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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1997)

[충무로 도가니] 싸이의 기적을 영화에서도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제목처럼 이번주 금요일에 미국에서 개봉하는 김지운 감독의 <라스트 스탠드>가 만일 미국 박스오피스 1위에 오른다면…. 생각만 해도 흥분이 된다.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빌보드 차트 2위에 오르면서 그 뒤로 매주 목요일이 되면 설마 이러다가 1위에 오르는 거 아냐라는 상상을 하던 시간이 엊그제 같은데, 이번에는 더 큰 핵폭탄 같은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현재까지의 상황은 매우 긍정적이다. <블레어 윗치> <쏘우> 등을 배급한 라이온스 게이트는 2800개의 스크린에서 <라스트 스탠드>를 개봉한다. 같은 날 개봉하는 경쟁작은 마크 월버그, 러셀 크로 등이 나오는 범죄스릴러물 <브로큰 시티>와 올해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오른 데이비드 O. 러셀 감독의 <실버라이닝 플레이북>, 그리고 현재 박스오피스 1위를 달리고 있는 캐스린 비글로 감독의 <제로 다크 서티> 정도이다. 특별한 이변이 없는 한 이번주 1위 영화는 세편 중 한편이 되지 않을까 예상해본다. 일단 로튼토마토의 지수는 100%이다. “강하고 속도감있게 밀고 나가는 김지운 감독의 연출과 조연들의 탄탄한 연기. 모두들 신나게 한바탕 즐기고 있다”(<어소시에이티드 프레스>의 크리스티 르미르), “감독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서부영화와 액션영화 법칙을 따르면서도, 장르를 뛰어넘거나 벗어나지 않는 미덕을 갖춘 영화”(<슬랜트 매거진>의 칼럼 마시) 등. 영화에 대한 호평 일색이다. 물론 김지운 감독 이전에도 리안, 오우삼 감독 같은 중국 감독들이 할리우드에서 성공 스토리를 쓴 적은 있다. 그러나 <라스트 스탠드>는 앞의 두 감독과 다른 점이 있다. 많이 알려진 대로 충무로 출신인 김지용이 촬영을, 모그가 음악을 맡았다. 할리우드에서 첫 영화를 찍는 감독이 자신의 스탭을 데리고 함께 작업할 수 있었다는 건 그만큼 감독에게 기대고 있는 작품이라는 뜻이다. 이 영화가 성공한다면 그건 감독 한 개인의 능력뿐만 아니라 한국 스탭의 우수성도 함께 보여주는 사례가 될 것이다. 쓰다 보니 마치 무슨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예상하는 글이 되고 말았다. 제작한 영화도, 수입한 영화도 박스오피스 1위와 거리가 먼 영화만 한 사람이 아무 관계도 없는 영화의 미국 박스오피스 성적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모습이 우습기도 하다. 하지만 누가 만들었든 누가 수입을 했든 누가 돈을 벌든 그것과 상관없이 남들이 안될 것이라고 얘기한 일을 가능하게 한 데 대해 찬사를 보내고 싶다. 싸이의 노래를 지겹게 듣다가도 텔레비전에서 그가 세계적인 스타들과 친구처럼 얘기하는 모습을 보면 신기하고 자랑스럽다. 그건 어쩌면 대리만족의 감정이 아닐까. 많은 영화인이 한국 감독의 첫 할리우드 박스오피스 1위 작품을 기대하고 있는 건 그만큼 지금 우리의 영화 환경이 척박하고 어렵다는 방증이다. 제발 올해 연말에는 영화판 곳곳에서 “누구누구는 떼돈 벌었네, 누구는 쫄딱 망했네”라는 얘기보다는 “모두가 먹고살 만했던 한해였다”라는 소리가 들렸으면 좋겠다. 잡지가 나올 무렵이면 나의 예상이 맞았는지 틀렸는지 결과가 나오겠지만, 아무튼 축하드립니다. 김지운 감독님! 일찍이 한국 스탭이 할리우드영화에 참여한 사례는 많았다. 드림웍스 같은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에는 한국인 출신 애니메이터들이 많다. 그러나 충무로에서 인정받은 뒤 헤드 스탭으로 진출한 사례로 범위를 좁혀보면 몇 안된다. <라스트 스탠드>보다 일주일 뒤에 개봉하는 박찬욱 감독의 <스토커>는 감독의 오랜 파트너인 정정훈 촬영감독이 촬영을 맡았다. 알려진 대로 정두홍 무술감독은 <지.아이.조: 전쟁의 서막>(2009)에서 이병헌의 스턴트 더블로 참여한 뒤 <지.아이.조2>에서 액션 코디네이터를 맡았다.

큰 그림은 이제 시작이다

2012 연극 <리턴 투 햄릿> 연극 <서툰 사람들> 2012~2013 예능 2013 드라마 스페셜 <또 한번의 웨딩> 드라마 <이웃집 꽃미남> <여의도 텔레토비> 말도 많았고 탈도 많았던 지난 제18대 대통령 선거의 힐링 포인트 중 하나는 의 작은 콩트 ‘여의도 텔레토비’였다. 또, 문제니, 안쳤어 등 대선 후보와 대통령을 묘사하는 텔레토비 캐릭터를 앞세워 욕설도 불사한 정치 풍자를 선보인 ‘여의도 텔레토비’를 보면 박하사탕 하나를 입에 문 것처럼 속이 다 시원했었다. 특히 이렇게까지 표현해도 괜찮을까 싶을 정도의 수위를 오가며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을 묘사한 캐릭터 ‘또’를 맡았던 김슬기의 활약이 눈부셨다. “우리 아빠가 뭐!”라며 눈을 부릅뜨고 소리를 지르는 김슬기의 당돌함이 불쾌하지 않고 오히려 귀여워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더불어 거침없는 표현 수위 때문에 욕설 논란에 시달리면서도 이토록 과감하게 표현할 수 있는 신인 여배우의 강단은 어딘가 예사롭지 않게 여겨진다. 한편으론 부담이 될 수도 있었던 캐릭터 또에 대해 김슬기는 “부담보다는 즐거움으로 임했던 캐릭터예요. 저와 성격이 비슷하지 않은 면도 있지만 그래서 더 재미있었어요. ‘또’가 돼서 소리를 지를 땐 스트레스까지 풀리더라고요”라며 웃어 보인다. 귀여움 속의 대범함, 김슬기의 매력은 거기에 있었다. 온화 시즌1부터 시즌3까지, 이 프로그램의 크루로 활약하며 김슬기는 더없이 즐거웠던 한편 고민거리도 하나 생겼다고 했다. “프로그램의 성격때문인지 저를 배우가 아니라 예능인이라 오해하는 분들이 있어요. 아직까지는 여러 모습을 보여드리지 못해서겠죠. 그래서 다양한 것들을 경험하며 내실을 다지고 싶어요. 웃음을 주는 것도 좋지만 제 안에 다른 모습들이 더 많기 때문에 언젠가는 온화한 모습도 보여드리고 싶거든요.” 뮤지컬 차분하고 낯도 많이 가리는 성격이지만 춤과 노래, 연기가 좋아서 뮤지컬 배우를 꿈꿨다는 김슬기에게 무대는 색다른 에너지를 주는 곳이다. “무대, 그리고 지금 하고 있는 드라마 <이웃집 꽃미남>까지 오면서 여러 생각을 많이 했어요. 무대는 무대대로 방송은 방송대로 각자 다른 매력을 지닌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무엇 하나만 딱 사랑할 수가 없어요. (웃음) 예전에 뮤지컬과 방송, 영화까지 점차 발전해나가는 큰 그림을 그렸었는데 이제 시작인 것 같아요.” 장진 감독이 본 김슬기 욕심 숨기고 더 무심해지길 “언젠가 김슬기에게 배우가 경험할 수 있는 화려함은 화려함대로, 신인 배우가 겪는 어려움은 어려움대로 모두 체험하되 겸손한 배우가 되라고 말한 적이 있다. 배우의 아름다움은 외모의 치장과 협찬 의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배우가 만들어낸 개성과 소양에서 나온다. 함께 연극과 를 해오면서 느낀 것이지만 김슬기는 그 나이대에서 오랜만에 나타난 연기파 배우다. 그러니 부디 욕심을 들키지 마시고 더 무심해지시길.”

뽀통령으로 대동단결-친구들 모여라

울던 아기도 울음을 그친다는 아이들의 대통령, 뽀로로가 10주년을 맞아 드디어 <뽀로로 극장판: 슈퍼썰매 대모험>으로 제작되었다. 뽀로로를 사랑하는 아이들이 있는 한 아이들을 사랑하는 부모들은 당연히 극장으로 발길을 향하겠지만 아이들이 왜 그토록 뽀로로를 좋아하는지 정도는 알고 가는 것이 예의 아닐까. 이제 뽀로로도 10살이 되었으니 그간의 발자취를 더듬어볼 때도 되었다. 10년간 번성한 뽀롱마을의 비밀을 한번 파헤쳐보자. 어린이들 사이에서는 그 어떤 연예인보다도 인기가 좋다. 누군가에겐 고마운 육아도우미다. 어떤 이들에게는 그저 아동용 애니메이션일 뿐이다. 혹자는 몸값이 수천억원에 달한다며 호들갑을 떨기도 한다. 대한민국 아동 애니메이션 시장을 지배하고 계신 제정일치 절대왕정의 군주, 통칭 뽀통령, 또는 뽀느님 ‘뽀롱뽀롱 뽀로로’의 이야기다. 2003년 EBS에서 첫 방영될 당시만 해도 이 정도의 반응을 이끌어내리라고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그러나 지난 10년간 이 이등신의 동그란 펭귄 한 마리는 한국 유아 애니메이션 시장의 지형도를 바꿔놓았다. 모두가 알고 있지만 아무도 알지 못하는 세계 거시적인 수치로만 봐도 비교 불가다. 2012년 기준 매출 누적액은 1조원이 넘었고 130여개국에 수출되었으며 브랜드 가치가 7천억원에 육박한다는 분석도 나왔다(2009년 서울산업통상진흥원 기준으로는 3893억원이다). 미시적인 현상으로 보면 더하다. 뽀로로에 얽힌 수많은 간증의 경험담(그렇다. 간증이다. 서너살 아이를 둔 부모들에게서 터져나오는 증언들을 듣다보면 다른 표현이 생각나지 않는다. ‘뽀느님’이라는 말 그대로 가히 종교의 영역이라 할 만하다)을 일일이 열거하자면 날밤을 새워도 모자랄 지경이다. 산업적인 측면에서든 문화적인 관점에서든 뽀로로는 하나의 아이콘이 된 지 오래다. 하지만 우리가 과연 그만큼 뽀로로를 잘 알고 있는지를 생각해보면 회의적이다. 뽀로로를 둘러싼 무수한 반응과 말들에도 불구하고 정작 뽀로로와 친구들이 살고 있는 뽀롱마을의 속사정을 아는 이는 별로 없어 보인다. 단편적인 뉴스로 접하는 숫자와 신드롬에 가까운 소문들을 듣고 그저 피상적으로 대단하다고 한수 접어두고 있는 건 아닌가. ‘대단하다’는 말이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여기저기 토스 되고 있을 뿐, 그나마 뽀로로의 대단함을 논하는 근거들도 대부분 숫자에 기댄 까닭에 소위 콘텐츠‘산업’ 측면 또는 ‘신성장동력’이라는 매우 세속적인 기준에서 욕망과 기대가 뒤섞여 있다. 뽀로로를 찬양하는 말들이 ‘<쥬라기 공원> 한편이 자동차 몇대 분량의 수출효과’라며 호들갑 떨던 뉴스들과 겹쳐 보이는 건 지나친 우려일까. 보건소 소아과 벽에 스티커로 강림하시어 겁에 질린 수십명 어린이들의 눈물을 단번에 그치게 했다든지, 주전자에 엉덩이가 낀 세살짜리 아이를 꺼내려 119 소방대원들이 구조작업을 벌이는 동안 아이가 울지 않도록 뽀로로 영상으로 달랬다는 믿을 수 없는 간증 현장의 제보들과의 괴리가 그런 걱정을 더한다. 아이들의 뽀로로에 대한 반응은 그야말로 초자연적이다. 사람들은 이해되지 않는 현상을 목격했을 때 대개 두 가지 반응을 보인다. 마치 그것을 이해하고 있는 양 적당한 이유를 갖다붙이든지, 아니면 이유 따윈 아예 생각지 않고 그저 그러려니 하는 것이다. 그 대단하다는 뽀로로를 제대로 설명하려는 이가 없는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유아용 애니메이션이기 때문에 더욱 쉽게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뽀로로도 어느덧 10살이 되었다. 아직 10년밖에 안됐냐는 이도 있을 테고, 벌써 10년이라며 놀라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10주년을 맞이한 뽀로로가 극장 진출이라는 새로운 도약을 준비한다. 모두가 알고 있지만 실상 아이들만 알고 있는 세계, 뽀로로 월드의 비밀을 파헤칠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유아용 애니메이션 전성시대 2003년 11월 뽀로로가 나올 때까지만 하더라도 우리나라는 영유아를 대상으로 한 애니메이션 시장의 불모지, 아니 단순한 소비시장에 불과했다. 전세계적 어린이들의 사랑을 받는 대표적인 캐릭터들, 예를 들어 ‘곰돌이 푸우’나 ‘꼬마기관차 토마스’ 등도 지속적인 애니메이션 채널을 확보하진 못한 상태였다.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아동용 채널의 수요를 확장시킨 것은 영국의 <꼬꼬마 텔레토비>다. 어린이 교육 프로그램의 오랜 노하우를 지닌 영국 는 대상 아동의 연령, 취향, 방송 목적에 따른 다양한 프로그램을 세세하게 구분하고 있는데, 그중 특히 <꼬꼬마 텔레토비>는 영유아를 대상으로 한 대표적인 프로그램이었다. 이후 우리나라에서도 영유아 애니메이션의 가능성을 깨닫고 본격적으로 제작에 불이 붙기 시작했는데 그 선두주자가 바로 <뽀롱뽀롱 뽀로로>다. 2003년 당시만 해도 한국 애니메이션은 일본의 모델을 벤치마킹하여 완구산업과의 연계를 통해 수익을 창출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그나마 애니메이션에 대한 이중의 부정적 인식(교육에 유해한 콘텐츠라는 것과 질적으로 수준이 떨어진다는 오해)이 팽배해 있던 때라 유아용 애니메이션을 위한 시간 편성은 전무했다. 뽀로로는 바로 그 점을 파고들었다. 뽀로로는 당시 애니메이션으로는 이례적인 전략적 접근이었다는 점에서 특별했다. 현재 오콘, 아이코닉스 엔터테인먼트, SK브로드밴드(옛 하나로텔레콤), EBS가 공동으로 저작권을 소유하고 있는 뽀로로는 저작권의 구성원들이 증명하듯 시작 단계부터 철저히 필요에 의해 기획 구성된 프로젝트다. 아이코닉스가 기획을 하고, 오콘이 제작을 맡았으며, 교육방송인 EBS를 통해 배포함으로써 에듀테인먼트로서의 이미지를 제고하였다. 여기에 콘텐츠가 필요했던 하나로텔레콤이 투자를 하며 밑그림이 완성되었다(당시 대북사업에 참여하고 있던 하나로텔레콤의 영향으로 뽀로로 시즌1의 52편 가운데 22편은 북한의 삼천리총회사에서 담당했다). 그 결과 첫해 로열티로만 1억3천만원을 벌어들였고 2005년부터 본격적인 흥행가도에 돌입하여 현재는 2천여개의 관련 상품, 연간 5천억원대의 시장을 움직이는 거대 브랜드로 자리잡았다. 지금이야 아이들이 ‘선물공룡 디보’ 인형을 들고, ‘로보카 폴리’ 장난감을 가지고 놀며, 뽀로로 월드에 놀러가는 것이 그리 신기한 풍경이 아니지만 몇년 전만 해도 이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장면이었다. 새롭고, 거대하며, 안정적인 시장이 탄생한 것이다. 그렇다면 뽀로로가 이토록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동력은 무엇이었을까. ‘노는 게 제일 좋은’ 눈높이 공감 뽀로로의 성공 요인에 대한 몇 가지 가설 중 설득력있는 몇몇 의견이 있다. 첫째로 동물을 의인화한 디자인이 아이들의 친밀감을 자극한다는 것이다. 곰돌이 푸우를 비롯한 디즈니의 대표적인 캐릭터들을 떠올려보면 일견 타당한 분석이다. 아이들이 동물 캐릭터를 좋아하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고 실제로 이등신의 둥근 체형이나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디자인은 아이들의 호감을 불러일으키는 중요한 요소다. 유아용 애니메이션 대다수가 디자인에서 비슷한 노선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하지만 꼭 동물이 아니라도 괜찮다. 요컨대 핵심은 친밀감과 의인화에 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신과는 다른 존재와 대화하고 싶어 하는 욕구가 있고 아이들의 경우 이같은 욕망이 좀더 적극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뽀로로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유아의 행동패턴까지 공유하고 있다. 아이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감정이입할 수 있는 극도의 유사체험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등신의 캐릭터들이 뒤뚱거리며 걷는 모양새는 유아들의 걸음 그대로다. 뽀로로와 친구들의 각각의 성격 또한 아동집단에서 나타나는 성격들을 반영한다. 예를 들어 ‘크롱크롱’이란 말밖에 하지 못하는 아기공룡 크롱은 자신보다 어린 아이를 연상시키고, 작품 속 뽀로로는 실제로 형처럼 크롱을 챙긴다. 늘 수줍은 비버 루피, 듬직하고 조용한 백곰 포비 또한 어느 집단에서건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캐릭터들이다. 뽀로로의 서사는 기본적으로 곰돌이 푸우와 유사한 측면이 있는데, 푸우 또한 각기 다른 개성의 친구들이 모여 서로의 다름을 깨닫고 어울리는 담백한 이야기로 전개된다. 제작진 역시 기획 단계에서 푸우를 어느 정도 염두에 뒀음을 숨기지 않는다. 이른바 ‘아이들의 일상’이다. 뽀롱마을은 자신들만의 독립된 공동체이며 나름의 방식으로 문제를 맞닥뜨리고 각자의 성격을 존중하여 어른들의 도움 없이 문제를 해결해내는 세계다. 그것은 대여섯살의 어린아이들이 실제로 겪을 법한 과정에 대한 체험이고, 이 지점이 공감의 직접적인 통로가 된다. 그렇게 아이들을 흉내내려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 세계를 고스란히 옮겨왔기에 뽀로로는 아이들의 욕망을 대변할 수도 있다. 이는 오프닝의 가사에서도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노는 게 제일 좋아, 친구들 모여라.” 뽀로로의 서사는 이것이 전부다. 여기에 더이상 무슨 의미와 분석을 더할 필요가 있는가. 좋은 게 좋은 것, 재미있으니까 재미있는 것. 그것이 놀이의 본질적인 요소다. 5분 내외로 완결되는 이야기 구조는 어른들의 눈높이에서는 단순하기 이를 데 없지만, 아이들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기승전결이 있는 갈등해결의 서사다. 게다가 짧은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종종 비어 있어 그 자리는 아이들 스스로가 상상력을 동원하여 메워야만 한다. 아이들끼리 해결하는 세계, 무언가를 하라고 강요하지 않는 세계, 뽀로로의 핵심은 거기에 있다. 상이한 것들이 사이좋게 함께 놀 수 있는 곳이 뽀롱마을이고 아이들은 뽀로로를 통해 다른 존재와 교감하는 방법을 익힌다. 그곳에는 유아들의 생존과 성장의 드라마가 있다. 여기에 “왜 이렇게 아이들이 좋아할까”라는 질문을 더해봤자 “뽀로로는 왜 나이를 먹지 않는가, 백곰이 왜 펭귄을 잡아먹지 않는가, 사막여우가 왜 극지방에 있는가”라는 질문과 다를 바 없다. 오히려 뽀로로의 전략적인 지점이 어른들을 향한다. 에듀테인먼트로서의 가치, 즉 교육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부모의 강박을 달래기 위해 플랫폼을 EBS로 선정했고 각 화에 짧은 교훈을 하나씩 넣어둔 것. 대개 아이들의 겉모습만을 흉내낸 애니메이션들이 교육적인 목적 위에 달콤하고 자극적인 재미를 덧씌웠다면 뽀로로는 반대로 어른들을 달래기 위한 ‘교육적’이라는 위안을 제공한다. 그야말로 아이들에 의한, 아이들을 위한, 아이들의 대통령답다. 아이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뽀로로가 극장판으로 나왔으니 흥행은 당연한 것처럼 보일 테지만 사실 문제가 그리 단순하진 않다. 무엇보다 유아 애니메이션 시장 자체가 굉장히 보수적이기에 플랫폼을 바꾼다는 게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 게다가 3~4살의 유아들에게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는 뽀로로의 경우 원래 TV시리즈로 제작되었기에 5분 내외의 짧은 작품이었던 것에 반해 극장판은 70분 넘게 아동을 붙잡고 있어야 한다는 어려움도 있다. 5분의 서사를 70분에 담아야 하니 이야기는 당연히 복잡해질 것이고 눈높이도 올라갈 수밖에 없다. 극장판에 대한 우려와 가능성 다행히도 뽀로로 극장판은 처음으로 돌아가서 이 어려운 매듭을 풀려 한다. 재미있는 이야기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통한다는 단순하고 간단한 진리. 디즈니의 <라이온 킹>의 흥행을 떠올려보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뽀로로 극장판의 이야기 구성은 제법 높은 연령대에서 봐도 그리 밋밋하지 않다. 어른들은 어른들 나름대로 동심으로 돌아가 즐길 수 있고, 아이들은 아이들 나름대로 좋아할 요소를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층이 두터운 이야기다. 무엇보다 고무적인 건 3D의 완성도다. TV시리즈 뽀로로의 강점 중 하나도 3D 배경의 탁월한 묘사였다. 낯선 광경에 대한 신선함은 그걸로 충분한 스펙터클이다. 뽀로로 극장판에서는 그간 테마파크 등에서 아이들을 대상으로 수차례 공연했던 외전 격의 작품들을 통해 축적된 노하우와 그 반응을 토대로 그야말로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는 3D 화법을 시도한다. 아이들을 대상으로 충분히 검증된 독자적인 기술이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깊다. 뽀로로 극장판의 성패가 중요한 건 단지 10주년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곰돌이 푸우>나 <토마스와 친구들>의 사례에서 보듯 유아용 애니메이션 역시 그 최종 콘텐츠는 결국 영화가 될 수밖에 없다. <뽀로로 극장판: 슈퍼썰매 대모험>은 브랜드가 다음 궤도에 접어들 수 있는가에 대한 중요한 척도가 될 작품이다. 언젠가 뽀로로를 보고 자란 아이들이 부모가 되어, 다시 아이들의 손을 잡고 극장을 찾아와 뽀로로를 함께 관람할 그날을 향한 진짜 첫걸음이 시작됐다.

[영화제] 영화를 영화답게 만드는 것

서울아트시네마는 3월5일부터 24일까지 20일 동안 작품성과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대중에게 소외받은 영화들을 모아 특별전을 개최한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라는 부재를 단 이번 행사를 위해 각국의 수작 15편이 뭉쳤다. 유운성•이용철 영화평론가가 참여하는 비평가 좌담 행사(3월17일)를 비롯해 김성욱 프로그램 디렉터가 직접 진행하는 시네토크(3월9일)와 상영 전 영화 소개(3월16일) 등의 특별행사가 마련되어 있다.(www.cinematheque.seoul.kr 참조) 프로그램 중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4월 개봉예정작 <홀리 모터스>다. 지난해 칸영화제에 소개되면서 유명해진 이 작품은 새벽부터 한밤까지 한 남자의 하루를 뒤쫓아, 그가 연기하는 아홉 가지의 삶을 보여주며 진행되는 일종의 ‘영화에 대한 영화’다. <폴라X> 이후 레오스 카락스가 만든 13년 만의 복귀작. 드니 라방과는 21년 만에 다시 장편에서 조우했다. 루이스 브뉘엘의 <트리스타나>를 비롯해 장 콕도의 <오르페>, 조르주 프랑주의 <얼굴없는 눈> 그리고 감독 자신이 만든 <퐁네프의 연인> 등 다양한 영화들이 변주되어 오마주된다. 길고 거추장스러운 하얀색 리무진을 탄 <홀리 모터스>가 파리 시내 곳곳을 훑는 것에 달리 벨라 타르의 <런던에서 온 사나이>는 오직 한 도시에만 머무른다. 2003년부터 2007년까지 약 4년간 코르시카섬에서 촬영되었다는 이 영화는 ‘느린 플랑세캉스’와 ‘강한 콘트라스트의 흑백영상’이 주조를 이룬다. 1934년 조르주 심농이 쓴 동명의 원작 소설은 1943년 앙리 드쿠앙의 영화 이후 세 번째로 각색됐다. 벨라 타르 특유의 시네마적 기법, 주인공의 심리에 맞춘 두 가지 종류의 라이트모티브 음악에 귀기울여 감상하길 권한다. 한편, 어느 평론가에 의해 ‘분류 불가능하고 이상야릇한 농촌코미디’라 명명된 알랭 기로디의 <도주왕>을 통해서는 프랑스 남서지방의 거친 풍경을 재발견하게 될 것이다. 마르코 벨로키오의 <내 어머니의 미소>도 인상적이다. 조형적 아름다움을 특징으로 내세운 이 이탈리아영화는 ‘몽매주의와 타협, 무기력’을 키워드로 현대의 이탈리아 사회와 종교, 부르주아의 범주 등에 딴지를 걸고, 비난을 가한다. 2002년 칸영화제에서 기독교심사위원상을 수상하며 주목받았다. 이에 비해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는 미국사회에 대한 관찰이 돋보인다. 감독은 주인공 역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통해, 감독 스스로의 미국에 대한 애증을 대중에게 소개하고 있다.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세 번째 디지털 장편 <트윅스트>는 또 다른 미국의 문화적 유산을 드러내는 작품이다. 코폴라는 에드거 앨런 포와 자신을 직접 연계시키거나, 또 다른 거장 너새니얼 호손을 빌리는 식으로 극을 진행해가는데, <대부> 등 이전작에서 느끼지 못한 독특한 멜랑콜리의 감성이 영화를 일종의 벌레스크 소동극으로 완성시킨다.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는 있지만 <트윅스트>가 지닌 바로크적 개방성은 의외의 수작과 조우했다는 만족감을 선사해줄 것이다. 아벨 페라라의 <4:44 지구 최후의 날> 역시 놓치기 아깝다.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이튿날 새벽 4시44분에 일어날 지구의 종말이 예견되고, 뉴욕 로어 이스트사이드에 사는 시스코와 스카이 커플은 이를 함께 준비해간다. 같은 소재를 다룬 영화들과 구별되는 차분하고 엄숙한 논조가 특색인 작품. 상영 내내 주인공의 아파트에는 오라클을 예언하는 텔레비전 뉴스가 방영되고 있다. 감독은 디지털 화면 속 앨 고어나 달라이 라마 등 실존 인물의 입을 빌려 독특한 형식으로 세상의 종말을 고하고, 폼페이의 석화된 연인을 상기시키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 ‘얼굴이 맞닿은 남녀의 클로즈업’을 통해 사랑의 생흔이야말로 지상 최상의 가치임을 다시금 강조한다.

악(惡)은 어디에 있는가?

<허트 로커>에 이은 캐스린 비글로의 전쟁영화 <제로 다크 서티>가 3월7일 개봉한다. 주인공이 누군지조차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베일에 싸여 있던 이 프로젝트는 지난해 12월 북미 개봉한 뒤에도 비밀스러운 제작 과정 때문에 여전히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9.11 이후 10여년간 음침한 수용소와 무미건조한 사무실을 오가며, 서류더미에 파묻혀 서방세계 ‘악의 축’ 오사마 빈 라덴에 다가갔던 미국 첩보국의 실체가 어떻게 재구성됐는지 그 제작기를 소개한다. 이름하여 <제로 다크 서티>를 위한 26가지 보고서다. A 아보타바드 Abbottabad 2011년 5월2일 새벽, 수십발의 총성이 파키스탄의 평화로운 북부도시 아보타바드의 하늘을 갈랐다. 이윽고 덥수룩하게 턱수염을 기른 남자가 쓰러졌다. 미국이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남자’라고 부르던 오사마 빈 라덴이 미군의 습격에 의해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9.11 테러의 주범이 아프가니스탄의 동굴이 아니라 파키스탄의 풍요로운 도시에 머물고 있었다는 사실은 전세계인을 충격에 빠뜨렸다. 이 아보타바드의 총격전이 바꿔놓은 건 미국의 운명뿐만이 아니었다. 2001년, 아프가니스탄 토라보라 산악지대에서 벌어졌던 미군의 실패한 빈 라덴 암살 작전을 토대로 신작 촬영 준비에 한창이었던 캐스린 비글로 감독과 시나리오작가 마크 볼은 3년간 구상해왔던 시나리오를 과감히 엎고, 아보타바드로 눈길을 돌리기 시작했다. “(빈 라덴을 암살했다는) 역사적 사건이 구상하던 영화 시나리오의 규모를 넘어서버렸”(마크 볼)기 때문이다. 이것이 영화 <제로 다크 서티>의 출발점이다. B 블랙사이트 Black Site 블랙사이트는 CIA의 해외 비밀 감옥을 일컫는 용어다. 2001년 9월11일, 뉴욕의 심장부에 테러조직 알 카에다의 비행기가 날아들어 꽂힌 뒤,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은 해외 곳곳에 블랙사이트를 설치하는 것을 승인했다고 한다. 문제는 이 시설의 운영 방식이다. 테러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용의자에 가하는 각종 고문과 비인간적인 행위가 블랙사이트 내부에 만연했고, 빈 라덴을 추적하는 CIA 요원들을 조명하는 <제로 다크 서티>는 이러한 장면들을 피해가지 않는다. “도서관에 가서 허가된 사진을 보고 영화를 만들려면 2년 정도는 걸릴 거다. 하지만 요즘 군인들의 개인 웹사이트에 어떤 사진이 올라오는지 보면 깜짝 놀랄 거다.” 블랙사이트 고문 장면을 준비한 프로덕션 디자이너 제레미 힌들의 말이다. 오바마 미 대통령은 2009년 블랙사이트 폐쇄를 명했으나, CIA 해외 비밀 감옥의 실상을 유추할 수 있는 수많은 이미지들은 망령처럼 구글에 넘실댄다. C 미 중앙정보국 CIA 빈 라덴의 머리를 저격한 건 미군 특수부대 네이비 실이었지만 9.11 이후 10여년 만에 그의 거처를 알아낸 장본인은 미국 정보기관 CIA였다. <제로 다크 서티>는 “현장 요원, 케이스 분석가, 스파이”(캐스린 비글로) 등으로 구성된 CIA 요원들의 임무 수행 과정을 묘사하는 데 러닝타임의 대부분을 할애한다. 그 중심에는 ‘워싱턴의 킬러’라고 불리는 젊은 CIA 여성 요원 마야(제시카 채스테인)가 있다. 그녀는 블랙사이트에 수감된 알 카에다 조직원에게 아부 아흐메드라는 정체불명의 인물에 대해 들은 뒤, 그가 빈 라덴의 최측근이라고 확신하게 된다. 시나리오작가 마크 볼은 “모든 캐릭터는 실존 인물에 기반했다”며, “빈 라덴의 은신처를 습격하던 날, 현장에 파견됐던 CIA 여성 요원”이 마야의 모델이 되었음을 밝혔다. 영화가 지난해 12월 북미 개봉한 뒤, 미국 언론은 마야의 모델이 된 실존 인물을 찾는 데 혈안이 됐지만 CIA의 비밀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이유로 여성 요원의 정체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D 논쟁 Debate 물고문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죄수의 얼굴을 그대로 보여주거나 목줄을 채워 개처럼 끌고 다니고, 죄수를 상자에 집어넣는 등 <제로 다크 서티>가 묘사한 CIA 요원들의 고문 장면은 미국 전역에 격렬한 찬반 논쟁을 일으켰다. 고문 장면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고문 뒤에 수감자로부터 정보를 얻고 빈 라덴에게 보다 가까워지는 과정을 묘사해 영화가 마치 고문을 옹호하는 듯한 입장을 취했다는 것이 문제다. <가디언>은 이 작품이 “더럽고 추한 비즈니스가 미국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하다는 관점을 보여준다”고 비판했고, 평론가 프랭크 브루니는 <제로 다크 서티>가 “물고문 없이는 빈 라덴도 없다”고 주장하는 듯 보인다고 말했다. 최악의 평가는 페미니스트 나오미 울프에게서 나왔다. “비글로는 나치의 선동가 레니 리펜슈탈과 다를 바 없다. 리펜슈탈처럼 비글로는 훌륭한 예술가다. 하지만 지금부터 그녀는 고문의 시녀로 영원히 기억될 거다.” 반면 작가 앤드루 설리번처럼 이 영화가 “고문에 대한 폭로”라며, “7년간 전범들이 미국을 그런 식으로 이끌어왔다는 의혹을 제거해준다”고 옹호하는 입장도 있다. 고문 장면에 대한 문제제기에 대해, 감독 캐스린 비글로는 “나도 고문이 우리 역사의 한 부분이 아니길 바란다. 하지만 현실에는 고문이 존재했다”며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영화에 반영하고자 했음을 밝혔다. E 선거 Election <제로 다크 서티>를 둘러싼 논쟁은 그뿐만이 아니다. 이 영화는 2012년 미국 대통령 선거 운동 기간의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재선에 도전하는 오바마의 임기 중 가장 큰 업적이 오사마 빈 라덴을 제거했다는 점이다. 빈 라덴의 은신처 습격을 다룬 이 영화가 민주당 후보 오바마에 맞서는 공화당의 집중포격을 받은 건 당연해 보인다. 공화당 의원 피터 킹과 공화당 사법감시단은 오바마 정부가 재선을 위해 캐스린 비글로를 비롯한 영화의 제작진에 빈 라덴 암살과 관련된 기밀 정보를 제공했을 가능성이 있다며 문제를 제기했다. 하지만 그들이 밝혀낼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고, 캐스린 비글로와 마크 볼은 “적법한 절차에 따라” 공개된 국방부 자료를 검토했다고 해명했다. <제로 다크 서티>의 미국 개봉을 2012년 10월로 예정해두고 있던 배급사 소니픽처스는 11월 대선을 둘러싼 정치적 공세에 압박을 느낀 듯 12월로 개봉을 변경했다. F 허위 정보 False Information 모두가 이야기의 결말- 빈 라덴의 죽음- 을 알고 있을 때, 어떻게 보는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을까. <제로 다크 서티> 제작진의 가장 큰 고민이 여기에 있었다. 시나리오작가 마크 볼의 해답은 이 사건의 “메커니즘”에 집중하는 것이었다. 미군이 빈 라덴의 은신처에 당도하는 영화의 마지막 35분 전까지, <제로 다크 서티>를 채우는 건 수많은 허위 정보들이다. 친척의 아는 사람이 파티에서 빈 라덴을 목격했다거나, 마름모 패턴(빈 라덴이 그렇듯)으로 움직이는 남자들을 봤다는 농부의 증언 등 얼핏 듣기만 해도 믿지 못할 가설들이 편집증적으로 정보를 수집하는 CIA 부서 내부를 떠돈다. 관객은 이미 어떤 정보가 진짜인지 알고 있으나, 등장인물들은 “건초더미에서 바늘 찾듯”(캐스린 비글로) 믿을 만한 정보를 가려내야 하는 상황이 <제로 다크 서티>의 서스펜스를 길어올리는 원동력이다. G 녹색빛 작전 Green Light Operation 모든 희생과 노력을 감수한 끝에, 네이비 실 부대가 빈 라덴의 은신처에 잠입하는 마지막 35분의 전투 신은 <제로 다크 서티>의 백미다. 보는 이들에게 “당신이 거기 있다”는 느낌을 주고 싶었던 캐스린 비글로는 촬영에 있어 쉽지 않은 선택을 했다. 실 요원들이 야간 습격 당시 투시경을 끼고 봤던 그 모습 그대로, 야간 투시 렌즈를 카메라에 장착해 화면 전체를 녹색빛으로 채운 것이다. “야간 투시 렌즈는 조도가 0이었을 때 작동 가능하다. 100여명의 제작진과 실 팀을 연기하는 22명의 배우들이 칠흑같이 어두운 돌무더기 세트장에서 터벅터벅 걷는 경험은 굉장히 흥미로웠다.” 캐스린 비글로의 말이다. 보통의 감독들은 야간 투시의 느낌을 살리고 싶을 때 일반적인 방식으로 촬영을 진행하고 후반작업에서 그 문제를 해결한다. 하지만 비글로는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다. 그 어떤 조명 없이 작업해야 했던 촬영감독 그레이그 프레이저의 떨리는 가슴을 누가 짐작이나 할 수 있겠냐마는, 영화를 본 이라면 누구나 여장부 캐스린 비글로의 모험이 시도해볼 만한 가치가 있었다고 생각하게 될 거다. H 홈랜드 Homeland <제로 다크 서티>의 히로인, 마야와 비견되는 인물은 미국 전쟁드라마 <홈랜드>의 캐리(클레어 데인즈)다. 그 역시 CIA 요원인 캐리는 이라크에서 8년 동안 구금됐다 풀려난 브로디 하사가 테러조직에 매수됐다고 생각하지만, 그녀를 제외한 모든 이들은 브로디가 전쟁영웅이라고 생각한다. 포스트 9.11을 맞이한 미국의 트라우마와 편집증을 온몸으로 대변하는 캐리는 <제로 다크 서티>의 마야를 보기 전 반드시 예습해야 할 인물이다. I 정보국 Intelligence Agency “펜타곤과 CIA가 <허트 로커>의 엄청난 팬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영화에 대한 미국 정보국의 지원을 두고 <엔터테인먼트 위클리>는 이렇게 평했다. 캐스린 비글로에게 여성으로서는 아카데미 역사상 최초의 감독상을 안겨준 <허트 로커>는 미국의 대테러전을 소재로 한 비글로의 두 번째 영화 <제로 다크 서티>의 제작 지원에 큰 도움을 줬다. 공화당 의원 피터 킹과 사법감시단이 정보공개법에 따라 요청한 자료에 의하면, CIA는 빈 라덴 암살작전을 소재로 영화를 만들려 한 론 하워드와 이매진 엔터테인먼트의 지원 요청에 앞서 이런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우리는 영화적 위상, 제작의 실현 가능성을 고려했을 때 마크 볼과 캐스린 비글로의 영화가 더 가치있다고 생각한다.”(CIA 대변인 마리 하프) J 제시카 채스테인 Jessica Chastein <트리 오브 라이프> <헬프>를 통해 할리우드의 가장 주목할 만한 여배우로 급부상한 제시카 채스테인이 <제로 다크 서티>의 마야를 연기한다. 그녀에게 이 영화는 “그 어느 때보다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영화를 보면 채스테인의 말을 이해하게 될 거다. 캐스린 비글로는 빈 라덴을 집요하게 추적하는 마야의 모습을 담기 위해 요원으로서의 삶 이외의 모든 요소들을 거세했다. 그녀의 가족, 연인, 친구, 생각. 달리 말해 전쟁영화의 여성 캐릭터들이 관습적으로 안고 있는 요소들을 제시카 채스테인은 고민할 새가 없었다. “마야는 별다른 설명 없이도 파악돼야 하는 캐릭터다. 그녀의 외모, 눈빛,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로부터 마야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야 했다. 이건 <헬프>에서 셀리아 풋을 연기할 때처럼 목소리와 몸 상태를 바꾸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작업이었다.” 캐스린 비글로의 여전사가 되는 길은 그렇게 험난했다. K 캐스린 비글로 Kathryn Biglow “비글로가 만든 가장 인상적인 영화, 그리고 그녀의 가장 사적인 영화다.” <할리우드 리포터>의 토드 매카시는 <제로 다크 서티>를 이런 작품으로 정의했다. 이 영화가 비글로의 전작 <허트 로커>를 제치고 가장 인상적인 그녀의 영화가 되리라는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 비글로의 가장 사적인 영화라는 점에는 동의한다. <블루 스틸>의 제이미 리 커티스, <스트레인지 데이즈>의 안젤라 바셋처럼 비글로의 영화에는 종종 강인한 여성들이 등장했으나 <제로 다크 서티>의 마야만큼 비글로와 닮아 있는 여성 캐릭터는 없었다. 영화의 초반부, 블랙사이트로 파견된 마야를 두고 남자요원들은 수군거린다. “이런 문제를 맡기에 너무 어리지 않나?” 어쩌면 여성으로서 할리우드의 마초적인 영화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비글로가 실제로 겪었을 편견들. 그녀가 <제로 다크 서티>를 연출하며 마야의 여성성을 유추할 수 있는 그 어떤 장면도 할애하지 않은 건 여성이라는 이유로 자신의 유능함이 평가절하됨을 경험했던 비글로의 자전적인 모습이 반영된 것일지도 모른다. L 로케이션 Location 아보타바드의 야간 습격 장면은 <허트 로커>의 주요 로케이션이기도 했던 요르단 사막에서 촬영됐다. 비글로는 습격 장면의 흐름이 끊기지 않도록 배우들의 동선을 고려한 빈 라덴의 은신처를 실제 규모로 짓길 원했다. “16피트 높이의 장벽과 외부와 차단된 창문들, 그 안을 둘러싼 7피트의 벽”을 완비한 빈 라덴의 요새는 10주간에 걸쳐 재창조됐다. 영화의 첩보 장면은 인도 찬디가르 등의 지역에서 촬영했는데, 모슬렘 복장으로 힌두 지역을 돌아다닌다는 이유로 한때 폭도들이 제작진을 위협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고 한다. CIA의 블랙사이트 지역은 폴란드의 단스크에서 촬영했다. M 마크 볼 Mark Boal <허트 로커>로 시작된 캐스린 비글로의 재기의 일등공신은 이 남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허트 로커>에 이어 <제로 다크 서티>의 각본을 맡은 시나리오작가 마크 볼은 프리랜서 기자다. 마크 볼은 폴 해기스의 이라크 전쟁영화 <엘라의 계곡>의 각본을 쓴 뒤, 역시 전쟁영화 <허트 로커>를 준비하던 비글로와 인연을 맺었다. <엘라의 계곡>의 원안 기사를 잡지 <플레이보이>에 연재하며 그가 발굴한 정보원들은 <허트 로커>와 <제로 다크 서티>의 리얼리티를 구현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깊은 조사를 통해서만 파악할 수 있는 퍼즐 조각이 있었다. 이 영화를 위한 자료조사는 그야말로 진빠지는 일이었고 엄청난 시간이 소비됐다. 마크의 조사 능력과 경험이야말로 빈 라덴 추적의 복잡한 과정을 탐구할 수 있게 했다.”(캐스린 비글로) N 네이비 실 Navy Seal 세계 최강의 엘리트 부대라 불리는 미 해군의 특수부대. 빈 라덴의 최후를 집행하고 목격한 부대이기도 하다. 지난해 9월, 마크 오언이란 필명을 쓰는 네이비 실 전직 대원이 빈 라덴 사살 과정을 다룬 <노 이지 데이>라는 책을 출간해 화제가 된 바 있다. 그는 “빈 라덴을 초기에 제압한 뒤에도 그가 더이상 움직이지 않을 때까지 수차례 총격을 가했다”고 책에서 밝혔고 영화 또한 그런 장면을 반영하고 있다. O 오바마 Obama 오바마 정부와 <제로 다크 서티> 제작진의 밀월 관계와 더불어 이 영화의 큰 이슈 중 하나는 과연 오바마 대통령이 영화에 모습을 나타낼지에 대한 것이었다. CIA 첩보 과정을 무미건조하게 다루는 <제로 다크 서티>에는 대통령의 말 한마디로 작전이 일사불란하게 실행되는, 애국주의적인 장면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오바마가 직접 모습을 드러내는 건 단 한 장면, CIA 사무실의 TV 화면에서다. “미 정부는 고문을 자행하지 않는다”는 오바마의 성명이 울려퍼지는 순간을 CIA 요원들은 심드렁하게 쳐다본다. 민주당도, 공화당도 좋아할 만한 장면은 아니다. P 정치적 논쟁 Political Controversy 미국 대선을 피해서 개봉했음에도, <제로 다크 서티>를 둘러싼 정치적 논쟁은 끊이지 않고 있다. 공화당쪽은 마크 볼과 캐스린 비글로를 비롯한 영화의 제작진이 공개되지 않은 비밀 문서에 접근할 권한을 실제로 가졌는지에 대해 꾸준히 추적할 것이라고 말했다. Q 말, 말, 말 Quote “이 영화는 실제 사건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제로 다크 서티>는 미국에서 비밀스러운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여러 정보원들의 ‘말’로 구성된 영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네이비 실의 빈 라덴 암살 작전에 대한 서적들이 쏟아져나오고 있음에도 마크 볼이 굳이 관계자들의 증언을 직접 듣길 고집한 건, 팩트의 중요성을 아는 기자 정신 때문이었다. “나는 국가 안보에 대한 정말 훌륭한 보도가 있다는 점도 알지만, 현실과는 멀리 떨어진 기사가 있다는 점도 안다. 훌륭한 책이 나올 때까지 기다릴 시간이 없었다.” R 실존 인물 Real Person 마야의 롤모델을 비롯해 <제로 다크 서티>의 시나리오작가 마크 볼이 도움을 받은 정보원들은 철저히 신원을 보호받고 있다. 노출을 꺼리는 그들의 예민함이 어느 정도인지는 의 기사를 참고할 것. “2008년, 시나리오작가 마크 볼은 퇴임한 특수부대 요원과 약속을 잡았다. (중략) 볼은 그를 만나기 전까지 약속이 잡히리라는 사실도 몰랐다. 요원은 GPS로 위치를 알려줬다(나중에 그 장소는 주유소로 밝혀졌다). 미팅은 짧았다. 정보 교환에 대한 보증도 없었다. 그의 첫마디는 이랬다. ‘내가 왜 당신과 얘기해야 하는지 합당한 이유를 대보시오.’ 마크는 ‘여하간 만나서 반갑습니다’라고 인사했다. 마크 볼은 할리우드 시나리오작가가 언제나 밥 우드워드(워터게이트 사건을 폭로한 기자)를 닮을 수는 없다는 걸 깨달았다.” S 음향편집 Sound Editing 작품상, 여우주연상을 포함해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 5개 부문에 오른 <제로 다크 서티>는 <007 스카이폴>과 음향편집상을 공동 수상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음향편집의 묘미를 느낄 수 있는 장면은 후반 35분의 습격신이다. 은신처로 접근하는 스텔스 전투기의 프로펠러 소리, 문을 폭파하는 소리, 총성으로 가득한 이 영화의 마지막 35분은 별다른 대사 없이도 긴장감을 끌어낼 줄 아는 음향편집의 승리다. T 트리플 프론티어 Trifle Frontier 캐스린 비글로-마크 볼이 <허트 로커>를 끝낸 뒤 준비하던 영화. 남아공의 마약 범죄를 소재로 한 이 저예산영화의 제작을 파라마운트가 지체하자, 비글로와 볼은 <제로 다크 서티>의 전신인 <킬 빈 라덴>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U UBL Ussamah bin Ladin CIA 요원들은 오사마 빈 라덴을 UBL(Ussamah bin Ladin)로 불렀다. 회고록 <노 이지 데이>에서 마크 오언은 빈 라덴이 최후의 은신처에서 발각되었을 때 무력한 상태였다고 밝혔다. UBL이 끝까지 저항했다는 미국 정부의 주장과는 반대되는 진술이다. <제로 다크 서티>에서도 빈 라덴이 쓰러지는 건 한순간이다. 보이지 않던 그는 서방세계를 위협하는 공포의 대상이었으나, 아보타바드 호화 은신처 바닥에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진 빈 라덴은 주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V VS 어디까지가 영화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인지에 대한 논란이 분분하다. 이에 <텔레그래프>는 ‘<제로 다크 서티>: 팩트 vs 픽션’이라는 주제로 전문가들의 의견을 물었고 그중 가장 흥미로운 차이는 네이비 실 요원의 증언에서 비롯됐다. 그의 말에 따르면 빈 라덴의 암살은 영화보다 훨씬 건조하게 진행됐다. 그를 저격한 뒤, 모두가 비명을 지를 뿐 영화에서처럼 오사마의 이름을 소리쳐 외칠 생각조차 못했다고. W 전쟁영화 War Film 폭탄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아드레날린을 분출했던 <허트 로커>의 폭탄전문가 윌리엄 하사(제레미 레너)를 기억하는가. <제로 다크 서티>는 다큐멘터리 형식을 차용한 영화이며 <허트 로커>보다는 장르적인 재미가 덜한 작품이지만, 비글로의 전작과 마찬가지로 전쟁이 주는 스릴의 순수한 즐거움을 굳이 외면하지는 않는 영화다. <허트 로커>에 등장했던 사제 폭탄들이 고루한 문서와 사진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마야의 선배는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하기도 한다. “저기, 아부 아흐메드(빈 라덴의 접선책)가 네 아기인 건 아는데… 이제 탯줄 끊을 때가 됐어.” <제로 다크 서티>는 테러리스트로 이어지는 탯줄을 끊지 못하는 첩보중독자 여성 요원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X X파일 X File “나는 시나리오작가로 이야기에 접근하되 마치 (전장에 나간) 리포터처럼 과제를 해야 했다”고 마크 볼은 말했다. 그가 <제로 다크 서티>를 통해 선보인 빈 라덴 은신처의 세부적인 모습과 이를 묘사하는 데 기여한 수많은 익명의 정보원들은 미국 언론이 풀어야 할 새로운 X파일이 되었다고 외신 매체들은 보도한다. Y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과제들 Yet 모든 작전이 끝난 뒤, “어디로 가길 원하세요?”라는 비행사의 질문에 마야는 대답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녀는 아무 생각이 없음을 깨닫는다. 이 장면이 마야를 넘어서는 무언가를 보여준다”고 주연배우 제시카 채스테인은 말한다. 미국과 중동의 테러전은 추적하고 죽이는 일 이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전쟁기계’들을 낳았고, <제로 다크 서티>는 전쟁의 부속품처럼 소비되는 사람들을 무미건조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영화다. Z 제로 다크 서티 Zero Dark Thirty 영화의 원제인 ‘제로 다크 서티’는 오전 12시30분을 일컫는 군사용어로, 하루 중 가장 어둡기 때문에 군사작전이 용이한 시간으로 알려졌다. 제목의 뜻대로 비글로의 신작 <제로 다크 서티>는 미국 첩보국의 가장 비밀스러운 임무를 사실적인 필치로 그려내는 데 성공했다. 무엇보다 고문 같은 전쟁의 추악한 이면을 완전히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은 채, 전쟁의 본질 그 자체를 담아내려는 노력을 높게 평가할 만하다. <제로 다크 서티>는 애국주의와 적에 대한 증오로 무장한, 감상주의적인 전쟁영화에 냉소를 보내는 21세기 미국 전쟁영화 장르의 현재를 보여준다. 그 점만으로도 이 영화를 볼 가치는 충분하다.

[김소희의 오마이 이슈] 대통령의 일머리

초등학생이 된 아이 방을 창고가 아닌 방으로는 만들어줘야겠다 싶어 벽장부터 비우기로 했다. 문제는 이것이 엄청난 ‘도미노 효과’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꺼내 분류해서 넣을 곳을 보니 그곳에는 다른 짐뭉치가 있고 그 뭉치를 정리해 옮길 곳을 보니 그쪽도 사정은 간단치가 않고…. 으아악. 몽땅 쓸어버리는 게 나을 뻔했다고 여기며 집 한구석에 쌓아놓고는 이번 생애 저것들을 다 정리할 수 있으려나 노려보다가 가자미눈이 되어 애 입학식에 참석했다. 담임선생님 얼굴? 늦게 가서 잘 모르겠다. 전직 대통령께서는 잡념없이 바쁘게 살면 건강에 좋다는 ‘말씀’을 남기셨는데(그분이 바쁘게 산 덕에 많은 걸 잃은 분들이 들으면 건강까지 나빠질 지경이겠다) 몇날 며칠 잡념없이 바쁘게 집을 뒤집은 결과 허리는 욱신대고 팔다리는 후들거린다. 살림의 여왕들이 보면 코웃음칠 수준이지만 일머리 없는 나로서는 이렇게 수족이 고생한다. 새 대통령도 일머리가 부족하신 것 같다. 새봄맞이 ‘인사 도미노’에 너무 진을 빼신다. 준비된 여성대통령을 내세운 것치고 참으로 답답하다. 당장 임명장 주거나 일 시켜도 될 자리는 방기하고 국회의 ‘정부조직법 처리 지연’ 탓만 하며 “비상 국정운영”을 들먹이는 것은 완벽주의의 폐단일까 몽니일까 아니면 ‘잡념’ 탓일까. 변화될 부처에서 일하는 한 친구는 요새 인터넷 서핑에 매진하며 괜찮은 혼수가구(십수년 전에 결혼한 니가 왜), 주꾸미 맛있게 하는 집(이건 도움됐다) 따위를 뒤지는 것으로 세월을 보낸다. 국방장관 후보자는 비록 예편한 신분이긴 하나 천안함 침몰사건 다음날 골프를 치고 순직장병 애도기간에도 골프를 쳤다. 연평도 포격사건 다음날에는 일본으로 온천관광을 다녀왔다. 보통 사람들도 텔레비전 속보에서 눈을 떼지 못할 때였다. 그에 앞서 현직(1군사령관) 시절에는 “군대 내 자살은 개인문제”라는 인터뷰를 했다. 자신이 책임지던 동부전선 최전방에서 총기난사 사건이 일어난 지 얼마 뒤로 범정부적으로 병영문화 전반을 심각하게 진단하고 개선책을 찾을 때였다. 놀러다닌 것보다 더 개념없는 인식의 일단이다. 대통령이 내보일 강단과 결기는 싸고돌 사람과 내쳐야 할 사람을 가르는 일에 먼저 쓰여야 한다. 그게 일의 순서다.

[신 전영객잔] 슬픔은 어디서 보아야 하는가

7년 전 어느 밤에 서간체 형식의 짧은 칼럼 하나를 쓴 적이 있다. 양영희의 다큐 <디어 평양>에 관한 것이었는데 양영희가 아버지와 자신의 관계를 그려낸 방식에 대해 내가 느낀 감동을 적었고 그 표현 중에는, “당신의 영화가 보여준 만드는 자로서의 ‘나’와 카메라와 대상으로서의 존재 그 사이에서 뛰던 관계의 맥박을 나는 쉽게 잊기 힘듭니다”라는 감탄의 표현도 있었다. 양영희는 왜 아들들을 북송시킨 아버지의 과오를 역사의 자리에서 냉정하게 다시 생각하지 않는가. 그건 일종의 회피가 아닌가, 하고 비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위의 칼럼을 쓰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웬만한 영화평론가보다 뛰어나고 날카로운 영화적 안목을 갖춘 유명감독 한분이 사석에서 내게 위의 칼럼을 언급하며 그와 같이 <디어 평양>을 비판했다. 내게는 그 영화의 어떤 결여된 객관성을 지적하는 말로 들렸는데, 그 비판이 일견 정당하다고는 생각했어도 공감은 끝내 못했던 것 같다. 그 영화의 주관적 특수성을 그 감독은 불편하게 느꼈던 것 같고 나는 용인했던 것 같다. 이런 오래된 기억들을 새삼 돌아보는 계기를 갖게 된 건 양영희의 첫 번째 극영화 <가족의 나라>를 보고 나서다. 이 영화를 먼저 본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울음바다가 된 극장 안의 풍경을 전해주었다. 깊은 식견과 섬세한 필력을 지닌 문학평론가 정홍수 선생께서 이 영화를 보고 손수건을 다 적실 만큼 눈물을 흘렸다고 말해주셔서 그 의견이 궁금한 나머지 나는 영화를 보기도 전에 냉큼 평문부터 청탁 드리기도 했다. 내가 신뢰하고 존경하는 많은 이들이 그렇게 이 영화의 감흥을 미리 말해주었다. 그런데 영화를 본 나는 결국 울지 못하였다. 눈물을 흘리고도 욕이 나오는 영화들이 많지만 이 영화의 눈물은 감동과 직결되는 것이라 솟지 않은 눈물이 더 난감했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웠는데 그 뒤에는 궁금했다. 눈물에도 스포일러가 있어서인가. 혹시라도 풍문이라는 예방주사를 너무 맞아 둔감해진 것인가. 혹은 재일 한국인과 북송사업에 관한 나의 역사적 무지나 무관심 때문인가. 그도 저도 아니면 나 홀로 감성의 가뭄에 시달리는 것인가. 역사적으로는 불우하고 한 가족의 일생으로서는 안타깝고 영화적으로는 수준 이상의 격식을 갖춘 이 영화를 말하며 비 공감의 고백을 늘어놓는 건 욕먹기 십상이다. 그럼에도 나는 내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는 피하지 못할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가운데 내가 신뢰하는 다른 이들의 눈물의 가치를 폄훼하지 않으면서 나의 그 감정적 난처함의 경험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고 싶어졌다. 다큐 감독이 극영화를 택하는 이유들 다큐를 만들던 감독이 왜 극영화를 만들게 되었을까. 여기서부터 시작해보자. 양영희의 차기작이 극영화라는 소식을 접했을 때 반사적으로 들었던 생각이다. 다큐 감독으로 연출 경력을 시작했으나 극영화 감독으로 돌아섰던 폴란드의 거장 크지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는 자서전에서 자신을 다큐에서 극영화로 옮겨가도록 만든 일화 하나를 전하고 있다. 그가 <스테이션>(1981)이라는 다큐를 촬영 중이던 때다. 새벽녘에 그를 찾아온 경찰이 전날 밤 촬영팀이 촬영한 필름들을 무작정 압수해갔고 시간이 지나서야 돌려주었다. 얼마 뒤에야 키에슬로프스키는 그 이유를 알게 됐다. 자신들이 촬영하고 있던 그날 그 기차역에서 어머니를 살해하고 토막 내어 가방에 나눠 담은 한 소녀가 시체가 담긴 가방을 그 역의 사물함 어딘가에 넣었다는 것이었다. 키에슬로프스키의 영화에 그 행각이 담기진 않았지만 그는 카메라가 왼쪽으로 조금이라도 돌아가기라도 했다면 자신의 영화가 범죄행위를 입증하는 경찰의 정보 제공물 신세가 되었을 거라는 생각에 치를 떨었다. 다큐가 태생적으로 세상의 증인 역할을 한다는 것에 대해 새삼 깨닫게 된 어두운 일화다. 하지만 오로지 그 이유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 일화를 전하며 키에슬로프스키는 더 중요한 생각을 밝힌다. 요약건대, 그의 카메라가 누군가에게 더 다가가기를 원할 때마다 대상은 더 멀어지거나 마음을 닫는다며, 그의 기록의 카메라가 사랑을 그리고 싶다고 하여 사랑을 나누는 인물들의 침대에 들어갈 수 없고 죽음에 관한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하여 누군가가 죽어가게 할 수는 없으니, 그러한 결핍감을 이유로 다큐를 떠나 극영화로 가게 되었다고 그는 말한다. 여러 차례 인용된 바 있는데, 다큐 <동>을 촬영하던 중에 극이 필요하다고 느껴 <스틸 라이프>를 연출한 지아장커는 다르지만 또 유사하게 말했다. “다큐멘터리는 그 사람의 생활을 찍지만 다가가면 갈수록 사람들은 자신의 비밀스러운 부분을 방어하려고 합니다. 내가 그의 비밀 안으로 들어가려면 이야기가 필요해집니다.” 양영희도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다큐멘터리는 카메라를 대고 찍히는 모습을 보는 과정이다. 섬세하고 미묘한 순간이 있지만, 대상이 마음속에 있는 말들을 꺼내주지 않으면 말로 되어 나오지 않는다. 반면 극영화는 마음속에 카메라를 설치해놓고, 마음속에 있는 말을 꺼내놓는 과정이다.” 기록하는 것으로는 어쩌지 못하는 것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가운데 그것들을 표현하고 싶어질 때 그 다큐의 감독들은 극영화의 세계로 갔다. 반면에 어떤 위대한 다큐 감독들은 기록할 수 있는 것을 최선으로 기록해내서가 아니라 도저히 기록할 수 없는 것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실패하여 인정함으로써 어떤 극영화보다도 위대한 다큐를 만든다. 우린 위대한 다큐 감독 김동원과 <송환>의 예를 잘 알고 있다. 어쨌거나 다큐에서 극으로 옮겨간 이들은 다큐가 할 수 없는 일을 극이 하게 하라는 명제를 신봉하게 된 것이다. 일반적이라면 다큐에서 극영화로의 이런 이동에 관하여 말할 때 사실의 기록을 중시하는 공고한 객관적 세계(다큐의 세계)에서 상상적 허구를 허용하는 지극히 주관적인 세계(극의 세계)로 옮겨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키에슬로프스키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지난 두편의 다큐 <디어 평양>과 <굿바이, 평양>에서 <가족의 나라>로 옮겨간 (그리고 다음 영화도 극영화를 계획 중이라는) 양영희의 경우도 그러한가 생각해보면 이 경우는 양상이 조금 다르다. 예컨대 양영희는 지난 두편의 다큐를 만들면서 객관에 의존하는 것을 처음부터 자신의 창작 반경 안에서 주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거나 주관 안에서만 보는 데 몰두한 것 같다. 그 점은 <디어 평양>에서 특히 매혹적인 장점이었다. 양영희의 다큐는 원래부터 강력한 주관성의 힘으로 작동했다. 그렇다면 양영희의 극영화는 어떠한가. <가족의 나라>는 다소 놀랍게도 주관적이기는커녕 자기의 이야기를 매우 객관적으로 그리고자 한 것 같은 인상을 일차적으로 전하고 있다. 그런데 이 점은 실은 의아하다. 양영희가 다큐에서 극영화로 가면서 그녀 자신이 원했던 것, 그러니까 사람의 마음 또는 비밀 또는 하지 못한 말들, 그건 객관적 태도로는 얻어지기 힘든 것이라고 그녀 스스로 결론내리고 인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객관이 아니라 여전히 주관의 문제에서, 그러나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아마 그럴 것이다. 다만 그러기 위해 지금으로서는 이 논의를 조금만 더 잠정적으로 끌고 가보자. 카메라가 고수하는 특정 시점에 대한 의문 물론이지만 어떤 극영화는 충분히 사태를 객관적으로 묘사할 수 있다. <가족의 나라>도 그 조건을 다 갖추고 있는 것 같다. 북송선에 실려 북한에 가서 살고 있는 리에의 오빠 성호는 뇌에 종양이 생겼다. 북한의 의술로는 치료받을 가망이 없어진 성호는 치료를 받기 위해 겨우 당국의 허락을 얻어 일본에 왔다. 하지만 체류 기간으로 허락받은 3개월 중 단 3일 만에 돌아가야만 하는 처지가 되고 만다. 이렇게 슬프기 그지없는 이야기이지만 영화는 비교적 차분한 톤으로 진행된다. 영화에서 인물들은 몇 차례 감정적으로 폭발하기는 하지만 대개는 3일간의 일상을 그저 수긍하는 사람들로 그려진다. 그 전반적인 차분함이 양영희가 자신의 이야기를 객관적 태도로 지켜보려 했다는 인상을 주며 한편으론 담백해서 좋다는 감상도 얻어낸다. 영화를 본 동료 기자도 이 영화의 장점은 그런 담백함에 있었다고 말해주었다. 그런데 이같은 인상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하나 있다. 서사와 인물을 다 말하고 나서도 <가족의 나라>를 말하기 위해서는 결국에 말해야 하는 것, 그건 영화가 어떻게 이 이야기와 인물들을 보여주느냐의 문제다. 그리고 영화에서 어떻게 보여주느냐 하는 문제는 이른바 시점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가족의 나라>에는 주요 장면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특정 시점이 있다. 영화에서 인물들의 감정의 격류가 흐르는 몇 장면에서 특히 더 두드러지고 있다. 초반부의 가장 극적인 장면 중 하나를 꼽으라면 우리는 성호가 옛 일본 집으로 찾아드는 걸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성호가 차에서 내려 골목을 따라 집으로 걸어가면 어머니가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 골목길을 걸어가는 성호를 몇 발짝 거리를 두고 쫓아가던 카메라는 성호와 어머니가 만나는 순간에 성호의 왼쪽 뒤편으로 휙 하고 돌며 모자의 상봉을 그 자리에서 비춘다. 혹은 성호가 여동생 리에에게 북의 공작원이 되어주지 않겠느냐고 넌지시 말한 다음 그에 화가 난 리에가 성호에게 화를 내는 장면에서도 유사한 시점이 등장한다. 카메라는 차마 동생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무안함과 죄책감을 삭이는 성호의 누운 왼쪽 옆모습을 역시 비슷한 거리에서 담아내고 있다. 한편, 결국에 자신을 북송시킨 아버지에게 성호가 화를 참지 못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때 “결국 하는 말은 그것뿐이로군요”라고 결정적인 대사를 하기 전까지 오랫동안 카메라는 종전의 장면들과 마찬가지로 유사한 자리에서 그를 잡는다. 카메라에 담기는 저 인물들에게서 서너 발짝 떨어진 비스듬한 뒤쪽 특히 왼편에서의 시점이 유독 <가족의 나라>에서는 많이 등장한다. 왼쪽과 뒤편이라는 자리가 중요하기보다는 그와 같은 고정된 시점의 자리가 상존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시점>이라는 개론서를 쓴 조엘 마니는 시점에 관하여 우리의 상식에 준하여 이런 설명을 한다. 가령 죽은 나무나 바위가 사람이나 동물의 형상으로 보일 때가 있는데 그걸 더 잘 보여주기 위해서 어떤 사람은 누군가에게 “이 각도에서, 내 자리에 와서 보세요. 자, 어떤 것이 보이나요? 당신에게도 그 형상이 보이죠?”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그 표현 자체가 시점의 구성 원리를 경험적으로 설명한다”는 것이다. “시네아스트는 카메라를 단지 가장 좋은 시선의 지점에 위치시킬 뿐 아니라, 관객에게 ‘자신의’ 시각과 ‘자신의’ 시점을 전달할 수 있는 장소에 위치시키는 것이다. 물론 이 경우 시점이란 물리적 의미의 시점을 뜻하지만, 심리적 의미의 시점, 나아가 정신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의미의 시점을 가리키기도 한다”고 그는 적고 있다. 영화의 카메라가 특정한 자리에서의 물리적 시점을 고수할 때 거기에는 그 대상이 이해되기를 바라는 창작자의 이해의 지평이 함께 깃들어 있다는 뜻일 것이다. 그렇다면 양영희는, 카메라가 사람의 마음을 드러내기를 바라면서 극영화를 만들게 된 양영희는, <가족의 나라>에서 우리를 그 자리로 자주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자 여기로 와서 보세요, 제가 있는 자리로 와서 보세요, 그래야 저들의 마음이 잘 보입니다, 저들의 슬픔이 잘 보입니다. <가족의 나라>의 이 특정 시점은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 거기에는 얼마간의 기원이 있는 것 같다. 가령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한 한 가지 비교대상이 될 만한 영화로 <워낭소리>를 들 수 있다. <워낭소리>는 다큐인데도 불구하고 극화를 강조하기 위해 인위적인 시점숏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감성을 자극했다. 그러니까 다큐의 카메라가 할 수 없는 극적 시점의 구조라는 <워낭소리>의 이 활용을 인정하는 경우에는 공감을 백배 더 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이 영화를 기만적이라고 느끼게 된다. 비교컨대 <가족의 나라>에서의 쟁점은 시점이 놓인 자리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있다. <가족의 나라>는 <워낭소리>와 반대의 방식을 취하고 있는 것 같다. 말하자면 <워낭소리>가 다큐에 극영화적 시점숏을 도입한 것이라면 <가족의 나라>는 극영화에 다큐적 시점을 도입하고 있다. 그것이 이 영화가 객관적이라는 인상에 큰 몫을 한다. <가족의 나라>에서의 핵심은 시점숏의 교차가 아니라 시점, 언제나 몇 발자국 떨어져 대상과 그들의 무리를 지켜보는 일관된 보기의 자리다. <워낭소리>에서 시점숏의 도입에 불편함을 느끼지 않은 부류와 그걸 느낀 부류가 감동의 크기가 달랐던 것처럼 이 영화에서도 이 시점의 자리에 갑갑함을 느끼지 않는 부류와 그렇게 느끼는 부류의 감상은 차이가 날 것이고 나는 아무래도 후자였던 것 같다.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이 다큐적 시점으로 인하여 <가족의 나라>에 관한 나의 감성적 감상은 오히려 방해 받은 것 같다. (극영화에서) 슬픔은 풍요로워야 더 슬프다 영화의 창작자 중 누구라도 그 자신이 특별히 선호하는 시점의 자리는 가질 수 있다. 그것은 기질과 취향과 사상의 문제인 데다 그 밖에 우리가 더 알 수 없는 요건들에 의해 결정되는 미묘한 문제다. 그런데 그때 핵심이 될 만한 물음은, 특히나 그것이 극영화일 때, 그 시점의 자리로 인하여 저 극화된 서사의 세계가 어떻게 보이게 되느냐는 것이다. 이때 중요한 조건이 한 가지 있다. 극영화에서의 시점은 전적으로 시점 자체의 자리가 강조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저 극이라는 세계의 독립적인 소우주를 자율적으로 돌아가도록 하는 암묵적인 자리로 스스로 가야 한다는 점이다. 다큐가 기록을 전제하듯이 극영화는 극의 자율이 기본적 전제다. 그러므로 이때의 시점은 기본적으로는 보여서는 안되며, 아니 그렇더라도 적어도 스스로를 드러내 무언가를 강제하거나 강박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극의 세계를 보장하는 기초적인 극영화 안에서의 시점의 약속이다. 모던 시네마의 시네아스트들이 카메라가 놓인 시점의 자리를 일부러 종종 드러내는 경우는 그 극영화의 약속을 일부러 위반하여 자기반영적 성찰을 얻기 위해서였다. 앞서 말한 <가족의 나라>의 그 시점은 그런 경우가 아닌데도 잘 숨겨지지 않을 뿐 아니라 숨겨져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것인 양 시종일관 강조되어 드러난다. 나로서는 그 특정 시점이 그렇게 자기의 자리를 계속 고집할 때 개인적으로 저 시점의 공고함으로 인해 극의 세계에 있는 인물들이 어딘가 주눅 들어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인상을 종종 받게 되었다. 그건 극의 인물들이 처한 갑갑함과는 별개의 갑갑함을 불러온다. 그러니까 시점의 자리로 인하여 저 극의 세계가 어떻게 보이느냐가 중요하다고 우린 말했다. <가족의 나라>에서는 그 특정 시점의 결과로 마치 무대 위에 올라 있는 배우들이 리허설을 하는 것을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가족이 모이거나 친구가 모였을 때 혹은 오빠와 동생이 모였을 때를 생각해보자. 그러니까 관계가 이뤄지는 중요한 장면에서 카메라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무리와 떨어져 자리를 잡고 조망하면서 그들이 대사를 할 때 그 대사의 향방을 따라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겨가며 이 상황을 관찰하고 중계하는 누군가 매개가 있음을 수시로 일깨우고 있다. 이 점을 두고 대상을 다루는 양식은 다큐에서 극으로 바뀌었으나 그 카메라의 존재론적 역량은 바뀌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디어평양>에서 카메라에 들어오는 것은 양영희의 눈을 대신하여 들어오는 것이다. 하지만 <가족의 나라>에서 카메라에 들어오는 것은 우리에게 직접 들어오는 것이어야 한다. 다큐가 위대한 것은 거기 카메라가 있다는 사실 때문이지만 극영화가 자유로운 것은 거기 카메라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없는 것으로 치부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족의 나라>에서는 앞서 말한 대로 극영화의 이야기가 다큐의 시점에 시종일관 묶여 있다는 인상이다. 카메라가 있지만 그것의 존재는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무매개성이 극영화의 가능성이라고 할 때, 어딘지 모르게 <가족의 나라>는 그 무매개성을 믿지 않고 오히려 매개하려고 하고 있다. 이야기가 지어졌다면 시점도 지어져야 하는데 양영희는 이야기는 짓고 시점은 기록하는 쪽으로 놓아둔다. 이 시점을 관찰과 중계의 시점이라고 이름 붙일 수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관찰과 중계의 시점이 지닌 어떤 거센 힘이다. 이 이야기가 다름 아니라 다큐로부터 그리고 양영희 자신의 실화로부터 파생한 것이라는 점을 이 관찰과 중계의 시점을 빌려서 계속 특권적으로 행사하려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한다면 그건 너무 지나친 것일까. 그러니 관찰과 중계라고 불렀지만 사실은 그 시점의 자리에서 개입과 권위의 효과를 느끼게 된다. 여기에는 지금 펼쳐지는 이 극이 자기의 극적 세계를 스스로 조직하고 가질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창작자가 갖고 있는 이상한 두려움이 있다. 정작 극을 취했지만 이것이 실화였음을 강조하려는 이 자세는 저 허구의 기적적인 자율성을 다큐적 시점으로 다스리려 하는 것 같아서 나의 사례처럼 몰입되지 않고 완성되지 않는 감상을 낳기도 하는 것 같다. 관찰과 중계의 역할을 넘어 어떤 관할의 무의식을 대변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서다. 그 무의식은 사실의 권위로, 다큐의 권위로 극을 관할하려는 무의식이다. 이 점을 두고 양영희가 원치 않았고 의도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혹은 다큐를 만든 감독이었기 때문에 극영화로 전환하면서도 바꾸지 못한 단순한 습관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족의 나라>에 주관이 작 동하였는데 그 주관이 긍정적 주관으로 이행되지 않고 부정적 주관으로 작동한 결과, 어떤 시각적 법령의 자리가 형성된 것만은 부인하기가 어렵다. 이것이 앞으로 양영희의 극영화를 옥죄게 될 시각적 대타자의 자리가 될 것인지 아니면 양영희만의 긍정적 원근법적 자리가 될 것인지 아직은 모르겠다. 다만 <가족의 나라>에서는 이 시각적 법령의 자리가 영화에 가능했을 무수한 조화를 가로막은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니까 나의 눈물은 그 조화를 목격하지 못해 실패한 것이라고 지금 이 순간 둘러대고 싶어진다. 양영희가 극영화로 하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나. 결국 조화였을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인물들의 내밀함을 드러내는 극적 기적을 바랐으나 그것이 시각적 대타자의 시선에 붙들려 적당한 격조 안에 머물게 되었다. 그러니 이 영화에 관해서라면 인물들의 마음 상태가 조화롭게 드러났다기보다는 몇개의 감정적 대사가 있었고 그 대사가 발생하는 순간을 포착할 수 있는 가장 특권적인 자리에 카메라가 있었고 그로써 내면의 외화라는 성취를 이뤄냈다고 믿게 하는 최면술이 작동했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물론 이것이 양영희 영화만의 특별한 면모로 승화될 수도 있는 일이겠으나 지금은 어쩔 수 없이 다소 메마르며 상투적인 그 인상에 대해 말할 수밖에 없었다. 연출자의 주관으로 세우되 저 인물들 사이의 물질적 관계 사이에서 기적이 일어나는 것. 결국 양영희가 바란 건 이 조화였는데 이 영화엔 그게 없다고 나는 느꼈으니, 다큐에서는 통하지 않을 말이지만 극영화에서는 억지를 부릴 만한 말을 하나 하고 싶다. 슬픔은 풍요로워야 더 슬프다. 영화의 맥박이 다시 뛰기를 몇년 전 어느 주말 아침에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국경의 남쪽>이라는 한국영화를 보았다. 한 남자가 사랑을 약속한 여인을 두고 탈북했고 서울에 정착했다. 남자는 곧 다른 여인과 사랑에 빠져 살림을 차렸는데 이윽고 북에 두고 온 여인이 필사적으로 경계를 넘어 남자를 찾아 서울에 도착했다. 그리고 둘은 현실의 벽을 넘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헤어진다. 가족의 문제가 아니라 남녀의 사랑이라는 큰 차이가 있지만 그 어떤 역사의 가정법도 통하지 않는 임시적 만남과 헤어짐이 주는 슬픔이라는 점에서 <가족의 나라>와 비교 가능한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북에서 온 여인이 남자에게 화가 나서 고작해야 화단의 돌을 몇개 집어 힘없이 던지는 저 순박한 행위를 했을때, 그때 그녀의 다소 굵은 음성과 무표정한 포기와 원망이 돌 몇개 에 실려 그렇게 촌극으로 끝나고 말았을 때, 어마어마하게 큰 감정과 운명의 소용돌이에 대한 극단적 반응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미숙하고 촌스러운 저 행위가 그녀의 마음을 행위로 확 하고 드러낸 것처럼 느껴져서 나도 모르게 눈물을 참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가족의 나라>가 <국경의 남쪽>보다 뛰어난 영화라고 생각하지만 연출자의 능력 범위를 순간 벗어나 생성되어버린 <국경의 남쪽>의 그런 자율적 기적의 순간이 <가족의 나라>에서는 더 절실했다고 나는 느낀다. 물론 <가족의 나라>에 그런 장면이 하나 있다면 그 시점의 자리를 끊임없이 벗어나 감정을 몰아오는 성호의 얼굴 혹은 배우 이우라 아라타의 얼굴일 것이다. 하지만 와카마쓰 고지의 <11•25 자결의 날>에서는 극단적 우익주의자이며 탐미주의자였던 일본의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를 연기하였고 지금 여기에서는 가냘프고 허약한 희생자를 연기하는 아라타의 얼굴만으로는 역부족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디어 평양>을 본 다음 감동에 젖어 “당신의 영화가 보여준, 만드는 자로서의 ‘나’와 카메라와 대상으로서의 존재 그 사이에서 뛰던 관계의 맥박을 나는 쉽게 잊기 힘듭니다”라고 과거에 썼던 건 그 관계의 거리감이나 그 거리를 포착하는 감독의 자리가 정확해서가 아니라 부정확하다 해도 자유롭고 생생하게 느껴져서다. 카메라와 대상의 생생한 거리와 그 거리를 찰나에 뛰어넘는 의외의 기적적인 디테일들이 함께 약동하는 걸 느껴서다. <디어 평양>은 그런 맥박이 느껴졌고 <가족의 나라>에서는 그걸 느끼지 못했다. 그러므로 지금으로서는, 양영희 영화의 맥박이 다시 뛴다면 그때 또 무엇이라도 감탄을 고백할 수 있을 것이라고 둘러대는 수밖에는 없겠다.

[must 10] 오랜만이야, 에드워드

1. 오랜만이야, 에드워드 영화도 보고, 전시도 보는 일석이조의 기회. CGV에서는 <가위손> <프랑켄위니> <링컨: 뱀파이어 헌터>를 번갈아 상영하는 팀 버튼 기획전을 연다. 관람 고객 전원에게 ‘현대카드 컬처프로젝트9 <팀 버튼 전>’의 초대권을 증정하는 이벤트도 함께한다. 3월15일부터 21일까지는 CGV명동에서, 3월22일부터 28일까지는 CGV명동역에서 만날 수 있다. 2. 전설의 외전 현재까지의 누적 판매량 1천만부. 한국 판타지 소설의 고전이 된 <퇴마록>의 이우혁 작가가 출간 20주년을 맞아 <퇴마록 외전>을 3월28일 출시한다. 시간의 흐름을 따르지 않는 중/단편 위주의 옴니버스 작품집으로, 본편의 맥락상 제외됐던 이야기들이 공개될 예정이다. 3. 사랑은 미술을 타고 화폭에 수놓인 멜로영화 속 명장면을 감상해보자. 부암동 서울미술관에서 <러브 액츄얼리(Love Actually)전>을 연다. 영화에 나타난 다양한 사랑의 모습을 미술작품을 통해 해석해보는 독특한 전시다. 각각의 내러티브를 갖춘 여섯개 섹션으로 구성돼 있으며, 3월14일부터 6월16일까지의 전시 기간 중엔 초청 강연과 무료영화 상영회도 마련된다. 4. 천천히 부드럽게 재즈 보컬 나윤선이 8집을 발표했다. 제목은 ≪Lento≫. 한국보다 프랑스에서 먼저 호평받아, 문화지 <텔레라마>로부터 만점에 해당하는 ffff를 받는 등 필청음반으로 꼽혔다. TV 광고음악으로 쓰였던 <아리랑>도 수록되었다. 5. 봄이 싫은 이유 예년보다 황사가 더 심해질 거란다. 미세먼지 농도도 최고조에 이를 예정이라니 당장 약국으로 달려가 황사 마스크를 구입하자. 가글 용품도 챙기고, 공기 청정기도 다시 꺼낼 때다. 따뜻한 차를 텀블러에 담아 자주 마시는 것도 좋겠다. 흡연자에겐 금연을 권한다. 황사가 기승을 부리는 동안만이라도. 6.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간머리 앤~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의 ‘피판 로드쇼’는 계속된다. 이번에는 지난 1월 개봉됐던 <빨간머리 앤: 그린게이블로 가는 길>이다. 3월29일 롯데시네마 부천역점에서 시민들을 대상으로 무료로 상영한다. 신청은 영화제 홈페이지에서. 7. 떡밥왕의 신작 미드 어느 한날한시에, 지구상의 모든 전기가 끊기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면? 줄거리에서부터 ‘떡밥왕’ 제작자 J. J. 에이브럼스의 취향이 확연히 드러나는 미드 <레볼루션>이 <폭스>에서 3월23일 자정부터 방영을 시작한다. 반전과 플래시백의 묘미, 기대하겠다. 8. 안되면 새로고침하면 되고~ 올해로 <한겨레> 인터뷰 특강이 10회를 맞았다. 올해 주제는 ‘새로고침: F5’이다. 강사로 나선 은수미 민주통합당 국회의원, 정재승 카이스트 교수(사진), 표창원 범죄심리학자, 홍세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전 편집장,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상임이사,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이 말하는 새로고침은 뭘까? 3월26일부터 4월10일까지 서울 용산 백범기념관에서 듣자. 수강신청은 온라인(hanter21.co.kr 또는 hanedu21.co.kr)으로만 받는다. 9. 뮤지컬영화의 신기원을 찾아 <레미제라블> 다시 보기, 다시 듣기. 블루레이와 O.S.T 앨범을 한데 묶은 한정판 디지북이 발매된다. 배우 인터뷰, 메이킹필름, 비하인드 스토리 등 알찬 스페셜 피처와 24쪽으로 구성된 북클릿이 함께 온다. 4월23일 출시예정으로 예약에 들어갔다. 10. <서칭 포 슈가맨> DVD 발매 음악이 얼마나 멀리까지 갈 수 있는지. <서칭 포 슈가맨>은 뮤지션이 모르는 새 그의 음악이 국경을 넘어 새 생명을 얻은 실제 사연에서 시작한 영화다. 극장에서 보지 못했다면, 이 DVD만큼은 놓쳐서는 안된다. 예술의 힘을 믿게 하는 영화.

우리의 아픔이자 슬픔이었던 것 <비념>

영화는 김민경 PD의 외할머니인 강상희씨의 개인사로 출발한다. 강상희의 남편 김봉수는 제주시 애월읍 납읍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 4.3 사건의 희생양이 되어 총살당했다. 강상희는 딸과 함께 10년 만에 남편과 시어머니의 무덤을 찾고 이후 카메라는 제주를 돌며 4.3 당시 학살이 일어났던 곳을 찾아가며 그 공간을 화면에 담는다. 돌과 나무, 물, 바람, 곤충 등 자연의 모습과 더불어 제주도가 세계 7대 자연경관으로 선정되었다는 뉴스가 나오는 텔레비전, 자동차, 라틴댄스를 추는 사람들의 모습들도 카메라는 함께 보여준다. 영화는 일본 오사카로 건너가 4.3 사건 전후 제주도에서 이주해 정착한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1949년 이덕구 부대가 토벌대와 맞서 최후의 항전을 벌인 이덕구 산전을 비롯해 주민들의 희생이 있었던 곳을 찾아가던 영화는 강정 마을까지 이른다. 학살이 일어났던 그곳에서 영화는 해군기지 건설을 둘러싼 여러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낸다. 그리고 영화는 다시 강상희 할머니가 혼자 살고 있는 집으로 돌아온다. <비념>은 언급한 줄거리의 요약만으로는 많은 부분을 설명할 수 없는 영화이다. 영화는 4.3 사건이나 강정 사태에 대해 진상을 규명하거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설명하거나 자신의 목소리를 크게 내지 않는다. 다큐멘터리에서 흔히 사용되는 내레이션도 없고 인터뷰도 많지 않다. 인터뷰가 나와도 말하는 사람은 많은 장면에서 보이지 않고 다른 화면으로 대체된다. 영화는 관객의 정서를 인물이나 이야기의 극적 전개로 끌어내지 않는다. 영화가 치중하는 것은 먼저 바위, 숲, 나무, 뱀, 쥐, 떨어진 귤, 눈 위의 발자국과 같은 이미지들이다. 영화는 자연의 정물과 인간의 풍경 사이에서 거리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자연적 존재이지만 자연과 분리되어서 풍경으로밖에 볼 수 없는 인간의 시선 속에서 기억과 흔적을 더듬어간다. 가까운 것 같지만 한없이 멀리 떨어져 우리를 꿈꾸게 만들고 꼼짝 못하게 만드는 권력과 반대로 흔적은 아무리 멀어도 가깝게 느껴지고 우리를 깨어나게 만든다. <비념>은 백 마디의 말을 선택하는 대신 한 할머니에게 새겨진 자국에서 시작해 이 시대의 우리에게 한없이 멀게만 느껴지는 4.3을 풍경의 바깥에서 깨어나게 만든다. 비념은 큰 규모의 굿과 다르게 무당 한 사람이 방울만 흔들며 빌고 바라며 기원하는 작은 규모의 무속 의례다. 영화는 제주의 무속 의례로 시작한다. 영화의 제목과 시작이 의미하는 것은 결국 애도이다. 영화는 그것의 방법으로 불편함과 낯섦을 택한다. 영화는 친절하지 않다. 영화가 친절하게 제시하는 것 같은 주민들이 희생된 곳의 지도조차 도보여행 코스인 올레길과 같이 명시되어 있다. 한때는 우리의 아픔이자 슬픔이었지만 언제부터인가 낯설게만 느껴지는 그것을 영화는 우리에게 같이 비념하자고 한다.

[신 전영객잔] 이런 무력함이라니

9.11 테러 이후 빈 라덴을 사살하기까지 CIA의 비밀활동을 다루며 여전히 첨예한 정치적 쟁점을 건드린 탓에 <제로 다크 서티>는 비교적 고른 지지를 얻은 <허트 로커>에 비해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실제 사건을 기반으로 하는 영화들에 따라오기 마련인 불평들, 이를테면 실제로 일어난 일을 왜곡했다며 온갖 증거들을 나열하는, 대개의 경우 영화 자체와 별 관계가 없는 비평들은 열외로 두자. <제로 다크 서티>에 대한 대부분의 비평들이 문제를 삼는 지점은 영화에 등장하는 고문장면에 대한 영화의 태도이다. 빈 라덴에 대한 정보를 얻는 과정에서 수감자들에 대한 고문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처럼 보여주고 있으므로 결국은 고문을 옹호하는 것이라는 비판적 견해가 한편에, 오히려 현실의 고문을 폭로하는 것이라는 견해가 다른 한편에 있다(“악은 어디에 있는가?”, <씨네 21> 894호). 캐스린 비글로는 이런 논쟁에 대해 <제로 다크 서티>는 판단을 내리는 영화가 아니라 현장감을 중시하는 영화라는 식으로 에둘러 방어하고 있지만, 고문이 어떻게 도덕적으로 중립적인 사안일 수 있냐는 비판을 피해가지 못하고 있다. 혹은 영화적 입장 앞에서의 지나친 신중함이 오히려 영화를 오해하기 쉽게 만들었거나 고문의 도덕성과 유효성에 대한 보다 심도 깊은 논의들을 가리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JonathanRosenbaum.com’, 2013년 2월 13일). 현장감이라고? 그런데 정작 내게 흥미로웠던 건 정치적으로 뜨거운 감자에 어쩔 줄 몰라 하며 어떤 식으로든 하나의 입장을 선택한 다음, 영화 안과 밖을 혼란스럽게 오가며 결국 논리를 단순화하는 미국 평단의 반응이 아니라, 이 영화가 한국에서 받아들여지는 방식이다. 이 영화를 보고 쓴 비평가들의 평이나 일반 관객의 단상은 대체로 ‘이 영화의 이데올로기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이라는 단서를 달고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 장르로서 영화가 주는 쾌감, 특히 그 현장감에는 매혹될 수밖에 없다는 견해를 공유한다. 말하자면 캐스린 비글로가 성취한 영화적 야심을 즐기면서 그 영화에 내재된 이데올로기는 불편해한다는 것이다. 그 태도를 문제 삼고 싶은 건 아니다. 어쩌면 이 간극은 모든 전쟁‘영화’들을 보면서 관객인 우리가 언제나 느낄 수밖에 없는 모순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고문을 옹호하는가, 아닌가에 대한 질문으로 <제로 다크 서티>를 판단하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해서라면, 나는 망설인다. 이 영화에는 그보다 복잡한 쟁점들이 있거나, 질문의 방향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고문을 방관하거나 자행했던 요원들이 텔레비전 화면으로 오바마 대통령의 대담을 보는 장면이 있다. 그는 미국은 그 어떤 고문도 도덕적으로 용인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데, 영화상 이미 수많은 고문장면들이 지나간 뒤이며, 요원들은 그 단호한 주장을 무감한 응시로 쳐다보고 일순간 정적이 감돈다. 매우 짧게 스쳐가지만, 이 순간의 모호함이 이 영화가 머뭇거리는 지점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영화를 비판하는 이들이 지적하듯, 그 모호함이 결국 영화의 위험한 태도라고 하더라도 나는 위와 같은 이분화된 입장 중 하나를 택하는 것보다 이 위태로운 지점에 머무르며 영화를 보려고 한다. 이 영화가 결국 고문을 정당화하고 말았다고 비판하는 견해들이 문제를 제기하는 지점은 고문장면 자체가 재현되는 방식의 윤리는 아닌 것 같다. 비판의 초점은 빈 라덴 사살작전을 위해서 고문이 어쩔 수 없는 필요악인 것처럼 그려지고 있으며, 고문 관련자들이 처벌을 받지 않는 상황에 맞춰진다. 말하자면 이들은 고문이 등장하는 시점이 아니라, 빈 라덴 사살작전이 완료되는 장면들이 지난 뒤, 즉 이 영화의 현장감이 클라이맥스에 달한 장면들을 즐긴 다음, 영화가 이 지점에 이르는 데 고문이 동력으로 작용했다는 점을 문제 삼는다. 여기에는 암묵적인 동의가 있는데, 그건 빈 라덴 사살장면의 영화 내외적인 함의를 일단 정당하다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좀 거칠게 말해, 이들의 질문은 선한 목적(악의 축을 제거)을 위해 악한 방법(고문)을 동원해도 되는가, 에 있지 그것은 과연 선한 목적인가, 그 목적이 은폐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에 있지 않다. 9.11 테러 이후 나돌던 음모론을 새삼 꺼내려는 것은 물론 아니다. 다만 나는 영화 속 고문의 쓰임새에 대한 문제제기 이전에 먼저 말해져야 할 것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이 전투장면에서 영화가 취하는 입장의 층위 혹은 정치성을 따지지 않고서, 이 영화의 고문에 대한 태도를 단정짓기는 어렵다. 그리고 이 전투장면의 목적이 많은 사람들의 지적처럼 생생한 현장감에 있다면, 전쟁영화에서 현장감이란 관객인 우리로 하여금 무엇에 반응하도록 하는 것인지, 그때 우리의 위치는 어디에 있는지에 대해서도 물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후반부의 전투장면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그와 일종의 짝을 이루는 영화의 도입부를 경유해야 한다. 암전된 화면 위로 9.11 테러 현장에서 실제로 녹음된 다급한 목소리와 아수라장이 된 상황의 노이즈가 파편적으로 흩어진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서사를 불러일으킨 현실의 결정적 사태가 초반의 검은 화면에 압축되어 있다. 십여년이 지난 일이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이미지로 생생하게 각인된, 우리가 이미 여러 차례 반복적으로 시청한 현실의 그 순간을 영화는 스펙터클화하지 않는다. 재난영화의 한 장면처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비현실적이어서 우리를 섬뜩하게 끌어당겼던 현실의 그 이미지가 정작 영화 안에는 지워져 있고 대신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음을 보증하는 현실의 목소리만이 거기 있다. 이와 달리 빈 라덴의 사살작전이 펼쳐지는 후반의 전투장면에서 우리는 특수 제작된 야간 투시경이 잡아낸 이미지와 개별 군인들의 숨소리에 포위된다. 현실에서 빈 라덴의 죽음을 직접 목격하지 못한 우리는 영화가 현장감의 구축을 위해 과잉되게 배치한 이미지와 사운드(실은 현실에서 우리의 자연적인 눈으로는 접근하지 못하고 기계의 눈으로 접근되는 ‘과도한’ 현실)에 밀착되어 마치 그곳에 있는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힌다. 말하자면 도입부와 이 후반의 전투장면은 어떤 식으로든 대응하는 것 같다. 영화가 현실에서 우리가 본 것을 이미지의 공백으로 만들고 우리가 보지 못한 것을 이미지의 과잉으로 살려내며 그 둘을 한줄로 엮어 마주보게 할 때, 우리에게는 몇개의 질문이 가능하다. 둘의 관계는 시각적 체험의 무기력한 자리로부터 최전선에서의 신체적 체험으로의 전환인가? 관객인 우리가 매혹되고 감독이 의도한 현장감이란 그 전환의 쾌감인가? 가상처럼 현실을 찢고 들어온 테러의 충격에 대한 영화적 대답이 후반부의 전투장면, 즉 현장감에 몰두하는 가상일까? 9.11 테러가 우리에게 안긴 무력감과 두려움,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부할 수 없었던 시각적 쾌감, 즉 현실의 언어로 설명 불가능한 사태의 구멍, 영화에서 암전된 화면으로만 접근된 그 심연을 빈 라덴 사살작전에 돌입한 후반의 시퀀스, 실은 우리로서는 허구로만 접근 가능한 과정들이 (정치적으로든 장르적으로든) 메워주고 있는가? 이 질문에 간단히 대답하고 말기에 빈 라덴의 은신처에 잠입하는 후반의 전투장면에는 좀더 들여다봐야 할 것들이 있다. 녹색 화면이 불안하게 흔들리는 이유 전쟁영화가 현장감을 강조할 때, 그 효과는 대개의 경우 시점의 문제와 분리될 수 없다. 영화가 우리를 양 진영 중 어느 쪽의 시점에 더 동일시하게 만드는지, 혹은 어느 개별 인간의 시선으로 상황을 겪게 하는지에 따라 우리가 느끼는 현장감의 쾌감은 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어떠한가? “요원들이 야간 습격 당시 투시경을 끼고 봤던 그 모습 그대로, 야간 투시 렌즈를 카메라에 장착해 화면 전체를 녹색 빛으로 채운”(“악은 어디에 있는가?”, <씨네21> 894호) 이 장면을 통해 캐스린 비글로는 관객에게 “당신이 거기 있다”는 느낌을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여기서 캐스린 비글로가 말하지 않은 건 당신이 있는 그 자리에서 당신이 점유하는 시선은 미군의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영화 안에서 그 시선은 일방적이다. 실제 현실에서는 어떤 식으로 빈 라덴이 제압되었는지 모르지만, 영화에서 우리는 빈 라덴쪽 사람들의 시선을 감지하지 못하고 저항의 움직임조차 제대로 보지 못한다. <허트 로커>에서 폭발물 처리반뿐만 아니라 관객을 불안하게 하는 건 미군을 쳐다보던 저항군의 시점숏, 혹은 파편적으로 흩어진 그들의 끈질긴 응시다. 아니, 영화는 그 시선의 주인이 저항군인지 민간인인지 분명하게 밝히지 않은 채 그 자리에 존재하게 두었고, 심지어는 폭발물이 터진 다음에도 이것이 그들의 소행인지 정확히 알려주지 않는다. 다시 말해 누군가가 미군을 숨어서, 혹은 드러내놓고 응시하고 있는데, 영화가 그 시선을 테러행위와 직접적으로 연결시키지 않아서 그 간극에서 종종 불길함과 두려움이 양산된다. 누군가에게 바라보인다는 사실, 타인의 시선에 노출된다는 사실 자체가 공격받을 가능성을 전제한다는 이 간단한 논리로 영화는 총과 폭탄에 의한 신체 절단이 주는 공포보다 더 지독하게 인간의 심리를 괴롭히는 불안을 보여준다. 그러나 <제로 다크 서티>에서 요원들이 상대 진영의 시선에 노출되어 있다는 느낌을 주는 장면은 거의 없다. 물론 마야가 집 앞에서 공격을 받는 장면이 있고, 요원들의 신원이 노출된 위험에 대해 말하는 장면들이 있지만, <허트 로커>에 비한다면 상대 조직의 시점은 거의 제거되어 있거나 무력하다. 특히 빈 라덴의 은신처를 습격하는 장면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제로 다크 서티>는 폭발물 처리반의 이야기가 아니니 영화가 시선을 운용하는 방식이 다를 수밖에 없겠지만, 시선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이 가능하다. 마지막 전투장면에서 우리가 느낀 현장감이란 관객의 시선과 미군의 시선, 그리고 카메라의 시선이 동일시된 결과로 받아들여도 될 것인가? 이 전투장면의 대부분이 미군이 낀 투시경의 녹색 빛 시야에서 진행되고 있으므로 표면적으로는 그렇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이상한 건 관객인 내가 영화 속 요원들의 시점으로 그 시공간을 따라가고는 있지만, 무언가에 의해 그 시선과의 동일시에 실패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다. 나의 시선과 현장에 투입된 미군의 시선과 카메라의 시선이 하나로 통합된 이 완벽한 환영 속에서 빈 라덴을 찾아 사살하기까지의 스릴, 긴장, 해소의 쾌감에 완전히 몰입할 수 없게 하는 무언가가 여기 작동하고 있는 것 같다. 영화이론가 피터 월렌은 ‘응시 이론에 대하여’라는 논문에서 카메라와 등장인물, 그리고 관객의 3중적 동일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인물과의 동일시를 유도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불편한 거리감을 만들어낸다고 말한 적이 있다. 관객인 우리가 등장인물의 생각, 동기 같은 것들을 공유하지 않으면서 단지 그의 지각만 공유할 때 동일시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등장인물에 대한 외부 시선을 통해서만 라캉이 ‘타동성’이라고 부른 것을 통해서만 심리학적으로 동일시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의 논리를 전적으로 이 영화에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따를 것이다. 하지만 위의 장면이 주는 이상한 느낌에 대해 중요한 힌트 하나를 얻을 수는 있다. 상대의 시점이 무력화되거나 아예 삭제되고 모든 상황이 투시경 속 ‘우리의’ 시선으로 봉합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 ‘우리’ 안에 심리적으로 완전히 동화될 수 없는 이유는 놀랍게도 거기 ‘우리’를 응시하는 상대의 시점이 없기 때문이다. <허트 로커>에서 여기저기 잠복한 타자의 응시가 우리의 불안을 자아냈다면, 여기서는 반대로 우리의 시선이 투시경의 시야를 벗어나 상대의 응시에 닿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우리의 불안이 나온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제로 다크 서티>의 전투장면이 미군의 시선으로만 진행된 데 대해 마치 과거 할리우드의 베트남전 영화들이 서구 중심적인 시선으로 전쟁을 바라본 것과 무엇이 다르냐고 비판한다면, 그 비판은 틀렸다. 이 영화들이 타자를 편견어린 시선 속에 가두고 자신의 시선에 우월성을 부여한다면, 캐스린 비글로는 적어도 이 장면에서만큼은 타자의 시점이 삭제된 상태에서 내가 점유한 시선이 실은 얼마나 불안에 시달리고 있는지를 느끼게 한다. 그것이 캐스린 비글로의 의도는 아닐지라도 이 녹색 빛의 세상은 <허트 로커>에서 마약에 취한 듯 전쟁에 중독된 군인들처럼 병적으로 흔들린다. 우리는 모두 보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내게 <제로 다크 서티>의 클라이맥스인 이 전투장면은 마침내 빈 라덴을 사살하여 이 길고 지난한 서사를 끝내는 장면, 혹은 우리에게 그 현장에 입회하게 해서 쾌감을 선사하는 장면으로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는 뭔가 마무리되지 않았다는 느낌이 강하게 스며 있다. 그건 앞서 말한 것처럼 장면 내의 일방적인 응시가 주는 불안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지만, 영화가 9.11 테러에서 시작된 이 긴 서사의 종결 앞에서 머뭇거리거나 두려워하고 있다는 인상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2011년 5월, 우리는 미군 특수부대에 의해 오사마 빈 라덴이 사살되었으며, 오바마 대통령이 그 과정을 지켜보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빈 라덴의 시신이 공개되지 않은 까닭에 그의 죽음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지만, 결국 알카에다의 인정으로 그의 죽음은 받아들여졌다. 그러니까 현실의 우리는 빈 라덴의 시신을 실은 직접 본 적이 없다. 영화에서 군인들은 빈 라덴으로 추정되는 남자를 쏴 죽이고 나서 얼마간 그의 신원을 확인하지 못한다. 그들의 카메라 렌즈에 잡힌 시신은 얼굴이 뭉개지고 흐릿한 형체로 보일 뿐인데, 그때 한 군인이 가족으로 추정되는 소녀에게 죽은 자가 누구인지 묻는다. 그러나 소녀는 대답하지 않고, 더는 아무도 묻지 않으며, 그 숏은 이상하게도 그냥 지나가버린다. 이후 마야가 시신의 신원을 확인하고 빈 라덴의 죽음을 공식화하는 장면에서도 영화는 시신의 정면을 찍지 않는다. 우리는 마야가 본 것을 보지 못한다. 아니, 마야는 자신이 본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을까. 영화는 그 시신이 빈 라덴이라고 확언할 수 있는 몇몇 순간들을 이처럼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지나쳐버리고 만다. 빈 라덴의 은신처에 대해 100% 확신을 말했던 마야지만, 영화의 마지막에 남겨진 그녀의 얼굴은 확신의 희열이 아니라 불확신의 피로로 뒤덮인다. 그러니 <제로 다크 서티>가 고문을 필요악으로 인정하거나 고문으로 이룬 성취를 옹호하는 영화라고 단정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이것은 고문과 복수라는 행위로도, 인간의 눈을 넘어서는 지각체계로도 더이상 다가갈 수 없는 이 세계의 어떤 지옥 앞에서 공허와 불안에 시달리는 영화에 가깝다. 이것은 적확한 행위에 대한 영화가 아니라, 차라리 그 모든 것을 늪에 빠뜨리는 무력한 시선에 대한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