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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1997)

[진중권의 미학 에세이] 인간이 불행해지는 두 가지 방식

“예수는 우리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 죽었다는데 우리의 죄란 무엇인가?” 고(故) 이병철 회장이 타계하기 전에 남겼다는 24개의 종교적 물음 중의 하나다. 차동엽 신부는 이 물음에 이렇게 답한다. “‘죄’는 히브리어로 ‘하타’(hata), 그리스어로 ‘하마르티아’(hamartia)다. ‘과녁을 빗나간 상태’란 뜻이다. 과녁이 뭔가. 기준이다. 어떠한 기준을 벗어난 상태가 죄라는 얘기다. 우주에 깃든 섭리, 그런 섬세한 질서에서 벗어나는 것이 죄다.” 과녁을 빗나가다 최 신부의 말대로 그리스어 ‘하마르티아’는 ‘과녁을 빗나가다’(hamartanein)라는 말에서 유래한다. 신약에서 이 말이 ‘죄’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게 흥미롭다. 고전기의 그리스에서는 ‘하마르티아’가 ‘단순한 실수’를 가리키는 데 쓰였다. 사실 과녁을 맞히지 못한 것은 ‘죄’(sin)보다는 ‘실수’(error)에 가깝지 않은가? 그러던 것이 헬레니즘 시대에 들어와 ‘죄’를 가리키는 도덕적 어휘로 전의(轉意)된 모양이다. 미학에서 ‘하마르티아’는 주로 아리스토텔레스와 관련하여 논의된다. <시학>은 비극의 주인공을 이렇게 정의한다. “덕과 정의에서 월등하지는 않으나 악덕과 비행 때문이 아니라, 어떤 과실 때문에 불행에 빠진 인물.” 이는 물론 ‘공포’(phobia)와 ‘연민’(eleos)이라는 비극의 효과와 직접 관련이 있다. “연민의 감정은 부당하게 불행에 빠지는 것을 볼 때 환기되며, 공포의 감정은 우리와 비슷한 자가 불행에 빠지는 것을 볼 때 환기”되기 때문이다. 위에 인용한 정의 속에서 ‘과실’로 번역된 것의 원어가 바로 ‘하마르티아’다. 연민의 감정은 주인공이 “부당하게 불행에 빠지는 것을 볼 때” 발생한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하마르티아’란 도덕적 ‘죄’가 아니라 악의가 없는 ‘실수’, 자신도 알지 못하는 새에 저지른 과오를 가리킬 거다. 주인공이 도덕적으로 악한 짓을 하다가 불행해졌다면, 주인공의 불행에 연민을 느끼기는커녕, 외려 그의 몰락에 통쾌감을 느끼지 않을까? 비극적 결함 ‘비극적 결함’이냐, ‘비극적 오류’냐? 이 구절의 해석을 둘러싸고 학자들은 오랫동안 논쟁을 벌여왔다. 어떤 이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하마르티아’가 무엇보다도 주인공의 성격적 ‘결함’을 가리킨다고 본다. 가령 오이디푸스는 성질이 너무 급하고, 맥베스는 야심이 너무 크고, 오셀로는 질투가 너무강하고, 삼손은 아내 앞에서는 사족을 못 쓴다. 이 성격의 결함, 이른바 비극적 결함(tragic flaw)이 주인공들을 불행에 빠뜨린 하마르티아라는 것이다. 한편, 다른 이들은 ‘하마르티아’에서 도덕적 의미가 없는 단순한 과오를 본다. 가령 아리스토텔레스가 예로 드는 <오이디푸스>의 경우를 보자. 거기서 불행은 주인공의 성격적 결함보다는 단순한 오인, 즉 친부를 잘못 안 데에서 비롯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모르고 행하였다가 행한 뒤에야 알게 되는 경우”야말로 비극에 적합한 상황이다. “이 경우 불쾌감을 자아낼 게 아무것도 없고, 발견이 우리를 놀라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14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예로 드는 상황들은 대부분 오이디푸스의 경우와 비슷하다. 가령 아스티다마스의 작품에서 알크메온은 자신의 어머니인 줄 모른 채 에리필레를 살해한다. 소포클레스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부상당한 오디세우스>에 나오는 텔레고노스도 자신의 아버지인 줄도 모르고 한 사내를 살해한다. 비극의 주인공은 이렇게 “자기의 행위가 얼마나 무서운 행위인지 알지 못하고 행한 뒤에 나중에 가서야 근친관계를 발견한다”. 시학에 나오는 ‘하마르티아’의 개념은 아마 윤리학과 연관돼 있을 거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행위의 책임을 물으려면 그 행위가 ‘자발적’ 선택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어서 행위의 책임을 물을 수 없는 ‘비자발성’의 경우로 ‘강제’와 ‘무지’를 든다. 강제적 힘이나 무지로 인한 악행은 용서받거나 심지어 동정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결국 행위의 비자발성이야말로 비극이 가진 ‘연민’의 효과의 전제가 되는 셈. 사실 <오이디푸스>에는 연민을 자아내는 계기가 두개 존재하는 셈이다. 하나는 물론 자신이 상대하는 자가 제 아버지임을 모르고 살해한 것이다. 이는 ‘무지’로 인한 비자발적 행위라 할 수 있다. 또 하나는 그가 하는 모든 행위가 사실상 신들에 의해 ‘강제’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신탁은 이미 오래전에 그가 제 아버지를 죽일 것이라 예언한 바 있다. 그는 이 예언을 피하려 했으나, 운명을 피하려는 그 행위로 인해 예언을 실현하게 된다. 플롯의 핵심은 역시 ‘발견’(anagnorisis)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발견’을 “무지의 상태에서 지의 상태로 변화하는 것”으로 규정한다. 여기서 다시 한번 ‘하마르티아’가 도덕적 책임을 물을 수 없는 비자발적 행위임이 드러난다. 언뜻 보기에 오이디푸스의 행위는 자발적 선택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모든 게 신이 정한 운명이라면, 오이디푸스의 행위는 사실상 강제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죄’가 아니다. 신약성서에서 말하는 ‘죄’에 가까운 것은 차라리 ‘휘브리스’(hubris)가 아닐까? ‘휘브리스’는 감히 신에 도전하거나 감히 그의 율법을 파괴하는 교만의 과오를 가리킨다. 그리스 비극의 바탕에 깔려 있는 또 하나의 모티브가 바로 ‘휘브리스’다. 가령 <안티고네>를 생각해보라. 여기서 테베의 왕 크레온은 서로 싸우다 전사한 두 형제 중의 한 사람은 정중히 매장하되, 다른 사람의 사체는 들짐승에 뜯어먹히도록 들판에 내버려두라고 명령한다. 죄와 벌 원래 ‘휘브리스’는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전쟁포로, 혹은 그 밖의 희생자를 그저 재미로 모욕하며 괴롭히는 행위를 가리켰다. 가령 전사한 헥토르의 시신을 전차에 매달고 다니던 아킬레스의 행동을 생각해보라. 크레온이 사체를 매장하지 않고 들판에 방치한 것 역시 ‘휘브리스’의 이 야만적 어원에 잘 어울린다. 물론 이 불필요한 잔혹함이 신들의 마음에 들 리 없다. 그런 의미에서 크레온의 행위는 신의 계율을 파괴하는 ‘휘브리스’라 할 수 있다. 예언자 테이레시아스가 ‘폴리네이케스의 사체를 매장하고 동굴에 밀봉된 안티고네를 풀어주지 않으면 아들을 잃을 것이며, 신들도 테베의 공물을 받지 않을 것’이라 경고한다. 하지만 그 충고가 교만한 크레온의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이 또한 휘브리스다. 겁에 질린 합창단이 그 예언자의 말이 이제까지 틀린 적이 없음을 상기시켜주자 크레온은 비로소 고집을 꺾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동굴을 다시 열었을 때 안티고네는 이미 목을 맨 뒤였다. 안티고네의 죽음을 본 아들 하이몬은 자결을 하고, 이 소식을 들은 왕비 에우리디케마저 그 뒤를 따름으로써 왕은 아들과 아내를 모두 잃게 된다. 물론 그는 제 행위가 이런 결과를 낳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거다. 하지만 그 행위는 ‘하마르티아’, 즉 무지로 인한 비자발적 과오가 아니었다. 죽은 사람은 묻지 않고, 산 사람을 묻는 것은 어디까지나 ‘휘브리스’, 즉 피할 수도 있었기에 또한 책임도 져야 할 죄다. 죄에는 당연히 ‘벌’(nemesis)이 따른다.

R등급 장르 축제 <캐빈 인 더 우즈>

장르의 가장 뻔한 클리셰를 제목으로 쓰는 사람들의 의도는 둘 중 하나다. 하나는 ‘이런 뻔한 것으로도 얼마든지 좋은 걸 만들 수 있다는 걸 보여주겠어!’로 애거사 크리스티의 <서재의 시체> 같은 작품이 이에 해당된다. 다른 하나는 ‘이렇게 뻔해 보이는 것으로도 얼마든지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 수 있다는 걸 보여주겠어!’로 <캐빈 인 더 우즈>가 여기에 속한다. 제목만 봐도 <캐빈 인 더 우즈>는 슬래셔영화의 가장 고루한 공식으로 시작한다. 다섯명의 대학생들이 방학을 맞아 숲속 오두막으로 간다. 가는 길에 그들은 음습한 경고를 하는 주유소 노인을 만나지만 그를 무시한다. 도착한 날부터 학살이 시작되는데, 최초의 희생자가 되는 사람은 당연히…. 하지만 영화는 초반부터 이들의 뻔한 이야기 뒤에 무언가 다른 것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감추지 않는다. 예고편에도 나오지만, 이 평범해 보이는 오두막과 평범해 보이는 좀비 살인귀들 뒤에는 최첨단 과학으로 무장한 정부의 특수기관이 존재한다. 이들이 왜 이런 짓을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특수기관과 오두막집 젊은이들의 관계가 호러 작가, 감독, 관객과 호러영화와의 관계와 정확히 연결된다는 것이다. 특수기관이 하는 일은 실제 인물과 괴물을 동원해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영화를 만드는 것으로, 영화는 각본에서부터 상영에 이르기까지 호러영화 제작과 관련된 모든 일들을 꼼꼼하게 다룬다. 각본을 쓴 드루 고다드와 조스 웨던은 모두 컬트 텔레비전 <버피와 뱀파이어>의 작가진 출신으로, 영화는 그들이 시리즈를 거치면서 쌓은 장르 해체와 재조립의 경험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단지 영화는 <버피와 뱀파이어>가 TV와 시리즈라는 한계에 갇혀 멈출 수밖에 없었던 선을 가뿐히 뛰어넘는다. <캐빈 인 더 우즈>의 후반부는 피와 신체손상과 존재하는 거의 모든 장르 도구들이 폭발하는 R등급 장르 축제다.

[김중혁의 최신가요인가요] 격, 격, 격하게 아낀다…만

격, 격, 격하게 너희들을 아끼고 있어. 맞아, 블랙홀처럼 빨려들어가, 끝이 안 보여, 라는 새 노래 의 노래 가사에 맞춰 f(x)에 전하고 싶다. 함수 소녀들아, 너희들이 데뷔할 때부터 쭈욱, 격하지만 격조있게 아껴왔단다. f(x)에 마음을 뺏긴 이유는 그들만의 확고한 스타일을 처음부터 강렬하게 눈치챘기 때문이다. 텔레비전에서 f(x)를 처음 보았을 때가 생각난다. 내 머릿속에는 수많은 물음표가 어지럽게 떠 있었다. 저 뜬금없는 가사들은 다 뭐란 말인가. 저렇게 아스트랄한 가사를 저토록 진지하게 발음하는,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소녀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외계에서 캐스팅한 소녀들일까. 나는 모든 물음표를 거두기로 했다. 물음은 의미없었다. f(x)가 내뱉는 말은 외계어였고, 독해가 불가능한, 운율로서의 말이었다. 어떤 불일치가 소녀들을 아름답게 만들었고, 잦은 과잉이 현기증을 일으키게 했다. f(x) 스타일은 에서 완성된 게 아닌가 싶다. ‘새로운 혈액형’이라는 뜻의 (아냐, 의미가 뭐 중요해! 그냥 예뻐요로 들리는걸!) 제목도 낯설지만 ‘나 어떡해요 언니?’로 시작하는 가사, 꿍디꿍디라는 단어, ‘딱 세번 싸워보기, 헤어질 때 인사 않기’ 같은 사랑법을 듣고 있노라면, 그래, 내가 졌다, 네 맘대로 아무렇게나 하고 싶은 말을 해, 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가끔은 이런 가사를 f(x)에게 선사한 유영진씨가 미울 때도 있지만 f(x)만의 스타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상할 바에야 어쭙잖게 유치한 것보다 이렇게 밑도 끝도 없이 뜬금없는 게 더 낫다. 인정! 신곡 에서도 가사는 별 의미가 없다. 의미를 해석해보려고 하다가 이내 포기하고 말았다. 하하, f(x) 팬들이라면 이런 건 아무렇지도 않죠. 한두번 겪는 일도 아니잖아요. ‘격변하는 세계, 그 속에 날 지켜줘’라든가 ‘대체 끝이 없는 게이지’ 같은 문장들을 발음하는, 소녀들은 여전히 예쁘다. 새 앨범을 듣고 좀 갑갑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피로감이 쌓인 걸까. 스타일이라는 건, 말하자면 벽지 같은 거다. 무늬를 정하고 색을 정하고 패턴을 결정하는 거다. 예술가들은 모두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들기 위해 오랜 시간 공을 들이고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친다. 벽지를 정하고 나면 그다음에야 비로소 거기에 어떤 가구가 어울릴지, 어떤 그림을 걸어두면 좋을지 고심하며 공간에 깊이를 더하게 된다. 평생 벽지를 고르지 못하는 예술가도 있고, 벽지만 골라놓고 가구를 집 안에 들이지 못하는 예술가도 있다. f(x)의 벽지는 매번 너무 화려해서, 벽지에 색을 너무 많이 입혀서, 도무지 어울리는 가구나 그림을 찾을 수가 없다. 제작자들이 조금은 밋밋한 벽지를 만들어서 이 예쁜 소녀들이 더 아름답게, 더 잘 보일 수 있게 해줬으면 좋겠다.

[김중혁의 최신가요인가요] 아직은 없는 노래, 하지만 좋을 노래

일주일 동안 여기저기서 들었던 최신가요 중 한곡을 고른 다음 내 얘기로 살을 (많이) 붙이고 이런저런 (잘못된) 개그로 양념을 가미하는 것이 ‘최신가요인가요’의 핵심인데, 지난 일주일 동안은 가요를 거의 듣지 못했다. 새 장편소설 쓰기에 돌입했고, 소설 속에 오페라 아리아가 자주 등장하는 바람에 일주일 내내 아리아만 듣고 살았다. 아리아만 듣고 살았더니 대화를 나눌 때도 노래로 말을 하고 싶어진다. ‘오, 편집자님이여, 마감의 경계는 어디까지오! 마감을 지키려 애쓰는 내 마음을 정녕 아시는지. 마감은 멀었건만 까닭도 없이 한숨짓고 가슴 조이는, 이 마음.’ ‘김중혁의 최신가요인가요’의 연재가 끝나면 ‘김중혁의 최신아리아리오!’로 연재를 이어가자고 제의해봐야겠다. 한주가 끝나갈 때쯤 텔레비전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끝내주는 노래를 발견했다. 내가 오랫동안 꿈꾸던 프로그램을 Mnet에서 막 시작했는데, 라는 랩 오디션 프로그램이었다. 오래전 에미넴 주연의 <8마일>을 보면서 영화 속 ‘랩 배틀’ 같은 오디션 프로그램이 있으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아직 1회밖에 방송하지 않아서 정확히 어떤 프로그램이 될지 알 수 없지만 어떤 식으로 방송이 되든 는 매주 끝내주는 힙합 공연을 보여줄 것 같다. 와우! 프로그램을 보면서 놀랐던 것은 오디션에 참가한 젊은 친구들이었다. 노래 위주의 오디션 프로그램에 사람들이 몰리는 거야 당연하다고 해도 랩 오디션에 이렇게 많은 젊은이들이 참가한 게 신기했다. 우리나라에 힙합을 좋아하는 친구들이 이렇게 많구나, 새삼 깨달았다. 그들이 방에 엎드려 종이에다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든 다음 라임을 맞추고 플로에 맞게 랩을 하는 모습을 생각하고 있으면, 어쩐지 가슴이 찡하다. 랩은 절대 노트북에다 쓸 수 없다. 종이에다 쓰고 고치고 지우고 다시 써야 한다. 펜을 들고 종이에다 자신만의 랩을 적어내려가던 그 시간들에 나는 박수를 보내고 싶다. 영화 <8마일>에서 에미넴이 버스를 타고 가면서 꼬깃꼬깃한 종이에다 가사를 적던 장면은 언제 봐도 뭉클했다. 내 마음에 든 두명의 래퍼는 ‘의경 래퍼’ 김정훈과 ‘래퍼 일통’이었는데, 두 사람이 한팀이 되어도 좋을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느릿느릿한 자신만의 리듬으로 랩을 하고 있었는데, 듣는 사람들을 자신들의 비트로 설득해내는 힘이 있었다. 김정훈과 래퍼 일통이 결합한 내 상상 속 팀 이름은 ‘슬로우 웨일’. 두 사람의 가사를 조합해서 만든 곡은 <육지로 가는 고래>다. ‘내가 내는 판소리 플로우/ 래퍼는 퀵퀵보다는 슬로우/ 힙합영웅의 본색은 타락한 지 오래/ 난 숨쉴 곳을 찾아 육지로 가는 고래.’ 아리아로 시작해서 랩으로 끝난 일주일이었다. 생각해보니 둘 다 노래로 말을 한다는 건 비슷하다. 다음주부터는 정말 노래로 말을 하려고 들지도 모르겠다. ‘yo, 최신가요인, 가요, 이 칼럼은 왜 핵심이 없을까요, 글 쓰고 있다 매번 약속에 늦어, hey, 그래도 마감엔 절대 안 늦어.’

[안현진의 미드 크리에이터 열전] 바이어들은 열정을 산다

<브레이킹 배드>는 장수 TV시리즈가 되기 위한 황금률들을 거스르고도 성공한 희귀한 경우다. 제1황금률: 시청자로 하여금 주인공을 사랑하게 하라. 매주 같은 시간대에 시청자를 TV 앞으로 불러오려면 그건 당연하다. 한데 <브레이킹 배드>의 주인공 월터 화이트(브라이언 크랜스턴)는 좋아하기 힘든 인물이다. 소심하지만 착한 남자였던 주인공이 아무렇지 않게 폭력을 행사하고 합리화하는 악당으로 변모하는 걸 보고 있으면, 좋아하기보다 싫어하기가 쉽다. <브레이킹 배드>가 어긴 두 번째 황금률은 레퍼토리 구조를 포기하고 마지막 방영일자를 예고했다는 점이다. <로 앤 오더> 등의 TV시리즈가 20년 동안 시즌을 거듭하며 방영될 수 있었던 것은 레퍼토리 드라마가 가지는 반복 구조를 고수하고 캐릭터에 큰 변화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브레이킹 배드>는 다르다. 주인공은 극적으로 변화했고, 해피엔딩은 애초에 배제되었으며, 시즌이 지날수록 드라마 속 소우주는 주인공에게 안겨줄 비극적인 결말을 향해 가속도를 붙여 달려간다. 크리에이터인 빈스 길리건이 직접 지은 제목 ‘Breaking Bad’는 ‘탈선’ 혹은 ‘타락’을 의미한다. 그의 고향인 버지니아를 비롯해 남부에서 주로 사용되는 표현인데, 드라마가 성공한 지금은 미국 전역에서 그 의미가 통할 정도로 널리 알려졌다. 여러 인터뷰에서 길리건이 말한 <브레이킹 배드>의 시작은 이랬다. 아픈 아이가 사는 낡은 아파트에서 메스암페타민을 제조하다가 적발된 남자에 대한 뉴스를 친구와 전화로 이야기하다, 이동성 있는 RV에서 제조하면 어떨까 농담을 했다. 하지만 이 농담 속 한 장면은 평소 “천국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옥이 없다고 믿고 싶지는 않다”라는 인과론자였던 길리건으로 하여금 속죄로 끝을 맺어야만 하는 비극적인 이야기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친구와의 대화에서 얻은 힌트에 평소의 철학이 더해졌고, 주인공이 암 진단을 받고, 뉴멕시코를 배경으로 설정하는 등의 세부사항은 그 뒤 여러 사람의 아이디어와 영감으로 채워졌다. 시작은 순조로웠지만 문제는 그다음에 찾아왔다. 의 작가로 7년 동안 일한 경력 덕분에 네트워크를 상대로 피칭할 기회는 종종 찾아왔으나, 실제로 방영하겠다고 나서는 채널은 없었다. 무단횡단도 안 하고 쓰레기도 버리지 않을 모범적인 화학교사가 마약제조를 하는 범죄자로 타락하는 이야기가 공중파 방영에 부적절하다는 걸 알기에, 그가 두드릴 수 있는 문은 등으로 한정됐다. 반응은 좋았지만, 거절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기회는 거듭된 고배에 지칠 무렵 로부터 찾아왔다. 지금이야 <매드맨> <킬링> 등을 방영하는 케이블 채널로 성장했지만 당시 는 주로 고전영화를 재방영했고 오리지널 드라마를 만든 적이 없었다. 길리건은 자신의 동의 없이 각본을 보낸 에이전시에게 “왜? <푸드네트워크>에 보내지 않고? 메스암페타민을 굽는 이야기잖아?”라고 비아냥거렸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와의 첫 만남은 성공적으로 진행됐다. 그렇게 <브레이킹 배드>는 날개를 달았고, 2012년 7월 시즌5의 방영을 기다리고 있다. 빈스 길리건은 이전에도 히트작은 없었지만 영화계에서는 비교적 고속 성장한 어린 작가였다. 하지만 그는 영화작가의 꿈을 접고 작가실로 들어간 1995년에야 비로소 자신의 경력이 제대로 시작된 걸 느꼈다고 한다. 아메리칸 텔레비전 아카이브는 인터뷰 가장 마지막에, 후학들에게 줄 수 있는 조언을 물었다. 그는 대답한다. “이야기를 팔려고 한다면 실패할 것이다. (네트워크) 바이어들이 사려는 것은 열정이다. 열정은 꾸며낼 수 없다.”

[신 전영객잔] <두 개의 문>은 어떻게 빨간 잉크가 됐나

아우슈비츠 학살에 관한 클로드 란츠만의 기념비적 다큐멘터리 <쇼아>가 개봉했을 때 이 영화에 가차없는 비난을 던진 건 장 뤽 고다르였다. “이 영화는 보여준 것이 아무것도 없다.” 고다르는 그렇게 비난했다. 고다르에게는 한 가지 확신이 있었다. 학살이 이뤄졌던 가스실의 바로 그 순간의 현장이 독일군의 영화 카메라에 찍혔으며 그것이 세상 어딘가의 기록보관소에 존재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아우슈비츠의 기록물이라고 자처하는 <쇼아>가 그 이미지들을 보여주지도 않고 찾으려 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는 점을 고다르는 힐난했다. 고다르는 텔레비전 토론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쇼아> 옹호론자 마르그리트 뒤라스와의 논쟁도 불사했다. 훗날 한 평자는 그것이 경험적인 검토와 무관하게 그의 유죄의식에서 기인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20세기의 매체인 영화가 20세기의 가장 끔찍한 역사적 사건을 기록해내지 못했으므로, 혹은 기록했다 하더라도 사실상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므로 그에 대한 유죄의 강박관념이 작동하여 공격의 대상을 찾아 나섰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영화가 윤리적 파산을 맞은 것이라 믿었던 고다르는 “영화의 촛불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꺼졌다”고 탄식했다. 고다르 특유의 우격다짐이라 할지라도 영화의 존재론에 신중했던 태도에서 나온 것이므로 그건 경청할 만한 우격다짐이다. 없음이 증언하는 있음 반면에 클로드 란츠만의 의견은 고다르와 달랐거니와 완벽하게 반대였다. “나는 모든 아카이브에 대항하여 <쇼아>를 만들었다”고 그는 말했다. <쇼아>는 학살의 현장에 관계된 기존의 문헌 중 단 한장의 사진조차 사용하지 않았다. 생존자들과 가해자들과 주변인들을 릴레이 인터뷰하고 있으며 때로는 수용소의 인근 장소를 배회하고 그것으로 모자라다고 판단될 때는 재연도 했지만 기록화면은 쓰지 않았다. 란츠만은 설령 고다르가 말한 그러한 영상 자료들을 “내가 발견하게 된다고 해도 없애버릴 것”이라고까지 말했다. 여기에는 반드시 보아야 하는 이미지와 보아서는 안되는 이미지를 사이에 둔 윤리적 쟁점의 대립이 있으나 이건 고다르와 란츠만 논쟁에 대한 또 다른 하나의 글을 요구할 정도로 복잡한 사안이다. 다만 지금은 란츠만의 다음과 같은 주장에 닿기 위해 배경을 설명하는 마음으로 썼다. 란츠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흔적이 소멸되었다는 사실을 주의 환기시키는 것이 애당초 <쇼아>의 출발점이었다. 바로 그 공허로부터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꼈다.” 쇼아란 원래 절멸을 뜻하는 말이다. 그러니 그의 말을 이렇게 해석해볼 수 있다. 모든 증거가 사라져버린 그 사건의 실체를 제대로 증명할 만한 방법은 아무것도 남겨져 있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고 거기에서 형식을 구축하는 것이며 그것만이 오로지 실존했던 역사를 말하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고다르는 그 무엇이 있어야 증거가 된다고 탄식하고 란츠만은 그 무엇이 없다는 것이 강력한 증거라고 주장한다. 란츠만이 말한 ‘공허’와 정확히 같은 의미가 되지는 않겠지만 무언가 필시 있어야 할 자리가 비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아우슈비츠를 소재로 생명정치에 관한 경청할 만한 정치철학적 개념들을 내놓은 조르지오 아감벤의 생각을 경유할 수 있다. 아감벤은 아우슈비츠의 생존자들의 직접적인 증언에조차 공백이 깃들어 있음을 지적한다. 그의 현학적이며 복잡다단한 분석을 요약하는 건 나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으니 그 생각을 능동적으로 해석한 슬라보예 지젝의 단언이 더 적절할 수는 있겠다. “아우슈비츠에 대해 직접 증언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바로 그 사실이 그 존재를 증명해주고 있다.” 증거할 것이 아무것도 없을 정도로 절멸해버렸다는 그 사실이 현실적으로는 감당키 어려운 엄청난 비정상적 학살이 실재하였음을 가리키는 것이며 그것이 곧 역설적으로 증거가 되고 있다는 걸 믿는다는 점에서 어쩌면 란츠만과 상통하는 점이 있다고는 추론해볼 수 있을 것이다. 용산엔 없는 빨간 잉크 용산이 ‘광주’ 이후 우리 시대의 쇼아 즉 절멸처럼 보인다. 이 사건은 생명정치의 실현과 유지에 관한 상식이 송두리째 흔들린 예외적 사건이자 거대 체제에 의해 게토화되어 망루에 갇힌 ‘벌거벗은 생명들’에 관한 사건이며 그러나 그 당사자들 대부분은 살아나오지 못하고 증거는 대부분 미궁으로 빠져버린 사건이다. <두 개의 문>에 관한 지난 글들에서 김소영이 국가가 행사한 “비상사태”(예외상태)를 말하고 변성찬이 체제가 만든 “공백”에 관하여 말할 때, 나는 그들이 아우슈비츠를 설명할 때 대두된 정치철학적 개념인 예외상태와 공백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미루어 짐작한다. 예외여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상시적으로 벌어지는 비상사태가 여기 있고 그 결과로서 사회적 공백, 사법적 공백, 역사적 공백, 현실의 공백이 여기 남겨진 것을 그들은 지적한다. 앞선 평자들의 귀한 의견에 빚지고 도움을 얻는 동시에 또 한편으로는 이 정치철학 개념의 복잡한 함의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나는 그러한 배경들이 <두 개의 문>이라는 영화와 영화적으로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영화는 소멸한 증거들 속에서 어떻게 새로운 증거가 될 수 있는가. 혹은 공백은 어떻게 그 영화의 숨은 역학이 되고 있는가, 하는 것이 나의 질문이다. 다만 어떤 비상한 개념이라도 그 개념의 엄중함이 현실의 감각적 충격보다 내게 더 가깝지는 않다. 그러니 세속적 윤리와 상식에 기대어 풀어 말하고 싶다. 예외 상태란 설마 그럴 리는 없다고 믿었으나 결국 일어나는 일들이 상시적으로 발생하는 상태라고 불러도 될 것이고 공백은 그런 상태로 인하여 부재나 무지나 무력감 등을 동반하는 가운데 있어야 할 것들이 사라진 상태 즉 ‘없는 상태’라고 말해도 될 것 같다. <두 개의 문>에는 바로 그런 상태가 기입되어 있다. 그럼 어떻게 기입되어 있는 것일까. 우리는 지젝이 여기저기 인용하기를 즐기는 오래된 독일식 농담 하나를 우리 식대로 지금 반복해볼 수 있을 것이다. 시베리아로 일하러 가게 된 독일 노동자가 검열관의 우편물 검열을 피해 어떻게든 친구에게 그곳의 실상을 전하려고 고민한다. 그런 끝에 친구와 약속을 한다. 그는 친구에게 보내는 자신의 편지가 빨간 잉크로 씌여 있으면 그건 거짓말이고 파란 잉크로 씌여 있으면 진실이라고 친구와 약속한다. 마침내 그 친구에게 편지가 날아든다. 그 편지는 파란 잉크로 쓰여 있다. “여기서는 모든 것이 훌륭해. 가게에는 상품들이 가득하고, 음식이 풍부하며, 아파트는 크고 난방도 적절해. 영화관에서는 서양영화를 보여주고 관심을 끌 만한 아가씨도 많아. (그런데) 자네들이 얻을 수 없는 것 단 하나가 있다면 그건 빨간 잉크야.” 그 독일 노동자는 빨간 잉크를 구하지 못했거나 구할 수 있었더라도 빨간 잉크로 편지를 쓰는 대신 그것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지금 이 편지의 내용이 거짓이라는) 진실을 말하는 데 더 효과적이라 판단한 것이리라. 영화에 관한 지젝의 의견에는 그다지 흥미가 없으나 시대를 평론하는 그의 수사학은 효과적이라고 느끼는 나는 이 빨간 잉크의 일화가 용산을 다룬 <두 개의 문>의 영화적 상태를 과장되게나마 효율적으로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건 란츠만이 말하는 공허, 아감벤이 말하는 공백, 용산에 관하여 우리가 느끼는 없는 상태 혹은 없는 것들과 관련되어 있다고 직감되기 때문이다. 용산에 관한 영화들은 대개 빨간 잉크로 직접 쓰인다. 즉 용산 사태의 법적 모양새가 거짓임을 밝히기 위해 가장 직접적인 진실의 도구를 골라 쓴다. 이를테면 철거민 생존자의 증언을 담아내는 것이다. 하지만 <두 개의 문>은 우리에게 지금 이렇게 편지를 쓰고 있다. 친구, 지금 여기 용산에 없는 것은 빨간 잉크야, 라고.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용산의 법적 모양새가 실은 거짓이라는, 그 진실을 말하기 위해 여기 무엇이 없는지를 말한다. 알려진 그대로 <두 개의 문>에는 철거민 생존자의 증언이 등장하지 않고 혹은 등장하지 못한다. 대신 무엇이 없는지 말해지고 또한 구조화된다. 이 비유가 다소 과장으로 비친다 해도 나는 이 과장됨이 지금 필요하다고 느낀다. 바깥을 어떻게 볼 것인가 없는 것들 혹은 없는 상태의 층위는‘용산’이라는 사건 그 자체에 이미 내장되어 있다. 이를테면 사건 당일에 부검을 명목으로 사라져버린 시신, 경찰쪽을 가해자로 두고 수사를 벌였으나 수사의 방향이 바뀌면서 사라져버린 3천쪽의 초동 수사 기록 등 김형태 변호사가 지적하고 있는 것들이다. 영화는 초반부터 이 사건에 관련하여 있어야 할 무엇이 여기 어떻게 없는지 설명하는 데 주력한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구조는 알려진 것처럼 스릴러 구조가 아니라 없는 것들과 없는 상태를 의문시하는 구조라고 좀 엉뚱하게 풀어 말하는 편이 더 적절해 보인다. 이렇게 상상해보자. 시신이 사라지지 않아 사체 파악이 가능하고 3천쪽의 초동 수사 기록이 진작부터 밝혀졌다면 이것들의 행적을 두고 일종의 의문 구조로 이끌어가는 <두 개의 문>의 초반부는 성립 가능한 것인가. 꼭 필요한데 정작 없는 이미지도 있다. 2차 화재 발생과 연루된 경찰의 중요 채증영상이다. 경찰쪽의 말을 믿자면 이건 원래 찍히지 않았던 것이고 농성자 변호인단의 말에 기대자면 이건 찍었으나 없어졌을 가능성이 큰 것이다. 현실적으로 엄연한 공란이며 제약이다.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두 부류다. 그 안에서 잡혀갔거나 죽은 사람들, 이 사람들만 진실을 보았을 것이다. 그 사람들을 만날 수 없는 상황에서 유일한 끈은 영상이다. 감사한 일이기는 하지만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 우리가 가질 게 너무 없다는 무력함의 증거이기도 했다”고 박진 활동가는 말한다. 그가 말하는 감사하지만 무력한 영상은 칼라TV, 사자후TV, 경찰의 채증영상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영화의 입장에서 그것들은 다양한 화법의 가장 기초적인 요건들이 된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터뷰이들이 영화적으로 보자면, 전부 이 이미지에 대한 해설자들이라는 사실도 이때 중요하다. 물론 다양해지는 화법의 과정 속에서 실패한 것도 있어 보인다. <두 개의 문>의 영화 형식 자체에 관한 한 가장 꼼꼼하게 들여다본 건 <프레시안>에 글을 쓴 이동연(문화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인 것 같다. 그의 생각에 대체로 공감하지만,‘인터-픽션’이라는 개념으로 이 영화의 재연을 칭찬하는 부분에는 좀 다른 의견을 덧붙이고 싶다. 우선 재연은 일반적으로 보통의 시사 프로그램에서뿐 아니라 연예뉴스 프로그램에서도 흔히 쓰이므로 그 자체로 특별하지 않다(손문권 프로듀서 유가족과 임성한 작가쪽의 법정 공방을 보도하던 중, 한 연예뉴스 프로그램은 임성한 작가쪽의 변호사의 부탁으로 그를 모자이크 처리하고 목소리를 연기로 재연했다). 재연은 어떤 효과를 가져 오는 것인가. 재연이야말로 무언가 없는 상태를 적극적으로 메우는 화법이 아닌가,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는 메우고 덧붙인다는 그 효과가 오히려 문제가 되는 것 같다. 재연으로 공백을 보충하는 순간 본래 그 개인의 개별성은 지워지고 식별 불가능한 상태로 이끌릴 뿐만 아니라 보는 우리로 하여금 보편적이며 불특정한 상태로 그 대상을 느끼게 한다. 소재에 따라 재연은 대상을 무디게 한다. 재연된 주체의 개별적 육화는 사라지고 그래서 우린 종종 긴장감을 잃는다. 서술상 필요했겠지만, 그럼에도 <두 개의 문>에서 경찰 특공대의 재연 장면은 가장 안이한 부분으로 남는다. <두 개의 문>의 다양한 화법은 대개 공백을 메우는 것이 아니라 그 공백을 드러내는 구조로서 활력을 갖는다는 사실을 이때 지적할 수밖에 없다. 재연보다 더 나은 다른 방식을 추천하기란 어렵지만 이것보다 더 나은 방식이 지금 영화 속에 이미 많다는 사실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특공대원들의 서면 진술서를 클로즈업한 것과 육성을 녹취한 것의 효과는 재연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생생하며 또 독창적이다. 특공대원들이 쓴 진술서는 활자를 크게 잡은 것에 불과하지만 그 행간에는 심리적 침묵이 있다. 그렇다면 육성은 더할 것이다.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것 같은가, 라는 검사의 질문에 “농성자에게 있는 것 같다”라고 말하기까지 그 특공대원이 지켰던 몇초간의 침묵을 변성찬은 이미 지적했다. 인물의 증언 속에 자리한 침묵이다. 게다가 법정에서의 진술을 녹취한 그 장면에는 그의 얼굴이 등장하지 않으므로 여기엔 목소리가 있지만 표정이 없다. 란츠만은 육성 증언을 기반으로 한 자신의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얼굴이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두 개의 문>은 그 특공대원의 얼굴을 보여줄 수 없고 그 때문에 영화에는 새로운 긴장이 흐른다. 게다가 재판과정의 육성이 들려올 때 거기 사람의 표정 대신 망루의 농성자들이나 특공대원들의 당시 모습을 흐릿하고 음침한 흑백장면들로 처리하는 것은 그 자체로 불투명한 이 사태에 대한 탁월한 선택이다. 한편 법정의 육성 진술 중에서도 피고인(농성자)으로 참여한 이들의 진술을 영화가 넣지 않았음을 우린 인식해야 할 것이다. 2009년 11월21일 용산참사재판 피고인 최후 진술에서 이충연씨는 “제가 바라는 세상은 더불어 사는 세상입니다. 역사에 남을 정의로운 판단을 부탁드립니다”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지지만 영화는 그 내용을 넣지 않고 있다. 전략적 편집의 선택이 수행되었다는 뜻일 것이다. 그렇게 하여 <두 개의 문>은 처음 시작했던 장면으로 다시 돌아온다. 영화의 도입부에 잠시 등장했던 2차 화재 장면은 결말부에 다시 등장하여 “화재 발생 2분 전”이라는 자막과 함께 말 그대로 2분간의 지속시간을 버틴다. 여기에는 눈을 찌르고 들어오는 끔찍한 장면들이 있다. 화면상으로 망루 왼쪽에 놓인 창문으로 사람이 들락거리는 장면과 화면상 정면으로 무언가 불길에 닿으면 안되는 것들이 밖으로 던져지는 장면을 볼 때, 이 영화의 정점에 놓인 이 장면은 처음 볼 때와 좀 다른 강도로 느껴진다. 이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장면은 최후의 호소로서 강력해진다. 우리가 이 장면을 보는 경험은, 지금 무엇인가를 놓치지 않고 보고 있지만 지금 저 안의 무엇은 보지 끝내 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경험하는 것인 동시에, 그 때문에 지금 이 사태를 일으킨 거대한 바깥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 새삼 직감하게 되는 경험이다. 보고 있으나 알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이미지, 시각적 증거이나 인식론적 공백인 이 이미지가 영화의 정점이 되면서 결국 ‘용산’이라는 사태의 그 바깥에 놓인 체제를 우린 생각하게 된다. 무언가‘없는 상태의 구조화’ 혹은 ‘공백의 구조화’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그러므로 <두 개의 문>의 성취는 피해자의 입장을 대변하지 않은 것, 농성자와 특공대 혹은 피해자와 가해자의 이원적인 대립 구조를 벗어난 역설이라는 관점에 놓인 것이 아니다. 그걸 가능하게 한 더 중요한 것은 이것이 얼마나 예외상태의 상황이었는지를 밝히는 것, 즉 예외 적으로 가해자들조차 공포에 싸여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내는 것이며 그 점을 위해 증거의 공백을 받아들인 다음 그 공백을 역으로 형식으로 구조화하고 화법화한다는 사실에 있다. 영화의 첫머리에 등장하는“경찰 진술과 증거 동영상을 바탕으로 용산참사와 재판 과정을 재구성한 것”이라는 머리말은 그렇게 이해되어야 할 것 같다. 그러니 <두 개의 문>은 애당초 두 감독이 말했던 것처럼 국민참여재판의 상연이 아닌 것 같다. 그보다는 실은 공공연한 증거물, 법질서보다 중요한 윤리적 질서의 회복을 요구하는 윤리적 증거물로서 기능하고 있다. 그러니 ‘증거가 없음을 증거하기 위한 증거가 되기’라는 동어반복의 구조가 이 영화의 운명이며 다음과 같은 문장에 대한 증거가 되는 것이 이 영화의 운명이다.“법의 유일한 목표는 판결이며 그것은 진실과 정의와는 무관한 것이다. (조르지오 아감벤)” 윤리로만 접근 가능한 영화 앞에서의 두려움 <두 개의 문>을 보고 나면 국가의 폭력이 문제라고 입을 모아 말하게 된다. 한치도 틀리지 않은 말이다. 다만 이 영화의 영화적 전략을 통과하고 나면 국가폭력이 문제다, 라고 단지 되풀이하는 것은 조금 힘 빠지는 일이라고 느끼게 된다. 가령 다음과 같은 문장 “수용소에서 저질러진 끔찍한 일들과 관련해 제기되어야 할 정확한 질문은, 어떻게 이토록 잔인한 범죄들이 인류를 대상으로 자행될 수 있었는가라는 위선적인 질문이 아니다. 인간존재로서의 권리와 특권들을 어쩌면 그토록 완벽하게 박탈했는지, 그들에게 자행된 어떤 짓도 더이상 위법이 아닌 것처럼 (그러니까 사실상 모든 것이 정말로 가능해지게) 보이도록 만든 법적 절차와 권력 장치들을 주의 깊게 탐구하는 것이 보다 정직하며 또 무엇보다도 보다 유용할 것이다”라는 말이 <두 개의 문>에서 중요하기 때문이다. 현명한 정치철학자 아감벤은 그렇게 말했지만 영화에 관한 글을 쓰는 나는 그저 그 말을 받아서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두 개의 문>이라는 영화는 인간존재로서의 권리와 특권들을 완벽하게 박탈하고 자행된 어떤 짓도 더이상 위법이 아닌 것처럼 보이도록 만든 법적 절차와 권력장치들을 어떻게 주의 깊게 영화적으로 탐구했는가, 하고. 이 영화가 한국 다큐멘터리사에 획을 긋는 작품이라고 말하는 데에는 망설여진다. 다만 여기 용산에 빨간 잉크가 없다고 말하려고 애쓴 이 영화는 능숙하게 그걸 말한 다음 그 법적 절차와 권력장치에 대해 다음과 같은 생각을 남기고 있다. 하나의 일화로 그걸 정리하는 게 좋겠다. 그러니까 지젝이 소개한 일화로 시작했으니 다시 지젝이 소개한 일화로 그 생각을 정리해도 되겠다. <폭력이란 무엇인가>의 첫장에 있는 우화다. “물건을 훔쳐낸다는 의심을 받던 일꾼이 한명 있었다. 매일 저녁, 일꾼이 공장을 나설 때면 그가 밀고 가는 손수레는 샅샅이 검사를 받았다. 경비원들은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손수레는 언제나 텅 비어 있었다. 결국 진상이 밝혀졌다. 일꾼이 훔친 것은 다름 아닌 손수레 그 자체였던 것이다”<두 개의 문>은 손수레가 비어 있다는 걸 충분히 알렸다. 그리고 손수레가 비었으니 거기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빈 손수레 자체가 문제의 핵심이었음을 충분히 알린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중요한 작품이 됐다. 객관적 폭력 그 중에서도 구조적 폭력이라고 불릴 만한 그 빈 손수레가 <두 개의 문>이 겨냥하고 있는 국가 폭력의 실체다. 버튼 하나로 수백만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폭력, 전화 한 통화로 수명의 목숨을 앗아 갈 수 있는 폭력. 두 개의 문이 조준하고 있는 폭력의 진상은 실은 눈앞에서 행해지고 있는 국가의 주관적 폭력이 아니라 그 안존하고 평안한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상위적 국가의 구조적 폭력이다. 이 영화는 그 실체가 누구인가 하는 점을 빨간 잉크의 화법으로 말하는 것이다. 빨간 잉크로 빈 수레와 그 도둑을 말하는 것이다. 적어도 현장의 특공대장은 물로는 소화할 수 없다고 다급하게 말하지만 지휘본부의 무전기 넘어 목소리는 사법처리 할 수 있도록 증거를 채집하라고 평온하게 말한다. 그 상위의 체계는 더 평온하게 말할 것이다. 국가폭력이 어떻게 예외상태를 자기의 것으로 권능화하고 동시에 공백을 법적으로 유용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가 바로 <두개의 문>이다. 아우슈비츠 이후에 시를 쓴다는 건 야만이라는 아도르노의 말은 너무 유명하다. 그리고 아우슈비츠 이후에 영화의 촛불이 꺼졌다고 탄식한 고다르의 생각은 이미 전했다. ‘용산’ 이후에도 무언가는 야만이며 무언가는 불가능할 것이다. 다만 나는 이들의 과장된 절절함을 흉내내어 용산 이후에 무엇이 야만이고 무엇이 불가능한지 당장에 선언하고 싶지 않다. 용산 이후에 어떤 예술적 행위가 야만이 될 것인지 혹은 무엇이 불가능한 것인지 나는 선언할 위치에 있지 않으며 그럴 수도 없다. 다만 미학이라는 범주로 말하는 게 불가능한 창작물들이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했을 뿐이다. 적어도 이 영화를 생각하며 오로지 윤리를 통할 수는 있으나 미의 기쁨을 말하는 건 불가능한 어떤 창작물을 대할 때의 괴로움을 실감했다. 어떤 형식을 통해 윤리를 말할 수는 있으나 그 형식을 통해 아름다움을 말할 수는 없는 운명의 영화.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고 했던가. 그럼에도 사람이 여기 있어요라고 말했는데도 거기서 사람이 타죽은 사건을 지금 이 영화는 다루고 있지 않은가. 미학을 말하는 것이 봉쇄되고 윤리학으로만 접근 가능한 영화의 출몰은 실은 두렵기 짝이 없는 일이다. 지금이 예외 중의 예외 상태이며 공백 중의 공백 시대라는 걸 그런 고통으로 어렴풋하게 감지하기 때문이다. 실은, 아름다운 것들과 더 오래 많이 살고 싶기 때문이다.

비명 지를 준비 되셨나요?(2)

산타가 악마라고? <산타를 보내드립니다> Rare Exports: A Christmas Tale 얄마리 헬렌더 / 핀란드, 노르웨이, 스웨덴 / 2010년 / 80분 / 월드 판타스틱 시네마 산타클로스를 공포의 대상으로 만든 영화들은 사실 그리 드물지 않다. 최근 개봉한 네덜란드영화 <세인트>나 2005년작 <산타즈 슬레이>를 한번 떠올려보라. <산타를 보내드립니다>가 다른 ‘산타 공포영화’들과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산타클로스의 본고장인 핀란드산 영화라는 사실일 거다. 일단의 미국인들이 핀란드와 러시아의 경계에 위치한 시골마을에서 뭔가를 발굴하는 중이다. 시골 소년 피에타리는 그들이 발굴하려는 대상이 오래전에 땅속에 묻힌 산타클로스이며, 신화 속의 산타클로스는 코카콜라 광고의 성인이 아니라 좀비 같은 엘프들을 이끌고 아이들을 고문하는 악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2010년 핀란드 최고 흥행작인 <산타를 보내드립니다>는 피와 고어로 넘치는 산타 호러가 아니라 산타클로스 전설과 좀비영화 장르를 코미디의 기운으로 버무린 영화다. 좀비떼들을 유인하기 위해 헬리콥터를 타고 벌이는 마지막 액션 시퀀스는 올해 부천의 명장면 중 하나로 손색이 없다. 2010 시체스국제판타스틱영화제 대상 수상작이다. 동성애 차별에 반기를 <퍼레이드> The Parade 스르잔 드라고예비치 / 세르비아 등 / 2011년 / 116분 / 비전 익스프레스 올해 부천에는 예년처럼 몇편의 퀴어영화들이 있다. 아트하우스 퀴어영화 팬이라면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온 <뷰티>를, 보다 직설적으로 동성애 차별에 맞서는 장르영화를 보고 싶다면 구유고연방 국가들이 제작한 <퍼레이드>를 선택하면 좋다. <퍼레이드>의 게이 커플 라드밀로와 미르코는 네오 나치들의 동성애자 테러가 횡행하는 세르비아에서 게이 퍼레이드를 기획하고 있다. 사회적 편견과 테러의 위험 앞에서 퍼레이드의 향방이 불확실한 가운데, 동성애라면 치를 떠는 갱단의 두목이 약혼녀의 부탁으로 동성애자들의 경호를 맡게 된다. 스르쟌 드라고예비치 감독은 마초 문화가 득세하는 세르비아에서 동성애자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말하는 동시에 갱단 두목과 게이가 유고연방 유고내전의 적국 군인들을 경호원으로 고용하는 이야기를 통해서 발칸반도의 화합이라는 주제까지 건드린다. 발칸반도 영화 특유의 활기로 가득한 퀴어 코미디지만 마지막 장면에서는 손수건을 준비하는 게 좋을 거다. 가장 핫한 연체동물 <점쟁이 문어 파울의 일생> The Life and Times of Paul the Psychic Octopus 알렉산더 필립 / 미국, 스위스 / 2012년 / 72분 / 월드 판타스틱 시네마 2010년 10월26일, 그해 월드컵의 실질적인 VIP 문어 파울이 세상을 떠났다. 향년 2살. 조별 리그전 때부터 승패를 점치느라 과로해서 단명한 것인지도 모르겠으나, 어쨌든 그가 생전 누린 유명세로 따지면 할리우드의 배우견 우기 부럽지 않았다. ‘똘끼’ 충만한 이 다큐멘터리는 그 해양동물계의 우기에게 바치는 추모 다큐멘터리라 할 만하다. 오버하우젠 시라이프 수족관 관리인, 파울의 에이전트, 자신에게 파울을 팔라며 백지수표를 내놓았던 러시아인, 파울은 영국 혈통일 것이라고 주장하는 영국 음반업계 종사자, 파울을 벤치마킹한 여타 동물원 관리자 등 별 희한한 전문가(?)들에게 딴 인터뷰들을 총망라했는데, 그 조합이 빵빵 터진다. 파울의 죽음을 동물사적 사건으로 추앙하는 사람들과 그의 예지 능력은 사이비라고 비웃는 사람들의 증언이 엇갈리는 가운데,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해 보인다. 파울은 역사상 가장 핫한 해양동물로 남을 것이다. 아키하바라에 온 히키코모리 <리버> River 히로키 류이치 / 일본 / 2011년 / 89분 / 스트레인지 오마주 소녀가 걷고 있다, 도쿄의 아키하바라 거리를, 마치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처럼. 그 이유를 알자면 2008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해, 트럭을 몰고 아키하바라에 들이닥친 25살 청년의 손에 죽은 7명 중 소녀의 남자친구가 있었다. 이후 ‘히키코모리’ 생활을 시작한 소녀는 오늘 그 어두운 기억으로부터 한 발짝 걸어나왔다. 영화는 여기서 출발한다. 소녀는 아르바이트로 에로배우를 하는 소녀와, 자살을 꿈꾸는 겁쟁이 소년과, 느릅나무를 노래하는 여인과, 메이드 카페를 운영하는 아저씨를 지나, 죽은 남자친구를 기억하는 한 소년에게 도착한다. 그리고 그도 3·11 동일본 대지진으로 부모를 잃었음을 알게 된다. 그렇게 두 역사적 트라우마가 만난다. <바이브레이터>의 섬세한 연출로 잘 알려진 감독은 그들의 상처를 성마르게 봉합하지 않는다. 상처가 아무는 속도는 그들이 아픈 기억의 땅을 걸어서 통과하는 속도에 겨우 육박한다고 말할 뿐이다. 할리우드 B급 호러의 공포 <상태 개조> Altered States 켄 러셀 / 미국 / 1980년 / 102분 / 켄 러셀 회고전 심리학 교수 에드워드(윌리엄 허트)는 마약과 고립상태를 이용해서 인간 진화의 비밀을 캐내는 연구를 진행 중이다. 무의식중에 일어나는 환각을 실험하기 위해 스스로를 좁은 장소에 고립시키고 약물을 투입하던 에드워드는 점점 기괴한 행동을 하기 시작하고, 현실과 환상이 뒤섞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상태 개조>는 ‘영국 영화계의 이단아’로 불렸던 켄 러셀이 처음으로 할리우드로 건너가서 만든 영화다. 당연히 거대 스튜디오와 타협한 흔적이 역력한 영화인데, 지금 와서 돌아보면 그런 흔적은 <상태 개조>의 단점이 아니라 독특한 장점으로 여겨진다. 브라이언 드 팔마의 <전율의 텔레파시>,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플라이>와 <비디오 드롬> 등 1970년대 후반과 80년대 초반 할리우드 B급 호러영화들의 거의 사악할 정도로 음습한 공포를 다시 한번 맛보고 싶다면, <상태 개조>는 정말이지 근사한 경험이 될 것이다. 납치범과 피해자, 50/50 <하이네켄 유괴사건> The Heineken Kidnapping 마텐 트뢰니에 / 네덜란드 / 2011년 / 127분 / 비전 익스프레스 제목을 보고 맥주 이름을 떠올렸다면 맞다. <하이네켄 유괴사건>은 1983년 독일 유명 맥주회사 대표 알프레드 하이네켄이 납치당한 뒤 3주 만에 풀려난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한 영화다. 당시 범인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검거됐으며 지금도 수감 중이다. 한마디로 이미 결말이 나와 있는 이야기다. 그래서 영화는 서스펜스보다 캐릭터와 심리에 초점을 맞춘다. 일면 빤한 그 방식이 지루하지 않은 이유는, 포커스가 납치를 한 사람과 당한 사람 양자에게 공정하게 분배돼 있기 때문이다. 러닝타임 2시간 중 1시간은 납치범을, 나머지 1시간은 하이네켄을 위해 쓰인다. 영화는 누구 편에도 서지 않는다. 향후 폐쇄적인 삶을 선택하게 되는 하이네켄의 상흔을 훑으면서도, 납치범이 구조적 피해자라는 사실도 잊지 않고 각인시킨다. 결국 최후의 승자는 없다. 어떤 스포일러도 그 결말의 무게를 덜어내진 못할 것이다. 과연 자매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헬> Hell 팀 펠바움 / 독일, 스위스 / 2011년 / 86분 / 부천 초이스 재난영화와 호러영화가 사촌지간이 된 지도 오래다. <헬>은 그 전통을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영화는 두 장르에 양발을 걸친 채 파국에 다다른 자본주의와 자연 생태계에 대한 지독한 풍속도를 펼쳐 보인다. 지구 온난화에 대한 전 지구적 공포가 구체적 현실로 드러난 미래의 유럽 어딘가, 인간은 살육을 생존의 수단으로 삼고 있다. 마리와 여동생 레오니는 너의 물 한 방울로 내 목을 적시고, 너의 빵 한 조각으로 내 허기를 달래야만 한다. 그 살벌한 쟁탈전이 꼬리를 물고 펼쳐지는 스크린은 때로는 피로 흥건히 적었다가, 때로는 말라버린 대지 위에 피어오른 모래먼지로 자욱해진다. 그 피와 모래의 장막을 뚫고 두 자매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 질문에 어떤 희망적 대답이 가능하다고 해도 일시적 변통에 불과하다. 세계의 파멸은 계속된다. 그 사실이 이 영화를 극도로 비관적인 인류멸망보고서로 남게 한다. 폴란스키와의 독대 <폴란스키 파일> Roman Polanski: A Film Memoir 로랑 부즈로 / 영국, 이탈리아, 독일 / 2011년 / 90분 / 스트레인지 오마주 어떤 드라마보다도 드라마틱한 한 남자의 인생이 여기 있다. <폴란스키 파일>은 우리가 잘 아는, 혹은 잘 안다고 생각했던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지난 80년을 그의 영화와 더불어 찬찬히 되돌아본다. 이 간단치 않은 여정의 안내자는 폴란스키의 50년 지기 로랑 부즈로다. 메이킹 다큐 제작자로도 유명한 그는 2008년 에서 제작한 <로만 폴란스키: 원티드 앤드 디자이어드>처럼 섹스 스캔들을 집중 조명하는 대신, 폴란스키와 독대를 택한다. 덕분에 나치 집권 아래 참혹했던 폴란스키의 유년기, 안제이 바이다와의 인연과 영화계 입문기, 전 부인 샤론 테이트를 앗아간 비극 등을 그의 육성으로 전해 들을 수 있다. 그것이 때로는 주관적 서술에 머무르는 결과를 낳게도 한다. 하지만 조금 기운 인터뷰라 해도, 그의 영화만큼이나 아찔하고 처절했던 그의 삶을 들여다보고 싶은 유혹을 보상하기엔 충분해 보인다. 연극 무대 위의 연쇄살인 <시련> The Crucible 김연수 / 한국 / 2012년 / 87분 / 월드 판타스틱 시네마 <시련>은 아서 밀러의 연극이다. 17세기 미국의 한 마을에서 벌어지는 마녀재판과 진실찾기, 비극이 주된 내용이다. 영화 <시련>은 연극 <시련>을 연습 중인 어느 연극과 학생들의 이야기다. 어느 날, 극장의 문이 닫히고 이 안에는 연출, 배우, 무대감독, 조연출만이 남는다. 카메라로 연습장면을 기록하던 학생이 누군가에게 살해당하면서 학생들은 하나씩 죽음을 맞는다. 단절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연쇄살인극이라는 점에서 <시련>이 연상시키는 이야기는 무수히 많다. 하지만 <시련>은 연극과라는 집단이 가진 디테일한 특성을 이용해 관습적인 느낌을 피해간다. 다른 전공에 비해 특히 엄격한 선후배 사이의 서열구조가 갖는 권력관계, 타과 편입생을 ‘굴러온 돌’이라며 무시하는 분위기, 주인공을 향한 배우들의 욕심에서 비롯되는 갈등은 누가 왜 사람들을 죽이는가에 대해 수많은 가능성을 제기한다. 미스터리의 끝에 밝혀지는 비밀이 그다지 놀랍지는 않지만, 이야기를 지탱한 긴장의 힘은 상당히 세다. 생선 비린내와 피 비린내 <데드 스시> Dead Sushi 이구치 노보루 / 일본 / 2012년 / 91분 / 월드 판타스틱 시네마 나르는 초밥들의 반격이다. 신선한 초밥의 맛을 만끽할 생각으로 한적한 시골의 료칸에 짐을 푼 제약회사 사람들 앞에 한 걸인이 나타난다. 알고 보니 세포재생술을 연구하다 식인괴물을 만들어낸 일로 제약회사에서 부당해고를 당한 미치광이 과학자다. 복수심에 찬 그는 제대로 된 스시 맛도 모르면서 잘난 체하는 간부들을 스시의 밥으로 만든다. 그의 폭주를 막을 이는 초밥 요리사의 꿈을 이루지 못해 낙망한 료칸의 여직원 케이코와 기구한 사연 때문에 초밥 요리사의 길을 포기한 중년 사와다뿐. 그들이 끊임없이 쏟아지는 밥알과, 이빨을 세운 생선들을 물리치고 초밥 요리사로서의 소명을 되찾는 과정을 눈뜨고 지켜보려면 강한 비위는 필수다. 물론, B급 상상력으로 똘똘 뭉친 이구치 노보루 감독 특유의 황당무계한 상차림을 기대한 이라면 생선 비린내와 피 비린내가 뒤섞여 코를 찌르더라도 한술 떠볼 만한 영화다. 과연! 미이케 다카시 <사랑과 정성> 愛と誠 미이케 다카시 / 일본 / 2012년 / 133분 / 폐막작 1972년의 어느 날, 아이(다케이 에미)는 거리에서 불량학생들과 싸우고 있는 남자에게 눈길이 간다. 이마에 독특한 상처를 갖고 있는 그는 아이가 어렸을 때 스키장에서 구해준 마코토(쓰마부키 사토시)다. 아이는 불량학생으로 낙인찍힌 마코토를 아버지가 운영하는 사립학교에 입학시키고, 아르바이트까지 하며 그를 돌본다. 그럼에도 마코토의 비행은 멈추지 않고 결국 그는 학교를 그만두게 된다. 마코토와 끝까지 함께하고 싶은 아이는 폭력서클과 야쿠자에게 위협당하는 상황에까지 내몰린다. 과연 미이케 다카시다. 그는 순정만화의 주인공들을 극단적인 폭력과 괴상한 유머로 마구 덧칠해버렸다. <사랑과 정성>은 더이상 순정만화도 청춘영화도 아니지만 익숙한 옛 노래가 등장하는 뮤지컬 장면이 더해져 영화의 인상은 전체적으로 산뜻하고 유쾌하다. 우스꽝스러워 보이던 영화는 결말로 치달을수록 비장한 드라마의 냄새마저 풍긴다. 호러영화에 대한 향수가 절절하다 <칠레라마> Chillerama 애덤 그린 / 미국 / 2011년 / 120분 / 금지구역 네명의 감독이 보여주는 코믹한 호러 옴니버스. 자동차 극장의 폐업 전날, 상영기사 엉클 세실(리처드 리엘)은 희귀한 고전영화 네편을 상영한다. 괴물 정자의 뉴욕 정복에 관한 이야기 <와질라>, 패러디의 막장 <나는 십대 곰인간이었다>, 심성 고운 프랑켄슈타인과 어리바리한 히틀러가 등장하는 <안네 프랑켄슈타인의 일기>, 역겨움의 끝 <데시케이션>에 이어지는 <좀비영화>가 그것들이다. 자동차 극장이 성행하던 어느 날에 만들어진 듯 조악한 만듦새는 친근하고 정겹다. 1970년대 호러영화에 대한 감독들의 향수가 절절하게 묻어난다. 익숙한 배우들이 출연하거나 유명한 영화의 장면들이 패러디된 부분을 찾아내는 재미도 상당하다. 특히 명작 속 대사를 읊으며 자폭하는 상영기사 엉클 세실의 마지막 모습은 장렬함까지 선사한다. 각 영화의 크레딧이 올라가며 나오는 쿠키 영상들도 놓치지 말 것. 영화의 꿈이 숨어 있는 에로영화? <불가리아> Vulgaria 팡호청 / 홍콩, 중국 / 2012년 / 90분 / 비전 익스프레스 <불가리아>란 제목이 뜻하는 건, 요구르트로 유명한 나라가 아니다. ‘vulgar’(저속한, 음탕한)에서 따온 제목을 가진 이 영화는 ‘음탕한 언어와 성적 묘사’에 대한 경고로 시작한다. 영화 프로듀서인 토는 돈이 없다. 이혼한 아내가 키우는 딸을 만나고, 사무실을 유지하기 위해 돈이 필요한 그는 어느 날 삼합회의 두목을 만나 투자 제안을 받는다. 그가 원하는 건 어린 시절 보았던 포르노영화의 여배우를 캐스팅해 그녀의 대표작을 리메이크하는 것이다. 토는 일단 돈이 급해 제안을 받아들이지만, 그의 고난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영화 속에서 영화는 말 그대로 유린당하는 처지다. 전직 감독은 지금 카메라와 함께 마작판 매니저를 하고 있다. 단속이 뜨면 바로 마작판을 촬영 중인 영화현장처럼 보이기 위해서다. 배우를 꿈꾸며 여러 실력자를 유혹하던 여배우는 파트타임 모델을 하고 있다. <불가리아>는 비록 에로영화이기는 하나, 그래도 영화에 꿈을 가진 이들의 소동극이다. 제목처럼 음탕한 성적 묘사가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건 아니다. 영국을 떠들썩하게 한 엽기적 살인사건 <검은 연못> Black Pond 톰 킹슬리 / 영국 / 2011년 / 83분 / 비전 익스프레스 “그들은 시체를 냉장고에 보관하다 검은 연못에 던져넣었다.” 죄책감에 흘러나온 팀(윌 샤프)의 한마디가 평범한 일가족을 희대의 살인마로 둔갑시킨다. 톰슨 가족의 집에 찾아온 블레이크(콜린 헐리)가 저녁 식사 테이블에서 급사하는 바람에 톰슨 가족은 살인 혐의로 기소된다. <검은 연못>은 온 영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엽기살인사건을 주제로 한 페이크 다큐멘터리다. <검은 연못>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가 지나치게 예민하다. 과민한 성격에서 비롯한 인물들의 과격한 액션은 종종 보는 이를 당혹스럽게 하지만 그런 점이 <검은 연못>의 매력이다. 인물들이 말을 하던 중 입을 다물고 황망한 표정을 짓는 순간엔 실소가 비어져 나온다. 특히 괴팍한 치료사 에릭 삭스로 분한 사이먼 암스텔의 연기가 무척 인상적이다. 저예산으로 제작했음에도 개성있는 짜임새로 구성된 <검은 연못>은 20대인 두 감독 톰 킹슬리, 윌 샤프의 데뷔작으로 2011년 영국아카데미상(BAFTA) 후보에도 올랐다.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며 <조지 해리슨>

비틀스 멤버 중에서도 폴 매카트니와 존 레넌의 이름이 두드러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이 작사·작곡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고 음악의 성격을 규정했으며 인기의 핵심이었기 때문이다. 폴 매카트니나 존 레넌에 관한 이야기는 그래서 더 많을 수밖에 없다. 리드 기타리스트 혹은 매카트니와 레넌 사이의 중재자 또는 그들 이후의 삼인자가 조지 해리슨이었다. 그가 비로소 자기의 음악적 활력을 펼친 건 비틀스가 결성된 지 한참 뒤의 일이었다. 그 오랜 시간 동안 조지 해리슨은 자기가 만든 노래들이 발표할 길은 없고 쌓여만 가는 것에 조바심냈다고 한다. 하지만 훗날 그의 독창적인 음악적 세계가 점차 인정받게 된다. 그의 노래 을 두고 엘튼 존은 “지금까지 쓰인 역사상 최고의 연가다. 모든 면에서 아름다움의 극치를 들려준다”고 극찬했다. 영화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핸드 메이드’라는 제작사를 차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테리 길리엄의 <시간 도둑들>을 비롯하여 몇편의 독특한 영화들을 기획하기도 했다. 1943년에 태어난 그는 2001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며 새로운 사람으로 살았고 평안히 돌아갔다고 그를 사랑한 사람들은 이 영화에서 말하고 있다. 마틴 스코시즈의 <조지 해리슨>이 바로 이 조지 해리슨의 일대기를 그려낸다. 스코시즈는 아주 오래된 일화부터 손을 댄다. 비틀스 결성 초창기, 십대 후반에 그들이 모이는 시점부터 전세계 비틀마니아가 양산되는 과정을 거쳐 팀 해체 위기의 시기를 지나 비로소 영화의 중반부가 지날 즈음부터는 조지 해리슨 개인의 독창적인 음악사와 인생사를 순차적으로 탐독해 나간다. 그때에 각종 사진과 영상들의 일부는 한번도 공개된 적이 없는 희귀한 자료들이다. 물론이지만 출연하는 인물들이 쟁쟁하다는 건 더 말할 필요가 없다. 폴 매카트니는 십대 시절 그를 어떻게 만났는지 말하고, 링고 스타는 등장하여 멤버들 사이에 어떤 교감과 문제가 있었는지 고백하고, 에릭 클랩턴은 그의 아내와 어떻게 사랑에 빠져버렸는지 말한다. 그들의 회고담과 함께 그리고 생전의 조지 해리슨이 남긴 인터뷰와 함께 변화무쌍한 그의 삶이 전해져 온다. “비틀스 멤버 중 내가 가장 많이 변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게 인생이다”라고 조지 해리슨 자신도 말한 적이 있다. 그러니까 많은 시간이 흘러서 그 유명한 거리인 애비 로드에 젊은 시절 비틀스 복장을 한 코미디언 배우들이 우르르 나타났을 때 사람들은 그들에게 사인을 받으려 아우성이었지만 정작 그 옆에 서서 웃고 있던 한 남자가 조지 해리슨이라는 건 알아보지 못했다고 한다. 상영시간 3시간28분, 짧은 시간은 아니다. 하지만 <조지 해리슨>은 상영시간의 부담이 없는 영화다. 오히려 길어서 더 재미있는 이야기다. 무엇보다 이 작품이 스코시즈가 연출한 한편의 전기영화이자 음악다큐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믿을 만한 보증수표와 같다. 음악 다큐의 명작 <노 디렉션 홈: 밥 딜런>을 보고 만족했던 관객이라면 <조지 해리슨>을 보고도 만족할 가능성이 높다. 스코시즈는 “조지 해리슨의 노래들, 잡지, 앨범 커버의 이미지들, 텔레비전 출연 영상, 뉴스릴 영상, 리처드 레스터의 영화 등을 모두 살펴보았다”고 말했다. 무궁무진한 자료들이 조지 해리슨을 재구성하고 있다는 뜻이다. 한편 스코시즈는 자기 고백도 했다. “나는 를 처음 들은 순간을 절대 잊을 수 없다. 그것은 대성당으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조지는 영적으로 깨어 있는 음악을 만들고 있었고, 우리 모두 그것을 듣고 느꼈다. 이 영화를 만들자는 제안을 받았을 때, 나는 뛸 듯이 기뻤다.” 이 영화를 보는 어떤 관객도 그렇게 뛸 듯이 기쁠 것이다. 한 가지 더. 비틀스와 조지 해리슨의 아름다운 음악이 무수히 흐른다는 건 더 길게 말할 필요가 없다.

[김중혁의 최신가요인가요] 앗 뜨거워(한숨)

2NE1님들께서 새 노래를 발표하셨으므로 이 자리를 님들에게 바쳐야 마땅하겠으나 아직은 한곡밖에 발표하지 않은 상태고, <씨네21>의 다른 지면에서 앨범을 다룰 게 분명하므로 일단은 경거망동을 삼가고 조용히 전곡 발표의 시기를 기다릴 생각이다. 는 서울 마을 갈 때 몇번 들었는데 마냥 좋더라. 새로운 노래들은 주로 버스에서 감상하는 편이다. 예전에 시디플레이어를 가지고 다닐 때에는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 비닐을 뜯고 시디를 플레이어에 넣으면 난생처음 듣는 음악이 이어폰에서 흘러나왔다. 돌아오는 길이 지루하지 않았다. 서서 와도 즐거웠다. 음악은 버스에서 들어야 제맛이라고 생각했다. 요즘도 새로 산 시디를 파일로 바꾼 다음 버스에서 아이팟으로 듣는 경우가 많다. 버스 환경이 많이 바뀌었다. 일산에서 서울 가는 (아니, 서울에서 일산 오는 건가? 아무튼) 광역버스에는 두대의 텔레비전이 설치돼 있는데 거기에서 계속 뭔가를 보여주는 바람에 눈 둘 곳이 마땅찮다. 광고를 보여주기도 하고, 헛웃음이 절로 나는 난센스 퀴즈를 내기도 하고 (난센스 문제를 척척 다 맞히는 나는 센스가 있는 거야, 없는 거야?) 화면을 휙휙 지나가는 글자를 알아맞히라는 문제를 내기도 하는데, 관심이 없으면서도 자꾸만 눈길이 간다. 좁은 버스 공간에서 계속 움직이는 화면이 있으니 눈이 갈 수밖에 없다. 눈을 감아도 화면 속 빛의 움직임이 눈두덩을 계속 간지럽힌다. 버스 텔레비전의 방송 중에는 뮤직비디오도 있다. 당연히 음악은 나오지 않고 영상만 보인다. 처음에는 저런 바보 같은 영상이 다 있나 싶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자꾸만 말려들고 있다. 영상을 보면 환청이 들리는 거다. 아예 모르는 노래면 괜찮은데, 적당히 아는 노래들은 특정 부분의 멜로디가 자꾸만 귓가에서 맴돈다. 최근에는 지나의 <2Hot>이 절찬리에 상영 중인데, 소리도 내지 않고 열심히 섹시하게 춤을 추고 있는 지나를 볼 때면 ‘뜨거 뜨거 난 너무 뜨거워’ 부분이 계속 생각난다(진정한 후크송!). 가끔은 이어폰을 꽂지 않은 채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고 싶은데, 그러기가 힘들다. 아, 버스에서 뮤직비디오 화면과 악전고투하게 될 줄은 몰랐다. 비디오가 라디오 스타들도 다 죽이더니(video killed the radio star), 나도 죽일 생각인가보다. 버스에 타면 늘 맨 뒷자리에 앉곤 했는데, 요즘은 텔레비전의 사각지대에 앉는 버릇이 생겼다(왼쪽 뒤에서 다섯 번째쯤이 가장 좋다). 버스에서 화면에 내 눈을 뺏기고 싶지 않다. 나는 풍경을 보고 싶고, 계절을 보고 싶고, 날씨를 보고 싶고, 햇살을 보고 싶고, 지나치는 사람들을 보고 싶다. 그걸 보면서 음악을 듣고 싶다. 머지않아 버스 텔레비전에서 2NE1의 뮤직비디오도 흘러나오려나. 나는 그걸 보면서 를 따라부르고 있으려나. 보느냐, 보지 않느냐, 힘든 결정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

아이돌 클라우드

적금 하나, 보험 하나, CMA 통장 하나. 가진 금융상품이라고는 이것밖에 없는데, 어느 날 증권광고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이 광고에서 티아라의 함은정은 “당신의 자산, 대우받고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함은정의 질문이 이끈 호기심은 내 자산의 안정성이 아니었다. ‘자산.’(資産) 개인이나 법인이 소유하고 있는 유형·무형의 재산. 이 단어가 무대에서는 <롤리폴리>를 부르고 <우리 결혼했어요>에서는 결혼놀이를 하고 있는 아이돌이 던지기에 적합한 메시지일까? 금융광고는 신뢰성을 우선으로 하고, 성공모델의 표본을 내세우며 지킬 자산이 있는 30, 40대 이상 소비자를 대상으로 한다. 그런 광고에 대부분 부모가 자산관리를 해주는 아이돌 스타가 출연한다고 했을 때, 생각해볼 수 있는 이유는 몇 가지가 되지 않았다. 티아라라는 걸그룹에 빠진 수많은 삼촌 팬들을 겨냥했을까? 아니면 2012년 한국사회에서는 아이돌이 누구보다도 강력한 성공모델인 걸까? 그러고보니 이전에는 아이돌이 출연하지 않았을 법한 광고들이 이미 아이돌을 앞세우고 있었다. 소녀시대의 침대 광고, 닉쿤의 정수기 광고, JYJ의 두통약 광고 등등. 대중문화의 기호와 흐름에 가장 빠르고 강하게 반응하는 광고업계가 지금 아이돌의 위치를 정확하게 드러내고 있을 것이다. 아이돌은 이제 소년, 소녀 팬을 넘어 삼촌 팬과 이모 팬까지 들뜨게 만드는 스타에 머물지 않는 듯 보인다. 특정한 세대와 타깃에 국한되지 않은, 사실상 대한민국 전체가 바라보고 있는 이상향에 가까울 것이다. 음반 수익 감소가 영역 확장의 시작 2012년은 아이돌의 영역 확장사에서 뚜렷한 분기점을 남긴 해로 기록될 듯 보인다. JYP엔터테인먼트는 박진영이 주연한 영화 <5백만불의 사나이>를 공동제작했고, 이미 영화와 드라마 제작에 나선 SM엔터테인먼트는 합작투자를 통한 외식법인을 설립해 레스토랑을 열었으며 여행업체를 인수해 ‘SM타운 트래블’을 설립, 여행사업에도 뛰어들었다. YG엔터테인먼트의 영역 확장도 흥미롭다. 제일모직과 50 대 50의 확장법인을 세워 내년 봄 시즌부터 전세계 아이돌 팬을 대상으로 신규 브랜드를 선보이기로 했다. 아이돌의 영역 확장에 더해 아이돌을 만들고 관리하는 회사까지 이제 규모의 경제(생산규모가 증가할수록 생산비 대비 생산량 증가율이 커짐으로써 발생하는 이익) 단계로 접어든 걸까? 아이돌이 대중문화의 대세가 되고, 아이돌이 한류의 첨병이 되면서 일어난 자연스러운 현상으로만 보이지는 않는다. 아이돌 산업이 이렇게까지 확장될 수 있었던 근본적인 동력이 무엇인가를 물어야 할 때다. 아이돌 산업의 관계자들이 먼저 꼽는 확장의 이유는 물론 ‘수지타산’이다. 보통 하나의 아이돌 팀을 개발하고 제작하는 데 들어가는 돈은 “적게는 10억원, 많게는 20억원”이다. 국내시장에서 투자금을 회수할 수 있는 아이돌은 그리 많지 않다. 가수 박진영과 H.O.T.의 매니지먼트를 담당했고 다국적 아이돌 그룹인 ‘크로스 진’을 제작한 아뮤즈 코리아의 홍현종 대표는 “음원 사이트에서 1등을 아무리 오래 해도 유지비용의 3분의 1 정도만 채울 수 있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옛날에는 CF 한편 수익이 많게는 10억원에서 적게는 2억원 정도였다. 그런데 앨범 수익이 어느 정도였냐면, 1만원짜리 CD 한장을 팔면 중간마진 빼고 6천원 정도가 들어왔다. 그러면 100만장을 팔면 60억원인 거다. 히트를 하면 하루 주문량만 3만장에서 5만장인 시절이었다. H.O.T.는 3집 이후에 선주문만 70만장이 들어왔었고. 음반 수입이 그만큼 되기 때문에 개인적인 꿈이나 자기만족이 아니면 CF나 연기를 하려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10여년 전 한국 음반시장의 규모는 약 4천억원대였다. 2011년 기준으로 보면, 현재의 규모는 7500억원 정도. 이 가운데 6700억원 정도가 온라인 음원시장이다. 시장의 규모는 확대됐고 가온차트가 발표한 지난 2011년 음원 종합차트 100에서 따르면 아이돌 가수는 53개를 차지했다. 음반 종합차트 톱100에서도 아이돌 가수 앨범의 점유 수가 74개로 음원보다 더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하지만 음반시장에서 수익을 나누는 시스템과 지분은 달라진 상황이다. 관계자들은 유통 플랫폼과 이동통신사업자가 수익의 절반을 가져가는 구조라고 말한다. SM, JYP, YG 등 7개의 엔터테인먼트사가 출자해 만든 음원유통회사인 KMP 홀딩스의 홍상욱 본부장은 “메인 3사를 제외하면 수익을 기대할 수 있는 곳이 거의 없다”고 말한다. 아이돌이 다양한 채널의 TV 프로그램을 접수하고, 아이돌을 극장에서도, 뮤지컬 무대에서도, 빅뱅의 경우처럼 서점에서도 만날 수 있게 된 현재의 동인은 결국 음반시장의 붕괴라는 이야기다. 합숙을 통한 육성은 한국만 가능한 시스템 프랑스의 저널리스트인 프레데릭 마르텔이 쓴 <메인스트림>에서 SM의 이수만 회장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연예인들은 다목적 스타들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그들은 노래, 춤, 연기, 패션모델 등 이 모든 것을 소화할 수 있도록 양성된다는 거죠. 이들은 아주 다재다능합니다. 우리는 이런 특별한 방법으로 한국식 보이밴드들을 대중 앞에 내보내는 겁니다.” 아이돌이 노래와 춤 이외의 영역에서 만능이 된 데에는 한국식 매니지먼트가 지닌 특징도 한몫을 했다. 아뮤즈 코리아의 홍현종 대표는 말한다. “한국의 경우는 외모와 춤이 좋은데, 노래가 안된다고 하면 데려다가 가르치는 구조의 시스템이다. 말하자면 개발비를 들이는 거다. 그런데 일본과 미국은 개발비를 들이느니 외모와 춤 노래가 모두 다 되는 사람을 찾는다. 인구가 많으니까 가능한 거다. 해외에서는 개발비를 들이는 한국의 시스템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차우진 음악평론가는 “합숙을 통한 육성 시스템도 한국이어서 가능한 것 같다”고 말했다. “외국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일 거다. 16살 이상의 아이들이 같은 공간에서 먹고 자는데, 성인이 되어서도 합숙생활은 반복된다. 하지만 한국의 부모나 학생들은 그에 대한 거부감이 없다. 입시를 위해서는 기숙학원도 보내니까. 말하자면 아이돌 매니지먼트사가 현재는 예술교육의 대안학교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관계자들은 과거에 비해 연기만을 통해 스타의 반열에 오르는 20대 초반의 배우들이 적어진 것도 아이돌 매니지먼트의 개발 시스템과 성공에 기인한다고 말한다. 배우를 전문적으로 관리하는 매니지먼트사의 한 관계자는 “요즘은 과거와 달리 연극영화과 1학년생들에게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성공 가능성이 높은 이들은 이미 대학 입학 전에 오디션을 통해 아이돌 산업으로 진입하는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유튜브, 한류, 해외판권의 관계 아이돌이 ‘자산’을 거론할 수 있을 만큼 자본주의 사회의 성공모델이 된 원인에는 한류시장의 확대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아이돌 매니지먼트의 현지화 전략, 그리고 유튜브와 소셜네트워크의 확산이 가져온 결과다. <메인스트림>에서 이수만 회장은 말한다. “우리 그룹의 전략은 언어를 중심으로 짜여 있습니다. 우리는 캐스팅을 통해 여러 나라 말을 하는 소년들을 선발해서 보이밴드를 만듭니다. 국적이 서로 다른 슈퍼주니어의 멤버들처럼 말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들에게 외국어를 배우게 합니다. 보아가 그런 경우죠. 우리는 보아를 열한살 때 발탁해서 일본어, 영어, 중국어를 배우게 했습니다. 더 많은 걸 배우게 할 때도 있고요. 이어서 치밀한 마케팅 작전을 세우는데, 그 특성은 철저하게 현지화한다는 겁니다. 판촉, 제작, 텔레비전 방송, 이런 모든 것들을 전부 현지 실정에 맞게 개편합니다.” 차우진 음악평론가는 “음악을 생산하는 시스템으로 볼 때도 글로벌화의 전략이 눈에 띈다”고 말했다. “이전에는 아이돌의 노래를 댄스가요라고 불렀다. 하지만 지금은 그냥 팝음악이라고 하는 게 맞을 듯하다. 특히 메이저 회사의 음악은 호주나 핀란드 같은 나라의 회사에 소속된 작곡가들이 만든다. 이들은 켈리 클랙슨이나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곡을 만드는 사람들이다. 오퍼가 들어오면 회의를 통해 컨셉을 정하고 그렇게 곡이 만들어지지만 다시 한국에서 편곡을 거친다.” 유튜브 등을 통한 온라인 마케팅에 대해 관계자들은 ‘한국식 콘텐츠 관리’가 주요했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단순한 마케팅 도구로 생각했던 유튜브의 경우, 예상보다 넓은 지역에서 많은 트래픽이 기록됐고, 결국에는 국내에서 유입된 조회수보다 해외 유입량이 많은 걸 확인하면서 더 많은 콘텐츠들이 온라인으로 퍼지게 됐다는 것이다. 아뮤즈 코리아의 홍현종 대표는 이 또한 “한국과 일본의 차이”라고 말했다. “가령 뮤직비디오도 일본은 방송용으로는 15초 분량을 만들고 유료 팬클럽에게는 풀 버전을 보여주는 등 콘텐츠로 낼 수 있는 수익관리가 철저하다. 하지만 한국은 뚜렷한 수익원이 없기 때문에 온라인으로 제공하는 전략이 가능하다.” 어쩌면 비정상적인 콘텐츠 유통이 한류를 살린 걸까? 한국의 아이돌 산업에 한류는 사업 다각화를 더 넓게 고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아이돌 스타의 드라마 출연을 더이상 ‘가수와 배우 겸업’이라는 단순한 말로 설명하기 힘들어진 것도 이 때문이다. 드라마에 출연해 인지도를 높이고 인지도가 올라가면 CF 출연이 용이하다. 만약 그 드라마가 한류를 타서 일본과 중국, 동남아시아 시장으로 수출돼 다시 그곳에서 인지도가 올라가며 또 다른 CF 출연과 MD 상품(팬을 타겟으로 삼은 스타관련상품) 사업을 할 수 있다. 드라마 제작사로서는 아이돌의 출연만으로 해외판권을 보장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리기도 한다. (아이돌로 분류하기는 어렵지만)장근석과 소녀시대의 윤아가 출연한 드라마 <사랑비>의 경우, 방영 이전에 이미 제작비의 70%를 해외판권으로 충당했다고 알려졌다. 영화에서도 이러한 흐름은 가속화될 전망이다. <내 아내의 모든것>을 제작한 수필름의 민진수 대표는 “근래 들어 아이돌 스타를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들에 대한 해외의 투자기획이 많아졌다”고 말했다. 아이돌 산업은 더 성장할 수 있을까 음반시장의 붕괴, 그로 인한 사업 다각화, 사업 다각화를 위한 개발비 투자, 다시 투자 대비 손익분기점을 맞추기 위한 또 다른 사업 다각화의 모색. 지금 한국의 대중문화를 아이돌이 선점할 수 있었던 건, 사실상 아이돌 산업의 자구책에서 파생된 결과로 보인다. 여기에 한류의 흐름이 더해지면서 아이돌은 신자유주의 시대 성공 신화가 되고, 아이돌을 키운 회사는 규모의 경제를 모색하게 됐다. 과연 이러한 흐름이 언제까지 갈 것인가를 고민할 수밖에 없는 시점이기도 하다. 차우진 음악평론가는 “음악을 만드는 이들의 층위가 다양해졌고, 그만큼의 경쟁이 벌어지기 때문에 이런 동력으로 인해 꽤 오랜 기간 동안 아이돌 산업이 지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SM의 요식업과 여행업, YG의 의류업 또한 사업 다각화와 함께 한류의 영속성을 위한 전략을 고민한 결과로 보인다. 무엇보다 아이돌의 영속을 가능하게 만들 흐름은 이제 아이돌 산업 외부에서도 아이돌을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TV, 영화, 뮤지컬, 출판만이 아니라 대기업까지. 아이돌의 자산은 그 어느 때보다 대우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