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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1997)

<바디 오브 라이즈> 인터뷰 - 리들리 스콧,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外

“모호한 도덕성에 둘러싸인 현실을 보여주려 했다” 원작자 데이비드 이그나티우스, 각본가 윌리엄 모나한, 프로듀서 도널드 드 라인 인터뷰 -어떻게 이 프로젝트에 합류하게 되었나. =데이비드 이그나티우스: 원래 리들리 스콧과는 ‘The Invisible World’라는 기존의 시나리오 각색건으로 함께 작업하고 있었다. 이라크 전쟁을 취재 중인 여성 저널리스트가 현지의 이라크인을 만나 사랑에 빠짐으로 둘 다 위험에 처해지는 내용인데 그 프로젝트 때문에 여기 도널드나 윌리엄 모두가 본격적으로 모이게 되었다. =윌리엄 모나한: ‘The Invisible World’로 이른바 데이비드가 영화계에 본격적으로 진입하는 셈이었으니까. (데이비드를 보고 씩 웃는다.) 그러다가 리들리가 데이비드의 <바디 오브 라이즈> 원고를 건네주더라. 정말 뛰어난 첩보물이었다. 이런 작품을 놓칠 수가 없었다. -자신의 소설이 처음으로 영화화된 셈인데 영화를 보니 어떤가. =데이비드 이그나티우스: 흥분될 수밖에 없지 않나.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정말 좋은 영화라는 것이다. 작가로서 전달하고 싶어했던 주제인 CIA의 세계, 그 세계가 실제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들이 어떤 도덕적 경계에 서 있는지 등 이른바 중동에서의 미국인이라는 그림이 영화에 잘 녹아들어 있어서 만족한다. -기자였던 경험이 스파이물을 쓰는 데 어떤 영향을 끼쳤나. =데이비드 이그나티우스: 내가 이해한 그 세계 속 인간들의 역학 관계가 늘 흥미로웠던 이유는 그 관계들이 내가 속한 저널리즘의 세계와 유사했기 때문이다. 리포터의 과제는 소식통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 데서 시작한다. 그래서 그가 남들과 공유해서는 안 되는 정보를 빼내는 것이다. 때로는 그 정보 때문에 정보를 흘린 사람이 곤란해지는 상황이 온다. 그래서 그 사이에서 비밀스런 교환들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또 하나 유사점은 현장에서 일하는 기자와 편집장과의 관계이다. 내가 특파원으로 일했을 때 나와 편집장의 관계는 바로 페리스와 호프만의 관계 그대로였다. 당시 편집장과 전화할 때마다 말 그대로 돌아버리기 직전까지 가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이놈의 편집장은 도대체 현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아무리 설명해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이 작품은 이라크를 바라보는 미국인들의 두 시각을 보여주고 있는 정치적인 영화이다. 그에 대한 각자의 관점은 어떤가. =윌리엄 모나한: 정치적인 영화라고 말할 때 대개는 어떤 특별한 의제를 관객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읽힌다. 그렇지만 이 영화는 사실상 CIA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좀더 현실에 가깝게 보여주는 데 있다는데…. =도널드 드 라인: (윌리엄의 말을 끊으며 프로듀서답게)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자체로 좋은 스파이영화다! =윌리엄 모나한: 호프만은 극중에서 레오가 지적하듯이 스스로를 ‘미국’으로 보고 있다. 그의 모든 대사들은 기본적으로 그런 관점을 깔고 있다. 그러나 그는 미국이 아니다. 실상 그는 미국인의 어떤 타입의 결함을 보여주는 캐릭터로 실책을 범하곤 하는 존재다. (말을 더 이으려고 하는데…) =도널드 드 라인: 호프만의 뻔뻔하고, 막무가내인 면은 요르단의 정보 수장인 하니와 좋은 대비를 이룬다. 그들의 오랜 역사만큼 그들은 좀더 기다리고, 좀더 큰 그림을 보고, 다른 방식으로 자신들의 체제를 운영한다. 하니는 과일이 제대로 익을 때까지 기다릴 줄 안다. 페리스는 그 둘 사이에 갇혀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고. 이 영화에는 특정한 정치적 의도가 따로 없다. 어느 누구도 선과 악의 구분에 딱 맞아떨어지지 않고 있다. =윌리엄 모나한: (여전히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그렇다. 정치성을 담고 있지 않다는 것이, 어떤 결론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이 이 작품의 매력이다. (약간 답답해하다가) 예술가로서 어떤 결정을 내릴 때는 그런 정치성에서 자유로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어떤 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자 노력할 뿐이다. =데이비드 이그나티우스: 이 영화는 스파이 스릴러물이다. 스파이 스릴러 영화의 매력은 그를 둘러싼 시대를 미묘하게 포착해낸다는 점에 있다. 존 르 카레의 소설이나 영화나 텔레비전을 통해 그려진 냉전의 이미지를 떠올려보라. 모든 것이 회색빛이고 모호해진 도덕적 경계라는 주제가 아름답게 그려지고 있지 않나.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에서도 조지 스마일리 시리즈와 같이 여전히 모호한 도덕성에 둘러 싸인 지금 이 시대가 전해졌음 한다. “시간은 돈이며 느려지면 배우들이 지친다” 리들리 스콧 감독 인터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러셀 크로를 캐스팅한 이유는. =그야 그들이 현재 가장 뛰어난 할리우드 배우들이니까. 처음 책을 읽어내려가는데 ‘이건 레오군… 맞아, 이건 레오야…. 이건 러셀이 맡으면 되겠군’이라는 생각이 바로 들었다. 그래서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나는 캐스팅 리스트를 펼쳐두고 누굴 선택할까 고민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대부분의 캐스팅은 시나리오를 보는 순간 누가 적임자일지가 바로 보인다. -러셀 크로는 어떤 배우인가. =러셀은 언제나 왜 자기여야 하는지에 대해 묻는다. 그래서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주인공인 페리스가 아니면서도 그와 동등한 무게를 가지고 있는 캐릭터이고, 그렇기에 좋은 캐릭터 연구가 되지 않을까라고 대답해줬다. 그러면서 슬슬 이제까지 그가 연기한 가장 인상적인 캐릭터는 <인사이더>의 제프리 와이갠드라든가, 며칠 전에 만났던 사람이 CIA쪽에서 일했던 모양인데 몸무게가 꽤 나가더라, 꽤 뚱뚱하고 땀을 많이 흘리더라며 지나가듯 덧붙여준다. 그때부터 러셀의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한다. -러셀 크로는 함께 일하기 어렵다는 평가도 있지만, 당신과는 유난히 호흡이 맞는 것 같다. =러셀은 말을 돌려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무척 똑똑한 배우이기도 하고. 아무래도 나는 영국인이고 그는 호주인이라 건조하고, 다소 차가운 유머감각을 공유해서 둘이 잘 맞는 것 같다. -여러 대의 카메라를 동시에 돌리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원래는 예산에 맞추기 위해서 시작되었다. 내가 맡은 프로젝트들이 대개 벅찬 규모들이다 보니 예산 범위에서 계획했던 그림들을 잡아내기 위해 멀티 카메라 시스템을 고안해낼 수밖에 없었다. <블랙 호크 다운>에서는 11대의 카메라와 카메라팀을 돌렸다. 이렇게 여러 대의 카메라를 동시에 돌리면, 직감적으로 순간순간 결정을 내려야 한다. 멈칫하는 순간, 모든 게 다 느려져버린다. 그러면 째깍째깍 시간이 흘러간다. 시간은 곧 돈이지 않나. 또 하나, 배우들의 연기에도 엄청난 영향을 준다. 서로 대화하는 장면에서 한쪽만 카메라에 잡히면 상대배우가 스스로 리허설도 할 겸 프레임 밖에서 대사를 쳐주고 싶어하는데, 왜 그렇게 배우를 낭비하나. 같은 대사를 반복하면 배우란 지칠 수밖에 없다. 그러면, 또 느려진다. “리들리 스콧 감독과 나는 같은 부류다” 러셀 크로 인터뷰 -50파운드를 어떻게 찌웠나. 맥도널드만 먹었나. =뻔하지 않나. 그냥 한다. 대단한 게 아니다. 캐릭터에 맞다고 생각했고, 그게 리들리가 보는 캐릭터의 모습이기에 했다. 캐릭터가 좀더 현실감있게 다가와야 하니까. -이런 정치적인 소재를 다룬 영화가 박스오피스에서 성공할 것 같은가. =이 영화의 박스오피스 성공 여부는 영화의 완성도에 따를 뿐이다. 리들리가 어떤 정치적인 의제를 전달하고자 하는 관점에서 만들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정보전 세계를 현실에 가장 근접하게 묘사하려고 했을 뿐이다. 그 세계에는 선한 자와 악한 자가 따로 구분되지 않는다. 이 영화는 그 세계 속에서의 속고 속이고 유혹하며, 버리고 버려지는 관계에 관한 이야기이다. 어떤 특정한 정치적 메시지가 아니라. -리들리 스콧 감독과 몇번이나 함께했는데 그와 작업하는 것은 어떤가. =그는 내게 딱 맞는 존재다. 하루의 일이 끝났을 때 무엇인가 이루어냈다, 제대로 일을 했다라는 그 기분이 좋다. 논의해야 할 사항이 있다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바로바로 그 자리에서 이야기한다. 이를테면 스쳐지나가는 와중에 문득 떠오른 생각을 아무렇지도 않게, “두 번째 신에서 문이 아니라 창문이면 어때?”라고 하면, “아, 그게 좋겠다”라고 말하고는 각자 또 가던 길을 가는 식이다. 우리는 현장에서의 이런 직관적인 판단을 제대로 살리고 싶을 뿐이다. 그러면 나중에 영화에 그대로 그 느낌이 드러난다. 우리가 빠르게 일하는 방식이 그런 느낌을 살리는 데 확실히 도움이 되는 것 같다. 리들리는 오래전부터 2대의 카메라로 20주 동안 일하는 것보다 5대의 카메라로 10주 동안 일하는 것을 선택해왔다. 그게 나는 참 좋다. 왜냐하면, 내가 연기할 때, 나와 내 상대편을 향하는 카메라가 따로 있다는 소리니까. 클로즈업 숏이나 와이드 숏, 내가 하는 세세한 리액션 숏들이 그 한번의 테이크에 다 담기고 있다는 소리니까. 리들리의 연출 방식은 누구보다도 즉각적이다. 촬영장에서 그는 5팀의 5개의 카메라를 잡아내고 있는 5개의 모니터 앞에 앉아 있다. 그 앞에서 그는 마치 자신의 캔버스 앞에 팔레트를 들고 있는 화가처럼 어느 공간에 무엇인가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그 자리에서 필요한 요소를 바로 집어넣어 완성시킬 수 있는 감독이다. 감독 의자에 기대 앉아서 모니터를 그냥 바라보고만 있는 다른 감독들과 달리, 이미 리들리의 머릿속에서는 영화가 편집되고 있는 것이다. 현장에서 그는 끊임없이 일하고 있다. 그래서 그가 내게 맞다는 것이다. 그는 나와 같은 부류(Bloke)이다. “정치적인 소재의 영화에 흥미를 느낀다” 레오나드로 디카프리오 인터뷰 -정치적인 소재의 영화에 특별히 매력을 느낀다고 생각하나. =흥미롭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어떤 특정한 사건이 일어나고 있을 때 그에 관한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이니까. <블러드 다이아몬드>도 그런 맥락에서 한 작품이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중요한 사안이고 흥미로운 주제라고해도 좋은 이야기가 아니라면, 나아가서 훌륭한, 재미있는 영화가 아니면 그건 정말 철저한 시간 낭비라고 생각한다. -리들리 스콧과 러셀 크로의 관계는 이른바 당신과 마틴 스코시즈와의 관계와 유사할 것 같은데. =그렇게 볼 수 있을 것 같다. 작업을 같이 하다 보면 얼마나 서로를 편하게 느낄 수 있느냐가 관건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정말 서로에게 얼마나 솔직하게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느냐라고 할까. 첫 리딩 때였나, 그 둘과 시나리오를 읽는데 바로 그 자리에서 둘이 “그 세신은 그냥 한 장소로 묶어버리는 게 어때?” “어, 그게 좋겠다”라면서 바로 그 자리에서 두신을 잘라버리는 바람에 당황했던 기억이 있다. 서로의 직감에 의존하는 두 사람이라 처음에 적응하는 시간이 좀 필요했다. -이 작품을 하면서 CIA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나. =당연히. 그들이 처한 상황의 위험도나 긴박성은 예상했던 것 이상이었다. 그 세계의 특성상 접근할 수 있는 자료에 한계가 있어서 기본적으로 데이비드 이그나티우스의 소설이나 그의 경험에 많이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몇몇 시퀀스를 위해 전직 CIA 요원을 만나기도 했지만, 이 모든 과정을 통해 얼마나 그 세계가 복잡한지, 우리가 다른 나라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고 할까.

불경기 덕? 다양성의 힘!

믿거나 말거나, <텔레그래프>가 전하는 2008년 여름 영국 극장가 호황의 원인은 “경기 침체”다. 불황이어도 기분전환을 위한 재밋거리는 찾게 마련이고, 그중 저렴한 영화관람이 혜택을 봤다는 뜻이다. 영국영화배급자연합(FDA)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전세계가 경제 난항을 겪은 지난 3개월 동안, 영국 박스오피스 수입은 1969년 이래로 최고 성적을 기록했다. 2008년 6월부터 8월까지 영국 극장가는 5360만명의 입장객을 맞이했고, 총 5억9890만달러의 수입을 거뒀다. 이는 2007년 같은 기간과 비교했을 때 입장객은 5%, 극장수입은 14% 상승한 수치다. FDA 대표인 마크 베이티는 영화는 경기변동과 반비례하는 대표적인 엔터테인먼트라며, “저녁에 3시간 외출한다면 술집이나 경기장보다 극장에 가는 것이 경제적”이라고 말했다. 날씨마저 우중충한 영국의 여름, 극장가를 뜨겁게 달군 영화들이 <아이언맨> <인디아나 존스: 크리스탈 해골의 왕국> <맘마미아!> 등으로 추려지는 것 역시 같은 견지에서 이해가 가능하다. 팍팍한 현실의 편린을 돈내고 들어간 극장에서는 잠시 잊고 싶었을 거란 이야기다. 하지만, 40년 만에 날아든 낭보의 일등공신은 다양한 장르로 채워졌던 여름 극장가 그 자체다. 지난 3개월 동안 극장가는 가족관객에게는 <인디아나 존스: 크리스탈 해골의 왕국>, 액션 팬들에게는 <아이언맨>과 <핸콕>, 여성관객에게는 <맘마미아!>와 <섹스 앤 더 시티> 등 폭넓은 입맛을 만족시키는 가지각색의 영화들을 선보였다. 특히 <맘마미아!>는 개봉 12주차가 되도록 주간 낙폭이 14%에 불과해 장기흥행에 대한 예상을 적중시켰고, 역대 영국 개봉작 중 흥행순위 4위에 오르기도 했다. 축배를 들기에 이르지 않냐고? 모르는 소리다. 영국의 극장 관계자들은 2008년 남은 3개월 역시 장밋빛으로 내다본다. 액션블록버스터 <007 퀀텀 오브 솔러스>부터 <다시 찾은 브라이스헤드> <고스트 타운> <햄릿2> 등 영국 출신 배우들의 출연작들이 줄줄이 개봉대기 중이기 때문. 여기에 <체인질링> <바디 오브 라이즈> <슬럼독 밀리어네어> 등 시상식을 겨냥한 유명 감독들의 신작들도 세모까지 극장의 관객몰이에 한몫할 전망이라 하반기 극장가가 여름의 기세를 몰아갈지 관심이 주목된다.

[가가와 데루유키] 배우가 되기 전에 진짜 히키코모리였다

10년차 히키코모리(집안에만 틀어박힌 은둔자)의 일상은 평화롭다. 텔레비전은 보지 않고 잡지를 읽는다. 식사는 테이블에서 하지 않고 서서 먹는다. 집 안은 남자 혼자 산다고 말하면 안 믿을 정도로 깨끗하게 잘 정리정돈되어 있다. 필요한 물건은 전화 한통이면 다 배달된다. 게다가 토요일마다 시켜 먹는 피자는 삶의 또 다른 낙. 그런 그 앞에 여자 피자배달원(아오이 유우)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는 영원히 히키코모리로 살아갔을지도 모른다.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어 11년 만에 집 밖으로 뛰쳐나오는 주인공 히키코모리를 연기한 배우는 가가와 데루유키. 그는 최근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유레루> <키사라기> <20세기 소년>에서 개성 넘치는 역할을 맡아 바쁘게 활동하고 있다. 평소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을 좋아했다는 그는 유키사다 이사오 감독(<오늘의 사건사고>)의 소개로 봉준호 감독을 처음 만나게 됐고, 감독의 신작 <도쿄!>에 참여하게 된 것. 서민적인 이미지로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하는 그가 한국의 봉준호 감독을 만나 어떤 연기를 선보일까. 이번이 세 번째 한국 방문이라는 가가와 데루유키를 만났다. -(몸으로 보여주며) 당신의 전작들을 보면 ‘종종걸음’을 하는 장면이 많더라. 습관인가. =(웃음) 전부 다 연기다. 처음 캐릭터를 맡을 때 그 인물에 대해 잘 몰라도 ‘이 사람은 이렇게 걸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게 행동을 한 건데 비슷하다니 신기하다. -<도쿄!> 시나리오를 받고 캐릭터 구축을 위해 가장 먼저 한 것은 무엇인가. =두 가지가 있다. 먼저 ‘달리는 모습’을 고민했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초반에는 정적이지만 후반에는 역동적으로 변한다. 그때, 달리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두 번째는 영화 속 히키코모리가 1~2년차가 아닌 10년차다. 그래서 봉준호 감독과 함께 ‘10년차 히키코모리는 방도 깨끗하고, 오히려 더 일상적일 것이다’라는 이야기를 나눴다. 그래서 인물이 히키코모리로 보이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현장에서 감독과 이견이 생길 경우 어떤 식으로 조율했나. 그리고 어떤 장면에서 가장 많이 부딪혔나. =일단 나는 레벨이 높은 감독과 일을 할 때는 감독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는 편이다. 그래서 이번에 봉준호 감독과 작업할 때는 그로부터 연기 레슨을 받는 기분이었다. 가장 의견이 달랐던 부분은 히키코모리가 11년 만에 처음으로 집 밖으로 나와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방황하는 장면이었다. 그 장면에서 나는 인물의 행동이 순간마다 이유가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반면 봉준호 감독은 그냥 자연스럽게 다큐멘터리적인 느낌을 원했다. -영화 속 당신의 연기는 감정의 폭이 작다. 대신 근육, 눈 등 신체의 아주 작은 움직임만으로 표현하는 점이 인상적이다. =나는 배우가 되기 전에 히키코모리였다. 물론 지금도 히키코모리처럼 산다. 정말 내성적이다. 그나마 배우가 되면서 몸으로 감정들을 표현하는 방법들을 익히게 된 것이다. 40년 동안 지금까지 히키코모리로 살아왔던 경험이 이번 영화의 캐릭터에 축약된 것 같다. -이번 영화를 비롯한 전작의 당신의 모습을 보면 상대배우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않는다. =일본의 국민성인데, 오히려 쳐다보지 않는 편이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감독이 “상대배우를 똑바로 쳐다봐! 시선이 맞지 않잖아”라고 하지 않나. 한국에서는 시선처리 때문에 NG가 나는 경우가 많다. =일본 감독들도 눈을 쳐다보지 않는 것을 자연스럽게 생각하는지 별다른 지시를 내리지 않는다. -그동안 남자배우들과 작업을 하다가 청춘스타 아오이 유우와 호흡을 맞췄다. 그녀와 함께 일을 해보니 어떻던가. ‘인간 가가와 데루유키’의 답변을 듣고 싶다. =(웃음) 감사했다. 유키사다 이사오 감독(<고>(2001), <오늘의 사건사고>(2003))이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최근 일본영화의 흐름상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가가와 데루유키와 아오이 유우의 조합이 이제는 충분히 가능할 것 같다.” 하지만 일본 감독들은 아직 ‘나와 아오이 유우’식의 조합을 해내지 못했다. 이번에 봉준호 감독이 이런 조합도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셈이다. -개인적으로 전작을 통틀어 <유레루>의 초반부 방문을 사이에 두고 오다기리 조와 대화하는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그때 카메라는 빨래를 개는 당신의 뒷모습만 바라보는데, 당신은 대사만으로 두 사람의 심리, 인물의 캐릭터 등 모든 정보를 한번에 보여주더라. =당시 감독이 뒷모습으로만 보여주자고 했다. 오히려 그러는 편이 사람이 거짓말을 하는 순간을 잘 포착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 장면을 찍기 전에 오다기리 조와 단둘이서 배우의 태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던 기억이 난다. 그때 그는 ‘배우라는 직업이 뭐가 대단한가. 그냥 어른이 애들 놀이를 하는 거잖아. 그런데도 배우들은 잘난 척하고 다닌다. 이게 다 거짓이다. 우리도 거짓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런 대화를 그와 공유하면서 서로 믿음을 쌓았던 것이 그 장면이 나오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한다. -차기작은 무엇인가. =<20세기 소년> 3부를 촬영할 계획이다. 그리고 얼마 전에 촬영이 끝난 작품이 있다. <쓰루기다케>라는 제목으로 101년 전 ‘칼’(쓰루기) 모양의 산에 최초로 올랐던 한 남자의 이야기다. 나와 아사노 다다노부가 주연을 맡았고, 다카쿠라 겐 감독의 촬영감독으로 유명한 기무라 다이사쿠가 68살의 뒤늦은 나이에 감독으로 입봉한다. 2009년에 개봉할 예정이다.

노희경-표민수-송혜교-현빈 <그들이 사는 세상> 드림팀 출격!

지난 20일 서울의 한 호텔에서 KBS-2TV 새 월화미니시리즈 <그들이 사는 세상>의 제작발표회가 열렸다. 노희경 극본, 표민수 연출, 송혜교, 현빈 주연. 그 이름만 들어도 입이 딱 벌어지는 <그들이 사는 세상>의 드림팀이 드디어 출격의 신호탄을 터뜨린 것. <그들이 사는 세상>은 한 편의 텔레비전 드라마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남녀 PD 주준영(송혜교 분)과 정지오(현빈 분)를 중심으로 제작 현장에서 땀 흘리는 스태프들의 이야기를 리얼하게 담고있는 드라마이다. 더불어 화려함 속에 인간애를 갈망하는, 단조로운 인간관계보다 더욱 복잡한 현대인들의 이야기를 담는다는 것이 제작진이 설명하는 기획의도. 이날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노희경 작가는 "그동안 내가 썼던 드라마와는 다르게 젊은 배우들에게 의존하는 작품이 될 것이다. 가족 드라마나 진지한 멜로는 많이 해봤는데 이렇게 신나고 즐거운 드라마는 처음인 것 같다"며 유쾌한 작품 분위기를 전했고, 방송국 PD 주준영 역할의 송혜교는 "노희경 작가와 표민수PD의 작품이기에 안할 이유가 없었다. 시놉시스만 받고 이미 결정했다"며 제작진에 대한 깊은 신뢰감을 드러냈다. 현빈 역시 "좋은 감독님, 작가님, 그리고 선후배 동료배우가 있어 든든하다"며 동조했다. 또, 연출자인 표민수PD는 두 배우의 연기에 대해 "이젠 연출자로 데뷔해도 될 정도"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한편, <그들이 사는 세상>은 지난 21일 스페셜 방송을 시작으로 오는 27일부터 매주 월, 화요일 KBS-2TV를 통해 안방극장을 사로잡을 계획이다.

대니얼 크레이그 "제임스 본드 계보 이었다"

(서울=연합뉴스) 김지연 기자 = 영화 007 시리즈 21~22편에서 제임스 본드 역을 맡은 영국 배우 대니얼 크레이그(40)는 자신이 "본드 변천사에 보탬이 됐다"고 자평했다. 내달 5일 007 22편 '007 퀀텀 오브 솔러스(Quantum Of Solace)' 개봉을 앞두고 있는 크레이그는 최근 여성지 엘르와의 인터뷰에서 "영원히 본드 역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면서도 "본드가 어떻게 변해왔는지 보여주는 계보에 내가 무언가를 추가했다고 생각하고 싶다"고 말했다. 숀 코너리(78), 조지 레전비(69), 로저 무어(81), 티모시 달튼(62), 피어스 브로스넌(55)의 뒤를 이은 6대 본드 크레이그는 최초의 금발머리 본드로도 화제를 모았다. 2006년 007 21편 '007 카지노 로열'에서 본드 역을 처음 맡아 배우 생활의 황금기를 맞은 그는 올해 6월 '007 퀀텀 오브 솔러스' 촬영을 하다가 얼굴을 크게 다쳐 성형수술을 하기도 했다. 그는 "다른 배우에게 실수로 걷어차여 얼굴 상처에 여덟 바늘이나 꿰매야 했다"면서 "의료진이 훌륭한 성형수술을 해줬다"고 설명했다. 그는 최근에는 역시 촬영에 따른 어깨 부상으로 수술을 받고 공식행사에 보호대를 착용하고 등장하기도 했다. 크레이그는 M 역을 맡은 영국 중견배우 주디 덴치를 "영국 영화계의 우두머리"라고 표현하며 극찬했다. 그는 "덴치에게는 선천적인 힘이 있다"며 "본드는 '이봐, 007, 너는 바보야'라는 말을 해줄 수 있는 M과 같은 여성을 필요로 한다"고 강조했다. 크레이그는 또 본드와 M 캐릭터를 미국 대선 후보들과 비교하기도 했다. 그는 퍼레이드지와의 인터뷰에서는 "버락 오바마 후보가 그의 말대로라면 적을 직시하고 정면으로 맞서려고 한다는 점에서 본드와 비슷하며, 존 매케인 후보는 M 캐릭터에 더 가까운 것 같다"고 분석했다. '007 퀀텀 오브 솔러스'는 마크 포스터 감독이 전편 '007 카지노 로얄'의 마틴 캠벨 감독으로부터 메가폰을 넘겨 받았다. 이번 22편의 아이디어는 이언 플레밍의 원작에서 뽑은 것이 아니라 제작자인 마이클 윌슨이 구상한 내용을 토대로 폴 해기스, 닐 퍼비스, 로버트 웨이드가 각본을 맡았다. 새 본드걸로는 우크라이나 여배우 올가 쿠릴렌코가 캐스팅됐다. 줄거리는 본드가 거대한 천연자원을 장악하려는 무자비한 사업가와 그의 비밀 첩보원인 본드걸의 음모에 맞서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남아메리카 등지를 오가며 활약하는 내용. 007의 고향인 영국을 비롯한 영미권에서는 이번 영화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BBC 방송의 연예전문기자 리조 음짐바는 "더 좋아졌지만 규모가 더 커지지는 않았다"고 평가했고, 데일리 텔레그래프의 마크 모나한은 "포스터 감독과 작가들이 007의 전통적인 구성과 동떨어진 작품을 내놨을까 우려했지만 영화는 갑작스러운 놀라움을 여러 차례 안긴다'고 평했다. 더 타임스의 제임스 크리스토퍼도 "포스터 감독은 페이스 조절을 잘했다"고 평했다. 그러나 가디언의 피터 브래드쇼는 "대화와 캐릭터 구현이 미흡해 실망스러웠다"고 평가했으며 블룸버그통신은 "전편보다 많은 국가에서 촬영했고 추격신 같은 적절한 재료도 갖췄지만 훌륭한 이야기라는 마법이 사라졌다"고 지적했다. cherora@yna.co.kr (끝) <연합뉴스 긴급속보를 SMS로! SKT 사용자는 무료 체험!>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전영객잔] 우리도 양미숙과 놀고 싶다

2008년 하반기 한국영화계의 주목할 만한 데뷔작으로 이경미의 <미쓰 홍당무>를 꼽는 추세다. 호평은 이어지며 이론(異論)은 찾아보기 힘들다. 몇몇 평자는 이 영화의 결함을 지적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단서를 단 뒤 다시 가치의 복권을 위해 애쓰는 편이다. <미쓰 홍당무>는 사실 기발한 인물의 출현 자체보다는 인물과 그 역을 맡은 배우의 조화가 돋보이는 영화다. 그렇지 않고 시나리오상에서 성립된 캐릭터만 두고 말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오래전에 이미 <엽기적인 그녀>가 있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게다가 양미숙 정도의 캐릭터 설정은 매일 밤 텔레비전 앞에만 앉으면 볼 수 있는 시트콤 드라마에서도 있어왔다. 간단하게 김병욱의 시트콤에 출연한 배우 박영규의 역할을 상기하면 된다(그는 양미숙에 버금가는 자뻑과 진상과 콤플렉스의 캐릭터이며 그 누구도 따라잡지 못할 만큼 변덕이 죽끓고 화를 자주 내서 같이 있기 불편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미쓰 홍당무>에 공감할 만한 점이 한 가지 있다면 공효진이라는 본능적으로 뛰어난 배우가 양미숙이라는 기발한 인물에 놀랄 만한 생명력을 불어넣은 것이다. 이경미는 그 대신 단편 <잘돼가? 무엇이든>에 얼마간 깃들어 있던 자기의 중요한 무엇을 잃고 새 출발한 것처럼 보인다. <잘돼가? 무엇이든>은 기이한 영화였다. 거기에는 질문이 있었다. 그 질문을 영화의 형식을 빌려 시도하고 있었다. 칼을 품고 있던 나를 누군가가 툭 치고 지나가서 내가 다친 것이라면 그건 어설프게 칼을 품고 있던 나의 잘못인가 나를 쳐서 다치게 한 그 누구의 잘못인가. <잘돼가? 무엇이든>의 꿈장면에서 제기되었던 화두다. 이 영화에서 이경미는 두 여성의 아이러니한 경쟁심과 연대감을 끌어내 질문을 던지고 답을 구하려고 애썼다. 어떤 답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거기에 영화적인 간절함이 있었다는 게 중요하다. 그런데 즉각적인 인상으로 말하자면 이경미의 장편 데뷔작 <미쓰 홍당무>에는 그 간절함을 지키려는 의지가 보이지 않으며 어떻게든 웃음을 유발하기 위한 구조를 진전시키는 데 더 급급하다. 간절함의 부재가 뭔가 영화 전체를 의미심장한 코미디가 아니라 시끌벅적한 단순 소동극으로 그치게 하고 있다. 그럼에도 <미쓰 홍당무>의 공감대는 대략 세 가지 점에서 형성된다. 장르영화 안에서 여성들의 심리와 담화를 잘 풀어냈다는 점과 돌발적이고 유별난 캐릭터 양미숙이 있다는 점과 그녀를 포함한 다른 인물이 연합하여 폭발적인 웃음을 끌어내는 코미디라는 점이다. 이때 여성성의 문제는 따로 떼어 말할 수 있지만, 캐릭터는 코미디라는 범주 안에 있는 핵심이기 때문에 둘은 함께 말해져야 할 것이다. 그녀는 과연 여성성을 대변하는가 먼저 이 영화가 여성성의 무엇인가를 획기적으로 대변한다고 인식되는 건 무척 모호한 구석이 있다. 다른 어떤 분석에 앞서 이 영화의 서사를 생각해보면 된다. 고등학교에서 러시아어를 가르치던 양미숙은 좌천되어 중학교 영어 교사로 내려간다. 그녀가 학생에게도 선생에게도 인기가 없는 왕따이기 때문이다. 외양이 그다지 호감을 주는 편이 아닌데다 자기의 콤플렉스를 공격적이고 비꼬인 방식으로 내지르는 성격이다. 또 그만큼 위축됐기도 하다. 그런 그녀가 서종철을 좋아한다. 서종철은 양미숙의 고3 당시 선생이었다. 수학여행 때 반 아이들 모두가 양미숙을 따돌릴 때 오직 서 선생만이 자기의 이름을 불러주었다. 그 뒤로 양미숙은 서 선생을 좋아하게 됐고, 같은 학교로 부임한 다음에는 계속 그를 짝사랑한다. 하지만 서 선생은 관심이 없고 양미숙만 그렇다. 양미숙은 같은 러시아어과 선생이었던 이유리가 서 선생과 내연의 관계라는 걸 알게 되자 중학교에 다니는 서 선생의 당돌한 딸 서종희와 한팀이 돼서 둘을 갈라놓으려고 한다. 이것이 <미쓰 홍당무>의 대강의 스토리 라인이다. 그런데 한 가지 이 영화에는 없는 황당한 가설을 제안해보자. 만약 양미숙이 일하는 학교 옆에 남학생들만 다니는 중·고등학교가 있다고 치자. 러시아어를 가르치는 남자 선생 양미석이 있다고 치자. 그는 왕따다. 학생도 선생도 모두 그를 꺼린다. 그가 고등학교 3학년 수학여행 때 반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할 때 미모의 여자선생님이 그를 챙겨주었다. 그 뒤로 양미석은 그 미모의 선생님을 사랑하게 됐고 같은 학교에 선생으로 부임한 뒤에도 계속 사랑하고 있다. 하지만 이 여선생은 동료 젊은 남자 선생과 바람을 피우는 중이다. 양미석은 그 둘을 떼놓고 싶어하고, 마침 이 학교에 다니는 그 여선생의 아들과 함께 방해공작을 펼치기로 한다. 사람이 비상식적인 예를 들 때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미쓰 홍당무>의 여성성을 설명하는데 왜 이런 황당한 치환이 필요하겠는가. 여성주인공을 남성주인공으로 치환하는 이 설명이 가당키나 한 것인가. 무엇보다 이 가설의 가장 큰 걸림돌은 감성의 디테일 문제에 있을 것이다. 여성적 감성의 디테일이 남성적 감성의 디테일로 결코 변환되지 못할 것이라는 데 있다. 그건 구조로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물론 이 문제는 <미쓰 홍당무>에 여성성에 대한 화두나 담화가 충분히 있다는 가정하에서만 그러하다. 그런데 <미쓰 홍당무>에 그와 같은 여성적 감성의 디테일에 대한 탐구가 정말 있는가. 이 영화의 수다나 담화를 여성 심리의 전유물로 볼 수 있지만, 양미숙과 서종희 사이에 오가는 몇몇 대화란 특별할 게 없으며 그걸 여성성의 화두에 걸맞게 더 깊이 파내려가지도 않는다. 나는 지금 양미숙과 서종희가 여성 짝패로서 어떤 여성성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걸 남성 짝패로 바꾸어도 이 영화가 거의 손실을 입지 않음을 말하는 중이다. <미쓰 홍당무>는 여성적 감성의 디테일과 그걸 보장할 만한 요소를 그다지 중요하게 강조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한번 시작된 이야기는 끝없이 반전을 거듭하면서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그때 이 영화는 감성의 디테일이 아니라 대사가 꼬이고 인물이 폭발하고 신이 서로 부딪치는 코미디 구조에 더 천착한다. <미쓰 홍당무>가 그 구조를 빌려 제기하는 문제라면 성차에 관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우리’와 ‘쟤들’이라는 이분 범주의 문제다. 이 문제는 다시 말해져야 할 것이다. 이 영화가 강력한 코미디라고 할 때 캐릭터가 핵심이자 요체인 건 분명하다. 양미숙이 중심이다. 그리고 양미숙이 주로 하는 짓은 알려진 것처럼 삽질이며 양미숙의 삽질이 양미숙의 캐릭터다. 양미숙은 히키코모리가 아니다. 히키코모리에 대한 역설이다. 누군가가 양미숙처럼 수세적일 만한 상황에 놓일 경우 집 안으로 숨어 들어가버리는 대신 그걸 공격적으로 드러낸다면 얼마나 재미있게 보일까라는 상상이 이 영화의 애초 전략 중 하나였을 것이다. 양미숙은 그 상상으로 태어난 인물이며 당연히 그에 따른 실천을 한다. “세상이 공평할 거란 기대는 버려. 우리는 남들보다 더 열심히 살아야 해”라거나, “종희야 너 착하게 살지 마라. 그럼 사람들이 너한테 못되게 군다. 못되게 굴면 착하게 군다”라고 일장 연설을 한다. 또는 양미숙의 휴대폰에는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고 쓰여 있다. 무엇보다 그 제어되지 않는 비뚤어짐으로 무한 삽질을 하는 것이 우리가 말하는 양미숙의 흥미로운 캐릭터다. 억지로 들어와서 노는 언어의 유희들 그런데 <미쓰 홍당무>가 캐릭터 영화로서 성공적이고, 그 캐릭터가 바로 양미숙이라고 할 때 잘 지적되지 않는 이 영화의 매우 중요한 전개 방식이 한 가지 있다. 그리고 그것이 <미쓰 홍당무>의 구조적 전개를 말할 때 거의 모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양미숙만 삽질하는 게 아니고 등장인물 전부 삽질한다. 그러니까 그 삽질의 정체가 무엇인가 묻는 건 당연하다. 삽질은 착각하는 상황, 착란으로 생기는 믿음에 대한 일종의 은어에 불과할 것이다. 중요한 건 이 영화의 모든 코미디의 동력을 끌어가는 것이 바로 이 착각과 착란이라는 점이다. 착각과 착란이 <미쓰 홍당무>의 코미디를 만드는 기술적인 모든 것이다. 무수히 많은 예가 있지만 몇 가지만 들어보자. 우선 청각적인 착각 기호. 첫 장면에서 우리는 양미숙이 분명 정신 상담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알고 보면 피부과 의사를 붙들고 하소연을 하는 중이다. 또는 시각적 착각 기호. 우선 양미숙이 지금 엉뚱한 짓을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을 영화는 실제로 양미숙이 땅을 파고 있는 장면으로 시각화한다. 혹은 영화에서 양미숙과 서종희가 힘을 합쳐 이유리를 놀려먹을 때 그들이 사용하는 것은 주로 메신저와 전화 문자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이 시각적 도구를 통해 이들은 잘못된 정보와 기호를 이유리에게 전달하고 사건은 계속 이어진다. 또는 음성적 착각 기호도 있다. 서종휘는 이유리를 협박하기 위해 전화를 거는데 그때 이 아이의 목소리는 음성 변조되어 있다. 이런저런 것들이 많지만, 가장 중요하게 웃음의 코드로 유용하게 쓰이는 건 라이터의 러시아 말인 ‘좌지깔까’다. 양미숙과 서종희는 마치 서종철이 러시아어로 라이터(좌지깔까)라고 말해달라고 한 것처럼 이유리를 속인다. 극장에서 관객이 가장 많이 웃는 지점이다. 누가 봐도 “당신은 나의 라이터” 운운하는 이 부분은 좀 억지스럽다. 이 영화는 언어의 유희에 남다른 재능을 갖는데 이 순간만큼은 유치하게도 기어코 어울리지 않는 낱말을 가져온 것이 이상하다. 그건 라이터가 필요했던 게 아니라 무리한 흐름을 인정하면서라도 좌지깔까라는 말을 꼭 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이 영화에는 뭔가 착각과 착란을 위해 억지로 들어와 있는 것들이 있다. 사실 착각과 착란은 양미숙의 모든 것이다. 양미숙은 실은 아무 일도 없었음에도 “제제제작년 고깃집에서의 회식 뒤에 티코에서 있었던 일” 운운하며 혼자 서종철과의 관계를 착각하고 있다. 그때 서종철 선생은 술에 취했고 어쩌다 좁은 티코에서 잠깐 손이 양미숙의 귓불을 스친 것뿐이지만 양미숙은 그게 서로의 사랑의 밀어였던 것처럼 진심으로 생각한다. 말하자면 이건 이 영화의 중심에 있는 심리적 착각 기호인 셈이다. 그리고 양미숙과 서종희는 공연장에서 아이들이 던지는 밀가루와 쓰레기 등을 애써 자기들을 위한 환호로 착각해서 해석하기도 한다. 이 모든 착각의 기호를 날려버리는 것은 어학실 장면이다. <미쓰 홍당무>는 이 장면에서만 거의 20분을 쏟으며, 그동안 이리저리 꼬아놓았던 착각과 착란의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것으로 설정한다. 감독 이경미는 <미쓰 홍당무>에 관한 어느 인터뷰에서 이 영화가 찰리 채플린과 어떤 영향관계가 있음을 말한다. 그녀가 어떤 의미에서 찰리 채플린을 거론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일면 닿는 점이 없진 않다. 채플린이 바로 착각과 착란의 대가다. 예컨대 그의 어느 영화에서 찰리는 아내에게 버림받는다. 카메라는 그때 찰리의 등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아내를 잃은 슬픔에 가득 차 우는 것 같다.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는 것 같다. 하지만 그가 뒤돌아섰을 때 진실이 밝혀진다. 찰리는 그냥 칵테일을 흔들고 있을 뿐이다! 이건 아주 단순한 예다. 채플린은 이 문제를 더 중요한 쪽으로 끌고 간다. <시티 라이트>에서 장님 소녀가 갑부 찰리와 떠돌이 찰리를 소리의 착각 기호로 오인하고 또 구별했던 순간이 있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무엇보다 <위대한 독재자>에서 유대인 이발사 찰리와 히틀러를 빗댄 독재자 찰리를 사람들은 그 콧수염 하나 때문에 착각했다. 들뢰즈는 “작은 유대인 이발사와 독재자의 차이는 두 개의 콧수염만큼이나 작은 것이다. 그럼에도 그로부터 엄청난 거리를 지닌 두 가지 상황이 생겨나는데 그 둘은 희생자와 도살자의 차이만큼이나 서로 다르다”고 지적했다. 그 차이란 전체주의와 민주주의의 차이로 발전한다. 하지만 내 생각에 이경미가 찰리 채플린의 이런 면모를 염두에 두었던 것 같지는 않다. 뿌리는 다른 곳에 있다. 이경미가 거론하지 않았지만 <미쓰 홍당무>의 구조와 유사한 건 채플린의 영화가 아니라 박찬욱의 영화다. 한국영화에서 착각과 착란으로 영화의 묘미를 만들어내는 대가는 박찬욱이다. 어딘지 모르게 <미쓰 홍당무>를 보고 제작자 박찬욱의 영향력을 말하는 게 다들 상투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그걸 말하지 않는 게 더 상투적이다(박찬욱은 이 영화의 공동 각본가로도 크레딧에 올라 있다). 박찬욱은 고래와 진달래를 같다고 생각할 때 영화 속 세계가 재미있어진다고 본다. 그것만으로 테마를 꾸려 만든 것이 바로 <싸이보그지만 괜찮아>가 아니었나. 그 밖에도 유사성은 더 있다. <미쓰 홍당무>의 초반부 인물 소개방식과 특히 ‘대단원의 무대화’라는 개념이 그렇다. 둘 중에서도 대단원의 무대로서 쓰이는 어학실신이 특히 그렇다. 이 영화는 어느 모로 보나 박찬욱적인 요소들을 고스란히 가져왔으며, 이때 <미쓰 홍당무>는 박찬욱 영화에 대한 충실한 습작에 가까워진다. 무엇보다 ‘착각과 착란을 따라가다 마주친 판단의 유보’라는 박찬욱의 엔딩방식을 이경미는 거스르지 않고 있다. 어학실에서 양미숙은“사모님 2번 새 출발로 하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이제 서종철에게서 손을 떼겠다고 선언하는데, 그렇다면 이때 모든 문제는 다 해결된 것일까? “괜찮아 괜찮아 착각해도 괜찮아" <미쓰 홍당무>가 양미숙의 아픔을 치유한 사이코드라마로 이해되고 있는데 내 생각은 다르다. 물론 양미숙이 치유됐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때 미궁에 남겨지는 것은 영화를 보는 우리다. 이 문제는 만듦새와 상관없이 영화 스스로 짜낸 치유의 구조가 마침내 어떻게 마무리되는가와 깊은 연관을 맺는다. 우리는 여전히 그녀 양미숙에 관해 알고 있는 사항이 별로 많지 않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뭔가 이해했다고 생각하게 된다면 그건 당신의 착각이고 착란이다. 우리는 정말 양미숙을 이해했는가? 이경미가 자기의 주인공 양미숙을 소홀히 다뤘다는 뜻이 아니다. 이경미가 양미숙이 처한 상황인 왕따 현상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한다는 뜻도 아니다. 이 영화가 양미숙을 돌보지 않았다는 그런 윤리적 비판을 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 윤리적 비판을 지금 하지 못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이 영화는 이분의 선택을 강요한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와 쟤들의 명확한 구분이 있다. 우리는 서종희를 따돌린 다음 커다랗고 우스꽝스러운 리본을 목에 매고 바보 같은 춤을 추는 학생들처럼 쟤들 중 한명일 가능성이 더 크다. 양미숙과 서종희가 우리의 모습 일부인가. 아니 그건 판타지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건 해몽의 삽질이다. 양미숙과 서종희에 공감할 만한 사람들은 이 영화를 보고 결코 웃지 못한다. 그들이 못 웃기 때문에 우리가 웃는다. 우리가 이때 실컷 웃고 나서도 할 수 있는 비판 한 가지가 있기는 하다. 이경미 당신은 왕따를 윤리적으로 돌보지 않았어, 왜냐하면 그 소재로 우리를 웃겼기 때문이지, 당신은 양미숙을 웃음거리로 만들었어, 그건 너무 비윤리적이야, 라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비판이 비평적 클리셰이며 뻔한 불평이라고 본다(물론 이 비평적 클리셰조차 지금으로서는 거의 아무도 제기하지 않지만…). 왜냐하면 양미숙을 접할 때의 웃음은 재난영화와 공포영화의 괴물을 볼 때의 심리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저 괴물이 나의 안방을 넘어 나의 신체를 뚫고 들어오지는 못하리라. 저 찰거머리 같은 인간이 나의 동료, 나의 스토커는 되지 않을 것이다. 바로 이런 것이다. 그 때문에 이 영화가 사악하다고 말하는 건 너무 뻔한 불평이다. 우리는 장르영화 속 괴물을 보고 나서 저 괴물을 저렇게 다루어서는 안 된다며 윤리적인 고민을 하지는 않는다. 이 문제의 핵심은 그러므로 이경미가 왕따를 우습게 그린 것이 아니다. 충분히 상상적인 지평 내에서 기발한 방법으로 그려냈기 때문에 우리는 일단 그걸 인정할 수 있다. 문제는 이경미가 마침내 우리를 향해 너희들은 끝까지 이 왕따를 잘 모를 거야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양미숙은 서종희를 데리고 피부과 의사 박찬욱을 찾아간다. 그를 찾아가 “난 네가 참 마음에 든다” 고 말한다. 서종희의 엄마 아빠, 그러니까 서종철과 성은교가 그 말 한마디로 사랑하는 사이가 됐다는 걸 양미숙은 들어 알고 있다. 양미숙은 지금 의사 박찬욱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중이다. 의사 박찬욱이 그걸 받아들일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양미숙은 그가 그걸 받아들이거나 말거나 관심사가 아니다. 자기의 심정을 당당하게 고백하면 된다. 물론 이제 양미숙은 자신있게 말한 다음 퇴짜를 맞을 수도 있다. 의사 박찬욱의 표정을 보명 백발백중 퇴짜를 놓을 것도 같다. 그렇다면 양미숙은 이제 그래 알았다며 뒤돌아 나올 것인가. 이 장면의 표면적인 의미는 양미숙이 이제 새 출발을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이 마지막 장면이 바라는 바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 이후 양미숙이 어떻게 행동하느냐는 영화적으로 가늠할 수 없는 상태다. 내게는 양미숙이 박찬욱을 찾아낸 다음 거기서 자기의 할 말을 하고 그냥 멈추는 것으로 짜여진 이 영화적 설정이 더 중요해 보인다. 이 때 마지막 웃음을 바라는 이경미의 바람이 확실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삽질의 이유가 아니라 삽질 자체가 중요한 영화입니다, 라고 끝까지 말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다름 아니라 양미숙의 마지막 삽질에서 끝나는 것이다. 이건 삽질이 아니라 새로운 사랑 고백이라고? 아니 그렇지 않다. 양미숙은 몰라도 우리는 의사 박찬욱이 그녀를 피해 도망갔음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양미숙에게는 사랑고백이지만 우리에게는 그녀의 삽질이다. 이 장면은 이 영화에 담긴 많은 행위를 대표하는 환유로 보인다. 서종희라는 친구가 생겼고 새 출발을 한다는 뜻은 표면적으로만 중요할 뿐이다. 이 영화의 욕망은 어쩌다 슬프게 삽질하게 된 양미숙이 아니라 끝까지 귀엽게 삽질하는 양미숙이라는 점에 있기 때문이다. 양미숙은 삽질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때문에 우리의 혼란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서종철을 쫓아다닌 것에도, 혹은 그 밖의 모든 행위에도 정말 이유가 있기는 했던 걸까? 인물 양미숙에게 이유가 있었다면 감독 이경미에게도 이유가 있었을까? 이 영화가 우리에게 설명한 양미숙에 관한 모든 것에 딱히 다 이유가 있기는 한 걸까? 양미숙은 내 생각에 이 영화에서 끝까지 미지의 인물로 남는다. 다만 이런 메아리는 남는다. 괜찮아 괜찮아 홍당무지만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삽질해도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착각해도 괜찮아. 오로지 이게 이 영화의 전갈이다. 나는 이 점이 허망하다. 양미숙이 고아였고, 왕따였고, 가난했기 때문에 저러는 것이라고 이해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판단이 유보되고 무효화될 때 그동안의 삽질의 우스꽝스러움은 원인을 상실하고 그 치유성 바깥에 놓이게 된다. 그렇다면 그동안 놀림을 받은 건 양미숙이 아니라 삽질의 이유를 모르고, 삽질을 위한 삽질(농담을 위한 농담)을 하는 양미숙을 보며 시간을 허비한 우리가 아닌가. 양미숙이 아니라 시간을 허비한 우리가 왕따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게 이 영화의 허망함이다. 한편으로는 비하하면서(비윤리적이라는 지탄을 감내하면서까지), 한편으로는 이해하면서(윤리적이려고 애쓰면서까지) 우리는 웃음 속에 이 영화를 따라왔지만, 만약 비하한 것도 아니고 이해한 것도 아닌 채로 도대체 아무것도 모르면서 우리가 판단을 잃고 말았다면, 우리의 그 웃음은 시트콤 드라마를 보고 나서 채널을 돌리는 그것과 도대체 무엇이 다른가.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 2시간짜리 시트콤을 극장에 앉아서 보고 환호를 보내야 하는가. 이상하게도 올해 한국영화가 발견한 귀중한 신예라고 하는 두 남녀 감독 <추격자>의 나홍진과 이경미의 <미쓰 홍당무>는 전혀 다른 장르에서 유사한 주인공에 대한 매혹을 갖고 있다. 둘 모두 주인공이 설명되지 않는 괴인이어야 하는 것에 대한 집착을 보인다. 나홍진과 이경미는 둘 다 콤플렉스 덩어리 인물을 내세운 다음 그 원인을 굳이 들여다볼 필요가 없다고 말하거나 그 행동만을 거듭 보여준 뒤, 그 인물로부터 우리를 차단하고 판단을 유폐한다. 즉, 장르적 규칙성 안에서 어떻게 그걸 두려움(<추격자>) 또는 웃음(<미쓰 홍당무>)으로 받아들이게 할 것인가의 기술적 문제에만 오로지 집중한다. 그러므로 이 때 더 시급한 문제는 윤리의 공란이 아니라 그걸 동반하고 찾아오는 형식의 무기력이다. 이 무기력한 웃음의 상영시간을 즐긴 다음 환호하는 건 그래서 아무래도 억울하다. 이경미는 양미숙과 같은 편을 먹고 ‘우리’라고 정한 다음, 끝까지 영화를 보는 우리는 ‘쟤들’로 남겨둔다. 우리도 양미숙과 놀고 싶다. 양미숙, 넌 누구냐.

[듀나의 배우스케치] 박신양

전 <파리의 연인>도 안 봤고 <쩐의 전쟁>도 안 봤습니다. 다시 말해 박신양이라는 스타의 경력을 제대로 평가할 입장이 아니라는 거죠. 저에게 박신양은 <범죄의 재구성>이나 <4인용 식탁>과 같은 영화에 출연한 장르 전문배우입니다. 그리고 이런 영화들에서 그가 보여준 연기에 대해서는 아무런 불만이 없어요. 좀더 인기있는 <편지>나 <약속>은 단 한번도 진지하게 자리를 잡고 본 적이 없으니 뭐라고는 못하겠고. 아무래도 전 박신양을 멜로드라마 배우로 본 적이 없나 봅니다. 적어도 그가 선택하는 멜로영화들이 제 취향이 아닌 것이겠죠. <바람의 화원>을 보기 시작했을 때 전 이런 선입견을 갖지 않고 그의 연기를 보는 게 오히려 더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영화와는 달리 텔레비전 시리즈는 혼자 보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선입견을 갖지 않으려 해도 사방에서 온갖 소리들이 들려옵니다. 게다가 거의 완벽하게 신윤복 캐릭터에 적응한 문근영과는 달리 비판도 셉니다. 지금도 전 <베토벤 바이러스>의 김명민과 비교해 그와 송일국을 까는 인터넷 기사를 읽고 있는 중이죠. 그래도 전 궁금해집니다. 과연 <바람의 화원>에서 보여주는 박신양의 연기는 <쩐의 전쟁>이나 <파리의 연인>을 보고 나서 볼 때와 보지 않고 볼 때가 다른가? 다르면 얼마나 다른 거지? <바람의 화원>에서 그가 보여주는 김홍도 연기에 걸리는 구석이 전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그는 정통사극의 테크닉을 보여줄 때 많이 약합니다. 드라마의 김홍도는 이미 궁중생활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베테랑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왕 앞에서나 다른 신하들 앞에서 서툴기 그지없어요. 일부러 규율 파괴적인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어떤 식으로 말하고 행동해야 할지 확신이 서 있지 않은 것입니다. 정조 역을 하는 배수빈과 비교해보면 차이는 더 분명해집니다. 경험문제가 아닌가 생각해요. 사극이란 그냥 아무렇게나 시작해도 되는 게 아니죠. 하지만 그의 다른 연기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립니다. 저는 그가 일상적인 현대극의 대사로 사극을 하는 게 뭐가 그렇게 문제인지 모르겠어요. 어차피 우리는 18세기 조선 사람들이 어떻게 말하고 행동했는지 아는 바가 없으며 당시의 언어와 동작을 그대로 재현할 수도 없습니다. 그걸 고려한다면 배수빈의 좀더 정통적인 왕 연기나 박신양의 김홍도 연기는 큰 차이가 없어요. 여전히 궁중장면은 거슬리지만 그가 문근영과 함께 다소 나사가 풀어진 스승 역을 연기할 때는 별 문제가 없습니다. 배우 궁합도 맞는 편이며 (여전히 ‘사제라인’을 생각하면 오싹한 구석이 있긴 하지만) 감정 표현도 좋고 특히 코미디에 뛰어납니다. 원작의 김홍도는 이보다 더 심각한 사람이지만 문근영이 자기만의 신윤복을 만들었다면 박신양이라고 자기만의 김홍도를 연기하지 말라는 법은 없죠. 하지만 저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는 이 연기 매너리즘은 그의 경력을 따라온 시청자에겐 방해가 됩니다. 전 얼마 전 인터넷에서 어느 외국 시청자와 함께 이 프로그램과 박신양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박신양이 …에서 보여준 이 연기는 <쩐의 전쟁>(또는 <파리의 연인>)과 똑같아!”라는 반박을 몇번이나 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럴 때는 주객이 전도되는 것 같아서 기분이 묘하죠. 저에겐 이런 상황에서 대처할 기성품 반박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럼 케리 그랜트나 오드리 헵번 같은 배우들은 어쩌고?” 맞는 말이죠. 자신의 고정된 매너리즘을 고수하면서 평생을 스타로 보낸 사람들은 넘쳐납니다. 그건 문제가 아니에요. 하지만 그럼에도 전 이 고정된 반박을 제시할 수 없어요. <파리의 연인>이나 <쩐의 전쟁>을 보지 않는 한, 특정 매너리즘이 특정 상황에서 반복될 때 시청자가 왜 그런 반응을 보이는지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니까요.

PD와 DJ가 티격태격하더니…

드라마 <온에어>와는 주력 분야부터 엄연히 다르다. 드라마 왕국의 이면을 날카롭게 파고든 동명 드라마와 달리 뮤지컬 <온에어>가 다루는 건 총천연색 텔레비전 세상에 빛을 잃어가긴 해도 여전히 낭만적인 라디오 방송. 게다가 달큰하고 발랄한 로맨틱코미디다. 심야 라디오 프로그램 <매직타임>. 융통성없이 진지하기만 한 김순정 PD와 엉뚱한 우아미 작가가 몸담은 이곳에 아이돌 그룹 그리핀 출신의 가수 알렉스가 합류한다. 지난 3년을 군대에서 보낸 알렉스는 라디오 DJ로 컴백하는 게 못마땅하고, 라디오의 따스함을 사랑하는 김순정 PD는 그의 태도가 실망스럽다. 이후는 당신의 상상대로. 다투다 화해하길 반복하던 두 사람은 결국 이 수상쩍은 감정의 정체가 사랑임을 깨닫는다. 관객의 사연을 직접 읽어주는 등 라디오 방송의 형식을 이어받은 주크박스 뮤지컬. 다만 익명의 다수에게 열린 라디오 프로그램의 특성을 지나치게 의식한 탓인지 곁가지로 첨가된 이야기가 너무 많다. ‘시즌2’라는 꼬리표가 더해진 이번 공연은 2008년 선보인 뮤지컬 <온에어>를 각색·보완한 작품. 알렉스가 군 제대 뒤 복귀하는 아이돌로 설정된 것이 가장 큰 차이점이다. 드라마 <커피프린스 1호점>의 김동욱과 아이돌 그룹 클릭비의 오종혁, 연극 <실연>의 장서원이 알렉스에 캐스팅됐다.

[듀나의 배우스케치] 윤진서

윤진서가 처음으로 관객에게 주목을 받기 시작한 건 <올드보이>. 유지태의 죽은 누나로 나왔었죠. 뭐랄까, 매력적인 역할이었지만 그만큼 배우로서 평가하기 어려운 역할이기도 했습니다. 이미 죽은 사람, 그것도 정신이 그렇게 온전하다고 할 수 없고 집착이 심한 남자의 회상 속 주인공이었으니 꿈이 도대체 몇겹으로 겹친 건가요. 그 때문에 <올드보이>를 보고 “와, 이 배우가 도대체 누구야?”라며 궁금해 하고 흥분했던 관객이 <파리의 연인>에 카메오 출연했던 같은 배우를 보고 급실망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었죠. 그 뒤로 한동안 윤진서의 배우로서 기능성과 가치는 의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도 당연한 것이 이 사람이 그 이후 <액션배우 정맑음>(TV)이나 <슈퍼스타 감사용>과 같은 작품들에게 보여준 연기엔 <올드보이>의 영화적 매력이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배우가 가지고 있는 기술적 단점들만 노골적으로 드러났지요. 특히 비음이 강한 윤진서의 독특한 발성은 문제였습니다. 이 배우는 지금 <돌아온 일지매>(TV)로 첫 미니시리즈 주연을 준비하는데, 과연 이 핸디캡을 어떻게 돌파할지 모르겠어요. 영화 관객에겐 이런 것도 슬슬 개인적 매력으로 다가오기 시작했지만 텔레비전 시청자들은 비전형적인 발성법에 훨씬 민감하지요. 그럼에도 <올드보이> 때 우리가 접했던 윤진서의 가치는 조작된 환상이 아니었습니다. 아니, 조작된 환상인 건 맞았어요. 하지만 거기엔 배우의 개성이라는 기반이 있었던 거죠. 단지 그 기반은 일정한 조건이 주어졌을 때 나타났습니다. 윤진서는 러닝타임이 짧을수록, 작품이 비주류일수록, 대사가 적을수록, 주인공의 개성이 일상성에서 벗어나 있을 때일수록 좋았습니다. <따로 또 같이>나 <나의 새 남자친구>와 같은 허진호 단편들에서도 그랬고,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에서도 그랬지요. 둘 다 무언가를 가지고 있지만 그걸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고 위태롭게 흔들리는 젊은 배우의 매력을 잘 잡아낸 작품들이었습니다. 여기서 전 윤진서의 주목할 만한 장점을 하나 지적하고 싶습니다. 그건 이 배우가 전형적인 시네필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고, 말하고 심지어 연기까지 하는 많지 않은 한국 배우 중 한명이라는 것입니다. 가끔 이 배우를 바라보다보면 시네마테크의 옛 영화들과 채널링을 하는 게 보여요. 매체의 꿈과 같은 성격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런 장르적 이해는 종종 기술적 테크닉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그 때문에 윤진서는 여전히 기술적인 결함에도 영화 재료로서 좋은 배우입니다. 이게 배우에게 꼭 좋은 소리인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이 배우를 캐스팅하려는 감독에게는 좋은 소식이죠. 최근 몇년 동안 윤진서는 독립적인 배우로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 노력했습니다. <두사람이다>와 같은 장르호러물의 주연을 맡기도 했고 <바람 피기 좋은 날>이나 <비스티 보이즈>와 같은 주류영화에 도전하기도 했지요. 그 결과는 앞에 제가 예를 든 영화들보다 평범했지만 그래도 나름 적응의 흔적이 보입니다. 여전히 강한 비음은 남아 있지만 발성은 자기 개성에 맞추어 통제되고 있고, 앙상블도 좋아졌어요. 소문에 따르면 결코 모범적인 팀플레이어라고 할 수 없었던 성격도 나름 개선되었다던데, 그건 제가 신경 써야 할 일은 아니죠. 장률 감독의 <이리>가 곧 개봉됩니다. 윤진서는 이 영화에서 이리 폭발 사고 때 태어난 지적장애인을 연기했죠. 설정만 봐도 딱 라스 폰 트리에식 성녀학대극이라, 이런 종류의 영화에 민감하신 분들(저 같은 사람 말이죠)에겐 그리 추천하고 싶지 않지만, 그래도 이 영화가 배우 윤진서의 기능성과 매력이 극대화된 작품이라는 점은 밝히고 싶군요. 세상 사람들과 다른 박자의 북소리를 듣고 있는 것 같은 어긋난 리듬감, 비전형적인 캐릭터에 대한 자연스러운 이해, 그리고 꿈결과도 같은 시적 질감과 같은 것 말이죠.

‘대학살의 왈츠’를 기억하라 <바시르와 왈츠를>

<바시르와 왈츠를>은 기묘한 영화다. 아리 폴만 감독은 어머니와 아이를 포함한 3천명의 무슬림이 이스라엘 군부의 비호와 레바논 기독교 민병대에 의해 무참하게 살해당한 ‘사브라-샤틸라 학살’의 개인적인 기억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냈다. 여기서 우리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과연 다큐멘터리인 동시에 애니메이션인 학살의 증언이 가능한 일일까. 사실을 담는 그릇으로서의 다큐멘터리, 환상을 창조하는 그릇으로서의 애니메이션이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며 조화롭게 왈츠를 출 수 있을까.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아리 폴만 감독은 <바시르와 왈츠를>을 통해 흥미로운 영화적 왈츠를 안무해냈다. 정치적으로 논쟁적이고, 형식적으로 전복적인 애니메이션 <바시르와 왈츠를>을 탐험한다. 오리 시반: 대학살에 대한 자네 관심은 그 사건보다 훨씬 오래전에 생긴 거야. 다른 학살에서 비롯된 거라고. 사실 ‘다른’ 수용소가 그 밑바탕이 된 거야. 자네 부모님도 수용소에 계셨었나? 나: 응 오리 시반: 아우슈비츠? 나: 응. 오리 시반: 그러니 대학살이란 (문제는) 여섯살 이후로 자네와 함께해온 거야. 자넨 그런 학살과 수용소(라는 문제)들을 통과하며 살았던 거고. 해결책은 사브라와 샤틸라에서 진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내는 수밖에 없어. 사람들을 찾아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누가 있었는지 물어봐. 상세하게 들어보라고. 그러다보면… 자네가 정확히 어디 있었는지, 어떤 역할을 했는지 알게 될 수도 있어. -영화 <바시르와 왈츠를> 중에서 애니메이션 <바시르와 왈츠를>은 기억과 망각의 이중무다. 1982년 레바논의 팔레스타인 난민촌 사브라와 샤틸라 두 지역에서 일어났던 대학살의 기억을 독특한 방식으로 길어내는데, 흥미롭게도 이 기억에 관한 영화는 감독 아리 폴만 개인의 망각에 대한 경험에서 출발했다. 그는 당시 레바논에 주둔한 이스라엘군 중 한명으로 그곳에서 벌어진 많은 참사를 목격했다. 하지만 25년이 지난 어느 날 돌아보니 자신의 많은 기억이 무의식적으로 머릿속에서 지워져 있음을 알게 된다. 아리 폴만은 이 이상한 경험을 영화로 만들기로 했다. 레바논의 강성 기독교도인 팔랑헤 민병대가 사브라와 샤틸라에서 어린아이, 노인 가리지 않고 무슬림을 학살하고 있을 당시 몇백 미터를 사이에 두고 그 광경을 지켜본 영화 속 주인공 ‘나’. 25년이 지난 어느 날 그는 친구의 꿈 이야기를 듣는다. 레바논의 한 마을에 진입하기 위해 죽였던 26마리의 개에게 쫓기는 악몽을 자주 꾼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듣던 주인공 ‘나’는 갑자기 무언가를 깨닫는다. 친구와 다르게 그 자신에게는 그때의 일이 상처로 남아 있기는커녕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처럼 말소되어버렸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그때의 일을 잊을 수 있을까. 왜 그런 거대한 망각의 늪이 내 머릿속을 차지했을까. 정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나는 무엇을 본 것이며 무엇을 잊은 것일까. 영화감독인 영화 속 ‘나’는 마침내 레바논에 함께 있었던 자신의 동료와 그 밖의 증언자, 조언자 등을 찾아나선다. 나의 기억을 애타게 찾아 떠나는 여행은 그렇게 시작된다. 자신의 ‘이상한 경험’을 영화로 만들다 2008년 칸에서 처음 선보였을 당시 <바시르와 왈츠를>은 큰 호평을 얻었다. 특히 아우슈비츠 문제를 원죄처럼 공유하는 유럽인들에게 대학살이라는 사건이 중심을 차지하는 이 영화가 크게 호소력을 발휘했으리라 추정하는 건 어렵지 않다. 하지만 단지 소재 덕분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비범하다 말하기는 힘들어도 <바시르와 왈츠를>은 명민하고 매력적인 애니메이션이다. 무엇보다 제작방식에서 감독 아리 폴만은 독창성을 발휘했다. 어떤 이유로 다큐멘터리 감독 출신인 아리 폴만이 애니메이션 작업에 손을 댔던 것인가. <바시르와 왈츠를>은 1962년에 첫 작품이 나온 뒤 이스라엘에서 나온 두 번째 장편애니메이션이다. 이 믿기지 않는 기록에도 <바시르와 왈츠를>은 완성도 면에서 뛰어나다. 하지만 여기엔 어떤 열악함이 있긴 했다. 그걸 감독은 재치있게 호소한다.“어떤 사람들은 Q&A 시간에 영화 속 인물들이 느리게 걷는 건 그들이 정신적 외상을 입었기 때문이냐고 묻는데, 그때마다 나는 이렇게 답한다. 그들이 늦게 걷는 건 (정신적 충격 때문이 아니라) 예산이 적어서라고.” 인물들의 움직임을 한장 한장 전통적으로 그려내는 컷아웃 기법에 의해 만들어진 <바시르와 왈츠를>에서 그들의 더 정교한 움직임과 실제적인 속도감은 다 돈의 문제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다큐멘터리로 잔뼈가 굵었던 아리 폴만이 열악한 작업 조건을 넘어 애니메이션이라는 새로운 영역에 도전할 생각을 했던 데에는 어떤 이유가 있다. 다큐멘터리를 애니메이션과 접목시켜 표현의 영역을 확장해보자는 것이었다. 영화에는 9명의 주요 등장인물들이 나온다. 꿈속에서 개에게 매번 쫓긴다는 ‘나’의 친구 보아즈 레인 부스키라, ‘나’의 정신적 외상을 상담해주는 친구이자 정신과 의사인 오리 시반, 지금은 네덜란드의 조용한 마을에 칩거하며 사는 옛 동료 카미 크난, 죽음의 위기에서 겨우 살아나 부대로 귀환했던 로니 데이즈, 전장 한복판으로 뛰어들어 기관총을 난사한 적 있던 ‘나’의 룸메이트 슈뮤엘 프렌켈, 또 다른 정신치료 상담자 제하바 솔로몬 교수, 그리고 용감무쌍하게 전장의 소식을 알리던 텔레비전 기자 론 벤 이샤이와 당시 탱크 부대 책임자 중 하나였던 드롤 하라찌 등이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나’라는 인물. 카메라 앞에 서기를 끝까지 거부했던 이들 대개는 실존 인물들에게서 영감을 얻었다. 아리 폴만은 일단 실존 인물들을 스튜디오로 불러들여 카메라를 동원하여 인터뷰했다. 이 과정에서 카메라 앞에 서기를 끝까지 저어했던 보아즈 레인 부스키라와 카미 크난은 각각 두명의 다른 배우가 연기했다(아리 폴만은 “9명 중 7명은 실제 인물에게서 영감을 얻었고 2명은 발명됐다”고 말하고 있는데, 일부러 정확히 밝히고 있지 않지만 이 두 사람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다음 그 인터뷰 영상을 다듬어 편집했고 몇개의 극중 대화장면도 촬영했다. 그 다음 영상자료를 기초로 심화된 시나리오 작업을 한 뒤 애니메이션 작업에 착수했다. 그 과정에서 실존 인물들은 애니메이션의 인물들로 바뀌고, 성우들에 의해 목소리가 입혀졌다. 그러니까 실제 다큐멘터리 방식으로 인물들을 인터뷰한 뒤, 혹은 그게 불가능하면 배우들로 하여금 인터뷰를 바탕으로 카메라 앞에서 연기시킨 뒤, 그 영상 증언을 토대로 전체 극화된 이야기를 정리하고 짜내는 방식으로 나아간 셈이다. 때문에 어떤 이들이 <바시르와 왈츠를>에 관해 말할 때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애니메이션 <스캐너 다클리>와 비교하며 이것도 로토스코핑(실사로 촬영한 뒤 애니메이션 이미지로 전환 출력하는 기법)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냐고 물을 때마다 이 영화의 총감독 아리 폴만과 애니메이션 감독 요나 굿맨이 발끈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는 셈이다. 그들은 <바시르와 왈츠를>을 실사 화면 위에 애니메이션의 세계를 입혀 완성된 작품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한 것도 아니다. <바시르와 왈츠를>은 다큐멘터리처럼 한번 만들어진 다음 애니메이션으로 다시 만들어져 나온 이중의 결과물이다. 이 과정에서 아리 폴만이 중요하게 여긴 건 다큐멘터리적 요소가 바탕이되 어떻게 애니메이션의 무한한 표현력으로 그 설득력을 확장할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중년의 남자가 어두운 과거를 취재하고 그것에 대한 기록을 이야기로만 표현한다면 아마 무척 지겨운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가 반드시 환상적인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이렇게도 말한다.“당신은 이 영화에서 잃어버린 기억·꿈·잠재의식 그리고 전쟁·마약·잃어버린 사랑을 볼 것이다.” 잃어버린 기억… 꿈… 잠재의식… 아리 폴만은 그것을 다큐멘터리로는 표현하기 힘들어도 애니메이션의 보완을 통한다면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더 사실적으로, 더 환상적으로 <바시르와 왈츠를>의 매력이 여기 있다. 인물들의 증언이 이어지고 그 증언이 곧 비주얼로 바뀌는데, 다큐멘터리 화면으로는 도저히 보여줄 수 없는 환상적인 내용들이 주를 이룬다. 대체로 애니메이션으로만 가능한(혹은 실사영화라면 엄청난 예산이 들어야 가능한) 초현실적 이미지들로의 확장, 그 슈퍼 표현력의 획득이라는 점에 <바시르와 왈츠를>의 성취도가 있다. 예컨대 이런 장면들. 카미 크난이 전장으로 가던 첫날. 그 이름도 아름다운 러브보트에서 뱃멀미에 고생하던 그는 잠깐 잠이 들고 꿈을 꾼다. 저 멀리서 바다의 여신처럼 보이는 여자가 다가와 배 위로 올라온다. 보니 엄청난 거인이다. 카미 크난은 배를 떠나 그녀의 몸에 아기처럼 안겨 바다를 유영하고 그때 러브보트는 폭발한다. 혹은 ‘나’가 우연히 보게 된 베이루트 공항. 처음에는 활기차고 세련돼 보이지만 순간 환상에서 깨어나고 나면 이곳은 폐허다. 시계는 멈춰 있고 비행기는 불타 있다. 특히 <바시르와 왈츠를>이라는 제목을 선사한 시가지 전투장면은 아이러니하다. 룸메이트 프렌켈이 적과의 대치 중 영웅 심리를 참지 못하고 다른 동료의 기관총을 빼앗아 전장 한복판에 뛰어나가 난사할 때의 장면. 그때 그는 기관총의 거친 반동으로 마치 왈츠를 추듯 종종거리면서 주변을 뒷걸음치며 돌아다니게 되고 음악도 그렇게 깔린다. “그 왈츠장면은 전시에 시간이라는 것이 어떻게 왜곡되는지 보여주려 사용했다. 나는 그가 얼마나 오랫동안 기관총을 난사했는지 알 수 없다. 누가 그걸 말할 수 있을까? 2초? 10초? 30분? 그 기관총과 함께 시간은 멈춘 것이다.” 감독은 그때 기억의 문제를 시각화하여 제시하는 것이다. 그때 들려오는 ‘나’의 내레이션은 이렇다. “그는 교차로를 건너가지 않고 무아지경에 빠진 듯 춤을 추고 있었어. 적군을 저주하며 거기 영원히 있을 것 같았지. 포격 한가운데에서 왈츠 솜씨를 과시하는 듯했어. 머리 위에 바시르의 포스터가 보였지. 바시르의 추종자들은 200m도 안된 곳에서 복수를 준비했고. 그게 바로 사브라와 샤틸라 대학살이야.” 바시르는 이 영화의 등장인물은 아니지만 그들 모두와 연관을 맺은 역사적 인물이다. 또한 <바시르와 왈츠를>이라는 제목은 이스라엘과 레바논의 동맹을 빗대어서 하는 말이다(박스 기사 참조). 마침내 <바시르와 왈츠를>은 마지막 장면에서 바시르라는 정치적 인물의 죽음이 계기가 되어 어떤 민간인 학살이 벌어졌는지를 짧지만 고통스러운 동영상을 덧붙여 보여준다. 아리 폴만은 가편집본 다큐멘터리를 한편 완성하고 그걸 바탕으로 한편의 애니메이션을 완성하되, 다시 마지막 장면에서는 충격적인 실사 화면을 덧붙여 마침내 다큐멘터리와 애니메이션의 접목이라는 자신의 목표를 정리하고 있다. 왜 ‘깡그리 망각’은 되풀이되는가 <바시르와 왈츠를>에서 정신과 의사이자 친구인 오리 시반은 ‘나’에게 충고한다. “대학살에 대한 자네 관심은 그 사건보다 훨씬 오래전에 생긴 거야. 다른 학살에서 비롯된 거라고…. 그러니 대학살이란 (문제는) 여섯살 이후로 자네와 함께해온 거야. 자넨 그런 학살과 수용소(라는 문제)들을 통과하며 살았던 거고.” 이 문제가 실은 가장 중요하다. 400만명이 넘는 유대인이 온갖 종류의 고문과 도륙으로 죽어간 그날 이후 몇 십년이 흘러 기독교를 따른다는 레바논의 팔랑헤 민병대들이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학살하는 역사의 불운이 이어졌다. 그걸 옆에서 목격한 유대인의 자손이자 이스라엘의 한 병사이자 참혹한 학살의 동조자로서의 ‘나’는 충격에 기억을 잃었다. 그러니까 망각은 어떤 식으로건 계속되는가. 언젠가 체코의 작가 밀란 쿤데라는 말했다. “방글라데시의 피비린내 나는 학살은 소련군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의 기억을 덮어버렸고, 아옌데의 암살은 방글라데시의 신음 소리를 가라앉혔으며, 또한 시나이 사막의 전쟁은 아옌데 사건을, 캄보디아 대량 학살은 시나이 사막의 전쟁을 잊게 했다. 이러한 식으로 매사는 계속되고, 결국은 모든 사람이 모든 것을 깡그리 망각할 때까지 되풀이된다.”(<웃음과 망각의 책>) 그러니 사브라와 샤틸라 학살을 깡그리 잊었던 영화 속‘나’의 망각의 경험도 사실은 전쟁의 외상 때문이 아니라 이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영화 속 ‘나’가 그렇게나 애타게 기억을 찾아 나선 것도 그에 대한 죄책감은 아니었을까? 역사는 반복된다. 슬프게도 망각의 역사로. 알고 나면 충격적인 기억의 역사로. <바시르와 왈츠를>이 전하려는 바다. 사브라-샤틸라 사건 3천명을 학살한 팔랑헤의 복수 1982년 9월16일 레바논의 사브라-샤틸라 난민촌에서 휴머니즘은 학살당했다. 1982년 7월. 레바논 테러리스트들에 의한 미사일 테러로 몸살을 앓던 이스라엘은 대규모 군대를 보내 레바논 남부를 점령했다. 이스라엘 정부가 원했던 것은 팔레스타인 해방전선이 레바논에 설치한 미사일 기지를 색출하고 40km에 이르는 안전구역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국방장관 아리엘 샤론을 수장으로 한 군부세력은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를 점령한 뒤 기독교도 수장인 바시르 제마엘(영화의 제목 <바시르와 왈츠를>은 그의 이름으로부터 따온 것이다)을 대통령으로 앉히려는 계략을 세우고 있었다. 이는 1975~76년의 내전 이후 끝없는 모슬렘과 기독교도 사이의 테러로 분열된 레바논에 친이스라엘 꼭두각시 정부를 설립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리엘 샤론의 계획은 1982년 9월14일 바시르 제마엘이 대통령 취임 9일 전 폭탄 테러로 살해당하면서 좀더 극단적인 방향으로 치닫기 시작한다. 바시르의 죽음에 광분한 레바논 기독교도 팔랑헤 민병대가 이스라엘군이 포위하던 팔레스타인 난민촌 사브라와 샤틸라로 기습해 들어간 것이다. 이스라엘군은 팔랑헤 민병대의 목적이 팔레스타인군의 색출이라고 믿었지만 이미 팔레스타인군은 시리아로 거처를 옮긴 지 오래였다. 팔랑헤 민병대의 목적은 애초부터 복수였다. 그들은 사흘 동안 3천여명에 이르는 난민을 남녀노소 구분없이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학살극은 <뉴욕타임스> 레바논 특파원에 의해 신속하게 서방에 보도되었다. 기사를 통해 이스라엘 군부의 개입 여부가 문제시되자 이스라엘 정부는 책임자를 색출하는 위원회를 구성했고, 아리엘 샤론은 학살을 방조한 책임을 판결받아 국방장관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사브라-샤틸라 학살이 벌어진 지 20년이 지난 2001년, 아리엘 샤론은 이스라엘 총리에 당선됐다. <바시르와 왈츠를>이 공개된 직후 극소수의 서구 및 무슬림 언론은 아리 폴만의 영화가 사브라-샤틸라 학살로부터 직접적인 책임을 회피해온 이스라엘 정부의 전형적인 입장을 대변한다고 공격했다. 이에 아리 폴만은 <바시르와 왈츠를>이 당시 사브라-샤틸라 지역에 사병으로 주둔하던 개인적 기억에 근거해 만들어진 영화라고 변호했다. “유일하게 확신할 수 있는 것은 학살의 직접적인 책임자는 레바논 기독교 팔랑헤 민병대들이라는 것이다. 나 같은 이스라엘 사병들이 학살을 직접 자행한 일이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스라엘 정부가 민병대들의 계획된 극단적 복수극을 사전에 인지하고 있었는지는 그들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김도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