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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1997)

[성기완] 언어는 연, 음악은 후렴구

토요일 점심 무렵 성기완에게 인터뷰 요청 전화를 걸었다. 그는 지산밸리록페스티벌에 가 있었고, 주변이 무척 시끄러워 통화가 힘들었다. 비로소 조용한 통화가 가능했던 건 월요일에서였다. 페스티벌에 3일 내내 머무르는 동안 어떤 팀이 흥미로웠는지 물었을 때, 그는 패티 스미스(“너무 멋있는 할머니라서, 누나라고 불러드려야 한다”)와 베이스먼트 잭스(“카니발처럼 잘 준비된 패키지 쇼를 선보였다. 사운드도 다른 팀보다 확연히 좋았고”)를 꼽았다. 1970년대부터 활동했던 펑크 신의 대모와 2004년 그래미 어워드 최우수 댄스 앨범상을 수상했던 일렉트로니카 그룹을 함께 즐기는 그의 취향이 새삼스러웠다. 성기완은 시인이자 번역자이며 홍대 인디 뮤직 신의 대표주자 ‘3호선 버터플라이’(이하 3호선)의 멤버다. <싱글즈> <플라이 대디> 등의 영화음악을 맡았고, 2005년부터 올해 초까지 EBS FM 프로그램 <세계음악기행>(이하 세음행)을 진행했다. 현재는 음악 관련 강의, 홍대 앞 최고의 술집 ‘곱창전골’의 DJ, 프리랜서 글쟁이 등의 부가 활동도 겸한다. 그중에서도 최근 저서 <홍대 앞 새벽 세 시>는 홍대 앞 10년간의 풍경을, 그 안에 담긴 수많은 군상의 정서를 느슨하고 분방하게 펼친 독특한 에세이집이다. 10년 전의 홍대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가슴이 먹먹해지거나 다시금 뜨거워질 수밖에 없을 생생한 기록물을 읽다가, 대체 이 사람의 다채로운 스펙트럼이 어떻게 가능할까 궁금해졌다. -새삼스럽게 뭐가 본업이냐고 묻는 건 무의미한 질문 같다. 대신 어떤 시점에 특정한 매체를 택하는 이유를 묻는 쪽이 더 맞을 듯하다. =많아 보여도 정리해보면 별것 없다. 내가 관심 갖는 두 분야인 문학과 음악이 다양한 매체에 적용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시집 <당신의 텍스트>와 솔로 앨범 <<당신의 노래>>는 같은 시기 ‘한쌍’으로 등장했다. 특정한 테마를 언어와 사운드로 분리한 이유가 뭔가. =‘당신’이라는 테마가 어느 순간엔 장황한 시로, 어느 순간엔 단순한 사랑 노래로 표현될 수 있다. 서로 소용돌이처럼 휘돌면서 감싸는 연(verse)과 후렴구(chorus)의 관계라고 할까. 이러저러했어, 그래서 사랑한단 얘기야, 이러저러했어, 그래서 미안하단 얘기야. 일단 전달해야 할 이야기를 연에서 건넨 다음, 후렴구에선 그 내용의 핵심이나 더 아래쪽의 단순한 마음을 이야기한다. 전자가 시집이고, 후자가 앨범이다. 1절에서 2절로 그냥 넘어가는 것도 아쉽고, 후렴구만 공허하게 외치는 것도 아쉬워서 같이 한쌍으로 발표했다. -요즘도 연과 후렴구의 관계를 동등하게 유지하는 편인가. =점점 후렴구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다. 단순하고 무의미한 무언가가 반복되면서 중심을 형성하고, 그 따뜻하고 물렁한 중심으로 뭔가 슉 들어올 수 있는 과정 자체가 후렴구의 힘이 아닐까 싶다. <문학과사회> 가을호에 <ㄹ별곡>이라는 시를 썼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한글 자모가 ㄹ이다. 돌돌 굴러가고, 감기도 하고, ‘로큰롤’이라는 단어에도 많이 들어가고. (웃음) 시나 노래의 발음상에 ㄹ이 여왕벌 역할을 하는 것 같다. <ㄹ별곡>은 ㄹ을 사용한 단어들을 죽 따와서 ‘리랏다’로 끝나는, 전체가 거의 무의미한 후렴구인 시다. 이젠 글 역시 후렴구적으로 쓰고 싶다. -<홍대 앞 새벽 세 시>는 질풍노도의 시기였던 ‘90년대 홍대 앞’에 관한 좋은 입문서다. 이에 따르면 ‘홍대 앞’은 홍대 미대쪽으로부터 시작하여 90년대 중반 인디음악의 발흥과 함께 대중화되었다고 정리할 만 하다. =예를 들어 미대 출신이자 ‘황신혜밴드’로 잘 알려진 김형태씨가 운영하던 클럽 ‘곰팡이’는, 당시의 전위적인 극과 음악을 한꺼번에 수용하는 공간이었다. 지금은 엄청 유명해진 미술가 이동기씨가 ‘곰팡이’ 벽에 스파이더맨 그림도 그렸고. 그렇게 병존하던 다른 장르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스스로를 퍽 터뜨리는 과정에서 파편들이 튀었다. 그 파편들이 서로 교류했고, 안에 있던 진액들이 점점 스며드는 데까지 꼭 10년이 걸렸다. ‘크라잉넛’이나 ‘노브레인’을 배출한 클럽 ‘드럭’도 처음엔 레게 바였다. 그런데 희한한 애들이 자꾸 드나들면서 공간의 성격을 바꾸었다. 미술에서 말하는 ‘의도적인 점거’(squat)처럼 특정 세대가 그 공간을, 말하자면 점거한 것이다. 보통은 주인들이 침입자들에게 나가라고 할 텐데, 여기선 받아들일 준비가 됐던 것 같다. 90년대 중반 <말달리자>가 그 세대의 송가가 되고, 그애들이 이쪽 동네의 주인으로 활개치고 다니면서 더 심화되었다. 결정적으로 2002년 월드컵 이후 홍대 앞은 완전히 대중화되었다. -지금도 뭔가 다른 것을 하고 싶어 하고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홍대 앞에 많지만, 90년대 중반만큼 폭발력이 발생하지 않고 있다. 욕구불만의 상태는 팽창했는데, 그때처럼 자연스럽게 터지지 않는 이유가 뭘까. =글쎄, 구심점이 생긴다면 이젠 다른 데서 다른 느낌으로 생기겠지. 일례로 젊은 미술가들은 문래동 빈 공장지대에 모여 흥미로운 작업을 하는 중이다. 그것도 힘있게 터지려는 하나의 싹 아닐까. 홍대 앞은 2002년 이후로 다른 단계에 접어든 것 같다. 예전엔 비일상적이었고, ‘우리는 달라’라고 주장했다. 이젠 ‘장기하와 얼굴들’의 인기만 봐도 그런 모습을 낯설고 웃기게 보기보다 ‘내 안에 존재하는 어떤 부분을 여기서 공유할 수 있구나’라고 받아들인다. 예전보다 의미는 덜 강렬해졌을지 몰라도 일상화됐다고 해야 할까. 저쪽에서 터질 것 같으니까 홍대는 죽었구나라는 생각보다 ‘거기도 있고 여기도 있고 그렇게 산발적이면서 비중심적으로 흘러간다’고 받아들이게 된다. 미디어법이 통과되면서 더 심각해질 텐데, 상업적인 대중매체의 압도적인 트렌드에 저항하는 조그만 거점들이라고 할까, 그게 형성되는 과정인 것 같다. 또 다른 초기 단계다. 아직 뭘 좀 더 만들어야 한다. -홍대쪽 토박이로서 혹시 그런 현상에 대한 상실감은 없나. 예전의 홍대를 그리워한달지. =다른 건 몰라도 아직 음악은 홍대 앞에서 한 발자국이라도 벗어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단순히 소비적인 차원을 떠나, 뭔가 행해지고 있고 실행되고 있다는 느낌을 가질 만한 곳은 여기밖에 없다. 그러니까 아직 상실감을 느낄 때가 아니다. (웃음) 90년대 중반의 모든 움직임에는 뭔가 알리려는 목적이 있었다. 우리끼리만 놀려고 한 건 아니었다. 지금의 홍대는 그렇게 알려진 결과물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재처리 방법들이 나와야 한다. 예전보다 밍밍해졌다면, 다시 진한 걸 탄다든가 끓인다든가. 상실감이 아주 없다고, 지치지 않는다고 말할 순 없다. 하지만 홍대 앞도 점점 넓어지고 있다. 예전엔 주차장 거리에 몰렸던 공간들이 산울림소극장쪽이나 신촌, 연남동까지 넓어진다. 이 공간 자체도 변화한다는 걸 다른 국면으로 이해하는 관점이 필요하다. -지난해에 <라듸오 데이즈> 음악을 담당했다. 한때 쏟아져 나왔던 30년대 배경의 영화나 드라마들과 어떤 차별점을 두려고 했나. =과거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 음악은 두 가지 방향으로 가게 된다. 현대적인 요새 음악을 써서 “그때는 쟤들도 우리랑 똑같이 연애하고 음모를 펼치는구나”라고 받아들이게 하는 쪽이 있다. 반대로 철저하게 그 시대 음악을 쓰면서 “너희들도 이리 와봐”라고 권하는 쪽이 있다. 브라이언 드 팔마의 <언터처블>은 신시사이저를 사용하여 80년대 트렌드 뮤직을 수용했지만,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카튼클럽>은 완벽한 30년대 음악을 썼다. 난 <라듸오 데이즈>에서 후자로 가보려 했다. 신경을 나름대로 많이 썼고, 지켜내고자 했던 일관성을 비교적 잘 가져갈 수 있어서 만족한다. -구체적으로 30년대 음악의 어떤 점에 집중했던 건가. =개인적으로 30년대가 한국 대중문화의 첫 번째 폭발이라고 본다. 이상이나 박태준 같은 작가가 배출됐고, 스윙이나 탱고처럼 최초의 월드 와이드 트렌디 뮤직이 쏟아져 들어왔다. 30년대 음악인들은 그 앞에서 당황하지 않고 굉장한 음악들을 만들어냈다. 예전까지 민요를 만들던 사람들이 스윙을 처음 접했을 때 무너지지 않았다는 것, 더군다나 일제 식민지 시대에서 ‘내 것’으로 소화했다는 게 대단하다. 음악적인 포스도 엄청나고. 대표적인 분이 김해송이다. 그분의 노래 <청춘계급>을 <라듸오 데이즈>에서도 리메이크했다. -사실 이난영 노래를 찾아 듣다가 김해송이 이난영의 남편이자 그녀에게 수많은 노래를 선사한 작곡가라는 것을 알게 됐다. 이난영 하면 딱 떠오르는 노래 <목포의 눈물>과는 완전히 다르더라. =그러니까! 30년대 음악은 뽕짝스럽지 않다. 일본 음악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뽕짝이 대중화된 건 오히려 해방 이후부터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김해송에 대해 뭔가 해보고 싶다. 그분의 전기를 소설 형식으로 풀어보면 어떨까 구상 중이다. 거의 텔레파시 수준, 빙의 수준으로라도 시도해보고 있다. (웃음) -O.S.T 앨범은 독립적으로 받아들여지기가 쉽지 않다. 오히려 이런 30년대 컨셉의 음악을 따로 기획 앨범으로 만들면 어떨까. =안 그래도 한복밴드를 결성해서 빅밴드 형식으로 공연해보고 싶다. 지금의 인디 뮤직 넘버를 스탠더드 풍으로 편곡해서 패키지 쇼를 펼치는 거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인원과 악기를 많이 잡아먹는 작업이라 여의치가 않은데… 심지어 꿈까지 꿨다. 깨고 나니 슬퍼서 뜬눈으로 누워 공상을 오래도록 했다. (웃음) 사실 올해는 ‘3호선’ 10주년이라서 그쪽에 집중하느라 30년대 커버밴드는 미루고 있다. -정말! 1999년에 결성됐으니까. 3집은 2004년에 나왔는데 혹시 신보를 낼 계획이 있나. =어느 날 꿈에서 어떤 노래를 만들었는데 괜찮더라고. 깨자마자 휴대폰에 대충 그 테마를 녹음한 다음 멜로디를 붙였다. EP라도 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밴드 멤버들과 열심히 작업 중이다. 9, 10월경에 나올 것이다. 요즘 인디 뮤직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산뜻한 ‘샤방샤방’으로 많이들 가는데, 우리 EP에선 ‘그런 거 아니야, 한번 더 구질구질해져보자’라고 말할 거다. ‘3호선’의 예전 앨범들을 처음 듣는 사람들은 “이게 정말 10년 전에 나온 음악 맞아?”라고들 하더라. 나도 다시 들어보니 민망하지만 요새 애들보다 더 잘했다는 생각도 들고 그렇다. 흠흠. (웃음) 우리 색깔을 죽이지 않고 유지하더라도 괜찮다는 자신감을 얻었달까. -EBS 라디오에서 <세음행> DJ를 오랫동안 맡았다. =그동안 월드뮤직이라고 하면 너무 비슷비슷했다. 라틴이나 이탈리아 계열, 혹은 각 국가의 민속음악을 팝음악화한 것 위주로 소개했다. 그것만으로는 미흡하다. 젊은 친구들은 록이나 힙합처럼 전세계적으로 보편화된 문법들을 수용하면서 자기들 로컬만의 색깔을 내잖아. 소말리아 사태가 터진 날에는 방송에서 소말리아 힙합을 트는 식으로, 그렇게 일반적인 월드뮤직에서 빠진 음악들을 찾아 새롭게 채워넣는 일이 재밌었다. 한국의 인디 뮤직, 아시아 록도 그 연장선상에서 함께 소개했다. 특히 피노이 록(Pinoy Rock)은 발견이었다. 필리핀의 60, 70년대 록을 들어보면,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라며 한국의 뺨을 열대씩 때려도 될 정도다. (웃음) 갑작스레 하차하면서 가장 아쉬운 점은, 4년 동안 꾸준히 쌓아온 그 데이터베이스가 현재 프로그램에서 유지되거나 수용되지 않는 것 같다. 뭐 요즘 시대엔 어느 문화판에나 늘 있는 일이지만. 안 그래도 <세음행>의 안재필 작가와 합동 블로그 이야기도 나누었다. 개인적으로 지난해에 두달 동안 아프리카를 여행했는데, 그때 가져온 음악과 느낌들을 나만 갖고 있기가 아깝다. 하루에 하나씩이라도 업데이트를 하면 어떨까…. -8월부터 한예종 자유예술캠프에서도 강의한다고 들었다. =예전에 ‘문지문화원 사이’에서 강연했던 ‘크리에이티브 리스닝’이라는 개념을 그대로 갖고 갈 예정이다. 예를 들어 산울림 노래에서 폴 베를렌의 시를 떠올리고 그러면서 고려가요로 넘어가는 게 가능하다. 우리 모두 음악을 듣더라도 사실 소리만 듣는 게 아니라 다른 마음들을 듣는 거잖아. 그런 통합적인 느낌이 참 중요한데 별로 얘기되는 것 같지 않다. -이 일들을 한꺼번에 하다니… 설마 올해 준비하는 다른 일들이 더 있는 건가! =아프리카 여행기를 가을쯤 책으로 묶는다. 시집도 한권 더 낼 예정이고, 연말까지 성장소설을 한편 쓰기로 했다. 밴드를 하는 10대 후반 청춘의 이야기인데, 배경은 1996년으로 잡되 직접적으로 홍대 앞을 거명하진 않으려고. 사실 특정 공간을 형상화하는 데에는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24시간 파티 피플>을 봐도, 맨체스터 클럽신을 영화화하는 데 20년이 걸렸잖나. 대신 당시 그곳 사람들의 마음을 드러내는 청춘소설 형식은 가능할 것 같다. 근데 지금까지 한 열줄 썼나…. (웃음) 그리고 EP 작업까지. 어휴, 사람이 이 네 가지 이상 어떻게 더 하겠나. (웃음)

새로운 행성 판도라로, 떠날 준비 됐습니까?

지난 7월23일 샌디에이고 컨벤션센터에서는 어느덧 40주년을 자랑하는 코믹콘이 열렸다. 코믹콘은 단순히 젊은 코믹북 팬들만이 아니라 40년 전 최초의 코믹콘에 참가했을 당시의 10대들, 이제는 나이든 팬들 역시 한데 모이는 의미있는 장이다. 손을 꼭 잡고 전시장 내를 돌아다니는 천진난만한 표정의 노부부에서부터 그룹 코스프레를 한 심각한 표정의 10대 아이들, 벌써 지쳐버린 어린 아들을 달래며 상기된 표정으로 전시장을 돌아다니는 젊은 아버지, 그리고 여느 관객이나 다름없는 표정으로 슬렁슬렁 돌아다니며 사진기를 눌러대며 구경하는 텔레비젼 시리즈의 익숙한 얼굴을 이곳저곳에서 마주치는 곳이 올해의 코믹콘이었다. 제임스 카메론이 14년간 꿈꿔온… 코믹콘 첫날 오후 3시, 6천여명 규모의 인원을 수용하는 H홀. <타이타닉> 이후 처음으로 장편영화를 들고 나온 제임스 카메론 감독이 25분 분량의 <아바타> 클립을 전세계 최초로 팬들 앞에 공개했다. 새벽부터 기다렸지만 밖에는 미처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을 뒤로한 채, 사람들이 가득 찬 H홀 속으로 제임스 카메론 감독이 성큼성큼 들어왔다. 캐나다의 조그마한 마을에서 <스타트렉>을 보면서 우주를 꿈꾸어왔다던 14살 소년의 마음 그대로 그가 14년간을 꿈꾸고 4년 동안 만든 3D영화 <아바타>가 공개되기 직전, 카메론은 6천명의 군중 앞에서 외쳤다. “여러분, 그럼 새로운 행성 판도라로 떠날 준비가 되었나요?” <아바타>는 인류가 발견해낸 새로운 행성 판도라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다룬 미래 액션서사극이다. 지구에서 멀리 떨어진 판도라에는 파란 피부, 3m가 넘는 신장, 뾰족한 귀, 긴 꼬리를 가진 나비라는 종족이 산다. 화려하고 아름답지만 인간의 몸은 견뎌낼 수 없는 환경의 행성 판도라. 이 행성의 무한한 자원에 접근하기 위해 인간은 나비족과 같은 육체에 인간의 의식을 주입한 아바타라는 하이브리드를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공개된 25분 클립에서는 거대한 밀림 속 움직이는 식물들, 마치 물속에서 부유하듯 판도라의 공기를 가로지르는 신비로운 생물들, 원시시대 공룡을 닮은 위협적인 생물들이 눈앞에서 끊임없이 펼쳐진다. 지구에서는 휠체어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하반신 불구의 몸이지만 아바타의 육체를 통해 판도라에 발을 내딛게 된 제이크(샘 워딩턴)에게는 이 모든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들떠서 판도라의 이곳저곳을 쑤시고 다니는 제이크를 향해 활시위를 겨누는 나비족 공주 네티리(조이 샐다나)가 등장한다. 그녀의 팽팽한 활시위 위로 꽃가루가 신비롭게 사뿐히 내려앉고, 그 모습에 네티리는 조용히 활시위를 내리고 만다. 조용했지만 가장 인상깊은 장면이었다. 그러고 나면 아름답고 신화적인 판도라의 자연 속에서 신화 속 영웅처럼 제이크가 사나운 익룡을 길들여 하늘을 나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해 25분짜리 영상이 끝난다. 지구 및 인간을 보여주는 장면들은 기존의 실사영화 방식으로 촬영되었고, 판도라와 그 속에서 숨쉬는 생명체는 말 그대로 제작진에 의해 가상의 공간에서 창조되었다. 아바타와 나비족은 배우들의 ‘퍼포먼스 캡처’를 통해 살아 움직이게 되었고, 3차원 공간의 환상을 만들어내기 위해 스테레오 카메라 시스템이 도입되어 3D영상이 완성되었다. 이 새로운 세계의 언어와 억양을 창조하기 위해서 전문 언어학자가 동원되었으며 판도라의 지리·역사·문화 역시 빠짐없이 실재처럼 창조되었다. 물리적 공간을 벗어나고픈 바람, 바람, 바람 프레젠테이션이 끝난 뒤 관객과의 문답에서 제임스 카메론은 판도라는 미지, 미개의 세계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 잊어버렸던 우리의 또 다른 영적인 모습을 상징한다고 했다. 그는 10여년 전 디지털 도메인의 수장으로서 기술의 한계를 시험해보고자 하는 욕심으로 <아바타>를 시작했지만, 오랫동안 힘겹게 달려와 마침내 도달한 곳은 데이비드 린의 <아라비아의 로렌스>와 같은 낭만적인 서사시였으면 한다는 바람을 밝혔다. 프레젠테이션이 끝나자 <타이타닉>의 프로듀서이기도 했던 <아바타>의 프로듀서 존 랜도, 생물학자이자 아바타 프로젝트를 담당하는 그레이스 어거스틴 박사를 맡은 시고니 위버, 인간의 입장에서 판도라를 지배해야 할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쿼리치 대령를 맡은 스티븐 랭, 네티리 역의 조이 샐다나가 이어지는 패널에 참석해 팬들과 만남의 시간을 가졌다. 샘 워딩턴은 촬영 때문에 영상 인사로 대신했다. 소년은 조그마한 마을을 벗어나고 싶었고, 생물학자는 황폐해진 지구를 벗어나고 싶었고, 휠체어 위 군인은 몸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렇게 벗어나서 자신과는 다른 세계를 만나고 싶고 다른 누군가를 만나고 싶기 때문이다. <아바타>에서 그들 모두는 그 꿈을 이룬다. <아바타> 밖의 세계에서도 그 바람은 여전한 것 같다. 물리적 공간을 벗어나고픈 그 바람은 실시간으로 트위트를 하며 감상을 올리는 옆사람의 모습에서도 여실히 느껴졌다.

[나의 친구 그의 영화] 이렇게 사실적인 개소리가 있나

이름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계속하는 말이지만, 2005년에 서울에서 국제문학포럼이 열린 적이 있었다. 프로그램에 실린 방문작가 리스트를 보니까 오에 겐자부로, 오르한 파묵, 게리 스나이더 같은 이름이 보였다. 어릴 때부터 소설만 읽던 사람에게 그건 세계적인 밴드가 총출동하는 록 페스티벌이나 비슷했다. 차이가 있다면, 작가들은 모두 한 사람이라는 점. 옛날에 고은 선생께서 미당 서정주를 두고 하나의 공화국이라고 한 적이 있는데, 정말 작가는 혼자니까 반란이 일어날 일도 없고 그 공화국은 꽤 오래갈 것이다. 그렇게 프로그램을 들여다보다가 옆에 있는 사람에게 물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듀엣인가요?” 거기에는 응구기와 시옹고가 발제한다고 적혀 있었다. 이런저런 이름 때문에 생기는 애환은 나날이 깊어간다. 이건 H.O.T. 때부터 생긴 오래된 애환이다. 그래서 가능하면 남들 앞에서 창피를 당하기 전에 확인과정을 거치는데, 그때 큰 도움을 주시는 분이 바로 쭝혀기와 쫑코남이다. 둘이서 커피숍에서 노닥거리다가 마침 텔레비전에 어떤 여성그룹에 관한 뉴스가 나와서 내가 물었다. “투네원은 예쁘냐?”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쭝혀기와 쫑코남은 나를 바라보더니 얼마나 ‘쫑코’를 주든지. 놀랍다는 둥 무슨 한의원 얘기하는 줄 알았다는 둥. 아, 진짜…. 기획사들이여, 그룹 이름 좀 그렇게 짓지 마시라. 어쨌거나 이런 지경이니 잔뜩 소심해진 내가 ‘유피’를 볼 생각이라고 말하자, 쭝혀기와 쫑코남의 표정은 차라리 평온하더라(젠장, 발음대로 읽어도 틀렸고, 알파벳으로 읽어도 틀렸고). 개망신 깔때기 쓴 더그의 표정이라니… 오랜만에 픽사의 새 작품을 봤더니 정말 놀라웠다. 연예기획사들이 ‘아이 돈 케어’ 하는 나 같은 사람은 <개구리 왕눈이> 같은 만화영화를 보면서 자랐다. 그 구슬픈 주제곡, 생각나는가? “개구리 소년.”(여기까지 읽고 “빰빠밤!”이라고 따라 부른 사람들이 있다면 참 동병상련이다. 안쓰럽겠지만 우리끼리라도 끝까지 투네원이라고 부르자). 그랬던 만화영화가 픽사가 나오면서 천지개벽하는가 싶더니 이제는 그 과장된 얼굴만 나오지 않으면 실사영화와 거의 구별되지 않을 정도의 그래픽을 보여주게 된 것이다. 이게 대략 30년 정도의 시간에 벌어진 일이다. 이 칼럼은 ‘이 세상은 나아지고 있는가?’라는 제목의 연중기획에 가까워지고 있는데, <업>을 보니까 분명해지더라. 탄압받는 왕눈이가 무지개 연못에서 울던 시대는 진짜 끝났다. 뉴스에 나오는 정부 관계자들을 보면 여지없이 개구리 왕눈이가 생각나긴 한다. 하지만 그건 다시 한국이 그런 시대로 돌아간다는 불길한 예감 때문이라기보다는 촌스러워서 그렇다. 촌스러워서 못 살겠다(“속아준 거짓말만 해도 수백번. 무릎 꿇고 잘못을 뉘우쳐. 아님 눈앞에서 당장 꺼져. 아이 돈 케에에에에에”).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기술이 진보해지자, 만화영화는 점점 현실에 가까워지게 됐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업>에서는 알레고리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개구리 왕눈이>와 비교하면 분명하게 알게 된다. 칼 프레데릭슨은 실제로 현실에 존재할 만한 그런 인물이다. 생김새가 남기남씨에 가까운 점만 빼면 소년 러셀도 픽사가 있는 캘리포니아에서는 흔히 만날 동양계 미국 소년을 닮아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여기에 등장하는 개들도 특수장치를 이용해서 말을 한다뿐이지, 실제 지구 물리법칙의 영향을 받는다. 집에서 개를 키우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그 개들의 사실적인 동작이 정말 놀라웠다. 특히 개망신 깔때기를 뒤집어쓴 더그의 표정은 인상적이었다. 그 난감하고도 슬픈 표정은 정말 사실적이었다. 그럼 점 때문에 나는 픽사의 제작자들이 목조주택의 무게를 지탱하려면 풍선을 몇개 매달아야만 할까까지도 계산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해봤다. 찰스 먼츠와 황우석의 공통점? 물론 그렇다고 해서 <업>이 픽사 사실주의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먼 미래에는 모르겠지만 당분간은 아무리 많은 풍선을 매단다고 해도 집은 하늘을 날 수 없을 것이며 개들의 목에 번역기를 매단다고 해서 그처럼 멋진 농담을 던지는 개를 만나기는 힘들 것이다. 다만 더 많은 데이터를 사용할 수 있는 대용량의 컴퓨터가 등장하는 등의 기술적인 진보 덕분에 만화영화는 이제 알레고리의 형식이 아니라 직접 현실에 대해서 말하게 됐다는 생각이 든다. 칼과 엘리의 일생은 몇개의 중요한 순간들을 보여주면서 지나가는데, 그 부분에는 대사가 없었지만 이해하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엘리가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여자라는 진단을 받는 장면에서 주위의 어린이들은 왜 저러냐고 물었지만, 어른들은 대부분 그게 무슨 장면인지 아는 듯 보였다. 이건 몇개의 풍선이면 목조주택이 하늘로 떠오를 수 있을까는 질문과도 비슷한 얘기다. 그 장면은 <업>의 등장인물들은 우리와 같은 현실 속에 있다는 걸 보여준다. <개구리 왕눈이>의 무지개 연못처럼 알레고리화된 리얼리티가 아니라 우리와 같은 리얼리티. 집이 하늘을 날아다니는데도 <업>은 사실주의적 규약을 거의 어기지 않았다. 이 영화는 다른 만화영화보다 좀더 감상적인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가 사는 리얼리티가 그렇게 좀 감상적인 곳이니까. 우리와 같은 리얼리티를 배경으로 만든 만화영화라는 점이 최종적으로는 찰스 먼츠라는 안티히어로를 만들어낸 것으로 보인다. 이 인물은 만화영화에서 좀체 찾아보기 힘든 캐릭터다. 물론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는 이런 인물을 잘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서 (여전히 논란이 분분하던데) 황우석 박사 같은 경우. 나는 아직도 그분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찰스 먼츠처럼 그분 역시 자기 인생의 알리바이를 찾기 위해서 지금까지도 노력을 기울이지 않겠는가. 진지한 소설이나 영화를 보면, 이런 복잡한 캐릭터를 자주 만나볼 수 있다. 이들은 자신의 선택이 결코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모험의 정신’이란 비록 자신이 틀렸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될 뿐이라고 하더라도 세상에 굴하지 않고 그 길을 가는 사람의 정신일 것이다. 그중 몇몇은 사기꾼으로 밝혀지고, 몇몇은 명예를 회복할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게 끝난 뒤에도 우리는 과연 그 사람이 사기꾼이었는지 아니었는지 확신할 수 없게 된다. 이런 인물이 등장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업>은 충분히 놀랍다.

배수빈, SBS '천사의 유혹' 주인공 발탁

(서울=연합뉴스) 윤고은 기자 = 탤런트 배수빈이 SBS TV 드라마 '천사의 유혹'의 남자 주인공으로 발탁됐다. 27일 소속사 BH엔터테인먼트에 따르면 배수빈은 '드림' 후속으로 10월 방송되는 '천사의 유혹'을 통해 처음으로 드라마 주인공에 도전한다. '아내의 유혹'의 김순옥 작가와 '조강지처클럽'의 손정현 PD가 호흡을 맞추는 '천사의 유혹'은 복수를 위해 원수 집안의 남자와 결혼한 여성과 이를 뒤늦게 안 남편이 또 다른 복수를 감행한다는 내용이다. 배수빈이 맡은 신현우 역은 초반에는 부드러운 남자로서 천사 같은 모습을, 복수를 결심한 후반에는 악마 같은 모습을 선보이게 된다. '주몽', '바람의 화원'을 거쳐 최근에는 SBS TV '찬란한 유산'에서 모든 것을 갖춘 '훈남' 박준세를 연기하며 사랑받은 배수빈은 "첫 주인공에 대한 기대가 크다. 오랫동안 맡은 배역에 충실하게 임하다 보니 좋은 기회가 닿은 것 같다"며 "최선을 다해 열심히 연기해서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겠다"고 밝혔다. 그는 현재 자신의 출연작인 영화 '애자'와 '비상'의 개봉을 앞두고 있으며, 한일합작 텔레시네마 '결혼식 후에'도 10월 SBS를 통해 방송될 예정이다. pretty@yna.co.kr (끝) <연합뉴스 긴급속보를 SMS로! SKT 사용자는 무료 체험!>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아저씨의 맛] 네오 마초, 어딨니?

며칠 전 나로호 발사 실패 충격도 무력화시킬 만큼 경천동지할 톱스타 여배우의 비밀결혼 소식을 듣고서 적막강산이 따로 없던 사무실에 갑자기 텔레비전에 나오는 신문사처럼 분주한 활기가 돌았다(내가 주동이 됐다고는 차마 말 못하겠다). 마감 중이던 우리 팀 여기자 셋은 현안을 파고드는 기자 정신을 발휘해 ‘의문’, ‘비밀’ 따위의 단어가 주로 등장하는 자료들을 면밀히 검토하다가 한 가지 날카로운 의문에 봉착했다. “도대체 왜, 왜, 왜, 결혼했을까?” 돈? 돈 많은 남자라면 57박58일 단체 면접봐야 할 정도로 많은 이들이 달려들지 않았을까? 외모? 갖가지 추정자료를 검토한 결과 그건 아닌 거 같은데~. 젊음? 구구한 억측으로 보나 하다못해 ‘여권 나이’로 보나 그럴 리 없고. “그는 진짜 사나이가 아니었을까?” 셋 중 하나가 말했다. 웃자고 한 이야기였으나 나름 설득력있는 답변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 사나이. 그 얼마나 오랜만에 들어보는 말이던가. 언젠가 우리 지면에 상담글을 기고하는 김어준은 ‘땅에 떨어진 돌쇠의 도를 되찾을, 네오 마초가 필요한 시대’라고 일갈한 적이 있다. 여기서 돌쇠라 함은 여성에게 들이대는 데서 얄팍한 자존심 따위 내던져버리고 스트레이트하게 질주하는 진짜 사나이의 동의어 되겠다. 그럼 진짜 사나이란 무엇일까? 손잡은 지 100년 됐는데 이제 키스하면 제 감정이 너무 앞서가는 거겠지요? 라고 조심스레 묻는, 왜 그녀는 준비된 저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하지 않을까요? 근심하는 ‘요즘 남자’의 반대말이라 할 수 있겠다. 사나이라는 말은 요즘 세상에서는 퇴출된 단어나 다름없다. 하지만 쿨하고 깔끔한 남자가 대세라고 하더라도 한 떨기 끈적임과 거칠고 직설적인 무엇을 마음속 깊은 곳에서 열망하는 건 나만의 변태적 성향일까? 언젠가 영국 남자 배우들에 대해 수다를 떨다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꿈속에라도 만난다면) 물론 콜린 퍼스를 선택해야겠지. 하지만 클라이브 오언이 나를 확 끌고 간다면….” ‘그걸 어떻게 거부해, 아우’를 의미하는 신음소리가 동시다발적으로 터져나왔다. “40평대 아파트 당첨됐지”라고 뿌듯해할 것 같은 콜린 퍼스보다는 “지구가 반쪽이 나도 넌 내가 지킨다”라고 버럭 외칠 듯한 클라이브 오언 같은 남자, 그가 진짜 사나이 아니겠는가. 내가 친한 남자들이나 연애했던 남자들, 그리고 결혼 뒤 남자의 탈을 쓴 여자로 입증된 남편에 이르기까지 마초랑은 거리가 먼 삶을 살아온 게 사실이다. 그래도 초식남, 토이남 등등의 단어들만 만연한 이 세상에서 진짜 사나이를 한번 만나고 싶단 생각이 든다. 아 물론 김어준 말마따나 ‘인문학적으로 각성된’ 네오 마초면야 금상첨화겠지만, 거기까지는 바라지도 않고 그냥 매력적인 진짜 ‘싸나이’만 만나더라도 간만에 안구가 정화되는 느낌이 들지 않을까 소망한다.

[spot] 8mm 필름 다 가져오시오

체감 200%의 불쾌함. 시종일관 지글거리는 화면. <고갈>의 이 비주얼을 완성하기 위해 김곡 감독은 유럽 어딘가로 날아가야 했을지 모른다. 만약 이 남자가 없었다면 말이다. 아시아에서 8mm필름을 유일하게 현상할 수 있고, 텔레시네 작업까지 마칠 수 있는 곳. 우병훈씨가 대표로 있는 8mm필름은 김곡 감독의 욕심을 보기좋게 완성해준 곳이다. 영화에 대한 애정에서 시작해 8mm필름에 탐닉한 게 벌써 6년. 이화여대 근처 사무실에 자리잡고 홀로 8mm 세상에 빠져사는 우병훈 대표를 만났다. 그는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모든 종류의 8mm필름을 만질 수 있는 남자다. -<고갈> 작업은 어떻게 제안받았나. =8mm film이라는 사이트를 운영한다. 보통은 단편영화하는 학생들이 많이 온다. 대부분 단편영화이고 극중 잠깐 나오는 회상신 등의 작업을 맡긴다. 그런데 김곡 감독은 장편 작업을 제안하더라. 기술적인 스탭, 서포트를 하는 위치해서 이야기를 많이 했다. 8mm가 가진 특징 같은 거. 가령 8mm필름은 선예도가 좋지 않다. 8mm로는 샤프한 느낌이 잘 나오지 않는다. 16mm만 돼도 꽤 샤프하지 않나. 하지만 클로즈업으로 찍어도 8mm는 부드러운 느낌이 많이 난다. 입자들이 많이 부딪치니까. 나는 그 느낌이 영화의 분위기, 주제와 어울린다고 봤고 그런 것들에 대한 조언을 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조언이었나. =가령 사운드 문제. 8mm는 사운드백이 없어서 커버되지 않는 소리 파장이 있다. 야외에서는 어느 정도 괜찮지만 실내에서는 큰 문제가 될 수 있다. 또 8mm 화면이 위아래로 미세하게 떨리는 현상이 있다. <고갈>에서도 맨 마지막 갯벌장면을 보면 화면이 떨린다. 그게 떨림을 방지하는 장치를 쓰면 조절할 수 있다. 손가락 크기만한 건데 필름 안에 끼운다. 작은 화면에선 별 문제가 되지 않지만 큰 화면에선 바로 보인다. -장편 작업이라 부담도 됐겠다. =부담이 없지 않았다. 일단 학생 작품이 아니고 두 시간 넘는 장편이니 8mm로서는 대작이다. 찍은 분량만 5시간이 넘었고. 현상도 많이 힘들었다. 현상 작업이 기계로 하는 게 아니잖나. 몇천 피트나 되는 필름들을 일일이 손으로 만져서 해야 하니까. 한롤 작업하는 데 한 시간 넘게 걸린다. 프레임 하나하나를 사진 파일로 만들고, 그걸 또 컴퓨터로 부르는 데에도 시간이 많이 걸리고. -2004년에 8mm필름 사이트를 만들었다. 어떻게 8mm 작업에 빠지게 됐나. =처음엔 영화를 많이 좋아했다. 책도 많이 보고 영화도 많이 보고. 고등학생 때엔 교과서 대신 영화 책 보고. (웃음) 그러다 8mm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외국 사이트에 가보면 많지는 않지만 개인적으로 작업하는 사람도 꽤 있는 것 같았고. 나도 영화를 찍고 싶은 생각이 있었고, 16mm는 비싸니까 일단 8mm로 찍어보자는 생각을 했었다. 실제로 찍은 것도 있다. 사실 비디오든, 8mm든, 16mm든, 35mm든, 그리고 HD든 선택 가능한 포맷 아닌가. 자신이 찍고 싶은 컨셉에 따라 고르는 거다. 그 선택의 폭을 넓혔다고 생각한다.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정보를 모으고 현상, 텔레시네 작업까지 가능하게 하려면 힘든 점이 많았겠다. =2004년 당시만 해도 한국에서 8mm필름을 구할 수 없었다. 한국 코닥쪽에서 필요성을 못 느끼니까 정식 수입을 하지 않았다. 그러니 해외의 개인 판매자에게 사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코닥쪽에 메일을 보냈다. 주문을 하면 코닥쪽에서 살 수 있도록 하게 해달라고. 자체 회의를 하고 메일을 보냈더라. 그래서 이제는 대리점에 문의하면 바로 살 수 있다. 국내 재고는 없지만 선주문식으로 판매한다. -현상과 텔레시네 작업을 한 건 언제부터인가. =사이트 문 열고 1년쯤 지나서였다. 사실 이전까지 사진 현상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몰랐다. 그저 책과 인터넷을 보고 직접 찍어서 해보면서 배웠다. 독학이었다. 텔레시네를 시작으로 네거필름 현상, 컬러리버셜, 흑백순으로 배웠다. -8mm 작업에 대한 수요는 어느 정도인가. =많지는 않다. 가끔 뮤직비디오나 CF 작업 의뢰가 들어온다. 일년에 두세편 정도. 대부분은 연말이나 학기말에 가져오는 졸업작품이나 워크숍 작품이고. 또 가끔은 70, 80년대 찍어놓았던 홈비디오 같은 걸 가지고 오는 분들도 있다. 80년대 이전에는 비디오가 없었으니 필름이 있어도 이제 다시 볼 수 없는 경우가 있지 않나. 그래서 30년 전에 한번 봤는데요, 하면서 작업을 맡긴다. 결혼식 영상 같은 거. -해외에서 작업을 의뢰하는 경우도 있나. =예전에 일본으로 유학 간 사람이 작업을 맡긴 적은 있다. 일본에서도 네거필름 현상이랑 텔레시네는 안되니까. 한번은 필름을 급하게 구할 일이 있어서 친구에게 부탁해 일본에 전화를 한 적이 있다. 네거필름을 문의하니까 현상 못하는데 어떻게 할 거냐고 묻는다더라. 그래서 이쪽에서 할 수 있다고 그랬더니 정말이냐고, 대단하다고. (웃음) -사실 이제는 대학생도 디지털로 작업하는 게 대세다. 8mm의 어떤 점이 좋아 계속하는 건가. =얼마 전에 극장에서 <무지개 여신>을 보면서 저런 걸 언젠가 해봐야지 생각했었다. 그 영화에 8mm 화면이 나오지 않나. 필름만의 매력이 있는 것 같다. 디지털로 찍은 화면과 달리 차가워 보이지 않는다. 편안한 느낌이다. 값이 싸고 편하기 때문에 한다기보다 결과물이 주는 느낌을 좋아하는 것 같다.

[정기훈] 이 영화로 37년 만에 효도한 듯

모녀간의 애틋한 이야기를 담은 영화 <애자>의 감독이 인터뷰 장소에 등장했다. 예상외로 덩치 큰 사내다. 그렇다면 과묵한 사내? 아닌 것 같다. 말을 붙여보니 적은 말수가 아니다. 수다의 ‘일초식’을 아는 자다. <애자>에서 딸과 어머니 사이를 이어주던 말과 감정의 공방전을 다룬 사람답다. 충무로에서 스탭으로 오래 일하면서 배운 화기애애 공력이 몸에 배어 있어 그렇다고 한다. 도제시스템에서 오랜 시간 동료들과 나눈 애정이 힘이 되어 자애로운 인물들을 만들었고 그 인물들에 자기의 일부분을 투사했다. <애자>의 감독 정기훈과 수다를 떨었다. -평소에도 담소를 즐기나. =담소보다는 방정맞다고 해야 할 거다. 내가 막내 스탭들하고 노는 걸 보면서 (최)강희가 그러더라. “감독이 왜 그렇게 체통이 없느냐”고. 격식이 없는 거다. 오두방정인가? 충무로 생활을 오래 하다보니 몸에 밴 습관이다. 스탭들과의 융화를 중요시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얻게 된 거다. -충무로에서 오래 일했다는 말은 들었다. =대학 졸업하고 23살에 충무로에 들어왔다. 김유진 감독님 밑에서 오래 일했다. <금홍아 금홍아>부터 <약속> <와일드카드> <신기전>까지. <신기전>은 시나리오까지 했다. 내 나이대의 어지간한 감독들은 전부 입봉했으니 경력에 비하면 좀 늦은 편인데 그동안은 글쓰면서 먹고살았다. 각색 작업을 주로 했고, 그게 주로 엎어졌다. (웃음) 뮤직비디오 시나리오를 많이 썼다. 그게 좀 짭짤했다. 그동안 한국에서 만들어진 드라마 형식의 뮤직비디오 중 3분의 1은 아마 내가 썼다고 봐야 할 거다. -김유진 감독과는 유독 각별하다고. =한 10년을 한집에서 살았다. 집이 굉장히 넓으니까. 감독님은 안채, 나는 행랑채. 감독님이 <약속>을 찍고 끝날 때쯤 “내 집으로 들어와라” 하시더라. 아, 이제 진짜 머슴이 되는구나 싶더군. (웃음) 아버지 보는 시간보다 감독님 뵙는 시간이 더 많다. 감독님 밑에 있는 사람 중에 그동안 잘 풀린 사람이 없어서 감독님이 늘 속상해 하셨는데 이번에는 어쨌든 효도했다는 생각이다. 바깥에는 괜찮은 영화 만들었다고 말씀해주시지만, 저녁에는 6시간씩 술먹으면서 많이 혼내신다. (웃음) 시나리오가 아깝다, 이런 건 내가 하면 더 잘하는데 하시면서. 원래는 내가 비주얼에 관심이 많았는데, 감독님하고 같이 살면서 사람들하고 부대끼고 그 속에서 드라마를 끌어내는 것을 많이 배웠다. 사람 사는 걸 봐야 사람 이야기를 한다며 지하철이나 버스를 일부러 타고 다니신다. 방송쪽에 얼굴 내미시는 것도 싫어하시는데, “야 너 쪽 팔리면 아무것도 못해. 너 임권택 감독님이 얼마나 불행한지 알아?”라고 농담도 하신다. -<애자> 같은 이야기에 관심이 많았었나. =사람들의 소소한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허진호 감독님 영화도 무척 좋아하는데,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리모컨 두고 싸우는 장면 있지 않나. 실은 <애자>에서 텔레비전 보면서 엄마와 딸이 싸우는 장면을 찍을 때 그걸 생각했다. 앞으로도 내 영화는 그런 이야기쪽으로 가지 않겠나 싶다. 그런 게 영화계에서 한 부분 있는 게 필요한 것 같다. <애자>가 신파나 통속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나로서는 일상을 다룬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다만 일상을 다루는 방법적인 면에서 관객의 눈물을 뽑기 위해 작위적인가 아닌가라는 문제가 남는다. 작위적이지 않으면서 눈물 흘리게 하는 방법이 있을 거다. <애자>에서 그런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고 보지만 여전히 아쉬움은 남는다. -어머니와 딸의 이야기가 전면에 있다. =처음에는 그보다 다 큰 처녀의 성장 이야기로 생각하며 시작했다. 원래 성장 이야기가 청소년기, 유아기를 많이 다루지 않나. 나는 다 컸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내가 아직도 배울 것이 많구나’ 느끼게 되는 그런 인물을 다루고 싶었다. 그중에서도 가족, 그리고 엄마와 딸의 관계 안에서. 서브플롯이 처음에는 다 균등했다. 일도, 가족도 이야기상 같은 몫이었다. 하지만 이 영화의 투자자를 생각했을 때 감동이 더 필요하겠다는 판단을 했다. 그래서 엄마에 대한 이야기가 더 늘어났다. -그렇다면 이야기는 많이 바뀌었겠다. =하지만 성장드라마라는 건 편집 때까지도 놓치지 않았다. 성공드라마와 성장드라마는 다르지 않겠나. 주인공인 애자가 여유를 좀 가졌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나중에 이런저런 사건을 겪으면서 갖게 될 작은 여유 말이다. 즐거움의 상징인 휘파람을 불 수 있을 만한 정도의 여유, 그 정도를 그리고 싶었던 것 같다. 처음에는 영화에서 애자를 소설가로 당선시키는 걸로 할까 하는 생각도 했다. 내가 감독이 되기를 꿈꾸었던 것과 비교하면서. 하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애자>에서는 다른 사람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작은 여유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누가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아유 기집애 여유가 있어 보이네’ 하는 정도만 반응하면 될 것 같다. 영화 속 일들은 우리가 어차피 겪어야 할 일이다. 앞으로 어떻게 극복할 건가 묻고 싶었고, 이런 게 결코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가족이란 참 미스터리한 관계이긴 하다. =가장 아름다운 사랑은 전쟁통에서만 가능하다라는 말이 있지 않나. <애자>에서 딸은 애물단지고 엄마는 철천지원수다. 그 둘 사이에 사건이 들어오지 않으면 아마 둘은 평생 싸우면서 지냈을 것이다. 내 경험을 비춰봐도 가족이란 안식처이며 회귀 본능을 자극하기도 하지만 언제나 그렇지는 않다. 나도 아버지에게는 핍박받고(웃음) 어머니는 아버지가 낸 생채기를 어루만져주셨다. 그런 부분이 <애자>로 표현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엄마와 딸이라는 부분이 조금 뻔하기는 하지만, 뻔하기 때문에 자칫 잊고 사는 건 아닐까. 자기를 돌아보고 부모님을 돌아보는 영화로 비쳐지면 좋겠다. 영화를 보고 나서 관객이 부모에게 전화 한통 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지면 좋겠다는 게 내 생각이다. -영화 일을 하는데 아버지의 반대가 심했던 모양이다. =소설 속에 나오는 애자와 나의 감독의 길이 비슷하다. 자식이 불확실한 직장에 매달리고 있는 걸 보면 누구나 그럴 것이다. 나도 정말 내가 감독을 할지는 장담 못했으니까. <애자>에서도 엄마는 딸에게 시집이나 가라 하지만 딸은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 있으니까 밀고 나간 거다. 나와 부모님의 관계가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갔다. -김영애와 최강희가 닮아 보이기는 한다. =서로 안 닮은 듯 닮은 사람들이다. 먼저 최강희가 캐스팅됐다. 김영애씨도 그전부터 계속 생각은 했었다. 두 사람이 미용실에 앉아 사진을 한컷 찍은 게 있는데 한 화면에 나란히 두 사람이 담긴 걸 보니까 정말 신기하게 닮았더라. 따로따로 보면 안 닮았지만, 둘이 한 프레임 안에서 웃고 있으니 그렇더라. 그걸 보니 어느 정도 자신감이 생기더라. 한 프레임에 저 두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도 무언가 되겠구나, 라고. -결혼했나. =아니, 아직. 미혼이다. 이 점 꼭 크게 써달라. (웃음) 그런데 남자로서 매력이 없는 건가? 내가 좋아한 여자는 많은데 나를 좋아해준 여자가 별로 없었다. -기혼자였다면 이번 영화의 이야기는 좀 달라졌을까. =연애는 해왔으니까 꼭 그렇지는 않을 거다. 모든 여자들이 엄마이기도 하고 딸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취재를 많이 했다. 그런 엄마와 딸들에 대한 취재가 없었더라면 나도 내 영화 보고 “저 영화 왜 이렇게 신파냐” 그랬을 거다. 하지만 취재하면서 그들 모녀 관계의 독특함이 발견되더라. 그게 여자 관객에게는 특히 많이 와닿는가 보더라. 나는 관객이 엄마와 딸의 반응으로 갈릴 줄 알았는데, 결과적으로는 남자와 여자의 반응으로 갈리더라. 기자들이 리뷰를 쓴 걸 봐도 그렇다. 남자 기자들은 높은 점수를 안 주는데 여자 기자들은 좋은 리뷰를 써주더라. 인터넷에 뜨는 별점을 봐도 그렇다. -취재를 통해 많은 걸 얻었다고 생각하나. =역시 김유진 감독님 밑에 있으면서 배운 거다. 인터뷰와 취재가 중요하다는 거. 상상적인 것과 간접적인 것만 갖고서는 형태적인 접근밖에 안된다는 걸 배웠다. 그걸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인터뷰와 취재라고 생각한다. <와일드카드>도 김 감독님이 이만희 작가님하고 둘이 썼다고 했지만, 취재는 내가 다한 거다. 석달 동안 날 경찰서에 처박아놓고 “사소한 거라도 다 적어와” 그러시더라. (웃음) 그때 취재했던 게 영화의 연기, 대사 등에 하나하나 녹아들어가는 걸 보고 확신했다. 형사들이 자기 아이들 키를 잴 때 왜 세로로 안 재고 가로로 재냐고 할 때 애들 잘 때만 보니까 그렇다는 대사. 그것도 취재 중에 들은 거다. 사실 한 가지 말하자면 형사들에게는 일반인에게 공개 안되는 그들만이 읽는 잡지가 있다. 밀봉되어 있다. 3개월 동안 함께 있었으니 그걸 보여줄 만도 한데 끝내 안 보여주더라. 그래서 어쩌겠나, 슬쩍했지. (웃음) 1년치 열 몇권 정도 되는 것 중에서 이거다 하는 사건을 발견하고 큰 맥락을 잡은 거다. <공공의 적>에 나오는 대사던가? “강력계 형사는 좀 먹어도 돼” 그런 말 있지 않나. 강력계 형사들이 안 좋은 이미지도 많이 있지만, 정말 쥐꼬리만큼 받으면서 성실하게 일한다는 것도 알게 됐다. -<애자>에서 그런 취재 중 일화는 무엇이 있나. =어머니가 “김치 가져가 이 년아~” 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우리 어머니는 내게 김치를 택배로 보내주지만 누나한테는 그렇게 말하더라. 딸과 엄마는 싸울 때 절대 서로 얼굴을 보면서 싸우지 않는다.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고 감정을 소모한다. 내가 모르고 있던 거다. 가령 영화에서처럼 텔레비전 보며 감정적으로 싸운다. 인터뷰나 취재에서 알게 된 거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 영화의 대표적인 장면을 엄마와 딸이 마지막 여행 가는 거라고 하지만, 나는 엄마와 엄마 친구 그리고 애자가 마루에 앉아서 대화 나누는 장면이라고 본다. 그 안에는 웃음도 있고 모든 게 있다. 그들은 평행선을 달린다. 평행선을 달리는 것 때문에 자주 싸우기도 하고. -전주 출신인데 영화의 배경은 부산이다. =실제 모델이 있는데 그분이 부산 출신이다. 그리고 영화적으로는 엄마와 딸의 물리적인 거리가 필요했다. 내가 잡은 캐릭터상 전라도 엄마는 안 어울리는 것 같았다. 우리 어머니만 봐도 아는데, 전라도 어머니는 잔정이 많고 화는 속으로 삭인다. 경상도 어머니는 정은 속으로 꽉꽉 감춰놓고 겉으로는 툭툭 윽박지른다. 그쪽이 더 어울린다고 봤다. 사투리는 그다지 중요치 않다고 본다. 그게 도드라지면 오히려 안된다고 봤다. 사투리가 좋은 테이크와 감정이 좋은 테이크가 있으면 무조건 감정이 좋은 걸로 선택했다. -실제 모델은 어떻게 알게 됐나. =내가 운영하는 블로그에서 알게 됐다. 그 친구의 글을 몇개 보는데, 이런 캐릭터로 영화를 만들면 재미있겠다 싶더라. 나이도 꽉 찬 친구인데 써놓은 글을 보면 아직도 철이 안 들었네 하는 생각이 들더라. (웃음) 이 여자의 주변 생활을 그려보자 했다. 이 영화의 원안자로 크레딧에 오른다. 몇 장면은 실제 일어난 일 그대로 썼다. 채팅하는 장면은 그 친구가 엄마와 하던 내용을 내가 직접 갖다 쓴 거다. -영화 보고 부모님 반응이 어떤가. =아버지가 시사회 때 명함을 하나 만들어 오셨다. 거기에 참 민망하게도 “전주가 낳은 영화감독” 어쩌고 이렇게 써놓으셨더라. (웃음) 학력부터 시작해서 이력을 주욱 적어놓은 명함이었다. 정을 속으로 감추고 그걸 표현 안 하시는 분인데… 참… 전주가 낳은 영화감독이라니. 예전이었다면 창피하게 왜 이런 걸 만들어서 들고 다니느냐 했을 거다. 그런데 그러지 않았다. 당신께서 한때 극심한 반대를 했다는 것에 대해 미안하다고 표현하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로 37년 만에 효도를 한 것 같다.

그 고집스런 의협 정신이여

필자는 조니 토의 작품을 몇 년째 연구해 오면서 텔레비전에서 활동한 시기의 영향에 특별한 관심을 쏟고 있다. 그의 작품들은 텔레비전 드라마와 무협영화의 영향을 받은 3가지의 특징으로 좁혀진다. 텔레비전 활동 시기의 조니 토의 심층 연구내용을 간단하게 묘사해 보면 이렇다. 액션·멜로·코미디…다양한 분야에 정통 첫 번째. 조니 토가 텔레비전에서 활동하던 시절 대부분 드라마 시리즈 촬영에서 디지털 연출을 맡았다. 드라마 시리즈는 연기자가 같더라도 각 연출자들의 작업 스타일에 따라 판이하게 다른 작품이 만들어진다. 이러한 까닭에 느낌이 서로 다른 드라마 시리즈가 탄생할 수 있었다. 이런 파트 분담 식 제작 방식으로 각 연출자들이 실력을 겨룰 좋은 기회가 됐을 뿐 만 아니라 연출자들의 문제 해결능력, 적응력을 향상시켰다. 최근 서극, 임영동과 조니 토 감독의 합작품 <트라이앵글>(2007)을 살펴보면 국제적으로 명망 있는 세 감독이 바톤을 터치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서극 감독이 발단을 맡고 임영동 감독이 전개 부분을, 조니 토 감독은 결말 부분을 연출했다. 이러한 구성은 글자 그대로 텔레비전 드라마 형식의 구성 방식으로 세 명 감독의 각기 다른 제재상의 흥미와 차이를 느껴 볼 수 있다. 서극 감독은 역사적인 재미를, 임영동 감독은 낙(樂)의 리듬을, 조니 토 감독은 무협적인 분위기를 추구하고자 했다. 그들은 마치 예전 텔레비전의 모습으로 회귀한 것처럼 서로를 격려하면서 기량을 뽐냈다. 텔레비전 연출 시절의 경험은 조니 토에게 좀 더 다각화되고 융통성 있는 작품을 만드는데 도움을 줬다. 작업을 하면서 촬영 현장에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발생했을 때의 대처방법과 전혀 다른 환경에 적응 하는 법도 배울 수 있었다. 실제로 조니 토가 영화계에 발을 들인 초기에 만든 비극적인 드라마 <우견아랑>(1989), 기괴한 사극 액션 <심사관2: 제공>(1993), 실제상황을 그린 영화 <화급>(1997)이나, 자신의 영화사 ‘밀키웨이 이미지’를 설립한 후 촬영한 오피스 멜로영화인 <니딩 유>(2000), 코미디인 <역고력고신년재>(2002), 그리고 홍콩은 물론 국제적으로도 좋은 인상을 심어준 <암화>(1998), <미션>(2000), (2003)와 같이 범죄조직이나 경찰을 다룬 작품들까지 이 모든 영화들은 그가 정통한 다양한 분야를 보여준다. 무대형식의 조명으로 자신만의 세계 창조 두 번째. 조니 토는 스튜디오 형식을 선호한다. 야외 로케이션 화면이든 스튜디오 세트 화면이든 그의 엄격한 통제 아래 이뤄졌다. 최근 들어 그의 가장 두드러진 특색은 강렬하게 대비되는 조명의 사용이다. 특히 외부 촬영시 많이 사용되는데 무대 조명 효과처럼 그가 중점을 두고자 하는 사물과 인물만을 부각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이러한 조명효과가 가장 개성적으로 표현 되어 으뜸으로 꼽히는 예가 다. 그 후의 <대척료>(2003)와 <유도용호방>(2004) 역시 조명효과가 잘 표현된 예로 꼽힌다. 이러한 성향은 조니 토의 어두운 야외 배경 촬영시 사용되는 그만의 주된 특색으로 점점 발전했다. 이러한 무대화된 조명효과는 심도의 거리를 짧게 하여 주된 것과 부차적인 것이 구분되는 시각적 효과도 거둔다. 종전처럼 숨기는 방식으로 객관적 사물의 윤곽을 흐리게 만들어 버리면 배경이 길게 이어진 거리일 경우, 인물 앞과 뒤에 3미터 거리밖에 시야를 확보할 수 없다. <유도용호방>에서 고천락과 곽부성이 밤거리에서 서로 싸우는 장면이 바로 이러한 예다. 홍콩은 황금기부터 현재까지 텔레비전 드라마 촬영에서 연출자가 스튜디오 조명을 아주 밝은 상태로 유지해 어떠한 상황이라도 연기자와 주변 배경의 선명한 해상도를 유지해 근거리에서 원거리로, 원거리에서 원거리로 변화시킨다 해도 효과가 조금도 차이가 없으며, 영상의 주된 영역과 부차적 영역이 모호한 평면적인 효과를 표현할 수 있을 뿐이었다. 조니 토는 영화 산업으로 뛰어든 후 강렬한 개인 색채가 강한 밀키웨이 이미지 작품을 만들어 내면서, 무대형식의 조명을 통해 창작자 의식의 존재를 깨닫게 했다. 동시에 텔레비전 스튜디오 제작과정 중 습득한 감독 고유의 색깔을 발견하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스튜디오 형식의 촬영방식은 조니 토에게 여전히 주도적이다. 이런 현상은 무조건 스튜디오에서 화면을 만들어 내고 촬영을 하겠다는 의도는 아니다. 다만 조니 토는 종종 주요 장면에서 가장 만족스러운 구도를 연출하기 위해 전면적인 통제가 가능한 스튜디오 촬영을 고집하기도 한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는 <암전2>(2001) 중 정이건과 유청운의 오토바이 레이스 장면을 들 수 있다. 이 장면의 배경엔 이어지는 긴 거리에 있는데 스튜디오에서만 완성된 것일까? 무엇 때문에 그래야 했을까? 라는 궁금증을 연발하게 한다. 이 장면만을 살펴보면 정이건과 유청운이 오토바이 페달을 밟으며 쫓고 쫓기는 레이스를 펼친다. 복잡한 카메라 분할과 예리한 장면 배치, 박진감 넘치는 편집으로 승패를 떠난 남자들만의 천진함과 장난스러움이 전해주는 재미를 속속 드러내는 이 레이스 장면은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는 스튜디오에서 완성됐다. 조니 토의 뛰어난 예술적 연출을 바탕으로 본래 약 20-30미터의 가량의 스튜디오 세트가 화면에서는 약 1, 2km 정도로 느껴지게 촬영된 것이다. 이 부분에서 조니 토는 스튜디오 촬영의 뛰어난 매력을 충분히 발휘했다고 할 수 있다. 연기자에 대한 고집스런 미학 세 번째. 조니 토는 텔레비전 연기자에서 영화배우로 이어져 개성파 배우에 이르는 수순을 밟은 배우들을 사랑했다. <암화> <참새>의 노해붕, <비상돌연> <익사일>의 허소웅, <역고력고신년재>의 황문혜, <유도용호방> <익사일>의 장조휘, <대사건> <익사일>의 장가휘, <흑사회> <복수>의 임가동, <역고력고신년재>의 용천생, <암화> <흑사회>의 소미기, 그리고 <복수>의 황일화 등이 그들이다. 조니 토는 왜 텔레비전의 드라마 훈련으로 다져진 연기자를 선호했을까? 그는 취재 중 자신이 연기자를 보는 방법엔 자신만의 고집이 있다고 언급한 바가 있다. 그리고 연예인과 스타의 연기태도에 의문을 품어 왔다. 텔레비전 연기 제도가 연기자로 하여금 연기의 본질을 깨닫게 함은 물론 유연성과 한계를 분명이 구분하게 한다. 연기자들은 사실은 형태가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그의 연기자들에 대해 갖는 고집스런 미학은 심층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이 글은 단지 조니 토의 무협 사상과 텔레비전 드라마와의 영향 관계에 대해 설명한 글이며 그간 언급되지 않았던 그의 고집스런 의협 정신에 대해 논한 것이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무협영화의 정통은 본래 홍콩에 뿌리 깊게 내려있고, 조니 토는 다른 감독들과 달리, 무협을 새로운 각도로 재구성해 전면적으로 현대화시키고, 최근의 유행에 걸맞게 변화시키고, 세대간의 대화를 이끌어 내며, 예술적 경지로 승화시켰다는 점이다. 그런 까닭으로 조니 토의 영화는 그 근본인 홍콩 무협영화와 밀접한 관련을 맺으면서 국제무대에서도 여전히 추앙받고 인정받는지 모른다. 이 글은 타인의 값진 비평을 마다하지 않으며 근 10년간 홍콩을 대표하며 우뚝 선 거장에 관한 작은 의견임을 밝힌다.

예술가로서의 뿌리 찾기

첫 영화를 만들고 11년. <블루 맨션>의 글렌 고에이 감독은 자신의 첫 작품 <영원한 열정> 이후 오랫동안 영화를 만들 수 없었다. 싱가포르에선 “이런 유의 영화가 투자 받기 굉장히 힘들기 때문”이다. 싱가포르에는 영화 산업이 제대로 조성되어 있지 않아 정부의 지원을 받아 영화를 제작하곤 하는데, <블루 맨션>은 정부의 지원을 받지 못했다. 그렇다면 <블루 맨션>이 정부를 비판하는 영화냐. 설마!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영화냐. 전혀! 어느 재벌의 급작스런 죽음 이후 가족간의 갈등이 불거지고 재벌 회장은 영혼으로 돌아와 갈등을 지켜본다는 게 영화의 기본 줄거리다. “유교 사상”이라는 “아시아적 가치”가 여전히 유효한 사회에서 후계자 문제로 반목하는 형제의 모습이나 가족들 사이의 다툼은 그리 달갑지 않은 이야기인 것이다. 20살에 영국으로 건너가 20년 가까이 그곳에서 살았던 글렌 고에이 감독으로선 더더욱 싱가포르 사회가 답답했을 것이다. 영국에선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역사를 공부했고, 졸업을 하곤 드라마스쿨에서 연기를 배웠다. 촉망받는 배우로 연극 무대에 섰고 텔레비전과 영화에 출연했다. 하지만 그는 감독 겸 제작자로 또 연극 연출가로 진로를 선회한다. “운 좋게 남들보다 빨리 배우로서 자리를 잡았으나 동양인라는 한계를 뛰어넘기는 힘들었다. 동양인 남자 배우에겐 마약상이나 깡패 역할만 주어진다. 화가 났다. 그래서 내 손으로 연극 회사를 차렸다. 동양인에 대한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바꾸고 싶었다.” 그리고 다시 싱가포르로 돌아왔다. “영국에서 예술가로써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다한 것 같아 고향에 돌아와 뿌리를 찾는 중”이다. <블루 맨션>같은 영화를 만들면서 “아버지와 국가에 대해 비판조차 할 수 없는 가부장사회, 부당한 국가의 통제와 간섭”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중이다. 그리하여 그의 바람은 “다음 영화를 만들기 위해 10년을 기다리지 않아도 됐으면” 하는 것이다.

영상으로 쓴 입센의 비극

페란 아우디 감독은 연극을 사랑했다. 런던에서 연극배우로 또 연극 연출가로 오랫동안 활동했다. 이것을 외도로 봐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올해 자신의 첫 영화를 들고 부산을 찾았다. 비아시아권의 신예를 발굴하기 위해 경쟁부문으로 재탄생한 플래시 포워드 부문에 초대받았다. <프로스트>는 헨릭 입센의 희곡 <절름발이 천사>를 각색해 만든 영화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굉장히 충격이었다. 심리학적으로 여러가지가 뒤섞여 있음은 물론이고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도 신선하다.” 영화는 비교적 원작에 충실하다. 한 쪽 다리가 불편한 외동아들 에욜프가 사고로 죽고, 그 죽음에 죄책감을 느낀 부모 알프레도와 리타의 삶도 파국으로 치닫는다는 게 기본 줄거리다. 연극과 영화는 그 표현의 방식 때문에 똑같은 이야기에서 출발한다 하더라도 결과는 판이하게 다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입센은 매우 시적인 작가다. “연극에선 시적인 대사가 굉장히 많다. 연극이 말로써 상황을 전달한다면 영화는 그것을 보여줘야 한다. 그래서 영화를 찍으며 가장 먼저 한 게 희곡 대본을 영화적 이미지로 바꾸는 작업이었다.” 연극무대와 텔레비전, 영화 등 다양한 매체에서 30년 동안 배우로 활동했던 페란 아우디 감독은 그 경력에서 보듯 매우 열정적으로 삶의 즐거움을 찾는 사람이다. 스페인에서 태어났고 영국에서 공부한 그는 얼마 전 바르셀로나와 런던을 오가며 영화 한편을 또 찍었다. 감독으로서가 아닌 배우로서 말이다. 게다가 ‘감독’ 페란 아우디는 전 세계를 돌며 영화를 만들고 싶어 한다. <프로스트>는 노르웨이에서 찍었고 현재 시나리오 작업 중인 영화는 멕시코에서 찍고 싶다고. “내가 살아온 궤적을 봐서 알겠지만 새로운 곳에서 새 삶을 꾸리는 걸 좋아한다. 이번에 부산에 왔는데, 아시아 땅은 처음 밟아본다. 시차 때문에 조금 어지럽지만 흥분을 감출 수 없다.” 플래시 ‘포워드’ 섹션에 초대된 페란 ‘아우디’ 감독의 이야기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열정이 아우디를 전진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