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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1997)

<요로나의 저주>를 계기로 <컨저링> 유니버스의 한계를 생각함

2013년 <컨저링> 시리즈가 시작되기 이전에도 워런 부부는 호러 팬들에게 유명 인사였다. 소위 실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귀신영화나 텔레비전물이 나올 때면 그 사건을 맡은 워런 부부의 이름이 어딘가에 박혀 있거나 극중 캐릭터가 이들을 모델로 하고 있기 마련이었다. 워런 부부는 20세기 호러물에 지울 수 없는 하나의 틀을 만들었다. 악령에게 시달리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을 구원해주는 초자연현상 전문가. 이들이 없었어도 이 틀은 존재했겠지만 그래도 우리가 아는 세계에서는 워런 부부를 통할 수밖에 없었다. 요새 사람들은 이들의 이름을 <컨저링> 유니버스 영화를 통해 안다. 나에겐 이게 굉장히 이상해 보인다. 초자연현상을 다룬 호러영화를 만드는 것이 금지된 중국이나 베트남에 사는 게 아니라면, 워런 부부의 사건 파일에 실린 사건들에 영감을 받아 귀신 나오는 호러 영화를 만드는 건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다. 워런 부부가 맡은 사건을 영화화하면서 이들의 캐릭터를 실명으로 등장시키는 것도 자연스럽다. 워런 부부가 보관하고 있는 귀신 들린 인형을 주인공으로 스핀오프를 제작하는 것도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이들이 주인공인 유니버스를 만들어 귀신영화를 만드는 건 좀 다른 일이다. <컨저링> 영화들의 가장 막강한 무기가 무엇인가. 영화가 그리는 사건이 실화라는 것이 아닌가. 초자연현상을 다룬 이야기를 접할 때 사람들은 어느 정도 융통성 있는 태도를 취하긴 한다. <컨저링> 영화의 고정 관객이라고 워런 부부의 주장을 다 믿는 건 아니다. 전혀 믿지 않는 관객이라도 이 영화를 즐기는 건 가능하다. 영화를 보기 위해 초자연현상에 대해 입장을 가져야 할 이유도 없다. 하지만 주연배우들이 실존 인물과 이렇게 밀접한 인간 관계를 맺고 있는 상황에서 허구의 이야기로 유니버스를 확장하는 건 어떻게 보아야 할까. 비슷해 보이지만 전작들과는 다른 내가 미심쩍은 눈으로 보건 말건 <컨저링> 유니버스는 넓어지고 있다. 지금까지 세편의 <애나벨> 영화가 나왔고 <컨저링 2>(2016)에서 이명박 닮은꼴로 화제가 됐던 수녀 귀신이 악역으로 나오는 <더 넌>(2018)이 나왔고 얼마 전에는 <요로나의 저주>가 개봉했다. 이들 중 <애나벨> 시리즈의 2편인 <애나벨: 인형의 주인>(2017)은 기대 이상의 성취를 보여준다. ‘실화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에서 한참 떨어져 있긴 하지만. 실화와 <컨저링> 유니버스를 연결하던 마지막 연결고리인 로레인 워런이 세상을 떴으니 이 세계의 이야기는 점점 더 막 나가지 않을까? <요로나의 저주> 이야기를 해보자. <컨저링> 유니버스의 이야기가 모두 그렇듯 이 영화의 시대배경도 20세기 후반, 그러니까 1973년이다. 경찰 남편을 잃은 주인공 안나 테이트 가르시아는 두 아이를 키우며 사회복지사로 일하고 있다. 안나는 파트리시아 알바레스라는 여자가 자신의 두 아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고 집 안 벽장에 감금하자 아이들을 엄마로부터 격리시킨다. 파트리시아의 아이들은 얼마 되지 않아 초자연적인 상황에서 살해당한다. 안나는 이들의 죽음에 ‘라 요로나’라는 악령이 개입하고 있으며 그 악령의 다음 타깃이 바로 자기 아이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이들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이다. 가톨릭 교회의 전문가들을 불러오면 좋겠지만 시간이 없다. 다행히 안나가 찾아간 페레스 신부는 사제 출신이지만 다른 접근법을 쓰는 전문가인 라파엘 올리베라를 소개시켜준다. 아, 그리고 페레스 신부는 <애나벨>에도 나왔다. 이렇게 안나와 아이들의 이야기는 <컨저링> 유니버스에 통합된다. 이 스토리 전개는 앞에 나온 두편의 <컨저링> 영화와 흡사하다. 초자연적인 존재에게 고통받는 가족과 이들을 구하러 온 초자연현상 연구가. 단지 이들을 갈라놓는 몇 가지 차이가 있다. 가장 큰 차이는 워런 부부가 안 나온다는 것이다. 그다음은 이 이야기의 타이틀롤 라 요로나가 원래부터 멕시코 문화권에서 잘 알려진 슈퍼스타라는 것이다. 이 영화가 나오기 전에도, 남편에게 애인이 생긴 사실을 알게 되자 자기가 낳은 아이들을 죽였다는 이 흐느끼는 유령이 등장하는 수많은 작품들이 나왔다. 라 요로나의 이야기가 어떻게 만들어졌고, 세월이 흐르면서 어떻게 변형되었는지를 알아내는 것은 민속학자들에게 의미 있는 과제일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라 요로나와 같은 인기 있는 유령의 등장은 이야기의 현실성을 떨어뜨린다는 것이다. <컨저링> 영화들과 <요로나의 저주>는 비슷한 이야기지만 후자는 (더) 장르화되어 있다. 이 차이는 참 오묘하다. <컨저링> 역시 장르화된 이야기일 테니. 하지만 앞에서도 말했듯 귀신영화, 또는 귀신 들린 집 영화로 분류되는 장르는 좀 까다로운 구석이 있다. 이들 상당수는 ‘실화’에 바탕을 두고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다른 서브 장르보다 더 ‘현실성’을 추구한다. <디스커버리 채널>의 <헌팅> 같은 인기 재현 프로그램은 시즌10 동안 꾸준히 귀신과 귀신들린 집에 대한 이야기를 해왔는데, 그것들은 모두 비슷비슷한 내용의 미니 호러영화였다. 이 따분할 수 있는 이야기의 반복을 10년 이상 끌어올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실화’라는 인증이었다. 여기에 참여한 전문가 중 워런 부부가 있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컨저링> 유니버스의 한계 <요로나의 저주>는 괜찮게 만들어진 영화다. 아역들을 포함한 배우들의 연기가 좋고 현실 논리를 깨트리며 공포를 창출해내는 몇몇 매력적인 아이디어도 있다. <애나벨: 인형의 주인>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 아이디어의 구현은 굳이 실화인 척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라 요로나의 등장과 함께 20세기 후반 로스앤젤레스에 사는 멕시코 사람들의 문화를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고 이를 활용할 수도 있었다. 워런 부부를 주인공으로 했다면 이 이야기를 그렇게까지 깊이 파지는 못했을 테니 라파엘 올리베라의 등장도 의미가 있다. 이 영화는 실화 소재의 <컨저링> 영화들이 건드리지 못했던 영역에 있다. 하지만 <요로나의 저주>는 <컨저링>처럼 고만고만한 이야기에서 안주해야 할 ‘실화’의 정당성을 갖고 있지 않다. 비슷한 이야기를 해도 <컨저링> 영화와 달리 <요로나의 저주>의 익숙함이 더 식상해 보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컨저링>에서 사실의 추구였던 것이 <요로나의 저주>에서는 이야기꾼의 안이함처럼 보인다. 이는 영화의 한계일 뿐만 아니라 <컨저링> 유니버스의 한계이기도 하다. 여기 질문이 있다. 비현실적인 공포 현상을 실화라고 내놓으며 만든 허구의 유니버스에서 그 공포의 가능성을 극대화하고 최대한 다양화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모든 이야기의 씨앗이었던 ‘사실’의 씨앗을 버려야 하는가? 아니면 이 모든 것들을 빛과 그림자로 만들어진 쇼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보고 할 수 있는 걸 다 해야 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해 워런 부부는 어떤 답을 갖고 있었을까?

오슨 웰스와 테리 길리엄, 감독을 매혹하는 돈키호테

저주받은 프로젝트 혹은 결코 완결될 수 없는 작품, 지난 30여년 동안 악운이 겹치며 번번이 무산돼왔던 테리 길리엄의 시대착오적 소동극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작품은 2018년 칸국제영화제 폐막식으로 선정되어 기대에 부푼 관객에게 처음 소개되었다. 우스꽝스럽고 서글픈 초현실주의 코미디로서 테리 길리엄의 독창적 상상력을 반영하는 작품이라는 반응에서부터 난삽하고 파편적인 근래 작품들의 결함을 이어받았다는 반응까지 평가는 다양했다. 냉혹한 현실을 부정한 채 망상에 빠진 자라는 모티브는 테리 길리엄이 이미 <피셔 킹>(1991)에서 보여주었다. 시대착오적 모험담의 주인공이 미치광이라는 설정은 <바론의 대모험>(1988)과도 상통한다. 이성과 계몽의 시대에 상상과 판타지의 권능을 예찬하던 바론 남작, 이미 사라진 궁정연애와 기사도의 세계를 향수하는 돈키호테는 모두 시대착오적 광인이다. 몽상의 시대에서 CG의 시대로 영화 패러다임이 바뀌었음에도 흐름에 적응하지 못하는 감독 테리 길리엄의 경우도 유사하다. 그가 펼치는 편력담은 바로크적 세계관을 상기시킨다. “바로크적 관점에서 세계는 인간이 지은이를 알 수 없는 한편의 희곡을 그 의미도 모른 채 보이지 않는 관객 앞에서 공연하고 있는 무대”(제라르 주네트)다. 환상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바로크 연극과 마찬가지로 테리 길리엄 역시 자신의 영화에서 미장아빔(Mise en Abyme, 액자기법) 혹은 극중극을 적극 활용하거나 ‘세상은 연극 무대’라는 모토를 비유가 아니라 직설적으로 사용해왔다. 확장하는 돈키호테 서사 보르헤스가 <돈키호테>에는 “무한적용의 테크닉”이 발휘된다고 하였던 바(<삐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 중), 이 마법 같은 책에는 참으로 많은 판본이 있으며 작가인 세르반테스도 책의 2부에서 작품의 진위 여부와 작가의 정체성에 대한 자기반영적 농담을 반영하기조차 했다. 단일한 원본은 존재하지 않으며 무한히 복제되고 증식하는 판본들, 자기 충족적으로 완결되지 않은 채 끊임없이 다시 써내려지면서 앞선 판본에 뒤의 판본이 겹쳐 써지는 상호텍스트성이야말로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가 보여준 놀라운 근대성이었다. 영화의 세기인 20세기 이후로도 이 책은 피터 오툴이 등장하는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1972)에서부터 오슨 웰스의 문제적 프로젝트 <돈키호테>(1992), 알베르트 세라의 명상적 무훈시 <기사에게 경배를>(2006)에 이르기까지 영화적 판본도 거듭 만들어졌다. 설정은 이러하다. 스페인에서 보드카 광고 촬영을 하는 CF감독 토비(애덤 드라이버)는 의욕 상실과 상상력 고갈에 봉착해 있다. 그는 우연히 과거 자신이 촬영한 졸업작품이자 출세작인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의 DVD를 보게 된다. 그는 근처에 있던 당시의 영화 촬영지를 방문하고 뜻밖의 장소에서 과거 자신의 영화에 돈키호테 역으로 출연했던 구두수선공 노인 하비에르(조너선 프라이스)를 만난다. 노인 하비에르는 자신이 돈키호테라는 망상에 빠져 있는 데다 토비를 산초 판자로 착각하기까지 한다. 하비에르와 토비는 어설픈 돈키호테와 산초로 분한 채 기이한 편력을 시작한다. 이후 등장하는 이슬람교도들의 여관, 신비한 동굴 체험, 성에서의 가장무도회 등 대부분의 에피소드는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에 등장하는 에피소드를 현대적으로 각색한 것들이다. “나는 이 철의 시대에 잊혀진 기사도를 다시 세워야 한다. 나는 라만차의 돈키호테다.” 영화는 이렇게 선언하며 돈키호테가 종복 산초와 함께 모험을 떠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스스로를 라만차의 기사로 명명하며 편력의 길을 떠나는 오프닝 시퀀스는 사실 주인공 토비가 찍는 보드카 광고의 한 장면이다. 자신의 상관의 아내와 밀회를 가지려고 하던 호텔방에서 그가 보는 장면 역시 돈키호테가 자기를 명명하며 모험을 떠나는 장면이다. 자신의 옛 영화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이 영화의 제목과도 같은 이 영화의 오프닝 장면은 극중 극으로 작품 곳곳에 등장한다)를 접하며 토비는 광고 속 돈키호테의 세계는 가짜(허상)이고 영화 속 과거 자신이 추구하던 것이 진실(원본)이라는 묘한 향수에 젖어들어가는 것으로 보인다. 돈키호테가 모험을 떠나는 장면은 토비가 낡은 자동차극장에서 자신의 영화를 우연히 관람할 때 다시 등장한다. 여기서 자신의 과거 작품이 진실(원본)이라 여기던 토비는, 망상에 빠진 노인 하비에르(자신을 돈키호테라고 착각하는)를 만나는 순간 혼란에 빠지고 만다. 그리고 이 자기 명명은 하비에르의 죽음 이후 이제 자신을 돈키호테로 여기는 토비의 입을 통해 반복되며 영화의 엔딩을 장식하게 된다. 물론 돈키호테라는 광인 캐릭터를 현대성의 세계에 소환시키는 상상력을 테리 길리엄이 처음 선보인 것은 아니다. 오랫동안 돈키호테는 오슨 웰스의 저주받은 프로젝트였다. 그의 <돈키호테>는 1957년부터 이후 30여년간 멕시코와 스페인 등지에서 간헐적으로 촬영되었다. 결국 영화를 완성시키지 못한 채 오슨 웰스가 사망하자 그의 반려자였던 오야 코다가 미완성 프로젝트를 편집해 1992년 칸국제영화제에서 이를 공개했다. 개봉 제목이 <당신은 언제 돈키호테를 완성할 것인가?>가 될 뻔했던 이 작품은 현대에 뛰어든 돈키호테와 산초 판자의 착란적 모험을 다루었다. 테리 길리엄이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를 만들 수밖에 없었던 이유 시대착오적 인물의 편력담인 돈키호테 텍스트는 오슨 웰스에게도 테리 길리엄에게도 자신의 영화적 삶을 반영한 것이기에 매혹적이었을 것이다. 끊임없이 감독 자신에 대한 자기반영적 발언을 영화 속에 넣고 있다는 점도 공통적이다. 오슨 웰스가 작품에 직접 카메라를 들고 등장해 스페인에서 돈키호테 영화를 찍겠노라 인터뷰하고, 이 장면을 텔레비전을 통해 현대로 소환된 산초가 보고 있다. 테리 길리엄의 영화에 등장하는 토비는 명백히 감독 자신의 페르소나다. 그리고 묘한 점은 두 작품 모두 원작이 품은 시대착오성으로 ‘영화’와 만난다는 점이다. 조르조 아감벤은 <세속화 예찬>에서 오슨 웰스의 <돈키호테>의 한 장면을 “영화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6분”이라 말한 바 있다. 장면의 시작은 종복 산초가 돈키호테를 찾아 시골 마을 영화관에 들어가는 데서 시작한다(타인의 손에 의해 편집된 칸 공개 버전에는 이 장면이 빠져 있다). 산초는 극장에서 돈키호테를 찾지만 다가가지 못한다. 상영되는 영화 속엔 무장한 기사들이 말을 타고 한 여자를 위협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영화를 지켜보던 돈키호테가 일어나 갑자기 스크린으로 돌진하여 스크린을 찢기 시작한다. 스크린은 암전되고 관객은 떠나지만 아이들은 이를 열렬히 환호한다. 허구(기사 이야기)와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돈키호테는 영화와 현실을 구분하지 못한다. 오슨 웰스와 마찬가지로 테리 길리엄도 원작 내용의 재현을 넘어서 원작의 형식인 자기반영성과 상호텍스트성을 활용했다. 앞선 웰스의 장면과 유사한 장면이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에도 등장한다. 스페인의 시골 마을에서 돈키호테의 표지판을 보고 찾아간 곳에서 살아 있는 돈키호테를 보여주겠다는 노파를 만난다. 그는 돈을 내고 트럭에 설치된 이동식 극장에 들어가는데, 그 안에는 자신이 대학 시절 촬영한 돈키호테 영화가 상영되고 있다. 극장의 스크린 뒤에는 과거 영화에서 돈키호테 역할을 맡았던 노인 하비에르가 감금된 채 영화 내레이션을 하고 있었다. 산초의 모습에 토니의 얼굴이 겹치고 찢겨진 스크린 너머 돈키호테는 토비를 보고 그를 산초로 착각한다. 영화라는 거대한 엔터테인먼트 세계에 진입한 자가 현실과 영화를 구분하지 못한 채 그 속으로 돌진하여 스크린을 찢고 그 너머의 세계로 간다. 이는 사실 이전에 테리 길리엄의 <바론의 대모험>과 <파르나서스 박사의 상상극장>(2009) 같은 현란한 바로크극들이 이미 보여준 설정들이기도 하다. 오프닝에서 흰색 상하의 슈트에 흰 모자를 쓴 토비의 의상은 영화가 진행되면서 차차 변하게 된다는 점도 흥미롭다. 우선 토비가 상사의 아내와 바람을 피우려다 도망칠 때 그는 검은 모자를 집어든다. 이 검은 모자의 주인인 집시는 기이하게도 토비가 가는 곳마다 등장하며, 영화의 초반 그에게 졸업작품 DVD를 건네는 것도 그다. 검은 머리의 집시는 우연히도 결정적 순간마다 등장하고 때로 토비와 오인되기도 한다. 21세기 영화에 고하는 패배선언 나는 이 집시와 같은 캐릭터를 <바론의 대모험>에서 본 적 있다. 주인공인 허풍선이 바론 남작의 주위에는 늘 검은 베일로 된 옷을 입고 낫을 든 사신이 등장한다. 사신은 때로 다른 인물로 변신한 채 바론의 주위를 배회한다. 필멸의 운명에서 벗어나 기상천외한 모험을 하는 바론의 곁에 죽음이 배회하는 것처럼,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에서도 영화 전반적으로 죽음의 무드가 깔려 있으며 이를 상징하는 것이 검은 머리 집시며, 아마 그는 토비의 도플갱어일 것이다. 어쩌면 토비가 젊은 시절 영화 찍던 마을인 수에노스(단어의 의미는 ‘꿈’이다)로 향하는 장면에서부터 죽어 있던 것일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그가 방문한 수에노스 마을에서 예수의 고난, 죽음, 부활로 이어지는 ‘성주간’(Holy Week) 가장행렬이 이루어지고 있음도 인상적이다. 영화 속 사람들은 스스로를 돈키호테로 착각하는 하비에르와 산초 취급 당하는 토비를 가장행렬 인물로 착각한다. 성주간의 가장행렬 장면은 영화의 후반부에 성에서 일어나는 거대한 가장무도회 장면과도 이어진다. 광고주인 보드카 회사 사장이 광기에 빠진 하비에르(돈키호테)와 토비(산초)를 골탕먹이기 위해 16세기 기사도의 시대처럼 꾸민 성에서 가장무도회를 연다. 그리고 영화 촬영 스탭들을 동원해 하비에르(돈키호테)에게 사악한 마법사와 맞서는 모험을 경험하게 한다. 이 작품에서 ‘영화’란 21세기의 사악한 마법이다. 광기에 빠진 순순한 몽상가를 기만하고, 그를 우스꽝스러운 구경거리이자 싸구려 스펙터클로 전락시킨다.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적 인물이 돈키호테적이지 않은 세상과 대적할 때 벌어지는 서글픈 상황을 풍자와 해학으로 승화시켰다. 테리 길리엄은 동시대 영화의 세계를 자신과 대적하는 세계로 인식하고 있는지 모른다. 몽상과 상상력만으로 놀라운 영화 세계를 만들어내던 시대를 지나, CG 디지털의 시대가 되자 테리 길리엄의 영화는 좀처럼 적응하지 못한 채 힘을 잃었다. <그림형제: 마르바덴 숲의 전설>(2005)이나 <파르나서스 박사의 상상극장>처럼 CG를 한껏 활용하여 이미지의 권능을 과시한 영화들이 도리어 앙상하고 초라했다. 이번 영화의 대사 속에서 주위 사람들이 토비를 두고 CG를 싫어하는 감독이라고 언급하기도 한다.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는 감독의 페르소나인 토비가 영상사업이라는 거대한 괴물에 기만당한 채 돈키호테를 (상징적으로) 죽이고 그 죄책감을 잊기 위해 망상 속에 빠져 스스로를 돈키호테라 선언하고 모험을 떠나며 끝난다. 이는 20세기 영화가 21세기 영화에 내리는 패배 선언이며, 망상과 광기 없이 할리우드에서 생존할 수 없음에 대한 성찰인 셈이다.

[주성철 편집장] <기생충>에 대한 프랑스의 열광적 반응

지난 6월 5일 프랑스(현지시각)에서 개봉한 <기생충>이 첫 주말을 보내고 5일을 경과하며, 25만 관객을 동원했다. 이는 역대 프랑스 개봉 한국영화 중 최고 흥행기록(68만명)을 세웠던 <설국열차>의 개봉주 흥행기록 23만 관객을 넘은 성적이다. 또한 <기생충>은 같은 날 개봉한 <엑스맨: 다크 피닉스>에 이어 프랑스 박스오피스 2위를 기록하는 놀라운 성과를 거뒀다. 597개 관으로 시작한 <엑스맨: 다크 피닉스>의 3분의 1 정도인 179개 상영관에서 개봉했지만 관객수는 <엑스맨: 다크 피닉스>가 거둔 49만 관객의 3분의 2 수준이다. 관객점유율로는 훨씬 앞섰다고 볼 수 있으며, 금주 중 300여개관 이상으로 확대 상영될 예정이다. 프랑스에서 <설국열차>가 <취화선>의 31만 관객 흥행 기록을 넘어서기까지 무려 12년이 걸렸는데, <아가씨>의 30만 관객과 <부산행>의 27만 관객이 그 뒤를 이었다. 이제 <기생충>이 <설국열차>가 세운 기록을 넘어설 것은 무난해 보이며, 15만 관객을 동원했던 <괴물>(2006)까지 더해 현재 프랑스가 가장 사랑하는 한국 감독이 봉준호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2종으로 제작된 <기생충> 프랑스 포스터 중 박 사장(이선균)이 연교(조여정)에게 귓속말하는 장면으로 만든 두번째 포스터다(이번호 <기생충> 비평 기획 중, 김나희 평론가의 ‘프랑스 현지 개봉 리포트’ 66쪽 참조). 프랑스 관객에게 배우 이선균과 조여정이 낯설다는 점, 프랑스에서 개봉하는 영화 포스터에서 큼지막한 카피를 쓰는 일이 드물다는 점을 감안하면, 바로 그 귓속말 장면에 마치 말풍선을 넣은 것처럼 “너 스포일러하면 죽여버린다!”라는 카피를 넣은 것은 무척 위트 있으면서도 의미심장하다.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 이후, 많은 프랑스 관객이 ‘<기생충>은 스포일러를 조심해야 하는 영화’라는 것을 이미 전반적으로 알고 있음을 전제한 포스터이기 때문이다. 김나희 평론가에 따르면, 프랑스에서도 이른바 ‘N차 관람’ 열풍이 불기 시작했고 모든 방송과 리뷰에서 ‘의식적으로’ 스포일러를 조심하고 있는 분위기라 한다. 분량상 다 담아내지 못한 리포트 내용으로, 김나희 평론가는 ‘현지 개봉 후 <기생충>에 평점 5점 만점을 주는 매체의 다양성’을 언급했다. “<카이에 뒤 시네마>와 <포지티프>처럼 한국 독자들에게도 익숙한 영화전문지부터 대중적인 <텔레라마>, 좌파성향이 강한 일간지 <리베라시옹>, 중도 좌파 성향의 <누벨 옵세르바퇴르>, 연극 등 마이너한 장르를 지지하며 좌파적 성향을 진하게 보여운 <뤼마니테>, 시사주간지 <르푸앙> 등 매체의 특성과 결이 무척 다름에도 불구하고 27개 매체 모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이례적인 만장일치 만점을 주었다”는 것이다. “그외 <르몽드> <피가로> <프리미어> 등에서는 4점을 줬다. 보통 프랑스에서도 영화제 수상작이 흥행과는 별도로 인정받는 분위기인데, <펄프 픽션>(1994) 이후 이 정도의 관객 반응을 끌어낸 것은 사실상 처음이 아닐까 싶다. 무려 24년 만의 일이라 해도 틀리지 않다”고도 덧붙였다. 더불어 봉준호 감독의 전작 <옥자>를 함께한, 미하엘 하네케의 칸 황금종려상 수상작 <아무르>(2012)를 촬영한 다리우스 콘지 촬영감독이 지난 김나희 평론가와의 <옥자> 단독 인터뷰를 인연으로, 이번 <기생충>에 대한 감상을 <씨네21>로 전해왔다. 기사로 확인하시기 바란다. 그리고 <기생충>에 관한 기사는 다음주에도 이어진다.

잘 가요! 명장면으로 복습해 보는 <엑스맨> 시리즈

<엑스맨> 시리즈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엑스맨: 다크 피닉스>(이하 <다크 피닉스>)가 지난 6월 5일 개봉했다. 그러나 <다크 피닉스>는 시리즈 사상 최악의 오프닝 스코어를 기록, 아쉬운 성적을 거두고 있다. 2000년 개봉한 <엑스맨>을 시작으로, 히어로 영화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던 <엑스맨> 시리즈이기에 더욱 아쉬움이 남는 마지막이다. 그러나 시작이 있다면 끝은 존재하는 법. <엑스맨> 시리즈도 이제 보내줄 때가 됐다. 현시점에서 명장면을 통해 지난 <엑스맨> 시리즈를 복습하는 ‘추억팔이’ 시간을 가져보려 한다. 찬사를 받은 영화도, 혹평을 받은 영화도 있지만 그 모두를 아울러봤다. 장면은 주관적인 기준으로 선정했으며, 혹시 빠진 장면이 있다면 댓글로 남겨주시길 바란다. 세계관을 공유하지만 직접적인 연관적은 없는 <데드풀> 시리즈와 현재 상영 중인 <다크 피닉스>는 제외했다. ※ <엑스맨> 시리즈의 줄거리 스포일러가 대거 포함돼있습니다. 오리지널 삼부작 울버린과 더불어 <엑스맨> 시리즈에서 가장 두터운 팬덤을 보유한 캐릭터는 금속을 조종하는 능력자, 매그니토다. 오리지널 시리즈에서는 <반지의 제왕> 시리즈의 간달프 역으로도 유명한 이안 맥켈런이 그를 연기, 관록의 카리스마를 자랑했다. 매그니토는 뮤턴트인 동시에 홀로코스트를 겪은 유대인. 소수를 향한 핍박을 경험한 그는 완강한 태도를 가지게 됐다. 영화의 초반부, 프로페서 X(패트릭 스튜어트)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는 그의 태도를 엿볼 수 있었다. 자신의 앞을 막지 말라며 프로페서 X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는 모습은 전운이 감돌았다. 시리즈 전체를 보면 명장면이라고 하기는 힘들지만 <엑스맨> 시리즈 특유의 그로테스크함이 처음 드러났던 켈리 의원(브루스 데이비슨)의 탈출 장면. 매그니토의 실험으로 돌연변이가 돼버린 그는 신체가 늘어나는 능력을 이용해 감옥을 탈출한다. 액체 괴물이 떠오르기도. 매그니토와 울버린(휴 잭맨)이 맞붙는 기차 신, 그리고 이어지는 정류장 신은 매그니토의 놀라운 능력을 볼 수 있었던 장면이다. 온몸에 아다만티움이 심어진 울버린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고, 경찰들의 총을 역으로 겨누는 매그니토. 금속을 마음대로 조종한다는 것이 얼마나 강력한지 처음으로 선보인 장면이다. <엑스맨> 시리즈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또 다른 캐릭터 미스틱(레베가 로미즌). 그녀는 모습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는 덕에 여러 명장면들을 탄생시켰다. 능력까지 구현할 수 있어 두 명의 울버린이 맞붙는 장면이 등장하기도. 위 사진은 울버린으로 변신했다가 본 모습으로 돌아가는 장면이다. 클로를 이용한 공격력도 있지만 울버린의 진짜 힘은 극강의 회복력을 자랑하는 ‘힐링 팩터’ 능력. 덕분에 생명력을 나누어 로그(안나 파킨)을 살려냈다. <엑스맨>의 클라이맥스를 장식했던 순간. 아주 잠깐 등장했지만, 죽지 않고 켈리 의원 행세를 하고 있는 미스틱의 모습도 반전을 선사했다. 마지막은 플라스틱 감옥에 갇힌 매그니토와 그를 방문한 프로페서 X가 체스를 두는 장면이다. 두 사람은 액션신 보다 대화가 오갈 때 더 큰 긴장감을 자아냈다. 가치관이 뚜렷이 갈리기 때문. 찰스에게 “무슨 수를 써서라도(By any means necessary)”라고 말하며 뮤턴트 탄압 정책을 막겠다고 하는 매그니토. 이는 강경파 흑인 인권 운동가 말콤 X의 말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이후로도 체스는 오랜 세월 함께 해온 두 사람의 관계를 보여주는 수단으로, 혹은 대립하는 은유로서 빈번히 등장했다. <엑스맨 2> 역시 동공을 확장시켰던 장면들이 다수 등장했다. 그 시작은 나이트 크롤러(알란 커밍)의 백악관 침투 신. 순간 이동이 가능한 그는 경호원들을 물리치며 순식간에 대통령의 코앞까지 도달한다. 화려한 액션에 웅장한 음악까지 더해져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미스틱이 주입한 철분을 간수의 몸에서 빼 내어 플라스틱 감옥을 탈출하는 매그니토. 그의 매력 포인트라고 할 수 있는 여유로운 태도가 강조, 악역으로서의 위압감을 자랑했다. 다음은 새롭게 등장한 캐릭터 데스 스트라이크(켈리 후)와 울버린의 액션. 데스 스트라이크는 울버린의 능력을 토대로 만들어진 뮤턴트다. 다만 칼날이 손등이 아닌, 손톱에서 나온다. 같은 능력을 사용하는 둘의 대결은 화려한 볼거리를 선사했다. 투박한 울버린과 달리 스트라이크는 유연한 액션이 강조된 점이 돋보였다. <엑스맨> 시리즈에서 가장 중요하게 등장하는 장치 세레브로. 찰스의 텔레파시 능력을 극대화해 전 세계 사람들과 소통, 혹은 조종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기계다. <엑스맨 2>의 주요 빌런으로 등장하는 윌리엄 스트라이커(브라이언 콕스)의 계략에 빠져 모든 뮤턴트를 세레브로를 사용해 죽이려는 프로페서 X. 그러나 매그니토는 그와 미스틱의 능력을 이용해 타깃을 인간으로 바꾼다. 매그니토의 오랜 숙원이 이루어질 뻔한 순간이다. 이후 이어지는 “잘 가게. 찰스(Good Bye Charles)”도 명대사. 진 그레이(팜케 얀센)는 이때 박수받으며 떠나야 했을 듯하다. 엑스맨 멤버들을 살리기 위해 밀려오는 강물을 막아내며 죽음을 택하는 진. 연인 스캇(제임스 마스던)의 절규가 안타까움을 더했다. <엑스맨: 최후의 전쟁>(이하 <최후의 전쟁>)에서 갑자기(?) 살아 돌아온 진 그레이. 이는 부족한 개연성으로 팬들의 질타를 받았지만 진과 스캇의 재회는 애틋함을 자아냈다. 헌신적인 사랑의 끝을 달린 스캇이 처음 맨눈으로 진을 마주했기에 더욱. 물론 영화의 문제점 중 하나였던 ‘캐릭터 죽이기’가 곧바로 이어지지만. 엑스맨의 수장 프로페서 X도 폭주한 진의 손에 허망하게 떠났다. 그러나 온몸이 분해되기 직전, 울버린을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띠는 그의 표정은 강한 인상을 남겼다. <최후의 전쟁>에서 반전 묘미를 줬던 부분은 뮤턴트의 능력을 이용한 매그니토의 노림수. 인간들은 뮤턴트들의 캠프를 기습하지만 이를 미리 알아챈 매그니토는 분신술이 가능한 뮤턴트를 통해 뒤통수를 친다. 그 사이 매그니토는 섬 한가운데 위치한 인간들의 시설로 쳐들어간다. 이때 “찰스는 인간과 뮤턴트 사이의 다리가 되고 싶어했지”라고 말하며 거대한 철교를 통째로 옮겨 버린다. 센스 있는 대사와 함께, 오리지널 시리즈 속 매그니토는 능력 범위의 정점을 찍었다. 그렇게 폭주하던 진은 울버린의 손에 사망했다. 지금은 진부해진 소재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제 손으로 죽이는 장면은 울버린 팬들의 마음도 덩달아 아프게 했다. <최후의 전쟁>은 부족한 개연성, 산만한 스토리 등으로 혹평을 받았지만 오리지널 삼부작을 마무리한 중요한 장면이다. 프리퀄 시리즈 <엑스맨> 시리즈의 양대 산맥, 프로페서 X와 매그니토의 시작을 다룬 만큼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이하 <퍼스트 클래스>)는 매 순간 명장면이 넘쳐났다. 그 첫 번째는 <엑스맨>의 시작 장면을 그대로 가져온 오프닝. 2006년 혹평을 들으며 마무리된 줄 알았던 <엑스맨> 시리즈가 다시 부활한 벅찬 순간이다. 맥주 광고 아니다. 에릭(마이클 패스벤더)은 나치 잔당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술집으로 찾아간다. 일순간에 그들을 처단할 수 있었지만 함께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눈 후 복수를 강행하는 에릭. 그 사이 흐르던 긴장감은 마치 스파이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했다. <퍼스트 클래스>는 기원을 시작점을 다룬 만큼 ‘ㅇㅇ했던 첫 순간’이 여럿 등장했다. 위 장면은 레이븐(제니퍼 로렌스)이 처음으로 매그니토, 프로페서 X라는 닉네임을 지어주는 순간. 철없는 행동을 하는 어린 뮤턴트들이 혼이 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곱씹어 보면 의미가 큰 장면이다. 스틸컷은 섬뜩하지만 실제로는 감동적인 장면이다. 찰스(제임스 맥어보이)의 도움으로 분노가 아닌 행복한 기억으로도 힘을 끌어올리는 에릭. 그는 눈물과 함께 미소 지으며 한 단계 더 성장한다. 이 장면 덕에 마이클 패스벤더는 ‘이빨 부자’, ‘상어’라는 별명이 생겼다. 미스틱이 왜 본모습인 파란색 피부를 고집하게 됐는지도 밝혀졌다. 남들과 다른 외모에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던 레이븐은 “숨을 필요 없다”는 에릭의 말을 듣고 더 이상 스스로를 숨기지 않는다. 화룡점정으로 파란색 레이븐을 보고 “완벽하다”고 말하는 에릭. 미스틱이 왜 그토록 매그니토를 따르게 됐는지에 대한 완벽한 설명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오묘한 로맨스가 흐르기도. 드디어 모든 원흉이었던 세바스찬 쇼(케빈 베이컨)을 죽이는 데 성공한 에릭. 그러나 그는 곧바로 세바스찬이 사용하던 텔레파시 능력을 막는 헬멧을 쓴다. 훗날의 매그니토 하면 빠질 수 없는 아이템이자 찰스와의 대립이 본격화되는 시점이다. 이어지는 뮤턴트들을 향한 인간들의 폭격. 에릭은 능력으로 미사일을 돌려보내며 살아남기 위해서는 대립해야 한다고 주장, 찰스는 화합을 주장한다. 결국 미사일은 찰스의 저지로 공중분해되지만 그 과정에서 찰스는 에릭의 실수로 허리에 총알이 박힌다. 두 사람이 왜 갈라서게 됐고, 프로페서 X가 왜 걸을 수 없었던지를 박진감 넘치게 풀어냈다. 그렇다. 또 에릭 렌셔다. <퍼스트 클래스>는 거의 매그니토의 탄생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영화의 엔딩 역시 에릭이 스스로를 매그니토라고 지칭하며 막을 내렸다. <퍼스트 클래스>에서는 볼 수 없었던 유전자 세포를 지나 세레브로가 닫히는 오리지널 삼부작의 오프닝. 그러나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이하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에서는 이를 음악까지 그대로 가져왔다. 브라이언 싱어 감독이 다시 복귀, 오리지널 삼부작을 계승하겠다는 의지다. 그렇게 영화는 시리즈의 흑역사로 불린 <최후의 전쟁>을 시간 여행을 통해 갈아엎는데 성공, 완성도에서도 큰 호평을 받았다. 이후 이어지는 센티널과 뮤턴트들의 결투. 이전까지는 개개인의 능력이 강조됐다면 이 장면은 협공을 통해 더욱 화려한 액션을 자랑했다. 그러나 결국 센티널 앞에 맥없이 쓰려지며 말 그대로 ‘이길 수 없는 적’에 대한 공포까지 유발했다. 새로운 신 스틸러도 탄생했다. 엄청난 속도를 낼 수 있는 퀵실버(에반 피터스)다. 여타의 영화에서 빠른 캐릭터는 CG를 통해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구현했지만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는 반대로 그 이외 모든 것이 느리게 연출했다. 덕분에 신기하면서 코믹한 장면이 완성됐다. 긴박한 상황이지만 혼자서만 여유로운 퀵실버가 듣는 곡, 짐 크로스의 ‘Time in the Bottle’도 한몫했다. 역시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가 호평을 받았던 가장 큰 이유는 오리지널 삼부작과 프리퀄 시리즈를 완벽하게 아울렀기 때문. 이를 가장 잘 대변한 장면은 젊은 날의 찰스와 노년의 찰스가 서로 얼굴을 맞대며 대화하는 부분이다. 불가능할 것이라 생각했던 장면을 완벽히 구현, 팬들의 마음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에서 모든 뮤턴트들을 살린 일등 공신은 레이븐이다. 에릭을 따라 인간들에게 복수할지, 혹은 찰스를 따라 화합을 추구할지 선택의 기로에 놓인 상황. 끝내 총을 내려놓은 그녀는 미래를 바꿨다. 바로 이렇게. 바뀐 미래에서 깨어나 죽었던 진과 사이클롭스를 마주하는 울버린. 이야기 상으로도 감동을, 영화 외적으로는 흑역사를 완벽하게 지우는 데 성공했다. 프리퀄 시리즈를 보면 매그니토가 왜 악역으로 변모하게 됐는지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는 항상 인간들의 과오로 사랑하는 이들을 잃는다. 이런 에릭의 ‘짠내’가 폭발한 것은 <엑스맨: 아포칼립스>에서. 매그니토라는 이름을 버리고 평범히 살아가려 했지만 그는 동료들의 밀고로 아내와 딸을 눈앞에서 잃는다. 퀵실버 또다시 제 몫을 톡톡히 해냈다.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 때와 같은 기법으로, 거기에 더욱 커진 스케일로 모든 동료들을 구했다. 그 유명한 유리드믹스의 ‘Sweet Dreams’가 흘러나오며 경쾌한 분위기를 더했다. <아포칼립스>는 <엑스맨> 시리즈 중 스펙터클 면에서는 최고치를 자랑했다. 최초의 뮤턴트 아포칼립스(오스카 아이작)는 찰스를 조종해 지구상에 존재하는 핵폭탄을 모두 우주로 날려보낸다. 베토벤 교향곡 7번과 함께, “바벨탑을 세운다 한 들 신에게는 닿을 수 없다”라는 아포칼립스의 외침은 웅장함을 극대화했다. 이 장면에서 마블의 대부, 고 스탠 리가 부인과 함께 카메오로 출연하기도. 이외에도 매그니토가 금속이 아니라 자기장 자체를 조종하는 것, 아포칼립스가 순식간에 피라미드를 세우는 장면 등이 있었다. 신 스틸러 역할을 한 만큼 이 장면도 선정했다. 사실 그는 매그니토의 숨겨진 아들. 그러나 정작 매그니토와 마주한 순간, 그는 이를 밝히지 못하며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가히 <엑스맨> 시리즈의 홍길동이 됐다. 명장면이라고 하기는 힘들지만 <퍼스트 클래스>의 장점 중 하나였던 ‘ㅇㅇ한 순간’도 등장했다. 제임스 맥어보이 팬들에게는 안타까움을 줬을 장면이다. 프로페서 X는 나이가 들어 대머리가 된 것이 아니었다. 아포칼립스의 숙주가 될 뻔한 상황에서 벌어진 일. <다크 피닉스>의 등장은 이미 <아포칼립스> 때부터 암시됐다. 아포칼립스를 자신의 정신 공간으로 끌고 와 막으려 한 찰스. 그러나 그 힘에 비례해 거대한 크기로 표현된 아포칼립스를 막지 못한다. 절망스러운 상황을 모두 뒤엎는 것은 봉인됐던 능력을 해방하는 진 그레이(소피 터너). 힘의 일부였음에도 아포칼립스를 재로 만드는 모습은 <엑스맨> 세계관 속 최강자다운 면모를 자랑했다. 울버린 삼부작 울버린의 울부짖음은 언제 봐도 처연하다. 과거를 청산하고 아내와 행복한 삶을 꾸리지만 이마저도 이루어지지 않는 로건. 그가 어떻게 울버린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됐는지도 이 장면 직전에 등장했다. 오리지널 시리즈에서 매번 울버린의 기억으로만 문득문득 등장하던 장면. 바로 아다만티움 이식 장면이다. <엑스맨 탄생 : 울버린>에서는 그 전체가 등장했다. 기억이 지워지고 몸에 아다만티움이 주입된 채 깨어나는 울버린. 폭주하며 주위의 모든 것을 파괴하는 모습은 인간보다는 짐승에 가까워 보였다. 데드풀이 찾아와 총구를 겨눌 듯하지만 언급 안 할 수가 없다.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담당하고 있지만 차마 명장면이라 말할 수는 없는 그 장면. 울버린과 웨이드(라이언 레이놀즈)의 결투 신이다. 온몸이 개조당한 웨이드는 끔찍한 혼종이 됐다. 울버린과 같은 능력에 순간 이동이 가능, 눈에서는 레이저까지 쏜다.(심지어 배역 이름도 데드풀) 이 장면만큼은 <데드풀 2>의 백미였던 진짜 데드풀의 타임라인 정리로 대체한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에 붙잡혀 있던 울버린. 그는 힐링 팩터 능력으로 원자폭탄이 터지는 순간에도 살아남는다. 불멸을 중심 소재로 잡은 만큼 그 한계치를 보여주며 이목을 끈 도입. <스파이더맨 2>, <원티드> 등 기차 액션 하면 생각나는 영화들이 있다. <더 울버린>도 기차 위에서의 액션 신만큼은 그 대열에 합류해도 좋을 듯하다. 울버린의 클로를 활용해 마치 암벽을 기어오르며 싸우는 것처럼 연출했으며 주위 사물을 통해 독특한 장면을 완성했다. 마지막 영화는 울버린 그 자체가 된 휴 잭맨의 완벽한 퇴장 <로건>이다.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든 <로건>은 히어로 울버린이 아닌, 한 사람으로서의 로건에 초점을 맞췄다. 힐링 팩터 능력을 점점 잃어가는 로건의 ‘짠내’ 가득한 모습이 시종일관 유지된다. 도입부터 무덤에 서있는 그의 쓸쓸한 뒷모습을 포착하며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그토록 강력했던 클로도 하나가 제대로 나오지 않아 맨손으로 피를 흘리며 빼낸다. 로건 앞에 나타난 이는 자신의 유전자를 토대로 한 작은 뮤턴트 소녀 로라(다프네 킨). 청소년 관람불가를 택한 <로건>인 만큼, 그녀는 어린아이라는 특성에 맞는 민첩하고 유연한 몸놀림으로 적들을 잔혹하게 죽인다. 반전과 함께 완성도 높은 액션이 돋보였다. 퀵실버처럼 연출이 돋보였던 장면도 있다. 치매에 걸려 자신도 모르는 채 주위 모든 이를 죽이게 되는 병에 걸린 프로페서 X. 로건 일행이 휴식을 취하던 호텔에서 그의 증세가 다시 시작된다. 제임스 맨골드 감독은 이 장면에서 화면을 마구잡이로 흔들어 시공간이 무너지는 듯한 효과를 줬다. 눈알만 움직일 수 있는 디테일 등도 긴장감을 더했다. 역시 프로페서 X의 죽음은 <최후의 전쟁>에서가 아닌, 이 장면에서라고 말하고 싶다. 로건과 떠나기로 한 희망의 배, ‘선시커’를 나지막이 내뱉으며 숨을 거두는 그는 팬들의 눈물샘 자극 1차 포인트였다. 새로운 캐릭터 칼리번(스테판 머천트). 햇빛을 보면 피부가 타버리는 그는 적들에게 붙잡혀 고통받는다. 그리고 끝내 로건 일행을 위해 자폭을 선택한다. 로건은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약물을 투여, 마지막 남은 힘을 모두 끌어올린다. 힘겹던 그가 드디어 제대로 된 힘을 발휘하는 순간이지만 이미 만신창이가 된 만큼 멋짐보다는 안쓰러움을 자아냈다. <엑스맨> 팬이라면 이 장면을 보고 눈시울 붉어졌을 것이다. 끝내 목숨이 다한 로건. 로라는 그의 무덤을 만들고, 꽂혀 있는 십자기를 눕혀 X로 만든다. 오랜 시간 사랑받았던 캐릭터와 배우를 향한 예우란 이런 것이 아닐까.

[TVIEW] <백종원의 요리비책>, 참 쉽죠?

“만들 수 있는 요리가 일곱 가지입니다. 일곱 번째 순서가 지나가면 다시 첫 번째 요리로 돌아간답니다.” 1980년 이후로 요리를 하지 않았다는 미국 연방대법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의 말을 보며 생각했다. 아니, 일곱 가지나? 카레, 떡볶이, 박막례표 간장국수… 다시 카레로 돌아가던 중, 유튜브 채널 개설 사흘 만에 구독자 100만명을 훌쩍 넘긴 <백종원의 요리비책>을 클릭했다. 목살이 없으면 아무 돼지고기나, 새우젓이 없으면 액젓, 하지만 국간장이 없으면 진간장은 조금만 넣어야 한다며 느슨한 듯하면서도 중요한 포인트를 놓치지 않는 백종원의 입담은 요리 의욕이 0에 수렴하는 사람마저 사로잡는다. MBC <마이 리틀 텔레비전>, tvN <집밥 백선생>, SBS <골목식당>의 레시피와 솔루션을 합쳐놓은 듯한 이 채널에서 특히 보는 재미가 있는 것은 한 가지 메뉴를 100인분씩 만드는 업소용 대용량 레시피다. 커다란 냄비에 돼지고기 10kg을 한꺼번에 익혀 제육볶음을 만들고, 마요네즈를 3.4kg이나 턱 쏟아넣어 감자 ‘사라다’를 완성하는 능숙한 손놀림에는 <메가팩토리> 같은 다큐멘터리를 볼 때처럼 경이로운 중독성이 있다. 그리고, “절대 우리 팀들은 좌절하실 필요 없습니다”라는 격려에 힘입어 일주일 전 카레를 만든 뒤 처치 곤란해진 감자, 당근, 양파를 꺼내기로 했다. 곧 만들 수 있는 요리에 감자 샐러드가 추가될 것 같다. 재료를 100분의 1로 무사히 계량할 수만 있다면….

[파리] 프랑스 노장 알랑 카발리에 감독의 <살아 있기와 알기>

올해 87살인 프랑스 노장 감독 알랑 카발리에가 신작 다큐멘터리 <살아 있기와 알기>로 관객을 만났다. 감독의 전작 <파테르>는 프랑스의 국민배우 뱅상 랭동이 국무총리 역을 맡고 카발리에 자신이 공화국 대통령으로 변신, 최저임금이 아니라 최고임금을 법으로 규정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정치인 역할 놀이를 소형 DV 카메라로 촬영해 2011년 칸국제영화제 상영 시 20분간의 기립 박수를 받았다. <살아 있기와 알기>는 시나리오작가 에마뉘엘 베른하임에게 바치는 오마주다. 카발리에와 베른하임은 30년이 넘게 우정을 쌓아왔다. 베른하임은 스위스에서 ‘적극적 안락사’로 생을 마감했던 자신의 아버지 이야기를 <다 잘 끝났습니다>라는 자서전으로 발간했다. 2005년 <필름 맨> 이후 꾸준히 삶과 죽음의 경계를 탐구해온 감독은 소설가 베른하임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고 싶어 했고, 두 사람은 함께 각색 작업을 시작한다. 감독은 소설가에게 그의 장기인 ‘역할 놀이’를 제안한다. 베른하임은 그대로 아버지를 보내는 자신의 역할을 맡고, 감독은 소설가의 죽어가는 아버지 역할을 맡고 싶다는 거다. 그런데 갑자기 소설가의 건강이 악화되면서 두 사람의 역할은 완전히 뒤바뀌게 된다. 올해 칸국제영화제 비경쟁부문에서 상영된 이 작품에 대해 프랑스 언론은 “범속하면서도 깊이 있는 걸작”(<레 피쉬뒤 시네마>), “삶을 향한 전율적 찬가”(<르피가로>), “위엄 있으면서 감동적인 다큐멘터리”(<프리미어>), “부끄럽고 시적인 일기. 가슴을 아리게 한다”(문화 주간지 <텔레라마>)라고 입을 모아 극찬했다.

<기묘한 이야기>, 가장 영화로운 80년대를 복원하라

맷 더퍼에게 영향을 끼친 영화 ● <미지와의 조우>(1977)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오랫동안 만들고 싶어 했던 영화다. 2천만달러의 제작비로 3억달러 이상의 수익을 올렸다. 감독의 허락 하에 제작된 우주선 장면 등을 추가한 감독판이 존재한다. 어느 낯선 존재의 방문으로 자신의 인생이 송두리째 뒤흔들린다는 컨셉은, 더퍼 형제의 머릿속에 오랫동안 각인되어왔다고. ● <상태 개조>(1980) 켄 러셀 감독의 초기 SF영화로 일종의 ‘지킬 앤드 하이드 박사’ 모티브의 이야기다. 이 영화의 실험실 세트 장면은 더퍼 형제가 호킨스 국립연구소의 인테리어 외관을 꾸미는 데 많은 영향을 줬다. 이 영화에 영향을 준 존 C. 릴리 박사의 감각차단실험은 시즌1에서 일레븐이 데모고르곤과 맞서기 위해 사용한다. ● <이블데드>(1981) 샘 레이미 감독의 걸작 호러영화. 친구들끼리 한적한 산골 마을의 외딴집으로 여행을 떠났다가 우연히 고대의 악마 같은 존재를 건드리면서 끔찍한 참극이 벌어진다. 더퍼 형제가 10대 시절에 가장 열광했던 영화 중 한편으로 윌의 형인 조나단의 방에 포스터가 걸려 있다. 윌이 사라졌을 때 아버지가 보고는 포스터를 떼라고 윽박지르기도 했다. ● (1982)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가장 위대한 업적을 한편 꼽으라면 바로 다. 이 영화는 <기묘한 이야기>의 전체 톤을 잡아갈 때 방향키가 되어준 작품이다. 어린 주인공 삼남매가 부모와 정부 요원의 눈을 피해 미지의 존재를 지켜려 한다는 이야기. 언제 들어도 가슴 설레는 이야기다. 로스 더퍼에게 영향을 끼친 영화 ● <괴물>(1982) 존 카펜터 감독의 이 영화 포스터도 드라마 곳곳에서 등장한다. 남극 대륙 탐험대를 두고 벌어지는 기이한 이야기. 더퍼 형제가 <기묘한 이야기> 시즌3의 에피소드에서 많이 차용해서 썼고, 개가 괴물로 변하는 모습 역시 데모고르곤의 디자인에 영향을 끼쳤다. ● <에이리언>(1979) SF 호러 장르에 있어서 <에이리언>과 리플리(시고니 위버)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H. R. 기거가 디자인한 제노모프의 외형은 궁극적으로 데모고르곤의 디자인에 영향을 끼쳤다. <에이리언 2>에서 카터 버크를 연기했던 폴 라이저는 공교롭게도 시즌2의 주요 배역으로 등장한다. ● <죠스>(1975) 더퍼 형제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여름 블록버스터라는 거대한 흐름을 만들어낸 작품이다. 배우 로이 슈나이더가 연기한 경찰서장 마틴의 캐릭터가 트럭과 모자로 대표되는 호퍼 서장을 만드는 데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 <폴터가이스트>(1982)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제작한 영화 중 가장 무서운 영화일 것이다. 토브 후퍼 감독이 만들어낸 끔찍한 유령의 집은 디자인 면에서 <기묘한 이야기>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일레븐이 집중할 때 필요한 텔레비전이나 손을 뻗어 미지의 세계로 빠져드는 상징적인 제스처 등이 드라마에 쓰인다. 시즌1에서 엄마 조이스와 윌이 함께 이 영화를 보는 장면이 있다. <기묘한 이야기> 트리비아 모음 ● 스티븐 킹 스티븐 킹은 다방면에서 더퍼 형제에게 많은 영향을 준 작가다. 우선 시리즈 로고는 원래 1980년대 소설인 <쿠조>와 <크리스틴> 표지에 사용됐던 글꼴과 비슷하다. 그의 소설 중 드라마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것은 영화 <초능력 소녀의 분노>(1984)로 알려진 <파이어스타터>다. 정부의 과학 실험 대상이 되었다가 초능력이 생긴 소녀와 그를 보호하려는 아버지의 이야기. 4개의 계절을 소재로 한 소설집 <리타 헤이워드와 쇼생크 탈출>에 실린 <스탠 바이 미>는 영화 <스탠 바이 미>(1986)에 영감을 준 이야기. 그리고 <데드존> 역시 특별한 능력을 지닌 주인공, 풍부한 캐릭터 묘사, 공포에 대해 격렬히 저항하는 정서적 울림 등 더퍼 형제에게 영향을 끼친 소설이다. 그 밖에 <캐리> <샤이닝> <그것> 등도 직간접적인 영향을 끼친 소설로 꼽힌다. ● 스타코트몰 미국의 쇼핑몰 구조는 대부분 중앙홀을 중심으로 개별 상점들이 2층에 걸쳐 자리해 있다. 특정 반응, 즉 소비심리를 자극하고 멀리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는 앵커링 효과를 노리기 위한 구조라고 알려져 있다. 1956년 미네소타주 에디나에서 처음 오픈한 사우스데일몰은 1980년대에는 미국 전역에 약 3천개가 있었다고 한다. 시즌3의 스타코트몰을 실제 촬영한 그위넷 플레이스 몰은 1984년에 문을 열었던 곳. 시즌3에서는 쇼핑몰에서 정말 많은 일이 벌어질 예정인데 어쩌면 구조 자체가 중요한 복선이 될지 모른다. 조지 로메로 감독의 <새벽의 저주> 속 쇼핑몰과 숀 펜 주연의 <리치몬드 연애소동>(1982) 속 쇼핑몰의 디자인을 겹쳐놓은 것이 바로 스타코트몰이다. 아이스크림 가게 유니폼을 입고 있는 스티브의 모습에서 젊은 시절의 숀 펜이 보이는 것이 우연은 아니다. 그리고 시즌3 오프닝에서 피비 케이츠 이름이 계속 언급된다. ● 일레븐의 드레스 1980년대 당시 어린 소녀들 사이에서 대유행했던 이 폴리 플린더스(polly flinders) 드레스는 영국 동요 속 가사에서 착안해 이름을 지은 브랜드다. <기묘한 이야기>의 의상디자이너 킴벌리 애덤스는 1970년대부터 유행했던 이 드레스의 스타일을 기반으로 시즌1 당시 일레븐이 정체를 감추기 위해 입었던 드레스를 제작했다. 일반적으로 이 드레스는 가슴과 손목 부위에 탄성이 있도록 디자인됐다. 당시 거의 모든 소녀들이 이 원피스를 입고 다녔다고 하는데 친구들이 일레븐에게 씌우는 가발 역시 드레스와 매치되도록 디자인됐다고 한다. 드레스의 색상은 복숭아색과 분홍색 사이 정도로 구현했고 긴 양말로 포인트를 줬다. 일레븐이 처음 신어본 스니커즈는 컨버스에서 출시한 컨버스 올스타라는 이름의 신발이다. 1923년 미국 야구선수인 찰스 척 테일러가 신어 대중에 소개된 첫 스포츠화라고. 일레븐의 위장술(?)은 의 그것을 오마주한 것이기도 하다. 달려오던 자동차를 뒤엎던 자전거 액션 장면도 역시 의 오마주. ● 던전 앤드 드래곤 & 데모고르곤 게임 <던전 앤드 드래곤>에 등장하는 세계관 중에 어둠의 계곡(The vale of shadow)이 있다. 이 다른 차원의 공간은 현실 세계의 어두운 반향 혹은 메아리라고 알려져 있다. 부패와 죽음의 장소이기도 한 이곳은 엇갈린 차원이자 괴물들의 거처다. 인간의 곁에 있지만 인간이 볼 수 없는 곳이라고. ‘뒤집힌 세계’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 바로 <던전 앤드 드래곤>이다. 실제로 주인공들이 이 게임을 거의 매일 한다. 거기 등장하는 데모고르곤은 두개의 머리를 가진 악마로, 파워 면에서 최강으로 꼽히는 악마다. 더퍼 형제는 인공 보철을 착용한 배우가 거대한 탈을 뒤집어쓰고 연기하도록 했다. 발포 고무 형태의 재질로 제작된 데모고르곤 모형은 더퍼 형제에 따르면, “어릴 때 수업 시간에 낙서하면서 그리던 바로 그 디자인”을 살린 것이라고.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언브레이커블

가족이나 연애에 대해 말할 때 우리의 시야는 물기로 흐려지기 십상이다. 그러나 아스가르 파르하디 감독의 눈은 통속의 디테일을 그릴 때 누구보다 명철하다. 스페인으로 무대를 옮긴 신작 <누구나 아는 비밀>에서도 감독의 장기는 그대로다. 친척의 결혼식날 일어난 한 소녀의 납치 사건은, 관련된 여러 가족의 내력을 들쑤시고 구성원들을 시험에 들게 한다. 파르하디 감독의 치밀한 서사는 범죄물의 그것이지만, 하나의 사건이 해결된 것처럼 보이는 순간 둘 이상의 폐허를 남긴다는 점에서 영락없는 멜로드라마다. 07/18 비일상적 사건이 일어날 가능성이 낮은 보통 사람들의 일터는 극영화보다 텔레비전이 즐겨 찾는 영역이다. TV 엔터테인먼트가 직장을 그릴 때 즐겨 쓰는 장르는 시트콤이다. 다수 인물이 반복적 루틴 속에서 소소한 희로애락을 겪고 관계를 발전시키는 서사를 담는 데에 적합하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노동은 딱히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반면 영화는 노동 자체를 주제로 삼을 경우 비판적 접근법을 택하는 경향이 있다. 다수의 다큐멘터리영화는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에 포함된 비인간화와 소외의 과정을 폭로했고, 극영화들도 경제 시스템에 편입되지 않은 히피, 실업자, 홈리스 같은 캐릭터를 통해 아웃사이더적 시선으로 노동을 조명해왔다. 그런데 <그녀들을 도와줘>의 앤드루 부잘스키 감독은 제3의 길을 간다. 숙련된 인간 행위의 아름다움, 노동이 주는 성취감을 주시하는 동시에, 아무리 일해도 부와 존중을 얻기 힘든 열악한 조건을 드러낸다. 최근에 비슷한 궤적을 보이는 감독으로는 <스탈렛>(2014), <탠저린>(2015), <플로리다 프로젝트>(2017)의 숀 베이커가 있다. <그녀들을 도와줘>에서 앤드루 부잘스키 감독을 인도하는 길잡이는, 텍사스의 식당 지배인 리사(레지나 홀)다. 카메라는 원인 모를 눈물을 훔치며 주차하는 아침 출근길부터 24시간 남짓 리사의 일과를 뒤따른다. 그의 직장 ‘더블 웨미’(Double Whammy)는 여성 종업원의 섹스어필을 상품성으로 내세우는 일명 ‘브레스토랑’(breastaurant)이다. 몸매를 노출한 유니폼을 입은 젊은 여성이 서빙을 하며 고객을 상대하는 식당이다. 미국의 실존 프랜차이즈 ‘후터스’와 비슷한 컨셉이되, ‘더블 웨미’는 업장이 하나뿐인 자영업자의 가게다(위키피디아에 의하면 후터스의 직원 가이드북에는 “고객에게 미국적인(All American) 치어리더, 서퍼, 옆집 아가씨의 이미지를 제공한다”고 명시돼 있으며, 채용된 여성 직원들은 이 식당이 성적 어필에 기초하고 있으며 농담과 즐거움을 위한 대화가 노동환경의 일부임을 인지한다는 서류에 서명한다고 한다). 요컨대 ‘더블웨미’는 여성의 성적 대상화에 기대어 이익을 창출하는 사업장이다. 하지만 바로 그 이유로 여성 노동자들은 동료 이상의 결속을 맺는다. 성 상품화를 아예 전제로 한 직장에 다니는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은, 궁극적으로 아무도 그들을 보호해주지 않음을 알기에 오직 서로에게 의지한다. 영화의 제목 역시 리사가 어려운 직원을 돕기 위해 사장 몰래 여는 세차 이벤트의 구호 “아가씨들을 도와주세요”(Support the Girls)에서 나왔다. 중간 관리자인 리사는 ‘더블 웨미’의 진정한 주인이다. 소유주는 백인 남성 사장이지만, 이곳에서 일하는 스탭과 고객을 속속들이 알고 돌보고, 시스템을 운영하는 이는 리사다. 스스로도 고용주의 변덕으로 언제 해고될지 모르는 처지이면서도 리사는 직원과 손님이 안전하고 행복한지 헌신적으로 살핀다. 리사의 분주한 하루는 신입 종업원 지망생들에게 긍지를 불어넣고 밤새 침입한 도둑을 경찰에 넘기는 업무로 시작한다. 절도와 관련된 내부자를 최대한 관대하게 정리하고 나면, 베이비시터를 구하지 못한 웨이트리스가 어린 아들을 데리고 출근하고, 여성 동료들은 자연스레 다함께 아이를 돌본다. 하필 큰 경기가 있는 날 TV 케이블이 고장나고 음향 시스템을 빌릴 일도 생긴다. 이 와중에 종업원을 모욕하는 손님이 나타나자 리사는 무관용 원칙으로 경찰과 협력해 동료를 보호한다. 앤드루 부잘스키 감독은 홀과 주방, 로커룸을 한달음에 드나들며 상황에 따라 매너를 바꾸는 리사와 동료들의 움직임을, 티나지 않지만 공들인 블로킹으로 따라잡으며 이들의 일상에 내포된 리듬을 표현한다. 리사의 일과는 이를테면 폭설 속에서 계속되는 제설 작업과 비슷하다. 끊임없이 치워야 할 장애물이 쌓인다. 그러나 삶은 참으로 배은망덕하다. 남편은 리사의 안간힘에도 불구하고 가정을 떠나려 하고, 옹졸한 사장은 리사가 직원들의 개인적 곤경까지 배려하는 것이 못마땅하다. 07/19 <그녀들을 도와줘>의 최대 역설은, 유능하고 선량한 리사가 더 오래, 더 열심히 일할수록 사장이 돈을 벌고 성 상품화는 지속되는 반면, 그곳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들이 겪는 빈곤과 성차별은 개선될 가망이 없다는 사실이다. 부잘스키 감독은 이 암담한 팩트를 소리내지 않고 명시한다. 그렇다면 리사의 긍지와 원칙은 무의미할까? 사회학도라면 그렇다고 말하겠지만, 영화는 다르게 답할 수 있다. 직장이 객관적으로 얼마나 척박한 조건의 노동현장이건, 자기가 관할하는 동료들이 최소한의 품위를 지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리사는 숭고한 인물이다. 명예와 책임을 매일 지키는 현대의 성인(聖人)이다. 이 작은 체구의 슈퍼히어로가 품은 목표는 세계를 구하는 것 따위가 아니다. 실제 가족으로부터 아무런 ‘서포트’를 기대할 수 없는 동료들에게 리사는 가족 엇비슷한 울타리를 주고자 한다. 막 사회에 진출한 20대 초반의 여성들이 자존감을 잃지 않도록 “여기는 스트립 클럽이 아니다. 고객이 선을 넘으면 내가 지켜줄 것이다”라고 단단한 말투로 긍지를 불어넣는다. 리사와 동료들은 선봉에 서서 유리천장을 깬 엘리트 슈퍼우먼이 아니다. 시간과 감정 때로는 육체의 이미지를 팔며 생계를 지탱하는, 대부분의 여성 노동자와 같은 조건에 처한 인물들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노동에서 얻는 것이 임금만은 아니다. 일은 그들에게 임금뿐 아니라 웃음과 우정, 인간임을 확인하는 보람이다. 바쁜 일과 중 벽에 부딪힐 때마다 리사는 식당 뒷문으로 나와 하늘을 올려다본다. “도로의 자동차 소음도 이제 눈을 감으면 파도소리 같아”라는 리사의 말은 일터 밖에서 따로 낙원을 찾지 않는다는 의미로도 들린다. <그녀들을 도와줘>는 “노동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묻고, 그 의미를 실현하는 데에 방해가 되는 사회적 조건을 조용히 적시한다. 이쯤해서 떠오르는 <그녀들을 도와줘>의 엉뚱한 남매 영화는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매직 마이크>(2012)다. 댄스 뮤지컬의 속성이 강하지만 <매직 마이크>는 남성 스트리퍼들을 통해 남부 미국의 저임금 노동계급의 현실을 드러내는 영화이기도 했다. 퍼포먼스의 성격을 띠는 노동으로 육체적 매력을 파는 불안정한 일자리라는 점도 유사하다. 춤추는 청년들은 <그녀들을 도와줘>의 여성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스트립쇼가 일시적 직업이라고 여기면서도 무대 위에서 자긍심을 느끼고 무대 뒤에서 유사 가족을 이룬다. 사람들은 창의적 일과 단순노동을 쉽게 구분하지만 모든 노동은 유의미하고 의미있어야 한다. 나와 남에게 영향을 주어 변화를 일으키고 세계를 움직여 흔적을 남기는 한. 좋아요 조나 힐 <돈 워리>는 20년 전 로빈 윌리엄스가 카툰 작가 존 캘러핸의 자서전 영화 판권을 사면서 시작된 프로젝트다. 초기부터 함께 시나리오를 개발한 구스 반 산트 감독은, 윌리엄스가 타계한 후 호아킨 피닉스를 캘러핸 역에 캐스팅해 젊은 시절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재구성했다. 더불어 캘러핸의 알코올중독 극복 과정에 무게가 실리고 중독 치유 모임의 스폰서였던 도니(조나 힐)의 비중이 커졌다. 도니는 우리가 익히 아는 조나 힐의 철없는 캐릭터들과 사뭇 다르다. 중독과의 치열한 싸움을 통해 성숙한 인물이자, 지병으로 인해 내일이 없는 사람만의 쓸쓸한 냉철함도 갖고 있다. 부유하고 우아한 취향을 소유한 캐릭터인 도니는 블론드 장발에 실크와 캐시미어를 걸친다. 조나 힐에게 매우 생경한 의상과 분장이지만 묵직한 연기의 힘으로 웃음이 터지는 일은 없다. 조나 힐은 <돈 워리>의 현장을 경험한 직후 감독 데뷔작 <미드 90>을 연출해 호평받기도 했다.

잉여들의 미학, <패터슨> <데드 돈 다이> 짐 자무쉬의 대표작 7

인디 영화의 대부 짐 자무쉬가 신작 <데드 돈 다이>를 들고 왔다. 무려 좀비 영화다. 짐 자무쉬와 좀비 영화라는 조합 만으로도 남다른 기대를 걸게 되는 <데드 돈 다이>. <패터슨>의 인기로 자무쉬의 팬들이 소폭 늘긴 했지만, 아직 그의 영화 리듬이 낯선 관객들을 위해 소개한다. 짐 자무쉬의 대표작 일곱 편을 정리했다. 천국보다 낯선, 1984 “이봐 이거 웃기잖아. 우린 여기 처음인데 다 똑같은 거 같아.”-<천국보다 낯선> 중에서 찰리 파커를 숭배하는 젊은 청년이 인생의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이야기 <영원한 휴가>로 새로운 인디 영화의 흐름을 개척한 짐 자무쉬. 그는 다음 작품인 <천국보다 낯선>을 통해 느림의 미학, 잉여의 이미지와 같은 특유의 리듬으로 자신만의 영화 세계를 구축했다. 영화는 세 가지 단편적인 에피소드인 '신세계', '1년 후', '천국'으로 전개된다. 자무쉬의 페르소나가 된 존 루리를 포함, 에스터 벌린트, 리차드 에드슨 세 청년 세대가 무료한 여행을 떠난다. 새로운 감각을 향해 떠난 이들이지만 여기도 저기도 똑같이 익숙하다는 결론에 이르고 마는, 작가 짐 자무쉬의 주된 정서이기도 한 덧없음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다운 바이 로, 1986 “슬프고도 아름다운 세상이야.”-<다운 바이 로> 중에서 자무쉬가 사랑한 뮤지션 톰 웨이츠, 페르소나 존 루리, 이탈리아 배우 로베르토 베니니가 모여 독특한 조합을 이룬다. <다운 바이 로>는 각자 희한한 이유로 감옥에 갇히게 된 세 사람이 점차 감방 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하다가 탈옥을 감행하게 되는 내용이다. 극적인 전개에 아주 잘 어울릴만한 '탈옥'이라는 소재를, <다운 바이 로>는 너무나 짐 자무쉬 다운 건조한 톤으로 풀어낸다. 어떻게 보면 이 영화는 탈옥 영화라기보다, 방랑 영화에 가깝다. 말 수가 적은 톰 웨이츠와 존 루리 사이에서 홀로 수다쟁이로 활약하는 로베르토 베니니의 연기가 소소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데드 맨, 1995 “내 시를 알아요?”-<데드 맨> 중에서 짐 자무쉬의 여섯 번째 장편영화 <데드 맨>. 서부극의 장르를 취했지만 전통적인 서부극의 구조를 따라갈 생각은 (당연히) 없는 영화다. 조니 뎁의 연기로 탄생한 인물 윌리엄 블레이크는 서부의 한마을에 회계사로 고용돼 기차에 오른다. 그러나 도착한 뒤엔 자신의 자리가 빼앗겼음을 알게 되고, 갈 곳이 없어진 윌리엄은 마을을 배회한다. 느린 템포로 유유자적하던 이야기는 죽을 뻔했던 윌리엄을 주술로 살려내는 인디언 노바디의 일화와 킬러들의 추격전이 더해지며 잔재미를 더한다. 짐 자무쉬는 웨스턴 장르에서 인디언과 백인이 야만과 문명으로 대비되던 것을 비틀어 문명에 냉소를 보낸다. 물질적인 것보다 정신적인 것에 관심을 가지는 자무쉬의 철학이 돋보이는 매력적인 서부극이다. 커피와 담배, 2003 “금연의 장점이 뭔지 아나? 이제 끊었으니까 한 대쯤은 괜찮다는 거야.” -<커피와 담배> 중에서 짐 자무쉬의 대표작 가운데서도 <커피와 담배>는 그의 시그니처 같은 작품이다. 거창한 것들에 의미를 두지 않고, 커피나 담배 같은 우리의 일상에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사물들에 애정을 가지는 자무쉬의 관심사를 제대로 펼쳐 보인다. 영화는 11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고, 커피를 마시며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의 무료한 대화를 조명한다. 대단한 이야기가 발생하지 않더라도 가장 우리의 일반적인 인생들과 맞닿은 영화라 볼 수 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커피잔과 담뱃갑을 내려다 본 프레임 하나하나까지 무심하지만 감각적으로 촬영됐다. 이른바 짐 자무쉬 사단으로 불리는 배우들이 <커피와 담배>에 대거 등장한다. 빌 머레이, 톰 웨이츠, 스티브 부세미, 로베르토 베니니 등의 배우들을 포함해 케이트 블란쳇과 이기 팝 등 스타 배우의 출연이 눈길을 끈다. 브로큰 플라워, 2005 “과거는 지났고, 미래는 아직 오지도 않았어. 우리한테 남은 건 모두 현재고 내가 말해줄 건 이것 밖에 없어.”-<브로큰 플라워> 중에서 자무쉬 영화의 단골손님 빌 머레이는 <브로큰 플라워>를 통해 단독 주연으로 나선다. 매일 무감각한 표정으로 텔레비전을 응시하고 있는 독신남 돈(빌 머레이). 그는 자신에게 19살 난 아들이 있다는 익명의 편지를 받고 과거의 연인들을 찾아 나선다. 결론부터 말할 것 같으면 그는 아들을 만났다고 할 수도 없고, 과거에 만난 많은 여성들 중 누가 편지를 보냈는지를 확정할 수도 없다. 그러나 짐 자무쉬의 스타일을 대강 알 만한 사람이라면, 정답이 중요한 영화가 아님을 알 것이다. 과거의 연인을 차례로 만나 벌어지는 소소한 일화들, 빌 머레이의 무감각한 얼굴에 얼핏 비치는 작은 상념들. 그 점이 바로 <브로큰 플라워>를 감상하는 묘미다.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 2013 “서로 우주 반대편에 떨어져 있어도 통한다는 거야. 한쪽에서 변화가 생기면 다른 쪽도 그 영향을 피할 수 없는 거지.”-<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 중에서 자무쉬가 새로운 장르에 손을 댔다.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는 뱀파이어 장르이지만, '자무쉬의 뱀파이어물'이라는 점에서 흥미를 돋운다. 영화엔 예술과 문화를 사랑하는 짐 자무쉬의 예찬이 곳곳에 숨어있다. 수 세기를 죽지 않고 살아온 뱀파이어 커플 아담과 이브를 주인공으로 수 세기에 걸친 예술과 문화의 변화에 절망적 시선을 더한다. 본능과의 필연적인 싸움을 하는 뱀파이어라는 설정에 자무쉬스러운 유머가 섞여 빚어진 독특한 무드가 일품. 이브를 연기한 틸다 스윈튼, 아담 역의 톰 히들스턴을 비롯해 미아 와시코브스카와 안톤 옐친 등 개성 넘치는 할리우드 배우들의 호연까지 눈을 즐겁게 한다. 패터슨, 2016 “때론 빈 페이지가 가장 많은 가능성을 선사하죠.”-<패터슨> 중에서 아마도 <패터슨>으로 국내 짐 자무쉬의 팬이 꽤 늘지 않았나 싶다. 국내 관객 6만 7천여 명을 동원했는데, 그의 영화 중 최고 기록이다. 영화감독이 되기 전 시인을 꿈꿨던 짐 자무쉬가 만들어 낸 한 편의 시와 같은 영화 <패터슨>. 시의 핵심이라고 칭해지는 운율이 정말로 영화에서 느껴진다. 뉴저지 주의 소도시 패터슨에 살고 있는 버스 운전사 패터슨(아담 드라이버)의 매일 똑같지만 조금 다른 일상을 일주일 패턴으로 보여준다. 영화 곳곳에 산재한 운율과 패턴을 찾는 재미가 쏠쏠하다. 우리 삶의 많은 이야기들은 짐 자무쉬의 <패터슨>처럼 비슷한 나날들의 연속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점이 이 영화 속에선 되레 소소한 일상에 대한 예찬이 된다.

<그녀들을 도와줘>, 앤드루 부잘스키의 무질서한 운동

리사(레지나 홀)는 너무 많은 것을 보고 듣는다. 앤드루 부잘스키의 <그녀들을 도와줘>에서 특별히 강조되는 것은 리사의 눈과 귀에 들어오는 화면 안팎의 물질성이다. 그것들은 끊임없이 걸음을 옮기며 바깥의 변화를 예민하게 수용하는 리사의 신체적 반응을 빌려 프레임 내부로 침입해 들어온다. 영화의 도입부는 이런 성질을 선제적으로 제시한다. 리사는 혼자 눈물을 닦고 있는데, 그 행위는 제대로 완수되지 못한 채 밖에서 창문을 두드리는 메이시(헤일리 루 리처드슨)의 등장으로 중단되고 만다. 이는 징후적인 신호였다. 금고를 노린 침입자의 소리가 들려오고, 신입 직원들과 온갖 손님들이 찾아오면서 영화는 ‘더블 웨머’라는 이름의 작은 스포츠바가 얼마나 많은 것을 지탱하고 있는지, 그러면서 얼마나 다종적인 질료들이 관계를 이루고 모순을 만들어내는지를 폭로하며 그것이 부서지는 과정을 해부학적으로 관측한다. <그녀들을 도와줘>의 모럴은 영화의 근간을 이루는 요소들로 단일한 논리의 시공간을 구성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역설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이를테면 이 영화에는 이상할 정도로 시간 흐름이 감지되지 않는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영화는 의도적으로 맑게 갠 백주의 풍경만을 화면에 담아내고 있다. 저녁과 밤의 광경은 어느 장면에서도 등장하지 않는다. 어둠이 찾아오면 카메라는 오직 실내 전경을 비출 뿐이다. 기묘하게 밝음을 유지하는 무시간적인 세계에서(여기서 부잘스키의 전작 <컴퓨터 체스>(2013)의 엔딩에서 태양을 비추는 화면을 검은 얼룩으로 뭉개버린 광학적 시도가 이런 기이한 밝음에 대한 저항임을 파악할 수 있다) 리사는 텔레비전과 스마트폰의 영상, 직원과 고객 또는 가족과 동료의 관계, 경찰의 협조와 범죄의 행태 사이를 가로지른다. 형태를 이루는 요소를 하나씩 떼어내거나 추가하면서 또 다른 형태로 이탈하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이처럼 부잘스키는 제한된 시공간 안에 공존 불가능한 배치의 방법들을 산출해내는 것으로 픽션을 작동시키고 있다. 부잘스키는 '더블 웨미'를 세계 안의 또 다른 세계로 형성한다. 이곳은 구성원들의 내재적인 규칙이 기계의 무심한 운동처럼 가혹한 방식으로 적용되는 공간이면서 불법적인 공모가 이루어지는 무대이기도 하다. 수많은 텔레비전 모니터로 가득한 이 공간의 전경은 “영화가 세계의 도시라면, 텔레비전은 폐쇄된 마을을 구성한다”고 지적한 세르주 다네의 견해를 환기시킨다. 서로를 바라보지 않는 세계. 단지 공통의 영역을 향해 시선을 던지는 것이 전부인 무대. 이곳은 영화의 역량이 부재한 채로 텔레비전의 기능으로만 작동하는 세계다. 대신 부잘스키는 영화 없는 세계의 주변부에서 작동하는 영화의 기능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더듬어본다. 카메라는 식당 내부와 외부를 쉼 없이 가로지르는 리사의 동선을 집요하게 좇으며 매 순간 다른 문제들이 프레임 안으로 침투하고 시시각각으로 변모하는 세계의 외양을 담아낸다. 내러티브의 리듬은 조금씩 변수를 맞이하면서 픽션에 다공적인 구멍을 구축하는 것이다. 질서가 카오스로 이행하는 과정, 경계의 붕괴를 발견하면서 <그녀들을 도와줘>는 영화라는 무질서의 운동을 지속시킨다. 루이스 브뉘엘의 <절멸의 천사>(1962)에서 부르주아 집단은 비가시적인 원리로 인해 바깥으로의 움직임을 차단당하지만, <그녀들을 도와줘>의 노동자들은 자유롭게 식당에 들어오고 나간다. 문제는 현대의 노동계급에 주어진 그 자유의 환영이다. 스포츠바에서 동등한 노동자로 마주하지 않는다면 그녀들은 집단으로 호명될 수 없다. 그곳을 벗어나자마자 이들의 ‘자매애’를 흔드는 여러 층위의 계급적 긴장이 침입해 오는 건 그래서다. 리사는 바의 사장 커비(제임스 르그로스)와 동행하면서 인종주의와 성차별을 비롯한 각종 폭력과 격차를 체감한다. 결정적인 배반은 모든 공모의 목적이었던 샤이나(제나 크레이머)가 새삼스럽게도 폭력적인 남자친구와의 동행을 선택하는 순간에 찾아온다. 이 순간에 리사는 ‘더블 웨미’의 불공정한 구조가 그들을 집단으로 구성하는 유일한 구조라는 아이러니와 대면한다. 리사는 ‘더블 웨머’의 제도 안에 머무는 것을 중단하고 비참과 불확실의 외부로 이동한다. 이 선택을 낭만적인 탈출로 이해할 순 없다. 영화의 마지막에 그녀는 다시 생계를 위한 면접에 뛰어들고 있다(마찬가지로 이 선택을 순응의 증거로 받아들여선 안 된다). 중요한 것은 중단과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다른 곳, 바깥으로의 이행을 지속했다는 점이다. 멈추지 않는 걸음, 이탈의 움직임. 픽션에 구멍을 만들어내는 건 이런 지향성이다. 절망한 모습으로 식탁에 앉아 움직임을 멈춘 리사의 상반신이 근사한 자세로 면접장의 테이블에 되돌아오는 것은 영화의 일탈적 궤적이 만들어낸 도약이다. 그러니 연대가 성립되지 않음이 폭로된 자리에서 역설적으로 그들은 연대의 방법론을 공유할 수 있는 것이다. 가령 리사를 대신해 바의 매니저 역할을 맡은 대니얼(샤이나 맥헤일)에게도 많은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성희롱을 일삼는 남성 고객들의 말과 시선, 지저분하게 음식을 먹는 입과 맥주를 쏟고 지나치는 손짓이 그녀의 공감각적 영역 안으로 진입한다. 이렇게 보면 <그녀들을 도와줘>에서 여성 노동자들의 연대가 실패에 이르는 까닭은 리사가 보고 듣는 것을 다른 사람들은 정확히 인지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대니얼은 처음으로 이 공간을 구성하는 너저분한 몸짓들을 시점숏으로 포착하면서 지금은 눈에 보이지 않는 리사가 겪은 감각에 근접한다. 이 불가능한 접속을 지나치고 난 뒤에야 바의 노동자들은 질서를 깨트리는 몸짓으로 텔레비전을 끄고 테이블 위로 올라선다. 면접장에서 놀랍게도 재회한 리사, 메이시, 대니얼은 건물 옥상으로 향한다. 백색으로 칠해진 옥상은 구체적인 시각적 정보나 지표가 완벽히 사라진 기이한 이미지의 공간이다. 어둠도, 그림자도 보이지 않아 거의 추상적인 사막의 형상으로 다가오는 한낮의 밝음에 그들은 무엇으로 대응할 수 있을까. 그들이 지르는 비명은 하층계급의 손상된 목소리와 몸짓을 가시화하지만 그 퍼포먼스는 가혹하게 생략되고 만다. 세 인물이 한데 모였지만, 그들이 향한 곳은 결국 비좁은 섬에 다름아니다. 이곳에서 리사는 무심하게 흘러가는 하늘을 바라본다. 너무 많은 것을 보았던 리사, 그리고 카메라는 픽션에 균열을 일으키지 못하는 시선의 무기력에 마침내 도달한다. <그녀들을 도와줘>가 모든 것이 변모하고 변주되는 영화적 여정이라면, 이 마지막에선 세계를 향한 어떤 변형도 허용되지 않는다. 이곳에서 비명과 외침은 가능하지만 지속을 상상할 수는 없다. 고속도로 반대편에서 우리가 다시 가족이 될순 없겠냐는 메이시의 제안에 리사가 심드렁하게 반응하는 까닭도 이와 같다. 변화를 일으키는 건 이미지가 아니라 크레딧이 모두 지나고 난 뒤에야 들려오는, 누군가를 깨우는 듯한 남성의 목소리이다. 여전히 잠들어 있는 자는 누구인가? 세 여성이 재회하는 마지막 시퀀스는 어쩐지 지나치게 매끄러운 꿈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것은 흑인의 몽상이자, 여성 노동자들의 백일몽인가? 영화의 마지막은 불가능한 시공간의 감각을 재생한다. 온 힘을 다해 비명을 지르는데도, 이곳은 어느 공간보다 폐쇄적이고 고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