 익숙하지 않은 부분들이 많아서 생각을 요구하는 영화다. 지금의 결과물이 가장 적절하고 흥미롭게 정리된 수준이 아닌가 싶다. -편집에서 많은 부분을 잘라낸 것 같다는 인상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인물들의 감정선을 따라가기가 벅찬 지점이 있었고 특히 해명과 난실의 러브라인이나 인물들이 왜 그런 선택을 하는지에 대해 설득되지 않는 순간이 종종 있다. 이 영화는 이야기보다는 묘사적인 이미지(화된 기억들)가 남는 영화로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해명과 난실의 난투극 신은 러브신과 다름없다는 생각으로 찍었다. 다시 안 봐도 될 사람들이 다시 만나 러브신과 유사한 난투극을 벌이고 사랑을 이어가는 게 개인적으로는 별로 비약이 아니라고 본다. 그리고 이미지가 남는다고 느꼈다면, 이 영화는 완전한 실패다. 인물들 내면의 변화과정이 어떤 흐름을 타고 가느냐의 문제가 이 영화의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근거가 인물에서부터 나오지 않았다면 이야기가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는 영화다. -원작에서 해명은 다른 선택을 한다. 지난 인터뷰를 보니 ‘식민지 근대화론을 일방적으로 인정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시선에 동조하고 싶었다’고 말했는데, 그런 마음의 반영일까. 후반으로 갈수록, 그리고 결말에 이르러 영화가 개인에게 역사적 운명을 짊어지게 하는 것 같다. 끝까지 가볍게 가는 길을 생각해보지는 않았나. =이 영화를 만들면서 일반 국민의 평균적인 감성을 피부로 느꼈다. 일제강점기에 대해 얼마나 집단적인 트라우마를 갖고 있는지. 어리면 어릴수록 유쾌한 톤으로 질러내는 것이 좋겠다고 하고 나이가 많을수록 이 시대를 다루는 태도가 그래서는 안 된다는 의견으로 갈렸다. 이 시대를 다룬 영화들이 특정 태도를 취하는 것은 단순히 대중과 절충하겠다는 타협의 문제가 아니다. 영화의 결말에 나타나는 무드나 후반부 해명의 달라진 태도가 없었다면, 총독부 밖에서 이뤄지는 기념식이나 천황을 향해 절하는 장면들을 문제 삼고 상처로 받아들이는 이들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나는 지금 취향의 문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시나리오, 촬영, 편집 단계를 거치며 느낀 건 관객이 이 시대를 받아들이는 어떤 준비된 수준이 있다는 것이다. 내가 취한 걸음이 성큼 뛰어넘어서 완전히 다른 그림을 만들어낸다면 영화적으로는 멋있을지 모르겠지만, 누군가에게는 분명 상처로 남는다. 그 누군가는 내가 만든 영화를 위해 티켓값을 소비한 사람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사실 나는 이 영화에 대해서 아직도 위태로운 기분이 든다. 한쪽에서는 진부하다고 하고 한쪽에서는 ‘일본인이 되고 싶다’고 말하는 주인공을 문제 삼으니까. 내가 방어적이거나 보수적인 입장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기분이 드는 게 참 싫다. 나는 너무 고통스러운 순간을 통해서, 정말 많은 시간을, 가장 어려운 과정을 통해 내 태도를 결정했다. 단순히 어떤 선택이 좋으냐의 문제가 아니라 도대체 당시 인물들이 갈 수 있는 끝이 무엇일지를 고민한 것이다. 영화를 만들면서도 끊임없이 피드백을 했는데 모두들 시대에 대한 다양한 감성을 이야기하지만 결국 하나의 태도로 모아지더라. 어제 시사 끝나고 벌써 우려했던 대로 일본 군가 나오는 행사, 일본인 공간 안에 들어간 주인공들이 취한 태도들에 대한 반감도 접했다. 아까 이 영화에서 이미지가 남는다는 말에 공포감이 생기는 것도 같은 이유다. 경성에 얼마나 쇠락한 공간들이 많았는데, 경성을 이렇게 살 만한 공간으로 만들어놓은 것에 대해 책임질 수 있냐고 누군가가 물었을 때, 만약 이미지가 전부라면 답할 게 없다. 주인공들의 마음 때문에 가슴이 아팠다는 감상이 없다면, 이건 치명적이다. -핸드헬드로 촬영을 고집한 이유는 무엇인가. =배우들이 마음대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해주고 싶었다. 배우들을 방해하지 않고 그들에게 제한을 주지 않는 것은 내게도 절체절명의 매혹이었다. 그런 촬영을 즐길 수 있는 배우들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시각효과 면에서는 아주 힘든 작업과정이었지만, 멈춰서 찍지 않았기 때문에 공간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진 것 같다. -김혜수의 어떤 점에서 난실을 보았나? <해피엔드>에서 텔레비전 드라마가 잠깐 스쳐 지나가는데 그 모니터 안에도 김혜수가 있었다. =그녀는 한국 남자들의 로망이었다. (웃음) 지금은 그녀의 불균질함, 알 수 없는 기운 같은 것이 섞였을 때 나오는 매혹이 있다. 그리고 그런 매력이 가면 갈수록 깊어진다. 그녀 특유의 몸의 기운이 어쨌든 휘발되고 있는 상태에서 다른 것이 주변을 맴도는데, 그게 아직 명료하지 않아서 점점 재미있어질 것 같은 배우다. -난실은 과거가 없는 여자다. 애초 설명을 거부하는 캐릭터이지만, 때로 그녀의 행동과 선택의 근거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가. =인물을 설명하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겠지. 난실의 경우 경회루에서 하는 조선왕조에 대한 언급이나 운동그룹 내에서의 리더 역할로서 여자가 왜 대역을 내세워서 일의 진행을 도모할 수밖에 없는지 등의 간단하지 않은 고민과 상황은 던져져 있다. 그런 부분들에 대한 자세한 언급이 없는 것을 불친절하다고 얘기할 수도 있지만, 영화 내 캐릭터의 흐름에 있어서 일관성의 문제라든가, 맥락의 이해여부에 대한 문제라면 그다지 부족하다고 보지 않는다. -예전에 “경험으로 인간이 개선되면 얼마나 좋으랴만”이라는 말을 한 기억이 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해명과 난실은 결말에 이르러 달라진다. =맞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달라질 수는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큰 계기는 사랑이다. 사랑이 새로운 세계를 선물할 수 있다는 것이다. 후반부의 기념식장 장면을 찍으면서 해명이 태극기를 꺼내드는 모습을 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힘으로 영화도 완성할 수 있었다.

아시아에도 슈퍼히어로들이 있다

서구에서 시작된 슈퍼히어로는 재미있는 구경거리지만 아시아 각국의 공간에 등장시키기에 이질적인 요소들이 많다. 하지만 근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아시아의 각국들은 고유의 전통, 종교, 문화를 바탕으로 할리우드의 슈퍼히어로를 결합한 다양한 토종 슈퍼히어로들을 탄생시킨다. 가장 적극적으로 히어로를 탄생시킨 국가는 일본이었고, 이들은 기계문명과 결합한 다양한 슈퍼히어로들을 만화와 영화를 통해 생산해냈다. 그에 못지않게 필리핀에서도 다양한 슈퍼히어로가 만들어졌고, 이 중 한 캐릭터는 인도네시아의 영화에 등장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말레이시아, 인도에서도 슈퍼히어로가 탄생되었다. 반면, 중국, 대만, 홍콩처럼 슈퍼히어로에 무관심하거나 거부하는 국가도 있다. 이들 국가는 다른 아시아 국가보다 유교권의 영향이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 슈퍼히어로의 등장 1950년대 후반, 일본에 텔레비전이 보급되면서 가장 선풍적인 인기를 끈 것은 미국의 <슈퍼맨>시리즈였다. 이에 영향을 받아 이듬해 신토호에서 <슈퍼 자이언트:외계에서 온 강철맨>가 제작되었다. 이는 슈퍼맨의 조악한 모방에 불과했지만, 큰 인기를 끌어 이후 시리즈로까지 제작됐다. <슈퍼 자이언트>의 성공은 일본 제작자들에게 슈퍼히어로 장르의 시장 가능성에 대한 확신을 주었다. 1960년대에 들어서자 로봇 히어로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테즈카 오사무의 만화를 원작으로 한 <우주소년 아톰>, 외계인과 싸우는 거대한 <울트라맨>이 대표적이다. 비슷한 시기에 중국과 한국 등 아시아의 주변국가가 근대화의 과정을 거치면서도 여전히 유교의 영향권에 놓여있었던 것에 비해, 세계대전을 거치고 원자폭탄의 피해를 직접 몸으로 체험한 일본에게 기술 문명은 공포와 놀라움의 대상이었다. 기술 문명이 야기한 충격은 그들의 땅과 육체에 직접 새겨진 지워지지 않는 상처이면서 동시에 전후의 삶 속에서 반드시 극복해야 할 대상이었던 셈이다. 1950년대부터 시작된 일본의 슈퍼히어로 물은 일정한 마니아층의 관객을 형성하면서 장르영화의 자리를 탄탄하게 구축해나갔다. 필리핀, 인도네시아, 인도의 슈퍼히어로들 유교의 영향력이 한국, 중국, 대만에 비해 상대적으로 미치지 못했던 필리핀에서는 자국의 사회,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한 토종 슈퍼히어로들이 일찍부터 등장했다. 1950년대의 필리핀 텔레비전 방송에서는 이미 <진흙맨>, <화산의 아들>등 토종 슈퍼히어로가 등장한다. 1947년 잡지에서 처음 모습을 보인 <다르나>는 1951년에 영화화되었다. 다르나는 할리우드 원더우먼의 아시아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는 원더우먼처럼 하늘을 날고, 눈에서 레이저 광선을 발사하며, 팔찌를 이용해서 총알을 막아낸다. 단, 그녀는 신체의 노출에 대한 사회적인 시선을 의식하여 삼각형의 팬티는 착용하되 허리띠에서 배 부분을 가리는 천을 늘어뜨려서 복부를 완전히 드러내지 않는다. 한편, 할리우드의 슈퍼히어로들이 방사능 노출에 의한 돌연변이로 탄생했다면 필리핀의 슈퍼히어로는 우연히 손에 넣게 된 물건으로 변신마법에 의해 탄생되는 식이다. 이것은 필리핀 어린이들의 리얼리티의 범주 안에서 허용되는 범위임을 의미한다. 이처럼 필리핀의 슈퍼히어로 속 주인공은 사회에서 소외되고 가난한 인물로 영화의 주 관객층인 어린이들에게 희망을 준다. 인도네시아 영화는 슈퍼히어로 장르를 받아들이는데 있어 다른 국가들에 비해 늦은 편이었다. 최초의 인도네시아 슈퍼히어로 작품은 1974년의 <라마 슈퍼맨 인도네시아>이었다. 이것은 만화가 원작이 아니라 영화를 위해 창조된 캐릭터다. 6년 후, 필리핀의 <다르나>의 흥행에서 영감을 얻은 <기적의 다르나> 가 제작되었고, 이듬해 <번개의 아들 군달라>가 개봉되었다. 절대 악과의 투쟁을 부르짖는 여타의 슈퍼히어로들과는 달리 인도네시아 슈퍼히어로가 싸우는 적은 친구의 가족을 괴롭히는 악령이거나 소년들을 유혹하는 마약상, 폭탄 제조 방법을 노리는 악의 무리다. 인도네시아의 슈퍼히어로는 필리핀과 마찬가지로 가족을 지키기 위해 악과 싸운다. 2006년 인도 영화사 흥행 1위를 차지한 <끄리쉬>는 끄리쉬를 주인공으로 삼은 본격 슈퍼히어로 영화다. 끄리쉬는 총명하고, 초능력을 가지고 있고, 멋진 외모를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춤과 노래에도 능하다. 그는 할리우드 슈퍼히어로의 흔적을 굳이 숨기지 않는다. 오히려 노골적으로 장르적 특징을 발리우드의 경계 안에서 그럴싸하게 조합해낸다. <끄리쉬>는 거대자본의 투자와 싱가포르 로케이션 촬영 등 실험적인 시도로 인도 영화 시장에 새로운 가능성의 영역을 펼쳐보였다. 속편인 <끄리쉬2>가 내년 개봉을 목표로 현재 촬영 중이다. 태국과 말레이시아의 변종 슈퍼히어로 태국의 대표 슈퍼히어로 물 <머큐리맨>(2007)은 다소 엉뚱하다. 고대 티베트의 부적때문에 슈퍼히어로가 된 방콕의 소방관 출신 주인공 샤른은 아프가니스탄의 테러리스트 오사마 빈 알리를 상대한다. 오사마 빈 알리의 야심은 티베트의 부적을 이용해서 미국을 공격하는 것. 미국의 안전을 위협하는 아프가니스탄의 테러리스트와 싸우는 태국의 슈퍼히어로 머큐리맨은 슈퍼히어로가 민족성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라는 물음조차 가뿐히 뛰어넘어버리는 아시아의 변종 슈퍼히어로인 셈이다. <치착맨>은 다른 슈퍼히어로에 비해 우연적으로 탄생하였다. 게다가 사고로 치착맨이 된 하이리에게 슈퍼히어로는 재앙일 뿐이다. 가장 친한 친구에게 자신의 변화를 털어놓고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기 위한 약을 찾아 헤매는 과정에서, 유일한 희망으로 여겼던 교수의 음모가 드러나고 치착맨은 자신의 몸의 변화가 가지고 있는 슈퍼히어로의 잠재성을 깨닫게 된다. 아시아에서 제작된 대부분의 슈퍼히어로들은 촌스럽다. 이들은 슈퍼맨이나 스파이더맨처럼 화려한 도시를 배경으로 종횡무진하지도 않고, 현란한 카메라 테크닉이나 감각적인 편집으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할리우드식 쾌감을 선사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아시아 슈퍼히어로들은 각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감춰진 욕망, 갈등, 고민의 흔적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즉, 아시아 각국의 역사성과 문화에서 파생되는 섬세한 면면과 각 문화 사이의 작동을 관찰할 수 있는 점에서 아시아 슈퍼히어로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