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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1997)

"수상작 명단에 오를만한 작품이다"

<시>는 이창동 감독의 가장 조용하지만, 가장 주제적으로 완결된 영화다". 제63회 칸영화제의 공식 경쟁작인 이창동의 <시>에 대한 <스크린 인터내셔널>의 평가다. 현지시간으로 지난 5월19일 수요일 아침 8시 30분에 공식 기사 시사를 가진 <시>가 현지 언론들로부터 고르게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수상작 명단에 오를만한 작품"이라고 상찬을 보낸 <텔레라마>는 "점진적으로 펼쳐지는 서사적 완성도가 훌륭한 작품이다. 이야기의 가닥이 차츰 차츰 엮어지다가 전체적 그림은 영화의 결말에 도달하여 완전한 형태를 취하게 된다"고 썼다. <까이에 뒤 시네마>의 평론가 뱅상 말로사 역시 <크로니카>에 기고한 글에서 <시>의 서사적 완결성을 칭찬했다. "서사가 저절로 부풀어 오르면서 이야기의 모든 요소들을 무차별적으로 쌓아올리는 것 같아보이나, 이렇게 냉담한 서사의 축적 뒤에는 엄청나게 강력한 효과를 갖는 검은 불꽃이 지펴진다"고 말했다. 주연 배우 윤정희에 대한 칭찬도 꽤 눈에 띈다. <르 몽드>는 "줄리엣 비노슈와 레슬리 맨빌 다음으로, 윤정희는 우리가 여우주연상감으로 가장 지지하는 배우"라고 썼다. <르 피가로>는 "거의 무중력 상태에 있는 듯한, 미묘한 뉘앙스와 감수성으로 가득찬 윤정희의 연기는 여우주연상을 받을 만하다"고 평가하며 "이창동 감독은 여배우들에게 행운을 가져다주는 감독이기도 하다"고 했다. 윤정희와 함께 현재 가장 유력한 여우주연상 후보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오리지널 카피>에 출연한 줄리엣 비노슈와 마이크 리의 <어나더 이어>에서 호연을 펼친 영국의 신인 여배우 레슬리 맨빌이다. 현재 이창동의 <시>는 전세계 평론가들의 별점을 집계하는 <스크린 인터내셔널> 데일리지의 별점평가란에서 2.7점의 높은 점수를 받으며 21일 현재 경쟁작 중 마이크 리의 <어나더 이어>와 자비에 보브와의 <인간과 신들>에 이어 세번째로 높은 순위를 점유하고 있다. 프랑스 언론들의 별점을 집계하는 <필름 프랑세즈>에서도 <시>는 별점 1점을 안긴 <까이에 뒤 시네마>를 제외하고는 좋은 점수를 획득했다. 제63회 칸영화제 경쟁부문 수상작은 현지시간으로 5월23일 일요일 오후에 발표될 예정이다. "작년보다는 올해가 더 좋은 것 같다" 이창동 감독 공식 기자회견 -이 영화의 성공적인 부분은 미쟝센 내부에서 시란 무엇인가를 느끼게 해준데 있는 것 같다. 이런 부분이 작품 제작 초기부터 기획되어 있던 것인지, 아니면 촬영 중 혹은 편집 중에 이런 복잡한 기획을 실현시킨 것인지. 혹시 제인 캠피온의 <브라이트 스타>를 염두에 두셨는가. =이창동/ 문학의 한 장르로서 시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지만, 더 나아가면 예술, 또는 제가 하고 있는 영화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고 생각했다. 또 더 나아가서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것, 돈으로 가치를 따질 수 없는 그 어떤 것에 관한 영화라고 생각했다. 그것을 어떻게 영화로 드러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다. 시라는 것이 꽃처럼 그저 눈에 드러나 보이는 아름다움, 눈으로 볼 때 그냥 아름다운 것만 시가 아니라, 어쩌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우리의 삶 그 자체, 어쩌면 아름다워 보이지 않고 추하고 더러워 보이는 것에 숨어있는 아름다움을 찾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런 것을 어떻게 영화에 드러내는가를 끊임없이 고민을 해야만 했다. -영화 속 사건은 현재 한국에서 실재로 벌어지는 일인가. =이창동/ 영화에서 보여지는 사건은 뭐 꼭 한국에서만 일어나는 사건은 아닐 것이다. 어디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다. 드물게 일어나기는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일상에 숨어있는 도덕성에 대한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그런 사건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영화로 이야기해보고 싶었다. -술집에서 한 인물이 부르는 독일어로 된 노래에 대해 질문하고 싶다. 이 노래는 독일어로된 가장 아름다운 노래이기도 한데, 대체 어떻게 발견했고 왜 영화에 넣었는지 알고 싶다. =이창동/ 슈베르트의 <보리수>는 한국에서도 유명한 노래다. 남자가 시인들을 환영하는 뜻에서 그 노래를 부르는데, 독일어를 하시는 분이 들으면 약간 가사가 틀렸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거다. 시를 즐기는 사람들이 그 정도의 멋을 부린다고 할까. 어떻게 보면 약간 허영기가 있고 위선적으로 보일지 모르나, 그들 나름대로 순수한 마음으로 즐기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이 작품과 <밀양>을 비교해주셨으면 한다. 두 영화 모두 아이의 죽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밀양>에서는 남자아이가 죽고, 여기서는 영화 초반 여자 아이가 죽는다. =이창동/ <밀양>에서는 남자아이를 잃은 어머니의 고통을 다루었다. <밀양>이 피해자에 관한 이야기라면, 굳이 구분하자면, 저는 구분하기는 싫다만, 이 영화는 가해자쪽에 있는 사람의 고통을 다룬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가해자를 손자로 둔 할머니의 고통이랄까 마음의 죄의식이랄까. 그런 것과 시를 쓰기위해서 찾아야 하는 세상의 아름다움과의 긴장, 갈등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고 싶었다. -시나리오 작업을 할 때 여자주인공을 염두에 두고 작업을 하셨는가. 왜 이런 질문을 하냐면, 마치 선택하신 배우를 위해 존재하는 것 처럼 훌륭한 연기였기 때문이다. =이창동/ 여자 주인공을 생각하면서 아주 자연스럽게 윤정희씨를 떠올렸다. 윤정희씨는 과거에는 한국 영화의 전설이라고 부를 수 있는 분이고, 어릴 때 부터 하늘의 별 처럼 우러러 보던 배우였지만, 10여년 넘게 활동을 하지 않은 분이다. 그런데도 이상하게도 자연스럽게 윤정희 선생을 떠올렸다. 왠지 시나리오의 주인공과 윤정희 본인의 외면이나 내면이 굉장히 닮아있을 것 같은 예감을 했다. -윤정희씨는 영화에서 은퇴하신지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당신은 그레이스 켈리가 모나코 공주가 된 후 받은 것보다 더 많은 시나리오 제안을 받으셨고, 거절하셨다는 이야기가 있다. 왜 <시>로 복귀하게 된건가. =윤정희/ 나는 영화를 절대 떠난 적이 없으며, 영화는 내 인생이다. 여러 시나리오를 받아보았지만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날 이창동 감독이 "제가 지금 당신을 위해 시나리오를 쓰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그리고 2년이 지나 이창동 감독이 시나리오를 보냈다. 읽어보니 너무 너무 좋은 거다. 아직도 계속 영화를 하고 싶고, 절대 영화를 떠난 적이 없다. 계속 하고 싶다. 90살까지. -보도 자료에서 보면 당신은 "시는 위협을 받고 있다. 마치 영화가 그런 것 처럼"이라고 썼다. 한국 영화든 영화 일반이든, 무엇이 영화를 위협하고 있다고 생각하나. =이창동/ 한국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영화가 죽어가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모든 영화가 죽어가지는 않을거다. 다만 어떤 영화는 죽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작년에는 심사위원으로 이자리에 오셨었고, 금년에는 경쟁작을 가지고 오셨다. 작년과 금년의 마음 상태를 비교해주실 수 있을지, 그리고 어떤 것이 더 좋은가? =이창동/ 둘 다 그렇게 썩 좋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심사위원으로 온 것은 남의 영화를 평가하고 점수를 메겨야 한다는 것이 굉장히 부담스러웠고, 영화를 즐기고 싶었지만 종종 즐길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썩 좋은 경험은 아니었다. 심사위원으로 온 것 보다는 제 영화를 직접 가지고 와서 관객들과 만나는 것이 더 좋다고 말할 수도 있는데, 어쨌든 경쟁이기 때문에 결과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즐기기만 할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좀 부담스럽기도 하다. 어쨌든 작년보다는 올해가 더 좋은 것 같다. 칸=김도훈, 취재지원 유동석(파리 한불영화제 예술감독)

[must10] 법정 스님을 기억하다 외

1. 법정 스님을 기억하다 지난 3월11일 입적한 법정 스님의 미출간 원고 63편이 발견됐다. <불교신문>은 “<불교신문>의 전신인 <대한불교>의 영인본을 조사한 결과 법정 스님이 1963년부터 1977년까지 쓴 수필과 시, 제언과 칼럼, 서평 등 63편의 글을 찾아냈다”과 밝혔다. 스님의 뜻을 따르던 이나, 스님의 입적을 슬퍼하는 이에게나 소중한 선물이 될 글이다. 한편, MBC는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특집 프로그램 <법정, 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를 방송한다. 내레이터는 배우 고현정이다. 2. 신의 손길을 느껴봐~ 신의 손, 로댕님의 작품이 서울시립미술관에서 8월22일까지 전시됩니다. 해외 반출 금지됐던 <신의 손>을 포함해 <생각하는 사람> <아담> <이브> 등이 공개된다네요. 추상과 구상의 절묘한 조화를 느껴보시길. 3. 투표, 우리가 격려해드려요~ ‘지방선거 독려공연’이라고 들어보셨는지? 6월2일, 투표 꼭 하시고 오후 7시 홍대 클럽 사운드홀릭으로 9천원만 들고 오세요. 저희가 마구마구 격려해드립니다. 갤럭시 익스프레스, 불나방스타쏘세지클럽, 텔레파시, 아침 밴드의 재밌는 공연. 4. 아이폰 과외 받으실래요? 메일, 로밍, 캘린더, 어플 설치. 힘들어서 못하시겠다고요? 저희가 달려갑니다. 아이폰 개인교습 받거나 하고 싶으신 분, 포털사이트 알바천국(www.alba.co.kr) 게시판을 확인하시길. 기본 시급은 7천~1만원에 재택근무까지. 이거, 손발이 오글거리게 당기는 아르바이트. 5. GGGG 베이베베이베베이베~ 아이폰 3gs로 갈아탄 지 6개월밖에 안됐다. 그런데 6월에 4g가 나온단다. 애플은 오는 6월7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리는 세계개발자컨퍼런스(WWDC)를 통해 아이폰 4g를 발표할 예정이다. 그동안 아이폰이 없는 편집장 이하 몇몇 기자를 무던히도 놀렸더랬다. 흑, 이제 그 자랑질을 어떻게 견디나. 6. 연아씨, 울지 마요 MBC가 파업을 중지하면서 <황금어장>이 쟁여둔 <무릎팍도사> ‘김연아’편이 5월26일 방송된다. 이제는 <무릎팍도사>가 그토록 갈망했던 장동건보다 더 궁금한 아이템이다. 강호동, 우리 연아에게 함부로 소리지르지 말지어다. 7. 목소리 미남의 귀환 근사한 출근용 음악을 소개한다. 목소리 미남 김동률과 기타리스트 이상순의 베란다 프로젝트가 음반 <>를 발표했다. 첫 트랙 은 한번 들으면 이내 흥얼거리게 만드는 매력이 있으니 필청. 매번 이 목소리와 사랑에 빠진다. 8. 소녀들, 웰컴 백! 국민 여동생 원더걸스와 톡톡 튀는 아이돌 포미닛, <2dt>와 로 컴백! 소희는 보이시해도 예쁘고나. 래퍼 소현도 멋지고나. 그런데 요즘 노래들은 왜 이렇게 팝송 같냐. 한글이 잘 안 들리는 이 기현상은…. 9. 전화벨이 울리고… 대학생은 물론 그 어머니들까지 귀를 쫑긋 세울 신간 소식. 신경숙의 장편소설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가 출간되었다. 2009년 초여름부터 초겨울까지 인터넷을 통해 연재된 작품. 성장소설이고 청춘소설이며 연애소설이다. 10. 니들이 태양을 알어? <씨네21> 새 사무실까지 매일 등산을 하다 보니 자외선에 대한 공포가 극에 달했다. 양산을 쓰려고 했더니 온갖 아침 정보 프로그램을 섭렵하는 어머니의 진중한 조언. “자외선 차단에는 선캡이라고 뉴스에서 그랬다.” 선캡! 김혜수도 쓰는 울트라캡숑시크 아이템 아니던가! 태양이 무서운 자들이여, 가려라!

시리즈 10년, 마지막 모험을 떠나요

윌리엄 스타이그의 인기 동화책이 원작인 <슈렉>은 마법에 걸려 흉측한 괴물로 변한 아름다운 공주가 진정한 사랑과의 키스를 통해 저주에서 풀려난다는 내용의 고전 동화를 신선하게 패러디하면서 지난 10년간 팝문화의 아이콘으로 자리잡아왔다. 진정한 사랑과의 만남, 이후 서로를 각자의 삶 속에 받아들이는 과정, 친구와 가족을 만들어가는 이야기를 거쳐 도달한 <슈렉> 시리즈의 마지막 장인 <슈렉 포에버>는 어느 순간 불현듯 드는 “이렇게 사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었을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슈렉 포에버>는 슈렉이 드래곤으로부터 피오나 공주를 구하기 전 왕(테리 길리엄 감독의 <몬티 파이톤>의 존 클리스)과 왕비(줄리 앤드루스)가 마법사 룸펠스틸스킨(월트 돈)을 만나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피오나 공주의 저주를 풀어주는 대신 왕국을 차지한다는 계약서를 들이미는 룸펠스틸스킨. 소중한 딸을 생각하며, 왕이 계약서에 서명을 막 하려던 차에 슈렉이 공주를 구했다라는 소식이 전해져오고 룸펠스틸스킨의 계략은 수포로 돌아간다. 슈렉이라는 이름을 기억하며 이를 갈면서 사라지는 룸펠스틸스킨을 뒤로하고 화면에는 피오나 공주를 구해내고, 진정한 사랑임을 서로 확인하고,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자리를 잡은 슈렉의 일상이 보인다. 피오나 공주는 아이들 뒤치다꺼리하느라 정신이 없고, 슈렉 역시 자신만의 시간은 꿈도 꿀 수 없다. 이제 하루하루가 똑같이 정신없는 아버지로서의 일상에 숨막혀하던 슈렉은 문득 고개를 돌려 거울 속의 자신을 보며 한때 모두가 무서워하던 오거로서의 자유로운 삶, 이제는 과거가 되어버린 자신만의 삶을 그리워하게 된다. 그런 슈렉 앞에 나타난 마법사 룸펠스틸스킨. 그는 슈렉에게 하루 동안의 일탈이라는 달콤한 제안을 하고, 슈렉은 그 대가로 자신이 지불해야 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보지도 않고 덥석 받아들인다. 그러자 바로 슈렉은 슈렉이 태어나지 않았던 평행우주의 세계로 떨어진다. 룸펠스틸스킨이 슈렉이 태어난 날을 가져가버린 탓에 이 세계에서는 슈렉이 태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태어나지 않았기에 당연히 슈렉은 피오나 공주를 구출한 적도, 용과 싸운 적도, 동키를 만난 적도 없다. 슈렉이 이제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세계와 그 모든 이전의 기억을 가지고 갑자기 등장한 슈렉. 이곳에서 동키는 슈렉을 알아보지 못하고, 사람들은 예전처럼 슈렉을 두려워하고, 장화 신은 고양이는 장화를 신지 못할 지경까지 살이 쪄 있다. 자신을 구해줄 기사를 기다리다 지친 피오나 공주는 마침내 스스로의 힘으로 성 안에서 빠져나와 왕국을 통치하고 있는 독재자 룸펠스틸스킨에 맞서 오거 저항군을 이끄는 여전사가 되어 있다. 슈렉에게 그녀는 여전히 사랑이지만, 여전사 피오나는 더이상 진정한 사랑을 믿지 않는다. 한때 자신이 가졌던 가족과 친구들을, 그리고 피오나 공주의 사랑을 되찾기 위해 이번에는 슈렉이 진정한 사랑의 키스를 필요로 하게 된다. 3D로 제작되어 마이크 마이어스(슈렉), 카메론 디아즈(피오나 공주), 동키(에디 머피) 및 안토니오 반데라스(장화 신은 고양이) 등의 친숙한 목소리와 함께한 <슈렉 포에버>가 지난 5월16일 로스앤젤레스에서 프리미어를 가졌다. 하루 앞서 에디 머피가 빠져 아쉬었지만 베벌리힐스의 포시즌 호텔에서 배우들과 마이크 미첼 감독을 라운드 테이블에서 만날 수 있었다. 카메론 붙잡고 3D 관해 질문 천개쯤 했을걸 마이클 미첼 감독 - 실사영화와 애니메이션 작업의 차이가 있다면. = 엄청난 디테일을 미리 다 계산해두어야 한다는 점이다. 실사로 마차를 찍어야 한다고 하면 프로덕션 디자이너가 가지고 온 몇장의 샘플 사진 중에서 한장을 고르면 그것으로 끝이다. 하지만 <슈렉 포에버>에서 동키가 끄는 마차를 정하기 위해서는 애니메이터들의 수없이 많은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마차가 움직일 때 랜턴은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는지, 흔들리는 마차의 아래는 어떤 식으로 움직이는지 등등. 그런데 그게 바로 애니메이션 디렉팅의 재미 같다. - 실제와 캐릭터간의 싱크로율이 가장 높은 배우는. = 모두 다 각자의 캐릭터를 상당 부분 가지고 있다. 마이크 마이어스는 굉장히 머리회전이 빠르면서도 괴짜 같은 모습이 슈렉과 잘 맞고, 항상 넘치는 에너지의 카메론 디아즈도 피오나 공주 그 자체다. 녹음실에 배우들이랑 같이 들어가서 작업을 하는데, 어떨 때에는 이들을 그냥 보고 있는 것만으로 금세 진이 빠지는 느낌이다. 다들 목소리 연기를 하면서 몸을 많이 움직이는데, 그런 모습을 애니메이터들이 카메라로 녹화해두었다가 애니메이션에 참고하기도 한다. 에디 머피의 경우 그 방법을 많이 썼다. - 이번 작품에서 캐릭터에 이전과 다른 변화를 주려고 한 시도가 있었다면. = 살찐 장화 신은 고양이도 있고, 재니스 조플린처럼 머리를 내린 피오나 정도? - <슈렉> 시리즈의 매력이 무엇인 것 같나. = 슈렉에게는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게 있다. 이번에 피오나는 슈렉에게 구출되지 못했다. 그리고 스스로 오거 전사로 거듭났다. 그 과정에서 진정한 사랑을 믿지 못하게 되어버렸다. 필요로 할 때 구해주지 못한 피오나를 바라보는 슈렉의 딜레마를 보면 마음이 아프지 않은가. 슈렉은 이른바 애니메이션 버전의 ‘토니 소프라노’( 텔레비전 시리즈 <소프라노스>의 주인공)라고 생각한다. (웃음) 그러고보면 슈렉은 우락부락한 체구에, 늘 화난 표정의 무뚝뚝한 토니와 비슷하지 않나. 만드는 입장에서 보면 피노키오가 거짓말을 하면 코가 늘어난다는 것을 굳이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유머가 그대로 전달된다라는 등에서 또 다른 재미가 있다. - <슈렉> 프렌차이즈의 마지막 장을 만드는 것은 부담이 꽤 컸을 것 같은데. = 그렇기도 하면서 동시에 애니메이터들 모두가 다들 들떠 있었다. 처음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난 두 아이의 아빠였고, 생일 파티에 한창 시달렸을 때라 슈렉의 심정이 딱 와닿았다. 부담보다는 우리 모두 이 작품을 만드는 데 자부심과 즐거움이 더 컸다. - 그래도 어려운 점이 있었다면. = 3D 작업이었다는 점이다. 3년 전 일이라 3D 작업을 그때 처음 해보는 것이었으니까. 그래서 제임스 카메론을 붙잡고 질문만 천개를 했던 것 같다. 그래도 그 과정에서 <아바타> 작업물을 누구보다 먼저 볼 수 있어 좋았다. 드림웍스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에서 <드래곤 길들이기>도 함께 3D로 제작돼 우리끼리 문제점이 생기면 같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곤 했다. 드림웍스에는 이른바 히피 문화같이 서로 돕는 분위기가 있다. 그래도 3D 작업을 이렇게 하나 해보고 나니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기술만이 아니라 스토리텔링 기능으로서의 3D가 가진 매력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동키를 바라보며 혼자가 되는 슈렉을 3D로 잡아 후면에 배치하는 장면이 있다. 앗, 3D다 하고 눈에 확 띄는 장면은 아니지만, 그를 통해 슈렉의 심리를, 슈렉의 관점에서 훨씬 더 생생하게 표현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3D는 모노 사운드에서 스테레오 사운드로의 변화와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슈렉 포에버>의 주인공들을 LA에서 만나다

영국 TV 시리즈처럼 우아하게 끝낼 수 있다니 슈렉 목소리 역의 마이크 마이어스 - <슈렉> 시리즈를 하면서 가장 좋았던 점은. = 고정수익이 있다는 것이 좋았는데. (웃음) <슈렉> 시리즈는 애니메이션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줬다. ‘젠장, 이건 그냥 만화일 뿐’이라고 하면서도 마음이 끌리지 않는가. 그리고 이렇게 우아하게 마지막 장에 이르게 되었다는 점도 마음에 든다. (질질 끌지 않고) 영국 텔레비전 시리즈처럼 우아하게 끝을 낼 수 있다니! (웃음) - 목소리 연기하면서 어려운 점이 있었다면. = 나는 뉴욕에 사는데, 녹음실로 가면서 살인현장을 두번이나 봤다. 길거리에서 죽어 있는 시체랑, 칼이랑, 피로 가득한 현장을 지나 녹음실로 들어와 동화의 세계에 적응하는 것이 어색했다고 해야 하나? 녹음실에서 두 블록 떨어진 곳에서 연달아 살인사건이 일어났으니 말이다. - 슈렉과 자신이 어떤 면을 공유하는 것 같은가. = 나는 캐나다 출신이고, 부모님은 스코틀랜드 출신이다.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쉽게 화를 내면서도 정이 많다. 이를테면, (걸걸한 목소리를 윽박지르며) “당장 거기서 손을 떼지 못해!” 하다가도 (갑자기 씩 웃으며 누그러진 목소리로) “이리 와. 자, 한잔 들이켜자고” 하는 식이다. 그 모습이 슈렉이 속한 오거의 문화랑 비슷한 것 같다. 뭐랄까, 오거는 동화 세계의 ‘일하는 사람들’(working people)이랄까. 또 하나는 캐나다인이기 때문에 겉으로 보기에는 미국인 사이에 그냥 잘 섞여 있는 것 같지만, 나 스스로는 언제나 그 미묘한 차이를 의식하면서 살아왔던 것 같다. 어렸을 적에 캐나다 텔레비전 시리즈를 보고 학교 친구들에게 신이 나서 이야기하면 “캐나다 TV, 난 그런 것 몰라” 혹은 “그런 것은 관심 없어”라는 표정의 친구들의 반응에 풀이 죽었던 기억도 나고. - 당신이 생각하는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는 어떤 것인가. = 안토니오와 그 이야기를 잠시 나누었는데, 우리 둘 다 “happy”라는 단어보다는 “joy”라는 말을 훨씬 더 좋아한다. happy에는 왠지 그래야 한다고 강요하는 뉘앙스가 있다. 결과로서의 행복함이 아니라 스스로가 행복해지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더 마음에 든다. 나한테 일어나는 행복이 아니라, 내 안에서 행복이 만들어지는 것이니까. - <슈렉> 시리즈는 10년간 이어져왔다. 감회가 있다면. =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하다. 사실 좀 슬픈 것 같다. 이제 47살이 되는데, 되돌아보면 그때는 언제 이 일들을 다 할 수 있을까 했는데, 그동안 참 많은 일을 해온 것 같다. 엘리아 카잔의 <라이프>라는 자서전을 보면 장마다 너무나 불행하다고 생각하고, 힘든 일들만 첩첩이 쌓이다가 마지막에 기적이 일어나면서 장이 마무리되고 새로운 장으로 들어서는 식이라 인상적으로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인생이 그런 것 같다. 1편부터 공주라기보단 전사였지 피오나 공주 목소리 역의 카메론 디아즈 - 피오나 공주로서도 마지막인데,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 = 지난 10년을 돌이켜보면, 슈렉과 나는 비슷한 삶의 궤적을 걸었던 것 같다. 그러고보면, 나 역시 내가 가진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불현듯, 도대체 어디를 향해서 달려가고 있는 것이지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 4편을 통해 공주에서 아내로, 엄마로, 이번에는 전사로 인생의 다양한 단계들을 거쳐왔는데, 어떤 피오나가 가장 마음에 드나. = 그 여러 모습의 피오나는 실은 다 똑같은 피오나이다. 내게 피오나는 1편부터 공주라기보다는 언제나 전사의 모습이었다. 언제나 슈렉을 이끌어갈 수 있었던 것도 그녀 스스로가 사실은 내면이 강한 인물이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대체 어딜 봐서 내가 공주의 모습인가. (웃음) 내 안의 14살 난 소년은 나도 어쩌질 못한다. - 안 그래도 다들 당신이 에너지가 넘쳐난다고들 이야기한다. 에너지를 유지하는 비결이 무엇인가. = 그래도 3주 전에는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 그때는 진짜 지쳐 있었으니까. <나잇 & 데잇>으로 톰 크루즈와 6개월간 거의 매일 12시간 이상의 강행군 촬영을 하고, 바로 다음 작품으로 들어갔으니까. 진짜로 힘들었다. 아, 다시는 이렇게 앞뒤로 영화를 찍지 않고 싶다. 그렇지만! 잠을 제대로 자니까 이렇게 다시 내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잠이 최고다. 앞으로는 여러 작품을 연달아 하는 것보다 1년간 한 영화만을 제대로 집중해서 해보고 싶다. - <슈렉>을 하면서 어떤 점이 즐거웠나. = 다른 것도 많지만, 내 영화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즐겁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이런 좋은 작품을 하게 되면,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서로 나누고,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직접 듣고, 영화를 정말로 즐길 수 있는 기쁨을 준다. <슈렉>이 내게 그랬다. - 어떻게 하면 피오나처럼 진정한 사랑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은가. = 진정한 사랑에 대한 잘못된 인식 중 하나가 그런 사랑이 18살 즈음에 나타날 것이라고 믿는 데 있다. 진정한 사랑이 20살에, 30살에, 40살에, 혹은 60살이 되어야 나타날 수도 있지 않은가. 게다가 그렇게 만난 사랑과 남은 여생을 계속 함께해야 한다는 생각도 문제다. 그런 사랑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현실적으로 그렇지 않은 쪽이 훨씬 많다는 것이지.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만약 한 사람과 앞으로 남은 여생을 늘 함께해야 하는 것에 대해서 자신이 없다면, 그런 약속은 (단호히) 하지 말아야 한다. 5년, 10년, 혹은 20년 이렇게 쪼개어서 인생의 시기별로 충실한 사랑을 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지 않을까라는 게 내 생각이다. - 30대 여성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 자신이 지금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을 마음껏 표현하면서 살았으면 좋겠다. 자신이 지금 가지고 있는 것들의 가치를 최대한 누리면서 살아야 하지 않을까. 왜냐하면 10년 뒤에는 옷을 입더라도 지금만큼 예쁘지 않을 테니까. 현재 가진 것을 최대한 누리면서, 또 가진 것의 최고를 끌어낼 수 있도록 노력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동화나라 이야기에 머물지 않아 장화 신은 고양이 목소리 역의 안토니오 반데라스 - 이번 작품에서 꽤 몸무게를 늘려야 했는데, 어땠나. (웃음) = (웃음) 그러게 말이다. 로버트 드 니로 말고는 나만큼 영화를 위해 찌운 배우가 없다. - 장화 신은 고양이의 연기를 하면서 특히 염두에 둔 점이 있다면. = 내가 해석한 장화 신은 고양이는 짓궂은 캐릭터이다. 달콤한 목소리로 “당신을 사랑해…. 아, 그렇지만 당신도 사랑해”라고 속삭이는 바람둥이이기도 하고. 처음에 어떤 목소리로 연기를 할까 고민할 때, (가느다란 목소리를 내며) 이런 식으로 말한다면 너무 뻔하지 않나, (슈렉 속의 목소리로 돌아가서) 뭔가 대비되는 맛을 주고 싶었다. 그 조그마한 몸에 뭔가 우아하면서도, 무게가 있는 그런 목소리가 나온다면 훨씬 재미있을 것 같았으니까. (다시 본래의 목소리로 돌아와) 그래서 장화 신은 고양이가 거울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면 스스로 깜짝 놀랄 것 같은…. - 목소리 연기를 하면서 어려운 점이 있었다면. = 브로드웨이에서 한창 <나인>을 공연하다가 장화 신은 고양이 역을 하러 녹음실에 오면 바로바로 적응이 안될 때가 있곤 했다. 녹음하고 다시 공연장 가면 또 헷갈리고. 아, 그리고 나는 <슈렉>의 미국 버전 말고 스페인어 버전, 이탈리아 버전에 다 참여했는데, 각 버전에 따라 악센트 등의 변화를 주는 것이 생각보다 어려웠다. - 마지막 <슈렉>이다. 어땠나. = <슈렉> 시리즈는 팝컬처를 비틀면서 독특하게 다가왔는데, 이번 작품은 단순히 동화 나라의 이야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스파게티 웨스턴과 같은 에픽적 성격을 띠고 있다. 신선했다. - 극중 캐릭터처럼 그렁그렁한 큰 눈으로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스타일인가. = 하하. 노력 중이다. - 애니메이션 작품에 참여하면서 얻게 되는 것이 있다면. = 애니메이터들은 ‘뛰어난 것’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이다. 작가에서부터, 애니메이터들에 이르기까지 이런 팀워크의 한 부분이 되는 것에 매력이 있다. - 스핀오프로 제작되는 <장화 신은 고양이>에 샐마 헤이엑과 함께 출연하기로 되어 있는데 스튜디오에 샐마 헤이엑을 추천했다고 들었다. = <데스페라도>를 찍으면서 샐마와 알게 되었다. 샐마는 코미디 연기를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흔치 않은 여배우이다. 서로 쥐어뜯고 으르렁거리면서도 결국에는 함께하게 되는 클래식한 관계를 보여줄 계획이다. - 장화 신은 고양이를 연기하게 되면서 가장 좋았던 기억은. = 칸영화제 레드카펫을 밟을 수 있었던 것. 체코슬로바키아에서부터 한국까지 다양한 나라의 영화들이 선보이는 곳에 같이 설 수 있었던 기억이 좋았다.

교육감님이라도 영화클럽 만들어주세요

프랑스 학생들은 참 좋겠다. 전세계를 통틀어 영화를 가장 사랑하는 나라 프랑스에서, 오는 9월부터 프랑스 전역의 중등학교 학생이라면 누구나 온라인으로 전세계 걸작 고전 200여편을 볼 수 있는 온라인 시네 클럽(www.cinelycee.fr)을 런칭한다고 한다. 프랑수아 트뤼포의 <400번의 구타>, 오슨 웰스의 <시민 케인>, 장 뤽 고다르의 <경멸>, 하워드 혹스의 <리오 브라보>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지난 5월18일자 <가디언>에 따르면, 프랑스 교육부와 국영 프랑스 텔레비전이 협력하여 구축한 이번 시네 클럽은 2009년부터 시작된 중등학교 시스템 개혁 논의의 일환이라고 한다. 이 야심찬 계획의 목표는, ‘로맨스와 섹스와 반항’이 가득한 영화를 통해 10대들로 하여금 문화의 다양한 영역과 국제정세 등에 자연스럽게 흥미를 느낄 수 있도록 유도하려는 것이다. 시네 클럽이 ‘온라인’으로 제공되는 데에도 이유가 있다. 파리 교외 혹은 타 지역 학생들에게도 문화적 혜택을 공평하게 제공하기 위함이다. 교육부 장관 뤽 샤텔은 “불평등이 절규하는, 학교가 충분한 역할을 하고 있지 않은” 곳에 문화가 존재해야 한다고 부연했다. 파리 시네마테크 대표 코스타 가브라스는 “이미지는 우리 사회에서 엄청난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며, 청소년은 그 이미지들을 따라잡고 해독하는 걸 배워야 한다”라고 두팔 벌려 환영했다. 문화부 장관 프레데릭 미테랑은 “여러분은 <시민 케인>을 보면서 권력과 야심의 음모가 구축되는 방식에 대해 특별한 통찰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국 역시 몇년 전부터 영화를 수업의 일환으로 끌어들이는 노력을 다각도로 기울여왔지만, 그것은 언제나 ‘특화된’ 무엇인가로 여겨졌다. 가장 손쉽고, 가장 저렴하게, 가장 다양한 분야에 접근할 수 있는 교육방식으로서의 영화를 고민할 수도 있지 않을까.

[김영진의 인디라마] 취향은 존중하지만, 유감이다

첫 번째 장편영화 다음에 꽤 시간이 흘러 두 번째 장편 <폭풍전야>를 만든 조창호는 한국영화계에서 보호받지 못하는 재능을 지닌 감독이다. <폭풍전야>는 개봉 당시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고 금세 시야에서 사라졌다. 데뷔작 <피터팬의 공식>이 특이한 정서를 갖고 있는 영화라고 생각했던 터라 이번에는 조창호가 어떤 것을 보여줬을지 궁금했다. 잊고 있다가 뒤늦게 영화를 찾아봤다. 역시 특이점이 있지만 그만큼 대중적인 외연은 옅은 영화였다. <폭풍전야>는 이야기만 놓고 보면 텔레비전 드라마 소재로 봐도 별 무리가 없다. 그만큼 통속적인 자극이 강한 상투형의 범벅인데 감독의 취향이 이걸 전혀 다른 방식으로 버무린다. 여주인공은 마술사 상병을 사랑한다. 상병은 실은 동성애자이며 그걸 안 미아가 상병의 애인을 총으로 쏴 죽인다. 상병은 미아 대신 죄를 뒤집어쓰고 교도소에 들어가고 거기서 수차례 탈옥을 시도한 수인을 만난다. 요리사 출신인 수인은 에이즈 환자는 출옥한다는 그릇된 정보를 믿고 상병의 피를 받지만 출옥하지 못하자 탈옥한다. 상병의 부탁으로 미아가 운영하는 카페에 칸 수인은 거기서 주방장으로 일하며 수인과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환상적 리얼리즘이 아침 드라마와 만난 부조화 데뷔작인 <피터팬의 공식>과 마찬가지로 금지된, 치명적인 사랑이라는 모티브에 죽음의 기운을 얹은 <폭풍전야>는 보여주고 싶은 것을 위해 스토리를 강제한 흔적이 짙다. 논리적으로 무리한 부분을 억지로 밀고 나가며 마치 특정 상황에 처한 인물의 내적 심상을 풍경으로 펼쳐 보이기 위해 기능적으로 전개된다는 느낌을 준다. 미아가 운영하는 카페는 세상의 오지처럼 거의 이웃이 없고 손님도 별로 없는 한적한 곳인데 동시에 외부자들에게 완벽하게 노출된 투명유리창 안의 공간처럼 보이기도 한다. 에이즈에 걸린 수인은 시한부 생명이며 미아도 마찬가지다. 수인은 쫓기고 있으며 미아는 스스로 유폐돼 있다. 수인과 미아, 그리고 상병 모두 거둬내기에는 깊이 박힌 심한 마음의 자상을 입고 있다. 조창호는 도대체 왜 이런 이야기를 지어낸 것일까. 영화를 보는 내내 인물들을 감싼 무기력과 출구없는 절망과 가끔 느껴지는 관능과 느닷없이 벌어지는 마술적 상황이 주는 놀라움의 정체에 대해 궁금했다. 영화 속 인물의 삶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철저하게 방기되어 있는데 그걸 채운 내용은 때때로 덧없는 생의 감각을 일깨우는 쪽이다. 수인이 요리를 만드는 장면, 그 요리를 미아와 함께 먹는 장면은 공들여 반복적으로 묘사되고 상병과 미아가 보여주는 마술은 속임수가 아니라 진짜로 벌어지는 일 같다. 가브리엘 마르케스의 환상적 리얼리즘이 아침 드라마와 만난 이 부조화 속에서 조창호는 무엇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 영화 내내 생기없는 표정으로 텔레비전 연속극 연기 패턴에서 벗어나지 않는, 미아와 수인 역의 황우슬혜와 김남길의 연기가 그냥 그랬던 것은 이 맥없는 이야기의 굴레에서 어쩔 수 없었겠지만 역시 너무 전형화돼 있다. 가끔 이들이 자신들의 배역에 동화되어 연기하는 것인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배우들을 정물처럼 배치하고 감독은 천천히 느린 호흡으로 풍경을 각인시키려 한다. 화면의 물성을 포착하려는 이 노력은 영화감독 조창호의 재능이 배어 있는 부분이다. 어쩌면 그가 찍고 싶었던 것은 이 부분인지도 모른다. 나른하고 무심한 풍경, 겉으로 심심해 보이지만 너무 초연해서 오히려 무섭고 잔인하게 다가오는 풍경, 비바람이 불 때만 비로소 억센 표정을 보여주는 풍경, 불행이 예정되어 있는 운명과 닮아 있는 풍경의 각인이 스토리를 지탱하는 명분이다. 이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그 풍경의 부분으로 가려 있으나 아주 가끔, 특히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서 그 풍경에 자신들의 뭔가를 새긴다. 오로지 진짜 마법으로만 성취 가능한 이 이미지를 보여주기 위해, 해변 가득 날리는 색종이들의 흩날림을 보여주기 위해 영화는 그토록 가라앉아 있었다는 인상을 준다. 풍경에 묻히고 바람 속에 밀리기만 하던 인물이 이윽고 거기에 자신들의 자취를 새기는 것은 운명에 스러지는 것이 아니라 나름의 생명과 관능의 몸짓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 자체로 아름답고 인상적이지만 미로에 갇힌 발버둥처럼 보인다. CF 같은 가공의 세계는 착시를 불러일으키고 조창호라는 감독이 이런 길을 택한 것은 유감이다. 우리가 관습적으로 생각하는 상업영화판에서의 생존방법이라는 것은 이렇게 무서운 방식으로 복수한다. 텔레비전 드라마의 극적 충격을 갖춘 이야기를 꾸미는 척하면서 거기 감독 나름의 개성을 새긴다고 하는 추상적인 명제는 실제로 증명되기 힘든 신기루 같은 것이다. 숱한 감독들이 실패했으며 성공사례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조창호는 <폭풍전야>에서 상투적인 이야기에 비관적인 패배주의와 거센 영화적 에너지를 심고자 했다. 보호받지 못하는 사랑이라는 모티브, 인간이 거역할 수 없는 죽음의 운명, 세상의 구석에서 유배당했거나 유배를 자청한 인간들, 루저의 삶에 무관심한 세상의 표표한 질서를 그려내는 것은 그의 취향이지만 상업적으로 용도폐기당하기 쉬운 그 상상력의 겉에다 그는 가짜 충격의 당의정을 입혀놓고 실은 알맹이는 그게 아니라는 식으로 접근했다. 어떤 정서만 갖고 영화가 성립될 수 있을까. 삶의 이력이 전시되는 공간으로서의 풍경에 정서만 남고 나머지는 휘발될 수 있을까. <폭풍전야>의 배경이 된 해변가의 공간적 질감은 멋있는 외양을 갖추고 있다. 이곳에서 서너명의 등장인물들만으로 애욕과 상처가 전시되는 이야기를 펼치고 풍경은 이야기를 걸치는 긴 사다리 노릇을 한다. 실제의 풍경이 완전한 인공적 산물이 되는 순간들이다. 비관의 정서는 현실적으로 착목될 목침을 갖지 못한 채 풍경속에 떠도는데 이 CF 같은 가공의 세계는 마술이라는 모티브와 결합해 환상적 리얼리즘의 비약을 가능하게 할 것처럼 착시를 불러일으킨다. 잔인한 상황의 도래와 그것을 치유하는 데 드는 시간이 이어지며 영화는 내내 그런 식으로 이어진다. 그리고는 영화적 제스처가 나오는 것이다. 현실에서는 절대 불가능한 초월적 상황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시치미를 떼고 벌어지면 그걸 관객에게 기적이라고 믿고 싶게 만드는 것 같다. 지금은 시효가 지난 듯이 보이는, 이 계열의 대표자 에미르 쿠스투리차의 영화에서 마술적 리얼리즘은 등장인물들의 총합적 에너지의 맥을 따라 펼쳐진다. 쿠스투리차의 <아빠는 출장중>과 같은 영화에서 주인공 꼬마의 비상하는 순간은 구체적이고 실증 가능한 듯이 보이는 일상적 사건들의 질감을 뚫고 나옴으로써 충격을 준다. 쿠스투리차의 근작들에서 더이상 그런 에너지가 느껴지지 않은 것은 남용된 영화적 수사의 시효가 끝난 이유도 있지만 구체적인 현실의 실감을 뚫고 나오는 것이 아닌, 가공된 영화적 장치로서만 기능했기 때문이다. <폭풍전야>는 독립영화와 상업영화의 무분별한 경계 속에서 창조력을 이상한 방식으로 펼쳐낸 안타까운 사례이다. 재능있는 감독 조창호가 오랜만에 만든 신작에 대해 야박한 글을 쓰는 것이 미안하지만 이건 한 감독 개인의 사례가 아니라 한국영화계 전체의 불길한 사례로 재고되어야 한다. 영화에 대중적인 외피를 두른다는 강박이 의식적으로 일정한 자극을 배열하는 텔레비전 막장드라마식의 패턴을 모방하는 퇴행의 증거로서, 동시에 감독의 자율적인 상상력이 제한된 이야기 소재 범주의 굴레에 갇혀 낯선 방식으로 분출되는 증거로서, 창조적 표현욕구가 시장의 사이즈에 맞춰 예측 불가로 어그러진 사례로서 남을 것이다. 조창호의 실패를 안타깝게 생각한다. 그는 더 적극적으로 타협하거나, 아니면 자기 영역을 고수하는 쪽이 좋을 것이다. 당장 많은 이들이 보지 않는 개인적 영화를 만들기 위해선 용기가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많은 이들이 볼 영화를 만들기 위해선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 <폭풍전야>는 어느 쪽으로도 자세가 잡혀 있는 영화는 아니었다.

[영화읽기] 한없이 막장인, 그래서 정확한 멜로드라마

<스플라이스>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 전에 분명히 해야 할 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이 영화가 아무리 그럴싸하게 위장을 하고 있다고 해도 하드 SF가 아니라는 것이다. <스플라이스>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은 빅터 프랑켄슈타인이 시체 조각을 꿰매어 살아 있는 생명체를 만들 가능성보다 특별히 더 높지 않다. 도달하기 어려운 목표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정상적인 과학자들이 영화 속 주인공 엘사와 클라이브가 벌이는 실수를 그대로 반복할 가능성은 전무하다. 하긴 익숙한 장르 관객은 컴퓨터가 ‘인간+동물 유전자 합성 삐뽀삐뽀!’를 알릴 무렵부터 그런 기대는 접었겠지만. SF라고 할까 막장드라마라고 할까 정말 딱 <프랑켄슈타인>이다. 빈센조 나탈리는 유전공학 시대를 무대로 자기만의 <프랑켄슈타인>을 만들었다. 심지어 주인공들의 이름마저 힌트가 된다. 엘사와 클라이브. 이들은 유니버설 <프랑켄슈타인> 시리즈의 배우들인 엘사 란체스터와 콜린 클라이브의 이름을 따온 것이다. 영화에서 벌어지는 일들 대부분은 <프랑켄슈타인>에서도 일어났다. 다양한 유전자들을 조각이불 만들듯 꿰매어 만든 드렌과 다양한 시체 조각들을 하나로 합쳐 만든 프랑켄슈타인의 비교는 너무 손쉬워 민망할 지경이다. 드렌과 엘사의 관계. 엘사의 애인인 클라이브와 드렌의 관계 역시 <프랑켄슈타인>의 부자 관계의 성전환한 거울상에 가깝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그건 이 영화가 다루는 이야기와 주제가 현실 세계의 과학보다는 장르 관습에 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빈센조 나탈리가 유전공학에 대해 무슨 의견을 가지고 있건 <스플라이스>는 현실 과학과 그 위험성에 대해 생각처럼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스플라이스>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은 환상의 슈퍼 과학을 통해 과장된 가공의 상황에서 일어날 수 있을지 모르는 인간의 행동에 대한 이야기로, 여기서 ‘과학’은 ‘마법’으로 전환되어도 아무런 무리가 없다. 중요한 건 이 시치미를 뚝 뗀 비현실적인 도구가, 소재가 되는 인간 드라마에 어떤 영향을 끼치느냐이다. 그것은 꼭 현실적이지 않아도 좋다. 그 연역과정이 얼마나 타당하고 그것이 얼마나 우리 인간을 잘 설명하고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우리가 가장 집중해야 할 것은 과학이 아니라 멜로드라마다. 그것도 가족드라마. 빈센조 나탈리는 <스플라이스>를 통해 우리가 올해 텔레비전에서 보았고 앞으로도 보게 될 막장 연속극들을 모두 모아서 쌓아올려도 그 발뒤꿈치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막 나가는 막장 드라마를 만들어냈다. 현실세계만을 다루는 연속극 작가들은 결코 빈센조 나탈리의 영역에 도달할 수 없다. 그들의 제한된 상상력과 현실이 길을 막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막장성은 기존 SF의 우주전쟁이나 시간여행과 마찬가지로 철저하게 SF적 상상력의 산물이다. SF의 도구를 타고 영화는 우리가 미처 가보지 못했고 갈 수도 없는 곳으로 간다. 단지 그 종착역이 다른 행성이나 다른 시간대가 아닐 뿐이다. <스플라이스>가 다른 행성 대신 우리를 데리고 간 곳은 가족 관계, 그것도 모녀 관계가 도달할 수 있는 경계선의 끝이다. 이 영화에서 엘사와 드렌의 관계를 보자. 빈센조 나탈리는 시작부터 우리가 ‘어머니와 딸’에 대해 품고 있는 고정관념 저 너머의 지점에서 이야기의 터전을 잡는다. 엘사는 자신의 유전자 절반을 제공해준다는 기본적인 행위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것을 반대로 한다. 잉태하는 대신 잉태시키고, 보호하는 대신 이용하고 학대한다. 권력의 문제가 아니라 이해의 문제 영화의 모든 이야기들은 이런 식으로 부모 관계에 종속되어 있다. 심지어 영화가 깃발처럼 흔드는 ‘유전자 공학으로 탄생한 신종 생물에 대한 창조자의 의무와 책임’이라는 주제를 볼까? 얼핏 보기에 이것은 전적으로 과학과 관련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스플라이스>에서는 훨씬 친숙한 주제로 치환된다. ‘자신이 만든 생명체에 대한 책임과 의무’가 우리에게 가장 직접적으로 와닿는 건 언제인가? 바로 부모 관계와 임신이 개입되었을 때다. 왜 사람들은 우리의 몸이 모두 유전자 공장이며 실험실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인가. 엘사의 이런 위치는 자연스럽게 ‘나쁜 엄마’의 역할로 넘어간다. 하지만 엘사의 역할이 부정적인 여성적 스테레오 타입을 일부러 과장한 것이라는 의심은 잠시 접어두기로 하자. 타당하지 않기 때문에 아니라(오히려 반대다) 기능성을 따진다면 더 큰 의미가 있는 주제가 이미 있으며, 엘사의 역할 역시 거기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스플라이스>가 이야기하려는 것은 ‘창조주’로서 부모의 권리이다. 이는 서구의 유대/기독교 전통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미신으로,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의 주제이기도 했고, 그 이후 수많은 SF에서 복제된 주제이기도 하다. ‘나쁜 엄마’인 ‘미친 과학자’ 엘사의 위치가 보기만큼 단순하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대부분의 SF영화에서 엘사의 위치는 아버지와 남성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이 두 역할은 겹치지 않는다. 이 역할을 여성에게 주는 것은 단순한 역할 전환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이미 과학이 부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통처럼 계승되어오던 ‘창조주 아버지’에 대한 신화를 무심히 깨버린 것이기 때문이다. 나탈리는 당연하다는 것처럼 그 역할을 여성인 엘사에게 주는데, 그 부정할 수 없는 생물학적 정확함은 오히려 신선해 보인다. 부모의 위치가 바뀌면서 드라마도 변화한다. 아버지-아들의 관계를 다룬 일반적인 <프랑켄슈타인> 신화는 대부분 아버지의 권위에 대항하는 아들의 이야기로 수렴된다. 누가 권력을 잡아 신의 위치를 지키거나 차지할 수 있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하지만 <스플라이스>에서 권력은 부차적인 문제이다. 이 영화에서 좀더 관심을 가지는 것은 ‘이해’의 영역이다. 이 역시 기본 골격은 익숙하다. 영화에서 드렌이 펼치는 모든 이야기는 “왜 엄마는 날 이해 못해!’라는 10대의 절규에 다름없기 때문이다. 단지 영화는 익숙한 순환의 미신을 깬다. 엘사는 끝끝내 드렌을 이해하지 못하고 온전한 딸로 받아들이지도 못한다. 그것은 ‘나쁜 엄마’인 엘사의 한계 때문이기도 하지만 ‘딸’인 드렌의 한계 때문이기도 하다. 아무리 약간의 유전자를 공유한다고 해도 둘은 생물학적으로 어쩔 수 없는 타자이고 서로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엘사가 드렌을 자신의 영향력 아래 가두려 해도 드렌은 늘 새로운 탈출구를 찾는다. 피와 살이 튀는 가족 멜로 드렌의 이야기는 이 이해불능 사태를 극도로 과장한 잔인한 코미디 시리즈다. 엘사와 클라이브는 드렌이 태어나면서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계속 이 정체불명의 생명체이며 딸인 존재를 익숙한 틀에 넣고 해석했다가 그것을 깨트리고 다음 틀에 넣는 과정을 반복한다. 하지만 이런 과정은 늘 불완전한 해답만을 제공해줄 뿐이며 드렌은 늘 이해 불능의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이것은 부모에게 최악의 악몽이다. 부모들은 자식들이 그들의 연속이길 바라고 성장 과정의 불이해는 순환의 과정에 불과할 것이라 생각한다. 나탈리는 드렌과 엘사의 관계를 그리면서 그 미신을 하나씩 발로 밟아 으깬다. 영화 후반에 이르면 드렌에게 가해지는 끔찍한 학대들에 진저리를 치면서도 엘사의 폭력적인 대응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엘사에게는 드렌과 제대로 된 관계를 맺는 방법이 없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한다. 아마 그런 것은 처음부터 없는지도 모른다. 아까 나는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표면에 드러나 있는 과학이 아니라 그를 매개로 발생하는 멜로드라마라고 했다. 하지만 다시 보면 <스플라이스>는 처음부터 끝까지 과학에 대한 영화다. 단지 그것은 유전공학과 같은 구체적인 대상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과학의 추구와 그 결과물에 대한 소유욕과 통제의 환상에 대한 은유이다. 나탈리가 <스플라이스>를 통해 거둔 최대의 업적은 이 익숙한 추구의 과정을 피와 살이 튀는 가족 멜로드라마의 언어를 통해 재구성하는 방법을 찾아냈다는 것이다. 이 멜로드라마는 한없이 막장이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정확하다. 늘 경계선 밖을 탐구하는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막장 아닌 어떤 것을 기대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그리고 그것이 당연한 사실이라면 우린 처음부터 이 막장 드라마의 가능성에 대비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소녀들만 좋아하라는 법은 없다네

<트와일라잇>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 <이클립스>가 개봉한다. <씨네21>은 <트와일라잇>과 <뉴문> 개봉 당시 이 영화에 관한 뜨거운 팬덤 현상에 관해 입체적으로 기사화한 바 있다. 세 번째 시리즈 <이클립스>는 좀더 친밀하고 유머러스해졌다. 그러나 기본적인 감성은 변하지 않았다. 이쯤 되니 <트와일라잇> 시리즈에 관한 소녀들의 이례적인 열광에 관해 단상을 붙일 때가 됐다고 판단했다. <트와일라잇> 시리즈의 인기와 매력을 어떻게 볼까. 가장 거리가 멀어 보이는 아저씨의 눈으로 보면 신선하지 않을까? <트와일라잇> 시리즈와 연관될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는 게 곧 밝혀졌다. “이 시리즈는 소녀 취향이다”라고 누군가 단언하자 다들 동의했다. 그러자 누군가 이어 말했다. “그것에 관해서는 많이 써왔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이 영화와 그다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필자가 써서 의외성을 주면 어떻겠나. 가령 아저씨가 보는 길티 플레저로서의 <트와일라잇> 시리즈는 어떠한가.” 화살의 방향은 이제 엉뚱하게 바뀌었다. 소녀들과 가장 어울려 보이지 않을 사람은 누구인가, 아저씨 중의 아저씨는 누구인가, 그 오명이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결국 피하지 못하고 억울하게(!) 당첨됐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소녀들에게 미안하다. 키다리 아저씨는커녕 키 작은 아저씨가 <트와일라잇> 시리즈에 관한 어설픈 단상을 풀어놓게 된 사연은 이렇게나 순식간이었다. 그러니까 회의시간에는 딴생각을 하면 안된다. 다행히도 <트와일라잇>과 <뉴문>이 싫지 않았다. 환호까진 아니었어도 관심 가는 부분들이 없지 않았다. 텔레비전으로 뒤늦게 <트와일라잇>을 보았을 때 어떤 매력을 느꼈고 “애들이 좋아할 만한 이유가 있네” 하고 뭔가 아는 척 혼잣말을 했던 기억도 있다. <뉴문>의 오프닝 시퀀스에서 저 멀리 서 있는 노인을 발견하고 자신의 할머니인 줄 알고 좋아하던 여주인공 벨라가 가까이 다가온 노인을 보고 미래의 나이든 자기 자신의 모습임을 알고 소스라치게 놀라는 장면은 인상 깊이 남아 있다. 1편 <트와일라잇>이 장르적 균형감각과 하이틴물의 자극에 민감했다면 2편 격인 <뉴문>은 원작이 지닌 분위기를 좀더 숭배함으로써 오히려 실패작으로 취급받은 것 같다. 솔직히 영화 <트와일라잇> 시리즈의 재미를 말할 때는 만듦새의 편차를 논하기보다 원작에서 시작된 소녀들의 환호성이 어떻게 영화에서도 이어지는지 그 속내를 궁금해하는 편이 더 흥미롭겠다는 생각이다. 무엇이 소녀들의 환호성을 끌어내는가. 끝내 알지 못한다 해도 자리가 이렇게 되었으니 한마디 거들고 싶은 게 이 아저씨의 솔직한 심정이다. 뒤늦게 TV로 본 <트와일라잇>의 매력 먼저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관해. 출중한 외모의 남자 배우 로버트 패틴슨 때문인가. 일단 그런 것 같다. 개인적으로만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크리스토퍼 워컨의 젊은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이 청년의 외모는 창백하고 차갑지만 이성적인데다 연민까지 끌어내는 면모가 있다. <트와일라잇> 시리즈의 뱀파이어 주인공에 제격이다. 게다가 피를 빨아먹는 뱀파이어의 행위는 관능적 성행위로 은유되어온 것이 사실인데 이 친구가 낮은 목소리로 대사를 던질 때마다 어딘지 모르게 거절하기 힘든 구애의 행위처럼 느끼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원작자 스테파니 메이어는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조차 읽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건 아무래도 그녀에게는 상관없는 일이었던 것 같다. <트와일라잇> 시리즈는 알려진 것처럼 거의 모든 화제가 로맨스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건 벨라의 사랑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벨라에게 투영된 소녀들 자신의 사랑에 관한 어떤 욕망이 가장 중요할 것이다. 어떤 관객은 여기에 관해 온라인상에 귀여니의 소설식으로 평해 놓았다. “다들 나만 좋아해. 그리고 내 속은 아무도 몰라.” 그 말은 적절하다. 혹은 툭하면 얼굴이 상기되고 거르지 않은 짜증을 내고 다니던 <미쓰 홍당무>의 여주인공 양미숙이라면 벨라를 보고 다른 식으로 심하게 말할 것이다. “네가 무슨 캔디냐. 다 너만 좋아하게.” 그것은 사실이다. 모두가 벨라를 좋아한다. 그것이 소녀들이 벨라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 반대의 상황이 <트와일라잇> 시리즈에 존재한다는 것이 더 흥미롭다. 모두가 벨라 때문에 곤경을 겪는다. 벨라가 뱀파이어 에드워드를 사랑하게 되고, 그들이 그것을 숙명으로 여기자, <뉴문>부터는 늑대의 혈족인 제이콥과의 삼각관계가 강력하게 형성되고 <이클립스>에 이르면 그 삼각관계는 정점에 이르게 된다. 꾸준히 이어지는 삼각의 릴레이. 그런데 삼각관계와 숙명적 사랑에 관해 말할 때 벨라가 사랑하지만 정작 사랑하는지조차 모르는 그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이 이제는 더 중요해 보인다. 너무 뻔해 보여서인지는 모르겠으나 벨라를 사랑의 열병으로 몰아넣은 대상인 에드워드와 제이콥에 관해 말할 때 잘 묘사되지 않는 인상 하나가 있다. <뉴문>에서 에드워드의 가족이 벨라의 깜짝 생일파티를 해주기 위해 모여 서 있을 때 혹은 <이클립스>에서 외부인을 기다리며 에드워드 가족들이 무리지어 서 있을 때, 그들의 자태와 패션 등이 미국의 텔레비전 드라마의 주인공들을 연상시킨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됐다. 나는 그들이 서 있을 때 어딘지 모르게 뉴욕 최상류층의 이야기를 다루는 <가십걸>의 포스터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그에 비한다면 제이콥과 그의 가족은 인디언의 혈족이며 오두막에 가까운 허름한 집에 살고 있으며 웃통은 벗고 다니고 성격은 거칠고 투박하다. 세련되고 부유한 상류층 화이트칼라와 거칠고 투박한 블루칼라라는 대립구도가 <트와일라잇> 시리즈 안에 있다는 것이 때묻은 아저씨의 눈에는 중요해 보인다. 해선 안 되는 것에 대한 소녀들의 환상 오해가 없으면 좋겠다. 이건 벨라의 로맨스가 은연중 상류층 출세기로 점철되어 있다는 뜻은 아니다. 그건 지금 이 말의 핵심에서 벗어난다. 그보다는 <트와일라잇> 시리즈에서 중요한, 벨라와 에드워드와 제이콥의 삼각관계가 그녀를 사랑받고 사랑하게 만드는 모종의 대립구도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가령 하이틴 대 어른, 사람 대 뱀파이어, 늑대 대 뱀파이어, 나쁜 뱀파이어 대 착한 뱀파이어, 높은 지위의 뱀파이어 대 낮은 지위의 뱀파이어라는 식으로 겹겹이 대립 국면이 형성된다. 그리고 그 안에서 문제의 원인이 된 벨라는 지속적으로 무언가를 위반하고 뛰어넘어야 한다. <트와일라잇> 시리즈에는 일관되게 ‘해도 되는 것과 해서는 안되는 것’이 대치하고 있으며 그것이 교차할 때 긴장감이 증폭한다. 특히나 벨라는 마치 그 규약들을 무너뜨리고 위험에 빠뜨리는,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새로 세우는, 일촉즉발의 사태 그 자체다. 그것이 벨라가 사랑하고 사랑받는 방식이다. <트와일라잇> 시리즈에서 벨라의 사랑을 그냥 사랑이 아니라 더 낭만적이며 더 숙명적인 것으로 느끼게 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벨라의 선택 때문이다.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할 수밖에 없다고 믿는 것을 완전한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벨라 때문이다. 벨라는 에드워드와 영원히 함께하기 위해 제이콥의 만류에도, 심지어 에드워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일관되게 뱀파이어가 되기를 희망한다. 하이틴 문화에 대한 관습적 이해도의 차이에 따라 한국 소녀들과 미국 소녀들의 환호성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벨라의 사랑의 정체는 ‘무엇을 하고 싶다’가 아니라 ‘무엇을 해서는 안된다. 그런데 그걸 하고 싶다’에 가까울 것이다. 그것이 <트와일라잇>의 로맨스를 영원하게 한다. 벨라가 진실로 사랑하는 것이 에드워드인지는 모르겠으나, 벨라의 이야기를 사랑하는 독자와 관객의 환상은 벨라와 에드워드를 둘러싼 그 장벽과 금지가 아닐는지. 그러니 벨라가 숙명이라고 말하는 것에 관해, 이 시리즈를 사랑하는 소녀들이 그렇게 믿는 것에 관해, 정작 사랑의 마음을 불러온 건 강력한 금지와 장벽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말이 될 것인가. <트와일라잇>의 지고지순한 사랑의 판타지는 그것을 숙명에 대한 실현으로 뒤집어 읽도록 만들어져 있는 것 같다. 고전적 사랑에의 낭만성으로 대표되는 작품들. 로미오와 줄리엣 사이에 놓인 기나긴 밤 그러나 곧 오게 될 헤어짐의 새벽. 엘리자베스 베넷과 미스터 다아시 사이에 놓인 오해의 소용돌이(<오만과 편견>). 히스클리프와 캐시의 사이에 놓인 증오에 가까운 사랑(<폭풍의 언덕>). 당신이 남자에게 더 매력적으로 보이기 위해서는 그와 당신 사이에 장애를 설치해야만 한다는 대중연애지침서의 가르침에 이르기까지 모두 해당하는 그것이 미국 소도시의 평범한 10대 소녀 벨라와 109살 먹은 뱀파이어 에드워드의 사랑으로 옮겨왔다. 아저씨도 <트와일라잇> 시리즈가 좋다 <트와일라잇>의 원작자 스테파니 메이어는 소녀와 뱀파이어가 사랑에 빠지는 ‘꿈’을 꾼 다음 이 작품을 쓰게 됐다고 한다. 그리고 19세기에 꿈을 포함하여 사람의 의식과 무의식을 분석하기를 즐겨했던 그 유명한 아저씨는 참고할 만한 말을 이미 해두었던 것 같다. “리비도를 최고조로 부풀리기 위해서는 어떤 장애물이 필요하다. 그리고 역사의 모든 시기에서, 만족을 가로막는 자연적 장벽이 충분치 않았던 어떤 곳에서건 인류는 사랑을 즐기기 위해서 인습적 장벽을 세웠다.” 어쨌거나 원작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무의식의 세계에서 영감을 받아 작품을 써내려간 식이니 우리는 그 아저씨의 말을 참고할 만하다. 물론 여주인공 벨라와 <트와일라잇>의 소녀들은 다르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영화 <뉴문>에서 벨라는 <로미오와 줄리엣>을 침대에 두고 잔다. 영화에는 제외되었지만 원작 <이클립스>에서 벨라는 <폭풍의 언덕>의 한 구절을 마치 경전처럼 읽는다. “만약 모든 것이 사라져도 그가 남는다면 나는 여전히 살아갈 거야. 하지만 다른 모든 게 남고 그만이 소멸한다면 이 우주는 아주 낯설어지겠지.” 벨라의 그 말을 믿고 싶다. 그 말은 아름답다. <이클립스>를 극장에서 본 날 벨라는 에드워드의 프러포즈를 마침내 받아들였고 극장을 나오는 사람들의 표정은 상기되어 있었다. 하지만 어쩌다 <트와일라잇> 시리즈에 관심을 갖게 된, 그러니까 미스터 다아시가 되고 싶었으나 남산 밑의 아저씨 중의 아저씨로 뽑힌 키 작은 아저씨는 잠깐 딴생각을 해보았다. 그나저나 이유는 모르겠는데 생각해보니 아저씨도 <트와일라잇> 시리즈가 좋다.

“엔딩에 대한 반응은 관객과 나의 싸움”

강우석 감독은 신작을 만들면 최종편집 전에 늘 영화계 지인들을 편집실에 불러 미니 시사회를 연다. 모니터를 한다는 명분이지만 그에게 직언할 만한 영화인들은 많지 않다. 강우석 자신이 먼저 자기 작품에 자긍을 표할 때 그에게 비판적인 말을 하기는 힘들 것이다. <이끼> 역시 그런 과정을 거쳤다. 잡지계를 떠나 대학교수가 된 뒤에 이 비밀 시사회의 초대명단에 오른 나도 <이끼>를 먼저 보게 됐다. 가기 전에 마음이 불편했다. 혹 직언을 해야 할 상황이 오면 발언 수위 조절에 신경이 쓰이기 때문이다. <한반도> 촬영 당시 현장에 갔다가 시나리오를 읽고 비판했는데 그에게 원망을 들었다. <한반도> 개봉 직후에 그를 만나 또다시 비판하자 그의 반응에 날이 서 있는 것을 느꼈다. <한반도>에 대한 내 비판이 균형잡힌 것이었음을 그가 인정하기까지는 개봉 몇주가 지나야 했다. <이끼>의 가편집본을 본 몇달 전, 나는 이 영화가 강우석의 이때까지의 작품 중 최고작이라고 말했다. 그는 반신반의했다. “뭔가? 또 뒤통수치려고?” “영화 속 모든 인물의 캐릭터가 살아 있습니다.” 그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근데 흥행은 될 것 같아?” “잘되겠죠. 확언할 순 없지만.” 그로부터 몇달이 지난 뒤 공식시사회가 있던 날 영화가 끝나고 나오는 길에 그와 마주쳤다. “어때? 문제없지?” “문제없습니다. 후반부에 확 치고 올라가는데요.” 그는 승자의 웃음을 짓고 사라졌다. 그는 한때 그의 영화를 냉소했던 내게 무언의 승리감을 표하고 있었다. <이끼>는 <공공의 적>과 함께 강우석 영화의 이정표가 될 만한 작품이다. <투캅스>로 부동의 흥행감독이 되기 전부터 강우석 영화는 늘 경쾌한 풍자의 세계였다. 얕게 찌르고 관망하는 코미디를 통해 그는 대중과 접촉했다. 이어지는 <투캅스> 연작과 <마누라 죽이기> <생과부 위자료 청구 소송> 등에서 그는 좀더 깊게 찌르는 대신 풍자의 밑천을 소재에 의존하며 퇴행했다. <공공의 적>은 강우석의 코미디 감각이 일종의 블랙유머적 아이러니로 확장하면서 그의 작품세계의 지평을 바꿔놓았다. 풍자의 무게와 마찬가지로 극적으로 강렬한 파토스가 인물에 스며들어 직선적인 그의 영화에 낯선 여백과 틈과 아이러니를 생성시켰다. 이는 <실미도>의 감상주의에 부분적으로 스며 있던 것이기도 하지만 <이끼>를 통해 더 큰 진폭으로 넓어졌다. 원작 만화의 양식화된 누아르 감성 대신 그는 각 캐릭터에 고르게 에너지를 분산하고 권력시스템 내에서의 리더와 집단의 관계에 대해 복합적인 성찰을 새겨놓았다. 이는 강우석의 직설화법에서 지금까지 가장 멀리 나아간 성취일 것이다. 김영진/ 영화평론가 - 윤태호의 만화 <이끼>를 강우석이 영화 <이끼>로 만드는 그림은 뜻밖이었다. = 사실 <강철중: 공공의 적1-1>을 찍고 나서 고민이 있었다. 이 시리즈를 당장 또 이어가는 건 식상했다. 감독으로선 지루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데 제작자로선 <김씨표류기> <주유소 습격사건2> <용서는 없다> <백야행>을 스타트시켰다. 이 영화 4편에 회사의 운명을 맡길 상황인데, 그 영화들이 안됐을 때 대비할 만한 게 뭐가 있을지 갑자기 불안했다. 시네마서비스 건물을 팔고 어려울 때였다. 막연히 또 다른 흥행영화를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하던 참에 <이끼> 기획이 들어온 거다. 렛츠필림의 김순호 대표가 제안한 아이템인데 그가 예전에 내 제작부를 했던 인연이라 읽어보고 거절하려 했다. 그런데 읽다보니 순간적으로 확 끌렸다. 김순호 대표를 불러 어떻게 만들 거냐고 물었더니, 마을 하나를 잘 헌팅해서 15억원 정도 예산으로 찍겠다는 거다. 감독은 누구냐고 했더니, 몇몇 감독을 후보에 올려놓고 있었다. 한동안 그렇게 일이 진행됐는데 내가 후보에 오른 감독들을 다 거절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 내가 연출하고 싶어서 이런 게 아닐까 싶더라. 김순호한테 내가 연출하면 어떠냐고 했더니, 자기는 발을 빼고 나한테 다 맡기겠다고 했다. 오케이, 그럼 기획비 지불하고 이익금 일부는 나랑 나누자고 했다. 그렇게 시작했는데 후회하는 데 얼마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웃음) - 원작만화가 연재 중일 때 결정한 건가. = 3분의 1쯤 전개됐을 때다. 왜 그렇게 성급했나 싶더라고. 나중에 원작이 잘 못 나오면 어떻게 하냐는 불안감이 있었다. 그래도 초반에 이 정도의 드라마로 시작했다면 좋은 엔딩이 있을 것 같다고 믿었다. 원작이 좋은 결말을 못 찾으면 내가 찾으려고 했다. 정지우 감독이 각본을 쓴 초고는 원작이 엔딩을 내기 전에 나왔다. 그 뒤에도 죽 고쳤고. 지금 완성된 버전에서 볼 수 있는 엔딩은 촬영 들어간 뒤에도 끊임없이 고민한 결과로 나온 거다. - 원작의 드라마를 영화로 옮기면서 가장 힘든 부분은 뭐였나. = 그림을 보면 말이 되지만, 영화에서는 안되는 것들이 있지 않나. 영지란 여자 캐릭터만 해도 원작에서는 관능적이고 퇴폐적인 면이 있다. 특히 창고에서 4명의 남자에게 둘러싸인, 성교를 암시하는 장면을 그대로 가져오면 영화에선 불편한 이미지가 될 것 같았다. 또, 만화에서는 현재에서 과거로 바로 넘어가는 게 큰 문제가 없지만, 영화는 아무 때나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 플래시백이 드라마 호흡을 짜는 데는 상당히 거추장스러우니까. 그런 구성을 다시 짜는 게 어려웠다. - 원작의 분위기는 상당히 누아르적이다. 그 스타일을 버리는 게 이 영화에 좋았던 것 같다. 좀더 캐릭터 중심으로 갔고 그게 매력이 있었던 것 같다. = 누아르로 만들려 했다면 못했을 거다. 난 그렇게 찍을 방법이 없다. 이 영화가 처음부터 누아르로 갔다면 시각적으로 상당히 피곤했을 거다. 감정적으로도 보는 내내 답답했을 테고. 영화 <이끼>는 원작에 비해 조금 더 큰 그림을 그린다. 이상적인 세계를 건설하려고 하는 신의 대리자를 자임하는 자와 속세의 소권력자를 자임하는 자의 대결은 원작과 같다. 그렇지만 이들을 둘러싼 주변 인물들의 비중은 원작보다 훨씬 커져 있다. 영화는 그들의 반응을 원심적으로 그려내면서 권력자들의 대결구도에 그치지 않는 결론을 예비해둔다. 권력은 필연적으로 악한 것이라는 속설 외에 권력자들의 대립과 소멸 이후에 누군가에 의해 권력은 계속 추구되는 삶의 꼴이 그려지며 좋은 권력과 나쁜 권력이 아니라 권력으로 뭘 소용될 수 있게 하는가라는 질문이 남는다. 아니, 이 질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걸 개별적인 인간들이 어떻게 감당할 수 있는가, 라는 의문이 더 큰 잔영으로 남는다. 영화 속 모든 인물이 보여주는 선악의 밀도는 각자 차이가 있지만 그들에 대한 인간적인 공감이 더해지면서 똬리를 튼 뱀처럼 사적인 악과 공적인 선, 또는 그 역의 문제가 인간의 개별성 차원에서 복합적인 차원으로 묘사된다. - 영화에 담긴 권력에 대한 관점이 흥미로웠다. 천용덕 이장이 자신만의 유토피아를 꾸리려고 했던 류목형에게 “넌 신이 되려고 했냐? 난 인간이 되려고 했다”라고 말한다. 이상과 현실 차이에서 오는 결핍이나 좌절감을 상기시킨다는 점에서 정치적인 은유로 볼 수도 있겠더라. = 사람 사는 게 그런 것 아닌가. 류목형이란 영화 속 인간은, 베트남전의 후유증이라고 하지만, 결국 신처럼 뭔가를 해보려 했던 거다. 그런데 결국 그가 만들려는 파라다이스는 엉뚱한 인간이 만든다. 이런 부분을 정치적으로 대입해도 크게 흐트러지지 않을 것이다. 관객이 영화를 복기할 때 어떤 결론이든 많을수록 좋은 것 같다. 하지만 굳이 정치적으로 해석되기보다는 긴장감있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봐주면 좋겠다. - 강우석 감독의 영화는 2000년대 이후로 변했다. <공공의 적> 1편에서 놀란 부분은 이전에 없던 강렬한 파토스가 들어와 있다는 거였다. <실미도>도 신파로 변형된 부분이 있지만 그런 파토스가 있었다. 그리고 <한반도>에는 사라졌고, <이끼>에서 다시 돌아왔다. 외부자의 시선으로 볼 때는 놀라운 게 있다. 한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비약하는 지점이 있다는 것 말이다. <이끼>는 그 농도가 더 센 것 같다. 인물 각자의 존재 이유를 다 보여주는데, 그럼에도 파멸의 스토리다. 그런데 또 뒤에서 큰 그림을 보면 권력승계의 드라마가 이어지는 엔딩이다. = 사실 나는 <공공의 적2>도 사람들이 재미있게 받아들일 줄 알았다. 나에게 그 영화는 검사라면 이래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나중에 <강철중: 공공의 적1-1>을 찍었을 때 지인들이 근데 2편은 왜 그랬느냐고 하더라. 나는 적어도 이 정도는 되어야 사회가 굴러간다고 조금 직접적으로 이야기한 건데 말이다. <한반도>도 <실미도>의 연장선상에서 보면 못 만든 게 아니다. 하지만 사람을 저렇게 그리면 안된다는 반발들이 있었던 거지. 그래서 <이끼>에서는 좀더 내 속에 있는 진짜 이야기를 하려 했다. 내가 어떻게 영화를 찍고 싶은지, 캐릭터를 어떻게 움직이고 반전을 어떻게 줄지 여기서 한번 다 녹여보려 했다. 믿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주변 사람들의 의견을 들었을 때 헛발질은 아닌 것 같다. - <한반도>에 대한 이야기를 좀더 해보자. 선악이 분명하고 히어로가 있고 판타지가 있다. 하지만 한국의 대중영화에선 통하지 않는 직설적인 판타지다. = 내가 제작한 <신기전> 때 그런 걸 느꼈다. 이 영화를 두고도 민족주의다 뭐다 하는데, 정말 무섭더라. 우리가 발명한 신기전이란 미사일에 대한 근거와 고증이 있는데도 말이다. 전투장면에서 적들을 너무 쉽게 물리쳐서 그럴까. 갑자기 20대들한테 민족주의 영화로 몰리더라. 그러면 TV에서 <주몽>을 보고 난리친 건 뭔가? 아무튼 한때는 <한반도> 때 욕했던 사람들을 미워했는데, 그 이후로 미워하지 않았다. (웃음) - <이끼>를 연출한다고 했을 때, 네티즌의 반발이 있었던 것도 전작의 그런 모습 때문이었을 것 같다. = 왜 하필 강우석이냐, 감독 바꾸라고 했다. 내가 제작자인데, 내가 나를 왜 바꾸나. (웃음) 박찬욱이나 봉준호 같은 특정 감독을 거론하기도 했다. <이끼>의 장르적 특성상, 이 엄숙하고 진지한 이야기를 왜 당신 같은 감독이 어쭙잖은 유머로 만들려고 하냐는 의견들일 거다. 사실 내가 그런 댓글을 잘 안 보는데, 이번에는 안 본 댓글이 없다. 도대체 사람들이 원작의 어떤 부분에 열광하는지 궁금했다. 그들의 기대치를 충족시키려는 강박관념 때문에 촬영 중반 넘어갈 때는 우울증까지 생겼다. 방에만 들어가면 고민인 거지. 내일 찍는 게 그리 대단한 장면도 아닌데, 다시 시나리오 보고, 만화도 봤다. 내가 바보가 되는 것 같더라니까. 결국 그때마다 술 마시다가 취기로 잠들었다. 그러다 아침에 눈뜨면 모르겠다, 일단 찍어보자는 심정으로 나가고. 그런데 현장에서 찍다보면 또 오후에는 기분이 좋아진다. 뭔가 잘 찍은 기분이 있어. 말하자면 변태 비슷한 거지. (일동 웃음) <이끼>에서 가장 잘된 것은 배우들의 연기다. 등장인물들 모두 한 장면 이상씩의 명장면들이 있다. 천용덕 이장 역의 정재영은 느물거리는 면과 사악한 면의 경계 사이에서 인간적인 욕망의 구체적인 덩어리를 보여준다. 이렇게 선이 굵은 캐릭터를 연기하는 쉬운 방책인, 이른바 열연한다는 것의 방증으로서 정재영은 일상적이며 심지어 근친관계를 느끼게 하는 악의 화신을 보여주었다. 박해일은 그런 정재영을 상대해 눈을 똑바로 뜨고 꼿꼿하게 걷는 것의 표면적인 연기의 힘이 무엇인지 알게 해준다. 원작에 비해 가장 진폭이 큰 것은 이장의 충복인 김덕천 역의 유해진의 연기인데 권력에 의탁한 자 내면의 두려움과 피로를 유머로 위장했다가 막판에 폭발시키는 굉장한 에너지를 보여준다. 박민욱 검사 역의 유준상은 거침없이 내지르는 연기의 간결함을 통해 꾸밈없는 듯 보이는 외형이 인물의 내면에 어떻게 가닿는지 증명하고 있다. 김상호와 김준배는 존재감을 축으로 한 타입 캐스팅의 위력을 드러낸다. 또, 영화가 끝나고 나면 유선이 연기하는 영지 역이 가장 뇌리에 남는다. 드라마의 감정선에 충실한 연출자, 쉽게 말해 전형적인 방식의 연출자인 강우석이 이들 배우에게서 각자의 인장을 남기게 한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강우석은 대화장면에서 텔레비전 스타일의 나눠찍기 연출을 마다지 않는 감독이지만, 수식이 별로 없는데도 상투적이지 않은 것은 클로즈업이나 기타 고정 화면으로 잡힌 앵글 속에서 배우들이 각자의 존재감으로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클라이맥스 장면을 비롯해 이 영화는 가장 전형적인 방식이 정통의 방식이 될 수 있다는 역설을 리듬과 템포로 보여주는 증표다. - 인물의 성격을 묘사하는 태도가 원작과 다르다. 원작은 선악구도가 비교적 명확한데, 영화는 그렇지 않다. 인물 각자의 존재구도가 다 있다. 그게 매력적이기도 하고. 정재영이 연기하는 마을 이장, 절대적 권력자인 천용덕 같은 인물만 봐도 냉혹한 인간이지만 과자와 콜라를 먹으며 컴퓨터로 고스톱을 치는 일상이 자연스럽게 묘사된다. 약간씩 인물들에게 인간적인 피와 살을 덧붙인 건 강우석 감독의 영화세계에서도 흥미로운 변화로 보인다. = <이끼>가 나에게는 역부족이라고 생각하면서 과거의 나를 거꾸로 추적해봤다. 영화계와 대중은 왜 <공공의 적>에 그렇게 호의적이었는가. 관객이 아주 터진 건 아니지만, 여전히 내 영화의 맨 앞줄에 그 영화를 세우지 않나. 그럼 <한반도>는 일정하게 흥행이 됐지만 왜 그렇게 비난을 받았는가. 관객의 이중적인 태도 탓은 아니라고 본다. 좀더 객관적으로 사람을 봐라, 이런 반응이 아닐까. 직접적인 화법이 지나치면 관객은 우롱당한 느낌을 받는다는 거다. <이끼>를 연출할 때, 이런 장르가 항상 엄숙해야 할 필요는 없다고 봤다. <공공의 적>의 묘미는 상당히 썩어 있는 악의 축인 인물이 더 큰 악의 화신인 인물과 대결한다는 지점이었다. 결국 사람은 다 얼마간 악한데, 악인이면 끝까지 악인이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이 영화에서도 관객이 이해할 수 있는 악인의 분노를 그리는 한편, 좀더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인간을 담으려 했다. 그게 나름 복잡한 해석에서 나온 건 아니다. 고통스럽게 찍었지만, 전작들에 대한 반성이 <이끼>에 들어 있다고 보면 된다. - 배우들의 연기가 다 좋다. 영지의 캐릭터가 원작하고 가장 다르다. 좀더 밝고 음보다는 양의 기운이 많은 캐릭터다. 원작에서는 완전 음의 캐릭터 아닌가. 그 부분은 시나리오를 처음 쓸 때부터 계획했던 것인가. = 유선이 합류하기 전에 엔딩을 풀었다. 엔딩을 설정하고 앞부분을 다 뒤집었다. 그러면서 영지의 캐릭터도 변했다. 농담 잘하는 여자 같은 캐릭터다. 유선도 처음에는 그런 분위기의 대사를 어색해하더라. 그래서 예정된 엔딩을 설명해주니까 좋아 죽더라. 영화 속 엔딩의 모티브는 영지가 어린 시절에 겪은 상처였다. 그런 설정 때문에 영지가 단순히 남자들의 관음적 대상이 아니라, 그 자체가 스스로 관찰하는 캐릭터가 될 수 있었던 것 같다. 영지의 엔딩에 대한 반응은 관객과 나의 싸움이기도 하다. - 엔딩이 절묘했다. 대중영화적인 감각을 충족시키면서 동시에 다른 그림을 그려놓는 엔딩이었다. = 일반 관객이 그렇게만 받아주면 흥행할 것 같다. 그런데 평론가가 그렇게 이야기하니 다시 또 불안해지네 이거…. (웃음) - 배우 이야기를 좀더 하자면, 검사 역 유준상의 연기도 신선했다. 원작의 캐릭터는 굉장히 짓눌려 있는데, 영화에서는 스스로 치고 나오는 에너지가 있다. 상당히 많은 성격을 자기 스타일로 끌어들인 것 같더라. = 유준상이 처음에는 불안해했다. 그리 큰 역할이 아니니까. 나는 한컷 찍으면 그 컷이 그대로 나온다고 안심시켰다. 검사가 짓눌려 있는 캐릭터였다면 <이끼>는 현대극이 아니라 사극처럼 보였을 거다. 배경이 시골이고, 인물도 시골 사람이기 때문에 현대와 과거가 공존하지만, 사실상 과거처럼 보이지 않나. 그래서 검사는 유일하게 현대적인 인물이어야 했다. 그의 말과 행동이 현실과 맞닿아 있다는 느낌을 주려 했다. 유준상은 처음에는 연기에 많은 설정을 계산하고 왔는데, 초반에는 나에게 타박을 많이 받았다. 쓸데없는 동작을 하지 말라고 했다. 말도 또박또박하고. 워낙 순발력이 좋아 바로 따라붙더라. - 천용덕 역의 정재영은 발군인데 그와 대적하는 류해국 역의 박해일도 의외였다. 캐릭터상으로 천 이장에게 먹혀버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박해일에게도 무시하지 못할 기운이 나오더라. = 류해국이랑 박해일이 잘 안 맞는다고 나도 모르게 투정을 자주했다. 처음에는 나를 피하더라고. (웃음) 그도 금방 적응했다. 워낙 에너지가 좋아서 눈에서 불을 뿜는다. - 요즘 한국영화의 흥행작들을 보면 밋밋해지는 경향이 있다. <이끼>는 그렇지 않은 대중영화의 방향을 세울 수 있을 것 같다. 흥행에 성공한다면 긍정적인 여파가 있을 것 같은데, 그래도 두려운 부분이 많을 것 같다. = 당연하지. 세상을 50년 정도 산 사람이 사람을 그리는 데 그렇게 실수하겠는가 싶다가도, 영화 속 인물들이 이 시대에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맞을까 싶기도 하다. 그래도 원작의 팬들은 그 칙칙하고 음습한 마을에 열광했다. 그 드라마를 이해한다면 영화도 충분히 이해받을 거라고 본다.

영화의 21세기적 환생체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신세기에 출현한 가장 비범한 감독은 누구인가? 그 질문에 타이의 영화감독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이름은 수없이 불렸고 늘 상위권에 있었다. <열대병>과 <징후의 세기>는 21세기 최고작을 뽑는 어떤 자리에서도 거의 빠지지 않고 거론되었다. <씨네21>의 1998년에서 2008년까지의 베스트10 목록에도 있었다. 그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여섯 번째 장편영화 <엉클 분미>가 그의 영화 중 처음으로 국내 개봉한다. 올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이다. 과연 <엉클 분미>는 어떤 영화일까. 그 내용과 감상을 전한다. <씨네21>이 칸에서 그와 나눈 대화(756호), 다시 시네마디지털서울영화제 개막작 감독으로 한국에 왔을 때 그와 나눈 대화(769호) 등과 함께 읽는다면 더 흥미로운 첫 번째 만남의 자리가 될 것 같다.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이라는 낯설고도 신기한 감독은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던 2000년에 그의 첫 장편 <정오의 신비한 물체>와 함께 출현했다. 이 영화에서 극이 시작되지 않고 아직 다큐일 때 생선장수 아주머니의 슬픈 과거사를 듣고 있던 카메라 뒤의 아핏차퐁은 “우리에게 들려줄 다른 이야기는 또 없나요”라고 묻는다. 아주머니가 뭔가 생각난 듯 말하려 할 때 컷. 휠체어에 앉은 소년과 가정교사가 있는 집 안이 보이고 영화는 이제부터 종잡을 수 없이 흐른다. 정말 종잡을 수 없다. 한명의 화자가 이야기를 하면 아핏차퐁이 그걸 영화로 반영하고, 다시 누군가가 이야기를 보태면 또 영화의 내용으로 반영해 수십명의 이야기로 한편의 영화가 완성된다. 그러니 영화는 말 그대로 산으로 가는데 그 과정이 놀랍게도 생기 있다. 서구의 한 평론가는 그걸 초현실적 기법 안에서 해명하려고도 했지만 실은 그건 집단적 서사 구전의 과정을 영화적으로 명석하게 시도한 것에 더 가깝다. 그때 이야기는 누구에 의해 꼬리 무느냐에 따라 태어나고 또 태어나며 평등하게 혹은 상상적 공동체의 이야기로서 울려퍼진다. 다시 태어나는 이야기의 운명 혹은 환생하는 이야기 그것이 <정오의 신비한 물체>가 다루고자 한 것 중 하나였고, 환생이란 아핏차퐁의 지속적인 영화적 관심사이며 여섯 번째 장편 <엉클 분미>에서는 환생하는 생물체, 환생하는 영화로 다시 돌아와 있다. 타이의 한 평론가는 아핏차퐁의 영화를 “환생의 시네마”라고도 불렀다. 유령들(관객)이 유령들(영화)를 본다는 관점 이미지를 다루는 영화감독 중에는 자신의 작품에 달라붙으려는 개념들을 최대한 밀쳐내고자 하는 쪽이 있는가 하면, 스스로 알아서 매우 명석하게 자기 개념들을 도출하고 정렬해내는 쪽도 있다. 아핏차퐁은 철저하게 후자에 속한다. 그가 자기 영화를 설명할 때마다 참고하는 은밀한 자신만의 개념어 사전이라도 하나 갖고 있는 게 아닌가 착각이 들 정도다. 그걸 다 나열할 순 없다. 정글, 질병, 기억, 전생, 시간성, 움직이는 이미지, 연출(directing)이 아니라 고안(conceiving) 등등. 환생은 그중 하나에 속할 뿐이다. 하지만 “<엉클 분미>는 영화와 환생 사이의 특별한 관계를 탐구하는 것이다. 영화는 대안적인 우주와 존재하지 않는 존재들을 창조하는 인간만의 방법이다”, “이 영화는 나의 고향과 내가 자라면서 영향을 받은 영화들에 대한 존경의 표시다”라고 그가 말할 때 이 말이 이상하게 지금까지는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엉클 분미>는 사람의 환생에 관한 것이되 영화의 환생에 관한 것이고 동시에 그 환생을 보는 관객이라는 유령을 의식하고 만든 것이다. 관객이라는 유령이라니. 이 점은 아핏차퐁이 생각하는 영화의 존재론 혹은 영화의 유령론에서 나온 말이다. 아핏차퐁은 자신의 에세이 <어둠 속의 유령들>에서 “관객 유령들”(the audience ghosts)이라고 표현한다. “영화(film)를 보는 동안 주변 사람들이 어떠한지 알아차린다면 당신은 그들의 행동이 마치 앞에 있는 움직이는 이미지를 보기 위해 고개를 든 유령들 같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영화(cinema)는 그 자체로 마치 주술에 걸린 것처럼 앉아 있는 육체가 담긴 관과 같다. 스크린의 움직이는 이미지는 이미 일어난 사건들의 카메라 기록이다; 그것들은 과거를 떠올리게 하고 일제히 엮어냄으로써 영화(film)로 불린다. 이 어둠의 넓은 방 안에서 유령들(관객)이 유령들(영화)을 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아핏차퐁은 환생의 가능성과 유령의 존재가 영화적 재현과정에 매우 유사하고 또한 영화를 보는 우리의 유령적 상태와도 관련이 깊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엉클 분미>의 내용은 이렇다. 신장병으로 죽음이 가까워온 것을 아는 분미 아저씨는 도회지에 사는 처제 젠에게 자신의 농장을 물려주고 싶어 한다. 그들 옆에는 정확한 관계는 알기 어렵지만 충복으로 보이는 통이라는 착한 젊은이가 늘 있다. 그들 셋이 어느 날 저녁 식탁에 앉았을 때 19년 전에 죽은 아내와 원숭이 인간에 홀려 그들과 성교한 다음 자신도 원숭이 인간이 되어 집을 떠나버린 아들 분쏭이 나타난다. 그들은 모두 자연스럽게 과거와 내세에 대해 대화한다. 그러다 영화는 얼마간 지났을 무렵 예고도 없이 우화 속 한 공주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그녀는 아름답지 않은 자신의 얼굴을 한탄하다 물속으로 들어가고 거기서 메기와 성교를 한다. 이야기는 다시 돌아와 분미 아저씨가 동굴로 들어가 죽음을 맞고 그의 장례식이 있는 날 무슨 이유에선지 통은 스님이 되어 있다. 사원에서 잠을 청하던 그는 무섭다며 젠과 그녀의 딸이 머무르는 숙소에 와서 함께 텔레비전을 보다가 야식을 먹으러 가자고 한다. 그들이 일어섰을 때 똑같은 그들의 모습이 그 자리에 있다. 시간은 이제 두개로 흐르며 마무리된다. 야식을 먹으러 간 사람들의 시간과 그 자리에 남은 사람들의 시간. 이것만 듣고 전모를 알기란 좀 어렵긴 하다. <엉클 분미>, 아핏차퐁의 첫 범작 <엉클 분미>는 알려진 것처럼 아핏차퐁의 비디오 설치미술 작업 ‘프리미티프 프로젝트’와 연을 맺고 있는데, 이 프로젝트의 우연한 첫 시작은 <열대병>을 찍을 당시 알게 된 한 스님이 건네준 책이었다. 자신의 전생을 기억하는 한 남자(프라 스리파비야티웻)가 쓴 <전생을 기억하는 남자>. 거기서 아핏차퐁은 자기의 전생을 기억하는 사람들에 대해 알게 됐다. 하지만 이 책은 아핏차퐁에게 영감을 주었던 것이지 원작이 된 것은 아니다. 아핏차퐁은 작업을 준비하는 중에 타이 북동부로 향했고 많은 사람들을 만났으나 마침내 나부아라는 지역에 도착했을 때에야 윤곽을 잡았다. 그는 60년대 이곳에서 정부와 공산당 게릴라 사이에 피비린내 나는 이데올로기 대결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당시 시민과 타이 정부 사이에 있었던 대치 국면도 그의 머릿속을 사로잡았다. 환생하는 것은 어떤 역사적 사건이기도 한 것이다. 아핏차퐁은 여기에 유년 시절 자신을 사로잡았던 코믹북이나 영화의 면모를 함께 넣기를 원했고 그 때문에 영화에는 인간 원숭이나 박색 공주의 이야기가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제작 과정 중의 그런 경험이나 계획이 어떤 방식으로 담겼을까. 영화에서 분미 아저씨는 죽음이 다가오는 걸 느꼈을 때 “내가 옛날에 공산주의자를 너무 많이 죽인 업보”라고 말한다. 그때 그는 지나간 타이의 역사를 은밀하게 불러내고 있다. 여기에 아핏차퐁은 별안간 우화 한 토막을 삽입해 영화의 결을 풍부하게 하려 한다. 갑작스럽게 삽입되는 공주 신은 일종의 환생에 관한 우화인데, 추함에서 벗어나 아름다움을 취하고 싶어 하는 공주의 이야기를 데이 포 나이트(특정 필터를 사용하여 낮에 촬영했으나 밤장면의 효과를 내는 촬영기법)로 촬영한 것은 고전적 B급영화의 촬영술을 모색한 흔적이기도 할 것이다. 마침내 이 영화의 정점이라 할 만한 장면. 동굴로 들어가 죽음을 맞이하는 분미 아저씨의 마지막 장면은 매우 성스럽게 펼쳐진다. 세상을 떠나는 분미 아저씨가 목소리만으로 “난 전생에 이 동굴에서 태어난 적이 있어… 어젯밤 다음 생에 대한 꿈을 꿨어”라며 전생과 다음 생을 말할 때 그의 죽은 아내가 해준 “유령은 장소가 아니라 사람이나 생명체에 머물러요”라는 말도 함께 떠오른다. 분미는 또 다른 무엇으로 다시 태어날 것인데, 그가 죽음을 맞이하는 곳이 다름 아니라 동굴인 건, 그러니까 아핏차퐁이 극장에 비유한 적이 있는 동굴이었던 건, 그가 영화의 장소로 들어가 영화적으로 죽었으니 그가 또 영화적으로 환생할 것이라는 예고일 것이다. <엉클 분미>는 일단 소재나 내용에서 아무나 손댈 수 있을 만한 영화가 아니다. 눈에 잡히지 않는 것들, 미지의 것들, 그것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깊은 명상적 탐구가 몸에 배어 있는 아핏차퐁 정도만이 형상화에 도전할 수 있을 만한 영화다. 하지만 이 영화에 관한 지금까지 알려진 것과 좀 다른 면모도 이제는 함께 말해야 할 것 같다. <엉클 분미>는 여전히 연결이 쉽지 않은 내용이 있지만, 전체적인 감상에서 보자면 전보다 훨씬 수월해졌다. 그러나 문제는 동시에 좀 무뎌진 면도 있다는 점이다. 또는 아핏차퐁이 자신의 경험으로 체득해낸 나부아에서의 역사적 운명성이 이 영화 자체만으로는 잘 전달되지 않는다는 흠도 있다. 그 때문에 <엉클 분미>는 보통의 작품과 비교하자면 현저히 뛰어나겠지만 아핏차퐁의 작품 중에서 볼 때는 그가 첫 번째 양산한 범작이자 첫 번째로 멈추어선 창작의 발걸음인 것 같다. 공력은 오히려 비디오 미술쪽에… 뛰어난 장면은 물론 있다. 사원에서 잠을 자다가 무서워서 못 자겠다고 모녀의 방에 온 젊은이 통. 셋이 야식을 먹으러 가자는 둥 농담을 하다가 갑자기 셋은 텔레비전 화면에 시선이 꽂힌 채 굳은 표정을 짓는다. 거기 타이 시위대의 모습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들은 조용히 일어나 야식을 먹으러 간다. 그때 두개의 시간이 공존하게 된다. 그들이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여전히 같은 인물이 그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일종의 유체이탈과도 같은 분리가 일어나는데, 이 영화의 마지막은 야식 먹는 사람들의 시간과 텔레비전 보는 사람들의 시간을 공존시키기 위함이다. 그런데 이 장면은 뛰어나긴 해도 아핏차퐁에 걸었던 기대에 비한다면 예상 밖으로 좀 도식적이다. 다음과 같은 비범한 점들에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 구전적 활력이 놀랄 만큼 이미지를 끌고 가서 결국 모두가 말한 것 같은 착각을 주는 말하기의 혁신성(<정오의 신비한 물체>), 벌레소리와 새소리와 초록빛의 숲과 벌거벗은 두 여자와 한 남자의 육체라는 엄청난 감각의 확장(<친애하는 당신>), 심장 박동처럼 음악이 들리는 순간 춤을 추듯 수풀을 헤치고 직진으로 움직이는 카메라의 활동(<열대병>), 저 밑에서 혹은 저 멀리서 왕의 동상이나 불상을 쳐다볼 때 또는 갑자기 검은 구멍이 스크린에 자리 잡을 때 일어나는 엄청난 시간적 혼미함(<세기와 징후>) 등이 <엉클 분미>의 대개의 장면에서 느껴지지 않는 것은 좀 당혹스러운 일이다. 어디에서 완만함이 생긴 것일까. 물론 지금까지 그의 발전의 보폭이 너무나 놀라웠기 때문이겠지만 <엉클 분미>의 종종 생기를 잃은 것 같은 배경들, 감각 대신 개념만으로 제시된 유령들, 시무룩해져 있는 카메라, 그 카메라의 약간 붕 떠 있는 것 같은 구도, 때때로 어색한 인물들, 그게 어떤 이유 때문인지 우린 문득 궁금해진다. 그의 영화를 소개하는 이 자리에서 자세한 이야기를 더 하긴 어려울 것이다. 다만 영화 <엉클 분미>가 비디오 설치미술 작품 프리미티브 프로젝트의 일환이었던 것이 이 영화 자체에 장점이 된 것 같진 않다. 이 장편이 중심이고 나머지가 주변이라 생각했던 우리의 예상과는 다르게 상영시간이 비록 짧아도 공력은 오히려 비디오 설치미술쪽에 쏟아져들어간 것이 아닌가 싶다. 일례로 프리미티브 비디오 미술 작품 중 단편 <나부아의 유령들>은 10분간의 짧은 시간이지만 숨이 막힌다. 여기서 빛은 그냥 빛의 효과가 아니라 영혼이 담겨 날뛰는 혼불로 여겨지도록 만들어져 있고, 거기 뛰어노는 아이들은 잔인할 정도로 천진난만하고, 본다는 것의 문제는 이중 삼중의 틀로 생각을 불러일으켜 10분 만에 보는 사람의 혼을 쏙 빼놓는다. 당장에 이렇게 예측해볼 수는 있다. 아핏차퐁의 영화적 혁신 중 하나는 새로운 말하기 방식에 있는데, 우리가 흔히 서사라고 말하는 것의 전통적 기능 대신 다른 무엇으로 서사적 느낌을 전개했던 것이고, 그때 그 다른 무엇이란 창의적인 비주얼 텔링이었다. 그런데 <엉클 분미>엔 그 비주얼 텔링의 놀라움이 줄어들었다. 왜일까? 비디오 설치미술 프리미티브 프로젝트에 다 흡수되었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비유컨대 <엉클 분미>는 어떤 화가의 연작 중에서도 가장 대형의 화폭에 그려졌는데 듬성한 그림인 것 같다. 그간 비디오 설치미술의 어떤 무엇을 영화에 도입해 혁신을 이루었던 것에 반하여, 둘을 한 프로젝트 안에서 병행하자 갑자기 이번에는 영화쪽에서 힘이 떨어지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잠재울 수 없다. 하지만 이런 아쉬움이 있다 해도 아핏차퐁에 대한 관심과 지지가 당장 철회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21세기에 출현한 가장 비범한 영화감독과 그의 영화가 쉽게 방치되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아직 극장에서 정식으로 그의 나머지 다섯편을 만나보지도 못한 것 아닌가. 아핏차퐁에 대해서는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말해져야 할지 모르겠다. 아핏차퐁은 언제라도 다시 변신을 시도할 영화의 21세기적 환생체이기 때문이다. 비디오 설치미술 ‘프리미티브 프로젝트’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비디오 설치미술 ‘프리미티브 프로젝트’는 총 7개의 비디오 설치미술과 2개의 단편영화가 포함된다. 2009년 5월17일, 독일 뮌헨의 미술관 하우스데어쿤스트에서 첫 전시를 연 뒤 작품별로 각국의 전시장을 순회하고 있다(서울에서도 현재 미디어시티서울 행사에서 전시되고 있다). 7개의 비디오 설치미술 작품의 제목은 다음과 같다. <프리미티브> <나부아> <우주선 만들기> <헌신하는 기계> <저녁 촬영> <뮤직비디오: 나는 여전히 숨 쉬고 있다> <뮤직비디오: 나부아 송>이다. 처음 나부아라는 지역에 관심을 갖게 되었을 때 아핏차퐁은 남편 없는 미망인들에 대한 이야기에 끌렸지만 어느 순간부터 이 마을에 살고 있는 마을 청소년들에게 더 관심을 갖게 됐고 프리미티브 프로젝트는 그들과의 공동작업 형태에 가까울 정도로 서로 어울려 완성됐다. 대다수 작품은 2008년 9월 즈음 나부아에 머물면서 만들었다. 반면, 두개의 단편은 <엉클 분미께 보내는 편지>와 <나부아의 유령들>이다. 전자는 장편 <엉클 분미>를 완성하기 전 감독이 이 영화의 소재가 된 인물 분미씨의 혼령에게 보내는 일종의 위령편지의 의미를 띠고 극화됐다. <나부아의 유령들>은 나부아의 아이들이 한밤에 공을 차고 뛰노는 설정으로 촬영했고, 과거 타이의 SF영화 방식으로 시작하여“빛들의 소통”(아핏차퐁)이라고 할 만한 초현실적 분위기를 흠씬 자아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