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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1997)

“군인들이 게이머 같다는 생각을 했다”

캐나다 출신의 드니 빌뇌브 감독의 촉수는 전세계 분쟁지역을 향해 쫑긋 세워져 있는 듯하다. 전작 <그을린 사랑>(2011)이 중동의 한 가상공간에서 벌어진 민족간의 갈등과 종교 분쟁을 정면으로 바라봤다면, 칸 경쟁부문에서 첫 공개된 신작 <시카리오>는 미국 텍사스와 멕시코의 국경지역에 현미경을 들이댄 작품이다. FBI 요원 케이트(에밀리 블런트)가 멕시코 마약조직 카르텔을 소탕하기 위해 멕시코 국경지역으로 잠입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시카리오>는 그곳에서 얼마나 많은 폭력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사실적으로 담아내고, 그곳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공권력을 투입하는 것만이 정답인지 되묻는다. 갑자기 생긴 감독의 개인 사정 때문에 예정된 약속 시간을 훌쩍 넘긴 뒤 우여곡절 끝에 만나 나눈 드니 빌뇌브 감독과의 대화를 전한다. -영화는 미국 텍사스와 멕시코의 국경지역을 배경으로 한다. =이 지역에서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은 무척 슬프다. 사회의 여러 제도들이 무너지고, 민주주의가 힘을 잃게 되고, 범죄조직이 큰 권력의 핵심이 되면서 자본주의가 인간을 지배하고, 정의가 무너지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테일러 셰리던 작가와 시나리오 작업을 하면서 가장 공을 들인 부분은 무엇인가. =텍사스 출신이기도 한 그와 함께 멕시코 국경지역에 가서 13개월 동안 취재했다. 미국마약단속국(DEA)과 CIA 스파이 프로그램이 어떻게 작전에 투입되고 있는지를 취재한 기자들도 만났다. -남성이 주인공인 기존의 범죄영화와 달리 <시카리오>는 여성 FBI 요원 케이트가 주인공이다. 전작 <그을린 사랑>이 그랬듯이 이번에도 여성 캐릭터를 중심에 두고 이야기를 끌고 나간다. =DEA에서 일하고 있는 여성 요원을 모델로 했다. 여성으로서 끊임없이 권력과 마주해야 하며, 남성들에 둘러싸인 환경에서 세상과 맞닥뜨려야 하는 것에서 강한 이미지를 느꼈다. 케이트는 기성세대의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다음 세대를 대변하는 인물이다. -촬영이 매우 사실적이다. 촬영감독 로저 디킨스와 함께 세운 촬영 원칙은 무엇인가. =실제 사막이 배경이라 조명을 거칠게 표현하는 게 원칙이었다. 어두운 그림자를 활용해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나올 것 같은 분위기를 조성했다. -영화의 후반부, FBI 요원들이 멕시코 마약조직에 잠입하는 시퀀스는 비디오 콘솔 게임을 보는 느낌이었다. 관객이 게이머가 된 것처럼 느끼게 찍은 이유는 무엇인가. =군인들이 게이머 같다는 생각을 했다. 기밀 정보를 가지고 막후에서 조종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전투 신을 비디오 게임처럼 촬영한 것도 그래서다. -헬리캠과 와이드숏 같은 촬영방식을 통해 넓은 공간을 사실적으로 담아냈다. =사실 헬리캠 사용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헬리캠을 사용한 건 고가도로 촬영 허가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텍사스와 멕시코의 경계를 한눈에 보여주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헬리콥터를 띄워야 했다. 와이드숏을 사용한 이유는 간단하다. 텔레비전 화면과 다르게 보여야 하니까. -<블레이드 러너> 시퀄의 연출을 맡았다.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학생 시절, 이 영화를 보면서 영화를 배웠다. 시퀄을 연출하게 돼 아주 영광이다. 아직 자세한 얘기를 할 순 없지만 현재 나온 시나리오는 무척 좋다. -차기작은 파라마운트가 제작하는 <스토리 오브 유어 라이프>로 알려져 있다. =한 여성 언어학자(에이미 애덤스)가 외계인들을 만나 그들의 사고방식을 습득하고, 그렇게 얻은 능력을 자신의 딸을 위해 이용한다는 내용의 이야기다. 언어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꿀 수 있다는 주제를 얘기하는 작품이다.

[김호상의 TVIEW] 집밥으로 가는 머나먼 여정

준비할 재료는 간단하다. 계란 1, 2개, 그리고 전기밥통의 묵은밥, 진간장, 식용유. 굳이 더하자면 양파 반개 정도일까.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양파를 볶고, 계란을 풀어 볶은 후 밥을 투하해 잘 버무려주면 완성이다. 잘만 보관하면 두끼도 먹을 수 있다. 일명 ‘계란밥’. 어머님은 집 떠난 아들딸을 위해 바리바리 반찬을 싸다 나르시겠지만, 결국 반복되는 일상의 무게가 우리에게 허락하는 것은 계란밥이거나 그 변종에 불과한 것이 현실이다. 매일 진화하는 각종 배달음식과 냉동음식의 촘촘한 사이를 뚫고 ‘집밥’으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멀다. 최근 프랜차이즈 요식업계 최선두에 서 있는 셰프이자 기업인인 백종원이 집밥 전선에 나섰다. tvN에서 매주 화요일 저녁에 방송되는 <집밥 백선생>. 예전부터 요리 프로그램 또는 식당 개조 프로그램에 간간이 모습을 보이며 존재감을 알렸던 그인데, 최근 <마이 리틀 텔레비전>을 통해 예능감까지 장착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런 그가 네명의 제자를 거두어 진정한 집밥, 쉬운 요리가 무엇인가를 보여주려고 나섰다. 김구라, 윤상, 손호준, 박정철. 무협지에서라면 ‘집밥 사협’이나 ‘집밥 사인’ 정도 되려나. 아직은 각각의 캐릭터가 정확하게 정립되어 있지는 않지만 이들이 가지는 공통점은 대부분, 찌개조차 한번도 제대로 끓여본 적 없다는 것. 다시 말하면 계란밥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집밥 사협’의 사부가 되는 백 선생이 유행어처럼 내뱉는 말이 있다. “난 그렇게 어렵게 안 하지.” 부침가루의 성분을 묻는 김구라에게 ‘부침에 필요한 가루’라고 대답하더니, 도마에다 김치를 가지런히 써는 손호준을 보고, “그냥 김치를 그릇에 넣고, 가위로 잘라요”라고 조언한다. 툭, 툭 편하게 ‘계란밥’의 레벨에서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이다. 자신이 요리할 때도 숙련된 손놀림을 제외하고는 그의 지론을 실천한다. 그러면서 어찌보면 가장 중요한 한마디를 던진다. ‘이미지를 상상하라.’ 음식을 만들 때 음식의 맛을 상상하지 말고 그 모양을 떠올려 보라는 것이다. 자신이 먹어보았던 음식들을 가만히 떠올려보고, 어떤 재료가 들어갔는지, 어떤 모양을 하고 있었는지를 상상해보면 자신만의 음식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일종의 이미지 트레이닝이라고나 할까. 결국은 호기심이다. 그리고 그 호기심을 실천에 옮기는 방식이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매일 적어도 두끼, 세끼를 먹으며 살아간다. 김치찌개도 식당마다 방식이 다르고, 계란말이도 얼마든지 응용이 가능하다. 집밥을 만들어 먹는 길은 멀고 험하다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SNS의 음식 사진과 댓글이라기보다는 그 사진을 바라보는 관점일 것 같다. 아 맛있겠다, 어떻게 만들면 될까. 이건 비단 음식에만 통용되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기도 하지만. + α 상상의 힘 십년쯤 지난 듯싶다. ‘백 선생’ 백종원씨가 이렇게까지 유명해지기 전에, 방송에 초대한 적이 있었다. ‘상상’과 관련해 그때 그가 한 말이 아직 기억에 남아 있다. 그는 각국을 여행하며 요리책을 사들이는데, 그 책의 글자는 보지 않는다고 한다. 요리를 찍은 사진만을 보며, 어떤 재료가 들어갔을까, 어떻게 조리했을까에 대해 고민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방법대로 그 사진의 요리를 만들어본다고 했다. 상상의 힘은 위대하다.

[신 전영객잔] 남는 것은 제스처뿐

나는 10여년 전 <무뢰한>의 시나리오를 읽었다. 모니터를 부탁한 오승욱 감독에게 뭔가 얘기를 해줬겠지만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살인범을 쫓는 형사 얘기에 최소한의 액션은 필요하다는 따위의 철없는 충고가 기억날 뿐이다. 완성된 영화를 보니 내가 무슨 말을 했어도 다 괜한 헛소리였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그가 쓴 시나리오 행간에서 이 영화의 무드와 제스처를 떠올리지 못했다. 핏빛 잔상을 남겼던 <킬리만자로>(2000)와는 반대 방향에서 강박적으로 적요한 분위기에 매달리는 것으로 의심했을 뿐이다. 오승욱이 오랜 기다림 끝에 스크린에 구현한 인물들의 표정과 몸짓, 그들을 감싼 공간의 분위기는 오승욱이 구상한 스토리가 근사한 맥거핀이었음을 알려준다. 오승욱은 형사 누아르물의 외피를 두른 이 영화에서 ‘억압의 미적 제스처’라고 할 만한 것들을 허다하게 만들어낸다. 그것들이 스토리의 인과를 빼곡 메울 필요는 없다. 그것들은 이미 이 영화의 스토리가 시작되기 전에, 스토리가 끝나고도 지속적으로 이어질 제스처들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이 혹 알맹이 없는 퇴행의 제스처라고 해도 상관없다. 영화 속 주인공들의 삶에는 우리가 허위로라도 채워넣고 싶은 그런 가치의 알맹이가 없기 때문이다. 결핍과 억압의 담지자 김남길이 연기하는 형사 정재곤이 터덜터덜 살인현장으로 걸어가는 뒷모습의 영화 도입부는, 남자의 정체를 이 영화가 묘사하는 방식의 시각적 신호이다. 좀 가냘픈 몸매에 나사가 빠진 듯 발길을 내딛는 순간, 단호해 보이는 그의 걸음걸이는 장차 보게 될 그의 삶의 행보와 유사하다. 그는 자신의 직업적 삶에 이물이 나있으며 그 직업적 삶을 잘 수행해야 하는 의무와 그 직업적 삶에 따르는 윤리의 준수 사이에 일어나는 갈등에 지쳐 있다. 나중에 알게 되는 것이지만, 그는 형사가 자신의 직무에 충실한 나머지 그가 검거해야 하는 범죄자들과 닮아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인물이다. 완벽한 전문가주의와 그에 따르는 윤리의 마비 사이에서 그는 답을 찾지 못한 인물이다. 그런 그의 일상적 삶은 당연히 행복하지 않다. 그는 아내와 이혼했으며 가끔 연락을 주고받긴 하지만 전혀 달갑지 않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내가 읽었던 이 영화의 10년 전 초고 시나리오에는 정재곤과 전처와의 관계가 비교적 상세히 묘사돼 있지만 완성된 영화 버전에선 그들의 관계가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형사의 직업적 일과도 마찬가지다. 아마도 최근까지 그는 꽤 훌륭한 업적을 거뒀을 테이지만 발정제로 용의자의 애인을 고문하는 것과 같은 유형의 비인간적 취조방법 끝에 남은 자기혐오에 시달리는 것처럼 보인다. 도입부에 정재곤을 소개했던 화면은 다소 난폭하게 한 여자의 집에 들어온 남자를 소개한다. 그는 살인범 박준길이다. 그는 정재곤이 수사하게 될 살인사건의 가해자다. 그는 자신을 마중하는 한 여자를 품고 섹스하며 그녀를 위해 살인했노라고 고백한다. 풀기 없이 지친 기색으로 살인현장을 살펴보는 형사 남자와 그 현장에서 빠져나와 맹렬하게 짐승처럼 섹스하는 살인범 남자를 교차편집하는 이 도입부의 연결고리는 여자다. 정재곤은 현장의 사체를 보며 죽은 남자의 사나운 애인이 현장 보존을 무시하고 죽은 남자 몸에 강제로 이불을 덮어줬다고 하는 순경의 말을 듣는다. 정재곤은 밖으로 나와 순경이 말한 사나운 여인을 바라본다. 그녀는 사납게도 보이지만 애인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오들오들 떨고 있는 가련한 여인이기도 하다. 정재곤이 죽은 남자의 애인과 대화하고 있을 때 살인을 저지른 박준길은 그의 애인과 섹스하고 있다. 박준길의 애인은 (전도연이 연기하는) 김혜경이다. 그녀 역시 겉으로는 사나운 여인이다. 그녀 역시 나중에 정재곤의 앞에서, 애인의 죽음 앞에서 오열하는 가련한 여인이 될 것이다. 이 도입부는 각운을 맞춰 정재곤과 김혜경의 운명을 암시하고 있다. 이 도입부에서 보게 되는 정재곤은 순전히 외형적인 인상으로만 판단하더라도 결핍과 억압의 담지자다. 전문가로서 완전한 어른이 되고 싶었으나 그럴수록 자신 안의 모순을 해결하지 못하는 정재곤은 퇴행적인 문제적 개인이다. 박준길은 정반대 방향에서 퇴행적인 인물인데, 그는 도박하고 섹스하고 싸움질하는 깡패이며 애인을 등쳐먹고 사는 데 거리낌이 없는 철부지다. 그는 정재곤보다 훨씬 더 어린애 같은 인물이다. 이 두 사람을 묶어주는 공통분모는 그들이 자기존엄의 표식으로 그나마 완강히 행세하려고 하는 육체적 강건함이다. 영화 초•중반, 이들이 형사와 범인으로 인적 없는 아파트 야외 주차장에서 뼈가 으스러져라 싸우는 장면은 몸은 어른이되 마음은 어린애인 이들의 짐승과 견주어도 꿀릴 것 없는 야수성을 드러낸다. 그들의 싸움은 공허하지만 동시에 치열하다. 따지고 보면 정재곤은 굳이 자고 있는 김혜경을 깨우지 않은 채 박준길을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게 하지 않아도 되었다. 박준길을 밖으로 나가게 한 뒤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그의 허영심이다. 그때까지 지켜본 김혜경을 염두에 둔 질투심도 있었을지 모른다. 또는 애인이 오길 기다리며 음식을 만들었다가 애인이 오지 않자 그걸 남김없이 버리는 김혜경에 대한 연민이 숨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은 선배 형사가 차 안에서 잠복할 때 농담처럼 던진 과거의 에피소드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정재곤이 과거에 업적을 올리기 위해 여인들에게 했던 악행에 대한 죄의식의 발로일지도 모른다. 박준길에게 완력으로 지고 난 뒤 유유자적 사라지는 박준길을 보며 정재곤이 느꼈던 감정은 죄의식의 일시적인 해방감이다. 잠시나마 얻어터지고 난 뒤, 여인을 다치게 하지 않은 채, 그 자신만 얻어터지고 끝난 싸움의 결실로 얻는 대속의식 비슷한 것이다. 대속의식은 정재곤의 행동을 관통한다. 영화에서 그가 보이는 모든 행동의 신호들은 다 이에 따른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무의미하고 유치하다. 사춘기 남성들이 멋있다고 여기는 공허한 제스처의 연장선상에 있을 만한 것들이다. 이 공허를 지탱하고 보완하고 조금이라도 유의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전도연이 연기하는) 김혜경의 존재감이다. 그녀는 우리가 숱한 삼류영화나 소설에서 튀어나올 법한 캐릭터의 전형이다. 한때 텐프로 룸살롱의 잘나가는 여급이었으나 이제는 퇴물 새끼마담으로 빚만 잔뜩 안고 사는 여자, 남자에게 이용만 당하고 이미 불행해져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남자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그녀는 앞에서 말했듯이 자기의 연약한 상처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겉으로 보기엔 함부로 다가설 수 없을 듯한 암표범 같은 자태이다. 진실/허위 게임의 연속 중뿔나게 잘난 것 없으면서도 대속의식에 가득 차 있는, 육체적으로 강인하지만 속은 빈약한 형사 남자와 상처받기 쉬운 내면을 지녔으면서도 더이상 다치고 싶지 않아 세게 내지르는 여자와의 만남은 각자 서로 연기하는 행위들로 점철된다. 정재곤이 김혜경이 일하는 단란주점의 영업부장 이영준으로 위장해 취직한 뒤 시작되는 두 사람의 관계는 처음부터 진짜가 아니라는 걸 의심하는 가운데 끊임없이 주고받는 진실/허위 게임의 연속이다. 김혜경은 정재곤의 정체를 신뢰하지 않지만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며 정재곤이 보여주는 진실한 단면의 흔적들에 혼란을 느낀다. 정재곤/이영준의 서툰 연기 덕분에 흔들리는 김혜경의 모습은 관객에게 압도감을 준다. 몸의 잔근육까지 세세하게 느껴지는 김혜경의 자태와 표정은, 영락없이 그녀를 연기하는 전도연의 존재감을 지울 수 없게 하지만, 동시에 전도연의 김혜경은 스크린에 그대로 살아 있다. 정재곤/이영준의 일관되지 않은 연기력을 관찰하듯이 보는 김혜경이 문득 “진짜 같애”라고 중얼거릴 때 정재곤의 가슴에 통증으로 꽂혔을 상대의 진심에 대한 절실함은 관객에게도 이입된다. 김혜경을 가두고 있던 캐릭터의 상투형을 전도연이 당당히 뚫고 나와 속죄의식과 연민과 사랑이 한꺼번에 합쳐지는 맹렬한 감정의 소용돌이를 만들어낸다. 그러므로 정재곤이 시도했던 게임은, 그가 처음부터 예감하고 있었듯이 그 자신을 구원하는 결말로 향하지 않는다. 정재곤은 아주 먼 길을 돌아 자신이 징벌당하는 길을 택한다. 박준길이 검거되는 현장에서 굳이 나서지 않았던 정재곤은, 박준길이 칼부림하며 형사들에게 저항하는 아수라장이 펼쳐지자 어쩔 수 없이 김혜경이 보는 앞에서 그를 사살한다. 취조 심문실에서 김혜경은 망연자실한 채 정재곤에게 묻는다. “당신 이름이 뭐예요?” 정재곤의 거짓 연기에 속지 않은 채 그가 연기의 마디마디 보여줬던 진심을 끝까지 믿고 싶어 했던 그녀는 정재곤에게 강하고 무심한 척 연기하지 않았던 자신을 책망한다. 두 사람은 연기하는 데 실패했고 동시에 파멸했다. <무뢰한>의 많은 장면들에서 극적으로 사소한 순간들은 기능적인 왜소함의 굴레를 벗어나 그것 자체로 둔중하고 외면할 수 없는 동요를 만들어낸다. 그중에서도 특히 김혜경 앞에 정재곤이 이영준으로 위장하고 처음 나타난 날 해장국집 장면이 나는 가장 좋았다. 해장국을 안주 삼아 소주를 마시고 있는 김혜경 앞에 정재곤이 나타난다. 그는 대각선 식탁에서 김혜경을 마주 보고 있다가 슬그머니 자리를 옮겨 김혜경을 등지고 앉는다. 소주를 주문한 김혜경의 요청에 주인이 응답하지 않자 정재곤은 재빠르게 냉장고에 다가가 소주 한병을 꺼내 들고 냉큼 김혜경의 식탁 맞은편에 앉는다. 이 영화에서 드물게 보는 경쾌한 무드 속에 가벼운 선의를 우겨넣은 이 장면은 불투명하지만 농도가 짙은 다른 허다한 장면들과 마찬가지로 이 영화의 정체를 함축한다. 서서히 다가설 수밖에 없는, 그러나 끝내 도달하는 데는 실패하는 관계의 서막으로 이 장면은 산뜻하면서도 조금 슬프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정재곤과 김혜경이 어스름한 새벽 거리를 걸으며 시시한 말들을 주고받을 때 그들의 존재 자체가 자아내는 외로움과 그에 따르는 절박함의 기세는 텔레비전 드라마의 어떤 수다한 말들보다 더 강렬하다. 이 영화 속 대화 장면들은 어느 것도 서투르지 않다. 예를 들어, 영화 중반부에 김혜경이 단란주점의 텅 빈 방에서 얼음을 안주 삼아 양주를 마시는 장면에서 정재곤이 합류하고 그들이 서로 위로할 말을 찾다가 상대의 아픔을 건드리는 말들을 주고받는 장면은 말들의 내용보다 인물들의 반응과 어두운 실내 공간의 가냘픈 빛들이 조응하며 오케스트라의 화음과 같은 시청각적 공명을 자아낸다. 영화의 긴 에필로그에서 정재곤은 기어코 김혜경을 찾아내 뒤늦게 자신의 본명을 밝힌다. 요리하는 평범한 아내로 살고 싶다고 했던 김혜경은 마약중독자를 간병하며 살고 있다. 어쩌면 그녀는 자신의 박복한 운명에 따라 연기를 그만둔 채 살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런 그녀 앞에 정재곤이 실명을 밝히고 그가 박준길을 죽인 것은 그녀에 대한 감정과 무관하게 직업적 선택이었다고 말해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영화 중반, 정재곤은 김혜경과 동침하면서 상처를 기억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상처 위에 또 상처를 입는 것이 인생이라면서 체념할 줄 알았던 김혜경과 달리 정재곤은 그의 의식 속에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상처를 간직하고 살며 끝내 치명상을 입는 인물이다. 남는 것은 제스처뿐이다. 정재곤은 김혜경이 자기 배에 박아넣은 칼을 그대로 둔 채 걷는다. 피가 밴 배의 상처를 보며 정재곤은 허탈하게 웃는다. 그리고 ‘무뢰한’ 제목 타이틀이 뜬다. 이것 역시 글 서두에 언급한 억압의 미적 제스처로 손색이 없었다. 오승욱은 ‘영화감독’이다. 자명한 이 명제를 증명하는 감독들은 많지 않다. 그가 앞으로 더 자주 영화를 만들기를 바랄 뿐이다.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테마파크의 절기

<밤을 걷는 뱀파이어 소녀>는 스크린에서 움직이는 흑백 그래픽 노블 같다. 소녀(실라 밴드)는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을 살며 너무 많은 것을 본 뱀파이어다. 차도르를 두른 소녀는 이란 어디쯤인지 미국의 이란계 이민공동체인지 모호한 ‘악의 도시’에서 무감동한 사냥을 이어간다. 검은 차도르는 소녀의 생을 휘감은 작은 적막처럼 보인다. 소녀는 사냥할 때 상대와 비슷한 속도와 자세로 다가간다. 이때 차도르는 그림자놀이의 ‘코스튬’으로 변한다. 스케이트보드를 탄 소녀가 밤거리를 미끄러지면 바람을 품은 차도르는 돌연 슈퍼히어로의 날개가 된다. 사물은 주어진 용도를 배반할 때 송곳니 같은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굴레가 무기로 변하는 경우야 말할 나위도 없다. 06/20 스티븐 스필버그의 <쥬라기 공원> 개봉을 둘러싼 시끌벅적함을 지금도 기억한다. “공룡이 살아 움직여!”라는 탄성이 우선 전 지구적으로 울려 퍼졌고, 곧이어 사운드가 이미지 못지않은 스릴의 원천임을 입증하는 영화로 꼽혀 5.1채널 홈시어터 장만을 부채질했다. H자동차의 150만대 수출 수익과 등치로 인용되며 문화를 이윤으로 환원하는 비창조적 ‘창조경제론’의 논거로 변질돼 두고두고 우리를 괴롭힌 사태는 그다음이다. 개중 예나 지금이나 귀담아듣는 사람이 제일 적은 평단의 반응도 생각난다. “놀랍다. 게임의 규칙을 바꿀 영화다. 그러나 스필버그의 고전 <죠스>에 비하면 특수효과에 크게 기댄 이벤트다”라는 의견이 꽤 많았다. 시리즈 네 번째 영화인 <쥬라기 월드>를 보고 나오는 길에 1993년 당시 평에서 <죠스>를 <쥬라기 공원>으로, <쥬라기 공원>을 <쥬라기 월드>로 바꿔 넣어도 곧장 통하겠다 싶었다. <쥬라기 월드>는 제공하겠다고 공약한 오락을 안전히 배달하는 무난한 여름영화다. 그러나 스릴의 내역은 <쥬라기 공원>, 심지어 스필버그의 2편 <쥬라기 공원2: 잃어버린 세계>와도 좀 다르다. 티렉스의 지프차 습격, 랩터의 주방 침입 시퀀스가 보여주듯 몬스터로서 공룡의 소름끼치는 특성은 강력한 발톱과 하악골이 아니라 어느 육식동물과도 닮지 않은 특유의 움직임이며 이 영화의 아드레날린 펌프는 공룡에게 쫓기는 장면의 횟수나 폭력의 세기보다 숏으로 서스펜스를 구축하는 솜씨에 있다. 스릴만이 아니다. 스필버그는 감정을 능란하게 다루고 어린 배우를 연출하는 데에 탁월하다. 공포, 유머, 경이를 한 장면 안에서 서걱거리지 않게 굴리는 기교는, 대중영화감독으로서 스필버그가 보유한 유용한 도구다. 구사일생으로 티렉스의 공격에서 살아난 <쥬라기 공원>의 어린 남매는 나무 위에서 불안한 하룻밤을 보내는 와중에도 안개 너머에서 들려오는 브라키오사우루스들의 노래에 매료된다. 영화 도입부에서 쥬라기 공원에 처음 입성한 세 과학자(샘 닐, 로라 던, 제프 골드블럼)도 마찬가지다. 신의 영역에 개입해 생명을 지어낸 인간의 월권 행위에 죄책감을 드러내는 동시에 어린애처럼 무책임한 흥분도 미처 감추지 못한다. 말하자면 스필버그는 공룡이라는 아틀란티스 같은 생물을 향한 우리의 불가해한 매혹을 블록버스터로 만들었고 <쥬라기 월드>의 제작진은 <쥬라기 공원>이라는 블록버스터를 향한 매혹을 블록버스터로 만들었다. 06/21 가끔 생각한다. 인간이 경험으로부터 도통 배우지 못하는 까닭은 혹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프랜차이즈의 스토리를 이어가기 위해서가 아닐까? 그만한 인명피해를 냈으면 열두번 폐쇄되고도 남을 텐데 <쥬라기 월드>의 공룡 공원은 성업 중이다. 게다가 전작의 사파리로부터 한 단계 나아간 명실상부 놀이동산이다. 리조트와 식당, 기념품 가게는 기본이고 여느 동물원처럼 어린이들이 어린 동물과 스킨십을 갖도록 꾸며진 놀이터(patting zoo)도 있다. VIP 패스 소지자는 줄을 건너뛸 수 있고 검표 직원은 단순반복 업무에 지루해 죽으려 한다. 그러니까 “공룡은 코끼리만큼 심상해졌다”는 명제가 <쥬라기 월드>의 제법 흥미로운 핵심 설정이다. 공원 운영자들은 투자 유치를 위해 더 무섭고 치아 개수가 많은 신종 공룡을 창조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린다. 여차하면 태극 배색의 눈을 가진 펩시사우루스, 삼선 무늬 아디다노돈 같은 브랜드 공룡도 ‘주문생산’될 기세다. 극중에서 군인 빅(빈센트 도노프리오)의 대사가 섬뜩했다. 공룡을 아프가니스탄에 파병할 궁리를 하는 그는 복종하지 않는 개체는 제거하면 된다고 말한다. 원래 멸종됐던 종을 부활시켰으니 당연히 인간에게 생사여탈권이 있다는 논리다. 반려동물을 유기하거나 입양한 유기동물을 다시 버리는 사람들도 비슷한 생각일까? 영화를 보다 멈칫했다. 06/22 <쥬라기 월드>의 난센스들을 적어보기로 한다. 결코 영화가 미워서가 아니라, 여름 시즌 영화가 주는 재미를 다변화해 보려는 나름의 심심파적이다. 하나. 공룡 테마파크의 소유주 사이먼(이르판 칸)은 매니저 클레어(브라이스 댈러스 하워드)에게 운영 현황을 묻고 그녀가 각종 수치를 보고하자 그런 것 말고 방문객과 공룡들은 행복하냐고 질문한다. 클레어가 머뭇거리자, 공룡의 표정을 살펴보면 알 수 있지 않느냐고 현자의 말투로 깨우쳐준다. 기업 오너나 자본가에게 약간의 문화적 ‘허영’이 있는 편이 전혀 없는 경우보다 결과적으로 훨씬 많은 사람을 이롭게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래도 욱했다. 어쩌라고! 사장도 경영 매니저를 고용할 때 공룡 눈동자를 들여다볼 ‘애니멀 위스퍼러’를 구하진 않았을 것 아닌가. 적자 나면 추궁 안 할 요량도 아니면서 실무자를 슬쩍 냉혈한 취급하고 반대급부로 본인의 철학과 감수성을 과시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장님의 응석이다. 게다가 이 사장님은 나중에 사고가 터지자 얄짤없이 소리친다. “그 공룡 한 마리에 2600만달러라고!” 다음은 공룡을 최종병기로 쓰겠다는 악역 빅과 관련된 실소다. 우선 오늘날 군이 공룡보다 훈련하기 쉬운 맹수들을 전쟁에 동원하지 않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더욱 이상한 대목은 주인공 오웬(크리스 프랫)이 랩터 우리에 떨어진 동료를 구해내는 광경을 보고, 빅이 공룡의 파병 가능성을 확신하는 장면이다. 해당 장면에서 오웬은 겨우 목숨만 건졌는데 어딜 봐서 랩터들에게 충성스런 병사의 자질이 보인다는 건지 알 수가 없다. 한편 빅의 부하들은 비상사태가 닥치자 대뜸 쥬라기 월드 통제센터에 들이닥쳐 전문가들을 몰아내고 콘솔을 접수한다. 그렇게 아무나 해도 괜찮은 업무였단 말인가. 셋. 유전자를 인위적으로 엔지니어링해 탄생한 인도미누스 렉스를 추격한 랩터들이 “오, 우리 같은 DNA를 공유했군. 한편이 돼야겠다”라고 ‘대화’하는 장면이다. 볼 때는 그런가보다 넘어가놓고는, 집에 돌아와서야 수긍한 자신이 어이없어 이불을 찼다(영화의 설명에 따르면 오징어, 개구리의 유전자도 인도미누스 렉스에 들어 있다고 하니 테마파크에 대왕오징어나 황소개구리 떼가 없었던 것이 다행이다). 물론 영화의 영향으로 사자와 아나콘다를 동시에 마주쳤을 때 같은 포유류라고 사자한테 텔레파시를 쏘는 관객은 없겠지만 역시나, 웃음이 나는 건 어쩔 수 없다. 06/26 옛날 옛적 장 보드리야르는 “디즈니랜드는, 나머지 세계(미국) 역시 디즈니랜드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존재한다”라고 썼다. 그가 살아 있다면 최근 영화에 줄줄이 등장하는 디즈니랜드 모방 공간을 어떻게 해석했을까 궁금하다. <투모로우랜드> 속 유토피아는 제목 그대로 놀이동산 조감도처럼 디자인됐다. <쥬라기 월드>는 현재 흔히 보는 테마파크에 동물원을 결합했다. 그리고 <인사이드 아웃>은 인간의 마음이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중앙 관제소와 서로 연결된 여러 개의 테마파크, 그리고 기억 물류 창고로 시각화했다. <인사이드 아웃>에 등장하는 머릿속 테마파크 지도는 한때 유행했던 ‘뇌 구조도’와 비슷하다. 장난, 가족, 정직성, 특기, 우정 등 주인공 라일리(케이틀린 디아스)의 열한살 인생에서 비중을 차지하는 영역이 각각 놀이동산 섬(island)의 형태로 표현된다. 섬과 섬은 놀이동산으로 치면 모노레일에 해당되는 ‘꼬리를 문 생각 열차’(Train of Thought)로 연결된다. <몬스터 주식회사>의 알록달록한 비명 공장을 설계했던 피트 닥터 감독은- 픽사 프로덕션 전체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하나의 세계를 통째로 디자인하는 데에 유능할 뿐만 아니라 집착한다. 피트 닥터는 픽사 스튜디오 중견 가운데 눈물샘 자극의 최고수이기도 하다. 그가 스토리를 맡았던 <토이 스토리> 시리즈(특히 3편)와 연출작 <업>의 페이소스까지 가미되면 <인사이드 아웃>의 레시피가 완성된다. 침체된 픽사를 부흥시키기에 가장 믿음직한 심폐소생술이다. 그리고 진부한 말이지만 <인사이드 아웃>의 특출함과 한계도 공히 여기서 나온다. (다음에 계속) 좋아요 추상화(抽象化)? 추상화(抽象畵)! <인사이드 아웃>에서 라일리의 정신을 시각화한 공간 중 흥미로운 장소는 ‘추상적 사고의 방’(Abstract Thought)이다. 여기 입장한 캐릭터들은 기하학적 형태로 해체됐다가 납작한 2차원으로 눌리고 이윽고 완벽한 추상이 된다. 피카소, 브라크, 칸딘스키의 스타일이 인용된다. 디즈니의 불운한 수작 <쿠스코? 쿠스코!>가 도전했던 장식적 카툰 스타일의 재시도이기도 하다. 의미도 적절하다. 문 앞의 ‘출입금지’ 경고가 암시하듯, 추상적 사고는 풍부한 현존을 일부 유실할 위험을 수반한다. 동시에 이 방은 극중 정신의 통제본부로 복귀할 지름길이기도 하다. 일단 개념을 수립해야 논증을 통해 결론에 이를 수 있으니 지름길 맞다.

[trans × cross] 이런 인생도 하나 있어야 재밌잖나

배우 겸 방송인 홍석천은 요즘 24시간이 모자란다. JTBC <마녀사냥>, MBC <나 혼자 산다> 출연에 이어 JTBC <냉장고를 부탁해>에서는 요리하랴, MBC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서는 인테리어와 패션에 대해 조언하랴, 이태원에서는 외식업 운영까지 하랴, 정신이 없다. 얼마 전까지 TV드라마 <복면검사>(2015)에서 형사로 등장했고 틈틈이 영화의 카메오로도 얼굴을 내비쳤다. 올해 첫회를 맞은 서울국제음식영화제의 홍보대사로 활동하며 관객과의 대화도 진행했다. 요즘 가장 ‘핫’하다는 분야마다 홍석천의 이름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최근 미국에서 동성결혼이 합법화되며 한국 최초의 커밍아웃 연예인인 홍석천을 새로이 바라보고 있기도 하다. 몸은 피곤하지만 마음만은 그 어느 때보다 여유로워진 홍석천, 그를 만났다. -매회 게스트가 원하는 요리를 만들고 승패를 가리는 <냉장고를 부탁해>에서 스타 셰프들을 제치고 가장 많은 승수를 챙겼다. 비결이 뭔가. =셰프들은 본인의 자존심을 세울 만한 요리를 내놓는다. 반면 나는 상당히 대중적인 요리를 한다. 되게 셰프들은 맛이 은근히 배어나도록 하는데 나는 은근히라는 게 없다. 자극적이고, 공격적인 맛으로 승부를 본다. 배우도 자기만의 확실한 분위기나 캐릭터가 있으면 무너지지 않고 계속 가잖나. 요리도 마찬가지다. -게스트가 먹고 싶어 하는 요리를 녹화 당일 전달받고 정말 딱 15분 안에 완성하는 건가. =1초라도 넘기면 다들 난리다. (웃음) 나도 한번은 조기를 미처 다 굽지 못한 적이 있다. 처음 사용해보는 오븐이라 예열을 어떻게 할지 감을 못 잡아 그만…. MC와 게스트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머릿속으로 어떤 재료로 어떻게 요리할지 그림을 그린다. 게스트의 냉장고에 들어 있는 식재료라는 게 크게 다른 게 없다. 쇠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연어, 새우라는 기본 베이스를 두고 몇 가지 경우의 수를 생각해 응용한다. 희귀한 재료가 있으니 꼭 써 달라는 정도의 요청은 미리 받기도 한다. -요즘 부쩍 방송 활동을 활발히 하는 것 같다. <마녀사냥> 출연이 그 시작이 아니었을까 싶은데. =2013년 1월9일 방영한 <라디오스타>가 큰 계기가 됐다. 굉장히 오랜만의 예능 프로그램 출연이었다. 더이상 나는 잃을 게 없다는 생각으로 편하게 했다. 그때 (윤)종신 형이 “그 녹화가 너무 재밌어서 잘하면 2회분으로 나가겠더라. 너 올해 잘될 것 같다”고 했다. 정말 반응이 좋았고 그다음부터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 <마녀사냥> <나 혼자 산다>에 줄줄이 출연했다. 그러면서 자연히 웃기는 홍석천과 생활인 홍석천이 동시에 TV에 보여졌다. 특히 <마녀사냥>은 아예 나더러 ‘놀아라’ 하고 놀이터를 준 셈이다. 이런 방송의 변화가 내게는 새로웠고 나를 흥분시킬 만했다. -<마녀사냥>을 통해 ‘톱 게이’라는 별칭이 생겼다. 성정체성을 희화화해 웃음의 소재로 삼은 면도 있지만, 방송에서 성소수자의 지분을 갖게 된 면도 있다. =종합편성채널이긴 하지만 대중을 상대로 하는 방송에서 ‘게이’라는 말을 그렇게 편하게 불러준 적은 없었다. 내게는 굉장히 중요한 한 걸음이었다. 그전까지는 ‘게이’라고 하면 꼭 ‘새끼’라는 말이 따라붙었다. 성소수자를 비하하거나 터부시하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이제는 거리에서도 사람들이 날 보면 “톱 게이”라고 부른다. 굉장히 즐거운 경험이고 잊지 못할 별칭이다.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그 말이 붙었다면 굉장히 질투났을 거다. (웃음) -그동안 방송에서 성소수자로서 다른 성소수자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고 말해왔다. 그때마다 “소명”, “책임감”이라는 말을 꺼냈다. =자신의 정체성을 놓고 고민하는 청소년들의 상담을 많이 해왔다. 누군가는 그런다. ‘왜 잠도 못 자가면서까지 그렇게 하느냐’고. 나는 그저 내가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 친구들이 누구를 붙잡고 말하겠나. 구체적인 고민을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 나밖에 없는 거다. 힘들고 괴롭고 죽고 싶고 누군가와 얘기하고 싶을 때 내가 그들의 창이 돼주고 싶다. 잘난 것도 없는 내가 뭐라고 그 친구들을 외면하나. 물론 그만큼 내 것을 많이 내려놔야 한다. 또 주변 사람, 애인한테도 서운한 짓을 많이 해야 하고. 그래도 계속 한다. -과거에 비해 자신을 좀더 친숙하게 바라봐주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 것 같은가. =요즘 모두가 힘들잖나. 그 와중에 시청자들이 내가 차근차근 일궈둔 것들이 하나씩 좋은 방향으로 변화하는 걸 지켜보면서 궁금해하는 것 같다. ‘홍석천은 세상 사람들한테 거의 밟혀 죽을 뻔한 사람인데 어떻게 그걸 이겨냈지?’ 한편으로는 그런 나에게 박수를 쳐주고 싶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나를 질투하는 묘한 감정 속에서 나를 보고 있는 게 아닐까. 10년 넘게 버티며 쌓은 내 노하우로, 여러 제약으로 미처 보여주지 못했던 내 모습을 자연스레 보여주게 됐다. 나이 마흔을 넘기고 보니 누구 눈치 볼 것도 없더라. 그저 내 행동과 말에 책임만 지면 된다. -최근 성소수자 운동이 주목받고 있는 사회적 분위기뿐 아니라 요리하는 싱글 남성들에 대한 방송가의 관심이 활동에도 영향을 미친 것 같다. =‘요섹남’(요리하는 섹시한 남자)이라는 트렌드에 잘 묻어가고 있다. 지난해는 (신)동엽의 19금 섹드립에도 얹혀갔다. 동시에 동성애 인권 문제에도 계속 관심을 갖고 있다. 문어발처럼 여기저기 걸치고 있지만 나름 잘 통제해오고 있다. 이런 인생도 하나 있어야 재밌잖나. 나는 1등 하는 것에는 관심 없다. 3등이 딱 좋다. 여러 군데에서 3등을 하다보면 한 군데에서만 1등 하는 사람보다 더 나을 때가 있다. 그리고 내가 한번 일을 벌이면 오랫동안 한다. -그러고 보니 1995년 KBS 대학개그제로 데뷔한 이후 계속 활동 중이고 2002년에 시작한 외식 사업도 10년을 넘겼다. =부모님께서 항상 하시는 말씀이 있다. ‘사람이 무슨 일을 했다고 말하려면 10년은 해봐야 한다, 그전에 뭔가를 했다고 말하는 건 네 욕심이고 사기일 수 있다.’ 19살에 서울 와서 연기자가 되고 싶어 10년 동안 별의별 걸 다 했다. 내 나이 서른이던 2000년, 커밍아웃을 했고. 그 후 10년간은 ‘내 정체성은 이렇다, 나는 어떤 사람이다’를 설명하며 살았다. 그렇게 하다보니 2010년쯤부터 방송이 좀 편해졌다. 외식업도 마찬가지다. 2002년 시작해 13년째다. 처음 개업할 때는 모든 게 힘들었는데 그걸 10년 넘게 하니 이제는 그림이 그려진다. 지난했지만 오다보니 길이 좀 보인다. 예전부터 프랜차이즈를 해보자는 제안은 많았지만 매번 거절했다. 10년은 채워야 뭘 해도 한다는 생각이었다. 이제는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을 만큼 사업 수완도 생겼다. 하반기에 스시와 타이 요리로 프랜차이즈를 낼 계획이다. 제2의 인생을 준비하는 분들이 5천만원에서 1억원 사이의 작은 규모로 창업할 수 있도록 하고 싶다. 그러면서 나도 이태원을 좀 떠나보려고 한다. -‘홍석천 하면 이태원’이 떠오를 정도로, 이태원에서만 9곳의 식당을 운영 중이다. 그곳을 떠나겠다고 말하는 데는 사업 확장의 의미 외에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건가. =내 마음속 제2의 고향이 이태원인 데는 변함이 없다. 다만 이태원을 향한 나의 맹목적인 사랑을 그만둬야 할 것 같다. 이태원에 대기업이 치고 들어오면서 건물주들이 임대료를 턱없이 올리고 있다. 자영업자들이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 내가 처음 이태원에 자리 잡을 때는 ‘이태원을 홍콩의 란콰이펑이나 미국의 소호처럼 만들 거야’라는 사명감이 있었다. 그런데 요즘은 내가 마치 이태원의 임대료를 올리는 데 일조한 사람처럼 말하는 이들이 있어 배신감을 느낀다. 새로운 연애 상대를 찾고 싶다. 이런 마음을 먹었다는 것 자체가 내겐 굉장한 변화다. -올 상반기에 <오늘의 연애>(2015), <연애의 맛>(2015)에 우정 출연했고 드라마 <복면검사>로도 연기 활동을 펼쳤다. 다양한 분야에서 일하면서도 연기 활동을 꾸준히 해오고 있는데. =연기는 계속 하고 싶다. 드라마가 들어오면 하던 예능 프로도 많이 줄일 만큼 집중한다. 하반기에도 드라마를 한편 더 할 것 같고 나중에 공연도 해보고 싶고. 헤어스타일이 역할에 제한을 준다고? 사극이 있잖나. 가발을 쓸 수 있으니까 굳이 기르지 않아도 가능하다. 그래서 지금 사극을 노린다. (웃음) 노래가 당신을 위로하리라 “석천아~ 질겨~.” <냉장고를 부탁해> 35회에 출연한 이문세의 이 한마디에 모두가 쓰러졌다. 그동안 출연한 게스트 중 가장 강렬하고 솔직한 맛 표현이었다. 그럼에도 이문세는 “어떻게든 끝까지 맛을 내려 도전하는” 홍석천을 이날의 승자로 꼽았다. 그때 눈시울이 붉어진 홍석천. “성정체성에 대한 고민으로 숨고 싶고, 죽고 싶었던 내 10대, 20대 내내 이문세 선배님의 라디오 <별이 빛나는 밤에>와 선배님의 노래를 들으며 위로받았다. 선배님은 언제나 내 우상이다. 그분이 건강히 우리 곁에 계시고 내 요리를 선보일 수 있다는 생각에….” 험난했던 옛 생각에, 좋은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는 지금에 홍석천은 또 한번 울고, 또다시 웃는다.

[김민정의 디스토피아로부터] 말만 쓰면 아프다

골프의 ‘골’자도 잘 모르지만 곧잘 골프 프로를 보곤 한다. 골프 전문 채널이 여럿이니 작정하고 텔레비전을 켜면 재방송이든 생방송이든 하루 종일 골프 치는 남과 여를 골라볼 수도 있다는 얘기다. 내가 클래식 음악 듣듯 골프 경기를 보게 된 건 필드 위에서 펼쳐지는 놀라운 적막, 그 ‘침묵’이란 먹먹함을 눈으로 확인하게 된 후부터다. 공이 홀 안으로 완벽하게 빨려들기까지 요구되는 고도의 집중력이 어떤 힘인지 한 선수가 품어내 보이는 어떤 자세로부터 확실히 알아먹을 수 있었던 것이다. 문학적 화두로 자주 쓰이는 테마이니 그 침묵에 대한 이야기는 참으로 많이 쏟아져왔다. 그러나 막 짜낸 젖소의 젖처럼 그 침묵이 바로 구현되는, 그 침묵의 생짜를 경험하기란 쉽지 않은 터. 골프를 대표로 예를 들긴 했지만 인간들의 스포츠야말로 그 침묵의 다양한 민낯을 엿보게 해주는, 무수히 많은 그 침묵들의 바로미터가 아닐는지. 다이빙보드 위에 한 선수가 몹시도 신중히 물구나무를 서고 있다. 물속으로 뛰어드는 동작의 기술과 미를 겨루는 다이빙 경기에서 보다 아름답게 입수하기 위해서는 더한 침묵이 전제되어야 한다. 테니스 코트에서 팽팽히 맞선 두 선수 가운데 한 선수가 라켓을 힘껏 휘둘러 서브를 넣고 있다. 상대로부터 넘어오는 공을 보다 강하게 되받아치기 위해 한 선수에게는 더한 침묵이 전제되어야 한다. 사격이나 양궁처럼 분명한 표적을 목적으로 하는 스포츠의 경우 침묵이 전부라서 덤덤하기도 하거니와 동시에 승부차기 시 골키퍼와 마주선 스트라이커의 침묵에는 안쓰러움을 느끼게도 된다. 페터 한트케의 소설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에 암묵적으로 깔려 있을 침묵의 전제는 그러다 어느 날 저마다 제 안에 잘 싸매둔 슬픔의 감정까지 죄다 꺼내 풀게 만든다. 울게 만든다. 산다는 일이 그렇지, 어차피 죽어가는 일이지. 이 빤한 사실을 제대로 맞닥뜨리면 사는 데 여러모로 불편하다는 걸 너나 할 것 없이 아주 잘 아는 까닭에 오늘도 우리는 그 침묵의 순간을 견디지 못한 채 말에게 애걸복걸이다. 통화만 간단히 그렇게 시작했던 전화기를 ‘가짜 팔’이 아닌 ‘진짜 팔’처럼 제 귀에 매단 것도 우리다. 들리지는 않으나 보여지는 말로 말의 알을 무수히 낳고 있는 말의 산란 장소 SNS를 만든 것 또한 우리다. 어젯밤에 열 시간 넘게 잤는데도 잔 것 같지가 않아요. 후배가 벌게진 눈으로 내게 답답함을 호소했을 때 나는 더 뻘게진 눈으로 이렇게 말했다. 난 있지, 잠의 그 침묵을 영영 잃어버린 것 같아. 나는 잠도 밤도 다 까먹었어. 수면제가 떨어져 병원에 전화를 하니 일주일 전부터 예약 스케줄이 꽉 차 있다고 했다. 간호사는 내주부터 시작되는 병원 여름휴가 전에 약을 처방받으려는 환자들이 몰린 탓이라 했다. 몸은 안 쓰고 말만 쓰니 이렇게들 아픈 걸까. 침묵이고 나발이고 나는 일단 텔레비전부터 꺼야 살겠다. 끈다.

[듀나의 영화비평] 괴물을 일으켜 세우는 방법

우리가 1세기 넘게 서부극에서 보아왔던 세계는 존재하지 않았거나 존재했다고 해도 아주 잠시만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우리가 이런 장르를 통해 접했던 전설적인 인물들, 그러니까 와이어트 어프, 애니 오클리, 버펄로 빌, 빌리 더 키드와 같은 인물들 역시 서부극 팬들의 상상 속에 거주하는 캐릭터들과는 전혀 다를 것이다. 그렇다면 서부극의 원형을 복원하려는 시도는 어디를 목적지로 삼아야 하는가? 역사를 있는 그대로 복원하려는 시도는 허망하다. 그 순간부터 장르 자체를 포기해야 한다. 존 포드의 영화들을 기준점으로 삼으면 안전하겠지만 심지어 그의 영화도 시대에 따라 다르다. 수정주의 서부극, 스파게티 웨스턴 그리고 그 밖의 온갖 변종들은 오래전에 장르가 먹어버렸다. <백 투 더 퓨처3>의 마티 맥플라이가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갈 때 그가 모델로 삼았던 것이 존 웨인이 아니라 클린트 이스트우드였다는 것을 잊지 말자. 어차피 다 거짓말인데 더 오래된 거짓말이라고 나을 게 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준점은 존재한다. 역사와 경험과 전통이 어우러져 완벽하게 진짜 같은 가짜 역사. 이런 장르화된 허구 역사의 세계가 서부극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중세 기사 이야기가 그렇고 무협지의 세계가 그렇다. 은근슬쩍 제2차 세계대전도 여기에 편입되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이들 세계는 그 자신만의 자연스러움을 갖고 있다. 존 포드의 전성기 서부극이나 김용의 무협지가 갖고 있는 언어와 행동의 자연스러움을 떠올려보라. 그들의 세계는 실제 역사에 뿌리를 내리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자기만의 깊이와 무게를 갖고 있는 평행우주이다. 이런 종류의 장르물을 만들려면 당연히 실제 역사뿐만 아니라 그 평행우주의 역사에도 익숙해야 한다. 장르 독자들이나 관객이 국외자의 장르 참여에 의심의 눈길을 던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 작가는 후자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프랑켄슈타인 괴물과 같은 세계 <협녀, 칼의 기억>(2014)은 두 종류의 평행우주를 하나로 합치려 한다. 하나는 한국 사극이고 다른 하나는 무협이다. 그러니까 영화가 그리려 하는 세계는 무협세계의 생물학과 물리학이 작동하는 고려 배경의 한국 사극 우주이다. 여기서 내가 늘 재미있어 하는 것이 하나 있다. 한국 사극 우주가 고증을 떠나(그러니까 사극 캐릭터에게 굳이 감자를 먹이려는 집요한 집착 같은 것을 말한다) 이상하게 불완전한 세계라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과거의 세계를 완벽하게 재현할 수는 없다. 하지만 현대어로 쓰여진 시대물의 전통이 70, 80년을 넘어 가는데도 사극 캐릭터의 행동과 언어에서는 자연스러운 수렴점을 찾기 힘들다. 이들의 행동은 전통에서 일탈하는 것이 아니라 전통의 부재 속에서 부유하는 것이다. 이건 텔레비전에서 틀어주는 자칭 전통사극도 마찬가지다. 이들이 쓰는 고풍스러운 대사의 상당수는 뿌리가 없고(“경들은 들으세요!”), 일부는 노골적인 번역체이다. 물론 존칭이나 존대어의 상당수도 그냥 틀린다. <협녀, 칼의 기억>의 캐릭터들도 이런 파편화된 행동과 말 속에서 존재한다. “…는 …을 만든다”와 같은 영어 번역체, 현대 청소년의 일상어, 고풍스럽고 사극적으로 들리지만 사극보다는 무협지 번역물에서 따온 것 같은(두 차이를 인식하는 것은 중요하다) 대사들이 공존한다. 프랑켄슈타인 괴물과 같은 세계인 것이다. 이게 나쁜가? 그렇지는 않다. 여러분은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을 싫어하나? 싫어한다면 도대체 왜? 괴물은 재미있고 멋지다. 단지 괴물이 으르렁거리며 마을 사람들을 죽이고 다니려면 그 괴물을 살아 숨쉬게 하는 일관된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이런 종류의 사극영화의 경우 그 무언가는 세계에 대한 자기확신이다. 적어도 자신이 어떤 전통에서 어느 정도 떨어져 있는지는 알아야 한다. 이런 파편화는 이 사극 우주가 무협 우주와 결합하면서 더 심각해진다. 무협물을 이루는 판타지는 한자문화권에서 일반화되어 있다. 원칙적으로 고려 말기와 결합해도 이상할 건 없다. 하지만 우리가 아는 무협소설이나 영화는 현대의 비교적 짧은 시기 동안 급속성장한 장르로, 그냥 생각 없이 고려 역사와 끼워맞추는 건 심장이식수술만큼 어렵다. 당연히 묻게 된다. 그런 이식이 필요했나? 주인공 홍이(김고은)의 사명은 무엇인가. 원수를 칼로 찔러 죽이는 것이다. 그런데 그 임무를 수행할 때 과연 경공술이 필요한가? 실제로 반영된 결과물을 보면 더 어리둥절해진다. 시퀀스마다 레퍼런스로 삼은 전혀 다른 영화들이 보이기 때문이다. 대나무 숲 장면은 <와호장룡>에서 따온 것 같다. 복수 장면에는 <킬 빌>도 보이고 <형사 Duelist>도 보인다. 몇몇 장면들은 로마 검투사 영화에서 본 것 같다. 이들 일부는 잘 찍었지만 굳이 하나의 영화여야 할 이유는 없다. 심지어 동일한 캐릭터의 액션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레퍼런스가 있다는 건 아무런 문제가 안 된다. 장르란 것 자체가 누적된 레퍼런스로 구성되어 있다. 굳이 다른 장르에서 레퍼런스를 따오고 싶다면 그래도 된다. 하지만 각각의 레퍼런스가 하나로 녹아들지 않고 따로 논다면 그건 만든 사람들이 장르에 대한 확신이나 이해가 부족하다는 뜻이다. 그냥 장면마다 죽어라 열심히만 한 것이다. 괴물을 구성하는 조각난 몸의 일부는 살아 있지만… 이런 이야기를 계속 늘어놓는 것은 <협녀, 칼의 기억>이라는 영화의 매력이 장르의 본류에서 살짝 벗어난 비전형성에 있기 때문이다. 다시 서부극 비유로 돌아가는데, 60, 70년대에 할리우드에서 수정주의 서부극이 유행이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정신분석의의 긴 의자에 누워 있어야 할 것 같은’ 카우보이 주인공들에 대해 불평했다. 하긴 그들은 과도하게 예민해서 그들이 속해 있는 단순명쾌한 장르 세계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사람들이 기대하는 장르 세계란 의도적으로 실제 세계의 복잡함을 떨어뜨린 곳이고 실제 세계에서는, 아니 장르 세계에도 카우보이들이 얼마든지 신경쇠약에 걸릴 수 있다. 카우보이들이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다 빼버리면 어떻게 <브로크백 마운틴>이 나오겠는가. <협녀, 칼의 기억>은 장르 틀 안에 바로 그런 인물들을 등장시킨다. 이들이 장르에서 금지된 인물형이라는 말은 하지 않겠다. 장르는 자체적으로 캐릭터의 성격을 금지할 능력이 없고 굳이 그럴 생각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들이 대나무 숲보다 정신분석의의 긴 의자에 더 어울리는 사람들이라는 건 도저히 감출 수가 없다. 특히 월소(전도연)의 경우는 욕망과 동기가 극단적으로 뒤틀려 있어서 지켜보는 것만으로 책 한권을 쓸 수 있을 것 같다. 이들의 행동 역시 복수와 정의실현, 협, 의와 같은 한 글자 한자로 정의되는 장르 공식 안에서 움직이지만, 이들은 사실 사극 복장을 한 현대인에 더 가깝고 막판엔 심지어 그도 넘어선다. 특히 이 영화 결말에서 벌어지는 일은 장르 내에서 아주 드물게 일어난다. 심지어 현대 한국 관객 상당수가 “아무리 그래도”라고 멈추는 부분에서 더 나아간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장점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을 구성하는 조각난 몸의 일부가 살아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하지만 영화가 온전히 살아남기 위해서는 일부만 꿈틀거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리고 기왕 장르를 택했다면 괴물을 일으켜 세우는 방법도 역시 장르에서 찾아야 한다. 등장인물들의 사고방식이 장르의 전형성을 벗어난 경우는 오히려 더 치밀한 장르 지식과 테크닉이 요구된다. 배경을 이루는 세계가 완성되지 않는다면 영화는 가장무도회에서 멈추고 만다. 캐릭터가 반항하고 맞서고 배반해야 할 상대로서 세계가 불완전하다면 영화가 어떻게 온전히 설 수 있겠는가.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실패

※<판타스틱4>와 <오피스>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침묵의 시선>에서, 50년 전 인도네시아 민간인 학살로 형을 잃은 아디는 가해자와 방조자들을 방문해 왜 그랬는지 묻는다. 누구 하나 책임을 인정하거나 사죄하지 않는 가운데 유일하게 사과하는 사람은 아버지의 잔혹 행위가 금시초문인 여인이다. 아버지를 평생 존경해온 효녀의 얼굴은 대화가 진행될수록 굳어가고, 아디가 피살자 유족임을 밝히는 순간 쩍 하고 금이 간다. 아버지의 체면을 지키려는 안간힘 와중에도 그녀의 눈은 충격과 연민을 감추지 못한다. “제가 대신 사과할게요. 이제부터 우리 가족처럼 지내요.” 둘은 포옹하지만 떠나는 아디는 씁쓸해 보인다. 그녀는 지금 자신이 어떤 부피의 고통에 대해 사과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인은 아디가 좀더 머물길 바라지만 차마 붙들지 못한다. 08/17 <판타스틱4>에 대한 혹평은 일약 에스컬레이터를 올라탄 느낌이다. <뉴욕타임스>의 A. O. 스콧은 “인비저블 우먼(케이트 마라)의 남을 투명하게 만드는 파워를 본 영화에 행사했으면 좋았을 뻔했다. 안 그래도 1, 2주면 저절로 안 보이게 될 영화지만”이라고 썼다. 평소 호평을 퍼주는 편이던 <롤링 스톤>의 피터 트래버스도 “차원이라고 할 만한 걸 갖지 못한 이 영화를 보고 있으면, 극중에서 다른 차원으로 텔레포트되는 원숭이가 부러워진다”라고 악평했다. 그런가 하면 “이 영화에 비하면 <그린 랜턴: 반지의 선택>은 <다크 나이트>”라는 일타이피성 독설도 어디선가 읽었다. <판타스틱4>는 제작과정부터 잡음이 꾸준히 흘러나오다보니 부정적 기대가 미리 형성된 블록버스터다. 몇해 전 <월드워Z>도 뚜껑을 열기 전까지는 비슷했지만, 하향 조정된 기대에 비해 완성된 영화가 그럭저럭 즐길 만해, 결과적으로 가산점을 얻기도 했다. 불운하게도 오늘 확인한 <판타스틱4>는 특이한 관점으로라도 부각시킬 만한 장점을 찾기 어려웠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나 <주피터 어센딩>처럼 철저히 허술하거나 뒤죽박죽이라 아이로니컬하게 즐길 수 있는 부류도 아니다. 어느 쪽으로도 비상구가 없어 보이면 평 쓰는 사람들은 영화의 어디가 어떻게 미비하고 역기능을 일으켰는지 상술할 의욕을 잃고, 영화가 실망스러운 정도를 개성 있게 표현할 문장을 구상하는 방향으로 에너지를 돌리는 경향이 있다. 08/18 이십세기 폭스는 2005년작 <판타스틱4>와 2007년작 <판타스틱4: 실버 서퍼의 위협>과 차별화되는 비주류 감성을 리부트에 끌어들이겠다는 목표로 <크로니클>의 조시 트랭크 감독을 선택했다. 그러나 완성된 <판타스틱4>는 허망하게도 기성 슈퍼히어로영화의 단골 블록으로 조립돼 있다. 부당하게 학교에서 따돌림당하는 소년, 직접 연구한 신기술의 피실험자로 나섰다가 입는 부작용, 좌절한 이상주의를 인류멸망론으로 비화시키는 악역 등이 등장한다. 웬만한 히어로물이면 하나씩 돌려쓰는 클리셰지만 <판타스틱4>는 개수가 많다. 얄궂은 점은, 그러면서도 서사 장르의 훨씬 유서 깊은 공식인 3장 구조나, 발단-전개-절정-결말 구성은 포기했다. 냉정하게 말하면 <판타스틱4>는 영화 전체가 100분짜리 발단처럼 보인다. 마블 스튜디오의 영화를 보며 액션 클라이맥스가 너무 길다고 투덜거리긴 여러 차례였지만, 액션 클라이맥스가 끝나고 나서야 클라이맥스인 줄 깨닫기는 <판타스틱4>가 처음이다. 그러나 진짜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세부가 독창적이라면 상투성이나 구조의 미비함에 대해 히어로물 관객은 상당히 너그러워질 수 있다. 한데 <판타스틱4>는 에피소드와 대사도 연방 빗나간다. 주인공 리드(마일스 텔러)와 벤(제이미 벨)의 고교 시절이 시작되자마자 나는 당황했다. 무려 순간 차원 이동 테크놀로지를 개발하는 연구자들이 비책을 찾아다니는 곳이 고등학교 과학경진대회장이라니! 소싯적 키아누 리브스가 출연했던 <엑설런트 어드벤처>(1989)류의 청소년 모험물을 추억하게 만드는 설정이다. 리드가 박스터 연구소에 발탁된 이후 전개도 김이 빠진다. 일종의 과학 영재 호그와트라고 할 수 있는 특별한 배경에서 청춘영화로서, SF로서 개발할 수 있었던 풍부한 드라마와 유머는 잠재성으로만 남았다. 고작 오가는 말이 “너, <해저 2만리> 읽었니?” 운운이다. 말난 김에 대사를 돌아보자면 <판타스틱4>의 언변은 <허큘리스>, <터미네이터 제니시스>의 그것만큼 둔탁하다. “과거를 바꿀 순 없지만 미래는 바꿀 수 있어”, “그는 우리보다 훨씬 강하지만, 우리를 전부 합친 것보다는 강하지 않아!” 등의 하나마나한 회화 예문이 결정적 순간 주인공들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쓰고 보니 후자의 대사는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의 주제와 별반 다르지 않은데 차이는, 조스 웨던 감독은 같은 메시지를 기승전결이 있는 액션과 이미지로 풀어냈다는 점이다. 텔레포트 기계를 완성한 리드와 조니(마이클 B. 조던) 일동은 본인들이 아니라 미국 항공우주국(NASA)의 전문 파일럿들이 장치에 탑승할 거라는 말에 펄쩍 뛴다. 고생은 우리가 하고 유명세는 비행사들이 누린다고 분노하며 술김에 텔레포터를 작동한다(그러면서도 여성 동료 개발자인 수에겐 아무도 연락하지 않는다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하지만 만든 자가 반드시 장치를 운행해야 한다는 법은 어디에도 없고 합리적이지도 않다. 세계에서 제일 똑똑한 청년들의 발상이라기엔 부연 설명이 필요한 응석이다. 달리 생각하면 이런 유치함과 객기는 <판타스틱4>를 조시 트랭크 감독다운 영화로 차별화할 스프링보드가 될 수도 있었다. 우연히 얻은 초능력을 지리멸렬한 현실을 달래기 위해 오남용하다가 피투성이 파국을 맞는 <크로니클>의 안타까운 소년들을 회상해보라. <판타스틱4>의 대리 보호자인 프랭클린 스톰 박사(레그 E. 캐시) 역시 “그들은 겁먹은 어린아이들일 뿐이야”라는 대사로 4인조의 미숙함을 강조한다. 그러나 <판타스틱4>의 네 주연배우는 사춘기 소년, 소녀로 보이진 않는다. 결정적으로, 인물들이 돌연변이 능력을 얻은 시점부터 영화는 급격히- 이 시점에 감독이 배제된 것이 아닐까 추측할 정도로- 캐릭터의 속성을 외면한 선악 대결 노선으로 달려간다. 젊은 주인공들의 미성숙과 더불어 <판타스틱4>가 발전시켰으면 어땠을까 싶은 두 번째 계기는, 신체 호러로서의 가능성이다. 특히 바윗덩이 괴물로 영영 변해버린 벤과 고무처럼 몸이 늘어나게 된 리드는 그들에게 닥친 변화를 혐오한다. 침상 위 리드의 늘어난 다리를 하염없이 훑어가는 숏은 <판타스틱4>에서 거의 유일하게 잊을 수 없는 이미지이기도 하다. 하지만 영화는 부적응, 그리고 적응의 시간을 생략하고 이들을 액션에 투입함으로써 벤의 광물성 피부와 리드의 고무 사지를 그저 우스꽝스럽고 거추장스러운 무기로 활용하는 데에 그친다. 여기서 엄한 상상 하나. <판타스틱4>에 스튜디오가 재도전한다면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에게 전화라도 한번 넣어보는 것이 어떨지? 08/19 <오피스>는 “사표를 칼처럼 품고 다닌다”라는 관용어에서 비유를 지워버린다. 정말 칼 한 자루를 안주머니에, 사무실 책상 서랍에 넣어두고 다니는 샐러리맨들이 나온다. <숨바꼭질> <소셜포비아>도 그랬지만, 개인과 조직을 불문하고 능동적 목표보다 낙오의 공포가 행위의 큰 동기로 작용하는 한국 사회 양상에 잘 착안한 장르영화다. 동시대 집단이 현실에서 겪는 고역에 기초한 호러는 쇼크와 무서움도 중요하지만, 히스테리와 노이로제의 뿌리를 드러낼 때에 긴 전율을 남긴다. <오피스>는 이 대목에서 미흡하다. “고위 간부들은 가혹하다”, “동료들은 이기적이다”, “인턴은 착취당한다”, “중간관리자는 고독하다”는 만인이 동의할 만한 정서에 호소하지만, 여러 인물의 스트레스와 폭력 충동이 어떻게 맞물리고 전이되는지 회로를 그리지는 못한다. 존속살인부터 사내 연쇄살인까지 초래하는 ‘몬스터’가 초자연적 힘인지, 사람인지 혹은 어느 지점에서 어떻게 양자가 접속했는지 종장 이전에 명백히 하고 밀어붙였다면 <오피스>는 끝까지 흥미진진했을 것이다. 아무튼 <오피스>는 다시 확인시켜준다. 소재만 따져도 한국 공포영화는 훨씬 무서워질 여지가 무궁무진하다. 좋아요 모녀의 화해 EBS국제다큐영화제 상영작 <몽테뉴와 함께 춤을>은, 몽테뉴를 번역하는 불문학자 어머니(심민화)의 현지답사 여행에 카메라를 들고 동행한 이은지 감독의 기록이다. 자연히 영화의 토픽은 양 갈래다. 어머니의 어깨너머로 엿보는 번역이라는 작업의 정체가 하나, 그리고 모녀관계에 대한 사색이다. 세상 모든 가족여행이 그렇듯 감독 모녀도 길 위에서 다툰다. 단, 푸는 장면이 특별하다. 딸은 아이처럼 엄마 무릎을 베고 문제를 지적하고, 엄마는 정면의 공중에 시선을 고정한 채 생각을 정확히 전할 단어를 고른다. 내 마음은 연약해졌는데 너는 날 여전히 노인으로 여기지 않아 부딪치는 것 같구나. 모녀 대화라기보다는 어쩌다가 먼저 늙게 된 친구가 배려를 청하는 말로 들린다. 가장 가까운 남편과 딸에게도 평생 완전히 이해받지 못할지 모른다는 60대 여성의 불안, 인생의 다음 단계를 잠시 유예한 채 엄마의 삶을 견학 중인 딸의 불안이, 두 사람의 자세가 만든 삼각 구도 안에 부드럽게 어우러진다.

[trans × cross] “무대에 올라 연기하는 내가 가장 나답다”

김민교는 를 통해 대중에게 얼굴을 알렸다. 그는 서울예술대학교 연극과 93학번으로 김수로, 이종혁, 임형준 등의 동기들과 대학로 무대부터 차근차근 시작한 배우다. 그런데 아직도 그를 개그맨으로 아는 사람들이 더 많은 듯하다. 그렇다면 이 기회에 확실히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조만간 방영을 시작하는 시즌6에서는 아쉽게도 그를 볼 수 없지만 9월1일 막이 오른 연극 <택시 드리벌> 무대에서 그를 만날 수 있다. 그는 여러 편의 영화 촬영도 겸하고 있다. 연극뿐만 아니라 영화로까지 활동 영역을 확장하고 있는 그는 이때를 기다려왔다는 듯 꽁꽁 숨겨왔던 배우로서의 에너지를 쏟아내고 있는 중이다. 그의 스케줄이 더 바빠지기 전에 서둘러 자리를 마련했다. 그러자 스튜디오로 배우 김민교가 걸어들어왔다. -어제(9월1일) <택시 드리벌> 첫 공연을 마쳤다. 오랜만에 연극 무대로 복귀했다. = 시작하면서 무대를 떠났다가 3년 만에 다시 컴백했다. 어릴 때 연극 무대에 올라가면 인기 많은 배우가 되어 있는 모습을 혼자 상상해보곤 했다. 그런데 어제 무대 위에 불이 켜지는 순간,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는데도 관객 반응이 느껴져 기분이 묘했다. 벌써 웃기 시작하고. (웃음) 내가 상상해왔던 모습이 이런 거구나 싶었다. -왜 그렇게 오랫동안 연극 무대를 떠나 있었던 건가. =방송에 올인하기도 했고 사실 그 이전까지는 때가 아니라는 생각도 있었다. 그러던 중 수로 형의 설득에 마음을 고쳐먹었다. 재미있는 게 김수로 프로젝트 1탄 <발칙한 로맨스>가 나의 연출작이다. 그때 당시 대학로에서 19금 코미디를 처음으로 시도한 작품이었다. 아직은 한국에서 시기상조라며 아무도 안 될 거라 했다. 이후 가 방영되면서 대학로에 19금 코미디 붐이 일기도 했다. -그때 이미 의 전신을 만들었던 셈이다. = 시즌2에 합류하게 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장진 감독과 마주쳤는데 지금 뭐하냐고 묻기에 딱히 하는 게 없다고 하니까 오라고 하더라. 여하튼 방송하는 동안 <발칙한 로맨스> 때 축적해놨던 19금 코미디에 대한 아이디어가 제대로 구현된 셈이다. 장진 감독과는 <킬러들의 수다>(2001)에 단역으로 출연하면서 연을 맺은 후 를 거쳐 최근 작업한 TV영화 <바라던 바다>까지 함께했다. -를 처음 시작할 당시에는 어떤 이유로 참여하게 됐나. =(잠시 한숨) 내 인생 최악의 시기였다. 아버지가 암으로 돌아가신데다 사기를 크게 당했다. 어머니와 아내가 있는 집으로 빚쟁이들이 찾아오니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바닥을 쳐보니까 소중함을 절실히 깨닫고 열심히 했다. 오랫동안 연극 무대에 서면서 자존심처럼 지켜왔던 게 하나 있다. 당시 많은 배우들이 아동극을 겸하면서 돈을 벌었는데 나는 고귀한 연기를 배워서 왜 낭비하느냐며 아동극 탈을 단 한번도 안 썼다. 그런데 에 들어가 여의도 텔레토비 탈을 쓰고 인기를 얻기 시작한 거다. (웃음) -얼굴 근육 곳곳을 자유롭게 움직일 줄 안다. 그리고 특히 눈을 즐겨 활용한다. =솔직히 표정 연기를 연습해본 적이 없다. 연극할 때도 큰 눈 때문에 득을 봤다. 남들보다 몇배의 감정을 실어나를 수 있었다. 게다가 나는 순간 뒤집기, 즉 갑작스런 감정 전환 연기에 굉장히 강하다. 펑펑 울다가 갑자기 웃는다거나, 울면서 웃는 연기 등을 잘한다. 그런 연기를 에서 많이 활용했다. 연극 무대에서는 진중한 연기를 주로 보여주곤 했다. 지인들은 아직도 내가 사람들을 웃게 만들면서 뜰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말한다. 스스로 내 얼굴을 한계라 여길 때도 있다. 내가 알 파치노 같은 배우의 표정을 보여줄 수는 없으니까. - ‘GTA’ 코너의 인기도 빼놓을 수가 없다. 누구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나. =종종 배우들이 자신의 게으름을 포장할 때 ‘이게 다 연기인생에 도움이 되는 거야’라는 말을 하곤 한다. 예전에 공연하다가 십자 인대가 끊어져서 1년6개월 정도 쉬었는데 그때 게임에 빠져 폐인 생활을 했다. 같이 살던 친구가 컴퓨터를 부수겠다고 협박할 정도로 심하게 매달려 1년이 지나고 나니 웬만한 온라인 게임에서 죄다 상위권에 올라 있었다. 그때 경험이 코너 짜면서 정말 유용하게 쓰였다. 그 코너로 대중적 인지도를 얻었고 광고도 찍었다. 당시 게임에 빠진 내게 화를 냈던 32년지기 친구는 내 권유로 우리 기획사 매니저로 일하고 있다. -김수로, 강성진, 박건형을 비롯해서 아무리 친한 사이더라도 오랫동안 공적 관계를 유지하며 작업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 =술을 좋아해서일까? 사실 의리를 중요하게 여긴다. 어린 시절, 나를 뒤흔들어놨던 영화가 유덕화, 알란탐의 <지존무상>(1989)이다. 그 영화 때문에 의리 지킨답시고 탈선도 하고 분주하게 살아왔다. (웃음) 아무튼 사람들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매니저 친구도 그래서 오랫동안 함께하고 있고. 형들도 마찬가지라서 이제는 웬만한 단점은 그냥 덮어준다. -군대에도 잘 적응했을 것 같다. =생활보다는 배우로서 이 기간 동안 연습을 안 하면 뒤처지겠더라. 정체되는 게 싫은 불안감에 군가를 부를 때나 관등성명을 대는 순간을 발성 연습으로 활용했다. 함께 지내는 사람들을 관찰하고 보이는 모든 것을 연기하는 상황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2년을 보내고 나왔더니 발성이 눈에 띄게 달라졌다. 복학하고 첫 무대에 올랐는데 교수님들이 내 목소리만 들렸다며 칭찬을 해주시더라. 그렇게 자신감이 생기니까 더욱 신나서 연기했던 것 같다. -어제 섰던 무대와 대학 복학 후 섰던 무대는 어떻게 다르던가. =잘난 척은 아니지만 늘 자신감을 가지려고 한다. 이렇게 힘든 환경에서 버티려면 나라도 나를 믿어줘야 하지 않을까? 기회만 오면 뭐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입한다. 어제 섰던 무대는 그동안 갈고닦아왔던 자신 있는 것들을 펼쳐놓았고, 지금까지의 삶을 보상받는 기분이 들었다.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합기도 유단자다. 액션 연기에 대한 욕심은 없나. =제대하기 전까지는 합기도 선수와 사범 생활도 겸했다. 지금은 외모가 액션 배우의 그것이 아니라 불러주지 않는 것 같고. 지금도 내게 여전히 액션 연기를 권하는 딱 한 사람은 <점쟁이들>(2012)의 신정원 감독이다. 우리가 이십대 후반일 때, 그가 처음 사비를 들여 장편독립영화를 찍는다며 나를 섭외한 적이 있다. 좀비영화였는데 내가 무술로 좀비를 때려잡는 주인공을 연기했다. 그때 이후로 아마 20kg 정도 쪘을 거다. 신 감독은 지금도 만나면 언제 한번 액션영화 같이 하자고 이야기한다. -현재 촬영 중인 영화도 간략하게 소개해달라. =박광현 감독의 <조작된 도시>에서 살인 누명을 쓰고 위기에 처한 게임 마니아 권유(지창욱)를 돕는 게임 모임 회원 용도사 역을 맡았다. 용산 전자상가에서 일해서 아이디가 용도사인데 같이 연기하는 김기천 선생님, 심은경, 안재홍 등 오합지졸 멤버들과 힘을 합쳐 주인공을 돕는다. 일종의 코믹 액션 분위기가 강하다. -아무래도 <조작된 도시>가 본격적으로 스크린에서 연기를 보여줄 첫 영화나 다름없다. =어느 영화든 열심히 해왔지만 이제 조금 뭔가 연기를 보여줄 수 있는 작업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늘 동경해왔고 기대하던 현장 분위기와 역할이다 보니 초심으로 임하고 있다. 늘 꿈꿔왔던 나의 모습이니 이제 시작이다. -10월에 또 다른 영화 촬영에 들어간다고. =신태라 감독의 신작 <바운티 헌터스>에 출연한다. 얼마 전에 크랭크인했고 나는 10월부터 촬영한다. 한•중 합작 액션 코미디라 규모가 꽤 크다고 들었다. 제주도와 홍콩, 마카오, 타이 등을 오가며 촬영한다. 내가 맡은 역할은 이민호를 옆에서 도와주는 약간 반전 있는 조력자다. -마지막 질문이다. 김민교에게 연기란. =이십대 때는 연기가 숙제나 도전 같았고 잘하고 싶다는 의지가 나를 힘들게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내가 연기하는 순간에 거짓말을 하지 않고 믿음을 가지니 되더라. 때론 연기할 때가 인간 김민교로 살아가는 순간보다 편할 때가 있다. 현실에서는 고민해야 할 것이 너무 많다. 누군가의 비위를 맞춰야 하고 예의를 차려야 하고 안 아픈 척해야 하는 등 거짓을 안고 살아야 한다. 그런데 연기할 때는 그 순간만 진실하게 임한다면 스트레스 받을 일이 없다. 마치 고등학생 때 어른들이 공부만 할 때가 제일 편한 시기라고 하는 것처럼 딱 그런 편안함을 느낀다. 김수로 프로젝트 12탄 <택시 드리벌> 장진 감독의 오리지널 연극 <택시 드리벌>을 김수로 사단 버전으로 만날 수 있는 기회다. 이야기 골격은 원작을 유지하되 시대상을 반영한 에피소드 등을 덧붙였다. 장진과 김수로의 유머 스타일도 확연히 달라 원작을 본 관객도 새롭게 즐길 요소가 많은 것이 특징. 과거에는 택시를 테이블과 박스 정도로 표현하면서 배우들의 연기에만 집중하게 했다면 지금은 무대 위에 진짜 택시를 올리고 프로젝터를 이용해 배경 영상을 스크린으로 상영하는 등 마치 영화가 스크린 밖으로 튀어나온 듯한 효과를 연출한다. 김민교와 박건형, 김도현 등 세 배우가 주인공 장덕배를 연기하고 김수로, 강성진을 비롯해 배우 남보라도 함께 참여한다. 11월22일까지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서 공연한다.

[박수민의 오독의 라이브러리] 神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신다, 우리처럼

“텔레비전이 우리를 신으로 만든다고 생각해본 적 있어?” 영화 <파이트 클럽>(1999)의 원작자로 유명한 척 팔라닉의 처녀작 <인비저블 몬스터>(최필원 역, 책세상 펴냄)에서 한 캐릭터가 묻는다. 그에 따르면, ‘별별 인간들’이 다 나오는 TV 속엔 채널마다 ‘다른 인생’이 있고, 매 시간 바뀌는 인생들이 ‘생중계’되며, 우리는 그들 모르게 세상을 훤히 ‘들여다본다’. “신은 우리를 마음대로 할 수 없으니, 그가 하는 일이라고는 그저 지켜보고 있다가 지루해지면 채널을 바꾸는 것뿐이야.” 그러니 TV 앞에 앉은 우리도 신과 다를 바 없다는 거다. 백남준의 설치미술 (1974)가 언뜻 떠오르면서도, 지금 현실을 생각하면 더욱 그럴듯한 얘기 같다. 전지전능한 신은 그 전능함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세상이 지옥이 되어가는 꼴을 내버려두며 곤궁에 처한 인간들을 절대로 구하지 않는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TV 뉴스 속 온갖 병폐와 부조리와 숱한 죽음을 들여다볼 뿐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안타까운 탄식을 내뱉거나 혀를 차고 나면 손에 쥔 전능한 리모컨(‘Remote Control’이라니, 정말 멋진 이름 아닌가!)으로 채널을 돌려 다른 인생을 보거나 혹은 전원을 꺼 무시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신 대신에 뭔가를 해야 하는 쪽은 인간이다. 그러나 TV가 제공하는 현실은 인간의 고유한 삶도 대체한다. 의식주부터 연애와 결혼, 출산과 육아, 이혼과 재혼까지도 TV만 보고 있으면 모두 대리체험할 수 있다. 이른바 ‘n포 세대’가 포기한 n을 현실에 잉여된 인간들 대신 ‘리얼 버라이어티’가 채운다. 현실 도피를 위해 보는 예능이 남의 현실이다. TV 속 셰프의 근사한 요리를 맛보고 감격하는 연예인들을 보며, 골방의 시청자가 편의점 도시락 혹은 라면을 입에 넣고 있는 모습은 를 패러디한 퍼포먼스처럼 보일지 모른다. 언젠가 모처에서 열린 시나리오작가 세미나에서 방송국 PD와 의도치 않은 논쟁을 벌인 적이 있다. 호기심에 참관을 왔다는 그는 겨우 영화 한편을 만들기 위해 오랜 시간 시나리오만 붙잡고 있는 작가나 감독들의 노력이 너무 덧없는 모양이었다. 훨씬 거대한 시장에 더 많은 시청자가 있는 TV를 두고, 어째서 영화라는 허황되기 짝이 없는 일에 각자의 귀한 인생들을 거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것. 영화는 결코 TV보다 대단한 매체가 아니라는 그에게, 그래도 영화가 더 의미 있다고 답하는 나는 요령부득의 답답한 영화 근본주의자로 보였을 거다. 실제로 영화의 ‘대중매체’적 기능은 생각보다 대단치 않다. 열린 매체인 TV에 비해 닫힌 텍스트인 영화는 단품의 그림이나 조각상, 소설, 교향곡에 가깝다. 영화는 관객에게 일방적이고, TV는 실시간으로 시청자와 상호작용한다. 영화가 픽션에 현실을 반영하고 방증하고 반성하려 한다면, TV는 현실 자체를 다루면서 현실에 직접 개입하거나 통제한다. 영화는 재해석한 현실을 보여주지만 TV는 계획한 현실과 계획 밖의 현실 사이에서 포착한 것들 중 보여줄 장면을 선택한다. 영화는 절대 세상을 바꿀 수 없는데 가끔 우연히 바꾸는 것처럼 보인다. TV는 능히 세상을 바꿀 수 있어도 돈이 되는 쪽으로 바꾼다.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지 모르겠으나, 이미 세상은 TV 속에 있다. TV에 영화는 프로그램 편성의 수고를 더는 ‘콘텐츠’일 뿐이다. TV 매체의 강력함은 선점하고 있던 ‘볼거리’의 자리를 위협당한 영화의 세계에서 가공할 공포의 대상으로 그려졌다. TV 프로그램이 스폰서의 자본과 대중의 선정주의에 휘둘려 섹스와 폭력, 죽음을 파는 쇼가 될 거라는 예측은 SF 액션의 명분으로 삼기에 좋았다. 제임스 칸이 분투하는 노먼 주이슨의 이색작 <롤러볼>(1975)로부터 국가간 전쟁 대신 기업 주최의 살상 스포츠가 개막하자, 이탈리안 익스플로이테이션의 마왕 루치오 풀치는 거대 방송국이 지배하는 미래 로마에서 콜로세움의 검투사들이 마차 대신 모터사이클을 타고 싸우는 <뉴 글래디에이터>(I Guerrieri Dell’anno 2072, 1984)를 만든다. 스티븐 킹 원작, 아놀드 슈워제네거 주연 <런닝 맨>(1987)의 인간사냥 쇼 포맷이 이어져 일반인들끼리 생존 경쟁을 벌이는 <시리즈 7>(Series 7: The Contenders, 2001) 같은 영화에 이르면 이런 상상은 실제 TV에서 하고 있던 ‘서바이버’ 같은 리얼리티 게임 쇼보다 시시해진다. 좀더 영민한 작가들은 네트워크와 채널로 이루어진 TV 매체의 형식에 주목했다. 웨스 크레이븐의 <영혼의 목걸이>(1989)에서 악마를 숭배하는 연쇄살인마는 스스로가 TV 전파로 변해 송신탑의 거대 안테나로 뻗어나가면서 “이제 공중파로 진출한다!”고 외친다. 결말부 TV 속으로 들어가 리모컨을 무기로 채널과 채널을 오가며 악마와 싸우는 아이디어는 피터 하이엄스의 가족 코미디 <스테이튠>(1992)의 Hell TV와 666개의 채널로 확장된다. 물론 이 모든 것은 먼저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비디오드롬>(1983)이 있었기에 가능한 상상들이었다. 마셜 매클루언의 <미디어의 이해>(1964) 시청각 교재로 손색없는 이 영화에서 TV는 현실이고 현실은 TV보다 덜 현실적이다. 실제의 폭력을 넘어 가상과 현실의 본질적인 차이마저 흐리게 만든 미디어는 인간 육체와 기계 기술을 말 그대로 ‘융합’해버린다. 로버트 레드퍼드의 <퀴즈쇼>(1994), 피터 위어의 <트루먼 쇼>(1998), 론 하워드의 <생방송 에드TV>(1999) 등 TV 속 조작된 현실을 다룬 영화의 계보 맨 앞자리에는 시드니 루멧의 걸작 <네트워크>(1976)가 있다. 오랫동안 UBS TV의 간판 뉴스앵커였던 하워드 빌(피터 핀치)은 시청률 저조를 이유로 해고를 통보받자 생방송 도중 다음 뉴스 시간에 권총 자살을 하겠다고 선언한다. 오랜 동료인 보도부장 맥스 슈마커(윌리엄 홀든)의 비호 속에 마지막 방송에서 사과 대신 내뱉은 푸념이 전국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키자, 시청률 반등에 주목한 프로그램 기획자 다이아나(페이 더너웨이)는 하워드를 진실의 예언자로 내세운 새로운 컨셉의 뉴스 쇼를 사장 프랭크 해켓(로버트 듀발)에게 제안한다. 영화는 시청률과 이윤 창출을 위해서라면 가능한 모든 것을 돈벌이로 삼는 미디어 산업과 그 종사자들의 비인간성을 지적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이면에 존재하는 기업과 자본주의의 본질에까지 도달한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낡지 않는 영화. TV를 소재로 한 영화 중 단 한편을 꼽는다면 단연코 이 작품이다. 위대한 작가 패디 차예프스키가 쓴 시나리오의 모든 대사가 훌륭하지만, 그중에서도 최고는 UBS를 합병한 거대 기업 CCA의 회장 아서 젠슨(네드 비티)이 하워드에게 일장연설하는 내용이다. 그 속엔 알 건 다 안다고 생각하는 지금의 우리도 감히 인정하기 두려운, 태초부터 그래왔고 앞으로도 영영 이어질 이 세계의 진짜 진실이 밝혀져 있다. 진실 앞에 큰 충격을 받은 하워드는 “나는 신의 얼굴을 보았다”고 말한다. 천상에 있다는 유일한 신은 TV 앞의 우리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지상에 존재하는 어떤 신은 TV 뒤에서 온갖 일을 하느라 바쁘다. TV 속이 세상에 존재하는 현실이고 실제 나의 인생은 모호한 환상이 된 우리를 위해 <심슨 가족>의 호머가 오열하며 했던 말을 마지막으로 인용해야겠다. 그는 그가 아무것도 안 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TV 때문이야. 고품격의 프로그램이 너무 많아 다른 건 할 수가 없어. 새로 나오는 것마다 더욱 신선하고 기발해. 한번이라도 실수해서 우리에게 30분만 준다면 좋을 텐데. 하지만 절대 실수하지 않아! 내가 살아볼 기회를 안 줘!” 어떤가? 남 얘기가 아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