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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1997)

[비평] 마주 보기의 불가능성을 마주보기, ‘애스터로이드 시티’와 ‘슬픔의 삼각형’

지난해와 올해 칸영화제에서 소개된 루벤 외스틀룬드의 <슬픔의 삼각형>과 웨스 앤더슨의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폐쇄된 장소를 무대로 삼는다. <애스터로이드 시티>의 배경은 미지의 소행성이 발견된 건조한 평원이다. 혜성 관측일에 외계인을 태운 우주선이 출몰하는 일이 일어나면서 그 자리에 참석한 인물의 이동이 통제된다. <슬픔의 삼각형>은 망망대해 위의 크루즈와 크루즈 폭발 사고 이후 생존자들이 모인 외딴섬을 주된 장소로 삼는다. 영화에서 특정 장소에 갇히거나 이동이 통제된 인물을 보여줄 때, 그것은 영화관에 모인 관객의 비유로 인식되곤 한다. 영화를 보는 동안 움직임이 제한된 채 화면에 시선을 고정해야 하는 관객은 갇힌 이들을 통해 자신의 현 상태를 자각한다고 이야기된다.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동시대 상황 속에서 한정된 장소와 이동의 통제는 일상에 가까운 것이 되었다. 거의 동시적이라 말해지는 극장의 위기와 팬데믹은 영화적이라고 인식된 행위를 일상에 침투한 재난 상황에 관한 비유로 바꾸었다. 팬데믹 이후라는 맥락에서 <슬픔의 삼각형>과 <애스터로이드 시티>를 놓을 때, 두 영화에서 팬데믹은 하나의 소재로 쓰이기보다는 영화의 근원을 다시 보게 하는 창구 혹은 틀이라는 다른 가능성을 얻은 것처럼 보인다. 두 작품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우리가 어떤 몸짓을 취득하거나 잃어버리게 되었는지, 혹은 같은 몸짓이 어떻게 다른 의미망 속에 놓이게 되었나를 보게 한다. 이때 중요한 매개는 사진 혹은 사진을 찍는다는 것이다. 사진은 사실성을 바탕으로 신뢰할 수 있는 증거와 기록으로 기능했다. 반면 조작이 손쉽고 정교해지면서 신뢰성을 상실해갔다. <애스터로이드 시티>의 전쟁 사진작가라는 오기(제이슨 슈워츠먼)의 직업은 설정일 뿐 아무런 쓸모가 없다. 이곳 애스터로이드 시티에서 그는 전쟁과는 무관한 장면들을 촬영하며, 그의 직업은 다른 이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촬영하는 습관의 좋은 핑계가 될 뿐이다. 전쟁 사진을 찍지 않는 전쟁 사진작가는 나아가 리얼리즘 이미지가 처한 전반적인 위기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 그 반대편에는 광고와 화보 사진이 존재한다. <슬픔의 삼각형>에서 협찬으로 크루즈에 탑승한 모델 커플 야야(샬비 딘)와 칼(해리스 디킨슨)의 사진은 일상의 자연스러움을 위장한 일종의 광고다. 일광욕이나 식사 도중 포즈를 취하고, 사진을 찍는다. 파스타를 한 움큼 집어들고 먹는 포즈를 취하는 야야를 본 다른 탑승객이 파스타를 실제로 먹을 거냐고 묻는데, 이는 무용한 질문이자 쓸데없는 사족이다. 파스타를 든 인물이 실제로 파스타를 맛있게 먹었는지 여부는 사진의 가치와 목적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애스터로이드 시티>에서 오기는 배우 밋지(스칼릿 조핸슨)가 몸을 살짝 숙이자, 사진을 찍기 위해 잠시 그 자세로 멈춰달라고 부탁한다. 밋지는 방금 무의식적으로 했던 동작을 의식적 상태로 반복한다. 두편의 영화는 진실에 다가가는 두 가지 방식을 보여준다. 하나는 사진에 담기지 않는 실체를 폭로하듯 말로 보충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동일한 동작을 두번 반복하는 것이다. 한쪽이 사진 위에 일상화된 허구성을 지적하는 대화를 덧붙일 때, 다른 한쪽은 동일한 동작이 사진이 인화되는 것처럼 진실에서 진실과 비슷한 것으로 서서히 옮겨가는 모양을 지켜본다. 1950년대를 배경으로 한 <애스터로이드 시티>에서 오기는 필름 사진을 찍는다. 현상하기까지 기다림을 동반하는 필름 사진은 사진이 기억의 매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사진을 매개로 한 기억은 그리 오랜 시간 간격을 요구하지 않는다. 사진이 찍히고 다시 현상되기까지의 시간이면 충분하다. 영화에서 전쟁 사진을 대체한 것은 밋지의 사진만이 아니다. 오기가 포착한 외계인 사진은 엄격한 통제를 뚫고 도시 밖으로 전파되어 사회적 파문과 변화를 불러오면서 전쟁 사진과 비슷한 역할을 한다. 이때 외계인 사진은 그럴듯하기보다는 조악함을 숨기지 않는다는 점에서 사실적이다. 동그란 흰 바탕에 검은 점 두개로 표현한 눈을 비롯해 전반적으로 단순한 외양은 컴퓨터그래픽이 상용되기 이전에 일차원적으로 제작된 크리처처럼 보이고, 그를 찍은 사진은 외계인이 등장한 B급 고전영화의 기록용 스틸처럼 보인다. 허구의 외계인을 찍은 리얼한 사진은 무대와 텔레비전, 영화를 관통하는 허구의 역사가 전쟁 사진의 리얼리즘을 대체했을 뿐만 아니라, 리얼리즘의 전환적 회복이기도 했음을 증명한다. 마주 보는 것 <슬픔의 삼각형>에서 사진을 찍는 장면은 종종 등장하지만, 사진이 프레임에 잡히는 경우는 거의 없다(칼이 노트북 작업을 하는 장면에서 흐릿한 이미지가 등장하지만, 그것이 야야의 사진인지는 확언할 수 없다). 관객은 그저 찍히는 몸과 찍는 몸이 나란히 배치된 모습을 보게 될 따름이다. 한 인물이 다른 인물을 찍을 때 상대방을 정면에서 마주 보고 찍는 경우는 드물다. 칼이 야야를 찍는 장면에서 두 사람은 나란히 놓인 두개의 선베드 위에 몸을 기댄 채 방향만 상대방쪽으로 튼 자세가 된다. 야야와 칼의 사진 촬영 숏 직후에는 이들을 모방하는 것처럼 사진을 찍는 남자와 포즈를 취하는 여자가 거울상으로 맞붙는다. 늙은 남자는 열심히 포즈를 취하는 상대를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일으키기도 귀찮다는 듯 벌러덩 누운 자세로 손만 뻗어 버튼을 눌러댄다. 사진 찍는 장면이 사진을 대체한 광경은 사진의 아우라 상실의 원인이 그 내용 때문이 아니라 사진 찍는 행위의 무성의함에 있을 수 있음을 상상하게 한다. 무성의한 태도는 사진을 찍을 때 삭제되어버린 마주 보는 행위의 부재로 단적으로 표출된다. 마주 보는 장면은 오프닝 시퀀스에서 리포터가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방송을 준비할 때나 칼이 모델 면접을 보는 시퀀스처럼 압박받는 상황을 제외하고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예외적인 마주 봄은 2부에 잠깐 등장하는 한 남성 승무원과 관련된다. 사진을 찍으며 일광욕을 즐기던 야야와 칼은 맞은편에서 작업 중인 승무원을 눈여겨본다. 선글라스를 낀 짙은 피부의 남성은 작업 전 상의를 벗은 채 몸에 오일을 바르며 커플의 눈길을 끈다. 승무원 역시 두 사람을 발견한 듯 시선을 고정한 채 가볍게 인사를 건네고, 야야가 인사를 받는다. 카메라는 올려다보는 야야와 칼의 시선과 살짝 내려다보는 승무원의 시선을 나누어 포착한다. 인물의 행동과 대사를 통해 마주 보는 상황을 전제하지만, 이들의 실제 위치를 조망할 수 있는 마스터숏은 등장하지 않기에 마주 봄은 어딘가 미심쩍은 것으로 남는다. 더군다나 잠깐의 마주 봄에 의해 남자는 크루즈에서 하차하는 뒷모습으로 퇴장해버린다. 마주 보는 행위의 불가능함 혹은 위험함은 웃을 수 없는 농담이 담긴 오프닝 시퀀스에서 예견된 바 있다. 칼과 몇몇 모델들은 진행자의 주문에 따라 브랜드의 위상에 따라 달라지는 표정 연기를 즉흥에서 실행해 보인다. 저가 브랜드가 친밀하고 밝은 미소로 관객을 끈다면, 고가 브랜드는 카리스마 있는 표정으로 위엄을 내세운다. 배우들은 촬영 중인 카메라를 바라보지만, 이 표정은 영화를 보는 관객을 정면으로 마주 본다고 느껴진다. 당신은 ‘발렌시아가파’인 가, ‘H&M(에이치앤엠)파’인가. 둘을 오간다거나 둘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지만, 예외는 허용되지 않는다. 이 농담에 H&M식으로 웃을 수 있는가, 혹은 발렌시아가식 무표정으로 전혀 웃지 않을 것인가. 여기에서 마주 보기란 어디까지 견디거나 참을 수 있는가를 묻는 일종의 테스트다. <애스터로이드 시티>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마주 보는 숏은 관객을 정면으로 마주 보되, 관객을 시험에 들게 하진 않는다. 배우가 다른 배우와 대화한다는 전제로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볼 때, 그 마주 보기는 현대적인 행위처럼 보인다. 밋지의 방과 오기의 방은 창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위치에 있다. 창은 창문 없이 차광막이 달린 사각의 구멍으로, 조형적인 실내와 더불어 세트 느낌이 강화된다. 창가에 기댄 얼굴로 카메라에 가까이 다가선 밋지의 얼굴과 실없는 말들은 오늘날 각자의 집에서 개인 방송하는 유튜버를 연상시킨다. 창은 상황에 따라 여러 기능을 한다. 창은 대화를 나누는 창구이자, 작은 연극 무대 혹은 리허설 현장이다. 밋지는 몇개의 시퀀스를 즉흥에서 연기한다. 샤워 이후 가운으로 갈아입는 노출 장면과 약을 털어넣고 욕조에서 자살한 채 발견되는 상황을 연기하며, 오기에게 상대역을 하도록 유도한다. 오기의 방이 사진을 현상하는 암실이라면, 밋지의 방은 사진을 촬영하는 스튜디오다. 밋지가 포즈를 취하면 오기는 촬영을 한다. 마주 보기는 세계의 경계를 뛰어넘어 이뤄진다. 사람들이 고전적 VR 기계라 할 머리 하나 크기의 박스를 쓴 채 시공간을 뛰어넘어 도달한 붉은빛을 관측하는 장면에서 예상치 못한 초록빛과 함께 우주선과 외계인이 등장한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이 멍하게 외계인을 바라보는 사이 외계인은 보호 장치를 해제하고 소행성을 취득한다. 오기가 목에 걸린 필름 카메라를 천천히 들어올려 사진을 찍으려 하자, 외계인은 방금 취득한 소행성을 얼굴 가까이에 대고 손가락으로 브이를 그리며 이에 응한다. 외계인이 마주 보기의 대상으로 들어온 것은 대면이 유예되었던 시기의 불가능했던 마주 보기를 기억하는 것이자, 되찾은 마주 보기의 기이함을 과장하는 것 같다. 거리를 두는 것 마주 보는 행위는 거리를 전제로 하는 행위다. 최소한의 거리가 생성되지 않으면 서로 마주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두 사람이 마주 보는 장면은 정면을 바라보는 두 사람을 프레임에 각각 담는 것으로 드러나는데, <애스터로이드 시티>에는 이를 보충하듯 마주 보는 사람들의 측면숏을 통해 둘 혹은 그 이상의 사람들 사이의 실제 거리를 가늠하게 한다. 그러나 측면숏의 의미가 단지 등장인물 사이의 거리를 보여주는 것만은 아니다. 인물이 서로 마주 볼 때, 관객의 시선은 언제나 그로부터 비켜난 자리에 있을 수밖에 없다. 한 인물이 카메라를 정면으로 마주 볼 때 관객은 그와 마주 본다는 느낌을 받게 되지만, 리액션숏이 등장함에 따라 마주 보는 느낌은 깨어지고 조정된다.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이처럼 불가능을 긍정하는 한눈팔기를 허용한다. 관객의 시선은 보이지 않는 눈 맞춤을 가로지른 저 너머를 향하게 된다. 초점이 맞지 않는 그곳에선 (아직 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관객이라는 공동체가 잃어버린 장소를 가리키는 가상의 조형물이 우리를 마주 본다. 배경 이미지는 고전영화의 풍경을 흉내낸 것에 불과하며 영화는 이를 숨기지 않는다. 그런데도 관객은 영화의 한 세기와 마주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애스터로이드 시티>에서 관객이 느끼는 거리감은 <슬픔의 삼각형>을 마주할 때의 거리감과 차이가 있다. 전자가 일정한 거리감을 통해 정념을 건드린다면, 후자는 관객과의 감정적인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시종 관객을 겨냥한다. <슬픔의 삼각형>은 둘로 나뉜 세계를 전제한다. 나는 둘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거나, 둘을 오갈 수 있다는 비선택은 허락되지 않는다. 영화의 풍자에 함께 웃거나 불쾌해하거나다. 병증 이후 ‘인 덴 볼켄’과 ‘나인’ 등 딱 두개의 독어로 긍정과 부정을 전달하게 된 테레즈(아이리스 베번)는 이분화된 세계에 허락된 두 가지 반응을 상징하는 인물과도 같다. 크루즈 안에서 게워내는 토사물과 나부끼는 몸마저 우연으로 점철된 놀라운 광경이기보다 예견되고 약속된 정돈된 동작처럼 보인다. 중간의 것, 애매한 것은 모두 솎인 자리에 남은 것은 전복이 아니라 속물과 아름다움이 생존이라는 이름으로 몸을 섞는 회귀의 광경이다. 그러나 관객은 의도된 이야기로부터 끊임없이 미끄러질 수밖에 없다. 영화는 계급을 요트 위에 축소한 듯 굴지만, 실제 요트에서 보이는 것은 젊은 주인공과 나이 든 승객의 대조일 뿐이다. 영화라는 이미지의 계급 안에서 젊음은 곧 아름다움이고 이를 이길 수 있는 부유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한 탑승객이 승무원에게 억지로 물에 몸을 담그라고 지시하는 장면이 주는 감정도 굴욕감으로 정리되지 않는다. 영화가 설정한 계급은 관객의 심리에 그대로 복사되지 않는다. 관객 역시 때때로 이 사실을 망각한다. 루벤 외스틀룬드의 단단한 이야기가 시각과 심리에 있어서의 미끄러짐과 이탈을 초래했다면. 웨스 앤더슨은 미끄러짐을 허용하지 않는 단단한 이미지의 세계를 짓는다. 웨스 앤더슨 영화의 배경과 사물은 실제보다 작게 보인다. 특히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그 자체로 가공된 미니어처라는 느낌을 지속해서 불러온다. 다른 매체와의 비교 속에서 영화가 거대함에서 존재 이유를 찾을 때, 웨스 앤더슨은 소유할 수 있을 만큼 작아지기를 택한다. 두드러진 세트의 활용은 세계의 허구성을 폭로하지만, 허구성은 세계의 진실을 돌려놓는다. 세트는 다른 세트에 의해, 허구는 다른 허구에 의해 감싸여 있다. 진실은 허구와 허구 사이를 지나칠 때, 그 사이에서 언뜻 비추는 것이다. <애스터로이드 시티>의 구조에 관해 언급할 때 극중극이라는 말보다는 극바깥극이라는 말이 더 적절해 보인다. 극중극은 전체로서의 극이 하나의 극을 감싸는 형태지만, 극바깥극은 극 이후의 가능성을 열어둔다. 극은 서로에게 개입하여 작은 구멍을 내고 틈새로 빠져나가면서 두개의 극 중 어느 것도 충분한 사실성과 허구성을 획득하진 않는다. 오기가 겹겹이 싸인 두 층위의 무대를 연속해서 빠져나오는 장면은 분리된 것으로 인식된 세계가 실제로는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를 폭로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이 끝은 아니다. 오기가 건물 내부를 통과해 비상계단으로 빠져나왔을 때, 프레임을 오른편으로 조금 더 이동하면 옆 건물 비상계단에 선 한 인물이 보인다. 오기의 죽은 아내를 연기한 배우(마고 로비)로, 본편에서는 사진으로만 등장했다. 순간적으로 오기가 죽은 아내를 만나는 초현실적인 장면인가 착각하게 되지만, 커다란 가발을 쓰고 귀족부인 분장을 한 배우는 다른 작품에 출연 중일 뿐이다. 극장가의 네온사인을 후면에 두고 공중에 붕 뜬 채 마주 보며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은 마치 발코니형 무대에서 연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부부로 등장했지만, 실제는 몇번 만난 적이 없는 두 사람은 즉흥에서 본편에서 삭제되었던 대사를 읊는다. 극 중 죽음을 맞은 배우가 멀쩡히 나타나는 것은 본편의 설정을 깨어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로 인식되지만, 여기에서는 카메오로 사라지는 단역을 되살린다는 점에서 관계의 서사와 감정을 도리어 생성한다. 배역이 잃어버린 자리를 되찾는 잠깐의 시간이 주는 어딘가 찡한 감정은 죽은 아내와의 비현실적인 만남이라는 착각이 주는 벅찬 감정과 무람없이 뒤섞인다. 그 순간 우리가 잃어버린 몸짓과 되찾은 몸짓, 일상적인 몸짓과 영화적인 몸짓이 일정한 거리를 둔 채 서로를 마주 보고 있다는 착각과 함께.

[인터뷰] 일하는 여성의 모습 여성 연대에 방점을 찍다, ‘여성백년사-그때도 틀리고 지금도 틀리다’ 이혜진 PD

남성 독립운동가 세 사람을 말하시오. 안창호, 안중근, 윤봉길…. 어렵지 않게 이름을 댈 수 있다. 그렇다면 여성 독립운동가 세 사람일 경우는 어떨까? <여성백년사-그때도 틀리고 지금도 틀리다>(이하 <여성백년사>)는 유관순 외에 바로 떠오르는 여성 독립운동가가 없어 자기반성을 하는 패널들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한다. 100여년 전 이 땅에서 본연의 목소리를 냈지만 주류 역사학계에서 자주 소환되지 못했던 여성들의 미시사를 조명한다. 만연한 성차별에도 불구하고 꺾이지 않는 존엄성을 지켰던 그들의 모습은 현 한국 사회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이달의 좋은 프로그램’ 최우수상, YWCA가 뽑은 좋은 미디어콘텐츠상 대상을 받은 <여성백년사>를 연출한 이혜진 PD는 이 연결점에 주목하며 여성들의 역사를 수집해나갔다. - <여성백년사>는 어떻게 시작된 기획인가. = EBS <다큐 프라임> 시리즈는 PD들이 기획안을 내면 서류 심사와 프레젠테이션을 거쳐 기획의 참신성과 완성도, PD의 연출력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선발된 아이템으로 제작된다. <여성백년사>는 내가 처음으로 쓴 <다큐 프라임>기획안이었다. 2009년 EBS에 입사했을 때부터 여성의 역사를 다루는 다큐멘터리를 하고 싶었는데, 방송국 특성상 교육적인 의미가 담기지 않으면 편성되기가 어렵다. 100년 전 경성을 주제로 한 전시를 보러 갔다가 그들이 남긴 기록이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고 오히려 더 노골적으로 여성 인권을 주장하기도 했던 모습을 발견했다.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는 구성으로 기획안을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입사 초부터 여성사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 대학교 4학년 때 들은 교양 수업에서 나혜석을 알게 됐다. 나혜석에 심취해서 거의 한달 동안 도서관에서 나혜석에 관한 책만 읽었다. 이를테면 이혼 여성을 향한 비난에 부조리를 느낀다든지 당시 나와 비슷한 생각을 80년 전에도 똑같이 하고 있었다는 게 재밌었다. 오히려 과거 여성들이 더욱 거침없이 자기 이야기를 전했다는 것도 신기했다. 나중에 나혜석 같은 여성들을 조명하는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만든다면 어느 정도 경험이 쌓인 후 하고 싶었다. - 잘 알려지지 않은 역사를 발굴한다는 기획인 만큼 자료 조사의 난이도도 높았겠다. = <다큐 프라임>의 장점은 충분한 준비 시간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EBS 내부에서도 PD들이 무척 하고 싶어 하는 프로그램이다. 취재 작가와 메인 작가, 나 이렇게 셋이서 당시 신문, 잡지 기사는 거의 다 봤고 관련 논문도 많이 찾아봤다. 취재 작가의 가족이 한의사라서 고어 해석에 도움을 많이 받았다. (웃음) 2부에 나오는 동양 최초의 여성 택시 기사 이정옥의 경우 신문에 작게 나온 토막 기사에서 발견한 것이다. 사실 방송에 담긴 것은 조사한 내용의 100분의 1도 안된다. - 자료 조사한 내용 중 무엇을 다큐멘터리에 담아낼 것인지를 어떤 기준으로 결정했나. = 현재를 반추해볼 수 있는 스토리를 가진 사람들. 그리고 단순히 그들이 입은 피해나 억울함에 초점을 두지 않고 현실의 장벽을 극복하기 위해 했던 일이 명확한 이들을 주목했다. 이를테면 1부에 나오는 김명순 소설가는 현대인들에게 ‘최초의 미투’로 주로 알려져 있는데, 그 이전에 작가로서 무척 뛰어난 역량을 갖춘 사람이었다는 점을 알리고 싶었다. 또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인물을 소개했다. 근대 신여성이라고 하면 나혜석, 김일엽, 김명순을 많이들 꼽는데 나혜석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선을 넘는 녀석들: 마스터-X> 등 다양한 매체에서 여러 차례 다룬 바가 있다. - 유튜버 이승국, 통역사 안현모, 역사학자 심용환, 배우 김현숙 등 패널들이 시간 여행을 하고 과거 인물을 만나 이야기를 듣는 토크멘터리 형식을 취했다. 자칫 딱딱할 수 있는 역사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가고픈 연출자의 배려가 돋보였다. = 요즘 시청자들의 눈은 과거 경성을 재현한 영화와 드라마에 맞춰져 있다. 상대적으로 제작비가 적은 다큐멘터리는 그 정도 규모의 세트와 의상, 보조 출연자를 동원하기 어렵다. 그래서 요즘 유행하는 스토리텔링 기법에 역사 토크멘터리 형식을 접목했다. 사실 방송 전에는 시청자들이 어색하게 받아들이지 않을까 걱정이 많았는데, 과거 인물을 맡은 배우들이 뻔뻔하게 연기를 잘해줬다. (웃음) - <여성백년사> 1부는 김명순, 2부는 다양한 직업여성들, 3부는 N번방 사건을 추적한 이들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이같은 흐름은 어떻게 결정됐나. = 1~2부는 과거, 3부는 현재의 다양한 이야기를 담는다는 것이 이미 정해져 있었다. 심지어 3부에서 요즘 여성들의 고민을 담기 위해 결혼 정보회사 대표도 취재했다. 그러던 중 추적단 불꽃의 <우리가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때>를 읽게 됐다. 이 이야기를 다루는 것만으로 1시간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이야기를 얕게 다루기보다는 지금 시점에서 가장 필요한 이야기, 디지털 성폭력을 집중적으로 다루자고 결정했다. - 3부에는 대학생 신분으로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을 취재했던 추적단 불꽃,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지원 단체 리셋 외에 이 사건을 보도한 <한겨레> 기자들이 등장한다. 여성들의 연대를 다룬 흐름에서 김완 기자 같은 남성이 등장하는 것은, 사안의 맥락이나 <한겨레>의 기여도를 모르는 이들에게는 돌출적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 김완 기자를 사전 취재했을 때 여성 연대에 대한 의견을 잘 줬고, 무엇보다 “뿌리 깊은 남성들의 포르노 문화부터 잘못된 것”이라 말해준 것이 이 다큐멘터리에서 무척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이런 이야기를 남자 기자의 입으로 듣는 것이 의미 있었다. - 사실 패배의 역사를 반복적으로 목격하다 보면 지칠 때가 있다. 그렇다고 희망만을 강조하면 자칫 사건의 심각성을 약화시킬 수도 있고. 특히 현재를 다룬 3부 ‘N번의 잘못’의 구성과 접근 방식에 고민이 많았겠다. = 특히 1부 김명순 같은 경우는 오랜 기간 무수히 많은 성폭력을 당했던 사람이다. 그의 죽음도 새드 엔딩에 가깝다. 하지만 나는 김명순이 정말 잘 싸웠다고 생각한다.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보여주고 싶었다. 또한 2부에서 분위기를 전환해 동양 최초의 여성 택시 기사 이정옥, 한국 최초의 미용사 오엽주, 데파트 걸에서 시작해 기자가 된 송계월 등 피해자로서가 아닌 일하는 여성의 모습을 다양하게 담았다. 3부를 준비하던 중 넷플릭스에서 <사이버 지옥: n번방을 무너뜨려라>(이하 <사이버 지옥>)가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사실 아이템을 포기해야 하나라는 생각까지 했다. 하지만 <사이버 지옥>은 아직 디지털 성폭력은 끝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며 마무리됐고, 피해자의 용기에 집중한 반면 여성들의 연대를 깊이 다루지는 않았다. 이야기 흐름이나 출연자가 겹치지만 우리는 여성 연대에 좀더 방점을 찍을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그냥 진행하기로 했다. 비슷한 범죄가 반복되고 있지만 여성들의 연대 덕분에 조금씩 달라지고 있고, 오랫동안 지속됐던 성폭력이 다음 세대에도 이어져서는 안된다는 이야기를 담고 싶었다. - 처음 EBS에 입사하게 된 스토리도 듣고 싶다. 이후 EBS에서는 어떤 프로그램들을 연출했나. = 원래 시사 교양국을 지망하던 PD 지망생이었다. 그런데 최종 면접에서 “올해는 여자를 안 뽑는다”거나 “온실 속의 화초 같다”는 식의, 나의 여성성을 스스로 검열하게 만드는 말을 몇번 들었다. 그리고 고생을 모른다는 이미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삼성중공업에 입사했다. (웃음) 거제도에서 스쿠터를 타고 다니며 1년 반 정도 일을 한 경험이 결과적으로 방송국 면접을 볼 때 무척 유리하게 작용했다. EBS는 입사 초부터 <생방송 톡!톡! 보니하니>나 <딩동댕 유치원> 같은 유아·어린이 프로그램을 시작으로 다양한 방송을 경험할 수 있는 방송국이다. 어린이들과 소통하고 학부모의 피드백을 즉각적으로 받다 보면 디테일한 연출을 하는 데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가장 오래 맡았던 방송은 <스페이스 공감>이다. 단순히 무대만 중계하는 것이 아니라 뮤지션의 음악 세계와 앨범의 메시지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인서트 영상을 고민해야 한다. 추상적인 이야기를 이미지화하는 방식에 대해 공부가 많이 됐다. 관객의 감상이 실시간으로 오기 때문에 시청자 반응을 염두에 두는 버릇이 생겼다. 이후 다큐멘터리를 만들 때도 시청자가 너무 어렵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는 길을 고민하게 됐다. - EBS PD들의 성비는 어떻게 되나. 다큐멘터리 연출자의 성비가 균형 있게 잡히면 회사 전체에 어떤 영향을 주나. = 내가 입사한 이후에는 남자 PD가 더 많이 들어온 적이 한해도 없다. 그전에는 압도적으로 남자가 많았는데 지금은 확실히 여자가 많다. 성비가 맞춰지면 조직 전체가 균형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다. 가령 시사회를 연 후 여성 PD들이 젠더 관점에서 의견을 많이 전달한다. 자연스럽게 남자 PD들도 생각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노력할 수 있다. - 어떤 다큐멘터리가 좋은 다큐멘터리라고 생각하나. = 다른 작가가 했던 말 중에서 무척 공감한 내용이 있다. 보는 사람도 바뀌고 만드는 사람도 바뀌는 다큐멘터리가 좋은 다큐멘터리라고. <여성백년사>를 만들기 이전의 나는 젠더 이슈에 무척 회의적인 사람이었다. 부조리한 세상이 앞으로도 바뀌지 않을 것만 같았다. 다른 사람의 일에 자신을 모두 던져가며 나서는 리셋과 추적단 불꽃의 모습을 보면서 나도 무언가 해야겠다, 부정적인 상황에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작진이 생각했던 것과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생각이나 행동이 달라지고, 이러한 변화가 시청자에게도 전해지는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다. 나를 연출자로 만든 것 경험에서 비롯된 문제의식 그리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영상이었다. 영상 매체는 내 목소리를 더 많은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게 한다. 요즘 나를 즐겁게 하는 것 체력이 좋아지고 있는 것. 헬스를 열심히 하는 만큼 체력이 느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 다큐멘터리는 드라마처럼 현장 스탭이 많지 않기 때문에 장비와 소품을 함께 옮겨야 하는데, 근력을 키워서 번쩍번쩍 들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사실 8년 정도 필라테스를 할 때는 미용 목적이 컸는데, 내게 필요한 건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이번 PT를 시작할 땐 다이어트가 아닌 무거운 장비를 드는 것이 목표라고 확실히 말씀드렸다.

[기획] 우수상 당선자 ‘김신’ 작품비평, Open 24 hours - ‘리코리쉬 피자’를 중심으로

1차 석유파동 전후의 산페르난도 밸리를 담아낸 <리코리쉬 피자>의 첫 번째 화면은 화장실에서 거울을 보고 있는 주인공 개리 발렌타인의 뒤편에서 변기가 폭발하는 장면이다. 그 직후 영화는 장면을 바꿔 평화롭게 복도를 걸어가는 알라나와 개리가 처음 눈이 맞는 현장을 보여준다. 먼저, 상호연관성이 결여된 두 장면을 이어 붙인 이 몽타주를 다소 도식적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몽타주가 여러 사건과 인물을 혼란스럽게 흡수하며 질주하는 <리코리쉬 피자>의 마취적 구성을 집약하는 미장아빔으로 기능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반대의 해석을 제시할 수도 있다. 어쩌면 첫 장면에서 개리가 변기 폭발을 피해 화장실에서 빠져나왔기 ‘때문에’, 그가 다음 장면에서 복도를 거니는 알라나와 마주칠 수 있었다는 인과론적 추정이다. 그런데… 다시 보니 두 장면이 시간적으로 인접해 있다는 근거는 없으므로 우리는 세 번째 해석을 제출해볼 수도 있다. 이게 우발적인 연결이든, 필연적인 만남이든, 딱히 별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말장난 같은 얘기이긴 하지만, 여러 방향성으로 개방된 이 느슨한 접합의 방식이야말로 <리코리쉬 피자>의 무질서를 관통하는 하나의 질서라고 말할 수 있다. 폴 토머스 앤더슨은 시대극을 오밀조밀한 세부로 채우는 리서치의 대가로 잘 알려져 있지만, 석유파동과 베트남전쟁의 여파 속 여러 디테일과 인물은 선명한 사회학적 인과율에 구애받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흐트러져 있는 것도 아니라서, 인물들은 시대의 요구에 따라 창업 아이템을 갈아타는 개리처럼 역사의 현장 안에 느슨하게 배열된 채 얼기설기 기워져 있다. 첫눈에 반해 알라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개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른 여인들에게 추파를 던지며, 신문 너머로 알라나를 쳐다볼 때도 지면에 새겨진 포르노 광고를 흘깃거린다. 알라나는 스스로를 영화 속 한 장면에 속한 배우로 소개하던 개리의 첫인사에 “그 수십명 중 네가 누구인지 내가 어떻게 아냐”고 대답한다. 하지만 몇 장면이 지나면 무대에 오른 수십명의 조연 사이에서 개리의 얼굴을 식별하며 뺨을 붉힌다. 대충 두세 장면 정도가 또 지나가면 개리의 친구인 랜스에게 반해 외도의 궤적을 그린다. 심지어 그 랜스조차 알라나의 가족 식사에 초대받아 몇 마디를 횡설수설한 후에는 화면 밖으로 추방된 뒤 다시 등장하지 않는다. 핸드폰이 보급된 이후의 세계를 영화화하는 게 어려워 시대극을 찍는다고 고백했던 폴 토머스 앤더슨은 동시대의 파편적 징후를 70년대의 풍경에 투사해 재구성했다. 영화를 관통하는 헐겁고 느슨한 공기는 그가 2010년대를 건너오며 점차 전작들을 가로지르던 신경증적이고 역사적인 강박관념과 작별하려 했다는 점과 유관할 것이다. 그전까지도 앤더슨은 지식인적 소명을 선명하게 표방하는 작가는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그의 인물은 한 시대를 가로지르는 병리를 과도하게 수렴해낸 정념의 화신으로 나타나곤 했다. 텔레비전 쇼와 뮤직비디오의 문법을 영화에 편견 없이 수혈했던 <매그놀리아>의 인물들도 속죄를 갈망한다는 기독교적 형이상학의 전통을 내면화한 채 “우리는 과거를 잊었지만, 과거는 우리를 잊지 않았다”는 성찰적 대사를 내뱉은 바 있고, 일그러진 석고상 같은 클로즈업을 우당탕탕 디밀던 <마스터>의 탕아 프레디도 첫사랑 도리스와의 추억이 담긴 유년기의 과거와 직면해 “내면의 악”(Inherent Vice)을 길들이려는 의지를 내비친다. 이것은 앤더슨이 속죄와 치유를 목적으로 삼았다는 게 아니라, 그 목적의 실질적 달성 여부와는 무관하게 개인의 심리적 외상을 구심점으로 작동하는 시대극을 조직하는 데 몰두했다는 뜻이다. <리코리쉬 피자>도 성년기를 통과하는 인물들의 성장담을 구성하는 영화다. 하지만 인물들은 속죄와 치유에의 강박으로부터 한층 자유롭다. 서사와 감정의 추이를 암시하는 단서도 치밀한 논리에 종속되지 않은 채 한가롭게 널브러져 있다. 그러므로 <리코리쉬 피자>의 인물들은 아마도 <매그놀리아>의 구절을 비틀어 다음과 같은 대사를 중얼거릴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는 과거를 ‘진짜로’ 잊었기 때문에 특별한 트라우마가 없으며, 과거도 우리에게 별 관심이 없다고.” 대신 “평범한 사이즈”의 성기 크기(<리코리쉬 피자>는 랜스와 개리 모두가 말하는 이 특성 없는 범박함에 주목하려 하며, 이는 거대한 성기 사이즈로 포르노 산업의 중추를 누빈 인물을 소묘했던 <부기 나이트>의 기획과의 대조를 예시한다)와 사업가적 독립성을 갖춘 그들은 스스로의 동물적 활력을 길들이려는 이성에의 강박 없이 복수의 시공간을 환승하듯 건너뛴다. 그 증거로, 석유파동의 여파로 자동차가 모두 멈춘 도로 한복판에서 개리는 울기는커녕 “세상이 망했다”고 신명나게 소리치며 흥뚱거린다. 주인공이 앤더슨 필모그래피의 다른 주인공보다 어려서 그렇게 보이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잭 홀든과 존 피터스 같은 어른들 또한 폴 토머스 앤더슨이 애덤 네이먼과의 인터뷰에서 직접 말했듯, “최악의 빌어먹을 애X끼들처럼 행동한다”. 종종 거울과 공간으로 프레임을 분절해 인물들이 하나의 시공간을 공유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게 한 미장센은 이런 파편적 세태를 은유하는 주요한 상징이다. 이완된 구성과 관련해서는 또 다른 장면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물침대를 판매하는 엑스포에서 난데없이 경찰에 붙잡힌 개리가 이내 누명을 썼음이 판명나 풀려나는 싱거운 시퀀스다. 개리가 풀려난 후, 알라나는 “너 마약 했냐? 사람 죽였냐?”라고 윽박지르지만, 2초 정도 지나면 진상 따위 관심 없다는 듯 경쾌하게 질주하며 실없는 웃음을 흘린다. 인물들이 경찰에게 체포되면서 시대와의 불화를 증언했던 앤더슨의 전작을 떠올린다면 이 장면의 가벼운 뉘앙스는 더욱 두드러진다. 비슷한 맥락에서, 개리와 알라나는 가족에 의한 트라우마를 겪지 않는다. 개리의 집에는 <데어 윌 비 블러드>와 같은 억압적인 아버지의 자리가 애초에 비어 있으며, 주인공을 괴롭히는 <펀치 드렁크 러브>와 <팬텀 스레드>의 사나운 누님들도 자취를 감춘 채 없다. 아버지가 부재한 개리는 심지어 어머니와의 관계도 희미하지만, 그래도 그냥저냥 독립심을 갖춘 채 사업을 벌일 생각에 골몰한다. 대체로 두 주인공의 사정에 무관심한 가족들은 그저 70년대의 시민들이 “집에서 매일 밤 죽음을 기만하고 자기 자신의 그림자를 보지 않기 위해 TV를 본다”던 장뤼크 고다르의 관찰처럼(<넘버 2>) 흐리멍덩한 눈빛으로 TV나 보며 패스트푸드를 씹을 뿐이다. 쿨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혹은 그렇기 때문에 종종 외로움을 타는 <리코리쉬 피자>의 군상이 겪는 소외감은 그들의 정체성이 가변적인 역사적 조건에 노출되어 있음을 암시하는 몇 가지 표지로 구체화된다. 액션 배우 잭 홀든이 영화배우를 지망하는 알라나를 보고 레인보우라는 배역 명이나 그레이스 켈리라는 이미지로 호명하지만, 막상 알라나가 자연인인 본인의 이름을 아느냐고 물었을 때는 무감하게 그녀를 내동댕이치며 다른 여인의 이름을 외치던 장면을 떠올려보자. 영화 속 인물들은 안정적인 관계에 정착하지 못한 채 어긋난 신호를 주고받으며, 때로는 불분명하고 거무스름한 실루엣에 감싸인 채 자아의 변주를 겪는다. 실제로 폴 토머스 앤더슨은 알라나가 25살인지 28살인지, 아니면 이도 저도 아닌지 모호화하는 사소한 대사를 은근슬쩍 기입해두었다. 영화에서 유일하게 정치적 이상주의를 설파하는 인물인 시장 후보 조엘 왁스 또한 마이크와 카메라가 자리를 비운 일상에서는 성 소수자로서의 정체성을 감추기 위해 연기를 한다. 어쩌면 잭 홀든의 바이크가 버려둔 알라나의 실루엣이, 달려나가는 개리의 실루엣과 결합하는 장면의 드라마틱한 역광은 두 주인공의 자아가 근본적으로 불확정적이라는 점을 지목하는 은유적인 장치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전화기 너머에 있는 상대의 정체를 식별할 수 없듯 불분명한 기호로 얼룩진 세계에서 두 주인공은 결과적으로 합일에 이른다. 하지만 종막에서조차 영화는 분열적 기색을 오롯이 남겨두었다. 두 인물은 서로의 존재가 대체 불가능하다는 인식의 각성을 겪으며 화합하는 대신 다른 관계로부터 겪은 혼란과 소외감을 달래기 위한 동기로 급작스럽게 결합하며, 핀볼 가게를 메운 손님들은 “여러분, 알라나 발렌타인을 소개합니다!”는 개리의 말에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는다. 인물의 개인적 드라마가 도시적 환경과 이격한다는 포스트모던한 징후를 보여주는 연출일 텐데, 관련해서 보다 적나라한 단서는 알라나가 개리를 다시 조우하기 직전의 화면에 음각되어 있다. 그 장면에서 알라나는 어느 건물의 회랑을 달리던 중 “Open 24 hours”라고 쓰인 간판 밑을 스쳐간다. <펀치 드렁크 러브>에서 정교하게 계산된 도심의 구조와 조명이 주인공의 내면과 탁월하게 조응했다면, 여기서 알라나의 머리를 맴도는 간판의 메시지는 그들의 사랑이 언제든 또 다른 관계에 대해 “24시간 오픈” 될 수 있음을 짓궂게 암시한다. 누아르적 조명 밑에서 비장한 표정으로 마주하던 <마스터>의 프레디와 도드는 다음 생에 만나자는 영원의 서약을 맺은 채 작별의 서정을 새기고 갔지만, <리코리쉬 피자>의 캐릭터들은 마지막 순간에도 그렇게까지 진지할 의향이 없다. 그들은 그저 일시적이고 즉흥적인 순간의 매혹에 몸을 던지며 입을 맞출 뿐이다. 감초처럼 길쭉하게 생긴 여인과 피자 같은 여드름을 지닌 소년의 괴상한 조합이 어찌저찌 하나의 메뉴를 구성하는 찰나의 순간이다.

[비평] ‘여자’는 팀이 될 수 있는가, ‘미션 임파서블: 데드 레코닝 PART ONE’

<미션 임파서블: 데드 레코닝 PART ONE> 개봉 이후 톰 크루즈가 없는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는 상상도 할 수 없다는 말을 여기저기에서 종종 듣는다. 그 말에 100% 동의하지만 그래도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지 어리둥절해하며 머리를 긁적일 수밖에 없다. 오리지널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의 설정은 캐릭터가 몽땅 바뀌어도 이야기 진행에 아무 지장이 없는 종류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시리즈의 배우들은 꾸준히 바뀌었고 1988년에 나온 속편 시리즈까지 포함한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고정으로 출연한 배우와 캐릭터는 단 한명도 없다. 피터 그레이브스(영화에서는 존 보이트)가 연기한 팀의 리더 짐 펠프스도 시즌2부터 등장했다(첫 번째 리더인 댄 브릭스는 배우 스티븐 힐이 안식일에 일하는 걸 꺼려하는 정통주의 유대교도라 하차했다). 설정에서 캐릭터보다 더 중요한 건 그 캐릭터들의 역할이었다. 리더, 변장의 명수, 테크 전문가, 근육 그리고 여자의 역할만 확보된다면, 그들이 누구더라도 팀은 별 탈 없이 움직였다. 여성 캐릭터의 ‘홍일점’ 위치 여기서 신경 쓰이는 건 ‘여자’라는 표현이다.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엔 늘 흑인 남자가 한명 있었지만 (이 전통은 영화 시리즈에서 빙 레임스가 연기한 캐릭터 루터 스티켈로 이어진다) 그들의 역할은 ‘흑인’이 아니었다. 모두 테크 전문가라는 역할이 따로 있었다. 하지만 여성 캐릭터의 역할이 뭐냐고 물으면 ‘여자’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물론 모두가 연기를 해야 하는 사기 집단에 여자가 한명 있으면 큰 도움이 되긴 한다. 하지만 정말 그게 전부인가? 시리즈 내내 여성 캐릭터의 ‘홍일점’ 위치는 쉽게 바뀌지 않았다. 다시 말해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는 여자들에게 ‘여자’ 역할이 아닌 무언가를 주지 않았다. 그리고 속편에선 순전히 새 여성 멤버에게 자리를 마련해주기 위해 이전 여성 멤버를 살해해버리는 일이 일어났다. 속편의 케이시 랜들은 영화 시리즈가 시작되기 전, 시리즈 내에서 목숨을 잃은 유일한 IMF 멤버였다. 영화 시리즈가 시작되기 전엔 그래도 사정이 좀 나아지긴 했던 모양이다. 브라이언 드 팔마가 감독한 <미션 임파서블> 도입부에선 여성 멤버가 둘로 늘어나 있다. 하지만 에단 헌트를 제외한 팀원들 전원이 몰살당하면서 이 느린 발전은 순식간에 의미를 잃는다. 여기서부터 치밀한 팀워크라는 <미션 임파서블>의 설정도 깨진다. 그보다 에단 헌트의 버스터 키튼 스타일의 맨몸 액션이 더 중요해졌다. 에단 헌트가 근육, 변장의 명수, 리더까지 맡았으니 교묘한 사기 행각의 앙상블도 의미를 잃는다. 이제 미션 임파서블팀은 현장 요원과 테크 전문가로 나뉜다. 3편부터 사이먼 페그가 연기하는 벤지 던이 고정이 되었지만 이 캐릭터도 루터와 마찬가지로 테크 전문가다. 젠 레이(매기 큐)와 제인 카터(폴라 패튼)라는 여성 멤버가 3, 4편에 등장했지만 이들이 시리즈 안에 녹아들 수 없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이들이 안정적으로 시리즈 안에 머물며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톰 크루즈라는 남성 슈퍼스타가 그 공간을 먹어버렸다. 다시 말해 여자들에게 IMF의 환경은 텔레비전 시리즈 때보다 나빴다. 이런 상황에서 레베카 페르구손이 연기한 일사 파우스트라는 캐릭터가 등장해 만만치 않은 존재감을 드러낸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하지만 이건 일사가 IMF라는 팀 바깥에서 존재하며 에단 헌트와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일사는 상대역이었다. 팀원이 아니라. 톰 크루즈가 버티는 한 IMF는 여자들에게 그리 좋은 직장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이런 걸 고려해봤을 때, <미션 임파서블: 데드 레코닝 PART ONE>의 포스터는 예상외로 바람직했다. 일사 파우스트와 버네사 커비가 연기한 무기상 알라나 미트소폴리스를 포함해 적어도 네명의 여자들이 등장했다. 영화가 시작되니 네명의 존재감도 상당했다. 폼 클레멘티에프가 연기한 파리는 훌륭한 악당이었고 헤일리 앳웰이 연기한 소매치기 그레이스는 거의 투톱 주인공 중 한명이라고 해도 될 것 같았다. 그리고 그레이스는 만능의 현장 액션 요원이 아닌, 자기 전문 특기가 있는 최초의 여성 캐릭터처럼 보였다. 이 모든 게 바람직했다. ‘여자’ 역할 이상의 기능을 가진 존재는 가능할까 그러다 다들 분노하는 일이 일어났다. 일사 파우스트가 그레이스를 지키려다 죽어버린 것이다. 여기에 어떤 사정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모든 걸 고려한다고 해도 이 부분은 모든 게 안 맞았다. 일단 일사에게 어울리지 않는 안티 클라이맥스였다. 둘째로 이 죽음은 케이시 랜들의 죽음을 연상시켰다. 이놈의 시리즈는 수소 원자도 아니면서 내부의 여성 캐릭터를 오로지 한명밖에 허용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여담이지만 죽음 전에 에단 헌트와 어울리지 않게 로맨틱한 분위기를 연출한 것도 걸렸다. 그 때문에 일사는 ‘냉장고 속 여자 친구’에 더 가까워졌다. 결국 조금 전으로 돌아간다. <미션 임파서블: 데드 레코닝 PART ONE>이 많은 여성 캐릭터들에게 숨 쉬고 활동할 기회를 준 건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들의 존재감과 운명은 오로지 에단 헌트와의 관계에 의해서만 결정된다. 그리고 그레이스가 등장하자 궤도에서 튕겨나가는 일사에 비하면 에단 헌트가 목숨을 살려줬기 때문에 ‘은혜 갚은 호랑이’가 되는 파리는 그래도 정상적인 편이다. 여성 캐릭터를 다루는 방식에서 이번 <미션 임파서블: 데드 레코닝 PART ONE>은 수상쩍을 정도로 옛 본드 영화를 연상시킨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도. 원작의 앙상블 공식이 유지되었다면 여자들의 위치는 보다 안정적이었을 것이다. ‘여자’ 역에 그친다고 해도 그 위치는 리더와의 관계와 상관없이 독립적일 것이기에. 우리가 본 영화는 시리즈의 1부다. 그리고 이 영화는 최근 유행하듯 나오고 있는 2부작의 1부치고는 이야기를 잘 마무리한 편이다. 하지만 아직 이야기의 끝이 열려 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를 기대할 수 있다. 이 글과 어울리는 기대는 에단 헌트와 함께 일하는 여성 캐릭터가 두명 이상으로 늘어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중 한명은 ‘여자’ 역할 이상의 기능을 가진 존재일 것이다. 물론 이 수상쩍을 정도로 본드 영화스러운 흐름 속에서 이 숫자가 줄어들 가능성도 만만치 않고 반대로 우리가 지금까지 본 걸 다 뒤집는 일이 일어날 가능성도 아주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모든 게 기대 이상으로 잘 풀린다고 해도 톰 크루즈의 원맨 액션쇼라는 영화 시리즈의 틀 안에서 이 여자들이 숨 쉴 틈을 찾아낼 수 있을까. 아니면 그 기회는 톰 크루즈가 퇴장한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라는,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단계를 거쳐야 찾아오는 것일까.

[기획] 김소희, 김병규, 송경원, 송형국 평론가가 뽑은 2023년 한국영화의 결정적 장면

몽타주 속 은밀한 동조자 <비밀의 언덕> / 김소희 <비밀의 언덕>에서 마음이 흔들린 순간은 경희(장선)가 시에서 주최한 어린이 글짓기 대회 당선작이 실린 신문을 보는 장면에서였다. 단순하게는 경희의 반응이 상의 경중을 따지지 않고 자식을 무한히 자랑스러워할 부모의 존재를 연상시켰기 때문일 것이나, 감동의 경로를 좀더 구체적으로 들여다보고 싶다. 이 장면은 혜진(장재희)이 대상 당선작을 낭독하는 목소리가 내레이션으로 깔리는 가운데, 교내 방송을 통해 이를 청취하는 사람들의 반응을 보여주는 일련의 숏과 연속해서 등장한다. 즉 경희는 대상 수상작 청자의 자리에 불려나온 셈이다. 하지만 이어진 숏에서 경희는 신문 한 귀퉁이에 실린 명은(문승아)의 글을 가위로 오려내고 있을 뿐이다. 즉 이 장면은 대상 수상작의 무거움에 짓눌린 일련의 리액션을 중단하는 역할을 하기에 특별하다. 만약 명은이 대상을 받아들였다면 그 숏은 지금과 같은 힘을 지니기는커녕 홀로 무거움을 감내하는 전형적인 얼굴로 남겨졌을 것이다. 경희의 행위가 놓인 자리는 수상자 기념사진을 찍는 장면에서 명은의 위치와 심리적으로 유사하다. 주요 수상자들에게 밀려 몸과 얼굴이 가린 명은의 자리는 소외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대상 수상작에 얽힌 비밀의 당사자이자 기획자이기에 적절했다. 상의 이름에 아랑곳하지 않고 기사를 스크랩하며 홀로 영광을 누리는 경희의 얼굴은 은밀한 배치에 의해 명은의 비밀과 우연히 조우한다. 이 텔레파시가 올해 내가 한국영화에서 발견한, 모녀 멜로드라마와 가족 신파의 유일한 생존 신호였다. 오늘날의 영화가 감정을 위해 발굴해야 할 지점은 충격적 사연이나 과잉 동조의 눈물이나 민망한 유머가 아니라, 더없이 담백한 기쁨을 위한 적절한 자리 선정이다. 영화가 감정을 다루는 적절한 태도는 조급한 개입이 아니라, 설사 관객이 눈치챌 수 없다 해도 찰나의 비밀로 남겨지길 고집하는 용기가 아닐까. 아파트와 한국영화의 잃어버린 장소 <드림팰리스>와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 김병규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가성문 감독의 <드림팰리스>와 김희정 감독의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에는 같은 구도의 장면이 나온다. 집 안에서 창문 바깥을 바라보는 여자의 뒷모습을 담아낸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창밖을 보는 여자들은 공통적으로 남편이 죽은 뒤에 새로운 집에 도착하거나 살던 집을 벗어나 다른 집으로 떠나는 상황에 놓여 있다. 카메라는 같은 집에 머물던 동반자의 죽음을 마주하는 뒷모습을 바라본다. 이내 두 영화의 방향성은 투쟁의 기록을 따라가는 것(<드림팰리스>)과 애도의 시간을 관측하는 것(<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으로 갈리지만 내게 흥미로운 부분은 서로 다른 두 영화가 집이라는 장소를 매개로 죽음 이후의 시간을 바라보고 있다는 지점이다. 10년 전이라면 이런 구도는 <건축학개론>의 마지막 장면을 장식했을 것이다. 집에 남아 창밖을 바라보는 여자의 뒷모습은 과거의 상흔에도 불구하고 다음으로 이어지는 삶의 시간을 가리킨다. 하지만 오늘날의 한국영화에서 집은 미래로 향하는 안식의 장소가 아니다. 이곳에서 일상적인 생활로 돌아오는 것은 불가능하다. 집은 시도 때도 없이 녹물을 쏟아내고, 죽은 자와 나눴던 기억을 불러낼 것이다. 집은 해결되지 않는 유죄의 장소다. 우리는 그 ‘이후’의 시간에 도착했다. 그리하여, 김희정 감독의 영화 제목처럼 그 안에 머무는 이들에게 안정적인 정주를 제공하는 대신 “어디로 가고 싶은” 것인지 혼란스럽게 되묻는 장소로 다가온다. 그런 의미에서 2011년 출간된 동명의 책을 제목으로 삼은 엄태화의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어쩌면 한국영화의 표면적 질서를 지탱하던 그 집의 표상을 폭파하는 분기점인지도 모른다. 하루아침에 폐허가 된 서울에서 유일하게 무너지지 않은 아파트를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에서 폐쇄적이고 자족적인 아파트 내부의 질서는 붕괴하고 만다. “아파트는 주민의 것”이라는 구호가 무색하게, 그곳은 우리가 머물 수 있는 장소가 아니다. 집을 잃어버린 한국영화는 아직 장소를 찾지 못했다. 우리는 어디로 갈 수 있을까, 어디에 도착할 수 있을까. 그 매치컷 <콘크리트 유토피아> / 송형국 영탁(이병헌)이 민성(박서준)에게 방범대장직을 부탁하는 회상 장면. 악수를 청하는 영탁의 손이 클로즈업된다. 이어 맞잡지 않은 채 내려진 민성의 손이 매치된다. 악수할 듯 올라가는 손. 알고 보니 어느 정도 시일이 지나 자신의 방 옷장 앞에 서 있는 민성의 손이었다. 그대로 옷장 행거 봉을 움켜쥐는 손. 방범대로 나설 것을 결심하는 손이다. 이로써 영탁과 민성의 늦은 악수가 완성된다. 주저함 속에 동조에 이르는 과정을 단 몇컷으로 요리한 장면이다. 민성은 망설임 끝에 폭력에 가담하는 구성원으로서의 기능이 부여된 인물이다. 고밀도 콘티뉴어티다. 지난 10년여 사이 세계 곳곳은 ‘악의 평범성’(해나 아렌트)과 ‘자유로부터의 도피’(에리히 프롬)가 재소환될 수밖에 없는 정치사회적 현실을 보여줬다. 웹툰 <유쾌한 왕따>나 등의 텍스트가 등장해온 흐름은 그래서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영탁이 얼떨결에 힘을 쥐고 외부의 적을 활용해 지지세를 유지하는 권력자 캐릭터라면, 민성은 폭력의 방관자, 동조자 혹은 가담자로서 ‘내집단 편향’에 순응해가는 평범한 시민의 얼굴이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내러티브나 플롯뿐 아니라 콘티와 편집으로도 각 인물의 기능을 설득하는 장면들로 빼곡하다. 엄태화 감독은 박찬욱 감독으로부터 연출 수업을 받은 경력을 증명이라도 하듯 정교히 다듬어진 매치컷들을 여럿 배치한다. 영탁의 얼굴 측면 줌인-클로즈업에서 ‘아파트’ 노래방 기기로 들어가고, 여기에 인물의 사연을 알리는 플래시백을 매치시킨 다음 영탁의 얼굴 정면 줌아웃으로 빠져나오는 콘티에선, 엄태화 감독을 한국영화가 주목할 차세대 감독으로 손꼽기에 충분한 근면함이 보인다. 민성이 점차 폭력으로 물들어가며 건물 잔해를 파헤치는 숏 뒤에 명화(박보영)가 영탁의 집 벽을 부수는 숏으로 매치시켜 폭력의 실체를 파고드는 대조적 교차 역시 부지런한 콘티 구성의 결과다. 소진된 자기 복제의 승리 <범죄도시3> / 송경원 2023년 그 어떤 한국영화 속 장면도 영화 밖 결정적 장면을 넘어서지 못한다. 올해 유일하게 1천만 관객의 선택을 받은 <범죄도시3>는 이미 한편의 영화 이상의 여진을 남기고 있다. 물론 흥행이 절대적 기준이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대체로 질적 평가와는 반비례하는 경우가 흔하다. 하지만 속편이 거듭될수록 열화되어 몇 안되는 장점마저 까먹어가고 있는 이 시리즈가 여전히 압도적인 차이로 2023년 제일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건 하나의 징후로서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범죄도시3>는 한편의 액션 오락영화로서 충분한 즐거움을 제공한다. 문제는 세 번째 선보인 이번 영화가 1편과 2편보다 나은 구석이 하나도 없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결국 관객의 선택을 받았고 아는 맛이 무섭다는 걸 증명했다. 마동석을 중심에 두고 이 시리즈를 소비하는 감각은 사실 편한 마음으로 이미 본 시트콤을 보는 심리와 유사하다. 귀엽고 강력한 마동석이라는 아이콘은 불변의 고정값이 되어 늘 같은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후 갈등이나 긴장은 거의 배제한 채 압도적인 힘으로 부조리한 상황을 깔끔하게 정리하는, 안전한 쾌감을 제공한다. 문제는 상황과 무대, 빌런만 교체하며 반복을 거듭하는 가운데 재미와 개성마저 옅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빌런은 늘었지만 더 약해졌고, 무대는 넓어졌지만 산만해졌다. 마지막을 장식하는 마석도 형사의 시그니처 개그 한방은 자기 복제 끝에 어느덧 솜 주먹이 됐다. 1편에서 “혼자야/어 싱글이야”, 2편에서 “5:5로 나누자./누가 5야?”라던 마석도는 이제 소스가 떨어져 개그마저 반복한다. “5:5 얘긴 꺼내지도 마. 어차피 내가 5잖아.” 개그의 핵심 중 하나는 반복과 변주다. 하지만 주먹을 내밀며 “인사해, 주 변호사야”라고 싱긋 웃는 마석도의 모습은 매너리즘에 빠져 슬슬 폐지가 가까워진 개그 코너의 주인공처럼 느껴진다. 더 씁쓸한 건 이 익숙한 개그 코너 말고 돌릴 채널이 마땅치 않아 그냥 멍하니 틀어놓고 있는 우리다.

[복길의 슬픔의 케이팝 파티] 이제 남은 건 절망뿐이야

대구역 건너편 골목에 있는 교동시장은 1960년대생인 우리 엄마가 젊은 시절 친구들과 함께 놀던, 지역 최고의 번화가였다. 그러나 90년대, 도시의 중심이 한일극장이 있는 동성로 2가로 완전히 옮겨가자 교동시장 부근은 영업을 중단한 단관 극장과 오래된 금은방, 철거하지 못한 백화점만 남았고, 이내 그곳은 외국인 노동자들과 노인들만 거니는 동네의 외진 그림자가 되었다. 도시의 모습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한국인이라면 모두 안다. 위와 같은 히스토리를 가진 골목들이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70년대와 80년대의 흔적이 적당한 낭만으로 남아 있으면서, 90년대와 2000년대에 받은 외면으로 자릿세가 낮은 모든 골목들. 교동시장 골목 역시 2010년대를 거치며 ‘O리단길’ 혹은 ‘제2의 성수동’ 같은 장소가 되고 말았다. 단관 극장, 금은방, 백화점이 있던 오래된 골목에 어느새 에스프레소에 레몬을 넣어주는 카페, 레코드판과 향초를 함께 파는 잡화점, 머리에 포마드를 발라주는 바버숍이 들어와 자리를 잡았고, 그 상점들이 내뿜는 ‘쿨’한 공기는 모기향처럼 대구의 젊은 힙스터들과 관광객들을 수시로 끌어들였다. 2023년 7월. 나는 지금 교동을 걷고 있다. 골목 어귀에서부터 느껴지는 젊음의 기운에 정신을 차리기 힘들다. 어떤 가게는 간판이 없고, 어떤 가게는 문이 없는데 사람들은 줄을 길게 섰다. 나는 걸으며 줄 선 사람들을 바라본다. 여자들은 모두 뉴진스처럼 옷을 입었고, 남자들은 모두 유승준 스타일을 하고 있다. 2020년대와 90년대가 공존하는 ‘MZ존’인 것이다. 에스프레소를 연거푸 세잔을 마셔서인지 심장이 미친 듯이 빨리 뛴다. 걷고 또 걸으니 ‘무궁화 백화점’과 ‘경상감영공원’이 보인다. 여기서부턴 ‘실버존’이다. 성인 카바레 앞, 팔에 장미 문신을 한 할아버지가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있고, 공원 어귀 벤치엔 키스하는 노인 커플과 그들을 바라보며 <퀴사스, 퀴사스, 퀴사스>를 부르는 할아버지가 있다. 이 좁고 긴 골목을 지날 때 나는 마치 한 ‘인싸’의 일생을 통과하는 느낌을 받고 말았다. 힙스터의 찬란한 생애에 잘못 방류된 불순물의 모습으로…. 그렇게 지친 몸과 마음으로 골목을 벗어나려는데 어디선가 들려오는 익숙한 비트의 음악이 내 심장을 움켜쥐었다.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살펴보니 음악이 나오는 곳은 배달 오토바이의 스피커다. 사이렌 소리로 시끄러운 전주가 멎자 곧장 날카로운 목소리가 “모두 ‘쩨정신’이 아니야” 하며 귀를 찌른다. 골목을 탈출하던 밀레니얼 ‘아싸’는 순간 ‘이정현’이라는 텔레포트를 만나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이정현은 누구인가? 아니, 이정현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밀레니얼의 또 다른 이름이자, 세기말의 절망을 광기로 제패한 Y2K의 수호신, 21세기에 대한 불안과 기대를 굿판으로 털어내던 테크노 무당. 베를린 클럽에 가도 영혼이 울리지 않는 이유는 나의 테크노가 이정현이기 때문이요, 세상을 타도하는 트랩 뮤직을 들어도 피가 끓지 않는 이유는 나의 전사는 오직 이정현밖에 없기 때문이다. 어느 누가 마이크를 새끼손가락에 꽂고 세상을 향해 저주를 퍼붓겠는가, 어느 누가 부채에 그려진 눈으로 세상을 노려보려 하겠는가, 어느 누가 ‘저그족’의 익룡 날개를 달고 세상에 침을 뱉겠는가, 어느 누가 클레오파트라의 금붙이를 입고 세상에 제를 지내듯 춤을 추겠는가! ‘사실이 아니길 믿고 싶었’지만, 시대는 야속하게 저물었다. ‘이제 남은 건 눈물과 절망’뿐이라며 푸념을 하고 있는데 한바탕 살풀이를 하고 새로운 시대를 향해 ‘내게 와 줘!’를 외친다. 외계 행성에서 왔다는 다소 황당한 설정, <와호장룡>을 연상케 하는 동양풍 의상과 헤어스타일, 꺾고 멈추기를 반복하는 다소 기괴한 춤, 떠나간 연인에게 저주를 퍼붓는 무서운 노랫말…. 그의 데뷔곡 <와>는 시대가 바뀌며 발생하는 혼란을 연쇄적인 충격요법을 통해 수습했고, 나는 그의 춤과 노래를 통해 비로소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세상에 종말이 올 거라는 예언보다 내 컴퓨터가 바이러스에 걸리는 게 더 두려웠던 1999년의 불안은 이정현의 등장과 함께 ‘새천년’을 향한 기대감으로 완전히 상쇄된 것이다. 모든 사람에겐 자신만의 음악 역사가 있을 것이다. 첫 번째로 구입한 앨범, 처음으로 반한 가수, 처음으로 외운 노래 가사…. 내게 <와>는 CD를 구매하게 하고, 이정현의 브로마이드를 방에 붙이게 한 나의 ‘첫 K팝’이다. 미련이 무엇인지, 한은 또 무엇인지 모르던 나와 내 친구들은 어깨보다 넓은 비녀를 꽂은 여자의 독기와 광기에 매료되어 새끼손가락에 쥐가 날 때까지 춤을 추고, ‘이제 남은 건 절망뿐’이라 함께 외치며 즐거워했다. ‘MZ존’과 ‘실버존’이 마주 보는 ‘인싸의 길’ 위에서 지난날을 회상하며 홀로 착각에 빠진다. 그렇다. 나는 절망을 즐길 수 있는 ‘아싸’로 길러졌으며, 이 도시의 낭만은 나의 고독으로 인해 완성된다. ‘젊은 인싸’와 ‘늙은 인싸’ 모두 자중하며 살라. 당신들의 빛은 나의 어둠에서 탄생한 것이니…. <와>를 귀에 꽂은 나는 당당한 ‘인싸’의 걸음으로 골목을 관광했다. 매일 부수고 다시 짓기를 반복하는 동네. 여긴 10년 뒤엔 또 어떤 모습일까? 이런 도시의 순환을 즐길 수 있어야 진정한 ‘인싸’인데…. 그렇게 2절이 시작되고 외관이 세련된 신상 카페에서 ‘MZ 인싸’들이 우르르 나오며 무겁게 속삭인다. “자리 개불편해. 빨리 집에 가고 싶음.” 아, 그들에게 이 노래를 들려주고 싶다! 너무나 처절해서 오히려 희망적으로 들리는 이 미친 노래를! 이제야 공공장소에서 이어폰을 쓰지 않고 큰 소리로 트로트를 듣는 노인들이 이해된다. 그것은 ‘인싸’, ‘아싸’ 구분 없이 모든 인간에게 내재된 소외감의 표현, ‘다 같이 놀자’라는 구조의 신호. 30년 후 ‘O리단길’에서 ‘인켈효도라디오’로 <와>를 듣는 노인을 발견한다면 새끼손가락을 입에 대고 화음을 넣어주세요. 당신이 ‘인싸’든, ‘아싸’든 상관없습니다. 그렇게 흥을 나누는 것만으로 저는 위로를 받을 거예요. 도시라는 공사판에서 서로를 보호하려면 그것이 유일한 방법입니다.

[기획] 쓸쓸함도 황량함도 노래가 된다, 독일영화의 좌표에서 크리스티안 페촐트의 자리 찾기

처음 본 크리스티안 페촐트의 영화인 <내가 속한 나라>에서 지금도 또렷하게 남아 있는 장면이 하나 있다. 차창 밖으로 달려가는 유럽의 풍경과 그 풍광을 담고 있는 동경 어린 소녀의 눈망울은 쓸쓸하기 짝이 없다. 부모가 좌파 테러리스트라 쫓겨다니는 통에 자기가 선택하지도 않은 떠돌이의 삶을 살아가는 소녀에게는 자신의 자리인 세상의 점 하나가 간절하다. 점이 없으니 선도 없다. 내부 안전을 위해 세상 누구와도 연결되면 안되니 내면의 안정은 찾을 길이 없다. 그렇다면 1960년 서독의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에서 태어난 페촐트의 자리는 어디일까? 의외로 쉽게 답이 나온다. 독일이다. 독일 감독이니 당연한, 그런 의미가 아니다. 그러니까 활동 영역을 뜻하는 게 아니고 국적을 뜻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의 시점이 독일에 있고,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도, 그의 시야도 독일이다. 이는 오랫동안 정체되었던 독일영화계에 1990년대 이후로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었던 동료 감독인 도리스 되리, 톰 튀크버, 올리버 히르슈비겔, 플로리안 헹켈 폰 도네르스마르크의 행로와 비교해보면 더욱 확실해진다. 무엇보다도 영화의 주제들이 그가 언제나 현재 독일의 문제의식에서 출발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68 학생운동의 잘못된 유산인 적군파 테러리스트들의 유령 같은 삶, 포스트 포드주의 시대를 맞은 자본주의국가 독일의 도덕적 함몰, 그곳에서 일찌감치 낙오자이자 국외자가 된 청소년들, 통일 뒤에 나타난 또 다른 동서의 비대칭, 전범국가 독일의 해외 파병과 그 후유증, 독일 내 터키 이민자들의 고단함, 사회주의 독재국가 동독의 억압 체계, 나치 독일의 수용소와 정치적 난민의 생존 문제, 신자유주의 사회의 사랑, 능력사회의 폐해에 이르기까지 그의 시선은 늘 독일을 맴돈다. 사회에서 개인의 문제로 그렇다고 신독일영화의 선배 감독들처럼 직접적인 사회 비판을 하는 것도 아니고 노선이 선명한 것도 아니다. 베를린파라는 범주의 실효성을 믿지는 않지만, 그 대표주자답게 사회의 큰 사건보다는 일상 속 인물들을, 대우주와의 격돌보다는 개인들의 소우주를 바라본다. 사회적 모순에 대한 해결 방법이나 대안을 제시하기보다는 새로운 삶에 대한 간절한 희망이 꺾이는 순간을, 선한 피억압자보다는 가해자가 되는 피해자를 차분히 그려낸다. 그러나 페촐트의 매력은 이렇게 사회의 민감한 지진계 역할을 하는 것으로 소진되지 않는다. 사회적 문제의식은 매번 인간의, 또는 인생의 본질적인 문제들에 대한 탐구로 이어진다. 철저하게 독일적이면서도 그렇지 않은 이유 역시 여기에 있다. 그리고 이러한 탐구 과정은 전적으로 탐색을 통해 이루어진다. 다큐멘터리 같은 느낌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그는 자신이 스크린 위에 펼쳐 보이는 세상의 전지전능한 창조자처럼 굴지 않는다. 그의 인물들은 결코 완전히 파악되지 않는다. 사람의 계획은 우발적 사건들을 통해 끊임없이 엎어진다. 그렇기에 연민과는 거리가 먼 객관적인 탐색의 시선과 시선이 가닿지 않는 어딘가에 도사리고 있는 무엇인가가 언제든지 뒤엉킬 수 있다. 또 한명의 독일 거장 감독인 안드레아스 드레젠의 세계에 마법 같은 순간들이 있다면 페촐트의 세계에는 미스터리와 신비로움이 대기 중에 떠돈다. 물론 이러한 탐색의 모습은 정밀하고 섬세한 수공예의 결과물이자 오랜 성찰의 산물이다. 이제는 루틴이 된 듯한 삼부작 구조가 그 극명한 증거다. 삼부작의 경향은 그가 자신의 주제에 얼마나 진심인지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얼마나 끈질기게 천착하는가를 방증한다. 또한 직접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배우들과 촬영을 준비하는 단계에 이르기까지 다른 예술작품들과의 대화가 늘 동반된다. 그가 영화를 공부하기 전에 독문학과 연극학을 전공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세미나’라 불리기까지 한다는 배우들과의 준비 과정에는 주로 영화와 문학작품들이 ‘교재’로 쓰인다. 그것들을 골라내는 솜씨를 보면 감탄이 절로 난다. 평소에 열심히 읽고 본다는 얘기일 뿐 아니라 읽어내는 능력 또한 뛰어나며 응용력은 말할 것도 없다. 그의 영화가 보여주는 다층성과 상징성은 문학의 영향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회화의 영향은 무엇보다 그의 영화 곳곳에서 등장하는 황량한 풍경에서 드러난다. 독일 낭만주의 풍경화의 화풍을 떠올리게 만드는 영상은 인간이 얼마나 작은 존재이며 위태로운 존재인가를 느끼게 해준다. 바바라가 탈주 자금을 감추러 바위 더미로 갈 때면 바람은 또 어찌나 부는지. 어쩌면 베를린파 미학의 핵심 개념인 ‘분위기’의 요체가 여기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중적인 시선 페촐트는 자신의 인물들에게 해피 엔드를 선사하지 않는다. 그의 인물들에게 과거의 흔적들이 지워져 있듯이, 영화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또한 늘 열려 있다. 오히려 그들 뒤로는 항상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어서 때로는 서서히 그것에 잠식당하고 때로는 난데없이 급습당한다. 이것이 페촐트의 낭만주의적 리얼리즘이다. 그렇기에 신산한 인생의 뒷맛이 영화관을 나선 뒤에도 여운처럼 남는다. 그런데 이상하게 차갑게만 느껴지지는 않는다. 사실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의 인간적인 면모는 영화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하지만 온기에도 종류가 있는 법이다. 드레젠과 비교해보면 차이가 확연하게 느껴진다. 동독 출신으로 포츠담 바벨스베르크 영화·텔레비전 대학교를 나온 드레젠에게서 무조건 내 편일 것 같은 푸근한 엄마의 따뜻함이 느껴진다면, 서독 출신에 베를린 독일 영화·텔레비전 아카데미를 나온 페촐트에게서는 젊은 감각을 유지하며 짚고 넘어갈 것은 짚고 넘어가는 이성적인 아빠의 따뜻함이 느껴진달까. 드레젠의 영화에 동트는 아침의 노릇한 붉은빛이 감돈다면, 페촐트의 영화는 그 두 시간쯤 전, 푸르스름함이 가라앉아 있는 풍경을 담는다. 드레젠이 여명으로 독일 사회의 아래쪽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감싸안는다면, 페촐트는 사회의 바깥으로 밀려나 그 푸르스름함 속에 서 있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그 시선은 이중적이다. 그들을 밖으로 내모는 냉혹한 사회를 직시하는 냉철함 안에 곧 퍼져올 따스함이 담겨 있다. 이렇게 그의 영화에서는 쓸쓸함도 황량함도 노래가 된다.

[기획] 다큐멘터리, 오늘을 감각하다 제15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추천작

제15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이하 DMZ영화제)는 올해 변화를 꾀했다. 프로그램 섹션을 전면 개편해 국제경쟁, 프런티어, 한국경쟁으로 경쟁부문을 나누고 비경쟁 섹션을 베리테, 다큐픽션, 에세이, 익스팬디드, 기획전으로 구분했다. 이 다채로운 섹션에서 총 54개국 148편을 만날 수 있다. 영화제는 CGV 고양백석, 메가박스 백석벨라시타에서 9월14일부터 21일까지 열린다. 달라진 DMZ영화제의 지형도를 탐색하려는 관객을 위해 가이드를 준비했다. <씨네21>이 엄선한 9편의 추천작과 고 이강현 감독 개인의 영화사를 되짚는 기획전 ‘메모리얼 이강현’, 극장 밖에서 영화와 관객의 접점을 도모한 비(非)극장 프로그램 ‘귀신을 본 적 있나요?’를 차례로 소개한다. 이터널 메모리 The Eternal Memory 마이테 알베르디 / 칠레 / 2023년 / 100분 / 개막작 / 김예솔비 영화 평론가 <이터널 메모리>는 알츠하이머에 걸린 공고라와 그의 동반자 파울리나가 보내는 다정하고 열렬한 시간을 응시한다. 저널리스트로 일했던 아우구스토 공고라는 피노체트 독재의 참상을 목격하고 이를 언론에 알리기 위해 나섰던 인물이다. 그렇기에 공고라의 기억을 붙잡으려는 두 사람의 분투는 특정한 역사의 이미지를 망각으로부터 구해내기 위한 구원에의 몸짓이기도 하다. ‘기억이 있는 자에게 용기가 있다’라는 말은 단순히 알츠하이머라는 상실의 병에 전하는 위로이기보다 금지된 기억을 역사로부터 누락시키지 않기 위해 함께 저항하는 용기를 칭하는 문장이 된다. 무언가를 기억한다는 것은 그것이 망각되는 순간까지 끌어안는 것이며, 그 순간을 가능한 한 멀리 지연시키면서 자신의 보폭으로 희망의 반경을 더듬는 일과 같다. 영화는 아카이브 푸티지 영상과 홈비디오, 기록과 관찰 사이를 오가면서 기억과 망각 사이를 팽팽히 순환하는 한 사람의 미시 세계를 들여다보고 그 풍경을 칠레의 근현대사와 느슨하게 겹쳐놓는다. 화면이 어두워지고 다시 밝아질 때마다 공고라의 증상은 점점 악화되고 알츠하이머는 예정된 상실을 상연하지만, 감동적인 것은 카메라가 기록하기를 멈추지 않을 때다. 영화는 쇠잔해가는 육체와 달리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단단하게 보호되는 어떤 기억의 존재 방식과 기록의 상관관계를 가늠해 보게끔 만든다. 어나더 바디 Another Body 소피 캠튼, 루벤 햄린 / 미국, 영국 / 2023년 / 80분 / 국제경쟁 / 김예솔비 영화평론가 대학생 테일러는 자신의 얼굴이 딥페이크 기술로 합성되어 포르노 사이트에 떠돌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얼굴뿐 아니라 이름과 학교, 주소까지 노출된 탓에 그녀는 자신의 집에서조차 안전하다고 느끼지 못한다. 한편 아이러니하게도 테일러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 보호받을 수 있는 유일한 형식은 딥페이크가 조성하는 익명성 속에서다. 테일러라는 이름조차 가짜라고 밝힌 그녀는 가상의 이름과 얼굴을 빌려 잠입 수사를 시도한다. 그녀는 딥페이크에 대한 마땅한 처벌법이 제정되지 않는 현실에 낙담하는 대신 스스로 범인을 추적하며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놓인 동료들을 조우한다. <어나더 바디>는 각종 SNS와 포털, 불법 포르노 사이트를 옮겨다니며 추리를 벌이는 노트북 무비이면서, 트라우마적 사건을 경험한 이가 자신의 절망을 헤쳐나가는 과정이 담긴 자기 고백적 비디오 다이어리다. 테일러의 얼굴은 모든 여성의 얼굴이 기입될 수 있는 잠재적 자리이고, 바로 그 점으로부터 연대의 정의가 가능해진다. 그것은 속삭임이 모이면 하나의 구체적이고 정확한 육성으로 들린다는 사실이다. 수카바티 선호빈, 나바루 / 한국 / 2023년 / 102분 / 한국경쟁 / 조현나 서포터스의 개념조차 명확하지 않던 1990년대. ‘레드’(RED)는 K리그를 주름잡던 안양LG치타스의 팬클럽 이름이었다. 이름처럼 붉은 화약포를 한꺼번에 터트리는 것이 이들 응원의 시그니처와 다름없었다. 당시 K리그를 휩쓸던 안양LG치타스는 2003년, 돌연 서울로 연고지를 이전해 현재의 FC서울로 변모한다. 갑작스레 적을 둘 팀을 잃었음에도 레드는 와해되는 대신 자신들의 축구팀을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연출을 맡은 나바루 감독이 본인의 터전 안양을 돌아보는 것에서 영화의 여정이 시작된다. 안양을 둘러보던 그가 포착한 것이 바로 레드였고 감독은 삶의 일부인 축구를 잃은 팬들의 상실감을, 어떤 면에선 가족보다 더 깊게 결부된 팀과 팬의 관계를 세심히 들여다본다. 레드를 창단한 이들부터 다른 팀 서포터스와 언론사 기자까지 다양한 시점의 증언이 감독의 기록에 힘을 싣는다. FC치타스의 자리에 FC안양이 들어서고 마침내 ‘수카바티’의 뜻이 밝혀지는 극의 말미엔 뭉클함마저 느껴진다. 특정 스포츠팀을 좋아하거나 혹은 그런 경험이 없을지라도 <수카바티> 속 팬들의 열렬한 애정에 공감하게 될 것이다. 맨 인 블랙 Man in Black 왕빙 / 프랑스, 미국, 영국 / 2023년 / 60분 / 프런티어 / 이보라 영화평론가 나신의 남자가 계단을 걸어내려와 원형 무대로 진입한다. 빈 객석 틈으로 중앙에 다다른 나이 든 남자는 불가해한 동작을 반복하며 움직인다. 카메라는 그의 몸을 지나치게 탐색한다. 핏줄과 각질과 상처와 주름에 노골적으로 다가가며 인물의 신체를 가감 없이 취할 기세다. 동시대 중국 사회의 풍경을 면밀하게 담으려 애써온 왕빙은 이번에 재독 중국인 작곡가 왕시린을 주인공으로 삼았다. 그는 1960년대에 반정부 인사로 낙인 찍혀 고문과 수감을 겪었다. 실존 인물에게 거의 달라붙어 그(들)의 삶을 가능한 한 투명하게 담아내던 왕빙은 <맨 인 블랙>에 이르러 별안간 당혹스러운 1인극을 시도한다. 왕시린이 말문을 열고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조차, 시종 울려 퍼지는 그의 음악은 마치 소음처럼 대사를 덮으면서 ‘음과 말’이 충돌한다. 실재의 포착을 고수해오던 왕빙은 왜 이토록 형식적인 모험에 관심이 생겼을까? 그렇다면 <맨 인 블랙>은 다큐멘터리인가? 예술가와 작품이 서로를 방해하고 끼어드는 과정을 선보이면서, 영화는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오간다. 나는 군산에서 태어나 7년、그리고 일본으로 송환되고… 존필원 / 일본, 한국 / 2023년 / 239분 / 한국경쟁 / 이보라 영화평론가 한국영화에서 전라북도 군산을 로케이션 촬영지 또는 서사의 배경으로 삼은 적은 더러 있었지만, 존필원 감독의 <나는 군산에서 태어나 7년、 그리고 일본으로 송환되고…>에서만큼 이 지역이 복잡한 역사성을 지닌 장소로 등장하(지 않)는 사례는 달리 떠오르지 않는다. 영화가 시작하면 대나무숲이 펼쳐지는 화면 틈으로 어떤 남성의 일본어가 들려온다. 그는 제목처럼 1938년 군산에서 태어난 뒤 어린 시절을 보내다 일본으로 강제 송환된 캄바야시 아키오다. 군산에서 시작한 그의 회고는 전후 일본으로까지 이어진다. 와중에 숲을 떠나 도심을 떠도는 카메라는 애니메이션 필터를 씌운 듯 노이즈로 가득 차 형상을 알아볼 수 없도록 뭉개진다. 종종 캄바야시의 말은 인터뷰이를 상정한 채 특정 사진이나 활자 등을 언급하지만 관객은 이 대화가 발생하는 현장을 모른다. 이 불일치와 미지의 감각은 내내 이어지지만 끝내 기묘한 감동을 건넨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매우 구체적인, 캄바야시의 기억력이다. 하긴 그는 마흔 넘어 참석한 동창회에서 군산초등학교의 교가를 불렀던 이다. 개인의 기억이 역사가 되는 경험, 그리고 그 역사를 이야기로 바꾸는 모험이 만나 만들어진 대장정이다. 니트 아일랜드 Knit’s Island 에키엠 바르비에 외 / 프랑스 / 2023년 / 98분 / 프런티어 / 김예솔비 영화평론가 세 사람이 숲을 가로질러 마을에 도착한다. 자신들을 다큐멘터리스트라 소개하는 이들은 마을 공동체의 이야기를 수집하고 있다며 인터뷰를 요청한다. 마을 사람들은 무장한 채 폐허가 된 건물에 모여 살고 있고, 좀비가 득실거리는 바깥은 언제 적의 총알이 날아올지 모를 위험지대다. 기묘한 것은 이 다큐멘터리가 게임 속에서 제작되고 있다는 점이다. 언뜻 보기에 게임 시점 녹화 기능을 이용해 연출된 화면처럼 보이지만, 이들의 여정은 정해진 서사의 줄기 없이 관찰 다큐멘터리 형식을 따른다. 이는 정해진 플레이 없이 스스로 생존 전략을 구사해야 하는 ‘데이즈’(DayZ)라는 게임 자체의 특징이기도 하다. 게임의 서사는 이미 주어져 있기보다 플레이어의 선택과 의지로 조정 가능한 대상이 된다. 플레이어들은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위험으로부터 자극을 얻는 동시에 자신만의 공동체를 만들고 거닐며 위안을 누린다. 이 감각은 정녕 현실 세계와 치환 가능한 경험일까? 가상과 현실 사이, 어디에도 위치지어질 수 없는 시간들. 그 속에서 만나고 흩어지는 사람들이 있다. 마더랜드 Motherland 알렉산더 미할코비치, 하나 바지아카 / 스웨덴, 우크라이나, 노르웨이 / 2023년 / 95분 / 국제경쟁 / 조현나 입대하는 젊은 청년들과 이들을 배웅하는 가족들. 2020년 벨라루스에서 펼쳐진 이 풍경에 균열을 내는 것은 군에서 아들을 잃은 어머니, 스베틀라나의 외침이다. 그의 아들 사샤는 교육을 목적으로 자행된 고문으로 인해 군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 뒤로 스베틀라나는 같은 이유로 가족을 잃은 이들의 발언을 수집하기 시작한다. 스베틀라나의 외로운 싸움은 입대한 아들이 어머니에게 띄운 편지의 내레이션과 중첩된다. 젊은 남성의 목소리로 낭독된 편지에선 그가 군대 내에서 정신적, 신체적으로 어떻게 붕괴해갔는지 서술돼 있다. 이는 <마더랜드>가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은 군대 내의 폭력을 연상시키고, 극 후반부에선 독재정권에 대한 대중의 반발과 이를 억압하려는 대치 사이의 긴장감과도 이어진다. 이러한 흐름은 결국 전쟁의 잔학성과 결부된다. 입대를 준비하는 한 청년과 정권에 대항하는 청년들의 도처엔 죽음의 그림자가 반복해 드리운다. 징병제 국가로서 한국 또한 이 폭력과 죽음의 굴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참혹한 현실 속에서 과연 우리는 무엇을 시도할 수 있을지 되뇌게 만드는 작품이다. 생각의 극장 Theater of Thought 베르너 헤어초크 / 미국 / 2022년 / 108분 / 베리테 / 이보라 영화평론가 5 더하기 5는 11임이 틀림없다고 주장해보자. 전혀 믿지 않는 것을 강력하게 발화할 때 우리의 뇌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질까?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며 베르너 헤어초크는 인간의 뇌라는 화두에 사로잡혔다. 그는 미국의 유명 대학과 실험실, 병원 등을 방문하며 수많은 연구자를 만나 뇌에 관해 질문한다. 히드라의 느릿한 움직임에서 영생의 단서를 배우듯, 이 과정은 비인간적 존재를 통해 궁극적으로 인간 세계에 적용할 교훈을 찾는, 꽤 진부한 시간이다. 와중에 흥미로운 지점은 어느 학자의 열성적인 설명 뒤로 헤어초크가 “거의 알아들을 수 없었다”라며 고백하는 보이스 오버가 흐를 때처럼, 이따금 탈선하는 영화의 딴생각이다. 헤어초크는 종종 생뚱맞은 질문으로 화제를 전환한다. 인간이 동물과 소통할 수 있는지, 자신의 다음 영화를 찍기 전에 미리 볼 수 있는지, 죽은 사람이 텔레파시 기기를 갖고 있으면 천국의 존재를 알려줄 수 있는지. 스스로도 순진하다 자평하는 그의 상상력은 사실 영화라는 상상적 행위와 긴밀하게 맞물린다. 이쯤에서 우리는 왜 제목이 ‘생각의 극장’인지 다시금 곱씹게 된다. 조용한 선박들 정여름 / 한국 / 2023년 / 26분 / 한국경쟁 / 김예솔비 영화평론가 화자는 베트남전쟁의 비무장지대(DMZ)였던 곳을 방문한다. 관광 가이드 민은 DMZ에 얽힌 역사를 해설한다. ‘미국이 베트남을 침략했고, 오랜 격전 끝에 평화 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상당한 병력이 동원되었습니다.’ 읊조리는 목소리와 동시에 화면에 나타난 것은 사진들이다. 폭격으로 무너진 성당 터, 녹슨 전쟁 기계들, 여행자의 카메라에 포착된 시간의 사소한 단위들. 이상한 의문 하나가 우리를 감싼다. 기억이 장소로부터 미끄러지고 있다는 사실. 사진은 그 자체로 보이는 것의 총체인 동시에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다. <조용한 선박들>에서 사진 이미지는 정보를 제공하는 텍스트이기보다 지상에 감도는 불길한 오차를 드러내는 수단이다. 공산주의를 수호했던 베트남을 제어하고 있는 힘은 자본주의이며, 지난 전쟁의 상흔을 보존하고 있는 기억은 사실상 기억의 하청이다. 정여름은 사진을 배치하고, 아주 가깝거나 멀리서 들여다보면서 세계와 기억의 불협(들)이 진동하는 시공간을 드러낸다. 올해 DMZ영화제의 한국경쟁 섹션은 장편과 단편 섹션을 통합해 작품을 선정했다.

[기획] 개인적인, 지극히 역사적인, ‘이터널 메모리’에 담긴 칠레의 기억

제15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개막작으로<이터널 메모리>(2023)가 선정됐다. 올해 1월 선댄스영화제에서 첫 소개된 이후 전세계 시네필들의 입소문을 타기 시작한 이 작품은 9월20일 국내 개봉을 앞두고 있다. 영화는 칠레의 미첼 바첼레트 정권에서 문화부 장관을 지낸 파울리나 우루티아가 남편인 언론인 아우구스토 공고라의 알츠하이머병 투병을 도우며 진행되는 이야기를 다룬다. 다큐멘터리 분야에서 남미의 새로운 흐름으로 부각되는 마이테 알베르디의 다섯 번째 장편 <이터널 메모리>를 통해 사라져가는 현실을 기록하는 새로운 방식을 찾을 수 있다. 한 노년 남성이 침대에서 몸을 뒤척이고 있다. 그의 곁으로 다정한 목소리의 여인이 카메라를 매만진다. 여자가 남자에게 묻는 것은 자신과 그의 이름에 대해서다. 아우구스토는 현재 알츠하이머 발명으로 인해 작은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렀다. 이윽고 영화는 현재와 대비되는 젊은 시절 그의 모습을 보여준다.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던 시기에 그는 검은 머리와 굵은 수염으로 ‘칠레의 영혼’을 소리 높여 외치고 있었다. 이러한 그의 활동은 사랑하는 여인의 이름조차 구분 못하는 현재의 상태와 비견된다. 한마디로 ‘죽음’과 ‘사랑’의 극단을 영화는 한데 모으고 있다. 개인적인 관계가 묘사되는 동시에 인물들을 둘러싼 역사적인 사건들이 부각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카메라는 인물에 점점 더 다가가고, 사건의 심각성은 확장된다. 사랑과 결혼, 그리고 알츠하이머 인물들의 감정을 좀더 입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칠레의 역사적인 상황을 살피는 것은 도움이 될 것이다. 1970년 칠레에서는 ‘인민연합’의 아옌데가 투표를 거쳐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그야말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빈부 격차가 심각한 상황이었고 모두가 우파의 승리를 예측하던 시기였다. 아옌데는 평화적으로 대통령 자리에 오르는 데 성공했다. 전세계 언론이 칠레를 주목했다. 냉전 시대에 혁명이나 폭동이 아닌 제도를 통해 사회주의에 도달한 드문 사례였다. 일종의 역사적 실험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희망은 빠르게 사그라졌다. 아옌데가 집권한 지 3년 만인 1973년 9월11일, 피노체트의 독재정권이 시작되었다. 희망의 칠레는 암흑기로 변한다. 대통령궁은 군부의 폭격으로 폭발됐고 아옌데는 자살했다. 의회는 정지되었으며, 모든 정당과 노동조합의 운동은 금지되었다. 이후 1989년 아일윈이 대통령에 당선될 때까지 무려 17년간 피노체트의 공포 독재가 이어졌다. 미국 CIA의 내부 문서에 따면 당시 미국은 간접적으로 피노체트의 쿠데타 기획을 도왔다고 한다. 미국 회사가 소유했던 칠레의 구리광산이 국유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리고 쿠바 혁명 이후 남아메리카에서 또 다른 사회주의국가가 안착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미국은 움직였다. 이러한 당대 상황을 영화는 인물의 트라우마와 연결시킨다. 아우구스토가 처음 사회에 발을 내디딘 시기는 피노체트 정권 휘하에서였다. 1970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그는 곧장 군사독재에 반대하는 매체의 저널리스트가 됐다. 그리고 1976년부터 격주간지 <솔리다리다드>의 편집자로 일하기 시작했고, 이후 시청각 뉴스 <텔레애널리틱스>에서 뉴스 진행을 맡았다. 해당 내용은 아카이브 필름의 형태로 영화에 삽입된다. 과거 주인공 아우구스토의 모습은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칠레 언론의 대표적인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 경력을 인정받아서 1993년에 그는 칠레 국영방송()의 문화부문장 자리에 오른다. 이후 의 문화 관련 프로그램 진행자로 활동하는데, 당시 모습도 영화에서 살필 수 있다. 특히 2007년과 2008년에 그는 영화감독 라울 루이스의 TV 미니시리즈 2편을 총괄 제작했다. 그중 2007년에 방송된 4부작 미니시리즈 <라 렉타 프로빈시아>에서는 잠깐 배우로도 등장했다. 한편, 아우구스토의 아내 파울리나는 어려서부터 배우를 꿈꾸던 소녀였다. 그녀는 스무살이던 1989년에 연극 무대에 데뷔했고, 이 제작한 <텔레노벨라>로 점차 이름을 알렸다. 본격적으로 그녀가 대중에 각인된 것은 2000년대였다. 당시 칠레 배우연합에서 활동하면서 그녀는 배우연합 회장직을 맡는다. 그리고 2006년 문화부 장관으로 임명된다. 아우구스토와는 오래 기간 연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화에 등장하는 결혼식 장면은 2016년 6월17일의 기록으로, 연애를 시작한 지 거의 19년 만의 일이었다. 하지만 이 시기에 아우구스토는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은 지 2년째 접어든 상태였다. 생각해보면 이 영화의 역사적 상황과 부부의 결혼식 장면은 묘하게 겹쳐진다. 독재의 횡포가 시작되던 즈음, 그들은 질병의 지배를 받으며 정식 부부로 인정받는다. 이러한 상황은 영화의 극적 동력으로 작용한다. 이 사랑은 가장 위태로운 시기에 이루어졌고, 평화로워 보이는 현재의 인물들에게는 어둠이 깃들어 있다. 한마디로 이 영화는 과거와 소통하는 중이다. 놀라운 속도로 사라져가는 현재의 시간들을 <이터널 메모리>는 상반된 것들과 연계시킨다. 책으로 드러나는 과거의 사건들, 영상의 언어로 유비되는 감정들, 영화가 드러내는 것이 아무리 미온적이더라도 과거의 사건들이 지금의 시간을 장악한다. 마이테 알베르디 감독은 평온한 부부의 일상을 기억의 세부와 대비시키는 몽타주를 보여준다. 육체를 가까이서 프레임화하지만, 슬픔을 직접 말하지는 않는다. 대신 사건의 구체성을 르포르타주 속 대사나 기록된 문구를 통해 드러낸다. 결과적으로 끔찍한 역사의 흔적이 개인에게 투영된다. 영화의 뉘앙스가 낭만적인 것은 그런 면에서 매우 의아하다. 서로를 찾는 시선의 교차와 제스처를 통해서 영화는 그들이 몹시 행복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렇지만 과거 아카이브의 이미지는 이와 상반된다. 기억을 건드리는 영화이지만, 명확하게 질병 자체를 소재로 삼지 않는다고 볼 수도 있다. 어쩌면 이 영화의 알츠하이머는 소재가 아니라 장치처럼 활용되는 것 같다. 비슷한 소재의 다른 영화들과 구분되는 지점이다. 감독은 이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 오랜 기간 동안 파울리나와 아우구스토를 설득했다고 한다. 특히 파울리나가 완강하게 거절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에 마이테 알베르디가 이 작품이 ‘보편적인 영화’이고 ‘사랑에 대한 영화’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극장에서 울거나 고통받으면서 나오는 관객들은 없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생각해보면 이 설득은 조금 모호하다. 어쩌면 이 점이 이 영화의 특별한 부분처럼 보이기도 한다. 전작 <요양원 비밀요원>(2020)의 경우와 흡사한 논리가 감독의 의도에 투영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요양원 비밀요원>의 경우, 영화는 픽션과 다큐를 절묘하게 교차시킨다. 실제 요양원이라는 표면적인 사실에 의도적인 인물이 지닌 허구가 더해져 영화는 ‘다큐드라마’로 완성된다. 흡사하게 <이터널 메모리> 역시 장르를 통합한다. 언뜻 평범한 사실성의 영화인 듯 보이지만, 이 극은 매우 의식적이다. 선택된 과거의 모습들, 책의 구절들, 그리고 매우 정갈한 질문만이 스크린에 표시된다. 그외 모든 기록은 표면뿐이다. 작은 움직임들, 그 속에 사건은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 주인공의 죽음에 대해서도 영화는 직접 언급하지 않는다. 다만 관객들은 짐작할 수 있다. 만약 이 영화에 주요 이벤트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단 하나 ‘병의 지속과 가속도’만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터널 메모리>의 비범함 매우 내밀한 관계의 포착, 따스한 손길과 감정이 프레임에 담긴다. 하지만 완성된 영화는 지극히 냉정하다. 극도로 폭발하는 순간의 진실을 알리지만, 그럼에도 사건을 일으키지는 않는다. 알츠하이머의 진행에 주인공은 몹시 괴로워하지만, 어떤 등장인물도 이에 저항하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역사를 바라보는 언론인 아우구스토의 시선 역시 마찬가지였다. 끔찍한 현장을 방문한 인물에게 감정의 흐름은 부가적인 짐일 따름이었다. 그는 저항의 흔적을 글로 남겼다. 그는 살아남았다. 그 결과 헤어날 수 없는 트라우마가 생겼지만, 이 역시 개인의 것은 아니었다. 현실을 촬영할 것인지 촬영하지 않을 것인지를 두고 누구도 모럴을 언급하지 않았다. 다큐멘터리 연출자의 입장에서 이 작업에 다가가는 방식도 동일하게 바라볼 수 있다. 파토스를 건드리지 않겠다고 다짐하고서야 비로소 영화는 진실을 찍을 수 있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모든 어두운 것들을 영화는 밝게 채색한다. 병으로 가득 찬 아름다운 둘만의 공간, 죽음의 시간으로 변화하는 새의 그림자, 남은 시간은 한정되어 있지만 그렇다고 슬픈 것만은 아니다. 인위적인 결정이지만 이보다 더 객관적일 수는 없다. 그 상태의 올바름에 대해 언급해야 하는 것은 이제 관객들이다. 칠레의 역사에 대해 고민해야 하는 것도 우리의 몫이다. “아무 일도 저지르지 않은 사람들은 전혀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문구는 피노체트 독재정권 당시 칠레 어느 일간지의 타이틀이었다. 같은 지면에 산티아고에서만 4천명이 체포되었다는 기사가 실렸다. 흐름을 억제하려는 표면의 노력들이 어떤 결실을 맺었는지에 대해 영화에선 명확히 설명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독재자는 비난을 받았고, 어떤 이들은 살아남았다. 그리고 살아남은 자들은 지금도 움직이고 있다. 그들이 정당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적어도 진실을 강탈하지는 않았기에 그들은 휴머니즘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진실함에 다가가는 이 영화의 노력은 언뜻 평범해 보이지만 비범하다. 부드럽고도 공모적인 화해의 숏들, 이 작품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 간극에서 발견된다. 의식은 사라지고 망각은 점점 더 개인의 영역을 침입한다. “기억이 없으면 정체성도 없다”는 영화 속 구절을 다시금 떠올린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영화의 결말에서 이 대사는 작동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모순의 아이러니야말로 영화를 절묘하게 인간적으로 만든다. <이터널 메모리>가 아름다운 이유는 우리 삶의 본질을 영화가 드러내기 때문일 것이다. 저장하지 않는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동시에 무한하지 않다고 해서 가치가 없는 것도 아니다. 죽음을 통해 어떤 창조는 빛을 발한다. 영원하지 않더라도, 존재하는 모든 것은 맹세코 지속된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들 사이에서 우리의 기억은 영원히 진동할 것이다. 현존하는 모든 것은 그래서 의미가 있다고 이 영화는 넌지시 알린다. 영화 <이터널 메모리>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어쩌면 현상의 저 너머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