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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검색결과

기사/뉴스(9404)

코폴라감독 구하기 - 칸 의 22년 애정

<대부>로 너무도 잘 알려진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62) 감독은 칸과 인연이 깊다. 지난 9일 개막한 제54회 칸영화제는 79년 <양철북>과 함께 황금종려상을 공동수상한 코폴라 감독의 <지옥의 묵시록> '디렉터스 컷'(감독 편집본)을 특별상영하는 행사를 11일 열었다. 코폴라는 이 편집에 무려 6개월의 시간을 들였고, 개봉당시 상영시간 153분에서 53분이 더 늘어났다. 코폴라 감독은 "역사적 관점을 더욱 분명히 해 주제를 보다 명료하게 하면서도 복잡다단하게 만들었다"며 "당시 아주 혹평을 받았던 결말은 이번에도 그대로 남겨 두었는데, 이번 판본에선 그 결말이 제대로 기능을 수행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또 "프랑스의 플랜테이션 농장운영 장면을 새롭게 넣어 50년대 프랑스에서 있었던 식민지 정책에 대한 항의와 베트남전에 대한 미국 내부의 반대운동을 동시에 보여줄 수 있는 효과를 낼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칸은 코폴라의 아들인 로만 코폴라의 감독 데뷔작 <시큐>를 '주목할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해 이들 집안에 겹경사를 안겨주었다. 79년 이 영화가 칸영화제에서 수상했을 때도 코폴라 감독에게는 구원의 의미가 있었다. "당시에 이 영화가 볼 수도 없고 쓸모도 없는 재난이 될 거라는 소문이 파다했고, 미국 언론들은 끊임없이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런 조건에서 영화를 만드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고, 나의 유일한 대답은 영화를 완성해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촬영이 끝나기도 전에 칸으로부터 초청을 받았다. 칸이 나를 구했다." 68년 '진보' 물결 대응 못해 영화제 못 열려 칸은 자칫 지옥 속으로 떨어질 뻔했던 <지옥의 묵시록>을 살려냈지만 반대의 경우도 많았다. 독립성과 특유의 자존심을 지키며 세계 최고 권위의 영화제가 되기까지 칸의 뒤켠에는 예기치 않았던 일화들이 몇가지 더 있다. 1954년 할리우드 스타 로버트 미첨과 미국 여배우 시몬 실바가 칸 해변에서 찍은 한 장의 사진은 뜻하지 않은 스캔들을 일으켰다. 실바가 토플리스 차림이었던 것이다. 손으로 가려 가슴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도 아니었지만 영화제는 실바에게 칸을 떠날 것을 요구했다. 미국으로 돌아온 실바는 곧 할리우드의 윤리위원회에 회부됐고 일자리를 사실상 박탈당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배우는 자살했다. 1962년 이탈리아 영화의 거장 페데리코 펠리니, 루키노 비스콘티, 비토리오 데 시카, 모니첼리 등 4명의 감독이 각각 만든 단편을 모은 <보카치오 70>가 영화제의 초청을 받았다. 하지만 조직위는 영화가 너무 길다고 생각했고, 모니첼리의 작품을 삭제해버렸다. 이에 로셀리니는 물론이고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등이 항의의 뜻으로 칸 방문을 취소했고, 일부 심사위원이 사임하기도 했다. 1968년 5월 학생혁명의 열기는 칸을 비켜가지 않았다. 영화제가 열릴 즈음, 프랑스 누벨바그를 이끈 프랑수아 트뤼포와 장 뤽 고다르를 선두로 수많은 청년영화인들이 영화제 본부 앞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기존 제도와 관습에 반기를 든 정치적 진보의 바람이 안이한 영화제 운영에 역풍을 일으킨 것이다. 로만 폴란스키 등 상당수 심사위원들이 이에 동조해 심사위원직을 사임했고, 개막작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상영이 `물리적 방해'로 좌절됐다. 결국 이 해의 영화제는 열리지 못했다. 칸/이성욱 기자 lewook@hani.co.kr

칸 영화제 출품한 미 코언형제

작가주의와 대중성을 동시에 지닌 미국 독립영화의 대가 코언 형제가 13일 칸영화제 경쟁에 오른 <거기에 없는 남자>를 선보이고 기자회견을 가졌다. 코언 형제는 지난 91년 <바톤핑크>로 칸영화제 대상을 받은 이래 재기발랄하면서도 신랄한 풍자가 넘쳐나는 화제작을 끊임없이 만들어왔다. 전작 <오 형제여 어디로 가는가>에서 다소 실망스런 모습을 보였지만 <…남자>에서 데뷔 초기의 누아르 장르로 돌아가 특유의 재능을 뿜어냈다. 40년대말 조그만 도시의 이발사로 일하는 에드(빌리 밥 손튼)가 무미건조한 삶에 질려있다가 아내(프랜시스 맥도먼드)의 불륜을 이용해 인생의 반전을 꾀하는 음모를 꾸미면서 일이 복잡하게 꼬여간다. 범죄와 욕망으로 얼룩진 누아르 장르의 재미에 일상의 복잡미묘한 풍경을 덧붙였다. 왜 흑백으로 찍었느냐는 질문에 “뭔가 있어 보이려고”라고 툭 내던져 웃음을 자아낸 조엘 코언은 늘 그렇듯 시큰둥한 표정으로 작품 배경을 설명했다. “소설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를 쓴 제임스 M. 케인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었다. 그의 작품은 범죄를 다룬 하드보일드 소설이면서도 식당주인, 은행원 등 소시민의 삶의 이면을 잘 담아낸다.” “자신을 작가라고 생각하느냐”는 물음에 “나에게 딱 맞는 말 아니냐”며 또 한번 웃음을 선사하고는 “나에게 영화는 오래 전부터 함께 일해온 배우, 기술진과의 협력의 결과이며, 이게 작가라고 여겨주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동생 에단은 “실존의 불안감을 넣지 않았으면 다들 상업적이기만한 누아르 영화로 받아들이지 않았겠느냐”고 반문하고는 “영화 자체를 너무 심각하고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말아달라”고 주문했다. 누아르의 고전적인 스타 험프리 보가트를 떠올리게 한 빌리 밥 손튼은 “흑백으로 찍어 삶의 사실성을 얻을 수 있었다”며 “영화에서 끊임없이 담배를 피워대야 하는 바람에 촬영이 끝나고 자연스럽게 담배를 끊게 됐다”고 말했다. 코언 형제의 <파고>에서 아카데미 여자배우주연상을 받았던 프랜시스 맥도먼드는 “가족(남편이 조엘 코언)과의 작업은 의외로 실용적”이라고 말했고, 조엘은 “이번에도 시나리오를 쓰면서부터 아내의 배역을 염두에 뒀다”고 밝혔다. 칸/글, 사진 이성욱 기자lewook@hani.co.kr

`꼬레` 바람, 파리에서도

<섬>에 이어 <인정사정…> 개봉, 관객동원여부 관심 지난 4월25일 김기덕 감독의 <섬>이 파리에서 개봉된 데 이어 이명세 감독의 <인정사정 볼 것 없다>가 한주 뒤인 5월2일 개봉됐다. 두 영화는 파리중심에 자리한 MK2와 UGC 같은 멀티플렉스를 포함해 4개관에서 각각 상영되고 있다. 이제까지 프랑스에 개봉된 한국영화는 <춘향뎐>을 포함해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인데, 이처럼 동시에 2편의 영화가 개봉된 데서 2∼3년 전부터 본격화된 한국영화 소개작업을 통해 이제 일정 정도의 잠재관객층이 형성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섬>의 경우 지난해 베니스영화제 화제작이었다는 점과 판타지와 에로티시즘 속에서 시적인 아름다움을 끌어낸 점이,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경우 지난해 도빌 판아시아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포함해 주요 부문 4개상을 휩쓴 점이 우선 언론의 관심을 끈 것으로 보인다. 주요 언론들은 대체로 한국영화가 소수의 작가영화와 헐리우드영화를 한국화시킨 상업영화로 나뉘고 있다는 인식아래 두 영화에 달리 접근하고 있다. <섬>의 경우 작가영화의 잣대로 영화 속의 독특한 표현들을 찾아 감독의 강박적인 주제들을 유추해내는 평이 주였다면, <인정사정 볼 것 없다>는 최근의 성공적인 한국상업영화라는 전제 아래 오우삼 영화부터 만화영화에 이르는 기존장르에서 차용된 기법을 들거나, 액션영화라는 장르영화기준으로 타영화와 비교해 완성도를 가늠하는 평들이 대부분이었다. <섬>은 대체로 호평을 얻었다. 특히 <르몽드>는 ‘낚싯바늘에 걸린 사랑-두 연인의 침묵의 발레, 관능과 격정의 시’라는 제목의 평에서 “실제 공간을 사용하면서도 그것을 추상화시켜내는 낯선 느낌의 공간구성”을 주목하며, “김기덕 감독은 두 주인공들이 서로 지켜보다 다가서고, 고통이 가미돼 더 자극적인 쾌락 속에서 서로를 소유해가는 과정을 담은 침묵의 발레를 그려냈다”고 찬사를 보냈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경우 영화 스타일의 역사를 꿰고 있는 이명세 감독의 화두인 ‘오늘날 한국에서 어떻게 장르영화를 새롭게 찍을 것인가’에 대한 또 하나의 답이라는 긍정적인 평과 오우삼 감독의 정교함이나 서정적인 힘에 도달하기엔 아직 거리가 있다는 비판이 엇갈렸다. 파리=성지혜 통신원

<웨어 더 머니 이즈>

■ STORY 캐롤(린다 피오렌티노)은 양로원의 간호사로 일한다. 한때는 고교 졸업파티의 여왕으로 뽑힐 만큼 잘 나갔지만, 지금껏 오리건주를 벗어나보지도 못한 채 노인들의 뒤치다꺼리로 바쁜 일상에 지쳐 있다. 그런 캐롤의 양로원에 유명한 은행강도였으나 전신이 마비된 노인 죄수 헨리(폴 뉴먼)가 실려온다. 헨리의 간호를 맡게 된 캐롤은, 그가 감옥에서 나오기 위해 전신마비를 가장하고 있음을 알아챈다. 하지만 캐롤은 헨리의 속임수를 밝히는 대신 오히려 다시 은행을 털자고 제안한다. 처음엔 코웃음치던 헨리도, 전 파트너에게 맡겨둔 돈을 찾는 데 실패한 뒤 캐롤, 그녀의 남편 웨인(덜모트 멀로니)과 현금 수송 차량을 털기로 한다. ■ Review<내일을 향해 쏴라>의 부치 캐시디가 칠순 노인이 됐다면, 과연 어땠을까. 더구나 은행을 털다가 정전으로 금고에 갇히는 바람에 감옥 신세를 지고 있다면 말이다. <웨어 더 머니 이즈>의 헨리는 ‘노년의 부치’에 다름 아니다. 전설적인 은행강도였던 그는 감옥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신마비를 ‘연기’하고, 양로원으로 이송된다. 그리고 선댄스 키드처럼 ‘행동파’ 간호사 캐롤을 만나 다시 한탕의 꿈을 펼치는 것이다. 서부시대가 현대로, 부치와 캐시디가 나이든 헨리와 여자인 캐롤로 바뀌었지만, <웨어 더 머니 이즈>는 <내일을…>처럼 법질서에서 이탈한 이들의 강도 행각을 그린, 이른바 케이퍼(caper) 무비라 불리는 영화들의 뒤를 잇는 작품이다. 애초 이 영화가 가능했던 이유 하나는, 폴 뉴먼이란 배우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미 <내일을…> <스팅> 등에서 매력적인 범죄형 캐릭터를 보여준 바 있는 뉴먼의 전력은 영화 도처에 향수어린 잔영을 겹쳐놓았다. 그 흔한 총격전 한번 없이 사전계획만으로 현금을 터는 헨리는, 총보다 머리를 쓰는 은행강도 부치와 닮아 있다. ‘헨리’란 이름은 <스팅>에서 뉴먼이 맡은 역할과 같고, 헨리가 바에서 캐롤과 웨인에게 자신의 과거를 얘기하는 장면에서는 <컬러 오브 머니>가 떠오를 법하다. 캐롤의 육탄공세에도 눈하나 까딱 않고 전신마비를 연기하는 천연덕스러움부터 백발 성성한 나이에 새로운 시작에 나서는 낙천적인 웃음까지, 뉴먼의 카리스마는 좀체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극의 전개에 완숙한 무게를 실어준다. <웨어 더 머니 이즈>는 리들리와 토니 스콧 형제의 영화사 ‘스콧 프리’에서 제작하고, 같은 영국 출신인 마렉 카니에프스카가 연출을 맡은 작품. 귀에 익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감독의 화술은 새로울 것 없이 심심하지만, 총격과 유혈 낭자한 속도전 대신 사소한 아이디어와 유머감각을 배치한 구식 강도영화의 향수, 무모하나마 꿈을 찾아나서는 노익장 폴 뉴먼과 린다 피오렌티노 콤비의 호연은 매력적이다. 황혜림 기자

<3000 마일>

■ STORY머리 좋고 잘생기고 타고난 악당에다 엘비스 프레슬리 숭배자인 머피(케빈 코스트너)는 ‘큰집’에서 우애를 쌓은 동료들과 함께 카지노를 턴다. 이들이 거액을 손에 넣자 악당의 본색을 드러내 서로 총질을 하는 바람에 돈의 향방은 머피와 마이클(커트 러셀), 그리고 좀도둑 아들을 데리고 사는 영리한 여자 시빌(커트니 콕스)의 3자 구도로 압축된다. ■ Review 같은 영화에 대해 말하면서 고상함을 잃고 싶지 않다면 짧게 가는 게 상책이다. 예컨대 이런 식으로. 극한 상황에서도 위엄을 잃지 않는 이지적이면서도 냉소적인 캐릭터를 유지해온 케빈 코스트너는 과연 시나리오나 끝까지 읽고 계약서에 사인했던 것일까? 이 영화는 최근 뮤직비디오와 CF를 거쳐서 주류 상업영화에까지 널리 퍼진 시각적 스타일들을 총출동시키면서 매너리즘의 극치를 보여준다. 엘비스를 흉내내는 사람들(Elvis impersonators)을 전면에 내세웠지만 ‘엘비스 현상’에 대한 어떠한 이해도 제공하지 않으며, 아이디어의 치졸함은 엘비스가 무덤에서 튀어나올 정도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고상을 떠는 평론가에 못지않게 멀쩡한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같은 영화를 ‘황금광’으로 간주하는 수가 많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어쩌면 이런 식으로 ‘평론’할지도 모른다. “아후∼ 평론가들 별 많이 달아논 거 나는 절대 안 봐. 커트니 콕스 그 여자 괜찮지 않냐? 꼬마애 걔 캡이더라. 영화 끝나고 바로 나오지 말고 마지막 자막 쭉 올라갈 때까지 앉아 있어. 러셀이 엘비스 춤추는데 끝내주거든.” 그러면 눈치빠르고 귀 얇은 평론가가 이런 식으로 덧붙일 것이다. 케빈 코스트너는 한 가닥의 인간적인 양심을 가진 마이클 대신 속 밑바닥까지 악당인 머피 역을 자원하면서 “폭력의 논란, 그 중심에 서고 싶다”고 말했다. 현실을 재현하기보다는 게임을 복제하겠다는 의지를 가진 이 영화에서 배우들은 연기(acting)를 한다기보다 게임 캐릭터로서 작동(operating)한다. 전자오락‘적’인 것을 넘어서서 전자오락 그 자체인 이 영화의 스타일은 고전적인 의미의 프레임을 무의미하게 만듦으로써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내포하고 있는 또 하나의 극단적인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김소희| 영화평론가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입맞춤

● “아주 뚱뚱한 여자예요. 머리를 틀어 올리고 있고요. 커다란 옷을 입었어요. 옷이 헐렁거리는데 양끝 손은 손이 아니라 불이 막 타올라요. 응… 손으로 자기 배를 막 밀고 있어요, 얍 하면서. 막 화내요….” 이제 막 8살이 된 꼬마환자는 대체 이 흐리멍덩한 잉크반점에서 어떤 세상을 보고 있는 것일까. 핑클과 이소라의 목소리를 자유자재로 흉내내고, 연극을 하는 듯 “엄마, 죄송해요. 절 용서해주세요”라며 셰익스피어의 여주인공보다 더 구슬피 흐느끼는 이 조그만 성격배우의 세상은…. 그녀의 반응에 그림자를 덧씌우고 가위로 오려내본다고 치자. 혹 그녀가 꿈속에서라도 프랑스의 애니메이터인 미셸 오슬로 감독을 만났던 것은 아닐까? 그도 아니라면 그녀가 말한 무의미한 잉크반점 속에 커다란 옷을 입은 여자와 <프린스 앤 프린세스>에 나오는 기모노를 입고 도둑의 배를 발로 조이는 노파는 왜 그리도 비슷한 그림자로 내 머릿속 명암의 경계를 지워내고 있는 것일까? 게다가 그 기모노를 입은 노파를 살짝 지워내고 검은 옷의 망토를 입은 노인을 만들어내니, 잉마르 베리만 감독의 <제7의 봉인> 속 죽음의 사자마저 보이는 것 같다. 1907년,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 칼 구스타프 융은 40년째 병상에 누워 있는 노환자를 맡게 되었다. 76살의 이 노파는 50여년 전에 입원했는데, 오직 35년 전부터 이 병원에서 일해온 고참 간호사만이 이 환자의 역사를 좀 알고 있을 뿐이었다. 한컵의 우유를 마시는 데 거의 두 시간이 걸리는 그녀는 그 와중에도 손과 팔로 이상한 움직임을 했는데, 융은 이것이 무슨 의미라도 있는지를 궁금히 여겼다. 그는 어느 날 병동을 지나다 수수께끼 같은 동작을 하는 그녀를 보고 고참 간호사에게 그녀가 이전에도 같은 동작을 했는지 물어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내 선임자 말로는 환자가 이전에 구두를 만들었답니다”라고 대답해주었다. 융은 다시 한번 차트를 검토했다. 거기에는 그녀가 마치 구두를 깁는 것과 같은 동작을 한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그 동작은 당시로서는 시골 구둣방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어서 융은 다시 한번 궁금해졌다. 환자가 사망하자 얼마 뒤 융은 비로소 그녀의 오빠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융은 그에게 물었다. “어쩌다가 당신의 여동생이 병들게 되었나요?” 그러자 오빠는 머뭇거리며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내 동생은 구두장이를 사랑했어요. 그런데 어쩐지 그는 그녀와 결혼하려고 하지 않았죠. 그 바람에 동생은 실성을 한 거예요.” 그 구두동작은 그녀가 자신의 애인과 같아지려고 일생동안 지속해온 단 하나의 움직임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일들을 통해 융은 하나의 인격 뒤에는 하나의 생활사, 하나의 희망과 욕구가 있음을, 정신병에는 하나의 보편적인 인격심리학이 숨어 있고 여기서 오랜 인류의 갈등이 재발견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아니엘라 야훼 지음·<융의 회상, 꿈 그리고 사상> 중에서). 그림자가 일깨우는 인간의 양성성 모든 사람들 마음속에는 왕자와 공주가 있다. 흔히 신화나 동화는 정신작용이 빚어내는 가장 심오한 형태의 언어로 우리 내면의 어떤 모습을 드러내준다. 즉 개인의 꿈이란 특정화된 신화이며, 반대로 신화는 보편화된 꿈인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번에 개봉한 미셸 오슬로의 실루엣 애니메이션인 <프린스 앤 프린세스>는 융의 분석심리학에 대한 완벽한 구현이자 어떤 경배 같아보인다. 일단 <프린스 앤 프린세스>가 형식적인 측면에서 이 차원의 평면 그림자를 택했다는 것, 삼차원의 입체를 포기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흔히 그림자는 생명력의 일부로 ‘스승의 그림자를 밟지 말라’는 속담처럼 그림자를 밟는다는 것은 그 사람의 영혼을 침해하는 행위로 여겨진다. 중국이나 타이에서 발달한 그림자극을 한번 떠올려보자. 원숭이, 개구리, 여우 등등, 얇은 천 뒤의 가녀린 빛이 우리의 조야한 의식을 포장하는 동안 너울거리는 그림자들은 가장 간단한 방식으로 천 뒤에서 불현듯 나타난다. 이제까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무형의 실체가 실재하는 그 순간. 디즈니의 셀 애니메이션이 삼차원적인 세밀한 방식으로 현실을 창조하려 할수록 우리는 보이는 것만을 믿게 되는 심리적 빈곤에 빠지는 반면 <프린스 앤 프린세스>의 빛과 그림자의 향연은 평면을 선택함으로써 최대한 우리의 시적 상상력과 심리적인 틈을 자극하는 것이다. 동시에 <프린스 앤 프린세스>의 빛과 그림자는 영화의 본질적인 속성이기도 하다. 나비의 영혼처럼 흔들리는 종이 몇개가 어둠의 세례를 받아 펼쳐지는 이집트나 중세의 세상. <프린스 앤 프린세스>는 바로 우리 무의식에서 끌어올려지는 우리 내면의 고갱이들로서, 영화를 보는 즉시 어린 시절 잠들면서 꿈꿨던 벽장 너머의 세상으로 우리를 데려다준다. 융은 모든 문화권과 동화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엇비슷한 주제가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개인들도 어떤 무의식이 있을 뿐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는 공통된 집단 무의식도 있는데, 이 집단 무의식이 만들어내는 원시적 이미지를 ‘원형’(archetype)이라 하였다. 심리적 원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대표적인 것이 아니마와 아니무스라는 것이다. 분석학적인 눈으로 보자면 인간은 남성적인 잠재력과 여성적인 잠재력을 모두 지닌 양성적인 존재라 할 수 있겠다. 융이 개념화한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사람들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여성성과 남성성을 상징한다. <프린스 앤 프린세스>에 등장하는 공주는 바로 사람들 마음속에 깃들어 있는 여성성 즉 아니마로서, 막연한 느낌과 기분, 육감, 비합리적인 것에 대한 감수성, 개인적인 사랑의 능력, 자연에 대한 느낌 등의 능력을 관장한다. 흔히 비너스나 헬레네, 이브, 성모 마리아 그리고 현대의 마릴린 먼로나 마돈나, 조디 포스터 같은 여성들은 다른 수준의 의미를 지닌 아니마로 작용한다고 보겠다. 반대로 왕자로 상징되는 아니무스는 사람들 마음속에 깃든 남성성이다. 남성적인 책임과 믿음, 잔인함과 광폭성을 아우르는 이 심리적 원형은 흔히 아폴로나 헤라클레스, 타잔 혹은 간디나 낭만적인 브래드 피트의 모습 등에서도 찾을 수 있다. 따뜻함이 고정관념을 벗긴다 <프린스 앤 프린세스>는 중세의 연금술이 그러하듯 공주와 왕자, 즉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통합에 대한 간명한 은유를 보여주며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특히 첫 삽화 111개의 다이아몬드를 찾아야 하는 왕자의 이야기는 서구의 영웅 신화 대한 짧은 소묘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박진감이 넘친다. 많은 동화에서 청년 영웅들은 흔히 자신의 진정한 인성이나 자아를 발견하기 위해 먼곳으로 여행을 떠나고 마침내 용을 죽이고 공주와 결혼하게 된다. <프린스 앤 프린세스>에서의 다이아몬드는 상징체계에서 보자면 불멸성을 지닌 진정한 자아를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다. 이때 다이아몬드는 여타 동화에서는 황금양털일 수도, 금은보화일 수도 혹은 성배나 신발 한짝일 수도 있다. 왕자가 다이아몬드를 찾아 헤맨다는 것은 자신의 진정한 인성이나 자아를 발견하기 위해 진지한 내면 여행을 떠나야 한다는 뜻이 된다. 흔히 왕자는 가는 도중 여러 어려움을 겪지만 결국 자신을 도와주는 조력자들을 만나게 된다. 조력자는 까마귀일 수도 있고, 늙은 노파일 수도, 혹은 두꺼비나 개구리, 혹은 새일 수도 있다. 왕자는 이들 조력자들이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연민으로 잘 대해주지만 결국 조력자들의 도움은 다이아몬드를 얻는 데 결정적인 열쇠가 된다. 그렇다면 <프린스 앤 프린세스>에 나오는 조력자는 무엇이었을까? 콩쥐에게 물을 긷게 하는 두꺼비, 낟알을 모아주는 새들이었을까? 이들은 사람들이 자신 안에 있지만 잘 모르는 어떤 잠재능력과 원초적인 본능을 나타낸다. 흔히 사람들은 항상 자신이 잘 이용하고 겉으로 보여지는 능력만으로 보물을 얻으려 하지만 겉으로 보여지는 능력의 대극에 있는 숨겨진 능력을 깨닫는 것이 자아의 완성에 핵심이 된다고 동화들은 가르쳐준다. 조력자는 이렇게 우리가 좀더 신경써야 하고 혹은 그 존재 자체가 있다는 것을 겸허히 인정해야만 하는 우리의 열등기능들이다. 왕자는 자신이 간과했지만 자신 안에 있었던 어떤 능력- 개미, 즉 질서, 바름, 덕, 혹은 복종을 배움으로써 111개의 다이아몬드를 무사히 찾게 된다. 결국 주인공 왕자는 다른 왕자들과 달리 내부의 본성을 이용해 111개의 다이아몬드를 찾고 자신의 여성성을 통합하는 데 성공한다. 왕자는 마침내 공주와 결혼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미셸 오슬로 감독은 <프린스 앤 프린세스>에 고답적인 동화의 숨결만을 불어넣지 않았다. 매우 정치 적이고 이데올로기적으로 교정된 감독의 안목은 ‘마녀의 성’이나 ‘왕자와 공주의 키스’ 같은, 감독이 직접 창작한 이야기에서 더욱더 그 묘미를 발휘한다. 어린 시절, 흑인만 다니던 공립학교의 유일한 학생이었던 감독답게 <프린스 앤 프린세스>의 이야기는 매혹적이면서 동시에 세상의 편견을 깨부수는 묘한 쾌감이 공존하고 있다. 예를 들면 마녀의 성에 들어가려던 청년은 대포를 동원하고 높은 벽을 타고 오르던 이들과 달리 결국 마녀의 성에 들어가는 가장 간단한 방법을 알게 된다. 그것은 바로 마녀의 성문을 살짝 노크하는 것. 사람들이 마녀라 불렀던 그녀는 실은 예술과 문학을 사랑하는 지혜로운 여자였다. 마치 누가누가 먼저 지나가는 이의 외투를 벗기나 내기한 ‘바람과 태양의 동화’처럼 ‘마녀의 성’은 결국 편견을 허무는 따뜻한 마음의 손길, 사람들의 정신적 방어물을 허무는 중용과 겸허함의 미덕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론을 앞서는 오랜 지혜 특히 <프린스 앤 프린세스>의 백미는 황당한 마법의 키스로 인해 개구리, 나비, 코뿔소, 코끼리, 애벌레, 벼룩, 기린, 고래, 황소로 변하는 왕자와 공주의 키스 행진곡이다. 융에 따르면 흔히 여성들은 자신이 억압시켰던 내면의 남성성인 아니무스를 다른 남성에게서 보게 되면, 그 남성에게 자신의 아니무스를 투사함으로써 사랑에 빠지게 된다고 한다. 이 점은 남성 역시 마찬가지이다. 융식으로 말한다면 남성들은 사랑하는 여성에게서 자신이 억압했던 자신의 여성성을 보게 된다. 여기서 투사라는 말이 어렵다면 흔히 말하는 ‘눈에 콩꺼풀이 씌운다’, 이런 말로 대치해보자. 왕자와 공주는 서로의 눈에서 서로의 아니마와 아니무스를 발견하고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곧 벼룩과 기린으로 변한 두 사람은 1분 전에 한 사랑의 맹세를 어기고 뜻밖에 이기심어린 비난을 서로에게 퍼붓는다. 사람들이 하마나 코끼리로 변하는 까닭은 무얼까? 그것은 두 사람이 상대편을 그렇게 지각했다는 말에 다름 아닐 것이다. 사랑의 변덕스러움과 서로의 투사를 떨쳐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상대편을 보는 방법을 가장 간명한 방식으로 전달하는 공주와 왕자. 이 에피소드의 마지막 반전은 스크린에 뽀뽀라도 해주고 싶을 정도로 귀엽고 장난스럽다. 물론 <프린스 앤 프린세스>는 분석학을 동원하지 않아도 있는 그대로 충분히 사랑스럽고 재미있다. 감독 미셸 오슬로는 자타가 공인하는 프랑스 애니메이션의 거장으로 행복은 멀리 있지 않음을, 삶의 지혜는 가장 간명한 방식으로 찾아내는 것임을 한칼에 보여준다. 그런데 여기에 마음만 먹는다면 단아한 그림자를 사모했던 종이 한장에 융의 통찰력을 겹침으로써 가장 저렴하고 즉각적인 방법으로 삶에 대해 많은 것을 깨닫게 되는 신기한 내면여행의 보너스도 가능한 것이다. 그건 위의 꼬마환자나 노파를 등에 업고 후지산에 올라갔던 <프린스 앤 프린세스>의 도둑도 마찬가지였다. 어머니에 대한 심한 분노와 자신의 정서를 잘 통제하지 못하는 꼬마소녀는 자신의 손이 불이 되어 스스로를 옥죄고 있다고 느낀다. 또한 도둑이 얻기를 바랐던 기모노나 큰 옷 등은, 안으로 감싸안는 이미지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가 외부세계에 자신을 드러내는 가면으로써의 자아, 바로 페르소나만을 원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껍질인 페르소나는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없다. 여기에 신성한 노인이 나타난다. 노파나 게이샤 혹은 할아버지나 도사가 될 그 또는 그녀는 우리의 마음 안에 초자연적인 개성, 즉 우리를 한 단계 이끌어올릴 현명한 노인 필레몬이다. 마치 헤라 여신을 등에 업고 강을 건너면서도 그녀를 평범한 노파로 착각했던 그리스신화의 영웅 이아손처럼 우리는 일종의 도둑이며 노파인 동시에 하마가 될지도 모르는 왕자이자 공주는 아니였던가. <프린스 앤 프린세스>는 향기는 없는 평면의 실루엣이지만 깊이있는 애니메이션의 전형으로 오래된 지혜의 향내를 화면 가득히 품어내고 있었다. 심영섭 |영화평론가

노력이냐, 새출발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오은하| 대중문화평론가 oheunha@hotmail.com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액션배우는 아놀드 슈워제네거다. 물론 <터미네이터> 시리즈에서 아주 멋졌지만 그뒤로도 유치원도 가고 아들 선물을 사려고 무진 애를 쓰기도 하고 심지어는 임신까지 하는 모습에서 친근감을 느꼈다. 가장 싫어하는 액션배우는 장 클로드 반담이다. 내가 이 사람에게 감사하는 것은 제목들이 더러 ‘장클로드 반담의 **’ 하는 식으로 이름을 명시해주어 즉각 피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설명하기 창피할 정도로 구질구질하고 기구한 사정으로 인해 <엑시트 운즈>를 보게 됐다. 제목으로 미루어 액션영화인 것 같다는 것만 짐작할 뿐 주인공이 누구인지조차 모르는 상태였다. 나는 제발 반담만은 아니기를 초조하게 빌었다. 다행히 그 바람은 이루어졌으나. 아아, 스티븐 시걸. 반담에 비해 나은 점이 있다면 섣부른 연기를 아예 시도조차 안 한다는 점 정도일까. 평생을 같은 표정과 같은 복장으로 일관하며 때가 되면 액션 한 게임씩 선보일 뿐인 그 거인. 내 심장은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시걸 영화를 개봉관에서 내 돈 내고 보게 될 줄이야. 그런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영화는 꽤 재밌었다. 화려한 쌈박질과 음악은 액션영화에 약한 나에게조차도 즐길거리를 제공해주었던 것이다. 게다가 시걸 영화로는 드물게 유머와 뜻밖의 반전까지 있었으니. 마음이 편안히 자리잡자 시걸이 귀엽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비록 중견이긴 하지만 초보나 마찬가지로 갖은 실수를 저지르며 좌충우돌 헤매다가 좌천까지 당하는 모습을 보니 내 옛모습까지 슬며시 떠올랐다. 취직 못해 방황하며 입사시험이란 시험은 다 응시하고 있던 무렵 한 경제신문사가 단순암기력 하나만 보고 나를 구제해주었더랬다. 지금으로부터 십오년 전쯤 얘기다. 그 신문사 국제부는 어떤 곳이었던고 하니 예를 들어 중국이 변동환율제를 채택했다고 하면 그것이 일은 물론이고 점심식사 화제와 잡담에까지 오르는 그런 풍토였다. 어떤 선배는 오로지 간밤 세계 각국 외환시장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가 너무나 궁금해 새벽같이 출근해 단말기를 두드려보는 것이 하루의 시작이었고 또 어떤 선배는 간단한 질문 한 가지를 해도 자본주의의 연원과 세계경제 최근동향까지 다 동원해 강의를 하는 바람에 나중엔 모르는 것이 있어도 궁금함을 참게 만들어버렸다. 간단한 농담 한 마디를 하려 해도 분데스방크나 CBOT를 언급하는 분위기에서 나는 너무나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대체 분데스방크가 무슨 결정을 내리던 나랑 무슨 상관이관대 여기에 온 신경을 세워야 하는지 동기부여가 전혀 안 됐으며 텍사스 중질유 값이 최고치를 경신하든 말든 왜 내가 밤잠 못 자며 그것을 챙겨야 하나 의아스러웠다. 그런 동기부여 여부는 실은 사치스런 얘기고, 진짜 힘들었던 건 나의 무식함이었다. 도쿄외환시장에서 1달러가 어제 103엔이었는데 오늘 105엔이라면 대체 엔이 오른 건지 달러가 오른 건지 그럼 원화는 어떤 영향을 받는 건지가 한번에 깨달아지지가 않고 적어도 몇 단계 거쳐 산수를 해야만 했던 것이다. 매사가 그런 식이었다. 무식한 상사는 회사의 재앙이지만 무식한 루키도 만만찮은 두통거리다. 무식한데 마음만 앞서는 루키는, 무식한데 의욕만 충천한 상사 못잖게 성가신 존재다. 없는 실력을 부지런함과 의욕으로 만회해보려던 나는 결정적인 실수를 여러 건 올렸고 급기야는 한 나라의 GNP에 0 하나를 더 붙이는 대단한 만행까지 저질렀다. 다행히 매번 신문이 인쇄되기 직전에 누군가가 바로잡아주었지만 견디기 어려운 수모였다. 영화 <파이란>에서 가장 가슴에 남는 대사는 그래서 강재 것도 아니고 파이란 것도 아닌, 용식이의 말이었다. “너는 이 바닥 사람이 아냐. 안 되는 건 안 돼. 그냥 내려가.” 비록 센스는 없어도 용기넘치고 의욕 대단한 경찰 시걸은 갖은 노력과 의지 끝에 결국 모두에게 인정받는 엘리트로 변화하지만, 현실은 영화와 달라서 나는 용식이 말마따나 이 바닥이 내 바닥이 아니라고 일찌감치 결론 내리고 몇년 안 지나 그곳을 떠나는 것으로 마무리지었다. 모르는 걸 배우고 익히게끔 열심히 노력할 수 있는 것조차 적성이고 실력임을 깨달으면서. 이젠 나이도 들고 세상살이 이치도 조금은 알아서, 모든 사람이 적성에 맞아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전문가처럼 보이는 사람들 중에도 실은 얼치기인 사람들이 많이 있으며 실력보다 더 크게 그 사람 평판을 좌우하는 것은 포장능력이라는 것도 알지만 그때만 해도 양심과 과대망상이 살아 있던 때라서 조직에 필요없는 사람은 스스로 나가줘야 한다는, 피래미 주제에 참으로 어마어마한 직업윤리를 갖고 있었던 것 같다. 만약 자기가 지금 일에 잘 안 맞는다고 생각된다면 자기가 시걸 같은 경우인지 오은하 같은 경우인지를 판단해봐야 할 것이다. 시걸쪽이라면 열심히 노력하면 되겠고 불행히도 오은하쪽이라면 다시 두 가지 선택이 있다. 떠나 새출발하든가, 아니면 아예 신경을 꺼버리든가. 경험자로서 얘기한다면, 후자도 전자만큼이나 현명한 방법이고 전자도 후자만큼이나 비전없는 길인 것 같다. 근데 영화 재밌게 보고서 왜 이런 뚱한 결론이 나온 거지?

유럽에 부는 한국영화 바람

■ LG 한국영화제와 우디네영화제, "아시아의 새로운 영화" 환대 세계를 향한 한국영화의 발걸음이 가볍다. <춘향뎐>이 5월5일 미국 61개 도시에서 개봉했고 <공동경비구역 JSA>는 5월26일 일본의 280여개 극장에서 대대적으로 개봉하는 등 올해 들어 한국영화를 받아들이는 해외의 눈길이 유달리 따스해진 것을 느낄 수 있다. 이같은 환대에 발맞춰 한국영화는 아시아와 미주를 거쳐 유럽으로 발길을 옮기고 있다. 최근 벌어진 이탈리아의 우디네영화제와 런던의 ‘LG 한국영화제’는 한국영화에 대한 유럽의 관심을 읽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런던과 로마의 <씨네21> 통신원이 유럽에서도 서서히 불기 시작한 한국영화의 상큼한 봄바람을 담아왔다. 편집자 LG 한국영화제, 런던관객과 행복한 대면 런던은 유럽에서도 한국영화의 불모지 같은 곳이었다. 런던에서 한국영화를 보려면 매년 한번뿐인 런던영화제를 기다리거나, 아주 드물게 아트하우스에 걸리는 영화들(지난해 초의 <거짓말>처럼)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극소수의 영화 전문가나 아시아 영화광들을 제외한 런던의 일반 영화관객에게 한국영화는 아무것도 알려져 있지 않은 미지의 영역 같은 것이었다. 최근 한국영화산업의 급작스런 성장과 국제영화제에서의 선전에 힘입어, 한국영화에 관한 호기심은 높아졌지만 여전히 이들을 만날 수 있는 실제적인 기회는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지난 4월29일부터 5월5일까지 일주일간, 런던 시내 중심의 메트로극장에서 열렸던 ‘LG 한국영화제’는 런던의 일반 영화관객에게 한국영화를 맛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뜻깊은 행사였다. <공동경비구역 JSA>를 포함, 7편의 서로 다른 성격의 작품을 선정, 가장 젊고 역동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한국영화의 색다른 면모를 보여줬다. 특히 지금까지 영국에 소개된 한국영화가 주로 아트하우스 영화였던 것과는 달리 이번 영화제에 소개된 작품들은 나름대로 어느 정도의 수준을 갖춘 주류영화들 중심이었고 각 영화가 한국 사회의 다양한 측면에 대해 발언하는 영화들이었다는 점도 의미있는 부분이었다. 이 영화제에 대한 런던 언론의 관심도 높아서, 행사기간중 <가디언>지는 영화제 자체와 영화 <…JSA>에 대한 긍정적인 리뷰를 연달아 실었으며, <인디펜던트>지에는 영화제의 의의와 함께 한국영화산업과 역사를 전반적으로 소개하는 글이 실렸다. 두번의 상영에서 <…JSA>는 매회 매진을 기록했으며, 특히 배창호 감독의 <정>에는 영국 관객이 대거 몰려, 거의 빈 좌석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높은 좌석 점유율을 기록했다. 이외에 <정사> <간첩 리철진> <세친구> <파란 대문> 등에도, 모두 최신작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많은 관객이 찾았다. 이들 관객이 영화제를 찾은 이유는 다양해 보였다. 아시아영화 전반에 대해 관심이 있어서 온 관객이나 한국문화 자체에 대한 관심 때문에 오는 관객, 순수하게 영화적인 관심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다. 영화제 특별 행사로는 런던에서 한국 학생들이 만든 단편경선과 영화제를 찾은 박찬욱, 이재용 감독과 송강호씨의 토크 프로그램이 진행됐다. 모두 14편의 단편이 출품된 단편경선의 심사위원 중 한명이었던 <오사카 스토리>의 재일동포 감독 나카타 도이치는 “죽음에 관한 성찰적인 다큐멘터리부터 셰익스피어 스타일의 시대극에 이르기까지 그 다양성과 독특함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특히 “한국 사람이 만들었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 것에 놀랐다고 심사 소감을 밝혔다. 이번 영화제는 최근 런던에서 대만, 이란 등 아시아영화에 관한 관심이 높아가고 있는 시점에서 한국영화에 대한 관심과 대중적 인지도를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현재 영국의 영화배급회사인 메트로 타탄은 이명세 감독의 <인정사정 볼 것 없다>와 김기덕 감독의 <섬> 배급권을 사놓은 상태이며 <인정사정 볼 것 없다>를 6월중 개봉할 예정이기도 해 올해는 런던에서 한국영화의 인지도를 확고히 하는 한해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번 영화제는 유럽에서는 최초로 한국영화에만 바쳐진 최초의 영화제라는 의의가 있다”는 영화제 디렉터 하태욱씨는 “<정>이 성공하는 것을 보고 한국에서는 안 먹혔던 영화가 런던에서는 더 잘 먹힐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어떻게 PR을 하는가가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다시금 절감했다. 물론 영화도 어느 수준 이상이 돼야 하겠지만, 이미 어느 정도 수준이 되는 영화에 대해서는 그 영화 자체의 내용과 맥락을 고려하면서 어떻게 영화를 잘 포장하느냐가 관건”이라고 설명했다. 런던=이지연 통신원 우디네영화제, "<반칙왕>은 한국의 <풀몬티>" 지난 4월20일부터 28일까지 이탈리아의 우디네에서 열린 우디네영화제(Far East Film Festival)는 이탈리아에 한국영화의 이미지를 확고하게 심어준 계기가 됐다. 1500석의 대형 오페라하우스 누오보 조바네 극장에서 일주일 동안 열린 이번 영화제는 경쟁 영화제는 아니었지만 관객 투표로 결정되는 최우수 관객상과 우수상을 각각 김지운 감독의 <반칙왕>과 박찬욱 감독의 <공동경비구역 JSA>가 차지하는 영광을 안았던 것이다. 올해 출품된 한국영화는 <반칙왕> <…JSA> <해피엔드> <물고기 자리> <시월애> <동감> 등 11편이었으며, 게스트로 이현승, 김지운, 박찬욱, 정지우, 김형태 감독 등과 배우 송강호가 참석해 한국영화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관객은 지난해에도 <조용한 가족>으로 우디네를 방문한 바 있는 김지운 감독의 <반칙왕>을 ‘한국의 <풀몬티>’라며 극장을 들썩이게 했다. 주최쪽은 “그 웃음 뒤에 소외된 주인공의 현실이 드러나 결코 코믹한 영화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 이 영화의 장점”이라고 선정이유를 밝혔다. 폐막작으로도 선정된 <…JSA>는 민감한 남북문제를 주제로 하면서도 추리적이고 드라마적인 요소를 복합적으로 잘 표현했다며 많은 박수갈채를 받았다. 또 현지 언론들은 <해피엔드>의 정지우 감독을 ‘한국의 히치콕’이라고 극찬했으며, 단순한 사랑이야기가 아니라 사랑의 집착이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풀어간 김형태 감독의 <물고기 자리> 역시 단순한 멜로드라마나 스릴러영화가 아닌 색다른 시도였다고 평가했다. 영화제 기간중에는 중국, 홍콩, 한국영화 등을 분석하는 토론도 마련됐는데, 적극적으로 참여한 관객은 영화의 뒷얘기뿐 아니라 한국영화에 관해 갖가지 궁금증을 보였다. 영화제에 참여한 평론가와 기자들은 한국영화가 빠른 속도로 질적 성장을 하고 있으며, 아시아영화에서 중요한 위치로 떠오르고 있다고 평가했다. 또 다양하고 색다른 주제와 개성있는 스타일의 시도가 장점이라며 한국영화의 미래를 긍정적으로 전망했다. 올해로 15년째를 맞는 이 영화제는 시행 초기에는 매년 개성있는 주제를 선택, 영화상영과 토론을 통해 낮선 영화들과 관객과의 만남을 제공하는 자리를 마련했었다. 그리고 1998년 ‘홍콩영화’를 주제로 아시아영화에 처음 접근을 시도한 뒤 이듬해부터 주제를 아예 ‘아시아영화제’로 바꿔 올해로 3회째를 맞고 있다. 이 영화제는 해를 거듭할수록 규모가 커지고 있다. 올해 초청된 작품 수는 모두 73편이었고 관객 수도 3만명이 넘어 아시아 밖에서 열리는 아시아영화제로는 매우 큰 규모에 속하는 영화제가 됐다. 올해는 중국의 왕정 감독 특별전을 마련하여 제작자로서 100편, 감독으로서는 75편의 영화를 만들었고, 배우로서는 20편 이상에 출연해 중국과 홍콩영화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그의 공을 인정하였다. 또 ‘이소룡의 기억’이라는 이름의 이소룡 영화 특별전을 열어 그의 오랜 작품들을 다시 보는 계기도 마련했다. 한편 이번 영화제는 수준 낮은 홍콩 액션영화도 초대돼 비난을 받았고, 영화 상영중 소리와 초점 등이 맞지 않는 등 잦은 기술적 문제가 발생해 아쉬움을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같은 아시아에서도 보기 힘든 필리핀, 타이, 베트남 등의 영화까지 관객에게 소개하는 성의는 돋보였다. 다만 영화제가 끝난 뒤에도 작품성이 높은 영화들의 배급계획은 여전히 세워지지 않은 점은 서구에서 아시아영화가 풀어야 할 어려운 숙제로 남았다. 한편 4월29일 폐막된 제5회 베로나 센티멘털 멜로 영화제(Festival del Cinema Sentimentale e Melo)에서도 이현승 감독의 <시월애>가 젊은 심사위원상, 최고 예술기여상, 그리고 기자와 비평가가 뽑은 ‘스테파노 레지아니’상 등 3개 부문에서 수상하는 영광을 안았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도시 베로나에서 열린 이번 영화제에는 <시월애> 외에도 곽지균 감독의 <청춘> 등 한국영화 10편이 출품됐다. 우디네=이상도 통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