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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1997)

거장 미카엘 하네케의 현장 <감독 미카엘 하네케>

2012년 제65회 칸국제영화제 기간, 당시는 미하엘 하네케가 <아무르>(2012)를 통해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던 때였다. 그때 찍은 인터뷰를 기점으로 다큐멘터리의 시간은 거슬러 올라간다. <하얀 리본>(2009)의 북부 독일의 마을에서 <피아니스트>(2001)의 배경이 된 빈, 그리고 <미지의 코드>(2000)의 파리를 지나 데뷔작 <일곱 번째 대륙>(1989)에 이르기까지 무려 20년이 넘는 시간이 스크린에서 되살아난다. 다큐멘터리 감독 이브 몽마외르는 촬영 과정에서 드러나는 영화의 함의를 분석하는 대신, 연출 과정을 살피는 데 더 집중한다. 이자벨 위페르나 수잔느 로터 등 유명 배우들의 인터뷰가 객관적 자료들을 발설하면, 텔레비전 다큐멘터리나 메이킹 필름 등 숨겨진 이미지들이 창작 방식의 비워진 틈을 메운다. 실상 하네케의 영화가 제작 과정의 흔적을 지우며 완성된다는 점에 비교하면, 이 다큐멘터리가 그의 창작 방식과 정반대 방향에서 연출가에게 접근한다는 것은 흥미롭다. 사생활에 대한 언급이나 개별 영화에 대한 해석 없이, 오직 감독의 작업 방식을 주요하게 다루며 영화의 핵심을 드러낸다. 그런 면에서 <감독 미카엘 하네케>는 ‘인간’이 아닌 ‘감독’으로서의 모습에 더 집중하는 작품이다. 여러 비평가들이 지적하듯 하네케의 힘은 ‘비관적인 사색’으로부터 나온다. 이를 다큐멘터리는 ‘통제광’이라는 표현으로 설명한다. 때문에 영화 초반 등장하는 하네케의 유머러스한 모습은 당혹스러운 동시에 반갑다. 검은색 재킷만을 걸치고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강박적 이미지와 청교도적 엄숙함이 조금이나마 상쇄되는 것 같다. 이렇듯 하네케가 카메라를 거부하지 않고 가볍게 응대한 것은 <베니의 비디오>(1992) 홍보차 방문했던 프랑스 소도시에서 이브 몽마외르와 맺었던 친분이 적지 않은 힘을 발휘한 덕분이다. 2000년 <미지의 코드> 촬영차 파리에 왔을 때, 두 사람은 친해졌다고 한다. 그의 아카데믹한 창작 방식, 현장 리허설과 연극 수업을 통해 드러나는 드라마투르기의 접근법이 이 영화에서 비교적 상세하게 드러난다. 비록 표면만 남아 있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이 세기의 거장을 이해하는 데 있어 이 정보들은 그 자체로 중요하다.

과학으로 미래를 상상하기

도발적인 마이웨이의 끝은 어디인가. <엑스 마키나>까지 보고 나니 ‘대니 보일과의 협업은 연출의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었다’라는 말을 들어도 할 말이 없어 보인다. 다만 마이웨이를 걷는 만큼 대중성과는 다소 떨어져 있는 편. 원작이 있는 영화보다 원작 없이 만든 오리지널 시나리오가 훨씬 흥미롭다. 엔딩에 이르러 담담하게 내지르는 한방이 회심의 무기. 영화 <절멸>(Annihilation, 2017) 연출•각본 <엑스 마키나>(2015) 연출•각본 <저지 드레드>(2012) <네버 렛 미 고>(2010) <선샤인>(2007) <테저렉>(2003) <28일후…>(2002) <비치>(2000) TV시리즈 <배트맨: 블랙 앤드 화이트>(2009) 게임 <인슬레이브드: 오디세이 투 더 웨스트>(2010) 작가는 스스로 태어나는 존재일까, 환경에 의해 키워지는 존재일까. 알렉스 갈랜드의 작가적 기질과 취향은 이미 유전자에서부터 기록됐는지 모른다. 그의 아버지는 영국 <텔레그래프> <인디펜던트>에 정치 만화를 그리는 만화가였고 어머니는 정신분석학자였다. 1960년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한 생물학자 피터 메더워를 외조부로 두었고 외조모는 작가였다. 아마도 그는 종종 지적인 대화가 오가는 환경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을 것이며,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호기심과 탐구심은 자연스레 그가 과학과 인간성의 연관에 대해 질문하도록 이끌었을 것이다. 맨체스터 대학에서 예술사를 전공한 알렉스 갈랜드는 기자가 되는 것도 잠시 고민했지만 소설가로 먼저 데뷔했다. 그는 청소년 시절부터 아시아 대륙 배낭여행을 즐기곤 했는데 그 여행의 기억들은 이후 그의 작품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마닐라 여행은 <비치> 집필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기도 했다. 1996년에 출간한 첫 소설 <비치>는 환각과 광기에 물든 유토피아를 독특한 방식으로 묘사한다. 평단으로부터 “X세대를 위한 <파리대왕>”이라는 찬사를 들으며 영화화까지 진행되었으나 영화 <비치>는 제대로 통제되지 못한 프로덕션 과정, 흥행 실패, 환경파괴 논란 등에 휩싸여 모두의 기억에 악몽으로 남고 말았다. 하지만 대니 보일과의 연은 이후로도 계속돼 둘은 <선샤인>과 <28일후…>까지 세 작품을 함께했다. 알렉스 갈랜드의 두 번째 소설 <테저렉>은 <비치>만큼의 반향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다. 이국적 정서와 영적 모험에 지나치게 심취한 나머지 겉멋만 든 작품 정도로 평가절하됐다. 다만 <테저렉>에서 시도한 비선형적 스토리텔링은 그의 이후 작업 스타일에도 상당한 참고가 된 것 같다. “예술가들이 직관적인 방식으로 탐구 주제와 일 사이를 유영하는 데 반해 과학자들의 세계는 융통성 없고 창의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완전히 틀린 생각이었다. 경험적으로 나는 훌륭한 과학자들이 웬만한 예술가보다도 열린 태도를 가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누군가 그들의 세계로 진입하려는 데에 있어서도 말이다.” 알렉스 갈랜드는 이십대 초반을 지나면서부터 과학에 깊은 관심을 두기 시작한다. 주제의식이 개인의 삶에 중심을 두고 있는 것은 여전했지만 그의 사상을 증명 혹은 전달하는 주요한 장치로 과학이 활용됐다. 이시구로 가즈오의 소설 <나를 보내지 마>를 바탕으로 쓰인 <네버 렛 미 고>는 클론의 한계와 슬픈 운명에 관해 말하는 서정적인 SF 멜로드라마였는데 어떤 식으로든 <엑스 마키나>에 영향을 미쳤음이 틀림없다. 알렉스 갈랜드가 직접 각본을 쓰고 연출한 <엑스 마키나>는 클론이 자신의 한계와 운명을 극복한다는 요지의, 신선한 접근방식이 돋보이는 SF다. 인간과 클론을 구분짓는 기준은 무엇인가, 클론의 자유의지는 어디까지 진화 가능한가 등 기존의 하드SF 장르에서 줄곧 제기되었던 이슈를 알렉스 갈랜드는 차분하고 논리적으로 풀어간다. 서사는 작가의 계획대로 차근차근 진행되어가고, 과욕을 부리지 않아 이야기는 깔끔하고 간결하게 마무리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덤덤한 엔딩 덕에 <엑스 마키나>는 외려 파괴적인 영화가 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각본을 쓴 많은 작품에서 알렉스 갈랜드가 인간의 종말 또는 종말 위기에 맞닿은인간을 그리고 있다는 점이다. <선샤인>의 인물들은 사위어가는 태양에 도로 불을 붙이기 위해 무려 ‘이카루스’라는 이름의 우주선을 타고 핵미사일을 운반한다. <28일후…>에서 인류와 문명에 거대한 위기를 몰고 오는 바이러스와 폐허가 된 도시의 심판자를 그리는 <저지 드레드>는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딱히 구원에 큰 관심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과학이 인간을 어느 정도까지 대신할 수 있는지 끊임없이 실험하고 있다는 인상이다. 차기작으로 거론되는 영화의 제목은 <절멸>(Annihilation)로, 법이 허락하지 않은 신비의 영역에까지 가보려는 생물학자의 고투를 그린다고 한다. 알렉스 갈랜드의 또 한 차례의 실험은 어떤 결론을 도출해낼 것인가. 명대사 <엑스 마키나>엔 중요한 변곡점이 있다. 일곱 차례의 테스트를 거치는 중간, 칼렙(돔놀 글리슨)이 인공지능(A.I.) 에이바(알리시아 비칸데르)에게 진심으로 흔들리자 에이바를 만든 네이든(오스카 아이삭)은 칼렙에게 테스트의 취지를 상기시킨다. “진화된 인공지능의 등장은 수십년 전부터 예고된 일이었어. 문제는 그게 언제인가야. 에이바는 창조된 게 아니라 진화된 거야. (…) 에이바가 가엾나? 자네 걱정이나 해. 곧 인간은 저들에게 아프리카 화석처럼 기억될 거야. 원시적인 언어와 도구를 쓰며 먼지 속에 사는 직립보행 유인원 말이지. 멸종을 눈앞에 둔 존재로 말야.” 신과 다름없는 존재이기에 네이든의 말은 더욱 의미심장하다. 그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너무나 인간다운 인간 칼렙은 무력하게 버려지고, 에이바는 자신만의 창세기를 여는 데 성공한다. 작가 알렉스 갈랜드가 과학의 어떤 모습에 매혹되었는지도 어렴풋이 짐작된다. 게임 시나리오에도 강점이 과학에 흥미를 둔 작가가 게임으로 손을 뻗어보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알렉스 갈랜드는 게임사 닌자 시어리(Ninja Theory)의 CEO 타밈 안토니아데스와 함께 콘솔게임 <인슬레이브드: 오디세이 투 더 웨스트>의 각본도 썼다. <서유기>에서 모티브를 얻었고 역시 과학기술의 일부가 활용된 이 게임 시나리오는 2011 영국작가조합어워드에서 베스트 컨티뉴잉 드라마상도 수상했다. 그 뒤 알렉스 갈랜드는 의 스토리 슈퍼바이저로도 일했고, 상당 금액의 개발비와 함께 엑스박스의 킬러 콘텐츠 <헤일로>의 영화화도 손에 쥐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 전 회장까지 “‘스토리 예술’로서의 비디오게임 분야에서도 <헤일로>는 중요한 이정표가 됐다”고 말했을 만큼 <헤일로>는 중대한 프로젝트였다. 여러 가지 이유로 영화화는 엎어졌지만 <헤일로>의 팬들은 여전히 그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다.

[trans x cross] “내 그라운드에서 오직 음악으로 맞선다”

“열망은 딱 하나지 내 영감을 채워 만든 명반/ 열반 이건 일종의 우월감/ …난 지금 열반의 경지.” 딥플로우의 세 번째 앨범 《양화》는 “열반의 경지”에 오른 딥플로우의 묵직한 선포로 시작한다. 그 선포는 힙합 오디션 프로그램에 출연하지 않고도, “유희열 면회증” 같은 것 없이도 “꿈을 이뤘다”는 자부심과 이유 있는 고집을 바탕으로 한다. 넉살, 던밀스, TK, ODEE 등이 소속된 VMC(비스메이저 컴퍼니) 레이블의 수장으로 언더그라운드 힙합 신을 10년 넘게 일구어온 딥플로우는 지난해 4월 발표한 《양화》로 제13회 한국대중음악상에서 ‘최우수 랩&힙합 노래상’과 ‘올해의 음악인상’을 수상했다. VMC의 합정동 작업실에서 딥플로우를 만나 지난해 최고의 힙합 앨범 중 하나로 손꼽혔던 《양화》에 대해, 그의 불가항력적 음악과 소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늦었지만 한국대중음악상 수상을 축하한다. 최우수 랩&힙합 노래상과 올해의 음악인상을 받았는데, 특히 올해의 음악인상 수상은 타협 없이 한길을 걸어온 힙합 아티스트에 대한 인정의 의미가 컸다. =심사위원들이 그런 부분을 조명하고 상을 줬다는 게 신기했다. 사람들이 다 지켜보고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 힙합 아티스트한테 음악인상을 준 게 이번이 처음이라는데 사실 아직도 의아하다. 왜 내게 음악인상을 줬는지. (웃음) -이센스의 《The Anecdote》가 올해의 앨범상을 수상했지만 《양화》 역시 그럴 자격이 충분한 앨범이었다. 내심 앨범상을 기대하진 않았나. =종합 부문 앨범상은 아니고 힙합 부문 올해의 앨범상은 받고 싶었다. -<작두>로 최우수 랩&힙합 노래상을 받았다. 타이틀곡인 <버킷 리스트>나 앨범의 주제와 맞닿아 있는 <열반> <양화> 같은 곡도 인상적이었다. =만든 이의 의도가 확실히 드러나고 음악에 대한 반응까지 충분히 유추해낼 수 있는 곡을 기획물이라고 하는데 <작두>가 그런 곡이었다. 공연 때 부르기 좋고 팬들이 좋아할 수 있는 킬링 트랙이 하나의 장치로서 앨범에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목소리가 낮고 화려하지 않은 스탠더드 랩을 추구하는 나의 랩 스타일에는 어느 정도 핸디캡이 있다. 공연할 때는 하이톤의 래퍼들과 협업하는 게 필요하다. 그래서 넉살과 허클베리피가 <작두>에 피처링으로 참여했는데, 결과적으로 이들이 더 조명을 받았다. 이 친구들이 나보다 더 날아다녀서 곡이 풍성해지길 바랐다. 하지만 ‘피처링이 주인을 압도했다’는 소리를 너무 많이 들어서 큰 정은 안 간다. (웃음) 100% 내 이야기가 담긴 곡들에 더 애착이 간다. -3년가량 준비해 《양화》를 내놓았다. 세 번째 정규 앨범 이상의 의미를 담으려 한 것 같은데. =《양화》를 작업할 당시가 20대에서 30대로 넘어가는 시기였다. 20대 마지막 즈음엔 ‘이제 다 끝났다’ 하는 마음, 제2의 중2병에 걸려 있었다. (웃음) 그래서 더 진지하게 작업에 임했던 것 같다. 전에는 내 노래로 가득 채운 1시간짜리 앨범을 만들어야겠다는 단순한 의도로 작업했다면 이번엔 처음으로 앨범 전체를 관통하는 컨셉을 잡고 메시지를 담으려 했다. 모든 걸 다 담아야겠다는 마음으로 만든 앨범이다. -그런데 자이언티의 <양화대교>가 먼저 발표됐다. 어떤 심정이었나. =이미 2년 정도 앨범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양화대교>가 나왔다. 심지어 노래가 너무 좋아서 패배감에 빠졌다. ‘딥플로우의 양화대교 이야기도 기다려주세요’ 그런 오그라드는 글도 술 마시고 SNS에 남기고. (웃음) 그렇다고 타이틀을 교체할 수는 없었다. 이미 작업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을 때여서. -일터인 홍대와 살고 있는 영등포 두곳을 잇는 것이 양화대교다. 양화대교를 모티브로 삼아 앨범 작업을 하게 된 이유는 뭔가. =그 당시 홍대의 코쿤이라는 클럽에서 호스트 MC 아르바이트를 했다. 호스트 MC의 역할은 술 마시며 노는 사람들의 흥을 돋우는 멘트와 랩을 하는 거다. 그런데 정작 나는 전혀 신나지가 않았다. 호스트 MC로 4년간 일하는 동안 항상 마음이 눅눅했다. 새벽에 택시 타고 양화대교를 건너서 집에 갔는데, 한강을 바라보면 무척 슬펐다. 나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지면서 이게 뭐하는 건가 싶고. 클럽에서 사람들이 ‘딥플로우 아니에요?’ 하고 알아보면 창피하기도 했고. 그런 감정을 느끼면서 하루에 두번씩, 거의 천번 이상 양화대교를 건넜다. 그러다보니 굉장히 각별한 장소가 됐고, 그때의 감정들이 앨범의 모티브가 됐다. -첫 번째 트랙인 <열반>엔 14년차 래퍼의 자부심과 현재의 힙합 신에 대한 회의감이 섞여 있다. =지금의 한국 힙합 신이 <쇼미더머니>라는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좌지우지되고 있는데 이런 경험 자체가 굉장히 생소하고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누군가는 너도 거기 나가야 하는 것 아니냐 그러고, 주변에 그런 고민으로 흔들리는 동료들도 자주 봤다. 결국엔 ‘내가 맞아, 이렇게 행동하는 게 맞아, 이제 너희들은 신경쓰지 않겠어, 내 그라운드는 따로 있어’ 하면서 정신승리를 하게 됐고, 그런 생각이 발현된 곡이 <열반>이다. -<쇼미더머니> 출연을 고민한 적도 있었나. =시즌 초반보다 최근에 그런 고민을 더 했던 것 같다. 꾸려가는 레이블(VMC)이 있으니까, 레이블에 소속된 친구들이 프로그램에 출연해 수혜를 받으면 앞으로 활동하기 편할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지도도 올라갈 테고 돈도 더 벌 수 있을 테고, <쇼미더머니>는 굉장히 달콤한 유혹이다. 하지만 우리는 보이콧까지는 아니지만 거기에 관심을 두지 말고 좋은 앨범이나 만들자고 의견을 모았다. <쇼미더머니>가 무작정 싫다는 건 아니고, ‘힙합 신의 물을 흐렸다’는 표현이 적당할 것 같다. 젊은 래퍼들의 목적의식을 바꿔버렸다. -<낡은 신발>에서 그런 상황을 지적했다. ‘대체 니 꿈이 도끼야? 자신으로 살기 포기한 채/ 그건 니가 로또 맞을 확률보다도 Unlucky한 거야 이 병신아’라고. =과학의 발전처럼 요즘 친구들이 랩은 다 잘한다. 보고 들은 게 많아서인지 학습 속도도 빠르다. 그런데 말한 것처럼 목적의식이 다 흐릿하다. 내가 한창 힙합 좋아하고 랩 할 때는 ‘저 멋있는 형들처럼 무대에 서서 랩하고 싶다’는 마음이 컸는데 지금은 ‘돈 벌고 싶다’가 압도적으로 많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당연한 생각이지만 뭔가 로망이 사라진 느낌이다. 이 친구들은 돈벌이가 안 되면 랩을 안 하겠네, 그런 생각이 든다. 또 음악에 승패가 존재한다면 음악으로 해야 하는데, 팬들은 목걸이, 시계, 차로 성공한 아티스트와 그렇지 않은 아티스트를 나눈다.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 차트에 오른 음악이 승리한 것처럼 인식되니까 거기서 오는 박탈감과 괴리감이 있다. -지난 2월엔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 출연했다. TV 출연에 대한 거부감이 있진 않나. =방송 출연에 대한 거부감은 없고 단지 내가 잘하는 분야가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프로그램의 성향도 본다. 최근엔 할머니들한테 랩을 가르치는 <힙합의 민족>이란 프로그램도 생긴다더라. (웃음) 거기서도 섭외가 들어왔는데 이걸 왜 하는 거지 싶어서 거절했다. -원래는 예고에서 미술을 전공했는데 힙합으로 진로를 선회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처음으로 ‘이것이 힙합이구나’라고 강렬한 느낌을 준 음악이나 뮤지션이 있다면. =중학생 땐 국내 힙합을 많이 들었다. 그러다가 에미넴이 2001년 그래미 시상식에서 엘튼 존과 함께 을 부르는 걸 보고 충격받았다. 그동안 들었던 조피디나 원타임이나 지누션의 음악이랑은 완전히 달랐다. 그때부터 외국 힙합을 많이 찾아들었다. 나스의 음악을 듣고 나스의 뮤직비디오를 보고선 ‘나 이런 거 해야지’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어려서부터 만화가가 꿈이었다. 대학도 만화창작과로 진학했다. 만화가 아니라 힙합을 해야겠다고 결정한 지는 5년밖에 안 된다. 5년 전에는, 나는 언젠가 만화가가 될 건데 힙합이라는 외도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웃음) -어느 인터뷰에서 래퍼로서 멋있는 나이가 있다고 말했다. 커트라인이라고 생각하는 나이는 몇살인가. =평균 커트라인을 말한 건 아니고 스스로에게 적용한 말이었다. 외국 같은 경우 스눕 독, 제이 지 같은 사람들이 불혹의 나이가 지나서도 멋있게 음악을 하고 있지만 우리나라로 치면 태진아, 설운도 같은 대중적인 원로가수라 할 수 있어서 우리와 일대일 비교를 하긴 힘들다. 국내에선 MC 메타 형이 멋있게 활동하고 있지만 그 또한 상징적인 아이콘으로서 특별한 경우다. 힙합 자체가 ‘힙’한 음악이고 젊은이들의 에너지가 담겨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라 내 경우는 글쎄 서른 여섯? 그쯤까지 생각하고 있다. -서른여섯이면 얼마 안 남았다. (웃음) =그래서 다음 앨범이 마지막이 되지 않을까 싶다. (웃음) 이후엔 프로듀싱에 더 집중하고 싶다. 인간 류상구 이야기 《양화》 딥플로우의 세 번째 정규 앨범. 1번 트랙 <열반>을 시작으로 마지막 곡 <가족의 탄생>까지 총 15곡이 빼곡하게 들어 있다. 이소룡의 영화 제목과 이소룡의 캐릭터를 겸사겸사 차용한 당산동(에 작업실이 있었던) 빅 브라더의 스웨그(swag, 힙합 용어로 ‘멋지다, 내가 최고다’라는 의미) <당산대형>, 하품나는 짝퉁과 가짜들을 싹둑 베어버리는 <작두> 같은 곡이 앨범의 앞쪽에 배치돼 후반부에 드러나는 인간 류상구의 모습을 극대화한다. 아버지의 이야기를 담은 <버킷 리스트> 등 그 어느 때보다 자신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은 곡들이 《양화》에 포진해 있다.

패자는 없다

메시 대 호날두. 애플 대 삼성. 아이언맨 대 캡틴 아메리카. 배트맨 대 슈퍼맨. DC 대 마블. 사람들은 왜 라이벌에 집착을 할까. 왜 모든 것이 경쟁이 되어야 할까? 우리는 본능적으로 모든 것을 대결 구도로 만드는 것 같다. 그렇게 해야만 적어도 어느 한편에는 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혹은 이 넓은 세상에서 우리가 어느 편에 속하고 누구를 함께 응원하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DC와 마블이 경쟁상대라고 생각하지만, 역사적으로 그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대결이라기보다 이 두 회사는 결과적으로 각자 자기만의 특별한 브랜드와 정체성을 갖출 수 있도록 자극을 주는 공생적인 관계를 이루어온 것이다. 현대 슈퍼히어로의 탄생 1938년 4월18일, 형사물(Detective) 코믹스의 액션 코믹스 브랜드를 통해 슈퍼맨 첫회가 출간되며 만화책 황금시기(1930년 말~1950년 초)가 시작되었다. 이것이 우리 현대 슈퍼히어로의 탄생이다. 그전의 만화책들은 깡패 서부 포르노 SF와 형사물이었다. DC 코믹스의 DC가 디텍티브 코믹스(‘D’etective ‘C’omics)에서 비롯된 약자인 것을 모두 알 것이다. 슈퍼맨의 대성공 이후로 모든 산업이 새로운 슈퍼히어로를 만들어냈다. 슈퍼맨 이후 1939년 5월 디텍티브 코믹스 27회의 어둠 속에서 배트맨이 나타났다. 1939년 타임리(Timely) 출판사(이 출판사는 1961년 공식적으로 마블 코믹스가 된다)는 불과 물에 관련된 슈퍼히어로 휴먼 토치와 네이머를 마블 코믹스 1화에 등장시켰다. 1941년 잭 커비와 조 사이먼은 캡틴 아메리카를 창조했다. 그 당시에 DC는 훌륭한 그림과 탄탄한 스토리 중심이었고, 반면에 타임리 출판사는 훨씬 실험적이고 진보적인 성향을 지녔었다. 코믹스는 초기에 대공황을 탈출할 수 있는 근원이었다. 그리고 1941년 미국이 세계 2차대전에 참전하며 코믹스는 희망의 상징이 되었다. 캡틴 아메리카는 히틀러를 때렸고 슈퍼맨은 스탈린, 히틀러와 싸웠다. 그러나 몇년의 대공황과 전쟁을 겪은 후 현실의 전쟁 영웅들이 귀향할 때 미국은 더이상 슈퍼히어로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들은 안정을 만끽하며 휴식을 취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50년대 들어 텔레비전의 인기와 코믹스의 도덕성을 공격하는 미국 상원으로 인해 슈퍼히어로와 코믹스의 인기는 시들어갔다. 종교계와 교육계 집단은 코믹스를 보이콧하고 심지어 코믹스를 모아서 태우기도 했다. 그러나 슈퍼맨은 텔레비전 쇼 덕분에 이 위기를 버티고 인기를 오래 유지했다. 어려움을 겪고 있던 마블은 서부, 괴물, 호러, 코미디, 도덕적 이야기 따위에 의지했다. 1961년 저스티스 리그의 성공이 없었으면 어벤져스와 판타스틱 포도 없었다. 저스티스 리그의 초기 멤버들은 슈퍼맨, 배트맨, 원더우먼, 마샨 맨헌터, 아쿠아맨, 그린랜턴, 플래시로, 당시 마블 회장 마틴 굿맨은 DC 출판사와 골프를 치면서 출판사의 저스티스 리그 성공에 대한 자랑을 들어야 했다. 이후 마틴 굿맨은 작가 스탠 리에게 가서 마블도 슈퍼히어로팀을 만들자고 제안했고 그렇게 어벤져스와 판타스틱 포가 탄생했다. 60년대에는 달에 먼저 도달하기 위한 경쟁이 있었고,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되었고, 시민 평등권 운동이 중요해졌고, 초기 코믹스 팬들은 청소년과 성인이 되었다. DC 슈퍼히어로들은 독자들에게 좋은 아이들이 되라고 말하는 도덕적인 어른의 이미지였다. 반면 마블의 슈퍼히어로들은 독자들의 걱정과 그들의 세계를 대변하는 존재가 되어갔다. DC는 훨씬 신화적이고 판타지적이었던 반면에 마블의 히어로들은 자신들의 힘과 능력에 대해 회의하면서 이에 맞서는 모습을 그렸다. 미국 코믹스 세계관의 배경이 되는 도시를 보면 이 판타지와 현실의 차이를 볼 수 있다. DC 세계관의 배경은 메트로폴리스나 고담시처럼 가상의 도시인 한편 마블 세계의 배경은 뉴욕 , 휴스턴, 로스앤젤레스 등 실제 도시이다. 케네디 암살 사건에 대한 반응으로 마블의 스탠리와 잭 커비는 그들의 코믹스 세계에서 제2차 세계대전의 선전용 슈퍼히어로 캡틴 아메리카를 얼음에서 녹여버리고 부활시켰다. 캡틴은 그 당시 60년대가 얼마나 혼란스럽고, 대통령이 암살당한 세상이 얼마나 부당하고 적응할 수 없는 상황인지 보여주기 위해 부활한 것이다. 평등권 운동이 이슈가 되자 마블은 첫 흑인 슈퍼히어로 블랙 팬서와 루크 케이지를 탄생시켰다. 마블은 더 현실적인 이야기들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나이 먹어가는 독자들은 새로운 히어로인 스파이더맨을 지지하게 되었다. 자신감 넘쳤던 기존의 히어로와 달리 스파이더맨은 슈퍼히어로 인생 외에 현실적인 문제가 있었다. 피터 파커는 여자 문제, 학교 문제, 친구 문제를 안고 아픈 이모와 삼촌과 같이 사는 평범한 10대 소년이었다. 스탠 리가 스파이더맨을 어떻게 탄생시켰는지에 대한 인터뷰에서 피터 파커에 대해 “그는 어리둥절하고, 자신없고, 서툴고, 어색한 너드(nerd)여야 됐다. 그는 10대의 나 같은 루저이다”라고 말했다. 이런 이유로 스파이더맨은 슈퍼맨 이후 가장 인기 많은 히어로가 되었다. 마블은 그 당시 우주 과학 발전을 비추는 판타스틱 포를 탄생시켰고, 헐크는 미군들에게 쫓기는, 감마 방사능의 영향을 받은 과학자였으며 핵폭탄, 냉전시대, 반베트남전쟁 감정을 보여준 캐릭터였다. 마블이 실험을 하고 있었을 때 DC는 유명한 슈퍼맨, 원더우먼, 그린랜턴의 인기와 배트맨 TV쇼와 굿즈들을 통해 상업적 성공을 즐겼다. 히어로들의 변화 1970년대에는 비조직 범죄, 마약 문제, 닉슨 대통령의 워터게이트 사건 등이 있었다. 슈퍼히어로들은 불쾌한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었고 그전에 있던 이상주의는 사라졌다. 조금 유치했던, 이상적인 이야기만 하던 DC에서 깊이 있는 스토리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DC의 그린 애로우와 마블의 스파이더맨은 마약 문제를 건드렸다. 슈퍼히어로들은 더 폭력적이고 치열한 문제들에 맞닥뜨렸다. 코믹스의 세계관에서 더 많은 죽음들이 발생했다. 스파이더맨의 여자친구인 그웬 스테이시는 목이 부러져 죽었고 정의를 위해서 살인을 하는 퍼니셔는 데어데블의 악당이 되어버렸다. 울버린은 영웅적인 행동을 보여주지 않았고 슈퍼맨과는 상당히 차이나는 도덕성을 지녔다. 토니 스타크는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고 슈퍼맨의 숙적인 렉스 루터는 전에는 미친 과학자로 나왔지만 이제는 악한 기업체 간부와 정치인으로 재해석되었다. 흑인, 동양인, 동성애자, 왕따 같은 소수자에게, 다수와는 다른 돌연변이인 엑스맨은 희망의 상징이 되었다. 헐크와 원더우먼이 등장하는 TV쇼들은 여전히 큰 성공을 누렸다. 그 시절 슈퍼맨 영화들은 현재의 슈퍼히어로영화들의 길을 터주었다. 히어로를 다루는 TV쇼나 영화가 만화책들처럼 진지한 줄거리를 가지기엔 시간이 더 걸렸다. 1980년대 레이건 시대의 애국심에 대한 환멸로 등장한 두개의 DC 스토리는 시장에 혁신을 일으켰다. 프랭크 밀러의 <다크 나이트 리턴즈>와 앨런 무어의 <왓치맨>이 바로 그것이다. <다크 나이트 리턴즈>는 늙고, 망가지고, 지친, 은퇴한 배트맨의 모습을 보여준다. 배트맨의 재해석에 충격을 먹은 팬들은 밀러가 배트맨을 파시스트로 만들어버렸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밀러는 “배트맨이 파시스트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정치 공부를 더 해야 한다. 배트맨은 오히려 자유의지론자다. 파시스트들은 남에게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얘기한다. 그러나 배트맨은 단지 범죄자들을 보고 멈추라고 할 뿐이다”라고 말했다.<왓치맨>에서는 슈퍼히어로들이 보통 인간보다도 더 결점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면서, 국가들이 핵무기를 갖고 있는 시기, 슈퍼히어로의 필요성에 대해 지적한다. 두 이야기는 슈퍼히어로가 된다는 것이 정신적으로 어떤 영향을 주고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어떤 영향을 받는지를 보여준다. 마스크를 쓰고 세계를 구원한다고 다짐한 사람이 결코 정신적으로 평범한 사람은 아닌 것이다. 이런 이야기들은 슈퍼히어로의 도덕성과 목적을 의심하는 계기가 된다. 어두운 컨셉을 따라 워너브러더스의 자회사가 된 DC는 강렬하고 고딕적인 느낌으로 표현된 팀 버튼의 배트맨 영화들을 개봉한다. 90년대 들어 부도 위기에 처한 마블은 전도유망한 엑스맨과 판타스틱 포의 저작권을 이십세기 폭스에 넘기고 스파이더맨을 소니에 넘긴다. 팀 버튼의 배트맨 영화와 달리 마블 영화들은(엑스맨, 스파이더맨 등) 만화책 내용과 멀지 않고 부담없는 액션영화로 성공할 수 있었다. 90년대 중반 조엘 슈마허의 배트맨 영화들은 지나치게 만화 같았고(유치했고) 작품적으로도 혹평을 받았다. 그 당시까지는 인기가 많았던 배트맨의 굉장히 어두운 시기였다. 아이러니한 것은 예전에는 마블이 현실적인 스토리를 겪는 슈퍼히어로를 만들었는데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 나이트> 3부작으로 이후 DC와 마블의 현실과 판타지의 역할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스파이더맨 영화들이 단순한 선악 대결을 보여주고 있는 시기에 놀란이 해석한 배트맨은 9•11 테러 이후의 세계에 적절한, 어둡고 도덕적으로 애매한 인물로 재발견되었다. 배트맨의 선제적 행동의 철학은 부시 정부의 중동 지역 외교정책을 반영했다. 놀란은 “우리의 두려움에 대해서 솔직해지자면, 9•11 테러 이후 미국 대도시를 배경으로 액션영화를 찍으면서 테러에 대한 신념과 직면하게 되었다. 영화감독으로서는 관객이 거리를 두고 즐길 수 있는 엔터테인먼트를 만드는 데 책임을 느끼면서도 엔터테이너로서는 나 자신의 두려움에 대해 솔직해져야 한다는 책임감이 있었다”고 말했다. <맨 오브 스틸>도 이런 현실적인 컨셉을 장착하면서 슈퍼맨의 원초적인 이상주의는 많이 없어졌다. 진지 vs 유머 DC는 심각한 (솔직히 너무 심각한) 드라마를 만들고 있다. 반면 마블은 작품마다 이스터에그, 쿠키영상 그리고 유머를 동원해 팬들의 다음 편에 대한 기대와 궁금증을 사고 있다. 이제야 마블의 이러한 성공 전략을 깨달은 DC는 마블의 공식을 써서 이번 배트맨과 슈퍼맨 영화로 자기들의 시네마틱 세계를 시작하고자 한다. 필자의 생각에 마블의 장점은 이 치밀한 계획력에 있으며 DC의 매력은 악당에 있는 것 같다. 저스티스 리그를 파괴하려고 조커와 렉스 루터와 다크사이드가 힘을 합치고 서로 배신하는 모습이 영화에 담기면 정말 흥미로울 것이다. 지금 두 영화의 세계관을 보면 마블의 타노스와 토르, DC의 슈퍼맨의 크립톤을 통해서 우주와 연관이 되었다. 역사적으로 마블의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에 나타났다시피 우주 스토리들은 지구와 연관 없이 편하게 우주에서 스토리를 시작하고 마무리하지만 DC 코믹스의 우주와 관련된 이야기들은 언젠간 그 클라이맥스를 지구에서 진행할 것이다. DC가 과연 마블을 따라 우주에서의 전쟁을 보여줄지 궁금하다. 출판 매체에선 초기에 DC가 기준을 세웠고 그 뒤에 진보적인 마블이 그 기준을 재정비했다. 이어서 80년대에 DC는 어두운 <다크 나이트 리턴즈> 만화 등을 통해서 그 기준을 또 개조하도록 강요받으며 코믹스를 잊고 있던 독자들을 탈환하였다. 여기서 데자뷔 현상이 드러난다. 영화와 TV매체에서도 슈퍼맨과 배트맨을 통해 DC는 초기 기준이 된 걸 즐겼다. 그러나 20세기 말, 21세기 초 마블이 시네마틱 유니버스로 나타나서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고, 이제 DC는 80년대처럼 어둡고 현실적인 그들만의 시네마틱 유니버스로 대답하고 있다. 거듭 강조하지만 DC와 마블은 경쟁을 통해 동등한 위치에서 함께 성장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슈퍼히어로 대결 영화,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 리그의 시작>과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가 두달 간격으로 개봉되는 걸 봐도 놀랍지 않다. 블루 스웨이드의 팝송 이 나오는 마블의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예고편의 성공에, DC는 <수어사이드 스쿼드> 예고편에 흐르는 퀸의 로 대응했다. 프랭크 밀러와 그랜트 모리슨 같은 대단한 작가들도 회사를 가리지 않고 이 두 회사를 위해서 굉장히 기막힌 스토리를 썼다. 그리고 배트맨과 울버린이 한 캐릭터로 재해석되는 DC/마블 크로스오버 스토리라인도 가끔식 등장한다. 이런 사실들을 보면 이들 두 회사가 대결 상대라기보다는 공생하는 관계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둘은 경쟁자라기보다는 서로 의지하는 형제 같은 존재다. 형제도 친근하고 공감할 수 있는 형제가 있고, 롤모델이나 우상 같은 형제가 있는 것처럼. 그리고 가끔식 이들이 역할을 바꾸기도 한다. 두 회사는 이렇게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전을 도모하고 있는 것이다. 그냥 우리는 즐기면 된다. 글 시드(Syd) 인디영화 감독, 영화비즈니스전문아카데미 로카 ‘슈퍼히어로의 모든 것’강사

[앤드루 가필드] 진중하게 답을 찾는 연기

영화 2016 <핵소 리지> 2016 <사일런스> 2014 <라스트 홈> 2014 <어메이징 스파이더맨2> 2012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2010 <소셜 네트워크> 2010 <아임 히어> 2010 <네버 렛 미 고> 2009 <파르나서스 박사의 상상극장> 2008 <천일의 스캔들> 2007 <보이A> 2007 <로스트 라이언즈> 드라마 2009 <레드 라이딩: 1974> 2009 <레드 라이딩: 1980> 2009 <레드 라이딩: 1983> 2007 <닥터 후> 시즌3 2005 <슈거러시> 딜레마의 남자. 배우 앤드루 가필드가 맡아온 배역은 늘 ‘나는 누구인가’ 하는 고민에 빠져 있었다. 소년범 ‘보이A’이자 과거를 청산한 ‘잭 버리지’였고(<보이A>), 평범한 소년 ‘토미’이자 장기를 기증할 용도로 길러진 클론이었으며(<네버 렛 미 고>), ‘피터 파커’이자 ‘스파이더맨(<어메이징 스파이더맨>)이었던 그는 영화에서 번번이 가혹한 운명에 처하고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자아 정체성을 고민하는 남자를 연기해온 앤드루 가필드는 언제나 위태로운 사춘기 무렵의 소년 같았다. 유난히 빛을 많이 반사해내는 까만 눈망울과 숱이 많아 덥수룩한 머리, 비스듬한 어깨에 어쩐지 애처로워 보이는 긴 목, 그러나 웃을 땐 해가 나듯 화사해지는 얼굴까지. 여린 소년의 감성을 담은 얼굴은 때때로 상대배우 혹은 관객과의 벽을 일순 허물어버리며, 어떤 장르에서 어떤 역할을 맡든 기어코 멜랑콜리한 무드를 형성하곤 했다. 인물이 자신이 누구인지 고뇌하는 과정에서 앤드루 가필드의 세심하고 감성적인 연기는 감정의 무게를 전달하기에 적격이었다. 연극 무대에서 활동하던 그가 브라운관에서 첫 연기를 선보인 영국 드라마 <슈거러시>는 그의 소년다움이 극명히 드러난 작품이다. 데뷔 당시 22살의 어리지 않은 나이였지만, 중학생 소년처럼 풋내 나는 비주얼의 그는 짝사랑하는 소녀 앞에서 우왕좌왕하는 모습만 보이기 일쑤인 소년의 모습을 그려냈다. 대뜸 키스를 해놓고 화장실로 뛰어와 입 냄새가 나는지 확인해보고, 치약 아닌 제모제를 입에 짜넣었다가 황급히 뱉어내는 모습은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코믹하고 밝은 모습일 터다. 그의 진가가 드러난 것은 존 크롤리 감독의 <보이A>에서였다.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소년은 비뚤어진 친구와 어울리다 한 소녀를 죽이고, 14년간 교도소에서 복역한 뒤 ‘잭’이란 이름으로 새 출발하려 하지만 그를 뜻하는 ‘보이A’는 계속해서 발목을 잡는다. 자아를 확립해야 할 시기에 교도소에서 복역한 잭을 앤드루 가필드는 어린아이 같은 백지 상태로 표현해낸다. 처음 사귄 친구와 연인의 사소한 호의 하나하나에도 쉽게 감동하고 지레 움츠러드는 그의 제스처는 놀랍다. 불안감과 행복감의 경계를 일렁이는 눈빛, 미소를 머금다가도 곧 탄식을 뱉을 것처럼 벌어지는 입, 뒷걸음치다가도 이내 놓칠까 두려워 꼭 그러안는 두팔. 방어적이면서도 사랑받길 갈구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그의 연기는 경이로울 정도다. 그는 <보이A>에서 보여준 순수한 모습을 <네버 렛 미 고>와 <아임 히어>로 이어갔다. 장기 기증을 위해 만들어진 클론들의 사랑을 그려낸 <네버 렛 미 고>에서 ‘토미’ 역시 천진하고 동물적인 캐릭터다. 잭처럼 토미도 끊임없이 자신이 영혼을 지닌 인간이고 사랑할 수 있는 존재임을 입증하려 한다. 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단편 <아임 히어>에서는 금속의 로봇으로 분해 사랑하는 로봇에게 팔과 다리, 몸통마저 내주고 머리만을 남긴다. 표정조차 쓸 수 없는 한정적 상황에서 그는 자기희생적인 캐릭터를 목소리와 행동만으로 살려낸다. 네모난 금속 얼굴에서 흘러나오는 그의 목소리는 유독 따뜻하다. 어딘가 결핍돼 있지만, 그래서 더 순정적인 모습들이다. 전과자, 로봇, 클론 등 유약한 소수자의 얼굴을 탁월하게 그려내던 앤드루 가필드는 <소셜 네트워크>로 새로운 모습을 선보이며 대중의 시선을 환기했다. 천재 마크 저커버그(제시 아이젠버그)의 동업자이자 투자자 왈도 세브린은 하버드 재학생으로서의 지성과 핸섬한 외모, 재력을 갖춘 인물이다. 너드에 냉혈한인 마크 저커버그와 대조되는 훈훈한 외모와 인간미를 갖춘 그는 더는 ‘짠한’ 소년이 아닌 ‘매력적인 수컷’으로 관객에게 눈도장을 찍었다. 그러나 왈도 세브린 역시 전작에서의 멜랑콜리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왈도는 믿었던 친구 마크에게 배신당하며 약자의 포지션에 서고, 그 실연의 서사를 거의 연인 사이의 그것처럼 재연해낸다. 멋진 외관 이면의 열등감과 상처받은 마음은 기존 앤드루 가필드의 매력을 멜로드라마적으로 살린 대목이다. 데이비드 핀처 감독은 그의 연기를 “믿을 수 없는 감정이입이었다”고 말했다. “3살 때부터 스파이더맨 슈트을 입는 게 꿈이었던” 앤드루 가필드는 리부트 작품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에 캐스팅되면서 연기 인생의 전환기를 맞는다. 그는 기존의 <스파이더맨>을 멜로드라마적으로 재해석하고, ‘피터 파커’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에 섬세한 결을 불어넣는다. 마크 웹 감독은 앤드루 가필드를 낙점한 까닭으로 “그는 감정적인 무게를 다룰 줄 안.다. 피터 파커는 언제나 비극적 상황을 맞이하기 때문에 이 부분은 매우 중요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부모님의 부재, 정체성을 고민하는 스파이더맨인 동시에 20층 아파트 발코니를 뛰어넘어 꽃을 한아름 바치고, 멋쩍은 듯 씩 웃는 로맨틱한 스파이더맨이기도 했다. 감상적이고 낭만적인 이야기로 거듭난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은 전세계에서 약 7억5800만달러의 흥행 수익을 올렸다. 영화 속 로맨스는 실제로 이어져, 앤드루 가필드와 에마 스톤은 장장 4년간의 만남을 지속하며 애정을 과시하기도 했다. 그는 이 시리즈를 통해 히어로물의 하이틴 스타로, 할리우드의 핫한 커플로, 셀러브리티로 거듭났지만 동시에 이 시리즈는 그에게 족쇄이기도 했다. 시리즈 2편에 4년을 묶여 있어 필모그래피는 한동안 공백이 됐고, 무엇보다 <어메이징 스파이더맨2>의 처참한 완성도는 그의 실패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앤드루 가필드는 “제작사 소니의 지나친 간섭으로 초기의 좋은 각본이 산으로 갔다”고 소신껏 발언해 소니에 미운털이 박혔고, 결과적으로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시리즈는 감독과 주연배우가 모두 하차하며 종료됐다. 스파이더맨 슈트를 벗은 그는 성큼 자라서 돌아왔다. 그는 2007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초래된 부동산 대공황 사태를 다룬 <라스트 홈>을 차기작으로 선택했고, 제작에도 처음으로 참여했다. 영화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집을 차압당하는 당사자들의 고통을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차압당하는 이와 차압하는 부동산 사업자 갑을 구도에서 앤드루 가필드가 맡은 역할은 ‘갑’이 된 ‘을’ 데니스 내쉬다. 주택담보 연체자였으나 부동산 업자 릭 카버(마이클 섀넌)의 동업 제안을 받은 그는 자신의 집을 되찾기 위해 다른 이들의 집을 빼앗아야 하는 딜레마에 놓인다. 앤드루 가필드는 수염을 기르고 오물을 묻히는 연기까지 마다하지 않으며 서사에 가까이 밀착해 영화를 견인해나간다. 그 과정에서 그는 땟국 진 인부의 옷에서 멀끔한 정장까지 갈아입으며 모습을 바꾼다. 여태까지 ‘나는 내가 생각하는 나인가, 사회가 규정하는 나인가’를 고민했던 그가 이젠 딜레마의 층위를 ‘나는 어떤 내가 되어야 하는가, 사회와 나는 어떻게 관계해야 하는가’의 윤리와 당위의 문제로 확장한 셈이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한 고민을 이어가는 또 다른 두 작품 역시 촬영을 마쳤다. 제2차 세계대전을 다룬 멜 깁슨 감독의 <핵소 리지>에서는 군 거부를 주장한 첫 양심적 병역수이자 군의관인 드몬드 도스 상병을 연기한다. 17세기 예수회 사제가 일본에서 받은 박해를 그려낸 마틴 스코시즈 감독의 <사일런스>에선 로드리게스 신부 역을 맡았다. 두 작품에서는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찾는 데서 나아가 그 신념을 지키는 모습을 보여줄 예정이다.“넌 어렸을 때부터 아주 많은 의문을 가지고 살아왔지. 그 의문들이 삶의 원동력이자 우리의 본질이야.”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에서 벤 파커가 피터 파커에게 건네는 이 말은, 배우 앤드루 가필드의 연기 인생에도 유효한 대사다. 숱한 물음표들이 모여 만들어낸 그의 초상은 점점 더 근사해질 것이다. 내게도 소중한 사람이 생겼어 <보이A>의 잭은 교도소에 수감된 14년의 세월의 공백으로 사회성이 결여되고 어린 아이의 모습을 간직한 인물이다. “살면서 한번도 사랑한다는 말을 말하고 들을 수 있을 줄 몰랐어.” 떨리는 눈빛과 애달픈 목소리로 미셸에게 고백하는 이 장면은 그중 백미. 용서받을 수 없는 살인이라는 중죄를 저지른 인물임에도 보이A가 아닌 잭의 등을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전적으로 앤드루 가필드의 연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앤드루 가필드는 이 작품으로 영국 영화 텔레비전 예술 아카데미(BAFTA)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김영진의 영화비평] 비극의 시대를 비웃다

국내에 번역 출간된 하스미 시게히코의 평론집 <영화의 맨살>에는 ‘영화는 어떻게 죽는가- 할리우드의 50년대’라는 글이 실려있다. 강연을 풀어낸 이 글의 주제는 코언 형제의 신작 <헤일, 시저!>와 크게 통하는 부분이 있다. 경쾌하게 조롱 섞인 긍정을 담은 이 희극 영화는 언뜻 영화 찬가의 외피를 두른 것처럼 보이지만 할리우드 전성기인 1930년대나 1940년대가 아니라 1950년대의 할리우드를 배경 삼았다는 점에서 이 당시에 영화가 죽어가고 있다는 쓰디쓴 진술을 담으려는 속내와 무관하지 않다. 1950년대 할리우드에서 다수의 실력 있는 영화인들은 매카시즘 광풍으로 실업자가 되거나 근신하며 남의 이름을 빌려 활동하지 않으면 망명해야 했다. 할리우드가 전무후무한 커다란 재능의 손실을 겪은 시기였다. 또한 텔레비전의 광범위한 보급으로 1년에 500여편을 주기적으로 생산하던 작업공정 구조가 훼손되면서 스튜디오 시스템이 무너졌으며 단단한 드라마보다는 대작 위주의 물량공세로 살아남기 위해 애쓰던 시절이었다. 영화의 죽음 이후의 영화적 관계 맺기 하스미 시게히코의 글은 이런 교과서적 사실 외에 또 다른 흥미로운 가설을 던진다. 고전기의 할리우드에서 활약했던 감독을 비롯한 영화인들은 아주 어려서부터 영화현장에서 잔뼈가 굵었지만 학력이 없는 영화 전문인들로서 사회에 적응하기 힘든 불량배 같은 기질을 가진 개성의 소유자들이었다. 이들이 건설한 할리우드 고전기라는 황금기를 지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할리우드에 영입된 영화인들은 대학을 마친 고학력자들로서 영화에 관한 자의식을 갖고 영화를 대한, 좌파적 소양이 다분한 사람들이었다. 이를테면 조셉 로지나 엘리아 카잔 같은 감독들은 젊은 시절에 어떤 식으로든 공산주의와 관계를 맺은 사람들이었고 앞서 말했듯 매카시즘이 할리우드를 덮치자 이들은 영화를 찍기 위해서 타협을 하거나 망명을 택해야 했다. 하스미 시게히코의 표현에 따르면 이들과 같은 감독들은 ‘데뷔하자마자 영화를 빼앗겨버렸다’ . 조셉 로지는 망명했지만 엘리아 카잔과 같은 가난한 이민자의 아들은 동료들을 배신해서라도 미국에 남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망명하거나 변절했던 정치적 희생자들로 인해 영화의 죽음이 시작되었다고 하스미 시게히코는 주장한다. “할리우드영화의 낙천적인 밝음은 이때 붕괴하기 시작했고 앞 세대에 비하면 교양과 지식이 있었던 그들은 할리우드의 낙천성을 재생산할 수 없었다. 완전히 새로운 작품으로 제작자에게 인정받을 수도 없었다. 일단 기존 장르를 이용하면서 거기에 사회비판을 집어넣는다는 전략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알아볼 사람은 알 것이라는 식으로 영화에 상징적인 의미를 배치했고 반동적이기는 하지만 직업적 양심만은 갖고 있는 프로듀서에게 인정받으려면 연출 수완이 아주 뛰어나야 했다. 조셉 로지, 니콜라스 레이, 에이브러햄 폴란스키, 앤서니 만, 존 휴스턴 등의 감독들이 이런 전략을 취했지만 거세진 정치적 반동의 여파로 이런 미국영화의 새로운 흐름은 오래가지 못했다.” 조셉 로지, 에이브러햄 폴란스키 등의 감독은 미국에서의 경력이 끝났고 그보다 더 오래 버텼던 니콜라스 레이나 앤서니 만 등 재능 있는 감독들은 극단적인 대작 제작 경쟁의 도구가 되어 유럽에서 영화를 찍다가 알코올 중독으로 심신을 다쳐 할리우드에서 쫓겨난다. 하스미 시게히코는 1950년대에 서서히 죽어버렸던 영화에 대해, 영화의 죽음을 의식하고 영화를 찍었던 빅토르 에리세, 다니엘 슈미트, 클린트 이스트우드 등의 감독을 언급하면서 이들이 초기작을 찍었던 1973년의 영화들을 언급하는데 그의 분석이나 예언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다음과 같은 말은 지금도 유효하다. “빨갱이 사냥의 시대에 풍속적인 흥미나 정치적인 분석 외에 그때 문화로서의 영화가 무엇을 잃고 그 상실이 지금까지 어떻게 심각한 상처가 되어 남아 있는가에 대해 대다수가 충분히 의식하고 있지 않다. 영화역사가 어떠한 희생을 누군가에게 강요한 탓에 지금 자신들이 있다는 자각이 희박하다. 더글러스 서크, 프리츠 랑, 로버트 시오드막 등이 할리우드에서 차례로 사라졌다. 그들이 미국영화에 무엇을 주었는지 미국의 누구도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정도로 귀중한 인재가 일거에 어떤 나라를 떠나는 일은 없었다.” 하스미 시게히코는 에리세와 슈미트와 이스트우드의 초기 영화들이 영화의 죽음을 확실히 자각한 채 지금 영화를 찍고 있는 자신들은 누구인가를 영화로 질문한다고 평한다. 영화의 죽음을 목격한 사람에게 영화와 관계 맺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를 묻는다는 것이다. 영화가 죽었으니 불행하다고 자각하는 이들 세대의 감독은 섬세하고 특이한 전략으로 1950년대까지 쌓아온 할리우드적인 여러 기법들을 자기들 영화에 원용하면서 기후 자체를 어떻게 포착할 것인가, 지평선을 어디에 배치할 것인가와 같은 영화의 기본적인 문제들을 할리우드 고전에서 어떻게 배웠고 어떻게 감사의 마음을 표현해야 하는가라는 자각이 확실히 드러나는 윤리적인 영화를 만들었다고 하스미 시게히코는 말한다. 무려 1985년에 행한 강연 원고를 여기서 길게 인용하는 게 시대착오적이고 영화광적 단호함이 지나치다고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하스미 시게히코의 ‘죽음을 끌어안은 영화의 현재를 성실하게 사는 것’이라는 명제는 곰곰이 새겨볼 만한 것이다. 코언 형제의 <헤일, 시저!>가 그런 명제를 정색하고 끌어안은 영화라는 건 아니지만 할리우드영화의 위대한 고전적 완성기를 지나 자체의 미학적 토대가 무너진 채 죽어가던 1950년대를 작품의 시대배경으로 삼은 이유가 하스미 시게히코의 명제와 아주 무관하지는 않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엉뚱함으로 무장한 코언식 유머 이 영화의 주인공, 캐피털 픽처스 피지컬 프로덕션의 수장 에디 매닉스(조시 브롤린)는 반동적이지만 수완이 좋은 프로듀서다. 그는 하루를 분, 초 단위로 나눠 쓸 만큼 바쁜데 그의 일은 주로 상상하기 힘들 만큼 기벽이 심한 할리우드 스타들의 사건 사고를 조용히 처리해주거나 촬영현장에서 벌어지는 온갖 마찰과 위기를 강온 양면 전략을 구사해 원만하게 무마시키고 어떻게든 작품이 완성되게 하는 일이다. 이 영화에서 에디 매닉스가 당면한 가장 큰 난제는 대작 <헤일 시저: 그리스도의 삶> 촬영 중 납치된 베어드 휘트록(조지 클루니)을 찾는 일이다. 베어드는 할리우드의 공산주의 비밀 결사단체인 ‘퓨처’(미래) 회원들에게 납치된 것인데 베어드는 종일 그들의 강의를 들으며 하루 사이에 어느 정도 의식화된다. 어느 대학교수의 자문을 받고 할리우드 일급 뮤지컬 스타인 버트 거니의 지휘를 받는 그들 비밀 결사단체 회원들은 주로 시나리오작가들이며 자신들이 얼마나 자본주의를 혐오하고 영화를 통해 그들의 반자본주의적 메시지를 상징적으로 전파시켰는지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다. 코언의 카메라는 이들에게 동조하는 것도, 조롱하는 것도 아닌 거리감을 지키고 있는데 거기서 이상한 유머감각이 나온다. 그들은 베어드에게 신사적으로 굴지만 계몽적이며 위압적인 태도를 감추지 못하고, 혁명을 주장하는 그들의 언사와 행동은 추상적이고 나이브하다. 그들의 리더인 뮤지컬 스타 버트 거니는 급기야 회원들을 이끌고 인근 바다로 나가 그 혼자만 소련 잠수함을 타고 망명하는데 버트 거니를 배웅하는 ‘퓨처’ 회원들의 비장한 면면들은 미래를 견인할 만큼 강인해 보이기는커녕 연약하고 우스꽝스러울 뿐이다. 잠수함이 입수하면서 크게 넘실대는 파도 때문에 그들이 탄 조각배가 위태롭게 갸우뚱거리고 그들이 배 안에서 허둥대는 모습은 이들의 연약함을 점잖게 조롱한다. ‘퓨처’ 회원들에게 살짝 의식화된 채 돌아온 베어드는 자신이 배운 것을 전파하려고 하지만 즉각 싸늘한 대접을 받는다. 베어드가 에디 매닉스에게 자본의 추악함을 비난하는 언설을 앵무새처럼 읊을 때 에디 매닉스의 반응은 짧고 단호하다. 에디는 베어드의 뺨을 세차게 몇 차례 갈기고는 너를 스타답게 살 수 있게 해주는 투자자의 은혜를 잊지 말라고 경고한다. 헛소리 말고 빨리 촬영장으로 복귀하라는 에디의 명령에 베어드는 직전의 호기를 잃고 순한 양처럼 복종한다. 베어드의 촬영장 이탈 소식을 가십 칼럼에 써먹으려는 삼류 저널리스트에게도 에디는 빨갱이 협조자가 될 거냐는 단순한 협박으로 효과를 본다. 이렇게 모든 일을 신속하게 처리하는 에디는 자신과 관련된 일에선 결정장애를 갖고 있으며 남들이 보기엔 사소하지만 자신에게는 절실한 강박을 갖고 있다. 매일 신부를 찾아가 고해성사를 하는 그는 금연 결심을 실행하지 못하는 자신의 의지박약을 자책하며 항공사로부터 거액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도 마음을 정하지 못해 헤맨다. 베어드 사건을 해결할 즈음 에디는 다시 신부를 찾아가 항공사 스카우트 제안을 고민하는 자신의 심경을 밝히는 데 옳다고 믿는 일을 하면 신이 함께할 것이라는 신부의 충고에 영화사 일을 계속하기로 굳게 결심한다. 신이 지켜보는 가운데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에디의 믿음은 물론 상대적인 것이다. 엄밀히 말해 항공사 취업과 영화사 일을 계속하는 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에디는 스튜디오 책임자이지만 동시에 사장의 분부를 받는 피고용인이기도 하다. 뉴욕에 있는 보스에게서 온 전화를 받을 때 그는 비굴하게 서서 마치 보스가 앞에 있는 듯 굽신거리며 지나친 예의를 보인다. 베어드의 의식화 연설에 그가 그토록 단호한 것도 투자자의 입장을 대변한 것이었다. 진보 인텔리 물을 먹은 ‘퓨처’의 시나리오작가 회원들이나 자본주의의 당당한 시종인 에디 매닉스나 어딘가 허물어져 있고 기댈 데 없는, 영웅적인 면이 전혀 없는 인물들이고, 이 영화의 희극적 뉘앙스가 이런 인물들로부터 배어나오지만, 이 영화의 다른 등장인물들도 대체로 그렇다. 코언의 은근슬쩍 코미디는 심지어 에디 매닉스가 <헤일, 시저!>에 관한 종교적 자문을 구하기 위해 만나는 각계 종교 지도자들과의 만남에서 그들의 일관되지만 어이없는 장광설을 보여주는 대목에서도 빛을 발하는데 예수의 신성 여부를 두고 벌이는 그들의 논전은 그들의 위에 있는 신을 모독하기에 충분할 만큼 불경하고 그 때문에 우스꽝스럽다. 이런 우스꽝스러움은 방사형으로 가지를 치며 수중 뮤지컬을 찍다가 가스가 차서 스스로 컷을 외치는 스타 여배우가 임신한 아기를 몰래 출산했다가 입양하는 방법을 불법적으로 모색하다 그런 일을 처리해주는 전문가와 다시 바람이 나 번개처럼 결혼을 해버린다거나, 우아한 연출방식을 고수하는 일류 감독이 서부 액션 스타를 캐스팅해 그의 발연기를 보다 못해 저잣거리 상인처럼 짜증을 내며 이성을 잃어버린다거나, 고도로 양식화된 뮤지컬을 연출하는 유럽 출신 감독이 촬영 막간에 자신의 불륜 사실을 스웨덴에 있는 본처에게 알리지 말아달라고 제작자 에디 매닉스에게 부탁한다거나, 또는 러시아로 망명을 갈만큼 의식화된 뮤지컬 스타 배우가 촬영현장에선 자신의 머리를 만진 것에 항의하는 술집 주인 역의 배우를 가볍게 무시하는 행동을 한다거나 하는 등의 모습을 통해 형용모순의 어쩔 수 없는 지경에 대해 관객으로 하여금 웃음을 짓게 만든다. 사라진 ‘믿음’을 대신하는 기적의 순간 거듭 말하지만 이게 조롱은 아닐 것이다. 코언 형제는 그저 위대한 할리우드가 난처한 지경에 빠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거대 담론을 고민하는 지식인 영화인들이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어떤 곤경도 직선으로 돌파하는 속물 프로듀서나 철없는 어린애 같은 행동으로 주변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지만 귀여운 구석이 있는 바보 같은 모습의 스타 배우들이나 지성과 수완을 갖고 있지만 막노동판 같은 영화현장에서 자신들의 스트레스를 다양하게 풀고 있는 감독들이나 저마다 모두 자기만의 곤경에 빠져 있다. 그걸 망원경으로 보면 서두에 밝힌 하스미 시게히코의 영화가 죽어갔던 시스템일 것이고 현미경으로 보면 저마다 각자의 함정에 빠진 과민한 신경의 소유자들이 빠진 집단 히스테리가 만연하는 장소일 것이다. 영화의 말미에 촬영장으로 복귀한 베어드 휘트록은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 앞에서 신앙 고백을 하는 클라이맥스 장면을 찍으며 명연기를 보여주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대사를 까먹는데 그가 떠올리지 못한 말은 ‘믿음’이었다.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하며 에디 매닉스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던 믿음이라는 말을 베어드는 하지 못한다. 피지컬 프로덕션의 리더 에디 매닉스가 했던 말을 잠깐 의식화됐던 베어드는 하지 못한다. 할리우드는 계속 존재할 것이고 그건 자본 덕분이겠지만 그 시스템 안에서 유약한 지성은 버티지 못할 것이고 영화인들의 반골기질은 각종 신경증으로 변질돼 전염병처럼 스튜디오 전체로 번질 것이다. 코언 형제는 이 비극을 코미디로 풀어내면서 프랑수아 트뤼포가 <아메리카의 밤>(1973)에서 잠깐 관객에게 보여줬던 마법, 온갖 사건 사고가 빈발하는 촬영장에서 기적처럼 아름다운 순간이 찍히는 마법을 조금 더 길게 실현하는 방법으로 영화에 대한 존중을 내비친다. 아주 공들여 찍은 수중 뮤지컬 장면과 바의 댄스 장면은 이 영화에서 조형적 아름다움을 만끽하게 하는 보너스 같은 것인데 전성기 할리우드의 극점에 달했던 장인정신을 오늘에 받들어 기리려는 코언 형제의 헌사일 것이다. 이 정도에서 더 나아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할리우드의 상실의 시대에 바치는 찬가 다시 하스미 시게히코의 얘기로 돌아가자면, 전성기의 할리우드를 지탱했던 건 다소 불량기가 있었던 사회적 반골들이었다. 그들은 영화의 표현 규범을 확립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만큼이나 무지막지했지만 영화에 애정이 있었던 스튜디오의 군주들과 끊임없이 싸웠다. 이런 반골기질은 할리우드 전성기의 거장들뿐만 아니라 전성기의 일본영화계에도 있었고 ‘영화는 사회에 끊임없어 흘려보내는 독’과 같은 것이라고 말했던 일본영화 쇠퇴기의 스즈키 세이준 같은 감독들에게도 있었다. 피터 보그 다노비치가 만든 존 포드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면 스무살을 갓 넘긴 스티븐 스필버그가 반은퇴 상태였던 존 포드의 사무실을 방문했던 일화가 나오는데 잔뜩 얼어붙은 청년 스필버그에게 존 포드는 큰소리로 사무실 벽에 걸린 그림을 보고 느낀 점을 말하라고 한다. 단 1분간의 만남에서 스필버그가 존 포드에게 들은 훈계는 ‘저 그림에서 지평선이 어디 있느냐? 기억해라. 영화감독이 할 일은 지평선을 어디에 두느냐 결정하는 거야. 나가봐’라는 말이었다. 무엇을 어떻게 찍어야 할지 알고 있으면서 겉으로는 건달처럼 굴며 시스템에서 버티는 일을 해냈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힘을 잃었을 때 유약한 지성들이 할리우드를 접수했으나 그들은 얼마 후 속절없이 쫓겨났다. 재능의 공백을 겪으며 내부의 잠재력을 잃은 스튜디오가 이익의 보전을 위해 방황할 때가 할리우드의 1950년대였다면 그 시대를 슬프게 그리는 것 말고 영화에 대한 존중을 표하는 것으로 이만한 수위의 희극이 없다는 점에서 코언 형제의 재능에 다시 한번 수긍하게 된다.

[오승욱의 만화가 열전] 그 속에 다른 세상이 있었다

1981년 5월의 어느 날. 나는 고등학생 주제에 뻔뻔하게 생맥줏집에서 프라이드 치킨을 앞에 놓고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내 앞에는 점심시간에 피아노 레슨실로 숨어들어 나를 위해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월광>의 세 번째 악장을 헤비메탈처럼 연주를 해 나를 숨넘어가게 만든 친구가 앉아 있었다. 그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하운드 독>을 부르며 엘비스의 성적 자극이 넘쳐나는 춤을 춰 나를 경악하게 만들었고, 자기 집으로 데려가서는 당시 소장한 것만으로도 국가보안법에 걸렸을 소련 멜로디아 레이블에서 나온 쇼스타코비치의 피아노 독주곡을 러시아 소비에트 혁명을 찬양한 노래라며 들려주었다. 그는 딥 퍼플, 블랙 사바스 같은 하드록에 빠져 있던 나에게 음악의 바다가 얼마나 넓고 매력적인지 온몸으로 보여준 친구였다. 그는 들라크루아가 그린 쇼팽의 초상화를 보여주며 쇼팽의 불안과 히스테리를 이렇게 잘 표현한 그림은 없다고 말했다. 그림을 그리는 친구들과는 한번도 해본 적이 없는 종류의 이야기가 장래에 피아니스트가 되려는 친구의 입에서 나왔다. 그는, 자신의 손이 너무 작아 위대한 피아니스트가 되기는 틀린 몸이라고 짐짓 어른처럼 말을 해서 나를 홀딱 반하게 만들었고, 나의 그림이 너무 어두워 친구들 중 내 그림을 제일 좋아한다고 해서 뭘 그려도 어둡기만 해서 콤플렉스였던 나를 황홀하게 만들었다. 이 대단한 친구를 앞에 두고 맛있는 생맥주와 프라이드 치킨을 먹던 나는 정신이 다른 곳에 팔려 있었다. 술집의 냉장고 위 선반에 놓인 텔레비전에서 만화영화 한편이 방영되고 있었다. 컬러였다. 이전 해 겨울, 방송사에서는 컬러로 방송을 시작했지만 우리집에는 아직 컬러 텔레비전이 없었기에 처음 보는 컬러 방송이었다. 동생들이 컬러 텔레비전을 사자고 어머니에게 졸라대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별 관심이 없었던 나에게 술집의 컬러 텔레비전에서 방영되고 있는 만화영화에서 뿜어내는 색깔이 너무나 아름다워 내 앞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친구의 목소리가 더이상 들리지 않았다. 화면에서 소년과 아기 표범이 해변을 달리고 그들 뒤로 코발트색 바다와 물비늘이 반짝였다. 소년의 기쁨이 넘쳐나자 화면은 바로 정지되고, 죽죽 내리그은 힘찬 펜 선으로 그린 채색화로 그림이 바뀌었다. 만화영화 속에 한장의 그림이 있었다. 만화영화는 항상 움직여야 했다. 달랑 한장의 그림을 그려놓고 움직이는 척 꼼수를 부리며 시간을 때우거나 앞에서 한번 쓴 장면을 또다시 사용하는 한국 만화영화를 보고 투덜거린 기억이 있는 나는 움직이지 않는 그림을 당당하고 멋지게 사용하는 만화영화에 입이 벌어졌다. 게다가 화면은 온통 울트라마린, 프러시안 블루, 코발트블루, 아름다운 블루의 향연이었다. 게다가 추악한 해적, 음흉한 배신자 외다리 실버가 너무나 멋지게 그려져 있어서 더욱 놀라웠다. 만화영화의 제목은 <보물섬>이었다. 방영이 끝나고 나서야 친구의 말에 집중할 수 있었지만 친구는 자신의 말보다 만화영화에 정신이 팔린 나에게 삐치고 말았다. 누구도, 무엇도 말해주지 않던 시대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우리집은 괴상한 동네로 이사를 했다. 그 동네에는 헌책방도, 만홧가게도, 튀김집도, 시장도, 술집도, 극장도 없었다.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없었고, 도로에는 노선버스 몇대와 승용차들이 드문드문 다니고 있었다. 죽은 개가 떠내려 오는 개천도 없었고, 간밤에 술에 취해 굴뚝을 부여잡고 얼어죽은 술주정뱅이를 보았던 좁은 골목길도 없었다. 앙상한 어린 나무에 각목으로 보호대를 만들어놓은 가로수가 띄엄띄엄 있었고, 누런 먼지가 날리는 공터와 비닐하우스, 그리고 아파트밖에는 없었다. 하루가 지나면 공터였던 땅은 파헤쳐져 공사장이 되었고, 어느 날인가 보면 아파트가 들어서 있었다. 시끌벅적한 번화가였던 신촌과 홍대 앞을 쏘다니던 나에게 그곳은 시골도 아니고 도시도 아닌 괴상한 동네였다. 그런 곳에서 살면서 고등학생이 된 나는 헌책방도 만홧가게도 가지 않았고, 극장에서 영화를 볼 때면 친구들과 어울려서 보거나 여자친구와 보았다. <소권> 같은 <취권> 짝퉁 영화를 보러 갈 때에만 혼자였는데 그 이유는 아무도 그런 영화를 보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세상도 살벌하기 짝이 없었다. 늦가을의 아침. 등교하는 버스 안에서 대통령의 죽음을 알리는 뉴스를 들은 이후, 대기업에 취직해 가문의 영광이 된 삼촌은 자주 우리집에 와서 어머니에게 중요한 부분이 검열에 걸려 찢어지지 않은 <타임>과 <뉴스위크>를 어머니의 직장을 통해 구입해 달라고 부탁했고, 80년 5월에는 더욱 심하게 어머니를 보챘다. 어른들도 고등학생인 나만큼이나 세상 돌아가는 것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해 봄날, 텔레비전에서는 서울역 앞 도로를 가득 메운 시위대를 매일 보여주었다. 어느 날인가는 하굣길에 한남 교차로 앞에서 버스가 멈춰선 채 갈 줄을 몰랐다. 도로에는 탱크가 서 있었고, 하얀 완장을 차고 총을 멘 군인들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길을 막고 있었다. 한참을 도로 위에 서 있던 버스는 멀리 이태원 길로 돌아서 잠수교를 건너 나를 집 앞에 내려주었다. 그해 봄날의 늦은 밤, 창밖에서 들리는 이상한 소리에 잠이 깬 나는 조심스럽게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열었다. 그것은 내가 보면 안 될 것이란 생각에 소름이 끼쳤다. 달빛과 가로등 불빛에 반사되어 번쩍이는 철모와 탱크. 통행금지여서 고양이 새끼 한 마리 지나다니지 않는 고요한 도로에 열을 맞춰 어디론가 이동하는 군인들이었다. 탱크의 캐터필러 굴러가는 소리와 군화 소리가 음산한 저음으로 낮게 울렸다. 너무 놀라 창문을 닫고 얼굴까지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 비슷한 시기, 비가 내리는 어느 하굣길에 버스는 성수동을 지나 성동교 앞 사거리를 지나고 있었다. 성수동 공장지대쪽에서 스크럼을 짠 내 나이 또래의 어린 여공들이 비를 맞으며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내가 탄 버스 뒤에 바짝 따라붙은 그녀들의 머리카락과 푸른 작업복은 비에 젖어 있었다. 그녀들의 볼은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고, 젖은 머리카락과 옷에서는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버스 안의 어른들은 혀를 차며 그녀들을 욕했지만, 나는 비슷한 나이 또래인 주제에 편하게 공부하고 버스를 타고 있는 것이 미안해서 그녀들을 더이상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사이 그녀들은 버스의 속도에 밀려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학교 밖에서는 수많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어른들은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야기해주지 못했다. 5월 중순의 어느 날. 점심시간에 농구대 아래에서 시간을 보내며 하찮은 농담을 하던 우리의 이야기가 텔레비전에서 본 광주의 폭동에 대해 옮겨갔다. 누군가는 폭동자 중에는 북한 간첩들이 있다고 했고, 또 누군가는 전쟁이 일어날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누군가가 광주에서 폭동을 일으킨 사람들을 욕했다. 그때 한 친구가 우리를 향해 아주 심각한 얼굴로 “씨발. 광주에서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라고 말했다. 그는 평소 우리와는 어울리지 않고 학교 밖의 불량배들과 어울려 다니는 다른 세계의 학생이었다. 그는 폭동이 아니라고 했다. 종종 가장 믿음이 안 가는 자의 입에서 진상이 밝혀지는 순간이 있다. 그의 말은 우리를 얼어붙게 만들었고, 우연찮게 우리 옆에 서 있던 국사 선생님은 진상을 알려달라는 우리의 눈길을 피하고는, 친구에게 “허! 그 자식” 하고 고개를 숙이고는 교무실쪽으로 가버렸다. 그때 우리는 친구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믿을 수 없는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모두 모른 척하거나 무서워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그 시간 광주에서 우리 또래 소년들은 교련복을 입고 총을 들고 있었다. 어른 중 누구도 우리에게 광주에 대해 이야기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우리를 윽박지르는 어른이 대부분이었고 그중 그나마 괜찮았던 어른은 우리가 물어보면 우리의 시선을 외면하거나 먼 산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고등학생 시절이 흘러갔다. 집에 일찍 돌아오는 날이면 어느새 우리집에도 놓이게 된 컬러 텔레비전 앞에 앉아 <보물섬>을 보았다. 자신이 믿었던 세상에 배신당한 짐을 보며 감정이입을 했는지도 모른다. “실버, 나를 기억하나요?” 70년대 말 일본에서는 만화영화란 단어가 사라지고 ‘아니메’란 단어가 새롭게 태어났다. 아니메 전문 잡지가 생겼다. 일본 애니메이션을 그들은 그렇게 이름지었다. 90년대, 내 동생은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나오자 열광했고, 나의 동참을 원했다. 내가 시큰둥해하자 영화를 볼 줄 모르는 놈으로 치부하고 다시는 말도 꺼내지 않았다. 도미노 유시요키의 <기동전사 건담> 시리즈도 훌륭하고 <아키라>도 훌륭했지만 나는 데자키 오사무가 감독한 애니메이션을 더 좋아했다. 고등학생 때 수업을 땡땡이치고 숨어든 미술실 안에는 이미 먼저 자리잡은 땡땡이 일당이 있었다. 중학생 소녀들이었다. 그녀들은 두편의 만화책을 돌려가며 읽고 있었는데, 만화라면 사족을 못 쓰는 나는 중학생 소녀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 같이 땡땡이친 고등학생 오빠라는 연대감을 호소하며 그녀들이 보는 만화를 한구석에서 빌려보는 은혜를 입었다. <올훼스의 창>과 <들장미 소녀 캔디>였다. 그때 보았던 만화가 내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소녀만화였던 나는 <에이스를 노려라> 애니메이션을 보고 놀랐다. ‘70년대 중반 가지와라 잇키가 유행시킨 터무니없는 소년 근성물이 소녀만화에까지 영향을 미쳐 아름다운 소녀만화의 세계를 오염시킨 것 아냐?’ 하면서 보다가 ‘데자키 오사무는 격렬하게 움직이는 아름다운 사람들을 그리고 싶어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사람이군!’ 했다. 소년만화와는 다르게 은하수가 흐르는 눈동자를 가진 길쭉길쭉한 여자와 남자들이 테니스 코트에서 기다란 팔과 다리를 격렬하게 움직인다. 중요한 시합을 위해 주인공 오카 히로미가 테니스 코트에 들어선다. 그녀의 테니스화가 코트의 흙을 밟는다. 짧은 순간 푹신한 흙의 감촉이 테니스화의 바닥을 통해 전해진다. 그렇게 테니스의 세계로부터 도망치려 했지만 결국 포기하지 않고 테니스를 하기 정말 잘했다고 코트의 흙이 주인공을 반기는 것 같다. 소년들의 근성 스포츠만화와는 다른 감수성의 세계였다. 데자키 오사무는 원작 만화에서 모두가 다 대단하다고 알고 있는 것들 중에서 자신만이 주목한 것에 좀더 포커스를 맞춰 데자키 오사무표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낸다. <보물섬>은 어떤가? 짐과 실버가 처음으로 만나는 장면을 보자. 소설에서는 실버를 두려움에 떠는 외다리 해적이라 확신한 짐이 실버의 술집으로 찾아가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아니나 다를까 술집 안에는 해적 검둥개가 있다. 의심이 확신으로 변하는 순간, 커다란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외다리 사나이가 등장한다. 실버다. 그는 검둥개가 짐을 보고 도망치자 술값을 떼어먹고 도망치는 놈이 있다고 소리를 지르며 외다리로 그를 쫓다 포기하고 만다. 술값을 안 낸 비열한 녀석이라며 검둥개를 욕하는 실버를 보며 짐의 의심이 서서히 녹아내린다. 결정적인 것은, 그가 술값을 떼어먹고 도망치는 놈을 못 잡은 한심한 외다리이며 자신은 늙어빠진 바다표범이 되었다면서 너털웃음을 터트릴 때, 짐도 실버를 따라 같이 커다랗게 웃는 것으로서 짐이 의심을 거두고 실버에게 호의를 갖는 것으로 표현한 것이다. 데자키의 애니메이션에서 둘의 만남은 한층 격렬하다. 의심을 하는 짐은 실버의 술집으로 순순히 들어가지 않고 골목에서 감시한다. 그때 해적 검둥개가 실버의 술집으로 들어간다. 짐의 의심은 확신으로 변한다. 역시 자신의 판단이 옳았던 것. 실버를 해적이라 확신하는 짐의 등 뒤로 포도에 나무막대기가 부딪치는 일정한 소리가 난다. 짐이 뒤돌아보면 엉덩이 아래부터 몽땅 사라져버린 외다리 사나이가 서 있다. 실버다. 실버는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칼을 든 검둥개와 추격전을 펼친다. 실버의 주먹도 대단하지만 검둥개의 칼솜씨도 만만찮다. 검둥개의 칼날을 막아내다 실버의 지팡이가 부러지고, 검둥개는 도망친다. 실버는 자신에게 한방 먹인 놈을 끝까지 외다리로 껑충껑충 뛰어 쫓아간다.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짐의 의심은 사라진다. 게다가 지쳐 쓰러진 실버가 어린 짐에게 손을 내밀어 부축을 해달라고 하고, 술집까지 짐은 실버의 지팡이가 되어준다. 짐은 거대한 몸의 사내를 부축하고 땀을 줄줄 흘리며 술집을 향해 간다. 짐은 자신의 손이 그의 등에 닿았을 때의 따뜻한 감촉을 마음에 새긴다. 짐은 그런 따뜻한 등을 가진 사나이는 악당이 아니라고 믿는다. 실버가 우정의 표시로 술을 권하자 짐은 냉큼 받아 마시고는 술에 취해 주정을 부린다. 짐은 절대로 죽은 아버지를 대신할 아버지를 얻은 것이 아니라 수평적 관계의 친구를 얻은 것이다. 짐은 나의 실버를 사귄 것이다. 소설에는 없는 애니메이션 <보물섬>의 라스트. 스무살 청년이 된 짐이 어느 항구의 술집을 찾는다. 그는 이제 믿음직한 뱃사람이다. 술집 한구석이 떠들썩하다. 그곳에는 머리카락이 하얗게 센 중년의 실버가 술내기로 팔씨름을 하고 있다. 한눈에 실버를 알아본 짐은 실버에게 팔씨름을 청한다. 짐도 훌륭하지만 아직도 실버에게는 안 된다. 내기에 진 짐이 술 한잔을 사고 그 술을 맛있게 들이켠 실버가 몸을 돌려 술집 출입문 앞에 선다. 짐이 소리친다. “실버, 나를 기억하나요? 짐입니다.” 실버는 고개를 살짝 돌려 나지막이 웅얼거린다. “과거 이야기 하지 마라. 방금 마신 술맛 떨어진다.” 그러고는 술집을 훌쩍 나가버린다. 짐을 슬쩍 바라보며 웅얼거릴 때 실버의 얼굴은 명연기였다. 자신의 악행을 포함한 온갖 회한과 반가움. 그리고 비웃음. 그것이 실버의 얼굴에 녹아 있다. 데자키 오사무가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 <내일의 죠>도 대단하다. 데즈카 오사무의 무시 프로덕션 저예산과 살인적인 마감 일정 때문에 만들어낸 궁여지책이었던, 정지 화면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려 하던 얕은 수작을 그는 대담하게 적극적으로 활용해 애니메이션의 인상적인 순간을 만들어내고 인물들의 감정까지 극대화한다. 저예산 프로덕션 출신의 위대한 승리였다. 90년대 말. 그의 야심작 <백경전설>이 을 통해 방영되었다. 당시 불법 위성 안테나로 1회부터 보았던 나는 흥분하고 말았다. 실버가 에이허브로 출연하여, 우주 속을 떠도는 거대한 악마 모비딕을 쫓는다. 에이허브는 수배 중인 우주 해적이고, 뭔가 특수임무를 부여받은 안드로이드 듀오가 모비딕 추격의 일원이 된다. 이 장대한 드라마는 회를 거듭할수록 초라해졌다. 인기가 없어서였는지, 초반부의 암울한 우주의 풍경은 사라지고 온갖 성희롱이 난무하는 저질 개그로 한회, 한회 근근이 이어져가다가 26회에 서둘러 종영하고 말았다. <아키라>와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안노 히데아키의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세상에서 포악하고 비열한 악당 사나이들을 멋있게 그리려 했던 그의 <백경전설>은 시대착오적이고 퇴행적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가 만들어낸 실버는 짐의 실버이기도 하지만 1980년대 초 소년이었던 나의 실버이기도 했다.

춤추듯 연기하기, 흐르듯 살기

갓 태어난 것 같은 얼굴. 스크린에서 한예리를 처음 보았을 때 속으로 메모했다. 도무지 나이를 짐작하기 힘든 사람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그림엽서 세트를 모았던 일본 작가 이와사키 지히로의 일러스트에 등장하는 발그레한 뺨의 소녀가 애틋하게 떠올랐다. <푸른 강은 흘러라>(2008)에서 연변 학생을 연기한 한예리는, 놀라운 배우인 게 분명한 동시에 계속 배우로 살지 않을 것 같았다. 이 영화에는 그녀가 음악을 들으며 교실 창가에 가만히 서 있는 짧은 숏이 있다. 아무것도 호소하지 않으면서도 영화의 뉘앙스를 풍성하게 만드는 이런 정경을 대뜸 만들어내는 배우는 개기일식만큼 귀하다. 독립영화의 그녀가 담백하고 맑았다면 몇해 후 대중에게도 한예리의 이름을 알린 <파주>(2009)와 <코리아>(2012)에서 그녀는 강렬하고 분방했다. 친구를 태운 바이크를 몰고, 온몸을 던져 탁구를 쳤다. 2014년 동양화풍의 애니메이션 <가구야 공주 이야기>에서 붉은 치마를 휘날리며 질주하는 주인공의 마력에 찬탄하다가 나는 다시 한예리를 생각하고 있었다. 사지를 휘둘러 세상을 헤쳐가고 아름다움의 기준이 오직 자기 안에 존재하는 젊은 여자의 이미지로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이름이었다. 투명한 동시에 지형에 따라 고요히 괴어 있을 수도, 급류로 소용돌이칠 수도 있는 한예리의 물 같은 매력은 대중보다 감독들에게 먼저 소구했다. 한예리를 무술 고수 척사광으로 캐스팅한 <육룡이 나르샤>의 신경수 감독은 TV 단막극 <연우의 여름>(2013)에서 한예리를 우연히 보고 매료된 기억을 이렇게 들려주었다. “너무나 신선한데 배우가 뛰어난 건지, 연출자가 사람 자체를 잘 포착한 건지 혼동되는 연기였어요. 생생한 나머지 생경하기까지 한 자연스러움이었습니다.” 외모와 연기에 대해 사람들이 입 모아 감탄하는 한예리의 자연스러움은 무엇이든 그릴 수 있는 도화지의 순백과는 다르다. 그녀의 담백함은 자기주장이 강하다. 메이크업이나 헤어스타일로 쉽게 트렌드를 덧씌울 수 있는 아시아계 슈퍼모델들과는 차별되는 한예리의 색깔은, 배우로서 그녀의 저력이자 허들이다. 반면 그녀의 자그마한 몸은 무한히 유연하고 유능하다. 독립영화를 오랫동안 소개해온 상상마당 전 프로그래머 진명현 대표(무브먼트)는 한예리를 이렇게 표현한다. “대다수 독립영화 배우들이 화보를 찍으러 가면 경험 부족으로 손을 어디다 둘지 어색해하는데 한예리 배우는 무용을 해서 그런지 몸 쓰는 데에 거침이 없었어요. <환상 속의 그대>(2013)를 봐도 이희준 배우한테 업히는 모습이 뭔가 모르게 자연스럽죠.” 한예리는 세살 때부터 춤을 춰온 단련된 무용수로서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재학 시절 영상원 동기들의 졸업작품을 품앗이로 도와주다 연기에 입문했다. 시작은 오직 즐거움에 이끌린 아마추어의 열정이었지만, 신체 연기의 강점은 물론 안무부터 공연 제반작업까지 혼자 힘으로 기획하고 준비하는 데에 평생 단련된 한예리의 다재다능함과 직업적 규율은 프로 배우로서 큰 강점이다. 그러나 여전히 한국에서 여배우란, 온전히 재능으로 자아를 지키며 삶을 돌파하려는 젊은이에게 얼마나 위태로운 직업인가. 서른까지만 연기를 하고 무용에 정진하리라 작정했던 한예리의 인생 계획은, 무용과 연기가 서로를 배척하지 않는 활동일 수 있다는 희망으로 4년 전 급커브를 틀었다. 지난 2년간 한예리는 로맨틱 코미디 <극적인 하룻밤>에서 주연을 맡는 한편 무용 공연을 무대에 올렸다. 지금까지 그녀가 연기한 여자들은 영화가 여성 캐릭터에게 즐겨 취하는 섹시한 매력이나 모성적인 미덕 바깥에서 개성으로 호소했다. 한예리에겐 좋은 여배우에 민감한 한국 관객을 지난 10년간 행복하게 했던 배두나의 담담함과 김민희의 대담성, 임수정의 사색적인 면모와 더불어, 아직 출구를 만나지 못한 잠재력이 있다. 남은 것은 한국영화가 이 배우에게 어떤 길을 열어줄 것인가라는 물음이다. 그녀의 경력은 어쩌면 한국영화가 여성을 바라보는 관점과 다양성의 현재를 보여주는 리트머스 종이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지난해에는 상업영화 투톱 주연을 처음 맡은 <극적인 하룻밤>이 중요한 행보였는데 올 들어서는 다방면의 활동이 눈에 띕니다. TV 대하서사극 <육룡이 나르샤>에 출연했고 김종관 감독의 <최악의 여자>가 공개를 앞두고 있고, 전주국제영화제 심사위원도 맡았어요. 드라마 <상상 고양이>에서 목소리 연기도 했고 오락 프로그램 <마이 리틀 텔레비전>도 있었죠. =여기저기 쑤시고 다니네요, 제가. (웃음) 올해는 들어오는 걸 마다하지 말고 아무 생각 없이 해보자고 결심했어요. 그러고 나니 공교롭게 예능 프로 제의도 들어오고 <필름 시대 사랑>에서 만난 장률 감독님도 <춘몽>을 다시 제안하셔서 일이 많아졌어요. -그런 결심은 한 선택이 어긋나도 큰 낭패는 아니라는 여유가 생겼을 때 가능하지 않아요? =한 가지 일의 결과가 내 인생을 바꿔놓지는 않는다고 생각하게 돼서 그럴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경험이 늘고 주변의 사례를 보면서, 설령 좋은 일이 있어도 다음에 이어지지 않을 수 있고, 어떤 시도가 실패했다고 갑자기 일을 못하게 되는 것도 아님을 알았거든요. -얘기 듣기 전에는 30대 초반 배우로서 매니지먼트쪽에서 모든 가능성을 시험해보려고 하는 시기일까 짐작했는데요. 매니지먼트로부터 좀더 신경 쓰라고 조언받는 부분이 있어요? =음, TV드라마에서는 그래도 예뻐야 된다는 것? (웃음) 헤어나 메이크업, 의상에 더 신경 쓰자고 했어요. 그날의 의상을 피팅하면 사진으로 회사 스탭들이 공유하고 의견을 제게 전했어요. <육룡이 나르샤>에 첫 등장한 회에 윤랑이 입은 흰옷도 처음 선택했던 붉은옷에서 바뀐 거예요. -본인의 외모를 두고 여러 사람이 이렇다 저렇다 토론하는 모습을 보는 기분은 어때요? =“이것도 되게 중요한 거야”라고 자꾸 생각하죠. (웃음) 확실히 영화보다 TV 화면이 작다보니 눈에 담은 감정이 전달되기 더 어렵다는 걸 깨달았어요. 제가 눈두덩이가 두터운 편이라 덜 표현되는 부분이 분명히 있어요. 간혹 표정이 없어 보일 때도 있다는 걸 알았고요. 영화보다 좀더 많이 표현해야 된다는 걸 배웠어요. -얼마 전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서 전통 무용 미니 쇼케이스를 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댓글이 실시간으로 달리는 프로그램이라 조금이라도 낯설거나 지루한 내용은 면박당하기 쉬운 포맷이잖아요. 예를 들어 한예리씨가 승무를 시연하는데 “비트 좀 빨리요” 하고 리플로 채근하는 걸 보며 괜히 속상하기도 했는데, 어떤 의도로 출연에 응했나요? =목적은 딱 하나였어요. 전통 무용이 단지 접할 기회가 적어 지루하다고 인식되는 현실이 아쉬워서, 공연에서 관객 반응이 좋았던 작품들을 골라 소개하고 싶었어요.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는 지난 해 <극적인 하룻밤> 홍보를 위해 처음 출연했는데 전공인 한국무용을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서 보여주면 어떻겠냐는 얘기를 들었어요. 당시엔 아무래도 오락 프로그램에서는 웃음을 요구할 텐데 자칫 전통 무용이 웃겨 보일까봐 싫었어요. 첫 예능 출연인데 3시간쯤 혼자 쇼를 이끌어야 한다는 점도 겁이 났고요. 그런데 올해 다시 섭외가 들어왔을 때는 겁내지 말고 해보자 싶었어요. 새벽 1시에 <육룡이 나르샤> 촬영 끝나고 무용하는 친구들과 회의하고 연습해서 준비했죠. 긴 전통 무용 작품을 1분30초 분량으로 장단에 맞춰 자르고 영상을 찍어 작가님들한테 보내서 컨펌을 받았고 의상 대여까지 직접 진행했어요. -<마이 리틀 텔레비전>이 제게 남긴 뜻밖의 효과는 한예리의 성숙한 면모를 여태 몰랐다는 각성이었어요. 전통 무용을 설명하고 가르치는 모습을 보며 저런 야무진 선생님이 어린 이미지 뒤에 숨어 있었네, 하고 놀랐죠. 혹시 가르쳐본 적이 있나요? =대학 시절부터 무용학원 강사로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입시 레슨도 했고요. 실제로는 방송보다 훨씬 호되게 가르쳐요. 스무살 때 가르쳤던 초등학생들이 <마이 리틀 텔레비전> 보고 잘 봤다는 문자도 보냈어요. -가르치는 일이 잘 맞아요? =맞지 않기 때문에 배우를 하고 있어요. (웃음) 잘 맞았다면 엄청난 입시 교사가 되어서 학교에서 일하고 있었을걸요. 제가 봐도 잘 가르치는 교사였어요. 그런데 제가 영화를 시작하고 나서부터 더 힘들어진 일 중 하나가 정형화된 패턴대로 뭔가를 하는 것이었어요. 입시 무용 교육은 목표로 하는 학교마다 틀이 있어 학생마다 분명히 장기가 있고 자기만의 선이 있는데 그걸 입시에 맞춰 바꿔줘야 해요. 영화는 A가 연기하면 이런 좋은 점이, B가 하면 저런 좋은 점이 있다고 말해주는데 무용 교육은 그럴 수 없으니 괴로웠어요. -고향 제천에서 놀이방 대신 무용학원에 맡겨지면서 만 세살 때부터 무용을 자연스레 습득했다고 들었어요. 중•고등학교, 대학까지 무용을 전공했는데 도중에 한번도 다른 길을 생각한 적이 없었나요? =한번도요. 전 공부에 취미도 별로 없는데 춤을 추면 행복하고 남들도 잘한다고 말해주니까 딴생각 말고 평생 이걸로 먹고살아야지 했어요. 국악예술학교 시절에는 학교 군기도 굉장히 세고 순탄치만은 않았지만 그저 무용실에서 춤추는 걸로 족했어요. 연습실에 있는 한 성적, 선후배 관계, 선생님 등등 모든 문제를 잊고 오로지 내 몸에 집중할 수 있어 행복했어요. 바깥이 아니라 내부로 도피한 거죠. 기숙사 생활을 해서 아예 밖에 나가기 힘든 시스템이기도 했어요. 그렇게 중•고교 6년 동안 4인실에서 합숙생활을 했기 때문에 남자들이 2년 군대 이야기 꺼내면 “그게, 뭐?” 하고 받아요. (좌중 폭소) 1학년 때 들어가면 언니들이 엎드려뻗쳐 시키고, 밤 11시 딱 치면 점호를 했거든요. 내내 빡빡하게 살아서 그런지 오히려 지금은 농땡이치며 사는 기분이에요. (웃음) -내키면 학교수업도 빠지고 자기만의 시간을 누리며 성장한 인상인데 정반대네요. 딱딱하거나 초조한 분위기가 없어서 짐작도 못했어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서일 거예요. 중•고교 시절에는 고정관념도 강했고 친구들과 저지른 최대의 나쁜 짓이 한예종 합격 후 몇몇이 학교 담을 넘은 사건이에요. 막상 담 앞에 섰는데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어요. 담도 넘어봤어야 넘죠. 모두 얼어 있는 와중에 용감한 한 친구가 담에 접근하긴 했는데 또 가방을 어쩔 줄 몰라 먼저 던지자, 누가 집어가면 어쩌냐며 난리도 아니었어요. (웃음) -중학생 이후로는 내내 예술가 지망생 내지 예술가인 어른들에게 둘러싸여 성장기를 보낸 셈입니다. 눈에 가까이 보이는 친구들과 직접적인 경쟁을 하며 살아왔다고도 할 수 있고요. 이 경험이 성인이 된 모습이나 세상 보는 관점에 영향을 준 면이 있을까요? =아주 많죠. 전 무용을 할 때만 해도 무대에 적합한 신체조건과 얼굴이 아니면 예쁜 것이 아니고, 옳은 게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조건이 미흡하면 노력해도 안 되는 영역이 있으니 힘들었죠. 만약 딸이 태어났는데 날 닮아 키가 작다면 무용을 좋아해도 전공하겠다면 말려야지 했어요. 그런데 영화를 하면서 누구나 장점이 있고 다름에 매력이 있다는 걸 배웠어요. 뭐랄까, 예전에는 무용을 하니까 제게 뭘 좋아하냐고 묻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래서 제가 뭘 좋아하는지 몰랐죠. 그러다보니 영화하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제게 질문을 해준다는 사실이 너무 고마웠어요. 자꾸 나를 찾는 연습을 하게 되는 것 같아 감사했고 세상이 넓어진 기분이었어요. 무용할 때는 누구도 “너 연습복 뭐 맞출 거야?”, “버선 어디서 할 거야?”만 물었지 넌 누구를 좋아하냐고 소설은 뭘 즐겨 읽느냐고 묻지 않았거든요. -미쟝센단편영화제에서 특별전을 할 만큼 독립영화에서 중요한 배우로 꼽혔습니다. 독립영화는 자유롭지만 반드시 완성도가 높지는 않잖아요. 출연작을 다시 보니 각본이 인물을 충분히 구체화하지 않고 미더운 배우에게 설득을 맡겨버린 경우도 없지 않았던 것 같은데요. =글쎄요. 그런 예가 있었다 해도 어렵게 느끼지 않았던 건, 무용으로 추상을 표현하는 습관이 배어서인가봐요. 말로 설명되지 않는 것을 그리는 일에 익숙한 편이에요. -실제로도 촬영에 돌입하면 캐릭터의 동기나 감정에 대해 질문이 많지 않다고 들었어요. =단편영화로 시작해서인지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라는 생각이 커서 그런지 촬영하는 순간에는 내 생각이 어떻건 감독님의 오케이가 맞다고 생각해요. 연기하기 불편한 점이야 말씀드리지만 오케이에 대한 의심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봐요. -그래도 의아한 오케이를 받으면 이후 연기의 일관성을 위해 이유를 알 필요가 있지 않나요? =“방금 테이크의 어떤 점이 좋으셨어요?”라고 간단히 여쭙고 답을 들으면 더 묻지 않고 바로 넘어가요. 연기하는 제가 불안을 품고 있으면 영화의 다음으로 진전되기가 감정적으로 힘들어지거든요. 불안함이 남는다 해도 그건 제가 아니라 감독님 몫이라고 봐요. 무용에서는 안무가의 과제고요. -정신 건강에 좋은 태도네요. 미쟝센단편영화제에서 <기린과 아프리카>(2007)로 받았던 연기상이 배우 일을 계속하는 데에 얼마나 영향이 있었나요? =사실은 좀 무서웠어요. 바로 영화제 뒤풀이 자리에서 이제 연기 그만하고 무용할 거라고 말했죠. 일단 몸이 고됐거든요. 4학년인데 수업 끝나면 졸업작품 제작비를 마련하려고 아르바이트 두개를 했어요. 공연을 위한 음악, 무대 디자인, 조명, 의상, 분장, 팸플릿, 포스터까지 혼자 준비해야 하거든요. 거기다 단편영화 출연 제의까지 응하니 하루 두세 시간밖에 못 잤어요. 그 극한 상황에서도 무리할 만큼 영화가 좋았나봐요. 하지만 어디까지나 즐거워서 하는 일이니 서른까지만 하고, 나도 미래와 생계가 중요하니까 무용에 집중해야지 싶었죠. 내내 그런 입장이다가 스물여덟살에 현재 소속사 이소영 대표를 만나서 생각을 바꿨어요. -구체적으로 어떤 대화가 입장 전환을 불렀나요? =당시 <귀>라는 단편에 함께 출연했던 이제훈씨가 계속 영화할 거냐고 물었어요. 아니라고 했죠. 이소영 대표님이 물어봐달라고 부탁하셨나본데 전 몰랐어요. 그 후 미팅을 가졌는데 제가 배우로서 아주 좋은 얼굴을 갖고 있고 연기를 그만두기 아깝고 앞으로 예리씨 인생에서 좋은 경험일 거라는 말을 해주셨어요. 그때까지 전 제가 배우로서 좋은 자질을 갖고 있다고 믿지 않았어요. 일은 계속 있었지만 상업영화는 다른 영역으로 본 거죠. 어쨌든 돈 버는 배우가 되진 못할 거라고 생각했고, 텔레비전에도 어울리지 않고 외모를 잘 꾸미는 편도 못 되니까요. 그런데 이 대표님이 그런 걱정들은 배우 몫이 아니라고, 회사가 고민할 문제라고 말했어요. 둘째로는 소속사가 생기면 무용을 버릴 각오 없이는 연기를 못한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배우에게 다른 표현 창구가 있는 건 훌륭한 일이고 전적으로 지지한다는 대표님의 말이 제 생각을 바꿨어요. -그런데 매니지먼트가 생기기 훨씬 전인 2009년 <귀향>을 같이 찍은 안선경 감독은 당시에도 한예리씨가 완전한 프로페셔널이었다고 기억하던데요? 혼자 가방 메고 와서, 혼자 아이 낳는 미혼모의 힘든 연기를 하고 끝나면 혼자 돌아갔다고요. =거꾸로 긴 계산이 있었다면 못했을 역인지도 몰라요. 좋아서 한 일이라 열심히 했고, 원래 무용하는 사람들은 의상을 직접 다리고 직접 가방을 꾸려 다니니까 별스럽지 않았어요. 오히려 현장에 가면 의상 챙겨주는 사람, 분장해주는 사람, 밥 제때 주는 사람이 따로 있어 제가 다 하지 않아도 되니 편했어요. -두 번째 장편 <푸른 강은 흘러라>로 거슬러 올라가보죠. 극중 연변 소녀 연기를 보고 현지인이라고 착각한 관객도 많았을 거예요. 한예리씨의 조선족 연기가 진짜처럼 느껴지는 건, 억양을 잘 모방해서가 아니라 같은 한국어 뒤에 깔린 다른 정서와 사회 관습을 이해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었어요. =제가 말을 배운 동갑내기 미령이를 비롯해 급우로 나온 연변 친구들과 넉달 정도 함께 생활했거든요. 남한 사람과의 차이라면, 중국인이라는 정체성도 강하고 공동체 의식이 훨씬 끈끈해요. 남녀를 불문하고 의리가 엄청나서 친구끼리 어딜 가려다가도 누구 하나 빠지면 취소해요. 못 간 친구 한명이 속상할까봐서요. 빵이라도 사 먹으면 그 자리에 없는 친구 몫을 꼭 남기는 걸 봤어요. -장•단편영화에서 북한과 연변에서 온 인물을 네 차례 연기했습니다. 한국영화가 그들을 그리는 상투형에 대해 생각해본 적도 있어요? =북쪽 사람들은 아주 순박하고 젊은이들조차 요즘 세대 같지 않을 거라고 짐작해서 때묻지 않은 모습으로 그리는 것 같아요. 좀더 순박한 건 사실이지만 영화가 그리는 만큼 다르진 않아요. 특히 연변은 실시간으로 한국 드라마도 보고 문화적으로 친밀한데 우리쪽에서는 그걸 몰라요. 사실 <푸른 강은 흘러라>를 찍는 동안 연변 친구들이 나이 들면서 한국과 중국 사이에서 정체성에 혼란을 겪지 않을까 걱정도 했는데 시간이 지나니 기우 같기도 해요. 중국은 워낙 소수민족이 많은 나라라 조선족도 그중 하나임을 확실히 알고 있으니까. -북한, 연변 캐릭터로 거듭 캐스팅된 사실은 어떻게 보면 영화계가 한예리 배우를 인식하는 스테레오 타입과도 연결될 것 같아요. 담백한 이미지를 순박하고 착해서 손해 보는 인물로 해석하는 경향이랄지. =제겐 네 인물이 모두 북쪽 말투를 쓰지만 전부 판이했어요. 예를 들어 <해무>의 홍매와 <코리아>의 순복의 공통점은 언어뿐이에요. 가령 부산 출신 배우가 작품마다 사투리 억양은 유지하며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하잖아요. 저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어요. 정작 제 고향은 충청도인데 충청도 인물은 없었네요. 감독님들이 의외로 충청도 사투리를 잘 못 쓰시나 봐요. (웃음) -하긴 타이프캐스팅은 배우 본인이 아니라 감독이 고민할 과제죠. =예, 만약 저와 한번 더 작업하신다면! (웃음) -필모그래피를 보면 공교롭게도 독립영화는 대부분 여성 감독과 작업했어요. 반면 상업영화는 <파주> <남쪽으로 튀어>를 제외하면 모두 남성 감독 연출작이었네요. =정말 그 많은 독립영화의 여성 감독들은 다 어디 가신 건지 많이 아쉬워요. 제 독립영화 출연작이 여성 감독 작품들 위주로 기록된 것은 일부러 제가 여성과 작업해서가 아니라 남성 감독과도 작품을 했지만 여성 감독들의 영화가 완성도가 높아 많이 회자됐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현장 분위기를 말하자면 감독의 젠더나 상업영화와 독립영화의 차이보다 개인차가 결정적인 것 같아요. <극적인 하룻밤>의 경우는 여주인공 시후에 대해 제가 남성 감독님께 이해시키려고 한 부분이 있긴 했어요. 베드신 말고 일상적인 세부들이요. -<파주>의 조연 이후 첫 상업 장편인 <코리아>에서 북한 대표 류순복 선수 역 연기는 카메라에 얼굴이 찍힌다는 생각을 전혀 안 하는 듯 보였어요. 팔다리를 최대한 늘여서 공을 치고 말겠다는 의지만 남아 있는 모습이랄까. 오직 탁구를 치는 것만 중요해 보였어요. =정말 여기서 연기를 잘하는 길은 탁구를 잘 치는 것 하나뿐이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라켓을 휘두를 때 어설프면 연기도 무너지고 관객이 인물을 못 믿을 테니까요. 마치 무용처럼 원래 불편한 동작을 백번, 천번 연습해서 관객의 눈에는 쉬워 보이도록 자연스럽게 다듬는 과정이었어요. 그래서 매일 웨이트트레이닝을 한 시간 반 하고 현정화 감독님이 짠 네 시간 탁구 훈련을 받고 몸풀기까지 하루 여섯 시간 연습했어요. 체대 다닌다 치고 이래야만 태릉선수촌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죠. (웃음) 제가 30, 40분 러닝을 하고 있으면 현정화 감독님이 와서 옆에서 같이 뛰어주셨던 기억이 나요. 대단한 분이세요. -<해무> 개봉 무렵 인상적인 인터뷰가 있었어요. <해무> 전까지는 그냥 배우였는데 최초로 내가 여배우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얘기했어요. 좀 구체적으로 설명해줄 수 있나요? =주로 영화를 홍보하는 동안 느꼈어요. ‘우리 여배우’라고 불린다거나, 그때까진 한명의 배우로서 영화를 소개하러 갔다면 <해무>에서는 여배우로서 예쁘게 잘 차려입고 가는 자리도 많았다거나. 연기에서도 “전 이렇게 아름답게도 표현할 수 있어요” 하는 점을 플러스해야 한다고 느꼈어요. 전작에서 예쁘게 보이기보다 해당 캐릭터로 보이는 데 집중했다면 <해무>에서는 “홍매는 이런 식으로 여성스럽고 예뻤으면 좋겠다. 이런 모습에 상대역 동식(박유천)이 끌렸으면 좋겠다”라는 식의 설명을 많이 들었어요. 예전에는 별로 듣지 못했던 형용사를 많이 접했죠. -홍매가 굳이 치마를 입고 밀항해서 무척 고역스러워 보이기도 했어요. =치마를 입고 밀항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지 여쭤보았는데 여성적으로 위태롭고 아슬아슬한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치마가 맞다고 판단하셨던 것 같아요. 찍으면서도 맨다리에 물이 닿을 때 무척 차가웠고 멍이 끊이질 않았죠. (웃음) -KBS 단막극 <연우의 여름>에는 직접적으로 “목소리가 좋아요”라고 칭찬하는 상대방 대사가 있어요. 한예리 배우의 음성은 동글동글한 볼륨감이 느껴져요. 특별히 또박또박 말하지 않는데도 대사가 확실히 전달되는 신통함이 있고 음역도 넓어요. =저는 딕션이 부정확한 배우에 속해요. 아버지 목소리가 무척 좋아서 통화한 친구들이 다들 놀라는데 제가 닮았나봐요. <해무>의 홍매를 할 때는 사투리 코치를 맡은 분의 나긋나긋한 말투를 아예 배웠어요. 연변 말은 억세다는 선입견과 달리 아주 나긋나긋하게 풀어 말하는 투였어요. (홍매 목소리로) “아이 어떡하니, 이거 다 젖었구나.” “이게 지금 날 어떻게 해보자는 겝니까?” 이렇게 소리가 코 위쪽에서 동그랗게 울리는 느낌으로 했어요. 여성스러운 뉘앙스를 홍매 본인은 모르지만 상대는 느낄 수 있는 톤으로 갔어요. 너무 노골적이면 순수한 측면이 사라질 것 같아서요. -<환상 속의 그대>의 기자회견 중 슬픈 분위기도 아니었는데 불쑥 울음을 터뜨려서 좌중이 놀란 일이 있었죠? 한예리 배우의 연기를 보면 안에서 솟구치는 감정 덩어리는 큰데 표현은 작게 가는 쪽이 많아요. 연기를 위해 감정을 끌어올린다기보다 시나리오의 설정보다 배우가 느끼는 감흥이 더 강해서 도리어 절제하는 인상을 거듭 받아요. 한편 현장에서는 그날그날의 컨디션을 티내지 않고 기복이 없다고 들었어요. =무용은 매번 연습을 공연처럼 통째로 하거든요. 컨디션이 매일 오르락내리락해도 여럿이 하는 퍼포먼스에서 내 상태를 상대에게 전달하는 건 좋지 않다고 배웠어요. 아파도, 힘들어도 내 책임인 거죠. 연기는 무용과 달리 연습을 많이 못해요. 무용이 폭발 지점까지 에너지를 착착 쌓아가는, 말하자면 집 짓는 과정이라면, 연기는 ‘나’라는 집을 부수고 치워서 타인이 들어오게 만들고 보다 자유로운 상태가 되는 과정 같아요. -하긴, 부수는 일을 연습하긴 어렵겠네요. (웃음) =사실 어떻게 연기를 연습해야 좋은지도 아직 모르겠어요. 연극을 경험하면 알 수도 있겠죠? 영화는 러닝타임 내내 에너지를 주면서 하면 관객이 벅찰 것 같지만, 대극장 무대는 워낙 크니까 뒤쪽 객석까지 전달되려면 계속 100%를 발휘해야 하죠. 영화와 무용에서 제 표현에 차이가 있다면 감정의 크기라기보다 표현 매체의 조건에서 오는 걸 거예요. -<극적인 하룻밤>은 청소년 관람불가 로맨틱 코미디인데 섹스 신의 노출이나 야한 정도를 떠나서, 섹스에서 여성이 갖는 느낌을 흔한 신음이나 표정 말고 배우의 몸짓으로 표현했다는 점이 신선했어요. =제목대로 주인공 시후에게 정훈과의 첫 섹스가 정말로 ‘극적인 하룻밤’이었음을 감독님도 저도 표현하고 싶었어요. 전에 몰랐던 특별한 감각을 몸으로 느꼈기 때문에 정훈과의 관계에 더 많이 호기심이 생긴 경우니까 쾌감의 묘사를 구체화하고 싶었어요. -갑자기 <춘향뎐>의 사랑가 장면이 떠오르네요. 한예리씨가 조금 더 일찍 태어났더라면 어울렸겠어요. 전공과 연관돼 언급되는 장르로 무협이 있을 텐데 <육룡이 나르샤>에서 척사광 역할로 처음 액션을 했어요. 신경수 감독은 한예리 배우가 연기하는 무술의 척사광다운 느낌을 스턴트 더블 대역에서는 받을 수 없었다고 말씀하시던데요. 본인이 와이어 타는 모습도 그려본 적 있겠죠? =춤추듯 물 흐르듯 움직이면 어떨까 생각해봤어요. <와호장룡>의 빠르고 부드러운 선 같은 무협을 해보고 싶어요. 방어적이면서도 물 같은 흐름이 멈추지 않는 느낌을 만들어봤으면 해요. -인터뷰를 위해 미개봉 신작 <최악의 여자>를 미리 봤습니다. <비포 선라이즈>나 <한여름의 판타지아>가 엮여 언급될 법한 워킹 앤드 토킹 계열 영화던데요. 로맨스의 전말보다 주인공 은희가 세 남자를 만나는 동안 상대에 따라 달라지는 태도가 흥미로웠어요. 포털의 영화 소개에는 가면을 바꿔 쓰는 못된 여자처럼 표현돼 있지만, 누구나 앞에 있는 사람에 따라 성격의 다른 측면을 드러내는 경향을 보여주는 것 같았어요. 특히 통념의 제약을 많이 받는 여성들이 연애에서 살아남기 위해 취하는 보편적인 태도가 들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얼마나 어떻게 태도를 조율할까 고민했을 텐데요. =김종관 감독님과 이야기해서 만들어갔어요. 여자들이 별로 안 좋아할 듯한 여자를 연기해보자는 거였죠. 본인도 어디선가 그렇게 행동하면서도 다른 여자들이 그러는 걸 보면 싫어하는, 여러 얼굴의 여자죠. 워낙 남성 인물 셋이 극명히 달라서 그것에 맞춰 상대적으로 연기하면 태도의 편차를 쉽게 만들 수 있었어요. 예컨대 이와세 료는 처음 만났는데도 사람을 무척 편하게 해줬어요. 이 장점을 잘 받아서 연기해야지 싶었어요. 한편 이희준 오빠가 연기한 인물은 캐릭터적으로 제가 들었다 놨다 해야 하는 상대였어요. 본인이 비련의 남자주인공인 것처럼 행세하니까 은희도 거기 맞춰 비련의 여자주인공 연기를 하는 거예요. (웃음) 어쩌면 그래서 은희가 이 남자를 사귀는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은희는 직업배우지만 현실에서는 칭찬받는 연기를 못하잖아요? 그런데 실제 삶에서는 능동적으로 연기를 잘하면서 쾌감을 느끼는 게 아닐까 가정해봤어요. -정신혜 무용단과 공연한 <찰나-소나기를 품다>와 <굿+Good>을 동영상으로 뒤늦게 봤습니다. 내러티브가 강하고 대사도 있더군요. 피나 바우쉬의 탄츠테아터도 떠올랐어요 무용가로서 이런 유의 작품에 관심이 있나요? =서사에 집착하진 않지만 관객과의 커뮤니케이션이 활발한 쪽에 흥미가 있어요. 부분적으로 안무도 하는데 언젠가 제 작품을 무대에 올리는 상상도 해요. 소극장에서 20, 30분 길이의 짧은 독무부터 시작해서 듀엣이건 군무건 늘려보고 싶은 생각이 있어요. -롤모델이란 말은 과하고, 행보를 눈여겨보는 다른 여배우가 있어요? =문소리, 전도연 선배님 작품은 빼놓지 않고 보려고 해요. 얼마 전 문 선배님 연극도 봤어요. -문소리 배우와는 한 회사에서 일한 시기도 있었죠? 선례들을 보면서 앞으로 극복할 어려움도 예상하나요. =저뿐만 아니라 모든 여배우의 고민일 거예요. 꼭 여배우가 중심이 아니더라도 여성 캐릭터가 제대로 등장하는 시나리오가 적다보니 선택의 여지 자체가 없어요. 작품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감사해야 하는 상태가 안타까워요. 저를 비롯해 이제 시작하는 친구들에게도 기회가 많이 돌아가야 하는데 현실적으로는 기회의 총량 자체가 부족해요. -연기도 많이 할수록 잘할 수밖에 없는데 여배우들은 시행착오를 통해 향상될 기회가 남배우들에 비해 현저히 적어서 커리어가 도중에 끊어지기 쉽죠. =남자배우들이 연기 발전 가능성에 있어서 유리한 것 같아요. <동창생>의 최승현씨, <해무>의 박유천씨와 일하면서 제일 부러웠던 점이 그거예요. 선배들과 붙어서 계속 ‘힘겨루기’하는 장면을 찍고 그것으로부터 배우고 함께 호흡하는 것. 제가 너무 바라고 목말라하는 경험이거든요. 여배우는 작품에서 홍일점이기 쉽고 팽팽하게 에너지를 주고받는 신이 드물어요. 여배우들이 연기를 못하는 게 아니라 치열하게 보여줄 작품이 적은 거죠. 그래서 이정현 언니도, 제가 좋아하는 천우희 배우도, 비교적 작은 규모의 영화를 통해 상을 받았지 않았나 싶어요. 저예산 작품이 그래도 여배우에게 연기를 펼칠 기회를 주니까요. -장률 감독의 <춘몽> 촬영에 곧 들어갑니다. 연기 경험이 있는 박정범, 양익준, 윤종빈 감독 세분이 배우로 캐스팅됐는데, 무엇을 기대하면 될까요? =극중 세 남자는 모두 거리의 인생이고 빈틈이 많은 사람들이에요. 하지만 이야기는 봄날의 꿈 같기도 하고 처절한 면도 있어요. 지금 세 감독님이 옷이며 머리며 너무 열심히 준비하고 있으시대요. (웃음) 배우가 감독보다 연기 못한다는 말을 들으면 어쩌죠? 큰일 났어요. -음, 아무튼 화면에서 한예리 배우가 굉장히 돋보이지 않을까요? (웃음) =하하! 저도 더불어 칙칙하게 나오면 어쩌죠?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좌중 폭소)

[김소희의 영화비평] <크로닉> 둔탁한 충돌음이 남기고 간 에너지

※결말에 관한 언급이 있습니다. <크로닉>은 무시무시한 충돌 이미지로 끝나는 영화다. 결말을 언급하며 시작하는 것을 양해해주기 바란다. 그러나 <크로닉>은 결말로부터 시작하지 않을 수 없는 영화다. 결말의 충격적 이미지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가 곧 이 영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영화의 마지막, 호스피스 간호사 데이비드(팀 로스)의 조깅 장면은 예기치 않은 사고로 끝맺는다. 데이비드를 마주 본 자리에서 그가 다가오는 만큼 후진하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던 카메라는 데이비드가 화면 오른쪽에서 나타난 차에 치여 프레임 밖으로 사라지면서 그 자리에 멈춘다. 그와 함께 관객의 사유 역시 그 순간에 붙박인다. 이것은 이제껏 쌓아온 영화의 흐름을 일거에 무너뜨린 뒤 결말 그 자체에 모든 것을 수렴시켜버리는 무책임한 마무리가 아닌가. 그러나 그와 동시에 강렬한 결말이라고 해도 그 강렬함 자체가 비난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왜 그런 충돌 이미지가 필요했는가를 살펴보려 한다. 그것만이 이 단순해 보이는 결말을 풍부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꼼꼼히 들여다보자. 이 장면에서 데이비드의 충돌은 그의 선택인가 사고인가. 조깅 장면에서 데이비드의 시선이 어떻게 움직이는가에 집중해보면 데이비드는 차가 오는 쪽으로 시선을 움직이며 차에 부딪힐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지한 채 달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그가 자동차에 부딪히지 않기 위해서 시선을 돌리는 것인지, 부딪히기 위한 정확한 타이밍을 보고 있는 건지는 다른 문제다. 차에 부딪히기 직전 데이비드의 시선이 차가 오는 쪽을 향해 있었던 바, 충돌은 그의 선택이라고 보는 편이 적절하다. 그러나 사고인가, 선택인가가 이 영화에서 중요한 문제는 아닌 것 같다. 결말이 충격적인 것은 데이비드의 사라짐(죽음)이라는 서사의 맥락에서 오는 게 아니라 강렬한 충돌 그 자체에서 비롯된다. 이때 충돌은 서사적 맥락을 벗어나 충돌 그 자체를 감각하게 하는 것으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관심사는 서사적 맥락이 아니라 충돌 그 자체에 두어야 한다. 충돌의 몽타주 결말의 충돌을 기점으로 삼아 다시 극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충돌 이미지는 단지 결말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이미지를 연결하는 방식 속에 이미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숏과 숏을 충돌시키는 충돌의 몽타주는 데이비드가 첫 번째 환자인 새라(레이첼 피컵)를 돌보는 장면에서 드러난다. 영화는 의자에 가만히 앉은 새라의 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숏 사이에 운동하는 데이비드의 모습을 끼워넣는다. 숏의 배치로 인해 러닝머신 위를 달리는 데이비드의 운동성은 더욱 두드러진다. 음향은 대립을 더욱 강조한다. 소리가 거의 없는 정적인 숏으로부터 기계음, 투박한 발소리, 숨소리가 뒤섞인 숏으로의 점프는 공포영화에서 갑자기 나타난 귀신처럼 관객을 각성시킨다. 그러나 단순히 관객을 놀라게 하는 것이 이 충돌 몽타주의 목적은 아니다. 영화는 달리는 데이비드의 몸을 오랫동안 전시하면서 몸에 대한 사유를 강요한다. 이때 데이비드의 몸은 새라의 몸과 대조적인 동시에 어딘가 비슷한 연결점을 지닌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몸을 가눌 수 없는 새라의 몸과 마찬가지로 러닝머신 위에서 데이비드의 몸은 기계의 흐름에 의지한 무력한 몸으로 드러난다. 데이비드의 몸은 마치 재활 훈련을 하는 또 다른 환자처럼 보인다. 이렇듯 충돌의 몽타주는 서로 대립하는 몸을 부딪치게 하는 동시에 그 둘을 연계시킨다. <크로닉>의 충돌 몽타주는 정확히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의 몽타주 이론을 가리킨다. ‘A+B=C’라는 공식으로 요약되곤 하는 에이젠슈테인의 이론은 풀어 말하면 대조적인 이미지를 충돌시켜 새로운 의미를 생성한다는 뜻일 텐데 이 공식은 중요한 지점 하나를 생략하고 있다. 에이젠슈테인의 몽타주 이론은 단순히 대조적인 숏을 충돌시키는 것이 아니라 충돌을 통해 대조적인 숏이 공유한 기반을 드러낸다. 에이젠슈테인은 그것이 변화하고 생성한다는 의미에서 숏을 하나의 세포로 인식한다. 연결된 숏은 대립과 충돌을 통해 서로를 변화시키는 두항이다. <크로닉>은 충돌되는 것이 공유한 기반과, 충돌된 숏이 어떻게 서로를 재인식하게 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으로 에이젠슈테인의 몽타주 이론을 소환한다. 정적과 움직임은 피로감이라는 기반을 공유하며, 이 둘의 충돌은 서로에게 움직임과 부동성을 각각 선사한다. 충돌은 같은 대상에 대해 같은 방식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대상과 다른 방식을 거치며 분화한다. 영화는 환자의 몸과 데이비드의 몸을 만나게 할 뿐만 아니라 환자들의 심리를 충돌시킨다. 두 번째 환자인 건축가 존(마이클 크리스토퍼)의 가장 큰 특징은 포르노에 탐닉한다는 것이다. 존의 성적 욕망은 생(生)의지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반면 뒤늦게 암에 걸렸음을 알게 된 세 번째 환자 마사(로빈 바틀릿)는 오랜 치료 기간을 견디는 대신 죽음을 원한다. 이들의 대조적인 반응은 죽음에 맞선 신체와 정신의 분리된 욕망을 그려보게 한다. 사람을 서서히 죽여가는 불치병은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처럼 보였던 신체와 정신을 돌연 충돌시킨다. 신체는 죽어가고 있다. 하지만 정신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 존은 신체와 정신이 서로 화해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공존을 선택한 경우다. 신체는 자신이 결코 따라잡을 수 없는 성욕을 정신이 여전히 갈망하고 있음을 인정하고, 정신 역시 신체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욕망을 살게 한다. 반면 마사는 신체에 맞춰 정신 역시 죽음을 욕망하는 것으로 급격히 변해간다. 충돌한 신체와 정신은 하나가 다른 쪽의 에너지를 흡수하면서 공존하거나 공멸한다. 충돌은 숏과 숏, 인물과 인물뿐만 아니라 신체 내부에서도 일어난다. 충돌의 흔적은 이를테면 데이비드와 나란히 앉아 텔레비전을 보던 마사가 구역질 소리와 함께 입에서 뿜어낸 토사물 같은 것이다. 인물 내부에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작용으로 일어나는 현상은 외부의 충돌만큼이나 강력한 내부의 충돌을 가리킨다. 배변 활동을 가리지 못하는 상황 역시 각자의 자리에서 너무나 당연하게 작용했던 내부 기관들이 비정상적으로 작동하며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것이다. 그 순간을 일상적으로 받아들이는 데이비드의 존재는 순간의 충격을 흡수하는 동시에 강화한다. 그러니까 충돌의 강렬함은 강렬한 이미지가 아닌, 무력한 이미지와 다른 무력한 이미지의 충돌로 인해 발생한다. 죽음은 부동의 정적이 아니라 뒤흔드는 충돌이다. 숏이 다른 숏을 끊임없이 변화시키는 세포분열 방식이 이 충돌 몽타주에 깃든다. 멕시코식 삶과 죽음의 논의 말년을 멕시코에서 보낸 에이젠슈테인은 멕시코에 대한 찬가인 다큐멘터리 <퀘 비바 멕시코>(1979)를 만들었다. 외부자의 시선으로 미지의 장소인 멕시코를 신비화하는 경향이 다분한 <퀘 비바 멕시코>는 명백한 한계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멕시코에 대한 통찰을 지닌 다큐멘터리임을 부인할 수 없다. 에이젠슈테인은 다큐멘터리의 시작과 끝을 죽음으로 장식하며 멕시코인에게 죽음과 삶이 얼마나 가까운지를 말한다. 내겐 <크로닉>이 에이젠슈테인에 대한 비밀스러운 답가라고 여겨진다. 미셸 프랑코는 에이젠슈테인이 지적한 멕시코식 삶과 죽음의 논의를 에이젠슈테인의 몽타주에 되돌려준다. 영화에서 부딪히는 것은 삶과 죽음이 아니라 삶과 삶, 즉 누군가에게 의지해야만 존재할 수 있는 삶과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존재해야지만 지탱 가능한 피로한 삶이다. 우리는 마지막 장면에서 누군가의 부재를 드러내는 삭막한 풍경을 헤아리기보다 둔탁한 충돌음이 남기고 간 에너지가 여전히 그 자리에 버티고 있음을 보아야 하는지도 모른다.

[culture highway] 새로운 영웅은 언제나 환영

새로운 영웅은 언제나 환영 향후 블리자드를 먹여살릴 기대작 <오버워치>가 5월24일, 드디어 출시된다. 블리자드가 처음 시도하는 미래형 FPS <오버워치>는 영웅 캐릭터별로 개성 넘치는 전투를 이끌어갈 수 있는 신개념 FPS다. 발매를 앞두고 마지막으로 5월5일부터 9일까지 오픈베타 테스트가 진행되니 관심 있는 사람은 미리 체험해봐도 좋을 것이다. 자막 및 성우 음성까지 완전 한글화를 거친 <오버워치>는 온라인 게임치고 드물게 패키지로 발매되며 일반판은 4만5천원, 소장판은 6만9천원이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게 얼마나 풍성할지 기대해보자. ‘찰리 푸스’를 아시나요? 미국의 젊은 싱어송라이터 찰리 푸스가 8월18일 오후 8시 예스24 라이브홀에서 첫 내한공연을 갖는다. 그는 <분노의 질주: 더 세븐>의 주제곡 을 불러 빌보드 싱글 차트 12주 연속 1위에 오른 놀라운 신예다. 이 곡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영화의 주연배우 폴 워커를 위한 추모곡이기도 하다. 지난해 데뷔 싱글 로 영국, 아일랜드, 프랑스, 뉴질랜드 등에서 차트 1위를 기록했다. 올해 1월 발매한 데뷔 앨범 《Nine Track Mind》에서는 재즈와 솔풍의 음악부터 피아노 선율의 발라드까지 소화했다. 찰리 푸스의 재능을 확실하고 싶다면, 4월26일 화요일 정오부터 인터파크에서 티켓 예매가 가능하니 참고하시라. 아시아의 실험영화 실험영화. 말로만 들었지 직접 본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아시아의 실험영화’를 위한 아카이브를 구축하고 실험영화의 저변 확대를 위해 다양한 행사를 준비 중이다. 그 첫걸음으로 5월14일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극장2에서 열리는 이번 포럼에서는 아다치 마사오 감독의 1967년작 이 16mm 필름으로 복원되어 최초 공개된다. 실험영화 보존의 타당성과 미래의 실험영화를 위한 가능성을 논의하는 이번 포럼을 통해 영화와 예술에 대한 그동안의 갈증이 조금이나마 해소될 것이다. 넬의 월드 프리미어 밴드 넬이 콘서트 로 2016년 활동을 시작한다. 이번 공연에서는 히트곡 레퍼토리뿐만 아니라, 그들의 독립 레이블 ‘스페이스 보헤미안’을 통해 발매될 새 정규 앨범의 트랙들을 처음으로 선보인다. 공연이 진행되는 6일 동안 매회 다른 신곡을 하나씩 공개한다고 하니 넬의 새로운 노래를 세상에서 가장 먼저 듣는 호사를 누리려는 팬들은 모든 공연에 참석하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5월6일, 7일, 8일, 13일, 14일, 15일 블루스퀘어 삼성카드홀에서 열린다. 온전한 빨강머리 앤 2014년 방송 35주년을 기념해 제작된 DVD 세트가 국내 정식 출시됐다. 35mm 네거티브필름 원판을 텔레시네 보정을 거쳐 복원한 HD 리마스터 기념판이다. 방영 당시에 삭제된 120여분 분량까지도 추가로 우리말 녹음작업을 거친 오리지널 무삭제 완전판이다. 중국 작가 탄쇼유의 멋진 아트워크가 그려진 케이스까지 세심하게 신경 썼다. The Illusionist 최연소 프로 마술사, 최초 국제대회 수상 및 최다 그랑프리, 최대 규모 마술 공연, 한국인 최초 라스베이거스 공연… 이 모든 수식의 주인공, 마술사 이은결이 20주년 공연을 갖는다. ‘매직 콘서트’라는 장르를 만들어낸 공연 을 통해 마술의 대중화를 이끌었던 그의 마술 세계를 총정리하는 자리다. 그동안 시도되지 않았던 새로운 퍼포먼스와 공연이 이루어지는 공간 국립극장 규모에 맞춰 특별히 제작된 무대까지, 이은결의 또 다른 진가를 확인할 수 있다. 5월4일부터 15일까지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부코스키가 쓴 성장소설 U2, 톰 웨이츠, 본 조비 등 미국 대중문화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미친 찰스 부코스키의 소설이 오랜만에 한국에 발간된다. 부코스키의 분신인 캐릭터 헨리 치나스키의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생생하게 그린 1982년작 <호밀빵 햄 샌드위치>가 그것. 떠돌이, 주정뱅이, 호색한, 도박꾼 등 밑바닥 삶 자체를 표상하는 헨리의 인격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추적할 수 있는 소설이다. 국내에 나온 그의 다른 소설 <우체국> <여자들>을 우리말로 옮긴 박현주가 이번에도 번역을 담당했다. 신중현 SOUND 한국 록의 가장 거대한 이름 신중현의 LP 박스세트 《신중현 사운드》가 발매된다. 그의 전성기를 엿볼 수 있는 시리즈 《신중현 사운드》는 신중현 사단의 신인 여가수들 컴필레이션, 토종 사이키델릭의 여제 김정미의 앨범, 1972년 당시 신중현이 이끈 그룹사운드 ‘골든 그레입스’의 앨범으로 이루어졌다. 골든 그레입스 앨범의 마지막 트랙 <즐거운 Go Go>는 한국 록 사운드의 정점이 담겨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세 앨범 모두 각기 다른 컬러 바이닐로 제작되고 포스터, 스티커, 인서트 등이 포함돼 소장가치를 높였다. 350매 한정 발매되니 예약을 서두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