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내가 찾는 영화 정보를 손쉽게!

‘텔레@CASHFILTER365비트코인송금대행카지노믹싱비트코인송금대행카지노믹싱' 검색결과

기사/뉴스(1997)

[스페셜] 화제작 가이드 ① 논란 속에 첫 공개된 봉준호 감독의 <옥자> 리뷰

<옥자>는 강원도 산골의 어린 소녀 미자(안서현)가 자신이 키우던 ‘슈퍼돼지’ 옥자를 찾아나서는 모험을 그린 액션 어드벤처물이다. 하마와 돼지를 섞은 듯한 거대한 동물인 옥자는 뉴욕의 미란다 주식회사가 식량 문제 해결을 위해 개발한 신품종 가축이다. 다국적 기업 미란다 코퍼레이션의 최고경영자 루시 미란도(틸다 스윈튼)는 친환경 시스템을 내세워 회사를 적극 홍보하고 나선다. 슈퍼돼지는 청정지역인 강원도 산골 같은 농가에서 키워진 ‘싸고 맛 좋은’ 자연산 돼지로 둔갑한다. 교배를 통해 탄생한 26마리의 돼지는 전세계 농가에 보내져서 길러지는데, 옥자도 그중 하나다. 회사는 10년 후, 최고의 품종을 선별하기 위한 콘테스트를 개발하고 옥자를 다시 데려오려 한다. 부모를 잃고 할아버지와 산골에서 사는 미자에게 슈퍼돼지 옥자는 둘도 없는 친구이자 가족이다. 루시의 위협 앞에서 옥자의 죽음을 막으려는 미자는 탐욕스런 동물학자 조니(제이크 질렌홀)와 제이(폴 다노)를 필두로 한 동물보호단체(ALF) 등과 엮이면서 쫓고 쫓기는 여정을 펼친다. <이웃집 토토로>와 그리고 <옥자> <옥자>에는 많은 작품들이 엿보인다. 온전히 숲에서 살아가는 미자와 옥자의 우정을 통해 자연과 동물이 함께 어우러져 살던 이들이 도심으로 나와 고초를 겪는 과정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친환경적 세계관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특히 거대한 옥자와 뒹굴며 노는 미자의 모습은 <이웃집 토토로>에서 본 귀여운 이미지가 자동으로 연상된다. 돈을 좇는 어른들에게서 옥자를 보호하려는 미자의 모험은 스티븐 스필버그의 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인간의 이기심을 대표하는 루시에 맞서는 어린 소녀의 모험은 로알드 달의 동화와도 똑 닮아 있다. 숄더색을 불끈 메며 옥자를 구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유리문으로 돌진하는 미자의 액션 신은, 자본의 탐욕으로 오염된 지구상에 마지막 남겨진 순수하고도 강렬한 몸짓으로 읽힌다. 더불어 봉준호 감독의 작품 안에서 <옥자>는 <괴물>(2006)의 할리우드 버전에 가까워 보인다. <괴물>이 블랙코미디를 통해 한국 사회에 대한 보다 씁쓸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면 <옥자>는 식량, 가축 문제를 통해 자본주의에 만연해 있는 인간의 욕심, 탐욕에 관한 문제를 탐구하고 있다. 옥자 역시 방사능 실험을 하던 중 독극물의 무단 방출로 태어난 괴물처럼, 인간의 욕심으로 한껏 몸집을 부풀린 변종 생명체다. 옥자가 미란도 일당의 추격을 피해, 동물보호단체와 서울 동대문의 지하상가를 누비는 추격전은 <괴물>의 초반에 등장하는 한강 괴물 습격 장면을 감독이 자기 패러디하고 있는 듯 시종 경쾌하게 구현된다. 옥자를 둘러싼 인간들에게서 봉준호 감독은 무조건의 비난보다는 풍자의 시선을 보탠다. 옥자의 유전자를 이용하려는 루시나 조니, 문도(윤제문) 등의 캐릭터를 악인으로 묘사하지 않고 우스꽝스럽고 어수룩하게 그리고 있다면, 옥자와 미자에게 도움을 주려는 동물보호단체 역시 유연하지 못한 꽉 막힌 행동을 부각시켜 비판의 지점을 안겨준다. 한바탕의 난장 끝에 <옥자>는 후반부에 이르러 톤을 달리하는데, 도축장으로 끌려가는 무수한 ‘옥자들’과 일사불란하게 진행되는 도축장의 압도적인 풍경은 다리우스 콘지의 촬영을 통해 섬뜩하게 화면에 제시된다. <델리카트슨 사람들>(1992), <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1996)에서 보았던 다리우스 콘지 특유의 음울한 기운이 맞물리면서, 전반부의 톤에서 벗어난 영화의 비장미를 한층 더해준다. 인간이 먹고 소비하지만 육식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마주하는 것은 ‘보기 불편한 진실’과 맞닥뜨리는 체험이다. 마치 한강에서 <괴물>의 은신처를 발견했을 때와 같은 공포가 엄습한다. 그러니 채식주의자건 아니건 적어도 이 영화를 보고 나와서 고기를 먹는 건 당분간은 불가능할 것 같다. 특히 옥자를 단순히 가축이 아닌, 반려동물로 인지하는 어린 소녀 미자의 눈으로 이 모든 광경이 목도됨으로써, 처참한 광경은 더 극명하게 표현된다. ‘칸의 결정’은 어떨까 <플란다스의 개>(2000), <괴물>, <설국열차>(2013)에 이르기까지 봉준호 감독의 전작들의 코드를 상당 부분 차용하고 있지만 <옥자>는 봉준호 감독의 6번째 작품으로 볼 때 한편으로는 상당히 낯선 톤의 영화다. 제시하는 주제의 심각성에 비해 코믹, 액션 어드벤처, 드라마 등 다양한 장르가 결합된 영화의 톤은 다소 경쾌하게 구축되어 있다. 지향점 자체가 모두가 함께 즐길 만한 할리우드 가족 어드벤처에 맞추어져 있는 듯 보인다. 특히 옥자를 찾아나서기까지 옥자와 미자의 끈끈한 감정선 구축이 다소 헐거운 점, 캐릭터들의 희화화로 인해 설득력이 다소 약한 점 등 드라마적인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데 있어 아쉬운 지점을 남기기도 한다. 공개 후 현지반응은 찬반이 엇갈린다. 경쟁부문 심사위원장인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이 “극장에서 개봉하지 않는 영화는 황금종려상에 적절치 않다”는 말로 넷플릭스 영화에 대한 입장을 표명한 바 있다. 수상을 하든 하지 않든 간에 어떤 방식으로든 <옥자>는 이번 ‘칸의 결정’으로 해석될, 뜨거운 선상 위에 놓여 있다. 봉준호 감독의 뛰어난 솜씨는 사라지지 않았다_<옥자>에 대한 외신 리뷰들 <가디언>_ “어떻게 이 영화의 제작자가 조그마한 스크린용 콘텐츠를 선보이는 넷플릭스인가. 디지털 효과는 장관이고 비주얼은 아름답다. 이 작품을 아이패드용으로 줄이는 건 끔찍한 낭비다. <괴물>에 이은 봉준호 감독의 새로운 크리처 영화인 동시에 사랑스러운 가족용 액션 어드벤처 영화다. 흥미진진하고 매력적이며 사랑스럽다.” <르 푸앙>_ “확실한 건 <옥자>가 공식 경쟁부문에 진출할 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라는 것이다. 걸작이라는 말이 아니다. 영화는 분명 단점도 있고, 불만스런 부분도 보인다. 특히 예측 가능하고 끈적끈적한 감성주의에 호소하는 엔딩이 그렇다. 하지만 어린 소녀와 옥자라 불리는 이상한 동물과의 우정을 다룬 이 웃긴 이야기는 감독의 참신함과 자조적 시선을 충분히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봉준호 감독은 장르의 코드를 능숙하게 차용하고 이들을 전복시켜, 웃기면서도 섬뜩한 동시대의 초상화를 그려낸다.” <텔레라마>_ “봉준호 감독의 뛰어난 솜씨는 사라지지 않았다. 볼거리가 넘쳐나는 장면들이 많고, 무례한 유머도 그대로다. 영화는 동물 학대와 이를 은폐하는 마케팅 방식을 고발한다. 하지만 이 좋은 의도는 등장인물들을 점점 더 싫증나게 하는 뻔한 존재로 변형시킨다. 우스꽝스러운 캐릭터가 관객의 마음에 모두 들 수는 없다. 하물며 이게 독창성을 잃었을 땐 말이다.” <버라이어티>_ “다리우스 콘지가 촬영한 와이드 스크린 화면 안에서 그 누구도 옥자를 실제 동물이 아니라고 상상할 수 없다. 훌륭한 CG 기술이 의심을 중단시킨다. <옥자>는 봉준호 감독의 전작 <괴물>과는 완전히 다른 크리처 영화다. 그럼에도 관객은 이 영화를 보고 독극물을 함부로 버리는 것은 나쁘다, 육식은 살인이다, 라고 같은 방식으로 인지할 것이다.”

[스페셜] 부산국제영화제 부집행위원장 김지석을 추모하며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소식이었다. 한국시각으로 5월 19일 아침, 수많은 영화인들이 프랑스 칸에서 들려온 비보에 눈시울을 적셨다. 출장차 칸국제영화제에 참석한 김지석 부산국제영화제 부집행위원장 겸 수석 프로그래머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부산국제영화제의 지난 22년을 함께하며, 국내에 국제영화제라는 영화적 토양을 구축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한 장본인이기에 영화인들이 느끼는 상실감 또한 크다. 고 김지석 부집행위원장을 추모하며 그가 우리에게 남긴 것들을 다시금 돌아보는 지면을 마련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의 일화로 이 글을 시작하려 한다. 김지석 수석 프로그래머와 인터뷰가 예정되어 있던 날 아침, 초유의 태풍이 해운대에 들이닥쳤다. 그날은 영화제 개막식 하루 전이었다. 호텔 프런트 문이 부서지고, 파도에 휩쓸린 물고기가 인도에서 파닥거릴 지경이었으니 해운대 바닷가에 설치한 영화제 컨테이너의 상태가 온전치 못할 것임은 불 보듯 뻔했다. 그런 혼란의 한가운데에서 김지석 프로그래머를 만났다. 부산국제영화제 점퍼를 입고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던 그의 얼굴은 몹시 침착했다. “준비는 다 했는데 태풍 때문에 타격이 좀 있네요. 빨리 복구해야죠. 허허. 올해는 삼재가 아니고 십재는 되는 것 같아요. 뭔가가 끊임없이 닥쳐오네요.” 이상하게도, 이런 식의 대화를 나누는 도중에 불안했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건 함께 대화를 나누는 상대방으로부터 전해지는 어떤 기운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부산시와의 갈등으로부터 빚어진 업무 공백, 이용관, 전양준 등 오랫동안 뜻을 함께했던 영화제 동료들의 불명예스러운 퇴진, 영화인들의 보이콧, 그리고 태풍이라는 자연재해. 그야말로 끊임없는 시련의 한가운데서도 중심을 단단히 지키고자 하는 김지석 프로그래머의 결연함과 의지를 그날의 만남에서 실감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부산국제영화제의 “새로운 시작”은 지금부터라며, 영화제가 끝난 직후 태스크포스팀을 구성해 조직의 나아갈 방향을 본격적으로 고민해보는 자리를 만들겠다고 그는 힘주어 말했다. 그렇게 그는 부산국제영화제라는 하나의 세계 속에서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을 끊임없이 고민하고 실행해나가는 사람이었다. 김지석 프로그래머의 빈자리가 유독 크게 느껴지는 이유다. 지난 5월 18일 저녁(프랑스 현지시각 기준), 김지석 부산국제영화제 부집행위원장 겸 수석 프로그래머가 프랑스 칸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57살, 사인은 심장마비였다. 매년 5월마다 전세계 영화인들이 모여드는 거대한 영화축제의 한복판에서,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영화와 함께였다. 칸국제영화제 티에리 프레모 예술감독은 전세계 기자들에게 보내는 보도메일을 통해 김지석 프로그래머의 죽음을 애도했다. “이 비극적인 소식은 김지석 프로그래머의 절친한 친구, 봉준호의 영화가 상영되는 날 알려졌다. 우리는 칸국제영화제의 가장 소중한 멤버 중 한명을 잃었다.” 5월 22일 영화진흥위원회의 주최로 열린 ‘한국영화의 밤’ 행사에서는 김동호 부산국제영화제 이사장, 강수연 집행위원장을 비롯해 지아장커 감독,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 등 600여명의 국내외 영화인들이 검은 리본을 달고 30초간 고인을 추모하며 묵념하는 시간을 가졌다. 국내에서는 5월 27일부터 29일까지 3일간 부산 광안리에서 부산국제영화제장으로 고인의 장례를 치른다. 29일 오전 11시 발인 후에는 영화의전당 중극장에서의 영결식도 예정되어 있다. 김지석 프로그래머의 부재와 더불어 부산국제영화제 역시 하나의 챕터를 마무리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영화제의 시작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부산국제영화제의 모든 순간을 함께한 이가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김지석 프로그래머는 이용관 전 집행위원장, 전양준 전 부집행위원장과 더불어 부산국제영화제의 밑그림을 설계한 핵심 멤버였다. 1980년대 이용관, 전양준과 함께 계간 영화평론지 <영화언어>의 편집인으로 활동하던 김지석 프로그래머는 1991년 일본 야마가타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 참석한 뒤 문화적 충격을 받고, 자비를 들여 홍콩국제영화제, 싱가포르국제영화제 등을 다니며 한국에서의 국제영화제 개최를 꿈꾸기 시작했다. 국제영화제라는 문화적 토양에 대한 인식이 전무했던 1990년대 중반, 부산시와 언론, 스폰서와 문화예술인 등을 설득해가며 영화제 프로그래밍은 물론이고 “5분 대기조”처럼 영화제의 궂은일을 도맡았던 (김지석을 비롯한) 초기 멤버들의 노력은 1996년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의 성공적인 개최로 빛을 발하게 됐다. 이후 김지석 프로그래머는 2007년부터 수석 프로그래머를, 지난 2015년부터는 부집행위원장을 겸하며 부산국제영화제의 22년을 함께해왔다. 무엇보다 김지석 프로그래머의 업적은 부산국제영화제를 아시아영화에 관한 한 가장 영향력 있는 국제영화제로 성장시켰다는 데에 있을 것이다. 6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하는 칸과 베를린 등의 국제영화제, 이미 아시아에서 나름의 입지를 구축해나가고 있던 홍콩, 도쿄 등의 국제영화제와 부산이 차별화될 수 있는 지점은 아시아영화의 라인업을 강화하고, 아시아 영화인들과의 굳건한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데 있다고 그는 믿었다. 2002년 아시아프로젝트마켓을 통해 지금은 아프가니스탄영화의 대부가 된 시디그 바르막(<천상의 소녀>)을 발굴하고, 모스토파 파루키의 <텔레비전>을 2012년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으로 선정해 방글라데시영화계에 뉴웨이브의 물결을 불러일으키는 등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아시아 지역 미지의 영화들에 주목하고 그들의 정제되지 않은 재능을 알아보는 것 또한 그의 역할이었다. 중요한 건 변방의 지역에서 온 영화인이든, 영화 선진국에서 온 영화인이든, 그들을 대하는 김지석 프로그래머의 태도는 한결같이 다정다감했다는 점이다. 그의 곁에는 언제나 그가 “부산영화제 패밀리”라 부르는 아시아 영화인들이 함께했다. 김지석 프로그래머와 사석에서 술잔을 기울일 때면 다양한 아시아 영화인들에 대한 에피소드를 들을 수 있었다. 광견병에 걸린 이란 감독 모흐센 마흐말바프의 치료제를 찾기 위해 서울의 종합병원까지 수소문해 항공 택배로 주사약을 공수했던 경험, 리안 감독의 <음식남녀>에 출연했던 대만의 유명 여배우 양궤이메이를 집에 초청해 미역국을 만들어줬던 기억, 장준환, 유키사다 이사오와 함께 옴니버스영화 <카멜리아>를 부산에서 촬영했던 타이 감독 위시트 사사나티앙에게 한국의 찜질방 문화를 알려줬다는 경험담을 그는 즐겁게 얘기하곤 했다. 그렇게 김지석 프로그래머는 파트너 이전에 친구이자 형으로, 가족 같은 다정함으로 아시아 영화인들을 감싸안았다. 때문에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에서 입장하는 게스트를 호명하는 역할은 언제나 김지석 프로그래머의 몫이었다고 남동철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는 소회한다. “지금 논지 니미부트르 감독님 입장하십니다. 지금 아딧야 아사랏 감독님 입장하십니다…. 이런 멘트를 할 수 있는 사람은 ‘김샘’이 유일했다. 왜냐하면 일반인이 아닌 영화인 가운데도 이런 아시아 영화인의 이름을 정확히 알고 부를 수 있는 분은 김샘밖에 없기 때문이다. (중략) 지금 누구나 안다고 말하는 그 거장들이 거장이 되기 전에 그들의 이름을 불러 세계영화의 지도에 자리를 잡아주고 한국에 그들을 알린 사람은 김샘이다. (중략) 김지석, 말고 누구도 그런 일은 한 사람이 없고 앞으로 누구도 대체할 수 없다.” 지난 2015년 김지석 프로그래머는 부산국제영화제 20년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묶은 <영화의 바다 속으로>라는 책을 출간했다. 그의 부고를 접하며 김지석 프로그래머가 직접 집필한 이 책의 프롤로그를 다시금 떠올리게 된다. 글의 서문에서, 그는 부산국제영화제를 생각할 때마다 ‘테세우스의 배’와 관련된 신화를 연상하게 된다고 말한다.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고 아테나로 돌아온 테세우스를 기리기 위해, 사람들은 그가 타고 돌아온 배를 영원히 보존하기로 하지만 세월이 지나 배를 보수하는 과정에서 어느덧 테세우스의 배는 새로운 나무 판자로 만들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부산영화제를 만들어가는 사람들도 언젠가는 떠날 것이고, 그 자리는 새로운 사람들로 다시 채워질 것이다. 나는 아테네 사람들이 ‘테세우스의 배’를 기억하듯, 부산 시민과 영화인, 영화제 팬들이 부산영화제를 기억해주기 바란다.” 김지석 프로그래머의 부재를 아파하며 이 글을 떠올리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그의 빈자리를 언젠가 새로운 누군가가 대신하게 되더라도, 김지석이라는 이름은 테세우스의 배처럼 부산국제영화제의 역사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이제는 그의 이름을, 우리가 기억해야 할 때다.

[듀나의 영화비평] <원더우먼>과 제1차 세계대전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나에게 원더우먼은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이었다. 린다 카터 주연의 텔레비전 시리즈도 방송국을 옮긴 시즌2부터는 70년대로 건너뛰었고 이후 코믹북 시리즈도 윌리엄 몰턴 마스턴의 시절 이후 그 시대에서 점점 멀어졌지만 어린 시절 한번 각인된 이미지는 쉽게 잊히지 않는다. 아무리 <저스티스 리그> 시리즈가 현대를 배경으로 한다고 해도 <원더우먼> 영화는 무조건 40년대가 배경이어야 한다고 내가 아무도 안 들어주는 허공에 대고 혼자 외쳤던 것도 이해해주셔야 한다. 그만큼 TV시리즈 시즌1과 골든 에이지 코믹북 시절의 고풍스러우면서도 천진난만하고 낙천적인 분위기를 사랑했다. 그 뒤로 나는 꾸준히 가까운 미래에 만들어진다는 <원더우먼> 영화의 배경에 관심을 가졌다. 망해버린 에이드리언 팔리키 주연의 TV시리즈 파일럿에서는 무대가 현대였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원더우먼> 시나리오를 영화사에서 사들였다는 소문이 들린다. 이후 소문을 들어보면 나중에 판권 문제가 생길까봐 미리 대비한 것이란다. 그럼 시대배경은 2차 세계대전이 될 수도 있는 것인가? 그런데 엉뚱한 소문이 들린다. 패티 젠킨스가 감독하는 <원더우먼>의 시대배경은 제1차 세계대전이 될 것이다! 여기서부터 나는 당황하기 시작한다. 이해는 한다.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슈퍼히어로영화는 최근에 하나 나왔다. <캡틴 아메리카: 퍼스트 어벤져>(2011)와 <원더우먼>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두 영화의 분위기가 겹치지 않길 원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계속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다. 제2차 세계대전은 할리우드에서 비교적 다루기 쉬운 시대이다. 선악이 분명하고 당시에 대한 향수와 자부심도 강하다. 성조기 색깔의 유니폼을 입은 미국의 슈퍼영웅이 나치와 싸우고 있는 그림은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럽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라? 어느 전쟁이라고 선악으로 단순하게 나뉠 수 있겠냐만, 이 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만큼 명확해 보이지는 않는다. 젠킨스의 영화는 제1차 세계대전도 제2차 세계대전과 똑같았고 독일군은 모두 그냥 독일군일 뿐이라고 주장할 것인가? 걱정은 기우로 끝났다. 패티 젠킨스의 영화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정공법으로 치고 나가는 영화였고 시대에 대해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젠킨스의 제1차 세계대전은 차선책으로 선택한 ‘위장한 제2차 세계대전’이 아니었다. 그냥 제1차 세계대전이었고 영화는 아주 사실적이지는 않더라도 이 시대를 있는 그대로 이용한다. 영화 속 상황을 보자. 미군 파일럿 스티브 트레버가 아마존들이 사는 숨겨진 섬 근처에 추락하고 앞으로 원더우먼이라고 불릴 다이애나가 그를 구출한 뒤 바깥 세계의 전쟁에서 싸우기 위해 같이 바깥 세계로 나간다는 설정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나간 세상은 사악한 나치가 세상을 정복하기 위해 팔을 벌리고 있는 40년대 초반이 아니라 수년 동안 끌어온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마지막 전쟁’에 양쪽 모두가 지쳐 있는 1918년 가을이다. 이 영화의 최종 악역처럼 보이는 인물은 실존 인물의 이름을 빌리고 있지만 전혀 상관없는 악당인 에리히 루덴도르프 장군인데, 그는 닥터 포이즌이란 별명으로 불리는 이자벨 마루가 발명한 독가스로 이미 다들 끝났다고 생각하는 전쟁에서 이기려 한다. 그리고 다이애나는 루덴도르프 장군이 인류를 멸망시키려고 하는 전쟁의 신 아레스의 현신이고 그를 죽이면 전쟁이 끝날 것이라고 믿는다. 제1차 세계대전을 경유하여 획득한 보편성 가장 먼저 건드려야 할 것은 페미니즘이다. 사실 이 영화의 다이애나는 골든 에이지 원더우먼과는 달리 바깥 세계 여성의 권리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다. 아레스를 죽여 영원히 전쟁을 끝내고 인류를 구해야 한다는 더 큰 목표가 먼저다. 하지만 영화는 다이애나보다 더 많은 것을 본다. 남자들만의 성스러운 영역에 눈치 없는 젊은 여자가 들어왔을 때 발생하는 긴장감, 20세기 초 서구 여성들이 막 벗어나기 시작한 구시대 복식의 갑갑함 등등. 영화는 고정 캐릭터 에타 캔디를 영국인 서프러제트로 만드는데, 에타는 이 영화에서 다이애나의 존재를 처음부터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당연히 동시대의 여성권리쟁취 운동은 원더우먼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물론 여성 진출이 이를 통해 확대되었던 제2차 세계대전도 잘 어울렸지만 기왕이면 진짜 초창기로 가는 것이 더 신화적인 시작이 아닐까. 하지만 스토리 면에서 영화가 더 구체적으로 집중하는 것은 전쟁 자체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호평을 받는 액션 신이 있는 벨드 전투를 보자. 신선하면서도 그만큼이나 익숙하다는 생각이 든다. 갑자기 제1차 세계대전 전장에 나타난 고대의 초자연적인 존재가 독일군을 때려잡고 승리를 안겨다준다는 이야기.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지 않은가? 유명한 제1차 세계대전의 전설인 몽스의 천사들이다. 아니면 그 이야기와 연결되었다고 믿어지는 아서 매켄의 단편 <사수들>을 예로 들어도 좋고. 이 부분은 코믹북 슈퍼 히어로 액션보다는 죽어가는 병사들 사이를 떠도는 전장의 전설을 그대로 영상화한 것처럼 보인다. 그 때문에 약간의 귀기가 느껴지기도 한다. 다이애나가 보는 전쟁과 스티브 트레버를 포함한 전쟁은 다르다. 다이애나의 전쟁은 옳고 그름과 목표가 분명하다. 과정도 마찬가지여서 마치 체스게임의 킹을 잡듯 최종 보스인 아레스를 제거하면 끝이 나는 게임이다. 이 관점은 아직 20세기 현대전을 직접 경험해본 적이 없는 구세대의 관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다이애나 주변의 군인들은 참호전과 셸 쇼크, 대공습, 기관총과 탱크를 모두 겪은 사람들이다. 전쟁은 더이상 구식 영웅담의 재료가 아니고 전투는 영예를 잃었으며 선악은 쉽게 구별되지 않는다. 제1차 세계대전은 제2차 세계대전처럼 선명한 미국의 성공 신화를 제공해주지 않으며 영화는 이 흐릿함을 일부러 노출시킨다. 전쟁광 루덴도르프 장군도 여기에 분명한 선명성을 더하지는 않는다. 그는 오히려 대량살상 무기를 만들면 필연적으로 닥칠 수밖에 없는 자연적인 사고에 가깝다. 그 와중에 영화는 제2차 세계대전과는 다른 보편성을 확보받는다. 제1차 세계대전은 이제 그냥 ‘전쟁’이 되고 원더우먼은 절대 악 나치와 싸우는 애국적인 슈퍼히어로가 아니라 현대전과 현대 정치의 잔인한 난장판에 버려진 옛 시대의 유령과 같은 존재가 된다. 성장물로서 <원더우먼>은 환상과 이상으로 구성된 이 과거의 유령이 (그리스 신화에 기반한 캐릭터의 배경은 여기에 아주 잘 들어맞는다) 불완전하고 더러운 동시대와 불안한 화해를 하며 살아가는 현대인으로 첫걸음을 디디면서 끝이 난다. 그러는 동안 영화는 굉장히 잔인한 수를 둔다. 앞에서 다이애나가 신화적인 전투 끝에 구출한 벨드의 주민들을 루덴도르프 장군의 독가스로 날려버리는 것이다. 이 영화의 아레스가 코믹북의 아레스보다 훨씬 설득력 있게 발전한 존재이며 최종 전투 직전까지 상당히 인상적인 존재감을 과시함에도 불구하고 다소 잉여처럼 보이는 것도 그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주제만 본다면 아레스는 이 영화에서 얼마든지 잘라낼 수 있는 불필요한 방정식과 같은 존재이다. 하지만 <원더우먼>은 전쟁에 대한 영화인 만큼 신화적 영웅이 신화적 악당과 맞서 싸우는 신화적 여정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언제까지 이 인물을 현대의 현실적인 역사에만 남겨놓을 수는 없다. 그렇다면 아레스와 마찬가지로 원더우먼 역시 잉여의 존재가 될 테니까.

[스페셜] 현실의 불의한 질서를 거역하려 애쓴 <대립군><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 <노무현입니다>의 아쉬운 점

*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전주국제영화제가 끝난 후 지난 몇달간 보지 못했던 한국영화들을 몰아보았다. 대다수 영화들이 재미가 없었다. 한국의 상업영화들은 여전히 감독보다는 스탭과 배우들이 만드는 영화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흐름이 극장 흥행으로 검증되는 것이라면 모르겠는데 순제작비 평균 60억원 이상인 상업영화들이 미적지근한 반응을 얻는 걸 투자 관계자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지금 한국영화의 질적 수준이 나같은 평자들에게만 지루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내 주변의 보통 관객도 한국영화가 이제 별 볼일 없다고 말하는 경우를 많이 보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최근 개봉한 세편의 한국영화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이하 <불한당>) <노무현입니다> <대립군>에 대해 써보려 한다. 이 영화들은 전혀 다른 장르의 영화들인데도 현실의 불의한 질서에 거역하고 공격적인 메시지를 화면에 심어놓으려는 의지를 갖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스타일에 관한 자의식이 없는 최근 한국영화의 흐름을 놓고 볼 때 이들 영화는 뭔가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가장 안타깝고 충격적인 사례는 정윤철 감독이 9년 만에 만든 신작 <대립군>이었다. 내가 아는 감독 정윤철은 화면에서 벌어지는 것을 관객이 감각하게 하는 데 상당한 재능을 지닌, 좋은 의미에서 대단한 테크니션이었다. 그의 장편 데뷔작 <말아톤>(2005)에서 조승우가 연기한 주인공이 마라톤 달리기 연습을 하는 범상한 장면에서 그는 장애인 주인공이 느끼는 세밀한 신경의 흐름을 포착해냈다. 주인공들이 집단으로 나오는 <좋지 아니한가>(2007)에서도 다른 영화에서는 전혀 보지 못한 각도의 촬영으로 관객의 의표를 찌르면서 상투적인 가족의 의미를 전복시켰다. 불운하게 흥행에 실패한 <슈퍼맨이었던 사나이>(2007)에선 저 혼자 망상에 빠진 남자의 삶의 트라우마를 초현실적 묘사로 초월 상승시켜 묘사할 수 있었던 능력의 소유자였다. 극적 맥락을 완전히 잃어버린 <대립군> <대립군>에서 정윤철은 이전 영화들에서의 연출 전략과는 정반대의 것을 시도한다. 그는 아마도 역사적 정황에 기초한 이 영화를 어떤 과시적 수사도 배제한 채 사실적으로 재현하려고 결심했던 것 같다. 이런 연출적 결단은 하등 이상할 게 없지만 그게 뚝심과 간결함으로 드러나는 게 아니라 투박하게 거듭 강조되는 정서적 과잉으로 귀결된다는 게 유감이다. 이 영화는 어린 광해(여진구)가 선조의 명을 받아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이끌게 되는 역사적 팩트에 기초해서 소수의 대립군 병사들과 궁궐 식솔들, 대신들의 호위를 받으며 광해가 임지로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을 일종의 로드무비 형식으로 그리고 있다. 로드무비에서 당연히 강조되는 풍경은 광해 일행의 이동경로를 따라 다양하게 자주 바뀌는데 이상하게도 이 로드무비에서의 다양한 풍경들은 어떤 의미와 감정의 지배소로서의 기능을 다하지 못한다. 감독과 제작진이 자랑스럽게 제작 후기에서 밝힌, 고단하게 실제 장소에서 촬영한 허다한 장면들은 이 영화의 장점으로 부각되지 않는다. 좀더 편집되었어야 할 장면들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 풍경 장면들이 꾸준히 나열되는데 이것이 등장인물들의 감정을 덧대는 효과 이상의 것을 겨냥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지루한 느낌을 준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 장면들은 기이하다. 앞서 등장인물의 감정을 덧대는 배경막으로서의 풍경 효과를 언급했지만, 실제 이 풍경들이 등장인물들의 감정적 상황과 긴밀하게 조응하는 것은 아니다. 자연은 실제 장소에서 있는 그대로 찍어야 사실적인 효과가 나는 것이 아니라 극적 맥락 속에서 어떤 기능을 발휘해야 관객에게 사실적으로 다가간다. 나무와 풀이 거센 바람에 움직인다고 하면 그것이 광해 일행의 이동 행렬이 주는 정서적 느낌과 조응할 수도 있다. 산세가 험하다고 하면 그것이 광해와 민중이 처한 상황을 시각적으로 웅변한다고도 할 수 있다. 또는 풍경 그 자체가 배경에서 튀어나와 화면의 지배소가 되면서 왜소한 인간적 드라마를 거대한 운명의 소실점 안으로 수렴시킬 수도 있다. 이 영화의 풍경 사용법은 그 어떤 것도 아닌 기능에 머물고 있다. 실제 자연의 장소 안에서 등장인물들은 격심한 물리적 고통을 겪으며 이동하고 있다는 것을 지시적으로 가리킬 뿐 그 이상의 연출적 개입을 자제하고 있는 상태의 화면들이 나열된다. 이것은 정서적 과잉을 의식적으로 누른 연출의 패착이 아닐까. 정윤철은 그가 잘해낼 수 있는 것을 굳이 스스로 억압하면서 극적 맥락의 전개에 꼭 필요한 대화 장면에만 집중하는데, 이게 영화적 묘사를 위한 더 큰 그릇을 포기하는 결과를 초래하고만다. 이정재가 연기하는 대립군 대장 토우의 감정묘사가 전해주는 파토스는 그리 과한 것이 아닌데도 이 영화에서는 과잉으로 보인다. 그의 거센 눈빛, 얼굴 표정의 변화가 토해내는 감정묘사가 이 영화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거의 전부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다른 부분과 달리 상대적으로 자연스럽게 극적 맥락 속에서 드라마를 운반하는 예를 들어보자면, 강가에서 광해 일행이 야영을 할 때 어디선가 빗살같이 쏟아지는 화살 세례에 모두 당황하는 사이에 광해의 처소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토우가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광해에게 달려가 그를 구출하려 하자 광해가 공포에 떨면서도 토우의 말을 잘 듣지 않는 장면은 이들 사이에 놓인 계급적 간극을 필연적으로 드러내는 한편, 어린 세자와 어른 군사의 기량 차이를 보여주고 전반적으로 무능한 이 집단의 상황대처 능력을 시각적으로 그려내면서 토우가 처한 감정적 딜레마를 거의 완벽하게 전달한다. 각본에서 이미 직설적으로 명기된 주제는 말하는 인물의 헤드숏을 통해 전달되는 것보다 훨씬 더 간접적이고 세련된 방식을 필요로 한다. 그게 텔레비전 드라마와 영화의 매체적 차이일 것인데, 아쉽게도 이 영화는 위에 언급된 묘사방식을 일관되게 추구하지는 못했다. 영화의 클라이맥스 부분에 묘사된, 광해 일행이 의주에 도착한 후 허름한 성에서 왜군들의 공격을 막아내는 대규모 전투 장면에서도 감독의 연출적 관점은 인물들의 피와 살이 터지고 뼈가 부러지는 사실적 전투 묘사에만 몰두한다. 이것 역시 액션 안무의 장르적 쾌감을 배제하고 사실적 느낌만 부각하려는 의지의 결과물인데 전투의 경과에 따라 강도가 높아지는 잔혹한 묘사들 외에 과연 더 보여줄 게 없었는가라는 의문이 남는다. 극적 맥락에 따라 관객이 화면에 보여지길 원하는 것은 변변히 지휘할 장수도 없는 중과부적의 상황에서 왕세자 일행과 백성들이 처한 절박한 처지와 그에 따른 교감의 농도다. 이편과 저편의 전략 전술을 관객에게 알려주고 전투 전에 상황을 예측한 것과 전투 발발 후에 예측하지 못한 상황이 벌어지는 것의 간극에 따라 이야기의 맥락이 피말리게 흘러가는 걸 보여주는 것은 사실적인 묘사의 기준과는 별개의 문제다. 정보의 배분과 그에 따른 극적 맥락의 교집합이 없으니 화면에 전해지는 건 죽어가며 고통을 느끼는 사람들의 모습을 전시하는 것뿐이다. 이 전투의 무모함과 백성들의 희생이 맺는 상관관계를 축으로 놓고 광해라는 왕세자와 중간자인 대립군 일행, 백성들 사이에 오가는 시선의 교차와 접합이 이 장면에는 적절히 배분되지 않는다. 꼭 있어야 할 묘사가 없음으로 해서 <대립군>에는 직설로 강조되는 좋은 리더의 조건과 민중의 불우한 처지를 보여주는 숏들만 돌출된다. 이것이 미진하다 여겼는지 영화의 맨 마지막 부분, 토우 일행이 왕세자와 백성들의 피난을 열어주기 위해 자신들의 목숨을 바치는 장면은 강가에서 장렬한 분위기로 펼쳐진다. 갑자기 묘사가 종결되는 의주성에서의 전투 다음에 오는 이 장면은 관객을 믿지 못하는 초조한 묘사의 산물이자 우린 좋은 얘기를 하고 있다는 제작진의 자기도취를 드러내는 징표이다. 이 영화가 선의를 갖고 제작된 영화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서둘러 주제를 드러내는 강박적인 인물 헤드숏들을 가급적 배제하고 묘사하려는 침착함을 갖추지 못함으로써 이 마지막 장면에서 묘사되는 대립군들의 장렬한 최후는 고통의 퍼포먼스 이상의 기능을 갖지 못한다. 나는 현재의 버전보다 훨씬 더 간결한 이 영화의 편집버전이 가능했을 것이라고 본다. 필요 이상으로 늘어진다는 느낌을 주는 이 영화의 상영시간은 관객을 못 믿어 자꾸 화면에 대사를 밀어넣으면서도 이렇게 늘어놓는 것이 관객의 아드레날린을 더 활발히 분비시킬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감독을 비롯한 제작진의 자기최면이 초래한 최악의 결과가 아닐까 의심이 간다. 고유의 시각적 스타일을 어느 정도 성취한 <불한당> 정윤철의 <대립군>이 사실적인 묘사에의 강박과 주제 전달에의 과신이 결합한 화면 남용의 결과물이라면, 변성현의 <불한당>은 장르 픽션의 상투형을 과신함으로써 실패한 정반대의 사례다. 특히 이 영화의 초반부는 최근 몇몇 영화들에서 허투루 묘사된 교도소 감옥 설정의 안일함 면에서 최절정을 보여주는데 이게 과연 한국의 교도소에서 가능한 상황설정인지를 관객 스스로 자꾸 되묻게 만드는 개연성 무시의 극치다. 교도소 간부들의 묵인 아래 죄수들이 그들만의 세상을 꾸리는 걸 이해한다고 해도 이 영화는 그 묘사 한계를 한참 넘는다. 공권력의 허술함과 무능을 소재로 삼는 건 대다수 한국영화의 특징이긴 하지만 거꾸로 생각해보면 현재의 한국은 공권력의 지칠 줄 모르는 집요함에 지쳐 있던 사회이기도 하다. 평자들은 물론이고 대다수 관객도 이 점을 그냥 쉽게 넘겨보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플롯의 소재가 되는 공간은 사실적 개연성 면에서 매우 중요하며 그에 따라 등장인물의 동선과 행동도 정해질 것이기 때문에 플롯의 역동성을 예비하는 측면에서 공간을 사실적으로 설정하는 것은 제작진의 필연적인 의무다. 이 점을 만회하려는 변성현의 연출은, 비록 그가 SNS에서의 말실수로 비난을 받기는 했지만 완전히 성공한 수준은 아니더라도 주목할 만한 부분이 있다. 설경구가 그 스스로 잘해낼 수 있는 연기를 무리 없이 해낸 주인공 재호를 묘사하는 여러 장면들에서 감독은 그가 지닌 불안과 그 때문에 지닐 수 있는 강력한 기운을 관객에게 능숙하게 전달한다. 이 영화에서 재호의 클로즈업이 주는 여러 복합적인 감정들은 단지 그 화면의 효과로만 축약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클로즈업의 효과를 가능하게 숱한 배음효과를 냈던 여러 장면들의 축약된 효과이다. 누구에게도 정을 주지 않고 받지도 않았던 개인사를 지닐 수밖에 없었던 주인공 재호는 언뜻 이해하기 힘든 기이한 행동을 하는데 이를테면 자신의 조직과 별개로 마약을 거래하는 다른 조직을 재호의 조직이 습격하는 영화 속 한 장면에서 그가 다른 패의 조직 폭력배들을 상대할 때 그는 자기 몸의 안위 따위는 상관하지 않는다는 듯 폭력의 주고받기를 즐기는 광기를 보이며 카메라는 꽤 긴 호흡으로 인물의 동선을 연출한다. 이런 과시적인 호흡의 긴 연출은 영화 초중반 교도소 장면에서 범죄자로 위장한 현수가 재호와 의미 있는 관계를 맺으려 시도도하는 가운데 교도소 내 운동장의 분위기를 살필 때도 보여졌지만 그 장며에서는 일정한 긴장감을 자아내는데 실패했다.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장면들의 축적은 재호와 범죄자로 위장한 형사 현수(임시완), 재호의 동료인 병갑 등의 관계에 초점을 주는 드라마의 감정선을 예리하게 벼리는 데 성공한다. 아무도 믿지 못할 집단 속에서의 불안과 긴장은 이 세 주인공의 내면을 설명하는 주된 감정 통로이다. 변성현은 영화에 허다하게 나오는 몹신에서의 공들인 묘사를 통해 이들 주인공들의 어디에도 안착하지 못하는 감정을 이중, 삼중으로 두르며 겨냥해낸다. 다소 서투르고 산만하지만 영화를 영화답게 만들고자 하는 스타일에의 야심을 일정하게 성취하면서 이 영화는 호모 소시알의 경계에서 호모 섹슈얼로 나아가는 것을 망설일 수밖에 없는 남자들의 공생 관계와 상호 연민 그리고 증오를 그려낸다. 이게 가능해진 것은 집단에서의 주인공들의 처지를 끊임없이 시각적으로 그려내려는 시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젊은 감독답게 스타일에의 패기를 보여준 변성현의 재능이 그의 설화로 인해 묻히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일회성으로만 유효한 극단적 프레이밍 연출 <노무현입니다> 앞선 두 영화와 다른 다큐멘터리 장르의 영화이지만 이창재의 <노무현입니다>는 어떤 당파적 입장에서는 선의를 품은 의도로 접근한 결과물이다. 이 영화는 아직 중앙무대에 설 위치가 아니었던 정치인 노무현이 새천년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기적 같은 승리를 거두는 과정을 플롯의 주된 축으로 삼았다. 지역감정이라는 망국적 현상에 맞서 동서화합을 내세운 정치인이 색깔론마저 극복하고 대선 후보가 되는 영웅적인 서사가 점차적으로 전개되는 동안 온탕과 냉탕을 오가는 것처럼 주 플롯 사이에는 생전의 노무현의 인간적 면모를 증언하는 관계자들의 인터뷰가 끼어든다. 이 인터뷰는 고인이 된 노무현의 삶을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에 영화의 주 플롯인 승리하는 서사와 충돌하면서 관객으로 하여금 비탄의 감정을 자아내게 한다. 이창재 감독은 새천년민주당 경선의 실황중계 장면들에서 극영화에서 주로 쓰이는 숏/역숏 문법을 효과적으로 배치해 노무현이라는 주인공이 고립된 처지를 뚫고 승리하는 모습을 극적으로 수식한다. 경선에서 상대 후보가 노무현을 비난할 때 노무현이 보이는 반응화면이 실제 맥락에서 따다 쓴 것인지 여부는 우리가 확인할 수 없으나 드라마의 흐름에서 그런 반응은 자연스러운 것이므로 우리는 일단 받아들이게 된다. 이 숏/역숏 문법의 기발한 점은 객관성을 가장한 시점에서 화면의 자연화 효과를 거두게 된다는 것이다. 극적 동요와 흥분을 느끼는 가운데 관객은 한 정치인이 영웅적으로 승리하는 모습을 받아들인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이 경선 과정 단락에 끼어드는 인터뷰 화면의 프레이밍 구성이다. 이창재는 이 화면들을 정면 클로즈업으로 잡는다. 앞서 기록화면들을 재구성한 경선 장면들이 극적 감정을 자연화 효과로 북돋우는 것이었다면 이 인터뷰 화면들은 거침없이 들이대는 근접 프레이밍으로 인해 감독의 주관적 개입 효과를 강화한다. 감독은 이 인터뷰 프레이밍과 관련해 관객과 직접 대면하는 느낌을 주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으나 실제 효과는 좀 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이들에게 이 화면 프레이밍은 지나치게 관객의 이입을 강요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런데도 <노무현입니다>가 흥행하고 있는 것은 노무현의 인간적 면모를 증언하는 관계자들에게 관객이 더 감정이입할 수 있도록 극단적 방법을 쓴 이창재 감독의 프레이밍 연출이 효과적이었음을 증명한다. 미학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이 방법은 평자 입장에서 옹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당파적 입장을 갖고 노무현에 대한 호불호로 진영이 나뉜 한국 사회의 정치 지형에서 이것이 선동적인 효과를 걸고 내건 도박이라는 걸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이창재 감독은 지금과 같은 정치적 상황이 아닐 것을 가정하고 지극히 당파적이고 주관적인 이 수법을 썼다는데, 통념상 객관적일 것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다큐멘터리를 대하는 관객에게 청한 영리한 일회용 파격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 시도는 일회성으로만 유효한 측면이 크다. 관객의 개방성을 불신한다면 퇴보할 수밖에 없다 사회가 정치적으로 불우할 때에도 그 사회의 영화는 미학적으로 진취적일 수 있다. 영화역사의 수많은 사례들이 그것을 증거한다. 불행하게도 한국영화는 그 정반대의 길을 최근 몇년간 걷고 있다. 정치적 억압이 내면화되어 직설과 과장, 강조가 아니면 억눌린 관객의 감성과 접속할 수 없다고 하는 제작진의 좌절과 불신과 초조가 미학적으로는 점점 퇴보하는 결과물들을 내놓고 있다. 영화적 성취보다는 데이터를 더 믿고 제작진의 의지보다는 모니터 시사의 설문지를 선호하는 가운데 초래된 한국영화의 획일화는 더이상 감독의 이름으로 영화를 구분짓는 것이 극소수의 영화가 아니면 불가능한 상황을 만들어냈다. 관객의 개방성을 믿지 않는 제작진의 협량함은 거꾸로 대다수 관객의 지속적인 불신을 자초할 것이다. 모두 다 이구동성으로 중요하다고 말하는 창의성을 진정으로 발휘할 수 있는 시스템이 어떤 꼴일지 다시 상상해야 할 시점이 왔다고 생각한다.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노 맨스 랜드

<더 서클>은 이른바 ‘투명사회’를 직격 비판하려는 야심 큰 영화다. 극중 공룡IT기업 ‘더 서클’은 페이스북과 유사한 ‘트루유’ 애플리케이션을 근간으로, 만인이 자발적으로 사생활을 공유함으로써 완벽히 개방되고 연결된 세계를 건설할 수 있다는 유토피아니즘을 성공적으로 판다. CEO 에이몬(톰 행크스)이 뽑아낸 슬로건 “비밀은 거짓말이다”가 특히 의미심장하다. “남이 보지 않을 때 인간은 악하고 약한 면을 드러내게 되므로 완전한 사생활 공유야말로 진보”라는 논리에, 젊은 엘리트 사원들이 갈채로 동조하는 광경은 모골이 송연하다.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그들은 세계 최대 기업에 입사해 세상을 바꾸고 있다는 쾌감, 여가와 노동이 하나된 쿨한 기업 문화에 도취돼 있다. 흥미로운 설정을 충분히 전개하지 못한 각본이 아쉽다. 06/01 20대 말 어느 날 유학 중 영국 하원의 토론을 중계하는 텔레비전을 무심코 틀어놓고 과제를 하던 나는, 불현듯 내 눈앞의 그림이 뭔가 잘못돼 있다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인구의 반이 생물학적 여성인데 국민을 대표하는 사람의 압도적 다수가 남성인 광경에 대해- 놀랍게도- 처음으로 기괴하다고 체감한 것이다. 어이없게도 공적 영역의 성비가 훨씬 기울어진 한국에서 살아온 27년간은 당연시한 나머지 무감했던 그림이었다. 머리로는 불평등을 인지했지만, 사고를 작동하기 전에 눈이 먼저 소스라친 경험은 그때가 처음이었던 것이다 묵은 기억까지 뒤진 건 <원더우먼>의 어떤 장면들 때문이다. 영화의 장단점을 세세히 따지기 전에 <원더우먼>은 우리가 결여하고 있었으나 결여했다는 사실마저 잊고 있던 이미지를 커다란 스크린에 펼치는 것만으로 심박수를 펌프질한다. 주요 액션 시퀀스 중 아마조네스들의 섬 데미스키라의 군사 훈련 및 전투, 그리고 영화 중반 적에게 점령된 벨기에 마을에 다이애나(갤 가돗)가 포화 속을 뚫고 진입해 수복하는 과정이 그랬다. 먼저 관객은 프레임이 다양한 연령대의 여성 인물로만 채워져 있는 광경이 반대 성(性)의 경우와 달리 얼마나 생소한지, 그리고 그들이 목적을 갖고 움직여 공간을 장악하는 모습이 얼마나 장쾌한 감동을 주는지 데미스키라 배경의 1막에서 깨닫게 된다. 말과 무기와 어우러진 그들의 애크러배틱은 여성 전사라는 핑계 아래 제공되곤 하는 남성 관객용 눈요기가 아니다. 패티 젠킨스 감독은 액션의 주체인 아마조네스들의 호흡과 쾌감을 앞세운다. 예컨대 코스튬이 액션 동작에 따라 어떻게 몸을 노출시킬 것인가는 <원더우먼>의 안중에 없다. 활과 창검의 고전적 무기, 강한 콘트라스트, 동작의 속도를 늦췄다 높였다 하는 비주얼은 DC 확장 유니버스에 계속 관여하는 잭 스나이더의 <300> 액션과 스타일을 같이하지만 상당한 차이가 보인다. 아마조네스들의 무장은, 적보다 자연에 먼저 다칠 것처럼 헐벗은 스파르탄의 그것과 달리 실용적이다. 패티 젠킨스 감독이 밝히는 액션 연출의 레퍼런스는 전란을 묘사한 르네상스기의 역사화들이다(아마존족의 탄생 기원을 올림포스 신들의 전쟁을 통해 밝히는 설명 플래시백 시퀀스도 같은 양식으로 연출됐다). 한편 <300>이나 아류 영화들과 달리 <원더우먼>에는 사지가 절단되고 두개골이 꿰뚫리는 고어 표현도 없다. 물론 등급의 영향이 절대적이다. 그러나 다이애나를 포함한 아마존 전사들의 액션에서 중요한 테크닉은, 먼저 공격하고 때려눕히기보다 상대방의 힘의 반동을 이용하고 정확하게 에너지를 집중시키는 능력이다. “싸움이 공정할 거라는 생각을 버려!” 이모인 안티오페 장군(로빈 라이트)이 방심한 다이애나의 허를 찌르고 경고할 때, 어떤 여성 관객은 이 대사의 중의적 교훈을 새기며 “예, 언니!”라고 속으로 복창할지도 모른다. 영화 중반 마침내 1차대전 벨기에 전장으로 진출한 다이애나가 마을을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모두의 만류를 뿌리치고 ‘무인지대’(No Man’s Land)를 가로지르는 순간도 마찬가지다. 그녀의 팔찌는 공격을 튕겨내고 정확하게 받아쳐서 길을 연다. 이 대목의 감흥은 일렉트로닉 첼로를 앞세운 한스 짐머/루퍼트 그레그슨 윌리엄스의 스코어에도 적잖이 빚지고 있다. 다분히 관습적일지언정 <원더우먼>은 <슈퍼맨>에 비할 만한 진한 인장의 팡파르를 확보했다. <BBC>와 인터뷰에서 원더우먼의 액션 디자인에 관해 패티 젠킨스는 “최소한 원더우먼은 상대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는 유형의 히어로는 아니라는 정도의 가이드라인은 확실했다”라고 밝혔다. 혈혈단신 포화 속을 질주하는 해당 장면의 원더우먼은 확실히 ‘국제경찰’로서 간섭주의를 고수하는 미국의 엠블럼이기도 하다. 그러나 적어도 새 영화의 코스튬은 더이상 성조기로 만든 속옷처럼 보이지 않는다(거꾸로 다이애나는 런던 백화점에서 코르셋을 무장으로 착각한다). 06/02 단독 영화의 1편이자 기원담으로서 여타 수퍼히어로들과 차별되는 원더우먼의 성격을 정립하는 데에도 패티 젠킨스는 성공적이다. 데미스키라에 불시착한 미군 첩보장교 스티브 트레버(크리스 파인)와 함께 전쟁의 신 아레스를 막고자 1918년 런던에 당도한 다이애나는 물 밖에 나온 인어 같은 처지다. 이웃 마블 유니버스 중 물정 모르는 왕자가 나오는 <토르>와 1차대전 시대극인 <캡틴 아메리카: 퍼스트 어벤져>도 동시에 연상시키는 2막이다. 다이애나의 선악 개념은 회색지대가 없고 전쟁에 관한 이해는 나이브하다. 어찌 보면 철없는 여성을 합리적인 남성이 지도하는 구도 같기도 하다. 그러나 영화는 진실과 정의에 관한 다이애나의 천진한 믿음이 뜻밖의 돌파구를 뚫고 경험 많은 남자들을 설복하는 이야기로 발전한다. 리처드 도너 감독의 <슈퍼맨>(1978)을 참조했다는 젠킨스 감독의 말에서 짐작할 수 있듯 나이브함은 그 자체로 원더우먼이라는 슈퍼히어로의 태생적 차별성이다. 프롤로그가 예고하듯 다이애나는 변하겠지만 그녀의 뿌리에는 순진한 인류애가 있다. 보다 주목할 점은 DC 트리오의 남성 멤버 슈퍼맨과 배트맨에게 언제나 중요한 동기로 작용하는 자아 집착과 메시아 콤플렉스, 폭력으로 번민을 해소하는 성향을 원더우먼에겐 찾을 수 없다는 점이다. 다이애나는 적어도 곤경에 처한 눈앞의 약자의 고통에 당장 감정을 이입하고 돕고자 하는 자연스런 메커니즘으로 움직인다. 인간의 도시에 도착한 순간부터 우리는 다이애나가 끊임없이 눈에 띄는 사물에 관심을 기울이고 즉각적으로 반응하고 생동하는 감정을 표출하는 모습을 지켜본다. 그녀는 아이스크림 맛에 찬탄하고, 섬에선 볼 수 없던 아기에게 달려간다(모성애 탓이 아니다). 여성 참정권 운동이 한창인 런던이 배경임에도 <원더우먼>은 다이애나에게 한번도 페미니즘을 주제로 한 독백이나 연설을 시키지 않는다. 제작진의 타협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 다이애나에게는 성차별의 개념 자체가 낯설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녀가 금녀 구역인 정치 회합에 끼어들고 다국어 능력을 발휘하고 남자들을 물리적으로 제압할 때 객석의 웃음거리가 되는 건 분위기 파악 못한 괴짜 여자가 아니라 개명 못한 당대 남자들이다. 영웅의 로맨스 상대이자 제2주인공으로서 결코 다이애나의 스포트라이트를 가로채지 않는 크리스 파인의 스티브는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의 맥스(톰 하디)와 같은 클럽에 속하는 적절한 조력자다. 여성이 비범한 능력을 발휘할 때 “남자인 나보다 낫네?”라는 리액션을 굳이 농담조로 던져 물을 타거나 웃어넘기지 않는 점이 훌륭하다. 심지어 다이애나의 장기를 눈여겨보았다가 전투 중 결정적 디딤돌이 되어주기도 한다. 극중에서 스티브는 당신이 인간 남자의 평균이냐는 다이애나의 질문에 “나는 평균 이상이다”라고 말하는데, 나 역시 큰 이의는 없다. (다음에 계속) 좋아요 거기까지! 기타노 다케시의 <8인의 수상한 신사들>에서 왕년의 야쿠자 류조(후지 다쓰야)는 보이스 피싱 사기에 걸려들 뻔한 사건을 계기로 어찌어찌 7명의 옛 동료를 모아 조직을 재결성한다. 하지만 야쿠자 올드보이들의 몸 상태는 운신하는 게 고작이고 도덕적으로도 그들이 응징하려는 본데없는 양아치들보다 우월할 게 없다. 그들은 관록의 슈퍼파워를 발휘하는 어벤저스도, 강호의 도를 세우는 8인의 사무라이도 되지 못한다. 다행스럽게도 기타노 다케시는 구식 야쿠자의 가치관에 향수를 보이는 대신, 이 영화를 더이상 원하는 만큼 쿨하거나 위협적일 수 없는 노년에 관한 철저한 농담으로 만들었다. “그래도 설마” 하며 반추의 시간을 기다렸던 관객을 감독은 가차없는 엔딩으로 일축한다. 적어도 그는 아직 그만큼은 쿨하다.

[내 인생의 영화] 권해봄의 <곡성> 최고의 로맨스영화

감독 나홍진 / 출연 곽도원, 황정민, 구니무라 준, 천우희 / 제작연도 2016년 내 인생 영화를 꼽아달라는 요청에 한참 고민했다. <쇼생크 탈출> <포세이돈 어드벤처> <올드보이> <비포 미드나잇> 등 머릿속을 스치는 수많은 영화가 있었지만, 인생에 다시 없을 혹은 인생을 바꿔놓은 영화라고 할 만한 작품은 역시 하나뿐. 바로 <곡성>이다. 배우들의 연기도 경이로웠고, 관객과 놀이하듯 대담하게 미끼를 던지고 현혹하는 감독의 연출도 더할 나위 없이 새로웠지만 <곡성>이 나의 인생 영화인 이유는 따로 있다. <곡성>이 개봉할 무렵 회사 같은 팀에 좋아하는 동갑내기 친구가 있었다. 회사에서는 밥도 자주 같이 먹고 회식도 종종 하는 좋은 동료 사이였지만 사적으로 만난 적은 한번도 없었다. 혹여 그런 말을 건넸다가 어색해질까 무서워 만나자고 청하기는커녕 커피 한잔하자는 말도 꺼내지 못했다. 어느 날 둘이 함께 밥을 먹다가 <곡성> 얘기가 나왔다. 그녀는 영화에 반전이 있으니 스포일러를 접하기 전에 후딱 봐야 한다고 했다. 그때 같이 보러 가자는 말만 꺼냈어도 데이트 신청이 좀 자연스러웠을 텐데 나는 우물쭈물하다 물어볼 기회를 놓쳐버렸다. 나중에 <곡성>을 함께 보러 가자는 말을 꺼내려 했지만, 말할 기회가 도무지 생기지 않았다. 어떻게 어색하지 않게 얘기를 꺼낼까 고민하다가 주차장 그녀의 차 옆에 내 차를 대놨다. 그녀가 퇴근할 때 우연인 척 차로 같이 향하면서 문득 생각난 것처럼 얘기를 꺼내면 좀 자연스럽지 않을까 싶었다. 토요일 밤, 방송 준비를 마치고 집에 가려고 주차장으로 향하는 그녀 옆에 타이밍을 맞춰 같이 걸어갔다. “이번주도 참 힘들었다. 그렇지?” “그러게 말이야.” 이제 영화 얘기를 꺼낼 타이밍인데… 그녀가 갑자기 말이 많아졌다. 이번주는 선배들 때문에 힘들었고, 이렇게 편집을 했으면 방송이 더 재밌었을 텐데 하며, 자동차로 향하는 시간을 일 얘기로 채웠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영화 얘기는 꺼내지도 못한 채 차 있는 곳으로 도착했다. “어? 네 차 내 차 옆에 있네!” “응, 그… 그러게.” “이번주도 수고했어. 잘 가.” 아… 그렇게 그녀는 자신의 차로 걸어갔고 나는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는 모든 타이밍을 놓쳤다. 아, 이렇게 기회가 날아가나. “야, 저기….” “응?” “저기… 주말에 나랑 <곡성> 볼래?” “어? 왜?” 왜? 왜냐니, 뭐라고 말하지? 왜 나는 그녀에게 일주일에 하루 있는 휴일을 함께 보내자고 하는 거지? 굳이 함께 영화를 보러 가자고 하는 이유를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어… 나… 무서운 영화 혼자 못 보거든.” “뭐야. 무서운 영화 못 봐?” 그녀가 피식 웃었다. “그래 알았어. 가자” 와! 성공이다. 그런데 무서운 영화를 못 본다는 얘기는 어디서 갑자기 툭 튀어나온 말인지. 그날 일만 생각하면 아직도 얼굴이 화끈거리고 손발이 오글거린다. <곡성> 같은 대작을 가벼운 호러영화나 데이트 무비로 만든 것 같아 죄송합니다, 나홍진 감독님. 내가 던진 성긴 미끼를 그녀는 모른 척 물어버린 것일까? 그렇게 주말에 그녀와 영화를 보러 갔고 공포영화를 일부러 찾아다닐 만큼 좋아하는 나지만 괴이한 장면엔 얼굴을 돌려가며 겁이 나는 척 연기했다. 우리는 영화가 끝난 후 스크롤이 다 올라가고 모든 관객이 나갈 때까지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느라 자리를 뜨지 못했다. 영화가 끝나면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는 나에게 꽤 신기한 경험이었다. <곡성>은 해석의 여지가 무궁무진하고 이야깃거리도 풍부해 심지어 헤어지고 난 후에도 영화에 대한 얘기를 주고받다 보니 연락이 끊이지 않았다. 영화를 본 지 꼭 1년 후, 우리는 결혼을 했고 부부가 되었다. 그래서 <곡성>은 적어도 내게는, 아니 우리 부부에게는 최고의 로맨스영화다. 캬, 이게 바로 인생 영화가 아니고 무엇이랴. 여러분, 마음에 드는 이와 함께 영화를 볼 때는 이야깃거리가 많은 영화를 보는 게 좋습디다. 권해봄 MBC 방송 PD. 예능 프로그램 <렛츠고 시간탐험대> <헬로! 이방인> <동네 한 바퀴>등에 조연출로 참여했으며 MBC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서 ‘모르모트 PD’라는 별명으로 큰 인기를 얻었다.

[해외뉴스] 애플, 자체 콘텐츠 제작에 뛰어들다

애플도 넷플릭스와 같은 플랫폼이 될 수 있을까. 최근 애플이 자체 TV프로그램과 영화 제작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고 있다. 이들 콘텐츠는 애플 뮤직을 통해서만 볼 수 있을 예정이다. 지난 6월 6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새너제이에서 열린 애플 개발자 콘퍼런스에서 자체 제작 리얼리티 프로그램 <플래닛 오브 디 앱스>가 처음 공개됐다. 제시카 알바, 기네스 팰트로 등 유명 배우와 기업가들이 출연하는 이 방송은 출연진이 힘을 합쳐 애플리케이션을 직접 만드는 내용을 담았다. 이 프로그램이 평론가들에게 엄청난 혹평을 받으면서 일부 언론에서는 애플의 자체 콘텐츠 제작 계획에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기도 했지만, 분위기를 전환시킬 만한 사건이 등장했다. 지난 6월 16일(현지시각) 애플이 소니픽처스 텔레비전 출신의 제이미 일리흐트와 잭 반 앰버그를 비디오 프로그래밍 부문 총괄로 영입하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그동안 두 사람이 관여했던 콘텐츠로는 <브레이킹 배드> <베터 콜사울> <더 크라운> <블러드라인> 등이 있다. 오는 8월에는 지난해 판권을 구입했던 <CBS>의 <더 레이트 레이트 쇼> 인기 코너 ‘카풀 가라오케’의 스핀오프를 방영할 예정이다. 자체 제작 콘텐츠에 대한 애플의 관심은 기존 서비스 매출과도 연관이 있다. 자체 콘텐츠를 통해 아이폰, 애플 TV 등 기존 애플 제품의 영향력도 견고히 하겠다는 것이다. 2700만명에 이르는 애플 뮤직 가입자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플랫폼 개척은 5천만명의 가입자를 보유한 스포티파이가 취하고 있는 전략이기도 하다. 애플의 콘텐츠 사업이 넷플릭스처럼 영화 및 TV프로그램 시장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지, 그래서 최근 주가 하락을 면치 못하고 있는 애플에 새로운 성장 동력이 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스파이더맨: 홈커밍> 함께 보면 좋을 10대 소년 이야기 담은 영화

1. <나 홀로 집에>(1990)의 케빈(매컬리 컬킨) 사상 최악의 크리스마스 악당 하면 누가 먼저 떠오를까. <팀 버튼의 크리스마스 악몽>(1993)의 잭 스켈링톤이나 짐 캐리가 열연한 <그린치>(2000)의 그린치도 이분 앞에선 명함도 못 내민다. <나 홀로 집에>의 케빈은 자신이 저지르는 짓의 한계를 모른다는 점에서 무도하기 이를 데 없는 순수 악당이다. 어리바리 도둑 2인조를 잔인하게 응징하는 케빈의 트랩 퍼레이드는 악동과 악당의 경계를 넘나든다. 스파이더맨도 대적하는 빌런들과 한끗 차이다. 스파이더맨 속 악당들은 스파이더맨의 또 다른 자아라 해도 좋을만큼 유난히 닮았다. 피터 파커는 어느 날 생긴 특별한 힘을 스스로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사용할 수도 있었지만 끝내 선한 의지를 지켜냄으로써 영웅의 자격을 증명한다. 어른이 되어버린 케빈이 왠지 서글픈 것처럼 악동으로 머물 수 있는 시기는 피터팬보다 훨씬 짧은 것 같다. 2. <크로니클>(2012)의 앤드루 데트머(데인 드한) 어른들은 항상 궁금하다. 지금 10대들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에 빠져 있을까. 한참 전에 그 시절을 이미 지나온 입장에선 현재의 소년 소녀들이 열광하는 감정은 이해할지언정 그 방식은 불가사의에 가깝다. 몇몇 영화들은 유튜브와 인스타그램 한가운데 사는 10대를 표현하기 위해 특별한 형식을 동원한다. 조시 트랭크 감독의 <크로니클>은 페이크다큐멘터리와 홈비디오 형식을 결합해 영상 세대의 리얼리티를 구현했다. <크로니클>은 <스파이더맨: 홈커밍>의 다크 버전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닮은 구석이 있다. 특히 오프닝에서 부산스럽게 홈비디오를 찍고 ‘피터 파커 작품’이라고 떡하니 타이틀을 붙이는 피터 파커의 허세는 소년의 흥분을 엿보는 것 같아 귀엽다. 훨씬 어둡고 살벌한 <크로니클>의 카메라를 보니 역시 중요한 건 페이크 다큐라는 영상 형식이 아니라 ‘카메라를 든 소년’이 누구인가에 달렸나보다. 3. <백 투 더 퓨처>(1985)의 마티 맥플라이(마이클 J. 폭스) 존 와츠 감독은 스파이더맨을 15살 시절로 되돌리면서 <백 투 더 퓨처>의 마티 맥플라이를 21세기로 소환했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와 미래를 오가는 고등학생의 모험에 가슴이 두근거리는 건 알지 못했던 과거의 비밀이나 미래의 신기한 물건들 때문만은 아니다. 모험의 중심에는 고교생 마티 맥플라이의 평범함이 자리한다. 마티는 적당히 평범한 고등학생이다. 대체로 소심하지만 적당히 착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도움의 손길을 내밀 만한 용기와 선의를 갖추고 있다. 숭고한 이상이나 거창한 목표보다 당장 멋지게 보이는 게 더 신경 쓰이는 허세남이기도 하다. 톰 홀랜드의 표현을 빌리자면 “하나도 쿨하지 않은데 엄청 쿨한 척하는” 게 매력이다. 스파이더맨이 ‘우리의 친절한 이웃’이 될 수 있는 건 그가 마티의 얼굴을 한 슈퍼히어로이기 때문이 아닐까. 4. <킥애스: 영웅의 탄생>(2010)의 데이브(에런 존슨) 피터 파커와 친구들의 차진 대화를 듣고 있자면 <구니스>(1985)의 왁자지껄한 소동이 생각난다.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끝내 찾아가는 피터 파커를 보고 있자니 텔레비전으로 방영되며 컬트적인 인기를 끌었던 랜달 크레이저 감독의 <협곡의 실종>(1986)도 연상된다. 하지만 미숙한 10대 영웅의 성장담이란 점에서 <킥애스: 영웅의 탄생>(2010)을 빼놓고 이야기 할 순 없다. 매튜 본 감독의 <킥애스: 영웅의 탄생>은 초장부터 스파이더맨과 배트맨을 언급하며 시작한다. 데이브는 쫄쫄이 코스튬을 입으며 되뇐다. “슈퍼히어로를 만드는 건 거미에 물리는 일이나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아니라 긍정과 순수에 대한 믿음”이라고. 물론 곧장 신나게 박살이 나긴 하지만 올바름을 향한 곧은 선의가 소년을 히어로로 만드는 가장 중요한 마지막 조각임에는 틀림없다.

<옥자> 봉준호 감독 인터뷰 - 옥자야 놀자

장맛비가 숨을 돌린 오후, 인터뷰 장소에 들어선 봉준호 감독은 7월 독감을 앓고 있는 운 없는 사람 치고는 매우 밝았다. 아니, 3년 만에 새로운 장편을 공개하고 열흘째를 맞이한 영화감독 치고는 대단히 명랑했다고 말하는 편이 낫겠다. 스코어라는 유령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감독의 활기는 첫주 박스오피스 성적이라는 괴물이 얼마나 영혼을 좀먹는지 반증을 보는 듯했다. 대화를 통해 기자는, 동물권 문제가 단순히 인간과 동물의 우정을 그리기 위해 <옥자>에 끌려들어온 소재가 아니라 봉준호 감독이 현재 세계의 중요한 이슈로 통감하고 감독으로서 구현할 수 있는 영화적 아름다움을 그 안에서 발견한 주제임을 확인했다. 카페에서 상주하는 고양이 후추가 무심한 척 덧문에 등을 대고 우리의 인터뷰를 엿들었다. 주차장에서 구조된 후 3kg이 늘었다는 몸으로 끙차 돌아눕는 태가 옥자 같았다. 넷플릭스 영화는 블루레이 발매가 늦는 편이라고 한다. 그때까지 감독 코멘터리를 소박하게 대신하자는 마음으로 상세히 물었다. -<괴물> <설국열차> 때보다 오히려 관객과 만남이 많은 것 같다. =극장에서 가늘고 길게 버텨보려고 다양한 행사를 하고 있다. 7월 28일에는 ‘감금틀 사육 반대 서명운동’을 <옥자>와 함께하는 동물보호시민단체 카라 회원을 위한 특별상영을 하고 8월 5일에는 <옥자>와 내가 좋아하는 조지 밀러의 <꼬마돼지 베이브2>를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동시상영한다. (웃음) 최대한 큰 스크린에서 영화를 보일 기회를 만들자고 다리우스 콘지 촬영감독, 프로듀서와 한 다짐을 실천하려고 한다. 제시된 손익분기점이 없으니 솔직히 마음 편하다. 덕분에 1895년 개관한 인천의 애관극장도 가보고 대구 만경관도 가봤다. -극중 미자의 여정이 봉 감독 자신의 할리우드 경험과 평행선 아니냐는 짐작이 있다. 말하자면, 하이브리드의 존재(영화)를 만들어 미국에 갔는데 쌍둥이 형제를 만나 고초를 겪는다는 설정에서 루시와 낸시가 (<설국열차> 배급권자로서 최종편집을 두고 감독을 압박했던) 웨인스타인 형제에게서 힌트를 얻은 건 아닌가 하는 가설이다. (웃음) =과도한 해석이긴 하지만 하비 웨인스타인의 흔적이 하나 있긴 하다. 제이(폴 다노)가 처음 미자에게 장광설로 미란도 기업의 거짓말을 설명하며 옥자가 태어난 지하 실험실 영상을 보여주는데 위치가 뉴저지 파라무스라고 나온다. 실은 파라무스의 거대 쇼핑몰에 있는 멀티플렉스에서 웨인스타인이 30분을 잘라낸 90분짜리 <설국열차> 테스트 스크리닝(관객 반응을 최종편집에 반영하기 위한 시사.-편집자)이 있었다. (좌중 폭소) 사지 잘려나간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아무 생각 없는 10대들이 팝콘을 먹으면서 “왓 더 퍽 이즈 고잉 온?” 하고 있는 광경을 프로듀서와 맨 뒷줄에서 지켜봤다. 시사가 끝나고 대행사에서 관객 설문지를 집계했는데 데이비드 린치 영화에 나오는 것 같은 반짝이 양복을 입은 직원이 심각한 표정으로 다가와 “봉. 아임 소 소리. 스코어 이즈 베리 배드” 하더라. 속으로 ‘아 당연히 안 좋지, 영화를 30분이나 쳐냈는데’라고 구시렁거리다 오히려 점수가 낮으니 잘된 건가 하고 있는데 웨인스타인이 다가오더니. “봉, 이츠 베리 배드. 레츠 컷 아웃 모어” 하는 거다. (좌중폭소) 남의 일이면 모든 상황이 너무 웃기고 재밌는데 불행히도 그것이 내 영화였다. 다행히 계약서에 감독판도 유사 조건에서 테스트 시사를 1회 가질 권리가 명시돼 있었고 결과적으로 감독판 점수가 훨씬 높게 나와 디렉터스 컷으로 미국에서 개봉할 수 있었다. 웨인스타인의 가위손에서 살아남은 감독 두명 중 한명이라는 말도 들었다. 다른 한명은 <모노노케 히메>를 미라맥스를 통해 미국에 배급한 미야자키 하야오다. 웨인스타인에게 선물을 보냈는데 열어보니 사무라이칼과 ‘노 컷’이라고 쓴 종이가 들어 있었다고 한다. -<옥자>가 올해 시드니영화제 폐막작이었다. <매드맥스> 시리즈, <꼬마돼지 베이브>, <해피 피트>와 공통점이 있으니 당연히 호주 출신 조지 밀러 감독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것 같다. =물론이다. 올해 칸국제영화제가 70주년을 맞아 많은 감독을 초청한 덕분에 조지 밀러를 처음 만났다.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편집 중에 <설국열차>를 반복해서 봤다고 하셔서, <설국열차> 편집하며 <매드맥스2>를 반복해서 봤으니 스스로에게 영감을 받으신 것이고 나는 끼어들었을 뿐이라고 답하며 웃었다. 시드니에서 재회했다. “정말 아름답죠?” -<옥자> 안으로 들어가자. 영화가 시작할 때 울리는 여섯번의 종소리는 무엇인가. =<플란다스의 개> 오프닝을 보면 개 짖는 소리가 중앙부터 극장 한바퀴를 빙 돈다. 스피커 상태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넣은 일종의 테스터다. 이번에는 종소리로 여섯 방향 스피커를 체크한 거다. 시사회에 앉아 있다가 시작과 동시에 종소리 중 하나가 깨져 있거나 안들리면 내가 ‘스위치’를 빡 누르고 곧장 연출부가 퓽 총알같이 영사실로 달려올라가 “멈추어!”라고 외치는 거다. (웃음) -그래도 영화의 오프닝을 상영관 테스트에 바치다니 상상 밖이다. =난 모든 영화들 앞에 극장시설 점검 리더 필름이 필요하다고 본다. 예컨대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안성기 선배를 캐스팅해 1분30초짜리 영상을 만드는 거다. 안 선배가 차트를 하나 들고 “지금 이 숫자를 읽으실 수 있습니까? 아니라면 보시는 상영관의 포커스는 나가 있습니다”, “다음은 스피커. 모든 종소리가 들렸나요? 그럼 안심하고 관람하세요” 하는 거다. 그래야 모든 극장이 긴장하지. 게다가 이번에는 스트리밍 공개인 만큼 인터넷 속도가 느린 나라에서도 틸다 스윈튼의 최초 숏을 종소리로 지연해 전송 상태가 정리된 다음 정상화질로 보게 하려는 마음도 있었다. -그렇게 시작되는 루시 미란도(틸다 스윈튼)의 TED 토크는 자본주의의 탐욕이나 잔혹함보다는 변태성이 더 강렬하게 느껴졌다. 우리가 먹는 것들에 대해 가지는 분열적 태도랄까. =구구절절 아름답게 미란도 기업의 슈퍼돼지 프로젝트를 소개하고 맨 마지막에 “무엇보다 X나게 맛있다”라고 한다. 극중 신문기사에서 루시 미란도는 사람들이 앞으로 먹게 될 동물과 사랑에 빠지게 만든다는 구절이 해당 장면의 핵심이다. -공동작가 존 론슨은 미국 대테러 첨단무기 회사의 레지나 듀간이 로봇 벌새 드론을 프레젠테이션하면서 “정말 아름답죠?”라고 했던 동영상을 참고했다고 하던데. =틸다와 존과 함께 봤던 영상이다. 그 아름답다는 로봇 벌새가 독침으로 표적을 살상하는 무기 아니냐는 질문이 좌중에서 나오자 행사장이 썰렁해진다. 주섬주섬 나가는 사람도 있고. -루시는 프롤로그에서 교정기를 끼고 있다. 혼자 있는 시간에 사인을 연습하는 장면을 보면 딱 아이들이 식탁에서 그림 그리는 자세이기도 하다. 틸다 스윈튼이 인터뷰에서 <옥자>에서 가장 성숙한 존재가 옥자, 정반대 극점이 루시라고 말했더라. =<설국열차>에서는 메이슨 역으로 틀니를 했는데 틸다가 입에다 뭘 하는 걸 나보다 더 좋아한다. 대사하기도 불편할 텐데. 회의 장면에서 보면 루시는 어른이지만 징징거린다. 그래서 조금 가엾기도 하고 결국 실패할 거라는 예감이 든다. 마지막에 미자가 찾아갔을 때도 낸시 정도 되니까 미자와 대결하지 루시는 깜이 안 됐을 거다. “너는 가고 김기춘 나와!”와 비슷한 상황 아닌가. (웃음) 외젖꼭지와 작은 눈 -옥자는 돼지 수명으로는 꽉 찬 10살 시점에 영화에 소개된다. 10년이라는 시간은 서사적으로 어떤 필요였나. =즉, 공장형 축산 기준으로는 옥자가 상품성이 없다. 26마리 귀엽고 예쁜 아기돼지들은, 미란도가 지하 실험실에서 진짜 대량생산 유통을 위한 유전자 변형 돼지를 시행착오를 거쳐 완성하는 동안 10년을 커버하는 장기 마케팅 도구다. 실제로 배설물에 인 성분이 적게 함유된 유전자 변형 돼지를 북미 산학협동으로 만들어내는 데 9년이 걸렸다고 한다. -이윤을 위해서는 대량생산이 중요한데 옥자의 젖꼭지는 하나뿐이다. 그렇다면 나중에 개발된 돼지는 젖꼭지가 여럿인가. =생산력을 제고하려면 생체주기가 짧고 많은 새끼를 낳아야 한다. 그래서 비육장의 돼지들은 외젖꼭지가 아니다. 화면이 어두워 자세히 안 보이지만 몸도 옥자보다 작고 피부에 얼룩도 있다. 기형으로 기어다니는 돼지도 있다. 그럼에도 불도저 같은 낸시는 옥자까지 도축하려고 한다. 루시라면 살려서 왕관 씌워 마케팅에 더 이용했을지도 모른다. -옥자는 디즈니적으로 귀엽지는 않지만 관습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사랑스러워야 했을 텐데 외양과 움직임의 디자인에서 어떻게 해결책에 도달했나. =첫눈에 귀엽지 않을 수도 있음을 감수하자고 장희철 크리처 디자이너와 논의했다. 개도 첫눈에 자지러지게 귀여운 애가 있는가 하면 종에 따라 퍼그처럼 뭉툭하지만 사나흘 보면 더 정드는 종이 있지 않나. 두툼하고 둔탁한 느낌과 디즈니 스타일과 다른 콧구멍만한 작은 눈을 생각했다. 눈이 크면 빨리 호소할 수 있지만 큰 덩치의 동물이 눈까지 크면 체구가 실감나지 않는다. 하마나 코끼리를 봐도 안구가 크진 않다. 눈으로 뭔가를 호소할 때는 카메라가 빅 클로즈업으로 다가가면 된다고 봤다. 대신 귀를 키웠다. -옥자는 오른쪽 콧구멍만 인중과 연결돼 있다. =자연스럽게 자랐지만 태생은 유전자 조작이라 불균형이 있다. 장희철 디자이너와 두 번째 작업이라 <괴물> 디자인 기간의 반 정도에 해냈다. -절벽에서 미자를 구하는 장면을 보면 지능도 유전자 조작으로 올라간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떨어져도 죽지 않음을 알뿐더러 행위의 논리적 결과를 예측하고 있다. =다른 슈퍼돼지의 지능은 모르지만 옥자는 물리법칙을 아는 듯하다. 나야 오로지 옥자가 어떤 귀여운 자세로 추락할까만 고민했다. -몸을 일으킬 때에도 단번에 안 일어나고 옆으로 한번 굴러 뭉기적거리고 일어나는 옥자의 모습에는 감독의 습관이 혹시 반영돼 있나. (웃음) =비만인들의 심금을 울리는 장면이다. 내 주변에 비만인도 많고. 나도 117kg까지 나간 적이 있다. 우리는 결코 한번에 일어날 수가 없다. 90도로 한번 꺾어 팔에 의지하며 일어나야지 불쑥 일어나면 허리를 다칠 수 있다. -추락 후 미자의 사과와 옥자의 반응은 둘의 관계를 복합적으로 잘 보여줘서 재미있다. =옥자는 “내가 죽을 뻔했구만 감 하나로 덮어?” 하는 토라진 태도고, 거기 대응하는 미자의 행동을 보면 둘 사이에 이런 상황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미국적 감수성이라면 미자가 울고불고했겠지만 무뚝뚝한 한국 산골 아이 미자는 다르다. -미자와 옥자는 한쪽이 어머니 역을 하지 않는 수평적인 관계다. =영화에서는 옥자가 인간이 지배하는 세계에 끌려갔기 때문에 미자가 분투를 벌이고 뛰어다니는 거지 대등한 솔 메이트다. 만약 브라질 아마존에 갔더라면 옥자가 미자를 지키거나 둘이 함께 헤집고 다녔겠지. -<괴물>의 현서가 어머니 없는 가족의 어린 엄마 역할을 했다면 미자는 나이브하지 않은 시골 소녀다. 서울에 상경해서도 별다른 문화충격을 느끼는 것 같지 않다. =실제로 시골이라고 순수하고 세속을 등진 것은 아니다. 컴퓨터는 군민회관 같은 곳의 바자회에서 가져왔을 법한 구형모델이지만 그걸로 인터넷 다 하고 ‘레티나 디스플레이’에도 관심이 있다. 서울 갈 때도 미란도 코리아 주소를 검색해 야무지게 찾아간다. -<괴물>의 크리처가 참고한 인간 모델로는 배우 스티브 부세미, 다케나카 나오토가 있었는데 옥자의 경우는. =(태블릿으로 <쉘 위 댄스>의 다구치 히로마사 사진을 보여주며) 영화에서 항상 땀에 절어 있고 되게 소심한데 춤출 때는 엄청 정열적인 귀여운 캐릭터다. -할리우드 배우들에게 한국 문화를 연기시킨 것 아니냐는 반응도 많다. 제이크 질렌홀의 TV 동물박사 연기가 시끌벅적한 한국 예능 프로그램 진행과 비슷하다거나 낸시(틸다 스윈튼)의 의상이 한국 아주머니들의 취향과 비슷하다거나. =전혀 아니다. 오히려 배우들이 그런 표현을 너무 좋아해 말리느라 힘들었다. 샤넬 한복도 틸다가 우겨서 졌다. 조니 윌콕스 박사(제이크 질렌홀)를 보고 노홍철씨 같다는 반응이 촬영 중에도 있었는데 존 론슨과 내가 제이크에게 보여준 영상은 1960년대 영국 텔레비전 동물쇼 진행자 조니 모리스의 방송이었다. 군복 입고 나와서 침팬지랑 서로 때리고 동물한테 밟히는, 지금으로선 상상하기 어려운 내용이다. -하긴 낸시의 옷차림도 미국 평자들은 공화당 지지자 계열의 패션이라고 부르더라. 미란도 기업이 고용한 사병 블랙초크도 한국인에게는 백골단을 연상시키지만 비슷한 이름의 미국 민간 용병(보안컨설팅) 회사가 실존한다는 걸 처음 알았다. 그렇다면 금돼지 순도를 어금니로 깨물어 확인하는 행동은. =존 부어먼 감독의 <제네럴>을 보면 아일랜드 장물아비가 같은 행동을 한다. 한국과 아일랜드만의 풍습인가? (웃음) 우리가 한국적인 요소라 생각한 것들의 많은 부분이 사실 세계적이다. 현대의 도시적 생활세계는 그만큼 균질화돼 있다. 나도 낸시 의상을 보며 <마더>의 김혜자 선생님 옆에서 춤추던 아주머니랑 비슷하지 않은가 싶었다. 제일 좋았던 틸다의 아이디어는 목베개다. 베개를 덜렁거리고 여기저기 다니는 걸 별로 창피해하지 않는 안하무인적 기운이 낸시에게 있다. 블랙초크의 모델은 유전자 변형 식품산업을 대표하는 기업에 의해 제3세계 농부들의 진압에 투입됐다는 보도가 나왔던 회사다. 멕시코 감독 알폰소 쿠아론 감독이 찍은 <칠드런 오브맨>의 거리 풍경도 한국인에게 익숙한 참상과 다르지 않다. 결국 비슷한 거다. -동물해방전선(ALF)은 실존하는 단체다. 연락을 취했나. =두명을 만났다. 그들은 결코 공식 단원임을 인정하지 않고 서포터라 말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대학 동물 실험실을 습격해 무단침입 죄목으로 실형을 살기도 했다. 헤드쿼터가 없는 점조직으로 기본적 프로토콜만 공유하는 조직으로 안다. 준비과정에서 <언더그라운드: 1990년대 ALF 후원자 그룹 매거진 모음>이라는 책을 구입했는데 미팅 자리에서 폴 다노도 슬그머니 같은 책을 꺼내놓더라. 근면성실한 배우다! 축산 대기업의 로비력이 막강하다 보니 미국에서는 ALF를 중동 테러리스트와 동격으로 치부한다고 들었다. -현실의 ALF는 영화가 그리는 것처럼 비폭력주의는 아니지 않나. =창립자 로니 리의 원칙은 극중 폴 다노가 말하는 40년 원칙과 동일하다. 다만 현실에서 항의하다 보면 경비인력이 다치기도 하고 기물도 파손된다. 영화에서도 옥자를 트럭에서 떨어뜨리는 등 실수투성이다. 두 사람에게도 “당신들의 이상이 훌륭하고 그 이상에 동의하지만 슈퍼히어로로 그릴 생각은 없다”고 했고 “당연하다. 우린 평범한 사람들이다. 다만 지나친 괴짜단체로만 그리지 말았으면 한다”는 대답을 들었다. 많은 영화에서 동물보호운동가들이 할 일 없는 사람들로 그려졌기 때문에 나온 우려일 거다. -ALF 단원 중 실버와 블론드는 커플로 보인다. =명확하지 않나? 서로 만지지 못해 안달이다. 어느 팀이나 서너명이 넘어가면 내부에서 연애를 한다. 유일한 여성 멤버 레드(릴리 콜린스)가 팀원과 사귀는 설정은 싫었다. 레드는 가장 냉정하고 정확하게 일을 진행하고 바주카포를 터뜨리고 운전을 맡는 역이기도 하다. 폴 다노의 제이는 조직 내에서 연애할 사람이 아니라고 봤다. 순열조합의 묘와 깽판의 폭발 -봉준호 영화에서는 언제나 운동을 주목하게 된다. 그리고 격투보다 추격이 중심이다. 회현지하상가 추격전과 뉴욕 슈퍼돼지 축제의 ALF 시위 장면을 2대 세트피스로 본다면 각각 가장 역점을 둔 부분은 무엇인가. =뉴욕 장면은 프로듀서들이 성취한 기막힌 순열조합의 묘다. 조립식 무대를 세번 짓고 해체하며 실제 뉴욕 파이셜 디스트릭트 촬영분과 브루클린 창고에 세운 블루스크린 촬영분, 밴쿠버 무역센터 지하 분량을 섞었다. 무대 정면 숏은 창고에서, 빌딩과 군중이 보이는 앵글은 실제 길거리에서 찍은 거다. 봉합이 감쪽같아 우리조차 헷갈렸다. 회현지하상가 장면은 질감 차이를 부각시켰다. 도시에서는 모든 것이 차갑고 광택나고 미끈거린다. 나무와 흙의 질감 속에 살아온 옥자와 미자는 도시에서 계속 유리벽에 막히고 미끄러지고 부딪힌다. 또, 도시에 와서 둘은 계속 박스 안에 갇힌다. 창 없는 복도에 갇히고 지하상가로, 지하주차장으로 계속 내려간다. -내용의 긴박함과 비극성을 떠나 추격의 절정에서 카니발스러운 음악을 선호한다. 회현지하상가 시퀀스 막판에 흐르는 마케도니아 브라스 밴드 잠보 아구세프의 음악을 듣고 <괴물>의 <한강찬가>를 추억하는 관객도 있을 거다. =무수한 물건이 있는 지하상가는 정보 과잉의 공간인데 그것이 깽판의 절정에 이르니 음악과 사운드도 완전 혼을 빼놓겠다는 방향으로 갔다. 그러다 조용해지면서 존 덴버 아저씨가 등장한다. <에이리언: 커버넌트>에도 존 덴버 노래가 나왔나? 몰랐다. 편집실에서 어릴 적 형이 즐겨 듣던 <Annie’s Song>을 넣었는데 잘 어울려서 결정했다. -충돌의 종착점이 천원숍이어야 했던 이유는. =혼란의 극점이니 색색의 온갖 물건이 있는 곳이어야 할 것 같았다. 레드가 우산을 집어들어도 어색하지 않고 옥자의 발바닥에 박힐 파편도 있어야 하고, 슬로모션이 걸릴 테니 사물들이 이리저리 튕기고 팔락였으면 했다. 예를 들어 행남자기 매장이었다면 곤란하다. (좌중 폭소) 옥자 목소리 연기를 한 이정은 배우가 휠체어를 타고 비명 지르고 옥자가 코너를 도는 순간부터 남양주 세트장 촬영분이다. 이하준 미술감독이 기막히게 지하상가를 복제했고 다이소 쪽에서 적극 협찬해줬다. -옥자와 인간 배우가 뒤엉키는 장면에서 테니스 공을 연기의 기준점으로 쓰지 않고 실제 모형을 썼다고 들었다. 에릭 드 보어 시각효과감독이 현장에서 배우들에게 어떤 도움을 줬나. =(현장 사진을 보여준다. 옥자의 얼굴 모형이 몸크기만 한 틀에 붙어 있고 안에 두 사람이 들어가 있는 장치가 있다.) 미자는 만날 얘를 만지며 연기했다. 에릭 드 보어가 어디까지 손발이 들어가도 되는지 기술적 조언부터 나중에 CG로 커버가 가능한지 여부를 즉석에서 판가름해줬다. 그의 오른팔인 애니메이션 슈퍼바이저 스티븐 클리가 직접 연기하며 후반작업 CG애니메이션과 현장을 연결했다. 몸을 대신한 틀은 배우보다 촬영감독을 위한 것으로 앵글에서 옥자의 크기를 정확하게 가늠하는 기준이었다. -스스로 미쳐가는 동물학자 조니 윌콕스는 대변하는 이슈가 많아 좀 벅차 보이기도 했다. 동물을 사랑해서 직업을 택했는데 기업의 후원이 공장 축산의 이윤을 늘리는 연구에 집중되다 보니 분열증을 일으킨 경우다. 여성 보스 아래에서 일하는 상황을 수용 못하는 면도 보인다. =루시에게 모욕당하고 조니가 기도하는 옥자의 폭력적 짝짓기 장면을, 나는 동물이 실제 축산업에서 겪는 수난으로서 접근했지만 존 론슨 작가는 조니가 품은 여성에 대한 병적 감정도 은연중에 표현한 것 같다. 조니가 옥자를 루시와 동일시했을 수 있다. -낸시와 루시의 관계를 묘사한 신이 삭제된 건 아닌가? ALF 단원을 비롯해 조연 캐릭터의 스토리도 덜 개발돼 시리즈의 첫편 같은 기분도 들었다. =원래는 프롤로그 직후 낸시가 루시와 통화하는 숏이 있었으나 루시의 화려한 연설에서 조용한 강원도 풍경으로 넘어가는 흐름이 좋아서 포기했다. 그 숏이 살아남았다면 처음부터 루시와 낸시의 이중 관계를 포석하는 장점은 있었을 거다. ALF에 대한 미니시리즈를 보고 싶다는 트윗도 봤다. 그러나 <옥자>는 미자와 옥자의 시점에 입각한 영화이니 둘의 관점에서 보이고 추측되는 만큼이면 적절하다고 봤다. 다른 누가 후속 시리즈를 만들어줬으면 좋겠다. <설국열차> TV시리즈도 관여하지 않고 있다. 스콧 데릭슨 감독(<닥터 스트레인지>)이 잘하겠지. -원래 감성과 지성을 지닌 옥자는 도리어 인간에게 학대받은 후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한동안 ‘짐승’이 된다. 그런데 옥자가 물리적으로 해치는 인간은 미자뿐이다. 미자가 팔을 다치는 장면은 정확히 <모노노케 히메>의 멧돼지 공격을 떠올리게 했는데. =그보다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서 작은 동물이 소녀의 손가락을 물었는데 가만히 기다리자 귀를 내리고 할짝할짝 핥는 장면에서 더 영향을 받았다. 찍을 때도 생각했고. 무엇을 어떻게 먹을 것인가 -공장식 축산업에 관한 다큐멘터리 등을 사전에 배우들에게 보여줬다는 릴리 콜린스의 인터뷰를 들었다. 콜로라도 도살장 견학 외에 어떤 리서치가 있었나. =허구한 날 도살장을 다닐 수 없으니 다큐멘터리를 많이 봤다. 내레이션이 일체 없는 독일 작품 <아워 데일리 브레드>가 큰 도움을 줬다. 특히 이마에 스턴건(충격총)을 써서 동물을 절명시키고 회전통에서 굴러나오게 하고 거꾸로 매다는 도살장 구조를 빌려왔다. 오스카 단편다큐멘터리상 후보였던 <리퍼>(The Reaper)는 스터너라 불리는 방아쇠 당기는 담당자의 일상을 “동물을 죽여 자식을 먹인다”라는 컨셉으로 지켜보는 영화다. 살해와 부양의 개념이 병치된다. 촬영도 훌륭하다. 그 밖에도 식품산업 실상에 관한 교육적 다큐멘터리는 넷플릭스에도 많다. <푸드 인코퍼레이티드> 등등. -동물이 살아 있는 상태에서 상품으로서 몸의 일부를 채취당한다는 설정이 <옥자>의 주제와 관련해 중요해 보인다. 마블링을 추출해 검사하는 기구도 등장하는데. =만든 소품이 아니라 업계에서 쓰는 물건이다. 찔렀다 빼면 고기가 뽑혀 나오고 소는 몸에 구멍이 난 채로 멍하니 서 있다. 쌀 수매할 때 농협에서 가마니를 쑤시는 도구를 살아 있는 소에게 쓰는 셈이다. 실제 도살장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도 생명체에서 제품으로 전환되는 경계가 어디냐였다. 스턴건으로 절명당했을 때도 소는 여전히 동물이다. 목을 따서 거꾸로 매달아 피를 뽑을 때도 여전히 죽은 동물 같다. 그러다 0.1초 만에 소 전체의 가죽을 벗기는 거대한 기계가 다가오고 순식간에 붉은 살덩이가 출렁한다. 그 순간부터 제품이구나 싶었다. 동물의 가죽이 벗겨지는 사운드가 있다. 엄청난 기계음 소용돌이 속에 그 소리만 따로 들렸다. 정말 음향효과로 만들고 싶지 않은 소리였는데 <옥자>에는 그런 장면이 안 나온다. -어렸을 때 어머니와 시장에 가면 닭을 잡아서 줬다. 그 울음소리와 닭털 냄새가 강력하게 몸 안에 남아 있다. 요즘 스티로폼 접시에 얹힌 정육을 사는 현대 소비자에겐 그런 과정이 완전히 가려져 있다. =도살장을 유리벽으로 만드는 순간 전세계가 육식을 멈추게 될 것이라는 말도 있다. 바코드가 박힌 마트 제품으로 보니까 안전한 구역에 머물 수 있는 거다. -<설국열차>의 양갱과 <옥자>의 육포는 휴대할 수 있는 식품이고 원재료를 상상하기 힘든 형태의 식품이기도 하다. =루시가 육포 먹는 모습을 꼭 넣고 싶었다. 자기들이 생산하는 식품을 정작 먹지 않는 내부자들도 있지만 루시는 유전자 변형식품에 대한 공포가 과장이라는 믿음을 정말 갖고 있다. 미란도 기업 내부자들이 직접 먹지 않는다면 영화의 층이 너무 단순해진다는 생각을 했다. 최소한의 변명이랄까. 사실 유전자 변형 동식물에 관한 논란은 아직 진행 중이다. -아무튼 공룡기업이 그렇게 돈을 퍼부어도 안전성을 입증한 연구는 아직 없지 않나. =위험성을 입증한 프랑스의 실험이 있었는데 반박이 다시 나왔다. 그런데 반박한 과학자들이 식품기업의 장학생이었음이 폭로됐다. 위험성을 입증하라는 요구가 나왔고 “아니 당신네가 안전성을 입증해야지 우리가 왜 위험성을 입증해야 하는가”라는 대응이 있었다. 현재 유전자 변형식품에 관해 한국과 일본은 너그럽다. 참여연대가 금지는 못하더라도 알고는 먹도록 성분을 표기하라는 주장을 했는데 국회 통과가 안 된 상태다. -<옥자>의 도살 장면은 다큐멘터리에서 본 현실보다 오히려 덜 끔찍하다. 강제수용소처럼 보이는 비육장의 풍경이 더 강력했다. =콜로라도에서도 “우리 시스템이 가장 인도적”이라고 자랑하더라. 위생관리도 잘하고 스턴건 도살은 NGO도 추천하는 방식이다. 나 역시 도살장 내부를 볼 때는 압도적 냄새와 초현실적 이미지에 멍했고 촬영이 허락되지 않아 눈으로 사진을 찍겠다고 긴장해 있다가 바깥으로 나와 제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기나긴 소의 행렬을 마주쳤을 때 무너졌다. 소들의 경로는 동물학자 템플 그랜딘이 고안한 선진적 방식에 따라 공포를 최소화하도록 디자인돼 있었지만 닥칠 일을 모르는 그들과 눈이 마주쳤을 때 힘겨웠다. 6개월간 살이 찌워진 다음 단계적으로 도살장에 가까워질 수만 마리 소의 무리가 자동차로 30분을 가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비육장 디자인에 현대사가 남긴 이미지는 영향이 없었나? 클레이애니메이션이지만 <치킨 런>에도 2차 세계대전 수용소 같은 양계장이 나온다. =당시엔 떠올릴 겨를이 없었고 다만 미술팀과 철조망 디자인은 2차 세계대전 수용소, 특히 아우슈비츠 자료를 참조하자고 이야기했다. 동물의 입장에서 상황을 간접체험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했다. 옥자의 시점숏도 있고 불특정 다수 돼지의 시점도 있다. -결말에 아기돼지의 구조와 관련된 플롯이 몸속에 혈연 없는 어린 것을 품고 구한다는 면에서 <괴물>과 너무 비슷하다는 주저는 없었나. =유사하다고 느꼈지만 상관없었다. 2고까지는 없던 설정인데 뭔가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자세히 보면 제이와 미자가 도살장에 들어가도록 케이가 전기 철조망을 벌려줄 때 문제의 돼지 가족이 옆에 있다. 그 광경을 보고 학습한 아빠 돼지가 감전의 고통을 참고 철망을 벌리는 것이고 엄마 돼지가 아이를 밀어 내보내는 거다. -<옥자>를 보면서 동물권 운동가들을 다른 영화처럼 놀림감으로 삼을까 봐 우려했던 입장이다. 한국에서는 특히 동물권 옹호와 채식주의를 유난 떠는 행동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럴 거였으면 ALF 단원들이 햇살 속에 여전히 투쟁하고 있는 에필로그를 시나리오에 쓰지도 않았겠지. 미자는 옥자 때문에 울고불고하니 백숙과 생선도 먹지 않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반응도 있는데 동의할 수 없다. 우리 대다수가 동물을 사랑하면서 삼겹살도 먹는다. 육식하는 사람이 모두 동물을 학대하는 것도 아니다. 문제는 대량생산에 동물을 편입시킨 공장식 축산이다. 지금 같은 축산업을 유지하면 소요되는 물과 사료, 메탄가스와 폐수로 환경이 심각하게 파괴되고 수학적으로 지탱이 불가능하다. IMF 때 금 모으듯 전 인류가 합의해 육식을 줄여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다. 감정을 떠나 간단한 산수이고 더이상 ‘유난 떠는’ 동물 애호가들만의 이슈가 아니다. 완전채식을 하건 1년에 한번 개를 먹건 그것은 개인이 알아서 하더라도 전체적으로 고기 소비를 줄이지 않으면 산술적으로만 봐도 환경 재앙이다. 거기서 더 나아가면 윤리적 선택의 단계가 있다. 소녀의 거래 -미자네는 이웃이 하나도 없다. 거대한 몸집을 가진 옥자는 어쩌면 인구밀도가 매우 낮은 곳에서나 자유로울 수 있고 조금만 사람이 주변에 많아도 문젯거리가 되는 존재가 아닐까 생각했다. 즉, 고립된 산골 말고 나머지 세계에서는 행복한 공존이 어렵다는 체념의 표현 같기도 하다. =제작진끼리는 미란도 기업이 어떤 기준으로 26개국의 슈퍼돼지 사육자를 선정했을까에 대해 토의했다. 우수 축산농은 말뿐이고 정작 제품이 될 돼지는 따로 키우고 있으니 아마 마케팅에 도움될 지역색이 뚜렷한 경치 좋은 곳에 사는 농부를 선정했을 거라고 짐작했다. 사실 주희봉(변희봉)도 그냥 동물을 산에 풀어놓는 것 외에 테크닉이 없다. (웃음) -“옥자는 돈으로 살 수 없다더라”는 할아버지의 말이 미자의 여정을 시동하는데 결국 미자는 옥자를 산다. 가족을 포함해 살 수 없는 게 없는 세상이다. 어떻게 보면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있다는 입장(동물은 상품이 아니라는 입장)과 모든 것은 돈으로 살 수 있다는 입장의 투쟁이므로, 옥자를 되찾은 결말은 미자의 성공이지만 만물은 상품이라는 입장이 이긴 셈이다. =미자도 인정하는 셈이 되니 씁쓸하다. 폴 다노의 파트너인 배우이자 작가, 연극 연출자인 조이 카잔(<빅 식> <루비 스파크스>)이 <옥자>의 시나리오를 읽고 미자가 금돼지로 낸시와 거래하는 장면에서 시나리오가 좋은 의미에서 다른 레벨로 올라간다는 감상을 줬다. 반면 이 허무한 귀결이 클라이맥스 맞냐는 반응도 내부에서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ALF가 고기 공장을 뒤집어엎는 이야기는 처음부터 아니지않나. =북미 최대 규모 ALF 시위를 도살장에 소집해 모든 돼지를 해방시키는 아이디어를 약 이틀 반 정도 생각했지만 역시 싫었다. (웃음) 극과 극의 두 반응이 공존해서 나로서는 좋다. 촬영 당시에는 당연히 씁쓸한 이야기라 여기며 찍었는데, 아쉬워하는 반응을 접하다보니 요즘은 미자가 낸시 수준에 맞춰준 거라고 설명하고 다닌다. 낸시는 설득될 사람이 아니다. 죽여야만 팔 수 있으니 죽이고 자신의 자산이니 집에 돌려보낼 줄 수 없다. 방법은 상품으로서 사는 것 뿐이다. 미자가 “이거나 먹고 떨어져”라고 맞춰주는 것이다, 라고 말하는 중이다. (웃음) -에필로그 전 마지막 숏이 아름답다. 미자와 할아버지가 밥을 먹자 아기돼지는 마루에 올라와 엉덩이를 들이밀고 마당을 향해 앉고, 원경 퇴창으로 옥자의 얼굴이 보인다. <괴물>의 매점 라스트신의 변주 같기도 하다. =처음부터 그렇게 끝내려 했다. 네댓개 레이어로 감싸인 숏이다. 새끼돼지가 궁둥이를 내려놓는 속도가 좋지 않나? 여기서 옥자 얼굴이 좀 어두운데 “옥자가 뒤끝이 있다”는 해석도 있다. 미자가 잘 때 자기를 미란도에 넘긴 희봉의 방에 들어가 앞발로 지그시 눌러준다거나. (좌중 폭소)

새 정부에 바란다, 김숙현·명소희·박홍준·정용택·홍형숙 독립영화 창작자 5인의 대담

독립다큐멘터리 감독 80여명이 자발적으로 텔레그램에 단체 대화방을 만들어 대화를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대화의 내용은 새 정부의 영화정책에 대한 제언이었다. 이에 앞서 감독, 평론가 등 작가들이 중심이 돼 운영되는 인디포럼도 올해 영화제 기간 중 ‘#독립영화 #창작자 #대나무숲’이라는 특별포럼을 열었다. 인디포럼은 홈페이지에 포럼 내용을 정리해 공개했고 후속 논의를 이어가기 위해 게시판을 신설했다. 영화계 각 단위가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체부) 장관 취임 이후 본격화된 새 정부 영화산업 로드맵 구상에 의견을 제기하는 흐름에서 나온 움직임이다. 이런 창작자들의 목소리는 특히 이명박, 박근혜 정부가 집권하는 동안 독립영화가 뿌리째 흔들리다 못해 고사 상태에 처했다는 심각한 문제의식이 전제됐다. 창작자 스스로 자신들의 현재 상황을 타개할 독립영화 진흥책을 생각해보려는 건설적인 행보이기도 하다. 향후 독립영화 감독들은 온·오프라인을 넘나들며 토론의 자리를 마련해 문체부와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에 창작자의 의견을 직접 전달할 예정이다. 7월 12일 독립영화 감독들이 대담을 위해 다시 만났다. 참석자는 <감정의 시대: 서비스 노동의 관계미학> 등 실험적인 영화를 만들어온 김숙현 감독, <24>를 연출하고 신진 여성감독으로서 동료 감독들과 ‘두 번째 영화, 찍을 수 있을까?’(이하 두영찍)라는 기획단을 만든 명소희 감독, <5월의 봄> 등을 연출한 박홍준 인디포럼 의장, 홍대 두리반 강제 철거 반대 투쟁을 담은 <파티51>의 정용택 감독, 1980년대 중·후반부터 독립영화 현장에서 활동하며 <변방에서 중심으로> <경계도시> 등을 연출한 홍형숙 감독이다. 독립영화란 무엇인가, 독립영화 진흥의 방향은 어디로 향해야 하는가. 그들 각자가 경험한 영화 현장을 바탕으로 문제점과 대안 논의 등 전방위적으로 이야기를 나눴다. -독립영화 창작자들이 자발적으로 새 정부의 영화정책 방향에 목소리를 내기까지 일련의 과정을 먼저 짚어보면 좋겠다. =박홍준_ 올해 인디포럼영화제를 준비하던 때가 새 정부가 들어서기 직전이라 영화정책에 문제를 제기하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왔다. 인디포럼은 작가 중심으로 운영하므로 플랫폼으로서 논의 테이블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영화제 기간에 특별포럼을 열었고 이후 패널로 참석한 <거미의 땅>(2012)의 김동령 감독님과 우리의 논의가 계속돼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공유했다. 기존에는 한국독립영화협회(이하 한독협)가 독립영화계의 목소리를 모으고 정부쪽과 의견을 조율하는 등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비회원인 감독들은 논의 진행 사항을 잘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다양한 형태로 작업하는 신진 감독도 많은 상황이다. 창작자의 목소리를 좀더 분명히 낼 필요가 생겼다. =정용택_ 지난 9년간 영화정책은 신자유주의적 방향으로 흘러갔다. 동료 감독들, 미디어 활동가들이 계속 주변으로 밀려나는 모습을 지켜봤다. 새 정부에 거는 기대도 크지만 지금 재정비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더이상 영화를 만들기 힘들겠다는 우려가 커졌다. 나도 한독협 회원이지만 창작자들이 교류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정보도 있다. 독립영화라는 큰 틀 안에서 정부, 영진위 등과 논의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정보 등을 더 많은 사람이 공유해야 한다. 지난 6월 21일에 열린 도종환 문체부 장관과 독립영화계의 간담회만 해도 그렇다. 종로의 한 식당에서 만났다는데 그 내용을 사전에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극장, 배급 관계자들은 있는데 내가 아는 다큐멘터리 감독은 한분도 안 계시더라. 창작자들이 모여서 얘기를 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꼈다. =홍형숙_ 1998년 한독협이 생겼으니 내년이면 20주년이다. 협회 회원인 나는 그간 한독협이 세대교체가 되고, 미디액트나 인디스페이스 등 유관 단위들과 보조를 맞추며 논의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조직력 있는 협회가 정부와 대화에 나서 협상력을 발휘해온 부분은 분명 인정해야 한다. 한독협쪽도 간담회 전날 연락을 받았고 혹여 들러리 서는 게 아닐까 염려했지만 만나서 독립영화계의 상황을 정확히 전하고 정책을 제안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 와중에 다큐멘터리 감독들이 모인 것이다. 그동안 창작자들이 한독협 내 다큐멘터리분과라는 한정된 형태로 만났다면 이젠 훨씬 많은 개별 창작자를 흡수하는 자리가 필요하다. 이는 한편으로 창작자들이 자신의 말로 문제의식을 전하려는 건강한 움직임의 시작이다. =명소희_ 신진 여성감독으로서 이 자리에 나왔다. 텔레그램 단체방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선배 감독들과 신진 감독인 내가 느끼는 고민의 결이 다르다는 것도 알게 됐다. 선배 감독 중 많은 분이 신진 감독의 멘토이다보니 더욱 그렇다. 정책 토론방이 생긴 뒤 신진 감독들은 ‘우리도 움직여 네트워크를 만들어보자’는 얘기를 많이 한다. =김숙현_ 실험영화, 다큐멘터리, 예술영화의 중간 지대에서 작업하는 이들의 미학적 고민은 상당하다. 독립영화가 계속 변화해오면서 미학적 가치도 분화됐다. 지금의 젊은 관객은 관심의 영역이 다양해 기존 독립영화의 미학적 준거로는 다 담아낼 수가 없다. 새로운 플랫폼이 필요하다. 이런 변화가 기존의 독립영화라는 기표 안에서 어떤 방식으로 소화 가능할까. 사실상 지난 정부에서 실험영화는 영진위의 지원을 받지 못했다. 지원 분야가 극영화, 다큐멘터리로만 구분돼 있다. 다큐멘터리 부문에 지원해 ‘제 영화는 실험영화입니다’라고 설명해야 한다. 최근 몇년간 영화제 상영작을 장르별로 분석해봤다. 장르별 편수를 공지하는 곳은 서울독립영화제와 인디포럼뿐이다. 실험영화가 5~6% 이상이다. 그에 합당한 제작지원이 따라야 한다. 올해 영진위 제작지원 개편안을 보면 4억원에서 10억원 미만의 저예산 독립영화는 사업자등록증까지 있어야 한다더라. 극영화와 다큐멘터리로 카테고리를 나누는 데도 반대한다. 정권에 따라 그런 카테고리는 계속 바뀔 테고 특히 실험영화는 시장논리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언제든 어디로든 이동 가능하다. 독립영화라는 큰 틀 아래에 있는 게 가장 안전하다. 독립영화의 정체성을 분명히 해야 -6월 22일 영진위는 ‘영화발전기금 2018년도 기금 사업 설명 자료’를 발표했다. 2018년 총예산은 2017년 대비 5% 감액됐고, 정부의 입맛에 맞는 영화에 지원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을 받은 가족영화 제작지원은 폐지했다. 한국영화 기획개발지원 대상에 다큐멘터리는 여전히 없고 독립예술영화 제작지원은 2017년 대비 동결이다. 이런 흐름에 대해 좀더 얘기해봤으면 한다. 박홍준_ 한번 물어보자. 저예산영화가 독립영화인가. 영진위는 독립영화 제작지원을 다양성영화 제작지원, 비상업영화 제작지원 등으로 이름만 바꾸어왔다. 고영재 한독협 대표도 “독립영화 제작지원으로 바꾸라”고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홍형숙_ 영진위야말로 적폐 청산의 대상인데 말이다. 시장 중심의 논리로 독립영화를 말하는 현재의 좌표에서 이동해야 한다. 시장 질서 안에 있는 영화는 정책 방향을 그 질서대로 잡으면 된다. 그렇다고 모든 영화가 시장으로 달려갈 필요는 없다. 특히 한국의 독립영화는 태동부터 기존 질서에 저항하는 사회운동의 성격이 분명했다. 저예산영화는 상업영화 내에서 비교적 예산이 적은 영화를 퉁쳐 말하는 게 아닌가. 끼워 넣기다. 독립영화의 정체성을 분명히 해야 한다. 영진위 집행 예산 총액의 20%는 반드시 독립영화 예산으로 확보해야 한다. 정용택_ <워낭소리>(2008) 이후 독립영화계에서 이른바 ‘대박 영화’를 향한 욕망이 생겨났다. 그걸 또 적절히 상품화해 CGV아트하우스 등이 독립영화를 배급하면서 독립영화라는 개념에 혼란이 생긴 측면이 있다. 그 이전 독립영화는 20~30개 상영관에서 관객 1만명 정도만 들어도 대박이라고 했다. P&A(Print & Advertisement)비용만 겨우 맞췄을 뿐 제작비조차 회수되지 않는 상황이었는데도 말이다. CGV아트하우스가 배급하는 독립영화는 개봉 전부터 시사를 수십회 해 개봉일에 이미 상당한 관객수를 기록하곤 한다. 실험영화를 포함해 애초에 시장에서 성공할 가능성이 낮은 영화는 아예 배급 지원을 받을 수 없다. 극장 개봉을 하지 않더라도 다른 방식으로 관객과 만날 수 있어야 하는데 그 통로가 전무하다. 김숙현_ 텔레그램 단체방에서 ‘비평이 살아나야 한다’는 얘기가 많이 나온다. 자본의 논리에서 벗어난 감독에게는 적어도 인정 욕구라는 상징 자본이라도 있어야 한다. ‘네 영화는 가치 있다. 네 작품이 더 많이 논의될 필요가 있다’ 하는 평가 말이다. 최소한의 인정을 위한 창구, 담론화해줄 수 있는 비평계의 흐름이 필요하다. 작가를 위한 정책이 다시 살아나야 한다. 2000년대 초반만 해도 독립영화 한편을 만들면 관심 갖고 말하는 이들이 꽤 많았다. 그래서 영화를 만드는 일에 가치를 느끼고 다음 영화를 만들 방편을 강구할 힘이 났다. 그런데 지금은 오로지 <씨네21>에만 기대고 있다. (웃음) 비평가들도 ‘관객이 비평을 워낙 안 보니 허공에 대고 말하는 것 같다’고 한다. 영화장(場)의 구성원으로서 함께 나눌 수 있는 이야기의 장이 꼭 필요하다. 명소희_ 상당히 공감한다. 이와 함께 얘기하고 싶은 건 멘토링 시스템이다. 신진 감독에게 멘토링이 필요 없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멘토-멘티 시스템에서 발생하는 선후배간 위계와 권력의 문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 멘토가 아닌 신진 감독의 영화를 새롭게 끊임없이 읽어내고 발견해주고 다음 영화를 만들 수 있는 발판이 돼주는 게 비평이다. 박홍준_ <씨네21>에서 독립장편극영화 비평도 많이 해주면 좋겠다. 감독들은 정확한 비평을 원할 거다. 어떤 작품을 두고 그 작품이 과연 독립영화인가 하는 문제제기도 해주면 좋겠고. 물론 정부가 독립영화 비평이나 비평 잡지 활성화를 지원하는 것도 중요하다. 영화제 수상작 중심의 발굴이 아니라 영화를 많이 보는 비평가들이 글을 쓸 수 있는 지면이 있어야 한다. 단계별로 최적화된 지원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명소희_ 신진 감독의 영화 제작을 지원하는 정책이 상당히 부족하다. 신진 감독들은 멘토링, 피칭, 제작지원 등 상업적 시스템 안에서 제작지원을 하는 게 당연하게 여겨지는 환경부터 경험하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독립다큐멘터리라는 게 뭘까 고민하게 된다. 신진 작가를 대상으로 규모가 큰 제작지원 정책을 갖춘 것은 DMZ국제다큐영화제, 영진위 정도고 그외에는 규모가 작거나 멘토링 시스템에 기댄다. 신진 감독도 영화를 만드는 한명의 감독이다. 제작지원을 받을 때마다 매번 다른 멘토에게 다른 코멘트를 받는 게 과연 효과적일까. 멘토링 여부를 신진 감독 스스로 선택할 수 있어야 하고 멘티가 멘토를 선택하는 매칭 방식이어야 한다. 멘토링의 매뉴얼이 없는 것도 문제다. 멘토-멘티가 서로 맞지 않거나 남성 멘토와 여성 멘티 사이에 문제가 생기거나 경력 차에서 오는 부당함 등을 개별 감독이 풀어야 한다. 박홍준_ 독립영화는 창작권 보호가 기본이다. 그렇다면 멘토링은 왜 필요한 것인가. 제작지원을 위한 방편이라면 신진 감독을 기존 감독과 동등한 위치에서 봐줘야 한다. 지원하고 싶은 부분에서 신진일 뿐이다. 멘토-멘티 관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고 일이 벌어지면 그 책임을 당사자에게 전가해버린다. 공적 자금이 투자한 지원제도에서 멘토링은 없어져야 한다. 홍형숙_ 제작지원제도도 프리 프로덕션, 프로덕션, 포스트 프로덕션 등 단계별로 최적화된 지원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예컨대 제작 기획 단계에서도 사전 취재가 필요해 스탭을 꾸린다. 그런데 감독 본인과 스탭 인건비는 제작지원비로 사용할 수 없게 돼 있다. e나라도움(기획재정부가 국고보조금의 예산 편성·교부·집행·정산 등의 전 과정을 전자화해 통합·관리하는 시스템이다.-편집자) 시스템도 문제가 많다. 피칭도 수요와 공급이라는 시장이 있어야 가능한데 독립영화 특히 다큐멘터리가 시장이 있나. 공공의 채널인 방송이 다큐멘터리의 플랫폼이 돼야 한다. 인천다큐멘터리포트는 국내외 방송과 영화의 펀딩 플랫폼이다. 그것은 그것대로 특화해야 한다. 창작자들이 작품마다 어떤 형태의 피칭에 참여할지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독립영화 제작지원의 전체 파이가 커져야 함은 물론이다. 정용택_ 방송국 외주 프로듀서는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방송국에 납품하고 일정 제작비를 받으면 끝이다. 제작권은 방송국에 귀속된다. 유럽은 방영하고 다른 편집본으로 극장 개봉도 하는 선순환 구조다. 방송법 개정이 필요하다. 명소희_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멘토링과 피칭이 결합돼 있다. 지난해 이 프로그램에 지원해 4주간 토요일마다 시간을 내 피칭 멘토링을 받았다. 엄연히 노동력을 들였는데도 창작자에겐 아무런 보수가 없더라. 사실 나는 아이를 지방의 친정에 맡기고 왔고, 아르바이트를 포기하고 오는 이도 있었다. 1500만원을 두고 다섯팀이 경쟁했는데 극장을 빼곡히 메운 전혀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극장 어딘가에 앉아 있을 심사위원들을 상대로 피칭을 해야 했다. 어떤 경우는 피칭으로 발표하고 싶지 않은 부분도 있다. 또 나처럼 사적인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경우는 작품에 대한 문제제기가 아니라 나에 대한 문제제기성 피드백을 받기도 한다. (웃음) 중견 감독에게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피칭이 있는 제작지원에는 지원하지 않으려 하지만 쉽지 않다. 항상 고민이다. 독립다큐멘터리를 만드는 현장에서 이러한 시스템이 과연 맞는지 이제는 얘기를 해봐야 할 때다. 박홍준_ 유통 관계자들이 오는 마켓에서야 피칭이 가능하지만 불특정 다수의 관객 앞에서 피칭하는 건 아이템 유출이라는 문제가 생길 우려가 크다. 인터뷰 심사로도 충분히 가능한데 주체측에서 보여주기 위한 목적으로 하는 경우도 꽤 많다. 창작자들이 먼저 목소리를 내야 한다 -도종환 장관은 취임 전인 지난해 11월 영화 및 비디오물의 진흥에 관한 법률 일부 개정 법률안을 발의하기도 했다. 지난 6월 30일 국정기획자문위원회는 ‘영화산업 독과점 개선 방안’ 간담회를 마련해 한국영화의 독과점 규제 방안을 논의했다. 대기업 규제와 함께 또는 별개로 독립영화정책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입장을 듣고 싶다. 정용택_ 배급과 상영 분리는 영화계에 큰 영향을 끼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곧 독립영화가 처한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이 될 수는 없다. CGV아트하우스의 독립영화 배급도 생각해봐야 한다. 또한 단관 예술관 등에서 <옥자>(2017)를 배급하면서 독립다큐멘터리가 극장에서 상영되지 못하는 일만 해도 그렇다. 산업적 욕망에 따라 각자의 선택지가 달라질 수 있어야 하는 건 제작지원제도만이 아니다. 배급제도도 마찬가지다. 멀티플렉스마다 한 관 정도는 독립영화전용관으로 만든다든지 독립영화전용관, 예술영화전용관 등에서 한 작품의 최소 상영일수를 보장하는 등 보다 세심하고 현실적인 방안이 따라야 한다. 박홍준_ 콘텐츠가 없으면 이 모든 논의가 다 무슨 소용인가. 그래서 창작자들이 목소리를 내는 게 더욱 중요하다. 창작자의 복지를 얘기하는 이유도 제작지원으로 모든 게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창작 생태계만이라도 보호된다면 좋겠다. 결과적으로 파이는 커져야겠지만 원칙이 없으면 또다시 나눠 먹기 식밖에는 안 된다. 도종환 장관도 “문체부 예산을 확정하는 기획재정부를 설득할 수 있게 영화계가 힘을 모아달라”고 하는데 문화예술진흥기금 등이 기획재정부 통제하에 있는 것도 문제다. 국고 지원이 가능하려면 독립영화에 대한 사회적 합의, 공론의 장도 함께 마련해야 한다. 김숙현_ 정부 정책이 불필요하게 세분화되고 개념 혼용으로 복잡해져 창작자들이 좇아가기가 너무 어렵다. 창작자가 많아진 만큼 각자의 욕망도, 지향하는 영화적 실천 방식도 다 달라졌다. 하나의 창구로 모이기 어려운 구조다. 하지만 파편화돼 작업하는 실험영화 창작자들이 적어도 자신의 최소한의 권리를 찾을 수 있는 창구는 있어야 하지 않나. 홍형숙_ 올해 인디다큐페스티발에서 만난 한 관객이 이렇게 묻더라. “의미 있는 작품 만들어줘 고맙다. 근데 무척 궁금하다. 이렇게 해서 먹고살 수는 있는 거냐.” 영화를 만들어야 하니 지난해 서울영상위원회의 제작지원에 신청해 제작비를 받았다. 후배 감독들에게 많이 미안했고 가슴 아팠다. 경력이 쌓인 만큼 제작환경도 개선돼야 한다. 영화정책이 정권에 따라 롤러코스터를 타는 상황만큼은 제발 벗어나길 바란다. 명소희_ 다큐멘터리 감독들과 이야기를 나눠야겠다고 생각한 건 이 모든 게 당장은 내 일이 아닌 것 같아도 결국에는 내가 맞닥뜨려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동료들과 다 같이 다음 영화를 만들고 싶다. 건강한 제작 기반에서 우리의 얘기를 영화로 만드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나부터 목소리를 내야 한다. 그래야 동료들이 다음에 좀더 쉽게 얘기하고 나보다는 좀더 나은 제작환경에서 일할 수 있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