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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1997)

임권택이라는 102편의 영화, 혹은 공존할 수 없는 영화들이 이루는 임권택이라는 하나의 별자리

르네 마그리트처럼 시작하고 싶다. 이 글은 여행기가 아니다. 아마 그래야 할 것이다. 나는 임권택 감독님의 전작 회고전을 따라 프랑스 낭트영화제에서 시작해서 파리 시네마테크(La Cinematheque Francaise, 이하 ‘파리(에 있는) 시네마테크’로 표기)로 이어지는 열흘에 걸친 모험극의 시간을 가졌다.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일정은 살인적이었고 나는 거의 매일 숨 돌릴 틈도 없이 무대에 올라가서 영화를 소개하고 라운드 테이블에 앉아야 했다. 물론 수없이 많은 관객과의 대화 시간을 가져보았고 그보다 더 많은 영화를 관객 앞에서 소개했으며 종종 기이한 라운드 테이블에도 앉아보았다. 하지만 단 한번도 프랑스 관객을 상대로 영화를 소개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 사람들을 가늠할 수 없었다. 나라마다 다른 영화 ‘관객’ 문화가 있으며, 시네 클럽을 이끌던 앙드레 바쟁과 앙리 랑글루아의 전통 아래 진행되어온 스타일의 디테일이 무언지 누구도 내게 이야기해준 적이 없었다. 원칙을 알고 있는 것과 그걸 실제로 하는 건 서로 전혀 다른 일이다. 말하자면 이건 누가 누구에게 전수할 수 없는 매번의 아슬아슬한 테크닉에 관한 이야기다. 내 앞에 들이닥친 임무는 몹시 실전적인 상황이며 게다가 나는 영화감독이 아니라 (만일 그렇다면 아무 말이나 해도 그들은 경청할 것이다. 나는 그걸 잘 알고 있다) 영화평론가로 이 자리에 서야 한다. 심지어 앙드레 바쟁조차 그가 이끌던 시네 클럽 토크에 관해 설명하면서 자신이 매번 콘서트 무대에 서서 오늘 공연을 망칠지도 모른다는 피아니스트의 불안감에 사로잡히곤 했다는 글을 쓴 적이 있다. 맙소사! 나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이동하면서 차창 너머로 본 풍경, 혹은 아주 잠깐 틈을 내 도둑고양이처럼 파리를 거닐어본 시간 말고는 내가 프랑스에 대해서 할 말은 없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는 나보다 훨씬 더 잘할 수 있는 사람이 당신의 주변에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임권택 감독 전작 회고전에 이르는 어려운 길 처음 시작은 지난해 겨울이었다. 벌써 2년 전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임권택 감독님에 관한 전작 회고전(이라고는 하지만 한국영화사가 분실한 29편을 제외한) 72편을 상영하였다. 이 프로그램에 파리 시네마테크는 큰 흥미를 보였고 여기서 상영된 영화 모두를 다시 한번 파리에서 상영한다는 것이 애초의 목표였다. 정확하게 말하면 부산에서의 전작 회고전은 두 번째였다. 일년 전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이미 같은 프로그램을 상영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상자료원 바깥에서 영화를 상영하는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일단 박물관인 이 장소를 벗어나면 어떤 명분을 가져와도 판권 소유자로부터 상영 동의를 받아야만 한다. 그렇게 되면 이제부터 긴 협상이 기다린다.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는 수없이 많은 제작자들에게 그 권리가 흩어져 있으며 그들은 모두 각자의 이해관계 속에서 각자의 상영료를 요구한다. 아쉽지만 상영료의 공식적인 액수는 정해져 있지 않고 (혹은 그럴 수 없으며) 프로그램을 진행해야 하는 쪽은 이미 정해진 예산 내에서 설득을 해야 한다. 문제는 더 복잡한 데 숨어 있다. 종종 감독들은 제작자와 헤어지면서 서로 다시는 얼굴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건 임권택 감독님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누군가는 호의를 지니고 있지만 누군가는 질투심에 가득 차 있다. 내가 들은 바로는 그렇다. 그리고 이건 우리나라만의 경우가 아니다. 유명한 이야기. 허우샤오시엔은 자신의 영화사를 만들기 전의 영화 제작자들과 등을 돌렸고 그런 다음 매번 서로 다른 나라에서 허우샤오시엔의 전작전을 할 때마다 제작자들의 조건은 “돈은 상관없으니 허우샤오시엔이 내게 직접 전화를 걸어 부탁을 하면 허락하겠다”는 것이었다. 허우샤오시엔은 그걸 할 바엔 하지 않아도 좋다고 거절했다. 결국 대만영화진흥국이 중재에 나서야만 했다. 나는 더 많은 예를 들 수도 있다. 정확하게 동일하진 않지만 비슷한 상황이 부산에서도 반복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부산국제영화제는 거의 영웅적으로 이 문제를 하나씩 해결했다. 하지만 가까스로 행사를 마친 부산국제영화제에 파리 시네마테크가 프로그램 교류를 제안했을 때 갑자기 모두들 패닉에 빠진 것과 같은 표정을 지었다. 말하자면 힘겨운 액션 장면이 가까스로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 갑자기 클라이맥스로 향하는 총격전이 시작되는 것만 같은 기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한국영화의 개벽, 거장 임권택의 세계’라는 이름으로 프로그램을 책임 진행했던 허문영씨가 내게 한 말이 기억에 남는다. “일흔두장이나 되는 수학 시험문제를 풀고 났는데 그걸 가져간 다음 백지를 내주면서 처음부터 다시 풀어보라고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처음 내가 받은 제안은 (지금 진행 중인) 임권택 감독님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감독님의 영화들과 함께 파리 시네마테크에서 상영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만세! 나로서는 최상의 상황이었다. 그 제안을 받아들였을 때만 해도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 계산은 빗나갔다. 왕빙에 관한 다큐멘터리 에세이 <천당의 밤과 안개>는 후반작업에서 계속 문제를 만들고 있었다. 게다가 이상할 정도로 임권택 감독님 다큐는 여기서 촬영을 끝내면 안 된다는 그 어떤 힘이 나를 계속 거기 머물게 만들고 있었다. 무한정 계속될 것만 같은 촬영. 내가 책에서만 읽었던 일이 그만 내게 벌어지고 말았다. 주어에서 목적어로의 전도. 여름이 되었을 때 나는 파리 시네마테크쪽에 미안하지만 일정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려야만 했다. 그런 다음 몹시 슬퍼졌다. 파리 시네마테크에 가지 못해서가 아니라 임권택 감독님 전작 회고전에 가지 못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상황은 예기치 않게 풀려나갔다. 이 행사는 한•불 수교 130주년 프로그램 중 하나가 되었고 여기에 낭트영화제가 공동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이 영화제의 공식 이름은 다소 긴 ‘낭트 3대륙 축제;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아시아의 영화’(Festival des 3 Continents Nantes; Cinema d’Afrique, d’Amerique Latine, et d’Asie)여서 모두들 그냥 ‘낭트영화제’라고 부른다. 이미 올해로 37회를 맞고 있는 이 영화제는 로카르노국제영화제가 첸카이거의 <황토지>를 발견할 때 허우샤오시엔의 <펑쿠이에서 온 소년>을 발견했고, 그런 다음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신인상을 받은) 지아장커의 <소무>에 작품상을 안겨주면서 공식적인 걸작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때 심사위원장은 허우샤오시엔이었다. 장선우의 <우묵배미의 사랑>을 발견했고, 박광수의 <칠수와 만수>와 <그들도 우리처럼>을 발견했다. 김홍준의 <장밋빛 인생>을 발견했고 최명길에게 여우주연상을 주었다. 낭트영화제는 특히 일찍부터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에 관심을 기울였다. <만다라>가 베를린국제영화제에 초대되고 <안개마을>이 런던국제영화제에 초대된 직후인 1983년에 다소 ‘간단한’ 규모의 회고전을 가졌고, 그런 다음 1989년 10편의 영화를 모아 다시 한번 회고전을 가졌다. 나는 두 번째 회고전을 할 때 감독님과 함께 이 영화제를 처음 방문했다. 첫인상. 조용한 도시. <짝코>를 반드시 언급해야 한다 어쩌면 이 행사에 낭트영화제가 뛰어든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파리 시네마테크는 낭트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낭트는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 중에서 25편을 직접 골랐다. 그 선정을 위해 낭트영화제의 젊은 예술감독 제롬 바론이 서울에 와서 (현재 남아 있는) 임권택 감독님의 전작을 보았고 그런 다음 그 과정에서 내가 쓴 책에 많은 도움을 받았으며 그러니 영화제 기간 중에 임권택 감독님과 함께 낭트에서 이 영화들을 소개하기 위해 와주었으면 좋겠다는 제안을 했다. 두 번째 우연은 부산국제영화제의 마지막 밤 전날에 이루어졌다. 나는 별로 파티를 좋아하지 않으며 그래서 소란스러운 자리에서 빠져나왔을 때 바로 옆에 자리한 작은 술집에서 허문영의 문자가 제시간에 도착했다. 재빨리 옆집으로 옮겼고 거기서 허문영은 홍상수와 맛있는 사케를 마시고 있었다. 나는 이런 자리가 훨씬 좋다. 그때 우연히 그 집 앞을 지나가던 한 프랑스 남자(와 한국인 코디네이터)가 합석을 하게 되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 장 프랑수아 로제. 현재 파리 시네마테크의 수석 프로그래머. 수없이 많은 영화 제목들이 오가면서 (홍상수를 눈앞에 두고) 각자의 “가장 좋아하는 홍상수 영화 뽑기” 게임을 하다가 갑자기 이야기는 불이 붙었고 홍상수는 마치 <해변의 여인>에서의 한 장면을 방불케 하는 순간을 연출하면서 앞에 놓인 냅킨에 그림을 그려가며 리얼리티와 환상에 관한 사람들의 오류 추론에 대해서 거의 30분 넘는 강의를 했다. 장 프랑수아 로제는 내게 당신이 쓴 임권택 책은 선정 과정에 큰 도움을 주었으며 그러니 라운드 테이블에 참석해달라는 제안을 했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허락을 했다. 이 자리는 새벽 5시가 되어서 끝났다. 그렇다고 금방 떠난 것은 아니다. 서울에서 두 가지를 결정해야 했다. 하나는 파리 시네마테크 전작 회고전에서 개막작으로 어떤 영화를 하고 싶은지 결정해달라는 요구가 날아왔다. 다른 하나는 파리 시네마테크와 낭트영화제에서 임권택 감독님의 간단한 마스터클래스를 했으면 좋겠고 그걸 위해서 감독님이 고른 장면에 대한 설명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제안이었다. 첫 번째 결정. 이런 경우 대부분 둘 중 하나를 고른다. 가장 최근의 영화거나 아니면 가장 유명한 작품. 나는 둘 다 피하고 싶었다. 그곳은 파리 시네마테크이고 여기서 이미 알려진 임권택을 반복하는 대신 다시 시작하는 ‘재발견’의 자리를 만들고 싶었다. 내가 한 가지 감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대부분의 비평가들이 지금은 <만다라>를 임권택의 대표작으로 가장 먼저 손꼽지만 다음 세대의 비평가들은 <짝코>를 선택할 것이다. 물론 <만다라>는 걸작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 아름다움이 바깥 언저리를 떠돌고 있으며 어딘지 모르게 불가에서의 배움이 역사라는 시간 속의 인간을 소진시켜버리고 있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임권택에서 역사란 그저 시간의 두께가 아니다. 그의 삶은 그 안에서 거의 부서지다시피 했고 그러면서 견뎌온 육신의 생명이 사회의 성질 속에서 살아온 시간이다. 나는 임권택 감독님의 전작에 위한 서문 역할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아마도 진정한 임권택 영화라고 할 수 있)는 영화는 <짝코>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 영화에는 역사라는 운명 안에서 가냘픈 의지로 가까스로 살아가는 플래시백의 더없이 아름다운 리듬의 종합이 있다. 힘들의 위계질서. 하여튼 그 안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하찮은 삶이란 어디에도 없다. 전쟁 중에 빨치산이었던 한 남자가 북한에 올라가지 못한 채 남한에 남아 신분을 숨기고 그저 떠돌며 평생을 살아가는 동안 그 남자 때문에 집안이 풍비박산이 난 다른 또 한명의 남자가 그를 평생에 걸쳐서 쫓아다닌다. 망친 두개의 삶. 임권택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 운명에 대해서 비애로 가득 찬 분노를 삼키고 또 삼켜가며 한 장면씩 만들어나간다. <짝코>를 보는 것은 한국 근대사라는 생선가시 뼈를 삼키는 일이다. 우리는 이 영화를 보면서 영화를 느껴보는 내장이 망가지는 경험을 해야만 한다. 나는 파리 시네마테크에서 망가진 한국영화의 창자를 꺼내들어 보여주고 싶었다. 임권택 감독님은 약간 망설인 다음 내 제안을 받아들여주었다. 다른 하나는 마스터클래스를 위한 장면을 고르는 일이 남았다. 임권택이라는 102편의 영화, 혹은 1962년 <두만강아 잘 있거라>에서 시작해서 2015년 <화장>에 이르는 마치 기나긴 병풍화처럼 끝도 없이 기나긴 목록에서 그 어떤 하나의 장면은 오해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의 선택은 두개의 장면을 고르는 것으로 전략을 바꾸었다. 하나는 <장군의 아들>에서 먼저 발췌했다. 신마적 엄동욱이 혼마치깡(충무로)의 술집에 갔다가 일본 야쿠자들이 보낸 하야시와 그의 일당들이 음식점을 점령하고 술을 마시고 있다는 말에 싸움이 붙고 칼에 찔린다. 그 말을 듣고 김두한이 달려가 음식점 안에서 큰 싸움이 벌어지고 마침내 하야시의 앞잡이 주먹이 된 (김두한의 유일한 맞상대인) 김동회와 대결을 하는 클라이맥스까지이다. 상영시간은 7분52초. 이 시퀀스에는 임권택 영화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순간 중 한 장면이 포함되어 있다. 그건 엄동욱의 소식을 듣고 달려가는 김두한의 숏들이 보여주는 그 율동감이다. 지리적으로 종로에서 충무로까지 뛰어가는 설정인데 당연한 말이지만 세트 안에서 그렇게 긴 거리를 찍는 것은 불가능하다. 매우 짧게 나눈 숏들은 한쪽 방향으로 진행되는데 이 벡터에 가속도를 더하는 것은 순간적으로 달려가는 김두한의 머리에서 날아가버리는 모자다. 김두한은 모자가 자기 몸을 떠나는데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간다. 그때 세트 안의 많은 엑스트라들이 자기 역할을 하면서 움직이지만 아무도 김두한의 벡터를 방해하지 않도록 섬세하게 배치되어서 활동한다. 모두가 이 순간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지만 누군가는 그 순간을 틀림없이 볼 것이다. 관객에 대한 믿음. 그것은 내가 왕빙에게서 배운 것이다. 누군가, 단 한명이라도, 그걸 보면 그러면 된 것이다. 다른 하나의 장면은 <서편제>에서 그 유명한 신 41, 전라남도 청산도 언덕배기에서 1992년 11월18일 오전에 찍은 장면, 아버지 유봉과 딸 송화, 아들 동호가 <진도 아리랑>을 부르면서 걸어오는 5분40초에 걸친 고요한(fixed) 롱테이크 숏이다. 두 장면은 어제의 임권택과 내일의 임권택을 나누는 분기점이 되었다. 두 영화 사이의 간격은 고작해야 2년에 불과하다. 임권택의 전작을 펼쳐놓고 보면 사실상 두 영화 사이의 경계는 겹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장군의 아들>은 임권택이 만들어온 장르영화의 시대가 잡아끌어당기고 있었다. 반대로 <서편제>는 임권택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을 열고 있었다. 감독님 댁에서 두개의 클립을 확인하면서 청산도를 걸어오는 장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감독님이 중얼거리듯 한마디 하셨다. “여기서부터 내 영화가 제 길을 간 거예요.” 낭트영화제 예술감독 제롬 바론이 임권택 전작을 모두 본 다음 고른 25편의 목록 모든 준비가 차곡차곡 진행되었지만 예상하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잘 알려진 대로 11월13일 파리에서 연쇄테러가 벌어졌다. 아무래도 예감이 좋지 않았다. 이 모든 진행을 차례대로 한 박선영 프로그램 코디네이터가 감독님을 영상자료원에서 뵙고 여쭤보았다. “감독님, 괜찮으시겠습니까?” 임권택 감독님은 그 질문에 간단하게 대답했다. “가야죠, 안 가면 지는 거잖아요.” 이것이 이 사람이 세상을 살아온 방식이다. 11월27일 금요일. 샤를 드골 공항으로 날아가는 비행기는 텅 비었고 항공사에 미안하긴 하지만 사람들은 좌석에 누워서 잠을 청하며 긴 여행길에 올랐다. 함께 길에 오른 사람은 임권택 감독님 내외와 (둘째아들인) 권현상군, 그리고 (부산국제영화제 공동집행위원장인) 강수연씨가 임권택 감독님의 ‘결정적’ 영화(중 한편)인 <씨받이>와 다른 두편의 영화 <아제 아제 바라아제>와 <달빛 길어올리기>를 소개하기 위해 나섰다. 홍효숙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도 함께 동행했다. 우리는 드골 공항에서 약간 대기한 다음 낭트까지 이어지는 비행기에 환승했다. 겨울의 프랑스는 해가 일찍 지고 어둠이 서둘러 찾아왔다. 날씨는 나빴고 공항 바깥에서는 비가 느리게 내리고 있었다. 깊은 어둠에 잠긴 낭트에 도착해서 숙소로 향할 때 거리에는 곳곳에 낭트영화제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이미 홈페이지를 보고 알고 있었지만 올해 낭트영화제 포스터는 임권택 감독님이 1987년에 연출한 여든일곱 번째 영화 <아다다>의 한 장면이다. 거의 검은색으로 타들어가는 녹색의 밭에서 하얀색 머릿수건을 면사포처럼 쓴 신혜수가 한손으로는 곡물을 붙잡고 다른 한손으로는 낫자루를 금방이라도 벨 듯한 모습으로 서 있는 장면. 영화에서 단 한마디도 하지 못하는 벙어리로 나오는 그녀는 여기서 무언가를 바라보듯이 하늘을 쳐다보고 있다. 그걸 어둠에 잠긴 낭트에서 바라보는 느낌은 반갑다기보다는 약간 시간 감각을 잃게 만드는 것이었다. 호텔 앞에는 예술감독인 제롬 바론과 낭트영화제를 처음 시작한 다음 거의 이끌다시피했지만 지금은 은퇴한 알랭 잘라도가 임권택 감독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낭트영화제는 몇년 전에 사실상 파산했고 그런 다음 개최 여부가 불확실했었다. 제롬 바론. 올해 45살의 매우 지적이고 조용한 남자. 파리 8대학과 3대학에서 다큐멘터리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낭트영화제에서 오레리 고데와 함께 영화를 선정하고 있다. 무엇보다 제롬 바론이 임권택 전작을 모두 본 다음 고른 25편의 목록이 내게는 흥미로웠다. 아마 이 목록은 프랑스가 임권택을 받아들이는 방식의 한 표본이 될 것이다. 우선 60년대 영화로 1962년 2월에 개봉한 데뷔작 <두만강아 잘 있거라>를 시작으로 <법창을 울린 옥이>(1966), <황야의 독수리>(1969), <월하의 검>(1970), <둘째어머니>(1971), <삼국대협>(1972)을 선택했다. 약간 의아하게도 제롬은 이 시기에 만든 ‘다찌마와리’ 액션활극과 사극영화를 한편도 선택하지 않았다. 그런 다음 (임권택 스스로 자신에게 하나의 분기점이 되었다고 선언한 <잡초> ‘이후’의 영화로) <왕십리>(1976), <낙동강은 흐르는가>(1976), <상록수>(1978), <족보>(1978), <신궁>(1979), <짝코>(1980)를 골랐다. 이 목록은 무언가 노골적으로 ‘새마을’ 영화들을 피했다. <만다라>를 포함해서 1980년 ‘이후’의 영화로는 <안개마을>(1972), <길소뜸>(1985), <티켓>(1986), <씨받이>(1986), <아다다>(1987), <연산일기>(1987), <아제 아제 바라아제>(1988)로 이 시기의 영화들에 가장 많이 관심을 기울였다. 그런 다음 임권택의 마지막 ‘후기’ 영화로 <장군의 아들>(1990), <개벽>(1991), <서편제>(1993), <태백산맥>(1994), <하류인생>(1999)을 추가했다. 물론 선택은 영화제의 권리이며 무엇을 선택했는가, 라는 질문은 무엇을 배제했는가, 라는 결단과 맞물리는 것이다. 하지만 내게 약간 놀랍게 보인 것은 이 선택이 내 목록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약간 상투적인 질문으로 왜 <춘향뎐>과 <취화선>을 제외했냐고 묻자 그 영화들은 너무 유명하기 때문이라고 웃으면서 대답했다. 제롬 바론에게 언제부터 임권택 영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냐고 물어보자, 놀랍게도 17살 때 <안개마을>을 처음 본 다음부터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간단한 산수. 그러니까 1987년. <씨받이>를 찍고 난 다음, 혹은 <아다다>를 찍고 있을 때 제롬은 임권택의 영화를 발견했고 그런 다음 그 선을 따라온 셈이다. 영화제 공식 책자에는 제롬 바론이 짧지만 긴 시간 공들여 쓴 것이 분명한 소개의 글이 있었다. 그가 쓴 글의 제목은 ‘임권택, 역사의 몸, 민중의 육신’ (Im Kwon-taek, Le Corps de l’ Histoire et d’un peuple)인데 글의 후반부에서 “(…) 그가 이루어낸 다양성, 창조를 위한 독창적인 지렛대. 존 포드와 그의 미국을 구태여 떠올릴 필요도 없이 임권택은 아시아영화에서 그 누구도 비교할 수 없는 차원의 시야를 우리에게 명확하고 폭넓게 보여주었음에 틀림없다”라고 단언한다. 제롬 바론은 망설이지 않고 임권택을 설명하면서 김기영과 이만희를 끌어들인다. 그러면서 그들이 한국영화의 위대한 작가들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들의 시기는 매우 제한적이며 그들에게 주어진 상황의 벽 앞에서 멈추어 섰다고 덧붙인다. 물론 우리는 얼마든지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는 먼저 제롬 바론의 설명을 더 들어보고 싶다. 그는 임권택 영화 속의 등장인물들의 몸이 힘겹게 1970년대를 지나면서 영화 안에 국가와 민중 사이의 긴장을 고스란히 담아놓은 하나의 그릇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 영화들이 앙상해 보일 때조차 장르 속의 일상생활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의 풍부한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고 설명한다. 제롬 바론이 가장 흥미롭게 생각하는 것은 이상할 정도로 임권택 영화 속의 주인공들이 몸이 부서지거나 일부를 훼손당하는 대목이다. “(…) 임권택 영화는 초기부터 거의 마지막 시기까지 그 안에서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가야 하는 몸의 문제였다고 생각합니다. 처음 초기 영화를 볼 때 대수롭지 않게 팔이 잘리거나 아니면 장님을 만들어버릴 때 몹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런 다음에도 이런 순간들은 반복해서 나타났습니다. <만다라>에서는 깨달음을 위해서 자기 손가락을 태우고, 전혀 다른 맥락에서 같은 목표를 위해 <서편제>에서는 딸을 장님으로 만들지요. <아다다>는 벙어리에 관한 이야기이고, <안개마을>에는 몸이 불편한 이상한 사내가 나오는데 그들은 자신의 육신이 지닌 약점 때문에 신비롭게 보입니다. 심지어 한 화가는 자신의 작품과 하나가 되기 위해 자기의 몸을 불구덩이 속에 밀어넣습니다(<취화선>).” 매번 임권택 감독의 영화를 보기 위해 객석은 가득 차고 다음날 임권택 감독님의 오랜 친구인 피에르 리시앙이 한쪽 다리를 지팡이에 의지한 채 불편한 몸을 이끌고 파리에서 찾아왔다. 함께 온 사람은 왕무훙(王穆宏)이라는 젊은 중국인이었다. 그는 상하이 근처 도시에서 태어났고 지금 파리에서 6년째 영화이론을 공부하고 있는데, 아시아 영화에 관심이 많으며 한국영화를 열심히 보고 있는 중이라고 자기를 소개했다. 피에르 리시앙은 내게 자신이 젊은 비평가들의 견해를 거의 참고하지 않지만 이 사람은 영화에 대해 좋은 견해를 갖고 있으며 좋은 영화를 발견하는 감각이 특별하게 훌륭하다고 소개했다. 이제까지 당신이 본 임권택 영화 중 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왕무훙은 대답에 망설임이 없었다. 내 경험에 따르면 이건 중국 사람이 가진 기질인 것 같다. <만다라>와 <서편제>. 오후에는 장 미셸 프로동이 도착했다. 장 미셸 프로동은 <르몽드> 영화기자로 시작해서 21세기에 <카이에 뒤 시네마> 편집장이 되었다. 그는 편집장 시절에 한국영화에 관한 특집호를 만들었으며, 이때 <카이에 뒤 시네마>는 임권택에 관한 비평과 긴 인터뷰를 실었다. 지금은 온라인 매체 슬래이트 프랑스(slate.fr)에 정기 기고를 하면서 대학에서 영화를 강의하고 있다. 나는 거의 매회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를 소개하기 위해 무대에 올라갔다. 사흘 동안 아침 첫회부터 밤 늦은 마지막회까지 여덟편의 영화를 소개했다. 내가 감격한 것은 두 가지였다. 한 가지는 매번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를 보기 위해서 객석이 꽉 찼다는 것이다. 관객은 연령과 성별, 인종을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다양했지만 단 한 가지, 믿을 수 없을 정도의 호기심 어린 눈길로 모두들 내 말을 기다려주었다. 다른 한 가지는 매우 개인적인 것이다. 내가 소개를 하러 무대에 오른 극장은 낭트 시내 중심에 있는 카토르자(Katorza)극장이었는데 여기서 16년 전인 1989년 12월 둘쨋주 화요일 오후 4시에 허우샤오시엔의 <비정성시>를 처음 보았다. 나는 그날의 감흥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날은 허우샤오시엔의 ‘앞서가던’ 창작의 시간과 나의 ‘뒤늦은 발견으로 뒤쫓던’ 감상의 시간이 비로소 시간의 평행선을 긋기 시작한 첫날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내가 이 극장에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를 소개하기 위해 다시 올 것이라고는 정말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멀티플렉스인 이 극장에서 지금 상영 중인 다른 영화는 올해 칸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받은 러슬로 네메시의 <사울의 아들>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날 그때처럼 영화를 볼 시간은 없었다. 극장 입구에는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와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가 쌓여 있었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유대인 교수. 하지만 그는 매일 밤 다시 아우슈비츠에서 깨어나는 꿈을 꾸었다. 결국 그는 이 고통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1987년 4월11일 자살했다. 이미 이 두권의 한글 판본을 갖고 있으면서도 왠지 그걸 사는 것이 내 의무이기라도 한 것처럼 영화를 보는 대신 그 두권의 책을 샀다. 그날 밤 제롬 바론은 호텔로 <카이에 뒤 시네마> 12월호를 잔뜩 들고 찾아와 나눠주었다. 이번호에는 6페이지에 걸쳐서 임권택 감독님과의 인터뷰가 실려 있었다. 첫페이지는 <화장>을 연출할 때 태안반도에서 찍은 것이 분명한 사진으로 시작했다. 글의 제목은 ‘시네마 판소리’(Cinema Pansori). 내 시선을 끈 것은 두 가지였다. 먼저 표지. 마치 애도를 하기 위한 듯한 검은색 바탕에 흰색으로 그려진 그림은 (편집실에 침입한 테러리스트들에게 총을 난사당한) 저널 <샤를리 에브도>의 만평가인 필명 ‘뤼즈’로 알려진 레날 뤼지에가 그린 것이다. 누가 봐도 한눈에 알 수 있는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의 퓨리오사가 무릎을 꿇고 비통함에 젖어 절규하는 장면. 그리고 그녀의 주변에 난장판처럼 보이는 풍경은 아마도 11월13일 그날의 참상일 것이다. <카이에 뒤 시네마>가 영화와 세상 사이에 개입하는 방식. 두 번째는 올해의 톱10 목록이다. 1위는 난니 모레티의 <나의 어머니>. 2위는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찬란함의 무덤>. 3위는 필립 가렐의 <여자들의 그림자>. 4위는 래리 클라크의 <우리들의 냄새>. 5위가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6위는 리산드로 알론소의 <도원경>. 7위는 폴 토머스 앤더슨의 <인히어런트 바이스>. 8위는 미구엘 고메스의 <아리비안나이트>. 9위는 알란테 카바이테의 <상가일레의 여름>. 10위는 구로사와 기요시의 <해변가로의 여행>. 11월13일 이후의 파리에서 우리 일행은 다소 하드코어한 일정을 마치고 파리로 향했다. 가장 걱정한 것은 11월13일 이후의 스산한 분위기였다. 잠시 동안 이곳을 지나가는 사람의 눈에 파리는 조용했고 거의 동요하지 않는다는 느낌이었다. 아마 그럴 것이다. 세월호 ‘이후’의 서울 거리를 걷는 관광객이 어떻게 우리의 마음을 읽을 수 있을까. 혹시 당신이 이번 겨울 파리에 가서 시네마테크를 방문할 예정인데 아무도 가는 길을 일러주지 않는다면 가장 쉬운 방법을 일러주겠다. (당신이 도심에 있다는 가정하에) 올림피아드로 향하는 14호선 전철이나 나시옹으로 가는 6호선 전철을 타고 베르시(Bercy)역에서 내린 다음 일단 바깥으로 나와 그 앞에서 아무에게나 물어보(거나 거기서부터 구글 맵을 이용하)면 걸어서 2분 정도 걸린다. 나는 예전 시네마테크는 가본 적이 있지만 새로 지은 시네마테크는 처음이었다. 약간 자크 타티의 세트장처럼 지어진 이 건물은 지하 1층, 지상 4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2층에는 잘 정리된 북숍이 있고, 입구 바로 옆에는 ‘400번의 구타’라는 이름의 레스토랑이 있다(그리고 의외로 맛이 괜찮다). 물론 프랑수아 트뤼포를 기념하는 이름인데 안에는 일본어판 <어른들은 알아주지 않는다>(<400번의 구타>)와 <밤안개 속의 연인들>(<도둑맞은 키스>) 포스터가 걸려 있었다. 앞에는 넓은 공원이 있고 하얀색에 창문으로 이루어진 이 건물 앞에 서면 어쩔 수 없이 경건한 마음이 든다. 앙리 랑글루아. 앙드레 바쟁과 그의 아이들. 1968년 5월. 여기서 오즈 야스지로를 발견한 빔 벤더스. 수없이 많은 일화. 말하자면 지구상의 모든 시네필의 성지. 그렇다. 나는 지금 임권택 감독님을 모시고 성지 순례를 온 것이다. 그게 내 마음을 설레게 만든다. 파리 시네마테크에서는 몇 가지 행사를 동시에 진행하고 있었는데 그중 가장 규모가 큰 것이 마틴 스코시즈의 ‘작업 노트’ 전시회였다. 시네마테크 앞에는 커다란 포스터 광고판이 세워져 있었는데 위아래로 <택시 드라이버>의 모히칸족 인디언 헤어스타일을 한 그 유명한 로버트 드니로의 얼굴과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웃는 얼굴이 있었다. 그런데 거기에 약간 무언가 묻은 것 같아 다가가서 자세히 살펴보니 누군가 디카프리오의 코밑에 수염을 그려넣은 낙서를 해놓았다. 전세계 어디에서나 마주치는 거리의 낙서가들이라니! 파리 시네마테크의 다음 전시는 ‘구스 반 산트: 젊은이들의 컬트 시네아스트’이며 내년 4월13일에 시작해서 7월31일까지 이어진다는 소개가 한쪽 모퉁이에 함께 있었다. 임권택 전작 회고전은 12월1일에 개막작 <짝코>로 시작해서 내년 2월29일 <아제 아제 바라아제>가 오후 4시15분에 상영되는 것으로 끝난다. 상영작은 부산국제영화제 전작 회고전보다 두편이 더 많은 74편이다. 그 이유는 그사이에 <화장>이 만들어졌고 한국영상자료원에서 1966년에 만든 <전장과 여교사>를 찾아냈기 때문이다. 파리 시네마테크는 3개월 단위로 ‘작은’ 프로그램 북이 나오는 것 같은데 그 안에 장 프랑수아 로제가 임권택에 관해 쓴 소개의 글 ‘한국, 몸과 영혼’(La Core′ e, Corps et Ame)이 실려 있었다. 제목에서도 느낄 수 있지만 장 프랑수아 로제의 글은 제롬 바론과 같은 선상에 놓여 있으면서도 다른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는 먼저 근대 한국사에 대해 설명을 한 다음 그 안에서 만들어진 102편에 이르는 임권택 영화의 심장부에는 구체적인 한국의 역사와 그가 이루어낸 상상적인 재현, 무엇보다 국가적인 몸과 민족적인 영혼 사이의 복잡한 관계가 놓여 있다고 설명한다. 무엇보다 그가 놀라는 것은 그 안에서 함께 공존할 수 없는 영화들이 임권택이라는 하나의 별자리를 이룬다는 사실이었다. 파리 시네마테크 라운드 테이블에서의 긴장 지금 파리 시네마테크 관장은 혹은 <뮤직박스>로 잘 알려진 그리스 감독 콘스탄틴 코스타 가브라스이고, 프로그램 감독은 세르주 투비아나이다. 잠시 동안 멈춰 서게 하는 이름. 1974년 <카이에 뒤 시네마> 6월호. 통권 250호. 세르주 다네와 함께 편집장이 된 다음 이른바 ‘붉은 표지’의 시대를 끝내고 다시 <카이에 뒤 시네마>를 정치의 계절로부터 영화의 목록에로 되돌린 두명 중 한명. 두명의 세르주. 다네가 전투적이었다면 투비아나는 전술적이었다. 다네가 다가오는 영화의 변화에 민감했다면 투비아나는 구체적인 변화의 기록을 <카이에 뒤 시네마>의 임무라고 생각했다. 아니, 이런 대차 대조표를 떠나서 그저 나는 다네와 함께 <카이에 뒤 시네마> 편집장을 8년 동안 했던 그가 궁금했다. 첫인상은 차가웠고 그는 할 말만 하는 조용한 사람이었다. 공식적인 파티도 잠깐 머문 다음 떠났고 점심 식탁에서 마주친 적이 한번도 없었으며 저녁 만찬의 자리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뭐랄까, 그는 마치 프리츠 랑 영화에서 걸어나온 사람처럼 보였다. 마부제처럼 분명히 거기 존재하지만 다만 목소리 저 너머에 있는 사람. 그에 비하면 장 프랑수아 로제는 열정적인 웅변가에 가까웠다. 개막식 무대에서 임권택 감독님을 소개할 때 분명히 손에 정리된 문장이 쓰인 메모 카드가 있었음에도 그걸 무시하고 손을 위아래로 크게 흔들면서 시네마테크의 관객을 향해 “당신들은 한국에서 온 이 거장의 영화를 보고 나면 아시아영화를 다시 바라보게 될 것이다”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무대에 오른 임권택 감독님을 향해 파리 시네마테크의 관객은 일제히 기립 박수로 환영했다. 스산한 파리의 풍경과 요즘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모이지를 않는다는 걱정 어린 충고에도 불구하고 객석은 가득 차 있었다. 낭트영화제에서 마스터클래스를 한번 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파리 시네마테크에서의 라운드 테이블이 훨씬 긴장됐다. 그건 전적으로 관객 때문이다. 그 자리에는 <카이에 뒤 시네마>의 편집장이었으며 지금은 칸국제영화제 비평가주간 수석 프로그래머이자 임권택 감독님의 지지자이기도 한 샤를 테송도 왔다. 먼저 준비한 두편의 클립을 보여주었다. <장군의 아들>을 보여주었을 때 반응은 예기치 않은 것이었다. 그들은 이 장면을 마치 무성영화 시대의 코미디 활극처럼 받아들였다. 여기저기서 가벼운 웃음이 터져나왔고 일부는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이제껏 방문한 나라들은 각자의 관객 영화문화를 갖고 있었고 거기에는 다소 복잡한 문화적인 차이와 영화적 경험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여기에 우열이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하지만 이 차이의 문화정치학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설명한다. 이를테면 이미지의 형태가 불러일으키는 반응의 차이. 그 차이 속에 자리잡은 예술적 번역과 사회적 거리. 1920년대 모스크바의 관객과 뉴욕의 관객은 스펙터클을 향해서 얼마나 멀리 있으면서 또 가까운가. <킹콩>은 <알렉산더 네브스키>로부터 얼마나 가까우면서 멀리 있는가. 이때 그 반응의 차이를 생각해보는 것은 얼마나 흥미로운가. 그런 다음 <서편제>의 롱테이크 장면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이 숏의 첫 장면이 시작하는 순간, 그러니까 셋이 고개 너머 멀리서 거의 보이지 않게 걸어오면서 <진도 아리랑>을 부르기 시작하는 바로 그 순간, 객석에 서 있던 나는 바로 내 옆에 앉은 어린 소녀가 함께 온 남자친구에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플랑 세캉스(롱테이크)인 거야?”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고 조심스럽게 조잘거리며 영화를 보는 이 소녀를 유심히 내려다보았다. 객석은 좀전과 완전히 달랐고 누군가는 갑자기 객석에서 등을 떼고 몸을 앞으로 끌어당겨가며 보기도 했다. 이 장면은 전광석화처럼 관객을 사로잡았다. 두개의 클립이 상영을 마쳤을 때 파리 시네마테크의 관객은 박수로 호응했다. 장 프랑수아 로제는 낭트에서의 제롬 바론과 달리 공격적인 질문을 했다. 어쩌면 이것이 파리 시네마테크의 전통인지도 모르겠다. 유명한 예. 60년 전 여기서 알랭 드코앵이 관객과의 대화를 했을 때 열일곱살의 프랑수아 트뤼포는 손을 들고 발언 기회를 얻은 다음 “나는 당신이 나이를 먹었기 때문에 참고 있지만 영화만 생각하면 달려나가 당신의 턱을 주먹으로 갈기고 싶다”고 분노에 차서 외쳤다. 첫 번째 질문은 이제까지 당신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1973년 ‘이전’의 영화들이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발언을 해왔는데 이번 회고전에서 상영을 허락한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임권택 감독님은 초청을 한 상대가 이런 질문으로 시작할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한 것 같다. 나는 방어를 해야만 했다. 약간 장황하게 1960년대 한국영화의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서 당신들의 누벨바그 파리와 그 지구 반대편의 도쿄의 쇼치쿠 누벨바그의 동시대성으로부터 서로 다른 시간의 영화문화가 있었다는 것을 말해야만 했다. 임권택이 데뷔한 1962년이 한국전쟁 휴전으로부터 고작해야 9년이 지난 다음이라는 말에 객석은 약간 얼어붙은 분위기가 되었다. 군사 쿠데타가 있었고 이중의 검열 속에서 영화산업이 처한 끔찍한 상황을 그들에게 설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두 가지 상황을 떠올렸다. 1960년 4월19일 이후 잠시 동안 서울의 봄이 온 다음 이듬해 5월16일 군사 쿠데타를 말할 때 그들은 1968년 8월20일 ‘프라하의 봄’에 침공한 소련의 탱크를 떠올렸으며, 1970년대 독재정권과 검열에 대해서 설명할 때 동시대의 맞은편 라틴아메리카 영화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들의 영화사에는 존재해본 적이 없는 경험. 분위기는 화기애애했지만 가장 예상치 못한 질문은 마지막에 나왔다. 장 프랑수아 로제는 당신의 영화에서 시종일관 나타나는 힘은 섹슈얼 에너지이며, 이 강도는 장르영화 시절에서 작가영화 시대를 가로지르는 힘의 역량이며 동시에 둘 사이를 연결시켜놓으면서 하나의 세계를 이룰 뿐만 아니라 당신 영화 전체의 하부를 이루고 있다, 이 섹슈얼한 힘을 설명해 달라, 는 요구였다. 임권택 감독님은 처음 받아보는 질문이라고 운을 떼면서 난감하게 생각했다. 장 프랑수아 로제는 비평가의 입장에서 거기서 무엇을 보았냐고 물었다. 무엇을 보았냐는 질문, 이 전통적인 프랑스식 질문. 나는 거기서 유교를 본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파리 시네마테크 관객에게 부디 섹슈얼한 힘을 오리엔탈리즘의 신비함으로 해석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조선시대에 시작했지만 아직도 한국인의 잠재의식 안에 반복해서 학습되고 있는 이 유교는 거의 항상 여성의 몸을 경유하여 재생산되는 지식인데 그 과정에서 섹슈얼한 힘은 신체를 부수거나 반대로 기록하는 방식으로 집행되고 있고 그 과정의 미학적 진술 안에 담겨 있는 두 가지 상반된 힘을 보아달라고 했다. 하나는 부정적 힘으로서의 폭력이고 다른 하나는 긍정하는 힘으로서의 생명이다. 장 프랑수아 로제는 내게 그렇다면 임권택의 자리는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전적으로 이건 개인적인 견해라는 전제 아래 아시아영화에는 전기(傳記)라는 방식으로 전체를 내려다보는 투시도법으로서의 관점의 계보가 있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 선을 연결하는 세개의 선은 미조구치 겐지와 임권택, 그리고 허우샤오시엔으로 이어진다고 설명했다. 그런 다음 그것이 일본과 한국, 그리고 중화권으로 이어지는 창조의 선이라고 덧붙였다. 질문이 모두 끝나고 무대 아래로 내려왔을 때 장 프랑수아 로제는 내게 웃으면서 당신은 오늘 오늘밤 승리했다, 는 표현을 썼다. 그 순간 내가 느낀 무대에서의 결투의 느낌이 그리 멀지 않았다는 걸 확인했다. 세르주 투비아나는 파리에 온 이래 처음으로 내게 웃으면서 먼저 악수를 청했다. 내가 올해 받은 악수 중에서 가장 따뜻한 터치였다. 그날 밤 우리는 새벽 1시까지 즐거운 담소를 이어갔고 혼자 숙소로 돌아오던 나는 시네마테크에서 마스터클래스를 감명 깊게 들었다는 한 청년과 길거리에서 마주쳐 다시 한 시간을 더 이야기해야만 했다. 완전히 지친 나는 호텔로 돌아왔는데도 잠이 오지 않았다. 텔레비전에서는 프리츠 랑의 을 방영하고 있었다. 페터로레가 도시의 사람들 앞에서 재판받는 장면에서 그만 잠들었다. 텔레비전은 아침까지 혼자 외롭게 중얼대고 있었다. “왠지 모르겠지만 승리한 이 기분이 참 좋습니다” 다음날 점심은 임권택 감독님이 사는 자리였고 맛있는 포르투갈 해산물 레스토랑에서 모두 모였다. 가벼운 담소. 한국영화의 현재의 작가주의에 대한 그들의 평가. 그런 다음 내년 칸국제영화제에 올지도 모를 세계 영화의 목록들을 주고받았다. 그러더니 일제히 오후 1시 반이 되자 일어나서 모두들 시사를 보러 간다고 말했다. 무슨 영화를 보러 가냐고 묻자 쿠엔틴 타란티노의 <헤이트풀8>를 보러 간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조금은 부러웠다. 영화를 보러 가는 그들을 바라보면서 영화가 이어주는 우리의 공동체를 잠시 생각했다. 어디서나 영화. 우리는 오던 길을 역순으로 공항으로 간 다음 다시 긴 비행시간을 견디면서 서울로 돌아왔다. 돌아가는 길에 임권택 감독님께 문자를 보냈다. “왠지 모르겠지만 승리한 이 기분이 참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잠시 후에 답장이 왔다. 언제나처럼 짧은 문자. “수고했어요.”

미술관으로 간 영화를 찾아서

영화가 스크린을 벗어나 극장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사실 이제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영화와 현대미술의 크로스오버는 진즉부터 진행되어왔고 올해 주목받은 작품 중에도 미술에 뿌리를 둔 영화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2015년의 끝자락, 공교롭게도 미술관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꽃피운 세 가지 영화, 전시가 동시에 찾아왔다. 2016년 3월13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진행되는 <스탠리 큐브릭전>, 2016년 2월28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진행되는 <필립 가렐: 찬란한 절망전>, 2016년 3월27일까지 국립현대미술 서울관에서 진행되는 <윌리엄 켄트리지: 주변적 고찰>이 바로 그것이다. 각기 다른 전시를 관통하는 흐름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고 느껴 영화미디어학자 김지훈 교수에게 설명을 부탁했다. 미술관으로 간 영화들은 우리에게 어떤 감흥을 남기는가. 이 전시들이 지금 우리에게 전하는 바는 무엇인가. 예술과 영화의 경계에 대한 간략한 답이 여기에 있다. 회고전을 기념해 한국을 찾은 필립 가렐 감독의 인터뷰도 덧붙인다. 영화는 무엇인가. 이 오래된 질문의 답을 미술관에서 찾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영화는 어디에 있는가 영화이론과 비평에서 가장 본질적인 질문은 “영화는 무엇인가”이다. 이 질문은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수반한다. 영화의 본질을 이루는 것은 무엇인가?(셀룰로이드 필름, 카메라, 몽타주, 운동의 환영, 영사 시스템, 실물보다 큰 스펙터클) 영화는 다른 예술(회화, 사진, 건축, 연극) 및 미디어(텔레비전, 비디오)와 어떻게 다른가? 영화의 탄생기와 영화를 ‘제7의 예술’로 인정하고자 했던 20세기 초를 거쳐 정립된 이 질문들은 물론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그런데 1990년대 중반부터 또 다른 중요한 질문이 제기되어왔다. “영화는 어디에 있는가?” 디지털 미디어의 발달은 이러한 질문의 단초가 되었다. 우리가 고전적으로 상정했던 영화의 구성요소인 셀룰로이드와 필름카메라 기반의 동영상은 디지털카메라와 프로젝션 시스템, 디지털 시각효과로 발빠르게 대체되어왔다. 물론 이것은 “영화는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연결된다. 그런데 영화의 구성요소를 넘어서 영화의 ‘경험’이라는 차원으로 시선을 돌려보면 “영화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된다. 우리는 극장을 넘어 IPTV와 홈시어터 시스템은 물론 랩톱과 스마트폰, 태블릿PC와 같은 다양한 작은 스크린들로 영화를 체험한다. 즉 실물보다 큰 단일 스크린과 관람 자세의 부동성, 상영시간 동안의 집중을 특징으로 하는 영화적 경험의 굳건함도 흔들린다. 영화적 이미지, 영화장치, 영화적 경험 모두가 자신의 전통적인 경계와 구성성분을 잃고 인접예술 및 미디어로 흩어진다. 이 글은 “영화가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또 다른 중요한 대답으로서 1990년대부터 지금까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영화와 현대미술의 크로스오버를 다룬다. 영화가 어떻게 우리가 알던 영화와 비슷하면서도 다르게 미술관에 존재하는가를 설명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상황을 그려보자. 당신은 지금 어떤 가상의 전시를 관람할 예정이다. 이 전시는 3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의 방에는 영화가 현대미술로 이주하는 세 가지 방식, 또는 현대미술이 영화를 포용하는 세 가지 방식에 대한 풍경이 전시되어 있다. 각 방은 지금 당신이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관람할 수 있는 3개의 전시를 포함한다. 3개의 방, 3개의 풍경 첫 번째 방. 당신은 여기서 영화에 대한 전시, 혹은 특정 영화미학이나 영화사의 주요 국면을 조명하는 전시들을 볼 수 있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내년 3월13일까지 진행되는 <스탠리 큐브릭전>을 살펴보자. 2004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처음 선보인 이 전시 프로그램은 유럽 주요 도시들과 LA, 상파울루, 토론토를 거쳐 서울에 상륙했다. 국내에는 2012년 말 개최되어 큰 반향을 일으킨 <팀 버튼 전>에 이은 두 번째 감독 관련 전시다. 전시공간에는 큐브릭의 전작들에서 발췌한 주요 장면들과 사운드트랙 장면들, 관련 다큐멘터리들이 다수의 프로젝터들과 모니터를 통해 재생된다. 전시장 입구에 들어서면 전문 사진작가로부터 출발한 큐브릭의 초기 이력을 만날 수 있고, 출구에는 <나폴레옹> 등 그의 미완성 프로젝트들에 대한 자료들이 작별인사를 건넨다. 이 전시의 관람 포인트는 큐브릭이 수정을 거듭한 대본들, 작품 제작을 위해 수행한 리서치 자료들, 정밀한 스토리보드와 꼼꼼한 작업 스케줄 다이어그램, 지지자들과 검열기관들에 보낸 서신들, 그가 지속적으로 업그레이드한 카메라 렌즈들, 그리고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혁신적으로 적용한 특수효과의 신비다. 이 방대한 자료와 정보들이 전시된 약 1천㎡의 공간은 고전적인 영화작가의 이념을 가장 잘 구현한 감독으로 평가받는 큐브릭의 세계를 입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탐사선이다. 그러나 이 탐사선에는 영화작가의 명성과 신비를 재확인시키는 것 이상의 기획이 숨어 있다. 이 기획은 20세기 말 이후의 미술관이 큐브릭 같은 영화작가를 고흐나 칸딘스키, 앤디 워홀과 같은 선상에 포용하게 되었음을 전제하는 기획이다. 즉 미술이 전시와 비평을 통해 전통적으로 구축해온 초월적 작가성의 이념과 아우라를 영화작가가 충족시킬 수 있다는 기획이다. 해외로 눈을 돌려보면 장 뤽 고다르, 앨프리드 히치콕, 마틴 스코시즈, 데이비드 린치, 잉마르 베리만 등에 대한 전시가 바로 이런 기획 아래 진행되어왔음을 알 수 있다. 두 번째 방. 이 안에서 당신은 우리가 영화제와 시네마데크에서 보았던 감독들의 이름을 볼 수 있다. 크리스 마르케, 하룬 파로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차이밍량,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아톰 에고이얀, 아녜스 바르다, 아이작 줄리언, 존 아캄프라, 그리고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샹탈 애커먼. 그런데 비디오 모니터와 필름 영사기로 설치된 이 작품들 대부분은 극장에서 볼 수 있는 장•단편영화들이 아니다. 즉 이 작품들은 이들 감독들이 극장용 영화와는 별도로 갤러리에서의 설치를 위해 제작한 작품들이다. 일부 작품들은 이 감독들이 극장용으로 제작한 영화들이다. 그러나 이 영화들 또한 극장에서 보던 것들과는 다른 모습들로 구현된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지난 11월25일에 오픈한 <필립 가렐: 찬란한 절망전>을 살펴보자. 이 전시는 가렐의 작품 16편을 미술관 자체의 극장에서 회고전으로 상영하면서 함께 마련된 것으로 3편의 영화를 설치작품의 형태로 구현했다. <그녀는 조명등 아래서 그토록 많은 시간을 보냈다…〉(1985)는 전시장 내부에 설치된 35mm 영사기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반복상영된다. 당신은 여기에서 이 영화 특유의 빛나고도 고독감을 자아내는 흑백 이미지만 체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극장에서 보았을 그 이미지를 가능하게 하는, 그러나 극장에서는 의식하지 않게 되는 그 영사 상황과 영사기의 생생한 소리를 함께 경험할 수 있다. 가렐의 또 다른 흑백 무성영화 <폭로자>(1968)와 <처절한 고독>(1974)은 각각 2채널과 3채널 비디오 설치작품으로 재탄생했다. 약 10초간의 간격을 두고 3개의 모니터로 재생되는 <폭로자>의 전체 화면은 비디오를 사용했지만 마치 필름을 펼쳐놓은 것과 같은 효과를 자아낸다. 고독과 상처로 침잠된 3명의 여인에 대한 초상화인 <처절한 고독>은 동일한 영상을 마치 거울을 보는 것과 같은 모양으로 2개의 모니터에 재생한다. 정지된 듯 미세하게 움직이는 인물들의 이미지는 영화작가로서의 가렐이 현대미술(특히 앤디 워홀의 영화작업)과 맺는 관계를 확인시킨다. 세 번째 방. 두 번째 방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방에도 수많은 필름 및 비디오 설치작품들이 싱글스크린 또는 멀티스크린 포맷으로 재생된다. 그런데 두 번째 방과는 유사하면서도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 먼저 영상 설치작품들 사이에 이 작품들을 제작한 작가의 사진과 드로잉, 혼합매체 설치작품들이 종종 포진해 있다. 가장 분명한 차이점은 바로 작가의 이름들이다. 더글러스 고든, 스탠 더글러스, 피에르 위그, 스티브 매퀸, 샘 테일러 존슨, 도미니크 곤잘레스 포레스터, 히토 스테옐, 타시타 딘, 매튜 버킹엄, 마크 루이스, 쉬린 네샤트, 아르나우트 믹, 더그 에이트킨, 에이자 리사 아틸라 등. 만약 당신이 예술영화극장과 영화제, 시네마테크에서만 시네필의 경험을 쌓았다면 낯설게 다가올 이름들이다. 1990년대부터 각종 비엔날레와 도큐멘타 등 국내외 주요 전시들의 상당 부분을 차지해온 이 작가들은 영화의 제작방식은 물론 영화를 이루는 구성요소들인 화면구성, 촬영기법, 몽타주, 내러티브, 특정 시퀀스, 특정 장르, 특정 영화를 자유롭게 취하고 변형시킨다. 또는 자신의 예술적 아이디어와 매체를 발전시키고 변주하기 위해 영화의 구성요소들과 영화사의 흔적들을 탐구하고 활용한다. 그 결과 이들의 작품들은 전통적인 영화매체의 구성적 경계를 넘어서고 영화와 비디오아트, 조형예술 사이의 모호한 공간에 혼종적으로 자리한다. 또는 영화의 사회적, 문화적, 이데올로기적 기능과 영화의 역사 및 운명을 성찰하는 성격도 띠게 된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12월1일부터 문을 연 <윌리엄 켄트리지: 주변적 고찰>은 바로 이러한 작가들의 경향을 대표하는 대규모 회고전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의 윌리엄 켄트리지는 1980년대 후반 이후 목탄 드로잉을 여러 예술 및 매체들과 혼합한 작업들을 지속해왔다. 목탄 드로잉의 역동적인 변형을 전개하는 그의 초기 수작업 애니메이션은 얼핏 보기에는 영화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영화의 탄생이 움직이는 그림의 환영에 대한 실험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켄트리지의 작품들은 영화와 애니메이션이 장르적으로 구분되기 이전의 역사를 탐구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2000년대 중반 이후의 비디오 설치작품들은 목탄 드로잉을 넘어 배우들의 퍼포먼스를 촬영한 실사영상, 포토몽타주, 플립북, 책 페이지의 빠른 스크롤을 포함한다. 이 모든 매체들은 영화적 운동의 환영을 다양한 모습으로 환기시킨다. 초기 무성영화를 연상시키는 배우들의 과장된 퍼포먼스, 1920년대 아방가르드영화에 영향을 주었던 포토몽타주의 이미지 병치, 움직임의 인상을 창조하는 원시적 매체인 플립북, 그리고 구조영화에서 실험된 필름스트립의 빠른 스크롤을 연상시키는 책 페이지의 활용. 켄트리지의 방대한 작업은 이처럼 영화사에 다채롭게 존재했지만 지금은 쇠퇴한 것으로 여겨지는 영화적 기법들을 인접 예술과의 대화를 통해 탐구한다. 방을 나가며, 2개의 복잡한 질문에 대한 간략한 답 이 3개의 방을 통과하고 나면 당신은 다음의 두 질문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왜 이런 전시들과 작품들이 번성하게 된 것인가. 도대체 당신이 알던 영화적인 것들과 비슷하면서도 분명히 다른 이 전시들과 작품들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이 질문들은 너무나 다양하고 방대한 답을 요구한다. 그러니 여기에서는 가장 손쉬운 답들을 간략하게나마 제시하기로 하자.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 영화의 입장에서 보면 이 다양한 전시와 설치작품들은 20세기에 전성기를 누렸던 예술이자 대중문화로서의 영화가 종언을 맞았다는 인식에서 비롯되었다. 셀룰로이드의 물질성과 세계를 바라보는 카메라에 근거한 시청각적 이미지로서의 영화, 영화예술을 성숙시킨 작가들이 주도한 영화, 그리고 극장에서 실물보다 큰 스크린으로 집단적으로 관람하던 영화가 위기에 빠졌다는 인식이다. 영화가 100살을 맞이하던 그 기념비적 순간은 역설적으로 영화의 한 세기가 끝났다는 깨달음을 불러왔다. 이는 많은 영화학자들은 물론, 자극적 시각효과와 가벼운 이야기들에 밀려 영화작가와 시네필의 시대가 몰락했다고 선언한 수잔 손택과 같은 비평가들도 공유했던 인식이다. 바로 그 시점에서 미술관은 영화예술의 풍부한 역사를 기억하고, 디지털 이미지와 엔터테인먼트에 밀려 점점 낡은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영화 이미지와 영화매체를 보존하고 갱신할 수 있는 장소로 부각되었다. 영화학자 D. N. 로도윅은 이 점에 대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영화적 지속의 경험이 사라질 때, 필름은 갤러리에서 다시 출현하여 새로운 잠재적 삶을 추구한다.” 물론 미술관이 영화를 포용한 역사는 20세기 중반 이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이 당시의 미술이 제도적, 담론적으로 포용했던 영화는 현대예술과 관심사를 공유했던 아방가르드영화들이었다. 반면 90년대 이후의 미술관은 아방가르드영화는 물론, 오랫동안 미술과는 대립된 대중예술로 인증되었던 내러티브영화와 다큐멘터리도 포용하기 시작했다. 바로 이런 상황 속에서 과거에 예술영화나 아방가르드영화의 제도에 근거했던 감독들도 갤러리로 자신의 영화적 비전과 실험을 연장해왔다. 이런 상황은 90년대 이후 새롭게 등장한 수많은 영상 설치작가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이 작가들 중 많은 이들은 20세기 영화의 전성기 속에서 예술가적 수업을 받은 시네필들이었다. 이들에게 영화의 요소들은 문화적 기억의 원천이자 전유와 재활용의 대상이며, 영화작가는 여타 예술에서 불가능한 기술적, 물리적, 표현적 수단들의 통제를 가능케 했던 이상적인 예술가상을 제공했다(이를 입증하듯 스티브 매퀸, 샘 테일러 존슨, 쉬린 네샤트 등의 작가들은 극장용 장편영화를 함께 제작해왔다). 그렇다면 두 번째 질문, 갤러리에서 구현되는 이 영화적 설치작품들은 영화인가 그렇지 않은가? 프랑스 영화학자 레이몽 벨루르가 영화적인 영상 설치작품에 대해 말한 ‘혼돈의 미학’이라는 표현이 암시하듯 답은 이 둘 모두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갤러리는 영화가 극장을 떠나 새로운 모습으로 자리잡게 되는 장소다. 이 설치작품들에서 당신은 영화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 모두를 경험한다. 당신은 영화적 촬영방식, 화면구성, 몽타주, 내러티브, 기존 영화 이미지들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극장 기반 영화와는 다른 모습으로 변형된다. 예를 들어 멀티스크린은 단일 채널 극장 스크린과는 다른 종류의 공간적 몽타주를 수행하고, 내러티브의 시공간을 극장과는 다른 동시적 시공간으로 구현할 수 있다. 영화적으로 보이는 인물과 배경이 갤러리의 어둠 속에 투영될 때, 그것들은 영화 이미지의 감각적인 풍부함을 유지하면서도 회화나 조각과 같은 조형예술의 성격을 띠기도 한다. 무엇보다 가장 커다란 차이는 관람 경험에서 비롯된다. 영화관에서 당신은 상영시간 동안 온전히 스크린에 집중해야 한다. 하지만 갤러리에서는 개별 관람자가 특정 작품에 얼마의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가에 대한 척도가 없다. 그러기에 영상 설치작품은 관람자의 자유로운 선택과 이동을 특징으로 하는 정신분산의 상황 속에 전시되는데, 이는 영화가 요구하는 집중의 관람성과 충돌한다. 이런 모호함과 난점에도 불구하고 현대예술은 영화매체와 영화예술의 과거를 회복하고 그것들을 미래를 향해 실험할 수 있는 풍부한 가능성의 공간을 제공한다. 이 공간에서 우리가 지금 볼 수 있는 것들은 극장을 넘어 전개되는 ‘다양한 영화들’이다. 전통적인 영화의 형식들을 차용하고 변형하면서도 그것들에서 얻을 수 없는 다른 종류의 형식과 경험을 동시에 전개하는 그런 종류의 영화들이다. 중요한 점은 이 ‘다양한 영화들’을 가능케 하는 것은 바로 전통적인 의미의 ‘유일한 영화’라는 것이다. 탄생 초기부터 인접 예술들과 소통하고 미디어의 변화에 대응하면서 극장과 단일 스크린을 통해 여러 가지 모습들로 변이하면서 자신의 영토를 유지해온 그런 영화 말이다. 2007년 ‘도큐멘타 12’의 영화상영 프로그램을 기획한 알렉산더 호워드는 “도큐멘타 12에서 영화의 장소는 영화관”이라고 선언하면서 ‘유일한 영화’가 ‘다양한 영화들’과 공존해야 한다는 점을 역설한 바 있다. 극장과 갤러리는 서로 수렴하면서 영화의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한 다양한 모습들을 발산하는 것이다. 이 점을 염두에 둔다면 당신은 “영화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에 이런 답을 얻을 수 있다. “오늘날 영화는 어디에나 여러 모습들로 존재한다. 그러나 그 영화는 또한 극장에 있는 것이다.”

[trans x cross] 초딩들의 영원한 보니하니 신동우, 이수민

상영관 문이 열리자 초등학생들이 우르르 몰려나온다. 가 제작한 자연다큐멘터리 <미니 자이언트 3D>를 보고 나온 아이들이다. 이날 상영에는 특별히 EBS에서 어린이를 대상으로 방영하는 <생방송 톡!톡! 보니하니>(이하 <보니하니>)의 보니 신동우와 하니 이수민이 극장을 찾았다. 두 사람은 <미니 자이언트 3D> 예고편에 참여했다. 지금은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보니하니’가 대세다. 어른들도 예외가 아니다. <무한도전>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 <보니하니>가 등장했다. 이수민은 <동상이몽, 괜찮아 괜찮아!>(이하 <동상이몽>)에도 출연했다. SNS에 공유되고 있는 <보니하니> 동영상은 놀라웠다. 합이 착착 맞는 두 사람의 진행력은 그야말로 ‘유재석급’이다. 어린이들과의 GV 행사를 마친 보니와 하니를 늦은 시간에 만났다. -요즘 <보니하니>의 인기가 엄청난 것 같아요. 인기를 실감하나요. =신동우_잘 모르겠어요. SNS에 <보니하니> 영상이 많이 올라오긴 하더라고요. 그냥 얼떨떨해요. -수민양은 어때요. =이수민_저도 똑같죠. 저는 SNS를 안 해서 잘 모르는데 친구들이 페이스북에 <보니하니> 영상 올라왔다고 보내주거든요. 그런 거 볼 때 <보니하니>가 이슈가 되긴 했구나 생각해요. -얼마 전에 <무한도전>에서 MC 그리(김동현)가 언급한 게 화제가 됐어요. =신동우_동현이랑 친한데 <무한도전> 녹화를 했다고 하더라고요. 어떤 예능프로그램을 즐겨보냐는 질문을 받았는데 <보니하니> 얘기를 했다고 들었어요. 방송 나가면 재밌겠다 했는데 자료화면까지 나와서 깜짝 놀랐어요. -기자는 <무한도전> 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제목이 좀 그런데 유튜브에…. =신동우_정신나간 진행력이요? (웃음) -멘트와 동작이 딱딱 맞아떨어지는 게 신기했어요. =이수민_저희는 항상 하던 거라 잘 몰랐는데 어른들이 보면 신기한가 봐요. -어린 친구들(초등학교 1~2학년생)과 전화 통화할 때 친구들이 말도 잘 못하고 그런 경우가 있는데 임기응변이 좋더라고요. =이수민_저희도 처음엔 대처를 잘 못했어요. 계속 하다보니 요령도 생기고 순발력도 생겼어요. -그렇게 대처를 했던 순간 중에 기억나는 게 있나요. =신동우_이것도 동영상이 올라와 있던데 친구가 갑자기 전화를 끊어버렸어요. 수민이는 엄청 놀라서 아무 말도 못하고 저는 수습하려고 “그러면 어떻게 하죠” 이러고 있었어요. 그때 같이 프로그램하는 최영수 형이 도움을 주시더라고요. 간신히 넘어가기는 했어요. 그런 것도 생방송의 묘미죠. -진행을 잘하지만 두 사람 다 아역배우로 활동해서 그런지 연기를 잘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방송이 연기에도 도움이 됐나요. =신동우_확실히 <보니하니>를 하면서 콩트, 시트콤 연기에 자신감이 생기지 않았나 싶어요. 생방송이라 애드리브도 마음대로 하니까 그것도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이수민_저도 그래요. 그전엔 정극 연기만 했었거든요. 처음 <보니하니> 할 때는 콩트 연기에 적응하느라 힘들었어요. 지금은 많이 편해졌어요. 예전에 동우 오빠가 애드리브 치면 당황스러웠는데 이제는 먼저 하기도 해요. -두 친구가 방송을 즐겁게 하는 게 느껴졌어요. 그런데 이번에 <미니 자이언트 3D> 예고편 더빙을 했잖아요. 어땠나요. =신동우_더빙이 처음이라 어떻게 하는지 몰랐는데 막상 해보니 어렵지 않았던 것 같아요. 이수민_애니메이션처럼 입모양에 맞추는 게 아니라 화면을 보고 리액션을 하는 더빙이라 “더빙 연기에 도전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에요. -어린이날이 있는 5월 전에 더빙 연기를 해볼 기회가 올 수도 있지 않을까요 =신동우_기회를 주신다면 해볼 거예요. 잘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수민_저는 ‘덕후’ 기질이 있어서 애니메이션을 정말 좋아하거든요. 특히 지브리 애니메이션을 좋아해서 다 봤어요. 지브리 애니메이션 한국어 더빙 기회가 있으면 꼭 하고 싶어요. -더빙보다 예능에서 먼저 섭외가 올 것 같은데요. 수민양은 <동상이몽>에 출연했잖아요. =신동우_자세한 건 말씀을 못 드리는데 동현이랑 설 특집 파일럿 프로그램에 나갈 것 같아요. 이수민_저는… (엄마를 보며 “이거 말해도 돼?” 묻고) 2월부터 <동상이몽>에 반고정으로 출연하기로 했어요. 고정은 너무 힘들 것 같아서요. -<마이 리틀 텔레비전> PD도 언급을 했더라고요. 출연하는 거 아니에요. =신동우_3시간을 채울 만한 콘텐츠가 있어야 나가죠. 이수민_아니, 그걸 떠나서 연락이 안 왔어요. (웃음) -혹시 나가게 된다면 어떨까요. =신동우_채팅창을 보면서 소통하고 돌림판 돌려서 선물 주고 하겠죠. -어린이 친구들이 원하는 선물이 절대 안 나온다는 소문이 있던데. =이수민_(단호하게) 아닙니다. 나온 적도 있어요. 저희는 열심히 돌리는데 마치 조작이 있는 것처럼 창작동화전집만 걸리더라고요. 저도 안타깝죠. 오늘 제가 돌림판을 돌렸는데 제발 한번만 (거의 모든 친구들이 원하는) 스마트 워치 걸려보자 했는데 안 나왔어요. 속상해 죽겠어요. -지금은 예능 섭외도 들어오지만 결국 배우잖아요. 어떤 배우가 되고 싶은지 듣고 싶어요. =신동우_저는 다른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배우가 목표예요. -그런 식으로 본인이 영향을 받은 배우가 있나요. =신동우_저의 롤모델은 송강호 선배님이에요. 그분처럼 연기로 인정받고 싶어요. -그분은 연기의 신에 가까운데…. 수민양은 전지현이 롤모델이라는 인터뷰가 많던데요. =이수민_음… 보셨군요. 전 그렇게 생각해요. 정말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고 싶어요. 대박이 나지 않더라도 꾸준히 대중 앞에 서는 한결같은 배우가 되고 싶어요. 차태현 선배님 같은. -차태현을 언급한 인터뷰는 없었는데. =이수민_처음 말하는 거예요. 사실 제 ‘인생영화’가 <복면달호>거든요. 처음 본 영화이면서 동시에 가장 많이 본 영화예요. -아직 많은 영화를 보진 못했겠군요. 수민양은 이제 중3이니까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는 당연히 볼 수 없을 테고요. =이수민_아직 못 보죠! 아, 그리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예의 바른 배우가 되는 거예요. 어릴 때부터 부모님에게 어디 가서 버르장머리 없다는 얘기를 듣지 말라는 말씀을 들었어요. -영화에 출연할 계획은 없나요. 지금은 시간상 불가능한가요. =신동우_<보니하니> 끝나고 해야죠.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평일은 다 방송이 있으니까요. 이수민_직장인처럼 출근을 하는 거죠. EBS 건물에 들어가면서 안내 데스크에 계신 분께 “안녕하세요” 인사해요. 매일 보는 사이니까요. (웃음) -바쁘게 지내는군요. 시간 날 땐 뭘 하나요. =신동우_저는 기타를 독학으로 연습하고 있어요. 그리고 이제 고3이라 입시 준비도 해야 해서 연극 관련 책을 보고 있어요. 예전에 배우던 수영도 다시 하고 싶어요. 이수민_저는 킥복싱…. (킥복싱 배우는 거 유명하더라고 하자) (웃음) 요즘은 쉬고 있어요. 제가 좋아하는 가수가 많아요. (‘인피니트?’라고 묻자) (테이블을 치며) 아니, 어떻게 아시죠? -이미 인터넷에 다 올라와 있던데요. =이수민_제가 좋아하는 가수가 좀 많아요. 엑소, 인피니트, 러블리즈, 아이유 앨범을 모으고 있어요. 그리고 동우 오빠처럼 책을 읽어요. 심리학 책, 시집을 많이 읽어요. -수민양이 <보니하니> 오프닝에서 러블리즈의 노래에 맞춰서 춤을 추는 장면이 생각나네요. ‘<보니하니> 이수민 애교 모음’이라는 동영상에서 봤어요. =이수민_헉! 애교모음이라니. (웃음) 한동안 그 노래에 꽂혀서 영수 오빠랑 그 노래 틀어놓고 춤을추면서 놀았거든요. 작가님이 보시고 그 노래를 오프닝에 넣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러블리즈의 안무는 아니고 그냥 즉석에서 춘 춤이에요. -마지막으로 잡지에서 하고 싶은 말 있나요. =신동우_<씨네21> 독자 여러분, 저도 <씨네21>을 즐겨 보고 구독할 예정입니다. 언젠가 좋은 영화로 표지에 실릴 테니까 그때까지 많이 응원해주세요. <보니하니>도 많이 시청해주시고 <씨네21>도 많이 사랑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대답이 방송처럼 아주 완벽하네요. 수민양도 한마디. =이수민_진행자 이수민으로 여러분과 만나는 것도 좋긴 하지만 빠른 시일 내에 배우 이수민으로 만나고 싶어요. 그때까지 관심과 애정 부탁드리고 지켜봐주셨으면 좋겠어요. (…) 제 욕심이겠죠. -욕심은 아닌 것 같은데요. =이수민_배우 이수민 금방 옵니다! (웃음) <생방송 톡!톡! 보니하니> ‘행운의 여보세요’ SNS를 통해 널리 알려진 ‘보니하니 정신나간 진행력’이라는 영상은 <보니하니>의 마지막 꼭지인 ‘행운의 여보세요’를 담고 있다. ‘행운의 여보세요’의 내용은 간단하다. 어린이들과 전화 연결을 해서 자기소개와 원하는 선물, 방송에서 하고 싶은 말을 듣는다. 여러 가지 선물이 적힌 돌림판을 돌려서 나온 선물을 보내준다. 특별할 게 없어 보이지만 실제로 보면 그렇지 않다. 보니(신동우)와 하니(이수민)가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는 멘트와 동작이 입을 쩍 벌리게 만든다. 궁금하면 검색창에 ‘보니하니’를 검색해보시라. 중독성이 매우 강하니 주의 바람.

[이송희일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잔혹 동영상

<워싱턴 포스트>는 그 동영상에 대해 “굴욕적인 사과”라고 했다. <뉴욕 타임스>는 중국의 ‘자아비판’ 형식을 본뜬 사과라고 했다. 대만의 한 여성은 한글로 작성한 호소문에서 “총만 없다 뿐이지 흡사 IS가 인질을 죽이기 전에 찍는 동영상” 같다며 울분을 토했다. 아이돌 걸그룹 ‘트와이스’의 대만 멤버 쯔위의 사과 동영상, 근래 본 동영상 중 가장 끔찍한 영상이었다. 화장기도 없고, 핏기도 없는, 파리한 얼굴의 17살 소녀가 미리 준비된 사과문을 읽어내려가는 1분27초 분량의 영상 속엔 정작 쯔위의 진짜 목소리는 없었다. 그저 정치적 힘의 논리와 자본이 어린 소녀의 등을 떠밀어 연출한 복화술에 다름없었다. 나고 자란 조국의 국기를 흔든 게 그렇게 잘못인가. 쯔위의 소속사인 JYP엔터테인먼트의 박진영 대표는 “부모님을 대신하여 잘 가르치지 못한 저와 저희 회사의 잘못”이라고 말했지만, 자기 나라 국기를 흔들지 못하게 하는 게 잘 가르치는 일인가? 쯔위의 대만 부모는 자식에게 대만 국기를 흔들지 못하게 교육했어야 했다는 말인가? 양안관계에 예민한 중국에서 대만 소녀를 앞세워 한류 사업을 하는 처지에 청천백일기 같은 민감한 상징 소품을 체크하지 못한 1차적 책임은 당연히 JYP에 있다. 중국 시장이 자신들에게 그렇게 중요하다면, 대표 본인이 동영상에 직접 출연해 사과했어야 했다. 쯔위에게 청천백일기를 흔들게 했던 MBC <마이 리틀 텔레비전> 역시 그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그 방송의 직접적인 책임자들은 17살 소녀에게 사건의 무게를 다 짊어지게 한 채 카메라 속으로 등을 떠다밀고 자아비판을 통해 자기 정체성을 부정하게 만든 한편의 ‘잔혹 동영상’ 뒤편으로 숨고 말았다. 책임져야 할 어른들은 없고, 오직 뒤에 숨어 떡고물만 주우려는 졸렬한 어른들만 있었을 뿐이다. 돈을 위해서는 잘못이 없어도 빌게 만들고, 패권 국가의 눈칫밥을 얻어먹기 위해 자기 정체성도 기꺼이 부정하게 하는 이 약삭빠른 속물근성은 어쩌면 친일 부역의 시대에서부터 지금까지 이어져오는 한국 지배층의 영혼일지도 모르겠다. 미국-일본과의 공조 체제를 위해 기껏 100억여원에 위안부 역사를 지우겠다는 굴욕의 합의를 한 박근혜 정부나, 중화 패권주의 시장의 압력에 굴복해 어린 소녀를 정치 희생양으로 기꺼이 공조한 사기업이나 그 속물근성이 도긴개긴이다. 사건의 책임과 슬픔을 당사자들에게 전가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지우는 그 무책임한 태도도 똑같다. 도망치듯 졸속으로 일을 처리해 더 큰 화를 불러들이는 그 경박한 무능력도 똑 닮았다. 책임감은 없고 그저 사익에만 눈이 먼 자들이 지배하는 나라, 저 17살 소녀의 슬픈 동영상이 바로 그 명백한 증거일 터다.

김기덕에서 레이먼드 카버까지

오한기 1985년생. 소설가. 동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고 2012년 <파라솔이 접힌 오후>로 등단했다. 지난해 11월, <더 웬즈데이> <나의 클린트 이스트우드> <유리> 등 9편의 단편이 실린 첫 소설집 <의인법>이 나왔다. 십대 땐 영화감독을 꿈꿨다. 지금은 회사를 다니며 소설을 쓰고 있다. 동료들은 오한기를 두고 ‘뇌구조’가 범상치 않은 ‘신인류’라고 말한다. 피아니스트 조성진과 일본 배우 마쓰다 류헤이를 연상시키는 외모. 금정연 1981년생.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서 인문 분야 MD로 일하다 본격 서평가의 길에 들어섰다. <서서비행> <난폭한 독서>는 그의 독서편력과 책에 대한 애정을 확인할 수 있는 서평집. 정지돈, 오한기, 이상우 등과 후장사실주의자 그룹을 결성해 영향을 주고받고 있다. 정지돈의 말을 빌리면 “자타공인 대한민국에서 개를 제일 사랑하는 남자”이기도. 닮은꼴로 돔놀 글리슨과 가세 료의 이름이 언급됐으나 긍정도 부정도 아닌 웃음만 흘렸다. 정지돈 1983년생. 소설가. 동국대학교 영화영상학과와 문예창작학과에서 공부했다. 2013년 <눈먼 부엉이>로 등단. 지난해 <건축이냐 혁명이냐>로 제6회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대상을 수상했다. <창백한 말> <미래의 책> 등 지금까지 6편의 단편소설을 선보였다. 오한기와 비슷하게 십대 땐 영화를 꿈꿨다. 지적인 작가, 공부하는 작가답게 문학, 미술, 영화 등 그의 촉수는 넓고 깊게 뻗어 있다. 대화를 나눌 때도 인명, 도서명, 영화명 등 고유명사를 대방출한다. 어딜 가도 구심점이 될 것 같은 사람. 이상우 1988년생. 소설가. 2011년 <중추완월>로 등단. 지난해 12월 <비치> <객잔> <888> <추리 추리 하지 마 걸> 등 8편의 단편을 수록한 첫 소설집 <프리즘>이 출간됐다. 이상우의 템포, 이상우의 리듬을 탄 소설들은 그림 같고, 음악 같고, 시 같다. 유튜브 세대답게 사진합성과 영상편집은 일상의 유희. 고다르의 <경멸>(1963)을 패러디해 만든 2분짜리 미디어아트(!) <금멸>은 인터넷에 떠도는 금정연의 영상에 <경멸>의 음악을 절묘하게 입힌 것. 가만히 있어도 시크함이 뚝뚝 흐른다. “작가에게 가장 나쁜 일은 다른 작가와 알고 지내는 것이고, 그보다 나쁜 일은 다른 작가 여러 명과 알고 지내는 것이다. 같은 똥덩어리에 몰려다니는 파리 떼처럼.” 찰스 부코스키 <여자들>의 한 대목. 그리고 오한기의 소설 <의인법>에도 인용되는 말. 소설가 오한기, 이상우, 정지돈 그리고 서평가 금정연은 이른바 ‘후장사실주의’자다. 후장사실주의란 로베르토 볼라뇨의 <야만스런 탐정들>에 언급되는 ‘내장사실주의’를 패러디한 것으로, 처음에는 농담처럼 시작했으나 문단에 신선한 에너지를 불어넣으려는 이들의 움직임으로 이해하면 어떨까 싶다. 아무튼 이들은 한국문학이라는 좁은 바운더리 안에서 글로써 시공간을 초월하는, 비약하고 도약해서 낯선 지평으로 독자를 훌쩍 데려가는 작가들이다. 이들은 위악적으로 찰스 부코스키의 저 말을 인용했다. 등단 순서에 상관없이, 나이에 상관없이 서로를 ‘상우씨’, ’한기씨’로 부르는 이들은 커피잔이 바닥을 보인 지 한참이 지날 때까지 문학에 대해, 소설의 미래에 대해 무한정 얘기할 수 있는 관계. 정지돈 작가는 “보통의 작가나 소설가 같지 않아서 서로 친해진 것 같다”고 말했고, 이상우 작가는 “개인적으로 이 만남이 유지되는 건 각자에게 배울 게 너무 많아서”라고 말했다. 각설하고, 소설이 아닌 영화를 동경했던 시절을 공유한 정지돈, 오한기 작가와 이미지를 예민하게 감각하고 그 감각을 그러모아 소설을 쓰는 이상우 작가, 그리고 이들의 소설을, 소설의 탄생 과정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관찰해온 금정연 서평가를 한자리에 불렀다. 영화적 취향, 소설과 영화의 관계, 지금의 한국영화에 대한 아쉬움과 기대점들이 종횡으로 엮인 이야기는 끊길 줄 몰랐다. 1월23일 토요일 오후 3시에 모인 이들은 저녁 8시에야 집으로 돌아갔다. 씨네21_최근 오한기, 이상우 작가의 첫 소설집 <의인법>과 <프리즘>이 나란히 출간됐다. 또한 두 작가의 해설을 금정연, 정지돈 작가가 썼다. 이상우_문예지에 소설을 발표할 때는 소설 뒤에 나라는 사람이 숨어 있는데 소설이 책으로 묶여 나오면서 인터뷰도 하게 되고 나 자신이 공개되는 느낌이 들어서 좀 혼란스럽다. 심지어 난 작가의 말도 안 쓰는데. 비겁한 말이지만 책임지는 걸 싫어하는 것 같다. 작가의 말을 쓰면 아무래도 그 말에 조금은 얽매이게 되지 않을까. 정지돈_인터뷰와 관련해 장 주네가 한 이야기가 있다. “내가 말하는 순간 상황이 나를 배반합니다. 나는 그저 내가 말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내 말을 듣는 사람에 의해 배반당합니다. 단어의 선택도 나를 배반합니다.” 그 말이 늘 와닿는다. 상우씨 소설의 해설을 쓰게 된 건 물론 부담스러운 작업이었지만 그럼에도 지금 한국문학에서 굉장히 중요한 소설이고 대단한 작품이기 때문에 추천사가 됐든 뭐가 됐든 써야 할 것 같았다. 씨네21_오한기의 소설은 논리적이기보다 본능적이고, 이상우의 소설은 회화적이고 음악적이다. 각 소설집의 해설에선 이상우를 한국문학의 백남준, 오한기를 한국문단의 김기덕에 비유했다. 정지돈_그건 일종의 전유 개념이 있는 유희적 표현이다. 금정연_“거칠고 종잡을 수 없으며 종종 (실은 자주) 비약을 거듭하지만 어쨌거나 끝내준다”고 해설에 썼다. 김기덕의 영화를 볼 때도 비슷하지 않나. 거칠고 불편하고 컷의 비약도 있고, 그런데 이유를 모르겠지만 쑥 빠져들게 되는, 그런 느낌의 동질성을 발견하게 된다. 정지돈_백남준이 매체를 다루는 방식, 즉 시간적 요소, 조형적 요소, 철학적 요소들을 위상수학적으로 병치했던 방식이 상우씨의 소설에서도 읽힌다. 시간과 공간이 전혀 다르게 배치되는 지점이 있다. 씨네21_그렇다면 정지돈 작가는 누구와 비교할 수 있을까. 금정연_텍스트를 읽는 법, 소설 쓰는 법, 현대미술에 관한 관심, 새로운 지식에 대한 호기심 등 다방면에서 우리에게 큰 영향을 준다. 그러니 영도자란 말이 딱 맞겠다. (웃음) 이상우_당대의 앙드레 말로와 좀 비슷하지 않나? 오한기_에너지가 넘치는 작가다. 초기작을 보면 말도 못하게 괴물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지금은 지적으로 더욱 성숙하면서 그것이 에너지와 조화를 이루게 된 것 같다. 케이크 같은 작가라고 생각한다. 이상우_이런 게 김기덕 같다는 거다. 여기서 케이크가 왜 나오지? (웃음) 오한기_생크림도 있고, 초코도 있고, 호두도 있고…. 정지돈_케이크는 진짜 충격적이다. 씨네21_“<비치>의 판권을 할리우드에서 사갈 것 같다”고 금정연 작가가 해설에 썼는데, 이상우 작가의 몇몇 작품은 영화 같다는 인상을 준다. 이상우_누벨바그 감독들이 문학에서 영향을 받아 영화를 만들었듯이 영화의 이미지들에 영향을 받아서 문학이 탄생하기도 하는 것 같다. 그런데 지금의 내 소설은 또 다르다. <비치> 때만 해도 서사가 있어서 영화화 얘기를 할 수도 있겠지만. 정지돈_자크 랑시에르가 <이미지의 운명>에서 회화의 목표는 시가 되는 거라고 했다. 다른 장르에서 영향받는 일은 늘 벌어지는데, 상우씨는 이미지에서 강렬하게 자극받고 그걸 텍스트로 어떻게 풀 것인가 고민하는 작가인 것 같다. 씨네21_이중에서 영화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사람은 오한기 작가 아닌가. 금정연_실제로 본인이 영화도 찍었으니까. 오한기_상상마당 홈페이지에 단편영화 <인간쥐의 습격>이 소개됐다. 초창기 소설의 경우 영화를 본 뒤 독후감으로 쓴 소설도 많다. 이상우_영화도 많이 보지 않나. 전작주의자라고 해야 하나. 오한기_예전에 배우 윤진서가 에릭 로메르를 좋아한다고 말한 인터뷰를 읽었다. 그때가 대학교 1~2학년 때였는데 난 에릭 로메르가 누군지도 몰랐다. 소설가가 되고 싶고 영화감독이 되고 싶은 사람이 에릭 로메르는 봐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그때부터 영화를 계보학적으로 보기 시작한 것 같다. 그런데 취직을 하고 난 이후엔 영화를 거의 보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은 영화의 영향이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인간쥐의 습격>은 대학 때 친구들이랑 재미삼아 찍은 작품이다. 분장할 돈이 없어서 가장 쥐를 닮은 친구를 캐스팅해 찍었는데 댓글로 욕 많이 먹었다. ‘영화는 장난이 아니다’ 그런 쪽지도 받았고. 어린 마음에 상처받았다. 금정연_최근에 <한국일보>에 칼럼을 썼다. “첫 책을 낸 사람의 90%는 깜짝 놀란다. 책이 안 팔려서. 두 번째 책을 낸 사람의 90%도 깜짝 놀란다. 여전히 안 팔려서.” 두 번째 책 <난폭한 독서>가 나오고 쓴 글이었는데 칼럼에 달린 댓글이 뭐였는지 아나. “이렇게 쓰니까 안 팔리지!” (웃음) 비디오 가게가 몰락한 이후… 씨네21_각자의 영화적 취향이 궁금하다. 정지돈 작가는 여러 번 장 뤽 고다르와 알랭 레네에 대한 애정을 표한 바 있고, 오한기 작가는 <나의 클린트 이스트우드>라는 제목의 단편을 내놓기도 했다. 정지돈_고다르와 레네 이야기를 자주 하니까 사람들이 예술영화만 좋아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더그 라이먼도 좋아하고 브라이언 드 팔마는 말할 것도 없다. 예술영화는 나 못지않게 상우씨도 많이 본다. 이상우_나도 <앤트맨>(2015) 좋아하고, <우리동네 이발소에 무슨 일이>(2002) 같은 미개봉 흑인 주인공들 영화도 챙겨본다. 금정연_난 고급스럽지 않은 영화, 소위 말하는 화이트 트래시 코미디를 좋아한다. 이상우_한기씨의 영화적 취향은 클린트 이스트우드? 정지돈_극우! (웃음) 오한기_큰일 날 사람들이네. (웃음) 이상우_박근혜 대통령의 수필과 한기씨 소설이 <현대문학>에 같이 실리지 않았나? 오한기_같이 실리진 않았다. 내 소설은 그다음 호인가 실렸는데, 당시 나는 박근혜의 수필이 실린 것도 모르고 있었다. 아무튼 지금 생각나는 감독은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와 데이비드 린치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배우로서 좋아했지 감독으로선 좋아하지 않았다. 금정연_갈등이 없는 영화를 좋아한다. 서사가 없는 영화가 아니라 서사가 있지만 갈등에 맥이 없는 영화. 최근 본 영화로는 카메론 크로의 <알로하>(2015)나 휴 그랜트 주연의 <한 번 더 해피엔딩>(2014) 같은. 기본적으로 10대 때 보던 할리우드영화들, 브루스 윌리스, 케빈 코스트너 주연의 영화들이 내 취향이다. 씨네21_영화를 얼마나 자주 보는지, 관람 패턴도 궁금하다. 이상우_나를 비롯한 지금의 20대는 인터넷에 대해 아무런 신기함도 못 느낀 채 너무도 자연스럽게 접근한 세대다. 그래서인지 극장에서 영화 보는 것보다 컴퓨터로 다운받아 보는 게 편하고, 유튜브로 영상을 많이 찾아본다. 정지돈_영화적 경험이 많이 달라졌다. 감독이나 평론가들은 극장이란 공간이 중요하다고 얘기하지만 지금은 그게 거의 무너지고 있는 것 같다. 20대 땐 나도 시네마테크에 자주 갔다. 하지만 컴퓨터로 다운받아서 본 영화가 훨씬 많다. 그게 내 영화적 경험에 큰 영향을 줬다. 책의 경우, 신작이 있고 베스트셀러가 있고 고전이 있는데 그 모든 책에 언제든 접속이 가능하기 때문에 신작이 굳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이제는 영화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이상우_<내부자들>(2015)과 나루세 미키오 영화가 동시대의 것처럼 느껴진다. 두 영화를 동시대에 접할 수 있으니까. 내게는 안 본 영화가 신작인 거다. 정지돈_글을 좀 적어왔는데 (일동 ‘역시 공부하는 작가’라는 눈빛을 보낸다) 유운성 평론가가 지난해 <문학과사회> 겨울호에 쓴 ‘밀수꾼의 노래’를 보면, 토렌트 영화 공유 커뮤니티 멤버들이 나루세 미키오의 59편 작품의 영어자막을 제작해 배포한 일을 어느 영화평론가가 올해의 사건으로 꼽기도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파일 공유 사이트가 예술계에 영감을 주는 중요한 공간이며 이걸 불법으로 접근해선 안 된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영화 자막계의 정성일’로도 불리는 자막 제작하는 ‘태름아버지’ 같은 이들의 기여를 무시해선 안 된다는 얘기다. 그들이 자막 작업하는 영화는 개봉이 요원하거나 개봉을 하더라도 시네마테크에서만 볼 수 있는 영화들인데, 그들 덕에 좋은 영화에 늘 접속할 수 있게 됐다. 비디오 가게가 몰락한 이후 어쩌면 우리는 훨씬 더 광활한 아카이브에 무한으로 접속해 영화를 볼 수 있게 된 것은 아닐까. 이상우_유튜브에 비하면 비디오 가게가 굉장히 좁은 공간처럼 느껴진다. 금정연_이건 진짜 세대 차이인 것 같다. 책에선 분명 그렇게 느낀다.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책이 있고 신간이 있을 때 그 둘을 동일선상에서 생각하고 선택하는 게 가능하다. 반면 내게 영화는 다르다. 신작이 주는 의미가 분명 있다. 어렸을 때 비디오 가게에 신작이 나오면 며칠을 기다렸다 예약해서 빌려보곤 했다. 지금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10분 안에 파일을 다운받아서 영화를 볼 수 있다. 하지만 컴퓨터나 스마트폰으로 영화를 보진 않는다. 대신 IPTV 서비스를 통해 텔레비전으로 본다. 이제 내게 영화는 편하게 누워 아무 생각 없이 리모컨으로 선택하는 게 된 것 같다. 오한기_하드디스크에 이만큼의 영화가 쌓인 순간 영화에 대한 매력을 잃어버렸다. 영화라는 게 받아놓고 언제든지 볼 수 있는 것이 돼버렸으니까. 요즘 한국 상업영화에 대해 씨네21_정지돈 작가는 에 쓴 칼럼 ‘한국영화는 영화가 아니다’에서 요즘의 한국 상업영화가 “오락도 예술도 아니고 ‘영화’도 아닌 게 돼버렸다”고 했다. 정지돈_나도 그렇고 주변 사람들도 그렇고 기본적으로 ‘한국영화 구리다’ 라는 인식을 갖게 된 것 같다. <명량>(2014), <국제시장>(2014) 같은 영화들이 전혀 당기지 않는다. 한국문학도 1990년대까지는 잘나갔다. 출판계는 독자들이 소구하는 방식을 계속해서 재생산했다. 그렇게 10년쯤 지나고 나니 ‘한국문학 촌스럽다’는 인식을 많은 사람들이 가지게 됐다. 지금의 한국영화가 그런 것 같다. 2000년대 초•중반 박찬욱, 봉준호, 김기덕, 홍상수 영화가 나올 때는 그렇지 않았다. 어제 상우씨가 ‘K-와꾸’라는 표현을 썼는데, <히말라야>(2015), <국제시장> 같은 영화들, 박훈정 영화들에도 공통적으로 ‘K-와꾸’가 있다. 박훈정의 <신세계>(2012)가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대부>(1972)를 오마주했다고 하지만 조폭영화의 K-와꾸는 그대로 가져가면서 멋있는 것만 취한 거 아닌가. <대부>가 무슨 남자들의 의리를 부각한 영화인가. 회장 자리에 오른 이정재의 등장 신이나 박성웅의 마지막 장면 같은 앵글이 너무 불편했다. 씨네21_지난해 개봉한 두편의 천만 영화, 최동훈의 <암살>(2015)과 류승완의 <베테랑>(2015)은 어떻게 보았나. 오한기_주위 사람들은 <베테랑>을 다 좋아했는데 난 실망했다. 마지막에 정웅인의 꼼지락거리는 발가락을 보여주는 것도 불편했다. 진짜 잔인했던 건 정웅인이 고층에서 굴러떨어지는 장면을 두번이나 보여준 거였다. 금정연_유아인을 비롯한 대기업 사람들을 지질한 절대악으로 만드는 구도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차라리 유아인이 정웅인을 직접 죽이려 한 것은 아닌데, 단지 사과하기 싫어서 일이 커졌다는 이야기로 갔으면 풍부한 뉘앙스를 전달할 수 있었을 것 같다. 이상우_재밌게 봤다. 그런데 최근 <검은 사제들>(2015)을 보면서도 느꼈지만 한국영화가 점점 드라마적 구조와 느낌을 취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야기에 큰 레이어가 없고 평면적이랄까. 어쩌면 이런 것들이 특히 미드 세대한테는 더 편하게 다가갈 수는 있겠구나 싶었다. 정지돈_<부당거래>(2010), <베를린>(2012)과 달리 <베테랑>은 류승완 감독에게 무척 잘 어울리는 옷 같았다. 액션의 참조점을 성룡 영화에서 가져온 것도 잘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 다만 기업을 다루는 부분, 사회를 절대악과 절대선으로 양분하는 지점들이 ‘지금 시대’라는 맥락에 들어오면 불편할 수 있다. 칼럼에도 썼지만, <암살> <베테랑> <국제시장>은 서로 다른 영화이고 완성도도 상이하지만 그 영화들이 보내는 ‘시그널’에서 유사함을 느낀다. ‘기업은 나쁘다, 정부는 나쁘다, 그래도 우리에게 희망은 있다’라는 시그널. 류승완이나 최동훈처럼 재능 있는 감독들이 왜 그런 부분에서 좀더 예민하지 못했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괴물>(2006)만 보아도 봉준호는 한국 사회를 지금의 영화들과는 전혀 다른 뉘앙스로 건드리지 않나. <암살>을 보면서도, 타란티노가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2009)에서 했던 것처럼 시대적 사명감에 얽매이지 말고 영화적으로 가지고 놀았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했다. 금정연_<암살>은 재밌었다. 1930년대 경성과 상하이를 배경으로 한 시대극이라는 게 오히려 많은 것들이 소거된 무중력 공간으로 다가왔다. 일종의 서부극 같은 느낌으로. <암살>은 그야말로 오락영화로서 즐겼던 것 같은데 <베테랑>은 포퓔리슴적인 구도 속에 이데올로기를 투사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정지돈_<암살>에서 “우리가 계속 싸우고 있다는 걸 보여줘야지”라는 전지현의 대사나 “우리 잊으면 안 돼” 같은 오달수의 대사는 정말 걸리더라. 왜 자꾸 영화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다. 선조들의 업적을 알아달라는 건가? 국방부에서 (영화) 만드나? 감독이 설사 특별한 의도 없이 쓴 대사라 하더라도 예민한 촉수로 걷어냈어야 한다고 본다. 오한기_박찬욱, 봉준호, 김지운이 미국으로 떠나버렸다고 생각하던 즈음에 기대할 감독은 류승완, 최동훈이라 생각했는데 <암살>을 보고서 최동훈 감독 초기의 매력이 사라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금정연_<대호>(2015)야말로 보면서 깜짝 놀랐다. 아들이 일본군 포수대에 지원해 들어갔다는 걸 최민식이 깨닫게 되는 장면 있지 않나. 앞서 보여준 아들의 이야기를 편집해 플래시백으로 보여주는데 드라마를 보는 것 같았다. 거대 예산이 들어간 영화들이 종종 범하는 오류인데, 할아버지도, 할머니도 재밌게 봐야 하기 때문에 예능의 자막 넣듯이 장면을 만드는 거다. 이상우_<신세계> 좋아하는 사람들이 <내부자들>을 좋아하는 거 아닐까. 정지돈_<내부자들>에도 <암살> <명량>과 비슷한 대사가 나온다. “우리가 이렇게 고생하는 거 알겠냐”는 이병헌의 대사. 그리고 정치인은 무조건 나쁘고 썩었다는 이야기. 이런 방식으로 영화를 만드는 게 포퓔리슴이다(“시스템이나 제도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를 정치화시키며(이른바 먹고사니즘) 기존의 정치 모두를 매도하는 것, 모든 문제를 카타르시스의 방식으로 해결하는 것. 이 지점에서 파시즘은 포퓔리슴과 결합한다”고 정지돈은 에 썼다.-편집자). 영화가 보여주는 마초성, 권위성, 폭력성이 너무 불편했는데 사람들은 그런 카타르시스를 불편함 없이 받아들이고 멋있다고 말한다. 결국 <내부자들>에서 남는 건 정치인들은 술자리에서 그렇게 논다더라, 하는 이야기와 조승우와 이병헌의 의리다. 씨네21_창작자의 책임 외에 관객의 책임은 없을까. 정지돈_관객에게 책임이 있다고 하기 힘든 게 관객은 책임지지 않을 거니까. 이런 식의 한국영화가 계속 나오면 언젠가 관객은 돌아선다고 본다. 하지만 괜찮다. 미국영화 보면 되고 유럽영화 보면 되니까. 관객은 책임질 필요가 없다. 결국은 영화가, 영화계가 해결해야 할 문제다. 문학도 마찬가지다. 1990년대와 2010년대의 한국문학을 비교하면, 인기 작가들의 판매부수가 과거에 비해 1/3로 떨어졌다. 그렇다고 그 문제의 책임을 독자들이 지진 않았다. 대중에게 제대로 된 소비를 해달라고 책임을 요구할 것이 아니라 문학계 내부가, 영화계 내부가 바뀌는 게 맞다. 기대되는 감독들, 영화들 씨네21_2000년대 초•중반 한국영화 르네상스를 일군 박찬욱, 봉준호, 김지운, 김기덕, 홍상수 그리고 이후 나름의 색깔을 보여준 류승완, 최동훈, 나홍진 감독 중에서 여전히 기대되고 기다려지는 감독이 있나. 오한기_박찬욱 감독. <박쥐>(2009)를 보고 놀랐다. 분홍색 고래가 물을 뿜더라. (웃음) 한국영화에서 이런 장면을 보게 되다니. 이상우_한기씨가 말한 것처럼, 최근의 한국영화에서 이미지를 건진 영화가 한편도 없다. <베테랑>과 <암살>을 재밌게 봤지만 인상 깊은 이미지는 하나도 없었다. 질문에 답하자면 그 이름들 중에 기다려지는 사람은 없다. 대신 주목하는 사람은 있는데…. 정지돈_나는 김기덕. 홍상수와 비교했을 때 김기덕 감독이 홀대받는 느낌이다. 김기덕 감독이 최근에 일본에 건너가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소재로 다룬 영화를 찍었다던데 대체 어떤 영화일지 궁금하다. 그런데 홍상수 영화는 개봉하면 재밌게 보지만 늘 예상하는 대로 흘러간다.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2015)도 그랬다. 김기덕은 다르다. 기복은 심하지만 어떻게 이렇게 찍었지 싶은 장면을 발견하게 된다. 평론가들이 홍상수는 만장일치로 지지하면서 <뫼비우스>(2013)는 한명도 지지하지 않았다는 게 놀랍고 안타까웠다. 금정연_대부분의 예술은 기술적 완성도를 높이는 방식으로 양식화가 되는데 비평가나 학생들은 그러한 양식과 기술에 집중하는 면이 있다. 정지돈_김기덕의 영화는 갈수록 기술적 완성도가 떨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흥미롭다. 이건 좀 심하다 싶다가도 벌떡 일어나게 만드는 장면이 있으니까. 씨네21_봉준호의 이름이 나오지 않아서 신기하다. 정지돈_다들 기대하는데 우리까지 기대할 필요가 있나. (일동 웃음) 봉준호의 신작 <옥자>는 궁금하다. 이 영화로 봉준호가 데이비드 핀처나 크리스토퍼 놀란의 길을 가느냐 못 가느냐가 결정되지 않을까. 이상우_그게 너무 슬픈 것 같다. 정지돈_무슨 소리야. 지금 영화계에선 놀란과 핀처가 제일 잘나가는 감독이지. 씨네21_그렇다면 주목하는 감독은 누구인가. 이상우_김희천 작가! 영상작업하는 미술가다. 아주 단순하게 접근해보자면 그의 영상 <바벨>과 <랠리>가 미술작품으로 출품되지 않고 영화라는 이름으로 공개됐다 해도 아마 (다른 영화들을) 다 씹어먹었을 거다. 아무튼 솜씨가 정말 대단하다. 정지돈_김희천 작가는 최근 미술계가 주목하고 있는 신진작가다. 영화라고 해도 무방한 영상작업을 선보이고 있다. 이를테면 내레이션은 스페인어로, 자막은 한국어로 깔고 흑백의 자료화면과 본인이 찍은 영상을 겹친다. 자전적 비디오 에세이 같지만 사회적인 맥락과도 연결된다. 무엇보다 정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보게 된다. 영화계에서도 참조할 만한 지점들이 많은 작품이다. 씨네21_최근 가장 과대평가받은 영화와 과소평가받았다고 생각하는 영화 리스트도 궁금하다. 오한기_<무뢰한>의 평가는 어땠지? 과소평가는 아닌 건가? 정지돈_한국영화에 대해 계속 맹비난만 해서 미안한데, 개인적으로는 <무뢰한>을 보며 슬펐다. 오승욱 감독은 기본적으로 영화를, 이미지를 너무나도 잘 아는 감독이다. 그런데 깡패 같은 경찰과 술집 여자의 이야기, 그 판타지가 너무 70년대 뉘앙스였다. 이야기의 감수성이 올드하다고 느꼈다. 오한기_나는 <무뢰한>을 보고 진짜 오랜만에 낭만을 느꼈다. (웃음) 정지돈_같이 영화 본 친구는 김남길의 마지막 대사, “새해 복 많이 받아라 XX년아” 거기서 견딜 수 없어 하더라. 그 낭만과 정서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참지 못하는 거지. 금정연_그 대사가 끝나면 비로소 타이틀이 뜬다. 무뢰한! shameless! (웃음) 그런데 나도 영화 자체는 재미있었다. 이상우_과대평가받은 작품으로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의 <버드맨>(2014)과 드니 빌뇌브의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2015, 이하 <시카리오>). 금정연_그래, <무뢰한>이 여성 캐릭터를 다루는 방식이 많은 비판을 받았는데 <시카리오>도 나쁘기는 마찬가지잖아. 마지막 시퀀스를 봐. 그런데 왜 인기가 있을까? 정지돈_이것도 상우씨의 표현인데, <시카리오>를 두고 인스타그램 앵글이라더라. 금정연_그럼 <무뢰한>은 싸이월드 화면인가? (웃음) 이상우_<버드맨>은 전형적인 ‘아메리카 와꾸’였다. 금정연_그래서 내가 재밌게 봤나봐. (웃음) 정지돈_퇴락한 백인 남자 이야기 좋아하니까. 이상우_거기에 레이먼드 카버까지 나오니 환장하지. 금정연_나는 카버 안 좋아한다. 정지돈_(대담 4시간 경과) 아, 진짜 이 좌담의 끝이 없을 것 같다. 씨네21_정말 마지막이다. 해 떨어질 때까지 영화를 주제로 이야기 나눈 소감 한마디 부탁한다. 오한기_대학에서 영화동아리 활동할 때 <씨네21>은 로망이었는데, <씨네 21>과의 인연은 여기서 끝인 것 같다. 엉망으로 얘기해서. 오늘 정지돈만 살아남은 것 같다. (웃음) 이상우_한국영화 욕을 많이 했는데 한국문학도 만만치 않게 욕 먹을 게 많다. 어쨌든 어딘가에서 좋은 영화를 만들고 있을 사람들이 분명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금정연_상우씨 마음이 참 따뜻하다. (일동 웃음) 마찬가지로 좋은 영화만큼 좋은 한국소설도 많이 보셨으면 좋겠다. 정지돈_<씨네21>이 더 매력적인 매체가 됐으면 좋겠다. 그게 한국영화와 상호작용하는 지점도 분명 있을 거다. 사람들이 재밌는 이야기를 많이 떠들면 재밌는 영화를 만들게 되어 있다. 내 인생의 영화 금정연 “영화의 원체험이라 할 수 있는 게, 1989년 어머니와 함께 동시상영 극장에서 본 브라이언 드 팔마의 <언터처블>(1987)과 아놀드 슈워제네거와 대니 드 비토가 쌍둥이로 나온 <트윈스>(1988)다. 드 팔마의 영화 중엔 이상한 작품도 많은데 <언터처블>은 지금 봐도 참 잘 만든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화이트 트래시 코미디를 좋아하게 된 건 <트윈스> 때문이다.” 오한기 “자크 타티의 <나의 아저씨>(1958). 자크 타티의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절대적인 따뜻함이 있기 때문이다. <나의 아저씨>에는 내가 경험한 최고의 영화적인 순간이 나온다. 윌로씨가 창문의 각도를 조절하며 햇빛을 반사해 맞은편 건물에 걸려 있는 새장을 비추는 장면. 햇살이 비추면 새가 지저귄다. 극장에서 그 장면을 보며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윌로씨가 선물한 햇살 아래에서 영화를 본 듯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이상우 “단순히 지금 당장 잔상이 떠오르는 영화를 얘기하면 피터 그리너웨이의 <필로우 북>(1996)이다. 영화의 모티브가 된 세이 쇼나곤의 수필집 <베갯머리 서책>은 오래전부터 애서가들의 사랑을 받아왔지만 나는 크게 좋지 않았다. 영화도 기대 반 걱정 반의 마음으로 감상했는데, 감독이 아무렇지도 않게 연출해나가는 영상의 상상력이랄지 배짱이 좋아서 기억에 많이 남는다.” 정지돈 “요아킴 트리에의 장편 데뷔작 <리프라이즈>(2006). 마르그리트 뒤라스, 조르주 바타유, 모리스 블랑쇼 등 다양한 작가를 인용하고 참조할 뿐 아니라 알랭 레네, 고다르 등의 영화를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패러디한다. 주인공인 문학청년 에릭의 데뷔작 제목이 <의인법>인데, 나의 등단작 <눈먼 부엉이>의 주인공 에릭 호이어스와 그의 소설 <의인법>을 이 영화에서 가져와 변형해서 사용했다. 오한기씨의 소설 제목 <의인법>도 아마 그런 걸로 안다(내용은 전혀 다르지만). 여러모로 내게 많은 영감을 준 영화다.” 내 인생의 배우 금정연 “브루스 윌리스와 케빈 코스트너. 오늘 이야기한 걸 반추해보면 ‘한국영화에 대해 비난했지만 결국 좋아하는 건 할리우드의 화이트 트래시 영화와 주드 애파토우 그리고 브루스 윌리스’가 돼버린 것 같은데, 마치 한국소설 비판하는 영화평론가가 자신이 좋아하는 소설은 <다빈치 코드>라고 말하는 것처럼. (웃음) 하지만 그럼에도 브루스 윌리스는 정말 최고다!” 오한기 “케빈 스미스 영화들에 출연한 제이(제이슨 미웨스)와 사일런트 밥(케빈 스미스) 콤비. 동국대 영화공동체 ‘디딤돌’ 신입생 때 학내 케빈 스미스 영화제를 주최하면서 이들을 알게 됐고, 케빈 스미스 월드를 상징하는 것 중 하나인 이 콤비에 매료됐다. 더군다나 사일런트 밥은 케빈 스미스 감독 자신이다. 이 둘이 주인공인 <제이 앤 사일런트 밥>(2001)이라는 영화 또한 정말 유쾌하게 봤다.” 이상우 “캐리 히로유키 다가와는 거의 모든 영화에서 똑같은 연기를 펼치지만 그가 나타날 때면 지겹지 않고 반갑다. ‘아, 저 아저씨 살아 있구나. 아직도 연기하는구나. 이제 <모탈컴뱃>(1995) 때만큼 젊지 않구나’ 그런 마음. 가끔 구글에 이름을 검색해본다. 요즘은 뭐하고 지내는지.” 정지돈 “영화를 그만두게 된 이유 중 하나가 내가 배우에 대한 애정이 없는 사람이란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영화를 할 사람이 배우에 대한 애정이 없으면 어떻게 영화를 만드나 싶었다. 기본적으로 좋아하는 영화들도 대개 일반인 배우, 비전문 배우가 나오는 영화들이다. 그런 배우들의 연기를 보는 게 좋다.”

수다, 섹스, 폭력, 그리고 데드풀

슈퍼히어로 역사상 가장 산만하고 잔인하고 제멋대로인 캐릭터로 알려진 데드풀. 일찍이 이렇게 과감한 영화 홍보는 본 적이 없었다며 독특한 마케팅 전략이 연일 화제가 됐던 영화 <데드풀>이 드디어 베일을 벗었다. 동방예의지국에서는 가족이 다같이 관람하기 조금 어려울 수도 있는 수위 높은 성적 농담과 잔인한 폭력 묘사가 난무하는 이 영화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대체 누구와 함께 봐야 할지 신중해질 수밖에 없다. 아마도 데드풀이라면 연인과 가족끼리 오붓하게 시간을 보내려다 봉변(?)을 당하고 돌아서는 관객을 향해 통쾌한 웃음을 날려줄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유쾌하고 짜릿하고 조금은 과격한 영화다. 불과 몇년 전만 하더라도 거의 인지도 제로에 가까웠던 무명의 히어로였지만, 시대의 변화에 발맞춰 지금은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캐릭터의 매력에 대해서도 개봉 전에 어느 정도 숙지하고 가면 좋다. 코믹스 역사상 가장 별난 히어로, 데드풀의 신상을 털어보자. Charming Point 1. 여기저기서 뒤섞인 캐릭터 마블 코믹스의 캐릭터 데드풀은 제멋대로의 까칠한 성격과 산만하고 방정맞은 말투와 태도, 시도 때도 없이 야한 농담을 일삼는 약간의 변태 성향까지 더해진 일종의 안티히어로다. 다른 슈퍼히어로처럼 건실하게 세계 평화 따위를 고민하지 않는다. 그는 일단 돈만 주면 의뢰인을 위해 뭐든 하는 용병 출신이라 세상 보는 눈이 좀 다르다. 그런 데다가 슈퍼히어로로서는 치명적인 약점을 지니고 있다. 그건 바로 무개성이다. 일단 외모부터 살펴보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을 탄탄하게 휘감은 코스튬은 (비록 색상은 다를지라도) 스파이더맨에서 따왔고, 등에 두개의 검을 메고, 양 허벅지에 권총을 찬 무기 착장 센스는 블레이드의 저작권에 위배된다. 어디 그뿐인가. 아무리 다쳐도 원래대로 돌아오는 재생능력(‘힐링 팩터’라고 부른다)은 대대로 울버린의 가보였다. 영화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코믹스상에서 그의 이름이 탄생한 배경도 가관이다. 그는 원래 1990년대에 경쟁사인 DC 코믹스의 데스스트록이란 캐릭터를 패러디한 인물이었는데 데스스트록의 본명이 슬레이드 윌슨이었고 데드풀은 웨이드 윌슨이다. ‘수다스러운 용병’이란 별명을 갖고 있을 정도로 말이 많고 잡다한 대중문화 지식도 많지만 워낙 언행이 비호감이라 ‘재생하는 퇴화’(regenerating degenerate)라는 별명으로도 불린다. 그리고 눈 밝은 독자들은 그를 이미 다른 영화에서 본 적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것이다. 데드풀은 <엑스맨 탄생: 울버린>(2009)에서 울버린을 ‘웨폰X’라는 생체실험에 끌어들인 스트라이커 대령에 의해 개조된 용병으로 출연한 바 있다. 그때 그는 시끄럽게 주절거리던 입술은 꿰매지고 손등에 울버린의 칼날을, 그리고 눈에는 사이클롭스의 레이저를 이식당해 기괴한 괴물이 된 채 등장해 울버린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데드풀이 얼마나 굴욕적인 탄생 비화를 지닌 캐릭터인지에 대해 이렇게 길게 설명했는데 사실 지금까지 언급한 데드풀에 관한 모든 요소가 영화 <데드풀>에서는 굉장한 재미로 작용한다. 왜 그런지는 이제부터 차차 설명하겠다. Charming Point 2.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야한 웨이드 윌슨, 그러니까 아직 데드풀로 변하기 전의 웨이드 윌슨은 굉장히 자유분방한 성격의 소유자다. 조금이라도 방해받거나 간섭받는 걸 싫어해서 용병들 사이에서도 자주 시비가 붙고 사람들과의 사이도 좋지 않았다. 그런 그가 악당 에이잭스(에드 스크레인)에 의해 이상한 실험에 끌려가 데드풀이 되고 나면, 기본적으로 냉소적이었던 까칠한 성격에 복수심까지 토핑처럼 추가되어 정말 대책 없는 악동으로 변모하게 되는 것이다. 어떤 악당이든 그에게 걸리면 대부분 곤죽이 된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폭력 묘사 수위의 강도가 세질 수밖에 없고 영화 심의 등급도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여기엔 장면 묘사뿐만 아니라 대사에도 원인이 있다. 데드풀은 ‘수다스러운 용병’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캐릭터인데 그의 끊임없는 성적 농담은 거의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다. 대단히 순화해서 한 가지 정도만 언급하자면, 거의 모든 대사에 ‘거시기’를 등장시키는 식이다. 팀 밀러 감독은 “(미국에서는) R등급을 받은 덕분에 PG-13등급에서는 불가능한 수준의 리얼리티를 추구할 수 있었다”며 흡족해했다. 데드풀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작가 파비안 니시에사와 롭 리펠드 두 사람 역시 데드풀을 “슈퍼히어로답지 않은 애티튜드를 가진 캐릭터로 생각했다. 삐딱한 유머 감각을 장착하고 거친 대사와 선정적인 표현 등을 여과 없이 내뱉는 인물로 만들었다”고 한다. 아무튼 징그러운 장면이 나온다고 눈만 가렸다가는 귀를 무방비 상태로 열어놓게 되는 사태가 여러 번 발생할 수 있다. 하지만 지난해 개봉했던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에 열광했던 관객이라면 무난하게 즐길 수 있는 수준이긴 하다. Charming Point 3. 데드풀과 무지막지한 아이들 웨이드 윌슨은 암 말기 판정을 받고는 방황하다가 의문의 ‘리쿠르터’(제드 리스)를 만나 암도 치료해준다는 임상실험에 참가하게 된다. 이 실험은 ‘웨폰X’라는 히어로 각성 프로그램인데 악당 에이잭스가 사람들을 데려다가 실험을 하고 있었던 것. 웨이드는 이곳에서 데드풀로 변모하게 된다. 에이잭스의 정체는 바로 울버린을 변화시킨 그 프로그램 ‘웨폰X’의 운영자다. 스스로 실험에 참가해 민첩성과 근력 강화, 그리고 무통증을 얻었다. 데드풀은 잘 알다시피 이 실험 덕분에 치유 능력을 얻게 된다. 이종격투기 선수 출신의 배우 지나 카라노가 연기하는 에이잭스의 오른팔 앤젤 더스트는 아드레날린으로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는 여성으로,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인지 그저 본업인 이종격투기를 하고 있는 것인지 헷갈리는 무시무시한 액션을 선보인다. 이들에 맞서 데드풀을 보호해주는 이들은 다름 아닌 ‘엑스맨’으로 이번 영화에서는 네가소닉 틴에이지 워헤드(브리아나 힐데브란드)와 콜로서스(표트르 라스푸틴) 두 사람이 등장한다. 워헤드는 본인 스스로 핵미사일로 변할 수 있으며 콜로서스는 몸을 강철로 바꿀 수 있는 뮤턴트다. 두 사람 모두 영화 후반부에 가장 굵직한 액션 시퀀스를 책임지는 캐릭터이니 기대해도 좋다. 그 밖에 데드풀의 절친이자 무기 딜러, 그리고 술집 ‘다루기 힘든 여학생들을 위한 마거릿 수녀의 학교’(Sister Margaret’s Home for Wayward Girls)를 운영하는 위즐(T. J. 밀러), 앞을 못 보는 할머니 블라인드 앨(레슬리 우감스) 등이 그를 돕는다. 데드풀의 진심을 알아주는 이들이다. 무엇보다 웨이드 윌슨이 데드풀로 변모하기 전에 좋아했던 애인은 바네사 칼리슨(모레나 바카린)으로, 불우한 유년 시절을 보냈으며 현재도 팍팍하게 살고 있지만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아름다워 보인다. 모레나 바카린은 바네사가 “똑똑하고 섹시하고 쿨하고 터프한 모습이 다 모인” 그러나 “매우 여성스러운 진정한 파이터”라고 소개한다. “슈퍼히어로영화에서 남자만큼 강하고 할 말 다 하고 배짱 있는 여성을 만나게 되다니 정말 신선하다.” Charming Point 4. 데드풀의 독특한 뇌구조 팀 밀러 감독은 “처음 <데드풀>을 기획할 때만 하더라도 코믹스를 원작으로 하는 영화의 경우에는 기본적으로 ‘텐트폴 영화’가 되어야만 했다. 즉 최대한 많은 관객에게 어필해야만 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데드풀>은 원작의 특성상 신랄한 느낌의 영화가 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그는 “지금이 딱 이런 영화를 선보이기 좋은 시기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슈퍼히어로영화와 만화 원작 영화의 장르가 넓어졌는데, 그 경계를 좀더 넓혀줄 이런 영화를 선보이기에 적절한 시기라고 생각한다”고. 이런 과감한 선택은 표현 수위뿐만 아니라 연출 구성에도 영향을 끼친다. <데드풀> 원작 코믹스에는 “제4의 벽을 뚫은 만화”라는 재미있는 별칭이 붙어 있다. 이는 데드풀 스스로가 자신이 만화 속 캐릭터라는 걸 인지하고 있는 상태에서 진행되는 만화라는 점을 표현한 것이다. 작가들은 만화를 진행시키면서 종종 데드풀이 독자들과 대화를 주고받는 장면 연출을 삽입했는데, 데드풀이 독자들에게 말을 걸어 농담을 던지거나 조롱하는 장면을 볼 때의 재미가 그의 캐릭터와 잘 맞아떨어졌다. 이를 두고 ‘제4의 벽 깨기’라고 한다. 영화에서도 데드풀이 스크린 밖으로 말을 건네는데 그러면서 플래시백이 진행되는 등 극의 구성 흐름이 바뀌기도 한다. 가부좌를 틀고 고민하며 봐야 할 영화가 전혀 아니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영화만이 할 수 있는 일종의 기교라고 볼 수 있다. 코믹스에서는 가끔 데드풀이 자신의 출연작을 읽으며 대화를 나누는데, 그러다가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횡설수설하기도 한다. 마치 연예인이 팬들을 의식하듯 데드풀 역시 독자들을 의식한다는 설정인데 이렇게 자유분방한 구성 덕분에 데드풀이 더욱 유별난 캐릭터로 굳어진 이유도 있다. 데드풀은 확실히 시대를 잘 타고난 히어로 중 한명이다. Charming Point 5. 몸이 기억하는 라이언 레이놀즈의 과거 생각해보면 라이언 레이놀즈가 쌍권총을 휘두르며 뛰어다니던 모습은 그의 전작을 살펴보면 꽤 자주 봤던 모습이다. 먼저 그는 <블레이드3>(2004)에서 웨슬리 스나입스와 제시카 비엘 사이에서 숱하게 죽을 고비를 넘기며 뱀파이어들과 싸웠던 인물 ‘한니발 킹’을 연기했다. 그리고 <엑스맨 탄생: 울버린>에서는 이미 데드풀 역으로 등장해 검을 창처럼 휘두르며 총알을 막아냈다. 물론 <그린랜턴: 반지의 선택>은 역대 슈퍼히어로영화 가운데에서도 손꼽히는 흥행 실패작으로 남겠지만 이번 영화에서 보여주게 될 라이언 레이놀즈와 데드풀의 조합은 지난 과오를 모두 잊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에서의 모습도 함께 잊게 될 것 같다. 그린랜턴과는 캐릭터 성향도 완전히 달라서 라이언 레이놀즈 입장에서도 지금 그의 모습이 훨씬 여유롭게 다가올 것이다. “데드풀은 대중문화에 대해 언급하는 매우 모던한 캐릭터다. 시대와 소통하는 모던한 캐릭터라는 점에서 흥미로우면서도 한계가 없는 캐릭터라고 생각한다.” 그는 또 하필 캐나다가 고향이라 설정되어 있는 데드풀과는 고향 친구이기도 하다. 데드풀과 가장 연관이 깊은 영화인 <엑스맨> 시리즈가 대부분 캐나다에서 촬영이 진행된 이유도 있지만 영화 전체의 분위기를 묘하게 자극시키는 우연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공동각본을 맡은 렛 리즈도 “제작 과정에서 라이언 레이놀즈가 ‘감시자’ 역할을 했다. 각본의 분위기가 좀 엇나간다 싶으면 ‘이건 데드풀답지 않은데요?’라고 지적해줬다. 원작 만화를 잘 알고 데드풀의 성격 및 유머감각과 닮은 점이 많은 그이기에 최고의 결정권자라고 할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Charming Point 6. 데드풀의 덕후 취향 데드풀은 음악과 영화, 드라마 등에 조예가 깊은 히어로다. 영화에서 그는 특히 그룹 왬(wham)의 와 같은 서정적인 노래를 좋아하고, 림프 비즈킷은 존재 자체가 1990년대 빌보드 역사의 해악이라며 극도로 싫어한다. 만화 중에서는 다섯 마리의 사자가 몸을 포개어(?) 합체하는 볼트론을 특히 좋아하며 평소에는 뮤지컬 <렌트>의 티셔츠를 입고 다니는 등 문화를 소비하는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다. 그는 또 코믹스상에서 누군가가 <스타워즈> 프리퀄 시리즈가 더 좋다고 말하자 그 자리에서 머리를 날려버리고는, 함께 있던 또 다른 이에게 ‘자자 빙크스 극혐!’이라고 외치게 만든다. 또 그의 무기 가방에는 헬로 키티 캐릭터가 그려져 있다. 데드풀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고기와 치즈, 콩 등을 토르티야에 싸서 기름에 튀긴 멕시코 전통 음식 ‘치미창가’이다. 코믹스상에서는 그가 치미창가를 열렬히 좋아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데드풀과 치미창가’ 피겨가 만들어지기도 했는데 영화에서도 관련 대사가 등장한다. 노골적인 수위의 성적 농담이 난무하는 영화이기에 궁금해할 관객을 위해 덧붙이자면, 데드풀의 성적 정체성에 대해서도 팬들 사이에서 이래저래 말이 많다. 코믹스에서는 온몸이 해골 골격으로 되고 커다란 낫을 들고 다니는 데스와 사귀기도 했다. 아무튼 데드풀은 자신이 모든 성을 사랑하는 ‘옴니섹슈얼’이라고 밝힌 적 있다. 그의 캐릭터를 만든 작가 파비안 니시에사는 이에 대해서 “데드풀은 성적 취향에 상관없이 순간적인 끌림을 따른다. 그 끌림은 일시적이다”라고 설명한다. 게다가 데드풀은 “사랑을 살 순 없지만 3분 정도는 빌릴 수 있다”고 말하고 다닌다. Charming Point 7. 데드풀에 관해 더 알고 싶다면 만화에서 데드풀은 사실 슈퍼히어로를 흠모하는 마니아로 묘사된다. 웨이드 윌슨은 어릴 때 캡틴 아메리카를 우상으로 생각했으며 스파이더맨과는 돈독한 브로맨스도 보여준 바 있다. 게다가 데드풀은 마블 유니버스에서 등장하는 거의 모든 캐릭터들과 나란히 출연하는 영광도 누렸다. 하지만 4부로 이루어진 시리즈 <데드풀의 마블 유니버스 죽이기>(국내 출간)에서는 그를 향한 또 한 차례의 실험이 엉망진창이 되어버리자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고 어벤져스 멤버들과 판타스틱4, 엑스맨, 스파이더맨, 퍼니셔, 헐크, 닥터 스트레인지 등등 마블의 모든 캐릭터를 살해하는 충격적인 전개를 보여준다. 그는 또 다른 시리즈 <데드풀 킬러스트레이티드>(국내 미출간)에서 삼총사, 돈키호테, 인어공주 등 캐릭터들의 내장을 적출하고 프랑켄슈타인의 몬스터, 셜록 홈스, 닥터 왓슨, 베오울프, 내티 범포, 뮬란 등과도 싸운다. 데드풀이 링컨에서 린든 존슨까지, 미국 대통령 좀비들과 싸우는 시리즈도 있으니 마블 코믹스 내에서 데드풀이란 캐릭터가 갖는 입지는 좀 특별하다고 할 수 있겠다. 패러디 캐릭터에서 시작해 단독 영화가 제작되기까지 인기의 극과 극을 모두 겪은, 게다가 그를 연기하는 배우 라이언 레이놀즈의 그동안의 부침까지 겹쳐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만들어낸다. 현재 영화 속편에 관해서 제작사가 배우들과 협의 중인데 아마도 속편에서는 케이블이란 동료 캐릭터가 함께 등장할 것 같다. 케이블은 염동력과 텔레파시를 이용할 줄 아는, 미래에서 온 군인으로 데드풀의 발광을 이성적으로 제어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캐릭터이다. 국내에는 두 사람의 협업을 다룬 <데드풀&케이블 얼티밋 컬렉션1>이 출간되어 있다. 그나저나 정말로 다음 영화에서는 케이블이 함께 출연하게 될까. 라이언 레이놀즈는 얼마 전에 가진 팬들과의 만남 자리에서 “나를 믿어달라. 이미 (케이블이 등장하는) 이야기가 진행 중이다”라고 호언장담했다. 그 비밀은 엔딩 시퀀스에서 밝혀질 예정이다. 영화가 끝나도 서둘러 극장 문을 나서지 말란 얘기다. 데드풀 프로필 이름 / 데드풀. 본명은 웨이드 윈스턴 윌슨 별명 / 수다스러운 용병, 재생하는 퇴화 등 국적 / 캐나다 캐릭터 / 1991년 2월 <뉴 뮤턴츠 #98> 직업 / 용병, 안티 슈퍼히어로 신체 사이즈 / 188cm, 95kg 병명 / 암 말기 능력 / 울버린과 같은 재생 능력(힐링 팩터) 출연작 / <엑스맨 탄생: 울버린> <데드풀> 애인 / 바네사 칼리슨 동료 / 위즐, 블라인드 앨, 네가소닉 틴에이지 워헤드, 콜로서스, 그리고 아마도 다음 편에서 케이블 합류 예정 자주 가는 곳 / 다루기 힘든 여학생들을 위한 마거릿 수녀의 학교 (Sister Margaret’s Home for Wayward Girls) 해당 배우 / 라이언 레이놀즈 주요 악당 / 에이잭스, 앤젤 더스트 데드풀의 주요 무기 데드풀의 상징과도 같은 무기는 카타나(일본의 외날 곡도)다. 제작진은 데드풀의 복잡 미묘한 캐릭터에 어울리도록 전통적인 디자인이 아니라 하이브리드 스타일의 카타나를 제작했다. 그리고 일본과 중국의 검술에 필리핀 무술인 칼리를 접목시켰다. 데드풀이 언제나 카타나를 이용해 적들의 중요 부위만 공략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데드풀 이름의 기원 극중 데드풀은 술집 벽에 쓰인 게임을 보고 자신의 히어로 네임을 짓는다. 데드풀 게임은 일정 기간 동안 특정 인물이 죽는지 안 죽는지 알아맞히는 내기 게임으로 ‘풀’은 참가자들의 판돈을 의미한다. 그 게임법은 다음과 같다. 첫째, 게임의 기간을 정한다. 둘째, 참가자들은 각자 똑같은 수의 사람(유명인사)을 골라 목록을 만든다. 목록이 동일하지 않으면 같은 인물을 여러 참가자가 선정해도 된다. 셋째, 게임 종료 시점에 실제 사망자의 목록을 가장 많이 맞힌 참가자가 우승하게 된다. 넷째, 동점자가 나오면 게임 기간을 한달 연장한다.

[오승욱의 만화가 열전] 소년에서 남자로

내 옆자리에 앉은 소년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물론 선생은 없었고, 나와 그 소년은 교실 안에서 뭐라고 할 사람이 없는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수업이 끝나면 유화반이라는 과외수업을 했는데, 한동안 비어 있었던 내 옆자리에 새로 온 소년은 얼굴이 우유처럼 뽀얗고 귀티가 흐르는 얼굴로 입만 열면 “내 팔자에 뭘 더 바란다고”, “이제 내가 죽어야지” 같은 아줌마들 입에서나 나올 법한 소리를 시도 때도 없이 뱉어내거나 유행가를 청승맞게 부르면서 그림을 그렸다. “어제는 비가 내렸네. 키 작은 나뭇잎 새로”로 시작되는 윤형주의 <어제 내린 비>였다. 목욕탕의 탕 안에 느긋하게 몸을 담그고 있다가 목욕탕 문을 열어젖히며 “그건 너, 바로 너”를 큰 소리로 부르면서 안으로 들어오던 키 작고 빼빼 마른 깡패소년을 보고 깜짝 놀랐던 것이, 그때까지 내가 본, 일반인이 유행가를 부르는 가장 인상적인 모습이었는데 얼굴이 하얀 미소년의 입에서 흘러나온 <어제 내린 비>도 인상적이었다. 어린이가 어른들의 노래를 태연하게 부르는 것도 그렇고 연애영화의 주제가를 부르는 것도 그랬다. 노래를 부르다 멈춘 소년은 고개를 돌리며 나에게 영화 <어제 내린 비>를 보았냐고 물었다. 다람쥐처럼 극장을 쏘다니며 영화를 보다가 홍콩 성인영화 <소녀>(召女)를 보았고, 대학생들 사이에 인기가 많았던 <바보들의 행진>도 보았지만 본격적인 성인 남녀의 연애 이야기를 그린 영화는 본 적이 없었다. 남자의 입으로 연애영화를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 생각했기에 소년의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소년은 누나들이 여럿 있는 집안의 막내였다. 누나들이 많은 집의 소년을 만난 것이다. 소년과 친해진 이후로 나는 윤형주의 <바보>, 뚜아에무아, 현경과 영애의 사랑 노래를 듣고 따라 부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게 되었다. 위로는 삼촌과 사촌 형, 아래로는 남동생, 어머니를 제외하고 시꺼먼 남자들만 득시글거리는 환경에서 자란 내가 위로 누나들만 있는 친구를 만난 것은 신세계였다. 나는 그 소년의 인도로 임예진, 올리비아 허시, 노라 마오 같은 여배우를 좋아하는 것이 전혀 부끄럽지도 않고 남자답지 못한 행동도 아님을 배웠다. 그래서 왕우나 이소룡 영화를 보고 또 보았듯 올리비아 허시를 보기 위해 <썸머타임 킬러>를 보고 또 보아도 아무렇지 않았고, 임예진이 등장하는 <진짜 진짜 잊지마>를 보러 극장 매표구 앞에 섰을 때는 쑥스러웠으나 다음에 개봉한 <진짜 진짜 미안해>는 당당하게 보러 갔다. 중학생이 되어서는 우리 반 최고의 불량소년이 임예진 영화를 혼자 보러 가기 부끄러웠는지 나를 앞세워 <푸른 교실>을 보러 가기도 했다. 어느 날 영화를 많이 보러 다니는 내게 관심을 보여 친해진 친구가 자기 집에 가자고 했다. 그 친구 집에 들어가자마자 나는 벌어진 입을 한동안 다물지 못했다. 일본 영화잡지 <스크린>과 <로드쇼>는 물론이고 홍콩의 영화잡지가 책장에 한가득이었다. 걸신 들린 사람처럼 홍콩 영화잡지를 펼치니 듣도 보도 못한 적룡과 깡따위, 왕우가 출연한 영화의 스틸 사진들이 쏟아져나왔다. 숨도 쉬지 않고 잡지를 읽고 있는데 친구의 고등학생 누나가 학교에서 돌아와 나와 친구를 곱지 않은 눈으로 보고 한마디 했다. “너희 내 방에서 뭐해?” 그렇다. 그 친구 역시 누나들이 많은 집 막내아들이었다. 양병집과 양희은의 노래를 알려준 친구도 위로 누나들이 셋이나 있는 집 아이였고, 중학교 3학년 때 나에게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읽게 한 사람은 화실의 고등학교 2학년 누나였다. 누나들과 자란 소년들에게는 남자들과 자란 나와는 다른 세계가 있었다. 그들은 내 책가방 속의 무협지를 몰아내고 삼중당에서 나온 이어령의 수필집을 읽게 만들었다. 만화책과 무협지 말고 또 다른 읽을거리가 내 손에 들어온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헌책방에서 가끔 노다지처럼 만났던 일본 만화책을 돈만 있으면 반짝반짝 빛나는 새책으로 살 수 있는 명동의 중화민국 대사관과 코스모스 백화점 사이에 있던 ‘딸라골목’을 알게 되었다. 질 떨어지는 종이와 인쇄 상태의 한국 만화들을 보면 한숨이 나왔던 시기에 나와 같이 동행한 누나들이 많은 소년은 내가 일본 만화책에 정신이 팔려 있으면 당시 인기 최고였던 록밴드 키스(KISS)의 화보집을 들어 보이며 “이런 책을 사야지, 어린애처럼 만화가 뭐냐?”라고 했었다. 누나들이 많은 집에서 자란 소년들은 어린애였던 나를, 소녀를 사랑하는 소년으로 만들어주었다. 중학교는 정말 끔찍한 곳이었다. 초등학생 때는 한명의 선생만 상대하면 되었는데, 중학교에 들어오니 교과목 수만큼 많은 선생들이 매 시간 번갈아 들어왔고, 그들이 학생들에게 구사하는 폭언과 폭력은 선생 수만큼 다양했다. 교과목마다 바뀌어 들어오는 선생 중 단 한 사람도 어린 학생들을 슬퍼해주지 않았다. 여선생이 담임인 적이 있었는데 그녀는 유일하게 우리에게 매를 들지 않았지만 덩치 큰 같은 반 학생을 반장으로 삼아 그가 우리를 때리게 만들었다. 지은 지 오십년은 넘은 낡고 좁은 교실 안에 칠십여명의 학생들이 들어차 있으니 교실로 들어온 선생들의 첫마디는 “항상 창문 열어”였다. 매 시간 선생이 학생을 패고, 쉬는 시간에는 학생들끼리 악다구니를 쓰며 싸움을 했다. 그런 곳에서 나는 어질어질 바보가 되고 말았다. 초등학생 때에는 아무런 문제가 안 되던 가죽 허리띠가 교칙 위반이었고, 양말의 색깔까지 정해져 있어서 아침 등굣길 교문 앞에서 자주 무릎을 꿇고 있어야 했다. 친구와 정다워지기 전에 사소한 일로 주먹질을 해서 서로 외로워졌다. 그 시절 그곳에서는 친구를 만들기도 힘들었다. 학교를 무단결석한 학생을 선생이 자신의 시계가 텅! 하고 날아가면서까지 패는 광경을 숨죽이고 지켜보며 꾀병을 앓아 학교를 빠진다는 생각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런 시절에 만난 위로 누나들이 많은 집 소년들은 구원이나 마찬가지였다. 악당이자 선인인 절대 영웅을 찾다 어느 비오는 휴일. 거의 몇달을 찾지 않았던 만홧가게에 발을 들였다. 사실 몇번 들르긴 했지만 만화들이 전부 시시해 보였고, 황재의 <쾌걸 흑나비>와 <소림사> 시리즈를 빼고는 재미있는 만화들도 별로 없었다. 홍콩 무협영화에서 발을 넓혀 하이틴 멜로영화까지 섭렵하고 텔레비전에서 줄기차게 틀어주던 이탈리아 웨스턴에 홀딱 빠져버렸으며, 무협지에서 한국 소설들까지 발을 넓힌 내가 어린애들이나 가는 만홧가게에서 더이상 재미를 찾긴 어려울 듯 싶었다. 게다가 등굣길에서 만나는 여학생을 짝사랑하기까지 했으니 심심할 틈이 없었다. 내게 만홧가게의 만화는 이미 관심 밖 세상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황재의 신간이 있으면 빌려볼까 해서 들른 만홧가게에서 한복을 입고 발차기를 하는 모습이 너무나 멋있는 표지의 만화책을 만났다. <각시탈>이었다. 선 채로 잠깐 읽기만 했는데도 피가 머리 위로 솟구쳤다. 다음주 휴일, 청계천의 만화책 도매상으로 가서 부길문화사판 <각시탈>을 손에 넣었고, 친구들에게 물어물어 <각시탈> 시리즈가 모두 모여 있다는 장충동의 어느 만홧가게에서 전권을 다 보았다. 엄마를 속여 돈을 타내서는 <각시탈> 시리즈를 돈이 되는 만큼 사들이고서야 머리 꼭대기로 솟구쳤던 피가 정상으로 몸속으로 돌아 긴 한숨을 내쉬었다. <각시탈> 앞에서 누나가 있는 친구들을 사귀며 만들어졌던 그 나이 또래 소년이 당연히 가져야 할 감성은 모두 날아가버리고, 다시 마초 남자들의 비린내 나는 세계로 순식간에 귀환하고 말았던 것이다. 상하이 어느 뒷골목의 골방 안. 두 사나이가 난로를 사이에 두고 앉아 있다. 험상궂은 중국인이 난로 뚜껑을 열어 시뻘겋게 타고 있는 조개탄 하나를 맨 손가락으로 꺼내어 곰방대에 불을 붙이고 난로 속으로 툭 집어던진다. 중국인의 건너편에 앉아 중국인을 바라보던 젊은 사내도 난로 뚜껑을 열어 맨손가락으로 조개탄을 꺼내든다. 그러고는 자신의 허벅지 위에 조개탄을 올려놓고 주머니를 뒤져 담배 쌈지를 꺼내어 담배를 말기 시작한다. 어두운 방 안에 살타는 냄새가 진동하고 중국인들이 경악한다. 사내는 표정의 변화 없이 느긋하게 담배를 말아 허벅지 위에 올려두었던 조개탄을 집어 불을 붙이고는 난로 속에 던져넣는다. 이 만화는 이재학 글•그림의 성인만화 <히라소니>의 한 장면으로 내가 처음 본 허영만이 그린 만화였다. 허영만이 이재학의 문하생으로 있을 당시 이재학의 대필로 그린 이 작품은 당시 신문가판대에서 판매되던 성인만화였다. 형과 동생이 있다. 형은 일제의 단발령에 걸려 머리카락을 잘리고 실성해버렸고, 동생은 출세를 위해 헌병대의 조선인 앞잡이가 된다. 동생은 택견의 달인인 복면 괴인 각시탈을 잡아 승진하려 애쓴다. 복면 괴인 각시탈은 원성이 극에 이른 일본인 부자와 상인, 군인, 경찰들에게 테러를 하는 테러리스트다. 하얀 한복 저고리에 바지를 입은 각시탈은 놀라운 무술 실력으로 신출귀몰한다. 각시탈을 잡기 위해 수많은 동족들을 괴롭히던 동생은 드디어 각시탈이 출현한 현장에서 그에게 부상을 입힌다. 핏자국을 따라가는 동생. 각시탈의 핏자국은 자기 집으로 이어져 있다. 집으로 들어가 안방 문을 열면 동생이 쏜 총탄에 죽어가는 형과 그가 벗어놓은 각시탈이 놓여 있다. 나는 이 이야기가 너무나 좋았다. 일본 만화 <타이거 마스크> <내일의 조> <황야의 소년 이사무>에는 있었으나 당시 한국 만화에는 없었던, 악의 소굴에서 자라나 개심한 인물로 반은 악당이고 반은 선인인 주인공을 한국 만화에서 발견한 것이다. <타이거 마스크>의 완전한 한국판이었다. 중학생 시절에 나는 절대적으로 하나만 꼽으라면 이것이라 말할 수 있는 주인공이 없는 것을 부끄러워했다. 질투심도 있었다. 바로 ‘중국 무사나 사무라이. 황야의 무법자들 같은 멋진 캐릭터가 우리에겐 왜 없는가?’였다. 물론 시라소니나 김두한 같은 깡패들의 신화 이야기가 영화와 만화로 만들어져 인기를 끌었지만 그것들은 뭔가 만듦새가 조악했다. 내가 가장 반한 것은 각시탈이 발차기를 할 때 허영만이 그린 한복 바지의 모양새였다. 몸에 딱 달라붙은 그런 바지가 아니어서 각시탈이 발차기를 하려고 발을 공중으로 들어올리면 발을 중심으로 허리까지 삼각형의 모양이 만들어진다. 각시탈이 몸을 움직일 때마다 옷고름과 한복 자락이 펄럭인다. 그것이 각시탈의 움직임에 활력과 우아함을 더해주었다. 복면을 안 썼을 때에는 바보 노릇을 하다가 탈을 쓰면 잔혹한 응징자로 변하는 캐릭터도 마음에 쏙 들었다. 내가 각시탈의 완전한 포로가 된 것은 부길문화사판 <각시탈> 하권에 부록처럼 붙어 있던 에피소드였다. 형을 죽이고, 어머니가 돌아가시게 되는 원인을 제공한 악당이 아무리 개과천선한다 해도 지난날 죄의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법. 과거에 지은 죄은 언젠가 되돌아와 죗값을 묻는다. 각시탈 이강토는 어이없는 실수로 눈이 멀어버린다. 장님이 된 강토는 결국 각시탈을 쓰고, 과거의 죄를 속죄할 길을 찾지 못한다. 눈 덮인 깊은 산의 동굴 속에서 고통에 몸부림치며 참회하는 장면이 대부분이었던 이 만화를 보고 나는 한국 만화의 단 하나의 절대적 캐릭터는 각시탈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소년잡지 <우등생>에 부록으로 연재되었던 <우등생판 각시탈>에서 서로 다른 길을 걷는 옛 친구와의 고통스런 대결도 좋았다. 특히 마지막 대결 장소가 매운탕집이라는 것이 너무나 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많은 <각시탈> 시리즈 중 내가 가장 좋아했던 각시탈의 에피소드는 <여기는 우리땅>이었다. 이 에피소드에서 이강토는 한번도 각시탈을 쓰지 않는다. 각시탈을 쓰지 않는 <각시탈> 만화. 이 만화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10년 전 김성수 감독이 <각시탈>을 TV시리즈물로 만들려는 기획을 하고 있을 때, 그에게 나도 <각시탈> 한 에피소드를 연출하게 해달라며 각시탈이 각시탈을 한번도 안 쓰는 에피소드인데 죽이지 않느냐고 졸랐던 기억이 있다. <여기는 우리땅>에서 강토는 일본인 악덕 지주의 집에 얹혀살며 잡일을 하면서 일본산 도사견의 마음을 빼앗는 데 성공한다. 지주의 창고가 도둑맞지 않는 이유는 사나운 도사견 때문. 강토는 불순한 마음으로 개의 마음을 빼앗고 지주의 창고를 터는 데 성공한다. 라스트는 비극이다. 강토에게 마음을 준 개는 몇해 동안 먹여주고 길러준 주인을 버리고 사악한 마음으로 접근한 강토를 선택하지만 개에게 주어진 운명은 죽음이다. 일제에 대항하여 투쟁한다는 가면을 쓰고는 있었지만 허영만이 그린 <각시탈>은 한 사내를 죽이고 그 사내가 되어버린 사내가 그를 죽이려는 또 다른 수많은 사내들과 대결하는 남성 멜로드라마였다. 거침없이 세상을 휘젓는 남자 이야기 <태양을 향해 달려라>는 이상무의 야구 만화들과 비슷한 이야기와 캐릭터들이었지만 이상무의 만화보다 강토와 강산의 우정에 조금 더 포커스가 맞춰져 있었고, <변칙복서>에서는 아들이 발레리노가 되기 원하는 아버지를 피해 권투를 하는 청년의 이야기를 통해 끝없이 남자 이야기를 한다. <변칙복서>는 영국영화 <빌리 엘리어트>와 정반대 지점에 있는 만화였다. 동생은 내가 좋아하는 <미스터 손>이 일본 만화 <드래곤 볼>의 표절이라며 무시했지만 <미스터 손>을 <드래곤 볼>의 표절로 보는 것은 너무나 억울하지 않은가. 허영만의 <미스터 손>은 고우영의 <서유기>의 피를 더 많이 가지고 있는 만화다. 고우영의 손오공은 세상 끝까지 날아가 그곳에 서 있는 기둥(부처의 손가락)에 오줌을 싸는데, 허영만의 미스터 손은 옥황상제가 보낸 전투기의 캐노피 위에 오줌을 갈긴다. 미스터 손은 전형적인 악동이고, 트릭스터 캐릭터다. <서유기>를 원작으로 한 수많은 만화 중 손오공이 옥황상제가 지배하는 세상을 얼마나 깽판 치느냐에 따라 선호도가 바뀐다. <드래곤 볼>에서는 손오공이 옥황상제가 지배하는 하늘나라를 난장판으로 만드는 에피소드를 아예 빼버렸지만, 미스터 손은 고우영의 손오공만큼 악랄하진 않아도 소년만화에서 허용되는 만큼 난장판을 만들어버린다. 허영만은 <서유기>를 원작으로 한 만화 중 가장 새로운 캐릭터인 사오정을 탄생시킨다. 물론 허영만의 저팔계도 재미있지만 음흉함에 있어서는 고우영의 저팔계가 조금 더 저질이다. <서유기>를 원작으로 한 만화 역사상 최고로 독특한 삼장법사가 <오공도>를 그린 야마구치 다카유키의 색계를 위해 탄생한 여자 삼장이라면 최고의 사오정 캐릭터는 허영만의 것이다. 80년대 들어 허영만의 만화는 날개를 단 것 같았다. <담배꽁초> <오, 한강>으로 이어지는 그의 행보는 감탄을 자아냈다. 그러나 내가 가장 사랑하는 허영만의 만화는 재미있는 만화를 그리겠다는 일념으로 그렸던, 만홧가게에 진열된 그의 만화들이다. 중학생 시절 만홧가게의 진열대에 꽂혀 있던 <각시탈> 시리즈들의 빛나는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김정원의 도를 아십니까] 스타 뒤에 사람 있어요!

신림동에 살고 청담동 부근에서 일하(면서 한국 사회의 빈부 차이를 온몸으로 느끼)던 시절이었다. 동료가 사무실 근처에서 주운 휴대폰 하나를 두고 우리는 고민에 빠졌다. 연락처를 찾으려고 열어본 전화기에 유명한 연예인과 매니저들의 전화번호가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로 말하자면 먼저 인터뷰를 잡았는데도 다른 일정이 들어오면 가차 없이 까이고 까이다가 영혼에 깊은 화인 하나 품고 살아가기에 이른 청춘들로서, 그 화인에 아로새긴 네 글자는 이.류.잡.지.였으니…. “베끼자.” 누가, 네가? 그랬다. 때는 휴대폰으로 인터넷을 한다는 건 근미래에나 가능한 일로 보이던 선사시대, 전문가의 손을 거치지 않고 주소록을 옮기려면 손으로 베끼는 수밖에 없던 암흑의 시절이었다. 결국 우리는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면서 (사실은 없어, 가오) 궁상맞게 주소록 베끼는 걸 포기하고 휴대폰을 주인에게 넘겼다. 그는 누구였을까, A++급 여배우 ***의 매니저였다. 인터뷰 1회권하고 교환할걸 그랬지. 세월은 유수와도 같아 휴대폰으로 동영상을 주고받는 근미래가 살아생전에 도래했다. 전화기 잃어버린 매니저가 그거 찾겠다고 도시의 연쇄 폭행범으로 거듭나는 영화 <핸드폰>을 보면서 나는 안도했다, 그때 주운 것이 멀티미디어 따위 모르던 뗀석기 수준의 휴대폰이어서 얼마나 다행이었던가. 100만원대 월급이 그나마도 밀리고 있었는데 거기에 *양 비디오라도 들어 있었다면 <핸드폰> 찍을 뻔했다. 김혜수와 전도연 등을 맡았던 전직 매니지먼트계의 거물 박성혜의 에세이 <별은 스스로 빛나지않는다: 스타를 부탁해>를 보면 15년 동안 전화번호를 바꾸지 않았다던데 그걸 읽은 나는 그럼이 사람은 15년 동안 번호 이동 할인 한번 안 받고 기기 바꿨겠네, 가오 있어, 아니 이게 아니라, 매니저에게 전화기는 그만큼 소중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우쳤다. 하지만 <핸드폰>은 전화만큼이나 전화 예절 또한 소중하다고 역설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기획사 대표 오승민(엄태웅)이 성질 부리지 않고 전화를 받았더라면 이런 액션 활극을 찍지 않아도 좋았을 텐데, 이 영화 각본 쓴 사람, 매니저들하고 통화깨나 해봤구나. 나도 매니저들하고 통화만 했다 하면 왠지 겁이 나고 비굴해진 나머지 스스로 착해져서 한번은 옆에서 듣고 있던 편집장에게 칭찬도 받았다, “텔레마케터 해도 되겠다.” 그렇다고 세상에 친절한 매니저가 없는 건 아니다. 이 사람 저 사람 뒤엉켜 술을 마시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이라고는 나하고 난생처음 보는 어느 매니지먼트 회사 대표뿐이었던 (나머지는 의자에 걸려 있었고) 어느 술자리에서의 일이었다. 적막이 흘렀다. 나는 그를 보고 웃었다, 그도 나를 보고 웃었다, 자, 이제 뭘 해야 할까. 그는 가방을 열더니 인화한 사진을 한 보따리 꺼냈다. 그리고 내가 그때껏 만난 누구보다도 친절한 말투로 설명을 시작했다. “우리 ** 사진 보실래요? 이건 정장 입은 거, 아유, 잘생겼다, 그리고 이건… 어머, 수영복이네? 우리 **가 요새 운동을 하느라. 그럼, 수영복으로 몇장 더?” 그렇게 나는 몸은 좋지만 웃기게 생긴 청년의 반누드 사진을 보면서 충만한 새벽을 맞았다. 아, 친절하여라. 그리고 몇년 뒤, 웃기게 생긴 청년은 개성 있는 마스크를 지녔다는 스타가 되었다. 그 아슬아슬한 경계를 포착하다니, 아무나 매니저 하는 게 아니구나. 제목이 그래 보여 팬픽 독립영화로 착각했지만 어엿한 팬픽 상업영화였던 환희 주연의 <스타: 빛나는 사랑>에 나오는 매니저는 정교한 내추럴 메이크업으로 무장한 주연 여배우한테 화장하면 예쁘겠다고 눈뜬장님 수준의 대사를 날리기에 저러고도 월급 받나 싶었지만, 그러고도 월급 받는 사람이 한둘도 아니고, 아니, 어쨌든 진짜 매니저에겐 날카로운 안목이 필요하다. 하지만 영화에서나 현실에서나 매니저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하라는 일은 뭐든지 한다는 사실이다. 집에서 게임하던 톱스타의 전화를 받고 담배 사러 나가던 매니저가 “우리 **이 진짜 착해요. 동네 담배 가게가 어딘지 몰라서 그러는 거예요” 감싸길래, 어쩜 이런 거짓말을 하면서도 표정이 진심이야, 과연 배우 매니저구나 했지만 <라디오 스타>를 보니까 진짜였어, 매니저 있는 사람들은 담배를 어디서 파는지 몰라, 이래서 담배 자판기를 부활시켜야 한다니까, 아니 이게 아니고, 그 사람 연기가 아니었구나 뒤늦게 깨달았다. 재벌이 아니라면 세상에 감정 노동 아닌 일이 없어 오늘 하루도 키보드 두드린 내 손가락이 한 일보다 갑을 상대로 내 감정이 한 일이 훨씬 많지만 (그러니까 돈 받으면 내 손가락을 위한 반지 한개보단 내 감정을 위한 술 한병을 사리라), <라디오 스타>의 매니저 민수(안성기)처럼 “얼굴에 수십번 똥칠해서 똥독 오른” 건 아니니 다행이라 하겠다. 20년 동안 민수가 한 일을 꼽아보자면, 짐꾼에 기사에 가이드에 대변인에 짜장면 비벼주다 말고 담배와 커피 자판기 노릇까지, 게다가 팬들이 몰려들면 보디가드도 해야 한다. 저 깊은 바다를 가르며 헤엄치는 청어 떼처럼 질주하다가 순식간에 270도 회전하여 송골매처럼 스타를 덮치는 팔팔한 10대 소녀 무리 곁에 한번이라도 서봤다면 알게 될 것이다, 매니저에게도 보디가드는 필요하다. 박성혜가 내린 정의에 따르면 매니저란 “한마디로 문화 상품인 스타를 생산하는” 직업이면서 이상하게 그 ‘문화 상품’ 중 하나인 영화에선 미움받는 직업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동안 거친 직업으로도 모자라 다시 새로운 직업을 구하느라 고심 중인 실업자로서, 직업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왠지 저 사람이 사는 세상은 한여름 같아, 아주 눈이 부시지. 퇴직했지만 용돈 주는 딸자식은 없고 그냥 딸자식만 있던 아빠가 경비원 일을 시작했을 때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노동과 월급이 있는 찬란한 세상이라니. 어쩌면 미안해서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참을 수 없는 존재로 인한 서러움 매니저에게 웬만해선 없는 두세 가지 것들 퇴근은 없다 매니저 관상인 건지, <핸드폰>에 이어 <톱스타>에서도 배우가 되지 못해 매니저 노릇을 하는 엄태웅은 기어이 톱스타가 되고 나서도 이런 소리만 듣는다, 촌스러워, 욕심이 붙었어, 빈티 나. 그러고 보니 <톱스타>는 왕후장상엔 씨가 없어도 톱스타엔 씨가 있다고 주장하는 영화였군, 매니저는 안 되는 거야. 어쨌든 그 영화에서 술 마시고 사고 치는 엄태웅을 보면서 나는 왜 매니저들이 새벽까지 배우들하고 붙어 있는지 알았다. 집에도 데려다줘야 하겠지만 감시도 해야 하니까. 옛날에도 퇴근 시간 없던 그 매니저들은 이제 24시간 스마트폰으로 트위터 감시해야겠구나. 스마트폰 너무 보면 목에 주름 생긴다던데. 국경도 없다 한물간 스타라도 열심히 뒤치다꺼리하다가 <라디오 스타>의 민수처럼 “얼굴이 삭는” 매니저 팔자에는 국경도 없다. 그 많은 러브라인에서 한 가닥도 배정받지 못한 <러브 액츄얼리>의 조는 돌보는 가수의 막말과 사고를 감당하느라 그랬는지 원래 그랬는지 살찌고 삭았는데, 그걸 일깨워주는 사람이 바로 그 가수다. 얼굴도 안 나오는데 자꾸 추남에 뚱보라고 시청자들한테 알려주지, 아, 친절하여라. 그러고는 크리스마스에 들고 오는 것이 고작 샴페인 한병이다. 매니저에게도 안주는 필요할 텐데. 배려 따윈 없다 신인 배우를 차로 치었다가 합의금 주는 대신 매니저로 일하게 된 <스물>의 치호(김우빈)는 감독(박혁권)의 귀염둥이다. 술자리 진상, 그 갑 중의 갑으로서, 이미 한 얘기를 하고 또 하는데 심지어 그 얘기가 진지하기까지 한 완전체 진상하고 놀아주는 사람은 치호뿐이니까. 그렇게 놀아주는 치호를 보면서 감독과 동고동락해야 마땅한 스탭들은 지금이다 싶어 잽싸게 도망간다. 원래 술자리 진상하고는 한 시간씩 돌아가며 놀아주는 것이 사람 사는 세상의 인정이거늘.

Ia Ora na, FIFO! 안녕, 오세아니아다큐멘터리영화제!

타히티(Tahiti)는? 정식 명칭 / 프랑스령 폴리네시아(본 섬인 타히티로 통용됨) 수도 / 파페에테(Papeete) 사용 언어 / 공용어는 타히티어와 프랑스어. 호텔, 레스토랑, 관광지 등에서는 영어 통용. 시차 / 한국시간보다 19시간 늦음(타히티시간=한국시간+5시간-1일). 통화 / 프렌치 퍼시픽 프랑(CFP, XFP). 유로로 환전해 현지에 도착한 뒤 공항이나 리조트에서 현지 화폐인 퍼시픽 프랑으로 환전하면 된다. 리조트 안에서는 신용카드나 유로화로 통용. 항공편 / 우리나라에서 타히티까지 직항편이 없다. 일본 도쿄를 경유하는 것이 가장 편한 방법이며, 비행시간은 도쿄에서부터 11시간10분 정도 걸린다. 프롤로그 “타히티는 왜?” 타히티에 출장 간다고 하니 회사 동료, 친구, 가족 등 주변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한 질문이다. 얘기가 나온 김에 물어보자. 타히티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버킷리스트의 단골 메뉴이자 신혼여행지인 보라보라 섬? 타히티와 보라보라는 각기 다른 섬이지만 두 섬 모두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에 속하니 아주 틀린 얘기는 아니다. <타히티의 여인들> <아레아레아>(기쁨) 등 많은 명작을 그린 고갱에게 영감을 준 섬으로도 유명하다. 뒤에서 다시 이야기하겠지만, 할리우드 멜로영화 <러브 어페어>(감독 글렌 고든 캐런, 1994)에서 주인공 워런 비티와 아네트 베닝이 가까워진 모레아 섬을 기억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커플 테라피: 대화가 필요해>(2009)에서는 위기의 부부 네쌍이 보라보라 섬에서 금실을 회복했을 정도니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의 섬들은 사랑이 꽃피는 묘약을 가진 게 분명하다. 타히티는 남태평양에 위치해 있다. 남반구인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남미 방향으로 이동하면 보인다. 그곳에 타히티, 보라보라, 모레아를 포함한 118개 섬이 옹기종기 모여 있으며, 이들을 프랑스령 폴리네시아라고 부른다. 지도로 보면 한국에서 거리가 만만치 않은 듯하지만, 일본에서 한번만 갈아타면 되니 그리 먼 것도 아니다. 어쨌거나 타히티에 간 건 제13회 오세아니아다큐멘터리영화제(이하 피포(FIFO, FESTIVAL INTERNATIONAL DU FILM DOCUMENTAIRE OCEANIEN))를 취재하기 위해서다. 매년 오세아니아 지역에서 만들어진 다큐멘터리가 이곳에 모이는 까닭에 피포가 이 동네에선 가장 큰 영화제라고 한다. 11시간의 비행 끝에 타히티의 파아아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입국 심사를 받기 위해 공항 건물에 들어서자 한 무리의 전통 악사들이 음악을 연주하며 흥겨운 노래를 불러주었다. 공항에 마중 나왔던 영화제 스탭이 색색의 꽃목걸이를 목에 걸어주었다. 낭만적인 환대를 받자 흥이 절로 났다. ‘이아 오라 나’ (Ia Ora na, 안녕), 타히티! 피포만의 전통을 만나다 모레아 섬 (Mo’orea) 투어 개막식이 이틀이나 남았는데 영화제 일정은 이미 시작됐다. 1월31일 일요일, 피포 왈레스 코트라 집행위원장, 심사위원장인 압데라만 시사코 감독을 포함한 경쟁부문 심사위원 7명, 경쟁부문에 초청된 감독, 프로듀서, 피포 주요 스탭들과 함께 모레아 섬으로 소풍을 갔다. 앞에서 짧게 언급한 대로 모레아 섬은 <러브 어페어>의 배경이 된 섬이다. 비행기 안에서 우연히 만난 마이크 갬브릴(워런 비티)과 테리 매케이(아네트 베닝)의 원래 목적지는 호주다. 하지만 비행기는 엔진이 고장나는 바람에 남태평양의 작은 섬나라 쿡아일랜드에 불시착한다. 그곳에서 마이크는 숙모가 있는 타히티로, 테리는 하와이로 가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테리는 하와이행 배 시간이 맞지 않아 마이크와 함께 타히티로 간다. 타히티에서 두 사람이 배를 타고 간 곳이 바로 모레아 섬이다. 타히티의 수도 파페에테에서 배로 50분밖에 걸리지 않는 모레아 섬은 영화에서 소개된 대로 무척 아름다웠다. 보라보라에 비하면 한국 사람에게 아직 덜 알려져 있지만, 현지인의 말에 따르면 모레아는 보라보라 못지않게 진주 같은 곳이라고 한다. 명성대로 육지는 숲이 울창한 산들이 줄지어 있었고, 바다는 에메랄드빛을 반짝반짝 냈다. 상어, 가오리가 지나가는 모습이 선명하게 보일 만큼 바다 또한 투명했다. 보트를 타고 남태평양 한가운데에 있는 라군에 당도해 사람들과 함께 물속으로 첨벙 뛰어든 것도 그래서다. 수심이 성인 남자의 허리밖에 되지 않아 수영을 못하더라도 충분히 라군을 즐길 수 있었다(상어와 가오리가 해치지 않는다). 이런 곳에서 자기소개를 차례로 하고 나니 사람들과 금세 친해졌다. 왈레스 코트라 집행위원장은 “영화제가 시작되면 각자 일정이 바빠서 친해질 시간이 없지 않나. 그런 의미에서 마련한 소풍으로, 피포만의 전통”이라고 자랑했다. 이날 알게 된 사람들 덕분에 영화제 기간 동안 취재하는 데 꽤 수월했다. 영화제 운영 시스템을 먼저 파악해 짜인 일정대로 기계적으로 움직여야 하는 칸이나 베를린 같은 큰 영화제와 달리 이곳은 사람과 먼저 친해지면 편하다. 영화가 어땠냐고 서로 물어봐주고, 점심을 함께 먹고, 매일 밤 열리는 와인 파티에 나가 쉴 새 없이 수다를 나눌 수 있었으니까. 관객과의 영상 인터뷰 제13회 피포 개막 2월2일 아침 8시. 시차 적응을 못해 밤새 잠을 설친 탓에 졸린 눈으로 영화제가 열리는 메종 드 라 컬처로 향했다. 상영관 두개로 이루어진 이곳은 이른 아침부터 개막식 준비로 시끌벅적했다. 폴리네시아 원주민 의상을 입은 건장한 청년들은 북을 둥둥 울렸고, 젊은 마오리족은 전통 춤 하카를 선보이며 관객을 열렬히 환영했다. 밤에 진행되는 보통 영화제의 개막식과 달리 피포의 개막식은 하루의 시작과 함께한다는 점에서 흥미로웠다. 레드 카펫 행사가 없는 대신 형형색색의 꽃무늬 전통 의상을 입은 여성들이 무대에 올라 영화제 주제곡을 합창했다. “피포~ 피포~ 피포~ 피~ 포.” 반복되는 가사 때문에 하루 종일 귀에 울릴 만큼 중독성 있는 곡이었다. 소박하고 귀여운 개막식이라고나 할까. 개막식 행사가 그랬듯이 피포는 13년 동안 이어져온 영화제 전통을 고집 있게 지켜오고 있는 영화제다. 서른명이 넘는 피포 스탭들은 피포를 찾은 관객을 세심하게 배려했다. 영화제가 열리는 타히티의 수도 파페에테 구경을 하다가 15분 늦게 극장에 도착한 적이 있다. 상영관을 지키고 있던 자원 활동가가 “늦었는데 영화 볼 수 있냐고? 물론이지. 그런데 상영 도중에 문을 열면 관객의 감상에 방해가 될 거야. 그러니 상영관 뒤에 있는 강의실에도 영화를 동시에 틀고 있으니 거기 가서 보지 않을래?”라고 안내해주었다. 피포에서만 볼 수 있는 이벤트도 있었다. 영화 상영이 끝난 뒤 자원 활동가가 한 관객을 골라 아이패드 영상 인터뷰를 요청한다. 관객은 아이패드에 연결된 수화기를 들고 영화가 어땠는지 말하면 된다. 친구나 가족과 전화 통화하듯이 말이다. 기자 역시 자원 활동가에게 붙잡혀 <넥스트 골 윈즈>(감독 마이크 브렛•스티브 재미슨, 2014)의 감상 소감을 말해야 했다. 메종 드 라 컬처를 든든하게 지키는 큰 나무 아래에서 관객과 감독이 만나 대화를 나누는 자리도 인기 만점이었다. 감독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몰려든 관객 덕분에 빈 의자 잡기가 하늘의 별따기였다. 학생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도 있었다. 시나리오를 쓰고 싶은데 어떻게 쓸지 몰라 고민하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시나리오 마라톤 대회가 열렸다. 참가자들이 오전 9시부터 오후 7시까지 멘토들의 도움을 받아 3분짜리 단편영화의 시나리오를 써야 하는 대회였다. 이 밖에도 사진을 촬영하면 피포 포스터와 합성해 인화해주는 부스는 줄을 서야 할 만큼 많은 사랑을 받았고, 어린아이들은 드론 촬영 설명회의 단골손님이었다. 영화제를 쭉 둘러보니 영화 상영부터 부대 행사까지 모든 프로그램의 중심은 첫째도 관객, 둘째도 관객, 셋째도 관객이었다. 지금 세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경쟁부문 상영 경쟁부문에 상영된 다큐멘터리 11편의 완성도가 생각했던 것보다 높았다. 호주(3편), 뉴질랜드(3편), 프랑스령 폴리네시아(2편, 이중 한편인 <튜파이아>는 뉴질랜드와 공동 제작), 뉴칼레도니아(1편), 하와이(1편), 영국(1편) 등 오세아니아 여러 지역에서 온 작품들은 현재 이 지역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축소판이었다. <힙합어르신, 라스베이거스에 가다>(2014)는 평균 연령대가 90대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힙합에 도전하는 이야기다.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들이 낯선 힙합 리듬에 맞춰 인공관절을 꺾는 걸 보면서 도전에는 나이가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주인공인 27명의 할머니, 할아버지의 캐릭터가 개성 있고, 서사가 단순해 관객 반응이 좋았다. 축구 팬으로서 앞에서 짧게 언급했던 <넥스트 골 윈즈>도 재미있었다.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최하위권에 있는 미국령 사모아 축구대표팀의 월드컵 지역 예선 1승 도전기를 그린 작품이다. <평화의 대가>(감독 킴 웨비, 2015)는 뉴질랜드 정부를 상대로 7년간의 투쟁을 벌인 마오리족 활동가인 테임의 사연을 그린 작품이다. 뉴질랜드 경찰이 마오리족 공동체 문화를 문제 삼아 테임을 테러리스트로 탄압했다. 테임은 “마오리족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건 정부에 위협을 가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저 우리의 문화와 언어를 공유하기 위해서다. 정부가 나를 테러리스트로 규정하는 걸 이해할 수 없다”고 저항했다. 카메라는 정부를 상대로 한 테임의 싸움을 7년 동안 성실하게 따라다닌다. <평화의 대가>가 뉴질랜드의 사회문제를 다룬 작품이라면 <더 그라운드 위 원>(감독 크리스토퍼 프라이어, 2015)은 뉴질랜드의 어느 시골 마을에 있는 럭비팀을 그린 사적 다큐멘터리다. 흑백으로 촬영된 이 작품은 <넥스트 골 윈즈>처럼 축구팀의 도전기를 그리는 이야기가 아니다. 럭비를 하고, 아이를 키우고, 젖소를 키우고, 술을 마시고, 성인식을 치르는 등 럭비팀 구성원의 일상을 통해 삶의 희로애락을 담아낸다. 이 밖에도 <프리즌 송>(감독 조슈아 길버트, 2015)은 호주 베리마 지역의 한 감옥이 배경이다. 수감자의 80%가 원주민인 이곳에서 수감자들은 자신의 사연을 직접 노래로 부른다. 영화의 소재나 주제에 어울리는 형식을 고민한 작품이 많았다는 점에서, 상영작 모두 한국 관객을 만날 기회가 생기면 좋겠다. 놓칠 수 없는, 끝에서 끝까지의 타히티 타히티 섬 일주 출장 마지막 날. 거금을 들여 현지 택시기사를 일일 가이드로 고용했다. 여행사가 운영하는 투어 프로그램에 참여할까 고민하다가 타히티 사람들이 즐겨찾는 곳이 궁금해 여행 방식을 바꿨다. 여행을 함께하기로 한 택시기사는 에이미. 타히티에서 나고 자란 중국계 아저씨다. 그에게 주문한 건 두 가지다. 파페에테에서 출발해 서쪽 해안도로를 따라 타히티이티(Tahiti iti)까지 간 뒤 동쪽 해안도로를 따라 타히티 섬을 한 바퀴 돌 것, 현지 사람들이 주말에 가족과 함께 놀러가는 장소를 소개해줄 것. 타히티 섬은 표주박 모양인데 북쪽의 큰 섬을 타히티누이(Nui는 크다는 뜻이다), 작은 섬을 타히티이티(iti는 작다는 뜻이다)라 부른다. 두 섬은 표주박의 잘록한 부분에 해당하는 타라바오 동네에서 좌우로 나뉜다. 어쨌거나 택시 여행은 성공적이었다. 달리는 내내 도로의 왼편에는 높은 산들이, 오른편에는 에메랄드빛의 라군이 펼쳐졌다. 어느 한 군데 빼놓을 수 없지만 서핑을 좋아한다면 타히티이티 남쪽에 있는 테아후푸를 추천한다. 파도가 세고 빨라서 세계 서핑 대회가 많이 열리는 곳이라고 한다. 타히티누이와 타히티이티가 이어진 모습을 보고 싶다면 테아후푸 근처에 있는 타라바오 고원을 오르면 된다. 수백 마리의 소들이 풀을 뜯고 있는 풍경을 뒤로하고 고원 꼭대기에 오르면 전망대가 있는데 이곳에서 두개의 타히티 섬이 연결된 장관이 한눈에 들어온다. 마지막으로 들른 곳이 타히티누이 동쪽 해변가에 있는 아라호호 바람구멍. 절벽 아래에 웅장한 바람 소리와 함께 바닷물을 내뿜는 바위구멍이다. 화산폭발로 생긴 검은 모래 해변이 절벽 아래에 있어 현지인들이 나들이 장소로 즐겨찾는 곳이라고 한다. 에필로그 하이킹한 뒤 계곡 구경, 보라보라, 마우피티 섬 탐방, 테아후푸에서 서핑 강습 등등. 시간이 좀더 있었더라면 해보고 싶은 것들을 쭉 나열해놓고 나니 무척 아쉽다. 아, 다음에는 6월과 10월 사이에 타히티를 찾아 고래 구경을 하고 싶다. 오세아니아 사람들을 영화로 하나로 왈레스 코트라 피포 집행위원장 <프랑스 텔레비전>의 프랑스령 폴리네시아 지역 감독이기도 한 왈레스 코트라 집행위원장은 지난 13년 동안 피포를 이끌어왔다. 그가 영화제를 찾은 관객과 손님을 각별하게 챙긴 덕분에 피포는 오세아니아를 대표하는 영화제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시상식이 열린 2월5일 오후, 그를 만나 올해 영화제가 어땠는지부터 물었다. “폐막까지 아직 이틀이나 남았는데 유료 티켓 관객수가 3만5천명이 넘었다. 기분 좋다. (웃음)” -영화제가 올해로 13회째다. 영화제를 준비하면서 가장 주력했던 건 무엇인가. =비단 올해만의 컨셉은 아니다. 피포는 남태평양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더욱 가깝게 지낼 수 있는 장이 되어야 한다. 남태평양 지역은 섬이 많아서 다른 섬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알기가 쉽지 않다. 오세아니아 사람들이 서로 가깝게 지내고, 소통하기 위해서는 이들을 하나로 묶을 만한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게 피포였다. -13년 전, 피포를 처음 만든 것도 그런 이유에서인가. =그렇다. 당시 지역 방송국인 <프랑스 텔레비전>에서 일하고 있었다. 영화를 만드는 친구와 함께 피포를 만들었다. -왜 다큐멘터리영화제였나. =영화를 만드는 데 비용이 많이 들어가니까. 반면 다큐멘터리는 영화에 비하면 제작 비용이 적다. 오세아니아 지역은 텔레비전 산업 규모가 작다. 누구나 만들 수 있는 다큐멘터리가 이 지역에 적합했다. -영화제를 운영하면 어떤 점이 가장 힘든가. =오세아니아 지역은 섬들이 많다. 그러다보니 이동 수단이 비행기라 비용 부담이 만만치 않다. 또, 피포 상영작이 인터넷을 통해 지역 사람들에게 더 많이 소개되길 원하는데 아직은 부족한 게 현실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나. =물론이다. 프랑스령 폴리네시아 정부를 포함한 타히티관광청, 에어 타히티누이 등 기관과 기업으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고 있다. -혹시 부산국제영화제를 알고 있나. =아주 오래전에 김동호 명예집행위원장이 피포를 찾은 적이 있다. 최근 부산국제영화제의 위기와 관련한 소식에 대해 들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다른 영화제들이 부러워하는, 오랜 시간 힘들게 이뤄온 역사를 왜 그리 쉽게 무너트리려 하는지, 많이 걱정된다. -앞으로 피포의 목표는 무엇인가. =늘 그래왔듯이 피포를 통해 오세아니아 사람들이 하나로 연결됐으면 좋겠다. 우리 역시 늙으면 노인이 된다 알렉스 리, 관객상 수상작 <힙합어르신, 라스베이거스에 가다> 프로듀서 -노인들이 힙합에 도전하는 아이디어가 인상적이었다. 소재의 어떤 면이 다큐멘터리로 만들면 적합하다고 생각했나. =뉴질랜드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노인 이야기는 어느 곳이나 똑같지 않나. 그들은 항상 자녀나 손주가 찾아오기만을 기다리지만 아무도 오지 않으면 외로운 데다가 대화 상대는 없고. 그렇다고 노인이 인생에서 무언가를 기대하지 않는 건 아니잖나. 노인 이야기이지만 우리 역시 늙으면 그들이 된다. -촬영을 하면서 어려웠던 점은 무엇인가.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건강 문제가 걱정됐다. 영화를 만드는 데 들어가는 비용과 그들이 힙합 대회에 참가하는 데 필요한 비용 문제가 있었다. -다음 작품은 무엇인가. =<아시안 디아스포라>(가제)라는 프로젝트다. 세계 각국의 아시아 커뮤니티에 관심이 많다. 가령, 다른 나라에서 살아가고 있는 한국 사람들의 모습이 궁금하다. 최근에 지켜보고 있는 문제는 고기잡이배에서 노예처럼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다. 가난한 나라의 노동자를 2, 3년 동안 배에서만 머물게 하며 일을 시킨다. 휴식도, 물도, 식량도 없이 말이다. 그러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아무도 모르게 바다에 빠트려 죽인다. 현대판 노예이야기인데 잔인하지 않나. 소재에 대한 진실한 접근이 중요하다 심사위원장 압데라만 시사코 감독 인터뷰 올해 경쟁부문 심사위원장은 아프리카 말리 출신인 압데라만 시사코 감독이 맡았다. 그가 연출했던 <팀북투>(2014)도 개막식 하루 전 특별상영됐다. <팀북투>는 말리에 위치한 팀북투라는 동네에서 한 가족의 가장이 살인사건에 휘말리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로, 2014년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상영된 바 있다. 개막식이 열리는 2월2일 아침, 호텔 식당에서 함께 식사를 하며 나눈 이야기를 전한다. -심사위원장을 맡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 =피포에서 심사위원장을 맡아달라는 연락이 왔다. 오세아니아 지역의 현실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소개하는 영화제라는 얘길 듣고, 어떤 영화들이 있을까 궁금했다. 좋은 작품을 만날 수 있으니 맡지 않을 수 없었다. -그전에도 영화제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적이 있나. =없다. 심사위원으로 영화제를 찾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항상 영화를 만들기만 해서 다른 사람이 만든 영화를 보고 어떤 작품인지 생각하는 것도 재미있겠다 싶었다. 물론 어깨도 무겁지만 말이다. -어제 당신의 영화 <팀북투>도 특별상영됐다. =영화를 어떻게 봤나. -이슬람 강경주의자들이 장악하고 있는 팀북투라는 지역이 현실과 어울리지 않게 아름답게 묘사돼 슬펐다. 개인의 자유가 엄격하게 제한되고 있는 현실이 충격적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개인이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저항하는 마지막 장면은 응원해주고 싶었다. =맞다. 그런 메시지를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 만든 영화다. -촬영은 팀북투에서 진행했나. =팀북투는 위험한 곳이라 다른 곳에서 찍어야 했다. 그럼에도 군대의 경호를 받았다. 경찰 말고 군대. (웃음) 촬영은 6주에 걸쳐 진행됐지만 완성할 때까지 한시도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심사할 때도 <팀북투> 같은 영화에 힘을 실어줄 생각인가. =하하. 소재를 진실되게 다루는, 좋은 작품을 만나고 싶다. -차기작은 무엇인가. =아직 시나리오를 쓰고 있는 중이라 자세하게 얘기할 수 없다. 아프가니스탄과 중국이 배경인 이야기다. 그래서 3월에 중국에 시나리오를 쓰러갈 계획이다. 올해 칸국제영화제에서 투자자들과 미팅 약속이 있다. 내년 촬영이 목표다. (취재지원) 프랑스 문화원 http://www.institutfrancai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