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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1997)

<박스오피스> '2012' 압도적 1위

(서울=연합뉴스) 한미희 기자 = 할리우드의 재난 블록버스터 '2012'가 주말 박스오피스에서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다. 16일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스크린 가입률 99%)에 따르면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의 '2012'는 13-15일 사흘 동안 전국에서 상영관 858개를 차지해 관객 130만704명(64.5%)을 모았다. 개봉 첫 날인 12일 동원한 30만명을 더하면 누적 관객 수는 160만5천147명이다. 박예진ㆍ임창정이 주연한 '청담보살'은 2위로 출발했다. 470개 상영관에서 38만4천278명(19%)을 모아 11일 개봉 이후 누적 관객 수는 55만8천324명이다. 3주 동안 정상을 지킨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3위로 내려섰다. 12만2천117명(6.1%)을 더해 누적 관객은 244만2천426명을 기록했다. 6만1천927명을 더한 판타지 로맨스 '시간여행자의 아내'는 4위를 지켰다. 지난달 28일 개봉해 누적 관객은 67만3천7명이다. 조재현ㆍ윤계상 주연의 '집행자'는 세 계단 내려선 5위로, 5만4천730명을 더해 누적 관객 32만2천319명을 기록했다. 12일 함께 개봉한 텔레시네마 시리즈 '천국의 우편배달부'와 '19'는 6~7위를 차지했다. 관객은 각각 3만4천158명, 1만3천563명이다.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바스터즈 : 거친 녀석들'은 세 계단 밀려났다. 1만1천544명을 더해 지난달 28일 개봉 이후 누적 관객은 32만1천863명이다. '펜트하우스 코끼리'와 '마이클 잭슨의 디스 이즈 잇'은 9-10위다. eoyyie@yna.co.kr (끝) <연합뉴스 긴급속보를 SMS로! SKT 사용자는 무료 체험!>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talk show] “1년 개봉작 몽땅 본 적도 있어요”

이슈가 된 영화가 있으면 단체관람한다. 그것도 연례행사에 가깝다. 최근 화제작에 대한 질문을 공식석상에서 받으면 “바빠서 보지 못했습니다”라고 답한다. 한국의 정치인들이 영화를 대하는 태도는 거의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협소한 경험과 무관심이 낳은 빈곤한 감수성은, 대개 산업논리로서의 영화에 대한 역설로 이어지기 일쑤. 그들에게 <쥬라기 공원>은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가 아니라 자동차 150만대였다. 인터뷰어로 나선 영화감독 장항준이 대담을 희망한 이는 진보신당의 노회찬 대표. 평소 영화에 관심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그 ‘관심’을, 정치인 일반의 영화에 대한 이해에 빗대거나 ‘정치인 중에서는 영화를 좀 아는’ 수준으로 넘겨짚어서는 곤란하다. 두 사람의 대화가 시작된 지 채 5분도 지나지 않아 좌중에는 과거 PC통신 시절의 ‘영퀴방’마냥 영화제목들이 난무하기 시작했으니. 그러니까 이 인터뷰는 영화감독과 정치인의 만남이 아니라, 어느 두 영화광의 만남이라 이름 붙이는 게 옳을 것이다. 장항준: 오늘 노 대표님 뵈러 간다고 하니까 ‘휴대폰 번호 교환해라. 나중에 술자리에 모시게’라는 사람이 절반, ‘괜찮겠어? 좌파 감독으로 찍히는 거 아냐?’라는 사람이 절반이더라고요. 사실 제가 정치에 큰 관심은 없지만 노 대표님께서 영화 좋아하신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살아오셨고, 그 과정에서 좋아하게 된 영화의 변천사 같은 것이 궁금하더라고요. 물론 제 최고의 관심사는 노 대표님과의 차후 술자리입니다만. 노회찬: 저에게는 음주가 중요한 행사입니다. (웃음) 의미있는 행사가 될 것 같으니, 올해가 가기 전에 한번 자리를 만들겠습니다. 장항준: 영광입니다.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대표님께서는 어떤 영화를 좋아하세요? 노회찬: 기본적으로 영화는 다 좋아합니다. 다큐멘터리는 무조건 좋아하고요. 그리고 코언 형제의 영화를 좋아해서 작품이 개봉되면 무조건 봅니다. 장항준: 뜻밖이네요. 노회찬: 한국 감독 중에서는 김기덕 감독 영화 좋아하고요. 장항준: 센 거 좋아하시는군요. 노회찬: 그렇죠. 에스프레소 계통으로. (웃음) 한때는 이란영화도 많이 봤고 터키영화, 유고영화… 할리우드풍이 아닌 영화들을 좋아했어요. 그리고 문제의식이 있는 영화들. 최근에 봤던 영화 중에서는 <이리나 팜>의 여운이 길게 남더라고요. 장항준: 문제의식있는 작품 중에도 본질을 살짝 덮은 영화들이 있고, 전면에 내세운 영화들이 있잖아요. 저는 고등학생 때 영화쪽으로 진로를 정했는데, 그 이야기를 듣고 음악선생님께서 부르시더라고요. 그리고 일일찻집 티켓을 하나 주시더니 ‘서울대 앞 녹두거리의 어느 다방에 가면 생전 보지도 못한 영화를 하나 만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시더라고요. 찾아서 다방에 들어갔더니 커튼 사이로 불빛이 간간이 새어나오고 있었어요. 보니까 24인치 텔레비전 앞에 수십명이 담배를 피우며 영화를 보고 있더라고요. 그게 <전함 포템킨>이었어요. 노회찬: 아, 저도 그 이야기하려고 했었어요. 저도 에이젠슈테인 영화는 구할 수 있는 데까지 다 구해서 봤어요. 장항준: 그때 ‘영화가 이런 것이구나’라는 걸 느꼈어요. 대사없이 자막과 음악만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데 그게 가슴 벅찬 무언가를 주더라고요. 그때부터 센 영화들을 찾아보게 되었는데 결국 발견한 제 취향은 에미르 쿠스투리차 감독의 영화였어요. 코미디이면서도 몽환적이고, 냉철하지는 않지만 다시 돌아보게 되는 사회비판이 담겨 있더라고요. 대표님의 취향은 어떻게 변해왔나요? 노회찬: 저희 부모님은 두분 다 피난민이셨고, 저는 그때 부산에서 태어났죠. 피난민촌에서 생활하느라 어려웠는데 그런데도 부모님이 학교 교육보다 문화예술을 중요시하는 분들이셨어요. 지금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인데, 제가 어릴 때 방 하나에 다섯 가족이 살았단 말이에요. 그런데도 그 와중에 두분이 가끔 부산에서 하던 오페라 공연을 보러 가셨어요. 그리고 저도 초등학생 때 한달에 한번 이상 버스를 타고 시내에 나가서 영화를 봤는데, 그때 채플린 영화를 많이 봤죠. 그 기억 때문에 영화를 좋아하게 된 것 같아요. 고등학생 때는 그해에 개봉한 영화를 모두 본 적도 있어요. 노트에 감독 이름도 적고, 나름 별점도 매기고. (웃음) 그때까지는 정말 마구잡이로 영화를 보다가 그 뒤에 사회문제에 눈을 뜨면서 취향이 달라지게 됐죠. 장항준: 학창 시절에 많이 보고 감동받은 영화들은 대부분 미국영화들이었을 것 같은데요. 대략 어떤 영화들이었나요? 노회찬: 당시에 네번 본 영화가 있는데, 몽고메리 클리프트와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나왔던 <젊은이의 양지>였어요. 그 영화도 사실은 미국사회가 급속히 성장하면서 생겨난 문제들에 관한 이야기였죠. 장항준: 사회적인 관점에서 보더라도 촘촘하게 잘 만든 영화인 것 같아요. 노회찬: 네번 중에 두번은 엘리자베스 테일러 얼굴 보려고 간 것입니다만. (웃음) 그 시절의 마지막을 장식한 작품이 두편인데, <닥터 지바고>와 <대부>였어요. <닥터 지바고>는 중학생 때 누나가 단체관람하는 걸 따라가서 처음 본 이후로 지금까지 다른 판본으로 10번 넘게 봤죠. <대부>가 개봉했을 때는 학생이어서 당연히 볼 수 없었는데 사복 입고 가서 봤고요. 장항준: <대부> 3부작 중에서는 몇 번째가 개인적인 취향에 맞으시던가요? 노회찬: 2편이죠. 1편도 손댈 데 없이 완벽하다고 생각됩니다만 2편에는 서사성이 있잖습니까. 제 취향이 그쪽 계열이기도 하고요. 장항준: 저도 최근에 기고할 일이 있어서 <대부2>를 다시 보게 되었는데요. 저는 2편이 시리즈의 1편인 것 같아서 좋았어요. 다시 보면서 예전에는 별 생각 없이 넘어갔던 장면에서 크게 감명을 받았는데요. 젊은 시절의 비토 콜레오네(로버트 드 니로)가 동네 유지를 죽이러 가는 장면을 보면 바깥 길거리에서는 축제가 열리고 있고, 건물 내부 계단에는 복도 등이 깜빡깜빡 점멸되고 있어요. 그 어둠 속에서 비토가 모습을 드러내는데, 점멸과 함께 모습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가 나타났다가를 반복하는 대목에서 순간적으로 소름이 돋더라고요. 노회찬: <대부> 시리즈는 전체적으로 그 대비 효과가 좋은 것 같아요. 1편 결혼식 장면도 그렇고, 2편의 그 장면에서도 살인자는 옥상으로 이동하고 있는데 아래에서는 축제가 이어지고. 그 대비들이 매우 자연스럽게 긴장감을 주는 거죠. 장항준: 대표님께서 지금까지 보신 영화 중에 가장 좋았던 영화 세편을 꼽는다면요? 노회찬: 너무 난감한 질문인데. 장항준: 지금 이 순간, 아니면 2009년 버전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노회찬: <모던 타임즈>를 우선으로 꼽고 싶어요. 그건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 같아요. 두 번째는 <워낭소리>. 세 번째는 <로큰롤 인생>이라는 다큐멘터리영화. 다큐멘터리는 스토리를 강제하기가 쉽지 않은데 아주 절묘하게 스토리가 만들어졌고, 메시지 자체도 강렬하더라고요. 근간에 본 영화 중에서는 제일 좋았어요. 장항준: 영화를 그토록 사랑하신 만큼 한번쯤은 영화계로의 진로도 고민해보셨을 법한데요. 노회찬: 고등학생 때는 영화도 많이 봤지만 다른 예술과 문학에도 심취했었어요. 당시에는 소설 월간지가 있었는데, 4개를 정기구독했고 그해에 발표된 단편문학을 모두 읽은 해도 있었어요. 음악회는 입장료가 비싸니까 못 다녔지만 전시회는 공짜니까 국전을 포함해서 전부 다녔고요. 그렇게 영화나 소설을 보고 전시를 찾아다닌 이유는 세상을 알고 싶어서였던 겁니다. 사춘기였고 세상에 대해서 궁금한 게 많았으니까, 독서를 통해서 간접경험을 하고 <대부> 같은 영화를 보면서 ‘마피아가 저런 거구나’ 같은 걸 알게 된 거죠. 장항준: 성장기에 집안이 부유한 편이셨나요? 노회찬: 그렇지는 않습니다. 부모님께서 자식들에게 공부 열심히 하라는 말씀은 안 하셨지만, 악기는 하나씩 할 줄 알아야 한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저는 첼로를 배웠고요. 제가 중학생 때 전교를 통틀어 첼로를 하는 유일한 학생이었습니다. 제 동생은 부모님의 그 방침을 거부해서 많이 맞았고요. (웃음) 음악보다 축구가 좋다고. 장항준: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교육 방침이네요. 요즘의 하버드나 예일이 원하는 신입생 아닙니까? (웃음) 그럼 영화는 그 많은 취미활동 중 하나였을 뿐이네요. 노회찬: 그렇게 무언가를 많이 했던 건 아니고요. 영화는 제 생활에서 중요한 일부였죠. 못 보고 지나가는 영화도 있잖아요? 못 보더라도 어떤 영화인지는 다 아는, 그런 상태였던 거죠. 당시 우리나라에는 영화잡지가 없어서 일본 <스크린>을 헌책방에서 사다 보곤 했었어요. 일본어는 몰랐지만 한문만 가지고 대충 이해하면서 사진 중심으로. 장항준: 한국의 관객 중에 할리우드 키드가 아니었던 이는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대표님께서 마지막으로 할리우드 키드였던 건 언제였습니까? 노회찬: 아무래도 고등학생 때죠. 그런데 제 세대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어릴 적에 보고도 계속 기억에 남는 것은 <쌀> <갯벌> <마부> 같은 한국영화들이에요. 당시에는 한국영화들이 사회적인 문제를 리얼하게 다루었는데, 이후에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면서 많이 바뀌었죠. 고등학교 들어갈 무렵부터 볼 만한 한국영화가 없어지고, 할리우드영화들이 많이 들어오니까 엄청나게 보게 된 거죠. 장항준: 사모님도 대표님과 영화적 취향이 비슷하신가요? 노회찬: 네, 영화 좋아합니다. 처는 80년대 초반에 문화계 근처에서 일을 했었어요. 그래서 안성기, 배창호, 이장호 감독과 매우 친합니다. 얼마 전에 저는 이장호 감독을 처음 만났는데, 제 처 안부를 먼저 묻더군요. 장항준: 80년대에는 비판적인 문화들이 모두 지하로 숨고, 오버그라운드에는 전두환이 육성한 3S가 장악하고 있었는데요. 그래서 저희 세대한테 한국영화는 에로영화였어요. 고등학생 때도 동시상영관을 즐겨 찾았죠. 주로 두 번째 영화를 보기 위해서. (웃음) 혹시 에로영화들도 가끔 보시나요? 노회찬: 제가 도덕성이 높아서가 아니라, <애마부인> 같은 영화는 한번도 안 봤어요. 시간이 나면 더 재미있고 좋은 영화를 보려고 했죠. 장항준: <감각의 제국> 같은 영화는요. 노회찬: 그건 봤어요. 그런데 저는 그 영화도 센세이션을 내세운 작품이지 영화적으로 완성도가 높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를 굉장히 좋아해서 거의 다 본 편인데, 그런 영화들이 훨씬 좋죠. 장항준: 굳이 에로가 아니더라도, 흔히 길티 플레저라고 하잖아요. 단지 오락을 위해 즐기는 영화는 없으신가요? 이를테면 화끈한 액션영화를 보고 스트레스를 푼다든가. 노회찬: 저는 예전에 EBS에서 일요일 낮에 해주는 영화들을 좋아했어요. 문제작들을 많이 방영했었는데, 그런 걸 보면 스트레스가 풀리곤 했었어요. 액션을 찾아서 보는 편은 아니에요. 그런데 ‘제이슨 본’ 시리즈는 그런 영화 중에서 제일 나았던 것 같아요. <미션 임파서블>이 촌스러워 보일 정도로요. 촬영기를 보니 새로운 시도도 많이 했더군요. 그리고 무기 안 쓰는 것, 그게 참 마음에 들더라고요. 가재도구 같은 걸 무기삼아 싸우는데 보는 재미도 있고. 장항준: ‘제이슨 본’ 시리즈는 액션장면만 봐도 정통 할리우드 스타일과는 다르죠. 예를 들어 마이클 베이 감독은 자동차 추격신을 찍어도 와이어에 매달아서 차를 공중에서 두 바퀴 돌린 다음 반대 차선으로 떨어트려서 쿵쾅거리게 만들잖아요. 저도 홍콩에서 자동차 액션신을 찍으려고 할리우드 출신 액션 스탭들과 상의한 적이 있어요. 그때 ‘제이슨 본’ 시리즈처럼 리얼로 가고 싶다고 했는데, 그들은 그게 관객에게 별로 재미를 주지 못한다고 생각하더라고요. 노회찬: 튀니지에서 촬영한 신 중에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 집 창문으로 뛰어들어가는 장면. 거기서 카메라맨도 같이 뛰었다는 거 아니에요. 그게 훨씬 훌륭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새로운 시도나 발상 같은 것들이 의미있게 생각되더라고요. 장항준: 영화를 대하는 관객의 태도가 멀티플렉스 시대와 함께 참으로 많이 바뀌었다고 생각하는데요. 예전에는 취미란에 ‘독서, 음악감상, 영화감상’이라고 흔히들 썼었는데, 요즘은 영화를 ‘감상’으로 표현하는 사람이 거의 없거든요. 영화 보기 아니면 관람. 이게 영화를 예술로 보느냐 아니냐의 어떤 척도일 수도 있을 텐데,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대표님의 입장은 어떠신지요. 노회찬: 저는 기본적으로 영화는 예술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순수예술처럼 소수들만 향유하다가 사회가 민주화되고 경제 수준이 높아짐에 따라 더 많은 사람들이 고급한 예술을 즐기는 방향으로 변해온 거죠. 예술 자체의 콘텐츠가 대중화된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더 많은 사람들이 피카소를 보고, 더 많은 사람이 베토벤을 듣게 된 것처럼 말이죠. 장항준: 현장에서 느끼는 좌절감은 그보다 좀더 깊은 부분이 있어요. 마치 막장드라마가 시청률을 올리는 것과 비슷한 느낌인데, 예술이냐 아니냐의 고민을 넘어서 좋은 상업영화와 좋지 않은 상업영화로 나뉠 뿐인 것 같다는 느낌이죠. 노회찬: 과거에 영화는 유일한 활동사진이었어요. 그러다 TV가 나왔고, 인터넷이 등장했고, 광고가 발달하면서 이제는 재미없는 영화보다도 훨씬 재미있는 뮤직비디오가 나올 수 있는 시대가 된 거죠. 그만큼 동영상의 세계가 훨씬 확장되었는데, 그럼에도 영화의 영역도 넒어졌잖아요. 마이클 잭슨을 그렇게 많이 들어도 베토벤 역시 전세계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듣는 것처럼요. 영화도 그렇게 시장이 확장되면서 예술영화와 재미있는 상업영화가 공존해가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물론 기본적으로 팔려야 하니까, 장사가 되는 이야기에 일단 몰두할 수밖에 없지만 기본적으로 시장이 커지는 것은 좋다고 봐요. 장항준: 기본적으로 좌파는 로맨티시즘에서 출발한다고 하잖아요. 노회찬: 그렇습니다. 특히 혁명가는. 장항준: 그런 관점에서 영화에 대한 대표님의 시각도 현장에서 느끼는 것보다는 좀더 낭만적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웃음) 노회찬: 그렇죠. 영화라고 하면 일단 좋아하니까요. 정치인의 입장에서는 영화를 출판산업과 비슷한 관점에서 보고 있어요. 우리나라에는 1년에 책 1권도 못 내는 출판사가 90%를 넘습니다. 출판사들도 일단 잘 팔리는 책을 낼 수밖에 없어요. 그나마 양식이 있는 대형 출판사들은 잘 팔리는 책을 내서 번 돈으로 안 팔리지만 있어야 할 책들을 한두권씩 냅니다. 하지만 자금여력이 없는 출판사들은 안 팔리는 책 한권 내고 나면 이후 1년간 책을 못 내는 거죠. 이런 문제는 정책적으로 정부가 개입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단 200권만 찍더라도, 그 책을 찾는 사람이 단 한명이라도 있다면 그 책은 도서관에 꽂혀 있어야 합니다. 그 관점은 영화에 대해서도 똑같아요. 독립영화 중 우수한 시나리오들은 심의해서 영화예술·산업진흥 차원에서 자본을 지원해야 합니다. 장항준: 사실 오늘 대표님 만나러 오면서 어느 정도 생각은 했었어요. 영화를 좋아하신다고 하는데, 보통 좋아하는 정도가 아닐 거라고. 오기 전에 시트콤 <지붕뚫고 하이킥!>의 김병욱 PD와 통화했는데 ‘너보다 영화 더 많이 아실 것 같다’더군요. 진짜 그렇습니다. (웃음) 장항준(1969년생) 서울예술대학 연극과 졸업. 1996년 <박봉곤 가출사건> 시나리오에 참여하며 영화계 데뷔. 2002년 <라이터를 켜라>, 2003년 <불어라 봄바람> 연출. 2008년에는 케이블 채널 OCN의 TV시네마 <전투의 매너> <음란한 사회> 두편의 메가폰을 잡았다. 현재 SBS TV의 영화정보 프로그램 <접속! 무비월드> ‘영화는 수다다’ 코너 진행 중. 2010년 <연극열전> 시리즈 ‘감독열전’의 무대를 준비하고 있다. 노회찬(1956년생)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 1987년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 창립. 1989년 인민노련 사건으로 2년6개월간 수감생활을 마친 뒤 90년대에 한국노동정책정보센터 대표, 진보정치연합 대표, <매일노동뉴스> 발행인 등을 역임했다. 2004년 민주노동당 사무총장으로 제17대 비례대표 국회의원으로 당선. 2008년에는 진보신당 창당, 현재 상임대표직을 수행하고 있다.

영웅재중의 이름에 크게 기댄 영화 <천국의 우편배달부>

synopsis ‘천국의 우편배달부’ 재준(영웅재중)은 죽은 연인에 대한 원망어린 편지를 보내려 하는 하나(한효주)를 만난다. 남겨진 사람들이 쓴 편지를 천국에 먼저 간 이들에게 배달하고 그들의 답장을 지상의 사람들에게 전하는 게 자신의 일이라 소개하는 재준의 말이 믿기지는 않지만 하나는 그와 동업하게 된다. 부인을 잃은 남편, 자식을 잃은 아버지를 만나 땅으로 꺼져가는 한숨을 건강한 삶의 에너지로 바꿔놓는다. 둘의 관계가 가까워지면서 재준의 정체도 서서히 밝혀진다. 아이돌의 영화 도전이 더이상 새로운 이슈는 아니라 하더라도 영화 포스터에 큼지막하게 찍힌 그 이름에 눈길이 멈추는 건 어쩔 수 없다. <천국의 우편배달부>는 영웅재중의 이름에 크게 기댄 영화다. 영화의 주요 타깃층은 당연히 영웅재중 혹은 동방신기의 팬들이다. 그들에겐 ‘영웅재중이 연기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다. 그가 기대치 않은 호연을 펼쳐 진짜 영웅이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다만 서툰 연기를 선보였다 하더라도 영웅재중은 언제나 그들 마음속의 영웅이다. 문제는 감동 멜로드라마를 예상한 일반 관객이 <천국의 우편배달부>를 봤을 때 발생한다. 14일 동안 재준과 하나가 천국에 편지를 배달하고 답장 전달 작전을 실행한다는 이야기는 참신하지는 않아도 관객의 감수성을 건드릴 만한 부분이 존재한다. 드라마 <상두야 학교가자> <미안하다, 사랑한다>를 연출했던 이형민 감독과 드라마 <롱 베케이션> <오렌지 데이즈>의 각본을 썼던 일본의 기타가와 에리코 작가 역시 머리로 이해하는 영화가 아닌 가슴으로 느끼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도무지 감정이입되지 않는 캐릭터, 낯간지러운 대사, 손발이 오그라드는 연기를 어떻게 두 시간 동안 견딜 것인가. 영웅재중의 발성은 답답하고, 한효주는 혼자서 아등바등하는 느낌이다. 김창완, 신구, 주진모 등 훌륭한 조연들이 순간순간 영화에 광을 내주지만 전체와 조화롭지 못하다. 영화의 후반부 재준의 실체가 밝혀지고 이야기의 아귀가 맞물려야 하는 지점에선 급기야 실소가 터져나온다.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의 사랑 이야기를 판타지로 폭넓게 소화하는 일본의 문화와 달리 우리에겐 그런 소재가 아직 낯설다. <천국의 우편배달부>는 일본 작가가 시나리오를 쓰고 한국 감독이 연출하는 ‘텔레시네마7’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제작됐다.

[전영객잔] 언젠가 본편을 보고 싶다

*스포일러 있습니다 영화적으로 미비하나 놀랍게도 그 미완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호의적 해석을 낳고 있는 영화 <파주>는, 그 때문에라도 관심을 갖고 말해질 자격이 충분하다. 쓴소리조차 무색한 영화에 비한다면 필시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많은 호평이 있었으니 이견이 하나쯤 첨부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는 생각이다. <파주>에 관한 호의적 평가들로는 <씨네21>에 실린 주성철, 김용언, 남다은의 글을 귀담아들으면 좋겠다. 드물게 김봉석만이 <씨네21>의 20자평에서 “인물과 이야기, 어디에도 논리와 일관성은 없다”고 비판적 태도로 잘라 말했다. 나는 <파주>에 대한 그의 평가에 공감한다. 하지만 스무자 정도의 요약으로 재단될 만큼 이 영화가 간단치는 않다. <파주>의 인물과 이야기에 논리와 일관성이 없는 것이 아니다. 다른 종류의 어떤 집요한 논리와 일관성이 이 영화를 다스리고 있어 그런 인상을 받게 되는 것이다. ‘무언가 부재하다’는 것과 ‘무언가 강력하게 존재하는 것이 부재함의 인상을 주고 있다’는 건 다른 문제이며 다른 진술이다. 전자가 아니라 후자의 관점에서 출발하는 것이 필요하다. 개인적인 인상으로만 먼저 말하자면 <파주>는 결국 닿고자 했던 목적지에 닿지 못하고 표류하는 상태에서 끝난 것 같다. 나는 이 영화가 표류하는 느낌을 준다, 가 아니라 표류하고 있는 상태다, 라고 쓰고 있다. 이 영화의 만듦새에 헐거움이 있다는 뜻이다. 나는 의외로 파주의 만듦새가 다소 헐겁다고 보는 편인데 여하튼 만듦새와 무관하게 호의는 존재할 수 있으니 그건 그 자체로 인정하자. 그런데 이때 쟁점은 <파주>에 관한 대부분의 호의적 평가의 근거가 제시될 때 ‘안개 같은 영화, 모호한 영화, 형부와 처제 사이의 금지된 사랑에 대한 묘연한 심리드라마’라는 쪽으로 말해진다는 것에 있을 것이다. 그건 관객 혼자 만들어낼 수 있는 감상이 아니고 영화쪽에서 걸어오는 서술에 대한 긍정이거나 합의일 가능성이 더 크다. 문제는 이 합의과정에 동참할 것인가 아닌가 하는 점이다.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이곳, 어떤 식으로건 관념적인 이 영화가 어렵다, 애매하다고 말하는 쪽은 보았어도 수긍하기 어렵다는 쪽을 거의 보지 못했다. 왜 수긍하기 어려운지를 설명하려는 시도는 아예 보지 못했다. 어렵지만 어쨌든 수긍하도록 만들어져 있다는 생각을 대체로 불러일으키는 것 같다. 안개처럼 다가와 붙잡히지 않는 신비로운 영화로 인식되는 <파주>에는 그러나 앞서 말한 어떤 집요한 논리와 일관성이 진주해 있고 그것이 실제로 사태가 그렇지 않은데 그렇다고 믿게 만들고 있으며 그럴 때 우리는 환상이 여기 서성이고 있음을 감지해야 한다. 안개를 일으키는 환상이 있다면 그건 무엇일까. 그러므로 질문은 이것이다. <파주>는 어떤 환상을 기술하기에 이 영화에 관한 지대한 해석의 사랑을 끌어내는 것일까. 지금은 <파주>의 환상에 대해 말할 시간이다. 영화는 개봉 전부터 두 가지 상징적인 제시어로 자기의 영화적 정체성을 예고해왔다. 하나가 ‘파주’이고 나머지가 ‘안개’다. 이 두 낱말의 조합 때문에라도 나는 인터넷에 이 영화의 후기를 올린 몇몇 블로거들처럼 한국문학 속의 한 지명으로 이끌린다. 당연한 일이다, 그곳은 ‘무진’이다. 박찬옥이 은연중 파주를 가상의 소도시 무진처럼 보이고 싶어 했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그곳으로 나의 생각이 이끌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1964년에 나온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의 무진은 안개를 명물로 가진 가상의 소도시다. “서울에서의 실패로부터 도망해야 할 때거나 하여튼 무언가 새 출발이 필요할 때(<무진기행>)” 주인공 윤희중이 찾아들던 곳. ‘안개에 휩싸인 채 도사리고 있는 음험한 상상의 공간, 지도위의 어느 곳도 아니면서 도처에 널려 있는 도시, 일상에 밀려 변방으로 쫓겨난 아득한 도시, 문득문득 삶의 한복판을 점령해 들어오는 신기루의 도시’(김훈), ‘어촌도 아니고 농촌도 아닌 규정 불가능한 공간, 안개에 둘러싸인 상상적 관념적 공간’(신형철). <파주>에도 안개가 상주해 있다. 게다가 이곳도 신기루의 도시, 규정 불가능한 상상적 관념적 공간으로 보인다. 누군가는 여기 머무르고 있고 누군가는 들고 난다. 애써 비교하자면 중식이 아니라 은모가 윤희중인 것 같고 중식은 하인숙에 가까울 것이다. 혹은 은모가 파주에 들어올 때 택시에 함께 탔던 나이트클럽 사장(이경영)은 <무진기행>의 미친 여자처럼 당신은 파주로 들어왔습니다(혹은 지금 파주를 벗어나고 있습니다)를 알리는 표지판쯤 될 것이다. 물론 그 유사성에는 빈틈이 많고 두 작품 사이에는 차이가 많다. <무진기행>의 무진은 변화의 징후를 갖지 않지만, 아이의 화상과 한 여자의 죽음과 사랑할 수 있었으나 그러지 못했던 관계로 한 타래 얽혀버린 <파주>는 갑자기 솟아나는 세계의 융기가 있다. <무진기행>에는 세계에 대한 결론이 없지만 <파주>에는 세계에 대한 결론이 징후적으로 내정되어 있다. <무진기행>에서 하인숙에게 보내려고 썼으나 찢어버린 편지로 하인숙에 대한 윤희중의 연모의 수준을 알기란 어렵지만, <파주>에서 은모를 위한 중식의 마음은 이제 그의 말과 행동을 따라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그럼에도 <무진기행>을 빌려 <파주>를 말하는 것에는 무엇보다 이곳이, 안개 낀 파주가, 말 그대로 신기루처럼 느껴지고 변하지 않는 관념의 섬처럼 종종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곳은 어떤 식으로건 관념적이다. ‘솔직한 막연함’의 설득력은 있으나 그렇다면 <파주>는 전적으로 관념만을 다루는가. 짧게 덧붙여야 할 한 작품이 더 있으며 이번에는 문학이 아니라 영화다. 김소영이 적절하게 지적한 것처럼 <파주>는 더도 덜도 아닌 10여년 전 일산이라는 도시를 떠올리게 한다. 그곳의 도시 개발이 한창일 때 배경으로 만들어진 이창동의 <초록물고기>를 불현듯 생각나게 한다.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서울 외곽지역의 저개발의 기억들은 현실에 떠밀려 상실되어가고 소실되어가는 사람들의 주거의 현장을 만들어낸다. <파주>는 분명 서울 외곽의 삶이라는 발전과 소실에 대한 지역적인 구체성을 안고 있다. 이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구태여 <파주>를 말하기 위해 <무진기행>과 <초록물고기>를 우회한 이유가 있으며 그것을 바탕으로 우리는 <파주>에 대한 일차적 환상 하나를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무진이 일견 관념적 장소인 것처럼 파주도 그러하다. 안개는 그때 이 영화의 인상에 큰 영향을 미친다. 둘째, 하지만 한편으로 <초록물고기>의 일산이 현실의 현저한 저개발의 기억이었던 것처럼 <파주>의 파주는 재개발의 현실적 싸움터다. 중식과 은모는 그곳 철거대책위원회에 몸담고 철거 용역들과 대치 중이다. 그러니까 <파주>는 한쪽으로는 관념적, 혹은 비현실적인데 또 한쪽으로는 현실적이다. 박찬옥은 비현실과 현실 사이에 인물들을 밀어넣는다. 이 지점은 간단치 않고 더 나아간다. <파주>의 비현실성은 중식과 은모의 미완의 관계라는 심리적 긴장상태를 은연중에 보장한다. 한편 현실적 상황은 저 밖의 괴물들과 싸우는 활동가(중식)의 사회적 믿음으로 나아간다. 이렇게 이중의 계통을 꾸린다. 의미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더 깊어져, 미학과 윤리학으로 번진다. 비현실적인 파주에 대한 인상과 그 안에 있는 미완의 관계는 안개의 미학으로 심화되고, 현실적 싸움과 그 싸움을 이끄는 활동가와 주민들의 투쟁은 윤리학으로 심화된다. 미학과 윤리학. 이 둘의 상승적 기운과 효과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영화에는 그러니까 중요한 한 순간이 있다. 투석과 화염이 난무하는 곳을 느린 화면으로 지나친 다음 건물 위로 올라간 은모는 물대포를 맞으며 용역 깡패들과 싸우는 중식에게 “왜 이런 일을 하세요. 이 일이 형부한테 무슨 보람이 되죠?”라고 문득 묻는다. 중식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글세… 처음엔 멋있어 보여서 한 것 같고 그 다음엔 내가 갚을 게 많은 사람이란 생각이 들어서였던 것 같은데, 지금은 잘 모르겠어. 그냥 늘 할 일이 생기는 것 같아. 끝이 안 나”라고 답한다. 선언적이기는커녕 최소한의 자신감도 결여되어 있는 이 말, 그러나 어떤 선언보다 울림이 있는 이 말을 듣는 순간, 이 사람의 윤리를 근거로 이 영화의 미학을 온당하게 믿고 싶어진다. 저 불확실의 윤리, <파주>에는 안개가 낀 것처럼 설명될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아서 지금 몽롱하구나, 라고. 그가 자신의 활동에 대한 적절한 이유를 대지 못할 때 그 솔직한 막연함이 영화 일단의 막연함에 대한 믿음의 근거로 받아들여지는 환상이 작동한다는 것이 지금 이 부분에서 나의 요점이다. 물론 이 환상은 받아들이기에 나쁘지 않다. 그 감정의 파동은 아름답다. ‘영화를 보는 동안’ vs ‘영화를 보고 나서’ 하지만 문제는 지식인 남자의 윤리적으로 올바른 그러나 가식 떨지 않고 이유를 찾지 않은 그의 대답이 이 영화의 미학적 행위를 결정적으로 관할하고 있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는 데 있다. 이 장면이 영화 <파주>에서 가장 공들여 찍은 장면 중 하나라는 사실을 우리는 모르지 않는다. 우리는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그 남자 중식의 고뇌에 기원한 망설임과 이 영화의 미진함을, 그리고 그 남자의 세계에 대한 근심이 <파주>의 세계에 대한 근심인 것처럼 받아들여져 그의 막연함이 이 영화의 막연함에 대한 준거로 삼아지는 것을. 이때 인물의 고뇌를 통하여 윤리에 빚진 다음 <파주>의 미학에 응당함을 부여하는 잠정적 결론에 관객은 스스로 도달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그런 다음 이 영화는 안개 같은 것이라고 탄식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일단 이 환상은 너무 아름다워서 한번 믿으면 회피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우리는 이 해석의 덫을 경계해야 한다. <파주>의 미학과 <파주> 속 특정 인물 중식의 대의적 윤리는 아무 상보적 관계가 없다. 이것이 걷어내야 할 첫 번째 <파주>의 환상이다. 그의 윤리는 올바르지만 <파주>가 애매해지는 이유는 따로 있다. 그러니 더 큰 환상을 말할 차례다. 이렇게 재차 물어보자. 정돈되지 않고 미완의 느낌을 주는 <파주>의 인상이 주인공의 윤리와 작품의 미학을 혼동하는 것에서 오는 오해라고 하자.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가. 아닐 것이다. 그의 윤리는 그의 것으로 두고 이번에는 영화의 구조에 대면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혹시라도 이 영화가 모호하고 애매하다는 것은 이야기, 즉 <파주>의 서사가 그러하다는 것인가. <파주>의 서사는 ‘영화를 보는 동안’ 단숨에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서’ 이 영화의 서사를 요약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사람을 나는 많이 보지 못했다. 아니 일반의 관객이 전체의 이야기를 설명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들 중 누구라도 이것이 형부와 처제의 금지된 사랑 이야기라고 자신있게 일축하는 건 자주 보았다. 이때 ‘영화를 보는 동안’이 아니라 ‘영화를 보고 나서’라는 표현에 유의해주기를 부탁드린다. 영화를 보는 동안에는 이야기가 어렵지만 영화를 보고 나서 이야기를 요약하는 데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는 건, 또는 그렇게 생각한다는 건 무슨 뜻일까(영화를 보고 나서도 도저히 이야기가 요약되지 않는 영화들이 있다.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들이 그렇다). 그 말에는 차이가 있다. ‘서사’와 ‘신의 배열’은 미묘하게도 실상 다른 영화적 항목이다. 좋은 영화에는 그 둘 사이의 조화가 필요하다. <파주>는 신들의 관계를 느끼기에 어렵도록 구성되어 있는 것 같다. 그것이 보는 동안 서사 파악의 난점을 불러오는 실제적인 이유다. <파주>는 의도적으로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이 이야기에서 미로에 빠지도록 신들을 배열하고 있다. 하지만 보고 나면 이야기는 요약할 수 있다. 그건 어떻게 가능한가. 결정적으로 “은모야, 난 단 한번도 너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어”라는 말이 등장할 때 대부분은 이 영화의 서사적 열쇠를 쥐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 한마디의 대사는 문득 우리가 <파주>의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안심을 심어준다. 지적한 것처럼, 이로써 많이 사람들이 이 영화를 금지된 사랑으로 요약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영화구조상 좀더 복잡한 문제가 있다. 결론으로 가기 위해 그걸 말해보자. 방치된, 수습되지 않은 것들 박찬옥의 <질투는 나의 힘>을 몇 차례 보아도 계속 남는 인상은 영화가 지루하지 않은데 무언가 펼쳐놓은 것들을 채 수습하지 못하고 방치된 상태로 끝맺는다는 것이다. 영화의 음성이 과장되지 않고 과묵하고 차분하여 그것에 끌려 보게 되는데 그러자면 좀 주마간산 격이다. 물론이다. 수습되지 않는 것은 수습되지 않는 대로 놓아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방치되어 아름다운 영화가 있다. 하지만 어떻게 그 방치됨을 고안할 것인가는 영화의 몫이다. 그냥 놓아지는 것이 아니라 놓아진 것 같은 느낌을 주도록 고안되는 것이 방치를 아름답게 하는 영화의 형식이다. 박찬옥의 <파주>에서 그 방치됨은 고안되지 않고 불철저하다. 편집 전문가가 아니므로 그냥 한명의 관객으로 말하자면 <파주>는 커팅 포인트(숏의 편집점)가 불안한 지점이 많다고 느껴진다. 혹은 신 배열이 좋지 않아 내내 서성이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신이 서성이는 것과 다른 평자들이 지적한 이 영화의 안개 같음, 모호함은 멀고도 다른 문제일 것이다. 물론 박찬옥은 세계의 전체가 있고 그 전체의 일부를 어떻게 분산시켜 보여주느냐가 중요하다고 보는 것 같다. 남다은이 적절히 지적한 것처럼 “영화가 모호함을 끌어안고 대면하며 세상 안에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파주>의 힘이 있고 그 모호함이 영화 서사상의 모호함이 아니라 세상의 모호함을 대하는 이 영화의 태도”일 수 있다. 이것이 원래 박찬옥이 세계를 보는 방식인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인물의 관계가 마침내 영화를 보고 나서 서사로서 완성되는 것에 비해 장면(신 또는 한신 안에서의 숏들)들의 밀도는 종종 중요시하게 생각되지 않는 것 같다. 이 점이 바로 영화를 보고 나서 서사는 요약할 수 있지만 영화를 보는 동안 서사를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을 만든다. 이런 예를 들고 싶다. 언젠가 극장에서 한 영화의 예고편을 상영한 다음 연이어 그 영화의 본편을 상영한 적이 있다. 이 행태가 이미지 학습의 효과를 낳는다는 사실을 그 자리에서 경험했다. 적어도 그 극장 안에 있던 사람들은 예고편이 미리 짚어준 영화의 포인트마다 정확히 한번도 빠짐없이 반응하여 웃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때 관객의 웃음은 준비되어 있었다. 정확히 예고편에서 알려준 지점에서 웃는 것이 학습의 효과였다. 예고편은 언제나 그 영화의 전부가 아니라 본편을 위한 전략이다. 당연하지만, 예고편은 본편의 신 순서를 전략적으로 뒤섞는다. 그때 예외없이 편집이 중요하며 그때 몇개의 신들을 배치하는 선택의 기준이 되는 것은 첫째 어떻게 궁금증을 유발할 것인가이며, 그러기 위해 둘째 어떻게 방점들을 찍어야 할 것인가이다. 마침내 그걸 다 보고도 관객이 얼마간은 알았다고 생각하지만 또한 얼마간은 알지 못한다고 느껴야 뛰어난 예고편이다. 그러므로 모든 예고편이 가져야 할 최상의 비수는 환상에의 기술이다. 본편을 괄호 안에 넣고 지금 그 본편에 대한 환상을 일구는 것이 예고편이 해야 할 일이다. 이것은 뛰어난 예고편이다 말을 돌릴 필요가 없겠다. 비유컨대 <파주>는 뛰어난 예고편이다. 나는 안개 같음, 모호함, 등으로 묘사되는 찬사가 <파주>의 이 예고편식 구조가 지닌 환상의 기술에 대한 환호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파주>는 111분짜리 예고편인 것처럼 보인다. 심지어 이 영화를 보고 나면 <파주>의 본편은 따로 있을 것이라는 생각까지 든다. <파주>는 세계를 형성하지 못하고 그 형성의 의지가 있었음을 예고하는 데서 그친다. 이것이 이 영화가 세계를 대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그에 따른 ‘미스터리 구조의 플래시백’과 ‘방점의 에디팅’은 구체적 기능이다. 영화에는 두번의 문답이 있다. 은모가 학생들과 공모하여 중식을 놀렸을 때 중식이 “왜 그랬니”라고 물으면 은모는 “우리 언니 건드리지 마”라고 말한다. 얼마 뒤 장면에서 중식이“3년 전에 왜 그랬니”라고 물으면 은모는 “혼자 못 살아간다는 게 두려워서요”라고 답한다. 시간의 혼란을 느끼며 영화를 보는 동안 우리는 재빨리 답을 찾아야만 한다. ‘언니를 건드리지 말라고 한 건 무슨 뜻인지 알 것도 같은데, 그건 8년 전이다. 그런데 3년 전에 왜 그랬냐고 묻는 걸 보면, 이 질문은 그 뒤에 다른 일이 있었다는 뜻이다.’ 물론 이런 식의 빈칸을 남겨두고 오가는 미스터리 구조는 흥미진진하다. 우리는 이후에 알게 된다. 첫 번째 대답과 두 번째 대답에 모두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 두려워서요’와 ‘당신 밑에서 살아가는 게 두려워서요’라는 중의적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많은 신이 매번 뒤로 밀리는 답안지처럼 수수께끼 같다. 우리는 첫 장면에서 확신하지 못하고 유사한 다음 장면에서 확신한다. 혹은 영화를 보는 동안 확신하지 못하고 본 다음 확신한다. 이때 중요한 점은 이 확신이 사후적 승인이라는 데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녀의 욕망과 두려움에 대한 수수께끼 같은 수신호를 먼저 받은 다음, 그 대답으로서의 정보는 나중에 받게 된다. 그런데 궁금하다. 그렇다면 그와 그녀의 욕망이 전이되는 순간은 언제였던가? 욕망이 전이되는 장면을 보지 못했는데 그들이 서로 욕망한다고 우리가 확신하게 된 것은 아닌가. 욕망의 장면에 대해 우리가 본 경험치는 부족하고 사후에 정보로서만 그렇다고 인정받도록 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나는 솔직하고 싶다. 당신은 <파주>를 ‘보는 동안’ 은모의 욕망과 중식의 욕망을 접한 적이 있는지 궁금하다. 은모가 계단을 급히 올라서 중식의 안위를 살피고, 연행된 그의 전화를 받으며 우는 것으로? 한발 물러서서 그것이 암시일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암시를 배열하는 것으로 욕망을 전이시키지 못할 것이다. 오직 방점뿐이군 우리는 <파주>가 미스터리를 위한 플래시백 구조라는 걸 이상에서 말한 셈이다. 이런 구조에서 중심이 되는 건 어디에 방점을 찍는가 하는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미스터리는 방점이 좌우한다. <파주>는 시간을 여러 차례 옮겨가고 있는데 그때마다 새로운 방점을 제시한다. 그중에서 영화의 중·후반부에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의 장면이 연이어진다. 은수가 죽고 중식과 은모는 단둘이 산다. 같이 트럭에서 장사하는 중식과 은모의 신이 지나면 곧장 시장에서 브래지어를 함께 고르는 중식과 은모의 신이 이어진다, 그 다음 공부방에서 중식과 은모가 돌아올 때 집 앞에 자영이 와서 기다리고 있다가 아기 사진을 보여주면 중식은 운다. 그 다음 신에서 자영의 전화를 받고 중식은 활기차게 나간다. 그 다음 신에서는 중식과 은모의 집에서 회의가 열린다. 자영이 중식과 은모의 관계를 염려하고 은모가 듣는다. 그 다음 중식이 연행되었다고 자영이 은모에게 알려주고, 은모는 유치장으로 중식을 만나러 간다. 오는 길에 은모는 인도행을 결심한다. 바로 이어지는 다음 신, 현재로 돌아와 장미아파트에서 용역 깡패와 싸우는 중식에게 가서 은모가 질문을 던지고, 연이어지는 신에서 마침내 중식의 고백이 나온다. 몇개의 신을 놓쳤을 수도 있지만 대략은 맞을 것이다. 이 신들의 연결은 벅차다. 신마다 거의 하나씩의 외상 또는 전환점 또는 사건들이 놓여 있다. 따지자면 어마어마한 변화와 진실 출몰의 지점들이 총망라 되어 있다. 이 영화가 포괄하던 앞과 뒤의 문제가 모두 터져나오는 지점들이다. 그런데 영화에서 그걸 보여주는 신들은 오래 머무르거나 망설이지 않고 인물의 아주 일부분적인 상징적 제스처만 보여주고 넘어간다. 가령 브래지어를 고르는 중식과 은모는 은수를 잊은 것 같다. 다 나은 아기의 사진을 본 중식은 외상에서 벗어난 것 같다. 그러다 갑작스런 연행을 당하고 그런 그를 본 은모는 진짜 멀리 가는 가출을 결심한 것 같다. 그러나 바로 다음 장면에서 그녀는 이미 돌아와 있고, “왜 이 일을 하느냐”는 갑작스런 질문을 던진다. 그 다음 은모의 방을 찾은 중식과 은모는 끌어안는다. 이 뒤의 장면들을 거론해야겠지만 이 정도의 예시로도 벅차다. 이 연속된 신에서 우리는 무엇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아니 무엇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여기에는 너무 쉽게 물러서는 트라우마와 너무 많이 출몰하는 새로운 사건들이 들어찬 것은 아닌가. 영화의 구조인 신이 내밀하게 상황을 포괄하지 않고 넘어가버리는 방식의 반복으로 은수가 죽은 뒤 단지 몇신 만에 많은 걸 털어버리거나 새로 문제를 설정한다. 숏과 신이 그 정보와 변환의 홍수 속에서 미처 세계의 모호함과 아픔을 다 담지 못하고 매번 부서지면서, 다음 신, 그 다음 신으로 넘어가다가 마침내 “한번도 사랑하지 않은 적 없다”는 대사에 모든 걸 맡기고 있다. <파주>는 매우 많은 신에서 사건이나 정보의 매듭을 너무 세게 묶은 다음 때로 납득할 수 없을 만큼 그 매듭을 너무 쉽게 끊어버리는 것처럼 보인다. 세게 묶은 다음, 쉽게 끊어버리는 이 구조적 결단은 <파주>에서 지속적이며 일관적이며 잘못된 선택 같다. 금지된 사랑 혹은 그들은 사랑하였다. 인정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결과를 말하기 위해 괄호 속에 쳐진, 존재했어야 할 그 순간의 감정의 부재함은 안타깝다. 서사는 되돌아와서 질문에 대답을 줄 수 있지만 감정의 신의 빈칸은 이미 시간을 따라 지나가버렸다. 박찬옥은 영화의 리듬으로 세계의 리듬을 형성하는 것에 골몰하지 않고 영화의 방점찍기로 전체라는 세계를 예고하는 것에 골몰한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가 예고편처럼 보인다는 건 그런 뜻이다. 방점에 골몰할 때 영화는 신별로 개별의 정보를 다루고 플래시백으로 숨긴 뒤 그것이 거대한 세계의 이면인 것처럼 행세하게 된다. 박찬옥은 방점의 사이사이를 느끼게 하기보다, 그 방점을 너무 여러 번 찍는 것에 주력했던 게 아닐까. 나는 그런 방점의 연쇄가 묶어낸, 숏과 신이 세계를 버티지 못하고 뒤로 넘겨지는 그 영화적 세계관에 공감하기 어렵다. 그건 잘 만들어진 텔레비전 시트콤이나 유능한 예고편도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보는 동안의 감흥이 있어야 누군가는 기술적 문제에 집착한다, 이것이 정색하고 물어야 할 만큼 중요한가, 라고 반문할 것이다. 중요하다. <파주>의 서사가 ‘무엇을(그들은 사랑했다)’이라는 목적어를 결코 놓치지 않은 것에 비해, <파주>의 신의 배열들은 ‘얼마나(그들이 지금 이 순간 이만큼 사랑하고 있다)’라는 영화적 경험의 현재적 밀도를 지나치게 놓쳤기 때문이다. 때로 영화에서는 그것만이 전부다. 사후적으로 그들이 얼마나 사랑했는지 설명할 수는 있다. 하지만 우리가 영화를 보고 있는 그때에, 그 흐르는 시간에, 목도하고 대면한 그 순간에 느낀 맨눈으로서의 감정의 덩어리만큼 중요하지는 않다. 거기에 바로 드라마틱한 것과 시네마틱한 것의 차이가 있다. 나는 보는 동안 감흥을 미루고 보고 나서 해독으로 뒤늦게 감흥을 되찾는 영화를 지지하지 못하겠다. 그러므로 박찬옥의 <파주>가 미완성 교향곡인 것처럼 말해지는 것은 의아한 일이다. 우리는 그 순간 음악을 들어야지 악보를 해석한 다음 음악이 훌륭하다고 말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 언젠가 <파주>의 본편을 보게 되면 좋겠다.

[세계의 관객을 만나다-LA] 아주 좋았다, 그런데 마지막 5분…

1960년대 초 영국을 배경으로 영민한 십대 소녀의 성장을 다룬 <에듀케이션>(An Education)은 2009년 독립영화계의 단연 화제작이다. 선댄스영화제에서의 호평이 무색하지 않게 영화를 본 관객의 입소문 역시 자자하다. 목요일 저녁 선셋대로의 아크라이트 극장 앞. 많은 영화들의 레드 카펫 행사가 이루어지는 극장이라 미처 치워지지 않은 카메라 라인 앞에는, 다른 영화를 보고 나온 관객이 그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는 화기애애한 장면이 펼쳐졌다. 그 앞에서 <에듀케이션>을 보고 나온 스티브 루돌프와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에듀케이션>을 보러 오게 된 이유는 뭔가. =지난 주말 이곳에서 코언 형제의 신작 <시리어스맨>(A Serious Man)을 보러 왔을 때 트레일러를 봤다. 영화를 꼭 극장에서 보아야 한다는 주의는 아니었지만, <시리어스맨>을 보면서 이런 영화는 영화관에서 봐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어서 이번에도 영화관을 찾게 되었다. -영화관에서 보아야 할 영화라. 얼핏 생각하기에 두 영화 다 이른바 대규모 블록버스터급은 아니라서 오히려 반대의 경우일 것 같은데. =<시리어스맨>은 영화 한컷 한컷에 생각을 많이 담았다. 큰 화면에서 관람하다보니 작은 화면에서 봤으면 그냥 지나쳤을 디테일들이 보여서 좋았다. -그럼 <에듀케이션>은 극장에서 볼 만했나. =그냥 영화가 시작한 지 한 10여분 지나는데 ‘와- 이 영화 상당히 훌륭할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계속 아주 좋았다. 사실 론 셰르픽 감독의 이전 작품인 <초급 이태리어 강습>(Italian for Beginners)을 재미있게 봐서 감독에게 기대감이 있었다. 그 작품은 도그마영화라서 두 작품을 같은 선상에서 이야기하기는 무리일 것 같지만. 굳이 따지자면, 그 영화도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잘 끌어냈다는 정도? -이 작품에 대한 감상은 어떤가. =사람 사이의 관계, 그 사이의 미묘한 감정들을 아름답게 담아냈다. 어떻게 보면 뻔할 수 있는 연애에 대해 1960년대 초 영국사회를 배경으로 십대 소녀와 그녀의 중산층 가족, 그에 대한 그녀의 미묘한 감정을 유려하고 아름답게 잡아냈던 것 같다. 각자가 서 있는 상황들이 모두 이해되는 좋은 시나리오였다. -아주 재미있었던 모양인데 혹시 마음에 들지 않는 점도 있던가. =마지막 5분! 이렇게 엄청난 걸 만들어놓고는 마지막을 평범하게 끝내버렸다. 게다가 내레이션으로 끝내다니. 시작을 내레이션으로 했었나? (아니었던 것 같다고 확인을 받자)그것 봐라. 시작을 내레이션으로 한 것도 아닌데 끝을 소녀의 내레이션으로 끝내다니. 흠. 그게 과연 감독의 의도였을까. 내 생각에는 편집실에서 다른 사람들의 입김이 들어간 것이 틀림없다. -이를테면 프로듀서의 입김이라든가. =왠지 어느 한명의 의견이라기보다는 여러 사람들의 의견이 한데 섞여서 얼렁뚱땅 영화를 끝내버린 것 같다. 상처입었지만 결국에 주인공은 행복해졌다는 결론으로 꼭 맞추어야 했을까. 인생은 완벽하지 않아도 되는데 말이다. -<시리어스맨>도 <에듀케이션>도 1960년대가 배경이다. 그러고보니 텔레비젼 시리즈 <매드멘>의 시간적 배경과도 겹치는데, 영화인들이 그 시기에 매력을 느끼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나. =글쎄. 베이비 붐 세대가 아무래도 사회적으로 가장 영향력있는 세대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1960년대 이후는 각종 매체에서 다각도로 많이 다루어진 데 반해 1950년대 말 60년대 초는 상대적으로 노출 빈도가 낮았던 것 같다. 그래서 작가들이 흥미를 느끼는 것이 아닐까 싶다.

[전영객잔] 줌이라는 기호놀이

이것이 어떤 이정표인지, 아니면 짧은 휴식인지, 혹은 간주곡 같은 것인지, 이도 저도 아니면 새로운 시도인지는 분명치 않다. 점점 더 홍상수는 비탈길에 선 것처럼 속도를 내고 있다. 마치 그가 쓰러지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더 빨리 달려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새로운’ 영화에 몸과 마음을 내주고 있다. 몸과 마음? 그렇다. 그는 어떤 것을 의도하기보다는 자신을 사로잡고 있는 그 무엇을 (그런데 그 무엇은 무엇일까?)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라도 한 양 서둘러 존재의 증명을 해야 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서두르고 있다. 그러면서 홍상수는 점점 더 파악하기 어려워졌다. 홍상수는 매우 공을 들여 이미지란 헛것이라는 설명을 했다(<해변의 여인>). 나는 그가 그 다음 영화를 좀더 미룰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틀렸다. 심지어 다음 영화의 주인공은 ‘대마초를 피우고 파리로 도망 간’ 화가다(<밤과 낮>). 이미지, 영화, 회화. 소란스러운 허깨비들. 환각. 점과 선. 어떻게 그들 사이를 연결할 것인가의 문제. 어떻게 거기서 정신을 잃지 않을 것인가? 내가 홍상수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쓴 글은 <밤과낮>에 대한 짧은 소개였다(시네마_디지털_서울 2008 카탈로그). 그런 다음 나는 그의 영화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왜냐하면 마치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멈추지 않고 계속 그것을 붙들려는 내 손을 벗어나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 사이에 홍상수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중편영화 <첩첩산중>, 다음주에 프린트가 나온다는 <하하하>를 찍었고 이미 지금 <사친>(思親)이라는 가제로 알려진 열한 번째 영화를 촬영 중이다. <첩첩산중>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의 촬영을 끝낸 다음 두달 보름 뒤에, 그러니까 2008년 11월 둘쨋주에 전주에서 닷새 동안에 모두 찍었다. 그러나 <첩첩산중>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 시간적으로 매우 가깝게 있긴 하지만 두 영화 사이에서 어떤 친화성이 느껴지거나 혹은 서로의 그림자가 어른거리지는 않는다. 두 영화는 거의 동일한 스탭들과 작업했고(김훈광 촬영, 정용진 음악, 함성원 편집) 동일한 디지털카메라인 소니 EX 1로 찍었으며 정유미가 연이어 나오긴 하지만 전혀 다른 도시에서 찍었고 (이전에는 제천에서 제주도로, 그러나 여기서는 전주) 전혀 다른 계절이다(여름, 그리고 여기서는 초겨울, 혹은 늦가을). 하지만 무엇보다 여기서 먼저 눈을 돌리게 되는 대상은 다시 한번 등장인물들의 세계가 소설가의 무리라는 점이다. 좀더 홍상수처럼 말하면 여기서는 소설의 효과로서 활동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돌아왔다. 영화감독은 영화 주변을 떠돌고(<극장전> <해변의 여인> <잘 알지도 못하면서>) 소설가들은 소설 주변을 떠돈다. 내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첩첩산중>은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이후’ 처음으로 다시 소설의 사교계 안으로 돌아온 영화이다. 철자로 이미지를 다루는 사람들의 세계. 간접적인 이미지. 말을 믿지 않는 홍상수가 언어를 다루는 자들 안으로 들어와 그들 사이의 사교에 관한 힘의 관계와 만남 그 사이의 행동들을 바라보고 거기서 서로가 어떻게 빠져드는지를 다룬다. 이때 이미지는 글자보다 더 나쁜 것일까, 덜 나쁜 것일까? 아니면 직접적 이미지와 간접적 이미지 중에서 어느 쪽이 더 위험한 것일까? 첩첩산중, 말하자면 미로 우선 <첩첩산중>의 무대. 전주는 홍상수의 영화 안에서 나쁜 기억이다. 보경의 남편 동우는 전주에 출장 갔다가 여관에서 커피 배달하는 아가씨와 섹스를 한 다음 성병에 걸려서 돌아온다(<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그런 다음 홍상수의 등장인물이 다시 전주에 간 적은 없다. 물론 그의 다른 등장인물들도 같은 도시를 다시 방문하지는 않았다. <첩첩산중>은 처음으로 같은 도시를 다시 방문한다. 하지만 소설을 쓰는 사람은 동우가 아니라 보경의 불륜 상대인 효섭이었다. 그러므로 정수기를 팔러 다니는 동우와 소설가 지망생인 미숙은 만날 일이 없다. 게다가 <첩첩산중>은 전주라는 도시를 보여주는 그 어떤 지표도 없기 때문에 이 영화를 보고 전주를 찾아간다면 길을 잃기 십상이다. 말하자면 미로. 첩첩산중. 이야기는 간단하다. 아파트가 ‘疊疊山中’처럼 보인다(이 한자를 유심히 보아주기 바란다. 마치 아파트처럼 생긴 글자). 영화는 아파트에서 시작한다. 말하자면 아무 데서나 시작한다는 뜻이다. 미숙(정유미)이 서울말을 쓰기는 하지만 거기가 서울이라는 어떤 보장도 없다. 마찬가지로 전주에 갔지만 아무도 호남 말을 쓰지는 않는다. 말하자면 산에서 산으로 이어지는 동선. 미숙은 선배 진영(김진경)을 만나러 차를 끌고 전주에 내려간다. 그런데 진영은 마침 “엄마와 싸워서” 미숙을 자기 집에 재워주지 못한다. 미숙은 알고 지내던 소설가 전 선생(문성근)에게 전화를 해서 만난다. 둘은 낮술을 마시면서 최근에 상을 받은 소설가 명우(이선균)를 성토한다. 함께 수만모텔에 가지만 “안 하던 짓을 자꾸 하려고 해서 뛰쳐나왔다” (그런데 안 하던 짓이 무엇인지는 끝내 알 수 없다). 진영의 집에서 잔 미숙은 그녀의 방에서 전 선생의 시계를 발견하고 “오전 내내 꼬치꼬치 캐물은 다음 둘 사이의 관계를” 알게 된다. 전주에 내려온 김에 미숙은 “진짜 존경하는” 은희경 작가의 집을 찾아간다. 우연히 집 앞에서 존경하는 작가와 마주치지만 은희경 작가는 “엄마와 싸워서 들어가 봐야” 한다. 미숙은 그녀 앞에서 “좋은 글을 쓰겠다”고 다짐한다. 그런 다음 서울에 사는 명우에게 전화를 해서 내려오라고 한다. 그리고 저녁에 미숙과 명우, 진영 셋이서 술을 마신다. 미숙과 명우는 취해서 함께 모텔에 가고, 그들이 떠나는 것을 본 진영은 전 선생에게 전화해서 “모텔을 잡아놓고 기다리겠”다고 말한다. 다음날 정오쯤 밥을 먹으러 나온 네 사람은 동해횟집에서 마주친다. 밥만 먹고 그냥 가려던 명우와 미숙에게 전 선생은 불러서 왜 인사를 하고 가지 않느냐고 야단을 친다. 명우는 죄송하다고 사과를 한다. 진영은 괜찮다고 대답한다. 쳐다보던 미숙은 “챙피한 줄도 모르고”라고 한 다음 커피를 집어던지고 그 자리를 떠난다. 이 영화의 마지막 대사는 떠나가는 미숙의 등에 들리는 전 선생의 한마디다. “저 싸가지.” 모텔이 ‘疊疊山中’처럼 보이면서 끝난다. 이박삼일. <극장전> ‘이전’과 ‘이후’ <첩첩산중>은 홍상수의 유일한 중편영화다. 그 자신의 말에 의하면 다시 중편영화를 만들게 될 것 같지는 않다고 대답했다. 물론 앞으로의 일은 알 수 없다. 이 중편영화는 좀 이상한 자리에 놓여 있는데 <극장전> ‘이후’ 홍상수의 영화는 점점 길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해변의 여인>은 2시간7분이다. 그 바로 앞에 있는 <극장전>이 1시간29분, 좀더 앞의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가 1시간27분이라는 걸 생각하면 이건 갑작스러운 길이다. 물론 세 번째 영화 <오! 수정>이 2시간6분이긴 하지만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 1시간54분, <강원도의 힘>이 1시간48분, 그리고 네 번째 영화 <생활의 발견>이 1시간55분이라는 걸 생각한다면 홍상수에게 2시간은 어떤 물리적 한계선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밤과낮>은 2시간24분에 이른다(그의 영화 중에서 이제까지는 제일 길다). 그리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는 2시간6분이다. 그는 <해변의 여인> ‘이후’ 2시간의 시간을 넘겨서만 이야기의 리듬을 이어갔다. 영화가 시간의 예술이라는 식상한 표현의 배후에는 매우 중요한 진실이 있다. 무엇보다 상영시간은 영화에서 가장 물리적인 결정이라는 사실이다. 일단 상영시간이 결정되면 관객은 그 시간을 도리없이 체험해야 한다. 차라리 나는 영화란 스펙터클이 아니라 시간의 체험이라고 말하고 싶다. 홍상수는 마치 <극장전> ‘이전’과 ‘이후’가 있는 것처럼 영화의 시간을 늘렸다. 물론 그것이 영화 안의 리듬과 동일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홍상수는 어느 순간 갑자기 리듬이 빨라지거나 혹은 느려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래서 홍상수의 영화에서 리듬은 일종의 간격이다. 둘 사이의 거리. 둘 사이의 공존. 세워진 면. 홍상수는 자꾸만 볼록하거나 오목한 면을 “다림질을 하고 싶다”고 말한다. 지각으로 이루어진 면적들. 그 사이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영화가 진행되기 시작한다. 이것과 저것 사이에서, 이 사람과 저 사람 사이에서, 이 숏과 저 숏 사이를, 혹은 이 사건과 저 사건을, 어느 정도의 간격으로 세워놓을 것인가, 라는 문제. 홍상수라면 이것을 짝짓기라고 불렀을 것이다. 만사형통? 천만의 말씀. 홍상수는 어느 정도의 간격으로 세워놓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순간 거기서 이야기가 발생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는 관계를 서술하는 대신 얼마만큼 정확한 간격으로 세워놓느냐가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이것이 처음에는 분명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홍상수 영화 안에서 구조라는 문제가 너무 압도적이어서 그의 영화 안에서 활동하는 간격이 분명치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 구조는 와해되기 시작했다. 아니, 차라리 와해시키기 시작했다. 홍상수는 구조를 만드는 순간 곧장 원하건 원치 않건 고정적 지시자가 발생하며 의미의 소급이라는 방식으로 해명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가 싸우려는 욕망의 경제. 그러기 위해서 홍상수는 구조 대신 비일관성으로 이루어진 감각의 흐름에로 이끌린다. 세상의 표면에 대한 감각. 물론 그곳은 환상이 사라진 사막이다. 그 사막 위에 세워진 면들. 면들 사이로 때로는 끈적거리고 때로는 미끈거리면서 흘러(내리거나 흘러)가는 감각. 홍상수가 아무리 열심히 사랑을 다루어도 거기서 낭만적인 정서가 느껴지지 않는 것은 거기에 자기의 자리를 버리고 타자라고 가정된 대상을 껴안으려는 어떤 노력도 없기 때문이다. 무서울 정도로 그 자리에 머물고 있는 면들. 그 사이의 액체 같은 감각. 이때 종종 홍상수의 영화를 설명하면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말은 반복과 차이이다. 둘은 서로 자리를 바꾸어서 끈질기게 나타난다. 여기서 이 둘이 자리를 바꾸면서 우리에게 던지는 통찰은 대부분 희극적 웃음이다. 내 질문은 반복과 차이가 자리를 바꾸면서 나타날 때 어디서 멈출 것이냐는 것이다. 만일 이것을 중간에 중단시키지 않으면 사태가 끔찍해진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만일 홍상수의 영화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어디 한번 끝까지 가보자고 밀어붙이면 어떻게 될 것인가? 기다리는 것은 반대로 비극적 파국이다. 그때 우리는 홍상수 영화에서 파국이 예언되는 것을 느껴보는 대신 그것을 고스란히 경험해야 한다는 사실을 환기해야 한다. 홍상수의 예술적 재능은 간격의 마지막 순간 더이상의 간격이 없다고 갑자기 텅 빈 공간을 제시함으로써 우리에게 안겨주는 거의 무아지경에 가까운 실재와의 대면이다. 말하자면 그 순간. 그 다음 간격의 순간을 기다리는데 문득 마주치는 텅 빈 자리. <첩첩산중>은 그 텅 빈 자리를 가장 작게 보여준다. 나는 여기서 짧다, 고 말하는 대신 작다, 고 말했다. 왜 그런 인상을 받았을까? 나는 영화를 볼 때는 단지 몇개의 면을 빼놓고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짧다고 생각했는데 다 본 다음의 인상은 작다는 것이었다. 길이로부터 면적에로 바뀐 인상. 이것이 <첩첩산중>을 본 다음 가장 먼저 든 궁금증이었다. 시각적 감각의 회복을 노리다 약간의 우회. 영화를 말하면서 음악을 끌어들이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음악은 영화와 존재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다만 여기서는 태도에 한해서만 말할 것이다. 홍상수는 점점 더 재즈에서의 임프로비제이션에 가까운 영화를 만들고 있다. 이 방법을 어디까지 더 밀고 나아갈지 알 수 없지만 그는 마치 세션을 하는 것처럼 영화를 만들고 있다. 물론 영화는 재즈가 아니다. 이 말은 비유가 아니다. 그날의 공연. 알 수 없는 감흥. 그저 선율의 윤곽만을 정해놓은 상태. 누가 누구를 만나느냐는 문제. 세션으로서의 영화. 이때 홍상수에게 함께 연주할 상대는 배우들이다. 재즈의 대가들처럼 홍상수는 배우들을 자유롭게 자기 영화에 초대한 다음 그 배우들을 건드린다. 그때 홍상수는 먼저 대사로 건드리고, 그런 다음 서로 다른 배우들끼리 서로를 건드리게 한 다음, 카메라로 건드린다. 말하자면 그에게 카메라는 가장 마지막에 건드리는 공명현상이다. 서 있는 면들 사이의 진동. 영화적 기호들 사이의 시청각적 긴장. 이때 홍상수는 약간 수줍게 사람을 바라본다. 나는 세상이 아니라 사람이라고 썼다. 홍상수 영화의 핵심은 결국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프레임은 대부분 초상화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그의 사람은 세잔이 바라본 사과와 마찬가지, 라는 사실을 덧붙여야 할 것이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홍상수의 사과는 걸어다니고 거짓말을 아주 잘할 뿐만 아니라 유혹하고 버림받으면서 키스도 하고 섹스도 한다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 정도의? 그렇다. 그저 그 정도이다. 이 차이를 과장하려 드는 것은 자꾸만 홍상수 영화를 텔레비전 드라마처럼 보려는 비평들의 특징이다. 홍상수의 영화가 다른 영화들과 가지는 결정적 차이점. 홍상수는 그 사람들을 그렇게 쳐다보는 대신 그렇게 느껴보려고 한다. 홍상수는 그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보는 대신 어떻게 느껴볼 것인지를 생각하면서 계속 건드린다. 그가 현장에서 배우들을 자유롭게 놓아둔다는 것은 그의 현장을 보지 못한 사람들이 하는 말이다. 홍상수는 매우 엄격하게 배우들을 다룬다. 무엇보다도 그의 엄격함은 대사에 종속된 신체의 관리에서 오는 것이다. 등장인물들은 대사의 증인처럼 말을 하고 그 말에 자기의 행동을 복종시킨다. 이때 인물들의 리듬은 절대적으로 대사에서 오는 것이다. 아니, 차라리 대사하는 면들이라고 나는 말하고 싶어진다. 이때 이 면들을 무엇으로 건드려야 할까? 나는 홍상수의 줌이 여기서 출발했다고 생각한다. 홍상수는 <극장전>에서부터 갑자기 줌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모두들 이 갑작스러운 줌에 대해서 당황했다. 그런 다음 영화 안에서의 줌의 일관성, 혹은 의미, 어쩌면 의도를 설명하기 위해 노력했다. 혹은 그에게 직접 물어보았다. 홍상수는 일관되게 대답했다. “아니에요, 그냥 거기서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다음 약간 귀찮다는 듯이 덧붙였다. “저는 게을러서 그런지 화면을 나누어야 하는데 나누는 대신 그렇게 줌을 통해서 다르게 했어요.” 이상하게도 그 다음부터 모두들 마치 줌을 보지 못한 것처럼 다루기 시작했다. 아니 거기서 줌이 있지도 않았다는 듯이 설명하기 시작했다. 귀차니즘의 만연. 나는 그런 태도에 동의할 수 없다. 줌은 아무렇게나 거기서 할 수 있는 선택이 아니다. 줌이 활동하는 순간 숏은 갑자기 자기의 성질을 바꾸어야 한다. 단지 화면의 크기가 변하거나 대상에 다가갔다는 것이 아니라 줌이 활동하는 순간이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줌은 이제까지 보고 있던 화면에서 영화라는 기계의 양태를 드러내면서 카메라라는 존재를 말 그대로 ‘보여준다’. 좀더 정확하게 카메라가 건드리는 것은 대상과 프레임 그 사이이다. 말하자면 간격. 그 다음. 홍상수의 설명에 대해서도 동의할 수 없다. 만일 그가 줌을 사용하는 것이 단지 투숏에서 더 들어가는 것에 지나지 않다면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홍상수는 단지 한 사람을 찍을 때도 종종 그렇게 했다. 혹은 그렇게 구태여 할 필요가 없다고 느낄 때도 그렇게 했다. 이를테면 <첩첩산중>에서 진영의 집에 있는 철창 안의 두 마리의 개를 향해 갑자기 줌이 들어가는 이유가 그 두 마리의 강아지 투숏을 “나누어 찍기 귀찮어”서라고 말할 수 있을까? 홍상수는 줌의 사용에 대해서 설명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히 홍상수는 줌에서 어떤 자유를 찾은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제는 점점 더 많아져서 거의 줌의 과잉에서 오는 화면의 일시적인 무너짐을 느낄 정도다. 마치 인상주의 다음에 도착한 어떤 야만성에의 매혹. 쳐다보던 카메라가 갑자기 대상과 갖고 있던 거리의 한계를 넘어서 다가갈 때 홍상수는 몬드리안이나 말레비치, 혹은 칸딘스키 같은 효과가 일어나길 기대한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지나치게 다가갈 때 잭슨 폴록이나 에드 라인하르트, 루치오 폰타나가 될지도 모른다. 마치 회화가 왜 우리는 물질이 전자와 양자, 중성자 덩어리라는 것을 그리지 못하는가, 라는 질문을 안고 갑자기 형상을 버린 것처럼 홍상수는 왜 사람을 찍는 것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몸과 마음을 느껴보지 못하는가, 라면서 건드린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줌은 언제나 눈에 잘 보일 뿐만 아니라 일종의 기습처럼 보인다. 예기치 않은 순간에 두들기는 노크와도 같은 효과. 면의 진동. 홍상수가 여기서 노리는 것은 우리의 시각적 감각의 회복이다. 올 한국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 퀴즈를 한번 해보자. <첩첩산중>에서 첫 번째 줌은 언제 등장하는가? 대답은 미숙이나 진영, 혹은 진영 집 앞의 나무에 매달린 감이 아니라 미숙의 전화를 받으면서 “이빨이 아프다”고 대답하는 전 선생의 담배를 피워 무는 모습이다. 영화 안의 리듬적인 인물의 등장. 보이스 오버를 장악한 화자 미숙이 먼 길을 찾아온 대상 진영, 그런데 갑자기 이야기가 곁길로 새면서 전 선생이 등장할 때 줌은 그의 몫이다. 하나의 능동에서 다른 능동으로. 힘의 분산. 감각의 흐름은 갑자기 다른 쪽으로 방향을 돌린다. 다음 장면. 이때 줌을 둘러싼 맹렬한 권리투쟁이 벌어진다. 왼쪽에 전 선생이 앉았고 오른쪽에 미숙이 앉아서 낮술을 마신다. 그때 미숙이 말한다. “선생님이 (제가 써야 할 글을) 다 써버렸어요.” 갑자기 줌은 두 사람의 내밀한 관계 사이로 스며들기라도 하듯이 화면을 가득 채울 것처럼 다가간다. 하지만 여기가 끝이 아니다. 그런 다음 다시 한번 줌으로 전 선생을 밀쳐내고 미숙에게로 다가간다. 두번의 줌. 그러나 전 선생은 “그 개새끼”라고 명우를 욕하면서 미숙에게 다가간 카메라를 팬으로 다시 자기에게 끌어당긴다. 말하자면 힘의 밀고 당기기. 그때 힘은 느낌에서 나온다. 줌과 팬. 영화에서 두개의 운동. 그러나 이 운동은 얼마나 웃기는가. 세 번째(혹은 네 번째) 줌은 다음날 아침에 뜬금없이 진영 집의 강아지 두 마리를 보여준 다음 갑자기 그 두 마리에게 줌인한다. 두 마리의 개. 나는 이 두개의 신을 서로 결합해서 의미를 만들 생각은 없다. 그러나 미숙과 전 선생을 보여준 다음 두 마리의 개를 우리 앞에 같은 방법으로 전시할 때 그것은 줌이라는 기호의 외설적 누설처럼 느껴진다. 아마도 미숙이 숲길을 걸으면서 전 선생과 통화하는 장면은 <첩첩산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일 뿐만 아니라 올해 한국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의 하나이기도 할 것이다. 이 영화의 유일한 풍경이기도 할 장면에서 줌은 거의 무너져내리는 미숙을 따라 들어간다. 숲길은 비스듬하게 프레임을 가로지르고 있으며 미숙은 그 길을 따라 걸으면서 전 선생과 통화를 한다. 서 있는 나무들. 미숙은 소리를 지르다가 땅바닥에 거의 쓰러지다시피 한다. 세개의 운동. 수직으로 서 있는 나무(진영을 만났을 때 집 앞의 감나무를 따라 올라가던 카메라의 팬의 기억. 이전에도 이후에도 다시 등장하지 않는 나무). 전 선생과 통화를 하는 미숙에게 수평으로 다가가는 줌(전 선생을 영화에서 처음 보았을 때의 줌인, 반복하는 미숙과의 전화). 두개의 흔적의 힘. 지금 전 선생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수직으로 하강하듯이 쓰러지는 미숙. 세개의 면이 겹쳐진 흔적과 운동. 팬과 줌. <첩첩산중>에서 맨 첫 장면의 아파트 ‘疊疊山中’과 맨 마지막 장면 모텔 ‘疊疊山中’ 사이에 있는 세 번째 ‘疊疊山中’은 은희경 작가의 집 앞일 것이다. 이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이상하게 찍혔다. 차를 끌고 미숙은 “전 선생님보다 훨씬 좋아하는 작가”를 만나고 싶어서 집을 찾아간다. 이때 붉은 벽돌로 둘러싸인 막다른 골목 계단 집은 마치 산속에서 길이 사라진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그 집 앞에서 서성이는 미숙에게 줌으로 다가간다. 그런데 이상한 방식으로 미숙은 줌을 피하듯이 빠져나가서 계단을 올라간다. 철창 너머의 “전 선생님보다 훨씬 좋아하는 작가”의 집 안 풍경. 마치 영화 이야기 저편에 존재하는 현실 속의 소설가의 삶의 공간. 둘 사이를 가로막는 철창 대문. 이편과 저편.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진짜’ 은희경 작가가 나타난다. 이때 은희경 작가와 미숙을 보여주기 위해서 줌아웃을 한다. 여기서 줌아웃은 이 영화에서 유일하다는 것을 환기해주기 바란다. 영화 안에 찢고 들어온 실재. 미숙이 서 있는 영화와 철창 저 너머에 있는 ‘진짜’ 소설가의 삶 사이의 경계가 갑자기 지워지고 뒤에서 은희경 작가가 나타날 때 줌아웃은 미숙에게 다가간 줌인을 무효화하면서 이 ‘이후’의 장면을 영화와 현실 둘 사이에서 오가는 메아리 같은 응답의 장소로 간격을 바꾼다. 미숙은 은희경 작가에게 “좋은 글을 쓰겠다”고 약속한다. 은희경 작가는 미숙에게 그냥 작가가 아니다. “선생님이 저에게 제일 중요한 작가입니다.” 이 갑작스러운 현실 속의 응답이 영화 바깥으로부터 안으로 들어올 때 미숙은 맹세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행동한다. 그러나 미숙의 행동은 “좋은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속해 있는 이 이야기를 끝내는 것이다. 은희경 작가는 집으로 들어가고 미숙 혼자 계단에 남는다. 다시 남겨진 영화. “좋은 글을 쓸” 것이라는 맹세. 이야기를 잘 끝내야 한다. “엄마와 싸우는” 중인 그녀들 물론 여기 은희경 작가의 난데없는 영화 안의 침입에 대한 방어가 있긴 하다. 은희경 작가는 미숙의 질문에 진영의 대답을 반복한다. “저는 지금 들어가봐야 해요, 엄마와 싸워서요.” 나는 이 반복을 단지 진영과 은희경 작가를 묶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첩첩산중>은 여자가 주인공인 홍상수의 첫 번째 영화이다. 혹은 적어도 보이스 오버 화자가 여자인 첫 번째 영화이다. 물론 홍상수는 “여자랑 남자랑 다 사람이라고 생각해요”라고 대답할 것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파란 사과와 빨간 사과는 그것의 내용을 물어서 사과라고 생각할 때는 같은 것이지만 그것이 우리의 신경지각에 주는 감각을 물을 때 그 둘은 서로 다른 것이다. 무엇을 무엇과 묶을 것인가, 라는 문제. 이를테면 주인공과 ‘엄마’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그 둘의 차이는 좀더 분명해진다. <극장전>에서 자살을 하려다가 집에 돌아온 상원은 ‘엄마’에게 야단을 맞은 다음 아파트에 올라가 저무는 해를 보면서 “엄마”를 부르며 통곡한다. 상원은 의붓아들이 아니다. 말하자면 아들과 어머니의 관계. 반면 <첩첩산중>에서 ‘엄마’는 모두 세번 등장하는데 세번 모두 여자들과의 관계 안에서만 존재를 드러낸다. 첫 번째는 미숙이 집을 떠날 때다. 미숙은 집을 나서면서 혼자 자동차를 끌고 전주로 떠나기 위해서 “엄마를 안심시키느라 호들갑을 떨었다”고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으로) 말한다. 두 번째는 미숙이 진영의 집에 도착을 했더니 진영이 집 앞에서 “엄마와 싸워서” 지금은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한다. 세 번째는 은희경 작가의 집 앞에서 그렇게 만나고 싶어 했는데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은희경 작가는 “엄마와 싸워서” 지금 들어가 봐야 한다고 말한 다음 미숙을 바깥에 남겨두고 집 안으로 들어가버린다. <첩첩산중>에서 ‘엄마’는 여자들과 묶인다. 딸과 어머니의 관계. 공통점. 홍상수의 주인공들은 누구도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고 ‘엄마’라고 부른다. 이때 그(녀들)에게 어머니를 부르는 자리는 아직도 자아가 부모로부터 분리에 성공하지 못한 소외의 자리이다. 차이점. 딸들은 어머니와 인정투쟁을 벌이는 중이다. 이때 서로 완전히 떨어진 진영과 은희경 작가는 “엄마와 싸우는” 중이다(하지만 진영은 ‘아마도’ 다음날 아침 엄마와 화해했다. 미숙이 보기에 “진영언니는 복 받은 줄 모른다”). 그리고 매번 집 앞에서 미숙은 따돌림당한다(하지만 그날 밤 미숙은 진영의 집에서 잠을 잘 수 있다). 이 이상한 묶음의 셈에서 미숙은 영화 안에서도 진영에 대한 미숙이지만 영화 바깥에서도 은희경 작가에 대한 미숙이다. 같은 말이지만 은희경 작가와 겹치는 자리는 미숙이 아니라 진영이다. 이때 핵심은 양쪽으로부터 미숙이 버림을 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하나가 둘로 분리된 것처럼 보이는 양쪽 모두에게 미숙은 둘 사이의 거리를 좁힐 수 있는 화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화해? 그렇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미숙은 영화와 현실 사이에서 완전히 찢어질 것이다. 미숙이라는 면을 영화 안쪽에서 한번 건드렸고 그런 다음 바깥에서 같은 방법으로 건드렸기 때문이다. 휘청거리는 간격. 말하자면 이 영화 안에서 지금 진동하는 면. <첩첩산중>이 작게 느껴진 이유는 은희경 작가가 계단으로 올라가는 장면을 찍은 다음 바로 이어서 (장소를 고속버스터미널로 바꾸어서) 계단에서 명우가 내려오는 것은 현실 저편으로 사라진 은희경 작가에 대한 영화 안의 대답이다. 미숙은 명우를 만나서 함께 차를 탄다. 그러면서 (보이스 오버로) “남잔 다 똑같애”라고 말한다. 남자가 다 똑같다면 사실 명우와 전 선생도 아무 차이가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명우가 영화 안에 처음 나타났을 때 그를 줌으로 당겨서 다가가지는 않는다. 그 둘은 진영을 불러서 셋이서 술을 마신다. 미숙은 술을 마시면서 “난 망했어”라고 푸념한다. 그제야 미숙을 줌인한다. 그때 명우는 술집 바깥으로 나와서 전 선생에게 전주에 내려왔다고 전화한다. 그런 다음 미숙과 명우는 화장실 앞에서 키스한다. 전 선생과 통화한 명우의 그 혀. 말을 다루는 소설가의 혀. 그러나 카메라는 이상할 정도로 이 키스를 무관심하게 쳐다본다. 다음 장면은 이번에는 미숙이 술집 바깥에서 전 선생에게 전화를 한다. 이때 이 장면은 이상할 정도로 숲길 장면의 반복처럼 찍혔다. 명우가 전화할 때는 그저 쳐다보던 카메라가 미숙이 전화할 때는 줌으로 다가간다. 그리고 숲길에서와 마찬가지로 미숙은 주저앉고 만다. 다음 장면은 다시 술집으로 돌아왔고 두 사람은 진영 앞에서 전 선생과 통화했던 그 혀를 가지고 서로 키스한다. 진영의 시선. 전 선생의 혀. 미숙과 명우의 입. 거의 뒤엉킨 관계. 하지만 아직 더 남았다. 미숙과 명우가 떠나간 다음 진영은 전 선생에게 두 사람이 떠났다고 전화한다. 그때 마치 진영을 감싸안듯이 줌인한다. 진영은 “방을 잡아놓고 기다리겠다”고 말한다. 동일한 장소. 술집 앞 주차장. 주저앉듯이 전화에 매달려 쓰러지던 가련한 미숙에게 다가가던 무거운 줌. 날아갈듯이 가볍게 전화에 매달려 “그러면 저는 좋지요”라면서 기대감에 들뜬 진영을 따라가는 줌. 두개의 줌의 운동. 그런 다음 기다리는 마지막 만남. “오전 열두시가 지나서” 엘리제 모텔에서 나오는 미숙과 명우는 점심을 먹기 위해 동해횟집에 들어간다. 같은 시간에 전 선생과 진영은 아테네 모텔에서 나와서 같은 집에 들어간다. 이 불편한 자리. 먼저 자리를 떠나는 미숙과 명우를 뒤따라나온 전 선생이 부른다. “야, 너희들 이리 와.” 옆에는 진영이 서 있다. 전 선생은 너희들 왜 인사 안 하냐고 따져 묻기 시작한다. 물론 말도 안되는 상황이다. 이때 이 장면은 미숙과 명우, 전 선생과 진영이 모두 한자리에 모인 유일한 숏이다. 미숙의 차 앞까지 간 미숙과 명우를 전 선생이 부를 때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미숙과 명우의 동선 방향을 따라 팬을 한 카메라는 네 사람을 보여준 다음 그냥 그 자리에 멈춰 선다. 이때 마치 카메라는 줌을 잊어버린 것처럼 그냥 서서 본다. 자, 이제 질문에 대답할 차례다. 왜 나는 <첩첩산중>이 작다고 느꼈을까? 이 이야기는 ‘하여튼’ 미숙의 보이스 오버로 진행되었으며, 미숙의 방문이며, 미숙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하지만 모든 장면에 미숙이 나오는 것은 아니며 미숙이 떠난 다음에 카메라가 그 장소에 잠시 동안 남아서 머물기도 하였다). 그런데 세워놓은 이 네 사람 가운데 가장 작게 서 있는 사람은 미숙이다. 줌으로 건드리거나 잡아당기던 카메라로부터 화자인 미숙이 가장 멀리 있을 때 화면의 원근감 안에서 가장 작게 보였다. 가장 작은 면. 너무 멀리 있는 간격. 마치 줌으로 잡아당길 수 없을 만큼 멀리 있다고 느껴지는 포기의 상태. 그때 미숙은 세워진 세개의 면들 사이에서 혼자 떨어져 나간 것처럼 보였다. 줌의 기호 바깥에 놓여질 때 그것은 홍상수에게 그 면을 느껴볼 수 있는 거리 바깥으로 나갔다는 것과 같은 의미일 것이다. 미숙은 네 사람으로 이루어진 사각형의 면을 부숴버리고 바깥으로 나간다. 그때 그 면을 부수기 위해서 미숙은 커피 잔을 집어던진 다음 사각형의 면을 벗어나서 자기 차가 놓여진 원래의 방향으로 다시 되돌아간다. 이때 카메라는 부서진 사각형의 면, 혹은 남겨진 삼각형의 면을 버리고 미숙을 따라서 이 숏의 시작을 거꾸로 되돌리기라도 하듯이 다시 오른쪽으로 팬을 한다. 그러면 영화는 첫 시작과 마찬가지로 ‘疊疊山中’을 보여주고 끝난다. 완전한 대구, 4개의 숏으로 시작한 첫 장면. 4개의 숏으로 이루어진 마지막 장면. 차이라면 첫 장소는 아파트이고 마지막 장소는 모텔이라는 것뿐이다. 그리고 남은, 어두은 근심 하지만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아직 미숙은 차를 타지 않았다. 그런데 화면은 어두워졌고 음악이 흐른다. 이 피아노 선율은 영화가 막 시작했을 때, 그러니까 전주에 진영을 만나러 갈 때 제목이 떠오르면서 흐르던 음악이다. 나는 잊지 않았다. 미숙은 차를 몰고 가면서 (보이스 오버로) “고속도로를 타니까 하나도 겁이 안 난다”라고 말했다. 정말 그럴까? 그녀는 차를 몰면서 쉴새없이 중얼거렸다. “죽어두 돼, 죽어두 돼, 죽어두 돼.” 그때 미숙과 동승한 카메라는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불안하게도 경사지어진 프레임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앞으로 들이받을 것 같은 자세. 전주는 고속버스로도 갈 수 있으며 기차를 타고 갈 수도 있다. 그러나 미숙은 지금 차를 끌고 필사적으로 목숨을 걸고 가는 중이다. 단지 “진영 언니를 만나는”데 그렇게 목숨을 걸 이유가 있을까? 아니, 정말 그렇다면 미숙은 “진영 언니도 잃어버리고 이제 누구하고”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까? 어두운 근심. 미숙은 무사히 집에 돌아갈 수 있을까? 첩첩산중. 산에서는 길을 잃기 쉽다.

<지붕 뚫고 하이킥!> 울다가 웃다가… 정신 사나워 죽겠어!

하루는 배를 잡고 웃다 눈물을 찔끔거리고, 하루는 애처로워 눈시울을 붉힌다. 꼬박꼬박 회당 두개의 시추에이션을 완결시키면서도 인물들의 운명에 연연하도록 관심을 붙들어놓는다. 오후 7시45분대 MBC 일일시트콤 <지붕 뚫고 하이킥!>(극본 이영철·이소정·조성희, 연출 김병욱·김영기·조찬주)이 우리를 정신 사납게 만들고 있다. 인기도 김병욱 PD의 전작 <거침없이 하이킥> 못지않다. 일일시청률 (11월5일 TNS미디어 집계)이 20% 고지에 올랐고 광고 판매율도 100%를 웃돈다는 소문이다. 120회로 예정된 시리즈가 반환점을 향해 달려가는 이즈음 <씨네21>이 일산 드림센터 제5스튜디오의 ‘지붕 없는’ 순재네 집을 방문했다. 김병욱 시트콤을 꾸준히 지켜보아온 듀나의 글과 PD의 중간소감도 듣는다. “시트콤이라며~!” “다섯살짜리 딸이 시트콤 보다가 울었어요.” “상식적인 선에서의 시트콤을 원합니다.” “왜 시트콤을 보면서 걱정을 해야 할까요?” 시청자 게시판에 올라온 일부 글의 제목은 김병욱 PD의 일곱 번째 작품 <지붕 뚫고 하이킥!>(이하 <지붕킥>)이 일으킨 독특한 반향을 보여준다. 분명히 <지붕킥>은 같은 인물이 반복 출연하고 스튜디오 촬영이 큰 비중을 차지하며 웃음소리가 효과로 깔리는 시추에이션 코미디다. 또한, 대가족과 그 주변 이웃을 구성원으로 삼는 김병욱 시트콤의 익숙한 구도도 보존하고 있다. 혼돈의 원인은 장르의 암묵적 계약을 넘어서는 정서다. <지붕킥>은, 워낙 인간의 보편적 어리석음과 거기서 비롯되는 페이소스를 기본 재료로 취했던 김병욱 PD의 전작과 나란히 세워놓아도 비죽 튀어나온다. 상황은 훨씬 처절하고 인물들의 행태는 더 절박하거나 병적이며 드라마는 슬픔과 콤플렉스에 한층 예민하게 반응한다. 잠깐. 김병욱 시트콤은 ‘오바’를 해충처럼 질색하는 세계 아니었던가? 김 PD는 진짜 감정을 직면하는 것과 과잉은 다른 사안임을 말한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절절한 속내를 드러내면 촌스럽다고 여기는 문화에 길들여져 진심과 괴리된 채 생활하는 데에 익숙해진 것 같아요. 표현하는 코미디의 형식이 낡지 않았다면 바닥에 깔린 욕구와 정서야 좀 뜨거우면 어떠냐는 생각이 있었어요.” 일례로 6회 에피소드를 보자. 강원도 산골에서 상경한 세경과 신애 자매는 노숙생활을 하다 실수로 서로를 잃어버린다. 세경은 한옥집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고, 넋이 나간 채 동생을 찾아다닌다. 신애 역시 목 놓아 울며 언니를 찾아 헤매는데, 줄곧 오열하는 틈틈이 주택가에 배달된 우유를 훔쳐 마시고, 편의점에 남겨진 컵라면과 단무지를 싹싹 비우고 노숙자 무료 급식의 밥풀까지 떼먹는다. 한편 도와주러 나섰던 정음은 옷가게 쇼윈도에 정신이 팔리고 인나와 광수는 쾌청한 날씨에 홀려 교외로 놀러가버린다. 밤이 이슥하도록 뒤꿈치에 피를 흘리며 뛰어다니던 세경은 환청처럼 동생의 음성이 들리자 차디찬 아스팔트 바닥에 귀를 대고 엎드려 운다. 어느 시청자는 “갈 곳 없는 아이가 거리에서 음식 주워 먹는 게 웃기냐?”고 항의했다. 아마 <지붕킥>의 작가와 감독은 웃기기도 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삭막하고 화나고 슬픈 상황이라고도 생각한다. 그래서 그 모든 감정을 23분 러닝타임 안에 숨차게 포개놓는다. 가난이 코미디와 비극의 원천 <지붕킥>의 차별성은 주로 세경과 신애의 존재에서 나온다. 형식적으로 우선 <지붕킥>은 <귀엽거나 미치거나>(2005)에서 시작돼 <거침없이 하이킥>(2006~2007, 이하 <하이킥>)으로 이어진, 개별 에피소드를 관통하는 장기적 서사를 적극 밀어붙이고 있다. 세경 자매가 헤어진 아빠를 찾는 과정이 이야기의 척추다. 둘째, 낯선 환경에 던져진 소녀들에게 시점을 부여함으로써 성장드라마 성격이 강해졌다. 한편 이들의 강한 자매애와 독립성은 가족 안에서 거의 감화를 받지 못하는 순재네 아이들- 준혁과 해리- 도 성장시킨다. 셋째, <지붕킥>에서 가난이 초래하는 불편과 거기서 파생되는 다양한 감정은 코미디와 비극의 원천이다. 부잣집에 식모로 입주한 세경의 생활이 계급의 대조를 때로 노골적으로 보여준다면 명문대생인 척 과외교습을 하면서 카드빚에 쪼들리는 대학생 황정음은 소비를 결코 따라잡지 못하는 상대적 빈곤을 코믹하게 표현한다. 김병욱 PD와 제작진은 <지붕킥>에서 가지지 못한 사람들을 부러 정의롭게 묘사하거나 픽션을 빌려 사과하지 않는다. 그냥 가난을 얼굴 앞에 확 들이밀고 돈 때문에 인간적 품위를 지킬 수 없는 세세한 상황에서 코미디와 멜로를 만들어낸다. “60분짜리 서사에는 흘러가야 할 큰 방향이 있어서 이런 작은 이야기들을 끼워넣기 힘들어요. 어찌보면 25분짜리만이 다룰 수 있는 영역이라 곧 장르의 자부심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그것이 제게는 다른 어떤 가치보다 우선해요.” 오랫동안 영화나 정극 드라마를 향해 갈증을 품었던 김병욱 PD는 이제 25분짜리 서사의 고유한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였다. “제가 하고 싶은 드라마를 할 뿐 그것이 어떤 형태로 규정되는지는 관심이 없고요. 웃음 효과도 방송사와 약속이라 조연출이 까는 거지, 전 빼도 상관이 없어요.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채널이 고장난 것도 아닌데(웃음) 다른 걸 보면 되지 않을까요?” 컷의 리듬대로 악보 연주하듯 촬영 “뭐 제가 사갈 것은 없을까요?” 취재 전날 인사 문자를 보내자 김병욱 PD의 시름시름한 답신이 날아왔다. “시간을 좀 사다주세요.” 어느 일일극 연출자든 치러야 할 싸움이겠으나, 김병욱 PD가 더욱 고된 까닭은 그가 세 작가와 더불어 대본 작업에도 직접 매달리기 때문이다. 자기 이야기를 연출하려는 고집이냐 물었더니 다른 방법은 아예 모른단다. “대본을 쓰면서 콘티를 떠올리는 방식이 몸에 배어 제 손이 닿지 않은 대본으로는 콘티를 못 짜요.” 김병욱 PD가 직접 연출하는 <지붕킥>의 세트 촬영은 매주 목·금요일 이틀 동안 밤을 새우며 이루어진다(야외장면은 김영기, 조찬주 감독이 맡는다). 세트에서 소화하는 분량은 일주일 방송분의 절반인 100여신. 목요일은 순재네 집, 금요일은 자옥·정음·줄리엔·광수·인나가 사는 한옥 세트를 중심으로 녹화가 이뤄진다. 11월12일 목요일 오전 11시. 리허설을 위해 모여든 제작진과 배우들이 이 방 저 방 우르르 뛰다시피 몰려다니며 연기의 톤과 동선을 체크한다. 격려차 방문한 엄기영 MBC 사장과 일행을 제대로 응대할 경황도 없다. 아직 분장하지 않은 배우들의 분위기는 캐릭터와 사뭇 다르다. 신세경은 힐을 또각이며 들어섰고 지훈 역의 최다니엘 얼굴에는 뿔테 안경이 없다. 극중에서 퉁명스러운 말투의 소년 준혁인 윤시윤은 주변이 동그랗게 환해지는 웃음을 뿌리며 ‘빼빼로’를 돌리고 있다. 원체 상냥하고 웃음 많은 성격을 쿨한 준혁에게 맞춰 억누르느라 수고가 많다. 점심과 음향효과 녹음을 마친 오후 3시, 촬영이 개시됐다. 세트와 부조정실의 모든 스탭은 카메라 앵글과 연기자의 동선이 컷별로 표기된 ‘악보’- 콘티 대본에 따라 움직인다. 세대의 카메라에서 잡은 영상은 촬영과 동시에 악보에 지정된 대로 편집된다. 숏이 아니라, 세 카메라를 한번 배치해 찍어낼 수 있는 한달음의 연기가 구성의 기본단위다. 컷의 리듬대로 손가락을 튕기는 김병욱 PD는 무슨 노래를 연주하는 것처럼 보인다. 세트에서는 현경이 해리의 두 다리를 붙들고 상체 강화 훈련을 시키고 있다. 매사에 급우 신애보다 처지는 딸에게 부아가 치민 체육교사 현경이, 달리기만은 질 수 없다는 결단으로 특훈에 돌입한 것이다. 해리가 팔로 계단을 오르는 장면을 어떻게 하면 더 역동적으로 잡을지 촬영감독과 부조정실 사이에 몇 차례 논의가 오가다 부감으로 결정을 본다. 록키 발보아가 울고 갈 훈련을 거친 해리가 드디어 실력을 발휘해 신애를 뒤쫓는 장면. 곁눈질해본 대본의 지문에는 무려 “영화 <추격자>의 김윤석과 하정우처럼”이라고 써 있다. 두 소녀의 레이스를 베란다에서 내려다보던 현경은 해리가 마침내 신애를 붙잡자 승리의 어퍼컷을 날린다. 표출되는 기쁨의 크기를 김병욱 PD가 꼼꼼히 주문한다. “체육인으로서 훈련이 성공했다는 보람이지, 딸이 신애를 때리는 걸 좋아하는 건 아니에요.” <하이킥>부터 팀을 이뤄온 김태홍 조명감독은 배우를 대하는 김병욱 PD의 기술을 세 가지로 요약한다. “중견 연기자에겐 강한 캐릭터를 심어주고, 신인 연기자에겐 연기력과 캐릭터를 동시에 주입하고, 연기자 캐스팅에 100% 관여하여 비교우위에서 일을 진행한다.” <지붕킥>의 순재네는 지금까지 김병욱 시트콤의 어떤 가족보다 데면데면하다. 가장 순재는 연애에 몰두해 식구들의 생활에 그닥 신경을 쓰지 않는다. 부부간의 대화는 주로 면박, 부모자식간의 대화는 꾸중과 변명이다. 먹이사슬의 최종 고리는 장인회사에서 허수아비 부사장으로 일하는 보석. 그는 자기 의지대로 무엇을 결정한 기억이 아득한 식물 같은 남자다. 53회는 보석의 비애를 아들 준혁의 눈으로 조명하는 에피소드다. 오늘도 순재와 보석의 주된 스킨십은 발길질. 모욕당하는 아빠를 바라보는 준혁의 표정 연기를 PD가 지시한다. “너무 짠한 티를 내지마.” 대선배 정보석이 팁을 일러준다. “속으로만 아픈 마음을 갖고 표정없이 봐.” 빵꾸똥꾸를 빵꾸똥꾸라 부르지 못하는 고통 무뚝뚝한 준혁이지만 세경 누나를 마주 볼 때만큼은 동요한다. 깊은 밤 사골을 고며 식탁에서 혼자 공부하는 세경과 차를 마시는 장면. 기쁜 빛이 만면에 완연하자 PD가 다시 제어한다. “준혁이 조금만 웃음을 줄이자. 넌 딱 그만큼 웃을 때가 멋있어.” 세경에게 공부를 가르쳐주는 오붓한 즐거움에 막 젖어드는 준혁에게 날벼락이 떨어진다. 엄마가 35점짜리 성적표를 세경에게 보여준 것. 이번에는 상반된 주문이 떨어진다. “바로 전 컷이 좋아하는 사람 손에 들린 35점짜리 성적표야. 네가 이 클로즈업에서 제대로 분노해야 다음 장면들이 살아.” 허공에 걸려 있는 감정을 표현하느라 힘든 또 한명의 연기자는 지훈 역의 최다니엘이다. 세경은 그를 향해 막 싹트는 마음을 잘라버리려고 일부러 덤덤히 등을 돌린다. 친절을 거절당한 지훈은 그녀를 어떤 눈빛으로 바라보아야 할까. 오전 리허설에서도 김병욱 PD에게 가이드를 구했던 최다니엘이 말한다. “제3자가 보기에는 분명해 보여도 당사자는 막상 규정할 수 없는 감정이 있잖아요. 아직 모호해요. 아마 한쪽(정음)은 재미있고 한쪽(세경)은 연민에 가까운 감정이겠죠.” 52회, 53회는 꼬마 악녀 해리의 어휘 절반을 차지하는 ‘빵꾸똥꾸’의 기원과 그 적용사례를 파고든다. 보석이 상품을 걸고 내린 빵꾸똥꾸 금지령. 입에 붙어버렸는지 “빵…”까지 하고 입을 다물어야 하는 대목에서 해리가 그만 “빵꾸똥꾸!”를 내처 외쳐버리자 스탭들이 웃음짓는다. ‘빵꾸똥꾸를 빵꾸똥꾸라 부르지 못하는 고통’이 참으로 눈물겹다. 이 어린 배우는 방영 초기 미운 캐릭터로 미움을 샀으나, 카리스마의 경지까지 연기를 폭발시켜 짧은 시간에 시청자의 적대감을 경외로 바꿔놓았다. “오디션 100:1 뚫을 때만 해도 덜했는데. 이 정도일 줄 몰랐어요. 하나의 연기에 7, 8가지 안이 준비돼 있어요.” 스탭의 존경어린 평이 무색하게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자마자 해리는 무섭게 구박하던 신애와 사이좋게 어울려 세경의 목을 끌어안고 텔레토비 노래를 흥얼거린다. 자정이 다가온 세트에는 피로감이 안개처럼 서렸다. 순재네 거실과 마주보고 있는 자옥의 방과 불 꺼진 한옥 마당, 식당과 연해 있는 이순재 F&B 사무실. TV에서 보는 것과는 다르게 배치된 세트들을 다시 둘러보았다. 세경 자매가 기거하는 옷방에서는 무릎까지 이불을 덮은 최다니엘이 대본을 옆에 둔 채 건공중을 골똘히 바라보고 있다. 몇달이 흐른 뒤 시리즈가 끝나면 이 방들은 허물어질 것이다. 여기서 복닥거리던 사람들- 캐릭터, 배우, 스탭 모두- 은 자기 몫의 성장과 상처를 챙겨들고 뿔뿔이 흩어질 것이다. 안온하게 밀봉된 시트콤의 명랑한 우주를 창조하면서도 종장에 이르면 죽음의 예감과 회자정리(會者定離)의 섭리를 외면하지 않았던 김병욱 PD는, 이번에는 어떻게 이 공간에 안녕을 고할까.

명랑하다 재미난다 독립영화탐구생활

서울독립영화제2009 12월11일부터… 경향을 알 수 있는 추천작 15편을 소개함 서울독립영화제2009가 12월11일부터 18일까지 9일 동안 독립영화전용관 인디스페이스와 스폰지하우스에서 열린다. ‘치고 달리기’(Hit & Run)라는 야구용어를 슬로건 삼은 이번 영화제 출품작은 모두 722편. 지난해보다 100편 이상 많아졌다. 이중 홍형숙 감독의 <경계도시2>를 비롯한 45편의 작품이 예심을 거쳐 경쟁부문에서 관객을 만난다. 개막작은 지난해 ‘인디 트라이앵글’ 프로젝트에 선정된 민용근, 이유림, 장훈 감독의 옴니버스영화 <원 나잇 스탠드>. 제목처럼 하룻밤의 섹스가 공통 주제다. 국내 초청부문에선 이지상 감독의 <몽실언니>, 애니메이션 <산책가> 등 24편이 상영된다. 장률 감독 특별전과 라야 마틴의 <필리핀 인디오에 관한 짧은 필름> 등 필리핀 독립영화 특별전도 해외초청 부문에 마련됐다. 올해 독립영화의 경향을 한눈에 일별하는 축제에 앞서 ‘치고 달리기’라는 슬로건처럼 ‘명랑하고 역동적인 독립영화’ 15편을 먼저 소개한다. 88만원 감독 김일현 | 애니메이션, 실험 | 컬러 | 13분 | 2009년 눈을 감고 귀로 들어야 한다. 절절한 애니메이션이다. 비유가 아니라 진짜다. 한달 생활비 명세표를 숨 쉬지 않고 읽는 남자의 목소리, 영락없이 슬픈 랩이다. 남자가 생활고를 호소하는 동안 호랑이보다 무서운 돈 잡아먹는 여자친구에게 전화가 걸려온다. 안절부절못하는 남자는 데이트를 회피하고자 콧소리 섞은 거짓말을 해댄다. 몇번의 승강이 끝에 떨어지는 이별 선고. 그러나 나쁜 남자는 실연 통보에 쾌재를 부른다. 이 나쁜 남자의 이름은 ‘88만원 세대’다. 간단한(그러나 이유있는) 낙서만으로 재기를 보여주는 신통방통 애니메이션. 거짓말 감독 임오정 | 극 | 컬러 | 32분 | 2009년 세상 물정 모를 것 같은 영희와 세상 다 산 것 같은 연희는 둘도 없는 오랜 친구다. 대학 선배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집을 나선 두 사람. 그녀들의 손엔 청첩장 대신 수신자 없는 편지가 들려 있다. <거짓말>의 ‘주인없는 편지’는 실은 ‘도둑맞은 편지’다. 헤어지자면서 한때나마 당신을 정말로 사랑했다는 내용의, (사실상) 익명의 편지를 뜯어보고 연희는 뻔한 ‘거짓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초대받지 못한 결혼식에서 수모를 당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영희는 누군가의 거짓말을 잠시나마 진심이라 믿고 싶었던 연희의 뒷모습을 본다. 연희가 ‘쪽팔려’라고 말할 때, 그건 ‘거짓말’일까 ‘참말’일까. 속주패왕전 감독 이혜영 | 애니메이션 | 컬러 | 17분 | 2009년 사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속주 수련에 나선 기타리스트 박승용, 이라고 주인공을 소개하면 재미없다. 박승용으로 말할 것 같으면, 삼거리기타교습소 원장 쌤 마태풍의 수제자이자(수강생은 달랑 혼자다), 똥통에서 파리와 사투를 벌이며 지옥훈련을 마다않는(전설의 ‘소림기타18괴도권’을 익히기 위해) 의지의 사나이. 그의 입방정은 사부를 외팔이로 만드는 변고를 낳지만, 더 나아가 사부가 혀로 세상을 구원(?)할 수 있게 만들기도 한다. 키치와 패러디의 정서로 무장한 이경석의 동명 웹툰이 원작. 갖가지 장르 횡단의 쾌감도 즐겁지만, 쉴새없는 쌍욕과 썰렁한 유머가 더 강력하다. 쿠바의 연인 감독 정호현 | 다큐멘터리 | 컬러 | 72분 | 2009년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연인들에게도 해당하는 주기도문이다. <쿠바의 연인>은 발칙하게도 사랑을 시험한다. 한국과 쿠바라는 정반대의 저울대 위에 올려놓고 연인들은 자신들이 나누는 사랑의 무게가 얼마쯤 되는지 재본다. 정확한 중량을 확인하기 위해 그들은 발가벗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감독의 의도를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치노’(Chino) 소리 듣는 한국 여자는 무작정 쿠바에 갔고, 그곳에서 머물며 만난 쿠바 사람들을 소개한다. ‘카스트로 만세’라고 외치지만 뒤돌아 “12시간 일하고 5달러 버는 삶”이 부럽다고 말하는 쿠바 사람들을 비출 때 다큐멘터리는 ‘푸른 유니콘을 잃어버린’ 인민의 슬픈 눈망울을 감상하는 기록처럼 보인다. 그렇게 낭만의 여행이 끝날 것 같은 지점에서, <쿠바의 연인>은 본색을 드러내고 유턴한다. 택시를 탄 한국 여자의 옆자리엔 폭탄 머리를 한 쿠바 남자가 앉아 있다. 두 사람이 결혼을 약속한 사이임이 얼마 뒤 밝혀진다. 그리고 악마의 씨를 가진 쿠바 남자는 미래의 장모님에게 어서 빨리 구원받아야 할 대상으로 여겨진다. 국경을 훌쩍 뛰어넘은 사랑이 가능할까. 시종 유쾌하고 저돌적인 화법을 구사하는 <쿠바의 연인>이 증명하고 싶어 하는 명제는 ‘사랑보다 위대한 것은 없다’는 아닌 듯하다. 평등을 자위하는 아바나와 경쟁을 추종하는 서울을 오가는 피부색 다른 두 남녀의 ‘대장정연애리얼리티’ 프로그램의 진짜 목적은 결혼 팡파르가 아니라 ‘진화하는 혁명’의 가능성 아닐까. 속히 속편이 보고 싶은 다큐멘터리. 조금 불편한 그다지 불행하지 않은 0.24 감독 임덕윤 | 극 | 컬러, 흑백 | 32분55초 | 2009년 먼저 관객은 ‘조금 불편한’ 상황을 감수해야 한다. 중도 시각장애인인 덕윤의 일상을 들여다보려면. 1주일에 세 차례 병원에 들러 혈액투석을 받아야 하는 덕윤을 따라 집 밖으로 나설 때 위험천만한 세상은 흑백 실루엣으로 변한다. 도움을 주겠다는 손은 코브라가 되고, 쌩쌩 달리는 트럭은 탱크 굉음을 낸다. 신기하게도 도중 동정의 시선은 역전된다. 아마도 <이별의 종착역>에 맞춰 덕윤이 휘파람을 불 때 모두들 따라 부를 것이다. 길잡이는 우리가 아니라 어느새 덕윤이다. 직접 출연한 시각장애인 감독은 불행하지 않다. 앞이 보이지 않는데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 그는 내기에서 이겼다. <남매의 집> 감독 조성희 | 극 | 컬러 | 43분 | 2008년 어린 남매인 철수와 순이는 지하방에 살고 있다. 그들은 아빠를 기다리는 것 같다. 하지만 무언가 이상하다. 텔레비전은 지직거리며 나오지 않고 순이는 바깥에서 누군가가 집 안을 자꾸 들여다보는 것 같다고 말한다. 아빠는 자기가 돌아오기 전까지 누구에게도 문을 열어주어서는 안된다고 말했지만 자꾸 이상한 사람들이 집을 찾는다. 목이 마르다고 해서 문을 열어주었으나 곧 괴이하고 거친 사람들로 돌변한 세 남자는 집 안의 앵무새도 죽이고 마침내는 동생 순이를 납치하기에 이른다. 방 안을 벗어나지 않고 철수와 순이의 집 안에서만 벌어지는 이 영화는 놀랍게도 특수효과 없는 SF에 가깝다. 게다가 영화는 조여드는 압박감으로 곧 찢어질 것처럼 팽팽해진다. 순이를 잡아간 그들은 누구일까. 지금 그들이 살고 있는 세상은 어떤 것일까. 정체 모를 긴장감으로 가득한 영화. 회오리 바람 감독 장건재 | 극 | 컬러 | 95분30초 | 2009년 미숙한 10대들의 감정을 흔히 치기라 부른다. 사랑이든, 우정이든, 그건 중요치 않다. 10대의 한때는 어설픈 해프닝 혹은 위험한 장난으로 얼룩져 있다고들 여긴다. <회오리 바람>의 태훈을 만날 때 우리는 얼마간 얼굴 화끈거리는 치기를 떠올리며 비웃을지 모른다. 여자친구 미정과 만난 지 100일 기념으로 강원도로 1주일 여행을 떠난 태훈이 서울로 돌아오는 차비가 없어 1만원을 빌리러 터미널 주변을 배회할 때, 거짓말이 들통나 미정의 아버지에게 혼쭐이 난 뒤 대학 입학 때까지 미정을 만나지 않겠다고 각서를 쓸 때, 돈을 벌겠다며 중국집 아르바이트 배달 일을 하다 급기야 오토바이 사고를 낼 때, 태훈은 매번 고개를 푹 숙이고 치기는 더더욱 보잘것없는 모양새가 된다. 그럼에도 <회오리 바람>은 10대들을 치기덩어리라 단정하지 않는다. 치기가 어설프거나 위험한 것은 미숙함이 아니라 절실함 때문이라고 믿는다. 악몽의 현실에 쫓겨 숨이 턱밑까지 차오른 태훈과 미정도 열아홉의 문턱에서 어렴풋이 깨닫는다. 헉헉거린 뒤 찾아드는 잠깐의 평온이야말로 어떤 휴식보다 달콤하다는 것을. <회오리 바람>은 태훈과 미정에게, 혹은 그만한 나이의 친구들에게 ‘내 생에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을 선물한다. “더 하지 못하고 포기했던” 누군가에겐 부러운 선물이기도 하다. <반드시 크게 들을 것> 감독 백승화 | 다큐멘터리 | 컬러 | 94분 | 2009년 인천의 모텔촌에 난데없이‘루비살롱’이라는 인디음악 라이브 클럽이 생긴다. 오랫동안 홍대 인디음악계에서 활동했던 리규영이 차린 곳이다. 누구도 신경쓰지 않을 것 같은 록음악의 황무지 같은 이곳에 클럽을 만들어놓고도 리규영은 태연자약하게 “홍대에는 클럽데이가 있으니 우리는 모텔데이라도 만들면 된다”고 떵떵거린다. 그의 말이 허풍처럼 들릴 즈음 사건이 시작된다. 홍대에서 활동하던 두개의 밴드 ‘갤럭시 익스프레스’와 ‘타바코쥬스’가 루비살롱의 일원으로 찾아온다. 영화는 이제 이 두 밴드에 관한 일거수일투족을 그려낸다. “우주에서 온 로큰롤 전도사” 갤럭시 익스프레스는 승승장구한다. 실력도 인정받고 유명해지면서 각종 페스티벌의 스타로 급부상한다. 하지만 “홍대 최고의 막장밴드이자 찌질이들의 대마왕”인 타바코쥬스는 매일이 여전히 똑같고 찌질하다. 술에 취해 멤버끼리 싸우는 건 다반사고 공연을 펑크낼 때도 있다. 이 두 록밴드의 엇갈리는 명암을 영화는 따라간다. 게다가 이 영화의 감독은 타바코쥬스의 드러머다. 간단한 마음으로 자기가 아는 친구들을 다룬 다큐멘터리인데, 재미있는 인물들이 많이 등장하고 유머가 만만치 않으며 영화의 구성도 재치 만점이다. 때로는 덜컥 가슴 적시는 감동의 장면까지 있다. 스턴트계에 <우린 액션배우다>가 있다면 이제 홍대 인디음악계에는 <반드시 크게 들을 것>이 있다고 말할 만하다. 올해의 가장 쾌활한 영화 중 한편. ACT OF LIFE 감독 임호경 | 극, 다큐멘터리, 실험 | 컬러 | 52분 | 2009년 화자인 나는 죽은 친구 다다의 흔적을 찾아나선다. 그가 떨어져 죽은 아파트 공사장에 가보기도 하고, 생전의 룸메이트를 찾아 죽기 전날 그가 찍었다는 손목사진도 보고, 그가 들렀다는 핑크색 술집의 마담과 대화도 나눈다. 또 그의 죽음을 현장검증이라도 하듯 직접 재연해보기도 한다. “그의 삶 혹은 죽음을 결정”한 사소함의 배후를 파헤치기 위해서다. 하지만 수사는 종결되지 않는다. “당신이 고백한 것들이 왜 구태여 노력해서 고백해야만 하는 것들이 되어버린 거지”라고 자문할 때, 다다는 이미 희미한 기억 부스러기다. 무국적 내레이션을 반주삼은 독특한 레퀴엠. 삶과 죽음의 끝나지 않을 숨바꼭질을 반복 연주한다. 오후 3시 감독 김지곤 | 다큐멘터리 | 컬러 | 24분32초 | 2009년 오래되고 낡은 부산의 한 극장을 영화는 보여준다. 제목 <오후 3시>는 그 극장을 카메라가 들여다보기 시작한 시간을 말하는 것 같다. 초라한 극장에서는 이제는 늙은 영사기사가 혼자 일하고 있다. 손님이 있을 리 없다. 극장은 꼭 초현실적인 장소처럼 포착된다. 하지만 이 극장을 보는 카메라의 시선은 현재적이다. 현재에 있는 것들이 신기하게도 컷마다 저 추억 속 사진이나 그림에서 빠져나온 것처럼 향수로 가득하다. 빠르게 변해가는 모든 것들 속에서 마지막에 해당할 만한 이 동시상영 극장을 보는 것만으로도 추억에 잠길 만하지만 그걸 포착하는 소리나 색감, 사진적 구도 등은 이를 데 없이 빼어나다. 주목받지 못했던 우리의 삶의 이곳저곳을 평정으로 한번 들여다볼 수 있게 하는 안내자 같은 영화다. 드라이브 감독 심명훈 | 극 | 컬러 | 11분23초 | 2009년 가죽점퍼를 걸친 남자가 운전 중 휴대폰을 받는다. “여보세요. 네. 출발했습니다. 지금 잠수대교로 가고 있습니다. 가방은 챙겼습니다.” 뒷좌석에 피를 흘리며 쓰러진 또 다른 남자가 있다. 인사이드 미러로 보이는 운전자의 눈빛은 음흉하다고까지 할 순 없어도 보통은 아니다. 그리고 흔들리는 십자가! 익숙한 범죄물처럼 운을 떼지만, 이 모든 것이 실제상황은 아니다. 가죽점퍼 사내의 정체가 드러날 때 예기치 않았던 웃음도 터진다. ‘달리고 싶은’ ‘욕구’를 ‘쫓는’ 주인공을 택했다는 점에서 <드라이브>만큼 적절한 제목이 있을까. 여러 번 핸들을 꺾는 <드라이브>처럼, 희망과 절망을 오가는 삶의 박동 또한 시시각각 바뀐다. 땅의 여자 감독 권우정 | 다큐멘터리 | 컬러 | 95분 | 2009년 대학 선후배인 세 여자는 졸업 뒤 곧장 농촌으로 갔다. 농민운동을 하기 위해서였다. “꿈이 삶 저편에 있다고 믿지 않았고” 그래서 땅에 투신했다. 그곳에서 만난 동지를 남편으로 삼아 가족도 이뤘다. 10년이 흘렀다. 진주와 창녕과 합천에 흩어져 사는 세 여자는 여전히 농민활동가다. 세 여자의 의지는 더 깊게 뿌리내렸을까. 아니면 흔들리고 있을까. 전반부는 ‘남녀탐구생활’ 농민활동가 편처럼 보인다. “그냥 안 굶어죽으면 되지”라고 하는 소희주씨의 천하태평 발언에 남편은 “지 혼자 나가버리잖아. 같이 활동하면서”라고 볼멘소리를 한다. 보기 즐거운 언쟁이다. “일이 몸에 붙지 않아” 호미 들면 타박 들었다는 변은주씨의 푸념과 “노총각에게 성은을 베풀었다”는 이유로 활동을 보장받았다는 강선희씨의 무용담도 흥미로운 애정표현이다. 농군이 된 세 친구의 거침없는 폭포수 직설을 맛보는 것만으로도 쏠쏠하다. 그러나 <땅의 여자>는 꿈같은 전원일기가 아니다. 누군가는 우는 아이 떼놓고 새벽 일찍 나섰지만 서울 집회에는 막상 가보지도 못하고 주저앉는다. 누군가는 10년 넘는 시집살이 끝에 “내가 이 집 종이야?”라고 참아왔던 속엣말을 터트린다. 누군가는 제 욕심 채우자고 아픈 남편을 병수발 하지 않은 괘씸한 아내라고 손가락질당한다. 그제야 육아와 가사와 논일과 활동을 한데 짊어진 세 여자의 그늘도 비로소 드러난다. 수진들에게 감독 강연하 | 극 | 컬러 | 20분10초 | 2008년 스무살이 넘으면 다른 삶이 펼쳐질 줄 알았다. 그런데 교복 대신 유니폼이다. “만날 똑같은 치마를 입어야” 한다고 불평하지만 달리 선택도 없다. 아니, 어떻게든 입어야 한다. 그래야 월세 단칸방에서라도 살 수 있다. 대형마트 시식코너에서 일하는 수진만의 처지는 아니다. 지하마트의 다른 코너에도 다른 이름의 ‘수진’이 있고, 화려한 쇼핑몰에도 다른 이름의 ‘수진’이 또 있다. 환상조차 허락하지 않는 현실. 그래서 수진은 수진을 만나 돌을 던진다. 바뀌는 건 없다. 언제나 그 자리, 제자리다. 에스컬레이터 없는 삶에 지친 20대 여성들에게 보내는 작은 위무의 편지. 복자 감독 정희재 | 극 | 컬러 | 21분40초 | 2009년 삶은 가혹하다. 극단의 선택을 종용하고 나서도 웃으라고 명한다. 삶의 린치는 10대 소녀 복자에게도 예외없이 가해진다. 쫓겨다니던 아버지는 교통사고를 당해 돌아왔다. 빚쟁이 때문에 위장이혼한 어머니는 아버지를 그냥 내버려두자고 말한다. 다시 함께 살 수 있다고 믿었던 복자는 울어야 할까, 웃어야 할까. 마지막 장면. 복자는 울음을 꿀꺽 삼키고 눈을 감는다. 이미 행해진 극단과 앞으로 택해야 할 극단 앞에서 그녀는 아마도 비극은 고작해야 1장이 끝났을 뿐이라고 되뇌일지 모른다. 눈물까지 말라버린 소녀의 얼굴은 이따금 <복자>를 다큐멘터리로 오인하게 만들 정도다. 교미기 Part2-비밀스런 짐승 감독 장은주 | 실험 | 흑백 | 21분54초 | 2009년 섣불리 <동물의 왕국>의 짝짓기를 떠올리진 말자. 검은 옷을 입고 계곡에서 느릿하게 부유하는 여성 혹은 비밀스런 짐승들의 육체만을 반복해서 보여주니 말이다. 어쩌면 <교미기 Part2-비밀스런 짐승>의 문을 열 수 있는 자그마한 비밀의 열쇠는 보여주는 무엇이 아니라 삭제된 무엇일지 모른다. 신비한 의식을 거행하는 검은 유령들의 숲속에서 우리가 절대로 찾아볼 수 없는 것은 남성적인 형상물이다. 모든 사운드는 거세되어 있다. 시각과 청각의 교접을 통한 의미화는 애당초 불가능하다. 인지할 수 없는, 그러나 매 순간 감각하는 비밀스런 짐승들의 관능적인 향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