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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1997)

레오스 카락스라는 인물의 본모습 <미스터 레오스 카락스>

퐁네프 다리가 내려다보이는 건물 창가에, 한 남자의 실루엣이 비친다. 끝까지 명확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그는 바로 레오스 카락스 감독이다. 카락스의 기행적인 언론 기피 습성은 잘 알려져 있다. 영화계에 몸담았던 지난 30년 동안, 그가 직접 참여한 인터뷰 횟수는 손에 꼽을 정도다. 그나마 텔레비전 영상인터뷰는 찾을 수 없다. 그 연장선상에 아직도 카락스는 서 있는 듯 보인다. 자신에 대한 내용을 담은 이 영화 <미스터 레오스 카락스>에서도 그는 새로운 모습이나 기존의 고정관념을 뒤집을 흔적은 보여주지 않는다. 때문에 다큐멘터리 연출자 테사 루이즈 살로메는 과거 아카이브 영상 자료들을 활용해 그를 간접적으로 설명한다. 최근 촬영한 듯한 관계자들의 인터뷰가 여기에 덧붙는다. 과거 줄리엣 비노쉬의 인터뷰 장면이나 <홀리모터스> 상영 당시 칸국제영화제의 반응이 담긴 텔레비전 화면, 그리고 촬영장 메이킹 필름 등이 짜깁기되어 등장하고, 이어서 드니 라방과 하모니 코린, 질 자코브 등 감독이나 배우, 관계자들의 설명이 교차된다. 만일 레오스 카락스의 작품 세계를 한마디로 설명하라면, 미국의 영화평론가 리처드 브로디의 말을 빌리는 편이 수월할 것이다. 카락스 영화에는 금기가 있는데, 그건 바로 ‘평범함, 반복, 일상’이다. 1980년대 데뷔한 이 젊은 천재는 빠르게 프랑스영화의 저주받은 시인 자리에 올라섰다. 하지만 30년 동안 그가 완성한 영화는 <소년 소녀를 만나다>와 <나쁜 피> <퐁네프의 연인들> <폴라 X> <홀리모터스>, 단 5편뿐이다. 카락스 자신을 대변하듯 주인공은 자기파괴의 욕구로 응집돼 있고, 여자주인공은 시적으로 과장되어 설명된다. “레오스 카락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에 고다르는 잠시 망설이다가, 이내 특유의 느릿한 말투로 미소 지으며 “용기를 주고 싶군요”라고 답한다. 그걸로 충분하다. 영화 <미스터 레오스 카락스>의 구심점에는 분명히 카락스가 서 있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마치 무중력 상태에 빠진 내면처럼 비밀스럽게 번지기를 반복할 뿐이다. 마치 수수께끼 같은 신화가 레오스 카락스라는 인물의 본모습이라고 일러주듯 말이다.

[파리] 환경을 생각하는 다큐냐 그린 버스터냐

‘왜 우리는 아직도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지 못하는 것인가?’ 사진작가이자 환경운동가로 세계적 명성을 떨치고 있는 얀 아르튀스 베르트랑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통계나 분석 대신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찾아내길 원했다. 이를 위해 그는 지난 3년간 60개국을 돌아다니며 2020명의 증언을 63가지의 언어로 2500시간 동안 촬영해 그의 두 번째 장편다큐멘터리 <휴먼>(2015)으로 완성했다. 유엔 창설 70주년 기념행사 때 첫선을 보인 이 영화는, 아르튀스 베르트랑의 첫 장편 다큐멘터리 <홈>이 그랬던 것처럼 전통적인 방식으로 개봉하는 대신, 개봉과 동시에 텔레비전 공중파로 대중에게 소개됐고, 동시에 인터넷상에서도 무료로 공개됐다. 상업적인 이윤 추구보다는 더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보고 환경과 인류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것이 더 큰 목적이라는 감독의 가치관 때문이다. 참고로 2009년 세계 환경의 날에 맞추어 첫선을 보인 <홈>은 지금까지 극장, 텔레비전, 인터넷 그리고 각종 사회단체에서 마련한 무료 상영을 통해 600만명에 가까운 관객과 만남을 가졌다. <휴먼>은 사형선고를 기다리는 미국 죄수, 히로시마 원폭 피해자, 일부다처제 사회에서 살아가는 여인 등 다양한 인종, 언어, 문화, 연령대의 사람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이 이야기들은 아르튀스 베르트랑의 장기인 아름다운 항공숏과 조화롭게 교차되면서 보여진다. 프랑스에선 <휴먼>의 이런 시각적인 아름다움, 친환경적 메시지, 비영리적 배급방식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매체들이 있는 반면, 그의 작업 자체의 모순을 비판하는 매체들도 있다. 얀 아르튀스 베르트랑이 <휴먼> 같은 ‘그린 버스터’ 영화제작을 위해 사회에 물의를 일으킨 베탕쿠르-슐러 재단(사르코지 전 프랑스 대통령의 비자금 횡령 사건과 연관된 유대계 프랑스 그룹)과 연계하고 있고, 또 헬리콥터로 촬영하는 그의 장기인 항공숏들은 영화 메시지와 달리 환경을 해치기 때문이다. 과연 그의 작품들을 액티비즘 다큐멘터리로 볼 수 있을까? 관심 있는 독자들은 유튜브에서 직접 그 답을 찾아보기를 바란다.

“모바일 이후 상황을 준비한다”

2005년 실시간 개인방송 서비스 ‘W’ 베타 서비스를 시작했고, 2006년 멀티미디어 개인방송 서비스 ‘afreeca’를 정식으로 오픈한 ‘아프리카TV’는 이제 10년의 역사를 채웠다. 초창기엔 “방송을 놀이로 접근”했다면 지금은 플랫폼 사업에서 나아가 양질의 콘텐츠 제작에도 집중하고 있는 상황. 1인 미디어가 올드미디어를 대체하고, 새로운 미디어 플랫폼들이 생겨나고 있는 상황에서 라이브 소셜 미디어 플랫폼 아프리카TV의 차별화된 전략과 계획은 무엇인지 살폈다. -1인 미디어의 성장과 발전에 아프리카TV 같은 동영상 플랫폼이 끼친 영향이 크다고 보나. =블로그, 트위터, 페이스북이 활성화됐을 땐 텍스트 기반의 1인 미디어가 많았다. 지금은 텍스트에서 영상 중심으로 변했다. 그 과정에서 유튜브 등 10년간 꾸준히 사업을 이어온 글로벌 플랫폼 사업자들의 역할이 중요했다고 본다. 아프리카TV의 경우 BJ (Broadcasting Jockey)를 중심으로 한 팬 커뮤니티 형성에 집중적으로 신경을 써왔다. 현재는 플랫폼 사업에서 나아가 BJ들이 어떤 방송, 어떤 콘텐츠를 만들면 좋을지 방향성을 제시하는 등 콘텐츠 제작과 관련한 다양한 지원을 펼치고 있다. -이른바 스타 BJ들은 회사에서 따로 관리를 하는 건가. =MCN은 콘텐츠 크리에이터들을 관리하는 매니지먼트 사업인데, 최근 우리도 윤종신씨가 속해 있는 미스틱엔터테인먼트와 함께 프릭(Freec)이라는 MCN 벤처사를 세웠고, 영상 제작 스튜디오를 마련했다. 물론 차이는 있다. 기존의 MCN 사업자들이 유명 크리에이터들을 영입해 관리하고 육성해 수익을 창출하는 개념이라면, 아프리카TV는 수익창출을 위해 크리에이터들을 영입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아프리카TV에서 한달에 활발하게 방송하는 BJ 수가 30만명이 넘는다. 그 인력을 모두 관리할 순 없다. 대신 내부적으로 BJ 관리 시스템을 만들었고, 베스트 BJ 등급이 되면 여러 혜택을 제공받을 수 있게 했다. -네이버TV캐스트, 카카오TV, CJ E&M의 다이아TV 등 다양한 동영상 제공 플랫폼들이 생겨나고 있다. 창작자들이 자신의 콘텐츠 특성에 맞는 플랫폼을 고민하는 추세에서 아프리카TV는 어떤 차별화된 전략을 가지고 있는가. =유튜브가 VOD, 즉 이미 만들어진 콘텐츠인 RMC (Ready Made Contents)에 특화된 서비스라면, 아프리카TV는 라이브가 중심인 플랫폼이다. 창작자와 시청자는 실시간 채팅으로 의견을 교환하고 소통한다. 시청자의 채팅은 콘텐츠에 그대로 반영된다. 실시간으로 참여하고 공감하고 소통하는 게 아프리카TV의 특징이다. 채팅 자체가 또 하나의 콘텐츠이며, BJ의 팬 커뮤니티는 또 다른 크리에이터인 셈이다. -좋은 콘텐츠를 확보하는 것보다 스타 크리에이터의 확보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나. =스타 BJ를 만드는 건 우리의 지향점이 아니다. ‘아프리카TV’라는 사명에서도 알 수 있듯, ‘Any Free Casting’, 즉 누구나 콘텐츠를 만들 수 있게끔, 누구나 하나씩의 개인방송을 가질 수 있게끔 환경을 제공하는 게 아프리카TV의 역할이다. 현재 아프리카TV는 게임 방송, 보이는 라디오 형태의 토크 방송, 스포츠 방송이 활성화되어 있는데, 그외에 메이크업 방송, 웹드라마 제작 등 여러 분야에서 좋은 콘텐츠가 제작될 수 있도록 콘텐츠 다양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플랫폼 및 인프라와 관련해 연구개발 중인 것도 많은 것으로 안다. =모바일 이후의 상황을 준비해야 할 것 같다. 최근 뜨겁게 떠오르고 있는 VR(가상현실)이라든지, 드론 방송, 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그녀>(2013)에 나오는 인공지능 운영체제 같은 것도 연구개발 중이다. 인공지능을 가진 3D 아바타가 시청자와 커뮤니케이션을 하며 방송을 하고, 거기에 가상현실을 접목하는 일들이 머지않은 미래에 충분히 실현될 것이다. -최근 ‘미디어, 콘텐츠, 플랫폼으로 본 1인 창작자의 미래’ 컨퍼런스에서 “아직까지 1인 미디어의 갈 길은 멀다”고 얘기했다. =미디어의 형태, 콘텐츠의 특성, 서비스 플랫폼 등 많은 것들이 변하고 있고, 변화의 속도도 빠르다. 앞으로 미디어 산업이 어떻게 변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지금은 그 변화의 시작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의 1인 미디어가 단기적인 트렌드는 아니라고 본다. <마이 리틀 텔레비전>처럼 기존 방송사들도 새로운 포맷을 받아들이는 시도를 하고 있다. 올드미디어와 뉴미디어의 콜라보레이션도 활발히 일어날 것이다.

중산층의 자화상, 도시의 자화상

부동산과 흥망성쇠를 함께한 한 가족의 일대기와 현재를 그려낸 <버블 패밀리>는 피칭작 중 유일한 사적 다큐멘터리다. 마민지 감독은 부동산 브로커인 아버지와 부동산 텔레마케터 어머니, 감독 본인의 삶에 주저 없이 카메라를 밀어넣었다. 집 안 곳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카메라에 담겼고, 어색하게 브이를 그리던 부모님은 나중엔 카메라가 있다는 사실을 잊기 시작했다. “촬영 중반까지는 관찰자 입장에서 촬영하려 했다. 그런데 점점 거리가 좁혀지면서 나 역시 카메라 안으로 들어가게 되더라. 급기야 경계가 없어져 촬영 중에 싸우기도 했다. (웃음)” 그러나 <버블 패밀리>는 단순히 한 가족의 자화상에만 머물지 않는다. 잠실 토박이인 마민지 감독은 1970년대 섬이었던 잠실이 개발된 과정과 그에 따른 부동산 열풍, 중산층의 모습을 다면적으로 그려낸다. 가족의 자화상은 곧 중산층의 자화상이자 도시의 자화상이 됐다. “공간과 지역사에 대해 관심이 많다”는 그녀가 태어나고 자라온 잠실을 탐구의 공간으로 삼은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잠실은 신도시 개발의 초기 모델이 되는 상징적 지역이다. 지방에서 상경해 잠실에 자리잡은 부모님은 건축사업을 해 건물만 서른개 이상 보유했고, 부동산 열풍으로 단번에 중산층의 지위에 올랐다. 잠실 개발사를 찾아보면 토지구획 자료들이 있는데, 부모님이 집을 지었던 위치, 시기와 일치한다.” 잠실 개발사 한복판에 있었던 생생한 증인을 확보한 그녀는 1970, 80년대 잠실 풍경을 담아낸 파운드 푸티지 영상들을 구입해 잠실의 지역사를 본격적으로 다룬다. 그녀의 탐구는 부동산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진다. “그 후에도 아버지는 종로의 땅을 매입해 건축사업을 하셨다. 그런데 법규가 바뀌면서 건물을 못 짓게 되어 돈을 날려버렸다. 사업을 접고 건물도 팔고 월세방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부모님은 지금도 부동산 한방을 꿈꾸신다.” 그녀가 포착하고자 하는 것은 그 욕망의 근원이다. 공간과 지역사에 대한 마 감독의 호기심은 문화연구를 공부하면서 시작됐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사에서 영화연출을 전공한 그녀는 문화연구 수업에서 공간성에 대해 흥미를 갖게 됐고, 졸업작품으로 다큐멘터리 <성북동 일기>를 찍으며 방향성을 전환해 전문사에는 다큐멘터리 전공으로 진학했다. <성북동 일기>에서도 공간성과 지역사에 대한 그녀의 비판적인 시선은 여지없이 드러난다. “성북동의 북정마을은 도시 재생사업을 통해 마을이 관광화되는 과정을 거쳤다. 공간을 자본화하는 젠트리피케이션(특정 지역이 주목을 받으면서 중산층이 유입되며 임대료가 올라 원주민은 떠나고 기존 지역색을 잃는 현상을 이르는 용어)에 관심이 많다.” 풍자적 내용의 사적 다큐멘터리에 가족이 부담을 느끼진 않았을까. 처음엔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던 부모님은 두 차례의 피칭상 수상 후 영화에 대한 기사를 접하고 영화 촬영을 지지해줬다(<버블 패밀리>는 전주국제영화제의 프로젝트마켓에서 다큐멘터리 피칭 최우수상을,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피치&캐치에서는 더펙&기록문화보관소상을 받은 바 있다). 이번 인천다큐멘터리포트는 부족한 제작비를 충당할 마지막 피칭의 기회다. “신인의 패기로 임하겠다”는 그녀의 마음은 벌써 단단히 여물어 있다. <버블 패밀리>의 결정적 순간 “어느 날 아버지가 영화 제작비를 부동산에 투자하면 어떻겠냐고 하시더라. 어머니는 딸이 영화 찍는 돈까지 쓸 작정이냐며 역정을 내셨지만, 다음날 전화로 그 부동산 수익률을 묻고 계셨다. (웃음)” 그녀는 안타까우면서도 웃긴 이 상황을 영화의 하이라이트로 꼽았다. “<버블 패밀리>는 욕망을 풍자적으로 드러내는 블랙코미디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웃픈’ 감성을 관객도 충분히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김민정의 디스토피아로부터] 빗자루와 삽이면 충분하다

병가. 몸이 아파서 얻는 휴가. 직원 수가 200명에 육박해가는 우리 회사만 봐도 연중 전 직원이 몽땅 다 출근해 있기란 쉽지 않은 노릇이다. 어디가 아플까. 물어보면 병명 한번 가지가지다. 허리가 아프대요. 목 디스크래요. 엄지발톱이 뽑혔대요. 며칠째 못 자고 있대요. 장염이래요. 이명증이래요. 대장에 용종이 생겼대요. 안과에 다녀온대요. 그런데 참 특이한 건 연차가 보통 10년이 넘은 직원들은 웬만해서 아프지 않고 한 2년이나 3년쯤 되는 직원들의 병가 횟수가 가장 빈번하다는 사실이다. 경력이 좀 되었다고, 후배들의 육체적, 심리적 고통을 의심쩍어해서 이 얘기를 꺼내는 것이 아니다. 나 역시 그런 시절을 같은 마음으로 경험하고 겪어왔기 때문이다.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말이 한때 유행처럼 번지기도 했지만, 직장 초년병 시절의 나는 일상이 환자였던 것 같다. 쓰고 싶은데 벌리는 돈은 없고, 놀고 싶은데 나이 먹어감이 두렵고, 어쩌다 일은 하게 되었지만 그 미래가 너무 빤하고, 그런 만큼 막막해서 살기 싫어지는 하루하루가 심장을 압박해오곤 했던 것이다. 마음의 병은 우리의 몸을 쉽게 무너뜨린다. 우리는 누웠다 일어나기를 수차례 반복하면서 달궈진 숯불처럼 뜨거웠던 마음의 혈기에 약으로 분무를 해가며 겨울 절벽의 돌들처럼 차갑게 늙어가는 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보통의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이 땅에서 매일같이 벌어지고 있다. 나는 텔레비전 뉴스를 보지 않고 신문을 사지 않은 지 꽤 오래되었다. 무식함을 자랑하는 게 아니다. 그런 나를 스스로 비난하지만은 않는 것은 사람의 탈을 쓰고 어찌 저럴까 하는 사람들에 의해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태들에 꼴도 보기 싫은 마음이 너무 커져버려서다. 나도 안다. 내가 얼마나 비겁한 사십대인지. 후배들을 위해 이 사회의 정의와 선의를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뒤로 물러나 팔짱을 낀 채 말만 씨불이는 내가 얼마나 한심한 선배인지를. 국정화 교과서 반대 시위로 주말에 10만명이 운집할 거란 뉴스가 일찌감치 보도된다. 그 10만명은 어디에 기본을 두고 계산한 숫자일까. 경찰 동원력이 최고에 이를 거라는 뉴스도 함께 보도된다. 이 시국에 분노는 하지만 이 시국에 함께 시위 대열에 뛰어들지 않는 이들의 대부분은, 우리가 힘을 합한다고 무언가 바뀔까 하는 패배주의에 만연한 사고가 분명 팽배해져 있기도 해서일 것이다. 그런데 역사를 거슬러보면 합해진 목소리가 크고 우렁차며 보다 간절할 때 우리는 우리의 뜻한 바를 이뤄왔던 것 또한 사실 아닌가.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 그런데 피해봤자 냄새는 점점 더 심해지고 부패는 더 더럽게 진행될 것이니 방법은 하나, 누군가는 빗자루를 들고 누군가는 삽을 들고 여기저기 곳곳에 무더기로 쌓여 있는 똥을 치워야 할 것이다. 후배들에게는 보다 가벼운 빗자루를 쥐어주고 선배들은 보다 무거운 삽을 들자. 일단 아프지 말자. 아프지 않아야 똥도 안 밟는다.

감각적인 영상과 다채로운 사운드 <위아 유어 프렌즈>

콜(잭 에프런)은 야심찬 아마추어 DJ다. 마약과 술로 뒤범벅된 파티를 즐기는 게 그와 친구들의 일상이지만 콜은 음악 작업 또한 게을리하지 않는다. 무대 뒤에서 보조 DJ로 일하던 그는 파티의 메인 DJ이자 유명 DJ인 제임스 리드(웨스 벤틀리)를 만난다. 제임스에게 재능을 인정받은 콜은 함께 작업할 기회를 얻으며 조금씩 자신의 꿈에 다가선다. 문제는 콜이 제임스의 조수이자 연인인 소피(에밀리 라타이코프스키)에게 끌린다는 점. 이기적인 제임스에게 지쳐가던 소피도 콜에게 마음을 열면서 둘은 짧은 밀회를 즐긴다. 그러나 제임스에게 이 사실을 들킨 콜은 작업실에서 쫓겨난다. 설상가상으로 절친한 친구 스쿼럴이 마약을 과다 복용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한다. 절망에 빠져 있던 콜은 그동안 만들어놓은 트랙들을 모아 다시금 제임스를 찾아간다. TV 카메라맨, 광고 기획자로 활동한 이력이 있는 감독의 작품답게 감각적인 영상들이 돋보인다.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영화 초반, 환각제를 복용한 콜이 마주하는 환각을 영상으로 표현한 장면이다. 몸속에 환각제 기운이 퍼지자 콜이 보고 있던 미술작품은 물감으로 분해되어 사람들을 뒤덮는다. 그래픽으로 변한 사람들이 춤을 추는 장면은 팝아트 작품을 연상케 한다. 이외에도 지도나 위성사진을 비롯한 자료가 빈번히 삽입되고 화면 위로 글자가 새겨지는 등 독특한 아이디어가 담긴 영상들이 곳곳에 등장한다. 영화의 방점은 쉴 새 없이 흐르는 일렉트로닉 댄스음악(EDM)에 찍힌다. 영화는 콜의 입을 통해 EDM이 사람들의 흥을 돋우는 방식까지 설명하며 관객이 음악을 즐기도록 유도한다. 하지만 환락에 취한 파티 장면을 배경으로 흐르는 EDM이 관객의 심박을 제대로 자극할지는 의문이다. 영화는 콜을 비롯한 네 청춘의 성장영화이기도 하다. 파티가 있는 화려한 밤에 비해 생활비를 벌고자 사기성 짙은 텔레마케팅을 하는 이들의 낮은 보잘것없다. 대책 없이 살던 네 청춘은 친구의 죽음을 통해 마침내 각성한다. 감각적인 영상과 다채로운 사운드에 비해 스토리와 결말은 평이하다. 워킹 타이틀사가 제작을 맡았으며, 맥스 조셉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오승욱의 만화가 열전] 그는 왜 만화를 더 그리지 않았을까

초등학교 1학년의 첫 수업 시간. “아침해가 떴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노래를 배우고 있을 때였다.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와 간호사가 교실에 들어와 뭔가를 나누어주었다. 칫솔과 치약이었다. 학교 근처의 보건소에서 온 그들은 어린 학생들에게 보건 위생에 대해 알려주러 온 것이었다. 의사와 간호사는 그들이 나누어준 칫솔과 치약으로 이 닦는 방법을 설명해주었지만, 나는 내 책상 위에 놓인 치약을 보느라 그들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앙증맞게 생긴 작은 치약의 하얀 바탕 표면에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호피와 차돌바위, 그리고 홍길동과 곱단이. 신동우가 그린 만화 <풍운아 홍길동>의 주인공들이었다. 알루미늄 껍데기 위에 그려진 신동우의 그림이 얼마나 좋았던지, 이런 멋진 것을 나눠주는 학교란 정말 좋은 곳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물론 그 생각은 얼마 가지 못했지만. 집으로 돌아와 그 치약을 애지중지 모셔두고 한동안은 쓰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린 시절 내 주위에는 신동우의 그림들이 넘쳐났다. 교실 벽에 붙어 있는 위생 포스터. 저축을 장려하는 은행 광고. 그리고 어린이 잡지에 항상 있었던 진주햄 소시지 광고. 물론 그 그림들도 좋았지만, 홍길동의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그림은 귀했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 그의 형 신동헌과 함께 만든 애니메이션 <호피와 차돌바위>(1967)를 극장에서 보면서 왜 홍길동은 안 나오는 거냐, 며 투덜거렸던 터라 홍길동 캐릭터가 그려진 치약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리고 몇년 후. 학교가 끝나면 함께 어울려 집으로 돌아가는 친구들이 있었는데, 그중 대구에서 전학 온 곱슬머리 친구는 항상 앞장서서 내성적이고 겁이 많은 나를 데리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그 친구는 선생들이 하굣길에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고 한 모든 짓을 해내는 대단히 용감한 친구였다. 가장 깜짝 놀란 것은 어른들에게 소주를 잔술로 파는 리어카 행상 앞으로 당당하게 걸어가 어린이가 좀처럼 먹기 힘든 해삼과 멍게를 험상궂게 생긴 아저씨에게 주문하고, 구부린 옷핀으로 해삼을 콕 찍어 초고추장을 발라 맛있게 먹어 나를 질리게 했다. 온갖 병균이 다 들어 있고, 먹는 즉시 배탈이 난다는 거리의 음식을 아무렇지도 않게 어른처럼 먹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떡볶이 집 좌판 앞에 서서 주인이 한눈을 팔면 돈을 따로 더 내야 하는 비싼 어묵을 번개같이 포크로 찍어서 아구아구 먹고는 시침 뚝 떼고 떡볶이 값만 내고는 입을 싹 닦았다. 나는 그 친구를 따라다니며 돈을 내고 뭔가를 사먹는 방법을 배웠다. 선생이 하지 말라는 불량식품을 아무렇지도 않게 사먹는 것도 대단했지만, 어른처럼 당당하게 돈을 내고 뭔가를 하는 그의 모습은 대단히 경이로웠다. 그때까지 나는 어머니가 뭔가를 사주거나, 데리고 다니는 곳만 따라다니는 어린이였기 때문이다. 그 친구는 학교가 끝나면 집으로 곧장 가는 법이 없었다. 모래내의 시장을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구경하거나, 할 일 없고 가난한 어른들이 모래내 천변에 모여 개를 잡아 가스불로 털을 태우고, 다 익은 고기를 쭉 찢어 지푸라기가 섞여 있는 굵은 소금에 찍어 먹는 것을 군침 흘리며 애타는 눈으로 지켜보는 것도 그를 따라다니며 한 일이었다. 아마도 그 친구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12살짜리 어린이가 혼자서 좋아하는 영화를 보러 퇴계로의 극동극장을 찾는 일년 뒤 나의 행동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친구를 따라 학교가 끝나고 만홧가게에 가게 되었다. 지금까지 나는 방학 때 할머니 집에 가거나, 어머니의 허락을 받아야지만 만홧가게에 갔었는데, 그 친구는 주머니에 돈이 있고 자기가 가고 싶으면 가는 것이었다. 그 친구와 내가 항상 다니는 골목 어귀에 남가좌동 침례교회가 있었고, 그 옆 배추밭 너머에 아주 작고 어두컴컴한 만홧가게가 있었다. 그 친구를 따라 하교 후 만홧가게를 들르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치약에서 만난 홍길동을 만홧가게에서 다시 만나다 그 만홧가게에서 나는 아주 오래된 만화를 발견하였는데 신동우 글, 그림 <풍운아 홍길동>이었다. 몇해 전 받았던 치약의 표면에 그려진 홍길동을 그제야 만화로 만나게 된 것이었다. <풍운아 홍길동>을 뽑아들 때 나의 마음은 이거 재미있을까? 하는 반신반의였다. 그 당시 신동우는 만화작품을 여러 편 낸 이름난 히트작가는 아니었다. 그는 정부 홍보물과 각종 광고에 그림을 그리거나, 텔레비전의 대담 프로 또는 오락 프로에 신동우 화백이라 소개되어 사람 좋은 웃음을 짓는 것으로 더 유명했기 때문이다. 당시 인기작가들이라면 작품 수가 100편이 넘는 만화가들이 수두룩했고, 나는 그가 그린 만화책을 처음 만나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알려진 이름의 유명세에 비해 작품 수가 턱없이 부족한 작가를 누가 믿겠는가? 하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그런데 <풍운아 홍길동>은 재미있었다. 집을 떠난 홍길동은 길을 가다가 소년 도적 차돌바위를 만나 그를 동생으로 거둬들이고, 백운도사 밑에서 무술과 둔갑술을 배우고, 도적이 되어 탐관오리들을 징벌한다. 탐관오리들은 홍길동을 잡으려 수많은 강적들을 보내고 홍길동은 그들과 대적한다. 이 간단한 스토리 속에 <수호지>적인 영웅 호걸들이 등장한다. 홍길동이 만나는 주인공 중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는 호피다. 홍길동과 호피의 만남은 홍길동이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김기호란 이름으로 홍길동을 토벌하는 토벌대장을 뽑는 무술대회에 참가하러 가는 길 위에서다. 번개검법의 달인 호피는 홍길동을 잡아 출세하려는 야심차고 냉혹한 소년이지만 김기호로 가장한 홍길동이 대단한 실력의 소유자이며 멋진 놈이라는 것을 안다. 두 소년은 서로 숙식을 같이하며 우정을 나누고, 무술대회에 출전하여 수많은 대결에서 승리하여 결국 결승전에서 만나게 된다. 호피의 무술이 뛰어나지만 홍길동에게는 안 된다. 싸움에 진 호피는 친구가 되어 함께하자는 홍길동의 간곡한 부탁을 뿌리치고 표표히 떠나버린다. 대등한 관계가 아니면 친구가 아니다. 친구이고 싶은 자의 부하가 되는 것은 싫다. 이것이 호피의 생각이고, 홍길동도 그의 생각을 안다. <수호지>에서 노지심 또는 <미래소년 코난>에서 포비 같은 인물인 투덜이 차돌바위의 캐릭터는 어떤가? 귀엽지만 포악하고, 양반과 관리들에 대한 증오심으로 똘똘 뭉쳐 사고만 치고, 홍길동이 탐관오리들이라 할지라도 절대 살생을 하지 않는 그의 신념에 대해 번번이 반항하는 장면은 노지심이 송강에 반대하며 술상을 엎어버리는 장면을 연상케 한다. 탐관오리들로 득실거리는 조선 사회에 숨은 진주와 같았던 청렴하고 백성을 위하는 장군인 우충을 감화시켜 그를 홍길동 자신의 휘하로 삼는 장면도 멋지다. 홍길동의 적들은 어떤가? 해인사를 폭력으로 점거하고 백성을 괴롭히는 악당 중 골반대사, 여진족 출신 장풍의 대가 지갈그미 장군, 그들을 겨우 물리쳤다 싶자 등장하는 공포의 악당 도마술. 나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홍길동에 빠졌다가 돈이 모자라 용돈을 받는 날 다음 권을 보리라 기약하고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하지만 그 만홧가게가 나와 만화책 홍길동만의 장소는 아니었고, 학교를 땡땡이 친 남자 고등학생들의 아지트이기도 했다. 그들은 <선데이서울>을 책가방에서 꺼내어 비키니 차림의 여자 사진이 있는 브로마이드를 펼쳐 보며 킬킬거렸고, 아버지에게서 훔친 일본 담배라며 한 개비를 돌려 피우다가 땅콩맛이 난다며 왁자하게 떠들었다. 담배에서 땅콩맛이? <풍운아 홍길동>의 마지막 권에 이르러 중공군이 연상되는 옷을 입은 악당 도마술과 홍길동의 연기 자욱한 대결에 빠져 있던 나는 만화에서 눈을 떼고 그들이 만들어내는 연기를 바라보았다. 어른 흉내를 내며 담배를 피우는 고등학생들에게 만홧가게 주인 아줌마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것이 이상했지만, 담배에서 땅콩맛이 난다는 것이 더 이상해서 나도 좀 그 맛을 음미해보려 숨을 크게 들이켜 연기를 좀 마셔봤지만 담배연기에서 땅콩맛이 나지는 않았다. 그 후 담배에서 땅콩맛이 나는 그런 담배는 뭐였을까가 항상 궁금했다. 그들이 교복과 책가방을 만홧가게에 맡기고 사복으로 갈아입고 왁자하게 나가버리고 나는 신동우의 <풍운아 홍길동>으로 다시 눈을 돌렸다. 내가 신동우의 <풍운아 홍길동>을 생각할 때 항상 부록처럼 따라붙는 것은 땅콩 냄새가 난다던 그 일제 담배였다. 노동의 흔적을 볼 수 있는 펜선 <풍운아 홍길동>의 각권 첫 페이지에는 <선데이서울>의 비키니를 입은 여자 브로마이드보다 더 황홀한 전장 컬러 그림 페이지가 있었다. 각권의 내용을 요악하거나 대표적인 장면을 박진감 넘치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린 것이었는데, 울트라마린 색과 크림슨 레드색의 향연이었던 아름다운 배경에 홍길동이 펄쩍 뛰어오르거나, 차돌바위가 도끼를 휘두르는 장면이 서비스처럼 각권에 한장씩 들어 있었다. 70년대 중반. 나에게 만화를 가장 잘 그리는 만화가는 절대적으로 신동우였다. <소년 수호지> <소년 삼국지> 같은 어린이 잡지에 연재되는 소설에 삽화를 그렸던 이성박의 그림도 훌륭했지만, 언제나 첫째는 신동우였다. 그 시절 만화가가 되고 싶어서 박기준의 <만화작법>을 사서 보았는데, 만화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만의 그림체가 있어야 하고 자신만의 그림체를 가지기 위해서는 좋아하는 만화가들의 그림을 따라 그리라는 박기준의 글을 보고는 첫 번째 스승을 신동우로 정하고 그의 만화주인공 홍길동과 차돌바위를 따라 그렸었다. 그러고는 절망했다. 신동우의 그림은 아무나 따라 그릴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그림이 아니었다. 차돌바위를 비슷하게 그릴 수는 있었지만, 신동우의 펜선이 주는 그 오묘한 맛을 흉내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신동우의 펜선은 제비처럼 빠르고 날렵했다. 신동우의 빠른 손이 일필휘지로 그어지면서 선에 농담이 생기고, 캐릭터에 날아갈 듯한 속도감이 부여되었다. 신동우 만화는 정적인 만화가 아니다. 그의 만화는 활력이 넘치는 그림들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 당시 일본 소년만화 잡지 <소년 선데이>에 연재되던 <오토노구미>의 작가, 이케가미 료이치의 극화체 그림을 보고 넋을 잃기도 했었고, 지바 데쓰야의 <허리케인 죠>와 <검도 소년 텐베이>의 그림체가 훌륭하다고 생각했으며, 데즈카 오사무의 만화들을 보고 눈물, 콧물을 흘리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림을 제일 잘 그리는 만화가는 신동우였다. 단순히 그가 한국 만화가여서는 아니었고 복간된 <풍운아 홍길동>을 나이가 들어서 본 지금도 신동우가 그림을 잘 그리는 만화가라는 생각은 변하지 않는다. 인쇄 상태가 별로 좋지 않은 원본을 정성껏 살려내려 애를 써서 복간한 <풍운아 홍길동>을 보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컷마다 만화가가 정성들인 노동의 흔적이다. 정확한 해부학 지식을 가지고 그린 인물들의 움직임은 만화의 액션 장면은 이렇게 그리는 거야! 할 만큼 활력과 긴장감이 넘치고, 인물들이 내지르는 소리와 음향효과의 디자인적인 표현도 단연 선구적이다. 배경에 공들인 흔적에 이르면 절로 기분이 좋아진다. <소년 조선일보>에 연재할 당시 신동우에게 어시스턴트가 있었는지 확인된 것은 없지만, 만화의 배경은 모두 신동우의 펜선으로 그려진 것이라 짐작된다. 배경의 초가집과 기와집의 표현, 소나무의 표현, 시소한 돌멩이 하나도 재능 있는 화가의 스케치가 연상되는 능수능란한 펜선으로 표현되고, 검은 먹칠을 다이내믹하게 넣어 만화의 한컷이 동양 수묵화 같은 느낌을 부여한다. 만화에 등장하는 지명들과 건물 배경 역시 허투로 그린 것이 아니다. 광화문 네거리 장면에서는 광화문이 멀리 그려져 있고, 평양 장면에서 등장하는 대동문 역시 그럴듯하다. 조선시대 한양의 동네 지명과 전국의 도시들 지명이 세심하게 배려되어 등장한다. 전 8권(복간본은 전 6권). 1700여 페이지의 <풍운아 홍길동>은 어마어마한 걸작이라기에는 장대한 스토리를 완성하지 못하고 서둘러 끝내버린 아쉬움이 많은 작품이지만, 그의 다음 작품들을 기대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60년대 말. 그가 가장 물이 올라 만화가로서 역량을 발휘할 시기에 그는 그의 형 신동헌과 애니메이션 <홍길동>과 <호피와 차돌바위>를 만든다. 터무니없이 과중한 노동을 요구하는 애니메이션 작업을 하느라 그에게 만화를 그릴 시간은 없었을 것이다. 70년에 발표된 <개천대왕>의 몇 장면을 보면 인물과 배경의 완성도가 대단하다고 생각된다. 만화가로서 역량이 최고였을 그 무렵 신동우는 더이상 만화를 그리지 않는다. 70년대 신동우는 만화를 그리기보다는 정부 홍보물과 광고의 삽화 그리기만을 한다. 만화라면 불량식품과 더불어 어린이의 정서를 해치는 사회악이라 치부되는 끔찍한 세상이었으니 넌덜머리가 나 만화를 안 그렸을지도 모르고, 70년대에 들어 고우영으로 대표되는 성인만화가 인기를 끌자 성인만화를 그리기 싫어서라는 본인의 말이 그 이유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겉으로는 항상 웃고 너그러운 성품을 반영하는 말과 행동을 하지만 그 뒤에 숨은 그의 본질 중 하나가 과묵하고 속내를 밝히지 않는, 1•4 후퇴 때 월남한 함경도 아바이였으니 또 다른 그만 아는 이유가 있었을지 모르지만 그는 더이상 만화를 그리지 않는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어쩌면 한국의 디즈니, 또는 데즈카 오사무가 될 인물이었던 그는 불행하게도 텔레비전의 <묘기대행진>에 출연하여 그의 재능을 눈요깃감으로 만들어버린다. 물론 대중이 재미있어하면 그만이고, 인기를 얻으면 그만이겠으나, 그의 재능을 낭비하는 모습이어서 어린 나이에 텔레비전을 보며 분개했던 기억이 있다. 응답하라 1988, 만화가 대신 화백 칭호를 선택하다 만화가와 화백, 그 사이에서 신동우는 화백이란 칭호를 선택했고, 만화가 출신의 그는 엄숙주의에 찌든 화단에서 설 자리가 없었으며 80년대 들어서는 어용 만화가란 오명이 그의 이름 뒤를 따라다녔다. 그리고 1980년대 중반,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의 준비가 한창일 때, 신동우의 이름과 그림이 신문에 크게 실렸다. 그것은 88올림픽의 마스코트로 신동우가 그린 그림들이 사용될 것이란 이야기였다. 그때 대학생이었던 나는 “뭐 10년간 줄기차게 정부 홍보물을 그렸으니까”라고 생각했고, 디자인과 학생들은 만화가가 그려 격이 떨어진다며 분개했었다. 그런데 얼마 안 가 신동우가 그린 88올림픽 마스코트는 소리없이 사라지고, 그 대신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호돌이가 88올림픽 공식 마스코트로 선정되었다는 기사가 나왔다. 그 당시 나는 어리둥절했다. 신동우가 그린 마스코트는 어떻게 된 거지? 그리고 88올림픽이 열리고, 신동우는 텔레비전의 오락 프로그램에 드문드문 출연하여 사람 좋은 웃음을 보이다 너무나 젊은 나이인 59살, 자신이 만든 캐릭터 홍길동을 일본의 애니메이터들을 불러들여 대규모의 제작비로 제작한다고 떠들썩하던 시기에 책상에 앉아 조용히 세상을 떠나고 만다.

가을의 파리 영화관 산책

파리를 다녀왔다. 지난, 10월 말의 일이니 파리가 테러로 얼룩지기 직전이다. 한국영화 컨퍼런스에서 짧은 발표를 끝내고 서둘러 파리 영화관들을 방문했다. 마지막 파리를 방문한 것이 8년 전이니 그간의 변화들과 현황이 궁금했다. 먼저 확인하고 싶었던 곳은 세곳이다. 일단 마틴 스코시즈 전시가 열리는 시네마테크 프랑세즈. 방점은 스코시즈가 아니라 ‘전시’에 있다. 둘, 2008년에 새로 개장한 포럼 데 이마주를 둘러봐야 한다. 전보다 네배나 더 큰 규모로 개장했다니 달라진 모습이 궁금했다. 셋, 2013년에 개장한 룩소극장은 필수 코스다. 서울시에 시네마테크 지원을 요청하며 룩소극장을 사례로 제시한 바 있지만, 정작 들른 적은 없다. 근 30년간 방치된 폐관 극장을 파리시가 2500만유로에 사들여 3년간의 개장공사를 마치고 2년 전에 문을 열었다. 파리 문화유산이기도 하다. 여전히 살아 있는 생미셸쪽의 예술 영화관들을 추억의 경로를 따라 찾아가는 것은 그다음의 일이다. 마틴 스코시즈의 전시회를 가다 10월24일 토요일 오후. 베르시에 있는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를 방문했을 때 거의 100m 넘게 너른공원쪽으로 길게 줄 선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10월14일부터 시작한 스코시즈 전시를 보기 위한 행렬이다. 중•장년층은 물론이고, 젊은이들이 족히 한 시간 넘게 기다려 전시를 구경하고 있었다. 거대 규모의 전시도 아니고, 사사로운 물건들이 주를 이루는(가령, 영화소품으로 활용된 스코시즈 집에 있던 가족용 원형탁자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전시였지만, 관람자들은 스코시즈의 작업 비밀을 깨달을지도 모른다는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었다. 전시장 복도 한구석에 서서 스코시즈 영화의 발췌된 장면들을 보거나 콘티북에 적힌 깨알 같은 스코시즈의 메모를 흥미롭게 읽는 젊은이들의 진지한 모습이 전시보다 더 흥미로웠다. 전시를 둘러보고 나오면 상영관에서는 마틴 스코시즈 전작이 상영되고 있다. 사실 더 구미를 당겼던 것은 그다음 주에 열리는 미클로시 얀초 회고전이다. 디지털로 새로 복원된 영화들을 포함한 18편의 극영화와 보기 힘든 그의 다큐멘터리들이 상영목록에 올라 있다. 12월에는 임권택 감독 전작전이 열릴 계획이다. 서울과의 시(격)차에 작은 현기증을 느끼며 이제 파리 예술 영화관들을 둘러보러 나섰다. 파리 시내에는 80여개의 예술 영화관들이 성업 중이니 방문에는 우선순위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미리 생각해둔 몇 가지 분류에 따라 대표적인 극장들, 기억에 남았던 곳들을 시간되는 대로 찾기로 했다. 몇몇 극장들은 유럽영화 상영 시에 극장을 지원하는 유로파 시네마의 장 밥티스트 셀리에즈가 직접 연락을 해주기도 했고, 생소한 극장은 함께 방문도 했다. 원래 서울아트시네마도 유로파 시네마의 회원으로 지원을 받아볼 요량이었지만 전반적인 문화예산지원 삭감으로 유럽 이외의 극장들은 더이상 지원대상이 아니라는 서운한 통보만 들었다. 참고로 말하자면, 파리 예술 영화관은 어떤 영화들을 상영하는지에 따라 다르게 분류된다. 세 부류의 영화들이 있다. 첫째, ‘연구와 발견’(예술 및 실험영화들), 둘째, ‘젊은 관객’(어린이 등의 청소년 관객을 위한 영화들), 셋째, ‘유산과 레퍼토리’(고전영화들) 영화들이다. 예술 영화관들은 최소한 이 가운데 하나의 영화를 상영해야 한다. 이에 따라 프랑스 영화진흥위원회에 해당하는 CNC의 지원규모가 달라진다. 두 번째 분류법은 극장 규모에 따라서다. 1920~30년대에 시작한, 그리고 전후 예술영화의 전성기에 개장한 예술 영화관들은 주로 단관형(1개관)이거나 예전의 단관을 쪼개서 나눈 소규모 분할형(2~3개관)들이다. 파리 5, 6구의 카르티에 라탱 지구에 집중되어 있는 극장들이 그러하다. 10개관이 넘는 대형 멀티플렉스와 차별적인 3~4개관의 복합형 극장들도 있다. 대도시에 새로 개장한 극장들이나 파리 교외에 있는 곳들이다. 멀티플렉스 체인인 MK2의 예술관들도 있는데, 한국과 달리 멀티플렉스의 한관이 아니라 별도의 극장이다. 마지막은 편의적으로 공적지원의 규모에 따른 분류다. 특별히 파리시가 예산의 상당수를 지원하는 공공 영화관들이 있다. 파리시는 ‘미션 시네마’라는 영화정책으로 공적인 성격의 영화관을 지원하는데, 레알역 지하에 있는 시네마테크에 가까운 ‘포럼 데 이마주’와 예술 전용관 룩소극장이 대표적이다. 파리시는 이 외에 민간 독립 예술 영화관들도 지원한다. 극장의 현대화, 디지털화 지원이 포함되어 있다. 말 그대로 영화 천국이다. 영화의 거리에 있는 포럼 데 이마주 미셸 공드리의 <무드 인디고>(2013)에서 연인들이 첫 데이트를 하는 곳이 지금 백화점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 ‘포럼 데 알’이라는 곳인데, 이곳 지하에 파리시가 지원하는 ‘포럼 데 이마주’가 있다. 한•불 수교 130주년을 맞아 ‘최면에 빠진 서울’이라는 기획전이 열리고 있다. 80여편의 서울이 담긴 영화를 상영하는 행사로, 프랑스 평론가들이 참여해 홍상수, 임상수, 봉준호 영화에 대한 강연을, 이송희일 감독, 배우 예지원 등이 방문해 관객과 대화를 하기도 했다. 5개 상영관을 구비한 ‘포럼 데 이마주’는 연간 30만명이 찾는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 이어 파리를 대표하는 극장이다. 1998년에 ‘비디오테크 드 파리’라는 이름으로 개장했지만, 2005년부터 공사를 시작해 2008년에 새로 개장했다. 제너럴 디렉터인 사빈 페로댕에 따르면 원래 소방 문제 때문에 공사가 시작됐지만, 디지털 환경 변화에 발맞춰 새로 공간을 확장하면서 전보다 네배 정도 더 큰 규모의 극장이 됐다고 한다. 포럼 데 이마주에는 7500편의 영화들이 보관되어 있는데, 주로 파리에 대한 기억들을 담은 영화들, 고전영화, 단편영화, 애니메이션, 아이들을 위한 영화들이다. 상영관이 있는 2층은 네온 조명에 스탠리 큐브릭 영화의 모던한 인테리어를 떠올리게 하는 소파와 의자들이 가지런히 배치되어 있다. 디지털화된 영화를 편하게 감상할 수 있는 열린 공간에 2인에서 8인까지 영화를 볼 수 있는 부스, 그리고 아이들을 위한 아틀리에도 있다. 여기에 ‘영화의 거리’ 조성과 더불어 영화 전문 도서관 ‘프랑수아 트뤼포 도서관’이 극장 옆에 새롭게 들어섰다. 37편의 서로 다른 영화를 상영하는 대형 멀티플렉스 UGC 시네시티로 가는 길 바로 입구에 있다. 1200㎡에 1만7천권의 장서, 7500편의 DVD를 수장하고 있고, 회원가입에 따라 모두 무료로 활용할 수 있다. 파리 7구 앙드레 말로 도서관에 있던 영화 관련 자료들을 ‘영화의 거리’ 조성에 따라 이곳으로 이전했다고 한다. 영화 관련 신간 도서를 알기 쉽게 소개하고 있고, 영화 관련 정보들을 제공한다. 포럼 데 이마주는 매년 2천편의 영화를 상영하고 15개의 영화제가 열리고, 30만의 관객이 찾는 곳이다. 상영의 60%가 여전히 35mm 필름이다. 유산적 가치의 영화를 상영하고 보존하기 때문이다. 한해 800만 유로의 예산 중에서 70%를 파리시가 지원하고, 나머지 30%는 CNC, 파리 지역 지원금, 기업 후원금으로 충당한다. 관객 수입은 3만유로 정도로 적은데, 티켓 값이 저렴하고 다양한 할인제도가 있어서다. 사빈 페로댕은 극장 운영을 위한 후원자들을 찾는 일이 여전히 가장 큰 일이라 말한다. 전반적으로 문화가 어려운 상황이라 돈을 만드는 일에 시간을 많이 쏟게 된다고. 한국에서는 기업이 후원할 경우 세금 감면 혜택이 있냐는 질문부터 서울의 시네마테크에는 기업 파트너가 있는지를 물었다. 넌지시 LG가 지난 3년간 이 극장의 주요 파트너라고 알려준다. 포럼 데 이마주의 사이트에는 실제로 LG가 영화를 사랑한다며, 2011년부터 공식파트너로 참여하고 있다는 홍보 글이 있다. 제7예술에의 관심 때문이란다. 스마트 텔레비전으로 이 극장의 드문 콘텐츠를 제공한다는 소개도 있다. 현대나 삼성 같은 곳이 시네마테크를 후원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그의 질문에 한국에서는 감독이나 배우, 관객이 대체로 돈을 낸다고 말했다. 내심 놀라는 눈치다. 프랑스는 감독들이나 영화인들이 문화적인 데에 돈을 내지 않는다고 했다. 국가나 기업이 지원하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 아닌가, 라고 말하고 싶었다. 되찾은 영화궁전 룩소극장 파리시의 진일보한 영화관 지원정책은 9구, 10구, 18구의 교차점에 있는 바르베역 근처의 룩소 극장의 사례에서 찾을 수 있다. 파리시가 인수해 대대적인 내부공사를 거쳐 민간에게 위탁한 극장이다. 1920년대 무성영화를 틀던 시절의 사라진 모습- 이집트 양식의 벽들과 테라스- 을 그대로 복원한 상영관 내부가 아름답고 웅장하다. 상영관 무대 위에는 무성영화 상영 시 연주를 위한 피아노가 한대 놓여 있었다. 극장 대표 에마뉘엘 파피용에 따르면, 룩소극장은 개장 초기(1920~21)에는 이집트인 건축가 앙리 집시가 건설한 네오 이집트와 아르데코풍의 건축물이었다고 한다. 1991년에 외벽과 지붕이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지만, 이미 폐관한 이 극장은 이후로도 20년간 방치되어 있었다. 파시가 사들여 새로 개장하면서 건축가 필립 퓌맹이 개관 당시의 이집트 데코를 복원했다. 룩소의 대형관의 명칭이 이집트 감독인 ‘유세프 사인관’이라 불리는 이유다. 디지털 상영시설까지 갖추고 새로 2개관을 덧붙이면서 룩소극장은 대중예술로서의 영화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그 시절의 위용을 몽마르트르 언덕을 향해 다시 자랑스럽게 내세우고 있다. 지하철 바르베역 근처는 몽마르트르 언덕으로 오르는 입구이자 아랍인, 흑인, 중국인, 인도인, 파키스탄인들이 섞여 있는 아직 덜 개발된 지구다. 에마뉘엘 파피용은 룩소극장의 재건에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말한다. 룩소는 개관 초기에 1천석이 넘는 대형극장으로, 1950년대에는 하루 두번 상영으로도 한해 동안 70만명의 관객이 왔던, 한때 잘나가던 극장이었다. 2003년 파리시가 이 극장을 구매하기로 결정한 것은 더이상 폐관된 극장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지역사회의 요구와 문화재로 지정된 이후 개발이 불가피했기 때문이다. 영화관으로 유지할지, 아니면 다른 문화공간으로 바꿀지를 두고 여러 논의가 있었지만, 지역극장으로 개•보수를 거쳐 민간 사업자에게 운영을 위탁하는 것으로 결론이 모아졌다. 문화유산이라지만 이 극장은 일종의 동네 영화관이다. 요금도 저렴하다. 이 극장의 매력은 데코에 있지만은 않다. 무엇보다 파리에서도 더이상 찾아보기 힘든 발코니 좌석이 아름답다. 옥상에 오르면 맥주나 와인, 커피 한잔을 할 수 있는 아름다운 뷰를 지닌 테라스에 작은 바가 있다. 바로 옆으로 고가철로 위를 지나가는 기차를 볼 수도 있다. 주로 예술영화들을 개봉하지만, 고전영화를 상영하는 시네클럽이나 매달 한번 영화 관계자가 아닌 유명인들을 초대해 그들이 선정한 영화를 상영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시민대학’(Universite Populaire)이라는 행사도 열린다. 극장 운영은 주로 CNC, 파리시, 유로파 시네마 등의 지원금에, 관객입장료와 옥상의 바에서 나오는 수입들로 메우고 있다. 연 관객이 20만명이라지만 일년에 5만유로에 달하는 유지비가 가장 큰 걱정이라 한다. 사실 룩소극장의 성공은 꽤 독보적이다. 양질의 프로그램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이 지구에 유일한 영화관이라는 장점도 있다. 근처 주민들이 예전에는 한달에 한번 영화관을 찾았다면 이제는 일주일에 한번 정도로 동네 영화관으로서 룩소극장을 찾는다고 한다. 에마뉘엘 파피용은 여전히 극장의 미래를 밝게 보고 있다. VOD나 인터넷, 컴퓨터로 영화 보는 개인관람행위가 늘어나긴 했지만 여전히 다른 사람과 같이 있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열망이 여전하기에 영화관을 찾는 관객이 있을 거라 여긴다. 룩소극장은 과거의 영화를 추억하는 전설의 극장이 아니라 미래로 향한 새로운 극장이다. 샹젤리제에서 여전히 전투 중이다 - 르 발자크 극장 샹젤리제 거리에서 유일하게 예술 영화관을 운영하고 있는 ‘르 발자크’의 극장주 장 자크 쉬폴리안스키와의 만남은 기대한 일이었다. 그는 이미 두 차례나 극장 문을 닫는 스트라이크를 했던 적이 있다. 샹젤리제 거리의 멀티플렉스 극장들이 예술영화를 상영하기 시작하면서 정작 ‘르 발자크’에서 상영할 영화들이 없어졌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상징적인 파업이긴 했지만 결과는 성공적이었고, 여전히 이 극장은 살아남았다. ‘르 발자크’는 1935년 개관 초기에는 630석의 대형극장이었다. 샹젤리제 거리에 8번째로 만들어진 극장이라 한다. 전쟁 전에는 주로 셜리 템플, 존 포드 등의 미국영화를 상영했고, 전후에는 새로운 프랑스영화를 상영해 1950~60년대에 황금기를 구가했다. 3대를 이어 영화관을 운영하는 장 자크 쉬폴리안스키는 그 시절이 일년에 한개 관에서 40만명의 관객이 왔던 황금기라 추억한다. “좋은 시절은 지나가버렸다. 요즘은 세개 관에 한해 15만명의 관객이라도 온다면 샹젤리제 거리에 깃발을 꽂겠다”고 말한다. 지난 5월에 개관 80주년 행사를 마쳤지만, 여전히 호화로운 샹젤리제 대로변 골목길에서 예술 영화관이 살아남는 것은 그에게는 진행 중인 ‘전투’다. 예전, 극장 파업을 했던 상황에 대해 질문을 꺼내자 그는 극장 문을 닫는 파업을 벌이며 라디오와 방송에 출연해 상황을 알리고 문화성 장관과 만나 문제를 논의하던 당시 상황을 즐거운 기억처럼 늘어놓았다. 요즘은 멀티플렉스 극장들이 예술영화 상영을 자제하는 분위기란다. 그는 이런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대중을 증인으로 끌어들이는 일이라 말한다. 영화 상영 전에 매번 관객에게 ‘르 발자크’의 역사에 대해 짧게 이야기를 하는 것도 그런 이유처럼 보였다. 80년의 오랜 역사를 지닌 극장이고, 이미 그 자신이 전설적 인물이 됐지만 최근 변모하는 영화 환경은 여전한 고민거리다. 그 하나는 젊은 관객을 극장에 끌어들이는 방안이다. 정확한 답은 없지만, 극장이 끊임없이 변모해야 하는 이유다. 변화의 시도는 지금까지 이 극장이 지속할 수 있었던 힘이기도 하다. 다른 하나는 샹젤리제 거리가 주로 파리지앵이 아니라 관광객이 잠시 머무는 지역이라, 사람들이 이 극장에 잠깐이라도 머물 수 있도록 영화관을 유지하는 방안이다. 작긴 하지만 그는 앉아서 커피와 음료를 마실 수 있는 바를 운영하고 있다. 방문 시에 그는 직접 라반자 커피를 내려주다가 셔츠에 커피를 쏟기도 했다. 여전히 대중이 극장을 찾는 일에서 행복감을 느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연간 100회의 콘서트(주로 예술계 대학생들이 참여해 영화 상영 전에 작은 연주회를 연다), 극장을 자주 찾았던 유명 요리사와 함께하는 행사(이중에는 한국에서도 유명한 호텔 발자크에 레스토랑을 갖고 있는 피에르 가니에르도 있다. 장 자크 쉬폴리안스키는 자랑스럽게 그가 ‘르 발자크’의 관람객 중 한명이라며, 그와 다른 요리사들이 관객에게 최고의 요리를 제공하는 특별 행사를 개최했던 행사 때 사진을 보여주었다)도 있다. 모두 ‘르 발자크’를 사랑하는 관객이 참여하는 행사다. 팔순의 나이지만 장 자크 쉬폴리안스키는 관객의 고령화를 걱정했다. 젊은이들이 조그만 휴대전화로 영화를 보면서 영화관의 스크린이 지닌 마법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하기도 했다. 그는 영화가 새로운 세계로의 모험이라는 것을 여전히 믿고 있다. 인터뷰를 마치고 극장을 나서면서 입구 왼쪽으로 나 있는 사무실 앞에서 사진 한장을 찍었다. 사무실은 얼핏 봐서도 배 모양을 닮았다. 그는 영화 관람이 항해와 같은 것이라며, 자신을 ‘캡틴’이라 소개했다. 발자크의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베를린] 명예황금곰상은 미하엘 발하우스에게

2016년 2월11일부터 21일까지 열리는 제66회 베를린국제영화제 라인업이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 심사위원장은 메릴 스트립이 맡고, 1966년 당시 동•서독의 영화적 전망을 주제로 회고전이 열릴 예정이다. 개막작은 코언 형제의 신작 <하일, 시저>로 확정되었다. 그리고 명예황금곰상은 지금껏 130여편의 영화와 텔레비전극을 찍은 촬영감독 미하엘 발하우스에게 돌아간다. 올해로 팔순을 맞은 발하우스는 오래전부터 베를린국제영화제와 깊은 인연을 맺어왔다. 1990년 심사위원장을 역임하였고, 2006년에는 카메라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발하우스는 마틴 스코시즈의 전속 카메라맨이라 할 만큼 그의 주요 작품 7편을 함께 찍었다. 할리우드에서의 성공 전엔 뉴 저먼 시네마의 기수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와 작품 15편을 함께하며 독일 영화예술에 새바람을 일으켰다. 발하우스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360도 회전 촬영기법도 파스빈더와 영화 작업을 하며 탄생되었다. 피학, 가학적 성생활을 하는 부부 이야기를 다룬 TV드라마 <마르타>(1974)를 찍으며 이 커플의 첫 번째 마술적 만남의 순간을 어떻게 표현할까 고민하다가 우연히 360도 회전 기법이 고안되었다고 한다. 촬영 당시 급경사 지형 때문에 카메라를 180도 회전하며 촬영하는 게 어떻겠냐는 발하우스의 제안에, 파스빈더는 아예 360도 회전에 도전해보자고 했다고. 이번 베를린국제영화제 기간에 열리는 명예황금곰상 회고전에서는 <컬러 오브 머니>(1986), <워킹걸>(1988), <드라큘라>(1992), <퀴즈쇼>(1994) 등 발하우스가 촬영을 맡았던 10편이 상영될 예정이다. 베를린국제영화제의 시상식이 열리는 내년 2월18일에는 <갱스 오브 뉴욕>을 상영한다. 할리우드에서 25년간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마틴 스코시즈, 볼프강 페터슨 등 쟁쟁한 감독들과 작업하며 카메라맨으로서 명성을 떨친 발하우스는 2007년에 독일로 돌아와 영화학교에서 후진 양성에 힘쓰고 있다. 베를린국제영화제의 세계 신인 영화인 양성 프로그램인 베를리날레캠퍼스부문에서도 발하우스와 사진작가 짐 라케트의 단상토론이 계획되어 있다.

[정우] 얼마나 남자다운가

영화 <히말라야>(2015) <쎄시봉>(2015) <붉은 가족>(2012) <인류멸망보고서>(2011) <바람>(2009) <스페어>(2008) <다찌마와리: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2008) <숙명>(2008) <애정결핍이 두 남자에게 미치는 영향>(2006) <짝패>(2006) <사생결단>(2006) <그때 그사람들>(2004) <돌려차기>(2004) <그놈은 멋있었다>(2004) <불어라 봄바람>(2003) <바람난 가족>(2003) <동갑내기 과외하기>(2003) <품행제로>(2002) <라이터를 켜라>(2002) <7인의 새벽>(2001) 드라마 <응답하라 1994>(2013) <최고다 이순신>(2013) <민들레 가족>(2010) <녹색마차>(2009) <신데렐라 맨>(2009) <못된 사랑>(2007) <사랑한다면 이들처럼>(2007) <루루공주>(2005) <슬픈 연가>(2005) “남자답잖나.” 요약하자면 그랬다. 정우가 드라마 <응답하라 1994>의 로맨티스트로 단박에 떠오른 직후, <히말라야>로의 고생길을 선택한 이유 말이다. 현재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무거운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점, 누구나 아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는 점만으로도 <히말라야>는 충분히 부담스러울 수 있는 작품이었다. ‘흥행하기 어렵다’는 고정관념이 기정사실처럼 여겨지는 산악영화인 데다 심지어 촬영 전 고된 훈련 과정을 필수로 거쳐야 했고, 현지 로케이션까지 배우가 직접 해내야 하는 상황은 스타가 된 입장에선 당연히 거절할 수도 있을 만한 프로젝트였다. 아니나 다를까, 훈련 중엔 실제 전문 산악인인 김미곤 산악대장의 지휘하에 “네발로 산을 기어내려왔을 만큼 극악한 연습”을 했고, 네팔과 프랑스 몽블랑에 로케이션 촬영을 가서는 높은 안압과 극심한 두통에 고생은 고생대로 다 겪어냈다. 시나리오를 처음 받았을 때엔 본인조차 “별 기대 없이 읽었다” 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우는 결국 히말라야를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그곳에 산이 있기 때문”에 산에 오른다는 어느 산악인의 말마따나 <히말라야>에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살에 와닿는 작품, 인간적이고 연민이 드는 캐릭터를 좋아한다. 캐릭터를 볼 때 저 사람을 이해할 수 있겠다는 포인트가 있으면 된다. 박무택이란 인물은 나에게 건강하고 유쾌한 인물로 받아들여졌다. 그분이 겪은 상황을 겪어보진 않았지만 그 감정은 공감이 됐다. 목표, 꿈, 자신의 모든 걸 걸고 산에 오른 그 의지까지도 얼마나 남자다운가.” <히말라야>의 초반부는 사실상 정우의 독무대다. 박무택, 정우가 앞에서 영화를 잘 이끌어야만 엄홍길(황정민) 대장이 굳이 에베레스트까지 후배의 시신을 수습하러 가는 이유, 영화가 휴먼 원정대의 슬픈 기억을 소재로 쓴 이유가 설명이 될 터였다. 박무택은 엄홍길 대장과의 관계를 쌓아가며 애교와 근성으로 관객의 마음을 훔치는 데까지 성공한다. 실제로 고 박무택 대원은 엄홍길 대장과 네번의 등정을 함께했을 만큼 진득하고 온화한 성품의 산사나이였다고 한다. 정우는 특유의 활기와 넉살을 불어넣어 박무택이라는 인물에 입체감을 더했고, 과연 <히말라야>의 박무택은 모두가 한마음으로 산에 잠든 그를 데리러 가고 싶어질 만큼 정겹고 사랑스러운 인물로 화했다. “그래서 초•중반까진 밝고 유쾌한 사람으로만 연기했다. 그라고 다가올 자신의 죽음을 알았을까. 당연히 몰랐을 거다. 죽음을 준비하는 느낌이 없이 밝고 유쾌한 모습이어야 사실적으로 보일 것 같았다. 그래서 뒤로 갈수록 관객의 감정을 증폭시킬 수 있었던 거다.” 촬영을 준비하는 동안 정우는 엄홍길 대장의 저서도 참고했고, 영화사에서 제공한 페이퍼와 다큐멘터리 자료도 꼼꼼히 챙겨보았지만 직접 유가족을 만나지는 않았다. 결국 <히말라야>는 영화다. 얼마나 고인을 잘 표현하느냐보다 고인의 성격적 특성을 빌려 박무택을 인간적이고 매력적인 캐릭터가 되도록 연기하는 것이 자신의 본분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노력한들 내가 그분이 될 순 없다. ‘내가 만약 그분이라면’ 하는 생각으로만 임했다. 팩트는 가져가되 표현 방식에 있어선 맡은 배우가 알아서 하는 게 맞다고 본다.” 주승환 프로듀서는 “현장을 찾아 멀리서 정우의 연기를 보고 돌아간 고 박무택 대원의 유가족이 정우에게서 고인과 상당히 비슷한 모습을 보았다 하더라”고만 전했다. 지금이야 <응답하라 1994>의 쓰레기, 영화 <쎄시봉>의 오근태, <히말라야>의 박무택과 같이 고지식하게 보일 정도로 지순한 순정남을 연이어 연기하고 있지만, 돌아보면 정우만큼 극적인 이미지의 변화를 겪은 배우도 드물다. 초기엔 남자 냄새 물씬 풍기는 거친 배역을 주로 맡았다. <품행제로>에선 조직 단군파의 조직원으로 등장해 주저없이 준필(류승범)의 등에 칼을 박아넣었고, <동갑내기 과외하기>에선 잔뜩 분위기를 잡으며 어린 동생들을 위협하는 껄렁한 동네 형이었다(신인 시절의 공유와 함께 등장하는 그 유명한 당구장 장면은 정우의 ‘못난 모습’의 최고봉이기도 하다). 첫 주연작인 <스페어>에서도 그가 연기한 길도는 위기에 놓인 친구를 팔아먹는 양아치였다. 한때는 류승완 감독의 영화들에도 슬쩍 얼굴을 내밀었다. <짝패>에서는 짝패 5인방의 리더 왕재(안길강)의 고등학생 시절을 연기했다. 고등학생 왕재는 불과 몇분 뒤의 자신이 얼마나 초라해질지도 모르는 채 친구를 위해 패싸움판에 덥석 끼어드는 의리 있는 소년이다. <다찌마와리: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에선 난감한 일본어를 구사하는 헌병대장으로 출연해 짧고 굵은 인상을 남기기도 했다. 최근 유한 캐릭터를 주로 연기한 탓인지 지금 관심을 두고 있는 시나리오들은 주로 남성적인 캐릭터가 주인공이라고 한다. 하지만 연기보다도 그의 일상을 먼저 보게 될 것 같다. 2016년 1월부터 예능 프로그램 <꽃보다 청춘 ICELAND>를 통해 조정석, 정상훈, 강하늘과 함께한 아이슬란드 여행기를 보여줄 예정이다. <응답하라 1994> 이우정 작가와의 친분으로 나영석 PD를 알게 됐고, 덕분에 <삼시세끼 어촌편>에도 잠깐 출연한 인연으로 아이슬란드까지 가게 됐다. “그 잠깐의 출연이 너무 짧았다. 목포까지 가서 배 타고 섬에 들어가는 데 12시간이 걸렸다. 아니 뭐 미국인가. (웃음) 그런데 정작 섬에 머문 것은 반나절도 안 됐으니까 같이 지내는 시간이 적어서 아쉬웠다. 원래는 여행을 즐기는 편도 아니었는데, <히말라야> 해외 촬영으로 그런 환경에도 적응이 된 시기에 마침 섭외 전화가 걸려왔다.” ‘진성 집돌이’인 그는 “어딜 가도 숙소에만 가만히 있는” 편이다. “재미없게 들리지만 연말, 신년에도 그냥 집에 있는 게 좋다. 남들처럼 텔레비전 보며 라면 먹고, 심심하면 책 보고, 치킨에 맥주도 먹고. 여행을 갔어도 적당히 바람 쐬면 그만이고, 시나리오든 책이든 읽으면서 숙소 안에 있는다. 새로운 동네 갔다고 명소 찾아다니고 사진 찍는 스타일도 아니다. 그런데 이번 아이슬란드에서는 정반대로 놀고 있더라. 예능이라고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었는데.” 연기보다 예능으로 대중을 만나는 데에 부담은 없어 보인다. 정우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 때, 조용히 작은 역할만 연기하던 때를 떠올리면 굳이 서두를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뭐든 심각하게 의미 부여하지 않고, 소신대로 호기로운 선택을 이어가는 대범한 그의 손가락이 어느 시나리오를 집어들게 될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너무 오래 쉴 생각은 없다. 얼른 작품을 골라 촬영 들어가야 내년 중에 또 관객을 만날 수 있을 텐데. 그래도 일단은 <꽃보다 청춘 ICELAND>가 있으니까? (웃음)” 넉살 좋은 또 다른 남자를 얼른 만나보고 싶다. 바람 불어 붙은 불씨 서른살 이후, 배우로서의 자신의 삶이 많이 달라졌다고 정우는 말했다. “내 연기에 대한 확신의 정도가 다른 것 같다. 배우로서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이십대를 보냈다면, 삼십대가 돼선 어떤 불씨가 붙었다.” 작품으로 말하자면 <바람>이다. <바람>은 정우가 ‘김정국’이란 본명으로 자전적 얘기를 깊숙이 들이댄 영화다. <바람>의 후속 이야기까지도 시나리오는 써두었다고. “지금은 어디 창고에 있을 텐데. (웃음) 그냥 연기에 도움이 된다는 목적으로만 쓰고 있다. 단편도 몇 차례 찍어봤는데 그것 역시도 연기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한 거지 연출에 욕심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연출은 뭐 아무나 하나. 연기나 잘했으면 좋겠다. (웃음)” 바람 불어 붙은 그 ‘불씨’ 덕에 우리가 그간 좋은 남자들을 만날 수 있었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