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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1997)

[talk show] 당신의 판타지를 ‘가짜로’ 실현시켜 드립니다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소녀. 손에는 막대걸레가 들려 있다. 그녀의 꿈은 개썰매를 타고 설원을 달리는 것. 다음 컷에서 그녀는 두툼한 방한복 차림으로 손에는 작살을 든 채 남극 한가운데에 도착한다. 평범한 이들의 판타지를 사진으로 구현한 미디어 아티스트 정연두의 <내사랑 지니> 프로젝트 중 두컷이다. 꿈(<내사랑 지니>)이나 기억(<수공기억>), 시각적 체험(<씨네매지션>)에 관한 집요한 탐구를 이어온 정연두의 관심은 그 모든 것과 현실 사이의 경계, 그리고 매체를 넘나드는 유희정신에 있다. 2007년 국립현대미술관이 선정한 최연소 ‘올해의 작가’이자 백남준에 이어 국내 작가로는 두 번째로 뉴욕현대미술관에 입성한 당대 가장 뜨거운 아티스트 정연두. 그의 작업실을 현재 한국 영화미술계에서 첫손에 꼽히는 프로덕션디자이너 류성희가 찾았다. 오롯이 판타지를 위해 복무하는 영화 미술감독으로서 그녀가 흥미를 느낀 부분 또한 정연두가 펼치는 경계의 유희. 그리하여 질문은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되었다. 류성희: 정연두 작가님에 관한 기사를 보면 흔히 ‘꿈과 판타지를 실현시켜주는 작가’라고들 하는데, 사실 꿈이나 판타지 같은 단어는 좀 쑥스러울 수 있는 말이잖아요. 그럼에도 그런 작업들을 꾸준히 해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결국 사람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을 잃지 않기 때문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언젠가는 영상쪽 일을 하실 수도 있겠다는 느낌도 받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최근에 마술사 이은결씨가 공연하는 모습을 촬영해서 그 과정을 동시에 상영하는 <씨네매지션> 작업을 내놓으셨더라고요. 영화를 하고 있는 입장에서, 그처럼 각기 다른 매체들에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신지가 특히 궁금했어요. 정연두: 제가 처음 영상을 사용한 작품은 <다큐멘터리 노스탤지어>였죠. 2007년에 국립현대미술관으로부터 ‘올해의 작가’라는 과분한 타이틀을 받고 전시를 하게 되었는데, 한국에서 채 10년도 활동하지 않은 작가에게 무려 1320㎡(400평)나 되는 전시공간을 준 거예요. 1320㎡면 굉장히 넓거든요. 여기 걸려 있는 큰 사진(대략 가로 1.5m, 세로 2m)이 80여점 이상 들어가야 해요. 주변의 큐레이터 분들에게 자문을 구하니 다들 한결같이 “완성도있는 전시를 하세요”라고만 하고. (웃음) 완성도있는 전시란 건 기존의 작품들을 밀도있게 꾸미라는 이야기라서, 일단은 제가 2000년부터 만든 작품을 다 모아서 전시안을 만들었죠. 그러고는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님들 앞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했는데, 괜찮다는 평가가 떨어지자마자 “잠깐만요, 2안이 있는데요”라며 슬쩍 내놓은 게 <다큐멘터리 노스탤지어> 시안이었어요. 전시 공간을 반으로 나누어서 한쪽에 영화세트장을 짓고 거기서 촬영한 영상을 상영한다는 아이디어였죠. 당연히 거부당할 줄 알았는데 괜찮다며 해보자고 하셔서 20일 만에 세트 짓고 전시하게 된 거예요. 사실 그 작업에 대한 아이디어는 1년 전부터 가지고 있었거든요. 보통 영화에서는 세트, 조명, 사운드를 세팅해놓고 배우 감정까지 잡은 다음 완벽하게 가꿔진 모습을 찍고 편집해서 관객에게 보여주잖아요. 제작현장에서 일어나는 긴장감이나 흥분이 완성된 영화에서는 보이지 않으니까, 그렇게 만드는 사람의 입장을 즐기는 사람에게 전달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류성희: 총 몇개의 세트가 등장하나요? 정연두: 방-도시-거리-농촌-숲-산의 모두 여섯개 신이 나와요. 카메라는 레코딩 상태로 가만히 있고 세트가 바뀌는 거죠. 쉽게 말씀드려서 영화에서는 정면 숏을 찍은 다음 카메라를 끄고 측면 숏을 찍잖아요. 그런데 여기서는 정면 숏을 찍고 있다가 “측면!”이라고 지시하면 스탭들이 무대를 측면으로 돌리죠. 85분짜리 롱테이크 무성영화라 저에게는 무척 재미있는 경험이었는데 촬영감독님께서는 어이가 없으셨던지 술자리에서 그러시더군요. “정 작가, 영화의 꽃이 뭔지 아나? 베드신이랑 롱테이크야. (웃음) 무수한 영화의 대가들이 15분짜리 롱테이크를 찍기 위해 얼마나 공을 들이는데 정 작가는 어떻게 영상작업을 처음 하면서 85분 롱테이크를 찍으려고 하냐”고요. 저는 그냥 “안 해봤으니 해보죠”라고 우겼죠. (웃음) 그 영상을 뉴욕에서도 상영했었는데 관객이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더라고요. 사람들이 스펙터클한 편집 화면에 익숙해서 그렇지 않은 것에는 쉽사리 지루함을 느끼는데 지루함이 어느 정도를 넘어서면 묘하게 빨려들어가는 게 아닌가라는. (웃음) 요즘은 3D까지 나오면서 관객을 압도하려고 드는데, 사실 이건 세트가 허술해지니까 점차 디테일들을 꼼꼼하게 뜯어보기 시작하고, 능동적으로 생각하게 되는 프로세스를 거치게 되는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는 초창기 버스터 키튼 영화들에서 카메라가 멈추지 않고 본인이 직접 액션하는 모습에 매료되어 영상작업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던 건데, 한번 해보고 나니 이후에도 맛을 들이게 된 거죠. 영화가 없다면 내 작업은 의미가 없겠죠 류성희: 감정을 생산하는 방식에 있어서 버스터 키튼이 동시대의 찰리 채플린과 비교되는 부분이, 편집이나 연기에 의존하는 게 아니라 그 긴 테이크 안에서 몸으로 모든 걸 해낸다는 거잖아요. <수공기억> 같은 타이틀이나 방금 말씀하신 걸 들어보면 버스터 키튼처럼 실제로 몸을 써서 육체적인 작업을 한다는 것에 의미를 두는 쪽인가요? 정연두: 이를테면 미술감독님께서는 영화에 등장하는 소품들을 작품으로 완성하시는 거잖아요. 하지만 영화에서는 살짝 비쳐지는 것으로 생명을 다하죠. 저는 그 소품들이 영화의 한 장면에 잠깐 등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가지는 가치가 크다고 생각해요. 단지 촬영을 위해 세팅하는 건 핵심적인 매체를 정말 단순화시키는 거니까요. 그에 반해서 소품을 만든다든지 조명을 설치하는 작업들은 몸으로 부딪치는 일이라 실재감이 매우 크고요. 제가 다루고 싶은 건 그런 리얼리티예요. 영화에서 두 남녀가 눈물을 흘리며 감정이 고조된다고 할 때, 관객은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조명기사와 음향기사를 상상하진 않잖아요. 류성희: 그런 관심이 자연스럽게 마술사가 등장하는 <씨네매지션> 작업으로 이어진 건가요? 정연두: <씨네매지션>은 좀 달라요. 마술의 트릭을 보여주고서 다시 똑같은 마술을 했는데, 사람들은 여전히 신기해한다는 거죠. 어떻게 보면 기존의 완벽함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만큼 트릭을 보여주는 것이 신기할 수도 있죠. 또 하나는 영화 용어 중에 ‘불신의 자발적 유예’라는 말이 있잖아요. 다 가짜라는 걸 알면서도 그 생각을 접어두고 극장에 가는 거요. 요즘 관객은 그 훈련이 너무 잘되어 있어요. 가짜를 보여주고 나서도 다시 조명과 소품에 의해 포장되면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곧바로 끌려들어가는 것 같아요. 특히 이 작업에 영감을 준 조르주 멜리에스의 후반 작품들을 보면 영화의 특수효과나 소품들이 손에서 빚어진 듯한 인간적인 느낌을 줘요. 사실 저는 <해리 포터> 소설을 너무 좋아하거든요. 모든 마법 주문을 다 외울 정도로. (웃음) 그런데 막상 영화가 나와서 보러 갔더니 감동이 별로 안 남는 거예요. 물론 미술이나 컴퓨터그래픽으로 구현된 마법들은 완벽하죠. 하지만 그런 기술적인 진보나 테크놀로지가 과연 해리가 이모 집 다락방 구석에서 열망하던 마법의 느낌을 얼마나 제대로 표현했을까 싶은 거예요. 차라리 저는 제가 좋아하는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대의 MGM 영화들과 텔레비전 인형극장에서 막대기가 보이는 구름이나 선풍기로 만드는 바람이 감정적인 것을 표현하는 데 더 적합한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어요. (웃음) 물론 최신 테크놀로지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표현력이 확장되는 부분이 있으니까. 하지만 저는 테크놀로지를 잘 쓰는 방법이, ‘눈에 보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라는 입장이에요. 그런 상태에서 사람들이 친근하게 내용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죠. 제가 <다큐멘터리 노스탤지어>를 찍을 때 HD영상을 하드 드라이브로 녹화하고 그 기록을 그대로 상영한 것도 당시로서는 최신 기술에 가까웠거든요. 하지만 화면상으로는 허술한 세트에 사람들이 와서 움직이는 모습들이 인간적으로 와닿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게 제가 생각하는 기술의 관점이에요. 류성희: 말씀하셨던 부분이 영화 미술에서도 비슷한 맥락을 가지는데, 이를테면 관객이 <마더>를 보러 갈 때와 <올드보이>와 <괴물>을 보러 갈 때의 기대감은 조금 다른 것 같아요. 판타지라는 면에서는 동일하지만 진짜처럼 보이고자 하는 목표에서는 조금씩 차이가 있죠. 사실 <마더>에서 보여준 미술들도 진짜 리얼리티인가 하면 그렇지 않거든요. 인물들이 처해 있는 상황에 따라서 리얼리티를 과장하는 방식을 써요. 요즘 시골 가보면 텍스처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고 지저분하고 그로테스크하지 않거든요. 한편으로 <올드보이> 같은 영화는 같은 스릴러라고 해도 그 영화의 여러 굴곡을 통해 판타지와 현실의 경계를 오가는 미술이 또 다른 감정을 느끼게 하는 것 같아요. 어쨌든 우리는 진짜처럼 보이는 판타지를 위해 나머지 군더더기들을 다 없애죠. 정 작가님은 그것을 만드는 총체적인 과정이나 경험의 중요성에 주목하시기 때문에 굉장히 흥미로운 것 같아요. 정연두: 사실 영화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제 작업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겠죠. 어떻게 보면 메타 영화에 가깝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관객이 제 작품에서 어떤 경험을 하고 어떤 생각을 하며 돌아가게 되느냐인 것 같아요. 류성희: 제가 정 작가님을 만나뵙고 싶었던 가장 큰 이유가 바로 그 지점이에요. 작업을 하시는 목표랄까요. 그게 결국은 ‘관객의 체험’인가요? 정연두: 그건 정말 표현하기 어려운 것 같아요. 예전에 어떤 신문에서 인터뷰를 했는데, 기자 분들은 좀 과장해서 기사를 쓰시잖아요. 제가 넘어졌다고 하면 부러졌다고 하고. (웃음) 제 작품의 원리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포레스트 검프>를 언급했거든요. 검프는 여자친구가 떠나간 뒤에 슬픔을 달래기 위해 달리기를 시작하고, 달리다 보니 동부에서 서부 끝까지도 뛰는데 주위에서는 ‘뭔가 심오한 메시지를 주려나 보다’면서 추종자들까지 생기잖아요. 대개 예술가들이 무언가를 하는 것은 포레스트 검프처럼 되게 단순한 자기 안의 원동력을 모티브로 삼는데, 하는 짓이 원체 바보 같으니까 주위 사람들이 의미를 붙여주고, 그 과정에서 전설이 형성되는 거라고 이야기했어요. 그런데 다음날 신문을 보니 ‘포레스트 검프 작가 정연두’라고. (웃음) 나는 감독 의자에 앉은 미술감독 류성희: 그럼에도 저는 관객으로서의 개인적인 감상이긴 하지만, 예전부터 작가님의 작품을 보면서 ‘따뜻하다’는 일관된 퍼스낼리티를 느껴요. 가끔 현대미술관 같은 데 가서 접하는 차갑고 냉소적인 미술의 느낌이 아니라 순진과 순수가 느껴질 정도로 솔직한 태도랄까요. 특히 재미있다고 생각했던 부분이 <내사랑 지니> 프로젝트였는데요. 아이들이 꿈을 담아 그린 그림을 사진으로 실현시켜주는. 저도 <헨젤과 그레텔>이라는 영화에서 비슷한 작업을 했었거든요. 아이들이 크리스마스에 책을 선물받는데, 거기에 그림을 그리면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그것을 실현시켜주는 대목이 있어요. 그 장면을 위해 실제로 애들을 데려다 그림을 그리게 하고 그걸 이미지화하는 작업을 거쳤는데 아무리 공포영화라고 해도 크리스마스 시즌에 관객을 너무 놀라게 하면 안되잖아요. 작가님께서는 진짜 핑크, 빨강 같은 원색을 써서 애들이 그린 그림의 느낌 그대로 구현하셨지만, 저희는 필터링을 거쳐서 <해리 포터>처럼 ‘안심할 수 있을 만한’ 이미지들을 만들었죠. 저 또한 끝까지 가보고 싶다는 갈망이 있지만 영화다 보니 자제해야 하는데, <내사랑 지니> 프로젝트를 보면서 너무 부러운 거예요. 유치원생들에게 몇백, 몇천점의 그림을 그리게 한 다음 그중에서 고르고, 재미있게도 고등학생들을 캐스팅해서 그 그림에 나와 있는 이미지대로 분장하게 했잖아요. 모티브를 구현하는 과정에서 왜 고등학생을 캐스팅했는지도 궁금해요. 정연두: 영화와 제 작업의 가장 큰 차이점은, 영화 작업에는 고려해야 할 요소들이 많다는 거예요. 그런데 저는 혼자니까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아무도 안 말린다는…. (웃음) 어떻게 보면 미술감독이 감독 자리에 앉아서 다 시키는 것과 같죠. <내사랑 지니> 프로젝트에서 재미있었던 점은 극도로 사실성이 부족한 아이들의 그림을, 사실성이 강한 사진이라는 매체로 옮긴다는 데 있었어요. 패션디자이너 분들과 애들 그림을 보면서 “얘가 이쪽 소매는 좁게 그리고 다른 쪽 소매는 커다랗게 그렸는데 그대로 의상을 만들어보면 어떨까요?”라는 식으로 의견을 내죠. “상당히 아방가르딕하게 나오겠는데요”라는 답이 돌아오고. 그런 게 재미있는 것 같아요. 그림을 카메라로 얼마나 표현할 수 있을지, 마치 게임을 하듯 디자인으로 풀어가다 보면 제가 채울 수 있는 영역도 넓어지고 아이들의 눈을 통해서 바라보는 사회라는 관점에서도 어떤 요소를 넣고 빼야 하는지 생각하게 되고요. 그리고 고등학생을 캐스팅한 것은, 애들 그림 중에서 차를 운전하고 있는 장면 때문이었어요. 아이가 운전하는 장면을 담는 것은 사실성이 굉장히 떨어지기 때문에, 몸은 어른이지만 정신적으로는 아직 아이들과 통하는 존재로 10대 청소년들을 생각하게 된 거예요. 어른들이 대신 그 역할을 해도 안될 건 없었지만 사진이 어른들의 매체고 상상력이 아이들의 매체라고 하면 그 중간자적인 단계의 소년들이 실행하도록 하는 게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류성희: 애초의 생각을 고스란히 표현한다는 게 쉬워 보이지만, 사실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는 것조차 훈련된 방식이 있기 때문에 생각을 제대로 표현하기가 힘들잖아요. 요즘처럼 정보량이 많은 세상에서는 더더군다나 어려워요. 심지어 자신을 구성하는 것조차 자신의 것이 아니고 그 생각 하나 표현하기조차 어려운 시대를 살다 보니 정 작가님의 뚝심이나 진심을 고스란히 전하려는 부분에서 감동을 받는 것 같아요. 정연두: 저랑 같이 뛰실까요? (웃음) 스튜디오에 대한 판타지는 작업의 원동력 류성희: 그리고 <다큐멘터리 노스탤지어>나 <내사랑 지니> 프로젝트, 그리고 <수공기억> 같은 작품을 보면 기본적으로 스토리텔링에 재능도 있으신 것 같아요. 한편으로 궁금한 것은 <수공기억>의 경우 노인들을 인터뷰해서 그분의 기억을 영상으로 실현시킨다는 내용인데요. 누구나 그렇듯 기억이란 완벽하지 못하고 머릿속에서 어느 정도 조작할 수 있잖아요. 그렇다면 이 작업의 포인트는 그분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다가가서 충분히 조작될 수 있는 그 기억들을 실현시켜서 위안을 주기 위함인지, 아니면 단지 진위 여부와는 관계없이 팩트 자체가 흥미로웠던 건지…. 정연두: <수공기억>은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에서 영감을 얻었는데요. 사람의 기억을 소재로 해서, 충실한 다큐멘터리 형식과 영화 세트장에서 완성되어가는 풍경 두 가지를 동일한 이야기라는 강박없이 병치시킨 거였어요. 사실임을 표방하는 매체와 가짜임을 표방하는 매체를 붙인 거고, 어느 시점에서는 그 둘이 교차되기도 해요. 한 예로 어떤 할아버지가 젊은 시절 탈영병 아버지를 찾아갔다가 본 육간대청 기와집 이야기를 할 때, 옆 화면에서는 세트에서 기와집을 만들고 있죠. 2m짜리 얄팍한 세트지만 완성한 다음 특정한 렌즈로 특정 거리에서 잡으면 정말 육간대청 같거든요. 그리고 영화적인 조명이 태양광처럼 쏟아지면 그 세트가 일순간 생명력을 얻는 것처럼 보였어요. 바로 그때 할아버지가 말한- 왜곡되거나 거짓일 수도 있는- 이야기와 세트의 영상이 교차되는 거죠. 그 지점이, 저는 <수공기억>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사실 제 작업방식은 단순해요. 아이디어가 풍부해서 그것들을 엮어낸다기보다는 경험을 바탕으로 하나씩 부딪쳐나가다 해결책을 찾아가는 방식이죠. 영화쪽에서 일하는 분들을 보면서는 ‘정말 계획을 잘 세워야겠구나’라고 많이 느껴요. 여러 변수까지 염두에 둬야 하고 사람 다루는 데도 내공이 있어야 하고…, 그런 작업에 비하면 제 방식은 정말 바보스럽죠. 반대로 제가 감독님께 궁금한 것은, 직접 메가폰을 잡게 된다면 어떤 작품을 해보고 싶으시냐는 거예요. 류성희: 저는 뮤지컬을 해보고 싶어요. 한국의 풍토는, 영화쪽도 리얼리즘에 익숙하잖아요. 진짜 사실처럼 느껴져야 하고. 그런데 나이를 좀 먹다 보니 아까 말씀하셨던 것처럼 ‘이것은 가짜고 세트이니 돈을 내고 들어와서 가짜 경험을 즐겨라’라고 하는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대 미술에 대한 생각을 새롭게 하게 되었어요. 하지만 저는 어디까지나 서포팅을 하는 직업인데다가, 그 과정에서 이미 많은 필터링을 거치고 숙련화되어서 그런 작업을 하기 힘들게 되어버린 게 아닌가 두려워요. 정연두: 아니에요. 제가 보기에는 제가 영화를 만들게 될 확률보다는 감독님께서 영화를 만들 확률이 훨씬 더 높은 것 같아요. (웃음) 이야기 중에 느끼셨겠지만 제가 봐온 영화들은 죄다 한쪽으로 쏠려 있거든요. 그래도 다행이라 생각하는 것은 그렇게 쏠려 있는 경험들이 제게 나름 좋은 판타지를 제공해준 셈이 되었다는 거예요. 스튜디오에 대한 판타지죠. 여튼 오늘 뵙게 되어 정말 반가웠습니다. 다른 분야의 분들을 만나는 일도 즐겁지만,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재미있는 생각을 가진 분이라면 함께 일을 해도 정말 재미있더라고요. 그건 확실해요. 류성희(1968년생) 홍익대학교 도예과 졸업. 도예 전공으로 대학원까지 마친 뒤 1998년에 도미하여 미국영화연구소(AFI) 석사과정을 이수했다. 귀국 뒤 <꽃섬>(2001)에 미술감독으로 참여하며 영화 프로덕션디자이너로 데뷔. <피도 눈물도 없이>(2002), <살인의 추억>(2003), <올드보이>(2003), <달콤한 인생>(2005), <괴물>(2006), <헨젤과 그레텔>(2007), <박쥐>(2009), <마더>(2009), <만추>(2010) 등의 작품에서 미술감독을 맡았다. 정연두(1969년생) 서울대학교 조소과를 졸업하고 런던대학 골드스미스 칼리지에서 석사과정을 이수했다. 귀국 뒤 2001년 <보라매 댄스홀전>으로 작품 활동 시작. 대표적인 작업으로 <내사랑 지니>(2003~), <로케이션>(2005), <다큐멘터리 노스탤지어>(2007), <수공기억>(2008) 등이 있으며, 현재 지난해 일본과 미국에서 선보인 <씨네매지션> 퍼포먼스의 국내 초연(4월26~27일, 서강대학교 메리홀 대극장)을 준비하고 있다.

비글로 "할리우드에 여성 감독 많아져야"

(서울=연합뉴스) 송광호 기자 = "할리우드에서 여성 감독들이 더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할리우드의 아마조네스'라는 별명을 가진 캐슬린 비글로 감독은 아카데미상 역사에서 여성으로는 처음 감독상을 받았다. 그가 만든 '허트 로커'는 제82회 아카데미시상식에서 작품상과 감독상을 포함해 각본상, 음향 편집상, 음향 효과상, 편집상 등 6개 부문을 수상했다. '유리천장을 깼다'는 칭송을 받는 비글로 감독은 영화 '허트 로커'의 개봉(22일)을 앞두고 8일 가진 이메일 인터뷰를 통해 "배우들과 원작자에게 감사할 뿐"이라며 "이 영화를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자신들의 목숨을 걸고 일하는 모든 군인에게 바치고 싶다"고 했다. 제임스 캐머런 감독의 전처이기도 한 비글로 감독은 '폭풍속으로'(1991)에서 큰 성공을 거두며 1990년대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웨이트 오브 워터'(2000),'K-19'(2001)가 잇따라 흥행에 참패하면서 한동안 연출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할리우드에서 더는 재기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소문도 나돌았다. 하지만, 그는 TV 시리즈물 등을 만들면서 재기를 노렸다. '허트 로커'를 쓴 마크 볼과의 인연은 재기의 실마리가 됐다. "볼의 글을 텔레비전 시리즈로 만들면서 꽤 친해졌어요. 저는 2004년 볼이 바그다드에 간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그곳은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었고, 그래서 더 궁금한 곳이었습니다. 그가 돌아올 때, 영화로 만들어도 될 만한 소재를 가지고 올 것이라고 예상했고, 그 예상은 적중했습니다. 2005년부터 영화를 만들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완성하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죠." 영화는 이라크전에 참전한 미군 특수부대 폭발물 처리반의 일상을 담았다. 폭발물 사고로 톰슨 하사가 죽자 윌리엄 제임스 하사(제레미 레너)가 새로운 팀장으로 온다. 폭탄 제거에서 희열을 느끼며 삶의 의미를 찾는 윌리엄은 자신의 실력을 믿고 독단적으로 행동하며 팀원들과 갈등을 빚는다. 액션 영화가 장기인 비글로 감독은 그간 천착했던 순수 액션영화 대신 왜 정치적으로 민감한 이라크전을 다룬 영화로 복귀했을까. "볼의 글을 읽으며 제가 정말 연출하고 싶은 이야기라고 생각했어요. 이 이야기 외에 다른 영화를 찍는다는 건 생각하지 못할 정도였어요. 다만, 각본을 살려 영화를 창의적으로 찍기 위해서는 메이저가 아닌 독립투자자들로부터 투자를 받아야 했습니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작업이었습니다." 투자받기도 용이하지 않았지만, 실제 촬영 자체도 순탄하지 않았다. 요르단에서 촬영에 들어갔으나 외적 요건이 최악이었던 것. "촬영을 시작했을 때는 7월 중순이었어요. 섭씨 40도가 넘는 찜통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였습니다. 열사병의 위험은 항상 있었죠. 게다가 엄청난 무더위 속에서도 배우들은 36-45㎏에 이르는 폭탄제거 장비를 착용해야 했습니다. 최악의 상황이었죠. 그런 상황을 참고 연기해 준 배우들에게 고마울 뿐입니다." 그는 '허트 로커'를 찍으면서 정치적인 부분보다는 "인간애를 그리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고 했다. "제임스 하사는 전혀 정파적 특징이 없는 인물이에요. 그는 공화당도 민주당도 아니죠. 목숨을 걸고 일을 할 뿐입니다. 저는 주인공이 상상할 수조차 없는 위험한 상황을 헤쳐나가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비글로 감독은 아카데미상 남우조연상 후보에 오른 제레미 레너에 대해 "매우 재능이 뛰어난 배우"라고 평했다. 차기작을 묻자 "무법지대로 알려진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브라질의 접경지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라고 소개했다. 이 영화도 마크 볼이 시나리오를 썼다. "만약 여자가 영화를 만드는 데 있어 어려움이 있다면, 저는 두 가지 이유에서 그런 어려움을 무시합니다. 일단 저의 태생적인 성(性) 자체를 바꿀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는 영화 만드는 걸 그만두지 못합니다." buff27@yna.co.kr (끝) <연합뉴스 긴급속보를 SMS로! SKT 사용자는 무료 체험!>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감각 있는 코미디이자 결이 고운 로맨스 <미 투>

synopsis 34살 다운증후군 환자 다니엘(파블로 피네다)이 사회복지기관에서 일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남들보다 더 똑똑하다. 다니엘은 직장에서 함께 일하는 라우라(롤라 두에냐스)에게 애정을 느낀다. 둘은 친해진다. 함께 어울리고 여행도 간다. 주변에서는 개방적인 라우라가 결국 다니엘을 찰 것이라고 걱정한다. 다니엘은 라우라에게 사랑한다는 고백을 하고 싶지만 거절당할까봐 말하지 못하고 라우라는 다니엘이 좋지만 확신이 없다. 다운증후군에 관한 단편을 만든 바 있던 스페인의 신예감독 안토니오 나아로와 알바로 파스트로는 텔레비전에서 한 사람의 인터뷰 장면을 보고 흥분을 느껴 <미 투>를 시작하게 됐다. 다운증후군으로 유럽 최초의 학사학위를 받은 실제 인물이며 동시에 이 영화의 남자주인공인 파블로 피네다가 전적으로 영화의 시작점이 됐다. 연기를 배운 적이 없고 앞으로 할 생각도 없는 것 같은데 그의 몸짓과 미소는 서툰 데가 없고 능숙하다. 그는 다니엘이라는 극중 이름을 얻었는데 카메라를 두려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매력을 발산한다. 극중 다니엘은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 라우라가 얼마나 덜 지적인지 “<세속적 쾌락의 정원>을 진짜 정원으로 알더라며” 형에게 농담한다. 그런데 우리는 <세속적 쾌락의 정원>이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슈의 작품이라는 걸 얼마나 알고 사는 걸까. 그러니 다니엘은 정상인과 비교해도 지적으로 수준급이고 다운증후군으로는 더없이 희귀한 인물이다. 정상인과 다를 바 없는 보통 이웃 다니엘의 이야기라고 이 영화는 홍보하고 있지만, 실은 이건 숨겨진 한명의 희귀한 삶의 영웅에서 출발한 이야기다. 그는 같은 게 아니라 특별하다. 보통 사람과 같은 건 그의 존재가 아니라 그의 사랑의 상투성이다. “라우라의 집에 안 가본 남자가 누구냐”는 말이 돌 만큼 라우라는 많은 남자를 거쳤는데, 다니엘은 라우라라는 그 동료 여직원에게 애정을 느낀다. 사람들은 다니엘이 결국 버림받을 것이라고 쑥덕거린다. 그런데 시원하게 알려지지 않지만 여주인공 라우라에게도 남모를 아픔, 가족사의 비밀이 있다. 다운증후군 남자와 마음의 상처가 있는 여자. 그들의 사랑은 순탄치 않다. 하지만 자주 유쾌하고 귀엽다. 이게 이 영화의 매력이다. 영화는 특별한 인물로 시작하여 유쾌함으로 순항하다가 예상된 도덕적 결말에 닿는 대신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의 자유로움을 찾아 닻을 내린다. 감독 중 한명인 안토니오 나아로가 형으로 나와 좋은 연기를 보여주고, 또 다른 다운증후군 연기자들도 발군의 연기실력을 보인다. 영화는 평등한 권리를 부르짖는 대신 사랑의 질곡을 들여다본다. <미 투>는 감각있는 코미디이자 결이 고운 로맨스다.

[talk show] 진정한 돌아이, 형님으로 모실게요

세대마다 전영록이라는 이름은 다르게 기억한다. 1970년대에 그의 팬이었던 이들은 포크 싱어송라이터이자 청춘드라마의 단골 주연이었던 하이틴 스타로, 80년대 팬들은 록 비트와 발라드의 콘트라스트 강한 히트곡과 <돌아이>로 대표되는 액션영화로, 그리고 그의 활동이 멈춘 시기였던 90년대에 태어난 세대는 전영록을 그저 ‘티아라’ 전보람의 아버지로만 알고 있을 것이다. 영화감독 오승욱은, 그 시계열별 이미지의 총합 또한 진짜 전영록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고로 다시 질문한다. 여러분은 전영록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신가요? 어쩌면 한국 대중문화계가 낳은 최초의 르네상스맨이었을 그의 광활한 스펙트럼에 대하여. 대한민국에서는 가히 대적할 자가 없을 시네필이자 수집가로서의 면모에 관하여. 오승욱: 저한테는 전영록 선배님과 얽힌 아픈 기억이 있어요. 재수 시절에 사귀었던 여자친구가 선배님의 어마어마한 팬이었거든요. 그 친구 말로는 전영록 선배님이 직접 학교까지 찾아와서 자기를 오토바이 뒤에 태워준 적이 있다 그러던데, 혹시 기억나세요? 전영록: 그거, 거짓말이야. (웃음) 나는요, 영화에서만 오토바이를 탔어요. 선친(배우 황해)께서 절대 오토바이 못 타게 하셨거든. 그, (이)덕화 형 사고났던 오토바이가 내 오토바이잖아. 우리 아버지께서 나 오토바이 못 타게 한 걸 알고, 덕화 형이 자기가 타겠다고 가져갔다가 3일 만에 사고난 거예요. 오승욱: 아, 그렇구나. 이제야 진실이 밝혀지는군요. (웃음) 어쨌든 당시에는 정말 여학생들에게 엄청난 대스타였잖아요. 전영록: 그때는 애들이 나 피해다녔어. 왜냐하면 야단나니까. 공부 안 하고 나 따라다니면 윽박질렀어. 팬클럽 회원들한테는 성적표 가져오라 그러기도 하고. (웃음) (데뷔에서 하이틴 스타 시절까지) 노래는 아빠가 싫어하고 연기는 엄마가 싫어해 오승욱: 데뷔 때 이야기 좀 해주세요. 영화에서 처음 주연을 맡으셨던 때가…? 전영록: 1975년. <내 마음의 풍차>였지. 사실 처음에는 영화보다 음악을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선친께서는 내가 음악하는 거 싫어하셔서 음악을 만들어서 영화에 삽입하려고 했던 거지. 그래서 화천공사에 음악을 들고 갔더니 “이거, 네가 만들었냐? 생긴 게 좀 돌아이 같은데 출연 한번 해봐.” 그렇게 된 거야. 오승욱: <<내 마음의 풍차>> 앨범에 좋은 노래 많았죠. <그 날이 오면> <철지난 바닷가>…. 전영록: <철지난 바닷가>는 정지영 감독이 가사를 써줬어. 당시 김수용 감독의 조감독이었거든. 오승욱: 어제 16년 만에 그 LP를 다시 들었거든요. 재킷 사진을 보면 분명 고등학생인데, 어떻게 <나그네길> 같은 노래를 만들었을까 싶더라고요. 전영록: 고3 때 만든 노래지. 오승욱: 그러면 영화보다 음악을 먼저 시작한 셈인가요? 전영록: 같이 시작했어요. 노래만 하고 싶은 마음이 많이 있었고요. 영화쪽은 연기보다 연출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컸어요. 그러다가 1973년이었는데, 아버지 따라서 당시 정동에 있던 MBC에 간 적이 있어요. 그때 <경향신문> 연예부 기자였던 이상벽씨를 만난 거죠. 보시더니 아버님 아들이니까 나에 관한 기사 하나 쓰시겠다고. “아니, 저는 한 것도 없는데 무슨 기사를 쓰신다고 그러세요?”라고 했더니, 곁에 계시던 송재호씨가 “하나 만들면 되지”, 그러시면서 이병훈 PD(<대장금> <동이>)를 부른 거야. 그래서 드라마 <제3교실>에 출연하게 된 거예요. 그리고 이병훈 PD님이 노래를 한번 시키시는 바람에 극중에서 <편지>를 부른 적이 있는데, 그걸 또 지구레코드 사장님이 보시고 전속을 해준 거고. 당시 우리집에서는요, 영화를 하겠다고 하면 우리 어머니(가수 백설희)가 싫어했어. “얘는? 노래를 해야지, 무슨!” 그런데 또 노래를 하겠다고 하면 아버지가 싫어해. (웃음) 너무 속상한 거야. 대놓고는 못하고 별짓 다 했지. 작사, 작곡도 하고 영화 스크립터 노릇도 했으니까. 그러다가 가수 시작하고 20년이 지나서 윤시내씨랑 듀엣으로 노래 부르는 걸 보신 아버지가 “너, 이제 가수 같다”고 그제야 조금 인정해주신 거야. 지금 (전)보람이가 티아라로 나오는데, 여기저기서 아버지와 함께 뭐 한번 해보자고 제안이 들어오거든. 절대 안 해줘요. 내가 선친하고 똑같아.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는 것 같아. 부모 자식 엮이는 거 꼴보기 싫거든. 오승욱: 그래도 따님이 하고 싶다는 일을 말리는 입장은 아니시잖아요. 전영록: 절대로. 나쁜 짓만 안 하면 되는 거니까. 자식은 절대 부모가 키우는 게 아냐. 할 수 있는 건 나쁜 쪽으로 빠지지 않도록 가이드하는 것밖에 없어. 자기들이 크는 거야. 오승욱: 살펴보니까 1975년부터 77년까지 무척 많은 영화들을 찍으셨더라고요. 전영록: 거의 김승호 선생님이었지. 김승호 선생님 하루에 다섯편씩 찍으셨잖아. (웃음) 그래서 내가 군대 가길 잘했다고 생각했어. 사실 그때 연예인 대마초 파동 일어나면서 아버지가 나를 강제로 군대에 보내셨거든. 그것도 ‘빽’써서 최전방으로. (웃음) 어쨌든 정신없이 일만 하다가 군대 가면서 차분하게 앞으로 뭘 할까 생각할 수 있게 된 거지. 군대 갔더니 고참들이 노래를 시켜. 그러면 나는 가요 안 부르고 군기 딱 잡고 군가 불렀거든. (웃음) “이 새끼 가수 맞아? 완전 돌아이 아냐”, 그러면서 별명이 돌아이가 됐어. 그때 생각했지. ‘맞아, <돌아이>라는 영화를 해보면 어떨까.’ 그래서 시놉시스를 쓰기 시작한 거야. (80년대 액션스타 시절) 키 작은 스턴트맨이 없어서 내가 다 했어 오승욱: 군대에서 <돌아이> 시놉시스를 쓰셨다고요? 전영록: 응, 제대해서 그걸 들고 영화사에 찾아갔더니 이장호 감독이랑 같이 해보면 어떻겠냐고 하더라고. 당연히 좋지. 그런데 어느 날 보니까 이두용 감독님으로 바뀌었어. 나는 장호 형이 바빠서 거절했나보다 했는데, 어느 날 형이 날 불러내더라고. “야, 네가 날 자른 거야?” “저 그런 힘없는데요.” 그래도 미안해서 그런 이야기를 해드렸어. “형, 제가 평론가는 아니지만 분명히 앞으로 만화의 시대가 옵니다. 이거 제가 보던 책인데 재미없으면 버리시고, 재미있으면 영화 한번 만들어보세요”라고 드렸던 책이 <공포의 외인구단>이었어. 대박이 났죠. 나중에 장호 형이 고맙다 그랬는데 내가 그랬죠. 형 영화 하나만 꼭 내가 리메이크하고 싶다고. 오승욱: <그들은 태양을 쏘았다>! 전영록: 그렇지. 그 이야기가 <홀리데이>보다 더 세지. 오승욱: 예전에 <씨네21>과 인터뷰할 때 밝힌 적 있는데요. 제가 꼭 만들고 싶은 필생의 영화가 바로 <그들은 태양을 쏘았다>의 ‘이종대·문도석 사건’이에요. 어릴 때 그 사건이 정말 크게 가슴속에 남았거든요. 저는 <그들은 태양을 쏘았다>도 좋았지만, <수사반장>에서 이 사건을 ‘내리막길’이라는 제목으로 각색한 적이 있었어요. 거기서 이종대 역을 박근형씨가 맡았는데, 개머리판 없는 칼빈소총을 들고 바바리코트 차림으로 구로공단 앞에서 강도짓을 하는데 행인이 쳐다봐요. 그때 박근형씨가 뭐라 그랬냐면 “강도 처음 봐?” (웃음) 전영록: 난 <돌아이> 가위질당한 게 정말 속상해. 이태원에서 미국인이랑 싸우는 장면이 있었어요. 걔가 극중에서 한국 사람 멸시하니까 불러내서 혼내준 거지. 근데 그게 잘렸어. 돈 받아먹는 방송 PD한테 돈 뿌리면서 “다 처먹어라” 하는 장면도 잘렸고. 그리고 그때는 말도 안되게, 영화에서는 범인한테도 존댓말 쓰라 그랬거든. 오승욱: 근데 저는 그걸 극장에서 보면서 되게 독특하다고 생각했어요. 돌아이 캐릭터와도 맞는 것 같았고요. 전영록: <돌아이> 하고 나서 (김)홍신이 형이 나를 보더니 “이 자식, 너 <인간시장> 보고 베꼈지?”라고 그래. 나는 <인간시장>의 ‘인’자도 모른다고 했지. <인간시장>은 허구지만 <돌아이>는 있을 수 있는 얘기라고. 당시에 실제로 다 그랬거든. 오승욱: 그 무렵 <돌아이>의 청춘 액션스타 전영록 선배님이랑 <인간시장>의 진유영씨가 양대 액션스타로 격돌했었죠. 전영록: 선친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나면 액션영화든 뭐든 주인공이 무게 잡으면 안된다고 했어요. 이두용 감독님도 그런 말씀을 하셨고. 그건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그래. 뭐냐면 비가 <닌자 어쌔신>에서 무게를 너무 잡았어. 귀여운 캐릭터가 나와줬어야 하는데. 오승욱: 그 무렵 텔레비전에서 쌍절곤도 돌리고 무술시범도 하셨던 기억이 나는데요. 전영록: 합기도를 하다가 80년부터 진짜 사부를 만났지. 홍문탁씨라고, 당랑권 세계 1인자셨는데 나랑 임성훈씨를 제자로 거둬주신 거야. 임성훈씨는 창술, 나는 권이랑 봉. 그 수련을 쭉 했어. 배우러 갈 수 없을 때는 방송국까지 오셔서 무대 뒤에서 수련 다 시킨 다음 가시고 그랬지. 오승욱: 그때 배운 무술이 <돌아이> 촬영 때 도움이 많이 됐겠네요. 전영록: 근데 이두용 감독님께서 “이 영화는 막싸움이야” 그러셔서, 얌전하게 “네” 그랬지. 오승욱: 그렇군요. 저는 <돌아이> 보면서 수련의 폼이 나왔다고 생각했거든요. 전영록: 전혀 없었어요. 진짜 싸움이 나와야 하니까. 오승욱: 그러면 청춘영화 찍을 때도 액션영화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던 거예요? 전영록: 완전 있었지! 군대 가서도 하이틴물은 곧 없어질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제대 이후에는 <달려라 풍선>이랑 <대학들개> 정도밖에 안 찍었지. 그러고는 하이틴영화 주연 자리를 이승현한테 물려준 거야. 오승욱: 맞아요. 사람들이 이승현씨를 하이틴 스타 1세대로 기억하는데 사실 선배님이 먼저죠. 전영록: 나하고 임예진, 이덕화 형이 1기, 이승현이 2기지. 오승욱: <돌아이>로 마침내 액션을 하게 되어서 너무 좋으셨겠어요. 전영록: 좋았지. 게다가 액션은 전부 내가 다 직접 해야 했어. 스턴트맨을 못 썼던 게 나처럼 키가 작은 스턴트맨이 없었어. 오승욱: 저는 <돌아이>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 골목길에서 권일수씨와 연탄재 들고 싸우는 장면이었어요. 전영록: 액션장면마다 여러 추억이 많아요. 연탄재 장면은 골목 싸움 찍을 때 “형, 우리 연탄재 써보자. 이거 나중에 추억거리 될 거야. 곧 없어지니까”라고 무술감독한테 이야기해서 한 거야. 3편 찍을 때는 물에 빠져서 죽을 뻔한 적도 있어요. 수상스키신 찍다가 파도가 오는 바람에 물속으로 곤두박질쳤거든. 누군가 간신히 머리카락 움켜쥐고 나를 끄집어냈는데 숨을 안 쉬더래. 나 진짜 죽었었어. 그때 정신 잃은 나를 절에 눕혀놨는데, 스님 한분이 오셔서 내 불가 이름을 지어주셨거든. ‘응관’이라고, 세상 이치 다 응하고 관대히 베풀라는 뜻. 그러고는 “너는 예전의 팔자가 아니다”라고 말씀하셨어. 그때부터 내 팔자가 없어졌어. 액션장면 찍을 때 제일 무서웠던 건 차끼리 부딪치는 거. 그런데 그것도 충돌이 세번 넘어가면 묘한 쾌감이 있어. 그래서 “감독님, 저 전봇대 한번 받아볼까요?” 그러고 막. (웃음) 2편인가에 보면 실제로 전봇대 부딪히는 장면이 나와. 그거 사고야. 오승욱: <돌아이>는 흥행도 되게 잘됐잖아요. 전영록: <돌아이> 개봉 직전에 이태원 사장님이 “재미있게 홍보하는 방법이 없을까?” 그러시기에, 내가 돌아이걸들과 함께 극장에서 공연하겠다는 아이디어를 냈어. 지방 대도시마다 첫 상영하기 직전에 공연을 했는데, 그게 먹혔잖아. <돌아이>가 태흥영화사 첫 작품이었는데 완전히 흥행했어요. 명동 중앙극장에서 개봉했는데 그때 허리우드극장에서는 <람보>를 상영하고 있었어요. 세편을 만들면서 계속 <람보3>까지 개봉시기가 같았는데, 그것도 안 깨졌지. 관객 줄이 스카라극장부터 시작해서 명동성당까지 죽 이어져 있으면 기분이 정말…. 오승욱: 그 풍경이 좋았죠. 저는 시나리오로 참여했던 <8월의 크리스마스> 때 그 기분을 딱 한번 느껴봤어요. 종로3가 지하철역에서 내렸는데 전철역까지 줄이 이어져 있는 거예요. 이게 무슨 줄인가 해서 봤더니 <8월의 크리스마스> 개봉한 피카디리극장에서 시작하더라고요. 그러고 보면 <돌아이>는 리메이크를 해도 좋을 텐데요. 그때 세상이랑 지금 세상이 별로 다르지 않은데다가. 전영록: 난 카메오로. 오승욱: 조연으로 나오실 만하죠. 전 그런 생각을 해봤어요. 과거에 돌아이였지만, 지금은 돌아이를 정말 증오하는 형사 역. 전영록: (웃음) 그거 히트다. (덕후의 제왕) <다크 나이트> 조커 피겨 안나와서 죽을 것 같아 오승욱: 영화 보는 건 학창 시절부터 좋아하셨죠? 전영록: 할리우드 키드였지. 개봉관보다는 동시상영관을 좋아했고. 왜냐하면 펄 시스터스, 김추자 누나들 공연 볼 수 있으니까. 극장 가면 좌석에 앉지 않고 무대 앞이나 무대 위까지 올라가서 보고 그랬어. 오승욱: 선배님 어렸을 때의 동시상영관이라면 한일극장이었나요? 전영록: 한일극장, 우미관, 청계극장 세개가 나란히 있었지. 책가방은 쓰레기통에 감춰놓고 그냥 들어가는 거야. 군대에서 휴가 나오면 매일 도시락으로 군만두 두 묶음 사서 아침부터 스카라, 단성사, 세기, 명보극장들을 훑고 살았지. 조금 벗어나면 중앙, 허리우드, 대한, 아세아극장 있었고. 오승욱: 저는 반포에 살았는데요. 방배동에는 ‘황금의 트라이앵글’이 있었어요. 교차로 주위에 동시상영관 세개가. (웃음) 전영록: 나는 어릴 때 ‘크면 쇼브러더스 영화들을 꼭 갖겠다’는 걸 소원으로 가지고 있었어. 오승욱: 저도 어렸을 때 극장에 가서 이소룡 영화 같은 걸 보면 저걸 가질 수 없다는 생각이 너무 사무치는 거예요. 그래서 머릿속에라도 봉인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극장에 가면 마지막 회까지 보면서 아예 외워버리려 했어요. 전영록: 나는 녹음기를 가지고 가서…. 오승욱: (웃음) 저도 그랬어요. 영화 시작하면 녹음 버튼을 누르고. 나중에 소리라도 듣는 거야. 전영록: 그거 녹음해와서 형들 들려주면서 <정무문> 중국어 대사 나오면 번역·해설 다 해줬다는 거 아냐. (웃음) 오승욱: 그러던 영화들이 다 비디오로 출시되었죠. 전영록: 출시되니까 또 욕심이 생기는 거야. 홍콩판 다르고 만다린판 다르고 우리나라에서 나온 거 다 다르니까 전부 또 가지고 싶은 거지. 오승욱: 영화쪽 취향은 어릴 때부터 센 쪽이셨나요? 전영록: 난 명화는 안 봐요. 공포영화만 한 3만편 봤어요. 그런데 그걸 다 안 까먹어. 생활하면서 다른 일에 대해서는 거의 치매 수준인데. (웃음) 오승욱: 공포영화에 출연하고 싶다는 생각은 없으셨나요? 전영록: 아뇨. 만들라고 하면 잘 만들 수 있어요. 내장 나오는 그런 유 말고 분위기로 오싹하게 만드는 거. 오승욱: 말씀 듣다보면 이것저것 좋아하는 게 많아서 지루할 틈이 없으시겠어요. 전영록: 나는 40년 동안 밤 11~12시에 자본 적이 없어요. 평균 아침 8시. 하루에 영화 네다섯편은 봐야 직성이 풀려. 지금도. 오승욱: 비디오 가게도 하셨잖아요. 전영록: 응, 나만 보면 죄악이다 싶어서 시작했는데, 사람들이 하나둘씩 집어가는 거야. 못하겠다 싶어서 3만편쯤 되는 비디오를 다 넘겼는데, 얼마 안 있어 ‘으뜸과버금’이라고 문을 열대? 오승욱: 아아, 그런 거였어요? 제가 알기로 선배님은 LP판 소장량도 어마어마해서 예전에 오아시스 레코드에서 전영록 선배님한테서 판을 구해다가 음반을 찍었다는 이야기도 들었거든요. 전영록: 스콜피온스(Scorpions) 음반을 내야 한다는데, 한국에서 원판을 나만 가지고 있었어. 그래서 그 음반을 가져다가 라이선스를 낸 거 아냐. 사실 나쁜 짓 하라고 도와준 거지. 이후엔 나 말고는 음악을 못 틀게 하려고 우리나라에 수입반이 나오면 전부 내가 다 사버렸어. 내가 라디오 DJ할 때 ‘코모도스’(Commodores)라는 그룹이 있었는데, 해체하면서 라이오넬 리치가 솔로 앨범을 냈네. 나는 분명히 이거 히트하겠다 싶어서, 국내에 나왔던 수입반 세장을 다 사버렸어. 그리고 방송에서 를 매일 틀기 시작한 거야. 그때 내가 하던 프로그램이 <젊음의 음악캠프>라고, 배철수가 하기 전이었거든. ‘일렉트릭 라이트 오케스트라’(ELO)의 라든가 버티 히긴스의 같은 곡들도 다 그런 식으로 내가 히트시킨 거야. 그때는 방송국 출근해서도 <빌보드>가 있으면 상위권보다도 50~100위 노래들을 주목했어. 그걸 구해다 틀어주면 결국 그 노래들이 1위로 오르는 거지. 오승욱: 전 정말 선배님 댁에 한번 가보고 싶어요. 영화, 음반 구경하려면 한달도 모자랄 것 같은데. (웃음) 전영록: 나, 그것도 많이 모았어요. 영화 캐릭터 피겨. 내가 술을 안 먹으니까, 집사람한테도 거기 돈 쓰는 건 이해해달라고 하고. 요즘 그걸 기다리고 있는데 안 나와서 죽겠어. <다크 나이트>의 히스 레저 조커. 석고로 된 건데. 오승욱: 제일 아끼는 피겨는 뭐예요? 전영록: 헬보이가 여러 가지 포즈를 취하고 있는 것, 그리고 슈렉. 가장 비싸게 산 건 <반지의 제왕> 나즈굴 피겨. 500만원을 주고 샀으니까. 요즘 보니까 아들놈이 하나둘씩 빼가는 것 같아. (웃음)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이런 분야다 보니 나는 고등학교, 대학 동창 모임을 안 나가. 나가보면 다들 무게 잡고 구라만 치고 앉아 있어. “야, 우리 (환갑까지) 3년 남았어”, 그런 이야기나 하고. (90년대 이후 두문불출) <얄미운 사람>도 내가 쓴 거라니까 오승욱: 딱 90년대로 넘어가고 나서부터 아무것도 안 하셨죠. 전영록: 1989년에 <> 음반 내놓고 났더니 할 장르가 없는 거야. 오승욱: 그 무렵에는 이미 하고 싶은 음악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았나요? 전영록: 아티스트도 돈이 있어야 하는 거더라고. 오승욱: 최고셨잖아요. 전영록: 인기와 명예뿐이야. 당시에 내가 쓴 히트곡 중에 내 이름으로 된 게 별로 없었어. 음반 낼 때마다 다른 사람들 이름으로 전부 올라갔지. 사람들은 내가 벌어놓은 돈이 있어서 일을 안 한다고 생각했겠지만, 나는 정말 답답한 거야. 약이 올라서 지난해에 돌아다니면서 명의를 전부 돌려받았어. “그동안 수억원씩 챙겼지? 이젠 내놔.” 그러고 도장 다 받았어요. 막말로 내 음악인데, 내 영화에는 마음대로 쓸 수 있어야 할 것 아냐. <두 얼굴의 여친>에 <사랑은 창밖의 빗물 같아요>가 삽입되면서 그 노래가 다시 떴는데, 다른 사람 명의로 되어 있으니까 돈은 또 그 사람이 다 먹은 거야. 그런 게 아주 많았어. 오승욱: 아, <사랑은 창밖의 빗물 같아요>도 선배님이 쓰신 거였구나. 전영록: 내가 쓴 것 중에 제일 많이 나간 건 그거야. <얄미운 사람>. 오승욱: 그 노래도 쓰셨어요? 전영록: 군대에서 부르던 구전가요 중에 그런 거 있잖아. ‘소령, 중령, 대령은~’ 그 멜로디가 너무 재미있어서 접목해본 노래였지. 오승욱: 영화면 영화, 음악이면 음악….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겪으신 내용을 기록으로 남길 생각은 없으세요? 불러주시면 제가 받아쓸게요. 전영록: 내가 충무로에서 태어났잖아. 하게 된다면 제목을 그걸로 해줘요. <충무로 키드의 생애>. (웃음) 오승욱(1963년생) 서울대학교 조소과 졸업. 1993년 <그 섬에 가고 싶다>의 조감독으로 영화계에 입문하여, <초록물고기>(1997), <8월의 크리스마스>(1998)의 시나리오작가로 이름을 알렸다. 2000년 본인이 각본을 쓴 <킬리만자로>로 연출 데뷔. 이후 (2002), <역도산>(2004) 등의 시나리오를 맡았으며 한국영화아카데미의 겸임교수를 역임했다. 저서로 <한국 액션영화>(2003)가 있다. 전영록(1954년생)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 중퇴. 1973년 드라마 <제3교실>로 방송, 1975년 음반 <<나그네길/별 친구>>로 대중음악, 그리고 1976년 <내 마음의 풍차>로 영화에 데뷔했다. 같은 해 <너무 너무 좋은 거야> <제7교실> <푸른 교실> 등의 영화에 출연하며 당대를 대표하는 하이틴 스타로 등극. 군 복무를 마친 뒤에는 <돌아이>(1985) 시리즈와 <독불장군> 등 다수의 액션영화들에 출연했다. 1989년 음반 <>와 1991년 영화 <토끼를 태운 잠수함> 이후 활동을 중단했다가, 지난 2008년 자신의 작업들을 새롭게 해석한 음반을 내놓았다.

[전영객잔] 노조미, 우리의 환상을 부탁해

<공기인형>에 대해 가장 동의할 수 있는 평론은 송효정이 썼다.(749호, 영화의 실존을 공기인형에 담아). 송효정은 <공기인형>을 아름답다고 이야기하는 일반적인 평과 달리 이 영화에서 불편한 요소들을 조목조목 짚어낸다. 나는 다만 송효정이 글의 끄트머리에 제기한 <공기인형>의 메타 영화적 성격에 대해, 그러니까 “공기로 가득 찬 노조미(배두나)는 영화의 현현”임을 지적한 것에 대해 좀더 부연하고 싶다. 내가 <공기인형>에서 가장 흥미롭게 느꼈던 것 역시 (송효정과는 다른 맥락에서) 영화의 메타포로서 노조미의 존재성이다. 그것이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중 <공기인형>이 가장 앙상한 영화로 남을 수밖에 없는 이유와 연관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난 많은 평자들의 지적만큼 이 영화가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것’의 충만함이 부재하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인물들은 무방비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남겨지곤 한다’. 그것이 어떠한 사건이었든 간에, 그의 인물들은 늘 준비가 부족한 상태에서 누군가의 부재를 경험한다. 상처받기 쉬운 인물들. 애써 태연한 척한다 해도,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인물들은 늘 상처와 함께 남겨지고, 그것과 힘겨운 싸움을 벌이며 살아간다. 그의 영화적 관심은 죽음(또는 누군가의 부재)이라기보다는 그것이 남긴 상처를 떠안고 살아가는 남겨진 자들의 분투기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은 묻혀있던 그 상처가 갑작스럽게 돌출될 때이다. 그의 데뷔작이었던 <환상의 빛>에서 죽은 남편을 잊고 잘 지내는 것처럼 보였던 부인이 계단을 걸레질하다 갑자기 그 동작이 응고되는 정지의 순간에, 그리고 <걸어도 걸어도>에서 인자한 웃음 대신 매정하게 복수의 방식을 이야기하는 어머니의 차갑고도 음산한 뒷모습 속에, 그 상처는 불현듯 솟아오른다. 하지만 <공기인형>에는 이러한 순간이 부재한다. 영화는 처음부터 직접적으로 ‘텅 빈 인간’의 물질적 알레고리로서 노조미를 제시한다. 적어도 지금까지 그의 영화에서는 상처로 얼룩진 인간의 마음은 쉽게 드러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영화가 적게 보여주고 적게 이야기함에도 불구하고, 늘 풍성한 영화적 분위기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보이지 않는 그 상처’로 인해 카메라와 대상이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인물들은 보이지 않는 괴물과 싸우며 영화를 풍성하게 한다. 적어도 내게 있어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의 매력은, 그리고 <걸어도 걸어도>가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정점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보이지 않는 것’을 중심으로 둘러쳐진 풍성한 영화의 분위기 말이다. <공기인형>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노조미의 형상을 통해 지금까지 보이지 않는 것으로 규정해왔던 것을 가시적 영역의 물질적 재현으로 이끌어냈고, 그것은 불행한 결과를 낳는다. <공기인형>이 공기인형의 눈에 비친 인간 세상에 대한 영화임을 상기해보자. 늙는 것이 두려운 노처녀, 홀로 어린 딸을 키우는 젊은 아빠, 세상을 거부하는 거식증 환자, 공원 벤치에서 하루를 보내는 할아버지 등 영화에 등장하는 인간들은 타인과 관계 맺기가 두려워 차라리 외로움을 선택한 자들이다. 노조미의 눈에 그들은 연민의 대상으로 머물 뿐, 그 어떤 생동감도 느껴지지 않는다. 이는 영화에서 제시하듯이, 그들이 텅 비어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더 본질적으로는 그들이 텅 빈 마음에 반응하며 해야 할 일을 노조미가 대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작의 인물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보이지 않는 것으로서) 상처와 싸워나간다. 그들은 애써 태연한 척하기도 하고, 누군가를 저주하고 상처주기도 하며, 슬픔을 폭발하기도 했지만, <공기인형>의 인물들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가시적 영역에서) ‘그들을 대신하는’ 노조미가 그렇게 할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많은 평자들이 지적하듯이, <공기인형>이 인간이 되어가는 노조미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노조미는 인간을 대신하는 완전한 대체물이 되어갈 뿐이다. 그럴수록 인간은…. 영화가 현실을 대체하는구나 노조미가 인간의 완전한 대체물이 되어갈수록 인간은 더욱 텅 비어간다, 라고 말한다면, 혹자는 <공기인형>의 엔딩을 근거로 이를 반박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엔딩이야말로 노조미가 그 이름처럼 하나의 ‘희망’임을 보여주는 장면이 아니냐고. 실제로 노조미의 몸에서 빠져나간 공기는 꽃씨를 날려 한번도 만난 적 없던 한 여인을 세상 바깥으로 나오게 한다. 그녀는 세상을 보며 아름답다고 말한다. 그것은 노조미의 첫 대사이기도 했다. <공기인형>은 그렇게 ‘전이된 환상’을 구축한다. 영화가 반쯤 접힐 때쯤 매력적인 장면이 등장한다. DVD 대여점에서 일하던 노조미는 사고로 상처가 나고 몸에서 공기가 빠져나간다. 그런 노조미를 발견한 준이치(아라타)는 상처 부위에 테이프를 붙인 뒤 그녀의 몸에 자신의 숨결을 불어넣기 시작한다. 준이치의 숨결과 함께 축 처져 있던 노조미의 고무 몸이 조금씩 부풀어오르고, 그녀의 하반신을 비추던 카메라는 오른쪽에 위치한 노조미의 얼굴로 천천히 이동한다. 노조미의 얼굴에 에로스적 충만감이 감돌 무렵 영화는 ‘커팅’해 그녀의 하반신쪽으로 다시 관객의 시선을 옮긴다. 이때 화면에 보이는 것은 인형에서 인간으로 변화된 노조미의 몸인데, 즉 이 편집은 단순히 ‘두숏-필름’의 물리적 결합이 아닌, 고무 몸을 인간의 몸으로 변형하는 영화적 마술 그 자체다. 텅 빈 채 죽어 있던 한 여인에게 삶의 생기를 불어넣는 <공기인형>의 엔딩은 이러한 영화적 마술이 영화 자체에 머물지 않고 영화와 관객간의 관계 속에서 이뤄졌으면 하는 희망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공기인형>이 영화에 대한 영화로서 읽힐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노조미는 영화를 통해 세상을 알아간다. 그녀에게 영화는 자신이 모르는 세상을 비추는 요술 거울이다. DVD 대여점이 극장의 대체물인 것처럼, 소녀가 선물로 받는 케이크가 엄마의 대체물인 것처럼, 무엇보다 노조미가 남성의 성적 욕구를 위한 여성의 대체물인 것처럼, 영화는 현실의 대체물이다. 물론 앙드레 바쟁은 영화와 현실의 존재론적 등가성을 주장했고 그것이 영화적 발전의 최종 목표지점인 양 말했지만, 영화는 현실의 시뮬라크르이자 대체물에 가깝다. 여기서 영화가 현실의 대체물이라는 것은 영화가 현실을 반영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가 현실이 해야 할 일을 대신함으로써, 현실의 의무를 덜어주기도 한다는 의미이다. 마치 텔레비전 쇼프로그램의 과장된 박수와 웃음이 웃어야 하는 우리를 대신해주는 것처럼…, 내 비디오테크가 한국영화 걸작선을 매주 녹화하며 나보다 더 많은 영화를 시청하는 것처럼…, 노조미가 인간을 대신해 자신의 마음을 채워나가는 것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론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영화와 현실간의 비대칭적 관계를 잘 알고 있다. 노조미가 자신이 경험했던 에로스적 충만감을 준이치에게 되돌려주려 했을 때, 그 결과는 준이치의 죽음이다. 순수한 감정이 초래한 불행. 그것이 대체물로서의 영화가 갖는 한계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어떤 해결책도 주지 못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영화와 현실간의 전이된 환상을 포기하려 하지 않는다. 노조미가 메타영화로서 위치를 갖는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노조미-영화’가 현실의 인간이 해야 할 일을 대체하는 ‘전이된 환상’을 가능하게 한다는 의미에서이다(송효정의 표현을 빌린다면, 노조미를 둘러싼 자들을 유사가족이 아닌 여전히 유가족으로 남겨두는 사태). 그것이 <아무도 모른다>와 같은 (연민이 아닌) 윤리적 태도 대신 사족 같은 엔딩이 필요한 이유이고, <공기인형>이 현실에 대한 페티시즘적 대체물에 머무는 이유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제기되는 마지막 질문. ‘우리 앞에 놓인 현재의 영화들’은 충분히 그런 전이된 환상으로서 기능하고 있지 않은가? 혹은 우리는 그렇게 영화를 즐기고 있지는 않은가?

[김지석의 시네마나우] 도시, 역사, 그리고 영화-에세이

새로 연재되는 칼럼에서 처음 다룬다는 것이 ‘영화에 나타난 도시’라고 한다면, 그건 너무 식상한 주제라고 치부하면서 곧바로 이 페이지를 넘겨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 것이다. 물론 그래도 상관없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려는 것이, 도시의 풍경을 담은 지난 세기의 이미지들(영화, 뉴스릴, 텔레비전, 광고 등등), 즉 이제는 조금 달라졌거나 원래의 모습을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변모된 그런 도시의 풍경이 담긴 이미지를 활용한 에세이적 다큐멘터리들이라고 한다면 조금 더 흥미로운 것이 될까? 설령 그렇지 않다 해도 올 초에 본 한편의 걸출한 데뷔작에 관해 간략하게나마 말하기 위해서는, 미안한 일이지만 이런 이야기로 시작할 수밖에 없다. 지난 10년 동안 기존의 영상자료를 활용한 도시-에세이들이 잇따라 나온 것은 우연히 그리된 것이라고만 말하기 힘든 측면이 있다. 얼른 떠오르는 대로 몇편의 중요한 영화들만 언급해보면 (영화잡지 <시네마스코프>가 10년간 최고의 영화 10편 가운데 하나로 꼽기도 한) 톰 앤더슨의 <로스앤젤레스 자화상>(2003), 가이 매딘의 <나의 위니펙>(2007), 테렌스 데이비스의 <리버풀의 추억>(2008) 그리고 피터 폰 바흐의 <헬싱키, 포에버>(2009) 등이 있다. 이런 작품들이 나오기 위해서는 우선 (작가 머릿속의 상상적 아카이브만이 아니라 물리적인 실체로서의 아카이브에도) 도시 자체와 그 재현방식의 변천을 추적할 수 있을 만큼의 이미지들이 축적되어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물론 100년이 넘는 영화사 자체가 부분적으로- 왜냐하면 모든 국가에서 그러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국을 비롯한 많은 아시아 국가들에서 지난 세기 이미지들이 겪은 ‘대량학살’의 역사를 떠올려보라- 그 기능을 담당했다. 또한 이들 영화들은 동시대 다큐멘터리 작업에서 사적, 허구적 요소들이 차지하는 역할을 간과하지 않고 있다. 외양상으로는 기존의 영상자료들을 활용한 다큐멘터리이지만 내레이션과 편집을 통해 은밀히 서브플롯을 구축하거나 드물게는 연기라고 하는 전적으로 허구적인 요소까지도 끌어들이는 식이다. 따라서 재현의 결과물들을 원래의 맥락에서 분리한 뒤 재구축하는 이 도시-에세이들은 매우 21세기적인 도시교향악 장르라고도 할 수 있다. 물론 그 형식과 스타일 및 정치적 태도에 있어선 알베르토 카발칸티가 만든 최초의 도시교향악 <오직 시간뿐>(1926)이나 장 비고의 <니스에 관하여>(1930)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것 같긴 하지만 말이다. 한 가지 의문은 혹시 이 장르가 자신들이 활용하고 있는 이미지의 역사에 걸맞은 신체적 연령을 지닌 이들에게서만 가능한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톰 앤더슨과 피터 폰 바흐는 1943년생, 테렌스 데이비스는 1945년생, 가장 ‘어린’ 가이 매딘은 1956년생이다). 이때 20세기 초·중반에 자신이 직접 연출한 작품들을 끌어오고 있는 마뇰 드 올리베이라(1908년생)의 <포르투에서의 어린 시절>(2001)은 대단한 압력으로 느껴질 정도다. 이런 추정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은 올해 베를린영화제 포럼부문에서 상영된 33살의 이탈리아 감독이 만든 영화 때문이었다. 피에트로 마르첼로의 장편 데뷔작 <늑대의 입>(2009)이 바로 그것이다. 제노아라는 도시의 역사가 담긴 일련의 영상자료들을 그곳에 사는 한 전과자- 감독을 대신해(?) 이미지의 역사에 걸맞은 신체적 연령을 지닌- 의 현재와 교차시키고 있는 이 영화는 사실 범주화가 거의 불가능한 작품이다. 안타깝게도 이 작품은 올해 전주국제영화제 기간에는 상영할 수 없게 되었지만, 나는 한국의 관객이 올해 안에 어딘가에서 이 작품을 꼭 만나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 또 지면관계상 여기서 못다 한 이야기는 그 이후로 미루기로 한다.

기대작 없고 화산재 날려도 칸은 걸작을 발견한다

제63회 칸영화제 개막일의 가장 거대한 적? 정치적 논쟁도 미학적 논란도 아니다. 올해 영화제의 첫번째 강적은 자연이다. 아이슬란드 화산 분화의 영향으로 올해 영화제는 거의 열리지 못할 뻔 했다. 시커먼 화산재가 바람을 타고 남쪽으로 이동하는 바람에 스페인과 독일의 일부 공항들이 잠시 문을 닫았다. 영화제 개최 이틀전까지만해도 니스 공항마저 폐쇄될 거란 흉흉한 소문이 떠돌았다. 게다가 영화제를 열흘도 남겨놓지 않은 상황에서 칸 해변에는 6미터가 넘는 쓰나미가 밀려들었다. 큰 돈 들여 설치한 영화제 구조물들이 희생양이 됐다. 일기예보는 영화제 기간 내내 강풍과 뇌우가 작렬할 것이라고 경고하느라 바쁘다. 문제가 어디 자연의 횡포 뿐이랴. 올해 경쟁부문의 영화들이 예년만큼 영화제 객들을 흥분시키지 못한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을 듯 하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마이크 리, 기타노 다케시의 이름이 고고하긴 하지만 유명한 거장의 숫자는 압도적으로 적다(유명한 감독과 배우가 없으면 찾아오는 기자의 수도 확연히 줄어든다). 마누엘 데 올리비에라와 장 뤽 고다르, 지아장커 등 칸이 사랑하는 감독들의 신작이 경쟁부문이 아닌 주목할 만한 시선에 이름을 올린 것도 불평을 자아내고 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올해 칸이 또다른 긴장감을 자아내고 있는 건 사실이다. 올해 영화제 집행위원회는 확실히 ‘발견’이라는 단어에 힘을 싣고 있는 듯 하다. 영화제 사상 최초로 아프리카 차드의 영화 <울부짖는 남자>(Un Homme Qui Crie)와 우크라이나 영화 <나의 기쁨>(Schastye Moe)가 경쟁부문에 진출했고, <하녀>의 임상수 역시 처음으로 경쟁부문에 이름을 올렸다. 경쟁부문 스무편 중 거의 절반이 경쟁부문에 처음으로 진출하는 감독의 영화다. 프랑스 잡지 <텔레라마>는 "올해 영화제의 선점권은 경쟁부문의 단골들이 아니라 아주 특별하지는 않은 미지의 감독들에게 주어져있는 듯 하다"고 말한다. "그들 역시 매혹적인 감독들이다. 그래서 약간 혼란스럽기도 하고, 약간 경계심이 일기도 한다" 국가적으로 보자면 프랑스 영화의 우세와 미국 영화의 몰락이 두드러진다. 프랑스는 무려 네 편의 영화를 경쟁부문에 올렸다. 베르트랑 타베르니와 자비에 보부아는 <몽펭지에 공주>(La Princesse de Montpensier)와 <사람들과 신들>(Des Hommes et des Dieux)로 오랜만에 칸에 복귀했다. <잠수종과 나비>로 유명한 프랑스 배우 마티유 아말릭이 <순회공연>(Tournee)으로 경쟁부문에 진출한 건 사건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반면 지난 몇년간 경쟁부문을 장악해 온 미국 영화는 단 한편 뿐이다. 그것도 순수한 상업적 오락영화를 만드는 덕 라이먼의 <페어게임>이다. 집행위원장 티에리 프레모에 따르면 테렌스 말릭과 구스 반 산트의 신작은 영화제 직전까지 완성을 보지못해 결국 경쟁부문 진출에 실패했다고 한다. <르몽드>에 따르면 줄리앙 슈나벨의 <미랄>(Miral)은 비경쟁부문 출품 제안을 거부했고, 소피아 코플라의 <어딘가에>(Somewhere)는 이미 베니스가 선점해버렸다. 어쨌거나 다들 덕 라이먼의 경쟁 진출에 어안이 벙벙해져 있는 상태인 와중에 젊은 필진으로 물갈이 된 <카이에 뒤 시네마>는 쌍수들고 환영이다. "이 얼마나 훌륭한 선택인가. 그는 유일하게 순도 100%의 좋은 미국영화를 세 편 연속으로 만든 감독 아닌가" 시대가 하수상한 만큼 정치적인 논쟁도 거세다. 이탈리아 베를루스쿠니 정부는 비경쟁부문에 초청된 <드라퀼라>(Draquila)가 "이탈리아 민중과 진실에 반하는 프로파간다"라며 항의를 하다못해 이탈리아 문화부 장관이 칸 방문을 보이콧 하기로 했다. 물론 <드라퀼라>는 작년 4월 아퀼라 지진에서 불거진 베를루스쿠니 정부의 비리를 파헤치는 ‘이탈리아 민중과 진실에 협력하는 좋은 영화’라는 소문이 자자하다. 경쟁부문에 진출한 라시드 부샤렙의 <법의 외곽>(Hors La Loi)은 프랑스 극우의 비난을 한 몸에 받고 있다. 1942년 알제리인 2만여명이 프랑스 경찰에 의해 학살당한 사건을 다루고 있는 탓이다. <르 피가로>를 비롯한 극우 신문들은 부샤렙의 영화가 살해당한 28명의 프랑스인들에 대해서는 제대로 다루지 않는다며 항의하는 중이다. 영화가 공개되는 날 극우 단체의 항의 시위가 열린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니키타 미할코프의 <위선의 태양 2>도 논쟁의 불꽃을 모락모락 피우고 있다. 러시아 영화감독 협회는 극단주의적인 푸틴주의자인 미할코프가 그간 러시아 정부지원금의 분배권을 독점해왔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했고, 프랑스 언론들은 이 영화가 스탈린을 새롭게 복권하려는 푸틴의 야망을 지원하는 영화라며 연신 폭격중이다. 전통적인 영화 배급 방식의 해체 역시 올해 칸영화제의 논쟁거리 중 하나다. <리베라시옹>에 따르면 올리비에 아싸야스의 <카를로스>(Carlos)와 장 뤽 고다르의 <필름 소셜리즘>(Film Socialisme)이 경쟁부문에서 탈락한 이유는 두 영화가 기존의 관습과는 전혀 다른 상영과 배급 방식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아싸야스의 신작은 이미 프랑스 채널 <카날 플러스>에서 방영을 시작한 5시간30분짜리 TV 시리즈다. 고다르의 신작은 영화제가 시작하자마자 VOD 서비스로 단돈 7유로에 다운로드가 가능해졌다. 경쟁부문 진출이 유력했던 두 작품은 결국 전통적인 상영과 배급 방식을 지지하는 영화제 이사회의 반대로 ‘주목할만한 시선’ 부문에 이름을 올렸다. 미디어의 진화에 재빨리 적응하길 거부하는 칸의 보수주의가 화산처럼 분출한 사례라고 해야할까. 한국 영화 역시 올해는 뜨거운 칸의 뜨거운 감자다. 이창동의 <시>와 임상수의 <하녀>가 경쟁부문에, 홍상수의 <하하하>가 주목할만한 시선에, 그리고 김기덕 조감독 출신인 장철수 감독의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이 비평가주간에 초청됐다. 물론 모두가 (궁금해하지 않는 척 짐짓 점잔을 떨면서도) 궁금해하는 건 이창동과 임상수 중 누가 트로피를 손에 들고 ‘merci beaucoup’를 외치는가다. 황금종려상의 행방이 심사위원장의 개인적인 성향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는다는 걸 생각하며 팀 버튼의 속내를 궁리하더라도 마땅한 정답은 없다. 만드는 영화와 좋아하는 영화는 다르게 마련이다. 1999년도 심사위원장이었던 데이빗 크로넨버그가 전혀 알려지지 않은 다르덴 형제의 <로제타>에 황금종려상과 여우주연상을 동시에 안겼던 사례를 떠올려보자. <카이에 뒤 시네마>의 젊은 편집장 스테판 들로름은 칸 특별호 에디토리얼에 이렇게 썼다. "매년 모두가 투덜댄다. 올해 칸은 정말 셀렉션이 별로라고. 하지만, 매년 그 해 최고의 영화는 결국 칸에서 나온다". 더욱 중요한 건 이거다. 올해 최고의 영화는 칸에서 나올테지만, 그건 아마도 입이 딱 벌어질 정도로 새로운 영화일지도 모른다는 것. 화산재와 저온과 빗방울을 뚫고 칸에 도착한 올해 최고의 영화는, 지금 발견을 기다리고 있다. 심사위원장 팀 버튼 기자회견 “올해는 유명 감독들이 모두 시나리오 집필 중이거나 촬영 중이다.” 집행위원장 티에리 프레모의 발언은 푸념이 아니다. 개막작 감독인 리들리 스콧까지 무릎수술을 이유로 불참했다. 말 그대로 스타가 부족한 해다. 심사위원장으로 참석한 팀 버튼 감독이 간판 역할까지 이중으로 해내야 할 판이다. 팀 버튼 감독을 비롯 배우 케이트 베킨세일, 베네치오 델 토로, 평론가 알베르토 바베라, 에마누엘 카레르, 영화음악가 알렉산더 데스플레, 인도 감독 세크하르 카프루 등 8명의 심사위원단이 참석한 심사위원 기자회견장이 예년보다 관심을 모은 이유도 여기 있다. 이들은 개막일인 12일부터 오는 23일까지 총 19편의 경쟁작을 평가한다. 12일 낮 열린 기자회견에서 팀 버튼 감독의 답변을 들어보았다. 이화정 -심사위원단의 역할은 무엇인가. =우린 전문가이고 모두가 평가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어떤 선입견이나 편견을 가지고 작품을 보지 않으려고 한다. 작품을 보고 그 작품들이 어떻게 우리에게 감동을 주고 교감을 주는지, 그것들에 대해서 토론하고 합의를 보길 원한다. 이번 영화제의 심사위원단이 모두 다른 문화와 나라에서 온 것들에 대해서 굉장히 흥미롭게 생각한다. 작품을 즐기고, 토론할 것이다. -화제작이 예년보다 없는 편이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영화를 보러갔을 때 난 그 영화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갔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영화에 대해서 모든 걸 다 안다. 제작비는 얼마고, 어떻게 만들어 졌고 등등. 그런데 모르고 볼 때 그게 더 놀랍다고 생각한다. 경쟁부문의 작품들은, 우리가 아는 감독들도 있고 또 그렇지 않은 감독들도 있다. 아직 결정되지 않은 목표를 향해, 우린 일종의 의무감으로 함께 이 여행을 시작하려고 한다. 그리고 이 여행에서 놀라운 발견을, 새롭게 떠오르는 작품들을 발견 하길 바란다. -심사위원으로 초청된 자파르 파나히 감독이 정치적 이유로 수감 중이다. 상징적인 의미로 심사위원 석 한 자리를 비어두었다. 그의 석방이나 구속 중인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석방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당연히 석방되어야 한다. 우리 모두 표현의 자유를 가지고 있다. 일생에 걸쳐 우린 모두 그걸 위해 싸운다. 당연히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걸 표현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녀>, 병적 사회에 대한 완벽한 통찰

'황금종려상, 감독상, 여우주연상에 <하녀>를!' 프랑스의 문화잡지 <테크니카르>는 14일(현지시간)까지 상영된 깐느영화제의 경쟁작을 대상으로 한 모의 수상에서 왕 샤오슈아이의 <충칭 블루스>와 마티유 아말릭의 <순회공연>을 제치고 <하녀>에게 세 개 부문의 수상 영광을 안겨줬다. <크로니카르>는 "이 영화를 두고 ‘끌로드 샤브롤의 시나리오로 만들어진 초현대식 자동차 광고’ 같다는 비난이나,‘또 하나의 박찬욱식 영화만들기’라고 칭하는 것은 잘못 짚은 이야기다.”라며 “논란의 여지는 있으나 매우 섬세한 영화”라고 호평했다. 이날 저녁 공식 갈라상영까지 마친 <하녀>에 대한 프랑스 현지 반응은 대체로 우호적인 편이다. <바람난 가족>부터 이미 임상수 감독의 영화를 지지해 온 프랑스의 문화 주간지 <텔레라마>는 <하녀>를 ‘이번 깐느 영화에서 본 영화 중 최고작품’이라고 칭하며, “미쟝센과 스토리, 정치적 코멘트까지 함께 함의하는 <하녀>의 완성도는 단순히 이 작품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봉준호 감독을 비롯한 한국의 감독들이 가진 가장 큰 힘”이라고 강조했다. 김기영 감독의 리메이크작에 대한 관심도 이어졌다. 문화웹진 <에벤느>는 "<하녀>는 김기영의 유산을 훌륭히 계승하고 있는, 보기 드물게 뛰어난 작품이자 동시에 놀라운 현대성과 예술적 자유를 가진 작품이다."라고 호평했다. 반면 지나치게 스타일을 지향한다는 점을 지적하는 우려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문화 주간지 <레 인록>은 “역설적 시각, 팬시한 세트, 시크한 의상, 끈적하고 병적인 분위기의 무거움은 70년대 샤브롤 작품들을 환기시키지만, 영화가 냉소적 살인 게임을 넘어서지 못한 것은 아쉬운 일이다."라고 평했으며, 일간지 <르몽드>는 "<하녀>의 양식주의적인 연출이 오히려 작품에 해를 준다”며 “사회적 소외를 육체적 욕망이라는 쟁점으로 접근하는 것을 포기함으로써, 영화는 단지 멋드러진 스타일 실습에 머물렀다."라고 혹평했다. 일간지 리베라시옹 역시 "지나치게 스펙타클하고 센 이미지로 마무리하려는 욕망 때문에 오히려 결말에 가선 굴복하고 만다.”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병적 사회에 대한 감독의 완벽한 통찰력은 조금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며, <하녀>에 대한 평가가 단선적일 수 없음을 다시 한번 알렸다. 한편, 영화제 초반, <하녀>는 가장 큰 관심을 모으는 기대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인생의 아이러니 담긴 서스펜스 주고 싶었다" 임상수 감독 기자회견 -깐느에서 복원작으로 상영되기도 한 김기영 감독의 <하녀>(1960)를 리메이크 했다. =리메이크라기 보단 재해석이다. 50년 전 작품을 똑같이 지금 만들 수는 없다. 김기영 감독의 작품이 당시 사회상을 깔고 있다면, 지금의 하녀는 2010년 지금의 한국 사회 전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오프닝 장면과 엔딩 시퀀스가 굉장히 독특했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선 어린이의 트라우마를 묘사하려 했다. =영화 첫 부분은 이후 집 안에서 벌어지는 일과 매우 다르다. 그러나 지금 여기 공존하고 있는, 섞일 일은 없지만 두 모습은 한국 사회에서 함께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마지막 장면은 그 소녀가 받은 트라우마가 어떻게 될까? 그것이 과연 좋은 선물이 될까라는 무서운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여성의 이야기를 이렇게 잘 표현하는 감독은 별로 없다. =아시아 감독 대다수가 남자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아시아 남자들의 편견이 담긴 여자를 그리고 있다. 반대로 난 좀 덜 그런 편이라 그렇게 느끼는 것 같다. 그리고 난 기본적으로 남자보다 여자를 좋아한다.(웃음) -아무리 세월이 변했다지만, 원작을 만들던 당시와 지금의 사회가 이렇게까지 변했나? =전세계적으로 봐도 한국은 빠르게 변하게 나라로 유명하다. 그런데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은 경제적인 면은 변했으나 집안에서 변하는 일은 그대로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다. 성적 관계, 임신, 그에 따른 반응이 얼마나 변했는지 생각 해 볼 일이다. -서스펜스보다 블랙코미디에 가깝다. 영화에서 서스펜스적인 측면은 어떤 것인가. =내 작품에 대해 블랙 유머나 풍자라는 표현을 많이 쓴다. 그런데 인생을, 세상을 냉정하게 객관적으로 보다 보면 웃기다. 일부러 웃기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블랙 유머가 절로 나온다. 서스펜스에 관해서는 이 영화야 말로 히치콕 서스펜스의 정석에 따라 연출했다. 거기서 더 비틀고 깊이 들어가서, 단순히 아슬아슬하다기 보다 인생의 아이러니가 담긴 서스펜스를 주려고 했다. -미술 세트가 대단히 효과적으로 사용됐다. =김기영 감독님은 그 당시 세트 촬영을 가장 잘하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내가 그런 기술을 넘어설 수 있을 지 모르지만 세트에 대단히 공을 들였고 그 세트를 몸으로 느끼면서 표현하려고 애썼다. -'이번 경쟁작 중 가장 지루하지 않을 영화’라고 단언했다. =항상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를 만드는 것이지, 깐느에 출품하던 하지 않던 중요한 건 아니다. 문제는 여러분이 어떤 영화를 지지할 지다. 가장 지루하지 않을 영화라는 건 페스티벌에 끝까지 참석하시면 알게 될 것이다. 한국영화가 두 편이나 깐느에 온 것을 주변에서 상당히 놀랍다고들 하는데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늘 깐느에 가던 감독이 있었는데 내가 끼어든 게 고소하게 느껴졌다.(웃음) 칸=이화정, 김도훈, 취재지원 유동석(파리 한불영화제 예술감독)

[김영진의 인디라마] 상처를 품은 도시의 표정을 보다

올해 전주영화제에서 상영된 두편의 다른 장르의 영화를 소개하겠다. 한편은 다큐멘터리로 박동현의 첫 장편 <기무>다. 다른 한편은 전규환의 두 번째 장편 극영화 <애니멀 타운>이다. 전규환은 벌써 세 번째 영화 <댄스 타운>을 거의 찍어, 첫 번째 영화 <모짜르트 타운>과 함께 ‘타운 3부작’의 완성을 앞두고 있다고 한다. 무슨 3부작 운운하는 걸 좀 우습게 생각하는 편인데 <애니멀 타운>을 보고 그의 3부작을 모두 보고 싶어졌다. 한국에서 처음 공개된 <애니멀 타운>은 서구의 일부 영화제에서 호평받았으나 한국에서 열린 국제영화제에서는 죄다 떨어진 작품이다. 전작 <모짜르트 타운>도 마찬가지다. 내가 이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재능에 비해 과하게 구박받은 전규환이라는 감독에게 느끼는 호감 때문이다. 그는 빠른 속도로 영화를 찍고 있으며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기무>와 <애니멀 타운>은 각기 다른 장르의 영화인데도 묶어 소개하는 것은 이유가 있다. 이 영화들은 모두 우리의 삶과 사회에 묻힌 상처에 관해 생각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대개 가장 안이하게 떠도는 말로 상처를 겪으면 인간도, 사회도 성숙한다고 한다. 그건 헛소리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상처를 겪으면 인간도, 사회도 거기서 헤어나기가 힘들고, 상처로 내파된 부분을 감추고 겨우 버티게 된다. 상처를 딛고 일어서자는 투의 성의없는 말에 기대기보다는 상처를 직시하는 게 괴롭더라도 차라리 현명한 일이다. 고통스럽지만 상처의 기원과 확산을 자각하는 게 우리를 약간은 더 강하게 만들어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곧 사라질 그래서 더 무서운 <기무> <기무>는 한때 기무사 건물이었던, 지금은 현대미술관 터가 된 공간의 역사성을 탐구하는 다큐멘터리다. 영화의 상당 부분은 조선 왕조의 종친부였고 식민지의 근대화된 병원이었으며 한때 보안사라 불리던 기무사 건물로 쓰인 이 건물의 역사적 가치를 조망하는 데 바쳐진다. 건축학자를 비롯한 전문가의 해설이 덧붙는 동안 카메라는 건물의 외관과 내부를 천천히 탐색한다. 화면에는 이 건물이 짧지 않은 세월 동안 이름을 바꿔가며 존재한 역사적 정황들이 자막으로 깔린다. 이 영화가 근엄하고 미적인 탐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지향하는 것은 숨가쁘게 짧은 상영 시간 동안 버텨내면서 끄집어내려고 하는 어떤 흔적이다. 공적인 역사적 기록과 별개로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마모되어 흔적이 없는 것을 카메라가 안간힘을 쓰며 마치 초혼제라도 지내는 양 불러내려고 하는 듯한 기운은 이 영화에 이상한 영적 분위기를 입힌다. 그렇더라도 물론 그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기무>에서 놀라운 반전이 일어나는 것은 그때부터다. 영화는 갑자기 옛 기무사 건물과 아무 상관없는 서울의 퇴락한 골목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한다. 우리가 전혀 몰랐던 역사적 건물의 시간성을 공들여 탐색한 뒤 동시대의 서울 거리를 카메라가 헤맬 때 파괴와 해체의 전개 과정은 동시대에 가공할 정도로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자각하게 된다. 이윽고 카메라가 움직임을 멈추고 어느 허름한 동네 골목길에 버티고 서서 오랫동안 그 골목에서 일어나는 일을 아무런 논평없이 지켜보고 있을 때 우리가 무심하게 지워가는 삶의 흔적, 동네라는 개념이 살아 있는 공동체의 살아가는 순간들이 잠시나마 충만한 형태로 존재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이기도 하다. 동네 사람들이 저녁 찬거리로 뭘 준비하고 있는지까지 알 수밖에 없는 동네 골목길의 스킨십이 지금 지워지고 있는, 곧 사라질 상처의 일부분이 될 거라는 생각에 두려움이 드는 것이다. 기묘한 서스펜스 보여주는 <애니멀 타운> 맥락은 전혀 다르지만 전규환의 <애니멀 타운>도 화면 곳곳에 상처의 기운을 품은, 그럼으로써 일상적으로 지각되지 않는 도시의 다른 면을 건져올리는 영화다. 아동성범죄 전과자와 작은 인쇄소 사장의 일상을 번갈아 병렬하는 이 영화에서 두 주인공의 삶의 관련성이 드러나는 것은 거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서다. 별다른 설명이 없는데도 비상한 긴장감을 갖고 두 인물의 일상을 주목하게 만드는 것이 이 영화의 힘이다. 특히, 아동성범죄 전과자 오성철에 대한 관객의 반응을 이끌어내는 감독의 방식이 특이한데, 그는 가스도 수도도 공급되지 않는 곧 철거될 아파트에서 하루하루를 버티며 건설현장을 전전하다 택시회사에 취업한다. 먹고사는 문제 외에도 그는 매 순간 자신의 범죄충동을 억누르며 힘겨워하는데 이 기묘한 서스펜스는 우리에게 그를 혐오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동정하게 만드는 힘을 발휘한다. 이 동정은 우리 자신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당혹스러운데, 이는 어떤 알 수 없는 불행을 겪은 뒤 영혼이 빠져나간 듯이 보이는 인쇄소 사장의 생기없는 삶과 대조적이다. 따지고 보면 두 사람 다 현세의 삶을 저당잡히고 간신히 살아내기는 마찬가지인데 한 사람은 시시각각 엄습하는 고통에 자신의 신체기관을 다 열어두고 있는 듯이 민감하게 반응하며, 다른 한 사람은 모든 감각기관을 닫아둔 듯이 행동한다. 습관적으로 교회에 간 인쇄소 사장은 목사의 설교에 눈물을 흘리기도 하지만, 목사가 낚시 때 잡은 커다란 물고기들을 선물로 양동이에 담아주자 그것들을 싣고 오다 대로변에 버리고 퍼덕거리지도 않는 죽은 물고기를 냉정하게 응시하며 담배를 피워 문다. 마치 자신의 몸과도 같은 그 물고기들의 죽음을 자학적으로 즐기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그에 비해 성범죄자 오성철은 공황장애에 시달리며 한시라도 약을 먹지 않으면 버티지 못하고, 수시로 형사를 비롯해 다른 사람의 감시를 받는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노출된 범죄자와 아무에게도 눈에 띄지 않는 듯이 유령처럼 살아가는 인쇄소 사장은 결국 동전의 양면처럼 동일한 사건의 가해자와 피해자로 유형의 상처로 괴로워한다. <애니멀 타운>에서 반복적으로 전시하는 것은 그 상처다. 영화에는 범죄자 오성철이 난방이 되지 않는 자신의 아파트에서 몸을 박박 씻는 장면이 자주 나오는데, 이 장면 때문에 나중에 오성철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다시 모종의 범죄를 저지르고 난 뒤 한적한 학교 운동장 수돗가에서 찬물로 피투성이가 된 상반신을 닦으며 울먹일 때 관객은 이상한 느낌에 휩싸이고 만다. 슬프다기보다 처절하게 다가오는 그 느낌은, 오성철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천형처럼 벗겨내기 힘든 그의 삶의 주홍글씨가 평생 지워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학교 수돗가에서 몸을 다 씻고 난 오성철이 어느 소녀를 발견하고 따라가는 것으로 이어지는 장면, 그를 보고 수상하게 여긴 학교 경비가 오성철을 따라가자 오성철은 건물 뒤편에서 오줌을 누고 있다. 오성철은 “죄송합니다. 너무 급해서요”라고 말하면서 울음을 그치지 못한다. 지극히 불행한 사건의 복판에서도 참을 수 없는 생리작용이 빚은 해프닝을 보여주는 이 장면은 오성철 몸의 주홍글씨를 우스꽝스러운 비극으로 다시금 각인하는 잔인함을 감추고 있다. 더 잔인한 것은 이런 일들이 이 도시에서는 일상의 편린으로 숨어 있다는 것이다. 영화에는 느닷없이 도시에 출몰한 멧돼지들로 아수라장이 된 상황을 전하는 텔레비전 뉴스 화면이 반복적으로 전해지는데 대다수 사람들이 뉴스로 접하는 이 사건이 누군가에게는 일상에 침입한 실제 사건이듯이 <애니멀 타운>의 두 주인공이 겪는 개인적인 거대한 비극은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우리 일상의 주변부에서 벌어지는 소소한 일일 수도 있다는 대비가 이 영화를 더욱 섬뜩하게 만든다. 영화는 도시에 출몰한 멧돼지 때문에 벌어지는 다소 난폭한 상황으로 종결되지만 감독은 (그는 실제로 멧돼지를 도시에서 봤다고 이 영화 상영이 끝난 뒤 열린 관객과의 대화에서 주장했다) 곧잘 인위적인 영화의 상황에서 도시가 주는 보편적인 상처의 흔적을 주조하는 데 성공했다. 두 주인공이 겪는 상처보다도 그들의 상처를 무심히 품은 도시의 표정을 찍어내는 데 이 영화는 아무것도 알려진 것 없는 무명의 감독이 찍은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꼼꼼하게 묘사하는 세공력을 보여준다. 음악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밀어붙이는 그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아마 좋은 감독이 될지도 모른다.

[actor/actress] <하녀> <하하하> 배우 윤여정

소녀의 사랑스러움과 노인의 지혜. 이 두 가지가 동일한 육체 안에 공존할 수 있을까. 그녀를 직접 보면 수긍할 수밖에 없다. 화면을 통해서만 듣던 그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생각지도 못한 소박함과 일상성을 품고 있을 때, 그저 추억을 얘기하는 것 같은데 어디서도 듣지 못했던 한국영화사의 한 단면이 겹칠 때 실로 감동적이었다. 실제와 허구 사이를 교묘하게 줄타기하며 여유와 유머를 적절하게 배합했던 <여배우들>, ‘엄마’와 ‘여자’를 동시에 보여주는 <하하하>, 현실적이고 속물적이지만 끝내 스스로를 해방시켰던 <하녀>. 전개상 필요한 역할이 아니라, 그 자리에 바로 그 모습으로 존재해야만 하는 역할들. 영화도 좋았고, 거기서 큰 존재감을 발휘한 배우 윤여정도 좋았다. 우리에게는 이 배우, 윤여정이 있었다. 홍 감독에게 현장에서 막 성질 부렸지만… 이재용 감독의 <여배우들> 텔레비전 배우들이 놀려요. 영화배우로 거듭났다고. (웃음) 기분 좋죠. <여배우들>은 만날 같이 영화 보러 놀러다니던 이재용 감독과 나와 (고)현정이가 한번 해보자고 뭉친 거였기 때문에 그 프로젝트가 현실화된 것 자체가 참 기뻤어요. 우리끼리 행복하게 찍었고, 완성된 영화 보고 나선 다들 즐거워했어요. 지우까지 “선생님, 나 그때 그거 할걸 그랬어요”라고 후회하더라고. 촬영할 때 원래 넣으려던 장면이 있는데 지우가 못한다고 그랬어요. 내가 “그걸 깨야 해 지우야, 그걸 깨고 나가면 아무 소리 없을 거야”라고 했는데 결국 포기했었거든. 보고 나서 안타까워하더라고요. 내가 늘그막에 이런 젊은 감독을 알아서 큰 선물을 받았구나 싶었어요. 이 감독이 아주 예쁘게 얘기했어요. <여배우들>은 선생님 소장품으로 갖고 계시라고. 사람이 나이 들면 혼자 감동을 잘해요. <여배우들>은 이재용 감독이 나 같은 노배우에게 바치는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게다가 이미숙이 ‘선생님이 중심에 계셔서 우리 영화가 빛났어요, 선생님, 잘난 척하셔도 돼요’라는 문자를 보내줘서 제일 기뻤어요. 동료한테 인정받거나 감사받을 때가 진짜라고 생각해요. 그게 보람이었어요. 홍상수 감독의 <하하하> 원래 <밤과낮>에서 김영호씨 엄마로 출연할 뻔했어요. 하루 정도만 촬영하면 되는 분량이었는데 결국 스케줄이 안 맞아서 못했지. 지난해 6월 <여배우들> 찍을 때 홍상수 감독을 만났는데 <하하하> 얘기를 하더라고. <밤과낮> 정도 분량을 생각하고 그러마라고 했지. 7월에 통영 내려갔는데, 분량이 엄청 많은 거야. 아주 죽을 고생을 했어요. (웃음) 젊은 배우들이야 한달 내내 거기서 찍었지만 난 뭐 늙은 사람이 걔네들하고 놀 일도 없고 그 술을 어떻게 다 먹어. 서울하고 통영을 왔다 갔다 하느라고 힘들었어요. 사람이 참 미련한 게 자기가 당하지 않으면 몰라. 현정이한테 홍상수 감독 연출 스타일을 다 들었는데 잊어버렸던 거지. 잘하는 배우들이 전부 단역으로까지 나올 순 없으니까, 비전문 배우들까지 같이 찍게 되잖아. 근데 감독은 자기 원하는 장면을 뽑아낼 때까지 재촬영을 해야 하니까. 상황은 다 이해를 하는데, 늙어서 체력이 안되는데 뭐. 나 같은 경우는 테이크를 세번 이상 가면 더이상 안 나와요. <하하하>에선 20, 30번씩 테이크를 가니까 힘들었어요. 그래서 현장에서 막 성질 부렸거든. 시사회 때 보니까 내가 제일 연기 못한 거 같아 미안하더라고. 사과도 했어요. (웃음) <하하하> 속 문경과 엄마의 관계 아들들이 다 그래요. 자기 엄마가 엄마여야지 여자인 걸 싫어해. 내가 문경이 회초리 때리는 장면 찍을 때도, 홍 감독의 참 섬세한 부분이라고 생각한 게 자꾸 나보고 속옷 끈 내놓으라고. (웃음) 엄마 입장에서도 그렇지. 엄만 본능적으로 다 알아요. 정화가 없어지고 내 아들이 없어졌으니까. 문경이가 남자들이랑 시시덕거리는 엄마 보는 걸 싫어하는 것처럼, 엄마도 그래요. 내 아들이 물론 성인인데, 다른 여자와 다른 짓을 하는 게 또 그런 거야. 물론 정화를 예뻐하지만, 내 아들하곤 아닌 거야. 그런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있어요. 김기영과 임상수는… 고 김기영 감독과의 인연 생각해보면 김기영 감독님과 내 인연이… 아마 그런 게 인연일 거예요. <화녀> 때 너무 고생해서 ‘영화는 부모님이 돌아가실 지경인데 약값이 없는 사람 아니면 못하는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웃음) <화녀> 다음에 시나리오가 많이 들어와도 죄다 거절했다가, 어쩔 수 없이 <여대생 또순이>를 찍었어요. 사실 안 하려고 출연료를 일부러 높이 불렀는데 그 자리에서 돈을 내놓더라고. (웃음) 난 그때까지 감독들은 다 김기영 감독님처럼 머리가 좋은 줄 알았어요. 근데 이 영화에선 너무 이상했어요. 윤정희씨가 이 신을 이렇게 찍지 말라고 하면 정말 바뀌고, 엔딩까지 완전히 달라졌으니까. 그거 찍은 다음 김기영 감독님이 또 왔어요. “이거는 내가 미스 윤을 위해 썼다. 미스 윤이 안 해주면 난 못하는 거지 뭐.” 나한테 반말 한번 안 하던 분이에요. 그래서 나도 모르게 <충녀>를 또 찍었어요. <화녀> 때 그렇게 고생했는데도 그분이 특별하다고 어렴풋이 생각했었나봐요. 사실 고생은 <화녀> 때 더 많이 한 거 같아요. 본편에선 편집됐는데, 날 욕조에 넣고 막 물먹이고 그랬어요. (웃음) 내가 김기영 감독님께 마지막까지 잘 못했어요. 부산국제영화제 2회 때 김기영 감독님 회고전을 하는데, 나한테도 참석해달라고 전화가 왔어요. 근데 전화하는 사람이 아주 재수없이 걸었어. 나 바빠서 못 가요, 라고 끊어버렸지. 김기영 감독님이야 뭐 내가 원체 틱틱거리고 고분고분하지 않다는 걸 잘 아시니까… 그러고선 돌아가신 거죠. 사람이 참, 그렇게 반성하면 안되는데… 그 다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김기영 감독님 유작 <죽어도 좋은 경험>을 튼다고 해서 그땐 내려갔어요. 그때까지도 잘 몰랐는데, 이번에 <하녀>를 찍으면서 마음이 많이 착잡하더라고요. 임상수 감독이 김기영 감독님의 수혜자일 수 있어요. 촬영 내내 내가 감상적이었거든. 24살 때 철없던 내가 <화녀>를 찍으면서 힘들다고 툴툴거렸던 게 너무 후회되더라고. 그때 못했던 걸 임상수 감독한테 다 했어요. 사람이 그렇게 바보야, 그분한테 그랬었어야 하는 걸 애꿎은 임상수 감독한테 다 해준 거지. (웃음) 하라는 대로 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아요. 인생이라는 게 참 그래요. 임상수 감독, <하녀>, 병식 <바람난 가족> 현장에서 임 감독 디렉션 보면서 김기영 감독님하고 닮은 데가 참 많다고 느꼈어요. 혹시 <하녀>나 다른 영화를 봤냐고 물었더니 잘난 척하면서 ‘뭐 전 그냥 별로…’ 하더라고. (웃음) 부부로 나왔던 김인문씨랑도 얘기했는데, 그분 말이 더 히트였어. “아냐, 쟤는 김기영보다 더 ‘또라이’야.” (일동 폭소) <하녀>에서 도연이가 연기하는 은이가 미스터리하잖아요. 백치 같기도 하고, 알고 저러는 건가 모르고 저러는 건가 싶은데. 그런 점이 바로 김기영 감독님이 나한테 요구했던 거거든요. 그거 보면서도 둘이 참 많이 닮았다고 다시 한번 느꼈죠. 처음 <하녀> 시나리오 읽었을 땐 대체 뭐라는 거야 싶었어요. 병식이래서 남잔 줄 알았어요. (웃음) <바람난 가족>에서 내 역할 이름이 병한이였거든. 병 자 돌림을 좋아하는구먼 하면서 읽었어요. 내가 아무 답을 안 주니까 임상수 감독이 전화를 걸었어요. “글세, 난 잘 모르겠어”라고 했죠. “제가 시나리오를 못 썼다고 생각하시는 거 압니다. 하지만 전 선생님이 필요합니다” 그러더라고요. 멋있었어요. 임상수 감독 스타일이 좀 그래요. 어떤 감독들은 완만하게 표현하죠. 모든 관객에게 친절하고. 임상수 감독은 김기영 감독님처럼 뚝뚝 생략하니까, 굉장히 강하고 극단적으로 보일 수 있어요. 그래서 내가 나름대로 병식한테 살을 붙여줬어요. 그 집에 아주 오래 있었던 여자, 미희(해라의 엄마)한테 오래 헌신했고 아들을 검사로 만들기 위해 수많은 세월을 견뎌낸 여자, 그 집안의 모든 걸 다 아는 여자라고. 처음에 의상 가봉할 때도 감독 말을 들었어야 하는데…. 임상수 감독이 그중 스커트 하나를 더 짧게 만들고 싶어 했는데, 내가 질색을 했거든. 이제는 알겠어요. 아마 병식이를 좀더 여자로 보이게 하려고 의도했던 거 같아요. 그 여자한테도 무슨 사연이 있었을 수 있잖아. 늙었지만 여전히 섹시해 보이는 여자, 은이랑 똑같은 일을 겪었을 수도 있는 여자거든. 그래서 병식이 와인 마시는 장면에서도 임상수 감독이 자꾸 치마를 좀더 올리라고 그랬는데… 시사회 보고 나서 후회했어요. 만날 후회해. 엔딩 때문에 말이 많겠지만, 이게 임상수지 싶더라고. 자기 터치를 잃지 않는 거지. 잘사는 사람들을 로봇으로 만들어버렸잖아요. 사실 그 엔딩 직전에 내가 집을 나서면서 펑펑 우는 장면도 이틀이나 찍었는데 편집에서 빠졌어요. 그래서 내가 막 뭐라고 그랬어. (웃음) 난 임상수 감독보고 좀 친절하라고, 군더더기도 붙이면서 설명을 하라고 잔소리를 해요. 어느 날엔가 진심으로 충고하는 거냐고 묻더라고요. “진심은 아니야. 그냥 흥행하라고….” (웃음) 내가 자랑스럽다, 오래 살아서 임상수 감독 아버님이 영화평론가 임영씨예요. 옛날에 임영 평론가가 김기영 감독님 영화를 무지 비판했대. 그래서 김기영 감독님이랑 정일성 촬영감독님이 집까지 찾아갔대요. 따지러. (웃음) 참 재밌잖아요? 그 아들이 그 감독 영화를 리메이크하고…. <하녀>에서 병식의 목욕장면 찍을 때, 욕조에 두세 시간 앉아 있으면서 그런 생각 많이 했어요. 돌고 돌아 우리가 어디서 만나게 될지 모르는 거다. 내가 <화녀>를 찍고 40년 뒤에 <하녀>에 다시 출연하다니, 내가 자랑스럽다, 오래 살아서. (웃음) 연기 인생을 돌아보며 어릴 땐 나보고 잘한다 잘한다 하니까 내가 진짜 연기 잘하는 줄 알았어요. 십 몇년 공백 다음에서야 내가 못한다는 걸 알았어. 내 말소리가 들리고, 내 몸이 뜻대로 안 움직이고. 30대 말인데, 굉장히 처참했어요. 너무 심하게 바닥을 친 거지. 그때부터 정말 열심히 연습했어요. 마음이 조금 편안해지기 시작한 게 쉰살 무렵이에요. 이제 60이 넘었는데, 다들 너무 잘해요. 문소리도 잘하고 전도연도 잘하고, 나도 내년부터 더 잘해야겠다는 희망이 생겨요. 연기라는 게 끝없는 도전이에요. 나 혼자서 끊임없이 장애물 경기를 하는 거예요. 완벽한 연기는 있을 수도 없고, 운때가 잘 맞아떨어지면 잘했다는 소릴 듣는 정도죠. 우린 우매하니까 남들이 잘했다면 진짜 잘한 줄 아는데 그건 착각이에요. 나 아닌 다른 사람을 표현하는 데 정답이 있을 수가 없잖아요. 그걸 잘했다 못했다 맞았다 틀렸다를 말하는 게, 답 없는 길을 그냥 가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