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내가 찾는 영화 정보를 손쉽게!

‘텔레@UPCOIN24검돈세탁문의비트코인사는방법검돈세탁문의비트코인사는방법' 검색결과

기사/뉴스(1997)

[파리] 프랑수아 오종, <페터 폰 칸트>로 파스빈더를 스크린에 부활시키다

분노, 금기, 저항, 동성애…. 일년에 4~5편, 많게는 9편에 이르는 작품들을 무서운 속도로 창작했던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37살에 요절하기까지 파스빈더의 놀라운 창작력과 재능은 그를 뉴 저먼 시네마의 중요한 인물 중 하나로 남게 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신성모독, 동성애, 근친상간 등 금기와 욕망의 문지방을 아슬아슬 오가며 매년 한편꼴로 장편영화를 발표하는 프랑스 감독 프랑수아 오종. 그는 “학생 때부터 파스빈더는 나에게 영화의 큰형과 같은 존재였다”라고 말할 만큼 파스빈더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숨기지 않는다. 사실, 생각해보면 <시트콤>(1998)과 <크리미널 러버>(1999)로 데뷔식을 마친 신예 오종이 당시 평단과 관객의 탄탄한 신뢰를 얻게 된 계기는 바로 파스빈더의 희곡을 각색한 <워터 드랍스 온 버닝 락>(2000) 덕분이었다. 약간은 넓적한 얼굴, 기름진 듯 이마에 딱 들러붙은 머리, 멋대로 자란 수염 사이로 삐죽 삐져나온 반쯤 타버린 담배, 그리고 슬픈 듯 광기어린 눈빛을 채 가리지 못하고 투영시키는 네모난 선글라스. 오종의 신작 <페터 폰 칸트>(2022)는 파스빈더의 얼굴을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원작은 파스빈더의 희곡을 영화화한 <페트라 폰 칸트의 쓰디쓴 눈물>(1972)로, 성공한 부르주아 레즈비언 디자이너가 패션모델을 꿈꾸는 한 젊은 여성과 격렬하게 사랑에 빠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오종은 원작 속 성과 직업을 바꾸어 페트라를 성공한 영화감독 페터로 탈바꿈시킨다. 페터(드니 메노셰)는 파스빈더의 분신으로, 여배우 시도니(이자벨 아자니)의 소개로 만난 청년 아미르(카릴 벤 가르비아)와 사랑에 빠져 그가 배우가 되도록 물심양면 돕지만 일방적이기만 한 페터의 사랑은 그를 철저하게 파괴한다. 연극적 무대, 격하면서도 미묘한 감정을 전달하는 배우들의 대사와 연기 등 오종이 재창조한 파스빈더의 희극은 “예측 불가능한 프랑스 감독의 새로운 성공작”(일간지 <레 제코>), “파스빈더의 세계로 다시 빠져들게 하는 잔혹하고 섬뜩한 사이코 드라마”(문화 주간지 <텔레라마>), “질투에 관한 파스빈더식 멜로드라마, 감독의 삶과 작품 전반을 다루는 환상적 전기영화”(영화 평론지 <레 피쉬에 뒤 시네마>)라는 평을 받으며 7월6일 개봉 첫주 동안 4만5천명의 시네필을 극장으로 불러모았다.

‘복원의 재구성: 이창동 전작 4K 리마스터링 포럼’에 가다

7월1일부터 8월25일까지 진행되는 ‘발굴, 복원 그리고 재창조’ 기획전은 한국영상자료원(이하 영상자료원)의 주요 사업인 영상 복원 사업의 결과물을 관객에게 선보이는 자리다. 올해 ‘발굴, 복원 그리고 재창조’ 기획전에선 4K 리마스터링된 이창동 감독의 장편 6편과 단편 <심장소리>를 상영하는 섹션이 마련됐다. 기획전의 일환으로 지난 7월23일, 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KOFA 1관에서 ‘복원의 재구성: 이창동 전작 4K 리마스터링 포럼’이 열렸다. 전석 매진된 이날 행사에는 수많은 관객이 참여해 <심장소리>를 관람하고 포럼을 경청했다. 영화 상영 전 모습을 드러낸 이창동 감독은 감사 인사와 함께 <심장소리>의 제작 과정을 전하고, “원본 복원 작업은 영화산업 전체를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강조하며 모두 발언을 마쳤다. <심장소리>가 상영된 뒤 김홍준 영상자료원 원장이 모더레이터를 맡고 박홍열 촬영감독, 조해원 영상자료원 영상복원팀장, 신정민 영상복원 전문가가 패널로 참여한 포럼이 시작됐다. 포럼은 2시간가량 진행됐으며 필름으로 촬영한 영화를 디지털화하는 복원 과정의 현황 그리고 디지털 촬영 시대에 발생하는 원본 아카이빙 문제에 관한 논의가 진행됐다. ■ 4K 디지털 리마스터링과 필름 복원의 중요성 조해원 필름 디지털 리마스터링은 화면과 음질 개선을 포함해 아날로그 형식으로 마스터된 것을 디지털 포맷으로 전환하는, 새로 마스터링을 하는 단계다. 35mm 필름의 해상도를 정확히 수치화할 순 없지만 대략 4K 해상도와 근접한 해상도를 내기 때문에 4K로 리마스터링하는 게 가장 좋다. 영상자료원의 필름 디지털화 과정은 필름 스캔, 필름 디지털화, 필름 복원의 세 단계를 거친다. 먼저 필름 스캔은 아날로그 자료를 디지털로 변환하는 단계로 여기서 가장 많은 작업을 거친다. 필름 디지털화는 스캔 파일을 활용해 색 보정, 음향 복원을 진행한 후 다른 디지털 파일로 마스터링하는 작업이다. 영상자료원에서는 필름 디지털화를 리마스터링 개념으로 본다. 마지막으로 필름 복원은 필름 디지털화 작업에서 추가 공정을 더해 원본과 동일한 상태로 복원하는 과정을 일컫는다. 김홍준 1990년대 한국영화 현장에서는 1.85:1 화면을 찍을 때 렌즈에 마스킹하고 와이드스크린을 만들어냈다. 이때 렌즈에 잡티가 있을 수도 있고 카메라가 바람에 흔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 또한 필름에 기록돼 있으니 원본일 것이다. 초창기에는 디지털에 대한 맹신 때문에 티 하나 없는 화면을 잘된 복원의 기준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복원은 상대적이고 문화적인 개념이다. 적절한 선에서 원본의 기준을 세워야 할 필요가 있다. 조해원 필름 복원에는 아카이브 철학적인 부분이 포함돼 있다. 원본을 무작정 깨끗하게만 만든다고 해서 복원이 잘됐다고 볼 순 없다. 영화가 제작된 시대 상황에 맞춰서 만들어내는 게 필름 아카이브 차원에서의 복원이기 때문이다. 가령 화면 가장자리의 머리카락같이 지금의 시선으로 봤을 때 지울 수도 있는 것들을 복원 공정에서는 남긴다. 즉 필름 디지털화, 리마스터링은 화면과 음질을 개선해서 더 좋은 해상도로 만드는 작업이라면 필름 복원은 원본에 대한 동일성을 유지하면서 디지털 파일로 만드는 작업이라고 보면 된다. 국내에서 필름 보수를 시작으로 필름 복원의 단계까지 할 수 있는 국가기관은 영상자료원이 유일하다. 이는 필름을 보존,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신정민 리마스터링 분야 세계 1위인 볼로냐 복원 서머스쿨에 26일간 다녀온 적이 있다. 해외의 경우 복원을 할 때 나무를 보지 않고 숲을 본다는 느낌을 받았다. 복원은 촬영 당시 스탭들의 열정, 당시의 상영 플랫폼까지도 공유할 수 있는 개념이어야 한다. ■ 시대별 작업 공정과 오리지널 네거티브 손실 문제 조해원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는 필름으로 촬영해 필름으로 상영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때 35mm 오리지널 네거티브 필름(촬영 원본)을 현상한 후 스틴벡을 통해 16mm 필름으로 편집했다. 최종적으로 색 보정 전 단계에서 오리지널 네거티브 필름 커팅을 하고, 그 과정에서 순서를 정리하고 해당 필름으로 상영용 필름을 복사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오리지널 네거티브가 보존될 수 있었다. DI(Digital Intermediate, 색 보정 포함한 교정 작업) 도입 전 단계에도 키-코드 텔레시네가 있어 편집 시 당연히 오리지널 네거티브를 보존할 수 있었다. 필름으로 찍어 디지털로 상영하는 시점부터 오리지널 네거티브 손실의 문제가 생겼다. 2001년 <화산고>를 시작으로 DI가 도입됐는데, 오리지널 네거티브를 디지털로 스캔해 그 위에 작업과 편집을 거친 후 최종 DI 공정에서 DCP(Digital Cinema Package, 극장 상영용 파일)를 만들어 디지털 상영관에 배급했다. DI 시 DSM(Digital Source Master, 색 보정이나 CG 등이 포함된 디지털 원본 마스터)은 필름에 또 새롭게 리코딩했다. 이때 리코딩은 상영 표준에 맞춘 2K DSM 소스로 진행됐기 때문에 촬영 원본이 제대로 보존되지 못했다. 심지어 DSM 공정은 필름에 디지털 자료를 넣는 과정을 포함하는데 이때 해상도는 더 작아질 수밖에 없다. 영상자료원이 보유하고 있는 2005년부터 2011년까지의 영화 시네온 파일(필름 리코딩용 파일)은 224편이다. 이들은 리코딩 필름과 2K DSM인데, 다시 말해 오리지널 네거티브가 없다는 뜻이다. 향후 2K 리마스터링을 진행할 수는 있어도 4K 해상도에 준하는 오리지널 네거티브 필름이 없기 때문에 시네온 파일을 스캔 후 4K 업스케일링을 통해 디지털 리마스터링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실제로 이 시기에 만들어진 이창동 감독의 <밀양>과 <시>는 2K DSM을 4K로 업스케일링하는 과정을 겪었다. 디지털 촬영 후 디지털 상영 단계로 넘어오면서 4K, 6K, 8K 고해상도로 촬영이 가능해졌다. DSM을 만들고 DCDM(Digital Cinema Distribution Master, 자막 등 부가 데이터 포함)과 DCP를 상영관으로 보내는데 3254개의 전국 스크린 중 4K 영사를 할 수 있는 상영관은 228개밖에 되지 않는다. 따라서 고해상도 촬영과 별개로 실제 극장에서 보는 것은 2K DCP일 수밖에 없다. 대부분의 상영관이 2K 영사기이기 때문에 4K를 구현할 환경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박홍열 한국영화가 전성기였던 2000년대 초중반에는 필름 사용량이 정말 많이 늘어났다. 그러던 중 디지털 기술과 디지털 영사기가 등장했다. 이때의 필름 현상소들은 필름 프린팅이 주 수입원이다 보니 고객 유치를 위한 서비스 차원에서 저가의 DI 산업을 편집에 도입했다. 그렇게 30만자 이상의 원본 필름들을 직접 편집하면서 이를 보존하지 않고 죄다 디지털화해버렸고, 그 과정에서 원본이 사라지는 문제가 발생했다. 필름은 디지털보다 훨씬 더 많은 걸 표현할 수 있다. 4K가 10비트니까 2의 10제곱인 1024만큼의 색 심도를 표현할 수 있다면 필름은 더 많은 걸 표현할 수 있는 셈이다. 하지만 디지털에 대한 맹신으로 더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날린 것이다.필름을 DCP로 만드는 과정은 복사의 과정이다. 한국영화가 부흥하고 극장이 많아지면서 필름 프린팅 양도 많아졌는데 오리지널 네거티브를 계속 복사하면 원본이 망가지다 보니 당시엔 훼손을 막으려 오리지널 네거티브를 디지털 리코딩하고, 그것을 계속 복사 또 복사하며 프린트를 떴다. 지금 영상자료원이 <반칙왕>의 릴리스 프린트로 리마스터링 작업을 진행 중이다. 실상 릴리스 프린트는 오리지널 네거티브가 아니라 연거푸 복사된, 원본의 정보량이 손실된 필름이다. 김홍준 당시 한국영화계의 상황을 다시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디지털이 도입되기 전 35mm 필름은 굉장히 비싸고 제작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 35mm 필름 오리지널 네거티브를 동일한 필름으로 복사했던 할리우드와 달리 당시 한국은 35mm 필름을 16mm 필름으로 축소하여 복사, 편집했다. 촬영한 필름이 5만자 정도라면 1만 5천자에서 2만자 정도가 오케이 컷이었고, 나머지 엔지 필름은 보존하지 않고 그냥 버렸다. 당시 한국영화의 취약한 산업 구조, 오랫동안 쌓아온 관행 등의 이유로 오케이 컷만 오리지널 네거티브로 남겨두고 나머지는 원본이 아니라 생각했다. 할리우드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엔지 필름도 아직 보관하는데 말이다. 물론 그 많은 필름을 보존할 공간이 없기도 했다. 충무로 영화인들이 돈이 많아서 100평짜리 집에서 떵떵거리며 사는 것도 아니고. (좌중 웃음) ■ 오리지널 네거티브 수집의 중요성과 제도 개선의 필요성 조해원 영상자료원은 90년대 중반부터 DCP 의무 납본제를 시행 중이다. DCP가 2K이기 때문에 향후 4K 이상의 리마스터링을 위해서는 촬영 원본 수집이 더욱 중요하다. 다행히 <버닝>은 4K로 촬영했기 때문에 4K DCP를 만들어 보존하고 있다. 몇년 전부터 수집팀을 통해 오리지널 네거티브 손실의 문제를 확인했고, 이 문제가 지속되면 필름 시대에 DI 공정이 들어오며 고해상도의 원본을 잃어버렸던 과정의 반복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올해부터 의무 납본을 DCP로 받되 색 정보가 들어가지 않는 오리지널 네거티브도 매입해 수집하고 있다. 박홍열 <기생충> 등의 최근 영화들은 전부 6K로 찍고 있음에도 최종 DCP는 무조건 2K다. 2K DCP를 자료원과 제작사들이 보관하는 게 안타까웠다. 영상자료원이 복원 사업에 중점을 두며 DI 없는 원본을 수집한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디지털로 촬영하는 영화 용량은 100~150테라다. 필름 촬영 때처럼 공간을 차지할 여력을 생각할 필요가 없음에도 관습이 남아 있다 보니 원본 데이터는 지금도 어떤 제작사도 관리하지 않는 듯하다. 그런데 얼마 전 공개된 <사이버 지옥: N번방을 무너뜨려라>의 원본 데이터를 넷플릭스에서 전부 보유하고 있어 놀랐다. 오리지널 네거티브를 보존하는 것은 산업적인 측면은 물론 역사적, 인류학적 맥락 안에서도 중요하다. 그리고 오리지널 네거티브의 보존 중요성에 관한 인식이 전환된다면 제작사들도, 지금 독립영화를 찍고 있는 사람들도 원본을 보관하고 싶을 것이다. 이건 영상자료원 혼자 힘으로는 되지 않는다. 여러분들이 그런 목소리를 높여준다면 정부가 예산을 배정할 것이고 아카이빙의 중요성도 재고하지 않을까. 김홍준 파주에 복원센터가 존재하긴 한다. 하지만 영상자료원이 예산을 쌓고 인원을 확충한다면 제3의 복원센터, 제4의 복원센터도 만들고 전국에 4K 시네마테크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꿈을 꾼다.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우리나라에서 극장 상영을 목적으로 영상물등급위원회에서 영화로 등급 신청을 하는 것만이 DCP 의무 납본 대상이다. 즉 OTT 제작, 배급물인 <승리호>나 <오징어 게임> 등은 우리가 수집할 의무도, 그들이 제출할 의무도 없어 공중에 떠 있다. OTT의 오리지널 네거티브는 고사하고 DCP조차 수집이 안되는 상황이라 이 점도 여론의 상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LIST] 이목원 미술감독의 리스트

'LIST’는 매주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에게 취향과 영감의 원천 5가지를 물어 소개하는 지면입니다. 이름하여 그들이 요즘 빠져 있는 것들의 목록. 아이폰 나의 앨범 “그런 곳이 세상에 어디 있어”라고 누군가 말할 때 “여기 있어” 하고 보여주기 위해 매일 찍기 시작한 일상 공간들의 사진. 세상 모든 이들의 때론 놀라울 정도로 파격적인 컬러 시도와 완벽하게 캐릭터를 녹여내는 세팅은 나의 미술 작업에 가장 큰 영감이자 레퍼런스. 세상의 모든 유튜브 콘텐츠들 제임스 웹 딥 필드, 키스 뉴스테드의 ‘오토마타’ 시리즈, 오래된 영상 자료의 리마스터링 채널까지. 얕더라도 많은 것을 알고 싶어 하는 나에게 최적의 공부 장소. 토마스와 친구들 아이를 통해 알게 된 <토마스와 친구들>. 등장하는 거의 대부분의 곡 제목을 알게 되었다. 기차 친구들을 구분하는 방법이 색상이 아니라 얼굴의 미세한 차이라는 것도 아이에게서 배웠다. 1984년부터 2022년까지 세상에 태어난 거의 모든 아이들이 좋아하는 보편적인 디자인이라니…. 게다가 이 기차의 디자이너 중에는 퀸의 전신인 밴드 스마일(Smile)의 팀 스태플이 있다. 기타 수집 브라질리언 보드의 59년 히스토릭 레스폴, 더블바운딩된 62년 텔레케스터, 1931년 OM-28 어센틱. 이 얼마나 역사적이고 조형적이고 아름다운가. 마빈 게이 술을 꽤 마시고 마빈 게이의 음악을 들으면 감정은 증폭되고 세상은 각성된다.

[곽재식의 오늘은 SF] 정치적인 V

1980년대 초에 나온 미국 텔레비전 시리즈 는 외계인의 대규모 지구 방문을 다룬 이야기다. 나는 에서 가장 긴장감 넘치고 아슬아슬한 장면이 초반의 외계인 등장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그 장면을 보여주기 위한 도입부터가 아주 멋졌기 때문이다. 어느 날 갑자기 전세계 각 지역에 외계인의 우주선들이 등장한다. 그들이 찾아온 이유는 무엇인지 지금부터 무엇을 할 것인지 다들 궁금해하는 가운데, 우주선은 그냥 가만히 멈춘 채로 기다리고 사람들은 저마다 TV 앞에 모여들어 세계 각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지켜본다. 말하자면 뜸을 들인 것이다. 이 뜸들이는 대목의 연출은 대단히 근사했다. 일단 외계인 우주선의 모습부터가 훌륭하다. 우주선이라고 하면 누구나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비행접시 형태의 모양이기에 구구한 설명 없이도 쉽게 외계인 우주선이라는 느낌을 준다. 그러면서도, 그냥 옛날 장난감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도록 독특한 특징을 갖고 있다. 하나만 예를 들면 일단 에 등장하는 비행접시는 굉장히 크다. 단순히 외계인 탐사대 몇 사람이 타고 다니는 교통수단이라는 느낌이 아니다. 비행접시 하나가 도시 상공을 뒤덮을 정도로 거대하다. 그 덕택에 거대한 물체를 공중에 띄울 수 있는 기술을 갖고 있는 무시무시한 적이라는 느낌을 과시할 수 있다. 동시에 갑자기 대낮의 도시에 햇빛을 가리며 그림자가 드리우는 모습이, 엄청난 천재지변 느낌의 재난인 듯한 심상을 살릴 수도 있었다. 이런 연출의 전통은 1950년대 SF 황금기의 명작으로 꼽는 소설 <유년기의 끝>에 나오는 외계인 우주선의 느낌을 화면으로 생생하게 표현한 것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얀 빛깔의 거대한 덩어리가 별다른 치장 없이 대낮 도심 상공에 떠 있는 모습이 불가해함을 나타내는, 그러한 미술적 충격을 주는 현대미술과 같다는 생각도 해본다. 거창하고 진지한 외계인 우주선이 등장하는 장면의 연출을 이야기할 때 <미지와의 조우>는 2등으로 뽑으면 서러운 영화일 것이다. 나는 밤에 나타나 온갖 소리와 요란한 색색깔의 불빛으로 현란한 쇼를 벌이는 <미지와의 조우> 이상으로, 대낮에 거대한 비행접시가 조용히 나타나 그냥 멀거니 가만히 있는 가 멋졌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비행접시에서 막상 외계인이 내려와 모습을 드러내면, 곧 굉장히 맥빠지고 우스꽝스러운 장면이 나와버린다. 엄청나게 분위기를 잡고 진지한 척하면서 외계인이 등장하는데, 그냥 미국 중년 아저씨처럼 생겼으며 나아가 지구인들에게 뜻을 전하기 위해 영어라는 언어를 사용해 말하기 때문이다. 태양계 너머 머나먼 우주 끝에서 수십억년 동안 지구와 아무 상관없이 탄생한 외계 생물이 하필 사람처럼 두발로 걷고 두손을 앞뒤로 움직이며 걷는 것부터가 대단히 놀라운 우연의 일치인데, 그 생물이 입을 움직여 소리내는 방식으로 의사소통을 한다는 것은 더욱더 기이한 일이다. 하다못해 지구의 벌도 춤으로 의사소통을 하고, 개미도 냄새로 의사소통을 하는데 외계인이 말로 의사소통을 한다고? 게다가 그 입으로 영어를 그렇게까지 유창하게 말하다니? 어떻게 이렇게 황당한 이야기를 그냥 이어 붙였을까? 물론 가장 중요한 까닭은, 그렇다고 치고 넘어가야 할리우드에서 배우에게 외계인 역할을 쉽게 맡길 수 있기 때문이다. 다리 8개 달린 해파리 모양의 외계인이 춤으로 의사소통을 한다고 하면, 아무리 뛰어난 배우에게도 연기를 시키기 힘드니까. 그렇거나 말거나 의 그다음 내용을 보면 이런 점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강렬한 시작 장면에 이어 붙이는 이야기에서 외계인이라는 소재로 보여줄 수 있는 다채로운 과학적 상상력 이상의 이야기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에는 적과 싸우는 이야기 속에서 작가와 제작진이 보여주고 싶은 정치, 사상에 관한 주제가 있었다. 의 외계인들은 독재 정부를 상징한다. 시대 배경을 생각하면 당시의 공산주의 국가,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비판으로도 비칠 만하다. 아닌 게 아니라 냉전, 즉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대결과 경쟁이 극심했던 1950년대 전후의 SF물에서는 외계인 침공 이야기를 다루는 유행이 이미 한번 휩쓸고 지나간 뒤였다. 그 시절의 외계인 침공 이야기들은 핵무기가 대량 배치된 시대에 강력한 기술을 가진 상대와 전쟁을 벌이다가 인류가 모두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이 반영된 것이라고들 한다. 그러다 데탕트 시대와 베트남전 종전을 지나며 냉전은 잠시 소강기를 맞는다. 이후 1980년대 들어 다시 미소간 대립이 심해지면서, 소위 신냉전 시대가 찾아왔는데 이때가 마침 가 제작된 시기다. 에서 외계인들은 지구인들에게 발달된 기술을 전해주어 지구인 모두가 잘 살게 해줄 거라고 선전한다. 그러면서 하나둘 지구인을 포섭해나간다. 그렇지만 사실 외계인들에게는 다른 꿍꿍이가 있는데, 결국 자신들이 지구인을 지배하는 것이 목표였던 것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다. 지금 어떤 사상가들은 부자들의 돈을 몰수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면 모두가 잘 살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거기에 솔깃한 사람들이 그쪽으로 넘어갈지 모른다. 그러나 결국 세상이 그런 식으로 변하고 나면, 그 후로는 사회의 모든 일들을 처음 그 사상을 퍼뜨린 사상가들과 그 동료 몇몇이 장악하는 세상이 될 뿐이다. 거기에 속지 말고 저항하자는 게 의 이야기다. 마침 공산주의와의 긴장이 높아지던 시대에 어울리도록, 이 TV시리즈에는 악당 외계인들은 항상 붉은색을 좋아하는 것으로 꾸며져 있었다. SF는 “세상이 지금처럼 굴러가다 보면 잘못하면 이렇게 될 수도 있다”는 미래 이야기를 자주 늘어놓곤 한다. 이런 이야기는 “내 주장에 한표를 주지 않으면 우리나라가 망할 수도 있다”는 정치인의 주장과 구조가 비슷하다. 그러다 보니 노골적인 정치, 사상을 내세우는 SF도 자주 나오는 편이다. 가끔 신문 사설에 “얼마 후의 한국 모습”이라며 미래의 한국이 망한 모습을 쓰는 기자들이 있는 것만 봐도 이런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나는 그런 SF를 보는 것도 나름의 재미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그런 중에서도 가끔 멋진 것들이 나오기도 한다. 이를테면 세상 알 수 없는 것이 에서 가장 인기 있고 화제를 모았던 등장인물은 하필 악역인 외계인 과학 담당 책임자, 다이애나였다.

[김겨울의 디스토피아로부터] 머리 쓰는 여자들

발단은 출장이었다. 집에서 역까지 한 시간을 가야 하고 역에서 다시 세 시간 동안 고속열차를 타야 하는, 왕복으로 여덟 시간이 드는 강연 일정이 잡혀 있었다. 이렇게 긴 이동 시간 동안 하염없이 한 가지 일만 할 수는 없고, 책을 한참 읽다가, 굳어가는 목을 느끼며 몸을 요상한 모양으로 비틀어 기지개를 폈다가, 태블릿 컴퓨터와 키보드를 꺼내 도각도각 일을 보다가, 시끄럽게 떠드는 옆자리 사람들에게 조용히 해달라고 말도 했다가, 집에서 챙겨온 커피도 쭉쭉 마셨다가, 최후에는 유튜브를 봤다. 유튜브 알고리즘님, 오늘 저에게 무엇을 점지해줄 것인가요. 이번에 선택된 건 머리를 쓰는 온갖 예능 프로그램의 짧은 클립들이었는데, 이건 아마도 <놀라운 토요일>을 즐겨 보는 나의 취향이 반영된 결과물인 것 같다. 엄청난 추리로 가사를 잡아내는 출연진의 활약을 보는 것으로 시작해 방탈출 같은 퍼즐을 푸는 영상들을 거쳐 남자 연예인들이 각종 어려운 문제를 풀어내는 쇼에 이르러 문득 깨달은 것은 마지막 쇼에는 여자 연예인들이 간헐적으로만 출연하며, 기본적으로 머리 좋은 남자들이 문제를 푸는 모습을 보여주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것이었다. 어라, 저거 재미있어 보이는데 여자들이 하는 것도 있으면 재미있겠다. 시청자의 호기심으로 떠오른 생각을 막 쓰다보니 유튜버의 본능에도 반짝반짝 불이 들어왔다. 재미있는 거 만들고 싶다! 소셜 미디어에 생각나는 대로 간단하게 아이디어를 냈는데 생각한 것 이상으로 좋은 반응이 돌아왔다. 대체로 ‘머리 쓰는 여자들’을 예능 프로그램으로 보고 싶다는 반응이었고, 내가 보고 싶다고 생각한 걸 그들도 보고 싶어 한다는 것을 대번에 알 수 있었다. 몸을 쓰는 여자들, 사람들을 웃기는 여자들이 있다면 머리를 써서 근사하게 문제를 푸는 여자들도 볼 때가 되었지. 그러고보니 텔레비전 프로그램으로 머리 쓰는 여자들을 언제 봤던가? 전문가들을 모아서 이야기를 나누는 프로그램에도 여성 출연자의 비율은 턱없이 낮았고, 평론가가 나와 이것저것을 평가하는 프로그램에서도, 지식을 가진 사람이 나와 패널들을 가르치는 프로그램에서도 그래왔다. 하지만 다들 알다시피 지식을 가진 똑똑한 여성은 충분히 많다. 이 풍부한 인재풀을 이제는 활용할 때가 된 것 같다. 이 아이디어가 실현이 될지 아직은 알 수 없지만, 이렇게 세상에 씨앗처럼 뿌려둔 아이디어는 스멀스멀 자라나서 결국 누군가에 의해 구현이 될 거라고 믿고 있다. 무엇보다 내가 시청자로서 너무 보고 싶은걸! 여러분도 그렇다면, 두 손을 모아 멀리멀리 소리쳐보자. 우리가 이런 것을 보고 싶어 한다고. 여기에 시청자가 있다고. 그곳에 사람이 모인다는 점이 보장된다면 당연히 만들어질 확률도 높아질 테니까.

[속보] 이정재, 에미상 남우주연상…아시아 배우 최초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의 배우 이정재가 미국 방송계 최고 권위의 에미상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한국 배우는 물론 아시아 배우가 에미상 주연상을 받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미국 텔레비전예술과학아카데미는 12일(현지시각) 미국 로스앤젤레스 마이크로소프트 극장에서 제74회 프라임타임 에미상 시상식을 열고 이정재를 드라마 시리즈 남우주연상 수상자로 선정했다. <오징어 게임>에서 사채업자들에 쫓기다 456억원이 걸린 죽음의 게임에 참가한 주인공 성기훈을 연기한 이정재는 제러미 스트롱·브라이언 콕스(<석세션>), 애덤 스콧(<세브란스: 단절>), 제이슨 베이트먼(<오자크>), 밥 오든커크(<베터 콜 사울>) 등 쟁쟁한 후보를 제치고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앞서 이정재는 미국배우조합상, 스피릿어워즈, 크리틱스초이스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으면서 연기력을 인정받은 바 있다. 이정재는 미국 방송계의 아카데미상이라 불리는 에미상까지 받음으로써 명실상부 최고의 배우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이날 시상식에서 <오징어 게임>의 황동혁 감독은 드라마 시리즈 감독상을 수상했다. 한국은 물론 비영어권 드라마 최초다. 남우조연상 후보에 오른 오영수와 박해수,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른 정호연은 아쉽게도 트로피를 안지는 못했다. 남우조연상은 <석세션>의 매슈 맥퍼디언, 여우조연상은 <오자크>의 줄리아 가너에게 돌아갔다. <오징어 게임>은 이날 시상식보다 한 주 앞선 지난 4일(현지시각) 열린 크리에이티브 아츠 프라임타임 에미상 시상식에서 여우게스트상(이유미)을 비롯해 시각효과상·스턴트퍼포먼스상·프로덕션디자인상까지 4개의 트로피를 안은 바 있다. 여기에 남우주연상과 감독상을 추가하면서 <오징어 게임>이 차지한 트로피는 모두 6개가 됐다. 한겨레 서정민 기자

[장뤽 고다르 추모 연속 기획①] 장뤽 고다르 감독 사망 관련 프랑스 현지 반응

2022년 9월13일 누벨바그의 거장 장뤽 고다르가 60년이 넘은 커리어와 120편이 넘는 작품을 뒤로하고 91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프랑스 현지에서는 각 분야의 유명인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을 SNS에 연이어 올리고 있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소식을 접하고 가장 먼저 자신의 트위터 계정에 심경을 올린 이 중 한명이다. “(고다르는) 프랑스영화계에 혜성처럼 나타나 거장이 되었다. (…) 우리는 천재의 시선, 국보를 잃었다”라고 썼고, 현 프랑스 문화부 장관 리마 압둘 마락은 트위터에 “‘인생에서 가장 큰 포부가 뭐죠?’ ‘불멸의 존재가 되어서, 그런 다음 죽는 거죠’”라는 <네 멋대로 해라>(1960)의 대사를 인용하면서, “고다르는 대담하고, 자유롭고, 불경스러운 세상을 추구하며 영화의 모든 규칙을 불태워버렸다”라고 썼다. 전 문화부 장관이자 현 아랍 세계 연구소 소장인 자크 랑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고다르, 어두운 상영관의 영원한 지배자”라고 쓰며 고인을 향한 각별한 존경심을 드러냈다. 함께했던 영화인들이 보내는 작별 인사 그의 작품 중 평단과 관객에게 가장 큰 사랑을 받은 <경멸>(1963)의 주인공 브리지트 바르도는 자신의 트위터에 고다르와 함께 카프리 촬영 당시 찍은 사진을 공유하면서, “그는 <네 멋대로 해라>로 위대한 스타 감독의 대열에 합류했다”라고 덧붙이며 경의를 표했다. 고다르가 발표한 70여 번째 작품 <누벨바그>(1990)의 주연배우 알랭 들롱은 에 “영화 역사의 한 페이지가 넘어간다. 아름다운 기억을 남겨준 장뤽에게 감사를 표한다. 내 필모그래피에 ‘누벨바그’가 있다는 게 자랑스럽다”라고 심경을 남겼다. 배우 상드린 키베를랭은 자신의 트위터에 브리지트 바르도가 올린 사진을 퍼다 게시하며, “시네마는 그림과 같다.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여준다”라는 고인의 말을 인용했고, 이자벨 위페르는 일간 신문 <리베라시옹>과의 인터뷰에서 “결국 그의 천재성, 섬세함, 시적 감수성이 모든 일을 쉽게 만들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누구도 고다르처럼 얼굴을 찍지 않는다”라며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인생)>(1980), <열정>(1982) 촬영 당시 그와의 작업을 상기했다. 질 자콥 전 칸영화제 집행위원장은 에 “고다르, 그는 영화의 피카소다. (…) 이제 세계 영화는 고아가 되었다”라며 다소 극단적인 심경을 밝혔다. 이에 고인과 끈끈한 애증(?)의 관계를 맺어온 칸영화제는 “그가 없었더라면 영화제는 현재와 같은 얼굴이 아니었을 거다. 고다르는 1962년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에 출연한 이후, 그의 작품 21편이 칸에서 상영되었다. 그는 (칸영화제 취소를 유발시킨) 1968년 5월 항쟁의 주모자였고, 2014년 <언어와의 작별>로 심사위원상을 받은 수상자이며, 2018년 칸이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선사한 특별 황금종려상의 수혜자였다”고 전했다. 또 <알파빌>(1965)에 금곰상을, <네 멋대로 해라>에 은곰상을 수여했던 베를린국제영화제는 “그는 영화 역사상 영향력 있고 혁신적인 누벨바그 감독 중 한명이다. 그는 60년대 영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고, 그 뒤로도 끊임없이 쇄신을 이어갔다”며 공식 인터뷰를 진행했고, 베니스국제영화제는 공식 트위터에 고다르를 “영화 역사상 중요한 감독 중 한명, 그리고 영화제의 중요한 주인공 중 한명”으로 명하며 작별 인사를 고했다. 반면 유대계 프랑스 배우 제라르 다르몽은 공영방송 채널 <프랑스5>의 토크쇼 <세 아 부>에 출연해 “나는 고인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얘기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 개인적으로 그의 작품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고, 특히 그는 내가 속한 커뮤니티에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았다. 전체적인 의미로서의 유대인, 특히 이스라엘에 사는 유대인들에 대해서”라며 공개적으로 입장을 밝혔다. 미디어와 극장가의 추모 물결 각종 신문, 텔레비전 채널과 라디오 방송, 극장에서도 예정된 기사와 프로그램을 전면 취소하면서 추모의 물결을 이어갔다. 일간 신문 <피가로> <르몽드> <르파리지앵> <리베라시옹>은 각각 ‘누벨바그 거장의 죽음’, ‘고다르, 혁명의 인생’, ‘고다르, 프랑스영화의 파괴자’, ‘고다르, 영화의 역사’라는 묵직한 제목의 기사를 앞다투어 실었고, 프랑스 민영 방송사 카날플뤼스는 <경멸>, <미치광이 피에로>, <알파빌>, <여자는 여자다>(1961) 같은 고다르의 첫 번째 전성기 때 작품뿐 아니라, 프랑스 국민 가수이자 배우인 조니 알리데가 출연한 <탐정>(1985), 제라르 드파르디외가 출연한 <오 슬프도다>(1993), 1988년에 시작해 1998년까지 장장 10년에 걸쳐 지속된 프로젝트 <영화의 역사>, 그리고 고인의 삶을 회고하는 여러 편의 다큐멘터리, <칸 1968, 칸의 혁명>(2018), <(평론가) 알랭 베르갈라가 본 장뤽 고다르>(2019), <고다르의 에이비시디>(2022) 등을 방영했다. 예술문화 채널 <아르테>는 <네 멋대로 해라>, <경멸>, <카르멘이라는 이름>(1983), <이미지 북>(2018)을, <프랑스5>는 <네 멋대로 해라>와 누벨바그의 두 주인공 고다르와 트뤼포의 애증 관계를 다룬 클레르 두구에 감독의 다큐멘터리 <고다르-트뤼포: 이별 시나리오>를 방영했다. 또 극장에서는 고인이 마지막으로 출연한 다큐멘터리 <씨 유 프라이데이, 로빈슨>(2022)을 다음날 바로 개봉했다. 이란 감독 미트라 파라하니 감독의 작품으로, 고다르와 올해 98살 이란 출신 작가이자 감독인 에브라힘 골레스탄이 서로에게 보낸 편지를 담아낸 다큐멘터리다. 노년의 두 감독은 29주 동안 금요일마다 영화, 예술, 삶에 대한 자신들의 의견을 영상 편지로 자유롭게 나눈다. 이 작품은 10월 <아르테>에서도 방영될 예정이다. 2010년 에릭 로메르 감독, 2019년 아녜스 바르다 감독, 2021년 배우 장폴 벨몽도에 이어 누벨바그의 주역이 또 한명 사라졌다. 레오스 카락스 감독은 9월13일 <리베라시옹>과의 인터뷰에서 “이번주 화요일에 죽은 사람은 고다르가 아니라 우리다”라며, 그의 죽음은 “(우리가) 다시 태어나 다시 눈을 뜨고, 다시 새로운 영화를 열어가야 한다는 메시지로 해석해야 한다”고 했다. 덧붙여 “고다르, 편히 잠들지 않아줘서 고마워”라는 의미심장한 말도 남겼다.

[장뤽 고다르 추모 연속 기획②] 1970년대, 고다르와 혁명의 영화들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두세 가지 것들>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콜라를 마시던 여자가 커피를 주문하는 남성을 바라보는 장면이다. 남자의 앞에 커피 잔이 놓이자, 카메라는 크레마가 떠 있는 잔의 윗부분을 하이 앵글로 비춘다. 영화의 시선이 완전히 컵의 윗부분으로 옮아간 뒤, 내레이션 목소리가 읊조린다. “한없는 심연이 객관적 사실로부터 주관적 인식을 분리시킨다.” 이후 남자가 스푼으로 잔을 휘저으면, 작은 물결이 일어난다. 목소리는 이어진다. “의사소통이 실패할 때마다 혼자라는 사실을 깨닫는다”고 여자는 낙담한다. 그렇게 설탕은 녹고, 커피는 소비된다. 이 세계를 둘러싼 소비의 괴물들, 이 영화의 이미지는 어쩌면 물질적인 세계 그 자체를 겨냥한 듯 보인다. 격변과 재분배의 에너지가 프티부르주아 사이를 관통하고 있었다 영화가 개봉되던 1967년 <카이에 뒤 시네마>는 장뤽 고다르와 평론가 장 나르보니의 대담을 실었다. 기사는 고다르가 도시에서의 삶을 매춘과 다를 바 없다고 평했다는 내용을 전했다. 영화 기획 당시에 고다르는 숫자로 표시되는 앙케트 조사 방식의 기사를 즐겨 읽었다고 한다. 1966년 어느 주간지에 실린 ‘파리 외곽 주택 단지의 삶’을 다룬 기사를 통해 그는 처음 영화의 내용을 떠올렸다. “어떤 수준에서든, 어떤 계층에서든, 어떤 방식으로든 여성은 자신을 매춘하거나 매춘의 법을 연상시키는 법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고다르는 생각했다. 그가 보기에 신도시의 공장 노동자들은 일상의 4분의 3을 자본주의에 저당 잡혀 생활했다. 하기 싫은 일을 하며 보수를 받는다는 측면에서, 은행원이나 우체국 직원, 영화감독도 다를 바가 없었다. “현대사회에서의 매춘은 정상적인 상태이다”라고 고다르는 결론지었다. 다소 황폐한 비유처럼 들리지만, 1960년대 후반의 프랑스는 68운동이 터지기 직전의, 민감한 기류가 지배하고 있었다. 겉으로 단단해 보이는 다양한 사실들이, 곧 무너질 수도 있다고 당대의 예술가들은 직감했다. 격변과 재분배의 에너지가 프티부르주아 사이를 관통하고 있었다. 고다르는 이를 매우 구조적인 측면에서 바라봤던 것 같다. 객관적인 숏들을 나열하며 그는 당대 사회의 분위기를 고발했다. 책과 잡지, 포스터, 휘발유 펌프, 맥주 레버, 심지어 슈퍼마켓에서 구매한 생활용품들이 차례로 등장해 신도시의 형상을 그린다. 그 사이에 세차 장면이 끼어든다. 자세히 보면 앞선 커피 잔 장면과 동일한 방식으로 이 장면은 몽타주되어 있다. 세차장 전체의 광경이 잡히고, 하이 앵글로 자동차가 드러난 뒤, 숟가락을 대신해 세차 기계가 차를 어루만진다. 이후 자동차 보닛이 클로즈업된다. 하지만 명백하게 객관적인 숏들 사이로, 파편화된 짧은 숏 하나가 침입하며 모든 세계관은 흔들린다. 마치 커피 잔에 담긴 거품처럼, 철판 뚜껑의 그림자가 움직인다. 열정적 혁명의 순간처럼, 이미지의 반란이 시작된다. 이 영화의 구조적인 창작 방식은 이후 고다르 정치영화 전반에 반영된다. 비견컨대 누벨바그 시기의 ‘시의 영화’ 같은 분위기는 이후 그의 영화에서 찾을 수 없다. 그는 더 근원적인 영역으로 이동해 ‘정치’라는 키워드를 내세우기 시작한다. <중국 여인>이 대표적이다. 고다르는 더이상 일상을 조망하지 않는다. 마오쩌둥주의, 마르크스-레닌주의, 자본주의를 탐구하면서 그는 (객관적인 사물이 아니라) 객관적 원칙의 적용을 논의한다. 그리고 이데올로기를 드러내기 위해 몇 가지의 물리적인 장치를 사용한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색채 사용이다. 붉고 푸르고 노란 세 가지 색깔이 상수가 되어서, 영화의 중심에 놓인다. 그리고 그 위로 밀도 높은 대사들이 추가된다. 공산주의와 미국의 정치 상황, 사회주의에 대한 단어들이 전투적으로 등장한다. 만일 누군가 이 영화가 급진적이라고 말한다면, 그건 순전히 정치적 대사 탓일 것이다. 색채와 이론의 나열, 이 두 가지 방식을 통해 고다르는 자신이 추앙하던 유토피아를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이와 대비되는 주관적인 이미지들을 등장시킨다. <중국 여인>에서 주관성의 영역은 팝아트적인 콜라주 화면이 맡고 있다. 어쩌면 장난기 넘치는 내면의 발로일 수 있지만, 계속해서 고다르는 자신이 생각한 느낌을 표현한다. 이처럼 객관성과 주관성의 두 가지 원리가 부딪히면서, 영화의 세 번째 교차 지점이 나타난다. <중국 여인>에서 정반합의 장소는 기차 내부가 된다. 양립하던 모든 요소들이 이곳에서 모순을 일으킨다. 안 비아젬스키가 연기하는 여대생 캐릭터는 철학자 프랑시스 장송을 만나서 꽤 긴 토론을 펼친다. 이 아름다운 장면에서, 주인공들이 탐색하던 이데올로기의 결말은 마침내 제삼자의 입을 통해 정리된다. 아무리 이상적인 의견이라도, 테러리즘과 같은 극단적인 주장은 해결책이 될 수 없음을 그녀는 수긍한다. 그리고 마침내 네 번째 단계에 도달한다. 이 부분은 순전히 관객의 몫이다. 고다르의 정치영화는 결론을 포함하지 않는다. 객관적이고 주관적으로 고려된 전반적 인식의 틈 사이에서, 관객은 모순된 상황을 스스로 논의해야 한다. 일련의 실험 이후, 고다르가 자신의 명시적인 변화를 표시한 것은 1969년에 이르러서다. 장피에르 고랭과 함께 고다르는 ‘지가 베르토프 그룹’을 결성한다. 그룹의 명칭은 1920년대 소비에트 아방가르드 영화의 창작법에서 빌린 것으로,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에 비견되는 베르토프의 자기 반영적인 사고방식이 그들의 출발점이었다. 그렇지만 소비에트 영화감독들과 달리 고다르와 고랭은 ‘집단창작’을 추구했다. 이 때문에 그룹의 색채가 브레히트적인 것으로 변한다. 연출자의 이름은 익명이 되었고, 그룹의 명칭이 전면에 등장했다. 당시 고다르는 스스로를 작가(auteur)가 아니라 활동가(militant)라 칭했다. 전문적인 혁명가가 되어서, 더 많은 활동가들이 나타날 수 있도록 독려하는 것이 집단의 목표였다. 이 과정에서 지가 베르토프 그룹은 “정치영화를 정치적으로 만들자”라는 슬로건을 내세운다. 그들은 기존 정치영화들을 타도하고자 했다. 특히 정치적 소재를 택해 습관적으로 영화를 만드는 전문 연출가들을 비난했다. 심지어 몇몇 감독들에게는 ‘노동자들의 투쟁을 견학한다’며 혹평하기도 했다. 비견컨대 자신들의 영화는 이미 지나간 투쟁이나 승리한 파업의 광경을 제공하지 않는다면서, 기존의 영화 제작 방식과 선을 그었다. 그리고 최소한의 장비와 비용으로 ‘어떻게’ 영화를 만들고 표시할 수 있는지를 알리려고 했다. 한마디로 그들은 분배보다 생산에 더 집중했다. 그런 면에서 지가 베르토프 그룹의 활동은 발터 베냐민의 ‘생산자로서의 저자’ 개념과 맞닿아 있었다. 전투적인 방식으로 가장 정치적인 주제를 다루는, 그의 생각과 작업 방식을 그들은 지지했다. 여러 차례 자신들의 행적을 이론화할 것이라 말했지만, 지가 베르토프 그룹은 활동이 마무리될 때까지 자신들의 책자를 발간하지 못했다. 그룹 해체 이후에 고랭은 “우리는 일정 수의 이론적인 텍스트를 작성해야만 했다”라며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집단의 슬로건은 명문화되었다. 영화를 통해서였다. 이들은 ‘칠판’에 문장을 적었고, 가사가 붙은 ‘노래’를 합창했다. 가끔 슬로건이 수정될 때도 있었다. 당연한 과정이었다. 지가 베르토프 그룹은 (레닌의 에세이와 동일한 제목인)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집중해서, 영화를 만들면서 스스로 답했고, 때로 실수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며 자아비판하기도 했다. 그는 고전적인 방식으로 되돌아갔다 대다수 관객이 지가 베르토프 그룹의 영화들을 접하지 못한 것은 당연한 결과처럼 보인다. 당시 고다르는 보여주기 위한 영화를 만들지 않았다. 물론 우연한 걸작도 탄생하지 않았다. ‘사악한 의사소통의 천재’라는 별명을 안고서, 그는 전투적이고도 의도적으로 대중으로부터 멀어졌다. 은밀하게, 악의적이면서 아이러니하게, 진심을 다했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새겨듣지 않았다. 그럼에도 성과는 있었다. 당대 정립한 창작의 원칙이 향후 그의 영화 세계를 지배하게 된다. <영화의 역사(들)>로 이어지는 거대한 흐름이 조금씩 감지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지가 베르토프 그룹의 해체 즈음에, 고다르는 <만사형통>의 작업을 시작한다. 아직 집단창작 활동이 마무리되지 않은 시점이었지만, 그는 고전적인 방식으로 되돌아갔다. 심지어 영화에는 이브 몽탕과 제인 폰다라는 당대 최고의 스타들이 기용되었다. <만사형통>의 시작부에서 고다르는 ‘그의 가장 상업적인 작품’라고 불리는 <경멸>의 상황을 인용한다. 주인공은 프랑스 영화감독과 미국인 저널리스트 부부로, 이들은 노조가 장악한 파업 현장에 잠입한다. 처음에 남자주인공은 상업적인 프로덕션 작업에 수긍하지 못하는 ‘좌파 영화감독’으로 설정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변화한다. 제삼자의 입장에서 파업을 목격하며, 생존을 위해 기꺼이 스타킹 광고를 만들 수 있는 사람으로 바뀐다. 아내의 변화도 흥미롭다. 그녀는 자신의 생각을 전부 말로 바꾸어 표현하는 인물이었지만, 본 것을 전부 말할 수 없다는 점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자신들의 불화를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불화와 연결해서 이해한다. 이 변화의 과정을 고다르는 트래블링숏을 이용해서 보여준다. 영화를 본 관객 다수가 기억하는 두 가지 카메라의 움직임이 있다. 하나는 벌통처럼 분리된 공장 내부를 탐색하는 가로와 세로의 트래킹숏이고, 다른 하나는 끊임없이 이어진 슈퍼마켓의 계산대 사이를 오가는 수평의 트래킹숏이다. 둘은 상반되면서도 비슷하다. 전혀 다른 사람들을 비추지만, 동일한 ‘과정의 형상’을 포착한다. 영화 제작을 포함해 모든 사회적 생산 과정이 구조적으로는 동일한 형태임을, 고다르의 카메라는 말하고 있다. 당연하게도 그의 미장센은 정치적 비전을 포함한다. 어떠한 도발적인 문장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설득의 언어가 이 과정에서 전해진다. 여전히 고다르에게 트래블링은 모럴의 문제임을 작품은 다시금 일깨운다. 1973년 고다르는 안느 마리 미비유와 함께 파리에서 그르노블로 터전을 옮겨 ‘소니마주’를 설립했다. 당시 미국과 유럽의 예술가들 사이에서 이러한 협동조합 형태의 비디오 프로덕션 설립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텔레비전의 전체주의적인 점령에 맞서서, 예술가들은 발빠르게 변화를 시도했다. 사회적인 혁명이기도 했지만, 예술가로서의 사명이기도 했다. 고다르는 이후 비디오 작업을 통해 설치미술에 발을 들였고, 당시에 인상적인 말을 남겼다. “텔레비전은 망각을 제조하는 반면 영화는 기억을 제조한다.” 그의 비디오 작업은 영화관에서 상영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영화를 위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충분히 전투적인 자세로, 고다르는 시스템을 벗어나는 비디오에 대한 폭로를 진행했다. 그는 경제적인 목표로 움직이는 산업 전체를 겨냥했다. 이미지가 생성하는 시간의 의미, 영화가 새겨놓은 기억의 아카이빙을 고다르는 비디오 작업으로 정리하고자 했다. 생각해보면 필름에서 시작된 고다르의 여정은 숏과 내러티브 연구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정치영화로의 투쟁, 비디오 작업의 과정을 거치면서 그는 ‘장치’에 자신을 투영하게 된다. 몽타주와 재생 속도, 이미지의 대립과 화해가 향후 그의 주된 관심사로 떠오른다. 고다르의 관심사는 이미 시네마를 벗어났다. 숏으로서의 의미 단위가 더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1970년대 후반에 이미 그의 작업은 숏보다 ‘이미지’라는 단위를 언급하는 것이 훨씬 더 나은 수준이 된다. 시의 순수함, 어쩌면 이 표현은 고다르가 그토록 열렬하게 추종한 이미지의 본질인지도 모른다. 그의 작품은 더이상 낭만적이지 않았지만, 이미지의 순수함을 포괄하고 있었다. 고다르는 비디오를 통해 이미지를 촬영했고, 연결했고, 인식했고, 어느 순간에 멈추었으며, 댓글을 추가했고, 다른 것을 생각하며, 또 다른 것을 생각해냈다. 1983년 12월, 주간지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와의 인터뷰에서 고다르는 “영화가 당신과 함께 죽을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삼단논법으로 답한다. 첫째, 그것이 내가 가진 유일한 희망이다. 둘째, 그것은 나에게 삶의 목적을 제공한다. 셋째, 나는 어렸을 때 영화가 영원하다고 믿었지만 그것은 내가 영원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말의 의미를 계속해서 생각해야 할 것이다. 고다르는 죽는 날까지 비디오 스크롤을 멈추지 않았고, 시시포스가 그러하듯 빛의 본질을 향해 다가갔다. 시네마는 영원한 진리라고, 우리 내면에 살아 있는 고다르를 바라보며 되뇌게 된다.

[장뤽 고다르 추모 연속 기획②] 고다르와 죽음, 그리고 1990년대

장뤽 고다르의 죽음은 녹화되었을까? 생각하는 것만으로 부도덕한 기분에 사로잡히는 공상이지만, 그가 조력 자살을 선택했다는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그 마지막 무대의 시각적 형식이었다. 스스로 최후를 선택하는 한 사람을 둘러싸고 의료진과 가족들이 지켜보는 현장에 과연 카메라는 입회하고 있었을까? 종종 그 자신을 픽션의 등장인물로 삼아왔고, 거주하는 집 내부와 아틀리에, 근처의 호수를 영화적 무대로 끌어들이는 데 거리낌이 없던 영상 작가라면, 모든 기록을 말살한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벌어진 학살조차 분명 촬영되었을 것이며 “그것을 촬영한 아카이브 영상이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확신하는 영화감독이라면, 그리고 조력 자살이라는 방법을 통해 개인의 죽음에 덧대진 합법과 위법의 범위를 캐묻는 인간이라면(이는 <필름 소셜리즘>에서 제시한 대로 ‘법이 올바르지 못할 때, 정의가 법에 우선한다’는 저항의 언어에 기초한다) 삶의 마지막에 하나의 이미지를 남기는 ‘연출’을 시도했을지 모른다는 불순한 생각을 품게 된다. 만약 그 현장이 촬영되었다면 언젠가 어떤 방식으로든 공개될지도 모르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런 사변적 공상이 환기하는 것은 우리가 아직 그의 죽음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직 “그는 아프지 않았다. 단지 소진되었을 뿐이다. 그는 삶을 끝내기로 했고 이 사실이 알려지는 것이 중요했다”라는 공식적인 문자를 통해 고다르의 죽음이라는 사건에 접속할 뿐이다. 이미지의 부재와 문자의 잔존. 다른 이라면 특별히 여기지 않았을 이 부고의 조건이 고다르에게는 남다른 문제로 남겨진다. 고다르 자신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결정과 선택이 우리에겐 지극히 논쟁적인 ‘고다르 현상’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저명한 주장은 이 순간에 다시 도발적으로 솟아오른다. 동시에 정반대의 공상을 떠올려볼 수 있다. 죽음을 앞둔 시점의 인간을 카메라로 기록하는 것은 고다르에겐 결코 어울리지 않는 범용한 유서의 형식일 뿐이라 반박하는 것이다. 죽기 직전에 작성된 유언은 고다르에게 적합하지 않다. 세르주 다네가 말한 대로 고다르는 “얼마 전의 과거와 가까운 미래 사이에 붙들려 있는” 시간의 패러독스에 노출된 자이고 더 이상 할 수 없는 것과 아직 할 수 없는 것 사이”에 위치한 영화감독이기 때문이다. 이를 증명하듯, 그는 영화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용도로 기획된 (이하 <고다르의 자화상>)의 도입부에서 특유의 낮은 목소리로 “대개 죽음이 찾아오고 애도에 잠기지만, 나는 먼저 애도에 잠기는 것으로부터 삶을 시작”했다고 읊조리고 있었다(‘12월의 자화상’이라는 부제로도 알려진 이 영화에서 고다르는 100년 전 뤼미에르의 영화가 상영된 12월과 자신이 태어난 12월을 겹쳐둔다). 이 말에 따르면 고다르는 찾아오지 않은 미래의 죽음을 과거에 두고, 과거에 작성된 애도를 아직 보이지 않는 미래에 던지는 눈먼 송신인이다. <언어와의 작별>에서 릴케를 인용해 말한 것처럼, 고다르에게 있어 인간은 무엇보다 시간 앞에 두눈이 멀어버린 존재다. 눈먼 자화상 누군가에겐 갑작스럽게, 누군가에겐 비로소 도착한 고다르의 죽음이라는 사건 앞에서 섣불리 애도의 문장을 들먹일 순 없다.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언젠가 고다르는 시인만이 작가의 부고를 제대로 추도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보르헤스의 지도처럼 그의 방법과 경력을 요약하다 보면 영화의 역사 전체에 개입하게 될 것이다. 지금으로선 고다르에게 던져진, 그리고 그가 마지막으로 제기한 죽음이라는 사건과 남겨진 이미지의 조건을 간신히 가늠해볼 뿐이다. <고다르의 자화상>에서 이야기하듯 고다르는 죽음을 마주하지 전에 일찌감치 애도에 잠겼고, 우리는 현실에 도래한 죽음을 목격하지 못한 채 그의 최후를 받아들였다. 이런 비대칭의 상태는 <포에버 모차르트>에서 하녀 자밀라가 꺼내는 알쏭달쏭한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한번은 차에 치여 넘어진 적이 있어요. 저는 도로에 떨어졌고 생사의 갈림길에 있었죠. 하지만 죽는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어요. 죽음은 없어요. 거기엔 단지 제가 있을 뿐이죠. 곧 죽게 될 제가요.” 그 자리에 죽음 일반은 없지만, 곧 죽음에 이르게 될 한 사람이 있다. 이를 다시 고다르에 대입한다면, 찾아오지 않는 죽음을 기다리며 애도에 붙들린 삶을 유지하는 작가가 존재하는 것이다. 20세기 영화의 역사를 되짚으면서 현실의 잔혹한 역사를 겹쳐두는 장대한 결산인 <영화의 역사(들)>의 작업을 착수한 1988년 이래로 고다르의 영화에는 죽음과 소멸, 영화의 불가능성이라는 근본적인 위기가 함께하고 있다. 필름의 유실과 마모, 두 차례의 세계대전, 텔레비전의 등장은 영화 이미지의 위상과 물질성을 일그러뜨렸다. 고다르는 20세기의 끝자락을 통과하면서 이 시기를 영화예술이 역사와 산업의 이중적 위기에 처한 시대로 간주한다. 역사의 의무를 다하고 군중을 통합하는 매체로서의 영화는 이제 성립하지 않는다. 영화는 타락한 매체가 되었다. 1980년 알프레도 히치콕이 사망했을 때 고다르는 “그의 죽음은 영화의 한 시대에서 다른 시대로의 이행을 표시한다”라고 말했다. 80년대부터 90년대에 이르는 동안 고다르는 촬영이 지연되거나 제작과정이 진척되지 않는 이유로 영화를 만들지 못하는 창작자들을 픽션에 옮기면서 그들의 반대편에 파괴된 역사의 기록을 새겨둔다. 그에겐 영화와 세계의 패러독스를 조정할 필요가 있었다. 영화를 “19세기의 열망이 실현된 20세기의 사물”이라 정의하는 고다르는 박물관과 서재에서 지켜본 19세기의 유산을 훔치는 말과 이미지의 도굴꾼이면서 20세기에 벌어진 전쟁과 학살의 현장(아우슈비츠와 베를린 장벽, 알제리 독립전쟁, 베트남 전쟁, 보스니아 내전, 팔레스타인)을 찾는 역사의 탐사자다. 그의 이중적인 역량은 두 세기에 걸쳐 있는 영화의 ‘뒤늦은’ 운명을 자각하게 한다. 고다르는 과거에 만들어진 영화들을 너무 늦게 보았고, 중대한 역사적 사건들이 이미 벌어진 뒤에 그 현장을 찾았다. 그러므로 영화(예술)와 현실을 감싸는 이중의 책무가 그의 영화에는 드리워져 있다. 그는 어둠 속의 극장을 밝히는 영화의 가시적인 빛을 응시하면서, 현실의 조건에서 이미 사라지고 없는 장소를 되돌아본다. 파괴된 베를린 장벽(<신 독일영년>), 사라예보의 잔해(<포에버 모차르트>), 팔레스타인의 평화로운 풍경(<아워 뮤직>)에는 영화가 참혹한 현실을 제시간에 기록하지 못했으며 그 무거운 현실의 조각들을 다시 합당한 픽션으로 조직하지 않았다는 자각이 새겨져 있다. <고다르의 자화상>의 한 장면은 노트에 적힌 메모를 보여준다. 고다르의 목소리가 그 메모를 읽는다. “과거는 죽지 않았다. 아직 지나가지도 않았다.” <영화의 역사(들)>을 포함한 90년대 고다르의 영화에서 여러 차례 반복해서 나오는 문장이다. 그런데 곧바로 이어지는 장면에서 영화는 테니스를 치고 있는 고다르를 비춘다. 상대방의 리시브가 너무 빠르게 돌아오자 다급하게 팔을 뻗지만 받아치지 못한다. 어설픈 슬랩스틱을 보여준 고다르는 떨어진 공을 보며 중얼거린다. “지나갔군.” 이처럼 영화의 시간은 노트에 적힌 문자처럼 사라지지 않은 과거에 붙잡혀 있지만, 되돌아온 테니스공처럼 너무나 빠르게 지나가버린다. 영화는 남겨진 역사의 흔적에 짓눌리면서, 모든 것이 순식간에 뒤바뀌는 현재를 통과하고 있다. 그 중간에 공을 놓쳐 허둥거리는 고다르의 신체가 있다. 그의 슬랩스틱은 영화의 운명이다. 카메라와 피사체는 언제나 타이밍을 놓치고 어긋날 것이다. 보이지 않는 영화 하지만 영화는 이와 같은 패러독스를 통합하는 한 가지 역량을 간직하고 있다. 그것은 투사와 상영의 기능이다. 영화는 피사체를 바라보지 못하고 정확한 타이밍에 만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것들을 투사하고 상영할 수 있다. <고다르의 자화상>에는 맹인 여성 편집자가 등장하는 에피소드가 나온다. 영화의 초반부에 드니 디드로의 <맹인에 관한 서한>에 두손을 얹으며 손과 눈의 관계를 낭독하던 것과 비슷하게 고다르는 디드로의 문답을 다시 인용한다. “당신은 그것을 어디에서 보고 있죠?” “내 머릿속에서요. 당신과 같이.” 고다르는 편집자에게 편집 중인 영화를 보여준다. 하지만 이런 표현은 우리의 오랜 습관일 뿐이다. 그는 편집자에게 영화를 들려준다. 그녀는 필름을 손으로 만지면서 영화를 듣는다. 여기서 영화는 시각적 체험이 아닌 귀에 들리는 소리와 손에 접촉하는 질감으로 펼쳐진다. 편집자는 고다르가 들려준 영화를 두고 “만들지 못한 영화”라고 말한다. 고다르는 그 말에 “아무도 본 적 없는 영화”라고 답한다. 만들어지지 않은, 누구도 목격한 적 없는 무명의 영화가 맹인 편집자의 손과 귀를 타고 스크린에 전해진다. 우리는 한번도 나타난 적 없는 이미지와 사운드를 담은 필름이 편집기에 감겨 돌아가는 소리를 듣게 될 뿐이다. 이 장면에서 한 가지 역설이 벌어진다. 상영은 영상의 규범적 체계에서 누락된 표상을 불러들이는 행위지만, 그 절차는 시각을 차단당한 눈먼 편집자를 통해 이루어진다. 누구에게도 보인 적 없는 영화가 비로소 상영되지만 그것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 영화다. 고다르는 자본과 합법적 절차가 승인하는 과정에서 말소돼버린 영화의 가능성을 재생한다. 일차적으로 이는 필름 속에 묻힌 영화를 되비추고 불가능한 조건 속에서 되살아나게 하는 실천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 장면에서 고다르는 추방된 영상을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대신 오히려 눈먼 자의 시각을 빌려 보이지 않는 영화의 권리를 주장한다. 맹인 편집자의 목소리를 타고 카메라는 실내 공간에서 벗어나 바깥의 풍경으로 향한다. <고다르의 자화상>의 마지막 장면은 눈이 뒤덮인 겨울의 고독한 풍경이 사라지고 녹색의 풀밭 위로 바람이 불고 그림자가 지나가는 봄의 풍경을 도착했음을 보여준다. 시각장애인 여성 클레르 바르톨리는 고다르의 <누벨바그>에 관한 글에서 “눈이 외부를 지향한다는 사실을 내가 깨달은 것은 시력을 잃으면서부터이다. 귀는 오히려 우리를 내면의 세계로 데려간다”라고 적는다. 그러므로 눈이 보이지 않는 편집자의 목소리가 안내한 자연의 공간에는 가시적인 풍경과 비가시적인 내면이 뒤얽혀 있다. 영화 제작의 중대한 목표를 “움직이는 숏에서 시작해 정지된 숏으로 이행하는 것”이라 말한 바 있는 고다르의 한 가지 결론이 이 숏에 있다. 그가 포착한 범용한 풍경 숏은 내부 공간의 어둠에서 자연의 빛으로, 감금된 실내에서 광활한 바깥으로, 비디오모니터로 상영되던 영화에서 아직 실현되지 않은 영화의 가능성으로 향하는 자화상의 궤적을 포함하고 있다. 하나의 표면은 둘의 기억을 매개한다. 고다르는 정지된 풍경 위에 복잡하게 매개된 몽타주의 작용을 상상한다. 자화상은 무수한 파편들로 부서지지만 고다르가 브레히트를 인용해 말하는 것처럼 “현실에서는 오직 파편들만이 진정성의 흔적을 전달”할 것이다. 자크 랑시에르는 80년대 이후의 고다르 영화들에서 이미지의 충돌은 융합을 향하고 있으며 영화로부터 현실을 돌려주려는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다고 말한다. <고다르의 자화상>의 마지막 장면은 영화의 흔적이 제거된 무심한 자연의 공간으로 이행한다. 90년대의 고다르에게 자연은 현실에서 훼손된 영화가 향하는 유토피아적 투사의 장소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마지막 장면의 자연에 진입하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곳은 하나의 문화, 국가, 개인에게 한정된 이미지가 아니라 서로 다른 역사와 집단과 영화가 뒤섞이며 충돌하는 복수화된 세계의 단면이기 때문이다. 고다르는 역사적 상흔을 간직한 현실의 풍경을 포착하는 데서 시작하지만, 스크린에 되돌아오는 것은 인간의 흔적을 초과하는 거대한 상상의 세계다. 그 상상의 단면에서 고다르는 서로 다른 역사의 시간을 평등하게 결합한다. <고다르의 자화상>은 빈 벽에서 시작한다. 벽에 비치는 그림자의 실루엣과 신원을 알 수 없는 소년의 초상사진을 같은 화면에 보여주는 첫 장면으로 영화가 시작된다. 화면이 열리면 카메라가 움직이면서 서서히 빛이 들어오지만, 그림자의 정체와 초상화의 소년이 누구인지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고다르는 이 구도를 두고 화가가 팔레트와 붓을 들고 자기를 그리는 모습과 같다고 말한다). 네거티브 이미지로 인화된 사진 속 소년이 유년기의 고다르이고, 마치 마부제 박사처럼 실루엣으로 모습을 드러낸 그림자 역시 노년의 고다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나중의 일이다. 이 영화의 주된 피사체인 고다르는 비어 있는 벽 위에서 모호하고 분열적인 형상으로 존재한다. 그와 동시에 모호해지는 것은 스크린을 응시하는 관객의 시선이기도 하다. 관객은 고다르의 움직이는 그림자와 유년기의 사진을 바라보고 있음에도 알아보지 못한다. 그들은 고다르의 영화 속 인물들처럼 눈먼 존재로 스크린 앞에 선다. 부채의 기록 <고다르의 자화상>의 마지막 장면에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살아 있을 것이다. 세계에 사랑이 존재할 수 있도록, 사랑함으로써 나를 희생해야 한다.” 21세기 들어 또 다시 사라예보를 방문하는 <아워 뮤직>에서 고다르는 이미지에 관한 강연을 진행하며 ‘보는 것’과 ‘상상하는 것’의 차이를 언급한다. 바라보기 위해서 우리는 눈을 뜨고 시선을 맞춰야 하지만, 상상하기 위해선 눈을 감아야 한다고 말한다. 객석을 비추는 부드러운 트래블링의 끝에 강연을 듣는 청중 가운데 유일하게 눈을 감고 있는 팔레스타인 학생 올가의 모습이 나온다. 강의가 끝나고 그녀는 극장에서 폭탄으로 자살하지만, 영화의 마지막 무대인 ‘천국’에 진입해 눈을 감고 상상을 이어간다. 그녀는 천국으로 설정된 자연의 공간 속에서 다시 눈을 감는다. 보이지 않는 영화는 그렇게 도래할 영화를 기다린다. F.W 무르나우의 <선라이즈>를 느슨하게 빌려온 <누벨바그>에서 고다르는 작은 배를 타고 강으로 향하는 연인들의 모습을 두 차례 반복한다. 한 번은 살인의 위협이, 다른 한 번은 구제의 손짓이 그 작은 무대에서 벌어진다. 고다르가 선택한 강물은 픽션의 장면을 연출하는 배경이면서 무르나우의 기억을 반사하는 표면이다. 고다르는 랑글루아의 시네마테크에서 뒤늦게 보았던 무르나우의 영화에 한 가지 이미지를 되갚는다. 수십 년 전에 보았던 연인들의 기록을 변주해 스크린에 드리우는 것이다. 말하자면, 영화는 시차를 두고 주어지는 두 번째 기회를 건네는 장치다. 고다르에게 있어 영화는 죽음과 부활을 오가며 나타나고 사라지는 형상들의 결합으로 성립한다. <경멸>에서 프리츠 랑을 불러들인 것처럼, <비브르 사 비>에서 칼 드레이어를 대면하던 것처럼, <미치광이 삐에로>에서 새무얼 풀러에게 질문하던 것처럼, 고다르는 영화의 역사에 진 부채를 스크린 위에 갚음으로써 영화사의 마지막 증언자로 남는다. 그림자로서의 노년의 ‘고다르’와 사진적 이미지로서의 유년기의 ‘고다르’가 여전히 <고다르의 자화상>의 첫 장면에 남아 있지만, 현실의 고다르는 그럴 수 없었다. 이미지 없이 문자로 전달된 고다르의 죽음 앞에서, 우리가 다시 한번 눈을 감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장뤽 고다르 추모 연속 기획③]고다르의 21세기 작업, ‘그리고’의 방법론을 연장하기

고다르의 21세기 작업은 20세기 후반부터 이미지와 몽타주의 본성과 관련하여 규정하고 심화한 ‘그리고’(ET)의 방법론을 연장했다. 이미지의 연쇄를 만드는 것은 정확히는 이미지들 ‘사이’에 있어야 하고 그들 사이의 관계를 탐색하고 구성해야 함을 뜻한다. 고다르가 안느 마리 미비유와 함께 제작한 1970년대 작품에 대한 세르주 다네와 질 들뢰즈의 논평이 이를 입증한다. 다네는 <여기와 저기>(1976)에 대해 “고다르는 감독의 진정한 장소가 ‘그리고’(ET)에 있음을 말한다”라고 썼다. 들뢰즈는 대안적 TV프로그램 <6x2, 커뮤니케이션의 위와 아래>(1976)에 대한 인터뷰에서 다네의 견해와 다음과 같이 공명한다. “‘그리고’(ET)는 하나도 다른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항상 사이(entre), 두 사물의 사이다.” 이를 입증하듯 21세기의 고다르는 형식과 기술의 차원에서는 필름과 디지털 사이에서, 그리고 역사와 제도의 차원에서는 시네마와 박물관 사이에서 움직였다. 고다르의 디지털 유세프 이샤그푸르와의 대담집 <영화의 고고학>에서 고다르는 <영화의 역사(들)>(1988~98)에서의 “비디오는 시네마의 아바타 중 하나”라고 말한 바 있다. 비디오 편집은 이질적인 원천의 이미지를 필름 편집보다 손쉽게 모으고 연결하고 중첩할 수 있으며 “그리기 행위”에 비유할 수 있는 색채와 형태 변형의 도구를 제공한다. <사랑의 찬가>(2001)에서 고다르는 현재와 과거를 왕복하며 예술의 운명을 성찰하는 에드가를 자신의 반영으로 제시한다. 35mm 필름으로 촬영된 고화질의 흑백 세계는 포화된 색채의 디지털 비디오로 촬영된 과거의 세계와 다층적으로 접속한다. 데이비드 노먼 로도윅이 지적하듯 이와 같은 두 세계의 접속은 필름에서 디지털 비디오의 시간으로 이행하는 영화의 상황을 반영한다. <필름 소셜리즘>(2010)에서 이와 같은 이행에 대한 성찰은 영화적 세계의 변화에 대한 응시로 변주된다. 유럽과 지중해의 주요 도시를 운항하는 유람선 내부를 촬영하기 위해 감시 카메라, 휴대폰 카메라가 동원되었고 온라인 비디오 이미지 또한 삽입되었다. 이 여러 촬영 장치와 포맷은 제국주의(하이파), 스페인 내전(바르셀로나), 2차 세계대전(나폴리)과 같은 20세기의 위기에 대한 기억 및 당대 유럽의 정치·경제적 위기와 대조적으로 목적 없는 여흥에 도취된 유람선 내부의 파국적인 경관을 열화되고 범속한 형태로 담아낸다. 고다르는 <언어와의 작별>(2014)과 관련한 인터뷰에서 디지털 3D영화 제작에 나선 이유로 3D가 “정해진 규칙이 없는 포맷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영화의 기술사에 어느 정도 지식이 있는 독자에겐 다소 기이하게 들릴 수 있다. 입체경은 19세기에 뤼미에르 형제의 시네마토그래프보다 먼저 발명되었고, 뤼미에르 형제를 포함하여 20세기 전반부에 입체영화를 실험한 다양한 기술자가 있었으며, 텔레비전이라는 당대의 뉴 미디어에 대한 반응으로 1950년대에 할리우드가 새로운 시각적 경험의 견인차로 홍보했던 3D영화의 짧은 유행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입체영화의 계보를 고다르가 모를 리는 없었을 것이다. 다만 고다르에게는 제임스 카메론의 <아바타>(2009) 이후 디지털 3D를 영화산업의 ‘뉴 노멀’로 홍보하기에 바빴던 할리우드 거물의 예언적 설교, 그리고 이들이 상찬했던 몰입적인 스펙터클의 증폭 가능성을 실현하는 3D 포맷이라는 가정이 흥미롭지 않았을 뿐이다. 산업적 권력과 이것이 제공하는 환상의 차원을 넘어선 3차원 영화의 가능성을 위한 게임의 규칙은 고다르에게 여전히 창안의 대상이었다. 고다르는 옴니버스영화 <3X3D>(2013)에 포함된 <세개의 재난>과 <언어와의 작별>에서 3D를 세개의 주사위 던지기에 비유한다. 주사위를 던지는 아이의 태도와 장인의 태도를 견지하며 고다르는 입체영화의 디스포지티프와 그 미적 효과를 실험했다. 캐논 HD 카메라와 고프로(GoPro), 루믹스(Lumix) 등의 저가 카메라를 망라하는 다양한 포맷의 촬영 장비를 장착할 수 있는 나무 고정 장치를 제작 활용했다. <필름 소셜리즘>에서도 협력했던 촬영기사 파브리스 아라그노에 따르면 <언어와의 작별>에 적용된 3D 촬영 시스템은 할리우드의 입체영화 제작에서 통상 적용되는 양안 시차 거리를 적용하지 않았다. 이 실험은 현실을 몰입적인 방식으로 재구성하거나 육안으로 보이는 것과 같은 현실에 맞게 이미지를 복제하는 표준적인 3D영화 제작의 프로토콜을 위반하거나 무시한 데서 비롯되었다. 대신 이는 공간의 왜곡 및 유령 효과(3D 촬영에서 두 카메라의 각도를 크게 벌림으로써 두눈이 종합할 수 없는 방식으로 두 이미지를 제시할 때 발생하는 형상의 중첩 효과)를 통해 관객의 응시를 동요시키는 효과를 지향했다. 다른 한편으로 이는 고다르 자신이 셀룰로이드와 비디오를 넘나들며 전복하고 창안했던 영화언어의 지평, 그리고 그 지평 아래 전개되어온 2차원 영화의 역사를 탐구하고 재구성하는 기획을 연장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이와 같은 양가적 태도는 고다르가 인터뷰에서 ‘아듀’(Adieu)에 대해 환기했던 이중적 의미와 공명한다. ‘아듀’는 일반적으로 ‘작별’(goodbye)로 번역되지만 고다르 자신이 거주하는 스위스 칸톤(자치주)에서는 ‘안녕’(hello)이라는 뜻으로도 통용된다. 즉 <언어와의 작별>은 몇몇 평자들이 생각하듯 20세기 영화와의 작별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디지털 3D 기술은 고다르가 스스로 실천했던 20세기 영화의 연장을 위한 도구가 되었다. 대니얼 모건은 이 작품에서 3D영화를 이루는 두 이미지(왼눈과 오른눈에 호응하는)가 다양한 방식으로 분리되거나 중첩되는 방식을 “눈 사이의 몽타주”라고 말했고, 니코 바움백은 영화 초반 두 남녀가 연속적 카메라 운동 속에서 분리되다가 중첩되는 장면을 지적하며 이를 “예이젠시테인과 바쟁의 결연“으로 명명했다. 이와 같이 2차원 영화의 언어가 디지털 3차원의 세계 속에서 갱신되는 방식은 2차원 영화의 역사적 차원, 그리고 2차원 영화가 재현하는 인간과 세계의 차원으로도 연장된다. <언어와의 작별>에서 TV스크린으로 재생되거나 직접 인용되는 과거 영화의 단편은 3차원으로 매개될 때 할리우드영화에서 관객이 기대하는 돌출 효과 대신 2차원 영화에서 기원하는 심도 효과로 제시된다. 또한 고다르는 이 영화에서 변주되는 남녀(즉 두 이미지라고도 할 수 있는)의 세계 ‘사이’에 사물과 자연, 동물(고다르의 애완견 록시)이라는 제3항을 삽입하고, 이들을 친밀하고 낯선 방식으로 바라보기 위해, 또는 (록시의 시점으로 보이는 장면에서 드러나듯) 이들의 탈인간적 응시를 체현하기 위해 왜곡과 불균형 효과를 적용했다. <이미지 북>(2018)에서 고다르는 <영화의 역사(들)>에서 아날로그 비디오로 실험했던 몽타주의 가능성, 즉 이질적인 역사적, 문화적, 예술적 원천을 가진 이미지와 사운드의 본래 맥락과 역량을 분리시키고 이들을 다수의 역사적 담화와 철학적 단상을 위해 결합하고 교환시키는 몽타주의 가능성을 디지털 비디오로 연장한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고다르의 디지털 비디오 편집은 이미지들의 다양한 군집을 구성하는 것 이상의 효과로 나아간다. 인용된 영화와 온라인 비디오 클립의 열화와 해상도 붕괴, 이미지와 사운드의 갑작스러운 일시 정지 및 감속, 무지 화면을 통한 이미지의 불연속, 이미지와 사운드의 분리 및 자유로운 믹싱은 <필름 소셜리즘>에서 본 것보다 더욱 두드러진다. 이런 점에서 평론가 에이미 토빈이 이 작품에서의 고다르가 1960년대 북미 아방가르드 영화에 가까워졌다고 말한 것은 적절하다. 이는 <이미지 북>의 한 챕터 제목이기도 한 ‘중앙 지역’(La Région centrale)이 마이클 스노우의 전설적인 1971년 영화를 가리킨다는 사실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관습적인 지각을 넘어선 지각의 영역을 개방하는 디지털 편집 및 시각효과의 활용은 ‘배우지 않은 눈’(untutoured eye)의 가능성을 탐구했던 스탠 브라카주를, 발견된 영화 푸티지와 사진을 대상으로 20세기에 고안했던 영화적 기법을 디지털 도구로 업데이트하는 고다르의 접근은 켄 제이콥스의 디지털 비디오 작품을 연상시킨다. 이 점은 고다르가 <이미지 북>에서 다빈치의 <세례 요한>(1513)을 포함하여 영화, 회화, 만화를 포괄하며 반복적으로 제시하는 손의 이미지로도 입증된다. 몽타주가 사유의 작용이고 그리피스나 예이젠시테인이 영화에서 했던 것보다 훨씬 광대하면서도 손의 작업을 요구한다는 점, 이는 고다르가 매체들을 경유하며 실천했던 바다. <이미지 북>의 보도자료에서도 고다르는 이 점을 단언한다. “심지어 디지털 편집도 손으로 하는 것이다. 우리가 영화에서 말하는 것처럼, 인간은 손으로 사유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내 영화는 처음부터 모든 것이 다섯 손가락에 근거함을 보여준다.” 고다르의 뮤지올로지 고다르와 예술의 관계는 누벨바그 시기의 작품부터 분명히 드러났다. <미치광이 피에로>(1965)에 인용된 입체파 회화와 팝아트 일러스트는 고다르의 과감하고 강렬한 색채 활용과 콜라주 미학의 원천을 지시했고, 이보다 전 <국외자들>(1964)에는 주인공 트리오가 경비원의 제지를 뿌리치고 루브르박물관 복도를 질주하는 유명한 장면이 있다. 이 둘의 몽타주를 통해 초기 고다르가 박물관 및 예술작품을 대하는 양가적 태도를 알아볼 수 있다. 앙투안 드 베크가 말하듯 한편으로 고다르는 예술작품을 영화에 삽입함으로써 그 작품을 둘러싼 아우라를 재건하고자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박물관을 위대한 유산의 보존과 교육을 수행하는 보수적인 제도라고 여겼다. 물론 <영화의 역사(들)>가 입증하듯 고다르의 박물관 이념을 이와 같은 양가적 태도로 환원할 수만은 없다. 영화가 스스로 말할 수 있는 영화의 역사, 영화가 구성하거나 외면했던(홀로코스트) 20세기의 역사, 그리고 영화와 미술사 및 지성사와의 교차로 구성되는 역사라는 세 가지 차원 모두에서 박물관은 고다르에게 <영화의 역사(들)>의 모델이 되었다. 이 모델은 페르낭 브로델과 같은 역사학자, 엘리 포르와 같은 미술사가, 시네마테크의 이상적 모습으로 영화박물관을 생각했던 앙리 랑글루아, 그리고 무엇보다도 과거 예술작품의 사진 복제 및 이미지와 텍스트의 병치로 이루어진 ‘상상적 박물관’(musée imaginaire)을 제안했던 앙드레 말로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영화의 고고학>과 <오래된 장소>(2000)의 내레이션에서 알 수 있듯 상이한 시간과 맥락에 놓인 자료들을 ‘성좌’(constellation)로 구성하는 발터 베냐민의 몽타주 개념은 이와 같은 영향을 종합하는 중요한 방법론이 되었고, 비디오는 이를 실행하는 충돌과 혼합의 도구가 되었다. <영화의 고고학>에서 고다르가 단언하듯 “우리는 모두 박물관에서 태어났”고 그곳이 어쨌든 “우리의 고국”이라면, <영화의 역사(들)>는 이와 같은 의미에서의 박물관을 비디오의 전자적 흐름 속에 건축한 결과였다. 2006년 퐁피두센터에서 개최된 <유토피아로의 여행(들): 장뤽 고다르1946-2006, 잃어버린 정리를 찾아서>(Voyage(s) en utopie, JeanꠓLuc Godard, 1946-2006: à la recherche d’un théorème perdu, 이하 <유토피아로의 여행(들)>전)는 <영화의 역사(들)>가 구축한 시청각적 박물관을 미술관의 제도적 공간에 구현하고자 했던 전시였다. 큐레이터 도미니크 파이니와의 협력으로 고다르가 2000년대 초반부터 기획했던 전시의 제목은 (Collage(s) de France, archéologie du cinéma, d'après JLG, 이하 <콜라주(들)>전)이었다. 그 특유의 언어유희로 제목에서 기법으로서의 ‘콜라주’와 ‘콜레주 드 프랑스’를 동시에 환기시키는 이 전시의 기획안은 ‘신화’(영화의 알레고리), ‘카메라’(은유), ‘현실’(꿈), ‘인류’(이미지) 등의 제목이 붙은 9개 방으로 구성된다. 고다르는 이 전시가 <영화의 역사(들)>와 마찬가지로 영화의 단편은 물론 여러 회화와 텍스트, 조각의 인용과 다양한 구조물을 수반하기를 원했고, 이를 위해 18개의 모형을 제작하기도 했다. 그러나 퐁피두센터는 고다르의 기획안이 지나치게 방대하고 많은 예산을 요구한다는 이유로 이를 거절했고, 고다르는 그로 말미암아 타협적으로 실현된 <유토피아로의 여행(들)>전에 만족하지 않았다. 고다르와 갈등을 일으키면서도 퐁피두센터와의 중재에 분투했던 파이니는 전시 몇달 전 해고되었고, 고다르는 기자회견과 언론 전시 공개 행사에 참석하지 않았다. <콜라주(들)>전의 9개의 방과 달리 <유토피아로의 여행(들)>전의 전시 공간은 3개의 방으로 구분되었다. ‘그저께(과거완료)’라는 제목의 방에는 앙리 마티스와 니콜라 드 스탈의 그림이 걸리고 <시민 케인>(1941)에서 ‘출입금지’ 안내문이 붙은 재너두 저택 장면을 보여주는 스크린이 설치되었으며 고다르와 미비유가 공동 제작한 중단편영화들이 아이팟을 통해 반복 재생되었다. 영화사에 대한 고다르의 회고적 응시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어제(과거)’ 방에는 알렉산드르 도브첸코의 <병기고>(1928), 프리츠 랑의 <마부제 박사의 유언>(1931), 니컬러스 레이의 <쟈니 기타>(1954)를 비롯한 20세기 영화 작품 14편의 발췌본이 정치적 모더니즘 시기 고다르를 대표하는 <주말>(1967),<동풍>(1969) 및 고다르의 자전적 에세이 영화 (1995)과 더불어 여러 평면 디스플레이에 전개되었다. 고다르의 동시대 미디어 문화 비판을 무대화한 ‘오늘(현재)’에는 할리우드 스펙터클 영화의 제국주의적 폭력을 대표하는 리들리 스콧의 <블랙 호크 다운>(2001)이 침대 위에 놓인 커다란 와이드 스크린 LCD TV를 장식한 가운데 일련의 포르노영화 이미지가 반복 재생되는 LCD TV를 갖춘 주방과 TF1, 유로스포츠의 실시간 방송을 무음 재생하는 두대의 LCD TV가 설비된 거실이 마련되었다. 영화의 단편들 이외에도 여러 오브제와 설치물, 텍스트의 인용구들이 전시장 곳곳에 겉으로 보기에 무질서하게 배치되었다. ‘그저께(과거완료)’ 방에는 칠이 완료되지 않은 페인트 자국과 목재 및 강판이 있었다. 모형 기차가 이 방과 ‘어제(과거)’ 방 사이를 왕복하고, 인용된 영화 단편을 보여주는 두대의 TV수상기를 열대식물이 둘러쌌다. 즉 이 전시를 구성하는 재료 중 상당 부분이 발견된 오브제, 조각적인 구성물, 혼합 설치작품을 닮은 구조물이었고 이들 중 대부분은 방치되거나 공사 중인 장소, 또는 폐허를 연상시켰다. <유토피아로의 여행(들)>전에 대한 반응은 극단적이었다. <콜라주(들)>전에서 영화의 장치를 미술관에 복원하려는 고다르의 구상, 즉 인용된 영화들을 반복 재생하는 키오스크를 넘어 영화를 기술적-문화적-제도적으로 구성하는 빛과 어둠, 영사의 결합체를 설치의 형태로 구현하고자 했던 기획은 실현되지 않았다. 대신 전선으로 어지럽게 연결된 다수의 소형 모니터와 이동용 재생장치가 화이트 큐브의 벽면과 빈 공간에 포진되었고, 미술관 방문자의 관람성은 영화관에서의 집중 및 몰입보다는 혼란과 방향 상실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고다르 연구자와 비평가들은 고다르가 <영화의 역사(들)>를 포함하여 지속적으로 탐구하고 변주했던 인용과 몽타주의 논리가 전시 구성물의 배치로 연장되는 방식을 읽어내거나, <경멸>(1963) 및 <작은 독립영화사의 흥망성쇠>(1986) 등 고다르의 여러 영화에서 다루어졌고 그의 여러 미완성 기획들로도 뒷받침되는 실패의 모티프가 전시 공간의 미완성 및 폐허의 모습으로 반영되었다고 주장했다. <유토피아로의 여행(들)>전은 1990년대 이후 영화와 동시대 미술간의 활발한 상호작용이라는 경향을 점검하는 데 있어 중요한 문제를 제기하는 이벤트로 남아 있다. 제니 샤마레트가 적절하게 지적하듯, 이 전시를 고다르의 필름 및 비디오 작업이 미술관 설치작품으로 자연스럽게 연장된 것으로 평가하거나 ‘큐레이터로서의 고다르’라는 창조적인 행위자를 인증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관점은 전시 기획 및 준비 단계에서 다양한 행위자들(고다르, 파이니, 퐁피두센터 등의)간의 긴장과 갈등을 간과한 것이다. 즉 이 전시의 위태로운 준비 과정 및 공개 이후의 스캔들은 미술관과 영화가 오랫동안 각자의 방식대로 기능해온 두개의 제도이며 이들간에는 매끄러운 교섭을 넘어선 틈새와 마찰이 존재할 수 있다는 토마스 엘새서의 견해를 확인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전시의 중요한 의의가 있다. 고다르는 필름 시기 작품의 주제와 기법을 미술관의 설치작품으로 연장시킨 하룬 파로키, 샹탈 아커만, 아녜스 바르다, 아바스 키아로스타미 등과는 다른 방식으로 미술관과 영화관 사이에서 작업했다. 그 결과 관객은 이 전시(그리고 지금까지도 북미와 유럽에서 전시되고 있는 <콜라주(들)>전의 모형)에서 영화와 예술작품, 예술작품과 레디메이드, 이미지와 텍스트를 ‘그리고’를 포함한 두개의 항과 마주하고, 이들간의 간극과 가능한 접속은 물론 내재적인 불화마저도 사유하도록 안내된다. 소진되지 않은 것 아날로그 미디어와 디지털의 사이에서, 시네마와 박물관의 사이에서 자신의 영화적 세계와 영화언어를 확장시키고 그 과정에서 불일치와 틈새, 불연속과 불안정마저도 그 확장의 결과로 제시했던 고다르의 21세기는 예기치 않은 사건이자 예고되고도 도래할 미래처럼 끝났다. 그의 죽음을 1970년대부터 그가 반복해서 설파한 ‘영화의 죽음’과 연관하여 말하기보다는, 그가 말년에 전해준 말을 인용하는 것이 영화의 현재와 미래를 사유하는 데 더욱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인도 케랄라국제영화제가 평생공로상을 수여하면서 2021년 3월 가진 온라인 인터뷰에서 고다르는 스트리밍 플랫폼이 영화의 경험과 산업적 생태계를 급격히 변화시키는 상황에 대한 논평을 요청하는 질의자의 말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내가 영화계에 있었을 때는 제작자와 제작이 가장 중요했다. 그러나 이제는 배급이 중요한 것이다. 배급과 배급자들이 영화의 제작과 제작자들을 집어삼켰다.” 이 말은 스트리밍 서비스를 새로운 엔터테인먼트로 상찬하는 리드 헤이스팅스나 이를 영화 형식 및 경험의 ‘게임 체인저’로 단언하는 산업 관계자들에 대한 비판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포스트-시네마 조건 속에서 영화 형식과 경험의 경계를 점검하고 다시 그리는 작업은 영화적 유산에 대한 역사적 탐색, 그리고 이에 근거하여 단절보다는 갱신을 목표로 수행되는 제작의 다양성을 살펴보고 평가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의 마지막을 지켜본 지인들에 따르면 고다르는 단지 ‘소진된’(épuisé) 것이라고 했지만, 영화의 변모하는 존재론에 대한 성찰은 소진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