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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1997)

김은형의 오! 컬트 <플란다스의 개>

지난해 ‘씨네21이 틀렸다’라는 창간특집을 읽고 난 다음 <플란다스의 개>를 봤다. 실은 봐야지, 봐야지 노래만 하다가 텔레비전에서 방영할 때야 봤다. 그냥 봤다고 하면 될 걸 자랑도 아닌 나의 게으름을 늘어놓는 이유가 있다. 2000년 초 개봉 때 봤다면 무심코 지나갔을지 모를 반가운 얼굴을 만났기 때문이다. 나는 현남이의 친구를 연기한 고수희씨의 열렬한 팬이다. 이 영화가 개봉한 지 1년 뒤쯤 이 배우의 팬이 됐으니 결과적으로 나에게는 나중에 비디오로 보는 게 훨씬 좋았던 셈이다. 고수희씨에게는 조금 미안한 이야기가 될 수 있지만, 내가 그녀에게 반한 건 그녀의 고향이면서 주무대인 대학로가 아니라 시트콤 <세친구>에서였다. 고수희는 <세친구>에 조역으로 여러 번 등장했다. 그중 인상적인 에피소드를 하나 들자면 헬스클럽에 다니기 시작한 고수희가 윤다훈에게 끈끈한 눈길을 보내자 이를 포착한 안연홍과의 한판 대결이었다. 알겠지만 안연홍이 연적들과 싸우는 장면은 대체로 ‘노려본다’→‘함께 화장실 간다’→‘상대방의 처참한 몰골 클로즈업’으로 끝난다. 그런데 고수희의 건장한 체격에 주눅든 안연홍이 이번에는 읍소작전으로 나갔다. “흑, 전 이미 윤 실장님에게 순결을 바쳤어요.” 심드렁한 표정의 고수희는 가느다란 담배를 피워 물며 ‘쿨’하게 응답한다. “어쩌라고∼.” 이 장면에서 나는 그녀에게 뿅 갔다. 대본작가에 힘입은 바 크겠지만 고수희에게는 여느 뚱녀 코믹 캐릭터들과 달리 기품이 있어보였고, 귀여운 섹시함도 살짝 느껴졌다. 그녀라면 밥을 솥째 들고 먹거나, 남자한테 눈길 한번 받는 것만으로도 턱이 땅 끝까지 떨어지는, 식상한 뚱녀 캐릭터 따위는 도도하게 거절할 것이라 믿어졌다. 정치적으로 올바르다는 것이 아니라 드라마 속 고정관념의 허를 찔렀다는 면에서 그녀의 등장은 신선하고 통쾌했다. <플란다스의 개>에서 그녀는 나를 배반하지 않았다. 현남 친구 뚱녀를 연기한 고수희는 배우 이름순으로는 이성재, 배두나, 변희봉, 김호정에 이어 다섯번째로 등장하는 주요 배역이었다. 이모가 운영하는 작은 문방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그녀는 신문의 낱말맞추기와 간간이 즐기는 ‘옥상담배’맛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청춘이다. 뚱녀는 퍼즐 정답 ‘결초보은’을 ‘결초보훈’이라고 생각하는 현남에게 “야, 이 무식한 년아”라는 욕을 서슴지 않지만 먹은 걸 다 토하고 자신에게 기대 잠든 현남의 머리카락을 얌전한 손길로 추스려주는 아이다. 둘은 동네 통닭집에서 맥주를 마시고 장난삼아 주차된 차의 옆거울을 떼어 훔쳐 달아나기도 하고, 그 좁은 문방구 안에서 음악을 틀어놓고 술을 마시며 춤을 추기도 한다. 그 모습은 우스꽝스럽고, 사랑스럽고, 쓸쓸하다. 특히 둘이 작은 배낭을 메고- 그 속에 들어 있는 훔친 옆거울을 꺼내 보며 손거울인 양 얼굴 매무새를 고치기도 한다- 산에 오르는 마지막 장면은 그들을 비추는 가을볕처럼 너무나 허허롭고도 아름다워서 그대로 포스터에 담아 벽에 걸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이러한 현남과 뚱녀의 장면들만 떼어놓는다면 <플란다스의 개>는 <고양이를 부탁해>의 사촌언니뻘쯤 되는 스무살 여자애들의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 우리 주변의 스무살 가운데는 팔등신의 지영이나 혜주보다 건장한 뚱녀를 만나기가 더 쉽다는 점에서 <플란더스의 개>는 <고양이…>보다 사실적인 이야기일 수 있다. 남자배우들에 비하면 여전히 여자배우들의 외모에는 엄격하고 연기에는 관대한 충무로에서 내가 본 고수희씨가 살과 완전히 무관한 역할을 맡기는 당분간 힘들 것 같다. 그러나 나는 <플란다스의 개>에서처럼 살보다는 눈빛과 표정이 도드라지는 그런 연기를 하는 그녀를 어서 만나고 싶다. 정치적으로 올바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이상 지겹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김은형/ <한겨레21> 기자

비디오판 머피의 법칙

그 기막힌 타이밍은 거의 예외가 없다. 영화 속 인물들이 신체적 접촉을 하려고만 하면 엄마가 나타난다. 전화벨 소리도 못 들을 정도로 깊은 낮잠은 꼭 감질나는 키스신이 시작되기 직전에 끝이 난다. 영원히 안방에만 머물 것 같던 진공청소기도 베드신이 시작되기 3초 전에 내가 있는 거실로 이동한다. 그걸 피해 안방으로 옮겨서 문을 닫고 비디오를 보고 있자면, 왜 생전 안 주던 과일은 꼭 잔혹한 강간의 순간에 문을 벌컥 열며 배달되는 건지. 게다가 한번 시작된 그 장면들은 내가 나서서 컷을 외치고 싶을 정도로 길게 이어진다. 그만, 컷컷컷! 한순간에 영화의 등급은 엄마의 주관하에 재평가되며 나는 졸지에 ‘문닫고 이상한 영화나 보고 있는 애’가 되어버리는 거다. 물론 엄마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신다. 내가 자발적으로 찔려하면서 비굴, 소심해지는 이유는 나도 알 수 없다. 뭔가 심상찮은 분위기가 펼쳐질 듯하면 나는 소리를 줄이고 엄마의 행동반경과 그곳에서의 정체시간을 계산한다. 긴장해서 숨을 죽이고 제발 이 순간이 어서 지나가기를 바라거나, 불안의 정도가 심할 경우 비디오를 끄고 텔레비전을 보는 척한다. 이것 참, 17살짜리가 포르노를 보는것도 아니고 말이다. 빨리감기 등의 트릭은 더구나 타이밍 계산을 신중하게 해야 한다. ‘그 장면들’을 빨리감기하고 있을 그 순간에 엄마가 들어오면 바로 ‘이상한 장면을 반복해서 돌려보는 애’로 전락하는 거다. 가만히만 있어도 괜찮을 뻔했는데 억울하게도 말이다! 이런 점에서는 극장이 좋다. 팝콘까지 씹어가며 어둠 속에서 모두들 당당하지 않은가. 손원평/ 자유기고가 thumbnail@freechal.com

네 이념대로 찍어라

10여년 전, 재야 출신 국회의원의 보좌관 노릇을 하던 선배는 “나중에 노무현이 대통령 선거에 나가면 발 벗고 뛸 거”라 말했다. 노무현은 처음부터 보기 좋았던 모양이다. 세월이 흘러 노무현은 대통령 선거에 나왔고, 이변이라 불릴 만큼 약진하고 있다. 노무현의 개혁 이미지는 대개 인정할 만한 사실이다. 그는 <조선일보>와 국가보안법에 공개 반대하고 지역주의에 당당히 맞선 유일한 정치인이다. 이른바 ‘비판적 지지’(어차피 당선 가능성이 없는 진보 후보를 찍어 죽은 표를 만드느니 좀더 나은 보수 후보에게 표를 몰아주어 진보의 미래를 도모한다는)의 두번째 대상으로 그가 거론되는 건 그런 점에서 당연해 보인다. ‘비판적 지지’의 첫번째 대상은 김대중이었다. 밝히자면, 나도 지난 대통령선거에서 그렇게 했다. 비판적 지지론이 아닌 진보 독자후보론을 주장하던 진영에 더 가까웠지만, 그래서 다들 내가 그렇게 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지만, 나는 망설임 끝에 그렇게 했다. 진보진영의 적지 않은 사람들이 조직적으로 혹은 개인적으로 그렇게 했다. 드디어 김대중은 대통령이 되었고 그에게 표를 몰아준 진보주의자들은 그의 개혁성에, 그의 개혁성을 통해 도모될 진보의 미래에 기대했다. 기대가 의구심으로 의구심이 다시 지루한 실망으로 바뀌는 데는 단지 몇달이 필요했다. 나는 그 즈음 내가 어리석었음을 깨달았다. 김대중에 대한 실망의 원인은 김대중에게 있는 게 아니라 그에게 실망하는 진보주의자들에게 있었다. 어리석게도 진보주의자들은 보수주의자인 김대중이 진보적이기를 기대했다. 실망에 찬 그들은 말하기를 김대중이 변했다고 했다. 그러나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김대중은 예나 지금이나 보수주의자이며 그의 정치는 예나 지금이나 그의 이념에 충실하다. 김대중에 대한 진보주의자들의 기대는 그가 한국사회 보수영역의 마이너로서 한국사회 보수영역의 메이저인 파시스트들에게서 오랫동안 견제받는 모습을 통해 생긴 판타지였다. 김대중에 대한 실망을 노무현으로 보상하려는 심정이야 인간적으로 이해 안 가는 바 아니나, 정치적으로 가련하기만 하다. 노무현이 김대중보다 인격적으로 신뢰가 가는가. 나 역시 그래 보이지만, 개인의 인격이 정치를 좌우할 수 있다는 가설은 텔레비전 궁중사극에서나 가능할 것이다. 노무현의 판타지에 젖은 사람들은 오늘 김대중을 잠시 접고 옛 김대중을 떠올려볼 필요가 있다. 그는 한때 오늘의 노무현과는 비교가 안 될 판타지를 가진, ‘선생’이라 불리는 정치인이었다. 노무현에게 남은 질문은 하나다. 노무현은 (개혁적) 보수주의자인가 진보주의자인가. 지역주의에 당당히 맞선 노무현은 신자유주의에도 당당히 맞서는가, 노무현은 하층계급의 싸움에 연대하는가. 김대중의 정치는 바보가 아닌 사람들로 하여금 이른바 나쁜 보수와 좋은 보수의 차이가 생각보다 크지 않다는 것(특히 오늘처럼 극단적 파시즘이 이면으로 물러난 상황에선 더욱더)을 충분히 깨닫게 할 만했다. 좋은 보수 후보에 표를 몰아주어 진보의 미래를 도모한다는 노회한 전략은 한국 정치에서 진보의 지분(득표율, 혹은 국회의원 수로 계량할 수 있는)이 하다못해 ‘김종필의 당’만큼이 되어, 캐스팅보트 노릇이라도 가능해진 다음에나 생각할 일이다. 진보주의자, 혹은 진보정당의 국회의원이 단 한명도 없는 세계 유일의 나라에서 진보주의자가 할 일은 오로지 ‘털끝만큼이라도 진보의 지분을 늘리는 것’이다. (중립적으로 말하자면) 모든 사람이 제 이념대로 순정하게 찍는 것, 그래서 한국 정치의 이념적 스펙트럼을 한국인들의 이념적 스펙트럼과 동기화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그것만이 한국인들이 제 처지에 가장 적절한 정치를 맞을 유일한 방법이다. 네 이념대로 찍어라. 한국사회가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럽다면 가장 반동적인 보수 후보를 찍어라. 한국사회의 표면적 악취라도 우선 덜고 싶다면 가장 개혁적인 보수 후보를 찍어라. 그러나 한국사회의 보다 근본적인 변화를 진지하게 바란다면 (당선 가능성을 절대 기준으로 한 이런저런 되지 못한 정치평론일랑 걷어치우고) 그저 가장 진보적인 후보를 찍어라. 진보에 외상은 없다. 네 이념대로 찍어라.김규항/ 출판인 gyuhang@mac.com

울렁대는 첫 영화의 추억,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

때는 1971년 아니면 72년쯤이었을 것이다. 당시 다섯살 남짓했던 소년은 부모와의 오랜만의 외출이 마냥 즐겁기만 했다. 부모는 아이를 데리고 극장에 들어갔고 아이는 뭔가 재미있는 영화겠거니 생각하며 텅 빈 극장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웬 걸, 그날 보게 된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라는 영화는 데이브라는 심야 라디오 DJ가 이블린이란 여자와 놀아나다 잘못 걸려들어 끈질긴 스토킹을 당한다는 매우 비교육적이며 무시무시한 내용이었다. 무서운 장면이 나올 듯싶을 때마다 꼬마는 어머니의 등 뒤로 고개를 파묻고 “무서운 장면 끝났어?”라고 물어보며 어서 영화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한숨을 돌리고 있는 데이브에게 또다시 칼을 들고 방 한구석에서 나타난 이블린의 광기 어린 눈빛, 그리고 언덕 위의 하얀집의 원경과 스토커의 최후로 이어지는 마지막 장면으로 영화는 끝났다. 너무나 오랜 시간 긴장을 했는지 극장을 나와 먹던 불고기도 별로 내키지 않았고, 속만 울렁거릴 뿐이었다. 이후 소년은 그 끔찍했던 영화관람 사건을 잊고 싶었지만, 밤에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또 추억의 명화랍시고 텔레비전에서 재탕 삼탕을 할 때마다 찝찝한 기억이 의식 표면으로 솟아오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한 여학생을 좋아하게 되었지만 왠지 가슴이 두근거리고 울렁거려서 ‘보기만 하면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그 애도 나를 좋아한다는 소문에 기쁘기는커녕, 이상하게 피하게 되었고 결국 그녀의 눈물을 보고 말았다. 대학 1학년 때에는 미팅에서 만난 친구가 처음 만난 날 생맥주 3천㏄를 마시며 내게 친하게 지내자고 했을 때 나는 왠지 모를 두려운 긴장감이 들면서 그녀를 멀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십수년이 지나 소년은 데이브를 괴롭히던 이블린과 같은 ‘경계성 인격장애 환자’를 치료하는 정신과의사가 된 뒤 이런저런 잡다한 문화계의 ‘경계’에서 얼쩡거리고 있다. 그 소년이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다. 아마 그 전에도 극장에 간 일은 있었겠지만 최소한 내 기억 속에서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는 ‘내 인생의 첫 영화’라 할 수 있다. 아이의 정서교육보다 자신들의 영화 욕구충족이 먼저였던(!) 부모 덕분에 미성년자의 신분으로 본 그 영화는 생각보다 광범위한 임팩트를 줬다. 당시 백지장 같던 어린 내 머릿속에 각인된 첫 영화의 잔상은 내 발달과정에 산탄총알이 박히듯 여기저기 많은 영향을 끼쳤음이 분명하다. 첫키스, 첫경험이 중요하듯이 첫 영화 경험은 내 인생에 어떤 작용을 했을까? 돌이켜보니 내가 정신과의사가 된 이유가 결국 그때의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을 치료자가 되는 것으로 극복해보겠다는 몸부림의 소산일 뿐이었다. 또 왜 어릴 때 이성관계에 서툴렀는지, 왜 공포영화를 보는 것을 싫어하는지 등의 난삽한 의문들이 이 영화를 기준으로 일렬종대로 늘어서며 한꺼번에 풀려버렸다. 아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기껏 영화일 뿐인데 이렇게 내 인생을 규정하고 있다니. 또 영화적 선호도로 보면 형편없는 그렇고 그런 이 영화가 왜 하필 ‘내 인생의 영화’라는 제목의 글을 쓰려는 이 시점에 내 의식선상에 떠오른 것인가. 지금도 뭔가 앙금이 남아 있는 걸까? 고백컨대 이 글을 쓰면서 위에 묘사한 영화 속의 장면이 실제로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비디오를 빌려보는 수고를 하지 않았다. 아니, 하고 싶지 않았다. 내 기억 속의 그 장면들이 내게 중요한 것이니까(웃기지 마, 역시 뭔가 남아 있는 게 분명해). 끝으로 내 딸의 첫 영화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였다. 그 행위가 내 딸을 환경론자로 만들려는 의도에서 한 일은 절대 아님을 밝힌다.

김수현 작가의 주말연속극 <내 사랑 누굴까>

김수현은 지난 2월23일 <여우와 솜사탕>(MBC 토·일 저녁 7시55분)에 ‘방송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 <여우와 솜사탕>이 자신이 집필한 <사랑이 뭐길래>(1992)와 상황뿐 아니라 대사가 발췌한 것같이 똑같다는 것이 소송의 내용이다. 3월7일 2차 심리에서 재판부는 판결이 종영 이후로 미뤄질 것을 감안해 김수현쪽에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안했으며 3차 심리 직후 김수현쪽은 이를 받아들인다고 말했다. 3월2일 김수현의 새로운 드라마 <내 사랑 누굴까>가 방송을 시작하였다. “내가 말을 하지 말아야지. 내 눈을 내가 쑤셔놓고. 미쳤지 미쳤어. 하기는 안양 일대가 날더러 미쳤다구 했지. 여부잣집 막내딸이 미쳐서 아무것도 아무것두 없이 방울 두개만 달그락거리는 사람한테 간다구….”(<사랑이 뭐길래>) “휴우 일러 뭐해, 말해 뭘해? 내 눈알 내가 쑤셔놓고. 부잣집 어말숙이 미쳐서 달랑 두쪽뿐인 인간한테 간다구 온 춘천이 다 뒤집어졌었는데.”(<여우와 솜사탕>) <여우와 솜사탕>의 방영 초반 상황설정이 비슷하다는 말들이 오고가긴 했지만, 10년 시간을 넘어 누가 드라마 대사를 꼭 집어 기억했으랴. 재판정에 출두한 테이프와 대본은 위와 같이 쌍생을 증거한다. MBC 법무저작권부에서는 “드라마는 2차 저작물이므로 방송작가가 표절을 시비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지만, “<사랑이 뭐길래>가 드라마의 고전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에 참고는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말로 변호를 하기도 한다. ‘고전이 된 드라마가 작가의 것이 아니’라는 반격에서 반(半)은 옳다. <사랑이 뭐길래>가 한국 드라마 지형도에서 고전으로 자리잡을 만큼 독보적이라는 반, 그래서 도덕성이 함몰된 지형도에서는 더욱더 돋보일 수밖에 없다는 반. 그렇다면 틀린 반은? 드라마가 작가의 것이 아니라고 법에 명시한다면 예외적 조례사항을 두어야 할 첫번째 작가가 바로 김수현이라는 사실이다. TV드라마 김수현 이전과 이후 따뜻하기보다는 전투적인 김수현 드라마는 특징 그대로 한국 드라마의 전방을 개척한 전위부대였다. 1972년 <무지개>가 텔레비전 드라마로는 첫 저작이므로 올해로 딱 30년의 세월, 대한민국 국민은 김수현 드라마에 길들여졌다. 시청률 기록을 세우는 드라마의 분석은 방송사의 몫이고 이는 ‘김수현 드라마’의 전술이 ‘드라마’의 전략이 되도록 하였다. 김수현 이후 드라마에서 김수현 드라마의 흔적은 질기다. <사랑이 뭐길래> 이후 남자 집안의 보수성과 여자 집안의 진보성을 대립시키는 설정, 아울러 세트의 한옥/양옥 설정은 가정극의 정석이 되었다. 남녀 결혼이 주요한 문제로 떠오르게 마련인 가정극에서 이보다 더 극적인 설정을 아직까지 찾지 못했다. 지금 방영되는 드라마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일일극 <사랑은 이런거야>(KBS)는 이 설정 그대로이며, 여고동창생의 반목과 그 자식들의 사랑이야기가 변형되어 일일극 <매일 그대와>(MBC)에서 재생된다. 김수현의 <사랑과 진실>(1984) 이후 탄생의 비밀은 여러 차례 인용되었다. <비밀> <저 햇살이 나에게> 등의 드라마에서 본격적으로 쓰였고, 같이 자란 이에게 자격지심을 느끼고, 비밀을 품고 대기업의 집안에 들어간다는 설정은 지금 <유리구두>(SBS)에서 그대로 쓰이고 있다. 김수현이 구현한 각각의 캐릭터는 연기자의 대표 성격이 되기도 했다. 김혜자의 ‘가부장제에 주눅 든 어머니’, 윤여정의 ‘자기 주장이 강한 어머니’, 한진희의 유능한 대기업 사원 등은 대표적이다. 심지어 양희경은 <목욕탕집 남자들>에서 아이를 못 낳는 역을 맡은 뒤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에서도 비슷한 역을 부여받았다. 김수현은 듣도 보도 못한 상류층의 생활을 처음으로 안방에 가져왔다. 탕비실이라는 말을 김수현 드라마 이전 누가 알았을까. 상류층의 생활을 묘사하는 관습적인 표현들- 잠을 자다가 늦게 들어온 이를 맞으러 나오는 사람이 한마디 툭 던지며 가운을 여미는- 은 김수현이 본격적으로 다룬 ‘사실 확인이 안 되는 리얼리티’의 일종이다. 무엇보다 이름을 가리고도 표식을 드러내는 드라마는 김수현이 독보적이다. 그 표식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한마디도 지지 않는 등장인물들의 화려한 언어다. <내 사랑 누굴까> 역시 김수현 표식을 달고 있다. 대사는 점점 쫄깃해지고, 맥락은 점점 더 깊어지고 <내 사랑 누굴까>는 해피하우스라는 건물에 사는 3대 가족의 이야기다. 여기에 결혼 적령기를 넘긴 처녀 두명이 이사를 온다. 1대는 80이 넘은 할아버지(이순재), 할머니(여운계), 2대는 아내를 잃은 아버지(이정길), 3대는 그의 세 아들 윤식(윤다훈), 현식(류진), 상식(김정현). 두층에 걸쳐서 사는 이 집이 남자들로 이루어져 있고 이사온 지연(이승연), 하나(이태란)의 집, 그리고 할아버지의 여동생(정혜선)과 그의 결혼하지 않은 과년한 두딸 경화(박정수), 경주(견미리)가 사는 집은 여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남녀 집의 대결구도와 함께, 짚신이 짝이 있고 젓가락도 짝이 있는데 내 짝은 어디 있을까라는 결혼문제로 뛰어드는 구도가 명확하게 펼쳐진다. 그래서 김수현 드라마의 두 극점, 가정극과 멜로가 한데 섞인다. 이 두 극점의 화합은 작가가 그간의 드라마를 총결산하는 의도로 집필을 시작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요컨대 “내 드라마는 무엇일까”라는 총정리. 거기다 과거 김수현 드라마의 후기쯤에 해당할 듯한 설정들이 등장한다. 드라마가 시작됨과 동시에 여러 군데서 ‘재회’가 이루어졌다. 현식은 결혼까지 약속했지만 미국으로 결혼해서 가는 것으로 자신을 배신한 고은(명세빈)을 만나고, 사랑을 잊지 못해 아직 결혼하지 못한 경화 앞에는 그 옛날 자신을 버린 남자 차명환(한진희)이 등장한다. 야망을 위해 사랑을 버리는 인물은 김수현 멜로극의 단골소재였다. <청춘의 덫>의 동우가 대표적인 예. 그러니 이 드라마는 사랑했음에도 (캐릭터의 혹은 작가의) ‘젊은 날의 혈기로’ 헤어졌던 모든 커플에 용서를 구하는 작가의 심중을 담은 것이 아닐까. 대사는 ‘독하다’고 방영 때마다 몇번씩 도마에 오르곤 하는데 이번 <내 사랑 누굴까>에서 맨 처음 매를 맞은 것은 1회 딸과 어머니 사이의 대사였다. “엄마한테서 냄새 나. 늙은 사람 냄샌가”, “엄마가 나보다 오래 살 거야”는 “아무리 딸과 어머니 사이라지만”이라는 반응을 끌어냈다. 딸들이 나와서 살기 위한 험한 공방전이었는데, 이외에도 1회를 보면서는 고함지르고 윽박지르니 드라마 보느라고 편히 기댄 자리가 미안해지고 골이 얼얼해졌다. 지연이 맞선 자리에서 “이제 재혼 자리 알아볼 나이 아니에요”라는 독한 소리를 듣는 것과 비슷하다. 정신없이 쏘아대는 대사가 완성되는 것은 맥락과 상황 속에서이니 1회에서 시청자는 배우는 드라마에 적응하지 못했다. 맥락 없이라도 대사는 빛난다. 그렇게 말을 잘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싶도록 말이 많지만 그 말들은 다음 말을 듣는 것을 놓칠 정도로 꼬이는 적은 없다. 한마디가 오면 한마디가 간다. 말에 쫄깃한 리듬이 느껴진다. “뜸들이다가 밥 태워 먹을 놈이네” 등 ‘김수현 사전’을 펴내고 싶을 정도로 풍부한 비유법과 “소싯적 얌체가 평생 얌체야”, “독 안에 들었어도 팔자 도망 못 간대” 같은 어른 말씀 하나도 그릇된 것 없는 통찰력도 역시 반짝거린다. 그 맥락과 상황은 드라마가 진행되어감에 따라서 깊어진다. 무엇보다 이는 작가의 귀가 얇기에 가능하다. 이것이 드라마 작가에게 단점이 아님은 말할 필요가 없다. 연기자 윤여정은 “어떤 배우가 안 되는 발음이 있으면 그걸 피하면서 대사를 쓴다”(<김수현 드라마에 대하여>)고 회고하기도 했다. 그러니 김수현 드라마에서 배우는 자신의 스타일에 가장 맞는 옷을 맞춤하게 된다. 대사뿐 아니라 설정도 마찬가지다. 훤칠하게 잘생긴 현식(류진)을 두고는 외모 칭찬을 아끼지 않고, 윤식(윤다훈)을 ‘닭눈’이라고 부르는 등 드라마가 진행될수록 연기자와 배역이 점점 맞춰간다. 작가의 다음 혁신은 어디일까 <내 사랑 누굴까>의 주제는 ‘사랑과 결혼’이다. 연속극치고 이거 아닌 게 있을까마는 <내 사랑 누굴까>는 정면돌파다. 적나라하다. 그리고 ‘강한’ 여성이 ‘사랑과 결혼’이라는 틀에서 움직이는 모습은 약한 모습의 여자보다 더 반동적일 수 있다. 박사과정에 있는 지연에게 왜 결혼은 중대사일까. 혼자 살기가 충분해보이는데 남자가, 결혼이 필요한 이유는 무얼까(젓가락도 짝이 있고 신발도 짝이 있지만 짝없는 물건은 얼마나 부지기수인데). 그건 가부장적 통념에서 나왔다. 남들이 보기에 과히 안 좋다는 것. 치과의사인 경화는 자신을 버리고 간 남자가 “사별한 부인과의 결혼생활이 행복했다”고 말하는데다 “당신이 질투하는 건 죽은 여자라는 걸 아시오”라는 말까지 하는데도 남자에게 끌린다. 남자가 재미볼 것 다 보는 세월 동안 허벅지나 찔렀던 그 세월이 불쌍해서라도 자신을 구제하겠다는 남자의 오만함을 분질러버려야 한다. 그 세월 동안 행복했다면 ‘그 나이니 재취 자리에나 앉으라’고 제안하는 남자와 결혼할 이유도 없다. 80 먹은 할아버지는 사랑하는 부인을 위해 모든 이가 다 아는 사실을 비밀에 부친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속고 살아온 세월이 대략 50년, 남북이 헤어진 세월만큼이다. 무엇보다 정서로 용납되지 않는 것은 신흥 부르주아지의 으리으리함. 아무리 대사에 혼을 빼앗겨도 억을 날려먹고 왔는데 그걸 눈감아주고, 어머니하고 살기 싫다고 억대 오피스텔을 금세 얻어나오는 순간을 맞으면 드라마에 빠져들기 어렵다. 치과의사, 수의사, 회사 사장, 전문 경영인, 모델, 중소기업보다 낫다는 디자이너, 레스토랑 경영인, 건축설계사, 커피숍 주인, ‘점빵’이라 칭해지는 대형 상점 주인 등이 진열된 쇼윈도는 눈이 부시다. 결국 해피하우스의 해피한 결혼소동은 한명의 진짜 ‘점빵’의 딸을 신데렐라로 만들면서 노동자 계급한테 안위와 위안을 줄 예정인 것 같다. 덧붙이는 의문 하나. 장르를 개척했고 드라마의 아우라를 완성했던 대가의 다음 혁신은 어디에 있을까 하는 것. 작가의 최근 행보는 안주(安住)였다. <청춘의 덫>은 리메이크였고 <불꽃>은 그와 비슷한 멜로였으며, <내 사랑 누굴까>는 가족극과 멜로의 종합이다. 개척자 작가의 혁신은 종종 드라마 자체를 개혁해왔다. 많은 이들은 그가 여전히 전선에 있기를 기대한다. 구둘래 kuskus@dreamx.net<내 사랑 누굴까> KBS2TV 토·일 저녁 7시50분

제4장 구조

4 사고는 뜻을 가진 명제이다. 메시지, 또는 메모. “사람들 보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라 해놓고, 놔두고 보면, 서로들 서로를 흉내내고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에릭 호퍼) 또는 “우리들 행동의 부조리함은 거의가 우리가 흉내내서는 안 될 것(그게 사람이든 뭐든)을 흉내내려는 데서 기인하는 것이다”(새뮤얼 존슨)라는 말을 2000년 8월 <생활의 발견> 트리트먼트 서문에 홍상수가 (홍보자료에 따르면) 붙여놓았다고 한다. 두 문장의 공통된 단어는 흉내이다. 4-1 흉내를 내는 것은 여기서 세 가지 서로 다른 모습으로 이루어진다. 그 하나는 등장인물이 다른 등장인물을 따라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같은 사건이 다른 사건 안에서 행위를 반복하는 것이고, 마지막 하나는 같거나 유사한 사물이 아무 상관없는 서로 다른 숏에 등장해서 그 사이의 무관함 속에서 연관성을 유추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흉내는 단지 이미 본 것을 따라 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서로 알지 못하는 상대에 대한 텔레파시가 존재한다. 이를테면 명숙이 쓴 문장을 선영이 반복한다. 그런데 선영은 명숙을 만난 적이 없다. 한 가지 더. 선영이 쓴 문장을 경수는 고발장을 쓰면서 다시 베낀다. 그 문장은 “자연현상은 언제나 우리에게 무심한 듯 보입니다”이다. 이 문장을 선영은 맨 앞에 쓰고, 경수는 맨 뒤에 쓴다. 그러니까 세개의 글은 서로 이어 쓴 것처럼 한 문장씩 겹쳐져 있다. 그러나 일직선으로 놓이며, 뫼비우스의 띠처럼 매듭이 묶이지는 않는다. 그건 이 영화의 전체 구조에 대한 알레고리처럼 보인다. <생활의 발견>을 뫼비우스의 띠에 비유하는 것은 내게는 이상하게 보인다. 여기에는 원형 구조가 없다. 여기서 중요한 것. 두개의 매듭은 같은 방식으로 묶이지 않았다. 또는 이야기는 되돌아오지 않는다. 오히려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는데, 이미 이 이야기를 알고 있는 것 같은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텔레파시와 데자뷔는 <생활의 발견>에서 우리가 무언가를 발견한 것 같은 기분을 불러일으킨다. 그런데 이 발견은 대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구조에 있다. 또는 발견이라고 믿은 것은 이 영화를 다시 보면 대부분 착시-효과이다. 그러므로 대상과 왜상 사이에 있는 구조가 중요해진다. 4-2 그러므로 이 흉내에서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그 반복이 아니라 차이이다. 또는 차이 안의 반복이다. 그러니까 여기에는 그 어떤 흉내도 그대로 반복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선배 성우가 술을 마시면서 몸을 좌우로 흔드는 것을 경주에서 경수가 반복하지만, 그 반복은 서로 다르다. 왜냐하면 경주의 삼겹살집은 4숏으로 나누어져 있다. 여기서 경수와 선영은 술을 마시는데 61신에서는 몸을 흔들지 않는다. 테이블에는 소주 1병과 사이다 1병이 올려져 있다. 그러나 63신에서는 몸을 흔들면서 술을 마신다(그 사이에 있는 62신은 잠시 삼겹살집 바깥으로 나왔다가 하늘을 보는 경수를 보여준다). 여기에는 시간의 생략이 있다. 테이블에는 소주 4병과 사이다 1병이 올려져 있다. 경수의 말에 의하면 몸을 좌우로 흔들면 취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춘천에서 성우는 대리 운전이 없기 때문에 술을 마셔서는 안 된다고 말하면서 몸을 좌우로 흔든다. 성우는 옷 벗는 술집에서도 몸을 좌우로 흔든 것 같다. 거기서 성우의 파트너는 “몸을 왜 이렇게 흔들어요, 재수 없게”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경수가 갑자기 몸을 좌우로 흔드는 것은 단지 취하지 않기 위해서일까? 성우는 취하지 않아도 여자 옆에 앉은 술좌석에 오면 몸을 좌우로 흔든다. 경주에서 경수는 성우의 면티를 입고 있다. 4-2-1 이상하게 그 흉내의 반복과 차이에 대해서 사람들이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또는 놓치는) 대목은 명숙과 선영이 쓴 메모의 마지막 문장의 차이이다. 서로 다른 앞 문장 뒤에 명숙은 “내 안의 당신, 당신 안의 나”라고 쓰지만, 선영은 “당신 속의 나! 내 속의 당신!”이라고 순서를 바꿔 쓴다. 반복은 결코 고스란히 겹쳐지지 않는다. 4-2-2 그런데 이 문장은 명숙이 경수를 향해서 쓴 “명숙 안의 경수, 경수 안의 명숙”, 또는 선영이 경수를 향해서 “경수 속의 선영! 선영 속의 경수”이지만 동시에 내게는 “명숙 안의 경수, 경수 안의 명숙”으로부터 “명숙 속의 선영! 선영 속의 명숙”으로 읽혔다. 그러나 “명숙 안의 선영, 선영 안의 명숙”으로는 읽히지 않았다. 이 말에 주의해야 한다. 왜 상호 전이가 일어나지 않은 것일까? 또는 나는 그렇기 때문에 홍상수는 나와 당신의 순서를 서로 다르게 썼다고 생각한다. 여기서는 그 순서가 중요해진 것이다. 우리(와 경수)는 선영을 만나기 전에 명숙을 만났지만, 명숙을 만나기 전에 이 문장을 알지 못한다. 선영은 2인칭 주어를 먼저 불러들인다. 알랭 레네의 참고할 만한 말. “영화의 숏에 과거와 미래는 없다. 기억과 예감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영화는 항상 앞에서 뒤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홍상수는 결코 강제적인 수단을 동원해서 되돌아오는 경우가 없다. 그런데 우리는 심리적으로 자꾸 뒤를 돌아본다. 또는 그렇게 하도록 유혹 당한다. 한번 더 강조할 만한 점. 홍상수 영화의 미학은 플래시백 효과이다. 물론 방점은 효과에 놓인다. 4-2-3 두개의 사례. 나에게 가장 이상한 부분은 두 가지였는데, 그 중 하나는 명숙과 선영이 남긴 문장이다. 같은 문장을 쓸 수도 있었는데 (아마도 의도적으로) 반대로 적혀 있다. 마치 거울에 비춰본 것처럼. 다른 하나는 춘천에서 오리 배를 타고 가면서 우연히 마주친 남자가 경주에서 선영의 남편이라고 말하는 대목이다. 이야기로서는 우연이지만, 또는 그럴 수도 있지만, 그걸 보는 우리는 거기에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우연과 의미 사이를 연결하는 것은 홍상수의 의도라고 믿(고 싶)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의도에 대한 대답이 영화 안에 없다. 그 의도가 이야기 안의 등장인물들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여기에는 잘못된 해답의 구조가 있다. 22신의 춘천 공지천에서 오리 배를 타고 경수와 선배 성우와 명숙이 이야기할 때 우연히 마주쳐서 라이터를 빌리는 사람을 주목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1시간5분이 지난 뒤에, 그러니까 62신이 더 지난 다음에 갑자기) 83신 경주장에서 경수가 그때 그 남자가 선영의 남편 같다고 선영에게 말할 때 우리는 틀림없이 이미 보았으나 놓칠 수밖에 없는 인물 때문에 이제까지의 이야기의 중심을 다시 설정해야 한다(그러나 여기서 홍상수가 속임수를 썼다고 말할 수는 없다. 꼼꼼하게 영화를 보는 사람이라면 그걸 알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명숙과 만난 이후 헤어질 때까지 경수와 명숙과 성우 사이에 끼어드는 인물은 성우의 사촌누나를 제외하면 오리 배를 타고 라이터를 빌리던 그 장면의 선영 남편뿐이다. 이 세심함이란!). 그러니까 홍상수는 이야기에서 우리가 괄호 치고 보는 의미의 영역을 자꾸만 의심하게 만든다. 의미가 없었다고 넘어간 것이 우리를 붙들고, 그 반대로 주의를 기울였던 것이 아무렇지도 않게 아무도 다시는 돌아보지 않는다(이를테면 나는 명숙이 비에 젖은 휴대폰에 남겨놓았다는 메시지가 정말 궁금했다. 그러나 경수는 경주에 간 이후로 그 말을 완전히 잊어버린 것 같다. 또는 그 ‘알려지지 않은’ 메시지가 경주에서 ‘무의식의 형태’로 집행되는 것일까? 그래서 결국 편지는 도착하는 것일까?). 여기에는 외재성의 이름으로 이야기 바깥에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와의 어떤 거래가 있다. 주목할 만한 점. 경수는 선영의 남편을 알아보는데, 선영의 남편은 경수를 알아보지 못한다. 경주장에서 우리는 선영의 남편의 자리에 불려간다. 그러나 그 자리에 선영의 남편은 없다. 4-2-4 그러나 없는 그 자리가 채워진다. 그 자리는 그걸 알고 있다고 가정되어진 당신에 의해서 매듭지어진다. 그러니까 이미 충만해 있는 화면에서 불안을 만들어내는 것은 결핍이라고 생각되는 잉여이다. 왜냐하면 반복되어지는 대사와 소도구와 상황과 카메라의 차이가 나타날 때 그 신의 내부에는 그 자체로 문제가 없지만, 그 설명은 외부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외부는 여전히 이야기 안이다. 같은 말이지만 사실은 거기에 없는데 분명히 거기에 있다는 스스로의 가정 아래 발견하려는 노력은 항상 실패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 노력은 영화의 고정점을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는 자꾸만 중심을 벗어나는 것이다. 매우 비극적인 이야기지만 알고 있다고 가정되어진 자리가 항상 기만당하는 것은 영화의 속성 때문이다. 왜냐하면 영화는 시간을 통해서 연쇄적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되돌아갈 수 없다. 그래서 지나간 것은 기억에 의지해야 한다. 그 기억의 오류가, 순서와 배열을 통해서, 의미를 만들어낸다. 영화 안에서의 지식은, 그러니까 인물과 사건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가정되어진 그 자리는, 사실은 대상에 이끌린 것이 아니라 원인에 떠밀린 것이다. 그러나 그 원인의 자리가 비어 있다면 무슨 일이 생길까? 그러므로 홍상수의 영화에서 의미는 지어낸 환상이다. 여기서 의도는 홍상수의 몽타주이며, 위장은 홍상수의 미장-센이다. 또는 어쩌면 그 역이다. 같은 말이지만 홍상수의 영화에서 지금 눈앞에 벌어지는 그 장면은 플래시백 효과를 생산한다. 그런데 그 환상을 만들어내는 매듭을 만드는 사람은 경수나, 명숙이나, 선영이나, 성우가 아니라, 당신이다. 또는 당신은 그 효과-증후이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당신은 경수나, 명숙이나, 선영에 비해서 너무 많이 알고 있다. 그런데 너무 많이 알고 있다는 말은 모순이다. 왜냐하면 지식의 잉여는 결국 그것을 포함하여 이루는 하나의 지식으로서 오류이기 때문이다. 4-3 한 가지 더. 신4 영화사 엘리베이터 앞에서 감독은 경수에게 “우리 사람되는 거 힘들어, 힘들지만 우리 괴물은 되지 말자”고 말한다. 그런데 이 말을 경수는 춘천에서 두번 반복한다. 그러나 그대로 반복하지는 않는다. 술집에서 나와서 경수는 성우에게 “우리 사람되는 거 어렵지만, 괴물은 되지 말자”고 말한다. 또 호수에서 휴대폰으로 명숙에게 “저, 우리 사람되는 거 어렵지만 괴물은 되지 맙시다”라고 말한다. 감독은 힘들다고 생각하는 것을 경수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이 요구에 대한 대답을 경수가 춘천을 떠나기 전에 버스터미널에서 선배 성우가 한다. “경수야! 너 사람한테 사람 이상의 것을 요구하지 말래!” 이 대답 이후 (하여튼) 경수는 이 말을 경주에서 더이상 반복하지 않는다. 이미 자신이 괴물이 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너무 어렵기 때문에 더이상 버티기를 포기한 것일까? 또는 사실은 괴물이 되고 싶은데 될 수 없는 자신이 괴롭다는 억압의 표현일까? ▶ 성일, 상수의 영화를 보고 회전문을 떠올리다 ▶ 제2장 자막 ▶ 제3장 회전문 ▶ 제4장 구조 ▶ 제5장 착각 ▶ 제6장 아버지 ▶ 제7장 …그리고 침묵

<재밌는 영화> 프로듀서 김상오

<선물> <재밌는 영화>와 같은 기획영화의 탄생 이면에 서 있던 김상오 PD(34)는 감독이 자칫 놓치기 쉬운 대중성의 측면을 끊임없이 자각시키는 것이 프로듀서의 중요한 역할이며, 이 시대의 관객이 어떤 영화를 요구하는가 하는 고민에서 PD의 역할은 시작된다며 긴 대화의 운을 뗐다. 그의 말을 빌리면 영화판에서 PD가 하는 일이란 한편의 영화가 만들어지는 실무의 모든 것. 작가나 감독에 의해 미리 시나리오가 나와 있는 상황이 아니라면, PD가 최근의 경향을 분석하여 시놉시스도 쓴다. 작품 기획이 끝나면 장르와의 궁합을 살펴 어떤 영화사와 함께 일할 것인지 결정한다. 호러물을 잘 만드는 영화사가 있고, 코미디물과 잘 맞는 영화사가 있기 때문이다. <주유소 습격사건> <신라의 달밤> 등을 제작해온 좋은 영화사는 그런 의미에서 <재밌는 영화>의 적격 산실. 그리고나서 감독을 지목하는데 대개 전작의 분위기로 판단하며, 신인감독의 경우 더욱 엄밀하고 객관적인 평가의 잣대를 들이댄다. 장규성 감독이야 워낙 김상진 감독이 비기(秘技)를 전수하며 ‘아들’처럼 키운 사람이기에 별 고민없이 결정된 케이스. 감독이 정해지면, 감독의 스타일과 제작사가 원하는 방향, 대중의 요구 등을 일치시키는 것도 PD의 능력이다. 그 다음은 투자자 모집. 대개의 영화사는 하나에서 여러 개의 투자사에 줄을 대고 있지만, PD가 직접 나서서 기업이나 개인 투자자를 모색하기도 한다. 좋은 영화사는 시네마 서비스라는 든든한 언덕이 있어 김상오의 짐을 덜었다. 투자자 모집이 끝나면 배우와 스탭 캐스팅. 기껏 전달한 시나리오가 거부당하는 데야 어쩔 도리가 없지만, 아예 시나리오가 배우 손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도 있어서 이럴 땐 PD가 나서서 소속 회사의 이름과 모든 인맥을 총동원한다. 대개 어느 영화사에서 흘러들어온 시나리오냐를 가려서 매니지먼트사에서 손을 내밀기 때문이다. 이번 <재밌는 영화>는 배우보다 스탭 캐스팅에 더 신경을 썼다. 코미디영화이기 때문에 웃으면서 일할 수 있는 분위기가 나야 한다는 김PD의 고집 때문. 촬영이 시작되면 하루에 몇천만원 단위의 제작비를 고스란히 까먹느냐, 예정된 일정과 예산에 촬영을 마치느냐가 PD의 재량에 좌지우지된다. 그 와중에서도 감독의 연출권을 보호하는 것은 기본. 촬영이 끝나고 후반 작업에 돌입하면 그야말로 몸은 녹초가 되지만 정신은 더욱 날카로워지는 시기. 믹싱, 편집, CG, 텔레시네, 현상을 거쳐 프린트가 나오면, 시사회 일정 잡고, 마케팅과 배급에도 관여한다. 개봉관이 잡히고 영화가 상영되면 비로소 그 무겁던 임무에서 면책되는 순간이라고. “<선물>에 이어 <재밌는 영화>까지 일년에 한편씩 꼬박꼬박 프로듀싱하는 실로 이상적인 상황”이라고 자평하는 김상오는 현재 ‘진짜 재밌는 영화’ 시나리오를 한편 구상중이다. 글 심지현 simssisi@dreamx.net·사진 정진환 jungjh@hani.co.kr 프로필 1969년생 경성대학교 연극영화과 출신 <영원한 제국>(94) 제작부 <내 안에 부는 바람>(97) 제작 총지휘 <질주>(98) 제작실장 <선물>(2001) PD <재밌는 영화>(2002) PD

“고생하고도 푸대접 받았지만, 상관하지 않았어”

90년대에 들어서 규모가 큰 대작들이 많이 기획됐어. 해외에서 올로케로 찍는 작품이 생기는가 하면 의상 제작비만 1억5천만원이 든 <사의 찬미> 같은 작품도 제작됐지. 91년도만 해도 <개벽>(임권택), <사의 찬미>(김호선), <은마는 오지 않는다>(장길수) 등 꽤 굵직한 작품들이 많았어. 이미 총각 때부터 영화로 알고 지낸 임 감독이야 작품만 들어가면 날 찾았으니까 <개벽>도 자연스럽게 내 손에 들어온 거고. 근데 그 영화 찍을 때 스탭들이며, 조합원(엑스트라)들이 어떻게나 말을 안 듣던지 하루하루가 말 그대로 천지가 개벽할 날들이었어. 처음 영화 들어갈 땐 동학당이 400명 나온다고 했거든. 거기다 군인까지 더 포함되면 한 5백벌 의상이 있어야 하지 않겠냐고. 그래서 다 준비를 해놨는데, 막상 숏 들어가고 조합원을 세어보니 100명도 안 되는 거야. 원래 그날 찍을 장면에는 200명이 필요하댔는데, 반도 안 나왔으니 감독 심정이 어땠겠어. 나 역시 준비해간 옷을 반이나 그대로 가지고 와야 했으니 마음이 안 좋지. 그게 시작이었어. 촬영기간 내내 조합과의 마찰로 제때 원하는 인원이 수송된 적이 없었어. 게다가 온 인원들도 통제가 안 되고. 날씨는 춥고 주로 산에서 촬영이 이루어지는데, 아무 데서나 오줌 누고, 툭 하면 술 먹고 행패 부리고. 아마 만들어놓고 반도 못 입힌 영화는 그게 유일할 거야. 물론 아예 처음부터 엎어진 영화는 빼고. 게다가 스탭들도 추운 데서 고생하다 나중엔 협조를 잘 안 하더라고. 그렇게 어렵게 찍어놨더니 역시나 흥행에 대참패를 했지. 다행히 미리 의상비를 받을 수 있어서 큰 손해는 안 봤지만, 입히지 못한 의상 때문에 계속 미안한 맘이 들더라구. 같은 해 찍은 <사의 찬미>는 거대한 제작 스케일로 일단 화제를 모았는데, 나중에 듣고 보니 의상비만 1억5천이라는 거야. 조연들 옷을 지었던 내가 받은 돈이 3천만원이었으니까 장미희 옷을 맡은 이가 무려 1억2천을 받았다는 얘기지. 이걸 능력 차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배우의 힘이라고 해야 하나. 아주 기분이 씁쓸하더라고. 그래도 김호선 감독 사정을 뻔히 아는 내가 돈 때문에 투정을 부릴 순 없었지. 나중에 그해 <사의 찬미>를 비롯한 세개 작품이 의상상 후보로 올라가는 바람에 시상식엘 몇번 갔었는데, <사의 찬미> 시상식장에 장미희 옷을 지은 여자가 앉아 있는 거야. 처음엔 ‘설마 회원도 아닌 이가 상을 타겠어. 그냥 자리를 빛내는 거겠지’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식장에 그녀의 이름이 불려지니까 꼭 배신당한 기분이더라고. 물론 그녀의 솜씨로 여주인공이 맵시있게 표현된 건 인정하지만, 영화 전체의 의상을 만진 나로서는 서운할 수밖에. 그 일이 있고 나서 김 감독이 미안했던지 춘사영화제에서 의상상을 주도록 애를 썼나봐. 난 그래도 지금껏 한번이라도 “그때 왜 회원인 나는 푸대접하고, 비회원에게 상을 주느냐”는 소리 해본 적이 없어. 아쉬운 소리만큼 하기 싫은 게 있을까. 안 주면 그만인 거지. 그때 내가 속으로 그랬지. ‘그래, 상은 니가 타가라. 일은 내가 다 할게’라고. 한진영화사에서 찍은 <은마는 오지 않는다>가 몬트리올영화제와 백상영화제 등에서 상을 휩쓸면서 91년이 끝났지. 92년도에 가서 제일 먼저 받은 시나리오가 최영철 감독의 <백백교>야. 지금도 내 필모그래피에 등장하는 이 영화는 사실은 완성된 작품이 아니야. 찍다가 돈이 없어서 중간에 엎어진 영화거든. 그래서 내 작품이라고 부르기도 뭣해. 고 다음에 찍었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박종원), <장군의 아들3>(임권택), <하얀 전쟁>(정지영)이야말로 96년 <애니깽>(김호선)으로 작품활동을 마무리할 때까지 맡은 작품들 중 백미라고 할 수 있어. <장군의 아들>은 30년대 종로 거리가 배경이라 한복과 양복이 한데 어울려 등장했어. 양복의 경우, 내 전공이 아니니까 주로 사서 쓰거나 양복점에다 맡겼지. 극중에 등장하는 기생들의 경우 실제 복장보다 더 화려하게 각색이 됐어. 원래 기생들은 관에 속한 몸이라 일종의 유니폼이 정해져 있거든. 나라에서 허가를 받은 차림새란 게 고작 남색 치마에 흰 저고리가 다야. 우리가 알고 있기론 기생들 옷이 화려하고 다양할 것 같지만 그게 정석이라고. 그치만 감독들은 밋밋한 그림 대신 변화를 주고 싶어하지. 그러다보니 언제부턴가 영화나 텔레비전에 등장하는 기생들이 화려하게 옷을 갈아입었지. 그건 무당도 마찬가지야. 굿을 할 때나 오색도복을 입는 거지 평상시엔 기생과 같이 남치마에 흰저고리야. 임 감독의 경우, 앞서도 얘기했지만, 아주 별나거나 튀는 건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야. 옛날에 실제 입었던 옷차림, 사실에 가까운 그림을 쓰는 감독이었어. 기생의 옷차림은 시각적 즐거움을 주기 위해 변형됐지만, 다른 배역의 옷들은 거의 실제 그대로의 옷차림이 재현됐지. 그리고 항상 자기의 바람에 부합하는 의상들을 두고 칭찬했지. 서로에 대한 믿음이 컸어. 정리 심지현 simssisi@dreamx.net 구술 이해윤/ 1925년생ㆍ<단종애사> <마의 태자> <성춘향> <사의 찬미> <금홍아 금홍아> <서편제> <친구> 의상 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