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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저예산영화 <라스트 리조트> 계기, 프리시네마 재조명

48년 만의 부활 영국영화계가 때아닌 ‘프리시네마’의 재조명에 나서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에 불을 댕긴 것은 최근 비평적으로 화제를 모으고 있는 폴 폴리코스키의 <라스트 리조트>가 프리시네마의 유산을 적극적으로 계승한 적자라는 비평계의 지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러시아 불법이민자들의 생활을 16mm로 찍어 35mm 블로업을 거친 초저예산의 이 영화는 린제이 앤더슨의 기념비적인 12분짜리 단편 <오 꿈의 나라>에 노골적인 오마주를 바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영화의 중심적인 이미지도 많은 부분 차용하고 있다. 1953년 만들어진 <오 꿈의 나라>는 영국영화의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던 프리시네마의 효시가 되었던 작품이다. <오 꿈의 나라>는 만들어진 지 3년이 지나서야 온전히 평가되기 시작했는데, 1956년 국립영화극장(NFT)에서 50분짜리 중편 <투게더>, 다큐멘터리인 와 함께 상영된 뒤 대중적 반향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로렌자 마제티와 데이비드 혼이 공동감독을 맡은 <투게더>는 이스트 런던에 사는 벙어리 형제의 고단하고 힘든 삶을 따라간 작품이고, 카렐 라이츠와 토니 리처드슨이 함께 연출한 는 클럽에 드나드는 틴에이저들의 삶을 관찰한 다큐멘터리이다. 감독의 면면을 볼 때 이후 프리시네마의 기수가 되는 세대의 등장을 알린 기념비적인 상영회였던 것이다. 로케이션 촬영, 저예산, 아마추어 배우 기용 등 다큐멘터리의 특징을 적극 차용한 프리시네마는 이후 린제이 앤더슨의 <만약에…>, 토니 리처드슨의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 등으로 50년대 후반과 60년대 초반 프랑스의 누벨바그에 비견할 만한 전성기를 맞게 되고 영국영화를 전세계에 알리는 첨병 역할을 하게 된다. 하지만 프리시네마는 오래 가지 못한다. 린제이 앤더슨을 비롯한 몇몇의 작가에 의해서만 주도되었던 프리시네마는 그 대중적 파급력이 영화가 가진 힘과는 별개로 약했던 것이다. 일종의 혁신적인 작가군에 의해 단기간 일어났던 ‘영화적 에너지’에 가까웠지 누벨바그와 같은 ‘운동’이 되기엔 국제적 파급력이나 뿌리가 약했던 것이다. 지난 3월22일 NFT에서는 <오 꿈의 나라> <투게더> 등 세편의 작품이 48년 만에 다시 소개되었다. 프리시네마를 재조명하는 스페셜이벤트도 열렸다. 이미 프리시네마를 잊어버린 많은 영국 관객에게 48년이라는 시차를 두고 탄생한 <오 꿈의 나라>와 <라스트 리조트>를 비교해볼 수 있는 값진 기회였을 것이다. 런던=최인규 통신원

옷아 제발 튀지 말아라

1972년생·크리스티앙 쇼보 분장학교 수료·<베이비 세일> <미술관 옆 동물원> <질주> <소풍> 분장. <선물> 의상 “이혼하자.” “못해. 쪽팔려서.” 이제는 이혼밖에 남은 게 없는 부부, 극과 극에 선 부부, 아내는 흰 옷을, 남편은 검정 옷을 입었다. 아내의 죽음을 모른 척하는 남편과 길거리에서 여러 번 쓰러지고도 남편은 모르리라고 생각하는 아내, 둘 사이에 비밀이 없어진 어느 날. 아내는 “그런다고 내가 당신이 좋은 남편이라고 할 것 같냐”며 퉁명하게 튕긴 뒤, 우물쭈물 나가는 남편의 뒤에다 대고 말한다. “오늘은 여기서 자라”고. 서로 등을 돌리고 누워 있어도 우리는 안다. 그들이 이미 화해했음을. 그들은 둘다 하얀 옷을 입고 있다. “의상하는 사람들이 스탭25시 나온 것 보면 뭐라고 할 것 같다.” 이유경씨는 8년 동안 영화계에 몸담아왔지만 의상으로는 크레디트를 처음 올렸다. 8년 동안 그가 한 일은 분장. 의상에 늘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나이가 더 들기 전에 하고 싶은 것 해야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바람을 알고 있던 아트 디렉터가 제안을 해왔다. 그래서 의욕도 앞섰다. 용기(이정재)와 정연(이영애)은 20번 정도 옷을 갈아입는다. 연결 신이 아니면 똑같은 옷을 입고 나오는 적이 없다. 협찬받은 옷들을 위해서 열심으로 갈아입은 것이 아니다. 그들 사이의 끊임없이 변화하는 긴장관계는 집에서 입는 옷도 열심히 갈아입도록 했던 것이다. 모두 하나같이 무릎 나온 후줄근한 바지와 목 늘어진 면티이긴 하지만. 개그천왕 장면을 찍으러 부산에 내려갔을 때는 의상 짐이 그 많은 촬영 장비를 압도할 정도였다. 동대문과 남대문, 벼룩시장을 샅샅이 뒤져서 마련한 70년대 옷 40벌을 마련하고, 애들을 줄세워서 일일이 입혔다. 이런 촌스러운 스타일이 싫다고 까탈부리는 애들을 달래가면서. 옷은 촬영기간 내내 보관하면서 드라이클리닝도 맡기고 손빨래도 해야 한다. 정연이 하던 빨래는 소품이지만, 정연이 신은 양말은 그가 챙겨서 신겨준 것이다. 캐릭터를 의상으로 보여주는 게 아니라 ‘그 사람’처럼 보이는 데 의상이 묻혀가도록 했다. 관객이 의상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은 그래서 속상하지 않다. 하지만 그들 옷이 스토리에 녹아들어가지 않고 튀게 되는 경우에는 후회가 된다. 친하게 지내던 이웃에게 레스토랑에서 정연이 밥을 한끼 사는 장면, 정연은 목까지 채운 하늘색 가디건을 입고 있다. 하지만 블라우스에 조끼나 파스텔 톤의 니트를 입히는 게 어땠을까 생각된다. 그것의 차이는? 블라우스가 가련한 정조를 더 강조할 것이다. 개그맨 용기는 알록달록한 홍과 녹 스타일- 일명 홍록기 스타일- 로 몸에 딱 붙고 튀게 해야겠다는 생각도 했지만, 평상시 모습이 튀면 개그가 죽지 않을까 하여 무난하게 갔다. 가족이 모여서 가족사진을 찍는 장면, 갑작스런 호출에 달려온 용기는 뒤가 약간 들린 하늘색 재킷을 입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찍힌 가족사진에서 하늘색은 느닷없는 화해의 따뜻함을 더한다. 이유경씨는 현장에서 여성답지 않다고 ‘꺼칠이’로 불렸다. 개그맨 철수가 대기실에서 “오늘은 왜 이렇게 꺼칠하지, 꺼칠이∼” 할 때 영화를 같이 보던 스탭들이 모두 웃었다. 시절은 보답받는다. 돌려줘야 할 옷, 내가 입지 않은 옷, 내 것이 아닌 옷들이 한참이나 쌓였는데, 그중 몇개를 잃었다. 잃어버린 줄 알았는데, 그 옷들이 영화에 어울려 웃고 있다. 글 구둘래/ 객원기자 anyone@cartoonp.com 사진 이혜정 기자 hyejung@hani.co.kr

의리는 살아 있다!

때아닌 진눈깨비가 내리는 날 밤 <친구>를 보러 갔다. 영화 시작 전부터 신랑은 매우 행복해 했다. 여기저기 하도 크게 광고가 나서 벌써 개봉한 줄 알고 극장에 갔다가 허탕치고 <천국의 아이들>만 보고 돌아온 지 며칠 만에, 운좋게도 시사회에 초대된 것이다. 우리가 처음 만나 극장에서 본 영화는 <네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인데, 그는 아직도 이 영화를 세상에서 가장 쓰레기 같은 작품 1위 자리에 올려놓고 있다. <왓 위민 원트>를 저주하고 <파니핑크>를 발로 밟아버리는 그가 공공연히 꼽는 최고의 영화는 단연 <지존무상>이다. 그리고 <유령>과 <첩혈쌍웅>에 경의를 바치며 <록키>와 <정무문>을 숭배한다. ‘사나이’, ‘의리’, ‘고독’, ‘승부’, ‘혈투’ 등은 그를 바로 미쳐버리게 만드는 단어들이다. “롤라장”(절대 “롤러 스케이트장” 아님)에 감동하고 유오성의 카리스마에 기절하고 장동건의 눈빛에 다시 깨어나는 사이 줄거리 파악도 완전히 못한 채 영화가 끝났다. 신랑의 반응이 궁금해 힐끗 쳐다보는데, 그는 감격에 찬 표정으로 느닷없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게다가 소리까지 질렀다. “<대부>보다 낫다!” 놀란 주위 사람들이 쳐다보는데도 아랑곳없었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그의 열변은 불이 붙었다. 나: 왜 하필 <대부>야? 신랑: <대부>도 지네 동네의 룰에 따라서 사는 마피아 패거리들 얘기잖아. 거기에 뭐 이태리 전통인지 시칠리아 정선지 뭐 그런 거 들어가고. 그래서 다 한 패밀리였지만 결국 등 돌리는 놈들 생기고. <친구>도 마찬가지야. 건달들의 룰이 있고, 부산 그 동네 정서가 있고, 다 한 친구들이었지만 죽고 배신하고…. 나: 난 좀 유치하던데? 신랑: 이태리 마피아놈들이 지네 흔한 공동체를 뭐 예를 들어 필리오레니 뭐니 부르면 우리 보기에 근사하잖아. 건달들 의리가 왜 유치해. 알고보면 한없이 멋있는 거지. 니: 마지막 “쪽팔리잖아”는 뭐야? 신랑: 말 잘했어! 그 “쪽팔리잖아”야말로 이 영화의 모든 것을 함축하고 있는 대단한 대사야! 그 한마디로 다 끝나는 거야! 준석(유오성)인 꼬붕들이 동수(장동건) 죽인 걸 몰랐지. 하지만 자기가 덮어쓰는 거야. 왜냐! 준석인 부끄러웠거든. 자기가 동수를 못 지켜준 게 말야. 그리고 자기 수하들이 저지른 일을 자기가 몰랐다는 것도 그렇고, 동수가 겨우 하빠리 피래미들 손에 죽은 셈이 된다면 자기나 동수나 너무너무 쪽팔리는 거지. 자길 위해서도 동수를 위해서도 준석인 그걸 뒤집어써야 했던 거지. 그게 진정한 건달들의 의리야! 그는 명동에서 분당까지 단 한순간도 쉬지 않고 사자후를 토해냈다. 원고를 쓰려는데 아무래도 줄거리가 석연찮아 편집부에 전화해 물어보다가 나는 신랑의 해석이 왕창 다 틀렸음을 알게 됐다. 준석은 동수가 죽는 것을 몰랐기는커녕 직접 지시한 당사자였다. “쪽팔리니까”도 그런 의미는 도저히 아니었다. 그날 저녁 집에 와서 또 <친구> 얘기를 시작하는 신랑의 말을 자르며 나는 말했다. “준석이가 동수 죽인 거라던데? 자기 해석 다 틀렸어.” 일순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누가… 그래?” 누가 그랬는지 알면 가만 안 두겠다는 투였다. “<씨네21>.” “<씨네21> 누구?” “남… 동철.” “또?” “김혜리.” 무시할 수 없는 이름들이 나오자 그는 잠깐 괴로워하더니 말했다. “감독이 직접 말하기 전엔 믿을 수 없어.” “감독이 그렇게 말했다던데?” “그건 또 누가 그래?” “이영진.” 그는 잠시 뒤 다시 말했다. “그건 감독이… 각본의 의도를 잘 몰랐던 거야.” 나는 케이오 펀치를 날렸다. “감독하고 각본이 같은 사람인데?” 하지만 그는 다시 일어섰다. “작가도 미처 몰랐던, 관객의 탁월한 해석이라는 게 있는 거야. 감독이 몰라서 그래. 내 해석이 맞아.” 말도 안 되는 걸 끝까지 우기는 그를 보자 내가 괜한 얘기 꺼냈나 싶기도 했다. 하긴 저 사람은, 학창 시절 체육복이 없어 쭈뼛거리던 자기에게 “우리 반씩 입자”며 바지를 벗어준 어떤 친구를 아직도 추억하는 사람인데. 사업이 망했다고, 동생한텐 비밀로 하고 돈 좀 빌려달라는 친구 형한테 수천만원을 대출받아 꿔줬던 사람인데. 그러다가 나한테 들켜서 “당신이 무슨 영화 주인공인 줄 아냐, 주제나 파악하고 꼴값을 떨라, 꼴같잖게스리 의리 좋아하네”, 하는 욕을 아직까지 듣고 있는 사람인데. 그러고도 후배들의 “형님” 소리 한마디면 한달 식비보다 훨씬 많은 술값을 그냥 긁어버리는 사람인데. 잠옷도 아닌 러닝셔츠 바람으로 허벅다리를 벅벅 긁으며 TV나 보는 저 소시민의 가슴 한구석에, 북만주 말달리는 사나이들의 의리에 대한 동경이 있다 이거지. 머릿속으론 자기가 바로 로키고 주윤발이고 준석이라 이거지.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어린아이의 산타클로스 꿈을 깨버린 야박한 어른이 된 기분이었다. 남자들도, 여자들의 신데렐라 판타지만큼이나 유치하면서도 절실한 그런 동화를 품고 사는 거였다. 오은하/ 대중문화평론가 oheunha@hotmail.com

“독립영화 영토확장, 올해의 슬로건”

필요한 곳에 누군가 있다는 게 얼마나 소중한지, 없어지지 않으면 잘 모른다. 돈도 못 벌고 빛도 못 보는 자리라면 특히 그렇다. 한국독립영화협회 사무국장이자 인디포럼 프로그래머인 조영각(33)씨 같은 사람은 그래서 눈에 잘 안 띈다. 뭔가 의미있고 보람있는 행사를 할 때도 이런 인물은 무대 뒤에서 뭔가를 꾸미느라 정신이 없다. 최근 그가 준비한 독립영화회고전도 만만한 일이 아니다. 서울영화집단의 <판놀이 아리랑>에서 장산곶매의 <파업전야>까지 10년도 넘은 영화를 일일이 수배해서 프린트를 구하고 비디오 출시를 계획하는, 자질구레하지만 의미있는 일을 그는 조용히 해왔다. 한해 독립영화의 성과를 망라하는 영화제 인디포럼이나 매달 여는 상영회도 그런 일이고 협회 차원에서 추진중인 미디어센터 관련 실무진행도 그의 몫이다. 애써 단편영화를 만들어놓고도 보여줄 기회를 찾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조영각씨처럼 자기 일을 대신 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참으로 다행스럽다. 감독도 제작자도 아니지만 그는 독립영화인이다. 비주류영화, 비주류영화인에 대한 애정이 그를 독립영화의 마당발로 키워왔다. 지난해 조영각씨는 황당한 일을 겪어 때아닌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이른바 ‘쓰봉사건’이 그것. 영진위 주최 세미나에서 반바지를 입고 나타났다 원로영화인 한분에게 날벼락 같은 꾸지람을 들은 사건이다. 김지운 감독은 조영각씨의 반바지 차림을 옹호하는 글을 <씨네21>에 싣기도 했는데 어쨌든 그 일이 있고나서 사람들은 ‘조영각’ 하면 ‘반바지’부터 떠올린다. ‘독립영화’와 ‘반바지’, 어쩐지 어울리는 궁합이다. 자기가 믿는 바를 따르고 스스로 즐거울 수 있는 일을 하자면 때로 주류가 못마땅한 눈빛을 보내는 일도 할 필요가 있다. <파업전야> 등 80년대부터 나온 쟁쟁한 독립영화들을 모아 회고전을 여는데 어떻게 기획된 것인가. 지난해부터 준비했다. 처음엔 쉽게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 올린 기획안이었는데 막상 준비해보니까 장난이 아니다. 10년 전 프린트도 행방이 묘연하고 제대로 보관된 영화도 많지 않았다. 60년대 한국영화 프린트가 없다고 충무로 영화인들 욕할 일이 아니더라. 작품 출처 찾는 데만 두세달 걸리기도 했다. <파업전야>도 장동홍 감독이 프린트를 갖고 있어서 틀 수 있게 됐다. 서명수 감독의 단편 <문>은 83년 이후 영상자료원에서 한번도 외부반출이 된 적 없고 <인재를 위하여>는 프린트는 없고 테이프만 구할 수 있었다. 행사를 기획한 건 우리 과거를 알아줬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에서 출발했다. 독립영화가 뭔지 혼란스러운 때에 과거를 돌아보면 지침이 있을 거 같고. 주위에 물어봐도 제목만 알았지 본 적은 없다는 영화가 상당했다. 영화제 끝나면 비디오로도 출시할 생각이다. 영진위에서 2800만원 지원금 받아서 영화제를 하고 비디오 내고 책자도 만들고. 독립영화 하는 사람들 아니면 그렇게 못할 거다. 최근 문화부 장관과 면담을 했다던데 어떤 이야기가 오갔나. 장관이 문화계 인사를 차례로 만나는 중인데 독립영화 하는 사람들도 만나보겠다고 해서 주선된 자리였다. 김동원, 류승완, 이효인 등 7명이 장관과 편하게 이야기를 했다. 독립영화에 대한 직접 지원보다 인프라에 투자하는 게 필요하다는 얘길 했다. 미디어센터와 독립영화전용관 건립문제를 꺼냈는데 일단 미디어센터 만드는 예산은 잡혔지만 아직 전용관을 위한 예산은 어렵다는 얘길 들었다. 기회가 되면 독립영화를 좀 봐달라고 했더니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를 아주 재미있게 봤다며 그러겠다고 했다. 98년 한국독립영화협회가 생긴 뒤로 주력하고 있는 사업이 미디어센터와 독립영화전용관인데 어떻게 나온 안인지 궁금하다. 진행이 얼마나 되고 있는지도. 지난해 초부터 계속 준비했는데 최근에 미디어센터 건립을 위한 예산 24억원이 배정됐다. 처음엔 독립영화전용관이 들어가 있는 미디어센터를 구상했는데 한꺼번에 추진이 안 돼서 극장과 별개로 미디어센터부터 만들 참이다. 미디어센터는 말하자면 독립영화를 제작, 지원하는 전초기지다. 독립영화 만드는 사람은 많이 있는데 다 개인작업이라 안정적인 제작시스템이 없다. 한두편 만들면 충무로로 가거나 영화를 그만두거나 하는 실정인데 기자재가 있고 제작지원이 되는 센터가 생기면 독립영화 작업도 꾸준히 할 수 있으리라 본다. 영화교육기관으로서도 효과적이다. 일반시민을 대상으로 워크숍을 하거나 기자재 대여를 하면 누구나 손쉽게 영화제작에 접할 수 있을 것이다. 독립영화 배급을 위한 네트워크 구축도 염두에 두고 있다. 지방 순회상영을 기획하고 정기영화제를 여는 일 등을 한다고 보면 된다. 지금도 독립영화 상영회는 계속하고 있다. ‘독립영화, 관객을 만나다’라는 명칭으로. 독립영화전용관은 이런 영화제를 상설화하자는 얘기인가. 작품을 만든 사람 입장에선 정기적인 상영이 반드시 필요하다. 만들어놓고 보여주지 못하는 상황이 오랫동안 문제였다. ‘독립영화, 관객을 만나다’는 정기상영의 필요성 때문에 협회가 생기면서 계속해온 행사지만 전용관이 생기면 언제나 독립영화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독립영화, 관객을 만나다’는 아트선재센터가 공동주최하면서 매달 한번씩 하는 행사인데 관객동원은 잘 안 된다. 독립영화를 접할 다른 기회가 많아진 탓도 있지만 매달 하면서 적극적인 홍보를 하기 어려워진 점도 있을 것 같다. 올 초에 협회에 배급팀을 만들어 영화제 전담을 맡겼다. 혼자 이것저것 다하는 것보다 조직적으로 일하는 게 필요하다는 판단에서다. 인디포럼 프로그래머 일도 계속하고 있는데 올해 준비는 어떻게 하고 있나. 올해 인디포럼은 6월2일부터 10일까지 아트선재센터에서 할 계획이다. 작품을 출품하는 감독들이 작가회의라는 이름으로 모여 주최하는 행사라 프로그래머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실무적인 일을 하고 있는 건데 올해 슬로건은 ‘영토확장’이라고 정했다. ‘영토확장’이라는 말을 듣고 우습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던데 내가 보기에 지금은 독립영화의 영역이 넓어지고 있는 시기다. 각자 지향점이 다르지만 그만큼 스펙트럼이 다양해지고 있는 셈이다. 어떻게 이쪽 일을 하게 됐나? 인디포럼을 하기 전엔 문화학교 서울에서 일한 걸로 알고 있는데. 93년 말에 처음 문화학교 서울을 찾았다. 영화보러 갔다가 일까지 하게 된 경우다. 88년 아주대 심리학과에 입학해 95년에 졸업했다. 원래 영화를 좋아했는데 내가 문화학교 서울에 처음 갔을 때는 시네마테크 활동을 시작하려 할 때였다. 내부에 제작팀을 만들고 제작준비도 하면서 영화상영회를 했는데 그때부터 제작보다는 글쓰고 기획하는 데 관심이 있었다. 회원들과 함께 화질 안 좋은 비디오를 졸면서 보고 공부하고 자료집 내고 그런 일을 했다. 그때만 해도 문화학교 서울에서 영화제 하면 굉장히 잘됐다. 다들 영화보는 데 굶주려 있는데 희귀한 영화를 볼 수 있는 곳이 없었으니까. 인디포럼을 시작한 계기는 뭔가. 영화제 프로그래머를 계획하고 시작한 건 아닌 것 같은데. 당시 서울단편영화제를 보면서 자극이 됐다. 대기업이 하는 영화제말고 우리 스스로 준비하고 만드는 영화제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싶더라. 김성숙, 김윤태, 임창재 등 단편영화 만드는 사람들과 뜻이 맞아서 문화학교 서울에서 실무를 맡아 영화제를 만들었다. 서울단편영화제는 많아봐야 15편 정도밖에 못 트니까 다른 많은 영화를 보여줄 기회가 있어야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이제는 규모가 커져서 신청하는 영화를 모두 틀 수 없는 상황이 됐다. 98년부터 공모작품 중 걸러서 영화제 상영프로그램을 짜게 됐는데 사실 비판도 있었다. 애초 취지에 상영기회가 없는 모든 독립영화를 보여주자는 게 있었으니까. 하지만 돈을 받고 트는 영화제라는 점에서 아무 영화나 트는 건 안 된다고 판단했다. 기본은 된 영화를 보여줘야 한다. 대신 선정기준에 이런 건 있다. 도발적이거나 실험적인 영화에 점수를 많이 준다는. 문화학교 서울에서 일하다 인디포럼을 만들게 되고 그러다 독립영화협회 사무국장을 맡고 계속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데 인생행로가 제대로 풀리고 있다고 생각하나. 운이 좋았다. 하는 일마다 나름대로 성과가 있었고. 독립영화협회가 처음 생기고 일을 맡았을 때는 뭐 별로 하는 일이 있겠나 싶었는데 막상 시작하니까 정신없다. 비상근으로 가끔 나오면 되겠지 싶었는데 매일 나가서 종일 일해도 힘들다. 그래도 많이 커졌다. 사단법인이 되고 영화제를 비롯한 사업도 많고. 계간지 <독립영화> 편집부를 포함해 상근하는 사람만 7명이다. 인건비는 2사람 몫이지만. 협회가 내 발목을 잡고 있는 거 아닌가 하는 때도 있다. 하지만 덕분에 열심히 살고 있다. 돈도 안 되고 크게 주목받는 일도 아닌데 계속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다 돈 되는 영화 하면 재미없지 않을까. 정치적으로 발언하고 싶어서일 수도 있고 그냥 개인이 자기 좋아서 만드는 영화일 수도 있지만 그렇게 마음대로 만든 영화들이 있는 게 좋다. 그리고 그런 영화를 볼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게 즐겁다. 처음부터 충무로 가서 일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그건 나한테 맞지도 않고. 물론 협회라는 데가 조직의 성격상 좀 지겹다.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하는 게 아니라 위에서 결정한 데로 해야 하는 일이 많다. 개인적인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지난해 말에 사무국장 그만두겠다고 한 적도 있는데 이런 일을 할 만한 사람도 없다. 독립영화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연출자이고 또다른 사람이 하는 거 보면 내가 답답해서 못 참는다. 이지상 감독의 <둘 하나 섹스> 만들 때는 프로듀서 일도 했는데. 준비가 안 된 상황에서 일한 거라 아쉬움이 많다. 이지상 감독이 작업하는데 문화학교 서울 사무실을 좀 빌려주고 그런 정도라고 생각했다가 막상 닥쳐보니 이것저것 많은 일을 하게 됐다. 독립영화 보다보면 제대로 된 프로듀서가 붙어서 작업했으면 훨씬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그런 차원에서 일을 배운 셈인데 앞으로도 기회가 주어진다면 기획이나 프로듀서로 참여하고 싶다. 올해 인디포럼 슬로건을 ‘영토확장’이라 했다지만 독립영화의 입지가 줄어들고 있다는 생각은 안 드나. 예전처럼 정치적인 이슈가 있는 것도 아니고. 독립영화가 더 많이 나오고 있고 제작환경도 좋아졌다. 예전엔 정말 자기 돈으로 한두편 만들고 그냥 끝이었는데 이젠 맘만 먹으면 계속 작업할 수 있다. 제작지원프로그램이 많아졌고 제작에 접근하기도 쉽다. 영화를 취미로 하든, 직업으로 하든, 정치적인 운동으로 하든 그 모든 걸 포괄할 수 있는 상황이다. 그런 면에서 독립영화의 입지가 넓어진 것이고 충무로에서 작업하다 돌아와서 다시 독립영화를 만들 수도 있게 됐다. 매년 독립영화의 정체성에 대해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하지만 올해는 정말 그걸 되짚어볼 생각이다. 무엇이 독립영화인지 자문할 필요가 있다. 편가르기가 아니라 뭔가 다른 영화를 만드는 방법이라는 점에서 말이다. 글 남동철 기자 namdong@hani.co.kr 사진 이혜정 기자 hyejung@hani.co.kr

`애마부인`의 아버지

에놈쌍쉬엘? 대학을 막 졸업했을 즈음이다. 최루탄 연기에 눈물콧물 흘리며 신촌의 뒷골목을 달리던 나는 괴상한 영화포스터 앞에서 발길을 멈췄다. 에놈쌍쉬엘? 이게 뭐람? 그래도 명색이 불문과 출신인지라 금세 그 뜻을 헤아리고는 폭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색깔 있는 남자>를 잔뜩 멋부린 불어식 표기로 그렇게 써놓은 것이다. 떡대 좋은 미남배우 임성민과 야시시한 섹시녀 오수미의 대단히 도발적이고도 곤혹스러운 자태가 인상적인 포스터였다. 그 영화를 나는 아마도 위기철이나 공지영 같은 친구들과 함께 보았던 것 같다. 선정적인 카피만큼이나 성적인 흥분감을 선사해주진 못했지만 어쨌든 우리는 배가 아프게 웃어대며 그 영화를 봤다. 당시 신촌의 신영극장이나 대흥극장에 죽치고 앉아 소주로 병나발을 불며 동시상영영화를 보는 것은 우리의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었다. 탱크로 광주를 깔아뭉개며 등장한 전두환 정권은 폭압과 자유화라는 양날의 정책을 썼다. 교복과 통행금지의 폐지 그리고 두발자유화는 전두환 정권의 선물이다. 충무로에 대한 전두환 정권의 선물은 에로영화에 대한 검열 완화였다. 덕분에 80년대 초중반의 극장가는 갑자기 봇물터지듯 쏟아져나온 에로영화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당시의 대학생이었던 우리는 참으로 그로테스크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낮에는 전두환의 폭압정치에 맞서 돌을 던지고 밤에는 전두환의 자유화정책에 발맞춰 싸구려 에로영화를 보며 킬킬댔던 것이다. 그때 봤던 에로영화들의 내용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완전히 맛이 간 듯 뿅간 표정으로 헉헉대던 여배우들의 모습과 당시 유행어처럼 통용되던 그 야한 영화제목들만은 지금도 기억에 또렷하다. <여자가 밤을 두려워하랴>(1983), <훔친 사과가 맛이 있다>(1984), <뼈와 살이 타는 밤>(1985)…. 위에 열거한 모든 영화의 시나리오를 쓴 작가가 이문웅이다. 이문웅은 한국외대 불어과를 졸업한 다음 한때 영화전문지인 <국제영화>의 기자로 일했다. 시나리오에 뜻을 둬 극작가 이진섭의 문하생으로 수업을 받던 중 쓰게 된 데뷔작이 <황진이의 첫사랑>. 널리 알려진 대로 그 타고난 미모와 가무로 지족선사를 파계시키고 벽계수를 도취시킨 조선 중종 때의 명기 황진이의 젊은 시절을 다룬 영화다. 성공적인 데뷔작이었음에도 이문웅은 한동안 작품활동을 하지 못한다. 폐결핵 때문에 마산요양소와 도봉산 등지에서 장기간 외로운 투병생활을 해야만 했던 것이다.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한 이후의 재기작이 양정화 주연의 <흑녀>인데, 독립투사의 딸이 홍콩 국제갱단의 2인자로 성장하여 아버지의 복수를 한다는 내용의 액션물로 당시로서는 대단한 흥행을 기록했다. <내가 버린 여자>는 김수현의 원작을 각색한 것인데 이후 ‘무슨 무슨 여자’라는 영화제목을 하나의 유행처럼 만들 만큼 대중적 성공을 거둔 작품이다. 26살의 수희가 365일 술을 따르고 몸을 팔아도 남는 것은 없더라는 뜻을 가진 는 70년대 중후반을 뜨겁게 달궜던 ‘호스티스영화’의 완결판. 유지인이 엄마의 병원비와 조카의 생활비를 위해 호스티스로 전락하는 여대생 역을 맡아 열연했다. <애마부인>은 확실히 80년대적인 영화다. 그 이전까지의 이른바 ‘호스티스영화’라는 것들이 명분이나 희생 같은 것을 내세워 ‘어쩔 수 없이’ 몸을 팔게 되는 수동적인 여인들을 다뤘다면, <애마부인>은 자신의 욕망에 도발적일 만큼 솔직하여 ‘스스로 기꺼이’ 성에 탐닉하는 능동적인 여인상을 제시했다. 안소영의 거대한 유방을 전면에 내세운 이 영화는 대단한 흥행성적을 기록하여 이후 현재까지 13편의 속편이 제작되는 한국영화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매편 새로운 여배우를 픽업해 선보이곤 하는데 오수비·염해리·이화란·유혜리·진주희 등이 그동안 애마를 거쳐간 그리운(!) 이름들이다. 이문웅은 오리지널인 제1편 <애마부인>과 소비아를 기용한 <애마부인5>의 시나리오만을 썼고, 나머지 작품들에는 원안자로만 이름이 올라 있다. 그가 80년대 이후 오직 에로영화의 시나리오에만 매달려온 것은 아니다.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와 <혼자 도는 바람개비> 등은 모두 진지한 사회적 주제를 다루면서도 캐릭터의 묘사와 작품의 완성도가 빼어난 수작들이다. 심산/ 시나리오 작가 besmart@netsgo.com ■시나리오 필모그래피 1969년 정진우의 <황진이의 첫사랑> 1973년 정소영의 <흑녀> ★ 1976년 박태원의 <성춘향전> 1977년 정소영의 <내가 버린 여자> 1978년 김기영의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 ⓥ 1979년 이두용의 <지옥의 49일> 노세한의 1980년 김성수의 <색깔 있는 여자> 1982년 김기영의 <자유처녀> 정인엽의 <애마부인> ⓥ ★ 1983년 김성수의 <여자가 밤을 두려워하랴> 1984년 배창호의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 ★ 1987년 김현명의 <키위새의 겨울> 1990년 하명중의 <혼자 도는 바람개비> ⓥ 1991년 조명화의 <탄드라부인> ⓥ 1994년 김성수의 <매춘5> ⓥ는 비디오출시작 ★는 자(타)선 대표작

스무살, 소녀와 여인 사이

▶횟집 골목의 강풍기 바람 앞에 선 소녀들. 한명씩 한명씩 나름의 몸짓으로 바람을 뚫고 나간다. 자기를 붙잡아줄 누군가를 내심 기다리면서. “바람을 느끼란 말이죠? 바람을 좋아하란 말이죠?” 감독의 말을 이해하려 열심이던 비류와 온조는 강한 바람에 그만 넘어졌다. “어우 야, 얘 앞머리 좀 봐!” 바람 부는 장면을 연출하려고 돌린 강풍기가 멎자 누군가의 삐친 앞머리에 까르륵 웃음소리가 터지고 다섯 여자애들의 싱싱한 열매 같은 주먹이 서로의 어깨를 토닥토닥 때린다. 봄기운이 잠깐 숨죽인 지난 3월27일 인천 월미도의 매서운 바람 속으로 나선, 영화사 마술피리의 창립작품 <고양이를 부탁해> 촬영현장은 영화 찍는 광경인지 소녀들의 발랄한 나들이인지 가려내기가 만만치 않았다. 27일 촬영분은 고교 졸업 뒤 다같이 모이기가 어려워진 혜주(이요원), 태희(배두나), 지영(옥지영), 쌍둥이 비류와 온조(이은실, 이은주)가 모처럼 함께 나선 나들이 풍경. 아무렇지 않은 듯 입술을 스쳐 흘러나오는 대화 속에 각자의 성격과 미묘한 갈등이 물감처럼 번져 나온다. <도형일기>로 제2회 여성영화제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했던 정재은 감독의 <고양이를 부탁해>는, 소녀와 여인 사이, 멜로드라마와 청춘영화의 공간 사이에서 손가락을 입에 물고 맴도는 스무살 여자아이들의 일기 같은 영화. 단편 <둘의 밤>에서 우연히 만난 인천의 풍경에 이끌렸던 정재은 감독은 그의 첫 장편을 다시 이 도시로 데려왔다. 오전 11시경 착수한 이날 촬영은 바닷가에 물이 다 차오른 해질녘에야 끝났다. 배두나, 이요원을 빼면 아직 연기가 낯선 소녀 배우들은 감독이 부르면 통통 달려와 모니터 앞 의자에 겹쳐 앉아 감독의 ‘지도’에 천진하게 수긍하고 대꾸하고 때로는 까불거린다. 리허설은 길었고 바람은 찼지만, 1월부터 얼음 깨며 촬영을 강행해왔다는 스탭들은 “요즘은 반팔 입고 일한다”며 움츠리는 기색이 없었다. 현재 50%가량 촬영을 마친 <고양이를 부탁해>는 봄날을 다 보낸 여름 초입에 기지개를 켠다. 글 김혜리 기자·사진 손홍주 기자 ◀일행 중의 깍쟁이 혜주(이요원)는 약속에 늦은 것에 대한 사과도 없이 지영(옥지영)의 염색 머리부터 타박한다. 지영이 읽고 있는 책은 <스완의 집쪽으로>. 황옥빛 눈동자가 인상적인 신인배우 옥지영은 극중에서 만화를 그리는 지영이가 되기 위해 펜놀림을 배우고 있다고. ◀영상원 1기 졸업생 정재은 감독은 <고양이를 부탁해> 현장에서 가장 자그마하고 단단해 보이는 사람. 슛마다 조금씩 다른 연기를 보이는 어린 배우들과 차근차근 대화하며 부드럽고도 단호하게 촬영을 진행했다. 스탭 의자에는 “강아지는 뭐 하나”, “토끼야 미안해” 같은 귀여운 낙서가 새겨져 있었다. ◀월미도를 지나가는 배의 기적소리와 헬기 소음은 가끔씩 촬영을 지연시키기도 했다.

가난한 시절, 선구자의 목소리

<김정미>/ 지구레코드 발매 재발매 문화가 아직 뿌리내리지 못한 이 땅의 음반시장 현실에서 70년대 초중반을 불우하게 수놓은 신중현 사단의 사이키델릭 보컬리스트 김정미의 이번 복각판은 진지한 우리 노래의 추적자들에게 가슴 뻐근한 하나의 선물이 될 것이다. 김정미의 LP 음반은 최근 2∼3년간 급격히 일기 시작한 아날로그 음반 수집 붐 이전에도 이른바 ‘컬렉터즈 아이템’으로 귀한 대접을 받아 왔다. 13장에 이르는 그녀의 음반 목록 중에서 <`Now`>와 <바람> 같은 앨범은 100만원을 전후한 가격에서 거래될 정도이니(그 가격은 70년대 신중현 사단의 음악을 선호하는 일본 수집가들이 대폭 올려 놓았다고들 하지만), ‘사이키델릭’이라는 한국 록 음악의 하위 장르를 개척한, 그러나 펄 시스터즈나 김추자와 같은 신 사단의 여늬 보컬리스트들과는 달리 성공의 당의라곤 맛본 적도 없는 김정미는 근 30년이 흘러서야 자신의 명예를 보상받고 있는 셈이다. 지구레코드에서 발매한 이 음반은 74년과 77년에 발표한 두장의 음반 중 김정미의 트랙들만 추린 것이다. 신중현의 몽환적인 일렉트릭 기타와 아스라히 사라져가는 듯한 김정미의 독특한 보컬 톤이 새로운 음악사의 페이지를 연 그 이전의 음반들에 비해 함량이 조금 미달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신중현 작곡본인 전반의 일곱 트랙만으로도 선구적인 두 뮤지션의 지음(知音)을 만끽하는 데 아무런 장애가 느껴지지 않는 모음집이다. 서두를 여는 <이건 너무하잖아요>는 김정미의 노래 중 그래도 당시의 대중에게 알려졌던 ‘시장의’ 대표곡이며 드라마 주제가로도 알려졌던 <갈대>는 김정미 특유의 허무한 성적 환상이 하늘하늘 피어오른다. 특히 네 번째 트랙에 자리하고 있는 <담배꽁초>의 자유분방한 발상법은 몇번이고 반복 재생 버튼을 누르게 만든다. 70년대 초중반은 한국 대중음악사가 맞이한 첫 번째 르네상스 시대였다. 모든 것이 절대빈곤에서 허덕였지만 형형한 눈빛과 독자적인 개성으로 무장한 음악가들이 속속 등장하면서 우리 대중음악의 무한한 가능성을 타전했다. 이 음반만으로도 한국 록 음악의 영원한 아버지 신중현의 위대한 권능을 알아차리는 데 그리 힘들지 않다. 그가 프로듀스한 노래들과 후반부의 대표적인 트로트 작곡가 김영광의 트랙들은 앞으로 나아가려는 도전적인 문제의식과 그 자리에 머물려는 스테레오 타입의 상상력이 극명하게 대비된다. 그러나 모두가 알고 있듯이, 이 불타오르는 예술적 열망은 박정희 유신 정권의 군홧발 아래서 무참하게 짓밟히고 만다. 어쩌면 지금의 상황으로선 아무런 시장성도 없을 수 있는 이런 음반을 재발매한 지구레코드에 조용한 박수를 보낸다. 이 앨범은 이 음반사가 6년쯤 전에 복각했던 신중현과 엽전들의 세장의 음반 이래 하나의 작은 쾌거이며, 세대별로 단절적인 음악문화 패턴을 재생산하고 있는 한국 대중음악 문화에 대한 최소한의 성실이다. 이 음반을 촉매제로 하여 신중현의 영원한 걸작인 <아름다운 강산>에 새로운 호흡을 불어넣은 명앨범 <바람>과 신중현/김정미 콤비의 대표적 유산이라고 할 수 있는 <`now`> 앨범까지 가난한 우리 노래 애호자들에게 선보일 수 있게 되기를 진심으로 희망한다. 강헌/ 대중음악평론가 authodox@orgio.net

무명 여성영화인들 “우리가 이렇게 많았어?!”

지난 달 29일 오후, 서울 사간동 출판문화회관은 낯은 익으나 이름이 얼른 안 떠오르는 여성들로 붐볐다. 암투병으로 불편한 영화배우 우연정씨가 남편 등에 업혀 들어왔고, 편집기사로 일했던 양성란(본명 양소자)씨는 “30년 만에 잃어버린 이름을 되찾았다”며 기뻐했다. 의상 일을 했던 이해윤, 실험영화집단 `카이두' 회원 한옥희·김점선씨 등도 “이게 얼마만이야”라며 손을 맞잡았다. 제3회 서울여성영화제를 맞아 출간된 <여성영화인사전> 출판기념회장은 이산가족찾기 광장보다 더 뜨겁고 절절한 사연들로 달아올랐다. “그렇게 많은 여성 영화인들이 이름 없이 묻혀져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자리로도 뜻이 깊었습니다.” <여성영화인사전>을 펴낸 이진순(사진·33·도서출판 소도 대표)씨는 이날 함께 자리하지 못한 수 만명 한국 여성영화인들을 다 발굴하겠다는 각오를 다시 다졌다고 했다. “1999년 제2회 서울여성영화제 홍보팀장으로 일할 때 <여성영화인 백서> 얘기가 나왔어요. 한국 최초 여성감독 박남옥씨 작품 <미망인>이 상영되는 현장에서 `백서로는 안되겠다, 사전을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지요. 워낙 자료가 없어서 지난 2년여 모래밭에서 바늘 찾는 심정이었지만 이제 뼈대가 잡혔고 도와주겠다는 분들도 나타나 얼마나 든든한지 모릅니다.” <여성영화인사전>은 1954년부터 89년까지 한국 영화판에서 일했던 여성 배우·감독·스태프 등 250여명 인명과 시대별 영화 속 여성 이미지 변천사 등을 담고 있다. 책임연구원으로 참여한 영화학자 주진숙, 영화평론가 변재란, 배우 장미희씨 등과 함께 중앙대 첨단영상전문대학원 출신 20여명 연구원과 자료조사원들이 발이 닳도록 뛰어다니며 애쓴 결실이다. `남성' 영화인사전도 제대로 된 것이 없는 현실에서 이들이 거둔 결실은 그대로 한국영화사 기록과 이어진다. “스타들이 참 덧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연기자로서 자신이 활동했던 70년대 한국영화 부분을 집필한 장미희씨 증언을 보면 영화 속에서 착취당하고 잊혀져간 여성배우들 그 자체가 바로 한국 사회 모순구조를 그대로 드러내주고 있어요. 그들이 영화사적 평가를 정당히 받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아울러 옛날 한국영화에 대한 재평가도 꼭 이뤄져야 하고요. 이 사전이 앞으로 한국영화사 연구가 풍성해지는 한 계기이자 자극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글 정재숙 기자 jjs@hani.co.kr 사진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친구` 따라 부산간다 - 둘쨋날 II

둘쨋날 II 오후 1시 범일동 일대 | 질주하는 청춘 “…Doctor, doctor give me the news, I’ve got a bad case of lovin’ you. No pill's gonna cure my ill. I’ve got a bad case of lovin' you”(<`bad Case of Loving You`>) 치유제 없이 답답하기만 한 청춘이 어디 부산에만 있었으랴. 먼저 내달리기 시작했으나 점점 숨이 차오르는 상택이와 중호를 제치고 준석과 동수가 앞서 내달리는 골목은, 사실 범일동 도로 아래 40m가량의 축대를 배경으로 스쿠터를 이용해 찍은 장면이다. “이 동네는 거의 안 변했다고 봐야죠. 커서 자주 온 적은 없어도 누구나 한번쯤은 이곳을 거쳐갔을 깁니다. 제 기억에도 희미하게 남아 있지요. 정확히는 태화가 놀던 동넵니다.” 축대를 빠져나와 왼쪽으로 몸을 비틀면 철길 위 육교가 나온다. 오른편의 무명천은 철길 아래로 흐르니 기차는 물 위를 달리기도 하는 셈이다. 육교 위에서 “부산 목욕탕은 왜 그리 높다란 굴뚝을 세워놓는지 모르겠다”면서 곽 감독이 촬영 당시 재밌는 에피소드 하나를 꺼내든다. “웬 할메가 장동건이를 보더니 반갑다면서 막 아는 척을 하더라고, 그라더만 하는 말이 ‘아이고, 유동근이도 왔네’.” 겨우 한나절이 지난 것뿐이지만 어제의 다소 어색했던 분위기와 다르게 감독과 3명의 기자일행은 거의 끊이지 않는 대화의 릴레이를 이어가고 있었다. 돌아볼 곳이 아직 많이 남았으므로 점심을 빨리 먹고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지금 생각하면 이해가 안 돼, 뭐 나올 게 있다고 그렇게 소독차를 따라다녔지?” 하는 질문에 “딴 세상 같잖아”, “하늘나라에 온 기분이지”, “뭐, 그때는 그만한 이벤트가 없었으니까” 하는 대답들이 줄줄이 이어진다. ‘천지 모르는’ 아이들이 소독차 뿌연 연기를 사탕이나 초콜릿처럼 쫓던 골목길. 엉덩이 깐 손주녀석을 ‘다라이’에 넣고 목욕시키는 할머니의 주름진 손마디와 행여 소독차 연기가 들어올까 문을 닫는 2층집 아저씨의 무심한 표정이 지나고 나면, 앞 못 보는 연기를 틈타 절도행각을 펼치는 아이들의 재빠른 손놀림이 이어진다. 준석의 아버지로 출연했던 주현씨가 “야, 저때 우리 진짜 도둑질 많이 했다”며 공소시효 지난 범죄사실을 고백했다는 타이틀 시퀀스에서 범일동 굴다리는 꽤나 많은 컷을 허용했다. 진시장에서 부산진역으로 내려오는 고가도로 옆으로 난 첫 번째 계단으로 내려가면 담쟁이 덩굴이 자랐던 흔적이 남아 있는 꽤나 멋스런 굴다리가 있다. “옛날 간지(느낌) 낸다고 보육원 아이들을 출연시켰어요. 타이틀 시퀀스는 여러 군데서 나눠서 찍었는데 이틀 동안 소독약 냄새 맡으며 계속 뛰니까 나중에는 아이들이 기진맥진하더라구요. 지금 생각해도 미안해 죽겠어요.” 굴다리를 지나, 소독차를 따라, 아이들이 달려간 곳은 범천동 안창마을. 꽃동네라고도 불리는 이곳 고지대는 영세민 거주집단이다. 사는 모양새가 남루하기에 서울 봉천동 산동네와 비슷한 이 마을은 70, 80년대로 시간여행을 떠나온 듯한 느낌을 준다. 바람을 막기에도 역부족인 판자들을 꼼꼼히 이어서 울타리를 쳐놓은 곳이 눈에 곧잘 띄지만, 그런 풍경이 각박한 세상을 살아내는 이곳 사람들만의 방식을 대변하는 것 같기도 하다. 주인이 곽 감독의 팬이라며 절대 돈을 받지 않는다는 마을 꼭대기 주차장을 따라 내려오다보면 왼편에 아이들이 소독차를 따라 나서는 장면 중 나오는 조그만 다리가 나온다. 구석구석에 박혀 있는 음식점들에서 내놓는 쓰레기 뭉치들이 조그만 다리의 반쪽을 점령하고 있는데다, 거기서 풍겨나오는 악취들로 사방이 진동하지만, 이곳 사람들은 누구 하나 얼굴을 찌푸리는 법이 없다. 만개한 꽃으로 뒤덮인 정원은 아니더라도, 안창마을이 꽃동네로 불리는 이유다. 안창마을에서 내려오는 길 왼쪽으로 부산고등학교가 스쳐지나갔다. “아부지 뭐하시노”하고 묻는 선생에게 “건달입니더”라고 사실을 말했는데도 불구하고 “좋겠다! 느그 아부지 건달이라 좋겠다”는 말과 함께 개 맞듯이 맞은 준석은 “누가 좋타캣심니꺼”라며 벌컥 화를 내고 교실을 박차고 나온다. “학교마다 이상한 선생들 진짜 많지요. 영화에 나온 야비한 선생 모델이 ‘개뼉따구’란 선생이었는데 꼭 고무밴드 두개를 뭉쳐서 코를 때렸는데, 와! 진짜 생각만 해도 아프네. 이런 선생들은 주로 말가지고 늘어지는 것도 장난이 아이지. 하루는 시험치고 났더니만 선생이 ‘어이, 곽경택이! 요번에 모의고사 잘 쳤나?’ 하고 부르더라구요. 그래서 ‘아니요, 요번에는 못 쳤는데요’ 했더니만 ‘요번에는 못 쳐? 언제는 잘 칫드나’ 하고 무안만 주고 가대요. 학교 앞에 오니 밸 생각이 다 나내. 우리 학교 앞에서는 도저히 신분을 알 수 없는 미모의 딸래미 둘이 라면을 팔았는데. 지금 생각하면 순진한 고등학생이란 약점을 이용해 장사를 해묵은 것 같아요. 선배들은 ‘니가 봐도 예쁘재’, ‘저 남자 애인이 조직 보스란다’ 뭐 이런 말도 마니 했었지요, 참, 그 딸래미들 지금은 뭐 하겠노….” 오후 4시 용두산공원 | 공원 언덕길 “상택아, 다음에도 아 새끼들 팰 일 있으믄 확실하게 조지아 된다이. 다음에 눈만 마주치도 오줌을 찔끔 싸게끔 만들어나야 되는기라. 아예 용서해주고 같은편으로 만들든가, 아니믄 차라리 빙신을 만들어삐라. 그래야 뒤탈이 없다.” “좋다. 앞으로 누구 팰 일 있으면 그래 하께. 그라믄 니도 내 부탁 하나 들어도.” “...뭔데?” 생존법칙을 이미 몸 속 깊이 배워버린 준석에게 상택이 부탁한 것은 다시 교복을 입고 학교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누구 말도 듣지 않을 것 같던 준석의 반항어린 눈매는 ‘친구’라는 부름 앞에 여지없이 부드러운 형상으로 바뀌고 그의 발걸음은 어느새 교실로 향했다. 이 긴 말 필요없는 ‘싸나이’들의 대화는 용두산공원 언덕길에서 이루어졌다. 부산 어디에서도 보인다는 부산타워(용두산타워)가 우뚝 서 있고 꽃으로 만든 대형 시계가 한가로이 누워 있는 용두산공원은 세상의 비둘기란 비둘기는 죄다 모이는 곳 같다. 중호(정운택)가 자위하다 이모에게 들킨 이야기를 익살스럽게 풀어내던 곳은 타워를 에워싼 팔각으로 생긴 난간. 곽 감독은 비둘기 모이로 줄 새우깡을 ‘오독오독’ 씹으며 엉뚱한 헌팅 이유를 풀어놓는다. “저기서 왜 찍었냐면요…, 저기는 아무나 못 올라가거든요. 사무실 통해야 올라가지. 그래서 어릴 적부터 저 위에 한번 올라가는 게 소원이었어요.” 벚꽃에 목련까지, 봄이 되면 온갖 다채로운 꽃들이 향기를 뿜어내는 곳. 서울의 탑골공원처럼 노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장기도 두고, 한쪽은 음악을 틀어놓고 자기 흥에 겨운 춤사위를 펼치는 모습 뒤로 대학 신입생처럼 보이는 무리들은 빙 둘러앉아 80년대식 수건돌리기를 하더니 벌칙인지 한 남학생이 여학생을 업고 공원을 뛰어다닌다. 오후 4시30분 국제시장 | 카드 사러 나온 상택과 준석 “상택아…, 우리 약속 하나만 하자, 내는 배운 기 깡패질이니까, 니가 앞으로 살아가면서 정말이지 직이삐고 싶은 놈이 있스믄 내한테 딱 한놈만 말해라. 내가 직이주께. 그라고 니는 나중에 내가 늙어가지고 건달짓 못하게 돼서 니 찾아가믄 그때, 개인택시 한대만 빼줄래?” “개인택시?” 오랜만에 찾아온 “엘리트 대학생” 친구의 파카를 빌려입고 준석은, 마약금단현상으로 쾡한 눈을 불안하게 움직이며, “성질 더러븐 영감 수발하다 죽어간 어무니”에게 보낼 크리스마스카드를 사러 가자며 국제시장으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용두산공원에서 자갈치쪽으로 향하는 길에 자연스럽게 지나치게 되는 국제시장에는 도로를 따라 각종 학용품 및 사무용품을 파는 문구사들이 쭉 늘어져 있다. “아까운 장면이에요. 조금 더 넓혀갈 수도 있었는데, 엑스트라들의 헤어나 분장까지도 80년대에 맞춰서 얼마나 신경을 많이 썼는데….” 부산고등학교에서 시작해 범일동 철길육교로 삼일극장을 향해 질주하던 뮤직비디오 시퀀스의 가운데 토막은 자갈치시장 건어물상회 옆이다. 자갈치를 ‘갈치’의 사촌쯤 되는 생선으로 알고 있는 사람도 있다지만, 자갈치는 본디 충무동쪽 보수천(寶水川) 하구 일대가 자갈투성이였던 자리를 말한다. 힘좋은 바다장어 머리를 못에 ‘꽉’ 찍고 한번에 쓰윽 껍질을 벗겨낸 뒤 철판에 구워주는 부산 특유의 장어구이가 풍기는 냄새가 연신 일행의 출출한 배를 자극하고 있었다. ▶`친구` 따라 부산간다 ▶`친구` 따라 부산간다 - 첫쨋날 ▶`친구` 따라 부산간다 - 둘쨋날 I ▶`친구` 따라 부산간다 - 둘쨋날 III ▶`친구` 따라 부산간다 - 셋쨋날 ▶<친구> 배우 이재용이 본 ‘부산’ ▶<친구> 촬영감독 황기석이 본 `부산`

희망의 속삭임, 이젠 한국이 뜬다

런던=최인규 통신원 최근 아시아시장에서의 비약적 성공에 비해 한국영화가 영화의 본산지라 할 수 있는 미국시장이나 유럽시장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아직 미미한 편이다. 이민자사회를 중심으로 한국영화 소비시스템이 구축돼 있는 미국은 그나마 상황이 나은 편이지만 유럽에서 한국영화에 대한 인지도는 아직 초기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미국과 유럽의 문화 교두보로 1990년대 중반 이후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영국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가끔 영화제를 통해 한국영화가 일년에 몇편씩 소개되고, 국립영화극장 같은 곳을 통해 한국영화전이 기획되긴 하지만 대중의 관심도나 인지도는 현저히 떨어지는 편이다. 지난 몇년간 영화제나 기획전이 아닌 일반 극장에서 한국영화가 소개된 것은 극히 드문데 장선우 감독의 <거짓말>이 유일무이한 경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거짓말>도 예술전용관에서 단관 상영에 그쳤고 언론이나 대중의 관심도 적은 편이었다. 같은 시기 여러 영화제를 통해 호평받은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경우 아직 개봉도 이뤄지지 않은 상황이다. 최근 <링> 시리즈를 비롯한 기타노 다케시의 <기쿠지로의 여름> 등 매년 대여섯편씩 일반 극장에서 영화를 선보이는 일본이나 <와호장룡> <화양연화>의 대중적, 비평적 성공으로 중국영화 붐을 이뤄내고 있는 중국어권의 상황은 한국영화로서는 상당히 부러운 일이다. 다양한 장르, 튀는 개성- 이제 시작이다! 한국영화가 가야 할 길이 먼 것은 분명 사실이지만 최근 들어 상황은 상당히 호전되고 있다. 지난해 런던영화제에선 한국영화가 최초로 6편이나 소개되었는데 좌석 점유율을 비롯한 언론의 반응 등 모든 것이 달라진 한국영화의 위상을 느끼게 했다. <박하사탕> <반칙왕> <플란다스의 개> <오! 수정> 등 다양한 장르의 영화가 관객을 즐겁게 해주었고, 심각하고 어둡다는 한국영화에 대한 편견을 없앨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여러 상황을 고려해볼 때 영국에서 한국영화를 위한 시간은 점점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봄 기운이 완연해지고 있는 요즘, 한국영화는 런던에서 새로운 전기를 맞고 있다. 곧 있을 게이·레즈비언영화제에서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가 소개되는 것을 필두로 4월에는 <화양연화>를 수입해 재미를 본 ‘메트로 타탄’에서 수입한 김기덕 감독의 <섬>이 소개될 예정이다. 가장 주목할 행사로는 오는 4월29일부터 7편의 한국영화가 런던 시내 한가운데인 레스터 스퀘어에 자리한 예술극장 ‘메트로’에서 상영되는 ‘LG 코리안 필름 페스티벌 2001’을 꼽을 수 있다. 그동안 국립극장이나 아트센터 같은 곳에서 비슷한 기획이 진행된 적은 있지만 일반 극장에서 한국영화제가 열리는 것은 처음이다. 또 이전에 기획된 한국영화 주간이 이곳 프로그래머들 주축으로 이루어졌다면, LG전기가 후원하는 이번 행사는 런던대학 한국 학생회가 한국문화를 알리기 위해 자발적으로 여는 행사라는 점에서 더욱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분단상황을 보여주는 <공동경비구역 JSA>를 오프닝으로, 일주일간 열릴 이번 행사에는 한국적 상황을 잘 보여줄 수 있는 다양한 주제를 표현한 작품들이 소개될 예정이다. 페미니즘과 관련있는 <파란 대문> <정사>, 전통 정서를 표현하는 <정>을 비롯, <세친구>(소외), <돈오>(섹스), <간첩 리철진>(분단) 등이 그것. 또 부대행사로 런던에서 활동중인 한국의 단편영화감독의 작품 상영회도 열릴 예정이며 행사기간 중 박찬욱 감독, 이재용 감독 그리고 배우 송강호씨가 런던을 찾아 행사를 더욱 빛낼 예정이다. 드라마에서 스릴러까지, 영화로 말해요 지난 3월 초 영국의 국립영화학교인 NFTS에서 졸업작품 시사회를 가졌다. 다큐멘터리, 극영화, 그리고 애니메이션 등을 통틀어 15편의 졸업작품이 선보였는데, 미래의 영국영화를 가늠해볼 만한 좋은 기회였다. 졸업생 중 유일한 한국인인 이영미 감독이 연출한 <캐비>(Cabby)라는 작품이 특히 화제를 모았다. 택시운전을 하는 한 여성의 동성애적인 욕망과 그녀가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겪는 갈등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바라본 이 작품에 대해 이 학교 졸업생이자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로 유명한 스티븐 프리어즈 감독은 “모든 남성들이 꼭 봐야 할 영화”라는 말로 치켜세우기도 했다. 이처럼 한국인의 손끝에서 나온 단편영화들도 한국영화를 알리는 촉매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런던 인터내셔널 필름 스쿨에서 졸업작품으로 만들어진 김판수 감독의 <바람 속의 속삭임>(Whispers in The Wind)은 한국인이 만든 영국 사극이라는 점에서 많은 관심을 끌었고, 셰익스피어와 한국의 선 사상을 잘 조화시킨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올 전주영화제 본선에 진출한 <누가 예수를 죽였나?>(Who Killed The Jesus?)도 런던에서 만들어진 한국영화다. 골드 스미스 칼리지 출신인 우민호 감독과 이석근 감독이 만든 스릴러물인 이 영화는 잘 짜인 드라마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는 현지의 반응을 얻어냈다. 현재 런던에서만 약 30여명의 한국 영화인들이 활동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들은 한국인 특유의 정서를 바탕으로 코스모폴리턴적 감성을 더하는 작업 속에서 많은 단편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들의 성과물은 ‘LG 코리안 필름 페스티벌 2001’에서 ‘런던의 한국영화감독’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될 예정이다. ▶인터뷰 | 영화평론가 스티븐 크렘린 ▶<바람 속의 속삭임>은 어떤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