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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1997)

연휴기간 TV 애청프로 '시간 확인' 필수

(서울=연합뉴스) 고현실 기자 = 특집 프로그램이 넘쳐나는 추석 연휴에 애청 프로의 시간 확인은 필수다. 시간대를 옮기거나 특집에 밀려 아예 결방하는 일도 빈번하다. 지상파 방송사는 대체로 드라마는 그대로 편성한 반면 교양은 특집 프로그램으로 대체하고 주요 예능도 특집 형식으로 재구성한다. ◇KBS = 1TV 저녁일일극 '바람 불어 좋은 날'은 연휴기간에도 정상 방송된다. 2TV 아침드라마 '엄마도 예쁘다'와 주말극 '결혼해주세요'도 그대로 방송되고 월화극 '성균관 스캔들'은 21일에만 시간대를 10분 당겨 오후 9시45분 방송된다. 지난주 종영한 수목극 '제빵왕 김탁구'의 빈자리는 특선영화 '의형제'(22일 오후 9시35분)와 '제빵왕 김탁구 스페셜'(23일 오후 9시35분)이 메운다. 21~23일 오후 7시30분 방송되는 1TV 교양 프로그램은 23일 특집 '엄마와 딸'로 대체되는 '기업열전K1'을 빼고는 모두 그대로 방송된다. 반면 이 기간 밤 10시대 교양 프로그램인 '시사기획 KBS 10' '환경스페셜' '생로병사의 비밀'은 모두 특집으로 결방한다. 월~목요일 밤 12시35분 방송되는 2TV 교양 프로그램 '낭독의 발견' '클래식 오디세이' '라이브 음악창고' 'TV미술관'도 20~23일 드라마 스페셜 베스트와 24일 특선영화 '거룩한 계보'로 대체 편성됐다. 금요일 방송하는 2TV '유희열의 스케치북'(밤 12시35분)은 24일 그대로 방송된다. 평일 11시대 2TV 오락 프로그램은 추석특집으로 꾸미는 '해피투게더'(목)와 '청춘불패'(금)를 빼고는 모두 특집으로 결방한다. '해피버스데이'(월)는 20일 특선영화 '굿모닝 프레지던트', '김승우의 승승장구'(화)는 21일 영화 '청담보살', '추적 60분'(수)은 22일 뮤직다큐 '서울의 달밤'으로 대체됐다. ◇MBC = 드라마는 거의 변동이 없다. 평일 아침드라마 '주홍글씨'가 추석 당일인 22일만 결방할 뿐 그대로 방송되고 시트콤 '볼수록 애교만점'과 일일극 '황금물고기', 월화극 '동이', 수목극 '장난스런 키스'도 시간 변경 없이 시청자를 찾아간다. 반면 평일 저녁 7시대 방송되는 교양 및 예능 프로그램은 모두 결방한다. '약이 되는 밥상'(월)은 20일 '2010 나눔 콘서트', 'TV특종 놀라운 세상'(화)은 21일 '여배우의 집사', '불만제로'(수)는 22일'아이돌 스타 트로트 청백전', '7일간의 기적'(목)은 23일 '2010 스타댄스 대격돌', '원더우먼'(금)은 24일 '원더우먼 최강전'으로 대체된다. 월~목요일 밤 11시대 방송되는 프로그램 가운데 'PD수첩'(화)은 21일 특선영화 '거북이 달린다', '후 플러스'(목)는 23일 '라디오스타 슈퍼쇼'로 대체 편성됐다. '놀러와'(월)와 '황금어장'(수)은 추석 특집으로 꾸며진다. 100분 토론(목요일 밤 12시10분)은 23일 '아이돌스타 트로트 청백전' 재방송으로 대체되지만 금요일 방송되는 '섹션TV 연예통신'과 'MBC 스페셜', 'W'는 24일 동시간대 그대로 방송된다. ◇SBS = 일부 드라마의 시간대가 바뀐다. 월화극 '나는 전설이다'가 종영일인 21일 시간대를 오전 8시50분에서 8시40분으로 앞당겨 방송하고 수목극 '내 여자친구는 구미호'는 22일 특선영화 '해운대' 방송으로 결방하는 대신 23일 오후 9시45분부터 2편 연속 방송된다. MBC '동이'와 치열한 시청률 경쟁을 벌이는 '자이언트'는 오후 10시 그대로 방송된다. 아침연속극 '여자를 몰라'는 연휴기간인 21~23일에만 기존보다 10분 빠른 오전 8시30분에 시청자를 찾아가고 저녁 일일극 '세자매'(오후 7시20분)는 21~23일 결방한다. 평일 오후 11시대 프로그램들은 '강심장'(화)과 '스타부부쇼 자기야'(금)를 빼고는 모두 특집으로 결방한다. '긴급출동 SOS 24'(월)는 20일 '스토리쇼 부탁해요', '뉴스추적'(수)은 22일 영화 '해운대', '한밤의 TV연예'(목)는 23일 영화 '김씨표류기'로 대체됐다. 이밖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행'(화요일 밤 12시45분)은 21일 텔레시네마 '나인틴', 'SBS 시사토론'(금요일 밤 12시15분)은 24일 텔레시네마 '천국의 우편배달부'로 각각 대체 편성됐다. '생활의 달인'(수)과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목)는 추석 특집으로 꾸며 각각 22일과 23일 평소보다 20분 빠른 오후 8시30분 방송된다. okko@yna.co.kr (끝) <연합뉴스 긴급속보를 SMS로! SKT 사용자는 무료 체험!>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소다 가즈히로] 도약과 즉흥의 즐거움을 아시나요

올해 DMZ다큐멘터리영화제의 개막작 <피스>에는 잊지 못할 장면이 하나 등장한다. 폐암에 걸려 죽어가는 독거노인이 담배를 입에 물며 문득 전쟁 때의 기억을 꺼내는 순간이다. 그는 사람 목숨이 엽서 한장 값이었다고 회고한다. 그때 그가 입에 문 담배의 이름이 ‘피스’(평화)다. 감독 소다 가즈히로는 사회복지 봉사활동을 하는 그의 장인어른을 좇다가 문득 이 독거노인을 만나고 이 장면을 찍었다. 하지만 운이 좋아 그런 것이 아니다. 소다 가즈히로의 다큐에는 어떻게 이런 장면을 이렇게 자연스럽게 찍어냈을까 하는 순간이 종종 있는데 그 과정에 관해 DMZ다큐멘터리영화제가 열리는 파주출판단지에서 그를 만나 들었다. -<피스>는 어떤 계기로 만들게 됐나. =DMZ다큐멘터리영화제쪽에서 평화와 공존에 대한 주제로 단편을 만들어달라는 부탁을 해왔다. 처음에는 세명의 감독이 같은 주제로 옴니버스를 만드는 것이었고 그중 한편으로 기획된 거라 알고 있다. 하지만 만들다 보니 장편이 됐다. 너무 큰 주제라 처음에는 이 프로젝트를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좀 꺼려졌던 게 사실이다. 나는 일본의 일상적 면모에 초점을 맞춰왔기 때문에 평화와 공존 혹은 거대한 갈등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한편으로는 이것이 정치적으로 너무 옳은 주제이기 때문에 오히려 상투적인 영화가 될까봐 걱정됐다. 하지만 장인어른이 도둑고양이에게 밥을 먹이는 것을 보고 나서 일상의 평화와 공존에 대한 힌트를 얻었고, 시작할 수 있었다. 장애인 복지사를 하는 장인어른을 카메라로 따라가다 보니 하시모토 시로라는 노인도 만나게 됐다. -그 장면이 놀랍다. 하시모토가 피우는 담뱃갑에 ‘피스’(PEACE)라고 쓰여 있었는데, 뭔가 그때 이 영화의 주제가 구체적인 느낌으로 전해져 왔다. =그 담배를 봤을 때 나도 정말 놀랐다. 그 담배는 2차대전 뒤에 대중에게 가장 먼저 보급된 담배라고 한다. 일본인은 전쟁에 너무 질려버렸기 때문에 전후 시기에 평화에 대해 희망을 가졌고 그런 뜻에서 이 담배가 나온 것이다. 하시모토도 전쟁 이후에 계속 이 담배를 피웠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지금 폐암으로 죽어가고 있고, 지금도 계속 그 담배를 피우고 있다. 그 점은 이번 영화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 처음에는 이 영화가 지도가 없는 여행이라고 생각했는데, 하시모토를 찍고 나서 아, 이제 영화가 되겠구나 확신하게 됐다. -좋은 의미에서 이번 영화는 즉흥연출이다. =그것이 바로 내 영화연출의 중요한 방법론이다. 나는 촬영 시작 전에 어떤 조사도 하지 않고 주제도 정해놓지 않는다. 인물에 대해서도 절대로 미리 정해진 촬영 대본을 갖추지 않는다. 단지 촬영하는 동안 일어나는 도약과 즉흥적인 일들을 즐길 뿐이다. 물론 이번에는 제안을 받은 것이니만큼 주제는 갖고 있었다. 하지만 대개는 촬영과 편집을 한 다음 그 안에서 주제를 발견하는 쪽이다. 처음부터 주제에 잠기면 너무 예상 가능한 영화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하시모토를 처음 봤을 때도 그가 내 주제와 아무런 관련이 없을 테니 찍지 말까 하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그래도 제한없이 찍어보자 했고, 마침내 그가 과거 전쟁 때의 이야기를 하는 순간을 만났다. -언제부터 즉흥성을 선호했는가. =그런 게 내게 제일 중요하고 또 다큐에서도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사람들과 상황을 다큐를 통해 영화적 현실로 재생하여 만들 때 그 즉흥성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나는 다수의 텔레비전 다큐멘터리를 만들었지만 그때는 수없는 조사와 정보와 시나리오와 내레이션을 미리 준비해야 했고, 답답했을 뿐이다. 만약 그 방법을 <피스>에 썼다면, 그러니까 아까 우리가 말한 인상적인 장면은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말을 듣는 와중에 다시 궁금해진 것인데, 처음 DMZ다큐영화제쪽에서 주제가 정해진 작품의 제안을 받았을 때 당신의 심정이 궁금하다. 왜 이걸 내게 맡기는 걸까 하고 생각해본 적이 혹시 있는가. =그렇게까지 생각해보지는 않았고, 다만 내가 이런 주제로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하기는 했다. 데뷔작 <캠페인>에서부터 느낀 것이지만 주제를 갖고 시작하는 방식은 나와 어울리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거의 거절할 뻔했다. 하지만 장인어른의 일상을 내 식대로 찍다보니 문득 이게 DMZ쪽이 원하는 작품이 될 수 있겠구나 생각하게 된 거다. -처음에는 어려웠던 프로젝트를 완성하고 난 지금, 마음은 어떤가. =너무 기쁘다. 이런 계기가 없었다면 평화와 공존에 대한 깊은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평화란 뭐지, 평화란 어떻게 가능하고 어떻게 깨지는 거지, 하는 질문을 하게 됐으니 말이다. -차기작 또는 요즘 관심사가 있다면. =음, 너무 많은데? (웃음) 20개 정도의 주제가 있다. 지금 작업 중인 것도 있다. 히라타 오리자라는 도쿄에 근거를 둔 연극연출가, 그의 극단과 그의 예술에 관한 다큐다. 300시간 넘게 찍었고 지금 편집 중이다.

[김영진의 인디라마] '갇힌 목소리'가 거슬리는 이유

제2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몇편의 다큐멘터리영화를 봤다. 이 영화제는 내 예상보다 근사했다. 휴전선 인근 지역에서 열린다는 상징성과 메인극장인 씨너스 이채가 위치한 출판단지의 정갈한 분위기가 섞인 장소도 좋았고, 흥청망청대는 것 없이 영화 보는 데 집중할 수 있어서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영화제 프로그램의 질이 우수했다. 그중 내가 본 한국 다큐멘터리는 두편이었다. 두편 다 전업 감독이 아닌 저널리스트와 사회운동가가 만든 작품이었다. 영화제 개막 다음날 본 서세진의 <저 달이 차기 전에>는 쌍용차 옥쇄파업의 전말을 내부에서 촬영한 것인데, 내부자들의 곁에서 찍었다는 것만으로 상당한 정서적 파장이 있다. 내부자 입장에서 그들의 고통과 회의를 기록하며 강경 대응으로 일관하는 바깥의 회사쪽과 정부의 세에 밀리는 약자의 패배와 희망을 담는다. 진보매체 <민중의 소리>에 오랫동안 몸담고 있던 영상기자 출신의 서세진 감독은 당파적인 저널리즘의 연장선상에서 이 영화를 만든 것 같다. 이런 유형의 작품은 많이 봐왔지만 비가 그치지 않는 눅눅한 날씨에 극장에서 <저 달이 차기 전에>를 보는 것은 폐소공포증을 불러일으켰다. 속이 꽉 막히고 분출되지 않는 분노 때문에 감정적으로 좀 힘들었다. 동시에 선악의 개념으로 구획될 수밖에 없는 이 싸움에 대한 정의에도 좀 물린다는 느낌이 들었다. 상영이 끝나고 진행된 관객과의 대화에서 한 남자 고등학생은 노동자의 입장뿐만 아니라 반대편 입장을 알 수 있도록 찍었을 수는 없었냐고 감독에게 물었다. 이런 질문은 나이브하다. <조선일보> 사설만 봐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사방에서 주류 목소리가 넘쳐나고 있는데 모른다는 것도 이상하다. 이 영화 속 노동자의 입장에 대해 뭔가 당혹스러움을 느꼈다면 그 뿌리가 바로 기왕의 고정관념이기 때문이다. 노동자는 반드시 선인가 필자는 <저 달이 차기 전에>에서 다른 것이 걸렸다. 처음부터 끝까지 줄곧 깔리는 내레이션이 신경 쓰였다. 관객에게 상황의 개요를 알려주는 설명 기능을 하는 것 외에 대체로 이 내레이션은 정서적이다. 처음 예상과 달리 점차 극한으로 몰리는 노동자의 입장에 대한 공감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공중파 텔레비전이나 주류 언론에서 담아내려고 하지 않았던 그들의 목소리와 감정을 담아낸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노동자를 인간화한다. 그들의 목소리와 형체를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상당 부분이 공장에 갇힌 노동자가 가족과 통화하거나 가족을 그리워하는 장면으로 채워져 있다. 그들의 개인적인 입장과 사쪽의 일방적 통고에 맞서 싸울 수밖에 없는 노조원으로서의 입장이 대비되면서 조금씩 어쩔 수 없이 감상적이 된다. 영화 말미에 쳐들어오는 경찰과 사쪽의 용역에 쫓겨 패퇴하는 노동자의 모습에선 어쩔 수 없이 이 불행의 맛을 음미하게 된다. 영화의 결말도 얼마간 공식적일 수밖에 없다. 지금은 패배하지만 언젠가는 승리하리라는 프로파간다의 옅은 그림자 말이다. 물론 그 와중에 이 투쟁 대열에서 스스로 이탈한 많은 이들이 있다. 영화는 그들의 모습도 보여준다. 앞서 내레이션이 걸렸다고 한 것은, 이 장치가 영화가 관객에게 맥락화된 태도를 갖는 것을 원천봉쇄하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사태를 잘 모르는 관객에게 이 내레이션은 일차적으로 줄거리를 알려주는 기능을 하지만 일방적이며 다른 맥락으로 확산되지 못하게 막는다. 영화가 끝난 뒤 사석에서 나눈 서세진 감독의 말에 따르면 영화 속 노동자들이 그렇게 절박하게 싸울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들의 삶이 바로 막장의 위기에 놓였기 때문이다. 근무연차가 20년 넘으면 연봉 7천만원 이상을 받는, 중산층의 틀이 보장된 삶에서 곧바로 일용직으로 추락한다는 위기감이 그들을 싸우게 만든다. 이 양극의 삶에서 연대의 흔적을 읽을 수는 없었다. 자신들을 보호할 수 있는 정당세력을 갖지 못한 그들의 비극은 우리가 자초한 것이다. 삐딱한 심보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그들이 선거 때 어떤 정파를 찍었을까 궁금했다. 사용자와 정부는 악이고 노동자는 선이라는 이분법만 읽히는 것보다 이런 식으로 다르게 맥락화할 수 있는 것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은 이 영화의 내레이션이라는 장벽 앞에 막힌다. 소수자를 보호하자라는 메시지는 그 직전까지 소수자가 아니었을 수도 있었을 대기업 노동자에 대한 생각 때문에 흐려진다. 영화가 입체적이라도 목소리가 수렴된다면… 지금종의 <오체투지 다이어리>도 흥미로운 영화였다. 수경 스님과 문규현 신부의 오체투지순례에 동행한 이 영화는 우리가 알지 못했던 많은 것을 보여준다. 오체투지가 무엇인지, 그것도 차가 쌩쌩 달리는 고속도로와 국도에서 오체투지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 영화는 보여준다. 영화 중반에 아스팔트의 지열과 소음, 바람을 가르며 지나치는 차들 옆에서 오체투지하는 수경 스님과 문규현 신부 일행을 보여주는 장면은 압권이다. 갑자기 세상의 모든 것이 이들을 포위하고 거세게 밀어붙이는 듯이 보이는 기세는 이들이 행하는 오체투지순례의 의미와 상황을 시각적으로 웅변하고 있다. 별다른 말도, 감정표시도 하지 않는 수경 스님과 문규현 신부가 뭔가 감정을 표시하는 방식은 대부분 유머다. 그에 반해 그들의 오체투지순례를 둘러싼 일반인의 반응은 각양각색이다. 말도 안되는 논리로 이들을 비판하는 사람에서부터 이들의 순례에 공감하는 다양한 사람들의 입장이 영화에 반영되는데 그것이 곧 <오체투지 다이어리>의 주된 내용이라고 하겠다. 사회운동가이며 지난 총선에 출마하기도 했던 지금종 감독은 관객과의 대화에서 그 점을 말했다. 예민한 관객은 아마도 이 영화에 드러난 다양한 사람들의 해석을 읽어낼 수 있었을 것이라고, 똑같은 상황을 보는 사람들의 시각이 이처럼 다를 수 있구나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이명박 정부가 소값을 떨어뜨렸다고 분개하는 촌로부터 예수의 수난과 같은 메타포를 읽어내는 가톨릭 신자에 이르기까지 각양각색의 반응이 이 영화에는 나온다. 개인적으로는 거기서 이 영화의 힘찬 목소리가 진동하고 있다고 느꼈다. 다큐멘터리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생성된 목소리, 현실의 다종다기한 목소리가 이 두 순례자 일행을 감싸고 있다. 그 목소리들의 총합에서 이 순례의 의미를 받아들이는 것은 관객 각자의 몫이다. 그것이 입체적으로 재구성될 수 있는 매력을 이 영화는 지니고 있지만 역시 내레이션이 걸렸다. <저 달이 차기 전에>와 마찬가지로 기본적인 상황정보를 제공하고 있지만 열려 있는 영화에 비해 닫혀 있고 다층적일 수 있는 목소리를 하나의 일방적 목소리로 가둔다. 꼭 비교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레이션의 기능과 관련해 이 두편의 영화와 다른 느낌의 영화를 마지막으로 거론하고 싶다. 영화제 기간 동안에 본 <카지노 잭: 돈의 미합중국>이라는 다큐멘터리는 미국영화답게 얼마간 상업적이고 유머 넘치며 시니컬한 작품인데, 이 영화에도 당연히 내레이션이 나온다. 풍자적인 입장을 내세운 영화의 성격상 내레이션에는 감상이 끼어들 틈이 없고 내레이션의 톤은 객관적이며 중성적이며 약간 빈정거리는 투다. 이 영화는 공화당 실세를 끼고 전설적인 로비행각을 벌인 잭 아브라모프와 그 주변의 부패를 다룬 것인데,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심지어 말레이시아 총리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의 정상회담을 주선하고 돈을 챙긴다(백악관도 돈을 챙긴다. 나는 부시가 정상회담 대가로 돈을 챙긴다는 걸 이 영화를 통해 처음 알았다). 영화의 맥락 살리는 <카지노 잭…>의 목소리 영화의 결말에서 잭은 실형을 선고받는데 한국과 그다지 차이가 없다. 어마어마한 범죄행각에도 불구하고 고작 2년 남짓 감옥에 갈 뿐이다. 그를 건드리는 것은 공화당, 민주당 의원을 망라한 지배블록의 돈 커넥션을 건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청문회도 대충 소란스런 가십성 스캔들 수준으로 넘어간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인상적인 것은 다음과 같은 코멘트다. 출연자 중 누군가가 이렇게 말한다. “잭이 희대의 악당이기 때문에 그를 제거하기만 되는 것이 아니다.” 그 말에 이어 영화는 로버트 레드퍼드가 홈런을 날리는 <내츄럴>의 한 장면을 보여주며 해설한다. “사람들은 20%의 부자가 되면 원하는 걸 할 수 있다는 걸 안다. 자신들이 현재 80%에 속해 있어도 언젠가 20%에 속할 수 있다는 환상이 있기 때문에 부자들의 탐욕을 용인한다.” 결국 시스템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는 걸 이 영화는 건드리고 내레이션은 그 맥락을 축소하지 않는다. 다소 정서적인 톤으로 기우는 다큐멘터리의 내레이션 효과에 대해 우리도 생각해봤으면 한다.

부산국제영화제 머스트40 - 지역타파 [4]

31. 문제가 많은 시칠리아 가족 말라볼리아 가네 사람들 Malavoglia 파스콸레 시메카/이탈리아/2010년/94분/월드 시네마 말라볼리아가의 성원들은 문제가 많다. 안토니오는 가업인 어업보다 작곡에 빠져 늘 음악만 듣고 산다. 누나는 모로코 불법이민자와 사랑에 빠지고, 여동생은 돈 많은 낯선 남자와 사귄다. 그러던 중 바다에 나갔던 아버지가 실종되고 어머니는 정신이상 증세를 보인다. 할아버지는 부서진 배를 고쳐 그와 남동생을 데리고 바다로 나간다. <말라볼리아 가네 사람들>은 한 어부 가족을 집중 조명함으로써 시칠리아의 일상과 이민자 문제를 조명하는 작품이다. 시칠리아 태생인 파스콸레 시메카 감독의 작품으로, 시칠리아 섬을 기반으로 작품을 집필, 이탈리아 진실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조반니 베르그의 동명의 작품을 원작으로 한다. 시칠리아 섬의 아름다우면서도 건조한 풍경과 어우러진 음악은 영화의 비장미를 더해준다. 특히 안토니오의 음악과 할아버지가 읊는 옛 속담들이 어우러지면서 잊을 수 없는 명장면을 선사한다. 국내에 잘 소개되지 않았지만, 파스콸레 시메카 감독은 이탈리아에서 다수의 독립영화를 연출해온 중견감독. <말라볼리아 가네 사람들>은 올 베니스영화제 오리존티 부문에 출품, 호평을 받은 작품이다. 글 이화정 32. 이라크전이 끝나고 집으로 가는 길 만두 Mandoo 에브라힘 사에디/이라크/2010년/90분/아시아영화의 창 <만두>는 포스트 이라크전을 다룬다. 후세인의 폭정을 피해 스웨덴으로 망명 간 쉬란은 헤어졌던 삼촌을 만나 이라크로 돌아온다. 쉬란의 가족과 삼촌은 그들의 고향인 이란으로 가기 위해 자동차에 오른다. 그러나 여정은 험난하다. 고속도로에서 폭탄이 쉴새없이 터지고, 검문검색 과정에서 인정사정없는 총격전이 벌어지기도 한다. 또, 여기저기 사상자가 속출한다. 아비규환이 따로 없는 이 풍경, 이라크에서는 일상이다. 물론 전장에서도 한 줄기 희망은 남아 있다. 도로 한가운데서 결혼식을 올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자동차가 고장나 더이상 갈 수 없는 사람들을 태워주기도 한다. 흥미로운 건 이야기가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된다는 것이다. 관객은 차 뒷좌석에 앉은 삼촌의 눈에 비친 풍경을 그대로 본다. 카메라의 눈이 삼촌의 눈이요, 또 관객의 눈이다. 삼촌이 조카와 승강이를 벌이는 경비대를 향해 권총을 겨눌 때, 보고 싶지 않은 풍경 앞에서 눈을 감을 때 우리는 삼촌처럼 긴장감과 안타까움을 느낀다. 전쟁을 직접 겪지 못한 관객에게 전쟁의 참혹함을 절실하게 느끼게 해준다는 점에서 <만두>의 1인칭 시점은 포스트 이라크전에 어울리는 선택이다. 글 김성훈 33. 상하이의 기억들 상해전기 I Wish I Knew 지아 장커/중국/2010년/138분/와이드앵글 변화와 현대화. 지아장커의 지속적인 테마가 이번엔 상하이를 향했다. <상해전기>는 상하이의 역사를 현재적 관점에서 다시 읽는 시적 다큐멘터리다. 중국에서 최초로 산업화된 도시, 중국 문화의 요람이 된 상하이의 결은 다양하다. 상하이에 살고 있는 혹은 상하이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홍콩과 대만의 정치가, 배우, 갱스터, 노동자 18명의 증언을 모자이크를 통해 중국의 역사를 재조명한다. 중국의 거대한 스튜디오의 흔적을 찾아나가는 동안 상하이의 과거는 증언으로, 또 상하이를 배경으로 한 영화가 푸티지로 삽입된다. 다큐멘터리와 픽션을 결합한 <24시티>의 실험은 이번에도 계속된다. 중국 청두 노동자들의 삶을 통해 중국의 근대화를 그렸던 <24시티>의 형식, 디지털카메라를 사용한 화면도 그대로다. ‘24시티’에 집중된 전작의 단단함을 벗어나, 이번 작품의 범위는 좀더 넓어지고 확장된다. 지아장커 감독은 “근대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형성한 혁명가들의 도시, 상하이의 면면을 탐구함으로써 상하이의 포트레이트를 남기고 싶었다”고 전한다. 영화 속 출연자들을 통한, 생생한 증언들, 그것을 통한 역사와 집단의 역사에 대한 반영은 지아장커 영화라는 인증이다. 올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서 상영됐다. 글 이화정 34. 필리핀의 국화는 아이들의 눈물 삼파기타 Sampaguita, National Flower 프란시스 파시온/필리핀/2010년/78분/뉴 커런츠 ‘삼파기타’는 필리핀의 국화를 뜻한다. 필리핀을 상징하는 동시에 필리핀의 아이들이 생계수단으로 삼는 꽃이다. 해가 뜰 기미도 보이지 않는 새벽. 라디오에서는 식사를 준비할 부모와 늦잠꾸러기인 아이가 만드는 평화로운 가정을 이야기하지만, 라디오를 듣는 아이들은 등잔과 통을 들고 삼파기타 밭으로 향한다. 아이들이 모아온 꽃으로 어른들은 목걸이를 만들고, 이를 아이들에게 팔게 한다. 아이들이 꽃목걸이를 들고 거리에 나온 사연은 각양각색이다. 부모가 버렸거나, 부모로부터 강요를 받았거나, 제 스스로 가족을 탈출했거나. 어떤 아이들은 스스로 고아원에 가기를 원한다. 또 다른 아이는 단지 비를 피해 잘 수 있는 곳만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삼파기타>는 이 아이들의 현실을 담은 다큐멘터리이자 극영화다. 실제 아이들을 인터뷰하는 한편, 그들의 사연을 재연하고, 그들의 현재를 전하는 함축적인 연출을 보이기도 한다. 등잔을 든 아이들이 삼파기타 밭으로 천천히 모여드는 장면은 서정적이면서도 슬프다. 경찰에 쫓기던 아이가 거리에 서 있는 성모상을 바라볼 때는, 그의 절실함과 신이란 존재의 허무함이 드러난다. 부모, 국가, 신이 버린 아이들은 그럼에도 자기들끼리 연대한다. 생일을 맞은 아이를 위해 음식을 구해와 나름의 만찬을 꾸미는 모습은 따뜻하기보다는 애처롭다. 글 강병진 35.염소에 집착하는 아버지라니 처녀 염소 Virgin Goat 무랄리 나이르/인도, 프랑스/2010년/87분/아시아영화의 창 농부 칼리안에게는 딸이 둘이다. 하나는 부족한 지참금 때문에 결혼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미나이고, 다른 하나는 암컷 염소 라일라다. 미나보다 라일라를 더 아끼는 칼리안의 최대과제는 라일라의 짝짓기다. 어떤 멋진 수컷 염소들을 갖다놓아도 반응이 없자, 칼리안은 비아그라를 빻아 물에 녹여 라일라에게 먹이는 등 갖은 애를 쓴다. 마침내 라일라의 몸에 반응이 온 어느 날, 칼리안은 딸을 데리고 읍내로 향한다. 하지만 마침 높은 정치인이 마을을 방문하기로 하면서 칼리안과 라일라의 여정은 험난해진다. 가는 곳 마다 길을 막고, 가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면 구금당한다. 칼리안은 라일라의 짝짓기에 성공할 수 있을까? <처녀 염소>를 연출한 무랄리 나이르 감독은 인도의 정치사회적 풍경을 풍자해온 감독이다. 집안을 건사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는 아버지와 일이나 공부를 하기는커녕 TV를 껴안고 사는 그의 아들, 그런 남자들 때문에 악을 쓰며 살고 있는 그의 아내는 무랄리 나이르가 관찰한 지금 인도의 가족 풍경이다. <처녀 염소>는 여기에 마을을 억압하는 권력의 기운을 함께 묘사하면서 풍자의 대상을 풍부하게 만들고 있다. 이야기의 중심은 소시민에 대한 권력의 억압을 드러낸다. 하지만 만사를 제쳐두고 염소에 집착하는 칼리안의 모습 또한 우스꽝스럽기는 마찬가지다. 허허로운 집착이 낳은 허허로운 좌절을 보여주는 영화다. 글 강병진 36. 아름다운 콜롬비아 풍광이 품은 상처 거짓말의 바다 속 초상들 Portraits in a Sea of Lies 카를로스 가비리아/ 콜롬비아, 남아프리카 공화국/2009년/90분/월드 시네마 소녀 마리나는 알코올중독인 할아버지에게 학대받으며, 다 쓰러져 가는 집에서 살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산사태로 할아버지가 죽고,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즉석사진을 찍어주며 돈을 버는 사촌 하이로는 오갈데없는 마리나에게 함께 떠날 것을 종용한다. 바로 마리나의 기억을 토대로 수년 전 떠나온 고향에서 할아버지가 남긴 집문서를 찾기 위해서다. 실어증과 기면증을 앓는 마리나는 여행 중 잊고 있었던 과거의 끔찍한 기억과 직면한다. 표면적으로는 마리나와 하이로가 고향집을 찾기 위해 떠나는 로드무비지만, 영화는 60년 이상 지속되어 온 내전으로 상처받은 콜롬비아인들의 고통스런 현재다. 카를로스 가리비아 감독은 이 수난사를 얼버무려 말하려 하지 않는다. 현실과 판타지를 오가는 기술 속에는 난민으로서의 삶뿐 아니라, 성에 눈뜨기 시작한 소녀의 혼란스런 사춘기까지 놓치지 않고 포착한다. 사회의 고통을 디테일한 개인의 역사로까지 파고들며 영화는 생생한 힘을 얻는다. 끔찍한 영화 속 현실에도 불구하고 로드무비 속 콜롬비아의 풍광은 이 모든 상처를 치유할 만큼 신비스럽고 아름다운 모순을 선사한다. 글 이화정 37. 아프리카 영화의 저력 맛보기 추락이라는 이름의 작은 마을 A Small Town Called Descent 자밀 쿠베가/남아프리카공화국/2010년/106분/월드 시네마 <추락이라는 이름의 작은 마을>은 남아공의 사회문제인 제노포비아의 참상을 고발하는 경찰드라마다. 남아공의 후미진 마을에서 짐바브웨 출신 남자가 시체로 발견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특수경찰 스콜피온 3인조가 곧 파견되고, 그들은 동네 신부의 증언으로 부패한 지역 경찰에 대한 조사에 착수한다. 그러나 변호사의 비호를 받는 권력자의 진실을 파헤치기란 여간해서 쉬운 일이 아니다. 마을 여자의 증언으로 끔찍한 사건이 드러나고 사건은 비극으로 치닫는다. 해마다 일자리를 찾아 아프리카 이주인들이 대거 유입되는 남아공에 제노포비아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현재적 문제다. 영화 속 표현처럼 남아공인들에게 이들 이주민들은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더러운 외국인’이며, 그런 인식이 불식되지 않는 한 폭력사태는 언제든 가능하다. 줄곧 다큐멘터리를 연출해온 자밀 쿠베카 감독은 대중적인 수사극의 형태를 빌려와 심각한 주제를 전달하는 방식을 취한다. 지루할 틈 없는 짜임새있는 내러티브, 스타일리시한 화면, 빠른 편집이라는 효과적인 도구 속에, 실제 뉴스 화면들을 입혀 현실적인 긴장감 또한 놓치지 않는다. 비극적 현실을 대변하는 아프리카 음악의 사용 또한 눈여겨 볼 만하다. 글 이화정 38. 세계를 향한 이란의 외침일까 방해하지 마시오 Please Don’t Disturb 모흐센 압돌바합/이란/2010년/80분/아시아영화의 창 유명한 TV쇼 진행자인 카림자데흐는 신혼 생활 6개월 만에 파혼 위기를 맞는다. 법원으로 향하는 아내에게 용서를 구하지만, 궤변 수준의 변명만 늘어놓는 그의 말을 아내가 들어줄 리 없다. 한편, 지갑과 휴대폰을 도둑맞은 율법학자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율법과는 거리가 먼 행동을 하게 된다. 텔레비전 수리공을 부른 어느 노부부는 그가 정말 수리공이 맞는지 끝끝내 의심하며 결국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자동차, 휴대폰 등 일상을 영위하기 위한 모든 것들에 경고문처럼 붙여 알리고 싶은 말이 있다. 바로 ‘방해하지 마시오’. 저 멀리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서도 현대인이 느끼는 비애는 마찬가지인가보다. 영화는 테헤란을 배경으로 일상적이지만 조금은 별스러운 상황을 실타래처럼 얽힌 3편의 에피소드로 구성해 블랙코미디라는 그릇에 꾹꾹 눌러 담았다. 이란의 여성문제를 비롯해 율법학자 스스로 드러내 보이는 현실과 율법 사이의 괴리, 이란사회가 처한 도덕과 종교적 가치 사이에서의 선택의 문제 등을 생각해볼 수 있는 영화다. 글 김현수 객원기자 39. 김복남처럼 ‘복수의 칼’을 든 여인 트럭 밑의 삶 Chassis 아돌포 알릭스 주니어/필리핀/2010년/73분/아시아영화의 창 <트럭 밑의 삶>은 필리핀판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이라 할 만하다. 살 집이 없는 두 모녀, 노라와 사라의 거처는 트럭 밑이다. 누구 하나 도와주는 이 없지만 엄마 노라는 하나뿐인 딸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전부 한다. 하루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트럭 운전사들에게 몸을 팔고, 트럭이 부두를 떠나면 얼마 되지 않는 짐을 싸서 또 다른 트럭을 찾아나선다. 언젠가는 남들처럼 따뜻한 곳에서 편안하게 잠을 자는 꿈을 꾸면서 말이다. 그러나 딸이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으면서 노라의 꿈은 산산조각난다. 분노로 가득한 노라의 복수가 시작되는 것도 이때부터다. <트럭 밑의 삶>은 항상 남성의 폭력에 노출되어 있는 필리핀 길거리 여성의 현실을 그린 극영화다. 그러나 감정의 구축보다 현실 고발에 더 신경 쓰는 듯 감독은 영화를 다큐멘터리처럼 연출한다. 시종일관 인물을 따라다니는 핸드헬드 카메라는 이야기에 현실성을 부여하고, 흑백화면은 상황을 냉정하게 묘사한다. 한편, 노라의 마지막 복수는 너무나 강렬해서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글 김성훈 40. 행복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 피노이 선데이 Pinoy Sunday 호위딩/대만, 필리핀, 일본, 프랑스/2009년/84분/아시아영화의 창 대만에서 일하는 필리핀 노동자인 마누엘과 다도의 삶은 낭패의 연속이다. 그들이 꿈꾸는 건 단지 퇴근 뒤의 안락함이다. “푹신한 소파에 앉아 그녀와 여름밤의 하늘을 보며 맥주를 마신다고 상상해봐!” 그러던 어느 일요일, 두 사람은 길거리에 버려진 빨간색 가죽소파를 발견한다. 문제는 이 소파를 집까지 운반하는 것이다. 트럭을 빌리기는 돈이 부족하고, 버스로 옮기려 하니 태워주지 않는다. 할 수 없이 그들은 크고 무거운 소파를 직접 들고 가기로 결심한다. <피노이 선데이>는 이들의 ‘뻐근한’ 일요일을 쫓아가는 영화다. 소박한 바람이 좌충우돌 소동극으로 변해갈 때, 애처로운 유머와 안타까운 현실이 드러난다. 영화는 마누엘과 다도뿐 아니라, 그들이 사랑하는 두 여인의 비정한 현실까지 비춘다. 두 남자에게 그들은 다가서고 싶은 아름다운 여성이나, 역시 어디까지나 같은 이주노동자인 그들 또한 밤새워 일하고, 누군가의 정부가 되어야만 살 수 있다. 유머러스한 행복찾기로 볼 수 있지만, 무엇을 원하든 그 소망이 고통이 되는 현실을 지적한다는 점에서 상당히 냉정해 보이는 결론이다. 글 강병진

마모되지 않는 매혹의 그녀를 만나다

어렸을 적 김지미가 동양최고의 미인이라고 어른들이 말씀하시는 걸 들었을 때도 나는 그다지 감흥이 없었다. 김지미라면 동네 어귀에 붙은 영화포스터에 새겨진, 빛바랜 여주인공의 이미지로만 남을 뿐이었다. 실제 스크린에서 봐도 그다지 감흥은 없었던 것 같다. <토지>와 같은 영화는 어렴풋이 기억나는데 김지미는 다른 배우들과 달리 상당히 잘 생긴 여배우라는 인상만 남았다. 언젠가 텔레비전의 나훈아 쇼에서 객석에 있는 그녀를 시청한 적이 있는데 목소리가 탁음이어서 깜짝 놀랐다. 극장에서 들었던 목소리와는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뭐랄까, 주변은 아랑곳하지 않는 위풍당당한 기개가 있는 목소리였다. 비너스가 아닌 중년의 연기파 배우 철이 들어 자세히 영화를 들여다볼 무렵 내가 본 김지미의 영화는 전부 다 좋았다. 임권택의 <길소뜸>과 <티켓>, 이장호의 <명자 아끼꼬 쏘냐>였다. 그녀가 한 시대를 풍미한 비너스였는지는 몰라도 내게는 중년의 연기파 배우로 보였다. 원래 임권택 감독과 찍기로 했던 <비구니>가 불교계의 압력으로 제작이 중단되었을 때 신문지상에는 그녀가 머리를 하얗게 밀어낸 모습이 사진으로 실렸는데 그때도 참 잘생겼다는 생각만 했었다. 그러나 <길소뜸>에서 동란 시절에 사귄 동네 첫 사랑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을 30여년 만에 상봉했음에도 혈육을 포기하는 유복한 중산층 주부 역할의 김지미는 적어도 내게는 처음으로 인간화된 모습으로 다가왔다. 이 영화에서 그녀는 가진 사람의 염치와 치욕이 혈육의 정 앞에서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 걸 애써 누르는 냉정한 모습을 연기하는데 이처럼 복합적인 진동은 과문한 내 소치로는 이전에 본 적이 없었다. <길소뜸>에서 김지미가 연기하는 화영은 청춘기에 사랑했던 남자와 재회했으나 그는 이미 추레한 중년 남자가 되어있다. 인간적으로 측은지심을 느낄 수는 있으나 과거의 사랑을 느끼지는 못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몸에서 났으나 전쟁 난리 통에 잃어버린 아들은 무학자에 가난한 무지렁이로 살고 있고 어느 쪽으로나 육친의 정을 되살릴 수 없다. 화영은 냉정하게 거리를 두고 옛 애인과 아들, 두 남자와 회자정리 하는 길을 택한다. 영화의 끝부분에서 화영이 신성일이 연기하는 동진과 이별할 때 그녀는 동진에게 명함을 준다. 그 명함은 화영의 것이 아니라 남편 명함이다. 명함을 들여다 본 동진은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을 짓고는 명함을 쓰레기통에 버린다. 그들도 이산가족이긴 하지만 이미 각자 가정이 있는 몸이다. 동진의 입장에선 더 미련이 남을지도 모른다. 고단하게 살아온 듯한 그의 삶에서 지킬 것은 별로 없어 보인다. 화영에게는 그와 달리 지킬 것이 많다. 남편의 명함을 주는 화영의 행위는 싸늘하게 느껴질 만큼 이성적이다. 이것은 임권택 감독의 연출에 크게 빚진 것이기도 하지만 김지미의 극적으로 과장하지 않는 연기는 오히려 그 때문에 더 극적이었다. 임권택의 또 다른 대표작 <티켓>은 김지미의 연기 인생을 응축할 만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에서 김지미는 지방 소도시에서 다방을 운영하는 민 마담으로 나와 부패한 자신의 인생을 견디며 그녀만큼이나 부패하게 될 젊은 여성들을 데리고 매춘업을 한다. 부패의 숙주이자 동시에 그녀들의 삶을 부패하게 만든 삶에 대해 애증을 갖고 있는 민 마담은 인간적으로 미워할 수 없는, 인생을 잘못 산 여자의 피로와 절박함과 체념과 연민을 동시에 품고 있는 여자다. 가혹하게 다방 종업원들을 생존경쟁으로 내몰아 채근하던 소(小) 권력자로서의 그녀는 동시에 그녀들의 유사 어머니이자 언니와 같은 존재이고 그녀들은 야박한 삶의 전쟁터에서 그들만의 공동체를 여하튼 꾸리고 산다. 영화의 후반부 한 장면에서 민 마담이 젊은 레지들을 앞에 놓고 다방에서 신세한탄을 하는, 길게 찍혀진 장면에서의 김지미의 연기는 강인한 카리스마 속에 슬쩍 감춰놓은 인간적인 연약함이 드물게 드러나면서 강함과 부드러움이 병렬된 에너지로 분출되는 매우 인상적인 순간을 만들어낸다. 임권택은 가차 없이 영화 속 인물들을 삶의 구석에 밀어 넣지만 그 인물들은 또한 원초적인 삶의 에너지로 견디어낸다. 이 긴장이 <티켓>에서는 팽팽한 극적 긴장의 심줄로 끝까지 지탱되고 있었다. 스크린에 존재를 새기다 아쉽게도 김지미의 연기 인생 후반전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이장호의 필생의 대작 <명자 아끼꼬 쏘냐>에서 김지미는 젊은 시절부터 노역까지 소화하는 의욕을 보이지만 그녀의 본색이 드러나는 것은 영화 속에서 중년 이후의 삶을 연기할 때였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영화가 좋았다. 한민족의 역사적 외상을 자기 몸에 품고 살아낸 것 같은 영화 속의 명자는 지난한 세월에서도 자기 색깔을 잃지 않고 군림했던 김지미라는 스타배우의 육체를 통해 구현될 때 칼로 찔리는 것 같은 상처의 흔적을 낸다. 종래의 김지미의 스타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았던 것은 김기영 감독의 몇 편의 영화들에서도 그랬다. <화녀 82>나 나중에 보게 된 <육체의 약속>과 같은 영화에서 김지미는 괴이한 인간의 마성을 탐구하는 김기영 감독의 일그러진 인간의 초상에 기꺼이 복종하는 연기를 보여주었는데 이상하게 그 불균형이 시각적으로 진한 잔상을 남기는 것이었다. 김지미가 영화에 더 이상 등장하지 않게 된지 오랜 후에 나는 교육방송의 한국영화특선 프로그램을 3년 여 간 진행하면서 숱한 김지미의 영화를 보게 됐다. 1960년대의 한국영화들을 방영하는 이 프로그램에선 과장을 보태면 한 주 걸러 김지미 주연의 영화를 틀어주는 것 같았다. 김수용 감독 <사격장의 아이들>이나 이성구의 <메밀꽃 필 무렵>과 같은 진지한 드라마에서부터 <댁의 부인은 어떻습니까?>, <팔도며느리> 등의 계도성 오락영화, <내 주먹을 사라>, <홍콩의 마도로스>, <요화 장희빈>, <대원군> 등에 이르기까지 그 시기 한국영화계의 스타들이 다 그렇지만 엄청나게 다양한 장르의 영화에 김지미는 출연하고 있었다. 연기한다기보다 스크린에 존재하는 김지미는 동시대의 다른 여배우들과는 달리 늘 기세가 세고 당당하며 남자들이나 주변 세상에 맞서는 듯한 여성 이미지를 풍긴다. 아름다운데다 기세가 세서 실제로 만나면 왠지 기가 죽을 것 같은 강한 여성의 분위기는 그 이후로도 유례가 없을 것이었다. 늙어, 더 아름답다 이번 회고전에 상영되는 <불나비>는 김지미의 그런 스타 페르소나가 비교적 정돈된 각본을 통해 다양하게 시연되는 점에서 흥미로운 영화다. 그녀는 이 영화에서 전형적인 요부와 정숙한 현모양처를 상황 별로 오가며 여러 이름을 가진 정체불명의 여주인공으로 나온다. 남성 주인공이 홀린 듯이 그녀를 따라다니며 탐문하는 동안 녹아드는 매혹의 늪, 너무 반들반들해서 닿으면 미끄러질 듯 눈부신 바위를 기어오르는 것 같은 심정으로 김지미를 지켜보는 것이 이 영화의 재미다. 서사의 농도가 치밀해서 빨려드는 쾌감은 없지만 느슨한 서사의 틈을 비집고 나와 메우는 김지미의 존재감은 장르영화에 소용되는 스타의 이미지 파워를 실감하게 해준다. 고전기의 많은 배우들이 그랬듯이 김지미도 숱한 영화에서 자신의 이미지를 마모시키고 소모해 기진하는 운명을 피하기는 어려웠다. 솔직히 말해 전성기 그녀의 출연작들에서 굵직한 대표작을 고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우리가 아름다운 김지미 외에 김지미의 연기를 보기 위해서는 그녀의 나이가 들 때까지 기다려야했다. 그런데도 엄청난 다작 필모그래피의 수렁 속에서 기진하지 않은 그녀의 존재감, 단지 미모의 카리스마가 뛰어났다는 것을 넘어서는 어떤 강력한 존재감이 김지미를 김지미답게 하는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불어라 칼바람, 외화의 공습이다 [6]

13. 존 카메론 미첼과 니콜 키드먼, 이름만으로도 떨리는 <래빗 홀> Rabbit Hole 감독 존 카메론 미첼/출연 니콜 키드먼, 아론 애크하트/개봉 2011년 2월 <헤드윅> <숏버스> 등 만드는 영화마다 화제를 낳고 관객을 사로잡으며 매력을 발산해온 감독 존 카메론 미첼이 니콜 키드먼이라는 강단있는 메이저 여배우와 만나 만들어낸 영화라는 점만으로도 흥미롭다. 베카 코벳(니콜 키드먼)과 호위 코벳(아론 애크하트) 부부는 어린 아들과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다. 하지만 교통사고로 갑자기 아들을 잃게 되고 집안은 엉망진창이 된다. 베카는 도저히 아들의 죽음을 믿을 수 없다. 오히려 아이의 물건들을 버리기까지 한다. 남편은 그런 아내가 안타까우면서도 걱정스럽다. 행복했던 가정은 온데간데없고 서로간에 갈등이 커진다. 그즈음 베카는 아들을 차사고로 죽인 장본인인 십대 소년에게서 오히려 어떤 기이한 위안을 얻으려 한다. 2007년 토니 어워드에서 수상한 연극을 각색한 작품이다. 니콜 키드만이 직접 자신의 제작사에서 제작했고 토론토영화제에서 상영했으며 미국 내에서도 아직 개봉되진 않았다. 토론토에서 이 영화를 본 몇몇 사람이 강력한 호평을 올렸다. 지난 10여년간 각종 영화제를 다녔다고 자부하는 한 저널리스트는 “내가 지난 영화제들에서 본 가장 뛰어난 작품 중 한편이다. 흠잡을 데가 없다”고 말한다. “아름답게 연기하고 참을 수 없이 긴장감 넘치는 <래빗 홀>은 쉬운 상투로 결코 흐르지 않고 관습적인 접근으로 안심하지도 않는 드물게 진심어리고 민감한 영화다”라는 평도 있다. 글 정한석 14. 거장의 이야기는 후대로 이어지고 일루셔니스트 L’Illusionniste 감독 실뱅 쇼메/개봉 2011년 1월 자크 타티와 실뱅 쇼메, 이 두 이름은 <일루셔니스트>를 통과하기 위한 관문과도 같다. <일루셔니스트>를 제작한 실뱅 쇼메 감독은 단편애니메이션 <노부인과 비둘기들> <벨빌의 세 쌍둥이>로 안시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는 물론 오스카와 BAFTA(영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주목받으며 스타로 떠올랐다. 쇼메는 2005년, 옴니버스 프로젝트 영화 <사랑해, 파리>에 참여해 극영화를 경험하기도 했다. 프랑스의 위대한 코미디 영화감독이자 배우인 자크 타티는 <일루셔니스트>의 시나리오를 제공한 장본인이다. 타티가 직접 제작하지 못한 시나리오는 쇼메의 손에 넘어갔고, 결국 애니메이션으로 탄생했다. 타티가 사망한 해인 1982년에 쇼메가 고등학교를 졸업했으니 둘은 만난 적이 없다. <일루셔니스트>는 1950년대 후반의 스코틀랜드를 배경으로, 힘겹게 살아가는 마술사와 그를 진짜 마술사라고 믿는 젊은 여자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쓸쓸한 색채의 그림은 영화의 정서를 대변한다. 영화 속 마술사와 젊은 여자는 타티와 그의 큰딸을 대신하는 캐릭터다. 쇼메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이렇게 얘기한다. “<일루셔니스트>는 아버지와 딸의 관계를 그린 영화다. 결코 로맨스영화가 아니다.” 원래 타티가 그린 도시는 스코틀랜드가 아닌 체코의 프라하였다고 한다. 아무래도 쇼메는 자신의 애니메이션 회사 ‘장고필름’이 위치한 스코틀랜드가 더 익숙했나보다. 글 이주현 15.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이름으로 히어애프터 Hereafter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출연 맷 데이먼, 세실 드 프랑스 /개봉 2011년 2월24일 <히어애프터>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연출하는 초자연적 스릴러라고 알려져왔다. <프로스트 VS 닉슨> <더 퀸> 등의 각본가 피터 모르간이 각본을 쓰고 스티븐 스필버그가 제작자 중 한명으로 참여하여 완성한 영화다. 영화는 세 사람의 각기 다른 주인공의 이야기를 하나로 모아간다. 중심은 조지(맷 데이먼)라는 인물. 그는 가난한 공장 노동자이지만 사후세계의 죽은 자들과 소통할 수 있는 영적 능력을 지녔다. 마리(세실 드 프랑스)는 프랑스의 텔레비전 저널리스트인데 그녀는 거대한 쓰나미에서 극적으로 살아남은 생존자 중 한명으로 죽음의 벼랑 끝에서 살아 돌아온 경험이 내내 그녀의 현실을 붙들게 된다. 그리고 영국 런던의 어린 소년 마커스, 그의 쌍둥이 형제가 다른 아이들에 쫓겨 도망가던 중 차사고로 죽게 되고 마커스는 형제의 죽음으로 참기 어려운 슬픔에 빠진다. 쌍둥이 배우 프랭키와 조지 맥라렌 형제가 이들을 연기한다. 각본을 미리 본 미국의 영화산업지 <버라이어티>는 <히어애프터>가 “<식스 센스>의 맥락 안에” 있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식스 센스>를 만든다면 그건 우리가 알고 있는 <식스 센스>가 더이상 아닐 것이다. 그가 장르주의자의 면모를 버리지 않지만 장르적 반전의 놀라움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을 그의 수많은 영화들을 통해 우린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공개된 예고편 클립을 보고 무작정 예상해보자면 이 영화는 알려진 것처럼 초자연적 스릴러라기보다는 초자연성을 겪는 사람들의 휴머니즘에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각본가 피터 모르간은 “영적인 소재이면서 또한 로맨틱하며 설명하기 쉽지 않은” 영화라고 했고 이스트우드는 “삶에서 트라우마를 경험한 세 사람의 이야기이며 어떻게 이 이야기들이 서로 모이는가 하는 것이다. 결국 하나의 중요한 시퀀스에서 이 모든 이야기들은 마침내 정점에 이를 것이다”라고 했다. 이스트우드, 그의 최신작 <히어애프터>의 열쇠말은 어쩌면 초자연적 스릴러가 아니라 죽음과 그 너머 혹은 남겨진 사람들에 관한 성찰의 드라마일지도 모르겠다. 글 정한석 16.<쇼 걸>에 <시카고> 추가요, 그리고 크리스티나 아길레라! <버레스크> Burlesque 감독 스티브 앤틴/출연 크리스티나 아길레라/개봉 2011년 2월 “LA행 표 주세요.” “편도요, 왕복이요?” “지금 농담하시는 거죠?” 가수의 꿈을 키우던 시골 소녀 앨리(크리스티나 아길레라)는 LA의 오디션장에서 줄기차게 탈락한다. 그녀의 눈앞에 나타난 공간은 클럽 ‘버레스크’. 전직 댄서 테스(셰어)가 운영하는 이 근사한 극장은 현란한 춤과 노래, 화끈한 여인들이 누비는 쇼로 유명하다. 웨이트리스로 취직한 앨리는 버레스크 무대에 오르는 날을 꿈꾸며 고군분투한다. “버레스크 쇼는 섹시하고 관능적이죠. 상대방을 애태우는 몸짓, 그 춤, 아름다운 여인의 예술이기도 하고요. 설명이 더 필요한가요?”(크리스티나 아길레라) 버레스크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미국 뮤직홀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쇼의 형태다. 풍자와 야유가 공존하는 퍼포먼스, 노래와 춤과 (대개는) 스트립댄스가 결합된 어덜트 엔터테인먼트, 가죽옷과 피시넷 망사 스타킹을 신은 여인들이 군림하는 무대. 버레스크가 다시금 부흥하게 된 건 1990년대부터다(패션 잡지 독자라면 뮤지션 마릴린 맨슨의 연인으로 유명했던 버레스크 퍼포머 디타 본 티즈를 기억할 것이다). 이제 그 무대가 영화 속으로 옮겨졌다. 19세기 파리의 ‘물랭루주’ 클럽까지 갈 것도 없이, 여기 <쇼 걸>이 <시카고>에 겹쳐진 것만 같은 뜨거운 현장이 펼쳐진다. 10년 만에 스크린에 모습을 드러낸 여신 셰어는 물론이거니와 마돈나의 뒤를 잇는 우리 시대의 디바 크리스티나 아길레라의 영화 데뷔작이라는 사실도 눈여겨볼 만하다. 글 김용언

[베를린] 독일 영화사를 한눈에

우중충하고 비 내리는 베를린 포츠담 광장의 가을. 요즘 이곳을 찾는 독일인은 감회에 젖을 수밖에 없다. 장벽이 서고 무너졌던 분단과 통일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11월은 베를린 장벽 붕괴 20주년이었고, 올 10월3일로 통일 20주년을 맞았다. 통일 직후 허허벌판이던 포츠담 광장은 20년이 지난 지금 모던한 고층 빌딩들로 미래도시를 방불케 한다. 영화 <메트로폴리스>의 공간을 본뜬 것 같은 이곳은 베를린영화제가 열리는 독일영화의 중심지다. 장벽 바로 옆의 소니센터 안에는 멀티플렉스 영화관, 레스토랑뿐만 아니라 영화박물관인 도이체키네마텍, 예술영화관 아르제날, 독일영화학교가 들어서 있다. 또 여기서 불과 몇 십미터 거리를 두고는 베를린영화제 본부와 행사장이 자리하고 있다. 서로 상호의존하는 기관들이다. 항상 수학여행 중인 학생과 관광객으로 붐비는 이곳의 연간 방문객은 14만명 정도다. 독일 다른 도시들에도 시네마테크가 있지만 자료 소장뿐 아니라 일반인도 열람 가능하고 박물관을 통해 전시까지 하는 시네마테크는 베를린영화박물관이 유일하다. 게다가 이곳은 베를린영화제에서 개최하는 회고전에 필요한 중요한 영화자료들을 소장하고 있다. 각본 3만편, 포스터 2만점, 영화 프로그램 6만개, 주요 영화인들 관련 자료 등이 모두 여기에 있다. 박물관 안에 들어서면 시간 여행이 시작된다. 1919년 무성영화부터 시작해 길을 따라가면 90년대 독일영화까지 전시되어 있다. 가는 길목에는 각종 시청각 시설로 감독과 영화를 시대별로 소개하고 있다. 오리지널 포스터, 낡은 영사기, 영화소품, 의상들도 눈길을 끈다. 베를린영화박물관은 올 베를린영화제에서 화려하게 선보였던 프리츠 랑의 <메트로폴리스> 복원에도 큰 공을 세웠다. 특히 장벽 붕괴 20주년을 맞아 베를린영화박물관이 지난해 선보였던 동구권 영화 회고전 ‘겨울, 안녕’은 의미가 깊다. 원래 이 회고전은 2009년 베를린영화제의 작은 섹션으로 소개됐었고, 이후에는 박물관에 소장되면서 대출도 가능해졌다. 컬렉션 영화들은 공산주의 동구권 국가에서 만들어졌지만, 엄격한 검열에도 불구하고 1989년의 동구권 민주화의 낌새와 분위기를 잘 포착해낸 15편의 작품들이다. 극영화뿐만 아니라 다큐멘터리, 애니메이션, 단편·실험영화도 포함하어 있는 이 회고전 컬렉션은 크지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 얀 스반크마이에르 같은 대가들의 작품도 담고 있다. 이 컬렉션에 속하는 영화들은 연말까지 독일 전국의 여러 소극장에서 상영될 예정이다. TV 자료까지 수집, 보관, 전시 베를린영화박물관 관장, 라이너 로터 인터뷰 -베를린 독일영화박물관의 역할은 뭔가. =박물관이라는 존재가 순수한 노스탤지어의 장소라고만 하기 어렵다. 박물관은 과거를 전시한 것 이상을 내포한다. 우리는 미래에 대한 전망을 제시한다. 워크숍, 강연, 영화 상영을 통해 전시회를 보완한다. 우리의 임무는 독일영화와 외국영화를 기록, 보관하는 것이다. 또 독일영화박물관만의 특별한 점은 텔레비전 자료도 수집, 보관, 전시한다는 점이다. 60년대 국제적으로 알려진 독일 감독 라이너 파스빈더, 폴커 슐뢴도르프, 페터 네스틀러는 원래 텔레비전에서 시작했다. 그래서 독일영화와 텔레비전 방송은 연관이 많다. -‘겨울, 안녕’이라는 회고전에 대한 생각은. =회고전의 영화들은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다. 일반인보다 좀더 예민한 예술가들은 지진계처럼 미세하게 당시의 상황을 감지했다는 것을 영화를 통해 알 수 있다. 이 테제가 틀리지 않는다면 아마도 지금의 영화들도 우리가 30년 뒤에 있을 일들을 미세하게 기록하고 있을 것이다. ‘겨울, 안녕’은 지금까지 평가절하됐던 영화사의 현상들과 그와 관련된 모순을 환기시킨다. 이 컬렉션은 서로 달랐던 동구권 국가들의 체제와 당시 시대에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고, 전망을 보여준 훌륭한 영화들을 모아놓았다. -예를 들면 동구권 몰락의 조짐이 영화의 어떤 부분에서 드러나는가. =가령 이 회고전 컬렉션 속 영화들은 유머없는 코미디나 현실과 동떨어진 미화된 노동세계 등을 다룬다. 반면 다큐멘터리영화들은 당시 현실과 더 정면으로 대면했다. 그래서 이 회고전의 타이틀도 동독 감독 헬케 미셀비츠의 <겨울, 안녕>(1988)에서 따왔다.

[2010 미드] 가을 시즌 미드 신작 9편 - 코미디

5.글로벌 시대, 변방의 전화소리 <아웃소스드> Outsourced | 출연 벤 라파포트, 아니샤 나가라잔, 디드리히 베이더, 리즈완 만지 / 채널 “돌아갈 곳이 없어요, 여기서 성공해야만 한다고요!” 비장한 이 선언은 캔자스에서 뭄바이로 근무지를 옮긴 ‘중미엽기쇼핑몰’의 콜센터 매니저 토드(벤 라파포트)의 대사다. 저렴한 통화요금과 임금을 내세운 인도가 글로벌 기업의 콜센터 기지로 각광받은지도 어느덧 10년. 한마디 상의도 없이 근무지를 옮겨버린 사장에게 항의도 해봤지만, “학자금 대출이 4만달러”가 남은 그는 군소리없이 뭄바이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겉과 속이 다른 현지 부매니저 라지브를 비롯해 한번 입을 열면 다물 줄을 모르는 굽타, 카스트의 가장 하층민이라서 제대로 말하지도 웃지도 못하는 마두리, 통신판매 대신 폰섹스를 하는 맨미트(이름이 ‘인육’이라서 코미디의 소재가 됨)까지, B급만 모아놓은 직원들을 데리고 벤이 금의환향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 하지만 <아웃소스드>의 의도는 충분히 들여다보인다. 뭄바이라는 허브 도시에서 여러 문화가 충돌하면서 벌어지는 상황을 웃음으로 이용하되, 쇼가 일단 정점에 오르면 글로벌 경영시대의 소비주의, 문화사대주의 등 영리한 소재를 마음껏 활용할 수 있을 것. ‘중미엽기쇼핑몰’의 소품들만으로도 명절 단골 TV프로그램인 <퍼니스트 홈비디오>의 효과를 내고 있으니 각오하시라. Up <오피스>의 총괄프로듀서 켄 콰피스가 뭄바이로 사무실을 옮긴 격. 재미는 보장됐다. Down 재료와 레시피는 좋은데 조리시간이 길다. 제대로 웃길 때까지 시간 좀 걸릴 듯. 6.철없는 미혼부의 대책없는 육아일기 <레이징 호프> Raising Hope | 출연 루카스 네프, 마사 플림턴, 개럿 딜라헌트, 섀넌 우드워드 / 채널 ‘풍선껌맛’ 아이스크림을 사가지고 집에 돌아오던 23살 백수 혹은 수영장 청소부 지미(루카스 네프)는 차도에 뛰어들어 도움을 요청하는 묘령의 여인과 눈이 맞아 화끈한 밤을 불사른다. 하지만 청순하고 아름답던 그녀의 정체는 공개수배 중인 연쇄살인범. 텔레비전으로 머리를 때려 기절시키는 기지를 발휘한 엄마(마사 플림프턴) 덕분에 ‘엽기적인 그녀’를 감옥에 가두고 전기의자에 앉히지만, 화끈했던 그 하룻밤은 임신으로 이어지고 지미는 졸지에 미혼부가 되어 갓 태어난 딸 호프를 키우게 된다. 하지만 15살에 지미를 낳은 뒤 3분요리로 가족의 식사를 책임져온 엄마와 지미가 청소해놓은 수영장에 낙엽을 도로 날리며 어린애처럼 즐거워하는 아빠(개럿 딜라헌트)가 육아에 도움이 될 리 없다. 스케일로 따지면 유랑악단의 즉흥연주 같은 코미디 <레이징 호프>는 한없이 대책없지만 또 그만큼 낙천적이고, 가난하고 냉소적이지만 마음속은 풍요로운 한 가족의 좌충우돌 육아일기를 그려낸다. 단 한대의 카메라로 액션과 반응숏만을 이용해 이야기를 끌어가는 솜씨가 놀랍다. 물론, <레이징 호프>가 사랑스러운 이유는 당연히 ‘호프’ 때문이다. 호프가 자라면서, 이 가족에게 희망(Hope)도 자라날지 지켜볼 일이다. Up 루저들만 모아서 육아 미션을 던져준 리얼리티쇼를 보는 기분, 죄책감 만점의 스릴이 넘친다. Down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은 많은데 유명한 캐릭터는 없음. 진지한 제목도 코미디로서는 살짝 부족.

[김영진의 인디라마] 관계‘들’에 대한 신중하고 치밀한 묘사

나는 김수현 감독의 두 번째 영화를 오랫동안 기대해왔다. 장편 데뷔작 <귀여워>를 2004년에 발표한 이후 김수현은 새 영화를 만들지 못했다. 그는 꾸준히 시나리오를 썼지만 직선적으로 뻗어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방사형으로 퍼지는 이야기를 쓰고야 마는 그의 창작 유전자가 영화계 투자자들의 마음이 들 리 만무했다. 많은 등장인물이 나오는 <귀여워>를 찍고 난 뒤에 그는 다음 영화에서는 한두명의 주인공이 축이 되는 이야기로 끌고 가겠다고 내게 말했지만 허언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올해 부산영화제 뉴커런츠 부문에 공개된 그의 두 번째 영화 <창피해>가 김수현의 그런 창작 유전자의 본질을 잘 보여준다. 그는 관계가 아니라 관계‘들’에 주목하고 그걸 상업장편영화라는 매체가 허용하는 선까지 파고들어가 보여줘야 직성이 풀리는 감독이다. 김수현식 만연체적 감정 표현 <창피해>에는 세명의 지우가 등장한다. 강지우, 윤지우, 정지우라는 여성들이 주인공이다. 미술대학 교수인 정지우가 작품 사진 모델로 윤지우를 캐스팅해 학생들과 스탭들을 데리고 해변에 가면서 벌어지는 <창피해>는 윤지우가 정지우와 정지우의 학생인 희진에서 털어놓는 강지우와의 격정적인 사랑에 대한 회상과 윤지우가 정지우, 희진과 나누는 교감이 현재의 플롯으로 교차 전개된다. 스토리는 지그재그로 얽혀 있고 현재와 과거, 현실과 환상이 마구 교차되기 때문에 두서없다는 느낌을 주는데, 김수현의 연출 스타일은 글로 치자면 만연체에 가깝다. 장면의 배분에 무리가 있는 것을 감수하고라도 필요하다면 장면을 길게 지속시키고 어떤 것들은 관객에게 암시 수준으로 짧게 던지고 지나가버린다. 인물들의 감정상태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면 만연체를 마다하지 않는데 스토리의 복선과 단서를 제공하는 것이라면 기능적으로 처리하고 마는 것이다. 이를테면 비교적 초반부의 한 장면에서 강지우와 윤지우는 형사 민용과 함께 민용의 후배가 운영하는 중국음식점에 간다. 소매치기인 강지우가 일행과 도망치다가 윤지우가 백화점 옥상에서 던진 마네킹이 강지우 일행이 탄 차와 충돌하면서 사고가 나고, 뒤쫓아온 형사 민용이 강지우에게 수갑을 채웠는데 윤지우도 일행인 줄 알고 함께 수갑을 채운 뒤에 이런저런 곡절로 밥이나 먹고 가자고 그 중국음식점에 온 것이다. 중국음식점 주인인 민용의 후배는 여자들과 좋은 일이 있을 줄 알고 흑심을 품고서 일행을 극진하게 대접하는데 질펀한 술자리가 될 뻔한 이 자리는 강지우가 술기운을 빌려 자기 과거를 고백하는 분위기로 흐르다가, 나중에는 저 혼자 취한 음식점 주인이 자기 상처를 드러내 주사를 부리는 엉망진창의 상황으로 끝난다. 이야기 전개의 기능적인 차원만 따지자면 이렇게까지 길게 늘어질 필요가 없어 보이는데도 이 장면을 김수현은 긴 분량으로 할애한다. 형사 역의 배우가 텔레비전 시트콤을 통해 알려진 연기자라는 걸 감안하면, 이 장면 이후로 그가 서사에서 어떤 역할도 하지 않은 채 이만 총총 사라지는 것도 황당하다. 영화를 처음 봤을 땐 이런 식의 리듬이 김수현이 스토리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채 정돈하지 못한 탓이라고 여겼다. 두 번째 봤을 땐 이것이 여하튼 김수현식 화법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스토리의 리듬보다는 관계의 반응에 주안점을 두고 연출하는 감독이다. 곧 말하는 사람보다는 듣는 사람, 행동하는 사람보다는 그걸 보는 상대편에게 비중을 두고 연출하며 그 반응이 애초의 화자에게 다시 메아리치는 걸 영화의 동력으로 삼는 연출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방법으로 <창피해>는 비일상적인 방식으로 사랑에 빠지는 두 여자의 궤적을 따라간다.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게 도식화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니다. 강지우는 어릴 적 아버지와 이별한 뒤 관계에서 버림받을 것에 대한 잠재적 두려움이 내재된 여자이다. 윤지우는 남자들에게선 이상하게 만족을 느낄 수 없는, 영화 속 표현에 따르면 이타적 유전자를 지닌 여자다. 고된 백화점 노동으로 살아가던 그녀가 어느 날 자신을 닮은 마네킹을 들고 옥상에 올라가 우아하게 와인 한잔을 들면서 시간을 즐기다가 마네킹을 옥상에서 떨어뜨린 건 빛이 보이지 않는 자기 인생에 대한 유사 자살시도였는지 모른다. 그런 윤지우를 만났을 때 “어머니가 자살하는 것을 보았다”라는 진실인지 거짓말인지 모를 소리를 태연히 하면서 도무지 세상 어떤 일도 자신을 자극하지 않는다는 식의 행동을 하는 강지우에게 끌린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이런 두 여주인공의 심리를 김수현은 소소하게, 반응을 통해서, 섬세하게 축적시킨다. 극적이고 명시적이며 단언적인 묘사와 달리 뭔가 주인공들의 어조와 제스처를 조심스럽게 훔치려는 듯한 연출 때문에 영화는 더디게 진행된다. 그것들이 축적돼 덩어리가 되어간다고 느끼는 중반 이후에 <창피해>는 그녀들의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의 정체를 얼마간은 알게 된 듯한 느낌을 관객에게 준다. 이는 윤지우의 근처에서 어른거리는 정지우와 희진을 통해 얻는 감정이기도 한데, 나이가 좀 있는 여교수 정지우와 대학 신입생인 희진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윤지우에게 호감을 품고 그녀를 관찰한다. 정지우가 윤지우의 상처의 정체를 어렴풋이 알고 보듬는 태도라면, 희진은 윤지우의 색다른 동성애 경험에서 삶의 에너지를 본다. 정지우는 광주학살 때 임신한 채로 죽은 젊은 여자의 사진에서 예술적 영감을 얻어 작품을 구상한 것과 마찬가지로 윤지우에게서 어떤 동질의 슬픔을 보는 것 같다. 희진은 이제까지의 자신의 삶에서 만족하지 못한 어떤 결핍의 활로를 윤지우에게서 본다. 적확히 드러나는 관계 속의 감정선 매혹과 상처가 관계들의 둘레에서 여러 겹으로 싸고 도는 이 영화에서 제목 그대로 ‘창피하다’는 감정은 하나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이다. 사랑 앞에서 자신이 그걸 감당해내지 못하는 건 아닐까, 라는 감정이기도 하고 사랑을 하거나 했다는 것만으로도 자신이 그럴 자격이 있나 우물쭈물해지는 그런 감정이 이 영화에선 창피하다는 감정으로 나타난다. 이런 점에서 <창피해>는 우리가 살면서 겪는 여러 관계들에서 상대에게 감응할 수 있는 감성의 최대치를 열어 보이는 영화다. 톱니바퀴처럼 들쭉날쭉하는 리듬 속에서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며 관객인 나는 간혹 숨이 열리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영화 속 대사에도 나오는, 들숨과 날숨이 똑같은 두 주인공의 상태에 완벽하게 동화되는 것은 아니지만 어쩌다 찾아오는 그들의 들숨과 날숨의 호흡에 완전히 동화됐다고 느낄 때 숨이 열린다는 기묘한 해방감을 얻었다. 이는 희한한 체험이었다. 누가 보더라도 김수현의 재능이 상업적으로 통할 만한 것은 아니다. 그가 꽉 짜인 내러티브에서 자신의 감성과 비전을 펼칠 만한 조건이 만만하게 주어질 것도 아니고, 그만큼 눈밝고 기가 센 프로듀서가 드물기도 하겠지만 여하튼 개인적으로는 그의 재능이 한국영화계에서 보호받았으면 좋겠다. 그는 다른 시각과 감성을 가진 감독이고 자기만의 예술을 한다. <창피해>에서 종횡으로 가로지르는 관계 속의 감성들은 갯벌에 묻혀 있는 게처럼 가끔 발을 내밀어 관객을 찌른다. 특히 이 영화에서 김효진, 김꽃비 등의 주연 여배우들의 클로즈업이 주는 느낌이 무척 좋은데 이건 단순히 숏 크기를 정해서 얻어지는 그런 감흥은 아닐 것이다. 인물들의 등장부터 퇴장까지 이 영화에서 전형적인 순간은 하나도 없다. 그게 인위적으로 보이지 않고 살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 김수현이라는 감독의 재능이 삶과 조응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우리가 늘 닫아놓고 살고 있는 관계의 소통망, 어느 일방으로만 열어놓고 있거나 상투적인 시선으로만 조율하고 있는 틈을 그는 마구 열어놓아 보는 이가 지칠 때까지 밀어붙인 다음 이런 것이 우리 삶의 주변에 있는 아름다운 자취는 아니었겠느냐고 신중하게 묻는다. 그의 만연체 연출 스타일은 삶에 대한 겸손과 대응의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영화진흥위원회 지원작으로 선정, 제작되어 부산영화제에 다행히 출품됐지만 지금으로선 상업적 개봉이 불투명한 <창피해>의 운명을 걱정하면서 김수현의 재능을 좀더 사람들이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이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

이스라엘이 가자지구뿐 아니라 국제영화제까지 공습했다. 이스라엘영화제가 초청자들의 잇단 취소로 곤욕을 치르고 있다. 이미 지난 7월, 가자지구 공습으로 9명이 죽은 참상을 들어 멕 라이언과 더스틴 호프먼이 앞서 열린 예루살렘영화제에 불참을 선언한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영화인들이 이스라엘영화제에 대해 가지는 반감은 유대계 영국인 마이크 리 감독이 불참을 통보하면서 드러났다. 당초 마이크 리 감독은 ‘샘 슈피겔 영화, 텔레비전 학교’에서 진행되는 마스터클래스 강사로 참여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정부의 시민권 수정법안 추진과 관련해 난색을 표했다.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가 이끄는 보수정부가 내린 이 법안은, 비유대인이 시민권을 취득하려면 이스라엘이 ‘유대국가이자 민주국가’임을 인정하고 충성서약을 하도록 규정한 내용이다. 마이크 리 감독은 영화제 주최쪽에 보낸 불참 통보서에 “실망시켜서 미안하다. 하지만 다른 선택은 없다. 갈 수 없고 가고 싶지도 않고, 가지 않을 것이다”라며 팔레스타인계 주민을 겨냥한 인종차별적 법안에 대한 정치적 소신을 밝혔다. 또 지난 5월, 이스라엘 특공대가 가자지구행 국제구호선을 공격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 방문을 취소하지 못한 걸 후회한다며, “좀더 빨리 결정하지 못한 자신이 부끄럽다”고 고백했다.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습을 두고 “어린이를 포함한 무고한 사람들을 끊임없이 사지로 몰아넣는 무자비한 행위”라는 비판을 덧붙인 그는 “팔레스타인과 가자지구 문제가 해결된 이후에 방문 초청에 응할 것”이라고 편지를 맺음했다. 한편, 영화제쪽은 마이크 리의 결정에 대해 ‘현실에 직면하는 대신, 오히려 가장 멀리 달아난 것’이라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올해로 25회를 맞는 이스라엘영화제는 지난 10월20일 이스라엘의 텔아비브에서 개막해 오는 11월4일까지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