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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1997)

[비평] ‘애프터썬’, 형식이라는 강박관념

샬롯 웰스의 <애프터썬>은 폭넓은 지지를 얻고 있다. 지난해 칸영화제를 비롯해 여러 영화제에서 소개되어 호평받았고 영화잡지 <사이트 앤드 사운드>와 <인디와이어>가 선정한 2022년 최고의 영화 1위에 뽑혔다. <씨네21>에서도 물론 다수의 평자가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캠코더에 보존된 유년기의 기록을 매개로 아버지와 동행한 오래된 휴가의 기억을 불러내는 이 영화에 쏟아진 전세계의 찬사는 보편적 합의를 이룬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작은 비디오카메라 렌즈 앞에 놓인 대상에 이토록 몰입하게 만드는 시선의 힘을 느껴본 적이 없다”라는 소감을 남긴 클레르 드니의 말처럼, <애프터썬>은 내밀한 기억을 통해 뒤늦게 체감되는 감정과 그것에 접속하게 하는 영화적 회상의 매혹을 짚는 환대 섞인 감상으로 가득하다. 나는 이런 평가에 동의하지 않는다. 동의하지 않을뿐더러 어떤 종류의 불만을 품고 있는 편이다. <애프터썬>이 형편없는 영화는 아닐 테지만 동시대 예술영화의 고착된 문제를 드러내는 한 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 몇몇 인상적인 장면들이 있긴 하지만, 그보다 많은 장면에서 표준화된 예술영화가 의존하는 진부한 전략이 대안적 형식이라는 미명하에 돌출되어 있다. 적잖은 평론에서 그것을 탁월한 영화적 효과로 받아들이고 찬사를 보내지만, 정말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 글은 <애프터썬>이 전하는 내용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다. 대신 이 영화가 구사하는 형식적 전략과 효과가 과연 흔쾌히 호평할 만한 것인지 의심스럽게 되묻고 싶다. 돌출된 미적 전략 <애프터썬>에는 두 차례 반복해서 제시되는 상황이 있다. 영화의 첫 장면에 나온 뒤 중반부에서 다시 반복되는 그 장면은 캠코더를 든 소피가 아버지 캘럼에게 장난스럽게 질문을 건네는 순간이다. 영화의 시작점에서 이 순간은 소피가 촬영하는 캠코더 화면으로 묘사되지만, 뒤에서는 탁자를 향해 고정된 앵글에 텔레비전에 비친 소피와 캘럼의 반영된 이미지로 변형돼서 나타난다. 첫 장면에 쓰이고 다시 한번 반복될 만큼 주의 깊게 강조되는 이 장면의 구도는 <애프터썬>이 구축한 미적 전략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여기에는 다수의 장치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아이의 손에 쥐어진 캠코더, 느닷없이 던져지고 나서 뒤늦게 밝혀지는 상황의 의미, 텔레비전에 반영된 이미지로 이어지는 롱테이크. 이런 효과에 그 자체로 문제 삼을 부분은 없다. 하지만 <애프터썬>은 많은 장면에서 지적인 인식을 유도하기 위한 구도와 배치가 언제나 인물들이 직면한 상황에 앞선다. 이 장면의 생김새는 언뜻 심오한 연출의 결과물로 받아들여지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이는 고전적 데쿠파주를 강박적으로 회피하는 연출자의 자의식을 드러낼 뿐이며 화면 내에서 충분히 활용되었어야 할 인물의 시선과 동작을 무시한 결과와 더불어 생겨나는 것이다. 소수의 관객과 비평가들이 알아보도록 노골적으로 조율된 장면에서, 무엇보다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은 장면에 설계된 장치를 인지하고 해독하는 절차다. 이 순간, 인물의 심리적 상태와 숏의 활동을 억제하고 의미를 설계하려는 감독의 흔적이 스크린 위로 불필요하게 묻어나온다. 이처럼 장면을 형성하는 구조적 장치들이 숏의 표면을 장악하는 가운데 지워지는 것은 샬롯 웰스가 수행했어야 하는 ‘연출’이라는 문제다. <애프터썬>이 기록장치를 매개로 아버지와 딸이 공유한 기억을 돌아보는 영화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캠코더와 꺼진 TV에 비친 인물의 형체와 플래시백이라는 전제가 동원되는 것도 분명히 파악할 수 있다. 이는 장면을 구상하고 준비하는 단계에서 완료되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그것을 구체적인 숏의 세부로 만들어내기 위해 영화가 마련하는 연출의 방법으로 어떤 것들이 실천되고 있는가? <애프터썬>이 취한 미적 형식에는 바로 그 구체적인 연출의 방법이 희미하다. 속되게 말한다면 <애프터썬>은 장면을 구상하는 개념적 도식이 큰 비중으로 존재감을 발휘하는 데 비해, 연출자가 어떻게 연기를 지도하고 동선을 짜고 배우들의 시선과 동작을 조정하는지 전혀 궁금하지 않은 영화다. <애프터썬>에서 장면의 쓸모와 의미는 특정 위치에 사물이 놓이고 인물이 자리 잡을 때 일찌감치 결정되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는 영화에서의 연출이라기보다 낡은 사진적 배치에 가까울 것이다. 샬롯 웰스는 캠코더 화면의 물질성, 주체와 시점이 모호한 플래시백, 반영된(reflection) 이미지라는 숏의 미적 디자인에 의존하면서 화면 내부를 밀도 있게 운용해야 하는 연출의 업무를 방치한다. 연출자의 역할이 현장에서 연기를 지휘하고 장면의 길이를 조절하는 업무에 있다는 고전적 문제의식을 고집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앤디 워홀의 <잠>과 <키스>, 또는 아바스 키아로스타미의 <파이브>처럼 장면의 긴 지속 시간을 받아들여 개념적으로 설계된 형식과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우연적 사건을 결합한 사례를 떠올릴 수 있다. 그들의 작업은 연출자가 촬영 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더라도 탁월한 ‘연출’을 구현해낼 수 있다는 명제를 급진적으로 증명해낸다(워홀은 종종 자신의 촬영 현장을 벗어났으며, 키아로스타미는 <파이브>를 찍는 동안 잠을 자고 있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애프터썬>이 의존하는 숏의 개념적 전략은 설정된 장면의 목적에 가닿는 것도, 예기치 않은 우연을 수용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어렴풋하게 뭉뚱그려진 미적 조합으로 완결된 의미를 방사할 뿐이다. 두 차례 반복되는 소피와 캘럼의 대화 장면에 연출자가 개입할 수 있는 공간은 희박하기 짝이 없다. 정확히 같은 의미에서 나는 이 장면을 포함해 <애프터썬>의 많은 장면에서 ‘연출’을 발견하지 못했다. 숏이 겨냥하는 바는 결정되어 있고 그 자리에 불확실한 면모가 개입할 여지는 현저히 적다. 대신 심미적 프레이밍을 위해 인물의 움직임을 철저히 억제하고, 장면에 담기는 정보나 변화에 비해 숏의 지속 시간을 길게 늘어뜨리는 관성적인 호흡이 주어질 뿐이다. 이 영화에서 구체적 감각은 언제나 보편적 수준의 일반화로 휘발된다. 무균실로서의 시공간 잘 거론되지 않는 부분이지만, <애프터썬>에서 적극적으로 환기되는 정서 가운데 하나는 유년기의 성적 긴장감이다. 소피는 화장실 열쇠 구멍 사이로 전날 있었던 성행위에 대해 떠드는 여자들의 목소리를 듣고, 수영장에서 밀접하게 서로를 만지는 사람들을 유심히 바라보며, 밤중에 게이 커플이 키스하는 모습을 목격하기도 한다. 이렇다 할 사건 없이 전개되는 이 영화에서 낯선 성적 체험이 소피의 시야에 침입하는 순간들은 영화 전체를 감싸는 긴장을 충전하는 과정이기도 해서, 소피는 우연히 마주친 또래 남자아이 마이클과 밤의 수영장에서 키스하기에 이른다. 도발적인 독해를 즐기는 이들이라면 소피의 시선에 포착되는 성적 긴장이 소피와 캘럼이 함께 있는 장면에도 침범하고 있으며, 두 사람이 서로의 얼굴을 매만지고 손을 붙잡는 장면의 질감에 근친상간적 긴장을 부여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애프터썬>의 기록엔 레즈비언 커플로 부모의 입장에 선 소피가 실현되지 않은 유년기의 불온한 에로스를 되돌아보는 시선이 결부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진정으로 문제적인 면모는 편재하는 성적 긴장이 아니라 그것을 미심쩍은 방식으로 억제하는 데서 드러난다. 이는 외부의 오염으로부터 완벽하게 차단된 무균적 시공간을 내세우는 것이다. 소피와 캘럼이 머무는 호텔과 그 주변은 문자 그대로 청결하게 세공된 무대다. 이곳에선 소피와 조금이라도 관련 맺지 않은 사람의 얼굴과 목소리는 카메라에 보이지도, 마이크에 채집되지도 않는다. 심지어 공사 중인 호텔을 배경으로 삼고 있는데도 노동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귀에 거슬리는 소음조차 들리지 않는다. 이 무대에 진입하기 위해선 어떤 방식으로든 소피와 캘럼의 근처를 맴돌아야 한다. 두 사람의 눈과 귀를 자극하지 않는다면, 없는 존재나 마찬가지다. 한 사람의 어린 시절 기억을 빌려 펼쳐지는 시공간이라는 절대적 전제로 모든 현상을 회피할 순 없다. <애프터썬>이 소피의 기억을 통해 재구성하는 영화적 시공간은 낯선 타인의 얼굴과 목소리가 존재하지 않는, 보편적인 풍경이 되어버린 세계다. 더 나아가 영화는 소피가 다른 사람과 만나며 겪는 (성적 긴장과 결부된) 불안과 위협마저도 철저히 차단한다. 이를테면, 캘럼과 다투고 나서 한밤중에 길을 잃은 소피가 마이클과 마주치는 장면이 있다. 마이클은 함께 있는 남자아이 무리를 가리키며 소피에게 “우리랑 놀래?”라고 제안한다. 혼자 밤거리를 배회하는 여자아이와 그에게 접근하는 여러 남자아이들의 모습은 왠지 모를 불안감을 촉발하게 한다. 더군다나 소피는 지금 캘럼과 떨어져 있다. 그를 지켜줄 유일한 보호막이 사라진 듯한 위태로움이 더해진다. 그러나 이어지는 장면에서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수영장에서 키스하는 소피와 마이클 단 두 사람의 모습이다. 이 경험은 불안하지도, 특별한 인상으로 남지도 않는다. 유년의 소피는 아무런 굴곡 없이 31살의 레즈비언 소피가 될 것이다. 이곳은 일탈적인 사건이 벌어지지 않는 공간이라는 듯 불길한 예감은 회피되고 소피는 침대에 잠들어 있는 캘럼에게로 돌아간다. 성적인 유혹과 불안정한 일탈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소피는 정신적 위기를 겪고 있는 아버지가 느끼는 위태로운 감정에(만) 정확히 접속할 것이다. 그것이 이 영화가 설정한 서사적 기획이므로 다른 가능성은 차단되어 있다. 의도적이든 아니든 샬롯 웰스는 타인의 불순한 흔적이 지워진 도착적인 무대를 그려낸 것이다. 이 과정에서 세공된 영화적 무대의 기능이 노출된다. 주관적 기억에서 출발해 보고 들은 적 없는 순간까지도 플래시백의 한 부분으로 끌어들이는 <애프터썬>의 기록은, 개인이 간직한 기억의 부피를 초과해 타인에게 접속하고 비로소 아버지라는 거대한 수수께끼를 이해하는 여정이다. 하지만 정작 영화가 비추는 공간에서 도드라지는 것은 오직 소피와 캘럼, 두 사람의 감각으로만 수렴되는 영화적 지각의 수축성이다. 그들 바깥에는 위협적인 기억도, 세상의 잡스러운 소음도 존재하지 않는다. <애프터썬>이 과거에 발견하지 못했던 인식을 넓히려는 시도라면, 현실의 공간을 주변화하면서 세공된 무대 바깥의 얼굴과 목소리를 철저히 차단하는 형식은 기만적이다. 웰스가 세운 미적 전략은 여기서 다시 한번 심미적으로 자족하는 장치일 뿐, ‘연출’의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을 증명한다. 아니, 더 나아가 영화가 시도하는 ‘연출’을 훼손하는 독립적인 장치로 실행되고 있다는 것을 노출해버린다. 장면의 미적 전략이 영화 내에 잠재하며 서로 다른 숏들과 일관된, 또는 의도적으로 불화하는 구성을 이루는 대신 그 자체로 영화를 규정하는 실체적인 조건으로 나타날 때, 그것을 조정하는 감독의 터치는 작품 속 세계를 부자연스럽게 왜곡하는 덧칠이 된다. 나는 <애프터썬>을 보면서 스크린에 떠오른 장면을 지켜보고 있음에도 여전히 장면들이 개념에 머물러 있다는 인상을 거듭해서 받았다. 자율적 활동이 억제된 숏은 빈곤한 개념에 붙잡힐 수밖에 없다. 전신 마비에 걸린 영화 존 부어먼은 언젠가 장 뤽 고다르가 전해준 말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고다르가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영화를 만들려면 젊고 무식해야 한다. 우리만큼 많이 알면 영화 만들기는 불가능해진다.’ 고다르의 말은 연출자가 모든 문제를 예견할 수 있으면 결국 전신 마비만 일으킬 뿐이라는 뜻이었다.” 존 부어먼과 샬롯 웰스는 일견 어떤 접점도 없는 연출자 유형처럼 보이지만, <애프터썬>을 보고 나오면서 즉각적으로 떠올린 것은 부어먼이 언급한 영화의 전신 마비라는 비유적 상태였다. <애프터썬>의 정적인 장면들은 시적이고 아름답다기보다는 마비된 것처럼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 그것이 영화가 해결해야 할 특수한 주제나 역학을 구현하는 데서 발생한 사태가 아니라 연출의 방기에서 오는 무성의한 화면의 결과물이라는 것은 부연할 필요도 없다. 샬롯 웰스라는 이 젊은 감독은 그럴듯한 외형으로 치장된, 그러나 지나치게 유식한 영화를 만들었다. 그의 유식함이란 동시대 예술영화가 어떤 형태로 만들어지고 어떤 유형으로 옹호받는지 직관적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뜻과 다르지 않다. 심술궂게 말하자면, <애프터썬>은 주류영화에 어울리는 전형적인 주제와 정서를 서툴게 감추면서 가장된 저항의 형식을 취해 보는 이들을 지적으로 호객하는 예술영화의 욕망을 드러낸다. 보편적 정서에 호소하면서도 작가로서의 역량을 과시하기 위해 짐짓 대안적인 형식을 구현하는 것처럼 구는 이중의 열망이 이 영화의 설계도에는 선명하게 노출되어 있다(과거였다면 선댄스영화제에 초청되어 화제를 모으는 영화들에서 쉽게 보이는 욕망과 감수성이라 치부할 만한 이런 경향은, 이제는 칸에서도 베를린에서도 로카르노에서도 토론토에서도 무사히 환대받을 것이다). 영화의 정해진 규칙에 의문을 제기하고 종합적인 체계를 이탈해 다른 형식을 제안하던 지난 세기의 시도를 통속적으로 ‘예술영화’라 불렀다면, 오늘날 그 명칭은 부지런하게 정해진 규칙을 따르고 호평받는 영화적 표현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패턴화된 규범으로 의미를 옮기고 있다. 그런 맥락에서 동시대의 ‘작가’와 ‘예술영화’라는 표현의 쓰임새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신작’이 유통되는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애프터썬>은 동시대적 예술영화의 양식에 철저하리만큼 충실한 작업이다. 이는 첫 장편영화를 만든 감독에겐 깊은 오명과도 같다.

[인터뷰] ‘구경이’ 를 하나의 정체성으로 함께 집필한 성초이의 독특한 작업 방식

아이디어 핑퐁 게임 <구경이>의 극본을 쓴 ‘성초이’를 만나고 싶던 건 이런 반짝이는 이야기의 탄생 배경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성초이를 2월15일 한겨레신문사 사옥에서 만났다. 성초이는 한 작가의 이름이 아니라 “내가 보고 싶은 드라마를 만들기 위해 글을 쓰고 있는 작가팀”이다. (두 사람의 답변은 성초이라는 하나의 정체성으로 정리하되, 각자의 답변을 나눌 필요가 있을 때만 ‘A’와 ‘B’로 임의로 적는다.) 각자 영화 작업을 해오던 이들이 드라마 작업을 함께하기 위해 만든 또 하나의 정체성이다. “드라마를 쓸 때는 같이 합의할 수 있는 그림을 찾아보자는 맥락에서 두 사람의 이름을 나란히 적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정체성으로 만들고자 했어요.” <구경이> 아이디어를 처음 주고받은 건 2017년께다. “그 시기에 영화 하던 사람들이 드라마쪽으로 넘어가는 흐름이 시작됐거든요. (각자 작업하다가) 짬 나는 시간에 드라마 이야기를 한번 해보자고 한 게 시작이었어요.” 아이디어는 두 사람이 탁구를 하듯 주고받았다. “은퇴한 경찰 - 현재 보험조사관을 주인공으로 하자. 왜인지는 모름.” (핑!) “보험조사관 일을 하는 은퇴한 경찰 출신에게 후배가 찾아오자. 도무지 해결되지 않는 사건이 있다며.” (퐁!) “오 첫 회 재밌다.” (핑!) “도무지 해결되지 않은 사건은 뭐지?” (퐁!) “그건 진짜 경찰 사건 같은 거. 실종 사건. 1회 뒤에 시체 발견.”(핑!) “주인공에게는 당연히 우울증이 있겠지….” (퐁!) “당연. 맨날 술 마심. 우리처럼….”(핑!) “내가 지금 이소라님 보고 있는데 집에서 맨날 게임하심.” (퐁!) “그거다. 이소라님 생각하면서 써야겠다.” (핑!퐁!) 이렇게 던지고 받는 대화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아이디어 노트로 한번 정리해보자고 해서 구글 문서를 처음 만들었어요. 처음엔 ‘몇 회’ 개념이 별로 없이 ‘일단 한번 써보자’ 하고 써내려갔죠.” <구경이> 시청자가 쾌재를 부른 건 이런 장면이다. 누아르영화에서 남성끼리 의리를 다지는 장소인 목욕탕에서 구경이와 용 국장이 마주하는 모습, 서로를 타박하면서도 끈끈한 믿음을 기반으로 호흡을 맞춰가는 구경이와 나제희 콤비(셜록과 왓슨, 이정재와 정우성 같은 여성 콤비를 떠올리기 쉽지 않을 것이다), 각자의 목표를 향해 달려나가다 때론 몸으로, 때론 머리로 힘껏 충돌하는 구경이와 케이의 추격전. 해맑은 살인범 케이의 데드 리스트 이처럼 극을 이끌어가는 굵직한 인물이 모두 여성으로 설정된 건 ‘재미’를 고려하다보니 자연스럽게 나온 결과물이다. “굳이 남자와 여자의 역할을 의도적으로 바꾸자고 작정한 건 아니”지만 “최종 빌런(악역)으로 나이 든 남자의 모습을 보는 게 너무 지겨웠”다. “(대본에 어울리는) 배우를 떠올리면서 ‘이런 분이 하면 재밌지 않을까?’ ‘이 캐릭터가 이런 느낌이면 어떨까?’ 고민하다보니 용 국장은 편한 등산복도, 슈트도 잘 어울리는 중년 여성이 되어 있었어요. 그게 제일 재밌고 새로운 그림으로 보였어요.” 동시에 극은 연쇄살인범 케이를 통해 현실과 맞닿은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진한 분노와 공감을 일으키기도 했다. 케이가 ‘죽여도 된다’고 생각한 대상은 성매수 남성, 불법촬영 가해자, ‘갑질’과 탈법 위에 선 기득권층, n번방과 ‘웹하드 카르텔’의 주범들이다. 이는 대본을 쓰던 당대의 현실, 그리고 그 현실을 살아가는 성초이의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다. “저희가 작품을 쓰는 동안 미투 운동이 대중화됐고, 그 전후에도 사회적 약자를 대상으로 한 사건이 너무 많았잖아요. 자연스럽게 ‘진짜 얘는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을 소재로 쓰자 싶었어요.” 하나의 정체성으로 함께 일하는 성초이의 작업 방식이 좀더 궁금했다. 작업을 위한 필수 앱은 페이스타임(영상통화 앱), 구글독스, 텔레그램 세 가지다. 페이스타임이나 텔레그램으로 실시간 대화하고 각종 참고자료를 주고받으며 구글독스 공유문서로 장면을 완성해나간다. 방식은 그때그때 다르다. 각자 다른 신을 쓸 때도 있고 아예 한 장면을 같이 쓸 때도 있다. 상대가 입력하는 글자를 실시간으로 동시에 볼 수 있는 구글독스 공유문서의 기능을 톡톡히 이용한달까. 둘 다 이 작업 방식이 “아주 잘 맞는다”. 공동작업은 지칠 때 서로를 붙들어주면서 짐을 나눠 지기에 제격인 방식이기도 하다. “사실 집에서 (작업을) 하면 잘 안될 때도 있잖아요. 그때 (페이스타임) 켜놓고 하면 집중도 되고요. ‘내가 좀 대충 봐도 상대가 열심히 봐주겠지’란 믿음도 있고요. (웃음) 스트레스가 경감되는 장점이 있죠.” <구경이>를 위한 자료 조사는 인터넷의 힘을 많이 빌렸다. <구경이> 곳곳엔 인터넷 밈을 적극 활용한 대사도 나오는데 “인터넷에 살고 있다”고 표현할 정도로 다양한 곳에서 정보를 얻는다. 다만 저유조, 출렁다리, 인천 월미도 등의 장소는 직접 다녀오면서 대본이 구체화하기도 했다. 개별적인 작업 루틴은 조금 다르다. A는 ‘다섯신’ 이상을 넘겼거나 ‘하루 3시간 이상’ 썼다는 두 기준 중 하나를 충족하면 그만 쓴다. “욕심내면 다음날 작업에 영향을 미치더라고요. 그래서 3시간 쓰고 나머지 시간에는 취미활동을 하든지 작업에 필요한 참고자료를 보든지 해요. ‘글을 안 쓰는 시간’이 확보돼야 쓰는 시간에 집중하게 돼요.” A는 ‘취미 부자’인데 피아노·프라모델·주짓수 등을 한다. “새로운 커뮤니티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보다 오는 일”은 적절히 자신을 환기하면서, 오히려 작업을 이어갈 수 있는 동력이 된다. 영화·드라마·책은 일상이다. B는 “마감을 어기지 않는다” 정도의 기준을 두고 있다. 단 퇴고하는 시간을 꼭 갖는다. “마감 최소 3일 전에 끝내고 ‘글 청소’를 하는 게 마음이 좀 놓여요. 물론 끝나도 끝나는 게 아니고 퇴고도 완전한 퇴고도 아니지만요.” B의 취미는 상대적으로 간단하다. 산책과 컴퓨터 온라인 게임을 열심히 하는 정도다. 방탈출은 성초이가 함께 즐기는 취미인데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땐 하나의 서사를 따라가며 문제를 풀어야 탈출 가능한 방탈출 게임을 하며 영감을 받기도 한다고. A는 “글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시간이 꼭 있어야” 하지만, B는 반대다. “늘 (글을)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서 A는 “작업이 끝나서 노트북을 닫으면 아예 보지도 않는” 반면, B는 “모니터 세개에 게임, 레퍼런스가 되는 영상, 작업창을 모두 켜두는” 스타일이다. 게임 한 차례가 돌 때마다 15초가량 쉴 수 있는데 그때 한 문장씩 쓰곤 한다.

[인터뷰] ‘질투의 화신’ 서숙향 작가, "드라마를 쓴다는 것에 대한 의미는..."

캐릭터가 자기 마음대로 구는 순간을 기다린다 서숙향 작가는 2002년 KBS 극본 공모에 당선되며 드라마 작가 활동을 시작했다. 대체로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은 작가들이 상금으로 작업용 노트북을 마련할 때, 그는 유유히 PC방을 찾았다. 현재 사용 중인 PC 역시 <파스타> 전부터 쓰고 있는 고물이다. 핸드폰도 여기저기 금이 간 지 오래다. 작가는 말한다. “그때 제 안에 묘한 경계심이 있었던 것 같아요. 인터넷 자료에 매몰되기 시작하면 제 색깔과 시간을 잃어버릴까봐. 인턴 작가들은 1년 동안 매달 1편씩 단막극을 써야 했는데, 온라인에서 남의 소재를 끌어오지 말고 오직 내 안의 땅굴만 파고 또 파서 1년을 버텨보자는 심정으로 매달렸습니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이렇게 내 안을 쳐다보겠나 하는 심정으로요.” - 배우 공효진의 생활감 넘치는 연기로 대표되는 일상적 구어, 속사포 같은 말하기가 서숙향표 대화의 특징입니다. 대사 쓰기의 원칙이 있을까요. = 더이상 뺄 것이 없을 때까지 빼겠다는 생각으로 한 문장, 한 대사를 짧게 쓰다보면 오히려 대사들의 행간이 살아납니다. 한 사람이 툭 던지면, 상대방이 슬쩍 받아내는 대사 사이의 공기를 만들어내는 재미로 써요. 드라마를 20년 이상 쓰면서 대본, 연기, 연출의 3박자가 잘 맞는 순간이 얼마나 행운인지 새삼 감사하게 됩니다. 서로 소통이 잘 안되면 대사의 묘미를 살리기 어려운 경우도 생길 수 있으니까요. 각본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역할이 무엇일지 늘 고민되는 건 사실이에요. - 만년 구박이나 받는 셰프 지망생 서유경(<파스타>), 온갖 설움과 수모를 견디면서도 아나운서가 되고 싶은 기상 캐스터 표나리(<질투의 화신>)는 공효진의 청춘이었습니다. <별들에게 물어봐>에선 이제 카리스마 넘치는 원정대장으로 변모했죠. 세월을 함께했으니 대본을 쓸 때 그의 목소리와 말투가 자동 재생될 것 같은데요. = 배우를 미리 상상하며 쓰는 스타일은 못 돼요. 그러지 않으려 노력하기도 하고요. 제가 캐릭터를 독자적으로 구축해놓으면 이후에 배우가 자신의 해석대로 더하고 빼면서 온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길 바라요. 서로의 영역이 있는 거죠. 공효진 배우는 이제 저와 제작에 필요한 여러 현실적인 여건들까지 함께 논의하는 프로 중의 프로죠. 언제나 변화에 열려 있는 사람이고, 무엇보다 제가 의도한 대본의 행간을 가장 정확하게 구현하는 사람입니다. - <질투의 화신>에 이어 <기름진 멜로>에서 호흡을 맞춘 이미숙, 박지영 배우 역시 톡톡 튀는 대사들을 스타카토로 경쾌하게 소화해내죠. = 전 두분을 믿고 그래서 대사를 어마어마하게 써놓는 편입니다. 지문과 설명은 최소화하려는 편인데 가끔 ‘(컷을) 나누지 말고 배우가 한번에 소화하게 해주세요’라고 써놓을 때는 있어요. 혼자 떠드는 장면으로 A4 용지 2장까지 써본 것 같네요. 이게 가능한가? 배우들이 볼멘소리 할라치면 저는 슬쩍 딴 데 봅니다. (웃음) 특히 이 두분은 엄청난 베테랑이라 누가 툭 치면 술술 쏟아져나올 정도로 치열하게 외운다고 하더라고요. - <드라마시티> 단막극 <나의 가장 사랑스러운 적>(2002) 이후 20년이 훌쩍 넘게 흘렀습니다. 중간에 그만두고 싶은 적은 없었는지요. = 제 인생이 제일 재밌을 때가 지금 쓰고 있는 드라마의 캐릭터가 자기 마음대로 굴 때, 뜻대로 신나서 이야기를 끌고 갈 때예요. 그 희열로 살고, 씁니다. - 자주 오나요, 그런 순간이. = 아니죠. 문제는 안 올 때가 대부분이라는 거죠. (웃음) 그리고 방송을 볼 때도 좋아요. 특히 현장에서 대본을 즐겁게 가지고 놀았다는 느낌이 드는 장면을 보면 작가로서는 더없이 기쁩니다. 그래서 지겨울 틈 없이 계속 합니다. 매력과 고난이 하나인 거지요. - 많은 서사 장르 중 드라마를 쓴다는 것. 작가님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 가족이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였는데 밤 9시 무렵 환자들이 다들 잠들고 나서 혼자 복도로 나왔죠. 적막한 병원 로비 텔레비전에서 <커피 프린스>가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제가 위로받게 됐어요. 앞으로 1시간 동안만큼은 드라마가 잠시 내 삶의 고단함을 잊게 해줄 테니까. 그냥 고마웠어요. 드라마의 역할이란 거, 그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요? 선의의 로맨스 서숙향의 로맨스엔 지나치게 피로하거나 위악적인 갈등이 없다. 미운 얼굴은 있어도 악한은 드물다. 작가는 “장점이라기보단 약점인 것 같아 고민된다”고 했다. “저는 여자를 쓸 때만큼 남자를 쓸 때도 애정이 많이 가고 재미있는데 아마도 아버지로부터 받은 사랑이 크기 때문인 것 같아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대학교에 입학했는데, 귀가해서 보니 창가에 앉은 어머니가 혼자 발톱을 깎다가 울고 계시더군요. 수개월 만에 자기 발톱을 깎은 거예요. 그동안 엄마랑 저는 살면서 직접 발톱을 깎아본 적이 별로 없었던 거지요. 아버지가 그런 분이었어요. 수험생 시절에 잠이 모자라서 딱 1시간만 쪽잠 잔다고 하면 제 발에 실을 묶어 창밖에 떨어뜨려놓고 1시간 뒤 창가에서 실을 잡아당겨 깨우던 분이셨죠. 창밖에서 딸을 놀라게 해줄 무언가를 준비해 서 계셨고요.” 인물들이 서로 냉정히 상처 입히는 장면에서조차 묘한 온기가 감도는 그의 서사는 하루치의 긴장을 이완하는 시간에 드라마를 찾는 시청자들에게 미더운 선택지가 된다. 에필로그 10대 시절, 서숙향 작가는 미술을 전공하고 싶었지만 “미대 가면 굶어 죽는다는 그 시절 부모님의 성화에 못 이겨” 꿈을 접었다. 고등학교 방송반을 기웃거린 건 반항심의 표출이었다. 그 뒤로 대학 방송부를 거쳐 평생 방송가에 몸담고 있으니 운명은 운명이다. 그는 어디를 가리킬지 모르는 나침반을 가진 사람이지만 한번 꽂히면 깊고 길게 사랑한다. “어느 감독님과 연극을 보러 가는 길에 잠시 시간이 남아 인사동의 달항아리 전시장에 들렀죠. 그 앞에 서는 순간 마치 도공이 제게 말을 걸어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는데, 나중에 정신 차려보니 감독님 혼자 연극을 보고 나와서 다시 전시장에 돌아올 때까지 제가 내내 그 앞에 서 있었대요.” 한번 잡힌 집필 루틴도 변하는 법이 없다. 아침에 일어나면 우선 씻지도 않고 책상에 앉아 전날 작업을 정리한다. “일어나면 어제 쓴 것에서 ‘덜어낼 감정’부터 떠오릅니다. 그걸 지우고 퇴고하고 나면 오전이 지나가고 점심 땐 열심히 청소를 하죠. 제2의 적성은 집 안 관리가 아닐까 싶기도 해요.” 미니멀하지만 이곳저곳 공들인 흔적이 가득하고 먼지 한톨 없이 깨끗한 그의 작업실은 “방송가에 안착한 30여년간 여의도를 벗어난 법이 거의 없”는 서숙향의 우주이고 정거장이다. “한참 골방에서 외롭게 글을 쓰고 나면 사람의 온기가 절실해지는 순간이 찾아와요. 하지만 마음먹고 한 외출도 결국 여의도 근처죠. (웃음)” 고집스럽게 정주하되 자신이 선 자리에서 가장 먼 곳을 상상한다는 점에서 그는 어떻게든 작가이고 말 운명이다.

[김세인의 데구루루] 굴러가는 영화

여자, 외계인, 아기, 임신, 자신, 복제, 출산, 탈피, 수영장, 반복… 인터넷을 처음 사용할 수 있게 된 10살 무렵부터 나는 종종 위의 키워드들을 나열해 검색했다. 위 키워드들은 텔레비전으로 본 어느 영화 속 한 장면이자 아주 긴 시간 간헐적으로 꿨던 꿈 장면의 요소이다. 중학생 때 수업이 시작하기 전 쉬는 시간에 컴퓨터실로 뛰어가 학교 컴퓨터로, 대학 신입생 때 도서관 컴퓨터로, 늦은 새벽 카페에서 과제를 하다 노트북으로, 지하철을 타고 가며 휴대폰으로 장면의 근체를 찾기 위해 검색했다. 이 미스터리는 장시간에 걸쳐 불현듯 얼굴을 드러내고 검색창에 나를 풍덩 빠뜨렸지만 재능 없는 탐정인 나는 여전히 어떤 영화의 장면인지 알지 못한다. 유치원 등원 중 작은 사고가 난 이후로 어린이 시절은 집에서 홀로 영화를 보며 지냈다. 영화 채널에서 나오는 영화들이었는데 팀 버튼 감독의 영화들, <애들이 줄었어요> 같은 가족 코미디 영화, <죽어야 사는 여자> <프라이트너> <엑시스텐즈> 등 나이와 어울리지 않는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영화들도 방영되는 대로 시청했다. 기억력이 좋지 않아 며칠 전에 본 영화의 내용도 나에게는 희미하기 때문에 당연히 대부분의 영화를 기억하지 못하지만 어쩐지 그중 여전히 생경하게 남아 있는 장면이 있다. 임신한 여자가 누군가로부터 쫓기고 있다. 그녀는 외계인으로 예상된다. 점점 배가 불러오더니 수영장에서 출산하게 되는데 정작 태어난 것은 아기가 아니라 자신, 여자였다. 출산이라기보다는 마치 탈피 과정 같은 모양새인데 그런 복제가 영화 내내 반복된다. 이 장면은 지속적으로 꿈에서 반복되었고 문득 일상 속에서도 떠올랐다. 여름방학 초저녁 무렵 발톱을 깎다가 떠올라서 나를 선득하게 만들고, 몹시 피곤했던 비 오는 날에도 괜스레 장면이 떠올라 외계인 여자가 안쓰럽게 느껴졌고, 늦은 낮잠 속 꿈에서도 선명히 떠올라 잠에서 깬 후 현실이 가짜인가 잠시 혼란스러워하기도 했다. 이렇게 시간이 지날수록 장면은 여러 감각으로 명징해지는데 어쩐지 영화의 정체는 점점 미궁으로 흘러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부족한 검색 실력 탓에 찾을 수 없는 이 영화를 급기야 25살, 졸업영화로 찍어버리자 결심하기도 했었다. 당시 나는 여느 20대 청년이 그러하듯 자아라든지 정체성에 관한 고민으로 잠들기 어려웠고 그것들과 연결지어 반복되는 장면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쳐 상상했다. 하지만 이 장면이 정말로 실재하는 영화라면 결국 표절이라는 판단이 들어 시나리오도 쓰기 전에 그만두었다. 긴 세월 동안 머릿속에서 변형되고 섞인 장면은 이제 영화인지, 꿈인지 구분도 할 수 없지만 말이다. 지난겨울 좋아하는 영화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자주 받았다. 사실 잘 모르겠다. 이 영화는 이래서 좋고 저 영화는 저래서 좋고. 내 취향은 기준 없이 변덕스럽다. 나는 점심 메뉴도 정하지 못하는 사람인데. 그러다 보니 가장 좋아하는 영화를 묻는 질문에는 우물쭈물하다 입을 꾹 다물게 된다. 부끄러웠다. 날을 잡고 사랑하는 영화에 대해 생각했다. 뒤늦은 고민이었다. 영화를 사랑한다는 것은 뭘까. 가장 사랑하는 영화에 대한 답이 어렵다면 가장 오래 생각한 영화는 뭘까. 가장 오래 나와 함께한 영화는 무엇일까. 그 장면이 떠올랐다. 내가 지금까지 만든 영화들을 포함해 비교해도 가장 오래 내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던 의문의 외계인 여자. 비록 온전하지는 않지만 부분적으로, 꿈으로 기억으로 형태를 바꿔가며 내 곁에서, 내 안에서 부유했던 그 장면. 아무 기준 없이 떠올랐다 생각했지만 돌이켜보면 꽤 자주 그것은 내가 혼자일 때, 외로울 때, 혼란스러울 때 나타나 그 시간들을 함께했다. 섣부른 위로 없이 다만 암흑의 구멍으로 남아 혼란한 마음들, 쓸데없는 고민들을 뺏어가고 굉장한 호기심으로 시간들을 채워주었다. 사랑까지는 몰라도 꽤 의리 있는 우정이 아닌가. 이제는 이 장면을 영화라 불러도 될까. 그것은 이제 내 일부가 되고 내 일상이 되고 내 친구가 되었다. 나의 친밀한 미스터리. 어린이였던 내가 하릴없이 보았던 영화들, 늦은 새벽 깜깜한 거실에서 까무룩 흐릿해지는 의식으로 만났던 케이블TV에서 흘러나온 영화들, 실험영화제에서 의미도 모른 채 받아들였던 영화들, 이미 친구의 감상과 섞여버린 친구가 들려줬던 영화의 줄거리들. 온전한 몸체는 아니지만 나에게 내려앉은 무언가가 있다고 믿는다. 2022년 가을부터 겨울까지 지난 영화(<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의 관객과의 대화와 인터뷰를 진행하며 필사적으로 의미와 장치들, 설계 따위를 피력했지만 정말로는 상관없다. 솔직히 부끄럽게도 동료들과 친구들에게 영화가 관객에게 다르게 전달되면 어떡하냐며 세상 모든 호들갑은 다 떨었지만 정말, 정말로는 상관없다. 다만 위에 호출된 영화들과 나의 관계처럼 영화가 누군가에게 내려앉아 미지의 어떤 감각이 되기를 희망해본다.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영화 <정오의 낯선 물체>에서 선생의 치마 속에서 튀어나온 구슬이 사람들을 경유해 흙바닥을 굴러가는 축구공이 되었던 것처럼 이야기가 누군가의 사연으로 누군가의 신비로운 구슬로 또 이내 천진한 사람들의 장난감이 되는 것을 상상해본다. 결국 내가 도달하고 싶은 것은 친밀함인가. 친밀한 이야기를 만들고 싶다. 나는 내가 만드는 영화, 이야기, 앞으로 <씨네21>에서 연재할 글들도 단지 어떤 단서로 남아 오래도록 사람들 사이를 무심하게 굴러갔으면 좋겠다. 아주 멀리, 깊은 곳으로 굴러가며 사람들 안에서 더해지고 덜어지며 마구 곡해되고 오해되고 가리가리 찢겼으면 한다. 3주에 한번, 이 지면을 통해 이야기를 쓰고 생각하는 생활에 대해 써보려 한다. 잘할 수 있을까 두려워하는 와중에 지금 이렇게 또 하나의 구슬이 식탁에 앉아 키보드를 치는 내 잠옷 속에서 튀어나와 굴러간다. 데구루루~

JEONJU IFF #4호 [인터뷰] '우.천.사' 한제이 감독, 불확실하기에 깊어지는 사랑의 마음

때는 1999년, 지구 종말론이 곳곳에서 흘러나오던 불안의 시대. 태권도 국가대표전을 준비하는 주영(박수연)과 소년원 학교 출신인 예지(이유미)는 ‘가정 프로젝트'라는 청소년 사회화 프로그램을 통해 같은 집에서 지내게 된다. ‘담쟁이' 넝쿨처럼 서로를 기대어 자라나는 두 소녀는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는 종말의 시대에서 유일하게 다음을 약속하고 사랑을 속삭인다. 사랑은 무엇으로 존재하고 증명되는가. 오랜 시간을 거슬러 올라야 답할 수 있는 질문 앞에서, 한제이 감독에게 <우리는 천국에 갈 순 없지만 사랑은 할 수 있겠지(이하 <우천사>)>를 통해 구현하고 싶은 세상의 모습에 대해 물었다. - <우천사>는 태권 소녀와 소년원 학교 출신 소녀의 만남과 사랑을 다룬다. 처음 시나리오 작업을 어떻게 진행했나. =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전작 <담쟁이>가 상영되던 시기에 원작 작가님으로부터 연출을 부탁받았다. 태권도 선수와 소년원 출신의 아이가 만난다는 주요 골자는 그대로지만 원작은 더 어둡고 폭력적 묘사가 많았다. 그래서 기본 주제 의식은 지키되 사랑 이야기가 70% 더 도드라지도록 각색했다. - 1999년을 배경으로 둔 만큼 당대를 나타내는 소품들이 눈에 띈다. 90년대 특유의 현수막 글자체부터 뚱뚱한 컴퓨터 모니터, 스칼렛 컬러의 몰딩까지. 미술 구현 과정은 어땠나. = 예산이 많지 않아서 최소 주영의 집과 성희의 집만큼은 1999년의 풍경을 반영하려 했다. 붉은 몰딩도 우리가 새롭게 도배한 것이다. 다른 데 돈을 줄이는 대신 미술 표현을 더 강조했다. 제작사에도 ‘미술을 위해서라면 회차를 줄이겠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가장 구하기 어려웠던 소품은 태권도 대회에서 나왔던 호구다. 머리에 쓰는 보호 장구인데 옛날 버전을 구하기가 어려워 시간이 오래 걸렸다. 또 시합장의 매트도 그 당시 쓰던 것을 찾아서 깔았다. - 장면에 맞춰 나오는 노래들은 어떻게 선정했나. 수연이 예지에게 반한 노래방 장면에서 자우림의 <애인발견>이, 여행을 떠날 때에는 신화의 <으쌰으쌰>가, 또 천국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에서는 고호경의 <처음이었어요>가 흘러나온다. = 노래 가사 자체가 시나리오 맥락과 일맥상통하길 바랐다. <애인발견>의 경우 ‘바보 같다 생각했어 널 처음 봤을 때' 라는 가사로 시작하는데 주영과 예지의 관계사를 보여주기도 하고, 끼 부리는 예지를 사랑할 수밖에 없도록 마지막 도장을 찍어준다고 생각했다. <처음이었어요>는 사실 가편집 단계에 김광석 노래를 깔아두었다. 그런데 김사월 음악감독이 여성의 목소리로 첫사랑의 설렘을 표현해주면 좋겠다는 의견을 주었다. 한번 맞춰보니 정말 잘 어울리더라. 그렇게 최종 플레이리스트가 완성됐다. - 아티스트 김사월과는 <담쟁이>부터 음악감독으로서 인연이 이어지고 있다. 어떻게 <우천사>까지 함께 하게 되었나. = 감독은 스탭과의 소통 방식을 따로 배우지 않는다. 그래서 의견을 나누는 과정에 예기치 못한 어려움을 겪기도 하는데, 김사월 음악감독과는 합이 잘 맞았다. 뭐랄까, 텔레파시처럼 생각이 연결돼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이번에도 자연스럽게 함께 할 것을 제안했다. 특히 아이들이 납치된 모텔 신은 작업 전부터 어려웠는데, 감사하게도 내가 연출하고 싶은 바를 음악에 자연스레 녹여주었다. - 영화는 십대 청소년의 퀴어 로맨스를 그리고 있다. 자신을 알아가는 10대와 자기정체성, 이 두 키워드는 떼려야 뗄 수 없는데 이 사이에서 무엇을 포착하고 싶었나. = 주인공을 고등학생으로 설정한 가장 큰 이유는 주영에게 예지가 첫사랑이기 때문이다. 보통 퀴어 영화에서 ‘여자를 사랑해도 괜찮은가?’ 하는 내적 갈등을 거치는데, <우천사>에서는 일부러 그런 과정을 빼버렸다. 첫사랑이야말로 그런 기준으로부터 가장 자유롭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마음이 들면 계산 없이 그냥 그 감정에 빠져버리고 말지 않나. 기준은 사회적 규범이나 여러 경험을 거칠수록 생겨나기 때문에 그냥 사랑하고 싶어하는, 순수한 본질에 집중하고 싶었다. - 이유미, 박수연 배우의 섬세한 감정 묘사가 큰 몰입을 키운다. 두 배우와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나. = 시나리오를 각색하면서 이유미 배우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한창 <우천사> 촬영을 하고 있을 때 <오징어 게임>이 공개됐다. 그리고 유미와 외형적으로나 연기적으로나 합이 가장 좋은 배우를 찾았는데 그게 바로 박수연 배우다. 풍파를 거친 예지와 달리 떼도 쓰고 철없어 보여도 그게 밉지 않은 사람이어야 했다. 수연은 연기 속에서 사랑스러운 구석을 잘 보여준다. 주변 인물들에게 물어물어 직접 전화통화로 캐스팅을 했다. 다른 독립영화에서 눈여겨 봐왔는데 밝고 순수한 면을 부각시킨 작품이 없던 것 같아 그런 면을 많이 강조했다. - 현재 패션 스타일로 각광 받는 Y2K는 사실 특정한 세대적 풍경이 담긴 언어이기도 하다. 새로운 세기가 도래하기 전 대두되었던 지구종말론과 각종 루머, 대중적 불안이 가득한 시기였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이 예지와 주영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 세기 말의 사랑을 다룬 영화를 보면 공통점이 하나 있다. 시대적 제한이 있어야 사랑이 깊어진다는 점이다. 사실 진짜 지구 종말이 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불확실 속에서 영원을 말하고 사랑을 약속한다. 이런 배경 아래 예지와 주영이도 서로를 더 확신했을 것이다. 이 시기를 거쳐 본 모든 이들은 가장 막연한 시간 속에 다음을 약속해봤다. 향수처럼 그리운 그 때의 풍경을 드러내고자 했다. - 하지만 무려 지구 종말을 앞두고 “우리가 천국에 갈 수 없지만 사랑은 할 수 있겠지”라는 말은 발칙하고도 나이브하게 들린다. = 맞다. (웃음) 주영이는 그런 말도 한다. “내가 너 먹여 살릴게. 우리 나중에 커서 같이 살자.” 현실적이지 않지만 그 나이이기 때문에, 또 첫사랑이기 때문에 지닐 수 있는 나이브함이다. 아마 주영이는 철저히 진심이었을 것이다. - 예지 곁에는 허심탄회하게 마음을 고백할 수 있는, 혈연관계가 아닌 이모가 있다. 예지는 소년원 학교 출신이지만 그에게도 좋은 어른이 있다는 게 무척 상징적이다. 태권도부 아이들에게도 주변 어른이 있지만 아무도 사고를 막지 못했잖나. <우천사>는 어른이 놓친 역할을 꼬집는다. = 예지에게도 네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어른이 있길 바랐다. 그래야 예지가 살 것 같았다. 이모의 전사는 사실 이렇다. 이모도 레즈비언으로서 예지의 어머니를 사랑했고, 가정폭력 피해자인 예지 어머니가 남편을 죽였을 때 죄를 다 뒤집어쓰고 교도소에 간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놓는 그의 모습을 보며 아마 예지도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영화 속의 아이들은 어른들의 올바른 보호 속에 있지 않지만 나 또한 좋은 어른을 만나고 싶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지금의 내가 그런 어른이 되고 싶기도 하고. 그런 복합적인 마음이 담겨 있다.

[정준희의 디스토피아로부터] 다락방

옛집에는 다락방이란 게 있었다. 집을 짓다 보면 생기게 마련인 허드레 공간인 셈인데, 좀 작으면 그냥 ‘다락’이었고, 사람이 들어갈 만한 여지가 있으면 다락‘방’이 되었다. 어릴 적 나는 이 다락방에서 많은 걸 했다. 사촌 동생과 놀아준다는 핑계로 어른들의 눈을 피해 나는 갖지 못했던 좋은 장난감을 충분히 만져볼 수 있었다. 보퉁이에 싸인 잡스러운 것들을 뒤져보는 재미에 더해 가끔씩 요긴한 물건을 ‘득템’하는 행운도 찾아왔다. 대개는 그곳에서 책을 읽었다. 퍽 학구적인 아동기를 보낸 것 같지만, 실은 계통이 잘 잡히지 않는 독서였다. 이른바 ‘남독’에 빠져 있던 셈인데, 삼중당문고 한국 근대문학 소설에서부터, 일본 대하소설 <대망>의 해적판, 고모가 보던 하이틴 잡지, 할아버지가 길거리에서 산 <생활상식백과>에 이르기까지, 말 그대로 손에 잡히는 대로 읽었다. 꿈을 해몽하는 법을 배웠고, 일본의 전국시대를 머릿속에 그려넣었으며, 이름이 비슷한 김동인과 김동리의 확연한 차이를 알게 됐다. 필경 지금의 내 잡학 가운데 3할 정도는 그 다락방에서 만들어졌을 테다. 그때 내가 책을 읽었던 건, 할 게 그것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텔레비전이 있었다. 하지만 매캐한 담배 연기로 싸인 증조부모 방에 가야 했고, 이분들은 전기를 금만큼이나 소중히 여기셨다. 골목길에서 딱지와 구슬치기도 했다. 그러나 잦은 이사로 학교를 멀리 다녔던 까닭에 반 친구는 있어도 동네 친구는 많지 않았다. 들로 산으로 뛰놀아야 비로소 성이 차는 유형은 아니었던 나는, 그럴 때마다 다락방에 들어갔다. 움푹 팬 천장을 가로지르는 서까래 위에 아슬아슬하게 누워 문고판 책을 펼치면 비록 문장이나 단어는 생경하더라도 그 안에 등장하는 인물과 사건의 시공간 속에 스며들 수 있었다. 아마도 그때부터, 사람과 사물을 ‘3인칭 관찰자 시점’에서 지켜보고 묘사하는 습관이 들었던 것이리라. 오늘날의 집에는 다락방이 없다. 집을 지을 때부터 철저히 계산된 도면에는 손바닥만 한 자투리 공간에조차 구체적인 이름과 기능이 부여된다. 굳이 ‘팬트리’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수납 기능의 공간에는 여전히 잡스러운 물건이 들어차 있다. 하지만 만약 지금의 내가 그곳에 처박혀 있으면, 필경 아내나 아이는 심각하게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볼 터. ‘우울증’이라든가 ‘중년 히키코모리’ 같은 검색어를 스마트폰에 쳐넣으면서 말이다. 할 건 너무나 많고, 읽고 보고 들을 것들이 차고 넘친다. 직업상 구독하고 있는 동영상 서비스만 해도 대여섯 가지가 된다. 학자답게 문자 매체를 고집하고 싶다면, 내 손길을 기다리는 수많은 책이 서재에 쌓여 있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는 그 많은 ‘할 것들’에 깊이 스며들지 못한 채, 손가락으로 화면만 쓸어 넘기며 나른해한다. 다락방에 있던 빈곤 속의 풍요를 찬미하려는 것도 아니고, 콘텐츠 폭발 시대가 주는 풍요 속의 빈곤을 개탄하려는 것 역시 아니다. 부족함 가운데 풍성함을 일궈냈던 것이 나라면, 너무나 많은 매체에 둘러싸여 나른해져버린 것도 나다. 내비게이션은 기계이고 장치다. 항행자는 결국 나다. 그런 내가 지금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는가, 지금 여기 내 다락방은 무엇인가. 그 이야기로 이 작은 지면을 채워갈 요량이다.

[기획] 칸영화제 화제작 대담, 어쩌면 이별의 셀러브레이션일

한국영화 <화란>의 첫 상영이 끝난 5월24일 낮, 16일에 개막한 영화제는 어느덧 중간점을 지나고 있었다. 빼곡한 상영 일정의 틈새를 노려 숙소 식탁에 둘러앉은 세명의 기자가 이날까지 공개된 17편의 경쟁부문 영화와 그외 섹션의 화제작들을 톺아보며 중간 결산의 시간을 가졌다. 1. 확장과 심화, 칸 단골들의 향연 김혜리 아키 카우리스마키를 비롯한 올드 보이들의 귀환이 올해 키워드다. 1990년대에 내가 대학에 다닐 때 김홍준 감독님(구회영)이 <영화에 대하여 알고 싶은 두세 가지 것들>이라는 책을 냈었는데 그 목차하고 거의 비슷한 이름들이 2023년 칸에 와 있더라. 빔 벤더스, 마틴 스코세이지, 빅토르 에리세, 기타노 다케시 등. 혹시 내가 타임머신을 탄 건가 착각을 부르는 라인업이다. 앞서 세번 칸을 방문할 동안 늘 켄 로치가 있었는데, 올해도 무려 네 번째로 함께한다. 송경원 이 정도면 운명적인 관계 아닌가. 현재까지 공개된 경쟁부문 영화 중 평점이 가장 높은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폴른 리브스>는 일정 문제로 우리 중에서 유일하게 김소미 기자만 볼 수 있었는데, 영화 어땠나. 김소미 <희망의 건너편> 이후 6년 만의 귀환이면서 감독이 30년 전에 처음 시도한 워킹 클래스 3부작으로의 회귀라는 점에서 뭉클한 데가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 상황을 중계하는 라디오 사운드를 배경으로 고단한 노동자 남녀의 표정 없는 로맨틱 코미디를 펼친다. 카우리스마키의 30년 전 영화들에서 나아진 바 없이 노동자들의 삶의 조건은 더욱 쓸쓸하고 가차 없어졌지만 건조함 속에서도 삶을 향한 연민은 오히려 선명해졌다. 김혜리 <폴른 리브스>가 카우리스마키의 노동 3부작을 잇는다고 평가할 만한 부분은 자본주의의 변화 양상을 인물들의 생활환경에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인가. 김소미 유통기한 지난 샌드위치를 집에 가져가려다 발각된 슈퍼마켓 직원과 술을 마시고 작업하다가 쫓겨난 공사장 인부가 제각기 해고된 이후에 사랑에 빠진다. 두 사람의 사랑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사소한 것들에 영향을 받는데, 가난할수록 선택지가 적기 때문에 더욱 포기하기 힘든 삶의 어떤 필수 조건들로 인해 어긋나는 연인의 코미디를 보고 있다보면 <모던 타임즈>가 떠오른다. 이번엔 실제로 채플린을 직접적으로 인용하기도 하고. 김혜리 다르덴 형제는 <토리와 로키타>에서 미성년 난민에 주목했고 켄 로치는 <미안해요, 리키>에서 택배 기사를 주인공으로 긱 이코노미를 들여다보았으니 두 감독과 비교해보는 것도 하나의 포인트가 될 것 같다. 송경원 카우리스마키의 영화는 비관주의자의 낙관이 주는 힘이 있다. 누리 빌게 제일란과 비교되는 지점도 흥미롭다. 누리 빌게 제일란의 <어바웃 드라이 그래시스>가 위선적인 인물들의 지적인 수다로 튀르키예의 현재를 들춘다면, <폴른 리브스>는 동시대의 전쟁 상황을 라디오를 통한 배경음 정도로만 간단히 처리하는데 관객에겐 후자가 더 강력한 효과를 발휘할 때가 있다. 김혜리 올드 보이들 외 칸 키드이자 단골이라 할 수 있는 토드 헤인스, 웨스 앤더슨까지 포함해 올해는 기존에 자신이 갖고 있던 방법론과 스타일을 더욱 확장하거나 순도 높게 심화시킨 감독들의 결과물들이 눈에 띈다. 가령 마틴 스코세이지 영화 <킬러스 오브 더 플라워 문>은 <아이리시맨>에 이어서 미국 자본주의가 어떻게 이 참혹한 지경까지 왔는지 그 배경을 보여주는 영화다. 원주민 구역에서 석유가 채굴되면서 갑자기 부유해진 오세이지족에 백인들이 접근하기 시작해 착취, 나아가 연쇄 살인까지 벌인다. <애스터로이드 시티>로 경쟁부문을 찾은 웨스 앤더슨의 경우에는 확실히 취향의 문제를 거론할 수 있겠다. 웨스 앤더슨 초기 영화들 특유의 멜랑콜리함, 페이소스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웨스 앤더슨의 최근 영화들이 점점 차가워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이번 영화 <애스터로이드 시티>도 대사와 시각 정보의 양이 상당해 따라가기 벅찰 정도다. 한편 그의 애니메이션들을 연상시키는 인형극적 요소도 돋보인다. 웨스 앤더슨이 점점 더 전통적인 영역을 벗어나 자기 세계를 짓는 모습에 아쉬워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다르게 보면 웨스 앤더슨이 시네마의 영토를 넓히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싶다. 송경원 경쟁부문 리스트에서 강력하게 한방을 보여준 작품은 상대적으로 부족한 해가 아닌가 싶다. 지금까지 본 영화 중 특히 언급하고 싶은 작품은 누리 빌게 제일란의 <어바웃 드라이 그래시스>다. 자기 복제의 소지도 있지만 끊임없는 대화 속에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사회문제를 녹이며 튀르키예의 현재에 관한 화두를 던진다. 미술 교사인 주인공이 스케치를 위해 계속 사진을 찍는 장면들도 기록 필름처럼 아름다웠다. 김소미 <파 프롬 헤븐>을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보았던 김혜리 선배는 올해 토드 헤인스를 <메이 디셈버>로 다시 만났다. 두 작품의 괴리가 <메이 디셈버>의 개성을 말해주기도 하는데 감상이 어떤지 궁금하다. 김혜리 <파 프롬 헤븐>이 할리우드 고전 멜로드라마에 대한 사랑으로 점철된 정념의 영화라면, <메이 디셈버>는 굉장히 다성적인 형식으로 나아간다. 음악, 연기, 서사, 미장센 등이 서로 불협화음을 내면서 보는 사람을 자꾸만 영화 뒤편으로 끌어당긴다. 기본적으로 타블로이드적인 사랑 이야기의 뼈대 위에 있는 이야기다. 나이 차이가 많은 관계를 뜻하는 제목처럼 30대 중반의 여성이 13살 소년과 사랑에 빠져서 감옥에 가는데, 출소 후에도 그 사랑을 유지한다. 결혼해서 아이까지 낳아서 잘 살고 있는데, 어느 날 자신을 연기할 배우가 찾아와 리서치를 목적으로 관찰과 인터뷰를 이어간다. 남녀를 바꿔 생각하면 굉장히 위험한 소재인 셈이다. 송경원 그래서 거리두기의 형식을 고집한 게 아닐까. 비틀린 코미디, 사이코 드라마, 소프오페라, 텔레노벨라의 요소가 모두 섞여 있다. 토드 헤인스 본인은 부정하지만 어쩔 수 없이 페드로 알모도바르도 떠오른다. 김소미 여러모로 토드 헤인스가 <벨벳 골드마인>과 <아임 낫 데어>의 감독이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하는 영화다. 인물 구도 면에서는 잉마르 베리만의 <페르소나>가 떠오르기도 했는데. 김혜리 인터뷰 때 토드 헤인스 감독이 올해 칸에 배우 리브 울만이 와 있다는 말을 듣고 베리만의 <페르소나> <겨울빛>이 자신에게 얼마나 많은 영향을 주었는지 그분에게 직접 꼭 말하고 싶다고 무척 들뜬 얼굴로 말했었다. 또 하나 재밌었던 것이 이 영화의 거울숏이다. 그레이시(줄리앤 무어)와 그레이시를 모델로 한 인물을 연기하기 위해준비 중인 배우 엘리자베스(나탈리 포트만)를 거울 앞에 나란히 세우기도 하고 거울을 소품 삼아 경계선을 만들기도 한다. 이후 엘리자베스가 그레이시가 되어 과거에 그레이시가 10대 소년에게 보냈던 편지를 읽는데, 관객이 엘리자베스를 정면으로 보고 있는 카메라 렌즈가 엘리자베스에겐 거울이 되는 효과가 생성되면서 두 여자가 겹쳐지는 궁극의 거울숏으로 수렴된다. <메이 디셈버>는 관계 바깥에 있던 외부자가 내부로 들어왔을 때 당사자들이 자신의 정체성으로 믿고 있었던 것들을 어떻게 손쉽게 흔들어놓는가를 질문한다. 더욱이 이 영화 속 남녀는 둘의 관계가 사랑이라고 맹목적으로 믿지 않으면 외부의 압박으로부터 도저히 자기를 지켜낼 수 없는 수세적인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이다. 송경원 또 다른 단골 손님인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괴물>에서 선명한 변화를 시도한다. <라쇼몽> 형식으로 똑같은 상황을 두고 엄마의 시점, 선생님의 시점, 그리고 아이들 관점을 구분해 보여주는데 이것이 단순히 시점의 변화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전체 편집의 호흡, 색감, 인물을 바라보는 방식들도 완전히 바뀐다. 지금까지 고레에다 히로카즈를 향한 공통된 아쉬움이 있다고 한다면 익숙해서 진부하게 다가올 수도 있는 안전지향의 세공들로 인해 돌출된 에너지라든가 의외의 순간 같은 것은 부족하다는 점일 텐데 <괴물>은 주제가 선명히 부각된다는 단점은 있지만 여러모로 새로운 시도에 몰두하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야심이 느껴져 크게 기억에 남는 영화였다. 다만 프랑스, 영미권 매체에선 평가가 박하다. 김소미 고레에다의 첫 퀴어영화라는 점에 대해 서구 관객과 아시아 관객이 받아들이는 감각도 다를 듯싶다. 칸영화제가 고레에다 히로카즈에게 바라는 것은 <클로즈>가 아닐 테니. <태풍이 지나가고> 이후 <세번째 살인> <파비안느의 진실> 등 장르나 스타일 면에서 색다른 시도를 해왔지만 기본적으로 고레에다는 일본영화의 전통 안에서 개별 작품들이 각각 매우 안정적이고 균질한 장인의 미학을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괴물>은 카메라워크부터 편집의 리듬감 등 모두 어떤 면에선 덜 다듬어진 것처럼 보일 정도로 과하고 역동적이다. 나도 이 도전을 지지하는 쪽이다. 2. 시간을 발명하는 영화들 송경원 올해 칸 상영작 중 러닝타임이 특징적인 영화들만 모아서 이야기해봐도 좋겠다. 우선 마틴 스코세이지의 <킬러스 오브 더 플라워 문>은 러닝타임이 3시간26분으로 스코세이지 영화 중 가장 길다. 김혜리 이렇게나 에너지가 높고 리듬감이 살아 있는 스코세이지 영화가 전에 또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재미있다. 러닝타임은 길지만 마치 넷플릭스의 화제작 미니시리즈를 4화 정도까지 보고 나온 것 같은, 대가의 손길에서만 느낄 수 있는 안락함과 편안한 재미가 있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릴리 글래드스턴 커플을 묘사하는 방식도 노련하다. 문화적인 뿌리, 세계관이 너무 다른 두 사람을 다룰 때 한 쪽을 신비화하거나 오리엔탈라이즈하기 쉬운데 <킬러스 오브 더 플라워 문>은 원주민을 지나치게 이국적인 방식으로 재현하지 않고, 지독하게 말귀를 못 알아듣는 어리석은 남자인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편의적으로 용서하지도 않는다. Apple TV+가 창립 이후 영화 한편에 가장 많은 제작비를 쏟은 작품이라는 기념비적 의미도 있다. 스코세이지는 1986년 <특근> 이후 이번이 두 번째 칸 방문이다. 송경원 긴 영화들에 대해 이야기하면 빼놓기 힘든 작품이 경쟁부문의 다큐멘터리, 왕빙 감독의 <유스(스프링)>이다. <비터 머니> 이후 청년 노동자들에 대한 다큐가 다시 나왔다. 열악한 노동 환경에 처한 청춘들을 고발하려는 목적이 앞자리에 있는 영화는 아니고 극적인 터치를 최대한 배제한 채 있는 그대로 보여줄 수 있는 것들을 물리적인 한계치까지 담아내려는 시도에 가깝다. 3시간32분 동안 의료 도시 작업장의 미싱 소리를 듣고 비슷한 노동 풍경을 반복해서 본다는 것은 견디기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왕빙의 영화를 보다 보면 어느 시점부터 내가 카메라 뒤에 서서 미싱을 돌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 감각이 찾아오기까지 최소한 2시간은 필요한 것이다. 시간의 흐름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고여 있는 시간을 보다 보면 어느새 시간이 살아난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김소미 왕빙의 앞선 작품들에 비해서 특별히 뛰어난 영화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런데 이번 영화는 왕빙이라는 다큐멘터리스트의 작업이 가지는 수행적 면모가 영화 내적인 서사와 맞물려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하루 종일 미싱을 돌리고 꿰매고 자르는 움직임, 한 사람에게서 또 한 사람에게로 반복적으로 초점을 옮기는 형식, 6년 가까이 그들 곁에서 머문 왕빙의 촬영 과정이 영화 안팎에서 하나로 거대한 노동으로 맞물린다. 송경원 칸에 도착해서 처음 본 경쟁부문 바깥의 영화가 칸 프리미어 섹션의 <유레카>였다. 러닝타임 2시간26분으로, 실제로 그리 긴 영화는 아닌데 꽤 긴 시간을 여행하는 것처럼 다가왔다. 리산드로 알론소가 <도원경>에서 했던 시도를 형식적으로 더 밀어붙인 작품이 <유레카>라고 할 수 있다. 전반적으로 평이 아주 좋지는 않은데, 그건 아무래도 관객과 더 멀어지는 선택이기 때문일 수도 있겠고 형식에 대한 집착과 강박이라는 평가도 있다. 나는 아주 좋게 봤다. 존재의 기원에 대한 서사를 펼치면서 늘 화면 안으로 파고드는 수직 운동을 하는 알론소의 스타일이 이번 영화에서도 역시 주제와 형식의 적절한 조우로 느껴진다. 극장에서 꼭 다시 보고 싶다. 김혜리 수입이 안될 텐데…. (일동 폭소) 김소미 우리를 고양시키는 영혼을 위한 영화라 하고 싶다. 시간의 속도에 타협하지 않는 태도가 더욱 강건해졌다. 리산드로 알론소는 이제 슬로 시네마가 아니라 슬리피 시네마로 나아가고 있다. 몽환적이거나 시적인 연출에 의존하지 않는데도 대단히 반내러티브적인 장면의 연결들로 인해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의 의식 속에서 꿈꾸는 것과 비슷한 작용이 일어난다. 흑백의 서부극인 오프닝 시퀀스로 시작해 뒤로 갈수록 신비주의적인 시간 여행이 일어나는데, 마치 내러티브가 점차 기화하는 것 같다. 한 매체는 발원지에서 먼 하구를 향해 뻗어가는 강의 지류가 끝없이 갈라지는 형상에 가깝다고 묘사하더라.

[김세인의 데구루루] 일곱시에 열두번 우는 뻐꾸기

화산 앞에서 글을 쓰려고 했다. 계획을 들은 사람들은 ‘그곳은 그럴 만한 곳이 아니에요!’라며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익히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정신없는 관광지인 것을 확인했던 터라 그곳이 글을 쓰기에 적합하지 않은 공간인 것은 나 또한 알고 있었다. 그래도 화산 앞에서 글을 써보고 싶었다. 또 ‘화산 앞에서 글을 쓰려고요’라고 말해보고 싶었다. 어쩐지 그렇게 말하는 것이 스스로 좀 근사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자아도취에 빠져 케이블카를 타고 산등성이를 한차례 넘자 정거장에 도착했다. 예상했던 것보다도 더 별 볼 일 없었다. 그날따라 날이 좋아서 역시 나는 운이 좋다며 신나게 숙소를 나섰는데 날이 심하게 너~무 좋아서 내리쬐는 태양 아래 증기도 연기도 신묘한 기세도 아무것도 없이 거대한 공사판 같은 날것의 흙바닥만 먼지를 피우고 있었다. 뭘 해야 할지 몰라 일단은 수명을 7년 늘려준다는 검은 달걀을 사서 먹었다. 따가운 햇볕 아래서 먹자니 목이 막혀 수명이 더 줄어드는 기분이었다. 시원한 것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검은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샀는데 사진을 한장 찍자마자 고온의 날씨 탓에 초스피드로 흘러내려 엉덩이를 쭉 뺀 요상한 자세로 흡입해야만 했다. 양손이며 흰 운동화며 검은 아이스크림으로 범벅이 되어서 화장실을 찾아 돌아다녔다. 화장실에 들어가 거울을 보자 아이스크림은 분명 입으로 먹었는데 뺨, 눈꺼풀, 코에도 검정 얼룩이 묻어 있었다. 이래서 다들 날 보고 웃었구나.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산통이 깨져 글은 무슨 글이냐 싶어 그대로 화산을 내려갔다. 화산 앞에 앉아서 드는 생각들에 대해 쓰려고 했지만 소득을 얻지 못해 다른 주제를 찾아야 했다. 꽤 오랫동안 벼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외 별다른 주제가 생각나지 않아 괜히 애꿎게 이전에 썼던 글들만 스크롤을 올리고 내리며 뒤적였다. 그러다 발견한 것이 하나 있다. 지난 세편의 글들 모두 과거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거였다. 유년 시절과 지난가을, 지난여름…. 그뿐만 아니라 이전에 썼던 각본집에 포함된 에세이들, 장단편의 시나리오들 또한 과거를 돌아보며 쓴 글들이다. 나는 과연 회고적 인간이구나 싶었다. 이러한 기질을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내가 쓴 거의 모든 글들이 과거를 향해 있는 것을 확인하자 민망했다. 일상을 보내며 어느 순간부터 시간의 초점이 계속 틀어지고 있음을 자각했다. 감각 자체가 현재보다는 과거나 미래로 기울어져 있어 어정쩡한 상태로 살아가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아주 조금씩 야금야금 틀어져 몇해 전에는 이거 큰일이다 싶었다. 그래서 그 간극을 좁히려 여러 해 동안 이런저런 것들을 배우고 익혔는데. 이렇게 글의 첫 문장들은 여전히 과거에 놓여 있었다. 시간을 들여 생각해야지만 정리되고 비로소 쓸 수 있었다. 어떤 글들은 그렇게 숙성의 과정을 거쳐 깊어지기도 했지만 대체로 시들해졌다. 계속 이런 식의 글쓰기는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 느끼는 것 자체로 담백하게 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노스탤지어라든지 어떤 꾸밈을 빌려야지만 글을 쓸 수 있는 자기 확신이 없는 겁쟁이 글쓰기 방식으로 말이다. 화산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곳에 앉아 두서없이 떠오르는 생각을 있는 그대로 써내려가고 싶었던 거구나. 그 또한 지금에서야 한 박자 늦게 알아차렸다. 요즘은 최승자 작가의 <어떤 나무들은–아이오와 일기>를 읽고 있다. 1994년 8월 말부터 1995년 1월 중순까지 하루하루의 지형이 소탈하지만 힘 있게 그려져 있다. 아까워서 급하게 읽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 지난가을에는 하미나 작가의 <베를린 유학기>를 구독해 출근길에 읽었다. 정말 놀라운 작가들이다. 존경한다. 뜸 들이거나 주저하지 않고 현재의 상태를 거의 실시간으로 기록해나가는 것이 굉장히 대범하다. 느끼는 즉시 써야지만 담기는 에너지가 분명 있다. 현재의 충만함, 기쁨, 슬픔, 아쉬움, 혼란, 분노, 만족, 창피함, 사랑…. 거쳐가는 수많은 감정을 어떠한 꾸밈도 용납하지 않고 독자에게 건넨다. 작가에게 발생하고 변화하고 소멸되는 어떤 것들이 그대로. 그야말로 날것의 활동들이 담겨 있다. 이러한 글들을 만나면 부끄러워진다. * 한달 전 뻐꾸기시계를 샀다. 이번 봄에 선생님께서 ‘너의 말이 새소리처럼 상쾌하게 들린다!’라고 말씀하셨다. 그 문장이 너무 예쁘고 아름다워서 나의 말보다 해사하게 웃으며 말씀하신 선생님의 말이 더 고운 새소리처럼 느껴졌다. 뻐꾸기가 때마다 시간을 알려준다면 그 아름다운 문장처럼 일상도 상쾌하고 청아하고 개운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초등학생 시절에는 우리 집에도 친구네 집에도 어딜 가든 뻐꾸기시계가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비싼 물건인 줄 몰랐다. 20만원에 가까운 금액으로 시계를 구매하기에는 부담스러워서 전통 뻐꾸기시계가 아닌 플라스틱 뻐꾸기시계로 구매했다. 그래도 색상은 한층 더 산뜻한 오렌지색이었기 때문에 기대했다. 그런데 정작 배달된 시계는 너무 조악해서 깔짝깔짝 흔들리는 시계추도, 엉성하게 색칠된 뻐꾸기도 매우 간사해 보였다. 그래도 울음소리만큼은 우렁찼는데 이 녀석이 일곱시에는 열두번을 울고, 열두시에는 세번을 울고 제멋대로였다. 문도 벌컥 열고 나와 시간에도 맞지 않는 울음소리로 나를 헷갈리게 만들고 할 일 끝내고 문을 획 닫고 들어가는 게 좀 건방지게 느껴졌다. 고양이들은 익숙하지 않는 소리에 정각마다 화들짝 놀라 뻐꾸기 곁으로 후다닥 달려갔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귀도 수염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공허하게 울리는 바보 뻐꾸기의 울음소리가 한동안은 꽤 짜증이 났지만 시간이 지나자 이제는 어쩐지 가엾게 들린다. 오늘은 저 뻐꾸기를 손 좀 봐줘야겠다. 그래도 완전 애먼 시간이 아닌 정각에는 울기 때문에 조율이 꽤 수월할 거라 예상된다. 뻐꾸기집의 뚜껑을 열고 시계의 톱니바퀴를 세밀하게 잘 조율해봐야겠다. 뻐꾸기가 과거의 울음소리나 미래의 울음소리를 지저귀지 않게. 제때에 맞춰 상쾌하고 개운하게 그리고 우렁차게 울기를.

[김세인의 데구루루] 무서운 이야기

인천 자유시장 입구에는 가파른 계단이 있었다. 성인의 걸음으로도 제법 다리를 올려야만 하는 높이였다. 한낮에 입구에서 계단 위를 바라보면 그곳은 너무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층에는 장터를 뺑 도는 창문 없는 복도가 사각형으로 이어져 있었다. 복도 한면만 해도 길이가 꽤 되었는데 고작 한두개의 전구만 꺼질 듯 희미하게 빛을 품고 있어 전혀 주변을 밝히지 못했다. 그래서 한쪽 모퉁이에서 다른 쪽 모퉁이를 바라보면 그저 한두개의 흰빛 덩어리만 보일 뿐이었다. 한층 아래는 활기 넘치는 시장의 소리가 들렸지만 한층만 올라서면 이따금 들리는 물 흐르는 소리와 전구 곁을 지날 때만 들리는 전기 소리 이외에는 아무 소리도 없이 고요했다. 긴 복도에 여러 개의 문이 줄지어 있었지만 그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한층을 사이에 둔 소리와 빛의 간극 덕분에 복도를 한 바퀴 돌고 내려오면 우리는 아주 먼 곳에 오래 다녀온 기분이 들었다. 더위에 한껏 빨갛게 달아올랐던 두뺨도 어느덧 금세 싸늘해졌다. 그럼 못내 아쉬워 주저하다 계단을 다시 오르곤 했다. 그렇게 학교가 끝나면 친구들과 ‘도깨비 집’으로 불리던 그곳을 두세번 돌고 집에 들어가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일과 중 하나였다. 가끔 전구 밑에 사람의 형태가 보였다. 그럼 우리는 그것이 진짜 귀신이었으면 바라면서도 진짜 귀신이 아니었으면 하는 상반된 오묘한 기대를 품고 한 걸음씩 다가갔다. 긴 복도의 바닥은 두세칸의 미니계단과 함께 이상하게 기울어져 있었다. 걷는 감각이 일상의 것과 사뭇 달라 울렁거렸다. 긴가 민가 하다 인식 범위에 들어서면 역시 짐 더미거나 쓰레기봉투였다. 안심하면서도 싱거운 마음으로 지나쳐가다 멀어지면 꼭 가자미눈으로 돌아보며 물체가 다시 사람의 형태로 보이는 것을 확인하고 ‘역시 저게 진실일지도 몰라’ 생각했다. 하루는 저녁에 시장으로 심부름을 갔다가 호기롭게 혼자 그 계단을 올랐다. 껌껌한 복도 앞에서 금방 심장이 콩알만해져서 다시 계단을 내려가는데 한 남자애가 뚜벅뚜벅 계단을 올라왔다. 남자애도 공포 체험을 하러 온 거구나 싶어 반가운 마음에 서둘러 다시 쫓아 올라갔다. 복도를 반쯤 왔을까. 남자애가 갑자기 멈춰 서더니 줄지어 서 있는 문 중 하나를 열었다. 나로서는 전혀 상상도 못한 전개였다. 문이 활짝 열리더니 그 안에서 ‘어서 와’ 하는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그와 함께 된장찌개 냄새와 고소한 기름 냄새, 텔레비전 소리, 달그락거리는 그릇 소리, 밝은 형광등 불빛 등 지극히 일상적인 풍경이 쏟아졌다. 남자애는 새침하게 문을 쾅 닫아버리고 나는 복도에 덩그러니 혼자 남겨지게 되었다. 깜짝 놀라 정신없이 계단을 뛰쳐 내려갔다. 갑자기 복도에 혼자 남게 되었다는 것보다 그 문들이 단순히 방음이 잘된 집들이었다는 것, 고작 그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우리가 공포 체험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 충격이었다. 미안하고도 이상한 마음이 들어 다시는 그곳에 가지 않았다. 나는 괴담을 좋아해서 몇년 전까지는 동네 친구들과 둘러앉아 괴담을 즐겨 나눴다. 지금은 인터넷으로만 괴담을 찾아보는 정도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괴담을 읽다 보면 머릿속에 빼꼼 문이 열린다. 이윽고 어디선가 된장찌개 냄새가 나고 텔레비전 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아니면 희미한 전구 불빛이 켜지고 그 밑에 쓰레기 봉지가 놓이는 것이다. 도무지 무시할 수 없게 작고 희미하지만 분명하게. 그럼 괴담들이 결국 모두 사람의 것으로, 너무나도 사람의 것으로 느껴져 무섭다기보다는 슬프고 미안해진다. 결국 공포는 삶의 어찌할 수 없음에서 오는 감각이기에. 결국 아주 깊은 슬픔은 공포이고, 공포는 아주 깊은 슬픔인 걸까. * 중학생 때 흔히 그렇듯 비 오는 날이면 선생님을 설득해 수업 대신 무서운 이야기를 했다. 한 선생님은 교탁을 우리에게 넘겨주셨고 우리는 돌아가며 무서운 이야기를 했다. 대개 그런 자리면 평소 말이 많고 나서기를 좋아하는 친구들이 자리를 차지하지만 그때만큼은 꽤 공평하게 자리가 돌아갔다. 그리고 그 순간만큼은 조용한 친구들이 오히려 인기가 좋았다. 고이 간직해둔 기묘한 비밀을 꺼내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나도 그럴 때면 나름 인기가 좋았는데 입도 떼기 전에 ‘무서워!’, ‘쟨 그냥 무서워!’ 이런 소리를 듣는 것은 좀 억울했다. 사람 눈을 잘 못 쳐다봤기 때문에 허공을 보며 말한 것도, 목소리가 덜덜 떨렸던 것도, 도중에 머뭇거렸던 것도 괴담 발표자로사 인기에 한몫한 것 같다. 다양한 말투와 성향의 친구들이 번호 순서대로 나와 교탁을 잡았다. 때로는 깜짝 놀랄 종류의 무서운 이야기, 때로는 잔잔하지만 뒤늦게 밀려오는 종류의 무서운 이야기, 때로는 무서운 이야기인 줄 알았지만 듣고 보니 웃긴 이야기 등 적절하게 배합되어 오히려 긴장했다가 풀렸다가 분위기가 아주 밀도 있게 쫄깃쫄깃했었달까. 비가 계속 왔다. 장마였다. 비가 오고 또 왔다. 우리의 무서운 이야기도 고갈되었다. 그럼에도 수업을 하기 싫다는 일념 하나로 선생님을 꼬드겨 다시 무서운 이야기 시간을 가졌다. 이제 선뜻 누구도 교탁에 서지 않았다. 결국 목소리가 큰 친구들만 다시 교탁을 잡았다. 그렇지만 이제 더이상 할 이야기가 없던 그 목소리가 큰 친구들은 저번에 했었던 무서운 이야기를 교묘하게, 비슷하게 다시 늘어놓았다. 또 그냥 생각나는 대로 앞뒤가 맞지 않는 무서운 이야기, 시시한 무서운 이야기를 떠들어댔다. 나머지 친구들도 그 이야기들이 더이상 무섭지 않았지만 수업을 시작할까 봐 선생님의 눈치를 보며 무서운 척했다. 목소리가 큰 친구들도 자신들의 이야기가 무섭지 않았지만, 믿기지 않았지만 선생님의 눈치를 보며 아주 무서운 척했다. 선생님도 이야기가 무섭지 않았지만 수업을 하기 싫으셨는지 그냥 그대로 두었다. 결국 아무도 이야기를 무서워하는 사람 없이 눈치 보는 사람, 방관하는 사람만 있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게 가장 무서웠다. 그야말로 공포다.

[비평] 마주 보기의 불가능성을 마주보기, ‘애스터로이드 시티’와 ‘슬픔의 삼각형’

지난해와 올해 칸영화제에서 소개된 루벤 외스틀룬드의 <슬픔의 삼각형>과 웨스 앤더슨의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폐쇄된 장소를 무대로 삼는다. <애스터로이드 시티>의 배경은 미지의 소행성이 발견된 건조한 평원이다. 혜성 관측일에 외계인을 태운 우주선이 출몰하는 일이 일어나면서 그 자리에 참석한 인물의 이동이 통제된다. <슬픔의 삼각형>은 망망대해 위의 크루즈와 크루즈 폭발 사고 이후 생존자들이 모인 외딴섬을 주된 장소로 삼는다. 영화에서 특정 장소에 갇히거나 이동이 통제된 인물을 보여줄 때, 그것은 영화관에 모인 관객의 비유로 인식되곤 한다. 영화를 보는 동안 움직임이 제한된 채 화면에 시선을 고정해야 하는 관객은 갇힌 이들을 통해 자신의 현 상태를 자각한다고 이야기된다.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동시대 상황 속에서 한정된 장소와 이동의 통제는 일상에 가까운 것이 되었다. 거의 동시적이라 말해지는 극장의 위기와 팬데믹은 영화적이라고 인식된 행위를 일상에 침투한 재난 상황에 관한 비유로 바꾸었다. 팬데믹 이후라는 맥락에서 <슬픔의 삼각형>과 <애스터로이드 시티>를 놓을 때, 두 영화에서 팬데믹은 하나의 소재로 쓰이기보다는 영화의 근원을 다시 보게 하는 창구 혹은 틀이라는 다른 가능성을 얻은 것처럼 보인다. 두 작품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우리가 어떤 몸짓을 취득하거나 잃어버리게 되었는지, 혹은 같은 몸짓이 어떻게 다른 의미망 속에 놓이게 되었나를 보게 한다. 이때 중요한 매개는 사진 혹은 사진을 찍는다는 것이다. 사진은 사실성을 바탕으로 신뢰할 수 있는 증거와 기록으로 기능했다. 반면 조작이 손쉽고 정교해지면서 신뢰성을 상실해갔다. <애스터로이드 시티>의 전쟁 사진작가라는 오기(제이슨 슈워츠먼)의 직업은 설정일 뿐 아무런 쓸모가 없다. 이곳 애스터로이드 시티에서 그는 전쟁과는 무관한 장면들을 촬영하며, 그의 직업은 다른 이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촬영하는 습관의 좋은 핑계가 될 뿐이다. 전쟁 사진을 찍지 않는 전쟁 사진작가는 나아가 리얼리즘 이미지가 처한 전반적인 위기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 그 반대편에는 광고와 화보 사진이 존재한다. <슬픔의 삼각형>에서 협찬으로 크루즈에 탑승한 모델 커플 야야(샬비 딘)와 칼(해리스 디킨슨)의 사진은 일상의 자연스러움을 위장한 일종의 광고다. 일광욕이나 식사 도중 포즈를 취하고, 사진을 찍는다. 파스타를 한 움큼 집어들고 먹는 포즈를 취하는 야야를 본 다른 탑승객이 파스타를 실제로 먹을 거냐고 묻는데, 이는 무용한 질문이자 쓸데없는 사족이다. 파스타를 든 인물이 실제로 파스타를 맛있게 먹었는지 여부는 사진의 가치와 목적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애스터로이드 시티>에서 오기는 배우 밋지(스칼릿 조핸슨)가 몸을 살짝 숙이자, 사진을 찍기 위해 잠시 그 자세로 멈춰달라고 부탁한다. 밋지는 방금 무의식적으로 했던 동작을 의식적 상태로 반복한다. 두편의 영화는 진실에 다가가는 두 가지 방식을 보여준다. 하나는 사진에 담기지 않는 실체를 폭로하듯 말로 보충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동일한 동작을 두번 반복하는 것이다. 한쪽이 사진 위에 일상화된 허구성을 지적하는 대화를 덧붙일 때, 다른 한쪽은 동일한 동작이 사진이 인화되는 것처럼 진실에서 진실과 비슷한 것으로 서서히 옮겨가는 모양을 지켜본다. 1950년대를 배경으로 한 <애스터로이드 시티>에서 오기는 필름 사진을 찍는다. 현상하기까지 기다림을 동반하는 필름 사진은 사진이 기억의 매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사진을 매개로 한 기억은 그리 오랜 시간 간격을 요구하지 않는다. 사진이 찍히고 다시 현상되기까지의 시간이면 충분하다. 영화에서 전쟁 사진을 대체한 것은 밋지의 사진만이 아니다. 오기가 포착한 외계인 사진은 엄격한 통제를 뚫고 도시 밖으로 전파되어 사회적 파문과 변화를 불러오면서 전쟁 사진과 비슷한 역할을 한다. 이때 외계인 사진은 그럴듯하기보다는 조악함을 숨기지 않는다는 점에서 사실적이다. 동그란 흰 바탕에 검은 점 두개로 표현한 눈을 비롯해 전반적으로 단순한 외양은 컴퓨터그래픽이 상용되기 이전에 일차원적으로 제작된 크리처처럼 보이고, 그를 찍은 사진은 외계인이 등장한 B급 고전영화의 기록용 스틸처럼 보인다. 허구의 외계인을 찍은 리얼한 사진은 무대와 텔레비전, 영화를 관통하는 허구의 역사가 전쟁 사진의 리얼리즘을 대체했을 뿐만 아니라, 리얼리즘의 전환적 회복이기도 했음을 증명한다. 마주 보는 것 <슬픔의 삼각형>에서 사진을 찍는 장면은 종종 등장하지만, 사진이 프레임에 잡히는 경우는 거의 없다(칼이 노트북 작업을 하는 장면에서 흐릿한 이미지가 등장하지만, 그것이 야야의 사진인지는 확언할 수 없다). 관객은 그저 찍히는 몸과 찍는 몸이 나란히 배치된 모습을 보게 될 따름이다. 한 인물이 다른 인물을 찍을 때 상대방을 정면에서 마주 보고 찍는 경우는 드물다. 칼이 야야를 찍는 장면에서 두 사람은 나란히 놓인 두개의 선베드 위에 몸을 기댄 채 방향만 상대방쪽으로 튼 자세가 된다. 야야와 칼의 사진 촬영 숏 직후에는 이들을 모방하는 것처럼 사진을 찍는 남자와 포즈를 취하는 여자가 거울상으로 맞붙는다. 늙은 남자는 열심히 포즈를 취하는 상대를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일으키기도 귀찮다는 듯 벌러덩 누운 자세로 손만 뻗어 버튼을 눌러댄다. 사진 찍는 장면이 사진을 대체한 광경은 사진의 아우라 상실의 원인이 그 내용 때문이 아니라 사진 찍는 행위의 무성의함에 있을 수 있음을 상상하게 한다. 무성의한 태도는 사진을 찍을 때 삭제되어버린 마주 보는 행위의 부재로 단적으로 표출된다. 마주 보는 장면은 오프닝 시퀀스에서 리포터가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방송을 준비할 때나 칼이 모델 면접을 보는 시퀀스처럼 압박받는 상황을 제외하고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예외적인 마주 봄은 2부에 잠깐 등장하는 한 남성 승무원과 관련된다. 사진을 찍으며 일광욕을 즐기던 야야와 칼은 맞은편에서 작업 중인 승무원을 눈여겨본다. 선글라스를 낀 짙은 피부의 남성은 작업 전 상의를 벗은 채 몸에 오일을 바르며 커플의 눈길을 끈다. 승무원 역시 두 사람을 발견한 듯 시선을 고정한 채 가볍게 인사를 건네고, 야야가 인사를 받는다. 카메라는 올려다보는 야야와 칼의 시선과 살짝 내려다보는 승무원의 시선을 나누어 포착한다. 인물의 행동과 대사를 통해 마주 보는 상황을 전제하지만, 이들의 실제 위치를 조망할 수 있는 마스터숏은 등장하지 않기에 마주 봄은 어딘가 미심쩍은 것으로 남는다. 더군다나 잠깐의 마주 봄에 의해 남자는 크루즈에서 하차하는 뒷모습으로 퇴장해버린다. 마주 보는 행위의 불가능함 혹은 위험함은 웃을 수 없는 농담이 담긴 오프닝 시퀀스에서 예견된 바 있다. 칼과 몇몇 모델들은 진행자의 주문에 따라 브랜드의 위상에 따라 달라지는 표정 연기를 즉흥에서 실행해 보인다. 저가 브랜드가 친밀하고 밝은 미소로 관객을 끈다면, 고가 브랜드는 카리스마 있는 표정으로 위엄을 내세운다. 배우들은 촬영 중인 카메라를 바라보지만, 이 표정은 영화를 보는 관객을 정면으로 마주 본다고 느껴진다. 당신은 ‘발렌시아가파’인 가, ‘H&M(에이치앤엠)파’인가. 둘을 오간다거나 둘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지만, 예외는 허용되지 않는다. 이 농담에 H&M식으로 웃을 수 있는가, 혹은 발렌시아가식 무표정으로 전혀 웃지 않을 것인가. 여기에서 마주 보기란 어디까지 견디거나 참을 수 있는가를 묻는 일종의 테스트다. <애스터로이드 시티>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마주 보는 숏은 관객을 정면으로 마주 보되, 관객을 시험에 들게 하진 않는다. 배우가 다른 배우와 대화한다는 전제로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볼 때, 그 마주 보기는 현대적인 행위처럼 보인다. 밋지의 방과 오기의 방은 창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위치에 있다. 창은 창문 없이 차광막이 달린 사각의 구멍으로, 조형적인 실내와 더불어 세트 느낌이 강화된다. 창가에 기댄 얼굴로 카메라에 가까이 다가선 밋지의 얼굴과 실없는 말들은 오늘날 각자의 집에서 개인 방송하는 유튜버를 연상시킨다. 창은 상황에 따라 여러 기능을 한다. 창은 대화를 나누는 창구이자, 작은 연극 무대 혹은 리허설 현장이다. 밋지는 몇개의 시퀀스를 즉흥에서 연기한다. 샤워 이후 가운으로 갈아입는 노출 장면과 약을 털어넣고 욕조에서 자살한 채 발견되는 상황을 연기하며, 오기에게 상대역을 하도록 유도한다. 오기의 방이 사진을 현상하는 암실이라면, 밋지의 방은 사진을 촬영하는 스튜디오다. 밋지가 포즈를 취하면 오기는 촬영을 한다. 마주 보기는 세계의 경계를 뛰어넘어 이뤄진다. 사람들이 고전적 VR 기계라 할 머리 하나 크기의 박스를 쓴 채 시공간을 뛰어넘어 도달한 붉은빛을 관측하는 장면에서 예상치 못한 초록빛과 함께 우주선과 외계인이 등장한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이 멍하게 외계인을 바라보는 사이 외계인은 보호 장치를 해제하고 소행성을 취득한다. 오기가 목에 걸린 필름 카메라를 천천히 들어올려 사진을 찍으려 하자, 외계인은 방금 취득한 소행성을 얼굴 가까이에 대고 손가락으로 브이를 그리며 이에 응한다. 외계인이 마주 보기의 대상으로 들어온 것은 대면이 유예되었던 시기의 불가능했던 마주 보기를 기억하는 것이자, 되찾은 마주 보기의 기이함을 과장하는 것 같다. 거리를 두는 것 마주 보는 행위는 거리를 전제로 하는 행위다. 최소한의 거리가 생성되지 않으면 서로 마주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두 사람이 마주 보는 장면은 정면을 바라보는 두 사람을 프레임에 각각 담는 것으로 드러나는데, <애스터로이드 시티>에는 이를 보충하듯 마주 보는 사람들의 측면숏을 통해 둘 혹은 그 이상의 사람들 사이의 실제 거리를 가늠하게 한다. 그러나 측면숏의 의미가 단지 등장인물 사이의 거리를 보여주는 것만은 아니다. 인물이 서로 마주 볼 때, 관객의 시선은 언제나 그로부터 비켜난 자리에 있을 수밖에 없다. 한 인물이 카메라를 정면으로 마주 볼 때 관객은 그와 마주 본다는 느낌을 받게 되지만, 리액션숏이 등장함에 따라 마주 보는 느낌은 깨어지고 조정된다.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이처럼 불가능을 긍정하는 한눈팔기를 허용한다. 관객의 시선은 보이지 않는 눈 맞춤을 가로지른 저 너머를 향하게 된다. 초점이 맞지 않는 그곳에선 (아직 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관객이라는 공동체가 잃어버린 장소를 가리키는 가상의 조형물이 우리를 마주 본다. 배경 이미지는 고전영화의 풍경을 흉내낸 것에 불과하며 영화는 이를 숨기지 않는다. 그런데도 관객은 영화의 한 세기와 마주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애스터로이드 시티>에서 관객이 느끼는 거리감은 <슬픔의 삼각형>을 마주할 때의 거리감과 차이가 있다. 전자가 일정한 거리감을 통해 정념을 건드린다면, 후자는 관객과의 감정적인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시종 관객을 겨냥한다. <슬픔의 삼각형>은 둘로 나뉜 세계를 전제한다. 나는 둘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거나, 둘을 오갈 수 있다는 비선택은 허락되지 않는다. 영화의 풍자에 함께 웃거나 불쾌해하거나다. 병증 이후 ‘인 덴 볼켄’과 ‘나인’ 등 딱 두개의 독어로 긍정과 부정을 전달하게 된 테레즈(아이리스 베번)는 이분화된 세계에 허락된 두 가지 반응을 상징하는 인물과도 같다. 크루즈 안에서 게워내는 토사물과 나부끼는 몸마저 우연으로 점철된 놀라운 광경이기보다 예견되고 약속된 정돈된 동작처럼 보인다. 중간의 것, 애매한 것은 모두 솎인 자리에 남은 것은 전복이 아니라 속물과 아름다움이 생존이라는 이름으로 몸을 섞는 회귀의 광경이다. 그러나 관객은 의도된 이야기로부터 끊임없이 미끄러질 수밖에 없다. 영화는 계급을 요트 위에 축소한 듯 굴지만, 실제 요트에서 보이는 것은 젊은 주인공과 나이 든 승객의 대조일 뿐이다. 영화라는 이미지의 계급 안에서 젊음은 곧 아름다움이고 이를 이길 수 있는 부유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한 탑승객이 승무원에게 억지로 물에 몸을 담그라고 지시하는 장면이 주는 감정도 굴욕감으로 정리되지 않는다. 영화가 설정한 계급은 관객의 심리에 그대로 복사되지 않는다. 관객 역시 때때로 이 사실을 망각한다. 루벤 외스틀룬드의 단단한 이야기가 시각과 심리에 있어서의 미끄러짐과 이탈을 초래했다면. 웨스 앤더슨은 미끄러짐을 허용하지 않는 단단한 이미지의 세계를 짓는다. 웨스 앤더슨 영화의 배경과 사물은 실제보다 작게 보인다. 특히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그 자체로 가공된 미니어처라는 느낌을 지속해서 불러온다. 다른 매체와의 비교 속에서 영화가 거대함에서 존재 이유를 찾을 때, 웨스 앤더슨은 소유할 수 있을 만큼 작아지기를 택한다. 두드러진 세트의 활용은 세계의 허구성을 폭로하지만, 허구성은 세계의 진실을 돌려놓는다. 세트는 다른 세트에 의해, 허구는 다른 허구에 의해 감싸여 있다. 진실은 허구와 허구 사이를 지나칠 때, 그 사이에서 언뜻 비추는 것이다. <애스터로이드 시티>의 구조에 관해 언급할 때 극중극이라는 말보다는 극바깥극이라는 말이 더 적절해 보인다. 극중극은 전체로서의 극이 하나의 극을 감싸는 형태지만, 극바깥극은 극 이후의 가능성을 열어둔다. 극은 서로에게 개입하여 작은 구멍을 내고 틈새로 빠져나가면서 두개의 극 중 어느 것도 충분한 사실성과 허구성을 획득하진 않는다. 오기가 겹겹이 싸인 두 층위의 무대를 연속해서 빠져나오는 장면은 분리된 것으로 인식된 세계가 실제로는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를 폭로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이 끝은 아니다. 오기가 건물 내부를 통과해 비상계단으로 빠져나왔을 때, 프레임을 오른편으로 조금 더 이동하면 옆 건물 비상계단에 선 한 인물이 보인다. 오기의 죽은 아내를 연기한 배우(마고 로비)로, 본편에서는 사진으로만 등장했다. 순간적으로 오기가 죽은 아내를 만나는 초현실적인 장면인가 착각하게 되지만, 커다란 가발을 쓰고 귀족부인 분장을 한 배우는 다른 작품에 출연 중일 뿐이다. 극장가의 네온사인을 후면에 두고 공중에 붕 뜬 채 마주 보며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은 마치 발코니형 무대에서 연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부부로 등장했지만, 실제는 몇번 만난 적이 없는 두 사람은 즉흥에서 본편에서 삭제되었던 대사를 읊는다. 극 중 죽음을 맞은 배우가 멀쩡히 나타나는 것은 본편의 설정을 깨어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로 인식되지만, 여기에서는 카메오로 사라지는 단역을 되살린다는 점에서 관계의 서사와 감정을 도리어 생성한다. 배역이 잃어버린 자리를 되찾는 잠깐의 시간이 주는 어딘가 찡한 감정은 죽은 아내와의 비현실적인 만남이라는 착각이 주는 벅찬 감정과 무람없이 뒤섞인다. 그 순간 우리가 잃어버린 몸짓과 되찾은 몸짓, 일상적인 몸짓과 영화적인 몸짓이 일정한 거리를 둔 채 서로를 마주 보고 있다는 착각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