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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1997)

[신성일] 꽃보다 할배? 말로만 그러지 말고

말기 암에 걸린 노인과 그를 간병하는 젊은 여인 사이에 피어나는 욕망에 관한 영화 <야관문: 욕망의 꽃>의 주연을 맡은 신성일 선생과의 인터뷰가 있던 날이다. 선생께서 골목길을 지나 카페에 들어선 순간, 사진기자의 표정이 굳어진다. 영락없이 운동복 차림이다. 일정을 착각했다는 말씀과 동시에 장소를 당신 집으로 옮기자고 한다. “그게 사진 찍기도, 말하기도 편하겠다”며. “우리 집으로 가자. 머리에 물이라도 묻혀야 사진을 찍지, 안 그래?” 1시간 뒤쯤, 공덕동 어느 아파트. 책이 가득한 책장, 조각상, 각종 트로피가 벽에 둘러져 있다. 탁자 위에는 서양 고전음악 해설서와 피카소 전시회 자료집과 영화 사설이 스크랩되어 있는 신문 뭉치들, 먹다 남은 음식 부스러기 몇개가 널려 있다. 그리고 저 멀리 운동기구. 텔레비전 아래에는 <밀리언 달러 베이비> <그랜 토리노> <이만희 컬렉션> <로마의 휴일> DVD가 뒤섞여 있다. 그렇게 집 안 구경을 하다 어느새 인터뷰가 시작됐다. -장소를 옮기길 잘한 것 같습니다. =이렇게 옷도 편하게 갈아입고 좋잖아. 내가 집이 세 군데거든. 대구, 영천, 서울. 요즘은 서울에서 일하는 경우가 많아서 여기 있지요. -손님들도 많이 오시나요. =최근에 방송 촬영팀이 좀 왔고. 그리고 자네 몰래, 애인 왔다 갔고. (웃음) -책이 많네요. =(의상을 갈아입는 동안 기자가 DVD 몇개를 만지작거린 걸 보셨나보다) 내 지금 인생에서 한 5년이나 10년 정도 봤을 때 바로 모델이 클린트 이스트우드야. 그 사람의 활동을 보면 지금도 굉장히 액티브하잖아. -최근에 클린트 이스트우드 평전이 나왔는데 읽어보셨는지요. =그럼 당연하지. 완전히 플레이보이지. 마누라도 다 인정하는. 그런데 그게 할리우드 분위기야. 우리나라하고는 좀 다르지. 나는 애인 있다고 말 한번 했다가 광고 다 떨어지고, 나쁜 놈 됐잖아. (웃음) 그런 걸 말 안 하는 연놈들이 더 캄캄한 것들이야. 다 쏟아내버려야지, 그래야 정직해지지, 마음속에 감추고 거짓말하다 보면 거짓말한 걸 기억을 못한다고. 내 평생 신조가 거짓말하지 말자예요. 있는 대로 쏟아내면 된다고. 영화를 506편이나 하면서 젊은 여인하고 그렇게 많이 연기한 놈이 애인 없었다고 해봐, 그게 거짓말이지. 내가 애인 있다고 말해서 죽일 놈 소리 듣지만, 또 없었다고 그래봐, 저놈 내숭 떤다 그러지. -어제도 인터넷에 도배가 되어 있던데요, ‘꽃보다 할배’들하고 여행 가는 것보다 배슬기(<야관문: 욕망의 꽃>의 여주인공)하고 가는 것이 더 좋다고 말씀하셔서. (웃음) =그래? 그럼 그럼! 나는 인터넷을 안 해서 잘 몰라요. 골프 친구들도 다 나보다 10년 정도 아래야. 내가 할배들하고 뭐하러 움직여? 차 타고 내릴 때 손 잡아주고 부축해줄 일 있어? 앤서니 퀸도 죽을 때 스물몇살짜리 젊은 여인하고 살았어. (피카소 책을 집어들며) 피카소도 그랬다고. 이런 정력을 가져야지. -인터넷은 안 하셔도 신문 스크랩은 하고 계시네요. =신문은 계속 집히는 대로 읽어요. 주로 사설하고 오피니언난을 많이 봐요. (국회의원 시절, 영화 <친구>에 대해 국회의원으로서 비판적인 의견을 피력했다가 인터넷상에서 호된 악플을 경험했던 일화를 들려준 뒤에) 인터넷이란 공간에 들어가면 그거밖에 안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끊어버린 거야. 마음 편하게 살아야지. 칭찬 받으면 기분 좋지만, 오래는 안 가요. 그런데 인격적으로 당하면 쉽게 잊지 못하지. 노 대통령도, 최진실도 다 그렇게 된 거잖아. 신성일이 잘되는 거 배 아프지. 마누라가 엄앵란인 것도 배 아프고. 나는 평생 그렇게 남자들의 적으로 살아왔잖아요. -그런데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텔레비전 보는 것도 별로 즐기시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왜 믿지 않는 매체인 텔레비전에 나오셔서 그런 중요한 말들을 하시나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하던데요. (웃음) =내가 할 수 있는 대로 하는 거지, 대응은 안 해. 나는 스포츠도 심판에 의해서 좌우되는 건 안 좋아해요. 축구, 배구, 결정적으로 야구. 9회말 투 아웃 풀 베이스 투 스트라이크 스리 볼에 심판이 잘못해버리면 승패가 갈린다고. 그런 거 보는 게 가슴이 아파. (기자를 보며) 심판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경기가 뭐가 있겠소? -음… 골… 프요? =그렇지, 골프밖에 없지. 그건 본인이 하는 대로 하는 거야. -말씀하시니까 생각났는데요, 수감 중이실 때(국회의원 재직 당시 뇌물을 받은 혐의로 신성일 선생은 2006년 즈음부터 2년여의 옥살이를 한 적이 있다), 벽에 힝기스, 미셸 위, 이신바예바 등의 사진을 붙여놓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배우가 아니라 전부 스포츠인들이었다는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이게 참 오해가 없어야 하는 건데… 교도소 안에 있는 친구들이 자기들이 봐도 나이는 내가 더 많은데 몸이 더 단단하거든. 그러니까 나한테 인사도 잘하고 선물도 주고 싶어 하고 그랬어. 그런데 선물이란 게 뭐가 있겠소. 여체, 여자의 누드 사진, 음화거든. 선생님 보여드릴까요, 그러더라고. 그런데 교도소에 감찰이 있을 때면 꼭 내 방을 보여준다고. 그런데 그런 게 내 방에 있으면 되겠어? 물론 보고 싶었지, 하지만 음화를 가져다놓을 수는 없잖아. 그런데 그때가 세계육상경기를 하던 때라고. 스포츠 사진기자들이 사진 잘 찍잖아. 이신바예바가 다리 딱 벌리고 뛰어넘는 거, 그런 사진을 화장실에 붙여놓았다는 그 얘기야. 물론 나도 다른 그림을 붙여놓고 싶었지만…. (웃음) -영화 얘기도 좀 해볼까요? 주연은 오랜만이십니다. =딱 20년 만이에요. -아무래도 이 영화에 출연하게 되신 계기는 그간에 방송에서 하신 발언이나 두권의 책 안에 있는 내용들하고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은데요(신성일 선생은 인터뷰집 한권과 자서전 한권을 출간했고 그 안에는 과거 연인과의 이야기 등이 담겨 있다. 방송에 출연해서는 아내와 애인은 별개의 문제라고 말하기도 했다). =내가 한 발언들과 연관 있는지 없는지를 내가 말하기는 어렵지. 그때 시나리오가 한 여섯개쯤 들어와 있었어요. 어떤 힘 떨어진 유공자 노인네가 연금받고 사는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는 자기도 과거의 공을 찾아다니는 이야기가 하나 있었어요. 요양소에서 병마에 시달리는 작품도 있었고. 그런데 요양소에서 그러는 거는 싫더라고. 가장 마음에 든 시나리오가 있었는데, <그랜 파더>라는 거였어요. 강직한 성격을 지녔으면서도 고엽제 후유증을 앓고 있는 베트남 파병 용사가 시골의 버스 운전사인 거야. 그런데 아들이 원인 불분명한 상태로 죽은 걸 계기로 조직폭력배를 소탕하는 이야기예요. 제일 나중에 들어온 게 <야관문: 욕망의 꽃>이에요. 나는 사실 그때 <그랜 파더>를 하려고 몸을 만들고 있었다고. 그런데 이 작품이 제작에 빨리 안 들어가는 거야. 그런데 이 영화는 바로 촬영에 들어가겠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바로 출연을 결정하셨나요. =아니. 그러다가 올해 3월인가 골프를 치러 나갔어요. 아침에 일기예보에서는 비가 안 온다고 했는데 나가봤더니 오전부터 비가 부슬부슬 내리더라고. 우리 나이에 감기 오면 크게 애먹어요. 그래서 어쩔까 고민을 했지. 그런데 골프 약속이라는 게 또 어길 수가 없는 거거든. 비를 좀 맞았는데 그게 안 좋아졌어. 그 다음 날 다른 모임에도 가고 하느라 심해졌고. 감기가 엄청나게 왔어요. 3월 늦추위에 끙끙 앓다가, 딱 그때 생각이 난 거예요. 이렇게 아예 운동도 못하게 됐으니까 이참에 근육을 빼서 <야관문: 욕망의 꽃>에 출연해야겠다, 그냥 앓는 대로 앓자, 이렇게 된 거지. 영화 봐서 알겠지만 그거 근육이 다 빠져 있는 거예요. 보름인가 앓고 감기가 완전히 떨어지지도 않은 상태에서 촬영에 들어갔거든. -주연 맡으신 작품이 506편에서 507편이 되는 셈인데요, 이 작품은 어디쯤 위치한다고 생각하시나요. =A, B, C로 나눈다고 하면, 최정상에 있는 작품은 <만추>예요. 그리고 상영금지당했던 <휴일>. 그건 비교가 안되지 뭐. 이번 영화도 A급이지. 저예산이라서 좀 위축되는 감이 있었지만, 그래도 영화 그 정도면 잘 나왔지 뭐. -다작을 많이 하셨는데요, 요새 배우들 보면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부럽지, 너무너무 부러워. 그렇게 해서 연기 못하면 바보들인 거지. 제일 부러운 게 바로 그거예요. -지금 왕성하게 작업하는 어느 배우, 어느 감독하고 함께 일하고 싶으세요. =아니, 그건 말 안 하는 게 좋겠어요. 문화 예술계쪽에서는 그런 건 금기라고. 피카소하고 다른 화가 그림하고 비교하면 안되는 것처럼 말이에요. -그러면 좀 다른 걸 여쭤보겠습니다. 같이 작업한 사람들 중에서는 누가 가장 많이 생각나시나요. =물론 이만희 감독이지. 그건 말할 수가 없어요. 유신독재정권 시대에 그래도 조금이라도 반발을 하고 거부를 하고 했던 사람이에요, 그 사람이. <휴일> 봤어요? 그 바쁜 가운데 어떻게 그런 걸 찍었는지. 그게 놀라운 거라고. 그 영화는 이만희 감독의 생각을 신성일이를 분신 삼아서 그려낸 영화라고. 결국엔 고치라고 그래도 고치질 않았잖아요. 서슬이 퍼런 그때에 말이에요. 이만희 감독하고 나하고는 너무 잘 맞았거든. 내가 이만희 감독 영화에 출연도 많이 했어요. <들국화는 피었는데> 찍을 때는 제작자 정진우하고 이만희 감독하고 생각이 달랐어요. 정진우는 반공, 이만희는 반전을 기본으로 했거든. 둘 사이에서 내가 중재도 하고 그랬다고. <삼포 가는 길>도 사실은 나하고 같이 하자고 했어요. 그런데 스케줄이 안 맞아서 못하게 됐지. 그래서 나 대신 김진규씨가 했어요. <삼포 가는 길> 찍을 때 몸이 확 안 좋아졌나봐. 저녁마다 술파티였다고 그러더라고. 김진규씨도 그렇고, 백일섭이도 그렇고 두주불사거든. 나하고 있을 때는 내가 술 못 먹게 했어요. <들국화는 피었는데>를 강원도 인제에서 찍었는데 그때 내가 돈이 좀 있었으니까 아침저녁으로 불고기 사먹이고 뱀탕 사먹이고 했어요. 그 형이 짱구였거든, 그래서 나는 짱구 형이라고 불렀고, 그 형은 일본식으로 나한테 신짱, 신짱 그랬지. -그 밖에 또 있으신가요. =하길종 감독. 이장호도 대마초 사건 걸렸을 때 우리 집에 와서 숨어서 밥 먹고 가고 그랬는데. 김묵 감독도 생각나고… 이만희, 하길종 감독만 있었어도 내가 파묻혀 지내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런데 영화배우보다 ‘무비스타’라는 말로 불리기를 더 좋아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신성일이라는 사람은 늘 주인공을 해왔어요. 주인공이면 스타인 거고. 그걸 우리말로 영화배우라고 하면 감이 잘 안 와요. 미국 사람들은 전부 무비스타라고 해요. 나는 스타가 아니고 배우가 되고 싶다, 뭐 그런 광고도 있던데, 내 생각에 영화에는 스타가 있어야 돼요. 나는 500작품 이상 했지만 대체로 혼자 끌고 가는 영화를 해왔잖아요. 요즘처럼 배우들이 집단으로 출연하는 거, 그거 배우들 다 살려주는 거 아니에요. -요즘은 신성일 영상박물관에 힘을 쏟고 계시다고 들었는데요. 구체적인 준비는 어떻게 돼가시나요. =박물관이라고 하면 유물이나 갖다놓고 구경이나 시키고 전시회나 기획전이나 하고. 그 이상이 없어요. 하지만 나한테는 동적인 자료들이 많이 있으니까 그걸로 볼거리를 많이 만들려고 해요. 땅값이 너무 치솟아서 시하고 조정 중이에요. 3000평 정도는 확보해야 되거든. 관광투어 코스가 될 수 있도록 해야지. 10억원 정도 필요해서 지금 투자자 몇 사람하고 얘기 중이에요. 그게 이제 내 남은 숙원 사업이지. -그 밖에 다른 계획이 또 있으신지요. =일절 없어요. 다른 것까지 할 여력이 없어요. -마지막 질문입니다. 요즘도 애인 있으세요? (웃음) =(기자를 살짝 째려보며) 당연하지. 내가 윤동주의 서시를 가장 좋아해. “죽는 날까지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내 나이 77살이라고. 열정적으로 살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아요. 한 5년으로 본다고. 그때까지 열정적으로 살고 그 뒤로는 아름답게 지어놓은 영천 집에 파묻혀 살아야지. 신성일 선생은 거짓말하는 게 가장 싫다고 했다. 그래서 거짓말하지 않으련다. 신성일 선생이 ‘그때 그 사람들’의 이름을 거론하며 은근히 과거 정치 인맥을 과시한 부분은 지면에 거의 넣지 않았다. 이미 출간된 책에 상세히 나와 있기도 하거니와 솔직히 듣기 거북했다. 반면에 그에게는 확실히 도저한 매력이 있었다. 자신이 삶은 호박이라며 먹어보라고 다정하게 한쪽 건네줄 때는 친근했고, 끝까지 연애하며 정력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할 때는 멋져 보였고, 함께 작업한 이들과의 일화를 떠올리며 그리워할 때는 의리 있어 보였다. 한국영화의 영원한 무비스타, 그의 복잡다단한 인생의 면모를 어떻게 이 짧은 만남 한번으로 전할 수 있을까. 다만 사람으로서 그의 훈훈한 됨됨이를 조금이나마 느껴보게 된 것이 만족스럽다.

[신 전영객잔] 바보도, 괴물도 아니라면

엄태화 감독의 <잉투기>에서 어른들은 거의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 인터넷 격투기 동호회에서 ‘칡콩팥’이라는 아이디로 유명한 태식은 커뮤니티 라이벌이었던 ‘젖존슨’으로부터 대낮에 기습적으로 얻어터진 뒤 그걸 담은 동영상이 네티즌들에게 회자되는 공개망신을 당한다. 태식은 젖존슨에게 복수를 맹세하고 그를 찾아다니는 게 인생의 단기 목표인 백수 잉여인데도 그의 어머니는 그를 별달리 타박하는 기색이 없다. 자식에게 기대하는 바가 없을 뿐만 아니라 아예 포기한 듯 보인다. 경매로 처분된 부동산을 접수하는 일로 돈을 버는 그의 어머니는 한국을 1%만을 위한 사회라고 원망하면서 코스타리카로 이민 갈 생각이다. 영화 후반에 태식이 ‘잉투기’라는 잉여들의 격투기 대회에 나가 젖존슨과 오프라인에서 재대결할 의지를 불사르며, 이제 뭔가 할 일이 생길 것 같다는 의지를 얻었노라고 어머니에게 편지를 쓰고 이민 가지 말자고 부탁을 하자, 어머니는 부드럽게 거절하면서 그렇다면 그녀 혼자만 이민을 가겠노라고, 보증금 5천만원에 월세 30만원 정도는 자기가 부담해주겠노라고, 가족이라고 꼭 함께 살아야 하는 건 아니지 않느냐고 묻는다. 어머니의 제안에 대한 태식의 대답은 이랬다. “근데 우리가 언제 같이 살았어? 같은 집에 산다고 같이 사는 건 아닌 것 같은데… 내 생각에는….” 밥알을 입안에 머금은 채 다 큰 사내가 어머니에게 이런 투정 비슷한 지적질을 할 때 관객이 이 주인공을 좋아하긴 힘들다. 공감이 가진 않지만 혐오나 경멸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엄태화 감독은 그의 동생 엄태구가 연기한 이 태식이란 인물의 저렴한 정체성을 괄호치고 바라본다. 뭘 생각하는지 모르는 인간이지만 괴물 주제도 못 된다. 젖존슨을 죽이겠다고 부엌칼을 가방에 넣고 다니는 그는 누굴 죽이기는커녕 누가 자기 앞에서 팔 동작만 크게 해도 움츠러드는 인간이다. 젖존슨에게 맞은 후유증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지만 본성이 원래 그런 쪽에 가깝다는 추측이 든다. 겁쟁이인 것이다. 눈에 살기를 가장하고 말과 행동을 거칠게 해도 그는 폭력적인 반영웅이 될 자질이 없는 인간이다. 그런데도 그는 누굴 죽이겠다고 설치고 다니며 선배이자 정신적 후원자인 희준의 말도 잘 듣지 않을 만큼 스스로 고립을 택하는 인간이다. 이 인간 앞에서 관객이 느끼는 건 난감함이다. 아마도 태식의 어머니가 자식에게 느꼈을 감정도 난감함이 아닐까. 괴물은 일종의 사회적 증상의 현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잉투기>에서 주인공을 비롯한 등장인물들은 괴물이 되지 못하는, 말 그대로 잉여인데 겉보기에는 괴물이 되기를 갈망하는 듯 보인다. 태식과 희준이 인터넷 먹방으로 나름 유명한 여고생 영자를 만났을 때 그들은 자신들보다 훨씬 난감한 캐릭터를 만나 당황한다. 킥복서 출신의 이 여고생에게는 격투기 도장을 운영하는 삼촌이 있다. 아마도 부모가 돌아가셔서 삼촌이 돌봐주고 있는 듯한 이 여고생의 삶도 요령부득이다. 인터넷에서 먹방을 운영하면서 빨간 가발을 쓰고 네티즌들과 말로 분탕질하는 이 소녀는 어른들의 제어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 영자를 보살피는 삼촌은 영자에게 절절매는데, 집에서 가져온 음식들을 냉장고에 채워주면서 자기 집에도 좀 들르라고 완곡하게 부탁하며 영자의 눈치를 살핀다. 화면이 바뀌면 그는 영자와 함께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 화면을 보며 키득거리고 있다. 격투기 도장의 관장으로서, 영자의 삼촌으로서 (김준배가 연기하는) 겉인상과는 달리 그는 어른의 권위감 있는 존재와는 전혀 거리가 먼 인물이다. 영자가 출입문이 고장났다고 하면 군말 없이 와서 고쳐주는 고분고분한 후견인이다. 어른들의 통제에서 완전히 벗어난 주인공들은 어른들의 훈계질을 거부할 자질이 있지만 그런 당당함으로 그들이 몰두하는 짓들은 그들 스스로도 병신 짓이라고 인정하는 것들뿐이다. 영자는 먹방을 진행할 때 네티즌 누군가와 채팅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충무김밥님, 저 이러는 거 부모님도 아시냐고요? 그러는 넌 이거보는 거 부모님이 아시냐?” 영자의 이 말은 나도 병신이고 너도 병신이라는 말이다. <잉투기>에서 무기력하기만 한 인물들은 자학을 긍정할 때만 생기를 얻는다. 태식과 희준은 영화에 처음 등장할 때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정체를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 무기력으로 일관한다. 영화 첫 장면에서 얻어터진 태식은 늘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꾸부정하게 걸으며 눈을 틱틱거리는 행동으로 일관하고, 희준은 잉여짓을 하는 태식을 말리지 못하고 간섭하지도 못하면서 무력하게 따라다니기만 한다. 그가 처음으로 태식의 바보짓을 말리는 건 태식이 격투기 도장에서 들고 있던 칼로 도장단원들을 위협할 때뿐이다. 그들과 달리 영자는 처음부터 자학으로 일관하며 생기를 얻는 인물이다. 그녀는 자신을 자학할 뿐만 아니라 남들의 자학을 보는 걸 재미있어 한다. 자신을 공격한 뒤 사라진 젖존슨을 태식이 찾아다닐 때 도우미를 자청한 그녀는 젖존슨과 오프라인에서 재대결을 원하는 태식에게 격투기를 가르친다. 영자의 행동을 애정으로 오인한 태식은 그녀에게 남자로 접근할 용기를 얻는다. 자신을 왜 도와줬느냐고, 나를 좋아한 것 아니냐고 태식이 묻자 영자는 직설로 되받는다. “그냥 좆나 재미있을 것 같아 그랬다. 왜? 젖존슨한테 처맞은 칡콩팥이 복수한다고 설쳐대면 웃기잖아. 그렇게 생각 안 해요? 아저씨만 심각하지 다들 좆나 비웃을걸.” 영자는 태식의 잉여짓을 존재증명으로 해석하고 스스로를 추락시키는 행동으로 받아들이며 그걸 즐긴다. 마치 그녀가 인터넷에서 희한한 행동을 하며 용돈을 벌고 병신 공동체를 운영하듯이 그녀는 태식의 행동을 응원한다. 감독 스스로 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에서 이영옥이 연기한 영자 캐릭터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밝힌 이 영화에서의 영자는, 류혜영이라는 매력적인 배우의 행동양식을 통해(그녀는 이미 양익준 감독의 <미성년>이라는 중편영화에서 비슷한 매력을 보여준 바 있다) 다른 색깔을 얻는다. <바보들의 행진>에서의 영자는 세속적인 의미에서 속물 그 자체다. 그 영화에서 ‘여자는 떨이로 팔리기 전에 시집가야 한다’며 주인공 병태를 애태우던 영자는 그를 만날 때마다, 가진 것 없고 미래도 불투명하다는 병태 스스로의 결핍감을 자극하지만, 병태를 좋아하는 마음이 없는 건 아니어서 그와 딱히 결혼할 것이 아닌데도 군대에 가는 그를 배웅하며 마치 엄마처럼 병태의 무운을 빌어주는 작별인사를 한다. 그 영화에서, 병태는 자신이 억누르고 있는 세속적 욕망의 거울로서 영자를 본다. 동시에 정체가 불분명한 이상주의적 가치로 대학 생활을 상처로 덧칠하는 자신의 청년기와 달리 그녀에게서 유별나게 팔팔 끓는 젊음의 생기를 본다. 그것이 속물적 가치로 터질 듯한 생기라 하더라도 그건 자신의 현실과 미래의 결핍일지 모른다고 병태는 생각할 것이다. <잉투기>의 태식도 영자에게서 자신의 그림자를 본다. 병신 잉여짓을 하되 자신보다 훨씬 당당하게 그 짓에 임하는 영자에게 기대면서 태식은 영자를 짝사랑한다고 착각하지만, 영자는 가차 없이 그런 태식의 환상을 짓밟는다. 우리 같은 부류의 인간들은 그런 감정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확언하는 것이다. 영화 말미에 태식과 영자, 그리고 희준은 자학에 가까운 퍼포먼스로 자신들을 일시적으로 구원한다. 희준은 잉투기에 나가 상대에게 실컷 얻어터지면서 비로소 살아 있다는 쾌감을 느낀다. 태식은 길거리에 나가 묻지마 폭력을 휘두르다가 반격을 당해 군중에게 엉망진창으로 두들겨 맞으면서 그때까지 상대의 주먹을 쳐다보지 못하던, 젖존슨에게 맞았던 후유증의 증상을 극복하게 된다. 영자는 인터넷 먹방 건으로 자신을 왕따시킨 자기 반 친구들에게 밀가루 포대를 들고 아침 자습 시간에 쳐들어가 밀가루를 급우들에게 처바르고 자신도 밀가루를 뒤집어쓴다. 카톡으로 태식의 묻지마 폭행 현장 소식이 알려지면서 희준과 영자 모두 그 곳에 도착하지만 영자는 휴대폰으로 그걸 촬영할 뿐이고 희준은 지켜만 볼 뿐이다. 태식이 이전과 다른 인간으로 진화하는 유일한 표식은 자신을 때리는 상대의 주먹을 피하지 않고 또렷하게 상대를 쳐다볼 수 있는 자학의 용기를 갖췄다는 것뿐이다. <잉투기>에서의 주인공들의 이런 자학의 긍정은 좀처럼 맥락을 가늠하기 힘들기 때문에 난감하다. 이를테면 그것은 하길종의 <바보들의 행진>이나 이장호의 <바람불어 좋은 날>과 같은 옛날 한국영화에서와 같은 사회적 맥락이 없다. 있다면 도저한 개인주의, 고립과 자학과 심지어 자살로 귀결되는 개인의 상실감의 재확인일 뿐인데 이걸 어떤 공감이나 비판의 테두리로 묶으려 하지 않는 점에서 엄태구 감독의 결정을 사실주의적 태도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나는 종종 학생들의 내면에 있는 세속적 욕망의 두께에 놀라지만, 동시에 그 욕망의 두께에 비해 곁에서 보기에는 엄청난 그들의 무기력에도 놀란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류의 젊은 세대를 향한 기성세대의 위로에 동감하지 않는 나는 그냥 난감한 심정으로 그들을 지켜보곤 한다. <잉투기>에서 받은 것도 비슷한 곤혹감이다. 아무것도 알 수 없는데 심지어 동시대의 창작자들에게서도 그들의 내면을 모르겠다고 하는 관찰자적 초연함을 보게 되는 것이다. 거꾸로 생각하면 이 자학이 젊은 세대의 반항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반항이라는 어휘에서 기성세대의 감염된 언어의 흔적이 나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기성세대는 다음 세대의 행동양식을 설명하는 어휘를 갖고 있지 못하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류의 말은 가장 기만적인 어휘이고 연대나 공동체의 가치를 운위하기에는 기성세대도 그 말의 진정성을 설득할 꼴값들을 하고 있지 못하다. 돌이켜보면 젊은 시절에는 다 무기력했다. 할 수 있는 게 없었지만 할 수 있는 게 있다고 믿었을 뿐이다. 그게 이상적인 가치든, 세속적인 가치든 어쨌든 미래의 내가 실현할 수 있는 가치라고 믿었을 것이다. 오늘날의 젊은 세대에게는 상당수가 어떤 것도 불가능하다고 느끼는 게 아닐까라고 추측할 수 있을 따름이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개인주의의 전도된 가치는 사회적으로 유일무이한 것으로 찬양되었다. 개인주의가 함축하는 자발적으로 행동하고 스스로를 지키는 개인의 가치는, 자기의 책임으로 위험을 감수하고 자기가 지향하는 바를 향해 도전하는 씩씩한 개인의 가치는, 냉정한 승자독식 사회 시스템의 위선적 장애물에 막혀 실현되지 못한 채 묻혀버렸다. 오늘의 잉여 청년들은 그런데도 여하튼 개인주의의 위장을 쓰고 헐값에 미래를 팔아치운다. 그들의 개인주의는 고립주의로 떨어지고 기성가치의 부정은 쇄말주의에 함몰된다. 지질한 행동에 몰두하는 <잉투기>의 등장인물들이 자학과 자살의 연쇄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그들 삶에 대한 정직성의 표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기성세대로서 나는 이 영화의 전개와 결말에 완전히 동의할 수는 없었다. 사람이 사는 것에 대단한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닐지라도 최소한 너무 지질한 것은 아니었으면 한다. 지질한 것에 몰두하는 인물들에게서도 우리와는 다른 활력이 있기를 바란다. 그들이 제발 진정으로 재미있게 살기를 바란다. 세속적 가치에 매달리든, 이상적 가치에 매달리든, 우리가 동조할 수 있는 다른 재미있는 유형을 창조하기를 바란다. 우리가 만들어낸 것이 괴물이 아니라, 괴물조차도 될 수 없는 불행의 주인공들이라는 걸 확인하는 게 고통스러웠다. 그들이 스스로 얻어터지기를 자임하면서 여하튼 삶의 활력을 스스로 충전해 다른 길로 빠져나가기를 바란다. 하긴 이 영화 속 인물들의 그 잘난 체하지 않는 자학이, 정직한 활기의 다른 얼굴이라면 긍정할 수도 있겠다. 격투기를 소재로 한 액션활극으로도, 서브플롯으로 로맨스조차도 성립할 수 없는 <잉투기>의 신기한 에너지를 마주하며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하는 곤혹감을 어쩌지 못하면서 그래도 영화를 통해서나마 뭔가 더 부숴버려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웰컴 투 정글!

<해리 포터> 시리즈와 <트와일라잇> 시리즈가 가고 <헝거게임> 시리즈가 왔다. 1편은 대성공이었고 2편은 이제 막 뚜껑을 열었다. 즐길 만한 오락물이라는 평이 대세다. 게다가 요소요소마다 꽤 다양한 층위로 얽혀 있는 것이 흥미롭다. 1편을 지나 3편과 4편을 기다리는 시점을 맞아 중간점검하는 기분으로 몇 가지 핵심들을 정리해본다. <헝거게임> 관람자를 위한 7개의 키워드별 가이드다. 근미래의 독재국가 판엠. 수도인 캐피탈에 살고 있는 독재자의 지휘 아래 매년 이른바 ‘헝거게임’이라는 잔혹한 행사가 열리고 있다. 수도를 제외하고 나머지 12개 구역에서 소년 소녀들을 뽑아 한 장소에 몰아넣고 단 한명의 생존자만 살아남을 때까지 싸우게 한 뒤 우승자에게는 윤택한 복지를 제공하는 것이다. 70여년 전 힘을 합쳐 반란을 도모했다가 실패한 주변 구역에 독재자가 내리는 피의 형벌인 동시에 많은 이들의 눈을 현혹시키기 위한 잔인한 엔터테인먼트다. 그리고 이 잔인한 게임은 방송을 통해 판엠의 모든 이들에게 강제적으로 방영된다. 캣니스 에버딘(제니퍼 로렌스)은 피타(조시 허처슨)와 함께 74번째 헝거게임의 12구역 대표로 뽑히고 게임 중에는 살아남기 위해 피타와 연인 행세를 한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실제 연인 게일(리암 헴스워스)이 있다. 우여곡절 끝에 캣니스와 피타는 최후의 공동승자가 되고 특히 캣니스는 일약 국가적 스타가 된다. 2편에 이르면 그녀는 더이상 단순한 스타가 아니라 혁명의 아이콘이다. 그런 그녀를 없애기 위해 독재자는 다시 한번 캣니스를 헝거게임에 끌어들이지만, 그녀는 전보다 더 강해져 있으며 그녀를 추앙하는 혁명의 무리들은 늘어나 있다. 1 프랜차이즈영화 주인공이 유명 상품 브랜드의 수준에 오른 대형 시리즈물을 두고, 프랜차이즈영화라는 말을 많이 쓴다. <해리 포터>와 <트와일라잇> 시리즈가 그 예다. 그리고 그들의 시대가 저물자 계승자로 나타난 것이 <헝거게임> 시리즈다. 원작은 수잔 콜린스의 소설이며 2008년부터 <헝거게임> <캣칭 파이어> <모킹제이>라는 삼부작으로 출간되어 베스트셀러가 됐다. <트와일라잇> 시리즈의 원작자 스테파니 메이어는 “이 책 덕분에 며칠 밤을 꼬박 지새웠다. 책을 다 읽고 난 뒤에도 이야기를 생각하느라 쉽게 잠들지 못했다”라고 칭송했다. 영화로는 4부작으로 완성될 예정인데, <헝거게임: 판엠의 불꽃> <헝거게임: 캣칭 파이어>가 완성되어 개봉했고, <헝거게임: 모킹제이 파트1>은 2014년 11월, <헝거게임: 모킹제이 파트2>는 2015년 11월에 개봉예정이다. 2012년에 개봉했던 1편은 그해 미국 박스오피스 3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고(그해 1위는 <어벤져스>, 2위는 <다크 나이트 라이즈>였다) 1편의 감독은 게리 로스, 나머지 세편의 감독은 프랜시스 로렌스이며 원작자 콜린스는 각색에도 참여하고 있다. 근래에 유행하는 프랜차이즈영화의 계통을 이어받은 작품답게 십대가 주인공이며 그 주인공의 성장담이 곧 거대한 서사시로 확장되는 이야기 구조다. 2 서바이벌 게임 12개 구역마다 제비뽑기로 18살 이하 남녀 한쌍씩, 총 24명을 뽑고, 뽑힌 이들은 지정된 장소에 가서 오직 한 사람만 살아남을 때까지 싸워야 한다. 헝거게임의 규칙이다. 그런데 실은 이 게임 방식을 두고 말들이 좀 있었다. 일본 작가 다카미 고슌의 소설 <배틀로얄>(후카사쿠 긴지의 동명 영화로도 만들어졌다)에서 그대로 가져온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배틀로얄>에서는 어른들이 청소년들을 지배하기 위해 유사한 게임을 만든다. 하지만 원작자 콜린스에 따르면, 그녀는 자신의 첫 소설이 출간되기 전까지도 <배틀로얄>에 대한 존재를 전혀 몰랐다고 한다. 오히려 자신의 책을 편집한 편집자에게 “지금이라도 내가 <배틀로얄>을 읽어야 하느냐”고 물었지만 돌아온 대답은 신경 쓰지 말고 당신의 세계를 밀어붙이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정작 콜린스는 이 게임의 모티브가 된 건 그리스 신화와 로마의 검투 경기였다고 말한다. “9년에 한번씩 소년 소녀들을 죽음의 미로에 보내 괴물 미노타우로스와 싸우게 했다는 테세우스 신화”와 로마시대 원형 경기장에서 벌어졌던 검투사들의 사투에서 모티브를 얻었다는 것이다. 3 여전사 <헝거게임> 시리즈의 여주인공 캣니스 에버딘은 말 그대로 매혹적인 신종 여전사다. 미국의 유명 작가 스티븐 킹은 이 캐릭터를 두고 “활과 화살을 쥔 애니 오클리”라고 칭했다(애니 오클리는 미국 서부시대에 이름을 높였던 명사수다). 누가 캣니스가 될 것인가, 혹은 누가 되어야 하는가를 두고 의견들이 분분했다. <킥애스2: 겁 없는 녀석들>의 크로 모레츠? 드라마 <니키타>의 린제이 폰세카? <폭풍의 언덕>의 카야 스코델라리오? <써커 펀치>의 에밀리 브라우닝? <디센던트>의 셰일린 우들리? 이중에서 미국의 유력 연예지 <엔터테인먼트 위클리>가 추천했던 배우는 린제이 폰세카다. 하지만 캣니스 역할을 가져간 것은 제니퍼 로렌스다. 캐스팅이 결정되자 원작자 콜린스는 자신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질문은 바로 이것, “그녀는 반란을 고무할 만큼 믿음직스러워 보이는가? 그녀는 다른 이들이 그녀를 따라 전쟁에 뛰어들어도 좋겠다고 느낄 만큼 힘과 저항과 지성을 갖추었는가?”였다며, 제니퍼 로렌스가 그 적임자인 것 같다고 환호했다. 한편 제니퍼 로렌스 또한 “내가 이 영화를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캣니스가 자신의 남자친구가 누구인지를 고민하기보다 자신의 생존과 혁명에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여전사 캣니스의 아이콘이라면 단단하게 땋아서 한쪽으로 묶은 머리와 그녀의 주무기인 활인데, 가령 2편에서는 독재자의 손녀조차 독재자에게 “요즘은 이런 머리가 유행”이라고 말하며 캣니스의 헤어스타일을 따라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렇다면 캣니스의 무기는 왜 활일까. 정확한 대답을 알지 못한 채 짐작하자면, 활의 아름다운 곡선의 모양새와 활을 사용하는 사용자에게 요구되는 어떤 자태가 이 여전사에게 어울렸기 때문 아니었을까? <헝거게임: 캣칭 파이어>의 시사회장에는 이 영화의 홍보대사인 걸그룹 ‘포미닛’이 잠시 나와 인사를 했고, 사회자는 퇴장하려는 그들에게 “활 쏘는 포즈를 취해주세요”라고 청했는데, 그러고 보니 이들에게 “창 던지는 포즈를 취해주세요”나 “도끼 휘두르는 포즈를 취해주세요”라고 했다면 그건 좀 이상했을 것 같다. 4 삼각 로맨스 “둘 다 인기가 있다는 걸 제외하면 도대체 뭐가 <트와일라잇>하고 비슷하다는 건지 모르겠다.” 1편의 감독 게리 로스는 투덜거렸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비교의 근거가 한 가지 있다면 그건 여주인공 캣니스와 두명의 남자주인공 피타, 게일 사이의 삼각 로맨스일 것이다. 2편의 감독 프랜시스 로렌스의 말을 요약하자면 “피타는 사랑을 배워가는 남자이고 게일은 혁명을 향해 가는 남자”다. 캣니스는 이 두 남자 사이에서 흔들린다. 물론 <헝거게임> 시리즈의 큰 축은 캣니스가 혁명의 여전사로 거듭난다는 것이지만, 이 시리즈가 한편으론 십대 소녀의 성장담이며 그 안에서 중요한 것이 로맨스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이들의 삼각 로맨스의 긴장이 영화에 기여하는 바를 아예 무시할 건 못 되는 것 같다. 다만, 피타 역의 조시 허처슨과 게일 역의 리암 헴스워스의 캐스팅 문제가 있기는 한데, 뭐랄까 두 사람은 전통적인 하이틴 로맨스물에 등장할 법한 미남형의 배우들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것 같다. (두 배우의 팬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그들은 다소 투박해서 더 정겹다고 해야 맞을 인상이다. 이 캐스팅은 영화의 큰 축인 여전사 캣니스의 나아갈 길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고려된 무척이나 섬세한 결단이었거나 혹은 그 반대로 안일한 실수였을 것이다. 5 혼종성 <헝거게임>의 배경이 되는 공간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는 12구역이라 불리는 탄광촌을 비롯하여 그 밖의 빈곤한 주변부 타 구역들이다. 둘째는 캐피탈이라는 상상 초월의 대도시다. 셋째는 서바이벌 게임이 벌어지는 야생의 게임장이다. 미술감독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 영화는 한마디로 “복고 미래풍이다”. 복고 미래풍이란, 과거에 존재했던 고대의 것들과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것들이 뒤섞여 있는 상태라는 뜻일 것이다(의상과 헤어를 담당하는 스탭 역시 비슷하게 “하이패션과 아방가르드가 공존한다”고 말했다). 빈민층 구역은 현실에도 충분히 있을 법한 낡은 탄광촌이나 포로수용소처럼 그려지고 있다. 반면에 수도 캐피탈은 현란하고 화려한 금속성의 도시다. 코리오라누스, 세네카, 시저 등등이 캐피탈에 살고 있는 주요 고위층들의 이름이기도 한데, 이 도시는 과거 로마 제국의 화려함을 미래에 비추어 상상해 만들어낸 것이다. 반면에 야생의 서바이벌 게임 장소는 1편에서처럼 거대한 숲이거나 2편에서처럼 무서운 밀림이다. 최첨단 우주복에 가까운 의복을 입은 인물들은 그러나 가장 원시적인 무기들만 제공되는 이곳 숲과 밀림에서 또한 원시적인 격투를 벌인다. 말하자면 고대와 미래, 부와 빈곤, 고급과 저급이 뒤섞여 있다. 6 리얼리티 쇼 원작자 콜린스는 무심코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새삼 깨닫고 충격에 빠졌다고 한다. 한쪽에서는 뜨거운 경쟁을 벌이는 리얼리티 쇼가, 또 한쪽에서는 이라크 침공에 관한 뉴스가 동시에 방영되고 있다는 사실. 이 두 가지가 “불분명한 방식”으로 뒤섞여 <헝거게임> 시리즈의 동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영화 속 게임은 판엠의 전 국민에게 텔레비전을 통해 실시간으로 의무 방영되는 리얼리티 전쟁 쇼다. 게임 참가자들을 위한 성대한 전야제가 열릴 때, 2주 뒤에는 여러분 중 한 사람만이 이 자리에 서 있게 될 것입니다 같은 <슈퍼스타K>식의 말은, 2주 뒤에는 여러분 중 한명만이 살아 있게 될 것입니다 같은 끔찍한 말로 변경된다. 리얼리티 쇼의 경쟁의 담보가 음악이 아니라 목숨이라면, 이라는 상상이 여기 깔려 있는 것이다. 헝거게임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이른바 리얼리티 쇼의 생리는 멈추지 않는다. 가령 캣니스와 피타는 <우리 결혼했어요>의 가상의 연인들이나 마찬가지이고 숲과 밀림에서 그들이 벌이는 생존의 노력은 <정글의 법칙>의 ‘병만족’들의 행동을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리얼리티 쇼에 대한 반감도, 응용도 함께 느껴진다. 7 독재사회 미디어를 장악하면 국가를 장악할 수 있다는 건 세속 정치의 진리다. 그래서 영화 속 독재자는 나름대로 고안하여 국민들을 겁주고 어르기 위해 헝거게임을 만들었다. 독재자가 1편에서 강조하는 바를 요약하자면, 무조건적인 두려움을 주기보다 실낱같은 희망의 미끼를 던져주고 국민들을 순종하게 하라, 이다. 그 미끼란 바로 헝거게임을 시청하는 과정에서 국민들이 우승자들에게 느끼는 공감일 것이다. 하지만 독재자의 이 원대한 국민 훈육 프로젝트는 그의 예측과 달리 빗나가버린다. 게임에 나가기 직전 참가자들에게 응원이랍시고 사회자들이 던지던 1편의 그 유명한 말, “해피 헝거게임! 확률이 여러분의 편이기를!”이라는 이 말은 2편에서 이렇게 분노로 바뀌어 벽에 씌어 있다. “확률의 신은 결코 너의 편이 아니다.” 캣니스가 그 변혁의 맨 앞에 서 있다. 앞으로 2년에 걸쳐 찾아올 <헝거게임> 시리즈 3편과 4편은 단순히 게임을 넘어 캣니스와 동료들이 독재국가라는 시스템과 벌이는 본격적인 싸움을 그려낼 예정이다.

[신 전영객잔] 실종된 코맥 매카시의 ‘풍경’

나쁜 시나리오가 좋은 영화가 되기란 어렵지만 좋은 시나리오인데도 나쁜 영화가 되기란 쉬운 일이라는, 영화계에서는 얼마간 통용되는 이러한 격언은 시나리오가 결코 영화의 좋고 나쁨을 결정하지 못한다는 시나리오 무용론을 가리키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시나리오가 영화 완성의 중요한 부분인 동시에 공정의 초기 단계에 해당한다는 그 잠정적 운명을 강조하기 위해 떠돌아다니는 말이다. 루이스 브뉘엘 만년의 중요한 영화들을 함께했으며 그 자신이 대단한 학식과 재담을 갖춘 사람이기도 한 시나리오작가 장 클로드 카리에르는 그가 막 입문했을 당시 위대한 감독 자크 타티와 그의 편집기사에게서 배운 촌철살인의 교훈 한 가지를 끝내 잊지 못한다고 전하고 있다. 시나리오작가로서 영화에 대하여 무엇을 아는가 질문하는 타티에게 카리에르가 영화에 대한 추상적인 열정과 사랑만을 열거하자 타티는 편집기사를 시켜 카리에르를 편집실로 보냈다고 한다. 그리고 편집실에서 편집기사가 한손은 시나리오가 적힌 종이를, 또 한손은 필름 릴을 가리키며 마침내 카리에르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결국 문제는 여기에서 여기로 가는 거예요.” 결국 문제는 종이에서 필름으로 가는 것이다. 이 말이 평생 시나리오를 쓰며 자신이 새긴 교훈이라고 <영화, 그 비밀의 언어>에서 카리에르는 회고하고 있다. 몇몇의 특별한 영화감독들을 제외한다면, 어쩌면 영화계의 철칙이며 일반적이기까지 한 이 과정이 갑작스럽게 우리의 관심사가 된 건 위대한 소설가 코맥 매카시가 돌연 <카운슬러>라는 한편의 시나리오를 제출하고 그것이 영화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매카시는 1976년에 <정원사의 아들>이라는 텔레비전용 영화의 시나리오를 요청받아 쓴 적이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극장용 영화 시나리오 <카운슬러>가 그의 첫 번째 시나리오로 꼽힌다). 심지어 매카시는 영화계의 그 어떤 요청도 없는 상태에서 이것을 쓴 모양이다. 그의 차기작으로 당연히 소설을 기다리고 있던 에이전트조차 시나리오의 형태를 받아들고 당황했다고 한다. 그가 왜 그런 마음을 먹었는지는 잘 모르겠고 크게 궁금하진 않다. 하지만 매카시가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그것을 리들리 스콧이라는 장인이 연출했을 때 어떤 영화가 될 것인지 기대하는 건 제법 흥분되는 일이었다. 매카시의 여기에서 스콧의 여기로 가는 문제는 호기심이 갈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다소 뒤늦게 <카운슬러>를 보고 예상치 못한 당혹스러움을 접하게 됐다. 이 영화는 한편의 완성된 작품인데도 불구하고 글로 치면 초안, 영화로 치면 러프 컷에 해당한다는 인상을 내내 주었다. 그 정도로 거칠고 산만한 실패작이다. 물론 긍정적으로 추리려고 노력해보지 않은 건 아니다. 가령, <카운슬러>는 주의를 기울여 사건의 구체적 사실관계를 은폐한다. 사건에 연루된 카운슬러(마이클 파스빈더가 연기하는 주인공 변호사는 영화에서 이름 없이 그저 카운슬러라고 불린다), 클럽 주인 라이너(하비에르 바르뎀), 라이너의 마성의 애인 말키나(카메론 디아즈), 마약 중개상 웨스트레이(브래드 피트)까지 그들은 그들이 지금 무슨 일에 어떻게 가담하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행동하거나 언급하기를 꺼리며 아주 일부만 보여주거나 말한다. 또는 카운슬러의 애인 로라(페넬로페 크루즈)의 죽음이 결정되는 클라이맥스에 이르기 전까지, 사건에 연루된 이들의 내면이 직접적으로 묘사되는 경우도 거의 없다. 그러니까 사건에 가담한 자들은 있지만 그에 대한 자세한 내용도 없고 가담자들의 심리도 없이 오로지 사건의 표면적인 진전과 그에 대한 두려운 예감과 피해가지 못하는 결과만이 제시되는 하드보일드한 세계라고 보아야 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도 해보았다. 하지만 그렇게 긍정적으로만 납득하기엔 외면할 수 없는 결함들이 너무 많다. 다만 그 결함들을 일일이 지적하기보다는 여기(시나리오)에서 여기(영화)로 가는 동안 발생되어버린 몇개의 패착을 언급하되, 당연한 비판보다는 우리의 상념을 더해 보는 쪽이 더 흥미로운 일이 될 것 같다. 매카시의 위대한 성취, 소설적 풍경 그렇다면 첫 번째 여기(시나리오)에 관하여 말해보자. “시나리오를 쓸 때는 소설가가 아니라 영화감독의 눈으로 써야 한다”는 카리에르의 말처럼, 매카시도 물론 같은 입장을 취하려 한 것 같다. 시나리오 첫장에는 다소 놀랍게도 “두 사람이 누워 있는 침대의 뒤쪽에서 카메라가 비춘다”라고 카메라의 자리까지 지정하고 있으며 오프닝 크레딧이 시작되는 지점과 끝나는 지점까지도 명시하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매카시의 시나리오를 읽으며 이것이 뛰어난 시나리오라기보다는 조금 평범한 수준의 희곡에 가깝다는 인상을 더 짙게 받았다. 매카시는 필시 어떻게 해야 영화의 시나리오로서 최선이 될 것인가 하는 문제를 껴안고 썼을 텐데 왜 나는 그것이 도리어 희곡 같다는 인상을 받게 된 것일까. 무엇 때문일까. 우선 손쉽게 제시할 수 있는 대답은 이 시나리오의 대화 방식 때문이라는 것이다. <카운슬러>의 시나리오에는 기나긴 대화 장면이 많다. 그것이 옮겨지고 축약되면서 영화에서는 최소한의 전압조차 상실한 중언부언의 대화 장면들이 연출되기도 한다. 양식으로만 본다면 어쨌든 이 대화들은 무대 위의 2인극을 떠올리게 하는데, 심지어 인물이 한 공간에 있지 않을 때는 전화 통화라는 수단을 사용하여 2인극 양식을 유지한다. 일단 대화가 시작되면 대개 그 신 안에 존재하는 건 두 사람뿐이고 상대가 바뀌어가며 2인 대화, 지문, 2인 대화, 지문이라는 식으로 시종일관 이어진다. 매카시가 쓴 희곡을 바탕으로 토미 리 존스가 연출하고 토미 리 존스와 새뮤얼 L. 잭슨이 연기한 2인극 영화 <선셋 리미티드>도 있었으니 매카시와 이런 대화의 방식이 아주 관계없지는 않을 것이다. 매카시는 시나리오를 쓰고자 했으나 은연중에 희곡의 방식을 반영하게 된 것 같다. 다만 이것 자체를 중대한 결함이라고 말하긴 어렵다. 그보다는 2인극 양식들 사이에 있어야 할, 혹은 2인극 양식을 끌어안고 있어야 할 매카시 세계의 상위의 무언가가 실종되어버렸다는 느낌이 더 핵심인 것 같다. 그렇다면 실종된 건 무엇일까. 나는 그게 풍경이라고 생각한다. 매카시의 시나리오에서는 2인극 대화가 연쇄적이며 거대해지는 반면에 풍경은 축소되거나 약화되어서 단순한 무대 정도로만 기술되거나 심지어는 아예 실종되어 있기도 하다. 매카시와 풍경의 관계에 관해서라면 세개의 지적을 떠올릴 수 있다. 첫 번째는 코언 형제의 지적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연출한 코언 형제는 매카시의 소설에 관하여 “코맥은 일종의 박물지처럼 소설을 쓴다”고 말했다. 흔히 찾을 수 있는 사전적인 뜻 그대로 박물지란 “동물, 식물, 광물, 지질 따위의 자연계의 사물이나 현상을 종합적으로 기록한 글”에 해당할 것이다. 예컨대 <핏빛 자오선>의 빛나는 한 구절을 어쩔 수 없이 옮겨보기로 하자. “북쪽 하늘을 빠짐없이 뒤덮은 뇌운에서 검은 덩굴처럼 벋어내리는 빗줄기는 마치 비커에 묻어난 램프의 시커먼 그을음 같았다. 그날 밤 수킬로미터 너머에서 초원을 두들기는 빗소리가 그들에게까지 실려 왔다. 바위투성이 산길을 오르자니 저 멀리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산을 번개가 훤히 드러냈다. 벼락이 내려칠 때마다 바위가 울렸고 씻어낼 수 없는 형광 물질 같은 푸른 불 다발이 말에 들러붙었다. 부드러운 용광로 빛이 금속 마구에 번지고, 푸른빛이 총신을 물처럼 흘러 다녔다. 토끼가 푸른 섬광에 미쳐 날뛰다 우뚝 서고, 쩌렁쩌렁 울리는 높은 바위산에는 독수리가 익살스레 몸을 웅크리거나 천둥에 짓밟혀 한쪽 눈이 노랗게 갈라졌다.” 동물과 식물과 광물과 지질의 성질이 한데 엉켜 박물지적 이미지로 가득한 이 절창에 대해 감탄 이외의 다른 말을 보태기 어렵다. <핏빛자오선>에는 그와 같은 절창의 문구들이 다수 있으며 소수의 위대한 영화감독들만이 저런 구절을 영화의 이미지로 옮길 수 있거나 그와 견줄 만한 이미지를 생성할 수 있을 것이다. 매카시의 또 다른 서부소설 <모두 다 예쁜 말들>을 영화로 옮긴 빌리 밥 손튼은 영화 자체로는 특별히 모날 것 없는 작품을 만들었지만 저 유사한 구절들의 이미지 구현에는 대부분 실패하거나 아예 관심이 없다. 그러므로 두 번째 지적을 떠올릴 수 있다. 매카시를 동시대의 위대한 작가로 손꼽는 미국의 저명한 문학평론가 해럴드 블룸은 매카시의 소설 중에서도 <핏빛 자오선>을 가장 탁월한 예로 꼽으며 “이 작품이 보여주는 세 가지 장관은 판사, 풍경, 그리고 (이렇게 말하게 되어 대단히 유감이지만) 학살자들이다”(<독서의 기술>)라고 썼다. 판사와 학살자들은 인물화의 탁월함에 대한 문제이므로 다른 자리에서 말해져야 할 것이고 지금 관련된 것은 풍경이다. 그 풍경이 어떻게 장관인지에 대하여 블룸이 보다 자세한 해설을 덧붙이고 있진 않지만, 이상에 옮겨놓은 <핏빛 자오선>의 한 구절이 그가 말하는 장관의 풍경을 대변하는 것 중 하나일 것이라고 여기며 나는 일부러 길게 적었다. 그리고 세 번째 지적이 있다. 얼마 전 허문영은 <그래비티>에 관한 글에서 미국영화 또는 서부영화와 풍경의 관계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통찰을 전한다. “미국영화의 위대한 성취 가운데 하나는 서사로 정돈되지 않는 리비도를 풍경이 끌어안으며, 서사적 기획과 긴장하는 시각적 기획의 전통에 있다. 위대한 미국영화들에 빈번히 등장하는 불모의 황야, 성난 바다, 끝없는 사막, 위압적인 산악과 밀림, 아득한 설원은 인간 중심적 서사의 재강화를 위한 경유지이거나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서사를 품고 있는 큰 형식이다. 이를 미국영화의 지리학적 전통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서부극의 전통이 그것을 완성했고, 소수의 걸작 SF들도 그것을 이어받았다.”(<씨네21> 929호) 미국영화 특히 서부극영화가 서사적 기획과 긴장하며 이뤄낸 시청각적 기획으로서의 신기원인 그 풍경을, 놀랍게도 매카시는 서부소설 연작 안에서, 즉 활자와 서사의 맥락에서 종종 단독적으로 완수해내곤 한다. 그걸 읽은 블룸과 코언 형제는 장관의 풍경이라고, 박물지라고 각자의 표현으로 찬탄한 것이다. 매카시의 소설은 그전에도 탁월했겠지만, ‘국경 삼부작’을 통해 명망이 끊긴 서부소설을 복원해내었을 때 공히 인정받게 된 데에는 그만한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도 <핏빛 자오선>과 같은 매카시의 서부소설을 읽으며 소름이 끼쳤다. 분명 쓰여 있는 소설을 읽고 있는 중인데 시청각으로서의 이미지가 너무 도저하여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을 개인적인 착시로 돌리거나 소설 장르가 지닌 일반적인 가치로 환원하는 대신에 매카시 소설이 지닌 독창적인 위대함으로 여기고 싶다. 이것은 활자와 시청각의 경계가 사라지거나 혹은 오롯이 겹치며 일어나는 신비이며, 그 신비의 예가 그 놀라운 지리적이며 박물지적인 풍경이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말하자면 이런 신비에 관한 추구를 매카시의 시나리오 <카운슬러>에서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다. 매카시 소설의 그 위대한 본연의 성질은 작가 스스로에 의해 여기 소멸된 것이다. 어쩌면 물리치기 쉬운 반론이 제기될 수도 있다. <카운슬러>는 매카시의 일련의 서부소설과는 다르게 서부시대를 배경으로 한 것이 아니므로 서부소설에서만큼 풍경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라는. 그렇다면 우리는 <카운슬러>와 유사한 종류로 여겨지는 하드보일드 소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나 묵시록에 가까운 <더 로드>를 읽으면서도 같은 인상을 받았다는 점을 짚으면 될 것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매력이 미국 남서부의 지리적이고 박물지적인 성질, 가령 끓어오르는 초원의 열기, 야생의 동물, 아무도 돌아다니지 않는 한밤의 도심지, 불길한 국경선의 분위기, 말려들어가는 사람들의 어감 같은 것들과 관계없는 것이었던가. <더 로드>의 매력이 지구 종말을 맞은 잿빛 가득한 하늘과 헐벗은 폐허의 건물들과 좀비 같은 타인들과 그리고 외로운 아버지와 소년이 걷던 그 쓸쓸한 대지와 상관없는 것이었던가, 하고 말이다. 또 다른 반론이야말로 좀더 심사숙고해야 할 것이다. 매카시의 소설에 존재했던 위대한 풍경이란 원래부터 시나리오에서 묘사되기 어려운 것이라는 반론이다. 가령 소설과 시나리오가 성취할 수 있는 것은 다르다는 사실 말이다. 실제로 많은 부분이 그렇다. 소설 속 인물의 내면에 대한 기술은 그 자체로 완성이지만 시나리오 속 인물의 내면에 대한 기술은 배우의 연기나 그 밖의 영화적 조건에 따라 무용해지기도 한다. 종종 소설에서는 귀중한 것이 시나리오에서는 쓸모없어진다. 어쩌면 매카시 자신이 그러한 문제를 신중히 여겨서, 시나리오에서 영화로 옮겨지는 것들 중 온전히 옮겨지기 어려운 것의 목록에 풍경을 포함시켰을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매카시의 소설적 풍경이 시나리오에서는 왜 사라졌는가 하고 물었지만 왜 사라질 수밖에 없었는가를 함께 생각해야 할 것이다. 아주 이상적인 상상을 할 수는 있다. 매카시가 소설 그대로의 수준으로 시나리오의 지문을 쓰고 어느 영화감독이 그것을 온전히 옮기는 것이다. 혹은 매카시가 조금 모자란 지문을 쓰더라도 감독이 더 훌륭히 옮기는 것이다. 그런데 그건 감독의 몫이므로 우린 결국, 여기에서 여기로 가는 문제에 다시 닿게 된 것이다. 개입하지 않는 스콧 그리하여 두 번째 여기(영화)에 관하여 말해보자. 스콧은 일단 매카시의 시나리오를 최대한 바꾸지 않고 영화로 옮기는 것이 자신의 소임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조금 더 말이 되도록 사소한 것들을 다듬는 정도이며 신의 배열에 관련해서는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다만 인물의 성격화를 위해 신의 순서를 약간 바꾼 대목이 있을 뿐이다. 예컨대 말키나의 섹스에 관련된 일련의 장면들은 시나리오에서 여기저기 퍼져 있는 것에 비하면 영화에서는 한곳으로 모여 있다. 그렇지만 크게 도드라지진 않는다. 하여간에 시나리오를 그대로 담아내겠다는 소신은 시나리오가 지녔던 문제까지 고스란히 함께 가져오는 부작용을 낳았다. 시나리오에서 부족했던 풍경의 중요도가 복구되지 못한 건 물론이고, 그마저도 구현된 장면들은 대부분 단순하고 기능적인 배경으로만 쓰이고 있다. 시나리오가 내장하고 있던 취약한 동선의 문제들도 전혀 해소되지 않는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도 <카운슬러>도 여러 명의 인물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자기의 구역을 갖고 움직이며 가끔씩 서로의 접선을 이뤄내면서 평행하게 가는 영화들이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명확한 차이가 있다. 코언 형제는 소설적 서사에서 영화적 서사를 어떻게 추려낼 것인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 동선의 뼈대가 되는 추격이라는 개념을 중시했다. 그 추격이라는 개념이 인물들의 산발적인 동선들을 하나의 응집력 있는 긴장으로 묶어준다. 그들의 성공과 실패와 무관하게 누가 누구를 끊임없이 쫓고 있으며 이 추격의 개념이 비유컨대 인물들간의 장력을 살벌하게 유지해주는 보이지 않는 끈의 역할을 하고 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인물들은 서로 보이지 않는 그 끈으로 묶여 있는 형국이다. <카운슬러>에는 보이지 않는 그 끈이 모조리 끊어져 있어서 마약을 실은 분뇨차는 저대로 가고 있고 카운슬러 또한 저대로 나빠져만 가는 와중이다. 영화는 그걸 하드보일드한 세상으로 받아들여달라는 눈치만 계속 보내고 있다. 평론가 정성일이 탁월하게 해석한(<씨네21>644호),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다음과 같은 신기한 대목과 견줄 만한 것도 <카운슬러>에는 없는 것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영화의 후반부, 안톤 쉬거(하비에르 바르뎀)와 보안관 에드(토미 리 존스)가 모텔의 문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다가 안톤 쉬거가 홀연히 유령처럼 사라져버리는 불가사의한 장면. 정성일이 “의심스러운 편집의 조형”에 따른 것이라고 지적한 장면. 원작 소설에서 이 장면은 안톤 쉬거가 주차장의 차 안에서 모텔로 향하는 에드를 보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으므로, 영화의 장면은 전적으로 코언 형제의 선택지를 따른 것이다. 스콧은 <카운슬러>에서 숏과 신의 운용에 있어 이와 같은 개입을 전혀 하지 않는다. 웃음 또는 울음, 영화로 가는 물질적 구현의 문제 그런데 의아하게도 스콧이 시나리오와 아주 판이하게, 아니 시나리오를 거의 무시했다고 할 정도로 바꾼 한 가지가 있는데 그건 주인공 카운슬러의 어떤 표정이다. 이 표정은 일관되게 등장하므로 감독의 지시 사항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까 그의 웃음이다. 약혼녀인 로라에게 사랑을 고백할 때는 물론이고, 로스가 당신 참 똑똑하다고 비웃을 때, 웨스트레이가 이상한 건배의 말을 할 때, 라이너가 말키나의 행동에 대해 전할 때마다 카운슬러는 빠짐없이 씩 웃는다. 하지만 매카시는 웨스트레이의 허튼 건배의 말을 듣는 장면 이외에는 카운슬러를 거의 무감정의 사내로 표현하거니와 그에게 “웃음”이라는 지문을 주지 않고 있다. 배우의 연기란 기계적인 것이 아니어서 상황에 맞는 표정을 짓는 건 배우의 역량이며 시나리오가 어쩌지 못하는 영화적 세부에 속하므로 지문에 없는 표정을 지었다는 이유로 잘못되었다고 억지를 부릴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데 웃음이라는 표정이 아니라 울음이라는 표정에 마침내 이를 때, 이 영화적 세부가 잘잘못의 측면이 아니라 조금 다른, 그러나 근원적인 측면과 맞닿아 있음을 우린 느끼게 된다. 연기 양식의 문제를 넘어 시나리오에서 영화로 가는 사이의 물질적 구현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직감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더 확실하게 느끼도록 하는 것은 잦은 웃음보다 큰 울음이다. 정점이라고 해도 될만한 장면. 약혼녀를 납치해간 일당 중 하나인 멕시코의 갱단 두목과 주인공 카운슬러가 길게 대화를 나눈다. 카운슬러는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이 사태를 마감짓겠다는 의사를 전달하지만 냉혈하기 짝이 없는 상대방은 꿈쩍도 하지 않은 채 단지 지금 처한 숙명을 받아들일 것만을 내내 가르치고 강조한다. 어차피 약혼녀는 죽게 되어 있는 것이라고. 대화는 겉돌며 속절없이 이어지고 상대방의 무심하고 질기며 잔인한 훈계도 이어진다. 그때에 매카시는 카운슬러의 답답한 심경을 표현하기 위해 그들의 기나긴 대화 사이마다 ‘침묵’이라고 네번 적어놓고 있다. 상대방이 한참을 말하고 침묵. 혹은 카운슬러 자신이 말하고 또 침묵. 그렇게 네번이다. 그런데 완성된 영화에서 스콧은 이 장면을 완전히 다르게 표현했다. 영화에서는 갱단 두목과 카운슬러 사이에 시나리오와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하지만 대화의 끝 무렵에 이르자 카운슬러는 솟아오르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오열하고 만다. 의아한 일이다. 매카시는 침묵해야 한다고 생각한 그 순간을 스콧은 오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원래는 각자의 판단을 따라야 할 문제이지만 스콧이 지나칠 정도로 필사자의 자세로 시나리오를 존중한다는 걸 감안하면 이 대목의 변동은 거의 과격하다고 느껴질 정도의 변절이거나 포기다. 게다가 이 대목은 영화의 거의 정점이다. 약혼녀가 이미 죽었거나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 이런 상황에 처한다면 누구라도 울음을 터뜨리는 것이 침묵을 유지하는 것보다 상식적으로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미처 완성되지 않은 영화적인 상태를 예상하며 혹은 옮겨지지 않은 그 영화적 이유에 호기심을 달며 또 이렇게 질문한다. 어쩌면 그 침묵의 무게가 영화로 표현 가능하기만 하다면, 네번의 침묵이 한번의 큰 울음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강력하고 무시무시한 숙명의 공기를 만들어낼 수 있지는 않았겠는가. 그렇게 묻는 동시에 이런 의심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적어도 스콧은 침묵이라고 쓰여 있는 활자를 침묵이라는 시청각적 활동으로 옮길 방법을 결국 찾지 못했거나 포기하고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감정의 묘사에 기대기로 한 것 같다. 카운슬러가 오열하자 오히려 이 장면은 평범하고 온순해졌다. 작은 부스러기들이 영화를 삼켜버렸네 도대체 어떻게 해야 갱단 두목과 카운슬러 사이에 놓인 침묵이라고 쓰여 있는 활자를 침묵이라는 활동으로 적확하게 표현해낼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것이 활자에서 물질로 옮겨져야 하는 문제라는 건 확실한 것 같다. 그런데 어떻게 바꿀 것인가. 침묵이라는 활자는 거기 박혀 있는 것이지만 침묵이라는 물질은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일 때 그걸 어떻게 옮길 것인가. 침묵이라고 써놓은 건 거기 아무것도 없다고 써놓은 것인데 그걸 어떻게 눈에 보이도록 존재케 할 것인가. 활자가 지시한 물질의 분위기로 바뀌어야 한다고 말하는 건 속수무책의 동어반복에 해당할 것이다. 영화사의 수많은 감독들이 그 문제를 두고 고민해왔을 것이다. 다만 이 침묵의 문제가 새삼 우리를 자극하는 요점은 분명하고 심원하다. 대다수의 영화에서 결국 문제는 여기에서 여기, 종이에서 필름으로, 시나리오에서 영화로, 언어에서 비언어로, 문자에서 시청각으로, 묘사의 기술에서 물질적 구현으로, 쓰여 있는 것에서 활동하는 것으로 어떻게 가느냐는 그것이다. 각자의 방식으로 그걸 시도하면서 실패하거나 조금씩 성공하고 있고 카리에르에게 영화를 가르쳐준 자크타티 정도의 위대한 감독들 몇몇만이 간간이 놀랄 만한 방식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있다. 이런 말을 덧붙일 수도 있다. <카운슬러>에 선택과 숙명이라는 테마가 있다는 걸 감안하면 영화에 등장한 작은 조역 두 인물의 행동을 눈여겨보게 된다. 약혼녀를 납치해간 갱단의 두목과 협상의 다리를 놔줄 것을 부탁하며 카운슬러가 접근하는 멕시코의 변호사, 말키나의 명령을 받아 웨스트레이를 꼬여내 물 먹인 젊은 여인이다. 멕시코의 변호사는 사례하겠다는 카운슬러에게 돈 대신 악수면 된다고 말한다. 그는 어차피 성사되지 않을 일인데 돈을 받으면 탈이 난다는 걸 알고 있다. 젊은 여인도 말키나의 돈을 받지 않는다. 대신 앞으로 일어날 일에 끼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두명의 조역은 그 돈을 받고, 받지 않는 작은 선택이 어떤 거대한 숙명을 만들지 직감하는 것 같다. <카운슬러>는 정확히 그들과 반대되는 선택을 따르고 반대되는 운명을 맞는 주인공에 관한 이야기다. 시나리오를 쓴 작가는 영화의 이상을 온전히 믿지 않는 것 같고 그걸 읽은 영화감독은 영화를 온전히 믿지 않는 시나리오를 그대로 시청각적으로 필사하되 하필이면 신비를 품고 있는 지점만큼은 포기하고 만다. 그게 <카운슬러>라는 시나리오에서 <카운슬러>라는 영화로 가는 과정 중에 벌어진 이상한 일이고, <카운슬러>는 실패작이다, 라고 말하는 대신 다른 말이 길게 필요했던 계기가 됐다. 어쩌면 그게 바로 이 영화의 선택과 숙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선택과 숙명의 테마는 은유적이나마 이 영화의 최종적 상태에도 아이러니하게 드리워 있는 것 같다. 빗댈 만한 두개의 명제가 영화에 등장한다. 웨스트레이는 범죄에 가담하겠다는 카운슬러에게 말한다. “아주 작은 부스러기 하나가 우리를 삼켜버릴 수도 있다.” 라이너는 카운슬러에게 말키나에 관하여 말한다. “섹시하기에는 너무나 적나라했다.” 이 두개의 대사를 <카운슬러>의 여기에서 여기로의 과정에 마음대로 비유하고 싶어진다. 예컨대 작은 부스러기들이, 하지만 더없이 중요한 선택으로서의 작은 부스러기들이 이 영화를 삼켜버렸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이 영화는 적당히 섹시한 것을 넘어서서 너무나 적나라하여 견디기 어려운 진짜 하드보일드의 세상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결국엔 적당히 섹시하고 슬픈 운명 안에 스스로 남은 것이다.

[유선주의 TVIEW] 채집의 즐거움

짝사랑하는 사람과 마주 앉아 있으면서도 상대방 유리잔의 지문 얼룩, 신발 매듭 따위를 마음에 새길 때가 있다. 나중에 되새김질할 정보를 저장하고 분류하는 모양새가 어쩐지 소나 염소를 닮았는데, 반추동물이야 주식을 소화시키는 위장의 구조가 그렇고, 내쪽은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별식으로 얻은 기쁨을 길게 반복해서 유지하고 싶은 가난뱅이 성정이라 그럴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94>를 볼 때, 특히 ‘쓰레기’(정우)가 등장하면 딱 그 상태가 된다. ‘멋도 맛도 모르는 쓰레기’라 불리는 부산 출신의 남자가 잔머리 굴리지 않는 다정함을 무슨 소파에 리모컨 던지듯 아무렇지 않게 툭툭 내보일 때마다 머릿속에선 만국기가 휘날리고 폭죽이 터진다. 일상생활에선 허점투성이인 천재 의대생이란 상투적 설정도 나사 빠진 일상을 워낙 탄탄하게 다져놓은 덕분에 천재임을 증명할 과업에 치이지 않고도 매력적인 갭을 만들어낸다. 사랑에 눈을 뜬 뒤, 돈이나 가족, 지위 등 이전의 모든 이득과 관계를 포기하는 남자주인공들이 표준어를 쓰며 관념적 사랑을 대리 실현한다면, <응답하라 1994>의 쓰레기는 관계 안에서의 의무나 책임의 무게를 자신의 체중처럼 당연하게 여기는 지방 출신 남자로 다시 현실을 향하는 판타지이기도 하다. 너무 잘 만든 캐릭터다. 머리로 이해하는 쓰레기는 그렇다. 좋아하는 배우나 근사한 캐릭터가 등장할 때, 보통은 다시 반복해서 보게 되면 분명 처음과 같지 않을 감흥을 놓치지 않기 위해 집중하는데, 이 드라마는 마치 몰래 좋아하는 상대를 마주했을 때처럼 판단이 흐려지고 시선은 화면 구석구석으로 흩어져 뭔가를 채집하게 된다. 드라마 캐릭터에 반한 게 한두번이 아니거늘 어째서일까? 어떤 이야기를 다루는가에 따라 차이가 있긴 하지만, 텔레비전 드라마의 연기는 대개 대사가 중심이 되어 상황과 감정의 정보를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데 집중한다. 몸의 움직임은 대사처럼 약속된 기호가 되고, 불필요한 움직임은 통제된다. 진심 혹은 어떤 감정을 호소하는 데 자주 눈을 깜빡인다면, 불안이나 거짓말이라는 정보가 개입하므로 의도했던 게 아닌 경우 이 장면은 폐기된다. 부자연스러움 없이 극도로 통제된 배우의 신체가 뿜어내는 경이가 있지만, 이는 몇몇 배우들에 한정한 이야기다. 뭐 대단한 질곡이 없는 일상의 평범한 연애를 그리는 드라마에서조차 배우의 대사와 표정, 몸이 너무나 알기 쉬운 정보를 전할 때, 당연히 진짜 일상 연애와의 밀도 차이는 크게 벌어진다. 그리고 <응답하라 1994>, 특히 쓰레기 역의 정우는 이 밀도 차를 현실과 가깝게 줄이는 배우다. 그는 달달 떠는 발, 때때로 축 늘어뜨리거나 여기저기 척척 잘 걸치는 팔등, 의미 이전의 습관처럼 보이게 하는 동작으로 몸을 쓰는 데 능란하며, 사투리와 표준말, 존댓말과 반말을 숨 쉬듯 자연스럽게 오간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대상의 별 의미 없어 보이는 습관적인 동작을 눈에 새기며, 진의를 간파하지 못하는 대신 윤곽의 말단을 좇고, 의미를 부여하고 곱씹다가 다시 미궁에 빠지기를 반복하는데, 극에서 전해야 하는 분명한 상황과 감정 외에도 채집할 거리가 많은 쓰레기는 그야말로 노다지나 마찬가지다. 그때 거기서 왜 뛰었는지, 어째서 멈칫거리는지, 걸어서 다가간 이유가 뭔지 수없이 생각해봐도 답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캐릭터. 제작진이나 연기하는 당사자는 ‘그때는 그래야 한다’는 답을 찾아가며 만들어냈겠지만, 이쪽은 “몰라. 그냥?” 정도로 대충 답하곤 목 근처를 긁는 습관을 상상하는 것으로 족하다. 그것만으로도 올겨울은 훈훈하다. +α 대사, 그 이상 <파스타> <골든타임> 등을 연출한 권석장 PD는 상황으로 빚어진 일차적인 정보 이상의 감정을 끌어내는 또 다른 연출가다. 보통의 드라마라면 정점의 순간에서 컷할 엔딩 키스 신을 한계까지 밀어붙여 마치 진짜 키스 이후처럼 수줍게 얼굴이 달아오르는 장면을 만들어내는가 하면, 정면을 향해 나란히 앉은 배우의 전신을 편집 없이 한컷으로 담아, 주고받는 대사보다 많은 감정의 흐름을 전한다. 물론 저 두 장면에 등장한 이선균 또한 손끝에서 발끝까지, 몸 전체로 많은 여운을 남기는 배우다.

안개 속의 풍경

장률의 <풍경>을 두번 보았다. 장률이 <풍경>을 두번 만들었기 때문이다. 한번은 올해 전주영화제 디지털 삼인삼색 프로젝트 세편 중 하나로 고바야시 마사히로, 에드윈과 함께 ‘이방인’이라는 주제 아래 <풍경>을 찍었다. 이 영화는 42분이다. 그런 다음 다시 <풍경>이란 제목으로 이 영화를 96분으로 만들었다. 장률은 두 영화 사이에 일부 장면이 겹치긴 하지만 단순히 늘리는 대신 완전히 다시 편집을 했다. 그래서 앞의 영화를 보았다 할지라도 뒤의 영화를 볼 때 마치 다른 영화를 보는 것처럼 만나게 될 것이다. <풍경>은 장률의 5 1/2번째, 그리고 여섯번째 영화이다. 하여튼 두 영화는 기묘한 방식으로 공존하게 될 것이다. 나는 한 가지 사실을 더 환기시키고 싶다. 그리고 동시에 <풍경>은 장률의 첫 번째 다큐멘터리이다. 당신이 장률 영화를 알고 있다면 이 말 앞에서 잠시 멈칫할지 모른다. 과도할 정도로 황폐한 풍경 앞에 서서 거의 멈춘 것처럼 등장인물들이 그저 물끄러미 상대를 바라보면서 단지 필요한 말만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영화들. 그건 첫 번째 영화 <당시>에서부터 지난번 영화 <두만강>까지 항상 그렇게 세상과 사람이 다루어졌다. 그런데 문득 카오스에 가까운 질서로 넘쳐나는 세상의 리듬 안으로 들어가기로 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누가 당황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래서 영화를 보았다. 나는 두편의 영화에 대해서 전혀 다른 두편의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자리는 비평에 적절하지 않은 장소이다. 그러므로 재빨리 인상을 쓴 다음 장률을 만나러 갈 생각이다. 장률은 언제나처럼 소수의 스탭을 끌고 구로동에서 안산역 부근에 이르는 동네를 찾아다니면서 이주 노동자들을 만났다. 당신이 떠올리기 간편한 이미지들은 이 영화에 없다. 장률은 그들의 고단한 삶에 관심이 없다. 그 대신 만날 때마다 단 한 가지 질문을 한다. 14명의 이주 노동자들. 14번의 질문. 14번의 대답. 당신은 한국에 와서 무슨 꿈을 꾸었습니까? 당신이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장률은 여기서 내면으로 들어가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기서 따분하게 프로이트의 꿈에 관한 이론을 늘어놓지는 않을 생각이다. 누군가는 꿈을 이야기하고, 누군가는 꿈 이야기를 하는 척하면서 소망을 늘어놓고, 누군가는 그러면서 고백을 하고, 누군가는 아무 대답 없이 그냥 그 자리를 피한다. 그걸 장률은 종종 사진관에 와서 증명사진을 찍는 것처럼 바라본다. 나는 그가 이따금 이야기가 끝났는데도 바라본다는 느낌을 받았다. 때로 인물이 카메라 바깥으로 빠져나갔는데도 그냥 거기에 멈춰 서 있기도 한다. 장률은 그들의 내면에서 꿈꾸고 있는 풍경을 찍을 수 있었을까. 그건 알 수 없다. 그 대신 그것마저 없으면 거의 윤곽이 부서져버릴 것만 같은 이 사람들의 생명이 어디서 숨 쉬고 있는지를 엿보고 싶어 한다. 종종 이 시도는 위험해진다. 대답은 때로 지나치게 순진하고 때로 지나치게 교활하다. 혹은 너무 멀리 있거나 가끔 지나치게 상투적이다. 그래도 장률은 지치지 않고 다시 만난다. 그때 장률은 말의 문자를 마치 풍경을 감상하듯이 들어보고 있다는 것을 문득 알게 되었다. 서울에 온 이방인들 틈에서 그저 우두커니 그들과 별 다를 바 없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당신에게 장률이 연변에서 온 사람이라는 사실을 일깨우고 싶다. 장률, 그리고 장루(張律). 이 영화에는 다큐멘터리에서 흔히 만나는 관찰의 기록이 없다. 여기에 있는 것은 인상의 기록이다. 삶의 리듬에 관한 인상. 그때 장률은 그들의 꿈을 빌려 자신이 여기서 바라보는 신기루와도 같은 풍경을 담아내기 시작한다. 나는 이 풍경화와도 같은 영화가 장률 자신의 초상화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자신을 이야기하기 시작한 이 사람에게 이번에는 내가 질문을 해보기로 결심했다. 당신의 꿈은 무엇입니까? 이 인터뷰는 여기서 시작한다. 정성일_이렇게 시작하겠습니다. <두만강>을 찍고 나서 의외로 공백의 시간이 길었습니다. 물론 영화에서 공백이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엔 정신적 공백이랄까. 할 이야기는 다 해버렸다는 소진의 공백이 있었습니다. 고향을 드디어 찍었다는 데서 오는 느낌? 그런 다음 <풍경>을 보았을 때 여기서 다시 한번 시작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니 <두만강>은 어떤 영화였습니까? 장률_거의 오늘 처음 얘기하는 거예요. 영화를 그만둘 생각이었어요. 어려워서가 아니고, 3년의 공백이란 게, 거기에 노력하기 싫다는 마음이 꽤 있었어요. 나도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옆에서 사람들 만나면 (영화를) 하냐, 안 하냐, 뭐 찍냐 물어보지 않습니까. 제일 중요한 건 맥이 좀 풀렸어요. <두만강>은 제일 먼저 찍고 싶은 영화였어요. 준비도 그렇게 했는데 이상하게 제일 늦게 찍었어요. 내 고향까지 다가가는 시간이 너무 길었어요. 그런데 제일 처음 찍고 싶은 영화를 찍었으니까 좀 몸이 풀어진다, 그럴 수도 있었겠죠. 그래서 <두만강>은 하신 말씀이 맞는 것 같고. <풍경>이 내 지금 다시 시작한다… (잠시 생각) 그런데도 아직 포기하는 과정 중에 있지 않겠는가. 나도 잘 모르겠어요. (웃음) 서로의 감정이 흐르는 딱 그만큼의 거리 정성일_<풍경>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가장 놀란 건 다큐멘터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장률은 절대로 다큐멘터리를 찍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정의내린다면 장률에게 다큐멘터리는 무엇입니까? 장률_원래 다큐를 찍을 생각은 없었지만 관심이 없는 건 아니었어요. 좋은 다큐를 볼 때 ‘나는 뭐야?’ 하는 생각을 할 것 같습니다. 나는 뭔가를 만들고 있는데 저 사람들은 진짜로 나가서 부딪치고 진짜의 것을 만난다는 생각. 실제 다큐를 찍어보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닌데 말입니다. 하지만 행동하는 사람이 더 아름답게 보이잖습니까. 전주영화제에서 날 찾아왔을 때도 다큐인가, 극영화인가 생각하지 않았어요. 지금 연세대에서 일년 반 동안 일주일에 두번만 강의를 하면서 서울에서 못 보던 이방인들의 풍경을 보기 시작했어요. 나와 사는 방식이 다른 나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에게 자꾸 눈길이 갔어요. 처음엔 한 40분 정도 영화에 담으면 큰 실수는 하지 않겠다 싶었어요. 그런데 극영화 생각나는 것도 없고(웃음), 전주에 다큐를 찍어도 괜찮겠느냐고 해서 시작했는데 이상하게 내 감정의 리듬이 길어졌어요. 장편이 돼버렸는데 (잠시 생각) 지금에 와서는 다큐가 무엇인가 묻자면, 모르겠습니다. 정성일_“좋은 다큐멘터리”라는 표현을 쓰셨는데 좋은 다큐멘터리라고 떠올리는 영화가 있습니까? 장률_실제 내가 다큐를 본 건 별로 없습니다. 봤다고 하면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중국> (Chung Kuo, 1972). 그때 내가 살아온 그 시대를 밖의 사람이 어떻게 보는가. 극영화를 볼 때에는 항상 밖의 사람이 들어와서 찍으면 엉망이에요. 외국 감독이 들어와서 찍으면 분노할 정도로. 다큐는 더하지 않겠는가. 그 시대를 이 사람은 어떻게 얘길 했는가, 의심스럽게 생각하면서 봤어요. 들어갔는데 빠진 거죠. 재밌는 건 극영화는 그 생활을 잘 알아야 더 좋은 게 나온다 싶지만, 다큐는 큰 시대를 얘기할 적에는 정말 냉정하게 거리를 둔 사람이 마지막엔 진실한 영상을 우리에게 남겨두는 것 같아요. 그리고 중국 감독 왕빙이 찍은 <철서구>(鐵西區, 2003)를 볼 때, 국영 공장이 무너지고 와해되는 과정을 아주 길게 찍었는데 실제 (중국인인) 우리가 보던 풍경이죠. 그 와해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찍는 것. 두 영화를 보면서 나를 위로하고 반성도 했어요. 그 시대의 사회를 살았던 사람으로서 그 두 영화를 인상 깊게 봤어요. 정성일_<풍경>이란 제목을 처음 들었을 때 무언가 이전 영화들과 다르다는 느낌을 먼저 받았습니다. 이 제목은 언제 결정한 것인지요? 장률_서울과 경기도에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이 사람들과의 관계를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앞의 영화들은 아주 단순해요. 거긴 거기고 그거면 그거고. 영화 찍다가 아니면 다 찍은 다음에 나오고. 이번엔 좀 달랐어요. 처음부터 <풍경>이었어요. 이 영화는 그게 필요했어요. 왜냐하면 시간이 없었어요. (영화제 상영이 4월인데) 12월 중순에 날 찾아왔어요. 거기서 시작되었어요. 시나리오도 없고 내 수업을 듣는 학생들과 2, 3일 동안 찍어보았어요. 그러면 리듬이 생기잖습니까? 해보니까 이건 단편으로 감당을 못하겠더라고요. 아예 망하든지 그 돈을 물어내든지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때 약속과 어긋나고 있다는 걸 알았어요. (웃음) 솔직히 얘기했더니 전주에서 우호적으로 나오더라고요. 단편 버전을 먼저 주고 그다음을 허락했어요. 사실 전주에서 다 봐줬더라면 아예 단편을 없앨 마음이었어요. (웃음) 1월 한달 동안 일주일에 서너번, 모두 19회차를 찍었어요. 정성일_그런데 장편 <풍경>은 전주 버전을 늘려놓은 게 아니라 구성 자체가 완전히 다릅니다. 두 영화 사이 편집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장률_장편 버전의 원칙은 내 리듬대로 가는 거였고, (잠시 생각) 좀 이상하지만 단편은 솔직히 말해서 원칙이 없었어요. (전주 버전의 마지막 장면이 장편 버전의 첫 장면인데) 실제 내 마음속에서 첫 번째 장면은 장편 버전이에요. 단편이어도 그건 명확했어요. 그렇게 해보지 않은 건 아녜요. 아우구스티노가 떠난 다음 그의 시선으로 그 공간에서 남은 또 다른 이방인을 보려고 했는데 그러려면 시간의 길이가 필요해요. 유일한 방법은 이걸 마지막에 갖다놓으면 내 뜻과는 멀리 있지만 논리적이 되었어요. 장편이 리듬을 따른다면 단편은 계산적인 영화가 된 거지요. 정성일_장편 <풍경>의 첫 장면, 아우구스티노가 떠나면서 인터뷰하는 장면에게, 마치 그를 증명사진 찍듯이 세워놓고 말 그대로 ‘촬영’을 했습니다. 이 영화는 종종 사진적인 감각이 있습니다. 장률_실제로 그 사람들 생활이 그렇게 비칩니다. 사람들 사이의 모든 거리는 계산이에요. 나는 실제 거리를 찾았어요. 그런 거리 속에서 나와 저 사람의 감정이 흐를 수 있는 딱 그만큼의 거리. 거기서 더 들어가면 용기인데 나에게 그런 건 없었어요. 관찰이 아니라, 인상의 기록 정성일_만나는 사람마다 이 영화는 딱 한 가지를 묻습니다. 이것이 <풍경>의 가장 특별한 점이자 들어가는 입구가 될 것 같은데요. 꿈 얘기를 듣는다는 건 무엇입니까? 장률_실제 우리 생활 중에서 마음속의 얘기를 듣긴 어려워요. 꿈 얘기를 듣는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할 거예요. 가끔 연인들끼리는 꿈 얘기를 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불편해요. 정말 깊숙이 들어가야 하니까. 거기에 흥미를 가진 거예요. 그렇게 전혀 다른 것도 소통 못하는데 제일 깊게 가서는 돼요. 물론 처음엔 다른 질문도 했고요. 인터뷰하는 사람들에게 동의를 받는 게 중요했어요. 그 사람도 동의하고, 사장도 동의하고, 그런데 다른 이야기를 하자고 하면 다 거절하는데 이상하게 한국에 와서 제일 인상 깊었던 꿈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처음에는 당황하고 몇초 생각한 다음 다 웃어요. 거기서 긴장감이 풀어지고 거의 진실하게 말해요. 이들은 다 외로운 사람들입니다. 깊숙한 꿈을 듣자고 하니까 갑작스럽게 연인의 감정이 생긴달까. (웃음) 나도 이런 소통 방식을 찾았다는 것에 찍어가면서 행복감을 느꼈어요. 정성일_서울에는 아주 많은 이주 노동자들이 있습니다. 어떤 기준을 갖고 인터뷰이를 선별했나요? 장률_난 다큐의 정신이 아직 모자란 사람이에요. (웃음) 준비할 시간이 필요한데 엉뚱하게 뛰어들게 됐으니까. 딱 한 가지 방법. 다양한 장소. 철공장, 농장, 도살장, 다양한 데서 일하는 사람들을 그 풍경에 대조하면 어떻겠냐는. 모호하게 짜서 무작정 간 거죠. 정성일_영화에 나온 열네명이 인터뷰한 사람 전부인가요, 버린 사람은 없나요? 장률_전부예요. (잠시 생각) 원래는 열다섯명인데 한 사람이 누구냐면, 방글라데시에서 온, 꿈에서 와이프 왔다고 말한. 그전에 옆에서 같이 밥 먹는 사람도 인터뷰를 짧게 했는데 쓰진 않았어요. 왜냐하면 다른 사람이 한 꿈 얘기와 비슷했어요. 중복되고. 그래도 그 사람 얼굴, 생활, 그건 나왔길래 내 마음이 조금 편하고(웃음) 사람이 풍경으로 나왔으니까요. 정성일_<풍경>은 사건을 좇아가는 것도 아니고, 계절도 한 계절에 집중됐고, 사람들 사이에 특별한 네트워킹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배열은 전적으로 연출의 권리인 영화입니다. 어떤 원칙으로 순서를 정했는지요? 장률_처음은 정했어요, (한국을) 떠나는 것. 나머지는 바깥 풍경의 순서를 제일 먼저 생각했어요. 첫 번째 외에는 밖의 풍경. 노동하는 풍경, 아니면 노동하기 전의 빈 공간의 풍경. 아니면 그 안의 사람들 인터뷰 아니면 재현. 소리. 그게 어떻게 자연스럽게 흐름이 됐다, 리듬이 나온다, 그러면 그렇게 갔어요. 정성일_<풍경>에서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안개가 가득한 한강 강변 고속도로를 달리는 장면입니다. 뭐랄까, 장률의 마음의 풍경 같다고 할까요. 질문을 이렇게 해보죠. 베이징에서 눈을 감고 서울을 떠올리면 맨 먼저 떠오르는 거리는 어딥니까? 장률_(한참을 생각해보고) …. 정성일_전혀 안 떠오르세요? 장률_네. 이렇게 얘길 하다 보니 무의식이 나오는 것 같네요. 김포공항이 맨 먼저예요. (웃음) 이것도 공항이 바뀌면서 그런 것 같아요. 1995년 서울에 처음 왔을 땐 김포공항에 내렸거든요. 그 뒤에도 생각이 났어요. 그런데 인천공항으로 바뀌고, 섞이니까 김포는 거의 생각나지 않는데, 이전엔 김포공항이 생각났었죠. 정성일_<풍경>을 보기 전에는, 아마도 감독님에 대한 선입견인데, 이방인들, 이주 노동자를 찍었다고 하자 중국인들, 혹은 잘 아는 연변 동포 중심으로 찍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틀렸습니다. 연변 동포는 어린 소녀 송홍련 한명이고 중국인도 쉬첸밍뿐입니다. 짧은 시간에 아시아 전역의 이주 노동자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서울에서 수많은 국적의 아시아 사람들을 만난다는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장률_지금 한국의 서울, 경기도를 가보면 각 나라 사람이 다 있어요. 막 섞여서. 항상 보면 궁금해요. 타이 사람이 나올까 하면 방글라데시 사람 오고. 그게 한 풍경이 돼버렸어요. 누구누구를 가를 수가 없어요. 그 속에서 그들끼리 감정의 연대가 있는 것 같아요. 한 풍경에 모인 사람들끼리는. 그중 가끔 한국 사람들이 지나가면 오히려 감정의 연대가 없어 보여요. 이들이 또 서울 다른 거리에 흩어지면 보이지 않고, 보였다가 안 보였다가 하는 게 인상적이더라고요. 정성일_그런 점에서 다큐멘터리를 관찰의 기록이라고 얘기합니다만 방법론에서 <풍경>에는 관찰의 기록이 없습니다. 이 영화는 인상의 기록, 종종 화면이 텅 비어 있기도 하고 카메라가 멈춰 있으면서 인물이 카메라 앞으로 떠난 이후에도 멈춰 서 빈 대상, 사람이 없는 화면에서 장소를 바라보기도 하고, 다큐에선 대부분 그런 방법을 잘 쓰지 않죠. 저에게 <풍경>이란 영화는 서울, 좀더 확장해서 한국에 대한 감독 장률의 인상의 기록이란 생각이 있어요. 이 영화가 그런 태도를 취하는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장률_뭐가 필요했을까요? (웃음) 그런 성격적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누구 한 사람 한 사람을 또렷하게 보고 그 사람을 분석하고 생각하고, 근시인 사람이 안경을 쓰고 똑똑히 보면 좀 피곤하고 단조롭고 짜증도 나고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안경을 벗고 보면 훨씬 뭔가 통하는 것 같아요. “이 아저씨는 말하는 풍경이다” 정성일_꿈 이야기를 듣는데 누군가는 어눌하지만 한국말로 하고 누군가는 영어로 얘길 합니다. 중국과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친구만 자국어로 말합니다. 의외라고 생각한 것은 꿈이라는 내밀한 이야기를 남의 나라 언어로 말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꿈과 언어는 서로 매우 밀접하지 않습니까? 장률_이 영화를 만드는 기본의 감정의 수요랄까. 여기 한국에서 살고 있는 이방인들과 한국 사람들이 어떻게 소통하는지를 크게 생각했습니다. 인터뷰할 때에는 한국말 잘하는 사람도 있고 아예 못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둘 다 할 수 있는 사람은 두개 다 했어요. 그런데 번역을 해보니 역시 한국말로 하는 게 더 재미있어요. 그때 표정이 더 재미있어요. 자기 꿈을 다른 나라 말로 다른 나라에서 살면서 제일 기억나는 걸 내가 살고 있는 이 공간 사람들에게 말하는 거잖습니까. 정성일_질문이 좀 이상하긴 한데(웃음) <풍경>에는 인서트 장면이 많이 나옵니다만 서울 풍경을 보면서 이상하게 베이징 풍경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었습니다. 어떤 점에서 이 영화는 그런 풍경을 찾아다니고 있다는 느낌을 순간순간 받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풍경>은 서로 이어진 <중경>과 <이리>를 거쳐 <두만강>에서 <경주>까지 가는 길목에 있는 영화라는 느낌이랄까요, 서울 안의 베이징이랄까…. 장률_(잠시 생각) 고의적인 건 아닌데 꼭 자기 성장 과정, 자기가 익숙한 공간, 자기도 모르게 그런 동질감 있는 장소에 다가가는 것 같아요. 그게 다큐 찍을 땐 더해지는 것 같아요. 나도 모르게 그 공간에 내 감정이 들어갈 수 있고, 변해요. 사람이 그렇지 않습니까. 어느 자리에도 습관적으로 구석에 앉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고, 중간에 앉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고, 거기서 그 사람만 맡는 어떤 냄새처럼 말이에요. 정성일_대림동의 평화 사진관 시퀀스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여기서는 유일하게 사진관 아저씨가 송홍련이라는 연변 소녀를 인터뷰하는 역할을 대신하고 있어요. 그래서 둘 사이의 대화로 진행됩니다. <풍경>은 사람마다 인터뷰하는 방법이 조금씩 다른데 이 소녀에게 다가갈 때에 그렇게 다가가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까? 장률_이 사진관은 원래 찍을 생각을 안 했어요. 그런데 그곳의 거리들, 풍경들, 간판, 사진관이 인상적이었어요. 요즘 한국 사람들은 사진관에 가지 않아요. 그런데 그쪽(연변)에서는 꽤 많이 가요. 증명사진도 있고, 가족사진도 있고. 아직 사진관은 가족과 연계되는 공간이에요. 그게 따뜻하게 보였어요. 그래서 사장과 얘기했죠. 카메라를 가만히 두고 하루만 찍을 수 있겠느냐. 대화하는 건 그 사장님이 평소에 그래요. 친절하고 외로운 사람 같아요. 오는 사람마다 다 인터뷰를 해요. 그런 다음 꼭 한번씩 마지막에 하나님 믿으십시오 하고. (웃음) 그게 좀 재밌었어요. 이건 말하는 풍경이다, 하고 찍었지요. 다른 사람들은 모두 섭외를 한 건데 소녀는 우연히 만났어요. 들어와서 이야기할 때 나랑 같은 연변 사람이고 너무 재미있어서 나갈 때 쫓아나가서 ‘너 인상 깊은 꿈이 뭐냐’라고 물어보고 싶었어요. 그런데 나가는 순간 다른 다큐가 되었겠지요. 그래서 스스로에게 설득한 거죠. 그냥 거기 넣어놓은 상태에서 아저씨와 대화하고 나는 거기서 멈춰야 했어요. 정성일_<풍경>은 카메라가 서면 움직이지 않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동선을 통제할 수 있는 극영화와 달리 다큐멘터리는 카메라가 서게 되면 현장에서 예상치 않은 선물들이 때로 있지 않습니까. 그걸 다 포기하겠다는 결단 같은 것이기도 합니다. 장률_제목과 관계됩니다. 풍경. 현실의 그 사람들, 그 공간의 풍경들, 그 사람들 꿈속의 풍경, 그걸 연계하고 거기에 초점을 뒀는데 풍경이라는 단어로 말할 때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다 사진처럼 생각해요. 어떤 풍경 생각 나, 하면 움직이는 게 생각나는 게 없어요. 다 사진이에요. 공간 안에 사람이 움직이지 공간이 움직이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사진이라 하면, 풍경이라 하면, 틀 안에 있는 건데 움직이지 않고 보면 이 사람들로부터 어떤 리듬이 나올까. 또 하나는 마지막 장면에 카메라가 흔들리지 않았습니까. 원칙을 세워놓았습니다. 카메라는 움직이지 않지만 실제 내 마음과 그 사람들 마음은 움직이지 않는 게 아니니까요. 풍경이란 단어에서 풍(風)이 뭐예요, 바람은 움직이지 않습니까. 바람의 경로. 그래도 사진처럼 생각이 나고, 어느 날은 흔들리고, 약간 흔들리든지 폭풍처럼 경(景)이 움직일 때도 있는 거죠. 감정의 연대 정성일_<풍경>에서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방글라데시에서 온 와리우라 브후아이야의 얘기를 들은 뒤 영화는 갑자기 제주도로 가는 겁니다. 질문은 두 가지입니다. 사실 이런 다큐멘터리는 없죠. (웃음) 많은 사람들이 영화 속 꿈에서 어떤 소망을 이야기하는데 왜 와리우라의 꿈을 이뤄주고 싶었는지, 이 사람의 어떤 것에 이끌린 건가요. 두 번째 질문은, 남의 꿈속으로 들어간다는 건 어떤 행동으로 다가오는 것인지요? 장률_와리우라의 얘길 카메라에 대고 들은 다음에 감동이 있었고 특히 한국말로 하는 게 재밌었어요. 그 친구는 제주도가 한국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몰라요. 그런 제주도가 그의 꿈에 나타났다, 너무 신기한 일이지 않습니까. 보통 꿈에 나타났다면 이전에 봤던 공간, 아니면 전혀 모르는 공간일 텐데 여긴 명확히 제주도라는 이름까지 나오고. 그 친구가 그 얘기만 하지 않았어도 다른 생각이 없었는데. 제주도에 꼭 가고 싶다고 말하는 그 친구를 충동적으로 제주도에 데려가고 싶었어요. 그렇지만 제주도를 너무 아름답게 얘기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갑자기 나도 그 풍경이 보고 싶어지는 거죠. 정성일_그전에 제주도에 안 가보셨나요? 장률_아니, 가봤죠. 그런데 나는 회에 집중했지. (웃음) 다른 친구들 꿈 얘기하는 덴 갈 수가 없어요. 그들의 가족을 불러올 수도 없고, 내가 그 나라에 갈 수도 없고. 그런데 제주도가 좀 다른 건 그 사람 꿈에 들어간다기보다 이 사람의 꿈속 풍경과 진짜 제주도의 풍경이 어떤 차이가 있고 어떤 분위기인가, 그래서 너무 가보고 싶어지는 거예요. 정성일_제주도에서 마지막 장면을 본 다음 제주도 사진으로 서울로 돌아오는데 그 사진이 걸린 집은 앞에서 말한 와리우라의 집이 아니라 네팔 여자 강가 바스넷의 방입니다. 제주도를 사이에 놓고 전혀 관계없는 두 사람을 텔레파시처럼 묶은 거죠. 꿈의 논리 같기도 하고, 비선형적인 진행이기도 하고, 무엇으로 이 연결이 성립된다고 생각했습니까? 장률_강가는 아파서 밖에 못 나가요. 거기는 요양원 같은 데입니다. 요즘 한국 사람들, 특히 세련된 서울 사람들은 집에다 풍경을 아주 튀게 붙여놓지 않아요. 그런데 이들은 풍경을 노출되는 곳에다 붙여놓아요. 특히 강가는 나가지 못하고 집에 있는데 풍경을 바라보면서, 우리와 인터뷰하는 데도 멍하니 앉아 있으면 눈이 그 풍경에 가 있어요. 이건 뭘까. 그 사람들이 갖고 있는 공간에 대한 감정이 우리보다 훨씬 그립고 강렬하지 않겠습니까? 정성일_<풍경>에는 가끔 다큐를 버리고 극영화의 태도를 취한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전철에 두 사내가 앉아 있습니다. 그런데 전철이 지나가니 두 사내가 없어졌습니다. 그 전철은 역에 서지 않았으니 탔을 리가 없습니다. 연출자가 명백히 기차가 지나갈 때 빠져나가라고 연기 지도를 한 것이겠지요. 다큐 안에 연출이 개입한 셈인데요. 여기엔 마치 이것은 다큐멘터리가 아니라고 선언하는 듯한 느낌마저 있습니다. 장률_감정이 그랬어요. 외국인 노동자들을 전철에서 보지만 실제 우리 주변의 사람들인데 다들 별 관심이 없어요. 보고 지나가는데 어느 때에 이 사람들이 없어졌는지 아무런 관심도 안 보이는 이런 감정. 그래서 심지어 그런 생각도 했어요. 이게 다큐인가? 다큐가 아니어도 좋다. 극영화인가? 극영화가 아니어도 좋다. 연출이 없는 다큐는 없죠. 그렇다면 열어놓고 해보자. 다 진짜로 찍긴 하는데 다 연출이에요. 최소한 그것보단 내가 정직하지 않았나, 노골적으로. (웃음) 정성일_거의 멈춰 서 있던 카메라가 방글라데시 남자 세크할 마문을 찍다 말고 갑자기 핸드헬드로 달려가서 어떤 사진을 봅니다. 별다른 설명도 없기 때문에 왜 거기에 방점이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 다음 다시 태연하게 원래의 자리로 카메라가 돌아옵니다. 뭐랄까, 여기에는 어떤 리듬의 절단 같은 것이 있습니다. 장률_이 안의 내 원칙이라 하면, 그것 역시 다큐와는 관계없는 나의 상상? 이 사람들의 공간에 가면 이전에 자기가 머물렀던 장소의 사진을 붙여놓을 때가 있어요. 그 사진은 (세크할이 예전에 일했던) 마석가구단지를 찍은 겁니다. (지금 자신의 공방을 열고 제자들을) 가르치는 공간은 홍대예요. 꿈속에서 (나쁜) 사장, (불친절했던) 한국 동료와 싸우고 그때 일했던 그쪽의 풍경이에요. 정성일_나쁜 기억을 가진 그 사진은 뭐하러 붙여놓은 겁니까? 장률_그러니까요. 분석하다보면 모르지 않습니까. 그렇게 나쁜 기억이 있고 자꾸 그때 나쁜 꿈을 꾸면서 (세크할 마문은 이 시절 꿈 이야기를 한다) 거기 사진을 붙여놓은 거예요. 이 공간에 들어오면 나는 그 사람이 사진부터 갈 것 같아요. 그 공간은 그 사람이 주인이에요. 그 사람이 그 사진을 거기 걸어놨다는 건 사진에 그 사람의 감정이 어느 정도 들어갔다는 것이지 않습니까. 영화 안에서 설명할 수도 있지만 그러면 설명할 수 없는 것도 생겨날 것 같은 거예요. 그래서 설명을 안 하고 사진만 보여준 거지요. 그게 기본 리듬과 맞다고 생각한 거지요. 정성일_이 장면에서 재밌는 건 인터뷰를 하다가 갑자기 코끼리가 나오는 신으로 연결됩니다. 너무 막연히 보여줘서 세크할 마문이라는 방글라데시 남자가 코끼리로 환생한 것 같기도 하고, 또 이 남자에게서 코끼리의 인상을 본 것을 보여준 것처럼도 보입니다. 그런 다음에 공방 유리에 있는 코끼리의 무늬를 보자 이 장면을 이해하게 됩니다. 말하자면 <풍경>은 종종 연상 작용을 따라갑니다. 이것이 이전까지의 장률 영화가 산문적이라면 <풍경>을 시적 논리의 방법으로 붙여나가고 있다는 인상을 줍니다. 장률_거기 가서 실제 사람만 찍자면 다큐는 사람만 집중하면 됩니다. 그 감정을 정확하게 빨리, 풍부하게 잡아내는 거잖습니까. 나의 목적은 그 사람 꿈속의 얘길 듣거나 그 사람이 사는 공간, 활동 공간, 스쳐 지나가는 공간의 풍경들이 이 사람과 무슨 관계일까 보는 거예요. 나는 공간의 지배를 많이 받는 것 같아요. 거기서 나에게 어떤 감정이 흐르고, 그 사람을 쫓아갈 때 그 사람이 없으면 그 사람 냄새가 더 나고, 어떨 때엔 더 진실 같아요. 사람이 떠나면 그 사람이 살고 행동했던 공간에 흔적이 남습니다. 공간에 어떤 사진을 걸어놓는가, 꼭 그 사람의 감정과 관계가 있다고 봅니다. 그 친구는 방글라데시 친구인데 방글라데시에선 코끼리가 거의 신이지 않습니까. 카메라도 유리 이쪽에서 (건너편의 세크할을) 찍었습니다. (고향을 떠나기) 15년 전의 그 사람이 옛날 (자기가 있던) 나라에선 코끼리를 마주치고 타고 그랬을 텐데, 이상하게 코끼리도 이 사람을 그리워했을 것 같아요. 그 공간에 모든 감정이 들었던 물건이라든지, 동물이든지, 무엇이든지 거꾸로 사람이 보는 게 아니라 이 친구를 그리워하는 거죠. 정성일_영화가 한참 진행되다 말고 중국인 쉬첸밍을 만나고 난 다음 갑자기 다시 한번 안개 낀 길을 하염없이 차를 타고 달려갑니다. 그때 이 영화의 제목 <풍경>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풍경의 불투명성에 대해서 <풍경>은 한국에 대한 장률의 마음속의 풍경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장률_나는 지금 한국에서 일년 반 살았지만 (한참 생각) 뭐가 뭔지 아직도 모르겠어요. 첫 장면은 인천공항에서 들어오는 길이고, 두 번째 장면은 제주도입니다. 귀신 같은 게 사는 것 같기도 하고, 이건 거의 꿈속의 안개 같은 보일 듯 말 듯한 느낌. 이 영화에 계속 그 사람의 꿈이 있고, 나의 백일몽 같은 순간도 많았습니다. 하늘, 거기에 따뜻함이 있지 않겠습니까 정성일_중국인 쉬첸밍을 도축장에서 끔찍하게 보여준 다음 등장하는 우즈베키스탄의 셰르조드 아크바로브는 이주 노동자라기보다 예술가처럼 보였습니다. 이 사람은 명백하게 존경심을 안고 노동을 바라본다는 그런 느낌이 거기 있었습니다. 장률_처음엔 인터뷰 섭외가 되지 않았어요. 그 친구는 한국말을 못해요. 그래서 거기엔 가서 그냥 풍경을 찍자, 하고 갔어요. 그 공장은 소리가 인상 깊었어요. 조용해요. 기계 소리만 나고. 말리는 소리, 그런 소리들로 꽉 찼어요. 거기서 그 두 친구, 외국인 노동자가 일하는 데에 너무 집중해 있는 거예요. 그 모습이 예술가처럼 아름답게 보이는 거예요. 그들이 만드는 천은 우리 일상에 꼭 쓰이는 물건이잖습니까. 거기에 아름다운 컬러와 문양을 내려고 모든 노력을 쏟는, 예술이 뭐 다른 것이겠습니까. 물어보니 한국말을 못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현장에서 (<하나안>을 연출한 우즈베키스탄 거주 동포 3세인) 박루슬란 감독에게 부탁해서 전화로 통역도 하고 한 거예요. 그때 꿈 이야기가 너무 아름다웠어요. 마장동 도축장 장면을 정화할 그런 꿈이 필요했는데 여기서 많이 해소한 거지요. 정성일_두 번째 비닐하우스 장면에는 이상할 정도로 온기가 감돌고 있습니다. 세상이 추운 겨울인데 생명을 갖고 견디는 작물들이 봄을 기다리는 모습을 보면서 뭐랄까, 이제까지 만난 사람들의 삶에 대한 어떤 응원의 마음을 본 것 같았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이제까지 감독님 영화에서 이런 순간을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습니다. 말하자면 장률 영화의 내면의 풍경의 변화랄까…. 장률_어제 도쿄에서 열린 중국 독립영화제에서 <당시>를 상영하고 관객과 대화를 했습니다. 그 영화는 실제 내 삶과 가장 가까운 영화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갇혀 있다 보면 더 나가고 싶고 더 소통하고 싶어집니다. 하지만 나가는 건 아주 힘든 과정이에요. 물론 계속 의심하죠. 진짜인가, 거짓말인가. 하지만 <풍경>은 진짜 사는 사람들에게 내가 다가갔는데 그 따뜻함을 의심할 수 없었어요. 의심하면 내가 진짜 나쁜 놈이죠. 비닐하우스를 찍을 때 바람이 불고 비닐 안에 뭐가 있는지 모르다가 그 안을 보여주지 않습니까. 그것도 과정인 것 같아요. 안개와 마찬가지로 보일 듯 말 듯한. 그래도 들어가야 하잖습니까. 그래서 들어가면 푸른색이지 않습니까. 농업이란 고향입니다. 하지만 지금 한국에서 그걸 이주 노동자들이 하고 있습니다. 잘 들어보면 거기서 일하는 베트남 사람들이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습니다. 오직 거기서만 일을 하면서 노래를 부릅니다. 정성일_고물들이 쌓인 폐차장을 보여주고, 그러면 이 영화에 한번도 없었던 페이드 장면이 이어집니다. 그런 다음 갑자기 카메라가 거리를 뛰어다니다가 골목에서 멈춰 서서 우두커니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으로 <풍경>은 끝나버립니다. 누가 봐도 장률의 꿈이죠. 계속 꿈 얘길 듣다가 마지막에 장률 감독님의 꿈이라는 인상. 장률 감독님의 꿈이자 서울에 대한 인상, 여기서는 오갈 데 없는 나쁜 꿈이란 느낌이 있습니다. 장률_타향에서 사는 사람들은 고향에서 살 때보다 안정감이 훨씬 적어요. 그리고 훨씬 더 긴장해요. 여기 사는 사람들은 하나의 사건엔 긴장할 수 있어요. 하지만 타향 사람은 전체에 불안감이 있어요. 그 사람들 꿈속에도 아름다운 게 있는데 전체의 질감을 보면 어딘지 불안해요. 그걸 계속 생각했습니다. 이 사람들, 나도 마찬가지고, 다시 꿈을 꾼다면 고향에 있을 때 꿈과는 전혀 달라요. 어딘지 흔들려요. 고향에서 꾸는 꿈은 큰 분위기에선 흔들리지 않는데 그게 이방인으로서의 동질감인 것 같아요. 이건 어쩔 수가 없어요. 내 영화가 어떻게 끝나는가. 그 안에 코끼리로도 끝날 수 있고, 아름답게도 끝날 수 있지만 아닌 것 같아요. 이상하게 뛰다 멈추지 않습니까. 그 숨소리. 불안감을 좋아할 사람은 없어요. 다 멈춰서 평온한 걸 원하는 게 사람인데 마지막인데도 숨가쁜 소리가 들리고 하늘을 보아요. 솔직히 말해서 이방인들과 우리가 이런 공간에서 살 적에 하늘, 그 선 아래 평등한 건 아무것도 없어요. 그 대신 그 안에서 조금 거리를 조성하면 따뜻해질 수 있겠죠. 외국인 노동자들 보면 고개를 들고 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어요. 일할 때도 고개를 숙이고, 사람이 불안하면 머리를 숙이게 돼요. 하늘과 점점 멀어지는 거죠. 내 영화 중에 하늘을 보여준 건 그래도 여기에 따뜻함이 좀 있지 않겠습니까, 라고 말 거는 것입니다. 하늘 비춰주면서 비행기 날아가는 소리가 약간 납니다. 어떤 가능성? 항상 고향 가고 싶잖습니까. 정성일_다음 영화 <경주>는 촬영을 다 마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요? 장률_<경주>는 <풍경>이 완전히 끝나고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게다가 내 처지가 지금 방학에만 찍을 수 있어서 투자가 몹시 힘들었어요. 경주를 처음 간 건 1995년이었는데 그다음 <두만강> 끝나고 여름에 한번 더 경주에 갔어요. 거기서 찻집을 갔는데 그때 같이 간 두 사람이 모두 고인이 되었어요. 장례식에서 그 공간이 자꾸 생각나는 거예요. 어찌보면 <경주>는 그 찻집에 대한 다큐일 수도 있겠군요. (웃음) 정성일_마지막 질문입니다. <경주> 촬영을 다 마쳤으니 <풍경>은 <두만강>과 <경주> 사이에 낀 영화가 된 셈입니다. <풍경>은 두 영화 사이에서 어떤 역할을 할까요? 장률_한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데… 두만강에서 경주까진 꽤 멀지 않습니까? 정성일_세상에서 제일 멀죠. 북한에서 남한까지 와야 하니까요. 장률_그 거리에 펼쳐지는 풍경? (웃음) 제가 영화의 한계를 느끼면서 한 3년을 영화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단절된 것을 다시 이으려면 다리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풍경>은 둘 사이를 이어주는 다리 같은 영화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정성일_이번에는 많이 기다리지 않아서 좋습니다. <경주>를 기다리겠습니다.

[김중혁의 바디무비] 아름답고도 격렬한, 몸·몸·몸

오랜만이다. ‘최신가요인가요’라는 난데없는 제목의 음악글 연재 이후 1년 만이다. 돌아오게 되어 기쁘고, 다시 지면을 얻게 되어 기쁘다. 이상하게 <씨네21>에 글을 쓰게 되면 수다스러워지는 경향이 있는데, 그건 아마도 <씨네21>이라는 잡지를 그만큼 좋아하고 편안하게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씨네21>의 내용도 무척 좋아하지만, (만드는 사람들은 죽을 맛이어도) 주간지라는 형식이 주는 반복 역시 나를 평온하게 만든다. 할 말이 많든 적든, 재미있는 이야기든 아니든, 일주일에 한번은 영화 이야기가 나를 찾아온다는 게 얼마나 안심되는 일인지 모른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 나를 위해, 오직 나를 위해, 글을 쓰고 있고, 카툰을 그리고 있고, 영화를 보고 있고, 정보를 모으고 있다. 그 결과물을 집결한 다음 일주일에 한번씩, 주간지라는 형식으로 나에게 배송해준다. <씨네21>의 필자들이 오직 나를 위해 글을 쓰는 것은 아닐 테지만,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나면 어쩐지 기분이 좋아진다(그렇다, 이것은 정기구독 유혹 글이다). 인간은 사소한 반복이 주는 안락으로 삶을 버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일요일이 있어야 6일이 경쾌해지고, 월급날이 있어야 나머지 29일이 의미 있고, 생일이 있어야 364일 동안 선물을 기다릴 수 있다. 과장하자면 그렇다. 일주일과 한달과 일년의 구분이 없다면 우리는 아마도 일상성의 도를 깨닫거나, 지루함을 참지 못하고 스스로 멸종했을 것이다. 몸과 스포츠에 대한 소소한 이야기를 인간은 결국 (맙소사!) 잘 반복하기 위해 태어났고, 반복을 잊을 정도로 짜릿한 욕망을 찾으며 살아간다. 가끔 한 인간이 살아온 삶의 단면을 떠올릴 때가 있다. 수많은 반복의 겹이 차곡차곡 쌓인(음, 제주 오겹살 같은?) 단면을 떠올린다. 흉측하지만 아름답고, 현기증 날 정도로 먹음직스러운 단면의 겹을 생각한다. 프랑스 사회학자 마르셀 모스(Marcel Mauss)의 말처럼 인간이란 ‘사회적, 문화적, 역사적 층위가 차곡차곡 쌓인 비밀스럽고도 불가해하며 신성한 장소’다. 아, 이제야 알겠다. 우리 배에 둘린 ‘배 둘레 햄’은 반복과 경험이 만들어낸 신성하고 종교적인 장소였다. 살 빼려 애쓰지 말자. 그게 다 훈장이었다. 오래전부터 몸에 대한 글을 써보고 싶었다. 몸에 쌓이는 반복과 몸이 겪는 스펙터클한 경험과 몸이 말하는 언어에 대해 써보고 싶었다. 영화야말로 몸이라는 주제에 가장 어울리는 매체라는 생각이 들었다. 흔히 연기를 할 때 가장 힘든 게 손의 움직임이라고 한다. (중학생 때 교회의 크리스마스 연극에서 예수님이 태어난 걸 원망할 정도로 망신을 당한 이후에는) 연기를 해보지 않았지만, 그게 어떤 말인지 대충 짐작이 간다. 프로필 사진을 찍기 위해 사진작가 앞에 섰을 때 그 어색한 손의 움직임 때문에, 내 팔이 조립식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사진 찍을 때는 나사를 풀어서 떼어내고, 영화 볼 때도 떼어내고 (거 참, 극장 관계자 여러분, 팔걸이 좀 넓게 만듭시다), 잠잘 때도 떼어내면(팔 저리는 건 막을 수 있겠지만 어디 긁지는 못하겠군) 얼마나 편할까 생각했다. 사진 찍는 데도 그렇게 불편한데, 영화를 촬영할 때면 얼마나 팔을 주체하기 힘들까. 얼마나 어색할까(<설국열차>에서 팔을 냉동시킨 다음 부러뜨리는 장면이 갑자기 떠올라서 팔이 없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취소하기로 했다). 영화를 볼 때면 배우들의 손을 유심히 관찰한다. 배우들의 어깨와 다리를 관찰한다. 거기엔 분명히 뭔가 이야기가 있다. 어떤 배우들은 캐릭터를 위해 어마어마하게 몸무게를 감량한다. 어떤 배우들은 반대로 살을 찌운다. 어떤 캐릭터는 다리를 절고, 어떤 캐릭터는 팔자걸음으로 걷는다. 몸이 더 잘 말할 수 있도록 판을 깔아주는 것이다. 나는 <그래비티>에 등장한 샌드라 불럭의 몸을 보면서 무척 슬펐다. 그 어떤 대사보다도 몸이 슬펐다(언젠가 이 얘기를 길게 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일대종사>를 생각하면 주인공 양조위가 한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막고, 또 다른 손으로 상대방에게 위협을 가하는 무술 자세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언젠가 이 영화도…). <플레이스 비욘드 더 파인즈>에서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등장하는 라이언 고슬링의 등은 보는 사람을 순식간에 압도한다. 그는 정말 ‘등 연기’에 있어서는 최고봉이다. 스포츠에 대한 관심 역시 몸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시작됐다. 언젠가부터 나는 영화를 스포츠 보듯 하고 스포츠를 영화 보듯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토요일 저녁 맥주 한캔 앞에 두고 텔레비전으로 잉글리시 프리미어 리그 경기를 보고 있으면, 선수들의 움직임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보일 때가 많다. 경기의 전개가 드라마틱하기도 하지만 (아스날이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나 맨체스터 시티나 리버풀 같은) 훌륭한 팀의 선수들은 자신들이 어떤 위치에서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를 정확히 안다. 자신의 대사와 동선을 정확히 안다(정말이지 아스날팀의 벵거 감독과 선수들은 ‘미장센’이 뭔지를 알고 있다). 영화를 보면서 배우들의 몸을 읽듯 축구를 보면서 선수들의 몸을 읽는다. 훌륭한 스포츠영화가 많지 않은 것은, 아마도, 영화가 보여주고픈 몸의 매력과 스포츠에서 드러나는 몸의 속성이 어긋나기 때문일 것이다. 스포츠에서는 미장센이 중요하지만 영화에서는 몽타주도 필요하다. 위대한 스포츠 경기의 맥락을 편집하는 순간, 결정적인 순간을 하이라이트로 보여주는 순간, 몸은 사라지고 이야기만 남게 된다. 현명한 스포츠영화들은 아예 다른 방식을 택한다. <머니볼>처럼 몸을 포기하고 야구의 본질에 접근하거나 <록키>처럼 영화의 리듬에 가장 잘 들어맞는 스포츠 종목을 선택한 다음 몸의 매력을 극대화시키는 것이다(한 경기가 3분 내외의 여러 라운드로 분리된 권투는 스포츠 종목 중 가장 영화적이다, 라고 쓰면서도 영화적인 게 무엇인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미장센이네 몽타주네, 거창하게 둘러대고 있지만 결국 몸과 스포츠에 대한 소소한 이야기를 하게 될 것이다. 어째서 <노브레싱>은 실패한 수영영화인지 <리얼스틸>은 알리의 로프 어 도프(rope a dope) 전략을 얼마나 잘 활용하고 있는지,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에서 미식축구와 징크스의 의미는 무엇인지, 궁금해하는 사람은 전혀 없지만 어쩐지 꼭 짚고 넘어가고 싶은 이야기를 하게 될 것이다. 앞서 주간지의 소중함에 대해 열심히 이야기하고서는 격주로 연재하는 게 민망하긴 하지만, 몸의 아름다움과 격렬함에 대한 이야기를 열심히 써볼 생각이다. 건강히 시작해보아요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이 있다. 원문의 어감은 전혀 다르다. 고대 로마 시인 유베날리스는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도 깃들길 기도한다’면서 몸만 가꾸지 말고 정신도 좀 가꾸라는 뜻으로 빈정거렸다. 원문의 의미가 어찌 변했건 간에 나는 저 말을 좀 믿는 편이다.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 는 너무 식상하니까 조금 바꿔 말하면, ‘아프면 만사 다 귀찮다’는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요약한 느낌이고, ‘앉을 기운이 있어야 뭐라도 글을 좀 쓰지’는 너무 작가적인 변형 같고, ‘자신의 몸에 관심을 가져야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다’는 피트니스센터의 회원 모집 문구 같고, ‘울림통이 좋아야 소리를 제대로 담을 수 있다’는 박진영씨의 심사평 같지만 모두 비슷한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새해도 되었으니 모두들 건강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씨네21>에 글을 쓰면 수다스러워지는 경향이 있다. 내 문제가 아니라 <씨네21> 문제다. 본격적인 ‘바디무비’는 다음 회부터 시작.

[유선주의 TVIEW] 추억은 없다

“자, 출발! 스따뜨!” 궁둥이를 철썩 때리는 퀸 미용실 마 원장(이미숙)의 호령이 떨어지자, 잔뜩 부풀린 헤어스타일에 수영복만 입은 여성이 지하철 승객들의 시선을 받아내며 미스코리아 워킹을 선보인다. 몸에서 가장 살이 많은 부위를 후려치는 차진 소리가 귓가에 꽂히고, 외투를 껴입은 승객들 사이로 새파란 수영복이 눈에 박히는 충격에 잠깐 정신이 얼얼했다. 미스코리아 하면 온 가족이 텔레비전 앞에 앉아 맘에 드는 후보를 점찍고 품평하던 추억이 먼저 떠오르는 한편으론, 대회를 앞두고 수치심을 이겨내는 특훈이 필요할 만큼 남 앞에서 맨살을 드러내 이목을 끄는 일이 지금보다 더 부끄럽고 조심스럽던 것도 같은 시절의 정서였다. 지금은 사라진 직업인 ‘엘리베이터 걸’을 처음 보던 때도 떠오른다. 두꺼운 화장을 한 예쁜 언니가 “올라갑니다”라고 안내하자 흠칫 놀란 기색을 감추고 자연스러운 고객을 연기하려 애썼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엘리베이터 걸을 그 공간의 일부처럼 무심히 여기게 되었다. 미스코리아를 상징하는 사자머리와 파란 수영복의 이물감을 무대라는 배경과 함께 당연한 규칙같이 받아들였던 것처럼. 그리고 그녀들이 언제 사라졌는지는 기억하지 못했다. 대형 건물 엘리베이터에서 상승과 하강을 알리는 녹음된 목소리가 아마 그녀들의 흔적이겠지. 1997년 IMF 무렵을 다룬 드라마 MBC <미스코리아>는 파란 수영복과 대비되는 흰 허벅지의 강렬한 이미지에 ‘철썩’ 하는 살 소리를 입혀 그녀가 ‘사람’임을 퍼뜩 깨닫게 했듯, 점심도 굶고 근무를 서는 스물일곱살의 백화점 엘리베이터 걸 오지영(이연희) 역시 고객들 사이에서 ‘꼬르륵’ 소리를 숨기지 못하는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아무도 없는 틈을 이용해 엘리베이터 모서리에 바짝 붙어 급히 깐 계란을 한입에 우겨넣는 처연한 뒷모습. 구조조정으로 아예 직업군 자체가 사라질 위기 앞에서 지영은 수많은 진을 만들어낸 퀸 미용실의 마애리 원장과 화장품 벤처기업 사장이 된 옛 연인 김형준(이선균)에게 12월로 연기된 미스코리아 대회 출전 제안을 받는다. 자금 압박으로 사채를 쓴 형준의 뒤에는 연말까지 돈 5억원을 받아내야 하는 깡패 정선생(이성민)이 있고, 투자를 미끼로 형준의 회사를 인수해 되팔려는 기업사냥꾼 이윤(이기우)까지 엮여 있는 형편. <미스코리아>는 위기를 극복하는 인간성이나 도전의식 등이 살아 있던 시절로 과거의 어떤 시점을 포장하는 유의 이야기와 유사해 보이지만, 추억을 파는 퇴행적인 낭만에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열일곱과 열아홉살. 성적인 긴장이 깔린 지영과 형준의 풋사랑은 더없이 싱싱하고 달콤했던 한편, 지영을 ‘발랑 까진 년’, ‘싸고 헤픈 년’, ‘머리에 똥만 든 년’이라고 험담하고 다녔던 형준은 십년 뒤, 한층 더 비겁해진 모습으로 나타났다. 고교 동창 이윤에게 투자를 요청하는 자리에서 교복을 연상케 하는 더플코트를 입은 형준은 투자를 거절당하자 화장실에서 뒷돈을 건네려 하고, 지영을 이용해 회사를 살려보려고 접근할 때도 종이비행기와 옛날 안경, 500원짜리 지폐에 메모를 적은 추억 소품을 들이밀었다. 절박해서 추억을 팔고, 거짓말과 허풍을 반복하던 그는 지영이 마 원장을 택한 이후에야 비로소 잘못 끼운 단추를 바로잡기로 결심한다. IMF로 인해 각자의 연약한 지반이 흔들리고 벼랑 끝에 내몰린 이들이 전과 다른 사람이 되기 위해서 발버둥치는 97년의 회고담 <미스코리아>는 신뢰와 유대는 앙금 같은 추억만으론 부족하다고 운을 띄웠다. 불황 극복 판타지를 반복하자고 그 먼 길을 돌아가는 건 아닐 것이다. +α 고졸입니다! 서숙향 작가의 드라마에는 유독 고졸 출신의 여주인공이 자주 등장한다. 오지영은 상고 졸업도 전에 엘리베이터 걸로 취직했고, <대한민국 변호사>의 고졸 변호사 우이경(이수경)은 변호사 애인이 변심하자 그가 남기고 간 법전으로 공부해 변호사 자격증을 땄다. <파스타>의 서유경 역시 고졸 출신의 풋내기 요리사였다. <로맨스 타운>의 노순금도 고졸의 가사도우미. 콤플렉스를 감추지 않으면서도 꺾이지 않는 단단한 심지가 이들의 공통점이다.

[홈초이스] 따라올 테면 따라와 봐

홈초이스는 전국 케이블TV 가입자에 VOD 프로그램을 공급하는 회사다. 국내외 유료 방송 시장에서 VOD 산업에 대한 높은 잠재력과 고객들의 수요를 고려하여 지난 2007년 설립되었으며, 전국의 케이블TV 가입자는 ‘디지털케이블 VOD’를 통하여 국내외 주요 최신영화, 드라마, 애니메이션 등 VOD 서비스를 만나볼 수 있다. 현재 홈초이스가 제공하는 케이블TV VOD 서비스는 15만 편으로, 국내 유료 방송 플랫폼에서 가장 많은 콘텐츠를 확보하고 있다. 특히, 영화 VOD의 경우 국내 유료 영화 VOD 시장에서 가장 많은 1만편의 서비스를 제공한다. 지난해부터는 “영화가 생각날 땐, 디지털케이블VOD”라는 슬로건 아래, 최신 해외 메이저 영화부터 국내외 예술ㆍ독립영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의 영화들을 발굴하여 소개하고 있다. 또한 시청자들의 영화 VOD에 대한 관심과 지속적인 참여를 위하여 다양한 이벤트와 상품을 개발하여 제공한다. 국내외 메이저 신작 VOD의 경우, 영화 출시와 동시에 이벤트를 진행하고 있으며, 국내외 각종 영화제 및 시의성 테마에 대해서는 수시로 특집관 서비스를 제공한다. 영화 외에도, 본 방송 종료 후 주요 콘텐츠에 대한 다시보기 수요를 고려하여, 본 방송 종료 직후, 즉시 보기 서비스를 실시하고 있다. 그동안 시청자들은 본방송 종료 후, 다시 보기 VOD 서비스를 이용하려면 일정 시간을 기다려야 했지만, 케이블TV 시청자라면 누구나 드라마, 연예, 오락 등 주요 프로그램을 방송 종료 직후 별도의 기다림 없이 즉시 시청할 수 있다. 케이블TV 하면 자칫 구식이라는 편견을 갖기 쉬운데, 홈초이스는 케이블 TV를 대표하여 다양하고 수준 높은 콘텐츠와 함께, 최신 방송기술의 혁신을 이끌고 있다. 일례로 홈초이스는 세계 최초 UHD 전용 채널 ‘UMAX’ 개국을 앞두고 있다. 케이블TV 시청자들에게 양질의 콘텐츠를 더 좋은 화질로 제공하기 위해 지난해 7월 세계 최초로 UHD 시범 방송 서비스를 시작했고, 시청자들은 UHD 전용방송을 통해 기존의 Full HD 방송보다 4배 이상 향상된 초고화질(UHD) 영상을 안방에서 즐기게 된다. 선배가 말하는 ‘내가 경험한 홈초이스’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사업전략실 홍수미, 2013년 5월 입사 -본인 소개 부탁한다. =사업전략실에서 프로모션 기획 업무를 맡고 있다. 시즌별로 특집관을 구성하거나 이벤트를 진행하는 일이다. 사내 포지션으로는 막내인 입사 9개월 차의 신입사원이다. -디지털 케이블TV 사업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신문방송학 전공자로서 먹고 살 길을 찾아야 하기에 방송의 미래에 대해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점점 자리를 잡고 있는 VOD 서비스가 영상 콘텐츠를 접하는 대세 플랫폼이 될 것이라 판단되어 그때부터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 일을 하며 좋은 점은 무엇인가. =수많은 콘텐츠들을 무료로 볼 수 있다는 것?(웃음) 내가 기획한 프로모션을 통해 시청자들의 접속을 유도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흥미롭다. 또한 콘텐츠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며 공부를 많이 할 수밖에 없는데, 점점 전문가가 되어간다는 점이 만족스럽다. -가장 보람을 느낄 때는 언제인가. =매일 저녁 집으로 돌아와 TV를 켤 때마다 감격을 느낀다.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하는 노래처럼 내 얼굴이 나오는 건 아니지만 내가 구성한 콘텐츠들이 우리 집 TV에 구현되어 리모컨으로 이것저것 눌러볼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다. -VOD 서비스 기획자가 되려면 어떤 준비가 필요할까. =특별한 기술이나 능력을 요구하는 직업은 아니다. 방송이나 영화를 상품으로 바라볼 수 있는 안목과 영상콘텐츠에 대한 남다른 관심이 제일 중요하다. -앞으로의 꿈은 무엇인가. =우선 시청자들이 원하는 콘텐츠를 제때 파악해낼 수 있는 기획자가 되고 싶다. 사람들이 영화가 보고 싶을 때 영화관과 함께 디지털 케이블TV까지 떠올릴 수 있게 하는 것이 꿈이다.

[해외뉴스] 고마웠어, 필름영화

필름영화와의 고별을 피할 수 없는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파라마운트가 할리우드 스튜디오로서는 처음으로 필름 프린트를 통한 배급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이다. 의 보도에 따르면, 파라마운트는 최근 미국 내 극장 소유주들에게 2013년 12월 개봉작 <앵커맨2: 전설은 계속된다>가 35mm 필름으로 배급하는 자사의 마지막 영화가 될 것이라고 통보했다. 이 사실에 덧붙여 이름을 밝히지 않은 한 극장산업 관계자는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가 디지털 프린트로만 배급된 파라마운트의 첫 영화라고 제보하기도 했다. 하지만 파라마운트쪽은 어떤 발언도 삼간 채 공식 발표를 미루고 있다. 필름 매체 포기에 앞장서는 스튜디오로 인식되는 일만큼은 피하려는 모습이다. 할리우드 관계자들의 반응은 우려 반 기대 반이다. UCLA 영화&텔레비전 아카이브 디렉터 잔 크리스토파 호락은 “120년 동안 필름은 극장 상영의 표준 포맷이었다. 이제 그 시대가 끝나가는 게 보인다. 내가 놀란 건 그런 변화 자체보다 지나치게 빠른 변화의 속도다”라고 우려를 표했다. 반면, 더트레이드그룹의 회장 존 피시언은 “메이저 스튜디오들이 이제 미국 내 배급을 디지털로만 한다는 사실은 새로운 시대로의 역사적 전환을 의미한다. 디지털 시네마는 상영의 질, 프로그래밍의 유연성, 3D, 대안적 콘텐츠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고객에게 굉장한 이득을 가져다줄 것이다”라며 반가운 내색을 드러냈다. 물론 파라마운트의 이같은 결정 이전에도 비슷한 움직임은 많았다. 스튜디오 입장에선 디지털 배급을 통하면 프린트 개당 운송비용을 20분의 1 수준까지 낮출 수 있으므로 그 유혹을 거절하기가 쉽지 않다. 2011년에는 이십세기 폭스가 상영업자들에게 “1, 2년 안에” 필름 배급을 중단하겠다고 고지한 바 있고, 이어서 디즈니도 극장 운영자들에게 비슷한 소식을 전했다. 지난해에는 라이언스게이트도 <헝거게임: 캣칭 파이어>를 일체 디지털로 배급할 계획을 세웠다가 취소했다. 한편 현재 미국 내 극장의 92%는 디지털 영사 시스템을 완비한 상태다. 나머지 8%도 디지털 배급을 종용하는 스튜디오들의 압력을 오래 견디긴 어려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