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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1997)

[나의 친구 그의 영화] “비이이이즈니스!”를 돌려세운 환영

내가 입체사진을 얼마나 좋아하는지는 2007년에 발표한 장편소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을 펼쳐 보면 알 것이다. 이 칼럼의 내용을 이해하려면 그 소설을 꼭 읽어봐야만 할 것이다(라고 쓰지만, 그 책을 다 읽고 나면 이 칼럼을 읽고 싶은 생각이 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어렸을 때, 우리 집에는 설악산 입체사진첩이 있었다. 부착된 두개의 렌즈를 들여다보면 거기 흔들바위나 백담사 계곡 같은 게 생생하게 보였다. 그건 내가 최초로 매혹된 이미지였다. 이 매혹은 내게는 더없이 중요했다. 입체사진을 영어로 스테레오스코피라고 부른다. ‘스테레오’는 ‘입체’(solid)라는 뜻의 그리스어다. 입체사진은 두장의 사진 사이의 차이에 의해서 입체로 보인다. 스테레오 사운드 역시 이런 원리로 만들어졌다. 들어보면 알겠지만, 양쪽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는 차이가 난다. 이 차이는 이 세상에 없는 공간을 만들어낸다. 중학 1학년 때, 나는 워크맨으로 처음 스테레오 사운드를 들었다. 광활한 들판에 나 혼자 서서 음악을 듣는 느낌이랄까. 그건 이 세상에 없는 공간이랄까. 감각할 수 없으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면, 스테레오가 만들어내는 그 공간은 실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래서 ‘국민통합’같은 말이 싫다니까 좀더 어렸을 때, 그러니까 텔레비전은 흑백화면이었고 모든 음악 소리는 모노였던 시절인 1970년대 후반에 내가 본 만화 <걸리버여행기>에는 소인 악단이 직접 들어가서 연주하는 라디오가 나오기도 했다. 아이들 중에는 라디오 속에 진짜 그런 소인 악단이 있는 줄 알고 뜯어보는 친구도 있었다. 그 정도는 아니지만, 나 역시 KBS 김천중계소에서 틀어주는 노래를 듣다가 혜은이가 그 중계소까지 찾아와서 부르는 줄 알고 흥분한 적이 있었다. 여름이면 수영하러 가면서 늘 지나갔던 중계소니 노래가 끝나기 전까지는 달려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내 말에 어른들은 꽤 웃었다. 그러니 이제쯤은 어린 시절 나를 매혹시킨 건 현실에 육박하는 환영, 즉 스테레오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지금도 라디오에 모노 사인이 뜨면 견디지 못하고 안테나를 이리저리 돌려보는 사람이다. 나는 민주주의마저도 스테레오의 관점으로 이해한다. 서로의 차이를 통해 만드는 입체적인 사회가 내가 상상하는 민주주의 사회다. ‘난 생각이 좀 달라’라고 말하지 못하는 사회는 모노 사인이 뜬 라디오보다 더 견디기 힘들다. 그래서 나는 국민통합 같은 말이 제일 싫다. 그건 경제가 어려우니 흑백TV를 보자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렇게는 못하겠다. <크리스마스 캐롤>이 입체영화라는 소식을 듣고 가슴이 뛸 정도였다. 크리스마스에나 개봉할 줄 알고 방심하다가 이미 개봉했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보러 갈 정도였다. 그런데 웬걸, 들어갈 때 입체안경을 나눠주는 직원이 서 있어야 할 텐데,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광고는 맨눈으로 볼 수 있도록 나중에 나눠주려는 모양이구나’). 실내등이 꺼지고 나서도 안경을 나눠주는 직원은 없었다(‘이건 맨눈으로 볼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입체영화인가?’). 하지만 카메라가 눈 내리는 런던의 거리를 날아다니는 도입부가 시작됐는데도 안경은 없었다. 꼭 그저 나는 생각이 좀 다르다는 걸 피력한 것뿐인데도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한다고 구박받는 걸로도 모자라 경찰에 끌려가는 것으로 국민통합에 이바지하는 기분이랄까. 좀 억울했다. 알고 봤더니 입체영화는 지정된 극장에서만 하는 것이었다. 급한 마음에 확인하지도 않고 달려간 게 실수였다고나 할까. 엄청나게 실망했다고 이 칼럼에 쓰게 되리라… 생각했지만 뜻밖에도 평범한 화면으로 보는 <크리스마스 캐롤>도 충분히 놀라웠다. 이 영화에는 단순한 입체영상을 넘어서는 뭔가가 있었다. 입체영상이 아니었기에 오히려 실사영화와 구별되지 않는 환영을 봤다고나 할까. 말했다시피 감각할 수 없다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적어도 사물들은 그렇다. 그렇다면 이토록 감각적으로 사실적인 영상이라면 이걸 환영이라고 불러도 될까? 이걸 환영이라고 부른다면 실사영화도 환영이라고 부르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이제는 적어도 실사와 CG의 차이가 현실과 스크린의 벽만큼 크지 않은 것 같다. 단순한 입체영상을 넘어서는 그 무엇 그런데 뜻밖에도 이 실사와 CG의 경계가 모호해진 상황이 이야기의 핍진성(흐흐흐, 소설 창작 강사 시절, 학생들을 괴롭힐 때 쓰던 단어로구나)에 기여했다. <크리스마스 캐롤>의 주제란 무엇일까? 젊어서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가난하게 성장한 탓에 돈밖에 몰라, 툭하면 경제를 살리겠다는 둥 직원에게도 값싸고 질 좋게 일하기 싫으면 나가라는 둥 귀신도 따라하다가 턱이 빠질 정도로 “비이이이즈니스!”라고 떠들어대던 한 늙은 인간이 어느 크리스마스이브에 유령이 보여주는 환영을 보고 개과천선한다는 이야기 아닌가. 그러므로 이 이야기의 성패는 노회할 대로 노회한 그 늙은 인간마저도 현실과 오해할 정도로 사실적인 환영을 보여줄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다. 관용을 베풀지 않은 부자들이 죽고 나서 어떤 처지가 될지 보여주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 지도 벌써 150년이 넘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가난한 사람들은 게을러서 가난하며,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느니 차라리 감옥에 보내버리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부자들이 많은 건 아마도 그간 이 이야기에 핍진성이 부족했다는 뜻이리라. 하지만 로버트 저메키스가 만든 <크리스마스 캐롤>을 보니까 인류가 환영을 다루는 능력은 이제 결정적인 지점에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내가 스크루지였다면 이 영화를 보면서 마음을 고쳐먹었을 것 같다. 특히 꼬맹이 팀이 죽은 뒤에 계단을 올라가던 환영 속의 밥이 스크루지를 빤히 쳐다보는 장면에서는 내 손발이 다 오그라들더라. 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개인맞춤 환영을 만드는 일이겠다. 환영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이렇게 일취월장한다면 조만간 각자가 주인공이 되는 <크리스마스 캐롤>도 만들 것이다. 자신의 과거와 미래가 그처럼 사실처럼 보인다면, 어느 누가 “비이이이즈니스!”라고만 떠들어대겠는가. 갈 곳이 없어서 망루에 올라간 사람들이 불에 타죽어도, 죽고 나서는 차가운 냉동고 안에 누워 있어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못된 사람들을 환영으로 뉘우치게 하는 일은 유령들이 했으면 좋겠으나, 유령들은 다 죽었는지 뭐하는지.

[김혜리가 만난 사람] <무한도전> 김태호 PD

속도와 밀도는 공존하기 힘든 속성이다. 거기에 지구력과 자기 혁신까지 뒷받침되는 일은 더 어렵다. MBC 주말 예능 프로그램 <무한도전>이 경탄스러운 까닭은 그래서다. 단독 프로그램으로 독립한 뒤 181주, 버라이어티쇼의 한 코너였던 ‘무모한 도전’과 ‘무리한 도전’까지 포함하면 5년째 방영 중인 <무한도전>은 기동성과 일정한 완성도를 견지하며 진화해왔다. 예닐곱명의 멤버가 어울려 미션과 놀이로 채워진 짧은 여행을 떠나는 <1박2일> <패밀리가 떴다> 등 후발 리얼 버라이어티들이 인기를 끌고 안착하자, <무한도전>은 포맷의 ‘무한도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매주 기댈 수 있는 최소한의 매뉴얼조차 부숴버렸다. 콘서트를 열고 체전과 디자인 경진대회를 벌이고 독창적으로 고안한 규칙에 따라 도심 추격전을 벌이고 연기자 각자가 작가와 프로듀서가 되기를 시도했다. 게임쇼, 패러디, 공익 캠페인 등 과거 한국의 예능이 축적한 모든 소재를 <무한도전>의 방식으로 변용하는가 하면 급기야 미니 방송국으로 둔갑해 지난 추석에는 하루치 프로그램을 ‘졸속’ 제작했고 1년 동안 틈틈이 벼농사를 지어 ‘이건 뭥미(米)’를 생산했다. <무한도전>이 회심의 기획을 내지를 때마다 시청자야말로 헥토파스칼 킥을 맞은 표정으로 중얼거릴 수밖에 없다. “이건 뭥미?” 매주 새로운 핀볼 기계를 발명하는 것과 같은 고역에 몸을 던지고 있는 <무한도전>의 김태호 PD의 외모는 어딘가 천재 피아니스트를 연상시킨다. 한점에 집중하면 만사를 잊어버려 달걀 대신 자명종을 삶아 먹을 것 같은 인상이다(실제로 대학 시절 과 동기는 학생회 총무였던 김태호가 열차 시간표를 착각하는 바람에 100여명이 막판에 서울역까지 구보를 한 추억이 있다고 들려준다). 김태호 PD의 기획과 연출에서 두드러진 특징은 좌표를 벗어나는 상상력이다. ‘봅슬레이 국가대표 선발전’,‘댄스 스포츠’, ‘벼농사’ 특집 등 장기 기획은 오락 프로그램에 투여되는 통상적 시간의 범주를 넘었고 좀비 특집 ‘28년 후’는 가장 판타지적인 기획을 통해 방송 제작 리얼리티의 맨살을 드러내버렸다. 주말 저녁 시간대에 상상할 수 없었던 침침한 해상도의 6mm 카메라 화면과 사전지식이 전혀 없었던 연기자의 돌출행동으로 인한 ‘28년 후’ 파국적 결말은 거의 충격적이었다. “모든 재난영화가 지구를 구하고 끝나는 건 아니겠구나 싶었어요. 그런데 방송이 나가고 나서 전국의 시청자에게 분노 바이러스가 퍼졌잖아요? (웃음)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말을 절감했어요.” 활자가 아니라 이미지로 사고하는 쪽에 익숙하다는 그의 말에 수긍이 갔다. 삼각형을 정사면체의 한면으로 볼 줄 아는 사람만이 그처럼 ‘판’을 자유롭게 뒤집을 수 있다. 조연출 시절 그와 함께 일했던 개그맨 송은이는 “감각도 뛰어나지만 따뜻한 연출자다. ‘무리한 도전’ 시절부터 언뜻 보면 몰라도 재미있는 작은 리액션을 놓치지 않는 세밀한 편집이 눈에 띄었다”고 평한다. 밖으로는 부단히 모험을 시도하면서 내부적으로 견고한 유사가족의 안정감을 지켜낸 것도 김태호 PD의 중요한 성취다. 든든한 울타리 안에서 캐릭터의 성년에 이른 6~8명의 고정 멤버들은 터무니없어 보이는 목표 앞에서도 능력의 200%를 발휘하며 어떤 다재다능함보다 긍정과 낙천성이 강력한 경쟁력이라는 교훈마저 전했다. 이제 <무한도전>의 연기자들이 다른 프로그램에 출연했을 때 마치 돌아올 집- <무한도전>- 을 두고 밖에 나가 일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건 나뿐일까? <무한도전>의 떠들썩한 표면 뒤에는 숨은 그림도 있다. ‘여드름 브레이크’의 소동 뒤에는 황량한 철거지역의 풍경이 있었다. 심지어 ‘식객’편에 대해서도 김태호 PD는 “급식예산을 삭감하는 한편에서 물량 공세를 해법으로 생각하는 한식 세계화 사업이 추진된다. 세계인들이 우리 생각만큼 한식을 잘 알지 못한다는 걸 은연중에 짚어주려는 생각도 있었다”고 밝힌다. 그래서 <무한도전>은 집중력을 요하는 쇼다. 방을 닦으며 건성으로 눈길을 던져서는 100% 즐길 수가 없다. <무한도전>이 ‘피곤하게’ 만든 건 시청자뿐만이 아니다. <지붕 뚫고 하이킥!>의 김병욱 PD는 “<무한도전>은 예능 분야 종사자들을 엄청나게 피곤하게 만든 것 같다. 이제는 모두 사력을 다해 찍고 혼신을 다해 편집하지 않으면 시청자를 만족시킬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관전평을 들려준다. 토요일 오후 약속 장소에 나온 김태호 PD의 빨간 헤드폰 속에는 조용필의 노래가 플레이되고 있었다. 복고 취향에 꽂힌 걸까? 속 편한 짐작이었다. 그는 조용필의 음악으로 이루어진 <맘마미아!> 같은 뮤지컬”을 1년이 넘게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그것이 김태호 PD의 휴일이었다. 김혜리: <무한도전>은 걱정해주는 사람이 굉장히 많은 것 같습니다. 매주 토요일 저녁 방영이 끝나자마자 곱씹을 시간도 없이 경쟁적으로 좋고 나쁨을 평하는 인터넷 기사가 쏟아져나옵니다. 최근 ‘식객-뉴욕’ 편 방영 뒤 명현지 셰프와 정준하씨가 벌인 갈등을 놓고 한창 시끄러웠는데요. 김태호: ‘식객’ 특집 첫회에서 허영만 선생님의 <식객>에 나온 “세상의 맛있는 요리 숫자는 세상에 있는 어머니 숫자와 같다”는 말을 인용했는데요. 저희가 볼 때 정준하씨한테 김치전은 어머니가 해준 그 맛이었고 셰프는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김치전을 생각한 것 같아요. 누가 틀린 게 아니라 서로 다른 건데 두분 다 고집이 있어서 생긴 일이죠. 현장에서는 셰프의 지위가 위니까 결과적으로 하극상으로 보였던 것 같아요. 김혜리: 두 사람의 불편한 분위기가 미국식 리얼리티쇼에서 흔히 보는 갈등 요소라고 여겼는데 의외로 파장이 커서 놀랐습니다. 한국의 리얼리티쇼에서는 캐릭터들이 밉상이 되는 데에 한계가 있는 게 아닐까요? 우리 시청자가 어쨌거나 그들이 ‘좋은 사람’이길 바라는 마음이 강한 것 같아요. 김태호: 선한 민족이라 그런가봐요. 착한 인물로 구성된 리얼 버라이어티는 많잖아요. 처음부터 완성된 사람들은 <무한도전>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캐릭터를 가진 유재석씨가 전체 이미지의 4/n가량을 점하고 있기도 하고요. 우리 연기자는 처음에 누가 봐주지 않던 데에서 시작해 여기까지 오는 데 4, 5년이 걸린 건데 가끔 원래부터 스타들이었다고 착각하세요. 중의적이고 함축적인 ‘<무한도전>스러운’ 자막 김혜리: <무한도전>은 팬덤이 활성화된 대표적 프로그램입니다. 얼마나 피드백을 하시나요? 김태호: 방송 직후에는 흥분 상태에서 비난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하루, 이틀 지난 다음에 시청자 게시판을 봐요. 10대부터 30대를 타깃으로 생각하니 주변 사람들의 반응도 보고요. 최근 대학생 크리에이티브팀을 모집했는데 4천명이 이력서를 냈어요. 아이디어를 뽑아내려는 게 아니라 젊은이들의 생각을 공유하려는 목적이에요. 일종의 아카데미 같은 느낌으로 저와 제작진이 직접 참여해서 운영하려고 해요. 저희로선 일의 능률이 떨어질 수도 있지만 교류를 통해 저희 생각도 젊어질 수 있겠죠. 김혜리: 일반인을 대상으로 치러진 ‘돌아이 콘테스트’특집을 보면서도 <무한도전>의 예비군 인력 풀을 형성하려는 게 아닐까 짐작했습니다. 김태호: 기본적으로 연기자와 스탭으로 이뤄진 ‘<무한도전> 가족’이 있지만 그 테두리를 많은 사람이 겹겹이 둘러싸야 외부의 충격이나 내부의 폭발이 있어도 충분히 감쌀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돌아이 콘테스트는,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라는 영화처럼 누가 보기에도 평범한 학생, 회사원들인데 알고보면 ‘또라이’인 사람들을 생각한 거예요. 멀쩡히 지내다가 어느 날 하늘에 ‘또라이’ 마크가 뜨고 홍철이가 드디어 우리가 활약할 때가 됐다고 선언하면 “나는 돌아이야!” 하면서 결집하는 거죠. (좌중 폭소) 김혜리: <무한도전>에서 PD의 존재감이 부각된 건 자막의 구실이 큽니다. 상황요약, 연기자에 대한 연출자의 말대꾸, 시청자를 향한 PD의 ‘구내방송’ 같은 기능을 두루 하면서 화면에 다섯 번째 차원을 보태는 느낌이고, 화면구성이 자막으로 인해 만화책처럼 보이기도 해요. 자막이 또 다른 오락의 소스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은 어떻게 시작했습니까? 김태호: 조연출 시절 1시간 분량이면 A4 용지 100장의 자막을 일일이 손으로 적었어요. 일주일이면 이틀을 소모하는 그 작업이 아무 창의력없이 단순한 노동이 된다면 굳이 우리가 PD일 이유가 없다는 생각을 했어요.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대단한 도전’ 코너부터 자막을 많이 썼는데, 한번 곱씹어볼 수 있는 자막을 쓰려고 했어요. 캐릭터를 부여하고 상황을 요약하면서 뒤에 올 코미디를 예비하는 발단과 전개를 짚어주는 거죠. 시청자가 “저 못난이들 또 저러고 있네”하고 비스듬한 자세로 보다가 “어? 내 마음이 들켰네?”하고 놀라서 주의깊게 보도록 접근한 거예요. 김혜리: 요즘은 직접 자막 작업에 손대지 않나요? 김태호: 지금은 후배들이 쓰죠. 일단 저와 두 후배 PD, 조연출까지 일곱명이 화요일에 1차 시사를 하면서 자막과 CG에 관한 생각을 공유해요. 이야기를 쥐락펴락할 방법을 찾는 거죠. 목요일에 1차 자막 넣은 편집본으로 웃음 더빙을 하며 모니터를 한 다음 <무한도전>스럽지 않은 자막을 걷어내고 수정하는 작업을 해요. ‘<무한도전>스러운’ 자막이란 너무 직설적이지 않고 중의적이고 함축적인 자막을 말해요. 그게 어르신 시청자에겐 어려운 요소일 수도 있죠. 김혜리: 하긴 <무한도전>은 시청률은 높지만, 간혹 전 국민이 알 법하지 않은 문화적 레퍼런스들이 들어가 있어요. 그래서 TV를 틀어놓고 귀만 기울여서는 흐름이나 재미를 놓치기 쉬워요. 김태호: 저희 부모님도 상당히 어려워하실 때가 많아요. 그러나 다른 프로그램과 비슷하게 가면 예능이 다 같이 먹을거리가 없어져요. 스스로 유목민이라고 부르는데 다 같이 풀을 뜯는 상황에서 저희라도 고개를 들어 다른 풀밭을 찾아보지 않으면 여기서 고사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방송사 입사한 이래 3년 전부터 현재까지가 예능이 사내외적으로 가장 높이 대우받는 시기라고 느껴요. 예전 예능국은 일은 뼈빠지게 하면서 부서간 서열로는 밑바닥인 이미지였어요. 지금은 경영과 마케팅, 수익을 따지는 시대가 되면서 드라마와 예능이 맨 위가 됐죠. 지난해에만 <무한도전>이 낸 순수익이 100억원이 넘는다고 들었어요. 광고회사에 따르면 이제는 얼마나 많은 시청자가 보느냐도 중요하지만 누가 보느냐가 중요한 시대가 됐다고 해요. 동아일보와 제일기획에 가지 않은 이유 김혜리: 충청남도 대천이 고향입니다. 바다가 가까운 동네였나요? 김태호: 마음먹으면 20분에 시내를 한 바퀴 도는 곳이었어요. 해수욕장은 버스로 삼십분 거리였는데 어머니가 어디선가 제가 물에 빠져 죽을 수 있다는 점괘를 보셔서 어려서는 바다가 금지구역이었어요. 어쩌다 몰래 안 들키고 놀고 왔다 싶으면 옷을 벗을 때 모래가 주르륵 흘러나왔죠. (웃음) 프로그램에서도 대천의 이미지를 가끔 표현하고 싶을 때가 있어요. 언제인지 모르지만 나중에 돌아갈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김혜리: 텔레비전을 많이 보는 편이었나요? 김태호: 예. 집에서 잘 나가지 않는 아이였어요. 여섯살 무렵에 나도 저런 걸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에 PD가 되는 꿈을 많이 꿨어요. 중·고교 시절 그 꿈을 잊었다가 대학원서 쓰면서 원래 PD를 하고 싶었다는 걸 기억해냈죠. 지금도 집에서 엄마가 보시는 가요 프로의 노래를 흥얼거리거나 엄마와 누나 옷을 뒤져서 의상을 흉내내 입어본 기억이 스쳐가요. 누나 셋에 여동생이 하나거든요. 대학 시절에도 TV 보는 걸 좋아해서 밤 10시면 드라마 보러 들어갔다가 다시 약속 장소에 나가기도 했어요. (웃음) 김혜리: 고려대 신문방송학과 선배와 동기 친구에게 들었는데, 신입생 때 “동남아 순회 공연을 마치고 귀국했다”고 말했는데 다들 믿어버렸다면서요? (웃음) 김태호: 당시 제가 얼굴이 까맣고 말랐었는데 마이클 잭슨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수능시험 본 이튿날 미용실 가서 잭슨 머리 해달라고 했거든요. <데인저러스> 즈음에 앞머리 한쪽으로 흘러내린 머리 있잖아요. 그런데 하고 보니 옆집 아줌마 머리하고 똑같은 거예요. (좌중 폭소) 나중에는 변진섭 머리처럼 풀렸고요. 입학하고 교환학생이라고 하면서 “아버지는 약 파시고 난 텀블링하고 여동생이 앞에서 돈 받았다”고 했더니 약 한달간 다들 믿더군요. 김혜리: 광고 동아리에서 활동하셨죠? 무엇을 배웠나요? 김태호: 15초 안에 극명하게 메시지나 감정을 확 전달해줄 방법을 모색한 고민이 많이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지금도 후배들에게 “다른 건 몰라도 <무한도전>은 웃음 rpm(분당 회전수)이 높아야 해”라고 말해요. <해피선데이-1박2일>이나 <일요일이 좋다-패밀리가 떴다>는 앞에서 천천히 흐르다가 마지막에 웃음을 줘도 되지만 우린 1분에 2~4번은 웃음을 줘야 한다는 게 있어요. 김혜리: <동아일보> 입사시험을 최종까지 합격했는데 포기하고 MBC에 지원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미래가 불투명한 시기에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요. 김태호: 제가 활자 습득력이 떨어지거든요. 글자를 읽고 이해하는 시간이 오래 걸려서 예를 들어 <한겨레>를 완독하려면 6시간이 걸려요. 그래서 기억은 보통 이미지나 화면으로 해요. 당시 <동아일보> 시험문제는 이메일인가 인터넷의 폐해를 논하라는 것이었는데 컴퓨터 화면에 이메일 프레임을 그려서 메일을 하나 썼어요. 여자친구한테 사과하는 내용을 잘못 보내서 바람 피우다 들킨 것으로 오인받는 상황을 가정했죠. 인턴 합격자 12명에 들었다고 8월20일에 출근하라는 연락이 왔는데 어째 남의 옷 입은 느낌만 들고 한숨만 나오는 거예요. “나 글 쓰는 건 싫은데…”싶고. 정장을 입고 오라는 지시도 마음에 걸렸어요. 결국 “내일 못 갈 거 같습니다”라고 전화했더니 “왜요?” 묻더라고요. “마음이… 안 내키네요”라고 대답했어요. (좌중 웃음) 그 전화 끊고 울었어요. 인생을 그르친 게 아닐까 두려워서요. 일단 다니다 전직을 도모할까도 생각했지만, 선배들 보면 그런 경우 백이면 백 첫 회사에 머무르더라고요. 김혜리: 한데 SBS는 원서내는 날짜를 놓쳤다면서요. 김태호: 오늘까지 접수니 자정까지 하면 되겠거니 믿고 친구와 어울리다가 집에 왔는데 저녁 8시에 마감했더라고요. 그날 같이 논 친구는 이듬해 SBS에 들어갔죠. (웃음) 남은 회사가 MBC와 광고회사 제일기획이었어요. 제일기획은 최종까지 갔는데 재학증명서를 빠뜨렸어요. 인사부 과장님이 다음날 퀵서비스로 보내면 받아주겠다고 했는데, 어린 생각에 설마 재학증명서 없다고 떨어뜨릴까 싶어 안 보냈더니 떨어졌죠. 그냥 정이면 될 줄 알았어요. 서로 눈을 바라보며 얘기했으니까…. (좌중 폭소) 사회가 만만치 않다는 걸 느꼈죠. MBC에는 노란 머리에 피어싱을 한 차림으로 면접을 보는데 면접관들이 옷 어디서 샀냐고 웃으며 묻더라고요.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저렇게 못생기고 튀는 애들이 일은 잘한다고 했대요. 난생처음 발급한 신용카드를 만지작거리면서 백화점에서 너무 예쁜 바지를 바라보며 망설이고 있었는데 합격통보를 듣자마자 바지를 산 기억이 나요. 김혜리: 다들 헙수룩한 조연출 시절에도 개성적인 옷차림이 눈에 띄었다고 들었어요. 방송사도 회사인데 옷을 선택할 때 전혀 눈치를 보지 않습니까? 김태호: 너무 옷을 편하게 입으면 사람도 편해지니까, 긴장감을 주고 싶어 그날그날 제 기분과 어떤 촬영이냐 하는 컨셉에 맞게 입어요. 가령 패션쇼편 촬영 같으면 저도 격식있게 정장 입고 가죠. 어느 해인가는 8월31일에 달력으로는 아직 여름이구나 싶어서 하와이안 셔츠랑 반바지 입고 비치볼 들고 가서 편집실에 파라솔 펴놓고 편집했어요. 그날그날 스스로 즐거움을 주지 않으면 힘든 경우가 많거든요. 근데 자꾸 화면이 파란색으로 보여서 흠칫 놀랐죠. 선글라스 낀 걸 잊고. (웃음) ‘루저들의 외인구단’식 컨셉으로 유재석과 의기투합 김혜리: 조연출로서 <일요일 일요일 밤에> <논스톱4> <코미디하우스> 등을 거치셨습니다. 무엇을 훈련하고 습득한 기간이었나요? 입봉하면 이런 색깔의 프로그램을 만들어야겠다는 구상도 있었을 텐데요. 김태호: 먼저 <섹션 TV연예>를 했는데 연예 프로 PD의 일은 리포터에 가까워서 주체적으로 내용을 정할 수 없었어요. <느낌표>에서 7, 8개월 일했는데 일주일에 하루 집에 들어오는 생활이었어요. 마늘과 쑥을 먹던 시기죠.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편집해서 선배한테 보여드리면 혼나고 다시 금요일까지 완성해놓고 주말에는 가출 청소년들 찾아다니고. 그즈음에는 회의실에 메인작가랑 둘이 앉아 있다가 문득 이런 생각을 했어요. “아니, 저 여자는 와이프가 왜 밥 먹자는 말을 안 하지?” 하도 같이 붙어 있으니까 부부처럼 느껴지는 거죠. (좌중 폭소) 그 다음 <일요일 일요일 밤에>를 갔는데 편집 잘하는 친구 왔다고 선배들이 손을 뗐어요. 하지만 그때는 힘들어도 재미있었어요. 잘했다고 박수쳐주니까요. 그러다 스물아홉 되던 해 연말에 쓰러졌어요. 열흘 정도 입원하면서 이제 서른인데 이 직업을 앞으로 계속해야 할지 고민했어요. 디자인을 공부해볼까 싶기도 했고요. 결국 5년만 이 회사에서 일해보자 했는데 올해가 딱 5년째죠. 김혜리: <무한도전>에 투입된 것은 <강력추천 토요일>의 한 코너인 ‘무리한 도전’ 시대부터였나요? 아니면 스튜디오로 들어온 <무한도전-퀴즈의 달인>(‘거꾸로 말해요 아하’ 게임을 중심으로 한 코너)부터인가요? 김태호: 2005년 10월 <강력추천 토요일>의 ‘무모한 도전’을 이어받아 ‘무리한 도전’으로 바꾸고 12월에 실내 스튜디오로 들어와 <무한도전-퀴즈의 달인>으로 넘어갔어요. 촬영할 때보다 결과물의 재미가 덜해 시스템 문제일까 캐릭터 문제일까 고민하다가 원점부터 시작하자 싶어 캐릭터를 명확하게 잡을 수 있는 스튜디오로 들어왔어요. MBC로서는 최초로 연기자 한명당 한대의 카메라를 배치했어요. 예컨대 야외에서 노홍철씨가 작게 말하는 멘트가 아주 시적이고 창의력 있는데 풀숏에서는 소화가 안됐거든요. 예능하면 무조건 카메라 한대 주던 때였는데 무조건 일곱대 이상은 있어야 한다고 고집해서 덕분에 인사위원회에 회부될 뻔했어요. 김혜리: 유재석씨는 <무한도전> 이전에도 <외인구단>이나 <감개무량> 등 어려운 과제에 도전하는 프로를 했었죠. 유재석씨와는 언제 처음 인연을 맺었나요? 김태호: <일요일 일요일 밤에>에서 일할 때 그간 고생했다고 선배가 어떤 프로그램을 하고 싶냐고 물었거든요. “유재석씨랑 하고 싶다. <토요일>로 보내달라”고 해서 처음 만났죠. 유재석씨는 원래 ‘루저들의 외인구단’식 컨셉에 애착이 있었어요. 얼마 전 유재석씨가 그러더군요. 자신의 머릿속에 언제나 잡힐 것 같은데 잡히지 않는 그림이 있었는데 그걸 현실로 만들어준 게 저라고. 저 역시 미국 다녀온 직후 영화 <엑스맨>처럼 초능력이 아니라 ‘저능력’을 하나씩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파워레인저처럼 활동하면 재미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고요. 김혜리: ‘무모한 도전’, ‘무리한 도전’, ‘퀴즈의 달인’을 거쳐 <무한도전>으로 독립해서 180회를 만드셨습니다. 어찌 보면 시즌제이되 시즌 사이에 휴식기가 없는 시즌제였던 셈인데요. 김태호: 드라마는 16부작, 24부작을 하면 끝을 정해놓고 큰 그림을 그릴 수 있지만 예능은 그게 없어요. 재미있다고 박수치던 분들이 그 손으로 손가락질을 해야 끝나는 게 예능이에요. 재미가 시들고 저거 왜하냐고 사람들이 화를 내야 끝나는 것이 슬픈 현실이에요. 그게 싫어서 사장님께 청을 드렸어요. 2008년 3월까지만 방영하고 적어도 3개월은 쉰다는 계획이었죠. 휴식기 동안 쉬는 게 아니라 배낭 하나씩 메고 6mm 카메라 들고 세계 7대 불가사의를 돌고 오겠다. 만리장성이나 피라미드를 우리 그림으로 찍어보고 마추피추에 가서 돌을 직접 등에 지고 날라보겠다. (웃음) 그런데 연초가 되니 그 약속 못 지킬 것 같다는 전갈이 오더라고요. 그 뒤로는 한동안 정말 아무 생각이 없었어요. 연기자들도 체력이 바닥나서 <무한도전>만 빼고 다른 프로그램을 다 접겠다고 한 적도 있었어요. 박명수씨는 “난 하나 해선 안돼”라고 했지만. (웃음) 실행되진 못했죠. 캐릭터는 만들어진 것을 주워모으는 것 김혜리: 시청자 입장에서는 2008년 6월 110회 ‘돈가방을 갖고 튀어라’부터 <무한도전>의 르네상스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110회 이후로 여타 리얼 버라이어티와 확연히 구별되는 포맷을 정립한 특집이 이어졌어요. 김태호: 그맘때 연기자들도 어깨가 처져 있었는데 ‘돈가방’과 ‘좀비’특집이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줬어요. 그해 2월 하하 게릴라 콘서트 끝나고 침체기가 있었거든요. 3월 인도 특집은 현지 프로덕션에 사기를 당하기도 했어요. 촬영의 편의를 위해 인도 국영방송에 관련된 프로덕션과 계약을 했거든요. 나무에 10년째 매달려 사는 사두, 평생 앞구르기만 하는 기인 등을 다 섭외해줄 수 있다고 했고, 발리우드 댄서들도 섭외해 뮤지컬 장면을 찍기로 계획했어요. 그런데 촬영 첫날 사두가 왔는데 너무 평범해 보이고 요가를 해보라니까 다리도 못 찢어요. 이튿날에는 두 번째 기인이 왔다는데 보니까 어제 온 그 사람이 저쪽에서 가짜 수염을 붙이고 있는 거에요. (좌중 폭소) 알고 보니 기인 6명이 다 같은 사람이었어요. ‘하나마나 송’(<무한도전> 멤버들의 별명을 소개하는 노래)을 인도어로 편곡해서 뮤지컬을 찍는 날은 한 무리의 여성이 트럭에서 내리는데 할머니, 애 업은 아주머니 등 동네 아낙들인 거예요. 봄까지 상당히 힘든 시기였어요. 김혜리: 매회 아이템을 연기자들이 정말 모르고 오나요? 아니면 유재석씨 정도는 알고 있는 것인가요? 매회 이번에는 얼마나 알리고 숨길 것인가에 대한 감이 필요할 것 같은데요. 김태호: 모르고 접근해야 하는 아이템은 정말 비밀로 하고, 굵직한 아이템은 유재석씨에겐 얘기하는 경우가 있어요. 아무리 리얼이 재밌어도 때로는 마음가짐의 준비 없이는 재미없는 기획이 있으니까요. 절대 얘기하면 안되는 멤버는 박명수, 정준하, 정형돈인데 알면 꼭 연기에 표가 나서죠. (웃음) 김혜리: 6명 내지 7명의 고정 캐릭터들에게 몇 배수의 별명을 지어주었습니다. 고정된 인원의 캐릭터를 변주하는 효과인가요? 김태호: 캐릭터의 수명은 분명 있어요. 유재석씨 경우가 가장 객관적인 인물이라 캐릭터 찾기가 제일 힘들어요. 이를테면 회전목마의 말에는 여러 색을 칠할 수 있어도 돌아가는 축이 되는 기둥에는 색칠하기가 애매한 거죠. 박명수씨는 어쩌면 제일 현실적인 캐릭터인데 그게 외모에도 잘 맞아요. 정형돈 캐릭터도 사실적이죠. 본인이 “난 캐릭터가 없어. 못 웃겨” 한탄하곤 했는데 네거티브 전략을 쓰자고 했어요. 못 웃긴다고 프로그램에서 자꾸 야단치면 <오즈의 마법사>의 겁많은 사자 같은 못 웃기는 개그맨 캐릭터가 되지 않겠냐고. 그런데 요즘엔 결혼하고 부인 덕 볼 거라는 자신감이 커져서 여유를 부리고 있어요. (웃음) 와이프가 손금을 봤는데 한국 7대 손금이라나요. 노홍철씨는 머리가 정말 좋아요. ‘나 잡아봐라’ 특집 같은 경우 홍철씨 아니면 단선적으로 흘러갔을 이야기가 그가 보태는 변수로 인해 판이 커졌죠. 김혜리: 별명으로 캐릭터를 변주하고, ‘체인지’편처럼 서로의 캐릭터를 바꿔입기도 했고 아예 권력관계를 재편하는 ‘박반장 3주천하’도 있었어요. 이정도면 가능한 변용은 다 해본 게 아닐까요? 김태호: 캐릭터는 어차피 제작진이 만드는 게 아니라 만들어진 것을 주워모으는 거예요. 얼마 전에는 아예 제가 빠지는 안도 이야기했어요. 예를 들어 <북극의 눈물> 감독께 맡겨본다거나 류승완 감독이 들어와서 해본다거나. 류 감독에게 말씀드렸더니 버라이어티를 할 자신은 없고 <무한도전>팀을 데리고 종일 찍으면 10분짜리 단편은 나오지 않겠냐고 하시더라고요. 저는 그 제작과정의 메이킹을 만들면 충분히 협업이 되지 않을까 해요. 올해는 외부와 협력 프로젝트를 활성화한 해였어요. 2, 3년 전에는 당시 예능의 클리셰를 바꾸면서 만들었는데 지난해부터는 아예 환경을 변화시키는 쪽으로 가고 있어요. 캐릭터가 이미 형성된 상황에서 인물끼리 충돌하는 건 이미 재미가 없거든요. 심지어 저희 멤버가 없는 <무한도전>도 생각해볼 수 있고요. ‘외전’도 생각해봤어요. 그동안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나온 관계들, 예를 들어 ‘여드름 브레이크’의 유 형사와 정 형사의 ‘두 형사 이야기’, ‘여드름 브레이크’에서 탈주한 세 죄수의 후일담을 만드는 거죠. 디즈니 월드도 미키마우스에서 시작했지만 다른 캐릭터가 늘어나면서 피라미드 조직처럼 확장됐잖아요. 하나의 세계를 만들고 싶어요. <무한도전>은 매뉴얼이 없다 김혜리: <무한도전>은 <라인업> <1박2일> <패밀리가 떴다> 등 여러 리얼 버라이어티의 후발 주자가 등장하자 기존 틀을 스스로 거의 깨버렸습니다. 만약 후발 주자가 없었다면 <무한도전>은 다른 진화의 궤적을 그렸을까요? 김태호: 이제 저희는 할 수 없는 것들이 많아요. 직업 체험을 해도 그냥 하루 경험으로 끝낼 수 없고 에어로빅 특집을 해도 한회 재미나게 배워보고 마지막 도전 하나로 마무리할 수가 없어요. 시청자가 저희에게 기대하는 건 뭘 했으면 대회에 나가든지 전국구적 성취감을 느끼게 해주는 거예요. 확실히 다른 프로그램의 존재가 이런 발걸음을 빠르게 만들었어요. 먼저 시작한 입장에서 저희가 한 아이템은 다른 프로에서 할 수 있지만, 그 반대는 허용되지 않아요. 김혜리: 멤버들이 디자인에 도전하는 ‘프로젝트 런어웨이’편에서는 케이블TV의 <프로젝트 런웨이 코리아>를 인용했습니다. 케이블에서 볼 수 있는 국내외 리얼리티쇼 가운데 자극을 받는 프로그램이 있습니까? 김태호: <프로젝트 런웨이>는 국내 프로그램이 방영되기 전부터 관심이 있었어요. 지난해에는 미국의 <프로젝트 런웨이>에 가서 인턴으로라도 일해보고 싶다고 메일을 보내기도 했고요. 해외 프로덕션의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세팅이 확실해요. <빅 브러더> <서바이버>를 만든 네덜란드의 엔데몰사도 포맷을 비즈니스 모델로서 세계 각국의 지사를 통해 팔아요. 1, 2년 전 해외에서 <무한도전>의 포맷을 사겠다고 온 사람들이 있었는데 제일 먼저 매뉴얼을 요구해요. 그런데 매주 원점에서 시작하는 우린 매뉴얼이 없거든요. 그들이 내린 결론은 “정말 몹쓸 프로그램이다”였어요. (웃음) 김혜리: 브라이언 싱어 감독이 <엑스맨> 프랜차이즈를 사랑하면서도 커리어의 6년을 바친 것에 대해 불안감을 토로한 인터뷰가 생각납니다. 김태호 PD도 5년째 <무한도전>에 매달리면서 그런 불안이 있을 텐데요. 아마 그 때문에 같은 프로그램 안에서 다양한 장르를 시도하는 게 아닐까요? 김태호: 원래 가장 하고 싶었던 프로그램은 시상식 같은 쇼였어요. 그런데 막상 방송국에 들어와보니 매우 힘든 작업이고 기회도 별로 없더라고요. 그래서 <무한도전> 하면서 음악 쇼, 시상식, 영화 다 해봤죠. (웃음) 솔직히 PD의 평균수명이 입사 뒤 5년은 조연출하고 현장에서 딱 10년 뛰면 데스크로 가거든요. 전 자칫하면 <무한도전>만 하다가 데스크로 물러날 수도 있는데 누가 제 경력을 챙겨줄 것도 아니고, 스스로 하고 싶은 걸 하자는 생각을 했어요.<무한도전>의 색깔을 유지하는 안에서 제가 하고 싶은 것, 연기자들이 해보고 싶은 걸 담아내며 위안을 구하지 않으면 정말 소모품밖에 안되는 거 같아요. 가장 경계하는 것은 ‘자뻑’ 김혜리: 마이클 잭슨이 타계했을 때 통상의 뮤직비디오 대신 <빌리 진> 공연 영상을 프로그램 말미에 넣어서 화제가 됐습니다. 김태호: 마이클 잭슨을 가슴에 안 품어본 사람이 있을까요? 학창 시절 곳곳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던 사람이에요. 고마운 사람한테 감사 표시를 하고 싶었어요. 가장 친했던 고등학교 친구와 둘이서 야간자습 시간에 땡땡이치고 늘 하던 일이 레코드점에 가서 발매 안된 걸 뻔히 아는 잭슨의 DVD가 나왔는지 괜히 물어보고 떡볶이 먹는 거였어요. 근데 그 친구가 고3 앞둔 겨울방학에 잭슨의 새 뮤직비디오가 출시된 것도 못 보고 자살을 했어요. 대학 입학 뒤 <넘버 원>이 나왔을 때 친구가 걸어 들어간 강에 던져주고 왔어요. <마이클 잭슨의 디스 이즈 잇>을 보면서 그 사람의 섬세하고 시적인 말투 때문에 마음이 아팠어요. 리듬을 아침 햇살 속에 겨우 몸을 일으키는 느낌에 비해 설명하고, 너무 큰 음향을 주먹을 귀에 쑤셔박는 것 같다고 표현하는 그런 사람한테 사람들의 막말이 얼마나 송곳처럼 들어갔을까요. 김혜리: <무한도전>이 시작 화면에는 12살 시청가 표지판을 하하씨의 캐릭터가 들고 있습니다. 그가 군대에 갔을 때 “하하가 올 때까진 어떻게든 하고 싶다”고 말한 적도 있어요. 연기자와 연출자의 실무 관계를 넘어서는 것처럼 보이는 이 우정은 어떤 의미인가요? 김태호: 형들은 나이와 가족이 있다 보니 다치는 걸 꺼리지만 하하는 비난을 신경 쓰지 않으면서 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드는 역할을 했어요. “넌 PD 마인드를 가진 연기자야. 내가 고마워하는 걸 알아줘”라고 늘 말하곤 했어요. 실제로 그가 떠난 다음 타격이 오고 시청률이 떨어졌을 때 그동안 비난했던 분들에게 “그것 보라”고 말하고 싶은 기분이었어요. 내년 봄에 돌아올 텐데 소지섭처럼 몸을 한달 동안 만들어오겠대요. 뭘 위해서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웃음) 연기자에 대한 제 애정이 남다르다면 저의 사람 대하는 방식 때문인 것 같아요. 먼저 못 다가가는 성격이라 누가 손을 내밀면 꽉 잡아요. <무한도전> 연기자들은 저한테 양손을 내밀어준 사람이니 진심으로 대하고 고민도 나누고 슬럼프라면 처방도 같이 내리고 싶어요. 한 연기자가 촬영 전날 밤 어머니가 중병 진단을 받았다고 전화를 했을 때는 제작비 손해를 감수하고 촬영을 취소했어요. 그럼으로써 한번은 잃는 게 있겠지만 저는 연기자의 신뢰를 통해 더 많은 걸 얻는다고 생각해요. 김혜리: 정준하씨가 접대부 고용 술집 경영에 연루됐다고 비난받았을 때 개의치 않고 멤버로 함께 가기로 한 것은 우정보다 작은 문제라고 봤기 때문인가요? 김태호: 저희가 정준하씨와 만난 자리에서 진실을 말해달라고 청했고 그는 자기를 믿어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저는 진실이라 믿고 밀고 나가겠다고 했고 만약 진실이 아닐 경우는 당신도 나도 틀린 거다라고 이야기했어요. 단순히 친분 때문에 무시하고 가겠다는 건 아니었어요. 김혜리: 최근 유재석씨 소속사의 외주제작 문제와 맞물려 유재석씨가 <무한도전>에서 하차한다는 설이 보도됐고, 이어 유재석씨가 <무한도전>을 위해 소속사를 바꾸지 않겠냐는 추측도 돌았습니다. 김태호: 저나 유재석씨는 모르는 일이었고 소속사쪽에서 보도자료를 낸 것 같아요. <무한도전>의 외주제작은 3, 4년 전에 논의됐다가 MBC 내부적으로 밖에 주지 않는다는 결론을 냈어요. 지금 다시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 건 소속사쪽에서 MBC쪽에 뭔가를 제의하고 싶은 게 있어서가 아닐까요. 우리 문제인데도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이 논의하고 있으니 이상하게 느껴져요. 김혜리: MBC 예능의 전통적 특징은 공익성과 휴머니티의 강조입니다. <무한도전> 역시 ‘사랑의 도서관’, 달력 만들기 등 봉사와 기부 컨셉의 기획을 비롯해 ‘벼농사’ 특집, 자영업자 살리기를 표방한 ‘박명수의 기습공격’을 만들었습니다. 공익성을 강조하는 방법도 자선의 형태부터 사회적 약자의 시선을 보여주는 접근법까지 다양할 텐데요. <무한도전>은 이 부분을 어떻게 정리하고 있나요? 김태호: 저희가 제일 경계하는 것이 ‘자뻑’이에요. 우리가 높은 데에 있고 베푸는 방식으로 나누는 것이죠. <느낌표>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러브하우스’를 하면서 일종의 거래가 아닐까 고민했어요. 어려운 사람의 신분을 노출하고 슬픔을 다시 끄집어내 상처를 보여준 다음 그 ‘대가’로 집을 지어주고 도움을 주는 게 아닌가 하는 불편함이었죠. 가출 청소년을 찾아다닐 때, 딸을 찾아나선 아버지가 속옷 바람이어야 하는데 제대로 옷을 입고 나와서 헐레벌떡한 느낌이 없다고 선배한테 야단맞은 일이 있어요. 전 표정만으로 다 보여줬다고 생각했고요. ‘러브하우스’도 방송국에서 간다고 말씀드리면 제일 좋은 옷을 입고 화장도 하고 계신데 리얼함이 떨어진다고 지우라고 시키는 일이 있었어요. 그런 게 너무 싫어서 공익은 다시 안 한다고 결심했는데 <무한도전>을 하다 보니 어떻게든 나누고 싶었어요. 3, 4년 전 연말 방영분에서 몰래 어려운 분들의 집 앞에 선물을 놓고 왔죠. 김혜리: 그런데 도움받은 분들의 반응을 보여주는 장면이 없었던 걸로 기억해요. 김태호: 그분들을 노출하지 않았지만 다음날 아침 집 앞의 용달차를 보았을 때 가족의 아버지가 모든 걸 함축하는 리액션을 하셨어요. “오, 하나님!” 하는 한마디였죠. 치킨집과 삼겹살집을 찾아간 ‘박명수의 기습공격’은 ‘신동엽의 신장개업’을 저희 방식으로 새롭게 접근한 거예요. 거기서 음식점 주인, 먹으러 간 운동선수들, 돈을 쓰는 박명수, 어느 하나 밑지는 장사가 아니거든요. 초대된 선수들은 잘 먹어서 좋고 장사하시는 분들은 불로소득이 아니니까 떳떳하게 돈을 받을 수 있고 저희는 기쁨을 나눠서 좋고 세 가지가 결부돼 긍정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공익도 거품은 빼고 진실을 돋보기처럼 확장해서 보여주는 쪽이 맞지 않나 싶어요. “휴대폰 꺼놓고 프로그램만 만드는 게 소원” 김혜리: 미국산 쇠고기 촛불집회 정국에서 자막으로 정치적 코멘트를 넣었다고 화제가 됐고 ‘여드름 브레이크’편에서 철거지역을 배경으로 택해서 주목받았습니다. 그와 같은 세부적 선택을 할 때 망설임은 없나요? 김태호: 저는 한국사회에서 보통 청년으로 자라 군대 다녀오고 대학 졸업해서 매일 신문을 읽는 평범한 사람이에요. 그런 보편적 시각을 담은 자막인데 반대쪽 편향의 시선을 지닌 사람들이 그것을 편향된 정치적 견해라고 봤어요. 그 정도 표현을 주저하는 상황 자체가 도리어 새로운 것 같아요. 불과 3, 4년 전에는 대통령 흉내도 냈잖아요? 빨갱이라고 부르는 협박전화도 받았어요. 김혜리: 예능이 드라마보다 더 사회 현실과 가까이 있을 수 있다는 입장이신가요? 김태호: 특히 버라이어티가 요즘 현실 속으로 많이 들어가잖아요? 그러다보면 만나는 시민, 찾아가는 장소의 현실과 고민과 동떨어져 있을 수 없어요. 다만 주제에 접근할 때도 중의적인 방식을 선호해요. ‘여드름 브레이크’의 경우 철거에 관련된 배경 사실이 없어도 충분히 재미있게 볼 수 있거든요. 정치성이라면 좀비 특집 ‘28년 후’가 더 선명했죠. 1980년에 퍼진 분노 바이러스에 관한 이야기였으니까요. 김혜리: 영화적인 기획들과 비인기 종목에 장시간에 걸쳐 도전하는 특집을 보면 더이상 “얼마나 웃기느냐”가 더이상 <무한도전>의 절대적 척도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김태호: 웃음이 가장 크긴 하지만 포괄적 재미를 추구해요. 만약 스릴이 시청자에게 충분한 쾌감을 준다면 웃음보다 스릴을 좇아갈 수도 있고 공익적 내용이 공감을 끌어낸다면 그 부분을 살릴 수도 있어요. 어차피 개그맨들이기 때문에 웃음은 자연히 들어가요. 전체적으로 저희 멤버나 시청자도 시즌1, 2 때처럼 넘어지는 몸개그가 자아내는 웃음만을 재미로 여기는 사람들은 아닌 것 같아요. 최근 들어 제작진이 바빠진 것은 어느 정도 성장을 마친 캐릭터들을 한꺼번에 다른 환경에 넣는 작업을 하고 있어서죠. 이번주에 눈떠보면 다른 환경에 처해 있고 다음주는 또 다른 세계죠. 과거 <무한도전>이 집에서 성장하는 과정이었다면 이젠 로드무비처럼 역에 멈출 때마다 다른 상황에 맞닥뜨리는 거죠. 가다가 기차가 고장날 수도 있고 그러면 정비를 해서 가야 하고 기관사가 바뀔 수도 있어요. 김혜리: <은하철도 999>가 생각나는데요? <무한도전>이 인기가 확고해지면서 이용하려는 사람들도 많을 것 같은데요. 김태호: 어디 가서 저랑 잘 안다며 영리적 목적을 채우려는 사람도 있고 프로그램을 통해 이익을 취하려는 사람도 있어요. 이름만 빌려달라는 제안도 있고요. 철저히 거절해요. 제 소원은 휴대폰을 꺼놓고 프로그램만 만드는 거예요. 김혜리: 9년차 예능 PD로 일하는 동안 인간에 대해 더 긍정적인 생각을 갖게 되었나요? 아니면 반대인가요? 김태호: 정말 친한 존재도 가끔은 상처가 되고, 다시는 너희랑 일 안 한다 싶다가도 너희밖에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게 인간인 거 같아요. 연기자와 제작진을 향한 감정이 프로그램에 대한 감정으로 연결돼요. 저희끼리 관계가 나쁘면 프로그램도 재미가 없어져서 늘 조심하고 있어요. 이제 <무한도전>은 하나의 프로그램이라기보다 저와 멤버들, 제작진의 관계를 통틀어 규정하는 말 같아요. 저나 멤버들에게 전화가 걸려왔을 때 “<무한도전> 하고 있어”라는 대답이, 한 프로그램을 녹화하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나 지금 집에서 쉬고 있어” 하듯 일상을 말하는 걸로 들려요. 追伸 소재고갈? 그게 먹는 건가요? 물론 김태호 PD가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다. 다만 “소재는 인체 세포 수만큼, 여기 공기 중에 떠다니는 먼지의 숫자만큼 많다고 생각해요. 문제는 그걸 어떤 내러티브로 엮어가느냐죠”라고 털어놓았을 뿐이다. 과거를 물어도 그의 이야기는 깔때기라도 달린 듯, 현재진행형의 기획과 내년에 추수할 아이디어들로 연방 되돌아왔다. 홍콩에 가서 <무간도>를 찍어도 재미날 것 같고, 버라이어티 안에 뮤지컬을 넣는 방식을 숙고 중이라며 상상도를 펼쳤다. 4년 동안 지지부진하던 <무한도전> 캐릭터 사업을 비로소 매듭지었다고 홀가분한 표정을 지었고, 사진작가에게 의뢰해서 작업해온 <무한도전> 스틸 사진 전시회를 예고할 때는 설레 보였다. 사진을 촬영하는 동안 그의 배낭을 맡았다가 무게에 무릎이 꺾일 뻔했다. 자료 파일과 서류, 그리고 노트북 컴퓨터가 들어 있다고 했다. 그 등짐을 멘 채 김태호 PD는 지인의 결혼식장에 가는 길이었다. 누군가에게 ‘재미’란 그렇게 지구만큼 거대하고 무거운 것이었다.

[아저씨의 맛] 올해의 아저씨로 그대를 선정하리 (최종회)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고 유종의 미를 거둬야 할 이 시점에 몇명 있지도 않은 친구 중 하나가 나의 안티였음이 밝혀지다니(<씨네21> 732호 ‘오마이이슈’ 참조) 먼저 심심한 유감의 뜻을 표한다. 나, 손석희 정말로 좋아한다. 누군가를 좋아한다고 그 사람이 만들거나 참여한 작품을 꼭 경험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박찬욱을 좋아한다고 박찬욱 영화를 꼭 봐야 하는가 말이다(으응? 이거 아냐?). 그녀의 주장을 반박하고 싶지만 주얼리 정을 더 좋아하긴 한다. 실은 사랑한다. 한때 MSN 대화명이 보사마였으며, 방송 담당후배에게 보사마 인터뷰는 어떻겠냐며 지그시 강압적으로 기사화도 성사시켰고 매일 잠자리에 들기 직전 그가 출연한 <지붕 뚫고 하이킥!>의 모든 장면을 낱낱이 복기하는 짓을 <거침없이 하이킥>에 이어 또다시 하고 있다. 내가 <지붕킥>에서 가장 흥미롭게 보는 부분은 청춘남녀들의 러브러브 사각관계도 아니고, 해리와 신애의 <톰과 제리>식 아옹다옹도 아닌 바로 보사마와 세경의 치열한 경쟁과 권력관계다. 일반적으로 한 집안의 서열 2위쯤 되는 사위와 권력의 최하층에 있는 가정부와의 암투는 한국 드라마사에 전무후무한 플롯이며 대한민국 사위계의 한점 얼룩으로 남은 미달이 아빠조차 이렇게 기묘한 긴장관계를 보여준 적은 없다. 게다가 이 관계에서 표면적인 약자인 세경은 ‘시크한 듯 무심’한데 보사마 혼자서 맹렬하게 경쟁심과 권력의지를 불태운다는 것이 비극적인 부조리다. 이순재 고사를 앞두고 세경을 견제하며 공부하는 보사마는 측은하고, 유일하게 만만한 세경에게 종종 언성을 높이며 명령하고 싶어 하는 보사마는 치사하다. 그런데도 보사마가 멋진 건 이렇게 웃기고 한심해서 도무지 좋게 보이기 힘든 그 모든 상황에서도 늘 품위를 버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드라마 캐릭터건 버라이어티쇼의 코미디언이건 요즘 웃음을 주는 아저씨들은 대체로 가부장의 권위와 함께 품위를 패키지로 갖다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걸 비난할 생각은 없다. 두개가 분리되기는 쉽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2009년 텔레비전 화면으로 쏟아져 나온 수많은 아저씨 캐릭터들 가운데 유일하게 보사마만이 권위의 부재와 품위의 만개를 실천한 인물이 아닐까 싶다. 게다가 그가 아직 잃지 않은 한 가닥 낭만주의는 이 드라마의 뾰족하고 차가운 웃음 한가운데서 우리에게 미지근한 손난로를 제공한다. 그래서 ‘아저씨의 맛’의 막을 내리며 올해의 아저씨로 보사마를 선정할란다. 보사마, 아니 족사마! 2010년에도 족구황제 족사마의 찬란하게 빛나던 시절처럼 잠깐잠깐(자주는 말고요) 당신의 찬란한 카리스마를 보여주세요. 그동안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들게 감사드립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가족애의 회복과 성장 <카페서울>

synopsis 일본인 프리랜서 기자인 준(사이토 다쿠미)의 전문 취재 분야는 식도락이다. 취재차 서울을 찾은 그는 우연히 전통떡 카페 ‘모란당’을 알게 된다. 그는 모란당에서 만든 떡맛에 감동해 취재를 시작한다. 그런데 모란당은 동네에 불어닥친 재개발 붐으로 철거위기에 놓여 있다. 어느 날 모란당의 주인인 상우(최성민)가 용역깡패들에게 폭행당하고, 소식을 들은 상우의 동생 상혁(김정훈)이 가게를 찾아온다. 한때 음악에 빠져 집을 나갔던 상혁은 준과 함께 모란당을 지켜내기로 결심한다. <까페서울>은 일본의 제작사와 감독, 한국의 스탭들이 모여 만든 영화다. 영화에서 보이는 한국과 준의 대사로 들리는 일본은 모두 개발의 흐름에 따라 전통적인 가치가 사라져가는 곳이다. 일본 전통과자를 만들던 부모 밑에서 자란 준 또한 동네에 들어선 아파트에 가게를 내줄 수밖에 없었던 상처를 지니고 있다. 일본인인 그가 같은 상처를 겪은 한국의 청년들과 함께 전통을 수호하면서 가족애를 회복하는 한편, 성장한다는 게 <까페서울>의 이야기다. 분명 억지스러운 설정이지만 거부감을 일으키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영화의 선한 의도가 재미까지 보장해주는 건 아니다. <까페서울>의 장르는 떡을 소재로 한 요리영화에 가깝다. 가게를 지켜야 한다는 미션과 요리대결이 결부되는 상황은 일본의 요리만화에서도 볼 수 있는 가장 기초적인 플롯이다. 그런데도 영화가 요리대결의 긴장과 관객의 혀끝을 진동시킬 요리과정을 묘사하지 않은 건 아쉬운 점이다. 게다가 요리대결의 결과가 맛이 아닌 추억의 힘에 의해 좌우되는 설정은 주제에 부합하는 것과 별개로 밋밋해 보인다. 가족애를 강조하거나, ‘파이팅!’을 외치는 장면들이 배우들의 어색한 연기에 실려 전면에 나서는 탓에 다소 민망한 순간들도 있다. <까페서울>은 최근 한국에서 개봉한 텔레시네마 시리즈와 같은 선상에 놓을 수 있을 것이다. 텔레시네마는 한국의 배우와 드라마 PD, 일본의 작가가 협력한 프로젝트다. 동아시아 영화시장의 통합 비전을 강구해본다는 의미는 있지만, 작품성으로나 시장성으로 볼 때 두 프로젝트 모두 소품에 가까운 결과물을 내놓는 데 그쳤다. 처음부터 가능성을 타진해보는 정도였을까, 아니면 그만큼 이야기를 구성하는 양국의 정서가 다른 걸까. 비슷한 프로젝트가 또다시 계획된다면 그때는 좀더 과감한 시도를 해야 할 듯 보인다.

[그 액세서리] 진주는 여자의 상징

다시, 메릴 스트립과 에이미 애덤스다. <다우트> 이후 일년 만의 재회. 에이미 애덤스는 간이 큰 건지 자신감이 지나친 건지 식탁 밑에서 내일 당장 내다버려야겠다는 주인의 얘길 엿들은 강아지 같은 난감한 얼굴을 하고도 메릴 스트립과의 투톱 주연을 마다하지 않는다. <줄리&줄리아>는 1940년대 파리의 줄리아와 2002년 뉴욕 퀸스의 줄리 얘기다. 줄리아(메릴 스트립)는 살집이 풍만하게 잡히는 40년대의 전형적인 미국 중산층 주부. 겉치레를 싫어하고 실용적인 걸 좋아하는 쿨한 성격이지만, 여자라는 본질과 천성을 온몸과 마음으로 즐긴다. 그래서 요리를 할 땐 남자 유니폼 같은 편한 셔츠를 입고 앞치마는 스커트 허리에 아무렇게나 꽂아둘지언정 사랑받는 ‘하우스와이프’의 표본인 진주 목걸이만은 꼭 챙긴다. 이후 줄리아 차일드가 텔레비전에서 요리쇼를 하는 전설적인 셰프가 된 뒤 독특한 억양의 클로징멘트 ‘본 아페티!’(프랑스어로 “맛있게 드세요”)와 목에 딱 맞게 채운 진주 목걸이는 그녀의 상징이 된다. 줄리(에이미 애덤스)는 별 볼일 없는 중급 공무원으로 9·11 사태의 후유증을 상담하는 지루한 일을 하지만 밤에는 식도락가로 변신해 자신의 블로그에 ‘줄리아 차일드식’ 레시피를 올린다. 줄리아 차일드의 긍정과 낙천, 삶에 대한 사랑은 줄리에게 빛이고 희망이고 구원이다. 한번도 만나지 못했고 서로 다른 시절을 산 줄리아와 더 밀접한 관계를 원하는 줄리에게 남편은 진주 목걸이를 선물한다. 바로 줄리아 차일드의 ‘그 진주 목걸이’다. 따뜻한 감정에 대해서라면 따를 자가 없는 감독 노라 애프런이 만들고 앤 로스가 의상을 맡은데다 음악은 알렉상드르 데스플라(줄리가 랍스터와 난투극을 벌일 때 토킹 헤즈의 <사이코 킬러>를 배경음악으로 넣는 센스라니). 그리고 메릴 스트립과 뜻밖의 즐거움 스탠리 투치까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1940년대 파리와 2002년의 뉴욕을 공평하게 분배한 장면들도 즐겁고 ‘르 코르동 블루’와 ‘셰익스피어&컴퍼니 서점’, ‘딘 앤 델루카’ 같은 친숙한 이름들도 반갑다. 무엇보다 <줄리&줄리아>는 죄의식없이 버터와 휘핑 크림, 초콜릿 파이와 마요네즈를 먹는 기분을 기억하게 한다. 고기맛 젤리라는 ‘아스픽’, 닭간과 크림치즈로 속을 채운 닭고기 요리 ‘뿔레 오티 아라 노르망’, 맛있는 디저트 ‘플로팅 아일랜드’(예전에 이태원 르 생텍스에 이 메뉴가 있었다), 줄리아와 줄리의 궁극의 메뉴였던 비프 부르기뇽이 화면에 꽉 찰 땐 냉정한 이성과 아름다움에 대한 가치관 따위는 다 잊게 된다. 그저 식욕만 남고, 그 마음이 세상에서 제일 정직하고 가치있는 감정인 듯 느껴진다.

[전영객잔] 이 시체를 보라, 그리고 응답하라

올해 일년 동안 한국영화의 이미지가 무엇이었느냐고 누군가가 내게 묻는다면 그냥 간단하게 집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한국영화를 보는 동안 나는 내내 이 집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그냥 다시 저 집에 들어간다고 느낄 정도였다. 먼저 세편의 영화. 가장 무서운 집. 홍상수의 <잘 알지도 못하면서>. 영화감독 구경남(김태우)은 낯선 제천에서 하는 영화제에 참석했다가 친구 부상용(공형진)을 만난다. 그리고 한밤중에 그의 집을 방문한다. 그는 이상한 아내 유신(정유미)과 살고 있다. 이 집은 문턱을 넘을 때마다 시간을 뒤죽박죽으로 만들기 시작한다. 아무리 앞과 뒤를 따지려 들어도 일시에 이 모든 시도를 와해시키면서 어디까지가 거짓이고 어디서부터가 착각인지 알 수 없는 마술적 상황으로 끌고 간다. 숏 사이의 접속이라는 몽상. 말 그대로 귀신들린 집. 가장 이상한 집. 박찬욱의 <박쥐>. 신부 상현(송강호)은 친구 강우(신하균)의 집을 찾아간다. 나는 이 영화를 두번 보았지만 아무리 맞추어보아도 일층과 이층의 면적이 일치하지 않는다. 이 가분수의 집은 거의 쓰러질 것만 같다. 이층은 과밀하게 우굴거리고 일층은 대부분 비어 있다. 도무지 올라갈 방법을 알 수 없는 이층. 올라온 다음 이야기의 전개에 따라서 마치 자기 증식이라도 하듯이 늘어나는 방들. 도대체 이층에는 몇개의 방이 있는 것일까? 이야기를 따라 전개되는 것 같은 복도. 라 여사(김해숙)는 비밀을 알고 있을까? 태주(김옥빈)가 이 집에서 나가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가장 음란한 집. 봉준호의 <마더>. 낮에도 거의 밤처럼 어두운 집. ‘마더’(김혜자)는 자기 집에서 이불을 펴고 아들과 한번 하고 싶은 마음을 고백하지 못할 뿐이다. 나머지는 모두 핑계이다. 도준(원빈)의 방에서 한밤중에 윗옷을 벗은 친구 진태(진구)가 걸어나와서 그녀를 껴안을 때 그녀가 정말 안아주기를 바랐던 사람은 누구일까? 두명의 이중효과, 혹은 착시효과. 이때 어느 쪽이 환상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뒤에서 얼굴을 보지 않고 안을 때, 도준과 ‘마더’가 몇 차례이고 그 체위를 반복하면서 이불에서 껴안을 때, 그래서 견딜 수 없는 시선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을 때, 위반의 선을 마지막으로 방어하기 위해서 남은 것은 무엇일까? 잠과 꿈. 무의식과 환상. 죽음과 섹스는 생각보다 훨씬 가까이 있다. 이 음란한 환상을 건너지 않고 ‘마더’를 설명할 수 있을까? 한국영화의 집들을 생각하다 물론 다른 집도 있다. 또 다른 세편의 영화들이 다루는 집. 이를테면 박찬옥의 <파주>. 은모(서우)의 집에 들어가서 사는 중식(이선균). 그는 왜 환대받지 못하는 것일까? 같은 질문. 왜 은모는 자기 집에서 주인이 아니라 손님처럼 행동하는 것일까? 혹시 그 집이 환대하지 않는 사람은 중식이 아니라 은모가 아닌가? 시간은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한다. 혹은 할 수 없다. 플래시백으로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집. 사라졌다가 나타나고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집. 그런 다음 폭발시켜버린 집. 그때 정말 폭발시킨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 와중에 진행되는 철거. 집을 부순다는 문제. 혹은 철거 용역에 몸담은 상훈(양익준). 내면 속의 지옥과 같은 두채의 집. 상훈과 연희(김꽃비)의 집. 집을 부수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 도시의 변경에서 부서져가는 집. 쫓겨나는 사람들. 집에서 쫓겨나면 어디서 살아야 할까. 양익준의 <똥파리>. 미쳐버린 동생, 혹은 신들린 동생을 찾아서 돌아온 언니 희진(남상미)이 마주해야 하는 집. 아파트라는 집. 그 집의 수상한 이웃들. 이용주의 <불신지옥>. 그들이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이 영화들은 어쩔 수 없이 집에 관한 사건을 연상시킨다. 올해 2009년 1월20일 서울 용산구 한강로2가에 세워진 5층 상가에서 새벽 6시45분에서 8시30분 사이, 고작 1시간45분 만에 철거민 5명과 경찰특공대 1명이 죽었고 23명이 부상당했다. 집은 우리 시대의 자본주의적 전선이다. 그것은 육체이며, 삶이며, 실제의 현실이다. 모든 것은 거기서 시작되고, 시작되어야만 하며, 거기서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 집은 삶의 크기이며 그것을 탈취당할 때 삶도 도둑질당할 것이다. 집의 전유와 재전유에 대한 전술을 우리는 공유해야만 한다. 왜 이 영화를 무조건 긍정하고 싶은가 그러므로 나는 지금 여기에 긴급하게 한편의 영화를 추가하고 싶다. 그냥 간단히 말하면 이 영화는 올해의 발견이자 최전선이다. 정재훈의 다큐멘터리 <호수길>은 마치 이 모든 비밀회의에 가까운 유령들의 난국을 타개해야 할 방법을 찾기라도 하는 것처럼 상황을 수정하려고 한다. 나는 이 영화를 무조건 긍정하고 싶다. 한국영화가 건축적 구조 안에 갇힌 것처럼 보일 때 거의 오로지 혼자서 <호수길>은 전혀 다른 지리적 탐사를 시작한다. 우리는 서로 전혀 다른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호수길>의 선언이다. 이 영화를 보기 위해서는 그 어떤 지식도 필요없다. 그냥 같은 시대에 같은 지리적 동네에서 함께 공존한다는 의식만 갖추고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우리는 허깨비가 아니다. 영화 제목 <호수길>은 서울시 은평구 응암2동의 골목 이름이다. 영어 제목도 ‘Hosu-Gil’이다. 이게 골목 이름이긴 하지만 이 동네에는 호수가 없다. 아마도 예전에는 있었을 것이다. 아무리 이 길을 따라가 보아도 호수는 나오지 않는다. 예전에는 있었지만 없어진 것. 그리고 이 영화는 지금은 있지만 없어져가는 것에 관한 영화이다. <호수길>은 간단하지만 소개하기에 까다로운 영화이다. 그래서 시네마디지털서울 신은실씨의 소개가 조금 길긴 하지만 대신 인용할 생각이다. “낮에 나온 반달이 뜬 하늘과 산이 보이는 동네에는 ‘호수길’이라는 이름이 붙은 골목이 있다. 사철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 동네에는 플래카드가 붙어 있다. 한편, 볼일 보러 집을 나서는 아주머니, 산책하는 젊은이와 소년 소녀들, 텃밭을 일구는 아낙들, 마실 나온 할머니,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과 그들을 돌보는 엄마가 있고, 때로는 경찰차가 동네를 오가고, 개와 고양이도 산다. 그런데 어느 순간, 동네의 마지막 불빛이 꺼져버리고, 갑자기 빛이 번쩍이자 빈집 천지가 되어버린 동네를 부수는 굉음이 들려온다. 개는 먹이를 찾아 헤매고, 고양이는 죽음을 맞는다. 빈집에서는 불꽃과 연기가 피어오르기도 하고, 불도저와 인부들은 물을 뿌려가며 동네를 계속 부순다. 햇빛은 강하게 빛나고, 새들도 동네를 떠난다.” (시네마디지털서울2009 카탈로그, 105쪽) 시적인 소개의 문장들. <호수길>에는 단 한마디의 대사도 없고,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도 없다. 물론 멀리서 목소리가 들리기는 하지만 그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아들을 수 없다. 분명하게 들리는 소리는 그저 동네 어귀에서 개짓는 소리뿐이다. <호수길>의 마지막 자막은 다음과 같다. “이 영화의 촬영은 2006년 가을부터 2007년 봄까지, 그리고 2008년 2월26일, 7월10일, 2008년 8월부터 11월까지 서울시 은평구 응암2동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마치 SF영화같아보이는 이유는 <호수길>은 2년 동안 촬영한 영화이다. 그건 짧은 시간이 아니다. 이때 이 시간에 대해서 우리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호수길>은 자기 운명을 알고 있는 영화이다. 정재훈은 취미로 자기가 사는 동네를 찍다 보니 어느 날 갑자기 재개발 지구로 결정되어서 사람들이 이주하고 텅 빈 동네에 혼자 남아서 이 영화를 찍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간단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영화. 그러나 결과가 아니라 과정을 바라보면서, 상황에 대한 그 어떤 방어능력도 없이 할 때 매우 복잡하게 이루어졌음을 깨달을 수 있다. “동네에 어느 날부터인가 검은 안경을 쓴 사람들이 돌아다니기 시작했어요. 기분이 나빠졌어요. 그래서 촬영을 시작했지요.”(2009년 11월7일 관객과의 대화) 물론 이 말은 비유이다. 이 영화에는 검은 안경을 쓴 사람들이 단 한숏도 나오지 않는다. 그때 나는 정재훈의 비유가 인상적이었다. 검은 안경을 쓴 사람들. 장르영화에서 악당들을 한눈에 알아보기 위해서 사용하는 인덱스. 혹은 공동체 커뮤니티에 나타난 낯선 이방인들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소도구 컨벤션. 그는 왜 그런 비유를 사용한 것일까? 정재훈이 촬영을 시작한 첫날은 아무리 빨라도 서울시 은평구 응암2동이 재개발지구로 결정된 다음일 것이다. 말하자면 행정적 결정이 난 다음에 시작된 영화. ‘포스트’로서의 영화. 이미 영화가 시작되기도 전에 결국 떠나가야 하는 결정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그 아이들. 물론 영화는 단 한번도 그들에게 물어본 적이 없다. 좀더 정확하게 카메라는 동네 주민들과 접촉하지 않는다. 마치 낯선 혹성에 와서 탐사를 하는 듯한 카메라. 당신은 이 영화가 우주로부터 불시착한 것처럼 시작한 첫 장면을 생각해야 한다. 나는 자꾸만 <호수길>이 SF영화처럼 보인다. 정재훈은 언제나 일정한 거리만큼 물러나 있고 그들과 카메라의 거리는 그들이 하는 대화가 들리지 않을 가청영역 바깥에 놓여 있다. 그래서 목소리는 들리는데 말이 없다. 말의 바깥에 있을 때 대상은 풍경의 일부가 된다. 망원렌즈로 담은 사람들은 카메라의 마이크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정재훈은 카메라의 거리감과 거의 동일한 마이크의 사용을 통해서 시각과 청각 둘 사이의 거리감을 일치시킨다. 그렇게 물러났을 때 영화에서 남는 것은 동사뿐이다. <호수길>은 오로지 동사들만이 존재하는 표면효과만을 따라가고 있다. 우리는 표면을 본 다음 그 안의 현실에서 작동하는 인과관계를 따져 물어야만 이 영화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말하자면 <호수길>을 보면서 나를 집중하게 만들었던 표면효과들의 예. 정재훈은 철거를 사건으로 다루지 않았다. 그는 시위에 관심이 없다. 틀림없이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는 갈 데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호수길>은 고요하게 진행된다. 동사무소 직원의 모습은 보이지 않으며(행정적 작동) 측량 기사들의 모습도 등장하지 않는다(수행적 장치). 물론 전경들도 나타나지 않는다(사건의 변수). 먼저 첫 번째, 은평구 응암2동은 지방 시골에 있는 폐쇄된 동네가 아니다. 지하철 3호선을 타고 가면 종로3가에서 채 30분이 걸리지 않는 곳에 위치해 있는 서울 안의 거주지역이다. <호수길>에서 철거 공사가 시작되기 전, 그러니까 시작하고 난 다음 42분이 될 때까지 이 동네의 생활을 찍은 장면들에서 신기할 정도로 남편들, 혹은 아버지들은 보이지 않는다. 나는 영화를 본 다음 정재훈을 만났다. “이 동네에 출근하듯이 가서 찍은 건가요?” 말하자면 촬영을 정해놓은 시간대가 있느냐는 질문의 우회. 그가 대답했다. “아뇨, 전 이 동네에 살면서 찍었습니다.” 정재훈은 남편들이, 혹은 아버지들이 거리에 보이는 시간대를 피해서 찍었다(또는 그것을 편집에서 사용하지 않았다). 그 사실 때문에 마치 이 동네가 세상에서 일시적으로 분리되어 나온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남자들은 영화의 후반부, 이 동네를 때려부술 때 비로소 등장한다. 그런데 이런 배제 상태의 진행은 다큐멘터리에서 신기한 결정이다. 전술로서의 핸드헬드, 이 긴급함 그 다음 두 번째. <호수길>의 자막에 따르면 영화는 “2006년 가을에서 2007년 봄까지. 그리고 2008년 2월26일, 7월10일, 2008년 8월부터 11월까지” 찍었다. 이 기간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를 모두 담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치 은평구 응암2동은 날씨의 변화가 전혀 없는 동네처럼 보인다. 언제나 화창하게 갠 맑은 날씨. 단 한 차례의 비도 오지 않으며, 겨울 내내 단 한번도 눈이 내리지 않는다. 아니, 흐린 날씨조차 없다. 여기는 캘리포니아가 아니다. 우리는 서울에서 살면서 이렇게 맑은 날씨를 볼 수 있는 날이 흔치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 말의 방점은 서울이다. 영화를 찍으면서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는 맑은 날씨로 설정하면 그걸 여러 날에 나누어 찍을 때 숏을 연결시키는 일이다. <호수길>은 단 하루로 설정한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사건도 없이 그 동네의 일상을 찍었다. 장면 사이의 극적인 연결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 동네의 날씨는 언제나 맑게 개어 있을 뿐이다. 맑은 하늘. 구름조차 없는 날씨. 다만 가끔 바람이 분다. 거의 초현실주의적인 상황. <호수길>의 첫 장면은 낮달이 보이는 하늘이다. 낮에 달을 보다니. 그런 다음 마치 카메라는 거기서 추락하는 무언가를 뒤쫓듯이 지구로 내려온다. 아니, 자신이 추락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구로 내려온 다음부터 카메라는 항상 멈춰 서서 찍고 있다. 우주선이 고장 난 것일까? 그 자리에서 옆으로 팬을 하거나 혹은 틸트를 할 수도 있을 텐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다큐멘터리에서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뜻은 극영화와 근본적으로 다른 의미가 있다. 두 가지 뜻. 극영화는 그렇게 인물을 세워놓거나 아니면 프레임을 정해놓고 동선을 설계했다는 뜻이다. 다른 뜻. 다큐멘터리에서 일단 카메라가 서면 그걸 움직일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은 인물을 쫓아갈 생각이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거기에 아름다운 풍경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때 우리가 보아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당연히 그 장소에 머물러 있는 시간이다. 장소의 느낌, 시간의 흐름. 대부분의 다큐멘터리가 인물을 쫓아가느라 바쁘고 사건을 다루느라 매달리는 동안 정재훈은 응암2동을 느껴보고 있다. 정재훈은 <호수길>을 세 가지 방식으로 찍었다. 하나는 카메라가 고정해서 서 있는 상태이고 다른 하나는 42분10초 이후, 그러니까 철거 ‘이후’부터 손으로 들고 찍은 것이다. 그러나 이 둘이 대조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아니, 차라리 그 둘 사이의 차이를 잘못 느꼈으면, 이라고 바라고 있다고 느낄 정도였다. 아마도 정재훈은 할 수만 있었다면 나머지도 모두 멈춰 서서(fixed) 찍었을(camera) 것이다. 그런데 철거 ‘이후’ 카메라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때 움직이는 이유, 혹은 손으로 든 이유는 (아마도)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우선 미학적 근거. 앞부분의 멈추어선 카메라는 그 동네의 일부처럼 보인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그냥 그 동네의 시선처럼 보이기도 한다. 마치 거기 서 있는 오래된 건물이 바라보고 있는 듯한 느낌. 그런 다음 철거가 시작되자 카메라는 자기가 의지할 데를 잃어버린 것처럼, 자기의 근거를 상실한 것처럼 흔들린다. 표류의 상태. 자기가 살던 장소가 낯선 공간이 되었을 때 겪어야 하는 고향이라는 지평의 상실. 그러나 이렇게 말할 때 사람들과 전혀 말을 나누지 않는 마이크를 설명하기 어려워진다. 그 다음 실용적 이유. 디지털카메라를 들고 철거현장에 단 한번이라도 가본 사람이라면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카메라를 들이댄 지 채 십분이 지나지 않아 누군가에게 촬영을 제지당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철거 현장은 이상하게도(당연하게도?) 마치 사건 현장처럼 그것을 은폐하려고 한다. 혹은 그 정도라면 운이 좋은 경우이고 카메라를 압수당하거나 신분을 물어본 다음 왜 여기서 촬영을 하고 있는지를 설명 못하면 신고를 당할 수도 있다. 카메라를 세워놓으면 갑작스러운 충돌 혹은 압수로부터 달아나기 어려울 것이다. 손으로 들고 찍을 때에만 확보할 수 있는 시간. 게다가 <호수길>은 대부분 혼자 촬영하면서 진행되는 영화이다. 말하자면 손으로 들어야 하는 상황. 전술로서의 핸드헬드. 이 긴급함. 깨져버린 평화. 고요함 뒤의 위기감. 마치 정지된 것처럼 진행되는 이 영화에서 손으로 들고 찍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호수길>이 담고 있는 ‘이후’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다. 오가와 신스케의 유명한 테제. 다큐멘터리에서 카메라를 다루는 손과 발은 그 영화의 세계관이다. <호수길>은 그것을 실천한다. 마지막 남은 방법은 ‘이전’ 장면의 멈추어 선 숏에서 갑자기 인서트처럼 개입하는 줌의 사용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다시 설명할 것이다. 기대하는 사건은 일어나지 않고 정재훈의 첫 번째 대상. 지구로 내려온 카메라가 먼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벌레와 움직이는 나뭇잎들이다. 거기에는 아직 사람이 담기지 않았다. 살아 있는 것들. 살아서 움직이는 것들. 물론 이 영화는 자연을 예찬하려는 것이 아니다. 사운드는 거의 들리지 않고 응암2동의 골목을 보여주는 프레임들은 마치 <스틸 라이프>의 구도에 가깝다. <호수길>은 같은 화면을 일정하게 되풀이하면서 반복해서 보여준다. 어떤 학습효과. 우리는 이 동네의 풍경을 마치 이곳에서 살아가는 사람처럼 받아들여야 한다. 이 일정한 간격의 진행에는 우리가 충분히 그 풍경을 보았다고 생각할 때까지 기다린 다음 화면이 바뀐다. 그 안에 담긴 삶의 리듬감. 동네의 소리들이 매우 작게 녹음된 화면들은 시작하고 4분40초가 지나서야 비로소 마치 스며들듯이 분명하게 들린다. 저물어가는 여름, 혹은 이미 시작된 가을. 골목 계단을 그저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렇게 한참을 바라보면 아줌마와 소녀가 계단을 걸어내려온다. 그 둘의 사이는 알 수 없다. 왜냐하면 두 사람 사이에 어떤 대화도 없기 때문이다. 그 둘은 지나가면서 흘낏 카메라를 보기까지 한다. 하지만 정재훈은 개의치 않는다. 카메라는 이 계단에서 사람이 지나가길 기다린 것이 아니다. 두 사람은 우연히 그 시간에 여기를 지나갔고 그렇게 그들이 지나가기를 내버려둔다. 그렇다고 이 두 사람을 설명할 생각도 없다. 정재훈에게 중요한 것은 이 시간을 담는 것이다. 이 순간 지나가는 두 사람은 이 시간에 나뭇잎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과 동일한 세상이라는 리듬의 일부이다. 말하자면 이것이 <호수길>을 진행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호수길>에 관한 그 어떤 정보 없이 영화를 보기 시작한다 할지라도, 그러니까 ‘이후’ 철거가 시작되는 참혹한 장면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할지라도, 당신은 이 영화에서 감도는 이상한 불길함이 불러일으키는 긴장감에 사로잡힐 것이다. 이를테면 무언가 일촉즉발의 느낌. 이토록 고요하고 평화로워 보이는 풍경.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서울에서 산다는 것은 매일 사건과 마주하는 것이다. 사건이 없는 서울의 풍경은 우리를 긴장시킨다. <호수길>은 낮의 풍경을 보여주다가 갑자기 한밤중으로 건너뛰어들어간다. 어떤 조명의 도움도 없는 촬영. 그저 골목에 켜진 가로등, 혹은 대부분 불이 꺼진 동네. 모두가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때 영화 혼자 깨어 있는 것은 대부분 이유가 있다. 거기 무언가 기다려서 보아야 할 것이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장면들은 아주 깊은 밤, 거의 대부분이 잠든 밤까지 기다려서 찍은 것 같다. 왜냐하면 불을 켠 집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마치 외로운 섬처럼 불이 켜진 집. 하지만 우리가 기대하는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 거기 이제는 살지 않는 아이들을 기억하라 그러면 다시 <호수길>은 낮 시간으로 옮겨간다. 어제와 다름없는 하루. 두 번째 낮은 이 동네의 작은 텃밭에서 (무언가를) 경작하는 할머니와 아저씨의 모습이다. 이때 카메라는 갑자기 줌으로 다가간다. 좀 갑작스러워서 느닷없게 느껴지는 줌은 우리에게 지금 카메라가 얼마나 멀리 떨어졌는지에 대한 물리적 확인처럼 보인다. 정재훈은 줌으로 다가가서 무언가를 잘 보려는 생각이 아예 없다. 텃밭에 있는 할머니와 아저씨에게 다가가서 무얼 보여주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 골목길을 기억해야 한다. 그런 다음 두 번째 밤을 맞는다. 앞에서 본 밤 장면과 똑같진 않지만 그러나 같은 태도를 갖고 밤을 지새운다. 물론 이 장면이 밤을 지새우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오랫동안 찍힌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동네의 고요한 시간대를 찍기 위해서 기다려야 하는 카메라는 도리없이 밤을 새웠을 것이다. 말하자면 그 시간을 찍기 위해서 기다리면서 보내는 시간. 두개의 시간. 기다리는 시간(의 두께). 촬영한 시간(의 순간). 그러나 마찬가지로 우리는 여기서 어떤 사건도 보지 못한다. 혹은 일어나지 않는다. 어떤 출현도 없다. 무엇을 기다리는 것일까. 아니, 무엇을 지키는 것일까. 그런 다음 다시 낮. 같은 리듬의 반복. 저 멀리 할머니 한분이 걸어가고 있다. 지팡이에 의지해서 가까스로 걸어갈 정도로 불편한 걸음걸이. 그렇게 걸으면서도 힘겨워서 자꾸만 다른 한손으로는 벽에 기댈 만큼 힘겨운 걸음. 지켜보던 카메라는 그때 갑자기 움직이면서 할머니에게로 줌인한다. 우리는 등 뒤에서 보고 있기 때문에 그 할머니의 얼굴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본다고 해서 누군지 알 수 있을까. 줌으로 쫓아가던 카메라는 특별하게 무얼 보려는 게 아닌데도 불구하고 한번 더 줌인을 한다. 두번의 줌인. 지나치게 멀리서 줌을 해서 심지어 화면의 질감에 픽셀이 묻어나는 게 보일 정도이다. 흔히 말하는 ‘화면이 뭉개지는’ 거리까지 다가간다. 이례적인 방법. 우선 정재훈은 할머니(의 행동이나 동선)을 훔쳐볼 생각이 없다. 할머니는 그저 걸어가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어디로 가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줌은 둘 중 하나이다. 이 줌인은 대상의 방법을 기억시키는 기호이다. 같은 말의 다른 말. 여기서는 대상이 아니라 대상을 보는 줌의 방법을 보라는 뜻이다. 혹은 이러한 방법으로 보는 대상은 동일하다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모든 대상을 이런 방식으로 보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거의 멈춰 서서 진행되는 숏 사이에서 만들어내는 리듬감이다. 이 줌인은 대상에 가까이 다가간다는 느낌이 들기는커녕 그 화질 때문에 오히려 대상과 카메라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확인시켜준다. 그러나 이 장면이 <호수길>에서 어떤 전환점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영화는 다시 원래의 리듬으로 돌아간다. 놀이터에서 잠든 할머니. 아이들의 노는 소리. 같은 풍경이 반복된다. 그리고 같은 구도가 되풀이된다. 우리는 화면의 변화에 대해서 점점 민감해진다. 계절이 바뀌고 있다. 할아버지는 두터운 옷을 입었고 나뭇잎들은 단풍이 들었다. 세 번째 마주치는 밤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불길한 밤이다. 밤거리에 불빛도 없이 개가 짖고 있다. 개는 낯선 사람을 가장 먼저 알아보는 짐승이다.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 먼저 소리칠 때, 지금 여기에 들어선 낯선 자를 조심하라는 경고이다. 낯선 자들. 그들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다시 되풀이되는 낮 장면. 우리가 이미 보았던 계단 길. 골목길을 올라오는 소녀. 아이들은 종종 카메라를 쳐다본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눈 마주침이 영화와 인물 사이의 어떤 이화작용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아니다. 차라리 그저 거기 있는 나무가 눈을 돌려 바라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서로 인사를 하는 것 같은 친화감. 그런 다음 <호수길>에서 가장 이상한 숏이 등장한다. 몇번이고 반복되는 응암2동의 전경을 멀리서 바라보는 롱숏 장면이 아이들의 얼굴과 디졸브된다. 교과서적으로만 말하면 디졸브는 추억의 입구이거나(플래시백의 시작) 두개의 장소 혹은 사건을 연결할 때 사용한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 어느 쪽도 아니다. 그런 다음 놀이터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가까이 다가가서 찍는다. 여기서는 망원렌즈로 찍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이들에게 카메라와의 접촉을 허락한다. 아이들은 유심히 바라보다가 차례로 다가와서 카메라를 만지기도 한다. 마치 기억의 소환과도 같은 순간. 서로 다른 것을 한데 묶어서 함께 생각하도록 요구할 때, 나는 이 롱숏의 집들이 다름 아닌 클로즈업의 아이들이 사는 장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롱숏과 클로즈업의 매듭. 차라리 단일한 결합. 숏으로 나누고 그런 다음 재결합. 그러나 두개의 숏이 디졸브 형식을 가지면서 만들어내는 유령효과. 유령들. 거기 이제는 살지 않는 아이들을 기억해야 한다. 불길함, 혹은 사태를 예견함 그리고 다시 우리가 몇번이고 보았던 그 골목길. 동일한 프레임. 멀리 떨어진 카메라(와 마이크). 아줌마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고 아이들이 그 길에서 뛰어논다. 저 멀리서 오던 할머니는 힘에 부치는지 중간에 놓인 침상에 앉아 쉰다. 6분40초 동안 그저 그 자리에서 지속되는 이 장면은 앞부분, 그러니까 철거가 시작되기 ‘이전’ 장면 중에서 가장 길다. 하지만 이 장면은 플랑 세캉스가 아니다. 마지막 순간 갑자기 줌으로 잡아당긴 아이의 얼굴 클로즈업을 보여준다. 그러고 나면 이제 평화로운 장면은 모두 끝났다. 우리가 영화에서 처음 보는 저녁 장면. 몇번이고 보았던 자리에서 바라보는 응암2동의 전경. 동네 여기저기에 불빛이 들어온다. 다시 밤 장면. 동네 전경을 보여주지만 사실상 어둠 속에서 거의 보이지 않는다.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전봇대의 불안정한 불빛. 다시 낮. 동네 어귀에 서 있는 할아버지는 자꾸만 돌아본다. 그 할아버지를 카메라는 줌으로 당겨서 보여준다. 이제까지 이렇게 카메라를 의심하듯이 바라보던 시선은 없었다. 무엇이 할아버지로 하여금 카메라를 그렇게 쳐다보게 만든 것일까? 카메라도 이제까지 무심하게 지켜보던 것과 달리 할아버지를 망원렌즈로 쫓아간다. 거의 ‘뭉개질 정도로’ 다가간 줌. 그런 다음 놀이터가 보인다. 이때 카메라는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에게 관심이 없다. 저 멀리 아파트촌에서 솟아오르는 연기. 여기는 바그다드가 아니다. 도시 한복판에서 연기가 피어오를 때 우리가 느끼는 불길함. <호수길>은 그렇게 우리에게 사태를 예감하게 만든다. 침묵. 그저 물이 떨어지는 소리. 회색빛 시멘트 벽을 따라 처마에서 물이 떨어진다. 이 장면이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은 계절을 알 수 있는 시간의 기호가 전혀 없는데도 불구하고 겨울이라는 추위를 보게 만든다. 두 번째. 거기 그 집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느낌이 없다. 누가 물을 틀어놓은 것일까? 어디서 물이 새는 것일까? 그 물방울은 고드름이 아니다. 말하자면 인적이 사라진 황폐함. 그러나 아직 사람들이 떠나간 것은 아니다. 다시 밤. 무시무시한 밤. 사람들이 사는 마지막 밤. 유리창 너머로 텔레비전 모니터의 푸르스름한 빛이 흘러나온다. 그 사이로 사람이, 어쩌면 모니터에 보이는 그 누군가가 희미하게 어른거린다. 유령의 흔적. 그가 사람이라면 이 한밤중에 왜 잠들지 못하고 서성거리는 것일까? 그가 모니터 속의 그림자라면 지금 이 늦은 밤에 누가 보고 있는 것일까? 이도 저도 아니라면 저 빛은 무엇인가? 저 푸르스름한 빛만이 남았다. 저건 등대가 아니다. 불 꺼진 동네. 그리고 개 짖는 소리. 어디에도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그때 문득 카메라는 그리운 듯이 하늘을 본다. 어둠 속에서 관용도가 매우 낮은 저가기종의 디지털카메라로 밤하늘을 본다(는 것은 미친 짓이거나 무언가 필사적으로 거기 볼 게 있다는 뜻이다). 프레임을 메우는 지글거리는 그레인. 밤하늘에 구름이 지나가고 나면 달이 슬그머니 모습을 내민다. 나는 이 영화의 첫 장면이 낮달이었음을 기억한다. 달은 다시 지워진다. 파리가 들끓는 고양이, 그 무시무시함 42분10초. 다시 여름. 다시 놀이터. 그러나 우리를 잡아끄는 것은 시각적 이미지가 아니라 청각적 소리이다. 갑자기 유리창이 깨지는 날카로운 소리. 철거 ‘이후’의 첫 장면. 카메라를 손으로 들고 오른쪽으로 느리게 팬을 하는 이 파노라마 숏은 ‘경축 응암 제8구역 관리처분 계획인가’라는 플래카드를 보여준다. 집들은 이미 창문이 대부분 뜯겨나갔고 거리는 마치 지금 막 폭탄 테러를 당한 듯이 파편이 나뒹굴고 있다. 이 스산한 바람소리. 나뭇잎들은 그때처럼 펄럭이고 있다. 두개의 펄럭임. 플래카드와 나뭇잎. 우리가 몇번이고 본 그 골목길을 따라 카메라는 느리게 뒤로 걸어간다. 이동한다고 말하는 대신 걸어간다, 고 말한 이유는 명백히 이 후진 트래킹숏은 그 어떤 것에도 의지하지 않고 말 그대로 손으로 들고 뒷걸음질치면서 찍은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모두가 떠나가버린 이 동네에서 정재훈이 마주치는 건 거의 부서져버린 화단에서 놀고 있는 한 마리 고양이다. 이때 우리는 이 고양이를 이제까지 정재훈이 사람을 보여준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찍고 있다는 사실을 환기해야 한다. 지나치게 줌으로 다가가서 픽셀이 고스란히 보일 정도로 뭉개져버린 화면. 왜 정재훈은 사람과 고양이를 같은 방법으로 찍고 있는 것일까? 말하자면 의인화의 숏. 몇 차례이고 반복해서 보여주었던 한계 허용치를 벗어난 줌. 정재훈은 거기 있는 건 고양이가 아니라 할머니, 혹은 할아버지, 어쩌면 뛰놀던 소년 소녀들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혹은 그들을 기억하는 그의 방법일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고양이에서 느리게 줌아웃하는 카메라는 카메라와 고양이 사이에 끼어든 두 마리의 나비를 따라 움직인다. 당연히도 이 나비는 CG가 아니다. 우연히 끼어든 나비. 정재훈은 예민하게 그 우연의 리듬을 따라 카메라의 시선을 옮겨간다. 그러나 나비는 매몰차게도 금방 프레임 바깥으로 빠져나간다. 철거는 계속되고 있지만 정재훈은 그 현장에 별 관심이 없다. 그가 보는 것은 오로지 흔적들뿐이다. 정재훈이 고양이 다음에 마주치는 건 골목을 떠도는 개 한 마리이다. 그리고 그 개를 따라간다. 그 개는 우리가 이미 보았던 그 골목, 어린아이가 뛰어놀면서 카메라를 얼핏 바라보던 그곳에서 마치 그 아이처럼 혼자 논다. 누가 버리고 간 것일까? 개는 먹을 것을 찾아서 여기저기 쓰레기통을 뒤진다. 하지만 사람들이 떠나간 이 골목에 먹을 것이 남아있을 리가 없다. 그 불쌍한 개. 그 개의 목에 묶여 있는 목걸이를 보건대 아마도 인도견이었던 것 같다. 그 개 없이 그 개의 주인은 집 밖으로 나설 수 있을까? 남아 있는 존재들은 떠나간 사람들을 생각하게 만든다. 정재훈은 자꾸만 나무를 바라본다. 아니, 차라리 그 참혹한 풍경에서 눈을 돌리기 위해 눈길을 돌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멀리서 포클레인이 집을 때려부수는 소리는 쉴새없이 들려온다. 정재훈은 그 소리를 들으면서 자기가 잘 알고 있는 길, 이미 우리가 보았던 계단, 카메라가 서 있던 자리를 차례로 방문한다. 거기에 감정을 담는 것은 아니지만 보는 우리는 이미 사라져버린 풍경 앞에서 쫓겨난 과거의 시간을 본다. 영화가 시작된 지 54분15초. 저 멀리서 공사하는 포클레인. 이제야 모습을 드러낸 거대 로봇. 부서지는 집들. 날리는 먼지가루. 거기에는 어떤 애도도 없다. 누군가가 두고 간 빨래. 바람에 펄럭이는 이불보. 그 이불이 불러일으키는 상념. 이불은 잠을 잘 때 덮는 것이다. 우리는 잠을 집에서 잘 때 제일 편하다. 자기가 살던 집을 떠나서 낯선 곳에서 잘 때의 불편함. 그런데 왜 이불을 두고 간 것일까. 이불이 불편한 짐이 되는 삶을 상상해보라. 이 풍경을 바라보는 건 전봇대의 참새들이다. 정재훈은 마치 그들을 출연이라도 시킨 것처럼 자기 카메라 안에 담는다. 한 마리, 두 마리, 집 저편으로 새떼가 무리를 지어 이곳을 떠난다. 말하자면 이제는 아무도 살 수 없는 곳. 날아갈 수 없는 카메라는 시선을 떨구듯이 땅으로 눈을 돌린다. 거기 우리가 좀전에 보았던 고양이가 죽어서 화단에 버려져있다. 이 말의 방점은 버려져 있다는 것이다. 거기서 죽은 것이 아니라 죽어서 버려졌다는 말은 누군가가 이 고양이를 죽였다는 뜻이다. 누가? 대답은 명백하지만 끔찍하다. 사람들은 이곳을 떠났고 남은 사람은 둘 중 하나이다. 이곳을 떠날 수 없는 사람과 지금 이곳을 철거하는 사람. 이 고양이는 누구의 고양이일까? 이곳을 떠날 수 없는 사람. 이곳을 철거하는 사람에게 가장 귀찮은 건 누구일까? 떠나지 않는 사람. 그를 떠나게 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협박. 가장 무서운 협박은 목숨을 놓고 벌이는 협상이다. 시체를 보여주는 것은 가장 단순하고 직접적인 위협이다. 파리들이 들끓는 고양이의 시체. 시체가 보여주는 이 장소의 무시무시한 상황. 이때 <호수길>에서 거의 유일하게 노이즈에 가까운 음향효과를 들을 수 있다. 스피커를 찢는 듯한 피드백 노이즈. 시체라는 결과 안에 담긴 폭력을 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상상력이 아니라 현실 안에서 살아본 우리 시대의 철거에 관한 경험의 공유이다. 만일 이 시체를 그저 무심코 지나친다면 매년 전세 이사 걱정없이 사는 당신이 그저 부러울 뿐이다. 집을 부수는 건 추억이 아니라 현실 <호수길>은 시종일관 거리에서, 골목길에서, 계단에서 진행된 영화이다. 하지만 56분30초가 되었을 때 정재훈은 집 안에 들어간다. 하지만 그가 집 안에 들어가서 무언가를 발견하려는 것은 아니다. 집은 이미 모두 부서졌고 거기에는 삶의 흔적이 없다. 정재훈은 방 안에서 거의 중얼거리는 것 같다. 도대체 집 안과 바깥이 무슨 차이가 있는가. 그때 누구라도 깜짝 놀라게 쾅, 소리가 들리면서 바람결에 문이 닫힌다. 이 소름끼치는 소리. 사람 없는 집에서 문을 여닫는 바람. 카메라가 방 안을 둘러보기 위해서 천천히 한 바퀴 돌면 뜯겨져나간 창문 바깥에서는 포클레인이 집을 부수고 있다. 그때 여닫히는 방문 소리와 기울어져가는 천장, 비틀리는 건축물의 기둥이 내는 사운드는 마치 사라져가는 집이 내는 신음소리처럼 무겁고 비통하다. <호수길>의 마지막 장면은 7분15초 동안 포클레인이 집을 부수는 단 하나의 숏이다. 주변은 이미 다 부서져서 그 많던 집들은 사라졌고 마치 공터처럼 텅 빈 공간에 세채의 집이 서 있을 뿐이다. 폭탄을 맞은 것 같은 풍경. 아니, 차라리 여기는 달 표면처럼 보인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이다. 그중 가운데 집을 포클레인이 부수기 시작한다. 정재훈은 그걸 바라본다. 이 장면은 너무 짧다. 여기서 이 시간은 특별한 호소이다. 7분15초는 이층집 한채를 완전하게 다 때려부수는 데 걸리는 시간이다. 사건없는 사건. 패배가 불 보듯한 상황의 정치학. 집은 우리의 삶의 방어선이다. 그것을 갖기 위해 삶의 대부분을 보낸다. 그 집에서 쫓아내기 위해 내가 알지 못하는 협상 테이블에서 재개발 결정이 난다. 그런 다음 그 집을 부수는 데는 고작 7분15초면 충분하다. 폭력적으로 기획된 질서. 그것을 당해낼 수 없는 가여운 존재의 슬픈 지리학. 정재훈은 두번 이 동네를 마지막으로 360도 회전하면서 바라본다. 거의 다 부서져버린 동네. 그게 단지 기억의 철거라고만 말할 수 있을까. 집을 부수는 건 추억이 아니라 현실이다. 푸르른 하늘. 맑게 갠 날 떠 있는 한점 구름. 오늘은 날씨가 참 좋다. 응암2동은 그렇게 거의 다 부서졌다. 그런 다음 에필로그처럼 덧붙여진 장면. 불꽃이 타오르고 있다. 불꽃. 우리 마음에 있는 그 꽃. 그저 재가 되게 내버려둘 것인가, 아니면 그 꽃을 온 들판에 피어오르게 할 것인가. 기다림. 기대가 와야 할 미래. 기대, 그리고 미래. “나는 집 밖으로 나가서 동네를 오랫동안 쳐다보곤 했다. 그렇게 동네에 머무르면서 내가 보고 들었던 게 이야기가 되었다” 정재훈 자신의 <호수길>의 소개의 글. 그 비통한 과거완료시제. 이제 그는 더이상 이 동네에 머무를 수 없을 것이다. 더이상 오랫동안 쳐다볼 만한 것도 없어졌을 것이다. 더이상 보고 들을 만한 것도 없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호수길>은 푸닥거리가 아니다. 그 반대로 우리에게 이 침묵으로 가득 찬 영화는 요구한다. 정당한 요구. 요구의 정의. 응답하라! 당신이 대답할 차례이다. 함께 대답할 당신에게 있는 힘을 다해서 해피 뉴 이어!

[시사 티켓] 그러고도 공영방송이라고?

영화명: <주먹이 운다> 관람자: 김인규 KBS 사장, 박효규 책임 프로듀서, 최시중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 1월1일부터 완전 기분 잡쳤다. KBS 인기 버라이어티 쇼 <스펀지2.0>에서 한건 터뜨렸다. ‘스페셜하고 재미있는(fun) 지식’이라는 프로그램명이 무색하게, 심각한 여성비하 내용을 공공연하게 방송했기 때문이다. 내용인즉 ‘새해특별기획’이라는 명목으로 유부남 2103명에게 “아내를 소녀시대보다 예뻐 보이게 만드는 최고의 내조는?”이라 물었다 한다. 4위는 술먹은 다음날 “여보, 꿀물 드세요”라고 꿀물을 대령하는 아내다. 3위는 “설거지는 그냥 두세요”라며 집안일 신경 안 쓰게 해주는 아내다. 2위는 “여보, 밖에 나가서 바람 좀 쐬고 오세요”라며 혼자만의 시간을 갖도록 배려하는 아내다. 1위는 남편보다 먼저 출근하며 “여보, 저 오늘도 돈 많이 벌어올게요”라고 웃어 보이는 맞벌이 아내다. 그리고 최악의 내조는 ‘꾸미지도 않고 저축만 하는 아내’란다. 얼마 전 “키 180cm 이하 남자는 루저” 발언으로 한바탕 소란을 일으킨 <미녀들의 수다>의 추억이 가시지도 않았는데, KBS가 노이즈 마케팅의 묘를 터득했나보다. 그렇지 않고서야 제정신으로 저런…. 이 와중에 최시중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은 KBS 수신료를 현행 2500원에서 올해 5천~6천원 정도로 인상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고. 아오… 텔레비전을 잘 안 보면서 꼬박꼬박 당연하게 수신료를 내는 것도 억울해죽겠단 말이다. 진실로, 주먹이 운다.

[그 요리] 요리도 환경입니다

한국에서도 알게 모르게 인기를 끌었던 책 <앗 뜨거워>의 주인공 마리오 바탈리가 실제 텔레비전에 등장해서 책에 묘사된 그 거대한 덩치를 흔들며 요리를 한다면? 바로 <철인요리왕>(Iron Chef)에서 만날 수 있다. 붉은 머리를 질끈 동여매고, 유아틱한 칠부바지에 이탈리아산 빨간 요리화를 신은 그 모습을 보기만 해도 묘한 포스가 느껴진다.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스, 일본식 등 알아주는 미국 요리계의 거장들이 등장하는 뜨끈뜨끈한- 높은 열량 때문이기도 하다- 프로그램이다. 이들에게 도전자가 나와 일대일 ‘맞장을 뜬다. 격투기라도 할 만한 덩치 좋은 사내들이지만, 다행스럽게도 요리로 결투를 한다. 제한시간 내에 주어진 재료로 누가 더 맛있게(필자가 보기에는 ‘누가 더 칼로리가 높게’) 만드냐가 관건이다. 마치 주방 한구석을 훔쳐보는 것처럼 생생하고 활력이 넘치는 스튜디오를 꾸몄다. 출연 요리사의 실제 어시스트들이 마구 칼질을 해대고, 믹서를 돌린다. 뜨거운 주방 열기가 안방에도 그대로 배달된다. 역시 미국 프로그램답다. 요리사 한두명이 소박하게 오밀조밀 요리를 해나가는 유럽식과는 스케일이 다르다. 서너명의 보조 요리사들이 실제 주방 같은 어마어마한 장비를 다루며 요리를 ‘생산’하듯 한다. 장비들은 왜 그리도 크고 힘이 좋은지 마치 군용 ‘지엠시’ 같은 파워를 보인다(돼지 한 마리라도 통째로 갈아버릴 것 같다). 요리조차도 에너지 과소비다. 에너지만 그런 건 아니다. 프랑스식, 이탈리아식, 그리스식의 다양한 요리를 선보이는데 하나같이 원래의 그 나라 요리가 가진 소박하고 섬세한 정서와 스타일은 없다. 나는 그렇게 살찌는 재료가 많이 들어가는 그리스나 이탈리아 요리는 처음 봤다. 글쎄, 출연자들이 그 나라 요리라니까 그런가보다 하는 수밖에 없는 걸까. 게다가 접시당 칼로리가 엄청나다. 코스로 먹게끔 전채부터 메인, 디저트까지 만들어 경쟁하는데 한 접시만 먹어도 성인 일일권장량이 될 것 같다(하긴, 미국의 한 패스트푸드점의 디저트 1인분은 자그마치 3천 칼로리가 넘는 것도 있단다). 에너지처럼 칼로리도 과소비다. 아하, 저렇게들 드시니 비만 왕국이 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요리는 고급이되, ‘웰빙’에 대한 성찰 따위는 없다. 철학? 그런 건 옥수수기름에 튀겨버리라고 그래, 이런 소리가 튀어나올 것 같다. 뭐, 신나는 요리 쇼라니까 거창하게 철학 따위가 등장하는 건 그야말로 웃기는 소리라고 해도 이건 좀 심하다. 누군가가 이럴 것이다. “쳇, 요리 프로그램조차도 철학 교수들이 나와서 토론해야 하겠수? 그냥 맛있으면 되는 거지.” 틀린 말씀은 아니다. 그러나 그 ‘맛있으면 그만’에 지구가 다 멍들어서 대책이 없다는 게 문제 아니겠수. 이젠 어떻게 하면 맛있게 먹을 수 있을까에서 ‘적은 에너지로 지구를 보존하면서 맛있게’ 먹을까를 고민하는 시대로 변했다. 이건, 이미 우리 생존의 문제니까 말이다. 조리법에 성찰 같은 건 없어, 라고 생각한다면 출연하는 요리사들의 화려한 기술은 볼 만한 눈요깃거리다. 날고 기는 근·현대 요리사들이 이룩한 기술은 죄다 나온다고 봐도 좋다. 저온조리법- 형태를 잃지 않으면서 재료를 부드럽고 맛있게 익히는 기술 sous vide 조리법- 은 물론, 갈고 튀기고 찌는 놀라운 기술들이 죄다 선보인다.

[김혜리가 만난 사람] MC 김제동

예능인들은 우리가 가장 친근하게 느끼는 연예인이다. 구르고 넘어지고 고함치고 춤추고, 사적인 약점을 농담의 소재로 삼아 쾌활하게 노출하는 그들은 아무것도 숨기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럴수록 나는 그들이 ‘언제나 맑음’을 연출하기 위해 카메라 뒤에 봉인해놓은 우울과 분노, 무거운 생각들의 가공할 부피를 상상하며 아찔해지곤 한다. MC 김제동은 희로애락의 절반만 선택적으로 보여주는 일이 유난히 여의치 않아 보이는 예능인이다. 그건 ‘분열’을 스스로 강렬히 의식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김제동은 웃음을 주는 중에도 농담에서 혹시 파생될지도 모르는 부작용에 신경을 쓰고, 의례적인 마무리 멘트도 허언(虛言)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는 티가 역력하다. 2인 MC 체제일 경우 그는 대개 여성적 역할을 수행한다. ‘진지함’은 웃음을 주는 사람들에게 매우 경계해서 다루어야 할 물건일 텐데, 신념과 의견을 자신의 무대에서 완전히 배제하는 일은 김제동에게 불가능해 보인다. 한명의 시민으로서 공동체에 대해 갖는 견해도 거기 포함된다. 그는 행사를 열고 닫으며, 사이를 메우는 MC인 동시에 스스로 풀어놓을 ‘본론’을 갖고 있는 유창한 이야기꾼이며 대중 강사다. 김제동은 하릴없는 구식이기도 하다. 7년의 방송계 생활도 그를 별로 바꾸어놓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그는 여전히 산에 올라 흥에 취하고 종이신문을 오려 스크랩하고 피부가 맞닿는 느낌이 살아 있는 대화를 할 때 가장 신명을 느끼는 남자다. 김제동은 고운, 어쩌면 지나치게 고운 체를 지녔다. 유보와 부연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예컨대 성을 상품화하지 말자는 이야기를 한 다음, 밖에 나가 미녀에게 눈길이 끌리는 자신을 마음에 걸려한다. 야구의 미덕을 예찬하다가도 배구나 축구가 상처받을까봐 걱정한다. 서기만 표기하면 단기가 섭섭할까봐 병기한다. 침묵도 표현에 포함시키고 무반응도 반응의 범주에 넣어 사고하려고 애쓴다. 그러다보니 많은 책을 읽고 다양한 견해를 수집해 오류를 줄이려고 한다. 토론을 가장 잘할 것 같은 연예인으로 뽑혀 <100분 토론> 400회 특집에 초대되는 반면, <일요일이 좋다-X맨>의 ‘당연하지’ 같은 상대를 일축하는 게임에 서툴렀던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리얼리티 쇼와 말하는 순서가 공평히 배분되지 않는 ‘가로채기’ 형식의 토크쇼가 부상하면서 방송에서 그가 느꼈을 곤혹은 능히 짐작되는 바다. 2009년 12월 초부터 대학로에서 열린 ‘노 브레이크’ 토크 콘서트는 그런 김제동이 자신에게 깔아준 최선의 멍석이다. 유난히 추운 겨울 저녁, 지하 소극장 통로에 줄을 선 사람들은 어떤 온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일찌감치 매진된 이 공연의 표를 몇주 전에 예매하고 기다려왔을 남녀노소 관객은, 소곤소곤 킥킥거리며 주최쪽에서 마련한 ‘김제동하면 연상되는 단어’의 빙고 카드를 채우고 주제 토크 게시판에 자신의 경험담을 붙였다. 그날 주제는 ‘내가 살아오면서 받은 작은 탄압’이었다. 150석 규모의 객석에 둘러싸인 야트막한 무대에, 김제동이 예의 약간 어깨가 솟은 구부정한 자세로 등장했다. 그리고 “아주 웃기거나 재미있는 공연은 아닙니다”라고 허두를 뗐다. 재미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나고 싶었다는 말은 진담이었지만 능청이기도 했다. 그는 노래하고 농담하고 책을 읽고 속삭이고 호소했다. 때로는 점점 빨라지는 생각의 속도를 말의 속도가 따라잡지 못해 문장의 끝에 이르면 숨차했다. 말하는 김제동의 음성은 메밀베개처럼 잘그락댔지만, 김광석의 <일어나>를 부를 때는 관악기의 리드마냥 처연한 바이브레이션을 냈다. 두 소리 사이에 걸쳐진 음역이 그가 가진 정서의 폭인 듯했다 마이크를 들고 세 방향의 객석을 향해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그의 모습은 부흥회의 전도사 같기도 했고 로커 같기도 했다. 아니, 안경을 벗은 클라크 켄트 같았다. 1시간 반으로 예정된 공연이 3시간이 다 되어서야 끝났을 때 김제동은 정말 외모조차 달라 보였다. 그는 크고 강했다. 김혜리: 엊그제 MBC 방송연예대상에 참석한 모습을 봤습니다. 시상이나 수상을 하지 않는데도 처음부터 끝까지 앉아 박수를 쳐주시더군요. 속없다는 말도 들으실 법한데요. 김제동: 그런 재미있는 자리를 놓칠 이유가 있나요? 특히 지난해처럼 상에서 완벽히 자유로우면 더욱 편하게 즐길 수 있습니다. (웃음) 콘서트 특석을 잡은 기분이죠. 상은 권위도 중요하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이 박수를 쳐주느냐가 중요… 하다는 진부한 이야기를 떠나서(웃음), 가야지요! 결혼식에 참석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방송 일을 시작한 이래 3사 연예대상은 한번도 불참한 적이 없어요. 지난해는 토크 콘서트와 겹쳐서 KBS와 SBS 시상식은 가지 못했습니다. KBS는 연락이 없긴 했는데 아마 제 콘서트 일정을 고려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김혜리: 유재석씨가 수상소감을 밝히면서 “쟤(김제동)는 웃고 있는데, 나는 마음이 아파요”라고 언급했을 때 김제동씨 얼굴이 확 붉어지시더라고요. 김제동: 무대 위에서 누가 제 얘기를 하면 그렇게 부끄럽습니다. (웃음) 유재석씨에게 진짜 고맙습니다. 저도 타봐서 압니다만(웃음) 대상을 타면 그 와중에 누굴 챙기기가 쉽지 않습니다. 지지난해 SBS 연예대상 때에는 제가 <야심만만> 잘리고 SBS 프로그램이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재석이 형이 시상식엔 네가 있어야 된다며 전화를 하셨습니다. “자식아, 너 지금 뻘쭘하지? 어서 와” 하는 마음 너머 마음이 읽혔어요. 누가 다가와서 말없이 머리를 쓰다듬어준 것 같았어요. 관객은 비밀과 언어 공유할 때 일치감 느껴 김혜리: 살아오면서 피치 못할 사정으로 말을 잃으면 어떻게 될까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까? 김제동: 마이크를 잡은 이후로는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큰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권력을 상징하죠. 그래서 힘있는 자는 기자회견을 할 수 있고 그 자리에 마이크가 얼마나 모여드느냐가 사안의 중대성을 방증하기도 합니다. 힘이 없어 아무도 목소리를 들어주지 않는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목소리를 내는 것이 집회고, 그래도 안되면 추운 날씨에 고공으로 올라가기도 합니다. 제가 사회를 볼 때는 대통령이 와도 순서가 아니면 마이크를 넘겨주지 않습니다. 다스릴 사(司)자, 모임 회(會)자입니다. 사회자는 모임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을 잘 사용해야 하므로 정당한 권리행사가 아니면 누구에게도 발언권을 주지 않습니다. 제게서 마이크를 빼앗을 수 있는 사람은 관객뿐입니다. 김혜리: ‘노브레이크’ 토크 콘서트는 무대의 턱이 있는 둥 마는 둥 해서 조금 놀랐습니다. 지금까지 경험한 무대의 높이나 객석과의 거리가 천차만별일 텐데, 본인에게 편안한 무대는 어떤 형태입니까? 김제동: 사실 이런 무대가 제일 편합니다. 원래는 아예 턱을 없애자고 했는데 그래도 무대인데 조금이라도 높이자 해서 이렇게 됐습니다. 바로 관객을 볼 수 있고, 무대를 원형으로 감싼 계단식 객석에서 관객이 어떤 각도에서든 무대를 내려다볼 수 있는 구조가 좋습니다. 사회자 한명이 고개를 들면 해결되는 쪽이 좋죠. 김혜리: 무대 공포증은 조금도 없습니까? 김제동: 왜요, 지금도 있습니다. 무대 오르기 전에 담배도 서너대씩 피우고 벌벌벌 떱니다. 그런데 막상 오르고 나면 어느 순간 공중부양을 하는 느낌이 듭니다. ‘작두’에 한번 올라타면 그때부터는 저도 없고 아무도 없습니다. 제 경험에 따르면 사회를 1년쯤 보면 객석의 사람이 보이고 거기서 1년이 더 지나면 한명 한명의 얼굴과 특성이 보입니다. 2년차가 넘으면 저 관객은 오늘 안 좋은 일이 있구나, 저 사람은 불러올리며 춤을 잘 추겠구나 짐작하는데 80, 90%는 맞아떨어집니다. 안 맞으면 또 그걸로 웃기는 겁니다. “집에 감나무 있어요?”라고 넘겨짚어서 없다 그러면 “있었으면 죽었습니다” 하는 거죠. (좌중 폭소) 김혜리: 어린이들이 모인 자리부터 공무원, 대학생 등 대하는 청중의 속성이 천차만별일 텐데, 그날 청중의 상태를 어떤 단서로 파악하시나요? 김제동: 행사의 속성을 알고 갈 때는 미리 조사합니다. 대학축제라면 2시간 정도 일찍 가서 운동장도 걸어보고 구내식당에서 밥도 먹고 벽보를 읽어 이슈가 무엇인지 파악합니다. 지난해, 지지난해에 걸쳐 제가 법제처, 국가정보원, 법원 등 정부부처를 거의 다 돈 것 같은데요. 그런 모임에 가면 그분들끼리 쓰는 용어를 섞어 씁니다. 의사 모임에 가면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개요?” 대신 “BP(혈압)가 지금 얼마?”냐고 묻고, 군대에 가면 휴가증 이야기를 하죠. 비밀과 언어를 공유할 때 사람들은 일체감을 느끼거든요. 내게 마이크는 여의봉 같아 김혜리: 2006년 KBS 연예대상을 받은 무렵부터 토크 콘서트를 하고 싶어하셨다고요. 이같은 형식에 대한 갈증이 있었던 것은 거꾸로, 방송에서 본인이 봉인된 부분, 100% 발휘 못하는 능력이 있다고 느껴서 아닌가요? 김제동: 어제 <야심만만>을 함께했던 윤선주 PD가 공연에 왔다가 <야심만만> 초창기 모습을 보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연세대 앞 프린세스 모텔인가에 기거하면서 주머니에 늘 동대구역행 기차표를 넣고 다닐 땝니다. 언제 내려갈지 모른다는 마음이 오히려 사람을 편안하게 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해온 방송을 죽 보시면 운이 좋았던 것이 모두 관객이 있었습니다. <윤도현의 러브레터>도 카메라가 숨어 있는 시스템이었고 <폭소클럽>도 스탠딩 코미디였죠. <야심만만>도 초기에는 관객이 콜로세움처럼 뒤로 둘러싸고 앉은 구조였습니다. 그것이 제게 엄청난 더하기 요인이었던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방송하기 전 사회자 시절에 축적된 모든 것을 크게 다르지 않은 환경에서 풀어놓을 수 있었습니다. 겁나는 것도 없었습니다. ‘어차피 그대들이 갈 길과 내 갈 길은 다르다’는 생각이었고 상경할 때 최대목표는 서울 대학가에서 사투리로 축제 사회를 보는 거였으니까요. 그런데 하다보니 방송 주류에 편입이 됐죠. 그 다음엔 방송 형식의 변화에 맞춰 진화해나가야 하는데 흔히 말하는 리얼 버라이어티건 비공개 녹화건 거기 맞는 적응력과 탄성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제 능력이 방송으로 인해 봉인됐다기보다는 제가 방송을 통해 확실히 보여줄 만한 능력을 가지지 못했다는 표현이 맞습니다. 김혜리: 무대 위에서 종종 마이크를 권총처럼 돌리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김제동씨에게는 마이크가 어떤 상징 이전에 하나의 사물로서 갖는 의미도 클 것 같습니다. 유선/무선 마이크, 핀 마이크, 얼굴에 붙이는 마이크를 대하는 감각도 모두 다를 것 같고요. 김제동: 마이크를 보면 여의봉 같다고 생각합니다. 잡으면 힘이 나고, 쑥쑥 자라나기도 하고 좀 어수룩하게 보여야 할 때는 작게 만들어 숨길 수도 있고요. 뒤쪽 관객에게 빨리 가닿게 해주는 근두운이기도 하죠. 한편으로는 손오공 머리를 조이는 금고아처럼 끊임없이 저를 긴장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전 손으로 잡는 마이크가 좋아요. 사진 찍을 때도 뭐 쥘 것 없나 찾죠. (웃음) 무대에서 마이크를 돌리는 건 그것이 제 손에 그만큼 붙어 있다는 확인이기도 해요. 마이크 앞부분과 뒷부분의 무게를 파악하고 있어야 가능한 일인데, 음향관계자들이 걱정하기 때문에- 마이크 비싸거든요- 떨어뜨린 적 없다고 미리 안심시킵니다. 김혜리: 마이크를 잡고 신들린 듯이 말하다가 급속히 힘이 빠지는 순간도 있겠죠? 김제동: 반응이 생각만큼 안 나오면 힘이 빠진다기보다 더 힘을 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걸 또 표내지 말아야 합니다. 관객을 웃기고자 했다는 의도 자체를 숨길 수 있어야 합니다. 못 웃긴 걸 사과하면서 웃길 수 있고요. 또 어떤 상황에서든 무조건 웃기는 비장의 이야기를 적어도 50~60가지는 갖고 있어야 합니다. 김혜리: 장금이가 비장한 감식초 같은 거군요? 김제동: <일요일이 좋다-패밀리가 떴다>의 라면수프 같은 거죠. 뭘 장금이까지. 하하. ‘아는’ 돼지 못 먹겠어서 육식 끊어 김혜리: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간다투어’ 코너에 다섯 누님과 어머니가 출연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때 보니 어머니가 굉장히 눈물이 많으시더군요. 김제동: ‘간다투어’ 이틀 찍고 귀성하시면서 하루 전에 만난 카메라 감독님하고 KTX 차창에 손바닥을 맞대고 우시는데, 참…. (좌중 폭소) 무슨 <클래식>의 한 장면인 줄 알았습니다. (웃음) 그새 정이 드신 거죠. 지금도 엄마 성경책 옆 기도 목록에 그때 만난 모든 사람들의 이름이 틀린 철자법으로 쓰여 있습니다. 어머님이 특별히 정이 많으시다기보다 한국에서 칠순 넘은 어머니들이 모두 한도 정도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에 종교전쟁이 없는 이유도 가족이 종교여서인 것 같습니다. 아놀드 토인비도 지구에서 우주로 가져가야 할 유일한 제도는 한국의 가족제도라고 했다잖습니까? 김혜리: 누나들과 터울도 많이 지고 집안의 유일한 남자였는데요. 누구랑 무엇을 하며 놀았나요? 김제동: 주로 밖에서 뛰어놀고 썰매 탔습니다. 여기 보시면 동그랗게 팬 흉터가 있죠?(무릎 근처를 보여준다) 초등학교 1, 2학년 때인가 장난치다가 우산으로 찍혔습니다. 엄마도 바쁘고 누나들도 공장에 다닐 때라 곪는 걸 방치했는데 뒤늦게 병원에 가니 절단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다행히 대구 큰 병원에서 절단은 안 해도 되겠다고 해서 거의 1년을 쉬며 대구 외숙모댁에서 통원치료를 했습니다. 깁스를 한 무거운 아이를 더운 날 업어 나르신 외숙모 은혜를 잊을 수 없습니다. 그때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집에 오면 요강 하나와 책밖에 없었으니까요. 역사 전집 70권을 다 봤고, 사촌형들이 숨겨놓은 <리더스 다이제스트> <건강 다이제스트>도 봤죠. 그때 촌아이가 받은 성적, 문화적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웃음) 김혜리: 어려서 도축하는 모습을 본 이후 육식을 못하시는 걸로 압니다. 굉장히 강력한 이미지였나봐요? 아니면 남의 고통에 이입하는 감수성이 발달했든가요. 김제동: 동네에서 돼지를 잡으면 울음소리가 들리고 피가 흐릅니다. 많이 먹고 살찌라고 돼지를 거세하는 것도 봤고요. 하여튼 “안다”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우리집 돼지가 아니라도 오가면서 보았던 ‘아는’ 돼지, ‘면식있는’ 돼지 아닙니까. (좌중 웃음) 사람이 일면식이 없다는 건 어진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과 같습니다. 더 어려서는 고기를 되게 좋아했다고 합니다. 꼬마 때 쇠고기국 끓인다고 부뚜막에서 춤추다가 국 위에 엎어져 덴 흉터가 등에 있습니다. (폭소) 김혜리: 더욱 마음 아팠던 건 돼지 잡으면 학교 안 간다고 김제동씨가 떼썼더니 어머니가 “돼지 안 잡으면 어차피 너 학교 못 간다”고 하셨다는 일화였습니다. 어머님과 누님들이 모두 말씀이 조리있고 위트 넘친다는 인상입니다. 김제동씨의 재능이 갑자기 뚝 떨어진 게 아닌 것 같습니다. 김제동: 한 시간짜리 드라마를 보고 다섯 시간 정도 토론을 하니까요. (웃음) 그 정도면 작가 못지않은 열정이죠. 돌아가신 분 치고 천재 아닌 분, 전설 없는 분 없지만 저희 아버님도 그렇습니다. 엉덩이쪽에 북두칠성 점이 있었다고 합니다. 뭐, 몽고반점이었을 가능이 높죠. (좌중 폭소) 어머님이 들려주시는 돌아가신 아버님 이야기는 거의 위인전인데, 요는 어머님의 이야기 만들어내는 능력이 대단하시다는 거죠. 거기에 일말의 진실이 있다면 아버님은 언어와 논리쪽에 좀 뛰어나셨던 것 같고, 어떤 사물을 보고 말로 끝장을 내고야 마는 점은 어머니와 누나들을 닮은 것 같습니다. 김혜리: 선생님이 장래 희망이었다고 하셨죠. 교사가 말로써 뜻을 전달하고 좌중을 휘어잡는 일이라고 생각하셨던 건가요? 김제동: 사회자라는 직업에 대한 인식이 없었을 때 선생님의 그런 점이 너무 좋았습니다. (일어서서 동작을 곁들여)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서서 말을 하고, 칠판에 따닥따닥 글씨를 휘갈겨쓴 다음, “자 이건 시험에 나온다!” 하며 점을 탁 찍을 때 분필이 반으로 꺾이면서 촥 날아가는 모습, 그러고는 돌아서서 마치 서부의 총잡이처럼 손가락에서 백묵가루를 ‘훅’ 불어내면서 창문에 기댈 때 너무나 멋있었습니다. 묘사가 아주 세세하지요? 하하. 김혜리: 대부분의 사람들은 군대에서 소질이 억눌리는데 문선대를 통해 소질을 계발한 특이한 경우입니다. 김제동: 특히 방위로 가서 그러긴 쉽지 않죠. (웃음)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데다 부양가족이 있어서 18개월 방위였습니다. 못 웃기면 두들겨 맞으면서 배웠습니다. 50번 웃기라고 했는데 30번 웃기면 20대 맞았고, 40회 웃기라고 했는데 30회밖에 못 웃기면 10분 동안 머리 박았습니다. 군악대와 문선대가 같이 있었는데, 연습하라고 하면 트럼펫 불고, 기타 치고, 드러머는 타이어 두들깁니다. 그런데 저희 사회자들은, 뭘 해야 됩니까? (좌중 폭소) 선임하사가 마이크랑 녹음기 주면서 주제를 하나주고 50분 동안 녹음을 하라고 했습니다. ‘독도’가 주제면 “러일전쟁 직후에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데… 어쩌고저쩌고”해서 채웁니다. 좋은 점도 있었습니다. “개인 장비 수입!”하면 기타, 스피커, 드럼은 윤나도록 닦느라 애를 먹는데 우리는, 계속 이만 닦았습니다. (좌중 폭소) 노 전 대통령 노제 사회를 진행하면서… 김혜리: 저는 레크리에이션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편입니다. 부자연스럽게 하나가 된다는 기분 탓인 것 같습니다. 사람들을 하나로 만드는 일에는 어떤 희열이 있습니까? 김제동: 사람들을 하나로 만드는 희열이라기보다 나아가 사람들과 제가 하나가 되는 희열이에요. 하나로 만들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다양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레크리에이션에서 하나가 되는 것은 웃음으로 하나가 되는 겁니다. 예컨대 카드 섹션을 연습시켜 하는 건 별로지만, 웃음이 퍼지면 알아서 카드 섹션이 됩니다. 관객이 허리를 숙이고 박장대소할 때 객석이 하얘졌다 까매졌다 합니다. 또, 집중해서 경청할 때는 정적이 흐릅니다. 꼭 왁자지껄해야 하나가 되는 건 아닙니다. 이야기가 딴 데로 갑니다만 노무현 전 대통령님 노제 때 몇 십만명이 모였는데 숨소리 하나 나지 않았습니다. 그 정적 속을 혼자 마이크를 들고 올라갔습니다. 김혜리: 김제동씨에게도 그런 경험은 처음이었겠습니다. 김제동: 거기 모이신 분들은 이미 하나가 돼 있고 저만 섞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올라갔어요. 사회자로서 “슬프시죠. 힘드시죠. 화나시죠” 하는 말조차 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대본대로 하지 않고 여러분들을 보고 느끼는 대로 말하겠다, 마이크를 든 건 저지만 말씀은 여러분이 하신다는 생각으로 하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김혜리: 그렇다면 노 전 대통령의 유서에 구절구절 답사한 대목도 즉흥이었습니까? 김제동: 즉석에서 유서 구절을 건네받아 했습니다. 미리 써놓을 정신적 여유도 없었습니다. 전날까지 술을 너무 많이 마셔 7, 8kg이 단숨에 빠진 상태였거든요. 노제 사흘 전엔가 매니저가 장의위원회쪽 연락을 처음 받았습니다. 유족의 의사가 반영됐다는 말 한마디에 수락했습니다. 장례 전날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 전 출연진이 시청 앞 프라자 호텔에서 잤습니다. 호텔 창문으로 보는데 전경버스로 서울광장이 빙 둘러쳐져 있었습니다. 제가 이제껏 본 원(圓) 중에 가장 흉측한 원이었습니다. 사실 모두에게 욕을 먹은 일이었습니다. 저쪽에서는 “역시 좌빨이구나” 하는 반응이었고 이쪽에서는 “무게감이 없다, 무슨 대학 축제도 아니고 일개 개그맨 따위가”라고 반대하는 십자포화였습니다. 평소 노 전 대통령을 조금이라도 아셨던 분이라면 웃음에 대해 그렇게 폄하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장례식 직전 생각을 정리하러 산에 올라갔는데 5분간 이런저런 고민을 하다 문득 너무 죄송했습니다. 내가 살아 있는 놈이라 간사해서 내 이미지, 앞길을 염려하는구나. 그 5분 동안은 철저히 돌아가신 분에 대한 예의와 비통함을 잊고 무례했던 것이죠. 그래서 그저 온 마음을 다해 보내드리자는 딱 한 가지 생각으로 무대에 올랐습니다. 노제가 끝나고 만장 지나가는 걸 본 다음, 딴 곳으로 가서 술을 마시다가 정신을 잃었습니다. 김혜리: 무대 뒤편에서 윤도현씨 품에 안겨 울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김제동: 한마디하고 내려와 쭈그리고 앉아 울기를 반복했습니다. 무대에서 울어버리면 진짜 선동이 되니 울면 안됩니다. 그게 힘들었습니다. 사실 고인을 두번 뵈었지만 그분은 절 모르실 겁니다. 처음 만났을 때도 저랑 상관없는 <느낌표! 아시아 아시아> 잘 보고 있다고 하셨으니까요. (웃음) 실은 당선자 시절 우리 어머니를 먼저 보셨습니다. 어머니가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우연히 노 당선자 일행을 보고 막무가내로 다가가 “윤도현씨 아시죠? 윤도현이랑 친한 김제동이 엄마입니다” 하셨는데, 그분이 다 응대해주셨다고 합니다. 김혜리: 방송 출연 초기인 2003년 무렵 기사를 보면 방송에 나오든 나오지 않든 자신은 엄연히 MC라는 강한 정체성과 자부심을 피력했습니다. 이 직업 안에서 어떤 경건함을 발견한 분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김제동: 한때 레크레이션 강사를 겜돌이라고 부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200명 정도가 모인 한 신입생 환영회 사회를 보러 갔는데 과대표가 “오늘의 겜돌이를 소개하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안 나갔습니다. 당황한 과대표에게 겜돌이 찾아오시라, 난 사회자로 왔다고 했어요. 오늘의 사회자를 소개하겠다고 말을 고쳤습니다. 그래도 안 나갔습니다. 기싸움이었죠. ‘사회사’라고 부르라고 했습니다. 썰렁한 분위기 속에 마침내 올라가서 사과를 드리고 “지금부터 제가 겜돌이와 사회사의 차이를 보여드리겠습니다.” 하고는 정말 혼신의 힘을 다해 휘몰아쳤습니다. 몇명은 웃다가 토했습니다. (좌중 폭소) “아, 제발! 그만!” 비명도 지르고요. 한 시간 예정 행사를 두 시간 반 하고 나서 말했습니다. “앞으로 여러분이 어떤 직업을 갖든 그 직업이 어떻게 불릴까는 여러분들이 결정합니다. 어떤 직업도 비하마시고 여러분이 재단하는 이름으로 부르지 마십시오. 소명을 갖고 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하고 큰절을 하고 내려왔습니다. 물론 과대표가 저를 모욕하려고 그러지 않았다는 걸 알죠. ‘사회사’란 말이 무리란 것도 압니다. 레크리에이션 강사 시절 대구 법원 앞에 즐비한 변호사 사무실을 후배들과 보면서 내가 반드시 저기 ‘사회사 김제동 사무실’을 내고 만다고 했습니다. 한 사람의 죄를 변호하고 구제하는 것도 위대하지만 우린 천명, 만명을 웃기는 사람들인데 저 정도 할 수 있지 않느냐고. 무당의 작두, 택시 기사의 운전대, 설거지하는 어머니의 수세미 안에는 다 신성이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요컨대 마이크를 잡으면 다 사회자입니다. 동네 이장님들이 가장 훌륭한 사회자입니다. 청중을 속속들이 알고 그분들이 알아듣는 적확한 단어와 명확한 정서로 말하는 것이 훌륭한 사회자 아닙니까. 신동엽·유재석·강호동이 웃기는 각각의 모양새 김혜리: MC로서 전범으로 삼는 인물이 있었습니까? 김제동: 대구 지역에서 활동하는 MC 방우정 선생님이 계십니다. 텔레비전을 보면서도 연구했습니다. 신동엽 형, 유재석 형, 강호동 형, 주병진 선배님, 모두 각자 사람을 웃기는 ‘모양새’가 있습니다. 방송에서도 말씀드린 적 있지만 제 안경을 어떻게 벗기느냐를 보면 다 나옵니다. 호동이 형은 (격한 말투로) “이야, 벗으면 진짜 웃길 텐데! 이렇게들 박수를 치는데 외면하시겠다고요?” 하면서 몰아갑니다. 경규 형은 옆발질을 하며 “벗어!” 합니다. 재석이 형은 자기가 먼저 벗습니다. 동엽이 형은 빙빙 주위를 돕니다. 저희는 ‘매 개그’라고 부르죠. (손을 설득하듯 움직이면서) “김제동씨는 못생겼다고 하는데 실제로 별로 안 그런 것 같아요. 안경 벗어도 안 웃길 것 같고요. 그렇다고 꼭 벗으시란 말씀은 아니고요. 하지만 굳이 벗으시겠다면 말리진 않아요.” 그분은 손 묶어놓으면 개그 못하는 분입니다. (좌중 폭소) 이런 모양새들로 선배님들을 다 표현할 순 없지만 다 배우고 수용해보자 싶었습니다. 김혜리: 애주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콘서트에서도 술 예찬론을 펴시는 걸 들었습니다. 그만큼 즐겨 마시다 보면 술이 오히려 자기를 제어한다는 두려움이나 경계심이 들 때도 있을 텐데요. 김제동: 공연 기간 중에는 그래서 겸사겸사 끊고 있어요. 술을 먹으면 자꾸 아래로 침잠된다는 느낌도 있고 요즘은 알코올이 해독되는 데에 이틀 가까이 걸리니까 몸도 힘듭니다. 지금까지는 술과 밀착해서 블루스를 췄다면 이제는 포크댄스 정도를 추고 싶습니다. 하하. 김혜리: 방송에서도 여러 종류의 프로그램을 했습니다. 스탠딩 코미디 <폭소클럽>, 토크쇼 <야심만만> 퀴즈쇼, <스타 골든벨>도 있고 <눈을 떠요>나 오지(奧地) 노인들에게 의료봉사를 실천한 <느낌표-산넘고 물건너> 같은 공익성 프로그램도 있었습니다. 어떤 포맷이 가장 잘 맞았습니까? 김제동: 공익적인 예능이 보람은 크지요. 그런데 전 웃음이란 말 속에 공익이 포함돼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막말 개그’라는 말은 ‘음식 쓰레기’처럼 모순된 단어조합이 아닌가 합니다. <산넘고 물건너>처럼 어르신들과 지내는 프로그램이 좋았습니다. 가만히 앉아 어른들 말씀 듣고, 일주일에 한번씩 제대로 된 밥 먹을 수 있잖아요.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그분들의 잔잔한 일상에 이야깃거리를 제공해드릴 수 있었거든요. 저희가 가면 무조건 동네잔치를 하세요. 비용을 걱정했더니 제작진이 상품권으로 구입하실 수 있게 한다고 걱정 말라더군요. 어르신들은 방송국에서 가기 한달 전부터 즐거워하시고 간 다음 또 한달 동안 이야깃거리로 삼으시죠. 그것만으로도 보람있었습니다. 김혜리: 방송을 시작하고 첫 번째 소진된 느낌은 언제, 어떻게 왔습니까? 김제동: 을 하다가 <느낌표!-눈을 떠요>로 옮긴 적이 있습니다. 호동이 형, 재석이형과 함께하면서 좀더 배웠어야 했는데 너무 빨리 움직였던 것 같습니다. 재석이 형도 “공익오락쪽은 너만의 색깔이 있지만, 뛰어 노는 프로그램에도 자연스레 녹아들어야 좋은 사회자가 될 수 있다”는 충고를 해주셨고요. 다시 시도해봐야겠죠. 몸개그는 싫어서 안 하는 게 아니라 시도를 하는데 잘 안됩니다. 위기는 항상 있었는데 그 저점이 1년 전이었던 것 같습니다. 김혜리: <김제동의 황금나침반>은 상식적으로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생활하는 사람이 등장하고 패널들이 조언을 하는 쇼였는데요. MC가 때로는 게스트에게 공격적이 되어야 하는 프로그램이라 김제동씨 같은 스타일의 사회자에겐 힘든 기획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김제동: 손님 자체를 인정했습니다. 잘못된 것 같은 부분이 있으면 다른 의견을 이야기했고요. 사회자는 어떠한 경우라도 연민과 애정을 가져야 합니다. 국선변호사의 느낌을 가져야 합니다. 김혜리: 본방에 편성되진 못했지만 지난해 10월16일 방영된 파일럿 프로그램 <오 마이 텐트>는 김제동이라는 달변형 MC가 지닌 다른 면을 보는 기획이었던 것 같습니다. 조준묵 담당 PD의 말씀을 들어보니, 야외로 환경을 바꾸고, 김제동씨의 조심스런 성격을 살려서 손님에게서 이야기를 자연스레 이끌어내는 토크 프로그램이었는데요. 김제동: 말을 하지 않는 것도 표현입니다. 침묵시위라는 것도 있잖습니까? 저는 그 침묵마저 담길 수 있는 방송이 되었으면 했습니다. 제 스스로 주인공이 된 파일럿 프로그램에서도 강가에서 아이들 노는 것 보면서 한 시간 반 동안 그냥 앉아 있었습니다. 연출자도 보고 느끼는 대로 말하고, 없으면 말할 필요없다고 하시더군요. 김혜리: 그러나 이른바 ‘방송분량’의 압박이라는 것이 있지 않나요? 김제동: 그걸 많이 고민했는데, 여백의 미를 최대한 활용했던 방송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쉬면서 볼 수 있는 프로그램도 필요하겠다는 생각도 했고요. 저는 밤 12시, 1시대에 가도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김혜리: 좀 엉뚱하지만 ‘경상도적인 유머’가 있다면 어떤 거라고 생각하세요? 김제동: 압축적이죠. 인터넷 유머에도 나오지만 “할머니, TV가 안 보이니까 머리 좀 치워주실래요?”를 “할매, 쫌!”이라고 합니다. (웃음) “할머니 진짜 멀리 오셨지요? 저희들이 찾아뵈었어야 하는데…”라는 말도 길게 안 하고 “할맨교?” 이럽니다. 대구, 경북은 처음에는 잘 안 열지만 한번 열면 많이 웃습니다. 가족 정서가 아주 강하죠. 끈끈하고, 아는 사람이 하면 많이 웃어주고 모르는 사람이 하면 “치아라!”합니다. (웃음) 김혜리: 김제동씨의 진행을 보면 여성적이라고 느낍니다. 옆에 앉은 사람과 스킨십도 많고 말하는 방식도 그렇습니다. 친절하게 배려하는 진행으로는 유재석씨가 꼽히지만, 그분은 깍듯한 쪽인데 김제동씨는 자기 속내를 많이 열어 보이는 쪽입니다. 김제동: 혼자 있는 시간이 많다보니 정에 굶주려서. (웃음) <야심만만>은 여성 출연자를 항상 제 옆에 앉혔습니다. 그러다보니 편해지면 저도 모르게 툭 치거나 하는 움직임이 나온 것 같아요. 저는 일단 저를 먼저 엽니다. 물론 다 드러내지 못하는 부분도 있지만요. 제 것부터 털어놓아 스스로 밑으로 내려간 다음 남들에게 “내려와볼래? 괜찮거든?” 하는 겁니다. 남들부터 먼저 내려가라고 하면 나락에 떨어뜨리는 거지만, 저부터 내려가면 동행이 되거든요. 내겐 끊임없이 묻고 풍자할 권리가 있다 김혜리: 웃음 주시는 분한테 이상한 이야기지만, 김제동씨를 보면 혼자 있는 시간이 꼭 필요한 우울한 사람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어둠을 알기에 그런 부분을 건드리는 이야기도 할 수 있고. 김제동: 요즘 좀 밝아진 게 이 지경입니다. 비관적은 아닌데, 기본 성향이 아주 밝고 쾌활한 쪽은 아닙니다. 긍정적인 일이 생기면 능력을 넘어선 혜택이라고 여기고 부정적 일이 일어나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알려진 사람은 누구나 그런 측면이 있지만 저는 과대포장돼 있습니다. 한데 때론 그것이 힘도 됩니다. “산에 업히러 간다”는 말을 자주 하다보니 등산객들도 제가 산을 잘 탄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르는 도중 섣불리 쉬질 못합니다. (웃음) 책도 많이 읽는다고들 하시니, 곱절로 읽으려고 애쓰게 됩니다. 짐이란 무겁지만 하체를 튼튼하게 합니다. 소수자적 성향이 강한 것도 사실입니다. 아버지 일찍 여읜 것도 그렇고 육남매 막내로 자란 사람이 제 또래에 흔치 않죠. 제 나이에 할아버지가 된 사람도 흔치 않고요(그의 큰조카가 딸을 낳았다). 시각 자체는 확실히 남들과 좀 다른 것 같기도 합니다. 김혜리: 지난해 5년간 진행한 <스타 골든벨> 하차가 정권의 입김 때문 아니냐는 논란으로 시끄러웠습니다. 하차 자체의 충격 못지않게 그 사건으로 말미암은 논란과 언론 보도로도 큰 부담을 안았을 듯합니다. 김제동: 그 상황의 주체는 제가 아니었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면 주체에게 왜 그랬냐고 질문이 가야 맞습니다. 객체인 저는 할 말이 없고 정확히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릅니다. 김혜리: 그러나 본인이 명확히 아는 진실의 범위를 건드리는 말도 나왔습니다. 예를 들어 <동아일보> 사설에 “김제동씨의 유명세가 5년간 올라가면서 제작진과 관계가 부드럽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인용됐습니다. 김제동: 정말 그랬다면 <스타 골든벨> 작가들이 왜 토크 콘서트를 보러 왔겠습니까. 인간관계에 대한 그와 같은 언급은, 적어도 직접 제게 물어보시고 나서야 하셨어야 합니다. <100분 토론>에 나오신 청와대 정무수석이 “김제동씨 때문에 우리도 재보선에서 표 손해 많이 봤다”는 발언을 하셨는데, 행위 주체를 저라고 했으면, 제가 한 행위를 적시하고 나서 그 결과를 말씀하셔야 하지 않습니까? 저의 어떤 행위 때문에 표를 잃었는지를 밝혀야 정상적이죠. 제가 민주당 지지자도 아니고 정치적으로 어느 당을 지지하는 선거운동을 한 적도 없는데, 자꾸 색채를 덧씌워가기 시작하면 불쾌할 수밖에 없습니다. 국감 중에 “이념적 편향이 눈에 띄는 사람은 제작진이 사회자 고를 때 부담스럽지 않습니까?”라는 질문이 나왔고 KBS 사장이 그렇다고 대답했는데, 오히려 거기에는 동의할 수 있습니다. 이념적 편향을 띤 것으로 보였다면 그건 제 실수입니다. 다만, 제가 한 어떤 행위에 편향이 있는지 설명해 달라는 것입니다. 노 전 대통령 분향소에 헌화하지 않은 사람이 현 정부 인사 중에 있습니까? 공인으로서 의견의 표출에 대해 가져야 할 신중성을 말씀하신다면 경청하겠습니다. 그러나 옳다고 생각하는 의견을 표하는 데에 있어서는 앞으로도 멈출 생각이 없습니다. 또한 제가 믿은 것이 옳지 않다고 검증되면 언제든 사과할 자세도 되어 있습니다. 진성호 한나라당 의원, <동아일보> 황호택 논설위원 등 이번 일에 대해 여러 말씀을 하신 정치인, 언론인들이 한번 토크 콘서트에 오셨으면 좋겠습니다. 홍정욱 의원은 성향이 다르다고 그 사람을 방송에서 내친다면 촌스런 정권이라고 표현하셨는데, 옹호해주신 건 고맙지만 ‘촌스럽다’는 단어는 그런데 붙이면 안됩니다. ‘촌스러움’을 모독하면 안됩니다. 저는 현 정부가 잘되길 바라는 한 시민으로서, 끊임없이 묻고 풍자할 권리가 있습니다. 앞으로도 이 일을 하는 한, 어느 집단이 힘을 쥐건 설령 제가 그 집단에 투표를 했다 하더라도, 이념 성향에 관계없이 풍자의 대상으로 삼을 겁니다. 제 가장 큰 이념은 웃음이고 그걸 포기하면 저는 끝입니다. 그것을 비판이고 반정부라고 말한다면 죽을 때까지 비판적이고 반정부적일 겁니다. 김혜리: YB, 김C 등 같은 소속사 연예인들과 매우 친하고 프로그램에도 내레이션, 게스트 등으로 함께 출연하는 일이 잦습니다. 여기에 단점은 없을까요? 김제동: 일장일단이 있습니다. 이승엽 선수만 해도 그만 팔아먹으라는 말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친한 사람들끼리 방송을 하면 아주 유대가 없는 사람들보다 편하고, 특히 예능의 경우 훨씬 잘 흘러갑니다. (웃음) 야구는 가족적인 스포츠라 매력적 김혜리: 이승엽 선수와 관계를 보면 좋은 친구, 어려울 때 날 알아준 친구에 대한 고마움 이상의 유대가 보입니다. 경상도 남자들끼리 미주알고주알 관계를 정의하고 만나진 않으시겠지만, 서로를 지속적으로 행복하게 하는 면이 있을 거라고 봅니다. 무엇인가요? 김제동: 이승엽 선수를 가리켜 “제 인생의 영원한 4번 타자”라고 말한 적이 있지만 요즘은 그 말도 후회합니다. 야구를 하든 야구를 하지 않든 그냥 이승엽으로 충분합니다. 그럴 경우 ‘4번’이란 말은 소중하다는 의미의 상징이 되겠죠. 서로를 행복하게 하는 건, 글쎄요. 뭘 해도 호적수입니다. 당구를 쳐도 3승2패, 장기를 둬도 3:2, 같이 있으면 수다떨고 즐겁습니다. 김혜리: 소중하다보면 상처도 받지 않습니까? 김제동: 싸운 적은 없습니다. 굳이 말하라시면, 아무리 친한 동생이지만 주위 사람에게 소개시켜준 뒤 저보다 더 친해보이면 약간 샘납니다. (웃음) 서울에선 매번 집 앞에 와 있고 나오라고 채근하던 사람이 대구 가면 운동하는 후배들 만나느라 전화가 뜸합니다. 예전에는 그럼 서운했는데 요즘은 제가 먼저 전화 걸어 타박합니다. 그럼 (이승엽 목소리로) “아, 형, 인생이 다 그런 거야” 합니다. 뭐, 저도 가족 생기면 거들떠나 보겠습니까? 하하. 김혜리: 기본적으로 야구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 있는 것 같습니다. 김제동: 야구는 인간과 공이 유일하게 경쟁하는 스포츠입니다. 축구도 공이 골대에 들어가면 득점, 배구도 코트 라인 안에 공이 떨어지면 득점, 미식축구 역시 공만 들어가도 점수는 됩니다. 그러나 야구는 홈에서 인간과 공이 다퉈 인간이 먼저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아주 가족적입니다. 포수는 안방마님, 투수가 아빠라면 핫 코너 3루는 궂은일하는 장남입니다. 1루수는 막내, 중간에서 잘 연결하는 유격수는 며느리입니다. 외야수들은 장성에서 해외 내보낸 애들입니다. 가끔씩 연락오고 명절돼서 한회 종료하면 집에 모이죠. (웃음) 김혜리: 김C가 김제동씨더러 “책에 너무 매여 있다”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어록’도 갖고 계시는데요. 무대에서 경구, 아포리즘을 쓸 때 얻는 혜택과 결함은 무엇입니까? 김제동: 경계해야 할 부분입니다. 선도하고 가르치려는 마음이 드는 순간 격언이나 명언은 그 가치를 상실합니다. 저는 이렇게 묻습니다. 이 구절이 제겐 이렇게 와닿는데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또, 경구가 지나치게 무거워지거나 시의적절하지 않아 웃음과 섞이지 않으면 실패입니다. 김혜리: 2009년 성공회대에 편입했습니다. 김제동씨의 꿈인 대안학교 설립에 필요한 바탕을 갖추기 위해서라고 동기를 밝혔는데요. 특히 어떤 커리큘럼이나 교수진에 끌렸습니까? 김제동: 신영복, 김창남 선생님도 계시고요. 이력으로서 학력보다 배우는 힘을 얻고 싶었습니다. 이력은 전문대 졸업으로도 꿀리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학교를 자주 못 나가고 있지만 얼핏얼핏 배우고 선생님들과 대화하고 평상에서 학생들과 자장면 시켜먹고, 그 모든 것이 김C 형이 말한 책에 얽매이지 않는 뭔가를 갖고 싶은 마음의 발로입니다. 지하철로 통학하는 시간에 얻는 단상들도 많습니다. 큰 매형의 죽음과 “철사 사온나” 김혜리: 토크 콘서트를 시작하면서 “술 취해서 횡설수설도 해보고, 환불도 해보고 돌도 맞아보고 싶다”는 인터뷰를 하셨습니다. 저도 관람했지만 혹시 한달이 지난 지금, 방송에선 못하는 내용을 더 해볼걸 하는 아쉬움은 없나요? 김제동: 그래서 어제(12월30일)부터 조지 칼린이라는 미국의 스탠딩 코미디언을 인용하면서 정치와 종교를 슬슬 건드리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정치문제는 첫 공연부터 조금씩 건드렸고요. 용산참사 협상 타결에 대해서는 잘했다고 말했습니다. 충분한 해결이 아니겠지만 장례를 치를 수 있게 된 건 잘된 일이니까요. 종교도 예컨대 예수님을 비판하진 않아도 교회를 비판할 수는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일이니까요. 김혜리: 죽음이 많았던 지난해였습니다. 막내들은 부모님과 지내는 시간도 가장 짧고 형제들을 여의면서 혼자 남겨질 처지라 죽음에 대한 생각도 많을 것 같습니다. 김제동: 아무것도 모른 채 아버지를 여읜 뒤, 제가 인지한 첫 죽음은 큰 매형의 죽음이었습니다. 대우조선 근로자로 근무하시다가 산업재해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때 찾아온 사람이 보상금을 탁 던지면서 “합의를 보든지 말든지 맘대로 하라”고 했던 광경이 어린 마음에 오래 남았습니다. 장지에서 그 돈 봉투를 제 가슴에 꼭 품고 있었죠. 매형은 집안에 남자가 아무도 없는 제게 썰매를 만들어주신 분입니다. 날아갈 듯 기뻤죠. 제 평생 가장 기억에 남는 감동적 한마디는 “철사 사 온나!”입니다. 그 다음 맞은 죽음이 노무현 전 대통령입니다. 그러나 제 일의 숙명은 죽음마저도 웃음으로 승화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몇해가 흐르고 나면 노무현 전 대통령도 다른 방식으로 추모하고 싶은 생각이 있습니다. 그분이 하신 농담을 모아서 영상으로 대화해보는 방식도 있을 거고요. 김광석 추모 콘서트는 이미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웃음에 대해 관대해져야 그 사회가 건강할 수 있습니다. 追伸 지난해 10월 MBC의 파일럿 프로그램으로 방영됐으나 정규 편성되지 못한 <오 마이 텐트>의 조준묵 PD는 MC 김제동의 배려심과 수줍음을 살려, 야외로 나온 게스트들이 자연스럽게 스스로 내면을 돌아보게 하는 토크 프로그램을 기획했다고 의도를 설명한다. 조 PD의 이야기에서 또 다른 솔깃한 대목이 있었다. 상대가 채식만 한다는 사실을 몰랐던 PD는 김제동의 집 근처 방배동 곱창집으로 첫 만남의 장소를 정했고 김제동은 선선히 응했다. 이런 상황에 익숙한 주인아주머니가 김제동 앞에 된장찌개부터 내놓았을 때에야 조 PD는 그의 사려를 알아차렸다고 했다. 만약 <오 마이 텐트>의 제작이 실현된다면, 우리는 MC가 무슨 말을 하느냐보다 그의 성품이 만들어내는 공기가 중요한 토크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김영진의 점프 컷] 소년의 절실함에 뼛속까지 아팠네

때로 영화에서 단 하나의 장면만 떠오르게 된다. 필립 리오레의 <웰컴>의 경우, 후반부에 쿠르드족 청년 비랄이 도버해협을 수영으로 건너는 장면이 그랬다. 감독이 이 장면을 찍기 위해 영화를 만든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 만큼 그 장면 하나가 인상 깊었다. 몹시 추운 날 이 영화를 보게 되었는데, 뼛속까지 시리는 아픔 비슷한 것이 그 장면을 보고 찾아왔다. 표면적으로 17살 소년은 사랑하는 연인을 만나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인데,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극적 인위성을 감안하고서라도 소년에게는 다른 삶의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4,000km 이상 사막을 걸어 프랑스에 온 소년은 영국에 가려 한다. 거기에는 연인도 있고 자신의 우상인 축구선수 호나우두도 있기 때문이다. 영화의 끝장면에서 비랄을 우연찮게 잠시 돌봐준 수영코치 시몬이 비랄이 도버해협을 건너다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뒤 런던으로 가서 비랄의 애인을 만나 자신의 것이었던 결혼반지를 비랄의 선물이라고 속여 전해주려는 상황이 나온다. 비랄의 애인은 거절한다. 그녀는 아버지의 강권으로 아버지의 친구인 중년 남자에게 곧 시집을 가야 한다. 맥없이 그곳을 떠나던 시몬의 눈에 텔레비전 중계 중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축구 경기 모습이 잡힌다. 마침 호나우두는 골을 넣고 포효하듯이 거만한 세레모니를 하고 있다. 화면 속의 호나우두, 누구의 시선도 받지 않겠다는 듯 의기양양한 모습과 그를 쳐다보는 시몬의 얼굴에서 영화는 끝난다. 내가 살기 위해 남을 감시하는 사회 삶에서의 불가능한 판타지가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불우한 17살 쿠르드족 소년에게 있었던 것은 행운일까, 불행일까. <웰컴>의 후반부 두 장면은 어쩔 수 없이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강박을 띨 수밖에 없는 이 영화의 선의에서 가장 뾰족하게 튀어나온 이미지였다. 많은 가난하고 비전없는 소년과 청년들이 호나우두의 성공을 보며 꿈을 키울 것이다. 극소수의 성공 아래에 바벨탑처럼 쌓인 숱한 좌절의 기록들이 있을 것이다. 사다리를 올라가는 것이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목숨을 걸고서라도 도버해협을 맨몸으로 건너겠다는 결심을 한 영화 속 소년의 절실함은 어떤 것일까. 비랄이라는 이 소년은 바람처럼 빠르게 달리는 말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고 축구에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 유서 깊은 박해의 역사를 가진 고향을 떠나 서구사회로 그가 건너왔을 때 기댈 것은 축구선수가 되고 싶다는 희망과 애인을 만나겠다는 달뜬 마음뿐이다. 이런 것들이 부질없는, 한줌 재와 같은 기대라는 걸 비랄을 보살펴주는 프랑스인 시몬은 안다. 그는 한때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였으나 이제는 지방 소도시에서 수영 강습을 하며 살아간다. 방금 이혼을 했고 삶에 별다른 희망이 없다. 겉으로 딱딱하게 구는 그의 태도는 앞으로 남은 삶에서 기대할 것이 없는 중년 남자의 공허를 감추기 위한 갑옷이다. 그가 미친 듯이 수영 연습을 하는 소년을 보며 한심해할 때 그는 소년에게서 자신에게는 없는 절실함을 감상적으로 느낀다. 거기서 잠시 연민을 품은 뒤 하룻밤 그를 재워준 것이 그를 둘러싼 적대적인 환경을 그로 하여금 자각하게 만든다. 이웃은 경찰에 신고를 하고 시몬은 요주의 인물로 감시당한다. 내가 살기 위해 남을 감시하는 사회가 된 칼레의 서슬 푸른 풍경이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두 남자, 중년의 서구인과 쿠르드족 소년의 희미한 교감을 방해하는 것을 느끼게 만드는 것이 감독 필립 리오레의 신중함이다. 예전에 이 지면에서 몇번 지적했듯이 이방인을 대하는 태도는 정치적 올바름의 강박에서 자유롭지 못할 경우 거꾸로 수직적인 시선의 덫을 피하지 못한다. 한국도 이제 어느 나라 못지않은 다인종 사회가 돼가고 있으나 소수자 이방인을 대하는 시선은 이제 막 열리기 시작했을 뿐이다. <웰컴>과 비슷한 소재를 다뤘으며 역시 한국에서 자그마한 규모로 개봉한 <비지터>란 영화에도 감독은 그들 내면을 다 아는 척하지 않는다. 영화에서 삶에 무감각해진 교수는 젊은 아프리카인에게서 북치는 솜씨를 배우고 그 리듬에 반해 열심히 북을 두드린다. 그것 때문에 그는 본국으로 추방당하는 젊은이를 번거롭게 끝까지 도와야 하는 처지를 감내한다. 갱생의 기회는 모두에게 오지 않고 나는 이런 종류의 망설임, 도와야 하는 것은 알겠는데 내키지 않는 심정으로 어쩔 수 없이 끌려가다가 결국 세상의 비극을 목격하게 되는 주인공들의 처지를 그리는 것이 비교적 솔직한 창작자의 태도라고 생각한다. <웰컴>의 필립 리오레 감독도 그 비슷한 것을 해낸다. 시몬이 비랄을 도와준 것은 하룻밤의 감상적인 휴머니즘에서 우발적으로 저지른 행위였다. 그에게는 이 행위가 사소한 것이었으나 불법 체류자 문제로 시끄러운 칼레에서는 대단한 일이었다. 시몬은 원치 않는 가운데 자꾸 비랄의 처지를 기웃거리게 된다. 비랄이 묵고 있는 칼레의 불법 이민자 수용소, 경찰이 무지막지한 몽둥이로 다스리는 그곳의 현실을 알게 되면서 시몬은 비랄을 더 도울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다. 이는 그 자신이 비참하다고 여겼던 삶에 다소 원기를 불어넣는다. 비랄과 마찬가지로 시몬도 이 자기갱생의 싸움에서 이기지 못한다. 영화 중반, 시몬이 걱정돼서 찾아온 전처와 고민을 나누다가 시몬은 격정을 이기지 못하고 그녀가 완곡하게 거절하는데도 관계를 맺는다. 관계가 끝난 뒤 황폐한 심정으로 어쩔 줄 모르는 두 남녀에게 비랄의 불행한 운명에 관한 소식을 알리는 전화가 온다. 시몬의 전처는 자신에게 달려든 시몬을 책망하고 그곳을 떠난다. 애인을 찾아 도버해협을 건너던 소년의 실패와 전처와 재결합하고 싶어 하는 자신의 실패가 겹치서 시몬의 삶은 더욱 어둠에 갇힌다. 개인적인 것을 전체의 삶과 반드시 이을 필요는 없지만 <웰컴>은 우리의 개별적인 삶이 어떻게든 필연적으로 상호연관되어 있는 지점을 드러낸다. 시몬이 대단한 일을 한 것은 아니지만 그걸 하기 위해선 그가 개인적 희생을 치러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걸 해냈음에도 갱생의 기회는 시몬에게나 비랄에게나 오지 않는다는 것을 영화는 보여주며 끝난다. 작은 규모의 영화이고 관객에게 큰 제스처를 취하는 영화도 아니지만 <웰컴>을 보는 느낌은 요즘 같이 시절이 하 수상한 세상에선 좀더 공명이 컸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시선을 줬을 때 그건 전과 다른 삶의 경험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어디서나 있는 불행이라고, 신문 방송에서 볼 듯한 일이라고 지나치며 살아갈 수도 있겠지만 이 영화에서의 시몬처럼 누군가에게 잠시라도 시선을 줬을 경우 그의 삶의 개별성은 나의 개별성과 묶이고 연대가 가능하지 않은 세상의 질서로부터 진한 복수를 당한다. 전반적으로 차가운 이 영화에서의 풍경, 소년이 수영으로 건너는 도버해협의 압도적인 무서움, 그런 것들이 영화가 끝나고 잔상으로 남게 된다. 활기찬 한 젊은 육체가 필사적으로 헤엄쳐가는 바다 위로 넘실대는 위압적인 파도와 거대한 배가 지나가는 풍경은 아무리 인위적으로 창조된 광경이라 해도 육체적으로 진한 통증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