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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1997)

[신 전영객잔] 아이맥스가 시네마를 구해낼 수 있을까

X에게 친구, 네가 그토록 열광하는 영화 <다크 나이트 라이즈>를 나도 드디어 보았어. 주말 아침 9시에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대로 간편한 옷을 입고 집 근처 멀티플렉스 상영관으로 달려가 몇장 남지 않은 티켓 중 하나를 겨우 구해 보았어. 물론 나도 영화를 보기 전날에는 무슨 행사라도 되는 것처럼 흥에 겨워 전작 <다크 나이트>를 보며 복습했지만, 스포일러가 두려워 며칠 동안이나 인터넷조차 끊었다는 너 정도의 설렘은 아니어서인지 하여간에 엄청난 흥분보다는 약간의 기대를 안고 극장에 들어갔어. 사실 좀 싱겁게 들릴 게 빤하지만, 영화에 관한 솔직한 감상을 말하자면 나는 <다크 나이트라이즈>가 <다크 나이트>를 뛰어넘지 못했을뿐 아니라 훨씬 못 미치는 영화라는 평가에 공감하는 편이야. 이 시리즈의 시작이었던 <배트맨 비긴즈>를 본 이후에 <다크 나이트>를 보았을 때 어떻게 전자의 그 엉성했던 영화가 이토록 흥미진진한 영화가 되었는가 놀랐던 것처럼 <다크 나이트>를 본 다음 <다크 나이트 라이즈>를 본 지금은 그 눈부신 영화가 어떻게 다시 이렇게 평범한 후속작을 낳은 것인지 놀랐다고 말하는 게 차라리 솔직한 표현일 거야. <다크 나이트 라이즈>의 악당 베인이 <다크 나이트>의 조커에 비할 바가 못된다고들 말해. 한마디로 캐릭터의 매력이 떨어진다는 뜻인데, 그런 것 같아. 조커에게는 감당키 어려운 미지의 존재감이 있었지만 베인에게는 목적에 따른 강력한 수행능력만 있어 보이기 때문일 거야. 조커는 어느 편도 아닌 아이러니한 미치광이 같은데 베인은 편을 잘못 먹은 성실한 군인 같아. 인물들 사이의 느슨함 혹은 서사의 느슨함도 한몫한 것 같아. 로빈이 될 블레이크와 캣우먼에게 할당된 장면들 그리고 우스꽝스럽게 느껴진 반전 설정은 배트맨-조커-하비 덴트의 삼각구조의 팽팽한 긴장감을 되살리지 못했어. 하지만 친구, 이런 이야기는 여기까지야. <다크 나이트 라이즈>를 보던 나를 진짜 호기심에 빠뜨린 건 그런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야. 불쑥 내 머릿속에는 다른 호기심이 생겨났어. 실은 그것에 관해 말하려고 해. 그래서 좀 이상한 샛길에서부터 시작해볼게.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한 여행 프로그램을 보았어. 김훈이라는 소설가가 한 사진가와 여행을 하고 있었어. 프라하의 어느 다리 위에서였을 거야. 평생 한번도 카메라를 잡아본 적이 없다는 이 소설가는 어쩌다 상대방을 찍어주어야하는 처지에 놓이자 카메라를 들고는 이 물건 참 번잡스럽다는 표정으로 문득 이렇게 말했어. “내가 앞으로 이걸 찍지는 않을 것 같아. 이걸로 들여다보는 세상하고 눈으로 보는 세상은 전혀 다른 세상이구먼. 이 세상은 뷰파인더 구멍으로 들여다보는 사각형의 틀 안에 갇힐 리가 없는 거지.” 사진가가 얼른 지지 않고 말했어. “하지만 그만큼만 독립될 수는 있지요.” 다시 김훈이 말했어. “그만큼만 끊어서 셔터로 고정시키는 거야.” 사진가는 또 지지 않고 말했어. “영원히 남기는 거지요.” 김훈이 또 말했어. “하지만 인간의 시간은 고정되는 것이 아니고 항상 흘러가는 거지.” 이 대화를 나는 좀 오래 생각했어. 다름 아니라 소설가가 부정한 바로 그것 ‘사각형의 틀’이라는 말에 내 생각이 붙잡혔기 때문이야. 그는 사진의 사각형의 틀을 말했지만 나는 영화의 사각형 틀을 떠올렸어. 사진은 스스로가 세계 그 자체가 될 수 있다고 우기지는 않아. 대신 저 사진가가 항변한 것처럼 세계를 기록한다고 말하지. 회화도 사각의 틀 안에 세계를 담지만 그 세계는 모사이거나 모방이거나 그로 인한 무궁무진한 관념적인 연상의 창이기에 아름다운 것이지 그 자체가 세계의 일부라고 나서지는 않아. 오로지 영화만이 활동함을 근거로 스스로가 세계의 반영이자 일부라고 주장해왔어. 거기엔 물론 운동과 시간이 있기 때문에 그럴 거야. 사각의 틀이라는 한계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 한계가 있다는 걸 업으로 창작의 수많은 방법들을 만들어낸 다음, 내가 바로 세계요 하고 주장하는 영화를 이 소설가는 인정치 않겠구나, 하고 그때 생각했던 것 같아. 나는 그의 말을 이렇게 바꾸어서 생각했던 거야. 사각의 틀, 그건 우리가 말하는 영화의 ‘프레임’이야. “스크린에는 날개가 없다.” 앙드레 바쟁이 한 그 말 기억하지? 영화의 스크린이란 실은 필름 프레임의 확장이잖아. 바쟁의 말에는 물론 더 복잡한 이론적 함의가 있지만 무엇보다 거기에는 영화가 사각의 틀로 세상을 오려내되 그 한계 때문에라도 영화만의 미학이 함께 잠재한다는 인정이 담겨 있어. 프레임이 만드는 그런 영화의 미학은 곳곳에 있어. 올해 초에 나는 누군가에게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의 한 장면을 참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어. 꼬마들이 기차 건널목 앞에서 소원을 비는 연습을 하는 장면 기억날 거야. 그때 건널목에는 할머니 한분이 서 있었는데 기차가 쑤웅 하고 지나가자 1~2초 만에 그 할머니는 사라져버려. 아이들은 놀라 그걸 기적이라고 말하지. 하지만 할머니는 사라진 게 아니라 화면 바깥에 있는 거야. 영화에서는 인물이 화면 바깥으로 한 걸음만 빠져나가도 그렇게 존재의 소멸이라는 의미가 생겨날 수가 있어. 그 장면이 좋다고 한 사람에게 나는 그게 바로 영화의 프레임이라는 한계 때문에 생겨날 수 있는 역설적 아름다움이라고 말하면서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거울> 이야기를 들려준 것 같아. <거울>이라는 영화의 도입부에 보면 저 멀리 후경에서부터 전경으로 아득한 바람이 불어와 갈대숲을 흔드는 장면이 두번 나오잖아. 기막히게 아름다운 그 장면, 그게 소망하거나 기다려서 얻어진 게 아니고 헬기 두대를 착륙시켜 일으킨 프레임 바깥의 조작된 바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그 옛날의 어느 날 나는 얼마나 놀랐었는지. 프레임이라는 안팎의 경계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아름다움인 거야. 그러니 영화감독보다는 영화의 사상가로 더 존중할 만한 피터 그리너웨이가 영화의 해방을 외치며 꾸준히 영화에서 걷어치워야 할 것으로 프레임을 지적하는 건 역으로 그게 바로 전통적 영화의 변치 않을 가장 원초적인 단위라는 확신이 있어서일 거야. 아이맥스란 거대한 프레임의 영화적 체험이야 모르긴 해도 너는 지금쯤 조바심이 났을 거야. 혹은 화가 났을지도 모르지. <다크 나이트 라이즈> 이야기는 제쳐두고 프레임 운운하는 이런 이야기를 왜 늘어놓고 있는지 궁금해할 수도 있겠지. 그렇다면 <다크 나이트 라이즈>를 만들면서 “읽는 형식의 이야기가 아니라 움직이는 프레임을 가진 이야기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하려고 노력했다”고 한 크리스토퍼 놀란의 말을 기억해주면 좋겠어. 이제 솔직히 말할게. 나도 너처럼 <다크 나이트 라이즈>를 두번 보았어. 한번은 처음 말했던 그날 일반 상영관에서 보았고 또 한번은 며칠 뒤 왕십리CGV 아이맥스관에서 보았어. 이유는 하나였어. 잊지 않았겠지? <다크 나이트 라이즈> 예고편에는 마치 계시처럼 이런 말이 있었잖아. “아이맥스로 경험하라!” 자랑할 일도 부끄러운 일도 아니지만 나는 성인이 된 다음 아이맥스 극장을 찾은 게 이번이 처음이야. 게다가 나는 아이맥스의 복잡다단한 기술적 공정에 대해 잘 알지 못할 뿐 아니라 관심도 없어. 기초적인 상식 정도가 있을 뿐이야. 다만 <다크 나이트 라이즈>에 관련해서라면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 나이트>가 최초로 27분가량을 아이맥스 카메라로 촬영했고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55분을 촬영했다는 정도는 들어서 알고 있어. 그러니까 영화의 3분의 1을 아이맥스로 촬영한 이 영화는 영화사에 전무후무한 최초의 아이맥스 극영화로 기록될 가능성이 높아. 그리고 <다크 나이트 라이즈>를 볼 계획이거나 본 이들은 거의 빠짐없이 부정이건 긍정이건 아이맥스에 관해 말하고 있어. 당신은 왜 아이맥스 카메라로 영화를 찍었느냐는 질문에 놀란은 이렇게 말했어. “아이맥스 기술로 액션 신을 찍는 것은 이야기를 그려나갈 엄청나게 큰 캔버스를 얻은 것과 같다.” 그는 캔버스라고 말했지만 우리는 그가 캔버스라고 말한 것이 프레임이라는 걸 알고 있어. “스크린은 영화를 유지하는 기초가 되는 필름 프레임의 투사”(스티븐 히스)라는 것도 말이야. 그러니 극장에서 볼 수 있는 아이맥스 스크린이 곧 거대한 캔버스이자 프레임이야. 따라서 아이맥스 카메라로 촬영한 영화를 아이맥스 상영관에서 상영할 때, 즉 좀더 큰 프레임을 지닌 필름으로 촬영하여 좀더 큰 프레임을 지닌 스크린에 투사하여 그것이 선명하고 크다고 할 때, 아이맥스로 경험하라, 라는 명령에 담긴 함의는 무엇일까. 그건 더도 덜도 아니고 이런 말이 될 거야.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반드시 최대한 크고 깊고 선명하며 어마어마하게 큰 프레임으로 경험하라! 그러므로 아이맥스란 거대한 프레임의 영화적 체험이나 진배없다고 나는 생각해. 이게 바로 내가 <다크 나이트 라이즈>의 아이맥스를 말하기에 앞서 프레임에 관한 단상을 늘어놓은 이유야. 그렇게 나는 아이맥스관에서 영화를 다시 보았어. 그리고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됐어. 전에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체험해보니 확실히 알게 된 그런 사실, 하지만 그 누구도 내게 그 체험의 느낌에 관해서는 자세히 들려준 적이 없는 그런 종류의 것. 내가 조커는 아니지만 퀴즈를 하나 내볼게. 내가 경험하고 너도 경험했을 그것에 관해서 말이야. 이렇게 물어볼게. 캣우먼은 배트맨과 공모할 것처럼 하면서 그를 유인하여 베인의 무리가 있는 지하소굴로 데리고 들어가. 그렇게 배트맨과 베인의 첫 격투 신이 성사되지. 배트맨은 거기서 가면이 찢기고 허리가 꺾이게 되잖아. 그런데 이때 이들의 격투 신의 시작을 알리는 영화적 신호 같은 것이 있어. 그러니까 배트맨을 가두기 위해 내리 꽂히는 그 철창과 함께 벌어지는 일이 있어. 그건 무엇이었을까. 그 숏을 시작으로 이 신의 스크린 화면비율이 2.35:1에서 1.44:1로 바뀐다는 사실을 우린 느껴야 해. 그건 액션의 시작이기 때문이야. 물론 이 영화가 1.44:1의 풀 스크린 비율(아이맥스 카메라로 촬영한 장면)과 스크린의 아래위에 레터 박스가 쳐진 2.35:1의 화면비율(일반 35mm 카메라로 촬영한 장면) 두 가지 버전이 섞여 상영된다는 걸 몰랐던 건 아니야. 하지만 그 느낌에 대한 설명을 들어보지 못했다는 걸 나는 말하고 싶은 거야. 그때 나는 극장의 자리에 앉아 생각했어. 이것이 아이맥스를 보는 체험의 중요한 일부가 될 터인데, 그렇다면 왜 아무도 여기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가 하고 말이야. 말하자면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어. <다크 나이트 라이즈>를 보는 동안 극장에 있는 스크린이라는 프레임은 변하지 않아. 하지만 스크린을 채우는 화면비율이라는 프레임은 시시각각 두 가지 버전을 오가는 거야. 우리는 그때 스크린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프레임을 응시하고 있지만 동시에 두개의 화면비라는 서로 다른 프레임을 체험하고 있는 거야. 일단의 정서 때문에 아이맥스 카메라를 쓴 것 같아 이게 특기할 만한 일이냐고? 물론이야. 전통적으로 본다면 스크린과 화면비율이란 서로 별개가 될 수 없는 것이었어. 혹은 한 영화를 두개의 화면비율로 영사한다는 건 없었거나 흔치 않은 일이었어. 너도 알다시피 화면비율이라는 건 어떤 창작자들의 경우에 컬러나 사운드의 문제만큼이나 중요한 영화적 요소잖아. 시네마스코프가 나왔을 때를 생각해보자고. 반대도 심했지만 환호도 열렬했지. 시네마스코프에 관한 가장 냉소적인 발언은 프리츠 랑이 했잖아. 시네마스코프는 장례식이나 뱀을 보여줄 때를 제외하고는 쓸모가 없는 비율이라고 그는 말했어. 장 르누아르도 시네마스코프를 반대했어. 이유는 확실했지. 좌우로 그렇게 화면이 길어지면 사람의 얼굴을 담는 클로즈업 숏의 미감을 해치게 될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어. 그는 그러한 비율로 얼굴 옆에 기다란 허공이 생기는 걸 마뜩잖아 한 것 같아. 반면에 영화의 성격도 다르고 창조적 관점도 달랐지만 니콜라스 레이와 스탠리 큐브릭 영화의 특징을 우리는 지금도 시네마스코프의 화면 안에서 느끼게 돼. 그들은 그 화면비율을 선호했지. 혹은 구로사와 아키라의 <요짐보>를 보며 시네마스코프가 없었으면 어쩔 뻔했나 생각했던 적도 있거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야. 시네마스코프의 비율에 반대하거나 환호하는 입장 차이가 있었지만 그들 사이에는 화면비율이 불변이어야 한다는 공약이 있었다는 거야. 그 말은 곧 프레임이 영화의 가장 기본 단위임을 인정하고 그걸 중시한다는 태도였지. 예외가 있다면 에이젠슈테인 정도였는데 그는 스크린의 가장 이상적인 비율을 정사각형으로 보았어. 마스킹을 통해 아주 여러 가지의 직사각형을 창출할 수 있다면서 역동적 정사각형이라 부르며 혼자 상상하며 좋아했던 거야. 나는 처음에 이 문제를 조금 단순하게 상상했어. 두개의 화면비가 쓰인다? 그렇다면 액션 신에만 아이맥스 카메라가 쓰여서 액션장면들만 1.44:1 풀 사이즈로 나오는 건 아닐까 하고. 하지만 실제로 보니 그렇지 않았어. 물론 대부분은 액션 신에 많이 쓰였지. 악당 베인이 비행기에서 탈출하는 장면이나 베인이 증권거래소를 터는 장면이나 베인과 배트맨이 두 번째 격투를 벌이는 장면 등이 대표적일 거야. 혹은 도시 전경을 보여주는 공중 인서트 숏은 예외없이 아이맥스 카메라로 찍었어. 하지만 아이맥스가 쓰인 장면이 실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은 금방 알게 됐어. 심지어 아주 의아하게 쓰인 장면들도 있어. 집사인 알프레드가 브루스 웨인에게 당신이 없는 동안 나는 피렌체에 기거하며 당신이 가족을 이루는 걸 상상했다고 말하는 장면 기억나지? 그 장면은 특별한 액션 신도 아닌데 아이맥스로 촬영됐어. 혹은 캣우먼이 감옥에 들어가는 짧은 장면도 말이야. 액션을 위해서 아이맥스로 촬영했다고 하지만 다른 것을 위해서도 아이맥스가 사용된다는 뜻인 것 같아. 이를테면 배트맨의 퇴장에서부터 로빈의 출현까지를 다루는 영화의 종반부는 특별한 액션 신이 없는데도 아이맥스 카메라로 촬영해서 풀 사이즈로 나오고 있어. 액션장면은 아니지만 어딘가 웅장한 서사시적 분위기가 필요하다면 그때에도 쓰이고 있는 거야. 놀란은 아이맥스 카메라를 일단의 정서를 위해서도 쓴 것 같아. 사실 뭐 어디에, 언제 아이맥스 화면이 등장하는지 일일이 열거할 필요는 없을 거야. 방금 말한 건 고정적이지 않다는 걸 짚기 위해서였던 거고, 그보다는 <다크 나이트 라이즈>를 볼 때 다른 영화를 볼 때는 잘 느끼지 못하는 이상한 심리적 미의 기준이 생긴다는 걸 중요하게 말해야 할 것 같아. 말하자면 중요한 장면과 중요하지 않은 장면이 다른 영화들과는 좀 다르게 나뉜다는 거야. 예컨대 우리는 일반적으로 서사의 정점에 이르러 시각적 비전의 중요성도 함께 느끼는 게 일반적이잖아. 그런데 이 영화는 그렇지 않았어. 영화 시작 직후 등장한 고공 비행기 신이 이미 시각적으로는 클라이맥스라고 할까. 혹은 예고편에서 이미 위용을 자랑한 풋볼 경기장 폭파 장면에서는 미처 폭파 장면을 보여주기도 전에 단지 경기장을 보여주었을 뿐인데 몇몇 관객은 마치 클라이맥스를 만난 것처럼 기대감에 차더라고. 아이맥스 효과를 위해 전통의 화면비쯤은 포기했지 조금 더 나아가면 이런 가정도 가능해. 놀란은 왜 영화 전체를 아이맥스 카메라로 촬영하지 않은 것일까. 물론 실리적인 공정상의 이유가 크겠지만, 이 영화를 본 사람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그건 아이맥스 화면으로 나올 장면들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기능도 있다는 거야. 말하자면 2.35:1일 때는 프레임의 아래 위가 비어 있다가 어느 장면에 이르면 1.44:1 풀 사이즈가 되면서 상하를 채우게 되는 거잖아. 그때 시각적인 것과 더불어 심리적으로도 무언가 충족된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는 거야. 만약 영화 전체가 처음부터 끝까지 풀 사이즈였다면 그런 충족감은 오히려 무뎌졌겠지. 그 때문에 <다크 나이트 라이즈>를 볼 때는 시종일관 무언가 덜 중요한 것을 보다가 더 중요한 것을 마침내 그 순간 충분히 보게 된다는 그런 인상이 있어. 그러니까 기본적으로는 상실감과 충족감을 번갈아 경험한다고 해야 하나. 그때 충족감이 채워지는 장면을 나는 내 식대로 비전의 클라이맥스라고 불러봤어. 왜 우리가 흔히 말하는 건 서사의 클라이맥스잖아. 이 영화에는 비전의 클라이맥스가 여러 군데 각자의 방식대로 있다는 거지. 하지만 불행한 건 내 눈에는 결국 비전의 클라이맥스와 서사의 클라이맥스가 조화를 이루지 못한 것이 이 영화의 커다란 단점 중 하나로 보인다는 거야. 가령 베인과 배트맨이 격돌한 두 번째 장면은 그 두개의 클라이맥스가 함께하려고 했지만 공히 실패한 장면이야. 두개의 화면비율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건 임의적으로 바뀐다, 신일 때도 있고 숏일 때도 있다, 액션에 주로 헌신하지만 때로는 정서적 웅장함을 위해서도 헌신한다, 비전의 클라이맥스와 서사의 클라이맥스의 분리가 심해지기도 한다, 라고 말한 셈인데, 그래서 뭐가 충격인데? 너는 그렇게 반문할 수도 있어. 맞아, 나도 그게 정말 충격인가 싶어서 주위의 몇 사람에게 물어보았어. 그들은 하나같이 풀 사이즈로 화면이 커질 때는 실감났지만 프레임이 변하는 것에 대해서는 큰 저항감이 없었다고 말해주었어. 실은 나도 고백건대 스크린 화면비가 교차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놀라운 일이었지만 ‘체험’으로서 혼동되어 영화를 못 볼 지경은 아니었거든. 그렇다면 화면비가 바뀐다는 그 ‘사실’자체는 지극히 충격적인데 그걸 체감하는 몸의 ‘놀람’은 그 사실의 강도보다 덜 충격적이라는 건 무엇을 시사하는 걸까. 그러니까 나는 이 사실의 체험과 충격의 강도 사이에서 한 가지 가설을 생각하게 됐어. 우리는 이미 제임스 카메론의 <아바타>를 본 관객이라는 거야. 3D란 엄연히 2차원적 프레임을 벗어나고 싶어 하는 욕망의 시도일 거야. 이미 프레임이 깨지는 것에 대한 훈련이 충분히 되어 있다는 거지. 그러니 이 정도의 화면비가 교차하는 건 괜찮다는 일정한 영화적 감각구조가 우리 몸에 이미 갖춰진 것은 아닌지 몰라. 디지털 룩이 처음 등장했을 때의 그 생경함을 생각해봐. 하지만 지금은 그다지 저항없이 보고 있잖아. 실은 놀란도 두개의 화면비를 오가는 것에 애초에는 걱정했던 것 같아. 하지만 의외로 관객이 이 부분에 저항감을 갖지 않는다는 걸 알고 난 뒤에는 안심했다고 말한 적이 있어. 그래서 말인데, 이제 중요한 건 특히 <다크 나이트 라이즈>에서 중요한 건, 놀란 스스로 화면비의 변화에 크게 개의치 않기로 했다는 사실이야. 이 말은 이렇게 바꿀 수 있어. 아이맥스의 효과를 위해서라면 전통의 화면비쯤은 쉽게 포기 또는 희생되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는 거야. 화질과 규모의 문제를 얘기해볼까 아이맥스의 효과라고 나는 말했어. 여기에는 근본적인 두 가지 핵심이 있어. 첫째는 화질. 두 번째는 규모야. 그런데 나는 마치 화면비의 교차를 사람들이 저항감없이 받아들이듯 이 화질과 규모의 문제 또한 평범하게 느낄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어. 나의 경우에는? 그냥 화질이나 규모가 담담하게 느껴졌어. 하지만 이것 때문에 아이맥스로 영화를 보아야 한다고 사람들은 말하고 있어. 그런데 여기에는 실질적으로 어떤 문제가 있어. 전세계에 아이맥스를 필름 상영하는 곳은 제한되어 있고 심지어 요즘 추세는 디지털 리마스터링한 극장에서 디지털 코드로 상영하는 것이고 너와 내가 본 것도 디지털 상영이야. 한마디로 극장에서 보더라도 놀란이 요구한 것만큼의 화질과 규모로는 볼 수 없다는 뜻이야. 놀란이 그걸 모를 리 없어. 그런데도 놀란은 아이맥스 촬영을 고집하고 있어. 그러므로 우린 하나의 잠정적인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어. 놀란의 아이맥스는 실리적인 게 아니라 일종의 미학적 태도라는 거야. 시네마에 대한 새로운 태도. 만약 폴라로이드 화면비를 고집하여 <엘리펀 트>를 찍은 구스 반 산트에게 아이맥스가 화질이 더 좋으니 섞어 찍자고 한다면 그건 불가능한 일 아니겠어? 그러니 이때 놀란의 아이맥스란, 완전한 기술적 구현에 방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크 나이트 라이즈>라는 영화를 그렇게 만들기로 한 그의 선택에 방점이 있다는 뜻이야. 규모와 화질을 중시하는 자세 말이야. 그리고 그 자세가 목적으로 두고 있는 건 실감일 거야. 놀란은 압도감이라고도 표현해. 많은 이들이 <다크 나이트 라이즈>를 보고 한 말, 야 실감난다, 라고 말할 때의 그 실감이야. 그런데 이 실감이라는 표현은 사실 다른 곳에서도 쓰였어. 아니 정확히 말하면 놀란이 그토록 반대하는 3D를 극찬할 때 실감이라는 말이 많이 쓰였어. 3D는 이차원적 프레임에 대한 변형이자 파괴를 기반으로 해. 그런데 놀란은 이차원적 프레임을 최대한 확장하여 그 프레임의 일부는 희생하되(화면비) 원천적으로는 그 자체를 지켜낸다는 기획으로 <다크 나이트 라이즈>를 만들었잖아. 그런데도 우린 그조차 실감이라는 허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말해야 하는 상황이 된 거야. 영화에서 실감이란 말은 유의해야 할 표현이야. 실감이란 말은 대체로 영상의 규모나 지각의 혼란과 함께 쓰이기 때문이야. 차가 뒤집히는 장면을 아이맥스로 보았을 때 그거 실감난다고 말하는 걸 우린 온전히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아니 그건 실제에 가까운 효과가 아니라 영화가 만들어내는 과장의 효과야. 아무리 놀란이 실제로 무언가를 폭파하고 그것을 찍는다 해도 그게 카메라에 담기는 순간 그건 실감이 아니라 영화적 감각의 공정을 거치는 것이고 실제 감각의 도래가 아니라 영화적 환영의 재강화일 가능성이 크다는 거야. 실감난다는 표현은 그러므로 영화적 감각에 대한 우리의 표현에 그치는 것일 수도 있어. 실감보다는 영화적 감각이 있을 뿐이야. 나는 아이맥스로 <다크 나이트 라이즈>를 본다고 해서 처음 보았을 때보다 더 좋지 않았어. 그러니 문제가 있다면 아이맥스가 성취했다고 말해지는 이 실감이라 불리는 영화적 감각이, 배트맨이 고담시를 지키는 것처럼 <다크 나이트 라이즈>를 지키지는 못한다는 점에 있어. 우리는 아이맥스로 해저의 고기떼를 보는 것과 아이맥스로 <다크 나이트 라이즈>를 보는 것의 차이에 대해서 생각해야만 해. 놀란이 아이맥스에 치중하는 것과 아이맥스가 이 영화를 미적으로 고양시키는 것은 별개로 보아야만 한다는 거야. 무언가에 치중한다고 해서 성공적인 건 아니기 때문이야. 그러니 같은 맥락상, 아이맥스로 본다고 해도 이 영화의 영화적 퀄리티는 놀란이 기대하는 것처럼 높아지지 않아. 이미지 퀄리티가 높아지기는 하지만 영화의 퀄리티가 높아지지는 않는다는 거야. <다크 나이트>를 아이맥스는커녕 그냥 평범한 나의 조그만 아날로그 텔레비전으로 다시 보아도 여전히 재미있다는 사실이 또 하나의 방증이야. 자 이것이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아이맥스는 미학이 아니라 차별적인 환경에 불과한 거야. 성사되면 자극은 되는, 하지만 대체로 성사되지 못하는, 하지만 추구되고 있는 욕망이라고 해도 될 거야. 아이맥스는 시네마틱한 욕망이야. 그것은 욕망이지 결코 영화의 완벽한 이상이 아니라는 뜻이야. 기술이 닿고 싶어 하는 또 하나의 어떤 욕망이야. 3D가 횡행하는 자리에서 2D를 지키려 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실감이라는 허상에 대한 욕망을 함께 끌어안은 사태가 벌어진 거야. 그 때문에 3D가 <아바타>를 구원하지 못한 것처럼 나는 놀란이 아이맥스로 <다크 나이트 라이즈>를 지키지 못했다고 생각해. 그가 말한 압도감이 3D가 추구하는 시각적 외설성에 위험하게 근접해 있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야. 아이맥스 스크린이라는 커다란 프레임, 즉 스크린이라는 프레임에 화질과 규모의 총량을 쏟아부으며 끝내 고수하되 그 안의 화면비율의 고정이라는 프레임은 포기하는 이 아이러니를 보면서 어떤 상상을 했어. 나는 이게 꼭 세계의 질서를 지키기 위해 사회적 프레임은 지켜내지만 그 안에서 자경단원으로서의 자기의 위치와 존재에 대해, 즉 두개의 자의식적 프레임으로서는 흔들리는 배트맨의 그것과 유사하다는 상상을 해보았어. 영화를 지키기 위해 등장한 아이러니한 시네마의 흑기사라고나 할까. 영화를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전철 안에서 휴대기기를 손에 들고 미드를 보는 사람 옆자리에 앉았어. 너도 알다시피 서울은 휴대기기라는 조커가 점령한 고담시야. 거기 저마다 영화가 흘러나오지. 그때 다시 또 아이맥스라는 흑기사를 생각했어. 그 순간 사람은 얼마만큼의 땅을 가져야 하는가라고 물었던 톨스토이의 동화가 생각났어. 영화는 과연 얼마만한 스크린을 가져야 하는 걸까 궁금해졌어. 나는 이렇게 다시 물었어. 아이맥스가 시네마의 흑기사가 될 수 있을까? 친구, 어떻게 생각해?

단순한 것이 좋아

TO 배우 이하나 전역한 지 한달이 조금 넘었지만 아직도 길거리에서 군복 입은 청춘을 보면 긴장하게 됩니다. ‘에이, 완전히 민간인이던데’ 하고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그건 어설픈 배우 경험을 발휘한 연기일 뿐임을 밝혀둡니다. 그렇기에 다소 한심해 보이긴 하지만 집에서 냉커피를 홀짝이고 담배를 태우며 텔레비전을 보는 것이 아직은 즐겁고 유쾌하기만 합니다. 여기저기 채널을 돌려가며 리모컨으로 과거 여행을 하던 중 저는 한곳에 정착했습니다. 드라마 <태양의 여자>였습니다. 배우 이하나씨의 존재가 저를 케이블TV 편성표까지 외우는 열혈 시청자로 만들었습니다. 이하나씨는 제게 절대적인 믿음을 주는 배우입니다. 저는 아직 내공이 부족해 배우의 연기력을 평가할 수 있는 스카우터까지 장착하지는 못했습니다. 왠지 말로는 표현하기 힘들지만, 믿음이 가는 배우가 좋은 배우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극중에서 이하나씨는 항상 자기만의 방법으로 열심히 살아갑니다. 왜 이렇게 몰입이 잘되는지 그 이유는 딱히 모르겠습니다. 그냥 이하나씨가 웃으면 나도 웃고 이하나씨가 부끄러워하면 나도 부끄러워하고 이하나씨가 슬프면 나도 슬퍼집니다. 드라마 <연애시대>와 <메리대구공방전>을 보면서도 그랬습니다. 이건 어떤 논리로도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그런 게 배우의 매력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저는 단순한 것이 가치있다고 생각해왔고, 언제나 단순하고 스트레이트한 것에 끌렸습니다. 제가 연출한 <경복>도 단순한 영화입니다. 좋은 것을 좋다고, 슬픈 것을 슬프다고, 잘 모르는 것은 잘 모른다고 말하는. 하지만 그 모든 것을 함께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라고 말하는 영화입니다. 앞으로 이런 영화도 만들고 싶고, 저런 영화도 만들고 싶지만 언젠가 꼭 한번 만들고 싶은 영화는 ‘이 시대 서울에 사는 젊은이의 사랑의 방식에 관한 영화’입니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이곳의 사랑 이야기를 영화로 만드는 것이 제겐 여간 가슴 두근두근한 일이 아닙니다. 첫 장면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생각해놓지 않았습니다. 비슷한 상처를 가진 남녀가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장면입니다. 한 남자가 이사하는 날입니다. 남자는 이삿짐을 챙겨 약속한 시간에 맞춰 새집에 도착합니다. 하지만 집을 비워야 할 전 주인은 아직 방을 정리하지 못했습니다. 잠시 위화감이 생깁니다. 그리고 남자는 무언가 알아차립니다. 전 주인인 그녀는 ‘그’와 헤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집은 그와 함께 살던 집입니다. 누군가의 짐은 없어지고 누군가의 짐은 채워집니다. ‘괜찮아요’라는 말을 해주고 싶지만 두 사람은 그리 다정한 말을 건넬 만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 사이가 아닙니다. 여자는 양해를 구하고 방문을 잠급니다. 그녀가 울지 어떨지 남자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기다려줄 뿐입니다. <서울영시>(가제)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막연히 생각한 영화이고 어떤 영화가 될지도 모르지만 단순한 영화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이하나씨가 떠올랐습니다. 이 영화의 한자리에 이하나씨가 들어온다면 제겐 최고의 행운일 겁니다. FROM 감독 최시형 감독 최시형은? 1985년생. 배우 유형근과 동일 인물이다. 최시형이란 이름은 ‘詩’와 형근의 ‘형’을 합쳐 지었다. 배우로 활동하던 시기의 대표작으로 <불을 지펴라> <다섯은 너무 많아> <나를 떠나지 말아요>가 있다. 배우가 꿈이었던 적은 없다. 다만 영화가 좋아서 연기를 했다. <경복>이 첫 연출작이며 여기서 직접 연기도 한다. 구상 중인 작품이 아주 많아서 탈이고, 내년쯤 단편과 장편영화를 각각 찍을 것 같다. 앞으로의 계획은 “뭐든 많이 하는 것”이다.

[전시] 백남준이 꿈꾼 미래의 비전

기간: 2013년 1월20일까지 장소: 백남준아트센터 문의: www.njpartcenter.kr 텔레비전 모니터 몇개로 연결된 로봇이 꽃으로 꾸민 자동차에 올라타 있다. 작가가 붙인 이름은 <마르코폴로>(1993). 또 다른 모니터 로봇은 천을 뒤집어쓰고는 낡은 자전거 위에 몸을 올린다. 백남준은 이를 <징기스칸의 복권>(1993)이라 불렀다. 자전거 뒤쪽에는 정보 수송과 관련된 기계들이 잔뜩 실려 있다. 고 백남준의 생일인 지난 7월20일 개막한 이 전시는 백남준이 꿈꾸었던 미래와 상상했던 과거가 한데 복잡한 회로도처럼 얽혀 있다. 작가의 일생이나 특정 시기의 작품이 아니라 백남준이 제시했던 ‘미래의 비전’을 보여주는 데 포인트를 찍은 전시인 만큼 그가 몰두했던 포스트 휴먼, 사이버네틱 시공간, 오픈 엑세스, 로봇 등의 주제가 다채롭게 반영되어 있다. 특히 여러 개의 로봇이 한데 모인 ‘로봇 극장’ 섹션에 들어서면 찰리 채플린, 선덕여왕, 율곡이라 이름 붙은 다양한 로봇을 만날 수 있다. 외계에서 떨어진 것 같은 ‘노스탤지어는 피드백의 제곱’이라는 전시 제목은 대체 무슨 말일까. 이 문장은 1992년 백남준이 작성한 글의 타이틀이라고 한다. 그는 과거를 뒤돌아볼 때 갖게 되는 노스탤지어야말로, 타인이 우리에게 주는 피드백(feedback) 이상의 훨씬 강렬한 깨달음을 줄 수 있다고 보았다. 그가 역사 속의 칭기즈칸과 마르코폴로를 자전거에 태우고 텔레비전과 연결시킨 것도 어제와 내일이 자유롭게 뒤섞인 소통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작가가 보는 과거의 ‘향수’는 동과 서가 자유롭게 만나고 인간과 기계 그리고 자연이 경계없이 느낌을 주고받는다. 이번 전시에서는 백남준 외에도 마이클 스노, 구보다 시게코, 이불, 김신일 등 국내외 12팀 작가의 작업을 볼 수 있다. 백남준의 테크니션으로 활동하기도 한 빌 비올라의 비디오 <지고의 존재>, 올라퍼 엘리아슨의 <당신의 모호한 그림자>는 놓치기 아까운 작품이다. MIT의 미디어랩 교수인 안토니오 문타다스의 <파일 룸>은 고대부터 현대까지 세계 각국의 예술과 문화 분야의 검열 사례를 데이터베이스화한 것으로, 지금도 꾸준히 리스트업되며 확장되고 있다. “비디오는 일직선으로 나가는 시간의 화살을 빠르게 하거나 늦출 수 있고, 방향을 뒤바꾸고 뒤집을 수 있으며 그 흐름을 휘게 하거나 비틀 수도 있다”는 백남준의 말이 이번 전시의 느낌을 대변한다.

[해외뉴스] 북유럽은 가능성의 땅?

스칸디나비아 반도가 노른자위 땅으로 부상하고 있다. 미국의 비디오 스트리밍 서비스 업체들이 북유럽 시장 공략에 앞다투어 뛰어들고 있는 것. 선두주자는 아마존닷컴이다. 아마존닷컴은 지난해 영국의 러브필름을 사들이며 북유럽에도 도전장을 내민 상태다. 그 뒤를 강호 넷플릭스가 잇는다. 수요일 오전 넷플릭스는 2500만 가입자 확보를 목표로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 핀란드 4개국에 진출할 예정이라 밝혔다. 지난해 남미까지 서비스를 확장한 넷플릭스가 유럽 중에서는 스페인의 문을 먼저 두드리리라는 예상은 빗나간 셈이다. 더불어 같은 날 HBO도 ‘HBO 노르딕’ 설립을 발표했다. 유럽시장에 눈이 밝은 피터 에크룬드의 유료 텔레비전 방송사 파르시팔 인터내셔널과 손잡고 활로를 고민 중이다. 지난 5월 범유럽 VOD 서비스사인 에이스트랙을 인수한 뉴스코퍼레이션의 BSkyB도 이 대열에 합세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레이스의 승자가 누가 될지는 미지수다. 우선 130만 가입자를 보유하고 있는 보들러(Voddler)나 아트하우스영화의 온라인 시장을 선점한 무비(MUBI) 등 북유럽 업체들과의 경쟁이 만만치 않다. 보들러의 커뮤니케이션부사장 앤더스 훼만은 “기술 면에서는 규모로 압도할 수 있을지 몰라도 콘텐츠 확보를 위해서는 그들도 같은 돈을 지불하고 판권 경쟁을 해야 할 것”이라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거기다 북유럽은 유럽 내에서도 온라인 대체 미디어에 대한 반응속도가 가장 높은 만큼 독점이 어려운 시장이다. 이에 월스트리트는 미디어 그룹들의 무분별한 몸 불리기를 경계하는 눈치다. B. 라일리 앤드 컴퍼니의 에릭 월드는 “과도한 경쟁으로 자국 및 해외 가입자 증가세와 수익성을 위태롭게 할 수 있다”며 우려의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관계자들은 희망적이다. 피터 에크룬드도 “북유럽 시장은 소비자들의 관람 습관 변화에 부응하는 혁신적인 서비스들을 흡수할 만한 엄청난 잠재력을 갖고 있다”고 낙관했다. 과연 그들의 스칸디나비아 상륙작전이 성공적일지 지켜볼 일이다.

[신 전영객잔] 그/녀에 대하여

주요 필모그래피 1986 <카라바지오> 1988 <대영제국의 몰락> 1989 <전쟁 레퀴엠> 1990 <정원> 1991 <에드워드 2세> 1992 <올란도> 1996 <여성의 도착(倒錯)> 1998 <러브 이즈 더 데블: 프랜시스 베이컨의 초상을 위한 스케치> 2000 <비치> 2001 <딥 엔드> <바닐라 스카이> 2002 <어댑테이션> <테크노러스트> 2003 <영 아담> 2005 <콘스탄틴> <브로큰 플라워> <나니아 연대기: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 2006 <스테파니 댈레이> 2007 <마이클 클레이튼> 2008 <줄리아> <나니아 연대기: 캐스피언 왕자> <번 애프터 리딩>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2009 <아이 엠 러브> <리미츠 오브 컨트롤> 2010 <나니아 연대기: 새벽출정호의 항해> 2011 <케빈에 대하여> 2012 <문라이즈 킹덤> “틸다 스윈튼이 우주의 여왕이라던데, 사실인가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남배우!” “이 사람 외계인 연기한 적 없나?” 인터넷 무비 데이터베이스(IMDb) 틸다 스윈튼 항목의 토론 게시판에 올라온 글 제목 몇개다. 작정한 농담이긴 해도 이 웅성거림 안에는 틸다 스윈튼이라는 배우의 결정적 실루엣이 포함돼 있다. 180cm에 육박하는 신장에 흐르는 이 세상 존재가 아닌 듯한 영묘한 아우라, 그리고 성별의 모호성(androgyny). 이 두 가지는 동시대 영미권 여배우 가운데 그녀와 아울러 프리미어 리그로 꼽히는 메릴 스트립, 케이트 블란쳇, 줄리언 무어 등에게는 없는 틸다 스윈튼의 독보적인 속성이다. 글을 쓸까 연기를 할까 망설이던 20대의 틸다 스윈튼을 영화로 잡아끈 전위적 퀴어 감독 데릭 저먼의 <대영제국의 몰락>(The Last of England)(1988)에서 그녀를 처음 본 이래, 나는 스크린에서 하얀 첨탑이나 북극성이라도 되는 것처럼 빛나는 이 기괴하게 아름다운 배우의 행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원래 첨탑이나 북극성은 고개를 들어 앙망하라고 있는 거다.) 대개 배우의 얼굴은 우리가 잃어버린 얼굴이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타고난 자연스러운 표정을 잃고 ‘연기’를 하는 우리가 극장에서 보내는 시간을 즐기는 이유 중 하나는, 배우의 퍼포먼스를 보는 동안만큼은 어둠 속에서 비로소 연기를 멈추고 휴식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한데 틸다 스윈튼은 이례적인 경우다. 그녀는 영화가 신화의 지위를 포기한 이후, 현대영화에서 사라지다시피한 피안(彼岸)을 상징하는 얼굴, 말하자면 우리가 소유한 적도 없는 얼굴을 갖고 있다. 오래 전 그레타 가르보와 마를레네 디트리히가 점했던 자리에 ‘시대착오적으로’서 있다고 해도 좋다. 그녀를 묘사함으로써 나는 이 환영(幻影) 같은 배우의 소매 끝을 잡아보려 한다. 어떤 대상에 대해 아무것도 쓸 수 없는 상태와 무엇이든 쓸 수 있을 것 같은 환각은 기묘하게 닮아 있는데, 이는 많은 글쟁이들이 걸려드는 끈끈이주걱이다. 깃발 같은 피사체 틸다 스윈튼을 내가 처음 보았을 때 그녀는 웨딩드레스를 찢어발기는 중이었다. 그녀는 데릭 저먼의 <대영제국의 몰락> 속에서, 탐스러운 붉은 머리채를 사나운 바람에 흩날리며 정원용 가위로 드레스를 자르고 이로 옷자락의 장미를 뜯어내고 있었다. 잉글랜드의 자연과 도시, 포클랜드전쟁의 파편화된 이미지로 이루어진 <대영제국의 몰락>은 시간이 흐르면 배우의 이름이 아니라 오직 감독의 도전적 미학만 기억되는 종류의 영화였지만, 프레임을 스쳐간 무수한 얼굴 가운데 틸다 스윈튼만은 단독자로 관객의 뇌리에 남는다. 서사가 부재하는 이 영화에서 그녀는 개인이라기보다, 산업화 이전 시대의 가치를 그리워한 데릭 저먼이 동경한 르네상스적 아름다움을 의인화한 피사체이며, 움직이는 조상(彫像)에 가깝다. 말하자면, 우리는 해질녘 폐허에서 여인의 형상을 하고 울부짖는 대영제국의 마지막 순수를 보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저먼의 <전쟁 레퀴엠>(1989)은 스윈튼에게 대본없는 4분간의 클로즈업을 할애했다. 한 평론가는 이 장면을 두고 “틸다 스윈튼의 몸은 보이는 스크립트, 육신의 내러티브다”라고 표현하기도했다. 잉글랜드의 옛 이상은 사라진 꿈이 됐고, 급진적 자본주의를 추구하며 성적 소수자를 탄압한 1980년대 영국은 대처 정권이 지핀 악몽이라고 믿었던 데릭 저먼은, 산업화 이전 장인의 시대와 60, 70년대의 반문화를 그리워하며 섹슈얼리티 해방을 옹호하는 영화를 동지들과 만들었다. 그리고 틸다 스윈튼의 육체는 그 공동체의 깃발이었다. 저먼은 “내가 함께 작업한 모든 사람 중에 틸다만이 스크린을 변모시켰다. 남자는 그런 경우가 없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가장 전투적인 게이 예술가의 깃발이 여성이었다니 역설적이지만, 저먼이 죽은 뒤 평자들은 어쩌면 틸다 스윈튼이야말로 저먼이 품었던 이상적인 남성상이었을지도 모른다는 흥미로운 가설을 내놓기도 했다. 관습적 의미의 직업배우로서 자신이 카메라 앞에서 제대로 기능할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한 상태에서 오직 데릭 저먼과 뜻이 통해 8편의 영화를 만들었던 틸다 스윈튼은 1994년 저먼이 타계하자, 한동안 병을 앓았고 계속 배우로 살 것인가 숙고하는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데릭 저먼의 죽음이 아니었다고 해도, 이념을 배우의 육체를 통해 표현하는 부류의 영화는 사라져가고 있었다. 배우로서 틸다 스윈튼의 1기는 그렇게 접혔다. 병들지도 늙지도 않는 존재처럼 에일리언, 신, 신상(神像). 틸다 스윈튼에 관한 저널의 묘사에 빈번히 등장하는 단어다. 통상 여배우를 ‘여신’이라고 칭할 때는 대단한 미인이라는 의미로 ‘여’(女)에 방점이 찍히지만, 틸다 스윈튼의 경우는 ‘신’(神)에 악센트가 있다. 물론 우리는 신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므로 이 말은 엄밀히 따지면 스윈튼이 서양과 동양의 미술사가 남긴 신의 형상을 닮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구체적인 예로는 16세기 이탈리아 매너리즘 화가 파르미지아니노와 폰토르모가 그린 과장된 신체비율의 성모마리아부터 떠오른다. 즉각적으로 대리석상을 연상시키는 큰 키와 석고같은 이마, 강건하고 긴 목, 유니콘의 뿔처럼 오연한 코, 모든 것을 굽어보는 듯한 눈과 대비되는- 아주 드물게 열릴 것 같은- 얇고 다부진 입술, 그리고 자주 빛깔이 바뀌는 머리카락. 분장 전 평소 틸다 스윈튼의 모습은, 후천적이고 세속적인 요소들이 더해지기 이전의, 기독교식으로 비유하자면 신이 자신의 이미지를 본떠 갓 만들어낸 인간의 원형처럼 보인다. 무엇보다 틸다 스윈튼은 압도적으로 하얗다. 설원 같은 피부는 큰 키와 어우러져 그녀를 화면 속 모뉴먼트처럼 두드러지게 만든다. 그녀는 프레임 중앙이 더없이 어울리며, 가까이서 촬영하지 않아도 관객의 시선을 끌어당겨 클로즈업 효과를 내는 배우다. 또한 어떤 남자배우와 커플을 이루어도 상대의 존재감을 희박하게 덮어버린다. 이 모든 사항은 틸다 스윈튼에게 배우로서 특권인 동시에 핸디캡이다. 월광처럼 조요한 흰빛을 발하는 이 배우에게는 다이아몬드보다 진주 장신구가 어울린다. 백인 중의 백인이라 할 만한 스윈튼의 아름다움은, 2010년 이 배우를 인터뷰한 저널리스트 에이미 라로카의 표현대로 ‘정치적으로 너무나 불공정해서’ 감탄할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불편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백인 관객도 그녀를 이족(異族)처럼 느낀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게다가 스윈튼은 평소 거의 화장을 하지 않는다. <마이클 클레이튼>의 변호사 연기로 조연상을 탄 2008년 오스카 시상식에 그녀는 검은 튜닉에 색조화장기 없는 얼굴로 나타나 작은 소요를 일으켰다. 오스카 레드카펫 기준으로는 누드나 진배없다는 평을 받은 이날의 스타일은 주변의 여배우들을 쇼윈도의 마네킹처럼 보이도록 만들어버렸고 TV 화면으로 그녀를 본 전세계 시청자의 눈에 스윈튼은 창백한 외계인처럼 비쳤다. “화장은 일종의 갑옷일 수 있는데 나는 화장으로 강해진다는 느낌이 없어서 필요를 모르는 케이스다.” 메이크업에 대한 스윈튼의 입장이다. 하얀 배우. 하나의 색상과 이처럼 밀접하게 연관되는 스타의 예는 드물 것이다. 아니, 틸다 스윈튼이라는 배우를 휘감은 백색은 많은 색채 중 하나라기보다 채색되지 않은 여백의 그것이며, 칸딘스키의 표현대로 “모든 색의 부재인 동시에 모든 색의 종합”으로서의 초월하고 포용하는 흰색이다. (마가레테 브룬스 저 <색의 수수께끼>에서 재인용) 데릭 저먼 이후 영화감독들은 틸다 스윈튼이 가진 순백의 초월적 이미지를 보다 직설적인 방식으로 활용했다. 위악없이 잔혹한 아름다움의 본보기를 보여주는 <나니아 연대기> 시리즈의 하얀 마녀 역과 <콘스탄틴>(2005)에서 세계를 멸망으로 몰고 가려는 천사장 가브리엘 역이 전형적 사례다. 서른살에 이르러 남성에서 여성으로 변신하는 <올란도>(1992)의 영국 귀족 올란도는 “병들지도 늙지도 말라!”는 엘리자베스 1세의 명을 받고 스르륵 영생의 존재가 됐고 1996년작 <여성의 도착(倒錯)>(Female Perversion)은 밧줄에 묶인 여신상처럼 보이는 스윈튼의 나신 숏으로 영화를 열었다. 스윈튼의 첫 메이저 할리우드영화인 <비치>(2000)에서 타이의 외딴섬에 코뮌을 건설하고 지배하는 족장 틸다 스윈튼이 나른하게 가로누워 있는 숏은, 영화 도입부에서 주인공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방콕에 도착하자마자 보는 거대 와불(臥佛)의 이미지와 신통하게 공명한다. 그런가 하면 짐 자무시 감독은 <리미츠 오브 컨트롤>에서 틸다 스윈튼에게 실버 블론드 가발을 씌우고 하얀 중산모와 장갑, 흰테 선글라스와 투명한 우산으로 그녀의 몸을 꽁꽁 감싸서 주인공 킬러에게 메신저로 파견했다. 상류층 부인이 관능과 열정에 눈을 떠 ‘인형의 집’을 뛰쳐나간다는, 간추리면 극히 전형적인 스토리의 <아이 엠 러브>(2009)가 “사랑은 우리를 구원하는 동시에 파괴한다”는 깊숙한 암시까지 영화적으로 전달할 수 있었던 저력은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안주인이면서도 가족 가운데 이질적 존재로 불가피하게 두드러지는 틸다 스윈튼의 외모와 품위에 크게 빚지고 있다. 남성과 여성을 모두 품은 완전체로서의 매혹 빈 도화지 같은 틸다 스윈튼의 얼굴과 몸은 작은 변수만 움직여도 변화의 진폭이 크다. 립스틱을 바르느냐 바르지 않느냐, 속눈썹과 머리칼을 어떻게 만지느냐에 따라 팜므파탈에서 남자로 건너뛰고, 천사와 마녀, 인간과 오브제의 영역을 횡단한다. 서사영화에서 그녀가 가장 빈번히 뛰어넘는 경계는 물론 성별이다. “데이비드 보위 전기영화가 제작된다면, 단연 틸다 스윈튼이 적격이다”라는 여론이 대변하듯 스크린 위의 틸다 스윈튼이 은연중에 환기시키는 화두는 성(gender)의 정체란 무엇이냐는 회의다. 실생활에서 틸다 스윈튼은 “선생”(sir)이라고 잘못 불리는 일이 흔하다고 한다(본인은 립스틱을 안 발라서일 거라고 생각한다). 약간의 일화도 있다. 영국군 소장이었던 아버지와 남자 형제들 사이에서 자란 스윈튼에게는 어머니의 드레스보다 아버지의 제복과 구두, 훈장이 더 인상적인 이미지로 남아 있으며, 일주일 동안 예뻐지는 것과 한 시간 동안 아버지만큼 잘생겨지는 마법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후자를 골랐을 거라고 인터뷰에서 언급했다. 안드로지니의 아이콘인 그녀는 공교롭게도 이란성 남녀쌍둥이를 낳았다. 틸다 스윈튼은 연극 <맨 투 맨>에서 남편이 사망한 뒤 생계를 위해 남편으로 둔갑해 여생을 살아간 여인을 연기했고,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에서는 역사상 가장 중성적인 천재인 모차르트로 분하기도 했다. 흥미롭게도 그녀는 남자 연기에 별다른 어려움을 느끼지 않으며 심지어 여성 역할이 좀더 어렵다고 토로한다. 남성과 여성을 포괄하고 자유롭게 오가는 완전체를 뜻하는 안드로자인(androgyne)은, 생물학적으로 남녀의 생식기관을 한몸에 가진 사람을 일컫는 헤르마프로디테(hermaphrodite)와 달리 추상적 개념이다. 그러나 안드로지니가 영화에서 배우의 육체를 통해 제시되는 순간- 예컨대 우리가 여성임을 아는 배우가 극중에서 남성을 연기하고 화면에서 양성을 모두 매혹할 때- 그것은 더이상 투명한 관념일 수만은 없으며 특별한 에로티시즘마저 발산한다. 수전 손택이 썼듯이 “가장 정제된 형태의 성적인 매력, 그리고 가장 세련된 형태의 성적 쾌락은 자기 성에 역행하는 부분에서 나온다. 강한 남자에게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은 여성적인 면이고 여성스러운 여자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은 남성적인 요소다.”(<캠프에 관하여> 중) 그렇다면 영화에서 안드로지니와 크로스드레싱(cross dressing 반대성의 옷을 입는 일)은 어떻게 구별해야 할까? 영화의상과 정체성 관계를 연구한 스텔라 브루지에 따르면 남장여자, 여장남자를 모티브로 한 숱한 코미디와 드라마에서 인물의 ‘진짜 성’은 시종일관 고정돼 있으며 그것이 폭로되는 순간은 대단원의 이성애 커플링을 예비하는 위기로 기능한다. 반면 <모로코>에서 남장한 마를레네 디트리히가 남녀 관객을 홀리는 장면이나 <여왕 크리스티나>의 그레타 가르보가 남자로서 행동하는 장면은- 시퀀스 단위에 한정된 것이라 해도- 코미디나 서스펜스와 무관하게 포괄적인 성(안드로지니)을 구현한다. 출세작 <올란도>에서 스스럼없이 두 성을 월경하고 <콘스탄틴>에서 남성복을 입은 천사로서 시종 중성성을 견지한 틸다 스윈튼은 이 계보를 잇고 확장한 배우다. 안드로지니가 영화에서 구현될 때 관객과 배우 사이에는 통상보다 복잡한 매혹의 메커니즘이 작동한다. 남자로 보이는 여성 인물에게 여성과 동일시하는 남성 관객이 끌릴 수도 있고 게이 남성과 동일시한 여성 관객이 끌릴 수도 있으며, 극중 안드로자인을 여성성 강한 남성 캐릭터로 수용할 경우 일련의 다른 방향 화살표들도 성립 가능하기 때문이다. 여장하는 여배우 중성성 혹은 유동적 성을 체현하는 배우 틸다 스윈튼이 명백한 여성으로 분할 때 그녀의 연기는 어떤 특징을 드러내는가? 요컨대, 스윈튼의 여성 인물은 ‘연기된 여성’이다. 이 무슨 김새는 동어반복? 우선 데릭 저먼 감독의 극영화 <에드워드 2세>(1991)의 이사벨라 왕비를 보자. 고증을 무시하고 촬영된 이 사극에서, 이사벨라는 장면마다 패션지에서 튀어나온 듯한 디자이너 드레스를 갈아입고 홀로 조명을 받으며, 충만하다 못해 체할 듯한 여성성(femininity)을 발산한다. 게이왕 에드워드 2세에게 사랑받지 못해 쿠데타를 사주하고 급기야 흡혈귀가 되는 악녀로 묘사된 이사벨라는, 당대에 게이 예술가의 텍스트가 보여주는 여성혐오적 캐릭터의 표본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2003년 발표된 니알 리처드슨의 논문 ‘데릭 저먼의 <에드워드2세>에 나타난 틸다 스윈튼의 퀴어 퍼포먼스’는 이사벨라를, 게이 커뮤니티가 숭배하는 ‘디바’ 캐릭터로 재해석한다. 마돈나나 조앤 콜린스처럼 사회적 억압 때문에 게이 남성들이 공공연히 드러내지 못하는 여성적 측면을 대리해소해주는 과잉한 여성성의 아이콘이라는 뜻이다. 또, 리처드슨은 여성혐오가 투영된 악녀의 일반적 성향과 달리 히스테리컬하고 비이성적인 쪽은 오히려 에드워드 2세와 그의 애인이라는 점에도 주목한다. 허리와 가슴을 강조하는 이사벨라의 의상이 스윈튼의 중성적 체형과 이루는 대비는 모든 성(gender)은 인위적 구성물이라는 메시지를 송신하고 있다는 해석도 덧붙였다. <리미츠 오브 컨트롤>에서 스윈튼이 분한 정체모를 은발 여인 역시 여성복 카탈로그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차림을 하고 있는데 그 작위성이 가장(假裝)에 육박해서, 도리어 졸라 맨 바바리 안에서 남자의 몸이 드러난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처럼 느껴젼다. 그런가 하면 에릭 종카 감독이 연출한 <줄리아>의 불안정한 알코올 중독자 줄리아와 <마이클 클레이튼>의 카렌은 캐릭터의 성격 자체가 연기자다. 울긋불긋한 야한 입성으로 매일 아침 숙취에 신음하며 모르는 남자의 침대에서 깨어나는 줄리아는 섹시하고 센 여성이라는 셀프 이미지에 맞춰 끝없이 거짓말을 하고 속이 들여다보이는 ‘연기’를 한다. 한편 <마이클 클레이튼>의 출세지향적 변호사 카렌은 집에서, 화장실에서 사람들 앞에서 지을 표정과 말을 부단히 연습한다. 여성 캐릭터로서는 보기 드물게 흥건한 겨드랑이 땀을 닦는 장면으로 화제가 됐던 카렌은 슈퍼 우먼의 역을 철저히 연기하려는 목적에 삶을 헌납한 병적인 ‘배우’다. 예측하기 어려운 궤적을 그리는 틸다 스윈튼의 필모그래피에서 모성은 거의 유일하게 반복 등장하는 모티브다. 스윈튼이 연기하는 어머니 혹은 유사 어머니는 예외없이 모성에 대한 세속의 통념과 불화한다. <딥 엔드>(2001)는 게이 아들을 살인죄로부터 구해내기 위해 누구의 도움도 없이 고군분투하는 전업주부가 협박범의 대리인과 이상한 유대감을 느끼는 드라마였다. 2006년작 <스테파니 댈레이>에서 신생아를 버린 10대 소녀를 인터뷰하며 모성에 내재된 공포를 직면하는 임신부로 분했던 스윈튼은, 2011년 <케빈에 대하여>를 통해 유사한 지점으로 회귀했다. 근작 <줄리아> <아이 엠 러브> <케빈에 대하여>는 스윈튼의 모성 3부작으로 묶이기도 한다. 줄리아는 돈 때문에 납치한 아이를 다시 납치당하면서 엄마의 정체성을 엉겁결에 뒤집어쓴다. <아이 엠 러브>의 엠마는 자녀들이 장성해 양육의 의무가 끝날 무렵 아들의 친구와 사랑에 빠지며 돌연 개인으로서 거울 앞에 앉는 어머니다. 충실한 내조자, 자애로운 엄마, 품위있는 안주인으로서 1그램의 과부족도 없는 엠마의 모습은 너무 완벽해 역시 위태로운 연극으로 보인다. 이 우아한 어머니가, 머리를 썩둑 자르고 선머슴 같은 트레이닝복을 입었을 때 비로소 여성으로 눈뜨는 연출은 다분히 틸다 스윈튼이라는 배우의 묘한 외모를 활용한 설정이다. 최근작 <케빈에 대하여>의 에바는, 모성애가 모든 여성에게 자연스럽게 내면화되는 감정이 아니라 일정 부분 사회적으로 구축된 규범이라는 점을 호소하고, 부모의 교육에 따라 자녀의 삶이 하나의 수제품처럼 빚어질 수 있다는 미신을 반박하는 캐릭터다. 에바는 엄마가 된다는 두려움을 극복하기 힘들다는 바로 그 이유로 임신에 도전하고 훌륭한 모성을 ‘연기’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지만 실패한다. 임신부 역할에 적응하려고 애쓰는 원작 속 에바의 독백은, 틸다 스윈튼의 연기가 여러 영화에서 드러낸 여성과 모성이라는 관념의 작위성을 묘사하는 듯하다. “난 진부한 광경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시도했어, 내숭 떨기, 뒤로 미루기, 어리둥절하기, 괜히 퉁명스러운 척하기, 감정의 과잉표출. ‘아이, 자기야!’ 그 어느 것도 내겐 적절해 보이지 않더군.” 액팅 < 퍼포먼스 앞서 검토한 대로, 틸다 스윈튼이라는 배우에게 있어서 궁극적 질문은 “어떻게 보이는가?”이다. 기존 인터뷰를 종합해보면 그녀는 연기(acting)보다 공연(performance)이라는 개념에 무게를 둔다. 이는 이른바 진정성 유무와는 무관한 연기에 대한 기술적 접근 방식의 문제이며 그녀의 대사 처리가 취약하다는 의미는 더욱 아니다. <아이 엠 러브>에서 러시아 출신 여성으로 분해 이탈리아어로 영화 대부분을 연기하면서도 스윈튼은 억양에 까다로운 유럽 평론가들로부터 트집을 잡히지 않았다. <줄리아>에서 스윈튼은 불안정하면서도 에너지가 넘치는 줄리아로 분해 어떤 메소드 연기자보다 철저하게 영화 전체를 씹어 삼켰다가 토해내는 표현적 연기를 보여준다. <줄리아>는 말하자면, 사람이 엉망진창이 되는 모습 중에도 완벽한 엉망진창이라는 것이 있음을 알려주는 영화다. <줄리아>는 따라서 틸다 스윈튼의 영화 가운데 가장 액팅에 가까운 연기가 담긴 작품이기도 하다. 배우 본인도 “내 안에는 줄리아가 없었고 줄리아 안에 약간의 틸다가 있었다”는 점에서 이 작품과 여타 영화의 연기를 구별한 바 있다. 스윈튼은 “나는 배우라기엔 부족하다”며 “실은 배우(actress)는커녕 공연자(performer)가 된 것조차 실수다”라고 여러 번 말했다. 그녀를 이해하고자 구분을 시도해보자면 액팅은 연극, 텔레비전, 영화에서 가상 인물의 성격을 형상화하는 예술이다. 관객이 있고 없고는 액팅의 성립에 결정적이지 않다. 반면 퍼포먼스는 어디까지나 노래, 연주, 몸짓을 포함해 언제나 관객을 상정하는 행위다. 스스로 ‘도제 시절’이라 부르는 데릭 저먼과의 실험적 작업이 남긴 흔적인지 틸다 스윈튼은 말보다 몸으로 표현하려는 성향이 강한 배우고 유성영화가 도래한 이후 영화는 나빠졌다는 고답적 취향의 소유자다. 그녀에게 최고의 칭찬은 본인의 연기를 버스터 키튼의 그것에 비교하는 평이다. 대다수 영국계 배우들이 그렇듯 스윈튼 역시 연기를 신비화하지 않는다. “우리는 실제 인간이 아니라 인물의 메타포를 연기하는 거다”라고 선을 긋는가 하면, 눈물 연기는 극중 인물이 되어 우는 게 아니라 캐릭터를 위해 우는 거라 여긴다. 의미심장하게도 잡지 <모노.쿨투르>(MONO.KULTUR)와 인터뷰에서 스윈튼은 글을 쓸 때와 연기할 때 같은 근육을 쓴다고 표현했다. 반면 <나니아 연대기> 시리즈나 <마이클 클레이튼>처럼 정교한 각본의 부품이 되어 하는 연기와 <줄리아>나 <올란도>처럼 한 캐릭터가 중심이 되는 영화의 연기는 목수일과 배관일만큼 동떨어진 작업이라고 말했다. 스스로를 배우로 정의하는 데에는 인색한 반면, 마음에 드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감독과 손잡고 투자자를 몇년씩 설득하거나 지역 영화제를 기획하는 일은 명백히 자기의 업이라고 여기는 그녀의 태도까지 알고 나면 틸다 스윈튼이 머릿속에 그리는 업무 벤다이어그램은 일반적인 배우의 그것과 상당히 다름을 알 수 있다. 틸다 스윈튼은 배우를 감독의 모델로 취급하는(긍지 높은 배우들이 대부분 반발하는) 로베르 브레송의 연기론에 동조한다. 심지어 <당나귀 발타자르>의 당나귀가 이상적 연기의 모델이라고 공언할 지경이다. <모노.쿨투르>와의 같은 인터뷰에서 그녀는 브레송 영화를 사랑하는 이유를 스스로를 스크린에서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을 카메라로 바라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적나라하게 “보여진다”는 퍼포먼스의 속성과, 연기하는 자신을 스크린에서 볼 수 있다는 영화연기의 특성 사이의 모순을 민감하게 의식하는 것이다. 데릭 저먼을 여읜 이듬해인 1995년 틸다 스윈튼은 런던 서펜타인 갤러리에서 라는 타이틀로 유리상자 안에 들어가 하루 8시간씩 잠을 자는 퍼포먼스를 했다. 이 아이디어의 핵심은, 관객은 그녀를 원하는 거리와 각도에서 선택한 시간만큼 지켜볼 수 있는 반면(시집을 읽어준 관람객도 있었다), 응시의 대상이 된 공연자는 잠이 들어 공연 순간에는 응시를 의식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말하자면 는 “연기하는 순간 관객이 부재하는 공연”인 영화 연기의 본질에 대한 그녀의 사색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처럼 틸다 스윈튼은 본인의 비범한 몸을, 남성과 여성, 게이와 스트레이트, 인간과 신성, 추상과 리얼리티 사이에서 관객이 주체적으로 교섭을 벌이는 장소로 제공하는 희한한 배우다. 평범한 화면 속에서도 연초점으로 촬영된 듯 미스터리를 안개처럼 두르고 있는 그녀의 ‘미친’ 존재감은 <케빈에 대하여>에서 케빈이 이혼을 논의하는 부모에게 던졌던 “내가 (이혼의) 맥락이잖아!(I'm the context!)”라는 한마디와 짓궂은 우연처럼 들어맞는다. 틸다 스윈튼, 그녀가 바로 컨텍스트다.

[people] 발견의 모험을 멈추지 않는다

김지석 수석프로그래머에게 먼저 두루뭉술하게 물었다. 수석프로그래머로서 느끼는 올해 영화제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무엇이 변했습니까. 그러자 “게스트들과 관련하여 한 가지 큰 변화가 있다”며 그가 본격적으로 운을 뗀다. “우리 영화제도 나름대로 게스트를 초청하는 기준이 있다. 오고 싶은 게스트를 다 맞이해서는 재정상 감당을 못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다보니 오고 싶어도 못 오는 게스트들이 매년 있었다. 그런데 올해는 그런 이들이 자비로 오겠다는 경우들이 부쩍 많아진 거다. 어떻게든 부산영화제는 한 번은 꼭 가봐야 하는 곳이라는 분위기가 생긴 것 같다. 농담이지만, 중요한 스타들이 너무 오래 있겠다고 해서 골치가 아플 정도다.(웃음)” 한마디로 부산의 위상이 높아졌다는 뜻이다. “추측컨대 영화의 전당을 개관한 것이 영향을 미친 것 같고 AFA(Asian Film Academy), ACF(AsianCinema Fund) 등 지원 프로그램의 영향력이 서서히 발휘되는 것 같다”고 그는 말한다. 그렇다면 지나칠 수 없는 질문. 올해 동세대 아시아 영화의 경향과 특징은 또 어떨까. 그 경향과 특징은 어떻게 프로그래밍에 반영되었을까. “아시아 신인 감독들의 영화를 상영하는 뉴 커런츠 부문에 올해 처음으로 중국영화가 선정되지 않았다! 물론 중국영화의 플랫폼이 다양해졌다는 것이 큰 이유 중 하나가 되겠지만 뽑을 만한 영화가 없기도 했다. 다만 아시아 영화의 창에서 상영하는 <화부> <학과 함께 날다> <사랑의 대역> 같은 영화들은 눈여겨봐주면 좋겠다. 한 명의 훌륭한 제작자(쵸우 컹)가 이 영화를 만들어냈는데, 작품들이 전부 좋다. 한편 대만 영화계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다. 오랫동안 자국 시장 점유율 1퍼센트대에 주저앉아 있던 영화시장이 지난 2~3년 사이에 20퍼센트로 치고 올라왔고 많은 영화가 제작되고 있으며 동시에 재능있는 젊은 감독들이 대거 데뷔하고 있다. 그 때문에 뉴 커런츠 부문에 관해서라면, 중국영화가 없는 대신 대만영화가 두 편이나 된다. 그리고 인도의 예술영화가 활성화되고 있고 필리핀은 해마다 계속 좋은 독립 영화와 데뷔 감독들이 나오고 있다.” 그의 꼼꼼한 설명으로 우리는 올해 주목해야 할 새로운 감독의 이름과 각국의 경향을 이렇게 또 미리 알게 된 것이다. 새로운 재능들의 이야기를 하고 나니 거장들로 화제는 자연스럽게 옮겨 간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속죄>를 주목해주면 좋겠다. 텔레비전용 영화이지만 텔레비전 포맷에 구애받지 않고 만들어진 영화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 하다. 그리고… 모흐센 마흐말바프… 그와 나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좀 알지 않나?(웃음). 사실 두 가지 걱정을 했다. 하나는 저 분이 반정부 활동을 벌이다 테러를 당하면 어쩌나 하는 것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저러다 창작의 에너지를 다 써버리면 어쩌나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번에 실험적인 영화 <정원사>를 만들어냈다. ACF 지원을 받아 서울에서 후반 작업도 거쳤다. 베니스영화제에 출품해도 괜찮다고 했는데도 부산에 내시겠다고….(웃음)”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의외라고 생각했을 법한 폐막작 선정의 변까지 듣고 나면 이제 김지석 수석프로그래머가 꿈꾸는 영화제의 상을 비로소 온전히 이해하게 된다. 올해의 폐막작은 방글라데시의, 그것도 신예 감독 모스타파 사르와르 파루키의 영화다. “상영할 영화가 없어서 그런 거 아니냐는 반응들? 물론 있을 거라고 봤다. 뭔가 펑크나서 갑자기 고른 거 아니냐는 식의. 하지만 이 영화를 폐막작으로 결정한 건 이미 7월이었다는 걸 꼭 말해 두고 싶다.” 말하자면 미지의 영화국가 그것도 신예 감독에게 거는 가능성이 올해의 폐막작을 고르는 절대 기준이었던 셈이다. “부산영화제가 지향하는 바에 대한 오해가 좀 있는 것 같다. 우리는 확장 지향적이지도 않고 화려함을 지향하지도 않는다”는 말을 그는 잊지 않았다. 기존의 위상을 높이는 것에만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관계와 성취를 내실 있게 다지되 멈추지 않고 모험적으로 발견의 가능성을 추구하는 것, 김지석 수석프로그래머가 꿈꾸는 영화제의 상이다.

[people] 혁신을 거듭하다

“주제나 목적의식만 강조한 게 아니라 만듦새까지 탄탄해지면서 전체적인 수준도 높아졌다.” 홍효숙 프로그래머는 올해 와이드 앵글 섹션의 경향에 대하여 말하며 강한 자신감을 보였다. 와이드 앵글 섹션부터 아시아영화펀드(이하 ACF)까지, 단순히 작품을 선정하는 프로그래머로서가 아니라 영화제 집행부 역할까지 해내는 그녀의 행보는 보통사람이라면 벌써 지쳤을 법한 스케줄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지치거나 포기할 수 없었던 이유는 와이드 앵글 섹션과 ACF가 보였던 성과 때문. 특히 올해 폐막작인 모스타파 사르와르 파루키 감독의 영화 <텔레비전>은 홍효숙 프로그래머에겐 가장 큰 성취다. “<텔레비전>은 2010 ACF 인큐베이팅펀드, 2012 ACF 후반작업지원펀드를 지원받았고 2010 APM 프로젝트 선정작이다. 이런 작품이 폐막작으로 선정된 것은 우리가 6년간 해왔던 교육과 지원프로그램이 성과를 내는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그간의 성과를 바탕으로 올해 ACF는 더욱 다양한 프로그램을 선보인다. “카타르 대표위성채널 알자지라 잉글리시와 아시아 다큐멘터리 감독을 발굴하기 위한 ‘뷰파인더 아시아’ 워크숍을 연다.” 이렇듯 와이드 앵글은 더욱 넓게 ACF는 좀 더 다양한 혁신을 거듭하고 있었다.

[special] 중요한 회사들이 모이는 잔치 만든다

“부산의 아시아필름마켓이 가을 시즌을 대표하는 아시아의 마켓으로 확실히 자리잡는 분위기다.” 지난해가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필름마켓의 전환점이 된 시기였다면, 올해는 변화로 인해 발생한 긍정적인 효과들을 발전시켜나가는 해가 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아시아필름마켓은 행사장을 벡스코로 옮겼다. 세일즈, 미팅, 피칭, 포럼 등이 한 곳에서 이루어지니 시너지 효과가 컸다. 우선 마켓에 참가하는 세일즈부스의 수가 늘었다. 올해는 지난해보다 7% 가량 세일즈부스가 많아졌고, 마켓 스크리닝 횟수는 30% 이상 늘었다. 지난해부터 독자적으로 개발해 선보인 온라인 스크리닝도 반응이 좋다. 남동철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필름마켓 실장은 “좋은 물건을 많이 파는 곳에 물건을 사러 오는 사람도 모이는법”이라 했다. 남동철 실장은 또 “올해 마켓에서 노력하는 부분은 중요한 회사들이 많이 참가하는 마켓이 되도록 하는 것”이라고 했다. 양적 성장과 더불어 질적 성장을 도모하겠다는 뜻이다. 아시아프로젝트마켓(이하 APM)은 올해 30편의 프로젝트를 선정했다. 김태용, 연상호, 민규동 감독 등 한국영화도 7편 뽑혔다. 올해는 또 APM에서 배출한 감독들이 특히 두각을 드러낸 해다. 양영희 감독의 <가족의 나라>, 에드윈 감독의 <동물원에서 온 엽서>, 허진호 감독의 <위험한 관계>, 폐막작인 모스타파 사르와르 파루키 감독의 <텔레비전> 등 APM을 통해 완성된 영화 8편이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된다. 아시아필름마켓이 올해 야심차게 준비한 행사도 있다. 출판사에서 영화로 만들 만한 원작을 소개해서 감독이나 프로듀서가 마음에 드는 원작과 만나게 하는 ‘북 투 필름’이 그것이다. “출판 산업과 영화 산업을 맺어주는 역할”을 하겠다는 취지로 신설됐다. 이외에도 아시아필름마켓과 부산영상위원회와 함께 준비한 BFC(부산영상위원회) 피칭, 한국영화진흥위원회가 준비하는 KOFIC 인더스트리 포럼, 독립영화 제작지원을 하는 전세계 펀드를 소개하는 필름펀드토크 등의 행사가 마켓 기간 동안 마련된다. 올해 아시아필름마켓은 8일부터 11일까지 4일간 해운대 벡스코에서 열린다.

[에디토리얼] 부산, 영화가 익어간다

여기는 부산이다. 10월4일 개막한 제17회 부산국제영화제 때문이다. 올해도 <씨네21>은 부산영화제 현장에서 데일리를 내고 있다. 이번 사무실은 영화의 전당 바로 옆에 있어서 개막식장에서 쏘아올린 화려한 불꽃을 코앞에서 볼 수 있었다. 나란히 앉은 문재인, 박근혜 후보는 그 불꽃을 보며 대망을 되새겼겠지만, 나는 ‘오늘도 무사히’를 되뇌었다. 영화제라는 곳이 워낙 상황이 급변하는 분위기다 보니 자칫하면 사고를 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오늘도 무사히, 올해도 무사히. 개막 전날인 3일 영화의 전당에 자리한 부산영화제 사무국을 들렀을 때 깜짝 놀랐더랬다. 이용관 집행위원장을 비롯한 프로그래머들이 평온한 분위기 속에서 개막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불과 2년 전만 해도 수영만의 컨테이너 건물을 우당탕 누비던 게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이용관 위원장은 “그만큼 시스템이 갖춰졌고 실무자들이 일을 알아서 잘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데, 아닌 게 아니라 부산영화제도 이제 17살이 된 만큼 철이 든 모양이다. 매주 쳇바퀴 돌리듯 허덕허덕 일하는 주간지 기자 입장에선 1년 단위로 일하는 영화제 일이 부러울 때가 있다. 그렇게 일하게 된다면 매년 야심을 불어넣어 그야말로 ‘작품’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이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정작 1년 단위로 일을 진행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세세하게 듣다 보면 사람 일이라는 게 똑같다는 생각을 하곤 하는데, 부산영화제 같은 경우는 매년 새로운 야심을 엿볼 수 있게 해 역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올해 부산영화제 최고의 야심작은 세계적인 중국 배우 탕웨이를 개막식 사회자로 내세운 것일 터. 탕웨이가 안성기 선배의 한국어를 너무 잘 알아듣는 게 조금 어색하긴 했지만(그냥 폼으로나마 귀에 리시버라도 꽂게 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할리우드 리포터>의 분석처럼 “진정 글로벌 행사로 발돋움하려는” 부산영화제의 야심만큼은 잘 엿볼 수 있었다. 영화에 있어서 변방인 방글라데시의 <텔레비전>이 폐막작으로 선정된 것이나 영화제 기간을 하루 늘려 관객으로 하여금 두번의 주말을 맞을 수 있도록 한 점도 열일곱 내기의 관록과 패기를 동시에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여러모로 어수선했던 영화의 전당도 정돈됐고 센텀시티의 부대시설도 잘 갖춰져(물가가 비싸다는 점만 빼고) 보다 편리해졌다. 프리뷰룸에서 여러 작품을 미리 접한 취재기자들에 따르면 상영작들도 예년만큼 고르고 좋단다. 미적대다 아직 출발하지 못한 분들을 위해 말씀드리자면, 두 번째 주말까지 영화제가 열리니 망설일 이유가 없다. 가볍게 짐을 싸서 부산으로 오시라. 영화티켓을 구하기 어렵다고? 어차피 영화제에서 영화는 옵션이 아니던가. 가을 햇살에 부서지는 해운대 앞바다의 광채만 즐겨도 본전은 뽑는 거다. 다만, 밤공기가 차가우니 두툼한 웃옷은 꼭 챙기시길. 자 그럼, 우리 부산에서 만나는 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