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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1997)

매력있는 특수촬영에 화려한 CG가 더해지다 <울트라맨 사가>

멸망을 앞둔 지구에 울트라맨 용사가 나타났다. 지구의 생명체를 제거하려는 악당과 거대 괴수에 맞서 아이들을 지키는 자칭 우주방위대 소녀들은 힘겹게 생존을 이어나간다. 위기를 감지한 다른 평행우주에서 울트라맨 코스모스, 울트라맨 다이나, 울트라맨 제로가 지구를 찾아온다. 거대 울트라맨에는 각각 우주인 타이가, 아스카, 무사시가 탑승해야 한다. 이들은 최강의 적수 하이퍼 젯톤의 각성에 맞서기 위해 ‘울트라맨 사가’로 합체해 최후의 승부를 펼친다. 머나먼 우주 저편 빛의 나라 거인족인 울트라일족이 거대 괴수의 위협에 처한 지구인을 돕는다는 설정의 <울트라맨> 시리즈는 1966년부터 TV로 방송된 특수촬영 시리즈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만든 안노 히데아키의 세계관이 <울트라맨> 시리즈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 텔레비전으로 소개된 적은 있지만 극장판으로 만나는 것은 드문 기회다. 화려한 CG가 더해져 낯설고 기이한 우주의 볼거리가 강화되었지만, 도심 괴수 대격전과 같은 특수촬영을 통한 아날로그 정서야말로 본 시리즈의 진정한 매력이다. TPC별에서 온 타이가(다이고)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울트라맨에 탑승하며 벌어지는 에피소드와 지구에 남은 불량소녀들이 자칭 우주방위대가 되어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도와주는 에피소드도 울트라맨과 괴수의 대결 못지않게 잘 엮어들었다. 소녀 방위대원으로는 일본 걸그룹 AKB48의 전 멤버인 아키모토 사야카, 마스타 유카, 고바야시 가나, 시마다 하루카 등이 나섰다.

‘이다’라는 이름의 60년대 폴란드

“내가 누군지, 무슨 일을 하는지 아니?” 자신을 찾아온 조카 안나에게 이모는 묻는다. 안나는 자신의 뿌리를 되짚어가야만 한다. 이 물음은 <이다>를 관통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이다>는 서원식을 앞둔 견습 수녀 안나가 이모 완다를 만나 자신을 억압하던 것들을 걷어내고 본래의 이름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다. 스탠더드 화면비의 흑백 화면 속에는 수녀복, 팝송과 재즈 등 이질적인 요소들이 뒤엉켜 있다. 기묘한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여정을 따르다 보면 1960년대 전후 폴란드 사회가 품고 있던 어둠이 보일 것이다. 보기 드물게 개봉하는 폴란드영화 <이다>(2013)는 극도로 조용한 흑백 영상으로 폴란드 사회가 안고 있던 어둠과 죄의식을 담아낸 작품이다. 1950년대 후반부터 60년대에 유럽 영화계를 석권했던 전성기 폴란드파 영화의 흔적이 느껴지는, 아울러 그 시기의 폴란드 역사를 더듬어볼 수 있는 작품이다. 가령, 폴란드는 원래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이 전개된 곳이지만, 다른 한편 유대인 박해의 역사 또한 갖고 있었다. 2차대전의 종전, 나치의 집단 학살이 끝난 뒤 유대인들은 수용소에서 해방되었지만 그들이 원래의 땅으로 돌아오는 것에 위험을 느낀 일부 폴란드인들이 유대인을 학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던 것이다. 1946년 7월 폴란드의 카일체에서는 유대인들이 폴란드 소년을 죽여서 종교의례에 사용했다는 거짓된 소문들이 퍼지면서 대학살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러한 학살은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유대인들이 전쟁 이후 유럽을 떠나도록 하는 계기로 작용하기도 했다. <이다>는 그런 어둠의 역사를 아주 은밀한 방식으로 보여준다. 영화에서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화면의 부자연스러움이다. 지금은 좀처럼 사용하지 않는 고풍스런 흑백 화면, 1.33:1의 스탠더드 화면비, 꽤 정적인 인물들의 부자연스런 연기(주인공 안나 역의 아가타 트셰부호프사카가 초연이기에 그렇다는 게 아니라, 반대로 그녀는 현실에서 부자연스런 인물을 가장 잘 소화하고 있다) 등이 그러하다. 영화는 가시성의 장치이지만 사각의 프레임으로 둘러싸인 시선의 한계, 카메라와 피사체 사이에 기록되는 시간, 구도의 중심을 불가피하게 갖는다. 프레임을 짜는 것은 공간의 배치에서 무엇을 포함하고 배제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일이기에, 특정한 경계들, 한계들, 가장자리가 만들어진다. 사실 이러한 한계와 제한 없이는 화면의 구도가 만들어질 수 없다. 그러므로 작가가 어떤 프레임을 선택하는가에 따라 어느 특정의 시점이 불가피하게 형성되어버린다. 그렇다고 영화가 내부만 지닌 가시성의 프레임에 갇혀 있지는 않다. 그랬다면 사진이나 회화의 모방, 혹은 텔레비전과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프레임 내부로의 유도와 외부의 소거는 대체로 텔레비전이 하는 방식이다. 반대로 영화는 바깥을, 주변을 끊임없이 내부로 끌어들여 세계를 확장한다. 첫 장면이 이를 예시한다. 1962년 겨울, 폴란드의 어느 수도원. 나이 어린 견습 수녀 안나가 복원된 예수 조각상에 채색을 하고 있다. 그녀는 수직으로 긴(수평으로 늘어진 최근의 화면들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길다는 의미다) 화면의 왼쪽 하단 끄트머리쯤에 위치한다. 나머지 화면의 1/4은 대체로 비어 있다. 이어지는 장면은 그녀가 잠시 붓질을 멈추고 예수상을 바라보는 순간으로 조각상과 안나가 화면의 중앙에 위치하는데, 꽤 부자연스런 연극적 구도처럼 보인다. 이어 반대의 각도에서 그녀가 조각상에 채색하는 순간은 화면의 왼쪽 하단에 둘이 위치하고 나머지 1/4은 비어 있다. 발의 클로즈업, 눈이 내리는 가운데 수녀원의 외부로 세명의 수녀가 예수상을 들고 정원으로 나가고 있는 장면이 이어진다. 이 또한 화면의 오른쪽 하단의 끄트머리쯤에서 아주 작게 그녀들의 모습이 보인다. 이 장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전후의 폴란드, 스탈린 사후, 고무우카 정권은 교회에 실용주의적인 태도를 보였고, 이 영화의 배경인 1962년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계기로 교회와 사회간의 관계가 새로이 혁신적으로 설정되던 때이다. 교회가 사회의식에 보다 관심을 갖던 갱신운동의 시기로, 수도원 바깥의 정원에 상을 세우는 것은 그러므로 꽤 상징적으로 표현된 시대상을 드러낸다. 작가는 여기에 다른 하나의 이야기를 덧댄다. 이어 우리는 원장 수녀가 고아인 견습 수녀 안나에게 수녀의 맹세를 하기 전에 유일한 육친인 완다 이모를 만나고 오라는 장면을 보게 된다. 그녀는 처음에 원치 않았지만 떠밀려 바깥, 즉 현실로의 여행을 떠난다. 역사의 가장자리에서 안나의 여행이란 관점에서 보자면 이 영화는 일종의 로드무비이다. 하지만 이 여행에서 중요한 것은 장소와 공간을 돌아다니는 탐색이 근원적으로는 내부와 외부의 접촉에 있다는 것이다. 이 테마는 흑백의 정적인 화면의 배치와 중심에서 비껴간 프레임 장치들을 통해 미학적 정당화를 얻는다. 대체로 인물들은 프레임의 좌우측 하단의 가장자리에 위치한다. 중심에서 벗어난 프레임으로, 이런 부자연스런 프레임은 화면이 스탠더드 사이즈일 때 손쉽게, 자연스럽게 발생할 수 있다(이 비슷한 사례가 구스 반 산트의 <엘리펀트>이다. 그는 스탠더드 사이즈를 모럴의 문제로 여겼다). 이때 우리는 영화를 성립시키는 프레임이라는 장치가 얼마나 불안정하고 부자연스러운 것인가를 느끼게 된다. 프레임 바깥에 잘린 부분들이 몹시 신경 쓰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꽤 민감하게 프레임을 보게 되고, 무언가 부자연스럽게 숨겨진 것들, 혹은 스크린에 이미 한발을 걸쳐놓고 있었지만 이제 막 그 안으로 들어오려는 무언가에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이 장치가 주제에 어울리는 이유는 수녀가 되려는 안나의 삶에 이미 한발을 들여놓고 있었지만 그녀가 몰랐던 일들, 과거 평범한 폴란드인들이 유대인에게 벌인 학살의 과거사들을 민감하게 볼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로드무비는 중심을 계속 변경하면서 주변을 넓혀가는 이야기와 역사를 보여주는 형식이다. 형식의 과잉이 도드라지는 작품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도리어 이 영화는 침묵과 풍경, 빛들만으로도 감정이 동하는 꽤 서정적인 영화다. 사실 이런 형식은 삶을, 역사를 표현하는 중요한 장치로 활용되고 있다. 1960년대 초, 마치 빙하기의 얼음이 녹아내리면서 숨겨진 것들이 조금씩 드러나던 때이다. 억압되었던 삶의 중심으로 주변에 있던 것들이 하나둘씩 들어오던 시기이다. 감독 파벨 파블리코프스키가 영화의 시대적 배경을 변경한 것도 그 때문이다. 원래 그는 1962년이 아니라 1968년 3월, 즉 폴란드에서 학생 시위가 발생해 혼란에 빠진 시기 당시 공산정권이 유대인을 희생양으로 삼아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반유대적인 배척운동을 벌였던 시기를 배경으로 시나리오를 만들었다고 한다. 당시 폴란드 정권은 약 1만5천명의 유대인을 강제로 추방했다. 하지만 지나친 정치적 내용들을 피하면서 불필요한 부분을 제거해 이야기를 단순화하고 인물을 함축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시대적 배경을 1962년으로 변경했다고 한다. 이 변화로 영화는 독일, 구소련의 지배하에 있던 폴란드 역사의 비극, 폴란드인과 유대인과의 미묘한 관계가 전후 10여년의 폴란드 역사의 숨겨진 단면으로 꽤 은밀하게 드러난다. 감독은 이 시기가 폴란드인이 가장 재기발랄하게 산 시대였다고 말한다. 이 시대의 자유로움은 영화 내내 흐르는 팝송과 재즈 음악으로 표현되고 있다. 특히 존 콜트레인의 음악이 그러하다. 물론, 여전히 과거 어둠의 잔여가 있다. 이의 가장 아름다운 사례는 외양간 창문에 어울리지 않게, 하지만 치명적인 아름다움으로 남아 있는 안나의 어머니가 남긴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이다. 아직 중심에 들어서지 못한, 하지만 끊임없이 주변에서 중심으로 회귀해 들어오는 것은 처음에는 인물들의 숨겨진 내력이다. 안나를 처음 만난 이모의 첫 질문은 “내가 누군지, 무슨 일을 하는지 아니”라는 말이었다. 누구인가, 무슨 일을 했는가, 라는 물음은 영화의 주된 질문이다. 안나는 자신이 유대인이며, 부모님이 폴란드인의 손에 살해당해 숲속에 버려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는 정체성의 혼란을 느낀다. 안나의 수녀원 바깥으로의 여행은 갑작스런 운명, 숨겨진 과거, 혹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 역사의 시간과 만나는 탐험이다. 가시의 영역을 불안정하게 좁힌 이 영화의 불완전한 프레임이란 그러므로 그 가장자리, 절단의 바깥에서 무언지 모를 것들이 방문하도록 허용하는 장치이다. 영화의 한 장면에서 부모님 묘소에 가보겠다는 안나의 말에 이모는 “시신도 못 찾고 있다. 그러다 신이 없다는 걸 알게 되면 어떻게 할래?”라 묻는다. 안나의 여정은 그러므로 상관적인 두 질문의 해답 찾기로 이어진다. 그 하나가 부모, 과거의 내력, 자신의 정체성 찾기라면 다른 하나는 그녀가 되돌아와야 할 신으로 열린 영혼의 탐구이다. 가장 멀리서 오는 지금 여기 프레임의 영역적인 경계를 해체하는 이러한 민감한 프레임(칼 드레이어의 <잔 다르크의 재판>에서와 같은 이런 식의 프레임을 파스칼 보니처는 데카드라주라 불렀다)은 구도의 중심성을 깨는 것만이 아니라 주체의 방향성을 상관적으로 잃게 한다. 인물을 프레임 바깥으로 기입되게 하고, 중심의 밖으로 놓는 것이 그 기능이다. 이때 프레임의 경계, 한계, 끝, 모서리는 그 모든 만남을 이루는 접촉의 장소가 된다. 안나의 여행은 그 모서리 바깥으로 나서는 탐색이며, 이때 수녀가 되려던 안나는 자기완결적, 자기충족적 단독자가 아닌 밖을 향해 열리는 존재가 된다. 안나의 ‘유대인 이다 되기’가 벌어지는 것이다. 이는 안나가 유대인 이다로 정체성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이다가 자신 내부로 침투되어 들어오는 것이다. 그때 그녀는 자신의 바깥에 있다. 그녀가 찾으려는 영혼 또한 수녀원의 내부가 아니라 바깥에 있게 된다. 영화가 후반부로 갈수록 우리는 안나/이다가 자기내면과 정체성을 외부와의 접촉으로 도달해가는 시도를 보이고 있음을 목격하게 된다. 그녀는 수녀복을 벗고 드레스를 입고,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고 색소폰 연주자인 젊은 청년(같은 해 나온 폴란드영화 <라이프 필스 굿>에서 장애인 연기를 놀랍게 소화한 데이비드 가드너가 역시 훌륭한 연기를 보여준다)과 사랑을 나눈다. 이를 일탈로 읽어서는 안 된다. 감독은 안나의 이모 완다가 맹신적이고 냉소적인 공산주의자이자 페미니스트이며, 무신론자이자 공산주의 정권 시절에 정치적 여론조작재판에서 검사로서 악명이 높았던 인물이라 소개한다. 그런 완다는 창밖으로 몸을 던져 프레임의 바깥으로 사라진다. 안나/이다는 반대로 어디로 향하는지 확인되지 않는 곳을 향해 길을 걷는다. 바흐의 아름답고 슬픈 멜로디가 흘러나온다. 그녀가 길을 걸어가는 모습은 이전의 정적인 카메라와는 달리 흔들리는 카메라로 보이고, 프레임의 외부와 가장자리를 민감하게 두었던 영화가 이제는 온전히 내부의 움직임에 집중하고 있어 차이를 보인다. 이를 어떤 구속으로 읽어야 할지 아니면 자유로움으로 보아야 할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기존의 테두리를 깨뜨리고 나가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내면의 영혼이 아니라, 몸의 바깥으로부터 그녀 자신에 접촉해 도달한 안나/이다의 또 다른 모험이 펼쳐지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다. 다른 한편, 이는 스스로 폴란드 영화계의 아웃사이더라 생각하는 감독 자신의 입장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는 1957년 바르샤바 태생으로 14살에 폴란드를 떠나 독일, 이탈리아, 최종적으로는 영국에 정착해 영화 작업을 하고 있다. 이 영화는 그가 처음으로 폴란드에서 만든 영화다.

[trans × cross] 40대를 넘어도 아줌마 역할에 갇히지 않는 여배우들이 많아지길

듀나가 에세이집 <가능한 꿈의 공간들>을 출간했다. 90년대 후반부터 SF작가로 활동한 듀나는 소설 집필과 더불어 각종 매체와 인터넷 게시판을 통해 사회 곳곳의 관심사에 대해 이야기를 해왔다. <씨네21> 초창기부터 영화에 관한 글과 평론을 기고해온 오랜 필진이기도 하다. 광활한 여백이 연상되는 제목에서부터 책의 성격을 가늠할 수 있다. <가능한 꿈의 공간들>은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수많은 이야기들”을 담은 ‘잡식에세이’다. 영화에 관한 글과 사회 비평을 비롯해 극장 환경, 디지털 문화 등 듀나가 꾸준히 관심을 표현해온 이슈들까지 빼곡하게 담았다. 듀나는 책에 다음과 같이 썼다. “SF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이야기의 영역을 커버한다. 일반적인 이야기꾼은 현실세계에서 가능할 법한 이야기를 다루지만, SF작가는 존재 가능한 우주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룬다.” 뾰족한 듯 섬세하고, 냉정한 듯 사려깊은 그의 글을 따라가다보면 무심결에 지나치고 말았던 공간들의 존재를 감지하게 될 것이다. 책 너머 다른 이야기도 들어보고자 듀나에게 필담을 청했다. -여러 지면과 게시판을 통해 독자와 만났지만 인터뷰는 낯섭니다. 평소 글을 쓸 때의 환경도 궁금한데요. 습관이나 원칙이 있나요. =이런 질문을 받으니 제가 마치 금욕적인 프로페셔널리즘에 도달한 것처럼 보이잖아요. 안 그렇습니다. 원칙이 있어도 못 지켜요. 프로페셔널한 장르 작가에 대한 판타지는 있지만 끝까지 판타지로 남겠지요. 시간 관리는 늘 엉망이고 마감 몇 시간 전에 초치기를 하고 전 제가 하는 일에 확신이 없습니다. 평생 이렇게 살다가 죽을 것 같습니다. 작업은 그냥 아무 데에서나 합니다. 모바일 환경 덕택에 이게 가능해졌죠. 이제 데스크톱 컴퓨터로는 작업하지 않아요. 전철 안에서 의외로 작업이 잘되고 침대 위에 굴러다니면서도 쓰는 편이고요. 이전에는 집중하려고 도서관 같은 곳을 시도해봤지만 전 어느 정도 어수선한 환경에서 작업이 더 잘되더군요. 지금은 방 안을 빙빙 돌아다니면서 태블릿으로 쓰고 있습니다. 답변을 처음 시작할 때는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코미디 빅리그> 재방송을 들으며 침대에 쪼그리고 있었어요. 그 사이사이에 화장실, 부엌 등을 방황했고요. 멋진 신세계입니다. -아카이빙은 어떻게 하나요. 고수하는 DVD, 책, 자료 정리법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드디스크에 ‘원고’ 폴더를 만들어 넣어둡니다. 관리하기 어려워지면 ‘원고2’를 만들어 그 안에 넣고요. 지금까지 폴더가 8개 생겼습니다. 전 정리엔 정말 재주가 없어요. 그나마 블루레이와 DVD는 알파벳으로 정리되어 있지만 모양과 크기가 제각각인 책은 불가능하죠. 주제와 장르별로 분류하긴 하는데 이게 그렇게 만만치가 않지요. 그러는 동안 새 책은 계속 쌓이고. 그래서 전자책의 발전에 기대가 큽니다. 세월이 흐르면 제 책장엔 전자책으로 완전히 변환 불가능한 그림책 종류만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어렵겠죠. 물건에 대한 애착이 심한 편이라. -책을 미처 읽지 않았을 독자를 위해, 비평에세이집 <가능한 꿈의 공간들>을 출간한 계기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만든 모든 책들과 같습니다. 출판사에서 만들자고 했어요. -원고는 어떠한 기준을 가지고 분류했습니까. =철저하게 랜덤이에요. 그냥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따라가봤던 거죠. 의도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 같습니다. 책은 혼자 만드는 게 아니고 저 혼자만 생각해서도 안 되지요. -영화에 관한 글, 취미에 관한 글, 특정 이슈에 관한 글, 혹은 이의 제기까지 짧고 다양한 글들이 일관되게 때로는 자유롭게 널려 있다는 인상입니다. 책의 구성에 관해 의견을 낸 바가 있다면. =규칙 같은 것 없이 자유연상으로 흐르는 책. 성공하지는 않았지만, 다음 목표도 그것이 될 것 같습니다. 논리적으로 완벽하게 구성된 책을 만들려면 처음부터 끝까지 새로 써야죠. 저에겐 그게 그렇게 올바른 작업 같지 않습니다. 미리 정해놓은 논리에 내용을 맞추기 시작하면 거짓말을 하게 되니까요. 앞뒤가 맞지 않는 건 오히려 당연한 것이고 일관성보다는 찰나의 진실이 더 중요하죠. -“극장에서는 상체를 숙여선 안 된다”는 내용으로 책을 마무리합니다. 극장 에티켓을 말미에 배치한 덕인지 굉장한 강조로 보이는데요. =모두에게 유익한 정보로 끝내고 싶었어요. 일반적인 우선순위에 따르면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지만 실제로는 아주 중요한 것들이 있어요. 그건 영화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감독이나 작가가 어깨에 잔뜩 힘주어 이야기하는 추상적인 주제보다 중간에 슬쩍 흘리는 실용적인 지식이 더 큰 도움이 될 때도 있죠. 둘 중 어느 쪽이 더 중요하다고 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저야 늘 후자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이고. 그래서 영화가 종종 잘못된 정보를 주면 아무리 재미있는 영화라도 신경이 쓰여요. 예를 들어 <다이하드2>의 클라이맥스 장면. 비행기는 그런 식으로 폭발할 수 없거든요. -트위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작가이기도 합니다. 인터넷 사용에 관해 쓴 ‘다들 그렇지 않나요?’를 읽으며 든 생각입니다만, 트위터를 사용하시며 글쓰기 방식에는 어떤 변화나 영향이 있었습니까. =트위터를 활용하는 게 아니라 그냥 트위터를 해요. 제가 이 매체를 제대로 활용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럴 의도가 있다면 장난감 사진을 올리거나 게임 화면 캡처 따위는 하지 않겠죠. 맞춤법에 더 신경을 쓸 거고 다음에 쓸 내용을 트위터에 흘리지도 않을 거고 140자의 한계를 보다 야무지게 활용하겠죠. 어차피 놀자고 시작한 건데 굳이 그렇게 치밀하게 계획할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변화가 있었나. 크게 달라진 건 없죠. 단지 트위터를 하면서 쌓은 생각들을 정리해 글로 옮기는 일이 늘어나긴 했죠. 이걸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그게 그렇게 문제인가 싶습니다. 어디서인가 일어날 일이 트위터에서 일어나는 것뿐인걸요. 여기서 손해보는 쪽이 있다면 그건 작업하는 사람이고. -비슷한 맥락에서 “대중은 언제나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가능성을 갖고 있다”고 쓴 것이 인상 깊습니다. ‘대중의 가능성’을 긍정하는 것은 작가로서의 관점인가요, 대중의 한 사람으로서의 관점인가요. =대중의 한 사람으로서죠. 잠재적 독자나 대상으로서 대중을 생각하는 것은 의미없는 일인 것 같습니다. 하나의 대상으로서 대중을 상상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런 걸 상상하기 시작하면 언젠간 자신과 독자 모두에게 거짓말을 하게 되겠죠. 사람들이 대중이라고 부르는 순결하고 단순하고 멍청하고 현명하고 기타 이것저것 모두인 무언가가 존재하긴 할까요? -최근 주목하는 이슈나 소재로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언제나 종말에 대해서 생각하지요. -젊은 여자 배우에 대한 한결같은 애정에 관해서도 묻고 싶습니다. 그들에 대한 애정과 호기심은 어디서부터 출발했는지요. =‘젊은 여자 배우’는 착시예요. 한국 배우들에게 그런 편향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건 특정한 환경 때문이죠. 90년대 이후 제가 관심을 가질 만하고 감정이입에 가능한 여성 캐릭터들이 등장했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여기서 걸리는 건 나이가 아니라 세대예요. 이들 중 상당수는 30대고요. 제가 팬질하는 외국 배우들에겐 그런 환경적 편향이 없죠. 그들 중 상당수는 이미 고인이고 심지어 몇명은 탄생 100주년을 넘겼어요. 한국 배우들에겐 그런 ‘팬질’이 힘들어요. 아무리 좋은 배우라고 하더라도 캐릭터에 대한 거부감이 ‘팬질’을 막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캐릭터들과 이들을 연기할 배우들이 움직일 만한 영역이 한심할 정도로 비좁은 게 한국 영화계죠. 어딜 가나 남자들이 지나치게 많고 그들은 제가 보기에 다들 비슷해요. 여성 캐릭터들이 많은 텔레비전으로 가면 또 비슷비슷한 전형적인 여성 캐릭터들을 보게 되고요. 다들 한국 사회에서 적당히 용인되는 전형성을 연기하고 있는데, 전 그게 많이 갑갑하고 무섭습니다. 이들의 욕망과 행동은 대부분 저랑 클릭하지 않아요. 그러니 그 틈 사이에서 제가 견딜 만한 그리고 기왕이면 감정이입도 가능한 무언가를 찾고 있는 거죠. 그러다보니 그 전형성에서 벗어난 캐릭터를 받아들일 수 있는 몇몇 배우들이 보이는 거고. 그들에게 주어진 기회라는 게 뻔하니까 관심을 가지게 되고. 결국 이들이 연기할 수도 있는 10% 정도 가능성에 대한 제 투자인 거죠. 이들 배우들이 40대를 넘어서도 아줌마나 사모님 역할에 갇히지 않고 제 관심을 끌 수 있는 캐릭터를 꾸준히 찾아낼 수 있다면 저도 좋겠죠. -올해는 <씨네21> 창간 20주년입니다. 오랜 필진으로서 앞으로의 <씨네21>의 방향에 목소리를 보탠다면요. =전 장르를 다루는 사람이니까 장르에 대한 관심이 더 커지면 좋겠죠. 책에서도 썼지만 극장 환경에 조금 더 신경을 썼으면 좋겠어요. 요샌 다른 매체에서도 이에 관심을 갖고 다루고 있는데, 일반 관객의 불편함만을 호소하는 것만으로는 멀티플렉스의 무책임함에 맞설 수 없어요. 보다 전문적인 관점이 따라야죠.

[obituary] 미스터 스팍을 떠나보내며

뾰족한 귀를 가진 지구인과 벌컨인의 혼혈 ‘미스터 스팍’으로 기억되는 배우 레너드 니모이가 향년 83살로 세상을 떴다. 1950년대부터 여러 TV시리즈물에 출연하며 얼굴을 알리기 시작한 그는 혼혈 항해사 스팍 캐릭터로 스타 반열에 올랐다. 연출자로서도 두편의 <스타트렉> 시리즈를 연출하기도 했던 그는 최근까지 J. J. 에이브럼스가 리부트한 <스타트렉> 시리즈에도 특별 출연하며 건재함을 과시했다. 그렇기에 SF 장르의 가장 선명하고 매력적인 캐릭터 중 하나였던 그의 사망 소식에 수많은 팬들이 깊은 애도를 표하고 있다. 영화평론가이자 SF소설가인 듀나가 그에 대한 추모의 글을 보내왔다. 그의 존재감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 그 이상이었음을 보여준다. 레너드 니모이가 지난 2월27일, 83살로 자택에서 세상을 떴다. 사인은 만성 폐쇄성질환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오랜 흡연으로 인한 발병 사실을 공개했던 그는 죽기 며칠 전까지 병원에 입원 중이었다. 죽기 며칠 전 그는 유언이라도 하듯 공식 트위터에 다음과 같은 마지막 트윗을 남겼다. “인생은 정원과 같다. 완벽한 순간은 있을 수 있어도 영원히 보존할 수 있는 방법은 기억뿐이다. LLAP(장수와 번영이 있기를).”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에 애도를 표했다. <스타트렉>에 같이 출연했던 윌리엄 샤트너와 조지 다케이와 같은 그의 연기 동료들은 뉴스가 뜬 지 얼마 되지 않아 트위터에 작별의 글을 남겼고 심지어 버락 오바마 대통령도 백악관에서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공식 메시지를 보냈다. 그중 가장 상징적인 애도의 제스처는 국제우주정거장에 체류하고 있는 미국인 우주비행사 테리 버트의 것으로, 그는 지구가 보이는 창에서 니모이의 트레이드마크라고 할 수 있는, 장지와 약지 사이를 벌리는 벌컨 손인사를 하는 자기 손을 찍어 인터넷에 올렸다. 레너드 니모이는 평생 134편의 영화와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출연했고 12편의 작품을 감독했으며 이외에도 사진집과 앨범, 회고록, 시집을 냈다. 가장 유명한 <스타트렉> 시리즈 이외에도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에 잠시 고정 출연하기도 했고 <인베이션 오브 바디 스내처즈> 시리즈 중 가장 암울한 2편에 나오기도 했다. 그는 UFO나 빅풋과 같은 소재를 다룬 다큐멘터리 시리즈 의 호스트를 맡기도 했는데, 이 작품의 소재 선택과 스타일은 시리즈와 <블레어 윗치>(1999)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엉뚱하게도 그가 감독한 작품들은 <스타트렉> 시리즈 몇편을 제외하면 대중적인 일반 드라마가 많았는데 그중 가장 히트작은 프랑스 코미디의 리메이크인 <뉴욕 세 남자와 아기>(1987)이다. 충분히 다채로운 경력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사람들은 ‘미스터 스팍’이라는 단 하나의 이름으로 레너드 니모이를 기억한다. SF시리즈 <스타트렉>은 시청률 부진으로 시즌3 만에 종영되었지만 그 뒤에 나온 영화 시리즈와 끝도 없는 재방영 덕택에, 미스터 스팍은 미국 SF 문화에서 불멸의 존재가 되었다. <스타트렉> 이후 그의 경력 대부분은 어느 정도나마 <스타트렉>의 이미지와 연결되어 있었다. 의 호스트로서 그가 적역이었던 이유도 아무리 프로그램이 허황된 주제를 다룬다고 해도 그의 믿음직한 스팍 이미지가 그 의혹을 지워주기 때문이었다. 그가 이후에 출연했던 SF 계열의 작품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도 없다. 아이작 아시모프는 60년대 이후 여성 SF작가가 급증한 이유를 두고 “미스터 스팍의 귀 때문이다”라고 말한 적 있다. 반쯤 농담이었겠지만 내용 없는 농담은 아니었다. 레너드 니모이가 무뚝뚝한 심각함으로 연기한 미스터 스팍의 개성과 매력은 기존 할리우드 SF의 공식을 완전히 뒤엎는 것이었다. 철저하게 이성과 논리를 추구하는 뾰족한 귀의 지구인/벌컨인 혼혈인 우주인의 인기는 SF 장르에 다양성과 복잡성의 문을 열었다. SF에 관심이 없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미스터 스팍을 통해 이 장르에 관심을 가졌고 그 안에 뛰어들었다. 여성 작가나 비백인 작가의 증가와 같은 건 그중 정상적인 현상이었다. 그보다 비주류의 현상이라면, 팬덤 사이에 커크/스팍 팬픽이 만들어지기 시작하면서 슬래시 팬픽의 끈적거리는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겠다. 무엇보다 스팍은 과학자, 엔지니어, SF 기크들의 영웅이었다. 별과 별 사이를 오가며 외계인 미녀와 데이트를 하고 외계 괴물과 레슬링을 하던 공식적인 주인공인 제임스 타이베리우스 커크 선장은 기존의 SF물의 백인 남자 액션 주인공과 크게 다를 게 없었다. 하지만 니모이의 미스터 스팍은 SF 장르에 최적화되어 있었다. 그는 이성과 과학을 추구했고 무엇보다 지구인들로 부글거리는 우주선 안에 홀로 남은 아웃사이더였다. 이런 그의 냉정한 성격은 종종 자폐인이나 아스퍼거 증후군의 증상처럼 보이기도 했는데, 실제로 자폐인 생물학자 템플 그랜딘은 스팍의 열렬한 팬이다. 종종 60년대 사회문제를 우주로 끌어들였던 오리지널 시리즈에서 그는 늘 믿을 수 있는 정확한 윤리적 판단을 내리는 쪽이었다. 니모이가 세상을 뜨자 과학자, 엔지니어 집단에 속한 수많은 사람들이 니모이의 죽음에 애도의 메시지를 보낸 것도 니모이의 스팍이 그들의 세계를 대표했으며 니모이 역시 그들을 존중했기 때문이었다. 1대 <스타트렉> 출연자로서 그는 반세기 동안 팬덤의 무게를 짊어져야 했다. 니모이는 두편의 회고록을 썼는데, 제목은 <나는 스팍이 아니다>와 <나는 스팍이다>였다. 니모이와 미스터 스팍이라는 캐릭터 사이의 애증을 짐작할 수 있다. 캐릭터의 인기가 배우로서의 경력과 자신의 이미지를 가로막는다고 생각한 니모이는 극장판 2편에서 자신을 죽여달라고 제작진에 요청하기도 했다. 요청은 받아들여졌지만 분노한 팬들의 아우성 때문에 스팍은 3편에서 부활했고, 심지어 3, 4편의 연출은 니모이 자신이 맡았다. 여기서 아서 코난 도일과 셜록 홈스의 관계를 떠올리는 분이라면 미스터 스팍이 언젠가 자신의 모계 조상 중 한명이 셜록 홈스라는 암시를 흘렸음에 재미있어할 것이다. 그가 세상을 뜨기 몇년 전 J. J. 에이브럼스가 <스타트렉> 오리지널 시리즈를 리부팅했고 미스터 스팍 역은 재커리 퀸토가 물려받았다. 비록 많은 팬들은 퀸토의 미스터 스팍이 오리지널의 희미한 복사품이라고 불평하지만, 그의 연기는 니모이 연기 진수의 상당 부분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비록 배우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만든 캐릭터와 연기 스타일은 다른 배우를 통해 대를 이어 시리즈에서 살아남아 있는 것이다.

마치… ‘죽음’ 같은 사운드

인간의 모습을 한 외계인이 있다면, 우리는 그가 외계인인지 사람인지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언더 더 스킨>은 ‘인간의 탈’(문자 그대로다!)을 쓰고 지구를 배회하는 외계인의 눈에 비친 인간세계를 투사하는 영화다. 그가 어째서 지금, 여기에 당도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설명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이 영화에서, 스칼렛 요한슨의 모습을 한 외계인을 외계인답게 하는 건 불균질한 사운드다. 라디오 주파수를 맞춰가는 과정에서 들릴 법한 노이즈, 조율이 잘못된 현악기에서 흘러나올 듯한 불협화음. <언더 더 스킨>의 일상적인 풍경은 뮤지션 미카 레비가 작곡한 매혹적인 불균형의 음악과 맞물려 긴장감 넘치며 위험이 서려 있는 공간으로 변모한다. 인간의 몸과 외계인의 마음, 이유 있는 친절함과 그 기저에 깔려 있는 냉혹한 의도. 서로 어울리지 않는 요소들이 위태로운 조화를 이루고 있는 이 영화에 어울릴 만한 음악가로 미카 레비는 최적의 선택지다. 1987년생으로, 다양한 장르를 혼합한 실험적인 음악으로 이름을 알린 이 싱어송라이터는 영국의 유서 깊은 음악 교육기관인 길드홀음악연극학교에서 작곡을 전공했다.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위해 곡을 쓰기도 했던 그녀는 현악기에 대한 자신의 지식을 십분 살려 <언더 더 스킨>의 불균질한 음악을 만들어냈다. 이 영화에서 미카 레비가 가장 자주 사용한 악기는 ‘비올라’다. “비올라의 음색은 견고하지 않다. 이 악기는 마치 무언가를 복사하고, 복사하고, 또 복사한 듯한 질감의 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공허함을 표현하기에 적합하다. 때로 이 악기는 우는 듯한 소리를 내기도 한다. 울림 또한 크지 않고. 마치 ’죽음’ 같은 소리라고 할까.” 그녀의 말처럼 의도적으로 조율하지 않은 <언더 더 스킨> 속 비올라의 선율은 이 영화의 심연을 효과적으로 표현해준다. 비올라와 더불어 심벌즈와 마이크의 잡음, 신시사이저 음향 또한 낯선 세계에 당도한 외계인의 심리를 대변하는 중요한 악기로 사용됐다. <언더 더 스킨>이 첫 영화음악 작업인 미카 레비는 ‘미카추 앤드 더 셰입스’ (Micachu and the Shapes)라는 밴드 활동으로 이름을 알렸다. 일렉트로닉 뮤지션 매튜 허버트가 프로듀서로 참여한 이들의 데뷔 앨범 ≪쥬얼리≫(2009)는 “겁 없이 실험적이고, 열광적인”(<텔레그래프>) 음악으로 가득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영국 음악평론가들로부터 그해의 범상치 않은 데뷔작으로 언급되곤 했다. 노이즈와 조율되지 않은 현악기의 사운드를 자유자재로 혼합하고, 필요하다면 진공청소기 소음까지 음악의 질료로 사용하는 이 아티스트의 실험정신이 앞으로 더 많은 영화의 자양분이 되길. 이 장면, 이 음악 <언더 더 스킨> 중 Drift 아름다움은 때때로 인간을 ‘죽인’다. 빼어난 외모로 남자들을 유혹해 자신의 아지트로 불러들인 다음, 그들을 심연에 가두어 피와 살을 발라내는 스칼렛 요한슨의 모습은 SF 장르 속 새로운 팜므파탈의 탄생을 가능하게 했다. 자신의 눈앞에 닥친 죽음도 감지하지 못한 채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남자들을 조명하는 장면에서 가 흐른다. 한없이 늘어지는 듯하다가도 현악기 특유의 날을 세우는 비올라 선율에 잠길 수 있는 장면.

시간을 포착하는 두 가지 방법

올해 전주국제영화제 스페셜 포커스 섹션에서는 왕빙의 다양한 작품들을 독특한 방식으로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준비되어 있다. ‘왕빙: 관찰의 예술’이라는 부제하에 진행될 이번 프로그램은 왕빙의 최근작 다큐멘터리 세편과 각각의 촬영현장에서 왕빙 자신이 찍은 40점의 사진들이 함께 상영, 전시된다. 왕빙의 사진 작품들은 이미 지난해 프랑스 파리의 퐁피두센터와 파리-베이징 갤러리(Galerie Paris-Beijing), 스페인 등지에서 몇 차례 소개된 바 있으며, 이번 전시에서는 실험영상작가 전하영이 큐레이터로 참여했다. 세편의 다큐멘터리 중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작품은 <아버지와 아들>이다. 중국의 시골 마을, 어린 두 아들을 키우며 석공으로 일하는 아버지 카이의 일상을 담은 이 작품은 이제껏 왕빙이 주목해왔던 ‘관찰의 시선’을 좀더 극단까지 밀고 나간다. 카메라는 침대 한개가 겨우 들어갈 좁은 방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올 아버지를 기다리는 두 아이의 지루한 일상을 지켜본다. 아이들은 침대에 누워 휴대폰을 쉴 새 없이 만지작거리거나 텔레비전에 텅 빈 시선을 던진다. 영화는 이들에게 더 다가가지도, 무언가를 요구하지도 않는다. 해가 저물어 방 안이 깜깜해져도 아이가 일어나 불을 켤 때까지 카메라는 어둠 속에서 숨죽이고 그저 기다린다. 무엇보다 인물들의 움직임조차 거의 없는 고정 숏들을 수분간 지켜보고 있노라면 영화에서 ‘시간’이라는 문제에 대해 자연스럽게 다시 생각해보게 될 것이다. 올해 로테르담국제영화제 스펙트럼 섹션에 초청된 바 있다. <흔적>은 왕빙 영화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짧은’ 상영시간(29분)을 가진 다큐멘터리로, 실험적인 성격이 좀더 강하게 드러난 작품이다. 1957년 중국의 반우파투쟁 당시, 강제노동수용소에 교화의 명목으로 잡혀왔던 수천명이 굶어 죽는 사태가 발생한다. 이 작품은 이제는 사라진 수용소 터에서 과거의 ‘흔적’들을 찾는다. 이를 위해 왕빙은 자신이 즐겨 사용해온 고정 카메라 대신 핸드헬드 방식을 택한다. 그리고 끝도 없이 이어진 황량한 벌판을 이리저리 헤매며 바닥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유골들과 작은 소지품들을 화면에 담는다. 흑백으로 기록된 이 영상은 많은 부분 아우슈비츠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든다. 인적이 드문 산속, 원시인처럼 동굴에서 살아가는 한 남자의 모습을 담은 <이름 없는 남자>는 2010년 작품으로 국내에서도 몇 차례 소개된 적이 있다. 영화는 어떠한 대사나 부연설명도 없이 주인공 남자의 동선을 따라 농사를 짓고, 물을 길어 밥을 하고 동굴에서 잠을 청하는 반복적 과정에 동행한다. 동굴이라는 좁은 공간에서 촬영하다 보니 카메라는 의도치 않게 종종 대상에게 가까이 다가서 있지만, 심정적으로 동요되지 않고 적정한 수준의 대상과의 거리를 찾아내는 왕빙의 직관적인 감각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시간을 멈추어 세운 사진보다 움직이는 이미지인 영화에 훨씬 더 많이 매혹된다는 왕빙이지만, 그가 이 세편의 영화를 만들면서 함께 촬영한 40장의 사진은 현실을 바라보는 왕빙의 시선을 영화보다 좀더 명확히 보여준다. 인스톨 형식으로도 상영될 영화와 함께 감상한다면 영화에서 왕빙이 담고 싶어 했던 시간을 사진이 어떻게 포착해내는지 비교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줄리언 무어] <스틸 앨리스>

“내가 사라지고 있는 것 같아.” 조발성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스틸 앨리스>의 앨리스에게서 사라지고 있는 건 몸이 아닌 기억이다. 기억을 잃는다는 건 곧 지나온 시간의 상실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녀에겐 이를 막을 방법이 없다. 그저 자신이 쌓아온 시간이 무너져내리는 걸 허망하게 바라볼 뿐. 앨리스는 유능한 언어학자로서 누구보다 언어의 조탁에 관심을 기울여왔고, 남편과 세 아이를 둔 엄마로서도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불행은 앨리스를 비껴가지 않았고 되레 그녀 안으로 깊숙이 침투해 들어간다. 처음에는 저녁 약속을 깜빡하는 수준이었지만, 이어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가늠하지 못하게 됐고, 마침내 가족과 자신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내가 누구인지도, 무엇을 더 잃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말하는 앨리스는 이 말이 얼마나 끔찍한지를 잘 안다. 하지만 머지않아 앨리스는 자신이 이런 말을 했다는 사실조차 잊게 될 것이다. 기억의 삭제, 자아의 상실이란 얼마나 비극적인가. 앨리스의 처연함은 줄리언 무어를 만나면서 그 비극성이 배가 된다. 잘 정돈돼 있어 쉽게 헝클어질 것 같지 않은 여자가 서서히 붕괴해가는 과정을 그녀만큼 잘 보여주는 배우가 또 있을까. 겉으로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는 중산층 가정의 안주인이 정신을 차리고 보니 비통함의 한가운데에 서 있게 되는 경우는 줄리언 무어의 연기 세계가 일궈온 핵심이다. 줄리언 무어의 인지도를 한껏 끌어올렸던 토드 헤인즈의 <파 프롬 헤븐>(2002)의 케이시는 그 시작이었다. 1950년대 미국의 평범한 가정에서 전업주부로 살던 케이시는 남편의 성정체성을 뒤늦게 알고 혼란에 빠진다. 그 순간, 줄리언 무어는 웃는 듯 우는 듯한 표정으로 되돌릴 수 없는 케이시의 삶의 균열을 절묘하게 포착해냈다. <디 아워스>(2003)의 로라도 마찬가지다. 남편과 아들과 함께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던 가정주부 로라는 문득 고요한 일상에 염증을 느끼고 집을 나선다. 안정과 불안정이라는 이분법 속에서 줄리언 무어는 늘 후자의 세계로 떠밀려 가거나 그 세계 안으로 스스로 걸어들어가는 쪽을 택하곤 했다. 여기에 더해 <스틸 앨리스>는 줄리언 무어가 가지고 있는 격조 있고 우아한 이미지를 역으로 이용한다. 비극과는 절대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줄리언 무어의 그 우아함이 앨리스를 만나면서 허물어져갈 때 슬픔은 더 커진다. 자신이 점점 기억을 잃어가고 있다는 걸 직감하며 앨리스가 보여주는 당혹스러운 눈빛은 <스틸 앨리스>의 모든 순간을 통틀어 가장 쓸쓸하다. 이런 감정 표현은 <매그놀리아>(2000), <디 아워스>, <세비지 그레이스>(2009), <클로이>(2010) 등에서 줄리언 무어가 능숙하게 표현해낸 불안과 음울한 기운의 연장선상에 있는 동시에 그보다 한발 더 나아간 애처로움이다. 앨리스의 초점을 잃은 눈빛을 볼 때면 마치 그녀 내부에 커다란 구멍이 만들어지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될 만큼 헛헛해진다. 줄리언 무어를 보고 “캐릭터가 느끼는 내적인 감정의 혼란을 마지막 순간까지 끌고 가는 능력이 탁월하다”라고 한 <가디언>의 평은, 그러므로 절대로 과장이 아니다. 올해 아카데미가 줄리언 무어에게 생의 첫 오스카를 안겨준 것도 같은 이유가 아니었을까. 신기한 건, 줄리언 무어가 표현하는 그 불안과 슬픔의 정서가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데 있다. 그 안에는 놀랍게도 용기나 결기와 같은 종류의 정조가 켜켜이 쌓여 있다. <스틸 앨리스>에서도 앨리스는 마냥 좌절의 상태에 머물지 않는다. 제목 그대로 앨리스는 어떻게든 계속해서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들이 기억하는 앨리스로 남아 있고자 한다. 알츠하이머가 한창 진행되던 와중에도 알츠하이머 학회에 나가 “이 세상의 일부가 되기 위해서, 예전의 나로 남아 있기 위해서 애쓴다. 순간을 살라고 스스로에게 말한다”는 말로 스스로를 독려할 때가 그렇다. 슬픔과 좌절로 신음하면서도 애상에 젖어 있지만은 않는, 기어코 그 좌절을 뚫고 나가려는 의지다. 비극 앞에서 당하고만 있지 않겠다는 앨리스의 결연함은 줄리언 무어의 연기로 비로소 완성된다. 점점 더 상태가 악화되는 앨리스가 미래의 자신에게 보내는 영상을 찍을 때도 그녀가 보여주는 침착하고 단호한 태도는 줄리언 무어의 다부진 말투와 표정 위에 자연스레 포개진다. 이처럼 줄리언 무어에게서는 도도함이나 고집스러움이라는 말로는 부족한 자신에 대한 굳은 믿음과 강한 자존감이 엿보인다. <눈먼 자들의 도시>(2008)에서도 그녀가 맡은 의사의 아내 역은 극 안에서 유일하게 책임감을 느끼는 인물이었고, 다소 황망한 결말로 이어진 <포가튼>(2004)에서조차 외부의 침입에서 아이를 구하려는 강인한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던가. 돌이켜보면 <스틸 앨리스>로 마무리된 2014년은 줄리언 무어에게는 기념비적인 한해였다. 앨리스를 연기하기 전, 그녀는 이미 세편의 영화 작업으로 평단의 지지와 상업적 성공을 두루 맛보고 있었다. 시작은 <논스톱>(2014)이었다. 비록 평단의 반응은 냉랭했지만 나쁘지 않은 흥행 성적을 거뒀고 곧이어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맵 투 더 스타>(2014)를 통해 칸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맵 투 더 스타>에서 줄리언 무어가 맡은 하바나 시그랜드는 영화의 등장인물 중 가장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캐릭터였다. 한때는 잘나갔지만 지금은 캐스팅 하나에도 전전긍긍하는 여배우 하바나는 거의 신경쇠약증에 걸린 사람처럼 행동한다. 죽은 엄마의 혼령에 시달리며 지칠 대로 지쳐 흐느끼거나, 할리우드에서 ‘퇴물’ 취급당하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를 때면 줄리언 무어의 진가가 발휘된다. 거칠 것 없어 보이는 하바나의 기운을 줄리언 무어는 자신의 왜소하지만은 않은 체구와 평소보다는 허스키한 목소리로 떡하니 받쳐낸다. 줄리언 무어 하면 곧바로 떠올려지는 초조하고 불안한 눈빛이 이번에도 빛난 것은 물론이다. 이후 그녀는 <헝거게임: 모킹제이>(2014)에 합류해 프랜차이즈영화에서도 무게감 있는 조연으로 극을 이끌었다. 데뷔 때부터 쉰살을 넘긴 지금까지 줄리언 무어는 독립영화와 블록버스터, 장르물과 정극 사이에서 경계를 두지 않고 거침없이, 또 쉼없이 연기 지평을 넓혀왔다. 이것은 또래의 여배우들, 아니 후배 여배우들까지 포함해 누구도 쉽게 이루지 못한 성취다. 그녀는 “감독이 하고자 하는 말이 명확하고 비전이 분명하다면 그가 누구든, 규모가 어떻든 마다할 이유가 없다”는 유일한 원칙만을 고수한다. 그녀가 신인감독 시절의 토드 헤인즈와 저예산영화 <세이프>(1995)를, 할리우드에 막 발을 들인 폴 토머스 앤더슨과 <부기 나이트>(1997)를 찍으며 그들의 성공의 견인차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시나리오를 보는 그녀의 탁월한 안목이 크게 작용했다. 이처럼 매 순간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길 주저하지 않는 줄리언 무어의 과감함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스코틀랜드 이민자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자란 유년의 경험 속에서 체득한 삶의 지혜가 큰 이유일 것이다. 어린 시절을 회상하던 그녀는 “여러 곳을 이주하면서 알게 됐다. 내가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나의 행동이 변한다는 걸. 캐릭터를 이해해야 하는 배우에게는 큰 도움이 되는 경험이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사람은 누구나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빠르게 받아들인 이 배우는 지금도 자신의 변화 가능성에 제약을 두지 않는다. 올해 개봉을 기다리는 <헝거게임: 모킹제이-파트2>(2015)의 출연을 비롯해 폐암으로 죽음을 맞이한 여형사의 실화를 다룬 <프리헬드>, 에단 호크와 호흡을 맞춘 <매기스 플랜>도 이미 촬영을 끝낸 상태다. 게다가 어린이 동화책 작가로도 성공적인 활동을 보이고 있다. 주근깨투성이인 얼굴 때문에 어린 시절 놀림거리가 됐던 자신의 경험을 살려 <주근깨투성이 딸기>(Freckleface Strawberry)라는 연작 동화를, 이민자 가정에서 겪은 본인의 일화를 옮긴 <우리 엄마는 외국인>(My Mom Is a Foreigner)을 발표해 상당한 인기를 얻었다. <텔레그래프>에 따르면 줄리언 무어는 앞으로도 다섯권의 동화책을 더 낼 예정이라고 하니 그녀의 자전 동화를 기다리는 팬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소식이다. 믿음직한 배우이자 작가인 줄리언 무어를 올해도 계속해서 만나볼 수 있다는 건 그 자체로 충분히 기쁘고 환영할 만한 일이 아니겠는가. Magic hour 여배우의 사자후 마음 수련을 하면 좀 나아질까. 풍경 소리를 들으면 좀 안정이 될까. <맵 투 더 스타>의 하바나는 지금 자기와의 싸움 중이다. 결과는? 대실패다. 하바나는 재기를 위해서라도, 자신의 평생 짐인 엄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맡고 싶었던 배역이 있었다. 하지만 마음 수련 중에 전해들은 결과는 비보뿐. 결국 그 자리는 다른 여배우의 차지가 되었다. 눈을 내리깔고, 코를 벌름거리며 숨을 고르던 하바나는 그 순간 제대로 폭발하고야 만다. 불안과 초조, 울분과 분노가 마구 뒤섞인 하바나가 된 줄리언 무어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격한 사자후를 내지른다.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렬하고 강력하게 줄리언 무어는 감정을 분출한다. 끊임없이 자신의 현재를 의심해야 하고 “그 애보다 내가 더 예쁘지? 내 피부가 더 곱지?”라며 자격지심에 똘똘 뭉쳐 있는 하바나. 성형수술과 보톡스를 싫어하고 자신은 배우라는 직업을 가진 한명의 인간일 뿐이며 그래서 가장 자연스럽게 사는 걸 지향한다고 말하는 줄리언 무어. 두 인물 사이의 간극을 알고 보면 훨씬 흥미로운 장면이다. 할리우드의 어두운 그림자, 그 야릇하고 치졸한 속내를 여지없이 까발린 <맵 투 더 스타>에서 과연 줄리언 무어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현지보고] 제68회 칸국제영화제 개막

금빛 칸 백사장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제68회 칸국제영화제가 5월13일 개막했다. 메인 상영관인 팔레 드 페스티벌 지붕에 탄생 100주년을 맞은 잉그리드 버그먼 포스터를 걸어놓은 올해 영화제는 새 시대를 열었다. 질 자코브 전임 집행위원장이 은퇴하고, 피에르 레스퀴르 새 집행위원장이 합류해 티에리 프레모 예술감독과 함께 투톱 체제를 이뤘다. <카이에 뒤 시네마> 장 미셸 프로동 전 편집장은 “피에르 레스퀴르는 ‘카날플뤼스’ 그룹 회장이었고,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의 측근이라 정치적인 수완이 좋다. 그의 프로페셔널하고 정치적인 관계가 영화제에 큰 힘을 불어넣어줄 것”이라고 힘을 실어주었다. 프랑스 시사주간지 <누벨 옵제바퇴르>는 “올해 라인업 발표 장면은 눈에 띄게 달랐다. 질 자코브가 사용했던, 소르본대학의 강의실 탁자와 비슷한 느낌을 주었던 딱딱한 가구를 치우고, 영화제 로고를 새롭게 입힌 새 책상에 앉아 경쟁부문 라인업을 발표하는 레스퀴르와 프레모는 TV 속 우스꽝스러운 인형 같았다”며 “어쨌거나 경쟁부문 19편 중 9편이 처음 선정된 감독들의 작품이다. 이것은 새로운 피를 수혈하고자 하는 쇄신과 노력을 상징한다”고 전했다. 새로운 출발을 염두에 둔 까닭일까. 올해 경쟁부문 라인업은 그 어느 때보다 고심의 흔적이 엿보이는 동시에 선정 결과를 둘러싼 말들이 많았다. 가장 눈에 띄는 건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포함한 유럽영화의 초강세와 아시아영화의 약진이다. 유럽과 영미권이 적절하게 양분해오다가 지난해부터 무게중심이 유럽쪽으로 살짝 기운 경쟁부문은 올해 그 현상이 더욱 두드러졌다. 그중에서도 경쟁부문 총 19편(미셸 프랑코의 <크로닉>과 귀욤 니클로스의 <더 밸리 오브 러브>가 뒤늦게 추가됐다.-편집자) 중 무려 5작품(<디판> <시장의 규칙> <마그리트 & 줄리앙> <나의 왕> 등)이 프랑스영화다. 이를 두고 프랑스 언론들은 상반된 반응을 보였다. <누벨 옵제바퇴르>는 “프랑스 영화의 새바람이 불었다. 지속적으로 경쟁부문에 이름을 올렸던 아르노 데스플레생 대신 발레리 도난젤리와 스테판 브리제, 마이웬 르 베스코 같은 신선한 얼굴이 들어간 것도 인상적이다”라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반면, 장 미셸 프로동과 <텔레라마>는 “칸이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영화제가 되려면 왜 다양한 나라에서 온 훌륭한 영화들을 소개하지 않는지 모르겠다”며 “영화제 심사위원들과 프랑스 영화산업이 너무 친근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영화제의 미래를 위협하는 요소가 될 수 있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티에리 프레모는 <텔레라마>와의 인터뷰에서 “영화제는 절대로 작품을 국적으로 분류해서 선택하지 않는다. 물론 프랑스영화가 많긴 한데, 경쟁부문에 이탈리아영화 역시 세편이나 있다. 과거 미국영화가 5편이나 포진한 사례도 있어 큰 문제라고 생각지 않는다”고 말했다. 티에리 프레모의 말처럼 프랑스 다음으로 많은 작품을 초청받은 나라는 이탈리아다. 매년 이탈리아영화 지지를 증명이라도 하듯 올해도 칸은 난니 모레티의 <내 어머니>, 파올로 소렌티노의 <유스>, 마테오 가로네의 <테일 오브 테일즈> 등 세편을 선택했다. 이밖에도 2009년 <송곳니>로 주목할 만한 부문 대상을 수상한 그리스의 요르고스 란티모스는 <더 랍스터>를 들고, 2011년 <오슬로, 8월31일>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된 노르웨이의 요아킴 트리에는 <라우더 댄 밤즈>를 가지고 다시 칸을 찾았다. 아시아 거장들도 칸을 찾았다. 지난해 칸에서 상영될 거라는 소문만 무성했다가 불발됐던 허우샤오시엔의 첫 무협영화 <섭은낭>이 드디어 정체를 드러낼 예정이다. 장편 연출은 2007년 주목할 만한 시선에서 상영됐던 전작 <빨간풍선> 이후 8년 만이며, 감독의 2005년작 <쓰리타임즈>의 두 주인공이었던 서기와 장첸이 다시 호흡을 맞췄다. 매 작품 꾸준하게 이름을 올린 중국의 지아장커와 일본의 고레에다 히로카즈 역시 각각 <산허구런>과 <바닷마을 다이어리>를 공개할 예정이다. 한국영화는 <무뢰한>과 <마돈나> 두편이 주목할 만한 시선에, <차이나타운>은 비평가주간에, <오피스>가 미드나이트 스크리닝에 초청받았다. 차고 넘치는 유럽영화와 달리 영미권 영화는 단 두편이다. 토드 헤인즈가 <밀드레드 피어스> 이후 5년 만에 내놓은 신작 <캐롤>과 2003년 <엘리펀트>로 황금종려상을 거머쥔 구스 반 산트의 신작 <씨 오브 트리스>가 그것이다. 모두 미국 감독 작품인데, 고작 두편이라고 해서 칸에서 할리우드의 영향력이 줄어들었다고는 볼 수 없다. <더 랍스터>에 콜린 파렐, 레이첼 바이스, 벤 위쇼가, <라우더 댄 밤즈>에 가브리엘 번과 제시 아이젠버그가 출연한 것을 보면 할리우드가 유럽예술영화에 얼마나 깊숙이 관여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있다. 또 영국영화는 단 한편도 없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칸 경쟁부문에 선정될 거라고 기대를 모았던 테렌스 데이비스 감독의 <선셋 송>과 벤 웨틀리 감독의 <하이-라이즈> 모두 후반작업을 끝내지 못해 불발됐다”고 아쉬워했다. 티에리 프레모 역시 “칸은 준비된 영화만 선정한다”면서 앞의 두편을 제외한 이유를 설명했다. <롤링스톤>의 피터 트래버스는 “저스틴 커젤의 <맥베스>,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더 랍스터>, 파올로 소렌티노의 <유스>, 토드 헤인즈의 <캐롤> 등 4편이 영국 제작사 필름9으로부터 투자받은 작품”이라며 어떻게 해서든 칸과의 연관성을 찾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나는 이 업계에 성차별이 내재한다고 본다. 칸영화제 출품작 1800여편 중 여성감독의 작품은 오직 7%뿐이라고 한다. 우리는 여성적인 관점을 좀더 알아야 한다.” 지난해 심사위원장이었던 제인 캠피온의 충고를 귀담아들으려는 의도일까. 올해 각 부문에서 눈에 띄는 점은 여성감독들의 작품이 많아졌다는 사실이다. 에마뉘엘 베르코가 연출한 개막작 <라 테트 오트>는 1987년 이후 첫 여성감독 개막작이다. 경쟁부문에는 발레리 돈젤리, 마이웬 르 베스코 등 2명의 여성감독들이 포진해 있다. 주목할 만한 시선 개막작으로 선정된 가와세 나오미 역시 여성이다. 경쟁부문을 제외한 주요 부문 심사위원장 역시 여성들의 차지다. 주목할 만한 시선의 이자벨라 로셀리니, 황금카메라상의 사빈 아제마, 비평가 주간의 로니 엘카베츠, 퀴어 종려상의 데지레 아크하반이 그들이다. 이런 분위기라면 시상식에서 여성감독의 수상 가능성이 좀더 높아지는 건 아닌지 조심스레 점쳐볼 만하다. 올해 작품 경향 중 가장 눈에 띄는 건 원작이 있는 작품이 많다는 사실이다. 마테오 가로네의 <테일 오브 테일즈>는 17세기 잠 바티스타바실레의 동화모음집이 원작이며, 토드 헤인즈의 <캐롤>은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소설 <프라이스 오브 솔트>를 각색했다. 1950년대를 배경으로 한 레즈비언의 사랑 이야기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바닷마을 다이어리>는 요시다 아키미의 동명 만화를 각색했고 저스틴 커젤 감독의 <맥베스>는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를 현대적으로 각색한 작품이다. 정치, 사회적 소재가 많았던 지난해와 달리 올해는 정치, 사회적 문제를 다룬 작품이 다소 줄었다. 5월12일 현재 공개된 정보만으로는 스리랑카 타밀 반군 출신 경비원의 사연을 다룬 자크 오디아르의 <디판>과 아우슈비츠에서 학살된 유대인의 시체를 태우는 유대인을 그린 라즐로 네메즈의 <사울의 아들> 정도만 있다. 특히, <텔레라마>는 “벨라 타르의 조감독 출신인 라즐로 네메즈가 논쟁거리를 제공할 것이다. 영화에서 홀로코스트를 재현하는 데 새로운 시각을 보여주고 있어 심사위원단 사이에서 적지 않은 마찰이 있었다”고 밝혔다. 개막작 <라 테트 오트> 리뷰 <문라이즈 킹덤>(2012), <위대한 개츠비>(2013), <그레이스 오브 모나코>(2014) 등 최근 칸영화제 개막작에 비하면 화려한 영화는 아니다. 화려함보다 내실과 안정을 기하려는 의도였다면 올해 칸의 선택은 현명했다. <라 테트 오트>의 주인공 말로니(로드 파라돗)는 소년 법원을 들락날락거리는 청소년이다. 6살 때 엄마에게 버림받은 이후로 공격적인 성향을 제어하지 못하고, 사고를 치고 다니기 때문이다. 그에게 사회의 문턱은 높지만, 소년 법원 판사(카트린 드뇌브)는 말로니가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고 자립할 수 있도록 그를 처벌하는 대신 기회를 준다. 엄격한 교육센터로 보내진 말로니는 그곳에서 또래 여자아이 테스와 사랑에 빠진다. <라 테트 오트>는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해 삐뚤어진 청소년의 반항을 그렸다는 점에서 프랑수아 트뤼포의 ‘앙투안’ 연작을 떠올리게 한다. 말로니를 맡은 로드 파라돗은 히스테리컬하고, 불안한 심리를 가진 청소년을 실감나게 연기해 얄미우면서도 마음이 간다. 에마뉘엘 베르코 감독은 말로니뿐만 아니라 그를 도우려는 주변인들까지도 애정을 듬뿍 담아 묘사했다. 인내심을 가지고 말로니를 지켜보는 판사를 연기한 카트린 드뇌브는 명성에 비하면 아주 작은 역할이지만, 극의 무게중심을 잘 잡아준다. 새로운 소재는 아니지만 극에 무리 없이 감정이입할 수 있는 드라마다. 새 집행위원장 피에르 레스퀴르는 누구? 언론인이자 전 ‘카날플뤼스’ 그룹 회장. 피에르 레스퀴르는 1965년부터 1972년까지 라디오 , 에서 기자로 활동하다가 1972년 텔레비전 방송국 로 옮겨 뉴스를 진행했다. 기자로서 그가 칸과 처음 인연을 맺은 건 1977년이었다. 당시 그는 채널 에서 장 클로드 브리아리, 에디 미첵과 함께 아침부터 저녁까지 영화를 본 뒤 중요한 게스트를 초대해 얘기를 나누는 방송을 했다. “아침부터 밤까지 하루 종일 영화를 봤다”는 게 그의 회상. 카날플뤼스 그룹 회장 시절이던 1996년쯤, 그는 질 자코브로부터 “카날플뤼스와 파트너십을 맺고 싶다”는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칸영화제와 비즈니스 관계를 맺었다. 당시 카날플뤼스는 칸영화제를 보도하고 있었지만 마켓에 관여하진 않았다. “그래서 질 자코브도, 나도 처음에는 겁을 냈다. 당시 사람들은 우리의 존재가 영화제의 균형을 파괴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카날플뤼스와 칸의 관계는 빨리 자리를 잡았다. 카날플뤼스는 영화제 작품들을 TV에 방영하기 위해 노력했고, 영화들은 성공적으로 브라운관에 방영됐다.” 피에르 레스퀴르는 2014년 1월 칸영화제 집행위원장이 되었다. 최근 영화잡지 <프리미어>가 그에게 인터뷰를 요청했을 때 레스퀴르는 “집행위원장으로서 임무를 얘기하고 싶지 않다”고 말할 정도로 신중했다. “집행위원장으로서 아직 영화제를 치른 경험이 없다. 그래서 할 말도 없다. 올해 영화제가 끝나야 재미있는 대답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 잘 안다. “칸이 경제적으로 건강하게 유지될 수 있도록 하는 게 내 역할이다. 질 자코브가 그랬듯이 말이다. 물론 젊은 시절 영화평론가였던 질 자코브와 저널리스트였던 나는 다른 사람이다. 나는 여러 이야기에 관심이 많고, 누가 어떻게 만났고, 여러 재능이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지 얘기하길 좋아한다. 문학, 음악, 연극도 좋아한다. 어쨌거나 내 이야기는 영화제가 개막하는 5월13일부터 시작한다.”

프랑스영화에 찬사를

제68회 칸국제영화제가 지난 5월24일 막을 내렸다. 이번 영화제의 가장 극적인 순간은 시상식이 열리는 폐막 당일에 마련되어 있었다.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디판>의 자크 오디아르가 모두를 놀라게 했고, 강력한 수상 후보로 거론되어왔던 <캐롤>의 토드 헤인즈는 다소 만족스럽지 못한 마음으로 고국으로 돌아가게 됐다. 올해 칸을 찾은 수많은 영화인들의 희비가 엇갈렸던, 그 드라마틱했던 순간을 전한다. 시상식에 대한 단상과 더불어 올해 영화제에 대한 전반적인 면모를 살펴보았고, 후반부에 상영된 한국영화 <마돈나>에 대한 현지 반응도 함께 실었다. 영화제 곳곳에서 들을 수 있었던 다양한 영화인들의 코멘트는 올해 영화제의 흐름을 짐작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씨네21>이 직접 만난 경쟁부문 감독 네명과의 만남에도 주목해주시라. 이번 지면에서는 유럽•영미권의 거장과 중견감독들과의 인터뷰를 엄선해서 실었다. 미리 예고하자면, 올해의 칸에 대한 리포트는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다음주에는 칸영화제 후반부 화제작 리뷰와 아시아 거장 3인방(허우샤오시엔,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지아장커), 주목할 만한 신예(저스틴 커젤과 요아킴 트리에) 감독과의 만남이 기다리고 있다. 축제는 끝났지만, 12일 낮과 밤 동안 칸에서 목격한 영화에 대해서는 더 오랫동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오늘 저녁, 프랑스영화는 칸과 전세계에서 빛났다.” 프랑스 총리 마뉘엘 발스는 칸국제영화제 주요 부문 수상결과가 발표된 직후, 자신의 트위터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디판>의 자크 오디아르부터 여우•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에마뉘엘 베르코(<나의 왕>)와 뱅상 랭동(<시장의 규칙>), 그리고 공로상을 수상한 아녜스 바르다까지, 올해의 칸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를 얻은 프랑스 영화인들을 기념하기 위한 한마디였다. 다른 해였다면 마뉘엘 발스의 이 말은 자국 문화축제에 대한 관심을 피력하는 정치인의 의례적인 수사로 들렸을 수 있다. 하지만 칸영화제 시상식이 열린 지난 5월24일만큼은 달랐다. 그 자리는 프랑스 총리의 말마따나 자국영화를 위한 축배의 자리나 다름없었다. 종려나무 무늬가 새겨진 시상식 무대에서, 프랑스 영화인들은 종종 호명되었고 자주 웃었다. 문제는 이 결과를 석연찮게 여기는 수많은 시선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모두의 동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 시상이란 없다. 하지만 보다 많은 이들의 동의를 얻을 수 있는 시상도 있다. 올해의 칸이 내린 선택은 다수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에는 얼마간 실패한 것 같다. 제68회 칸영화제 시상식을 지켜본 전반적인 소감이다. “자크 오디아르, 마스터이자 완벽한 감독” 시상식 당일 전세계에서 모여든 영화제 관계자들에게 가장 놀라움을 줬던 ‘사건’은 <디판>을 들고 영화제를 찾은 프랑스 감독 자크 오디아르의 황금종려상 수상이었다. 지난 5월21일 기자시사에서 첫 공개된 이래, <디판>은 전반적으로 호의적인 평가를 받았지만 황금종려상의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지는 않았다. 자크 오디아르의 이 신작은 난니 모레티의 <내 어머니>나 토드 헤인즈의 <캐롤>처럼 영화제의 큰 흐름을 주도한 작품도 아니었고 라즐로 네메즈의 <사울의 아들>처럼 뜨거운 논쟁 거리를 내포하고 있지 않았으며 허우샤오시엔의 <섭은낭>처럼 미학적 성취를 거둔 작품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황금종려상 예측의 중요한 기준이 되곤 하는, 경쟁부문의 다른 영화와 차별화되는 특별한 매혹의 요소가 <디판>에는 부족했다. 외신들이 <디판>의 황금종려상 수상에 놀라움과 아쉬움을 동시에 표하는 것도 이러한 연유에서다. <가디언>은 “자크 오디아르는 마스터이자 완벽한 감독이다. 하지만 이 작품이 그의 가장 훌륭한 영화라고는 볼 수 없다. 그 점이 당황스럽다”는 반응을 전했고, <버라이어티>의 저스틴 창 평론가는 이 영화의 능숙한 장르 운용과 뛰어난 연기를 장점으로 꼽으면서도 “우리가 칸에서 목도하길 원하는 뛰어난 예술성은 부족한 작품”이라는 평을 남겼다. 프랑스 주간지 <레 인로큡티브르> 또한 “아름다운 작품이지만 이야기가 너무 설명적이고 단순한 논리를 따르고 있다”면서 <디판>이 “절반의 설득력을 지닌 영화”라는 점을 지적했다. 한편 독일일간지 <쥐트도이체차이퉁>은 “<캐롤>이 아닌 <디판>에 황금종려상을 안긴 코언 형제의 선택을 보면서 우리는 심사위원들이 같은 나라에서 온 감독들에게 상을 주는 걸 피하려 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는 말로 심사위원단의 선택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올해 영화제의 심사위원장을 맡은 코언 형제는 “<디판>에 황금종려상을 주겠다는 결정은 매우 빨리 내렸다”면서 “우리는 이 영화가 다루는 주제에 완전히 매료되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황금종려상 선정 이유에 대한 코언 형제의 이 답변은 자크 오디아르의 범작 <디판>이 왜 올해의 영화제에서 가장 중요한 상을 안게 되었는지에 대한 일종의 힌트가 되어준다. <디판>은 스리랑카에서 정부군에 맞서 전쟁을 치르다 프랑스로 망명한 한 남자의 이야기다. 그는 ‘디판’이라는 이름을 지닌, 수년 전 죽은 외국인의 여권을 통해 프랑스에 왔고 안면도 없는 사람들과 ‘가짜 가족’이 되어 그곳에서의 위태로운 삶을 이어나간다. 21세기 프랑스 사회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인 이민과 망명의 이슈를 조명하는 자크 오디아르의 영화는 이 문제를 등장인물 간의 러브 스토리와 후반부에 장전된 강렬한 액션 시퀀스에 접목해 보다 보편적인 단계로 끌어올린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영화적 선택은 올해의 칸이 가장 주목하는 테마 중 하나였던 ‘동시대 유럽 사회가 직면한 문제에 대한 영화의 역할’과도 맞닿아 있다. 프랑스 잡지 <슬레이트>는 “코언 형제를 앞세운 칸의 심사위원단이 프랑스 대도시 근교의 폭력을 다룬 영화(<디판>)와 끔찍한 경제 상황을 다룬 영화(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시장의 규칙>), 사회가 버린 미성년자들이 겪어야 하는 사법제도에 대한 작품(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에마뉘엘 베르코가 연출한 개막작 <라 테트 오트>)에 손을 들어주었다”면서 “우리는 <디판>이 숀 펜이 뽑은 로랑 캉테의 <클래스>, 스티븐 스필버그가 손을 들어준 <가장 따뜻한 색, 블루>와 더불어 할리우드 출신 심사위원장이 세 번째로 뽑은, 프랑스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작품임을 환기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황금종려상과 더불어 여우주연상의 향방 또한 논쟁의 중심에 놓였다. 올해의 여우주연상은 <캐롤>의 루니 마라와 <나의 왕>의 에마뉘엘 베르코가 공동으로 가져갔다. 2년 전 압델라티프 케시시와 더불어 황금종려상을 공동으로 수상했던 <가장 따뜻한 색, 블루>의 두 여배우, 레아 세이두와 아델 엑사르코풀로스와 달리 <캐롤>에서 레즈비언 커플을 연기해 뜨거운 찬사를 받았던 케이트 블란쳇과 루니 마라는 반쪽짜리 상을 받게 되었고 이는 그녀들을 지지한 많은 이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올해의 여우주연상 결과는, 그야말로 케이트 블란쳇에게 대놓고 욕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토드 헤인즈의 <캐롤>에서 열연을 펼친 두 배우 중 루니 마라는 상을 받고, 케이트 블란쳇은 받지 못했다. 이건 용서를 구하지도 못할 모욕을 이 여배우에게 준 것이다. 루니 마라와 함께 에마뉘엘 베르코에게 상을 준 것은 정말 황당한 실수다. 베르코는 훌륭한 감독이지만 배우로서는 영향력이 없다. 마이웬의 <나의 왕>에서 그녀는 최선을 다해 연기하지만 매우 서툴다.”(<텔레라마>) “<캐롤>에서 두 여배우의 연기는 마치 카드 놀이를 하듯 서로에게 의지하고 있으며 이들이 공동 수상자가 되는 건 매우 자연스러운 결정이었을 거다.”(<플레이스트>) 케이트 블란쳇의 수상 불발에 대한 아쉬움은 이처럼 영미권 매체와 프랑스 매체가 한목소리로 전하고 있는 부분이며 <씨네21> 또한 그 견해에 동감한다. 올해의 심사위원단은 시상식 무대에서 가장 찬란하게 빛났을 영화 속 레즈비언 커플들을 갈라놓았다. 아이러니한 점은 게이 감독으로 유명한 자비에 돌란이 에마뉘엘 베르코를 밀었다는 소문이 영화제 후반부 크루아제 거리를 떠돌았다는 점이다.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시장의 규칙>의 뱅상 랭동과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한 <사울의 아들>의 라즐로 네메즈, 감독상을 받은 <섭은낭>의 허우샤오시엔과 심사위원상의 요르고스 란티모스(<랍스터>), 각본상의 미셸 프랑코(<크로닉>)에 대해서라면 대체로 수긍하는 분위기다. 하지만 <사울의 아들> 또는 <섭은낭>이 황금종려상을 받았다면, 올해의 영화제가 훨씬 흥미로운 결말을 맞이했을 거라는 지적이 많은 매체에서 여전히 되풀이되고 있다. 전반적으로 큰 이슈나 논쟁 없이 흘러간 이번 영화제 최대의 화젯거리가 시상식의 몇몇 이변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은 2015년 칸에 대한 씁쓸한 추억으로 남을 것 같다. 그리고 남은 이야기들 “<샤를리 에브도>의 비극이 올해의 칸영화제에 기나긴 그림자를 드리웠다”고 <버라이어티>의 평론가 저스틴 창은 말했다. 이슬람 테러리스트가 풍자 칼럼으로 유명한 프랑스 신문사에 총기를 난사해 12명이 숨진 이 비극적인 사건이, 칸영화제 조직위원회를 비롯한 프랑스 영화인들에게 자국의 현재- 사회적, 제도적, 윤리적인 부분에서- 에 대한 성찰의 순간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이전 리포트에서 전했던 대로 풍성한 합작영화 제작과 여성 영화인에 대한 조명, 상영부문간의 경쟁적 분위기 조성 등 수많은 이슈로 무장했던 올해의 영화제는 다소 지엽적인 끝을 맞이하게 되었지만 그것 역시 매년 끊임없이 변화를 거듭하는, 세계에서 가장 성대한 영화축제의 풍경 중 하나가 아닐까 하는 짐작을 위안 삼아 이 글을 닫으려 한다. 이어지는 다음호의 결산 기사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는 이의 오감을 자극하는, 올해의 칸에 당도한 매혹의 영화들에 대해 소개하려 한다. 허우샤오시엔의 <섭은낭>과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영광의 무덤>, 지아장커의 <산허구런> 등 영화제 후반부 상영작들에 대한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마돈나> 현지 반응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된 신수원 감독의 신작 <마돈나>는 올해 칸영화제에 초청된 한국영화 4편 가운데 가장 늦게 공개됐다. 프랑스와 북미 매체 모두 언급한 <마돈나>의 장점과 단점은 공통적이었다. 프랑스의 <아르테TV>는 “예상치 못하게 흘러가는 사건, 진짜라고는 믿기 어려운 장소와 강한 인물들, 흥미진진한 줄거리, 그리고 거의 판타지나 저승에 가깝다고 봐야 할 어두운 분위기를 통해 19세기 프랑스의 광기 어린 소설의 위엄 있는 이야기를 생각나게 한다”고 인상적으로 보았다. 칸 공식 데일리지 <할리우드 리포터>는 “플롯을 완벽하게 컨트롤했다. 연출이 촬영과 프로덕션 디자인과 맞물려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태연자약함을 실감나게 표현했다”고 전했다. 반면, <리베라시옹>은 “영화는 타락이 보여주는 마력 속으로 들어가지만, 영화의 이미지들은 설득력이 없고, 너무 텔레비전의 이미지 같아서 마돈나나 혜림에게 감정이입을 할 수 없도록 한다”고 비판했다. <버라이어티>는 “끊임없이 고통을 쌓아가는 방식이 관객을 너무 지치게 한다”고 했으며 <할리우드 리포터>는 “캐릭터가 플롯의 척추이지만, 긴 플래시백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들었던 흥분을 점점 약화시킨다”고 언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