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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1997)

[영화읽기] 모럴의 인플레를 헤집다

노천수영과 산책, 침대에서 혼자 눈뜨는 아침. 작전이 실패하자 요원 스마일리는 은퇴했다. 영화는 이 진부하고 고독한 현실에서 시작한다. 영국 첩보국은 민활하기보다 부패와 반응지체 속에 침체되어 있다. 아마도 금세기 들어 가장 격조 있는 스타일을 보여주었을 오프닝에서 첩보국의 서류함이 서서히 올라가듯, 리프트가 참을 수 없이 느리게 내려가듯 그렇게. 영화는 존 르 카레의 1974년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했다. 이야기는 원작보다 10년 정도 뒤인 1970년대 중반의 런던을 배경으로 정보국 내 이중스파이를 색출하는 과정을 따라간다. ‘금속 피로’ 속에서 오래 지속된 냉전은 첩보전의 언저리에 모호한 모럴의 인플레를 만들어놓았다. 영화는 이 침전물을 헤집어낸다. 이 침전물들은 노련한 자의 회고록 문체처럼 낡은 질서와 늙은 유럽에 대한 향수 어린 수사적 은폐 속에 쌓여 있다. 긴장, 의심, 공포, 그들은 피로하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는 영국·프랑스 합작의 첩보영화로 <렛미인>의 감독인 토마스 알프레드슨이 전에 보지 못한 스타일의 첩보물로 연출해냈다. 영화의 제목은 영국과 소련이 벌이는 장기판에서 이중간첩으로 의심되는 자들에게 붙인 닉네임에서 따왔다. 이는 아이들이 숫자를 세며 부르는 영국 동요에서 유래된 것이다. 브리티시 로맨틱코미디로 유명한 워킹 타이틀이 제작사라는 점이 이례적이다. 엘리트 스파이물이라는 수식이 붙을 정도로 영화는 움직임보다 밀도 높은 심리의 흐름을 정교하게 디자인했다. 단서를 주지 않고 현재와 과거를 뒤섞어놓아 사전정보가 없는 관객에게 난해하게 느껴질 수 있다. 두더지(이중간첩), 서커스(첩보국), 컨트롤(영국 첩보국 전직 국장), 칼라(소련 첩보국 국장) 등의 은어가 이해를 방해하기도 한다. 쉽게 생각해서 첩보국의 전 수장인 ‘컨트롤’이 등장하는 장면이 과거라는 점을 알아두면 이해가 쉽다. 긴장의 연속, 의심의 일상화, 공포의 만성화. 이것이 냉전 질서가 모두에게 만들어낸 피로의 핵심이다. 영화는 바람 없이 탁도 높은 먼지 속에 유폐된 듯한 분위기를 잘 만들어냈다. 어디에나 있을 수 있는 것이 스파이고, 바로 옆 사람을 의심해야 하는 것이 스파이며, 때로는 내 안에 그것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정체성의 불안을 만들어내는 것이 스파이다. 이는 냉전의 구성적 요소, 지젝식으로 말하자면 ‘외상적이고 실재적 중핵’이다. 올드유럽의 역사와 전통을 강매하는 방식이, 한편에서 투어리즘이라면 다른 한편에서는 스파이영화다. 냉전은 끝났다. 이후 본 시리즈나 새로운 007 시리즈가 개인의 정체성과 자본의 국경없는 메커니즘을 주제로 삼았으나 이들도 역시 올드유럽의 품격, 저개발국의 엑조틱한 스펙터클, 액션이라는 장르 컨벤션을 보여주고 있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는 스파이물의 기원, 즉 조로아스터적인 이원 세계에 대한 질문을 제기한다는 점(<무간도> 시리즈가 이에 가까울 것이다)에서 기존의 스파이물과 다른 인상을 준다. 비관적 피로감에 찌든 올드유럽의 도덕적 교착을 보여주는 이 영화는 윤리적이거나 이데올로기적 의도가 희박하다는 점에서 냉전시대 진지한 스파이물 내지 프로파간다 선전영화와도 다르다. 선악, 서방과 동구권, 푸른색과 붉은색 어떠한 대조를 갖다대도 이들은 같은 근원에서 나온 쌍둥이 반영상이다. 영화는 응징도, 발견도, 성장도, 보상도 없는 세계를 구성해내는데, 아마도 이것이 오늘날 유럽이 지닌 유일한 미덕이자 매혹일 것이다. 영화는 윤리, 지성, 미학의 혼돈 속에서 각자의 편집증에 빠져들어가는 스파이들의 모습을 그려낸다. 스마일리와 칼라, 바로크적 데칼코마니 스마일리(게리 올드먼), 그는 겉으로 보기에 민첩한 요원은 아니다. 원작의 묘사에 따르면 뚱뚱하고 안경 쓴 그는 말끔한 슈트의 플레이보이형 요원과는 스타일이 다르다. 홈스와 같은 거실형 탐정의 전통에 익숙한 영국인들에게 스마일리 캐릭터는 소설로도, 그리고 텔레비전 시리즈로도 익숙하다. 그는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함을 지닌 사람이다. 오랜 연륜에서 오는 심리적 평정, 독문학에 대한 전문가적 관심, 외도와 난교를 일삼는 아내에 대한 애정은 그의 개성의 핵심을 이룬다. 오프닝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는 한폭의 작은 그림을 바라보고 있다. 그림을 바라보는 장면은 마치 그가 작은 거울을 들여다보는 장면과도 같은데, 그림에는 초상화가 아닌 추상화가 그려져 있다. 그 추상화를 바라보는 것은 앞으로 그가 해결해야 할 미스터리 역시 설명 가능한 구체성을 띤 것이 아님을, 그것이 마치 불투명하고 왜곡이 심한 거울을 바라보는 것과 같으리라는 것을 암시한다. 스마일리는 독문학을 애호하고, 그와 첩보국 내 맞수인 빌 헤이든은 화가이기도 하다. 영화는 벽면 곳곳에 많은 그림들을 채워넣었는데, 이러한 그림들을 추적해가는 것도 영화를 독해하는 하나의 단서가 될지도 모르겠다. 한편 소련 첩보국의 오랜 수장은 ‘칼라’다. 여성형 이름으로 그와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것은 마치 연애의 기억을 더듬는 듯한 착각을 주기도 하는데, 적성국과의 첩보관계를 은밀한 연애의 관계로 은유하는 것은 원작자인 르 카레의 탁월한 솜씨 덕분이기도 하다. 칼라는 강력하고 교활하며, 당에 광신적인 냉혹한 자로 묘사된다. 그의 정체는 신비에 싸여 있다. 1950년대 중반 스마일리는 숙청의 피바람이 불던 러시아로 귀국하려던 칼라의 전향을 설득한 적이 있다. 스마일리는 과거에 칼라를 만났던 일을 술회하면서 홀로 그 장면을 마치 모노드라마 연기하듯 재연한다. 스마일리는 칼라와 자신이 닮았으나 그의 생김새가 기억나지 않는다고 한다. 평범하고 진부한 스마일리와 신비하고 광신적인 칼라의 조합은 역설적이다. 스마일리가 아내에 대한 충성도를 지키듯이, 칼라는 당에 대한 충성을 지킨다. 스마일리와 칼라는 반영된 짝패다. 칼라는 실재하는가? 칼라로 ‘추정되는’ 인물은 영화에서 얼굴 없는 부분신체로만 등장한다. 원작에서의 묘사가 그러하듯이 마치 신부처럼, 잔혹하고 냉정한 인간의 뒷모습으로. 하지만 혹시 칼라는 영국 정보국이 구성해낸 페르소나가 아니었을까. 스마일리가 재연하는 칼라는 실체가 아니라 강력하다고 오인되는 공허는 아니었을까. 냉전은 실체는 확인되지 않으나 반영물을 보고 자신의 실체를 확인하는 기이한 거울놀이를 만들어냈다. 러시아가 영국을 만들고, 적이 나를 만들며, 애국자가 변절자를 반영하고, 평범한 사람이 바로 스파이인 이상한 질서. 다른 한편에는 짐과 빌의 짝패가 있다. 원작에서 빌은 짐에게 ‘제2의 나’라고 하면서, 자신이 그의 메피스토펠리스가 되겠다고 말한다. 스마일리와 칼라, 짐과 빌은 각각 선과 악을 담당하는 듯 보이지만, 추잡한 방식으로 추잡한 전쟁을 수행하는 동안 닮아가고 더이상 윤리적으로 분리되지 않는 바로크적 데칼코마니를 만들어간다. 원작에서 스마일리가 어렵게 구한 그리멜스하우젠의 초판본은 소설의 시작과 끝부분에 두번 언급되며, 이를 통해 내용이 주인공의 전쟁 편력으로 전개될 것이라는 점을 암시한다. 영화는 진행되면서 점점 인물의 관계가 정교화되고 복잡해지며 심리는 보다 편집증적이며 기교적이 된다. 그리멜스하우젠의 <짐플리쿠스 짐플리치시무스>와 영화에 언급된 자크 칼로 판화의 배경은 17세기의 30년전쟁이다. 인유된 작품을 통해 작가는 전쟁이 평범한 사람을 어떻게 만드는지, 폭력이 어떻게 일상화되는지 암시하고 있다. 유럽의 국제관계를 전면적으로 뒤바꾼 30년전쟁은 냉전에 대한 비유가 된다. 그레이엄 그린은 스파이의 일이란 체스처럼 추상적인, 일종의 게임과 같을 때가 있는데 그래서 스파이는 도덕적 가치보다 메커니즘쪽에 더 흥미를 가질 수 있으며, 그 신중한 게임이 매우 정교한 단계에 도달하면 스파이는 본연의 의무를 잊게 된다고 말한 바 있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는 이 게임의 매너리즘적 단계, 정교화가 그로테스크하고 바로크적으로 변질되어 결국 선의 승리와 악의 발견조차 카타르시스를 주지 못하고 피로해져버리고 마는 그 단계를 보여준다. 스마일리는 이중간첩을 색출했고 첩보국에 돌아와 승진했으며 아내는 돌아왔다. 그렇다면 스마일리는 승리했는가? 엔딩에서 그의 표정은 모호하다. 첩보국의 각자는 자신의 평범한 자리로 회귀한다. 권총과 수영복, 활극과 치정의 시대는 지나갔다. 모두 쓸쓸히 홀로, 무기력하고 고독한 일상으로 돌아간다. 여전히 그들은 피로하며 환상은 저 멀리에 있다.

노장이 돌아왔다

수상 리스트 황금곰상 <시저는 죽어야 한다>(Cesare deve morire)/ 파올로 타비아니 & 비토리오 타비아니 은곰상(심사위원대상) <그저 바람>(Csak a szel)/ 베네덱 플리고프 감독 은곰상(감독상) <바바라>(Barbara)의 크리스티안 펫졸트 감독 은곰상(남우주연상) <로열 어페어>(En Kongelig Affære)의 미켈 보에 폴스라르 은곰상(여우주연상) <전쟁 마녀>(Rebelle)의 레이첼 음완자 은곰상(각본상) <로열 어페어>의 니콜라이 아르셀, 라스무스 하이스터버그 은곰상(예술공헌상) <하얀 사슴 평원>(Bai lu yuan)의 촬영감독 루츠 라이트마이어 은곰상(특별상) <자매>(L’enfant d’en haut)의 위르실라 메이에 감독 알프레드 바우어상 <타부>(Tabu)의 미구엘 고메스 감독 노장이 돌아왔다. 제62회 베를린국제영화제 금곰상은 80살을 넘긴 노령의 형제 감독 파올로(80)와 비토리오(82) 타비아니의 <시저는 죽어야 한다>가 차지했다. <스크린 인터내셔널 데일리> 별점 4점 만점에 3.3점으로 선두를 달렸던 크리스티안 펫졸트의 <바바라>는 은곰상인 감독상을 수상했다. 영화제 내내 독일영화의 금곰상 수상을 점치며 설렘을 감추지 않았던 독일 언론들의 실망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래서 이번 금곰상 수상에 대해 현지 언론들은 “정치적이고 실험적인 작품을 선호하는 베를린영화제의 기존 이미지에 반하는 보수적인 선택”이라고 평가하는 분위기다. 일간 <타게스슈피겔>은 “심사위원장인 마이크 리는 69살이고, 이번 상은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까지 거슬러 갔다. 이번 베를린영화제는 노장들의 축제인가?”라고 되물었다. 또 주간 <슈피겔>은 ‘성공적 영화제, 잘못된 수상자’라는 자극적인 제목과 함께 “62회 베를린영화제는 영화제가 갖출 수 있는 것은 모두 갖추었다. 젊고 추진력 강한 영화감독들의 강력하고 정치적인 영화들이 경쟁작에 포진해 있었다. 이 정도라면 칸과 베니스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마이크 리가 주도하는 심사위원회가 보수적으로 수상작을 선정한 것은 유감”이라고 썼다. 황금곰상에 대한 독일 언론의 불평 과연 <슈피겔>의 말처럼 올해 베를린은 뚜껑을 열어보니 예년에 비해 수작이 넘쳤다. 특히 후반부에는 가족 갈등, 집시족에 대한 극우 테러, 아프리카 식민지에 대한 추억, 전쟁과 테러, 혁명과 계몽을 다룬 역사극 등 다양한 주제의 흥미로운 작품들이 선보였다. 영화제쪽은 ‘아랍의 봄’을 모토로 내걸었지만 정작 경쟁작에선 직접적으로 아랍사회와 관련된 작품은 보이지 않았다. 특히 올해 눈에 띄는 걸작들로는 스위스 출신의 위르실라 메이에 감독의 <자매>, 베네덱 플리고프의 <그저 바람>, 포르투갈 미구엘 고메스 감독의 <타부>, 아프리카의 전쟁과 테러를 소녀 군인의 눈을 통해 마술적으로 그려낸 <전쟁 마녀> 등이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보자. 젊고 신선한 감독들의 수작이 넘치는 영화제였지만 타비아니 형제의 황금곰상 수상에 대한 독일 언론들의 불평은 온당한가? 그렇지 않다. 황금곰상의 주인공 타비아니 형제는 이미 1977년 칸영화제에서 <파드레 파드로네>로 황금종려상을 거머쥐며 명성을 날린 바 있다. 하지만 그들은 5년 뒤 칸영화제에서 <산 로렌조의 밤>으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한 이후 국제 무대에서 이렇다 할 작품을 내놓지 않고 있었다. 황금곰 수상작 <시저는 죽어야 한다>는 세미 다큐멘터리 형식을 빌린 영화로 실제 교도소 내 연극 프로젝트를 따라다니며 찍었다. 영화의 대부분이 교도소의 높은 담장 안에서 일어난다. 타비아니 형제는 지난 2월18일 열린 시상식에서 “관객은 중범죄로 갇혀 있는 교도소 수감자들도 인간이고 또 인간으로 남는다는 사실에 대해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고 소감을 밝혔다. 영화에서 수감자들이 무대에 올리는 <줄리어스 시저>는 우정, 배신, 권력, 자유, 의심, 살인까지 인간관계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고뇌와 감정이 집결해 있는 작품이다. <시저는 죽어야 한다>의 대사는 거의 대부분 셰익스피어 연극의 대사로만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영화 속 개개인의 감정상태와 사정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수감자의 개인적 비극과 극중 비극이 겹치면서 전해지는 감정의 깊이와 정도는 대단히 진득하다. 그러니 이 작품에 대한 독일 언론들의 불평은 좀 부당한 면이 있다고 해야겠다. 고전적인 것을 진부하다고 치부할 수는 없다. 노거장 형제가 연극이란 매개체를 통해 보여준 인간 본연의 모습은 심금을 울린다. 헝가리 집시족, 아프리카 10대 소녀… 정치적인 수상작들 이번 수상작 중 베를린영화제가 선호하는 정치적이고 실험적인 영화는 심사위원대상을 차지한 헝가리 출신 베네덱 플리고프 감독의 영화 <그저 바람>과 비전문 배우인 15살 레이첼 음완 자가 여우주연상을 받은 <전쟁 마녀>를 들 수 있다. 두 영화 모두 비전문 배우를 기용한 꾸밈없는 다큐멘터리 분위기로 생생한 현장감을 전해주는 작품들이다. 특히 현재 극우가 득세하고 있는 헝가리의 정세를 생각해보면 영화 <그저 바람>이 다루는 소재의 시의성은 매우 크다. 지난 2008년부터 2009년 사이 실제로 헝가리에서는 극우테러로 인해 집시인 로마족들이 목숨을 잃거나 다쳤다. 영화에서는 주인공의 이웃 가족이 몰살당한다. 카메라는 언제 어디에서 공격당할지 모르는 집시 가족을 아침부터 저녁까지 따라다닌다. 주인공의 표정은 거의 시종일관 무표정하게 굳어 있다. 새벽에 겨우 잠자리에서 일어난 주인공 버디는 늙고 병든 아버지의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아이들에게 등교를 재촉하며 흔들어 깨우고 일을 나간다. 10대 소녀인 딸이 학교에 가는 길, 학교에서의 생활, 아들이 학교에 빠지고 이곳저곳을 헤매는 장면, 버디가 청소부로 고된 하루를 보내는 장면들이 번갈아가며 이어지며 일상 속 차별과 로마족이 처한 빈곤의 실태를 여과없이 보여준다. 영화 속 집시의 모습은 우리의 고정관념에 박혀 있는 춤추고 노래하고 게으른 집시들과 동떨어져 있다. 그들은 그저 안전하게 살고 싶은 인간일 뿐이다. 일간 <베를리너차이퉁>은 “플리고프 감독은 로마족의 시각으로 삶 속에 내재한 위협을 환기시킨다. 위협당하는 자, 쫓기는 자와 함께 자기 길을 간다. 이는 영화 기술에서 최고의 완성이다”라고 격찬했다. 캐나다 출신 킴 응엔 감독의 <전쟁 마녀>는 눈뜨고 볼 수 없는 참혹한 상황을 겪는 10대 소녀의 극한 삶을 그려냈다. 어딘지 모르는 아프리카의 한 마을에 반정부군이 들이닥치고, 주인공 소녀에게 자신의 부모를 죽이도록 강요하고 납치한다. 영화는 주인공 소녀 카모나처럼 납치된 10대 초반 어린이 군인들의 행보를 좇는다. 죽고 죽이는 전투의 강행군 속에서 카모나는 신비의 나무즙을 마신 뒤 죽은 자를 볼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갖게 되고, 반군 우두머리의 ‘무당’이 된다. 영화는 이미 폭력과 테러가 일상생활이 되어 버린 삶에도 인간이 살아갈 힘을 얻어가는 과정을 담담히 그린다. 킴 응엔 감독은 “영화를 찍으며 다시 청소년으로 되돌아간 것 같았다. 일부러 정치적인 요소는 피하고 순수하게 10대의 시각으로만 영화를 찍었다. 그들이 폭력의 실태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를 그렸다”고 말했다. 알프레드 바우어상을 수상한 포르투갈 출신 미구엘 고메스 감독의 <타부>도 영화제 후반부에 호평을 받았던 작품이다. 모두 3부로 이루어진 이 영화는 모든 이야기가 내레이션으로만 펼쳐지는 흑백의 무성영화로, 최근 개봉한 <아티스트>를 연상케 한다. 1부는 정글과 아프리카 식민지 역사에 관한 이야기로 먼 옛날 식민지를 개척했던 남자의 에피소드를 보여준다. 2부는 리스본의 카지노에서 거액을 날리고 숨지는 노파의 이야기다. 3부부터는 점점 더 흥미로워진다. 2부의 주인공인 노파가 젊은 시절 아프리카 식민지에서 낙원처럼 살았던 이야기가 펼쳐진다. 멜로드라마, 슬랩스틱, 사파리, 60년대 밴드가 눈길을 사로잡는 이 영화에 대해 독일 <프랑크푸르터알게마이네차이퉁>은 “영화라는 도구에 대한 시적이고 영리한 흑백영화”라고 호평했다. 이해할 수 없는 남녀주연상 선정 다른 수상작들에 대해서는 현지 언론도 관객도 조금 못마땅한 눈치다. 덴마크 니콜라스 아르셀 감독의 <로열 어페어>는 각본상과 남우주연상을 차지했지만 뭔가 텔레비전 드라마에 가깝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20여년 전 덴마크왕 크리스티안 7세의 이야기를 통해 개혁와 반동의 우화를 보여주는데, 그다지 특별한 점이 없어 보이는 이 영화가 두개의 상을 쓸어간 건 미스터리에 가깝다. 여우주연상과 남우주연상에 대한 불평의 소리도 높다. 개막작 <안녕, 나의 여왕>과 <자매>, 두편의 영화에서 주연을 맡은 레아 세이두와 <제인 맨스필드의 차>에서 열연한 로버트 듀발이 유력했었던 탓이다. 특히 <로열 어페어>의 남우주연상 선정은 현지에서도 이해하기 어렵다는 평이 자자하다. 원래 영화제란 그런 곳 아니겠는가. 모두의 예상을 벗어나는, 어쩌면 영원히 잊히게 될 작품에도 종종 거대한 상이 주어지곤 하는 장소 말이다. 황금곰 파티는 이제 막을 내렸다. 총평을 하자면 전에 없는 성공적인 파티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올해 베를린은 젊고 실험적인 감독들의 발굴에 성공했고, 노장의 귀환을 통해 전통적 영화의 영속성도 확인했다. 또한 전례없이 많은 할리우드 스타들이 대거 출현함으로써 관객몰이에도 크게 성공했다. 예술도 건지고 대중에게 볼거리도 선사한 제62회 베를린국제영화제는 양적으로 성장해도 질적으로 떨어지고 있다는 그간의 평을 무마할 수 있게 됐다. 이런 성공이 내년까지 이어질 수 있기를!

[바르셀로나] 이변은 없다

오스카 시상식과 마찬가지로 큰 이변은 없었다. 지난 2월19일 스페인 시네 아카데미(Academia de Cine)가 주최하는 제26회 고야시상식이 열렸다. 고야시상식은 스페인에서 가장 권위있는 시상식으로, 스페인 영화인의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축제이기도 하다. 엔리케 우르비수 감독의 스릴러 <노 레스트 포 더 위키드>(No habra paz para los malvados)가 14개,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내가 사는 피부>가 16개, 마테오 길 감독의 서부영화 <블랙손>(Blackthorn)이 10개, 그리고 벤디토 삼브라노 감독의 시대극 <더 슬리핑 보이스>(La voz dormida)가 총 9개 부문의 후보에 올랐고, 결국 네 작품이 작품상, 감독상, 주연상 및 신인 남녀배우상까지 골고루 나누어 수상했다. 작품상과 감독상을 수상한 작품은 <노 레스트 포 더 위키드>였다. 몇몇 영화를 빼고 나면 ‘그들만의 잔치’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평이한 시상식이었지만 감상 포인트는 곳곳에 포진해 있었다. 우선, 스페인 시네 아카데미에 뿔이 나 2004년부터 시상식을 등졌던 알모도바르 감독이 <내가 사는 피부>로 몇년 만에 시상식에 참가해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유이스 오마르는 <에바>로 배우 인생 30년 만에 남우조연상을 수상하며 첫 고야상을 차지했고, 97년부터 알모도바르 감독과 꾸준한 작업을 이어가는 한편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로 오스카 음악상 후보에 오르기도 한 알베르토 이글레시아스는 <내가 사는 피부>로 10번째 고야상을 수상해 최다 개인수상자 기록을 세웠다. 올해 시상식장 안팎에서 가장 많이 논의되었던 주제는, 심각한 경제 위기에도 불구하고 좋은 작품들을 배출해낸 스페인 영화계에 대한 ‘자축’, 그리고 인터넷 ‘배급’문제였다. 특히 배급문제는 레드카펫 패션만큼 뜨거운 이슈로 떠올랐다. 시네 아카데미의 회장인 엔리케 곤살레스 마초는 영화제에서 행한 10분짜리 스피치에서 불법 다운로드가 영화 제작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언급하며 “인터넷은 아직 영화계에 경제적인 활동을 지원하는 창구는 아니다”라고 못을 박았다. 하지만 시상식 이후 인터넷 환경과의 ‘공존’을 모색하는 제작사와 미디어들의 움직임은 분주해졌다. <노 레스트 포 더 위키드>의 제작사이기도 했던 방송사 (텔레싱코)는 자사의 유료 다운로드 웹사이트 ‘미텔레’에서 4.72유로에 고화질로 다운받기 프로모션을 시작했고, 유료영화를 상영하는 <카날 플러스>에서는 <내가 사는 피부>와 <블랙손>의 다운로드용 고화질 영상 링크를 공유해 5유로에 관람이 가능하도록 했다. 한편, 2011년 개봉작이었던 수상작들은 3월부터 스페인 전역의 영화관에서도 재상영된다. 올해의 주요 부문 수상작 작품상 <노 레스트 포 더 위키드> 감독상 <노 레스트 포 더 위키드>의 엔리케 우르비수 여우주연상 <내가 사는 피부>의 엘레나 아나야 남우주연상 <노 레스트 포 더 위키드>의 호세 코로나도 여우조연상 <더 슬리핑 보이스>의 아나 와그너 남우조연상 <에바>의 유이스 오마르 신인여우상 <슬리핑 보이스>의 마리아 레온 신인남우상 <내가 사는 피부>의 잔 코르넷 신인감독상 <에바>의 키케 마이요

[박해천의 design+] 최익현씨의 그때 그 시절

해운대 마린시티의 주상복합 아파트 62층, 1940년대 중반 부산에서 태어난 경주 최씨 충렬공파 35대손 최익현(최민식)씨는 거실 창 너머로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다. 그는 지난해 부산에 들이닥친 부동산 열풍 덕분에 또다시 자산 목록을 늘릴 수 있었다. 생애 마지막일지 모르는 기회라 악착같이 달려들었고, 그만큼의 수익을 챙겼다. 그런 그가 지금 아들의 검사 임용 소식을 전해 듣고선, 자신이 경험했던 가난과 궁핍의 기억 맨 끝자락을 떠올리고 있는 중이다. 거기에는 영도 달동네의 방 한칸짜리 집이 버티고 서 있다. 그의 유년기는 6·25 전쟁의 소용돌이가 비켜나갈 정도로 구김살이 없었다. 그의 가족이 거주하던 일식 적산가옥은 외부의 불행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든든한 성채였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고 아버지가 정치를 시작하면서 모든 게 꼬이기 시작했다. 자유당 시절, 야당도 아닌 무소속 간판을 달고 국회의원 선거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연전연패. 땅 문서가 하나둘 사라지더니, 마침내 집도 빚쟁이들 손에 넘어갔다. 그 이후 익현씨의 청춘은 가파르게 내리막길을 걸었다. 영도의 집은 익현씨가 결혼 뒤 처음으로 장만한 것이었다. 이삿짐을 옮기는데 리어카 한대로도 충분했던 부실한 세간이었다. 하지만 익현씨가 밑돈을 꽂아주며 세관에 취직하면서 살림살이는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다. 한쪽 벽면에 허리 높이의 자개농, 덩치만 큰 목재장, 그리고 다리가 달린 캐비닛형 텔레비전이 차례로 자리를 차지했다. 그리고 딸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자 한쪽 벽면을 차지하고 있던 붙박이장의 미닫이문을 떼어내고, 그 자리에 앉은뱅이책상 두개와 책장을 놓았다. 책장에는 어린이용 전집류 책들이 빽빽하게 꽂혔고, 영어회화 카세트테이프가 담긴 가방도 놓였다. 그리고 때묻은 벽지가 드러나는 빈 공간마다 가족사진과 함께 상장들도 줄줄이 붙여졌다. 그 시절 익현씨는 퇴근 뒤 그 상장들을 바라볼 때면 하루의 피로가 일순간에 사라지는 것 같았다. 한편, 이런 집안 풍경과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행색의 전자제품들도 있었다. 익현씨가 세관에서 빼돌린 턴테이블, 포터블 컬러텔레비전, 비디오플레이어, 카세트라디오 등. 이 갖가지 세간들 중 아내가 가장 애지중지한 것은 국산 꽃무늬 전기밥통이었다. 다른 집 부인네들이 환장한다는 코끼리표 밥통을 구해준다고 해도, 한사코 반대였다. 그녀는 스테인리스스틸의 금속 질감이 두드러진 일제 밥통보다는 꽃무늬가 그려진 국산 밥통이 더 정감이 간다는 것이었다. 하긴 지금, 아들 명의로 구입한 이 주상복합 아파트의 주방도 온통 꽃무늬투성이다. 아무튼 영도에 살던 시절, 익현씨는 얼마 뒤 자신이 일확천금의 기회를 잡게 될 것이라는 사실, 가족을 위해 번듯한 이층양옥과 피아트 132를 구입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 뒤로 인생의 반전이 찾아왔고, 지금 그는 부와 권력으로 쌓아올린 조망의 자리에 서서, 옛 기억을 떠올리며 행복감에 빠져들고 있다.

[타인의 취향] ‘퍼펙트 샤인’한 그의 취향

취향은 나의 의지나 의도와 상관없이 다른 이의 영향을 받아 생겨나기도 하는데 나의 경우가 그러하다. 나의 취향은 순전히 ‘퍼펙트 샤인’(perfect shine)한 그의 취향에 맞춰졌다. 그에게 당신의 취향에 대해 조금 설명해달라 했더니 너무 긴 글이 왔다. 먼저 DP 익스트림 폼으로 거품을 만들어 먼지나 때를 불려 부드러운 양모 미트를 이용하여 전체를 닦아낸다. 이때 최대한 깨끗이 닦아야지 잔여물이 남게 되면 나중에 트러블을 일으킬 수 있다. 물로 깨끗이 거품을 씻어내고 Ps21 클렌저로 유분도 제거한다. 톤이 어둡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푸어보이즈 블랙홀을, 밝은 톤이다 싶으면 화이트다이아몬드를 추천한다. 바를 때는 퍼프에 물을 살짝 적시고 손톱만큼 덜어내 펴 발라준 뒤 가볍게 극세사 타월로 닦아낸다. 이제 기본적인 것은 마쳤다. 꼼꼼한 마무리를 위한 다음 단계는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카우나바 성분의 도도쥬스 슈퍼내추럴을 바르는 것인데…. 무슨 얘기인지 아시겠는가? 그는 자신의 몸은 3분 만에 닦으면서 차 닦는 데는 3시간도 모자란 세차 마니아다. 도통 알아듣을 수 없는 약제들과 이해할 수 없는 물품들(플라스틱 광택제- 플라스틱도 광택이 나긴 해?, 타이어 광택제- 차라리 신발 밑창을 닦지 그래?), 종류별 스펀지와 극세사 타월들은 네 박스가 넘는다. 대체 왜 이렇게 많은 게 필요한지 물어보는 나에게 여자들이 화장하는 것과 똑같다는 눈높이 설명을 해줬다. 그래 뭐 우리도 아이크림, 영양크림, 수분크림, 핸드크림, 풋크림을 바르니까 이해해줘야 하는 건가 싶기도 하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오늘도 밤 12시 가까운 시간에 그는 주섬주섬 세차 바구니를 챙긴다. 이젠 주차장에서 우리 차가 제일 깨끗한데 왜 또 세차를 하러 가느냐고 잔소리하지 않고 그냥 책 한권, CD 하나 챙겨 따라나간다. 세차장에 도착하면 그는 그의 취향대로 세차를 하고 나는 나의 취향에 맞는 음악을 튼다. 밖에서 쏴아~ 하고 물을 뿌리면 꼭 비오는 날 같아 음악이 더 맛있게 들린다. 차 안이 주는 아늑함을 느끼며 그동안 인터넷과 텔레비전에 치여 읽지 못했던 책을 펴들고 있노라면 이런 시간도 꽤 즐겁다. 느긋하게 앉아 차닦느라 고군분투하는 그를 관찰하는 것까지.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이젠 나도 타르 제거에 대해 물어보는 팀장에게 어느 브랜드가 좋다며 가격과 사용법까지 설명해주는 수준이 되었다. 운전면허조차 없는데 말이다. 가끔 남편의 유별난 취향에 대해 얘기하면 대체 차종이 뭐냐는 질문을 받는데 우리 차는 지금은 단종된 3년 된 국산차다. 아직도 가끔 주유하러 가면 “아이고~ 새 찬가 보네~”란 소리를 들으니 그의 취향을 인정해줄 수밖에 없다. 덧붙이며 ‘퍼펙트 샤인’은 그의 세차동호회 이름이다. 이름 한번 기막히지 않은가?

파운드 푸티지가 슈퍼히어로를 만났을 때

<크로니클>은 지금 영화를 만드는 세대라면 누구나 한번쯤 생각해봤을 아이디어로부터 시작된 영화다. 만약 <클로버필드>와 <블레어 윗치 프로젝트> 같은 파운드 푸티지 장르의 형식을 지금 할리우드를 휩쓸고 있는 슈퍼히어로물과 접목한다면? 이 아이디어를 실현시킨 사람은 스물일곱 동갑내기인 감독 조시 트랭크와 각본가 맥스 랜디스다. 조시 트랭크는 <스타워즈>의 제다이와 스톰트루퍼가 십대들의 파티에 갑자기 나타난다는 내용의 파운드 푸티지 단편 <레아의 22번째 생일날의 칼부림>(Stabbing at Leia’s 22nd Birthday)으로 유튜브에서 돌풍을 일으킨 바 있다. 다큐멘터리 제작자의 아들로 태어난 조시 트랭크는 “실생활에서 일어날 수 있는 그런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다”고 말한다. “아주 평범하고 현실에 바탕을 둔 이야기로 시작하다가 갑자기 엄청난 일이 일어나는 영화 말이다. 어느 날 여객기를 타고 날아가다 창밖을 봤는데 구름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다 생각했다. 아무런 두려움 없이 내가 저 하늘을 마음껏 날아다닐 수 있다면 어떨까? 친구들과 같이 구름 위에서 축구공을 가지고 놀고 나는 그 모습을 촬영하는 거다. 그러다가 비행기 한대가 날아와 그중 한명을 치고 날아가는 거다. 그리고 문득 나는 그게 영화의 줄거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실 실제 인물들이 촬영한 동영상을 편집해서 보여준다는 형식의 파운드 푸티지는 명백한 한계가 존재하는 장르다. <파라노말 액티비티>가 이 장르를 시리즈화하면서 성공을 거두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파운드 푸티지 영화는 일회성 이벤트에 가깝다. 하지만 파운드 푸티지는 여전히 가능성이 있는 장르다. 특히 조시 트랭크처럼 적은 예산으로 장르영화를 만들고 싶어 하는 감독이라면 파운드 푸티지는 값싼 특수효과를 살짝 가리면서 장르의 관습을 비트는 재주를 발휘하는 데 제격이다. 게다가 유튜브 시대의 젊은 관객에게 파운드 푸티지는 어떤 실험이 아니라 매일매일 눈으로 목도하는 일반적인 영상에 가깝다. 조시 트랭크는 “우리 세대에서만 솟아오르는 뭔가 예술적인 느낌 같은 게 존재한다”고 설명한다. “요즘 고등학생들은 역사상 자기 사진을 가장 많이 찍는 그런 세대다. 이런 분위기에서 영감을 받는 영화들이 점점 더 많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자, 이쯤 되면 이 영화의 제목이 무슨 의미인지 영어사전에서 가장 적당한 말을 찾을 수 있을 거다. ‘크로니클’은 ‘기록’이라는 의미이며, <크로니클>은 일상을 기록해야 한다는 유튜브 세대의 강박관념에 대한 슈퍼히어로 영화다. 그런데 <크로니클>이 지금까지의 파운드 푸티지 장르영화들과 상당히 다르다는 사실 역시 꼭 지적하고 넘어가야 한다. 물론 영화는 앤드류가 들고 다니는 HD카메라에 기록된 영상을 주요 소스로 활용하고, 클라이맥스로 가면서 CCTV 화면과 TV 뉴스 화면을 함께 버무려넣는다. 그러나 <크로니클>에는 <클로버필드> 같은 영화들이 유튜브 시대의 리얼리티에 다가가기 위해서 구사한 거친 핸드헬드의 미학이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감독은 영화의 주인공인 앤드류가 염력의 소유자라는 걸 장르적으로 활용한다. 앤드류는 염력을 이용해 24시간 내내 카메라가 자신의 주위를 맴돌면서 모든 상황을 기록하게 만든다. 특히 시내 한가운데서 빌딩과 빌딩 사이를 날아다니며 벌이는 클라이맥스의 카메라 움직임은 <크로니클>이 파운드 푸티지 영화라는 것조차 잊어버리게 할 정도로 안정적이다. 조시 트랭크 감독은 “다큐멘터리 형식을 빌린 일반적인 영화들과 많이 다르다. 정교하게 계산된 방식의 촬영을 원했다”고 말한다. 주인공이 염력으로 카메라를 움직이며 모든 장면을 기록한다는 설정 자체는 작위적이지만, 클라이맥스로 가면서 관객은 작위적인 설정 자체를 잊어버리고 전통적인 액션영화처럼 <크로니클>을 즐기게 된다. 뭔가 아귀가 맞지 않는 수법 같지만 의외로 효과는 자연스럽다. 어쩌면 우리는 이걸 파운드 푸티지 장르의 새로운 진화상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시네필 세대와 유튜브 세대의 근접조우 재미있는 건 <크로니클>이 유튜브의 시대정신을 슈퍼히어로 장르와 결합하고 파운드 푸티지 장르 자체를 비트는 이중의 서커스를 벌이면서도 동시에 꽤 고전적인 장르영화이기도 하다는 사실이다. 특히 <크로니클>은 70∼80년대 할리우드 선배들의 장르영화에 꽤 많은 빚을 지고 있다. 장르 팬이라면 이 영화를 보면서 브라 이언 드 팔마의 <캐리>(1976)와 <전율의 텔레파시>(1978),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스캐너스>(1981)를 거의 본능적으로 떠올릴 게 틀림없다. 슈퍼히어로 장르가 지금처럼 발화하기 이전, 70년대와 80년대 장르영화들이 ‘슈퍼파워’를 다루는 방식은 훨씬 더 어두침침하고 무시무시했다. 드 팔마와 크로넨버그가 염력을 가진 주인공들을 다룬 방식을 떠올려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 시절 엑스맨들은 블록버스터의 병기가 아니라 호러장르 속 괴물이었다. <크로니클>의 감독 조시 트랭크와 각본가 맥스 랜디스는 자신들이 쓰고 연출한 영화가 어떤 선배들의 유산으로부터 출발했는지 잘 이해하고 있으며, 선배들의 유산을 이 새로운 형식의 영화에 적절하게 집어넣는 데도 근사하게 성공한다. 특히 각본가 랜디스가 <애니멀 하우스>(1978)와 <런던의 늑대인간>(1981)을 만든 존 랜디스 감독의 아들이라는 걸 한번 생각해보시라. 두 사람은 ‘스필버그 제너레이션’이라 불릴 법한 새로운 세대의 감독들이다. 블록버스터 시대가 개막하면서 모든 게 PG13등급의 공장생산 오락거리로 추락하기 전, 70년대 중반과 80년대 초반까지의 할리우드 장르영화들은 아메리칸 뉴시네마 이후의 이글이글한 에너지를 여전히 품고 있었다. 그런 영화들을 어린 시절부터 몸으로 체득한 세대가 지금 막 할리우드의 중심부로 진입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조시 트랭크의 말을 들어보라. “내가 큰 영향을 받았던 <스타워즈>와 <에이리언>, 그리고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들에서 보았던 모든 것들을 영화에 등장시키고 이렇게 말하는 거다. ‘좋아. 이제 이 모든 것들이 진짜 내 주변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 되는 거야!’라고 말이다.” 어쩌면 <크로니클>은 스필버그와 동료들이 쏟아냈던 장르영화를 바이블로 삼는 80년대생이 내놓은 첫 번째 스튜디오 장르영화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66년생인 J. J. 에이브럼스보다 훨씬 더 젊은 세대가 발화를 시작한 것이다. <크로니클>을 설명하면서 한 가지 더해야 할 키워드는 오토모 가쓰히로의 <아키라>다. <아키라>는 <공각기동대>와 함께 서구의 팝컬처에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끼친 80년대 일본 만화다. <아키라>의 오토모 가쓰히로는 당시 아즈마 히데오, 다카노 후미코 등의 새로운 작가군과 함께 일본 만화계에 등장했다. 이 새로운 세대는 당대의 유럽과 미국 코믹스로부터 받은 영향력을 전통적인 일본 만화의 문법과 버무림으로써 일본 열도에 머무르던 ‘망가’를 국제적인 예술로 진화시켰다. 특히 오토모 가쓰히로의 <아키라>와 (일종의 <아키라> 프롤로그라고도 할 수 있는 단편) <동몽>은 제임스 카메론 같은 할리우드 감독들에게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크로니클>은 사실상 <동몽>, 혹은 <아키라>의 첫 번째 실사 극장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초능력을 갖게 된 평범한 인물이 결국 힘을 이기지 못해 폭주하자 같은 능력을 가진 인물이 이를 막아세우려고 노력한다는 이야기는 물론, 당대 젊은이들이 사회에 느끼는 근원적인 분노를 초능력이라는 매개를 통해 표현하는 방식도 <아키라>를 쏙 빼닮았다. 아니나 다를까, 주연배우 중 한명인 마이클 B. 조던은 “촬영 전 조시 트랭크 감독이 <아키라>를 권했다”고 말하고, 조시 트랭크 역시 주인공인 앤드류를 “나의 미국판 데츠오(<아키라>의 주인공)”라 불렀다고 고백한다. 어떤 면에서 <크로니클>은 일본 만화의 영향력 속에서 태동한 거대로봇물을 최초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이식했던 <트랜스포머>를 떠올리게 만드는 데가 있다. 지금의 할리우드 시스템은 젊고 재능있는 감독이 자신의 비전을 당차게 밀어붙여 SF, 판타지영화를 만드는 걸 거의 허락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계획되고 검증되어 마모된 채 시장에 나온다. 가끔 극적인 일도 생긴다. 젊은 감독의 1200만달러짜리 저예산 장르영화가 스튜디오 시스템의 도움을 받고 세상에 나와 관객과 평론가들을 동시에 매혹시키는 그런 일 말이다. 조시 트랭크의 <크로니클>은 (신성모독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그냥 말해보자면) 스티븐 스필버그가 스물여덟살에 <죠스>를 만들었을 때, 제임스 카메론이 서른살에 <터미네이터>를 만들었을 때를 떠올리게 하는 데가 있다. 어리고 야심만만한 감독들이 익숙한 장르의 법칙 속에서 이야기, 캐릭터의 힘과 아이디어로 불멸의 상업영화를 만들었던 옛 시절 말이다. 파운드 푸티지와 슈퍼히어로 장르를 결합하고 70~80년대 장르영화의 유산과 일본 팝컬처의 영향력을 버무려넣은 <크로니클>은 시네필 세대와 유튜브 세대의 제3종 근접조우다. 그리고 조시 트랭크는 이제 겨우 스물일곱살이다.

[유운성의 시네마나우] 지금, 이곳에 찾아온 고요한 종말

영화가 종말의 광경을 상상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여기서 종말이란 말 그대로 세상의 끝, 인간이 사라지고 역사가 중단되는 순간이다). 중요한 건 대체 그 종말의 광경을 영화로 불러들이려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인류 멸망의 위기를 소재로 삼은 영화들의 목록을 굳이 꼽아보지 않더라도- 만약 그렇다면 제법 긴 목록이 될 것이다- 종말은 대개의 경우 지금/이곳의 풍경을 바라보는 우리의 범용한 감각을 문제삼기 위해 스크린에 호출된다는 걸 깨닫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즉 ‘종말영화’를 지탱하는 건 무엇보다 현재에 대한 감각의 문제인데- 이런 영화들이 시간이 좀 지나고 나면 곧 시대착오적으로 느껴지는 건 바로 이 때문이다- 오히려 이런 영화를 보는 이들은 그 영화가 경이의 스펙터클로 그려내는 대상(외계인 침공, 소행성, 환경 재해)이나 그 안에서 펼쳐지는 인간관계의 드라마나 그도 아니면 정치사회적 암시(냉전, 포스트 9·11)에 관심을 집중하게 된다. 이는 관객의 탓이라기보다 어느 정도 ‘종말영화’의 특성에서 기인하는 것이기도 한데, 종종 이들 영화는 범용한 감각을 문제삼기 위해 불러온 일련의 특별한 사건들을 영화의 중심에 두고 특별하게 다루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임박한 종말에 너무 호들갑스럽게 대응하는 경향이 있다(가장 한심한 사례는 임박한 종말에서 인류를 구원하겠다며 달려드는 영웅들이 등장할 때다. 최근 영국영화에 풍성함을 더하고 있는 재기 넘치는 장르영화들 가운데 조 코니시의 <어택 더 블록>(2011)은 그런 식의 종말영화를 통렬하게 풍자한다). 지난해 베니스영화제에서 첫 공개되었지만 여태 미국에서조차 개봉되지 않은 아벨 페라라의 신작 <4:44 라스트 데이 온 어스>는, 임박한 103종말을 지금/이곳의 광경을 반추하기 위한 가설적 조건으로 적절히 활용하면서 오늘날의 각종 전자적 스크린의 풍경에 대한 담담한 사색을 가미한 특별한 작품이다. 페라라의 또 다른 SF영화 <바디 에이리언>(1993)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적은 예산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의 주요 무대는 주인공 연인(윌렘 데포와 페라라의 실제 연인인 섀닌 리)이 거주하는 뉴욕 이스트사이드의 옥탑방에 한정되어 있다. 오존층 파괴로 인해 이튿날 새벽 4시44분이 되면 지구 종말이 예고된 가운데, 영화 속 두 연인은 그 어느 때와 다를 바 없는 하루를 보내고 있다. 이들의 외부와의 소통은 거의 전적으로 여러 전자적 스크린에 의해 매개되고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대단히 경이로운 장치들은 아니고 저명인사들의 인터뷰나 뉴스가 방영되고 있는 텔레비전, 아이패드의 유튜브 동영상, 웹캠이 장착된 노트북의 스카이프를 통한 화상통화 등 일상적인 것들이다. 페라라가 이 고요한 종말의 풍경을 관찰하면서 특별히 과거 영화에 대한 향수나 전자적 스크린의 시대에 대한 혐오를 내비치진 않는 것 같다. 다만 세상에 임박한 종말이라는 가설적 상황의 힘을 빌려오되 그것을 철저히 이야기의 배경으로만 삼음으로써 오히려 너무나도 평범하기에 눈에 띄지 않을 법한 지금/이곳의 풍경- 예컨대 여기서 뉴욕은 페라라의 어떤 영화에서보다 더욱 생생한 일상의 풍경으로 다가온다- 에 윤곽과 색채를 더하고 관객에게 그것을 감각하게 만드는 식이다. <4:44 라스트 데이 온 어스>는 페라라가 여전히 자신의 영화적 뿌리를 인디영화에 두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이자 현재적인 것에 대한 감각을 소중히 여기는 진정 시네마토그래픽한 종말영화의 드문 사례 가운데 하나다.

[김중혁의 No Music No Life] 뽕끼 한 방울의 환각작용

얼마 전 몇몇 사람들과 술을 마시다가, 태어나서 처음 본 콘서트가 화제에 올랐다. 그 자리에는 1970년생부터 1981년생까지의 남녀가 모여 있었는데, 처음으로 본 콘서트가 어떤 것인지로 세대와 지역을 짐작할 수 있었다. 1970년생인 친구가 처음 본 공연은 들국화였다. 한살 차이가 나는 후배는 장필순이었고, 더 어린 남자 후배 한명은 이치현과 벗님들이었고(겉늙은 거야!) 가장 나이 어린 여자 후배는 김건모였고, 나보다 두살 어리고- 어리다고 해도 올해 나이 마흔!- 서울 근교에 살던 여자 후배가 처음으로 본 콘서트도 김건모였다. 내가 맨 처음 본 게 어떤 공연이었더라 잠깐 생각하다가 “아마 롤러코스터였을걸”이라고 하자, 1970년생이자 나와 같은 지역에서 태어나 현재는 작가로 활동 중인 친구가 곧바로 수정해주었다. “너 들국화잖아.”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같이 보러 갔잖아.” 아, 그랬나? 그랬구나. 생각해보니 그랬던 것 같다. 기억력이 형편없는 사람이 기억력 좋은 친구와 함께 있다보면 이런 수모를 자주 당하게 된다. 공연장은 대구의 실내강당 같은 곳이었던 것 같고, 주옥같은 들국화의 히트곡과 함께 ‘홀리스’와 ‘스틱스’의 노래를 들었던 것 같고, 전인권의 목소리가 참으로 찌릿찌릿했던 것 같다. 정확한 기억은 아니다. 친구는 어찌나 기억력이 좋은지 “그때 앙코르곡으로 <제발>을 불렀어. ‘제발 그만해 둬. 나는 너의 인형은 아니잖니.’ 가사가 앙코르곡으로 딱이잖아.” 들국화는 그때 이미 브로콜리 너마저의 <앵콜요청금지>를 노래로 실천하고 계시었구나. 그 많은 공연을 누가 다 보나 지방에 살면서 뮤지션들의 공연을 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겠지만 어지간한 거물급 뮤지션이 아니면 지방 순회 공연에 나서기가 힘들고, 지방으로 온다고 해도 큰 도 시 위주로 열리니 지방의 소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공연을 본다는 건 문화적인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서울에 와서 가장 놀랐던 것 중 하나는 매주 수많은 장소에서 수많은 공연이 펼쳐지고 있다는 거였다. 홍대 거리에 붙은 포스터를 보면서 저렇게 많은 공연을 누가 다 보러 가나, 싶었는데 막상 공연장에 가보면 늘 사람들이 많았다. 이 사람들은 다들 어떤 이유로 이 공연을 선택하게 된 것일까. 그게 늘 궁금했다. ‘붕가붕가레코드’의 곰사장은 한 강연에서 음악의 세계로 뛰어들게 된 계기가 고향 제주도에서 본 공연 때문이라고 했다. 제주도까지 찾아온 노브레인과 크라잉넛의 공연을 본 중학생은 꿈을 키워 음반제작자가 되었고 ‘장기하와 얼굴들’을 비롯한 수많은 뮤지션들의 앨범을 세상에 내놓을 수 있었다. 책 한권이 어떤 사람을 작가로 만들고 영화 한편이 어떤 사람을 감독이나 배우로 만들 듯, 한 시간 남짓의 공연이 수많은 사람들을 뮤지션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우리 세대가 들국화 공연을 보면서 꿈을 키웠듯 다음 세대는 노브레인, 크라잉넛을 보며 꿈을 키웠고, 또 다음 세대는 새로운 뮤지션들의 공연을 보면서 새로운 꿈을 꾸게 될 것이다. 고등학생 때 본 들국화 공연은 요즘과는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장소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서울에서 열린 들국화 공연은 분위기가 달랐을까- 모두들 좌석에 앉아서 사이좋게 박수를 치던 장면을 떠올리면 건실한 종교집단의 부흥회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그런 분위기로 들국화의 노래를 들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전인권이 아무리 “행진”이라고 외쳐도 우리는 의자에다 엉덩이를 딱 붙인 채로 박수 치며 따라부르기만 했던 것이다. 요즘 홍대 클럽의 록 공연장에 가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을 느낀다. 일단 공연이 (어지간히 비트가 빠른 음악을 하는 그룹이라면) 대부분 스탠딩인 데다가 관객의 반응도 격렬하다. 음악에 맞춰 정신줄을 놓고, 정신줄과 함께 관절의 줄도 놓으면서 미친 듯이 흔드는 걸 보면 보는 사람의 마음까지 짜릿할 정도다. ‘프레드페리 서브컬처 뷰직 세션 2012’의 2월 공연이었던 ‘텔레파시’와 ‘고고스타’의 공연을 보면서 새로운 세대의 몸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텔레파시의 무대도 좋았지만 (특히 새 보컬 정우진의 매력적인 목소리가 귓속에 또렷하다) 이날 공연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고고스타였다. 고고스타의 음악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하다. 디스코와 록을 섞은 다음에 (이런 표현이 어떨지 모르겠지만) 기묘한 ‘뽕끼’를 한두 방울 떨어뜨린 게 고고스타의 음악이다. 디스코가 기본에 깔려 있는 그룹이어서 공연장의 분위기는 흥겹지 않을까 예상했는데, 웬걸, 이런 난장판이 없다. 몸을 부딪쳐가며 아슬아슬하게 뛰어노는 ‘슬램’은 기본이고 간단한 원을 만들고 그 안에서 뛰어노는 ‘서클 핏’으로 분위기를 끌어올리더니 관객 한명을 무대 위로 올리기까지 했다. 이 정도면 거의 헤비메탈 그룹의 공연장이다. 나는 차마 그 속으로 들어가지 못했지만 (들어갔다가는 10분 안에 뼈에 금가거나 코피 흘리면서 끌려나왔을 거다) 맨 뒤에 서서 고고스타의 무대와 슬래머들의 신나는 무대를 함께 보는 게 즐거웠다. 젊음이라는 조커 브이제잉 영상은 플레잉카드(트럼프)의 디자인을 기본으로 한 게 많았는데, 날뛰는 슬래머들의 역동적인 모습과 텀블링을 곁들이며 무대를 뛰어다니는 보컬 이태선의 모습과 플레잉카드의 그래픽은 한 세트처럼 잘 어울렸다. 그 장면은 마치 자신의 패를 믿고 전 재산을 판돈으로 밀어넣는 무모한 카드 게임 같았다. 아니면 자신의 패는 보지도 않고 올인하는 무모한 카드 게임 같았다. 그들이 그러는 데는 이유가 있다. 젊음이라는 조커를 들고 있으니까, 이대로 모든 걸 불살라버려도 다시 땔감을 모으고 불을 지필 수 있는, 시간이라는 게 있으니까. 슬램을 하면서 공연장을 누비던 젊은이들 중 누군가는 뮤지션이 될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작가가 될지도 모르고, 또 누군가는 음반제작자가 될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슬램을 하다 다쳐서 병원에 입원하는 바람에 상실감에 빠지고, 심심해서 잡은 책에 몰두하여 공부에 전념하게 되고, 에잇 이렇게 된 거 공부나 열심히 해야지 생각하고는 계속 공부하다 덜컥 고시에 패스하는 바람에 판사가 될지도 모른다(앗 이것은 ‘비대위’ 김원효식 과대망상!). 한 30년쯤 지나서 우연히 그들이 다시 만났을 때 2012년 고고스타의 공연을 추억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들은 어떤 식으로 2012년의 공연을 기억할까. 자세히 기억 못하는 나 같은 사람도 있을 테고, 그때가 정말 좋았지 요즘 음악은 전부 이상해, 라며 세월을 한탄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아무래도 상관없다. 사소하지만 결정적인 시간의 기억 세월을 보내고 나이를 먹으며 우리가 쌓아가는 것은 돈이나 명예가 아니라 ‘사소하지만 결정적인’ 몇 시간의 기억이다. 밤을 꼴딱 새우며 책을 읽었던 시간들, 처음으로 가본 콘서트장에서 10분처럼 지나가버린 두 시간, 혼자 산책하던 새벽의 한 시간. 그 시간들, 그리고 책 속, 공연장, 산책길처럼 현실에 있지만 현실에서 살짝 어긋나 있는 공간에서 우리는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생각하게 된다. 기억하든 기억하지 못하든 그 시간과 공간이 쌓여 우리가 좀더 풍성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고고스타의 <쇼윈도>라는 노래에는 이런 가사가 나온다. ‘We are crazy but not rude’. 번역하자면, 아마도, ‘우리는 미쳤지만 무례하지는 않아’일 것이다. 2012년 고고스타의 공연장에서 나는 그 말을 떠올렸다. 그들은 모두 미쳐 보였지만 서로에게 무례하지 않았고, 모두 정신줄을 놓은 것 같았지만 먼 훗날 이 순간을 또렷하게 기억해낼 것이다.

기대하라 <해리포터>의 왕좌를 탈환하리니

예년이라면 평범한 수준의 애니메이션 혹은 중박을 기대하는 액션 스릴러를 개봉하며, 곧 시작될 블록버스터 시즌을 위해 숨고르기 중이었을 3월 넷쨋주 극장가를 두고 할리우드는 지금, 촉각을 곤두세우는 중이다. <헝거게임: 판엠의 불꽃>(이하 <헝거게임>) 때문이다. <헝거게임> <캣칭 파이어> <모킹재이>로 이어진 수잔 콜린스의 3부작 소설 중 첫편을 영화화한 <헝거게임>은, 2009년 라이온스게이트에서 4부작 프랜차이즈로의 제작을 발표했을 때부터 쏟아진 관심과 열기를 2012년 영화의 개봉까지 고스란히 끌고 온 화제작이다. 원작이 2300만부 이상 팔려나간 베스트셀러라는 점도 기대의 주범이었지만, 그보다 독자의 대부분이 젊은 여성층이며 소설에서 여주인공을 사모하는 두 남자가 있다는 점 때문에 <헝거게임>은 처음부터 <트와일라잇> 시리즈와 빈번하게 비교됐고 그러한 비교는 이 영화에 대한 기대를 높이는 데 단단히 한몫했다. 쏟아지는 기대로만 따져도 <헝거게임>은 제2의 <트와일라잇>은 물론이고, 한동안 번성했던 프랜차이즈 영화가 소강상태에 이른 지금, <해리 포터> 시리즈가 비운 왕좌를 노리는 신성이기도 하다.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SF장르로 분류되겠지만 액션, 어드벤처, 드라마, 로맨스 등 다양한 장르가 결합된 이야기에, 리얼리티 TV쇼에 대한 현대인의 과도한 애정과 99%와 1%가 대립하는 미국, 혹은 전세계의 현실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현실적인 면모도 가지고 있다. 영국의 <텔레그래프>가 <헝거게임>을 “우리 시대를 위한 단 하나의 SF영화”라고 호평한 데에는 현실과 공명하는 이야기의 매력이 클 것이다. <헝거게임>은 미래의 디스토피아 판엠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반복된 전쟁을 마치고 마침내 독재정권을 통해 안정에 이른 이 나라는 해마다 ‘헝거게임’이라는 이름으로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행사를 벌인다. 수도인 캐피톨을 제외한 12개 구역에서 12살 이상 18살 이하의 남녀를 1명씩 제비로 뽑아 게임에 출전시키는데, 이 게임에 출전하는 24명의 트리뷰트들은 단 한명이 살아남는 그 순간까지, 다시 말하면 23명이 죽을 때까지 싸워야 한다. 그리고 그 사투는 텔레비전을 통해 판엠의 구석구석에 24시간 생방송된다. 주인공 캣니스 에버딘(제니퍼 로렌스)은 제비뽑기에서 뽑힌 여동생 프림로즈를 대신해 12구역의 트리뷰트로 자원한 소녀다. 캣니스와 함께 12구역에서 뽑힌 소년은 피타(조시 허처슨)라는 동갑내기로, 둘은 캐피톨로 불려가 생존을 위한 기본적인 상식을 배우고, 전투훈련을 받으며 출전을 준비한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닦여지고 꾸며져서는 자신들을 후원해줄 사람들에게 매력을 발산하는 일이다. 사람들은 방송을 통해 보여지는 트리뷰트들의 정보를 수집해 승부에 베팅을 하고 후원금으로 비상식량이나 물 등을 보내줄 수 있다. 인기가 많을수록 생존 확률이 높아지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확률의 신이 언제나 너의 편이기를.” 영화에서 헝거게임에 출전하는 트리뷰트들에게 캐피톨 사람들이 후렴구처럼 덧붙이는 말이다. 당사자들에게는 신의 가호라기보다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에 가깝게 들릴 것이 분명하다. 라이온스게이트가 <헝거게임> 3부작을 영화화한다고 발표했을 때, 사람들은 같은 마음으로 행운을 빌었을지 모른다. 원작을 각색해 영화로 만드는 일이 쉽지 않을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경기장에 갇혀 서로 죽을 때까지 싸운다는, 절대로 각색되거나 윤색될 수 없는 원작 속의 기본 설정은 첫 번째 관건이었다. 영화에서 그려낼 폭력의 수위에 따라, PG-13등급에서 멀어질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고, PG-13등급이 보장되지 않으면, 박스오피스에서의 수익도 기대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원작의 인기에서 비롯된 엄청난 관심이었다. “<헝거게임> 초보자를 위한 안내서”, “<헝거게임> 영화에 우리가 바라는 8가지” 등 영화화 소식이 발표되기 무섭게 팬사이트는 기대와 우려로 넘쳐났다. 하지만 무엇보다 큰 걸림돌은 사람들이 이미 <헝거게임>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사실 <헝거게임>의 테마들은 관객 입장에서는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었다. 사람들은 <헝거게임> 속 캣니스와 피타, 게일(리암 헴스워스)이 이루는 삼각관계를 놓고 <트와일라잇> 시리즈와 비교했고, 죽을 때까지 싸운다는 플롯을 두고는 후카사쿠 긴지의 <배틀 로얄>을, 리얼리티 TV쇼에 대한 접근에서는 스티븐 킹의 <런닝맨>을, 경기장인 숲에서 아이들이 드러내는 잔인성을 두고는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을 거론하면서까지 비교를 멈추지 않았다. 캣니스의 시점에서 서사가 진행되기 때문에 두드러졌던 원작의 소녀적인 감성도 영화관을 찾을 다양한 관객층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는 변형되어야 할 과제로 꼽혔다. 개봉 전부터 달아오른 <헝거게임> 원작 팬들 결과부터 말하면, 영화는 소설을 충실하게 반영했으며 효과적으로 각색했다. 영화의 상영시간은 소설의 전개를 따라 할당되었고, 중요한 대사나 장면들을 생생하게 살려냈다. 각색은 원작자인 수잔 콜린스가 맡았는데, 원작에서는 그려지지 않았던 게임의 통제실 장면이나 대통령인 스노우(도널드 서덜런드)의 장미정원 장면 등이 추가되면서, 다양한 각도에서 이야기를 조명하는 것 역시 성공했다. 또한 생존본능이 투철한 전사와 사랑과 분노의 감정을 구분하지 못하는 소녀 사이를 오가는 캣니스의 독백에서 벗어남으로써 다양한 관객층이 즐길 수 있는 영화로 탈 바꿈했다. 소설에서 캣니스가 자신의 모습이 카메라에 어떻게 비쳐지고 있을 거라고 상상했던 장면들이, 영화에서는 실제로 TV화면의 클로즈업이나 그 화면을 보는 사람들의 반응숏으로 이어지는데, 관객은 그 장면들을 통해 영화가 아닌 헝거게임을 구경하는 관중이 된 듯한 느낌을 받을 것이고, 영화에 한층 몰입하게 될 것이다. 콜린스는 완성된 영화를 보고 자신의 페이스북에 “책과 영화는 각각 독립적인 작품인 동시에,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완성했다”며 흡족한 마음을 전했고, 글로 묘사된 판엠을 시각적으로 구현해낸 제작진에 공로를 돌렸다. 영화의 연출은 <플레전트빌> <씨비스킷>을 만든 게리 로스 감독이 맡았다. 로스 감독은 <헝거게임>의 제작이 발표된 뒤로부터 1년이 지난 2010년에 감독으로 호명됐는데, 그는 영화화 소식이 발표되자마자 제작자와 연락을 취하고, 영화에 대해 공부하고 준비하는 등 적극적으로 감독 자리를 얻기 위해 로비를 했다고 알려졌다. <헝거게임> 원작 소설을 10대인 그의 두 아이들로부터 소개받은 뒤 이야기에 푹 빠진 로스는, <헝거게임>만큼은 프로덕션 디자인까지 세세하게 설정한 스토리보드를 만들어 오디션을 준비했다. 프로듀서인 니나 제이콥슨의 마음을 움직인 결정적인 계기는 로스 감독이 직접 소설의 팬들과 만나 <헝거게임>에 대해 나눈 대화를 촬영해온 다큐멘터리 영상 때문이었다고 한다. “게리는 <헝거게임>의 팬들과 책의 어떤 점이 좋았는지를 이야기하는 비디오를 가지고 왔다. 영화는 이미 그 대화 안에 다 있었다. 게리는 처음부터 캐릭터와 테마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아이들과 앉아서 이야기를 나눌 만한 감성을 가진 사람이었다.” 하지만 <헝거게임>이 관객을 사로잡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이유는 캣니스 에버딘을 연기한 제니퍼 로렌스일 것이다. 스탠리 투치, 엘리자베스 뱅크스, 레니 크래비츠, 도널드 서덜런드 등 화려한 조연 캐스팅도 돋보이지만, 상영시간의 90% 이상 등장하는 제니퍼 로렌스야말로 <헝거게임>의 꽃이다. <윈터스 본>에서 로렌스가 연기한 리 돌리와 여러 면에서 비슷한 캣니스는 지혜롭고 총명한, 최근 영화나 TV에서는 만나기 힘들었던 영웅으로, 그동안 영웅을 기다려온 관객의 목마름을 씻어주기에 충분한, 매력적인 캐릭터다. 제니퍼 로렌스에 따르면, “내가 이 영화를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캣니스가 자신의 남자친구가 누군지를 고민하기보다는 생존과 혁명에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어째서 로렌스만의 즐거움이겠는가? <토털필름>은 로렌스를 두고 “제대로 과녁을 겨냥한 명사수”라고 감탄했으며, 영화에 대해서는 “놀라운 점은, 촌스럽지 않다는 점이다. 싸구려 특수효과도, 군더더기가 많은 대사도, 발연기도 없다. <트와일라잇>이 아니다”라고 평해, 꾸준히 이어진 <트와일라잇> 시리즈와의 비교에 마침표를 찍었다. <스크린데일리>는 “카메라는 로렌스의 표정, 표현, 제스처 하나라도 놓칠세라 접착한 듯 따라다니며, 관객의 시선을 붙든다”고 호평했고, <할리우드 리포터>도 로렌스를 두고 “소설에서 나온 듯”한 “이 영화의 별”이라고 추어올렸다. <트와일라잇> 시리즈 뛰어넘을까 인터넷 뉴스들이 전하는 업계 소식은, <헝거게임>의 첫주 개봉성적을 최소 7천만달러에서 최대 1억달러까지로 예상하고 있다. 이에 더해 온라인 티켓예매사이트 '판당고' (Fandango.com)는 <헝거게임>의 사전 예매율이 <트와일라잇: 이클립스>가 2010년에 수립한 최고 사전 예매기록을 경신한 83%에 이른다고 발표했다. 상영횟수로만 따지면 2천회에 이르는 영화표가 영화가 개봉하기도 전에 매진된 것이다. 뜨겁게 달아오른 기대에 발맞추어 프랜차이즈 제작 계획도 순풍을 만났다. 현재 2편인 <캣칭 파이어>는 <슬럼독 밀리어네어>와 <127시간>의 각본을 쓴 사이먼 보포이가 각색을 맡아 작업 중이며, 게리 로스 감독도 2편의 메가폰을 잡기로 결정했다. 이에 앞서 제니퍼 로렌스, 조시 허처슨, 리암 헴스워스, 우디 해럴슨 등 주요 배우들이 앞으로 만들어질 세 영화에 모두 출연하기로 도장을 찍은 것은 물론이다. 새로운 프랜차이즈의 탄생이고 영리한 엔터테인먼트의 귀환이다.

[김영진의 인디라마] 화면에서도 인과의 틀을 부쉈더라면

조영찬은 시청각장애인이고 김순호는 척추장애인이다. 나이는 김순호가 훨씬 연상이다. 두 사람은 부부다. 이들은 다큐멘터리 <달팽이의 별>의 주인공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두 사람은 시골에서 연을 날릴 준비를 하고 있다. 김순호가 다 준비해주고 조영찬은 기다린다. 이들의 일상은 대개 이런 식이다. 김순호가 조영찬의 수발을 들어준다. 흔하게 표현하자면 두 사람의 밀착된 관계의 힘을 사랑이라고 해야겠지만 나는 그들의 관계에 그 이상의 것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무엇이 두 사람을 저토록 한몸처럼 묶여 있게 하는지 궁금했다. 두 사람은 부부라고 하지만 김순호가 조영찬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그녀는 조영찬을 사랑해주고 보호해준다. 그녀의 그늘 아래서 조영찬은 당당하다. 그는 시를 쓰는 예술가이다. 눈과 귀가 막힌 상황에서도 그는 다른 수단으로 세계를 감각하며 자작시에서 자신을 ‘우주인’이라고 당당하게 선언한다. 눈과 귀가 달린 것이 보편적 인간의 물리적 조건이라고 생각하는 보통 사람에게 조영찬의 신체적 결함은 결핍이겠지만 그는 두 눈 다 뜨고 보며 두 귀로 듣는 우리가 비정상은 아닐까, 라고 그의 자작시에 쓴다. “사람의 눈 귀 가슴들은 대부분 지독한 최면에 걸려 있거나 강박에 사로잡혀 있거나 자아의 깊은 늪에 빠져 세계를 전혀 모른 채로 늙어간다. 그런 눈과 귀에서 자유로워지려면 나처럼 우주인이 되면 된다.” 이 글자들이 조합된 문학성을 판단할 능력이 없는 나로서도 거기 진실이 있다는 걸 안다. 영화를 보는 우리 대다수의 감각이 일정하게 불구라는 걸, 조영찬의 시는 지적한다. 그리고 <달팽이의 별>을 연출한 이승준의 카메라는 조영찬과 김순호가 서로를, 세상을 감각하며 충만하게 사는 삶의 행복을 일방으로 쭉 펼쳐놓는다. 드러내지 않는 장애인 부부의 현실 육체적 불구로 인한 결핍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그 결핍을 어떻게 극복하는가를 보여줄 줄 알았던 관객에게 이 영화는 거꾸로 그런 것은 있지도 않다고 아예 봉합해버린다. 주인공 부부의 지인들인 장애자들이 집에 놀러와 주인공들의 삶을 부러워하는 장면에서 조영찬과 김순호는 예외적 개인들이라는 게 드러난다. 그들의 지인들은 이들 부부의 행복을 부러워한다. 결혼하고 싶어 하는 동료에게 조영찬은 자신은 결혼할 준비가 되어 있었노라고, 그것은 외로움이라고 말한다. 경제적으로 준비가 되어 있었느냐는 현실적 속인의 질문에 그는 외로움이 준비였다고 시치미를 뗀 답을 한다. 사소한 장면이지만 자신의 현실적 생활의 어려움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그의 캐릭터가 묻어난다. 다른 지면이나 이 영화의 극장 GV 현장에서도 곧잘 나오는 질문이지만 이승준 감독은 주인공 부부의 생활에서 드러나는 어려움이나 그들의 속내를 굳이 드러내지 않았다. <달팽이의 별>에는 주인공 부부의 행복한 모습만 나온다. 김순호가 몸이 아파 혼자 병원에 가서 애로사항을 의사에게 상담하는 장면도 있고 방 안의 형광등 전구를 갈아 끼우기 위해 꽤 번거로운 절차를 두 사람이 낑낑대며 해결하는 장면도 있지만 여기에 무게중심이 있는 건 아니다. 영화 후반, 조영찬이 김순호의 도움 없이 혼자 차를 타고 외출하는 장면도 있으나 이 장면에 서 강조되는 건 둘이 한몸처럼 다니는 그들의 일상이 언젠가는 종결될 것이라는 데 대한 아쉬움이다. 조영찬이 외출해 있는 동안 김순호는 혼자 밥을 먹는데 반찬이 거의 없이 맨밥을 먹고 있다. 조영찬과 함께 식사할 때면 나름 짜임새있는 식탁을 차려놓고 그에게 밥을 먹여주던 그녀는 조영찬이 없을 때 빈약한 식사를 한다. 그 빈약한 식사는 조영찬이 없음으로써 오히려 더 외로워지는 그녀의 마음상태의 반영처럼 보였다. 굳이 잘 차려먹고 싶지 않은, 파트너가 없으면 대충 끼니를 때우는 어머니나 아내의 마음을 드러낸다. 이런 것들에도 불구하고 나는 끝내 김순호의 마음의 심연이 궁금했다. 그녀는 의심할 나위 없는 천사다. 그녀는 조영찬의 눈과 귀를 대신하며 문학수기 공모에 떨어지는 서투른 문학가 조영찬의 가장 성실한 애독자이고 그가 자신의 일상 삶에서 그녀와 함께 누릴 것을 제안하는 감각적 삶의 충일함을 받아들여 만끽하는 짝이다. 그렇다 해도 그녀의 삶의 피로는 화면에서 감춰져 있다. 내 눈에는 조영찬보다 김순호의 피로가 더 많을 것으로 보였다. 그녀는 눈과 귀가 다 보이긴 하지만 척추장애자이며 그다지 몸이 튼튼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녀는 남편의 일상을 위해 헌신한다. 그런 것이 조영찬의 외로움을 메워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외로움도 채워줄 수 있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녀의 피로와 곤궁만큼이나 예술적인 삶을 사는 남편의 우주인다운 감각적 기개가 그녀를 행복하게 만들어주었을 것이다. 배리어프리 버전이 궁금한 이유 이 글을 쓰면서 새삼 그녀의 천사 같은 행동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근원적 트라우마를 끝내 건드리지 않은 이승준 감독의 윤리적 선택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는 우선, 당사자인 김순호가 자신의 트라우마를 드러내는 걸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부분에 대해서는 카메라를 껐다고 말했다. 사석에서 들은, 그녀가 장애자가 된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은 눈시울을 적시게 만드는 호소력이 있었다. 스스로 진정한 외로움을 절실하게 느껴봤다면 타인의 외로움도 잘 공감할 수 있을 거라는 전제에 동의한다. 이 영화는 그 전제에 기대어 나머지는 관객의 상상에 맡기고 있다. 그다음, 감독 스스로가 과거의 어떤 트라우마나 동인을 캐내어 현재의 행동을 설명하는 인과적 논리의 전형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이야기로 드러내든, 화면으로 드러내든, 인과적 설명의 논리는 강한 설득력을 지니게 되지만 동시에 우리가 기대하고 쳐놓은 어떤 틀에 갇히게 된다. 인과적 논리의 표피적 설득력을 우리는 지금 숱한 텔레비전 다큐멘터리에서 보고 있다. 감동하게 되지만 또한 구경거리로 즐기는 소모의 함정을 피하지도 못한다. <달팽이의 별>은 명확한 인과적 논리를 거스르면서 등장인물의 심리학을 배제한 채 줄기차게 그들 행동의 표면만을 반복하며 우리를 설득시키려 하는 게 아니라 보는 것과 듣는 것을 통해 공감하게 만들려고 애쓴다. 우주인이라고 자부하는 아마추어 문학가 조영찬과 그의 아내이자 공동 삶의 설계자이자 어머니이자 연상의 아내인 김순호가 자잘하게 일상에서 만드는 감각의 무늬를 전시하는 것이다. 확실히 극장에서 보면 보고 듣지 못하는 남자주인공을 대신하여 그가 감각하려 애쓰는 공기가 영화라는 시청각적 공명의 통로를 통해 더 확대되어 우리에게 전달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감독 이승준의 윤리적, 미학적 선택은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급적 연출을 삼갈 수밖에 없는 다큐멘터리의 특징을 그가 너무 과신한 건 아닌가라는 의심도 거둘 수 없다. 내레이션이나 고백적 장치를 통해 등장인물을 설명하는 것은 촌스럽고 전형적일 뿐만 아니라 때로 등장인물에게 폭력적인 장치가 될 수도 있지만, 이 다큐멘터리에서처럼 대체로 극적이지 않은 주인공들의 일상에서 거대한 감정의 무늬를 찍어내려 한 감독의 야심은 지나치게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실제로 수영을 즐긴다는 조영찬이 몸에 끈을 묶고 바다를 수영하는 모습을 찍은 카메라는 시적이며 적당한 울림을 주지만 연출하지 않고도 화면에 감각의 무늬를 띠게 하려는 감독의 무모한 야심이 읽힌다. 조영찬의 시는 선언적이다. 그는 자신을 당당하게 비장애인이 느끼지 못하는 걸 느낄 줄 아는 사람으로 선포한다. 그와 김순호가 꿈꾸고 만끽하는 감각의 충만함은 대다수 우리에게 결핍된 것이지만 그걸 화면에 보여주는 것도 사실은 엄청난 관념이다. <달팽이의 별>은 우리에게 결핍된 것을 일깨운다. 행복의 상태에 대해서도 재정의한다. 감독 이승준은 명시적인 설명 없이 그걸 해냈다. 그런데도 약간의 불균형이 발생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화면에 보여지는 것만으로 감각의 충만함이 설명될 수는 없다. 스토리의 인과를 무시한 것처럼, 보여지는 화면의 논리에서도 인과의 틀을 좀더 과감하게 부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정해진 틀대로 설명하느니 생략하는 것처럼. 아니면 더 많이 설명하는 방법을 택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의 (김창완의 자세한 내레이션이 들어간) 배리어프리 버전이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