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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1997)

[정지연의 영화비평] 저항의 멜로드라마 <나, 다니엘 블레이크>

“영화는 많은 전통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중 하나의 전통은 ‘저항의 영화’, 강력한 권력에 저항하는 사람들의 이해를 담아내는 영화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올해 칸국제영화제에서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2006)에 이어 <나, 다니엘 블레이크>로 두 번째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켄 로치의 수상 소감은 흡사 정치연설에 가까웠다. 심사위원장인 조지 밀러의 발표와 함께 다소 상기된 표정으로 무대에 오른 켄 로치는 “이 상을 받는 게 이상합니다. 우리에게 이 영화의 영감을 준 이들은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부유한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라는 말로 포문을 열었다. 그는 ‘신자유주의’로 불리는 경제정책이 세상을 위험하게 만들었고, 그 결과 수많은 사람들이 잔혹한 빈곤과 내핍에 시달리게 되었음을 피력하며 영화예술의 책무가 무엇인지 상기시킨 것이다. 올해로 81살이 된 켄 로치 감독은 지난 2014년에 연출한 <지미스 홀>이 자신의 마지막 극영화라고 이미 선언한 바 있다. 일종의 은퇴 선언처럼 받아들여졌고, 왜 그의 마지막 메시지가 <지미스 홀>인지 처음엔 다소 의아했다. <지미스 홀>은 아일랜드 전쟁을 다룬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으로부터 정확히 10년 후를 다룬 작품이었다. 그는 이 영화를 통해 역사적 실패가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반성적으로 사유하길 촉구했으며(켄 로치는 혁명가 제임스 코널리의 말을 인용하며 현재의 정치국면을 은유했다. “만약 영국군을 철수시킨다 해도 사회주의 공화국을 조직하지 않는다면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 영국은 지주와 상업 기관들을 통해 아일랜드를 계속 통치할 것이다”), 동시에 자신의 가장 이상적인 캐릭터를 구축했다. <지미스 홀>의 주인공 지미 그랄튼. 켄 로치는 그에게 급진적 사회주의자, 문학과 음악을 사랑했던 예술가, 가난한 민중에 대한 한없는 연민과 숭고한 실천을 보여준 혁명가, 그리고 자유롭고 사색적인 인간의 면모를 부여했다. 그런 면에서 지미 그랄튼은 켄 로치가 이룬 모든 영화의 주인공들을 대변하는 이상적 캐릭터이다. 게다가 그가 존재했던 시간은 영국 노동계급에겐 가장 잔혹한 시간으로 간주되는 1930년대였다. 부르주아들과 상업 자본가들의 수탈이 극에 달하고, 노동계급은 붕괴했다. 켄 로치는 여러 인터뷰에서 오늘날 신자유주의가 부활시키는 사회는 흡사 30년대 영국 사회의 악몽을 떠올리게 한다고 말한다. 결코 돌이켜서는 안 되는 시간. 그래서 그의 마지막 영화에서 그 시대에 저항한 사회주의 혁명가를 다시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켄 로치는 은퇴 선언 이전부터 이미 오랫동안 정치투쟁에 가담했다. 좌파연합 ‘레스펙트’(Respect)의 전국위원이었으며, 사회주의자와 생태주의자, 페미니스트 등이 연대한 정당 ‘레프트 유니티’의 건설을 주도했다. 최근 레프트 유니티는 노동당의 보수화를 견제하며 제레미 코빈에게 힘을 실어줬고, 무엇보다도 ‘수 많은 민중이 성취한 사회·경제적 이익을 파괴하기 위한 긴축재정’ 반대투쟁에 앞장섰다. <1945년의 시대정신>(2012)이 사회주의 이념을 실현했던 1945년, 영국 사회의 놀라운 성취들(의료, 주거, 교육, 철도, 전기 등의 공공화)을 상기하며 신자유주의로 파괴된 현재의 영국 사회에 대해 강도 높은 비판과 논쟁을 제기하는 다큐멘터리였다면, 그가 은퇴 선언까지 번복하며 만들어야만 했던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긴축정책과 복지체제의 후퇴가 어떻게 노동자계급의 삶을 파괴하는지를 피력하는 비극의 드라마이다. 가난한 자들을 위한 나라는 없다 “착한 자본주의(Caring Capitalism)요? 사회적으로 책임지고 보살피는 자본주의란 ‘불사조’와 같은 겁니다. 누구나 들어는 봤지만 아무도 본 적은 없거든요.” <1945년의 시대정신>에서 영국 사회의 희망과 좌절을 모두 경험했던 한 노인은 그렇게 말한다. 1945년 사회주의적 이념을 내세운 노동당 정권이 들어서고, 사회적 부는 노동자들의 인권과 복지를 위한 정책으로 분배됐다. 그러나 1979년 영국의 악몽, 보수당의 대처가 집권했다. 신자유주의는 대처리즘으로도 호명되면서 영국 경제의 위기를 복지정책과 노동자계급의 책임으로 전가했다. 그리고 2016년, 영국 뉴캐슬에서 살고 있는 59살의 노동자 다니엘 블레이크. 이제 그가 직면하게 될 삶은 은퇴 후 편안한 노후와 여가가 아니라 경제 시스템과 복지제도의 모순, 위압적 관료제에 의한 생존권의 위협과 모멸, 불안이 된다.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암흑 화면 속에서 들려오는 다니엘 블레이크와 의료수당 지급 담당자와의 길고도 답답한 대화를 들려주는 것으로 시작된다. 한번의 심장 쇼크로 인해 주치의로부터 업무 불가 판정을 받은 그에게 담당자는 다니엘의 건강 상태와는 하등 상관없는 형식적인 질문들로 심사를 끌고 나간다. 어이없는 심사에 화가 난 다니엘이 유머 섞인 항변을 하곤 하지만, 그 결과는 잔인했다. 마치 괘씸죄인 양 그에게 심사 탈락을 결정한 것이다. 의료수당 심사에서 탈락하게 되면 그는 다시 일을 해야만 한다. 그러나 주치의는 그의 건강 상태가 일을 할 수 없는 정도라며 허락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심사 결과에 항소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항소절차가 복잡하다. 어이없는 심사결과 통보순서를 기다려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기관과 통화하기 위해선 두 시간의 연결대기음을 들으며 마냥 기다려야 한다. 그 힘든 시간을 버텨 통화를 하게 되면 또다시 불합리한 절차상의 순서가 통보된다. 전화로 해결하지 못한 그가 구직센터(Job Center)를 찾아가지만 그곳은 그의 마지막 자존감마저 앗아간다. 정확히 50년 만이다. 켄 로치는 이미 1966년, 영국 노동계급의 주거 문제와 복지제도의 모순을 다룬 ‘ 수요 드라마 극장’ <캐시 컴 홈>을 연출한 바 있다. 이 작품은 당시 영국 인구의 23%에 해당하는 1200만명 이상이 시청했고, 사회적 이슈로 부상했다. 켄 로치를 연구한 영국의 미디어 연구자 존 힐은 이 영화가 ‘국가적 양심’을 건드리는 데 성공했고, 는 방영 한달여 만에 재방송을 전격적으로 내보내기도 했다고 기록한다. 당연히 논란도 뒤따랐다. 보수주의자들은 이 영화에서 공무원과 센터 직원들이 여성의 가슴이나 훔쳐보는 무뢰한으로 묘사됐다고 분개했다. 그러나 존 힐은 켄 로치 영화를 평가하면서, “켄 로치 영화의 가장 큰 힘은 그의 작품을 둘러싼 논쟁 그 자체”라고 단언한다(<켄 로치: 영화와 텔레비전의 정치학>(존 힐 지음)). 그로부터 50년 후. “세상은 진보하고 발전해나가는 것이다”라는 한때의 역사적 낙관주의자들을 비웃듯 세상은 나쁜 역사를 되풀이하고 있다. 심지어 <캐시 컴 홈>이 만들어졌던 66년보다 더 나빠졌는지도 모른다. 영국에서 <나, 다니엘 블레이크>가 개봉되자 보수당 의원 데미언 그린은 의회에서 이 영화를 혹독하게 비난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영국 복지제도를 왜곡했으며, 구직센터의 직원들을 모욕했을 뿐만 아니라 영화 속 이야기는 완전 허구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켄 로치는 “우리가 이 이야기를 취재하면서 들었던 이야기들의 상당수는 더 끔찍했다. 그러나 영화에 담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믿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라고 항변했다. 시나리오작가 폴 래버티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는 직접 데미언 그린에게 이 영화의 스크립트 책을 보냈다. 책 첫장에 그는 이렇게 썼다. “당신이 얘기하는 걸 보니 아마 영화를 보지 않은 게 틀림없군요. 그래서 우리가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파악하라고 이 책을 보냅니다. 그런데 너무 바빠서 책조차 읽을 시간이 없다면 아무 푸드뱅크라도 방문해보세요. 그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들려줬던 비참한 이야기들을 당신에게도 들려줄 테니까요.” 존 힐은 켄 로치의 많은 영화들이 ‘저항의 멜로드라마’를 구성한다고 본다. 제임스 스미스의 연구서 <멜로드라마>에서 가져온 이 개념은 “무고한 영웅”을 시스템의 피해자로 그려내는 방식을 취한다. 1966년작 <캐시 컴 홈>은 영국 노동계급의 한 젊은 여성이 세 아이를 낳아 키우는 과정에서 그녀가 어떻게 노동에서 배제 되는지, 어떻게 건물주에 의해 일방적으로 쫓겨나는지, 사회복지 시스템은 왜 그들을 보호하기는커녕 관료적이고 모순적인 방식으로 더 공격적이고 심지어 아이들을 엄마에게서 빼앗는지를 묘사한다. 확실히 초창기의 켄 로치는 형식적 자의식과 실험의식이 강했다. 브레히트의 거리두기 방식과 다큐멘터리적 사실성을 추구하기 위해 그는 실제 공간과 사람들을 작품에 담아냈으며, 주인공의 극적인 이야기보다는 그녀가 삶의 과정에서 마주하게 되는 거대한 폭력과 모순을 포착하는 데 더 집중했다. 전지적 시점의 내레이션은 흡사 이 작품을 르포 형식의 다큐멘터리처럼도 보이게 한다. 그러나 가장 큰 핵심은 ‘무고한 영웅’, 즉 영화 속 캐시가 결코 그녀의 무능과 잘못으로 인해 그러한 삶으로 내몰리지 않았음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2016년,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서 우리는 다시금 현재적 의미의 ‘무고한 영웅’을 마주하게 된다. 59살의 목수 다니엘 블레이크와 20대 후반의 아이 엄마 케이티. 저항의 멜로드라마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딱히 언어적인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 작품이다. 전문가적 시선이 개입된 분석적 글도 어쩌면 의미 없을지도 모른다. 이 영화는 다니엘이라는 사람과, 그 사람에 대한 시선과, 그 사람이 살아가는 세계가 단순화된 카메라앵글 안에 미니멀한 방식으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담담히 담겨 있다. 그냥 가슴 먹먹한 상태로 들여다보는 것 말고는 달리 설명할 도리가 없다. 그중에서도 몇몇 장면들은 영화가 끝난 이후에도 내내 마음을 붙든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심사과정의 암전이 끝나면 우리는 처음으로 다니엘 블레이크의 얼굴을 보게 된다. 그는 몹시 상기되어 있으며 항변하고 싶으나 뭔가 설명하지 못하는 표정이다. 켄 로치는 이 영화에서 유달리 주인공의 클로즈업을 중요한 감정의 수사학으로 제시한다. 복지체제의 부조리함과 구직센터의 위악스러운 관료주의 앞에 당혹해질 수밖에 없는 늙은 노동자의 절박함. 자신 때문에 곤경에 처한 이를 바라보는 미안함, 채용 전화를 걸어온 사장에게 뭐라 거짓 핑계조차 대지 못하는 솔직함과 자괴감, 아이들을 위해 매춘 행위로 내몰리는 케이티를 향한 슬픔과 비탄. 그리고 컴퓨터를 쓸 줄 몰라 손으로 써온 이력서를 비웃고 제재를 가하는 구직센터 직원 앞에서 느끼는 모멸감과 수치심. 그리고 더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절망의 표정. 켄 로치 영화의 힘은 계몽주의에 가까우리만치 날카롭고 정확한 사회적 메시지에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모든 영화에서 드러나는 휴머니티와 연민의 시선 때문이기도 하다. 그것은 주인공뿐만 아니라 단순한 조연, 엑스트라 혹은 군중을 향한다. 물론 이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서 모든 주된 시선은 데이브 존스가 연기하는 다니엘 블레이크에 집중된다(그만큼 이 영화는 켄 로치의 이전작들에 비해 인물들과 사건이 미니멀하게 압축된다). 위에서 언급한 그의 클로즈업숏들은 말할 것도 없고 다니엘이 도서관 컴퓨터를 이용하기 전, 빈 시간을 메우기 위해 서늘한 도심에서 비를 맞으며 배회하는 장면들이 그러하다. 내러티브의 경제라는 측면에서 판단한다면 이 장면들은 삭제돼도 무방하다. 서사적으로는 그 장면들이 아무것도 이야기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켄 로치는 그 순간들을 매우 공들여 연출했다. 추운 거리의 건물 처마 밑에서 언 손을 부비며 서 있는 모습,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속에서 자리를 옮기며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야만 하는 초라한 순간들. 지금 다니엘 블레이크는 가난하고 지쳤으며 절박하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중요한 또 하나의 장면. 푸드뱅크에서 허기를 못 이기고 음식을 삼키다 울어버리는 케이티를 향해 그는 “이 모든 건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한다. 켄 로치의 ‘무고한 영웅’들이 직면한 빈곤과 실업의 문제가 결코 그들의 품성과 능력 문제로 전가될 수 없음을 피력한다(가령 이력서 작성 교육 장면에서 강사는 노동자들에게 취업을 하고 성공을 하려면 “똑똑해져야 한다”고 말한다. 사회적 모순을 개인의 역량 문제로 치환하고 왜곡하는 자본의 이데올로기). 연민과 시선 그리고 비극 종종 비전문 배우를 선호하는 이유에 대해서 “정말로 그런 삶을 살았던 사람을 캐스팅하면 카메라 앞에서라도 부지불식간에 삶의 체취가 묻어난다”라고 켄 로치는 말하곤 한다. 그건 켄 로치 자신에게도 적용될 수 있을 것 같다. 켄 로치 영화에서 보여지는 인간적인 연민과 시선의 따스함은 그 자신의 품성과 현장의 스타일이기도 하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 관한 다큐멘터리 <하우 투 메이크 어 켄 로치 필름>에서 시나리오작가 폴 래버티는 “나는 켄 로치와 20년 동안 12편의 영화를 같이 했지만 그동안 현장에서 그가 소리지르는 것을 한번도 본 적 없다”라고 말한다. 실제로 켄 로치는 영화의 모든 것을 스스로 통제하고 결정하고 있었다. 푸드뱅크 신을 찍는 날, 오전 10시에 모인 수십명의 엑스트라들 앞에서 그는 직접 푸드뱅크가 어떤 곳이고 영국 사회에서 어떤 의미인지, 그날의 촬영은 어떻게 언제까지 진행될지, 그들이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고 참여해주길 설명하고 부탁한다. 푸드뱅크 외부에서 길게 늘어선 사람들의 행렬을 찍기 전, 그는 직접 그 모든 엑스트라들의 위치를 설정하고 친절하게 그들의 이름을 물어주고, 아이를 업은 이에겐 힘들지 않느냐는 인사까지 건넨다. 영화를 촬영하는 동안, “아침마다 거대한 산을 마주하고 있는 느낌”이라는 그가 현장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중압감에 짓눌린 예민한 예술가도, 날카로운 정치적 선동가도 아니다. 이것은 흡사 <지미스 홀>에서 묘사했던 자신의 이상적 캐릭터와도 닮아 있다. 실천적 좌파 사회주의자이자 시와 노래, 춤과 음악을 사랑했던 예술가, 사람에 대한 연민과 애정을 아끼지 않았던 선하고 예의바른 인간 말이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2000년대 이후 켄 로치가 만들어낸 가장 비극적인 영화 중 한편이다. 생존을 위해 동료의 죽음을 방치 할 수밖에 없었던 <내비게이터>(2001)의 참담한 결말이나, 결국 자살로 치달은 이라크 참전 용사에 관한 <루트 아이리시>(2010)의 참담함처럼 이 영화는 과연 어디서 희망을 발견해야 할지 암담하다. 그리고 이에 대한 켄 로치의 오래된 응답(<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이후의 인터뷰), “희망은 없다. 정치가와 경제인은 대개 남을 위해 일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위해 일한다. 고용주는 고용인의 일자리를 뺏고, 헐값으로 대체 노동력을 산다. 이런 구조 안에서는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다. 유일한 희망은 새로운 경제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소수의 탐욕에 봉사하는 경제가 아니라 다수의 생계를 안정시키는 그런 구조 말이다.”

[김경욱의 영화비평] <여교사>, 자극적인 설정에 봉인된 주제의식

※이 글에는 <여교사>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쉬리>(1998) 이후, ‘한국형 블록버스터’ 시대의 도래와 함께 주류 한국영화는 남성 중심의 장르로 이동했다. 그 결과 지금까지 모두 14편인 천만 관객 영화를 돌아보면, 여성이 주연인 영화는 <암살> 한편뿐이다. 이것은 멜로드라마의 하위 장르인 로맨스가 주류영화에서 거의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서브플롯에서도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쉬리>의 경우, 주인공 유중원의 약혼녀이자 적대자로서 간첩 이방희가 등장하지만, <의형제>(2010)의 경우에는 이방희의 자리를 남성 간첩 송지원이 차지하고 있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서도 ‘로맨스’는 점점 사라지는 추세다. 예를 들어 <미션 임파서블>이나 ‘본’ 시리즈의 경우, 초기에는 로맨스가 서브플롯으로 들어가 있었으나 최근 시리즈에서는 볼 수가 없다. 로맨스는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중이다. 주류영화에서 남성 투톱(또는 스리톱)을 내세우는 경향이 대세가 되고 로맨스마저 사라지면서 결국 여배우가 주연으로 등장할 기회는 점점 줄어들게 된 셈이다. 대신 여배우는 구색 맞추기식으로 조연의 역할을 맡게 된다. 최근에 개봉한 <마스터>에서 엄지원은 터프한 형사로 등장해 이전의 이미지에서 변신한 모습을 보여주지만, 강동원, 김우빈, 이병헌 사이에서 존재감은 미미했다.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한, 2016년의 흥행작이자 주류영화라고 할 수 있는 <아가씨>는 예외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의 흥행 원동력에 스타 감독 박찬욱의 작품이라는 점뿐만 아니라 김민희가 극도로 노출을 꺼리는 여성 스타의 금기를 깼다는 점과 레즈비언의 섹스를 볼거리로 전시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2016년의 한국영화를 돌아보면, 블록버스터와 저예산영화 사이의 중간급 규모의 영화 <비밀은 없다> <미씽: 사라진 여자> 등에서 여성 스타의 등장이 눈에 띈다. 전자에서, 손예진은 딸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끝까지 파헤치는 엄마로 등장 한다. 후자에서, 엄지원과 공효진은 아이를 차지하려고 사투를 벌인다. 그들은 엄마 역할을 통해 멜로드라마와 로맨틱 코미디 장르에서 구축된 스타 이미지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로맨틱 코미디 스타의 이미지 전복 올해 첫 개봉영화의 하나인 김태용의 <여교사>도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이 영화에서 여교사 효주로 등장하는 김하늘은 14년 전, 인기 텔레비전 드라마 <로망스>에서 제자와 사랑에 빠지는 여교사 채원 역을 했다. 제자 재하(이원근)와 엮이게 되는 효주는 채원의 가장 어두운 버전으로서, 로맨틱 코미디의 대표적인 스타 김하늘이 자신의 이미지를 전복하는 시도를 한 것이다. 고등학교에서 계약직 교사로 일하는 효주는 정교사가 되기를 소망하고 있다. 그러나 이사장의 딸 혜영(유인영)이 느닷없이 등장해 그 자리를 차지해버린다. 효주의 가족이나 성장 배경에 대해 알려진 정보는 없으나, 이러한 설정에서 흙수저 효주와 금수저 혜영 사이의 계급 갈등이 형성된다. 김태용은 현재 한국 사회의 가장 핫한 쟁점을 설정한 다음 심리적인 차원으로 풀어나간다. 가진 게 별로 없는 효주가 다 가진 것 같은 혜영에게 느끼는 즉각적인 감정은 시기심이다. 시기심은 모든 인간이 경험하는 매우 보편적인 감정이지만, 효주의 시기심은 신경증환자처럼 심각하다(<비밀은 없다>의 손예진, <미씽: 사라진 여자>의 엄지원과 공효진도 ‘모성애’를 표면에 내세우고 있으나 한편으로는 신경증환자처럼 보인다. 또 <씨네21> 2016년 한국영화 베스트5에 선정된 <우리들>에서, 선과 지아 사이에 갈등이 빚어지는 원인에는 ‘시기심’이 있다). 혜영의 존재로 괴로워하던 효주가 혜영과 재하가 섹스 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자, 재하를 차지할 계획을 세운다. 한편으로는 혜영을 협박하며 괴롭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녀가 가진 것의 하나인 재하를 빼앗음으로써 박탈감을 만회하려고 한다. 효주는 먼저 열악한 가정 형편 때문에 학교 연습실에서 혼자 발레를 하는 재하에게 학원을 보내주는 명목으로 접근한다. 그런 다음 재하가 집에 들어갈 수 없게 되었다고 하자 자기 집으로 데려온다. 그리고 밥을 해주고 옷도 사준다. 이전에 효주는 소설가를 지망하는 남자를 10년 동안 돌보다 결국 헤어졌다. 논점에서 다소 벗어나지만, 그녀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돌봐야 하는 남자를 반복해서 만나면서 자신의 삶을 낭비하는 유형의 여성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영화와 대중영화 사이에서 길을 잃다 효주의 악전고투에도 불구하고, 흙수저는 결코 금수저를 이길 수 없다. 효주가 그 학교에서 계속 일하려면 혜영의 자비가 필요하다. 뿐만 아니라 재하마저도 알고 보니 혜영이 시키는 대로 효주를 사랑하는 것처럼 꾸민 것이었다. 효주는 완벽하게 굴욕적인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혜영이 무릎 꿇은 효주에게 최대한의 모멸감을 안겨줄 때, 효주는 혜영을 살해하고 만다. 이 장면은 공포영화처럼 섬뜩하게 연출되어 인상적이지만 한편으로는 결말에 이르러 대중적인 장르영화의 컨벤션을 선택했다고 할 수 있다. 금수저에 대한 복수로서, 대다수 흙수저 관객에게 일말의 쾌감을 안겨주는 결말인 것이다. 이러한 설정은 위에서 언급한 중간급 예산 영화에서도 발견되는 문제이다. 예산의 규모를 고려하면 흥행 요소들을 최대한 살려야 하는데, 그렇다고 작품의 질을 포기할 수는 없다. 일종의 작가영화와 대중영화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딜레마 속에서, 결과는 모두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쳤다고도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혜영의 약혼자가 등장하는 에피소드는 텔레비전 드라마 같은 설정이다. 딜레마 속에서 특히 고등학생 재하는 설명하기 어려운 기이한 인물이 되어버린 것 같다. 학교 연습실에서 잠들어 있던 재하는 그 모습을 바라보던 효주에게 느닷없이 비몽사몽간에 키스를 한다. 이 장면 때문에 효주와 관객은 그가 효주를 사랑한다고 착각하게 된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는 효주와 섹스를 하기는 해도 오로지 혜영만을 열렬하게 사랑한다. 효주와 혜영 사이의 갈등의 원인을 계급의 차이에 두었으나, 재하가 효주를 이용하고 혜영을 추종하는 이유가 그녀가 부르주아이기 때문인 것 같지는 않다. 금수저 혜영은 흙수저 효주와 재하 모두를 마음껏 농락했으나, 재하는 결코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그는 혜영의 신변에 문제가 생겼음을 감지하면서도 효주와 섹스를 한다. 이유는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섹스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이다. 혜영의 생사를 알 수 없는 가운데 그녀의 고급 아파트에서, 제자 재하가 선생 효주에게 강간에 가까운 행위를 벌이는 장면은 포르노의 설정과 유사하다. 이때 효주는 참을 수 없는 모욕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저항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쾌락을 느끼는 것 같지도 않다. 효주/김하늘의 무표정한 얼굴을 제시하면서, 관객에게 판단을 미루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김태용이 어느쪽도 결정하지 못한 건 아닌지, 김하늘이 자신의 스타 이미지를 고집한 결과는 아닌지 의문이 든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효주는 멘털 붕괴 상태임에도 학교의 자기 자리로 간다. 여기서 그녀가 원한 건 재하가 아니라 정교사 자리였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새삼 이 영화가 계급 문제를 모티브로 설정했다는 점을 환기하게 되면서 동시에 풀어낸 방법이 적절했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효주를 심각한 신경증환자로 설정하고 있기 때문에(혜영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여지가 있다), 그녀의 고통 속에서 사회의 문제가 투영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끔찍한 복수와 자극적인 설정 속에서 봉인되어버리는 것 같다.

[파리] 부성을 그린 영화 <투 이즈 어 패밀리> 흥행 기대

<언터처블: 1%의 우정>을 기억하는 영화 팬들이 있을 것이다. 전신마비 환자인 상위 1% 부자 필립(프랑수아 클루제)과 그의 개인 간호보조 드리스(오마 사이)의 특별한 우정을 그린 이 영화는 전세계적으로 1억9500만 관객을 돌파하며, 장 피에르 주네 감독의 <아멜리에>(2001) 이후 세계에서 가장 많은 관객몰이를 한 프랑스영화로 자리잡았다. <언터처블: 1%의 우정>의 대대적인 성공 이후, 국제적인 스타덤에 오른 오마 사이는 <쥬라기 월드>(2015),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2014), <인페르노>(2016) 등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조연으로 얼굴을 내비치는 한편, <웰컴, 삼바>(2014), <쇼콜라>(2016) 같은 자국영화에선 프랑스에 밀입국한 세네갈 난민, 19세기 말 프랑스에서 활동한 광대 등의 역할을 맡아 연기력을 보여줬다. 이런 그가 휴고 겔랭 감독의 코미디 <투 이즈 어 패밀리>(2016년 12월7일 프랑스 개봉, 원제는 ‘내일, 모두 시작된다’)로 돌아와 언론과 관객의 관심을 모았다. 극중 오마 사이는 누구인지 기억이 불확실한 하룻밤의 연인에게 3개월 된 자신의 딸을 건네받은 뒤, 철없는 바람둥이에서 훌륭한 아빠로 변해가는 사뮤엘 역을 맡았다. 1월3일 현재 <투 이즈 어 패밀리>는 개봉 4주 만에 225만여 관객수를 기록하며 프랑스영화 박스오피스 4위를 차지했다. 평단의 반응은 다소 엇갈린다. 이 영화에 긍정적인 쪽은 ‘놀라운 배우’(<20미니츠>), ‘탁월한 오마 사이’(<컬처 박스>) 처럼 대체로 배우의 호연을 높게 사는 분위기다. 반면 ‘감정이입이 힘들고 결말이 자연스럽지 못하다’(<유럽 1>), ‘눈물을 짜내는 평범한 코미디’(<텔레라마>) 같은 부정적인 반응도 적지 않다. 과연 오마 사이가 <투 이즈 어 패밀리>로 ‘언터처블, 1%의 부성’을 이뤄낼지 앞으로 더 지켜봐야 할 듯하다.

[스페셜] 국가관을 홍보하는 광고는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영진위의 당면한 문제는 무엇인가

박근혜 대통령 탄핵 심판의 시계가 빠르게 가고 있다. 국정 농단을 입증할 증거가 된다면 마지막 하나까지도 모두 밝혀야 한다. <씨네21>은 고 김영한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업무 일지를 다시 살폈다. 일지에는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근거한 정부의 <다이빙벨>과 관련한 외압(<씨네21> 1087호)뿐 아니라 <명량> <국제시장>에 대한 언급도 있다. 2014년 8월14일자에는 ‘長’(김기춘 전 비서실장), ‘CJ그룹, 명량 관련 고무’, 2014년 12월26일자 ‘長’, ‘영화 <국제시장> 保守(보수), 애국’, 12월28일자에는 ‘<국제시장> 제작 과정 투자자 구득난-문제 有. 장악, 관장 기관이 있어야’라 적혀 있다. CJ E&M이 투자·배급한 영화 <명량>은 2014년 7월30일 개봉했다. 그해 8월6일 박근혜 대통령은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과 수석 비서관들과 함께 여의도CGV에서 <명량>을 관람했다. 당시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은 “국가가 위기를 맞았을 때 민관군이 합동해 위기를 극복하고 국론을 결집했던 정신을 고취하고, 경제 활성화와 국가혁신을 한마음으로 추진하자는 의미가 있다”라며 청와대의 영화 관람 소감을 전했다. <명량>에 고무된 청와대가 앞장서서 <명량> 고무를 지시했다고 볼 수 있는 정황이다. 영화계 관계자는 “광화문에 이순신 동상을 세운 게 박정희 정권이다(1968년 4월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세워졌다.-편집자). 이순신 장군을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하고 <명량>의 흥행 고무를 지시한 것”이라고 전했다. “장악, 관장 기관 있어야” 2014년 11월 말, 박근혜 대통령은 손경식 CJ그룹 회장과 독대한 자리에서 “CJ의 영화·방송 사업이 정치적으로 편향돼 있다. 방향을 바꾸라”고 말했고 손 회장은 “죄송하다. 방향을 바꾸겠다”고 답했다. 하태경 바른정당 의원을 비롯해 영화인들은 “박근혜 대통령이 자신을 풍자한 tvN의 의 시사 풍자 코너 ‘여의도 텔레토비’에 대한 보복으로 이미경 전 CJ그룹 부회장 사퇴를 요구했다”고 해석했다. 업무 일지에 <국제시장>을 두고 ‘구득난’이라 말한 건 청와대가 업계 사정을 전혀 모른 채 한 소리로 보인다. <국제시장>은 업계 1위인 대형 투자·배급사 CJ E&M과 다년간의 제작 경험으로 여러 편의 흥행작을 만들어온 JK필름이 만든 영화다. 정작 청와대가 하고 싶은 말은, ‘장악, 관장 기관 있어야’로 ‘구득난’은 제 입맛에 맞는 영화만 보고 싶다는 청와대의 명분용이라는 분석이 가능하다(이어지는 기사에서 이와 관련한 정치인, 영화인들의 해석을 들어봤다). CJ그룹은 바로 다음해인 2015년 CGV 극장을 통해 ‘프리미엄 코리아’라는 극장용 광고를 내보낸다. 광고는 ‘우리 민족’을 강조하며 ‘이토록 큰 자부심을 주는 나라가 우리의 나라, 대한민국’으로 마무리된다. CJ그룹의 비전이나 활동 소개는 전혀 없고 국가 홍보용 광고로 보일 정도라 관객 사이에서는 ‘국뽕광고’로 불렸다. CGV의 조성진 홍보팀장은 “CGV는 광고비를 받고 상영만 했다”며 “광고의 내용과 집행 과정은 CJ그룹에서 결정한 사항”이라고 말한다. CJ그룹 홍보실 한수경 부장은 “CJ그룹 사장단이 제작을 결정한 광고다. 2015년은 CJ그룹이 문화 사업을 시작한 지 20주년이 되는 해였다. 여러 기념행사 중 하나였을 뿐”이라고 광고의 의미를 일축했다. 광고 내용에 대해서는 “2014년 <명량>으로 큰 사랑을 받아 국민들께 감사한 마음과 세월호 사고로 국가·경제적으로 힘든 시기라 ‘다들 힘내자’는 의미를 담았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CJ그룹의 한 관계자는 이 광고가 ‘현 정부의 외압과 그룹의 몸 사리기에서 나온 것’임을 부인하지 않았다. CJ E&M도 ‘창조경제를 응원합니다’라는 극장 상영용 광고를 만들기도 했다. <씨네21>은 업무 일지의 2014년 12월10일자 메모, ‘바른사회(시민회의)와 행복한 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이하 행변) 역시 주목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청와대는 업무 일지에 ‘보수 법률가 단체 活用(7월7일)’, ‘보수 법률 단체 現況(9월25자)’ 등을 언급하며 세월호 유족쪽 변론을 맡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활동 변호사들을 주시해왔다. 행변은 2014년 9월16일 조희연 서울시 교육청 교육감의 자사고 폐지 주장을 국민의 교육권 침해라며 성명서를 내면서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이후, 세월호 유가족에게 폭행을 당했다는 대리 기사의 무료 변론을 맡기도 했다. 청와대가 민변에 대항할 목적으로 결집시킨 보수 법률인 모임이 행변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다. 행변에는 세월호 특조위가 대통령의 행적을 조사하려 하자 반발하며 특조위원직을 사퇴한 차기환 변호사도 있다. 그는 정호성 전 비서관의 변호사이기도 하다. 그와 사법연수원 17기 동기인 이인철 변호사 역시 행변 소속이다. 이인철 변호사, 그는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 비상임 감사다. 유일호 기획재정부 장관이 2016년 3월 임명한 2년 임기직이다. 차기환, 이인철과 연수원 동기에는 더블루케이 한국법인의 대표였던 최철 변호사도 있다. 최철 변호사는 행변의 발기인인 강래형 변호사와 같은 법무법인 웅빈 소속이다. 영진위가 정권의 블랙리스트를 충실히 실행에 옮겼음이 밝혀진 이상 영진위 내부의 ‘수상한’ 커넥션을 그냥 넘길 일이 아니라는 지적이 충분히 가능하다. 영진위는 그동안 블랙리스트의 존재와 실행을 전면 부인해왔다. 지난해 국정감사와 문체부 특별감사로 위원장과 사무국장의 비위 사실까지 확인됐다. 사무국장은 직위해제됐고 김세훈 위원장은 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체부)에 이의신청을 한 상태다. 영진위, 지금 이대로는 안 된다 영화인들은 영진위를 국정 농단의 부역자로 보고, 김세훈 위원장과 부산국제영화제에 외압을 행사한 서병수 부산시장의 사퇴와 구속수사를 촉구하고 나섰다. 영진위의 최고 의결기구인 9인 위원회도 바로 세워야 한다는 입장이다. 지난해 12월30일로 임기가 만료된 3인의 위원을 새로이 구성하기 위해 임명권을 가진 문체부가 영화인들을 상대로 인재 추천을 받고 있다. 영진위 주무부처인 문체부 영상콘텐츠사업과의 박정후 사무관은 “문체부에 등록된 60여개의 영화 관련 단체에 추천해달라고 요구서를 보냈다”며 “이중에는 현재 활동을 하지 않거나 영화와 상관이 없는 듯한 단체도 여럿”이라고 말했다. 그는 “우리가 임의적으로 (추천인 명단에서 활동하지 않는 단체들을) 빼버리면 불필요한 논란이 발생할 수 있다”는 이유였으나 추천인을 제대로 받아보겠다는 문체부의 의지가 있는지 의심이 되는 지점이다. 박 사무관은 “(영화인 추천제는) 2009년에 만들어진 시행령에 따른 것인데 별 효과가 없어서 2012년 이후로는 추천을 받지 않아왔다. 필요한 경우 영화계 원로들의 추천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문제를 개선하려 시도조차 하지 않았음을 자인한 셈이다. 영화계는 문체부의 추천인 제안을 전격 거부했다. 고영재 한국독립영화협회 대표는 “조윤선 문체부 장관이 임명하는 9인 위원을 수용할 수 없다. 시급한 사업이 아닌 이상 2017년 영진위 사업을 전면 중단하라. 새로운 정부 수립 이후 영진위 사업을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 이 정권에 부역한 9인 위원회도 전부 사퇴하라”고 강력 규탄했다.

[김영진의 영화비평] 최근 한국영화의 낭비되는 이미지 문법에 관하여

이 글은 하나의 의문을 갖고 물고 늘어지며 쓰려 한다. 최근의 주류 한국영화에서 클로즈업된 배우의 얼굴들이 근사하다는 느낌으로 수렴되는 것 외에 왜 지속적인 잔상을 남기지 않을까란 의문이 그것이다. 나와 가끔 문자로 교신하는 어느 영화인은 요즘 한국영화에서의 얼굴 클로즈업은 대사와 표정 외에 어떤 기능도 하지 않는다고 한탄하는데 그의 말에 따르면 스토리는 다양해졌지만 얼굴이 영화적 이미지로 작동하지 못하고 사용가치로 전락해버린 작금의 한국영화 현실은 오염돼 있다는 것이다. 얼굴의 ‘사용가치’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무엇이든 지나치면 독인데, 이 풍토에 문제의식을 갖지 않는다면 얼굴의 페티시즘에 갇힌 온갖 메시지 영화들의 정치적으로 올바른 입장들도 머지않아 상투형의 막다른 골목에 막힐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윤리적 감각의 균형이 부재한 <마스터> 이를테면 <마스터>란 영화에 등장하는 숱한 배우들의 얼굴 클로즈업은 그저 배우들이 근사하게 생겼다는 인상 외에 어떤 것도 전달하지 않는다. 이건 ‘15세 관람가, 권선징악’의 연출 전력과 무관하다. 이병헌이 연기하는 희대의 사기꾼 악당 진현필은 이병헌이 ‘연기를 잘한다’는 느낌 이상의 것을 주지 않는다. 관객에게 연기를 잘하고 있다는 느낌을 줌으로써 그는 역설적으로 어떤 수준 이상의 연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한다. 관객은 영화 속의 진현필을 이병헌이 근사하게 연기하는 허구의 악당으로 받아들인다. 그는 심지어 무섭지도, 사악하지도 않은 멋있는 악당, 사악한 캐릭터를 연기하는 멋있는 배우로 관객에게 다가온다. 이 느낌을 주기 위해 그는 영화에서 수많은 클로즈업을 할당받는데 이건 끝없이 나열되는 광고 화면의 이미지에 가깝다. 그의 이미지는 영화 속의 인물 이미지로 육화된 것이 아니라 배우의 물리적 아름다움에 카메라가 자의적으로 포섭되어 사악한 것조차 멋있게 재현한다는 목적의 도구로 쓰이는 이미지다. <씨네21> 지난 1089호 인터뷰에서 감독 스스로 ‘사기 캐릭터’라고 밝힌, 진현필 회장을 끝까지 추적하는 엘리트 경찰이자 지능범죄 수사대 팀장인 김재명은 더 나아가 현실에 아예 존재하지 않지만 대리만족 카타르시스를 주기 위해 무한대의 경계로 넓혀진 캐릭터다. 첫 등장부터 영국 수상 처칠이 벌금을 문 일화를 언급하는 그는 청렴결백하고 총명하며 정의감 넘치고 최고 권력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상부의 절대적인 엄호를 받는 무결점의 인물이다. 그의 마지막 퇴장 장면은 진현필을 검거한 후 진현필을 비호하던 정치인들을 검거하기 위해 출동하는 수많은 경찰차들 사이에서 늠름하게 화면 저편으로 걸어가는 모습이다. 좋다. 이런 장면이 정의에 목마른 한국 사람들에게 잠시 동안의 대리만족을 준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지만 이 밋밋한 캐릭터를 수행하는 김재명의 멋지고 잘생긴 외모를 강조하기 위해, 드라마의 이야기 기능을 운반하기 위해 인형처럼 대사를 읊는 느낌을 주는 강동원의 소모되는 이미지는 어쩔 것인가, 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는 더할 나위 없이 잘생겼지만 그가 연기하는 인물은 영화에서 최소한의 극적 기능을 수행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잉여적으로 발산하지 않는다. 강동원이 연기하는 한국영화 속의 경찰 캐릭터는 그냥 영화 속 캐릭터일 뿐이다. 그래도 된다고 감독이나 배우는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이 캐릭터가 아무런 현실적 환기력도 지니지 않을 때 캐릭터는 강동원이라는 배우의 나르시시즘의 발현도구로만 머물게 된다. 이것은 이 영화가 그가 출연하는 사이비 공익 광고에 불과하다는 전시효과를 낳는다. 공허하게 정의는 살아 있다고 물리적으로 과시하는 이미지를 펼쳐봐야 그것은 강동원은 멋있다, 그렇지만 강동원은 연기를 너무 못한다, 강동원이 전시하는 정의의 담지자로서의 스크린 속 물리적 형상은 가짜다, 라는 느낌에서 더 나아가지 못한다. <마스터>는 실제 벌어졌던 사기사건을 소재로 현실에서와 달리 권선징악의 결말로 맺음하는 영화다. 현실에서 미제였던 사건을 극화해서 법의 심판을 받는 해피엔딩으로 바꾸는 것이 윤리적으로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 영화는 자명한 악을 향해 자명하다고 끊임없이 강조하는 이미지를 나열하고 있으며, 그 악을 처단하기 위해 집요하게 추적하는 경찰의 정의로운 이미지 역시 고루 안배하고 있다. 서사 차원에서 이 영화는 정치적으로 공정한 위치에 서 있다고 떳떳하게 주장하지만 나쁜 것을 나쁘다고 주장하는 게 정의는 아니다. 나쁜 것을 나쁘다고 주장하는 우리 안의 악 역시 들여다볼 수 있어야 정의에 대한 윤리적 감각의 균형이 선다. <마스터>에는 그런 윤리적 감각의 균형을 가늠할 서사적 자리가 전혀 없다. 진현필의 연기, 누구에게나 부자가 될 수 있다고 달콤한 유혹을 건네는, 그리하여 수많은 고객을 모으는 그의 수법을 드러내는 영화 초반의 경과 보고회 무대 연기는, 그가 가족이라고 부르는 고객들의 마음을 훔치는 고도의 연기라고 영화에선 주장되지만 관객 입장에선 상투적인 연기다. 연출자도 그 점을 아는지 진현필이 무대 연기를 마친 후 다음 장소로 이동할 때 그의 가짜 연기 실력을 드러냄으로써 진현필이 악당 캐릭터로서 서사적으로 이미 지고 들어가고 있음을 실토한다. 진현필 캐릭터는 이병헌이라는 스타가 연기하지 않으면 보고 있을 인내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수준의 캐릭터다.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이 반해 투자를 결심하게 만들었던 그의 매력을 증명하려면 그에게 자기 인생을 맡겼던 사람들의 어리석음, 무지, 탐욕이 우리 자신의 것이기도 하다는 데 이르러야 한다. 그가 사는 방식에서 표출되는 매력은 곧 우리 안의 악함이 반질반질한 최고 자본가의 외형을 향한 것이라는 자각이 있어야 한다. 거칠고 단순하지만 이병헌이 역시 악당으로 나왔던 <내부자들>에선 희미하게나마 그런 악의 공감성에 대한 묘사가 있었다. 기능적인 숏들의 나열로만 완성된 서사 강동원이 연기하는 김재명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이 없지만 진현필의 수하였으나 그를 배신하게 되는 박장군(김우빈)에 대해서는 조금 더 말할 것이 있겠다. 이 캐릭터도 평면적인 것은 다른 캐릭터와 비슷하지만 진현필의 편에 있다가 자기 생존을 위해 김재명 편에 서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약간의 실존적 동요를 영화에서 경험하므로 관객 입장에선 뭔가 약간의 이입 여지를 남기는 인물이다. 이 영화를 본 다음날 카페에서 차를 마시다 우연히 직장인들이 <마스터>에 대한 감상 소감을 나누는 걸 옆자리에서 듣게 됐는데 그들은 김우빈이 이 영화에서 가장 연기를 잘했다고 평가했다. 이는 김우빈이 맡은 역할의 캐릭터가 그나마 유일하게 도덕적으로 진화하는 인물이었다는 것을 반영하는데, 흥미롭게도 그는 이 영화의 주인공들 가운데 클로즈업으로 웅변하지 않는 유일한 인물이다. 그가 가장 생생한 캐릭터라는 느낌을 준 건 그에게는 그나마 다른 인물들과 달리 영화 속에서 뻔한 동선을 제공받지 않은 채 관객이 알지 못하는 미지의 공간으로 조금씩 이동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진현필이 점유한 공간이나 김재명이 점유하는 공간은, 영화 중반에 김재명이 터널에서 펼치는 액션이나 영화 후반부 필리핀에서 펼치는 김재명과 진현필의 대결 장면에도 불구하고 관객의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오직 박장군만이 다른 인물들과 달리 현실적 공간을 그나마 돌아다닌다. 형사들의 미행을 따돌리고 그가 비밀 전산기지를 방문하거나 진현필의 사기 피해자들 집회 모임에 나타나는 것과 같은 최소한의 동선 확보를 통해 그는 다른 인물들과 달리 그나마 상대적으로 현실적인 인물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의 빈약한 캐릭터는 오로지 서사의 문제인가. 꼭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앞에서 낭비되는 클로즈업에 대한 불만을 얘기했다. 빠른 속도감을 지키면서 관객이 지루하지 않게 잘생긴 스타배우들의 클로즈업을 나열하는 이 영화의 연출 호흡은 서사의 기능적 지분을 넘어서는 잉여를 창조하는 데 완벽하게 실패했다. 서사 작법과는 다른 차원에서 <마스터>는 최근 한국영화에서 낭비되는 이미지 문법의 적절한 실례를 보여준다. 하나의 장면이 시작하면 인물의 위치와 동선이 생생하게 재현된다는 느낌을 주는 프레이밍과 연결을 이 영화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근본적으로 텔레비전 드라마의 호흡이지만 빠른 속도감으로 대충 얼버무리고 다음 장면을 향해 초조하게 내달리려는 이런 연출에서 유일하게 생존의 동아줄처럼 붙잡고 있는 것이 클로즈업인데, 유감스럽게도 나 같은 관객은 초반 30분 이후부터 지루함을 견디기 힘들었다. 현장에서 연출, 촬영, 여타 스탭들은 인물과 카메라의 위치, 인물의 동선과 재배치를 끊임없이 고민하며 만들었을 텐데 왜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궁금하다. 하나의 가설을 만든다면 그건 이 영화가 스크린 위의 물리적 현실을 재현하려는 노력 대신 근사한 전시적 이미지에 봉사하는 기능적 숏들만으로도 서사가 완결될 수 있을 것이라는 안이함의 소산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영화가 현실을 방패 삼아 현실의 정반대 면을 재현한 가상의 판타지라서가 아니라 정의감의 충족이라는 서사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더라도 의당 심혈을 기울였어야 할 현실의 물리적 단면들의 재현과 복원에 관습적으로 임했기 때문일 것이다. 판타지에도 현재 우리의 삶의 모습이 투영되고 미래의 우리 모습이 어른거린다면 영화 속 이미지들은 우리를 소름 돋게 만들 수 있지만 이 영화에는 그런 이미지의 응결점이 생길 지점이 없다. 예를 들면 필리핀에서 진현필과 김재명이 담판을 지을 때, 경찰과 악당이 대결한다는 긴장감은 서사가 그때까지 감추고 있던 정보를 폭발적으로 풀어놓는 속도감 속에서 소모된다. 여기서 이 두 인물은 그 자체의 존재감으로 화면에 버티는 게 아니라 반전의 도구로서 소용된다. 캐릭터는 남아 있지 않고 이병헌, 강동원의 물리적 인상만으로 버티면서 서사를 다음 단계로 넘기는 데 급급하다. 숏이 정보의 기능적 전달을 넘어 내러티브의 진전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어떤 잉여의 것들을 창조할 때 우리가 그것을 영화적 이미지라고 부를 수 있다면 이 영화에는 단 한순간도 잉여의 창조가 발생하지 않는다. 그게 발생하지 않는 이미지라면 예쁜 관광엽서의 소모성 이미지와 다를 게 없다. 같은 배우를 계속 언급해서 미안하지만 <마스터>의 주인공 역할을 맡았던 강동원은 그 직전에 개봉했던 영화 <가려진 시간>에서도 비슷한 패턴으로 소모된다. 두개의 시공간이 있고 그중 하나의 멈춰진 시공간에 존재하는 소년이자 어른의 육체를 지닌 주인공으로 나오는 강동원의 이미지는 서사적으로 논리적 결함투성이인 플롯과는 별개로 어린아이들이 처한 고립의 절망감을 자기도취적으로 동어반복해 소비하는 곤란함에 봉착한다. 영화 중반에 등장하는 강동원의 존재감은 사슴처럼 맑은 눈망울로 뭔가를 호소하는 익숙한 이미지로 되풀이되지만 여기서는 아예 비현실의 공간에 처한 인물이라는 설정 때문에 위치와 동선을 영화적으로 재구성하려는 어떤 시도도 불가능한 모순에 처하게 되었다. 그런 이유로 강동원은 서사적 결함에 덧입혀 자꾸 화면 속에서 겉도는 느낌을 주게 되고 세월호의 비극을 의식하며 이야기를 구상했다는 감독의 정치적으로 올바른 작의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비극을 배우의 육체에 기대어 소비적인 페티시즘으로 낭비하고 있다는 혐의를 지울 수 없게 만든다. 이미지의 생존력이 살아 있는 영화를 기대하며 이제 좀 다른 차원에서 개인적으로 아쉬움을 줬던 한편의 영화를 더 언급해보려 한다. 이언희 감독의 <미씽: 사라진 여자>는 주제의식과 접근방법 모두 선의를 갖고 있고 매우 꼼꼼하게 재현된 화면 역시 수준급 연출력을 증명하지만 이상하게도 영화가 끝난 후 뭔가 해소되지 않은 감정을 준다. 나는 이게 일정하게 스릴러 장르 문법을 따르며 몇개의 맥거핀을 던진 후 살짝 방향을 비틀어 서사에 윤곽을 주는 이 영화의 전개 방식 때문이 아니라 인물 클로즈업과 사운드에 대한 약간 지나친 의존에 원인이 있다고 본다. 이 영화는 보모와 아기가 함께 실종되었다고 믿었다가 보모가 아기를 납치했다는 걸 알게 된 주인공 이지선(엄지원)이 결국 중국인이었던 보모가 왜 아기를 납치했는지 그 전모를 알고 공감하게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가해자와 피해자로 이분해서 나눌 수 없는, 두 여자주인공의 위치는 서사의 전개에 따라 조금씩 바뀌는데 주인공 이지선과 보모 김연(공효진)은 서로 가해자이자 피해자이기도 하다. 영화 초반 아기를 잃어버린 이지선의 행방을 따라 반쯤 정신을 잃고 경찰과 별개로 탐문에 나서는 이지선은 숱한 위협에 노출돼 있는 것으로 제시된다. 그를 대하는 주변의 시선은 어느 쪽에서도 우호적이지 않다. 직장 상사, 경찰, 이혼한 전남편, 시어머니, 브로커, 심지어 보이스 피싱 전화 너머의 미지의 남자에 이르기까지 이지선이 접하는 인물들은 그를 위협하거나 불신하거나 적대시 한다. 영화는 부분적으로 그가 느끼는 고립감과 두려움을 효과적으로 재현하는데 이를테면 그가 외국인들이 모여 사는 동네 골목을 심야에 탐문한다거나 사람들이 모여 있는 거리 복판에서 미친 여자 취급을 당하며 아기를 찾기 위해 달리거나, 보모가 살던 시골집을 탐문하며 낯선 집의 대문을 들어설 때와 같은 장면에서 화면들은 그의 실제 존재와는 별개로 무능력하고 약간 이상하고 무모하고 믿을 수 없고 연약한 여자로 정의되는 상황들을 시각적으로 잘 재현한다. 불가피하게 영화는 이지선의 내면을 관객에게 이입시키기 위해 허다한 근접 화면을 사용하는데 이는 영화의 중· 후반 이후 과거 회상 장면으로 사연의 전모가 밝혀지는 보모 김연을 보여줄 때도 마찬가지다. 이 영화가 주력해서 사용하는 또 하나의 장치는 정확하게 발음되지 않는 보모 김연의 목소리다. 김연은 한국말을 잘 쓰지 못하지만 아기를 달래기 위해 중국어 자장가를 부르는데 그 어조 덕분에 아기들이 그의 목소리에 잘 반응한다. 김연이 자장가를 부르는 몇개의 장면 외에 김연의 과거를 보여주는 몇몇 장면에서 김연이 통곡을 할 때 그의 울음소리가 화면에 계속 이어지면 현재 장면에서의 이지선이 마치 그 목소리를 듣는 듯 연결되는 장면들이 영화에는 꽤 나온다. 김연의 자장가 소리는 마지막 장면에서 김연이 물속에 뛰어들어 스스로 죽음을 택할 때 한국어로 바뀌어 화면에 깔린다. 이것을 누가 부르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 소리는 영화 내내 주조음으로 깔려 있던 것이고 그것이 일종의 배음 효과를 가졌더라면 이 마지막 장면에서 한국어로 들리는 자장가 소리는 오케스트라의 연주 화음 못지않게 관객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겼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클라이맥스 장면에서 두 엄마, 이지선과 김연이 아직 살아 있는 아기 다연의 목숨을 놓고 대립할 때 번갈아 오가는 그들의 클로즈업을 통해 배음이 폭포처럼 쏟아지는 인상을 관객에게 주고 싶었다면 그전에 매 장면에 수시로 끼어드는 클로즈업들은 좀더 자제됐어야 했다고 본다. 나는 뛰어난 감독들은 무성영화와 경쟁한다고 믿는 구식 평론가일지도 모르지만, 21세기의 영화 역시 근본적으로는 무성영화적 속성을 지녀야 한다고, 그래야 이미지의 생존력이 보장된다고 생각한다. 최근 한국영화들은 너무 많은 근접 이미지, 너무 많은 사운드로 화면의 전체 긴장을 해하며 결과적으로 영화의 강력한 표현 도구인 근접 이미지를 무의미하게 낭비하고 있다. 이것이 당장에는 스타 이미지의 소비를 통한 흥행 제고에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머지않은 기간에 이미지의 상투형이라는 동굴에 갇혀 흥행 제고에도 감점 요인이 될지 모른다. 무엇보다 낭비되지 않는 이미지, 정확한 순서에 정확한 크기로 배치되는 이미지, 전체의 아우라를 잘 보존해서 현실적 환기력을 꾀하려는 이미지, 그런 창조의 결과물들을 한국영화에서 보고 싶다.

[내 인생의 영화] 한성천의 <스타워즈> 시리즈

어린 시절, 나는 초등학교 5학년이 될 때까지 기관지천식을 심하게 앓았으므로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냈다. 부유하지 않은 환경이었지만 내 방엔 다른 친구들 집엔 없는 비디오 플레이어가 있었고, 조립해 만들 수 있는 장난감들이 가득했다. 매일 장난감을 조립하고 공상과학 소설들을 즐겨 읽으며 텔레비전에 나오는 <브이>나 <전격 Z작전>을 시청하던 어느 날, <주말의 명화>였는지 <토요명화>였는지 확실치는 않지만 어디선가 방영한 <스타워즈>를 보게 되었다. 나는 완전히 빠져들었다.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거대한 지구라는 별은 영화에 등장조차 하지 않았다. 등장했다 치더라도 지구는 작은 변두리 행성 중 하나로 나왔을 것이다. 그 세계 안에선 우주의 다양한 종족들이 거대한 연합을 이루어 살고, 그 연합을 무너뜨리기 위해 제국이라는 또 하나의 집단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모든 것의 중심에 자리한 포스라는 신비한 힘. 빛과 어둠의 양면을 가지고 있는 힘. 그리고 그 힘을 가진 제다이 기사들과, 자신에게 전 우주의 균형을 맞출 거대한 포스가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살던 주인공. 다음날 나는 일어나자마자 비디오 가게로 달려갔다. 세편이 더 있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바로 빌려 내리 세편을 다 보았다. 동서양의 철학을 동시에 담고 있고, 부자 관계로 얽힌 출생의 비밀이 존재한다. 평범한 세계에 살던 주인공은 어느 날 자신의 힘을 깨닫는다. 그 힘으로 인해 몸담은 세계로부터 단절되며, 다른 곳에서 능력을 연마하고 돌아와 악을 물리치고 세계를 구한다. 이 시리즈가 히어로물의 법칙을 완벽히 준수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금은 알고 있지만 그때는 전혀 알지 못한 채로 영화를 접했기에 충격이 컸다. 지금 생각해봐도 “I’m your father”라는 다스 베이더의 대사에 입을 다물지 못한 내 모습이 생생히 떠오른다. <스타워즈> 시리즈를 보면서 배우가 되겠다는 생각을 한 것도 아니고, 저런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도 아니다. 단지 병치레로 인해 집에만 있던 한 아이가 화면에 나오는 어마어마한 스케일의 영화에 압도되어 그 영화에 빠지고, 나에게도 그런 포스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했던 날들을 떠올려본다. 어느새 훌쩍 나이를 먹어버린 지금도 여전히 <스타워즈> 시리즈를 사랑하며 다음 시리즈를 기다린다. 포스가 있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한다. 아직 철이 안 들어서일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의 시대가 영화보다 더 말도 안 되게 돌아가고 있고, 힘 있는 자들이 힘없는 자들을 농락하며, 드러난 죄마저 부정하면서 뻔뻔스럽게 고개를 들고 있는 모습에 분개한다. 난세엔 영웅이 탄생하고 정의는 반드시 승리하는 법. 우리나라에도 루크 스카이워커 같은 영웅이 나타나 포스의 힘으로 국민들을 농락한 주범들을 물리쳐주길 기대해본다. 그리고 한 걸음 한 걸음 배우의 길을 열심히 걷고 있고, 미숙하지만 계속 시나리오를 쓰고 있는 영화인으로서 언젠가 우리나라에서도 <스타워즈> 시리즈 같은 멋진 영화를 만드는 날이 오길 기대해본다. <스타워즈> 속 대사처럼, 우리 국민 모두에게 포스가 함께하길 기원하며. May the Force be with you. 한성천 배우. <용서받지 못한 자>(2005), <577 프로젝트>(2012), <롤러코스터>(2013), <소시민>(2015), <터널>(2016) 등에 출연했다. 언젠가 시나리오작가로 데뷔할 날을 꿈꾸는 중.

[박수민의 오독의 라이브러리] 토니 스콧의 <맨 온 파이어>와 엘리 슈라키의 <격노의 사나이>

예전에는 영화 속 남자주인공들의 직업군이 대부분 형사, 군인 아니면 범죄자, 자경단이었다. 그들은 법의 집행자가 아니라면 반대로 범법자였고, 그 공권력마저도 위법하게, 지극히 사(私)적으로 집행하는 일이 예사였다. 그들은 위험한 외톨이들이었다. 생겨먹은 성격이 처음부터 고집불통에 수구꼴통인 그들은 걸어다니는 인간흉기였고, 항상 개인적인 원한과 증오에 불타는 프로페셔널이었다. 나는 그런 영화들을 좋아했고 거기 나오는 그런 남자들을 사랑했다. 사실 지금도 좋아한다. 하지만 솔직히 인정하자. 그들은 모두 각자 나름의 파시스트였다는 걸. 요즘 영화 속 남자주인공들의 직업은 대체로 무엇일까? 글쎄, 외국은 슈퍼히어로와 스파이라면 한국은 검사와 조폭? 통틀어 직장인 아니면 아빠라고 하면 어떨까. 법이 곧 정의를 상징하던 시대는 지났다. 위험한 외톨이는 주인공쪽에선 사라지는 추세다. 론 울프는 주로 테러범을 칭하는 말이 되었다. 영웅이든 악당이든 남자들은 모두 어딘가 시스템에 소속된다. 그리고 아버지는 이제 어머니만큼 숭고한 직업이다. 그들은 가족을 부양하고 가정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시스템의 노예가 된다. 남은 외톨이는 시스템에 똑같이 당하기 싫은 소년, 소녀들이다. 은퇴 후 알코올 중독자가 된 특수부대 출신 전직 정부 요원이 어느 부호의 딸을 경호한다. 과거에 자신이 했던 짓들 때문에 번뇌하는 괴물은 천진한 어린이와의 유대를 통해 닫힌 마음을 연다. 하지만 업보 탓인지 씻김은 정녕 불가능하니, 악당이 나타나 그에게서 소녀를 납치하고 부모에게 거액의 돈을 요구한다. 납치범에게 돈을 건네는 일은 중간에 틀어지고, 소녀는 아무래도 죽은 것 같다. 죽다 살아난 이 괴물에게 남은 일은 그의 전공인 파괴와 살육을 통한 철저한 앙갚음이다. 전형적인 어느 남자 영화의 플롯. 온갖 베리에이션이 나온 원형. 토니 스콧의 <맨 온 파이어>(2004)를 보았을 때, 나는 이런 식의 남자 영화가 쇠퇴기에 접어들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한 세대에 우세했던 종(種)이 이제 멸망, 곧 소멸하게 될 거란 감각이었다. 뤽 베송의 <레옹>(1994)은 돌이켜보면 중년 남자와 10대 소녀의 사랑을 다룬 영화다. 유대도 연대도 아닌 분명한 사랑이다. 소녀는 괴물을 사랑하고 괴물도 소녀를 사랑한다. 그래서 괴물은 소녀 대신 죽는다. 그러나 마지막 보이스카우트 토니 스콧은 차마 그런 사랑을 말할 수 없다. 그래서 <맨 온 파이어>의 괴물과 소녀는 이상한 부녀 관계에서 머문다. 소녀가 잡혀가자 영화는 본래 목적을 실행한다. 그것은 남자의 파괴와 살육이다. 애초에 소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던 게 아닐까 싶을 만큼, 폭력의 이미지가 부족한 정서 위에 넘쳐흐른다. 복수의 이유인 소녀는 현란한 편집 효과로만 존재한다. 아이의 죽음을 쉽게 소모해서는 안 된다 대중이 이입하기 쉬운 감정 중 하나는 자식 잃은 부모의 원한이다. 자식을 빼앗긴 부모의 분노는 너무 당연하기에 오히려 이야기를 만들 때 의심해봐야 한다. 세상이 그렇게 한다고 해서, 우리가 짓는 이야기도 너무 쉽게 아이들을 잡아가거나 죽이고 있는 건 아닐까. 물론 이 잔인한 세상에서 내 자식을 무사히 키울 수 있을지에 대한 공포의 반영이며 남의 자식 역시 귀한 줄 알라는 교훈을 주지만, 그것이 주인공의 폭력을 설명할 막연한 동기로 소모되어서는 위험하다. 사라진 옆집 아이를 구하러 간 아저씨의 회상에 굳이 트럭에 치인 임신한 아내까지 나오는 건 과도하다(<아저씨>). 심지어는 자식 대신 키우던 개 때문에 한 조직을 괴멸시키는 남자도 나왔듯이(<존 윅>), 오로지 필요를 위한 동기는 때론 있으나 마나 한 이유가 된다. 진실 비슷한 것은 결국 진실이 아니며, 패러디는 진실을 우스꽝스럽게 만든다. 나 역시 내 영화에서 진실 비스름한 이유를 격렬한 고민 없이 써먹었다. 이 남자를 관객이 알 만큼 고통스럽게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자식을 죽이자. 맙소사. 이런 식의 창작은 세상의 모든 부모에게 죄스러운 일이다. <맨 온 파이어>에서 남자의 분노와 복수의 명분은 바로 이 지점에서 애매모호하다. 그는 어쨌거나 소녀의 아버지가 아니다. 그의 복수는 엄밀히 말해 부모의 대행이고 애초에 그럴 권리가 없을뿐더러 있다고 한들 지나치다. 물론 어린이 유괴와 살인은 모두가 분노할 일이지만, 공권력이나 자경단이 아닌 남자에게 그 모든 폭력의 이유로는 동기가 부족하다. 그렇다고 이 남자도 한때 아빠였다는 식으로 덧붙일 것인가? 주인공의 비등점에 도달해서 선을 넘어야만 이후의 폭력이 용인되는 것은 편협한 남자 영화가 가지는 최소한의 내부 논리다. 그는 왜 선을 넘어버렸는가? 괴물과 소녀의 ‘사랑’은 죽어도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같은 이야기를 먼저 영화로 만들었던 엘리 슈라키의 <격노의 사나이>(1987)는 그 이유를 ‘우정’ 때문이라고 답한다. 사랑이 아니라 우정 때문에 오프닝에서 이미 시체 자루에 담겨 있는 남자는 “이것이 바로 나의 마지막 모습이다”라고 말한다. 죽은 남자의 무덤덤한 내레이션으로 이어지는 영화는 그가 왜 여기에 죽어 있는지의 이유로 향한다. 우리에겐 FBI 국장급 전문 배우로 낯익은 스콧 글렌이 온갖 전쟁터를 겪은 전직 CIA 요원으로 나오는데,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이 남자 역시 과거에 얽매여 마음을 닫고 산다. 그가 경호해야 할 소녀는 첫 만남에 대뜸 자신이 제일 좋아한다는 책을 내민다. 존 스타인벡의 <생쥐와 인간>에서 소녀가 읽어주는 부분은 이것이다. “우리 같은 사람에겐 가족이 없지. 무슨 일을 당해도 아무도 신경 안 써. 하지만 우리는 달라. 나한테는 네가, 너한테는 내가 있으니까. 우리에겐 서로가 있으니까 괜찮아.” 처음에 남자와 관객은 이 구절의 아름다움을 알 수 없다. 영화를 따라가다 남자와 소녀를 떠나서 두 외톨이가 만나 친구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후에야 이 구절은 가슴을 치는 비등점으로 작동한다. 이 구절은 스타인벡의 소설에서 ‘레니’의 대사다. “남자는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죽이는 법”이라는 오스카 와일드의 말을 연상시키는 레니는 자기 손에 들어온 사랑스러운 짐승들을 쓰다듬다 끝내 죽여버리고 마는, 큰 덩치에 괴력만 지닌 모자란 남자다. 영화 속 소녀는 재미있게도 자신을 경호하는 남자를 이 이름으로 칭한다. <격노의 사나이>는 극중 부모의 비중을 최대한 배제하고 영화를 오로지 남자와 소녀의 이야기로 몰고 간다. 그들이 어떻게 우정을 쌓는지가 중요하고, 소녀가 납치되었을 때 남자가 어떻게 대응하는지만 중요하다. 온몸으로 총알을 맞아가면서 절뚝거리며 소녀를 찾는 남자의 행적은 복수라기보다는 처절한 몸부림이다. 무자비하게 악당을 처치하는 통쾌함은 찾을 수 없다. 영화는 일견 이상할 정도로, 당연히 필요해 보이는 신들을 찍지 않았거나 최종 편집에서 집어넣지 않았다. <맨 온 파이어>에서 남자와 소녀는 죽음 앞에서 다시 만나고 둘이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고 서로에게 해줄 수 있는 모든 말을 하고 그 모든 액션과 리액션은 영화에 오롯이 담겨 감정의 폭발을 부추긴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런 당연한 장면이 없다. 고전을 인용하는 반칙을 써먹은 대신, 관객의 눈물을 짜낼 직접적인 대사 하나 허용하지 않는다. 영화의 절정에는 둘이 시체처럼 나란히 누운 장면과, 처음으로 돌아가는 죽음만 있다. 에필로그의 앵글도 멀리서 잡았다. 그런데 눈물이 흐른다. 나는 이제 어떤 장면을 찍은 영화보다 어떤 장면을 안 찍은 영화에 놀란다. 온갖 장면이 넘치는 영화보다 특별히 선택한 장면만 있는 영화에 경외감을 느낀다. 이 영화는 그런 영화였다. 1991년 4월27일 토요일은 한 소년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만한 텔레비전 편성이 있던 날이었다. KBS2에서 오후에 뜬금없이 이 <격노의 사나이>를 특선영화로 틀어주었다. 이때 제목은 <제2의 인생>이다. 영화를 보고 나면 스포일러가 아니라 중의적인, 꽤 근사한 제목을 붙였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리고 밤에는 MBC에서 마틴 스코시즈의 <택시 드라이버>(1976)를 방영했다. 나는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가 이 두 영화 중 한 영화라도 안 보았으면 좋겠다. 아무튼 나는 토니 스콧의 <맨 온 파이어>를 보고 어쩌면 이것이 마지막 남자 영화가 될지 모르겠다고 생각했고,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정말로 한 시대가 끝난 듯 서글펐다. 그런데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내가 마지막 남자 영화를 본 날은 1991년 4월의 어느 날이었는지도 모른다.

[스페셜] 아버지와 딸의 가면놀이 <토니 에드만>

독일의 여성감독 마렌 아데가 연출한 <토니 에드만>의 주인공은 괴짜 아빠와 워커홀릭 딸이다. 독립한 딸의 집을 방문하면서 벌어지는 부녀지간의 이야기는 농담과 장난이 몸에 밴 아버지의 예측 불허 행동으로 점점 우스꽝스러워진다. <토니 에드만>의 특별한 농담과 극단적 장난이 왜 이토록 웃픈지 생각해보았다. 지난해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의 유력한 수상 후보였고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 외국어영화상 수상작으로 강력히 점쳐졌던 독일영화 <토니 에드만>은 결국 양쪽 모두에서 수상에 실패했다. 칸국제영화제는 켄 로치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6)에 황금종려상을 안겼고 오스카는 아스가르 파르하디의 <세일즈맨>(2016)에 영광을 안겼다. 물론 <토니 에드만>은 그외 유수의 영화제에서 넘치도록 상을 받았지만 왠지 저 두번의 수상 실패가 영화 자체와는 더 잘 어울리는 느낌이다. 무엇 하나 뻔하지 않은 이 영화가 끝까지 특별하게 남은 느낌이랄까. <토니 에드만>은 모두가 같은 타이밍에 박수치고 웃음을 터뜨리며 신나게 관람할 수 있는 코미디 영화가 아니다. 인생의 무수한 실패들을 모아놓았는데 결국엔 희극이 되고 마는 우리의 삶을 이네스와 빈프리트 부녀의 이야기로 풀어내는 이 영화는,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찰리 채플린의 명언을 떠올리게도 한다. 가장 미지의 존재, 가족 가족의 굴레, 가족 안의 역할놀이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부모는 부모로서 자식은 자식으로서의 역할을 꿋꿋이 수행할 때 가족 내 분란은 줄어든다. 하지만 자식이 성인이 되고 독립을 하고 나면 부모와 자식의 삶에는 점차 공통의 분모가 줄어들기 마련이다. 가장 가까운 관계이기에 가장 잘 안다고 생각했던 가족의 존재가 어쩌면 가장 미지의 존재일 수 있다는 사실. <토니 에드만>의 이야기는 거기서 출발한다. 농담과 장난이 일상인 은퇴한 피아노 교사 빈프리트(페테르 시모니슈에크)는 기업 컨설턴트로 일하는 성공한 딸 이네스(산드라 휠러)를 만나러 루마니아 부쿠레슈티에 간다. 이 즉흥적 방문으로 빈프리트가 확인하려 했던 것은 그저 딸의 안부였을지도 모른다. 반면 계획에도 없이 아버지를 맞이한 이네스는 역할놀이에 혼란을 겪기 시작한다. 업무와 관계된 자리에 동석한 아버지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장난을 칠 땐 난감하기까지 하다. 빈프리트 입장에선 직업인으로서의 딸의 모습이 오히려 당황스럽다. 중요한 사업 관계자의 마음을 얻기 위해 언제든 상대가 원하는 말과 행동을 할 준비가 되어 있는 이네스의 모습은 자신이 상상하던 딸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내심이 바닥난 두 사람은 결국 “그러고도 네가 인간이냐!” “인생에 방귀 쿠션 장난 말고 다른 계획은 있어요?”라는 말들을 날리며 서로에게 상처를 준다. 그러나 뿔난 말들을 뱉고 난 뒤 찾아온 죄책감은 다시 부녀지간을 (일시적으로) 봉합한다. 결국 빈프리트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짐을 싸고 이네스는 아버지를 배웅하며 베란다에서 눈물을 훔친다. 그때부터 어색한 가면놀이가 아닌 진짜 가면놀이가 시작된다. 성공한 직업인으로서의 역할에도 충실하고 싶고 착한 딸 노릇에도 충실하고 싶은 이네스는 그러한 관계의 봉합에 만족하고 일상으로 돌아가지만, 빈프리트는 딸과의 진짜 소통을 위한 충동적 계획을 실행한다. 그것은 토니 에드만으로의 변신이다. 빈프리트는 토니 에드만이 되어 이네스 앞에 나타난다. 뻐드렁니 모양의 틀니를 끼고 덥수룩한 가발을 얹어 완성한 토니 에드만의 외형은 누가 봐도 우스꽝스럽다. 테니스 선수 티리악의 매니저라느니 독일 대사라느니 하는 신분 위장도 허술하긴 마찬가지다. 아버지의 속을 헤아리기 힘든 이네스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아버지이지만 아버지가 아닌) 토니 에드만을 상대한다. 그 과정에서 아버지에겐 절대 보여주지 않았을 음지의 삶들을 꺼내 보인다. 아버지와 딸이 아닌 이네스와 토니 에드만의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빈프리트의 변신은 영화 내내 특정한 웃음 효과를 자아낸다. 토니 에드만으로서의 역할놀이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부터 빈프리트는 이미 수시로 틀니를 꺼내 끼며 혼자만의 가면놀이를 즐겼다. 앞니가 드러나 늘 웃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그래서 조금은 멍청해 보이는 뻐드렁니의 위장 효과는 상당하다. 빈프리트가 언제나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것도 가상의 인물 토니를 소환하는 빈프리트의 장난인데, 빈프리트는 택배 기사로부터 물건을 받는 일조차 평범하게 넘어가지 않는다. 아무래도 (가상의 존재인) 동생 토니가 물건을 주문한 것 같다며 문 앞에서 사라진 빈프리트는 분장을 마치고 돌아와 토니인 척하고 물건을 건네받는다. 택배 기사는 나이 지긋한 고객의 장난에 어떻게 맞장구쳐야 할지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만 짓다가 화면에서 퇴장한다. 대개 빈프리트의 농담과 장난은 번지수를 잘못 찾은 듯 불발되기 일쑤다. 때와 장소는 물론이고 상대의 의중 따위는 고려하지 않는 장난이 대부분이라서 그렇다. 빈프리트가 회사 로비에서 이네스를 기다리다 그녀가 등장하자 슬쩍 틀니를 꺼내 끼고 무리의 일원인 것처럼 합류해 걸어가는 것도 불발된 장난이었고, 파티에서 마약을 한 딸에게 다음날 수갑을 채운 것도 상대를 곤란하게 만든 장난이었다. 결정적으로 장갑을 끼지 않은 시추공에게 장난을 쳤다가 일자리를 잃게 만드는 장면은 빈프리트가 사는 농담의 세계와 딸 이네스가 사는 현실 세계 사이의 간극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유머를 잃지 마세요”라는 빈프리트의 말은 진심이 담긴 위로이기도 하지만 이네스에겐 가혹한 말처럼 들린다. 이처럼 모든게 의도와는 무관하게 빗나가는 농담과 장난은 연쇄 부작용을 일으킨다. 하지만 소통의 실패는 불통이 아니라 단절이다. 그러므로 빈프리트의 농담과 장난은 실패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시도된다는 점에서 더없이 낙천적인 소통의 과정이기도 하다. 소중했던 순간들은 붙잡을 수 없다 빈프리트가 토니 에드만을 창조한 것은 마렌 아데 감독의 말처럼 “절박함” 때문이었다. “유머는 종종 현실을 감당하는 도구가 되는데 그 말은 곧 유머가 언제나 고통의 산물이라는 뜻이다. 빈프리트는 그 방법 외에는 딸에게 다가갈 방법이 없다. 유머는 빈프리트의 유일한 무기이고 그걸 극단까지 밀어붙인다.” 유머가 유일한 무기인 아버지는 또한 쉽게 패배감에 젖지 않는다. 극단적 선택을 한 마당에 물러날 곳도 없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딸의 불편한 동행이 지칠 만큼 반복되던 때, 남의 가족 잔치에 찾아간 빈프리트는 환대에 대한 답례로 노래 선물을 하겠다며 피아노 앞에 앉아 휘트니 휴스턴의 을 연주한다. 물론 그 노래를 불러야 할 사람은 휘트니 쉬눅으로 소개된 이네스다. “난 아이들이 우리의 미래란 것을 믿어요.… 가장 위대한 사랑을 하는 게 어려운게 아니에요.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아는 게 가장 위대한 사랑이에요.” 어쩌면 아버지가 딸에게 해주고픈 말이 담긴 노래, (가사를 모두 외우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했을 때) 어쩌면 이네스가 어릴 적 아버지와 자주 불렀을 그 노래는 빈프리트가 꺼낸 비장의 카드였다. 이네스는 열창하는 것으로 그 자리에서 예의를 다하지만 “요란한 방식으로 손을 내미는” 아버지의 손을 끝내 맞잡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네스에게 토니 에드만의 존재는 무용했을까. 마렌 아데 감독은 안일하게 관계의 회복과 소통의 가능성을 얘기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냉소적 태도로 세상을 바라보지도 않는다. 우리의 삶이 이별과 실패의 순간들로 채워진다 하더라도 그 인생이 희극이길 바라며 꿋꿋이 유머를 이어갈 뿐이다. 영화에는 여러 이별의 순간이 등장한다. 빈프리트는 함께 살던 늙은 개 빌리와 노모의 죽음을 맞고, 먼 도시에 사는 딸과도 만남과 이별을 반복한다. 뜨거운 작별 인사도 없이 사랑하는 존재들을 떠나보내는 빈프리트는 그래서 유머의 힘에 인생을 맡긴다. 의 열창을 시작으로 영화의 마지막 30여분은 거대한 농담들로 채워지는데, 빈프리트가 절박함에 토니 에드만을 창조했듯 이네스의 절박함은 즉흥 나체 생일파티를 여는 것으로 발현된다. 불가리아의 전통 탈 쿠케리를 뒤집어쓰고 거대한 털북숭이가 되어 나타난 빈프리트는 마치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난 듯 알몸을 하고 있는 이네스와 마주한다. 전에 본 적 없는 딸의 모습이고 아버지의 모습이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이네스는 진작 모든 것을 내려놓은 아버지가 얼마나 절박하게 소통하려 했는지 알게 된다. 그제야 이네스는 아버지의 품에 안긴다. 부쿠레슈티에서 벌어진 아버지와 딸의 극단적 가면놀이는 그렇게 조금은 우스꽝스러운 꼴로 마무리된다. 영화가 끝나고도 문득문득 생각나는 장면 중 하나는 자신의 집 마당에서 잠들었다 깬 빈프리트가 마당 한구석에 죽어 있는 빌리를 발견하는 장면이다. 우리는 아침마다 혼자 눈을 뜨고 밤이면 혼자 눈을 감는다. 언젠가 다시는 아침에 눈뜨지 못할 날이 올 테고, 그러기 전까지는 아등바등 살아갈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빈프리트는 인생에서 중요한 게 뭐냐는 딸의 질문에 미뤘던 대답을 한다. 대답은 평범하다. 이것저것 하다보면 인생이 훌쩍 흘러가고 소중했던 순간들은 붙잡아둘 수 없다는 얘기들이다. 아버지는 딸에게 농담으로 포장하지 않은 진담을 담담히 전한다. 하찮은 농담과 불발된 장난들로 쌓아올린 이야기는 결국 거창하지 않은 진담과 평범한 진심에 가닿는다. <토니 에드만>의 위로는 그렇게 영리하고 따뜻하다. 독일영화의 현재 마렌 아데 감독을 주목하라 독일의 여성감독 마렌 아데는 매 작품 관계에 대한 깊은 성찰과 빛나는 코미디 감각을 보여주었다. 1976년 독일에서 태어나 뮌헨 텔레비전필름스쿨에서 영화를 공부한 그는 2003년에 첫 장편 <나만의 숲>(2003)을 완성한다. 도시의 고등학교에 교사로 부임한 멜라니가 새로 사귄 친구 티나에게 과도하게 집착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인 <나만의 숲>은 2005년 선댄스영화제에서 월드시네마 드라마 부문 심사위원특별상을 받았다. 두 번째 장편 <에브리원 엘스>(2009)는 휴양지의 커플을 탐구의 대상으로 삼는다. 사랑에 빠진 주인공 커플은 자신들보다 더 행복하고 완벽해 보이는 커플을 만나면서 혼란스런 감정에 휩싸인다. 영화는 유머를 잃지 않으면서 그 감정의 본질을 정곡을 찌르듯 묘사한다. <에브리원 엘스>는 2009년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은곰상과 여우주연상(버짓 미니크마이어)을 수상하는데, 이 수상으로 마렌 아데 감독은 독일 영화의 새로운 기대주로 부상한다. 7년 만에 선보인 <토니 에드만>은 2016년 칸국제영화제에서 국제비평가협회상을 수상하는 등 전세계 영화인들의 찬사를 한몸에 받았다. 그로써 마렌 아데 감독은 명실공히 독일영화의 현재를 대표하는 감독이 되었다.

[댓글뉴스] <닥터 두리틀>에 캐스팅 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닥터 두리틀> 시리즈에 캐스팅됐다 =영국 작가 휴 로프팅이 탄생시킨 캐릭터 ‘닥터 두리틀’을 주인공으로 한 새 시리즈영화에서 그는 닥터 두리틀을 연기할 예정이다. 각본과 연출은 최근 <골드>를 연출한 스티븐 개건 감독이 맡는다. 원작에서처럼 1920년대를 배경으로 만들어질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미국작가조합(WGA)이 또다시 파업 위기다 =영화 및 텔레비전 제작자협회(AMPTP)가 미국작가조합과 새로운 계약 체결을 위한 협상을 시작했다. 최근 넷플릭스, 훌루, 아마존등 스트리밍 서비스 플랫폼은 급성장하고 있지만 작가들과의 수익 배분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못한 데 따른 조처다. 언론에서는 작가조합과 5월1일까지 합의가 되지 않으면 2007년 파업 사태가 재발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매트릭스> 시리즈, 다시 만들어진다 =워너브러더스가 SF 걸작 <매트릭스> 시리즈를 다시 만들 기획 개발을 시작했다고 밝혔다. 제작자 조엘 실버가 초기 아이디어를 개발하다가 판권을 스튜디오에 넘긴 이후 본격적인 기획이 시작된 것. 리부트나 리메이크 제작은 아니고 다른 형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오리지널 시리즈의 연출자 워쇼스키 자매의 참여 여부는 미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