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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1997)

<전주영화제 프로그래머가 추천한 영화10편>

(서울=연합뉴스) 김지연 기자 = 해마다 봄이면 영화의 성찬을 차려놓는 전주국제영화제(JIFF)가 어느덧 10회째를 맞아 42개국에서 공수한 영화 200편을 준비해 30일부터 손님들을 맞이한다. 정수완ㆍ유운성ㆍ조지훈 프로그래머가 영화제를 찾는 관객을 위해 놓쳐서는 안 될 영화 10편을 추천했다. ▲철서구(West of the Tracks) = 1∼9회 영화제에 소개됐던 신인 감독들 가운데 현재 활약 중인 감독들의 데뷔작을 재상영하는 'JIFF가 발견한 감독열전' 섹션 작품. 왕빙 감독은 철거 명령이 내려진 중국 셴양의 티엑시 공업지구를 2년간 촬영했다. '녹', '폐허', '철로' 세 부분으로 나뉜 영화는 영화제에서만 만날 수 있는 보물 같은 작품으로 551분이라는 러닝타임을 견딜 수 있는 열혈 관객을 기다린다. ▲킬(Kill) = '공각기동대'를 만든 오시이 마모루 감독과 일본 신예 크리에이터 3명이 만든 옴니버스 액션영화. 영화를 보기 위해서라면 밤샘도 마다하지 않는 관객을 위한 전주영화제의 인기 심야 프로그램 '불면의 밤' 작품이다. 칼에 의한 액션을 주제로 하며 다양한 시대배경과 형식으로 펼쳐지는 4개의 이야기가 한밤의 디지털 향연을 선사한다. ▲안나와의 나흘 밤(Four Nights with Anna) = 폴란드의 변두리 마을, 간호사 안나를 사랑하는 레온은 매일 밤낮으로 그녀를 엿본다. 괴상하지만 헌신적인 레온의 사랑을 담담하게 묘사해 현대사회의 비정함과 고립된 인간관계를 돌아보게 하는 영화. 1991년 전업화가로 돌아섰던 폴란드의 거장 예르지 스콜리모프스키감독이 17년 만에 내놓은 신작이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작품. ▲파르케 비아(Parque Via) = 파르케 비아는 주인공 베토가 세상과 단절돼 머무는 공간이다. 베토와 바깥세상을 연결하는 것은 가끔 방문하는 집주인과 텔레비전, 일주일에 한 번씩 함께하는 창녀 루페가 전부. 엔리케 리베로 감독은 주인공과 집주인 간의 관계를 통해 빈부격차, 인종 차별 등 현대 멕시코 사회의 문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리얼리티를 위한 감독의 세심함이 돋보이는 영화. ▲굿바이 솔로(Goodbye Solo) = 따뜻한 마음을 가진 택시기사 솔로는 한 노인으로부터 자살여행을 위해 2주간 기사가 돼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솔로는 노인의 마음을 돌려 살리기로 결심한다. 미국 내 이주민들의 삶을 그려온 라민 바흐라니 감독이 만든 감성 코미디로, 세네갈 출신 흑인과 백인 노인의 특별한 우정이 관객들에게 따뜻한 감동을 선사할 것이다. ▲테라 마드레(Terra Madre) = '대지의 어머니'란 뜻의 테라 마드레는 건강한 땅에서 건강한 정신으로 기른 음식을 먹어야 인간이 살 수 있다는 슬로 푸드 공동체 운동을 말한다. 이들은 언어, 사상, 종교, 정치적 장벽을 넘어 오직 자신과 대지의 관계를 통해 세계화에 맞선다. 이탈리아의 거장 에르마노 올리의 신작으로, 자연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는 이탈리아판 '워낭소리'라 할 만하다. ▲너 없인 살 수 없어(No Puedo Vivir Sin Ti) = 법적인 이유로 사랑하는 딸과 생이별을 해야 하는 주인공은 법과 맞서 길고 힘든 싸움을 시작한다. 2003년 대만 6개 채널에서 동시 생중계했을 정도로 대만 사회 전체를 뒤흔들었던 사건을 레온 다이 감독이 감성적이고 호소력 있는 멜로드라마로 재탄생시켰다. 아버지와 딸의 이별 이야기를 흑백화면에 아름답게 담아 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할 것이다. ▲악의 화신(Embodiment of Evil) = 브라질 호러 영화 선구자인 주제 모지카 마린스의 '코핀 조' 연작 완결판. 브라질 영화사상 가장 '매력적으로 사악한' 악당으로 꼽히는 코핀 조는 40년의 감옥 생활을 마치고 완벽한 후계자를 임신시킬 여성을 찾기 위해 돌아온다. 호러 영화의 모든 요소를 집약해 브라질 사회의 문제점을 비춘다. 간담이 서늘한 밤을 제대로 보내고 싶은 관객들을 위한 영화다. ▲비르와 자라(Veer Zarra) = 비행대대 대장 비르와 파키스탄 여인 자라의 운명적인 사랑 이야기. 인도의 3대 최고 흥행 감독 중 하나인 야시 초프라가 연출했다. 72세의 노장 감독이 만들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3시간에 달하는 영화는 시종일관 신나고 흥미진진하다. 화려한 춤과 노래, 박력 있는 액션 신과 호화로운 프로덕션 디자인으로 마살라 영화의 진수를 보여준다. ▲질주(On the Run) = 채무 불이행으로 빼앗긴 자신의 차를 찾으려고 보험회사에서 일하는 찬드레와 그의 여자친구는 임신 사실을 알게 되자 불법 낙태를 위해 돈을 모으기 시작한다. 일자리를 얻으려 무작정 도시로 오지만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스리랑카 젊은이들의 삶을 다룬 영화다. 스리랑카 특별전에서 선보이는 영화로, 스리랑카의 거장 달마세나 파티라자의 대표작이다. cherora@yna.co.kr (끝) <연합뉴스 긴급속보를 SMS로! SKT 사용자는 무료 체험!>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스타트렉> 폐인들, 트레키는 누구인가

개인적인 경험. 내가 트레키(Trekkie: 열광적인 <스타트렉> 팬들을 일컫는 고유명사)라는 사람들을 처음으로 인지한 건 심지어 <스타트렉>이라는 시리즈의 존재를 알아차리기도 전이었다. 아니, 이미 알고는 있었을지도 모른다. 시리즈는 본 적 없지만 드라마 에피소드의 각색판이 어린이용 문고본이나 잡지 연재물로 돌아다니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당시 내가 <원더우먼> 3시즌 에피소드인 에 나오는 SF 텔레비전 시리즈(<스타트렉>은 아니었지만 <스타트렉>의 패러디가 아닐 수가 없었다)의 우스꽝스러운 팬들과 <스타트렉>이라는 드라마를 하나로 연결시키지는 못했던 게 분명하다. 처음에 난 그들이 그냥 웃긴다고 생각했고, 다음엔 미국에서는 어른들이 저렇게 놀아도 되는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부럽다고 생각했다. 내가 아는 어른 중 저렇게 재미있게 노는 사람들은 없었다. 당시 정말 어린애였던 나는 장난감이 결합되지 않은 유희를 이해하지 못했다(사실은 지금도 이해 못하는 건 마찬가지다. 어른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며 노는 건가?). 하지만 그 에피소드에 나오는 정신 나간 사람들은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놀았다. 그들에겐 장난감이 있었고 그 장난감을 통해 들어갈 수 있는 판타지가 있었다. 그런 것을 보고 놀이라고 한다. 그렇지 않은가? 아이작 아시모프, 스티븐 호킹, 그리고 오바마… 사실 트레키들은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놀림감이었다. <원더우먼>에서도 그들은 우스꽝스러웠고 다른 패러디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그들은 아군한테서도 공격을 받았다. 1986년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에 윌리엄 섀트너가 호스트로 나왔을 때 그는 유명한 “Get a Life” 코미디를 선보였다. 그 단편에서 <스타트렉> 컨벤션에 참석한 그는 어이없는 질문을 해대는 트레키들 때문에 폭발하고 만다. “제발 그렇게 살지 마! 이건 그냥 텔레비전 쇼일 뿐이야! 나가서 네 인생을 살아!” 딱하게도 그의 연설은 주최쪽의 농간과 협박에 의해 에피소드에 나왔던 사악한 커크 선장의 연기로 포장되고 팬들은 안심한다.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의 에피소드에서도 볼 수 있듯, 트레키는 미국 기크 문화의 가장 막장스러운 사람들로 분류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한참 전에 종영된 텔레비전 시리즈의 세계에 집착하고 유치한 장난감들을 모으며 경제적으로도 무능력해서 서른이 넘어서까지 부모 집 지하실에서 산다. 아, 물론 그들은 여자와 데이트도 못해봤다(여기서 그들 대부분의 성별이 폭로된다). 그 때문에 슬슬 팬들 내에서도 출신을 가르는 시도가 벌어지기도 한다. 여기서 새로운 이름이 등장하고 팬들은 그 이름에 따라 재배치된다. 자신을 트레커로 분류하는 팬들은 적어도 자기네들은 트레키처럼 무능하지 않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리고 그건 사실이다. 그들은 고등교육을 받은 머리 좋은 기크들이고 높은 연봉을 받는 고급 직종의 종사자들도 많다. 그들이 자랑스럽게 내놓는 리스트에 오른 이름들은 막강하다. 아이작 아시모프, 스티븐 호킹, 마틴 루터 킹, 앨 고어, 마이크 올드필드, 톰 행크스…. 참,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 역시 트레커인 것 같단다. 오리지널 시리즈에서 스포크를 연기한 레너드 니모이에 따르면 그가 오바마를 만났을 때 악수 대신 셋째와 넷째 손가락 사이를 벌리는 발칸 인사를 하더라나! 그러나 그들의 행동은 트레키 못지않다. 아니, 오히려 더 튄다. 그들은 눈에 뜨이는 소동을 저지를 만한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트레키들을 다룬 유머스러운 다큐멘터리 <트레키즈>에 언급되는 사람들 대부분은 트레키라기보다는 트레커다. 그들은 클링온어를 배우고 사무실을 엔터프라이즈 우주선처럼 디자인하고 발칸족처럼 보이기 위해 귀수술을 할 생각을 갖고 있으며 배심원이 되면 정장 대신 스타플리트 장교 유니폼을 입고 법정에 나간다. 이런 사람들이 주기적으로 자신을 노출하게 되면 <스타트렉> 팬들은 막장 중의 막장이라는 악평을 다시 듣게 된다. 수많은 이들의 아이디어를 흡수하며 확장 그런데 한번 생각해보자. 과연 트레키/트레커들이 그렇게 괴상한가? 그들의 영원한 적수 <스타워즈> 팬들은 어떤가? 그들도 트레키처럼 부모 지하실에서 살며 장난감들을 모은다. <반지의 제왕> 팬들은 어떤가? 트레키들이 클링온어를 한다면 그들은 요정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미들 어스의 역사를 줄줄 읊을 것이다. 달렉 분장을 하고 국회의사당에 쳐들어간 열성 <닥터 후> 팬은 어떤가? 새로 발견한 행성과 위성에 지나와 가브리엘이라는 이름을 붙인 <여전사 지나>의 팬은? <바빌론5> 팬들은? <건담> 팬들은? 일단 일본으로 넘어가면, 일본의 오타쿠들은 가장 흉악스러운 트레키들이 했던 것보다 늘 몇배 더 심한 짓을 한다. 얼마 전에 애니메이션 캐릭터와 결혼하겠다고 소동을 부린 남자 일은 잘 풀렸나? 여기에 대한 답을 한다면, 트레키를 아주 특별한 존재로 정의하는 무언가는 없다는 것이다. 트레키라는 용어가 처음 사용되었던 1970년대 초에는 특이했을지 몰라도 지금은 그렇지 않다. 트레키만큼 열정적인 팬들은 다른 팬덤에서도 존재한다. 그들 모두 각자의 독립된 세계를 꾸리고 발전시킨다는 점에서 이들은 특별히 다를 게 없다. 그러나 트레키들을 의미있는 존재로 만드는 방향성은 존재한다. 이들은 유일한 존재는 아닐지 몰라도 특정 그룹의 의미있는 선두주자이기는 하다. 여기서 그들의 괴상한 패션 취향은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다. 그 특징은 이들의 우주가 열려 있다는 것이다. 조지 루카스의 독재 아래 있는 <스타워즈>의 세계와는 달리 <스타트렉>의 세계에서 크리에이터이 진 로덴베리의 비중은 생각보다 크지 않다. 이들의 세계는 오리지널 시리즈, 영화판, 이후 TV시리즈들(<더 넥스트 제너레이션> <딥 스페이스 나인> <보이저> <엔터프라이즈>)로 수십년간 이어지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아이디어를 흡수하면서 확장되었다. 그 아이디어를 제공한 사람들 대부분은 팬덤 안에서 성장한 골수팬들이었다. 특히 그들 중 전문 과학자들의 투입은 주목할 만하다. 외계인과 지구인 사이에서 혼혈아가 태어날 수 있다고 순진무구하게 믿었던 오리지널 시리즈의 과학과 최신 과학 이론들의 경쟁장이 된 후반 시리즈의 과학 차이를 주목해보라. 이 세계에서 엔터프라이즈호의 모형과 스타 플리트 유니폼보다 더 중요하고 매력적인 것은 열려 있는 허구의 세상 안에서 현실 세계의 진짜 지식으로 스스로 의미있는 창조를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시리즈의 과거 회귀가 팬덤에 끼칠 영향은 지금 <스타트렉>의 팬덤은 다소 수상쩍은 과도기를 겪고 있다. <보이저> 시리즈와 마지막 영화판 이후, <스타트렉> 프렌차이즈에 속해 있는 작품들은 계속 과거로 돌아가고 있다. <엔터프라이즈>와 곧 개봉되는 영화 <스타트렉: 더 비기닝>은 모두 프리퀄이며 아직 쓰이지 않은 과거의 재해석이다. 늘 미래를 향해 달려갔던 시리즈가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역사 쓰기를 중단하고 (상대적) 과거에 몰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만약 영화가 시리즈로 이어진다면 앞으로도 이런 성향은 계속될 것인데, 이 현상이 팬덤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 수 없다. 수십년 동안 이어져온 혼란스러운 세계관을 재정비하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어져온 <스타트렉> 팬들의 진취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가능성을 낮게 평가해서는 안된다.

[외신기자클럽] 놀리우드 제국의 진실은

한 아프리카 신문의 평론가는 “영화를 하루에 세편씩이나 보고도 우리나라에서 제작되는 작품의 반도 제대로 언급하지 못하는 형편”이라고 귀띔한다. 영화를 가장 많이 제작하는 곳은 뭄바이도 로스앤젤레스도 아닌 나이지리아의 라고스라는 사실. 이 사실을 우린 겨우 알고만 있을 정도다. 해마다 2천편이 넘는 영화를 제작하는 라고스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수지 맞은 영화공장이다. 나이지리아에 더이상 영화관이라는 게 없다는 점을 고려해볼 때 이러한 기록은 더욱 놀라운 일이다. 비디오카메라로 찍은 영화들은 카세트비디오나 DVD로 (불법 비디오 복제시장에서는 물론) 우체국을 통해 대규모로 판매된다. 이 영화들은 하루 종일 이들을 반복해서 방영하는 위성방송과 텔레비전 채널들을 통해 아프리카 전역으로 전파된다. 그중 흥행작들은 아프리카 식품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슈퍼마켓 조직망을 통해 유럽은 물론 아메리카 대륙으로 수출되는데, 영화가 흥행에 실패했을 경우 그 수명은 이틀을 넘기지 않는다. 최근 스위스 프라이부르크페스티벌 같은 몇몇 영화제들이 이 놀리우드 현상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놀리우드는 10여년 전 나이지리아 독재정치의 종말과 더불어 탄생했다. 할리우드와 달리 놀리우드 ‘제국’은 대형 스튜디오가 아닌 소형 영화제작소를 중심단위로 해 구성됐다. 일명 사업가들이 돌연 영화제작에 나서는가 하면 가톨릭 교회나 사이비 종교단체들이 그들의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영화에 투자하기 시작한 것을 계기로 해 그런 시스템이 작동을 개시한 것이다. 라고스에는 엄밀히 말해 촬영소라 할 수 있는 것이 아직 없다. 일반 빌라나 호화 호텔들이 배경을 대신하는 게 보통이고, 좀더 큰 규모의 예산이 요구되는 제작인 경우 해외에서 촬영하기도 한다. 장편영화 한편을 열흘 동안 집중 촬영한 뒤 일주일 동안 후반 작업을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처럼 짧은 기간 내에 하는 작업이 기술 면에서 영화의 질에 영향을 미치는 건 두말 할 것 없다. 그래서 손가방을 여는 지퍼 소리가 여배우 목소리보다 더 잘 들리는 장면이 등장하기도 한다. 한데 정작 관객은 그런 점에 전혀 상관하지 않는 것 같다. 자국영화가 할리우드영화를 월등히 능가하는 걸로 봐서는 말이다. 이런 현상은 작품의 형태보다는 내용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러니까 놀리우드영화는 코미디, 멜로, 탐정영화 등 모든 장르를 다루지만 전적으로 아프리카적 관점에서 다룬다는 것이다. 그래서 만나게 되는 장면은, 피해자가 양면 거울을 통해 가해자를 알아보는 스릴러영화의 전형적인 장면 대신 경찰관이 거북이를 눕혀놓고 돌리는 장면이다. 누가 범인인지를 거북이 머리가 가려낸다는 거다. 놀리우드는 꿈에서나 볼 법한 일상생활- 마치 한국 미니시리즈나 TV드라마에 나오는 세계- 과 흡사한 흠도 없이 반듯한 물질만능의 세계를 보여줌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환상을 꿈꾸게 한다. 동시에 에이즈와 같은 사회문제를 다루기도 하고 이슬람과 가톨릭 사이의 종교분쟁을 다루기도 한다. 놀리우드의 활기는 거의 극치에 달해서 영화산업은 이제 이 나라에서 석유산업에 버금가는 제2의 고용주가 됐다. 또한 놀리우드 주변으로는 스타 시스템 또한 발달해서 유명 배우 관련 기사들이 신문지상을 가득 메우고, 파파라치들은 이들의 사생활을 적극적으로 추적하고 공개한다. 게다가 스타들은 대개 가수로도 데뷔하는데, 이렇게 해서 영화는 나이지리아에 음반제작 산업을 탄생시켰다. 뿐만 아니라, 놀리우드는 아프리카 대륙의 다른 대도시에서도 볼 수 있는 헤어 스타일이나 패션 스타일을 유행시키기도 한다. 이 때문에 젊은이들이 장래를 걸고 아프리카 전역에서 라고스로 대거 몰려든다. 이러한 놀리우드 현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아프리카가 드디어 자신의 서민문화를 직접 도맡게 됐다는 결론을 내린다. 반면 혹자들은 세계 다른 나라들에서 아프리카 대중에 대한 관심이 완전히 수그러들자 여기서 오는 허탈감을 놀리우드가 대신 메워주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song book] 두번의 장례식

이맘때의 일본 대중음악계는 추모 시즌이다. 몇달 전 같은 지면을 통해 소개했던 오자키 유타카가 1992년 4월25일 숨을 거두었고, 록그룹 엑스재팬(X-Japan)의 기타리스트였던 히데가 1998년 5월2일 사망했으며, 자드(Zard)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던 인기 여성 보컬리스트 사카이 이즈미가 유명을 달리한 날 또한 2007년 5월27일이었기 때문. 세 사람 모두 젊은 나이에 스스로의 역량을 미처 다 보여주지 못한 채 숨을 거두었기에 해마다 이 무렵이면 그들에 대한 추모 공연이나 이벤트 등이 끊이지 않는다. 때맞춰 방송사들도 특집 프로그램들을 편성한다. 이들 중 사망 당시 가장 큰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이는 히데였다. 그가 소속되었던 그룹 엑스재팬은 최고의 위치에서 군림하던 1997년 말 해산을 발표했다. 팬들로서는 해산의 충격에서 미처 헤어나지도 못한 때에 기타리스트 히데의 죽음이라는 이중의 충격을 받아야 했던 것. 1998년 5월1일, 방송 출연을 마치고 귀가한 히데는 다음날 수건으로 목이 졸려 숨진 채로 발견되었으며 그 수건의 끝은 문고리에 매여 있었다. 경시청에서는 자살이라 단정했지만, 의욕적으로 솔로 활동을 전개하던 히데였기에 자살의 정황이 없는데다, 스스로 목을 매기에는 위치가 너무 낮다는 이유로 사고사라는 주장에 무게가 실렸다. 어쨌든 히데의 사망 이후 두명의 팬이 잇따라 목숨을 끊었으며, 닷새 뒤에 열린 그의 고별식에는 5만명이 넘는 인파가 식장과 그 주변을 가득 메웠다. 이 숫자는 오자키 유타카의 고별식과 일본의 국민 엔카 가수 미소라 히바리의 고별식에 참석했던 인원을 능가하는 것으로, 당시 그 추도 행렬은 23km에 달했다고 한다. 는 히데의 장례식이 끝난 직후 텔레비전의 추모 프로그램에 출연한 엑스재팬의 리더 요시키가 그에게 바친 진혼곡이다. 엑스재팬의 싱글 중에서는 가장 많은 판매고를 기록한 이 발라드는 곽재용 감독의 2004년 영화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에 삽입되어 제3차 일본 문화 개방 이후 한국영화에 사용된 최초의 일본 대중음악으로 기록되기도 했다. 그 추모 프로그램에서 요시키는 33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자신의 아버지에게 바치고자 이 곡을 만들었다고 밝혔다. 공교롭게도 히데가 숨을 거두었을 때의 나이 역시 33살이었다

[나의 친구 그의 영화] 그래 목숨 걸고 투표해야해

영화배우도 된 마당에 이번 어린이날에는 영화를 보면서 보내기로 결심하고 아침부터 딸과 함께 집에서 가까운 극장으로 나갔다. 그간 조조상영을 보면서 자유직업인의 이점을 한껏 활용했던 나로서는 입이 쩍 벌어질 수밖에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아침부터 극장에 나와 있었다. 그런 식으로 1년에 한번뿐인 어린이날을 때우려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니. 좀 놀라웠다. 어쨌거나 우리에게는 세개의 영화가 기다리고 있었다. 제일 먼저 <몬스터 vs 에이리언>, 그 다음 <케로로 더 무비: 드래곤 워리어>, 마지막으로 <초코초코 대작전>. 그중에서 우리는 <초코초코 대작전>을 보기로 했다. 뭔가 달콤한 내용일 것 같아서. 그러나 보는 내내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더라. 내용은 다음과 같다. 투표에 의해 건강최고당의 헬시 총리가 집권한 이후, 새 정권은 건강 제일을 내세우면서 몸에 좋지 않은 초콜릿을 금지시키는 법안을 통과시킨다. 이 법안에 따르면 초콜릿을 제조하거나 판매하는 사람은 물론 그걸 먹는 사람까지도 경찰에 구속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우리가 건강을 중시하는 총리를 뽑은 것이지, 어디 초콜릿을 먹지 못하게 만드는 총리를 뽑은 것이냐고 반발하며 시민광장에 모여들던 국민들도 경찰들이 상상을 초월하는 진압 작전으로 사람들을 강제 해산하고 연행하자, 하나둘 자신들이 괴물을 뽑았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국민들은 두 가지 덫에 걸렸는데, 하나는 자신들이 직접 투표해서 그 괴물을 뽑았다는 점이며(이른바 ‘국개론’), 또 하나는 국민이라면 정권이 제정한 법률의 바깥을 상상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는 점(그러니까 ‘법치’)이었다. 국민들의 저항은 이 두 가지 덫에 의해 무력화된다. 정권의 주된 공격 방법은 ‘우리를 뽑은 사람들은 너희들이다’와 ‘모든 불법적인 것은 나쁜 것이다’라는 논리를 번갈아 사용하는 것이다. 두 가지 덫, 국개론과 법치에 무력화된 우리를 마주하다 그리하여 헌법에 보장된 집회 및 결사의 자유와는 무관하게 주간이든 야간이든 모든 집회는 이 나라에서(어느 나라에서?) 금지된다. 정권은 초콜릿 금지 법안이 국회를 통과했기 때문에 그와 관련된 집회를 가지는 건 불법행위라고 말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불법행위가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과 합치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입을 다문다. 공권력은 합법 영역에 대해서 사유하지 않는다. 여기까지는 괜찮고 그 다음부터는 법적 논란의 영역이라는 식으로 신중하게 접근하지 않고, 오직 불법의 가능성에 대해서만 생각한다. 공권력은 그 불법의 가능성이라는 잣대로 기본권을 포함한 국민의 모든 행위를 구속 수사할 수 있다고 믿는다(이렇게 되면 ‘먼지털이’로 전락할 가능성이 많지만, 어쨌든). 그렇기 때문에 신고된 집회마저도 원천봉쇄하고 참가자들을 불법시위자로 연행한 뒤 엄중처벌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의 기본권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는 사람들이 하나둘 나오니 바로 ‘중딩 3년생’들이다. 이 중학생들의 주장은 간단하다. 왜 초콜릿을 먹을 수 없는가? 이에 대한 정권의 설명은 그건 불법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초콜릿을 먹는 게 불법적이라면 애당초 법이 잘못된 게 아닌가? 중학생들이 다시 되묻는다. 법의 잘잘못을 따지는 일은 정권의 영역을 벗어난 일이다. 법 자체가 그 정권의 사적 이익에 부합되게 제정됐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되물음에 대해 정권은 이런 식으로 빠져나간다. 나를 뽑은 건 너희들이지 내가 아니다. 고로 그런 법을 만든 건 너희들이지 내가 아니다. 나는 위임받은 권력을 정당하게 행사할 뿐이다. 어른들은 이 덫에 빠져서 무기력해졌지만, 중학생들에게는 어림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모든 법률의 효력을 정지시키고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다시 사유하자. 왜 초콜릿을 먹으면 안되는가? 뿔난 중딩들 vs 촛불소녀, 초콜릿 경찰 vs 민주 경찰 그리하여 이 무서운 중딩들은 ‘초콜릿 언더그라운드’라는 지하조직을 만들고, 헌책방을 뒤져 인터넷에서 검색이 금지된 초콜릿 제조법을 알아낸 뒤 밤마다 모여서 초콜릿을 먹는 불법집회를 연다. 정권과 그들의 사병으로 전락한 경찰, 그리고 알아서 스스로 통제하는 언론은 이들 중딩들을 체제전복세력으로 규정하고 검거에 나선다. 말하자면 이놈의 정권은 초·중·고와 싸우는 셈이다. 결국 경찰은 다른 학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채증자료를 토대로 불법집회에 적극 가담한 증거를 다수 확보한 중학생 한명을 연행해 구속시킨다. 출동 직전, 경찰본부장의 독백은 경찰 수뇌부가 집회에 나선 이 중학생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보여준다. “법을 어기는 쓰레기 같은 놈들.” 경찰이 친구를 강제 연행하는 데 흥분한 스매져가 정부의 편을 드는 반장 프랭키에게 소리친다. “데이브가 뭘 잘못했는데? 물건을 훔쳤어? 사기를 쳤어? 사람을 죽였어? 이런 사회가 무슨 건강한 사회야.” 이런 사회가 무슨 건강한 사회냐고 비아냥거리는 데에는 정권의 통제를 받는 텔레비전과 라디오에서는 건강최고당 헬씨 총리가 나와서 연방 초콜릿 없는 건강사회를 만들어가자고 떠들어댔기 때문이다. 초콜릿에 대한 정당한 욕구를 강제 진압하면서 국민들의 속은 부글부글 끓어서 마침내 폭발할 지경이 되는데도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건강최고당은 시민광장에서 무슨 페스티벌인가의 개막식을 한단다. 한마디로 제 무덤을 파는 것이다. 며칠 전에 서울광장에서 열린 이 개막식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더라? 만화영화를 보는데 이게 현실인지 허구인지 헷갈린다면 그 사람의 정신세계의 오묘함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바로 그꼴이었다. 어린이날을 맞이해서 딸과 극장에 갔다가 정부 말대로라면 폭력시위를 선동하는 좌파영화를 봤다고나 할까. 연초에 용산참사를 보면서 앞으로는 목숨 걸고 투표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 만화영화의 주제 역시 정치를 외면하지 말고 반드시 올바르게 투표하자는 것이었다. <초코초코 대작전>은 이명박 시대의 컬트 작품이 될 확률이 매우 높았다. 마지막으로 인상적인 건 초콜릿을 사수하려는 학생들을 진압하려는 경찰들 이름이 ‘초콜릿 경찰’이라는 것. 그게 꼭 ‘민주 경찰’이라는 말처럼 들렸다. 권력이 비판세력의 언어까지 선점하면 독선은 불가피하다. 마침 영화를 보고 난 뒤 뉴스에서 들으니 청와대로 초청한 어린이들 앞에서 대통령은 퇴임한 뒤에 ‘녹색운동가’가 되겠다고 말했다더라. 이 뭥미?

[나의 친구 그의 영화] 판타스틱했던 옛 극장을 닮았어

(<나의 판타스틱 데뷔작>의 누구나 예상 가능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개그콘서트-소비자 고발>의 황현희 PD가 자신의 예고를 지키지 않듯 소설가 고발의 본 PD 역시 소설가 김연수를 집중 조명하겠다는 지난편의 예고를 지키지 않을 예정이다. 아직 영화를 보지 못했다. 보는 게 겁난다. 파렴치한 남자일 뿐 아니라 강간범이기까지 하다는데, 아무리 영화라고 해도 친한 친구가 그런 나락으로 빠진 걸 어찌 눈뜨고 볼 수 있을까. 혼자서는 도저히 보지 못할 것 같으니 동네방네 수소문하여 소설가 단체관람이라도 추진해볼까 싶다. 관심있는 소설가들은 연락주기 바란다. 지난주 김연수 배우가 따님과 함께 보았다는 <초코초코 대작전>의 뜬구름 잡는 듯하나 지나치게 리얼리즘(이라는 게 현실의 리얼한 사실에 입각한, 그거 맞지요?)을 표방하는 스토리를 읽고 나니 나 역시 아주 오래전 아버지와 함께 보았던 영화가 생각난다. 1937년생이신 아버지는 온몸에 두꺼운 뼈를 장착하고 계시며(현재 몸무게 97kg), 노인정에서는 온갖 잡무를 도맡아 할 정도로 활동적이시고 (노인정의 영계랄까) 드라마는 꼬박꼬박 챙겨보지만 (아침 드라마 필수!) 스포츠는 절대 보지 않는 감성 풍부한 분이다. 나는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서 영화 보는 법을 배웠다. 프랑수아 트뤼포는 영화를 사랑하는 방법 중 첫 번째가 같은 영화를 두번 보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렇게 따지자면 아버지는 영화를 ‘무척’ 사랑하는 분이었다. 같은 영화를 세번씩 보기도 했으니 말이다. 아버지가 보는 영화 장르는 단 하나였다. 무조건 액션이었다. 아버지는 극장에 가서 같은 액션영화를 두번, 세번 보았다. 아버지 짐자전거에 묶여가던 풍경 극장에 가던 날을 생각하면 딱 떠오르는 풍경이 있다. 아버지는 (뒷좌석에 높은 손잡이 같은 게 세워져있어 짐을 묶기 편하도록 만들어진) 짐자전거에 형과 나를 꽁꽁 묶고 극장을 향해 페달을 밟았다. 불면 날아갈까 자전거에 태우면 떨어질까 노심초사 걱정하는 아버지의 잔정이 느껴지긴 하지만 (그렇게 믿고 싶다) 짐자전거에 묶여서 거리로 나설 때는 창피해서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형과 나는 적들에 생포된 포로의 모습으로 극장에 끌려갔다. 극장에 들어서면 아버지는 우리 둘을 앉혀놓고 영화 관람에 집중하셨다. 보고 또 보고 또 보았다. 아버지가 이소룡의 무술에 심취해 있을 때 형과 나는 잠에 취했다. 처음이야 열심히 보았지만 같은 영화를 두세번 본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도 극장에 앉아서. 아버지는 신비로운 무술을 보고 연방 껄껄 웃었고 (지금도 텔레비전을 보다 훌륭한 액션만 나오면 그러신다) 우리가 자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았다. 영화를 충분히 사랑한 아버지는 다시 우리를 짐자전거에 묶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때 보았던 영화는 단 한편도 기억나지 않지만 형과 내가 잠에 심취했던 극장의 분위기만큼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고등학생이 되고 영화를 열심히 보았다. 주로 야간자율학습을 땡땡이치고(그래요, 저, 그런 학생이었습니다) 시장 한복판에 있는 아카데미 극장에서 동시상영을 보았는데 극장 분위기가 참으로 남달랐다. 소도시 김천에서 좀 논다 하는 학생들이 극장에 모여들었는데, 이 학교 저 학교가 뒤섞이다보니 영화 ‘친구’의 극장 패싸움 장면까지는 아니더라도 소규모 충돌이 자주 일어났다. 극장의 최고 명당은 스크린 바로 앞 그러니까 제1열이었는데, 이곳은 동네에서 최고로 잘 노는 형들이 스툴처럼 생긴 의자에 다리를 턱 하니 올리고 담배를 피우며 영화 관람을 하는 자리였다. 극장에서 담배를 피우다니 지금 생각하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풍경인데 그때는 그랬다. 화면에서는 비가 내렸고, 맨 앞자리에서는 담배 연기가 피어올랐다. 정답은 늘 하늘에서 뚝 떨어지고… 가스 제닝스의 영화 <나의 판타스틱 데뷔작>을 보면서 가장 부러웠던 것은 극장의 풍경이었다. 영화의 첫 장면에 극장이 등장한다. 동네에서 좀 노는 아이인 리 카터는 오래전 우리 동네 아카데미 극장의 형님들처럼 담배를 피우며 영화를 관람하는데 그 모습이 그렇게 부러워 보일 수가 없었다. (담배도 끊었는데) 한대 피우고 싶었다. 영화의 맨 마지막 부분에도 극장이 등장한다. 주인공 윌이 리 카터를 위해 촬영한 단편영화를 상영하는데 온 동네 사람들이 모인 극장의 풍경은 어린 시절 아버지가 이소룡의 영화를 보던 풍경과 비슷했다. 언제부터 극장이라는 풍경이 사라진 걸까. 이런 극장이 동네에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극장의 시작은 무조건 동네의 영화여야 한다는 규칙을 세운 다음, 영화 <비카인드 리와인드>에서처럼 동네 사람들이 함께 만든 영화를 상영하는 것도 좋겠고, 학교에서 내준 영화 만들기 숙제를 동네 사람들 앞에서 상영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 나라면 어떤 영화를 보여주고 싶을까. 유명 소설가가 한편의 소설을 완성하는 동안 쫓고 쫓기고 속고 속이며 편집자와 싸워나가다 결국 마감이 한참 지나서야 자신의 정체성을 찾게 되는 휴먼드라마가 좋을까, 아니면 유명 소설가가 우연히 한 영화에 파렴치한으로 등장했다가 점점 개성이 강한 조연을 맡게 되고 악역 전문 배우가 된 뒤 자신의 실제 성격마저 그렇게 변했다는 사실을 깨닫고야 마는 본격 스릴러물이 좋을까. 써놓고 보니 둘 다 코미디물이 될 가능성이 높긴 하지만, 생각을 말자. 영화 시작하기 전에 젊은이들이 만든 단편영화 한편 트는 것도 불가능한데, 꿈같은 이야기다. 가스 제닝스 감독의 전작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는 뒤늦게 보고 호들갑 떨며 칭송하던 영화였다. 원작도 원작이지만 영화는 시종일관 뻔뻔하다. “아, 그런 리얼리티의 문제는 말이죠, 저의 영화에서는 취급하지 않습니다”라는 듯한 태도가 영화 전체에 깔려 있다. <나의 판타스틱 데뷔작>도 마찬가지다. 가스 제닝스가 좋은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장난치는 것처럼 영화를 만들고 굳이 영화 전체의 균형을 맞추려고 하는 것 같지도 않다. 어딘지 모르게 비어 있고 “그래서 이게 다야?” 싶기도 하고, 사건은 늘 뜻밖의 길로 전진하고 정답은 늘 하늘에서 뚝 떨어진다. 가스 제닝스의 영화는 아귀가 딱 맞물리면서 지독한 감동을 준다든지 엄청난 반전 때문에 손에 땀을 쥔다든지 하는 장면은 거의 없고 모든 게 부실하고 널널하다. 가스 제닝스의 영화는 어쩐지 오래전의 극장을 닮았다.

봉준호 감독이 말하는 <마더> 탐험기

봉준호 감독과 그의 영화를 이야기하는 건 모험심 가득한 탐험가와 함께 떠나는 여행과 비슷하다. 이미 그 영화의 여정 속을 수십, 수백번쯤 다녀갔음에도 불구하고 일단 여정이 시작되면 그는 다시금 진지한 자세가 돼 그곳을 탐험하며 생생한 설명을 덧붙여준다. 그는 의례상 던진 질문에도 진지한 고민을 거듭하며, 답변을 하는 중에도 자신의 영화가 가진 함의를 새롭게 분석한다. 봉준호 감독과의 인터뷰가 흥미로운 것은 그렇게 자신의 영화를 객관화하고 그 안을 끊임없이 후벼파는 그의 본성 때문이다. <마더>에 관한 대화 또한 비슷했다. <마더>에 관한 그의 생각 혹은 그와 함께한 <마더> 탐험 기록을 소개한다. -칸영화제는 잘 다녀왔나. =5월15일 떠났다가 어제(19일) 오후에 돌아왔다. 16일 저녁에 영화 상영을 한 뒤 17일 내내, 그리고 18일 칸을 떠날 때까지 계속 인터뷰만 했다. 물론 배우들에게는 흔치 않은 기회였을 것이다. -내심 경쟁부문 진출을 바랐을 것 같다.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진출해 섭섭하지는 않았나. =음…. 이창동, 홍상수, 박찬욱, 김지운 감독님은 다들 50대 아니면 40대 후반 아닌가. 나는 그쪽 나이로 39살이고. 그분들에 비해 나는 너무 젊은 거다. (웃음) 제발 나를 류승완, 김태용, 장준환 이런 감독들과 묶어달라. (웃음) 물론 칸 경쟁 진출을 목표로 영화를 찍는 것은 아니지만 아직 기회가 많다는 얘기다. -촬영을 할 때 이런저런 일로 연락을 했는데, 엄청 힘들다는 느낌을 받았다. 몸도 아팠다고 들었고. =아무래도 쉽지 않은 영화다 보니 그랬던 것 같다. <괴물> 때는 CG 핑계라도 댈 수 있었는데, 이건 정말 나와 주제, 나와 스토리가 완전 벌거벗고 정면대결하는 느낌이라 더욱 어려웠다. 촬영 때는 육체적으로 매우 고통스러웠지만 후반작업 때도 굉장히 예민한 상태라 정신적으로 힘들었다. -아무래도 배우들과 함께 연기를 만들어가는 게 가장 힘들었던 대목이 아니었을까 싶다. =연기에 가장 중점을 뒀다. 혜자 선생님을 중심으로 계속 인물들이 등장하고 퇴장하기 때문에 어디 하나만 삐긋해도 굉장히 치명적일 수 있다고 봤다. -당신이 여러 차례 말했듯이 <마더>는 김혜자라는 배우에서 출발한 영화다. 당신은 김혜자의 ‘국민엄마’ 이미지가 아니라 오히려 이상야릇한 측면에서 이 모성과 광기의 이중주라 할 수 있는 영화를 떠올렸다고 말해왔다. 그렇다고 해도 스스로의 생각이나 내적 동기가 없었다면 이런 이야기는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 같다. =나는 인물을 극한의 상황에 몰아넣음으로써 캐릭터나 인간들을 더 확연하게 표출시키는 것을 좋아한다. <괴물>에서 가족은 괴물에 잡혀간 현서를 구해야 하고, <살인의 추억>의 형사들은 벼랑 끝에 내몰린 채 수사를 해야 한다. <마더>에서는 혜자 선생님의 어두운 면이나 광기어린 면을 밀어붙이려는 의도가 있었는데 그것이 ‘엄마와 살인사건’이라는 잘 어울리지 않는 조합과 맞아떨어지면서 이런 이야기가 된 것 같다. ‘평온한 한강과 괴물’이나 ‘시골(형사)과 살인사건’처럼 도무지 조화될 것 같지 않은 두 요소를 충돌시키는 것이 내 적성인 것 같다. 김혜자는 신인보다 더 악착같은 배우 -김혜자는 오랜 경험을 통해 공력을 쌓아온 배우다. 감독은 그 배우를 컨트롤하려 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고. 충돌 같은 것은 없었나. =없었다. 어떤 장면을 놓고 해석이 다르거나 하는 경우도 거의 없었다. 설사 그런 게 있어도 테이크를 거듭하면서 합일점을 찾았다. 예를 들면 혜자가 공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가는 장면 있잖나. 거기서 혜자는 사무장의 말을 듣다가 “네, 그런데요…” 하면서 마구 쏟아붓듯 이야기를 한다. 그 장면에 관해서는 나와 혜자 선생님의 해석이 달랐는데, 혜자 선생님의 버전이 더 좋았다. 영화에 들어간 버전이 그것이다. 또 혜자가 미선에게 농약 이야기하는 장면이 있잖나. 그 장면을 보면서 많이들 웃던데, 혜자 선생님은 좀 스탠더드하게 슬픈 느낌으로 이야기해야 하지 않나 생각했다. 나는 좀 재미있게 해달라고 부탁했고. 나중에는 혜자 선생님도 “아, 이런 느낌으로 하니까 재밌네”라고 얘기했다. 그 정도의 공력을 가진 배우인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생각을 고집하신 적은 한번도 없다. 사람들은 쉽게 상상 못하겠지만, 혜자 선생님은 자기 연기에 대해 항상 불안해한다. “내가 잘한 거야? 나 텔레비전처럼 했지? 나 이상하지?”라면서 한번 더 찍자고 말하기도 한다. 신인배우들보다 더 악착같다. 나는 그런 면에서 행복했다. -김혜자의 장면을 30테이크 넘게 찍은 적도 있다던데, 체력적으로 힘들어하지 않았나. =혜자 선생님의 첫 촬영날 18테이크를 찍었는데, 그건 복잡한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카메라 움직임에서 실수가 있거나 단역 연기자의 동선이 잘못 됐거나 해서였지 혜자 선생님이 잘못해서는 아니다. 그런데 10테이크 넘어가니까 선생님은 본인 탓이라면서 걱정하셨다. 어떤 스탭들은 내가 어쭙잖게 선생님과 기싸움을 벌인다고 오해하기도 했다. (웃음) 30테이크 이상 찍은 날에는 내가 “오케이”라고 말하자 선생님이 “힘들까봐 억지로 오케이낸 것 아니에요?”라고 물으시더라. “이건 굉장히 중요한 장면이니까 더 찍어도 된다”면서. 그 정도로 열정과 프로정신이 충만한 분이다, 선생님은. 영화의 주제를 암시하는 오프닝 시퀀스 -혜자가 갈대밭을 배경으로 등장해 춤을 추는 첫 시퀀스는 굉장히 강렬하다. =이 영화는 <마더>잖나. 아주 거칠게 말한다면 혜자 선생님을 찍는 영화다. 첫 장면부터 혜자 샘을 보여준 것이다. 그리고 이 여자는 미친 여자일 수도 있고 미쳐갈 수도 있다는 사실을 미리 알려준 거다. 혜자는 넓게 펼쳐진 서정적인 공간에서 춤을 추는데, 더 중요한 건 춤을 출 때의 표정이다. 이상한 고통이 느껴지기도 하고 유체이탈된 사람 같기도 하고. 어쩌면 그것 자체가 광기인 것 같기도 하고. 그리고 다음 장면에서 혜자를 비추면서 제목이 뜨는데, 그때 혜자는 왼손을 옷 속으로 감춘다. 그야말로 뭔가를 감추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그 장면을 거기에 붙였다. 이 영화에서 손은 죄를 의미할 수도 있다. 그것을 암시하는 장면도 여럿 넣었는데, 오프닝의 두 장면에서 이 영화에 관해 어느 정도 알려주는 것 같다. -첫 장면의 춤은 인상적이었다. 어떤 주문을 했나. =라스트신의 춤은 실제로 관광버스도 태워드리고 해서 익힐 수 있었다. 아줌마들이 “아이고 총각” 하면서 나와 제작부 친구들의 티셔츠 속으로 손을 쑥 집어넣고 하는 것까지 다 보시면서. (웃음) 그런데 첫 장면의 춤은 혜자 선생님의 가장 걱정 중 하나였다. 결국 여자 연출부 2명과 함께 방에서 매일 연습하며 익히셨다. 선생님은 이 장면을 촬영할 때 모든 스탭들이 함께 춤을 췄으면 좋겠다고 하셨는데, 실제로 춤을 춘 건 나와 서우식 프로듀서뿐이었다. (웃음) 아마도 메이킹필름을 보면 우스꽝스러울 거다. -사건 현장에 출동한 형사반장이 “웬일로 이렇게 현장 보존이 잘됐어?”라고 말하는 장면이 재미있었다. <살인의 추억>에 대한 자기반영 같더라. =어찌하다보니 배경도 지방이고, 살인사건과 형사가 나오니까 자연히 나도 <살인의 추억> 생각이 나더라. 그래서 차라리 <살인의 추억> 때와 뭐가 같고, 뭐가 다를까, 어떻게 변주해볼까, 이런 것을 생각하게 됐다. 80년대 형사인 송강호나 김뢰하는 용의자를 직접 구타했는데 현대가 배경인 여기서는 사과를 차는 것으로 설정했다. 폭력은 쓰지 않되 폭력의 분위기를 조장한달까. CSI 운운하는 점도 비슷한 차원이다. 물론 나른하면서 여전히 아둔한 분위기는 <살인의 추억>의 연장선상에 있지만. 웃다가 슬프다가 하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 -형사가 세팍타크로 자세로 사과를 차는 장면이나 혜자가 미선에게 농약 이야기를 할 때 보면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어둡고 심각하면서 무거운데도 거기에 짓눌리지 않는 유머러스한 장면이 많았다. 처음부터 호흡조절을 위해 미리 장치한 것인가. =그런 것을 계산하지는 않는다. 시나리오 쓰거나 찍을 때 본능적으로 나오는 것 같다. 사람들은 어두운 분위기에서 갑자기 웃기고 하니까 걱정을 하는데, 내게는 웃다가 슬프다가 하는 게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물론 그런 걸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특히 일본 관객은 고지식해서 그런지 소심해서 그런지 (일본어투로)“웃어도 되는 것입니까?”식의 반응이다. (웃음) -<괴물>에서처럼 공권력에 대한 불신과 개인의 자위권 문제가 등장하더라. =<괴물>에서 가족들은 사회와 시스템의 도움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사회가 괴물이다’라는 주장이 영화의 주제라고까지 할 수 있지만, <마더>에서는 그저 출발점인 것 같다. 엄마는 어차피 고립하게 되어 있고. 그 다음에 엄마가 어떻게 움직이나를 관찰하는 게 핵심이니까. -그럼에도 그것이 당신의 이 사회에 대한 뿌리깊은 생각인 것 같기도 하다. =아, 난 한국사회를 사랑한다. (웃음) 복지도 잘돼 있고, 너무 많은 혜택을 받으면서 살고 있다. (웃음) 억눌린 성적 욕망은 히스테리의 기본 -혜자와 도준이 같이 자는 장면이 몇 차례 나오는데, 굉장히 불안한 느낌이 조장된다. 오이디푸스적인 모티브 또한 확실하게 느껴진다. =한국 관객은 혜자와 도준이 섹스를 했다는 생각보다는 도준이 모자란 아들이다 보니 성인인데도 엄마 젖을 만지면서 잘 수도 있다고 생각할 것 같다. 사실 오이디푸스 모티브나 모자간의 성적 관계가 있다, 없다를 떠나서 좀더 넓은 시각에서 보면 <마더>는 섹스에 관한 영화 또는 섹스라는 서브텍스트를 품은 영화다. 많은 대사와 장면에서 계속해서 섹스를 암시하고 있다. 그래서 차라리 엄마와 아들이라는 틀을 벗으면 좀더 잘 보일 수도 있다. 결국 그 좁은 집에 남녀 단둘이 사는 것이잖나. 엄마는 도준의 섹스를 통제하려 하고. 영화 전체를 누가 누구를 지배하려고 하나, 라는 관점으로 봐도 재밌을 거다. -도준은 엄마의 통제에서 빠져나가려 하는 듯 보인다. 엄마가 약을 먹이는 도중 오줌을 싸는 장면이나 술집을 찾아가고 여성들에게 껄떡거리고 하는 것도 그렇다. =사건이 나던 밤 도준의 여정은 성욕에 이끌린 것이다. 대사에도 나오지만 “발정난 개”의 여정이다. 그야말로 배설을 한 뒤 술집 마담에게 집적거리다가 나중에는 마담 딸에게 집적거리고, 살해당한 아정이까지 쫓아가게 된다. 그리고 결국엔 엄마 젖을 만지면서 잠든다. 그리고 그 여정 속에는 비극이 감춰져 있다. 혜자의 여정에도 성적 요소가 강하다. 혜자는 진태 집에 몰래 들어가는데 커튼 뒤에 갇혀서 진태와 미나의 섹스를 보게 된다. 그 다음에는 그 진태가 웃통을 벗은 채 등장해 뭔가 성적으로 위협적인 이야기를 한다. 얼마 뒤에는 마을 전체의 섹스도 엿보게 된다. 마침내 클라이맥스에 가면 혜자에게 성적으로 공격성을 띠는 남자까지 등장한다. -정말이지 이 영화 속 모든 사건의 이면에는 억눌린 성욕이 존재하는 것 같다. =억눌린 성적 욕망이야말로 인간 히스테리의 기본인 것 같다. 도준은 섹스를 하고 싶은 데 못하는 아이다. 아정이는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하고, 마을 남자들의 욕망은 뒤틀려 있고. 그런 가운데 섹스로부터 차단된, 생리대를 쓴 지 아주 오래된 혜자가 그 한복판으로 들어간다. 사회적인 풍자를 많이 배제해서인지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자연스럽게 인물들의 성적 히스테리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됐다. -어떻게 보면 그 섹스라는 서브텍스트가 지금 당신이 바라보는 한국사회의 실체와도 관련이 있는 것 같다. =마을 남자들이 소녀 한명을 능욕한 사건이 몇번 있었는데 그런 게 영감을 주기는 했지만 그것을 고발하려는 차원은 아니니까. 아까 내가 서로 다른 요소를 뒤섞거나 충돌시키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했는데, ‘엄마와 살인사건’이 그렇듯이, ‘엄마와 섹스’도 정말 안 어울리는 요소잖나. 특히 한국사회에서 엄마는 섹스의 반대말 아닌가. 엄마들이 그렇게 억눌려 있기 때문에 고속버스에서 아저씨들과 부비부비를 하는 것도 이해가 된다. (웃음) 따져보면 엄마이기 때문에 섹스가 나온 것 같다. 가장 어울리지 않는 요소를 뒤섞는 내 본능에 따라서. 과도한 자식사랑은 숭고한가, 광기인가 -후반부 혜자의 “우리 아들 발톱의 때만도 못한 새끼가…”라는 대사는 당신이 이 영화에서 말하려는 가장 중요한 핵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수 있다. 그것을 모성이라 불러야 할지 광기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부모들은 짐승이 되기 쉬운 것 같다. 자식으로 인해서 미쳤을 때 그게 숭고한 사랑이냐 야만적인 광기냐, 이 영화는 그 이야기인 것 같다. -이 영화는 혜자가 사람들을 하나씩 만나는 여정이기도 하다. 혜자의 거듭되는 1:1 대결인 셈인데, 그 과정이 <사망유희>까지는 아니더라도 판타지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혜자 선생님도 시나리오를 받아보고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인물들의 대사는 일상적이고 리얼한데 전체를 보면 몽환적이고 아련한 데가 있다고. 혜자는 이 사람, 저 사람을 거쳐서 결국 마지막엔 아들과도 대결하는데, 어차피 이 영화는 엄마가 사건을 헤집고 들어가는 이야기이니까 시각적으로도 혜자가 어디론가, 그것도 우군도 없이 홀로 걸어가는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사용하면서 강조하려 했다. 그것이 핵심 이미지 같기도 했다. -이 영화 전반에 걸쳐서 특징적인 것은 극단적인 빅 클로즈업이다. =미묘하게 불안정한 느낌을 전달하기 위해 빅 클로즈업을 사용했다. 화면비율을 2.35:1로 선택한 것도 그 때문이다. 턱이나 이마가 많이 잘리는데, 그 느낌이 중요해서 2.35 : 1을 썼다. 또 빅 클로즈업으로 보이는 혜자 선생님과 원빈의 눈 때문이기도 하다. 이 영화에는 거짓이나 무언가를 감추는 것에 관한 이야기가 많다. 누군가가 거짓을 행하는가는 눈을 보면 잘 드러나는 것 같다. 그리고 혜자 선생님이나 원빈은 눈의 이미지가 워낙 강하기도 해서 눈에 가깝게 들어가고 싶기도 했다. -당신은 어떤 영화든 스스로 만들고 싶어 하는 특정한 장면에서 출발한다고 했다. <마더>에서 꼭 만들고 싶었던 장면은 무엇인가. =라스트신이다. 혜자가 아줌마들과 어울려 버스 안에서 춤추는 장면 말이다. 2004년에 혜자 선생님에게 출연 제의를 할 때도 이미 그 장면은 있었다. 어릴 때 오대산에 갔는데, 버스가 입구에 도착했는데도 아줌마들은 그 자리에 차를 세워놓고 1시간 넘게 춤을 추더라. (웃음) 그때는 어려서 그랬는지 추태라고 생각했다. 근데 나이가 드니까 좀 달리 보이더라. 웃기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각자에게 다 사연이 있겠지 하는 생각이 들더라.

[김영진의 점프 컷] <김씨표류기>는 표류하고 말았나

<김씨표류기>는 올해 불운한 영화 중 한편으로 꼽힐 만하다. 내가 본 극장에서 대다수 관객은 이 영화를 즐겼다. 사방을 쓱 둘러보니 흐뭇한 미소를 짓는 이들이 많았다. 어느 면에서나 빠지는 데가 있는 영화가 아니었다. 소재도, 풀어가는 연출도, 연기도 수준급이었다. 정재영이야 원래 연기를 잘하는 배우지만 그의 상대역이었던 정려원도 기대 이상으로 느낌이 좋았다. 그런데 재미있다는 느낌 이상으로 영화가 나아가지는 못하고 멈칫거리는 인상이었다. 영화 중반까지 치고 올라가던 영화가 절정부를 축으로 완만하게 기력이 하강하면서 귀여운 영화라는 것 이상의 여운을 남기지 못한다. 절정부를 축으로 하강하는 감정이입 파산한 신용불량자가 한강에 투신자살했다가 무인도인 한강 밤섬에 휩쓸려가 그냥 거기 눌러앉아 살게 된다는 내용의 이 영화에서 주요 컨셉은 고독한 인간이 소통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우린 주변에서 종종 심심하다는 말을 하는 인간을 보게 되는데 이 영화는 그렇게 팔자 좋은 고독논리에 대한 전면적인 재해석이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주인공 김씨는 나무에 목을 매 자살하려다 하필이면 그때 다가온 변의를 참지 못하고 숲속에서 볼일을 본다. 김씨가 엉덩이를 까고 큰일을 보는 걸 보여주는 장면에서 이 희극적인 상황이 가져올 과정을 짐작하게 된다. 김씨는 자신이 포기하려고 한 육체, 지상에서 삭제하려고 한 육체의 부름을 받는다. 죽으려고 하기 직전에 느닷없이 찾아온 몸속의 경보음, 허겁지겁 찾아온 배설욕구를 해결하고 나서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숲의 정경이다. 그것들은 아마도 너만 여기 사는 게 아니야, 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이때부터 김씨는 먹고살기 위해 숲에서 일용할 양식을 찾는데 그건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과 같다. 어떤 건 먹어도 되고 어떤 건 먹으면 안된다. 쓰레기에서 찾아낸 짜파게티 수프 봉지는 김씨에게 장기적인 목표를 갖게 해준다. 그는 자장면을 손수 만들어 먹고 싶다. 그가 자장면을 만들어 먹기 위해서는 장기적인 과정이 필요하다. 여기서 그는 자연의 순환에 관한, 자신이 싼 똥을 숲이 거름으로 삼는 것과 똑같은 자명한 이치를 깨닫는다. 오리 똥에서 건져낸 씨를 무작정 심은 그는 결과를 기다린다. 싹이 난다. 그는 이제 주변과 소통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씨를 뿌리면 싹이 나는 것, 행동을 하면 반응을 보이는 것, 적극적으로 화답하는 것, 배설한 것에서 생명이 자라나는 순환에서 김씨는 소통을 깨닫는 것이다. 이제 그는 숲에서 너무 재미있게 논다. 자신에게 응답하는 조그만 밤섬의 생명들에게 환희를 느끼며 그는 자기집 안마당 같은 밤섬 모래밭에서 신나게 뛰며 즐거워한다. 김씨가 밤섬 자연과 나눈 소통은 건너편 아파트에서 자폐생활을 하는 또 다른 여자 김씨에게로 이어진다. 그녀는 남자 김씨의 정신나간 얼빠진 짓을 흥미롭게 관찰하다가 거기 어떤 맥락이 있음을 알게 된다. 그의 행동을 그녀만 이해할 수 있다. 그녀는 그와 소통한다. 그는 물론 그런 그녀의 이해와 이해에 비례해 늘어가는 애정을 알지 못한다. 그녀는 일방의 소통을 쌍방으로 바꾸기 위해 나름대로 피나는 노력을 한다. 남자 김씨가 숲의 생명들과 그렇게 하듯이 여자 김씨는 일종의 신호로 남자 김씨와 소통하려고 한다. 남자 김씨는 알아차린다. 그렇게 해서 그들이 행복하게 되느냐 하면 그건 또 다른 문제다. 각자 섬과 자기 방에 스스로 유폐된 그들의 공간은 그렇게 안전하지 않다. 여자 김씨가 부모의 집에서 피신처를 제공받는 것처럼 남자 김씨는 사회로부터 피신처를 제공받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여자 김씨는 남자 김씨를 돕고 싶어 하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기 방을 나서야 한다. 그건 남자 김씨가 밤섬을 떠나는 것만큼이나 그녀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는 위태로운 일이다. 클라이맥스에서도 왜 감흥이 안 생길까 어쨌거나 그들 각자의 안식처는 깨부숴야 한다. 그들의 삶의 즐거움은 그 안에서 자족적으로 누리기에는 너무 연약한 것이기 때문이다. 깨부수면 그들이 밤섬과 자기 방에서 누리는 행복도 깨어진다. 그게 일시적인 것인지 아니면 영원한 것일지 모르지만 여하튼 그들 삶의 즐거움은 도피를 벗어날 수 없다. 이것이 <김씨표류기>의 웃음과 멜랑콜리의 정체가 될 것이다. 감독 이해준의 연출은 무난하고 예쁘지만 자기만의 스타일을 관객에게 알게 해주는 것은 아니다. 그는 고전적 스타일도 아니고 공감각적 환기를 노리는 굵은 호흡도 아닌 애매한 연출태도를 취한다. <김씨표류기>에서 가장 이상한 것은 절정을 향해 치닫는 부분에서 감정이입의 잠깐 멈춤 현상이 일어나고 그 뒤로는 죽 감정이입이 하강한다는 것이다. 남자 김씨가 마침내 자기만의 목표달성을 해내는 장면이 있다. 김씨가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리는데 카메라는 그런 그의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잡는다. 그런데 관객, 아니 나는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함께 본 사람들도 그랬다고 한다. 감정적으로 낯간지러운 장면이긴 하지만 여하튼 그 클로즈업에서 관객은 적절한 공명을 일으켰어야 했다. 그게 연출의 목표였을 것이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때까지 감독이 세분한 화면 사이즈의 배분에 문제가 있었거나 내러티브의 목표와는 달리 시각적 콘티의 이상이 달랐다는 것일 수도 있다. 절체절명의 고독에서 자신이 혼자가 아님을 느끼는 것, <김씨표류기>는 대안의 삶의 방식을 찾지 못해 허덕이는 사람에겐 적지 않은 영감을 줄 수 있는 작품이었다. 김씨가 손바닥만한 밤섬에서 우주의 기운을 느낀 것은 코페르니쿠스적 삶의 전환이다. 그는 예술의 최종목표 중 하나인 공감각적 조응을 제 몸으로 느낀 사람이다. 자기 몸의 배변 욕구에서 다른 생명의 존재를 자각하고 그 생명들이 일정하게 순환하는 과정에 자기 노동을 투여해 그 자연의 일부가 된다. 거기서 그는 혼자가 아니다. 사람들이 없지만 혼자가 아니다. 그 자체로도 행복할 수 있었다. 여자 김씨가 끼어들어 어떤 행동으로 도와주려고 할 때 그는 거절한다. 그 거절의 의미를 여자도 깨닫게 된다. 그들은 다른 삶의 방식을 실천하는 것에 대해 이해하는 협력자이다. 그들은 그런 면에서 로맨스의 주인공이 될 자격이 충분히 있다. 그렇지만 연출은 김씨의 공감각적 기운 충만을 묘사할 만한 솜씨에는 이르지 못했다. 시간에 따라, 계절에 따라, 각도에 따라 달라지는 남자 김씨 주변의 친구들이라 할 주변 사물의 생명을 촉각적으로 담아내는 데는 힘이 달린다는 인상을 준다. 거꾸로, 이는 여자 김씨를 둘러싼, 그녀의 삶과 마찬가지로 무미건조하고 적대적인 환경을 묘사하는 데도 역시 마찬가지다. 여자 김씨가 사력을 다한 용기를 내어 남자 김씨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외출을 감행할 때 그녀가 사는 아파트 동네나 거리를 묘사하는 것도 좀 무미건조하다. 코미디의 외관을 유지하기 위해 형식적으로 찍어낸 느낌이 강하다. 그것으로 인해 굉장히 좋은 아이디어였다고 생각하는 클라이맥스에서의 두 남녀 주인공의 상봉도 예상했던 만큼의 반향을 일으키지 못한다. 고로, 이 영화는 충분히 외연을 확장할 수 있는 여지가 많은 스토리였음에도 불구하고 텔레비전 드라마 이상의 감정 용량을 담아내기 힘들었던 것이다. 스크린에서라면 이 정도의 감정과 의미의 용량으론 좀 곤란하다. 훌륭한 배우들의 연기에도 아쉽게 그렇게 되었다. 이 정도로도 만족할 수 있는 영화이긴 하지만.

[song book] 담배가 없어

1972년 2월28일, 일본 나가노의 아사마 산장을 점거하고 열흘간 인질극을 벌였던 무장학생운동 세력 ‘연합적군’ 일당 5명이 체포되었다. 경찰과의 대치 상황에서 총격전도 불사했던 이들은 체포 이후 ‘도피 과정에서 자아비판과 함께 12명의 동지들을 처형했다’는 놀라운 사실을 털어놓았다. 동료들의 잔혹한 린치에 목숨을 잃은 12명 중에는 임신부도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에 이미 쇠퇴일로를 걷던 학생운동은 이 충격적인 ‘아사마 산장 사건’을 계기로 완전히 와해되었다. 같은 해,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시라케’(白け)라는 신조어가 크게 유행했다. ‘퇴색하다’는 뜻의 동사 ‘시라케루’(白ける)에서 파생된 이 말은 세상 어떤 일에도 무관심한 풍조를 일컫는 용어. 무기력, 무감동, 무관심의 3무주의로 요약되는 시라케는 이상의 좌절을 끔찍하게 목격한 청춘들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태도였다. 그리고 같은 해 7월, 포크계의 신성으로 떠오르던 이노우에 요스이(井上陽水)는 문제적 싱글 <우산이 없어>를 발표했다. ‘도시에서는 자살하는 젊은이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오늘 아침에 배달된 신문 한구석에 써 있었어/ 텔레비전에서는 우리나라의 장래 문제를/ 누군가가 심각한 얼굴로 말하고 있어/ 하지만 문제는 오늘 내리는 비/ 우산이 없어/ 너를 만나러 가지 않으면 안되는데’라는 <우산이 없어>의 가사는 시라케에 젖어 있던 당시의 젊은이들에게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다. 지금에야 이노우에 요스이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서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지만, 데뷔 무렵이었던 70년대 초까지만 해도 그는 미디어에 대해 철저히 적대적인 입장이었다. ‘신문’과 ‘텔레비전’을 적시한 <우산이 없어>의 가사도 무관심보다는 불신에 방점을 두고 있었다. 그리고 노래의 말미에서 이노우에 요스이는 질문한다. ‘너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그건 괜찮은 것일까?’라고. 요컨대 그는 이 노래를 통해 무기력증에 빠진 청춘들의 정서에 영합하기보다는 자문을 통한 각성을 촉구했던 것이다. 2008년, 서울의 젊은이들은 시청과 광화문에서 쓰디쓴 패배를 맛보아야 했다. 이듬해에 그들은 한때 개혁의 표상이었던 전직 대통령의 서거를 경험해야 했다. 마지막 가는 길에 담배 한대 태우지 못했다는 소식에 하루에 열두번도 더 울컥하는 지금이지만, 얼마간의 세월이 흐른 뒤 우리는 다시 세태에 무관심해지거나 더욱 무기력해질지도 모른다. 그건 괜찮은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