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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1997)

[김소희의 오마이이슈]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이혜훈 언니가 여성할당이 아닌 선출로 새누리당 최고위원이 됐다. 2등으로. ‘박근혜 아우라’를 빼고는 설명할 수 없는 결과일지 모르나, 경제 문제에 집중해온 것이나 친박으로 일관되게 처신해온 것도 언니의 정치력이라면 정치력이다. ‘잡음없는’ 새누리당 전당대회를 보며, 이 사람들 참으로 담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줄로 줄 잘 서고 잘 세운다. 불법사찰의 ‘머리’인 VIP의 실체가 만천하에 드러나고 VIP께 각별한 총애를 받았던 이들이 줄줄이 쇠고랑 찼지만, 당명과 잠바 색깔을 바꾼 새누리당에는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줄도 잘 서고 편도 잘 나눈 덕이다. ‘돈으로 뭉친 사익집단’인 ‘친이’ 따위는 개가 물어간데다(무는 척만 하나?), 충성도에 따라 ‘친박’, ‘범박’, ‘비박’ 가르마 타고 이익을 배분하면 되니, 정책이나 명분, 철학 따위로 다툴 필요도 없다. 어쩌면 새누리당 역사에서 가장 평화로운 때인 듯하다. VVIP 1인 치하의 이런 깔끔 담백함과 지금이 21세기라는 것이 참으로 엇박자라는 것 외엔. 동네 건물 청소를 하는 아주머니와 얘기를 나눌 일이 있었는데, 이분은 박근혜 지지자다. 이유는 간단하다. 너무 고단해서란다. 박정희 시대에는 그래도 열심히 일하면 생활이 나아졌는데 지금은 한치 앞이 안 보인다고 했다. 최근 <한겨레> 창간 24돌 기획 ‘가난한 민주주의’를 보면, 경제적으로 하층에 속한다는 사람일수록 새누리당 지지세가 강했다. 빈곤층일수록 정보도 빈곤했다. 대부분 텔레비전을 통해 얻는다. 한달 2만~3만원의 인터넷 사용료도 큰 부담이 되는 탓이다. 정보 격차의 현주소다. 무엇보다 하루 벌어 하루 먹느라 정보를 취사선택할 시간도 기력도 없다. 박근혜 시대가 된들 생활이 나아지리라 믿진 않지만 더 나빠지지는 않을 것 같다는 게 아주머니의 희망이라면 희망이다. 한때는 일하는 사람들의 희망이 되겠다던 정당이 묵은 고름 짜내듯 극심한 진통을 하고 있다.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낀다. 이 정당의 시즌2를 도모하며 당원 가입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동지는 먹고 튀어도 VIP는 침묵하는 나라에서, 힘들게 일하는 사람들이 자기 이익과 정반대의 선택을 하는 것을 보며, 소신 때문이건 절박함 때문이건 깃발이라도 붙잡아야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앞서서 가지 않아도 된다. 부디 제대로 가자.

[SO WHAT] 장님이 눈먼 말을 탄다면?

간만에 버스 안에서 <나는 꼼수다>를 들었다. ‘봉알단, 정우택 음모, 터널 디도스’라는 부제를 단 ‘봉주 22회’였다. 듣다보니 뭐랄까? 수업 중에 멍때리고 있다가 담임한테 분필로 마빡을 맞은 것 같은 더러운 기분이 돋는다. 터널 디도스라니? 난 처음엔 또 무슨 새로 나온 악성코드 같은 건가 싶었다. 알고 보니 지난해 4.27 국회의원 재/보선 때 새누리당 김태호 후보쪽이 유시민에게 날린 1억원짜리 하이킥이었던 거다. 나 참, 이걸 이제야 주워듣다니. 오만상을 찌푸려가며 생각해보니, 가만 이거 참 절묘한 말이다. 디도스, 분산공격과 좀비 PC, 그리고 비정상적인 트래픽의 폭주로 인한 마비. 누가 지었는진 몰라도 천재다 천재. 낮에는 카니발로 고령의 유권자들을 실어나르고, 저녁에는 창원터널의 교통 체증을 유발해 젊은 유권자들이 제 시간에 투표장에 도착하지 못하게 하는 방해 공작. 그래서 ‘터널 디도스’. 이 희한하고 뻔뻔한 사건에 대부분의 언론이 입을 다물고 있었다는 사실에 울화통이 터진다. 이런 뻔뻔함은 도대체 어디서 파나? 돈 있으면 나도 좀 사고 싶을 정도다. 그래도 뉴스는 꼬박꼬박 챙겨보는 편인데, 세상 참 속 편하게 살았다. 얼른 집에 가서 텔레비전을 발로 차버려야지. 이놈은 다름 아닌 내 눈을 가린 헝겊이고, 이거야말로 병신이 따로 없는 세상을 위한 혓바닥 아닌가? <남영동1985>에 이런 장면이 있다. 고 김근태 의원을 모델로 한 주인공에게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끔찍한 고문이 자행되고 있는 현장에서 형사들이 태연하게 야구 중계를 듣는 장면. 움찔했다. 화사한 태양 아래 환호하는 관중은 바로 나의 모습. 모르긴 몰라도 그 시절 수많은 국민이 나만큼이나 평온하기 짝이 없는 일상을 보냈을 것이라 위안도 해보지만, 영문도 모른 채 야만을 향해 달려갔던 건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그로부터 30여년이 지나, 민주화를 열망하던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으로 <남영동1985>나 <26년>을 극장에서 보는 나는 참 다행일까 수치일까? 아무튼 무언가 아찔하다. 표현의 자유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아직 쌩쌩하게 살아 있는 전직 대통령 암살 계획을 실행한다는 내용의 영화가 버젓이 극장에 걸리다니 말이다. 그래서 안심했냐고? 미디어를 장악한 정권이 국민 알기를 뭣같이 알고는 자기들 멋대로 개소리를 늘어놓고 있는 이 마당에 무슨. 새삼 70, 80년대가 오버랩된다는 느낌이 들어서 하는 말이다. 흘러간 물은 물레방아를 돌리지 않는다고? 틀렸다. 요샌 기술이 좋아서 얼마든지 돌릴 수 있다. 그래서 생양아치들이 기사를 만들고 뉴스를 편집하고, 아첨에 가까운 논평을 무한 반복한다 해도 이젠 그 꼴을 애잔함을 가지고 볼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뭐랄까? 솔직히 자기 혼자 거울 보며 가위바위보하는 꼴을 보게 되면 누구라도 아, 쟤가 좀 맛이 갔구나 하지 않겠는가? 자기가 봐도 너무 거시기 하니까. 그나마 양심적인 언론인들이 들고일어나 파업하고 시위하고 저항했지만, 기소되고, 해직당하고, 좌천되고…. 하지만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이 몇 퍼센트나 될까? 참고로 내 주변 사람 중엔 한명도 없었다. 암울하다. 대선이 다가오고 말도 안되는 여론조사를 보면 볼수록 눈먼 말에 올라탄 장님이 천길 낭떠러지를 향해 내달리는 기분. 잠이 안 온다.

부가 판권 시장의 부활 견인차

빠름. 빠름. 빠름. 모 통신사 광고 얘기가 아니다. 극장 상영작이 VOD 서비스를 통해 IPTV(초고속 인터넷망을 이용해 제공되는 쌍방향 텔레비전 서비스. 시청자가 원하는 프로그램을 원하는 시간에 볼 수 있다.)나 웹하드에 선보이는 속도가 빨라졌다. 극장 상영이 거의 끝날 무렵 IPTV에 개봉하거나 극장과 IPTV에서 동시상영하는 건 기본이다. 아예 IPTV에서만 단독으로 개봉하는 영화도 있다(<피쉬 탱크>는 9월21일 LG유플러스TV에서 단독개봉했다). 물론 스크린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보고 싶은 영화를 극장에서 놓치더라도 발을 동동 구르지 않아도 된다. 불법 다운로드를 하지 않아도 된다. 지금은 리모컨 하나면 안방에서 원하는 영화를 선택해 감상할 수 있는 시대다. 극장 개봉작이든, 철이 지난 영화든, 극장에서 개봉하지 않은 영화든. 올해 11월 기준으로 IPTV 가입자 수가 600만명을 넘어섰다. KT의 올레TV가 약 365만명으로 가장 많다. SK브로드밴드의 BTV가 약 135만명, LG유플러스의 유플러스TV가 약 102만명의 가입자를 확보해 KT를 뒤쫓고 있다. 디지털케이블TV(사업자의 단말기를 통해 방송을 전송받는 서비스. 쉽게 말해서 지역 케이블방송이 여기에 해당된다.) 가입자 수는 올해 7월 기준으로 467만명 정도다. 그러니까 IPTV 가입자 수와 디지털케이블TV 가입자 수를 합친 1천여 만 명은 VOD 시청이 가능한 숫자다. 지난 10월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 국정감사에서 발표된 자료 ‘IPTV/디지털 케이블TV 연도별 가입자 현황’에 따르면, IPTV를 비롯한 케이블TV, 위성방송 등 국내 유료방송 가입자 수는 총 2200만명에 이른다. 그중 절반 정도가 VOD 시청이 가능하다는 소리니까 이건 어마어마한 숫자다. 매출액 역시 큰 성장세를 보였다. 지난해 IPTV와 디지털케이블TV의 영화 총매출액은 1014억원 정도(IPTV의 영화 매출액은 760억원, 디지털케이블TV의 영화 매출액은 254억원이다)로, 2010년의 213억원에 비해 무려 476%나 증가했다. 올해는 상반기까지 726억원을 기록했다고 하니 연말쯤에는 지난해의 매출액을 가뿐히 뛰어넘을 것으로 보인다. IPTV 가입자 수가 늘어나는 속도도 무시무시하다. 위성방송이 가입자 수 300만명 돌파하는 데 9년, 케이블TV가 400만명 돌파하는 데 6년 걸린 반면 IPTV는 4년 만에 600만명을 돌파했다. IPTV의 성장이 VOD 시장을, 2000년대 초 몰락한 2차 부가판권시장을 다시 부활시키고 있다. 라이프 스타일 변화에 따른 VOD 시장 성장 많은 사람들이 VOD를 통해 영화를 보는 이유가 대체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답을 하기는 쉽지 않다.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질문을 달리 던져보자. 어떤 사람들이 VOD를 통해 영화를 보는 것일까. 올레TV, BTV, 유플러스TV 등 IPTV 3사 관계자는 “30, 40대가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고 한목소리로 말한다. 그 연령대는 편당 3500~4천원쯤은 큰 고민없이 지출할 수 있는 경제력을 갖춘 것이 특징이다. 게다가 리모컨 버튼 몇번만 누르면 영화가 상영되는 IPTV의 시스템만큼 그들에게 편리한 도구도 없을 것이다. BTV 정소연 매니저는 “IPTV가 처음 선보였던 2009년 초, 이들은 성인 콘텐츠 위주로 VOD 서비스를 소비했다”며 “2011년 ‘극장 동시개봉관’이 신설되면서 <방자전> <완벽한 파트너> <후궁: 제왕의 첩> 등 노출 수위가 높은 한국영화를 애용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다가 개봉영화의 IPTV 상영기간이 점점 짧아지게 됐고, 그들은 극장 대신(혹은 극장을 찾지 못한 날에는) IPTV를 통해 가족과 함께 영화를 감상하게 됐다. TV를 통해 원하는 영화를 편리한 시간대에 소비하는 라이프 스타일이 이들의 삶에 자연스럽게 녹아들게 됐다는 게 업계의 분석이다. 그런데 그게 PC를 통해 원하는 영화를 불법 다운로드해서 보는 것과 뭐가 다르냐고? 원리가 비슷해 보이긴 하나 TV와 PC에는 큰 차이가 있다. PC는 매체의 특성상 영화에 집중하기가 쉽지 않다. 쇼핑, 이메일 등 ‘딴짓’ 할 게 많기 때문이다. 반면 TV는 감상을 전제로 한 매체이기 때문에 PC에 비해 더욱 집중할 수 있다. 영화진흥위원회 국내진흥팀 김현정 과장은 “포털 사이트쪽에서 정확한 매출을 공개하지 않았지만 같은 영화라도 네이버, 다음의 VOD 다운로드 매출액이 IPTV의 그것에 비해 훨씬 적은 이유가 PC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콘텐츠를 합법적으로 거래하는 영화산업의 분위기 역시 IPTV의 성장에 한몫했다. 올레TV 권용백 과장은 “최근 정부가 불법 다운로드에 대해 대대적인 단속을 벌인 것이 시장의 성장에 큰 도움이 됐다”며 “특히 합법 다운로드 캠페인 덕분에 소비자들이 영화는 당연히 돈을 주고 보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같다”고 전했다. 콘텐츠 구매가 한국 소비자들에게 익숙해졌다는 말이다. TV를 통한 영화 감상이라는 미디어 환경의 변화, 적게는 3500원, 많게는 1만원이라는 금액을 영화 감상에 지불하는 소비자의 소비 트렌드 변화, 그리고 불법 다운로드를 규제하는 정부와 업계의 노력 등 여러 요인이 맞물린 결과가 바로 위에서 언급한 엄청난 수치의 반영이다. 온라인상영관 통합전산망이 시급하다 IPTV를 비롯한 VOD 시장은 장밋빛 미래지만 여전히 해결해야 할 과제가 남아 있긴 하다. IPTV 3사, 네이버와 다음 같은 포털 사이트는 정확한 매출액을 공개하고 있지 않다. 그래서 매달 정산할 때 수입사는 “해당 영화가 한달 동안 총 얼마의 매출을 올렸는지, 정산된 금액이 과연 제대로 배분된 건지 알기 어렵”다. 수입사의 한 관계자는 “극장 개봉작에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이 있듯이 디지털 온라인 시장에서도 매일 매출을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다행스러운 건 얼마 전 올레TV, BTV, 유플러스TV 등 IPTV 3사가 매출액을 투명하게 공개하는 것에 동의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3사는 영진위와 함께 “IPTV, 디지털케이블TV 사업자와 문화부, 영진위가 참여하는 ‘온라인상영관 통합전산망 구축 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고 한다. 영진위 김현정 과장은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 때는 극장을 설득하는 데 10년이 넘게 걸린 반면 IPTV 사업자 모두 전산망의 필요성을 공감했다는 게 의미있다”며 “온라인상영관 통합전산망 시스템은 시스템대로 준비하되 당장 내년부터 IPTV 3사 홈페이지, 영진위 홈페이지, 별도의 보도 자료를 통해 매출액을 공개할 것”이라고 전했다. 영진위가 이 사업에 적극적인 이유는 간단하다. 부가판권시장이 몰락한 이후 한국 영화산업의 구조는 전적으로 극장 매출에 의존하는 기형적인 형태가 됐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최근의 부가판권시장의 성장은 한국 영화산업의 매출 구조는 물론이고 체질 개선에까지 긍정적 변화를 미칠 수 있는 가능성의 빛을 던져준다. 온라인상영관 통합전산망 구축의 관건은 역시 예산이다. 김현정 과장은 “시스템 구축에 필요한 비용은 내년 영진위 예산으로부터 확보할 계획”이라며 “일단 BK 사업에 21억원을 신청해놓은 상태”라고 밝혔다. 미디어 환경의 변화가 관객에게는 자유로운 콘텐츠 접근의 기회를 주고, 한국영화산업에게는 작은 숨통을 틔워주는 건 분명한 것 같다.

[해외뉴스] 시상식의 계절이 왔다

바야흐로 시상식의 계절이다. 올해 할리우드 영화계를 한눈에 살펴볼 각종 시상식들이 축제의 개막을 기다리는 가운데 속속 올해를 마무리할 영화계의 밑그림이 그려지고 있다. 우선 미국영화의 정서를 대변하는 미국영화연구소에서 제40회 AFI 평생공로상의 후보작을 선정 발표했다. 1973년 설립된 미국영화연구소는 해마다 영화와 텔레비전을 통해 미국 문화에 기여한 사람에게 평생공로상을 수여해왔다.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된 작품은 <아르고> <비스트 오브 더 서던 와일드> <다크 나이트 라이즈> <장고: 분노의 추격자> <레미제라블> <라이프 오브 파이> <링컨> <문 라이즈 킹덤> <실버 라이닝 플레이북> <빈라덴 암살작전: 제로 다크 서티> 10편이다. 방송영화비평가협회에서 선정하는 크리틱스 초이스 어워드도 후보 선정을 완료했다. 오스카상의 전초전으로 불리는 크리틱스 초이스 어워드는 올해로 18회째를 맞이하는 가운데 스티븐 스필버그의 <링컨>이 최대 13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는 기염을 토했고, <레미제라블>이 11개 부문에 이름을 올려 그 뒤를 바짝 추격하고 있다. 골든글로브,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과 함께 오스카상까지 이어지는 메이저 시상식 중 하나인 배우조합상의 후보도 발표되었다. 남우주연상 후보에 <플라이트>의 덴젤 워싱턴, <레미제라블>의 휴 잭맨, <링컨>의 대니얼 데이 루이스, <세션: 이 남자가 사랑하는 법>의 존 혹스, <실버 라이닝 플레이북>의 브래들리 쿠퍼가 물망에 올랐고, 여우주연상으로는 <히치콕>의 헬렌 미렌, <더 임파서블>의 나오미 왓츠, <재와 뼈>의 마리온 코티아르, <실버 라이닝 플레이북>의 제니퍼 로렌스, <빈라덴 암살작전: 제로 다크 서티>의 제시카 채스테인이 경쟁을 펼친다. 내년 오스카상의 어렴풋한 윤곽과 함께 2012년 할리우드의 흐름이 손에 잡힐 듯하다.

[김소희의 오마이이슈] 부디 철법통치라도…

퀭한 눈의 좀비로 새벽녘까지 대통령 당선인의 ‘인생역정’을 보았다. 한 인간의 집념이 어디까지 닿을 수 있는가를 생각했다. 20여년 전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때만 해도 그녀는 과거의 슬픔과 배신과 고통에 몸을 떨며 그것을 가까스로 견뎌내고 있는 ‘비운의 영애’였다. 수년 뒤 1997년 이회창 대선 후보 지원 연설을 시작으로 정치에 몸을 담고 이듬해 보궐선거를 통해 정치 무대에 등장했다. 그 뒤로는 망설임없이 흔들림없이 (코)앞만 보고 달렸다. 15년 뒤 대통령이 되었다. 그녀가 지닌 여러 자산 중 가장 높이 쳐주고 싶은 것은 특유의 ‘곤조’이다. 인정에 휘둘리지 않고 비난이든 아부든 타인의 시선이나 평가에 쉽게 마음이 바뀌지 않는다. 뼈를 깎듯 절치부심의 시간을 보낸 결과이지 싶다. 그것이 종종 불통과 철벽으로 작동하기도 하지만, 나는 ‘어떤 진심’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그 내용이다. ‘곤조’는 인정하지만 그 안에 담길 ‘개념’과 ‘물정’에 대해서는 불안하고 의심스럽다. 그녀를 둘러싸고 밀어올린 세력들이 마땅치 않기도 하거니와, 밑천과 내공이 드러나는 텔레비전 토론에서 자기 정책과 공약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손맛과 조리기구가 좋아도 재료가 부실하면 좋은 요리가 나오지 못한다. 하지만 여기에 그녀의 한계와 가능성이 동시에 있다고 생각한다. 머리는 빌릴 수 있지만 결단은 빌릴 수가 없다. YS만큼만 했으면 좋겠다. 법 위에 군림하는 특권세력에 대해 가차없는 모습을 보여줬으면 좋겠다. 철권이 아닌 철법통치 말이다. 과거의 청산대상이 군부였다면 오늘의 청산대상은 국민을 협박하고 사리사욕을 채워온 특권세력과 그 마름들이다. 범죄를 저지른 이는 전임 대통령이라도 죗값을 치러야 한다. 국록을 먹으며 국물도 챙기려는 자들, 불로소득자들, 재벌 총수 일가와 대기업 집단, 대통령 주변, 검찰 등이 떠오른다. 그들은 특히 지난 5년 동안 신호등도 브레이크도 없이 지나치게 질주했다. 저질로 찍힌 언론은, 낙하산만 안 내려보내도 된다. 법대로. 동토의 왕국이 될 것인가 선군의 시대가 될 것인가. 둘 다 시대착오적일지언정 후자쪽을 간절히 바란다. 털어야 할 먼지라면 털고 거쳐야 할 시대라면 거쳐야 하는 거니까. 이상, 급 샤머니즘 신봉자가 된 이의 자체 힐링 일기이다.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꽃게잡이 배를 타봤습니다

드라마 <발리에서 생긴 일>에서, 여주인공 수정은 부잣집 아들 재민과 동거하는 중에 그의 약혼녀가 일하는 곳이자 그의 어머니가 운영하는 화랑에서 일한다. 재민은 물론, 수정을 좋아하는 인욱도 그녀에게 “거기 꼭 나가야겠어? 오기야 자존심이야”라며 그만둘 것을 종용한다. 수정은 두 남자가 화를 내건 달래건 듣지 않는다. 재민의 재력도 인욱의 학벌도 갖추지 못한 그녀에게, 팁으로 먹고사는 노래방 도우미 같은 아르바이트가 전부이던 그녀에게, 전화받고 청소하고 은행 심부름이나 가끔 하면서 한달에 백만원이 보장되는 일자리는 자존심 ‘따위’로 그만둘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한승태의 <인간의 조건>을 읽다가 그 장면이 생각났다. <인간의 조건>은 단순히 일이 힘드네 박봉이네 하는 표현으로 묘사될 수 없는, 드라마 속 수정의 일자리와도 퍽이나 다른 몇몇 일자리에 관한 체험보고서다. 진도에서 꽃게잡이를 한 것을 비롯해, 서울의 편의점과 주유소, 아산의 돼지농장, 춘천의 비닐하우스, 당진의 자동차 부품 공장 등이 그의 일터가 된다(6장만이 그가 직접 경험한 것이 아닌 타인의 삶을 바탕으로 한 픽션이다). 그러니까 이런 식이다. 꽃게잡이 배에 탄 그는 미쉐린 타이어의 마스코트가 지명수배자로 분장한 모습 같은 남자로부터 “너 깨끗하냐?”는 질문을 받는다. 전과가 있느냐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그런데 “원래 내가 속해 있던 세상에서 ‘전과가 있다’는 말은 F학점을 받은 수업이 있다는 의미였다”. 취향이나 이상으로 선택할 리 없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는 남자들은 새로 온 남자에게 ‘어쩌다’ 바다까지 오게 되었는지 물은 것이었다. 돼지 똥을 푸는 일을 하는 대목을 따라가다보면 그 지독한 피로를 잊기 위해 새로운 피로를 더해 피로에 마취되는 수밖에 없다는 문장에서 절로 힘이 쭉 빠져버린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이런 일을 생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없어서는 안된다. 게다가 그들이 힘든 만큼 돈을 받는다면 우리는 이제 삼겹살을 쉽게 사먹지 못하게 될 것이다. 안심하시라. (쓴웃음) 한승태는 이 책 속의 그들보다 쉬운 방법으로 돈을 버는 우리를 비난할 생각이 전혀 없다. 다만 자신의 경험을 보여주고 싶을 뿐이다. 그의 유머감각은 발군이다. 고시원 방에서 폐소공포증과 아늑함을 동시에 느껴본 사람이라면 “나는 어느 전자제품 매장에서 이 방 크기만 한 벽걸이 텔레비전을 본 적이 있다”는 말에 한숨을 토해내고 말 것이다. 같은 방을 쓰는 남자가 괜찮은 사람 같다는 판단 기준은 이렇게 제시된다. “그는 열한시쯤 불을 끌 때까지 한 문장 안에 ‘사랑해’와 ‘씨발’을 함께 사용하며 여자친구와 통화를 했다.” 마지막으로, 초현실적으로 유머러스한 동시에 살풍경한 이 책에서 가장 애절한 대목은 책 제목을 출판사의 권유로 바꾸어야 했던 일을 구구절절이 적은 서문이다. 그가 원했던 제목 <퀴닝>은 그 뜻풀이를 보면 참 멋진데, 그렇게 긴 설명이 없이 이해 불가한 제목이라니 출판사가 만류한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웃음)

[국내뉴스] <지슬> <1999, 면회>를 아직 못 봤다면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 영화펀드(Asian Cinema Fund)가 서울에서 기획전 ‘ACF 쇼케이스 2013’을 연다. <지슬> <1999, 면회> <마이 라띠마> <텔레비전> <정원사> <만개한 벚꽃나무 아래에서> 등 극영화 6편과 <기억의 잔상> <다섯 대의 부서진 카메라> 등 다큐멘터리 2편 등 한국과 아시아의 독립영화 총 8편이 상영된다. 부산국제영화제 홍효숙 프로그래머는 “극영화 6편은 ACF 펀드 장편독립영화 후반작업지원 선정작이고, 다큐멘터리 두편은 레바논(<기억의 잔상>)과 팔레스타인(<다섯 대의 부서진 카메라>) 같은 국내에서 쉽게 접하기 어려운 아시아 국가의 다큐멘터리”라고 상영작을 소개했다. 그는 “특히 오멸 감독의 <지슬>과 김태곤 감독의 <1999, 면회>는 곧 열리는 선댄스국제영화제와 로테르담국제영화의 초청작이기도 해서 지난해 챙겨보지 못한 관객에게는 이번 상영전이 두 작품을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덧붙였다. 상영이 끝난 뒤 관객과의 대화 행사도 마련되어 있다. <텔레비전>의 모스타파 사르와르 파루키 감독과 <기억의 잔상>의 타마라 스테파니안 감독은 상영전 기간에 맞춰 내한한다. 모흐센 마흐말바프 감독은 <정원사> 상영이 끝난 뒤 화상 통화로 관객과의 대화를 시도할 계획이다. <지슬>의 오멸, <1999, 면회>의 김태곤, <마이 라띠마>의 유지태 등 세명의 한국영화 감독도 관객과의 대화에 참석할 예정이다. 홍효숙 프로그래머는 “모든 작품이 꼭 챙겨봐야 할 수작”이라며 “특히 <기억의 잔상>은 지난해 부산영화제 아시아 다큐멘터리 최우수상을 수상한 작품이고, <1999, 면회>는 지난해 부산영화제에서 한국영화감독조합상인 남자배우상을 수상할 정도로 배우들의 연기가 좋은 작품”이라고 추천했다. ACF 쇼케이스 2013은 1월10일부터 13일까지 인디플러스에서 열린다.

인생의 바닥에 내려갔다고 느낄 때 <프레셔스>

영화는 “모든 것은 우주로부터의 선물이다”라는 말로 시작되지만, 우주로부터 버림받은 것처럼 보이는 소녀가 등장한다. 1987년, 할렘에 사는 16살 소녀 프레셔스는 스스로 소중한 존재라고 여기지 않는다. 여느 아이들처럼 스타가 되어 멋진 모습으로 잡지에 나오는 상상을 하고 밝은 피부색을 가진 남자친구를 원하지만 현실의 그녀는 교실 맨 뒷자리에 앉아 있는 뚱뚱한 외톨이다. 제대로 읽고, 쓸 줄도 모르기에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놀림감이다. 유일하게 프레셔스의 수학적 재능을 알아봐주는 수학선생님은 그녀의 짝사랑이다. 공상 속에서 수학선생님과 결혼하여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을 잠시 꿈꿔보기도 하나, 프레셔스가 처한 상황은 상상을 초월하는 끔찍한 지경이다. 프레셔스는 엄마의 애인에게 성폭행당해 이미 한 아이를 출산했고, 지금은 두 번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다. 엄마는 아무 일도 안 하고 딸과 손녀에게 지급되는 정부보조금으로 생활하면서 딸에게 온갖 집안일을 시키는 것은 물론 폭언과 폭행을 일삼는다. 프레셔스가 처한 환경은 위로의 말을 건네기도 조심스러울 만큼 처참하다. 먹고, 텔레비전 보고, 먹고, 텔레비전 보는 것이 생활의 전부인 엄마는 딸에게 억지로 음식을 먹이고 뚱뚱하다고 욕설을 퍼붓는다. 엄마는 프레셔스가 부엌 바닥에서 첫아이를 낳을 때 돕기는커녕 발길질을 하였지만 그 덕에 생활보조금을 타서 생활한다. 엄마에게 딸은 내 남자를 유혹한 사악한 계집애일 뿐이다. 뿐만 아니라 필요도 없는 학교를 때려치우고 공장에 가서 돈을 벌어오라고 끝없이 잔소리를 퍼붓는다. 독립할 만한 여건이 못되어 할 수 없이 모욕을 견디며 사는 프레셔스에게 교장선생님이 뜻밖의 제안을 하고 이것은 그녀 인생의 전환점이 된다. 인생의 바닥에 내려갔다고 느낄 때, 주저앉는 사람도 있지만 마지막 주어진 기회를 간절하게 붙드는 사람도 있다. 프레셔스는 교장선생님이 추천해준 대안학교 ‘이치 원 티치 원’이 자신에게 주어진 최후의 희망이라는 것을 감지하고 용기를 내어 찾아간다. 그러나 선뜻 교실에 들어가지 못하고 복도에 앉아 망설이는 그녀를 발견한 선생님은 “20초 뒤에 교실 문을 닫을 거야”라는 한마디를 건넨다. 다른 학교에서 쫓겨난 아이들로 구성된 교실은 언뜻 보기에도 제멋대로다. 옷차림부터 말투까지 문제아들의 집합소라는 것이 한눈에 보인다. 자신의 이름을 블루 레인이라 소개한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어디 출신이고, 무슨 색을 좋아하고, 자신은 무얼 잘하는지 소개하는 것부터 수업을 시작하자고 제안한다. 프레셔스가 자신은 아무것도 잘하는 것이 없다고 대답하자, 선생님은 사람은 누구나 잘하는 것이 하나쯤은 있으니 잘 생각해보라고 권유한다. 알파벳도 잘 모르는 아이들을 교육하는 선생님의 방식은 독특했다. 바로 일기쓰기다. 철자가 틀려도 좋고 무엇을 써도 좋으니 매일 쓰는 것만은 지키라는 지시다. 일기쓰기는 “회전문” 같은 것이라고 설명하며, 누구는 안으로 들어가고 누구는 다시 돌아나오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프레셔스>는 어찌 보면 정말 어두운 영화다. 불과 16살에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소녀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답을 알려주지 않는다. <내 책상 위의 천사>(감독 제인 캠피온, 1990)처럼 못 생기고 뚱뚱한 소녀가 자기 비하에서 벗어나 멋진 작가가 되는 결말 같은 것도 없다. 혹독한 현실을 날것으로 봐야 하는 고통을 안겨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이란 지속되는 것이고 그 속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라는 걸 느끼게 한다. 더불어 ‘글쓰기’는 그것이 낙서든 일기든 소설이든 인간을 성찰하게 하고 한 걸음 나아갈 생각의 단초를 제공하는 중요한 것임을 새삼 느끼게 된다. 쓰기는 ‘프레셔스’한 존재가 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인 것 같다.

[신형철의 스토리-텔링] 죽일 만큼 사랑해

인생이라는 사건의 가장 확실한 팩트는 생로병사다. 그것에 대해서 나는 아는 것이 없다. 태어나기는 했지만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여전히 모른다. 하물며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어떻게 알겠는가. 물론 읽고 들어 알고 있는 것들은 있다. 그러나 그런 종류의 앎은 우리가 실감 혹은 절감이라고 부르는 것과는 다를 것이다. 단테의 <신곡-지옥편>을 읽고 지옥을 알겠노라 말하는 일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그래서 나는 모른다. 말년에 후두암에 걸려서 입에서 끔찍한 냄새가 나자 사랑하던 개조차도 더이상 가까이 다가오지 않게 되었을 때 프로이트의 심정이 어떠했는지를 모르고,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었던 아이리스 머독이 알츠하이머에 걸려서 텔레토비가 나오는 프로그램에 넋을 놓고 있을 때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남편 존 베일리의 기분은 또 어땠을지를 모른다. 미하엘 하네케가 만든 이 영화 <아무르>(Amour, 2012)에서 병들어 죽어가는 안느(에마뉘엘 리바)와 그녀를 돌보며 고통스러워하는 조르주(장 루이 트랭티냥)를 지켜보는 일은 참혹했다. 나는 울었다. 그러나 나는 모른다. 죽어가는 자의 고독 방이라는 관 속에 죽어 누워 있는 안느의 모습을 보여준 뒤에 화면은 과거의 연주회장으로 이동한다. 프레임의 가운데 왼쪽쯤에 노부부가 앉아 있다. 연주가 시작되어도 카메라는 객석을 비추고만 있다. 조르주와 안느는 각기 그들 삶의 연주자였겠지만, 신이 죽음을 연주하기 시작하면 그들은 그저 수많은 관객 중 한 사람이 될 뿐이다. 그들이 연주회장에 있는 동안 집에 도둑이 들었다. 조만간 죽음도 도둑처럼 찾아올 것이다. 오랜 세월을 함께 보낸 부부지만 이 죽음의 전조(前兆) 앞에서 두 사람의 반응은 다르다. 조르주는 범상하게 넘긴다. “도둑들은 그냥 아무 집이나 터는 거니까.” 안느는 예민하게 반응한다. “우리가 자고 있을 때 도둑이 들면 어쩌지? 생각만 해도 무서워.” 그래서 안느는 그날 밤 잠들지 못한다. 잠들면 뜯긴 문으로 다른 도둑이 들어올 테니까. 도입부의 이 에피소드는 두 가지를 넌지시 말한다. 죽음은 조르주가 아니라 안느에게 올 것이라는 것. 그리고 이 영화에서 죽음은 ‘문’이라는 메타포를 통과할 것이어서, 문을 따고 들어온 도둑처럼 곧 열린 창문으로 비둘기도 한 마리 날아들 것이라는 것. 다음날 아침, 도둑이 뜯어놓은 문을 수리하기 위해 조르주가 어딘가에 전화를 걸고 난 뒤에, 이 사람들이라면 믿을 수 있다고 자신하자마자,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때, 안느의 예감은 실현되기 시작한다. 잠시 정신을 놓았던 그녀는 이내 정신을 차리지만 방금 있었던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도둑이 뜯어놓은 문을 수리하기 전에 이미 죽음은 노부부의 집으로 들어왔을 것이다. 최초의 암시 혹은 경고다. 랄프 왈도 에머슨에 따르면 이 암시와 경고는 한층 더 모욕적인 방식으로 계속될 것이다. “자연은 실로 모욕적인 방식으로 우리에게 암시하고 경고한다. 소매를 살짝 잡아당기는 게 아니라, 이빨을 뽑아놓고, 머리카락을 뭉텅뭉텅 뜯어놓고, 시력을 훔치고, 얼굴을 추악한 가면으로 바꿔놓고, 요컨대 온갖 모멸을 다 가한다. 게다가 좋은 용모를 유지하고자 하는 열망을 없애주지도 않고, 우리 주변에서 눈부시게 아름다운 새로운 형상들을 빚어냄으로써 우리의 고통을 한층 격화시킨다.”(데이비드 실즈,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에서 재인용) 안느에게 찾아온 죽음은 경동맥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성공률이 95%인 수술이었지만 그녀는 나머지 5% 안에 들었다. 수술 실패가 어떤 결과를 낳을지 모르는 상태이지만 안느는 장기 입원치료를 거부하고 귀가한다. 그리고 다시는 입원 따위는 하지 않겠노라고 선언한다. 85살에 출간한 <죽어가는 자의 고독>(1982)에서 노르베르트 엘리아스는 적었다. 서구사회가 문명화되면서 죽음이라는 불편한 사건은 격리되기 시작했다고, 그 격리의 공간인 병원에서는 “사람 자체에 대한 배려는 뒷전으로 밀리고 장기에 대한 배려가 우선시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고, 그런데 죽어가는 자에게 정작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육체적 통증이 아니라 정서적 고립이라고. 안느는 그녀의 삶을 아직은 자신이 통제하길 원했고, 조르주는 다른 모든 이들의 회의와 반대를 예상하면서도 안느의 결정에 동의한다. 이제 그들의 삶은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질 것이지만 어떻게 달라질 것인지는 그들도 모른다. 일단은 최선을 다해서 변화에 적응해보겠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안느가 여전히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때의 얘기다. 상황이 악화되면서 안느는 계속 살아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말을 하는 안느는 여전히 자기 자신이다. 그녀가 여전히 자기 자신인 한에서 그녀는 자신의 절망을 스스로 이겨낼 수도 있을 것이다. 안느에게 진정으로 상황이 악화된다는 것은 그녀의 육체가 점점 파괴되어간다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더이상 자기 자신으로서 존재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제자의 방문이 그랬다. 오른쪽 팔다리가 마비되어서 그녀는 피아노를 연주할 수 없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스승으로서 제자를 맞이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안느를 방문한 이후 보낸 엽서에서 제자는 스승의 모습이 착잡하다는 심경을 피력하고, 이에 안느는 외려 상처를 입고 제자가 보낸 CD를 꺼버린다. 제자에게 그녀는 이제 스승이라기보다는 환자일 뿐이다. 딸과 사위의 방문도 부담스럽다. 그들의 걱정과 염려는 안느가 이제는 예전의 안느가 아님을 스스로 인정하도록 강요하는 일이 될 뿐이다. 더욱 치명적인 것은 안느가 말을 잃어간다는 것이다. 말을 잃으면서 그녀는 자기 자신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마지막 버팀목을 잃는다. 그런 의미에서 안느가 사진첩을 보는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언어능력에 고장이 난 이후 그녀는 거의 “엄마”(mere)와 “아파”(mal)라는 두개의 외마디 단어밖에 내뱉지 못한다. 그런 그녀가 마지막으로 완성된 문장을 말하는 때가 바로 그 장면이다. 어렸을 때의 사진을 한장씩 넘겨보며 그녀는 말한다. “아름다워.” “뭐가?” “인생이.” “(…)” “참 긴 것 같아.” “(…)” “인생은 참 길어.”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상황에서 이런 말을 하는 안느의 의중을 조르주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렇기는 관객도 마찬가지다. ‘인생은 아름답다’와 ‘인생은 참 길다’라는, 언뜻 보면 서로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문장들을 안느는 동일한 표정과 어조로 말했다. 두 명제 사이에 안느는 어떤 접속사도 집어넣지 않았다. 이 마지막 말들은 무슨 암호처럼 조르주에게 건네진다. 그래서 이 이야기의 후반부를 조르주가 떠맡는다. 그가 해야만하고 또 할 수밖에 없는 일은 안느의 마지막 두 명제에 기대어서 그녀의 비명(“엄마”와 “아파”)의 의미를 번역해내는 일이다. 자신이 번역한 대로, 그는 어떤 결단을 내릴 것이다. 사랑하는 자의 결단 조르주를 위한 첫 번째 장면. 조르주는 안느에게 화를 낸 적이 없다. 그러다가 안느가 잡지에 있는 별자리 운세 따위를 소리내어 읽을 때 그는 화를 참는 데 처음으로 실패한다. 조르주가 장례식에 다녀온 날 안느가 이미 했던 얘기를 자꾸 반복할 때 그는 두번째로 실패한다. 그리고 제자가 다녀간 이후 안느가 스스로 몸을 움직이려다 침대에서 굴러떨어졌을 때 조르주는 세 번째로 실패한다. 이쯤 되면 이제 조르주를 두렵게 하는 것은 안느일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이기도 할 것이다. 다가올 고난의 시간 속에서, 안느의 변화는 예상할 수 있어도 자기 자신의 변화는 예상할 수 없어서 두려울 것이다. 그 두려움이 그로 하여금 악몽을 꾸게 했다. 그 꿈 역시 이 영화의 핵심 메타포인 문에서 출발한다. 누군가가 문을 두드려 밖으로 나가보지만 아무도 없고 복도에는 물이 차 있으며 누군가가 조르주의 목을 조른다. 이 꿈속에서 그들 부부의 집은 땅속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햇볕이 잘 드는 지상이 아니라 불길한 물이 고이는 지하 같다. 이 집은 이미 땅속에 묻혀 있는 관이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집은 곧 안느의 관이 될 것이다. 두 번째 장면. 조르주가 고용한 두 번째 간호사가 안느의 머리를 거칠게 빗기고 그녀에게 거울을 들이미는 장면과 조르주가 그녀에게 해고를 통보하는 장면 사이에는 의미심장한 장면이 끼워져 있다. 열린 창으로 비둘기가 들어오고 조르주가 신속히 그것을 쫓아보내는 장면 말이다. 기독교 상징체계에서 비둘기가 성령을 뜻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 장면에서 그것은 그냥 죽음처럼 보인다. 앞서 말했듯이 이 영화의 은유체계에서 죽음은 ‘문’으로 들어온다는 맥락이 이미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직은 때가 아니므로 이 비둘기는 빨리 내쫓겨야 했다. 그런데 비둘기는 왜 하필 이 순간에 나타났나. 이 장면에서 감독은 누군가가 부주의하게 열어놓은 창문으로 비둘기가 들어오는 모습을 보여준다. (후반부에서 비둘기가 다시 나타나는 장면에서는 그것이 어디로 어떻게 들어왔는지를 보여주지 않는다는 사실과 비교해볼 만하다.) 그 창문은 아마도 감독이 이 비둘기 장면 전후에 나오도록 편집해놓은 그 간호사가 열어놓았을 것이다. 그녀의 거친 태도가 안느의 죽음을 앞당기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잘못 들어온 비둘기처럼, 내쫓겨야 했다. 세 번째 장면. 조르주가 딸 에바(이자벨 위페르)와 독대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에바가 방문하자 조르주는 안느가 누워 있는 침실의 문을 잠근다. 딸이 항의하자 아버지도 저항한다. 여기서 조르주는 영화 전체를 통틀어 가장 많은 말을 한다. 그리고 이 장면에서 우리는 이 부부에게 가장 가까운 존재일 딸조차도 그들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아프게 인정하게 된다. 아우슈비츠의 생존자 장 아메리는 <자유 죽음>(1976)에서 이렇게 적었다. “너무도 완벽하게 유일해서 다른 것과는 헷갈리려야 헷갈릴 수 없는 자기만의 상황, 이른바 ‘인생 상황’(situation ve′cue)이라는 것은 무어라 말해도 절대 완벽하게 전달할 수 없다. 바로 그래서 어떤 사람이 자신의 손으로 목숨을 끊거나, 끊으려는 시도를 할 때마다 누구도 들춰볼 수 없는 장막이 가려지는 것이다.” 말하자면 조르주와 안느의 ‘인생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그들 자신 외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빠는 딸에게 사과한다. 밖에서 문을 잠그는 일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그것은 마치 아내의 방을 관으로 만들어버리는 일일 수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는 듯이. 네 번째 장면. 모두가 불안해하며 예상했던 바로 그 장면이다. 조르주는 면도를 하다가 또 안느의 비명 소리를 듣는다. 그래서 그는 안느의 손을 잡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십대 때의 어느 날 그는 어머니의 강요로 청소년 캠프에 갔었다. 하기 싫은 일과 먹기싫은 음식을 먹어야 하는 그곳에서 그는 극심한 고독과 고통을 느껴야 했다. 그 와중에 디프테리아에 걸리기도 했다. 그는 격리되어야 했고, 어머니에게 고독과 고통을 호소하는 엽서를 보내야했다. 이 이야기를 끝내고 나서 조르주는 바로 그 일을 결행한다. 이 장면은 우리를 놀라게 하지만 조르주의 이야기와 관련해서는 필연적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 이야기의 주인공은 어린 시절의 조르주이지만, 지금 그와 같은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은 침대에 누워 있는 안느다. “엄마”와 “아파”를 번갈아 외치는 안느에게서 조르주는 고통 속에서 엄마를 간절히 그리워했던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그는 마침내 안느의 비명을 번역하는 데 성공한다. 이것은 끔찍한 결론이지만 이 번역이 틀렸다고 단호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다섯 번째 장면. 안느가 죽고 난 뒤 다시 비둘기가 날아든다. 앞에서 지적한 대로 이번에는 이 새가 어디로 어떻게 들어왔는지 알 수가 없다. 아니, 불을 켜야 할 정도로 컴컴했으니 모든 문이 다 닫혀 있었을 것이다. 안느가 죽었으니 이번에는 그 비둘기가 제때 제대로 들어온 것이다. 필연적인 방문이므로 그것은 닫힌 문으로도 들어올 수 있었다. 조르주의 반응도 다르다. 앞에서는 불결하고 불길한 것을 몰아내듯이 내쫓았지만 이번에는 그것을 담요로 덮어서 끌어안는다. 이것은 포획이 아니라 포옹이다. (잡고 나서 다시 풀어줬으니 잡는 게 목적이 아니라 안아보는 게 목적이었으리라.) 이 장면은 조르주가 조금 전에 안느에게 했던 일이 어떤 의미를 갖는 일인지를 상징적으로 복기한다. 비둘기가 처음 날아들었을 때 그는 안느를 죽음으로부터 지켜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지만, 두 번째 날아들었을 때의 그는 안느에게 죽음을 선물할 수 있는 자격과 용기를 갖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 자신임을 깨닫고 그 일을 결행한 직후였다. 죽음을 내쫓는 일과 죽음을 끌어안는 일의 차이가 이와 같을 것이다. 사랑은 자체의 기준을 설정한다 인간의 내부에는 여러 마리의 짐승이 산다. 진화심리학은 그중 하나를 본능(instinct)이라 부르고, 프로이트는 다른 하나를 충동(drive)이라 부르며, 라캉은 또 다른 하나를 욕망(desire)이라 부른다. 그들 덕분에 우리는 본능과 충동과 욕망이 어떤 법칙을 갖고 있는지 조금은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사랑에 대해서는 그러기가 쉽지 않다. 사랑에 대한 모든 정의는 시도되는 순간 실패한다. 사랑은 전칭명제로 규정할 수 없다. 그것은 언제나 개별적인 사례로(만) 존재한다. 그래서 ‘사랑은 무엇이다’라고 말하는 일은 어리석은 일이며(나 역시 그 어리석은 사람들 중 하나다) 다만 ‘무엇도 사랑이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어떤 것이 사랑인지 아닌지를 판별할 수 있는 기준은 오직 그 내부에 있을 것이다. “사랑은 자체의 기준을 설정한다. 따라서 사랑의 관계 안에서는 이것이 사랑인지 아닌지가 금방 분명해진다.”(슬라보예 지젝, <지젝이 만난 레닌>) 미하엘 하네케 감독은 이 영화에 ‘사랑’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이것도 사랑이다’라고 말하려 했을 것이다. 우리는 흔히 ‘죽을 만큼 사랑해’라고 말한다. 이 영화는 ‘죽일 만큼 사랑해’라고 말한다. 사랑에 관한 한, 이야기가 할 수 있는 일은 바로 거기까지일 것이다. 왜 문학이라는 것이 필요한가. 이 세계에는 여러 종류의 판단체계들이 있다. 정치적 판단, 과학적 판단, 실용적 판단, 법률적 판단, 도덕적 판단 등등. 그러나 그 어떤 판단체계로도 포착할 수 없는 진실 또한 있을 것이다. 그런 진실은,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한 인간의 삶을 다시 살아볼 수는 없더라도, 적어도 그러려고 노력할 때에만 겨우 얻어질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외도를 하다 자살한 여자’라고 요약할 어떤 이의 진실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톨스토이는 2천쪽이 넘는 소설을 썼다. 그것이 <안나 카레니나>다. 이런 작업을 ‘문학적 판단’이라 명명하면서 나는 이런 문장을 썼다. “어떤 조건하에서 80명이 오른쪽을 선택할 때, 문학은 왼쪽을 선택한 20명의 내면으로 들어가려 할 것이다. 그 20명에게서 어떤 경향성을 찾아내려고? 아니다. 20명이 모두 제각각의 이유로 왼쪽을 선택했음을 20개의 이야기로 보여주기 위해서다. 어떤 사람도 정확히 동일한 상황에 처할 수는 없을 그런 상황을 창조하고, 오로지 그 상황 속에서만 가능할 수 있고 이해될 수 있는 선택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는 시도, 이것이 문학이다.” 문학은 물론이려니와 영화 역시도 ‘이야기’라는 요소로 완전히 환원될 수는 없다는 것쯤은 안다. 그러나 저 문장이, 이야기라는 요소를 문학과 공유하고 있는 영화에도, 이야기라는 요소가 차지하는 그 비율만큼은, 유효할 것이라고 나는 기대한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이 영화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옳다. 덧붙이거니와, 좋은 이야기는 그것이 끝나는 순간 삶 속에서 계속된다. 처음 봤을 때 나는 이 영화가 안느의 환영과 함께 돌아올 수 없는 외출을 하는 조르주가 현관문을 닫는 그 매혹적인 영화적 순간에 끝났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닌 것 같다. 안느의 시체가 수습된 이후 그녀의 딸인 에바가 그 집을 다시 찾는 장면이 이어지는 것은 그럴 만하다. 그 장면에서는 모든 문들이 활짝 열려있다. 죽음이 이미 다녀갔으니 문을 잠글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에바는 거실로 간다. 늘 창가쪽 자리에 앉던 에바가 이번에는 그의 부모가 앉던 자리에 앉는다. 그런 그녀를 멀찍이 떨어진 채 지켜보던 카메라가 문득 꺼지면서 영화는 끝난다. 부모의 의자를 그녀가 물려받았다. 이제는 그녀에게 죽음이 찾아올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전시] 옛날 옛적엔 19금에도 풍류와 낭만이

기간: 2월24일까지 장소: 갤러리현대 본관, 두가헌 갤러리 문의: www.galleryhyundai.com 어젯밤 내가 본 <9시 뉴스>에서는 강추위를 알리는 화면에 이어 14세기 중반의 고려 불화가 등장했다. 이탈리아 로마에 있는 국립동양예술박물관에서 국내에 알려지지 않은 불화 한점이 발견된 것이다. 죽은 사람을 서방세계로 안내하고 있다는 기자의 멘트 뒤로 적의를 입고 온화한 표정을 한 아미타불 이미지가 등장했다. 몇초 만에 텔레비전 화면에서 사라진 아미타불은 나에게 시간대를 점프한 느낌 이상을 건네지 못했다. 과거와 옛사람은 ‘낯선 나라’라는 생각과 함께. 내가 고려시대 사람이라면 저 불화에서 무엇을 읽었을까. 조선시대 풍속화와 춘화는 고려 불화에 비하면 널리 알려진 장르다. 그림 속 사람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2013년의 시점과 비교해보아도 통하는 장면이 많다. 밥그릇이 상당히 크기는 하지만 밥을 먹고 있거나, 지금 우리가 그러고 놀지는 않지만 두 동네가 모여 씨름을 한다거나 달 아래 한복을 입은 남녀가 애틋한 눈매를 주고받는다거나. 알 법한 그림들이다. 왕이나 선비의 냉랭한 얼굴이 아닌 살아 움직이는 이들의 ‘생활’을 그린 장면은 친근하고 솔직하다. 인쇄매체를 통해 자주 보았던 김홍도와 신윤복의 풍속화를 보다보면 그림 속 이들을 알고 있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든다. 하지만 다시 반문. 내가 그림 몇장을 통해 이들의 실체와 이들의 고민을 안다는 건 불가능하지 않을까. 갤러리현대(두가헌 갤러리)에서 열리는 전시는 세 가지 측면에서 ‘옛사람의 삶과 풍류’를 조명한다. 관아재 조영석, 공재 윤두서 등의 내로라하는 화가들이 그린 풍속화가 전시장의 입구라면 청소년들은 들어올 수 없는 ‘19금’ 공간에서는 전시의 핵심이라 할 ‘춘화’가 전시된다. 걸쭉한 농담과 디테일한 성적 묘사가 난무하는 그림들은 조선 후기 가장 뛰어난 춘화첩으로 해석되는 <운우도첩>과 <건곤일회첩>에 담긴 것이다. 전시는 또한 평민화가 김준근을 통해 당대 풍속화가 기록 및 유통되는 방식을 말한다. 김준근은 중앙 화단과는 관계가 없었다. 하지만 조선 최초의 개항장인 원산에서 활약하며 뛰어난 그림 실력과 재간으로 자신의 풍속화를 해외에 ‘수출’했다. 그의 그림에는 어린아이들이 길거리에서 무얼 하고 노는지, 무속의 세계나 처녀총각의 결혼식은 어떻게 하는지 외국인 여행가들이 궁금해했을 법한 장면들이 실감나게 담겨 있다. 전시 기간 중에는 유홍준(1월23일), 이태호(2월13일) 교수의 강의도 진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