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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1997)

[클린트 이스트우드] 장대비를 우두커니 맞던 그 몇초간…

<석양의 무법자> (1966) 1950년대 후반 텔레비전 시리즈 <로하이드>에서 농장의 미남 감독관으로 첫 주연을 맡은 클린트 이스트우드. 이후 세르지오 레오네에게 발탁되어 스파게티 웨스턴의 ‘이름없는 사나이 3부작’으로 옮겨간 뒤에는 질겅질겅 시가를 씹어대는 거칠고 비정한 사나이로 돌변한다. 이 둘의 차이는 그 부드러운 미소와 찡그림만으로도 확연하다. 이름없는 사나이 3부작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성공적인 첫 번째 연기 변신이다. 세르지오 레오네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말수는 별로 없지만 말을 잘 타고 피곤함과 체념에 젖은 걸음걸이를 가졌다”는 걸 높이 평가했다. 그리고 얼굴을 찡그린 남자의 시가와 언제나 장전된 총은 오랫동안 그의 도상이 됐다(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세르지오 당신이 시키는 건 다 하겠어. 담배만 빼고”라고 말할 정도로 담배를 싫어했다). <석양의 무법자>에서 “어이 친구, 세상에는 두 종류의 인간이 있어. 하나는 장전된 총을 들고 있는 사람이고, 또 하나는 땅을 파는 사람이지. 어서 파”라며 말하는 것조차 피곤하다는 투로 윽박지르던 그의 대사가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고독한 방랑자> (1982) <고독한 방랑자>(원제 <홍키통크 맨>은 싸구려 술집을 돌아다니며 연주하고 노래하는 가수를 뜻한다)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무명의 컨트리 가수로 등장한다. 이 영화는 구두 세일즈맨에서 별 볼일 없는 서커스 단장이 된 뒤에도 진정한 카우보이의 꿈을 버리지 못하는 시대착오적 인물 <브롱코 빌리>(1980)의 그 주인공과 앞뒷면을 이룬다. 꿈을 좇는 사내들이라는 주제로 묶인다. <브롱코 빌리>에서 그가 좀 나사 빠진 카우보이였다면 이 영화에서는 건들거리는 예술가다. 그는 나이 어린 조카를 데리고 허름한 술집을 전전하면서 지내는데, 마침내 프로듀서의 눈에 띄어 인정받아 그토록 꿈에 그리던 녹음을 하게 된다. 하지만 더이상 폐병을 이기지 못한다. 그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장면은 어딘가 처연하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직접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서너번 등장하는데. 실력이 그다지 뛰어난 편은 아니지만 <페인트 유어 웨곤>(1969)을 제외한다면 그가 영화에서 기타를 들고 노래하는 장면을 거의 볼 수 없다는 점에서 의외의 명장면이다. <용서받지 못한 자> (1992)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이렇게 돌아오리라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냉혹한 신화적 총잡이로 살아온 그가 서부의 늙은 승냥이로 돌아올 줄 누가 알았을까. 아니 자기가 만들어서 이룩한 신화의 계보를 이렇게 냉혹하고 처량하게 끌어내려 파산시킬 줄 누가 알았을까. 몇개의 유명한 장면이 있는데 그걸 스파게티 웨스턴에 나왔던 그의 모습과 비교해보면 이건 장르만 유사할 뿐 완전히 다른 인간이다. 처음 사람을 죽였노라 겁에 질린 신출내기 총잡이에게 허망한 선배 총잡이로서의 교훈을 던질 때, 후반부 쓸쓸한 모습으로 퇴장할 때 그가 선보인 연기의 가치는 이미 많이 말해져왔다. 그럼 윌리엄 머니가 악당들의 소굴로 들어가 악당보다 더 잔인하게 살인을 저지르던 순간은 어떤가. 이때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주인공 윌리엄 머니를 피에 굶주린 짐승, 살인기계로서의 본성을 지닌 집행자인 것처럼 보여준다.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1995) 그 유명한 대사.“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말하오. 단 한번도 말해본 적 없는 거요. 이렇게 확실한 감정은 일생에 단 한번만 오는 거요.” 1965년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에 이방인으로 찾아온 사진작가 로버트 킨케이드는 그날 밤 망설이는 시골 여인 프란체스카 존슨(메릴 스트립)에게 그렇게 말하고 그녀의 집을 나섰다.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를 말할 때 가장 많이 회자되는 대사이자 동시에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자신의 연기인생에서 한 가장 로맨틱한 대사다. 하지만 그 장면보다 더 가슴을 치는 곳은 그가 장대 같은 빗줄기 속에 우두커니 서서 식료품점에서 나오는 그녀를 마지막으로 볼 때다. 차에서 저 여인이 내려 자기에게 오기를 기다리는 그 몇초간. 늙은 육체가 한마디 말없이 마지막 사랑을 호소하는 그 순간. 물 기운에 헝클어져 무너져내린 머리칼과 가늘고 단단하게 뜬 눈. 그러나 상대방은 망설인 다음 오지 않는다. 클린트 이스트우는 이 영화의 전에도 후에도 이만큼 강렬한 로맨스를 연기한 적이 없다. 물론 메릴 스트립이라는 당대 여배우와의 합이었기에 가능했겠지만, 그래도 빗속에 서 있던 그의 어깨를 잊을 수가 없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 (2004) 보호자 또는 대체부모 그러나 어딘가 완전한 보호와 양육을 약속하기에는 부족한 어른.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이런 인물을 종종 탁월한 연기로 완성해낸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서 늙은 트레이너 프랭키 던은 그 정점이다(그리고 <그랜 토리노>의 왈트 코왈스키는 좀더 고약한 그 후속인물쯤 될 것이다). 프랭키는 여자 복서를 받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매기의 끈질긴 청에 못 이겨 드디어 그녀를 제자로 받아들이다. 친딸과는 불화를 겪는 이 노인이 수양딸이나 다름없는 매기를 정성으로 가르치고 보살핀다. 불행하게도 링에서의 사고로 매기가 불구가 됐을 때도 그녀를 아끼는 건 그녀의 가족이 아니라 프랭키다. 그는 영화에서 그녀에게 기억에 남을 만한 몇 가지 행동을 하는데, 물론 약물을 투여하여 그녀의 뜻에 따라 저세상으로 보내주는 마지막 장면이 가장 강력하다. 하지만 프랭키가 “나 이제 일어나 이니스프리로 가리…”로 시작하는 예이츠의 시를 다정다감하고 유머러스하게 읽어주는 이 장면은 쉽게 지나치기에 너무 자애롭다. 코에 안경을 걸치고 예이츠의 시를 읽어주는 백발의 노인 프랭키 혹은 클린트 이스트우드.

[전영객잔] 당신의 확신을 고발한다

올해도 아카데미 시즌을 전후로 흥미로운 미국영화들이 많다. 그중에서 시간이 좀 지났지만 배우들의 황홀한 연기를 제외하곤 더 말해지지 않은 영화 <다우트>, 닉슨 연기로 호평을 받은 프랭크 란젤라에 대한 관심 이외에 다른 초점이 부가되지 않는 <프로스트 vs 닉슨> 두편에 관해서 생각해보려고 한다. 두 영화는 서로 의식하고 맞닿아 있지는 않지만 <프로스트 vs 닉슨>을 보면서 뒤늦게 <다우트>에 관해 더 깊게 생각해볼 계기를 얻었고 둘을 짝지어 어떤 문제를 말해도 좋겠다는 판단을 갖게 됐다. <다우트>는 1964년 브롱크스 지구에 있는 성 니콜라우스 가톨릭 학교에서 일어난 일을 다룬다. 이 학교의 근엄한 원장 수녀 알로이시스(메릴 스트립)는 폴린(필립 세이무어 호프먼)이라는 자유분방한 신부가 마음에 차지 않는다. 그때 젊은 제임스 수녀에게서 폴린이 도널드라는 흑인 소년을 추행한 것 같다는 보고를 받는다. 알로이시스는 폴린의 죄를 밝히려고 하고 폴린은 죄가 없다며 항변한다. <프로스트 vs 닉슨>은 토크쇼 진행자 프로스트(마이클 신)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사임한 닉슨(프랭크 란젤라) 전 대통령의 1977년 5월 TV대담이 성사되고 진행되는 과정을 중심으로 한다. 프로스트는 부패한 거물급 정치인 닉슨을 발판삼아 스타덤에 오르고 싶어 하고 닉슨은 만만해 보이는 연예인 프로스트를 자기의 정계 복귀를 위한 제물로 본다. 양측이 맞붙는 ‘대(vs)’의 구도에 주목 그런데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점이 있다. 지금 설명한 이름들이 이 두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은 아니다. 우리는 알로이시스 수녀, 폴린 신부, 혹은 그들에 관한 이야기를 본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프로스트, 닉슨, 혹은 프로스트와 닉슨에 관한 이야기를 본 것도 아니다. 실제로 이 인물들의 정보에 관하여 우리가 한정적으로만 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두 영화의 주인공은 그들이 아니다. <프로스트 vs 닉슨>은 그 점을 제목으로 명시한 것 같다. 그리고 비록 <다우트>가 제목에서 명시하지 않더라도 이 영화의 부제를 알로이시스 vs 폴린이라고 붙인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우리는 정확하게 프로스트 vs 닉슨, 알로이시스 vs 폴린의 이야기를 보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주인공은 어떤 상태, ‘대’(versus)다. 두 영화는 마치 승패를 건 승부차기처럼 진행된다. 두 영화에서 배우들의 연기를 주목하게 되는 것이 그들의 역량 때문이라는 건 두말할 필요가 없지만, 그것이 이 ‘대’의 구조 안에서 전개된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한다. 적어도 이 영화들을 보고 명연기를 말하는 것은 배우가 인물의 내면에 대한 끈을 풀어낸 것에 대한 감동이기보다 그들의 승부가 얼마나 표면적으로 팽팽하게 상연되었는가에 관한 사후 진술이 된다. 그러므로 우선 질문은 ‘대’의 상태가 어떻게 매력적으로 전개되는가, 승부의 긴장감은 어떻게 진전되는가, 이다. 이때 두 작품 모두 성공한 연극을 영화로 옮긴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더 중요하게는 <다우트>가 연극에서 영화로 곧장 건너온 것에 비해 <프로스트 vs 닉슨>은 애초 대담을 사칭한 텔레비전 TV쇼에서 연극으로 그 다음 다시 영화로 바뀌어왔다는 차이가 있다. <다우트>는 배우들의 곡예 같은 대사로 빈칸을 만들어 의문의 눈덩이를 굴린다. 이 영화의 문제제기와 그 해결법이 전부 그 방식 안에 있다. 제임스 수녀가 먼저 플린 신부의 의심쩍은 행동을 말로 옮겼다. 알로이시스 수녀는 무슨 근거로 나를 의심하느냐는 폴린 신부에게 말한다. 창밖으로 보았을 때 한 소년이 당신이 잡은 팔을 뿌리치는 걸 보았다고. 그때 알로이시스 수녀는 폴린 신부가 소년에게 한 말을 듣지 못했다. 폴린 신부는 말썽쟁이 소년에게 훈계를 하고 있었지만 그 말을 듣지 못하고 상황을 넘겨다본 알로이시스 수녀는 그것을 유혹의 현장으로 본다. 이를테면, 사건의 중심에 선 흑인 소년 도널드의 증언이 있으면 해결될 일이지만 영화에서 아이는 증언하지 않고 말하지 않는다. 결국 알로이시스 수녀가 들이민 증거도 다른 교구에 전화를 걸어 뭔가 폴린 신부의 비리를 확인했다는 거짓말이다. 그런데 그때 폴린이 주춤거린다. <다우트>에서 빈칸은 말로 시작되어 말로 종결되며 긴장은 이 사이에서 벌어진다. 배우들이 그 말을 상연한다. <프로스트 vs 닉슨>은 좀 다르다. 프로스트와 닉슨의 대립각이 특별한 숏(중계방송의 숏)으로 시작해서 그걸로 정점을 맺는다는 사실을 주목하자. 초반부 닉슨의 사임에 관한 정황을 알리는 뉴스들이 흘러나온 뒤 사임 연설의 녹화가 다 끝날 때까지 영화는 닉슨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다 헬기를 타고 떠나는 닉슨이 대중에게 손을 흔드는 장면을 프로스트가 브라운관으로 볼 때, 그때 마치 닉슨은 프로스트에게만 짓는 것 같은 눈빛을 보낸다. 물론 프로스트의 오해다. 하지만 그때 프로스트가 닉슨을 만나야겠다는 운명적인 생각을 갖게 된 거라고 영화는 보여준다. 그때까지 왜 닉슨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지에 관한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 속 닉슨의 얼굴을 우리는 이제야 처음 확실하게, 그것도 사임 연설을 하는 그곳의 현장에서가 아니라 떠나가는 현장을 중계하는 텔레비전 브라운관에서 보는 것이다. 중요한 건 브라운관 안에서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 프로스트와 닉슨의 첫 만남은 닉슨이 결정적으로 패한 걸 알리는 TV토론회 중계방송의 그 문제의 클로즈업으로 연관된다. 무승부입니까, 승패가 갈렸습니까 <다우트>는 영화가 연극을 무대화하는 방식을 취한다. 그때 말에 힘이 생긴다. 반면 <프로스트 vs 닉슨>은 텔레비전 중계를 연극화한 것을 다시 영화적 무대화로 옮긴다. 이때도 말은 중요하지만, 방점은 클로즈업에 찍힌다. 긴장의 정점에 마침표를 찍는 방식이 서로 다르며 각각 흥미로운 선택이다. 그러니 이것을 승부차기이지만 승부차기를 진행하는 룰이 다르다고 말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남는 질문은 있다. 대결의 구도를 전제한 상태에서 마침내 다시 돌아와 공통적으로 사라지지 않는 관심사는, 그러면 누가 승자인가 하는 점이다. 그건 괜한 질문이기보다는 이 영화가 제기한 구조를 따라 영화를 본 우리의 정당한 의문이다. 긴장감을 조성하는 재현의 장치가 다를지언정 이 점은 결국 누가 진실에 가까이 있거나 멀리 있는가를 예감하게 한다는 데서 중요해진다. 이때 개인적으로는 이미 알려진 평가들에 공감하지 않는다. 가령, <다우트>가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주지 않는다는 의견과 <프로스트 vs 닉슨>을 부패 정치가들이 보고 배울 점을 찾을 것이라는 의견이다. 그 말은 <다우트>를 보고 나면 누가 잘못을 저지른 것인지 알기 어렵고 <프로스트 vs 닉슨>을 보고 나면 승자가 확연해진다는 것으로 들린다. 하지만 나는 그와 반대로 <다우트>가 확고하게 어느 한쪽의 편을 들어준 영화이고, <프로스트 vs 닉슨>이 반대로 진실을 미루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다우트>에서 진실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은 대립이 주인공인 이 영화에서 결과가 무승부라는 뜻이다. <프로스트 vs 닉슨>에서는 엄연히 마지막에 닉슨을 사각으로 몰아넣어 항복 선언을 받아낸 프로스트가 승리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정말 그러한가. <다우트>는 무승부인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초반에 영화는 플린을 교인들 앞에 선 웅장한 강연자로 보여준다. 알로이시스는 그 반대편에서 일어나 걸어나오는 구도로 잡는다. 플린 vs 알로이시스의 대항 구도를 예고한다. 내내 폴린은 활기차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신부로 알로이시스는 과거에 붙잡힌 보수적인 옹고집으로 등장하는 것 같다. 그건 대체로 그렇다. 하지만 영화에는 이런 신도 있다. 두 사람의 식탁을 비교하는 장면에서 영화는 노골적으로 우리의 판단에 혼란을 요구한다. 특히 폴린 신부의 식탁으로 화면이 넘어갔을 때 화면 가득 클로즈업으로 잡히는 벌건 핏물이 배어 있는 고깃덩이, 그리고 그걸 포크로 집어 먹으며 느끼한 웃음을 흘리면서 뚱뚱한 두 모녀에 관해 쓸데없는 농담을 지껄이는 폴린 신부의 모습은 그를 사악한 자로 의심하도록 유도하는 장면이다. 그러니까 알로이시스 수녀가 진실을 밝히겠다며 나가려 할 때 폴린은 왜 그녀를 못 가게 막은 것인가. 그것은 그의 죄에 대한 인정인가, 아닌가. 이때 그 고기의 살점과 느끼한 농담의 잔상이 끼어들게 되고 그의 무죄를 믿기에 석연치 않다. 혹은 알로이시스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마지막 장면에서 흐느끼는 그녀의 행동이 옳은 일을 한 이후에 오는 허망함인지 아니면 그녀 자신의 오해에 대한 인정인지 혼란스러워진다. 이런 뒤죽박죽의 정황들이 알로이시스 vs 폴린이라는 구조에서 누군가의 손을 들어줄 수 없다는 판단에 이르게 한다. <다우트>는 의심이 아니라 ‘회의’한다 하지만 나는 좀 다른 방식으로 이 영화를 보기를 제안한다. 그건 이 영화의 다우트라는 단어의 뜻이 의심과 회의(懷疑)라는 두 가지 의미로 나뉠 수 있다는 것과 관련이 있다. 말하자면 <다우트>라는 말을 전적으로 의심이라는 말로 풀이하고 이 영화를 볼 때 오해가 생긴다. 결정적인 건 영화의 첫 신과 마지막 신이다. 내 기억이 맞다면 영화에서 다우트라는 말은 첫 신에서 폴린 신부가 사용한다. 그때 그의 강론의 요지는 ‘회의가 확신만큼 단단한 신앙’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첫 신이 지나서 다우트라는 단어는 내내 등장하지 않다가 마지막 신, 알로이시스 수녀의 신에 가서야 다시 등장한다. 이 영화가 말과 단어의 적확한 사용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자. 그들은 진실을 두고 그렇게나 다투는 그 사이에도 의심(다우트)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대신 확신(certainty)이라는 말을 쓴다. 나는 확신을 갖고 있다거나 당신은 그걸 어떻게 확신하느냐고 서로 논쟁한다. 폴린을 의심하는 알로이시스의 행위는 확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영화는 의심이 아니라 확신과 그 확신에 대한 회의에 관한 것이다. 폴린 신부는 첫 신에서 신앙적 회의를 믿으라 했다. 그런데 알로이시스는 의심을 가장한 확신을 영화 내내 밀어붙인 다음 결국에는 폴린 신부가 가르친 그 회의의 순간으로 이끌린다. 이 구조에 따른다면 첫 번째 신에서 있었던 폴린 신부의 강론, 즉 회의는 확신만큼 힘이 있다는 말을 마침내 가장 귀기울여 들은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알로이시스 수녀다. 누가 죄를 지었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누가 누구의 말에 승복하였는지는 알 수 있다. 이 영화는 알로이시스가 폴린의 강론에 따라 자기의 확신에 대해서 회의하는 것으로 끝나는 구조다. 그러므로 그녀의 마지막 말은 “의심이 들어요 정말 의심이”보다는 “(그동안 확신을 해온 것에) 회의가 들어요, 정말 회의가”라고 해야 더 맞을 것이다. 그녀는 지금 누구에게 고해성사를 하는 것인가. 누구의 강론을 따라 고백하는가. 영화는 이미 말해준 것이다. <프로스트 vs 닉슨>은 결국 무승부 반면 <프로스트 vs 닉슨>은 프로스트의 승리인가. 역시 그런 것 같지 않다. <다우트>가 아니라 이것이야말로 무승부다. 이 과정은 좀더 간단하며 많이 보아온 것이다. 물론 기록상 닉슨은 그 토론회에서 패배했다(프로스트와 닉슨의 대담은 클립의 일부나마 유튜브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영화는 그 승부를 원점으로 돌려 다시 제안하는 것이고, 우리는 이미 있었던 사실이 아니라 이 영화가 제안하는 효과에 관해서만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영화를 보고 난 다음 닉슨을 미워할 수 있는가? 이 영화를 보고 우리가 닉슨을 인간적으로 이해하려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는 걸 외면할 수 있을까. <프로스트 vs 닉슨>에는 이상한 장면이 있다. 즉 <다우트>에서 폴린 신부의 식탁을 보여준 것처럼 갑자기 끼어들어 혼란을 유도하고 전환을 시도하려는 장면인데 효과는 그 반대다. 닉슨이 술에 취해 프로스트에게 전화를 하는 장면. 우리는 이 장면을 나중에야 그가 기억을 못하는 것이라고 알게 된다. 이 사실을 그 신의 출현 즉시에 아는 것과 그 뒤에 알게 되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이 장면은 의외로 그의 곤경에 대한 우리의 동정심을 유발하는 계기를 낳는다. 그건 닉슨이 대담이 모두 끝난 뒤에 프로스트가 그를 찾았을 때 둘만 얘기하고 싶다며(즉 중계방송이 아닌, 진정 사적으로) “내가 정말 그날 밤 전화를 했느냐”고 묻기 때문에 인간적이다. 프로스트와 닉슨은 그전까지 일말의 교감도 통하지 않는데 결국은 이 한밤의 전화통화로 교감을 성사하고, 유능한 서로의 적으로 마지막 대전을 치른다. 결과는 프로스트의 승리다. 하지만 나는 실제로 일어난 일이었는지 아닌지 모르는 이 장면이 실제 기록된 닉슨의 패배자적 이미지를 넘어서서 훨씬 더 강하게 닉슨을 구제하는 동조감을 조성한다고 본다. 영화적으로 볼 때 둘은 경쟁구도에 있지만 이해할 만한 친구의 위치로도 격상한다. 닉슨은 죄를 지었지만 적어도 인간이기에 끌어안을 만한 사람이 된다. 정작 이때 중요한 것은 이 과정에서 닉슨의 무엇이 무마되고 있는가이다. 닉슨은 토론회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불법이라도 대통령이 하면 그건 불법이 아니다.” 뒤이어 그걸 후회하는 말을 했다고 해도, 그건 닉슨의 불변의 확신이다. 닉슨은 역사상 가장 강력하게 텔레비전에서 자기의 불법적 확신을 근거없는 방식으로 피력한 인물로 기록되었는데(거기에 비견할 만한 인물은 부시밖에 없다), 그러나 그 다음 이어지는 그의 클로즈업은 그의 무서운 확신을, 그에 대한 패배를 은연중에 인간적인 왜소함의 얼굴로 돌려 무마하는 효과를 낳는다. <프로스트 vs 닉슨>은 은연중에 나쁜 확신에 대한 무마가 있다. 알로이시스 수녀가 한 말, “걸레는 빨아도 걸레”라는 확신이 이때 겹친다. 한 번의 확신(<다우트>)과 또 한번의 확신(<프로스트 vs 닉슨>), 알로이시스의 확신과 닉슨의 확신. 이것이 이 두 영화에서 인물들이 승부를 겨룬 쟁점이다. 승부차기 결과 알로이시스가 지고 닉슨은 가까스로 무승부를 기록한 것 같다. 어째서 둘 다 1960년대인가 <프로스트 vs 닉슨>에서 닉슨은 1960년 대통령선거 TV토론회에서 “입술 위의 땀 때문에 대통령 자리를 빼앗겼다”고 말하는데, 그때 대통령직을 앗아간 건 존 F. 케네디였다. 그리고 영화 속 폴린 신부의 말에 따르면 <다우트>는 케네디 암살이 일어난 바로 다음해인 1964년을 무대로 한다. <다우트>의 감독 존 패트릭 셰인리는 부시가 이라크 전쟁에 살상 무기가 있다고 확신하고 이라크에 침공하는 걸 보고 이 이야기를 생각했다고 했고, 시대를 1964년으로 돌려놓았다. 두 영화의 시간대가 우연이라 해도 이건 생각해볼 만한 문제일 것이다. <다우트>의 폴린 신부는“확신이 든다고 해도 그건 감정이지 사실이 아닙니다”라고 알로이시스 수녀에게 반문했다. 우리는 여기서 폴린을 케네디의 다른 이름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폴린은 그저 망설임을 아는 사람이다. 망설임 없이 확신에 가득 찬 사람들이 언제나 가장 무섭고 위험하다는 걸 지적할 줄 아는 사람이다. 여기에 영화적인 것 외에 판단의 문제를 개입시키는 건 위험한 일이다. 다만 <다우트>와 <프로스트 vs 닉슨>은 어떤 확신, 그러나 우화 안에서의 확신과 더 명료하게 남은 역사 안에서의 나쁜 확신의 사례로서 서로 근접하여 비춘다. 확신에 대한 두개의 드라마. 차이가 있다면 하나는 우화이며 또 하나는 쇼였을 뿐이다.

[김은형의 아저씨의 맛] 맞으면서 커야 한다니까^^

네이버 사전에 쳐보니까 ‘역량이나 능력 따위를 모아서 다시 일어섬’ 이라고 나오는 ‘재기’라는 단어는 이제 거의 클리셰다. 잠시 텔레비전에서 사라졌다가 다시 등장해도 재기, 손목 좀 다쳤다가 깁스 풀고 나와도 재기, 웬만하면 재기나 부활 따위를 갖다 붙이니 말이다. 그래서 누가 재기했다는 기사를 봐도 감동적이지는 않은데 지난해 ‘재기’라는 말을 흐뭇하게 곱씹게 했던 인물이 있다. 아직 전성기라는 말을 붙이기엔 좀 뭣한, 그래서 여전히 재기 중이라고 봐도 무방할 개그맨 김국진이다. 내가 일하는 <한겨레> 섹션의 TV대담 코너에서 <라디오 스타>의 초창기 무렵 김국진을 열나게 ‘깠던’ 적이 있다. 하필 공중파 독한 프로그램의 효시가 된 이 코너로 복귀한 김국진은 웃자고 한 (센) 농담에 죽자고 버럭하는 모습을 자주 보였고 그 모습은 생뚱맞다 못해 처연해 보였다. 물론 오래전부터 불쌍해 보이는 이미지의 그였지만 독하고 능구렁이 같은 다른 출연진과 장단을 맞추지 못해 진짜 불쌍해지는 상황이 돼버린 거다. 말 그대로 영화 <라디오 스타>의 몰락한 왕년의 스타를 보는 기분이었달까. 우리의 독한 질타를 그가 봤는지, 그게 약이 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언젠가부터 김국진은 변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체념이었을 거다. 버르장머리 없는 후배들이 결코 자기를 ‘존경하는 대선배’로 대접해주지 않으리라 깨달은 것 같다. 물론 무시당하고 놀림받는 걸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아서 예의 이혼이나 골프 이야기로 공격당하면 얼굴은 벌게지고 코에서는 김이 나왔지만 그는 흐름을 깰 만큼 버럭하지는 않았고 강박적으로 뭔가 이 상황을 뒤집기 위해 억지를 쓰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그의 벌게진 얼굴은 CG로 빨갛게 칠해지고 똥 씹은 표정에 역시 CG로 비가 마구 쏟아지면서 웃음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여자 게스트만 나오면 이상하게 엮는 다른 MC들의 짓궂은 농담을 통해 그는 다시 수줍은 ‘늙은’ 청년으로 점점 돌아갔다. 그렇게 살벌한 정글에서 주춤주춤 적응을 해가더니 걸그룹 카라로까지 전수되는 “예예예” 회춘 댄스를 터뜨리고 사정없는 MC들의 공격에 “원펀치 스리 강냉이”(내가 한번 때리면 이빨이 3개 나간다)라는 귀여운 앙탈 개그로 포효하기에 이르렀다. 요즘 <라디오 스타>에서 가장 덜 뻔한 캐릭터인 그를 보면 재기라는 말보다는 성장이라는 말을 쓰고 싶다. 사람은 죽을 때까지 배우고 성장한다는 게 공자님 말씀만은 아니라는 걸 사십대 중반의 김국진을 보면서 새삼 느끼게 된다. 만약 김국진이 ‘국찐이빵’시절의 그 모습 그대로, 또는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복귀해서 자리잡았다면 성장담이 아니라 그냥 재기담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결과적으로는 다행스럽게도 복귀작으로 ‘지뢰’를 밟는 바람에 이 험한 (오락 프로그램의) 시대에 군내 나는 아저씨의 아집- 왕년의 스타야!- 을 버리고 탱탱하게 맷집 좋은 ‘젊은 오빠’로 돌아왔다. 역시 사람은 맞으면서 커야 큰 그릇 된다니까…?

<슬럼독 밀리어네어> 이 부조리한 기적을 어떻게 믿지?

Q : 이 부조리한 기적을 어떻게 믿지? A : <슬럼독 밀리어네어>의 대니 보일 감독은 여전히 몽상가거든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올해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 등 최다 8개 부문을 수상했다. 게다가 정말 ‘골고루’라는 표현에 걸맞게 원작이 있는 작품으로서 각색상, 인도풍 음악이 대부분인 사운드트랙으로 음악상과 주제가상, 그리고 100% 낯선 인도 로케이션으로 촬영됐음에도 촬영상을 수상한 것을 보면 말 그대로 올해 아카데미가 전폭적인 지지를 보낸 단 하나의 작품이라 해도 틀리지 않다. 얼핏 외국어영화상 후보로 생각될 법도 한 <슬럼독 밀리어네어>에 그들이 아낌없는 찬사를 보낸 이유는 뭘까. <슬럼독 밀리어네어>를 둘러싼 이모저모와 더불어 이 영화를 바라보는 듀나와 남다은 평론가의 서로 다른 두개의 시선을 싣는다. <텔레그라프>의 데이비드 그리튼이 ‘오바마 시대의 첫 번째 영화’라는 상징적 의미를 부여한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한 인도 빈민가 소년의 기적적인 판타지에 관한 영화다. 뭄바이 빈민가 출신의 18살 고아 자말(데브 파텔)은 거액의 상금이 걸린 ‘누가 백만장자가 되고 싶은가’라는 최고 인기 퀴즈쇼에 참가한다. 처음에는 모두에게 무시당하던 그였지만 예상을 깨고 최종 라운드에 오르게 된다. 정규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그가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본 경찰은 자말을 사기죄로 체포한다. 하지만 경찰에게 증언하면서 지금껏 자말이 살아온 모든 순간이, 정답을 충분히 알아낼 수 있는 단서를 제공했음이 플래시백으로 차례차례 보여지고, 그가 퀴즈쇼에 출연한 진짜 목적도 서서히 드러난다. 그렇게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하나뿐인 형 살림(마두르 미탈)과 갖은 어려움을 다 겪고, 또한 처음부터 운명이라 믿었던 여자 라티카(프리다 핀토)를 향한 오랜 이야기가 펼쳐진다. 인도가 배경인 현대판 <올리버 트위스트> 인도 태생의 비카스 스와루프가 자신의 일을 하면서 두달 만에 완성했다는 소설 는 믿기 힘든 행운에 관한 이야기이자, 위선과 거짓을 배제한 정직한 삶에 관한 동화다. 학교 문턱에도 가본 적이 없는 가난한 고아 청년이 지상 최대의 상금이 걸린 퀴즈쇼에서 우승한다. 모두가 그를 의심했지만 그 열두 문제는 모두 우연하게도 그의 삶과 관련된 문제였다. 책상 위에서 머리로 익힌 ‘지식’이 아니라 그의 몸에 깊게 새겨진 ‘체험’의 문제들이었다. 종교 싸움에 휘말려 어머니를 잃고, 형과 함께 타지마할에서 관광안내원으로 일하며 생계를 유지했으며, 거대 조직의 보스가 된 라티카를 구해내기 위해 동분서주하면서 알게 된 해답들이었던 것. <슬럼독 밀리어네어>의 기획자 테사 로스는 2005년 가 출간되자마자, 필름4의 북 스카우트 케이트 싱클레어의 권유로 접하게 됐다. 열두 문제에 얽힌 이야기를 재구성해나가면서 펼쳐지는 인도의 풍경과 현실이 꽤 복잡했지만, 이야기 자체가 지닌 메시지의 힘을 믿었다. 그리고는 곧장 <풀 몬티>(1997), <미스 페티그루의 어느 특별한 하루>(2008)의 시나리오를 쓴 사이먼 뷰포이에게 연락했다. 원작 소설을 읽고 ‘인도에서 펼쳐지는 찰스 디킨스의 이야기’라 생각한 그는 흔쾌히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빅토리아 시대의 빈곤과 부조리한 사회계층 구조에 대한 신랄한 비판자이자, 가난하고 고통받고 박해받는 자들의 지지자이기도 했던 찰스 디킨스는 무엇보다 화려하고 생동감 넘치는 문체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사이먼 뷰포이는 바로 <슬럼독 밀리어네어>가 퀴즈 프로그램 하나로 빈민과 부자 사이를 오가면서, 갖가지 인간 군상이 등장해 영화 전편을 풍성하게 메우는 현대판 찰스 디킨스 이야기가 되길 바랐던 것이다. 라는 밋밋한 제목이 <슬럼독 밀리어네어>라는 제목으로 탈바꿈하게 된 것도 순전히 그의 의지였다. 시나리오가 완성되자마자 사이먼 뷰포이를 비롯한 제작진이 가장 먼저 떠올린 감독은 바로 대니 보일이었다. 시나리오를 읽어 내려가던 대니 보일은 그가 전혀 손대지 않아도 되는 훌륭한 시나리오임을 알아채고는 단숨에 제의를 수락했다. 이 이야기가 인도를 배경으로 한 현대판 <올리버 트위스트> 스토리가 될 것이란 제작진의 의도도 거기에 한몫했다. 영화지 <시네아스트>의 로버트 콜러도 “찰스 디킨스가 주요한 배경으로 다뤘던 영국 산업혁명 초창기의 느낌과 확산되는 글로벌리즘의 새로운 영토로서 급속한 산업화가 이뤄지는 <슬럼독 밀리어네어>의 인도가 꽤 비슷하다”고 지적한다. 게다가 대니 보일은 처음에는 퀴즈쇼가 중심에 놓인 이야기라는 점에서 의구심이 들었지만, 상당한 분량으로 출연하는 아이들의 맑고 순진한 품성에 매료됐다. 그들은 대니 보일의 2004년 작품 <밀리언즈>의 아이들을 연상시키는 측면도 있다. <밀리언즈>의 두 꼬마 안소니와 데미안은 어느 날 100만파운드가 담긴 가방 하나를 발견하고 마음껏 돈을 쓰기로 결심하지만(유로화 통합 전 열흘 동안), 그것이 사실은 은행강도가 훔친 돈가방임이 드러나면서 골치 아픈 소동을 겪게 된다. 특히 천사표 동생 데미안은 돈가방을 ‘하늘에서 내려준 선물’이라 믿고서, 그 돈으로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돈을 나눠주는 착한 아이였다. 영화 속 자말의 어린 시절 모습이 딱 그렇다고나 할까. 그러고 보면 <밀리언즈>의 형 안소니와 <슬럼독 밀리어네어>의 형 살림도 권력 지향적인 속물이라는 점에서 닮았다. 배낭여행자처럼 촬영했던 추격신 대니 보일은 오직 영화 때문에 처음으로 인도를 방문했다. 원작을 새롭게 해석하고 변형을 가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인도 외의 로케이션 장소를 찾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뭄바이 빈민가의 풍경을 그려내는 것은 오직 인도 내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아버지가 전쟁 때 인도에 오신 적이 있고, 제게 많은 인도 이야기를 들려주셨다”는 게 대니 보일 감독의 사전 정보였다. 하지만 인도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스스로의 표현대로 ‘컬처 쇼크’를 받았다. 엄청난 인파와 소음, 그리고 뭄바이라는 도시가 뿜어내는 에너지에 압도당한 것. 환경 자체가 지금껏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시스템을 필요로 했다. 그러한 어려움은 인도의 로컬 프로덕션 회사인 테이크원(Take One)의 도움으로 거의 하루 종일 교통마비 상태인 인도에서 무사히 촬영을 진행할 수 있었다. 제작진은 인도에서 가장 큰 슬럼가인 다하라비, 그리고 뭄바이에서 서쪽에 위치한 가장 활기 넘치는 장소인 공항 근처의 주후 등지에서 촬영했다. 슬럼가에 최대한 방해가 가지 않게 최근 레드원 카메라와 함께 한창 주목받는 경량 디지털카메라 SL-2K를 사용했다. 이미 대니 보일과는 <28일후…>(2002) 등의 작품에서 디지털 작업을 함께했던 앤서니 도드 맨틀 촬영감독이기에 호흡은 문제없었다. 주인공 소년들이 슬럼가를 질주하는 추격신의 경우 앤서니 도드 맨틀이 한손으로 카메라를 들고서도 슬럼가 구석구석을 담아냈다. “촬영감독이 아니라 거의 배낭여행자 수준”이었다는 게 감독의 얘기다. 캐스팅은 더 어려운 문제였다. 최대한 슬럼 지역 실제 주민들을 캐스팅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영어 대사로 진행하기 때문에 그것만이 능사는 아니었다. 인도를 비롯 영국과 미국 등지를 돌아다니며 7살, 13살, 18살을 연기할 세 그룹의 배우를 동시에 캐스팅하기 시작했는데 연령대별로 일단 외모나 분위기가 비슷해야 하는데다가, 영어를 할 줄 아는 대부분의 학생들은 중학교 이상의 나이라는 점이 걸림돌이었다. 스탭 중 한명의 제안으로 어린 자말은 그대로 힌두어를 사용하게 하고 그 이후부터 영어로 이어가는 방식을 택하게 됐다. 그래서 주인공들의 어린 시절을 연기한 아이들은 실제 슬럼가에서 캐스팅됐으며 촬영 기간 동안 짧은 영어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착한 눈’을 가진 18살 자말 캐스팅은 순전히 대니 보일의 딸의 아이디어였다. 영국 인기 TV시리즈 <스킨스>의 광팬인 딸이 데브 파텔을 추천한 것이다. 그렇게 <스킨스>의 말썽쟁이 모슬렘 소년 ‘앤워’는 그와 정반대의 청년 자말로 태어나게 됐다. 주인공 자말 캐스팅은 감독 딸의 아이디어 얼핏 돈이라는 요소로 인해, 정체불명의 돈가방을 둘러싼 이야기인 대니 보일의 데뷔작 <쉘로우 그레이브>(1994)나 마약으로 번 돈다발이 등장하는 <트레인스포팅>(1996), 혹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돈가방 이야기 <밀리언즈>를 떠올릴지도 모르겠지만(그러고 보면 대니 보일 영화에서 ‘돈’은 늘 중요한 모티브를 제공했다), 사실 <슬럼독 밀리어네어>와 가장 가까운 느낌의 그의 이전작을 고르라면 단연 <이완 맥그리거의 인질>(1997, 이하 ‘<인질>’)이다. 물론 두 작품 사이에 꽤 큰 정서적 차이가 있긴 하지만 <슬럼독 밀리어네어>의 자말처럼 <인질>의 로버트(이완 맥그리거) 역시 한심한 가난뱅이 청소부이고, 끊임없이 곤경에 빠지게 하는 현실과 싸우며 미국 전역으로 도주하는 커플의 로맨스 로드무비라는 점에서 유사하다. 무엇보다 두 영화 모두 완전한 사랑에 관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그렇다. 거기에는 원작을 자기 식대로 만들고자 하는 대니 보일의 의지가 숨어 있다. 그가 영화지 <사이트 앤드 사운드>와의 인터뷰에서 “내가 이전에 만든 <28일후…>(2002)를 딱히 스스로 좀비영화 장르라고 생각하지 않듯, <슬럼독 밀리어네어> 역시 다른 많은 발리우드영화를 봤지만 그에 대한 직접적인 오마주라 생각하고 만들지는 않았다”고 말한 데서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대니 보일이 생각한 실마리는 무엇일까. 대니 보일은 <인질>에서 두 남녀에게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허락했듯 <슬럼독 밀리어네어>에서도 불가능에 가까운 현실을 지켜보며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등장시킨다. 이는 희랍고전극의 극작술 중 하나로 ‘초자연적인 힘을 이용해 극의 긴박한 국면을 일시에 타개하고 극적인 결말로 이끌어가는 수법’이다. 사전적인 의미로 ‘갑자기 나타난 신’ 정도 될 텐데 극중에서 기계장치로 작동하는 구름 따위를 타고 느닷없이 내려오기 일쑤였으므로 이런 이름이 붙었다. 종종 ‘부자연스럽고 억지스런 해결’을 일컫는 표현으로 이해되기도 하지만 대개의 로맨스 모험 소설들이 애용하는 장치인 것만 분명하다. <슬럼독 밀리어네어>가 보여주는 기적은 그렇게 이해될 수 있다. 다시 <인질>로 돌아가자면, 로버트는 “어떻게 이처럼 부조리하고 비이성적인 운명을 믿어야 하지?”라는 질문에 “왜냐하면 난 몽상가니까”라고 답한다. 그렇다. 대니 보일도 <슬럼독 밀리어네어>를 향한 수많은 질문에 바로 그렇게 답할 것이다. 난 여전히 몽상가야. 똥 뒤집어쓰게 한 그 배우는… 아미타브 밧찬과 아요디아 등 영화 속 실제 이야기 아미타브 밧찬은 어린 자말이 똥을 뒤집어쓴 몸으로 다가가 사인을 받을 정도로 사랑하는 배우다. 1942년 인도에서 태어난 그는 명문 델리대학 출신으로 영화배우로 데뷔해 무수히 많은 영화들에 출연했으며 한때 정계에 진출하기도 했다. 퀴즈쇼 <누가 백만장자가 되고 싶은가>가 2000년부터 인도에서 방송될 때 진행을 맡기도 했었다. 영화에서도 그 인기가 확인되듯 발리우드를 대표하는 위대한 배우 중 하나로 그의 아들 아비셰크 밧찬 또한 영화배우로 활동 중이다. 하지만 정작 아미타브는 <슬럼독 밀리어네어>가 너무 인도의 음지만을 보여줬다며 불쾌감을 표했다고. 인도는 인구의 80%를 차지하는 힌두교도들과 그 속에서 분리 독립을 요구하는 이슬람교도들의 갈등의 역사가 깊다. 특히 원작에서 주인공이 자신의 성장기의 중요한 일부분이라 말하는 아요디아는 1992년 두 종교집단의 극단적 유혈 충돌이 벌어진 곳이기도 하다. 바브리 이슬람 사원이 힌두교 람 사원을 허물고 그 자리에 세워졌다고 믿는 힌두교도들이 그 사원을 파괴하고 난장판으로 만들며, 전국적으로 힌두와 이슬람의 충돌이 번지면서 수천명이 목숨을 잃게 된 것. 영화에도 등장하듯 이런 폭동을 힌두 경찰들이 묵인했다는 소문도 공공연하다. 자말 가족은 이슬람교도로 나오며 어머니는 그 폭동의 한가운데서 숨을 거두고 만다. 영화 속 퀴즈 중 하나는 ‘역사상 가장 먼저 100점을 기록한 크리켓 선수’에 관한 것이다. 인도에서 크리켓은 거의 종교에 가까울 정도의 사랑을 받는 스포츠다. 세계 최강은 호주라 할 수 있으며, 자말은 예시들 중에서 호주의 대표적 크리켓 스타 리키 폰팅, 그리고 천문학적인 수입을 자랑하는 인도 최고의 크리켓 스타 서친 텐두카 사이에서 고민하다 정답 ‘잭 홉스’를 맞히게 된다.

<슬럼독 밀리어네어>에 찬성하는 듀나의 견해

<슬럼독 밀리어네어>에 대한 글을 청탁받았을 때, 나는 아직 영화를 보지도 않았었다. 심지어 영화 예고편도 제대로 보지 않았고 몇주 전 사다놓은 원작 소설도 읽어보지 못했으니, 이 영화에 관련된 내 지식은 이 영화와 관련된 몇몇 사람들의 이름과 기본 설정뿐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는 당연히 이 영화를 옹호해야 할 입장이 되었으니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잠시 머리를 굴리자 답이 나온다. 아, 출신성분.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작품을 보지 않고 출신성분을 읊는 것으로 비평 절반이 끝날 수도 있는 영화다. 생각해보자. 이 영화의 주인공은 뭄바이의 빈민가 출신 소년이다. 종교분쟁으로 고아가 되었고 뭄바이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며 온갖 험악한 일들을 다 겪는다. 여기까지는 괜찮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엘리트 가문 출신인 부유한 인도 외교관 비카스 스와루프의 영어 소설이 원작이고 인도영화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영국 감독 대니 보일과 영국 작가 사이먼 뷰포이가 각색한 영국영화다. 심지어 인도인 주인공을 연기하는 데브 파텔도 영국에서 태어난 영국 배우다. 여기에 영화가 제목에서부터 자랑스럽게 과시하는 물질적인 해피엔딩까지 치면 당연히 보는 사람들은 미심쩍어질 수밖에 없다. 이들이 <슬럼독 밀리어네어>를 제3세계의 빈곤을 이야깃거리로 착취하는 선진국의 오락물로 봐도 할 말이 없다. 실제로 이 영화는 다국적 식당 체인점의 번지르르한 코스 요리와 같은 맛을 풍긴다. ‘영국 감독 작품’이라는 출신성분의 문제 여기에 대해 변호할 필요는 없다. 다 공공연하게 표면에 드러난 사실이기 때문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런 것이다. 그래서 그 결과물로 나온 작품이 유해한가? 그렇다면 얼마나 유해한가? 가장 기초적인 질문부터 해보자.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현대 인도를 얼마나 정직하게 바라보는가. 미안하지만 나는 모른다. 아마 이 글을 읽은 대부분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한 나라의 본모습을 알기 위해서는 책이나 신문이 제공하는 간접정보를 흡수하는 것 이상을 해야 한다. 최소한 그곳에 가서 사람들 사이에 섞여 몇년 이상 살아봐야 한다. 인도처럼 복잡한 나라라면 사실 그것도 모자란다. 그러나 비교대상은 있다. 오리지널 발리우드영화들과 미라 네어나 디파 메타와 같은 감독들이 만든 정통적인 아트하우스영화들이다. <슬럼독 밀리어네어>의 출신성분이 의심되는 것은 영국영화여서이기도 하지만 형식적으로 이 영화가 이들 중 어느 쪽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는 할 수 있다. 빈민가의 밑바닥 세계에서부터 호사스러운 인도 텔레비전 세트까지 커버하는 <슬럼독 밀리어네어>의 세계는 일반적인 현실세계가 가지는 복잡성과 입체성을 상당한 수준으로 모방한다. 이 묘사가 서구인의 관점이냐를 따지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인도에서 나오는 아트하우스영화에서 ‘서구적 관점’을 제거하면 뭐가 남는가? 이야기 자체는 어떤가? 이 영화가 제공하는 완벽한 해피엔딩과 정갈한 로맨스, 술술 흘러가는 드라마는 의심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가? 분명 이 영화의 주인공 자말 왈리크의 이야기는 미라 네어의 <살람 봄베이>(1988)의 길거리 소년들처럼 당시 사회의 정확한 반영은 아니다. 하지만 자말과 <살람 봄베이>의 소년들은 전혀 다른 목적을 위해 전혀 다른 방식을 통해 디자인되었다. 그리고 관객은 모두 자말과 그의 이야기가 어떤 목표를 위해 디자인되었는지 안다. 모를 수가 없다. 이 영화의 이야기는 묘사되는 세계가 복잡한 것만큼이나 단순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자말의 이야기는 가장 안전한 부류의 오락이다. 관객에게 박진감 넘치는 즐거움과 대리 만족을 제공해주지만 정작 그것을 통해 거짓된 희망을 약속하지는 않는다.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모든 영화’가 아니다. 그냥 제한된 목표를 가진 하나의 영화일 뿐이다. 이 영화의 치명적 단점으로 지적될 수 있는 것들은 인도를 다룬 수많은 다른 영화들에 의해 해소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슬럼독 밀리어네어>가 많은 관객에게 그 영화들로 가는 길을 마련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韓日 스타 총출동 '텔레시네마' 면모는>

(서울=연합뉴스) 강종훈 기자 = 한국의 PD 및 연기자가 일본 작가와 손잡고 만드는 한일합작 '텔레시네마' 프로젝트가 각 작품의 제작을 속속 마치며 완성 단계에 접어들고 있다. 현재 제작이 확정된 7편 중 '천국의 우편배달부' 등 6편이 제작 중이거나 제작이 완료됐다. 제작사인 삼화네트웍스 측이 '101번째 프러포즈'의 노지마 신지 작가와 계약을 협의 중이어서 1편이 추가될 가능성도 있다. 90-105분 분량으로 제작되는 각 작품은 10월께 한국 SBS와 일본 TV아사히에서 동시에 방영될 예정으로 편성 시간을 협의 중이다. TV 방영에 앞서 이르면 5월께 극장에서 3-5편을 상영하는 계획도 추진 중이다. 양국의 최정상 작가와 PD, 스타 배우들이 뭉쳐 화제가 된 이번 프로젝트의 각 작품의 면면에 양국 드라마팬의 이목이 쏠려왔다. '천국의 우편배달부'는 '미안하다 사랑한다'의 이형민 PD가 연출하고 '롱 베케이션'의 기타가와 에리코 작가가 극본을 썼다. 주연은 동방신기의 영웅재중과 탤런트 한효주가 맡았다. IT기업의 젊은 사장이 죽은 사람을 잊지 못하는 사람들의 간절한 편지를 천국에 전해주는 우편배달부가 되고 우연히 만난 여자와 그 일을 함께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트라이 앵글'은 '귀가일기'의 오자키 마사야 작가와 '오! 필승 봉순영'의 지영수 PD가 호흡을 맞추며 안재욱, 강혜정, 이수경 등이 출연한다. 젊은 재벌 미망인이 소장한 세계적인 미술 작품을 둘러싸고 그의 주변 인물들이 벌이는 속고 속이는 서스펜스 블랙 코미디 드라마이다. '결혼식 후에'에서는 '고쿠센'의 요코타 리에 작가와 '내 이름은 김삼순'의 김윤철 PD가 만났다. 신성우, 예지원, 배수빈, 고아성 등이 출연한다. 40대 중반의 대학 동창생들이 오랜만에 모인 친구의 결혼식장, 한 여자 동창생의 딸이 동창생 중에 아빠가 있다고 찾아오면서 일어나는 에피소드가 담긴다. '얼굴과 마음과 사랑의 관계'는 '퍼스트 러브'의 오오시이 시즈카 작가와 '천국의 계단'의 이장수 PD의 조합에 강지환, 이지아가 주연으로 나선다. 꽃미남 인테리어 디자이너와 예쁘지는 않지만 밝은 성격을 가진 여자의 사랑을 둘러싸고 얼굴과 연애라는 주제를 다룬 코믹 멜로물이다. '돌멩이의 꿈'에서는 '야마토나데시코'의 나카조노 미호 작가와 '왕초'의 장용우 PD, 차인표와 김효진이 손을 잡았다. 세계적인 축구선수를 꿈꾸는 열 살 소년과 돌팔이 관상쟁이의 한국 일주 여행기를 따뜻하게 그린다. '파라다이스'는 지진희, 김하늘이 주연을 맡아 '지금 만나러 갑니다'의 오카다 요시카스 작가와 이장수 PD와 함께 촬영 중이다. 교도소에서 갓 출소한 여성이 '낙원'이라는 섬을 찾아 무작정 탄 배에서 만난 남자의 도움으로 섬 학교 급식소에 취직하면서 일어나는 에피소드다. '나이 19세'는 다음 달 촬영을 시작할 예정으로 '하얀 거탑'의 이노우에 유미코 작가와 장용우 PD가 뭉쳤다. 빅뱅의 탑과 승리, 박산다라가 출연한다. 3명의 19세 남녀가 어느 살인사건으로 인해 함께 도망다니며 겪는 성장기다. 삼화네트웍스 신현택 회장은 "텔레시네마는 신한류의 주춧돌을 놓기 위한 프로젝트"라며 "이제 한류가 국내가 아니라 아시아를 넘어 세계로 갈 수 있는 콘텐츠를 개발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50부작과 같은 긴 드라마는 해외에서 방영이 힘든 상황에서 8부작 이내의 작품으로 승부해야 한다"며 "이번 프로젝트는 아시아 최고의 드라마를 만들 수 있는 능력으로 외국 자본을 들여와 킬러콘텐츠를 만들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double@yna.co.kr (끝) <연합뉴스 긴급속보를 SMS로! SKT 사용자는 무료 체험!>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그 액세서리] 화풀이 대신 다시 헤드폰을 쓰다

<내 심장이 건너뛴 박동>에서 톰(로맹 뒤리스)은 라이터를 뱅글뱅글 돌리는 습관이 있고 가죽 블루종을 입을 때도 타이 매는 걸 좋아하는 스물여덟살의 젊은 부동산 중개인이다. 허울이 부동산 업자일 뿐, 실제로 그가 하는 일은 집세가 밀린 세입자를 야구 방망이로 두들겨 패거나 철거 예정인 건물에서 버티는 입주자를 쫓아내기 위해 계단에 쥐를 풀고 수도와 전기를 끊는 추접한 일이다. 시궁창 같은 일과에서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음악뿐이다. 식당에서 아버지를 만날 때나 차 안에서 날이 어두워지기를 기다릴 때, 혹은 건널목을 건널 때 톰은 늘 헤드폰을 쓰고 있다. 동그란 소니 헤드폰으로 그가 듣는 음악은 주로 ‘텔레팝뮤직’이나 ‘킬스’의 곡이다. 멜로디와 비트에 집중하는 톰의 취향은 알고 보면 죽은 엄마 소니아에게 물려받은 것으로, 그는 피아니스트였던 엄마의 연주테이프를 오랫동안 보관해왔다. 가끔씩 스스로를 위해서만 피아노를 치던 톰은 어느 날 시립 음악단의 피아노 연주자 오디션을 보기로 결심한다. 말이 통하지 않는 중국인 소녀에게 피아노를 다시 배우는 동안 톰은 뜻대로 안되는 연주 때문에 분노하고 엉뚱한 화풀이를 하고 소리를 질러댄다. 낮에는 주먹질을 하고 창문을 부수다가 밤에는 손등이 찢어진 손으로 바흐의 ‘토카타 E 마이너’를 연주하는 기우뚱한 생활. 톰은 커다란 헤드폰을 뒤집어쓴 채 음악을 듣고 술집 탁자와 자동차 대시보드, 리나스 샌드위치 접시를 건반 삼아 피아노 연주를 연습한다. 헤드폰을 쓰는 순간 톰은 프라이팬에 맞아 쓰러진 아랍 남자도, 부인을 따돌리고 매일 밤 바람을 피우는 친구도, 깨진 창문과 자루에서 풀려나온 쥐와 쫓겨난 자들의 악을 쓰는 목소리도 다 잊는다. 그저 호로비츠의 다큐멘터리에서 본 경주마가 트랙을 달리는 것 같은 손가락의 리듬감만 기억한다. 마침내 오디션 날. 톰은 한번도 입지 않은 크리스찬 디올의 흰 셔츠를 꺼내 입고 중국 차를 한 모금 마신 뒤에 슈트 차림으로 오디션을 보러 간다. 손수건으로 건반을 닦고 심호흡을 한 뒤 연주를 시작한다. 그러고는 완전히 망친다. 다시 거리로 나온 톰은 엉망이 된 스스로의 연주에 화를 내거나 울지 않는다. 거리의 깡통을 걷어차거나 쓰레기통을 뒤엎지도 않는다. 다만 사거리에 선 채로 다시 헤드폰을 쓴다.

[도서] 라틴의 영혼을 듣다

질베르토 음악을 듣고 싶다 지수 ★★★★★ 라틴 음악에 대한 정보 지수 ★★★★ 2003년 조앙 질베르토의 도쿄 콘서트. <행복>을 마친 그는 품에 안은 기타 위로 몸을 기대듯, 오른손을 입 언저리에 댄 채로 고개를 숙였다. 몇분이 그렇게 지나고도 그가 좀처럼 일어날 기색이 없자, 관객은 박수를 쳤다. 그는 미동도 없이 앉아 있을 뿐이고 사람들의 박수 소리는 커졌다 작아졌다를 반복했다. 그는 그렇게 20분여를 앉아 있었다. 그러다 나이 든 외국인이 맨발로 걸어나와 부드럽게 질베르토의 어깨를 감싸안고 그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 환호성. 질베르토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조빔의 곡 <코르코바도>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나중에 질베르토는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전혀 느끼지 못한 채로 관객의 박수 소리 하나하나에 마음으로 답을 하고 있었다고 했다. “이런 관객을 찾고 있었다.” 작사가이자 EBS 라디오 <세계음악기행>의 주말 DJ인 박창학이 쓴 <라틴 소울>은 남미 음악에 대한 이것저것을 들려주는 책이다. 그는 이 책에서 뮤지션 이름 읽는 법에 대한 이야기를 두런두런 늘어놓다가, 좋아하는 뮤지션에 얽힌 일화들을 회고하다가, 음반을 추천하다가, 노래 가사를 해석해주다가 한다. 음반이 너무 많아 뭐가 뭔지 헷갈리는 피아졸라의 디스코그래피에 얽힌 사연과 베스트 음반 추천은 라틴 음악에 갓 입문한 이에게 큰 도움이 된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 모든 게 라틴 음악에 대한 것으로 수렴된다. 그러니 이 책 자체가 라틴의 영혼, 그러니까 ‘라틴 소울’인 셈이다. 많은 이야기를 담은 책이지만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아무래도 보사노바의 창시자이자 ‘보사노바의 신’으로 불리는 조앙 질베르토에 대한 부분이다. 보사노바를 세계에 알린 <<게츠/질베르토>> 음반을 녹음하던 때 질베르토의 불평불만 때문에 가운데 낀 (무려!)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든지 하는 일화들은 흥미진진하다. 특히 일본 잡지에 실렸던 브라질 상파울루대학 음악사 교수 로렌조 맘미의 글을 중역해 실은 ‘조앙 질베르토와 보사노바의 유토피아적 계획’은 음악과 보사노바, 그리고 질베르토에 대한 아름답고 통찰력있는 비평글이다. “신체적으로도 음악적으로도 조앙 질베르토는 집 밖을 나서지 않았다. 이같은 태도에는 대체로 퇴보적이라는 딱지가 붙여지곤 한다. 그러나 그의 음악은 미래를 지향하며 유토피아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그가 노래하는 텔레비전 광고에서조차 나태함이 아닌 마치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감각이 전해진다. 재즈가 힘의 의지라고 한다면 보사노바는 행복의 약속이다.” 보사노바를 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라도 멈추어 다시 생각하게 하는 글의 힘을 느낄 수 있다.

히가시노 게이고 원작의 영화와 드라마 대표작 가이드

[영화 부문] 일본판과 프랑스판, 뭐가 다를까 비밀 秘密 1999년 | 감독 다키타 요지로 | 출연 히로스에 료코, 고바야시 가오루 더 시크릿 The Secret 2007년 | 감독 뱅상 페레 | 출연 데이비드 듀코브니, 올리비아 설비 <비밀>은 히가시노 게이고를 상업적으로 성공한 작가의 반열에 올린 작품이자 영화로 만들어진 그의 첫 번째 소설이다. 또한 히가시노 게이고는 데뷔작 <방과 후>로 에도가와 란포상을 수상한 이후 내내 상복이 없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정통 추리물의 작법에서 벗어나 ‘빙의’라는 초자연적 소재를 채택한 이 작품으로 비로소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을 수상했다. 원작 <비밀>과 8년의 시차를 두고 일본과 프랑스에서 제작된 두편의 영화는 서사에 접근하는 방식에서 미묘한 차이점을 보인다. 다키타 요지로의 <비밀>이 원작에 충실하되 유머러스한 기조를 잃지 않은 편이라면, 뱅상 페레의 <더 시크릿>은 딸의 몸에 깃든 아내와 남편간의 갈등을 중심에 놓았다. 그리고 원작 <비밀>의 시점이 남편/아버지에게 집중된 반면, <더 시크릿>은 빙의된 아내의 심리 묘사에 치중한다. 그리고 그에 따라 일본판 영화에서도 유지되었던 결말의 반전이 <더 시크릿>에서는 모양새를 달리한다. 한편 영화 <비밀>에는 원작자인 히가시노 게이고도 대학 교수 역할로 카메오 출연한 바 있다. [영화 부문] 게임의 본질은 함수 게임 g@me 2003년 | 감독 이사카 사토시 | 출연 후지키 나오히토, 나카마 유키에 <용의자 X의 헌신>에서 히가시노 게이고는 ‘기하 문제로 보이지만 실은 함수 문제’라는 표현과 함께 본격 추리물의 트릭에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즉 이것은 주어진 단서들을 조합하여 답을 내는 것이 아니라 전제부터 다시 사유하라는 것. <게임의 이름은 유괴>를 원작으로 한 영화 <게임> 또한 이처럼 발상의 재구성을 요하는 트릭을 숨겨놓은 채 관객을 게임으로 초대한다. 제안서를 거절당한 광고기획자 사쿠마는 광고주 가츠라기의 집 앞을 서성이다 가츠라기의 딸인 쥬리를 만난다. “나를 유괴하지 않겠어요?”라고 유혹하는 쥬리. 그리하여 가츠라기를 상대로 한 사쿠마와 쥬리의 유괴 자작극 게임이 시작된다. 빈틈없는 유괴 시나리오를 만드는 철두철미한 광고기획자 사쿠마 역은 후지키 나오히토가 맡았다. 히가시노 게이고 또한 그에 대해 “이미지 그대로의 캐스팅”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영화 부문] 입시 비리를 둘러싼 장르 삼중주 호숫가 살인사건 レイクサイド マ-ダ-ケ-ス 2004년 | 감독 아오야마 신지 | 출연 야쿠쇼 고지, 야쿠시마루 히로코 명문 사립중학교 입시 준비를 위해 세명의 학생과 그 학부모들, 그리고 유명 입시 강사가 외딴 호숫가 별장에 모인다. 그곳에 뜻하지 않은 방문자가 찾아오고, 이어서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원작 <호숫가 살인사건>은 세개의 장르가 동거하는 소설이다. 살인사건을 은폐하려는 이들의 처절한 노력을 다룬 전반부의 스릴러 전개는 어느새 클로즈드 서클, 즉 밀실 트릭을 규명하는 본격 추리물로 바뀐다. 그리하여 밝혀지는 진실은 입시제도의 추악한 이면이라는 사회파 미스터리적인 고발로 가 닿는다. 아오야마 신지가 각색을 통해 방점을 찍은 부분은 그중 세 번째. 원작에 비해 인물의 수도 줄이고 사건 전개도 단순화한 영화판 <호숫가 살인사건>은 범인과 피해자의 행동 동기가 명확하지 않은 등 추리물로서는 약점을 가지고 있다. 반면 경쟁을 부추기는 입시제도에 대한 당사자들의 입장을 더욱 첨예하게 부각시켰다. 그리고 이 메시지는 일제고사 실시와 3불정책 폐지 등 뜨거운 감자가 산적한 우리나라의 교육현실을 섬뜩하게 상기시킨다. [영화 부문] 남겨진 자의 고통 편지 手紙 2006년 | 감독 쇼노 지로 | 출연 야마다 다카유키, 사와지리 에리카 시작과 함께 범죄가 일어나고 범인이 체포된다. 그리고 그 과정은 관객에게 낱낱이 보여진다. 요컨대 <편지>는 추리물이 아니다. 그 직후부터 카메라는 남겨진 범인의 동생 나오키를 쫓는다. 자신을 뒷바라지해주던 형의 투옥으로 인해 진학을 포기한 나오키는 직업전선에 뛰어들지만 ‘살인자의 동생’이라는 꼬리표는 계속해서 그를 따라다닌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 중 가장 정통적인 사회파 미스터리에 가까운 <편지>를 각색한 이 영화에서 극을 이끌어가는 힘은, 가족이 재소자라는 사실을 숨기며 살아가야 하는 나오키의 살얼음판 같은 삶의 궤적에서 나온다. 그리고 연대책임을 중시하는 일본사회의 냉혹한 공기가 그 서스펜스를 더한다. 원작과의 주요한 차이점은 나오키의 꿈을 뮤지션에서 개그맨으로 바꾼 것. 그리고 이 차이는 원작과는 또 다른 모습으로 눈물샘을 자극하는 결말을 이끌어낸다. [드라마 부문] 원작을 과감히 벗어난 걸작 백야행 白夜行 2006년 | | 출연 야마다 다카유키, 아야세 하루카 각색에서 원작과 철저히 다른 노선을 견지한 드라마. 그런 이유로 방영 당시 원작의 팬들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기도 했다. 소설 <백야행>이 15년 전 발생한 전당포 살인사건을 추적하는 형사 사사가키와 목격자들의 시점을 중심으로 서술된 반면 드라마 <백야행>은 줄곧 범인의 시점에서 진행된다. 이에 관해서는 작품의 자유로운 각색에 대해 열린 입장인 히가시노 게이고조차 부정적으로 평가한 바 있는데 “원작이 미스터리라면 드라마는 사회파 미스터리”라는 것이 제작진의 입장이었다. 어쨌든 이같은 각색을 통해 시효가 만료되기 전까지 해는 떠 있으되 밤과 다를 바 없는 날들을 살아야 하는 주인공들의 내면과 원작의 주제의식은 더욱 부각되었고, 마침내는 가도카와의 TV매거진 <더 텔레비전>이 매년 주최하는 드라마 아카데미 어워드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비롯해 4개 부문을 석권했다. 이 드라마가 논쟁의 중심에 오른 또 하나의 이유는 캐스팅에 있다. 주인공, 즉 범인 역할을 맡은 야마다 다카유키와 아야세 하루카는 2004년에 방영된 멜로드라마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의 남녀 주인공이었던 까닭이다. 전작의 잔상이 채 지워지기도 전에 이전 드라마와는 판이한 범죄물의 주인공으로 나란히 캐스팅된 터라 몰입할 수 없다는 시청자의 의견이 줄을 이었다. 게다가 15년간 두 사람을 쫓는 형사 사사가키 역의 배우는 다케다 데쓰야. 일본 시청자에게는 학원물의 대명사 <3학년 B반 긴파치 선생>의 긴파치 역으로 각인된 인물이다. 마치 학원 멜로물의 주인공이었던 두 학생을 쫓는 선생님의 구도인 셈인데, 이 또한 제작진들의 의도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범인들을 괴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 작가와 연출가의 변이다. 참고로 드라마 <백야행>과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는 같은 작가(모리시타 요시코)와 연출가(이시이 야스하루)에 의해 만들어졌다. [드라마 부문] ‘논리 괴물’ 과학자의 첫 등장 갈릴레오 ガリレオ 2007년 | <후지TV> | 출연 후쿠야마 마사하루, 시바사키 고우 2007년 4분기 게쓰구(<후지TV>의 간판인 월요일 9시 드라마) 히트작. 천재 물리학자 탐정 유가와 마나부가 등장한 단편집 <탐정 갈릴레오>와 <예지몽>의 에피소드들을 각색했다. 그러니까 제작 순서로 보자면 영화 <용의자 X의 헌신>은 드라마 <갈릴레오>의 스핀오프가 되는 셈이다. 얼핏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보이는 사건들을 과학으로 규명한다는 매회의 전개는 원작을 충실히 따르고 있으나 캐릭터에는 상당한 수정을 가했다. 유카와의 인간적인 측면은 한층 배제되었고 ‘논리 괴물’로서의 면모는 강화되었다. 특히 원작에 없었던 유카와의 “실로 재미있군”과 같은 말버릇이나 사건의 실마리가 떠오른 순간 홀린 듯 수학식을 풀어대는 모습 등은 탐정드라마로서 <갈릴레오>의 개성을 확고히 각인시켰다. 유카와에게 자문을 구하는 형사 캐릭터를 남성인 쿠사나기에서 여성인 우쓰미(시바사키 고우)로 바꾼 것도 각색상의 변화. 하지만 단순히 성적 긴장을 활용하기 위한 이같은 드라마상의 설정을 히가시노 게이고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2008년에 발표한 신작 <갈릴레오의 고뇌>에서는 우쓰미 캐릭터를 소설에 등장시키기도 했다. 재미있는 것은 우쓰미가 등장한 원작 <갈릴레오의 고뇌>의 드라마판인 <갈릴레오 제로>(2008)에서는 거꾸로 유카와의 파트너로 쿠사나기가 등장한다는 점이다. 영화 <용의자 X의 헌신>의 현지 개봉 직전 방영된 스페셜 드라마였던 <갈릴레오 제로>에서는 장차 영화에서 맞붙게 될 유카와의 최대 라이벌 이시가미의 학창 시절 모습도 확인할 수 있다. [드라마 부문] 개그 퍼래디로 각색한 사기행각 유성의 인연 流星の絆 2008년 | | 출연 니노미야 가즈나리, 니시키도 료, 도다 에리카 사자자리 유성군을 관측하고 돌아온 어린 세 남매는 부모가 끔찍하게 살해당한 모습을 발견한다. 자라서 범인을 찾아 반드시 죽이겠다고 맹세하는 그들. 그로부터 14년의 세월이 지나 어느덧 시효의 만기가 눈앞인 때, 남매 사기단으로서 사기행각을 벌이며 새로운 타깃을 물색 중이던 그들은 부모를 죽인 범인의 단서와 우연히 맞닥뜨리게 된다. <유성의 인연>은 방영 전부터 화려한 라인업으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히가시노 게이고 원작, 드라마계의 명콤비 구도 간쿠로(작가)와 이소야마 아키(PD) 제작, 그리고 주연으로 자니스의 니노미야 가즈나리와 니시키도 료를 내세운 이 작품은 금요드라마로서는 2000년대 들어 처음으로 20%대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특히 세 남매의 사기행각을 액자식의 개그 패러디로 각색한 에피소드들은 ‘대사의 십자포화’로 불리는 작가 구도 간쿠로의 재기가 빛을 발한 대목. 다소 무겁게 진행되는 살인사건의 메인 플롯과 요소요소에 끼어드는 사기 트릭 에피소드의 발랄한 구성이 서로를 해치지 않으면서 롤러코스터적인 재미를 선사한다. 고수와 손예진의 <백야행> 앞으로 TV와 스크린에서 만날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들 먼저 2009년 2분기 드라마로 <명탐정의 규칙>(名探偵の掟)이 편성되었다. <아사히TV> 금요드라마로 4월17일부터 시작하는 이 작품은 자신이 소설상의 탐정 캐릭터라는 것을 인지하는 주인공을 통해 본격 추리물의 공식을 풍자하는 유머러스한 시리즈. 마쓰다 류헤이의 동생인 마쓰다 쇼타와 오다기리 조의 배우자인 가시이 유우가 주연을 맡았다. 국내에 출간된 <방황하는 칼날>(さまよう刃)도 현재 영화로 제작되고 있다. 끔찍한 범죄를 통해 외동딸을 잃었지만 정작 범인들이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가벼운 형벌을 받는 현실에 분개하여 스스로 복수에 나선 아버지 역할로 <박사가 사랑한 수식>의 데라오 아키라가 캐스팅되었다. 한국에서 제작되는 히가시노 게이고 원작 영화도 있다. 바로 <백야행>으로, ‘하얀 어둠 속을 걷다’라는 부제를 달았다. 남녀주인공 역은 고수와 손예진이, 형사 역은 한석규가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