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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1997)

[베를린] 제작기간 14년 걸린 <짐 크노프와 기관사 루카스> 개봉 후 반응

부활절 연휴를 맞아 독일 역사상 가장 많은 제작비가 들어간 블록버스터영화가 개봉했다. <짐 크노프와 기관사 루카스>가 그 작품이다. 영화는 1960년 출간된 미하엘 엔데의 동명 동화가 원작이다. 동명의 원작은 지금까지 총 3500만부가 판매되었다. 영화는 제작비가 무려 2500만유로 들었으며, 제작기간이 14년이나 걸렸다. 우여곡절 끝에 감독도 중간에 바뀌었다. 2013년부터 데니스 간젤이 감독을 맡았다. 학생들을 대상으로 파시즘의 폐해를 확인하는 실험을 한 고등학교 교사의 이야기를 다룬 <디 벨레>로 호평받았던 데니스 간젤은 “어린 시절부터 좋아했던 동화를 꼭 영화로 만들어보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영화 <짐 크노프와 기관사 루카스>에는 우베 옥센크네히트 등 독일 간판 배우들도 대거 출연한다. 영화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나라 룸머란트에 소포로 배달된 흑인 아기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주민들의 도움으로 자란 흑인 소년이 주인공 짐 크노프다. 짐 크노프는 기관차 엠마를 운전하는 루카스와 친해진다. 기관차를 타고 모험을 떠나는 루카스와 흑인 소년 짐 크노프는 모험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우정과 사랑을 키운다. 독일인들에게는 1960년대 아우크스 부르크 인형극단이 제작한 텔레비전 인형극 <짐 크노프와 기관사 루카스> 버전이 익숙하다. 단순하면서도 아기자기한 유럽 전통 인형들 대신 간젤 감독은 컴퓨터그래픽으로 화려한 실사를 구현했다. 하지만 기대 속에 개봉한 영화에 대한 평은 혹독하다. 유력 주간지 <슈피겔>은 “컴퓨터 효과로 가득 채운 간젤의 버전은 판타지를 배제한다. 그리고 (미하엘 엔데가 의도한 세계와는) 다른 세계로 침잠한다”고 평했고, 일간 <베를리너 차이퉁>은 “영화 속 인물들이 살아 있는 것 같지 않다”고 혹평했다.

[영화를 향한 책의 여정③] <왕가위: 영화에 매혹되는 순간> 신비의 근원을 찾아서

외로운 남자 아비, 그는 두 여성의 마음을 비집고 들어가 차례로 유혹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이내 그녀들에게 무관심해진다. 이런 그의 태도가 상대방의 마음을 황폐하게 만들지만, 그를 냉정한 마음을 가진 자라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영화 <아비정전>(1990)이 꼬집는 감정의 이미지가 우리에게 이 말을 전한다. 아비가 바라보는 대상은 특정한 누군가가 아니라,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가 있는 먼 곳의 장소를 바라본다고 말이다. 그 어딘가의 장소는 꾸준히 변주된다. 현재 그가 머무는 건물의 입구나 어두운 복도들, 혹은 시야가 흐려진 골목길과 같은 중간 어드메의 공간들이 그 상상적 이미지를 대체하게 된다. 홍콩이란 도시를 지탱하는 모난 장소들 곁에서, 왕가위의 영화가 갈망하는 욕망도 바로 이 지점에서 드러난다. 20세기 말의 관객이 그의 영화를 보며 ‘영국의 홍콩 반환’이라는 역사적 이벤트를 떠올렸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불가항력적인 망명과 덧없는 기억 사이에서, 당대의 관객은 스스로 채우는 것이 불가능한 공허 이면의 불안함을 거대한 스크린에 투영했다. 작가이자 비평가인 존 파워스가 바라본 왕가위 인터뷰집 <왕가위: 영화에 매혹되는 순간>은 감독으로서 왕가위가 스스로의 영화를 대하는 태도를 보여주는 책자이다. 첫장을 열자마자 독자들은 압도적으로 시선을 사로잡는 영화의 스틸사진들을 통해 이 책이 현장에서 출발해 감독의 개인적인 어린 시절 사진까지, 그야말로 왕가위의 팬들에게 ‘매혹되는 순간’을 안겨줄 것이란 걸 직감하게 된다. 여섯 차례 대화를 통해 완성된 왕가위 영화에 대해 그들이 나누었던 심도 깊은 대화는, 과거 트뤼포가 히치콕 특유의 ‘감정의 언어’를 조명하려 노력했던 과정을 떠올리게 한다. 존 파워스는 이번 인터뷰집에서 왕가위의 필모그래피 전체를 가로지르는 ‘신비함의 원천’을 재단하려 노력한다. 아마도 그가 찾아낸 핵심은 표면이 아닌 내면에 있는 것 같다. 37개의 작은 단위로 나눈 오프닝의 비평 에세이에서 그는 ‘시간, 기억, 유배, 실연, 홍콩의 각기 다른 얼굴들’이란 다채로운 주제를 분할해 왕가위가 결국에는 “아름다움으로 시작해 마지막은 감정으로 끝맺게” 되는 연출을 지향한다고 말한다. 시간에 대한 애착과 노스탤지어를 향한 간절함, 그리고 기다림에 대한 운명성이 왕가위 영화의 키워드가 된다. 감독 스스로 이르듯 “마음의 기나긴 방황보다 더한 대하드라마는 없을 것”이란 동감이 찰나의 집적을 통해 형성된다. 관객이 현실 너머에 있는 황홀한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돕는 불투명한 통로로서 왕가위의 영화는 우리 가슴에 자리잡고 있다. “제 영화는 전부 홍콩에 대한 겁니다. 설사 아르헨티나가 배경이라 해도 말이죠.” 생각해보면 <아비정전>에서 장국영이 탱고를 추던 홍콩의 작은 아파트를 벗어나서도 이러한 이미지는 계속해서 확장되었다. “주의 깊게 보면 모든 이야기가 다양한 방향으로 진행될 수 있다는 게 보일 겁니다. 다양한 방향 감각에 그만큼 다양한 방향의 가능성이 더해지는 거고요.” 시간이나 공간의 경계선 전략만으로 이를 묶어둘 필요는 없다. 저자는 이 부분에서 보르헤스의 단편소설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을 떠올린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중경삼림>(1994)의 낮과 밤의 이미지, <해피 투게더>(1997)의 절단되는 거대한 폭포수의 이미지, 그리고 <화양연화>(2000)의 남편도 부인도 아닌 관계들에 대해 연관 지을 수 있다. 이는 바로 ‘중국인의 디아스포라’라 표상되는 왕가위 자신의 개인적이고도 시대적인 상황과도 맞아떨어진다. 과거 왕가위가 진행했던 즉흥적인 촬영현장의 모습을 떠올린다면, 완성된 영화의 흐릿한 이미지들과 겹치는 것 같아 보인다. 오랜 기간 왕가위 영화에서 의상과 세트를 담당했던 미술감독 장숙평은 다음과 같이 한마디로 왕가위를 정의한다. “그 친구, 흐릿한 거 너무 좋아해요”라고. 실상 왕가위는 사랑의 상실과 어긋남 같은 내적인 감정을 계산하거나 법칙을 지닌 것으로 표현하지 않는 연출자이다. 초당 12프레임으로 촬영된 뒤 더블프린팅되는 중첩적인 이미지들을 통해, 행동이나 리액션이 아닌 시선 자체의 롱테이크를 통해 그는 과거지향주의자로서 자신이 지닌 ‘60년대 홍콩’에 대한 애착을 드러낸다. 90년대 후반, 당시의 관객은 무언가 느껴야 했고 스스로의 빈자리를 채워야 했다. 시대가 지닌 경계에서의 불가사의함이 왕가위 영화에 전방위적으로 반영된 것이다. 그가 직접 영향 받은 60년대 뉴웨이브의 영화들에서부터, 그가 즐겨 읽던 남아메리카의 소설에 이르기까지 “주제와 방식이 서로 햄 앤드 에그처럼 맞아떨어질 때 최고의 효과를 낸다”는 그의 취향은 이후에 믿음으로 바뀐다. 놀랄 만큼 충격적인 시각적 충만함이 그의 필모그래피를 채우게 된다. 인물이나 장소, 혹은 장르라고 하더라도 왕가위 영화에서 모든 가능성은 열려 있다. 그렇게 그의 영화는 확실한 장치들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진다. 완벽한 과거로의 진입이 불가능하다는 현실적 장벽이 왕가위 영화를 최대한 경계에서 가까운 곳으로 끌어다놓는다. 약 250장의 스틸사진으로 장식된 304쪽 분량의 이 깔끔한 하드커버는 2016년에 완성되어 국내에서는 올해 4월 발매됐다. 성문영이 번역한 한국어판은 원서와 거의 동일한 속도로 내용이 진행되며, 사진의 배치는 완전히 똑같다. 데뷔작 <열혈남아>(1987)부터 2013년 개봉한 <일대종사>(2012)까지 중요한 작품 전체를 아우르기에 회고전의 뉘앙스로 받아들여도 된다. 영화가 현실보다 과장된 것이어야 한다고 믿는 연출자로서 감독의 태도가 책장 사이사이에 배어 있다. 카프카나 도스토옙스키, 혹은 히치콕처럼 왕가위가 불안증에 사로잡힌 예술가는 아니더라도, 그는 관객에게 여전히 ‘오랜 시간 남게 되는 감정’이 담긴 작품을 제공한 아시아 최고의 영화연출자다. 과정의 반복이 만들어낸 이미지의 결과물은 우연한 조합이나 운 좋은 기적이 아니다. 수많은 가능성이 존재하는 마음의 교차점을 왕가위의 영화는 매혹적 구조물로 채운다. 그가 창조하는 아름다움의 과정에는 과장이 없다. 오직 진실한 내면의 깊이가 존재할 따름이다. 왕가위와 <포지티프> 존 파워스는 왕가위 영화가 “결코 최신 유행이라 부르는 것에 중독된 적이 없다”라고 강조한다. 이론에서 출발해서 영화를 제작한 것이 아니라, 텔레비전에서 작가 일을 습득하며 영화계에 발을 들였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그간 그를 오해했는지 모른다. 실상 왕가위는 <카이에 뒤 시네마>보다 <포지티프>에 더 잘 어울리는 감독이라 할 수 있다. 급진적 이론을 제작에 활용하기보다는, 단편영화에서 출발해 고전적 완성도를 발전시킨 좌안파의 부류에 더 적합하기 때문이다. 2008년 2월 영화잡지 <포지티프>는 비평가 얀 토빈의 주도로 <왕가위 Wong Kar Wai>라는 제목의 비평집을 내놓았다. 그간의 기사와 비평 그리고 장만옥, 양조위, 크리스토퍼 도일, 장숙평과의 인터뷰를 통해 책은 직접적 대면이 아니라, 주변부의 역설적 반응을 통해 연출자 왕가위를 소개한다.

앙드레 바쟁 탄생 100주년

올해 2018년은 앙드레 바쟁 탄생 100주년이다. ‘영화이론의 선구자’라 불러도 될 만큼 그는 리얼리즘 이론의 기초를 마련했고, 이후 많은 비평가들이 그의 유산 아래 자신의 언어와 화법을 발전 시켜나갔다. 최근 기념비적인 저작 <영화란 무엇인가?> 개정 영문판이 출간되고(물론 앙드레 바쟁이 쓴 글은 2616편에 달하고 <영화란 무엇인가?>는 그중 일부만을 모은 것이다), 앙드레 바쟁이 텔레비전과 3D, 시네마스코프에 대해 쓴 글을 영역한 <앙드레 바쟁의 뉴 미디어>가 출간되는 등 2000년대 후반부터 바쟁을 재조명하는 연구들이 서구 영화학계에서도 활발히 벌어지고 있다. 생일로 따지면 4월 18일이 그의 탄생 100주년이긴 하다. 김지훈 교수가 그의 비평을 재조명하는 소중한 원고를 보내왔다. (논문 제목은 괄호안에 작은따옴표로 표시했다. (예: ‘존제론’)) 앙드레 바쟁은 누구인가. 많은 이들은 두 가지 교과서적인 바쟁을 떠올릴 것이다. 오슨 웰스, 윌리엄 와일러, 장 르누아르,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영화를 지지하고 심도와 시퀀스숏, 롱테이크의 사용을 유성영화 이후 ‘영화언어의 진화’로 평가함으로써 현실의 기록과 재현을 영화매체의 본질로 간주하는 리얼리즘 영화이론의 기초를 마련한 바쟁이 있다. 또한 현대적 영화저널리즘은 물론 이러한 저널리즘이 지향하는 비평적 관점이자 방법론으로서의 작가주의를 후원한 바쟁도 있다. 1958년 너무나 이르게 세상의 스크린을 떠난 바쟁의 두 얼굴은 68혁명기 정치적 모더니즘 성향의 영화비평과 이러한 노선의 토대 위에 과학적 방법론을 구축한 1970년대 현대영화이론에서 탈신화화의 대상이 되었다. 관객에게 심층적 퇴행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고 생생한 스펙터클로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장치(apparatus)로서 영화 일반을 개념화하고자 했던 이 시기의 스크린 이론(Screen Theory)은 감독의 개인적 비전을 영화예술의 원천으로 평가했던 작가주의를 배격했다. 이러한 현대영화 이론의 기획에서 바쟁은 영화의 충실한 현실 반영을 믿는 나이브한 본질주의자로 기각되었다. 리얼리즘과 작가주의는 바쟁의 유산이기도 했지만 현대영화이론은 이를 계승하는 과정에서 바쟁의 비평에 고정관념적인 주형을 입혔다. 2000년대 이후 유럽과 북미 영화학계는 바쟁이 생전에 <카이에 뒤 시네마>는 물론 <시네마 누오보> <에스프리> 등 수십개 매체에 기고한 2616편의 비평문을 아카이빙하고 다시 읽고, 이들 중의 일부를 영역 출간하는 작업을 진행해왔다. 4권으로 이루어진 원본 <영화란 무엇인가?>(1958∼62) 중 26편의 글만이 1967년 두권의 책으로 영역되어 오랫동안 참조되어왔다는 기존 번역의 한계 때문만은 아니었다. 2009년 대규모의 국제학회를 기반으로 바쟁에 대한 새로운 연구들을 모아 <바쟁을 열기: 2차대전 후 영화이론과 그 내세>(Opening Bazin: Postwar Film Theory & Its Afterlife, 2011)를 출간한 영화학자 더들리 앤드루에 따르면 바쟁은 “예술과 역사 사이에서의 자신의 특별한 자리를 직감했고 자신의 위치를 스크린을 통해 영사되는 세계와 그 세계의 거주자들의 철학적 관찰자로 여겼으며, (영화예술의) 가장 중요한 시기에 파리에서 상영되는 수백편의 영화를 다룬 일상적 비평가이자 전투적 시네필”이었다. 이러한 다면적 성격을 입증하듯, 바쟁의 타자기는 일반적으로 작가주의 혹은 전후 유럽 모더니즘 영화로 분류되는 특정 작품들만을 대상으로 작동하지 않았다. 그는 장르영화, 탐험다큐멘터리, 예술다큐멘터리는 물론 현실의 기록을 영화예술의 본질로 삼았던 그가 반대했던 것으로 통상 알려진 아방가르드 영화의 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을 보였고, 스타와 에로티시즘, 새로운 스크린 테크놀로지, 텔레비전과 같은 영화의 경제적, 사회적, 기술적 차원도 성찰했다. 하나가 아닌 여러 리얼리즘, 모더니스트로서의 바쟁 바쟁을 리얼리즘 영화이론의 개념적 인물로 인식시키는 데 기여한 글은 ‘사진적 이미지의 존재론’(이하 ‘존재론’)이다. 기존 리얼리즘 영화이론은 이 글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바쟁에 따르면 조형예술은 “죽은 자를 방부처리”하고 시간의 흐름에 맞서 과거를 보존하는 ‘미라 콤플렉스’(mummy complex)의 욕망을 추구해왔으며, 중세와 근대의 회화는 실물과 유사한 “복제를 통해 외부 세계를 대신하는” 기법들을 개발해왔다. 화가의 주관성이 개입되는 회화와 달리 카메라의 자동기법(automatism)으로 인간의 개입이 감소된 채 피사체를 기록하는 사진의 발명은 실물과의 유사성을 추구하는 조형예술의 역사와 결정적으로 단절했다. 바쟁은 사진의 자동기법이 약속하는 “객관성으로 인해 (사진은) 모든 회화에서 있을 수 없던 강한 신뢰성”을 획득하고 “시간을 방부처리”하는 조형예술의 오랜 욕망을 실현한다고 주장한다. “사진 속 피사체의 실존은 마치 지문처럼 그 모델의 실존을 공유한다. 그때문에 사진은 자연의 창조를 대체한다기보다는 그 창조에 실제적 역할을 맡는다.”(‘존재론’) 사진 이미지를 실물로서의 모델 대한 모방적 재현이 아니라 “모델 자체”로 보는 바쟁의 관점은 그의 다른 글들에도 산포되어 있다. “초상화가 정당화되는 이유는 유사성”인 반면, 사진은 “사물이나 존재의 이미지가 아니라 더 정확히 말해 그 흔적이다…사진사는 렌즈를 활용하여 빛의 진정한 인상을 촬영한다. 말하자면 주형(mould)인 셈이다. 사진은 그 자체로 유사성 이상, 말하자면 일종의 동일성이다.”(‘연극과 영화’) 피터 울른은 기호학자 C. S. 퍼스의 지표 개념을 활용하여 바쟁의 견해를 지표적 리얼리즘(indexical realism), 즉 카메라 앞에 과거에 존재했던 피사체와 사진적 이미지간의 실존적, 인과적 관계에 근거한 리얼리즘으로 정식화하는 데 기여했다. “바쟁은 기호와 대상간의 결정적인 실존적 유대를 거듭 강조하는데 퍼스는 이를 지표적 기호의 결정적 특성으로 여겼다.”(<영화의 기호와 의미>) 지표적 리얼리즘은 바쟁에 대한 수정주의적 독해가 본격화된 1990년대 중반부터 도전의 대상이 되었다. 스테픈 프린스는 지표적 리얼리즘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사건을 스크린에 구현하는 컴퓨터그래픽과 디지털 합성 이미지의 현실감을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지각적 리얼리즘’(perceptual realism)이라는 개념을 제안했다. 이 용어는 비록 이미지가 물리적 현실에는 부재하는 존재나 사건을 전달하더라도 그것이 현실감을 지각하는 관객의 도식과 호응한다면 사실적으로 간주할 수 있음을 뜻한다. 톰 거닝은 지표적 리얼리즘을 고수할 경우 필름 기반의 사진과 영화를 현실의 충실한 흔적으로 여기고 디지털 사진과 영화를 현실의 조작으로 간주하는 이분법에 사로잡힐 수 있다고 경고하면서 “지표는 영화적 리얼리즘이란 문제에 접근하는 최고의 방식이 아닐 수도 있고 유일한 방식이어서도 안 된다”라고 주장했다. 바쟁의 리얼리즘과 관련된 주요 저작을 가장 꼼꼼히 독해한 논문에서 다니엘 모건은 지표성 개념이 바쟁이 리얼리즘의 관념으로 비평하는 영화들의 스타일적 다양성, 이러한 영화들이 다루는 물리적 현실의 다양성을 포착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모건이 이러한 지적과 더불어 환기시키는 바쟁의 한 구절은 다음과 같다. “하나의 리얼리즘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리얼리즘이 있다. 각각의 시대는 자신의 리얼리즘을, 말하자면 우리가 현실에서 원하는 것을 가장 잘 포착하고 유지하고 표현할 수 있는 기법과 미학을 추구한다”(‘윌리엄 와일러, 또는 영화의 장세니즘’). 이러한 수정주의적 독해는 각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가지 차원으로 수렴된다. 즉 지표적 리얼리즘은 영화의 사실성 또는 영화 이미지와 세계와의 관계를 설명하는 유일하고도 선험적인 기준일 필요가 없다는 점, 또한 바쟁의 비평은 지표적 리얼리즘만으로 환원되지 않는 여러 리얼리즘 개념들을 던지고 그 사이를 횡단했다는 점이다. ‘존재론’에서 바쟁은 “정신적인 사실성을 표현하려는 순수 미학적 열망”과 “복제를 통해 외부 세계를 대신하려는 심리학적 욕망”을 언급한다. 예를 들어 정신적 리얼리즘이라 말할 수 있는 전자는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영화를 “순수 사진처럼 객관적인 동시에 순수 의식처럼 주관적인 정신적 풍경”(‘로셀리니에 대한 옹호’)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할 때 반영된다. 환영주의(illusionism)를 함축하는 심리적 리얼리즘이라 말할 수 있는 후자는 ‘완전영화의 신화’에서 “세상을 이미지로 재창조함으로써 완벽한 리얼리즘을 완성하려는 욕망을” 영화의 발명을 추동한 관념으로 소환할 때 입증된다. 또한 스타일로서의 리얼리즘이 있다. 물론 이것이 가리키는 바는 파편화를 근거로 미리 상정된 관념적 현실 아래 숏들을 배열하는 몽타주와는 다른 데쿠파주(d coupage) 또는 미장센이다. <영화란 무엇인가?>의 개정 영역본을 2009년 출간한 티모시 버나드는 기존 영미권 영화연구가 데쿠파주를 고전적 할리우드의 ‘분석적 편집’과 동일시하면서 그 의미의 풍부함을 희석시켰으며, 바쟁이 웰스와 와일러, 르누아르와 관련된 비평을 고려할 때 데쿠파주는 각본과 촬영 과정에서 어우러져 작용하는 장면 구성, 카메라 배치와 이동, 배우 연기의 연출 모두를 포함함을 입증한 바 있다. 1950년대 <카이에 뒤 시네마>의 비평가들이 ‘미장센 비평’으로 계승한 데쿠파주의 중요성은 일례로 와일러의 공적을 “조명, 카메라 앵글, 배우의 연출을 포함하는 ‘미장센의 기예(art)에 가져온 결정적 변화”(‘윌리엄 와일러’)로 규정할 때 드러난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의 대상은 데쿠파주 또는 미장센, 혹은 이를 구성하는 특정 기법의 역할이다. 이것들은 현실의 흔적과 지속을 충실하게 보존하는가?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영화와 관련된 일련의 글들에서 바쟁은 현실과 관련하여 ‘공간적 밀도’나 ‘모호성’과 같은 표현을 쓰면서 이를 사실(fact/fait)이라는 용어와 구분한다. “그 자체로 다양하고 모호성으로 가득 찬 구체적 현실의 조각이 갖는 의미는 사실 이후에, 다른 주어진 사실들의 도움으로 드러난다. 정신은 이 사실들간의 어떤 관계를 수립한다”(‘현실의 미학: 영화에서의 리얼리즘과 해방 이후의 이탈리아 학파’). 즉 여기서 ‘사실’이란 농밀하고도 모호한 현실의 부분이며, 카메라의 기록과 데쿠파주는 “현실을 선험적 관점의 노예로 만들지 않고”(‘연출가 데 시카’) 그러한 현실로부터 ‘사실’을 구성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바쟁이 딥포커스와 롱테이크의 기능을 “시간과 공간의 연속체”(‘영화언어의 진화’)의 보존으로 간주한 이유는 현실을 존중하면서 관객의 심리적 리얼리즘을 만족시키기 때문이며, 데쿠파주가 구성하는 ‘사실’은 물리적 현실의 보존에만 한정되지 않는 정신적 리얼리즘의 영역, 즉 “추상적인 스타일과 추상화를 통해”(‘로셀리니에 대한 옹호’) 도달하는 “정신적 풍경”의 영역이기도 하다. 결국 바쟁의 비평은 지표적 리얼리즘에 국한되지 않는 다양한 리얼리즘들의 가능성을 제기하는 것 이상으로 나아갔다. 그의 글쓰기는 이러한 리얼리즘들을 활성화하면서 현실로부터 ‘사실’을 구성하는 데쿠파주의 유형과 미학적 효과에 대한 계통학적, 지질학적 탐사였다(그의 비평이 진화생물학과 지질학을 연상시키는 많은 비유들을 썼다는 점을 상기하자). 이처럼 “(영화)매체의 재료와 미학적 가능성들간의 복잡한 협상”(다니엘 모건)에 주목한다면, 우리는 바쟁을 리얼리스트인 동시에 모더니스트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그는 크리스 마르케의 <시베리아에서 온 편지>(1957)의 일차적 재료를 ‘지성’으로 규정함으로써 모더니즘적 영화로서의 에세이영화를 선구적으로 식별하기도 했다). 철학자이자 예술사가, 플랫폼 비평가로서의 바쟁 리얼리스트이자 모더니스트로서의 바쟁이 갖는 철학적 면모는 일찍이 알려졌다. 지속의 철학에 대한 베르그송의 교훈, 사르트르와 메를로 퐁티의 현상학과의 대면, 그를 신비주의자로 오해하게 했던 가톨릭주의 등 바쟁에게 영향을 준 철학적 전통은 물론 그가 질 들뢰즈의 ‘시간-이미지’ 개념에 미친 영향이 이러한 면모를 말해준다. 이들의 영향을 심도 있게 논의하는 것이 이 글의 목표는 아니지만, 그가 영화의 심리적 또는 정신적 리얼리즘을 말하면서 이미지의 현실에 대한 관객의 태도라는 문제에 매달렸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이 점은 섹스와 죽음과 같은 “근본적으로 의식의 영역을 벗어난”(‘매일 오후의 죽음’) 현실이 스크린에 반복될 때, 또는 탐험다큐멘터리 <콘-티키>(1950)에서 물에 언뜻 보이고 사라지는 상어를 기록한 불완전한 장면을 두고 “그 장면이 흥미로운 것은 상어를 보여주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위험을 보여주기 때문”(‘영화와 탐험’)이라고 말할 때 반영된다. 결국 바쟁이 자신의 비평에서 강조했던 ‘현실의 모호성’은 그 현실에서 사실을 구축하는 영화 이미지의 모호성, 이러한 이미지와 조우하는 주체의 인식론적 모호성이기도 하다. 필립 로젠이 적절히 지적하듯, 바쟁의 비평에서 영화적 리얼리즘의 문제는 비이성적인 것(미라 콤플렉스)과 상상적인 것(‘존재론’에서 그는 사진 이미지의 효과를 초현실주의와 연결시키기도 했다)을 포함하는 믿음(belief/croyance)의 문제이기도 하다. 바쟁은 또한 예술비평가의 태도로 영화이론의 고전적 문제인 영화와 인접 예술과의 관계를 탐구했다. <피카소의 미스터리>(1956)와 같은 회화다큐멘터리에 관심을 기울였고, 영화가 연극 및 문학의 유산을 어떻게 창조적으로 전용하는가의 문제를 성찰했다. <어느 시골 사제의 일기>(1950)에서 로베르 브레송이 조르주 베르나노스의 원작을 각색하면서 적용한 생략법과 간결한 몽타주를 옹호하며 바쟁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치 있는 각색은 문학작품의 각색을 진정한 영화, ‘순수 영화’가 아무것도 얻을 게 없는 것으로 보는 비평적 오해를 반박한다”(‘비순수 영화를 위하여: 각색에 대한 옹호’). 바쟁은 원작과 구별되는 영화적 표현을 추구하면서도 원작의 화법과 주제에 등가적인 각색이 가능하다고 생각했고, 리얼리즘의 효과가 내러티브의 차원에서도 구현된다고 보았으며, 미국 소설의 발달과 영화적 각색의 발달이 어떻게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는가를 역사적으로 고찰했다. 이러한 작업을 근거로 바쟁이 제안한 ‘비순수 영화’(cin ma impure)라는 개념은 1920년대 프랑스 아방가르드 영화담론에 기원하고 영화의 본질을 시각성의 표현에서 찾는 ‘순수 영화’ 개념에 대항함은 물론, 사진 이미지의 존재론을 영화를 구성하는 다양한 질료들과 상호작용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즉 영화매체의 특정성을 지탱하는 사진 이미지의 고유함은 영화가 포용하는 문학적, 회화적, 연극적 유산들의 혼종성과 협상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아울러 바쟁은 영화에서 대중과 산업의 관계를 중요시했고, 새로운 예술로서의 영화의 위상 또한 대중 및 산업과의 협상에 따라 변화한다고 믿었다. 이런 점에서 그는 서부영화의 영향력을 미국을 뒷받침하는 신화와 도덕의 차원에서 찾았고(‘서부영화: 탁월한 미국영화’), 영화가 자극하는 에로티시즘의 근거를 “참여와 동일화를 요구하는 상상적 공간”(‘영화에서의 에로티시즘에 대한 난외주석’)에서 찾았으며, 장 가뱅과 채플린을 스타 이미지의 관점에서 접근하기도 했다. 그러나 영화관에 근거한 영화적 경험과 영화의 산업적 경계라는 문제가 첨예하게 대두되는 포스트-시네마 조건하에서 가장 중요한 재조명의 대상은 바쟁이 텔레비전, 시네마스코프, 시네라마, 3D 등 새로운 스크린 테크놀로지에 대해 쓴 글들이다(이 글들은 <앙드레 바쟁의 뉴 미디어>(Andr Bazin’s New Media)라는 제목의 모음집으로 2014년 영역 출간되었다). 이 글들 중 많은 것들은 바쟁이 르누아르나 로셀리니의 텔레비전영화에서 영화미학의 유산을 계승할 수 있는 텔레비전의 미학적 가능성을 찾았다는 통상적인 견해 이상의 풍부한 통찰과 생생한 관찰로 가득하다. 바쟁은 시네마스코프를 비롯한 새로운 스크린 테크놀로지가 텔레비전의 위협에 대한 대응임을 간파했는데, 이는 “영화는 산업의 이윤이 사라질 때 자신의 육체와 정신이 소멸에 매우 노출된 산업적 예술”(‘시네마스코프는 영화를 구할 것인가?’)라는 그의 신념에서 비롯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테크놀로지의 도입과 대중화에 산업의 제작 분야 못지않게 상영관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고, 시네라마와 3D의 기술적 차원(시네라마의 화면비율, 3D 영화를 가능케 하는 양쪽 눈의 시각 차이 메커니즘)을 치밀하게 고려하면서 이것들의 생리학적 현실감을 관객의 입장에서 꼼꼼하게 기술했다. 더 나아가 이 새로운 스크린 테크놀로지가 몽타주 및 심도와 같은 미장센의 구성요소에 미치는 영향에도 예민하게 주목했다. 이러한 영향은 바쟁의 동시대 영화는 물론 오늘날의 영화에도 적용되는 것이다. “오늘날의 감독은 웰스와 와일러의 예를 따라 자신의 구성을 조직하기 위해 심도를 활용한다. 그런데 이들은 시네마스코프 스크린의 넓이를 활용하여 마찬가지의 결과를 성취할 수 있다”(‘시네마스코프와 네오리얼리즘’)라는 바쟁의 진단은 1960년대 이후 와이드스크린 포맷의 대중화를 예견했다. 또한 “몽타주는 그리피스의 유산으로부터 도달하는 근본적 법칙들을 깨뜨리지 않고도 새로운 시각적 상황들에 단순히 적응되고 있다”(‘3D 혁명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는가?’)는 바쟁의 관찰은 70mm 아이맥스 포맷을 채택하면서도 평행편집의 표현적 잠재력을 확장한 <덩케르크>(2017)의 사례를 떠올리게 한다. 결국 텔레비전과 와이드스크린, 시네라마와 3D에 대한 바쟁의 비평은 그의 주된 관심사가 테크놀로지와 산업이 결정하고 변화시키는 영화적 경험(cinematic experience)의 문제임을 우리에게 일깨운다. ‘영화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영화 이미지의 존재론을 넘어 영화적 경험의 관점으로 사유하는 바쟁의 문제의식이 다양한 종류의 작은 디지털 스크린들, 그리고 넷플릭스처럼 기존 영화산업의 프로토콜을 위반하는 스트리밍 서비스의 도전을 고려할 때 동시대적이라는 점에 동의한다면, 우리는 바쟁을 영화 스타일과 테크놀로지의 전환기에 활동했고 21세기에 재조명되는 플랫폼 비평가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바쟁의 세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칸의 밤을 환하게 밝힌 <버닝>의 열기

<버닝>이 칸의 밤을 환하게 불태웠다. 16일 저녁 6시30분(현지시간) 뤼미에르 극장에서 이창동 감독의 <버닝>의 첫 상영이 시작됐다. 2007년 <밀양>으로 칸 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 2010년 <시>로 시나리오상을 수상한 이창동 감독은 세 번째로 경쟁부문 레드카펫을 밟았다. 공개 전부터 영화 외적인 요소로 크고 작은 구설에 올랐던 만큼 이창동 감독과 유아인, 스티브 연, 전종서는 레드카펫에서 살짝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상영이 끝난 뒤 분위기는 일변했다. 뤼미에르 대극장을 가득 메운 박수갈채는 오랫동안 이어지자 이창동 감독과 배우들도 벅찬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결국 눈물을 터트렸다. 파인하우스필름의 이준동 대표는 프로듀서이자 칸 영화제 자문위원인 고 피에르 르시앙의 뱃지를 치켜들며 헌사를 보냈다. 고 피에르 르시앙은 “2018년은 반드시 그의 해가 될 것”이라며 장문의 글을 통해 이창동 감독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보내기도 했다. 집행위원장 티에리 프레모 역시 “순수한 미장센으로서 영화의 역할을 다하며 관객의 지적능력을 기대하는 시적이고 미스터리한 영화”라며 찬사를 보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소설 <헛간을 태우다>를 각색한 <버닝>은 두 남녀와 정체불명의 남자 사이의 비밀스런 관계를 그린 영화다. 유통회사 알바생 종수(유아인)는 우연히 어릴 적 동네친구 해미(전종서)를 만난다. 종수는 밝지만 공허한 분위기를 풍기는 해미에게 호감을 느끼지만 해미는 종수에게 고양이를 부탁한 채 돌연 아프리카로 여행을 떠난다. 얼마 뒤 해미는 젊고 부유하지만 뭘 하는지 의심스러운 남자 벤(스티븐 연)과 함께 귀국한다. 세 남녀 사이의 팽팽한 긴장을 그린 이 영화는 무라카미 하루키보다는 차라리 패트리샤 하이스미스나 루스 렌델의 소설에 가까운 미스터리 스릴러를 골격으로 하고 있다. <버닝>은 죄악감을 불태우는 이야기다. 인간의 죄의식에 대한 질문을 꾸준히 이어가던 이창동 감독이 이 원작에 끌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여기 있었던 것 같다. 이 모든 이야기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는 윌러엄 포크너의 소설 <헛간을 태우다>는 하늘까지 치솟는 불길의 장려한 배덕감을 그렸다. 영화의 원작인 무라카미 하루키의 <헛간을 태우다>는 좀 더 음산하고 축축한 정서에 휩싸여 있다. 이에 반해 이창동 감독의 비전은 뼛속으로부터 울리는 긴장감의 공기를 골자로 한다. 영화 전반에 깔린 낮은 고동을 축으로 밀도 있고 날카로운 드라마가 생성된다. <버닝>은 이창동 감독의 전작들과 유사하게 죄의식의 형상을 더듬지만 윤리와 도덕을 소재로 한 직접적인 드라마와는 거리가 멀다. 죄의식 주체의 내면을 직접 파고드는 대신 죄의식을 둘러싼 상황과 풍경, 비유하자면 퍼져나가는 파장을 민감하게 포착하는 쪽에 가깝다. 미니멀한 스토리지만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밀도의 장면들로 채워져 있으며 각 장면마다 상징적인 요소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져 촘촘한 메타포의 그물을 형성한다. 특히 음악과 사운드의 조율이 실로 탁월하다. 시사 직후 반응은 폭발적이다. 아직 매체들의 리뷰가 나오지 않은 상태지만 트위터를 통해 쏟아지는 평은 대부분 찬사로 가득하다. 호평과 혹평이 동시에 지적하는 부분은 이 영화가 매우 클래식하다는 점이다. 한쪽에서는 이를 근거로 “영화적인 것 밖에 없는 영화”라며 환호하고, 다른 쪽에서는 “옛날영화처럼 길고 지루하다”는 반응도 나오고 있다. 기자 시사에서는 몇몇 사람들이 빠르게 나갔지만 남아 있는 사람들은 열렬한 박수를 보냈으며 극장을 나오자마자 활발한 토론과 함께 SNS를 통해 감상을 전했다. <버닝>은 현지시간 17일 기자회견을 진행한다. 71회 칸 국제영화제는 오는 20일 폐막작 상영과 함께 경쟁 부문 수상결과를 발표할 예정이다. 현지 반응 -한마디로 지금까지 칸 영화제 상영 중 최고. 미니멀리스적 서사지만 긴장은 최고. 훌륭한 촬영. 대단한 음악. 역할을 완전히 소화한 배우. 아마도 내 생각엔 황금종려상. _<가디언> 피터 브래드쇼. -거인의 작품. 외형적으로 단순해보이지만 대단한 밀도. 아름답고, 영화적이고, 지적이다. 이런 영화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아마도 약간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_<르 필름> 루카스 누네스. -이창동은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시나리오 작법, 분위기, 연출, 연기의 모범이다. 이런 서사를 무리하게 늘어뜨리지 않으며너도 길게 이어가는 것은 놀랄만한 능숙함의 증거다. _<시네마티저> 오렐리앙 알랭. -이창동의 <버닝>은 정말 대단하다. 어쩌면 한 15분 정도 길어보이고 몇몇 부분은 지나치게 작가적이지만 정말 아름답게 잘 구성된 작품이다. _<텔레라마> 다비드 오노라. -좀 길다고 할 수 있지만 <버닝>은 아마 지금까지 개인적으로 나의 황금종려상이다. 이 영화에는 진짜 영화적인 것 밖에 없다. _<프르미에> 줄리앙 라다.

씨네21 추천도서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

핑크빛 표지에 ‘첫사랑’ , ‘낙원’이라는 아름다운 단어로 장식되어 있지만 이 소설은 강간 피해자의 마음속 지옥도를 그려낸 세밀화다. 쓰치와 이팅은 문학을 사랑하는 13살 소녀들이다. 감수성 풍부한 문학소녀들의 세계는 안온하게 흘러갔다. 50살의 인기 강사 리궈화가 나타나기 전까지 말이다. 소녀들은 이웃집 이원 언니의 집에 들락거리면서 문학 전공자인 언니와 토론하고 영화를 보고 책을 읽으며 성장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여자들의 세계에 문학 강사 리궈화가 침입한다. 입시 인기 강사의 자리를 이용해 소녀들을 유린해온 리궈화는 쓰치에게 ‘글쓰기를 가르쳐주겠다’며 유인하고, 강간 후에는 ‘이건 선생님이 너를 사랑하는 방식’이라고 위장한다. 폭력으로 지배한 후에는 교묘한 말로 정신을 지배한다. 우리의 관계는 장아이링의 연인 후란청(작가이자 유부남이었지만 14살 연하의 장아이링과 비밀결혼했다), 루쉰과 쉬광핑(루쉰의 제자였으며 17살 연상인 루쉰과 동거했다)의 관계라고 설명하는 식이다. 쓰치가 성폭행을 당하는 동안 이원 언니는 남편에게 지속적으로 폭행당하고, 이웃들은 피해자 얼굴 위의 멍자국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눈돌린다.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을 쓴 린이한은 책이 출간된 후 자살했다. 작가 나이 26살이었다. 작가의 가족들은 이 소설이 그녀의 자전적 이야기임을 인정하고 가해자를 고발했다. 그러나 “팡쓰치가 본인이냐”는 질문에 생전의 작가는 이렇게 답했다. “제가 팡쓰치인지 아닌지는 이 책의 가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그런 질문은 받지 않겠습니다.” 질문은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에게 해야 한다. 포식자에 의해 찢어지고 뭉개진 소녀의 마음을 따라가는 것이 독자에게는 괴로운 일이다. 그리하여 눈돌리고 싶을 때마다 팡쓰치는 세상에 이러한 고통이 있다는 것을 당신이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아름다워서 더 고통스러운 문장 사이사이에 슬픔이 차오르는 소설이다. 피해자의 기록 이원이 쪼그려 앉아 두 소녀에게 말했다. “내 머릿속에 더 많은 책이 들어 있어.” 시어머니가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머릿속에 책을 넣지 말고 배 속에 애를 넣어야지.” 텔레비전 소리가 그렇게 큰데 며느리의 말을 어떻게 들었는지 신기했다. 이팅은 이원 언니의 눈동자에서 빛이 사그라지는 것을 보았다. (30쪽)

<프랑스에서의 한 철> 마하마트 살레 하룬 감독, “차드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 국가다”

“마치 질병처럼 영화의 바이러스에 전염됐다.” 마하마트 살레 하룬 감독과의 대화에서 받은 의외의 놀라움은 그가 갖은 역경 속에서 오히려 낭만의 언어를 키워온 점이었다. 마하마트 살레 하룬 감독은 세계 최빈국이라는 고단한 수식어와 함께 지난해에는 트럼프 미 대통령의 입국 금지 조치로 몸살을 앓은 아프리카 차드공화국 출신 감독이다.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특별상을 받은 <다라트>(2006), 칸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상을 받은 <절규하는 남자>(2010) 등 세계 영화계 내의 인지도 면에서 볼 때 여전히 차드의 ‘유일한’ 영화감독으로 불리기도 한다. 올해 디아스포라영화제에 초청된 신작 <프랑스에서의 한 철>은 아프리카 대륙을 떠나 프랑스 파리를 무대로 삼은 그의 첫 번째 작품. 종교 분쟁을 피해 두 자녀를 데리고 프랑스로 건너온 압바스와 그의 연인 캐롤의 이야기를 담았다. 그는 이미 두번 전주국제영화제를 찾은 적 있는 이력을 두고 “다음 생에는 한국인으로 환생할 모양”이라며 웃었다. -<프랑스에서의 한 철>은 차드에서 프랑스로 이주한 당신의 자전적인 스토리가 일부분 반영된 것처럼 느껴진다. 어떻게 기획하게 됐나. =작은 신문 기사에서 출발한 이야기다. 차드의 한 남성이 프랑스에 난민 신청을 했다가 거절당했고, 이후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지만 실패해서 결국 분신자살한 내용이었다. 나 역시 차드의 오랜 내전(1960년에 프랑스에서 독립한 후 이슬람교가 대다수인 북부와 기독교를 믿는 남부 사이의 종교 갈등이 극심해졌다. 오랜 내전과 학살, 1980년대 들어선 이센 아브레의 독재 정권은 살레 하룬 감독이 피부로 겪은 차드의 가장 큰 비극이다.-편집자)을 피해 나라를 떠나온 난민이라는 점이 영화를 만드는 강한 동력이 됐다. -10대 시절에 차드 내전을 피해 파리로 가게 된 자세한 과정이 궁금하다. =탈출 과정에서 오발탄이 내 다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더이상 걸을 수 없게 되자 아버지가 나를 수레에 싣고 카메룬과 인접한 국경지대의 강을 건넜다. 그 직후부터 나는 공식적인 난민이 된 거다. 거리에서 생활하는 무일푼 상태였는데, 내 바지 주머니에 파리의 영화학교 주소가 적힌 쪽지가 있더라. 당시로부터 2년 전쯤, 잡지에서 프랑스 유학 중인 아프리카 영화감독의 인터뷰를 읽은 적이 있었다. 기사 하단에 학교 주소가 있기에 찢어서 넣어두고는 까맣게 잊고 있었던 거지. 난민 생활의 절박한 순간에 쪽지를 발견하면서 이게 운명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프랑스에 도착한 후 학비를 충당하기 위해 병원에서 야간 근무를 했고, 소설을 쓰기도 했다. 많은 청년들이 그렇듯이 가능한 한 낭만적인 방법으로 돈을 벌고 싶었다. 저널리즘 공부를 하고 기자 생활을 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영화학교 주소가 적힌 잡지를 찢어서 보관할 정도면 어릴 때부터 영화에 대한 애정이 있었던 모양이다. =9살 때 처음 영화와 만났다. 삼촌이 나를 극장에 데리고 갔다. 당시는 텔레비전은 물론이고 외부 세계의 그 어떤 이미지도 접할 수 없는 시절이었다. 야외극장에 모인 500명 정도의 관객에 둘러싸여서 발리우드영화를 봤다. 카메라를 향해 웃는 인도 배우의 클로즈업이 스크린에 등장한 순간, 짧은 몇초간이었지만 그녀가 꼭 나를 향해 웃는 것 같더라. 그 여인과 그리고 영화와 사랑에 빠진 순간이었다. -1999년 <바이 바이 아프리카>로 데뷔한 이래 여전히 차드와 아프리카의 대표적인 감독으로 꼽힌다. 세계 영화계에 차드의 목소리를 전달한다는 무거운 책임감에서 늘 자유롭지 못할 것 같다. =어떤 면에서 나는 약간 고립되어 있다. 가끔은 혼자서 가정을 책임지는 연장자의 마음가짐 같은 것을 느낀다. 내가 차드의 이미지를 보여주지 않으면 아무도 차드에 관심이 없을 것 같은 생각도 든다. 세계 영화산업을 큰 오케스트라에 비유한다면, 나는 그중에서도 매우 작은 나만의 악기를 담당하고 있는 셈이다. -당신의 영화는 늘 차드의 현재를 재현해왔는데, 이번 <프랑스에서의 한 철>은 처음으로 유럽을 배경으로 찍었다. =이제 프랑스에서 살게 된 지 30년이 넘었다. 영화에는 만든 사람의 기억이 자연스레 담길 수밖에 없다. 일반적으로 영화에 난민이 등장하면 난민으로서 처하는 어려움 외에 다른 삶은 아예 없는 것처럼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난민들에게도 일상적이고 내밀한 생활에서 보이는 진짜 얼굴이 있다. 이런 시각이 개개인이 겪는 트라우마나 스트레스를 가까이서 보여주기에 더 적합한 방식이라 생각했다. -<다라트> <절규하는 남자> 같은 대표작에서 드넓고 황량한 아프리카의 풍경을 정제된 이미지 속에 담아냈다. <프랑스에서의 한 철>에서도 카메라가 매우 신중히 움직이고 롱테이크숏 역시 돋보인다. =사실 이번 영화는 기술적인 면에서 그동안과 차이점이 있었다. 차드에선 거의 모든 장면에서 광활한 공간감을 다뤘던 반면, 프랑스에서 영화를 찍을 땐 좁은 장소에서 촬영하는 법을 새롭게 고민해야 했다. 로케이션이 좁을 때는 카메라 위치에 약간의 속임수를 쓰기도 했다. 그 밖에 내가 노력하는 부분은 모든 얼굴이 각각의 풍경으로 전달되는 일이다. 사계절의 이미지처럼 감정과 분위기가 천천히 보였으면 한다. 그제야 비로소 인물이 처한 극심한 고뇌(anguish)가 전달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2010년에 <절규하는 남자>가 칸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상을 받은 후 영화산업을 바라보는 차드 정부의 태도에 변화가 있었나. 2013년에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영화학교 개설에 대한 기대감을 크게 내비치기도 했는데. =칸 수상 직후에 차드 정부와 영화학교 건립에 관한 논의를 시작했다. 적은 금액이긴 하지만 통신 세금의 일부를 떼와서 영화 지원 사업에 투자하는 방안도 추진되었고. 이후 학교를 세울 부지까지 정했는데, 유가 하락이 지속되면서 현재는 계획이 중단된 상태다. 2017년 2월부터 1년간 차드로 돌아가 문화부 장관으로 일했다. 예산 부족으로 기대했던 프로젝트를 추진하지는 못했지만 계속해서 방안을 찾는 중이다. -<프랑스에서의 한 철>은 프랑스영화계의 제작비 지원이 있었나. =배경이 프랑스이긴 하지만 내 영화는 근본적으로 정부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다행히도 프랑스 정부는 예술 작품을 개방적인 태도로 받아들인다. 프랑스 국립영화센터(CNC)와 두개의 텔레비전 방송국으로부터 제작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당신 말대로 이번 영화에서는 이주민을 배척하는 냉혹한 유럽의 분위기가 감지된다. =난민과 외국인 노동자 등 이방인을 사회에서 배제하려는 정치적인 구호들이 곳곳에서 부상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인류의 역사는 이주의 역사다. 인류의 이동과 흐름을 막거나 제어하는 것은 내 입장에선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아주 단순하게 접근해서 초창기 인류는 사는 곳에 먹을 것이 떨어지면 자연스럽게 새로운 곳으로 이동하지 않았나. 그런 자연의 움직임을 멈출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다음 작품은 다시 차드로 돌아가서 찍을 계획인가. =차드에서 불법인 낙태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중이다. 원치 않은 임신을 하게 된 15살 소녀의 이야기가 될 것 같다. 부조리한 시스템 아래서 자유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이 나온다. ‘링기’라는 차드의 전통적 개념과 연결해보고 싶기도 한데, 링기란 특히 여성간의 단단한 의리, 유대감을 칭하는 개념이다. 깊이 있는 앎, 신뢰, 변하지 않는 마음을 통해 서로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관계를 등장시키고 싶다. -그동안 일관적으로 남성 중심의 서사를 구축해왔다. 여성이 주인공으로 나서고, 그들의 세계를 너르게 그리는 첫 번째 시도가 될 것 같은데. 변화가 흥미롭다. =장관직을 위해 1년간 차드로 돌아가 있을 때 차드의 여성들, 특히 어린 소녀들이 어떤 생활 속에 놓여 있는지 보게 됐다. 사소한 예를 들어 차드는 50% 이상이 이슬람교인데, 이슬람교 여성들은 낮에는 히잡을 쓰고 살지만 밤에는 몰래 히잡을 벗고 클럽에 놀러 가기도 한다. 거기엔 오로지 개인의 독자적인 세계와 자유에 관한 문제가 얽혀 있는 거다. 모든 여성에 대한 헌사 같은 작품을 만들고 싶다.

[북한영화⑤] 한국영화 속 북한은 어떤 모습으로 그려졌는가, 휴전 직후부터 2010년대에 이르기까지

혼란스러운 현실 반영과 가능성들 한국전쟁 직후 자연스레 냉전 이데올로기를 기반으로 한 반공영화가 확산되었다. 일차적으로는 반공 의식 강화에 목적을 두고 있었지만 본래 영화라는 게 딱딱한 틀로 고정하려고 하면 비죽 튀어나오기 마련이다. 1960년 이전의 반공영화들은 이데올로기의 고취보다는 전쟁의 비극과 부조리를 조명하는 데 좀더 집중한다. 전쟁의 스펙터클을 재현하는 데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었던 만큼 제한된 상황에서 휴머니즘적인 접근으로 상황을 해석하는 영화들이 다수 눈에 띈다. 이 시기 영화들은 북한을 적대국가로 설정하면서도 같은 민족, 같은 사람임을 잊지 않고 있다. <피아골> 1955·감독 이강천 휴전 후 지리산에서 게릴라 활동을 이어간 빨치산 부대 내부의 갈등을 그린 영화. 잔혹한 빨치산 부대장 아가리(이예춘), 온갖 만행을 지켜보며 공산주의 이념에 회의를 느낀 철수(김진규)와 그를 연모하는 애란(노경희), 동료를 겁탈하고 다른 이에게 누명을 씌워 살해하는 만수(허장강) 등 다양한 인간 군상의 면면을 다뤘다. 토벌대의 영웅적 업적 대신 빨치산들의 인간적인 고뇌를 다뤘다는 이유로 용공논쟁을 불러일으킨 한편 반공법 위반으로 상영이 금지되기도 했으며 마지막 장면에 태극기를 오버랩으로 삽입한 후에야 극장 개봉을 하는 해프닝을 겪기도 했다. 공산주의에 대한 이념적 갈등보다 애정 문제 등 인간적인 면모를 부각시켰다는 점에서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히지 않은 시선을 바탕에 깔고 있다. ★관련 영화★ 시점의 차이_ <나는 고발한다>(1959) 감독 김묵 한국전쟁 때 납북된 남한 인사들의 북한 강제수용소 탈출기. 빨치산과 정반대의 소재라고 할 수 있다. 절박한 상황에서의 멜로드라마를 축으로 하는 등 골격은 <피아골>과 유사하지만 수용소의 열악한 환경과 북한의 비인간적인 만행을 집중 조명한 반공 드라마의 전형. <7인의 여포로> 1965·감독 이만희 북한군 장교가 한국전쟁 중 포로가 된 간호장교 7명을 호송한다. 그 과정에서 중공군이 여포로들을 겁탈하려 하자 이를 막아서며 중공군을 해치운다. 북한군 장교는 한 민족이라는 생각에 일을 저질렀지만 이대로 포로를 호송하면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받을 거란 생각에 갈등하고 결국 여군들의 설득 끝에 남한으로 귀순을 결심한다. 북한군을 인간적으로 묘사했다는 이유로 논란을 일으켰다. 1962년 영화법 개정 이후 검열이 강화된 탓에 이만희 감독이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기도 했다. 감상적 민족주의, 무기력한 국군 묘사, 북한 괴뢰군 찬양, 양공주의 과장된 묘사가 구속의 근거였는데 지금에 와서 보면 그만큼 정확하게 시대상을 반영한 표현이라 말할 수 있다. ★관련 영화★ 시대고발_ <오발탄>(1961) 감독 유현목 전후 서울의 피폐한 풍경을 그린 <오발탄>에서 노모의 “가자, 가자”라는 대사가 북으로 가자는 말로 오해받을 수 있다는 이유로 문제가 됐다. 유현목 감독은 <7인의 여포로>를 옹호했다는 이유로 <춘몽>(1965)이 외설 혐의를 받는 등 고초도 겪었다. 반공의 장르화 북한과의 체제경쟁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1962년 이후 군사정권에 의해 반공영화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1966년 제작편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동시에 정권의 입맛에 맞춘 검열이 강화되며 감독들과 지속적인 불협화음을 일으킨다. 제도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자신의 색을 녹여낸 영화들은 꾸준히 나왔으며 반공영화가 전쟁, 첩보, 멜로드라마 등의 장르와 결합해 다양한 형태로 분화했다. <운명의 손> 1954·감독 한형모 반공 첩보물의 효시로서 이후 영화들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북한의 간첩 정애(윤인자)는 우연히 고학생 영철을 구해주고 정성껏 치료한다. 그 과정에서 애틋한 마음이 생기지만 영철이 실은 방첩 장교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사랑과 임무 사이에서 갈등한다. 멜로드라마를 기반에 둔 첩보물. 특히 여주인공 정애가 시대의 부조리를 꿰뚫고 있는 똑똑한 신여성으로 묘사된다는 점에 주목할 만하다. 북한에 대한 부정적인 고정관념에 사로잡히지 않고 분단 상황 자체를 장르적 갈등요소로 풀어낸 스타일리시한 작품. 클로즈업된 손의 몽타주로 문을 여는 오프닝, 한국영화 최초의 키스 신 등 여러모로 파격적이고 과감하다. ★관련 영화★ 첩보영화 제작 붐 반공 오락영화의 두축 중 하나인 첩보물은 1965년 <007 위기일발>(1963)의 개봉을 기점으로 크게 유행한다. 실제 첩보원이었던 김동현 원작으로 화제를 모은 <8240 KLO>(감독 정진우, 1966), 남편의 복수를 위해 첩보 활동을 하는 여성간첩을 그린 <죽은 자와 산 자>(감독 이강천, 1966), 한·홍 합작영화로 국제첩보조직을 다룬 <스타베리 김>(감독 고영남, 1966) 등 다채로운 소재와 결합했다. <돌아오지 않는 해병> 1963·감독 이만희 반공 오락영화의 나머지 한축인 전쟁영화는 한국전쟁 직후엔 대규모 촬영이 불가능해 현실적으로 제작이 어려운 지점이 많았다. 장동휘, 최무룡, 구봉서, 이대엽 등 당대 스타들을 총동원한 <돌아오지 않는 해병>은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한 해병들의 전우애를 그리고 있다. 한국영화 최초의 대규모 전투 장면을 선보이며 이후 전쟁영화 제작에 물꼬를 텄지만 이 영화가 기억되는 이유는 따로 있다. 군인들의 영웅적 면모보다 처참한 전장에서 몸부림치는 인간적 고뇌를 부각해 보편타당한 인간애를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해병대와 국방부의 대대적인 지원을 받은 이 영화에는 실제 탱크와 제트기가 동원됐고 3천여명의 해병대가 직접 출연했다. 특수효과 총을 구하기가 더 어려워 실탄을 사용하는 등 또 다른 차원에서의 리얼리티가 넘친다. ★관련 영화★ 전쟁영화 전성기 <돌아오지 않는 해병>의 상업적 성공으로 <빨간 마후라>(감독 신상옥, 1964), <피어린 구월산>(감독 최무룡, 1965), <남과 북>(감독 김기덕, 1965) 등 여러 장르와 결합한 형태의 전쟁영화들이 쏟아져나오며 반공영화의 폭발적 증가의 한축을 담당했다. <똘이장군: 제3땅굴편> 1978·감독 김청기 1970년대 전방위로 시작된 반공교육과 대대적인 지원을 받은 국책영화들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그중 가장 효과적인 매체가 무엇이었냐고 묻는다면 바로 애니메이션일 것이다. 오늘날 북한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의 상당 부분은 대표적인 반공만화영화 <똘이장군>(1978)으로부터 비롯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붉은 수령을 돼지로, 수하들을 여우와 늑대, 박쥐로 그리는 등 노골적이고 직관적인 묘사가 눈에 띈다. 공산당 붉은 수령의 생일을 위해 산삼을 캐오라는 명령으로 민중을 괴롭히는 악당들에 맞서 숲속에서 자란 똘이장군이 숲속 친구들과 함께 제3땅굴을 파내려가던 북한 괴뢰를 무찌르는 과정을 담았다. 고된 노동으로 인민들을 착취하는 모습, 아편 밀수로 호화로운 생활을 누리는 북한 특권층의 부도덕, 끊임없이 남한을 노리는 북한의 야심 등 민감한 이야기를 애니메이션이란 완충지대를 빌려 서슴없이 묘사한다. 김정일의 실명을 직접 거론하기도 했다. 여타 애니메이션이 많지 않았던 것이 흥행의 이유이기도 하다. 인기에 힘입어 속편 <똘이장군: 간첩잡는 똘이장군>(1978)이 제작됐다. 의심과 균열 반공영화의 장르적 효용은 사실상 1960년대에 끝났다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1970년대에도 반공영화는 꾸준히, 아니 적극적으로 제작되었다. 정권유지 차원에서 반공을 국시로 내건 이후 대대적인 제작에 들어간 반공영화는 국책영화라는 이름을 빌려 영화진흥공사(현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직접 제작하는 형태로 명맥을 이어간다. 그런 만큼 검열은 더욱 엄격해졌고 선전, 선동의 성격이 한층 짙어졌다. 한정된 표현의 자유 와중에도 시대와 부딪치고 창작의 틈새를 기어코 찾아낸 영화들도 있다. 이후 1990년 냉전해체 이후 반공에 대한 색은 옅어지고 자연스레 분단을 소재로 한 영화로 축을 옮겨가게 된다. 여기서는 그 대표적인 두 작품을 소개한다. <짝코> 1980·감독 임권택 “내가 제일 아쉽게 생각하는 것은 <짝코>에서 거의 주제와 닿고 있는 데가 잘려나갔단 말이오. 짝코(김희라)와 송기열(최윤식)이 갱생원에서 탈출 전에 텔레비전에서 6·25기념 방송이 나오고 있는데 전쟁 평론가들이 좌담하는 프로를 보고 있는 거예요. 요지는 결국 6·25가 열강들의 대리전쟁 격이었다는 이야긴데…. (중략) 두 사람이 거기서 알아차린 거요. 자기들이 피해자였다는 것을.” 임권택 감독은 정성일 평론가와의 인터뷰집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 2권에서 진한 아쉬움을 피력했다. 시나리오 검열에서는 통과한 그 장면이 영화에서는 삭제되어 본질이 훼손당했다는 것이다. <짝코>는 30년 동안 쫓고 쫓기던 두 남자가 갱생원에서 만나 마지막을 함께하는 이야기다. 빨치산이었기에 평생을 도망쳐야 했던 남자와 빨치산 토벌대였지만 그를 놓친 탓에 집안이 풍비박산이 난 또 다른 남자의 삶은 한국전쟁이 남긴, 잘 드러나지도 않아 곯아버린 상처다. 분노와 비애로 지난 한국 근현대사를 되돌아보는 이 영화는 실은 외화수입쿼터를 받기 위해 의무적으로 제작한 반공영화이며 이제는 역사의 뒷길로 사라진 대종상 우수반공영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실은 정확히 반공을 반대하는 영화라 불러 마땅하다. 부정적으로 그려지던 북괴의 모습을 탈피해 분단이 서로에게 남긴 상처 그 자체에 집중함으로써 나뉘고 대립했던 관계를 인간이라는 동등한 위치에 놓고 섞은 뒤 통찰한다. 이후 찾아올 분단영화의 전조라고 할 수 있는데, 시류에 편승한 게 아니라 감독 스스로 걸어온 삶의 역정을 반추하는 과정에서 빚어낸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독보적이다. ★관련 영화★ 국책영화의 표본_ <증언>(1973) 감독 임권택 <들국화는 피었는데>(감독 이만희, 1974), <울지 않으리>(감독 임권택, 1974), <태백산맥>(감독 권영순, 1975), <낙동강은 흐르는가>(감독 임권택, 1976) 등 1970년대는 정부가 지원한 초대형 반공영화들이 쏟아져나왔고 그 선두에 <증언>이 있다. 당시 1억2천만원이라는 엄청난 제작비가 투입된 이 영화는 한국전쟁 당시 북한의 남침 과정을 잔혹하게 묘사한다. 블록버스터 상업영화로서는 손색없지만 시선이 편향되어 있음은 어쩔 수 없다. 반대로 이 영화의 노골적인 편향성이 당대의 상황을 대변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쉬리> 1999·감독 강제규 한국형 블록버스터라는 말을 탄생시킨 영화로 당시 전국 관객 150만명 넘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사라져가던 분단이라는 소재를 다시금 전면으로 끌어올리며 이른바 새로운 분단영화의 문을 열기도 했다. 스펙터클한 전투와 실감나는 시가전, 멜로드라마적인 감성과 스릴러의 긴장을 갖춘 종합엔터테인먼트 무비다. 무엇보다 북한을 단순한 악의 축으로 그리지 않고 첩보원 이방희(김윤진) 등에 인간적인 면모를 부여하며 분단 상황의 비극을 강조한 것이 인식의 전환을 불러왔다. 찬반양론이 쏟아졌지만 이후 북한을 다룬 영화에 결정적인 방향을 제공한다. 같은 눈높이에서 <쉬리> 이후 모든 것이 변했다. 시대가 제대로 반영된 것이라 해도 좋겠다. 남북 화해 무드 시기에 나온 영화들은 남과 북을 한민족으로 묶어 인간애를 부각시켰고, 냉전 모드로 들어간 뒤로는 북쪽의 첩보원에 대한 영화들이 이어지고 있다. 비극적인 분단 현실이 장르적으로 소화되던 1950~60년대로 다시 돌아간 모양새라 해도 크게 틀리진 않을 것 같다. 가깝고 친숙하지만 여전히 장막에 가려진 이미지들. 영화는 그 틈새를 비집고 어떻게든 북한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공동경비구역 JSA> 2000·감독 박찬욱 멜로드라마를 통해 인간미를 강조했음에도 <쉬리>는 여전히 전문 요원들의 비현실적인 이야기였다. 그에 반해 박찬욱 감독의 <공동경비구역 JSA>는 북한군도 사람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일반인의 눈높이로 끄집어 내린다. 판문점에서 일어난 북한 초소병 의문사 진상을 파헤치는 과정에서 남북 군인들의 우정을 그려낸 이 영화는 김광석의 노래 <이등병의 편지>와 한장의 이미지로 보이는 것 이상의 진실들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다. 북한군의 사랑을 받는 초코파이에 대한 재미난 묘사를 통해 디테일한 부분까지 현실을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관련 영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남북 화해 분위기에 맞춰 민족의 화합을 그린 영화나 북한에 대한 편견을 걷어내는 영화들이 지속적으로 제작됐다. 박광현 감독의 <웰컴 투 동막골>(2005)은 전쟁과 동떨어진 강원도 산골 마을을 무대로 이념과 대립을 넘어 남북 군인들을 하나로 묶는 판타지적인 상상력을 선보인다. 안판석 감독의 <국경의 남쪽>(2006)은 북에 연인을 남겨두고 온 탈북민의 절절한 사연을 통해 그들도 우리와 다르지 않음을 새삼 일깨운다. <간첩> 2012·감독 우민호 표현의 영토가 어디까지 확장되었는지 알아보기 가장 쉬운 장르는 호러와 코미디다. 북한을 소재로 한 영화에서 코미디 장르가 추가되기 시작한 건 그만큼 익숙하고 유연한 영역에서 대상에 대한 풍자와 해석이 가능해졌다는 신호일 것이다. 우민호 감독의 <간첩>은 이제껏 보지 못한 생활밀착형, 생계형 간첩들을 통해 거리감을 좁힌다. 남파된 지 오래된 고정간첩들은 이제 자신이 간첩인지 남한 주민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다. 그런 상황에서 암살지령을 가지고 온 엘리트 간첩은 고민거리일 뿐이다. 오랜 남북 대치가 빚어낸 기발한 상상력이자 어쩌면 현실적이고 익숙한 풍경일지도 모르겠다. ★관련 영화★ 웃길 수 있다! 장진 감독의 <간첩 리철진>(1999) 이후 남파 간첩에 대한 스펙트럼은 극적으로 넓어졌다. 북한에 대한 친숙함의 정도가 반영된 결과라 해도 무방하다. 딱딱하고 진지하고 비극적으로만 받아들였던 현실은 분단 상황을 코미디적 상상력으로 풀어낸 <만남의 광장>(감독 김종진, 2007)처럼 점차 유연해져 생활눈높이까지 내려오는 중이다. <의형제> 2009·감독 장훈 송강호가 하면 뭐든 생활이 된다. 해직된 국정원 요원과 남파공작원이 각자의 목적을 가지고 서로를 이용하고자 하는 사이 형제처럼 친밀해진다는 구조 자체는 별반 새로울 것이 없다. 하지만 흥신소로 생계를 유지하는 국정원 요원의 밥벌이의 서러움이나 훤칠하고 어린 남파공작원의 콤비는 참신한 면이 있다. 북한에 대한 현실적인 묘사는 다소 준 대신 버디무디, 액션, 판타지 코미디 등 장르색이 강해졌다. 평화와 냉전 모드를 오가며 교착된 사이 분단 상황의 규모를 늘리는 대신 우회로를 찾은 결과라 할 수 있다. ★관련 영화★ 잘생긴 북한 첩보원과 생계밀착형 남한 요원 <은밀하게 위대하게>(감독 장철수, 2013), <공조>(감독 김성훈, 2016), <용의자>(감독 원신연, 2013)의 공통점은 잘생기고 능력 있는 북한 첩보원과 생계밀착형(혹은 비리형) 남한 요원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의형제> 이후 하나의 전형처럼 자리잡은 이러한 관계는 무능하고 부패한 남한 정부와 보수정권이 들어선 후 교류가 줄어들며 한동안 신비주의 장막에 가려진 북한에 대한 현실인식의 반영으로 보인다.

<너와 극장에서> 유지영·정가영·김태진 감독 - 누구나 자기만의 극장이 있다

누군가는 극장을 가다 미로 같은 길 속에 갇히고, 누군가는 극장에서 공격적인 질문을 하는 관객과 싸우고, 누군가는 극장이라는 낙원에 숨어버린 후배 직원을 찾아다니느라 진땀 뺀다. 옴니버스영화 <너와 극장에서>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극장이라는 공간을 공유하지만 각기 다른 방식으로 극장/영화를 사유한다. 유지영 감독의 <극장쪽으로>, 정가영 감독의 <극장에서 한 생각>, 김태진 감독의 <우리들의 낙원>이 <너와 극장에서>라는 제목의 옴니버스영화로 개봉한다. <너와 극장에서>는 서울독립영화제의 독립영화 차기작 프로젝트 인디트라이앵글을 통해 완성된 다섯 번째 작품이다. 서울독립영화제가 2008년부터 진행한 지원사업 인디트라이앵글은 젊고 유망한 감독을 발굴해 단편 제작을 지원하고, 이를 장편 옴니버스로 개봉·배급하는 프로젝트다(2017년 프로젝트인 <너와 극장에서>에는 네이버가 제작 및 배급·개봉지원금 5천만원을 지원했다). 인디트라이앵글을 통해 서로 다른 매력을 지닌 세편의 단편영화를 만든 유지영, 정가영, 김태진 감독을 만나 ‘그들 각자의 영화관’을 엿보았다. 동갑내기 정가영 감독과 김태진 감독의 티격태격 속에, 솔직한 고백과 귀여운 농담이 편히 오간 그날의 대화를 전한다. -극장이라는 공통된 제시어로 시작했지만 사뭇 다른 세편의 영화가 완성됐다. 서로의 영화에 대한 감상평을 들려준다면. =김태진_ 1차 편집 시사 끝나고 기분이 좋았다. 세편 모두 각자의 개성이 잘 드러난 만족스러운 결과물이 나온 것 같았다. 소심한 성격이라 면전에서 말을 잘 못하는 편인데, 그날 집에 돌아가서 문자를 보냈다. 영화 좋았다고. =유지영_ 그 문자를 나한테만 보낸 게 아니었구나? =정가영_ 난 문자 받은 기억이 없는데? 김태진_ 유지영 감독에겐 그날 바로 문자를 보냈고, 정가영 감독한텐 그날로부터 시간이 한참 지나서 문자를 보냈다. (웃음) 정가영_ 극장이라는 제시어로 어떤 생각을 했을지 궁금했다. 내가 만들 수 없는 영화를 두분이 만들었다고 생각하는데, 서로 다른 매력을 지닌 영화 세편이 묶여 있어서 확실히 보는 재미가 있는 옴니버스로 완성된 것 같다. 유지영_ 정가영 감독의 영화는 재기발랄하고 당돌한 매력이 있고, 김태진 감독의 영화는 이전에 만든 단편영화처럼 여자주인공을 섬세하게 다루는 게 눈에 띄었다. -서울독립영화제 인디트라이앵글 제작지원 프로젝트에 지원하게 된 건 ‘극장’이라는 제시어가 마음에 들어서였나. 정가영_ 각 영화에 1천만원을 지원해주는 그 기회가 감독들에겐 소중하다. 어떻게든 아이디어를 쥐어짜서 시나리오를 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극장이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에게 가까운 주제이긴 하지만 막상 그 주제로 이야기를 만들려니 어렵더라. 그러면서 이런저런 경험들을 떠올렸다. 영화 끝나기 5분 전에 극장을 나와서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다른 관에 몰래 영화 보러 들어갔던 적이나, <곤지암>을 청소년 요금으로 표 끊었다가 극장 직원이 ‘청소년 맞으세요?’ 하고 물어봐서 <곤지암>보다 더 무서운 상황을 경험했던 일이나. 김태진_ 이건 우리 삼촌 세대에서나 할 법한 일인데. 정가영_ 아무튼 그러다 ‘관객과의 대화’(GV) 관련 이야기로 영화를 만들게 됐다. 김태진_ 이야기에 기승전결이 없잖아! 유지영_ 우리 낮술이 필요한 것 같은데. (웃음) -정리하자면 극장이라는 제시어보다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기회가 더 소중했다는 이야기인가. 정가영_ 맞다. 그 말을 하려고 했다. (웃음) 유지영_ <수성못>을 찍고서 당분간 쉬려고 했다. 그런데 친구들이 대부분 영화인이라 이런 공모 소식이 눈에 안 띌 수가 없다. 후배가 공모에 낼 시나리오를 봐달라고 부탁하기도 했고. 나도 ‘되면 좋고 안 되면 말지’ 하는 마음으로, 이야기가 떠오르면 시나리오를 써서 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 접수 마감일 아침에 이야기가 떠올랐다. 한 시간 만에 시나리오를 써서 접수했고 결국 선정이 됐다. 김태진_ 이건 영웅담인데. 정가영_ 친구 오디션에 따라갔다가 본인만 합격한 이야기인 거네. (웃음) 김태진_ 나 역시 극장을 소재로 한 시나리오를 미리 준비해둔 건 아니었다. 영화가 찍고 싶었고 좋은 기회라 생각했다. 다행히 극장이란 소재가 현실감이 없는 것은 아니어서 좀더 편하게 글을 쓸 수 있었다. -전에도 극장에 관한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나. 정가영_ 한달쯤 전에 극장에 관한 단편영화를 하나 찍었다. 인천에 있는 미림극장에서 찍었고, 제목도 <극장미림>이다. 나의 개인 유튜브 채널 ‘가영정’에 가면 볼 수 있다. 채널 구독자 수가 1천명 정도 되는데, 홍보가 좀 덜 된 것 같다. 기사에 ‘가영정’ 얘기 좀…. (웃음) 유지영_ 김태진 감독은 평소 극장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해봤을 것 같은데.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손꼽을 정도로 많은 영화를 본 시네필이다. 정가영_ 그럼 <씨네21>에 ‘내 인생의 영화’ 한번 써야겠다. (웃음) 김태진_ 극장에 관한 영화나 영화에 대한 영화를 찍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영화에 대한 영화의 경우 영화과 다닐 때 주변에서 많이 쓰지 않나. 그런 얘기는 괜히 낯부끄럽기만 하고 신선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런데 이번에 극장을 키워드로 시나리오를 써보니 재밌긴 하더라. -극장이라는 제시어로 하고 싶은 얘기가 많았을 것 같은데, <너와 극장에서>의 각 영화는 어떻게 구상했나. 유지영_ 극장이라는 공간이 악몽처럼 표현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공모에 지원한 많은 영화들이 극장을 데이트 장소나 낭만적인 스케치로 표현하지 않을까 싶었고, 오히려 그런 생각을 뒤집어서 싸늘하고 건조한 톤으로 이야기를 쓰려 했다. 거기에 이방인, 고립, 외로움, 관계에 대한 불안 등과 같은 키워드를 생각했다. 극장이 일종의 신기루나 오아시스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막상 영화의 주인공이 극장이라곤 할 수 없는 이야기라서 시나리오 면접 때 극장이 너무 부각되지 않는다는 얘기도 들었는데, 그런 방향으로 수정하면 의미 없는 영화가 되기 때문에 더 바꾸긴 힘들다는 얘기도 했다. 정가영_ <비치온더비치>(2016) 개봉하고서 GV를 많이 했는데 극장에서 긴장이 되더라. 그때는 관객이 내 영화를 심판하는 심판자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게 긴장하는 게 싫어서 괜히 충동적인 행동을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도 많았다. GV에 대한 부담감과 충동적 행동에 대한 생각, 내 영화들이 사적인 이야기처럼 보이는 지점이 있는데 거기서 비롯되는 질문과 생각들을 GV라는 구성 안에 녹여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GV라는 설정 안에서 정가영이라는 사람이 끝까지 가는 상황을 만들어보자, 그렇게 이야기가 뻗어나갔다. 김태진_ <이미지의 삶과 죽음>이라는 책을 쓴 레지스 드브레의 말 중에 ‘텔레비전은 시청자를 안방의 정주인으로 만들지만 영화는 관객을 거리의 유목민으로 만든다’는 말이 있다. 극장을 향해 가는 여정, 함께 영화를 보기로 한 사람, 그날의 공기와 기억들이 합쳐져 영화에 대한 감상이 완성된다는 말이다. 때로는 영화 자체에 대한 미학적 평가나 기억보다 영화 감상 전후의 과정이 더해졌을 때 훌륭한 감상이 나올 때가 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극장 자체가 주인공이 아닌, 극장을 가기 위한 여정과 소동을 로드무비 형식으로 써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세 영화에 모두 주인공이 영화를 보는 장면이 등장한다. <극장쪽으로>에선 웨스 크레이븐의 <나이트메어>(1984)와 아녜스 바르다의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1962)가 사운드로 삽입되고, <우리들의 낙원>에선 프랭크 카프라의 <우리들의 낙원>(1938)이 등장하고, <극장에서 한 생각>은 가상의 영화 <극장 살인 사건>을 보고 정가영 감독이 GV를 한다는 설정이 있다. 유지영_ 누가 봐도 <나이트메어>라는 걸 알 수 있는 장면을 보여주려고 했는데, 그 장면을 사용하는 게 문제가 될 수 있다고 해서 결국엔 영화 사운드만 사용했다. 혼자 사는 여자들이 느낄 법한 불안감이 있는데, 오히려 공포영화를 보면서 그걸 극복한다는 의미로 주인공이 밤에 집에서 혼자 노트북으로 보는 영화가 <나이트메어>다. 기왕이면 관객이 단번에 무슨 영화인 줄 알았으면 해서 <나이트메어>를 떠올렸다. 영화 마지막 즈음 오오극장에서 상영되는 영화는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인데 선미(김예은)가 하루 동안 극장 주변을 헤매는 이야기가 클레오가 파리를 배회하는 것과 매칭되기도 하고, 무엇보다 이 영화의 사운드가 효과적으로 기능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선미가 상영관에 들어가면 공원에서 새소리가 들리고 주인공이 흥얼거리는 멜로디가 들려오는데, 마치 낙원 같은 극장 안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섬처럼 홀로 영화를 보고 있다. 그렇게 혼자 영화 보는 사람들의 모습, 그 이미지를 영화에 넣고 싶었다. 김태진_ 극장으로 향하는 여정의 마지막에서 주인공 은정(박현영)과 민철(오동민)이 함께 보는 영화로 무엇이 좋을까 고민하다가 프랭크 카프라를 떠올렸다. 유토피아적인 세계와 이상적 가치를 표현해온 사람이 프랭크 카프라이고, 마침 그의 영화 중에 <우리들의 낙원>이란 제목의 영화가 있어서 그게 딱이라는 생각을 했다. ‘우리들의 낙원’이라는 게 극장에 대한 비유이기도 하고, 로케이션으로 삼고 싶었던 서울아트시네마가 낙원상가에 있었던 시절도 있었으니 말이다. -<극장쪽으로>는 오오극장, <극장에서 한 생각>은 이봄씨어터, <우리들의 낙원>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촬영했다. 로케이션으로 삼고 싶은 특정 극장이 있었나. 유지영_ 대구 동성아트홀과 오오극장 두 군데 중에서 고민을 했다. 그런데 동성아트홀이 최근에 리모델링을 해서 내가 원한 극장의 느낌이 나지 않았고 그렇다면 선택지는 오오극장밖에 없었다. 오오극장은 대구에서 영화하는 친구들의 아지트 같은 곳이고, 극장 직원들과도 가족같이 지내고 있어서 섭외에 어려움이 없었다. 더불어 지금 시대의 변해가는 독립예술영화관의 한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오오극장이 영화와 잘 어울렸던 것 같다. 정가영_ 중요하게 생각한 건 촬영하기 좋은 극장, 대관료가 비싸지 않은 극장에서 찍는 거였다. 이봄씨어터에 대한 기억으로, <비치온더비치> GV를 하러 갔는데 관객이 딱 한분 앉아 있었다. 그런데 그분마저 영화가 끝나고 자리를 뜨시기에 붙잡아서 일대일 GV를 한 적이 있다. (웃음) 아무튼 극장에서 대관료도 싸게 해주고 촬영에 적극적으로 협조해줘서 고마웠다. 이봄씨어터에서 <너와 극장에서> GV도 진행하니 많이 와주시기 바란다. 김태진_ 주인공 박민철이 영화를 워낙 좋아하는 인물이라 그가 갈만한 극장으로 자연스럽게 서울아트시네마를 떠올렸다. 또 현재 서울아트시네마가 서울극장 내부에 있는데, 서울극장과 서울아트시네마와 인디스페이스가 별개의 극장이란 것을 잘 모르거나 헷갈려하는 분들도 있더라. 낙원상가에 있을 때나 서울극장 건물에 있는 지금이나 건물의 구조가 복잡해서 극장을 처음 찾는 사람은 상영관 앞에 제대로 도착하기 쉽지가 않은데, 그런 요소들이 영화의 서사에도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물론 나 역시 서울아트시네마쪽에서 많은 협조를 해줘서 수월하게 영화를 찍을 수 있었다. -실제 나에게 각별한 의미를 지니는 극장이 있나. 정가영_ 영화에서도 극장형 인간이 아니라고 얘기했지만, 집에서 영화 보는 걸 좋아해서 최근엔 넷플릭스를 깔았다. 거기 접속하면 뭐든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오히려 영화를 더 안 보게 되더라. 그래서 해지했다. (웃음)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극장은 따로 없고, 의정부에 살아서 의정부 근처 멀티플렉스를 주로 이용하고, 노원구에 예술영화전용관 더숲 아트시네마가 생겼는데 거기서도 영화를 종종 본다. 김태진_ 내가 좋아했던 극장들은 지금은 다 사라져버렸다. 고향이 부산인데, 수영만 요트경기장 안에 시네마테크 부산이라고 단관 극장이 있었다. 건물도 낡았고 좌석도 딱딱하고 매점에서 파는 커피도 전기 커피포트에서 오래 데운 커피였지만 그곳이 개인적으로는 각별했다. 시간이 잘 맞으면 영화를 보고 나와서 일몰의 바다도 볼 수 있었고. 그런 것들이 영화를 더 애착할 수 있게 해준 이미지였던 것 같다. 서울에 올라온 뒤론 하이퍼텍 나다, 스폰지하우스, 씨네코드 선재에 자주 갔는데 지금은 다 없어졌다. 좋아했던 극장들이 사라지는 걸 경험하면서 요즘은 어디 한곳에 특별히 정을 못 붙이고 있다. 유지영_ 22살 때 동성아트홀에서 지금의 남자 친구를 처음 만났다. 예술영화를 보러 동성아트홀에 갔는데, 거기서 우연히 과거 내 절친과 그 절친이 좋아했던 남자인 지금의 내 남자 친구를 만난거다. 당시 서로 호감은 느꼈지만 각자 연인도 있고 해서 우리는 아닌가보다 하고 6년을 연락도 없이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상경했다 대구로 다시 귀향해선 ‘앞으로 어떻게 영화하며 살아야 하나’ 고민하며 동성아트홀에 영화를 보러 갔다. 관객은 나밖에 없었다. 오늘도 혼자서 영화를 보나 싶었는데 앞에 누가 앉아 있더라. 지금의 내 남친이었다. 정가영_ GPS를 장착한 게 아니고서야 어떻게 그런 일이! 유지영_ 그때부터 사귀기 시작해서 지금 7년째 연애 중이다. 그리고 내년에 결혼한다. 그러니 동성아트홀이 내겐 각별한 공간일 수밖에. -그렇다면, 나에게 극장이란. 김태진_ 애증의 공간인 것 같다. 좋은데 싫은, 싫은데 좋은. 예전엔 극장이 기회의 공간이기도 했고, 사회와의 통로나 창구로서 즐거움을 주는 공간이었는데 영화를 업으로 삼은 이후엔 극장에서 순수하게 영화를 보고 즐기기가 어려워졌다. 공부 차원에서 영화를 볼 때도 있고, 의무적으로 봐야 할 때도 있고. 극장에서 책임감이나 자격지심을 느끼기도 한다. 영화와 마찬가지로, 극장과도 애증의 관계를 유지하며 밀당을 하는 것 같다. 정가영_ 나에게 극장이란 전 남친이다. 내가 찾아가고 싶을 때만 찾아가니까. (웃음) 유지영_ 나에겐 예배당이다. 극장에 가서 각 잡고 영화를 보는 편이다. 누가 조금만 떠들어도 ‘저기요!’ 그런다. 한 장면도, 한컷도 놓치지 말아야지 하는 마음으로, 온전히 집중하고 몰두하고 체험하기를 바란다. 일종의 의식처럼. 그렇게 영화를 보고 나와야지만 영화를 본 것 같다. 예를 들면 <쥬라기 월드> 같은 상업영화를 볼 때도 뭔가 얻을 게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본다. 한컷 한컷 어떻게 만들었는지 보려고 하기 때문에, 내겐 극장이 팝콘 먹고 데이트하는 장소는 아니다.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나. 유지영_ 지금은 좀 쉬고 싶다. 탐욕적인 독서여행을 가고 싶다. 게걸스럽게 책만 읽고 싶다. 그러다보면 또 하고 싶은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까. 정가영_ 우선 <밤치기>는 하반기에 개봉할 예정이다. 지금이 에너지가 넘칠 때라서 상업영화도 준비하고 있고 독립영화도 준비하고 있다. 빨리 들어가는 놈으로 얼른 찍고 싶다. 앞서 언급한 단편 <극장미림> 말고는 올해 영화를 찍지 못해서 너무 아쉽다. 김태진_ 그동안 찍은 단편은 일상의 이야기를 담은 드라마였는데, 이번엔 욕심을 좀 내서 장기 미제 사건을 다루는 수사극 장편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 자료조사와 인터뷰를 한창 진행하다보니 모든 일상이 범죄사건과 연관돼 보이기 시작하더라. 정가영_ 진짜 흥미로운 소재인 것 같다. <탐정: 리턴즈>도 ‘장기’ 소재던데 흥행이 잘되는 것 같더라. 김태진_ 우리가 말하는 장기(長期)는 그 장기(臟器)가 아닌 것 같은데. 정가영_ (복부를 가리키며) 이 장기가 아냐? 나 학교 다시 가야겠다. 아직 졸업을 못해서. (웃음) 유지영_ 나도 관심 있는 소재이긴 한데 쓸 엄두가 안 난다. 김태진_ 엄두만 안 나지 쓰면 또 잘 쓰지 않나. 정가영_ 친구 따라 오디션 갔다가 혼자 합격하는 게 장기(長技)니까. (웃음)

<허스토리> 미래의 통역자를 기다리며

<허스토리>에서 당신이 본 것은 무엇인가. 위안부 피해 여성들의 기구한 삶인가, 그들의 몸에 남은 치욕적인 상처인가. 아픈 몸을 이끌고 부산과 시모노세키를 오간 여성들의 고단함인가, 뻔뻔한 일본 재판정의 법조인이나 반대시위자들인가. 그것을 마주한 당신에게 어떤 변화가 있었나. 심정적인 공감인가, 아직도 제대로 된 사과와 보상을 하지 않는 일본 당국에 대한 분노인가.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는 사명감인가, 적절한 피해 보상과 사과를 요구하는 데 동참하겠다는 다짐인가. 당신은 이 모든 것을 보았지만 어떤 것도 보지 못했고, 이 모든 것을 느꼈지만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허스토리>가 위안부 피해 여성들의 이야기라는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영화는 위안부 피해 여성들의 이야기를 투과한 세상의 이야기에 가까운데, 그렇다고 세상의 이야기를 위해 위안부를 소재로 이용했다고는 보이지 않는다. 위안부 피해 여성의 사연은 영화의 모든 쟁점 속에서 단단히 중심을 잡는다. 영화가 다루는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의 투쟁기가 ‘달’이라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은 이들을 둘러싼 사람들의 이야기다. 영화는 관객에게 그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이리저리 움직여보도록 만든다. 누군가는 달을 보랬더니 왜 손가락을 보느냐고 타박할지 모르지만, 영화는 달을 묘사하는 방식만큼이나 그것을 가리키는 방식을 고민한다고 여겨진다. 곁에 있어도 미처 발견하지 못한 달을 비로소 인식하게 만든 그 손가락에 관해 더 이야기해보고 싶어졌다. 관객의 대변자인 정숙이 사건에 다가가는 과정 정숙(김희애)은 관객을 위안부 피해 여성의 이야기로 안내하는 인물이다. 위안부 사안에 무감했던 정숙의 자각은 서서히 이뤄진다. 위안부 이야기는 텔레비전 뉴스를 통해 처음 영화 속에 기입된다. 이때 실존 인물인 김학순 할머니의 실제 증언영상이 자료화면으로 쓰인다.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통해 이를 지켜보던 딸 혜수(이설)와 달리 정숙은 그보다 떨어진 곳에서 식사 중이다. 정숙에게 생존자의 증언은 학교를 그만두고 싶어 하는 딸을 겁줄 때에 유용할 뿐이다. 며칠 뒤 위안부들의 사연이 보도되는 텔레비전 앞을 떠나지 못하는 신 사장(김선영)과 달리 정숙은 텔레비전에서 떨어진 식탁에 등진 채로 앉아 있다. 기차 안에서 신 사장으로부터 위안부 피해 여성을 위한 신고전화 개설을 제안받을 때, 정숙은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다. 얼굴을 덮은 수건이 신 사장에 의해 홱 벗겨지면서, 정숙은 다소 수동적인 방식으로 제안을 받아들이게 된다. 영화는 대면의 순간을 유예하면서 그 간격 속으로 관객을 초대한다. 정숙의 변화는 앞서 언급한 장면을 전복적으로 전유하면서 이뤄진다. 오랫동안 가까이 지낸 배정길(김해숙)이 위안부 피해 여성임을 뒤늦게 알게 된 날, 정숙은 택시 안에서 위안부의 증언과 관련된 라디오 뉴스를 듣는다. “할마씨들이 쪽팔린 줄도 모르고…”, “보상금 탈라고 저런다”는 택시 기사의 망발에, 정숙은 “할매가 기사님 어머니면 어쩔 겁니까?”라고 따진다. 택시 기사의 무관심을 힐난하는 이 말은 불과 며칠전의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정숙이 재판을 도와줄 변호사 이상일(김준한)을 만나러 가는 장면에서 정숙의 변화는 좀더 분명해진다. 늘 차창 안에서 카메라를 외면했던 정숙이 이번에는 스스로 창을 내린 채 카메라를 환영한다. 정숙이 적극적인 행동가로 변모했음을 보여주는 이 장면은 이제 그녀가 관객과 비슷한 위치에서 벗어나 관객을 위한 전달자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때 그녀의 눈을 가린 선글라스는 그녀가 완전무결하기보다 모순적인 전달자임을 예고한다. 정숙의 사연은 피해자들의 투쟁 스토리에 완전히 흡수되는 것이 아니라 나름의 흐름 속에서 존재하며, 원고단의 이야기와 오케스트레이션을 이룬다. 가장 핵심적인 지점은 정숙의 여행사가 일본인을 상대로 한 기생관광에 연루된 것이다. 여행사는 이미지 쇄신 측면에서 위안부 피해 여성 신고전화를 개설했으므로, 기생관광은 피해 여성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중요한 계기이자 조건이다. 이는 단순히 극적인 설정만이 아니라 실제 맥락의 반영이다. 변영주 감독은 기생관광에 관한 다큐멘터리 <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1993)을 만들면서 일본인을 상대로 매춘을 하는 여성들을 만난다. 그중 한 여성으로부터 어머니의 병원비를 대기 위해서 이 일을 시작했으며, 그녀의 어머니가 위안부 피해 여성이었음을 알게 된다. 이것이 감독이 위안부 할머니들의 이야기인 <낮은 목소리> 시리즈(1995∼99)를 제작하게 된 계기였다. <허스토리>는 정숙이 기생관광과 느슨한 관계에 있는 것으로 설정하면서 <낮은 목소리>에 내재한 문제와 반복되는 여성의 역사를 의식하는 것 같다. 이는 정길이 증언을 위해 정숙의 여행사를 찾았을 때, 그녀를 맞이한 인물이 기생관광 문제에 연루된 선영(이유영)이었다는 점에서도 옅게 드러난다. 이중의 적 “세상은 안 바뀌어도 우리는 바뀌겠지요.” 정숙의 말은 중의적이다. 싸우는 동안 스스로 변화할 극중 인물들을 일컫는 한편, 영화가 건드리고자 하는 대상이 세상으로 대변되는 ‘그들’이 아닌 관객을 포함한 ‘우리’임을 알린다. 정숙이 위안부 피해자들을 돕고 있음을 알게 된 일본측 바이어와의 논쟁 장면을 보라. 일본 역시 피해자임을 강조하며 책임을 회피하는 발언은 분노를 유발하지만, 영화는 일본측 입장에 대한 분노로 이 시퀀스를 끝맺지 않는다. 누군가가 밖에서 여행사 사무실 창문을 향해 던진 공이 유리창을 깨고 들어와 선영쪽으로 날아든 상황을 통해 가까이에 있는 적을 잊지 않도록 만든다. 돌을 던진 이는 일전에 정숙과 논쟁을 벌인 택시 기사였다. 그의 망언은 위안부 피해자를 대하는 당대의 인식을 축약한다. 일상화된 탓에 잘못이라는 것을 인식하기조차 힘들어진 그의 말은 ‘성’(性)을 금기시하는 문화 속에서 성폭행을 피해자의 수치로 여겨온 오랜 관행에서 비롯된 것이다. 실제로 위안부 피해 여성이 증언하기를 망설였던 이유 중 가장 핵심적인 것이 이 강요된 ‘부끄러움’ 때문이다(변영주 감독의 <낮은 목소리> 시리즈를 참고하라). 정숙이 피해 증언을 설득하자 “내 이름도 나가는 거 아닌가”, “면상 다 까발리는 것 아니냐”는 생존자의 걱정스러운 반응에서 이들이 느끼는 거리낌이 단적으로 드러난다. 영화는 그 부끄러움을 정숙의 입을 빌려 우리에게로 돌려놓는다. 왜 그렇게 위안부 할머니들 문제에 집착하느냐는 신 사장의 물음에, 정숙은 “나 혼자 잘 먹고 잘산 게 부끄러워서”라고 말하지만, 이내 “…는 아니고, 못 이겼으니까”라고 말을 고친다. 이러한 말 바꿈은 부끄러움을 언급하면서도 관객에게 이를 강요하지 않겠다는 영화의 태도를 보여준다. 정숙의 이야기와 위안부 피해 여성의 이야기가 엮이는 가운데, 최근 성폭력과 미투(#MeToo) 운동을 통해 쏟아지는 증언과 이에 관한 2차 가해의 상황이 환기된다. 우리가 오늘의 문제라고 생각했던 것이 실은 역사적인 ‘허스토리’였음을 영화는 역설한다. ‘성’만큼이나 ‘돈’은 본질을 흐리기 좋은 대상이다. 보상금과 관련해 진의를 의심하는 시선은 피해 여성을 움츠러들게 한다. 적절한 보상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한데, 왜 돈이 개입되자마자 운동의 진의마저 곤두박질치는 것일까. 영화는 가장 속된 것으로 인식되지만 누구나 필요로 하는 ‘돈’과 ‘성’의 문제를 낮게 깔아둔다. 정길이 증언을 결심한 이유는 아픈 아들의 병원비를 감당하기 위해서였다. 정길에게 ‘돈’이 필요했던 이유가 단지 속된 욕망 때문은 아니었다고 해도, “보상금은 나올라나”라고 묻는 서귀순(문숙)의 말을 은근슬쩍 삽입하면서 이러한 문제에 관한 싹을 완전히 잘라내진 않는다. 여행사 CEO 정숙이 불미스러운 사건에 연루된 상황은 ‘성’과 ‘돈’의 문제를 함께 사유하려는 의도를 전면화한다. ‘성’과 ‘돈’의 결합체로 여성 캐릭터를 그릴 때 성매매에 연루된 피해자로 그려지기 마련이라면, 사건의 당사자가 아닌 느슨한 연루자의 자리에 있는 정숙을 통해 불필요한 묘사나 감정적 과잉을 방지한다. 또한 일대일로 말끔히 해결되는 폐쇄적인 해결 대신 복합적인 논의를 지향한다. 그러나 거리감이 면책의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해고당한 직원과 언쟁하며 자신은 몰랐다고 말하는 정숙에게 상일은 “몰랐어도 사장이면 책임을 져야지요”라고 슬쩍 끼어든다. 상일의 말은 다시 위안부 피해보상을 둘러싼 책임 문제를 환기한다. 몰랐다고 책임이 사라지지 않는 것은 일본 정부만이 아니라 우리 정부의 책임과 국민의 관심을 일깨우는 것으로 들린다. 그런 의미에서 시모노세키의 법정에 대응하는 중요한 장소는 부산의 택시 안이다. 택시는 법적 책임이 아닌 일상의 책임을 묻는 작은 재판소다. 시모노세키로 출항하기 위해 부산항으로 향하던 원고단 4인이 “할매들 꽃단장하고 어디 가는겨”라는 택시 기사의 물음에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한 이유는 부정적 반응을 예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몇년 뒤 다시 택시 안에서 같은 질문을 받았을 때, 원고단은 당당히 일본에 위안부 재판을 받으러 간다고 말하며, 자신의 변화를 새긴다. 재연이 아닌 통역으로서의 연기 <허스토리>는 실화영화이지만, 원고 4인방을 연기한 배우들은 실존 인물의 재연자가 아니다. 각자의 개성이 또렷한 4인의 원고는 굳이 실존 인물을 찾아 대조해보지 않아도 직조된 캐릭터임을 즉각 알 수 있다. 서귀순이 외유내강형이라면, 박순녀(예수정)는 외강내유형이다. 이옥주(이용녀)가 유연하고 아이 같다면, 배정길은 의연하고 어른스럽다. 상호보완적인 팀워크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국가대표’라는 박순녀의 자칭은 꽤 적절해 보인다. 응원하는 사람들과 취재진으로 북적이는 재판정 앞에 하얀 한복을 맞춰 입고 등장한 이들의 모습도 영락없는 ‘국가대표’다. 각자 캐릭터의 개성이 워낙 뚜렷한 까닭에 이들은 마치 한명의 캐릭터를 연기하는 서로 다른 자아처럼 보인다. 이들은 일종의 통역자로, 위안부 피해 여성의 어떤 측면을 연기한다. 특히 옥주는 전체 극에서 상징적인 존재 같다. 불안정하고 가끔 제멋대로인 옥주가 재판에 큰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는 것쯤은 짐작할 수 있다. 옥주라는 캐릭터가 있어야 했던 이유는 오직 여성들의 기억과 진술에 기댄 영화에서 옥주만이 여전히 그날 그 시간 속에 사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옥주는 플래시백이 없는 영화의 플래시백이며, 재현이 없는 영화의 재현이다. 옥주가 기억에 사로잡혀 빌고, 울고, 호소하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눈물 짓는 정길을 포함한 원고단의 반응숏을 삽입한다. 인물들은 마치 자신을 보듯, 서로가 서로의 진술 장면을 바라본다. 과거로 빙의한 채 몸과 표정으로 진술하는 옥주는 동료들을 대신해 감정을 발산하는 퍼포먼스를 펼치는 것 같다. 이것이 실화라는 것을 염두에 둘 때, 이러한 해석은 과도하거나 무지한 비유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적어도 법정 장면에서 영화는 스스로 이것이 한편의 극임을 인식한다고 여겨진다. 10인의 원고단 중 주요 인물 4인을 연기한 이들은 이미 관객에게 특정 캐릭터로 각인된 배우들이다.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자신이 가진 원래 이미지를 차용하는 동시에 이것을 비트는 방식으로 영화에 등장한다. 예수정이 최근에 떠오른 대표적인 어머니라면, 김해숙은 그보다 앞서 어머니의 전형으로 인식된다. <허스토리>에서 이들은 어머니가 아니거나 유사 어머니로 등장해 본래의 캐릭터를 환기한다. 문숙이 연기한 서귀순은 굵고 짧은 활동 후 영화계에서 자취를 감춘 배우가 가진 미스터리함과는 무관해 보인다. 그러나 문숙이 바닷가 어귀에서 등장할 때는 이만희 감독의 <삼포가는 길>(1975)에서 문숙이 연기한 백화의 미래처럼 느껴진다. 주로 세고 개성 강한 역할을 도맡아온 이용녀는 이번 영화에서는 대조적인 역할을 맡았음에도 순간순간 변화하는 모습에서 배우가 가진 원래의 개성이 드러난다. 이러한 경향의 정점에 있는 것이 정숙 역의 김희애다. 우아한 이미지가 강한 김희애는 <허스토리>에서 사투리 연기와 다혈질 캐릭터를 소화한다. 손님들의 불만 제기를 이유로 원고단이 일본에서 숙소 예약을 취소당했을 때, 모두가 침묵하던 중 정숙은 이들을 대신해 “씨발놈들”이라고 외친다. 이 순간의 통쾌함은 상황 속에서 주어진 것인 동시에 배우 김희애의 캐릭터 전환에서 온다. 워커홀릭인 정숙은 딸에게 거의 신경을 쓰지 못하나, 그렇다고 딸을 마냥 방치하지 않는 부모의 역할을 맡는다. 말 그대로 정숙은 ‘부’이자 ‘모’인 혼종적인 인물이다. 배우 김선영이 연기한 신 사장은 정숙과 대조적으로 기존에 ‘부산 아지매’로 인식된 수다스러운 인물에 닿아 있다. 신 사장은 정숙의 중성적인 성향을 훨씬 더 남성에 가까운 것으로 밀쳐내는 역할을 한다. 신 사장이 정숙의 가슴을 만지며 고생해서 살이 많이 빠졌다고 하는 장면이나 정숙이 신 사장에게 별안간 입맞추는 장면도 이러한 맥락의 일부다. 정숙과 신 사장이 보여주는 케미스트리는 레즈비언 캐릭터를 영화 속에서 등장시켜온 민규동 감독의 인장처럼 보이나, 영화 속 여성 캐릭터의 전형성을 둘러싼 문제제기에 관한 나름의 답을 제시하며 여성에 관한 다층적인 반영체로서의 영화의 성격을 드러낸다. 법정 밖의 법정 피해 증언자 4인의 중 마지막 발언자로 등장한 정길은 일본 재판정을 향해 당당히 사과를 요구하며 “인간이 돼라”고 꾸짖는다. 그런데 영화는 정길의 발언에 대한 반응숏 대신 서슬퍼런 정길의 얼굴 클로즈업에서 정기수요집회 현장으로 전환된다. 집회 현장에 모인 사람은 마치 정길의 발언을 향한 것처럼 박수를 보내는데, 그 박수의 주인은 집회 발언자로 나선 혜수다. 이는 판결 결과를 보여주는 장면에 앞서 등장하며 배정길의 진술의 진짜 수신처가 어디인지를 보여준다. 수요집회에 참석한 이들은 법정 밖의 ‘정숙들’로, 역사에 대한 저마다의 통역자들이다. 재판정에서 정숙은 원고의 진술을 그대로 전달하는 대신, 자신의 감정적 반응을 더한 과잉 통역으로 지적을 받았다. 이에 정숙은 자신은 원고의 진술을 생생하게 전달한 것뿐이라고 강변한다. 정숙처럼 우리에게도 역사에 반응하고 이를 자신의 언어로 통역해낼 것이 요구된다. 원고단이 사진관에서 단체 사진을 찍는 것으로 끝나는 마지막 시퀀스에서 관부 재판에 참여한 실존 인물들이 2017년 4월 모두 세상을 떠났음을 밝히는 자막이 등장한다. 그러나 영화는 흑백 영정 사진으로 이들의 이야기를 과거의 한때로 만들거나 추모하는 대신 단체 사진 찍기 직전 미소 띤 얼굴들을 보여준다. 마지막 순간 카메라는 이들의 맞은편에 있던 정숙의 얼굴로 돌아온다. 이 순간 정숙은 위안부 생존자들을 비로소 대면한다. 영화가 정숙의 얼굴로 끝맺는 데에는 위안부 피해 여성들의 목소리가 남은 이들에 의해 계속 통역되기를 기원하는 바람이 담긴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