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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1997)

국정원, CJ E&M 직접 관리했다

박근혜 정권의 국가정보원(이하 국정원)이 CJ E&M의 ‘좌경화’를 지적하며 ‘과도한 사업 확장을 견제할 필요가 있다고 (청와대에) 건의’한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 10월 30일(월) 국정원 개혁위가 발표한 ‘적폐청산 T/F의 블랙리스트 작성 관여 사건 조사 결과’에 따르면, 2013년 8월 27일 국정원은 ‘CJ의 좌편향 문화사업 확장 및 인물 영입 여론’이라는 제목의 청와대 보고서를 통해 CJ E&M이 투자·배급한 영화를 다음과 같이 바라보았다. △<살인의 추억> <공공의 적> <도가니> 등은 공무원·경찰을 부패·무능한 비리집단으로 묘사해 국민에게 부정적 인식을 주입하였고, △<공동경비구역 JSA> <베를린>이 북한의 군인·첩보원 등을 동지·착한 친구로 묘사해 종북(從北) 세력을 친근한 이미지로 오도하고, △<설국열차>는 시장경제를 부정하고 사회 저항 운동을 부추기며, △천만 관객이 관람한 <광해>가 노무현 전 대통령을 연상토록 하는 등 지난 대선 시 문재인 후보를 간접 지원했다는 의혹을 제기하였다. 이 보고서를 살펴보면 국정원은 영화뿐만 아니라 CJ E&M이 제작한 방송 프로그램도 꼼꼼하게 챙겨본 것으로 드러났다. △‘좌파’ 영화감독 장진에게 의 연출·진행을 맡겨 대통령을 폄훼하고, ‘여의도 텔레토비’코너에서 대통령을 패러디한 ‘또’를 욕설을 가장 많이 하고 안하무인인 인물로 묘사해 정부비판 시각을 조정하였으며, △MBC 노조파업에 적극 가담했던 최일구·오상진 아나운서를 방송진행자로, KBS 노조파업을 지지했던 나영석 PD를 예능감독으로 기용하는 등 좌파 세력을 영입하고, △탁현민·김어준·표창원·진중권과 임수경 의원, 성한용 <한겨레> 기자 등을 토론 패널로 집중 출연시켜 종북좌파의 입장을 대변하도록 지원했다고 지적하였다. 국정원은 ‘CJ의 좌경화’의 가장 큰 원인으로 ‘친노(親盧)의 대모’ 역할을 해온 이미경 부회장이 회사의 좌성향 활동을 묵인하고 지원한 것으로 보고, 국가정체성 훼손 등 정부에 부담요인이 되지 않도록 CJ쪽에 시정을 강력 경고할 것을 건의했다. 한편, 국정원 개혁위는 국정원이 박근혜 정부의 ‘특정 문화·예술인 지원 배제’ 활동에 단초를 제공하였고, 청와대의 지시를 받은 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체부)의 요청에 따라 소위 문제인물 및 단체를 선별·통보하는 등 소위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실행에 관여한 사실도 확인했다. 2013년 8월 부임한 직후부터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과 국정원 그리고 문체부 사이에서 지시와 보고가 꽤 긴밀하게 오간 것으로 드러났다. 2014년 2월 20일 국정원이 김 전 비서실장에게 문예기금 지원 심사체계가 보완될 필요가 있다고 보고했고, 다음날인 2월 21일 김 전 실장이 문체부에 문예기금 지원 대상이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 뒤, 국정원과 문체부에 지원 대상 인물을 검증하라고 지시했다. 2월 21일 이후 문체부가 국정원에 인물 검증을 요청하자 국정원이 문체부에 검증 결과를 통보했다. 국정원은 그렇게 검증한 결과를 바탕으로 2014년 3월 19일 김 전 실장에게 문예계 내 좌성향 세력 현황 및 고려사항을 보고했다. 청와대는 이것과 별개로 경찰에도 정부에 비판적인 인물이 있는지 검증하도록 지시했던 것으로도 확인됐다. 박찬욱·봉준호·이창동·정지영·류승완 감독, 배우 문성근·문소리·김규리 등 영화인 104명을 비롯한 문화·예술인 249명이 그렇게 작성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 포함됐고, 박근혜 정부는 이 블랙리스트를 지원을 배제하는 데 활용했다.

[베를린] 1차대전 독일 프로파간다로 시작된 영화사의 과거와 현재

1920년대 독일영화의 최고 전성기를 담당했던 우파(Ufa)영화사가 100주년을 맞았다. 우파영화사 세트장이 자리했던 베를린과 포츠담에서는 전시회, 회고전, 학술대회 등 기념행사가 연달아 열리고 있다. 이미 베를린 예술영화극장 바빌론이 9월 한달 동안 우파영화사 영화 100여편을 선정해 상영했다. 또 9월 25일엔 독일 대통령 프랑크 발터 슈타인마이어와 독일 영화인 4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독일 우파 100주년 기념식도 열렸다. 현재 포츠담 영화박물관에서는 전시회와 상영회가 열리고 있고, 베를린 영화박물관에서도 11월 전시회 일정이 잡혀 있다. 독일 프랑스 합작 공영 방송국 <아르테>에서는 우파영화사 100주년 기념 특집 영화들을 방영하고, 방영된 영화들을 인터넷에도 제공하고 있다. 우파영화사 영욕의 역사를 다룬 텔레비전 다큐멘터리들이 12월 초 방영 예정이다. 한편 독일 역사박물관에서 지난 5월에 열렸던 우파영화사 관련 학술회의가 12월에도 열린다. 우파영화사는 독일 역사의 격동만큼 영욕의 100년을 겪었다. 1917년 12월 8일, 1차대전 중 국가 주도로 만들어진 우파영화사는 군국주의 프로파간다 영화 제작을 목표로 했다. 패전 후 상업 영화사로 선회한 다음, 영화사에 길이 남을 표현주의 걸작들을 배출해냈다. 프리드리히 무르나우의 <노스페라투>(1922), 프리츠 랑의 <니벨룽겐>(1924)과 <메트로폴리스>(1927), 요제프 폰 슈테른베르크의 <푸른 천사>(1930)가 독일영화 황금시대의 대표작들이다. 하지만 1933년 나치 정권이 들어선 후 독일영화계에서 유대인들이 퇴출되기 시작하고, 나치 프로파간다 영화가 상업영화와 함께 무수히 제작되었다. 2차대전 후 동독과 서독으로 나뉜 것처럼 우파영화사도 둘로 나뉘었다, 동독에서는 국영 영화사로 영속했지만, 서독에서는 우여곡절을 거쳐 1964년 독일 미디어기업인 베텔스만이 우파영화사 전신을 매입해 지금까지 경영하고 있다. 우파영화사는 지금도 텔레비전 중심으로 상업성과 작품성을 오가며 작품을 제작하는 중이다. 독일의 인기 텔레비전 드라마 <좋은 시간, 나쁜 시간>이나 작품성을 인정받은 <우리 어머니들, 우리 아버지들>이 최근 주목할 만한 작품들이다.

[TV시리즈⑦] 숀 레비 <기묘한 이야기> 시즌2 - 거부할 수 없는 모험담의 매력

<기묘한 이야기> 시즌2 Stranger Things2 감독 더퍼 형제, 숀 레비, 앤드루 스탠턴, 레베카 토머스 / 출연 밀리 보비 브라운, 위노나 라이더, 핀 울프하트, 케일럽 매클로플린, 게이튼 마타라조 / 국내 방영 넷플릭스 <기묘한 이야기>가 공개되기 직전에는 어느 누구도 이 드라마가 <하우스 오브 카드>나 <오렌지 이즈 블랙>과 같은 성공을 넷플릭스에 안겨줄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 2016년 7월 시즌 첫 공개 이후 거의 신드롬에 가까운 화제를 낳았고, 기획과 연출을 맡은 더퍼 형제가 바로 시즌2 각본 작업에 돌입할 수 있었던 데는 눈썰미 좋은 제작자 숀 레비 감독의 공이 크다. 대여섯편의 단편영화와 이제 막 첫 장편 데뷔작으로 만든 호러영화 <히든>이 포트폴리오의 전부였던 맷 더퍼, 로스 더퍼 형제는 TV시리즈로 제작 가능한 파일럿 몇편의 각본을 들고 영화사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그러던 중 <히든>을 흥미롭게 본 프로듀서이자 숀 레비 감독의 제작사 ‘21랩스’의 대표인 도널드 디라인과도 만났는데 그에게서 시나리오를 전해 받은 숀 레비 감독은 <기묘한 이야기>를 읽자마자 그길로 더퍼 형제를 찾아가 드라마 판권을 계약했다. 더퍼 형제가 쓴 이야기가 워낙 흥미로운 이유도 있었겠지만 마침 시나리오를 받아 읽던 2015년 즈음은 숀 레비 감독 스스로도 뭔가 변화의 길을 찾아야겠다고 궁리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건강도 나빠지고 스스로에게 자극이 필요하다고 여기던 때에 마침 <기묘한 이야기>가 사무실 문을 두드린” 것은 거의 운명과도 같은 만남이었다. 그는 이 시리즈를 반드시 성공시키겠다고 다짐했다. 더퍼 형제가 전체 에피소드 10개 가운데 일부의 각본만 완성된 채로 1, 2편 촬영을 마쳤을 때 그가 나서서 “내가 3, 4편을 연출할 테니 자네들은 그 시간에 각본을 완성하라”며 공동 연출자로도 이름을 올려버렸다. 여기까지가 자존감이 곤두박질치던 어느 할리우드의 중년 감독에게 일어난 기묘한 성공담이다. 제작자로서의 감각과 감독으로서의 야심이 <기묘한 이야기> 성공의 일등공신인 셈이다. 더퍼 형제는 넷플릭스와 시즌2 계약서에 도장을 찍으면서도 비슷한 전략을 취했다. 자신들은 기획과 각본을 총괄하면서 1, 2편 연출로 기조를 잡아주고 3, 4편을 숀 레비 감독에게, 5, 6편을 앤드루 스탠턴 감독에게, 7편을 레베카 토머스 감독에게 맡기면서 각본 작업에 총력을 기울였다. 더퍼 형제는 시즌1 때 팬들이 보인 반응과 평을 면밀히 살피면서 각본을 계속 수정해나갔다. 물론 최종 마무리인 8, 9편은 더퍼 형제의 손에서 끝을 맺었다. <기묘한 이야기>는 1980년대를 배경으로 인디애나주 호킨스라는 도시에 위치한 정체 모를 과학 연구 시설에서 실험에 의해 개조당해 초인적인 힘을 갖게 된 소녀 일레븐(밀리 보비 브라운)이 다른 차원의 세계로 통하는 문을 열게 되면서 벌어지는 SF 호러 장르의 이야기다. 더퍼 형제는 자신들이 어려서부터 즐겨봤던 1980년대 할리우드 SF 블록버스터 영화들의 요소를 교과서 삼아 지금의 할리우드 영화산업 내에서는 제작되기 어려운 연출을 자유롭게 시도했다. 연구시설에서 도망쳐 나온 소녀 일레븐을 보호하고 마을을 구하기 위해 뭉친 동네 너드 소년 네명이 벌이는 화끈한 모험담의 플롯은 당대 스필버그 사단 영화나 스티븐 킹 소설 속 세계에서 아이디어를 빌려왔고 프로덕션 디자인과 음악 역시 1980년대에 유행했던 여러 요소로 꾸몄다. 기획 단계 때 여러 영화사를 돌며 아동용 타깃의 소박한 재미 요소라며 지적받았던 것들을 모두 살려 성공을 거둔 것이다. 넷플릭스의 전폭적인 재정 지원이 없었다면 만들어질 수 없었던 기획이다. 하지만 TV시리즈 제작에 잔뼈가 굵을 대로 굵은 숀 레비 감독의 감각이 없었다면 어느 누구도 이런 과감한 투자를 결정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가 처음으로 TV드라마를 연출한 <알렉스 맥의 비밀세계>는 1994년부터 1998년까지 <니켈로디언>에서 방영된 작품으로 하굣길에 우연히 화학물질에 닿아 텔레파시 능력이 생긴 소녀의 이야기를 다룬 SF 판타지 드라마였다. 그다음 연출에 참여한 드라마 <앨런 스트레인지의 여행>은 지구에 떨어져 흑인 소년의 모습으로 숨어 사는 외계인 이야기를 다룬 아동 드라마였다. <기묘한 이야기>의 배경 출처가 어디인지를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기묘한 이야기> 이후 숀 레비 감독의 이름을 크레딧에서 만날 수 있는 작품은 드니 빌뇌브 감독의 <컨택트>였다. 그가 연출을 맡을 차기작은 존 카펜터 감독의 <스타맨>의 리메이크 영화화 작업, 그리고 플레이스테이션 게임을 영화화하는 <언차티드>, 이혼한 부부가 외계인 침공을 겪으며 아이들을 잃어버려 위험한 여정을 떠나는 SF 액션영화 <더 폴> 등이다. <기묘한 이야기> 이후 숀 레비 감독이 완전히 새로운 길로 접어들었음을 알 수 있다. “감독으로서 어느 정도의 자신감이 나 스스로를 더 행복한 제작자로 만들어준다고 확신한다. 나는 이 일을 정말 사랑하고 또 그 결과물을 지켜보는 것이 즐겁다. 연출과 제작은 너무 다른 영역이지만 둘 다 내가 즐기는 일이다.” 더퍼 형제의 <기묘한 이야기>가 슈퍼히어로로 뒤덮인 할리우드에 지친 관객에게 신선한 활력이 되어줬다면 영화감독이자 제작자인 숀 레비에게는 인생의 새로운 활로를 열어줬다. 밀리 보비 브라운 2017년 전세계 핼러윈 시즌 최고의 코스튬은 단연 ‘일레븐’이었다. 하얗게 삭발한 머리를 하고 흙먼지가 묻어 지저분해진 드레스를 입고는 한손에 와플을 들고 코피를 흘리는 일레븐은 더없이 순수하면서도 세계를 뒤엎을 무자비한 파워도 갖춘 초능력자. <기묘한 이야기> 시즌1이 연구실에서만 갇혀 생활하다가 처음으로 바깥세상에 나와 친구들을 통해 우정과 사랑의 의미를 알게 된 일레븐이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면서 스스로 우정과 사랑의 마음을 담은 어떤 선택을 하게 되는 슬픈 성장담을 다뤘다면 시즌2의 이야기는 그녀를 아끼고 또 만나고 싶어 하는 친구들이, 일레븐이 살아갈 안전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적에 맞서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시즌2에서는 이전 시리즈에서 화제가 됐던 일레븐의 의상 스타일이 ‘MTV 시절’의 복고풍으로 확 바뀐 놀라운 장면을 만날 수 있다. 사실 이렇게 매력적인 여성 히어로 캐릭터는 <에이리언> 시리즈의 리플리나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사라 코너 이후 처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두 밀리 보비 브라운이라는 놀라운 배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2004년 스페인 출생으로 4살 무렵 미국으로 건너온 그녀는 2013년에 데뷔해 <기묘한 이야기>의 일레븐 역에 발탁되면서 인생이 달라졌다. 한쪽 귀가 들리지 않는 장애를 지녔지만 연기로 이를 극복 중이다. 전세계 장르영화 팬들은 그녀가 <스타워즈> 시리즈의 레아 공주의 젊은 시절을 연기할 유일한 배우라며 열광하는데 이에 대해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정도다. 그녀가 없었다면 <기묘한 이야기>의 성공도 없었을 것이다.

불행에 절실히 접근하는 이승원 감독의 <해피뻐스데이>와 <소통과 거짓말>

이승원 감독의 장편영화 <소통과 거짓말> <해피뻐스데이> 두편이 최근 개봉했지만 저예산 독립영화의 처지가 흔히 그렇듯 많은 관객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일을 하고 있지 않았다면 나 역시 이승원의 영화를 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영화들은 상업영화의 경계를 훌쩍 뛰어넘는 묘사들로 화면의 표면을 채워 반도덕의 도발 그 자체로 호소한다는 오해를 사기 쉬운 데다, 이런 유형의 충격적인 소재로 작품의 개성을 포장하려는 시도는 이미 국내에서도 여러 사례가 있었기 때문에 피상적인 정보만 갖고는 굳이 이승원의 영화에 접근할 마음을 품지 않았을 것이다. 전주국제영화제에 출품 신청된 이승원의 두번째 장편영화 <해피뻐스데이>를 보고 나는 그의 영화가 섣부른 오해를 사기 쉬운 진정성의 폭탄이며 머지않아 주류 한국영화계에도 상당한 자극을 줄 잠재적 재능의 징표라고 봤다. 개봉 즈음에 다시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나의 건방진 태도를 반성했다. <해피뻐스데이>와 이승원의 첫 장편 <소통과 거짓말>은 적은 제작비에 따른 낮은 기술적 완성도와 무관하게 그 자체로 발광하는 아름다운 진실의 순간들로 뭉친 작품들이다. 유별나게 뛰어난 배우들의 연기, 인간의 상처와 고통에 대한 감독 이승원의 절실한 접근은 데뷔작 <소통과 거짓말>을 통해 (나는 몇해 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된 이 영화를 이번에 처음으로 볼 수 있었다) 이미 적절한 표현의 통로를 찾았다. <해피뻐스데이>는 이승원이 데뷔작에서 극한까지 밀어붙였던 불행한 인간들의 흉터투성이인 삶의 묘사를 이어가면서도 삶과 죽음, 상처와 재생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지 않고 고유한 방식으로 접합한 것이 인상적이다. 서서히 드러나는 징후들 <해피뻐스데이>는 전신마비인 장남의 대소변을 번갈아 받아내야 하는 한 가족의 하루 일상을 시간 틀로 삼아 그 장남의 생일에 온 가족이 모여 어떤 음모에 의무적으로 가담해야 하는 내용을 담은 이야기다. 그 음모의 전개와 귀결에 서사적 긴장이 붙어야겠지만 그걸 방해하는 것은 가족 구성원 대다수의 정상성 규범에 벗어나는 말과 행동이다. 영화 초반에 소개되는 남매 상훈(박지홍)과 아현(김애진)은 방에서 함께 지내면서 하릴없이 뒹굴거리며 티격태격하는데 여장을 하고 여자가 되고 싶어 하며 어머니로부터 여자로 인정받은 상훈의 위치 때문에 이들의 관계는 남매가 아닌 자매다. 곧이어 집안 막내 승환(김성민)이 화면에 등장하는데 동네 깡패 형을 동경하는 그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대상을 정하지 않고 누군가를 죽여버리겠다고 칼을 들고 설쳐댄다. 그다음에 집에 도착한 셋째아들 성일(이주원)은 그런 승환을 완력으로 제압하는데 틱장애가 있는 그가 겉보기에 우스꽝스럽게 말할 때마다 그가 데리고 온 약혼녀 정복(장선)은 상스럽게 낄낄댄다. 이 가족 구성원은 서로 뭘 하든 관심이 없는 듯 보이지만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각자의 삶을 독립적으로 영위하며, 가족 누군가가 망가진 행동을 해도 또 다른 누군가는 그걸 재미있어 하는 상황들이 연이어 이어진다. 아버지가 없는 이 집안의 대장은 어머니인데 그가 겪은 불행은 가족들의 출생 계보를 뒤죽박죽으로 만든다. 누군가는 어머니가 동네 건달에게 성폭행당해 낳은 아들이고 누군가는 이 집안 아들이 성폭행한 탓에 데리고 들어와 키우는 딸이다. 이런 사연들은 영화가 진행된 지 한참 후에 차츰 밝혀진다. 감독 이승원은 등장인물들의 비정상적으로 보이는 행동들의 농도를 높여 반복적으로 제시한 다음에 우리가 그들의 사연을 궁금해하지 않을 지경이 되어서야 비로소 그들의 그런 행동동기에 대한 단초를 희미하게 설명한다. 인물들의 행동을 심리적 외상에 따른 징후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해도 그걸 다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승원은 관객의 이해를 구하지 않는다. 대신 인물이 겪는 물리적 징후의 결과들을 지켜보는 쪽으로 안내한다. <해피뻐스데이>의 화면에 나타난 물리적 징표들은 블랙코미디의 톤으로 묘사하는 척 위장하지만 실제로는 관객에게 난처함을 안긴다. 앞서 거론한 초반 장면에서 귀가하자마자 칼을 휘두르며 발작적인 행동을 하는 승환을 처음에는 여장 차림의 상훈이 말리는데 그 두 사람이 엉켜 이리저리 구를 때마다 상훈의 치마 속 삼각팬티가 드러나며 표시되는 것은 불쑥 발기된 성기다. 상훈의 발기된 성기를 보고 우리가 킥킥대고 웃는다면, 그건 어울리지 않게 여장을 한 배 나오고 못생긴 인물의 복장도착을 변태라고 비웃는 냉소의 묘사 전략에 따른 반응인지, 아니면 불우하게도 미모를 타고나지 못했으나 여하튼 스스럼없이 행동하는 인물에 대한 자발적인 공감의 데이터를 쌓아가는 반응인지에 대한 우리 스스로의 숙고가 필요하다. 이런 식의 묘사는 이 영화에 수두룩한데 가장 논란의 여지가 되는 것은, 영화의 중심 플롯에서 잠시 벗어나 곁가지로 묘사되는, 막내 승환과 존경하는 동네 양아치(감독 이승원이 직접 연기한다)가 만나는 장면이다. 말끝마다 욕이 붙어 있는 이 인물은 식당에서 소주를 마시며 승환 앞에서 허세를 떨다가 식당의 다른 손님들을 겁박한 후 밖으로 나와서는 근처를 지나가는 여학생을 한 건물 화장실에서 성폭행한다. 승환의 형 성일이 화장실로 찾아와 상황을 종결시키고 그 동네 양아치를 마구 때릴 때 뜻밖에도 그는 싱겁게 성일의 완력에 굴복하며 심지어 무릎을 꿇은 상태로 거듭 사과하면서 자기가 무릎이 좋지 않다고 징징댄다. 화장실에서 나온 성폭행 피해 여학생이 팬티를 끌어올리며 “이 새끼 죽여버리면 안 돼요?”라고 말할 때 이 장면은 끝나는데, 원래는 이승원이 연기하는 그 인물이 울면서 얘기하는 긴 장면이 있었으나 편집됐다고 한다. 이 장면은 단순히 받아들이면 논란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삽입된 장면처럼 보일 수도 있다. 관객의 불쾌를 일으키기 위한 불쾌한 장면은 관객의 도덕적, 심미적 기준을 혼란시킨다. 불구의 형상으로 제시된 초상 이승원 감독은 끈질기게 이 가족과 주변 사람들을 도덕적 불구자로 그린다. 여기에는 상대적으로 도덕적 우위에 오를 수 있는 인물들이 없다. 영화 초·중반 큰아들을 찾아온 장애인 성도우미를 어머니가 맞이할 때 며느리 선영은 그를 벌레 대하듯 한다. 거듭 감사를 표하던 어머니도 그 여자에게 얼마나 병균이 많겠냐고 하는 며느리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금방 마음이 변한다. 도우미가 작업을 하러 큰아들이 있는 이층 방으로 올라갔을 때 짐승같은 큰아들의 괴성이 울려퍼지고 별일 아니라는 도우미의 말에도 불구하고 며느리를 비롯한 가족들은 난리를 치는데 이때 화면에 담기는 것은 반나체의 도우미다. 이 여자의 처지는 가족들에 의해 삽시간에 불쌍한 사람을 능멸한 가해자로 바뀐다. 그런가 하면 성일의 약혼녀 정복은 시도 때도 없이 음란한 말로 상대를 공격하며, 성일의 형이자 이 집안의 유일한 며느리인 선영의 남편 기태는 상전 모시듯 그런 그를 공손하게 대하며 맞장구를 친다. 기태의 아내인 선영은 성일과 관계했었고 기태와 딱 한번 관계한 것 때문에 딸을 낳았으며 그 딸이 성일과 기태 중 누구의 유전자를 받은 것인지 알지 못한다. 떠들썩한 소동극의 분위기 속에서 불구의 형상으로 제시된 가족의 초상은 우리에게 익숙한 상투적인 도덕관의 경계를 넘어서며 점차 그들과 나란히 수평적인 위치에서 그들의 삶을 긍정도 부정도 아닌 관점으로 보게 만든다. 그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가족을 힘겹게 꾸리고 버티고 있다. 그들은 그들의 삶이 살아 있으되 죽은 것과 마찬가지인 지독한 고통의 대가라는 걸 드러내지 않고 공유한다. 영화 중·후반, 채팅으로 누군가를 만나러 간 상훈은 아현이 휴대폰으로 상대방에게 사진을 전송하는 바람에 허탕을 치고 귀가하는데 슬퍼하는 상훈을 키득대며 놀리는 아현은 “넌 나하고 여기서 죽을 때까지 살아야 돼”라고 말한다. 어머니는 가족들이 모두 공범으로 가담한 음모를 마무리하는 심야 술자리에서 함께 있는 다른 가족들에게 “너희들, 내 밑구녕으로 다 들어와. 다 죽어버려”라고 말한다. 이들은 영화에 나오는 또 다른 대사처럼 ‘죽어야 사는 것’이라는 역설을 각자 스스로 체화하고 있다. 죽음이 없다면 이 삶은 무한하고 무한한 삶은 고통이며 그렇기 때문에 본격적인 삶이 시작되지 않았던 어머니 자궁 속의 시원으로 이들은 돌아가야 한다. 그때까지 이들은 서로 상처를 주고받으면서 그 상처를 통해 살아 있는 것을 감각하는 순환 고리에 갇혀 있다. 세속의 도덕으로 수식될 수 없는 삶의 진흙탕 놀랍게도 이 영화가 도달하는 것은 죽어야 사는 것이라는 역설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이승원 감독은 자기만의 거친 방식으로(스포일러라 자세히 밝힐 수는 없으나), 어떤 등장인물이 또 다른 방식으로 현존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이 현존 방식은 세속의 도덕으로 가닿을 수 없는 무한한 인간긍정의 도달점이다. 우리가 본받고 싶고 환상의 영역에서나마 감정이입하고 싶은 영웅 서사의 정반대편에서 이 영화는 이해할 수 없고 망가져 있으며 저 스스로 감출 수 없는 상처의 자상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보이는 인물들을 통해 그들에게 수직적 연민을 보낼 수 없어 당황하는 우리 자신을 느끼게 한다. 그들은 우리의 수직적 연민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오로지 그들과 수평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위치에서만 바라볼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세속의 도덕으로 옹호되거나 수식될 수 없는 삶의 진흙탕에서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공존하는데 그들이 필사적으로 사는 것은 그들이 스스로 방기한 삶을 통해 이미 죽음과 가깝게 있기 때문이다. 거꾸로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더 삶을 갈망한다. 이 역설을 표방하는 것은 며느리를 연기하는 김선영의 존재다. 영화의 말미에 가족들 가운데 맨 마지막으로 큰아들의 방에 들어가 자기 삶을 고백하는 장면에서 며느리의 말은 세속적 도덕의 경계를 놀라울 정도로 위반하지만 그의 표정은 어느 누구의 것에 비해서 인간적이다. 이때까지 단독 화면을 거의 쓰지 않았던 감독 이승원은 이 장면에서 클로즈업을 구사하는데 이 예외성으로 드러나는 것은 며느리의 개별성이 아니라 다른 인물들의 것까지 포괄하는 대표성이다. 이어지는 마지막 가족 소풍 장면에서 다시 한번 배치된 김선영의 클로즈업은 폐소공포증의 지옥도였던 영화의 공기를 휴식의 온기로 바꿔놓는다. <해피뻐스데이>는 낭비되고 있는 최근 한국 주류영화의 클로즈업 사용 문법의 결함을 재고하게 하는 반면교사이며 텔레비전 드라마의 호흡이 아니라 블록으로 짜인 화면의 긴장이 쌓일 때 단독 화면의 정서이입 효과가 얼마나 강력할 수 있는지를 웅변한다. 슬픔을 표현하는 것을 잃어버린 사람 이제 이승원의 데뷔작 <소통과 거짓말>을 짧게 말할 차례가 되었다. <소통과 거짓말>은 <해피뻐스데이>에 비해 훨씬 어둡다. 등장인물들이 겪고 있는 내면의 지옥을 따라가며 관객이 경험하는 것은 끊임없는 감정적 하강이다. 정사각형 사이즈로 찍힌 화면은 인물들에게 일체의 탈출구도, 약간의 움직임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단호하게 인물들을 가두며 장선과 김권후가 연기하는 남녀 주인공은 각자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채 자신의 신체가 파열되는 과정을, 또는 자신의 마음이 붕괴되는 과정을 또 다른 자아가 지켜보는 듯이 행동한다. 일차적으로 이 인물들의 자기파괴적인 일상들이 묘사되는 면면은 아프다. 우리는 마음이 아플뿐만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아프게 될 것 같은 착각을 이 영화를 보며 느낀다. 경이적인 것은 그 병든 인간의 슬픈 상황을 연기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살아내는 것처럼 해내는 배우들의 연기다. <해피뻐스데이>에서 정복을 연기했던 장선은 특히, 어떤 연기론도 무색한 몰아의 경지를 화면에 구현한 것처럼 나는 느꼈다. 장선은 슬프다는 것을 슬프다고 표현하는 게 아니라 슬프다는 것을 슬프다고 표현하는 것을 잃어버린 사람으로 영화 속에 존재했다. 이것은 의지로 되는 것도, 이해력으로 되는 것도 아니라고 나는 추측한다. 비록 허구의 인물이지만 그 인물의 슬픔에 거의 완전히 동화될 수 있는 기운이 없으면 불가능한 작업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슬픔과 불행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만 그 노력에는 예상하기 힘든 기운이 필요하다. 다르게 말해서 우리는 자신을 훼손하면서까지, 또는 훼손할 수 있는 용기와 기운을 갖춰야만 다른 사람의 슬픔의 깊이에 가깝게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내게는 장선의 연기가 그 비슷한 경지의 훼손을 치르고 나서야 얻을 수 있는 성취로 보였다.

에밀리 디킨슨의 생을 그린 <조용한 열정>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이것은 한번도 답장하지 않은/ 세상에게 보내는 나의 편지/ 자연이 부드러운 당당함으로/ 전해준 소박한 소식이다./ 그 소식은 내가 볼 수 없는 손에게 맡겨진다/ 다정한 동포들이여 자연을 사랑하듯/ 나도 후하게 판단해주길.” 에밀리 디킨슨은 은둔자로 불리며 당대에는 평가받지 못했지만 이후 시대를 앞서간 문학적 감수성으로 숱한 영감을 남긴 19세기 미국의 대표적인 시인이다. “called back”(불려갔음)이라는 단순하고도 피할 수 없는 문장을 묘비명에 새긴 것처럼 에밀리 디킨슨의 시는 군더더기 없이 아름답고 솔직하다. <조용한 열정>은 에밀리 디킨슨의 삶을 담은 전기영화다. 유년 시절부터 죽음까지의 일대기를 담아냈지만 테렌스 데이비스의 영상으로 표현된 삶은 여느 일대기와는 결이 완전히 다르다. 표면화된 서사가 아니라 시의 아름다움을 담은 영화는 생생하고 고통스러우면서도 눈을 돌리기 힘든 마력이 있다.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써내려갔던 시인의 삶은 어떻게 시가 되었을까. 시도, 영화도 아름다움은 그 끝에서 통한다. 영화가 한 사람의 인생을 온전히 표현하려면 얼마의 시간이 필요할까. 56년을 산 에밀리 디킨슨의 삶을 하나의 손실 없이 이해하려면 56년 동안 찍은 필름이 필요하다. 물리적으로 그게 불가능하기에, 축약을 한다. 축약이란 결국 배제다. 불필요한 부분을 자의적인 판단 아래 제거하는 것이다. 어떤 정성을 들인다 해도 창작자에 의한 왜곡이 일어날 수밖에 없고 본래의 형태와는 달라진다. 다시 말해 완벽한 전기영화라는 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어쩌면 실존 인물을 다루는 모든 영화는 우리가 보고 싶은 대로 대상의 형태를 규정짓고 오해하고 있는 것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피치 못한 축약과 왜곡에서 벗어날 유일한 가능성이 하나 있다. 다름 아닌 시다. 에밀리 디킨슨의 표현을 빌리자면 시는 “진실을 압축하는” 작업이다. 시는 시인의 감정을 그대로 찍어내고자 하는 판화가 아니다. 단어의 배열, 문장의 형태, 시의 호흡을 거쳐 순간의 감정으로 이어질 수 있는 좁은 오솔길에 가깝다. 은유된 문장들은 읽는 이의 해석을 거쳐 각각 다른 가능성으로 발화된다. 시를 읽는 일은 일종의 교감이다. 우리는 시라는 문을 통해 100년의 시간을 뛰어넘고 그때 당시 에밀리 디킨슨이라는 인간이 느꼈던 감정에 맞닿는다. 에밀리 디킨슨이 쓰고, 테렌스 데이비스가 찍은 영상시집 테렌스 데이비스 감독이 그린 에밀리 디킨슨의 전기영화 <조용한 열정>은 삶을 찍어낸 영화라기보다는 삶에 조응하는 한편의 시라고 부르고 싶다. 이 영화는 에밀리의 유년 시절부터 죽음까지 일대기를 담고 있지만 삶의 궤적을 충실히 따라가는 여느 영화들과는 결을 달리한다. 테렌스 데이비스가 에밀리 디킨슨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영화를 만든다고 했을 때 관계자들이 즉각 은둔자에 관한 영화를 어떻게 만들 거냐고 반문했을 정도로 에밀리 디킨슨의 인생은 겉으로 알려진 사건이 거의 없다. ‘과격한 개인주의자’라는 평을 받았던 에밀리 디킨슨은 메사추세츠주의 작은 마을 애머스트에서 태어나 평생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아니 심지어 집을 떠난 적도 없다. 그녀는 외부와의 관계를 거의 끊고 철저히 은둔의 삶을 살았다. 하지만 그녀가 사회로부터 자신을 격리시킨 건 아니다. 에밀리 디킨슨은 일생에 걸쳐 거의 하루에 한편씩 시를 썼고 1800여편의 시를 통해 세상에 자신을 알려왔다. 그녀는 세상이 잠드는 고요한 새벽마다 시를 썼다. 평생 집을 떠나본 일이 없지만 영감은 넘쳐났다. 그녀는 가족과의 갈등과 애정, 여성에게 가해지는 억압, 기독교의 폭력적인 권위 등 시대에 저항했던 자신의 감정에 대해 썼다. 죽음과 어둠, 생의 무력감, 사랑하는 것들과의 이별 등 실존적인 깨달음에 대해서도 썼다. 꽃과 벌, 자연의 아름다움도 놓치지 않고 썼다. 그렇게 모든 시가 삶이었고 그녀가 버텨낸 시간이었으며 에밀리 디킨슨이었다. 테렌스 데이비스 감독은 에밀리 디킨슨이 겪은 사건들을 재구성하고 찍는 대신 그녀의 시를 찍는 쪽으로 연출의 가닥을 잡는다. <조용한 열정>은 에밀리 디킨슨의 전기영화라는 딱딱한 틀 안에서 설명하기 곤란하다. 차라리 에밀리 디킨슨의 영상시집이라고 부르는 편이 적절할 것이다. 이 영화에는 흔히 말하는 기승전결의 서사적 구조가 없다. 드라마틱한 사건도 없고 간혹 장면마다 점프하는 상황도 맥락이 없다고 봐도 좋을 정도로 갑작스럽다. 원인과 결과의 흐름으로 사건을 구성하는 대신 주어진 상황에 대응하는 에밀리 디킨슨의 감정들을 조각조각 그려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에밀리 디킨슨의 기숙학교 생활부터 출발한다. 아마도 강요된 질서 앞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지점이기 때문일 것이다. 속죄와 회개가 의무라는 원장 앞에서 에밀리는 “깨닫지도 못한 죄를 어떻게 회개하나요”라며 홀로 반항한다. 바로 다음 장면, 햇살이 따사롭게 비치는 창밖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는 에밀리의 뒷모습이 보인다. 카메라가 느리게 에밀리를 향해 클로즈업됨과 동시에 에밀리 디킨슨의 목소리로 한편의 시가 낭송된다. “모든 황홀한 순간엔 고통이 대가로 따른다/ 황홀한 만큼 날카롭고 떨리도록/ 사랑받은 시간만큼 비참한 수년/ 치열하게 싸운 동전들 눈물 가득한 금고.” 이 시가 에밀리 디킨슨의 감정의 표현인지 상황의 묘사인지 그것도 아니면 그녀가 평생토록 깊숙이 침잠해 탐색했던 삶에 대한 실존인지는 중요치 않다. 장면은 원장 선생의 강요처럼 특정한 해석을 요구하지 않는다. 화면과 관객 사이에는 오직 시적인 이미지의 순간들만이 존재할 뿐이다. 고요하게 펼쳐진 이미지와 내레이션은 관객에게 완전히 열린 감상의 기회를 제공한다. 그렇게 에밀리 디킨슨의 시들이 한편씩 영상으로 옮겨지고 쌓여나간다. 솔직히 말해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사건이라고 해봤자 가족간의 갈등 정도이고, 공간이라고 해봐야 집과 애트머스의 산책길 정도가 전부다. 제목처럼 고요하게 흘러가는 영화는 에밀리 디킨슨의 내면에 흐르는 격정과 열정을 극적으로 표출시키는 무리는 범하진 않는다. 대신 에밀리 디킨슨이 남긴 시를 내레이션 형식으로 풀며 상황과 매치시킨다. 그녀의 시에는 제목이 따로 없다. 그날의 겪고 듣고 품었던 세계를 고요한 새벽에 언어의 형태로 옮겨 적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정확히 에밀리 디킨슨이라는 우주와 그녀를 둘러싼 19세기라는 세계가 충돌하는 기록들이다. 기독교 중심의 가치관과 여성을 철저히 억누르고 가두었던 당시의 사회는 그녀에게는 감옥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집과 가족은 에밀리 디킨슨의 영혼을 보호하는 유일한 장소였다. 에밀리 디킨슨은 은둔을 한 것이 아니라 세계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는 투쟁을 이어간 셈이다. 기숙학교를 떠난 그날부터 그녀의 투쟁은 이어진다. 에밀리 디킨슨이라는 예민한 영혼과 19세기 미국, 두 세계가 때로는 불협화음을 내고 때로는 조화롭게 하모니를 이룬다. 그 모든 순간들이 시의 언어를 통해 발현되면 테렌스 데이비스는 전기영화의 서사에 개의치 않고 이를 하나하나 화면 위에 조각해낸다. 진실을 압축하는 이미지들, 절대적인 아름다움 에밀리 디킨슨의 시가 19세기 최고의 미국 시로 재발견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특히 주목하고 싶은 건 단어의 응축과 이미지즘적 스타일이다. 에밀리 디킨슨의 시는 군더더기가 없다.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는 걸 결코 풀어서 설명하지 않고 자신의 감성을 곧잘 사물에 빗대어 표현했다. 그 묘사들은 그림으로 옮길 수 있을 만큼 직관적이고 구체적이다. 가령 짧게나마 마음을 빼앗겼던 워스워즈 목사와의 만남 뒤 이어지는 시는 환희에 가득한 그녀의 심정이 구체적으로 묘사된다. “가을에 그대 오신다면 여름은 훌훌 털어버릴래요/ 미소와 콧방귀로 파리를 쫓듯/ 일년 뒤 그대 오신다면 각 달을 공처럼 말아/ 서랍에 넣을래요. 때가 올 때까지/ 만약 더 늦어진다면 손 위에서 셀게요/ 그러다 손가락이 나락에 떨어질 때까지/ 만약 이 생이 끝나고 당신과 함께할 수 있다면/ 이 생은 벗어버리고 영원을 맛볼래요.” 당대 상황에서 유부남 목사에게 마음을 품는 것을 두고 동생 비니는 경악하지만 에밀리 디킨슨은 자신의 감정을 외면한 적이 없다. 그녀의 시가 진실을 압축하고 있는 것처럼 다가오는 건 그 때문이다. 시대에 저항하고 세상에 상처 입은 모든 순간들을 언어로 옮겨 담는 것이 에밀리 디킨슨이 숨을 쉬고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테렌스 데이비스는 그 시간의 호흡을 하나도 거르지 않고 느리고 세심한 카메라로 담아낸다. 여느 영화에서는 결코 보여주질 않을 잉여의 시간들, 멍한 표정들, 비어 있는 순간들이 이 영화에서는 오히려 주인공처럼 담긴다. 흐느끼는 어깨의 뒷모습, 어머니의 손을 잡은 힘없는 손길, 디킨슨이 병을 앓는 순간까지 한 호흡 더 길게 응시한다. 카메라는 인물의 격앙된 감정이 아니라 세계와 충돌하는 시의 형태, 시가 태어나는 순간의 호흡을 담기 위해 그 자리에 조금 더 머무는 것이다. 미묘한 표정과 제스처를 잡아내기 위해 오래 머무르고 무심하게 공간을 가로지는 카메라가 일견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영상시집이라고 생각하고 각 시퀀스들을 끊어서 감상해보면 전혀 다른 방식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일대기이되 일대기가 아니다. 한 사람의 생을 따라가되 시가 탄생하는 순간에 방점을 찍고 한줄에 꿴다. 어떤 장면은 슬프고, 어떤 시는 애잔하고, 어떤 시는 푸근하고, 어떤 시는 황홀하다. 때로는 두세 가지가 동시에 이뤄지기도 한다. 에밀리 디킨슨이 시를 통해 영혼의 모양을 새겨 넣었다면 테렌스 데이비스는 시적 이미지를 통해 에밀리 디킨슨의 삶을 압축한다. 그래서 전체를 보면 일견 불균질하지만 부분적으로는 지나치게 완벽한 게 아닌가 느껴질 정도다. 그렇다. 테렌스 데이비스의 카메라는 에밀리 디킨슨의 시와 마찬가지로 ‘진실을 압축하는’ 작업의 일환이다. 가족과 집, 브라일링 버펌 같은 극소수의 우정 안에서 자신을 지켜오던 에밀리 디킨슨의 세계는 이별의 연속에 놓여 있다. 새로운 만남이 힘겨웠던만큼 익숙했던 것들과의 이별은 세계의 붕괴를 의미한다. 마음이 맞지 않던 고모가 죽고, 유일했던 친구가 결혼과 함께 떠나고, 이해와 반목을 반복했던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 또한 죽는다. 세계의 분열 앞에서 그녀의 영혼도 조금씩 찢어진다. 그럼에도 에밀리 디킨슨은 신장염으로 56살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고통과 균열의 흔적을 새기는 데 눈돌리지 않았다. 그것만이 유일하게 허락된 해방의 순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언젠가 사랑했던 모든 것들이 떠나가고 홀로 남겨질 것이라는 걸 예감하고 있는 에밀리 디킨슨에게 그것은 저주이자 축복이다. 그 축복은 전쟁 같은 자존을 통해서만이 유지된다. 새벽녘 혼자 시를 쓰고 있던 에밀리에게 오빠의 아내 수잔이 찾아와 말한다. “너에겐 시가 있잖아.” 에밀리는 화답한다. “너에겐 삶이 있잖아. 난 그저 일상이고. 구제불능에게 하나님이 주신 유일한 선물.” 에밀리의 시는 우리에게 영감을 주고 여성으로서 시대와 전쟁을 벌였던 인간의 열정을 품고 있지만 동시에 고통의 산물이기도 하다. 에밀리 디킨슨도 시대에 순응하며 행복을 갈구하는 삶을 살 수 있었지만 그러기에는 스스로에게 너무 엄격하고, 예민하며, 고고했다. 그 영혼의 형태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이름을 붙일 수는 있을까. 극중 결혼한 오빠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에밀리는 갓난 조카 아기를 품에 안고 읊조린다. “난 아무도 아녜요, 당신은 누군가요, 당신도 아무도 아닌가요. 그럼 우린 같은 처지네요. 말하진 말아요. 사람들이 알면 쫓아낼 테니. 누군가가 된다는 건 너무 우울해요.” <조용한 열정>에 어떤 묘사를 갖다붙이더라도 말이 무기력해질 것이다. 이 영화에는 압축 불가능할 것이라 여겼던 한 인간의 생이 담겨 있다. 모든 드라마와 극적 순간을 비껴가는 것 같지만 실상 그 묘사들이 너무도 생생하고 고통스러워 계속 바라보고 있기 힘들다. 동시에 그렇기에 영화가 내내 끝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든다. 여기 시가 된 영화, 영화가 된 시의 힘을 빌려 온전히 한 사람의 생을 목격한다. 영국의 영상시인 테렌스 데이비스 테렌스 데이비스는 1988년 장편영화 <먼 목소리, 정지된 삶>으로 데뷔한 이래 29년간 겨우 8편의 작품을 세상에 내어놓았을 뿐이다. 매우 신중하고 느리게 영화를 만들고 있지만 그 미학적 성취만큼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영국의 작가 감독이다.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아내거나 직접 각본, 각색을 하는 그는 시적인 은유가 돋보이는 영상 스타일로 주목을 받는다. “영화와 텔레비전 드라마는 다른 것”이라는 주장을 해온 그의 영화는 선형적인 서사 전달보다 영화적 형식의 아름다움에 집중한다. 데뷔작을 비롯한 초창기 작품들이 리버풀에 주목했다면 최근 테렌스 데이비스가 심취한 대상은 여성의 삶이다. 2000년 <환희의 집>, 2011년 <더 딥 블루 씨>는 물론 2015년 <선셋 송>까지 억압받아온 여성에 대한 관찰을 이어가고 있다. 어쩌면 애초에 영화를 통해 스크린에 절대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했던 그가 시인 에밀리 디킨슨에 이끌린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마음이 외치고 싶어해> 요시네 교코 - 맑고 은은한 빛

<마음이 외치고 싶어해>의 소녀 나루세 준은 진심을 입 밖에 꺼내지 못한다. 매사 소극적이고 쭈뼛거리는 그녀가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선택한 길은 뮤지컬 공연이다. 준 역을 맡은 요시네 교코가 경쟁해야 할 상대는 다름 아닌 원작인 인기 애니메이션 속 캐릭터다. 소심하고 여리지만 배려 깊고 맑은 마음씨의 소녀. 애니메이션은 그런 소녀를 그리면 되지만 요시네 교코는 연기를 해야 한다. 아마도 나루세 준을 실사로 표현하는 데 현재 일본에서 요시네 교코만큼 적합한 캐스팅도 없을 것이다. <후지TV>에서 방영한 드라마 <라스트 신데렐라>로 데뷔한 요시네 교코는 귀엽고 맑고 청순한 캐릭터의 대명사로 자리매김한 차세대 배우다. 거기에 더해 요시네 교코는 과장되지 않은 자연스러움이 묻어난다. 자신을 드러내고 감정을 쏟아내어 스스로 빛나는 태양이 아니라 눈에 띄지 않아도 항상 주변에 머물며 은은히 빛을 반사하는 달에 가깝다. <하나코와 앤> <탐정의 탐정> 등 주요 드라마에서 활약하던 요시네 교코를 배우로 각인시킨 작품은 2015년 <오모테산도 고교 합창부!>다. 무려 1천 대 1의 오디션을 뚫고 주연으로 발탁된 이 작품을 통해 제86회 더 텔레비전 드라마 아카데미상 여우주연상, 제1회 컨피던스 어워드 드라마상 신인상을 수상하며 자신만의 캐릭터를 만들어갔다. 대사나 표정보다 자세, 손짓, 목소리 톤으로 감정변화를 전달할 줄 아는 배우. 어쩌면 <마음이 외치고 싶어해>의 수줍지만 강인한 소녀 나루세 준은 그때부터 이미 그림을 찢고 나올 준비가 돼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영화 2017 <마음이 외치고 싶어해> 2016 <와사비> 2016 <64 파트2> 2015 <선배와 그녀> TV 2016 <벳핀상> 2016 <몽타주 3억엔 사건 기담> 2015 <오모테산도 고교 합창부!> 2015 <탐정의 탐정> 2014 <하나코와 앤> 2013 <가면티처> 2013 <라스트 신데렐라>

서효인의 <그때 거기 있었습니까?> 지속되는 우리의 삶처럼

감독 코르넬리우 포룸보이우 / 출연 마리시아 안드레스쿠, 테오도르 코반 / 제작연도 2006년 1988년 겨울, 5공 청문회가 열렸다. 그해의 기억을 소환한 드라마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기도 했지만, 내게 1988년의 기억은 청문회만이 또렷하다. 7살에 불과했으니 텔레비전에 나와 엄숙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젓던 군인들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른다. 마찬가지로 무지렁이 같은 차림으로 중계 카메라 앞에 주눅 들어 앉아 있던 사람들의 표정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몰랐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작은 화면으로 그것을 바라보던 어른들과 그들이 풍기던 분위기였다. 그곳은 광주였고, 할머니가 하던 함바집의 작고 두툼한 텔레비전 앞이었다. 그들은 화를 내다가 중얼거리다가 차갑게 돌아섰다 다시 돌아와 술잔을 기울였다. <그때 거기 있었습니까?>는 1989년 독재자 차우세스쿠를 쫓아낸 루마니아의 혁명을 다룬 영화다. 그러나 혁명의 드라마틱함은 자료화면처럼 스치듯 지날 뿐이다. 남은 건 사람들의 기억. 그때 거기 있었는지 아닌지를 두고 벌이는 설전 아닌 설전이 유머 아닌 유머를 만들어낸다. 오랜 시간을 시민 위에 군림한 절대 권력이 헬기를 타고 도망가는 모습이 생중계된 역사적인 순간이지만, 그때에 거기에 있었던(혹은 없었던) 사람들의 기억은 모두 다르다. 영화관에 막 들어섰을 때, 혁명의 정중앙에 있었던 소시민의 남은 열정 같은 것을 기대했던 내게, 영화는 혁명에 대해 그리고 삶에 대해 다시 묻는 듯했다. 그때에 거기에 있었던가, 있었다면 무엇을 했었나. 기억을 더듬는 순간 감독은 마지막 시퀀스로 슬쩍 힌트를 준다. 하나둘씩 켜지는 가로등 불빛. 이어서 낮은 조도로 불을 밝힌 크리스마스트리. 혁명 후 16년 지난 오늘, 다시 시작되는 하루. 혁명의 기념은 거대한 조형물, 으리으리한 기념관, 달력의 빨간 날 같은 것들로 완성될 것이지만, 그것들을 구성하는 본질은 사람이다. 우리의 기억이다. 오랫동안 우리는 그때 무슨 일이 생겼는지, 그때 거기에서 누가 사라져갔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1988년 청문회 생중계 화면 앞, 더 나아가 1980년 광주 변두리 마을, 나의 삼촌과 고모와 부모와 이웃 어른들은 있었다. 그리고 하나둘 켜지고 꺼지는 가로등처럼 깜박이며 삶은 지속된다. 혁명은 완성되지 않는 것이다. 각자의 기억으로 진행되는 것이다. 어느 훗날, 2016년의 촛불은 어떻게 기억될는지. 우리는 그때 거기 있었고, 지금도 여기에 있다. 미래에도 우리는 그곳에 있을 것이다. 어두운 사위를 밝히는 가로등이 될 것인지 어두움에 잡아먹힌 망각의 그림자가 될 것인지는 마저 지속될 우리의 삶이 증명할 것이다. 그날 “그때 거기 있었습니까?”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어딘가에서 무엇을 하며 있었다고, 삶으로 대답할 수 있기를, 그때와 거기를 들먹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하진 않기를, 다시 돌아온 겨울에 다짐한다. 이 다짐이 기억되길 바라면서. 서효인 시인, 출판편집자. 시집 <소년 파르티잔 행동 지침> <백년 동안의 세계대전> <여수>와 산문집 <이게 다 야구 때문이다> <잘 왔어 우리 딸>이 있다.

[영화와 건축] 공간구조와 이야기구조를 통해 <로건> 읽기

최근에 영화를 보면서 가장 눈에 들어왔던 디자인은 영화 <로건>(2017)에 나오는 자율주행 트럭이다. 스토리의 전개에는 로건(휴 잭맨)이 운전하는 리무진이 더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지만 더 인상적인 디자인은 자율주행 트럭이다. 영화에서 배경이 되는 2029년은 자율주행이 상용화된 상태이고, 운전자주행 자동차와 자율주행 자동차가 도로에 공존하고 있다. 자율주행 트럭은 로건과 자비에 교수(패트릭 스튜어트)가 돌연변이 소녀 로라(다프네 킨)를 데리고 미국 중서부 고속도로를 횡단하는 장면에서 나온다. 자율주행으로 달리는 대형 트럭 하나가 로건의 픽업트럭 앞으로 무리하게 끼어들고 이를 급하게 피하던 로건이 역방향으로 주행하는 장면이다. 로건의 트럭을 무시하며 거칠게 밀고 들어오는 자율주행 트럭의 모습은 시대에 뒤처져 소수자로 변해버린 운전자 자동차의 모습을 보여준다. 관습적인 선택으로부터 벗어나라 <로건>에서 미래의 자율주행 운송트럭은 운전석 공간이 사라진 형태다. 마치 컨테이너가 도로 위를 달려가는 느낌을 주고 있다. 감정 없는 자율주행 트럭이라는 영화 속 성격을 극대화하는 이 인상적인 트럭의 형태는, 곰곰이 생각해보면 논리적인 설계의 결과물이다. 운전자가 필요 없는 절대적인 자율주행의 조건에서 굳이 동력장치를 앞에 배치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의문이 생기기 때문이다. 자율주행 자동차의 미래를 예상하는 자동차 디자인의 대부분이 좌석의 방향 같은 문제에 집중하는 것과 비교하면 <로건>의 자율주행 트럭은 ‘운전석을 삭제해서’ 새로우면서도 낯선 형태를 만들어내고 있다. <로건>의 영화미술에서 이와 비슷한 접근은 자비에 교수가 숨어 지내던 폐공장 디자인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로건과 자비에 교수의 은신처는 멕시코 외딴 장소에 위치한 낡은 공장과 쓰러진 철재 물탱크다. 폐공장을 은신처로 사용하는 것이 영화의 공간디자인으로 자주 나오는 시도라면, 쓰러진 물탱크는 새로운 아이디어다. 산업 구조물을 활용해서 거주공간으로 사용하는 것이 이제는 유행으로 변해버린 현상이라면, 물탱크가 옆으로 누웠을 때 만들어지는 공간을 생각해내는 것은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2012년 여수세계박람회는 항구의 산업용 부지를 이용해서 건설되었다. 박람회 부지에는 시멘트 저장고로 사용하던 2개의 콘크리트 사일로가 있었다. 박람회를 위한 대부분의 건물들이 새롭게 건설된 반면, 2개의 사일로는 재활용이 결정되었다. 그리고 이 산업용 구조물을 건물로 변환하기 위해 설계공모전이 진행된다. 1차, 2차 두 단계로 나누어서 진행된 공모전에서 1차에서 뽑힌 5팀 중 한팀은 나머지 팀들과는 다른 접근의 계획안을 제안했다. 4팀이 사일로를 치장하는 데 집중하고 있는 반면에 일러스트레이터로도 유명한 건축가 오영욱의 안은 사일로 2개 중 하나를 쓰러트리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리고 이렇게 쓰러트리는 것을 통해서 원통형의 사일로는 우리가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마치 거대한 맨홀을 사용해서 건물을 만든 것과 같을 것인데, 오영욱의 계획안에서 사일로는 바다 방향으로 열려 있다. 쓰러진 사일로와 서 있는 사일로는 한쌍을 이루고 있다. 최종 당선작은 오영욱의 안이 아니었다. 아마도 심사위원들은 콘크리트 사일로를 쓰러트리는 계획에 불안감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관습적이고 안정된 선택은, 우리가 새로운 공간을 가질 기회를 놓치게 했다. <로건>은 울버린 같은 슈퍼히어로도 늙고 병든다는, 단순하지만 생각의 전환이 필요한 아이디어로 시작된다. 슈퍼히어로영화의 관습적인 길과는 다른 길을 택하고 있다. 엑스맨 영화의 뮤턴트들도 늙고 병들어가는 존재라는 사실은 영화를 현실 세계로 내려오게 한다. 이제 자비에 교수와 로건은 자신의 능력을 잃어가고 있는 중이다. 로건의 자연치유능력이 약해진 후 생겨난 몸의 상처들과 나이 든 자비에 교수의 나약한 모습은 이를 잘 보여준다. 몸의 변화뿐만이 아니다. 생활인으로서의 로건은 힘겹게 리무진 운전사로 일하고 있다. 이유는 다르겠지만 다른 나이 든 은퇴자들처럼 로건도 돈을 모아 바다에서 생활할 수 있는 요트를 구입할 계획을 갖고 있다. 영화미술 측면에서도 나이 든 뮤턴트라는 사실은 낡은 폐공장의 모습과 쓰러진 물탱크로 표현되고 있다. 그들은 왜 북쪽으로 가는가 <로건> 속 공간구조를 살펴보면 영화는 북미 대륙의 남쪽에서 북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로건>의 카지노 호텔방 텔레비전에도 나오는 <셰인>(1953)과 같은 서부영화들이 동부에서 서부로 향하는 영화라면, <로건>은 북쪽으로 향하고 있다. 로건 일행은 멕시코의 폐공장 은신처에서 시작해서, 캐나다 국경에 면한 노스다코타주의 산불 감시탑까지 연결되는 길을 이동한다. 그사이에는 텍사스의 주유소, 오클라호마시티 카지노, 캔자스주의 옥수수 가족 농장이 나온다. 그중에서도 캔자스주의 가족농장은 서부영화, 특히 <셰인>을 바로 연상시키고 있다. 하지만 다른 점이 있는데, 서부시대와 달리 이 흑인가족의 농장을 차지하려는 세력은 옥수수를 사용해서 음료를 만드는 거대기업이다. 영화 <로스트 인 더스트>(2016)에서 이미 한번 언급한 것처럼 서부 개발의 기폭제가 되었던 홈스테드법은 서부의 변화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 1862년에 제정된 홈스테드법은 동부 13개주 밖 서부에서 최소 5년 이상 정착하고 개간하려는 의지가 있는 사람들에게 국가의 공유지 땅을 무상으로 분배하는 법이다. 이 법에 따라 미국 토지의 약 10%에 해당하는 크기의 땅이 독립 자영농의 소유가 되었다. 따라서 서부시대를 배경으로 한 많은 영화들은 토지 소유에 관한 분쟁들을 이야기로 만들어낸다. 토지보다는 난민이나 소수자의 인권 문제가 더 중요한 오늘날 미국의 현실은 영화의 여정을 남쪽에서 북쪽 캐나다로 향하게 하고 있다. <로건>의 공간구조가 남쪽에서 북쪽으로 향하는 로드무비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면 이야기의 구조는 로건 자신의 복제에 관한 것이다. 멕시코에 위치한 한 기업이 뮤턴트들의 유전자를 이용해서 돌연변이 아이들을 만들어낸다. 이곳을 탈출한 아이들 중 로라는 로건의 유전자를 이용해서 만들어졌다. 그리고 탈출한 아이들을 추적하는 기업의 킬러는 로건의 복제품이다. 이를 통해서 로건은 로라와는 아버지와 딸이라는 관계가, 로건의 복제킬러와는 ‘자신의 딸을 구하기 위해 자신과 싸우는 울버린’의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있다. 영화는 로라가 로건의 무덤을 만들고 떠나는 것으로 끝이 난다. 로건은 돌연변이 아이들이 캐나다로 탈출할 수 있도록 돕는 과정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로라는 로건의 무덤을 떠나기 전 십자가 +를 쓰러트려 X로 만들고 떠난다. <로건>은 영화미술도 흥미로운 영화다. 훌륭한 아이디어를 갖고 있다. 자율주행 트럭과 물탱크 은신처, X로 변한 십자가는 개별적으로 봐도 좋은 디자인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영화와 건축이 아이디어만으로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외화 베스트⑥] 개봉 대기 중인 슈퍼히어로영화들 ― <블랙팬서> <앤트맨과 와스프> 등

무술년 극장가에 공개될 슈퍼히어로영화들을 한자리에 모았다. 일단 라이언 쿠글러 감독의 <블랙팬서>가 첫 스타트를 끊는다. 비브라늄 생산국인 와칸다의 왕 티찰라(채드윅 보스먼)가 비브라늄 이권을 노린 적들의 공격으로부터 와칸다를 지켜냄과 동시에 자신의 왕좌인 ‘블랙팬서’ 자리를 노리는 동족 킬몽거(마이클 B. 조던) 무리와도 싸워야 하는 이야기. 예고편에도 등장한 부산 촬영 장면으로도 화제가 됐는데, 해당 장면에서 블랙팬서의 슈트가 전편보다 완벽한 방탄 소재에 힘 조절이 가능한 업그레이드 버전이라는 것이 확인됐다. 그에 상응하는 액션과 비밀의 왕국 와칸다의 환상적인 비주얼이 주요한 볼거리로 등장할 것 같다(2월 14일 개봉). 뒤이어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가 4월에 개봉하고 나면 <앤트맨과 와스프>가 기다리고 있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의 20번째 작품으로, ‘시빌워’ 사건 이후 앤트맨으로서 그리고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하지 않으려는 스콧 랭(폴 러드)과 새로운 미션을 수행하게 될 ‘와스프’ 호프(에반젤린 릴리) 두 사람의 이야기다(7월 개봉). 마블의 또 다른 <엑스맨> 시리즈도 대거 공개된다. 시리즈의 11번째 작품인 <엑스맨: 뉴뮤턴트>는 스스로를 뮤턴트로 자각하기 시작한 5명의 젊은이들이 이상한 시설에 감금되자 자신들의 과거에 맞서며 병동을 탈출하기 위해 싸우는 이야기. <안녕, 헤이즐>의 조시 분 감독이 연출을 맡았는데 10대 뮤턴트들의 우울한 정서와 방황에 관한 어두운 이야기를 기대해본다. 배우 안야 테일러 조이가 텔레포트 능력을 지닌 러시아 여성 마직, 드라마 <기묘한 이야기>로 얼굴을 알린 찰리 히턴이 공중부양이 가능한 캐논볼, 메이즈 윌리엄스가 늑대인간과 같은 능력을 지닌 라네, 헨리 자가가 태양에너지를 조작할 수 있는 선스팟, 블루 헌트가 사람에게 환영을 조작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미라지 역을 맡는다. 이들 다섯 사람이 영화의 실질적인 주인공. 이들의 멘토인 의사 세실리아(앨리스 브라가)는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바이오필드를 만들 줄 아는 능력자다(4월 개봉). 같은 시리즈의 12번째 작품은 <데드풀2>로, 이미 1편 개봉 때부터 2편 제작을 예정했던 영화다. 1편의 팀 밀러 감독은 라이언 레이놀즈와 의견 차이로 하차하고 최종적으로 <아토믹 블론드>의 데이비드 레이치 감독이 이어받았다. 조시 브롤린이 케이블 역을 맡아 화제가 되기도 했으며, 현재까지 제대로 된 줄거리를 일부러 공개하지 않고 있다(6월 개봉). 이어지는 시리즈의 13번째 작품은 <엑스맨: 다크 피닉스>다. 이는 내용상으로는 <엑스맨: 아포칼립스>의 속편 격인 영화로 사이먼 킨버그 감독이 각본과 연출을 맡았다. 원작 그래픽 노블인 <다크 피닉스 사가>의 이야기인 시아 제국의 외계인과 다크 피닉스의 전지전능한 힘에도 맞서야 하는 사건을 다룬다. 때문에 이전 시리즈의 엑스맨 멤버들이 총출동할 예정이며 제시카 채스테인도 정체불명의 외계인 역으로 출연한다. 사실상 그녀가 강력한 악역일 것으로 예상된다(11월 개봉). 올해 대미를 장식할 슈퍼히어로영화는 MCU 영화들과는 직접적인 연관은 없지만 스파이더맨을 다르게 해석하는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가 될 예정이다. 필 로드와 크리스 밀러 감독이 제작과 각본을 맡고 밥 퍼시게티, 피터 램지, 로드니 로스먼 감독이 공동 연출한 애니메이션영화로 원작 그래픽 노블 <얼티밋 스파이더맨> 시리즈를 기반으로 만들어질 영화다. 2대 스파이더맨이 된 흑인 소년 마일스 모랄레스의 이야기로, 원작의 캐릭터는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과 배우 도널드 글로버에게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캐릭터다(12월 개봉).

[노순택의 사진의 털] 나도 한때는 MBC를 보았다

텔레비전을 없앴다. 영리한 바보상자에게서 달아나고픈 마음을 품어왔지만, 그것 때문은 아니었다. 누구라도 그러하듯 나는 텔레비전에 빠져들곤 했다. 탐사기획과 뉴스는 세상을 바라보는 또 다른 눈이었다. 헌데 어느 날부턴가 그것들이 꼴보기 싫어졌다. 이명박의 계절이 깊어갈 무렵이었다. 괜찮은 눈을 가진 사람들이 괜찮은 목소리로 전해주던 세상의 희로애락이 방송에서 자취를 감췄다. 농부를 고깃배에 태우는 식으로 기자와 PD를 쫓아내자 방송은 마치 사전의 뜻풀이를 시연하듯 ‘정권의 나팔수’가 되었다. 나팔수의 중요 임무 중 하나는 역설적이게도 침묵이었다. 거짓 저널리즘이 침묵의 토양 위에서 날개를 폈다. 통장에서 빠져나가는 시청료가 그 후원금처럼 여겨졌다. 때마침 텔레비전이 고장나자 미련 없이 버렸다. 그것은 MBC <뉴스데스크>와 <시사매거진 2580>과 작별을 고하는 일이기도 했다. 산하를 난자한 4대강 사업과 비리로 얼룩진 자원외교, 정권연장을 위한 정보기관의 선거개입과 민간인사찰의 국면에서 방송저널리즘은 무슨 짓을 했는가. 뒤이은 박근혜의 계절에서 방송은 사악한 허수아비일 뿐이었다. 허수아비들의 활약은 세월호 참사 앞에서 “형광등 100개의 아우라”처럼 빛났다. 박근혜·최순실의 국정농단 실체가 드러나고 촛불의 파도가 광장에서 넘실대던 겨울밤, 나는 보았다. 매끈하게 빛나는 MBC 현장중계 차량에 쌓이던 분노의 손팻말을. 누군가는 가래침을 뱉었다. 기시감일까. 1980년 오월광주 시민들의 손에 불타던 MBC 사옥이 떠올랐다. 다른 시공간이지만, 같은 장면이었다. 그랬던 MBC가 돌아왔다! 고 한다. 사실일까. 고깃배를 타고 떠났던 농부들이 들녘으로 돌아왔다. 최승호 신임사장이 그중 한명이라는 점이 반갑기만 하다. MBC는 지난날의 애칭 ‘마봉춘’을 되찾을 수 있을까. 쓰라린 기억을 곱씹지 않는다면 불가능하리라. 그래서 제안하고 싶어졌다. 사장실 벽에 방송의 밝은 미래를 걸지 말고, 어둡고 치욕스런 과거를 걸라고. 불타는 MBC 사옥과 가래침 쌓인 중계차량이 눈 밖으로 벗어나지 않게 하라고. MBC의 미래는 결국 과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