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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1997)

[김소희의 오마이 이슈] 4대강 구상권도 청구해야

열아홉살만 되면 동물원에서 먹고 자며 사육사로 일할 원대한 꿈을 꾸고 있는 우리 집 어린이는 텔레비전 뉴스에서 큰빗이끼벌레만 나오면 진저리를 친다. 보기도 흉물스럽지만 함께 나오는 이야기가 아홉살짜리가 듣기에도 심각하기 때문이다. 유병언 잡아다가 세월호 참사 수습 비용 물릴 생각만 할 게 아니라 4대강 사업을 주도한 일당에게 구상권 청구할 준비도 해야 할 때다. 유병언은 어디 있는지 모르지만 미스터 각하는 어디 있는지 모두 알잖아. 멀쩡한 강을 인공 호수로 만들어 대대손손 가늠조차 어려운 손해를 끼친 건 명백한 범죄 행위이다. 이대로는 국가 재정도 파탄난다. 그런데 4대강 사업으로 이득 본 자가 누구… 지? 건설사? 줄도산이라며. 그럼 몇몇 건설사? 임직원이며 하청 노동자며 수당 올랐다는 소리 듣지 못했다. 굳이 꼽자면 그 건설사에 투자한 몇몇 큰손과 오너 정도? 그리고 찬성한 학자와 관료들? 양심과 영혼을 팔아 알량한 자리보존했다는? 4대강 사업 후유증을 취재하는 지인의 말로는 당시 찬성한 이들 가운데 지금 연락되는 사람 아무도 없다는데. 대체 누가 이득을 봤냐고요. 수자원공사는 빚더미에 앉았고 강은 저렇게 푹푹 썩어가고 있는데. 아무리 뒤져봐도 자전거 거꾸로 타시는 그 한분밖에 안 남는다. 새정치민주연합이 좀 제대로 했으면 하는 사람들의 마음도 4대강 못지않다. 해도해도 너무한다. 이들에게는 민심도 시류도 스치는 바람일 뿐. 완전히 고인 물이다. 흘러본 지 너무 오래돼 자신이 원래 뭐였는지도 모르는 ‘정신나간 낙동강’에 버금간다. 박원순이 왜 재선에 성공했는지, 권은희가 왜 박수 받았는지, 노회찬에게 왜 미안해야 하는지 도통 모른다. 눈앞의 이익을 좇으면 다행이게. 눈앞의 이익이 뭔지도 모르는 이들이 부리는 고인 욕심이란, 정치적 큰빗이끼벌레의 토양만 될 뿐이다.

[culture highway] <터널 3D>와 호랑 작가의 무서운 콜라보

<터널 3D>와 호랑 작가의 무서운 콜라보 방심하면 당한다. 여름이 되면 찾아오는 공포웹툰의 정석, <옥수역 귀신> <마성터널>로 유명한 호랑 작가가 개봉을 앞둔 공포영화 <터널 3D>의 콜라보 웹툰으로 돌아왔다. 특유의 플래시 효과와 오싹한 사운드로 완성한 생생한 공포는 <옥수역 귀신> 이상이라는 반응. 생각 없이 스크롤 막 내렸다간 심장도 함께 덜컥 내려앉을지도 모르니 전후좌우 잘 살피고 경건한 마음으로 접하도록! 반드시 PC로 볼 것. 삶과 춤이 하나되는 순간 중력을 거스르는 춤꾼들의 몸짓, 삶과 춤이 하나되는 순간을 포착해온 사진가 조던 매터의 신작이 한국을 찾는다. 사진전 <매지컬 모먼트: 우리 삶의 빛나는 순간들>에서 공개되는 63점의 신작엔 태양의 서커스 출신의 폴 곡예사 에두아르 두와예, 헝가리 국립서커스단에서 활동한 공중곡예사 빅토르 프라뇨 등과의 협업 작업들이 포함되어 있다. 10월26일까지 서울 안국동 사비나미술관에서 마법과도 같은 순간과 조우할 수 있다. 하늘과 닿은 호수의 선물 체 게바라를 낳은 뜨거운 땅에서 그의 어머니는 감자를 캤다. 박노해 시인이 혁명의 역사를 안고 흘러온 볼리비아의 삶과 사람을 카메라에 담았다. 박노해 시인의 <티티카카>전은 부암동 라 카페 갤러리에서 7월25일부터 11월19일까지 넉넉히 진행된다. 무료관람이며 매주 목요일은 휴관한다. 엔니오 모리코네의 창작의 비밀 속으로 세계 영화음악계의 살아 있는 전설 엔니오 모리코네는 지금도 매달 영화음악을 작곡하고, 세계 각지의 공연 스케줄로 1년이 꽉 찬다. 뉴욕대학 영화과 안토니오 몬다 교수와 그가 함께한 인터뷰집 <엔니오 모리코네와의 대화>는 창작을 둘러싼 비하인드 스토리, 영화계 인사들과의 우정, 그리고 자신의 삶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까지 들려준다. 지금도 그는 자기만의 ‘절대음악’을 꿈꾼다. 마스무라 야스조 ‘아내 삼부작’ DVD 발매 일본 전후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들의 욕망과 심리를 심원하고 세련되게 파헤쳤던 일본영화의 거장 마스무라 야스조의 대표작들이 DVD로 출시됐다. 이른바 ‘아내 삼부작’이다. <아내는 고백한다>(1961), <세이사쿠의 아내>(1965), <하나오카 세이슈의 아내>(1967)다. 와카오 아야코가 연기하는 기이하고 섬뜩한 아내들을 당신은 만나게 될 것이다. 영화의 전당이 발매했다. 은밀하게, 위대하게! 엄격하고 무거운 미술관은 가라! 서울시립미술관이 스토리온에서 방영했던 아트 서바이벌 프로그램 <아트 스타 코리아>와 콜라보 작업을 진행 중이다. 최종 톱3에 오른 구혜영, 신제현, 유병서의 작품을 한자리에서 만나는 3인전 <은밀하게 위대하게>가 바로 그것. 실험정신과 유희로 가득찬 젊은 작가들의 번뜩이는 재치를 확인할 수 있다. 6월10일부터 8월3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3층에서 열린다. 눈물을 머금은 피아노 진도 앞바다에서 아이들이 돌아오지 못한 지도 벌써 100일이 되어간다. 전 국민이 느끼는 상실의 감정을 위로하고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피아니스트 백건우가 나섰다. 7월24일 오후 7시30분, <백건우의 영혼을 위한 소나타> 독주회가 열린다. 세월호에 탑승했던 사람들이 도착해야 했을 제주항, 바로 그곳에서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비창> 2악장으로 시작해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사랑의 죽음’으로 끝날 이번 연주회는 제주방송이 녹화해 SBS에서 방영할 예정이다. 돌아온 전설의 디바 김추자 컴백 최근 가요계에 가장 큰 이슈이자 가장 조용한 이슈는 아무래도 김추자의 컴백인 것 같다. 33년 만의 귀환은 시끌벅적한 반응을 일으켰지만 정작 앨범이 나온 뒤에는 큰 반응이 없는 것 같다. 왜일까. 일단 이 음악이 라디오나 텔레비전에 나오지 않는다. 음원 시장의 경우에도 아이돌 이슈에 가려져 별 반향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 앨범을 ‘실패’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럴 수는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김추자의 컴백은 앨범 판매와 다른 맥락에서 봐야 하기 때문이다. 김추자는 컴백 기자회견에서 공연 중심으로 활동하겠다고 했다. 왜일까. 2013년 기준으로 한국 공연 시장은 뮤지컬과 대중음악 콘서트의 규모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전체의 50.6%는 뮤지컬이고, 31.6%는 대중음악 콘서트다. 특히 콘서트는 2012년 기준으로 1839억원을 기록했는데 2010~12년의 연평균보다 55.5%나 증가한 액수다. 이런 현상의 근원은 2011년 영화 <써니>가 700만 관객을 기록했던 데에 있다. 요컨대 영화를 소비한 중•장년층이 공연시장으로 넘어가고 있는 것이다. 김추자의 컴백은 이런 맥락에서 볼 필요가 있다. 음반 판매는 공연을 위한 것이다. 이런 구조는 1980년대 미국 음악 시장에서 흔한 것이었다. 한국의 음악 시장도 바야흐로 어떤 지점을 지나고 있는 것 같다.

[런던] 극장에서 만나는 새 닥터

‘변화’에 유독 둔감한 탓일까. 영국에는 30여년 이상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드라마 시리즈가 특히 많다. 1960년 12월 첫 방송을 시작한 <코로네이션 스트리트>는 올해 55번째 시즌을 내놓았고, <이스트 엔더스>는 1980년대 방송을 시작해 현재까지도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영국의 장수 드라마를 논할 때 반드시 언급해야 하는 작품으로 1963년 시작해 2005년부터 시즌제를 도입한, 기네스북이 ‘역대 가장 성공적인 SF 시리즈’로 인정한 <닥터 후>를 빼놓을 수 없다. 영국의 공영방송 는 지난 7월25일, <닥터 후>의 ‘12대 닥터’ 피터 카팔디가 출연하는 8번째 시즌의 첫 번째 에피소드를 과 더불어 영국 전역의 영화 상영관에서 동시 상영할 예정이라는 뉴스를 내놓았다. 이는 지난해 11월23일 <닥터 후> 탄생 50주년을 기념한 에피소드, <닥터의 날>의 성공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당시 는 미국, 캐나다, 독일, 러시아 등 전세계 95개국 1500개 이상의 상영관에서 <닥터의 날>을 15개 언어로 동시 방영했고, 이 기록은 기네스북에서 다시 한번 세계기록으로 인정받기도 했다. <셜록> 시리즈의 성공으로 재능을 다시 한번 인정받은 <닥터 후>의 총괄감독 스티븐 모팻은 “지난해 11월 우리의 닥터는, 텔레비전만 점령한 것이 아니었다. 당시 <닥터의 날>을 보기 위해 많은 이들이 극장으로 몰려들었다!”라고 회상하며 “다시 한번, 극장에서 우리의 새 닥터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 싶었다”고 이번 이벤트에 대해 설명했다. 구체적인 예매 방법이나 참여 극장에 대한 정보는 아직 공개되지 않았다. 첫 에피소드의 제목은 로, 닥터 후가 동행자 클라라(제나 콜맨)와 함께 빅토리아 시대의 런던으로 시간여행을 하면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담을 예정이다. 피터 카팔다는 <선데이 타임스>와의 인터뷰를 통해 “클라라와 닥터가 결코 로맨스로 엮이는 관계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닥터의 관심사는 결코 연애가 아니”라는 것이다. 는 이번 에피소드가 빅토리아 시대로 돌아가는 만큼, 팬들이 과거 닥터에게 목숨을 빚진 적이 있는 패터노스터 갱- 마담 바스트라, 제니 플린트, 스트렉스- 도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김중혁의 바디무비] 먹는 것이 곧 나라면, 나는 누구인가?

※ 소설 <언더 더 스킨>과 영화 <언더 더 스킨>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전국 방방곡곡의 달인을 소개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수십년간 산속에서 혼자 살며 생활하는 사람이 나온 적이 있다. 마당에 솥을 걸어놓고 밥을 지은 다음, 텃밭에서 갓 뽑아낸 오이와 고추와 방울토마토 등을 함께 먹는 게 주식이었다. 다른 반찬은 아무것도 없고, 소금이나 간장, 고추장도 없이 밥과 채소만 먹으며 생활한다는 것이었다. 과연 그게 가능한 일일까.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데 제작진이 희한한 행동을 했다. 달인에게 작은 선물을 해주고 싶다며 라면을 끓여준 것이었다. 과연 그게 옳은 일이었을까, 고개를 갸웃거릴 새도 없이 화면 가득 환하게 웃고 있는 달인의 표정이 보였다. 눈물이라도 곧 흘릴 것 같았다. 라면은 10년 만이라고 했다. 라면을 맛있게 먹은 달인은 취재진에게 삶은 감자를 내주었다. 취재진의 기습 질문. “라면이 좋아요, 감자가 좋아요?” 달인은 멋쩍은 얼굴로 대답했다. “옛날에는 몰랐는데요, 지금은 라면이 좋네요.” 아마도 달인에게 라면은 특별한 음식이었을 것이다. 달인은 라면만 끓여 먹을 수밖에 없었던 시절에 대해 잠깐 얘기했다. 라면을 보는 순간 그 시절이 떠올랐을 것이고, 라면을 먹는 순간 그 시절의 공기를 함께 마셨을 것이다. 음식에는, 특히 라면과 같은 자극적인 음식에는 맛과 함께 추억을 밀봉하는 특별한 기능이 숨어 있게 마련이다. 외할머니의 죽음을 떠올리면 나는 돼지고기가 떠오른다. 외할머니의 장례 때 외갓집 마당에서 숯불에다 구워 먹었던 삼겹살의 쫄깃한 맛이 떠오른다. 외할머니의 죽음이 슬펐지만 고기는 달고 달았다. 불고기만 보면 나는 고향집이 떠오른다. 대학 때 대구에서 자취를 했는데 일주일에 한번 김천 고향집에 갔다. 기차역에서 내려 집으로 갈 때면 늘 불고기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매일 밥을 거르고 다닐 게 뻔하다는 어머니의 판단 때문에 (정확하십니다!) 거의 매주 불고기를 해놓으셨다. 삼청동에만 가면 닭고기가 생각난다. 삼청동의 친구 집에 얹혀살던 시절, 나는 집에 들어가기 전이면 늘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뭐 필요한 거 있냐?” 친구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프라이드치킨.” 동네의 닭집은 하나뿐이었고, 집에서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나는 얹혀산다는 미안함을 늘 프라이드치킨으로 보상했다. 도대체 닭을 몇 마리나 먹었을까. 육식은 자극적이다. 씹고 뜯기 때문에, 우리와 비슷한 어떤 동물을 먹는 것이기 때문에 자극적일 수밖에 없다. 한달 동안 채식을 해본 친구가 이렇게 말했던 게 기억난다. “채식의 좋은 점이 뭔 줄 알아? 채식을 하고 나면 고기가 훨씬 더 맛있다는 거야.” 웃자고 하는 말이겠지만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농담이다. 육식이냐 채식이냐는 어려운 문제다. 비참하게 사육되는 동물들의 모습을 볼 때나 인간들의 이기심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동물들을 알게 됐을 때, 당장 육식을 끊고 싶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육식의 시간에 길들여져 있고, 고기의 맛에 중독돼 있다. 소설가 조너선 사프란 포어는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라는 책에서 육식과 채식을 나누기 전에 과연 ‘동물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부터 해결해야 된다면서 인류학자 팀 잉골드의 사례를 소개한다. 사회 문화 인류학, 고고학, 생물학, 심리학, 철학, 기호학을 공부하는 각각의 집단들과 다양한 학자들에게 ‘동물이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던졌지만 모든 집단을 충족시켜줄 만한 결론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모든 학자들이 ‘동물’이라는 단어를 파고들수록 결국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넘어가기 때문에 민감한 소재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과 동물을 구별짓기 위해서 ‘짐승’이라는 말을 만들어냈고, 동물보다 우월한 존재임을 입증하기 위해 그토록 많은 살생을 저지르고 있다.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한 미헬 파버르의 소설 <언더 더 스킨>은 (조금 과장하자면) 육식 외계인과 채식 외계인의 대결을 다룬 소설이다. 과연 인간이란 무엇이며, 살아 있던 동물의 고기를 먹는다는 게 어떤 일인지 일깨워주는 소설이기도 하다. 외계인들은 포획해온 인간들을 (마치 우리가 푸아그라를 먹기 위해 거위를 사육하는 것처럼) 집중 사육한 다음 스테이크로 팔아치우는데, 재미있는 건 소설에서의 호칭법이다. 외계인들은 자신을 인간이라 부르고 기존의 인간을 보드셀(vodsel)이라고 부른다. 작가가 네덜란드 사람인 점을 감안했을 때 보드셀은 아마도 네덜란드 말 보드셀(voedsel)을 가리키는 것일 테고, 이 단어의 뜻은 ‘음식’이다. 그러니까 외계인들은 걸어다니는 인간들을 ‘음식’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주인공 이설리는 걸어다니는 ‘음식’들을 자신의 커다란 가슴으로 유혹한 다음 납치하는 일을 맡고 있다. 이설리가 먹을 것을 찾아 헤매는 장면에서 이런 대목이 나온다. “진열대에서 먹을 것을 골라보았다. 종류는 ‘핫도그’, ‘치킨 롤’, ‘비프 버거’ 등 세 가지였다. 세 가지 모두 하얀 종이로 포장되어 있어 내용물이 보이지는 않았다. 이설리는 치킨 롤을 골랐다. 텔레비전에서 쇠고기는 위험하다, 심지어 치명적일 수도 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보드셀이 죽을 정도라면 자신은 어떻게 될지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핫도그는… 불과 며칠 전에 개 한 마리를 살리려고 상당한 수고를 아끼지 않았는데 이제 와서 개를 먹는다는 건… 아무래도 내키지 않았다.” 소설에서는 사육된 인간을 도축하는 장면이 나온다. 나는 이 장면이 너무나 끔찍해서 도저히 영화를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읽는 것만으로도 힘든데 영상으로 보면 열배는 끔찍할 것 같았다. 그래도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건, 흠, 스칼렛 요한슨이 전라 연기를 감행했다고 해서는 절대 아니고, 외계인들의 묘사가 무척 궁금했기 때문이다. 영화는 내 기대를 무참하게 무너뜨렸다. 무섭기는커녕 아름다웠고, 한없이 느릿느릿했다. 마지막에 아주 잠깐 외계인의 모습이 등장하긴 하지만 내 기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누구에게나 추천할 수 있는 영화는 아니지만 소리에 관심 있는 사람에게는 추천하고 싶다. 영화 <언더 더 스킨>은 소설 <언더 더 스킨>보다 훨씬 청각적이다. 이상한 말 같지만 영화 <언더 더 스킨>은 소설의 사운드트랙 같은 모습이다. 소설에서 외계인이 ‘바라보는’ 지구를 강조했다면, 영화에서는 외계인이 ‘듣는’ 지구를 강조했다(수많은 뮤직비디오를 만든 감독이었기에 이런 영화가 가능했을 것이다). 실제 외계인들은 어떨지 궁금하기도 하다. 지구상에도 보는 것보다 듣는 게 중요한 동물들이 많으니, 외계인들 역시 그럴지도 모른다. 어떻게 먹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고민하고 있는 문제다. 나 역시 그렇다. 살아 있기 위해 살아 있는 것을 먹지만, 잘 살아 있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언더 더 스킨>의 영화 버전과 소설 버전은 무척 다르지만, (당연하게) 밑바닥에 흐르고 있는 메시지는 비슷하다. 소설 속 한줄의 대사가 그 메시지를 압축하고 있다. “한 꺼풀만 벗기면 모두 다 마찬가지예요.”

[김중혁의 바디무비] 여름의 한가운데, 뜨거운 운전석에서

※ <모스트 원티드 맨>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올여름, 나는 어딘가 구멍이 나 있는 자전거 타이어 같다. 펌프로 열심히 바람을 집어넣어도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여지없이 쭈글쭈글한 상태로 변해 있다. 전부 새고 있는 것 같다. 구멍이 하나뿐이라면 찾아서 메우면 될 테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언제부턴가 타이어에 공기 채우는 일도 그만두고 말았다. 펌프를 움직일 힘도 없다. 시작은 아마도 세월호 침몰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였던 것 같다. 사고 소식이 더해지고, 더이상 생존자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소식이 그 위에 얹히고, 이 모든 일들이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는 소식이 다시 들려오고, 충격이라는 단어를 끝내기도 전에 또 다른 충격이 덮쳐와서 도대체 어떤 일이 더 큰 충격인지도 셈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사건의 갈피를 잡고 싶었지만 사건은 생각보다 거대했고, 배후는 예상외로 많았다. 누가 누구의 배후이고, 누가 누굴 비호하는지는 여전히 정확하지 않지만, 모든 일들은 이미 일어났고 결국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세월호의 충격이 가시지 않았는데, 계속 사고가 벌어졌다. 잠에서 깨면 뉴스가 떴고, 대부분의 뉴스는 끔찍했다. 지하철이 충돌하고, 가까운 곳에서 불이 나고, 불이 계속 나고, 누가 누군가를 기묘한 이유로 죽이고, 이유 없이도 죽이고, 해외에서는 무차별 폭격이 벌어졌다. 확실한 이유를 대며 무차별 폭격을 자행하지만 대부분은 좀처럼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들이고, 그래서인지 때로는 어떤 사람들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다른 사람을 죽이기도 했다. 군에서 수많은 사건들이 벌어졌고, 총기를 난사하고, 때리고, 예전에 벌어진 사건들이 뒤늦게 밝혀지기도 했다. 2014년 여름은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이렇게 많은 일이 벌어졌고 지금도 벌어지고 있다. 거대한 상처에서 끝없이 고름이 터져나오는 것 같다. 올여름, 나는 매사에 의욕이 없고 힘이 잘 나지 않는다. 사람들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는 잘 웃고 떠들지만 혼자 있을 때면 하고 싶은 게 별로 없다. 인터넷 브라우저 창을 열어둔 채 관심도 없는 문서를 계속 들여다보고 있기도 했고, 텔레비전 오락 프로그램을 멍하니 보고 나서는 내용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한 적도 있고, 술을 마시고 기분이 조금 좋아졌지만 깨고 나면 더욱 가라앉은 기분 때문에 스스로를 책망하기도 했다. 모든 게 다 귀찮게만 느껴졌다. 힘을 내려고 안간힘을 써보는데도 손끝과 발끝으로 힘이 다 빠져나갔다. ‘그래도 힘을 내야지’ 머리로는 생각하는데 몸은 잘 움직이지 않았다. 이런 걸 무기력증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이런 무기력증은 생전 처음 느껴보는 것이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면서 바틀비를 떠올린 적도 있었다. 하지만 바틀비와 나는 질적으로 달랐다. 허먼 멜빌의 명작 <필경사 바틀비>의 주인공 바틀비는 매사에 “안 하는 쪽을 선택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데, ‘안 하는 것’에 밑줄이 그어져 있는 게 아니라 어떤 식으로든 ‘선택’한다는 점이 핵심이다. 바틀비와 달리 ‘어떤 일을 할지 안 할지를 선택하는 것도 뭔가 하는 것이니까 선택조차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나는 밑을 알 수 없는 무기력증에 빠진 것일 뿐이다. 어째서 이런 무기력증이 생긴 것일까. 나이 탓일까,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까, 단순한 권태일까, 나도 모르는 스트레스로 탈진해서 그런 것일까. 곰곰이 생각해보았지만 별다른 대답을 찾지 못했다. 분노하고 싶었지만 대상을 찾지 못했고, 치료하고 싶었지만 병의 실체를 알 수 없었다. 무력하고 또 무력했다. 현재를 알 수 없고, 미래가 불투명할 때 ‘절망의 마음’이 생겨난다고 전문가들은 이야기한다. 마음의 무게가 몸으로 이어져 무기력증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무기력증에 그나마 좋은 약은 영화와 소설이었다. 다른 세상을 둘러보고 나면 현실이 잠깐씩 낯설어졌고, 절망의 마음이 아주 조금 줄어들었다. 올여름엔 영화를 자주 보았고 소설도 많이 읽었다. 얼마 전 별다른 기대 없이 <모스트 원티드 맨>을 보다가 자세를 고쳐 잡고 앉았다.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의 팬으로서 그의 마지막 작품을 챙겨보자는 마음이었지만, 작품을 보는 내내 그를 향한 원망이 더욱 커졌고 그가 그리웠다. <모스트 원티드 맨>의 주인공 귄터 바흐만(필립 세이무어 호프먼)은 한때 독일 최고의 스파이였으나 상부 조직에 이용당하며 작전을 망친 이후 현재는 정보부 소속 비밀조직을 이끌고 있다. 대충 빗어 넘긴 머리카락, 밤송이처럼 까칠까칠한 턱수염, 불룩하게 솟아 있는 배는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과 귄터 바흐만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었다. 그럴 리 없겠지만, 캐릭터의 설정 때문이었겠지만, 죽음을 앞두고 있는 자의 고단한 피로감이 온몸에서 느껴졌다. 귄터 바흐만이 자신의 비밀정보원 ‘자말’과 이야기를 나눌 때, 블랙커피를 시킨 다음 거기에다 위스키를 부어 마실 때, 펍에서 술을 마시다 여자를 괴롭히는 녀석을 한방에 때려눕힐 때조차 그의 몸에서는 이상한 피로감이 느껴졌다. 열심히 일을 하고 있지만 문득 내가 대체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막막함과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봤자 내가 저항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이 나를 짓누르고 말 것이라는 무력감이 결합된 총체적 피로였다. 중요한 작전 전날, 위스키를 마시다가 그는 피아노 앞에 앉는다. 짧고 굵은 손가락으로 건반을 누르는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의 옆모습을 보면서, ‘아, 저 배우를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그 피아노 연주는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이 보내는 마지막 인사였다. 지금부터 스포일러가 시작되므로 <모스트 원티드 맨>을 보려는 사람들은 여기서부터 글 읽기를 멈춰야 할 테니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하자면, 나는 이 작품이 눈물나게 좋았다. 귄터 바흐만 때문이기도 했고,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 때문이기도 했다. 귄터 바흐만의 작전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작전의 클라이맥스에서 또다시 상부 조직은 그를 배신했고, 마지막 먹잇감을 그에게서 빼앗아갔다. 그는 철저하게 이용당했고 그가 지키려던 선의는 비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 그는 도로 한복판에서 버림받은 뒤 큰 소리로 욕을 한다. 영화 내내 흥분하지 않았던 그가 울부짖으면서 욕을 해댔다. 무기력했던 그에게서 분노가 느껴졌다. 그는 동료들을 놓아둔 채 차를 타고 어디론가로 향한다. 그가 어디로 가는지 영화는 보여주지 않는다. 집으로 돌아가는 것인지, 술집으로 가는 것인지, 자신의 비밀정보원 자말을 만나러 가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을 엿먹인 상부 조직을 박살내러 가는 것인지, 작전을 어떻게든 끝까지 수행하려 하는 것인지, 보여주지 않는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귄터 바흐만이 떠난 빈 운전석이다.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은 떠났고, 텅 빈 운전석만이 남았다. 나는 그가 어디로 갔을지 생각해보았다. 귄터 바흐만은 어디로 갔고,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은 어디로 갔을지 생각해보았다. 귄터 바흐만이 어떤 선택을 했을지 곰곰이 생각하다보면 무기력증이 조금은 낫지 않을까 싶다. 지금 나는 무덥고 기나긴 여름의 한가운데에서, 엉덩이가 얼얼할 정도로 뜨거운, 운전석에 앉아 있다.

[오멸] <지슬>의 성과보다 값진 것을 찾아서

<하늘의 황금마차>는 유쾌한 인권영화이자 흥겨운 음악영화다. 치매에 걸린 큰형과 함께 네 형제가 여행을 한다. 서울서 온 스카밴드 킹스턴 루디스카가 합류하자 흥이 더해진다. <하늘의 황금마차>는 영화 속 설정처럼 감독, 스탭, 배우들도 함께 여행하며 찍은 영화다. 노인의 인권 문제를 자연스럽게 풀어내며 음악과 판타지를 뒤섞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오멸 감독은 해외와 국내 평단에서 고평을 받았던 <지슬: 끝나지 않은 세월2>(이하 <지슬>)가 독이었다면 <하늘의 황금마차>는 득이었다고 말한다. 영화를 만든다는 것, 작가로서 뜻을 공유하는 스탭들과 현장을 꾸리는 것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게 한 작품이었다는 말이다. 무인도에서 차기작을 촬영하다 상경한 검게 탄 얼굴의 오멸 감독을 만났다. -예전 인터뷰를 보니 트렁크 인생이라고 들었다. 지금도 그러한가. =이제는 배낭으로 바뀌었다. 보증금을 빼서 영화를 만든 <지슬> 당시가 트렁크 인생이었다면, 이제는 영화와 연극을 위해 좀더 가벼워지려 배낭을 메고 여기저기 다닌다. 제주 시내에 살고 있지만 영화 찍거나 영화제에 다니는 등 바깥 생활에 익숙하다. -<하늘의 황금마차> 개봉을 앞두고 있다. 요즘 근황은 어떠한가.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 다녀오기도 했지만 요즘 거제도 아래 무인도에서 자파리 멤버 여섯명과 <달마의 눈꺼풀>이라는 새 영화를 촬영 중이다. 2~3년 전부터 바다나 무혼굿 관련 시나리오를 구상하고 있었다. 그러다 세월호 사건이 터지자 못 견디게 무기력해졌고, 나는 영화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 지난 시나리오를 버리고 새로 시나리오 작업을 했다. 영화 제목은 동굴의 고승인 달마가 9년간 참선을 하다가 졸려 눈이 무거워지자 눈꺼풀을 잘라버렸다는 설정에서 따온 것이다. 요즘 잠 못드는 많은 사람들의 심경이 힘겨운 달마의 눈꺼풀 같지 않나 싶다. -많은 사람들에게 <지슬>의 감독으로 기억되고 있다. 차기작에 대한 부담감은 없었나. =전작 때문에 오는 부담감은 별로 없었다. 다만 이번 영화가 인권영화라는 타이틀을 지니고 있어서 생기는 부담은 있었다. 내가 살아오면서 ‘인권’을 자연스러운 태도로 만나지 못했다는 게 함정이었다. 인권이라는 단어가 갖고 있는 표현하기 힘든 무게감이 있지 않나. 자연스럽게 인권을 표현해내고자 했던 게 가장 큰 부담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지슬>이 유명세를 타서 우리(자파리연구소)에게 득인 줄 안다. 하지만 실상 <지슬>이 독이고 이번 영화 <하늘의 황금마차>가 득인 셈이다. <지슬>이 성과를 보게 했다면 이번 작품은 우리를 돌아보게 만드는 작업이었다. 자파리연구소 사람들은 소박하고 욕심이 없다. 안 그러려고 해도 뭔가 <지슬>로 인해 분위기의 바람을 맞게 되니 알게 모르게 몸에 거품들이 묻더라. 이번 작품은 우리 자신의 태도에 대해 선명한 공부를 시켜준 경험이 되었다. -이번 영화는 배경이나 인물에서 <어이그, 저 귓것>이나 <뽕똘>의 성격과 비슷해 보이지만, 참여인원과 규모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다. 촬영에 어려움은 없었나. =처음에 예상했던 예산에서 오버된 부분이 있어서 어려움이 있었다. 그동안 스탭들이 영화제작하면서 너무 고생을 해 이번에는 좀 나누어주고 싶었다. <지슬>에서 조금 들어온 수익이 고스란히 이번 영화의 초과된 예산으로 넘어갔다. 창의적인 시도들을 해보려 현장을 자율적으로 풀어놓았는데 뜻하지 않은 난관이 생겨나기도 해서 만족스럽지 않게 촬영한 부분들이 있었다. 영화의 규모가 커지다 보니 예상치 못한 문제도 생겼다. 11대의 차량을 움직이다 보니 주차가 가능한 현장을 찾아야 했다. 그런 배려 때문에 마음에 안 드는 공간이 들어가게 되었다. 그 렇게 찍으려던 공간에서 밀려나고 내가 현장 상황 때문에 지고 있던 거다. -재촬영을 결심하기 어려웠을 것 같은데. =이 작품을 만드는 데 꼬박 1년이 걸렸다. 본래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때 공개하려 했지만 최종적으로 그러지 못했다. 아직 미혼이라 비유가 적절할지 모르겠지만, 공개하려고 보니 내 영화가 아직 미발달된, 장애가 있는 영화처럼 보여서 세상에 내보낸다는 것이 무책임하게 느껴졌다. 국가인권위원회나 부산국제영화제에 신뢰가 무너져도 감독으로서 무책임하게 마무리할 수 없었다. 제주도에 있는 멤버들로만 스탭을 만들어 추가로 3회차 촬영을 했고, 앞의 그림 중 버릴 것은 버리고 50%는 다시 찍었다. -1930년대 노래를 듣고 음악을 중심에 놓은 로드무비를 구상했다고 들었다. 영화를 처음 이끌었던 이미지 혹은 음악이 있었나. =<하늘의 황금마차>라는 노래를 듣고 바로 떠올렸다. 이난영이 부르기도 했고, 백설희가 부르기도 했다. 옛 노래였지만 참으로 놀라운 노래였다. 노래를 듣는 순간 이게 영화의 제목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춤추면서 시신을 안고 가는 엔딩 음악으로 적절하겠다고 생각했다. -<하늘의 황금마차>는 로드무비다. 네 형제가 큰형의 죽음을 앞두고 목적지도 없는 여행을 한다. 와중에 밴드가 등장한다. 어떻게 이러한 로드무비를 구상했나. =영화를 찍는 우리가 함께 여행하며 만들어가는 영화를 기획했다. 여행을 하면서 만들어지는 질감을 나누고 싶었다. 그래서 장소 헌팅도 미리 하지 않았다. <하늘의 황금마차>는 시나리오를 좀 빈 듯이 하여 영화를 찍으면서 완성해간 영화다. 내게는 시나리오의 완결성보다 현장에서의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스탭들과 함께 영화를 만들어나가고 싶은 욕심이 있다. -현장에 대한 꿈이 제대로 실현되었나. =영화의 스탭들은 일종의 붓이다. 그런데 실상 작품의 규모가 커지면서 다양한 스탭들이 참여하게 되었는데, 그들은 일종의 직업인으로 보이더라. 내가 다루고 싶은 붓의 질감이 아니라, 다른 현장과 다른 감독에게 익숙한 붓인 듯해서 내 생각 같지만은 않았다. 내심 현장에 ‘작가’들이 있었으면 했는데, 냉정하게 말하자면 현장에 ‘근로자’가 많았다. 독립영화 감독들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현장이 두렵다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나도 이번 작품으로 감독이 시스템에 적응해야 하는 것이 우리나라 독립영화의 현장이 아닌가 하는 실감을 했다. 독립영화든 상업영화든 똑같이 시스템이 돌아가고 직업인으로서의 스탭들이 와서 찍고 간다. <지슬> 때는 그 부분을 감수하고 찍었으나 이번에는 새로운 실험을 해보고 싶었는데 역시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었다. -영화에 등장하는 문석범(하르방 귓것), 김동호(둘째), 양정원(용필 삼촌), 이경준(뽕똘), 오영순(해녀) 배우 등이 인상적이다. 그들과의 인연은. =이 배우들과 삶을 바라보는 태도와 정서가 비슷하다. 감독으로서 행운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네 형제를 담당한 배우들과는 실제로도 매우 친하다. 그동안 영화를 함께해온 분들이기도 하고 말이다. -영화에 네 형제가 등장하는데, 어떻게 이러한 가족을 상상했나. =영화 4차 촬영을 마치고 돌아보니 영화에 뭔가 큰 구멍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네 형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형제애’가 빠져 있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내 인생의 공백이 영화에도 고스란히 묻어났던 것이다. 내 삶이 비어 있는데 어떻게 영화를 잘 찍을 수 있겠는가. 또 나 자신의 부모님들이 건강하시니 노인 문제에도 절실함이 없었고 그동안 한번도 그분들과 여행을 다녀본 경험이 없었다. 감독의 그릇만큼 담기는 게 영화구나 싶었다. 이러한 공백들에 대해서는 연결 고리만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방식으로 보완했다. 그리고 이번 제천국제음악영화제 때 부모님을 모시고 영화제 관람 겸 동해안 여행을 했다. -<어이그, 저 귓것>에서도 그랬지만 이번 작품에서도 죽음을 일상과 연결짓는 방식이 특이하다. =죽음이 한 개인의 인생사에서는 매우 특별한 일이기는 하지만 생과 사에 있어서는 자연스러운 거다. 이 작품에서 나는 죽음을 특별하게 다루지 않으려 했다. 제천국제음악영화제 개막 전에 오영순 할머니(극중 해녀 역할)가 돌아가셨다. 사실 <어이그, 저 귓것> 때 간암 판정을 받으셨다. 그 영화에서도 <지슬>에서도 오영순 할머니는 계속 죽는 역할을 담당하셨다. <어이그, 저 귓것>에서 오영순 배우에게 죄송스럽지만 돌아가시는 장면을 미리 감정을 상상하시라며 노래 신을 부탁해 촬영한 적이 있다. 실제 노래하시다가 너무 우셔서 그 장면을 영화에는 쓰지 못했다. <지슬> 때엔 치료차 계룡산에 계시다 오셔서 촬영을 하셨다. <하늘의 황금마차> 때에도 간곡히 부탁해서 오신 것이다. 오영순 할머니가 편찮으셨기에 작품마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작품마다 이게 유작이니 찍으셔야 한다고 농을 치기도 했다. 그런데 막상 부고를 들은 후 제천국제음악영화제 감독과의 대화(GV) 때 오영순 할머니를 소개하다 갑자기 울컥해버렸다. -이번 영화에는 오영순 할머니의 기천무 장면이 등장한다. =본래 그 장면은 시나리오에는 없던 것이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오영순 할머니가 계룡산에서 배운 기천무를 하고 계시더라. 그림이 되겠다 싶어 밴드 단원들이 기천무를 배우는 장면을 영화에 넣었다. -함께 여행하는 킹스턴 루디스카는 어떻게 만나게 되었나. =텔레비전에서 <불후의 명곡>을 보다가 발견했다. 스카 밴드를 처음 보았는데 참 흥이 있어 보였다. 그런데 아직 뭔가 발현이 안 된 듯한, 자신 내부의 흥을 이끌어내지 못한 느낌이 있어서 아쉬웠다. 이후 영화제작을 위해 연락을 해서 만나게 되었다. -흰 러닝셔츠에 파자마, 날개로 된 밴드 단복이 인상적이다. =킹스턴 루디스카가 배우가 아니라는 점에서 이질감이 컸다. 우리 배우들은 대개 촌스럽지만 밴드 단원들은 도시적이다. 처음에 그들이 평상복을 입고 찍은 장면을 다 버렸다. 도시적 생활에 익숙한 밴드 단원들을 바닥에 내려서게 해주자, 그렇게 생각해낸 것이 흰 러닝셔츠에 파자마다. 그것도 여행 중에 거의 갈아입지 않아서 누렇게 때가 탄 옷들로 말이다. 밴드의 정체성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고민했다. 음악인은 우리에게 또 다른 천사다. 음악은 찬송가처럼 영혼을 달래주지 않는가. 그런 의미에서 밴드 단복에 천사의 날개를 단 거다. 참, 뽕똘의 연두색 추리닝은 <어이그, 저 귓것>의 의상 그대로다. 이경준 배우는 자신이 등장한 배역의 옷을 보관해두고 있다. (웃음) -영화를 찍으며 이 장면이다 하는 감이 온 부분이 있었나. =시나리오에서 노인이 돌아가시는 장면만은 분명하게 구상했었다. 장소는 폐허인 건물의 2층이어야 했다. 2층의 창문 앞에는 큰 나무가 있어야 했다. 그 나무는 울어주듯이, 손짓해주듯이 살랑대면서 사람들이 지켜주지 못한 노인의 죽음을 지켜봐주는 거다. 마침 그러한 집을 발견해서 그곳에서 촬영했다. -노래 <바다의 꿈>이 흘러나오는 무덤 합주 신이 꽤 인상적이다. =사실 이 영화를 진심으로 엎어버리려 결심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버리지 못한 것이 바로 이 장면 때문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무덤은 내 20대를 함께 보낸 공간이다. 괴로울 때 찾기도 하고 홀로 시간을 보내며 놀던 공간을 언젠가 영화나 연극을 통해 재현해보고 싶었다. 무덤이란 공간은 죽음의 공간이다. 삶을 숙연케 만드는 곳이기도 하지만, 내가 무덤 속에 누워 있는 사람이라면 사람들이 많아 와서 놀다가는 것을 좋아할 것 같다. 그런 느낌으로 찍은 장면이다. 감독은 <하늘의 황금마차>가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을 유쾌하게 바라보며 삶을 건강하게 긍정하는 영화로 선보였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영화에서처럼 인생이란, 목적지가 분명치 않은 긴 여행이다. 쓸쓸하고 처량하지만 황홀하고 마법 같은 순간들도 존재한다. 감독 오멸은 영화가 예산과 기술에 달린 것이 아니라 철학의 문제라는 것을 확인받고 싶다. 더디더라도 함께 철학을 공유하는 사람들과 영화를 찍고 싶다. 그런 마음으로 투자를 거절하고 착수한 차기작이 <달마의 눈꺼풀>이다. 6명이라는 최소한의 스탭으로 무인도에서 촬영되는 이 영화는 배우 1인이 등장하는 시적인 작품이 될 것 같다. 내년에는 제주도를 배경으로 한 밝은 분위기의 해녀영화인 <인어전설>을 촬영할 예정이다. 감독 오멸은 지금 가장 왕성히 생산 중이다. <지슬>처럼 서늘하고 숙연한 작품도 있지만, 그의 창작의 원천은 언제나 ‘자파리’(쓸모없는 짓거리), ‘귓것’(바보스러운 짓)에 놓여 있다.

[오마이이슈] 우리, 사는 거니 버티는 거니

새 시장님이 주민들과 대화의 장을 마련했다길래 애 저녁 먹이고 텔레비전 틀어주고 부리나케 가봤다. 노인들만 잔뜩 있었다. 몇몇 민원성 요구가 오간 뒤 시장님의 대표공약에 대한 우려를 밝히고자 최대한 온건하고 정중하게 마이크를 잡았다. 노인 몇분이 “말이 많다”고 소리쳤다. 하실 말씀들이 있나 해서 서둘러 마쳤다. 하지만 딱히 발언을 한 분은 케이블카 놓고 중국인 관광객 유치하자는 할머니 빼곤 없었다. 노인들의 지지와 성원(비공식 고함과 공식 침묵)에 힘입었는지 시장님은 심히 ‘노인토크’ 수준으로 일관했다. 경로잔치를 할 거면 낮시간에 복지관이나 경로당을 찾을 것이지. ‘세계 삶의 질 지수’ 조사에서 우리나라의 45살 이상 응답자 중 절반이 삶의 목적, 사회적 관계, 경제상황, 공동체, 건강 등 5개 항목의 어떤 것에도 만족한다는 답을 하지 않았단다. 너무 리얼해서 비현실적이다. ‘사는 게 아니라 버티는’ 이런 분위기에서 정치 개입은 했으나 선거 개입은 아니다, 증세 효과는 있으나 증세는 아니다, “대통령 모독” 따위 언설들이 짓까부는 거겠지. 그리고 그 많은 ‘인정결핍’ 노인들을 양산하는 거겠지. 그런데 어쩌나. 우리의 세대간극은 남북분단 수준인데. 지난호(971호)에 실린 김일권 시네마달 대표 인터뷰를 보면서 그는 참 한결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과 삶에 대한 태도와 일과 일의 결과가 일치돼 있다. 깔끔쟁이 같으니. 십수년 전 촬영장에서 그를 처음 봤을 때 ‘사람에게서도 향기가 나는구나’ 싶었다(물론 그날 난 내내 취해 있었다). 그는 말하자면 식물성이었는데, 아주 질긴 종인 것 같다. 존경하고 지지한다. 그런 그가 “나이는 더 들어가고, 미안하다는 말은 더 많이 해야 하는 상황에 조금 지친다”고 얼핏 말했단다. 순간 울컥했다. 이 감정이입은 뭐지. 다른 건 몰라도 김 대표는 아주 잘 늙어갈 것 같다.

[파리] VOD 업계 골리앗의 노르망디 상륙 작전

미국의 주문형 비디오(VOD)를 대표하는 넷플릭스(Netflix)가 올가을부터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5개 나라에 진출한다. 넷플릭스는 1997년 DVD를 우편으로 대여•반납하는 획기적인 방식으로 사업을 시작한 영화 대여 업체로서, 시대의 변화에 발맞춰 인터넷을 통한 VOD로 영역을 넓혔다. 그리고 현재 전세계 41개국 5천만명의 회원을 보유한 시장의 선구자로 자리매김했다. 프랑스에서는 1달에 8유로(약 1만원)의 저렴한 회비만 내면 광고를 볼 필요 없이 TV와 컴퓨터는 물론 태블릿, 스마트폰 등의 다양한 플랫폼으로 영화를 무제한 감상할 수 있다. 넷플릭스는 이러한 점을 내세워 9월15일에 서비스를 시작한 이후 2주 만에 10만명의 가입자를 유치했다. 이는 프랑스의 유료 채널 <카날플러스>의 VOD 서비스인 카날플레이가 2011년 출범한 후 현재까지 50만명의 회원을 확보한 것에 비하면 가히 폭발적인 숫자라고 할 수 있다. 업계의 골리앗이 노르망디 상륙을 타진하던 지난해부터, 프랑스는 탐욕적인 문화 잠식으로 악명 높은 미국의 또 다른 ‘악당’을 경계 어린 시선으로 주시해왔다. 프랑스의 방송사들은 프랑스 영화와 유럽영화 송출에 쿼터를 적용하고 수입의 일정 부분을 자국의 영화 제작에 재투자하는데, 이는 시청료와 광고 수입을 통한 이윤을 창작 과정에 환원함으로써 문화의 다양성을 유지하고 시장이 균형적으로 성장하도록 하기 위한 정책이다. 하지만 넷플릭스가 올해 초 프랑스가 아닌 룩셈부르크에 지사(2015년 네덜란드로 이전 예정)를 세우면서 조세 회피의 의혹을 샀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 영화시장에 의무적으로 지원해야 하는 위와 같은 법조항을 피하려는 모습을 보여 이 문제는 문화계의 뜨거운 감자가 되었다. 결국 넷플릭스는 수익의 2%를 프랑스 국립영화청(CNC)의 재정에 지원하고 프랑스 내 소득에 대한 부가가치세도 지불할 것이며, 자체 제작 시리즈 <하우스 오브 카드>의 프랑스판인 <마르세유>를 제작한다고 발표하면서 프랑스에 유화의 몸짓을 취했다. 한편 영화팬들 사이에는 더욱 다양한 경로로 풍성한 카탈로그를 접하게 되리라는 기대감이 고조되는 듯하다. 프랑스의 업체 또한 앞다투어 경쟁사업 모델을 내놓기 시작했지만 고화질(HD) 스트리밍과 다양한 플랫폼을 지원한다는 점이 넷플릭스의 우위를 점치게 한다. 그러나 극장 개봉 후 36개월이 지나야만 VOD 제공이 가능하도록 제한한 법규는 기존의 텔레비전 시청자뿐 아니라 재빠르게 퍼지는 불법파일에 쉽게 유혹되는 인터넷 사용자들을 VOD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데 한계점으로 작용할지도 모른다. 넷플릭스의 대표 리드 헤이스팅스는, 디지털과 혼성된 미래의 텔레비전이 정해진 시각에 정해진 프로그램으로 제공되는 일방향성을 무너뜨릴 것이고, 현재의 텔레비전은 20년 후에는 사라질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 사망 유예 기간 동안 텔레비전과 영화의 관계가 어떻게 바뀌어갈지 귀추가 주목된다.

언젠가 이 편지를 꺼내볼 그날을 위해

※ 박지환 학생과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글입니다. 어느 날 한국영상자료원 SNS에 한 소년의 소식이 올라왔습니다. 어느 중학생이 해외 웹사이트를 뒤져가며 국내에 없는 한국 고전영화를 발굴해 정기적으로 자료원에 기증하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기특한 소년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소년의 기증작 편수가 무려 130여편이라는 겁니다. ‘보통 아닌 덕후로구나!’ 싶어 한국영상자료원 수집부에 전화를 걸어보았습니다. 한국영상자료원에서는 소년이 “영화과에 진학할 생각인데 혹시라도 기사들이 불공평하게 가산점이 될까봐 우려한 까닭에 지금까진 사진촬영을 겸한 인터뷰를 거부했지만, 영화잡지인 <씨네21>이라면 사진촬영에 응할 생각이 있다고 하더라”는 답변을 들려주었습니다. 다시 소년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간단하게 몇 가지를 물었습니다. 소년은 중학생 때부터 자료를 기증해왔으며 지금은 고등학생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잃어버린 한국영화를 찾는 일이 무척 즐겁기도 하고, 이 재미있고 예쁜 영화들을 혼자 보기가 너무 아까워 자료원에 지속적으로 자료를 기증하고 있노라고 말했습니다. 김수용 감독을 무척 동경해 그의 영화 비디오만 따로 보관할 자리를 마련해두었다고도 했습니다. 예상대로 보통 아닌 이 소년의 실물과 그의 ‘컬렉션’이 무척 궁금했습니다. 만나자는 약속을 잡고, 주말이라 꽉꽉 막히는 도로를 네 시간 동안 달려 강원도 동해에 자리한 소년의 집까지 찾아갔습니다. 모델 안재현을 조금 닮은 소년은 예상보다 눈이 높은 고전영화광이었고 대단히 수줍음이 많았으며 그럼에도 주관은 무척 뚜렷한 영화감독 지망생이었습니다. 스스로는 “반 애들은 나를 오타쿠 아니면 미친놈으로 생각한다”고 자조적으로 말했지만, 소년이 모은 비디오들을 하나씩 들추어보다 <씨네21>은 발견하고 말았습니다. 소년이 꼭꼭 숨겨두었던 은밀한 편지, 선배 감독들에게 보내는 씩씩한 출사표를 말입니다. 감독을 꿈꾸는 어느 소년이 씁니다. 좋은 영화를 보고 나니 어디로든 편지를 쓰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대상을 정하지 않고 선배 감독님들께 영화와 관련된 저의 경험들을 담아 편지를 써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가장 좋아하는 김수용 감독님의 <사랑의 조건>의 비디오 케이스에 이 편지를 넣어둘 겁니다. 가장 먼저 저의 편지를 읽는 사람이 누구일지 저도 무척 궁금합니다. 제가 좋은 영화감독이 되었다면 어느 분께든 직접 편지를 드릴 수도 있을 테고, 영화감독이 되지 못했다 해도 언젠가 숨겨두었던 이 편지를 발견하고 힘내서 다시 꿈을 꿀 수도 있지 않을까요. 영화에 대한 저의 기억은 초등학교 2학년 때 텔레비전 케이블 프로그램에서 방영해준 고전 크리처 영화들에서부터입니다. <쥬라기 공원> <죠스> <불가사리>를 보며 저는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고전영화를 즐기는 취향도 이 무렵 만들어진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수집은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였습니다. 그땐 그냥 재미있어서 샀습니다. 알라딘 중고판매 카테고리나 DVD프라임, 이베이옥션 같은 웹사이트를 열심히 뒤지고 다녔습니다. 처음 산 영화는 <엑소시스트> 1편과 2편이었습니다. 다들 존 부어먼의 <엑소시스트2>는 졸작이라고 했지만 저는 그 영화를 1편보다 훨씬 좋아합니다. 엔니오 모리코네의 음악을 굉장히 사랑하거든요. 모리코네를 만나게 된다면 제일 먼저 큰절부터 올릴 거예요. 정말이에요. 아니, 어쩌면 울음부터 터질지도 몰라요. 그 정도로 저는 모리코네의 음악을 사랑한답니다. <엑소시스트2>로 모리코네의 음악을 알게 된 뒤 저는 그의 음악에 푹 빠져들었습니다. 지금 제 휴대폰에 저장돼 있는 음악도 전부 모리코네의 영화음악들이랍니다. 주세페 파트로니 그리피의 <어느 날 밤의 만찬>(1969)이라는 영화에서 쓰인 음악이 특히 좋아요. 프랑코 루바텔리가 연출한 <베르슈카>(1971)의 삽입곡 <인형>(La Bambola)은 저에게 많은 영감을 주는 곡이에요. 제 시나리오엔 <인형>을 듣던 중에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장면도 있어요. 마음 같아서는 구상하고 있는 영화의 음악을 모두 모리코네의 곡으로 하고 싶어요. 어느 장면에 어떤 음악을 쓰면 좋을 것 같은지도 다 구상해뒀어요. … 물론 꿈으로만 그치겠지만요. 교장선생님께 장비를 빌려 달라고 부탁했지만 이미 저는 여러 편의 시나리오를 만들어두었답니다. 하지만 장비를 구할 수가 없어서 촬영은 미뤄두고 있어요. 비슷한 이야기를 많이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학교 연극부에도 들어가봤는데 제 생각과는 너무 다르더라고요. 그래서 얼마 뒤 탈퇴하고 교장선생님을 찾아갔어요. 제가 영화를 만들어서 영화제에 출품을 하고 운좋게 수상이라도 하게 되면 얼마나 학교에 이익이 되겠느냐고, 또 그 경험 자체가 학생들에게는 적성을 파악하는 뜻밖의 기회가 될 수 있지 않겠느냐고, 그러니 장비를 지원해주실 수 없겠느냐고 거듭 말씀드렸죠. 물론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였지만요. 그래도 문학을 가르치는 담임선생님께서는 저를 많이 응원해주고 계세요. “자기 꿈을 찾아서 이렇게 노력하는 모습이 제일 좋아 보인다”고 하시면서 저를 칭찬해주신 적이 있는데요. 그 말이 얼마나 힘이 되었는지 몰라요. 장비도 부족하지만 관심 있는 크루를 모으는 것도 힘든 것 같아요. 배우를 할 친구는 한명 구해뒀어요. 그 친구의 이미지가 참 마음에 들었는데 친한 친구가 아니라서 말을 붙이기 어렵더라고요. 그 친구의 담임선생님을 찾아가 그 친구를 소개해달라고 부탁드렸어요. 선생님이 만남의 자리를 마련해주셔서 직접 이야기를 해볼 수 있었어요. 일단 하겠다고는 했는데… 그 친구가 얼마나 적극적으로 참여해줄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다른 친구들과도 고전영화를 두고 재미난 대화를 할 수 있게 되면 정말 좋을 것 같아요. 저는 고전영화를 보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 작품을 탐구하고 관련된 영화 외적인 배경지식도 많이 쌓는 편인데요. 친구들이 저를 그저 단순한 ‘오타쿠’라고만 치부하는 건 솔직히 조금 기분 나빠요. 뭐, 꼭 틀린 말은 아니지만요. 제게 영감을 주는 또 한분이 있어요. 저는 오래된 이탈리아영화를 즐겨보는데요.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의 <테오레마>(1967)를 특히 좋아합니다. 몇번이나 돌려보았는지 몰라요. 영화 이면에 숨겨진 다른 것들을 찾아내는 재미가 대단하거든요. 원래 한편의 영화를 여러 번 돌려보며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는 편이기는 합니다. 다들 왜 그리 파솔리니의 영화를 ‘역겨운 영화 리스트’ 같은 데에 자꾸 올려놓는지 모르겠어요. <테오레마>의 마지막 장면 즈음, 하녀가 스스로의 의지로 땅에 묻히는 장면과 아버지가 나체로 소리지르며 벌판을 뛰어다니는 장면을 가장 좋아합니다. 또 파솔리니는 모리코네와 여러 번 작업한 감독이기도 해요. 파솔리니와 비토리오 데 시카, 루키노 비스콘티, 마우로 볼로그니니, 프랑코 로시가 단편을 엮어 만든 옴니버스영화 <다섯 마녀 이야기>(1969)도 자주 돌려보는 작품 중 하나인데요. 그중에서도 파솔리니가 만든 <달나라에서 온 마녀>를 역시 가장 좋아합니다. 다른 네 감독과 달리 파솔리니만 영화음악을 모리코네에게 맡기기도 했어요. 제가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죠. 이왕 말을 꺼냈으니, 제가 만들 영화의 한 장면 정도도 함께 적어볼게요. 소년이 환상을 보는데 회색빛깔의 장면이 될 거예요. 안개가 낀 부둣가에서 등대 불빛만 돌아가고 있고, 소년은 어리둥절한 느낌으로 서 있다가 긴 머리를 휘날리는 여인의 그림자를 보아요. 소년은 여인을 쫓아가고, 여인은 그림자만 보인 채로 바다를 향해 몸을 움직이죠. 여인의 모습은 사라지고, 여인을 잡으려는 찰나 소년은 바다에 빠지고 말아요.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시겠죠? 영화를 완성하게 되면 좀더 친절한 설명을 덧붙일게요. 아마도 제 영화엔 자연에 영감을 받은 장면들이 많이 들어갈 거예요. 자연적인 아름다움을 동경하는 건 자연과 더불어 자란 어린 시절의 기억 때문인 것도 같아요. 세살 때 울릉도에서 주황색 지붕을 얹은 집에 살았던 기억도 생생하고요. 여덟살 때부터 열한살 때까진 송정의 자연에서 뛰놀며 자랐어요. 동네 사람들도 정이 많고 풍경도 굉장히 환상적이었어요. 그때 생각만 하면 지금도 마음이 편해져요. 인천의 아파트 지하실에 간 적이 있었는데요 영상자료원에 기증한 첫 작품은 유현목 감독님의 <한>(1967)이에요. 국내엔 없는데 홍콩에 비디오가 출시된 걸 보고 복사본을 구해서 기증했어요. 홍콩에선 제목이 <인귀신>으로 출시돼 있더라고요. 홍콩으로 수출되면서 이름이 바뀐 영화가 꽤 많은 것 같아요. 이규웅 감독님의 <꼬마검객>(1970)도 홍콩에선 <소검객>으로 출시돼 있었어요. 이렇게 재미있는 영화들을 저 혼자만 보는 게 아깝더라고요. 영상자료원에 기증하면 저도 언제든 가서 볼 수 있고, 자료도 깨끗하고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고, 다른 이용자들도 볼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 일인가요. 어머니께서는 제가 영화에만 너무 빠져 있다고 늘 핀잔을 주세요. 고등학생인 아들이 공부는 안 하고 다른 취미만 탐닉하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시지요. ‘야자’도 안 하고 그 시간에 영화공부를 하는 데다 용돈을 받는 족족 비디오만 사들이니 말이에요. 나중에 영화감독으로 이름을 날리게 되면 이런 취미까지도 이해해주실 거라 생각해요. 오늘 만난 <씨네21>의 사진기자님은 “소극적인 성격이면 절대 한국 영화판에서 영화 못한다”고 하셨지만요. 전 세상에 안 될 일은 없다고 봐요. 보통은 가위가 보를 이긴다고 하죠. 그런데 보는 정말 가위를 이길 수 없을까요? 우선 부딪쳐봐야죠. 부딪치기도 전에 포기하는 것만큼 멍청한 일은 없어요. 해외에 돌아다니는 우리 영화들의 자취는 수출 기록을 찾아보거나 전해지는 말들을 통해 추적해나가요. 홍콩에 있다는 소문만 들리는 <만추>(1966)도 꼭 찾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홍콩엔 저에게 따로 비디오를 구해다주는 사람이 있어요. 중고 DVD 카페를 자주 이용하는데 우연히 그분이 제가 찾던 영화, 장일호 감독의 <여수대타록>(1976)의 비디오클립을 업로드해놓으셨더라고요. 그 인연으로 알고 지내게 돼서 홍콩과 중국쪽은 그분께 물어물어 비디오를 구하고 있어요.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중국인이라는데 그분 말로는 쇼브러더스에서 일한 적이 있다고 하시더라고요. 인터넷으로만 알고 지내는 분이니 그 말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저도 몰라요. 중요한 건 제가 그분 덕에 귀한 영화들을 모을 수 있었다는 거죠. 이분은 권격영화, 무협영화에 관심이 많은데 이분 도움으로 최근 <풍운의 권격>(1972)을 구하게 됐어요. 곧 기증할 예정이에요. 어떤 영화를 찾다보면 예기치 않게 다른 영화를 찾게 될 때도 있어요. <맥권>(1986)이라는 권격영화를 찾기 위해 인천의 어느 아파트 지하실까지 찾아간 적이 있어요. 한참 뒤지고 난 뒤 발견한 영화는 <맥권>이 아닌 <빨간 하이힐>(1986)이었어요. 이런 우연한 만남들마저 무척 영화적으로 느껴진다면, 제가 지나치게 낭만적인 것일까요. 김수용, 김기덕 감독님을 뵌 적이 있어요 언젠가 한번은 김수용 감독님께 편지를 써서 보낸 적이 있어요. 무사히 받아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궁금한 건 <학마을 사람들>의 영화 제작 소식입니다. 이범선 작가의 소설 <학마을 사람들>의 시나리오를 김수용 감독님이 쓰셨다는 기록을 어디선가 보았거든요. 영화화되었다는 가정하에 필름이나 비디오를 찾아보았는데 도저히 구할 수가 없어서 그 행방이 더욱 궁금해졌어요. 홍콩에 머물며 영화를 만드신 적도 있지요. 홍콩에서 번 돈으로 미국에 진출하시기도 했는데, 홍콩과 미국에서 별다른 어려움은 없으셨는지도 여쭤보고 싶었어요. 감독님은 기억하지 못하시겠지만 저는 감독님을 직접 뵙기도 했답니다. 한국영상자료원에 감독님이 오신 날이었는데요. 제가 모으고 있던 감독님의 비디오 표지 사진들을 가져가서 감독님께 사인도 받았어요. 그때 저는 동경하던 분을 직접 뵙는다는 놀라움과 긴장에 온통 정신이 나가 있었어요. 물어보고 싶던 것도 산더미였는데 직접 뵙게 되자마자 그 모든 질문들이 머릿속에서 홀라당 사라져버렸답니다. 손수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하신 영상자료원의 어느 직원분이 아니었다면 그 기념비적인 순간을 마음속으로만 간직해야 했겠지요. 필름마저 소실된 <씻김불>(1973)에 대해 김기덕 감독님께 묻고 싶은 것도 무척 많아요. 영상자료원 연말파티에 초대받아 간 날 김기덕 감독님께 직접 인사까지 드렸는데, 역시 머릿속이 하얘져서 아무 말씀도 드리지 못했던 거 있죠. 쓰다보니 편지가 너무 길어졌네요. 사실 마음에 담아둔 말은 반의 반의 반도 다 못했는데 말예요. 하지만 내일 학교에 가야 하니 지금쯤은 잠자리에 들어야 할 것 같아요. 모쪼록 낡은 비디오 케이스에 담긴 이 편지가 어느 날에는 꼭 감독님들께 전해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희망대로 영화감독이 돼서 감독님들께 자연스럽게 인사드리며 감독님들의 영화 곁에 고이고이 이 편지를 간직해왔다고, 언젠가 꼭 직접 말씀드릴 수 있게 된다면 정말 정말 좋겠습니다. 동해 사는 박지환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