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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1997)

[김중혁의 바디무비] 어이쿠! (쿨룩) (콜록) (쿨룩)

영화 <족구왕>에는 난데없이 웃음이 터지는 장면이 몇 군데 있다. 혼자 ‘풉!’ 하고 웃었는데, 과연 웃긴 장면인지는 잘 모르겠다. 텔레비전으로 다운받아서 보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웃음을 확인할 길이 없었고, (극장에서 영화 보는 게 이런 걸 확인하는 맛이지!) 감독이 코미디를 작정하고 넣었는지도 잘 모르겠다. 첫 번째 장면은 ‘가위바위보 뺨 때리기’ 장면이다. 여주인공 안나는 주인공 만섭에게 가위바위보 게임을 제안하고, 자신이 이기자마자 만섭의 뺨을 후려친다. 얼마 전 유행했다는 ‘가위바위보 뺨 때리기 게임’인데 급작스러운 장면이기도 하고, 뺨 때리기의 강도가 워낙 세서 ‘이건 뭐지’ 싶었다. 몇 차례 뺨을 때린 안나는 “나 졸라 나쁜 년이니까 좋아하지 마”라는 대사를 남기고 홀연히 자리를 떠난다. 혼자 남은 만섭이 갑자기 재채기를 하는데 그 장면이 너무 웃겨서, 마시고 있던 커피를 뿜을 뻔했다. 감독의 연출이었을까, 아니면 배우의 애드리브였을까. 재채기란 과연 무엇인가. 재채기란 ‘비점막의 자극으로 인해 일어나는 경련성 반사운동의 하나로, 주위 환경의 급격한 온도 변화나 물리적, 화학적 충격을 감지한 비점막이 문제요소를 제거하려고 강하게 반응하면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갑자기 뺨을 맞은 만섭의 몸은 충격을 흡수하기 위해 비점막을 통해 재채기를 내뱉게 한 것이다. 두 번째로 웃겼던 장면은 만섭이 우유팩차기를 설명하는 장면이다. 이걸 보고 웃는 사람은 누구일까. 우선 우유팩차기를 잘 모르는 사람은 이 장면에서 웃을 수 없다. 우유팩차기의 도구를 제작할 때는 주로 ‘서울우유 커피맛’을 이용한다든지 “팩차기는 족구에 대한 감각을 익히는 데 아주 좋아요. 공에 대한 집중력과 공이 발에 딱 닿았을 때의 감각을 미리 느끼게 만들어주고요” 같은 대사는 웃음기가 전혀 없다. 설명문에 가깝다. 우유팩차기를 한번도 접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어, 그래서?’라고 다음 대사를 마냥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팩차기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장면에서 웃게 된다. 웃을 수밖에 없다. 우리의 진지했던 장면을, 그러나 돌이켜보면 어이없게도 촌스러웠던 장면을, 주인공이 진지하게 되풀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 같은 40살 이상의 남자들이라면, 도서관에서 공부 좀 해본 학생이라면, 저런 설명을 누군가에게 한번쯤 해보았을 것이다. 스무살 무렵 서울의 한 대학교에 놀러갔을 때, 우유팩차기의 스펙터클을 처음으로 보았다. 그즈음 나는 친구와 함께 ‘서울의 대학 중에서 제일 싸고 맛있고 양이 많은 구내식당은 어디인가?’를 조사하고 다녔는데, (그런 걸 왜 조사하고 다녔냐고 묻는다면 답은 하나, 돈은 없고 시간은 많고 배는 고프니까) 모 대학교 구내식당에서 맛있는 점심을 먹은 뒤 담배나 한대 피우며 품평을 하자고 도서관으로 향했는데, 도서관 앞에서 수많은 우유팩 폐인들이 미친 듯 팩차기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몇명쯤 되었을까. 내 기억으로는 50명이 넘었던 것 같다. 아니, 어쩌면 100명이 넘었는지도 모른다. 운동이 부족한 학생들이 밥 먹고 할 수 있는 유일한 운동이 팩차기였고, 학교에서 가장 큰 공터가 도서관 앞이다보니 거기에 폐인들이 모두 모인 것이다. 그때는 그 풍경이 장관이라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짠하기만 하다. <족구왕>을 보면서 그 풍경이 되살아났다. 군대에서 축구한 얘기와 군대에서 족구한 얘기와 대학에서 우유팩차기했던 얘기는 절대 길게 하면 안 된다는 거 알고 있지만, 주제가 <족구왕>이니 이해해주기 바란다. 영화에서 우유팩차기에 대해 길게 설명을 해주었지만 부족한 점이 몇 군데 눈에 띄어 보충 설명해주고 싶어졌다. 우유팩차기의 핵심이랄 수 있는 정육면체 우유팩을 만들기 위해 윗부분을 접을 때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제대로 눌러주지 않으면 놀이 도중에 접힌 윗부분이 되살아나 정확한 차기를 방해할 수도 있다. 정육면체의 우유팩을 만든 다음 모서리에 구멍을 내고 살짝 바람을 불어넣어주면 더 팽팽한 팩을 만들 수 있다는 것도 중요한 팁이다. 마지막으로 지역 차이일 수도 있겠지만 내가 다니던 학교에서는 새 우유팩보다 중고 우유팩을 더 선호했다. 새 우유팩은 모서리가 너무 날카로워서 초보자들이 다루기 까다롭다(어디로 튈지 모르는 우유팩차기를 선호하는 사람들이 새 우유팩을 이용했는지도 모르겠다). 전문가들이 나서서 새 우유팩을 적당히 다뤄주고 나면 우유팩의 모서리가 뭉툭해진다. 정육면체의 날카로운 모서리들이 둥글둥글해지고 나면 우유팩은 우유볼로 변신한다. 축구 국가대표 선수들이 둥그렇게 모여서 패스 연습을 하는 것처럼 우리도 둥그렇게 모여서 우유팩을 하염없이 주고받았다. 날카로운 청춘의 모서리가 천천히 닳고 있다는 느낌으로, 속이 텅 빈 채 누군가에게 얻어맞는다는 기분으로, 하염없이 팩을 주고받았다. 영화 <족구왕>의 장르가 코미디나 로맨스로 분류되어 있지만 나는 SF로 보았다. <족구왕>은 족구가 사라진 근미래의 이야기이며,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에서 날아온 주인공이 족구를 탄압하는 세력과 맞서 싸우며 토익과 공무원시험에 세뇌당해 있는 민중을 해방시키는 내용이다(내가 말해놓고도 설마 이런 내용이었나 싶긴 하다). <족구왕>에서 자주 인용되는 영화 <백 투 더 퓨처>(아, 추억의 영화다, 친구들에게 ‘침 튀기기 위해’ 얼마나 이 영화 제목을 자주 읊조렸던가, 특히 ‘백 투 더 퓨처 투’는!)와 마찬가지로 <족구왕>의 정서는 향수로 가득 차 있다. 우린 무엇인가 잃어버렸으며, 무엇을 잃어버린지도 모른 채 이상한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다고, 영화는 내내 말하고 있다. 말하자면 <족구왕>은 주위 환경의 급격한 변화로부터 무엇인가를 지키고 싶어 하는, 재채기 같은 영화인 셈이다. <족구왕>에는 웃기는 장면이 많다. 여러 번 웃었다. 많은 사람들이 웃을 만한 대목에서도 웃었고, 저 두 장면에서도 나는 웃었다. 저 두 장면에서 많은 사람들이 웃었을 수도 있다. <내 몸의 신비>를 쓴 앙드레 지오르당에 의하면 ‘웃는다는 것은 생명의 방어기제’이다. ‘불합리하고 예상외이고 공격적이며 교란시키는 현실과 기대치(혹은 습관) 사이의 불일치를 보상하는 것’이다. 웃음도 재채기의 일종일 것이다. 어쩌면 <족구왕>은 많은 사람들과 함께 극장에서 봐야 할 영화였는지도 모르겠다. 웃음은 족구처럼 쉽게 전염된다. 내가 웃으면 네가 웃고, 우리가 웃으면 그가 웃는다. ‘웃어라, 모두가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우는 뒷부분은 생략).’ 우리는 과연 웃음을 전염시켜 ‘주위 환경의 급격한 변화로부터’ 우리를 지킬 수 있을 것인가. 곧 족구와 우유팩차기를 금하는 시대가 올 것이다. 이미 그런 시대로 접어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족구하지 마’(빨리 읽으면 곤란)라는 명령이 내려올지도 모르겠다. 뺨을 맞아도 그냥 조용히 찌그러져 있으라는 명령이 내려올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가 그럴 수 있나. 우리가 얼마나 잘 웃는 사람들인데, 우리가 얼마나 서로를 잘 웃겨주는 사람들인데…. 어딘지 모르게 어설프지만, 그 어설픔마저도 뭔가 고도의 전략처럼 느껴지는, 유희 정신으로 가득한 <족구왕>의 웃음을 지지한다. 누군가 족구와 우유팩차기를 금지시키면 다 함께 가운뎃손가락을 높이 쳐들고 이렇게 외쳐보자. <족구왕>!(이번에는 빨리 읽어보자.)

[포커스] 현실 속에 답이 있다

“Re-encounter reality”를 슬로건으로 내세운 2014 대만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TIDF)가 대만의 수도 타이베이에서 지난 10월9일부터 19일까지 개최되었다. 다큐멘터리 장르 자체의 존재론적 특징이 현실과의 만남일진대 현실과 다시 마주하자고 외치는 TIDF의 속내가 궁금했다. 1998년 첫 항해를 시작한 이후 새로운 변화와 도약의 시점에 직면한 TIDF. 다큐멘터리가 그러하듯이 영화제 또한 흔들리지 않고 지켜야 할 중심 가치를 현실에서 찾겠다는 다짐이 영화제 슬로건에 배어 있었다. 그동안 대만의 중서부 도시 타이중(臺中)에서 민간영화단체 중심으로 진행하던 영화제가 9회째를 맞이하면서 대만영화진흥위원회(Taiwan Film Institute)와 손잡고 타이베이로 개최 장소를 옮겼다. 정부기관의 지원으로 영화제의 규모가 대폭 커졌는데, 134편의 초청작품과 6개의 상영관, 그리고 다큐멘터리 감독과 연구자가 참여하는 10여개의 전문가 포럼이 관객을 맞이했다. 비엔날레 방식으로 개최하던 영화제가 앞으로는 매년 열릴 예정이라니, 다큐멘터리 제작자는 물론 대만 다큐멘터리 관객에게도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올해의 TIDF는 아시아권 다큐멘터리의 어제와 오늘을 조명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주목받았다. 아시아 다큐멘터리계의 거장 오가와 신스케 감독 회고전과 특별 대담, 중국 독립다큐멘터리의 현황을 짚어보는 세미나, 아시아 다큐멘터리의 현재를 이야기하는 포럼과 더불어 아시아비전경쟁, 대만국내경쟁, 중국 독립다큐멘터리 특별섹션이 아시아 다큐멘터리가 교류하고 소통하는 플랫폼의 역할을 맡았다. 인디다큐페스티발(SIDOF)이 해외작품 프로그래밍 차원에서 첫 방문한 올해의 TIDF는 무엇보다 대만을 보는 또 하나의 창(窓)이자 다큐멘터리 감독들이 대만의 오늘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확인할 수 있는 기회였다. 영화제 사무국장 W. U. 벨린의 설명에 따르면, 대만에는 제도권과 구획되는 ‘인디’(indie) 다큐멘터리 그룹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다큐멘터리를 제작한다는 자체가 상업영화는 물론 TV 방송과의 변별점이며, 그렇기에 다큐멘터리 제작자 사이에 일정한 공감대가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정부와 권력기관에 대한 비판적 발언을 주저하지 않으며, 대중과 소통하기 위한 영화적 노력이 돋보이는 대만 다큐멘터리의 경향성을 2014 TIDF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진실 폭로2: 국가 기관>(Unveil the Truth2: State Apparatus)은 전직 텔레비전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던 케빈 리 감독이 조류인플루엔자의 발병 사실을 숨겨온 대만 정부를 상대로 진실을 밝혀내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대만판 마이클 무어라고도 할 수 있을 법한 케빈 리 감독의 활약은 종횡무진, 에너지가 넘친다. 정부쪽 전문기관 관계자보다 더욱 철저한 자료조사로 행정 관료의 변명을 반박하는가 하면, 인플루엔자로 죽은 닭을 관계자들에게 우편으로 보내는 지혜를 발휘하기도 한다. 8년간의 힘겨운 노고 덕분일까, 감독의 주장대로 정부는 조류인플루엔자 발병 사실을 인정하고 책임자는 사임한다. 정부기관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다큐멘터리가 또 다른 정부기관이 지원하는 영화제에서 상영되는 상황을 보며, 얼마 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다이빙벨> 상영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해프닝이 오버랩되었다. 군사정권의 장기집권과 사회의 급격한 민주화, 보수와 진보정권의 교체 등 굴곡진 대만의 현대사는 한국과 여러 측면에서 닮았다. 그런 연유인지, <진실 폭로2…>가 증언하는 대만의 사회상이 낯설지만은 않았다. 대만 정부를 직접 겨냥한 날선 비판은 <시민 불복종>(Civil Diso-bedience)과 <불법 약물>(Black)에서도 돋보였다. 2008년 총통선거에서 국민당이 재집권하면서 혼란에 빠진 대만 사회. 계엄령이 다시 대두하고 정부가 시민들의 자유로운 소통을 감시하기 시작하자, 대다수 국민이 정부의 조치에 빠르게 순응해간다. <시민 불복종>은 급격히 보수화되는 대만 정부에 맞서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끈질긴 투쟁을 전개하는 시민운동과 연대해 그 실상을 영상으로 담았다. 대만 비디오 액티비즘의 최전선에서 제작된 <시민 불복종>은 비록 영화적으로는 다소 거칠고 불친절하지만, 대만 시민들이 겪는 사회적 혼란을 민중의 편에서 기록한 참여 지향적 다큐멘터리를 대표한다. <불법 약물>은 정부의 무능과 무책임을 정면으로 고발하는 다큐멘터리다. 2013년 한해 동안 대만 사회는 식품안전 문제로 큰 홍역을 치렀다. 이때 주로 논란이 되었던 음식물은 우유와 푸딩 같은 식료품이었다. 그렇다면 대만의 주식인 쌀은 과연 안전할까? 산업화의 물결 속에 도시 인근의 농지 주변에는 큰 공장들이 들어서고, 공장에서 배출된 오폐수로 농업용수는 시꺼멓게 썩어 보기에도 역겨울 정도다. 그러나 정부 당국은 큰 문제가 없다며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고, 농부는 생존을 위해 농사는 짓지만 자신이 경작한 쌀은 절대 먹지 않는다. <불법 약물>의 카메라는 농부와 행정 당국 책임자, 오폐수 전문가 등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미래 세대를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환경 파괴를 멈추자고 호소한다. 대만의 오늘을 비판적으로 관찰하는 또 하나의 흥미로운 작품은 <4891>이다. 설명과 설득을 배제한 <4891>은 기차역, 버스터미널, 사찰, 육교 등 대만 어디에서나 쉽게 목격할 수 있는 노숙자의 일상을 충실히 기록한 다큐멘터리다. 세계 16위권의 국가경제 규모에도 불구하고 가난과 불평등 해소에 실패한 정부는 노숙자를 보살피기보다는 곳곳에 CCTV를 설치해 그들을 감시하는 데만 전념한다. 일종의 디스토피아와도 같은 대만의 어두운 현실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4891> 제작진은 노숙인 생활도 마다하지 않는다. 현장 중심을 지향하는 황팅푸 감독의 다큐멘터리에 대한 열정과 현장 기록의 노고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대만 사회의 변방에 주목한 다큐멘터리도 눈에 띄었는데, 18세기 말엽 인도로 넘어가 영국 식민지를 경험하고 콜카타 지역에 중국인 공동체를 형성한 인도 내 중국인의 어제와 오늘을 조명한 , 대만 남성과 결혼하기 위해 남아시아로부터 이주한 여성들의 관점에서 대만 사회를 바라보는 , 그리고 초등학교 시절 만다린어를 구사할 수 없어 왕따를 당했으나 독학을 통해 전통 타이완 언어와 지역문화사를 가르치는 시골 독거노인의 일상을 담은 등 대만 주류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의 삶을 찾아, 그들의 목소리를 작품에 담아낸 작가군이 대만 다큐멘터리의 또 하나의 경향을 이루었다. 그 밖에 예술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다큐멘터리도 이채로웠다. 시각예술과 행위예술로 전성기를 구가하던 여성 예술인 슈쑤천이 갑작스레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을 담담히 담아낸 , 대나무 설치예술가로 유명한 산골 마을 출신 왕원치의 예술관과 작업과정을 완성도 높게 묘사한 , 그리고 대만을 대표하는 안무가 린리천의 삶과 무용세계를 예술성 높게 조명한 에서 예술가의 삶과 그의 작업을 아카이빙하는 매체로서 다큐멘터리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다. 아시아와 중국어권 다큐멘터리가 교류하고 대화하는 플랫폼을 지향한다는 TIDF. 마침 한국 다큐멘터리 <탐욕의 제국>(감독 홍리경)이 국제경쟁부문 대상을, <팔당 사람들>(감독 고은진)이 아시아비전경쟁에서 우수상을, 그리고 <철의 꿈>(감독 박경근)이 작가시선상을 수상함에 따라 한국과 대만의 다큐멘터리 교류가 더욱 진전될 것으로 기대된다. 내년 3월에 막을 올릴 2015 인디다큐페스티발에서 대만 다큐멘터리의 경향성을 직접 확인해보기 바란다.

[신 전영객잔] 그 (여)자는 무엇을 원하는가

*이 글은 <나를 찾아줘>의 결말 부분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나를 찾아줘>의 부부 닉(벤 애플렉)과 에이미(로저먼드 파이크)의 애증으로 얼룩진 결혼 생활사에 관한 설명이 간략하게나마 필요한 것 같다. 결혼 5주년이 되던 날 에이미가 홀연히 사라진다. 영화는 닉과 에이미의 황홀했던 첫 만남에서부터 결혼 뒤 관계가 서서히 악화되어간 과정까지를 주요하게 술회하는 한편, 속속 드러나는 정황에 따라 닉이 에이미 실종 사건의 주범이자 피의자로 지목받는 과정을 전개해간다. 여기까지를 이 영화의 1부라고 부를 수 있다. 2부에서는 시작과 함께 버젓이 살아 있는 에이미가 돌연 등장한다. 그녀는 실종되지 않았고 죽지도 않았다. 이것은 그녀 스스로 꾸민 일이고 일종의 남편 체벌 프로그램이다. 에이미는 남편이 자신을 죽였다는 누명을 쓰고 사형당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에이미에게도 예상치 못했던 일들이 벌어지고 계획은 수정된다. 결국 에이미는 자신을 짝사랑해온 갑부 콜링스가 자신을 납치하여 감금했던 것으로 일을 조작한다. 그를 죽이고 겨우 탈출한 것으로 위장한 뒤 집으로 다시 돌아온다. 이 부부는 장안의 화제가 되고 둘은 세상의 눈들을 의식하여 서로 사랑하는 척 꾸미며 지옥 같은 결혼 생활을 다시 이어가기로 한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 국내의 어떤 감상자라도 <나를 찾아줘>를 보고 나면 이 친숙한 한국 소설의 제목을 금방 떠올릴 만하다. 이것이 <나를 찾아줘>에 대한 가장 즉각적인 해석의 버전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끔찍한 갈등과 위협 이후에 재결합하게 된 영화의 후반부에서 닉이 에이미에게 “이렇게 상처를 주면서까지 같이 살아야 하는 것이냐”고 물었을 때 에이미조차 “그런 것이 결혼”이라며 한마디로 일축한다. 결혼이라는 이데올로기적 제도가 상투화해놓은 것들을 최대한 받아들이며 살아가야 한다는 포기와 위악의 말로 들린다. <나를 찾아줘>를 설명하기 위해 간간이 막장 드라마라는 표현이 사용되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가정사와 결혼사와 복수극을 둘러싼 해괴한 갈등 전개와 돌발적인 해결법으로 무장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나를 찾아줘>나 막장 드라마나 둘 다 유사하다. <나를 찾아줘> 감상에 따른 유력한 해석의 버전 하나를 더 제기해볼 수도 있다. 결혼은 갈등의 외적 구실에 해당할 뿐 진정으로 신랄한 다른 갈등은 닉과 에이미의 이야기의 대결과 승부에 있다는 해석이다. 이 영화가 두명의 화자를 앞세우고 있으며 각자의 진술의 힘으로 부딪친다는 사실을 주목하는 신중한 경우다. 영화 전체를 닉과 에이미의 대결 구도로 상정하되 결과적으로는 에이미의 서사가 닉의 서사를 철저히 농락하고 지배하게 되는 과정으로 판명하는 것이다. 이것은 생각만큼 감상자 편의의 가설도, 지나친 낭설도 아니며 영화 속 인물들조차 확연하게 인식하는 중요한 대당이다. 관련하여 세개의 대화 장면이 주목을 요한다. 첫 번째, 닉이 그의 변호사를 처음 만났을 때 변호사는 “아내쪽이 훨씬 더 완벽한 이야기를 가졌다”라고 말한다. 그는 아내쪽이 훨씬 더 완벽한 정황, 주장, 사실 등을 가졌다고 표현하지 않고 “이야기”라고 표현한다. 두 번째, 돌아온 에이미가 형사들을 모아놓고 조작된 사건을 꾸며내는 도중 그녀를 의심하는 여형사가 의문을 제기하자 에이미는 “당신처럼 무능한 형사가 이 사건을 계속 맡았더라면 남편은 사형당하고 나는 계속 침대에 묶여 있었을 것”이라며 제압한다. 완벽한 이야기를 가진 자에게 의문을 제기한 여형사는 졸지에 무능해진다. 세 번째, 닉의 쌍둥이 여동생 마고는 닉에게 다음과 같이 촌철살인으로 양자의 승부를 최종 정리해낸다. “놀라운 에이미와 그 초라한 남편의 이야기.” 막장 드라마론과 이야기 승부론은 일부분 흥미롭다. 지금의 논의와도 관련성이 있어서 전제했다. 하지만 영화를 관람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체감상의 몇 가지 질문들이 내게 그 이상을 고려하도록 요구하고 있는 것 같고 <나를 찾아줘>에 관한 나의 호기심의 자리도 여기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단단하고 치밀한 구조를 지녔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이 영화는 예상 밖이다. 1부가 상당히 혼란스럽다면 2부는 그냥 당혹스럽다. 이건 해석 이전에 솔직한 관람의 경험담이다. 그럼에도 이 혼란함과 당혹감의 이유는 당연히도 영화의 어떤 형식적 근거들과 연계되어 있을 것이다. 예컨대 1부의 혼란함은 영화라는 매체가 내장한 이야기와 이미지의 복잡한 결합성에 관계되어 있고 2부의 당혹감은 테마를 완성해내려는 이 영화의 내밀하고 외골수적인 의지와 관계되어 있다. 이러한 1부와 2부에 대한 형식적 관심을 거치며 우리는 데이비드 핀처의 관심사에 새로운 주석을 더할 수 있을 것이다. 핀처는 “집단적 자기애”가 이 영화의 동기가 됐다고 말했는데, 흥미로운 것은 그가 말한 이 집단적 자기애라는 테마의 그물망이 그 자신이 의식하며 던진 크기보다 훨씬 크고 복잡하여 그의 의도 너머의 것들까지도 끌어올린다는 데 있다. 앞서 전제한 해석들과 비교하건대, 나는 이 영화를 막장 드라마가 아니라 일종의 결혼우화라고 부를 생각이다. 아니 결혼우화도 부정확한 말이며 더 정확히는 재혼우화라고 부르고 싶다. 이 과정에서 핀처로서는 거의 고려치 않았을 영화의 어떤 오래된 장르성이 역설적으로 이 영화에 거대하게 드리워진다는 것이 나의 추론이다. 그러니 이야기의 대결론이나 승부론에 그치지도 않는다. 대결이나 승부의 구도가 아니라 오히려 그렇게 위장된 결탁과 공모라는 서사적 협업을 통해서 재혼우화라는 완성을 향해 나아가게 되며 그로써 핀처가 말한 자기애의 테마에 애타게 닿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게 가능한 것일까. 공동의 것으로 요약된 사랑과 갈등의 연대기 이미 밝힌 것처럼 1부는 혼란스럽다. 1부가 일목요연하게 경험된다고 누군가 말한다면 나는 이 영화에 관한 그의 전체 의견을 신뢰하지 못하겠다. 1부의 시작에 관하여 말할 때 우리는 은연중 ‘닉의 아내 에이미가 홀연히 사라진다’로 곧잘 시작한다. 앞서 나도 고의적으로 그렇게 썼다. 그런데 그 문장은 영화 전체의 내용을 축약하는 시작으로는 어울리지만 1부의 실상을 이해하는 데에는 쓸모가 없다. 무엇보다 그렇게 시작하면 1부에서 이야기와 이미지가 서로 모호하게 주고받는 결탁의 거래를 알아채지 못하게 된다. 우리는 에이미의 실종이라는 잠시 후에 있을 중대한 사건이 아니라 닉의 행방이라는 첫 번째에 발생하는 사소한 동선을 따라가야 맞다. 1부의 시작은 에이미가 실종되는 것이 아니라 닉이 바에 가서 동생 마고에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마고는 심지어 너와 아내의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시시껄렁하고 지겨운 이야기로 너를 괴롭히겠다고 닉을 부추긴다. 그렇게 해서 닉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하지만 그건 비교컨대 <소셜 네트워크>의 첫 장면처럼 구성되지 않는다. <소셜 네트워크>의 첫 장면은 두 남녀의 속사포 대사로 구성되어 있다. 반면에 <나를 찾아줘>는 여기서부터 이미 교차가 발생한다. 닉이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찰나 그러니까 닉의 대사가 등장하려는 찰나, 대사는 사라지고 “2005년 1월8일”이라 쓰여 있는 일기장의 자막과 함께 에이미의 음성을 따라 닉과 에이미가 만난 첫날이 이미지로 회상된다. 닉은 에이미가 조작해낸 (때로는 사실을 적어놓은) 그 일기장의 존재 자체를 모르고 있으므로 이것을 두고 에이미의 일기장에 대한 혹은 그걸 읽었던 닉의 회상이라고 말할 수 없다. 뒤집어 말하면 우리는 일기장의 존재를 알기도 전에 이미 이 일기장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될 뿐만 아니라 사실로 추론하게 된다. 동시에 이것을 닉의 회상이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닉은 진술의 제스처를 취했을 뿐이고 정작 진술은 이미지로 재현되고 있는데, 그 이미지가 불려나온 저장소는 닉으로서는 알 길 없는 일기장이며 무엇보다 일기장에 적힌 활자의 주인이 에이미이고 회상 장면의 강력한 주인이 되는 음성의 존재가 에이미다. 닉은 몇 차례 더 말하지만 회상 장면은 매번 유사한 방식으로 되풀이하여 재현된다. 핀처는 원작자이자 각본가인 길리언 플린이 이 영화를 ‘그가 말했다/그녀가 말했다’의 구조로 각색해냈다고 설명했는데, 핀처의 이 설명은 2부에서는 거의 들어맞지 않을 뿐 아니라 1부에서도 정확하지 않다. 사태는 좀더 심각해진다. 어느 순간부터는 닉의 진술의 제스처조차 사라진다. 일기장은 저 스스로 출몰하여 날짜를 알리고 과거를 불러온다. 그렇다면 이건 닉의 진술이 아니라 온전히 에이미의 진술로 보아야만 하는 것일까. 하지만 여전히 닉은 진술의 제스처를 주장하고 있으므로 닉을 구실로 삼은 에이미의 지배적 진술이라고 쉽게 단정하기도 어렵다. 여기에는 물론 애매함이라는 핀처의 노림수도 관계되어 있다. 그것은 순전히 핀처의 의도다. 예컨대 닉이 에이미를 밀치며 욕하는 회상 장면. 이 장면을 볼 때 우리는 닉이 당연히 그렇게 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녀의 조작된 일기장이 등장하기 이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닉은 그런 짓을 한 적이 없다고 얼마 뒤에 대사로 첨언한다. 당신은 에이미의 일기장의 이미지적 진술을 믿을 것인가 닉의 이야기적 진술을 믿을 것인가, 핀처는 야심차게 묻고 있다. 이 애매함이 정교하기는 하다. 하지만 부분적인데다 놀랍지 않다. 처음 경험하는 것도 아니다. 내가 1부에서 경험한 혼란함은 이것과 좀 다르다. 핀처가 노린 애매함은 둘 중 누구를 믿을 수 있을 것인가의 딜레마다. 내가 말하는 혼란함은 핀처의 의도와 무관하게, 여기 누구도 믿지 못하거나 양쪽 다 믿어야 하는 상태에서의 혼란함이다. 닉과 에이미 양쪽 다 화자로서 주체성을 상실하였거나 그 반대로 주체라고 주장하는 것이 가능해지고 이야기와 이미지가 서로 간섭하면서 핀처 그 자신조차 예기치 못한 제2의 애매한 굴이 만들어져 우리를 혼란스럽게 한다는 것이다. 1부가 착오 없이 해내려는 어떤 기본적인 기능 때문에 이런 혼란함이 발생한 것 같다. 놀랍게도 그 기능이란 더없이 간략한 기능이다. 닉과 에이미의 사랑과 갈등의 연대기를 요약하라, 다만 어느 한쪽의 것이 아니라 그들 공동의 것으로 요약하라, 그렇지 않다면 그들 누구도 갖지 못하도록 요약하라. 심지어 피의자로 몰리게 된 닉의 누명이라는 사건도 이 사랑과 갈등의 맥락 안에 있거나 그 부차물로 보인다. 우리가 1부에서 확실히 알게 된 건 그러니까 한 가지다. 그들이 한때 열렬히 사랑했고, 결혼했고, 지금은 미워하게 됐다는 것이다. 혼란함은 오히려 이 한줄의 서사를 공고히 하기 위한 공모의 결과다. 대결이 아닌 해결의 서사 모드 2부는 1부와 사태가 확연히 다르다. 1부는 복잡해서 혼란이 오지만 2부는 지나칠 정도로 간단한데 집요하게 굴어서 당혹스러운 것이다. 구체적인 이유 세 가지를 간명하게 요약할 수 있다. 첫 번째 당혹감, 이건 갑작스러운 전환, 압축, 요약의 도입부 때문에 온다. 이 도입부는 놀랄 정도로 갑작스러우며 쾌활하며 확신에 차 있다. 두 번째 당혹감. 갑작스러운 캐릭터의 단순화, 라는 문제다. 이건 다소 결함이거나 의도적인 퇴보다. 몇 가지 장면을 예로 들 수 있다. 에이미는 캠핑장에서 만난 여자와 텔레비전을 본다. 에이미의 일화가 방송되고 있다. 옆 사람이 당사자인 줄도 모르고 “부잣집 외동딸이 바람둥이와 결혼해서 생긴 일”이라고 여자가 비난한 뒤 화장실에 가자, 에이미는 그녀가 마시던 음료수에 가래침을 뱉는다. 드물지만 핀처의 영화에 적절한 유머가 아주 없는 건 아니므로 웃으며 볼 수 있는 그런 장면이다. 다음이 다소 문제가 된다. “미주리주에는 사형 제도가 존재합니다”라는 뉴스 앵커의 말을 듣고 바깥으로 나온 에이미는 남편이 사형당할 거라는 기대에 아이처럼 즐거워하며 천진난만하게 폴짝 뛴다. 복수의 성공을 예감한 기쁨 혹은 지독한 병적 징후를 묘사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도 다소 갑작스러운 부분이 없지 않다. 이렇게 더 말해보자. 에이미 역할을 맡은 로저먼드 파이크의 연기는 뛰어난 편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분량이나 무게감과는 반대로 그녀의 연기가 훨씬 더 고혹적으로 돋보이는 건 2부가 아니라 1부다. 1부에서 그녀가 더 아름답게 묘사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흔한 경우라면 광적이고 비참한 상태를 연기하는 2부에서 그녀의 연기가 더 돋보인다고 우린 말하는 게 맞을 것이다. 하지만 꼭 그런 것 같지 않다. 2부에서 파이크의 연기는 종종 단순하고 어색하다. 특히나 자신을 숨겨준 갑부 콜링스와 있을 때 가장 어색하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이건 여배우 파이크의 연기 역량의 탓이 아닐 수도 있다. 그녀는 2부의 분위기가 점차 요구해 온 캐릭터의 단순성을 극도로 받아들여 이제는 어색함까지 연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콜링스와 함께 있을 때 에이미가 마치 그를 사랑하는 것처럼 가장하고 있으므로, 그 우격다짐의 가장을 연기하는 파이크의 연기가 어색해 보이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피할 수 없는 자리에 온 것이다. 영화가 이토록 캐릭터를 갑작스럽게 단순화시켜 얻으려는 보다 큰 대가는 과연 무엇일까. 이것이 세 번째 당혹감과 관련이 있다. 세 번째 당혹감은, 말하자면, 대결이 아닌 해결의 서사 모드, 라는 점이다. 개인적으로는 이것이 2부에서 가장 중요한 점으로 보인다. 우리 모두가 은연중에 2부를 닉과 에이미의 2차 대전 혹은 제2의 대결로 가정하게 된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닉과 에이미는 2부의 어디에서도 거의 대결하고 있지 않다. 서로 용서했기 때문이 아니라는 건 관객인 우리가 더 잘 알고 있다. 이유는 다른 데 있다. 그들은 각자의 발등에 붙은 불을 끄기 바빠서 서로 대결할 시간이 없는 것이다. 대결의 가속화 서사가 아니라 각자의 해결 서사라는 것이 2부의 가장 당혹스러운 점이다. 따라서 2부의 서사는 정확하게 두개의 운동 방향을 따라 병렬 진전된다. 닉은 에이미가 쳐놓은 덫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다한다. 그런데 에이미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예정에도 없이 갑작스럽게 돈을 강탈당하고 콜링스의 집에 왔으니 그녀도 이 사태를 해결하기 급급하다. 이때 우리는 잠시 괴상하게 질문을 해볼 수 있다. 닉에게 빠르고 더 좋은 해결이란 방송에 좋은 이미지를 심어주는 것보다 차라리 에이미를 잡으러 나서는 것이 아닐까. 에이미의 경우는 어떨까. 닉에게 돌아가는 것보다 나은 해결책은 콜링스에게 말했던 것처럼 해외로 도피하는 게 아닐까. 둘 다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 영화의 해결 지점이 따로 모색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은 그럴 수 없다. 이 해결의 방식에 바로 캐릭터의 단순화라는 문제가 결합되어 있다. 즉, 닉에게 되돌아간다는 에이미의 선택은 누가 보아도 정상적이지 않다. 그러므로 그녀는 그 선택 이전에 보다 확실히 더 비정상적으로 보여야만 한다. 단순하고 명쾌한 미치광이가 되어 있어야만 한다. 영화는 그 강고한 미치광이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해결책으로서 남편에게 돌아가겠다는 비정상적 선택을 할 때 관객이 그걸 받아들이도록 하고 싶은 것이다. 뒤집어 말하면 해결책만큼은 결코 바꾸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가 캐릭터의 단순화라는 폐단을 맞으면서까지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상위의 것은, 바로 그 해결의 서사 모드이며, 남편과의 재결합이라는 그 해결책이다.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이 재결합으로 에이미는 그녀의 문제를 닉은 그의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게 된다. <나를 찾아줘>의 2부의 서사는 각자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두 인물의 평행선을 달리다가 닉과 에이미의 비정상적 재결합이라는 상징적 재혼으로 해소된다. 사랑을 버리더라도 자기애를 지켜라 1부와 2부가 고집스럽게 지켜내려 했던 것들을 이어보면 이 영화의 내밀한 전체 서사의 욕망이 보인다. 1부에서는 사랑했고, 결혼했고, 미워하게 된 과정을 내장하려고 한다(사랑->결혼->갈등). 2부에서는 파경을 맞아 갈등 상태에 놓였으나 유일한 해결책으로 서로를 다시 찾게 되는 결론으로 나아가려고 한다(갈등->재결합). 1부와 2부가 각각의 출혈을 감수하면서까지 완성한 이 선을 이으면 닉과 에이미 사이에는 결국, 사랑->결혼->갈등->재결합이라는 서사가 완성된다. 이것이 바로 <나를 찾아줘>라는 재혼우화가 직조되어가는 과정이다. 물론 이 서사가 얼마간 은밀하게 진행된 것이기는 해도, 우리는 마침내 <나를 찾아줘>에 연관되어 있는 영화사의 한 장르를 말할 만한 자리에 온 것이다. 처음에는 <나를 찾아줘>를 보면서 <싸이코>를 비롯하여 <서스피션> <마니> 등 앨프리드 히치콕의 영화를 떠올렸다. 하지만 히치콕 영화와 <나를 찾아줘>의 연관성보다 지금 내게는 다음과 같은 것이 더 흥미롭고 더 역동적이다. “스크루볼 코미디에서의 플롯과 주제는 성적, 사회경제적 차이 때문에 다투는 연인들이라는 캐릭터를 반드시 필요로 한다.” “이미 결혼한 스크루볼 커플이 등장하는, 변주된 스크루볼 코미디의 경우에는 플롯의 초점이 그들의 이혼과 재혼이 된다”(<할리우드 장르의 구조>, 토머스 샤츠). 가령, 레오 매커리의 <이혼소동>이나 조지 쿠커의 <필라델피아 스토리> 등이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명성 높은 영화학자의 말을 빌렸지만, 우리는 이미 몇몇 스크루볼 코미디가 이상의 사실들을 중시한다는 걸 체감적으로 잘 알고 있다. <나를 찾아줘>가 스릴러라는 점 때문에 이 영화와 스크루볼 코미디와의 여러 유사성을 굳이 외면할 필요가 있을까. 그렇다면 <나를 찾아줘>를 스크루볼 스릴러라고 불러보는 건 어떠할까. 처음부터 닉과 에이미는 미주리 촌놈과 뉴욕 상류층 여인이라는 계급차를 지녔었다. 수많은 스크루볼 코미디의 주인공들이 그러했듯 “부잣집 외동딸과 바람둥이 남자의 결혼”이기도 했다. 닉도 훗날 “에이미가 나를 촌놈 취급했다”고 화를 낸 바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들의 불행은 경제적 파탄으로부터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나를 찾아줘>에는 스크루볼 코미디라면 범접하기 어려운 무시무시한 살인 계획이 등장하고 있지 않느냐고 혹시라도 반론이 제기된다면 이렇게 제안하고 싶다. 그 계획을 스크루볼 코미디의 저 유명한 ‘앙숙의 다툼’의 위협적인 변주로 이해하는 것은 또 어떠하겠는가. 그러니까 이 영화도 스크루볼 코미디의 딱 그것만큼 다시 만날 여지를 남겨두고 닉과 에이미를 서로 다투게 한다. 닉은 사형당하지 않았으므로 돌아오는 에이미를 맞을 수 있다. 에이미가 모텔의 남녀 불량배들에게 살해라도 당했다면 우리는 <싸이코>를 떠올려야 할 것이지만, 그녀 역시 살아 돌아온다. 그리고 둘은 상징적으로 재혼한다. <나를 찾아줘>는 결혼우화와 재혼우화의 가장 공고한 장르인 스크루볼 코미디의 이러한 조건과 양상들을 충분히 취하여 스크루볼 스릴러로 태어나는 한편, 테마는 공유하되 정서는 그 반대의 것을 가져와 황폐함을 자아낸다. 철학자 스탠리 카벨은 ‘로맨스를 위한 두 건배’라는 글에서 몇몇 스크루볼 코미디와 멜로드라마 속 결혼에 관하여 말하면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합의로서의 결혼으로부터 로맨틱한 동맹으로서의 결혼으로의 이행”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적이 있다. 지금 내게는 전자가 결혼이라는 이데올로기로, 후자가 결혼(재혼)이라는 우화로 들린다. 후자에 해당하는 <나를 찾아줘>의 재혼의 기능은 한번 더 비틀린다. 재혼은 하고 동맹은 가져오되 로맨스는 가져오지 않는다는 역설을 발휘하는 것이다. 스크루볼 코미디의 앙숙이 다툼을 거쳐 영원한 짝이 된다면 스크루볼 스릴러 <나를 찾아줘>의 닉과 에이미라는 앙숙은 동맹은 하되 임시적이며 위험천만한 짝으로 남겨진다. 돌아온 에이미가 두려움에 떨고 있는 닉에게 하는 말을 기억하자. “난 자기 해치지 않아. 하지만 자기도 동참해. 자기 역할을 하라고.” 이것이 동맹자에게 넣는 은근한 압력과 추궁이 아니고 그 무엇일까. 그러므로 <나를 찾아줘>의 감독 핀처에게 연출 동기가 된 집단적 자기애라는 관심은 이 영화와 무관해 보이는, 하지만 우리로서는 관계 있음을 지속적으로 설명해온 그 재혼우화의 직조 과정을 인식할 때에야 더 잘 느껴진다. 핀처가 집단적 자기애라고 말할 때 그것은 예컨대 쇼프로그램으로 대변되는 대중적 자기애의 실현성을 주로 겨냥하고 있는 것이지만, 그가 자신의 예상에 포함시키지 않은 스크루볼 코미디의 재혼만큼 자기애를 도식화한 장르도 드물다. 스크루볼 코미디 주인공들의 재결합을 지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영원한 결합이 아니라, 결국 자신의 사랑에 관한 가장 아름다웠던 상을 포기하지 못해 돌아가게 되는 증상으로서의 결합이라고 가정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자기애를 찾는 과정이며 <나를 찾아줘>의 지독한 결론이지 않은가. 그러니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장면을 다시 생각해보자. 쇼프로그램에 나와 에이미를 향해 사과의 말을 하는 닉. 그를 보던 에이미는 별안간 왜 닉에게 돌아가기를 결심한 것인가. 그녀라고 그가 위선적으로 사랑을 말하고 있음을 모를 리 없다. 하지만 돌아온 그녀는 닉에게 말한다.“텔레비전으로 본 당신이 멋있었다”고. 프로이트는 그의 글 <나르시시즘 서론>에서 자기애의 경우 사랑의 대상이 어떻게 나타날 수 있는지 이와 같이 간략한 도식을 제공한다. “1)현재의 자신(그 자신) 2)과거의 자신 3)자신이 바라는 미래의 모습 4)한때 자신의 일부였던 사람.” 여기에 관련하여 에이미의 귀환의 선택이 (첫 번째 항목을 제외한다면) 프로이트의 이 도식에 지나칠 정도로 부합되는 면이 있다는 점에 우리는 놀랄 필요가 없을 것이다.‘어메이징 에이미’라는 말은 어디에서 기인했던가. 에이미가 철저하게 자기애로 가공된 유년의 삶을 살았다는 사실을 생각하자. 돌아온 에이미는 닉에게 “나는 전사야”라고 말한다. 그녀는 도대체 무엇과 싸웠다고 여기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그녀의 대답을 듣지 못했지만 그녀가 그간의 나날들을 그녀의 충만한 자기애를 망치는 것들과 싸운 나날들로 생각한다고 미루어 짐작한다. 영화는 왜 그녀에게 그런 병증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는 대신 영화의 끝까지 그녀의 이 전투를 완성시키고 있다. 따라서 <나를 찾아줘>에서 재혼의 목적은 자기애의 완성이다. 이것은 에이미의 이야기가 닉의 이야기에 승리했다거나 성공했다는 뜻이 아니다. 에이미의 이야기는 철저하게 실패했다. 에이미도 패배자다. 죽이려던 남편은 여전히 살아 있고 죽으려던 자신도 비겁하게 살고 있다. 천신만고 끝에 얻은 건 재혼뿐이다. 여기에 사랑이 없다는 것쯤은 그녀도 알고 있다. 그래도 괜찮다는 것이다. 자기애가 완성되고 충족되면 될 일이다, 다만 가장 비참하고 위선적인 실현으로. 그러므로 이 글의 도입부에서 인용했던, “그런 게 결혼”이라는 에이미의 말은, 사랑을 버리더라도 자기애를 지키는 것이 필요하다는 그녀의 재혼우화에 딱 들어맞는 강론이다. <나를 찾아줘>라는 제목은 한국에서 붙여진 제목인데, 마치 나를 찾아달라는 이것이 에이미가 아니라 자기애가 에이미에게 하는 말처럼 들릴 정도다. 카벨도, 위키피디아도 인용하고 있는 <가라, 항해자여>의 유명한 마지막 대사를 나 역시 인용하고 싶다. 이 영화가 스크루볼 코미디도 재혼우화도 아니라는 점 때문에 굳이 인용을 피할 필요가 있을까, 생각하면서. 그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 제리와 샬롯이 오붓하게 밤하늘의 창가를 보고 있다. 제리가 아직은 함께할 자신들의 미래가 걱정스럽다는 듯이 묻는다. “당신은 행복해질까, 샬롯?” 그때 샬롯이 바로 그 유명한 대사로 대답한다. “오, 제리, 달에 대해서는 묻지 말기로 해요. 우리는 저 별들을 가졌잖아요.” 카메라는 하늘로 올라가 밤하늘을 비추고 거기엔 달은 없지만 별들이 반짝인다. 달을 갖지는 못할지라도 별은 가졌다는 것에 더없이 만족하자는 그 말은 우리에게 한참을 비틀려 되돌아와 다시 핵심을 전할 것이다. <나를 찾아줘>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서 닉은 질문한다. “아내의 머리를 박살내서 뇌를 꺼내서라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묻고 싶다”고. 그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서 아내 에이미는 예의 고혹적이고 관능적인 자세로 말없이 우리를 보고 있다. 닉은 묻고 싶은 것이다. 우리는 정말 행복한가, 행복할 수 있는가. 다시 사랑할 수 있는가. 그녀는 영화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그녀의 야릇한 표정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 달(사랑)에 대해서는 묻지 말기로 해요. 우리는 저 별들(자기애)을 가졌잖아요. 이것이 <나를 찾아줘>의 재혼의 목적이며 애타게 자기애를 찾아 나선 어떤 이의 이야기의 끝이다. 상상적인 주석을 단다는 기분으로 썼다.

[trans × cross] 새까맣게 몰라서, 새파랗게 질렸던

재미와 감동. 대구에서 태어나 30년을 살다 서울 생활을 했고 결혼해서 구미에 정착한 40대 만화가 김수박이 생각하는 만화의 핵심이다. 그는 용산참사를 다룬 <내가 살던 용산>에 참여했고 삼성 반도체 공장 백혈병 문제를 다룬 <삼성에 없는 단 한 가지: 사람 냄새>(이하 <사람 냄새>) 등을 그린 작가다. “이 작품(<사람 냄새>)에도 재미가 있어요. 르포 형식으로 그렸지만….” 맞다. 얼핏 보면 재미없는 수업을 하는 선생님처럼 생긴 그가 웃을 때는 영락없는 개구쟁이의 눈빛이 되는 것처럼 그의 만화는 진지하다가도 웃기다. 코끝이 찡해지는 감동도 있다. 신작 <메이드 인 경상도>도 이런 만화의 핵심에 부합하는 작품이다. 지역감정을 다루고 있지만 그 안에는 작가 본인의 기억에 의지한 1980년대를 사는 김갑효(작가의 본명은 김효갑)라는 아이를 통한 재미와 감동이 있다. 물론 웃고 울다 보면 독자들의 마음에는 하나의 물음이 생길 것이다. -<메이드 인 경상도>의 시작이 ‘경상도 왜 그러냐’라는 질문이라고 했다. =‘경상도는 대체 왜 그래?’라는 질문이 공식처럼 있다. 실제로 들은 적은 없고, SNS나 텔레비전, 인터넷에서 들었다. 내가 경상도 사투리 쓰는 사람이라 해서 ‘경상도 대체 왜 그래요?’ 그러면 시비 거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사람들은 그 질문을 뒤에서 한다. 뒷담화인 거지. 작가는 세상의 어떤 질문에 답을 찾으려는 본능이 있고 거기에 답해보는 게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경상도 사람들의 특징을 정리해놓은 것이 있다. 가부장적이고, 텃세가 심하고, 무뚝뚝하다 등이다. =경상도 사람들은 이 특징들을 얘기해주면 안 그런 사람 많다고 말한다. 서울이나 다른 데 가서 물어보면 ‘우리도 그래요. 우리 아버지도 그랬어요’라고 한다. 결국 <메이드 인 경상도>에서 그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거다. -경상도를 얘기할 때 자신의 어린 시절, 1980년대를 이야기한다. 왜 그렇게 했나. =누군가의 특징을 분석하는 것은 이론적인 일이다. 실제 정서하고 격차가 많을 때가 있다. 80년대부터 90년대까지 걸어오듯이 이야기를 다루면 정서적인 측면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나름의 전략을 짰다. 경상도의 특성이라 여기는 것이 공간의 이야기가 아니라 시대의 문제였다는 걸 느끼게 하고 싶었다. -단행본이 나오기 전 창비 문학 블로그 ‘창문’에서 연재했다. 만화 중에 담당 편집자인 최지수씨에게 마감 독촉을 받는 장면이 재밌더라. =포털 연재를 안 하고 게릴라식으로 연재를 하니까 마감의 괴로움이 없었다. 게으름 피우다 올려도 되고, 내가 올리면 보라는 식이었다. ‘창문’은 달랐다. 내가 보기엔 기다리는 사람도 없는 것 같은데, 편집자가 기다리는 독자들이 많다고 그러는 거다. 그래서 만화에 편집자도 등장시켰다. 젊은 사람인데 독촉을 너무 잘한다. 막 쪼아서 독촉하는 타입은 아니다. 이분은 뭔가 실망하거나 좌절하는 뉘앙스를 준다. 그럼 엄청 압박이 된다. -나도 써먹어야겠다. =기자님은 그렇게 하면 안 된다. (웃음) 이 사람을 실망시키면 내 맘이 무너지는 것 같아서 연재한 것 중에 제일 열심히 했다. -편집자를 등장시키는 것처럼 실명을 거론하는 경우가 꽤 있다. ‘◦◦◦선생님, 존경하지 않는다’라는 말도 있고. 김구라 같다는 생각도 했다. =그런 태도는 영향을 받은 거다. 로버트 크럼이라는 미국 만화가가 있다. 그는 생각나는 걸 가리지 않고 말한다. 또 힙합, 랩을 좋아한다. 요새 힙합 디스전이 이슈였는데 사실 1990년대 2000년대 초반에 조PD 형님이 벌써 했다. 그때 영향을 받아 <아날로그 맨>에서 직접적 디스전을 만화로 그렸었다. -욕을 먹거나 하진 않나. =욕을 먹을 것 같지만 안 그렇다. 사실은 상대도 재밌어한다. 작가가 자기검열하는 건 좋은 게 아니다. 문제가 될까, 라는 생각이 혹시 들면, 검열 안 하고 그대로 가본다. 그런데 아무 문제도 발생 안 하면 세상은 좀더 자유로워진다. 물론 선생님 얘긴 안 하려고 했는데. 그건 진짜 실명이다. 첫사랑이던 주근깨 선생님이나 아버지 가게에서 일하던 은섭이 형의 여동생한테는 이 책으로 실제 신호를 보낸 거다. 만약에 보면 연락 좀 달라고. -주인공 갑효가 중학생 때쯤 5•18 광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메이드 인 경상도>의 핵심 메시지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앞부분의 어린 시절을 통해 우리가 지역사람의 특징이라 여기는 게 공간이 아니라 시간의 문제라는 걸 인식하고 나면 ‘우리나라 사람 다 똑같은데 이 얘기를 뭐하러 해?’가 된다. 그런데 엄연히 지역감정은 존재한다. 그러다가 생각난 게 광주였다. 경남 합천이 고향인 집사람한테도 물었다. 어른들한테 그 얘기 들어본 적 있냐고. 단 한 사람도 없다. 경상도 사람이 자기 자식한테 그 얘기를 안 한다. 그건 어떤 심리를 만들어낸다. 경상도 사람들은 당시에 광주의 일을 알았다. 그럼 미안하지 않나. 하지만 침묵했다. 그럴 때 어떤 작용이 나타나냐 하면 고개를 돌린 쪽으로 더 강하게 고집한다. 역사적으로 외면의 혜택을 본 거다. 외면의 대가로 지역차별의 혜택을 받았다. 먹고살기가 좀더 나았다. 거래의 기본 룰이다. 혜택은 이미 받았으니까 어쩔 수 없는 거다. 광주로 대변되는 지역차별을 받아들인 심리. 이걸 경상도 어른이 대부분 갖고 있다. 그걸 우리가 또 반복할 거냐? 그건 아니다. 이걸 끊어내려면, 빚에서 나온 침묵, 이걸 우리 세대에서 깨면 되겠다 싶었다. 그래서 내가 경상도 안에서 말을 꺼낸 거다. 만화에서 직접적으로 물어서 부모 입을 열게 만드는 것처럼. -그런 의도를 알겠지만, 지역감정을 만들고 이간질한 집단, 예를 들면 정치인들을 직접 비난할 수도 있었겠다 싶었다. =약간 언급은 했는데 그런 사례와 역사를 말하는 쪽을 선택하기 싫었다. 왜냐하면 그건 지역감정 조장에 의한 선택을 한 사람들에게 책임 소재를 따지는 문제다. 예컨대 세월호 같은 사건이 벌어질 때 그건 전체 구조 문제인데 누구 책임이냐를 따지기 때문에 유병언에게 포커스가 간다. 그런 태도와 유사할 수 있다. 누구를 고발하는 대신에 인간의 이치, 왜 그런 선택을 하는 건지 보여주고 싶었다. 친구 사이로 치환해서 말하면, 친구가 이간질을 해서 기자님과 내가 싸웠고 이간질한 건 모르는 상태다. 우린 서로를 미워하고 나중에 알게 됐지만 서로를 아직 미워한다. 한번 싸우면 괜히 밉다. 그런데 원인은 이간질한 친구니까 우리끼리 책임 따지고 싸울 게 아니라 손가락을 그 친구에게 돌려야 한다. 그 이치를 깨우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거다. -만화 속 이야기는 80년대까지 나온다. 90년대에 대해서는 할 얘기가 없었나. =사람들이 얘기가 많이 남은 것 같은데 끝냈다고 한다. 사실이다. 다른 주제로 연장해서 이야기할 계획을 갖고 있다. 80년대에서는 지역차별 문제를 말한 거고, 90년대에서는 우리 세대, X세대 얘기를 할 거다. 소위 386세대의 눈에 안 보이는 것들이 있기에 이쪽에서 자기고백을 할 필요가 있다. 가제는 ‘서태지의 등장과 마왕의 죽음’이다. -포털 사이트 웹툰 연재 생각이 있나. =네이버나 다음 포털이 아니라도 다 웹이다. 나도 웹툰을 그린 건데 그렇다고 얘기해주질 않는다. 네이버, 다음은 웹툰이란 말을 왜 독점하고 있나 이런 생각이 든다. 그건 정확하게 말하면 포털툰이다. 포털 연재를 해보고 싶어서 물어본 적이 있다. 그랬더니 거기 줄 서 있는 사람 엄청 많다고 하더라. 그 말은 나도 줄 서란 얘기라서 싫다고 했다. 만약 그쪽에서 작품을 하자고 제안을 한다면 모를까. -네이버에서 <송곳>을 연재하는 최규석 작가가 생각나서 물어본 거다. 둘 다 사회성 짙은 작품을 많이 한다. =이거 꼭 써달라. <송곳>의 최규석이 줄 서서 했겠나? 사실 아까 내가 물어봤다고 한 사람이 바로 최규석이다. 최규석 작가가 연재하려는 사람 많다고 줄 서라고 했다. 그래서 안 서, 그랬다. (웃음) -(인터뷰 뒤 예정된 김수박 작가의 ‘독자와의 만남’ 행사 시간이 다가왔다.)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달라. =마무리하자면 나는 만화가이고 만화가는 어떤 종류의 사회문제를 다룰 때조차 만화의 임무가 재미와 감동이라 생각한다. 나도 그걸 더 중점에 두고 만든다. 재밌는 이야기를 찾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런 방향으로 봐주셨으면 한다. 재미 가운데 하고 싶은 얘기가 담겨 있다. 재미와 감동. 그걸 목적으로 한 책이란 말을 꼭 하고 싶다.

[에디 레드메인] <사랑에 대한 모든 것>

우주물리학도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남자와 프랑스어와 스페인어를 공부하고 있다고 응수하는 여자. 신을 믿지 않는 남자와 영국 국교회를 믿는 여자. 커피잔 속에 스며들어가는 우유의 움직임을 보며 우주의 시작을 고민하는 남자와 누군가가 쓴 글을 보며 과거로 시간여행을 떠나는 여자. <사랑에 대한 모든 것>의 두 주인공, 스티븐 호킹(에디 레드메인)과 제인 와일드(펠리시티 존스)가 사랑에 빠질 확률은 화성과 금성이 충돌하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한 일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수많은 불가능의 확률을 뚫고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는 순간, 새로운 우주가 열린다. <사랑에 대한 모든 것>은 이 두 연인이 만들어낸 사랑의 우주에 대한 영화다. 그리고 스티븐 호킹을 연기하는 영국 배우 에디 레드메인은 이 거대한 우주의 한축이다. 케임브리지의 전도유망한 천재 물리학도였던 호킹은 어느 날 갑자기 교정에서 쓰러진 뒤 루게릭병에 걸려 앞으로 살날이 2년밖에 남지 않았다는 청천벽력 같은 선고를 듣는다. 그러나 그의 오랜 관심사였던 ‘시간’은 그에게 기나긴 삶을 허하는 대신 신체의 기능을 점진적으로 잃어가는 고통을 준다. 떨리는 손으로 칠판에 물리학 공식을 적어내려가던 청년은 언제부터인가 두손을 쓸 수 없게 되었고, 목발에 다리를 의존하게 되었으며, 흐느적거리는 몸으로 계단을 미끄러지듯 내려가게 된 뒤 결국엔 목소리마저 잃게 된다.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는 신체적인 고통과 더불어 호킹이 감내해야 했던 건 사랑하는 아내가 투병 중인 자신과 함께한다는 이유로 점점 더 수척해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었다. 모든 것을, 심지어 사랑조차 변질시켜버리는 ‘시간’을 견디는 법. 어쩌면 스티븐 호킹에게 ‘시간’은 물리학도로서 오랜 연구 주제이자 인간으로서 돌파해야 했던 지상 최대의 난제였을지도 모른다. 에디 레드메인은 이처럼 평생 시간에 맞서온 한 남자의 일대기를 놀랍도록 섬세하게 구현해냈고, 영미권 평단은 그를 현재 2015년 오스카 남우주연상의 가장 강력한 후보 중 하나로 점치고 있다. “이건 명백한 레드메인의 영화다. 그의 연기는 당신이 원하는 모든 요소를 갖추고 있다. 그의 신체적인 변화는 놀라운 설득력을 보여주며, (호킹의) 고통을 체감하게 하고, 따뜻하지만 지나치게 낙관적이지도 않은 최적의 상태를 유지한다.”(<텔레그래프>) 당연하게도 에디 레드메인에게 쏟아지는 최초의 찬사는 루게릭병을 앓는 스티븐 호킹의 육체적 변화 과정에 대한 해석이다. 비스듬히 한쪽으로 기울어진 고개와 근육이라고는 존재하지 않는 듯 흐느적거리는 손과 발. 스티븐 호킹으로 분한 레드메인은 종종 영화가 아니라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루게릭병을 앓는 이의 초상을 리얼하게 담아낸다. 캐릭터에 대한 평균 이상의 연구과정과 정신적인 혹사가 담보되어야 하는 이 역할을 위한 배우의 헌신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촬영에 돌입하기 전, 제작진으로부터 넉달 동안의 준비기간을 허락받은 에디 레드메인은 스티븐 호킹에 대한 논문과 다큐멘터리, 유튜브 영상을 수집하는 것은 물론이고 호킹의 움직임을 표현하기 위해 루게릭병을 앓는 환자들과 안무가의 도움을 받았다. “펜을 줍는 것, 걷는 것, 무언가를 마시는 것…. 한마디로 스티븐 호킹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법을 연구했다.” <월드워Z>에서 좀비들의 움직임을 감독한 안무가 알렉스 레이놀즈는 레드 메인과 하루에 네 시간씩 함께 작업하며 그의 움직임을 아이패드로 촬영했고, 레드메인은 “골반의 위치부터 머리를 드는 것까지” 루게릭병을 앓는 환자의 몸이 취할 수 있는 모든 자세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촬영이 시간순으로 진행되지 않는다는 점은 그에게 또 다른 도전과제를 안겨주기도 했다. 루게릭병의 진행 과정을 혼동하지 않기 위해 자신만의 ‘레벨’ 차트를 만든 에디 레드메인에 대해 시나리오작가 매카튼은 이렇게 말한다. “예를 들면, 어떤 장면을 촬영할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 이건 말하기 능력은 레벨4이고, 운동 능력은 레벨3겠네요.’ (중략) 그 다음 날은 10년 후의 레벨인 말하기 능력 레벨2, 운동 능력 레벨7, 이런 식으로 자신의 몸 상태를 바꿔가며 촬영해야 했다. 하루하루가 그의 재능과 능력 전부를 쏟아부어야 하는 나날이었다.” 사실 신체적 장애를 가진 인물을 연기한다는 건 배우에게 양날의 칼이다. 성공적으로 연기해낸다면 많은 이들의 찬사를 받지만, 범상치 않은 역할 자체에 배우가 매몰되는 경우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에 대한 모든 것>의 에디 레드메인이 이뤄낸 진정한 성취는 신체가 아니라 감정 연기에 기인한다고 말할 수 있을 듯하다. 제임스 마시 감독은 스티븐 호킹 역에 레드메인을 캐스팅한 이유에 대해 그가 호킹이 지닌 특유의 수줍음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의 말처럼 호킹의 일대기를 다룬 이 영화에서 시간이 유일하게 변화시키지 못한 건 장난기 가득한 스티븐 호킹의 눈빛과 소년다운 미소다. <사랑에 대한 모든 것>의 원작이 된 자서전 <영원을 향한 여정: 스티븐과 함께한 시절>(호킹의 전 부인 제인 와일드가 그 저자다.-편집자)의 한 구절, “스티븐이 얼마나 표현력이 강한 눈썹을 가지고 있었는지”에 대한 제인 와일드의 언급 때문에 거울 앞에서 몇 달을 보냈다고 에디 레드메인은 고백한 바 있다. 하지만 그러한 노력을 차치하고서라도 그는 본래부터 영원히 완결되지 않을 것만 같은 미완의 아름다움을 지닌 배우다. 제멋대로 난 주근깨와 묵직하지 않은 목소리, 가늘고 기다란 몸과 반짝이는 갈색 눈동자는 서른세살의 이 영국 배우에게 종종 어른이 되지 못한 남자아이의 이미지를 덧씌우곤 한다. 희대의 섹스심벌이었던 마릴린 먼로에게 매료된 할리우드 촬영 현장의 조감독(<마릴린 먼로와 함께한 일주일>), 어머니와 금기의 사랑에 빠지는 미국 상류층 집안의 자제(<새비지 그레이스>), 전쟁 중에 만난 아름다운 아가씨에게 순정을 바치는 열혈 청년(<레 미제라블>)은 배우로서 에디 레드메인의 입지를 공고하게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작품이다. <사랑에 대한 모든 것>의 스티븐 호킹 또한 이러한 이미지의 연장선상에 있는 인물이다. “영원한 낙천주의자”라는 영화의 제작자 리사 브루스의 표현대로 에디 레드메인이 분한 스티븐 호킹은 어떤 상황에서든 위트와 미소를 잃지 않는다. 세계적인 물리학자의 잘 알려지지 않았던 사랑을 이야기하는 이 작품에서, 레드메인이 지닌 청춘의 이미지는 이성으로 점철되었을 거라 짐작되던 한 과학자를 감성적인 존재로 인지하게 하는 데 일조한다. 생각해보라. 파티장에서 춤을 추기는커녕 조명에 반사되는 와이셔츠의 형광물질에 더 관심을 가지는 남자에게도 사랑을 느낄 수 있다고 믿게 만드는 건 아무 배우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에디 레드메인은 스티븐 호킹과 또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바로 케임브리지 동문이라는 사실이다. 호킹과 같은 대학에서 미술사학을 전공한 레드메인은 또한 영국에서도 명문으로 손꼽히는 이튼 칼리지를 졸업한 엘리트 출신의 배우다. 케임브리지를 졸업한 뒤 <염소 혹은 누가 실비아인가?>라는 연극 무대에 올라 이브닝 스탠더드 신인상과 비평가협회 신인상을 수상한 바 있는 그는 전통의 연극무대를 거쳐 브라운관과 스크린으로 진출하는, 뭇 영국 배우들과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자신의 이름을 대중에 알려왔지만 배역만큼은 파격의 선택을 거듭해왔다. <새비지 그레이스>의 근친상간과 그가 소아성애자로 분했던 <힉>을 떠올리면 될 것이다. 그건 에디 레드메인이 영국을 기반으로 활동하면서도 할리우드와의 끈을 놓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미국은 나에게 다양한 역할의 기회를 제공해왔다. 영국에선 시대극이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중요한 기반인데, 미국에서는 영국인으로서의 모든 정체성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당신, 인디언을 연기하고 싶어요? 그럼 오디션 한번 보죠. 안 될 게 뭐 있어요?’ 이게 할리우드가 일하는 방식이니까.” 그런 그의 차기작은 워쇼스키 남매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주피터 어센딩>이다. 주피터를 위협하는 섹시하고 손톱 긴 악당이란다. magic hour 고마워, 고마워 에디 레드메인이 직접 밝히는 <사랑에 대한 모든 것>의 가장 인상적인 순간은, 예상외로 너무나 일상적인 장면이다. “그건 우리가 촬영한 마지막 신이었다. (중략) 호킹과 제인이 침대에 앉아 있는 장면이었는데 대본에는 어떤 대사도 없었다. 그래서 우린 모든 것을 즉흥적으로 만들어내야 했다. 제인을 연기한 펠리시티 존스가 나를 바라보기에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고마워.’ 그러자 그녀가 다시 말했다. ‘나한테 뭐 하고 싶은 말 있어?’ 그래서 나는 다시 말했다. ‘고마워.’ 그 장면은 나에게 삶과 예술이 마주한 무척 기묘한 순간으로 남아 있다.”

[김대명] 달라진 건 없습니다

시인이 되고 싶었습니다. 풍부한 이야기를 하나의 단어, 하나의 문장에 함축하는 과정이 신비롭다고 생각했습니다. 틈틈이 시를 썼고 종이와 펜만 있으면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고등학교 3학년이 되던 해에 <8월의 크리스마스>를 만났습니다. 한편의 시와 같은 영화였습니다. 러닝타임 안에 필요한 것만 정확히 모아서 덜어낸 영화였습니다. 곱씹을수록 감상이 새로웠습니다. 당시 나이로 인물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할 순 없었지만 그때 커다란 무언가가 제게 왔습니다. 연기도 시와 비슷하구나 생각했습니다. 필요 없는 걸 치우고 필요한 것만 드러내는 것이 중요함을 배웠습니다. 스물네살 늦은 나이로 대학에 들어가 연기를 전공했습니다. 지도교수님이 연출하신 연극 <귀신의 집으로 오세요>(2006)에서 배우로 데뷔했습니다. <귀신의 집으로 오세요>가 끝나고 오디션을 보러 다니다 학전에서 올리는 <지하철 1호선>(2007)이란 작품을 했습니다. 꼭 ‘영화배우’가 되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연기를 하기로 한 계기가 영화여서인지 영화를 하고 싶다는 꿈은 항상 있었습니다. 월요일만 빼고 화•수•목•금요일엔 꼭 극장에 갔습니다. 돈이 없을 때라 하이텔 등에 시사회를 신청해 극장에 다녔습니다. 담당자 얼굴을 익히고 나서는 무작정 들여보내달라고 했습니다. 어느 날은 종로 씨네코아에서 라스 폰 트리에의 <백치들>(1998)을 보았고 그 다음주 <씨네21>을 통해 도그마 선언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무슨 작품인지 알지도 못하고 그냥 봤습니다. 덕분에 그 영화들이 지금까지도 제 안에 남아 기운이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개들의 전쟁>(2012)으로 첫 영화 출연의 꿈을 이뤘습니다. 지금은 제 매니저로 함께 일하는 친구의 소개로 오디션을 본 덕입니다. <더 테러 라이브>(2013)의 테러범 목소리 연기를 하며 더 많은 대중과 만났습니다. 추천을 통해 비공개 오디션을 보게 됐는데 조감독이 와서 대본을 통째로 녹음해갔습니다. 이름도, 성별도 다 빼고 목소리만 가지고 본 오디션인데 감사하게도 감독님이 제 목소리를 선택해주신 겁니다. 그 뒤로 <방황하는 칼날>(2013), <표적>(2014), <역린>(2014)에 참여했습니다. 꿈꾸던 대로 영화를 찍게 됐지만 일상엔 큰 변화가 없습니다. 수유동에서 삼청동을 지나는 파란 버스를 그대로 타고 다닙니다. 여전히 오래전 보따리장수 할아버지에게서 1만5천원을 주고 산 중고 태엽시계를 차고 다닙니다. 거리를 걸으며 대본을 외우는 것도 똑같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눈앞에 있는 이 역할을 잘해내야겠다는 생각뿐입니다. <내부자들>로 윤태호 작가와 다시 만난다 드라마 <미생>(2014)은 저에게 아주 고마운 작품입니다. 가장 큰 수확은 긴 호흡으로 연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은 것입니다. ‘김 대리’가 되기 위해 제게 중요했던 것은 ‘생활감’을 놓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미생>을 보는 직장인들이 ‘우린 저러지 않는데? 직장생활 안 해봤나보네’ 하는 순간 김 대리는 텔레비전 속 가상의 인물로 그치고 맙니다. 주머니에 펜을 꽂고 다니는 이유, 바지 사이즈, 전화받는 방식까지 ‘우리’의 일상으로 녹아 있어야 했습니다. 수화기를 들자마자 “예, 원인터내셔널 영업3팀 김동식입니다”가 한 호흡으로 나와야 했습니다. 사회생활 이후 무너진 신체의 밸런스도 보여줄 필요가 있어 체중 관리도 했습니다. 평소 차고 다니는 이 시계는 누구 것인지도 모를 중고 시계입니다. 뒤에 ‘전략기획국 일동’이라고 써 있는 걸 보면 팀원들이 선물해준 모양입니다. 김 대리가 이런 시계를 차고 있을 것 같아 촬영 때도 일부러 차고 나왔습니다. 스크립터에겐 여러모로 미안합니다. 애드리브가 워낙 많아서 매번 적어둬야 하는 게 힘들었을 겁니다. 나름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미생>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만 하는 드라마입니다. 다른 드라마는 일하다가도 연애를 하고, 야유회를 가고, 점심시간에 다같이 밥이라도 먹습니다. <미생>은 점심시간에 밥도 안 먹습니다. 그 안에서 윤활제 역할을 해줄 스무드한 유머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뜬금없이 태어난 애드리브는 없습니다. 쪽대본은 없던 현장이라 미리 대본을 받은 뒤 유머가 들어갈 만한 자리를 표시했습니다. 그때마다 감독님에게 미리 즉흥적으로 만든 유머를 보여드리고 오케이가 나면 써먹었습니다. 가령 김 대리가 “향수냄새 맡아볼래?” 하며 손목을 내밀다 딱밤을 때리는 건 인물간의 관계도를 은근하게 보여줄 수 있는 장난입니다. 그 장난을 장그래(임시완)에게 할 때와 강 대리(오민석)에게 할 때 둘의 반응은 사뭇 다릅니다. 두 사람이 어떤 시간을 공유해왔는지, 얼마나 가까운 사이인지 그 한순간으로 짐작할 수 있는 겁니다. <내부자들>로 윤태호 작가님과는 한번 더 만나게 되었습니다. <내부자들>에선 고 기자 역할로 출연하고 모든 촬영을 마쳤습니다. 고 기자는 야욕이 넘치는 인물입니다. 이번엔 기자들의 생활을 연구했습니다. 항상 들고다니는 노트엔 무엇이 적혀 있을까, 평소 어떤 방식으로 생각하고 어떤 단계를 밟아 위로 올라가는 걸까 궁금했습니다. 2월에 크랭크인할 <판도라>는 원자력발전소 폭발 이후를 다루는 재난영화입니다. 저는 발전소에 근무하는 기술자 역할로 참여합니다. 당장은 <뷰티 인사이드>를 촬영하고 있습니다. 주인공이지만 알다시피 20명 중 한 사람입니다. 영화를 여는 역할을 하게 돼 무척 기분이 좋습니다. 연초만 되면 올해는 무얼 할 수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일단 이번 한해는 보장된 셈이라 마음이 든든합니다. 내년에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꾸준하게 오래오래 연기할 수 있다면 그것이 제겐 행복일 것 같습니다. 김 대리의 포트폴리오 <미생> 9국에서 장그래 집에 다녀오는 길에 했던 대사가 기억납니다. 힘주어 말하지 않으면서 힘 있게 들리도록 하고 싶었습니다. “당신 실패하지 않았어. 나도 지방대 나와서 취직하기 되게 힘들었거든? 그런데 합격하고 입사하고 나서 보니까 말이야, 성공이 아니라 그냥 문을 하나 연 것 같은 느낌이더라고. 어쩌면 우린 성공과 실패가 아니라 죽을 때까지 다가오는 문만 열어가면서 살아가는 게 아닐까 싶어.” 참 좋은 말입니다.

‘썸’이라는 단어가 가진 의미 <오늘의 연애>

연애만 했다 하면 백일도 못 가 차이고 마는 초등학교 교사 준수(이승기)와 잘나가는 기상 캐스터 현우(문채원)는 둘도 없는 18년지기 친구다. 준수의 집을 제 집처럼 들락거리며 술만 마셨다 하면 거침없는 욕설을 쏟아내는 현우이지만, 이루어질 수 없는 비밀스런 사랑에 마음 아파하는 그녀를 가장 잘 이해해주는 것도 준수뿐이다. ‘가슴이 떨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준수와 사랑도 우정도 아닌 아슬아슬한 관계를 유지해오던 현우 앞에 어느 날 사진작가 효봉(정준영)이 나타나고, 이들의 우정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다. <오늘의 연애>는 <너는 내 운명> <내 사랑 내 곁에> <그놈 목소리> 등으로 우리에게 이름을 알린 박진표 감독의 신작이다. 하지만 흔치 않은 노년의 사랑을 용감하게 그린 <죽어도 좋아>로 데뷔한 후, 죽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순애보적 사랑을 그린 두편의 영화 <너는 내 운명>과 <내 사랑 내 곁에> 등을 연출하며 오랜 시간 ‘사랑’의 여러 양상에 대해 고민해온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생각해본다면 이 영화는 다소 의아하다. “이 영화를 통해 ‘썸’이라는 단어가 가진 의미를 되짚어보고, ‘썸’으로 맺어지는 남녀 관계와 감정들을 깊이 있게 파헤쳐보려 했다”는 감독의 말이 눈에 띈다. 실제로 영화는 ‘썸’이라는 단어가 제목 그대로 ‘오늘날의 연애’ 양태를 가장 잘 보여주는 일종의 ‘현상’이라고 관객을 설득시키기 위해 부단히 애쓴다. 문제는 영화가 생각하는 ‘썸’이 지나치게 표면에만 머물고 있다는 점이다. 텔레비전 예능 프로그램에서나 볼 법한 소란스런 자막들의 활용이나 슬쩍만 보아도 어딘지 알 수 있는 ‘핫플레이스’들을 선택한 노골적인 로케이션 전략, 그리고 문채원의 고운 얼굴에서 나오는 것이라고는 믿기 힘든 민망한 대사들은 지금 ‘썸’을 타는 이들에게도 공감대를 끌어내기는 어려워 보인다. 조금 더 곤란한 건 ‘썸’의 감각들이 다 떨어져가는 후반부다. 파편적인 에피소드들로 신을 쌓아나가다 보니 ‘썸’이 ‘연애’로 바뀌는 순간, 두 주인공의 감정 변화가 거의 설명되지 않는다. 영화 전체를 관통하곤 했던 ‘박진표식 사랑’의 우직함도 이 영화에선 찾아보기 힘들다. ‘문채원-이승기’라는 배우 조합은 이 영화의 벤치마킹 대상이었을 <엽기적인 그녀>의 ‘전지현-차태현’ 못지않은 ‘캐미’를 발산하지만, 이를 뒷받침할 감정의 근거가 미약해 캐릭터의 매력이 십분 살아나지 못한다는 점도 못내 아쉽다.

[이시이 유야] 시대와 사회가 내뿜는 공기에서 영화가 나온다

외모도 영화도 자못 평화로워 보이지만 이시이 유야는 작품을 통해 현대 일본 사회를 향한 “화와 분노”를 슬그머니 드러내온 신진 연출가다. 수편의 실험적인 단편을 연출하다 오사카예술대학졸업작품인 장편영화 <무키다시 닛폰>(2005)으로 피아영화제 대상과 음악상을 수상하며 데뷔했다. 국내엔 <행복한 사전>(2013)으로 이름을 알렸고 <이별까지 7일>(2014)은 그의 아홉번째 장편영화다. 최근 <이별까지 7일>의 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하고자 한국을 찾은 그의 발길을 잠시 붙들었다. 무심하게 툭툭 던지는 이시이 유야의 말끝엔 젊은 작가의 예리한 칼날이 숨어 있었다. -하야미 가즈마사의 소설 <이별까지 7일>을 영화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나. =이번에 처음 작업해보는 나가이 다쿠로 프로듀서에게 제안 받았다. 원작에서 큰 감동을 느꼈다고 하더라. -원작을 각색할 때 어떤 것을 취하고, 어떤 것을 버려야 겠다고 생각했나. =두 가지는 반드시 지키자고 생각했다. 하나는 하야미 가즈마사가 갖고 있는 가족에 대한 시선을 흐트러뜨리지 말자는 것. 그는 30대 초반에 이 소설을 썼고, 지금 나는 그때의 그와 엇비슷한 나이다. 그 시점까지 고려하고 싶었다. 또 하나는 원작을 읽고 난 독자의 감상과 영화를 본 관객의 감상이 같았으면 하는 거였다. -동생 슌페이(이케마쓰 소스케)가 아침에 텔레비전에서 행운의 색과 숫자를 보고 난 뒤 긍정적인 결말이 찾아온다는 등의 디테일까지도 살려냈다. =그걸 꼭 살리고 싶었던 이유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을 슌페이에 대한 공감 때문이었다. 의지할 것을 만들어주고 싶었달까. 원작엔 없지만 의도적으로 집어넣은 장면도 있다. 형제가 언덕 위를 마구 올라가며 우리 뭔가 제대로 해보자고 의기투합하는 장면이다. 원작에선 형 코스케가 다소 일방적으로 추궁당하는 중에 슌페이가 강한 의지를 드러낸다. 형에게도 굳은 의지를 드러낼 수 있게 해주고 싶어서 그 장면을 추가한 거다. -<이별까지 7일>에서 드러나는 가족의 모습이 현대 일본 사회의 가족 문제를 직접적으로 담고 있나. =내가 그려낸 형태가 일본의 일반적인 가족의 모습이라고 단정하긴 어렵다. 다만 부분적인 조각은 겹치지 않을까 한다. 가족 내 구성원끼리도 관계를 형성하며 살아가지 않나. 그들 사이에서 거리감이 생기는 부분과 가까운 가족의 문제이기에 미루면서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 태도들을 담으려 했다. 이러한 부분은 보편적인 공감대를 형성하지 않을까 싶다. -레이코(하라다 미에코)의 시한부 판정이 영화 초반에 가족의 고민거리로 제시되지만 진짜 문제는 그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열심히 살지 않았던 사람들이 특정한 사건을 계기로 열심히 무언가를 해볼 의지를 갖게 된다는 설정에 집착하는 편이다. 레이코의 시한부 판정을 계기로 변해가는 가족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지금 일본에 절실한 태도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때로 당신의 영화는 강인한 여성 캐릭터가 끌고 간다. <이별까지 7일>에서도 레이코는 집안의 남자들이 모르는 사이 어느새 집의 바탕과 중심이 되어 있는 캐릭터다. =내가 강한 여성에게 끌리는 건 확실하다. (웃음) 남성이 알고 보면 약한 존재라는 걸 스스로 잘 알기 때문인 것도 같다. 내가 알 수 없는 여성성에 의지하려는 면이 있다. -하라다 미에코는 여리지만 심지가 굳은 어머니로 적역이다. 기억을 잃으며 그녀가 보여주는 소녀 같은 모습도 대단히 사랑스러운데 당신은 그녀에게 어떤 기대를 가졌나. =그녀가 보여주는 소녀다움은 단순한 귀여움이 아니다. 아이 같은 천진한 표정도 있지만 그녀는 남자 셋이 뭐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이 절로 들게 만드는 사람이다. 치매 증상 때문에 본인도 모르게 자기 생각을 마구 얘기하는 것 같기도 하고, 오히려 그 점을 이용해 속내를 털어놓는 것 같기도 한 모호함 역시 하라다 미에코가 완벽히 표현해주었다. 가장 어려운 역할인 동시에 내가 가장 기대한 역할이었다. 물론 아주 성공적이었고. -반면, 남성 캐릭터들은 대체로 덜 자란 느낌이다. 특히 <이별까지 7일>의 세 남자에게서 그런 면모가 가장 크게 드러난다. =세명의 남성 캐릭터를 만들며 가장 의식한 부분은 셋 다 각기 다른 캐릭터이지만 근본적으로는 같다는 거였다. 술에 약하다든가 성격적인 부분이 비슷하지 않나. 레이코를 구해야 한다는 목적을 공유해야 함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기도 하다. 무엇보다 나는 세 남자가 ‘우리 상황이 이러니 서로 힘을 합치자!’라고 자연스럽게 화합하는 걸 원하지 않았다. 각자 뭔가 해보려고 하지만 사실 그들 개개인의 능력이 출중하지 못하고, 노력하는 중에 ‘어찌어찌하다보니 이렇게 되어버렸네?’ 하는 인상을 심고 싶었다. 이 ‘얼떨결’의 뉘앙스를 꼭 강조해달라. (웃음) -얼마 전 진행한 서면인터뷰(<씨네21> 988호)에서 쓰마부키 사토시는 이케마쓰 소스케와 캐치볼을 하며 우애를 쌓았다고 했다. 연출자인 당신이 둘의 관계를 조율한 부분도 있나. =형제간의 정이나 연결고리를 만들게끔 내가 그들 사이에 끼어든 건 없다. 둘 사이에서 빠지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나는 심지어 이케마쓰 소스케에게 ‘쓰마부키 사토시가 대단한 배우이지만 너도 할 수 있으니 그에게 지지 말라’고 하며 갈등을 부추기기까지 했는데. (웃음) 남자 형제 사이는 서로에 대한 대립의식을 보이는 게 더 어울린다. 덧붙이자면, 평소 나는 쓰마부키 사토시와 이케마쓰 소스케가 서로 닮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쓰마부키 사토시야 워낙 훌륭한 배우이니 캐스팅에 대해선 물어볼 게 없지만, 슌페이 역을 이케마쓰 소스케에게 맡긴 이유는 궁금하다. =그렇다고 해서 둘을 대하는 내 태도에 큰 차이는 없었다. 이케마쓰 소스케에 관해서만 얘기하자면 심지어 나는 그를 천재라고도 말할 수 있다. (웃음) 그가 천재여서 그랬다. -이케마쓰 소스케의 어떤 점이 그토록 천재적이던가. =응? 사실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웃음) 20초만 기다려달라. (정확히 20초 뒤) 나보다 네다섯살 어린데도 그는 같이 일하는 파트너로서 신뢰할 수 있는 타입이다. 그는 연출자의 모든 생각을 지지하고 믿어주는 편이다. 영화 안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연기도 아주 훌륭하다. 확신할 수 있는 건 그의 마음 깊은 곳엔 어떠한 분노와 야심이 단단히 자리하고 있다는 거다. 반면 상당히 순수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 모든 것이 이케마쓰 소스케의 연기에 설득력을 부여한다. -당신의 영화는 대체로 느리게 호흡한다. 영화의 리듬을 짜는 데엔 어떤 고민을 하나. =그래, 빠른 것 같진 않다. (웃음) 특히 최근 찍은 영화 셋(<행복한 사전> <이별까지 7일> <밴쿠버의 아사히>)은 더더욱 그렇다. 이것도 봐라, 저것도 봐라 하는 식으로 연출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끊임없이 관객에게 주입하는 영화들도 분명 있다. 하지만 나는 하나를 보여주더라도 제대로 보여주고 관객이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갖도록 하고 싶다. 특히 <이별까지 7일>처럼 가족과 관련된 영화라면 마음 한쪽에서 내 가족은 어떠한가 하고 가족에 대한 기억을 떠올릴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었다. -쉼없이 영화를 만들어왔지만 <미츠코, 출산하다>(2011)와 <행복한 사전> 사이에는 얼마간 시간이 비어 있다. 그 사이 어떤 일이 있었던 건가. =왜 그랬을까? (웃음) 동일본 대지진이 발발해 그사이에 약간의 정체가 있었던 것 같다. 그래도 꾸준히 뭔가 일을 하긴 했다. (한국엔 방영되지 않은) 의 2부작 드라마 <엔딩롤>과 의 8부작 드라마 <망상수사~ 구와가타 고이치 준교수의 스타일리시한 생활> 중 두 에피소드를 연출했다. -<행복한 사전> 이후 당신 영화의 성격이 조금 바뀌었다는 생각도 든다. 원작 각색 영화라는 점에서도 그렇고 청춘들의 주변적인 이야기를 주로 만들다가 <행복한 사전> 이후 작품엔 보편적인 드라마까지 얹혔다. =사실 원작의 유무는 중요하지 않고 연출자로서 내 태도가 달라진 것도 아니다. 너무나 명백한 답변이지만 프로젝트의 성격이 달라진 게 가장 큰 이유다. <행복한 사전> 이전의 영화는 제작비도 적었고, 그만큼 내가 알아서 영화를 만들 수 있었다. 또 그걸 관심있는 사람만 봐도 좋았다. 하지만 <행복한 사전>부터는 제작비도 늘어났고 영화도 더 폭넓은 관객이 볼 수 있도록 만들었다. -“사회에 대한 불만으로 꾸준히 영화를 만들 힘을 얻는다”고 지난 인터뷰(<씨네21> 647호)에서 말했다. 여전히 그런가. =불만이라기보다 내가 피부로 느끼는 사회에 대한 위화감에 가깝다. 이 시대와 사회가 내뿜는 공기, 나는 그 안에서 호흡하며 사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 공기에서 이건 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작품을 구상한다. -지금 가장 위화감을 느끼고 있는 일본 사회의 문제는 무엇인가. =한국 매체에서 직접적으로 이런 얘기를 해도 괜찮은지 모르겠다. 에둘러 말하자면 위기를 안고 있는 일본 사회는 점점 나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악화되는 부분은 정치나 경제 면에서 여러 가지가 있다. 그보다 문제인 것은 그 위기를 일본인들이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인간의 가치가 낮아지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한다. -한국에 소개되지 않았지만 현재 일본에서 상영 중인 신작 <밴쿠버의 아사히>는 쓰마부키 사토시, 이케마쓰 소스케와 또 한번 만난 영화다. =두번 같이 작업하니까 더 어렵다. 기존에 했던 것들을 일부 부정하고 새로운 걸 보여줘야 한다는 중압감을 느낀다. -배경이 1938년부터 1941년까지인데, 이 정도까지 옛날로 간 시대극은 처음이다. =전쟁 이전의 캐나다가 배경이다. 오히려 재밌다고 느낀 건 그래서였다. 국내에서가 아니라 외국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일본인 거다. 캐나다에서 사는 일본인이 일본인으로서의 자의식을 더 갖고 있고, 모국의 장단점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는 모습들이 흥미로웠다. 이민자로서 겪는 갈등과 차별 역시 현대 일본의 사회문제와도 통한다고 생각했다. -프로덕션상의 차이도 크게 느꼈겠다. =(질문 끝나자마자) 너무너무 힘들었다! (웃음) 캐나다 현지 촬영은 어려워서 일본에 당시를 그대로 재현한 세트를 지었다. 길거리는 물론이고 야구장까지 모두 만들었다. 만들 땐 힘겨웠지만 일단 만들고 나니 스탭과 배우가 영화에 집중하게 만드는 건 쉬웠다. -새해도 밝았는데 앞으로의 계획은 뭔가. =내 안에는 화와 분노가 굉장히 많다. 20대 중반까지는 그게 영화를 만드는 긍정적인 에너지가 됐지만 오히려 지금은 그런 감정이 더 격렬해져서 이걸로 내가 영화를 만드는 것이 괜찮은지 생각하게 됐다. 앞뒤 생각 없이 달려오기만 한 상황이라 앞으로는 시간을 두고 나의 영화에 대해 차분히 생각해보려 한다. 신작에 대해선 구체적인 계획 없이 생각만 하고 있다.

[베를린] 아버지 세대와의 갈등은 어떻게 표출되는가

개봉 전부터 화제였던 <우리는 젊다. 우리는 강하다>(We are Young. We are Strong)가 지난 1월 말부터 독일 극장가에서 상영 중이다. 이 영화는 1992년 8월 독일 북부의 옛 동독 지역인 리히텐하겐에서 발생한 난민거주주택 방화사건을 다룬다. 최근 독일의 각 도시에서 반이슬람 시위가 논란이 되고 있는데, 이러한 정세를 고려했을 때 이 영화의 개봉은 이보다 더 시의적절할 수가 없다. 리히텐하겐의 한 아파트 벽에는 아직도 해바라기 문양이 새겨진 모자이크가 남아 있다. 일명 ‘해바라기 집’이라고 불리는 이 아파트엔 1992년 당시 난민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 아파트 앞에서 반외국인 구호를 외치며 극우주의자들이 화염병을 무더기로 던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독일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충격을 안겨주었다. 영화는 1992년 8월24일, ‘해바라기 집’ 인근에서 벌어졌던 일들을 세 가지 시선을 통해 보여준다. 고등학교를 갓 마친 청년 슈테판과 그의 아버지이자 지역정치가인 마틴, 그날의 피해자였던 베트남 가족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 작품은 각기 다른 세 사람의 일상을 마치 다큐멘터리로 기록하듯 집요하게 좇는다. 이 영화가 인상적인 점은 ‘그날’ 밤 테러에 동참한 젊은이들을 단순한 악인으로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화는 오히려 방황하는 젊은 영혼들의 아나키즘적 반항심과 방향성 없이 끓어오르는 에너지의 표출에 초점을 맞춘다. 슈테판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대화에서 감독이 가진 철학을 엿볼 수 있다. “우리 세대는 나치 아버지에 대항해서 공산주의에 열광했고, 너희는 공산주의에 반대해 민주주의자가 되었지.” 결국 방화사건의 이면에는 아버지 세대에 반항하는 독일 젊은이들의 ‘갈등 메커니즘’이 작용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젊다. 우리는 강하다>는 부르한 쿠르바니 감독의 두 번째 영화다. 감독 자신이 아프카니스탄에서 독일로 건너온 이주민이다. 그는 12살 때 독일 현지 텔레비전을 통해 방화사건을 접했다고 밝혔다.

이와아키 히토시의 동명 만화 원작 <기생수 파트1>

더할 나위 없이 평범하게 살아가던 고등학생 신이치(소메타니 쇼타)는 어느 날 밤 이상한 일을 겪는다. 잠을 자던 중 작은 뱀처럼 생긴 정체 모를 물체가 자신의 오른손 안으로 파고든 것이다. 신이치는 꿈이라 생각하고 넘어가지만 다음날 아침 자신의 오른손이 말까지 할 수 있는 다른 생물로 변해 있음을 알아차린다. 하지만 놀랄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날을 기점으로 일본 전역에 끔찍한 연쇄살인사건이 일어나고, 신이치는 이 사건이 자신의 오른손을 차지한 ‘기생수’와 연관이 있음을 알아차린다. <올웨이즈 3번가의 석양>(2005) 시리즈 등을 연출한 야마자키 다카시 감독의 <기생수 파트1>은 이와아키 히토시의 동명 만화를 원작으로 한 영화이다(완결편인 <기생수 파트2>는 오는 4월 일본에서 개봉예정이다). 만화 <기생수>는 1988년에 연재를 시작한 후 기발한 상상력과 인간의 본성에 대한 날카로운 문제제기로 큰 인기를 얻었으며 영화화에 대한 기대 역시 높았던 작품이다. 원작 팬들은 인간의 몸을 산산이 해체해버리는 강력한 폭력과 문명사회에 대한 시니컬한 유머가 공존하는 매력적인 세계를 다른 매체에서도 보고 싶어 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해 <기생수 파트1>은 원작의 다양한 에피소드와 폭넓은 감정의 스펙트럼을 영화로 옮기는 데 실패한다. 영화는 원작의 ‘곁가지’에 해당하는 신이치의 아버지나 텔레파시 소녀 카나 등 만화 <기생수>의 많은 부분을 과감하게 잘라냈고 에피소드의 구성 역시 과감히 재배치했다. 이를 통해 신이치와 다른 기생수들과의 싸움을 그리는 데 더 힘을 쏟으며, 나아가 이야기의 빠른 전개에 주력한 것이다. 물론 이야기 전개의 효율성에 방점을 찍은 감독의 선택이 그 자체로 나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인물의 심리를 묘사하는 부분까지 거침없이 잘라낸 것은 명백한 실책으로 보인다. 특히 유약하던 소년 신이치가 점차 다른 존재로 변해가는 과정이라든지, 신이치와 ‘오른손’의 기묘한 연대를 한두개의 사건으로만 기능적으로 짚고 넘어가는 것은 결과적으로 영화의 감정을 밋밋하게 만들어버린다. 만화 <기생수>의 장점은 단순히 기생수의 기괴한 모습에 대한 생생한 묘사와 피와 살이 난무하는 폭력 묘사가 아니었다. 하지만 <기생수 파트1>은 겉으로 드러난 에피소드를 따라가기만 하다 그 아래 녹아 있는 인물의 심리 변화를 놓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