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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1997)

[오마이이슈] 듣도 보도 못한 정부

며칠 세게 놀던 아이가 고열 몸살로 앓아누웠다. 물 한 모금 제대로 삼키지 못하고 찬 마룻바닥을 찾아 몸을 붙인 채 꼬박 하루 반을 보내더니 멀쩡하게 일어나 앉아 밥 달라고 나를 흔든다. 해열제 먹이고 얼음주머니 갈아주는 거 외에 도울 길이 없었다. 짐승처럼 신음하는 동안 옆을 지켜주는 거 외에는(음, 물론 텔레비전도 나와 함께 애를 지켰지). 안쓰러움과 기특함에 이어 생명의 경이로움이 느껴졌다. 누구한테랄 것 없이 고마웠다. 애 하나 키우면서도 배우는 게 참 많다. 그런데 대체 애를 넷이나 키웠다고 자랑하던 사람의 성품과 태도가 왜 저 모양인지 모르겠다. 그가 보스로 있는 이 정부는 용산참사 유가족들과 제대로 된 대화 한번 하지 않았다. 사과는커녕 진상 규명도 책임자 처벌도 오리무중이다. 제대로 된 정부라면 이렇게 중요한 일을 몇달째 방치할 리가 없다. 정말 듣도 보도 못한 정부다. 행정안전부와 경찰 일각에서 대화 움직임을 보이자 청와대가 “대화는 책임을 인정하는 것”이라는 이유로 제동을 걸었다고 알려졌다. 한마디로 제 풀에 지쳐 그만두길 바라는 심산이다. 주검은 다섯달째 냉동고에 있고 장례도 치르지 못한 유가족들은 영안실에서 먹고 자고 있다. 정당한 법집행이었다면 성의있는 대화와 응분의 조처를 회피할 이유가 없다. 수사기록도 공개 못할 이유가 없다. 우리가 무정부지역에 사는 것도 아니고, 이 정부 관계자들이 사이보그도 아닌 이상 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최소한의 염치도 예의도 휘발된 냉혈 철면피가 이 정부의 실용인가. 최근 터져나오는 시국선언과 집회에서 눈길을 끈 손팻말은 “부자감세 1년 20조원=월 200만원 일자리 83만3333개”였다. 역시 한국여성노동자회 여러분들 진정으로 실용적이다. 부자 감세분에 4대강 파내는 예산을 더하면 일자리는 훨씬 늘어난다. 잘해달라 안 하겠으니 잘해준다 우기지나 말고, 아니 제발 때리지나 말았으면 좋겠다. 87년 이후 처음으로 시국선언한 교수들도 한줌, 평일 저녁 제 발로 촛불 들고 모인 시민들도 한줌이라고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기에 바쁘다. 그들이 말하는 ‘절대다수’는 몸과 마음을 지키고자 납작 엎드려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것인데.

<마이클 잭슨 사망 이모저모>-2

<마이클 잭슨 사망 이모저모>-2 = UCLA 메디컬센터, 팬.취재진으로 장사진 = ○...마이클 잭슨 사망 소식이 인터넷과 라디오, 텔레비전을 통해 전해진 뒤 UCLA 메디컬센터 주변은 몰려든 취재진과 팬들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다. 언론사 헬리콥터가 병원 상공을 맴돌고 방송 차량이 병원 주변 거리를 메운 가운데 병원 정문 주변에는 수백명의 팬들이 운집해 병원 측의 공식발표를 기다리고 있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인파가 늘어나고 있다. 일부 팬들은 새로운 소식을 고대하며 연신 휴대전화를 했으며 일부는 슬픔을 못 이겨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LA AP=연합뉴스) = 잭슨 전 홍보담당자 "비극 예상했다" = ○...마이클 잭슨의 전 홍보담당자인 마이클 러바인은 잭슨 사망 소식에 자신은 수년간 이 같은 비극이 일어날 것으로 예상했다고 밝혔다. 그는 미국 연예전문사이트 'TMZ닷컴(www.tmz.com)'에 "마이클 잭슨의 첫 아동 성추행사건 당시 홍보담당자로 일한 사람으로서 오늘의 비극적인 소식이 놀라운 게 아니라는 것을 고백한다"고 말했다. 그는 "마이클 잭슨은 수년간 극도로 힘들고 때론 자멸적인 여정을 겪었다. 그의 재능은 의심할 나위가 없지만 세상의 규범에 대한 그의 고민도 엄청났다"며 "어떤 인간도 그런 스트레스가 지속되는 것을 견딜 수는 없다"고 말했다. (서울=연합뉴스) = 잭슨 사망 소식에 인터넷 불통사태 = ○...마이클 잭슨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 순간 많은 사람이 인터넷으로 몰려들면서 월드와이드웹(WWW) 자체가 사실상 불통사태를 빚었다고 'TMZ닷컴'이 보도했다. 잭슨의 사망 소식을 처음 전한 TMZ는 페이스북과 마이스페이스, 트위터 AIM 등 주요 웹사이트들이 트래픽 폭탄을 맞았다며 대부분의 사이트가 작동은 하지만 속도는 매우 느려진 상태라고 전했다. 최근 인터넷에 이 정도의 트래픽이 한꺼번에 몰린 사례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취임식뿐이었다고 TMZ는 덧붙였다.(서울=연합뉴스) = 엘튼 존, 공연 중 마이클 잭슨 추모곡 = ○...영국 가수 엘튼 존이 공연 중에 마이클 잭슨의 사망 소식을 전해듣고 즉석에서 추모곡을 불렀다고 TMZ닷컴이 전했다. 엘튼 존 에이즈재단의 기금 모금을 위한 연례공연 '화이트 타이 앤드 티아라 볼'을 진행하던 엘튼 존은 잭슨의 사망 소식을 전해듣고는 즉석에서 "태양이 나를 미워하지 않게 해주세요(Don't Let the Sun Go Down on Me)"를 잭슨에게 헌정했다. 공연에는 리즈 헐리와 휴 그랜트, 릴리 앨런, 켈리 오스본 등 많은 명사들이 함께했으며 잭슨 사망 소식에 일부가 자리를 떴다고 TMZ는 밝혔다. (서울=연합뉴스) scitech@yna.co.kr (끝) <연합뉴스 긴급속보를 SMS로! SKT 사용자는 무료 체험!>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MBC, 마이클 잭슨 공연 실황 방송

7월 4일, 텔레비전으로 마이클 잭슨의 전성기 시절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있게 된다. MBC 는 지난 25일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마이클 잭슨의 추모 특집으로 <팝의 황제! 불멸의 라이브> 를 방송한다고 밝혔다. 이번에 방송되는 영상은 1992년 10월에 루마니아 부쿠레스티에서 있었던 (라이브 인 부쿠레스티 : 데인저러스 투어) 공연 실황을 담은 영상으로 당시 미국 HBO 역대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한 마이클 잭슨 최고의 라이브 실황으로 알려져 있다. 이 공연에는 MBC 배철수의 음악캠프에서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마이클 잭슨의 명곡 1, 2, 3위로 뽑힌 ‘Billie Jean’ ‘Beat It’ ‘Black or White’ 를 비롯하여 ‘I’ll be there’, ‘Heal the world’ 등 마이클 잭슨의 주옥같은 히트곡들이 모두 망라되어 있다. 1969년 형제들과 함께 잭슨파이브로 음악활동을 시작한 마이클 잭슨은 30년이 넘는 시간동안 수많은 히트곡을 발표하며 팝의 전설로 불려졌다. 그의 앨범 ‘Thriller’ 는 빌보드 차트에 무려 37주 동안 1위 자리를 지켰고, 가장 많이 팔린 앨범으로 기네스에 등재되기도 했다. 최근에는 활동이 뜸했으나 그가 사망 직전까지도 새 앨범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의 앨범은 1주일에 10만장 이상 판매되었으며 추모 열기가 미국 전역으로 퍼져나가고 있다. 7월 4일 토요일 밤 12시부터 90분간 방송되는 <팝의 황제! 불멸의 라이브> 는 한국인이 가장 사랑했던 팝가수, 마이클 잭슨을 다시 한번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나의 친구 그의 영화] 물어도 물어도… 답은 얻지 못하리

1. 미남 고민남 고민 상담한 안미남 상담남 고민 해결한 미남 고민남 안녕하세요, 저는 일산 ‘변두리’에 거주하는 미남 고민남(39·소설가)입니다. 일산 ‘중심부’에 거주하는 안미남 김연수 작가님(40·소설가)께서 보내주신 상담글은 잘 읽었습니다. 사실 제 고민 사연은 <한겨레> esc 지면의 ‘김어준의 그까이꺼 아나토미’에 보냈던 것인데, 착오가 있었나 봅니다. <한겨레>와 <씨네21>이 같은 건물에 있기 때문에 생긴 착오가 아닌가, 저 혼자 추측하고 있습니다(설마 제 고민 사연을 가로챈 건 아니겠지요?). 원하는 분께 상담을 받지 못하여 실망이 크긴 하지만 김연수 작가님도 인생 좀 살아보신 분이라니(저보다는 무려 1년이나 더 살아보신 분이라니) 뭔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 열심히 글을 읽었는데, 이게 뭡니까, 대충 살라니요. 따지지 말고, 일단 살라니요, 나중에 다 알게 된다니요. 김연수 작가님, 실망이 큽니다. 저로 말할 것 같으면 39년 동안 너무 대충 살아서 “이름을 DC KIM(대충 김씨)으로 바꾸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을 정도였으며, 텔레비전 프로그램 제목도 대충 보는 바람에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를 <대충나무 대충 걸렸네>로 읽어 주위 사람들을 당황케 하기도 했습니다. 이거 보십시오, 돈 받고 쓰는 글도 이렇게 대충 쓰고 있지 않습니까. 영화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고 벌써 3매 채웠습니다. 김연수 작가님은 언행일치를 몸소 실천하는 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대충 살라더니, 자신도 대충 살더군요. 고민을 해결해 주는 척하면서 은근슬쩍 고민남에게 자신의 고민을 상담 받으려 하다니, 정말 돈 받고 쓰는 글을 이렇게 대충 써도 되는 것입니까. 아무튼 저에게 질문하셨으니 저도 답변을 해드리렵니다. 질문은 이랬지요. 세상은 점점 나아지는 것인가? 여긴 조금 더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인가? 답이야 간단합니다. 답은 없습니다. 이것은 질문으로만 존재가 가능한 질문입니다. 세상에는 두 가지의 질문이 있지요. 답과 함께 짝패를 이루는 질문이 있는가 하면, 질문으로만 존재가 가능한 질문이 있습니다. 두 번째 종류의 질문은 답을 얻는 순간 질문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아, 제가 너무 진지했지요. 대충 살아야 하는데, 잠깐 딴생각을 하다보니 너무 진지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앞으로 서로의 고민은 각자 알아서 풀도록 하는 것은 어떨까요. 이상 변두리에서 대충 김씨였습니다. 2. 삶은 우연과 필연이 뒤섞인 혼돈 태어나서 한번도 상담 같은 걸 받아본 적이 없다. 누군가의 고민을 열심히 들어준 적도 없고, 누군가에게 내 고민을 털어놓은 적도 거의 없다. 고민을 잘 듣지 못하니, 고민 얘기 하기도 미안한 거다. 내 고민 얘길 잘하게 되면 남의 고민도 잘 듣게 되려나. 상담의 중요성은 알고 있다. 어깨에 짊어진 짐이 아무리 무겁더라도 누군가에게 얘기하고 나면 한결 가벼워진다. 그 어떤 초특급 비밀이라도 누군가에게 발설하고 나면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상담이 한 사람의 목숨을 살리기도 한다. 가끔은 나도 상담 같은 걸 받아볼까 싶은 마음이 들다가도 ‘에잇, 그 돈으로 김연수랑 술이나 마시자’ 싶은 마음이 들고 실제 술을 마신다. 술을 마시다보면 고민은 온데간데없어지고- 물론 해결되는 게 아니라 뒷전으로 밀리는 거다- 결국 남는 건 두통과 속쓰림뿐이지만 고민 얘기할 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본전은 건진 게 아닌가 싶다(라고 위안해야지). 사람들은 결정적인 선택을 해야 할 때 상담을 필요로 하는 것 같다. 어떻게 할지 모르는 거다. 이거냐 저거냐, 이 길이냐 저 길이냐, 이 사람이냐 저 사람이냐, 갈 거냐 말 거냐, 죽을 거냐 말 거냐. 그래서 사람들은 묻고 또 묻고, 점집에도 가보고, 종교에도 의지하고, 그러는 게 아닌가 싶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는 걸까. 더 많은 사람에게 물어보면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는 걸까. 아니, 문제는 그게 아닐 수도 있다. 정작 우리가 며칠 밤을 새우며 고민하는 선택의 갈림길들이 훗날 돌이켜보면 별것 아닌 것일 수도 있다.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선택한 것이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올 수도 있다. 우리가 그 결과를 어떻게 알 수 있겠나. 샘 레이미 감독의 최근작 <드래그 미 투 헬>을 보며 그런 생각이 짙어졌다. 주인공 크리스틴은 정말 별것 아닌 일로 저주를 받고, 삶이 꼬인다. 대출 연장을 신청한 집시 노파의 부탁을 거절하며 모욕을 주었다는 게 이유인데, 내가 보기엔 모욕도 아니다. 단순한 선택이 만들어낸 최악의 결과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원인과 결과로 이루어진 합리적 세계라면 좋은 원인에는 좋은 결과가, 나쁜 원인에는 나쁜 결과가 따라붙는 단순한 세계라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는 분명하다. 잘 살면 된다. 좋은 원인만 만들면 된다. 하지만 삶이란 일직선도 아니고 원인과 결과가 분명한 것도 아니고 우연과 필연이 아무렇게나 뒤섞인 혼돈일 뿐이다. 우리의 선택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지난 칼럼에서처럼 다시 묻게 된다. 정말, 솔직히, 모르겠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건지. 역시 김연수 작가의 충고처럼 대충 사는 것 말고는 길이 없는 건가. 나는 <드래그 미 투 헬>이 즐겁지 않았다. <이블 데드> 시리즈를 도대체 몇번이나 보았는지 브루스 캠벨의 표정까지도 기억하며 모든 장면에 열광했던 나인데, 샘 레이미의 귀환은 너무 싱거웠다. 예전에 비해 장난도 덜했고, 까무러치게 웃기는 장면도 적었다. 거장인 건 알겠지만 장르 특유의 쾌감에 좀더 충실했으면 좋았을 텐데라는 아쉬움이 크다. 무엇보다 가장 싱겁고 허무했던 것은 결말이다. 튀어나오는 내장들과 똑, 똑, 으스러지고 부러지는 뼈들과 나부끼는 핏자국에 놀라면서도 배꼽을 붙잡고 낄낄거리며 몇번을 다시 볼 수 있었던 것은 해피엔딩(이라고 하기엔 뭔가 쑥스럽고, 해피엔딩 비슷한 결말)이었기 때문이다. 원인이야 어쨌든 결과는 해피엔딩이고, 적들이야 어쨌든 우리는 승리할 거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웃을 수 있었던 거다. 나도 안다. 현실은 <이블 데드>보다 <드래그 미 투 헬>에 가깝다는 것을. 원인을 훌쩍 뛰어넘는 해피엔딩보다 원인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끔찍한 엔딩이 우리의 현실이라는 것을, 나도 알고 있다.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래서 하는 말이다.

[배명훈] L씨에게 창작지원 받았어요~

빈스토크. <재크와 콩나무>에서는 하늘로 솟은 거대 콩나무 줄기에 붙여진 이름이었지만 배명훈의 소설 <타워>에서는 674층, 2408m 50만명이 밀집해 사는 상상의 국가이자 초대형 복합빌딩의 이름이다. 배명훈은 상상의 건물 하나를 세상으로 구축한 뒤 여기에 세상살이의 은밀한 촌극과 그렇게 조금씩 웃다가 정신차려보면 문득 서글프고 무서워지는 모순 혹은 어딘가 남아 있을 사랑과 희망까지 동시에 그려 넣었다. ‘알라딘’에 연재되었던 6개의 단편을 묶어 <타워>라는 이름으로 출간했고, 그러자 한국 SF소설계에 주목할 만한 작품이 나왔다고 다들 재미있어 하는 분위기다. 대한민국과 지구상에서 벌어진다 믿었던 일들이 빈스토크 안에서 여러 변형으로 벌어지고 휘어져 반영되는 걸 보고나면 이 재기 넘치는 건물의 설계자가 자연스럽게 궁금해진다. -한국 SF소설계의 인기 필자다. =나로서는 SF만 계속 써온 건 아닌데… 어찌 보면 블루오션이라 좋기도 하지만(웃음) 외롭다고 느낄 때도 있다. <타워> 나오기 전에도 인터뷰를 몇번 했는데 그때마다 인터뷰 3분의 1의 질문은 SF 장르 전체에 대한 어떤 거였고 거기에 답해야 했다. 나는 내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말이다! 그때 느낀 게 내 이야기를 하는 것도 여럿이 같이 있어야 할 수 있겠구나 하는 거였다. SF작가라는 것이 일종의 낙인이 될 때가 있다. 어떤 이들은 <타워>를 보고 “이게 무슨 SF야”라고 하고 또 누구는 “이건 SF야”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정해놓고 쓰지는 않는다. -주위에 팬들이 있어 이것저것 좀 물어봤다. 집필 습관 중에 이런 게 있다던데. 어떤 작품의 구상을 누가 미리 알게 되면 그건 당분간은 쓰지 않는다고. <타워> 후기에 소설은 꽁한 사람이 쓰는 거라고도 썼던데, 관련있는 건가 =문학 하는 분은 아니셨는데 대학원 지도교수님이 해주신 말이다. 성격 좋은 사람은 말로 하면 된다. 하지만 소설 쓰는 사람은 뒤에 가서 깊이 생각하고 쓰게 된다고. 맞는 말이다. 나는 블로그를 하지 않는다. 관리하기 힘들어서이기도 한데, 더 중요한 건 거기에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버리면 다른 곳에서 할 게 없어서다. -소설은 언제부터 썼나. =대학 2학년 때 시작해서 군대 가면서 본격적으로. 그때 썼던 것들이 만족스러운 건 아니었다. 2003년쯤 되니까 이제 뭔가 좀 되는구나 했던 것 같다. 2004년에 제대하면서 <테러리스트>를 썼는데 대학원 어떤 선배가 읽어보더니 어디 내보내라고 해서 대학문학상에 냈고, 단편부문 우수상을 받았다. 먹히는구나(웃음), 알게 됐다. -20대 때와 지금 글쓰기에는 어떤 차이가 있다고 보나. =지금은 즐겁게 쓴다. 20대 때는 다들 그렇듯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뭔가 좀 확실해졌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실은 이런 이야기하면 돌 맞는데, 요즘은 괴롭지 않고 즐겁게 쓴다. 돌 맞아도 할 수 없지만 그래도 나는 한달에 한편씩 쓰지 않나. 해보니까 실은 스타일 차이다. 보통은 한 가지 소재를 잡고 치열하게 쓴다고들 하지 않나. 그런 경우에는 몇달을 잡고 계속 고치게 된다. 그런데 나는 다른 것을 써가면서 발전시킨다. <타워>에 실린 단편 <동원박사 세 사람_개를 포함한 경우>는 다른 단편 <초록연필>을 발전시킨 거다. 사무실에서 필기도구가 사라지자 이게 어디로 가나 추적하는 건데, 이론과 리서치를 더해서 한 단계 더 나아간 게 <동원박사 세 사람_개를 포함한 경우>다(빈스토크 내부 미세권력연구소의 권력장 연구의 일환으로 값비싼 술병에 바코드를 붙인 뒤 그 술병이 선물로 전해질 때 어디로 어떻게 흘러들어가는지를 연구하여 권력의 계보와 흐름을 계측한다-편집자). <초록연필>을 생각했던 게 지난해다. 요즘 말 많은 회사 KISDI(정보통신정책연구원)에 있었는데 대통령 바뀌자 출근 시간을 당기지 않나, 좀 이상했다. 히틀러 같은 절대 악마가 있어서 그렇게 시키는 것이 아니라 어떤 한칸 한칸이 변하는 것 아닌가, 싶었고 그걸 설명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것에서 시작됐다. 어떤 리뷰는 내 소설을 보고 권력에 대한 심오한 풍자라고 하던데 나는 좀 다르게 생각한다. 나는 어떤 누가 문제여서 그 권력자를 단순하게 치환한 게 아니다. 의인화될 수 없는 복잡한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고보면 각 단편들은 무엇을 따라 배치됐나. =맨 앞의 두편은 비판, 그 다음은 긍정적인 문제제기, 그 다음은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원래는 풍자가 재미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쓰다보니 웃기기만 해서 되겠나 싶었다. <타클라마칸 배달사고>는 처음에 말랑말랑한 로맨스로 가려고 했는데 <타워> 소재에 녹이면서 처음의 것이 아니라 좀더 큰 이야기의 사랑이 됐다. 도대체 왜 하는 거지, 하는 사랑. -<타워>는 알라딘에 연재한 단편을 묶어 낸 책이다. =편집자들이 먼저 추진했다. 지난해 12월쯤. 대강 간략한 내용을 달라고 하더라. 1월에도 얘기가 있었는데 다른 연재가 먼저 있었고 그 다음에 시작했다. -<타워>의 주무대인 빈스토크의 설계 계기는. =어느 날 텔레비전을 보다가 갑자기 떠오른 거다. 다큐멘터리 채널이었다. 두바이쪽 빌딩에 관한 것이었는데 엘리베이터를 더 빨리 가게 하는 건 기술적으로 문제가 없는데 그걸 못하는 건 사람들이 어지러워하기 때문이라고 하더라. 지하철도 사실 그럴 것이다. 더 빨리 갈 수 있지만 문제는 사람이다. 공학적인 문제 이외의 것, 사람의 문제가 생길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거다. 공학적인 이야기를 할 때 사람의 문제는 어떤 식으로 들어오나, 하는. 그렇다면 그걸 도시에서 일어나는 일로 써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살면서 보는 이야기를 여기에 넣고 그걸 SF라고 우기면 그렇게 되지 않을까. (웃음) 수직주의, 수평주의 이야기가 가장 먼저 나왔던 것 같다. -소설을 읽다보면 작가가 이 거대 빌딩 빈스토크의 ‘건물 안내도’를 그려서 따로 갖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지하철 노선도도 잘 못 그리는데 3차원 공간을 그리기는 좀 어렵고. (웃음) 누가 여기 산다, 그러면 이 사람은 어디쯤 살아야 하는가. 하는 걸 생각한다. 도시에서 중심지가 발생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될 것 같다. 도시에서 중심지가 발생하듯이 여기서도 땅값이 비싸고 싼 곳이 형성될 것이다. 가령, 상층은 운송문제 등이 있으므로 부촌일 것이고 하층은 좀 빡빡하고, 그 사이사이 못사는 사람들이 살고 있고, 하는 식으로. 엘레베이터들을 가운데에다 공용으로 만들어놨는데 그게 모자라니까 건물 외곽쪽에 더 만들고 그게 도시의 고속도로 역할과 비슷해지자 고속도로 주변 땅값 오르듯이 그 엘레베이터 주변 집값 오르고. 혹은 창가쪽은 경관이 좋으니까 비싸고. 이런 식이다. -그 빈스토크 안에 당신의 거주지가 있다면 몇층이라고 상상하나. =창가쪽에 살았으면 좋겠다. 휴양지쪽에. 대한민국 영토로 치면 동해안쯤 될 거다. 그러기 위해서는 돈을 많이 벌어야겠네. (웃음) 674층 중에서 50층쯤 살고 있는 거 아닐까? 미세권력연구소가 30층쯤에 있으니까. -<타워>가 정치적인 작품이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지만 여하튼 국내외 사회정치적인 일을 연상시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게다가 후기에 “무한한 영감의 원천이신 L씨의 건강을 기원한다”라고 썼다. 대한민국 사람이면 다 아는 그 분일 거라 추측한다. =그렇다. 그분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쓴 단편 중에 <바이센테니얼 챈슬러>라는 단편이 있다. 2007년 대선 끝난 다음에 쓴 글인데 어떤 주인공이 총통 선거 다음날 천재 과학자인 와이프에게 지금이 너무 살기 싫으니 5년쯤 동면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렇게 해서 나중에 깨어났는데 여전히 4년 중임이고, 다시 동면에 들어갔다가 깨보니 유신이고, 뭐 이런 식이다. 그분이 가끔 매스컴에서 한마디하실 때 보고 있으면 너무 기발하지 않나. 작가로서는 오랫동안 우리 세대가 겪은 게 너무 없어서 불리한 것 아닌가 생각했던 때가 있었는데 지금은 너무 분명한 무언가가 있는 것 같다. 작가로서 말하자면 꼭 창작지원사업 받는 것 같다. (웃음) -<씨네21> 동료가 말하길 당신 소설은 “설정은 강력한데 정서적”이라고 하더라. =설정이 강력한가? 여하튼 나는 SF라고 생각하지 않고 썼는데 SF라고 규정된 사례다. 원래 SF 마니아들은 그런 소설을 많이 읽고 이 분야 대가들의 감성을 잘 아는데 나는 사실 잘 모른다. 나는 우리나라 사람이 푸는 방식으로 풀 수밖에 없다. -예컨대. =살면서 보고 느끼고 하는 이야기들. SF를 쓰기 위해 그 종류의 책을 열심히 읽는 게 도움이 되는지 잘 모르겠다. 되레 과학책을 읽거나 사람들 사는 모습을 보거나 하는 게 더 나을 것 같다. 공학적인 것으로만 채우면 메뉴얼만 나온다. 사람들 사는 데에서 많이 문제의식이나 해법을 끌어온다. -마지막에 실린 단편 <샤리아에 부합하는>의 후반부에 “이 나라 전부는 나도 잘 모르지만, 이 동네만큼은 어쩔 수가 없었어요”라고 쓰여 있다. 글 안에서 빈스토크가 바벨탑이 아니라고 누차 강조하는 것과 연관이 있을 것 같다. =처음 구상단계에서는 비판적인 시선만을 염두에 두고 가늘고 높은 건물을 상상했다. 그런데 사람 사는 곳으로 쓰자 했더니 건물이 뚱뚱해지더라. 빈스토크를 대하는 태도에 차이가 있지 않을까. 나조차도 수직주의자들처럼 살고 있지만 수평방향에 대해 생각하고자 했다. 이 소설에 일종의 대안이 있다면 그건 생명, 삶이다. 그게 우리 사회에 대한 나의 대안과도 비슷하다. 처음에는 민주주의의 문제라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생명의 문제인 것 같다. 그걸 작가로서 말해야 할 것 같다. 사람이 죽으면 눈을 깜박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데 그렇지 않다. 질문은 문명에 대한 것에서 시작했지만 풀기는 생활이라는 형태로 해본 거다. -책의 뒤편에 실린 부록은 독자들의 댓글을 반영한 것이라고. =<자연예찬>에서 K라는 작가가 북극곰이 해탈했다는 이야기를 썼다는 게 농담처럼 나오는데 그것에 대해서 짧게라도 덧붙여 써달라고 해서 썼고, P와의 인터뷰(P는 사람이 아니지만 <타워>를 관통하는 중요한 존재이며 권력장 연구의 핵심적 변수에 해당한다-편집자)는 독자 서비스고, 카페 빈스토킹 이야기는 내 생각에 꼭 들어가야 하는 부록이었던 것 같다. -빈스토크를 소재로 한 또 다른 이야기들이 남아 있을 것 같다. =30년 동안 써먹을 수도 있을 거다. 그중 몇 가지만 잘 써도 좋은 책이 나올 것 같긴 하다. 작가로서 내가 가장 하고 싶은 일은 내 작품을 보고 누군가 그도 뭔가 하고 싶어졌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타워> 일러스트 해주신 ‘오기사’ 오영욱씨도 처음에는 바빠서 못하겠다고 했는데 책을 읽어보고 맡아주셨다. 그런 게 가장 좋다. 어떤 창작자의 마음속 불을 지피는 게 내 역할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우문이겠지만 <타워>에 실린 작품들 중에서 개인적으로 더 애착이 가는 걸 꼽을 수 있나. =<자연예찬>. 실은 읽는 사람마다 다 다르다. 대개 여자들은 <타클라마칸 배달사고>, 남자들은 <엘리베이터 기동연습>을 좋아한다. 어떤 경우에는 닉네임만 아는 사람이라도 <타클라마칸 배달사고>를 좋아한다고 하면 아 여자군, 하고 알게 된다. -다음 작품은. =어떤 행성에서 15만년 뒤에 일어나는 일이다. 장편인데 이게 설명이 쉽지 않다. 신이 있는데 그가 인공위성의 궤도를 돌고 있다. 그 행성에 사는 사람들이 거기 도달해야 하는 이야기다. 성직자가 나오는데 신이 궤도에 있으니까 성직자는 천문학자여야 하고….(듣고도 아직은 정말 잘 모르겠다-편집자) <타워> 들어가기 전에 절반 정도 썼고 8월까지는 끝낼 생각이다. -상투적이지만 영화지니까 이런 질문 하나 해보자. 어떤 영화 좋아하나. =인도영화! 우리나라에 왜 많이 안 들어오는지 모르겠다. 인도대사관에서 상영회할 때면 가끔 간다. 그런데 인도영화와 인도 음식만 좋아하고 인도는 별로 안 좋아한다. 뭄바이에 갔었는데 이미지가 너무 안 좋더라. (웃음) -이 표현 쓴 기자가 기분 나빠할지도 모르니 가서 묻지는 말라고 그랬는데 그래도 물어보자. 요즘 유행하는 초식남이 분명할 거라고 하더라. (웃음) =맞다. 나 초식남이다. (웃음) 그런데 그게 뭐 나쁜가? -초식남에게는 애인보다 취미생활이 제일이라던데, 가장 열중하는 취미는.. =글을 자주 빨리 쓴다고 말했으니 당연히 취미생활은 글쓰기라고 해야 욕을 덜 먹을 것 같다. 한달에 한편씩 쓰니까 취미생활 열심히 하긴 하는 거다. -취미생활 하나 더 하면 어떨까… <씨네21>에 길티플레저라는 코너가 있는데. =좋다. 그런데 뭘 쓰지? 요즘 곧잘 인터뷰하다 보니 아닌 말도 하게 되더라, 이런 거? (웃음)

[오마이이슈] 방송 비즈니스

대단위 아파트 단지마다 인터넷 기반 텔레비전(IPTV) 무료사용 혜택이 즐비하다. 공정 거래 여부를 따질 필요도 없다. 거래시장도 만들어지기 전에 물량부터 퍼붓는 형국이니까. 신문 무가지 경품 제공 차원을 뛰어넘는다. 신문은 재미없지만 이 텔레비전은 재미있거든. 게다가 편리함이 중독된다. <결혼 못하는 남자>를 볼까, <선덕여왕>을 볼까 본방 사수를 고민할 필요없다. 편한 시간에 모니터가 아니라 브라운관을 통해 앞으로 뒤로 멈춰가며 볼 수 있다. 흥행영화도 며칠만 지나면 입장료의 절반도 안되는 돈으로 온 가족이 떠들면서 볼 수 있다. 지금은 콘텐츠를 지상파 등에서 제공받지만 조만간 자체 제작의 길까지 열리면 굿바이~ 마봉춘 굿바이~ 김봉수씨. 온 국민이 예능인으로 거듭나는 일만 남았다. 아참, 무료사용 기간 공짜로 퍼먹은 것까지 지갑 열어 몇배로 뱉어낼 일도 남았구나. 이번에 ‘조중동 방송법’과 함께 날치기 처리된 ‘IPTV법’은 방송 장악의 다음 시나리오를 보여준다. 대기업이나 신문, 뉴스통신사가 이 인터넷 기반 텔레비전의 콘텐츠 사업을 쥐락펴락할 길이 열렸기 때문이다. 그동안 이들은 인터넷 멀티미디어 방송 콘텐츠 사업을 겸영하거나 소유할 수 없었다. 외국자본에도 빗장이 풀렸다. 한마디로 돈 많은 놈들 다 뛰어들어 새로운 시장을 만들라는 말씀이다. 어휴. 등골 빼가는 과정이 뭐 이렇게 선진 글로벌하다냐. 가장 큰 혜택은 사양길에 놓인 거대 신문사(신문사주)들에 돌아간다. 바뀐 미디어 환경에도, 여론·정보 독점의 지위를 대대손손 세습할 길이 열렸다. 왕비호 말투대로 너희들 이거 아니었으면 대체 어쩔 뻔했니. 직권상정을 한 국회의장조차도 이번 방송법 등이 민생과는 관련없다고 했다. 국민의 60% 이상이 반대하는데도 밀어붙이며 내건 명분은 지상파 방송사들의 여론 독과점 체제를 허물겠다는 것이었다. 앞뒤가 안 맞는 말이지만 비즈니스의 세계는 그런 거다. 이 비즈니스를 위해 여러 종류의 멍멍이 역할을 해준 국회의원들이 딱해 보일 정도였다. 살짝 아쉬운 마음도 든다. 머지않아 국회의 개싸움조차 욕할 일이 없어질지 모르니. 휙 채널 돌리면 그만. 아, 그럴 필요도 없겠구나. 시청률 안 나오면 뉴스도 없어질 테니.

<마터스: 천국을 보는 눈>의 파스칼 로지에 감독 인터뷰

-올해 본 가장 강렬하고 무서운 공포영화였다. 결과물에 대해서는 만족하는가. =내 자신이 이 영화에 대해서 만족스럽다거나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건 터무니없고 바보 같은 짓이니까.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나, 창의적인 작업을 하는 입장에서는 좋은 감정을 느끼기 힘들다. 단지 내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서 굉장히 진실되고 거짓없이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부천영화제에서 많은 관객과 이 영화로 소통을 하게 되어서 뜻깊은 자리였다. 관객의 질문이 많았는데, 그 점이 대단히 기쁘다. -<마터스>의 이야기가 흥미롭다. 영화 제작은 어떤 계기로 시작되었나. =프랑스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적은 예산으로 공포영화를 만들어 달라는 제안이 왔다. 나는 그들이 평소 개방적인 사람들임을 알았기 때문에, 영화를 자유롭게 만들겠다는 판단을 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있지만 그동안 하지 못했던 것을 할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이런 영화를 만들어야겠다는 계획을 하고 진행하기보다는 직감적으로 이야기를 쓰면서 작업했다. <마터스>는 내면에 있는 어두운 면들을 한꺼번에 쏟아낼 기회였다. 그래서 순간순간의 느낌에 충실한 영화로 만들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아마 오랜 시간을 두고 계획을 짜고 영화를 진행했다면 만들지 못했을 것이다. -할리우드 공포영화와는 스타일이 많은 부분에서 달랐다. 캐릭터를 소개하는 구성이나 묘사 방식에서 기존의 공포영화들과는 다른 느낌을 받았는데, 영화를 만들면서 어떤 점에 중점을 두었는가. =나는 프랑스 사람이기 때문에 내 영화가 주류 공포영화와 다른 것은 당연하다. 할리우드가 재미를 추구하는 대중적인 오락이라면 나는 개인적인 것을 추구하고 싶었다. 그런 면에서 할리우드 공포영화와는 다르다. <마터스>의 여성 캐릭터는 희생양이다. 그녀는 고통과 아픔을 매일매일 겪고 그것을 견딜 수 없기에 늘 패닉 상태다. 그리고 영화 후반으로 넘어가면서 ‘순교자’로서의 느낌이 나오도록 묘사했다. -<마터스>는 두 가지 이야기로 진행된다. 지옥 같은 곳에서 탈출한 루시의 이야기가 절반이고, 그녀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안나가 체험하는 것이 나머지 절반이다. 하나는 장르 클리셰이며, 뒤의 이야기는 참신했다. =루시가 주인공인 앞의 이야기는 기존의 공포영화들에서 흔히 나오는 것들을 몰아넣었다. 뒤에 안나가 주인공일 때는 내 자신이 창조한 새로운 것들로 채워넣으려고 했다. 영화를 보는 관객은 주인공 루시가 영화 시작 45분 지점에서 죽임을 당할 때, 당혹감을 느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지점에서 안나의 이야기로 넘어가면서 관객이 예측할 수 없었던 새로운 이야기로 끌고 싶었다. 불편하다는 느낌이 들겠지만, 의도적으로 그렇게 구성하고 영화를 찍었다. -루시는 탈출 과정에서 같은 고통을 겪는 한 여자를 외면하고 죄책감에 빠진다. 루시의 환상 속에서 그 여자는 뒤틀린 이미지로 계속 등장하는데, 그 기이한 이미지가 너무나 혐오스러웠다. =루시를 괴롭히는 여자의 뒤틀린 몸은 그녀의 죄책감을 형상화한 것이다. 루시는 도움을 줄 수도 있었지만, 외면했다는 죄책감으로 인해 벗어날 수 없는 트라우마를 가지게 되었다. 육체가 꼬이고 뒤틀린 것은 루시의 트라우마다. 그 형상을 만들기 위해서 많은 고민을 하지는 않았다. 나는 단순하게 생각을 했고, 상상을 통해서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억눌린 상처는 영화의 한 주제이기도 하기 때문에, 그런 이미지가 가장 이상적이라고 판단했다. -루시와 안나 캐릭터는 연기를 위해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야 할 것 같다. 이런 영화를 계속 촬영하면서 육체적으로, 심리적으로 굉장히 힘들었겠다. =그렇다. <마터스>를 찍는 것은 악몽 같은 경험이었다. 촬영현장은 조금도 즐겁지 않았고 너무 지치고 힘이 들었다. 여배우들은 촬영 전에 리허설을 많이 했기 때문에, 촬영에 들어갈 때는 호흡이 맞춰진 상태여서 역할을 잘 소화했다. 그녀들은 내가 표현을 하려는 의도를 잘 따라와주었다. 연기에 대한 자신감과 서로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순조롭게 촬영했던 것 같다. 많은 에너지를 쏟아내는 연기를 했지만 배우들이 탈진한 일은 없었다. 단지 촬영을 담당한 스탭 가운데 한명이 카메라 포커스를 맞추면서 피범벅이 된 루시를 지켜보다 실신을 해버렸다. 그 피들이 너무 사실적으로 보였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배우들이 별일이 없었다니 놀랍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관객은 탈진을 한다. 시각적인 것보다 정서적인 쇼크가 워낙 강한 탓이다. 프랑스에서 개봉 당시 많은 논란을 일으켰겠다. =물론이다. 가정과 관련한 사회단체에서 개봉을 저지하려고 했다. 그 일 때문에 법정 소송까지 갔다. 나는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승소했다. 법정에서 이기지 못했으면 정상적으로 개봉이 불가능하다. <마터스>는 프랑스 공포영화 최초로 18살 이상 관람가 등급을 받았다. 프랑스에서 18살 이상 등급을 받는 영화는 ‘포르노’밖에 없다. 영화는 감독이 의도한 온전한 상태로 보는 것이 가장 좋은 법이다. 법정 투쟁 끝에 16살 이상 등급을 받았다. 심의는 영화를 상영하는 나라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완전한 상태로 관객에게 보여줄 수 있으면 좋겠다. 그게 당연한 일이다. -안나의 고문 과정은 어떻게 구상을 했나? <호스텔> <쏘우>는 영화적인 느낌이 강했지만, <마터스>는 실제 체험을 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 =두 가지를 염두에 두었다. 멋지게 보이거나 흥미를 유발하는 장면 구성은 무조건 피하려고 했다. <마터스>의 고문 행위는 평범하다. 그래서 관객으로 하여금 슬픈 느낌이 들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호스텔>처럼 도구들을 사용한 고문을 배제한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관객이 안나와 함께 고문을 받는 느낌을 받았으면 하는 것이 그 장면의 핵심이다. 덧붙이자면 <호스텔>의 경우 공포영화라는 장르로서 내가 좋게 본 영화이다. 다만 <호스텔>의 연출은 내가 선호하는 취향은 아니다. -영화의 절반을 ‘고문’ 행위가 채우지만, 나는 그것이 고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건 숭고한 의식이기도 했다. 종교적으로 해석을 한다면 예수가 받는 고행의 길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마터스>는 고통에 대한 영화이다. 고문과 고통은 다른 의미라고 생각한다. 나의 관점은 안나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절대로 고문자들에게 동조하지 않았다. 안나가 고문을 받으면서 고통을 겪는데, 그 과정에서 그녀는 현재의 세계를 초월한다. 영화 컨셉 자체가 종교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마터스>를 통해서 신이 떠나고 없는 사회를 그리고자 했다. 믿음이 끝나버린 사회, 그건 지금 현실이기도 하고 미래의 모습이기도 하다. 안나를 고문하는 자들은 죽은 뒤의 세계를 보고자 한다. 그들 스스로가 신을 만드는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이다. -당신이 생각하는 공포영화란 어떤 것인가. =집착했다고 표현해도 좋을 만큼 어린 시절부터 공포영화를 좋아했다. 영화 장르 중에서 인생을 가장 거짓없이 표현할 장르라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이 죽고 모든 사람들이 고통을 느끼는 것들을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표현할 만한 훌륭한 매개체가 공포영화다. 다시 말하자면 공포영화는 세상을 살아갈 때 필요한 조건들이 얼마나 흉측하고 괴로운 것들로 가득 차 있는지를 거짓없이 드러낸다. 그럼 점에서 존 카펜터나 로만 폴란스키 같은 감독들이 개인적 감정들을 훌륭하게 표현했던 감독이라고 본다. 나는 세상이 너무나 좆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기분 좋은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내 자신을 배신하는 행위로 본다. 그건 정말 역겨운 일이다.

<퍼블릭 에너미> 대도적이 죽여준다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작가이자 동시에 대중영화의 단련된 장인인 마이클 만이 매력적인 갱스터영화 <퍼블릭 에너미>를 만들었다. 마이클 만이 대공황 시대의 갱단을 주인공으로 갱스터영화를 만들었다는 것만으로도 관심을 쏟을 만하다. 그의 영화세계 안에서 <퍼블릭 에너미>는 과연 어떤 자리에 놓인 것일까. 그가 역점을 둔 건 무엇일까. <퍼블릭 에너미>의 매력을 탐구해본다. 더불어 오랜만에 찾아온 갱스터영화를 계기로 1930년대를 풍미한 실제 대도적들의 면면을 살펴보고 갱스터영화의 지칠 줄 모르는 매혹의 계보를 정리해본다. 잊을 수 없는 두 갱스터 스타 제임스 캐그니와 에드워드 G. 로빈슨의 배우론까지 읽는다면 당신은 이미 갱스터 같은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다. W. S. 반다이크가 연출하고 클라크 게이블이 출연한 1934년작 갱스터영화 <맨해튼 멜로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은 주인공 블래키(클라크 게이블)가 사형대로 향하며 주지사인 그의 동생(윌리엄 파웰)에게 쓸쓸하고도 매력적인 농담을 던지는 것으로 끝난다. 블래키는 자신의 사형집행을 명령하고 나서 고통스러워하는 주지사 동생에게 괜찮으니 어서 사형장으로 가자고 스스로 재촉한다. 클라크 게이블이 분한 블래키라는 이 역할은 영화 속에서 그가 저지른 범죄나 패배에도 어딘가 시대의 법 집행을 향해 당당하게 대응하는 면모가 배어 있다. <맨해튼 멜로드라마>의 이 주인공이 1930년대 초 당대를 휩쓸던 전설의 은행강도 존 딜린저에게서 큰 영감을 얻었다는 지적이 많은데 마이클 만 역시 그렇게 믿고 있다. “존 딜린저는 굉장한 민속 영웅이 됐고 당시 할리우드는 그들의 캐릭터화에 딜린저라는 인물의 어떤 면모를 각인해 넣기 시작했다. <맨해튼 멜로드라마>는 ‘딜린저식’이었다! 이건 정말 기이한 고리다. 그가 영화를 베끼자 할리우드는 영화를 베낀 그를 베꼈던 것이다.” 미국의 대공황기란 현실의 갱스터와 할리우드의 갱스터영화가 서로를 베끼는 데 매혹되어 있던 때였다. 갱은 영화를 베끼고, 영화는 갱을 베끼고 마이클 만의 새 영화 <퍼블릭 에너미>에는 존 딜린저가 극장에 앉아 <맨해튼 멜로드라마>를 보는 장면이 등장한다. 1934년 7월22일 바이오그래피 극장. 갱스터영화를 즐겨보고 더군다나 클라크 게이블을 좋아했던 존 딜린저는 쫓기는 위협 속에서도 극장을 찾아 <맨해튼 멜로드라마>를 보았고 극장 문을 나서자 수사국 요원들의 총에 사살됐다. 그로써 존 딜린저라는 갱스터가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한 일은 갱스터영화를 본 것이며 더구나 자신을 모델로 한 작품을 본 것이 됐다. 영화 속 블래키의 죽음을 잔영으로 안고 극장을 빠져나오던 그때 존 딜린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단 몇분 안에 은행을 털지만 그곳에 있는 시민의 돈은 빼앗지 않고 여성 인질 앞에서는 절대로 욕설을 쓰지 않으며 붙잡혀서 감옥에 들어갈 처지에도 호방하게 검사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멋진 포즈로 사진을 찍었던 대공황기의 대도. 어쩌면 영화를 현실로 착각한 사내. 마이클 만이 미치광이 같은 삶을 산 공황기 대도적의 삶을 놓치지 않은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퍼블릭 에너미>는 존 딜린저의 실화를 조사하여 글로 써낸 브라이언 버로의 논픽션 <공공의 적들: 미국의 최대 범죄증가와 FBI의 탄생>을 원작으로 삼았다. 마이클 만에게 오기 전 이 논픽션에 먼저 관심을 보인 건 HBO였다. 책이 출판되기도 전이었지만 버로의 리서치를 토대로 텔레비전 시리즈를 완성하자는 프로젝트였다. 하지만 어디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지 갈팡질팡하다가 끝내 실패했다. 마이클 만은 <퍼블릭 에너미>를 만들기 전 이미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주인공으로 하여 1930년대 말 할리우드 스튜디오를 위해 일하던 사립탐정의 이야기를 구상했다(<퍼블릭 에너미> 역시 주인공으로 조니 뎁보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에게 먼저 시나리오가 갔다는 말이 있지만 마이클 만은 거기에 대해 구체적으로 답변하지 않는다). 당대의 또 다른 열차 및 은행 강도 앨빈 카피스에 관해 오래전 각본을 쓴 적도 있다. 또 1970년대부터 존 딜린저에 대한 이야기에 관심을 가져왔다. 그런 그가 버로의 원작을 놓칠 리 없었다. 게다가 버로가 마이클 만의 제안을 듣고 가장 끌렸던 건 존 딜린저의 러브스토리가 영화의 한축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다. 범죄의 시대, 전설의 갱단, 무법의 반영웅, 그의 사랑, 그의 파멸의 이야기가 마이클 만 식으로 완성된 것이다. 반영웅적 행위에 대한 우아한 환상 영화는 존 딜린저(조니 뎁)가 무법천지로 은행을 털다가 쇠락해가는 흥망성쇠의 몇 개월을 보여준다. 문득 클럽에서 코트를 받아주는 아가씨 빌리 프리쳇(마리온 코티아르)과 사랑에 빠지기도 하고 FBI의 전신인 수사국(Bureau of Investigation)에 “공공의 적 1호”로 지목된 뒤 쫓긴다. 국장 에드거 후버(빌리 크루덥)는 냉철한 요원 멜빈 퍼비스(크리스천 베일)에게 존 딜린저 사건을 전담시킨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은신처를 옮겨다니며 범죄를 저지르던 존 딜린저 일당은 조금씩 수사의 압박을 느끼며 동료를 잃고 궁지에 몰린다. 조니 뎁, 마리온 코티아르, 크리스천 베일의 연기는 각자의 명성에 걸맞게 흠잡을 데가 없다. 조니 뎁은 외양뿐 아니라 연기에서도 할리우드 갱스터 주인공의 거칠면서도 중후한 매력을 한껏 발산한다. 마리온 코티아르는 <라비앙 로즈>에서와는 또 다른 느낌으로 하층민 여성의 단단한 면모를 완성해낸다. 크리스천 베일은 어쩌면 <배트맨>보다 멜빈 퍼비스(만화가 체스터 굴드의 주인공 딕 트레이시는 이 인물에게서 영감을 얻어 창조됐다)에 더 어울려 보일 정도다. 정교한 구축과 훤칠한 이음으로 빛이 나는 장면들도 많다. 오티스 테일러의 노래 <텐 밀리언 슬레이브>가 울리며 멜빈 퍼비스가 범죄자 프리티 보이를 사살하는 장면, 같은 음악이 흐르며 존 딜린저 일당이 은행 안으로 들어가 총을 뽑아들고 은행을 터는 장면은 말 그대로 활극적인 위용을 뽐낸다. 혹은 자신을 잡으려는 경찰국 안으로 들어가서는 라디오로 야구중계를 듣는 경찰관들을 향해 “지금 몇 대 몇이냐”고 점수를 묻는 장면에서는 음악과 연기와 카메라의 움직이는 속도들이 더할 나위 없이 어울려 어떤 반영웅적 행위에 대한 우아한 환상의 쾌감을 실어준다. 그런데 의외로(?) <퍼블릭 에너미>의 이야기는 아주 간단하다. 존 딜린저라는 악당이 있었고 그가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으며 그를 시대의 적으로 삼아 처단하려는 정부의 집행이 있었고 그는 결국 패배했다는 진술 이외에 더 덧붙일 만한 것이 실은 없다. 아니 마이클 만의 영화는 처음부터 복잡한 이야기에 기대오지 않았으며 극단의 상황에 처한 인물들의 심리묘사에 많은 걸 걸어왔다. 그의 영화 중에서 그나마 가장 탄탄한 서사 구조를 갖췄다고 할 만한 <맨 헌터>나 <히트>, <콜래트럴>에서조차 대개 독보적인 장면은 그것의 서사화보다 심리적 긴장감이 돌출되는 순간들이다(그의 영화에서 종종 아주 긴 대화신이 그 자체로 긴장을 자아낸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으면 안된다). 마이클 만이 <퍼블릭 에너미>에서 좀더 주목하는 것이 있다면, 혹은 좀 더 치중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그 점인 것 같다. 그의 관심은 파멸하는 남자들의 심리를 어떻게 더 구체적으로 다룰 것인가, 더 정확히 말하면 심리를 어떻게 육체를 통해 묘사할 것인가 하는 데 있다. 그게 <퍼블릭 에너미>의 새로운 성취점이다. 지금 그곳에 ‘입회해 있는 카메라’ “갱스터영화의 궁극적인 갈등은 갱스터와 그의 환경 사이에 있는 것도 아니고, 또 갱스터와 경찰 사이에 있는 것도 아니다. 다시 말해 갈등은 갱스터 자신 내부 속의 모순되는 충동에 있다. 이런 내적인 갈등- 개인적인 성공과 공동선 사이, 남자의 이기성과 공동체의 본능 사이, 야만성과 이성적인 윤리 사이- 은 사회에 투사된다”고 영화사가 토머스 샤츠는 말한 적이 있지만 사실 이 말은 마틴 스코시즈의 많은 갱스터영화들에도 충분히 적용된다. <좋은 친구들>이나 <카지노>는 토머스 샤츠의 말의 영화화에 해당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혹은 마이클 만의 몇몇 영화는 그 말에 충분히 화답한다. 하지만 <퍼블릭 에너미>는 개인 내부의 비틀린 심리적 좌충우돌을 다루되 그것을 어떻게 이야기 짓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카메라에 담는가, 하는 쪽으로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때 데뷔작 <도적>에서는 거친 욕망으로 엿보였고 <히트>에서는 잘 짜인 이야기와 어울렸고 <알리> <인사이더>에서는 심리극과 어우러졌고 디지털을 만난 뒤 <콜래트럴>과 <마이애미 바이스>에서 분명해진 그것, 좀더 가까이 인물들의 그 자리에 있으려는 카메라의 욕망이 <퍼블릭 에너미>에서 정점에 이른다. 디지털로 갱스터의 심리극을 만든다고 할 때 마이클 만이 영화 속 육체와 사물들을 다루는 방식이 이 영화에서 한눈에 드러난다. 이를테면 <사이트 앤드 사운드>의 편집장 닉 제임스는 <퍼블릭 에너미>를 가리켜 “디지털 베리테”라는 표현을 쓰며 “심지어 주요 주인공들의 심리상태는 만의 기준을 따라 훨씬 감소됐다”고 지적하는데, 그만큼 육체의 묘사쪽으로 더 과감하게 기울었다는 말로 들어도 좋을 것이다. <퍼블릭 에너미>는 시대적 환경을 거의 끌어들이지 않고 오로지 주인공이 처한 그 자리의 환경에 집중한다. 마이클 만은 그러므로 우리의 일반적인 기대를 일부분 저버린다. 미국의 1930년대를 배경으로 갱스터무비가 만들어진다고 할 때, 그 시대를 풍미한 은행 갱단의 삶이라고 할 때 우리에게는 고전적으로 풍요로운 비극의 서사시를 보고 싶어 하는 기대가 있다. 그걸 보는 쾌감을 어떻게 마다할까. 마이클 만은 그런데 <퍼블릭 에너미>에서 확실히 다른 방식으로 우리의 시선을 초대하는 것 같다. 지금 그곳에 ‘입회해 있는 카메라’. 이 점에 그는 온 힘을 쏟는다. 그 자리에 있기 때문에 그 카메라는 시대의 전반을 말할 만큼 전지적이지 않으며 전지적이지 않기 때문에 때로는 더 구체적이고 육체적이며 신랄하다. 올해 가장 중요한 영화일지도… “나는 도덕적인 관점에서 사태를 보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이 영화는 가치있는 무언가에 관한 것이 아니다. 나는 그(존 딜린저)를 조종한 심리, 특정한 시대의 심리에 관심이 있었다.” 마이클 만의 이 말은 그가 인물의 심리묘사에 여전히 매진함을 말해준다. 그러나 동시에 “1930년대를 보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있는 것”을 추구한다는 말은 <퍼블릭 에너미>를 만든 그의 방식의 적극적인 변호가 될 것이다. 도덕을 거부하고 심리를 그리되 폭주기관차처럼 달리는 그들의 육체 옆에 카메라가 있음으로써 심리가 드러나게 하는 방식. 그것에의 재현이 아니라 ‘체화’에 매진하는 디지털-갱스터영화. 이 때문에 <퍼블릭 에너미>는 더할 나위 없이 건조한 갱스터영화로 기록될지 모르겠다. 다만 그 매혹의 건조함을 근거로 말한다면, <퍼블릭 에너미>를 올해의 영화 중 가장 중요한 한편으로 예고한다 해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