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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1997)

<구경이> 성초이 작가, 구경이는 정답을 주는 게 아니라 정답을 찾아가는 인물이다

작가 성초이가 쓴 JTBC 드라마 <구경이>는 복잡하고 ‘의심스러운’ 오늘을 살아가는 한국 여성들의 실제를 거침없는 태도로 발설한다. 이야기의 시작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재학 시절부터 감독, 배우, 작가 등으로 종횡무진하며 창작의 영감을 수다 떨던 오랜 친구 두 사람이 메신저 채팅방. <구경이>는 두 작가가 지난 몇 년간 서로에게 방언을 쏟아내게 만들었던 분노와 좌절, 그리고 실낱같은 희망의 경험을 총합한 결과물이다. 거기에는 이해할 수 없는 비극 속에서 존재의 이유를 찾는 인간의 슬픔이, 성별에 근거한 온갖 범죄의 덫에서 자유롭지 못한 여성의 고통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임 한판을 하거나 모여서 피자 한판을 뜯음으로써 살아 있기로 하는 생의 끈질김이 있다. 나쁜 놈들을 죽이는 것이 삶의 유일한 기쁨처럼 보이는 젊은 여자 송이경(김혜준)과 그를 잡으려는 중년의 히키코모리 탐정 구경이(이영애)의 긴 사투는 그런 부조리 위에서 춤추듯 흘러간다. 탐정 이영애와 살인마 김혜준이 진지하게 줄다리기만 해도 재밌을 서사이지만, 작가 성초이는 그 위에 한결 이상하고 애틋한 충동을, 억척스러운 유머를 뿌림으로써 캐릭터들이 보여주는 팀워크의 묘미까지 극대화했다. *성초이라는 정체성에 기반해 두 사람의 말을 합쳐 정리했다. 다만 두 사람이 서로 대화할 때는 임의로 각각 A와 B로 나누어 표기했다. - <구경이>가 12월12일에 종방했다. 본방송을 사수할 때 함께 모여서 보는 편이었나. = 각자 집에서 따로 봤다. 작업을 도와준 친구들이 모여있는 메신저 채팅방에서 실시간으로 문자를 하면서 봤다. 일종의 넷플 파티 같은 거랄까. 같이 수다 떨면서 본다. - 종방 시청률 2.3%의 수치 이상으로 열렬한 반응과 지지를 얻었다. = 우리가 보고 싶은 것들을 엄청나게 다 넣어서 만든 각본이다. 그래서 비슷한 생각을 하는 분들이라면 재밌게 보시지 않을까 하는 기대는 있었다. 분명 누군가에게는 필요한 콘텐츠이지 않을까 생각했고, 그런 의미에서는 <구경이>가 제작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잘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깊이 즐겨주신 분들이 있어 감사하다. 시청자층이 좀 더 넓었으면 좋았겠지만…. (웃음) - 구경이 캐릭터를 처음 떠올릴 때 어떤 과정이 있었나. = 2017년쯤 우리 두 사람의 메신저 채팅방에서 처음 <구경이> 아이디어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처음엔 50대 여성이 탐정 역할을 수행한다는 게 전부였다. 엄청나게 유능한데 히키코모리인, 아주 예민한 사람이라는 정도가 구경이 캐릭터의 첫 스케치였다. 2018년 즈음 이영애 배우면 어떨까 하는 이야기도 우리끼리 주고받았던 것 같다. - 가수 이소라가 온라인 게임을 즐긴다는 것이 반전 취미로 화제가 된 적 있다. 그로부터 영감을 얻어 구경이 캐릭터를 구체화했다고 알고 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포인트에 매료됐었나. = 외국 장르물을 보면 마약, 술에 찌들어 있는 괴짜 탐정들이 나오지 않나. 이런 캐릭터를 한국화한다면 어떤 요소들이 있을까 떠올려봤다. 과거에 삭발한 이소라씨가 기자간담회를 마치고 내려오는데, 손에 든 아이패드에 캔디크러쉬사가류의 모바일 게임을 띄워놓은 모습이 캡처되어 짤로 돌아다닌 적 있다. 어쩌면 그런 이미지가 한국화된 이상한 탐정의 모습이 아닐까 싶더라. 이소라씨는 게임을 좋아한다는 것이 알려지고 나니까 사람들이 자꾸 자기 캐릭터를 죽인다면서 슬프다는 말도 한 적 있는데 그게 너무 귀여웠다. - 2017년만 해도 아직 여성 서사가 부상하는 움직임이 크지 않았던 때다. 창작자들의 갈증은 큰 한편, <구경이> 같은 작품의 진가를 알아보는 분위기도 덜했을 텐데. = 처음엔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는 “주인공이 매력 없다”는 거였다. - 세상에! (웃음) = 그 시절 우리 사이엔 어떤 피로감이 공유되고 있기도 했다. 영화 시나리오 4~5편을 받아서 모니터링하는 일을 했는데, 모두 1신에서 5신 이내에 여자가 죽거나 다치는 이야기였다. 이 작품들에 큰 배우들이 붙어 몇억원짜리 영화로 제작되는 산업 분위기에 대한 극심한 피로와 회의감을 극복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그런 장르물에 나오는 남자 사이코패스들은 왜 그리 하나같이 ‘비릿한 웃음’을 짓는다고 쓰인 건지! (웃음) 우리는 꼭 ‘해맑게’ 가자고, 아무 생각 없어 보이고 말갛고 화사하게 웃는데 사람을 잘 죽이는 여자를 만들어보자고 그때 결심했다. 당시에 이런 문제의식을 많이들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최근 들어 좋은 작품들이 많이 나왔다고 생각한다. - 4년 넘게 준비한 작품인 만큼 여성 서사를 읽어내는 업계의 안목과 취향이 계발되고 있다는 사실도 체감했겠다. = 계속 퇴짜만 맞다가 키이스트에서 제작을 결정한 순간에 그랬다. 캐릭터가 재미있으니 ‘확실히 Go 한다’는 제작사의 피드백을 처음 들었다. 대표님이 당연히 남자 캐릭터일 줄 알았는데 여자여서 좋다는 말을 했다. 거기다 영애님이 구경이 역을 맡아주신대서 ‘대박!’ 하며 쾌재를 불렀다. - 천부적인 재능을 지녔지만 일상의 기술이 부족하고 과거의 상처로부터 깊은 트라우마를 지닌 전문가 캐릭터는 장르물에서 주로 남성 역할로 풀이되어왔다. 젠더가 바뀌었을 뿐 캐릭터의 굵은 줄기는 여전한데도 새롭게 생기는 활력들이 대단하다. 달리 말하면 젠더의 차이가 낳는 디테일의 묘사가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낸다는 거다. = 애초에 우리에게 구경이가 여성이라는 사실은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발상이었기 때문에 주로 남자로 해석된 캐릭터를 여자로 바꾸어서 의미가 있다는 평가에 대해선 약간 고개를 갸웃하게 되는 구석이 있다. 물론 그런 의미 부여가 왜 필요한지에 대해서도 공감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 여성 서사로서 <구경이>의 과감함과 정확함이 놀랍기 때문에 자꾸만 그런 지점들을 읽고 싶어진다. 예를 들어 송이경은 젊고 매력적인 여성 살인마 아닌가. 자칫 삐끗하면 얼마든지 대상화될 수 있는 캐릭터다. = ‘비릿함을 없애자!’는 구호가 있어서 가능했다. (웃음) 우리가 집중했던 포인트 중 하나는 이경이가 어떻게 웃느냐였는데, 진짜 속 없는 애처럼 ‘컹컹컹’ 웃기를 바랐다. 집필 당시에 조금이라도 무표정하면 욕먹는 여자 아이돌들의 운명에 대해서도 생각하면서 썼다. 늘 상냥하게 애교 부리길 요구받는 젊은 여성이 앞에선 그 기대에 부응하면서 뒤에선 사람들을 다 죽여버리는 어떤 충돌. 거기서 무언가 해소되는 지점을 찾아보고 싶었다. 앞에선 아이돌 뒤에선 살인마라는 컨셉조차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일종의 대상화가 될 수도 있겠지만. - N번방 사건을 비롯한 디지털 성범죄, 불법 카메라, 여성 혐오 범죄 등 몇 년 새 중대한 이슈가 된 우리 사회의 시급한 폭력들도 에피소드마다 녹여냈다. = 떠오르는 사건들이 너무 많아 그냥 술술 튀어나왔다. 구체적인 특정 사건에 반응했다기보다는 그동안 살아오면서 쌓인 분노가 동력이 됐다. 사실 작가가 화가 나 있으면 좋은 글을 쓰기 어렵다.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려면 ‘내 말 좀 들어보세요’ 하고 사랑을 품어야 하는데, 한동안 분노에 지배당한 사람처럼 그런 마음을 먹기 힘든 시절이 있었다. <구경이>는 그 과정에서 우리 스스로 답을 찾고 회복하기 위해 애쓴 과정의 결과물일 것이다. 그래서 구경이는 끝까지 정답을 주는 인물이 아니라 정답을 향해 찾아가는 인물이다. 조사 B팀 못지않은 성초이로서의 팀워크 -‘ 성초이’라는 이름은 어떻게 나왔나. 역시 채팅창에서 탄생한 작명인가. = 그렇다. (웃음) 엉망진창으로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나온 작명이라 비화를 다 들려주긴 힘들다. 주변으로부터 좀 허술한 작명이라는 야유도 종종 듣는다. - 가까운 동료 사이에서 공동 작업을 결심하기까지 서로를 움직인 특별한 계기가 있다면. = 진지하게 서로 협업을 해볼까 계획했다기보다는 각자 영화 작업을 시도하는 과정에 지쳐 ‘아, 정말 영화 못 해 먹겠다!’ 싶은 마음이 통했다고 보는 편이 맞겠다. 학교에서 만나 오랫동안 텔레그램을 주고받으며 수다 떠는 사이였기 때문에, 이렇게 된 이상 드라마라도 한번 써보자는 이야기가 나왔고 하다 보니 끝까지 써졌다. 뒤늦게 드라마 집필이 얼마나 어려운지 실감하게 된 한편, 함께 어려움을 풀어나가는 공동 작업의 장점도 크게 느꼈다. - 공동 작업의 묘가 궁금하다. 어떤 방식으로 일을 진행하나. = 어쩌다 보니 코로나19 시대에 최적화된 작업 방식에 일찌감치 적응한 편이다. 각자의 컴퓨터 화면에 구글 드라이브 문서를 하나 공유해놓고, 옆에 페이스타임을 켜서 대화를 한다. 얼굴 보며 대화를 하고 있지만 동시에 채팅도 하고 있고 텔레그램으로는 자료 링크를 실시간으로 주고받는다. 이때 손은 구글 드라이브 문서에 글을 쓰고 있다. (웃음) 신마다 어떤 내용이 들어갈지에 대해 대략 합의한 상황에서 홀수, 짝수 신으로 각본을 해체해 나눠 쓴 다음 마지막으로 교차 검증을 하는 식이다. - 성초이라는 얼터 에고에 관한 두 사람의 합의점 같은 것이 따로 마련되어 있는지도 궁금한데. = 성초이라는 정체성으로 글을 쓸 때는 개인으로서 글을 쓸 때와 꽤나 다른 스탠스를 지향한다. 고집과 취향은 각자의 글에서 풀기로 했다. 성초이로서는 서로의 취향이 겹치는 부분에 집중하기 때문에 이견이나 갈등이 잘 생기지 않는다. 우리 둘의 협의도 수월한 편이지만 감독님이 새롭게 제시한 것에 관해서도 수용과 수정이 빠르다. - 조사 B팀 소속의 나제희 팀장을 연기한 곽선영, 오경수를 연기한 조현철 배우의 말을 들어보면 캐릭터의 전사와 레퍼런스 같은 것도 꼼꼼히 던져주었다고. = 모든 캐릭터들의 전사를 일일이 따로 정리한 것은 아니고 매일 주거니 받거니 한 내용이 채팅창 안에 방만하게 흩뿌려져 있다. 곽선영 배우의 경우 준비할 때 캐릭터의 전사에 대한 자료를 원해서 나제희에 관해 특별히 따로 추려서 전달했다. 서로 계속 대화를 던지기 때문에 브레인스토밍을 모아둔 파일만 100장이 넘는다. - 영상원 출신으로 연출적 감각을 지닌 작가들이어서인지 애초에 극본에서 콘티를 염두에 둔 설정들이 꽤 눈에 띈다. 장면 전환과 시각적인 효과를 염두에 둔 전개들이 <구경이>의 활력 중 하나다. = 그래서 대본을 읽기 힘들다는 피드백을 받기도 했다. TV 드라마 대본 같지 않다는 말들이 많았다. 연출 전공자들이니 아무래도 이야기적으로만 접근하지 않고 장면에 대해 생각하는 습관이 있어서일 것이다. 장면화의 아이디어를 대본에 써두려고 하는 편이다. 하지만 게임 화면이나 연극 무대 장치를 적극적으로 장면화한 것은 이정흠 감독님의 아이디어였다. 구경이가 게임을 좋아한다는 설정, 케이가 희곡에서 살인의 영감을 받는다는 설정으로부터 감독님이 확장시킨 컨셉이다. 정말 잘 해석해준 결과물들이다. 사실 연극 역시 최초에는 없었던 설정인데, 케이의 살인 방법을 생각하다가 도입했다. 성경, 소설 등에서 살인의 영감을 얻는 살인마들 스토리가 있잖나. 그래서 쓰면서 이게 괜찮은지, 뻔하지 않은지 고민도 했었는데 케이와 구경이가 자기 감정을 연기하며 살아가는 인물이라는 특성과 잘 맞물리면서 깊이감이 생겼다. 운이 좋았지. - 두 사람이 실제로 게임을 즐기나. A 쟤가 한다, 난 안 하고. 그리고 쟤는 실제로 방도 잘 안 치운다. 영애님이 구경이 캐릭터는 저 친구한테서 온 것 같은데… 할 정도로. B 아니야, 아니라고! - 결과적으로는 게임과 연극적 요소들이 폭력적인 장면을 윤리적으로 소화하는 세련된 장치들이 되어주기도 했다. = 우리 둘 다 신체 훼손, 슬래셔 같은 장르물을 좋아한다. 하지만 TV에서 보여질 때는 달라야 한다고 본다. 특히 실제 사건에서 모티브를 얻은 설정이라면, 반드시 피해자가 당하는 것을 자세히 보여준 다음 가해자를 응징해야만 하는지 이전부터 의문을 가져온 편이다. 피해자에 대한 동정과 가해자에 대한 분노를 일으키기 위한 도구적 묘사들로부터 불쾌감을 느낀다. 그걸 보여주면 이입도 쉽고 ‘사이다’가 되겠지만 <구경이>는 애초에 피해자가 존재하는 폭력 혹은 피해자에 대한 폭력을 너무 손쉽게 묘사하는 일군의 한국 콘텐츠들에 대한 피로감으로부터 생겨난 아이디어라는 점을 스스로 되새겼다. 그것이 극을 쓰는 과정에서 우리가 무엇을 지켜나갈지에 대한 기준이 됐다. 어쩌면 그래서 시청률이 안 나왔으려나? (웃음) - 건욱(이홍내)과 대호(박강섭) 커플 외에도 구경이와 송이경, 구경이와 나제희 사이에서 퀴어 코드를 발견하는 팬들의 해석이 2차 창작물을 만들어 낼 정도였다. 혹시 각본상에 더 많은 디테일이 있었는데 TV 방송으로 편성되는 과정에서 잘려 나간 내용이 있나. = 딱히 잘린 건 없다. 딱 표현하고자 했던 대로 나왔다. 각본에서는 성애적 코드가 거의 없는 편에 가까웠달까. 오히려 감독님께서 그런 뉘앙스를 미묘하게 살려내는 작업을 즐기신 것도 같다. 처음에 이경이와 이모(배해선)가 포옹하는 장면에선 우리 둘 다 놀랐다. “이모랑 저런 느낌으로 안는다고? 너무 친한데!” (웃음) 남자 배우들이 여럿 나오는 작품에서 자연스럽게 브로맨스가 언급되듯, 여자들끼리 밀도 있게 부대끼고 서로 센 감정을 내보이는 작품이다 보니 그런 텐션을 성애적 감정으로 치환하기 좋은 포인트들이 많았으리라 생각한다. “49 대 51의 마음으로” - 배우 이영애가 스타로서 가진 우아한 이미지와 <친절한 금자씨> 같은 작품에서 보여준 키치한 매력이 모두 좋은 재료가 되었다. 전자는 파리가 꼬일 만큼 씻지 않는 구경이 캐릭터와 배우 사이에 요상한 간극을 만들고, 후자는 구경이 캐릭터의 비범함과 시너지를 낸다. = 한마디로 ‘짱’이었다. 영애님이 캐스팅되었기 때문에 과감하게 밀어붙일 수 있었던 설정들이 있다. <친절한 금자씨>에서 고등학생 시절을 연기할 때의 모습 같은 것. 극 중 구경이가 위장수사를 할 때 그런 매력을 더 잘 살려보자 싶었다. 조금 과하게 써도 얼마든지 훌륭히 소화해주리란 믿음이 있었다. 가령 대학축제 중에 벌어진 몰카범 살인사건을 수사하면서 구경이가 대학생인 척 전화하는 장면은 배우의 자질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에 추가한 장면들이다. - 송이경 캐릭터는 캐스팅 풀이 꽤 넓었을텐데 배우 김혜준은 일면 의외의 선택이고, 결과적으로 배우의 필모그래피 안에서 놀라운 도약대가 되었다. 구경이에 결코 밀리지 않는 배짱과 여유, 매력이 빛났는데 작가 입장에서도 흡족한 순간이 많았겠다. = “속 없이 웃는다”는 지문 한 줄이 쓰기에는 쉬워도 직접 그 웃음을 지어야 하는 배우에게 얼마나 큰 부담이겠나. 케이는 무서워질라치면 귀여워보여야 하고 짠해질라치면 미워보여야 하는, 어쩌면 배우에게는 아주 난해한 역할이다. 김혜준 배우의 이전 작들을 쭉 보면서 기본기가 상당히 탄탄하다는 인상을 받아왔는데, 극을 다 본 지금은 ‘김혜준이 아니었다면 누가 할 수 있었겠는가’하는 생각 뿐이다. 흔들다리에서 허성태를 내려다보는 김혜준 배우의 얼굴은 우리도 실시간으로 방송을 보면서 “헉!” 했다. - 나제희 캐릭터도 재미있다. 성장 드라마의 관점에서 보자면 평범한 삶을 살다가 표면적으로 가장 큰 사건, 사고에 휘말린 인물이다. 엔딩에서도 구경이가 나제희에게 “많이 변했다”고 한다. = 쓰면서 가장 고생한 게 나제희 캐릭터다. 탈고를 하고도 ‘나제희 어떡하지’ 할 정도로. 저마다 개성이 센 인물들 사이에서 이 친구가 어떤 얼굴을 입어야 할지 작가인 우리에게도 감이 조금 부족했다. 곽선영 배우가 엄청난 집중력을 갖고 인물을 연구했고, 심지어 대본과 똑같은 대사인데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레이어를 더한 부분이 많다. 나제희는 배우가 새로 쓴 캐릭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곽선영 배우님께도 직접 말씀드렸다. “당신도 이 시나리오의 작가입니다”라고. (웃음) - 배우 김해숙에게도 용국장 캐릭터는 드라마 필모그래피의 방점 중 하나가 될 만하다. = 종방 후에 김해숙 선생님께 전화가 왔다. 너무 즐겁게 연기를 하셨다면서 이런저런 소감을 들려주셨는데, 개인적으로도 고무적인 순간이었다. 특히 케이의 폭탄을 맞은 이후 서울역에서 경찰서로 연행되는 신은 배우가 대본을 적극적으로 재해석한 경우다. 원래는 구경꾼들이 사이에서 혐의를 부정하며 발악하는, 약간은 찌질하게 퇴장하는 컨셉이었는데 김해숙 선생님이 용국장은 이런 캐릭터가 아니라고 하시면서 스스로 경찰차로 걸어가는 모습으로 연기했다 - 케이는 감옥에 갇히고 용국장은 사회적 질타를 받는 등 엔딩에서 권선징악의 구도를 꽤나 심플하게 가져갔다. = 애초에 구경이가 승리하는 엔딩에 관해서는 의심이 없었으므로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갈 길로 간 것이라 본다. 사실 권선징악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게, 용국장은 곧 다시 활동할 것이고 허성태도 다음 선거에 또 모습을 드러내는 게 우리 현실 아닌가. 지금쯤이면 이경이도 탈옥하지 않았을까? (웃음) 응징 자체에 큰 의미를 두진 않았다. - 끝내 정체를 알 수 없는 산타(백성철)를 곁에 두기로 하는 구경이의 변화가 엔딩의 하이라이트가 되었는데. = 시청자가 된 처지에서 우리가 발견한 것은 산타만이 극 중에서 단 한 번도 거짓말을 하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사람들이 악의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으면서 선의에 대해서는 의심한다는 점도 재미있었다. 산타의 정체를 궁금해하고 의심하는 시청자들의 반응이 우리에게도 질문거리였다. 그리고 똑똑한 구경이는 사실 남편의 자살에 얽힌 사실관계에 관해서는 누구보다도 정확히 알고 있을 것이다. 다만 그녀가 모르는 것은 남편이 무슨 마음, 무슨 생각을 갖고 있었는가 하는 문제다. 그 보이지 않는 마음의 진실을 캐고 싶어서 매달렸다가 나락에 다녀온 인물이 구경이이고, 엔딩에서 산타를 받아들이는 결정은 그래서 구경이의 발전이기도 하다. 물론 그렇다고 구경이가 산타를 전적으로 믿는다는 것도 아니다. 그냥 옆에 두기로 한 것이지. - 구경이의 남편 장성우(최영준)의 죽음과 혐의에 관한 진실을 시청자들에게도 온전히 다 알려주지 않고 끝냈다. 갈무리 방식에 대해 여러 버전이 있었을 법한데 현재의 엔딩이 곧 작가의 말을 대신하는 듯 보인다. = 엄청나게 끔찍한 범죄가 아니더라도 우리 주변에 몹쓸 짓을 한 인간들은 언제나 존재한다. 그들을 내 삶에서 마음처럼 깨끗이 제거하고서 살아갈 수는 없다는 것이 30대에 접어든 이후 우리가 깨달은 사실이었다. 그저 매번, 반복 속에서,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인지를 고민하면서 49 대 51의 마음으로 살 뿐이다. 대본 리딩 때 장성우 선생님을 연기한 최영준 배우는 자신이 나쁜 사람이 아닐 거라고 믿었다. 장성우의 진실에 관해서는 작가인 우리 두 사람의 의견도 여전히 조금 다르다. 이경이가 왜 살인을 하면 안 되는지 그 이유에 관한 생각도 마찬가지로 조금씩 다른데, 그 복잡함 자체가 당연하게 느껴진다. 장성우가 결백하다고 믿는 배우의 해석에 관여하지 않고 뜻대로 남겨둔 것도 그런 맥락에서였다. 엔딩의 여러 국면 중 ‘어쩌면 이것이 진짜 엔딩이다’ 싶었던 것은 미애(최하윤)와 대호의 선택이었다. (불법 촬영물 유포의 피해자였던 미애는 송이경의 조력자였지만 자신을 “도와준 그 여자애가 더 나은 삶을 살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이경을 배신하고 구경이의 손을 잡는다. 대호는 끝까지 건욱의 옆에 남아 그를 지키기로 한다 - 편집자) 두 사람은 의심과 확신 사이의 흔들림 속에서 자기 양심과 진심에 따른 선택을 했고, 후과가 두려워도 기꺼이 책임지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 구경이가 이소라의 노래 중에서도 하필 <청혼>을 부르는 이유가 있을까. 가사가 더욱 아이러니하게 들린다. = 그게 재밌었다. “나는 당신을 믿을게요”라는 가사가 상황과 어우러지는 순간이. - 구경이와 송이경 모두 가족을 잃은 비극을 가진 슬픈 여자들이고, 살아있기 위해 애쓰는 과정에서 한 명은 의심하기를 다른 한 명은 남을 죽이기를 택한 셈이다. <구경이>를 쓰는 동안 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이 작가들 자신에게는 어렴풋이나마 생겼나. = 기획 의도에 썼던 말은 실제로 내 친구에게 들었던 꿈 이야기다. 큰 우울감에 빠져 있을 때 꿈에 신이 나와서 이 세상을 없애도 되겠냐고 물었는데, 왜 안 되는지 왜 살아야만 하는지 대답을 못 하고 있다가 꿈에서 깼다고 한다. 답을 찾아 나가는 과정은 사는 동안 계속해야 하는 일 같다. 다만 구경이가 그랬던 것처럼 곁에 믿을만한 친구들이 있으면 그 과정이 조금은 견딜 만해진다는 것, 그렇게 대충이나마 계속 살게 되더라는 것이 우리가 지금 말할 수 있는 전부다. - 앞으로 성초이의 정체성은 계속 유지될까. A 일단 다음 작업을 또 둘이서 같이 하고 있다. <구경이>랑은 전혀 다른, ‘보편적인 대중 서사’를 준비하고 있다. 이번엔 로맨스 장르다. B 혹시나 말해두자면 게이 로맨스 아니고 이성애 로맨스다. A (화들짝) 그랬나…? (웃음) -혹시 <구경이> 시즌2에 대한 생각은 어떤가. = 지금의 팀 구성이 아니면 절대 또다시 만들어낼 수 없는 드라마다. 이 좋은 배우들이 모두 스케줄을 맞출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작가로서는 후회나 미련이 없을 만큼 감독, 배우, 스태프들이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주었고 여기서 마무리하는 것도 좋은 그림이 아닐까 싶다. *원고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성초이 작가들로부터 짧은 메시지가 날아왔다. 인터뷰를 마치고 저녁 식사를 하던 중 자신들도 모르게 ‘시즌2에서 이런 건 어떨까, 저런 건 어떨까’ 습관적으로 아이디어를 주고받고 있더라는 것. 혹여나 시즌2가 나온다면 시즌1의 서사를 잇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캐릭터들을 유지하되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를 펼치고 싶단다. 온 얼굴에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띤 송이경이 자문자답하듯 성초이는 이렇게 덧붙였다. “솔직히 이영애가 연기하는 케이, 김혜준이 연기하는 구경이 보고 싶다 아니다?”

2021년을 빛낸 시리즈 스페셜: 올해의 시리즈 BEST 5

1.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 압도적인 지지다. “지금 한국의 블랙코미디를 해낼 수 있는 유일한 연출자 윤성호”(복길)의 “현실 정치를 들여다보는 급진적으로 깜찍한 시각”(이보라)을 보여주는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이하 <이상청>)가 2, 3위의 거의 두배에 가까운 표를 얻으며 1위를 차지했다. “한국 정치는 이야기의 보고”(김봉석)라는 점을 꿰뚫은 영리한 기획이 “정치가 코미디보다 웃기는 나라에, 드디어 정치보다 웃긴 풍자극의 등장”(김선영)을 알리며 “코믹과 현실의 드라마틱한 조화”(정석희)를 보여줬다. “지금 이 공포스러운 정치 상황에서 이처럼 어울릴 수 없는”(듀나) <이상청>은 “저격과 난사의 쾌감 모두를 선사”(김현수)하는 “한국인 소화흡수율 99.8%의 정치 시트콤”(유선주)이지만, 단지 현실의 소재를 무분별하게 가져온 코미디는 아니다. “당대의 정치, 사회, 문화(종교) 이슈를 첩첩이 쌓은 고맥락 코미디를 이해의 결락 없이 즐기는 쾌감”(유선주)을 선사하는 동시에 “무겁지 않지만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균형감”(이다혜)으로 “주제에 대한 책임감을 놓치지 않고” (최지은) 있다. 그 힘은 “다양한 캐릭터의 조합과 쉴 새 없이 수다스러운 대사”(홍수정)에서 기인한다. “성격, 맡은 업무와 지위, 가치관에 따라 각자 개성이 또렷하고 대사의 밀도가 높은”(유선주) <이상청>은 “인물이 내뱉는 말들에 옳고 그름을 영리하게 뒤섞어 냉소한 뒤에라도 종합적으로 생각해볼 여지를 주면”(김성찬)서, “맑고 상쾌하며 때로는 윤리의 경지에 도달한 웃음까지 선사하는 쾌거”(남지우)를 거두고야 만다. 동시에 “어공과 늘공이 모여 사는 공무원 세계의 구조적 모순을 들춰내는 데도 성공”(김현수)한 오피스 드라마이기도 한데, “정치인이라는 ‘직업’에 대해 이보다 더 성실하게 탐구한 작품이 있었던가 싶다”(장영엽)는 호평을 받았다. 한편 <이상청>은 “검열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OTT 제작 작품의 강점을 잘 살린” (박현주) 웨이브의 오리지널 시리즈다. “웨이브의 선택과 방향성. 이들의 향후 10년 플랜이 이 작품과 함께 천명된 듯하다. 쉽지는 않지만 유니크한 자리를, 한국에선 일단 먼저 웨이브가 차지한다”(남지우)며 평자들은 플랫폼의 결정을 지지했다. 그러니 “올해 가장 늠름한 통찰, 유머, 풍자로 그득한 최신의 K서사”(김소미)는 “김성령은 청와대로, 웨이브는 시즌2로”(김송희) 가기를 바란다. 2. 구경이 “‘이게 뭐지?’로 시작해서 ‘이거구나!’로 달린 드라마.”(남선우) “이게 되네? 이걸 했네? 놀랄 틈도 없이 아무렇지 않게 앞으로 나아간다.”(유선주) <구경이>는 마이너의 생경함을 결국 완전한 지지로 돌려놓는 드라마다. <구경이>에 자주 쓰이는 ‘요상하다’는 수식어는 “한국 TV드라마 속 여성 서사의 스펙트럼이 B급, 코미디, 복합 장르로 확장되고 있는 신호”(김소미)였다. “메인 스트림이 되기에 어딘가 하자가 있어 보이는 사람들이 한쪽에서는 세계를 파괴하고, 한쪽에서는 지켜내는데 이들이 선사하는 기이한 뭉클함”(장영엽)은 “텔레비전 드라마 환경에서 용인되지 않았던 ‘비주류 정서’를 메인 스트림에 제대로 끌어오는”(복길) 데 성공한다. 그 결과 “해마다 많은 편수가 제작되는 범죄물이 어떻게 새로워질 수 있을까에 대한 신박한 답”(이다혜)을 보여주며 “추적극의 신기원, 여성 서사의 신대륙, 장르 믹스의 어홀 뉴 레시피”(진명현)가 됐다. 기본적으로 인터넷 밈부터 주연배우들의 전작까지 인용과 오마주가 무척 풍부한 작품이다. 이들을 “적극적으로 가지고 놀기 위해 끌고 들어오고 눈치를 채도 좋고 몰라도 좋게끔 가공”(유선주)하는 동시에 “모든 요소가 과감하면서도 그 안에서 조화로운”(최지은) 신묘한 균형감을 보여주는데, 덕분에 <구경이>는 “현실밀착형 캐릭터와 만화에서 튀어나온 듯 과장된 캐릭터가 한 프레임에서 어우러지며”(이다혜) “잦은 갈등과 사건에도 인물들이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는”(조현나) 미덕을 성취한다. 특히 확실한 응징을 보여주는 엔딩은 “쉬운 사이다 서사로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케이(김혜준)에 대한 주인공의 단호함을 통해 윤리적 전망 역시 높은 수준으로 제시”(위근우)하며 <구경이>가 독보적인 장르 믹싱과 레퍼런스 놀이를 하면서도 가야 할 곳을 잊지 않는 명민한 드라마임을 보여준다. <킬링 이브>와 유사하다는 초반의 지적은 “구경이(이영애)와 케이의 대결 구도 외에 용숙(김해숙)이라는 카리스마적 인물을 더하며”(김성찬) 차별화된 지점을 확실히 만들어냈다거나 “<킬링 이브>보다 나은 드라마”(듀나)라는 평자들의 강력한 지지로 대신 해명이 가능할 듯하다. 여러모로 “지금 현재 한국에서 가장 트렌디한 드라마”(배동미)이면서 “가장 재미있고 가장 신나고 가장 웃기고 가장 끝내주는 액션 신과 추격 신을 가진 올해 최고의 ‘한드’”(듀나)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3. D.P. “국내 드라마 역사상 가장 반역적인 작품이 글로벌 플랫폼 넷플릭스를 통해 탄생한 순간.”(남지우) 탈영병을 잡는 군무 이탈 체포조 이야기인 는 “사회 드라마를 재미있게 만들기에 성공”(김봉석)한 “넷플릭스 ‘사우스 코리아’의 성취”(진명현)다. “외면하고 싶지만 꼭 알아야 할 이야기”(정석희)를 담아 “폭력과 착취의 순환선에 갇힌 청춘들의 지옥도를 서늘하게 재현”(김선영)했다. “원작의 좋은 설정에 기대서 안일한 소재주의에 빠질 수도 있었지만, 군 조직의 폭력성에 대한 문제의식을 마지막까지 놓치지 않고 힘 있게 밀어붙인”(위근우) 덕분에 “마치 상담가가 상담을 하듯 탈영으로 인해 돌출되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추격”(홍수정)하며 “디테일과 에너지, 속도와 앙상블의 완성도”(진명현)를 보여준 수작으로 꼽혔다. “실재했던 폭력 사건을 어디까지 서사로 취할지, 피해자가 있는 사건을 극화할 때 어느 선까지 접근하면 좋을지에 대한 창작자의 고민이 계속되는”(김송희) 시대에, “군내 폭력 행위가 필연적으로 담지하는 ‘동성간 섹슈얼리티의 침범함-침범당함’의 미묘한 뉘앙스를 예리하게 포착” (남지우)한 섬세한 접근을 해냈다는 점은 의 중요한 미덕이자 최근 제작이 확정된 시즌2에서도 이어질 숙제다. 군대 경험이 있을 가능성이 높은 남성들뿐만 아니라 여성 필자들의 지지도 눈에 띈다. 는 군대의 기억을 흔한 무용담으로도 승화하지 못할 이들이 마주했을 폭력을 직시한다. 이는 “군 복무를 하지 않은 여성도 한국 남성의 보편 경험을 대리체험하게 해줬을 뿐만 아니라 그 경험으로부터 소외된 남성들이 남성 사회에서 배제되는 악순환이 왜 반복됐는지를 아프게 깨닫게”(남선우) 했다. “여성 오디언스를 배제하지 않으려는 노력”으로 “군 시스템과 문화를 경험한 사람과 아닌 사람 사이에 발생하는 정보와 배경지식의 격차를, 재치 있는 대사 쓰임을 통해 최소한으로 좁혀내”면서 “권력, 계급, 폭력에 관한 이야기로, 바로 지금의 이야기로, 모두의 이야기로, 변모할 수 있었던”(남지우) 점도 의 영리한 지점이다. 한편 “오직 한국 드라마에서만 가능한 이야기를, 한국영화계의 라이징 스타들을 통해 설득력 있게 풀어낸”(장영엽) 는 올해의 남자배우 선정작이다. 한호열 역의 구교환은 물론 “주제의 비극성과는 대조를 이룰 만큼 활기를 띠는”(김소미) “주연배우들의 앙상블”(홍수정)이 고르게 호평받았다. 4. 미치지 않고서야 <미치지 않고서야>는 “생존하기 위해 자신의 쓸모를 끊임없이 증명해야 하는 노동자들의 비애를 담은 페이소스 넘치는 코미디”(위근우)로서 “오래 묵어서 돌아버리기 직전의 사람들만이 지을 수 있는 표정이 절창”(이다혜)이다. 한국 드라마에서 명맥이 끊기다시피 한 오피스물은 “서울, 20~30대 사무직 노동자로 한정하던 빈약한 상상”(유선주)에 머문 경우가 많았는데, “창원 올 로케이션으로 구체적으로 시야를 확장”(유선주)하며 “이 시대에 소모품으로 전락한 중년 직장인들의 애환을 진실하고도 위트 있게”(박현주) 담아냈다. 그렇게 “환상이라곤 조금도 없는 오피스 드라마”(김송희)는 오히려 “질주 후 탈진 직전인데도 안간힘을 내보는 나의 40대를 그려보게” (김송희) 한다. 정도윤 작가는 “노동 세계에 속속들이 박혀 있는 끔찍한 아이러니를, 감칠맛나고 통통 튀는 대사들을 통해 전달하는 차원이 다른 수준의 기교” (남지우)를 선보이며 “사극만큼 많은 등장인물 개개인의 캐릭터와 서사를 노련하게 운용”(유선주)하는 대본을 만들어냈다. “절망하지도 기만하지도 않으면서 이 시대의 일과 삶에 관해 말하는”(최지은) 균형감 역시 호평받았다. “최반석(정재영)이 코딩에 몰두하며 ‘일하는 즐거움’을 표현한 장면은 올해 최고의 엔딩”(배동미)이며, “실력 있는 배우들의 농익은 연기가 극에 몰입하도록 견인하는 역할”(김성찬)을 했기 때문에 “올해 MBC 연기대상은 반드시 배우 정재영의 것이 되어야 할 것”(남지우)이다. 5. 지옥 “연상호와 최규석의 환상적인 조화”(김봉석)로 화제가 된 넷플릭스 시리즈 <지옥>은 “태고의 공포와 당대의 불안을 절묘하게 버무린, 최근 디스토피아 서사의 정점”(김선영)을 찍었다. “장엄하고 엄숙하며 관념적인 ‘찐’ 연상호표 드라마”(홍수정)는 “죽는 날을 고지받는 설정이 인간사 전반에 의문을 던지는 도발적인 접근”(오진우)으로 “파국이 일상이 된 디스토피아에서 무엇을 어떻게 믿어야 하는지”(남선우), “어떻게 살아가야 옳은가, 때론 선의가 타인을 괴롭히진 않나 등등 좋은 질문”(배동미)들을 품고 있다. 동명의 애니메이션 및 웹툰과 스토리를 공유하지만 “원작의 상상력을 충실히 구현한 것에 더해 배우들의 놀라운 연기로 설득력을 갖추며”(남선우) 영상매체만이 할 수 있는 일을 보여줬다. 특히 “마지막 회의 예외적 순간에서 느껴진 감독의 따뜻한 시선이 더 빛나기 위해서 전반적으로 냉소적이고 비관적인 세계관을 완성도 있게 구축”(오진우)한 <지옥>은 “세계관과 분위기를 세팅하는 1~3회의 전반부보다 후반부가 진면모”(배동미)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부산행> <염력> <반도>로 이어지는 “대체로 공허하고 폐허인 지구인 대다수의 삶이 언제, 어떻게 인간다운 순간을 만들어내는지 질문하는 연상호 감독”(배동미)의 세계관은 6부작 시리즈물 <지옥>을 통해 보다 디테일하게 확장됐다. 그 답은 “후반부 배영재(박정민), 송소현(원진아)이 자신들의 목숨을 포기하면서까지 아이를 살리는 장면에서 암시되어”(배동미) 있다.

[이경희의 SF를 좋아해] 넷플릭스 기원합니다

명절을 쇠고 돌아와 덕담 이야기. 여느 일터와 마찬가지로 출판업계 역시 새해나 명절이 되면 다정한 덕담을 주고받곤 한다. 심지어 아리따운 엽서에 정성스러운 손글씨로 귀한 진심을 전하는 작가님이나 편집자님도 종종 계신다. 내가 소속된 ‘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에서는 매년 익명으로 덕담 엽서를 교환하는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SF 작가들이 전하는 덕담이라고 딱히 특별할 것은 없다. 물론 37세기까지 장수하거나 우주 정복에 성공하길 기원하는 멘트도 간간이 눈에 띄지만, 역시나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덕담은 건강을 기원하는 내용이다. 글 노동자에게 운동 부족은 책에 붙은 띠지 같은 것이니까. 그다음은 꾸준히 쓰자는 이야기. 여러 사정으로 글쓰기를 포기하거나 중단하는 경우가 많다보니 올해도 함께 생존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마지막으로 자주 듣는 덕담은 금전 운을 비는 것이다. 그 스케일은 ‘10쇄’부터 ‘만쇄’까지 다양한데, 최근에는 좋은 계약을 기원한다는 메시지도 자주 보인다. 여기서 ‘좋은 계약’이란 대개 웹툰과 영상물을 비롯한 2차 저작물 계약을 의미한다. 한동안 작가들 사이에서 ‘넷플릭스 기원합니다’라는 덕담이 유행처럼 돌았다. 참 듣기 좋은 말이다. 내 소설을 원작으로 <오징어 게임> 같은 글로벌 히트작이 탄생할지 모른다고 상상하면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따뜻해진다. 꽤 오래전부터 영상화는 이 업계에서 성공의 척도로 여겨지곤 했다. 유명 웹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드라마가 방영되자 한달 만에 억 단위의 수익이 원작자의 통장에 꽂히더라는 도시전설 같은 일화도 종종 들려온다. 유튜브와 OTT가 합세한 최근의 영상물 시장은 소설가인 내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돈이 오가는 곳이 되었고, 코로나19 이후로 이 흐름은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그에 반해, 부끄럽지만 내 책은 정말 조금밖에 팔리지 않는다. 솔직히 웬만큼 인기 없는 유튜브 채널의 구독자도 내 소설을 읽는 사람보다는 많은 것 같다. 그만큼 단위 자체가 다른 시장인 것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내가 소설가로 먹고살 수 있는 이유 역시 그나마 가끔 찾아오는 ‘좋은 계약’들 덕분이라는 거다. 시각성 강한 소설을 쓰는 덕분에 내 작품들은 감사하게도 ‘영화 같다’는 평을 종종 듣는 편이고, 이와 관련된 판권 판매나 내 원작이 아닌 작품의 각색 등 이런저런 작업에 참여하는 행운이 종종 찾아오곤 한다. 그런데 ‘한편의 영화 같다’는 말은 칭찬일까? 비난일까? 내 소설에 이런 평이 붙을 때면 상대가 어떤 의도로 그런 말을 하는지 가늠하기가 참 쉽지 않다. 어떤 이들에게 이 표현은 부족한 문학성을 돌려까는 수사다. ‘소설 같지 않다’거나 ‘이건 소설이 아니다’라는 기분 나쁜 표현이 함께 세트로 따라다니는. 그런 반면, 칭찬의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도 많다. 소설이 인기를 얻어 영화가 되길, 혹은 드라마가 되길, 궁극적으로 OTT 서비스를 통해 글로벌 히트작이 되길 염원하는 희망 섞인 칭찬. 하지만 칭찬인 경우에도 100% 기분이 좋지만은 않다. 마치 콘텐츠의 계층이 정해져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어서다. 나만의 자격지심일지도 모르지만, 업계의 일부 사람들은 소설을 마치 영상 시장 아래에 종속된 원천 스토리로 생각하는 것 같다. 이들에게 소설은 소설이 아니다. 그저 가공되지 않은 원재료일 뿐이다. IP라는 이상한 비즈니스 용어가 이러한 의도를 더욱 아름답게 포장한다. 우리 회사는 몇개의 IP를 보유하고 있다, 는 식의 계량화된 수사를 마주할 때면 내 작품이 진열장 속 101번째 트로피로 박제되는 것은 아닐까 불안해진다. 더욱이 일로 마주한 상대가 내 작품을 소설로 대하고 있지 않다고 느껴질 때는 솔직히 조금 슬퍼지는 것이다. (오해를 방지하자면, 이는 극히 드문 경험이었고, 절대다수의 담당자 분들께는 충분한 신뢰와 존중을 느낄 수 있었다.) 아무리 영화 같아 보여도 소설은 소설이고, 영상을 목적으로 소설을 쓰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럴 거면 그냥 트리트먼트를 쓰는 편이 경제적이니까. 한권의 소설책 안에는 분명 소설만이 표현할 수 있는 즐거움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지점에 소설이 가진 재미의 진정한 정수가 담겨 있다고 나는 믿는다. 예를 들어, 나는 지금 <모두를 파괴할 힘>이라는 제목의 초능력 소설을 쓰고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텔레파시 능력자다. 소설 속에서 텔레파시 능력자들은 <엑스맨>의 자비에 교수처럼 사람의 마음을 읽거나 조종하는 경우도 있지만, 때로는 감정 자체를 던지거나 빼앗는 식으로 다툼을 벌이기도 한다. 관념적인 심리 공간에서 추상적인 개념들이 문자화된 힘으로 충돌하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장면들은 글로 읽으면 정말 재미있지만 영상이나 그림으로 어떻게 표현할지 상상하기가 쉽지 않다. 동시에, 나는 이야기의 힘을 믿는다. 그 이야기에 강한 힘이 있다면, 굳이 다른 매체로의 전환을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매체를 옮겨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으리라고 말이다. 때때로 ‘영상향’(映像向) 소설을 써달라는 제의를 받을 때에도 나는 오히려 소설로서의 재미와 완성도에 배로 공을 들인다. 좋은 이야기는 작가가 원치 않더라도 알아서 생명을 얻어 이곳저곳으로 뻗어나가는 법이니까. 소설가는 훌륭한 소설을 만드는 일에만 집중하면 되는 게 아닐까.다만 내가 이런저런 각색의 과정을 직간접적으로 겪으며 깨달은 것은, 원작을 그 모습 그대로 타 매체에 옮겨담을 방법은 없다는 것이다. 출판 소설은 어디에든 담기는 원천 스토리가 아니라 책이라는 매체에 조율된 완성품이다. 소설, 만화, 영상은 각각 정보를 전달하는 방식도, 서스펜스를 풀었다 조이는 리듬도 전혀 다르다. 단숨에 감상하는 매체와 연재식으로 감상하는 매체의 특성에 따라 이 리듬감은 또 한번 틀어진다. 각색에는 해체의 고통이 수반된다는 것이다. 해체와 재구성 없이 옮겨담을 경우 어떤 끔찍한 일이 벌어지는지 우리는 일본의 만화 원작 영화들을 통해 몇번이고 확인해왔다. 원작이 가진 재미의 핵심은 보존하되 그외 모든 영역을 해체할 각오가 되어야 한다. 이야기의 순서도, 사건과 배경도, 심지어 주인공마저 바꿔버릴 수 있어야 한다. 소설적 재미가 삭제된 빈 공간에 새로운 매체만의 유니크한 재미를 채워넣어야만 한다. 제작자뿐 아니라 원작의 팬들 역시 이런 변화를 받아들일 각오가 필요하다. 당신이 애정하는 작품을 새로운 매체에서 제대로 즐기고 싶다면 말이다. 혹자는 과도한 변형을 원작에 대한 모독이라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오히려 이것이 원작을 제대로 각색하는 유일한 방식이라고 믿는다. 물론 그 이전에 원작에 대한 충분한 존중이 전제되어야겠지만, 솔직히 그거야 완성된 결과물을 슬쩍 보기만 해도 선수끼리는 다 알아챌 수 있는 문제 아닌지?

마이클 사노스키 감독의 빛나는 데뷔작, 니콜라스 케이지의 환상적 복귀작 '피그'

니콜라스 케이지가 돌아왔다. 마이클 사노스키 감독의 데뷔작 <피그>는 지난해 전미비평가위원회 최우수데뷔작품상, 라스베이거스비평가협회 남우주연상, 심지어 전미비평가협회 동물연기상까지 각종 시상식에서 호평받으며 수상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오랜만에 돌아온 니콜라스 케이지의 묵직한 연기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반갑다. 트러플 돼지를 잃은 남자가 돼지를 찾아 떠나는 여정 속에 스며드는 복잡한 감정의 소용돌이는 니콜라스 케이지의 육체를 통해 생생하게 전달되며, 그가 여전히 스크린을 장악하는 배우라는 사실을 새삼 증명한다. 돼지를 잃은 남자가 마음을 잃은 사람들을 만나는 이야기, <피그>의 아름다운 위로를 전한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위로는 기다림이다. 상처가 아무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과 마주할 때 곤란함을 느낀다면 당신이 매우 상냥하고 사려 깊은 사람이라는 증거다. 상실의 공허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실은 아무것도 없다. 거대한 균열 앞에서 거의 모든 말이 무력해지고 마음에 닿지 못한 채 흩어지기 마련이다. 그럴 때 흔히 시간이 약이라고들 한다. 감히 ‘너를 이해한다’는 어설픈 말 대신 스스로 상실을 받아들이고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가만히 기다려주는, 상냥한 인내가 필요하다는 의미다. 대체로 맞는 말이다. 다만 ‘시간이 약’이라는 문장에는 너무 많은 것들이 생략되어 있다. 우선 시간의 흐름은 사람마다 공평하지 않다. 인생의 결정적인 조각을 잃어버릴 때 때론 시간이 정지하는 경우도 있다. 상처를 마주 보는 것조차 힘들어 거대한 껍질 속에 틀어박힌 사람 앞에선 아무리 기다려봤자 소용이 없다. 그럴 땐 마치 알을 깨고 나오는 새처럼 안과 밖에서 두드려야 한다. 안에서 미동이 없다면 바깥에서라도 두드려야 한다. 니콜라스 케이지 주연의 <피그>는 아내의 죽음 후 15년간 속세를 떠나 숲속에서 은둔 생활을 택한 남자의 멈춰버린 시계를 다시 돌린다. 한때 포틀랜드의 요식업계를 흔들었던 전설적인 셰프 로빈 펠트(니콜라스 케이지)는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허무를 견디지 못하고 껍질 속에 숨었다. 숲속에서 트러플 돼지와 함께 버섯을 채취하는 로빈 펠트, 아니 롭의 삶은 일체의 변화를 거부한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정체를 알 수 없는 무리가 습격하여 돼지를 강탈하자 그는 돼지를 찾기 위해 드디어 무거운 걸음을 뗀다. 세개의 요리, 세 가지 사연, 그리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잔잔히 흐르는 강물에서 출발한 카메라는 울창한 나무 사이로 햇살이 커튼처럼 내리쬐는 고요한 숲속에 도착한다. 롭은 돼지와 함께 트러플을 채취하고 직접 만든 요리로 끼니를 때운다. 언뜻 평화로워 보이는 순간이지만 그것이 얇은 살얼음 같은 위장이란 게 얼마 지나지 않아 드러난다. 롭은 ‘로니’라고 적힌 테이프를 차마 재생하지 못하며, 무언가로부터 도망치고 있음을 암시한다. 잠시 뒤 롭의 사연을 미처 궁금해할 틈도 없이 누군가로부터 돼지를 강탈당하고, 롭은 자신의 트러플을 거래하는 푸드 바이어 아미르(알렉스 울프)를 데리고 범인들을 찾으러 도시로 나간다. <피그>는 잃어버린 돼지를 찾기 위한 롭의 짧은 여정을 따라간다. 그전에 롭에게 무슨 사연이 있었는지는 사실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롭의 고장난 시계가 돼지가 사라지면서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 그것이 영화를 움직이는 전부다. 다시 말해 시간의 물리적인 밀도 같은 건 의미 없다. 시간은 늘 상대적이고 롭에겐 15년간의 은둔 생활보다 단 하룻밤 사이에 일어난 일이 훨씬 의미 있다. 초반 숲속을 벗어날 때 롭의 녹슨 차가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 장면은 일련의 상황을 직설적으로 화면 위에 새긴다. <피그>는 정지한 채 녹슬어버린 시간에 다시 기름칠을 하는 과정에 대한 기록이다. 영화는 롭이 과거 포틀랜드를 주름잡던 요리사였다는 사실을 한참 뒤에 알려준다. 그전까지 롭을 둘러싼 분위기는 마치 <존 윅>(2014)처럼 암살자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베일에 싸여 있다. 후줄근해 보이는 아저씨가 도시의 지하 격투장을 운영하는 사람과 연이 닿고, 거침없이 단서를 추적해나가는 모습은 이 영화의 목적지가 어디인지 의아하게 만든다. 하지만 엉뚱한 길로 들어서지 않도록 잡아주는 것이 롭의 과거이자 정체성이기도 한 요리다. <피그>는 세개의 챕터로 이뤄져 있다. 첫 번째 챕터는 ‘시골식 버섯타르트’. 갓 채취한 버섯으로 직접 만들어 먹는 이 요리는 롭의 소박하고 단조로운 일상을 상징한다. 두 번째 요리는 ‘엄마표 프렌치토스트와 해체주의 가리비 요리’다. 챕터 제목만 듣고 의아할 수 있겠지만 조금만 따라가다보면 이내 감이 잡힌다. 요리에는 각 인물들의 사연이 깃들어 있고 롭은 이 요리들을 통해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고 사는 사람들의 기억을 환기시킨다. 음식만큼 삶의 단면들을 녹여내기 적절한 대상도 드물다. 살기 위해 매일 먹는 것들 속에 일상이 녹아들고 소중한 기억들이 깨알같이 박힐 수 있다. 롭은 천생 요리사다. 남루한 숙소에서 뒹굴며 트러플 채취를 해도, 흠씬 두들겨 맞아도 영혼에 새겨진 진실을 가릴 수 없다. <피그>에서 트러플 돼지를 찾아가는 경로는 일종의 맥거핀에 가깝다. 아니면 정지된 인물을 움직이기 위한 최소한의 미끼라고 해도 좋겠다. 이 여정의 노트 위에 빼곡히 적히는 건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사는 사람들의 삶이다. 롭은 자신이 요리를 접대한 사람들의 순간을 모두 기억하고 있다. 세상을 떠나 껍질 속에 틀어박혔던 남자는 요리를 보자마자 그 순간들을 하나씩 기억해낸다. 어쩌면 롭이 그동안 정지된 시간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가능한 기적인지도 모르겠다. 롭은 사람들을 마주할 때마다 원하지 않아도 요리를 떠올리고 각자가 잃어버린 것들의 무게를 새삼 일깨운다. 그것은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이기에 건넬 수 있는, 작은 위로다. 꿈을 좇는다는 이유로, 바쁘다는 핑계로 우리가 길 위에 흘려버린 것들. 영화는 롭이 돼지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만난 사람들과 요리를 매칭시켜 삶의 소중한 가치들을 새삼 일깨운다. 상실과 슬픔의 페이지를 넘기는 법 사람들이 하는 착각이 하나 있다. 위로는 일방적으로 건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거울과도 같다. 위로의 자리가 있다면 그것은 오직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한다. 롭의 의도와 무관하게 요리를 통해 기억을 되살리는 일련의 행위는 롭의 삶에도 변화를 안긴다. 상처를 외면하고 시간을 얼려버렸던 남자는 결국 요리와 인생을 매칭시키는 과정에서 비로소 자신과 마주하게 된다. 사실 여기에 거창한 위로나 대단한 성찰 같은 건 없다. 이미 우리가 힐링 서적에서 무수히 접한, 마음의 위안을 전한다는 수많은 이야기 속에서 반복해온 또 하나의 위로가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이 진부한 상실과 회복의 드라마가 심금을 울리는 건 이 영화가 설명하지 않고 기다릴 줄 알기 때문이다. 정확히 <피그>의 카메라는 인물의 슬픔이 화면 전반에 번질 때까지 차분히 기다린다. <피그>는 전반적으로 불친절하다. 인물의 감정을 정확히 묘사하지 않고 사연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주변의 사물, 둘러싼 공기, 한숨을 몰아쉬는 시간을 통해 감정의 정황을 전한다. 덜 구체적이고 모호할수록 더욱 큰 공명을 불러일으키는 일련의 과정은 작은 물결에서 큰 파도로 확장되는 롭의 행보를 고스란히 닮았다. 그리고 퍼져나간 파도는 다시 돌아오기 마련이다. 마이클 사노스키 감독은 트러플 돼지를 훔쳐가는 걸 막기 위해 밤새 보초를 선다는 이야기에 영감을 받아 <피그>의 시나리오를 썼다. 그렇게 재미난 에피소드에서 출발한 아이디어는 사람에 대한 탁월한 관찰이 더해져 끝내 슬픔의 얼굴을 포착한다. 감독은 이번 영화를 통해 “상실감과 슬픔이 자연스럽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고 한다. 이 익숙하면서도 범상치 않은 영화의 성취는 여기서 비롯된다. <피그>는 인물을 억지로 일으켜 세우고 위로의 꽃다발을 안기는 대신 온몸으로 슬픔을, 잃어버린 것들을 마주하는 시간을 바라보는 영화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상실의 크기를 체감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영화 말미, 롭은 트러플 돼지의 행방을 알고 나서 한 가지 상상을 해본다. “만약 내가 그 아이를 찾으러 나서지 않았다면 내 머릿속에서는 그 아이가 아직 살아 있을거란 거야.” 아미르는 답한다. “그래도 죽은 거예요.” 맞다. 진실은 변하지 않는다. 잃어버린 것은 잃어버린 것이다. 다만 그걸 받아들이기까지 필요한 시간은 각자 다르다. 슬픔을 떠나보내기 위해서는 먼저 슬픔을 마주 봐야 한다는, 당연하지만 잔혹한 진실. 롭이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를 받아들이기까지 필요했던 시간은 15년이었을까, 아니면 돼지를 잃어버린 며칠간이었을까. 모르겠다. 알 수 있는 건 단 한 가지, 롭의 시계는 이제 다시 흘러가리라는 사실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위로는 주어지는 결과가 아니라 오직 과정으로 성립한다. 어떤 짓을 해도 사태는 해결되지 않고, 상처가 회복되는 기적 같은 건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잃어버린 것을 되돌리는 건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그 무력함을 알고 있음에도 끝내 외면하지 못하는 따뜻한 마음들이 모여, 마치 거대한 상처와도 같은 이 세상이 유지된다. 세상을 등졌던 롭조차 그랬던 것처럼. 니콜라스 케이지에 의한, 니콜라스 케이지를 위한 상실이란 단어를 배우의 육체로 다시 빚으면 아마도 니콜라스 케이지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을까. 상실과 허무의 얼굴을 제대로 표현했던 <라스베가스를 떠나며>(1995)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니콜라스 케이지는 오랜 방황을 거친 후 다시금 초심으로 돌아가 <피그>에서 그 재능을 꽃피운다. “감독 마이클 사노스키에게는 최고의 데뷔작, 배우 니콜라스 케이지에게는 환상적인 복귀작”(<데일리 텔레그래프>)이라는 평은 <피그>의 성취를 정확히 설명하고 있다. 니콜라스 케이지는 감독의 데뷔작인 이 작품에 출연을 결정한 건 “상실에 대한 명상 같은 영화”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2000년대 화려한 비상과 추락을 반복한 자신의 굴곡진 커리어와 <피그> 속 사내의 모습이 겹치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마이클 사노스키 감독은 여기에 포틀랜드의 대자연과 소박한 도시의 풍경, 그리고 영혼을 들여다보는 요리를 버무려 절묘한 드라마로 조리해냈다. 또 하나의 주인공, 트러플 돼지 브랜디 아버지의 그늘을 벗어나 성공을 꿈꾸는 푸드 바이어 아미르, 포틀랜드 지하 파이트클럽의 호스트 에드거, 한때 롭 밑에서 일을 배운 포틀랜드 최고 레스토랑의 수석 셰프 데이비드 등 롭을 둘러싼 인물들은 여럿 있지만 영화 속 최고의 파트너는 아무래도 트러플 돼지다. 초반에만 잠깐 나오고 실종됨에도 불구하고 그녀(영화 내내 그녀라고 불린다)의 존재감은 영화 전반을 지배한다. 브랜디라고 불리는 이 돼지는 CG가 아니다. 마이클 사노스키 감독은 실제 포틀랜드 농장에서 발견한 돼지를 캐스팅했고, 그녀는 다정한 성격과 사랑스러움으로 촬영장의 인기 스타가 됐다. 니콜라스 케이지는 “브랜디는 돈을 받은 만큼 일할 줄 아는 프로 배우”였다고 파트너를 회상한다. 안타깝게도 브랜디는 촬영이 끝나고 한참 뒤 턱 염증을 앓다가 세상을 떠났지만 북미비평가협회는 이 명배우에게 동물연기상을 선사하며 그녀의 활약을 기렸다.

이재명 대선후보, “영화산업 지원정책의 대전환을 구상하고 있다.”

“문화의 힘으로 한류 코리아 프리미엄을 창출하겠다.” 한달 전,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는 문화예술인들을 만난 자리에서 문화예술 분야 공약을 내놓았다. 그가 발표한 공약은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조직위원장을 역임했던 경기도지사 시절부터 영화를 포함한 문화예술 산업에 깊은 관심과 애정을 드러내온 것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이재명 대선 후보는 6대 공약을 내세웠다. 문화 예산을 2.5%까지 확대하고, 문화예술인 기본소득 지급, 국민 창작 플랫폼 운영, 문화마을 조성, 청년 문화예술인 1만 시간 지원 프로젝트를 포함해 문화 외교 강화, 콘텐츠 투자와 일자리 창출 등이 그것이다. 그중에서 눈에 띄는 건 복지와 성장을 동시에 잡는 성장 전략인 이재명표 기본소득 정책이 차기 정부에서 본격적인 시험대에 오를 거라는 사실이다. 경기도지사 시절 ‘예술인 창작수당제도’라는 이름의 기본소득 정책을 시도한 바 있는 문화예술인 기본소득 정책은 예술 분야가 사회적으로 모두가 향유하는 공공 자산임에도 이를 창작하는 예술인 대부분은 소득이 규칙적이지 않는 등 불안정한 경제적 상황으로 인해 지속적인 창작 활동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어, 이들의 어려움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려는 취지로 예술활동증명 예술인을 대상으로 정기적으로 지원한다는 제도다. 이 후보는 미국과 견주는 ‘문화 콘텐츠 세계 2강’으로 설 수 있도록 “공공과 민간의 투·융자 보증을 5년간 최소 50조원 이상 규모로 늘려 영화, 드라마, 게임 등 콘텐츠 산업 육성에 힘쓰겠다”고 밝히면서도 “대기업 독과점, 계약 관계의 불평등 등 불공정한 거래를 시정해 문화예술 분야에 공정한 생태계를 조성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강조했다. 또 “이명박, 박근혜 정부의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 때문에 아직까지 고통받고 있는 문화예술인들의 피해 치유를 위해 더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연일 여론조사에서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와 엎치락뒤치락하고 있는 이재명 후보와 영화 및 문화예술 산업, 침체기에 빠진 극장산업에 대한 대비책, 급성장하는 OTT 산업에 대한 시선 등 여러 주제로 나눈 긴 대화를 전한다. 후보가 내세운 이번 대선 공약 중에서 ‘디지털 대전환 시기’라는 시대인식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이재명 후보는 “대한민국의 디지털 영토를 전방위적으로 개척해 무한한 기회를 창출하는 디지털 확장 시대를 열겠다”고 공약했다.-편집자). 디지털 대전환이야말로 영화를 포함한 콘텐츠 산업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한국 영화산업에서 디지털 대전환이 의미하는 건 무엇인가. 디지털 대전환을 문화 콘텐츠 측면에서 본다면, 우리나라는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이다.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다는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한류, K드라마, ‘치맥’, ‘먹방’, 대박, 김밥 같은 한국어 단어가 26개나 올라가 있을 정도다. 문제는 콘텐츠를 담아낼 도구, 하드웨어의 발전 속도가 아직은 더디다는 거다. 글로벌 OTT에 비해 국내 OTT는 걸음마 수준이다. 35mm, 16mm 필름으로 찍던 영화를 디지털로 찍을 수 있게 된 것이 이미 10여년 전 얘기다. 지금은 OTT와 메타버스까지 나아갔다. 속도가 매우 빠르다. 그런데 법과 제도가 이런 산업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문제라고 본다. 한국 영화산업의 디지털 대전환이 원활하게 이뤄지려면 쏟아져 나오는 양질의 콘텐츠를 충분히 담아내고 전파할 수 있도록 안정적인 디지털 플랫폼이 구축되는 토양을 만들어줘야 한다. 그리고 그 플랫폼 안에서 상상력과 창의성을 무한히 발휘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그것이 우리 영화의 디지털 대전환을 위한 국가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이번에 발표한 공약 중 하나로 문화예산을 2배 이상 늘리겠다고 한 것도 디지털 대전환 맥락에서 나온 판단으로 보인다. ‘문화예산을 2.5%까지 확대하겠다’고 했는데 2.5%의 의미는 무엇인가. 문화예산 증액이 국내 콘텐츠 산업에 어떤 변화를 기대할 수 있을까. 임기 중에 문화예산을 2.5%까지 늘리겠다는 공약은 문화 콘텐츠 세계 2강과 문화국가로의 도약을 위한 것이다. 디지털 대전환기에 문화 콘텐츠 산업은 미래 신성장동력 중 하나다. 특히 디지털 문화 소비를 자연스럽게 경험하며 성장한 청년 세대가 주역으로 나아가도록 뒷받침해주고 그 흐름을 지속적으로 주도할 수 있도록 정부가 제도적 장치를 만들고 또 필요한 지원도 해야 한다. 우리는 경제적으로 선진국이 됐지만 양극화에 따른 빈부 격차, 세대 불균형, 높은 자살률 등 아직 국민들의 삶의 만족도는 낮은 편이다. 이런 다양한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고 동시에 질 높은 삶을 누리기 위해서는 문화국가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문화예산을 2배 이상 늘려서 2.5%로 확대하게 되면 우리 영화산업의 뿌리를 튼튼하게 하고 체질을 개선하는 데에도 큰 기여를 할 것으로 생각한다. 다수의 이익이 되는 실용의 실천 ‘코리아 콘텐츠 메타버스’ 플랫폼과 K콘텐츠밸리도 구축할 것이라고 말했는데 그 둘 또한 디지털 대전환과 관련 있어 보인다.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일까. 쉽게 말해서 우리나라가 디지털 대전환을 통해 문화 콘텐츠 세계 2강 반열에 오르기 위한 ‘공간’을 만들어내는 정책이라고 보면 된다. 코리아 콘텐츠 메타버스는 K버전의 차세대 유튜브나 넷플릭스를 만들어 이후 디지털 플랫폼을 선점하려는 노력이다. 코로나19 장기화로 인해 경제와 여가가 비대면 온라인 공간에서 이뤄지고 있다. 정부 지원으로 안정적인 인프라를 구축하고, 문화, 예술, 관광, 체육 등의 공공 콘텐츠를 제공해 디지털 대전환 시대를 선도하고자 한다. K콘텐츠밸리는 과학기술과 문화예술의 융합을 물리적으로 증폭하기 위한 오프라인 거점이다. 투자, 융자, 보증 방식으로 5년간 50조원 이상 지원해서 콘텐츠 분야의 일자리 50만개를 창출하는 구심점이 될 것이다. 초광역 메가시티 구상과 함께 전국 10개 지역에 조성하려고 한다. 지역의 청년 K콘텐츠의 창의적인 인재들이 모여 만족한 삶을 꾸려나가서 지방 균형 발전의 토대가 되도록 할 생각이다. 이번 대선 공약은 크게 실용, 통합, 개혁의 가치를 주장한다. 이 가치가 콘텐츠 산업에서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 우리 사회는 저성장의 늪에 빠져 있다. 양극화와 불공정이 원인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핵심에 ‘실용’의 가치가 있다. 다수의 이익이 되는 실용, 이를 실천하는 과정 그 자체가 개혁이다. 그 결과가 대다수에게 이익으로 돌아가고, 궁극적으로 사회통합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불공정을 바로잡기 위한 합리적인 규제로 영화시장의 건강성과 지속 가능성을 회복하고자 한다. 영화산업의 주요 주체들이 각자의 역할과 전문성을 발휘할 수 있고, 성과와 보상이 공정하게 돌아가야 영화산업의 지속적인 성장과 발전이 가능할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이 되고 필요로 하는 상생의 관계가 만들어지면 통합의 가치는 자연스럽게 실현될 거라고 확신한다. 문화예술 분야 6대 공약으로 문화예술인 기본소득 지급, 청년 문화예술인 1만 시간 지원 프로젝트 등이 눈에 띈다. 문화예술 분야 공약을 준비하면서 가장 중점을 둔 가치와 방향은 무엇인가. 문화예술을 하려고 하는 청년들이 맞닥뜨리는 첫 번째 문제는 시작 단계에 큰 진입장벽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완만한 오르막으로 만들어줘야 청년 문화예술인들이 꿈을 좇을 수 있다. 이 장벽을 넘고 나면 이제는 시간과 싸워야 한다. 생계가 보장되는 창작 활동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다. 이 두 가지를 해소해줘야 최소한의 창작 활동을 하기 위한 토대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사실 이재명표 기본소득 정책은 복지와 성장을 동시에 잡는 성장 전략이라 볼 수 있다. 문화예술인 기본소득은 창작 활동을 하기 위한 최소한의 토대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경기도지사 시절 예술인 창작수당제를 시행했는데, 이를 정부 차원으로 확대할 것이다. 재정당국의 반대가 있겠지만 본인의 계산으로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본다. 청년 문화예술인 성장을 위한 ‘1만 시간 지원 프로젝트’는 무엇인가. 청년 문화예술인들에게 5년간 창작에 전념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서 스스로 창작의 경로를 찾아가도록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단계별 창작 활동 비용, 문화기관 이용권, 예술인 멘토 지원, 사업화 컨설팅과 같은 분야별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할 것이다. 문화예술 공약은 문화예술인 삶의 질 개선과 위상 제고, 창작자 중심의 콘텐츠 생태계 조성, 문화 콘텐츠 산업 인프라 구축으로 창의적인 청년일자리 창출에 역점을 두고 있다. 현재 한국 영화산업은 심각한 위치에 처했다. 특히 극장산업이 코로나19 장기화로 침체기에 빠졌고, 그로 인해 많은 극장 영화가 개봉을 연기하고 있으며, 많은 영화인이 OTT로 이동했다. 이러한 한국영화의 위기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나. 영화가 우리 문화산업의 핵, 총합의 자리에 있다고 생각한다. 문화산업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높기도 하고, ‘원 소스 멀티 유즈’의 보고라고 할 수 있다. 영화의 위기는 문화산업 전반의 위기로 확장될 수 있기 때문에 정부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한다고 본다. 우선 코로나19 피해 지원을 추진할 것이다. 다음은 국내 OTT의 경쟁력을 키울 수 있게 법 제도를 정비하고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토양을 만들 것이다. 그리고 글로벌 OTT에 진출한 우리 제작자들과 영화인들이 합당한 이익과 공정한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관련 법과 제도를 개선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독과점을 완화하고 불공정을 시정할 것이다. 공정하고 자유로운 경쟁 속에서 혁신과 창의가 발현될 수 있도록 정부가 역할을 해야 한다. 합리적 규제로 시장의 건강성을 회복시켜 플랫폼 대기업과 창작자들이 공생하고 영화시장이 지속 가능한 성장을 이뤄 지금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도록 힘을 쏟겠다. 좀더 구체적으로 영화산업이 재도약할 수 있도록 어떤 지원과 정책을 고민하는지 궁금하다. 영화산업 지원정책의 대전환을 구상하고 있다. 영화산업 육성을 위한 지난 20여년의 노력이 <기생충>으로 대변되는 큰 성과로 나타났다. 하지만 코로나19의 장기화로 영화산업이 큰 어려움에 처했다. 영화 창작이 위축되고 영화 생태계가 크게 훼손됐다. 영화산업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고민해야 하는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우선 영화산업의 공정성 회복과 자유로운 경쟁 환경 조성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전국의 지방 정부에 도서관과 함께 작은 영화관을 만들어 영화가 국민의 삶 속에 더 가깝게 다가가도록 하겠다. 투·융자 방식의 영화 제작 지원을 확대하고 콘텐츠 저작권 침해와 불법 서비스 근절을 위해 전담기구와 인력을 확충해 창작자가 존중받도록 하겠다. 정치의 본질은 민생에 있다 코로나 19의 장기화는 국내 콘텐츠 산업을 극장 중심에서 글로벌 OTT로 재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 계획인가. 기자 주변에 혹시 넷플릭스를 안 보는 지인이 얼마나 되나. 아마 드물 것이다. 사실 코로나19 시절에 극장 안 가는 게 당연하다. 게다가 집에 70~80인치 풀 HD 텔레비전이 있고, 개봉작들도 넷플릭스, 디즈니 같은 글로벌 OTT에서 조금만 기다리면 볼 수 있으니까 사실 극장 갈 필요성을 못 느낄 수밖에 없다. 국내 OTT들도 지금은 걸음마 단계지만 곧 일상으로 자리 잡을 것이다. 이 흐름을 막을 수는 없다. 인정해야 한다. 다만 지금의 법과 제도가 플랫폼의 진화를 따라가지 못한 부분을 보완해야 한다. 문화 콘텐츠 산업에 초융복합 시대가 열렸는데 국내 문화 콘텐츠 법과 제도는 여전히 장르별 체계에 머물러 있다. 유기적이고 체계적인 법과 제도 개선, 정책 전환을 통한 대응과 준비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현재 가입해 이용하고 있는 OTT 플랫폼이 있나. 있다면 어느 플랫폼에 가입했나. 얼마나 자주 OTT에서 콘텐츠를 감상하나. 많은 분들이 이용하고 있는 것처럼 넷플릭스를 이용하고 있다. 쉬는 날이면 집에서 즐겨보곤 하는데, 최근에는 선거 일정이 워낙 바빠 거의 보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오징어 게임> 등과 같이 전 세대로부터 공감을 받고 있는 작품들은 꼭 챙겨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최근 우리나라가 제작한 문화 콘텐츠가 전세계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보면서 뿌듯함을 많이 느낀다. 줄거리나 구성, 완성도 등 모든 면에서 세계 어느 나라 콘텐츠와 비교해도 손색없을 만큼 수준이 높아졌다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도 대한민국의 다양한 문화 콘텐츠가 세계 속에서 더욱 빛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유년 시절 문화예술 경험은 어떠했나. 추억에 남는 영화가 있나. 작은 산골 마을에서 태어나 넉넉지 못한 환경에서 자라다 보니 문화예술 경험과는 거리가 먼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근처 산을 벗 삼아 뛰노는 것이 전부였다고 할 만큼 영화, 공연 같은 문화예술 콘텐츠를 접할 기회가 없었다. 학교에 있는 작은 도서관이 ‘문화 체험의 장’이었던 것 같다. 도서관에 비치된 거의 모든 책을 읽으며 앎의 즐거움과 독서의 참맛을 체험할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해저 2만리> <암굴왕>(일본의 구로이와 루이코가 알렉상드로 뒤마의 소설 <몬테크리스토 백작>을 번역할 때 지은 이름.-편집자) 등 명작 동화들은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아 있다. 문화예술 정책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그때 누리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마음 한켠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더 다양한 문화예술 영역에 관심을 가지고, 더 나은 창작 환경이 조성될 수 있도록 노력해나갈 계획이다. 좋아하는 감독과 배우가 누군지 궁금하다. 날카로운 주제 의식을 가진 봉준호 감독을 좋아한다.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 중 하나인 양극화, 불평등 같은 문제를 굉장히 극적으로 연출해내는 역량이 탁월한 것 같다. <기생충>에서 억수같이 퍼붓는 빗속에서 하염없이 계단을 뛰어내려가는 가족의 모습에서 열심히 살아도 벗어나지 못하는 가난한 삶이 강렬하게 다가왔다. 좋아하는 배우로는 김혜수와 정우성을 꼽고 싶다. 다른 배우들에게서 느낄 수 없는 두 배우만의 매력을 느낄 수 있다. 물론 외모도 훌륭하지만 자신만의 뚜렷한 소신과 신념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환경 캠페인이나 난민 지원 등과 같은 사회 공헌 활동에도 적극적인 모습에서 존경심이 느껴지기도 한다. 경기도지사 시절 <씨네21>과의 인터뷰(<씨네21> 1273호 ‘복지와 성장은 상호보완적 관계… 기본소득 통해 영화산업 성장 가속화될 것’)에서 내 인생의 영화로 <명량>과 더불어 <기생충>을 꼽았다. 내 인생의 영화를 다시 꼽는다면 어떤 영화를 선택하겠나. <웰컴 투 동막골>(감독 박광현, 2005)을 정말 재미있게 봤다. 오락적인 측면에서도 훌륭하지만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하는 영화였다. 여러 명장면 중에서도 “고함 한번 치지 않고 부락민들을 휘어잡을 수 있는 위대한 영도력의 비결이 뭐요”라는 북한군 장교(정재영)의 질문에 “뭐를 많이 멕여이지 뭐”라고 촌장(정재진)이 답변하는 장면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촌장의 대사야말로 “정치의 본질이 민생에 있으며, 국민들의 먹고사는 문제를 최우선 해결해야 한다”라는 진리를 매우 정확하게 짚은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코로나19 위기로 많은 국민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정치가 민생에 가장 집중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지난 2월22일 인천 유세에서 “문화가 아주 강한 나라를 만들고 싶다. 문화 강국, 문화가 높은 나라를 만드는 것이 내 꿈이다”라는 김구 선생의 말씀을 인용했는데. 김구 선생께서는 ‘한없이 갖고 싶은 것은 문화의 힘’이라고 하셨다. 문화의 힘을 튼튼하게 길러 대한민국이 한 단계 높은 수준의 나라로 도약하는 것이다. 한 나라의 미래는 경제적 부와 군사적 힘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튼튼한 안보와 풍요로운 경제가 한 나라의 힘을 결정하는 필수조건이라면 문화는 충분조건이다. 문화 없이 그릴 수 있는 국가의 미래는 있을 수 없다. ‘문화의 힘’을 강조함으로써 국가의 참된 미래를 도모한 김구 선생의 혜안과 꿈을 이어가고 싶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문화국가의 초석을 다졌다. 김구 선생의 꿈과 김대중 대통령의 뜻을 잇는 문화강국을 다져나가겠다. 이 나라의 문화예술인들이 자유로운 상상력과 창의력을 마음껏 펼치고, 온 국민이 그것을 누리는 나라. 더 나아가 문화로 세계를 선도하는 문화강국 대한민국에 동력이 되는 꿈을 꾼다. 이재명 후보가 인상적으로 본 작품 <오징어 게임>과 “<오징어 게임>에선 일남을 연기한 배우 오영수의 대사가 가장 인상 깊었다. ‘제발, 그만해! 이러다가는 다 죽어, 다 죽는단 말이야.’ 굉장히 함축적이고 상징적이었다. <오징어게임>이 옆에 있는 사람을 밟고 죽여야 내가 살 수 있는 게임에 내몰린 현대 사회를 풍자한 것이라면, 일남의 그 대사는 극한의 생존경쟁에 내몰린 사람들에게 던진 감독의 메시지가 아니었나 싶다. 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와 금융위기 등을 거치며 내가 살기 위해 누군가가 희생돼야 하고, 실패한 사람들은 영영 재도전할 기회를 얻기 어려운 시대, 패자부활전이 힘든 시대가 돼버리지 않았나. 이런 시대적인 상황을 잘 풀어냈기 때문에 세계적으로 흥행하지 않았나 싶다. 는 주변의 추천으로 바쁜 일정을 마치고 단숨에 봤다. 잘 알다시피 산재로 군에 가지 못했다. 하지만 수십년 전 공장에서 매일같이 겪었던 일과 다르지 않았다. 그때의 경험과 겹쳐지니 마음이 아팠다. ‘뭐라도 해야지.’ 이 대사 한마디가 저릿하게 다가왔다. 사실 정치를 시작한 것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뭐라도 하자는 마음에서 출발한 거라서 더 마음에 와닿은 것 같다. 나만 살고 다 ‘죽는’ 게임이 아니라, 모두 함께 ‘사는’ 사회를 만들고 싶다.”

[파리] 새로운 미디어 크로놀로지 법안 합의에 엇갈리는 외국계 스트리밍 기업

프랑스영화의 배급 및 유통 과정의 순서와 기일을 규제하는 ‘미디어 크로놀로지’는 1982년 당시 극장 영화의 성역을 침범하기 시작한 비디오 시장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당시 문화부 장관 자크 랑이 시행한 법안이다. 그간 이 법안은 인터넷, 유료 채널, VOD 서비스의 등장으로 수차례 개정되었지만 프랑스는 장편영화의 경우 극장 개봉 후 36개월이 지나야 스트리밍 서비스를 허용한다는 비교적 엄격한 기준을 유지해왔다. 이 법안의 만기일을 15일 남짓 남긴 지난 1월24일, 문화부 장관 로즐린 바슐로는 영화, 텔레비전, 스트리밍 산업 대표들과 함께 ‘새로운 미디어 크로놀로지’를 체결했다. 이 법안에 따르면 프랑스 방송 <카날플뤼스>는 개봉 6개월 후부터 장편영화를 방영할 수 있고, 넷플릭스는 15개월 후, 디즈니+와 아마존 프라임 비디오는 17개월 후, 여타 프랑스 텔레비전 채널은 22개월 이후부터 방영할 수 있다. 대신에 외국계 스트리밍 기업은 프랑스에서 달성한 매출의 20~25%를 프랑스영화나 시리즈물 제작에 투자해야 한다는 조건이다. 로즐린 바슐로 장관은 이 새로운 법안이 ‘극장의 특수성’, ‘영화의 다양성’을 보호하면서 “다양한 매체로부터 제작 투자를 가능하게 할 것”이라며 자찬했지만 이 체결의 맹점을 간과해선 안된다라는 게 언론의 공통된 입장이다. 체결 당시 외국계 스트리밍사로 유일하게 참여한 넷플릭스는 “‘미디어 크로놀로지’는 (배급 유통 과정) 현대화의 중요한 첫걸음”이라며 다분히 모범생적인 발언을 했지만 사인도 직접 하지 않고 새로운 법안을 따라야 하는 신세가 된 디즈니사는 노골적으로 불만을 토로했다. “새로운 미디어 크로놀로지가 공정하고 균형 잡힌 시청각 생태계를 제공한다고 생각지 않는다. 우리가 프랑스 작품에 투자를 더 늘린 상황에서는 더더욱 실망스럽다.” 시리즈물이 주 종목인 넷플릭스에 반해 장편영화를 주메뉴로 방영하는 디즈니+나 아마존 프라임 비디오가 이런 조건에서는 자사 작품의 프랑스 극장 상영 자체를 거부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2023년 1월부터 프랑스에서 스트리밍 서비스를 시작할 워너사나 그 뒤를 따를 파라마운트사를 고려한다면 문제는 훨씬 더 심각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새로운 미디어 크로놀로지’는 2월10일부터 적용되고 있다.

[김겨울의 디스토피아로부터] 기후는 기다려주지 않는다

이 글이 올라갔을 때엔 이미 제20대 대선 결과가 나와 있겠지만, 뒤늦게라도 이야기해보자면 이번 대선은 환경 정책과 관련해 중요한 기점이다. 기후 위기가 코앞에 닥친 상황에서 5년은 ‘다음 기회에’를 외치기엔 너무 긴 시간이기 때문이다(어차피 지구에는 ‘다음 기회’ 같은 것도 없다). 우리에게 주어진 최후의 마지노선은 평균 온도 1.5도 상승인데, 그 마지노선을 지키기 위해 주어진 시간은 겨우 7년 정도다. 이미 여러 국가에서 다양한 환경 재난을 겪으며 기후 정치가 화두에 오른 이유가 있는 셈이다. 우리나라도 그랬… 어야 하지만, 어쩐지 대선을 앞두고 기후 위기 대응을 엄중한 과제로 여기는 사람들은 (후보 본인들을 포함해)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유세 연설에서도, 텔레비전 토론에서도 기후 이슈는 거의 다뤄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기후 위기는 환경을 보존해야 한다는 당위의 문제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다가오는 재난의 현실이다. 곽재식 작가가 <지구는 괜찮아, 우리가 문제지>에 쓴 표현을 빌리자면 기후 위기는 “내일의 종말이 아닌 오늘의 반지하 침수”다. 당장 농사지을 작물이 변하는 문제고, 전력 공급망이 열팽창으로 변형되는 문제고, 살던 집이 물에 잠기는 문제고, 빙하에 묻혀 있던 바이러스가 노출되는 문제고, 화재와 홍수와 가뭄과 태풍이 늘어나는 문제다. 그리고 이것 모두는 정치의 문제다. 재난을 겪은 시민은 어디로 어떻게 대피시킬 것인가? 어떤 돈으로 어떻게 지원해줄 것인가? 세계적인 식량 위기가 찾아온다면 어떤 전략으로 외교를 할 것인가? 코로나19처럼 또 다른 팬데믹이 찾아온다면 어떤 방역 정책을 펼칠 것인가? 무엇보다 그러한 재난이 늘어나는 정도를 최대한 제어하기 위해 정부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기후 위기 해결에 있어 기업과 국가 단위의 노력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개인이 노력할 수 있는 데에는 한계가 있고, 결국 기업의 생산 구조를 바꾸고 여러 국가가 연대해야 한다. 다른 국가를 설득할 수 있는, 제대로 된 기술 개발을 지원할 수 있는, 기후에 악영향을 주는 기업의 정책을 바꾸도록 유도할 수 있는 정부가 필요하다. 당장의 그러한 정책이 5년 뒤, 10년 뒤, 20년 뒤 우리의 삶을 결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우리의 발등은 이미 불타고 있다. 이번 대선으로 선출된 대통령은 이 문제를 해결할 준비가 되어 있을까? 누가 선출될지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는 알 수 없지만, 누가 선출되든 이 문제를 진지하게 바라보지 않는다면 정치인들이 입에 달고 사는 ‘민생’은 악화되기만 할 것이다. 이 글이 정말 ‘디스토피아로부터’ 보내는 글이 아니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리코리쉬 피자' '더 배트맨', 미국영화에 새겨진 70년대의 흔적에 관하여

“이 나라에서 사람들은 21살에 죽는다. 그들은 21살에, 어쩌면 더 어린 나이에 정서적으로 죽는다.” - 존 카사베츠, [The Films of John Cassavetes: Pragmatism, Modernism, and the Movies] 1. <리코리쉬 피자>, ‘홈 무비’의 소실 1970년생인 폴 토마스 앤더슨은 <리코리쉬 피자>에서 자신이 어린 시절을 보낸 1973년의 산 페르난도 밸리로 되돌아간다. 그의 아홉 번째 장편영화는 10대 소년과 스물다섯 살의 성인 여성이 커플로 결합하는 70년대의 이야기를 다룬다. 유년기의 흔적에 관한 개인적 기록이 반영된 배경일 테고, 영화사의 관점에서 본다면 균질한 스튜디오 시스템이 붕괴하고 60년대를 관통하던 정치적 이상이 사라진 뒤의 시기다. 텔레비전에서는 전쟁을 알리는 뉴스와 소비상품을 광고하는 문구가 동시에 송출되고, 포르노그래피와 약물이 주류 문화에 침범하던 때다. 폴 토마스 앤더슨이 다시 한번 선택한 70년대 할리우드 변방의 작은 도시(산 페르난도 밸리는 그의 초기작들의 배경이다)는 좌절된 유토피아를 표상한다. 그곳은 할리우드의 미국적 꿈이 조각난 파편으로 버려져 있다. <리코리쉬 피자>가 지극히 불안정한 물적 상태를 가리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영화의 첫 장면은 화장실 변기가 폭발해 물줄기가 솟구치는 모습이다. 견고하고 단단한 물체의 폭발과 역류하는 물은 화면을 난폭하게 변형시키는 영화의 무질서한 운동을 예고한다. <리코리쉬 피자>에 나오는 건축적 공간과 사물들은 소비상품이 약속하는 안정적인 내구성과 영구적인 시간을 갖추지 않는다. 언제 부서지고 파괴될지 모르는 잠정적인 시간이 그 자리를 대체하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화장실은 이유 없이 폭발한다. 쏟아지는 물줄기는 카메라가 야외로 나간 다음 장면에서 공원 잔디를 적시는 스프링클러로 연결된다. 이러한 사물의 불안정성과 자유로운 결합이 <리코리쉬 피자>의 연인들을 움직이게 한다. 많은 이들이 이 영화를 폴 토마스 앤더슨의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영화의 한 사례라 말하지만, 여기엔 이야기를 파열시키는 폭발과 구멍이 여전히 스크린에 드리워져 있다. 예를 들면 이런 장면이 있다. 청소년 박람회 현장에 들이닥친 경찰이 갑작스럽게 개리를 체포한다. 그들은 총기를 소지한 16살 백인 남성의 살해 혐의를 고지하는데, 정작 경찰서에서 개리는 용의자가 아닌 것으로 밝혀진다. 허무하게 끝나는 에피소드다. 실없는 코미디처럼 보이지만 이 장면에는 다른 흥미로운 측면이 있다. 개리가 아역배우로 성공하고, 사업가로 부피를 키워가는 동안 그와 비슷한 나이에 같은 색깔의 옷을 입은 소년은 총기 살인사건에 가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70년대의 산 페르난도 밸리는 두 사건이 같이 벌어지는 곳이다. 소년과 성인 여성의 로맨스가 펼쳐지는 이 영화의 배경은 소년의 살인사건과 성인 여성의 포르노그래피가(알라나와 미팅을 하는 배우 에이전시는 그녀에게 가슴 노출이 가능하냐고 묻는다) 만들어질 수도 있는 세계다. 이 영화에서 주의 깊게 반복되는 거울의 이미지는 벌어진 것과 벌어지지 않은 것이 한몸을 이루는 두 세계의 이중적 가능성을 표시한다. 커플의 격렬한 감정적 충동은 영화에 언급되는 살인과 마약, 베트남전의 상흔과 더불어 발생한 결과다. 우리는 그들만큼 정신이상적인 행동을 보이고, 그들은 우리만큼 충동적이다. 서사를 잠시 진동하고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사라지는 이런 미세한 파열은 세계의 감춰진 긴장을 영화에 덧붙인다. 이 작은 충돌에서 영화 속 인물들에게 불가피한 균열이 적힌다. 게리와 알라나는 연인처럼 동행하면서도 끊임없이 다른 이성에게 눈을 돌리고 질투하기를 반복한다. 그들의 이해하기 힘든 행동처럼, 이 영화는 하나의 인물과 공간에 안정적으로 머무르는 대신 계속해서 다른 사물과 사람들을 보여주는 것으로 전개된다. 수많은 인물이 개리와 알라나의 시선에 스쳐 지나가고 화면에 돌아오지 않은 채 사라져버린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서로를 찾는 개리와 알라나는 함께 머물렀던 장소들을 찾아가는데, 그곳에서 그들과 마주쳤던 인물들은 이미 사라지고 없다. 폴 토마스 앤더슨의 대표적인 장면인 <매그놀리아>의 개구리 비처럼 도시를 점유하는 서로 다른 유형의 인물들을 하나로 묶는 픽션적 장치는 여기에 없다. <리코리쉬 피자>는 경계를 넘어선 공통의 매개를 제공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리코리쉬 피자>가 강박적으로 회피하는 것이 있다면 그건 영화의 장소들이다. 구체적으로 어느 공간을 집어서 특별한 영화의 장소라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영화가 만들어지거나 상영되거나 영화 자체를 지시하는 통속적인 장소들이 이 영화에서는 이상하리만큼 배제되어 있다. 개리가 아역배우로 활동하고, 영화 문화와 비즈니스의 단면들이 끊임없이 나오는 데도 영화와 그 형상이 머무는 장소를 직접 비추는 것만큼은 허락되지 않는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개리가 등장하는 영화가 아니라 그가 나오는 텔레비전 쇼이고, 잭 홀든의 출연작이 아니라 그가 술에 취해 영화의 한 장면을 우스꽝스럽게 재연하는 순간이다. 영화를 촬영하는 도구(필름카메라와 마이크)들은 왝스의 선거용 홍보 영상을 찍는 장비로 실질적인 기능이 바뀌어 있다. <리코리쉬 피자>는 20세기의 자취를 돌아보면서 영화 문화의 영광스러운 순간을 되짚기보다는 텔레비전 쇼와 프로파간다 뉴스를, 인접 매체와 경합하고 장소를 내어주던 영화의 변형된 역사를 비춘다. 개리가 포르노 영화를 선전하는 신문 기사를 들여다보는 동안, 알라나는 석유 파동을 보도하는 텔레비전 뉴스를 본다. 기름값이 폭등해 LA의 거리에 늘어선 자동차들이 멈춰 있는 장면이 나온다. 장 보드리야르가 관찰한 대로 사막과 사막을 잇는 미국의 도시에서 문화를 일으키는 두 요소가 자동차와 영화라면, 폴 토마스 앤더슨은 미국의 두 가지 문화적 질료가 총체적인 위기와 중단에 이르는 최초의 순간에 도착한다. 앤더슨이 보여주는 세계는 영화의 장소가 지워지고 자동차 시동이 꺼져버린 곳이다. 비유적인 뜻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기계장치를 작동시키는 연료가 고갈되어버린 시대가 스크린에 전시되고 있다. 미국의 자동차를 멈추게 한 석유 파동이 벌어진 1973년은 (하스미 시게히코가 지적하는 것처럼) 존 포드가 사망한 해이자 니콜라스 레이의 마지막 영화인 <우린 집에 돌아갈 수 없어>가 공개된 연도이다. 시력을 잃은 한쪽 눈에 안대를 끼고, 나머지 한쪽 눈으로 허구적 공동체의 역량을 관객의 삶에 기입하던 작가들의 시간이 끝났다. 도시의 인간 공동체를 관통하던 영화의 시대가 끝났다. 소비상품과 정치의 이해관계가 앞서는 팻 버니의 사업장과 왝스의 선거사무소는 도덕적 인간 공동체를 구획하는 장소가 아니다. 이제 영화는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고, 작은 행동으로부터 어떤 의미를 발견해야 하는지 말하지 않는다. 영화는 세계를 종합할 수 있는 장치가 될 수 없다. 레이의 영화 제목처럼 그들은 이전과 같은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 연료가 떨어진 채 LA의 밤거리를 거꾸로 주행하는 알라나와 개리의 대형 트럭은 귀환할 수 없어진 시대의 한 표식이다. 개리와 알라나는 이름이 비어 있는 자들이다. 소속될 수 있는 정체성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알라나는 개리를 당대의 위대한 스타들인 ‘로버트 굴렛’과 ‘딘 마틴’의 이름으로 부르고, 잭 홀든과의 오디션을 끝내고 나서 “그레이스 켈리”처럼 보인다는 말을 듣고 기뻐한다(그러나 정작 알라나가 본명을 말하려고 하자 홀든은 그녀를 땅에 처박고 질주한다). 그들은 원래의 이름이 지워진 자리에 스크린에 등장하는 스타의 이름을 대입한다. 하지만 반복건대, <리코리쉬 피자>에는 영화의 장소가 손실되어 있다. 그들은 스크린에 출연하는 대신 거울과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것들에 붙잡힌다. 개리는 쇼윈도를 통해 바라본 물침대에 매혹되고, 팻 버니 가게에 구경 온 여자친구를 유리창으로 보고 시선을 빼앗긴다. 알라나를 처음 마주할 때도 화면에는 현실의 얼굴과 더불어 나타난 거울 속의 얼굴이 보인다. 영화가 없는 세계에서 그들이 꿈꿀 수 있는 이미지의 변형은 거울과 유리창의 표면에 시선을 던지는 것뿐이다. <리코리쉬 피자>는 폴 토마스 앤더슨이 만든 유년기의 ‘홈 무비’이다(실제로 알라나 하임의 가족이 모두 출연하고 그들의 집 내부 공간이 장면으로 다뤄진다). 이제는 아벨 페라라 같은 소수의 언더그라운드만이 고수하는 홈 무비의 속성을 산업과 시스템의 영역에서 보여주는 것은 무척 대담한 일이다. 이야기가 불균질하다거나 인물들의 거듭되는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이 영화의 홈 무비적 성질을 고려한다면 부자연스러운 문제가 아니다. 영화는 홈 무비의 형식과 리듬을 따라 어린 시절의 친밀한 장소들을 비추고 그 장소를 오가는 작은 공동체를 관측한다. 이는 차츰 영화가 진행되면서 소멸하기 직전의 기록으로 변모한다. 시간은 멈춰버린 것처럼 조금도 흘러가지 않으며, 눈앞에 나타났던 모든 것들은 사라지고 만다. 이 영화의 불균질한 서사는 영화에 나오는 모든 장소와 인물에 변형을 일으킨다. 세계는 미세한 단위로 쪼개지고 군중을 묶는 공동의 표식은 부재한다. 그러니 정확히 고쳐 말하면, <리코리쉬 피자>는 집에 돌아갈 수 없는 자들의 곧 붕괴할 ‘(노) 홈 무비’이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1970년대의 유토피아적 매혹이면서, 그 시대의 끝이다. 신원을 모르는 상대에게 걸려온 전화벨 소리가 전하는 궁금증과 흥분을 담아낼 수 있는 마지막 시기가 사라져가고 있다. 서로 알지 못하는 익명의 군중들을 무작위로 배치하는 영화의 장소 또한 사라지고 있다. 개리와 알라나는 마침내 도시의 밤거리에서 재회하고 끌어안는다. <리코리쉬 피자>는 갑작스러운 재회와 해피엔딩으로 끝나는데, 스탠리 카벨의 용어를 빌려 말한다면 위기에 놓인 커플의 재결합을 추구하는 할리우드 재혼 코미디에 속한다. 거리를 달려오는 두 사람의 발걸음으로 재회하는 마지막 순간은 돌이킬 수 없이 멀어져 버린 것들을, 더 이상 마주치지 않는 것들을 다시 결합하는 매혹적인 영화의 순간이다. 그러나 그들은 포옹하는 두 사람의 배경으로 자리 잡은 영화관에 시선을 두지 않는다. 그들은 영화가 머무는 시간에 속하지 않는다. 이 영화의 ‘해피엔딩’은 영화의 주변부를 맴도는 연인들의 행복한 시간을 끝내는 역설적 의미의 ‘엔딩’이기도 하다. 2. <더 배트맨>, 패닉 흥분과 도취가 지나간 자리에 파괴된 잔해가 남겨진다. 배트맨 시리즈의 새로운 책임자인 맷 리브스는 다시 만들어진 <더 배트맨>이 1970년대 아메리칸 시네마를 적극적으로 참조한 결과물이라는 것을 숨기지 않는다. 윌리엄 프리드킨의 <프렌치 커넥션>, 로만 폴란스키의 <차이나타운>, 마틴 스코시즈의 <택시 드라이버>가 주로 언급되는데, 시대를 관통하는 정신적 공허와 편집증적 증상이 뒤섞여 분출되는 폭력의 세계를 그린 필름누아르의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개인의 병리적 증상이 국가의 환부이자 시대의 얼룩으로 치환되는 남성서사의 거대한 삼위일체를 이루던(혹은 그렇다고 여겨지던) 마지막 시기의 영화들. 리브스는 개인과 국가 간의 밀접한 접속이 끊어진 시대에 여전히 국가의 붕괴를 꿈꾸는 시대착오적 기획을 <더 배트맨>의 고담시에 투영한다. 영화 속에서 리들러는 말한다. 토마스 웨인이 약속한 재개발 기금은 거짓이다. 그럴듯하게 들리는 자본가의 공약과 정치 언어는 실천되지 않았고, 눈먼 기금은 정치인들과 결탁한 도시의 지하 세계로 흘러 들어갔다. 그는 도시 기획의 원죄를 자본의 상속자인 브루스 웨인에게 덧씌운다. 리들러의 계획을 가속하는 것은 브루스 웨인과의 계급차다. 그들은 같은 장소에서 희망의 언어를 듣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살아남아 주목받은 것은 버림받고 자라난 수많은 고아들이 아니라 단 한 명의 브루스 웨인이다. 리들러는 공동의 약속이 실현되지 않은 도시 공간을 범죄적 폐허로 전환하려 한다. 리브스의 <더 배트맨>이 주의 깊게 묘사하는 부분은 도시를 구성하는 서로 다른 조직들이 하나의 몸을 이루는 기관처럼 작동하는 면모다. 도시 공간의 규칙을 실행하는 감춰진 논리가 기계적으로 유통되는 범죄의 절차를 통해 긴 시간에 걸쳐 드러난다. 실마리를 아는 자들은 진실이 밝혀지면 그들을 지탱하는 도시 전체가 무너질 것을 두려워하며 입을 닫는다. 이 과정에서 ‘날개 달린 쥐’를 찾는 탐정의 추론은 ‘펭귄’에서 ‘박쥐’로 종래에는 ‘매’로 그 정체를 옮겨 간다. 불확실한 판단과 추론의 혼동이 배트맨의 시야에 비친 고담시의 표상에 새겨진다. 마찬가지로 배트맨과 리들러는 망원경으로 사람들을 바라보고, 벽에 영사되는 영상을 마주하는 공통점을 갖는다. 이러한 시각의 등치성이 최종적으로 불러오는 것은 그들이 머무는 공동의 지반을 무너뜨리는 자기파괴적 집단행동이다. 그래서 배트맨이 자처하는 탐정의 역할은 이중적이다. 그는 리들러가 꾸며놓은 퍼즐에 접근하면서, 서로 다른 트라우마의 기원이 되는 아버지(들)의 흔적에 가까이 다가선다. 도시에 벌어진 살인사건을 추적하면서 탐정과 가해자를 결부 짓는 공통된 과거와 연결되는 것이다. 브루스 웨인은 아버지의 행적에 고통받고, ‘캣우먼’ 셀리나는 아버지를 죽이려 한다. 아버지 세대의 거짓말을 발견하는 허구적 서사에서 비참한 삶의 의미를 찾은 리들러의 편집증은 도시를 수몰시키려는 과대망상으로 번진다. 원인 없는 도시의 밑바닥에서 분노와 증오의 행위만이 연쇄적으로 나타난다. 영화의 마지막에 배트맨은 희망을 말하지만, 개인의 역량으로 통제할 수 없는 파괴에의 열망과 그 원인을 해소하지 못하는 공동체적 무기력이 또한 감지된다. 리브스는 이름 없는 자들의 요구에 제대로 응답하지 못한 도시 공동체의 뒤늦은 반응을, 70년대 미국영화가 발산한 시대적 불안과 과잉된 행동을 뒤늦게 가져온 영화의 형식과 연결한다. 다층적인 의미에서 <더 배트맨>은 후발주자의 영화다. LA와 뉴욕. 헤어지고 만나기를 반복하는 망상적 연인들과 오랜 증오 끝에 서로를 마주하는 영웅과 악당. 아버지가 부재한 소년은 덧없이 사라져가는 유년기의 충동에 사로잡히고, 박쥐 복장을 두른 남자는 죽은 아버지가 남긴 유년기의 고통에 접근한다. 두 편의 영화는 상반된 장르와 분위기로 차이를 드러내지만, 적지 않은 요소들을 공유하면서 비대칭적으로 접합해 있다. 1970년대의 병리적인 충동을 빌려오는 두 영화에서 미국은 꿈과 미래를 약속하는 신화 속의 아메리카가 아니다. 그곳은 연료가 고갈되어버린 차들이 방치되고, 거짓으로 파산한 도시의 잔해로 부서져 있다. 모든 것이 소진된 지대에 70년대적 미치광이들의 기획이 접속하는 <리코리쉬 피자>와 <더 배트맨>은 유사한 열망을 분출하는 서로 다른 비전이다. 아버지의 압력에서 벗어나 유년기적 열망을 찾으려는 충동은 아름다운 스크루볼 코미디로 한번, 어둡고 경직된 블록버스터 탐정 서사로 다시 한번 반복된다. 서두에 인용한 문장에 덧붙여 존 카사베츠는 이 나라의 사람들이 21살을 넘도록 돕는 것에 영화의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영화는 고통을 줄이는 방법을 제공하는 감성적이고 지적인 로드맵이다. 그렇다면 연료 없는 자동차를 주행하는 운전자와 도시 전체를 보지 못하는 눈먼 탐정에게 필요한 지도는 어디에 있을까. 극장의 어둠 속에서, 이미지는 사라지지 않고 되돌아왔다. 불균질한 질서와 비전이 허용되던 마지막 시기인 1970년대 아메리칸 시네마의 흔적은 오늘날의 미국영화에 주어진 육중한 족쇄를 푸는 단서일까? 아니면 동시대 영화가 직면한 또 다른 막다른 길일까? ​

관객이 극장에 가지 않는 이유를 말한다 - 관객 4인 대담

극장영화의 위기를 논하고 비상대책을 강구하기 위해 정부 차원에서 혹은 영화계 내 단체들이 몇번의 테이블을 마련했고, 정부와 극장 차원에서 가시적인 지원책을 마련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기에 관객의 목소리는 늘 빠져 있었다. 도화선을 지핀 것은 최근 CJ CGV의 영화 티켓 가격 인상 소식이었다. 이제 CGV에서 2D영화를 보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비용은 1만5천원(주말 기준)이 됐다. 영화계가 코로나19 직격타를 맞은 지 3년차에 접어든 지금, <씨네21>은 영화 제작자와 투자배급사, 극장이 겪는 고민만큼 관객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리라 판단했다. 대학 영화동아리 회장과 영화과 학생, 독립예술영화관 서포터스와 멀티플렉스 극장 VVIP 회원 등 대표성을 지닌 4인의 관객을 초청해 코로나19 이후 극장영화의 위기에 대한 생각을 들었다. 이들의 대화는 기업과 영화 제작자가 겪는 어려움을 중심으로 논의됐던 포스트 코로나 영화산업 담론에 반드시 탑승해야 할 핵심적인 재료가 될 것이다. 김태현 | 2020년 서울대학교 영화공동체 ‘씨네꼼’에서 회장을 맡았다. 지금은 학교에 다니면서 웹기획 개발을 하고 있다. 상업영화와 예술영화를 가리지 않고 보는데, 한창 많이 볼 때는 한해에 100~200편씩 봤다. 지금은 2주에 한편 정도 보는 것 같다. 가장 최근에 극장에서 본 영화는 <패러렐 마더스>다. 김한슬 | 중앙대학교 영화학과 18학번. 영화는 공부할 때 주로 보는데, 아무래도 프랑수아 트뤼포처럼 옛날 고전영화를 많이 접하게 된다. 평소에는 생각을 덜 할 수 있는 가벼운 작품을 선호한다. 코로나19 이후에는 극장을 거의 가지 않았다. 가장 최근에 극장에서 본 영화는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이다. 박세훈 | CGV VVIP 회원. 일부러 영화관 할인이 되는 카드를 두장이나 쓰고 있다. 일주일에 한번 정도는 꾸준히 극장을 찾아 영화를 챙겨본다. 가장 최근에는 <모비우스>를 봤는데, 일부러 굿즈를 주는 4DX관 상영 회차로 감상했다. 마블 영화를 포함해 ‘돈값’ 하는 영화를 좋아한다. 장혜령 | 예술영화관 아트나인 서포터스 ‘아트나이너’로 활동하며 소식지에 실리는 영화 리뷰와 기사를 썼다. 원래 극장에서 영화를 일주일에 2~3편씩 봤던 영화광이지만 코로나19 이후에는 1~2편 정도만 본다. 대신 OTT로 한국·미국·영국 드라마나 영화를 많이 보고 있다. 가장 최근에 극장에서 본 영화는 <모비우스>다. 코로나19 일일 확진자 수가 여전히 20만명대를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식당과 카페, 술집, 놀이공원에 간다. 백신 접종률이 86%를 돌파하고(2차 접종 기준) 일상 회복을 위한 움직임이 시작되면서 점차 회복세에 접어든 업계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유독 극장은 침체기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장혜령 극장은 환기가 되지 않고 어둡다. 코로나19 시대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것 같다. 지금은 취식이 금지됐지만 팬데믹 초기에는 마스크를 벗고 폐쇄된 곳에서 무언가를 먹는 행위가 위험하다는 인식도 있었다. 팝콘 먹는 즐거움도 사라졌는데 여전히 극장에 가기 위해서는 왕복 시간도 든다. 그에 반해 OTT에 재미있는 게 너무 많아졌다. 넷플릭스 프리미엄 구독료 1만7천원과 주말 CGV 티켓값 1만5천원에는 큰 차이가 없다. 그렇게 사람들은 집에서 쉽게 영화나 드라마를 감상하는 습관에 길들여졌다. 제작사들이 영화에 투자를 덜하면서 영화의 질도 많이 낮아졌고, 볼만한 개봉작이 없으니 극장에는 재개봉, 재재개봉하는 영화가 많아졌다. 극장 체험을 강조하는 작품이 아니고서야 극장에 안 가게 되지 않을까. 사람들을 불러모을 수 있는 마케팅을 해야 하는데 극장 상황이 어렵다며 요금을 두번이나 올리는 것은 해결책이 아닌 것 같다. 김태현 소비자 입장에서 극장이라는 공간은 기본적으로 장소를 대여해주고 먹을 것을 파는 곳이다. 그런데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는 곳이 요즘엔 너무 많이 생겼다. 코로나19 상황에서는 대면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요구가 더 커지는데, 사실 극장이 소통의 공간은 아니다. 그럴 바에야 사람들과 얼굴 마주보며 수다 떨 수 있는 곳을 가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혼영’이라는 말이 생긴 것은 혼자 영화를 보는 게 일반적이지 않아서다. 그런데 요즘엔 여러 명이 함께 영화 보러 가기가 주저되는 상황이다 보니 극장 문화 자체가 많이 쇠퇴한 게 아닐까. 이런 점에서 현재 극장에 비해 압도적인 우위를 가진 선택지는 모텔이라고 생각한다. 모텔 대실료가 극장 2인 티켓값보다 더 저렴하고, 이곳에서는 자유롭게 배달음식을 시켜먹고 떠들면서 무언가를 볼 수 있다. 요즘엔 넷플릭스가 구비되어 있지 않은 숙박업소가 없다. 김한슬 코로나19가 확산되기 직전 한국영화 관객수가 역대 최대 수치를 기록했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영화관에 관객이 오지 않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코로나19 영향이 가장 컸다. 아직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관객이 굉장히 위축될 수밖에 없다. 지난해 “영화는 이제 어디로 가고 있나”라는 주제로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영화를 공부하고 만드는 학생 입장에서 어떤 영화가 극장에 걸리기를 원하는지, 코로나19 이후 영화는 어떻게 될 것인지와 같은 이야기를 담았다. 다큐멘터리를 찍으면서 만난 관객은 극장에서 겪는 공동의 경험이 극장에 가는 이유라고 말했다. 누군가는 팝콘 먹는 소리가 거슬린다고 하지만 그것도 관람의 일부다. 웃긴 포인트에서 다 같이 웃는 경험이 코로나19 이후 어려워졌다. 그래서 코로나19 문제가 실질적으로 해결된다면 극장영화가 다시 부활할 수 있겠단 생각이 드는 동시에 코로나19 이후 가속화된 비대면 문화로의 흐름을 고려해야 한다. OTT의 편리함과 즐거움을 느낀 관객이 다시 극장을 찾게 하려면 단순한 영화 감상을 넘어서는 무언가를 극장이 제공해야 한다. 박세훈 친구들과 어울려서 대화할 때 예전에는 “봉준호 감독의 <괴물> 봤어?”라고 했다면 최근에는 “<오징어 게임> <지금 우리 학교는> 봤어?”라고 한다. OTT의 화제작들이 대화의 주제가 되기 때문에 극장에 가는 것보다는 넷플릭스 시리즈를 보는 것이 사회생활에도 이롭다. (웃음) “집에서 ‘치맥’ 먹으면서 TV로 영화를 볼 수 있는데 불편하게 밀폐된 공간에서 답답하게 마스크 끼고 앉아 있어야 하나?”라는 생각을 코로나19 초기에 많이 했다. 실제로 볼만한 영화가 많이 개봉하지 않기도 했다. 하지만 극장에서만 할 수 있는 경험이 있다.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에서 역대 스파이더맨들이 등장하는 신은 집에서 혼자 봤다면 그냥 무릎을 치고 말았겠지만 극장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반응하니 “나만 소름 돋는 게 아니었구나!” 하는 동질감을 느낄 수 있었다. 모두가 감탄사를 동시에 내뱉는 경험은 극장에서밖에 할 수 없다. <듄>의 성공이 의미하는 것 예전에는 완성도가 높지 않아도 흥행에 성공하는 영화들이 있었다. 팬데믹 상황에서는 <모가디슈>만큼 만들어도 361만, 역대 스파이더맨이 총출동해도(<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 755만 관객이 상한선이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던져볼 수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이 극장을 가게 만드는 것은 어떤 영화인가, 그리고 앞으로 어떤 영화들은 도태될 수밖에 없을 것인가. 김한슬 시청각적으로 고심해서 만든 영화만이 살아남을 수 있지 않을까. 드라마적인 서사가 중요시되는 이야기는 유튜브에도 OTT에도 넘친다. 유튜브에 올라오는 짧은 영상들을 단편영화로 볼 수도 있고, 기존 방송국들도 유튜브 영상을 만들고 있다. 미디어간 경계가 사라지고 있다. 그렇다면 영화관이 차별화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공부하는 입장에서는 사운드 전공자들이 하는 걱정을 많이 접한다. 돌비 애트모스 기술, 공간감이 느껴지는 음향 디자인을 고려해서 영화를 제작하고 있었는데 OTT로 가면 이게 하나의 트랙이 된다. 만드는 사람 입장에서도 아쉬운데 관객도 분명 그럴 거라고 생각한다. 거대한 이미지와 사운드가 주는 감각적인 차이와 몰입감이 우리가 실질적으로 느낄 수 있는 차이다. 박세훈 우리 집 TV는 아이맥스 비율과 돌비 사운드를 구현하지 못하고, 이웃이 신경 쓰여서 볼륨을 높일 수도 없다. 소파도 4DX관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집에서 하지 못하는 경험을 영화관에서 할 수 있을 때 극장을 찾는다. 아이맥스 카메라로 찍어서 1.43:1 비율이 나오는 장면이 존재하면 아이맥스관을 찾고, 최근에는 <모비우스>와 <해리 포터와 불사조 기사단> 재개봉을 4DX관에서, <더 배트맨>을 코엑스 돌비시네마관에서 봤다. 티켓값이 조금 비싸더라도 집에서 경험할 수 없는 요소를 하나라도 갖추고 있는 영화라면 극장을 계속 찾을 것 같다. 장혜령 앞으로 어떤 영화는 외면당하게 될 것인가를 고민해봤을 때, 오히려 서사가 중요해질 것 같다. 요즘 개연성이 없거나 결말이 흐지부지하게 용두사미로 끝나는 시나리오가 너무 많은데, 이렇게 가면 더이상 시장에서 먹히지 않을 것 같다. 요즘은 CGV 에그지수가 실시간으로 뜨니까 포장을 아무리 열심히 해도 완성도가 떨어지면 안 좋은 입소문이 빨리 돈다. 그리고 여러 이슈로 개봉하지 못했던 영화들이 창고 대방출처럼 공개될 때 유행이 지나서 트렌드를 따라가지 못하는 느낌이 든다. 특히 영화 <이웃사촌>을 봤을 때 그랬다. 천만 영화 감독이 연출하고 정우라는 배우가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억지 설정과 억지 신파를 강요하는 서사라서 불편했다.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도 트렌드를 읽지 못한 영화였다. 원작이 중국 소설인데 한국에서는 중국을 이슈로 하는 것이 별로 먹히지 않고, 북한 배경으로 각색했지만 이 역시 한국에서는 크게 관심을 끌지 못했다. 에로라고도 역사소설이라고도 할 수 없고, 금지된 사랑이나 북한 사상에 대해서도 포인트 없이 퀼트 보자기처럼 만든 영화였다. 2차 시장으로 직행할 것 같은 영화가 개봉하는 것을 보면 1만5천원을 주고 보느니 OTT에 풀리면 봐야지 하는 마음이 든다. 그리고 영화들이 점점 길어진다. 3시간 가까이 되는 <더 배트맨>을 보기 위해서는 작정하고 시간을 비우고 체력까지 준비가 되어야 한다. 점점 영화는 대중이 아니라 소수 시네필과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영역이 되어가는 것 같다. 대중과 더 멀어지지 않으려면 대기업이 만든 <영웅>과 같은 대작이 개봉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오늘 심심한데 영화나 볼까?” 하는 관객을 끌어들일 수 있을 것이다. 김태현 코로나19 시국에 흥행한 영화 중 가장 의외였던 것은 <듄>이었다. 예고편을 보고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지금 개봉하는 걸까? 사람들이 보기는 할까?”라고 생각했다. 개봉하자마자 봤을 때도 중간에 졸았고 흥행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듄>을 보기 위해 극장으로 향했다. <듄>이 제공하는 감각의 스펙터클은 OTT가 제공할 수 없다. 숏폼이 유행하는 시대이긴 하지만 긴 서사를 가진 영상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앞으로는 러닝타임이 길더라도 제대로 된 스펙터클을 보여줄 수 있는 서사를 가진 영화들이 경쟁력을 가질 것 같다. CGV 영화 티켓값 인상 소식이 떴을 때 관객의 거부감이 상당했다. 배달음식을 시켜먹으면 배달팁까지 포함해 1인당 2만원 정도를 지불해야 하는 시대에, 왜 관객은 영화에 1만5천원을 지불하는 것은 가혹하다고 느끼는 것일까. 김한슬 대체물이 너무 많다. 무료로 볼 수 있는 영화도, 영화라고 느낄 수 있는 콘텐츠들도 많다. 넷플릭스 스탠더드 기준으로 한달에 1만3500원이면 많은 영화를 볼 수 있는데, 영화관에 한번 가는 데 비슷한 비용을 써야 한다면 그만큼의 가치를 극장이 계속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기보다는 티켓값 인상을 위해 소비자들에게 책임을 나눈 것이다. 유튜브에서도 무료로 웰메이드 영상물을 얼마든지 볼 수 있는 소비자들이 거기에 응할 필요가 없다. 유튜브에서 만들어지는 숏폼, 숏필름이 많이 있는데 굳이 그 이상의 비용을 주면서 단발적인 소비를 하려고 하지 않는다. 기회 비용이 너무 달라진 거다. 배달음식에 배달팁까지 지불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다. 배달팁은 내가 직접 받는 편의를 위해 내는 비용이라면 극장 비용은 내게 그만큼의 편의를 주지는 않으니까. 장혜령 극장은 중장년층 관객이 지갑을 열어야 수익이 많이 나는 곳인데, 코로나19에 취약한 연령대다 보니 극장에 오는 것을 많이 꺼린다. 취식을 금지하고 좌석 거리두기를 해서 정작 청정구역이 된 극장을 찾지 않는 이유는 생계와 관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팬데믹 상황에도 사람들은 먹고 씻고 자는 것을 중요시한다. 때문에 식당에는 가지만 영화는 문화생활이기 때문에 가장 빨리 포기하는 선택지가 된다. 한국 극장 티켓값이 다른 나라보다 저렴하기 때문에 팬데믹에 두번이나 가격을 인상한 것 같긴 한데, 그래도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극장에서 큰 수익을 올렸던 대기업이 이렇게 가격을 올리는 것은 횡포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괘씸하기도 한다. 뮤지컬은 10만원 넘는 티켓을 구입해야 볼 수 있지만 영화는 부담없이 볼 수 있는 대중문화였다고 생각해서 더더욱 그렇다. 김한슬 예전에 영화계가 멀티플렉스 극장을 반기지 않았던 걸로 안다. 멀티플렉스 극장이 영화 제작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는가, 수익 분배를 정당하게 했는가에 대해 부정적인 목소리가 많았다. 그런데 지금 티켓값까지 인상하니 믿음직스럽지 못하다는 인식이 생긴 것 같다. 외국에 비해 티켓값이 싸다고 하더라도 극장은 이미 많은 것을 취하고 있다. <옥자> 개봉 때 멀티플렉스 극장들이 상영 거부를 하며 극장을 강력하게 지키려고 했던 만큼 지금 극장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대책을 제대로 마련했어야 했다. 지난 2년간 마케팅이라든지 다양한 자구책을 마련할 수 있었을 텐데 결국 나온 대책이 티켓값 인상이라면 이는 너무 1차원적인 방법이다. 박세훈 친구들이 “너는 영화를 왜 그렇게 많이 보냐?”라고 물었을 때 “가장 가성비가 좋은 문화생활”이라고 대답하곤 했다. 연극을 보려면 2만원, 뮤지컬을 보려면 10만원 정도가 드는데 영화는 만원만 내면 2시간 동안 꽤 괜찮은 경험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정신 차리고 보니 주말에 영화를 보려면 1만5천원을 지불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내 머릿속에서 아직도 조조영화는 6천원, 일반 영화는 만원인데 말이다. 이제는 한달 동안 영화를 안 보고 참으면 가장 저렴한 뮤지컬 좌석 티켓을 구입할 수 있다. 그리고 쿠팡플레이는 4천원대에 구독할 수 있다. 위로는 뮤지컬, 아래로는 OTT와 가격을 비교하다 보면 영화가 더이상 가성비가 좋은 문화생활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영화학과에 다니고 있는 김한슬씨의 얘기를 듣고 싶다. 요즘 영화과 학생들이 영화감독이 아닌 OTT쪽 회사 취업을 알아본다든지 시리즈를 준비하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는데 어떤가. 장편영화 입봉까지 시간이 많이 걸려서 생기는 현상 같다. 김한슬 주야장천 시나리오를 쓰고 줄 서서 기다리기만 할 것인가, 아니면 당장 일을 할 수 있는 곳으로 갈 것인가 하는 문제다. 연출로 나가기 전에 스탭으로 일할 수 있는 곳도 많기 때문에 경험을 쌓는 경우도 많다. 연출뿐만 아니라 촬영, 녹음 같은 기술 파트에서도 감독이 되려면 거의 20년을 기다려야 한다. 그럼에도 자기 시나리오를 준비하는 사람들도 분명 있다. 젊은 감독들도 있다. 또래 중에도 촬영감독으로 활동하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다 보니 다른 분야에서 기회를 잡으려고 하는 것 같다. 김태현 주변에 영화하는 분들이 우스갯소리로 하는 이야기가 있다. “영화는 명문대생들의 무덤이다.” 이른바 고시낭인처럼 영화낭인이 된 사람들이 많다는 뜻이다. 신랄하게 얘기하자면 그나마 잘 풀리면 대학원에서 학위받고 강사라도 할 수 있는데 딱 그 정도다. 영화감독으로 입봉하는 것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는데 영상산업 전체로 보면 오히려 기회가 굉장히 많다. 그러니 영화가 아닌 다른 분야로 가려고 하는 것이다. 올해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 선정작을 발표하면서 문석 프로그래머가 “소재라는 측면에서 보다 다양해졌고 장르적인 시도 또한 많았던 것 같지만 전반적인 질적 수준이 낮아졌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할 것 같다”고 선정의 변을 밝혔다. OTT 등 플랫폼의 확대와 코로나 팬데믹 장기화를 그 배경으로 들었는데, 관객 입장에서도 저예산 독립예술영화의 질적 수준이 낮아지고 있다고 느끼나. 장혜령 지금 개봉하는 작품들을 보고 실망하는 경우가 많아진 건 맞다. 그리고 미국·유럽 영화보다 한국영화가 더 그렇다. <벌새>와 <남매의 여름밤>처럼 좋은 독립영화가 잘 나오지 않는다. 좋은 인력들이 다른 분야로 빠져나간 이유가 크지 않을까. 그럼에도 주변에는 아직 독립·예술영화를 보는 친구들이 많고 영화제는 계속 매진이라 수요층이 아예 사라질 것이라는 걱정은 들지 않지만, 업계가 어려운 만큼 정부 지원이 절실하다. 김태현 지금 능력 있는 사람들은 영화판이 아니라 웹소설, 웹툰, 웹드라마, 뮤직비디오쪽으로 가고 있다. 사람들은 돈과 관심이 쏠리는 곳에 가고 싶어 하고, 영화가 더이상 매력적인 선택지가 아니게 된 것이다. 김한슬 저예산 독립영화의 질적 수준이 낮아졌다기보다는 수용자들의 수준이 계속 올라가고 있다. 영화제에 출품되는 작품 수는 늘어나고 있지만 관객이 실망감을 느낀다면 그건 보는 이들의 눈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특히 영상물에 특화된 MZ 세대는 시청각적인 안목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관객은 이미 많은 자극을 받고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단편·독립영화에 새로움이 없다고 느끼는 것 같다. 결과적으로 독립영화계의 질적 수준이 올라가고 예술적인 성취를 이루어내길 바란다면 그만큼의 지원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독립영화는 그 안에서 충분히 발전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시네마테크는 잘 유지될 것 같다. 한 차원 더 깊은 문화생활을 영위하고 예술의 세계를 이해하고 싶다는 마음에서 파생된 것이 시네마테크다. 관객의 질적 수준이 높아지면 시네마테크 역시 유지될 수 있다. 지금 대중문화는 MZ 세대 중심으로 흘러가고 있는데 가격 인상 정책은 MZ 세대를 제외하는 것이다. 거기서부터 이미 많이 어긋나버렸다. 새로운 영화문법을 고민해야 할 때 '보수적’이라는 키워드로부터 질문을 이어가고 싶다. 타 분야에 비해 영화는 주요 직책을 맡거나 실제 현업에서 뛰는 플레이어들의 연령대가 높다. 관객 입장에서 영화가 상대적으로 올드한 매체로 느껴지나. 영화가 올드 미디어이기 때문에 재능 있는 신인들은 웹소설이나 웹툰 업계로 흡수되고 있는 것일까. 김한슬 올드함을 많이 느끼고 있다. (웃음) 오히려 영화 공부를 하면서 보는 옛날 영화들이 굉장히 새롭다. 지금 대중이 보는 상업영화에는 그만큼 새로운 시도가 있을까? 영화적인 새로운 문법을 제시하고 있는가? 이런 의문이 계속 들었다. 플레이어들의 연령대가 높아서 영화가 올드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제작자들이 나태하게 고민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영화인과 관계자들의 에세이를 모은 <영화는 무엇이 될 것인가?: 영화의 미래를 상상하는 62인의 생각들>이란 책을 낸 적이 있다. 그때 주진숙 영화연구가가 쓴 글이 생각난다. 관객은 영화가 주는 기존 문법에 너무 익숙해져버렸는데 지금 우리는 새로운 문법을 만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극장영화의 새로운 문법의 도약 없이는 극장이 점점 쇠퇴할 수밖에 없다. 그게 관객이 생각하는 올드함과도 연결되는 것 같다. 나이가 많은 감독도 얼마든지 참신한 영화를 만들 수 있다. 단순히 나이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영화가 만든 문법이 모든 매체에 영향을 미쳤던 것처럼, 지금 새로운 영화문법을 고민해야 할 때다. 장혜령 소위 거장이라고 하는 감독들도 자기 개발을 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상도 많이 받고 좋은 작품을 많이 만들었기 때문에 엄지 들고 인정해주는 것은 당연하지만 시대는 빠르게 변하고 모든 사람은 나이에 상관없이 죽을 때까지 자기 개발을 해야 한다. 타성에 젖어 자신이 권위자이기 때문에 변하지 않으려는 태도가 영화를 올드한 매체로 만드는 것 같다. 가령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이 마블 영화는 영화가 아니라고 한 발언에도 답답함을 느꼈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자신의 장점과 요즘 젊은 세대가 좋아하는 게임을 결합한 <레디 플레이어 원>을 만들고, 조지 밀러가 요즘 사람들이 좋아할 것 같은 요소를 가미한 리메이크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를 만든 것처럼 기존 플레이어들의 변화가 필요하다. 젊은 친구들과도 컬래버레이션을 많이 했으면 좋겠다. 김태현 영화는 올드한 매체로 느껴지고, 올드한 포맷이기 때문에 올드한 사람들이 남아 있다고 생각한다. ‘어쩔TV’라는 유행어의 유래를 듣고 충격받았다. 어린 친구들에게는 텔레비전이 굉장히 구닥다리로 느껴지는 무언가라서 ‘어쩔TV’라는 말을 하게 됐다고 하더라. 그래도 영화보다는 TV가 트렌디하게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TV가 구식으로 취급받는다면 영화는 더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극장은 점점 더 프리미엄화된 공간으로 바뀌게 될까. 아이맥스나 4DX와 같은 특별관 상영이라든지 굿즈를 주는 회차가 아니라면 극장에 갈 마음이 잘 생기지 않는 시대가 도래하게 될까. 박세훈 최근에 CGV연남에 갔다가 굿즈가 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는 CGV용산을 다시 찾았다. 굳이 교통비를 더 쓰고 수고로움을 감수해서 포스터를 받았다. 1인당 1만4천원의 가격을 지불하기로 결심했다면 이에 상응하는 대가를 최대한 누리고 싶어서다. 4DX관에 가도 프라임 존에 앉지 못하면 100% 누리지 못한 것 같은, 아깝다는 마음이 든다. 예전에는 특별관을 잘 가지 않았던 것 같은데 요즘엔 일반관보다 특별관을 더 많이 간다. 결국 ‘돈값’을 하는, 굿즈를 주거나 익스트림한 경험을 줄 수 있는 곳을 선호하게 된다. 차라리 요금을 일괄적으로 올리는 것보다는 관을 다양화하고 가격도 차등을 두는 게 좋지 않을까. 일반관은 좀더 저렴하게, 특별관은 거의 2만원 가까이 되는 비용으로 책정된다고 해도 개인적으로는 기꺼이 후자를 찾을 수 있다. 특별관도 먼 곳까지 찾아가지 않아도 될 만큼 좀더 다양한 극장에 배치됐으면 좋겠다. 사실 주차별로 다른 굿즈를 모으면서도 내가 굿즈 중심 마케팅에 기꺼이 빨려들어가버렸다는 생각도 든다. (웃음) 역으로 말하면 다른 방식의 마케팅으로도 관객을 끌어들일 수 있었을 텐데 다양한 아이디어가 없었던 것이다. 지금은 굿즈 마케팅 아니면 선착순 무료 티켓 말고는 무엇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 김한슬 다양성이 제일 중요하지만, 가장 좋은 건 기본이라는 말도 있는 것처럼 결국 기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했을 때 프리미엄관의 장점도 눈에 보일 수 있지 않나 싶다. 영화 굿즈를 모으는 관객의 심리를 생각해본 적이 있다. 사람들은 매 순간 자신의 선택이 어떤 영향을 주는지 중요하게 생각하고, 자기가 본 영화가 휘발되어 잊어버리기보다는 기억하고 향수할 수 있는 순간으로 남길 바라는 게 아닐까. 좋은 영화가 있다면 포스터, 배지, 포토티켓을 갖고 싶은 거다. 관객에게 향수가 그만큼 중요하다면 기본적인 영화관의 형태가 사라져서는 안된다. 기존의 아트하우스관을 유지하면서 영화의 가장 기본을 잊지 말고 고수해야 다양한 프리미엄관과 가격 정책도 소비자에게 유효할 수 있다. 투자는 관객수 외 지표에 의해서도 고려되어야 희망적인 이야기도 비관적인 전망도 모두 나온 것 같은데 앞으로 영화계, 특히 극장은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에 대해 각자 생각도 정리됐을 것 같다. 장혜령 지난 3년 동안 가장 직격탄을 맞은 업계 중 하나가 극장이었다. 봉준호 감독님 같은 분이 빨리 차기작을 선보여야 사람들이 극장에 올 것 같다. (웃음) 혹은 천만 감독들의 신작이 개봉해야 사람들이 극장을 찾지 않을까. 기대작들이 개봉을 미루면서 관객의 실망이 누적됐고 점점 더 극장에 가지 않게 됐다. 그사이 OTT에서는 재미있는 콘텐츠들이 많이 나와서 OTT로 영상을 보는 것이 새로운 습관으로 자리 잡았다.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앞으로 10년 정도는 천만 영화가 나오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이젠 관객수로 평가할 게 아니라 스트리밍 지수를 따지는 등 흥행의 기준도 달라져야 한다. 투자는 관객수가 아닌 다른 지표에 의해서도 재고되어야 한다. 김태현 일단 영화의 위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극장의 위기일 뿐이다. 영화는 변화하는 생태계에서 더 많은 다양성을 내포하고 있고, 다만 그 과정에서 극장 중심의 문화는 필연적으로 도태될 것이다. 독립영화가 어떻게 관객과 만날 것인지 그 기회를 만드는 방법에 대해 좀더 고민이 필요할 것 같다. ‘세이브 아워 시네마’(#SaveOurCinema) 캠페인을 벌였지만 문제의 본질엔 가지도 못했다. 새로운 관객을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기존 소비자들의 감성에 호소하는 전략이 실질적인 변화로 이어질지는 모르겠다. 극장 그리고 독립영화 상영관이 다시 되살아나기 위해서는 마케팅에 대한 고민이 좀더 필요하다. 김한슬 오늘날 모두가 일상의 회복을 소원하고 있듯이, 그 누구보다 극장의 회복을 고대하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관객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친구와 함께, 연인과 함께, 가족과 함께 영화를 보고 느낄 수 있던 극장의 경험을 기다리고 있는 관객에게 극장이 다시금 소중한 추억을 남길 수 있는 공간으로 돌아올 수 있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 더 다양한 영화와 공간의 경험을 극장이 제공할 수 있기를 함께 고민하고 기대하며 응원하겠다. 박세훈 OTT 덕분에 사람들은 예전보다 더 영화를 많이 보고 있다. 그렇다면 이를 극장에서 더 좋은 경험을 할 수 있도록 이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승리호>가 넷플릭스에서 공개될 때 보지 않았다가 CGV에서 특별 상영을 했을 때 관람했다. 그때 “극장에서 보니까 괜찮은데?”라고 생각하며 봤다. 아마 이 작품을 스마트폰으로 봤다면 서사가 별로라 재미가 없었을 텐데, 그래픽이 좋다보니 극장 관람이 훨씬 영화를 재미있게 만들어줬다. 분명 극장과 OTT가 서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영화들이 있고 영화 경험을 확장시킬 수 있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다양해졌으면 좋겠다. <메기>를 재미있게 봤는데 이 작품을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제작했다는 것을 알고 다른 작품도 몇편 찾아봤다. 마블 영화와 특별관 상영을 좋아하지만 한편으로 내게는 <메기> 같은 영화를 원하는 자아도 있다. 이런 다양성을 보장해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자본의 논리대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시장이라면. 대기업의 선의를 기대할 수 없다면 결국 정부 차원의 정책이 필요하지 않을까. 마블 영화를 좋아하는 관객도 독립예술영화를 만나는 그런 영화적 경험들을 계속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