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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1997)

‘영화의 역사와 결혼한 배우’ 잔 모로를 기리며

잔 모로와의 첫 만남의 영화가 더 근사한 작품이었다면 좋았을 거라 생각한 적이 있다. 사람들은 잔 모로의 부고 소식에 <사형대의 엘리베이터>(1958)나 <줄 앤 짐>(1962)의 그녀를 떠올린다지만, 그녀에 대한 내 기억의 첫인상은 수상한 서부극에서의 총을 든 여인의 모습이 자리하기 때문이다. 감독이 루이 말이라는 사실도 나중에야 알았을 정도로 그저 흘려보내는 시간에 보게 된 영화다. 80년대 후반, 어느 주말 저녁에 텔레비전으로 <비바 마리아>(1965)와 만났다. 물론 그녀의 출연작을 이미 보긴 했었을 것이다. <현금에 손대지 마라>(1954)나 <대열차 작전>(1964) 같은 영화를 유년기 때 텔레비전으로 봤으니 그녀를 몰랐다고는 말할 수 없다. 다만, 장 가뱅이나 버트 랭커스터는 기억해도 잔 모로는 그런 영화들의 한구석에서 어떤 인상이나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비바 마리아>가 그렇다고 잔 모로를 영접하기 위해 마련된 특별한 작품은 아니었다. 나는 그때 브리지트 바르도 때문에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었을 것이다. 혁명의 마리아 <비바 마리아>는 멕시코 혁명을 다룬 일종의 자파타 웨스턴으로, 내용은 시시하지만 두 여인이 혁명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으로 등장해 군인들과 과감한 총격전을 벌이는 장면만으로도 흥미롭긴 했다. 아일랜드 혁명가의 딸인 마리아(브리지트 바르도)가 아일랜드 독립을 꾀해 테러를 감행하다 멕시코까지 흘러와 유랑극단 가수인 또 다른 마리아(잔 모로)를 만난다. 이어 둘은 의기투합해 정의를 외치며 멕시코 혁명에 나선다는 내용이다. 바르도는 잔 모로에게 혁명과 테러를 전파하고, 잔 모로는 선머슴 같은 그녀에게 반대로 사랑의 쾌락을 전수한다. 잔 모로의 가르침은 이때부터 시작이었을까. 90년대 초에 개봉한 <니키타>(1990)에도 그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잔 모로는 니키타에게 몸놀림과 매너, 화장이나 패션에 대해 가르침을 준다. 무엇보다 여성으로서의 쾌락에 자유롭게 너를 맡기라 권고한다. 아무튼, <비바 마리아>에서 잔 모로는 사랑의 메신저이자 전사인데, 그럼에도 그녀를 기억하게 한 장면은 액션이나 사랑의 순간들이 아니다. 영화의 중반쯤, 꽤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장면이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다. 바르도와 잔 모로의 얼굴이 마치 잉마르 베리만의 <페르소나>(1966)에서처럼 겹치는 순간이다. 카메라는 두 마리아를 한 화면에 단일한 카메라의 움직임으로 포착한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바르도를 쫓던 카메라에는 갑자기 잔 모로의 얼굴이 등장하고, 반대로 잔 모로가 움직여 기둥 뒤로 사라지면 반대편으로 바로도가 출현한다. 두 얼굴을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해지는 순간으로, 그녀의 얼굴들이 서로 닮아지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원래 한 사람이었던 마리아가 둘로 나뉘고 있는지 혼란스럽다. 이야기 전개와는 상관없는 과잉의 순간이다. 이 시퀀스가 지금 흥미롭게 다가오는 것은 그녀가 전후 프랑스 영화사를 새롭게 작성한 누벨바그의 어떤 이미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바르도와 잔 모로는 전후 해방의 시대에 모든 종류의 터부를 붕괴시키고자 했던 누벨바그 감독들이 꿈꿨던 현대적 여인의 두 초상이자 이상적 종합이다. 잔 모로는 그들이 꿈꾼 혁명의 마리아인 것이다. 변용의 배우 여기에 누벨바그 작가들의 피그말리온의 신화가 있다. 말하자면, 잔 모로의 이미지는 누벨바그 작가들의 섬세한 손길과 그들이 믿는 영화의 힘에 따라 변용되었다. 1928년생인 잔 모로는 이미 1947년에 연극 무대에 데뷔했고, 1949년부터 영화에 출현해 루이 말의 <사형대의 엘리베이터>에 출연하기 전까지 이미 20편의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했다. 그녀는 갑자기 새롭게 등장한 스타라기보다는 당시 주류 영화의 한계적 이미지에 갇혀 있던 배우였다. 잔 모로의 변화는 그러므로 누벨바그 작가들의 출현과 젊은이들의 파격적인 영화작업과 함께 시작했다. 언젠가 잔 모로는 누벨바그가 기성세대들에게는 공포였다며 “관습에 따르지 않는 자유분방한 젊은이들의 폭발적인 출현에 영화계 전체가 공포를 느꼈다”라고 술회한 바 있다. 젊은 작가들은 그러므로 잔 모로에게 단지 새로운 배역을 주었던 것으로 관습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잔 모로에게 접근하고자 했다. 1957년, 트뤼포는 이미 잔 모로를 향해 “그녀는 프랑스영화계의 가장 위대한 연인이다. 갱의 무리가 서로 죽도록 치고받는 동안에도 그녀는 댄스 스커트를 입고서 서커스단에서 춤을 추고, 사디스트에게 학대당하고 기관총 세례를 뚫고 나가면서도 오로지 사랑만을 생각한다. 떨리는 입술을 지니고 머리를 풀어헤친 그녀는 이른바 ‘도덕’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이, 사랑을 통해 사랑을 위해 살아갈 뿐이다. 제작자와 감독들이여, 그녀에게 진정한 역할을 주라. 그러면 우리는 위대한 영화를 가지게 될 것이다”라고 찬사를 보냈었다. 트뤼포의 고백처럼 누벨바그 작가들은 잔 모로의 얼굴과 몸짓, 특유의 걸음걸이에서 해방 된 여성의 자유를 체현하는 은막의 뮤즈를 발견하고자 했다. <사형대의 엘리베이터>의 오프닝 장면은 변화의 시작을 가장 완벽하게 보여준다. 이 영화는 잔 모로의 극단적인 클로즈업으로 개시한다. 마치 칼 드레이어의 <잔 다르크의 수난>(1928)에서의 팔코네티처럼 수수한 얼굴로 등장한 그녀는 “더이상은 못 참겠어. 당신을 사랑해”라 말하고 있는 중이다. 그 어떤 설정도 없이 루이 말은 과감하게 잔 모로의 거대한 얼굴을 스크린에 투사한다. 카메라의 새로운 힘이 그녀를 태어나게 한다. 이 영화의 가장 유명한 장면들 또한 잔 모로가 무기력하게 파리의 밤거리를 걷는 순간들로, 순수하게 관조적 접근일 뿐이지만 그녀의 어쩔 수 없는 허무감이 화면 가득 강렬하게 전달된다. 또 다른 시적 리얼리즘이라 해야 할까, 그녀의 얼굴에서 걸음에서 우리는 불가해한 내면과는 상관없는 잔 모로의 무의식, 분위기와 마주한다. 캐릭터는 제대로 기억되지 못한다. 단지 고독과 마주한 한 여인의 모습이 있을 뿐이다. 이른바 트뤼포가 말한 잔 모로의 ‘베트 데이비스’ 측면이라 할 만한데, 이는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밤>(1961)에서 거리를 돌아다니는 여자의 걸음으로, 자크 드미의 <천사들의 해변>(1963)에서 니스 해안 거리를 머리를 흩날리며 사뿐사뿐 걷는 모습에서 반복된다. 특별히 그녀의 걷는 순간을 사랑한 루이스 브뉘엘의 <하녀의 일기>(1964)에서 그녀의 움직임은 이상한 긴장과 불안정성을 보여준다. 이런 영화들에서 잔 모로는 어떤 인물을 소화한다기보다는 그저 움직이는 형태, 부서질 듯 파멸로 이끌리면서도 활력 있고 자유롭고 고고한 욕망을 품은 생동감 있는 몸짓의 인상으로 진정한 배우가 된다. 누벨바그의 안내자 잔 모로의 탁월한 아름다움은 그럼에도 루이 말의 두 번째 작품 <연인들>(1958)에서라 할 수 있겠다. 그녀를 진정으로 좋아하게 된 것도 이 영화 때문이다. <연인들>은 동시대 누벨바그 영화 중 가장 성숙하고 세련된 영화로, 무엇보다 잔 모로가 느끼는 감각적 경험이 그녀의 얼굴과 표정, 몸짓을 통해 세세하게 전달되는 영화다. 누벨바그가 새로운 파도였다면, 그 파도를 거쳐 어딘가 다른 세계로 우리를 안내할 매개자가 있어야만 한다. 잔 모로는 이 영화로 부유하는 파도를 거쳐, 미지의 대지로 우리를 끌고 가는 매혹적인 배우의 이미지를 구현한다. 그녀는 우리를 감정의 여정으로 안내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순간은 그녀가 새벽에 깨어나 정원을 산책하는 장면이다. 그녀의 멋진 목소리가 보이스 오브 내레이션으로 들려온다. “갑자기 그녀는 누군가 다른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녀의 변용을 보여주는 가장 완벽한 사례다. 모로는 이 순간 단지 집을 나서는 것만이 아니라, 사회의 터부에서 그녀의 몸을 구속하는 환경에서, 그녀에 대해 여하한 규정과 속박에서 벗어나는 중이다. 그녀가 몽유병 환자처럼 집을 나서면 한 젊은 남자가 그녀를 뒤따른다. 그는 잔 모로의 모습에 도취되어 있다. 연인들이 달빛을 온몸에 품은 채 숲을 거닐고, 그물에 걸린 고기를 풀어주고, 쪽배를 타고 강물을 따라 내려가는 여정은 우리를 알려지지 않은 영토, 영화의 크레딧에 나오는 ‘부드러움의 지도’라 부르는 고대적 여정을 따라가게 한다. 그들은 지금 유토피아로 나아가고 있는 중이다. 잔 모로의 머리는 흩날리고 달빛 아래 연인들의 열망이 우리를 사회 바깥으로, 도덕의 굴레 바깥으로 항해하게 한다. 어떤 저속한 욕망도 끼어들 틈이 없는 가장 낭만적인 장면에 브람스의 음악이 함께한다. 누벨바그의 파도를 따라 유토피아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 이 모든 아름다운 순간은 그러나 영화의 강력한 힘에 의한 작동이며, 여기서 잔 모로의 황홀한 변모를 넋 나간 듯이 지켜보는 이는 그녀를 연모하는 젊은 남자 혹은 관객뿐만이 아니다. 무엇보다 한 배우의 몸에 감동한 예술가의 존재가 있다. 장 뤽 고다르와 안나 카리나가 그랬듯이 여기서도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아의 관계가 있다. 잔 모로의 압도적인 현전에 대해서는 물론 프랑수아 트뤼포의 <줄 앤 짐>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여기서 잔 모로는 가히 여신으로 등장하는데, 이 때문에 당시 비평가들이 그녀가 두 남자의 우정이야기를 붕괴시키고, 심지어 작가의 영화를 배우의 영화로 변형했다고까지 푸념을 늘어놓기도 했을 정도다. 물론, 잔 모로의 압도적 아름다움이 두 남자의 특권화된 시선과 관련되어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쥘과 짐은 여성적 이미지를 고대의 조각상에서 발견하고, 잔 모로를 그들의 이상적 이미지의 체현으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잔 모로가 비록 60년대 해방적인 여성 이미지로 비쳐질지라도 그녀는 구체적인 역사나 사회, 문화적 조건에서 빠져나온 이른바 ‘사랑의 정열에 빠진 여인’으로 표현되고 있다. 트뤼포는 <비련의 신부>(1968)에서 잔 모로의 신화적 측면을 더 강렬하게 표현한다. 영화의 초반부, 잔 모로는 죽은 남편의 복수를 위해 살인자의 집을 방문한다. 카메라는 마치 그녀의 움직임의 시선을 따라가듯 아파트의 고층부터 아래로의 하강운동과 회전이동을 거듭해 마당을 쓸고 있는 한 남자에게 다가가는데, 이때 잔 모로는 전 장면에서의 검은 옷의 상복과 달리 바람에 살랑거리는 레이스 달린 흰 이브닝드레스를 입고 우뚝 서 있다. 이때 남자를 죽이러 가는 서스펜스의 전개는 이 이미지와는 하등의 상관이 없다. 중요한 것은 화면의 이동과 그런 모든 움직임을 순간적으로 중단시키는 그녀의 이미지의 대조에 있다. 잔 모로는 여기서 어떤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나중에 화가의 그림에 구현될 이상적인 여인의 이미지로, 숱한 남자들의 삶을 중단시키는 절멸의 여신으로 현현한다. 영화의 역사와 함께한 배우 이렇듯 잔 모로는 <줄 앤 짐>에서 그녀가 불렀던 노래처럼 ‘인생의 회오리바람’처럼 화면에 출연하곤 했다. 그녀의 초기 이미지들이 누벨바그 작가들의 이상화된 여성의 이미지를 체현했다 말한다 해도, 몇초만에 표정을 바꾸고 그녀를 둘러싼 환경을 순식간에 감정의 소용돌이로 몰아가는 잔 모로의 탁월한 능력은 작가의 한계를 언제나 초과했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현대적인 작가들과 작업한 한명의 배우가 아니라 (오슨 웰스, 누벨바그 초기 이후 그녀와 작업한 작가들의 목록은 화려하다), 세르주 투비아나가 말했듯이 ‘영화의 역사와 결혼한 배우’였다. 그녀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에 <사형대의 엘리베이터>의 마지막 장면이 떠오른다. 그녀는 암실의 현상액 속에서 서서히 떠오르는 자신의 사진을 멍하니 들여다보고 있다. 그리고 사진을 손끝으로 만지면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늙어가겠지. 하지만 우리는 여기 사진 속에 함께 있잖아. 어디에선가, 항상 함께 있는 거야. 아무도 우리를 떼어놓을 수는 없어.”

<혹성탈출: 종의 전쟁> 앤더스 랭글랜즈 감독·임창의 감독 - 폭설 속 몸싸움 장면을 눈여겨보시길

“시네마가 요구하는 모든 스펙터클이 그들의 얼굴에 담겨 있다.” <텔레그래프>의 평에서 유추할 수 있듯, <혹성탈출: 종의 전쟁>은 액션블록버스터 이전에 비장한 드라마로 기억될 영화다. 종의 명운을 건 유인원과 인간의 전쟁을 조명한 이 작품의 시각효과는 최첨단 디지털 시네마 기술을 감정의 시각언어로 치환하는 데 성공했다. <혹성탈출> 3부작을 통해 할리우드 시각효과의 놀라운 진보를 입증한 뉴질랜드 시각효과 업체 웨타 디지털의 두 스탭이 한국을 찾았다. 시각효과감독을 맡은 앤더스 랭글랜즈와 라이팅기술감독 임창의가 그들이다.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 <마션> 등을 작업한 시각효과 업체 MPC(Moving Picture Company)에서 13년간 일했던 앤더스 랭글랜즈 감독은 이번 작품이 웨타에서의 첫 영화다. 지난 2014년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 개봉 당시 한국을 찾아 <씨네21>과 인터뷰를 진행했던 임창의 라이팅기술감독(963호 기획 인터뷰 참조)은 이십세기폭스가 리부트한 <혹성탈출> 시리즈의 3부작에 모두 참여한 시각효과 전문가다. 두 사람이 참석한 국내 매체와의 기자간담회와 내한 단독 인터뷰에서 오갔던 이야기를 전한다. -<혹성탈출> 시리즈의 3편을 준비하며 새롭게 염두에 두어야 했던 점은. =임창의_ <혹성탈출> 세편에 모두 참여한 사람으로서, 3편의 가장 큰 도전과제는 전편을 넘어서는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2편(<혹성탈출: 반격의 서막>)을 만들 때도 마찬가지였다. 1편인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2011)의 CG가 정말 잘 나왔다. 관객의 기대치를 한껏 높인 상황에서 그 기대에 부합하려면 전편을 넘어서는 퀄리티의 시각효과 장면을 만들어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다. <혹성탈출> 시리즈의 시각효과 작업은 부문을 막론하고 전편의 기술력을 넘어서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의 과정이었다. -앤더스 랭글랜즈 감독은 이번 작품이 웨타 디지털에서의 첫 영화다. 그동안 <마션>(2015), <해리포터와 죽음의 성물1>(2010) 등 다양한 영화의 시각효과 작업을 해왔는데, 이전에 작업한 영화들과 비교해 <혹성탈출: 종의 전쟁>만이 가지고 있는 차별점이 있다면. =앤더스 랭글랜즈_ 가장 큰 차이는 캐릭터를 만들어가는 과정이었다. 맷 리브스 감독은 작가 출신인 만큼 캐릭터와 이야기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캐릭터를 만드는 과정에 있어서 기술팀까지도 열정을 가지고 임할 수 있도록 이끌어줬다. -3편은 전작에 비해 클로즈업숏이 유독 많은 영화였다. 디지털 캐릭터의 감정을 보다 섬세하게 표현해야 한다는 점에서 고민이 깊었을 법하다. 앤더스 랭글랜즈_ 클로즈업 장면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분석’이다. 시각효과 제작진은 스스로 작업한 CG컷을 보며 끊임없이 자문해야 한다. 캐릭터가 사실적으로 보이는지, 그렇지 않다면 무엇이 문제인지 말이다. 디지털 캐릭터의 두상을 만드는 작업부터 그들의 얼굴에 음영이 제대로 반영되었는지, 배우들의 감정 연기가 CG로 잘 전환되었는지 등에 주목하며 원하는 이미지를 만들어내려 했다. 특히 이번 영화에는 시저가 내적으로 깊은 갈등을 겪는 장면이 많은데, (시저의 모션 캡처 연기를 맡은) 앤디 서키스의 심오한 감정 연기가 인상깊었다. 한 프레임에 담기나 싶을 정도로 매우 짧은 순간에서조차 그는 시저의 미세한 표정과 떨림을 표현해내더라. 임창의_ 앤더스 감독님의 말대로 배우들의 연기가 굉장했다. 그들의 클로즈업 연기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감정이 전달돼서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이번 작품의 클로즈업 신에 대해 조명 기술자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전작에서 한번도 시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작업방식을 선택했다. 이전 <혹성탈출> 영화에서는 애니메이션 작업을 완전히 마친 다음 라이팅 작업을 시작했다. 라이팅과 렌더링을 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클로즈업 장면의 경우에는 조명을 어떻게 주느냐에 따라 캐릭터의 표정이 완전히 바뀌어버리기 때문에 애니메이션 작업 단계에서부터 라이팅이 필요하다. 이번 영화에서는 기존의 라이팅과 매우 흡사하면서도 애니메이션 작업만을 위한 라이팅을 새롭게 만들었다. 애니메이터들이 클로즈업 장면을 작업할 때 거의 완성본에 가까운 라이팅을 반영할 수 있도록 했다. -숲, 설원 등 야외 촬영분이 전편보다 많았다는 점도 3편의 중요한 특징이다. 시각효과 측면에서 도전과제가 있었다면. 앤더스 랭글랜즈_ 야외 촬영이 굉장히 많은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수많은 영화를 통해 축적해온 웨타의 기술력과 노하우가 탄탄해 수월하게 작업할 수 있었다. 특히 이번 영화에는 ‘토타라’라는 소프트웨어를 사용했는데, 실제 숲의 생애 주기나 변화의 과정을 묘사할 수 있는 툴이었다. 영화의 주요 배경이 되는 산악지대나 자연환경의 모습을 최대한 리얼하게 반영할 수 있어 좋았다. 임창의_ 야외 촬영은 빛의 방향과 날씨에 따라 수많은 변수가 존재하기 때문에 라이팅을 하기 쉽지 않다. 시각효과 작업에서 가장 어려운 순간은 실제로 촬영한 이미지의 라이팅을 바꿔야 하는 순간인데, 야외 촬영이 굉장히 많았던 이번 작품에서는 라이팅 작업을 하는 데 더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이번 영화에서 개인적으로 인상깊었던 장면을 꼽는다면. 앤더스 랭글랜즈_ 배드 에이프가 눈 내리는 산장 속에서 말하는 장면을 좋아한다. 배드 에이프를 연기한 스티브 잔은 배우 자체가 재미있고 흥이 많다. 캐릭터의 따뜻하면서도 유머러스한 특성을 굉장히 잘 살려냈고, 개인적으로 그 장면이 감동적이었다. 임창의_ 시저와 루카와 병사들이 폭설 속에서 몸싸움을 벌이는 장면이 인상깊었다. 이 장면은 캐나다에서 촬영했는데, 폭설이 내리는 날에 배우들이 퍼포먼스 캡처 슈트를 입고 진짜 난투극을 벌였다. 최근 영화로는 아주 보기 드문 사례였다. 보통 눈 내리는 장면은 후반작업을 통해 만들어내기 때문에 맑은 날 촬영하거나 스튜디오에서 촬영한 뒤 CG 작업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실제로 캐나다의 폭설이 내리는 환경에서 촬영했다는 건 라이팅 아티스트로서는 정말 축복이었다. 실제로 눈이 왔을 때 라이팅 조건이 어떻게 변화하고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분석하고 배울 수 있어서 굉장히 도움이 됐다. -시각효과 전문가로서, 최근 업계의 화두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앤더스 랭글랜즈_ <혹성탈출> 시리즈를 통해 유인원 캐릭터를 일정 수준 이상까지 현실적으로 구현해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인간을 정말 인간다운 모습의 디지털 이미지로 구현하는 건 아직도 시각효과 업계의 도전과제다. 임창의_ 영화를 만드는 사람 입장에서는 사실 매 작품이 도전일 수밖에 없다. 영화마다 시각효과에 대한 아이디어와 기술이 변화하기 때문이다. 라이팅 아티스트로서 향후의 도전과제가 있다면, 노이즈 문제에 대한 해결이 될 것이다. 현존하는 라이팅 기술에서의 가장 큰 문제점이 노이즈다. 지금으로서는 노이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굉장히 많은 컴퓨터 프로세스를 이용해 오랜 시간 동안 계산해야 한다.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기술을 발전시키는 게 라이팅, 렌더링 분야의 큰 과제라고 생각한다.

[동서대학교 임권택영화영상예술대학] 산학협력의 허브에서 진짜 인재를 키워낸다

동서대학교 임권택영화영상예술대학은 세계 유수의 전문 교육 학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지난 4월, 미국 영화산업 매체 <버라이어티>에서 전세계 예술 계열 대학을 대상으로 경쟁력을 갖춘 교육을 제공하는 20개 대학을 소개했다. 이 리스트에는 미술디자인 전문학교인 아트센터 칼리지 오브 디자인, 고블린 이미지 스쿨 등을 비롯해 예일, 페퍼딘, 이시카 대학교 등 미국 전역의 영화학과와 폴란드의 내셔널필름스쿨, 사우디아라비아의 이팻 대학, 인도의 필름 앤드 텔레비전 학교 등 전세계 20여곳의 다양한 학교가 올라 있었다. 임권택영화영상예술대학은 한국 학교로는 유일하게 이 리스트에 선정됐다. 이용관 임권택영화영상예술대학 학장은 “이번에 <버라이어티>가 선정한 리스트 기준은 전세계 최고의 톱클래스 학교가 아니라 발전 가능성을 고려한 차세대 리스트”라고 자세를 낮춰 이야기하면서 그들의 선정 이유가 아마도 동서대학교만이 가진 세 가지 교육 특징 때문일 것이라고 평가했다. 첫 번째 특징은 동서대학교만의 특수한 지원 방식이다. 임권택영화예술대학은 2015년부터 영화과, 뮤지컬과, 연기과와 함께 디지털 콘텐츠를 다루는 게임테크놀로지, 게임 아트, 3D애니메이션, 비주얼이펙트 등을 아우르는 디지털콘텐츠학부까지 통합해 영화와 영상 전반을 아우를 수 있는 교육을 추구한다. 그 어느 대학보다 교육의 정체성이 뚜렷한, 국내에서는 보기 드문 지원으로 학부간 장단점을 보완할 수 있는 효과적인 체계라 할 만하다. 예를 들면 영화과는 디지털콘텐츠학부의 강점인 CG와 애니메이션 기술력을 가까이 할 수 있고 디지털콘텐츠학부는 영화과로부터 연출과 시나리오 부문의 전문성을 얻을 수 있다. 한 학생이 학기 동안 교육받을 수 있는 과정 전반을 트랙으로 표현한다면 디지털콘텐츠학부는 게임테크놀로지, 게임아트, 애니메이션과 VFX 등 4개 트랙으로 세분화해 전문적인 교육을 실행한다. 둘째로 부산이 갖추고 있는 새로운 영상 문화 환경의 최대 수혜자가 임권택영화영상예술대학이라는 점이 세계 언론의 시선을 사로잡은 이유일 것이다. 일례로 임권택영화영상예술대학이 위치한 부산 센텀시티 지역은 매년 부산국제영화제가 열리는 영화의 전당을 비롯해 영화진흥위원회, 영상물등급위원회, 게임물관리위원회 다양한 정부 기관이 한데 모여 있는 특수한 산업 지역이다. 한국의 어떤 교육 현장보다도 산학협력이 활발하게 이뤄질 수 있는 지리적 요건을 갖췄다는 뜻이다. 이용관 학장에 따르면 해외에서도 이 부분을 특히 주목하고 있다고 한다. 예를 들면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영화아카데미(AFA)와 연계해 영화 제작을 비롯해 촬영과 사운드, 미술 부문 등에서 학생들이 직접 스탭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는 산학협력 네트워크가 탄탄하게 이뤄져 있다는 점은 임권택영화영상예술대학의 우수한 장점이자 학생들이 얻어갈 수 있는 훌륭한 혜택이다. 이와 연관지어 세계 유수의 대학들과 활발한 교류를 나누고 있다는 점도 동서대학교만의 장점으로 작용한다. 임권택영화영상예술대학은 현재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위치한 채프먼 대학의 닷지 필름스쿨, 중국 베이징의 전매대학 등과 교환학생 공동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베이징전영학원 등과 함께 ‘아시아대학생영화제’를 개최해 교류하고 있는 점도 차세대 아시아 영화인 발굴과 함께 활발한 네트워킹을 다져나가는 동서대학교 임권택영화영상예술대학이 가진 특징이라고 이용관 학장은 힘주어 강조한다. 이러한 체계의 특징뿐만 아니라 임권택영화영상예술대학 재학생이라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우수한 설비 또한 자랑거리다. 영화전공 학생이라면 누구나 1년에 2회 이상 임권택 석좌교수와의 만남을 통해 영화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거장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고, 레드원 카메라를 포함한 30대 이상의 카메라로 촬영한 다음 촬영조명실습실, 편집실, 사운드 편집실 등의 후반작업실에서 영화를 완성할 수 있다. 뮤지컬 및 연기과 학생들은 1074석 규모의 소향뮤지컬씨어터에서 언제든 마음 놓고 연습할 수 있으며 35평 규모의 무대제작실과 20평 규모의 의상 보관 및 제작실 등에서 부족함 없이 자신의 기량을 갈고닦을 수 있다. 어떤 학교도 이보다 더 갖추어진 시설을 보유할 수는 없을 것이다. 동서대학교 임권택영화영상예술대학이라서 가능한 규모다. 이용관 동서대학교 임권택영화영상예술대학 학장 현장 중심의 교육을 강화할 것 -여러 가지 새로운 교육방식을 고민 중이라고 들었다. =부산의 여러 교육기관과 연계한 이른바 ‘어셈블리 교육’을 구상 중이다. 어떻게 하면 부산지역 학생들을 가둬두지 않고 부산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교육을 제공할 수 있을까에 관해 고민했다. 센텀시티는 일종의 문화 산학협력단지로 특화된 콘텐츠를 보유하고 있다는 게 이곳만의 장점으로 꼽는데, 예를 들면 기업에서 직접 필요로 하는 과목을 개설해 학생들을 가르친다. 졸업 이후를 구상할 수 있게 해주는 방안을 모색하면서 여러 아이디어를 내고 회의를 거듭하고 있는 중이다. -학생들의 진로, 취업률에 관한 고민인 것 같다. =‘임권택’이라는 감독의 이름을 학교명에 쓰는 것만큼 현장 중심의 교육을 고민한다. 앞으로는 셀프 인증제라는 제도를 도입해서 3학년 과정부터 모든 과목을 스스로 세분화해서 현장 중심의 교육으로 이수시키는 방안을 구상 중이다. 현장 감독들이 직접 교육을 하고 학생들에게 현장 투입 인증을 해주는 것이다. 교육만 받고 각 전공분야에 진출할 수 없으면 소용이 없다. 얼마나 더 오래 졸업 이후를 관리해줄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가 구상해봤다. 일종의 아트 마켓이라고 이름 지어 연기전공자는 매니지먼트 형태의 지원을 해주는 식이다. 올해 발표를 해서 2학기부터 시범적으로 운영해보고 4~5년 계획을 짜볼 생각이다. -시설과 환경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 자부하는가. =자부한다. 영화의 전당에 가면 시네마테크도 있어 1년 내내 훌륭한 시설을 갖춘 극장에서 고전영화를 마음껏 볼 수 있다. 하지만 학생들 입장에서는 아직 피부로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이곳에 오면 정말 마음껏 영화와 놀 수 있다. -올해 수시전형 입시 기준의 변화가 있나. =지금까지는 크게 변동이 없다. 성적이나 시험에 의존하지 않고도 인재를 선발할 수 있는 기준을 고민하고는 있다. 올해도 선발 기준은 인성과 끼다. 우리의 목표가 끼 있는 교육이다. 1학년 1학기 첫 수업을 들어보면 이곳은 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수시든 정시든 끼가 많은 친구들이 들어오길 바란다. 동서대학교 학과 및 전형 소개 동서대학교의 슬로건은 ‘Before Dongseo After Dongseo’(BDAD)이다. 영화, 영상, IT, 디자인, 콘텐츠 분야의 특성화에 집중하며 슬로건처럼 ‘미래형 대학’을 목표로 한다. 동서대학교의 지역적 특성화 전략을 통해 실질적인 산학협력을 추구하며, 부산 해운대에 자리한 센텀시티 캠퍼스에 임권택영화영상예술대학을 오픈한 것은 글로벌 대학으로의 도약을 가능케 할 필수 요소다. 현장과 실습 위주의 영화과는 이론교육을 강화하는 1학년 과정을 거쳐 제작 실습이 강조되는 2학년 과정부터 직접 단편영화를 제작하게 된다. 물론 장편영화 지원 프로젝트도 가능하다. 뮤지컬과, 연기과는 맞춤형 교육을 추구하며 일대일 수업과 소수그룹 수업을 지향한다. 실기와 공연 중심의 커리큘럼을 통해 매년 5편 이상의 공연을 무대에 올릴 수 있다. 뮤지컬과는 베이징 전매대학교와의 교류를 통해 공동 학위 운영 프로그램을 개발해 운영중이다. 이런 환경에서 한국 최고의 교수진들이 학생들을 전폭적으로 이끌어주고 있다. 동서대학교 임권택영화영상예술대학의 2018년 수시전형은 디지털콘텐츠학부의 경우 입학 정원 140명 중 105명을, 영화과는 40명 중 30명, 뮤지컬과는 30명 중 20명, 연기과는 30명 중 20명을 수시전형에서 선발한다. 일반계고교 전형은 1단계에서 학생부 100%를, 2단계에서 학생부 90%+면접 10%를 반영해 최종 합격자를 선발한다. 뮤지컬, 연기과의 경우 학생부 40%+실기 60%를 반영한다. 뮤지컬과와 연기과는 지정 실기 과제 중 한 가지를 택해 준비해야 하고 디지털콘텐츠학부, 영화과 지원자는 실기고사가 없다. 원서접수는 9월 11일부터 15일까지, 서류 제출은 9월 11일부터 20일까지. 자세한 실기 사항 및 전형 일정은 동서대학교 홈페이지를 참조할 것.

[파리] 프랑스 언론, 영국 시선에서 그려진 <덩케르크> ‘디나모’ 작전에 혹평 쏟아내

크리스토퍼 놀란의 최근작 <덩케르크>는 2차대전 초반, 독일군과 벌인 전투에서 참패하면서 덩케르크에 포위되었던 40만명의 연합군 중 30만명을 구해내 영국으로 데려온 ‘디나모’ 작전이 한창인 현장으로 관객을 초대한다. 이 작품의 형식, 미학, 대사의 사용, 구조, 내러티브 등의 독창성에 대한 찬사는 본지에서도 여러번 다룬 바 있고, 놀란이 매번 세계적으로 호평받는 양질의 블록버스터를 만들어내는 감독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놀란의 이번 작품은 프랑스언론에 제대로 미운털이 박혔다. ‘영국인이 최고라는 잘못된 생각을 심어주는 영화’(<르 몽드>), ‘왜 놀란의 <덩케르크>가 역사의 왜곡인가’(<레 제코>), ‘역사는 어디로 갔나’(<피가로>), ‘리얼리즘 영화가 되기엔 너무 하얀 영화’(<텔레라마>), ‘영국의 관점, 프랑스를 화나게 하는 <덩케르크>’(<쿠리에 인터내셔널>)…. 이 영화에는 연합군으로 함께 참전한 프랑스군의 시선이 배제되었다는 점에 프랑스 언론이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고 있다. 이들의 반응은 <르 몽드>에 실린 프랑스 육군 중령이자 전쟁역사학자인 제롬 드 레피노아의 글을 읽으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레피노아는 ‘디나모’ 작전이 가능했던 건 4만여명의 프랑스 군인이 덩케르크 그 주변 도시에서 독일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며 희생했기 때문이고, 영국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한 군인 중에는 프랑스 군인도 1만2천명이나 속해 있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게다가 당시 프랑스군은 영국이 ‘디나모’ 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전해들어 뒤통수를 맞은 격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놀란의 영화에는 프랑스 군인들은 초반 10여초 동안 등장해 주인공에게 “영국인? 잘가’라며 비꼬는 모습이나, 목숨을 부지하고자 영국군의 옷을 입고 숨어든 겁쟁이 ‘개구리’로 그려지고 있으니(그것도 모자라 그는 마치 벌을 받는 듯 결국 물살에 휩쓸려 사라진다) 프랑스인으로선 불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큐멘터리 <저수지 게임> 주진우 기자, 최진성 감독 수다

지난 8월 29일 강남의 한 편집실에서 진행된 <저수지 게임>(제작 프로젝트 부·배급 스마일이엔티) 기술 시사에는 최진성 감독, 김어준 <딴지일보> 총수, 주진우 <시사IN> 기자뿐만 아니라 예닐곱명의 변호사들도 참석했다. 영화 상영이 끝난 뒤 이들은 한동안 자리에 앉은 채 주진우 기자의 영화 속 발언, 자막 하나하나를 검토했다. 소송의 빌미를 주지 않고, 혹시나 걸릴지 모를 소송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씨네21> 1098호 기획 기사 ‘2012년 대선 개표 부정 의혹 다룬 최진성 감독의 다큐멘터리 <더 플랜>과 <저수지 게임> 제작기’에서 이미 소개된 대로, 다큐멘터리 <저수지 게임>은 주진우 기자가 탐정처럼 이명박 정권의 비자금 저수지를 추적하는 “하드보일드한 미스터리 명랑 추적극”이다. 9월 7일 개봉을 앞두고 주연배우 주진우 기자와 최진성 감독이 나눈 이명박의 비자금 취재 후일담을 전한다. 이 영화를 제작한 김어준 총수는 서면으로 인터뷰 답변지를 보내왔다. -변호사들이 꽤 꼼꼼하게 검토하던데. =주진우_ 나와 김어준은 (소송에 걸려도) 상관이 없다. 최 감독을 조금 더 안전하게 하려고. =최진성_ 예전에 독립다큐멘터리를 작업할 때 온갖 욕을 영화에 넣어도 문제가 안 됐는데 주진우 기자가 그걸 하면 보통 사람들보다 화력이 세니까 (상대방에게) 위협이 될 수 있다는 거다. -영화는 어떻게 봤나. 주진우_ 내가 너무 많이 나와서 쑥스러웠다. (웃음) 평소에 거울도 안보고 사는데. 영화를 보니 내가 다큐멘터리를 찍기에 좋은 소재일지는 몰라도 좋은 도구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 감독과 만나게 해주고 싶은 사람들이 많았는데 취재원 대부분이 신변 노출을 꺼려 여러모로 한계가 많았다. 촬영을 하다가도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취재 때문에 해외에 나가기도 했고, 취재원의 전화를 받고 갑자기 그 쪽으로 먼저 가버리는 바람에 최 감독이 고생을 많이 했다. 최진성_ 2015년 11월 30일 주진우 기자를 처음 만났으니 함께 지낸 지 햇수로 3년째다. 개봉을 앞두고 있어 드디어 어둠의 터널을 빠져나오는구나 싶다. 1년10개월간의 긴 터널을. 홀가분한 심정과 더불어 이 영화에서 주 기자가 하고 싶어 하는 얘기가 잘 전달돼 한국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기를 기대하고 있다. 주진우_ 어차피 실패를 전제로 시작한 취재라고 해야 하나. 간단하게 비자금을 찾아내 이명박의 손목에 수갑을 채우면 끝난다. 그런데 검찰도, 국세청도 못하는 일을 일개 기자인 내가 하고 다니는 것 자체가 웃기는 일이다. 이명박이 보면 얼마나 가소롭겠나. 나라는 꼴통 기자 하나가 실패가 뻔한 취재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명박은 돈을 위해서 공권력을 이용해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을 너무나 많이 했다. 자원외교, 4대강 사업 등 그가 했던 사업들을 쫓아다녔는데 그게 잘못됐다고 증명할 순 없으니 기록으로라도 남기고 싶었다. 이 프로젝트를 최 감독과 함께한 이유는, 기사를 쓸 수 없게 될지라도 취재하면서 쏟았던 작은 노력이라도 기록된다면 그게 대중에 전달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다. -류승완 감독이 두 사람을 소개시켜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최진성_ 류승완 감독이 연락해와서는 주 기자와 함께 다큐멘터리를 작업할 생각이 없냐고 제안했다. 주 기자를 처음 만나 다음해인 2016년 4월에 촬영을 시작하기 전까지 일주일에 한번씩 만나 밥 먹고 차 마시면서 주 기자가 취재한 내용들을 조금씩 들었고, 그걸 가지고 어떻게 영화로 만들까 그림을 그려나갔다. 촬영이 시작된 뒤인 4월 말, 김어준 총수를 만나 함께하기로 했다. 주진우_ 류승완 감독이 최진성 감독을 두고 “좋은 감독”이라고 하더라. 박정희 신화에 사로잡힌 한국의 우익 꼴통들을 다룬 <뻑큐멘터리-박통진리교>(2001), 4대강 공사 현장을 찾아가 펼친 작은 공연을 그린 <저수지의 개들>(2011) 같은 최진성 감독이 만든 다큐멘터리들을 챙겨 봤다. 그러면서 최 감독을 만나 생각을 주고받았다. 최 감독과 나는 다른 점이 굉장히 많다. 김어준 총수나 나는 제멋대로라고나 할까. (웃음) 중요한 제보가 들어오면 그걸 확인하러 갑자기 달려가기도 했으니 영화 찍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최악이지. (웃음) 최진성_ 영화를 찍고 있는데, 찍을 신이 많이 남았는데, 스탭들이 대기하고 있는데 주연배우가 갑자기 가는 거다. (웃음) 주진우_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때 박근혜의 비자금을 찾기 위해 스위스만 10번 이상 갔다. 새벽까지 특검 수사에 협조했고. 그래서 이명박 각하에 집중하기가 굉장히 어려웠다. 국정원을 포함해 이명박과 관련된 취재 아이템이 굉장히 많았는데 여러 제약 때문에 최 감독이 영화에 쓸 수 없어서 어려웠을 것 같다. -주진우 기자와 함께 작업하려면 그만큼 리스크도 감당해야 하는데 연출을 맡기로 한 이유가 뭔가. 주진우_ 그래, 굉장히 위험한 일이야. (웃음) 지금은 (나와 함께) 하겠다는 사람이 많지만 말이야. 최진성_ 박근혜의 서슬이 시퍼 을 때니까. (웃음) <시사IN> 주진우 기자의 책상에 가면 (검찰이나 경찰에서 온) 소환장이 높이 쌓여 있었고, 그는 재판도 계속 받고 있었다. 지금은 정권이 교체돼 웃으면서 개봉을 준비하고 있지만 프로젝트를 처음 제안받았을 때만 해도 개봉은 어려울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박근혜 정권하에서 주진우와 김어준이라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위험하고 곤란한 스피커와 함께 작업한 거니까. 앞으로 영화 일을 못하게 될 수도 있다는 각오로 (연출을 할지) 고민한 거다. 그럼에도 맡기로 한 건 주진우가 영화의 주인공으로서 되게 흥미진진한 캐릭터고, 무엇보다 전직 대통령의 비자금을 쫓는 게 무척 재미있으니까. (웃음) 주진우_ 스케일이 이 정도는 돼야지. 최진성_ 어, 이 정도는 돼야지. 모든 것을 던져서라도 주 기자와 MB 한번 쫓아다녀야겠다고 마음속으로 딜을 한 거다. 주진우_ 류승완 감독과 다큐멘터리 감독을 찾을 때 가장 중점을 둔 게, 일단 실력이 있어야 했다. 두 번째 조건은 흔들리지 않는 정신, 똑바로 박힌 정신. (웃음) 나와 친해서 좌천되고 피해를 본 사람이 많아서 처음에는 감독 이름을 안 밝히고 (작업을) 하려고 했는데 (최 감독이) 모든 걸 던지고 함께해준 거지. 최진성 감독은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되기 전이었던 지난해 9월 21일 한겨레TV <김어준의 파파이스> 113회 방송에 얼굴을 가리기 위해 봉투를 쓰고 출연해 <더 플랜>과 <저수지 게임>을 소개했다. <저수지 게임>은 주진우 기자의 이명박 전 대통령 취재 중에서 2013년 발생했던 캐나다 토론토 역사상 가장 큰 부동산 사기사건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추적극이다. 한국 대기업과 농협이 직접 투자한 이 사업은 공사비만 1500억원 넘는 대형 프로젝트였다. 토론토 한인 밀집지역인 노스요크에 주상복합 빌딩을 짓겠다고 발표했다가 추가 자본금을 유치하지 못해 부지가 경매로 넘어가면서 건설이 무산됐다. 해외에서 벌어진 사기사건으로 넘기기에는 수상한 구석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농협은 국내 법인 A사를 통해 캐나다 시행사에 210억원을 선뜻 대출해줬고, 대출 과정에서 담보 관리가 부실했으며(나중에는 담보를 그냥 풀어주기까지 했다), 사기사건이 발생한 뒤로 대출금 210억원이 손실 처리됐음에도 돌려받기 위한 어떤 고소나 고발 신고를 하지 않았다. 이 사건은 <시사IN> 464호 기사 ‘농협이 날려버린 210억원의 배후는?’으로 보도됐다. -주진우 기자의 많은 취재 중에서 2013년 토론토 노스요크에서 발생한 부동산 사기사건을 서사의 큰 줄기로 삼은 이유가 뭔가. 최진성_ 처음 서너달 동안 주 기자로부터 파편적인 정보들을 계속 들었고, 카메라를 본격적으로 든 뒤로 주 기자가 MB 비자금을 추적했던 이야기를 세 차례에 걸쳐 서너 시간씩 들려준 게 이 영화의 밑그림이 됐다. 수많은 이야기가 있었다. 2016년 7월 주 기자와 함께 토론토와 뉴욕에 가게 됐는데 이상하게도 그곳에서 취재가 잘되지 않았다. 주진우_ 취재하기로 한 사람들이 만날 때쯤 다 사라졌다. 친했던 취재원들도 갑자기 피하고, 약속도 많이 취소됐고. 나한테는 얘기해줄 수 있는데 카메라 앞에 서거나 최 감독과 함께 만나는 건 굉장히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니까. 최진성_ 토론토 부동산 사기사건이 가장 취재가 많이 되어 있었고, 자원외교나 MB와 관련된 비자금의 흐름이 이쪽으로 오는 패턴이 있었으며, 정황 증거에 가까운 그림이라 감독으로서 다루기 좋은 사건이었다. 주진우_ 이걸 극영화로 찍었다면 훨씬 더 잘 나왔을 것이다. 최진성_ 무엇보다 국내와 해외를 넘나드는 인터내셔널한 사건이라는 점에서 흥미로웠다. 하드보일드 장르영화에서 봤을 법한 추적 서사를 갖추고 있고, 주 기자의 캐릭터가 사건에 쏙 들어오니 마치 탐정 같더라. 장르영화처럼 보여주기에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주진우_ 사실 더 멋진 장면이 많은데 감독니임. (웃음) 나는 뭐가 멋있나 그게 더 중요하니까. 하하하. -혼자서 취재하는 보통 때와 달리 다큐멘터리팀과 함께 취재해보니 기자로서 어땠나. 주진우_ 조금은 안심이 됐다. 그전에는 해외에 출장을 가면 방문 앞에 의자를 막 쌓아두고 그랬으니까. 혼자 취재하러 가거나 김어준과 같이 가면 온갖 미행과 감시가 붙었고, 그래서 위협적이었다. 하도 위험한 취재를 많이 하니까 가수 이승환씨는 SBS 예능 프로그램 <힐링캠프>에 출연해 외국에 취재하러 가지 말라고 울기까지 했다. 그러다가 다큐멘터리팀과 함께 나가니 만나야 할 사람을 못 만난 대신에 든든하니 좋더라. 우리가 만난 뒤로 지금까지 단 한번도 전화 통화를 한 적 없을 만큼 보안도 신경 썼고. 최진성_ 처음 만났을 때 나눴던 대화 내용이 ‘전화 쓰면 안 된다, 문자도 안 된다, 카카오톡은 더더욱 안 된다’였다. 주진우_ 텔레그램과 페이스타임(아이폰의 통화 기능) 같은 몇 가지 방식으로 연락을 주고받기로 했지. -주진우 기자의 취재를 따라다녀보니 어떻던가. 최진성_ <시사IN> 명함 하나 있으면 어디든지 들어갈 수 있는 게 부러웠고 신기했다. 주진우_ 아니, 그건 그냥 들어가는 거야. 최진성_ 과거에 다큐멘터리를 연출할 때 취재하러 왔다고 하면 정문을 통과하지 못했다. 주 기자의 ‘무데뽀 멘털’이 어느 정도 작용한 것도 있지만 다큐멘터리 감독보다 저널리스트가 취재하기 좋은 직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주진우_ 다큐멘터리 감독이니 취재원에게 항상 먼저 여쭤보고 (카메라를) 세팅해야 해서 그렇게 느낄 수 있는데 나 또한 일단 들어가는 거다. 들어가서 (취재원을) 찍어보고 안 된다고 하면 빠지고, 그게 딜이니까. -영화 속 주진우 기자의 취재는 실패의 연속이다. 취재원들이 만나주지 않을뿐더러, 만나더라도 원하는 말을 해주지 않는데. 최진성_ 주 기자가 만나려고 시도하는 취재원마다 안 만나주거나 거짓말을 하지 않나. 그런데 이게 우리 다큐멘터리의 이야기가 되겠다 싶었다. 영화에서 주진우 기자와 김어준 총수는 ‘이 취재가 실패담’이라고 얘기하는데 오히려 이게 이 추적극의 핵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진우라는 기자가 영화 안팎에서 항상 누군가의 옆에 서 있고, 그를 계속 쫓고 있다는 걸 보여주자. 우리가 당장 지금 진실을, 그분의 비자금을 발견할 수 없지만 ‘누군가가 오늘도 쫓고 있고, 당신 옆에 서 있다’라는 메시지를 보여주는 게 가장 중요한 임무였다. 나는 주 기자의 취재가 실패담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주진우_ 기자로서 취재를 계속 실패하고 있는데 실패하는 것만 카메라에 보여주면 어떻게 하나 두려웠다. 기자를 주인공으로 하는 보통의 극영화를 보면 증인이 갑자기 나타나 진실을 얘기해주거나 증거가 담긴 USB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나. (웃음) 사건의 열쇠를 쥔 사람이 딱 나오면 얼마나 좋겠어. 그런 사람을 찾고 싶었다. 그런데 실제로는 수백번 전화를 하고, 수십번 찾아가야 취재원을 겨우 만날 수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진실을 얘기하지 않는다. 당연하다. 그때마다 좌절하는데 그럼에도 취재원의 얘기를 하나라도 듣기 위해 수백번 시도하는 거다. 게다가 우리가 한 사람 얘기만 듣고 쓰는 게 아니라 크로스 체크를 해가며 신빙성 있는 얘기를 좇아갔다. 여러 전문가, 정부 관료 등 수많은 도움이 있었는데 그걸 우리가 (영화에) 다 쓸 수 없었다. -주진우 기자를 오랫동안 만나면서 관찰해보니 어떤 사람인 것 같나. 최진성_ 그를 만나기 전에는 팟캐스트 방송 <나는 꼼수다>의 귀엽고 성실하고 용기 있는 기자? (웃음) 그렇게만 알고 있다가 함께 일을 해보니이 사람, 미쳤구나 싶더라. <올드보이>에서 우진(유지태)이 오대수(최민식)에게 자신을 “오대수학 학자”라 소개하지 않나. 수학, 과학, 철학, MB학이 있다면 주진우 기자는 MB학 박사라 부를 수 있을 만큼 MB에 미쳐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웃음) 주진우_ 이명박을 쫓아다니면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너무 많이 했다. 그래서 최진성 감독에게 “내가 (중간에) 가더라도 잘 마무리해달라”고 얘기한 적도 있다. 이 다큐멘터리가 완성되지 못할 수도, 개봉하지 못할 수도, 흥행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누구라도 이 취재를 해야 하고, 취재를 하다가 무슨 일이 생겨도 뭐라도 남겨야 한다고 생각해왔는데 최 감독이 끝까지 완성해줘서 굉장히 많은 힘이 됐다. 최진성_ 노심초사하며 벌벌 떨면서 작업했던 기억이 많다. 집에 갈 때 괜히 무서웠고. -이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 중 하나는 기자가 취재하는 데 한계가 있으니 검찰이나 금융감독원 같은 국가기관이 제대로 수사해야 한다는 것인데. 최진성_ 엔딩 크레딧 직전에 ‘오늘도 주 기자는 H를 쫓고 있다’는 자막을 넣었다. 이 영화를 본 관객이, 언론인이, 정치인이 주 기자와 함게 희대의 사기꾼인 MB의 비자금을 쫓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주진우_ (MB 프로젝트 첫 번째 기사 ‘이명박 청와대 140억 송금 작전’이 실린 <시사IN> 519호를 들어 보이며) 이 보도는 성공이야. 이건 이명박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큰 폭탄인데 어떤 언론이나 포털 사이트도 이 기사에 대한 후속 보도를 내놓거나 메인에 내걸지 않고 있다. ‘장충기 전 삼성그룹 미래전략실 차장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 기사(<시사IN> 517호)가 나갔을 때도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앞으로 MB 프로젝트 기사를 몇탄 더 쓸 건데, 아직도 MB는 힘이 있다. 아직도 이명박의 아이들이 이 사회의 주류로 활동하고 있고, 그 메인스트림이 견고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한다. 국민들이 많은 관심을 가져줘야 나도 덜 외롭고 살 수 있다. 안 그러면 저수지에서 발견되거나 소송 폭탄에 허우적거리게 된다. 이명박이 역사적으로 다시 평가받아야 한다는 점에서 이 영화가 중요하다. -혹시 흥행 비책은 있나. 최진성_ 관객수 100만명이 넘으면 주 기자가 뭘 할까? (웃음) 주진우_ 뭐라도 할게, 이명박 잡으러 갈게. (웃음) 김어준 <딴지일보> 총수 인터뷰 -정권이 교체되었음에도 이 영화를 언제 개봉할지 꽤 오래 고민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고민한 적 없다. 적절한 때를 기다렸을 뿐. -영화는 어떻게 봤나. =이 영화는, 최소한 민간인 몇은 이명박 비자금을 잊지 않고 여전히 쫓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사회적 비컨이 되고자 박근혜 정권 시절 시작했다. 훗날 시간의 망망대해에서 그 등화를 발견한 시대가 그 비자금을 다 함께 찾아나서기를 바라며. 영화는 충분히 그 역할을 수행할 정도가 된다. -영화가 끝난 뒤 변호사들과 한참 얘기를 나누던데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이 논쟁거리였나. =소송을 어디까지 감당할 것인가. -한명의 저널리스트로서 이명박 전 대통령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국가를, 정권 자체를 수익모델로 삼은 그랜드 야바위인. 협잡을 국가정책 레벨에서 시전했다는 점에서, 우리 헌정사에 전무후무한 숙련 불법인이다. -영화에서 총수와 주 기자는 이 취재를 두고 실패담이라고 했는데 그 이유가 뭔가. =이제는 공권력이 이 영화가 도달한 지점 이후를 감당해, 꼭 성공담으로 끝을 내길 바란다는 뜻이다. -제작자로서 배우 주진우와 감독 최진성은 어땠나. =주진우, <경찰청사람들> 같은 재연드라마의 잡범 정도는 감당할 연기력이다. 최진성의 연출력은 이미 <더 플랜>에서 입증됐다. -관객에게 <저수지 게임>이 어떤 작품이 되길 바라나. 흥행을 예상해본다면. =100만명. 이명박 비자금 수사를 시작하게 만든 영화가 되길 원한다.

잔 모로(1928~2017) - 종래에는 나 자신을 드러내기… 연기가 내게 가르쳐준 것들

1928년 1월 23일 파리에서 태어난 잔 모로는 1947년 배우 출신의 유명 연출가로 당시 아비뇽페스티벌을 이끌던 장 빌라르의 작품을 통해 데뷔했다. 이어서 코미디 프랑세즈에 들어가 배우로서의 커리어를 이어갔으며, 장 빌라르와 함께하기 위해 그가 새로 설립한 TNP(Theatre National Populaire, 국립민중극장)로 적을 옮겼다. 루이 말 영화에서 단역으로 출연한 이후 그의 대표작들인 <사형대의 엘리베이터>(1958)와 당시 큰 스캔들을 일으킨 <연인들>(1958)에 출연한다. 소설가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원작을 영화화한 <모데라토 칸타빌레>(1960)에 출연해 칸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고, 1992년 <바다를 걷는 나이 든 여자>로 세자르상을 수상했다. 140여편의 영화에 출연했으며, 루이 말, 프랑수아 트뤼포, 오슨 웰스, 엘리아 카잔, 베르트랑 블리에, 조셉 로지, 로제 바딤, 테오 앙겔로풀로스, 빔 벤더스, 앙드레 테시네, 뤽 베송, 프랑수아 오종 감독 등 프랑스를 넘어 수많은 감독들과 함께했다. 잔 모로는 배우뿐만 아니라 가수로서도 특유의 목소리와 대체 불가능한 감수성으로 대중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으며, 감독으로도 두편의 영화를 연출했다. 2001년 문화예술 아카데미에 들어간 첫 번째 여성 회원이며, 2005년에는 앙제 지역에서 페스티벌을 시작해 젊은 감독들의 데뷔작 연출을 돕는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6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프랑스, 유럽, 할리우드, 해외 합작 프로젝트 등 가능한 한 모든 통로를 통해 영화에 출연하며 살아 있는 역사가 된 배우였으며, 그녀의 존재가 그 자체로 영화라는 것을 모든 영화인들이 알고 있었다. 잔 모로는 “우리는 모두 자유의 나라에 살고 있으며, 이 자유의 나라는 바로 영화입니다”라고 말했던, 영화의 영광과 자부심, 승리를 스스로 증명한 존재였다. (지난 7월 31일 잔 모로 작고 후 프랑스 현지에서는 언론들의 추모 기사와 지난 인터뷰 기사들이 계속 쏟아져나오는 중이다. 그 내용을 파리에 있는 김나희 클래식음악평론가가 1인칭 화법으로 재구성했다.-편집자) 이렇게 바 안에 들어가는 것, 이런 장소 모두 참 익숙해요. 제가 연기했던 인물들이 자주 이런 바 안에 있었죠. 루이 말 감독은 저와 음악에 대해 자주 말했어요. 우린 마일스 데이비스의 음악을 자주 들었죠. <사형대의 엘리베이터>를 찍는 도중 마일스 데이비스와 연락이 닿아서 루이 말은 전화로 영화 스토리를 말하고 ‘우리가 촬영을 거의 다 했으니까 음악을 맡아달라’고 했어요. 마일스는 작곡을 하지 않는다고 답했죠. 그래서 루이는 이제 편집본이 나오면 그걸 보고 음악을 만들어주면 된다고 했어요. 결국 샹젤리제 거리 부근의 스튜디오에 마일스 데이비스가 왔어요. 샹젤리제 마리냥 영화관이 있었고, 거기에 스튜디오가 있었어요. 마리냥의 가장 큰 관이었고요. 마일스는 그와 함께할 뮤지션을 다 고른 상태였어요. 우리는 영화를 보여줬어요. 영화를 보고 나서 마일스는 루이와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죠. 딱 봐도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아서 먹을 것들을 찾으러 갔어요. 간단한 요깃거리와 음료수를 가지고 돌아왔어요. 그다음에는 계속 거기 함께 있었어요. 다음날 새벽 5시까지 이어진 그 녹음 세션을 다 지켜봤어요. 마일스의 트럼펫 소리가 들려왔으니까요. 그 장소를 벗어날 수 없었죠. 마일스를 위해 영화를 멈췄다가, 다시 틀고, 또다시 틀었어요. 한꺼번에 다 녹음되지 않았던 터라 그랬죠. 마일스는 한 주제를 즉흥적으로 만들어냈고, 그 테마를 바탕으로 곡이 이어져서 나왔어요. 그래서 다시 영화를 틀었고, 또 멈췄고, 또 마일스가 즉흥연주를 만들어내고, 다시 곡이 이어져서 나오고…. 그렇게 영화 한편 전체의 음악이 완성된 밤이었어요. 저는 그 순간을 지켜보면서 마치 손님 접대를 하는 여주인처럼 모두를 위해 음식과 마실 것들을 가져다 날랐어요. 창작이라는 게 그런 식으로 하룻밤 사이에도 가능한 것이 아닐까요? 본능적으로 이미지에 맞춰 즉흥적으로 탄생된 음악들은 유일한 무엇이었어요. 저에게 어디에서부터 연기가 시작되는지 묻는다면, 거의 모든 것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말할 거예요. 우리가 읽어야 하는 대본, 어떤 시선, 내면의 감정, 일상에서는 절대 입을 일 없으나 영화에서는 입어야 하는 특별한 의상들, 거의 모든 것에서 시작돼요. 카메라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 스탭들 혹은 함께하는 배우들과의 물리적인 거리, 촬영 당시의 춥거나 더운 날씨일 수도 있고요. 그게 어떻게 어디에서 시작되는지 정의 내릴 수가 없어요. 이런 정의할 수 없음이 결국 인물들에게 생명력을 불어넣어요. 저는 한번도 주의 깊게 어떻게 인물에 몰입했는지 생각한 적이 없는데, 저를 둘러싼 모든 것들로부터 시작되었던 것 같고, 매번 영화마다 달랐어요. 한번도 같은 적이 없더군요. 의심의 여지없이 배우가 된다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닐까요? 연기를 한다는 것은.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와닿는 그 순간으로부터, 우리는 전혀 아는 거 없이, 뭐 하나 그냥 무심하게 지나치게 되는 것 없이 그냥 모든 것이 다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모든 것이 필름에 다 담기고 인화되니까요. 그 모든 것들이 관객에게는 아무리 사소한 것에 지나지 않더라도 다 의미를 지니는 무언가가 되니까요. 감독이 나서서 관객의 시선을 잡아두겠다고 의도한 거죠. 그가 렌즈를, 배우를, 그 영화에 접근하는 특별한 그만의 측면들을 다 선택했고요. 이런 날에는 카메라를 이렇게 움직이고, 또 다른 날에는 어떤 색을 강조하고, 다르게 움직이고요. 어느 순간 우리는 주의력을 잃게 되고, 작품 속으로 들어가고 있던 길의 중간에, 가던 길을 돌아 나와버려요. 더이상 그 인물이 아니게 되는 거죠. 이게 ‘춤’의 느낌을 줘요. 인물이 입체적으로 변화하죠. 저는 단 한번도 인위적으로 목소리를 낸다거나 트레이닝을 한 적이 없어요. 목소리는 바로 저 자신이니까요. 저처럼 변화무쌍하고 자주 달라지죠. 제가 우울해하거나 화가 나 있거나 장애물에 부딪히거나 한다면 제 친구들은 전화기 너머에서도 바로 알아요. 제 목소리는 만들어진 것이 아니니까. 그거 아세요? 감정이라는 것은 우리의 내면이고, 목소리라는 것은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자 한 인간의 어떤 측면이죠. 흔히들 눈이 영혼의 거울이라고들 하잖아요. 목소리는 감정이 비치는 현상이에요. 우리가 이런 면을 다 인식하고 있지 못하더라도 정말 중요한 거죠. 만들어진 가짜 목소리로는 어떤 것도 통하지 않아요. 정치인들을 보면 알잖아요. 텔레비전에 나와 만들어진 목소리로 말하는 그들을 볼 때마다 정말 놀라워요. 만약 정치인들이 배우가 된다고 가정해보죠. 그들은 어떤 역할도 소화해내지 못하고 바로 잘릴걸요. 만들어진 목소리로만 말하니까 어떤 것도 우리의 내면까지 와닿지 않을 거예요. 거짓된 목소리는 정말 끔찍하죠. 그거 아세요? 설령 투박하더라도 진실함은 결국 통해요. 거짓은 우리가 긍지를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위대한 배우들이 가진 그들만의 힘이 있다면 바로 이거예요. 그 순간, 바로 그 순간의 진정성이요. 결국 다 통하고 설득력을 갖게 하고야 마는 그 지점이죠. 그게 어떻게 통하는지, 왜 설득력을 갖는지 설명할 수도 없고 왜인지도 모르지만 우리 모두 그가 연기하는 인물에게 빨려들어가고 그렇다고 믿게 돼요. 그게 손짓일 수도 있고, 미세한 얼굴 근육의 움직임일 수도 있고, 특유의 몸짓이나 눈빛일 수도 있어요. 목소리의 높낮이, 그 목소리에 담긴 어떤 음악 때문이거나 그 순간의 호흡이나 숨소리, 윙크나 슬쩍 움찔대는 거, 어쩌면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한 어떤 것들 때문에 가능하죠. 위대한 예술가들이 지닌 힘에 대하여 빌리 홀리데이는 정말 특별한 가수였어요. 조셉 로지 감독과 만났을 때 제가 직접 빌리 홀리데이를 선택했어요. 당시에 저는 브르타뉴 지방에 샤토 드 빌로라는 성을 한채 빌려서 지내고 있었어요. 그곳은 모두가 꿈꾸는 그런 성은 아니었고, 아름다우면서도 사람들을 겁먹게 한달까 두려움을 주는 장소였어요. 조셉 로지라는 이름을 당시에 저는 잘 몰랐고, 그의 영화들에 대해서도 거의 아는 바가 없었어요. 그가 브르타뉴로 와서 저와 함께 일주일을 보냈어요. 그는 계속 다음 영화의 주 무대가 될 바에 대해 말했어요. 그 일주일은 거의 미친 시간이었어요. 우리는 거의 같이 시나리오를 썼어요. 제가 끝없이 아이디어를 꺼내놓았어요. 여주인공이 어떤 인물인지, 어떤 아이로 태어나 유년기를 어떻게 보냈는지, 그녀의 첫 성경험은 어땠는지, 그녀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녀를 둘러싼 사람들은 어떤지…. 그 시간 동안 우리는 내내 빌리 홀리데이 음악을 들었어요. 그때 제가 빌리 홀리데이를 듣기 시작한 지 5년쯤 되었을 때였고, 완전히 반해 있었으니까요. 결국 영화 <에바>(1962)의 장면과 장면 사이에 빌리 홀리데이를 넣기로 했어요. 빌리 홀리데이는 뭐랄까, 식물과도 같은 가수예요. 그녀는 음악의 바깥에서 존재하고 있는 다른 가수들과는 완전히 달라요. 뿌리를 내리는 식물처럼 그 안에서 살죠. 사랑의 고통과 잔인함, 그녀가 살아냈으므로 알고 있는 것들을 노래로 다시 꺼내놓아요. 그녀 스스로 평생 사랑을 찾아 헤매던 사람이라 그랬을지도. 온몸을 두드려 맞은 것처럼 그녀의 목소리는 듣는 사람을 완전히 뒤흔들고 지나가요. 그렇게 사랑의 경험이 우리에게 남긴 기억을 환기시켜요. 그 앞에서 우린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요. 그녀의 노래들 자체가 완전히 첫눈에 반해버리는 과정과 고스란히 닮아 있어요. 아름다운 사랑 노래는 더이상의 것이 필요 없어요. 그 자체로 사랑을 이해하기에 충분해요. 우리가 어떤 노래에 반하듯, 서로가 서로를 알아차리고 인식하고 스쳐서 지나가버리죠. ‘유혹’의 과정이 그러하듯이 말이에요. 그녀가 다른 가수들과 구별되는 지점을 두고 미국에서는 다들 토치송(Torch Song)이라고 말했어요. 토치, 우리의 심장을 불태워버리는 사랑의 고통, 그걸 꺼내놓는 게 미국 재즈 특유의 어법이었죠. 그게 그녀가 취했던 마약, 술, 삶의 굴곡진 지점들 때문에 더 강조되었던 것 같아요. 목소리가 완전히 부서져버렸달까. 약에 흠뻑 취해 있었거나 아니면 금단증상에 시달릴 때였나 잘 모르겠지만 그렇게 부서져 있던 시간이 역설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죠. 인간 존재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순간이니까. 그게 우리를 갈가리 찢고 지나가요. 심장과 영혼이 찢겨나가는걸요. 그 순간을 그저 음악으로만 듣는 데도 고통이 전해져서 숨쉬기가 힘들어져요. 그런 노래를 불렀던 그녀가 느낀 고통은 어떤 종류의 것이었을까요. 그래요. 우리는 그 고통이 지나간 흔적을 지켜보는데 그치는 거니까 모두가 그런 고통을 경험할 필요는 없어요. 바로 그거겠죠. 예술가가 필요한 이유는요. 엑소시즘(악령 퇴치)이 된달까. 생의 고통을 미리 경험해서 쫓아주는 역할이랄까. 그렇게 찢겨짐과 파멸의 가장 극단에 가닿는 사람, 환각과 광기, 고통을 가장 멀리까지 가서 경험하는 사람, 우리의 삶에서 우리를 따라다니는데 대체 왜인지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설명되지 않는 감정들을 경험하고 묘사하는 사람, 우리 내면에서 감정적으로 뭔가가 마구 폭발하고, 우리의 존재를 할퀴고 상처내서 우리가 피흘리는데, 그런 걸 대신 경험해주는 역할을 해요. 마치 엑소시즘처럼 말이에요. 그래서 예술가들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예요. 배우가 된다는 것에 대하여 배우가 된다는 것은 남들과 다르게 사는 걸 받아들이는 거죠. 그 값을 치르고요. 배우가 되어 누리는 만큼의 대가겠죠. 저는 관객이 영화를 보면서 영화 속 인물들을 통해 어떤 순간을 살아낼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좋은 일이자 꼭 필요하다는 걸 알아요. 그걸 설명은 못하겠어요. 정말 신비로운 과정이죠. 이걸 설명한 단어도 없고, 그 과정도 이성적으로 단계적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에요. 제가 표현해 낼 수 있다고 믿는 것들을 말로는 설명할 수 없을 때가 많아요. 배우들은 타인에 의해 평가를 받아요. 외모에 의해, 우리가 한번 배우가 되겠다고 결정을 내린 다음에는 우리의 목소리에 의해, 성격으로, 그리고 한순간, 우리는 우리가 지금까지 연기했던 인물들을 관통해서 새로운 누군가가 되죠. 그러니까 아무 역할이나 마구 해서는 안 돼요. 제가 지금 돌이켜 20살의 저를 떠올리면 지금의 저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는 게 보여요. 20살의 잔 모로는 제가 분명하지만, 더이상 제가 아니에요. 어쩌면 배우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다 비슷할 것 같아요. 10살에 어땠는지 스스로를 돌아보면 현재의 나와 같은 사람이 있을까요? 우린 지금 설명할 언어가 없는 걸 자꾸 말로 하려고 하네요. 하녀 역할도 해봤고, 속물의식에 젖은 젊은 여자 역할도 해봤고, <줄리에타>(1953), <여왕 마고>(1954) 같은 작품들에서 다양한 역할들을 이미 소화했었죠. 노래도 불렀고, 아직도 그 노랫말이며 노래를 불렀던 생 제르망 데 프레 부근의 바도 다 생각이 나요. 사람들은 저에게 함께한 위대한 거장 감독들에 대한 질문을 던지면서, 상대적으로 좀 덜 유명한(위대한) 감독들과의 작업은 언급하지 않는데 사실 저는 그 모든 역할들을 다 기억해요. 저에게는 감독의 유명세와 상관없이 다 똑같이 소중했죠. <사형대의 엘리베이터>를 찍고 나서 저는 루이 말과 함께 <연인들>을 찍었어요. 그때 이미 트뤼포에게서도 연락을 받았죠. 저는 루이 말을 알기 훨씬 이전에 이미 오슨 웰스를 알고 있었어요. 1951년 코미디 프랑세즈에서 만났어요. 그는 나와 함께 작품을 하고 싶어 했죠. 그가 에드워드 7세 극장을 맡으면서, 그는 제가 코미디 프랑세즈를 관두는 김에 <오셀로>(1952) 속 데스데모나를 맡아줬으면 했어요. 사람들은 제가 영화의 성공으로 쉽게 감독들을 만났고, 역할을 제안받았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에요. 저는 감독들을 이미 알고 있었어요. 제가 무대에서 연기하는 걸 보러 왔었으니까. 제가 연극으로 시작한 걸 잊지 말아야죠. 저는 사실 영화배우가 될 생각은 없었어요. 우선 영화를 좋아하지도 않았고, 많이 보지도 않았어요. 영화가 뭔지 제대로 알지도 못했어요. 무대 위 여배우가 되는 게 꿈이었어요. 고전 속 여주인공 역할을 꿈꾸면서요. 사라 베르나르 같은 그런 전설로 남은 여배우요. 연극은 이미 저희 부모님에게는 너무 험한 예술이었죠. 오랫동안 프랑스에서, 특히 파리에서 가톨릭의 영향으로(프랑스의 종교 중립은 1905년에 선포되었다) 수세기에 걸쳐 연극배우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인정받지 못했고, 성당에서 성인이 세례를 받거나 신부님 앞에서 결혼을 할 수도 없었고, 공동묘지에 묻히는 것도 금지되어 있었어요. 영화는 너무 새로운 장르라 연극보다도 못한 평가를 받았어요. 저희 부모님 세대에는 그림을 콜라주화한 것에 불과하게 여겨졌고요. 시와 노래와 음악이 하는 일에 대하여 누군가는 제가 손쉽게 음악을 했다고 하지만 사실 음악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에요. 주변 사람들은 일상이 음악에 둘러싸여 있거나 거의 듣지 않기도 하고요. 음악이 우리를 방해하는 소음이 되는 경우도 얼마나 많나요? 사실 제가 음악에 방해받을 때마다 놀라고는 해요. 그래도 음악에는 마법 같은 힘이 있어요. 천상에서 내려오는 것같이 우리를 어디론가 데려가요. 일상에 지쳐 있다가도 갑자기 어떤 음악 하나로 완전히 구원받는 기분이 들고는 하잖아요. 그건 음악이 가진 진실함에서 기원해요. 진실함이 아니면 설명할 수 없어요. 어떤 노래의 가사들은 고스란히 ‘시’가 될 때가 있어요. 그 시로 인해 음악은 더욱 특별해지고 위력을 갖죠.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말할 때 그녀는 마치 시를 쓰듯 그렇게 말했어요. 정말 경이로운 사람이었죠. 그녀의 소설 속 인물들이 매우 놀라운 존재들인 것처럼요. 가장 놀라운 것은 그녀의 소설 속 인물들이 말하는 방식인데, 일상에서는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 않아요. 흔히 사람들은 ‘이게 뭐야? 사실성이 없네?’라고 말해요. 맞아요. 현실과는 동떨어진, ‘사실적임’을 뛰어넘는 말투예요. 예언자와도 같이 초현실적이면서 동시에 아주 내밀한 목소리를 들려줘요. 설명을 통해 제가 뭔가를 표현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 분명하고, 실체가 있고, 감각적으로 느끼도록 노력할수록 제 내면에서는 감정들이 마구 끓어오르죠. 제가 살았고, 살아낼 것이고, 현재 살고 있는 그 순간의 감정들이요. 다 전해지지는 않지만요. 그래서 망원경이라는 단어로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문체를 설명하는지도 몰라요. 저는 말하면서 문장을 균형감 있게 프레이징하듯 구성하지만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써낸 인물들은 그런 걸 하지 않아요. 그들은 인생을 뒤흔든 커다란 위기를 경험하고, 그다음의 위기를 준비하는 듯한 사람들이에요.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그런 사람들의 내면의 목소리를 우리로 하여금 듣게 해줘요. 사실 우리 내부에는 얼마쯤 다 있는 건데 잘 모르고 지나가버리기 쉬운 걸 발견하게 해주는 거예요. 당연히 우리는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인물들에 대해 이야기할 수가 없어요. 우리가 메트로나 카페 같은 일상의 공간에서 마주칠 수 있는 인물들이 아니니까요. 현실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존재하는 그들이 우리를 한없이 괴롭게 하고, 고통받게 하고, 생각하게 하죠. 가장 역설적인 방식으로 소통할 수 없는 것, 말해질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하는 거예요. 일상적인 단어를 가지고 우리를 고뇌하게 하고 산산이 찢어버리고 파괴하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에요. 익숙하지 않은 자세를 취하고 낯선 구도로,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면서 그 어려운 일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 위대한 시와 노래와 음악은 그걸 가능하게 해줘요.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문장도 그래요. 저는 아주 많은 사람들이 같은 일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예술가들은 사실 도둑들이나 다름없어요. 도둑보다는 사기라고 해야 할까요. 영화에도 당연히, 사기꾼들이 있어요. 어떤 특정한 설정들이 엄청난 감정들을 가져온다는 걸 사람들을 미친듯이 웃게 한다는 걸 알고 있죠. 설정들을 고려해 시나리오를 써내고 영화를 찍어요. 안전하게 적당한 구도를 잡고, 편집으로 리듬을 조절하고, 시퀀스를 만들고 이런 영화들이 영화의 수준에 상관없이 쉽게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기도 하죠. 또 다른 영화는 절박함, 이 시점에 세상에 꼭 나와야 하는 위급함을 가지고 만들어진 영화들이에요. 진정성이 있으니까 결국 통하죠. 이 위급함은 분리할 수 없는 요소예요. 이렇게 만들어진 영화들은 사람들에게는 언뜻 낯설고 덜 매력적이라 관객의 인정을 좀 늦게 받아요. 사기꾼들은 곳곳에 숨어서 “이게 뭐야? 이상해! 이해가 안 가!”라고 말해요. 하지만 장담건대 18개월쯤 지나서 이 사기꾼들이 바로 이상하다고 했던 바로 그 부분을 가지고 슬쩍 다른 방식으로 비틀어 그들의 영화에 바로 써먹는걸요.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아방가르드함을 두고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요. 할리우드의 감독들이 어떤 특정한 시대의 프랑스영화에 홀딱 반해 있었던 건 정말 놀라워요. 당시 아방가르드 물결에 앞장서 있던 영화들을 통해 그 새로운 영토를 발견함으로써 새로움이 우리를 신선한 공기로 호흡하게 해줬어요. 아방가르드를 손가락질하던 이들이 나중에 결국 아방가르드를 차용한 걸 두고 사기였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아요. 누구든 우리 스스로를 먹여살릴 이유가 있죠. 만약 어떤 위대한 배우가 엄청난 연기를 하는 걸 본다고 가정해볼까요. 누구든 그걸 보면 연기가 하고 싶어질 거예요. 거기에 깃든 진정성은 숨어 있는 자들의 질투와 폄하로 훼손되지 않아요. 역시 진정성을 가진 사람들에게, 그 가치를 알아볼 수 있는 이들에게 가닿아서 의미 있는 울림이 되죠. 세상에 거짓이 얼마나 만연해 있나요. 누군가 제 앞에서 거짓말을 한다면 저는 상대가 진실하지 않다는 걸 금방 알아차려요. 진정성을 갖기 위해 평생 애를 썼으니까요. 나르시시즘에 기반한 만족감은 사실 배우의 커리어 초반에 시작되어 늘 배우들을 따라다니지만 곧 다른 것들을 알게 되죠. 단순히 우리가 스스로를 타인들의 시선에 노출하면서, 스스로를 보여주면서 느끼는 만족감이 다가 아니에요. 어떤 예술이든 장르에 상관없이, 창작에 있어서 깊이가 더해질 때, 수직 방향으로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존재를 아주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 탐구하게 돼요. 동시에 스스로를 가로질러서 다른 것들을 찾아가게 돼요. 그러니 나르시시즘은 일차원적인 감정이라 금방 초월하게 돼요. 영화 속 여성들의 역할에 대하여 저는 누구나 영화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스탭들이 필요한 건 맞죠. 예산이 있다면. 시나리오를 쓸 작가에게 시나리오를 사고, 그 돈을 낼 수만 있다면. 그다음 이미지들에 도전하면 되죠. 만약 당신이 영화를 창조한다는 그 사실에 대한 집착과 폐쇄성을 버리지 못한다면 어렵겠지만요. 영화에서 의미 있는 여성 캐릭터들은 지금까지 위대한 영화의 존재 가치를 더욱 빛내준 여주인공들의 역할과 같아요. 그런데 최근 들어 점점 여주인공들이 설 자리가 사라져가고 있어요. 더이상 영화에서 여성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아요. 제가 여배우로서 말하는 건데 아주 많은 영화들이 폭력적인 세계를 그려내기 위해 만들어지니까요. 폭력을 다루지 않는 영화는 에로티시즘에 천착하면서, 여기서도 역시 여성의 역할은 그저 대상화되어 줄어들어 있어요. 영화가 가장 빛나던 시대, 전성기의 할리우드나 누벨바그의 여주인공들은 이렇게 사용되지 않았어요. 처음에 그저 영화 속 인물들을 연기할 때에는 사실 그 캐릭터 속에 망명해 있는 거나 다름없어요. 가상의 인물 속 그림자에 숨어 있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겨우 깨닫게 되는 거죠. 캐릭터들을 연기하면서 타인들을 이해하기 쉬워진다는 걸요. 결국 배우가 마지막에 가서 드러내는 것은 영화 속 인물이 아닌 스스로예요. 우리는 그제야 우리가 타인에 대해 행하고 있는 이 매혹적인 일이 의미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요. 아주 깊게 통찰하는 것, 이해하고 그 내면까지 온전히 아는 것, 그건 배우인 저에게 가장 중요한 평생의 숙제였어요. 어쩌면 오늘날까지도 제 앞에 놓여 있는 것.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혈흔

※<살인자의 기억법> <윈드 리버>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발레리안: 천개 행성의 도시>의 데인 드한은 올 들어 가장 이상한 캐스팅이다. 그가 연기하는 발레리안은 자칭 마성의 바람둥이로, 사귄 여자들의 목록을 ‘플레이리스트’라고 부르며 영화에 등장하자마자 로렐린(카라 델러빈)에게 대뜸 구혼을 한다. 이런 역을 성립시키려면 뻔뻔한 카리스마- 가령 톰 크루즈나 해리슨 포드 같은- 가 필요한데 그것은 데인 드한의 사전에 없는 자질이다. 이 영화에서 데인 드한의 발성은 곧장 키아누 리브스의 둔탁한 대사연기를 연상시킨다. 특히 조종간을 잡은 로렐린에게 간섭하는 장면에선 판박이다. 드한의 캐스팅을 납득하는 길은, 뤽 베송이 전통적 마초 남성 영웅의 공식을 해체하려 했다고 믿는 것이다. 베송은 이번 영화에서 진주족의 외양을 중성적으로 디자인하고 황제 목소리를 엘리자베스 데비키에게 맡기기도 했다. 하긴 그러고보면 엄청난 능력을 지닌 이 영화 속 다양한 우주 종족들 가운데 왜 지구인이 여전히 중심인지도 설명하기 힘들긴 하다. 08/28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에서 많은 사람을 살해한 김병수는 죽이고 싶었지만 참고 살려둔 자들을 회상하며 “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사는 사람이 어딨나”라는 작고한 부친의 말에 공감의 한숨을 쉰다. 문제의 부친은 가정폭력범이었는데 소년 김병수는 아버지를 살해한 후 재능을 발견해 꾸준히 살인했다. 김영하 작가가 쓴 소설에서 주인공의 동기는 “나는 더 잘할 수 있을 거야”라는 ‘장인적’ 집착이다. 소설의 김병수는 규범을 벗어난 일종의 방외인(方外人)이다. 반면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에서 원신연 감독은 김병수(설경구)를 상식의 영역 안에 넣는다. 그의 동기는 정의구현으로, 자기가 사회를 좀먹는다고 판단한 악인들을 제거한다.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에서 알츠하이머는 평생을 속박한 살인의 의지로부터 인물을 풀어주는 구원이기도 하다. 그러나 해방감도 잠시, 기억상실을 안고 불가피하게 살인을 재개한 김병수는 심연을 마주한다. 내가 누구인지 죽여야 할 상대가 누구인지, 나침반을 잃어버린 그의 위기는 외적 파국이자 내적인 소멸이다. 그러나 영화의 김병수는 끝까지 해체되지 않는 주체다. 그는 관객이 동일시해 목적 달성 여정을 동반하는 고전적 영웅이다. 영화의 김병수에게는 애초에 “나쁜 놈들만 죽였다”는 정당화의 변이 있고 민태주(김남길)라는, 기억의 유실에도 불구하고 의심할 수 없는 확고한 적수가 있다. 관객이 김병수에게 동일시해도 괜찮은 이유로 영화는 핏줄도 안 섞인 딸을 끝까지 보호하려는 가족애를 제시한다(“내 딸만 손 안 대면 네가 뭘 하건 상관 안해”). 아버지의 정체와 그가 어머니에게 한 일을 깨닫고 (당연히) 저리 가라고 거부했던 착한 딸(설현)은 에필로그에서 용서하는 얼굴로 문병 온다. 마치 이 남자에게 아버지로서 자기를 보호하길 허하는 ‘고!’ 사인 같다. 결국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은 제 가족에게는 따뜻한 가엾은 악인과 훨씬 구제불능인 사이코패스의 관습적 싸움으로 귀결되어버린다. 소설에서 주인공의 기억과 세계는 불가분의 관계이며 살인 행위로 연결돼 서로를 구성하는 재료를 공급한다. 영화에서 세계는 강고하고 기억상실은 인물을 방해하는 핸디캡이 되는 데에 그친다. 남성 주체의 자아는 너무도 지우기 어려운 무엇이다. 09/06 <윈드 리버>를 밀어가는 엔진은, 와이오밍주 원주민 보호구역에서 일어난 두건의 강간살인사건이다. 야생동물 보호국 소속의 토박이 포식동물 사냥꾼 코리(제레미 레너)는 아메리카 원주민 아내와의 사이에 둔 맏딸을 잃었다. “완벽한 나의 세계 속에는 풀밭이 하나 있다”라는 시를 쓰는 아이였던 딸은, 눈밭에서 알 수 없는 누군가로부터 달아나다가 맨발로 죽었다. 3년 후, 가축을 해치는 퓨마를 추적하던 코리는 죽은 딸과 단짝이자 친구의 딸인 나탈리(켈시 초)의 얼어붙은 시신을 발견한다. 누군가로부터 달아나다가 폐가 터져버린. 코리는 이윽고 사냥할 포식동물이 네발 짐승만이 아니라고 결심한다. 사건 발생 장소가 보호구역이기에 파견된 FBI 수사관 제인(엘리자베스 올슨)은, 테일러 셰리던 감독이 쓴 전작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의 케이트(에밀리 블런트)처럼 나이브하지만(그녀는 바람막이 차림으로 눈밭에 타이어를 공회전시키며 등장한다) 선의를 품은 아웃사이더다. 피해자도 추격자 중 한명도 여성이지만 <윈드 리버>는 궁극적으로 ‘괴물’에게 딸을 잃은 아버지들의 애도와 복수를 그린다. 제인은 인상적인 주역이지만 영화는 그녀에 대해 알 듯 말 듯한 지점에서 더 들어가지 않는다. 유사한 환경에서 성장했다는 테일러 셰리던 감독이 묘사하는 와이오밍의 이 지역은 기실 모두가 모두로부터 달아나고 싶어 하는 곳이다. 오래전 인디언들의 땅을 빼앗고 억만장자가 다시 백만장자를 몰아낸 자리에서 개발은 계속되고 있다. “여긴 아무것도 없어. 여자도 없고, 여흥도 없고 눈만 계속 쌓이잖아.” 타지에서 온 백인들은 변방 생활의 권태와 욕구불만을 지역 여성들을 향한 폭력으로 해소한다. 셰리던은 역시 시나리오를 쓴 <로스트 인 더스트>에서와 마찬가지로 법에 호소하기보다 피해자의 상처를 달랠 수 있는 딱 맞는 방법을 법 밖에서 찾아 고독한 늑대의 태도로 밀어붙이는 방법을 택한다. 범죄 플롯과 금융자본이 휩쓸고 간 현대 미국의 스케치, 유장한 정서가 균형을 이룬 <로스트 인 더스트>에 비해 <윈드 리버>는 훨씬 감정적이다. 보호구역 주변 지역의 사회·경제적 조건과 문화, 아메리카 원주민 여성들이 성폭력 앞에 더 취약할 수밖에 없는 구조에 대한 코멘트는 생략돼 있다. 살인 미스터리는, 해결이랄 것도 없는 압도적인 샘 페킨파풍의 총격전과 플래시백으로 순식간에 풀리고, 영화는 무고한 죽은 자와 비운의 땅을 애도하는 자리로 허위허위 돌아간다. 09/07 쌍용자동차 노동자 김정운씨는 2009년 구조조정과정 대상에 해당되지 않았지만 무더기로 정리해고된 동료들과 연대하며 투쟁을 시작했고 싸움은 하염없이 길어졌다. 어른들이 싸우는 동안 아이들은 어김없이 자랐다. 한영희 감독의 다큐멘터리 <안녕 히어로>는 아빠가 감옥에 간 2009년 봄부터 복직한 2016년까지 맏아들 현우의 9살부터 15살을 관찰과 인터뷰로 기록한다. 두 아들은 아직은 옥살이를 한다는 사실이 반드시 죄를 지었다는 의미는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기엔 어리다. 현우의 가족은 평범한 듯 결코 평범하지 않다. 부부는 일상적으로 어린 두 아들을 텔레비전 앞으로 불러앉혀 아빠의 싸움과 관련된 뉴스를 보게 하고 현장에 데려간다. 아이들이 품는 궁금증과 의구심에 귀를 기울이며 본인조차 정답을 모르는 문제에 대해서도 최대한 솔직하게 설명한다. 아빠와 엄마가 옳은 일을 하려고 고생하고 있으니 참아야 한다고 다그치지 않는다. 이 담담한 태도는 소년을 스스로 조용히 생각하게 만든다. 아이들의 반응과 고충은 어른들의 염려하는 바와는 사뭇 다르다. 현우는 선거에 입후보한 아빠 동료의 포스터 앞에서 “노동자로 선수교체”라는 슬로건이 틀렸다고 말하는 친구들을 반박하지 않는다. 뭐, 주먹을 부르쥐고 입술을 깨물며 참는 것도 아니다. 평범한 또래들이 그렇듯 현우가 제일 꺼리는 일은 남다르게 보여 일대일 면담에 호출되는 것이다(“이상한 애로 안 보이면 그걸로 돼요”). 장래희망도 특이한 직종을 썼다가는 발표를 시킬까봐 조심한다. 표정을 도무지 읽을 수 없는 시기에 접어든 10대지만 영화는 김현우라는 개인의 성품을 서서히 드러낸다. 현우는 상냥함을 타고난 아이다. 이기적 불만이라고는 투쟁이 시작된 후 아빠가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줄어서 같이 놀 기회가 적다는 정도다. 소년의 근심은 주로 부모를 향한다. 몇년이나 추운 곳에 서 있는 아빠가 안쓰럽고, 예전에 장난감을 졸라서 사지 않았으면 통장 잔고가 얼마일까 헤아려본다. 심지어 선거운동이 시작되자 막연해 보였던 아빠의 고생에 가시적 목표가 생겨서 좋다고 안도한다. “나중에 후회하지 않도록 하고 싶은 것 다 하게 해주고 싶어요.” 부모가 아이에 대해서가 아니라 아이가 부모에 대해 하는 말이다. 영화가 끝나기 8분 전에야 현우는 아빠와 영웅이라는 두 낱말을 이어서 쓴다. 아빠는 분명 특별하다. 하지만 소년은 아빠처럼 되겠다고 말하지 않는다. “용기를 주는 약이 있다면?”이라는 감독의 질문에 현우는 위험한 지경에 뛰어들어 오히려 둘 다 죽을 수 있으니 약을 버리겠다고, 아니면 (더 훌륭한) 딴 사람에게 약을 넘기겠다고 대답한다. 아이들은 입력한 대로 출력되는 수식이 아니다. 우리는 다음 세대를 염려하되 이끌 생각은 하지 않는 편이 낫다. 한영희 감독은 이미 그 점을 잘 알고 있다. 좋아요 내 어머니의 모든 것 <우리의 20세기>의 도로시아(아네트 베닝)는 인류학자의 표정으로 본인의 장년과 10대 아들의 성장을 관찰한다. 아들을 무척 사랑하고 행복을 원하지만, 그것을 어렵게 만드는 세상사에도 호기심을 거두지 않는다. 영화 초반 슈퍼마켓 주차장에 세워둔 차가 발화하는 장면에서 도로시아의 얼굴에는 경악과 동시에 강 건너 불 구경하는 흥분이 스쳐간다. 아들이 결석사유서 서명을 위조했다는 사실을 학교에서 통보받아도 감쪽같은 솜씨에 감탄부터 한다. 도로시아는 세입자들과 가족처럼 살며, 다양한 사람을 초대해 파티를 즐긴다. 그것이 아들을 잘 키우는 길 중 하나라 믿는다. 그녀는 본인의 고독과 어려움에 집착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모색하고 기웃거리는 50대 여성이다. 지적이고 관대하며 쓸쓸한, 세월과 화해한 자연스런 아름다움. 배우 아네트 베닝의 현재 얼굴이기도 하다.

<돈의 신> 가수 이승환 - 적어도 정의롭게 살았다는 자부심이 있다

언제부터인가 그의 음악은 길고 긴 투쟁의 현장에 열기를 불어넣었다. 광우병 촛불 시위(2008년), 용산참사 유가족 돕기 콘서트(2009년) 무대에 올랐고 제작 난항을 겪던 영화 <26년>(2012)에 투자자로 참여해 힘을 더했으며 세월호 참사 추모곡 <가만히 있으라>(2015)를 내놓아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을 위로했고 공연 <한쪽 눈을 가리지 마세요>(2015)를 직접 열어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다. 그리고 지난겨울,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태 때 국민들의 힘겨운 겨울나기에 든든한 힘을 보탰다. 그런 그가 얼마 전 싱글 앨범 <돈의 신>을 발표해 음원을 무료로 배포했다. <돈의 신>은 주진우 기자의 ‘MB 프로젝트’ 일환으로, 이명박 전 대통령을 풍자한 곡이다. 최근 들어 좀처럼 인터뷰를 하지 않았던 이승환은 “주진우 기자의 취재와 그가 출연한 영화 <저수지 게임>을 응원하기 위해서 나오게 됐다”고 말했다. -<돈의 신>이 MBC에서 방송불가 판정을 받았는데. =예상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위한 헌가 <함께 있는 우리를 보고 싶다>를 발표한 날, 미리 잡혔던 MBC 녹화가 취소된 적도 있다. 그럼에도 이번 파업은 참여율이 좋고, 영화 <공범자들>도 개봉해 여론이 과거처럼 외면하는 상황이 아닌 것 같아 긍정적인 결과를 기대하고 있다. <돈의 신>은 SBS 라디오에서 많이 틀어주고 있다. -매일 페이스북 페이지를 통해 열심히 홍보하고 있던데. =미디어들이 반응이 없으니까. 포털 사이트는 아예 처음부터 메인에 노출해줄 수 없다고 했다. 유튜브와 지니뮤직을 합쳐 뮤직비디오 조회 수가 9월 4일 현재 약 49만5천건에 이른다. -주진우 기자의 MB 프로젝트에 함께한 이유가 무엇인가. =인생에 두번의 큰 사건이 있었는데 하나가 들국화 공연을 보며 음악을 직업적으로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일이다. 정치에 관심이 없었던 시절, 이명박이 대통령이 되겠다며 후보로 나서자 어떻게 그가 누구인지 모를 수 있을까, 스스로 너무 이상하다 싶었다. 그때 사회와 정치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그전에도 내 음악을 하고 있었지만 내 삶과 생각을 반영할 음악을 진정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거다. MB 프로젝트는 좋은 기회고, 당연히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2008년 광우병 촛불 문화제에 참여한 게 첫 집회 공연이지 않나. =음악을 하면서 돈을 벌면 좋겠지만, 나 스스로가 돈에 큰 관심이 없는 사람인 것 같다. 그게 나를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든다. 요즘은 아티스트의 능력이나 예술성이 아닌 오로지 돈을 기준으로 모든 가치를 평가하는 세상이 된 것 같다. 돈을 숭상하는 사람이 대통령이 돼 편법이나 범법으로 돈을 챙기고, 낙수효과처럼 국민들이 보고 배운 것 같다. 건물주가 아이들의 꿈이 된, 천박한 세상이 됐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다른 대통령과의 차이 중 하나가…. =완벽한 뻔뻔함이지. 하하하. -지위를 이용해 국가를 자신의 사업 수단으로 삼았다는 건데. =보수적인 집안에서 나고 자라 부산과 대구를 거쳐 서울 강남에서 학교를 다니면서 보수 엘리트의 과정을 두루 거쳐온 까닭에 (정치에 대한) 아무런 의식이 없었다. 그런데 그 아저씨가 나와 이상한 거짓말을 해대는 게 빤히 보이는데 사람들이 그것에 현혹되는 걸 보고 너무 놀랐다. 이명박은 내게 정치를 알려준, 의미가 큰 사람이다. 반대로 고 노무현 전 대통령에 관심이 전혀 없다가 퇴임 이후의 행보를 보고 대통령이 재직 때 했던 일들을 찾아보면서 좋은 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아, 내가 잘못 생각했구나 싶었다. -이명박의 존재가 지금도 견고한데 그를 풍자하는 음반을 내는 일이 두렵진 않았나. =(이명박은) 엄청 힘이 세다. 용산참사 유가족 돕기 콘서트에 나가기로 했을 때 공연 담당자를 통해 앞으로 공연장을 대관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연락이 온 게 가장 큰 위협이었다. 모든 것을 빼앗아가겠다는 얘기니까. 세무조사도 당했다. 진짜 꼼꼼하셨어. (웃음) -이명박을 풍자하는 가사가 재기 넘치고 재미있더라. =객관적이고 정확한 가사여야 해서 주진우와 함께 썼고 법률 자문을 받았다. 처음에는 세게 쓰고 싶었는데 곡 작업을 하다보니 풍자라는 게 선을 타는 재미가 있었다. -백종열 감독이 연출하고 주진우 기자가 이명박 분장을 하고 출연한 뮤직비디오도 인상적이었다. =신화와 관련된 컨셉이다. 백종열 감독에게 (주)진우가 무조건 나와야 하고, 이명박으로 분장하면 아이러니해서 더 재미있겠다고 싶었으며, (백종열 감독이) 콜라주를 시도하겠다고 하니 이명박 사진 열 몇장을 골라 넣어달라고 부탁했다. 레이어가 많아서 편집한 분이 고생을 많이 했을 것 같다. 음악적으로 이런 스타일을 구사할 수 있는 건 나밖에 없는 것 같다. 다행스럽게도 지난 5월 21일부터 일을 쉬고 있어서 시간이 많았다. 여자를 너무 안 만났으니까 10월까지 5개월 동안 소개팅을 해야지 하고 내린 결정이었다. (웃음) 그리고 내가 새 정부의 수혜를 받을 거라고 오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문재인 대통령의 더불어민주당 대표 시절, 국정 교과서를 반대하는 행사에 나와달라는 요청을 받았는데 특정 당이 주최하는 자리에 참석하기가 싫었다. 대선 때 지지하긴 했지만 말이다. 내 돈을 직접 투자해 국정 교과서를 반대하는 공연 <한쪽 눈을 가리지 마세요>를 열었다. 그만큼 특정 정당이나 정치 세력과 관련이 없는데 오해를 받느니 차라리 일을 잠깐 안 해야겠다 싶었는데 아무도 소개팅을 안 해주고. (웃음) 시간이 많아서 편집을 오래한 덕분에 곡이 잘 나온 것 같다. -주진우 기자가 출연한 영화 <저수지 게임>은 봤나. =언론에 공개되기 전에 봤다. 취재 실패담을 그린 영화인데 진우가 되게 껄렁거리더라. 아무래도 카메라가 따라다니니까 실제로 취재하는 것보다 멋지게 나온 게 아닌가 싶다. 류승완 감독과 여러 의견을 내기도 했는데 그걸 다 밝힐 순 없고. -박근혜 국정농단 사태 때 촛불 집회 무대에 올라 <세상에 뿌려진 사랑만큼> <물어본다> <폴 투 플라이> <덩크슛> <어떻게 사랑이 그래요> <가족> 등 총 6곡을 불렀는데. =공연을 가장 많이 하지만 텔레비전에 많이 안 나오다보니 사람들이 나를 잘 모른다. 그날 <덩크슛>을 불렀는데, 후렴구에 있는 가사 ‘주문을 외워보자/ 야발라바히야 야발라바히야’를 ‘주문을 외워보자/ 하야하라 박근혜 하야하라 박근혜’로 개사했는데 사람들이 멜로디를 몰라서 실제 음정과 다르게 불러 놀랐다. (웃음) 집회가 어렵고 무섭다는 생각이 안 들게 만들고 싶었고, 보다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오게 하는 게 의도였다. -대중가수로서 가진 영향력을 인간의 존엄과 세상의 정의를 지키는 데 활용하는 모습이 든든했다. =성향이 연예계에서 완전한 아웃사이더이자 꼴통이니까. 지금도 하는 얘기지만 아는 PD가 4명 밖에 없고, 아는 연예인도 4명밖에 없으며 연예계 매니저는 한명도 아는 사람이 없다. 25살 때 직접 앨범을 제작하고 매니지먼트를 하면서 지켜본 방송·언론쪽 아저씨들의 모습이 너무 안좋았기 때문이다. 촌지를 요구하고, 그걸 주지 않으면 ‘같이 사는 세상이야, 승환아’ 이런 얘기를 들어야 했고. 그때부터 이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겠다고 생각했다. 그 반감을 너무 많이 가져서 반골이 된 거다. 처음에는 ‘돈 때문에 음악 하는 게 아니야’라고 생각했다. 물론 중간에 돈을 벌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애원> 뮤직비디오를 찍을 당시 귀신을 조작했다는 루머가 돌았을 때 매니저나 제작자 같은 바람막이 하나 없이 많은 적폐들을 맞닥뜨리면서 그 사람들과 동화되지 않기 위해 튕겨져 나가야 했다. 사이가 워낙 안 좋았던 탓에 그들은 <애원> 뮤직비디오 사태가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처럼 보도했던 거다. -평소 후배 뮤지션들에게 대관료를 지원해주고, 수익금을 그들에게 돌려주는 ‘프리 프롬 올’(Free from All)을 운영해왔고, 최근에는 CJ문화재단과 함께 인디밴드 공연을 지원하는 프로젝트인 ‘프라지트’(FRAZIT)도 시작했는데. =지난 2년 동안 100개가 넘는 팀에 홍대에서 공연할 수 있도록 80만원씩 지원했다. 정의롭게 살아왔다는 자부심이 있다. 후배들을 도와주고 쓴소리도 아끼지 않는 역할을 하기 위해 숙명처럼 태어난 사람 같다. -후배들이 좋아할 것 같다. -지난해 인디신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으로 선정됐다(국제음악축제 잔다리페스타에서 올해 키워드를 ‘리스펙트’로 정하면서 ‘존중의 인물’로 이승환을 선정했다). 후배들에게 대놓고 얘기한다. 내 목표는 너희들한테 존경받는 사람이 되는 거야, 존경을 받기 위해 그런 일들을 할 뿐이야. -11월부터 전국투어 <공연의 끝>이 예정되어 있는데. 체력 관리는 어떻게 하나. =주진우가 전화를 해와서 ‘건강 괜찮으세요?’라고 물으면 맨날 하는 대답이 있다. 너보다는 나아. (웃음) 지난해 무대 위에서 8시간27분을 노래했다. 어제 팔굽혀펴기 기록이 165개였고, 한번에. 2, 3개월 전에 턱걸이를 30개 넘게 했다. 나는 건강하다. 오랫동안 섹스를 못해서 그게 자신이 없어서 그렇지. (웃음) 싱글 앨범 <돈의 신> 음원과 반주 음원을 음원 사이트에 무료로 배포됐다. ‘늬들은 고작 사람이나 사랑 따윌 믿지/ 난 돈을 믿어 고귀하고 정직해 날 구원할 유일한 선/ 늬들은 왜 그리 사니 근데 왜 그 꼴로 사니/ 돈으로 산 내 권세와 젊음 내 삶을 올려다봐.’ 이승환, 주진우, MC 메타가 이명박 전 대통령을 풍자하며 쓴 가사가 재기 넘치고 입에 착착 달라붙는다. 오케스트라가 동원된 멜로디는 이승환 특유의 창법과 어우러져 웅장하다. 주진우 기자가 이명박으로 분장해 출연한 것으로 화제가 된 뮤직비디오(연출 백종열)는 이미지 콜라주가 인상적인 풍자극이다.

[감독들의 감독들②] <매혹당한 사람들> 돈 시겔 - 직선적인 표현력

소피아 코폴라는 <매혹당한 사람들>(2017)의 원작인 돈 시겔의 <매혹당한 사람들>에 대해 “명성은 들었지만 이전에 보지 못했던 작품이었다”고 말했다. <매혹당한 사람들>은 미국 남북전쟁 시기, 부상을 입은 북군 존(클린트 이스트우드)이 여자들만 있는 기숙학교에 들어가 겪는 고전을 그린, 직선적이며 하드보일드한 남성적인 캐릭터를 구축해 온 시겔의 작품 안에서 비죽 솟아나온 독특한 작품으로 기억된다. 남성이 여성의 질투와 기만에 희생당하는 서사는, 46년 후 여성감독의 시각으로 여성의 응징으로 변환되니 두 작품의 비교지점도 상당하다. 그만큼 시겔의 스타일과 작품세계를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마치 그 극단에 자리한 것 같은 지금의 소피아 코폴라를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시겔을 대표하는 수식어는 언제나 로버트 알드리치, 새뮤얼 풀러 등을 위시한 ‘B무비의 제왕’이었고, 저예산으로 만들어낸 액션영화의 대가로 통했다. 빠듯한 예산, 한정된 기간은 그의 영화에 늘 따라다니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신체강탈자의 침입>(1956), <킬러들>(1964), <더티 해리>(1971) 등을 통해 그는 미국 주류영화계에서는 이전까지 보지 못했던 자신만의 독자적인 스타일을 구축해낸 장인이었다. 시겔이 영화를 시작한 건 1933년의 일이다. 시카고의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수학했고 파리 예술학교 보아트에서도 잠깐 공부했다. 20살이 되면서 그는 할리우드로 와서 영화계에 입문한다. 워너브러더스 스튜디오에서 배우 일을 하기도 했으며, 이후 편집, 영화자료실 조수 등 각 분야에서 일을 하기 시작한다. 1930~40년대, 텔레비전이 없던 시절 호황기를 누리던 할리우드에서 스튜디오는 다량의 영화를 찍어내느라 바빴고, 이때 습득한 다량의 작품을 효율적으로 발빠르게 찍어내는 제작 방식이 그의 영화를 만드는 리듬으로 자리잡은 셈이다. 당시 그는 수천편의 편집 일을 도맡기도 했는데, <카사블랑카>(1942) 역시 시겔이 편집에 참여했던 작품이다. 편집실에서 경험을 쌓던 그가 연출자로 각성하게 된 계기는 단편 <밤의 별>(1945)과 다큐멘터리 <히틀러는 살아 있다>(1945)를 만들면서다. 두 작품으로 아카데미에서 수상한 그는 곧바로 연출 재능을 살려 장편 극영화 만들기에 돌입한다. <신체강탈자의 침입> <킬러들> 등 시겔의 초기영화들이 이때 탄생한다. 감정에 치우치지 않는 직선적인 표현력, 레이먼드 챈들러나 대실 해밋 등이 쓴 하드보일드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을 연상시키는 마초적인 남성 캐릭터처럼, 이후 시겔 영화를 규정짓는 특징들이 이때 정립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례로 <킬러들>에서 킬러 찰리를 연기한 리 마빈에게서 시겔의 대표작인 <더티 해리>의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모습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저렴한 제작비로 액션 스릴러를 찍어내는 시겔은 할리우드에서보다 프랑스에서 먼저 인정을 받는다. 1950년대에 이르러 <카이에 뒤 시네마> 평론가들은 ‘더이상 유능할 수 없는 스튜디오 감독’으로 그를 평가한다. 일견 할리우드가 그를 저평가한 데는 작품 자체뿐 아니라 좀체 스튜디오 사람들과 화합하지 못하는 독불장군 스타일도 한몫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스튜디오 영화를 많이 찍는 만큼 반골 기질의 그는 자주 해고되기를 반복한 전적이 있다. 흥행에서도 이렇다 할 성과가 없던 그를 대중적으로 각인시킨 계기는 역시 클린트 이스트우드와의 만남을 빼놓을 수 없다. 이스트우드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영화에 관해 내가 아는 모든 것은 돈 시겔 감독에게서 배운 것이다”라는 사실을 공공연하게 밝혔을 정도로 그의 영화 인생에 시겔의 그림자는 막강했다. <일망타진>(1968), <사라 자매를 위한 두 마리의 노새>(1970) 등을 시작으로 <매혹당한 사람들> <더티 해리> 이후 <알카트라즈 탈출>(1979)에 이르기까지 총 5편의 영화를 함께 찍은 영화 파트너였다 (특히 시겔의 두 번째 부인인 캐롤 리달은 이스트우드의 어시스턴트로 일했을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친분 역시 돈독했다). 두 사람의 영화인생에 전기를 가져온 <더티 해리>의 제작 당시 일화는 시겔의 자서전 <돈 시겔: 시겔의 영화>에 둘의 대화체로 자세히 수록되어 있다. 워너와 이 작품을 협의 중이던 이스트우드는 시겔에게 영화에 대한 의견을 구하고, 만류하는 시겔에게 직접 연출까지 맡아주길 청했다. 그간 구축해온 액션 연출의 장기를 십분 발휘한 <더티 해리>를 통해 시겔은 파시스트 보안관 해리 칼라한 경사를 창조해낸다. 감상을 배제한 직선적인 방식의 캐릭터 창출과 영화 스타일은 이후 그의 작품의 지속적인 뼈대가 된다. 존 웨인의 출연작 <총잡이>(1976)에서 시겔은 뒤늦게 도착한 서부극을 통해 또 한번 자신이 영화에서 그리는 인물의 스타일을 강조한다. 더이상 서부극의 영웅을 필요로 하지 않는 시대, 왕년의 서부극의 영웅인 존 웨인은 악당들과의 대결에서 만신창이가 된다. 뉴할리우드 시대의 상처뿐인 영광은 그렇게 시겔의 영화를 통해 시각화된다. 이후 시겔은 1991년 사망하기 전까지 <알카트라즈 탈출>, <텔레폰>(1977), <러프컷>(1979), <재수없는 상대>(1982) 등 다수의 작품을 더 내놓는다. 할리우드에서 잔뼈가 굵은 숙달된 기술을 바탕으로 하지만 평생을 할리우드의 시스템을 거스르는 ‘불편한’ 영화 만들기에 매진한 시겔. “나는 권위가 싫다”는 태도로 초지일관 스튜디오의 애정을 구애하기보다 삐딱한 정신으로 평생을 승부한 B급 장인의 영화 결기는 지금 다시 꺼내봐도 죽지 않았다. 어떤 감독? <매혹당한 사람들>(1971) 돈 시겔 감독 누가 언급했나. 박찬욱 감독. 올해 칸국제영화제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다가 소피아 코폴라가 연출한 리메이크작과 비교해서 보면 좋을 작품으로 선정. <매혹당한 사람들>은 어떤 영화? 미국 남북전쟁 시기, 부상을 입은 북군 존(클린트 이스트우드)은 남부의 한 소녀에게 구출된다. 소녀는 원장부터 선생, 학생까지 모두 여성으로 구성된 기숙학교로 존을 데려간다. 여성들의 간호로 존은 부상에서 회복되지만 위기는 회복 이후부터 시작된다. 존에게 매력을 느낀 여성들과 은밀한 관계를 맺게 되면서 학교 분위기는 질투와 기만으로 가득 차게 되고, 이후 결단의 시간이 찾아온다. 남성을 단죄하는 후반부의 ‘액션’이 가해지기 이전, 전쟁이라는 긴장 상태, 폐쇄된 학교, 여성들간의 심리전, 섹슈얼한 판타지가 불러일으키는 긴장감 등이 치밀하게 직조된 작품이다. 시겔의 다른 작품에서 무자비한 남성성을 보여주었던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남부 여성이라는 ‘강적’을 만나 옴짝달싹 못하는 모습이 인상적. 소피아 코폴라의 리메이크작이 여성의 ‘응징’이라면, 시겔의 작품은 남성이 ‘당한다’는 관점의 차이가 엿보인다.

‘MB 정부 시기의 문화·연예계 정부 비판세력 퇴출건’ 조사 결과 드러난 블랙리스트에 오른 영화인들의 반응

문성근 배우 국정원 개혁위원회가 적폐청산 TF로부터 보고받은 ‘MB 정부 시기의 문화·연예계 정부 비판세력 퇴출건’ 조사 결과로 드러난 블랙리스트에 영화감독이 무려 52명(이창동, 박찬욱, 봉준호 등)에 이르며 다른 문화·예술 분야에 비해 압도적이더라. 국가정보 전문가들로부터 영화와 영화인들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정받은 것 같아 매우 기쁘다. (웃음) ‘이명박근혜’ 정권 기간 동안 영화계, 특히 독립영화와 민간 독립·예술영화전용관이 정부 지원을 못 받지 않았나. 지난 9년 동안 스마트폰이 사용하기 편리하다는 이점이 있는 반면 (감청이나 도청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다. 아이폰을 사용하고, 텔레그램이나 아이메시지를 통해 문자를 주고받은 것도 그래서다. 이번 공개된 문화·예술인 사찰은 사생활을 일일이 들여다보진 않았겠으나 동향을 광범위하게 파악했다는 점에서 국가폭력이라 할 수 있겠다. 문화·예술인을 포함해 KBS, MBC 같은 방송사와 대기업 투자·배급사에 대한 블랙리스트가 작동됐다는 것은 그것을 실행한 공무원들이 있다는 얘기다. 이들의 범법 행위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수사가 필요하다. 모태펀드 블랙리스트를 실행한 한국벤처투자에 대한 감사원 감사가 이루어져야 한다. 또 방송사와 대기업 투자·배급사의 내부 고발과 증언 그리고 고백이 계속 나와야 한다. 이것이 문재인 정부에 거는 기대다. 김조광수 청년필름 대표·감독 MB 정권 때 영화인들이 광우병 촛불집회, 민주노동당 지지 선언 등 시국 선언에 많이 참여했다. 영화인들의 시국 선언 참여는 MB 정권 이전에도 많았다. 참여정부 때 이라크 파병을 반대하기도 했고. 어쨌거나 당시 시국 선언을 조직하는 일을 했었는데, 광우병 촛불집회 때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 직원들도 참여해달라고 요청한 적 있다. 집회 이후 촛불집회에 참여했다는 이유 때문에 영진위 직원들이 징계를 받는 걸 지켜보면서 시국 참여를 독려할 때 자기 검열을 하게 되더라. 내가 피해를 보는 건 괜찮지만 나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피해볼 수 있으니까. 박근혜 정권의 국정원이 엔터팀을 따로 운영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국정원이 영화계의 동향을 파악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지만 실제로 정보 기관이 어떤 유의 영화를 만들려고 했다는 발상 자체가 대한민국을, 30, 40년 전으로 되돌린 일이다. 댓글을 단 것만으로도 한심했는데 말이다. 이용관 전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이명박 정권 초기에 좌파 영화제로 찍혔고, 집행위원장인 내가 '빨갱이'소리까지 들어서 국정원의 블랙리스트 문건이 있으리라는 사실을 예상하고 있었다. 과거 문화·예술인들을 담당했던 국정원 요원이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영화인들을 만났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막상 상세하게 작성된 문건 내용을 보니 어이가 없다. 지난주 문화체육관광부가 운영을 시작한 블랙리스트 진상조사위원회에 가서 지난 정권에서 부산국제영화제에 있었던 일들을 모두 털어놓았다. 정치적 성향을 떠나 지난 정권에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소상히 밝혀져야 한다. 이준익 감독 70년대의 시대착오적인 발상이 21세기에 통할 리 없다. 창작은 통제와 강요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이준동 나우필름·파인하우스필름 대표 개인적으로나 회사 차원에서 국정원 사찰을 당한 적은 없다. 기사 내용을 보니 돈줄을 쥐고 있는 대기업 투자·배급사 투자팀을 직간접적으로 압박한 게 아닌가 싶다. '이명박근혜'정권을 거치면서 민주화 투쟁을 통해 몇 십년 동안 이루해 온 민주주의가 퇴행됐다. 영화계가 몇십년 동안 국제적으로 경쟁력 있는 영화를 만들어오지 않았나. 그런데 지난 정권의 국정원은 자신들 마음대로 '대통령이 직접 액션도 하는 히어로물을 만들려고 했다'는 발상 자체가 영화와 영화산업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다고 볼 수 있다.그것은 창조경제의 의미를 하나도 몰랐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막강한 권력을 앞세운 정보기관의사찰은 창작자를 위축시킬 수밖에 없고, 현장에서 위축된다는 것은 자기 검열로 이어진다. 영화계가 무슨 작품을 만드는지 파악하는 일이 국정원 업무와 무슨 상관이 있나. 영화를 만드는 데 써야 할 에너지를 정보기관의 검열과 사찰에 쓰는 건 분명한 낭비다.국정원의 영화계 사찰은 이런저런 풍문을 들어 짐작은 했지만 실제로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어이없기도 하고, 분노가 앞서기도 한다. 정지영 감독 지난 9년 동안 국정원이 영화인들을 사찰할 거라는 사실을 예측하고 있었다. <부러진 화살>(2011), <남영동1985>(2012)를 연달아 연출했고, 다큐멘터리 <천안함 프로젝트>(2013)를 제작하며 활발하게 작업하다가 어느 순간 일이 잘 풀리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싶다. 당시 투자가 잘되지 않았던 건 흥행 감독도 아니고, 여러 이유가 있었겠지만 투자자들이 나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불편해한다, 같은 얘기를 간접적으로 들은 적 있다. 지난 6월 28일 개봉했던 다큐멘터리 <직지코드>(2017)는 콘텐츠진흥원에 지원을 요청했는데 심사에서 떨어진 게 내가 블랙리스트에 속한 감독이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 소신껏 일해왔는데 그게 권력에 미운털이 박힌 건 내 의지로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지 않나. 다만,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서는 안 된다. 우리(영화인)는 지금까지 싸워왔고, 앞으로도 끊임없이 싸워나갈 것이다. 심재명 명필름 대표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에는 올랐지만 국정원이 따로 만나자고 하거나 연락해온 적은 없다. 지난 정권의 국정원 사찰은 한국 사회에 전방위적으로 자행된 일인 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특정 이데올로기에 편향된 영화에 투자하고, 만들라고 독려한 건 단순한 사찰을 넘어선 일이라 할 수 있다. 국정원이 <변호인>(2013)에 관심을 보이며 제작 진행을 파악했던 일이나 한국벤처투자의 모 전문위원이 모태펀드 블랙리스트를 실행했다는 얘기는 익히 들었지만, 이토록 ‘화이트리스트’를 독려한 건 처음 들었고 매우 놀랍다. 얼마 전 업무를 시작한 문화체육관광부의 블랙리스트 진상조사위원회와 국정원 TF팀이 영화산업에 개입한 국정원에 대한 진상을 철저하게 조사해 책임을 물어야 한다. 권해효 배우 MB 정권의 국정원 블랙리스트에 오른 영화감독이 무려 52명에 이른다는 건 그만큼 영화계를 장악하기 힘들었다는 방증이다. 그게 인사권을 이용해 조직을 장악했던 공영방송의 경우와 가장 큰? 이점이다. 대기업 투자·배급사가 시국선언에 참여했다거나 정권과 어울리지 않는 정치적 성향을 가졌다는 이유로 배우와 스탭들을 A, B, C등급으로 분류해 관리를 해왔다는 정황이 있었다. 대기업의 정권 눈치보기인지 아니면 청와대나 국정원이 이런 문건을 토대로 그런 지시를 내렸는지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국정원이 블랙리스트 문건을 작성해 영화계를 사찰했다는 사실이다. 새 정부는 이것을 철저하게 조사·수사해야 한다. 김동현 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장 MB 블랙리스트에는 다수의 독립영화인이 포함되어 있다. 역시나 예상했던 것이라 그리 놀랍지는 않다. MB 정부 초기, 수많은 성명서와 입장을 독립영화인들이 참여한 가운데 발표했다. 서울독립영화제는 2008년 ‘촛불 섹션’을 별도로 신설해 작품 공모를 진행했는데, 그 까닭에 2009년 대규모로 실시된 시민사회단체감사에서 표적이 되었다. 실제로 감사를 받는 동안 ‘촛불’에 상당히 집착하는 인상을 받았다. 별 내용이 없으니 실망하는 듯했다. 공개된 리스트에는 한국독립영화협회, 서울독립영화제, 한국독립애니메이션협회, 강릉시네마떼끄, 대구독립영화협회 등의 주요 활동가 이름이 나열되어 있다. 수집경로가 어떠하든 독립영화에 대한 노골적인 배제로 읽힌다. MB 정부는 여러 방식의 공격을 통해 독립영화를 초토화하려 했다. 영화진흥위원회는 이명박 대통령 시절의 강한섭 위원장 때 독립영화라는 말을 지우고 비상업영화라는 말로 대체하려 하기도 했다. 원승환 인디스페이스 부관장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2009년부터 흉흉한 소문 떠돌았다. 정권의 반대자로 분류된 영화인과 영화단체의 리스트가 작성되었고, 리스트에 들어 있는 이들에 대한 대대적인 감찰과 배제가 있을 것이라는 게 소문의 내용이었다. 그리고 2009년 영화단체와 영화제에 대한 감사원의 표적감사가 진행되었다. 강한섭 위원장 체제의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는 독립영화전용관과 영상미디어센터의 사업자를 교체했고, 이후 조희문 위원장 체제의 영진위는 제작지원사업에서 이창동 감독의 <시> 시나리오에 0점을 주었다. 유인촌 장관 당시 문화체육관광부는 2010년 독립영화 제작지원 사업의 폐지를 시도하기도 했다. 이번에 밝혀진 이명박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는 일부에 불과하다. 이명박 정부는 좌파 청산이라는 미명 아래 영화계를 옥죄었고 탄압했다. 그리고 화이트리스트를 급하게 만들어 얼토당토않은 지원을 강행했다. 더 많은 것들이 밝혀져야 한다. 그리고 바로잡혀야 한다. 양우석 감독 <변호인>(2013)을 만들고 난 뒤 주변에서 조심하라는 걱정을 많이 해주셨다. 모태펀드 투자를 받는 게 힘들 거라는 얘기도 들었다. 다행히도 큰 어려움 없이 신작 <강철비>를 진행할 수 있었다. 영화를 포함한 문화콘텐츠는 자금 여력이 약한 분야고, 특히 영화는 유료 관객을 대상으로 하는 매체인 까닭에 권력이 정치적으로 개입하면 쉽게 위축될 수 있다. 지난 9년 동안 정권은 영화인들이 좌편향되었다고 했지만 그들의 표현대로 관객이 좌편향된 영화를 보기 때문에 영화인들이 그런 영화를 만드는 거다. 국정원이 좌편향된 영화인들의 버르장머리를 고치겠다고 하는 건 좌편향된 국민들의 버르장머리를 고치겠다는 거나 다름없다. 결국은 일부만의 국가를 운영하겠다는 얘기다. 지난 정권의 국정원이 영화계를 사찰하고, 우파 영화를 제작하려고 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사회가 퇴보했다는 생각이 들면서 분노보다 슬픔이 앞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