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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1997)

'후쿠오카' 장률 감독 - 관계를 잇는 소통에 대하여

중국과 한국 사회를 비추며 작품 활동을 해온 장률 감독은 일찌감치 일본 후쿠오카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찍기로 마음먹었다. 아시아 포커스 후쿠오카국제영화제에 이런저런 이유로 초청받아 그곳을 오간 지 10년이 되자 “후쿠오카가 궁금했고 관련 영화를 만들어야 하지 않겠나” 싶었기 때문이다. 현지 지인들에게 후쿠오카에서 영화를 찍겠다고 말하자 사람들이 언제 찍느냐고 물었다. 누구나 먼 곳에 사는 친구에게 언젠가 찾아가겠다고 기약 없는 약속을 하지만, 장률 감독은 영화로 약속하고 영화로 약속을 지켰다. <후쿠오카>는 서울에서 헌책방을 운영하는 제문(윤제문)이 손님이자 말동무인 소담(박소담)과 함께 후쿠오카를 여행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담은 영화다. 제문의 대학 동아리 선배지만 연애사가 복잡하게 얽힌 탓에 28년 간 연락을 끊었던 해효(권해효)까지 등장하면서 세 사람의 기묘한 어울림이 시작된다. <경주>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이하 <군산>) 등 지방 도시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삶의 면면을 섬세한 눈으로 들여다보는 장률 감독. 그와 나눈 대화를 옮긴다. -10년 동안 다닌 후쿠오카는 어땠나. =아주 편하다. 후쿠오카는 일본 같지 않다. 일본 같지 않다는 건, 도쿄 같지 않다는 뜻이다. 다양한 문화가 섞여 있고, 개인주의 성향도 덜하다. 예를 들면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옆자리 사람들과 말이 통하면 같이 술을 마신다. 이건 도쿄에서 상상도 못하는 일이고, 서울에서도 흔치 않은 일이다. 도시는 세련됐는데 사람들 마음은 개방적이어서 재밌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공간에서 윤동주 시인이 돌아가셨다. 윤동주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후쿠오카에 윤동주 시비를 세우자는 움직임이 있지만, 반대가 심해 아직 성사되지 못하고 있다. 이건 또 뭘까 싶고 후쿠오카가 계속 궁금했다. 영화에서 해효가 술집을 운영하면서 옛사랑 순희를 기다리고, 술집에 윤동주 시인의 시를 걸어놓았다. 후쿠오카에는 이런 복합적인 분위기가 있다. -배우 박소담이 전작 <군산>에 이어 또 출연한다. <군산>에서 일본 교포 주은을 연기하면서 부르던 일본 노래를 <후쿠오카>의 소담도 부르는데. =군산이란 도시가 일제강점기에 유명한 항구도시였고, 군산을 거쳐 한국의 쌀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래서 <군산>의 주은과 아버지 이 사장(정진영)을 일본 교포로 설정했다. 그런 다음 ‘일본에서 내가 제일 잘 아는 도시가 어디일까’ 생각해보니 후쿠오카여서 두 캐릭터를 후쿠오카 출신으로 정했다. 실제로 후쿠오카는 한국과 가깝고, 재일교포가 많이 사는 곳이다. 두 캐릭터가 부르는 일본 노래는 아이들이 부르는 어머니에 대한 노래다. 주은의 어머니는 죽었고 소담의 어머니는 집을 나가버렸다. 두 캐릭터 모두 성장과정에 어머니란 존재가 없다. 그렇다면 두 캐릭터 모두 어머니가 그립지 않겠는가. -<후쿠오카>의 소담은 영화 중반까지는 <군산>의 주은과 유사하지만 후반부에 가면 완전히 다른 성장 배경을 가진 것으로 그려진다. 말하자면, 장률 감독의 전작을 의식하면서 보는 관객을 배반하는 셈인데. =이 세상은 배신의 연속이다. (웃음) 물론 한 배우가 두 영화의 인물을 각각 연기했지만 <후쿠오카>는 <군산>과 완전히 다른 영화다. 사람들은 의외로 비슷한 면이 많다. 이 사람 몸에서도 저 사람이 보이고, 저 사람 몸에서도 이 사람이 보인다. -장률 감독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은 캐릭터에 자신의 성격이 반영되는 신선한 경험을 했다고 말한다. <후쿠오카> 역시 마찬가지인가. 배우 권해효, 윤제문, 박소담의 실제 성격이 반영됐나. =내 영화뿐 아니라 다른 영화에도 배우의 어떤 면이 들어간다고 본다. 그게 뭐냐면, 그 사람의 냄새다. 그 사람의 냄새는 어디 갈 수가 없다. 사람마다 어떤 특징이 있다. 동작도 좋고 표정도 좋고 언어도 좋다. 그게 영화 속에서 작용한다. -가까이에서 지켜본 박소담, 권해효, 윤제문 배우간의 호흡은 어땠나. =세 배우 다 아주 좋은 배우다. 세 사람 모두 연기를 위해 이 세상에 오지 않았나 싶다. 박소담은 몸에 연기가 딱 붙어 있다. 연기 세포 같은 게 있다. 세명이 다 그렇다. 배우들은 누구와 함께 연기하는지에 따라 연기가 다를 수 있다. <후쿠오카>의 세 주연배우는 서로를 너무 좋아했다. 서로 연기하는 것도 좋아했다. 배우로서 함께 연기하는 배우에게 어떤 주문을 받고, 자신도 또 다른 연기를 주었다. 현장에서 배우들이 아주 유창하고 아름답게 서로 연기를 주고받는 모습을 보니 너무 좋았다. -동네 책방 주인 제문과 젊은 손님 소담이 즉흥적으로 후쿠오카 여행을 떠난다. 관객에 따라 두 캐릭터가 함께 숙소에 머문다는 설정에서부터 불안감을 느낄 수도 있는데. =우리 삶에서도 타인을 일단 믿는 사람이 있고, 의심이 많은 사람이 있다. 남녀 둘이 함께 있으면 뭔 일이 나지 않을까 걱정하지만, 실제로 뭔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경우도 많다. 나이와 성별에 관계없이 서로 통하는 사람들이 있다. 통하기만 한다면 젊은이도 할아버지, 할머니와 친구가 될 수 있다. 그게 우리 삶의 아름다움이 아니겠나. 영화를 준비할 때부터 제문과 소담, 해효 세 캐릭터를 남녀 관계로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해효와 제문 사이의 28년간 묵은 감정이 어떻게 풀리는가 생각해보면, 사람을 믿는 소담 같은 캐릭터가 풀어줄 수 있지 않겠나 싶다.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고 소통하고자 하는 소담과 같은 사람. -서울에서 헌책방을 운영하는 제문이 해효, 소담과 함께 후쿠오카의 헌책방을 방문한다. 배경이 서울의 정은서점과 후쿠오카의 이리에서점인데, 두 헌책방은 마치 미로 같아 보이기도 하고 때론 아늑한 비밀 공간 같아 보인다. =책방을 아주 좋아한다. 요즘은 그렇지 않은데, 예전에는 며칠만 책방에 못 가도 불안했다. 요즘은 스마트폰이 있고 텔레비전이 있지만, 내가 성장할 때만 해도 다른 사람과 소통하는 길은 책밖에 없었다. 그리고 책방에서 서로 주고받는 눈길은 꽤 아름답다. 금품이 있는 곳에서 나누는 눈길과는 다르다. 과거에는 책방에서 사랑도 많이 이뤄졌다. 해효와 제문은 1980년대에 청년 시절을 보냈다고 설정했고, 그렇다면 책방에 대한 특별한 느낌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PC방 대신 책방에 와 있는 소담은 옛날 사람들의 정서와 통할 수 있다고 봤다. 지금 젊은 사람들 중에도 소담 같은 사람이 있을 것 같다. -중국에서 책방을 자주 다니던 청년이었나. =그땐 나만 그런 게 아니고 세상에 호기심이 있는 청년들은 다 책방에 다녔다. 중국에서 도서관은 좀 달랐다. 출입 조건이 까다로웠다. 직장도 따지고 누구나 들어갈 수는 없는 공간이었다. 도서관에 일종의 권위가 있었다. 90년대 후반부터 차차 좋아져서 지금은 누구나 갈 수 있다. 반면 서점은 당시에도 누구든 막지 않았다. -차기작은 무엇인가. =<야나가와>를 다 찍어놓고 후반작업을 못하고 있다. 중국 배우들을 데리고 일본과 중국을 오가며 촬영했다. 색보정은 베이징에서 하고 믹싱은 타이완에서 하는데, 코로나19 때문에 내가 그 어디도 못 가고 있다. 주제는 역시 사랑이다.

드라마 <비밀의 숲2>, 검경 수사권 조정을 ‘비숲’ 방식으로

침대에서 과자를 먹으며 스마트폰으로 SNS를 뒤적거리던 경위 한여진(배두나)이 몸을 일으켜 TV 볼륨을 키운다. 그가 경찰 고위 간부의 비리 뉴스에 반응하는 것은 자신의 직무와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tvN 드라마 <비밀의 숲2>의 1회에서는 이쪽 귀로 들어와서 저쪽 귀로 빠져나가는 라디오 뉴스들, 망막에 들어와 정보로 취합되지 못하고 금세 까먹게 되는 뉴스 화면의 양이 너무 많았다. 생초보도 드라마를 이렇게 쓰진 않을 텐데. 왜일까? 검경수사권 조정이라는 이번 시즌의 이슈에 접점을 대지 못하다가 인물들의 좌표가 정리되는 2회부터 비로소 자세를 고쳐앉았다. 2년 전 서부지검 비리를 밝히는 특임팀 안에서 공조했던 검사 황시목(조승우)과 경위 한여진은 대검 형사법제단과 경찰청 수사구조혁신단 소속으로 각자 검찰과 경찰의 입장 양 끝에서 재회한다. 오붓하게 이야기를 나누던 공덕동 서부 지검 포장마차는 사라졌고, 달라진 둘의 좌표에 한겹씩 덧씌워지는 장소가 함축하는 메시지는 이들이 이전 방식으로 소통하긴 어려울 것을 예고한다. 내가 아는 ‘비숲’의 방식이다. 수사지휘와 종결, 권한의 범위를 두고 갈등하는 검찰과 경찰의 오랜 입장 차를 두고 일반 시민인 내가 갖는 의견은 ‘검정소와 누렁소, 각자 일이나 잘했으면’ 하는 정도였을 뿐. 한데 시목과 여진을 비롯해 형사법제단 부장검사 우태하(최무성), 혁신단 단장 최빛(전혜진) 등의 인물에 살이 붙으면서 관련 뉴스들이 머릿속에서 훨씬 긴밀하게 꿰어지기 시작했다. 실망했던 1회로 돌아가 다시 보니, 흘렸던 뉴스들이 이렇게 쏙쏙 박힐 수가 없다. 부연 안개 같던 머리가 맑아지는 효과에 헛웃음이 나오는 한편, 방만했던 1회가 넘치는 뉴스 헤드라인의 숲이었나 싶기도 하다. VIEWPOINT TV 속의 TV 드라마 속 인물들도 TV를 본다. 시청자에게 전달할 필요가 있는 정보를 화면에 띄우는 가장 구태의연한 방식은 리모컨을 들고 전원을 누르면 기다렸다는 듯 바로 속보가 나오고 인물간 대화를 방해하지 않도록 알맞게 끄는 식이다. 좀더 자연스럽게, 일상처럼 전달하기 위해 고민하는 드라마도 눈에 띈다. JTBC 드라마 <우리, 사랑했을까>의 최향자(김미경)는 아침 식탁에서 스마트폰 영상에 시선을 고정한 손녀에게 “폰이면 폰 밥이면 밥 하나만 해. 보지도 않는 텔레비전은 왜 자꾸 켜놔”라고 타박하며 TV를 끄기 직전 짧게 정보를 노출했다.

'테넷'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시간은 영화적 스토리텔링의 비옥한 토지"

“전세계 영화인들이 만들고 있는 어떤 영화든 사람들이 그걸 볼 수 있을 때까지는 완성되지 않는다.” 개봉까지 순탄치 않은 과정을 겪어서일까. 전세계 최초로 한국에서 <테넷>을 공개한 뒤 <씨네21>과의 서면 인터뷰에 응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테넷>이 많은 관객을 만날 수 있어 무척 흥분된다”고 기뻐했다. <테넷>은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통해 비선형적 스토리, 아날로그적 스펙터클, 가족 등 자신의 인장을 아로새기고 변주해온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신작이다. 이 영화는 주도자(존 데이비드 워싱턴)가 인버전을 통해 현재와 미래를 오가며 세상을 파괴하려는 무리를 막는 스파이물로, 전세계에 개봉한 지 일주일이 지난 지금 관객 사이에서 ‘N차 관람’을 부르며 팬덤 현상을 주도하고 있다. 한국 개봉 첫날인 지난 8월 26일, 그와 주고받은 긴 대화를 공개한다. -<테넷>은 20년 전 당신이 연출한 영화 <메멘토>의 특정 장면에서 아이디어를 얻으면서 출발한 프로젝트로 알고 있다. =항상 시간 경험과 그것의 관계에 관심이 많았고, 시간이 얼마나 추상적이고 복잡한지 잘 알고 있지만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시간은 우리 존재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묘사할 수도, 분명하게 표현할 수도, 여러 방법으로 이해할 수도 없다. 하지만 카메라, 특히 필름 카메라는 시간을 볼 수 있고 포착할 수 있는데 그것은 100년 전 영화라는 매체가 처음 생겼을 때 보여준 근본적인 혁신이다. 그런 맥락에서 영화를 보는 방식과 시간과의 관계가 매혹적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영화는 관객에게 시간을 묘사하는 메커니즘을 각각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메커니즘은 대개 감추어져 있다. 나는 관객이 영화를 보면서 시간을 묘사하는 메커니즘을 폭로하고, 함께 토론하며, 자신의 생각을 나누는 것을 좋아한다. 그게 가능한 이야기들이 매우 흥미롭다. <테넷>은 오랫동안 생각해온 특정 이미지와 컨셉들이 있었다. -그게 무엇인가. =벽에서 총알이 튀어나오면서 두개의 타임라인이 교차하는 이미지다. 그것은 20년 전부터 이리저리 구상해온 이미지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과학 원칙이 자리 잡고 있다. 물체가 관통되고, 사람들이 시간을 거슬러 움직이는 세계를 배경으로 이야기를 만들어갔다. 2014년에 대본을 본격적으로 작업했다. <메멘토>에서 총알이 역행하는 장면은 주인공 레너드의 시점을 표현하기 위한 일종의 은유였는데 이 아이디어에 첩보 스릴러의 옷을 입혀 SF를 결합했다. -전작을 통틀어 스파이영화는 이번이 처음이다. 평소 스파이 장르에 어떤 매력이 있다고 생각했나. =스파이영화는 관객이 등장인물과 함께 모험에 나선다는 점에서 시각적인 스릴이 있지 않나. 일상에서 보기 힘든 풍경들을 보고, 절대 갈 수 없는 공간들을 경험하는 게 스파이영화의 매력이다.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스파이영화는 <007과 여왕>(1969)으로 알려져 있는데. =어릴 때부터 ‘007 시리즈’를 좋아했고, 특히 <007과 여왕>은 제임스 본드 영화의 좋은 표본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007 시리즈는 대규모 엔터테인먼트라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거대한 스크린에서 화려하고 이국적인 전세계의 공간을 누비는 모험이 무척 매력적이어서, <테넷>에서도 그것을 담아내고 싶었다. -전작 <인터스텔라>를 함께 작업한 이론 물리학자 킵손 박사는 언제 본격적으로 합류했나. 그의 합류가 <테넷> 시나리오 작업에 어떤 영향을 끼쳤나. =킵은 자신이 주도했던 <인터스텔라>가 진짜 과학을 기반으로 한 SF영화가 되길 원했다. <인터스텔라> 세트장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테넷> 시나리오를 쓰다가 다소 상상이 과한 컨셉을 실제 생활에서 어떻게 응용할 수 있을지 궁금하면 킵에게 전화를 걸어 점심을 함께 먹자고 요청했다. 킵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또 물리학적인 아이디어를 현실 세계에서 구현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내게 많은 영감을 준 든든한 조력자다. -영화 속 인물이 과거로 이동한 결과를 보여주는 보통의 시간 여행 영화와 달리 <테넷>은 시간을 역행하는 과정이 구체적이고, 열역학 법칙에 충실한데. =인버전의 과정이 스토리의 토대를 이루는 동시에스토리 자체이기 때문이다. <테넷>은 시간을 여행하는 영화가 아니다. 보통의 시간 여행 영화는 여행 과정이 시간 속에서 움직일 수 있는 핑계에 불과하다. 하지만 우리 영화에서는 인버전에 물리학적인 한계가 있고, 그것으로 인해 회전문을 언제, 어디에서 사용할 수 있는지가 스토리에서 중요하게 작용한다. 우리 영화의 특정한 규칙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설명하는 데 세심하게 공을 들인 것도 그래서다. -<테넷>은 새로운 냉전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기후 변화가 인류에 큰 위협이 될 거”라는 평소의 생각이 영화의 배경을 설정하는 데 얼마나 반영됐나. =확실히 인류 전체를 위협할 수 있는 아포칼립스를 다룰 때 우리의 존재에 가장 큰 위협이 되는 게‘오늘’이 아닌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원자력 발전소, 핵무기 경쟁 등을 소재로 한 007 영화가 1960년대에 제작됐을 때 핵의 위험성이 경고처럼 제기되지 않았나. 이처럼 오늘날 우리가 지구에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떻게 그것이 우리 생활에 위협이 되는지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걱정해야 한다. -존 데이비드 워싱턴이 맡은 캐릭터의 이름을 영화내내 알 수 없다. 그의 이름을 특정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가. =아이콘이 된 영화 캐릭터 중에서 이름이 없는 캐릭터가 전통처럼 전해진다.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이 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데리고 만든 ‘이름 없는 남자’(Man with No Name) 3부작(<황야의 무법자>(1964), <석양의 건맨>(1965), <석양의 무법자>(1966))도 있고. 드라마 중에서 내가 정말 좋아하는 <더 프리즈너>(1967)에서도 주인공이 이름이 없는데, 이 드라마는 <테넷>을 만드는 데 많은 영감을 주었다. <테넷>에서 ‘주도자’를 통해 이루어내고 싶었던 건, 우리 영화의 심장 같은 아이콘적인 존재감을 만드는 것이었다. 캐릭터의 이름도, 살아온 배경도 특정하지 않은 시네마의 전통을 활용하되, 존 데이비드 워싱턴이 표현해낸 캐릭터에 관객의 생각을 투영하게 했다. -존 데이비드 워싱턴이 출연했던 코미디 드라마 <볼러스>를 인상적으로 보고 출연을 제안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의 어떤 면모가 당신의 시선을 붙잡았나. =그의 카리스마가 시선을 확 끌었다. 이후 스파이크 리 감독의 초대를 받아 칸국제영화제에 갔는데 칸에서 <블랙클랜스맨>을 보고 그가 주도자 역에 적임자임을 확신하고 캐스팅하기로 결정했다. 그가 연기하는 인물에는 따뜻한 인간미가 있고, 그걸 잘 묘사하고 부각시킨다. -사토르와 그의 아내인 캣을 설정하는 과정에서 고민했던 건 무엇인가. 특히 당신의 전작에서 여성은 대체로 부재하거나 존재가 지워지는 경우가 많았는데 캣은 그렇지 않아 눈에 띄었다. =대본에서 사토르는 ‘차가운 눈에, 짧은 턱수염을 기른 중년 남성’으로 묘사했다. 사토르는 무자비하고 이기적이며 지적인 데다가 난폭하다. 원초적인 본능이 강하고 이기적인 인물로, 한마디로 짐승 같은 존재다. 그가 그렇게 된 데는 그가 성장기를 보낸 난폭한 환경이 작용한다. 캣은 다양한 면모를 가진 인물로 아들 때문에 사토르와 끔찍하게 얽혀 있다. 내 영화를 통틀어 가장 복합적인 여성 캐릭터로, 극도로 영리하고 직관적이며 매우 건조한 ‘교수대 유머’(gallows humor) 감각을 갖춘 인물이다. -주도자가 알고리즘을 되찾기 위해 인버전해서 고속도로로 다시 가는 영화의 중반부에서, 주도자가 과거의 시간을 기다리는 장면은 인버전을 정확하게 묘사하기 위한 목적으로 보였다. =자동차 추격 신은 같은 인물들, 자동차들, 사건들이 거꾸로 갈 때 또 등장하므로 같은 상태를 유지하는 게 중요했다. 그래야 어떤 타임라인에 적용해도 그 사건을 정확하게 볼 수 있으니까. 모든 것이 들어맞았고, 일치해야 할 타이밍 모두 정확하게 맞췄다. 애니메이션 소프트웨어인 마야(Maya)를 활용해 인물의 동선을 정확히 계산했고, 수정을 거쳐 두개의 타임라인을 정확하게 대칭시켰다. 다양한 기법을 연구했는데 카메라를 순방향으로 돌리고 연기도 순방향으로 할 수 있고, 아니면 카메라를 역방향으로 돌리고 연기도 역방향으로 할 수 있다. 혹은 카메라를 역방향으로 돌리고 연기를 순방향으로 할 수 있고, 카메라를 순방향으로 돌리고 연기를 역방향으로 할 수 있다. 네 가지 방식으로 구분해서 찍은 이유는 시퀀스마다 강조하고 싶은 효과가 제각각이었기 때문이다. -당신의 영화 속 시간은 서사에서 여러 역할들을 한다. 공간을 조립하고,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일이 이야기를 쓰는 데 어떤 영향을 끼치나. =시간은 모든 이야기의 토대가 된다. 내 영화에서 다른 점이라면 시간의 메커니즘을 스토리텔링에서 당연시하지 않고, 그 메커니즘을 밝힘으로써 관객이 시간의 역할을 탐색하고, 어떤 식으로 액션이 보여지며, 그게 어떻게 스토리에 영향을 미치고, 어떻게 이야기가 전달되는지 고민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테넷>에서 주도자가 노르웨이 프리포트에서 미래에서 온 자신을 마주한 기억을 떠올렸듯이, <메멘토>에서 레너드가 과거 아내와 있었던 기억을 해체하고 재조립했듯이, 당신의 영화 속 시간은 인물이 기억을 떠올리거나 기억을 왜곡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시간과 기억은 어떤 연관성이 있나. =내가 만든 영화들 중에는 시간과 기억의 상관관계가 도드라지는 영화들이 있다. 언급해준 <메멘토>가 그 관계를 다룬 첫 영화였고, <인셉션>도 그렇지만 구현하는 방식이 달랐다. <테넷>을 통해 시간과 기억의 상관관계를 다른 영역으로 확장하고 싶었다. 시간이 우리 존재의 토대이고 그래서 분석,설명, 이해가 힘들다는 견해가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영화적인 스토리텔링을 하기에 비옥한 토지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최근 당신의 관심사가 무엇인가. =<테넷>에 핵의 위험성과 기후 위기 문제가 포함되어 있는데 그것이 우리가 직면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무 깊게 생각하지 않고, 일차원적으로 생각나는 대로 시나리오를 썼다. <인터스텔라>에서도 기후 위기를 다뤘는데 영화에서 만 박사가 “우리는 잘 돌보면서 후손들이 처할 문제에는 공감하지 못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나. 윤리적 측면에서 이 질문에 흥미를 느낀다. 그래서 계속 이 문제를 고민하고 있다. 행성을 놓고 후손들과 갈등을 빚는 세대의 이야기. 끔찍한 방향으로 흘러가긴 하지만 점점 이해도가 높아지는 문제다. -코로나19가 장기화되면서 전세계 영화산업이 많은 변화를 겪고 있는데 이 광경을 어떻게 보고 있나. =공동체적 스토리텔링의 매력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1950년대의 텔레비전이든 1980년대의 홈비디오든, 오늘날의 온라인 동영상 스트리밍 플랫폼이든 극장과 경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매체들은 나중에 상호보완적인 역할인 것으로 판명되지 않았나. 큰 극장 스크린이 됐건, 작은 화면이 됐건 영화라는 매체는 앞으로도 발전하고 진화할 것이고, 우리 또한 그렇게 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여성, 영화사' 조각난 영화를 체험하는 일에 관해

이 글은 <여성, 영화사>에 관한 본격적인 비평이기보다는 다양한 영화 클립으로 채워진 아카이브 영화 관람기 혹은 비평을 위한 사전 작업의 흔적에 가깝다. 클로즈업과 목소리의 영화 올해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상영작 중 단연 눈길을 끈 건 마크 커즌스 감독의 다큐멘터리 <여성, 영화사>(2019)이다. 장장 840분에 달하는 이 다큐멘터리는 여성감독의 영화를 재료 삼아 40여개의 주제를 탐구한 로드무비다. ‘영화사’라는 제목과 840분이라는 방대한 분량은 장 뤽 고다르의 <영화사(들)>(1997)를 연상시킨다. 영화사를 쓰는 동시에 해체하는 고다르의 작품은 마치 영화를 관람하는 인간의 두뇌에서 일어날 법한 기억과 망각의 투쟁을 상연하는 것처럼 보였다. 불규칙하게 명멸하는 고다르식 영화사와 달리 커즌스는 명확한 규칙성을 지닌 채 개별 영화를 공들여 소개하는 쪽에 가깝다. 그 이유는 아마도 이 영화들이 관객에게 일단 기억되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를 어떻게 시작하고 끝맺는가’에 관한 질문을 앞뒤로 세운 뒤 영화에서 중요한 요소와 주요 장르와 주제 등에 관한 질문을 차례로 배치한다. <영화사(들)>가 영화사를 구성하는 개별자로서 작가 고다르의 존재감을 더욱 또렷이 드러냈다면, 커즌스의 작품 속에서 작가로서 감독은 자취를 감춘다. 타이핑하는 고다르의 모습과 활자가 등장했던 자리는 다양한 장소와 시간으로 점프하는, 하나의 스크린으로서의 자동차 안에서 촬영한 무빙숏과 이따금 등장하는 여성 화자의 모습으로 채워진다. 작가로서의 주체가 사라진 자리에 수백개의 클립으로 분산된 여성감독의 작품만이 온전한 스포트라이트의 대상이다. 내레이션에서 밝히듯 <여성, 영화사>는 여성 영화감독의 작품만으로 구성된 영화 학교이자, 영화 교재이다. 내레이션은 또한 이 여정의 목적이 감독의 일생이나 연대기적 역사 혹은 남녀의 차이나 최고작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영화와 영화 만들기에 관한 이야기임을 강조한다. 이것은 불필요한 오해를 막기 위한 필수적인 전제처럼 보인다. 한 가지 사례를 언급하고 싶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매년 영화제 기간을 전후로 여성감독이나 제작자, 평론가 등을 초청해 시네 페미니즘 학교를 연다. 2019년에는 다양한 분야의 영화인들을 초청해 그들의 노하우를 듣는 시간으로 꾸려졌다. 총 6회로 진행된 자리에 나는 강연 후 질의응답을 진행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때 자주 들었던 요청은 페미니즘적인 부분을 채워달라는 것이었다. 여성 영화인의 직무 관련 이야기를 듣는 것이 곧 페미니즘적인 의미가 있다고 믿었던 나는 영화인들의 직업적 노하우와 페미니즘적인 것을 애써 분리하는 어색한 과정을 거쳐야 했다. ‘여성감독과 남성감독의 차이를 논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여성, 영화사>의 전제는 ‘여성’을 카테고리에 넣었을 때 발생하는 ‘여성만의 특별함’에 관한 이중적 속박을 걷어내기 위한 조치다. 물론 ‘여성감독의 영화를 모은 것만으로 페미니즘적인 의미가 생성되는가’라는 질문은 가능하다. 이에 답하자면 ‘그렇다’이다. 여성감독의 영화를 모은 것만으로 의미가 생성되는 이유는 영화사가 남성 중심으로 편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틸다 스윈턴이 도입부 내레이션에서 밝혔듯 영화의 역사는 ‘보이 클럽’이다. 우리는 인용될 가치가 충분하지만, 상대적으로 덜 인용되는 영화의 목록을 보게 될 것이다. 물론 여기에 소환된 여성감독의 영화가 모두 페미니즘적이라 단언할 수는 없다. 그 이유는 우리가 영화의 일부만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뤼실 하지할릴러비치의 영화 <에볼루션: 새로운 탄생>(2015)에서 한 소년이 절벽 아래에서 벌거벗은 채 누운 여성의 무리가 뒤엉켜 천천히 몸을 움직이는 광경을 내려다보는 장면이 있다. 전체 영화 중 이 장면만 떼어놓고 보면 전형적인 남성의 판타지처럼 보인다. 관객은 여성감독의 영화에는 불필요한 노출이나 섹스 장면이 등장하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필요와 불필요는 해석자의 주관적인 의지가 개입된 판단이다. 더군다나 필요에 걸리지 않는 과잉은 영화의 필요조건이기도 하며, 그것은 때로는 우리를 감동시킨다. 오스카 와일드를 인용해 언급하자면 예술에 있어 도덕적인 것과 부도덕한 것은 없다. 다만잘 만든 작품과 못 만든 작품이 있을 뿐이다. <여성, 영화사>에서 논하는 것도 바로 좋은 오프닝, 좋은 구도, 좋은 대화 등 ‘좋은 무엇’에 관한 것이다. 수많은 영화 리스트를 마주한 관람자의 불안 한 가지 전제할 것은, 이 글은 인용된 모든 영화를 관람하고 쓴 것이 아닐뿐더러 언급한 모든 영화를 관람한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나아가 등장한 모든 영화를 관람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하려 한다. 관람하지 못한 영화뿐만 아니라 관람했으나 기억 속에서 희미해진 영화까지 포함하면 봐야 할 영화의 수는 더욱 늘어난다. 게다가 <여성, 영화사>를 소화하는 것만도 벅차기에 사전에 대부분의 영화를 관람하지 않은 이상 모든 영화를 관람한 상태에서 이 영화를 보는 것은 불가능한 일에 가깝다. 그러므로 여기서 해명하고 싶은 것은 <여성, 영화사>에 관한 것이기보다는 그것이 파생시킨 영화 관람에 관한 질문, 특히 분절된 형태의 클립으로 영화를 만나는 일에 관한 이야기다. 그러한 경험은 한계만큼이나 가능성을 지닌다. 영화에 인용된 클립을 통해 영화를 경험하는 것은 온전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영화를 체험한 것과는 물론 다르다. 분절된 상태로 영화를 본다는 것은 클로즈업으로 영화를 경험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분리된 그 자체로 일종의 확대 효과가 있을 뿐만 아니라 영상에 덧붙은 내레이션은 관객이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를 친절하게 설명한다. 그렇다고 이러한 경험이 영화의 본래적 체험보다 열등한 방식이라고 확언할 수는 없다. 이 글이 체험에 관한 기록이라는 것을 전제로 개인적인 일화를 덧붙이고 싶다. 특정 부분을 취하는 것은 때때로 실제 영화 경험을 초과한다. 나의 최초의 시네마틱한 경험 역시 클립처럼 분절된 이미지에서 출발한다. 작은 텔레비전 모니터 속에서 영화가 이미 시작된 채 흐르고 있었고, 어떤 이야기인지 모른 채 빨려들었다. 그 영화는 레오스 카락스의 <소년, 소녀를 만나다>(1984)였다. <여성, 영화사>에 언급된 주제 중 ‘분위기’에 관한 챕터에서 내레이터는 피리오 홍카살로의 <콘크리트 나이트>(2013)를 두고 “영화 자체가 분위기”라고 말했는데, 이는 레오스 카락스의 영화에도 적절한 수식처럼 보인다. 후에 이 영화를 온전히 관람했을 때는 처음과 같은 사로 잡힘을 경험하진 못했다. 물론 그사이 다양한 영화 경험을 쌓은 탓일 수도 있으나 적어도 분절된 영화 경험을 모조리 배격하지 않아도 된다는 근거로는 충분할 것이다. 또 다른 경험은 TV 영화 소개 프로그램에서 라스 폰 트리에의 <어둠 속의 댄서>(2000)를 보았을 때다. 이때 화면 속에는 교수대를 향해 가는 배우의 가벼운 발걸음이 등장했다. 발걸음을 세는 숫자는 노래로 변했고, 실제와 환상의 뒤섞임은 나를 사로잡았다. 죽음을 향한 발걸음은 결국 나를 극장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정작 극장 경험의 강렬함은 영화 바깥에 있었다. 함께 영화를 보던 친구가 과도한 핸드헬드 화면에 어지럼증을 느끼고는 하나둘 밖으로 나갔다. 나는 독하게도 끝까지 남아 영화를 관람했으나, 최초의 마주침을 뛰어넘는 경험을 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이후 <어둠 속의 댄서> 장면 일부를 국립현대미술관 <하룬 파로키-무엇으로 사는가?> 전시에서 다시 만났다. 하룬 파로키의 <110년간의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2006)이 12채널 설치로 전시되었으며, 이중 하나로 <어둠 속의 댄서>가 포함되었다. 해당 영상은 비욕과 카트린 드뇌브가 공장을 나서며 대화하다가 불쑥 끼어든 한 남자에 의해 방해를 받는 장면이었다. 나는 기억 속에서 지워진 이 장면과 생경하게 재회했다.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관람하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것을 부인할 생각은 없다. 다만 분절된 경험을 통해서도 영화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음은 물론이다. 분절된 영화들은 훗날의 재회를 기다리는 작은 씨앗이다. 여러 편의 영상 속에서도 유독 관객을 사로잡는 영상이 존재한다. 되도록 강렬한 것이 오래 기억되기 마련이다. 앞서 언급한 나의 체험을 구성하는 것도 가위, 교수형과 같은 강렬한 이미지다. <여성, 영화사>에서도 클립만으로 울림을 준 작품들이 있다. 그중 몇편만 언급하자면, 포르흐 파로 허저트의 단편 <검은 집>(1963)에서 칠판 앞에서 집에 관해 써보라는 질문을 받은 사람이 침묵 속에 사람들에게 열리지 않는 문을 떠올린 뒤 마침내 ‘집은 검은색이다’라고 쓰는 장면의 고요함이다. 혹은 킴 론지노트의 다큐멘터리 <잊지 못할 그날>(2002)에서 어린 딸이 할례를 받게 만든 어머니에게 사과를 요구하며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던 중 옆에 있던 어린 동생을 언급하며 그에게 할례를 시키지 않으면 어머니를 용서하겠다고 말하는 순간은 잊기 힘들다. 영화는 ‘노동’ 챕터에서 샹탈 애커만의 <잔느 딜망>(1975)을 소개하면서 이례적으로 작가의 말을 언급한다. 샹탈 애커만은 이미지의 위계에 저항하고자 했으며, 소외된 여성의 가사 노동을 보여주며 그것을 실천했다. 물론 <잔느 딜망>에도 폭발의 순간이 분명히 있다. 그러나 강렬한 사건은 그조차 지루한 시간의 연속을 삼키지 못함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여성, 영화사>는 기나긴 러닝타임과 주제 분류를 통해 영화와 장면간의 위계를 없애려 한 샹탈 애커만의 시도를 잇고자 한다. 질문 바깥의 질문 영화를 관람하는 동안 우리는 늘 어떤 목소리와 동행한다. 목소리는 흘러가는 영화를 예측하거나 설명하면서 관람 경험에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개별 영화를 이런 방식으로 탐험하는 데 익숙하다. 영화 소개 프로그램은 영화 유튜버들의 등장으로 다시 활기를 띤다. 좀더 창의적인 방식으로는 오디오 비주얼 필름 크리틱이 있다. 영상을 분절하고 연결해 새로운 이야기를 탄생시키며 개별 영상 작품으로의 가치를 지닌다. 오디오 비주얼 필름 크리틱에서 이미지의 연속만으로 발언을 대신한 예도 있으나, 대부분은 내레이션이나 자막을 통해 화자의 목소리를 낸다. 이러한 목소리의 진정한 효용은 영화를 정확히 설명할 때 있는 것이 아니라 정확한 설명에 실패하면서 관람자의 저항을 일으키는 데 있다. 화면 밖 목소리나 영상 위에 덧붙은 자막은 언어를 통해 장면을 한정한다. 그러나 장면의 의미는 결코 해설에 걸리지 않는다. <여성, 영화사>는 40개의 주제로 분류되어 있지만 같은 영화의 다른 장면이 반복해서 등장하기도 하며, 특정 장면 역시 여러 주제를 동시에 환기한다. 영화를 인용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특정 장면을 선택해야 하지만 영화에 담긴 풍부한 정보와 이야기는 포착되기보다는 흘러간다. <여성, 영화사>의 중요한 가치는 정확한 설명의 실패에 있으며 아울러 필연적인 실패로서 비평 행위와 만난다. 이것은 오디오 비주얼 필름 크리틱 전반에 해당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여성, 영화사>의 내레이션은 대부분 질문으로 이뤄져 있다. ‘엔딩’ 챕터에서 소개된 수미트라 페리에스의 <걸즈>(1978)는 거울에 대고 자신의 인생에 관해 질문하는 소녀의 독백과 함께 흰색의 물음표 하나를 비추는 독특한 엔딩을 보여준다. <여성, 영화사> 역시 그 모든 것을 포함한 하나의 거대한 물음표를 던지려는 것 같다. 관객에게 주어진 몫은 영화가 제시하는 질문에 만족하지 않고 이를 포괄한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일이다. 특히 ‘신뢰성’ 챕터는 질문이 생성되는 장이다. 디나라 아사노바의 <당신이 선택한 것>(1981)에서 한 여자아이가 남자아이에게 이끌린 채 카메라가 있는 쪽으로 천천히 다가온다. 여자아이는 겁을 먹은 채로 자세를 낮추어 천천히 올라왔다가 다른 아이의 부축을 받은 채 같은 자세로 내려간다. 카메라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이들의 모습을 지켜본다. 내레이터는 신뢰성을 위해 배우를 실제로 높은 곳에 올라가게 한 뒤 솔직한 반응을 보여줬다고 설명한다. 이 말은 의문을 불러온다. 장면의 진실함을 위해서라면 어떤 것도 괜찮은가. 영화를 사이에 두고 제작자와 관객 사이에 구축해야 할 신뢰성은 있는 그대로의 진실성뿐만 아니라 등장인물이 실제 위험에 처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 있지 않을까. 물론 이 장면은 과장된 위험이 아닌 일상에 산포한 단순한 위험일 뿐이지만, 적어도 이에 관한 코멘트는 의심스럽다. 확장하자면 배우가 대역을 쓰지 않고 고난도의 장면을 촬영했다는 것은 여전히 홍보 포인트가 된다. 그러나 관객은 과연 배우가 위험을 무릅쓰기를 원하는가. 코미디 챕터에 등장한 페니 마셜의 <위기의 암호명>(1986)에서 우피 골드버그가 공중전화 부스에 든 채로 납치된 상황이 펼쳐진다. 이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관람한다면 웃어넘길 수 있을 장면이다. 그러나 잘린 장면 속에서 자동차 끝에 매달린 채 위험천만한 레이스를 펼치던 우피 골드버그가 마침내 차에서 분리돼 공중전화 부스와 함께 나뒹구는 장면은 신뢰성 챕터에서 생성된 질문과 만나 그 장면의 위험천만함을 생각하게 된다. 발레리 마사디안의 <나나>(2011)에서는 엄마가 사라진 뒤 홀로 남은 어린 나나가 근처 숲에서 발견한 죽은 토끼를 인형처럼 가지고 노는 장면이 있다. 우리는 영화를 위해 동물이 희생되지 않았음을 믿고 싶어 한다. 영화 속에서 재현된 죽음이 실제 배우의 죽음이 아니라는 것을 믿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신뢰성에 관한 질문은 발리 엑스포트의 실험 SF <인비저블 애드버서리>(1977)에서 한층 복잡해진다. 이 영화는 학소스라는 외계인에 의해 정신분열증을 겪는 한 여성의 일상을 보여준다. 식탁 위에 식재료를 하나하나 내려놓던 여자의 놀란 얼굴이 클로즈업된 직후 식탁 위의 식재료가 동물과 곤충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식재료를 칼로 자르는 클로즈업 몽타주에는 실제로 잘리거나 잘릴 위험에 처한 생선, 햄스터, 앵무새, 딱정벌레가 포함된다. 몽타주는 마침내 냉장고 속에 들어있는 아기의 이미지로 정점을 찍는다. 식자재와 인간을 연결하는 몽타주는 인간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일까, 아니면 동식물의 가치를 격상하는 것일까. 이 모든 이미지를 ‘폭력 이미지’로 명명한 채 배격해야 할까, 아니면 전체 영화를 마주한 뒤에 판단할 문제일까. 이러한 시선은 검열이라 할 수 있을까. 시대와 장르를 넘나드는 다양하고도 위험한 리얼리티의 시퀀스들은 과연 위험한 리얼리티를 재현의 영역 바깥으로 배격해야만 하는 것인지를 묻는다. <여성, 영화사>의 마지막 주제로 ‘죽음’과 ‘엔딩’이 놓이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엔딩’ 뒤에 ‘노래와 춤’으로 마무리되는 것은 다소 의외다. 그중에서도 <비욘세: 레모네이드>의 뮤직비디오 영상으로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은 더욱 그렇다. 이 영상 속에서 노란색 드레스를 입은 전사를 연기한 비욘세는 미소 지으며 다가와 손에 든 방망이를 휘두르며 세트장 곳곳을 파괴한다. 이 퍼포먼스는 마침내 카메라를 때려부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이를 마지막에 배치하면서 영화는 부서진 카메라와 함께 스스로 파괴되고 싶은 것일까. 혹은 남성 위주로 꾸려진 기존 영화사를 파괴하고자 한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하나의 유희일까. 흥미로운 다른 포인트는 <여성, 영화사>라는 분절된 영화 경험 속에서 뮤직비디오와 시리즈 드라마, 단편영화와 장편영화가 구분 없이 뒤섞여 있으며 모두 영화처럼 인식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비욘세의 방망이를 빌려 영화가 깨부순 것은 영상간의 암묵적 위계인 것일까. 영화들의 여정은 그렇게 제멋대로 영화 안팎을 아우르며 흘러든다.

미국 대선의 이면을 파헤치는 #고발 #킹메이커 #체인지메이커 #스캔들 영화 살펴보기 1

11월 3일부터 미국 대통령 선거가 시작된다.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민주주의국가이지만, “사람은 모두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독립선언문의 정신이 선거를 통해 제대로 구현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물음표가 붙는다. 시스템의 부조리를 ‘고발’하고 각종 ‘스캔들’이 끊이지 않는 정치판이지만, 그 안에는 변화를 이끄는 ‘체인지 메이커’들과 묵묵히 뒤에서 일하는 ‘킹메이커’의 헌신이 있다. 집에서도 만날 수 있는 미국 선거영화를 4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소개한다. 다큐멘터리에 꾸준히 투자해왔던 넷플릭스에는 미국의 선거 시스템에 대한 이해를 돕는 좋은 콘텐츠가 많다. 이들 다큐멘터리는 불법 데이터 수집부터 게리맨더링(특정 정당이나 특정 후보에게 유리하도록 부당하고 기형적으로 선거구를 획정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기득권 정치인을 수호하는 시스템의 부조리를 강력하게 꼬집는다. 10월 19일부터 30일까지 한국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에서 열린 에도 미국의 선거 과정과 그 이면을 엿볼 수 있는 다큐멘터리영화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신문이나 텔레비전 뉴스를 통해 접하는 준비된 정치인의 모습이 아닌 남다른 사연과 은밀한 속사정을 지닌 개개인으로서의 모습, 그리고 그들의 곁에서 치열하게 캠페인을 준비하는 참모들의 모습 등이 궁금했던 이들에게 특별한 경험이 될 듯하다. 한국영상자료원의 특별전은 끝났지만 <거대한 해킹> <세상을 바꾸는 여성들> <익스플레인: 투표를 해설하다>는 넷플릭스에서 만날 수 있다.

'아니아라' 펠라 카게르만 감독 - 인간이 지구라는 우주선을 잃는다면

우주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직사각형 형태의 아니아라호. 그 안에는 지구 멸망 후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탑승해 있다. 3주 후 화성에 도착할 계획이던 아니아라호는 우주 부유물과 충돌한 후 경로를 이탈하고, 승객들은 자신들이 영원히 이 공허한 우주를 떠돌게 될 것임을 직감한다. 제9회 스웨덴영화제 초청작인 영화 <아니아라>는 노벨상 수상자 하뤼 마르틴손의 동명 SF 서사시를 각색한 작품이다. 2018년 토론토 영화제에서 프리미어 상영 후 국내외 유수 영화제에 초청받으며 "환경에 관한 경이로운 SF우화" "무섭도록 황홀한 우주 오디세이" (<가디언>) 란 평을 받았고, 2020년 스웨덴 최고 영화상인 굴드바게 어워즈에서 여우주연상을 포함해 4관왕에 오르는 영예를 안았다. 예술 학교를 졸업하고 다큐멘터리를 작업하던 펠라 카게르만 감독은 “이 혼란스러운 시기에 영화를 통해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란 질문에서 출발해 휴고 릴리아 감독과 함께 영화 <아니아라>를 연출했다. 영화는 “지구가 없는 인간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가”란 질문에 극단적인 답을 제시하며, 현재 우리가 누리는 지구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역설적으로 깨닫게 한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내한하지 못한 펠라 카게르만 감독과 <아니아라>에 관해 화상으로 나눈 대화를 전한다. 올해 스웨덴영화제는 11월 5일 서울에서 시작해 부산, 대구, 광주, 인천을 거쳐 오는 16일까지 열린다. -<아니아라>의 어떤 점에서 매료돼 영화로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나. =<아니아라>는 스웨덴에선 굉장히 유명한 시다. 나의 부모 세대는 이 시를 학교에서 배웠을 정도니까. 내용이 무척 복잡하고 어려운데 나는 할머니와 함께 상황극을 하면서 그 내용을 자연스레 익혔다. 할머니가 뇌졸중으로 병원에 입원해 계실 때였는데 병원의 의사와 간호사는 아니아라호의 승무원, 환자들은 탑승객, 이런 식으로 현실과 시를 접목해 연극을 하곤 했다. 그때부터 이 시가 내 마음에 강렬하게 남았다. -<아니아라>는 지구가 멸망한 후 인간은 어떻게 될 것인가란 질문에 굉장히 암울한 답을 내놓는 영화다. =그렇다. 비유하자면 이 지구가 우리의 유일무이한 우주선 아닌가. ‘우주선을 잃으면 인간은 어떻게 될까, 어떻게 살아갈까’란 질문을 계속 스스로에게 던지며 영화를 만들었다. -아니아라호의 형태는 긴 직사각형으로 굉장히 독특하다. =많은 사람들이 큰 메모리카드처럼 생겼다고 하더라. (웃음) 우주선의 모양과 크기 등은 시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었고, 내부 요소들까지 원작을 충실히 반영하기 위해 초기 설계 과정부터 공을 들였다. 다만 아니아라호의 웅장함을 부각하기 위해 우주선 외부에 조명을 켜는 디테일을 추가했다. -지구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AI 프로그램 ‘미마’도 마치 거대한 파도처럼 형상화했던데. =미마는 좀더 현대적으로 디자인을 바꿔봤다. 고전이라 그런지 <아니아라>에선 미마를 TV처럼 묘사해놓았는데 그것보다 더 흥미롭게 보였으면 했다. 미마란 존재는 AI 프로그램이지만 한편 신처럼 느껴지기도 해서 천장으로 끌어올렸다. 그 편이 후반 CG 작업하기에도 편했고. (웃음) 또 자연스레 지구가 연상됐으면 해서 거대한 물결의 흐름처럼 구현했다. -승객들은 항상 쿠션을 베고 엎드려서 미마와 텔레파시를 주고받는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 =승객들이 후두엽을 통해 미마와 연결된다는 설정이었다. 그래서 전부 시체처럼 엎드려 있는 거다. 또 다들 지구가 파괴된 후 원치 않게 화성으로 떠나게 된 사람들이라 이들이 조금이라도 편안함을 느꼈으면 해서 평화롭고 깨끗한 자연의 이미지를 보여줬다. -휴고 릴리아 감독과는 어떻게 함께 작업하게 됐나. =휴고와 나는 12년을 함께한 연인이다. 본래는 각자의 작업을 하다가 ‘이런 혼란스러운 시기에 영화를 통해 메시지를 전달해보자’란 생각이 들어 함께 <아니아라>를 연출하게 됐다. 주 업무를 분리해 이야기하기 힘들 정도로 긴밀하게 협업했다. -미마를 관리하는 미마 로브 역에 에밀리아 가버스를 캐스팅한 이유도 궁금하다. 에밀리에는 휴고 릴리아 감독의 전작 <더 언리빙>의 주연배우이기도 했는데. =사실 에밀리아와는 18살 무렵부터 친구 사이였다. 휴고가 단편을 찍는다기에 에밀리아를 주연으로 추천했고 이후 <아니아라>도 함께하게 됐다. 처음부터 에밀리아를 염두에 두고 각본을 썼기 때문에 주인공의 이름도 에밀리아다. 그는 굉장히 다재다능하고 준비를 철저히 하는 배우다. 촬영 전부터 스웨덴에서 핀란드를 오가는 페리에 올라 리허설을 하며 미마 로브 캐릭터를 구축하더라. -영화에선 기억이라는 테마가 중요하게 작용한다. 화성에서의 삶도 대안책이 되지 못하니 결국 생존자들 전부 미마를 통해 지구의 기억에 의존하며 살아간다. =사실 미마도 지구의 대용품이지 않나. 인간들은 지구를 계속 소비해 지구를 파괴한 후 같은 방식으로 미마를 파괴한다. 인간들에겐 그 어느 것도 충분하지 않다. 그렇다면 인간은 지구에서 벗어나 과연 얼마만큼 버틸 수 있을까. 이 질문은 결국 인간들에게 지구가 얼마나 필요한지에 대한 답으로 귀결된다. -평소 환경문제에 관심이 많은 편인가. =솔직히 그동안엔 그렇지 않았는데, 이번 영화를 제작하면서 환경문제를 깊이 생각하는 쪽으로 변화했다. -에밀리아는 애인이 자살한 이후에도 마지막까지 생을 이어나간다. 이처럼 강인한 여성을 주인공으로 설정한 이유를 말해준다면. =처한 현실을 각기 다르게 받아들이는 여러 인물들을 보여주고 싶었다. 아니아라호의 캡틴은 낙관주의의 끝을 보여주고, 주인공에게도 그런 면이 일정 부분 존재한다. 그러나 반대의 인물들도 등장한다. 승객 중 한 사람인 천문학자는 다른 관계자들과 달리 현실을 은폐하지 않고 공공연하게 드러내고, 에밀리아의 애인 이사벨은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아주 냉정하게 받아들인다. 이런 식으로 양극단의 사람들이 어떻게 변화하고 또 서로 어떤 영향을 주는지 그리고 싶었다. -물리적인 폭동보다 사람들의 감정과 생각의 변화에 초점을 맞춘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그런 심리적인 묘사도 기본적으로 원작의 묘사를 따랐다. 다만 원작은 영화보다 훨씬 더 암울하다. 가령 탐사선 하나가 아니아라호 안으로 들어오는 장면이 있지 않나. 원작에서는 이 탐사선이 아니아라호 옆을 스쳐 지나가버리고 만다. 그건 너무 허무한 것 같아서 원작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작게나마 희망적인 요소를 넣었다. -<아니아라>라는 제목을 ‘원자의 움직임’ 혹은 그리스어로 ‘슬픔, 절망’ 등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던데, 감독이 설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같은 자료를 조사한 것 같은데. (웃음) 우리는 그리스어에서의 ‘우울, 절망’이란 뜻을 차용했다. 원작자는 아니아라(Aniara)의 ‘A’에서 미학적인 아름다움을 발견해 이를 제목으로 설정했다고 들었다. -<아니아라> 이후론 어떤 이야기를 해보고 싶나. =다음 작품은 한 젊은 저널리스트가 평행 세계를 통해 여러 시대를 겪는 SF영화를 계획하고 있다. 일종의 성장영화다. -끝으로 관객이 영화 <아니아라>를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달받길 원하나. =이 영화를 보고 밖에 나가 신선한 공기를 마셔보길 바란다. 우리가 얼마나 아름다운 곳에 살고 있는지, 지금 여기에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인지. 지구가 우리를 신경 써주는 만큼 우리도 지구를 지켜줘야 한다는 걸 깨닫길 바란다.

[강화길의 영화-다른 이야기] 전설 속의 전설

지난해 홍콩에 다녀왔다. 여행 첫날, 나는 맹렬한 검색 끝에 장국영이 자주 들렀다는 어떤 카페 하나를 찾아냈다. 솔직히 확신은 없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내가 다녀온 곳에 정말로 장국영이 있었을까? 다녀갔을까? 자주 왔을까? 그건 단지 일종의 풍문, 소문, 그러니까 일종의 전설에 불과한 건 아닐까. 누군가는 장국영이 아니라 주윤발이라고 했고, 또 누군가는 배우들의 단골 카페가 아니라 영화의 배경으로 등장한 장소일 뿐이라고 했다. 그러나 어쨌든 나는 그 카페에 정말 가고 싶었다. 왜냐하면 사진 속 카페의 풍경은 어린 시절, 명절 때마다 텔레비전에서 방영되던 홍콩영화들을 떠올리게 했으니까. 도시와 어두운 밤, 고독한 식사와 나른한 목소리, 좁은 테이블과 두툼한 머그잔. 선정적인 부분을 잘라내고 한국어 더빙을 입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가 막히게 재밌었던 그 영화들. 좋았다. 그 카페에서 경험한 모든 순간이 정말로 좋았다. 옛 시절을 그대로 보존해놓은 듯한, 그러나 분명 ‘현재’의 일부인 곳. 앉아 있는 내내 낡은 문고판 책의 누렇게 변색된 책장을 넘기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진한 밀크티와 프렌치토스트를 먹었고, 일행은 밥과 라면을 주문했다. 그 여행에서 나는 밥과 차, 커피와 라면 같은 다양한 종류의 음식을 한 식당에서 함께 먹을 수 있는 것이 홍콩의 독특한 문화라는 것을 배웠다. 동양과 서양의 문화가 공존하는, 그 자체로 정체성을 이룬 사람들의 일상. 여행을 하는 내내 나는 그 일상과 마주쳤다. 그리고 어린 시절에 마르고 닳도록 보던 홍콩영화들을 떠올렸다. 코미디와 비극, 액션과 드라마, 로맨스와 공포, 사극의 장르가 기이하게 결합해 있던 이야기들. 어느 장면은 고딕소설의 일부를 떼어다 옮겨놓은 것 같았고, 또 어느 장면은 중국 동화를 그대로 묘사하고 있는 것 같았다. 생각해보면 그것이 바로 홍콩영화의 특징이었고, 바로 그 부분에서 나는 늘 속수무책으로 매료되었던 것 같다. 특히 무협극에서 그랬다. <백발마녀전>은 기본적으로 무협영화지만 코미디이기도 하고 로맨스이기도 하다. 그리고 판타지이기도 하다. 인물들은 모두 감정적이며, 사건들 역시 선정적이고 잔혹하다(나는 어른이 되어 이 영화를 다시 본 후 조금 충격을 받았다. 영화가 너무 야하고 잔인했다!). 이 온갖 것들이 콜라주처럼 붙어 있으면서도, 별로 어색하지 않은 이유는 아마 이 이야기가 ‘전설’(傳說)이라는 형식 안에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주아주 오랜 옛날, 명이 쇠락하고 청이 흥하던 시절. 강호의 무당파는 명을 도와 외족들을 처단하고, 특히 이단 세력인 마교를 탄압한다. 마교의 지도자이자 샴쌍둥이 남매인 희무쌍은 자신들을 배척한 무당파에 깊은 분노와 원한을 갖고 있다. 그들은 늑대 무리에서 찾아낸 소녀 안예상에게 마법과 무공을 가르쳐 살인마로 길러낸다. 그들은 안예상을 통해 무당파를 몰아내고 중원을 차지하려 한다. 그러나 안예상은 무당파의 일원 탁일항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무당파의 의무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탁일항과 자신의 운명을 지겨워하던 안예상은 함께 속세를 떠나기로 약속한다. 그러나 세상은 결코 그들을 가만두지 않는데…. 그들이 남고자 하는 세상은 신흥 세력인 청도 아니고 적통을 잇는 명도 아니다. 그들은 어디에도 속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이 가장 행복해하는 곳은 옛 벽화가 희미하게 남아 있는 좁은 계곡이다. 요녀, 늑대, 주술, 협객, 무공과 마법이 공존하는 전설의 세상. 물론 탁일항과 안예상에게는 필연적인 선택처럼 보인다. 그는 무인이고, 그녀는 “요녀”이니까.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탁일항과 안예상은 누군가를 공격하거나 방어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지 않은가. 그것은 격변의 시기에 필수적인 능력이다. 그들은 새로운 세력의 일부가 될 수도 있고, 쇠락하는 세력을 지키는 역사가 될 수도 있다. 대체 왜 그들은 무엇도 선택하지 않는가. 왜 그저 거부하기만 하는가. 탁일항의 친구 계숙은 그에게 “네가 할 줄 아는 건 무공”뿐이니 그것을 제대로 쓰라고 은근히 권유하기도 한다. 탁일항은 대답하지 않는다. 얼마 등장하지 않는 계숙이 인상적인 이유는 그가 나타날 때마다 이 전설의 세계가 속해 있는 “현실”이 환기되기 때문이다. 현실에서는 명분과 이해관계에 따라 적과 아군이 구별된다. 그런 삶을 살아가는 것이 영리한 것이다. 실제로 계숙은 명을 배신하고 청의 장군이 된다. 그는 전설 속으로 사라지려는 탁일항, 안예상과 달리 현실에 존재하는 인물이 되려 한다. 그 덕분에 두 사람이 남아 있으려 하는 세계가 얼마나 연약한지 알 수 있는 것이다. 쇠락한 주술의 세상. 영리하지 못한 감정으로 넘쳐나는 공간. 계곡에는 누구든 들어올 수 있다. 반대로 그들이 속한 세계에서 나가는 건 매우 어렵다. 하지만 탁일항과 안예상은 자신들의 것, 스스로 선택한 정체성을 양보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탁일항을 만나기 전까지 안예상은 그저 “요녀” 혹은 “랑녀”로 불렸을 뿐이다. 그러나 그는 그녀에게 이름을 지어줬고, 그녀는 그가 권력을 원하지 않는다는 걸 확인하게 해줬다. 그들은 속세의 그 어느 것도 선택하지 않는다. 대신에 서로를 온전하게 만든 정체성을 선택한다. 그러니까 사랑. 끝없이 아슬아슬하게 흔들리는, 그러나 무엇보다 대담하고 용기 있는 신념. 아, 정말이지 무협과 로맨스의 만남이란…. 영화의 파괴적인 결말 역시, 온전히 그들의 세계에서만 일어날 법하다는 점에서 매우 현실적이며 동시에 전설적이다. 아주아주 오랜 옛날, 한 여인은 정인을 굳게 믿었고, 마음을 저버리지 않았지만 결국 돌아서게 된다. 그가 결코 해서는 안되는 ‘말’을 했던 것이다. 때문에 여인의 머리는 하얗게, 아주 하얗게 세어버리고 만다. 뒤늦게 진실을 깨달은 정인은 그녀에게 용서받기 위해 길고 긴 기다림을 시작한다. 나는 <백발마녀전>의 이 마무리를 꽤 좋아한다. 속편이 등장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미완결의 느낌이 가득한 장면을 말이다. 실제로 <백발마녀전>은 2편이 있고, 그 이야기에 이르러서야 두 사람은 완전한 결말을 맞이한다. 하지만 나는 1편의 허무한 매듭을 훨씬 아낀다. 자신다운 선택을 해보려 노력했으나 끝내 실패했고, 그래서 용서받고 용서하기 위해 애쓰는 인간의 서툰 감정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문밖으로 걸어 나가는 백발마녀의 뒷모습은 언제나 구슬프다. 용서받을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저 기다리는 것 외에는 무엇도 하지 못하는 탁일항, 그러니까 장국영의 눈빛 역시 애처롭다. 이번에도 나는 그 열린 문을 바라보며 상상했다. 탁일항은 그녀에게 돌아갈 수 있을까. 용서받을 수 있을까.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리하여, 그토록 원했던 자신들의 세계에 남을 수 있을까. 오로지 그들의 사랑만 존재하는 전설 속의 전설. 오래된 벽화 속으로.

[故 송재호 배우를 추모하며①] 사나이, 아버지, 그리고 배우…

쉼 없이 긴 연극 같은 삶이었다. 막간을 둘 새도 없이 배역을 달리하며 무대 위의 성실함으로 삶을 채웠다. 60여년의 배우 인생을 뒤로하고, 지난 11월 7일 배우 송재호가 영면했다. 향년 83살. 1년 가까이 지병으로 투병했지만 마지막은 평온했다고 전해진다. <영자의 전성시대>에서는 베트남전쟁에서 돌아온 당대의 열혈 청년으로, 드라마 <부모님 전상서>에서는 인자한 아버지로, <살인의 추억>에서는 묵직한 기둥이었던 수사반장으로, <그대를 사랑합니다>에서는 지고지순한 순애보를 간직한 노인으로 출연하며 송재호는 배역을 따라 나이 들었다. 혹여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데 둔감했던 관객에게조차, 송재호의 푸근한 미소는 영화와 드라마 곳곳에 스며들어 미더운 약속처럼 기억된다. 봉준호 감독을 비롯한 영화인들이 보내온 추모의 메시지와 함께, 1960년대부터 한국영화의 파고를 함께하고 추억 속 브라운관 드라마의 단골이었던 그의 궤적을 되짚어본다. 영화 출연작만 총 88편. 작품 속에서 배우는, 그렇게 계속 살아간다. 이만희, 김호선, 배창호를 거쳐간 한국영화의 증인 당대 배우들의 이력에서 종종 발견할 수 있듯이 송재호의 첫 연기 경력은 녹음실에서 시작됐다.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후 1959년에 부산 KBS성우로 데뷔한 그는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고 싶다는 마음에 무작정 서울로 상경했다. 이북 출신인 박종호 감독과의 인연으로 <학사주점>을 통해 영화계에 입문한 송재호의 재능을 일찍이 알아본 이는 바로 이만희 감독이었다. <흑맥> <군번없는 용사> <잊을 수 없는 연인> <싸리골의 신화> <원점>까지 이만희 감독 영화속에서 배우 신성일의 옆을 지키고, 전쟁의 역사에 휘말리는 청년으로 분하며 그는 조연 경력을 착실히 쌓았다. 10여년 이상 내공을 다진 끝에, 서울 관객 36만여명을 기록한 김호선 감독의 <영자의 전성시대>로 송재호의 전성기도 시작된다. 가난한 노동자계급의 젊은 연인을 비추는 <영자의 전성시대>를 연기할 당시 송재호의 나이는 38살. 교차편집으로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구조 속에서 그는 스무살 청년의 모습도 멀끔히 소화하며 오랫동안 마땅한 스포트라이트를 기다린 청춘 스타의 염원을 드러낸다. 그렇게 김호선 감독의 페르소나로 자리매김한 그는 <세번은 짧게 세번은 길게>에서 광고주로부터 백지수표를 받아낸 ‘효과맨’(폴리기사)종실을 연기해 코미디 감각과 흥행력을 동시에 증명했다. 1980년대의 신축 복도식 아파트를 배경으로, 집을 잘못 찾아 의도치 않게 콜걸과 하룻밤을 보내게 된 남자가 체면을 차리느라 온갖 해프닝에 휘말리게 되는 이 영화에서 배우 송재호는 세련된 동시에 허황된 도시 남자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는 또 문학의 영화화가 활발하던 시대적 조류와 함께, 김승옥(<영자의 전성시대>), 이어령(<세번은 짧게 세번은 길게)>, 박완서(<그해 겨울은 따뜻했네>)의 작품이 품고 있는 역사적 초상들을 나눠 가졌다. 40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특유의 유한 인상이 점점 더 부각되기 시작했는데, 배창호 감독의 데뷔작 <꼬방동네 사람들>에서 빈민운동에 앞장서는 목사를 연기하면서 이상적이고 듬직한 조력자 캐릭터의 적임자임을 알렸다. 비중에 상관없이 관객이 기억하고 회자하는 배우, 그는 그렇게 선한 카리스마로 작중 인물과 관객을 안심시키는 조연의 대가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편지 쓰는 아버지의 따뜻함으로 서울 상경 후인 1968년에 KBS 특채 탤런트로 선발된 송재호는 19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브라운관에 진출했다. 영화계의 열악한 촬영 환경과 조·단역배우에 대한 후진적 인식에 실망한 나머지 1990년대에는 방송국 활동에만 전념했다. 송재호는 곧바로 소시민들의 일상사를 담은 일일극의 단골 배우로 자리 잡아, 100회를 웃돌며 짧게는 2년, 길게는 4년 이상 장기 방영되는 드라마에서 대중과 호흡하는 보통 사람으로 녹아들었다(드라마 <보통사람들> <사랑이 꽃피는 나무> <내일은 사랑>). 성우 시절부터 단련한 노련한 악센트 연기로 사극에서도 안정적으로 존재감을 빛냈던 그는 <용의 눈물> <상도> <장희빈> 등의 대하 사극에서도 활약했다. 암투와 모략이 난무하는 시대극 장르에서 조차 그는 악역을 맡는법이 드물었다. <용의 눈물>에서는 권력 앞에 초연하고 충언에 능한 태종(최수종)의 장인 민제를, <장희빈>에서는 학문에 매진하는 노론파의 문인을, <상도>에서는 억울하게 죽음을 맞는 거상 임상옥(이재룡)의 아버지를 연기하며 지성 혹은 덕성을 갖춘 어른의 상을 대변했다. 장년층 배우로서 송재호를 향한 대중의 사랑이 완연히 무르익은 또 하나의 작품은 <부모님 전상서>다.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가 가부장제를 수용하는 방식이 구시대적이라는 비판 속에서도 송재호가 보여준 아버지 연기만큼은 검열과 냉소를 물리게 했다. ‘양심에 부끄럽지 말자’가 좌우명인 4남매의 아버지로, 승진에 밀려 만년 교감인 그는 감정 표현엔 서툴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가족이 최우선인 묵묵한 아버지였다. 밤마다 일기 대신 부모님께 편지를 쓰는 안교감의 굽은 등은 송재호의 뒷모습에 자기 모습을 덧입히고 싶은 남편들을 주말 저녁마다 주 시청층인 주부들 곁으로, 텔레비전 앞으로 불러들였다. 영원한 수사반장, 사투리 연기의 달인 2000년, 송재호는 <무사>로 스크린과의 재회를 결심해 <살인의 추억> <그때 그사람들> <해운대> 같은 굵직한 작품들에 이름을 새겨넣었다. 경기도 시골 형사와 서울 형사 사이에서 걸쭉한 부산 사투리를 구사하는 <살인의 추억> 속 신 반장은 익숙한 구태와 매력적인 카리스마를 모두 갖춘 베테랑 캐릭터로 영화사에 각인됐다. 송재호의 사투리는 자연스러움 그 이상의 구수한 토속적 향취를 풍긴다. 1937년 평양에서 태어나 6·25전쟁 중(1·4후퇴) 아버지를 잃고 부산으로 내려온 그는, 생계를 해결하려 길거리에서 몸을 부딪치며 부산 사투리를 흡수했다. 표준어를 깔끔하게 구사하면서도, 방언을 쓸 기회가 오면 세월이 묻어나는 고전적인 어휘를 적재적소에 내보이는 배우. 그의 재능은 감독들로 하여금 서울말을 사용하는 캐릭터를 경상도 출신으로 바꾸게 만들었다(<살인의 추억> <그대를 사랑합니다>). <고독이 몸부림칠 때> 촬영 당시 이수인 감독은 사투리를 배워서 연기해야 하는 다른 배우들이 기죽지 않도록 “조금만 약하게 해달라”고 사투리 하향평준화를 제안하기도 했다. 유년기를 평양에서 보낸 배우답게 공유 주연의 <용의자>에서는 군더더기 없는 평양 말씨를 사용하며 이북 출신의 재벌 회장 연기를 사실적으로 소화했다. 대중을 위한 배우 일찍이 카메라에 취미를 들인 송재호는 고등학교 3학년 때 부산 지역 영화평론 모임에 가입해 꿈을 키웠고, 시나리오를 공부하기 위해 동아대학교 국어국문과에 입학했다. 감독 대신 배우가 되었지만 영화 제작의 열망은 여전했고, 30대에 차린 제작사 사업은 그에게 배우 생활에선 없던 고난을 안겨줬다. 큰 빚과 실패를 안은 뒤에도 2000년에 또다시 제작사를 설립해 미국에서 촬영을 계획했다고도 알려진다. 그는 한번 관심을 가진 분야에는 대체로 집요한 애정과 노력을 보였다. 1979년에 사격에 입문해 전국체전 금,은,동메달을 모두 섭렵한 뒤 국제사격연맹 심판 자격증을 취득했고 1986년 아시안게임,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심판으로 활동했다. 사격을 매개로 밀렵 활동에도 문제의식을 느껴, 생전에 “밀렵은 생태환경을 위협하는 만행”이라고 호소했다. 그는 2000년에 밀렵감시단장을 지내며 단속 활동에 꾸준히 참가했고, 2014년엔 야생생물관리협회 회장직을 맡았다. 2012년에 방송 배우들이 해묵은 출연료 미지급에 항의하며 파업을 선언했을 때도, 후배들을 위해 앞장섰다. 송창곤 한국방송연기자노동조합 대외협력국장은 부고 소식을 접한 뒤 “선생님은 조합 행사나 시위 때 늘 함께 자리해주셨다. 유명 배우 입장에서 쉽지 않은 일인데도 맨 앞줄에서 현수막을 들어주는 그런 분이셨다”고 회고했다. 홀트아동복지회 홍보대사로 오래 활동하는 등 그는 배우 생활 바깥에서도 성실함과 의협심이 탁월했던 인물로 기억된다. <영자의 전성시대>에서 목욕탕 때밀이를 하며 어렵게 모은 돈을 영자를 위해 아낌없이 탕진하는 남자 창수는, 36년 후 <그대를 사랑합니다>에서 치매에 걸린 아내를 극진히 보살피는 주차 관리원 할아버지로 나타나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전쟁에서 돌아온 마초, 순애보의 청춘, 철없는 중년, 인자한 아버지를 거쳐 실버 서사의 부활을 논의하게 만든 배우 송재호. 필모그래피만으로 한 사람의 인생을 설명할 수 있는 배우는 흔치 않다. 그는 2010년 무렵부터 앤서니 퀸이 주연한 <노인과 바다>(1990)같은 작품에 꼭 출연해보고 싶다는 말을 자주 남겼다. 그에게 <노인과 바다>를 연기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지만, 지난 60여년의 궤적을 살피면 왜 하필 <노인과 바다>였는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스타이기보다 대중을 위한 배우였던 사람. 온화한 열의로 평생 게으를 줄 몰랐던 한 사람이 오랜 항해를 마쳤다. 그가 남긴 수많은 작품이 있는 한, 작별인사는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다.

[스페셜] '에이리언3'에서 '나를 찾아줘'까지, '맹크'에 영향 준 데이비드 핀처의 세계

아메리칸드림 농담처럼 시작하자면 <맹크>는 <에이리언3>(1992)가 데이비드 핀처에게 안겨준 트라우마 치유의 마지막 과정처럼 보였다. 30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에이리언3>로 데뷔한 그는 20세기 폭스사의 나이 지긋한 중역들에게 후반작업 편집권을 빼앗긴 채 자기 영화를 부정해야 하는 아픔으로 커리어를 열지 않았던가. 21살에 페이스북을 만든 마크 저커버그를 거쳐, 25살에 황금기 시절의 할리우드 스튜디오를 등에 업고 <시민 케인>을 만든 오슨 웰스(그리고 ‘로즈버드’를 품은 채 미국의 마천루에 오른 찰스 포스터 케인)를 택한 것은 그래서 어쩐지 애틋할 정도다. 다만 여기에는 핀처 자신만큼 아버지의 페르소나도 뚜렷하다. 오슨 웰스의 그림자처럼 등을 맞댄 인물인 시나리오작가 허먼 J. 맹키위츠의 이야기가 <맹크>의 본령이기 때문이다. <시민 케인>의 시절에 극장에서 유년기를 보낸 잭 핀처와 그런 아버지 밑에서 영화감독이 될 것을 강력히 지원받으며 일찍이 맹키위츠의 존재를 자각했던 데이비드 핀처. 성실한 계승자로 자라난 아들은 저널리스트인 아버지가 은퇴할 무렵에 맹키위츠에 관한 시나리오를 써보면 어떻겠냐고 자신이 받았던 독려를 돌려준다. 1997년부터 영화화를 꿈꿨으나 당대 정치사를 복잡하게 품고 있는 고전적 스토리를 흑백 화면으로 고집한 프로젝트에 투자가 될 리 만무했다. TV시리즈 <하우스 오브 카드>(2013), <마인드 헌터>(2017), 넷플릭스 오리지널 애니메이션 <러브, 데스, 로봇>까지 성공적으로 마친 뒤에야 그는 마지막 카드로 <맹크>를 내밀 수 있었다. 2003년 타계한 잭 핀처와 데이비드 핀처 부자의 아메리칸드림을 실현한 건 할리우드 스튜디오가 아니라 넷플릭스였다. 원작 혹은 실화와 줄타는 법 그는 작가(writer)가 아닌 작가(Auteur)다. 오리지널 스토리의 정체성을 담보해야만 창작자로서 무게감을 가지는 듯한 세태에서 비껴서서, 자신만의 개성적 스타일에 집중한 감독이 핀처다. 그는 시나리오 작가 에런 소킨의 도약에 일조했고, 익히 알려진 대로 척 팔라닉(<파이트 클럽>), 로버트 그레이스미스(<조디악>), F. 스콧 피츠제럴드(<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스티그 라르손(<밀레니엄> 시리즈), 길리언 플린(<나를 찾아줘>) 같은 작가들을 스크린으로 초대했다. 그동안의 영화화가 방대한 이야기를 ‘얼마나 잘 압축할 것인가’ 하는 문제, 그러니까 스릴러 장르의 시간 제한 안에서 서사를 얼마나 유려하게 춤추게 할 것인가의 고민이었다면 이번엔 다르다. <시민 케인>이라는 거대한 판본 앞에서 잭 핀처와 데이비드 핀처, 그리고 시나리오작가 에릭 로스(<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어떻게 최대한 원작의 뒤편으로 갈 것인가를 고민했다. <소셜 네트워크>(2010)를 발표한 후 핀처는 특히 실화의 이야기화를 두고 <라쇼몽>(감독 구로사와 아키라)에 비유한 바 있다. 한 사건을 두고 서로 다른 증언을 하는 인물들의 진실 싸움인 <라쇼몽>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건 번민과 모순이 가득한 현실의 상태를 영화 속에 펼쳐놓는 것이다. 정신분열의 네트워킹 핀처의 영화는 심리적 대립을 이루는 두쌍의 마주보기, 이들의 격렬한 대립을 통해 구동된다. 프로타고니스트와 안타고니스트의 단순한 갈등이라기엔 두 대상이 지닌 속성의 중첩과 대조, 의미 체계가 꽤 정확하게 닫혀 있다. <파이트 클럽>(1999)의 소심한 주인공(에드워드 노턴)과 날라리 타일러 더든(브래드 피트)이 보여주는 자아분열을 필두로, <세븐>(1995)의 형사(브래드 피트)와 살인마(케빈 스페이시), <패닉룸>(2002)의 이혼한 여자(조디 포스터)와 집에 들이닥치는 (전남편을 포함한) 낯선 남자들, <소셜 네트워크>의 아웃사이더 마크 저커버그(제시 아이젠버그)와 하버드의 인사이더들, 그리고 <나를 찾아줘>(2014)에서 서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부부는 결국 비밀리에 남아야 마땅할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고 이상한 공생의 순간을 만들어낸다. 먼 옛날 할리우드와 마찬가지로 지금까지 핀처가 다룬 사회는 폐쇄적인 그들만의 리그였던 터라 인물들의 신경증적 상태는 더욱 자유를 얻는다. <맹크>의 경우 “너무 많은 돈과 지나치게 거대한 자아들의 공동 작업”(대중문화잡지 <벌처>)인 영화 만들기에서 감독과 작가에게 부과된 강제적 협력에 방점이 찍혀 있다. 고기능성 알코올 의존증 환자인 맹키위츠를 위해 술병에 진정제를 잔뜩 넣어 보내는 웰스와 짐짓 유순하게 응수하지만 얌전한 각색자가 될 마음은 애초에 없었던 맹키위츠는 서로를 해치면서 돕는 관계다. 오스카와 평단의 적절한 보상이 없었더라면 핀처가 2020년에 “웰스와 맹키위츠는 서로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관계”(<벌처>)라고 표현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폭력과 강박의 나날 강도, 살인, 수사, 정치, 알고리즘, 싸우기, 단추나 폭탄 만들기, 그리고 시나리오 쓰기에 이르기까지. 지나치게 몰두하는 사람들의 노이로제가 데이비드 핀처의 영화에 즐거운 긴장과 피로를 일으킨다. 핀처의 정서적 테마가 강박과 집착에 가깝다면 이를 가시화하는 건 폭력이다. <맹크>에는 <세븐>과 <조디악>(2007)처럼 연쇄살인이 없는 대신 나치가 벌이는 유대인 학살의 소식이 흉흉하게 떠돈다. 부드럽게 처리된 흑백 화면과 맞물려, <맹크>속의 폭력성은 핀처의 다른 영화들과 비교하면 지극히 간접적인 방식으로 처리되지만 오늘날의 현실과 겹쳐 보인다는 점에서 여전히 강력하다. 폭력과 부조리 속에서 점점 더 광기의 온도를 높여가는 핀처 영화 속 캐릭터를 곧 시대정신과 직업윤리의 결합으로 치환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세븐>의 형사, <조디악>과 <밀레니엄: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2011)의 기자, <소셜 네트워크>의 프로그램 개발자, <나를 찾아줘>의 텔레비전 스타에 더해 <맹크>의 시나리오작가는 역사의 파고가 큰 시대에서 어렵게 도덕의 꽁무니를 좇는 인물이다. 시대의 엄혹함만큼 뜨겁게 미화될 수도 있었던 인물을 핀처는 적당히 차갑게, 그리고 생각보다 희망차게 마무리하면서 그다움을 보여준다. 보이스 오버와 교차편집의 이중주 분열된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데이비드 핀처는 스토리 또한 다중으로 나누어서 제시하길 즐긴다. 애용하는 도구는 보이스 오버와 교차편집이다. <나를 찾아줘>의 내레이션은 누구를 믿을 것인가 하는 믿음의 시험을,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2008)의 보이스 오버는 데이지(케이트 블란쳇)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는 벤자민과 갓난아이가 된 벤자민의 말년을 기억하는 데이지의 서사가 보완되는 순간을 이끌어낸다. <파이트 클럽> <소셜 네트워크> <밀레니엄: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에서처럼, 제각기 떨어져 있는 인물들 각자의 스토리가 교차편집을 통해 별개로 지속되면서 다중 플롯의 묘미를 만들어내는 것도 데이비드 핀처 영화의 대표적인 내러티브 스타일이다. <시민 케인>을 써내려가는 중인 맹키위츠의 현재와 미디어 재벌 곁에서 정치적 격동을 몸소 맞이했던 과거의 교차는 <소셜 네트워크>가 다루는 저커버그의 시간과도 비슷하다. 페이스북으로 막 성공세를 맛보기 시작한 시기와 소송대에 올라 자신의 비인간성을 지목받는 시기가 공존하며 서로에게 영향을 끼친다. <소셜 네트워크>가 유려한 짜깁기로 플래시백을 사용하지 않은 것과 달리 <맹크>는 맹키위츠가 써내려가는 시나리오의 일부처럼, 장면 전환을 타이포그래피로 표현하면서 맹키위츠의 심리적 역동을 ‘플래시백’이라는 서사 기법으로 못 박는다. 테크니션, 그리고 스타일리스트 동시대 영화계의 테크니션들을 열거한다면 가장 앞줄의 어디쯤에 핀처가 있을 것이다. <패닉룸>에서 땀 흘리며 대치 중인 등장인물들을 벗어나 어느새 혼자 집 안을 날아다니고 있던 카메라가 대표적이다. 하나의 숏이 담아낼 수 있는 새로운 이미지의 한계를 돌파하려는 노력은 오슨 웰스에게 딥 포커스를, 데이비드 핀처에게 CG 트래킹 숏을 불러냈다. 어지러운 복도와 계단, 겹겹의 문과 창문을 거슬러 카메라가 홀로 인물들의 동태를 살피는 <패닉룸>의 트래킹 숏은 분명 화려한 만큼 효과적이었다. 그러니 <맹크>는 “UCLA 아카이브나 마틴 스코시즈의 지하실에서 발굴-복원된”(<인디와이어>) 영화처럼 보이길 바랐다는 감독의 바람을 성취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기술만 남겨두고 많은 것들을 버려야 하는 작업에 가까웠을 테다. <맹크>의 고전적 질감은 최신 기술로 최상의 화질-음질을 뽑아낸 다음, 예상보다 훨씬 길어진 후반작업 기간을 거쳐 화면에 스크래치와 담배 자국을 내고, 사운드를 저하시키는 작업이었다. 인위적인 손상을 입힘으로써 어떤 이미지, 어떤 사운드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각인시키는 것에 가깝다. 이를테면 핀처는 트래킹 숏을 통해 전지적으로 존재하는 카메라를 자각시키는 것만큼이나 프레임 자체의 물질성을 과시하곤 했던 감독이다. <파이트 클럽>과 <세븐>에서 관객을 놀리듯 번쩍이며 삽입된 싱글 프레임 필름 컷은 <맹크>에서 화면 상단 귀퉁이에 반짝거리는 릴 체인지 서클로 이어진다. 릴 체인지의 순간에는 일부러 사운드가 살짝 튀도록 만들었는데, 이 작은 파열음을 두고 핀처는 “너무나 아름답고 마음을 안정시켜주는 소리”라며 대책 없는 영화 중독자의 낭만을 드러내기도 했다.

[스페셜] <맹크> 깊이 보기 - 할리우드의 황금시대, 어떤 일이 있었나

“사람들이 극장에 오게 만드는 방법이 뭘까?”(<맹크>의 루이스 B. 메이어 대사 중)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내러티브 구조와 할리우드식 제작 시스템 그리고 장르 문법은 <맹크>의 시대에 구축됐다. 할리우드의 황금시대를 이끌었던 메이저 스튜디오 5개사 MGM, 20세기 폭스, 워너브러더스, 파라마운트, RKO는 배우 및 스탭들과 장기 계약을 맺어 영화를 만들고 소유한 극장을 통해 배급·상영해 이윤을 극대화했다. 돈을 버는 것을 최우선시하는 제작자 입장에서 그 목표를 가장 충실히 달성할 수 있는 수직적인 통합 구조를 만든 것이다. 1920년대 초부터 1950년대까지 할리우드를 이끌었던 이 시스템에 대해 토머스 샤츠는 <할리우드 장르>에서 ‘스튜디오의 천재성’이라 일컬었다. “이 시스템은 관객의 반응에 따라 자신의 작업을 측정 가능케 하기 때문에 성공적인 스토리와 테크닉의 반복을 촉진시킨다. 스튜디오들은 개별적인 상업적 노력과 함께 영화의 기존 관습에 또 다른 변형을 보여주고, 관객은 그 창조적 변형이 반복적 사용을 통해 관습화될 것인지의 여부를 지시하는 셈이다.” 이른바 할리우드 황금시대는 유성영화의 등장을 기점으로 정의된다. <맹크>에서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찰스 댄스)가 '말'을 다루는 시나리오작가 맹크(게리 올드먼)에게 “유성영화가 미래다. 황금시대가 오면 자넨 셰익스피어가 될 것”이라고 말하는 맥락이 여기에 있다. 이후 시스템은 더욱 견고해져 1940년대 중반, 5대 메이저 스튜디오가 25개 대도시의 163개 개봉관 중 126개를 통제하는 수준에 이른다. 스튜디오와 관객의 상호작용하에 자리 잡은 내러티브 관습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웨스턴과 드라마, 뮤지컬, 갱스터 같은 장르도 만들었다. 극중 윌리엄은 “요즘 영화는 갱스터 아니면 막스 형제가 하는 것 같은 코미디”라며 당시 유행하던 장르에 대해 언급한다. <맹크>에 등장하는 첫 플래시백은 그가 헤드 작가진으로 활동했던 1930년의 파라마운트 촬영소다. 여러 작가들이 한데 모여 이후 <스타탄생>(1937),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9) 등을 만들게 되는 거물 제작자 데이비드 O. 셀즈닉(알리스 하워드)의 차기 프로젝트 스토리를 함께 구상한다. 관객에게 친숙하면서도 전과 다른 변형이 있는 내러티브는 개인의 영감보단 집단 창작에 의해 확보됐다. 한 작품 안에서도 특정 내러티브 관습에 특화된 작가가 존재했으며, 많은 작가가 릴레이처럼 작업한 까닭에 정식 크레딧에 오르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 시퀀스에는 찰리 레더러(<오션스 일레븐>(1960), <그의 연인 프라이데이>(1940)), 조지 S. 코프먼(극작가로서 막스 형제의 <파티 대소동>(1930)등의 원작 연극 각본을 썼다), 벤 헥트(<스펠바운드>(1945), <오명>(1946)), 찰리 맥아더(<그의 연인 프라이데이>, <폭풍의 언덕>(1939), 벤 헥트와 함께 <악당>(1935)으로 오스카를 받았다), S. J. 페럴먼(<몽키 비즈니스>(1931), <풋볼 대소동>(1932), <80일간의 세계일주>(1957)) 등 고전기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작가들이 한데 등장해 시네필의 호기심을 끈다. <맹크>의 초반부, 맹크는 자신의 아내 세라에게 <오즈의 마법사>(1939)가 스튜디오를 말아먹을 것이라 말한다. 당시 영화인이라면 쉽게 짐작했을 만한 이야기다. 디즈니의 <백설공주와 일곱난쟁이>(1937)의 성공에 자극받아 MGM이 야심차게 착수한 <오즈의 마법사>는 제작 과정에서 잡음이 많았다. 맹크를 포함한 수많은 작가가 스토리를 뜯어고치고 우여곡절 끝에 시나리오가 완성된 후에도 감독이 4번이나 교체됐다. 특히 촬영 당시 18살이었던 주인공 주디 갈런드가 제작진으로부터 심한 학대를 받았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논란이 됐다. 화려하게만 비쳐졌던 할리우드 스타 시스템의 민낯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영화에는 워너브러더스나 메이저 회사에는 속하지 못했던 컬럼비아 픽처스 얘기도 잠시 등장한다. 1940년대의 워너브러더스는 <카사블랑카>(1942), <나우, 보이저>(1942) 같은 멜로는 물론 <성조기의 행진>(1943) 같은 선전영화를 만들어 전쟁 자금을 모았다. 1948년, 미국 연방대법원이 이같은 수직적 통합 체계가 위법이라는 이른바 ‘파라마운트 판결’을 내리면서 할리우드의 황금시대는 ‘종말’을 맞았다. 더이상 제작과 배급, 극장은 통합될 수 없었다. 역설적으로 스튜디오의 쇠퇴는 보수적인 영화계가 텔레비전업계와 손을 잡는 계기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