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내가 찾는 영화 정보를 손쉽게!

‘텔레@CASHFILTER365테더수사기관오다집수수료테더수사기관오다집수수료' 검색결과

기사/뉴스(1997)

재수를 시작하는 스무살들에게

내가 스무살 때 태어난 조카의 이름은 순정이다. 우리 나이로 내가 마흔이 되니 그애가 스물이 되었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프로야구 원년이거나 아니면 그 다음해의 여름에 그애가 태어났을 것이다. 올케가 해산하러 시골에 가고 오빠가 퇴근하기를 기다리며 나는 저물녘에 빈집에서 프로야구를 보곤 했다. 특히 해태가 게임을 하는 날이면 어김없이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었던 것 같다. 운동경기에는 별 흥미를 못 느끼는 내가 아직도 김성한, 이상윤, 김봉한, 그 뭐였더라… 이름이 가물가물한 김 뭐라고 하는 도루왕을 응원하며 한여름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날 시골에서 전화가 왔다. 여자애가 태어났다고 했다. 우리 집엔 참으로 오랜만에 생긴 아기였다. 모두들 황홀해했다. 그애만 보면 서로 안으려고 했다. 나중에 아기는 손을 너무 타서 안아줘야만 잠을 잤다. 잠이 든 것 같아 내려놓으면 귀신같이 알고 울었다. 그때는 희귀병인 디스크를 앓으며 고시공부를 하던 나의 셋째오빠는 뒤엉킨 젊은 날의 시름을 그애를 들여다보는 것으로 달래는 때가 종종 있었다. 나도 마찬가지여서 그애가 태어나고 나서는 집에 마치 무슨 향기나는 꽃나무가 자라고 있는 듯이 거리에 있다가도 그애를 보러 집으로 향하곤 했다. 사람에게서 그렇게 좋은 냄새가 난다는 것, 사람이 그렇게 부드럽다는 것, 사람이 그렇게 쓰다듬고 안고 싶은 것이라는 것을 그애를 통해 배웠다. 그애가 스물이 되었다. 지난 일년 동안 그애는 정말 공부를 열심히 하였다. 걸핏하면 무슨 핑계를 삼아 모이는 걸 좋아하는 우리 가족은 지난 일년 동안 우리에게 큰형네이거나 큰오빠네인 그애네 집을 슬슬 피하며 그애가 가능하면 안정된 분위기 속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애는 어렸을 적부터 의사가 되겠다고 말했다. 내신성적이 좋았고 공부를 무척 잘했고 지난 일년 동안 빈틈없이 입시에 임했기 때문에 나는 그애가 당연히 이번 입시를 통과할 줄 알았다. 마음속으로 제발 큰오빠가 어떤어떤 대학이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만 품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서 어느 대학이냐는 아무 문제가 아니다, 자신이 원하는 과가 중요하다, 발언을 은근히 여러 번 했다. 일년이 지났다. 그애는 수능시험을 치르고 와서 머리를 싸매고 드러누웠다. 수시를 치르는 족족 미끄러졌다. 정시를 기다리는 사이에 당사자가 실망하고 지쳤다고 했다. 나는 가슴이 조마조마해서 전화조차 하지 못했다. 시골에 가서 설을 지내고 온 셋째오빠가 우리 집에 들러 그애 소식을 전했다. 모 대학에 합격을 했으나 제2지망이라 그애가 가려는 곳이 아니었다. 재수를 할 것이냐 말 것이냐를 놓고 내가 전화조차 못한 사이 전쟁을 치른 모양이었다. 얘기를 듣는 동안 나는 도대체 어떤 애들이 그애가 가고 싶은 과에 가는지 궁금해졌다. 그동안 입시문제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아도 절실하게 와닿지가 않더니 그애가 입시를 얼마나 철저히 준비해왔는지를 지켜본 나로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애가 자신이 가고 싶은 과에 들어가지 못한 건 납득이 되질 않았다. 새벽 두시에 학원에 가기도 하질 않았던가. 대체 어떻게 더 해야 한단 말인지. 저물녘 내내 서성대다가 밤이 되어 자동차를 몰고 그애네 집에 가서 그애를 납치하다시피 내 집에 데리고 왔다. 스트레스 때문인지 얼굴에 뾰루지가 수도 없이 나 있는데도 불구하고 검은 머리 밑의 흰 이마가 반듯했다. 결혼할 때 어머니가 해주신 이부자리를 펴고 베개를 나란히 놓고 그애랑 누웠다. 이제 재수를 시작하려는 그애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태산같았다. 그런데 말이 안 나왔다. 미적거리다가 누군가가 나에게 선물한 다섯 가지 향수가 든 상자를 꺼내와 그애에게 주었다.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애가 먼저 그런다. 고모 나, 재수하는 거 힘 안 들어요, 나보다 엄마가 문제죠. 내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다 알고 있는 듯한 말투였다. 갑자기 나는 내가 그애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가 의아해졌다. 무슨 말을 하려 했나. 일년 그거 아무것도 아니란다, 이것이었나? 일년 더 공부해서 네가 하고 싶은 일 하게 되면 지금 힘든 거 다 잊게 된단다, 안 그러면 평생 뒤만 돌아보며 살게 돼, 이런 것이었나? 갑자기 자동차를 몰고 가 그애를 데려올 때는 하고 싶은 말이 들끓었는데 내 입에서는 불쑥 순정아, 내년 이맘때 고모랑 여행갈래?였다. 그애가 어디로요?라고 물어줘서 고마웠다. 글쎄, 어디로 갈까? 너, 어디 가고 싶은데? 파리? 프라하? 페루? 차라리 그애가 툴툴거리고 성질을 부렸다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할 수 있었을 텐데. 새벽에 일어나 물끄러미 모로 누워 잠이 든 그애를 바라보다가 나와 글을 쓴다. 재수를 시작하는 모든 스무살들이여! 건강과 축복이 함께하기를!

[Review] 칸다하르

■ Story 아프가니스탄 출신으로 현재는 캐나다에 살고 있는 저널리스트 나파스(닐로우파 파지라)는 칸다하르에 거주하는 여동생으로부터 20세기 마지막 개기일식이 일어나는 날 자살하겠다는 편지를 받고 그녀의 죽음을 막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으로 돌아온다. 그녀는 고향 칸다하르로 향하는 한 가족의 네 번째 부인으로 위장하여 여행길에 오른다. 그러나 강도를 만나 그녀는 혼자 사막에 남겨지고 이번에는 코란학교 퇴학생인 칵(사두 테이모우리)의 안내를 받아 다시 칸다하르로 향한다. 우물물을 잘못 마셔 병을 얻은 나파스는 동네의 진료소를 찾아갔다가 무자헤딘 출신의 의사 사히브(하산 탄타이)를 만나 도움을 얻는다. 나파스는 한 결혼식 행렬에 몸을 감춘 채 동생을 찾아가지만 개기일식의 시간이 점점 다가온다. ■ Review 9·11 테러사건이 마흐말바프의 <칸다하르>를 그 이전과는 상이하다고까지 할 수 있는 해석의 장으로 이동시켜놓았음은 분명하다. 기억의 저편에 자리하고 있던 아프가니스탄이라는 나라가 어느새 우리 의식 위로 갑작스레 돌출해버렸으니 말이다(하지만 우리는 또 빠르게 잊어가고 있는 중이다). 아프가니스탄에 대해 마흐말바프 자신이 쓴 글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바미얀의) 석불은 파괴된 것이 아니라 부끄러움에 스스로 무너져내린 것”이라는 뼈아픈 표현을 기억할 것이다. 석불의 파괴에 대해서는 그토록 유감을 표시하면서도 아프가니스탄 내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에겐 조금의 관심도 기울이지 않는 상황을 마흐말바프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칸다하르>가 이런 도덕적 호소만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영화가 아님은 분명하다. 우리가 이 영화를 보고 감동을 받고 기어이 아프가니스탄의 역사적 상황과 미국의 보복공격 이후의 일들에 대한 자료를 다시 한번 뒤적이게 되는 것은, 마흐말바프 영화 속에 내재한 설명하기 힘든 아니 차라리 응시하기 힘들다고 말해야 할 어떤 아이러니 때문이다. 부르카를 입고 전신을 감싸 숨긴 채 살아야 하는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인가를 파악하기란 어렵지 않다. “당신이 부르카를 입고 있는 이 여성들을 볼 때, 외적으로는 미적인 조화로움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 안에서는, 즉 부르카 안에는 질식할 듯한 상황이 존재하고 있다. 그건 이상한 모순이다. 그녀들에겐 자신들의 신체적 아름다움을 보여줄 권리가 없다. 대신 의상의 아름다움을 이용하는 것이다.” 칸다하르로 향하는 도정 가운데 그녀들이 손톱에 물을 들이고 팔찌를 고르는 행위, 이것은 결국 드러내 보이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음에도 무언가를 욕망한다는 사실 자체로 인해 우리를 숙연하게 만든다. <칸다하르>는 부르카가 지닌 화려한 색채들을 매개로 이미지의 힘과 기원을 묻는 영화이다. 이 영화는 고다르의 <사랑의 찬가>와 함께 지난해 칸영화제에 동시에 도착했다. 전쟁은 이미지화될 뿐 아니라 이미지의 속성을 바꾼다. 찍어서는 안 될 것을 찍는다는 행위는 마침내 윤리적인 긴장을 불러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어떻게든 윤리적인 긴장을 거세하고 나면 전쟁은 카메라를 위한 더할 나위 없이 매혹적인 사건으로 탈바꿈한다. 정말이지 이미지는 전쟁을 위해 태어난, 아니 전쟁이 이미지를 위해 존재해왔던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은 (그 오랜 내전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어떤 식으로든 자신들의 전쟁과 그로 인한 상처를 드러낼 이미지를 가져본 적이 없다. 그래서 윤리 대신 가혹한 율법만이 남았던 것이다. 마흐말바프는 아프가니스탄을 ‘이미지 없는 국가’라고 부르며 할리우드가 만들어낸 <람보3>의 무대로서만 존재했던 사실을 환기시킨 바 있다. 윤리적인 긴장을 드러내기 위해 고다르와 같은 주저함이 깃든 응시 대신 마흐말바프는 아이러니를 선택한다. <칸다하르>가 초래할 수 있을 가장 위험한 귀결은 이 영화가 ‘이미지 없는 국가’ 아프가니스탄을 위한 아름다운 부르카처럼 되는 것이다. 일단 마흐말바프는 이 위험을 감수한다. 언뜻 아프가니스탄 하면 떠올리기 쉬운 참혹한 정경 대신 화면을 메우는 것은 예기치 못한 아름다움이다. 낙하산에 매달려 떨어지는 적십자 구호품(의족과 의수)을 얻기 위해 목발에 의지한 채 전력을 다해 달려가는 일군의 사람들을 보여주는 고속촬영 장면의 정서적 효과는 압도적이다. 여러 사람에 의해 회자된 이 장면과 더불어 더욱 섬세한 배려가 느껴지는 것은 바로 칸다하르로 향하는 결혼식을 앞둔 신부의 행렬이다. 어둠의 심장으로 파고드는 이 행렬의 외양은 어딘지 심상치 않다. 주인공 나파스의 동생이 자살하려고 하는 그곳으로 그들은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 떠난다. 그런데 그 위에 흐르는 노랫가락은 어쩐지 장송곡처럼 들린다. “나는 그토록 애절한 결혼식 축가를 들어본 적이 없다.” 이제 결혼식 행렬은 장례식을 위한 당혹스러울 만큼 화려한 죽음의 사신들의 행렬이 된다. “아프가니스탄의 현실은 그 자체로 초현실적이다.” 개기일식은 지상에 어둠을 불러오지만 한편 그것은 어둠을 응시하는 커다란 동공처럼 보이기도 한다. 팔다리가 잘린 사람들, 코란을 암송하며 무기의 기능을 읊조리는 아이들, 사막에 버려진 시체, 기아로 허덕이는 사람들 속에서 나파스가 동생을 위한 희망의 전언을 찾기란 힘든 일이다. 그녀가 부르카 속에 감추고 있는 테이프 레코더조차 어떻게 될지 모른다. <칸다하르>는 온갖 미디어의 시선이 전세계를 뒤덮고 있다고 생각되는 지금, 그 시선의 여백을 발견한 자- 혹은 그 자신 여백에 놓여 있는 자- 가 터뜨리는 탄식과 같은 영화다. 그런데 이제 그 여백은 무너져내린 무역센터의 이미지 앞에서 다시 한번 <람보3>의 무대처럼 펼쳐진다. 유운성/ 영화평론가 akeldama@netian.com <칸다하르>의 여백 읽기 하루 340명이 죽는 곳 촬영 도중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난민들을 보며 충격을 받기도 했다는 감독의 심정은 영화 <칸다하르>에 잘 드러나 있다.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며 영화를 찍는 행위만큼이나 영화가 그 태생부터 짊어지고 있는 죄의식을 잘 드러내 보여주는 것도 없을 것이다. 마흐말바프가 아프가니스탄 난민에 관한 영화를 만든 것은 <칸다하르>가 처음은 아닌데 이미 1987년에 <싸이클리스트>(이 영화는 몇년 전에 국내 텔레비전에서도 방영되었다)를 통해 그들의 삶을 다룬 바 있다. 이 영화를 보고 찾아온 여주인공 나파스 역의 닐로우파 파지라의 이야기가 <칸다하르> 제작에 한 동기가 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흐말바프는 자신이 수집한 자료들을 토대로 이미 한편의 글을 발표한 바 있는데 라는 제목의 이 글은 인터넷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www.makhmalbaf.com 혹은 www.kandaharthemovie.com). 그는 다음과 같은 서늘한 말로 글을 시작하고 있다. “당신이 이 글을 주의 깊게 읽는 데에는 한 시간 정도가 걸릴 것이다. 바로 그 한 시간 동안,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전쟁과 기아로 인해 적어도 열네명 정도가 사망할 것이다.” 이어 세계인들의 아프가니스탄 상황에 대한 무지와 오해에 대해 언급한 뒤 몇몇 통계적 수치들을 제시하며 아프가니스탄의 현 상황에 대한 이해를 촉구하고 있다. “지난 20여년 동안… 매년 12만5천명, 하루로 치면 대략 340명, 시간당으로는 14명, 5분당 1명이 살해당하거나 죽어갔던 것이다.” 그 밖에도 아프가니스탄 내부의 종족문제(크게는 탈레반 정권으로 대표되는 파슈툰, 하자레, 우즈벡, 타지크족 등), 사진과 영화 및 텔레비전 시청의 금지, 여성문제에 대한 언급이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칸다하르>의 여백을 뒤지는 이들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글이다.

<세이브 더 라스트 댄스> O.S.T

TV시리즈 <마이애미 바이스>로 한 시대의 텔레비전 채널을 휘어잡았던 흥행의 명수 토머스 카터의 2001년작 <세이브 더 라스트 댄스>는 마치 <더티 댄싱>을 <초대받지 않은 손님>류의, 흑인과 백인간의 사랑이라는 구도에 집어넣은 듯이 보이는 작품이다. 토머스 카터는 이 영화말고도 1993년작 <스윙 키즈>에서도 춤을 중심에 놓았다. 주로 춤의 사회적 성격에 관해 고찰하는 일련의 영화들을 통해 그는 대중문화의 스타일들을 사회적으로 음미하려고 하는 듯하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흥행을 노린 작품들이다. 춤을 소재로 한 영화는 자연스럽게 ‘음악영화’가 된다. 발레리나를 지망하는 백인 소녀와 힙합에 일가견이 있는 흑인 소년간의 쉽지 않은 사랑을 다루고 있는 이 영화에서 춤은 두 사람을 연결하는 중요한 끈이다. 사실상 그 둘을 연결시키는 것은 ‘힙합’이다. 백인 소녀와 흑인 소년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장으로서의 힙합이라. 힙합의 ‘긍정적’ 사회적 영향력을 이렇게 부각시킨 영화는 아마도 드물 것이다. 처음 힙합이 출현했을 때, 백인들은 그 적나라함이 가지고 있는 비교육성에 치를 떨었다. 그러나 내막을 들여다 보면 그 ‘리얼’한 까발림에 두려워했다고 하는 게 옳을 것이다. 힙합처럼 저질인 음악이 당장 사라지리라고 장담하던 백인우월주의자들은 오늘날 뭐라고 할 것인가. 아마도 ‘말세다’라고 말하겠지. 그러나 그런 잘못된 취급에 아랑곳없이 오늘도 힙합은 천천히, 끈질기게, 그리고 힘있게 새로운 스타일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세이브 더 라스트 댄스> 같은 상업영화가 이렇게 힙합에 호의적인 것을 보면 이제 힙합은 백인, 흑인 할 것 없이 즐기는, 메인스트림에 진입한 문화가 된 것일까. 이 영화의 스코어는 마크 이샴이 맡았다. 말할 것도 없이 그는 현존하는 최고의 영화음악가 중의 한 사람이다. <타임캅> <숏컷> 등에서 인상적인 스코어로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그이다. 그는 영화음악뿐 아니라 재즈, 뉴에이지 분야에서 성공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솔로 아티스트이기도 하다. 특히 그가 1990년에 발표했던 <마크 이샴>은 그래미상을 타기도 했다. 그의 이력에 가장 빛나는 대목은 역시 <흐르는 강물처럼>의 감동적인 스코어로 오스카상을 거머쥔 것. 영화의 감동과 더불어 이 영화의 스코어는 쉽사리 팬들의 가슴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스코어는 마크 이샴이지만 이 영화의 음악적 분위기를 끌고 가는 것은 당연히 힙합이다. 영화의 사운드트랙 CD는 비교적 탄탄하게 만들어진 힙합, 리듬앤블루스로 채워져 있다. 흑인과 백인의 만남과 사랑을 그린 영화치고 사운드트랙은 철저하게 블랙이다. 물론 테마는 신디 로퍼의 노래에서 차용한 긴 해도 신디 로퍼로부터 암시받으려 했을지도 모를 반항적인 십대 소녀의 느낌이 이 노래에서 연상되지는 않는다. 철저하게 리듬앤블루스적으로 재편곡된 곡이기 때문이다. 거기다 메인 테마만 신디 로퍼의 것을 가져다 쓰고 중간에 나오는 랩은 신디 로퍼와는 정말 아무 상관이 없다. 사운드트랙 앨범에는 오랜만에 보는 뮤지션들도 들어 있어 힙합 팬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그중에 가장 눈에 띄는 뮤지션은 역시 아이스 큐브. 힙합 역사상 가장 적나라한 갱 분위기를 연출했던 NWA의 핵심 멤버였던 그는 그 힙합집단에서 뛰쳐나와 욕설과 폭력이 가득한 라임으로 악명을 떨쳤다. 워낙 풍기는 분위기의 선이 확실하여 영화배우로도 몇번 캐스팅되었던 그는 갱스터 랩의 상징적 존재 중의 하나이다. 그런 그가 이 사운드트랙 앨범의 한 트랙을 장식하고 있다. 씹어 뱉는 듯한 그의 랩은 여전하다. 시비거는 듯한 그 톤이 나이를 먹어도 많이 무뎌지지는 않았다. 썩어도 준치라고, 이미 한참 아래의 동생들이 힙합 신을 장악하고 있으나 그의 공격성은 예전과 그리 많이 다르지 않다. 그의 팬들이 반가워할 것 같다. 그외에도 트라이브 콜드 퀘스트에서 활동하던 전설적인 큐 팁, 야비한 느낌으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스눕 도기 독, 정통 리듬앤블루스 보컬을 자랑하는 케 시아이 앤 조조 등 흑인음악 신의 내로라 하는 뮤지션들이 많이들 불려나왔다. 이만한 컴필레이션이 가능하게 하려면 꽤 돈도 많이 썼을 것 같다. 그래도 힙합은 돈이 된다. 우리나라에서도 그건 마찬가지이다. 힙합은 속된 말로 짤없이 돈을 긁는다. 상업적? 돈밖에 몰라? 그런 평가 앞에서 주저하지 않는다. 메이저 레이블들은 그걸 잘도 이용한다. 성기완/ 대중음악평론가 creole@hitel.net

무하마드 알리는 어떻게 세상과 싸웠는가

복싱은 본능과 가장 지근 거리에 위치한 스포츠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의 생각처럼, 개인간의 분쟁을 해결하는 가장 원초적 방법론과 복싱 사이에 확실한 유사성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찬찬히 따지고 들어가면, 복싱은 매우 문명화된 `스포츠`다. 무엇보다도 복싱은 공격 부위와 방법을 엄격히 제한한다. 정확히 말해 상대의 벨트 라인 위쪽, 신체의 앞 부분을, 그것도 너클 파트라는 주먹의 특정 부위만을 써서 공격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일단 균형을 잃은 상대를 가격하는 것은 반칙이다. 게다가 상대를 가격하는 것은 이쪽의 맨주먹이 아니다. 글러브를 착용하고, 3분간 경기한 뒤 1분을 휴식하며, 정해진 시간 내에 승자가 가려지지 않을 경우, 점수로 승패를 가름한다는 이른바 퀸즈베리 룰(Queensberry Rule) 도입 이후, 복싱은 야성의 잔재를 털어내고 문명의 전당 안으로 진입하였다.그리고 어느 한쪽이 완전히 나가떨어지지 않더라도, 10초 동안 일어나지 못하면 그대로 승부를 마감하거나, 선수들의 안전을 위해 링의 로프를 3현에서 4현으로 촘촘히 하고, 체급의 간격을 더욱 좁혀 안전사고를 가능한 한 미연에 방지하는 등 나름대로 진보의 행마를 늦추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두 경기자의 주먹을 부드럽게 감싸는 글러브라는 완충물은, 이를테면 문명을 상징하는 도구에 다름 아니다. 왜 복싱은, 알리는 위대한가? 스포츠 경기로서 복싱의 위대한 점은 어디에 있는가. 복싱의 위대함은 중국 문명의 위대함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그렇다면 중국 문명이 위대한 문명이라 불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대륙을 통일한 진시황이 문자와 도량형과 궤(마차바퀴 축의 길이)를 통일한 이후, 중국에서는 한자(漢字)라고 불리는 표기체계가 흔들림 없이 수천년을 이어져 내려왔다. 노예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쉬운 글자라 해서 진시황이 예서(隸書)라고 명명한 당대의 표준서체는 2200여년이 지난 지금 도장포에서나 주류 글자체 취급을 받고 있는 처지지만, 제자원리가 현행 상용한자와 통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현역 글자체인 것이다. 이 유구한 일관성. 복싱 역시, 고대 올림픽 경기와 비교해도, 그다지 경기 형태가 변하지 않은 종목 가운데 하나이다. 이 말은, 복싱에는 유사 이래 숱한 이들이 고구하고 분투한 자취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뜻이다. 2천년의 더께를 얹은 테크닉과 훈련법이 아직도 현장에서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는 사실을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위에서 말한 문명과 역사의 뒤안길에는, 자본주의와 상업성의 도도한 물결이 있다. 복싱은, 어떤 점에서는 상품화하기가 가장 용이한 스포츠다. 무엇보다도 복싱은 기본적으로 개인 경기이다. 구기 경기에 비해 경기자를 양성하는 비용이 상대적으로 저렴하다는 뜻이다. 용구나 시설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복싱은 고대 영웅담이나 서사시의 현대적 대용물이다. 영웅적 인물이 만난신고를 헤치고 갖은 고생 끝에 절정 직전에서 좌절하거나 혹은 정상에 올라 희열을 맛본다는 구조는 더 꾸미고 말고 할 것도 없이 복서들의 삶에 고스란히 뿌리를 담그고 있다. 그리고 승부의 의외성. 통계적으로, 일발역전(一發逆戰)의 러키 펀치가 터지는 경우는 극히 드물지만, 복싱은, 아무리 세 불리하고 점수에서 뒤지고 있다 하더라도, 최후의 순간까지 승리에의 희망을 간직할 수 있는 유일한 스포츠다. 이처럼 별다른 각색을 할 필요도 없이, 기존의 요소에 약간의 양념만을 가하면, 복싱은 경기 외적인 파생상품을 가장 수월하게 만들 수 있는 스포츠이기도 하다. 복싱의 자본주의적 측면은 경기 방식에서도 잘 드러난다. 텔레비전이 세계 스포츠를 좌지우지하는 실질 권력으로 등장한 이후, 복싱은 이 막강한 대중매체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라운드 사이사이의 시간은, 시청자들의 집중도라는 기준으로 평가하면, 더할 나위 없이 농도가 짙은 광고 시간이다. 게다가 복싱은 경기자의 모습이 화면에 가장 크게 잡히는 스포츠이기도 하다. 경기복으로부터 신발이며 헤어스타일에 이르기까지 광고탑으로 이용할 거리가 얼마든지 널려 있다는 뜻이다. 상대방 선수 신발바닥의 광고권을 사고 싶다는 뼈있는 농담(우리 편이 KO로 이길 것이라는 뜻. 길게 누운 상대 선수를 비추는 화면에는 틀림없이 발바닥이 들어가야 하므로)은 기실 100% 농담만은 아닌 것이다.56승 중 KO승이 37번 그렇다. 복싱은 문명이고 역사이며 자본주의이고 상업주의이다. 복싱의 위대성은, 이 겹겹의 울타리를 한꺼풀만 걷어내면, 거칠게 포효하는 인간의 야성과 바로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야성과 문명이 동전의 앞뒷면처럼, 이렇게 가까이 붙어 있는 경기가 복싱 외에 달리 무엇이 있단 말인가. 사람들은, 무하마드 알리가 누구냐고 묻는다. 감히 단언하건대 알리는 복싱이 낳은 사상 최고의 전사(戰士)이다. 알리에게 승점을 기록한 3인의 복서 중 한 사람이자 그의 턱을 부숴놓은 유일한 인물인 켄 노턴은(알리와 통산 1승2패) ‘복싱은 알리에게 많은 것을 주었다. 그러나 알리는 복싱에게 더 많은 것을 주었다’라는 헌사를 바치기도 했다. 근현대사의 위대한 인물들의 초상을 모아놓은 영국 초상화 박물관(런던)에 가면, 전 영연방 헤비급 챔피언 헨리 쿠퍼(알리에게 2전2패. 두번 다 KO패)의 초상화를 발견할 수 있다. 선정 이유는 그가 알리를 녹다운시킨 최초의 복서라는 것.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이 아니고, 단지 알리를 한 차례나마 주저앉혔다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인물로 불릴 충분한 이유가 있다는 이야기다. 전문가들 중에는, 알리를 고대 그리스 시대를 포함하여 가장 위대한 복서로 꼽는 사람들이 많다. 고대 그리스 시대의 복서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인간의 신체를 가지고 알리보다 훌륭한 경기를 펼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알리는 도대체 얼마나 위대한 복서란 말인가?역사의 물줄기를 좇아가다 보면, 역사가 어느 특정한 개인과 만나 폭포처럼 분출하는 지점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그러한 역사적 개인들을 천재 혹은 시대의 창조자라고 부른다. 알리는, 시대의 창조자라고 불릴 당당한 자격이 있다. 경기장 안팎에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그보다 더 수많은 사람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은 찾아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단순한 일개 운동 선수가 아니었다. 경기 내적으로 보면, 그는 복싱 기술을 혁명적으로 뒤바꾼 사람이다. 헤비급이라는 체급에 스피드와 풋워크라는 개념을 도입하고 이를 실제로 보여준 최초의 인물이기 때문이다.스피드와 풋워크는 실상 새로운 개념은 아니다. 그러나 헤비급에 통용되던 개념은 아니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스피드와 풋워크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순발력이다. 그러나 순발력과 파워는 양립하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면 한꺼번에 앉고 설 수가 없는 것처럼, 개개의 복서는 자신의 장기를 살려 한쪽 길로 매진해야 한다. 그런데 헤비급에는 거의 모든 선수들이 파워쪽을 택하는 불문율이 있다. 펀치력은 체중에 비례하여 증가한다. 그러나 맷집은 체중에 비례하여 증가하지 않는다. 중량급으로 갈수록 KO로 판가름나는 경우가 많은 것은 이러한 까닭이다. 헤비급은 체중 제한의 상한선이 없는 체급이다. 그러므로 순발력을 이용하여 점수를 많이 벌어놓아도, 한방을 제대로 허용하면 만사휴의(萬事休矣)로 돌아갈 위험성이 상존한다. 확률상, 스피드의 길을 추구하려야 추구할 수가 없는 것이다. 알리는, 불가능해 보이는 이 길을 걸어갔다. 그리고 아무도 예상치 못한 방법을 써서 보란 듯이 성공했다. 오청원(吳淸源)의 신포석이 이런 느낌이었을까. 알토란 같은 귀와 변을 모두 내주고, 황무지처럼만 보이는 중원에 꿈을 심는 다케미야(武宮正樹)의 우주류(宇宙流) 바둑이 이런 느낌이었을까. 비킬라 아베베는 올림픽 마라톤을 2연패한 최초의 선수이기 때문에 추앙받는 것이 아니다. `지구력`만으로 시종하며 42.195m를 달리는 마라톤에 `스피드`라는 개념을 최초로 도입했다는 사실, 그리고 20분대 초반에 머물던 마라톤 기록을 10분대 초반으로 획기적으로 끌어내린 업적 때문에 사관(史官)들의 평가를 받는 것이다(64년 도쿄올림픽 우승 기록은 2시간12분11초2). 알리는 선수생활 내내 상대의 몸통을 거의 공격하지 않았다. 오직 안면만을 공격해도 충분히 승리할 수 있을 만큼 그의 스피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알리가, 스피드가 극한에 다다르면 그것이 파워를 대신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는 사실이다. 짧게 끊어치는 정확한 펀치. 알리는 56승을 거두었고 이중 37승이 KO승이다.장원재/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비교연극학, 스포츠평론가<사진설명>1.2 무하마드 알리3. 1996년 아틀랜타 올림픽 성화봉송 최종주자로 나선 알리 4. <알리> 촬영현장에서 마이클 만 감독과 이야기를 하는 알리의 최근 모습▶ 무하마드 알리는 어떻게 세상과 싸웠는가(2)▶ <알리> 주연배우 윌 스미스

화통한 배우 전도연 vs 소심한 감독 류승완 [1]

“누구라고? 전도연?” 류승완 감독이 <피도 눈물도 없이>의 첫 번째 카드로 전도연을 주저없이 내밀었을 때, 다들 의아해했다. 충무로 최정상의 여배우와 밑바닥 B급 무비를 신봉하는 키드와의 만남이라니…. “변신이 필요했던 배우와 흥행이 불안했던 감독의 만남이군”이라고 혹자들이 쑥덕거릴 만도 했다. 촬영에 돌입해서도 수군거림은 그치지 않았다. 현장 소식통은 “감독과 배우의 궁합이 찰떡이다”는 그 흔한 소문 대신 “서로를 좀 어려워하는 것 같다”는 추측만 들려줬다. 양수리와 인천과 수색의 현장을 직접 들여다봤을 때도 정말 그런 듯했다. 짬을 내서 청취를 시도했지만, 서로에 대한 멘트는 ‘영리한 배우’와 ‘세심한 감독’이라는 짧은 수식의 선을 넘지 않았다. 붙박이는 아니었으니 본 것만으로 모든 것을 안다고 할 수도 없겠고, 현장에서야 제3자가 모르는 감독과 배우의 긴장이 존재하는 걸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어쨌든 두 사람은 꽤 시간이 지난 뒤에도 멀어보였다. 그렇게 1년이 흘렀다. 하지만 감독과 배우는 얼마 전 홍릉에서 열린 기술시사에서 함께 영화를 본 뒤, “어때요?”라는 질문과 “좋네요”라는 답변만을 주고받았을 뿐이다. <피도 눈물도 없이>의 최종 프린트가 공개된 지난 2월14일. 개봉을 앞두고 이어지는 인터뷰에 녹초가 된 두 사람을 어둑어둑한 7시에, 그것도 험악한 서울 공덕동의 한 식당으로 유인해서, “이제는 말할 수 있는 것 아니냐?”며 종용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올해 서른이 된 73년 소띠, 동갑내기들의 거칠지만, 애정어린 ‘야자타임’은 바쁜 촬영일정 속에서 텔레파시로만 나눴던, 혹은 미처 못 나눴던 이야기들로 그렇게 시작됐고, 자리는 2시간 넘게 계속됐다.

8월의 크리스마스 DVD 리뷰

1998년, 감독 허진호 자막 영어, 한국어, 일본어 오디오 돌비 디지털 2.0 화면포맷 아나모픽 1.85:1 지역코드 0 출시사 새롬 요즘엔 우리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빼면 일상적인 대화가 진행이 안 될 만큼 재미있고도 다양한 영화들이 줄줄이 개봉되고 있다. 하지만 불과 몇년 전만 해도 상황은 많이 달랐다. 우리 영화에 대한 상품적 가치를 인정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는 얘기다. 그런 큰 변화가 진행되던 몇년 전의 시점에 나는 미국의 한 시골 동네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이런저런 매체를 통해 참신한 우리 영화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개봉되고 있다는 소식은 들려오는데 전혀 볼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사실 처음에는 ‘그래 봤자… 아마 거품일거야…’라며 애써 궁금한 걸 ‘무시’함으로써 넘어가려 노력했는데, 날이 가면 갈수록 더해지는 대단한 소식에 오히려 궁금증만 더해 갔다. 그런 궁금증에 대해 은근히 열을 받은 나는 미국으로 건너오는 인편을 수소문해 최신 한국영화 20여편을 케이스까지 다 갖춘 비디오 테이프로 공수받기에 이르렀다. 그때 내게 공수돼온 비디오들 중에서, 가장 먼저 손이 간 영화가 바로 . 그러나 너무 큰 기대를 해서였는지, 막상 영화를 보고 난 뒤에는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힘든 느린 템포의 멜로영화라 신선하긴 한데 조금 지루하다’라는 자체평가를 내렸다. 그런데 얼마 전 출시된 DVD를 본 뒤에, 나는 당시 나의 평가를 고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한석규의 자는 모습으로부터 시작되는 자연광의 부드러움이 화면 위에 생생하게 살아나면서, 전체적으로 따뜻하고 안정된 색감을 유지하고 있는 이 영화는, 분명 내가 2년 전에 봤던 그 영화와 달랐기 때문이다. 기술적인 이유를 꼽으라면 원본의 네거필름에서 바로 텔레시네를 했기 때문에, 비디오와 달리 필름의 느낌이 그대로 살아날 수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물론 허술한 원본필름의 보관상태를 반영하듯 가끔 잡티가 보여 혀를 차게 만들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서플먼트에 담겨진 허진호 감독의 나지막한 음성해설로 대표되는 이 따뜻한 느낌은 DVD 전체에서 풍요롭게 뿜어져나오며 잔잔한 즐거움을 새록새록 선사한다. 웃겨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는 배우 혹은 제작진이 음성해설의 중요한 의미를 계속 방해하는 식의 서플먼트와는 차원이 다르다. 그런 의미에서 DVD는, DVD가 뭔가 조용히 집중하고 음미할 만한 영화에 대해서도 상당히 좋은 매체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 하나의 실질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이 밖에도 DVD에는 국내 모 케이블 TV에서 방영된 50여분짜리 제작다큐멘터리와 O.S.T(상당량의 한정판에 한해서)까지 들어 있어 일본과 중국에서 이미 출시된 타이틀과 차별화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상처` 깊은 소희 온몸으로 느끼려 휴학까지 했어요

열일곱 살 소희를 연기한 김민정씨는 올해 갓 스물이다. 지난해 한양대 연극영화학과에 입학했지만 한 학기밖에 다니지 못했다. 소희 때문이다. “촬영에 몰두하기 위해 휴학했어요. 소희가 한 학기를 잡아먹은 거죠.”<버스, 정류장>의 소희는 연기하기 쉬운 캐릭터가 아니다. 열일곱의 나이에 세상의 부조리를 거의 다 알아채버린 데다 상처와 환멸이 지우기 어려울 만큼 깊다. 소희란 캐릭터와 자신의 공통점이 있느냐고 묻자 그는 펄쩍 뛴다. “너무도 다르죠. 원조교제나 자살 같은 일들은 신문지상에선 많이 봤지만 제 주위에선 보지 못했어요. 그렇지만 소희라는 아이를 연기하는 일은 매우 흥미로웠어요. 말투와 행동도 재미있지만 어른들도 감당하기 힘든 조숙한 아이라는 설정이 매력적이었죠. 직접 소희처럼 깊은 상처를 겪어보진 못했지만, 그런 아이를 표현하는 일에 거부감은 없었어요. 사람들은 누구든 상처를 입고 살아가게 마련이잖아요? 크든 작든. 다른 사람들이 상처라 여기지 않더라도 자신에겐 아픈 데가 있을 수 있잖아요. 그런 느낌으로 소희의 마음이 되려고 노력했어요.”영화는 상처 입은 두 사람의 만남에 관한 이야기이면서 ‘성숙’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연기하면서 사실은 저도 많이 성숙했다는 느낌이어요. 소희나 재섭이 흔히 볼 수 있는 캐릭터는 아니잖아요? 그런 이들의 내면을 이해하려고 고민하다 보니 나 자신도 조금은 컸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면서도, “진실이 뭔지 아세요? 거짓이요!”라는 소희의 대사는 “지금도 이해가 안 간다”고 털어놓을 만큼 솔직하고 당차다는 점이 그와 소희의 공통분모일 것같다.성인 연기자로선 이번 작품이 처음이지만, 그는 이미 지난 93년 <키드캅>이란 영화에 아역으로 출연한 바 있다. 텔레비전 드라마의 아역 배우로는 12년의 경력을 쌓았다. “아역을 오래 한 경우 연기 변신에 성공하지 못하는 경우가 더러 있는데, 전 그러고 싶지 않아요.” 이번 작품이 그에게 남다른 의미를 지니는 건 이 때문이다. “영화를 찍으면서 ‘배우’라는 자의식이 훨씬 강하게 들었어요. 깊이 있는 작업을 집중해서 하는 점도 좋았구요.” <버스, 정류장>에서처럼 작품과 캐릭터에 대한 진지한 자세와 ‘배우’로서 자의식을 버리지 않는다면, 그가 배우의 길을 가는 데 다른 걸림돌은 없지 않을까.이상수 기자▶ <버스정류장> 너도 세상과 담 쌓고 살았구나

가족이 내게 준 상처가 나를 키워놨을까

웨스 앤더슨 감독의 <로얄 테넌바움>은 문자 그대로 풍비박산이 난 어느 집안 이야기다. 집안 얘기라지만 진부한 가족주의에 대한 설교와는 친연관계가 없다. 영화는 가족이라는 모진 인연에 대해 진지한 어법 대신 시종 가볍고 익살스런 말투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로얄 테넌바움(진 해크먼)은 파산한 변호사다. 22년 전 아내와 별거한 이래 계속 거주해오던 호텔에서도 쫓겨났다. 테넌바움 집안엔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가 발에 채인다. 지성과 극성을 함께 갖춘 고고학자인 아내 애슬린(안젤리카 휴스턴)은 남다른 교육열로 남매 셋을 모두 천재로 키워냈다. 입양한 맏딸 마고(귀네스 펠트로)는 문학적 소양이 뛰어나 열다섯 살 때 이미 희곡으로 퓰리처상을 거머쥐었다. 둘째 채스(벤 스틸러)는 여섯 살 때 달마시안 무늬가 있는 생쥐를 교배해낸 괴짜다. 그는 어려서부터 부동산과 금융 분야에서 천재성을 발휘했다. 셋째인 리치(루크 윌슨)는 10대 때 주니어 테니스 세계 랭킹에 오른 테니스의 귀재다. 여기까지가 테넌바움 가문의 빛나던 시절이다. 로얄과 애슬린 부부가 별거에 들어간 뒤부터 세 천재는 박제가 되는 길을 걷는다. 문학과 세상 모두에 환멸을 느낀 마고는 하루 종일 목욕탕 안에서 담배와 텔레비전만 끼고 산다. 비행기 사고로 아내를 잃은 채스는 두 아이와 함께 언제나 빨강 아디다스 운동복을 입고 다니며 일주일에 열여섯 번씩이나 재난 대비 자체 비상훈련을 실시한다. 테니스 천재 리치는 마음 속으로 좋아했던 입양된 누나 마고가 결혼을 발표하자 경기 도중 망연자실해 완패한 뒤 망망대해를 떠돌며 여행으로 지새운다. 세 남매는 모두 세상에서 입은 상처가 아물지 않아 스스로를 과거에 가두고 성장을 멈춰버렸다. 테넌바움 집안의 회계사 헨리 셔먼(대니 글로버)이 애슬린에게 청혼했다는 얘기에 발끈한 로얄은 “위암 때문에 6주간의 시한부 삶을 선고받았다”는 거짓말로 테넌바움 집안에 다시 발을 들여놓는다. 이로 인해 흩어졌던 식구들이 다시 모인다. 그의 거짓말은 6주 만에 들통 나지만, 이 짧은 재회는 세 남매가 뒤집어쓰고 있던 각질에 작은 균열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프롤로그, 에필로그를 포함해 모두 10개의 장으로 구성된 영화는 각 장마다 등장인물 한 사람씩을 주인으로 삼아 그의 개성을 그려내면서 여기에 현재진행형의 사건을 얹어 이야기를 풀어간다. 모든 등장인물을 향해 따뜻한 시선을 고루 돌리고 있다는 게 이 수다스런 영화의 남다른 미덕이다. 가장 인상적인 캐릭터는 역시 로얄이다. 그는 아내 자식 재산 명예 등 모든 걸 다 잃어버린 철저한 패배자다. 그는 비록 자상하고 사려 깊은 아버지는 아니었지만, 폐쇄적으로 길러지는 손자들을 데리고 나가 쓰레기차 뒤에 몰래 올라타기, 대로 무단 횡단하기, 슈퍼마켓 물건 훔치기, 투견장에서 고함지르기 따위를 통해 일종의 ‘호연지기’를 길러줄 줄 아는 사람이다. 영화에서 각 인물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인생의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가장 가까운 가족이 가장 깊은 상처를 안길 수 있다는 건 이 영화가 보여주는 가장 차가운 역설일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인생에서 철저히 패배한 이가 오히려 다른 이들에게 매우 많은 걸 베풀어줄 수도 있다는 따뜻한 역설도 함께 보여준다. 이상수 기자leess@hani.co.kr

나의 소장 비디오: 0개

그러고보니 주변에 (공테이프를 제외하고) 비디오테이프를 하나라도 ‘소장’하지 않고 있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초기 흑백 무성영화와 각종 희귀영화들을 여기저기서 구해다 놓은 사람부터 시작해서, 부모님의 장롱 속에서 오래된 에로비디오를 발견했다는 친구의 증언에 이르기까지. 이런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더라도 대부분의 친구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비디오를 적어도 세편 이상씩은 꼭 갖고 있다. 나도 비디오 중고판매점을 지나칠 때면 들어가서 구경을 하곤 한다.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샅샅이. 그런데, 그러다가 그냥 나온다. 대여점에서 구프로라는 분류하에 단돈 500원이면 볼 수 있는 것들을 희귀품이라는 명목하에 몇 천원, 심하게는 1만원 이상씩 주면서 뽕빼먹을 만큼 보고 또 볼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500원이면 볼 수 있었던 영화에 대해 기어이 6천원의 연체료를 치르고야 마는 나 정도의 게으름이라면 빌려보느니 사보는 게 이득일 수도 있겠지만. 결정적으로 비디오는 카세트테이프나 시디와는 달라서, 내 것이 되는 순간 언제든 볼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영원히 보지 않고 방치해둘 가능성이 너무나 짙어지는 것이다. 친구에게 빌린 지 1년이 다 돼가도록 보지 않고 있는 비디오가 그 증거다. 단순 희귀품의 차원을 넘어서서, 아예 우리나라에서 개봉하지 않았거나 구할 수 있는 길이 없는 영화를 텔레비전에서 방영한다고 해도 나는 서둘러 녹화버튼을 누르는 대신 처음부터 보지 않은 영화는 아예 안 보는 습관 때문에 그냥 채널을 돌려버리곤 한다. 안녕,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겠지 뭐, 라고 생각하며. 영화에 대한 소유욕이 너무나 빈약한 까닭에, (나 같은) 친구에게 빌려줬다가 되돌려받지 못할 걱정도 없이 나는 항상 홀가분하다. 그 덕에 영화의 교과서라고 불리는 무수한 영화들을 아직까지도 기약없는 만남하에 남겨두고 있긴 하지만. 손원평/ 자유기고가 thumbnail@freech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