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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1997)

[SO WHAT] TV를 켜면 욕이 나온다

인디 밴드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의 ≪우정 모텔≫ 앨범 속에 수록된 <생두부>라는 곡이 있다. 최근에 내가 가장 열광적으로 좋아한 가요다. 들어도 들어도 질리지 않는 느릿한 곡조의 유장한 매력이 있는 데다가 가사가 압권이다. 특히 이 부분이 그렇다. ‘내 방의 고요, 동네의 정적, 우주의 큰 침묵 속에서, 나만 떠드네. 우~ 난 언발란스!’ 그럴 때 없나? 나 혼자만 떠들고 있다는 생각에 문득 외로워질 때. ‘문명의 실어증’ 앞에서 나 혼자만 ‘언발란스’하게 떠들고 있다는 생각에 문득 슬퍼지는 때? 내 경우 일방통행 매체인 텔레비전 앞에서 다들 과묵하게 앉아 있거나 좋다고 박장대소하며 웃고 있는데 나 혼자만 씨부렁씨부렁 불만을 토해낼 때 그런 느낌이 든다. 텔레비전을 보며 혼자 욕을 하는 여자라니. “야, 야, 입 닥쳐. 너도 아나운서냐? 그걸 뉴스라고 내보내? 무슨 놈의 아나운서가 존심도 없이 만날 버라이어티쇼 재탕하는 얘기만 그렇게 나불나불하냐고? 아으 무뇌아.” 정말이다. 언제부터인가 TV를 켜면 절로 나왔다. 욕이 KBS, MBC, SBS, YTN(종편은 아예 채널 신호를 지웠다!) 어느 채널을 틀어도 저절로 튀어나왔다. 특히 정부의 대리인들이나 다름없는 낙하산 ‘새끼’가 방송국을 점령하고 난 다음에도 여전히 자기들은 공영방송이라고 우기며 꼬박꼬박 시청료를 전기세에 포함시켜 영악하게 챙겨가는 KBS를 볼 때 특히 더 ‘된 욕’들이 마구 튀어나온다. “공영방송? 아주 지랄하고 자빠졌네. 차라리 개구리 옆구리에 날개를 달지 그래.” 총선 전후 거의 모든 방송사에서 김형태나 문대성 의원의 추문에 대해선 침묵하고 ‘김용민의 막말 파문’ 뉴스만 연일 지겹도록 반복하고 있을 땐 “이걸 돈까지 내면서 보는 내가 병신이지… 안 본다, 절대, 앞으로 눈깔이 다섯개라도 안 볼 거다. 정말. 이런 개…, 아니 이 개떡들아”, 했다. 우리 오빠 말이 맞다. “시청료, 흥 내가 왜 내? 받아야지. 얼어죽을 텔레비전을 왜 사? 지들이 줘야지. 자동차를 껴주든지.” 농담 아니다. 얼마 전 MBC <뉴스데스크>에서 앵커가 클로징 멘트를 하기 전 ‘까르띠에’ 광고가 3분 정도 방영되는 사고가 발생했을 땐 입으론 “이게 무슨 병신 짓이야?” 하면서도 머리로는 혹시 방송 사고마저도 수익성 광고로 이용할 만큼 장삿속이 점점 더 대범영악해지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 또다시 쌍욕이 돋았다. 과장 아니다. 어느새 텔레비전은 ‘우리의 수령, 통령, 우리의 갑’으로서 일상과 사고를 통제한다. 철저히. 그러니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는 시청자라면 돈 받고 보거나, 그게 아니면 아예 거부하거나, 둘 다 안되면 최후의 방법으로, 하는 수 없이 보게 되더라도 소신껏 욕을 해주면서 봐야 한다. 웬일인지 요즘은 소로가 세금 납부를 단호히 거부해서 감옥에 갔던 일이 자주 생각난다. 노예제도와 전쟁을 반대해서 미국 정부가 새롭게 인두세를 제정하자 그 돈이 노예를 사는 데 쓰이는지, 아니면 사람을 죽이는 총을 만드는 데 쓰이는지 알 수 없다며 세금 내기를 거부했던 그다. 그 때문에 감옥에 가게 된 소로를 찾아와 에머슨이 물었다고 한다. “자네는 왜 이곳에 있는가?” 소로가 대답한다. “당신은 왜 그곳에 있습니까?” KBS, MBC, YTN 등 방송 3사가 역사상 처음으로 합동 최장기 파업을 이어가고 있는 와중에, 파업에 참여하지 않고 전 국민을 기만하기 위한 땜빵용 방송을 만들고 있는 방송인을 볼 때마다 내가 묻고 싶어지는 말이다. “당신은 왜 그곳에 있습니까? 자동차를 껴줍니까?”

[베를린] “모든 영화의 진짜 근본은 관객”

독일 68혁명의 전조는 영화계에서 먼저 일어났다. 50년 전 ‘오버하우젠 선언’이 ‘뉴 저먼 시네마’의 물꼬를 텄던 것이다. 1962년 독일 오버하우젠단편영화제는 새로운 영화적 세대의 데뷔 무대였다. 26명의 영화인이 “아버지의 영화는 죽었다”고 선언했고, 전후 향토영화가 주류를 이루던 독일 영화계에 반기를 들며 혁신을 불러일으켰다. 이제 이 젊은이들이 팔순에 접어들기 시작했다. 이 세대는 세계대전 당시엔 너무 어렸고, 청년기에 접어들어서는 서독과 동독 분단과 재건의 시대를 맞아 군대의 의무를 면한 행복한 세대다. 그런 시대를 발판으로 새로운 세대의 영화인들은 새로운 형식의 영화를 지원해줄 진흥 시스템을 새로이 재구성해냈다. 오버하우젠 선언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알렉산더 클루게와 서면 인터뷰를 나눴다. 올해 80살을 맞은 그는 텔레비전 프로그램 제작자로, 작가로, 영화감독으로, 또 독일 지성계를 대표하는 원로로서 지치지 않고 새 작품을 내놓고 있다. 2008년부터 클루게는 현대사를 재조명하는 10시간짜리 연작영화를 제작 중이고, 그중 <마르크스-아인슈타인-자본론>(Nachrichten aus der ideologischen Antike-Marx/Eisenstein/Das Kapital, 2008), <신뢰의 결실>(Fruchte des Vertrauens, 2009)이 이미 DVD로 출시되었다. -올해 80살 생일을 맞이했다. 정기적으로 텔레비전과 인터넷 방송의 문화프로그램에 출연하고 거의 매년 책 한권은 출판하고, 거기다 가끔 영화도 만든다. 고령임에도 많은 창작을 해내는 비결은 무엇인가. =내 속엔 아직도 6살짜리가 들어 있다. 또 이미 돌아가셨지만 활기를 주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내 속에 아직 살아 계신다. 그래서 스스로 내 나이를 속일 수 있다. -1962년 오버하우젠 선언에 대해 개인적으로 어떤 특별한 기억이 남아 있는가. =그해는 독일의 전환기였다. 그해 쿠바 미사일 위기는 이른바 ‘슈피겔 위기’와 연관있었다. ‘슈피겔 위기’는 당시 서독에서 가장 힘있는 시사잡지 중 하나인 주간 <슈피겔>의 편집장과 발행인이 체포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을 통해 서독 총리 아데나우어로 대표되는 전후 재건시대가 끝나고, 그 자리에 새 세대가 들어섰다. 68학생운동이 터지기 6년 전 일이다. 1962년 오버하우젠 선언에 서명했던 26명의 영화인들은 선언 뒤 서둘러 자신의 장편 극영화를 찍어야 한다는 데 책임감을 느꼈다. 그래서 나를 비롯해 베르너 헤어초크, 폴커 슐뢴도르프, 에드거 라이츠,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등이 많은 영화를 찍었다. 이들과 함께 하나의 원칙을 세웠는데, 각자 자신의 영화를 책임져야 하고 독일 관객에게만 통하는 대중영화를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이 선언은 시작일 뿐이었고, 실제로 그 뒤 20년을 거치면서 서서히 우리의 선언이 실현되었다. 따라서 오버하우젠 선언에 참여했던 생존하는 모든 이들에게 ‘우리는 62세대’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현 독일영화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는가. =몇명을 예로 들자면 톰 티크베어, 로무알트 카마카르, 크리스티안 펫촐트와 같은 감독에게 큰 존경심을 갖고 있다. 하지만 현재의 미디어 환경을 고려해볼 때, 영화뿐만 아니라 인터넷, 텔레비전까지 아우르는 전체 동영상 미디어의 맥락에서 생각해야 한다. -예술영화 말고 대중에게 어필하는 영화에도 흥미를 느끼는가. =모든 영화의 진짜 근본은 관객이다. 이 사실을 너무 과소평가하거나, 절대 이들이 대중소비물의 수용자라고만 생각해서는 안된다. 최고의 작품이야말로 관객에게 환영받는다. 사람들은 최고의 작품을 이성으로가 아니라 감정으로 구분해낸다. 이 사실에서 작가주의 영화인과 관객의 의견이 일치한다. 작가주의영화는 반아카데미적이지만 고분고분하지는 않다. 관객이 이런 영화에 도전하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2009년에 나온 금융 위기를 다룬 <신뢰의 결실>이 가장 최근 만든 영화다. 새 작품 계획은 없나. =<신뢰의 결실>과 <마르크스-아인슈타인-자본론>에 대해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이는 러닝타임 10시간짜리 연작에 속한다. 앞으로 <1차 세계대전, 한 세기가 탈선하다>와 세계에 추위가 닥친다는 내용의 <용기있는 자는 말에서 추위를 떼어낸다>가 연이어 나올 예정이다.

봄날이 가는 이야기 <블루 발렌타인>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봄날은 간다>의 유지태가 기념비적인 대사를 던지던 순간, 몇몇 관객은 철없는 질문이라는 듯 코웃음을 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사랑은 유통기한이 짧은 우유처럼 쉬이 변한다. 수많은 멜로영화들이 끈질기게 반복적으로 변해가는 사랑을 탐구하는 이유가 뭐겠는가. ‘그 뒤로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happily ever after)로 끝나는 디즈니의 고전 만화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블루 발렌타인> 역시 봄날이 가는 이야기다. 신디(미셸 윌리엄스)와 딘(라이언 고슬링)은 부부다. 둘은 서로를 사랑하는 게 틀림없지만 불꽃이 점점 꺼져가는 것을 누구나 감지할 수 있다. 관계의 종말을 직감한 딘은 억지로 신디를 데리고 교외의 모텔로 간다. 마치 1970년대 텔레비전용 SF시리즈의 싸구려 세트처럼 생긴 모텔 방의 이름은 ‘미래’다. 사람들이 꿈꾸는 미래란 그토록 보잘것이 없다. 데릭 시엔프랜스 감독은 봄날이 가는 과정 사이사이 봄날이 시작된 과정을 삽입한다. 둘이 처음 만났을 때 신디는 의대생이었고 딘은 다정한 이삿짐 센터 직원이었다. 둘은 열정적인 사랑에 빠지지만 신디는 전 남자친구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걸 깨닫는다. 아이까지 품어주겠다는 딘의 사랑에 감화된 신디는 두려움 없이 결혼을 선택한다. 그러나 그녀는 치매에 걸린 할머니의 말을 기억했어야만 한다. “얘야, 나는 한번도 사랑에 빠져본 적이 없단다. 주의하거라. 사랑에 빠지는 남자가 과연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지 신중해야만 한단다.” 어떤 면에서 <블루 발렌타인>은 사랑에 관한 가장 비관적인 멜로드라마인 동시에 무계획적인 임신과 결혼에 관한 섬뜩한 경고영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데릭 시엔프랜스 감독은 부모의 이혼이 <블루 발렌타인>의 씨앗이 되었다고 말한다. “부모가 이혼했을 때 내게 위로가 되고 공감이 되는 영화를 보고 싶었지만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커다란 산이 어떻게 조약돌로 침식되는지, 작은 씨앗이 어떻게 삼나무가 되는지, 시간이 흐름에 따라 관계가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를 다루는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이게 됐다.” 시엔프랜스 감독은 시간의 흐름에 따른 관계의 변화를 보다 확연히 보여주기 위해 현재와 과거를 형식적으로 분리한다. 과거는 슈퍼 16mm로, 현재는 HD로 촬영됐다. 질감이 전혀 다른 장면의 대비는 다소 불친절하게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영화의 이야기를 명확하게 관객에게 전해준다. 영화적 형식이 서사의 결을 풍요롭게 만드는 사례로도 <블루 발렌타인>은 근사하다. <블루 발렌타인>은 관계의 종말에 관한 가장 고통스러운 영화 중 하나지만, 역설적으로 고통의 아름다움이라 불릴 만한 순간들로 가득하다. 그 순간들을 만들어내는 가장 큰 공신은 미셸 윌리엄스와 라이언 고슬링이라는 훌륭한 배우들이다. 두 사람은 상황에 대한 간략한 지침만 있는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많은 장면을 즉흥적으로 창조했다. 라이언 고슬링이 우쿨렐레를 연주하고 미셸 윌리엄스가 탭댄스를 추는 장면 역시 즉흥적으로 만들어진 순간들이다. 두 배우의 동물적인 화학작용은 영화의 매 순간을 살아 있게 만든다. 특히 미셸 윌리엄스는 <마릴린 먼로와 함께한 일주일>에 앞선 지난 2011년 <블루 발렌타인>으로 이미 오스카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바 있는데, TV시리즈 <도슨의 청춘일기>에서부터 계속해서 삶의 바퀴에 치여 쓰러지는 캐릭터만을 고르는 경향이 있다. 나쁘다는 소리가 아니다. 어쩐지 미셸 윌리엄스의 지치고 피로한 소녀적 얼굴은 점점 우리 시대의 아이콘에 가까워지고 있다.

[신 전영객잔] 돈의 맛도 결국 관념이고 허상일 뿐

나는 직업이 평론가니까 임상수의 <돈의 맛>을 봤다. 평일 조조 상영을 보는데 다른 관객은 뭘 기대하고 보는 것일까 궁금했다. 주부 관객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대개 서너 사람씩 동네 주민들끼리 온 것 같았다. 수다로 시끄럽던 객석은 영화가 시작되자 이내 조용해졌다. <돈의 맛>의 첫 장면, 주인공 주영작(김강우)이 윤 회장(백윤식)의 지시로 비밀금고에 들어가 돈뭉치를 담을 때 굉장한 스펙터클이 나오기 때문이다. 영작은 돈다발 더미를 보고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다. 카메라가 그의 넋나간 모습에서 뒤로 빠진다. 시야가 넓어지면 엄청난 돈다발들이 쌓여있다. 관객이 보고 싶은 스펙터클의 기대치를 처음부터 만족시키는 장면이었다. 그 장면에서 윤 회장은 영작에게 몇 다발 넣어두라고 충고한다. 맛 좀 보라고, 다들 그렇게 한다고 말이다. 영작은 돈다발의 냄새만 맡고 주머니에 넣지는 않는다. 냄새를 맡을 수 없는 관객은 그저 눈요기만 한다. 우리의 관음증은 이런 천문학적 돈을 쌓아두고 사는 부자들의 집안 내부 얘기를 궁금해한다. 임상수는 정확히 그렇게 한다. 예상할 수 있는 순서대로, 차근차근 그들의 욕망과 결핍을 그린다. 다분히 멜로 드라마틱한 공식을 따르며 종종 사회비판적인 메시지를 인물의 입을 통해 직설로 던진다. 관음증과 교훈극의 접합을 겨냥한 임상수는 이 영화에서 돈을 마음대로 주무르는 재벌가의 디테일을 볼거리로 묘사한 다음, 직설적으로 그들을 비판하고 그들에게 맞서는 주인공을 통해 인간의 자존을 따뜻하게 보여주려 한다. 이것은 기존의 임상수 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장치였다. <바람난 가족>의 마지막 장면에서 황정민이 연기하는 변호사 주영작이 아내에게 최종적으로 결별의지를 재차 확인받고 돌아서는 김에 살짝 두발을 공중으로 들어올리며 짝짝거리는 정도가 가장 산뜻한 임상수식 긍정의 표식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때 그사람들>은 처절한 비극을 블랙코미디의 감성으로 중화시킨 영화였고 <오래된 정원>은 멜로드라마였으나 다음 세대의 무심한 시선을 통해 아버지 어머니 세대의 불행을 희망으로 순치시킨다. <하녀>에서 은이(전도연)는 자존을 지키기 위한 방법으로 자신의 고용인들인 재벌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불태운다.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울어줄 리도 없으나 그것조차도 거부한다는 듯이. 그런데 <돈의 맛>에선 주인공 주영작을 단단한 자기 긍정을 회복하는 인간으로 그린다. 심지어 그의 점진적인 변화 궤적 속에선 재벌가 따님 나미(김효진)와의 동지적 관계가 연애 형식으로 만들어진다. 임상수의 예술, 소통에 성공했을까 관객은 부잣집 내부에서 벌어지는 화려한 통속극을 보고 싶어 했는데 주인공들은 그 세계에서 빠져나오려 한다. 그 세계 안에서 승리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또는 그 세계에서 멜로드라마틱한 과장법으로 치장된 패배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들은 그 세계를 부정하고 비판한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자신들의 위엄을 지킨다. 주영작과 나미는 평생 재벌가 리더로 살았던 윤 회장에게서 그 탈주를 위한 지침을 받는다. 유산을 물려받은 아내 백금옥 여사(윤여정)에게 얹혀살면서 부와 권력을 누린 윤 회장은 영화 중반, 필리핀 하녀 에바와 사랑에 빠져 가문을 등지기 직전에 주영작과 나미에게 평생 원없이 돈을 써봤으나 얻은 건 모욕감이라고 말한다. 그와 에바의 사랑은 지속되지 못하고 그는 비극의 장엄한 주인공이 되는데 그때가 되어서야 영화 속 어느 인물보다 행복해 보인다. 주영작은 윤 회장을 모방한 삶을 살 수도 있었다. 또는 윤 회장과 백금옥 여사 등과 대결 할 수 있었다. 이런 것도 클리셰지만 대중 관객이 원하는 것이기도 하다. 임상수는, 그리고 그의 의중이 반영된 주인공 캐릭터 주영작은 백금옥 여사가 제안한, 윤 회장의 삶을 흉내내는 삶의 길을 거절한다. 더이상 모욕감을 느끼고 싶지 않다며 <하녀>의 은이와 달리 당당하게 그들에게 등을 돌리고 걸어나온다. 돈의 맛을 느끼는 주인공을 보고 싶었던 관객에게 그는 돈의 맛을 보기를 거절한다. 첫 장면에서 윤 회장이 맛 좀 보라고 권할 때 주영작이 실컷 돈냄새를 맡은 뒤 호기있게 돈뭉치를 던져버리는 건 결말에 대한 복선이자 그의 본성이기도 하다. 영화에서 두 차례 반복되는 장면, 주영작이 방 모서리에 세워둔 거울을 치우면 뇌물 상납 때마다 챙겨놓은 돈다발들이 쌓여 있는 화면은 이 상승하지 않는 드라마의 알맹이를 표상한다. 돈의 맛을 본다 해도 그들에게 속하지 않은 우리는 찔끔 볼 수 있을 따름이다. 주영작의 방 안 모서리 거울 뒤에 숨겨둔 돈무덤처럼. 그것도 굉장하긴 하지만 이미 도입부에 산처럼 쌓인 돈더미를 본 우리에게 주영작의 방구석 돈다발들은 초라하다. 게다가 그걸 보기 위해서는 주영작이 거울 속 자기 모습을 보는 것을 우리도 봐야 한다. 간단하고 직설적이지만 이 두 장면은 충분히 인상적이었다. 거울 속 나를 보고 거울 뒤 돈다발을 챙겨야 한다. 돈다발이 쌓이는 정도만큼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내가 아니다, 라고 주영작은 생각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자기 성찰의 과정이 직설적인 화면으로 제시되기 때문에, 동시에 매우 공격적으로 묘사되기 때문에, 내가 본 극장의 객석 분위기는 초·중반의 관음증을 즐기던 온기가 점점 사라지는 것처럼 느꼈다. 한국 관객 대다수가 그렇긴 하지만,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관객은 조용히 서둘러 빠져나갔다. 노골적으로 불평을 늘어놓는 대신 조용히 빠져나가는 옆자리의 관객을 보고 나는 임상수의 예술이 소통에 성공한 것인지 아닌지 자문했다. 적어도 나는 <돈의 맛>에 감동했던 관객이다. 직설적이고 교조적이며 삐딱한 유머로 덧칠된 비극이라 정이 가지 않는다고 주변에서 비판하는 소리를 들었으나 나는 <돈의 맛>이 잘된 영화라고 생각한다.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을 생각한다>에서 읽은 것들이 떠오르긴 했지만 상관없었다. 임상수는 비교적 대자본이 들어간 주류 영화산업 복판에서 돈의 흐름을 관장하는 지배 엘리트들을 이렇게 맨 얼굴로 드러내 공격할 수 있는 예술적 호기의 소유자이다. 관음증의 충족과 그 죄의식을 덮어주는 말랑말랑한 멜로드라마의 수식을 원했던 관객의 요구를 의식하면서도 끝까지 우리에게 죄의식을 환기시키는 배짱의 소유자이다. 주영작과 나미가 필리핀 에바의 본가에 찾아간 마지막 장면에서 갑자기 비가 내리는 하늘을 보며 주영작과 나미가 서 있는 비교적 감상적인 이미지들 사이에 끼어들어간, 매우 임상수적인 이미지가 있다. 관 속의 에바가 갑자기 눈을 뜨며 영작이 넣어둔 돈다발을 보는 숏이다. 이미 죽어버린 불행한 멜로드라마의 히로인인 필리핀 여성은 우리에게 시위라도 하듯이 눈을 부릅뜨고 돈다발을 쳐다본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우리 대다수는 돈의 맛에 환장해 있다. 더 많은 돈이 우리 수중에 들어올 수 없는 걸 아는데도 언젠가는 들어올지도 모른다고 억지로 믿는다. 그 강고한 억지 환상이 우리 삶의 불우를 지탱해주고 있다. 완만한 멜로드라마 교훈극에 삽입된 악몽의 시연으로서 이 장면은 이어지는 이미지의 감상적인 선의를 왜곡하지 않으며 그 의미를 입체적으로 보태준다. 공간의 지배권을 갖지 못한 인물들 <돈의 맛>은 임상수의 반골적 태도뿐만 아니라 화면의 물성을 통제하는 그의 영화감독으로서의 재능도 잘 증명하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하녀>에서와 마찬가지로 인공적으로 꾸며진 재벌가 저택 내부는 인물들만큼이나 중요하다. 임상수는 대저택의 공간적 질감과 소품들을 인물들과 유리해놓는다. <하녀>에서도 그랬다. 리메이크라고 홍보됐지만 임상수의 <하녀>는 김기영의 <하녀>와 거의 관계가 없었다. 김기영의 <하녀>에서 일층과 이층의 공간, 그리고 일층과 이층을 이어주는 계단, 모든 방의 미닫이문들은 침입과 점거라는 모티브로 집요하게 사용됐다. 특히 이은심이 연기하는 주인공 하녀는 주인 부부의 집 내부 공간을 자기 것으로 전유하기 위해 공세적인 몸짓을 한다. 거기서 공간은 그곳을 점유하는 이들의 표정과 겹친다. 그러나 임상수의 <하녀>에서 공간은 그냥 액세서리이거나 실용적 기능을 위해 있을 뿐이며 그 결과 인물들과 유리되거나 심지어 밀쳐내는 인상을 준다. 이를테면 계단을 활용한 미장센은 김기영의 영화에서만큼 의미와 정서를 가진 표정을 지닐 기회를 아예 박탈당하고 있다. 아주 살짝 침입과 점거의 모티브가 있지만(은이가 주인의 욕실에서 목욕하는 장면이 일례다) 내러티브 깊숙이 들어오진 못한다. 임상수의 <하녀>에서 은이가 주인 훈과 관계를 가진 뒤 처음으로 조찬을 갖다주는 아침의 일과 장면에서 은이는 남자의 몸을 가졌다는 여자의 심리로 표나지 않게 으스대지만 피아노를 장중하게 치고 있는 훈은 그런 은이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는다. 은이는 모욕감을 넘어 패배감을 느끼는데 피아노 위에 수표가 든 봉투가 놓여 있기 때문이다. 몸의 소통으로 심리적 소통관계에서 대등한 위치에 올라섰다고 느낀 은이는 훈의 태도와 돈봉투의 권위적인 메시지 앞에서 다시 열등한 위치로 내몰린다. 우아하게 클래식을 피아노로 연주하는 재벌 총수는 그의 교양을 시위하고 있고 돈봉투는 그의 권력 앞에서 굴종을 요구한다. 이것으로 임상수의 <하녀>에서의 은이는 김기영의 <하녀>에서의 여주인공이 그랬던 것처럼 계단을 오르내릴 수 없다. 그녀는 공간의 지배권을 갖지 못한다. <돈의 맛>에서도 주영작은 당연히 공간의 지배권을 갖지 못한다. 그가 백금옥 여사의 지시를 받아 일상적인 잡무를 처리하기 위해 집안 곳곳을 돌아다니는 동안 그의 뒤와 곁에서 그를 쫓는 카메라는 그가 이 공간을 활보하는 게 아니라 조심스럽게 남의 집처럼 대하는 것을 공들여 묘사한다. 그는 곧잘 복도에서 방 내부로 들어가지만 그의 시점은 대체로 엿보는 자의 위치를 벗어나지 못한다. 주영작이 의도하지 않은 채로 윤 회장과 하녀 에바의 애무장면을 목격했을 때 주영작은 보지 말았어야 한다고 자책한다. 주영작은 이 부잣집 저택을 겨우 엿볼 수 있을 뿐이고 엿보는 것에 대해서도 두려움을 느낀다면 백금옥 여사는 자신의 침실 내부에 설치된 폐쇄회로 화면으로 집안 곳곳을 보고 있다. 그녀는 모든 것을 볼 수 있으므로 집안 공간을 장악하고 있다. 주영작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는 백금옥이 그를 폐쇄회로 화면이 설치된 방으로 불러들이는 영화 속 한 장면에서 주영작은 공간 깊숙이 들려오는 백금옥의 목소리를 따라 조심스럽게 백금옥의 사적 공간으로 살짝살짝 발걸음을 옮기며 들어온다. 투명 유리관을 걷는 것처럼 노출이라도 된 듯이 위축된 그는 이 공간에 대한 지배권을 가질 의욕조차도 박탈당한 사람 같다. 감시하는 자와 감시당하는 자의 위계 주영작이 걸으면 걸을수록, 그의 곁을 따라가는 카메라가 표상하는 것은 그가 좀비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덩달아 그의 시점에 포착되는 다른 피고용인들, 여러 하녀들과 경호원들의 존재도 영혼을 박탈당한 인형들처럼 보인다. 영화 속 한 장면에서, 주영작이 퇴근할 때 왕회장의 비서가 그런 주영작을 지켜보며 누군가에게 전화를 하고 그런 비서의 행동을 의아하게 나미가 바라볼 때 카메라는 감시하는 자와 감시당하는 자의 위계를 명확히 구분하는 이동화면을 연출한다. 이 화려한 공간에서 주영작은 겉돌거나 때로는 감시당하는 자이며 공간을 장악하고 감시하는 자의 편에 섰을 때 비로소 그들처럼 내려다보는 시점을 부여받는다. 고가의 장식품들로 꽉 차 있는 이 화려한 공간이 주인공과 겉돌고 있다는 느낌을 지속적으로 부여하는 임상수의 연출은, 그러나 그 공간의 주인들 입장에서도 똑같은 암시를 던진다. 윤 회장이 집을 나가기 직전 자신의 이층 서재를 정리하며 일층에 있는 주영작과 나미에게 돈을 맘껏 쓴 자의 모욕감을 얘기할 때 카메라는 그의 곁에서 내려다보는 앵글로 주영작을 비추고 있으나 여기서도 물리적 공간의 수직적 위계는 역설로 작용한다. 윤 회장조차도 그 공간의 지배권을 가질 수 없었다. 그는 꽉 찬 서재에서 자신의 것이라곤 고작 책 몇권만 챙길 뿐이다. 이는 윤 회장이 변심한 뒤 그가 드나들던 돈다발 창고가 텅 빈 것을 보고 허탈해하는 이전 장면과 조응하는 것이다. 자신들이 머무는 공간에서 등장인물들이 유체이탈된 듯한 이 역설은 심지어 이들 공간을 장악하는 것으로 보이는 백금옥 여사에게도 해당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돈의 맛도 결국 관념이고 허상이며 욕망의 가상대상일 뿐이고 누구도 그 돈으로 처바른 공간 안에 안착하고 있지는 않다. 결국 다 공허한 껍데기이므로. 임상수의 비관주의는 쓴맛이다. 그러니 애초부터 이 영화에는 요즘 유행하는 텔레비전 드라마와 같은 권력쟁탈의 드라마가 펼쳐질 여지가 없었다. 나는 그의 도저한 비관주의를 지지하며 그걸 화면의 번들거리는 물성에 비춰 보여준 영화감독으로서의 재능에 고개 숙여 경례한다.

매혹! “누벨바그의 메아리”

<다른나라에서>의 현지 반응?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일단 영미권 주요 매체들의 분위기는 ‘대체로 호평’이다. <버라이어티>는 <다른나라에서>가 “<밤과낮>의 이면처럼 상연된다”며 홍상수 감독의 전작과 비교했고, <스크린 데일리>는 “프랑스 누벨바그의 메아리가 이 귀엽고 쾌활한 세개의 로맨틱 익살극을 통해 다시 울려퍼지고 있다”라며 누벨바그와 비교하면서 글을 열었다. <텔레그래프>는 “홍상수의 영화는 로맨스라는 변화무쌍한 자연을, 윤회의 썰물을, 삶의 흐름을 지녔으며, 그것이 머리가 띵할 정도로 즐거운 혼란을 유발한다. 시각적으로 별나고, 당돌할 정도로 재미난 영화, 가장 좋은 종류의 이상함”이라고 호평했다. 본격적인 반응은 프랑스 현지 매체들에서 쏟아져 나왔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가 프랑스에서 호평 위주였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다른나라에서>에 대한 지금 분위기는 거의 만장일치에 가깝다. <르몽드> <리베라시옹> <인록> <누벨옵세르바퇴르> <크로니카르> 등 주요 매체들이 앞을 다투어 이 영화를 다뤘다. 최근 칸에 초대받았던 홍상수 감독의 어느 영화와 비교해도 감탄과 극찬의 물결이다. 이런 본격적인 호평들이 쏟아지자 상영 직후 영화제 데일리인 <필름 프랑세즈>와 <스크린 데일리>에 실렸던 다소 미지근한 별점은 거의 무색해졌다. 홍상수와 이자벨 위페르의 만남이 일으킨 마술이 자주 언급된다. “이자벨 위페르는 이 모험에 자신을 맡긴 나머지 고요한 아침의 나라의 국적을 획득했고, 홍상수에게만 속해 있는 숙취를 맛보게 되었다”고 <르몽드>는 전했고, “이번 영화제 작품 중 가장 뛰어나고 가장 재미있는 영화”로 <다른나라에서>를 소개한 <리베라시옹>은 “<다른나라에서>는 에릭 로메르에 비견되는 ‘트릭’ 하나를 공개한다. 홍상수에게 있어 핵심적인 것은 이미 본 것들이 교체된다는 점에 있다. 각각의 숏들은 마치 한 문장 안의 단어들처럼 같은 패러다임 안에서 서로 교체한다. 아마 이는 홍상수 영화의 시적인 면모와 관계가 있을 것이다. 아무 말도,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는데도 끊임없이 생생한 기다림을 부르고 세상에 대해 호소하는 하나의 목소리가 존재하고 있다”(<리베라시옹>)고 분석했다. 격찬은 이어진다. “<다른나라에서>는 우리에게 영화란 무엇인가를 다시 상기시켜주는 눈부신 기적에 다름 아니다”(문화 격월간지 <크로니카르>)라거나 “이자벨 위페르와 홍상수의 영화로 올해 칸 경쟁부문의 격이 높아졌다”(<누벨옵세르바퇴르>)는 단평도 있다. <인록>은 좀더 긴 찬사를 적었다. “배우 이자벨 위페르, 세명의 인물을 연기하는 이자벨 위페르는 홍상수의 악보에 몸을 맡기며 특별히 억지스러운 노력 없이 자연스럽고 우아하게 홍상수의 템포, 그러니까 그 굉장한 가벼움과 유연성을 받아 껴안는다. 동시에 홍상수의 영화 또한 이러한 이물성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상처 없이 살아남아 언제나처럼 사랑의 방황을 예리하게 과시하면서 그 어느 때보다도 유희적이고 눈부신 작품을 탄생시킨다. 이번 영화제 초반을 장식한 매혹!” 이런 분위기는 <카이에 뒤 시네마> 편집장을 지냈으며 홍상수 영화의 오랜 지지자인 장 미셸 프로동에 의해 잘 정리되어 있다. 그는 <다른나라에서>가 올해의 “칸에 해방적 바람을 불러왔다”며 이렇게 적었다. “이 바람이 지난 금요일부터 칸을 물에 잠기게 하고 있는 이 비까지 쫓아주기를 희망해본다. 엄밀한 수채화처럼 감동적이고 우아한 숏들이 이 영화에 동원된 그 모든 힘들에 그 모든 공간을 열어주고 있다. 어마어마한 자유분방함을 선보인 이자벨 위페르라는 배우의 연기의 힘, 바다의 힘, 바람의 힘, 그리고 웃음의 힘. 우리는 정말이지 많이, 그리고 진심으로 웃었다. 그리고 상영이 끝나자 관객은 감독과 배우들에게 마땅하면서도 기쁜 격찬을 선사했다.” <다른나라에서>의 해변 모항에는 프랑스 여인 안느가 있지만 칸의 해변에는 위대한 여배우 이자벨 위페르가 있다. 영화제 내내 홍상수와 이자벨 위페르의 협연은 큰 화제가 됐고 그녀의 모험심은 칭송의 대상이었다. 우연과 계산의 조화를 믿어 의심치 않는, 그 체질부터가 홍상수 배우다.

새로운 이름 아닌 거장의 새로움을 발견하다

폐막식이 있던 날 오후 칸영화제의 전 집행위원장 질 자콥은 열심히 호객행위를 하고 있었다. 심사위원들이 회의하는 과정을 사진으로 찍어 트위터에 올린 다음 거기에 수수께끼 같은 말을 달아가며 심사 과정을 생중계했다. 심사위원장 난니 모레티가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고민하는 사진이 올라오기도 했다. 결국에는 “빛이여 있으라!” 하고 질 자콥이 멘션을 날리자 그걸 본 사람들이 “이거 카를로스 레이가다스의 <포스트 테네브라스 럭스>(라틴어인 이 말을 영어로 옮기면 ‘Light After Darkness’가 된다)가 수상하는 걸 암시하는 말 아니냐”며 다들 웃었다. 설마 그럴 리 있겠느냐는 표정으로. 수상은 사실이 됐다. 수상 결과에 초미의 관심이 쏠리도록 전임 집행위원장까지 전면에 나서 다각도로 퍼포먼스를 한 것이다. 마침내 몇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황금종려상의 주인으로 미하엘 하네케의 <아무르>가 발표되었을 때 대개는 별다른 이견이 없었다. 그럴 만하다 혹은 그럴 수도 있다는 분위기였다. 수상작들에 의문을 제기함 하네케는 주제를 정하면 방식도 극단적으로 실천해야만 선택한 그 주제가 제대로 전달된다고 믿는 감독이다. <아무르>에서는 일차적으로 노년의 사랑과 죽음이 주제에 해당할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는 어떤 극단적 방식이 취해졌을까. 몇편의 전작들에서 하네케가 게임과 쇼크라는 극단성으로 폭력의 세계를 드러내려 했던 것이라면 <아무르>에서는 그 아무것도 장치하지 않고 그저 좁은 실내에서 움직이는 느릿하고 힘없는 노년의 배우의 몸짓을 지속적으로 지켜보는 극단성을 취한다. 무언가를 결코 하지 않으려는, 하지 못하는 극단성. 카메라는 결코 집 바깥을 벗어나지 않는다. 나이 든 아내가 갑자기 반신불수가 되고 정신을 잃어 병상에 눕자 나이 든 남편은 줄곧 집 안을 서성거리거나 잠시 외출했다 돌아오거나 할 뿐, 힘겨운 간병을 지속한다. 가끔씩 찾아오지만 말이 통하지 않는 딸은 도무지 도움이 되질 않는다. 남편의 눈에는 건강했을 때의 아내의 모습이 종종 상상으로 나타나지만 그것도 잠시 뒤면 사라지고 만다. 그런 일련의 과정이 모두 지난 다음 하네케는 이 남편에게 예의 하네케식 선택을 하게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그 결정적 선택보다도 그에 이르기까지의 숨 막힐 정도로 느리고 힘겨운 묘사들이 훨씬 더 깊은 슬픔을 자아낸다. 하네케 영화의 의심스럽고 위험한 영화 방식이 완전히 해소되지는 않지만 그의 영화의 새로운 정조가 그 극단의 방식으로 전해진다는 점에서 <아무르>는 확실히 관심을 받을 만하다. 12월에 국내 개봉할 예정이라고 하니 우리는 그때 또 <아무르>에 관해 말하게 될 것이다. 올해의 수상작에 관해서라면 그다음부터가 촌극이다. 심사위원 대상은 마테오 가로네의 <리얼리티>, 감독상은 카를로스 레이가다스의 <포스트 테네브라스 럭스>, 심사위원상은 켄 로치의 <앤젤스 셰어>가 받았다. 경쟁작 중 가장 무난한 작품과 가장 이해되지 않는 작품과 가장 대중적으로 유쾌한 작품 하나씩에 상을 나눠준 식이다. 이중에서도 특히 문제가 된 건 카를로스 레이가다스의 수상이다. 난니 모레티는 “이 영화의 영화언어에 매우 강한 인상을 받은 심사위원들이 있었다. 이 영화가 다른 감독이나 다른 영화에 비해 커다란 위험을 무릅쓰고 감행한 연출에 강한 인상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다른 심사위원들은 이 영화에 빠져들지 못했다”며 심사 과정에서 벌어졌을 논쟁을 시사했다. 프랑스 문화지 <인록>은 이 영화에 관해 “두 시간 동안의 헛소리”라고 무시했고 <르몽드>는 “이 영화를 그냥 못 본 척 지나칠 것인가 아니면 합리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이 작품을 합리적으로 분석하기 위해 노력해볼 것인가”라고 비아냥거렸다. 우린 이 영화의 형식적 실험이 강렬하다는 데에는 동의하지만 그 실험이 조화롭지 못하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난니 모레티는 영화제가 개막할 때 “세상에서 처음 보는 것 같은 영화”에 상을 주겠다고 했는데 정말 그렇게 한 모양새가 됐다. 지난해에 이어 칸영화제의 심사위원들은 자기가 보고 이해가 되지 않으면 그 영화가 좋은 영화라며 상을 주는 이상한 전통을 두해째 이어가고 있다. <포스트 테네브라스 럭스>가 올해의 <트리 오브 라이프>가 된 것이다. 앤드루 도미닉의 <킬링 뎀 소프틀리>를 기억하라 수상 결과에 관하여 우리만 의아해한 건 아닌 것 같다. 프랑스 현지 매체의 반응도 격렬하다. <텔레라마>는 “(황금종려상을 제외하고) 그외의 수상작 리스트는 완전한 난센스”라고 썼고, <리베라시옹>은 “황금종려상이 구원한 칸”이라는 제목을 달아놓은 다음 “웨스 앤더슨의 <문라이즈 킹덤>, 홍상수의 <다른나라에서>, 알랭 레네의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코스모폴리스> 등 경쟁부문의 몇몇 훌륭한 작품들을 은폐하는 바람에 심사위원장 모레티의 이미지는 손상을 입게 되었다”고 질타했다. <인록> 역시 “모레티는 결국 미학적이며 주제적인 측면에서 동시대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크로넨버그와 카락스를 무시했고 자기의 연출 실력을 과장하지 않는 홍상수와 키아로스타미의 섬세한 작품들도 무시했다”고 평했다. 하지만 이런 결과들에 너무 신경 쓰지는 않아도 될 것이다. 영화제를 정리하는 의미에서 수상작과 그에 관한 의견을 제출했지만 실은 영화제에서의 상이란 단지 심사위원 몇몇의 결정일 뿐 그 영화들에 관한 어느 온전한 증명도 되지 못한다. 혹은 공감과 격려의 목록은 누구에게나 따로 있게 마련이다. 단지 여기가 칸이기 때문에 늘 시끄러운 것일 뿐이다. 그러니 여전히 우리의 관심은 올해 심사위원들이 선택한 영화들에 한정되지 않을 것이다. 영화제 중반 이후 찾아온 우리의 흥미로운 영화 목록을 말할 차례가 된 것이다. 집행위원장 티에리 프레모가 특히 공을 들이고 있는 영미권 영화부터 말해보자. 그가 특히 이번 경쟁부문 선정 과정에서 영미권 영화에 자기의 안목이 많이 반영되었음을 과시하고 다닌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칸영화제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영화들은 역시 자국영화를 제외하면 대체로 영미권 영화들이기 때문이다. 칸의 신예 제프 니콜스가 만든 <머드>는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 이야기와 로브 라이너의 <스탠 바이 미>를 참조한 것 같은 영화라고들 많이 말하는데 그 점이 그다지 중요한 것 같지는 않다. 미국 아칸소 지역의 숲속에 살고 있는 두 소년은 옆 무인도에 놀러갔다가 숨어 사는 범죄자를 우연히 만난다. 하지만 그와 친밀해지고 그의 부탁까지 들어주는 사이가 되면서 위험에 빠지게 된다. 제프 니콜스는 한편으로는 범죄영화를 또 한편으로는 성장영화를 만들어간다. <테이크 셸터>로 실력을 인정받아 미국 독립영화계의 총아로 떠오른 제프 니콜스는 무언가 느슨하게 오래 극을 진행하다가 한방에 사건의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실력을 지녔다. 다소 성긴 구성과 진부한 결말과 처지는 리듬이 큰 단점으로 보이지만 제프 니콜스의 실력은 아직 한번쯤 더 기대해볼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라면 앤드루 도미닉은 뛰어난 수작 <킬링 뎀 소프틀리>로 완벽하게 자기 실력을 입증했다. 올해 경쟁부문에 오른 대중적 성향의 영미권 라인업 중 가장 뛰어나다. 이른바 얼간이 같은 범죄자 녀석 둘이 모여 어쩔 수 없이 더 얼간이 같은 녀석 하나에게 죄를 뒤집어씌웠을 때 어디선가 해결자(브래드 피트)가 나타나 그 모든 상황을 폭력적으로 종결해버린다는 이 내용은 조지 V. 히긴스의 70년대 범죄소설에 기초했다. 앤드루 도미닉은 시대를 오바마와 매케인이 경선을 벌이던 2008년으로 그리고 장소를 보스턴에서 뉴올리언스로 옮겨놓는다. 우매한 인물들이 등장하여 어처구니없이 엇갈린 방식으로 서로 난폭하기 짝이 없는 폭력을 휘두른다. 여기에 오바마 시대에 도래한 미국 경제난에 관한 우울한 메타포가 들어 있다고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이 영화의 매력은 그런 사회적 해석이 아닌 다른 데 있다. 어디선가 불쑥 나타나는 괴이한 인물, 그들 사이의 긴장감 넘치는 대립 그리고 무엇보다 코맥 매카시 소설에 빚진 코언 형제 영화의 배경에 마틴 스코시즈의 인물들이 결합한 것 같은 그 장르적 비장함과 살벌함 내지 우아함이 매력이다. 운명과 책임이 서로 엇갈리는 비정한 오해의 드라마가 피도 눈물도 없이 펼쳐진다. 브래드 피트의 연기가 뛰어나다는 건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귀엽고, 황당하고, 시원하게 <라이크 섬원 인 러브> 그리고 올해 영화제의 가장 큰 문제아(?)였던 카를로스 레이가다스의 <포스트 테네브라스 럭스>는 뛰어난 작품은 아니지만 문제작이라는 점에서 건너뛰어서는 안될 것 같다. 첫 장면, 초원에서 어둠을 맞이하는 아이의 길고 긴 이미지는 신기하고 성스럽다. 그다음부터가 문제다. 밀림에 사는 중산층 가족과 하층민 가족의 분절된 일화를 오랫동안 천천히 의미파악하기 어려운 순서로 보여준 다음 영화는 스스로 목을 뽑아버리는 남자(비유가 아니라 실제 자기 손으로 목을 뽑는다)에까지 이른다. 특징이라면 과장되고 과격한 미학에 있다. 그리고 그것이 언제나처럼 레이가다스의 영화를 졸작이거나 걸작으로 만든다. 이번에 그 과장됨과 과격함은 이성으로부터의 탈주를 목표로 두었던 것 같다. 그는 논리적 이야기를 배제하기 위해 철저하게 감각적인 시청각을 추구한다. 전에 없이 좁은 화면비율을 구사하고 화면의 가장자리를 뭉개서 흐릿하게 만드는 난생처음 보는 형식들도 도입한다. 레이가다스의 말에 따르면 그는 이 영화가 “이성이 가능한 한 적게 개입하는 표현주의 회화”를 겨냥했다고 한다. 어쩌면 이 영화는 걸작이 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작으로 남았고 올해는 유독 형식의 과격함이라는 성깔을 보인 작품이 적었기 때문에 수상의 행운까지 차지했다. 형식의 가장 과격한 끝점까지 나아갔다가 다시 돌아온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그가 만든 소품 같은 극영화 <라이크 섬원 인 러브>를 그다음에 말해야 할 것이다. 노교수의 집에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 초대받는다. 말하자면 원조교제다. 하지만 그녀는 피곤하다며 이내 잠들어버리고 노교수는 그렇게 아침을 맞는다. 우연히도 노교수는 다음날 그녀의 행적을 의심하는 그녀의 애인까지 만나게 된다. 그녀의 애인은 노교수를 그녀의 할아버지로 착각한다. 하지만 사실은 이내 밝혀진다. 여기서 키아로스타미는 자신이 창조했던 예의 그 신기한 구조적 다면체를 아예 모르는 척한다. 그 대신 하나의 선으로 얇게 이어지는 섬세한 정서를 붙들어가며 한편의 영화를 만들어낸다. 구조가 완화되고 감정에 치우치는 것이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다른 장점이 이 영화를 지탱하고 있다. 세밀하고 섬세하게 박자가 맞아가는 그 속도감과 운동성이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정겨운 원조교제 이야기(?)는 그렇게 따뜻한 감정을 갖게 된다.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도 한몫했을 것이다. 때때로 자동차를 타고 움직이는 것 자체가 곧 영화의 기본이라고 생각하는 키아로스타미는 차 안에서의 장면을 비상한 앵글로 찍어내기도 한다. 라스트 신에 이르렀을 때에는 다시 구조적 도전이 장면 전체를 감싼다. 사태를 파악한 다음 화가 나서 노교수의 집을 맴도는 여자의 남자친구는 다양한 소리로만 존재하고 집 안에서 그 소리들을 들으며 이렇게도 저렇게도 못하는 노교수는 동선으로만 존재한다. 그러다 갑자기 발생하는 마지막 ‘봉변’이 사건의 긴장감을 귀엽고 황당하고 시원하게 해소시킨다. 레오스 카락스의 <홀리 모터스>에 놀라다 대부분 예상치 못했고 솔직히 말하면 거의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작품인데 상영 이후 갑자기 화제작이 된 경우가 레오스 카락스의 <홀리 모터스>다. 개인적으로는 마감일과 겹쳐 보지 못했는데 동료 기자와 현지 평자들의 반응을 모아보면 호평 일색이다. 하루 종일 다른 무언가의 인물로 변신하는, 말 그대로 배우의 삶을 은유하는 어떤 남자를 드니 라방이 연기하는데 그의 변신 자체가 놀랄 만하며 그 변신이 영화와 배우의 존재론적 상태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아직까지도 반신반의하지만 어쩌면 레오스 카락스가 정말 수작을 내놓은 건지도 모르겠다. 적지 않은 프랑스 매체들은 레오스 카락스가 수상권에 들지 못한 것을 올해 영화제의 가장 큰 실수로 꼽을 정도다. “레오스 카락스의 <홀리 모터스>에 눈을 감고 듣지 않은 건 이번 심사위원들이 역사에 남을 만한 몰상식한 취향을 드러낸 것이다”(<인록>) 등이 대표적인 평이다. 뒤이어 우리는 마치 <홀리 모터스>에서처럼 리무진을 타고 유유히 나타난, 후반부 최고의 괴작이자 걸작인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코스모폴리스>를 말해야만 한다. 올해 칸은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와 아들 브랜든 크로넨버그를 각각 경쟁부문과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동시에 초대했는데, 두 영화를 다 보고 나니 아들의 영화는 기획상품에 불과했거나 아직 아버지의 영화만큼 되기에는 요원해 보인다. <코스모폴리스>는 또 다른 부자에 의해 기획되었고 크로넨버그의 손에 우연히 들어왔다. 포르투갈의 저명한 제작자 파울로 브랑코와 그의 아들이 직접 크로넨버그를 찾아와 제안하면서 성사된 프로젝트다. 그렇게 크로넨버그는 돈 드릴로의 원작을 2주 만에 각색했다. 머리를 깎고 싶다며 리무진을 타고 뉴욕의 동부에서 서부를 횡단하는 이 괴상한 억만장자의 이야기가 영화로 만들어진 것이다. 로버트 패틴슨이 연기하는 성공한 젊은 억만장자는 대통령의 퍼레이드가 있던 날, 분노하여 들끓는 시민들 사이를 리무진을 타고 유유히 움직인다. 그 와중에 여러 사람을 차 안에서 만나거나 그 주변에서 만나 대화하는 것이 거의 이 영화의 전부다. 아내와 미술상과 또 다른 재정 전문가를 만나고 혹은 한 남자에게 파이로 얻어맞기도 하고 직원이었던 남자에게는 살해 위협도 받는다. 지극히 표면적인 관계 혹은 추상적인 관계가 지속되는 와중에 크로넨버그의 가장 급진적인 미니멀리즘이 완성되는데, 이 영화는 이상하게도 긴장감이 늦춰지지 않는다. 액션 페인팅의 미술작품처럼 보이는 오프닝 크레딧으로 시작하여 다시 그와 같은 엔딩 크레딧으로 끝나기 전까지 우리는 피로할 정도로 그 대화를 듣고 그 피로한 대화가 걸작이 되는 기이한 경험을 한다. 미국 젊은이들의 우상이 된 흡혈귀의 왕자 로버트 패틴슨은 여기서 잘생겼다기보다는 창백한 인상으로 피로함을 드러내며 그가 연기를 할 줄 아는 배우라는 걸 입증해 보인다. 그가 타고 다니는 영화 속 리무진이 움직일 때 그 바깥의 공간과 안의 공간은 마치 행성과 행성 사이처럼 멀게 느껴지거나 아무 관계도 없는 사회처럼 느껴진다. 그 리무진을 타고 억만장자는 머리를 깎겠다며 뉴욕을 배회한다. 여기에 궁금증이 더해질 만한 크로넨버그의 말 한마디를 전하려 한다. 크로넨버그는 인터뷰에서 문득 이런 문장을 인용했다.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다름 아니라 이건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의 첫 문장이 아닌가. 동시에 크로넨버그는 자신의 영화가 그 문장과 관련있는 것 같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크로넨버그의 그 말은 수사가 아닐지도 모른다. <코스모폴리스>는 다만 유럽이 아니라 뉴욕, 그리고 역으로 공산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라는 유령으로 지금 배회하고 있다. 크로넨버그는 덧붙였다. “저는 마르크스가 이 영화를 보면 어떻게 생각할지 종종 궁금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그가 이미 예견했던 많은 걸 보여주고 있으니까요.” 그 말을 전하는 우리는 이 영화를 볼 당신이 어떻게 생각할지도 궁금하다. ‘나만의 수상작’을 꼽는다면… 2012년의 칸을 정리하는 의미에서 전반적으로 몇 가지 경향을 제시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큰 의미가 있을까 싶다. 새로운 이름의 발견이 전무한 대신(심지어 주목할 만한 시선에서조차 그러했다) 기존 거장들의 새로운 영화가 많았던 한해라고 표현하는 정도가 맞겠다. 두고 보아야 할 일이지만 마테오 가로네, 세르게이 로즈니차, 크리스티안 문주 등이 칸의 새롭게 부상하는 이름들이라면, 칸영화제에서의 놀라운 발견의 목록은 당분간 작성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러니 부정이 되었건 긍정이 되었건 매번 각자의 목록을 정리하는 것이 칸영화제에 관한 마무리가 되어야 할 것 같다. 그런 때문인지 <인록>과 <텔레라마>의 기자들은 앞다투어 각자의 ‘나만의 수상작’을 가상으로 뽑았고, <인록>의 경우는 집계까지 냈다. 그들은 황금종려상 <홀리 모터스>, 심사위원대상 <다른나라에서>, 감독상 <코스모폴리스>, 남우주연상 장 루이 트랭티냥, 여우주연상 이자벨 위페르를 선정했다. 우리도 그와 같은 목록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시상하는 대신 그 명단을 나열하기만 할 것이다. 여기엔 트로피도 부상도 없고 다만 존중과 공감과 경애만이 있다. 2012년 22편의 경쟁작 중 2012년 칸에서 우리가 사랑에 빠진 영화의 명단을 ‘상영순서’대로 작성하면 다음과 같다. 미하엘 하네케의 <아무르>, 홍상수의<다른나라에서>,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라이크 섬원 인 러브>, 알랭 레네의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앤드루 도미닉의 <킬링 뎀 소프틀리>,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코스모폴리스>. 올해의 칸영화제가 뜻깊었다면 그건 그 어느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이 영화들이 바로 거기 있었기 때문이다.

가장 스펙터클한 속편 VS <에이리언>의 빈곤한 친족

<프로메테우스>는 지금 한국의 리들리 스콧과 <에이리언> 시리즈 팬들, 심지어 비평가들 사이에서도 찬반양론이 격돌하는 영화다. 영화가 먼저 공개된 영미권 매체들 사이에서도 이런 현상은 마찬가지다. 외신들의 반응을 찬성과 반대로 나누어 정리했다. 찬성 <가디언> “혼란스럽고, 번잡하고, 스펙터클하다. 그러나 <프로메테우스>는 그 모든 정신나간 요소들을 잘 통제하는 영화이며, 매우 볼만한 경험이다. 물론 여기에는 <에이리언> 1편이 가졌던 결정적인 한방이 부족하다. 또한 <에이리언>이 지녔던 풍자적인 번득임과 인간 존재와 죄의식을 공격하는 합리주의자적인 면모도 부족하다. 그러나 <프로메테우스>에는 강력하게 굴러가는 내러티브의 추진력이 있으며, 순결해 보일 정도의 이상주의가 있고, 지구 바깥에 존재하는 어떤 존재와 접촉했을 때의 흥분감을 잡아채는 감각이 있다.” <옵서버> “리들리 스콧은 건실하게 긴장감을 쌓아올린다. 그는 오리지널 <에이리언> 시리즈로 귀환해서 생겨난 막대한 기대감을 반드시 충족시키되 똑같이 반복해서는 안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으며, <에이리언>이 던져둔 의문점들에 해답을 보여줘야 한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그렇다. 에일리언이 존 허트의 가슴을 뚫고 나오는 그 장면에 상응하는 장면이 있어야 하되 똑같은 방식으로 되풀이하면 안된다는 소리다. 그리고 리들리 스콧은 압도적으로 그걸 해낸다. <프로메테우스>는 거대한 종교적, 우주적, 목적론적 이슈를 불러일으키려 노력하지 않았던 존재론적 호러영화인 <에이리언>보다 무거운 영화다. 어떤 사람들은 이걸 허세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테지만.” <박스오피스 매거진> “무시무시한 하이프와 기대감을 생각한다면, <프로메테우스>가 그저 평균 이상의 좋은 영화라는 사실은 좀 실망스러울 수도 있다. 그러나 보통의 스펙터클 블록버스터보다 더 똑똑한 영화를 기대하는 관객은 충분히 만족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게 앞으로 30년간 SF 장르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칠 정도는 아니라도 말이다. <프로메테우스>가 <에이리언>의 ‘우주 공간의 유령의 집’ 테마를 그저 반복하고 있을지라도 여전히 이 영화는 비슷비슷한 장르영화들을 앞서 나간다. 우리는 마이클 베이의 교조적인 로봇 트럭에 관한 바보 같은 판타지가 SF로 간주되는, 우둔하고 어리석은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니 <프로메테우스>가 천국으로부터 훔쳐낸 불꽃의 빛과 열기에 대한 지적이고 격조있는 진짜 SF 장르의 시작이 되도록 허하자.” 로저 에버트 “<프로메테우스>는 경이로운 SF영화로, 인류의 기원에 대한 질문을 던져놓고는 답변을 내놓지 않기 때문에 더욱 흥미진진하다. <에이리언> 1편을 되풀이하면서도 독창적인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하는, SF 황금시대의 고전적인 전통에 위치한 영화. 솔기없이 봉합된 이야기와 특수효과, 완벽한 캐스팅, 관람을 방해하지 않도록 만들어진 분별있고 효과적인 3D 효과까지. 나는 이런 영화 앞에 약해질 수밖에 없다.” 반대 <빌리지 보이스> “<트리 오브 라이프>의 생명의 창조 장면이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모노리스 서곡을 연상시키며, <프로메테우스>는 지구의 유년기에 대한 독자적인 프롤로그로서 시작한다. 리들리 스콧은 여기서 장벽을 흔들고 있다. 그는 76살이며 아마도 삶과 우주와 모든 것을 아우르는, 어떤 경력상의 유산이 될 만한 영화를 만들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의 재능은 지난 10여년간 서서히 무뎌져왔다. 이 지나치게 야심이 큰 <프로메테우스>의 스콧은 마치 영화에서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피터 오툴을 흉내내는 로봇 데이빗처럼 보인다. 스콧은 여전히 에픽의 외양을 흉내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외양만 존재한다.” <데일리 텔레그래프> “유령의 집 장르를 우주 공간에 옮겨 심고 H. R. 기거의 악몽 같은 프로덕션 디자인으로 우리를 놀라게 하면서 <프로메테우스>는 가슴을 뚫고 에일리언이 튀어나오는 그 유명한 장면의 충격효과를 또다시 우리에게 안겨준다. 이건 <에이리언>과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DNA를 결합한 영화이며, 두 가지 이야기를 동시에 해내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프로메테우스>는 용두사미고 끔찍할 정도로 이야기가 울퉁불퉁하다. 끝내주게 만들어진 장면들은 결국 클리셰로 귀결되고, 멀쩡하게 생겨먹은 캐릭터들은 도무지 사리분별에 맞지 않는 행동만 계속한다.” <엠파이어 매거진> “축적되어가는 공포가 없다. 뼛속 깊이 스며들던 <에이리언>의 귀신 들린 듯한 고요와 원초적인 불안감도 없다. <프로메테우스>는 너무 바쁘고 수다스럽고 시끄럽다. 대단원으로 모래알처럼 날아가던 영화는 결국 B급영화적인 신체훼손의 난동 속으로 굴러들어간다. <에이리언>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품고 있었다. 서스펜스 부족과 진부한 캐릭터와 빈약한 대본 때문에 압도적인 비주얼과 질척한 광기와 마이클 파스빈더의 연기조차 <프로메테우스>가 <에이리언>의 빈곤한 친족처럼 느껴지는 걸 막을 도리가 없다.” <무비라인> “<프로메테우스>는 싸구려 오락거리는 아니다. 리들리 스콧은 그를 추종하는 관객을 만족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 것으로 느껴진다. 그는 <에이리언>이라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SF영화 중 한편을 우리에게 선사한 바 있다. 최근에 <에이리언>을 다시 보고 우아할 정도로 천천히 흘러가면서도 모든 순간에 긴장감을 집어넣는 솜씨에 감탄했다. 그러나 <프로메테우스>는 이 시끌벅적한 블록버스터 시대에 도전해야만 하는, 훨씬 만들기 힘든 영화다. 당신은 <프로메테우스>가 야망의 무게에 깔려 신음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소리는 리들리 스콧이 원했던 소리와는 아마도 거리가 멀 것이다.”

[클로즈 업] 라디오를 듣는 것처럼

전기현. 이 사람의 감미로운 목소리를 듣기 시작한 게 벌써 10년째다. <세계음악기행>이라는 월드 뮤직 전문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처음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지금은 밤에서 새벽으로 넘어가는 12시에서 1시 사이에 <전기현의 음악풍경>으로 우리를 찾아온다. 한편 라디오 전문 DJ이지만 그가 중요하게 하는 일이 또 하나 있다. OBS 경인TV에서 방영되는 영화 음악 프로그램 <전기현의 씨네뮤직>이다. 이 프로가 방영 일주년을 맞았다. 영화와 음악이 동등하게 존중받는 독특한 프로그램이다. 토요일 밤 현란하고 산만한 방송들이 많은 시간대에 휴식 같은 영화와 음악과 목소리를 듣고 싶은 당신이라면, 그와 금방 친구가 될지도 모르겠다. 그를 만났다. -월드 뮤직 라디오 프로그램 DJ로 유명하다. =원래도 좋아했지만 파리에서 유학할 때 더 폭넓게 듣게 됐다. 처음부터 라디오 DJ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내가 라디오 세대이기 때문에 하면 좋겠다는 생각은 한 것 같다. 결국 많이 모아둔 음반들이 빛을 보게 된 거다. (웃음) 월드 뮤직 전문가를 찾다가 친구 소개로 내게 연락이 왔고, 하게 됐다. 그런데 라디오는 처음 할 때부터 낯설지가 않았다. -방송 출연을 한 적도 있다. =귀국 직후 음반 사업팀에 있었다. 그렇게 음반들을 내다가 회사에서 “네가 샹송도 하나 불러서 넣어라”고 하더라. 그래서 그렇게 했고 어쩌다 사진도 나가게 됐다. 또 어쩌다 광고까지 찍게 된 거다. 의류 광고, 남성 화장품 광고 등이었는데, 카피가 대강 이런 거였다. “프리랜서는 프리랜서를 입는다”, “남자가 여자보다 아름답다”. <컬러>라는 윤석호 PD의 드라마에도 출연한 적 있다. 그런데 배우로서는 소질이 없었다. (웃음) -파리에서는 음악이 아니라 영화를 공부했다던데. =파리 7대학에서 영화방송학을 공부했고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뭐 특별히 연출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고 영화가 좋았고 궁금하고 알고 싶었다. 영화는 실컷 본 것 같다. -<전기현의 씨네뮤직>이 1년 됐다. 어떻게 맡게 됐나. =<울림>이라고 가수 김현철씨가 진행하던 OBS 경인TV 콘서트 프로그램이 있었다. 그 프로 중 일부로 5분짜리 새 코너를 만들었던 게 지금의 전신이다. 그걸 내가 맡아 했었다. 그런데 반응이 좋았었나 보더라. 지금 <전기현의 씨네뮤직>으로 확장된 거다. -매회 테마별로 진행된다는 게 특이하다. =우리는 오히려 개봉작은 피한다. (웃음) 계절도 생각하고 그달의 이슈도 생각하고 또 중요한 배우나 작곡가들 위주로도 고른다. 예를 들어 영화 속 전쟁이라는 테마라고 한다면, <디어 헌터> <지중해> <특전 U-보트> 등 영화 클립과 함께 음악을 들려준다. 그리고 되도록 음악을 끊지 않으려고 한다. -다룬 테마 중에서 기억에 남는 건 무엇이 있나. =영화로 치면 스탠리 큐브릭의 <배리 린든>이 있고, 작곡가별로 본다면 엔니오 모리코네, 프랜시스 레이, 모리스 자르, 존 베리 등이 좋았다. <대부> 시리즈는 내가 우겨서 했고. 왜냐하면 그건 파리에 있을 때 특별한 경험을 해서다. 밤 10시에 시작해서 다음날 아침까지 영화를 보고 나왔더니 문 앞에서 빵을 나눠줬던 기억이 난다. 아, 그리고 조르주 들르뤼, 92년에 세상을 떠난 프랑스 영화음악 작곡가인데, 음악이 참 좋다. 장 뤽 고다르의 <경멸> 음악을 했었다. -개인적인 취향이 많이 반영되나. =음악에 관해서는 거의 그렇다고 봐야 할 거다. 좋은 영화도 골라야 하겠지만 좋은 음악이 우리로서는 더 중요하다. 영화까지 좋으면 금상첨화이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음악에 중점을 두고 그다음에 영화를 고른다. 텔레비전 프로지만 라디오하고 유사한 프로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 처음에 내가 기획 제안을 받을 때도 그렇게 받았다. 라디오를 듣는 것과 같은 방송 프로그램을 하고 싶다고 기획자가 말했고 그래서 나도 무조건 하기로 했던 거다. 라디오가 좋은 건 영화가 좋거나 나쁘거나와 무관하게 음악이 좋으면 그 영화의 간단한 시놉시스만 들려주면 그 영화에 대해 궁금해한다는 것이다. 우리 프로그램이 독특한 게 그런 거다. -소개하고 싶은 소재들이 분명 많을 텐데. =작곡가로 치면 조르지오 모로더, 헨리 맨시니를 하고 싶고 배우는 알랭 들롱을 한번 다루고 싶다. 그가 출연한 영화들 중 음악이 좋은 영화들이 많으니까. 그리고 이제 얼마 안 있으면 메릴 스트립을 주제로 한 방송이 나갈 거다. 감독으로 치면 제임스 아이보리, 그리고 누구보다 니키타 미할코프의 영화들. 가을쯤에 꼭 한번 해보고 싶다.

할리우드 드림 <디디 할리우드>

우리가 비가스 루나라는 이름으로부터 절로 떠올리는 영화가 하나 있다. 하비에르 바르뎀과 페넬로페 크루즈를 전세계에 소개한 1994년작 <하몽 하몽>이다. 비가스 루나는 이후에도 <골든볼> <달과 꼭지> <밤볼라> 등 가히 스페인적으로 섹시한 영화들을 만들어냈다. 어떤 면에서 비가스 루나의 대표작들은 순결무구한 에로스의 동화라고 부를 만하다. 조금 덜 고상하고 조금 더 상업적인 페드로 알모도바르라고나 할까. <디디 할리우드>는 2002년작 <마르니타> 이후 10년 만에 복귀한 비가스 루나의 신작이고, 무대는 스페인이 아니라 할리우드다.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바텐더 일을 하는 다이아나 디아즈(엘사 파타키)는 스타가 되기 위해 미국 마이애미로 무작정 떠난다. 마이애미에서 입에 풀칠도 못하며 고생하던 다이아나는 조감독으로 일하는 로버트(루이스 하차)와 사랑에 빠져 할리우드로 향하고, 거기서 공격적인 에이전트 마이클(피터 코요테)을 만나 할리우드 스타 스티브(폴 스컬포)와 결혼한 뒤 ‘디디’라는 이름으로 스타가 된다. 그러나 디디는 스티브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흔들리기 시작한다. <디디 할리우드>는 순진할 만큼 직설적으로 할리우드 드림의 과정을 펼쳐내는 드라마다. 여배우의 할리우드 진출기를 다룬 일본 순정만화를 텔레노벨라로 각색하면 딱 이런 영화가 나올 것이다. 더 재미있는 건 노골적으로 실제 할리우드를 반영하며 만들어낸 캐릭터들이다. 디디는 라틴계 여배우로서 할리우드에서 성공한 페넬로페 크루즈에 다름 아니고, 스티브로부터 톰 크루즈를 떠올리지 않는 건 거의 불가능할 지경이다. 피터 코요테의 냉혈한 에이전트 연기도 재미있지만 <토르: 천둥의 신>의 주인공 크리스 헴스워스의 아내인 엘사 파타키의 매력은 스페인산 하몽처럼 쫄깃하다.

[SO WHAT] 고뇌의 벗들에게

답답하다. 오늘날의 실업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버트런드 러셀이 이미 50여년 전에 제시했다고 생각하는데 별로 주목하는 이들이 없는 것 같다. 아주 간단하다. 회사에 다니는 인간들은 너무 오래 일해서 불행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일자리가 없어서 문제다. 그렇다면 러셀이 말한 대로 하면 되는 거 아닌가? “만약 사회가 현명하게 조직해서 아주 적정한 양만 생산하고 보통 근로자가 하루 4시간씩만 일하게 한다면 모두에게 충분한 일자리가 생겨날 것이고 실업이란 것도 없을 것이다” 했던 것처럼. 물론 순진한 생각하고 자빠졌네, 하고 딴죽을 걸 사람들이 많다는 거 안다. 그 문제에 대해서도 미리 짚어보자. 첫째, 노동시간을 4시간으로 줄이고도 모두 만족스럽게 살 수 있겠냐는 거다. 예컨대 4시간만 일하면 수입이 절반으로 줄어들 거다. 그러고도 괜찮겠냐는 거다. 괜찮다. 내가 지금 그렇게 살고 있어서 안다. 너무 당연해서 입에 담기도 민망하지만, 수입이 줄어들면 지출을 줄이면 된다. 식료품비를 줄이기 위해 텃밭에서 각종 야채를 키워 먹고, 외식을 거의 차단 수준으로 줄이고, 가까운 거리는 무조건 걷다 보니 지난 20여년 동안 애물단지처럼 달고 다니던 뱃살이 쏙 빠지고 얼굴색까지 환해졌다. 또 전기료를 줄이기 위해 촛불을 켜고, 수도료를 아끼기 위해 한 욕조에서 둘이 같이 목욕을 하니 삶이 더 우아하고 섹시해졌다. 게다가 있는 옷으로 어떻게 하면 멋지게 입을까 고민하다 보니 스타일마저 좋아졌다(톰 포드가 그랬다. 같은 옷도 더 멋있게 입을 궁리가 필요없는 부자들이 더 스타일이 없다고). 물론 줄일 수 없는 지출이라는 게 있다는 거 안다. 예를 들면 대출금이라든가 월세 혹은 대학등록금 같은 거. 그래서 정부가 필요한 거다. 강력한 의지로 이 문제를 현명하게 해결해줄 정부. 서민 편에서 전국의 은행과 집주인, 땅주인, 그리고 부동산업자들을 압박하고 통제해줄 위대한 정부 말이다. 두 번째는 여가와 권태의 문제다. 그러니까 하루에 4시간만 일하면 나머지 시간은 뭘 하며 보내야 할지 몰라서 괴로워하는 권태로운 인간들이 많아질 거라는 지적이 있을 수 있다. 그래서 러셀은 “교육의 목표는 여가를 현명하게 사용하는 데 필요한 안목을 제공하는 항목이 들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이제라도 배우면 된다. 주로 텔레비전을 보고 술집에 가고 간혹 야구장이나 공연장을 찾아다니던 수동적 여가 말고 금속이나 나무를 다루고, 도자기를 굽고, 악기를 연주하고, 길거리 축구를 하고, 연극배우로 무대에 오르고, 화초를 가꾸고, 집수리를 하는, 생산적이면서도 창의적인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 모두에게 잠재되어 있다고 나는 믿는다. 너무 이상적인 생각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여하튼 그럼 세상은 개성적인 사람들이 더 많은 무척 재미난 곳이 될 텐데 하고 어리석을 정도로 순진하게 바라게 된다. 예컨대 아침에는 악보 베끼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점심 먹은 뒤엔 철학적인 저술 활동을 좀 하다가 오후 다섯쯤 되어 가재를 끌고 산책을 나갔던 루소처럼 말이다. 내가 그의 이웃이었다면 얼마나 재미있었을까? 루소가 말한다. “인사하게. 보다시피 가재일세. 식용은 아니고 내 절친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