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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1997)

<고스포드 파크>, 혹은 인간 난장의 오만한 지휘자 로버트 알트먼

또다시 반전이다. 1980년대의 침체를 <플레이어>(1992)로 보기 좋게 역전시켰던 로버트 알트먼 감독은, 장 르누아르의 시선으로 추리한 앙상블 미스터리 <고스포드 파크>로 근작 <진저브레드 맨>과 <닥터 T>가 남긴 미진한 뒷맛을 후련하게 일소했다. <고스포드 파크>에서도 인간 군상들의 쇼는 알트먼 영화에서 늘 그렇듯이 난장판으로 끝나고, 그 아수라장을 빚어나가는 솜씨는 경이롭다. 유사시 연출을 대행할 감독을 두고 메가폰을 잡는 77살의 나이에도 인간 일반과 주류 할리우드를 향한 독설을 누그러뜨릴 줄 모르는 로버트 알트먼 감독은 지금도 차기작을 위해 신발끈을 고쳐 매고 있다. 최근 본 할리우드영화를 묻는 질문에 “기억이 잘 안 난다”라고 대답하는 이 오만하고 냉정한 노장의 스테이지 뒤쪽을 영화평론가 유운성이 들여다보았다. 편집자 1990년은 화가 빈센트 반 고흐가 사망한 지 꼭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때 구로자와 아키라와 모리스 피알라는 각각 <꿈>(1990)과 <반 고흐>(1991)에서 이 불운했던 화가의 삶을 자신들의 영감의 원천으로 끌어들였다. 화려했던 70년대를 뒤로 하고 지지부진하게 80년대를 보내던 로버트 알트먼 또한 <빈센트>(Vincent & Theo, 1990)를 통해 조심스럽게 자신의 90년대를 열어보였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단지 반 고흐를 끌어들이는 데 그치지 않고, 영화 속에 자신의 영감을 불어넣을 수 있었던 이는 오직 한 사람, 모리스 피알라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로버트 알트먼은 여전히 잊혀져가는 감독일 따름이었다. <플레이어>(1992)와 <숏 컷>(1993)이 없었더라면 알트먼의 90년대는 얼마나 초라한 것이 되었을까? 특히 당시 우리나라의 영화광들에게, 즉 알트먼의 필모그래피 가운데 가장 시시껄렁한 영화로 간주될 만한 <야전병원 매쉬>(MASH, 1970)나 기이한 심리극 <사랑의 열정>(Fool for Love, 1985) 정도만으로 그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던 (나와 같은) 이들에게, 이 두 영화는 진정 거장의 힘을 느끼게 하는 걸작으로 다가왔었다. 이후 알트먼은 완전히 환골탈태한 모습으로 자신의 경력을 쌓아나갔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다중적 서사구조를 채택한 <패션쇼>(Pre^t-a`-Porter, 1994)와 <캔사스 시티>(1996) 등의 영화가 차례로 우리를 찾아왔다. 그리고 이번에 우리를 찾아오는 알트먼의 영화는 장 르누아르의 <게임의 규칙>(1939)의 무대를 1932년의 영국으로 옮겨놓은 느슨한 미스터리극 <고스포드 파크>(Gosford Park, 2001)이다. 장르의 역사는 오직 부수어지기 위해 존재한다 영화학자 노엘 캐롤은 <인유(引喩)의 미래: 70년대의 할리우드>라는 논문에서, 장르를 옮겨다니며 거기에 개인적인 비전을 새겨넣는 미국감독들에 대해 언급하며 로버트 알트먼의 영화가 그 구체적인 예가 될 수 있음을 지적한다. 정말이지 현역 미국감독들 가운데 알트먼만큼이나 여러 장르를 옮겨다니며 작업하는 이도 드물 것이다. 그는 서부극(<멕케이브와 밀러 부인>(1971), <버팔로 빌과 인디언들>(1976)), 필름 누아르(<기나긴 이별>(1973), <플레이어> <진저브레드맨>(1998)), 전쟁영화(<야전병원 매쉬>(1970)), 공상과학영화(<카운트다운>(1968), <퀸테트 살인게임>(Quintet, 1979)), 뮤지컬(<뽀빠이>(1980)), 그리고 갱스터(<우리 같은 도둑들>(1974), <캔자스 시티>) 영화들 사이를 종횡무진으로 오가며 작업한다. 다소간 장르영화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듯한 <내시빌>(1975), <패션쇼> 같은 영화도 고전기 할리우드의 백스테이지 뮤지컬로부터 서사구조를 차용해오고 있다. 물론 캐롤은 알트먼이 오직 장르 내부에서만 작업하는 감독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비록 알트먼이 장르를 오가며 작업하는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그의 영화들을 장르영화로 간주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은 것 또한 사실이다. 그의 영화들은 장르의 쇄신이라기보다는 장르에 대한 비판적 재해석이라는 관점에서 검토되는 것이 보다 적절할 것이다. 단적으로 알트먼의 영화에서 장르의 역사는 오직 부수어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시팅 불의 역사수업’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버팔로 빌과 인디언들>- ‘시팅 불’(Sitting Bull)은 이 영화에 나오는 인디언 추장의 이름이다- 은 확성기에서 흘러나오는 다음과 같은 목소리를 들려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 쇼는 단순한 엔터테인먼트가 아니라, 미국 개척사를 재조명한 것입니다.” 이 말은 영화 전체의 구조와 맞물릴 때 매우 아이러닉한 정서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주로 존 포드에 의해 발전, 완성된 서부극에 대한 재검토를 목표로 하고 있는 듯한 이 영화에서, 전형적인 서부극의 영웅은 일개 쇼비즈니스의 광대이자 사기꾼의 모습으로 축소된다. 물론 이러한 뒤집기는 알트먼 최고의 걸작으로 꼽힐 만한 서부극 <멕케이브와 밀러 부인>에서 이미 시도되었다. 그가 장르의 틀 안에서 다룬 인물들은 언제나 매우 유약하고 무능력하거나(<기나긴 이별> <우리 같은 도둑들> <퀸테트 살인게임> <진저브레드맨>), 비열하다(<플레이어>). 그러나 알트먼이 자신의 영화에서 즐겨 사용하곤 하는, 모종의 이화효과를 노린 장치들은 로빈 우드와 같은 평론가들에 의해 저열하고 일개 ‘속물근성’의 발현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사실 이건 전혀 근거없는 비난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 생각건대 알트먼의 영화가 그런 느낌을 주는 것은, 그가 장르의 역사에 대한 어떠한 향수도 지니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기인하는 듯싶다. 스스로가 오랜 기간 쌓아올렸던 성채, 혹은 그 자신을 매혹시켰던 그 무언가를 직접 무너뜨려야 한다는 데서 오는 아픔 따위는 알트먼의 영화에서 찾아볼 수 없다. 존 포드의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1962)와 <멕케이브와 밀러 부인>의 거리는 바로 이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혹은 버트 랭카스터가 루키노 비스콘티의 <레오파드>(1963)와 <버팔로 빌과 인디언들>에서 각각 맡은 역할이 그 표면적인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다른 느낌을 주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알트먼 특유의 ‘냉담함’을 확인할 수도 있다. 한마디로 알트먼의 몇몇 영화는 오직 ‘머리로만 만들어진’ 영화의 대표적인 예다. 그러나 빌모스 지그몬트가 촬영을 맡은 <멕케이브와 밀러 부인>은 필터촬영이 불러일으키는 노스탤지어의 감각, 눈발이 날리는 가운데 눈에 파묻혀 죽어가는 멕케이브(워런 비티)의 모습 등을 통해 알트먼의 장르영화로서는 이례적으로 깊은 정서적 공명을 끌어내기도 한다. 쇼는 언제나 망쳐진다, 그럼에도 계속된다? 알트먼에게 있어서 세상은 쇼비즈니스가 펼쳐지는 무대이다. 즉 그에게 세상은 허위로 가득한 것이라는 말이다. 아마 <내시빌> <버팔로 빌과 인디언들> <플레이어> 그리고 <패션 쇼> 등이 가장 직접적인 예가 될 것이다. 하지만 <숏 컷>이나 <캔자스 시티> 또한 이러한 알트먼의 인식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그런데 알트먼의 관심은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쇼 자체가 아니라 무대 뒤(backstage)에서 벌어지는 추악하고 속물적인 인간들의 거래에 놓여 있다. 그런 점에서 팀 로빈스(<밥 로버츠>(1992))와 폴 토마스 앤더슨(<매그놀리아>(2000))의 세계관은 모두 알트먼에게 그 기원을 두고 있는 것이다. 이때 알트먼의 영화는 백스테이지 뮤지컬과 유사한 것이 된다. 쇼는 언제나 망쳐지고야 만다. 그럼에도 쇼는 계속되어야 한다(Show must go on). 왜? <내쉬빌>의 무대만큼이나 온갖 인물들의 이해관계가 추악하게 얽혀 있는 곳도 없을 것이다. 콘서트에 참여하기 위해 온 가수들, 선거전을 펼치기 위해 몰려든 정치인들, 가수가 될 꿈을 안고 서성이는 가련한 인물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취재하기 위해 온 기자 등등. 결국 이 혼란한 무대 위에서 최종적으로 쇼 진행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은 정치인들이다. 그런데 그들의 계획은 뜻밖의 저격사건에 의해 산산조각이 나고야 만다. 그럼에도 ‘여기는 내시빌’이기 때문에 계속 노래가 불리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가수와 그의 뜻을 좇아 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군중들의 모습은 정말이지 우습다 못해 씁쓸하기까지 한 것이다. <패션 쇼>는 알트먼이 <내시빌>의 무대를 90년대에 다시 한번 불러들인 영화이다. 알트먼의 영화는 종종 다른 곳으로부터 영화의 중심적인 공간이 되는 곳으로 인물들이 이동해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직접적으로 쇼비즈니스가 다루어지는 영화들은 물론이고, <멕케이브와 밀러 부인> <세 여인>(1977) <퀸테트 살인게임> <뽀빠이> <사랑의 열정> <고스포드 파크> 등의 영화도 그러하다. 여기서 알트먼의 영화는 근본적으로 웨스턴과 유사한 것이 된다. 이동해온 인물들은 형성된 공동체 안에서 모종의 갈등에 휘말려들게 된다. 아니 차라리 이동해온 인물들 자신이 공동체에 내재해 있는 갈등을 비로소 불거져나오게끔 만든다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이때 선과 악의 결투는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것은 헤어나올 길 없는 파국으로 치닫는다(단 <뽀빠이>만은 예외이다). 그런데 우리로 하여금 영화 속에 등장하는 어떠한 인물과의 감정이입도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리는 알트먼의 전략으로 인해 파국은 언제나 낯설고 기이하다. 이러한 전략이 반드시 성공적인 것만은 아니지만 <숏 컷>은 그것이 대단한 정서적 효과를 끌어낼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알트먼 특유의 냉담함이 슬쩍 가셔진 <패션 쇼> <캔자스 시티>나 <고스포드 파크>와 같은 영화들은 분명 그의 변화의 조짐을 보여주는 것이다. 유럽영화에의 한없는 지향 만일 알트먼을 사로잡은 무언가가 있다면 그건 여러 평자들이 지적한 바와 같이 유럽영화에 대한 한없는 지향이다. 많은 사람들에 의해 걸작으로 평가되는 <내시빌>이나 <숏 컷>, 그리고 최근의 <고스포드 파크>가 보여주는 다중적 서사구조가 르누아르로부터 끌어온 것임은 분명하다. 여러 인물들의 대사의 중첩, 대화 도중 소음이나 흥얼거리는 노랫소리를 불쑥 끼워넣기- 알트먼의 사운드 활용방식은 특별히 주목받아왔다-, 그리고 다분히 즉흥적인 연기 또한 이른바 르누아르적인 것이라고 말해지는 것들이다. 캐롤은 알트먼의 작업이 “르누아르적 전통으로부터 영향받았다기보다는 그것을 모방하고 확장하는 쪽에 보다 더 가까운” 것이라고 말한다. 알트먼이 자신의 진가를 제대로 발휘한다고 여겨지는 것도 대체로 이 영역에서이다. <버팔로 빌과 인디언들>과 <캔자스 시티> 같은 영화도 어느 정도는 이와 같은 작업의 영역 내에 속해 있는 것이다. 알트먼이 자주 사용한 줌인·줌아웃과 단조로운 팬과 틸트는 영화의 성격에 따라 다소 다른 의미를 띤다. 장르에 대한 재해석의 성격이 강한 영화들에서 이는 고전영화의 미장센과 그 영웅주의를 조롱하기 위해 존재한다(이를테면 <멕케이브와 밀러 부인> <버팔로 빌과 인디언들> <뽀빠이> 등). 반면 심리극적인 성격이 강한 영화들에서 이는 황량함, 불확실성의 느낌 등을 강화하기 위해 존재하며(<세 여인> <퀸테트 살인게임> <사랑의 열정>), 다중서사구조의 영화들에서는 완벽한 혼란의 느낌을 전달하기도 한다. 어떤 식이든 간에 알트먼이 자신의 영화에서 활용하는 영화적 장치들은 그의 영화가 명백히 깊은 자의식을 지닌 이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알트먼이 1977년에 발표한 <세 여인>은 영화가 담고 있는 그 불길함만큼이나 그 자신에게도 불길한 징후가 되었다. 알트먼이 여기서 끌어들이는 것은 잉그마르 베르히만의 <페르소나>(1966)이다. 베르히만의 영향은 SF영화 <퀸테트 살인게임>에서도 감지되는데- 이 영화에는 베르히만 영화에 자주 등장한 비비 안데르손도 출연하고 있다-, 이 두편의 영화에서 알트먼은 그 스스로 완전히 혼란에 빠져든 것처럼 보인다(그런데 이러한 혼란스러움이 두 영화가 지닌 매력이기도 하다). 자유분방하고 거침없는 밀리(셜리 듀발)를 동경하다 그 자신 스스로 밀리가 되어버리는 <세 여인>의 핑키(시시 스페이섹)나, 목숨을 담보로 한 기괴한 게임에 빠져드는 <퀸테트 살인게임>의 폴 뉴먼은 거의 알트먼 자신의 반영처럼 보인다. 그의 추종자들조차 입다물게 만들어버릴 만한 실패작 <뽀빠이>로 80년대를 시작한 알트먼은 오랜 기간 자신의 명성을 회복할 기회를 잡지 못했다. 원작만화의 캐릭터들을 고스란히 끌어오고 슬랩스틱 코미디, 뮤지컬 그리고 무성영화의 스타일을 한데 버무려놓은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오직 올리브 역을 맡은 셜리 듀발의 독창이 얼마나 끔찍한 것이었던가 하는 기억밖에 남지 않는다. 그게 또 알트먼의 의도였을 테지만, 여하간 이 영화는 작가의 ‘냉담함’이 영화의 정서적 매력을 완전히 거세시켜버릴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희귀한 예이다. 달리 보면 <뽀빠이>는 알트먼의 ‘진정한’ 실험영화일 수도 있다. 주로 텔레비전에서 작업했던 80년대 후반, 알트먼은 장 뤽 고다르, 데릭 자만, 켄 러셀, 그리고 니콜라스 뢰그 등과 함께 옴니버스 영화 <아리아>(1987)를 만들었는데, 여기서 그는 18세기 귀족들의 오페라 극장에 눈요깃거리로 초청된 정신병자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 외 <사랑의 열정>- 이 영화에서 알트먼은 <기나긴 이별>에 이어 다시 한번 (빔 벤더스를 경유해서) 안토니오니를 불러들인다. 또한 알랭 레네의 영향도 조금쯤 감지할 수 있다-, 그리고 <위험한 사랑>(Beyond Therapy, 1987)이 이 시기의 필모그래피를 채운다. 설득력 있는 파국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러한 침체기를 거친 뒤에 나타난 <플레이어>와 <숏 컷>은 진정 놀라운 영화이다. 알트먼은 이후 자신의 영화들에서 단지 냉담한 시선만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거의 해부학적이라 할 만한 꼼꼼함으로 그 자신이 속한 시스템의 구조를 파헤치는 한편 그것에 통렬한 저주를 퍼붓는다. 파국은 보다 설득력 있는 것이 되었다(<숏 컷> <패션 쇼>). 이전의 영화들에서 잘 드러나지 않았던 계급의 문제가 부상하고 이는 유머 가득한 영화의 구조 속에서 오히려 더욱 신랄하게 다루어진다(<캔자스 시티> <닥터 T>(Dr. T & the Women, 2000), <고스포드 파크>). 물론 알트먼은 한동안 상승곡선을 그리던 그의 경력에 찬물을 끼얹은 <진저브레드맨> 같은 영화도 내놓았다. 이건 <기나긴 이별>에 비하면 지나치게 평범한 필름 누아르이다. 하지만 사랑을 너무 많이 받은 상류층 여성에게만 나타난다는 ‘헤스티어 콤플렉스’에 걸린 아내, 한껏 멋을 낸 옷차림으로 병원에 찾아와 수다를 떨어대는 부르주아 여성들, 그리고 그들 가운데 놓인 혼란에 빠진 의사의 모습을 보여주는 <닥터 T>는 아주 성공적이라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분명 흥미로운 부분들을 찾을 수 있는 영화이다. 이제 <고스포드 파크>를 통해 다시 한번 온전히 르누아르의 세계로 들어간 알트먼은 정말로 그 세계의 ‘확대’를 모색하고 있는 듯하다. 이 영화가 비록 <숏 컷>만큼의 흥분을 가져다주진 못하겠지만, 아마도 <캔자스 시티> 이후 잠시 알트먼을 잊고 있었던 이들에게 그의 존재를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게 될 것임은 분명하다. 유운성/ 영화평론가 akeldama@netian.com▶ <고스포드 파크>, 혹은 인간 난장의 오만한 지휘자 로버트 알트먼 ▶ 로버트 알트먼의 동료들

김은형의 오! 컬트 <넥스트 베스트 씽>

물론 최선은 완벽한 남자를 만나는 것이다. 동석한 친구에게서 “정말 사람좋게 생겼다”는 따뜻한 위로를 들을 필요없고, 함께 피트니스센터를 다니기로 했을 때 “등록비가 10만원이래. 내일까지 내 계좌로 넣어줘” 따위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 딴에는 서프라이즈 해준답시고, 바꾸러가는 수고를 덤으로 얹어주는 선물은 절대 하지 않고, 아이가 있을 경우 둘 다 바쁠 때는 당연히 자신의 사무실이나 약속장소에 아이를 데리고 가는. 어쩌다가 내가 한눈을 팔아도 “다음엔 발렌타인 30년을 마시자고 해”라며 여유있게 농담 한마디를 건네는. 그러나 내가 아는 사람 중에는,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 중에도,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 중에도 이런 파트너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없다. 경험으로 봤을 때 최선은 영화 속에나, 플라톤의 이론 속에나 있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건 어떤 차선을 선택하느냐인데 마돈나가 선택한 차선(‘넥스트 베스트 씽’)은 차선 중의 최선으로 보인다. 비현실적으로 들리겠지만 이 영화에서는 생활인으로서의 마돈나와 마돈나적인 라이프스타일이 공존한다. 실연당한 뒤 “또 2년을 허비했어. 좀더 나이를 먹으면 아이를 낳을 수도 없단 말이야” 질질 짜는 마돈나의 모습을 보는 건 통쾌한 구석까지 있다. 음악에서나 이전의 영화에서나 마돈나의 이미지는 대개 내가 원하는 건 뭐든지 얻을 수 있다는 식이었으니까. 그 모습은 부러우면서도 꼭 “빵이 없으면 고기를 먹으면 되잖아”라고 말하는 마리 앙투아네트를 보는 것 같은 느낌도 든다. 그렇다고 이 영화에서 마돈나가 평범한 선택을 하는 건 아니다. 그는 게이친구 로버트와 대안가족을 만든다.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에서 백명의 남자친구가 부럽지 않은 줄리아 로버츠의 게이친구 역을 했던 루퍼트 에버렛이 여기서도 멋진 게이로 등장한다. 그는 실연으로 괴로워하는 마돈나를 위로하기 위해 전 애인을 찾아가서 엿을 먹이고, 마돈나의 침대에서 함께 뒹굴뒹굴하며 텔레비전을 보기도 한다. 너무 많은 마티니잔에 의해 잠시 자신의 정체성을 까먹은 로버트와 애비(마돈나)는 하룻밤의 실수로 아이를 가진다. 한참 뒤에 애비의 전 애인 아이로 밝혀지기는 하지만. 아이를 위해 한지붕 아래 살면서 이들은 훌륭하게 부모노릇을 한다. 물론 부부는 아니다. 아주 가까운 친구에게 애인이 생기면 섭섭한 감정이 생기듯 이들은 서로의 애정생활에 샘을 내기도 하지만 그뿐이다. 오랫동안 한 이불을 덮었다는 이유로 양해해야 하는 무례함이나 거짓말, 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게 진정한 인생이라는 듯 독신친구들을 향해 피우는 구차한 거드름 따위가 필요없는 관계다. 이 영화도 그렇지만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이나 <파니 핑크>처럼 ‘잘 키운 게이친구 하나, 열 애인 안 부럽다’식의 관계설정이 영화에서 종종 등장한다. 단지 영화의 판타지적 속성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나에게도 게이친구가 있다. 하룻밤의 사고를 칠 경우 게이 문중에서 당할 쪽팔림을 두려워하는 소심증 환자이기 때문에, 그리고 좋은 아빠가 되기에는 게을러터졌기 때문에 나중에 내 아이를 키울 일은 없겠지만 실연을 당했을 때 “쌔고 쌘 게 남자야” 따위의 비난만도 못한 위로를 하는 여자친구보다 나은 친구다. 남녀가 한지붕 아래 사는 건 곧 섹스하고, 결혼하고, 애를 낳는 것을 의미하는 한국에서 게이친구를 갖는다는 건 좀더 특별한 것 같다. 내 친구들에게 그 친구 이야기를 하면- 쫀쫀한 년이라는 욕일 때도 많은데- 대부분 부러워한다. 이 작품의 국내개봉 제목이 이렇게 바뀌었더라면 좀더 많은 관객이 특히 여성 관객이 들지 않았을까 싶다. <나도 게이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김은형/ <한겨레21> 기자

정성일의 <복수는 나의 것> 비판론 [1]

저 사람들을 용서해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악의 편견은 공허해져버렸다. 스스로 악이고자 했던 것은 일종의 선일 뿐이며, 악의 매력은 무(無)화시키는 힘에 집착할 뿐이므로 무화(無化)가 완성된 이후에는 그것은 더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악의는 ‘가능한 최대한으로 존재를 무(無)로 변모’시키려 했다. ‘그러나 그의 행위가 실현이므로 무가 존재로 변하고, 동시에 악인의 절대성은 예속으로 들어선다.’ 다른 말로 하면, 악은 선이 그렇듯이 하나의 의무가 되었다. - 조르주 바타유 <문학과 악> 모든 말은 말하여지기 위하여 말하여지지 않은 곳 속에서 그 자체를 둘러싼다. 그리고 문제는 이 모든 말이 어째서 이 금지 자체를 말하지 않는가를 아는 것이다. 즉 이 금지는 그것을 인정하고자 하기도 전에 인정될 수 있는 것일까? 어떤 말은 그것이 말하지 않은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의 부재조차도 표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진정한 거부는 금지된 말을 배격한 행위에까지 확대되며, 그 부재가 인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 삐에르 마실레 <문학생산의 이론을 위하여> 코러스: (좀 난데없긴 하지만… 중략… 록 밴드) U2는 그들의 이미지를 동명영화에 담았습니다. 특히 는 정말(본인들이야 진지했겠지만, 듣는 사람들을 진짜 웃긴) 히트였죠. “더운 여름날 로스앤젤리스의 한 호텔 방, 나는 존 콜트레인의 러브 수프림스를 듣고 있었지, (중얼중얼) 옆방의 커플은 목사가 나오는 티브이 프로를 보고 있다네… (그러더니 난데없이 흥분해서) 내가 아는 신은 돈이 부족하지 않다구! 엘살바도르의 하늘 위로 비행기가 날아가지… 미국으로 가기 위한 돈 계단… (어쩌구저쩌구)” 이 내레이션은 너바나의 벨기에 공연에서 다시 패러디되었습니다. “나는 벨기에의 한 호텔에 앉아 있다네, (쫑알쫑알) 갑자기 벨기에의 와플이 먹고 싶다네, (궁시렁궁시렁) 벨기에 와플을 먹기 위한 돈 계단 (어쩌구저쩌구)” (이게 텔레비전에서 다시 인용되는데) 소녀가 하루는 학교에 안 가겠다고 떼를 씁니다. (중략) 그러자 아버지가 일장 연설을 합니다. “네가 학교에 안 가겠다고 하는 동안, 엘살바도르의 상공에서는 미사일이 떨어지고 있다구… (어쩌구 저쩌구)” 목자와 양떼 올해 가장 웃기는 대사를 꼽으라면 나는 이의없이, 판결문, 차영미 피살사건을 심리한 결과, 박동진이, 한국무정부주의자 동맹의 일원을 고문하고, 살해한 죄가 인정되므로, 재판부 전원합의에 의해, 무산계급과 혁명의 이름으로 사형을 언도한다, 라고 쓰여진 종이를 박동진의 가슴에 칼로 꽂을 순간을 선택할 참이다. 이건 비꼬는 말이 아니다. (어찌되었건) 장사는 끝났다. 그렇다면 이제는 진담을 말해야 한다. 목자와 양떼들 사이에서 거짓말쟁이 소년은 누구였는가? 우리는 늑대를 비난해서는 안 된다. 늑대는 양을 잡아먹어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목자는 잃어버린 단 한 마리의 양을 찾아 오늘도 헤맬 것이다. 하지만 누가 영화에서 본 것에 보지 않은 것을 덧붙이는가? 보았다고 말한 것이 정말 거기서 보이는가? 이제 소설을 쓰는 일은 중단되어야 한다. <복수는 나의 것>을 보고 너무나 잔인해서 기절할 뻔했다고? 아마 그 말을 듣고 가장 먼저 웃을 사람은 박찬욱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웃자고 만든 영화이기 때문이다. 이건 내가 아니라 박찬욱이 한 말이다. “어떤 사람들이 아무리 호러라고 주장해도 나는 코미디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사람들이 안 웃어도 모든 장면 또한 다 웃음이 있다.” 나는 그 말이 진심이라고 생각한다. 붉은 페인트가 많이 사용되고, 14명이 누울 자리가 부족하게 죽은 척하고 누워 있다고 해서 영화가 잔인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영화광 박찬욱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문제는 정말 사람들이 웃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에는 무언가 서로 빗나간 대상이 있다. 왜 웃음의 대상이 불가능한 욕망이 된 것일까? 반대로 대중들은 어디서 영화가 바라지 않는 오해의 환상을 연출해낸 것일까? 이 숨바꼭질의 진짜 술래는 누구일까? 왜 술래는 속지 않는가? <복수는 나의 것>은 처음부터 술래잡기를 자처하는 영화이다. 이 영화의 첫 대사, 그러니까 시작하자마자, 전 착한 사람입니다, 성실한 근로자죠, 라는 여자의 목소리가 먼저 들릴 때, 그리고 나서야 그 목소리와 글의 주인이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순간 우리는 경기장에 들어서는 것이다. 이 경기는 끝까지 계속되는데, 이 술래는 자기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라고 말한 그 장소로 되돌아와야 한다. 경기장은 결국 거기이다. 엽서에 그려보낸 강가는 실재하는 장소이고, 그 장소에로 모든 등장인물들은 결국 돌아와야 한다. 영화는 거기서 시작해서 거기서 끝난다. 술래에게 붙들려 그 장소로 가면 그건 결국 죽는 것이다. 그러나 그림 그려진 그 강가의 물 속으로 카메라가 잠길 때, 그 순간 의도적인 페이드가 개입할 때, 우리는 이제부터 벌어지는 이야기가 사건인지 상상인지, 실재인지 무의식인지, 종잡기 힘들어진다. 그렇게 생각할 만한 이유. 라디오 소리를 듣지 못하는 류가 신청엽서를 보내고 누나와 듣는(척 한)다. 글은 하나인데,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그리고 글을 쓴 사람 중 어느 것 하나도 일치하지 않는다. 결여를 결여로서 자리매김하는 과정으로서의 빈자리의 술래들. 그리고 다시 페이드. 생략과 설명, 원인과 결과의 비대칭 그렇게 페이드는 반복된다. 그때마다 우리들은 어리둥절해진다. 페이드는 설명을 괄호친다. 그때마다 우리는 알아서 알았다 치고, 넘어가야만 한다. 생략은 점점 과감해지고, 설명은 점점 늘어진다. <복수는 나의 것>은 빼먹고 넘어가는 것이 많은 영화이다. 반대로 지루한 설명이 반복되는 장면이 많은 영화이다. 또는 그것을 미덕으로 여긴다. 류(와 영미)가 동진의 딸 유선을 유괴하는 장면은 빼먹지만, 동진에게서 돈가방을 빼앗는 장면은 장소를 옮겨가며 그 과정을 보여준다. 류가 장기밀매 사기에 말려들어 수술하는 장면은 빼먹지만, 물에 빠져죽은 유선을 부검하는 장면은 꼼꼼하게 (복부를 가르는 데까지만 보여준 다음) 들려준다. 또는 장기밀매단 가족을 죽이는 장면은 꼭 챙긴다. 팽기사가 자해극을 벌이는 장면은 보여주지만, 팽기사 가족이 음독자살극을 벌이는 과정은 빼먹는다. 여기에는 원인과 결과의 비대칭이 존재한다. 비대칭의 구조 속에서 가장 이상한 점. 남은 것은 모두 자살, 살인, 자해, 꽁꽁 묶인 채 헐떡거리는 숨소리, 고문, 비명, 피, 그리고 죽음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이 모든 것이 2천400만원을 챙기려는 유괴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영화 중반 이후) 돈가방은 어떻게 된 것일까? 왜 아무도 그 돈가방을 기억하지 못할까? 그 비대칭 사이에서 등장인물들 사이에는 이미 벌어진 사건을 할 수 있는 한 가장 나쁜 선택으로 해결하고 싶은 의지가 개입한다. 류의 누나는 류의 바지에서 퇴직금 수령증을 보는 순간 신기하게도 유선의 유괴를 (본능적으로?) 알아차리고, 유선을 돌려주려는 그 어떤 노력을 하는 대신 그냥 자살한다. 그 누나의 시체를 차에 태워서 류는 밤새 차를 몰아 고향까지 간다. 더 대담하게 생각되는 점. 그 옆에 유괴한 유선을 태워서 같이 간다. 류는 내가 알고 있는 한 영화사상 가장 대담한 유괴범이다. 또는 가장 무모한 유괴범이다. 그리고 기어이 그 강가에 도착해서 유선은 죽어야 한다. 유선은 거기서 죽어야 할 어떤 이유도 없다. 만일 있다면 딸은 죽어서 사랑하는 아버지를 그 장소로 기어이 불러온다. (동진은 류의 방에서 때려죽일 수도 있었는데, 기어이 강가로 데려온다. 마치 딸의 추억을 되살리기라도 하듯이) 엘렉트라 이야기의 가장 무시무시한 버전. 궁금한 점 한 가지 더. 돈을 받는 데 성공했는데, 또는 애인의 유일한 혈육인 누나가 죽었는데, 영미는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그녀는 유괴에 성공한 날도 쉬지 못하고, 그녀의 말을 빌리면 “그런 자본의 이동으로 화폐의 가치를 좇나게 극대화”하는 데 성공한 날도, (아마도) 혁명동맹 건설에 너무 바쁘다. 또는 오직 그녀만이 강가에 오지 못한다. (후렴구) 내가 아는 신은 돈이 부족하지 않다구! 천국으로 가기 위한 돈 계단, 어쩌구저쩌구. 거꾸로 선 결정주의, 원인에 우선하는 결과 류는 동진을 협박하기 위해 어린 유선의 사진을 찍는다. 그런데 그녀는 류의 집에서 모두들과 참 친하게 지낸다. 그녀를 울리기 위해 달라는 목걸이를 빼앗는다. 사진을 찍은 다음, 유선의 아버지에게 보내기 위해 목걸이와 유선의 인형을 바꾸자고 제안한다. 그리고 마침내 사진과 인형이 유선의 아버지에게 도착한다. 그런데 그 사진 속의 유선의 목에는 목걸이가 걸려 있다. 어리둥절. 죽은 유선의 시신을 거두면서 딸을 죽인 자들을 찾는데, 그 앞에 유선의 목걸이를 한 뇌성마비 장애인이 나타난다. 사진 속의 목걸이와 장애인을 대조한 동진은 그가 그 순간 그 장소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장애인은 (정말 보통 사람이 해내기 힘든) 탁월한 기억력으로 류가 타고 온 자동차 번호와 색깔을 알려준다. 옥의 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원인과 결과 사이의 비대칭은 점점 이 영화를 웃음의 도가니로 몰고가기 시작한다. 사건은 원인으로 시작해서 결과를 향해 가는 대신 모든 결과가 원인을 만들어내기 시작하고, 또는 원인은 결과에 의해 채워지고, 그 순간 일어나는 대상에 대한 착란은 구조의 고정점을 정하지 못하게 만든다. 술래가 기만하는 것인가, 쫓기는 자가 착각한 것인가? 이 비대칭의 구조 안에서 실재가 모순을 일으키는 단계까지 밀고 나아가자, 그 반대로 원인과 결과의 연쇄를 차단하고 그 의미의 연쇄망의 내부에서 모순을 만들어내고 마침내 그 틈새를 메꾸는 결정주의가 개입한다. 이 순간 사악한 순환이 시작된다. 실재의 왜곡을 지배하는, 우연과 필연이 자리를 바꾸는, 모든 차이가 필연성으로 와해되는, 그래서 설명하려는 대상들이 결정상태에서 모순을 무시하고서라도 사후승인이라고 불리는 그 어떤 절대적 질서를 끌어들인다.

[Review] 리턴 투 네버랜드

■ Story 전편 <피터팬>으로부터 세월이 흘러, 피터팬을 따라 네버랜드로 갔다온 웬디는 결혼해 두 자매, 제인과 대니의 엄마가 됐다. 런던은 2차대전에 휩싸여 수시로 나치군의 공습을 받게 된다. 위태로운 전시상황에서도 웬디는 피터팬을 만났을 때의 동심을 간직하고서 수시로 두딸에게 네버랜드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러나 피터팬을 만났을 때의 웬디처럼 10대 초반인 큰딸 제인은 피터팬과 네버랜드를 꾸며낸 이야기로 여길 뿐 그 존재를 믿지 않으려 한다. 공습이 잦아져 시골 마을로 떠나기로 한 전날 밤, 피터팬 이야기를 두고 엄마와 한바탕 다투고 잠이 든 제인에게 후크 선장이 해적선을 타고 날아와 네버랜드로 납치해간다. ■ Review 어른이 되기를 거부하는 피터팬과 개구쟁이 고아들이, 인어와 인디언과 해적 후크 선장과 함께 살고 있는 네버랜드. 그곳의 흥미진진한 모험에 신이 났지만 가족을 떠나 낯선 땅에 남기가 두려워, 우리는 웬디를 따라 고향으로 돌아왔고 기어코 어른이 됐다. 그러나 피터팬과 개구쟁이 꼬마들은 아직도 그 모습 그대로 거기에서 모험을 펼치고 있을까. 1953년에 만든 만화영화 <피터팬>에 이어 디즈니가 내놓은 속편 <리턴 투 네버랜드>는 어린이들의 동심 못지않게 어른들의 향수를 자극하는 소재다. 마침 이야기는 소녀 웬디가 커서 두 자매의 어른이 된 시점에서 시작한다. 어릴 때 평화롭던 런던은 전쟁터가 돼버렸다. 포화 자욱한 런던은 웬디에게 인어가 뛰노는 네버랜드에 대한 향수를 더 부추긴다. 웬디는 제인에게 네버랜드 이야기를 싫도록 해대지만, 어려서부터 처참한 현실을 목격한 제인은 ‘동화 속에나 있는 꾸며낸 이야기’로 여긴다. <피터팬>은 네버랜드를 믿는 웬디가, 딸이 빨리 몽상에서 벗어나 어른이 되기를 바라는 부모들에게 네버랜드를 믿게끔 만들면서 끝났다. <리턴…>은 거꾸로 어른인 웬디가 어린 제인에게 네버랜드의 존재를 설득시키려고 애쓴다. 이렇게 역전된 설정이 자못 위태롭다. 포탄을 피해 대피한 제인 집의 방공호는 <피터팬>의 아늑했던 웬디의 방보다 더 네버랜드의 판타지를 갈구하게 만들지만, 네버랜드는 무엇보다 어린이들의 땅이다. 그 판타지의 생명력은 어른을 거부하는 데 있다. 그곳을 등돌리고 돌아온 어른이 일깨워주는 네버랜드가 어른의 향수 안에 갇히지 않고 어린이의 상상력으로 새롭게 살아 움직일 수 있을까. 마침 후크 선장은 중대한 실수를 범한다. 제인을 웬디로 알고 잘못 납치해간 것이다. 웬디가 다시 갔다면 네버랜드는 이전과 똑같을 수만은 없었을지 모른다. 제인이 네버랜드에서 겪는 모험은 엄마가 들려준 이야기가 사실이었음을 확인하는 수준을 크게 넘어서지 못한다. 그래도 달라진 게 있다. 후크의 왼팔을 삼킨 악어는 사라진 대신 거대한 문어가 후크를 괴롭힌다. 정치적으로 좀더 올바르게 인어와 팅커벨과 제인 등 여자들이 피터팬을 놓고 다투지 않고 서로 연대한다. 이런 식으로 별반 새롭지는 않지만 전편의 재미를 적절히 변형해 복제한다. 또 마지막에 제인과 함께 런던에 온 피터팬이 잠깐 동안 웬디와 재회할 때는 가슴이 저려오는 걸 피하기도 힘들다. <리턴…>은 디즈니사가 원래 텔레비전용으로 기획한 프로젝트를 나중에 확대해서 극장에 내건 영화다. 바닷물이 물결조차 보이지 않게 파란색 단색으로 처리되는 등 텔레비전용 애니메이션의 한계가 화면에 드러나는 건 큰 약점이다. 임범 isman@hani.co.kr

<집으로…>의 감동, 그 인공성에 관하여

● <집으로…>(감독 이정향)는 올해 나온 영화 가운데 가장 의미있는 문제작이라고 생각된다. 텍스트 외적인 차원에서 이 영화가 끼치게 될 영향만 예상하더라도 범상치 않다. 산업적으로 이 영화는 <쉬리>(1999, 감독 강제규)의 역할에 필적하는 중요성을 갖지 않을까 싶다. <쉬리>가 주제나 형식상으로 적절한 흥행 코드를 배합할 경우 한국 시장에서도 600만명의 관객 동원이 가능하다는 사상 초유의 경험을 안겨줌으로써 영화산업의 규모를 급팽창시켰다면, <집으로…>는 통상 비상업적이라고 간주돼온 요소만으로도 대형 흥행을 끌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기획과 제작의 다양성을 고무하는 기폭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작가주의/여성/어린이, 가장 비주류적인 것이 얽어낸 성취 어떠한 제작자나 투자자라도 이른바 ‘예술영화’ ‘작가주의영화’에 손대고 싶다는 욕망을 피력한다. 속칭 블록버스터나 대형 장르영화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예산을 들이면서도 합리적인 선의 자본 회수가 가능하리라는 기대야말로 그같은 욕망을 현실로 끌어내는 첩경이다(이 때문에 멀티플렉스를 중심으로 하는 주류 배급망과는 별도로, 공익성과 수익성을 절충한 대안적인 배급망을 설계할 필요성이 절실하다고 판단된다). <집으로…>는 한국영화에서 가장 비주류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온 요소들을 가지고 이런 성취를 선도해냈다는 점이 돋보인다. 쉽게 말해 산골 오지에 사는 할머니와 7살 짜리 손자 이야기를 가지고 비평과 흥행의 두 마리 토끼를 잡는다면, ‘상업영화’로 만들지 못할 소재란 없다는 용기를 주는 셈이다. 특히 이 역할을 여성 감독이 해냈다는 것도 의미있다. 여성 감독의 작품은 어떤 의미로든 주변적인 성격을 띠는 경우가 많다. 여성으로서 감독을 하는 것은 심지어 할리우드에서도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소수자의 자의식이 강해지고 여성 문제를 비롯해서 소외된 이들의 현실을 천착하는 진정성을 강하게 보여준다. 아니면 ‘여성 특유의 섬세함’을 앞세워 특화된 시장에 호소하는 것을 생존전략으로 삼기도 한다. 이정향 감독은 ‘외할머니’라는 여성의 계보를 강조하고 여성적인 섬세함이라고 부를 만한 특성을 보여주면서도 이것을 주류 영화계 안에 안착시켰다는 점에서 여성 감독의 역할을 편견없이 활성화하는 데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이 영화는 또한 사실상의 어린이영화, 성장영화로 분류할 수 있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1970년대까지는 <엄마 없는 하늘 아래>(1977, 이원세) 같은 일종의 새마을영화, 계몽영화의 범주 속에서 의미있는 어린이영화가 만들어지기도 하고, <로버트 태권브이>(김청기) 같은 어린이용 만화영화가 흥행에 성공하기도 했으나, 오늘날 한국영화계에서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제외한 어린이영화는 사실상 사각지대 중의 하나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찾아간 극장에서는 까르르거리는 보이 소프라노의 웃음소리가 관객을 행복하게 만들었다. 또한 할머니와 꼬마의 관계 발전이 멜로드라마 속 주인공의 관계공식(순정파 여인과 이기적인 남자)을 차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멜로드라마가 제공하는 풍부한 자양분을 재확인하게 된다. 이질적인 것의 충돌, 이정향 플롯 이제 <집으로…>라는 텍스트 안쪽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볼 차례다. 이 영화의 성공 요인은 ‘감동’이라고 말해진다. 코미디가 아니면서도 웃음을 지을 수 있고 결국에는 눈물을 흘리게 만든 감동은 풍부하게 발굴되어 있는 에피소드들의 효과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이정향 감독은 에피소드의 광맥을 캐어내는 자기만의 비법을 하나 갖고 있는 듯하다. 바로 이질적인 두 존재를 하나의 공간 안에 강제적으로 병치시키기라는 플롯 장치이다. 전작 <미술관 옆 동물원>에서는 ‘미술관’의 느낌을 주는 여성(우아하고 지적이지만 어딘가 폐쇄적이고 까탈스럽다)과 ‘동물원’의 느낌을 주는 남성(거칠지만 귀엽기도 하다)을 하나의 방 안에 밀어넣었고, <집으로…>는 첩첩산중을 벗어나본 적이 없는 칠순의 할머니와 도회지 물에 흠뻑 젖은 7살 소년을 오두막 안에 동거시켰다. 이질적인 것의 충돌은 당연히 많은 상황을 발생시킨다. 감독은 그것을 상상하고 관찰하면서 적절한 에피소드를 솜씨 좋게 걷어올렸을 것이다(이정향식 플롯 장치라는 개념은 한겨레문화센터 비평교실의 수강생 박순영씨로부터 얻은 통찰이다). 이 에피소드들은 매우 강력한 이야기성을 가진 메인 플롯 위에 실려 운반된다. 그 ‘이야기성’이야말로 <집으로…>의 성공을 떠받치는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보이는데,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의 문제가 이 영화에 대한 작품적인 평가를 가름하는 또 하나의 기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에 앞서 <집으로…>의 영화적 스타일과 대상에 대한 태도에 관해 말하자면, 이란 감독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영향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1987년작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를 필두로 그의 영화가 유럽에 소개되었을 때 그쪽의 일부 언론은 “키아로스타미가 세계 영화를 구원할 것이다”라는 찬사를 바쳤다. 필자 역시 1995년 한국에서 개봉되었을 때 느꼈던 기이한 전율감을 기억한다. 키아로스타미가 세계 영화를 정말로 구원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다큐멘터리처럼 보이는 소박한 접근법, 로케이션 위주의 촬영, 현지에서 발견한 비직업 배우, 무심한 듯 보이는 에피소드를 통해 사회적인 컨텍스트 드러내기, 오래되고 낡아보이는 대상에 대한 작가의 경외를 통해 현대 사회에서 소외된 전통의 문제를 우회적으로 재부각하기 같은 전략이 아름다운 페르시안 양탄자처럼 뒤섞인 키아로스타미적인 스타일이 최근 유럽의 국제영화제에서 접하게 되는 아시아영화들 가운데 하나의 흐름으로 관찰되는 것은 사실이다. 이것을 1940년대의 이탈리아 네오 리얼리즘에 비견할 만한 영향력이라고 평가한다면 지나친 속단일까? <집으로…> 역시 이러한 형식적 특징과 태도를 공유하고 있다. 물론 이 영화가 특정 대가의 영향권 안에 있다는 진단이 곧 이 영화의 미덕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청출어람은 세상 모든 신예들의 권리이자 책임이고, 좀더 적극적으로 말하자면 한국영화 비평 혹은 한국영화사 연구에서 외국 영화와의 지속적인 접촉과 상호작용이라는 이슈가 진지하게 부각될 필요도 있는 것 같다. 현대 도시인의 기대를 충족시킨 인공성의 승리 영화 <집으로…>의 감동의 원천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다양한 세대에게 폭넓게 호소할 수 있는 이야기라고 답한다면 그것은 동어반복이거나 모순적이다. <집으로…>의 극장 관객 역시 여느 상업영화들과 마찬가지로 20대의 젊은 층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어린이나 좀더 나이 든 세대가 단지 ‘섞여’ 있을 뿐이다. 할머니와 어린이라는 마이너 주인공을 가진 이 영화가 모든 세대를 만족시킬 수 있는 비결은 바로 대상에 대해 한국인들이 공유하는 집단적인 이미지를 솜씨 좋게 건드리며 하나의 이야기로 재구축한 데 있다고 생각된다. 그 대상은 모성과 농촌이다. 여기서 할머니는 모성 혹은 모성의 변형이다. 이 나이든 어머니는 시골에 산다. <집으로…>는 우리 안에 내장된 모성과 농촌 이미지를 정확히 반복한다. 듣기만 할 뿐 말하지 못하는 할머니라는 설정은 매우 상징적이다. 어머니와 시골은 그들이 낳은 자식을 도시/현대 사회/문명 사회로 내보내는 데 필요한 모든 요구들을 다 들어주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옷이 낡고 고무신이 떨어지고 지붕이 내려앉는 절대 빈곤을 감내했다. 그러면서도 도시와 자식들을 향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들은 입을 닫았고 자식들은 어머니와 시골의 관용에 대해 한편으로는 미안해하면서 한편으로는 그들이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이 같은 모성과 농촌을 개발독재시대의 권력자와 부르주아들은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악용해왔다. 도시로 나간 자식들은 농촌의 부모에게 절대 착취자들이며 개발독재의 공범자다. 오늘날에는 도시의 자동차족이 되어 농촌을 급기야 휴식과 소생의 이미지를 가진 관광상품으로 재활용한다. 이같은 원죄의식은 일년에 한두번씩 벌이는 발작적인 귀향 행렬과 효도의 세리머니로 표출되고 부모가 싸주는 촌스러운 선물꾸러미를 죄 사함의 증표로 받아들고 되돌아온다. <집으로…>에서 죄의식은 아이에게 전이되고 투사되었다. 아이가 할 수 있는 못된 짓은 고작 요강을 발로 차서 깨뜨리거나 밥숫가락 위에 얹어주는 김치를 덜어내고 비녀를 뽑아가는 정도이기에, 혀를 끌끌 차거나 함께 눈물 흘리며 카타르시스를 얻는 정도로 소화할 수 있다. 만약 그것이 외양간을 비게 만들고 지붕을 무너뜨리고 논밭을 팔아먹은 성인 세대 자신의 것으로 표현되었다면 죄의식은 감당하기 어려워지고, 영화는 웃고 울며 즐기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것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같은 성장의 역사를 직접적으로 경험하지 않은 젊은 세대가 <집으로…>에 함께 열광한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이것은 모성과 농촌의 이미지가 인공적이고 반복적으로 재생산되어 한국인의 집단의식 속에 주입되고 있지 않은가 의심케 하는 대목이다. <전원일기>를 20년이나 지속되는 국민드라마로 만들고, 개그맨이 진행하는 오락 프로그램에 나와 주름이 자글자글한 얼굴로 도시의 자식들에게 “난 잘 있다. 느그들 건강하고 가끔씩 전화해라”고 카메라를 향해 외치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한동안 히트 상품으로 만든 비결도 이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텔레비전의 모니터는 달리는 자동차의 유리창만큼이나 안전거리를 유지시키면서 노스탤지어만을 취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영화 <집으로…>는 현장에서 추출된 듯이 보이는 풍부한 에피소드와 이미지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것을 직조하는 이야기 자체는 집단적인 기억에 호소하는 매우 인공적인 것이며, 꼬마 상우는 어른의 조작된 기억을 모사하는 영특한 악동이다. 생각 여하에 따라서는 귀여운 것이 아니라 무섭다. 요컨대 <집으로…>는 영화형식상으로 다큐멘터리적인 진정성을 채용한 반면, 주제적으로는 모성과 농촌에 대한 현대 도시인들의 기대를 차용해서 감정을 끌어내고 그것을 확대재생산한다. 죄의식과 감동 그 자체가 꼭 나쁜 것은 아닐지라도,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반응이 천편일률이라면 문제가 있지 않을까. 김소희/ 영화평론가 cwgod@hanmail.net

영어로 임권택 감독론 공동 출간한 김경현

교수라기엔 너무나 털털한 모습의 김경현씨(33). 그는 한사코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책이 주인공이 되었음 좋겠다며 피플란 인터뷰를 사양하는 눈치였다. 그의 책이란 바로 지난 1월 미국의 인터넷서점 아마존에 등장한 한국영화 학술서적 . 김경현씨는 영문으로 된 이 연구서적의 공동편자 중 한명으로, 한때 <씨네21> LA통신원으로 일하기도 했고, 현재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어바인(UCI) 동아시아 어문학과에서 문화이론을 담당하며 대중문화론, 영화이론 등을 강의하고 있는 젊디 젊은 교수다. 그가 임권택 연구서를 구상한 건 석박사 과정 재학중이던 1997년, 남가주대학(USC)에서 임권택 회고전이 열렸을 때였다. <깃발없는 기수>부터 당시 최근작이던 <축제>까지 임권택 감독의 영화 20편을 튼 이 회고전에 미지의 영화나라 한국에 대한 뜨거운 관심을 표명하듯 많은 학생 관객이 찾아들었고 이에 고무된 그는 ‘임권택 영화를 중심으로 한국영화 서적을 만들어보자’는 생각을 하게 됐다. “임권택 감독을 통해서 우리는 한국영화 40년을 되짚어볼 수 있어요. 그의 잡초 같은 영화인생에 매력도 느꼈죠. 60, 70년대만 해도 영화계의 야인이었던 양반이 어떤 식으로 한국영화의 중심이 됐나, 그걸 통해서 한국영화 역사의 어떤 모순을 밝혀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은 데이비드 E. 제임스의 <임권택:한국영화와 불교>, 김경현의 <전쟁은 어떻게 기억되는가?: ‘태백산맥’에 나타난 기만적 성과 다시 남성화하는 나라>를 비롯, 조한혜정의 <서편제:그 문화적 역사적 의미>, 조은순의 <‘아다다’와 ‘씨받이’에서 여성의 몸과 발언> 등 두 엮은이를 포함한 국내외 연구가 8명의 한국영화에 대한 논문과 김경현씨의 임권택 감독 인터뷰, 한국사 연표와 임권택 필모그래피, 한국영화에 대한 문헌목록을 싣고 있다. 이 책을 만들기 위해 김경현 교수는 미국 내 영화학학회, 아시아학회 등에 필진을 모집하는 공고를 내 글을 받았고, ‘부지기수로’ 임권택 감독을 만났다. 하지만 출판사와 계약을 맺기가 쉽지 않았다. ‘시놉시스’에 해당하는 기획안을 여기저기 보냈지만 퇴짜를 맞기 일쑤었고, 그 끝에 웨인스테이트유니버서티프레스의 ‘컨템포러리 필름 앤 텔레비전 시리즈’에 채택되어 빛을 보게 되었다. “자세히 들어보면, 제 한국말이 좀 서툴다는 걸 알거에요.” 김경현씨는 건설회사 주재원이던 아버지를 따라 초등학교 4학년 때 서울을 떠났다. 동남아, 중미 등지의 외국인학교를 다녔고, USC에서 영화를 전공, 지난 97년 어바인대학의 교수로 임용됐다. 대부분의 시간을 해외에서 보냈지만 ‘영화광’이라는 그는 한국영화를 한국에 있던 사람 못지않게 많이 보았다. 한국에 올 때마다 극장에서 개봉하는 영화들을 보는 것은 물론 비디오로 그간 보지 못했던 영화들을 챙겨보는 부지런을 떨었던 덕이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는 그런 그에게 자못 특별하다. <길소뜸> <아제아제 바라아제> <씨받이> 등을 비디오로 보고 영화공부를 하기로 결심했다니 말이다. 그의 박사논문은 한국영화를 사회역사적 관점에서 접근한 <뉴코리안시네마:흔들리는 경계, 역사, 계급 그리고 성>. 임권택 연구서에 이어 그는 최근 20년간 한국영화 25편을 텍스트분석한 <뉴코리안시네마:남성성과 현대성>을 준비중이다. 문화텍스트로서의 영화를 사회적, 심리분석학적 관점에서 읽는 것이 그의 주요관심사. 그는 부인인 김진아 감독(1999년 서울여성영화제에 <빈 집> 발표)과 함께 차린 ‘픽쳐북무비스’라는 독립영화사의 이사를 맡아 김진아 감독의 장편 <그집앞> 제작도 돕고 있다. 은 곧 한글 번역판으로 국내 출간될 예정이다.

<프렌즈> 그 초강력 ‘프렌드십’의 비밀 [1]

카페인과 농담, 어리석은 연애에 구제불능으로 중독된 뉴욕의 여섯 친구들이 돌아온다. 케이블 채널 ‘동아TV’(스카이라이프 채널 713)는 현재 미국 에서 목요일 밤마다 방영되는 시트콤 <프렌즈>의 8부를 5월6일부터 방영한다. 8년 동안 갠 날도 궂은 날도 있었지만 폭넓은 대중적 인기와 컬트적 추종을 놓치지 않으며 시트콤의 새로운 장을 연 <프렌즈>의 과거와 미래, 그리고 그들이 들려주는 질리지 않는 6중주를 분석한다. 아아, 저 소파에서 뒹굴고 싶다! 뉴욕 그리니치 빌리지의 커피 가게 ‘센트럴 퍼크’ 한복판의 길고 둥근 안락의자는, 시트콤 <프렌즈>에 매료된 사람들에게 신화 속 어느 낙원 못지않은 푹신한 이상향이다. 혈연, 동창, 이웃 관계로 얽혀 단짝이 된 여섯명의 20대 백인 뉴요커들이 스크럼을 짜고 진짜 어른의 삶에 들어선다는 단출한 컨셉트의 시트콤 <프렌즈>는 1994년 가을 파일럿 프로그램이 첫 전파를 탄 이래, 평균 2400만명을 웃도는 시청자(미국)들을 텔레비전 앞 소파에 붙들어매고 무명 출연진을 할리우드 메이저 영화에 진출시키고 주제가를 빌보드 상위권에 밀어올리는가 하면 각종 잡지 표지부터 요리책(<프렌즈와 함께 요리를!>)에 이르는 출판물과 인터넷 사이트, 머그 컵과 티셔츠 가슴팍을 뒤덮으며 미디어 현상, 대중문화 신드롬으로 파장을 넓혔다. <달라스>류의 끈적한 연속극으로부터 <트윈 픽스> <사인펠드> <프렌즈> <프레지어> <앨리의 사랑 만들기> <섹스 앤 시티> 같은 옹골찬 작품들이 바통을 이어받은 1990년대는 미국의 TV에서 미국영화의 1970년대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시대였다. TV를 이유식 삼아 성장하고 영화학교에서 훈련된 인력이 브라운관에 진출해 예술영화에서나 보던 판타지, 블랙 유머, 포스트 모더니즘의 정신을 마구 풀어놓은 이 산란한 황금시대의 열매 중, <프렌즈>는 대중적 영향력과 장르적 완성도, 재미와 정서적인 파워면에서 왕관의 보석이라 부르기에 거리낌이 없다. “저건 딱 나야” 패거리를 지어 어울려 다니는 젊은이들이 몇몇 아지트를 중심으로 쇼를 끌어가는 <메리 타일러 무어 쇼> <서티섬싱> <치어즈> 같은 미국 TV 코미디의 계보를 잇는 <프렌즈>는 데이비드 크레인, 마르타 카우프만 등 스스로 맨해튼 커피숍에서 죽치는 일이 주요 일과였던 작가들의 펜 끝에서 태어났다. 크레인과 카우프만은 실제로 주변에서 보는 인물 같은 캐릭터로 채워진 시리즈를 원했다. 그들이 만난 X세대는 그런지 유행이 광고하듯 머리를 헝클어뜨리고 실존적 자문자답으로 소일하는 게으름뱅이들이 아니라 고교 졸업 이후 물심양면으로 자기자신을 부양하고 인생의 낙을 찾기 위해 애쓰는 활기찬 사람들이었고 <프렌즈> 여섯 친구의 유전자는 그렇게 프로그램됐다. 작가들이 열망한 최고의 찬사는 “저건 딱 나야. 저건 딱 내 여자친구야” 같은 반응이었다. 1994년 <프렌즈>를 선보인 파일럿 프로그램은 처음부터 캐릭터 스케치에 매진했다. 친구들의 응접실 안주인 노릇을 자처하는 모니카는 인생의 카오스를 정돈하려는 가망없는 노력을 결벽증과 정리벽으로 표현하는 아가씨다. 요리사인 그녀는 오빠인 로스에 비해 부모의 사랑을 덜 받은 탓인지 맛있는 음식으로 타인의 애정을 구한다. 자연사 박물관에서 공룡과 화석을 연구하는 고생물학자 로스는 쿨하게 살고 싶어하지만 모범생 고문관 기질을 어쩔 수 없는 남자. 고교 시절부터 동생의 예쁜 친구 레이첼을 짝사랑한 그는 뒤늦게 커밍아웃한 레즈비언 전처 사이에 아들 벤이 있다. 결혼식장에서 도망친 신부의 모습으로 <프렌즈> 첫회에 뛰어든 레이첼은 부유한 집안 응석받이 공주의 안전한 삶에서 뛰쳐나와 웨이트리스로 독립의 걸음마를 내딛는다. 쇼핑광에 울보라는 점은 여전하지만. 모니카의 전 룸메이트인 채식주의자 피비는 말도 안 되는 노래를 짓는 싱어송 라이터이자 안마사로 영기를 느끼는 능력도 있다. 다른 별에서 온 듯한 엉뚱한 사고방식과 어휘의 소유자로 모든 상황을 생각지도 못한 각도에서 해석하는 촌철살인이 특기다. 모니카와 레이첼의 건너편 아파트에 사는 로스의 대학동창 챈들러는 조크의 귀재. 날카롭다 못해 스스로를 벨 듯한 그의 조크는 알고보면 불안과 부적응과 수줍음을 가리는 방어기제다. 챈들러의 룸메이트 조이는 잘 풀리지 않는 배우. 상식 결핍증이 심해 누군가 ‘유니섹스’라는 단어를 쓰면 “You need sex”로 알아듣고 “나 며칠 전에 섹스 했어”라고 말할 지경이지만, 섹시한 여자와 샌드위치에 대한 그의 순진한 집착은 경지를 넘어 사랑스럽기까지 하다. 공룡에 대한 로스의 몹시 지루한 수다를 듣고 있는 친구들의 오후 한때를 보여주는 한 에피소드의 오프닝은 <프렌즈>의 선명한 캐릭터 디스플레이 전략을 잘 예증한다. 로스의 강의를 듣는 척하는 다섯 사람의 속마음이 보이스 오버로 깔린다. 모니카 : ‘또 지겨운 공룡 얘기야, 언제나 바닥날까!’ 레이첼: ‘저 진지함, 너무 사랑스러워’ 챈들러: ‘슈퍼맨과 투명인간을 합친 게 나라면 근사할 텐데.’ 조이: ‘디띠리리 띠리띠리 띠리(‘아기 코끼리 걸음마’의 콧노래).’ 피비 : ‘누가 노래를 부르고 있지?’ 말이 앙상블이지 제일 잘생기고 매력있는 주인공 주변을 괴짜 캐릭터들이 공전하는 구도에 안착하는 여느 TV 시리즈들과 달리 <프렌즈>는 정육각형의 앙상블을 제공한다. <트래시 컬처>의 저자 리처드 켈러 사이먼이 <‘프렌즈’에 관한 헛소동>에서 지적했듯, 캐릭터끼리의 대비와 보완의 밸런스가 셰익스피어의 로맨틱 코미디 <헛소동>에 비견되는 <프렌즈>의 여섯 남녀는 완벽한 ‘식스팩’이다. 모니카의 거실에 여섯명이 다 모여 있는데 누군가 문을 노크하자 매우 당황하며 자기들의 머릿수를 세어보는 장면이나 영국 태생 에밀리와의 결혼으로 로스가 동아리에서 떨어져나갈지 모른다는 예고가 불러일으킨 패닉은 극중 인물과 시청자 모두 여섯의 공존과 그들의 라이프 스타일을 얼마나 자연스런 정상상태로 받아들이고 있는지 엿보게 한다.

[도쿄리포트]30년전 인질극이 낳은 두 영화

<돌입하라! ‘아사마 산장’ 사건> vs <빛의 비>, ‘아사마 사건’에 대한 두가지 접근방식지금으로부터 30년 전인 1972년의 2월19일. 혁명이라는 목표를 내걸고 활동하면서 그때까지 금융기관에 대한 습격이나 폭탄 테러 사건을 일으켜온 연합 적군의 멤버 5명이 피서지인 나가노현의 가루이자와에 출현한다. 이곳에서 경찰관들과 총격전을 벌이던 이들은 가와이 악기라는 회사의 휴양소인 ‘아사마 산장’으로 장소를 옮겨 관리인 부인을 인질로 잡은 채 틀어박힌다.5월11일 개봉할 <돌입하라! ‘아사마 산장’ 사건>은 이 사건이 발생한 2월19일부터 경찰 기동대의 진압으로 인질이 풀려난 28일 오후 6시17분까지의 10일간을 철저하게 경찰의 시점에 서서, 다큐멘터리 분위기로 그린 작품이다. 감독은 <주바쿠>를 통해 은행 경영위기의 이면을 엔터테인먼트 작품으로 만든 하라다 마사토. 사건 당시 경비 막료장으로서 현장을 지휘한 사사 아쓰유키가 직접 쓴 책 <연합 적군 ‘아사마 산장’ 사건>을 원작으로 한 이 작품에는 <쉘 위 댄스?>의 야쿠쇼 고지가 주인공인 사사 역을 맡고 있다. 아무 요구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산발적인 총격만 되풀이하는 범인들에게 신경질을 내는 경찰의 인간적 고뇌와 클라이맥스 부문의 강제 진압을 극적으로 그린 이 작품은 오락영화로서 일정의 수준이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체포 순간까지 범인들이 등장하지 않는 등 사건의 배경이 전혀 보여지지 않는 탓에 권선징악만을 이야기하는, 단순한 영화가 돼버렸다.한편 지난해 12월에 공개된 <빛의 비>는 아사마 산장 사건 직전, 산 속 은신처에서 군사훈련을 하던 연합 적군 내부에서 발생한 린치 살인사건의 원인을 밝혀내려는 영화였다. 이 작품은 범인들과 같은 세대인 다테마즈 와헤이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지만, 소설 <빛의 비>를 영화화하는 촬영현장과 촬영중인 영화의 내용이 동시에 전개되는 이중구조로 얽혀 있다. 원작자와 같은 세대인 다카하시 반메이 감독은 이런 구조에 관해 “어떻게 하면 현재적 의미를 갖는 영화가 될 것인가, 이 사건을 젊은 세대들에게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을 때 제작자가 이 아이디어를 찾았다”고 <키네마순보>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그러나 극중에서 30년 전 연합 적군 멤버를 연기하는 현대의 젊은 배우들의 모습이 상투적인 탓에 당시 세대들이 본다면 실망할 수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사마 산장 사건은 텔레비전을 통해 생중계됐고, 당시 많은 사람들이 여러 입장에서 “체험했다”고 말해도 될 만큼 큰 사건이었다. 그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린치 살인사건도 60년의 일미안전보장조약 반대 운동으로 정점을 기록한 뒤 서서히 후퇴해온 학생운동의 비참한 말로로 보는 이가 적지 않았던 사건이었다. 이처럼 영화화가 잇따르는 것만 봐도 이 사건이 일으킨 파장이 30년이 지난 현재까지 미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도쿄=사토 유 통신원

돈벼락이닷! <일단 뛰어!>

어느날 차 위에 21억원이 든 돈가방이 떨어진다. 우리 셋 밖에 모르잖아? 3분의 1만 갈라도 이 돈이면 더이상 `이모·고모들' 상대로 호스트 아르바이트를 안 해도 되고, 이 돈이면 아빠 연봉 십수년어치니 집안 한번 일으킬 수 있고, 이 돈이면 아니꼬운 졸부 새아빠 밑에서 튈 수 있는데…. `고교생의 일상탈출'을 내건 청춘코믹영화 <일단 뛰어>의 시작이다. `거만한 얼굴' 21살 성환(송승헌)과 `기생 오래비' 19살 우섭(권상우), `심심한 놈' 진원(김영준)은 고교 3학년 같은 반 친구다. 학교 공부는 일찌감치 관심을 끊었고 졸부집 아들인 성환의 차를 타고 껄렁거리는 이들의 모습은, 하지만 밉지 않다. 종로서 강력계 신참형사인 지형(이범수)은 더더욱 미워할 수 없는 존재다. 궂은 일은 다 시키는 반장 밑에서, 밤샘 야근에 집에도 못 들어가 전기 끊기고 차 견인되기가 일쑤다. 아, 이제 캐나다로 잠시 몸을 피하고 인생 펴나 했더니 근데 웬걸? 이 거액을 사채업자 집에서 목숨 걸고 훔쳐 나온 도둑 형제(정규수·이문식)들이 죽기살기로 쫓아오고 사채업자의 청부를 받은 킬러가 끼어든다. “야! 일단 뛰어~”<일단 뛰어>는 `일단' 밉지 않은, 재미있는 영화다. 거액의 돈이 굴러온다는 흔한 소재지만 시나리오도 탄탄하고, 텔레비전에서 보다 주목받았던 젊은 배우들의 영화 연기들도 모두 기대이상이다. 특히 과장하기 쉬운 형사역을 코믹함을 잃지 않으면서도 절제하며 연기한 이범수는 인상적이다. 연출과 시나리오를 맡은 조의석 감독은 1976년생 답게 젊고 비판적 의식이 반짝거리는 요소들을 영화 곳곳에 박아 웃음을 끌어낸다. 경찰들은 매너리즘에 빠져있고, 선생은 `군 매거진'을 읽고 있으며, 사고친 학생은 교실마다 최신형 에어콘 쫙 깔아주면 해결되는 그런 식이다. 학교 모습이 적잖이 나옴에도, 주인공들과 학교는 겉도는 느낌인 건 아쉽다. 심각하란 게 아니라, 왜 이들이 고3으로 설정됐는지 잘 와닿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건 `코믹영화' 앞에 `청춘'이란 말까지 붙이기엔 차별성이 좀 떨어진다는 말도 된다. 10일 개봉. 김영희 기자dora@hani.co.kr

비오는 날 공포영화

나는 비가 올 때 집안에 혼자 남아 라면을 먹으면서 공포영화를 빌려보기를 좋아한다. 시사회를 볼 기회가 생겨도 기꺼이 비디오를 선택할 구실이 되는 것은 비다. 비를 즐기기 위한 여러 가지 영화가 있겠지만, 좀처럼 무서움을 타지 않는 나는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핑계삼아 조금이라도 공포 분위기를 만끽하고자 저주, 영혼, 악령 따위의 단어들이 포함된, 무섭다기보다는 하품이 나오거나 웃음이 나오고야 마는 80년대 공포영화들을 잔뜩 빌린다. 사실 이럴 때 보는 비디오들은 비의 분위기를 돋우기 위한 한낱 핑곗거리에 불과하다. 공포영화 특유의 긴장감 있는 음악과 비명소리보다 빗소리에 더 관심이 가고, 그나마 라면을 먹으면서 영화를 보면 눈앞이 온통 뿌옇게 흐려지기 때문에(이건 안경낀 사람들만 이해할 수 있을 거다) 화면이 어느 정도의 공포감을 주는지도 이래저래 놓쳐버리게 된다. 이번에 전주에서도 비가 많이 내렸다. 처음부터 영화를 많이 보지 못할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시간이 나는 대로 짬짬이 영화를 보러가고 전주의 맛집들을 찾아다녔어야 했을 나는 비를 핑계로 눅눅한 여관방에서 뒹굴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 결과 이번 전주영화제 동안 본 영화 중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건 양파링을 먹으며 여관방 텔레비전으로 본 <마녀와 루크>가 되어버렸다. 안젤리카 휴스턴이 아이들을 생쥐로 만드는 몹쓸 대마녀로 나오는 이 어린이영화도 그나마 시일이 지난 뒤엔 ‘비오는 날에 본 공포영화’로 기억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손원평/ 자유기고가 thumbnail@freech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