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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1997)

감독만의 해석이 부족하다 <헝거 게임: 판엠의 불꽃>

미국판 <배틀 로얄>. 혹자들은 수잔 콜린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헝거게임: 판엠의 불꽃>을 이렇게 요약한다. 9년에 한번 소년소녀들을 죽음의 미로로 보내 괴물 미노타우로스와 싸우도록 했다는 고대 그리스 신화 ‘테세우스’를 원형으로 한 ‘헝거게임’은 가상의 독재국가 판엠이 체제 유지를 위해 기획한 서바이벌 게임이다. 12개 구역에서 무작위 추첨을 통해 선발된 소년소녀 24명은 자신에게 주어진 무기를 이용해 1명만 살아남을 때까지 목숨을 건 사투를 벌여야 한다. 헝거게임의 규칙은 그러나 배틀 로얄의 그것보다 다소 복잡하다. 그 차이는 미디어의 개입에서 비롯된다. 일본과 달리 판엠에서는 텔레비전을 통해 24시간 동안 생중계되는 그 잔혹한 경기를 전 국민이 의무적으로 지켜봐야 한다는 규칙이 추가된다. 이에 <빅 브러더> <서바이버> 같은 영미권의 무수한 리얼리티쇼들이 떠오르는 것도 당연하다. 더불어 인터뷰 진행 방식은 <오프라 윈프리 쇼>를 연상시키며, 온 국민이 스크린 앞에 모여 자기 구역 대표 선수들을 응원하는 광경은 월드컵이나 올림픽 시즌을 상기시킨다. 그러다보니 영화가, 지금 우리가 미디어를 어떤 방식으로 향유하고 있는가에 관한 보고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고 이왕 그럴 작정이었다면 미디어의 양면성을 더 정교하게 드러냈더라면 좋았겠다. 디스토피아를 그리는 데 충실하려 한 의도가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을 통제하기 위한 도구로서의 미디어만 강조한 결과를 낳은 것 같아 아쉽다. ‘헝거게임’의 섬뜩함은 칼부림에 있지 않다. 폭력 묘사 수위만 두고 보면 비교적 얌전한 영화라 할 수 있을 정도다. 참가자들이 살상무기를 휘두르는 순간에도 자극적인 음향효과보다는 애잔한 음악을 사용하는 등 살육의 쾌락으로부터 거리두기를 하려고 한 노력이 엿보인다. 헝거게임이 진짜 무서운 이유는 아무리 발버둥쳐도 벗어날 수 없는 게임의 규칙 때문이다. 추첨 현장에 끌려가는 소년소녀들을 홀로코스트영화처럼 찍어낸 초반부 장면이 그 무거운 굴레를 체감케 한다. 비범할 정도의 활쏘기 능력을 지녔다 한들 주인공 캣니스 에버딘(제니퍼 로렌스)의 신세도 마찬가지다. ‘죽이거나 혹은 죽거나’라는 게임의 규칙에 복종해야 하는, 체스판의 말에 불과한 그녀는 판을 흔들어보려고 무진 애를 쓴다. 하지만 그녀가 게임메이커를 기만하는 데 성공했다 하더라도 잠시 동안만이다. 현실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게임이나 다름없는 세상, 배부른 자와 배고픈 자의 갈등이 최고의 오락거리로 활용되는 세상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최대한 오래 버티는 것뿐이다. 다만 이런 관점이 원작에서 빌려온 것이 아닌, 감독의 창조적 역량의 일부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원작을 압축하는 과정에서 주변인물이나 정치적 배경에 관한 설명을 과감히 생략한 감독의 결단력은 돋보이나, 감독만의 해석은 읽히지 않아 안타깝다.

미아들의 안식처를 창조하다

1961년생이니 적지 않은 나이다. 하지만 작품 수는 그에 비해 적은 편이다. 안드레아 아놀드는 영화가 아니라 방송 프로그램에서, 그것도 연출이 아니라 연기자로 자신의 경력을 시작했다. 1980년대, 그러니까 20대를 거치며 그녀는 이런저런 음악 방송과 아동용 방송을 기웃거렸지만 끝내 연기자로서 자신의 재능을 인정받진 못한 모양이다. 이후에 그녀는 미국영화연구소(AFI) 등을 거치며 영화연출의 길로 항로를 바꾸었고 몇편의 단편과 텔레비전 시리즈를 만든 다음 마침내 2006년에 <레드 로드>로 장편 데뷔하게 된다. 어쩌면 연기 인생에서의 그녀의 불운이 우리에게는 행운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거나 우리는 2000년대에 데뷔한 유능한 여성감독 중 한명을 만나게 되었으니까. 그녀가 주변의 지인들에게 시나리오를 처음 보여줬을 때부터 <레드 로드>는 스릴러로 낙점됐던 영화다. CCTV 오퍼레이터가 직업인 재키는 어느 날 밤 우연히 모니터를 살피다 몇년 전 자신의 남편과 딸을 사고로 치어 죽인 사내를 발견하고 복수를 계획한다. 그러나 신분을 감춘 채 사내에게 접근한 그녀는 얼마 되지 않아 그를 향한 복수욕과 성욕을 더이상 구분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른다. 보통의 남성 스릴러영화에서라면 침묵에 부쳐졌을 ‘그녀의 목소리’를 경청했다는 점에서 일단 주목할 만한 데뷔작이었다. 안드레아 아놀드의 두 번째 선택은 의외였다. 그녀는 청춘영화 <피시 탱크>(2009)를 만들었다. 이 영화는 마치 영국 특유의 과격한 청춘물 <스킨스>(영국 브리스톨에 거주하는 10대 청소년들을 주인공으로 한 텔레비전 드라마)를 연상시킨다. 그런 점에서 독창적이라고 보긴 어렵지만 도시의 주변부로 밀려난 사람들을 꾸준히 다루어온 그녀의 장기가 나름 살아 있는 작품이다. 안드레아 아놀드의 세 번째 선택은 더 의외였다. 그녀는 세 번째 작품으로 <폭풍의 언덕>(2011)을 골랐다. 저 유명한 에밀리 브론테의 고전이기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지 못한다면 이내 실패작으로 취급받을 위험도 있었다. 그때에 안드레아 아놀드는 과감하게 몇 가지 결정을 내렸다. 먼저 히스클리프 역에 흑인 비전문배우를 기용했다. 둘째로 소설의 뒤쪽 절반을 포기하고 앞쪽 절반만 다루어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유년기를 최대한 상세하게 재현했다. 결과적으로 그녀의 섬세한 감수성이 어린 화자를 통해 제대로 빛을 발했으며 이 영화는 역대 어떤 <폭풍의 언덕>에 견주어도 가장 관능적이라 할 만한 장점을 갖게 됐다. 안드레아 아놀드는 애초부터 배우가 되고 싶었던 사람이다. 팔색조의 본능이 있을 것이다. 스릴러, 청춘영화, 시대극을 격하게 오가는 것을 보면 일견 가늠해볼 수 있는 일이다. 그럼에도 그런 아놀드의 종잡을 수 없는 관심사 속에서도 주목할 만한 영화적 교집합은 있다. 그녀가 집을 떠나 부유하는 인물들을 시종일관 잊지 않고 다루어왔다는 사실이다. 이제까지 아놀드가 만들어온 영화들은 기댈 곳 없는 미아(迷兒) 같은 존재들이 자신의 욕망을 발설할 수 있는 은신처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안드레아 아놀드는 그 미아들을 껴안으며 마침내 주목받는 감독이 되었다. 그녀의 사소한 비밀◆안무단 안드레아 아놀드는 1980년대 초 영국 의 음악 쇼프로그램 <톱 오브 더 팝스>의 안무단 ‘Zoo’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데이비드 보위와 퀸이 함께 를 부르는 무대에서 흑백 분장을 하고 가만히 서 있는 병풍 중 하나가 그녀다. 자신의 말처럼 “언젠가 유튜브에 올라올지도…”.

[design+] 아파트를 가지고 싶었던 여자

날것의 폭력이 지배하는 무법의 폐기물 매립지, 여자는 그곳에 ‘쓰레기’로 내동댕이쳐졌다. 우여곡절 끝에 탈출하긴 했지만 여전히 그녀는 쫓기는 몸이었다. 사채업자들이 언제 다시 들이닥칠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불안과 공포는 그녀의 일상을 잠식했고, 밤마다 악몽의 연속이었다. 머리끄덩이를 잡힌 채 질질 끌려가다가 식은땀을 흘리며 꿈에서 깨어나곤 했다. 여자는 거처만 알아낼 수 있다면 자신을 빚쟁이로 만든 아버지를 정말 죽일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자살 유혹에 시달리던 시점, 여자는 뜻밖의 만남 덕분에 삶에 대한 의지를 되찾을 수 있었다. 화장품 회사에 입사한 그녀는 그 회사의 계열사인 건설업체의 모델하우스로 견학을 갔고, 구원의 손길과도 같은 하나의 장면과 마주쳤다. 그것은 분양을 앞둔 아파트 모델하우스의 거실 풍경이었다. 젊은 중산층의 눈높이에 맞춰 차분하고 단아하게 정리된 중형 평형대의 공간, 그곳에 놓인 모든 사물들은 봄 햇살을 닮은 조명 아래서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행복이라니. 그것은 여자가 IMF 외환위기 이후 단 한번도 체감해보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여자는 잠시 주방의 식탁 의자에 앉아 흰색 가죽 소파와 벽걸이 텔레비전이 놓인 거실을 바라보았다. 그래, 이 자리라면 다시 행복해질 수 있을 거야. 여자는 확신했다. 그녀는 휴대폰카메라로 거실 풍경을 찍었고, 그 사진을 액자에 담아 침대 머리맡에 두었다. 이후 여자는 사진을 볼 때마다 다짐했다. 언젠가는 그 공간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야 말겠다고 말이다. 하지만 걸림돌이 있었다. 그녀의 인격이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던 ‘차경선’이라는 이름은 욕망의 대리인으로 부적격 판정을 받은 지 오래였다. 여자는 다른 이름이 필요했다. 여자는 용의주도하게 살인을 저질렀고, 자신이 죽인 ‘강선영’이 되었다. 변신의 결과가 성공적이었던 것일까? 때마침 한 남자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여자가 아파트를 원한 것처럼, 남자는 사랑을 원했다. 여자가 원하는 아파트는 실물로 존재하는 지상의 아파트였고, 남자가 원하는 사랑은 첫눈에 반하는 낭만적인 사랑이었다. 다행히도 남자는 여자가 원하는 것을 사줄 수 있는 능력이 있었고, 여자는 사랑과 아파트가 등가로 교환될 수 있다고 믿었다. 액자 속의 사진을 남자와 함께 찍은 사진으로 바꾸면서, 이전 사진을 버리지 않았던 이유였다. 여자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성실히 연인의 배역을 수행했다. 남자는 자신이 꿈꾸던 사랑의 환상이 실현되자 한없이 행복해했다. 이제 그녀가 아파트를 선사받을 차례였다. 남자는 프러포즈를 했고, 그녀는 희미하게 번지는 미소로 화답했다. 남자의 아버지가 반대하고 나섰지만, 아들의 결심을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혼 일정이 잡히자, 남자는 여자가 선택한 신도시의 아파트를 구입했고, 여자는 새집을 꾸밀 준비를 시작했다. 외견상, 남자와 여자간의 거래는 그렇게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는 듯 보였다. 그러니까 전화 한통이 걸려오기 전까지 말이다.

아는 남자, 아는 여자 이렇게 웃긴 사이

장진 감독이 <아는 여자> 개봉을 앞두고 썼던 제작기를 인터뷰 전에 다시 읽었다. 그는 대략 다음과 같은 대화를 글의 한쪽에 옮겨놓았다. 장진 사랑이 뭐라고 생각해? 정재영 헤헤 왜 이래… 술 먹었어요? 이나영 감독님, 술 잘하세요? 근데 우린 왜 회식 같은 거 안 해요? 장진 십년 동안 한 남자만을 바라보며 살아온 여자는… 이룰 수 없을지도 모르는 사랑을 하는데 말이야…. 자신의 사랑에 대해 어떤… 희망을… 어떤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이나영 우리 밥 안 먹어요? 정재영 시켜먹자 그냥…. 이나영 난 짬뽕… 오빠 짜장 시켜요… 갈라먹게…. 장진 살면서 어느 순간엔가 누군가에게 ‘아, 이게 바로 사랑이구나’라는 확신을 느낀다면 자신이 어떤 상황에 놓여 있더라도 그 사랑을 잡을 수 있을까? 정재영 헤헤, 왜 그래 자꾸? … 나 결혼했어…. 이나영 오빠 애가 몇살이랬죠? 정재영 네, 네살이던가? …가만, 전화해서 물어봐야겠다. (전화 끊으며) 우리 아들 네살 맞대. 이나영 우리 강아지는 열두살인데…. 읽고 나서 이렇게 생각했다. 하하, 이분 글을 참 재미나게 쓰셨어. 이 엉뚱한 찰떡궁합 짝꿍의 성격을 단숨에 드러내주셨네. 그러면서 이런 생각도 했다. 그래도 그렇지 꼭 저렇게 말했으려고. <아는 여자>의 정재영과 이나영을 동치성(정재영)과 이연(이나영)으로 다시 만났을 때 깨달았다. 그때 정말 그렇게 말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추억을 더듬고 말을 주고받자, 엉뚱 발랄 코믹한 커플 동치성과 이연이 이미 거기 돌아와 있었다. -<아는 여자>라는 제목이 재미있습니다. 처음 이 영화의 제목을 들었을 때 두분은 어떤 느낌이었나요? =정재영_제목만 보고는 모르겠더라고요. 무슨 가요 제목 같기도 하고. 시나리오 읽어보니까 알겠더라고요. 그제야 제목이 너무 기가 막힌 거야. 극장에서. “(저 여자) 누구야?” 그러면…. 이나영_(말을 받으며) “아는 여자야”, 그러잖아요. 지금도 <아는 여자> 말씀하시는 분들 많아요. 개봉 때 못 보고 나중에 본 다음 좋다고 말씀해주는 분들도 많고요. 사실 저는 그때 포스터가 좀 아까웠어요. 더 멋지게 찍을 수도 있었는데. 아 맞다, 그때 우리 희한한 홍보도 했잖아요. 극장 객석에 앉아 있다가 우리쪽으로 조명 들어오면 영화 속 극장 장면하고 똑같이 퍼포먼스도 하고. 정재영_언론시사하고 나서 분위기는 좋았지. 다섯 중에 네 사람은 좋아했던 것 같은데? 이나영_대중은 이 영화를 나중에야 더 좋아한 것 같아요. 근데요, 궁금한 게, 남자들이 이 영화에 되게 로망이 있나봐요. 정재영_야, 당연하지. 너처럼 예쁜 여자가 짝사랑해주는데. 이나영_저 의외로 영화에서 짝사랑하는 역할 되게 많아요. 영화에서 왜 짝사랑만 하느냐는 질문도 많이 들을 정도예요. 정재영_실제로도 짝사랑하는 스타일이야? 이나영_그런 것 같아요. 정재영_오오. 누구냐 그놈은? 그러고보면 하느님이 있긴 한 것 같아. 공평해. 이나영_음… 조니 뎁? 조니 뎁 싱글이라던데. 정재영_뭐야, 그런 애 좋아하는 거야? 흰 수염에 주름, 아이고, 젊은 역할은 못하겠구나 -상상입니다만, 혹시 장진 감독이 <아는 여자>의 속편을 만들 계획이 있다고 하면 두분은 다시 응할 생각이 있나요? =이나영_아무래도 스코어는 잘 나오지 않았어도, 이 영화는 명작이잖아요. 재미나게 소소하게 면 또 다른 맛이 나올 것도 같고. 나쁘진 않을 것 같은데요? 정재영_원본의 이미지가 훼손되는 모험이 따르겠지만, 뭐 단순하게 생각한다면 나쁠 건 없지요. 이나영_다른 것보다 저희 둘의 호흡이 재미있을 것 같네요. 정재영_뭐 꼭 할 필요도 없지. 아, 벌써 8년이 됐어. 얘는 그대로인데, 나만 늙었어. 난 목소리도 변했고 생각도 변했고. 흰 수염도 많이 나고. 이나영_오빠, 저는 요즘 생각이 만신창이에요. 어, 근데 흰 수염 나면 좋을 것 같다. 정재영_야, 그럼 너도 한번 나봐라. 그거 매일 자라서 염색도 못해. 젊을 때는 내가 개성이 없는 얼굴이라고 생각했거든. 그래서 빨리 나이 들어서 로버트 드 니로나 숀 펜처럼 인생이 묻어나는 역할하고 싶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흰 수염 나고 주름 생기고 하니까 인생 묻어나기는 개뿔. 내가 늙어가는구나, 젊은 역할은 못하겠구나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어. 이나영_(진지하게) 우리는 벤자민 버튼이 될 하수는 없는 걸까요. 아니면 냉동인간이 되어야 하나. -음… 잠깐… 영화로 되돌아가… 볼까요. 장진, 정재영, 이나영의 조합은 당시에는 굉장한 모험으로 여겨졌습니다. 처음 제안받았을 때 두분은 어떤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나요. 정재영씨는 시나리오를 읽자마자 16시간 만에 승낙했고 반대로 이나영씨는 90일 넘도록 길게 고민하셨는다는데요. =이나영_정말 석달 고민했어요. 제가 그때 제 역할에 대해서, 연기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시작할 때였거든요. 더 시간 끌었으면 감독님이 제 안티 사이트 만들려고 하셨대요. (웃음) 일단은 장진 감독님 대본이 이해가 안 가더라고요. 저에게 <아는 여자>는 찍으면서 더 좋아진 영화예요. 처음에는 감독님의 코미디를 글로 이해하기란 어려웠던 것 같아요. 시나리오 보고 이 캐릭터는 왜 이러고 있나, 싶었거든요. 그래서 찍으면서는 감독님이 귀찮아할 정도로 많이 물어봤어요. 그런데 현장편집 보니 차근차근 그 디렉션을 이해할 수 있겠더라고요. 정재영_저에게는 제일 재미있었던 영화 중 한편이에요. 제가 그때까지 <실미도> <귀여워>, 이런 마초적인 역할을 많이 했잖아요. <아는 여자> 한다고 하니까 괜찮겠느냐고 주위에서 내 걱정을 막 하더라고. 하긴, <피도 눈물도 없이> 찍을 때도 내 걱정 해주는 줄 알았더니 사실은 작품 걱정이더라고. (웃음) 여하튼 전 새롭지 않으면 안 했을 거예요. 저한테 처음 들어온 제안이 아니란 것도 알고 있었거든요. 난생처음으로 제가 먼저 해보고 싶다고 제안했을 정도였어요. 물론 나영씨는 상대배우 때문에 고민 많이 했겠다, 그치? 상대배우가 정재영이었으니까. (웃음) -서로에 대한 인상은 어떠했나요? =이나영_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어요. 저는 일단 정재영 선배님이라는 믿는 구석이 있어서 좋았고요. 요즘에도 오랜만에 오빠 뵈면 그냥 편해요. 별로 안 어색하고요, 계속 보아왔던 사람 같고요. =정재영_나는 사실 그때 나영씨가 좀 어려웠어요. 내가 주로 남자들만 많이 나오는 영화에 나왔잖아요. (웃음) 그러다 이나영이라는 당대 스타 여배우를 만난 건데 그게 되게 어렵더라고. 일부러 그렇지 않은 척, 담담하고 대범한 척한 거지. 그런데 작품할 때 영화 속 인물 대 인물로 일해보니 호흡 잘 맞는 사람끼리 탁구 치듯이 아주 잘 맞더라고요. 이나영이라는 배우, 본능적으로 솔직하구나 -기억에 남아 있는 상대방의 연기가 있나요? 정재영_이나영이라는 배우에게 느낀 점은 이 배우가 연극을 하거나 연기 수업을 오래 받은 것이 아닌데 본능적으로 솔직하구나, 하는 거였어요. 몸에서 우러나는 대로 하는 그런 능력이 뛰어나요. 영화에서 동치성이 술 먹고 주정하는 장면이 있어요. 그때 이연이 귓속말로 “사랑해요”라고 말해주는 건데 그때 나영이가 막 울더라고요. 그런데 그 수위가 장진 감독이 의도한 정도가 아니었나봐요. 되게 당황스러워하더라고. 장진 감독이 나한테 와서 이거 지금 이상하지 않냐, 자기가 원했던 장면의 감정이 아닌 것 같다, 그러더라고요. 이나영_제가 리허설대로 안 한 거죠. 그때 많이 혼났어요. 리허설에서 감정을 드러내 보이면 현장에서 좋은 감정이 나오지 않을까봐 제가 일부러 마음을 닫고 있다가, 그래서 감독님이 말 시켜도 벽만 보고 저 혼자 감정에 집중하고 있다가 찍은 거거든요. 감독님께서는 그렇게 갑자기 톤을 올리면 상대배우가 놀라지 않겠느냐고 하셨고요. 그래서 제 연기 수위에 맞게 오빠가 리액션을 한번 더 찍는 수고를 하셨잖아요. 정재영_그런데 나는 그게 오히려 좋았어. 호흡이 처음에 안 맞을 수는 있지. 하지만 리액션이야 거기 맞춰서 다시 찍으면 되는 거잖아? 그런 부분을 상대배우가 고려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하거든. 저 배우가 왜 사전 약속대로 안 하는 거지, 라고 생각하는 건 오히려 잘못된 거지. 나는 그때 나영이 느낌이 훨씬 좋았어. 동치성의 느낌으로 말하자면, 주사를 부리다가 갑자기 술이 확 깨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장진 감독님은 정재영씨의 코믹 연기에 대해서도 말한 바 있습니다. “절실함과 품위에서 출발하는 코미디”라고 했습니다. =정재영_에? 뭐요? 절실… 품… 위요? 야아, 장진 감독이 포장을 엄~청 했네. 난생처음 들었네. 처음 듣는 얘기예요. 그 양반이 남의 칭찬도 흉도 앞에서는 안 해요. 다 뒤에서 하지. 이나영_(고개 끄덕끄덕) 정재영_그래도, 코미디란 게 원래 절실함과 품위가 있어야 나오는 거니까 그건 맞는 말일 수도 있겠네요. -동치성과 이연은 지금 생각해보니 어떤 인물인 것 같나요? =정재영_이연? 이연? 야 지금 들으니까 꼭 욕 같은데? 이나영_어, 정말, 욕하는 것 같아요. 근데 지금 생각해도 이연은 괴짜예요. 혼자 살아가는 모습이 많이 나오잖아요. 그런 외로움을 자기만의 엉뚱한 형식으로 삼고 살아갔던 아이인 것 같아요. 그래도 이연이 참 좋았던 건… 뭔가 거창하지 않아서 좋았어요. 정재영_나는 개인적으로 영화 첫 장면 기억이 많이 나. 내가 골덴 의상을 진짜 싫어하거든. 어렸을 때 하도 입어서. 그런데 그걸 갖고 왔더라고. 내가 이걸 입어야 하나, 그랬지. 그 장면에서 애드리브한 것도 생각나네. 옷까지 벗어던지고. 별걸 다 했네. 하루 종일 그렇게 찍었는데 그걸 점프컷으로 처리했더라고. (웃음) -<아는 여자> 이후 두분이 같은 영화에 출연한 적은 없습니다. 서로 연락은 하고 지내는 사이였는지요. 서로의 근황에 대해 알고들 계셨는지. =정재영_연락요? 잘 안 하는데… 하면 이런 걸로 해요. 전화해서 “야, 시사 와라”. 이나영_(말 받아서) 그러면 제가 “아니요, 저 바빠서 못 가요. 다음에 봐요”, 그래요. (웃음) 정재영_최근에는 (송)강호 형하고 나영이가 <하울링> 같이 하니까 그거 계기로 술자리에서 자주 봤네. 시시껄렁한 이야기 하고 놀았어요. 야, 술 사라 하면서. 같이 촬영하는 사람들 이야기도 하고. 그런데 여배우하고 개인적으로 연락을 하고 지내기는 어려워요. 수다 떨고 할 내용도 실은 별로 없고. 따로 만나야 하는 것도 아니고. 뭐, 개인적으로 만나면 나야 좋지만(웃음), 쉽지 않지요. 여배우들 만나는 게 일반인만 어려운 게 아니라니까. 이나영_(새삼 진지하게) 근데 여배우의 기준이 뭘까요. 까칠하고 말 잘 섞지 않고 하는 그런 모습을 여배우의 모습이라고 하는 분들도 계시던데… 여배우는 여배우다워야 한다고요. 폼도 좀 잡아야 한다고요. 그런데 그것도 하는 사람만 하는 거지. 저 같은 사람은 잘 못해요. 필요할 때가 있긴 하겠지만… (기자를 쳐다보며) 근데 정말 여배우의 기준이 뭘까요? 가장 웃기게 나온 사진 실어주세요! -(우물쭈물 넘기며 급격하게 마무리하는 분위기로) <아는 여자> 이후의 행보에 대해, 서로의 연기에 대해 해줄 말씀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서로 덕담이랄까요. =정재영_다른 것보다 대한민국에서 이나영이라는 배우가 오랫동안 연기했으면 좋겠어요. 세월이 더 흘러서 <씨네21>이 17주년이 아니라 27주년이 되었을 때 다른 영화로 또 이런 자리에 나오는 배우로요. 그때 저 역시 다시 한번 함께 나올 수 있다면 그게 행복이겠지요. 이나영_에이 쑥스럽게. 저는 뭐 감히 드릴 말씀이 없어요. <아는 여자> 이후에 오빠는 배우로서 너무 자리를 잘 잡으셨잖아요. 정재영_야, <아는 여자> 같은 작품, 나하고 한번 더 하고 싶다고 그래. 그래야 나한테도 시나리오 들어와. 이나영_오빠는 <아는 여자> 이후 최고의 배우가 되셨고요. 건강만 잘 지키면 될 것 같아요. 정재영_야, 나하고 드라마 하나 같이 하고 싶다고 그래. 네가 한다고 그래야 나한테도 들어온다니까. -이상하게 들릴 수 있지만 두분이 성별은 다르지만 성격은 비슷하다는 인상을 갖게 됩니다. =정재영_저는 낯가림이 심할 때는 되게 심한데요,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또 잘 어울려요. (그러다 문득) 그런데 배우들은 보면 다 정신병자 같아. 이나영_그러니까 배우 하는 거 아닐까요? 정재영_어떨 때 보면 나도 정신병자 같다니까. 그래서 그런가. 요즘은 나보고 자꾸 4차원이라고 해. 이나영_저한테도 그러는데요, 저는 정말 4차원이라는 기준을 모르겠어요. 4차원은 뭐고 2차원은 뭐죠? 정재영_나는 4차원 아니야. 2차원이지. 단순하니까. 가만, 2차원은 철이 없다는 건가?v 이나영_철없는 게 좋은 거예요. 정재영_철은 있었다 없었다 해야지. 사이코가 돼야 해. 이나영_맞아요. 왔다갔다해야 돼요. (진지하게)제가 얼마 전에 텔레비전을 보다 문득 생각난 건데요, 모든 인간은 코믹 본능을 전부 갖고 있는 것 같아요. 그걸 얼마나 표출하느냐가 문제인 거고요. 코미디를 할 때 굉장한 희열을 느끼는 것 같아요. 그래서 술을 먹거나 할 때 그런 걸 개발하기도 하는 것 같고. 저도 코미디 엄청 좋아해요. 루저 코미디를 주로 좋아해서 그렇지…. (사진기자의 말에 따르면, 이나영은 이날 찍은 사진 중 가장 웃기게 나온 사진을 실어달라며 특별히 부탁했다고 한다.) 정재영_아! 근데 내가 <언터처블: 1%의 우정> 봤거든? 재밌더라. <아는 여자>가 그런 과의 영화 아니었을까. 이나영_그러게요. 정재영_우리 <아는 여자> 속편 찍으면 프랑스에서 하면 좋겠다. 이나영_그래요, 프랑스에서 바바리 입고 우리 속편 찍어요. (갑자기 기자쪽으로 고개 돌리고) 근데 오늘 저희 찍은 거 표지 아니에요? (아니라고 하자) 에이, 사진 예쁘게 나오면 그래도 표지해주실 거죠? -…. 후기 종종 산으로 향했던 대화를 마치고, 인터뷰가 끝나 유쾌하게 돌아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아는 여자>의 한 장면이 불현듯 떠오른다. 동치성과 이연이 과일을 깎아 먹으며 다정하게 야구 중계를 보고 있다. 타자가 쳤고 수비가 공을 잡은 모양이다. 이연 방금 저렇게 친 볼을 잡아가지고요…. 동치성 수비가? 이연 예… 수비가 잡아서…. 동치성 땅볼로…? 이연 예, 땅볼로요. 잡아서 관중석으로 던지면 어떻게 돼요? 동치성 1루로 안 던지고요…? 이연 예, 그냥 확 관중석으로 던지면…. 동치성 (순간 이연의 뒤통수 치는 시늉을 지었다가)… 왜 거기다 던져요? 이연 재미있잖아요! 그런 거 보고 싶은데… 재미있겠다! <아는 여자>에서 동치성은 날아오는 공을 잡아 끝내 관중석으로 던진다. 이연 보고 재미있으라고. 우리는 산으로 가는 대화를 집어서 지금 당신에게 던진다. 역시 재미있으라고. 그게 <아는 여자>의 사랑법이고 대화의 기술이기 때문이다. 정신을 다잡고 영화의 장점을 말하려 애쓰는 개봉 시즌 때의 강박은 이날의 대화에 없었다. 따뜻한 봄날, 그냥 한나절, 편하고 나른하게 어울려 놀았던 한쌍의 이야기를 지금까지 전했다

[도서] 그는 결코 멈추지 않았노라

이 책의 표지에 실린 사진을 보자. 처음에는 어떤 노년의 부인이 웃고 있는 모습처럼 보인다. 턱 아래쪽이 제거되고 얼굴 하단이 홀쭉해지면서 그런 인상을 주었을 것이다. 일흔살이 되기 직전에 에버트는 갑상선암에 걸렸고 세 차례의 수술 끝에 입으로는 먹는 것도 말하는 것도 할 수 없게 됐다. 에버트가 심각한 병에 걸렸고 그 때문에 은퇴했다고 몇년 전에 들었다. 하지만 2012년 4월26일 현재에도 그의 블로그에 들어가보면, 에버트는 하루 전인 25일에 존 쿠색이 주연을 맡은 <더 레이븐: 에드가 앨런 포의 사라진 5일>에 관하여 리뷰를 쓰고 별 두개를 주었다. 그는 영화에 관한 글을 멈추지 않고 있다. <로저 에버트: 어둠 속에서 빛을 보다>는 그의 자서전이다. 그러고보니 영화평론가의 자서전을 읽어본 기억이 없다. <사이트 앤드 사운드>의 한 필자는 이 책의 서평을 쓰며 “에버트보다 훨씬 더 자기도취적이고 준유명인사인 평론가 폴린 카엘조차도 감히 자기의 자서전을 쓰지는 못했”음을 지적한다. 오로지 에버트이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1967년부터 영화평론 book을 시작한 이후 미국에서 가장 손꼽히는 대중적인 영화평론가이자 텔레비전 영화 프로그램(<에버트&시스켈>)의 인기 진행자였고 또한 영화평론가로는 처음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인물.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는 거동조차 불편한 상황에서도 영화평 쓰기를 멈추지 않는 인물이다. 에버트는 꿈 많던 청년기 시절을 되짚는 동시에 리 마빈, 잉마르 베리만, 마틴 스코시즈, 로버트 알트먼 등에 대한 단상과 일화로 자신의 삶을 반추하는 이야기꾼의 기질을 발휘한 다음 현재의 상태로 다시 돌아와 말한다. “나는 내가 이보다 더 나쁘게 보이지 않아서 행복하다. 나는 삶을 계속 살아가기 위해 간단한 결정을 내렸다. 나는 글쟁이였다. 다른 외과적 시도를 제의받았지만, 나는 싫다고 말했다. 할 만큼 했다. 나는 내 지금 모습처럼 보일 것이고 나 자신을 활자로 표현할 것이다. 그리고 만족할 것이다.” 에버트를 위대한 영화평론가로 말하는 건 망설여진다. 다만 한 인간으로서 그는 위대하다. 결코 멈추지 않는다는 점에서 위대하다.

[전영객잔] 무엇이 영화입니까

세상에서 가장 게으르고 한가한 자세로 텔레비전 뉴스를 보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경기도 부천시에서 일어난 어떤 좀도둑의 범죄행각이 단신으로 보도되고 있었습니다. 중대하기보다는 황당무계하다는 이유로 그날의 단신으로 채택되었을 이 사건을 접한 날, 저는 그만 더 황당무계한 상황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이 사건이 저에게 무언가 영화에 관한 단상을 줄지도 모른다는 느낌에 빠져버렸던 것입니다. 저의 머릿속은 마치 단관 개봉관의 극장처럼 하루 종일 그 사건이 상영되고 또 상영되었습니다. 사태는 급기야 불어나더니, 올해 초에 인상적으로 보았던 어느 영화 한편까지 불러들이게 됩니다. 처음 볼 때는 의심스러웠으나 두 번째 볼 때는 신기했고 세 번째 볼 때는 탄복하게 된 라스트 신을 지닌 그 영화가 앞선 사건과 뒤엉키며 머릿속은 이제 동시상영관이 되어갔습니다. 그러니 무언가라도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지금 이것이 저의 올해 첫 번째 흥미로운 영화 체험이었다고 전하려는 것입니다. 부디 이 체험이 새롭고 아찔한 영화 생각으로 합체하고 변태하기를 스스로 바라면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말씀드린 그 허술한 범죄극의 내용부터 밝혀야겠지요. 어떤 중년의 여인이 빵집에 빵을 사러 들어옵니다. 이 여인은 9만8천원어치의 빵을 계산대 앞에 가져간 다음 1만원권 열장을 손에 쥐고 계산을 요구합니다. 당시 가게에 손님이 많아 바빴기 때문인지 혹은 그것조차 이 여인의 계략의 일종이었는지 알기란 어렵지만 여하간에 점원은 10만원을 받기도 전에 이미 거스름돈으로 건네줄 2천원을 손에 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점원과 여인은 동시에 서로의 돈을 건네려 합니다. 자, 그때 사건이 일어납니다. 여인은 순간 점원의 눈을 다른 곳으로 유도하는 동시에 속사포처럼 말을 붙여 정신을 흩뜨려놓은 다음, 순식간에 손에 들고 있던 10만원을 손 안에 숨깁니다. 점원은 돈을 받았다고 착각하고 이렇게 계산은 어처구니없이 끝납니다. 하지만 아직 끝난 것이 아닙니다. 가게 안을 잠시 서성이던 여인은 잠시 뒤 계산대 앞으로 돌아와, 마음이 바뀌어서 빵을 사지 않겠다, 9만8천원을 환불해달라고 합니다. 점원은 요구대로 돈을 내줍니다. 믿기지 않지만 이런 방법으로 이 여인은 하루에 세건을 성공시켰고 30만원을 가져갔다고 합니다. 도대체 이런 마술 같은 일이 일어나다니요. 아니나 다를까, CCTV를 판독한 한 마술 전문가는 그 여인의 손 기술이 마술사가 돈이나 카드를 조작하여 숨기는 기술, 즉 “머니-매니풀레이션”이라 증언해주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이건 마술입니다. 때문에 이 사건은 일명 ‘마술 절도녀’ 사건으로 이름 지어졌습니다. 초기 영화사의 저 유명한 감독 조르주 멜리에스가 마술사 출신이라는 사실을 우린 알고 있습니다. 뤼미에르 역시 영화의 마술성과 함께 말해지곤 합니다. “동시대인들은 뤼미에르를 마술가로 여겼지 리얼리스트로 여기지 않았다”(토마스 엘새서)라고도 합니다. 둘은 영화가 착시의, 착각의 예술이라는 변치 않을 사실을 입증해줄 기원자들입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 영화의 기원에 있어 마술사와 마술이 중요한 몫을 했다는 점 때문에 이 사건에 거꾸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아니며 거기까지 거슬러 올라가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다만 사건 자체를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는 데 더 관심이 있습니다. 이상하게도 이 사건을 전하는 뉴스들은 하나같이 ‘마술의 손 기술이 범죄에 쓰였고 그것은 현란했다’라는 점에만 주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오히려 반문하고 싶습니다. 정말 그것이 핵심일까요, 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물어야 할 것 같습니다. 저 여인의 머니-매니풀레이션 이라는 기술은 궁극적으로 무엇을 최종 도모하기 위한 것이었습니까, 라고 말입니다. 좀도둑의 듣보잡 영화, 뇌에서 교묘히 상영되다 이 사건의 핵심은 그러므로 손 기술이 아니라 뇌 기술이며 손 조작이 아니라 뇌 조작입니다. 그리고 더 핵심은 이 뇌 조작이 단순한 눈속임을 넘어 ‘이미지’의 주입과 저장과 활동과 혹은 오작동을 통해 가능했다는 사실입니다. 계산이라는 실제 행위가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계산이라는 이미지가 발생한 것입니다. 그것은 저 여인이 점원의 뇌에 주입하고 투사하고 활동시킨 그녀의 이미지 연출법에 의해 가능했습니다. 물론 이건 마술의 일종에도 적용되겠습니다만 만약 이와 같은 유사한 체험을 안겨주는 매체나 예술이 있다면 그건 또 무엇이겠습니까. 가령 이미지의 조작과 조정과 연출과 연쇄와 활동과 지속으로서의 그것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짐작하셨겠지만 저는 지금 어느 좀도둑에게서 듣보잡 영화 한편이 막 연출되었고 한 점원의 뇌에서 그것이 교묘하게 상영되었음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제목도 없고 가치도 없지만 일면 영화의 경험을 껴안은 채로 당사자들의 뇌에서 상영된 그 수상한 영화 말입니다. 그러므로 저 여인은 나쁜 범죄자이며 뛰어난 마술사이고 동시에 본능적인 영화감독입니다. 우스꽝스러운 과장이라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사태야 우스꽝스럽고 비도덕적이지만 그 작동에 대한 생각은 신중하고 모험적이어야 합니다. 이것은 늘 말해져왔거나 시도되어온 영화의 중요한 일면이기 때문입니다. 현세와 전생을 오가며 어느 쪽이 어느 쪽을 투사하는 것인지 궁금하게 만들었던 영화 <엉클 분미>의 감독 아 핏차퐁 위라세타쿤은 문득 이 영화의 영감에 관하여 말하다가 “명상 자체가 곧 영화 만들기”라는 말과 함께 “우리의 뇌는 최고의 카메라이며 영사기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걸 적절하게 작동시키는 방법을 찾을 수만 있다면 말이지요”라고 고백합니다. 혹은 그렇게 뇌가 저절로 카메라와 영사기가 될 수 있다고 믿는 아핏차퐁이 “저 사람의 머릿속이 정말 궁금하다”라며 가리킨 감독은 홍상수입니다. 홍상수는 우리의 뇌를 훔칩니다. 그의 영화를 본다는 건 때로 우리의 뇌가 너무 왕성해지는 자극을 받는 바람에 오히려 정신줄을 놓는다는 뜻입니다. <북촌방향>에서 술집 여주인이 눈앞에 있는 손님을 향해 평소와 다르게 “오빠”라고 호칭을 바꿔 부르자, 그 순간 그 인물의 존재감과 앞에 있는 사람과의 관계와 그들 장면 앞에 펼쳐졌던 다른 장면들과의 관계가 순식간에 얽히고 흔들려서 우리는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았습니까. 혹은 그런 홍상수 영화에 관한 가장 뛰어난 논평자이자 동반자인 허문영이 ‘아덴만의 여명’, 즉 영화 같다고 칭해진 한국 정부의 살육 작전을 두고 “김선일 사건, 연평도 사건으로 집약되는 현실의 불안과 두려움을 달래주는 국가적 반격의 시뮬라크르”라고 지적하는 동시에 “그 자체가 액션영화가 아니라 그 사건에 관한 시청각적 정보를 우리가 액션영화의 틀로 받아들였다거나, 우리의 뇌가 그것을 액션영화로 재상영했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 것”이라고 마침내 통찰력있게 설명해낼 때, 우린 저 먼바다에서 벌어진 살육이 우리의 뇌에서는 어떻게 한편의 액션영화로 변모하는지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질들뢰즈는 더 간단히 자기 식대로 말했습니다. “뇌는 스크린이다.” 그리고 덧붙이지 않았습니까. “스크린, 다시 말해서 우리 자신은 창조적인 뇌일 수 있는 만큼이나 백치의 결함있는 뇌일 수도 있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니 부천의 어느 빵집에서 벌어졌던 그같은 뇌의 체험과 영화의 체험에 관하여 저는 저의 영화적 이해로써 일단락지어 보고자 합니다. 사실 알고 보니 마술 절도녀가 연출한 이 영화는 그녀가 잡히기 전까지 전국 각지에서 100회 이상 순회 상영하였으며 회당 대략 수10만원의 상영료를 챙겼고 도합 2700만원이라는 흥행 수익을 냈다고 하니 그 백치의 뇌(영화)는 한두 사람의 무지 때문에 생긴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마술 절도녀의 흥행 신화를 가능하게 한 요소들이 있었을 겁니다. 그건 무엇이었을까요. 물론입니다. 역시 첫 번째는 ‘시선’의 활용입니다. CCTV 안의 그녀가 1만원권 열장을 차례로 착착 세거나 혹은 톡톡 건드리는 것을 보십시오. 그녀는 그때 영화적으로 무엇을 바라는 것일까요. 시선이 발생하기를 바라는 것일 겁니다. 관객(점원)의 시선이 그 열장의 1만원권에 고정되기를 바라고 있으며 그의 눈이 돈을 보고 그의 뇌가 돈을 알기를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영화에서의 시선이란 종종 앎이라는 문제 혹은 착각으로 이어지니까요. 마술 절도녀가 영화사의 중요한 시선의 역사를 알지는 못했겠지만 그녀는 이미 뇌를 촉진하는 시선의 기능을 몸소 터득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때 저 시선이 무언가 의미를 동반하는 표현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더 중요해 보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시선을 잡아둘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저는 여기서 그 표현법으로 이른바 제유법이 쓰였다고 생각합니다. 제유법이란 “사물의 한 부분으로 전체를 표현하는 비유법”이며 왕관을 보자 왕을 떠올리고 왕의 권력까지 떠올리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시선을 휘어잡아 점원의 인식을 돈에 잠시 묶어둘 때, 점원은 단지 10만원이라는 ‘돈’을 보았을 뿐이지만 그 돈을 봄으로써 결국 ‘10만원을 지불하다’라는 전체의 착각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이런 유사한 경험을 고백한 철학자가 있습니다. 자크 랑시에르는 니콜라스 레이의 <그들은 밤에 산다>의 한숏을 논평하는 것이 필생의 꿈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가 논평을 꿈꿨던 그 숏은 그 영화에 애초부터 없는 것이었고 그의 상상일 뿐이었습니다. 그때 그의 착각을 불러온 제일의 이유로 그는 그 영화에서 얻은 어떤 제유법의 경험을 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랑시에르의 어려운 분석을 더 따라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일부를 보고도 전부를 알았다고 생각되는 이 상황의 돈의 제유를 이해하기만 하면 될 것입니다. 마침내 결정적인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그건 청각적 요소, 말의 사용입니다. 이것이 이 범죄의 내러티브를 더욱더 공고히 하고 있습니다. 마술사들이 관객의 시선을 뺏기 위해 가장 손쉽게 하는 술수가 잡담과 수다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마술 절도녀는 범죄 행각 내내 쉬지 않고 말을 시켜서 점원의 혼을 빼놓았다고 합니다. 공회전하는 말이 가세하여 시선이 짜놓은 내러티브를 인정케 하는 것입니다. 그건 영화적 마술이 가장 잘하는 것이기도 한데, 어떤 영화는 시각과 청각의 조화 그 자체가 아니라 오히려 둘의 부조화로서 영화적 효과를 극대화한다는 사실을 우린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저는 애초에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머니-매니풀레이션이라는 그 기술은 궁극적으로 무엇을 최종 도모하기 위한 것이었습니까, 라고 말입니다. 머니-매니풀레이션이라는 이 영화의 기술은 혼자 기능하지 않고 반드시 다른 것들과 함께 가동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현실에 등장한 한편의 기이한 영화가 마침내 그런 식으로 상영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영화란 늘 시청각의 감응을 재배열합니다. 우리의 뇌도 늘 시청각의 감응을 재배열합니다. 마술 절도녀가 연출하고 관객인 점원이 인지한 신종 영화의 전말이란 그런 것입니다. 점원은 10만원이라는 돈을 받은 것이 아니라 10만원이라는 이미지를 받은 것이고 10만원의 이미지라는 활동하는 영화를 건네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도덕적으로 나쁜 영화라도 이미 그건 성사되었고 상영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저는 이 영화의 활동에 대한 이러한 이해가, 제가 말하려는 다음 영화에 관한 진정한 이해를 위해서도 필수적이라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인간-매니풀레이션’ 기술로 우리를 조작한 다르덴 형제 다르덴 형제의 <자전거 탄 소년>. 마술 절도녀와의 동시상영작이라 말씀드렸던 바로 그 영화입니다. <로나의 침묵>까지 다르덴 형제 영화의 미학은 크게 변한 바가 없습니다(적어도 제가 본 <약속>부터는 그렇습니다). 동시에 그들은 한 가지 곤궁을 겪어야 했는데 이제는 그들의 영화도 매너리즘에 빠진 게 아니냐는 일각에서의 질타였습니다. 그런데 <자전거 탄 소년>으로 다르덴 형제는 전에 없이 다른 영화적 방식을 도모한 것 같습니다. 놀랄 정도로 말입니다. 변화란 무엇일까요. 그들이 처음으로 따뜻한 동화를 만들었다는 그 사실일까요. 그럴 수 있습니다. 또는 많은 이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그들 영화에 처음으로 음악이 본격 사용됐다는 점일까요. 그것도 얼마간은 맞을 겁니다. 그런데 당장 눈에 보이는 그런 것들이 다르덴 형제 영화의 가장 큰 변화일까 생각해보면 그다지 결정적이라는 생각이 영 들지 않습니다. 혹은 말해지지 않은 중요한 무언가가 더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말하는 라스트 신으로 생각을 한번 돌려보면 어떨까요. 영화의 가장 육중한 감동이 서린 장면, 그렇다면 거기에 무언가 결정적인 변화가 도사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요. 먼저, 다르덴 형제 영화의 리얼리즘에 관해 잠깐 우회적으로 말해야 할 겁니다. 이때 그들의 리얼리즘이란 소재적으로 비슷한 켄 로치나 로랑 캉테의 리얼리즘과는 다른 것이라 생각됩니다. 켄 로치의 리얼리즘이란 극의 리얼리즘입니다. 켄 로치는 극화된 세계 안에 살고 있는 인물의 이야기를 최대한 리얼하게 그리려는 영화적 목표를 갖고 있습니다. 로랑 캉테의 리얼리즘이란 상황의 리얼리즘 혹은 중계의 리얼리즘이라고 부를 만한 것입니다. <클래스>가 확실히 그 점을 보여줍니다. 그는 교실 안 풍경이라는 상황을 마치 중계하듯이 리얼하게 포착합니다. 여러 대의 카메라로 숏과 리버스 숏과 인서트를 오가며 전체를 꼼꼼하게 조망하려 합니다. 다르덴 형제의 리얼리즘이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리얼리즘은 카메라에 한계를 부과하고 고스란히 인정하는 리얼리즘입니다. 그들은 카메라 한대에 핸드헬드를 써서 인물을 쫓으며 (로랑 캉테라면 포착하고야 말) 그 나머지 풍경과 상황은 수시로 놓쳐버립니다. 그걸 보충하기 위한 숏과 리버스 숏과 인서트 등도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 세계를 그럴싸하게 담아 보여주겠다는 인상을 애당초 포기하고 있으며, 그 보완으로써 필요한 시각적 보완 장치들도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태도입니다. 그들의 리얼리즘은 오로지 인물과 카메라 사이의 물리적 거리감이 팽팽하게 느껴지는 그런 것입니다. 이때 영화가 스스로 정서적 효과를 높이는 방법은 그 인물과 카메라의 일대일의 ‘물리적 전압’을 높이는 것입니다. 그로써 그들이 저항감이라고 말하는 대상과의 그 마찰력을 높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떠한 다른 조작도 기술도 거의 쓰지 않으려는 이 감독들의 미학입니다. 저는 그런 그들의 리얼리즘을 마찰의 리얼리즘이라고 불러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하게도 이 마찰의 리얼리즘의 핵심은 지금까지는 적어도 그 어떤 영화적 조작이나 장치를 허용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자전거 탄 소년>에서 바뀐 것 같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자문해보겠습니다. <자전거 탄 소년>의 라스트 신도 그와 같은 리얼리즘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인가요. 그런 것 같지 않습니다. 영화를 다시 보며 이 라스트 신에서 놀란 것은 시릴이 일어났다는 점 때문이 아니라 시릴을 쓰러뜨리고 일으키는 그 방식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에는 어떤 새로운 조작이 있습니다. 부디 오해가 없기를 바라는 것은, 여기서 제가 조작이라 쓰는 표현은 그들의 영화가 사기꾼의 영화가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럴싸하게 꾸며냄’이라는 사전적 용어 그대로, 어떤 가치 훼손의 뜻 없이, 무언가 다른 인공적 영화 화법을 도입했음을 말하기 위한 표현입니다. 시릴은 사만다의 심부름으로 바비큐 파티에 필요한 숯을 사러 갔다가 그만 신문 판매상 부자(父子)를 만나게 됩니다. 영화를 본 당신이라면 시릴이 동네 나쁜 형의 꾐에 빠져 한때 그들 부자를 방망이로 때려눕히고 돈을 갈취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겁니다. 물론 법적으로는 용서 받은 다음입니다. 하지만 이 장면에서 시릴을 본 상점주인 아들은 분을 참지 못하고 시릴을 쫓아가 때리고 시릴은 도망가고 그러다 숲의 나무 위로 시릴이 올라갔을 때 상점주인 아들은 시릴에게 돌을 던집니다. 한번 던지고 두 번째 돌을 던졌을 때 시릴이 별안간 그 돌에 맞아 퍽 하고 땅바닥으로 추락합니다. 자, 이때의 솔직한 심정을 당신께 질문하고 싶습니다. 시릴이 그렇게 추락하여 땅바닥에 누워 있을 때 그걸 본 당신도 역시 저처럼 소년의 죽음을 떠올린 것 아니었습니까. 말하자면, 그때 이미 ‘저 소년은 단지 돌에 맞았을 뿐 잠시 뒤에 깨어날 것이다’ 하고 알아차린 사람은 몇이나 있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저의 궁금증은 이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시릴의 상태에 관하여 아직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상황이 아니었습니까. 엄밀히 말해 시릴은 그때 돌에 맞아 ‘쓰러진 것’이지 ‘죽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시릴이 죽었다고 미리 생각한 것일까요. 무엇을 근거로 말입니까. 왜 우리의 뇌는 먼저 움직이고 확신하여 시릴의 죽음이라는 판단을 먼저 하고 있었던 것일까요. 그러니까 우리는 착각을 했던 것이고 그 착각이 이 라스트 신의 역점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과정 때문에 우리의 그 착각이 생긴 것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이 반전이 사실 처음에는 좀 의심스러웠습니다. 억지로 신적인 것을 개입시키기거나 잠시 뒤에 뒤집힐 반전에 두배의 감동을 느끼기를 바라는 다르덴 형제의 꼼수로 느껴졌습니다. 그것이 처음에는 쇼크 효과로 보였고 다르덴 형제 영화 미학의 위험한 수신호라고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마술 절도녀와의 영화를 함께 생각해보니 다르게 볼 수도 있을 것 같았습니다. 이것이 ‘마술 절도녀의 영화’를 <자전거 탄 소년>에 앞서 말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저는 우선 <자전거 탄 소년>의 이 라스트 신을 ‘인간-매니풀레이션’ 기술이 작동한 장면이라고 부르려 합니다. 마술 절도녀의 그 기술이 머니-매니풀레이션 아니었습니까. 머니-매니풀레이션이 돈으로 우리를 조작하였다면 다르덴 형제의 영화는 지금 저 시릴로 우리를 조작하고 있습니다. 마술 절도녀가 머니-매니풀레이션이라는 기술로 점원에게 돈을 받았다는 착각을 심어주었다면 이 장면에서 다르덴 형제는 인간-매니풀레이션으로 우리에게 시릴이 죽었다는 착각을 심어주었습니다. 당연히도 여기에는 앞선 경우와 마찬가지로 인간-매니풀레이션과 함께 작동하는 몇 가지 요인이 더 있는 것 같습니다. 먼저 시릴의 추락입니다. 즉 육체의 추락입니다. 시릴의 몸이 땅바닥으로 고꾸라지면서 영화적으로 무엇이 발생했는지 우리는 묻지 않아도 앞선 경험으로 알 수 있습니다. 돈에 꽂혔던 점원의 그 시선처럼 시릴의 추락을 따라 여기서는 깜짝 놀란 시선이 발생합니다. 그러니 실은 두 번째 단계도 유사합니다. 제유법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지적하겠습니다. 시릴의 추락하는 몸을 따라, 그리고 쓰러져 있는 시릴을 두번이나 보여줌으로써, 즉 ‘추락과 쓰러짐’이라는 사태의 일부분으로써 이 장면은 시릴의 죽음이라는 전체를 착각하도록 우리를 유도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때 신문판매상의 부자는 어떤 대화를 나누게 되는 것입니까. “저 아이가 죽었다면…”이라는 대화를 나눕니다. 그 부자의 말들이 마침내 ‘시릴은 죽었다’는 내러티브를 그 순간까지 공고히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귀를 혼선에 빠뜨리는 청각적 정보들입니다. 물론입니다만 이 장면의 압권은 그 모든 걸 걷어 치우고 사만다의 사운드(전화벨 소리)가 시릴을 일으킨다는 데 있을 겁니다. 가짜 청각의 정보를 진짜 청각의 정보가 밀어내고 소년을 일으키는 것 말입니다. 리얼리티에 관한 동화 우리는 앞서 마술 절도녀의 영화를 예제로 지금 <자전거 탄 소년>의 마지막 장면을 설명해본 것입니다. <자전거 탄 소년>의 라스트 신에 관한 감상들은 대개 차이없이 부활과 면죄와 구원과 기적 등등의 낱말로 추려집니다. 하지만 그런 감정들을 받아들이기 전에 뇌의 조작과 착각이라는 영화적 과정이 먼저 작동하였음을 깨달아야만 한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다르덴 형제의 숨겨진 가장 큰 변화점입니다. 그러니 <자전거 탄 소년>에서 가장 크게 주목해야 할 궁극적 변화 지점이란 무엇이겠습니까. 그건 그들의 완강한 물리적 활동으로서의 영화에 뇌의 활동으로서의 부분적 개입이 영화의 정점을 통해 허용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위해 그들은 지금까지 손대지 않았던 뇌의 조작을 그리고 활동을 허용한 것일까요. 저는 오히려 이것이 리얼리티의 약화가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서 리얼리티 감각을 강화하기 위해서라고 느낍니다. 문제는 언제나 리얼리즘이 아니라 리얼리티 아니겠습니까. 이 장면의 경험으로 적어도 우린 한 가지를 확실히 알게 된 것입니다. 확실한 건 없다는 확실함 말입니다. 소년은 죽은 줄 알았지만 쓰러졌던 것이고 일어났습니다. 그러니 앞으로 어떤 일이 다시 일어나도 그건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 이 영화가 알려준 삶의 리얼리티의 확실성입니다. 그렇다면 저 멀리 자전거를 타고 프레임을 벗어난 소년이 사만다를 향해 가다가 다시 한번 후유증으로 쓰러질 것인지, 사만다에게 잘 돌아갈 것인지, 우린 섣불리 판단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게 이 영화의 진짜 리얼리티이기 때문입니다. 다르덴 형제가 다큐에서 출발한 감독들이라는 사실을 저는 기억하고자 합니다. 고다르는 연극과 극영화의 차이를 말하기 위해 연극에서 사람이 죽으면 극이 끝나고 그가 다시 살아난다고 관객이 당연히 믿지만, 극영화에서 사람이 죽으면 때로 그는 그 죽음으로 남는다고 했습니다. 이 말에 대한 저항적 인용인지 혹은 우연한 조응인지 알 수 없으나 다큐 감독 김동원은 극영화와 다큐의 차이를 지으며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면 그게 극영화이고 사람이 죽었을 때 정말 죽는 것이라면 그게 다큐라며 극영화와 다큐의 차이를 말한 적이 있습니다. 삶에서 죽음은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단 하나의 진실에 가까운 리얼리티이기 때문에 그런 말을 했을 겁니다. 다르덴 형제 영화 중 가장 순진해 보이는 이 영화의 에필로그에 이렇게 다큐적 세계관이 뇌의 활동 이후에 새겨져 있습니다. 결국 이 장면의 조작은 그 삶의 리얼리티를 역설하기 위한 조작으로 보입니다. 그러니 제 생각에 <자전거 탄 소년>은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한 소년의 동화라기보다는 한편의 영화가 어떻게 삶의 리얼리티를 순간 체험케 되는가를 질문으로 삼은, 리얼리티에 관한 동화처럼 보입니다. 세계에는 무수한 영화의 계열들이 존재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뇌를 조작하고 활동시키는 것으로 보이는, 그러나 외양적으로는 전혀 무관해 보이는 두편의 영화를 한 계열 안에서 말해보고자 했습니다. ‘마술 절도녀’와 <자전거 탄 소년>의 계열화 말입니다. 물론 마술 절도녀 사건은 실화일 뿐 실제 영화가 아닙니다. 그러나 제게 두개의 양상은 서로의 거울이자 서로의 영화적 현실로 보입니다. 그것이 바로 마술 절도녀를 예제로 놓고 <자전거 탄 소년>을 겹치면서, 동일한 분석법으로 두 영화의 몸통을 거치면서, 그럼에도 다른 결론에 이르려고 애쓴 이유입니다. 이것을 영화에 관한 두 가지 우화라고까지 말씀드리고 싶어집니다. 하나는 현실에서 어처구니없이 상영되었고 또 하나는 영화에서 기어이 현실성을 강화하려고 등장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술 절도녀는 감옥으로 갔고 다르덴의 영화는 우리를 감동으로 이끌었다는 차이가 있을 겁니다. 마침내 하나는 ‘현실 안에서의 영화(마술 절도녀의 영화)’이고 또 하나는 ‘영화 안에서의 현실(<자전거 탄 소년>)’인 것입니다. “예술은 현실의 반영이 아니다. 반영이라는 현실이다.” 고다르는 그 명제를 믿는다고 강고하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줄곧 이 문장을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지금 이 순간의 저에게는 현실의 반영과 반영이라는 현실, 그 둘 다 중요해 보입니다. 조금 비틀어도 그 사정은 마찬가지입니다. 가령 <자전거 탄 소년>을 현실의 반영으로 놓고 마술 절도녀의 영화를 반영이라는 현실로 놓고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반대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위대한 영화평론가의 질문, 영화란 무엇인가 하는 그 대전제가 저는 늘 힘겨웠습니다. 그래서 종종 그걸 뒤집어 비추어서 ‘무엇이 영화인가’ 물어보고 싶어집니다. 그 예로서 뇌를 활동시키는 영화의 어떤 계열에 관하여 잠깐 탐색해보았습니다. 그저 이렇게 한번 질문해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무엇이 영화입니까, 아니 무엇들이 영화입니까, 어떻게 서로 영화입니까.

[김중혁의 최신가요인가요] 말 많은 오빠, 나쁜 오빠야

텔레비전 음악 순위 프로그램에서 언제부터 가사를 보여주기 시작했을까. 자막처럼 가사를 보여주는 건 반대지만 (전 음악도 못 듣고 춤도 못 보고, 자꾸 그걸 읽고 있단 말예요! 음악을 자막으로 배운단 말예요!) 아이돌 그룹들의 현란한 노래와 랩의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려면 그 방법밖에 없을 것 같기도 하다. 가사의 내용이 어찌나 ‘아스트랄’ 하고 괴이하고 직설적인지, 자막 읽는 재미에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노래와 퍼포먼스와 가사의 불일치 때문에 배꼽을 잡는 경우도 많다. 걸그룹들의 노래는 대부분 ‘너는 정말 나쁜 남자다’라거나 (그래서) ‘남자와 곧 헤어질 예정’이거나 (아니다) ‘내가 오히려 나쁜 여자다’라거나 (이럴 바엔) ‘다 싫어, 전부 꺼져버려’(라며 ‘멘붕’의 극단을 보여주는) 가사들이 많은데, 이토록 가사는 슬프고 비트는 살벌하게 빠르고, 춤은 몸살나게 애크러배틱한 이유에는 “슬픈 일이 있을 때는 빠른 음악 속에서 너의 몸을 극도로 피곤하게 만들어 이겨내도록 하여라”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해보기도 한다. 걸그룹들의 무대가 슬프다. 관심이 깊어지고 있는 걸그룹(이라고 말하기엔 모호하지만 장현군이 입대하는 바람에 이제는 진정한 걸그룹) ‘써니힐’은 ‘아스트랄 걸그룹’의 한 극단에 있다(반대쪽엔 에프엑스?). 써니힐의 가사를 보고 있으면 정신줄을 놓은 멍한 모습의 누군가가 보인다. 3인조였을 때나 <최고의 사랑> O.S.T <두근두근>을 부를 때만 해도 멀쩡한 사람들로 보였는데, EP 《Midnight Circus》에 든 을 들으면서 이들의 남다른 해괴함을 눈치채고 말았다. 은 미성과 코타가 작사에 참여한 곡인데, 노래 중에 갑자기 연기를 한다거나 내레이션을 한다거나, 어디서 많이 들어본 듯한 ‘구어’를 끌어들여 노래를 풍성하게 만드는 솜씨가 놀랍다. 써니힐은 해괴함을 숙성시키더니 결국 다음 앨범에서 <나쁜 남자>라는 불세출의 괴작을 만들어내고야 말았다(이 곡 역시 미성과 코타가 참여했다). 2012년을 사는 한국 사람이라면 <나쁜 남자>를 듣는 순간 자동적으로 누군가를 떠올리게 된다. 가사가 이렇다. ‘내가 다 해봐서 아는데/ 오빤 말이 많아… 남들의 시선 따윈 눈이 작아 안 보여요 (우리 오빤) 남들의 의견 따윈 귀가 잘 안 들려요 (우리 오빤).’ 물론, 그분을 직접적으로 ‘디스’하려는 목적은 아니었겠지만 (설마, 그랬어?) 듣는 순간 가슴속에서 전해지는 ‘어떤 통쾌함’은 숨길 수가 없다. 2012년의 한국을 이런 식으로도 표현할 수 있는 거구나. 써니힐이 신곡 <백마는 오고 있는가>를 발표했다. (히트메이커이자 계속 함께 작업하고 있는) 김이나 작사, 이민수 작곡의 노래지만 이젠 뭘 해도 써니힐만의 색깔이 묻어나고 있다. 시원하고 통쾌하다. 써니힐, 이대로 쭈욱, 앞으로!

대신 웃어드립니다

‘하이킥’ 시리즈 중에서 가장 문제작이지만 그에 합당한 주목을 덜 받은 것이 바로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이하 <짧은 다리의 역습>)이다. 그 이유를 여러 가지로 지목할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이 시리즈가 노골적으로 블랙코미디를 표방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과거보다도 더 정공법을 택했다고 할까, 그래서 시청자에게 현실에 대한 위트를 제공하고자 했던 것이 이 시리즈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위트는 현실에 대한 재치있는 비틀기인데, 약간의 냉소가 묻어 있는 유머의 기법이다. 전작에 비해 <짧은 다리의 역습>은 이런 위트의 특성을 많이 살려서 코미디는 코미디이되 상당히 뒤틀린 스타일을 보여준다. 이전 시리즈에서 ‘하이킥’은 현실에 대한 알레고리를 제공했다고 할 수 있다. 알레고리라는 것은 현실을 그대로 말하지 않고 돌려서 다르게 표현하는 수사법이다. 극중 캐릭터는 현실의 개인이면서 동시에 전형이기도 하다. 전형은 현실을 비례적으로 재현하는 지도 같은 것이다. 따라서 이전 시리즈에서 현실은 상당히 추상적으로 제시되고 있지만, <짧은 다리의 역습>은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암울한 취업준비생이 나오고, 우울한 청소년 교육현장이 그려진다. 또한 부도를 맞아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되는 중소기업 사장과 그 가족이 등장한다. 이런 설정과 어울리지 않게 규범적인 ‘의사들’이 과장되게 그려진다. 익숙한 현실이 되풀이되는데, 어딘가 이상하게 경직되어 있다. 극중 한명은 나와 겹친다 이런 방식은 확실히 베르그송이 언급한 웃음의 원리를 떠올리게 만든다. <짧은 다리의 역습>은 자연스럽지 않은 뻣뻣한 제스처를 보여줌으로써 웃음을 자아내는 희극의 본질을 구현한다. 슬랩스틱은 아니지만 찰리 채플린의 코미디가 담고 있는 정서를 이 시리즈에서 느낄 수 있는 것도 흥미롭다. 채플린 영화에서 프롤레타리아는 부랑자와 겹치면서도 헤어진다. <짧은 다리의 역습>도 마찬가지로 심각한 사회문제를 두 갈래로 나눠서 보여준다. 이런 까닭에 한참 웃다가도 뒤끝이 남는다. 극중 캐릭터 중 한명과 자신이 반드시 겹치기 때문이다. <짧은 다리의 역습>이 환기시키는 현실은 이렇게 웃음 뒤에 남겨지는 ‘씁쓸한 실감’이다. 물론 코미디이기 때문에 상황은 슬픔을 극대화하지 않는다. 슬픔이 발생할 지점을 웃음으로 대체하는 것이 전략이다. 시청자가 <짧은 다리의 역습>에서 발견하는 것은 웃지 못할 현실이지만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웃을 수 있다. 바로 아이러니의 상황이다. 웃기지 않은 현실이 웃음의 소재로 바뀌는 순간을 곳곳에 숨겨뒀다. 장면은 빠르게 전환되고 호흡을 따라가면서 웃음보가 터진다. 그러나 삽입되는 웃음소리는 웃어야 할 지점을 시청자에게 알려준다. 웃음은 처음부터 극을 구성하는 요소로 설정되어 있다. 시트콤이라는 장르의 논리가 작동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웃음의 지점들을 정해놓음으로써 시청자를 유도하는 장치를 만들어놓은 것이기도 하다. 평등의 실현을 논의하며 소통하기 ‘웃음의 유도장치’ 덕분에 하이킥 시리즈는 시청자와 호흡하는 통로를 설치할 수 있다. 현실을 대신 웃어주는 것이 하이킥 시리즈의 역할이다. 현실에서 ‘이게 사는 건가’라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탄식할 때, 하이킥이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이들을 대신해서 웃어준다. 이 웃음소리를 들으면서 시청자는 ‘우리 모두는 평등하다’는 인식에 도달한다. 누구도 혼자 웃을 수 없다. 모두가 웃는 것이다. 웃고 싶지 않더라도 웃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하이킥 시리즈가 평등주의를 설파하려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평등주의에 집착했다면, 하이킥의 결론은 훨씬 윤리적이었을 것 같다. 이렇게 쉬운 길을 택하기보다 복잡한 공리주의의 논쟁을 택하는 것이 하이킥 시리즈의 특징이다. 결국 평등은 실현되는 것이지 원래부터 그렇게 주어진 것은 아니다. 평등을 실현하기 위한 방책을 논의하는 것이 이를테면 하이킥 시리즈가 시청자와 소통하는 방법이다. 그러므로 하이킥 시리즈는 누구의 편도 들어주지 않는다.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구분되지 않고, 도덕과 비도덕이 우열을 가리기 힘들다. 마치 ‘바보들의 배’처럼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는 군상이 각자의 이야기를 펼쳐놓는다. 현실에 대한, 방향성 없이 무질서한 묘사들을 보고 불쾌할 수도 있을 것이다. 게다가 <짧은 다리의 역습>의 경우는 현실에 대한 풍자의 기능을 더욱 강화했기 때문에 무질서한 현실성을 그려내는 것이 무책임하게 느껴져서 거부감을 줄 수 있다. 특정 현실의 거울 그러나 역으로 생각해, 웃고 즐겨야 할 코미디가 갑자기 심각한 분위기를 자아낸다면 맞지 않은 옷을 걸친 형국이 되어 외면을 받을 수도 있는 일이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상태에서 딜레마에 빠질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짧은 다리의 역습>은 하나의 문제를 여러 각도에서 보여주는 방식을 취함으로써 한계를 여유롭게 넘어서고 있다. 상호 참조를 통해 이야기들이 서로 교직되게 만드는 독특한 구조가 돋보인다. 예를 들어, 전작에 출연했던 배우들이 카메오로 등장하는 장면은 <짧은 다리의 역습>이 시청자에게 말을 거는 방식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하이킥 시리즈를 봐온 이들에게 이런 카메오 출연은 이전 시리즈에서 <짧은 다리의 역습>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들을 찾게 한다. 대중문화 내에서 참조가 이루어진다는 것은 장르화를 전제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이킥 시리즈가 단순한 연작의 수준을 넘어서서 하나의 코드로 독특한 장르의 논리를 형성할 수 있는 가능성이 형성되고 있는 셈이다. 자가 발전의 형식을 갖추었다는 점에서 하이킥 시리즈는 일종의 문화코드로서 보편성을 획득하게 되었다. 해당 시리즈마다 시시각각 변해온 정서들을 담고 있기에 하이킥 시리즈는 특정한 시기를 이해할 수 있는 거울이기도 하다. 가장 현실적인 캐릭터 백진희 20대의 표상 <짧은 다리의 역습>에서 가장 흥미를 끄는 캐릭터는 백진희이다. 다소 의아해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 이유는 백진희가 극중에서 가장 ‘현실’과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다른 캐릭터들은 현실을 직시하고 있지만 대체로 ‘다른 세계’에 속하는 것처럼 보인다. 백진희는 지금 한국사회에서 실체적으로 재현되지 않는 20대를 대표하는 캐릭터이다. 고시원에 살고, 밥을 굶고, 온갖 사회의 협잡에 휘말려 좌충우돌하는 모습은 이 사회에서 20대가 처해 있는 상황을 암시한다. 백진희가 특히 ‘궁상맞은 느낌’을 주는 이유이다. 그는 악역이다. 캐릭터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역할이 그렇다. 공중으로 떠오르는 열기구를 붙잡아두는 모래주머니 같은 존재가 백진희이다. 신세경이 시리즈 전체를 주도하던 관찰자였다면, 백진희는 가끔 등장하는 주변인이라는 점도 흥미롭다.

당신의 3일은 어떤가요?

총선이 있던 4월11일에 홍대 근처에 있었다. 내가 살고 있는 고양시에서 일찌감치 투표를 마치고 볼일을 보러 나간 것이었는데, 모임이 저녁 술자리까지 이어졌다. 한 클럽에서는 ‘우리 모두 모여서 총선 개표 방송을 보아요’라는(설마 지기야 하겠어, 싶은 마음의) 긍정적인 문구를 내걸고 조촐한 행사를 만들었다. 나도 그 자리에 가게 됐다. 분위기는 무거웠다. 무거울 수밖에 없지, 우리 모두 이제는 선거 결과를 담담하게 받아들이게 됐지만 투표함 뚜껑을 막 열었을 때는 우리 머리 뚜껑도 함께 열린 상태여서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울어, 말아? 홍대를 포함한 마포 구역을 지역 기반으로 활동하는 고소 전문 후보가 참담한 득표율을 보이고 있다는 소식에 환호성을 지르기도 하고, 몇몇 지역구에서 예상외의 선전을 하는 후보들을 보며 응원의 박수를 보내기도 했지만 한숨을 쉴 때가 더 많았다. 트위터에서는 진보신당이 여당이고 녹색당이 제1야당이었는데, 새누리당 이야기는 욕밖에 없었는데, 뚜껑을 열어보니 이게 뭐냐며 모두들 한숨을 쉬었다. 도대체 트위터의 그 많은 친구들은 모두 어디로 간 것이며, 저 이상한 결과는 어떻게 나온 것이냐며 모두 눈을 의심했다. 심상정을 비롯한 몇몇 후보들이 살떨리는 각축전을 벌이지 않았다면 진작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을 것이다. 술이나 마시러 가자며 일어나려는데, 아, 내 고향 김천의 선거 현황이 화면에 나타나는 것이었다. 잠깐, 이것만 보고 나가야 하는데 떠밀려 계단을 올라가다가, 아, 나는 그 놀라운 수치를 보고야 말았다. 83.5%. 내 고향 김천에서 야당 국회의원이 선거 대혁명을 일으켰을 리 만무하니, 그렇다면, 저 수치는…, 아니나 다를까, 새누리당 국회의원의 득표율이었다(83.5%는 최종 득표율이고, 내가 텔레비전을 보았을 때는 득표율이 더 높았던 걸로 기억한다. 83.5%는 결국 전국 최고 득표율이 됐고). 나는 83.5라는 숫자를 한참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당선된 의원을 비난하려고 그러는 게 아니다. 워낙 여권이 강세인 지역이었지만 83.5%는 이해가 되지 않는 숫자였다. 나는 그 숫자를 보다가 어머니와 아버지를 떠올렸다. 그래, 어머니와 아버지를 잊고 있었네. 오늘, 김천에서 투표하셨겠구나. 포맷의 승리 우리는 눈에 보이는 세계,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가 전부라고 생각하지만 세상은 넓고 별일이 많다. 홍대에서 함께 술을 마셨던 친구들은 우리가 응원하는 정당이 당연히 선거에서 이길 것이라 생각했지만 사람들은 트위터 밖에도, 컴퓨터 밖에도 많았다. 그 평범한 사실을 자주 잊는다. 평범해서 잊게 되는 건가.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보다가 그런 깨달음이 퍼뜩 떠오를 때가 많다. 내가 뭘 잊고 있었는지, 내가 보지 못한 세상이 무엇인지. 요즘 가장 즐겨 보는 프로그램 <다큐멘터리 3일>(이하 <다큐 3일>)에도 그런 ‘퍼뜩’ 하는 순간이 자주 나온다. <다큐 3일>은 ‘포맷’의 승리다. 어떤 삶이든 3일만, 72시간만 졸졸 따라다녀보면 그 윤곽을 파악할 수 있다는, 야심차고 건방진 기획인데 프로그램을 보다보면 그 기획에 설득력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삶과 인생은 반복이고, 기껏 변주돼봐야 3일의 패턴 속에서 반복되는 것이다. 잔인하고 섬뜩한 진실이다. 방송의 제목 리스트만 봐도 프로그램의 성격을 알 수 있다. ‘그들만의 여행-환경미화원 3일’, ‘생존의 방법-대구 곱창골목’, ‘엑스트라, 그들이 사는 세상-드라마 촬영장 3일’, ‘공존의 방법-성남 기름골목’ 등 이른바 ‘선택과 집중’을 통해 좁은 지역에서의 지속적인 삶을 보여주는데, (제작진에는 미안한 얘기지만) 프로그램을 날로 먹을 수 있는, 참으로 좋은 기획이다. 얼마나 할 게 많을까. 얼마나 찍고 싶은 3일이 많을까. 물론 알맞은 소재 선정에 고충이 따를 테고, 사전 대본 없이 ‘완전 리얼’로 카메라에 들어오는 사람들을 찍어야 하니 민감한 문제가 많겠지만 이 정도로 딱 떨어지는 기획을 만들기가 쉽지 않다. 소설가의 3일은 고작 10분? 좋은 기획은 파급력이 크다. 아마 내 생각엔 프로그램을 본 사람들 모두 ‘자신만의 3일’을 한번쯤 생각해보지 않았을까 싶다. 내가 주인공이 된다면, 내 삶의 3일을 찍는다면 어떨까. 나도 생각해봤다. 만약 찍게 된다면 제목은 ‘3일을 찍어도 분량이 모자라요-소설가의 3일’. 소설가 마을이 있어서 함께 소통하는 장면을 찍기도 힘들고, 누군가를 만나는 일도 많지 않고, 작업도 ‘액션’이 적으니 참으로 심심한 프로그램이 될 것이다. 술 마시는 장면만 자주 나오려나. 3일 찍어도 한 10분이면 방송 끝나겠지. 소설가를 촬영할 순 없겠지만 소설가에게 이보다 더 좋은 프로그램이 없다. 소설 속의 캐릭터를 만들기 위해서는 ‘생활’과 ‘반복’이 필요한데, <다큐 3일>에는 수많은 생활과 생활에 녹아든 캐릭터가 무수하게 등장하니, 이런 산삼밭이 또 없다. 세상엔 이렇게 사람들이 자신들의 일을 반복하며 살아가고 있었고, 그 힘으로 세계를 움직이고 있구나 생각하면 가끔 콧날이 찡할 때도 있다(솔직히, 자주 울었다). 개표 방송을 보다가 어머니, 아버지를 떠올렸던 것처럼 <다큐 3일>을 보면서 자주 어머니, 아버지를 떠올렸다. 반복을 인정하고 즐거움을 찾는 일 프로그램에 등장한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보면서, 결국 인생이란 반복을 인정하고 받아들인 다음 그 속에서 즐거움을 찾는 일이라는 걸 (나만 뒤늦게) 깨달았다(다들 진작에 알고 있었던 거야!). 때때로, 삶이 지루하게 느껴지는 건 아직 반복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투표 이야기로 시작했으니 투표 이야기로 끝내자면,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다큐 3일>에 등장하는 저 사람들, 자신의 삶이 반복되는 건 상관없지만 자식들에게 자신의 반복을 물려주고 싶지 않은 사람들의 마음을 붙잡아야 할 것이다. 저 사람들의 마음을 붙잡아서, 잘못된 역사가 반복되는 일은 막아야 할 것이다.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 74회 '인생 만물상, 고물상' 인생의 한계선 아래에 있는 사람들 주옥같은 에피소드가 많지만 최근의 개인적인 관심사 때문에 ‘인생 만물상-고물상 72시간’을 재미있게 보았다. 고물을 주워다 팔고 돈 몇천원을 받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고물을 팔아서 번 돈으로 기부를 하는 사람도 있었고, 2500원을 벌어 끼니를 때울 라면을 사는 사람도 있었다. 73살 안막내 할머니를 보다 울컥했다. “허리는 꼬부라지고 다리는 힘도 없고, 안 죽으려면 부지런히 해야죠”라며 구형 폴더폰처럼 접힌 허리를 펴면서 “아이고, 아버지, 아버지”라는 신음소리를 내뱉는데, 울컥하고 말았다. 뒤이은 고물상 사장님의 말이 프로그램을 요약한다. “인생을 알려면 어느 한계선이 아니라 그 밑을 봐야 해요. 밑을. 우린 항상 위만 보면서 살잖아요. 인생이 무엇인가. 여기 있어보면 그냥 눈물이 나올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