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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1997)

[특집] 블로그 시대의 비평 기록, 'k-펑크: 마크 피셔 선집 2004~2016 1: 책 영화 텔레비전'

k-펑크: 마크 피셔 선집 2004~2016 1: 책 영화 텔레비전 마크 피셔 지음 | 대런 앰브로즈 엮음 | 박진철, 임경수 옮김 | 리시올 펴냄 k-펑크(punk)는 영국 비평가 마크 피셔가 2003년 개설한 블로그의 이름이다. 록 음악, 포스트펑크에 대한 열렬한 관심을 바탕에 둔 음악 저술가이자 2000년대 초 1인 미디어의 새 장을 연 문화 이론가인 마크 피셔는, 사이버의 그리스어 어근 ‘kyber’의 앞글자를 따 학계와 주류잡지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채로 강도 높게 토론을 지속할 장소로서 자신의 블로그를 ‘k-punk’라 명명했다. 2017년 그의 사후에 블로그 게시물을 중심으로 매체 기고글, 인터뷰, 미발표 원고를 방대하게 엮은 824쪽 분량의 가 나왔고 국내에서는 리시올 출판사가 이를 4권으로 나눠 출간할 예정이다. 올해 9월에 나온 (이하 )은 문학, 영화, 텔레비전에 관한 글들을 중심으로 엮었다. 링크와 댓글을 타고 흩뿌려진 글들 사이로 즉각적인 이동이 가능한 블로그의 특성을 감안하면 이 책을 반드시 순서대로 완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영미권의 케이블 채널 분석, 텔레비전 예능 등 한국 독자들에겐 다소 낯선 레퍼런스들이 등장하거나, 마크 피셔의 언어유희가 번역으로는 생생히 전달되지 않는 경우, 방대한 인용이 종종 걸림돌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동시대의 곤경을 혁신적으로 사고하는 피셔의 논리는 대체로 주의력을 잡아끈다. 특히 윌리엄 S. 버로스의 <네이키드 런치>에서 데이비드 크로넌버그의 <네이키드 런치>로, <네이키드 런치>와 <스파이더>의 비교로, <폭력의 역사>와 히치콕의 영화의 대조로, <비디오드롬>과 <엑시스텐즈>에서 “디지털 시대의 진부함”으로 이어지는 글들의 전개는 마치 하나의 완성된 서사시를 방불케 한다. 앞선 피셔의 히트작 <자본주의 리얼리즘: 대안은 없는가>에서 그는 <칠드런 오브 맨> <월·Ⓔ>, 리얼리티쇼 <슈퍼 내니> 등을 아울러 동시대의 “지친 체념의 흔적”을 읽어낸다. 역시 밸러드를 필두로, 버로스, 크로넌버그를 통과하며 후기 자본주의가 반자본주의적 문제의식까지 포섭한 서사를 익숙하게 펼쳐 보이는 아이러니를 지적하고 있다. 현대의 병리학이 반체제적 독기를 잃어가는 과정과 이것의 ‘대안 없음’까지 직시하는 은 그렇기에 (피셔를 지독하게 괴롭혔던) 우울과 비극감을 독자 역시도 피할 수 없는 책이다. “<폭력의 역사>는 21세기 미국이 폭력이 억압된 이면으로 남아 있는 나라가 아니라 뫼비우스의 띠를 이루고 있는 나라임을 시사한다.”_ 227쪽 크로넌버그의 영화 <폭력의 역사>에서 주인공 톰 스톨에겐 또 다른 자아 조이 쿠색이 있다. 피셔는 이를 두고 “쿠색의 환상으로서의 스톨이 스톨의 환상으로서의 쿠색보다 훨씬 흥미롭다”고 짚고 <폭력의 역사>를 스톨의 환상으로 읽는 비평에 일침을 가한다. “이 설명이 잘못된 까닭은 린치의 <멀홀랜드 드라이브>나 큐브릭의 <아이즈 와이드 셧>에 대한 이해를 엉망으로 만들었던 것과 같은 ‘몽상적인 현실 탈출’이라는 해석- 두 영화는 긴 꿈 시퀀스로 해석되어왔다- 을 끌어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독해는 궁극적으로 영화의 존재론적 위협을 잠재우려는 시도에 해당하는 것으로, 영화의 모든 변칙적 특징을 내면의 섬망 탓으로 돌리면서 평면화한다.” 이어지는 <폭력의 역사>에 대한 재정의는 한층 더 날카롭다. 21세기 미국의 폭력은 이면에 억압된 것이 아니며, <폭력의 역사>는 비정하고 직설적으로 이를 노출함으로써 마지막 장면에서 톰 스톨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마침내 가정의 모든 풍경이 언캐니하게 보인다는 것이 피셔의 설명이다.

[특집] ‘개인의 역사 한국영화의 역사’, <시정신과 영화의 길> 김종원 영화평론가와의 대화

“오늘날 영화평론은 죽었습니다.” 얼핏 위험할 수도, 성급할 수도 있는 말에 가늠키 어려운 신뢰가 실린다. 김종원 평론가라는 화자의 무게감 때문이다. 자타공인 대한민국의 1세대 영화평론가이자 영화사가이며, 1965년에 한국영화평론가협회를 출범시켰고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 중인 그의 말을 쉬이 흘려들을 순 없다. 11월22일, 한국영상자료원이 주최한 ‘저자와의 대화@KOFA’의 첫 주인공으로 나선 김종원 평론가는 10월 말 출간한 회고록 <시정신과 영화의 길>에 기반하여 구순을 앞둔 개인의 인생사를 펼쳤다. <시정신과 영화의 길>은 제1장 유년기, 제2장 소년기부터 제6장 노년기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김종원 평론가라는 개인의 생애주기는 곧 대한민국의 근현대사, 장대한 문학사 및 영화사의 맥락과 진배없다. <자유만세> 등이 만들어졌던 해방 후의 한국영화사, 제주 4·3 사건의 전말, 50~60년대 한국 예술계의 산실이었던 명동 거리의 숱한 다방들, <영화잡지> <실버스크린> <영화예술> <씨네팬> 등의 초창기 영화잡지들, 유신정권의 탄압과 당대 영화 제작사들의 명운, 나아가 영화평론가의 사회적 입지를 공고히 했던 80년대, 공연윤리위원회(영상물등급위원회의 전신)에서 활동했던 십수년, 그리고 대한민국 최초의 영화를 가름하려 지금도 연구 중인 연구가로서의 생애가 장장 600쪽에 걸쳐 서술된다. “오늘날의 영화평론은 죽었다” “제가 경쟁력을 갖고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힘은 현장 비평이 아닙니다. 영화역사에 대한 치열한 도전입니다. 도전에 성과도 있었지만, 숱한 과오를 저질렀음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김종원 평론가는 “오늘날의 영화평론은 죽었다”란 어구에 위와 같은 말을 덧붙였다. 영화사에의 탐구를 포함한 문자의 평론이 쇠약해지고, 언어 혹은 구술 평론이 주류로 자리 잡은 현재를 진단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를 비하하거나 비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만큼 시대가 달라졌다는 것이죠. 되돌아보면 저의 시대는 대단히 행복했던 시절이었다고 봅니다.” 그의 말처럼 1980년대는 영화 저널리즘과 영화 비평의 전성기였다. 개별 영화에 대한 감상뿐 아니라 정책, 검열, 산업 등 영화계 전반에 대한 평론가들의 강한 의견 표출과 시론이 중요한 시절이었다. 입지가 높아진 영화평론가 중에서도 김종원 평론가의 위치는 남달랐다. 저자와의 대화의 진행을 맡은 한상언 영화사연구자는 “<한겨레>와 <조선일보>를 제외한 거의 모든 신문에 영화평을 기고했고, 90년대에 연구가 활동을 시작하면서는 당대 영화 연구자들의 공통된 은사가 되었다”라고 밝혔다. 사회적 입지가 높아짐에 따라, 매스미디어와도 점차 친밀해졌다. “국내 4대 신문에 광고 모델로 나가고, 텔레비전에도 자주 출연했다”라는 그의 회상엔 모종의 부끄러움과 함께 속 깊은 우수가 느껴졌다. 이때의 명성을 바탕으로 그는 대종상, 백상예술대상, 청룡영화상, 부산국제영화제 등 당시 터져나온 영화 축제들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며 영향력을 높였다. 1994년엔 오랜 영화 동료 이영일 영화평론가와 함께 국제영화비평가연맹 한국본부를 창설하기도 했다. “마치 영화평론가협회를 처음 꾸릴 때처럼 다방에서 그와 둘이 앉아 그의 생각을 구체화할 계획을 세웠다.” 대략 반세기 동안, 시대가 변할지라도 영화계에 파문을 던지기를 멈추지 않았던 그의 모습이 뚜렷하다. 이러한 부흥기에 대해 김종원 평론가는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이러한 시대의 필요에 따른 것뿐이었다”라며 겸손하게 말했다. 그러나 그가 과거에 보여줬던 도전 정신만은 지금에도 유효해 보인다. 1959년 김종원 평론가가 세상에 내놓은 첫 영화 글의 제목은 ‘한국 영화평론의 위기와 과제’였다. 한국의 평론계를 “매스컴의 줄을 탄 시사평”, “매명화된 광고평”으로 나누고 “지엽적인 사이비 비평으로 타락”했다고 지적했다. 말미엔 “현대인의 고민과 한국인의 불안이 무엇이며 영화에 어떻게 반영되는가를 분석하고 한국인의 불안과 고민의 해체 방법을 제시해주어야 하는 의무가 비평가에게 있다”라고 적었다. 이처럼 “영화계를 한바탕 흔들어보고 싶었던 마음, 한마디로 건방을 떨었던” 젊은 날 그의 치기가 현재의 평단에도 큰 자극을 안겼다. 시네마 천국 김종원 지음 | 한상언영화연구소 펴냄 <시네마 천국>은 35년 만에 내놓은 김종원 평론가의 세 번째 시집이다. <시정신과 영화의 길> 발간에 맞추어 함께 발행됐다. 김종원 평론가는 애초 평론가, 연구가의 삶 이전에 시인으로 이력을 시작했다. 1952년 중학생 시절, 당대 유행했던 학생 월간지 <학원>에 <국화는 피어도>란 시를 발표하며 시의 행로를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박남수, 조지훈, 박목월 등이 참여했던 <사상계>를 통해 1959년 본격적으로 시인에 등단했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쌓인 그의 시 73편이 <시네마 천국>에 적혀 있다. 제1부 ’영화와의 헌사‘부터 제5부 ’바다와 여행‘까지 총 5개의 주제로 묶인 시집의 처음은 단행본 제목과 같은 <시네마 천국>이다. 그 시작의 일부는 아래와 같다. 1. 뱃고동이 앗아간 망향의 부두도안개 낀 카사블랑카의 공항도노를 젓다 만 운하의 노천극장도불 꺼진 뒤엔 삭막하게 잠기지만 그것은 아주 꺼진 것이 아니다.새 날을 여는 축복의 불꽃처럼어둠 속에서 쓸쓸히 지켜본연인의 창문처럼그것은 정녕 닫힌 것이 아니다.(후략)

[파리] 제레미 페린 감독의 ‘화성 엑스프레스’, 프랑스 SF의 성과, 혹은 걸작의 답습

2200년. 일상의 모든 분야에서 인간과 안드로이드가 뒤섞여 살아가는 화성의 수도 노티스. 한 성격하는 알코올중독 탐정 알린 루비(레아 드루커)와 그의 안드로이드 파트너 카를로스 리베라(다니엘 엔조 로베)는 부유한 사업가 크리스 로이 데커(마티외 아말릭)의 요청으로 실종 사건을 맡는다. 사라진 이는 명문 사립대학에서 인공두뇌학을 공부하던 여학생 준 초우. 사건을 파헤쳐나가는 과정에서 알린과 카를로스는 준이 부패할 대로 부패한 화성 문명을 파괴할 수 있는 열쇠를 가진 중요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녀를 노리는 정체 모를 괴한의 무차별 공격이 이어지고, 알린과 카를로스는 준의 복제 레프리컨트를 이용해 그녀의 기억을 소환해내기로 한다. <블레이드 러너>(1982)에서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레플리컨트 레이첼(숀 영)의 트레이드마크인 잔뜩 부푼 앞머리를 그대로 따라한 알린. 사고로 죽기 전 인간이었던 시절의 기억을 그대로 저장하고 살아가는 안드로이드 카를로스. <공각 기동대>(1995) 특유의 디스토피아적 그래픽 화풍, <아키라>(1988)식의 박진감 넘치는 추격 장면, 준을 매섭게 추격하는 액체 금속 로봇(<터미네이터2>(1991)), 기억 소환 서비스를 제공해주는 회사(<토탈 리콜>(1990))까지. 텔레비전 성인 애니메이션 시리즈 <라스트 맨>으로 탄탄한 팬층을 확보하는 데 성공한 제러미 페린 감독은 그의 첫 장편애니메이션 <화성 엑스프레스>에서 사이버펑크 장르의 주옥 같은 걸작들에 노골적인 오마주를 보낸다. 프랑스 언론 사이에서는 “프랑스 SF영화의 가장 큰 성공작 중 하나”(주간지 <르푸앙>), “이 작품 이후 프랑스 SF는 절대 이전과 같을 수 없다”(영화 전문지 <프리미어>), “증강(augmented) SF의 카탈로그 같은 작품”(일간지 <르몽드>) 등과 같은 호평이 대부분이지만, “걸작들의 영향에 질식해서 정체성이 흐려진 작품”(영화 비평 사이트 ‘크리티카’ )이라는 혹평을 피해갈 순 없었다. 칸영화제, 안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 등 유수의 국제영화제에서 관객의 눈길을 사로잡은 <화성 엑스프레스>는 11월23일 개봉 첫주에 4만9천명의 관객을 동원하면서 프랑스 전국에선 아홉 번째로, 파리에선 다섯 번째로 높은 성적을 기록했다. 이것은 프랑스의 척박한 성인애니메이션 시장을 고려할 때 매우 이례적이고 놀라운 스코어다. 1980~90년대 사이버펑크 장르의 팬이라면 절대 놓쳐선 안될 작품이다.

[OTT 리뷰] ‘경성크리처’

넷플릭스 | 10부작 / 연출 정동윤 / 출연 박서준, 한소희, 수현, 김해숙, 조한철, 위하준, 김도현 / 공개 12월22일(파트1) 플레이지수 ▶▶▶ | 20자평 - 민족정론 플랫폼 넷플릭스 코리아? 미국의 도쿄 대공습이 시작되던 1945년 봄. 잘나가는 전당포 주인 장태상(박서준)과 만주를 누비며 실종자를 쫓던 토두꾼 윤채옥(한소희)이 만나는 곳은 일제 치하 경성이다. 경무관 이시카와(김도현)의 애첩 명자(지우)를 찾아 재산과 목숨을 보전하려는 태상, 헤어진 어머니와 다시 만나길 소망하는 채옥, 끌려간 애국단 동지들과 접선해 의거를 감행하려는 준택(위하준)은 각자의 목표를 갖고 옹성병원으로 향하며 일본 제국주의의 비밀을 목도한다. <경성크리처>의 구성은 넷플릭스 코리아가 잘해온 것들과 모든 측면에서 정합한다. 700억원 규모의 대작 시대극에 청춘 스타들이 등장하여 센티멘털한 K로맨스를 수행한다. <스위트홈>에 이어 다시 한번 고강도 VFX 기술을 통해 크리처라는 신선한 이미지를 선사하려 한다. 작품 그 자체보다도 괴물급 플랫폼과 역사적 윤리 의식의 조합이 만들어낼 파급력이 더 기대된다는 점은 양가적이다. <경성크리처>는 텔레비전-스트리밍 문화사 최초로 홀로코스트 아닌 이름으로 행해진 동양에서의 민족 학살을 그렸다. 예측 가능한 서사, 핍진성이 떨어지는 연기, 주입식 캐릭터 빌딩 등의 문제를 다방면으로 안고 있는 각본과 연출이지만, 슬픔과 고통과 환멸을 먹고 자란 한 민족의 역사를 고농축의 엔터테인먼트 에너지로 전환시켰다는 점에서 거대 문화산업의 새로운 문을 여는 작품으로 평가받을 것이 분명하다.

[비평] 거장의 어깨 옆에서, ‘마에스트로 번스타인’

“예술 작품은 답을 주는 대신 질문하게 하며 상반된 답들 사이에서 긴장을 유발하는 역할을 한다.” <마에스트로 번스타인>은 충실히 거장의 경전 구절에 복무한다. 그래서 모호하다. 음악 팬들은 브루노 발터의 대타로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지휘를 맡는 25살 레너드 번스타인(브래들리 쿠퍼)의 모습에 가슴이 뛰다가도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와 같은 브로드웨이 하이라이트와 베를린장벽 붕괴 기념 음악회 등 중요한 순간이 축소된 영화를 당황스럽게 바라본다. 번스타인이 1973년 케임브리지 일리 대성당에서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말러 교향곡 2장 롱테이크 신 정도를 제외하면 클래식 애호가들의 구미를 당기는 장면은 거의 없다. <마에스트로 번스타인>은 연극 혹은 뮤지컬처럼 느껴진다. 극의 주인공은 번스타인 혼자가 아니다. 번스타인과 그의 아내 펠리시아 몬테알레그레(캐리 멀리건)의 부부 관계가 핵심이다. 매튜 리바티크가 촬영하고 미셸 테소로가 편집한 결과다. 화면 전환은 화려하고 시간 전환은 비선형적이며 배우들의 연기는 고양되어 있다. 흑백 화면과 박스 화면비율로 펼쳐지는 과거 신은 뉴욕의 좁은 아파트와 운명의 상대 펠리시아와의 첫 만남, 뮤지컬 <온 더 타운> 속 한 장면을 빌려 소개하는 로맨스로 장식된 거장의 젊은 날이다. 실제 번스타인은 이 시기 뉴욕 필하모닉 지휘 이후 찾아온 꽤 긴 무명의 시기를 견뎌야 했지만, 영화는 그런 갈등보다 펠리시아와의 행복한 한때와 대가의 편린, 그 와중에도 동성 애인에게 눈물 어린 이별을 고하는 번스타인의 복잡한 자아를 조명한다. “개성이 너무 강하다 보면 독이 될 수도 있거든. 레니가 기뻐하거나 스트레스에서 벗어난다면 못 맞춰줄 것도 없잖아? 대신 희생하지 않는 선에서 하는 거야. 희생하게 되면 내가 사라지니까.” 바로 이다음 장면에서 펠리시아는 두려움과 경외감의 눈빛으로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을 지휘하는 번스타인의 그림자에 삼켜진다. 그런데 대가의 실루엣 가운데 반짝이는 드레스를 입은 펠리시아의 빛은 꺼지지 않는다. 힘찬 날갯짓에도 불꽃이 사그라지지 않는다. 번스타인으로 인해 상처받는 펠리시아가 역으로 번스타인의 삶을 구원하며 그를 견인하는 인물임을 짐작게 하는 장면이다. <스타 이즈 본>의 잭슨 메인은 저물어가는 컨트리 가수로 그를 사랑하는 엘리에게 모든 것을 바쳤으나, 레너드 번스타인과 펠리시아 몬테알레그레의 실제 삶은 할리우드의 고전 시나리오보다 훨씬 복잡했다. 테크니컬러 화면으로 전환되며 색이 돌아온다. 반대로 생동감은 꺼진다. 펠리시아와의 관계가 번스타인의 이중성으로 흔들린다. 희생하는 관계는 언제 깨질지 모르는 불안감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극의 진행은 더없이 차분하다. 대저택 파티에서 번스타인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온 젊은 남자에게 키스하는 광경을 목격한 펠리시아는 변명하는 남편에게 “머리 모양 좀 고쳐”라 말할 뿐이다. 펠리시아는 <마에스트로 번스타인>의 동등한 주인공이다. 실제로도 그는 1940년대부터 브로드웨이, 극장, 텔레비전을 섭렵한 스타였으며 여성 인권 운동과 흑표범당을 후원하는 등 사회 활동에 열정적이던 스타였다. 번스타인이 1950년대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와 CBS 음악 시리즈로 대대적인 성공을 거둘 때도 펠리시아는 파티를 통해 미국의 저명인사들과 만나고 서신을 교류하며 우정을 쌓아나갔다. <마에스트로 번스타인>은 펠리시아의 사회적 활동을 소개하는 대신 그를 번스타인의 곁에서 지켜보는 관찰자이자 파트너로 설정했다. 번스타인의 갈등과 비범한 성격을 평가하는 대신 가장 오래 곁에서 그를 지켜본 인물로 끝없이 대화를 나눈다. 번스타인의 동생과, 번스타인의 딸과, 번스타인을 이야기하는 수많은 사람과 함께 번스타인이라는 인물을 이해하려 노력한다. 영화 속 펠리시아가 번스타인을 바라보는 눈빛만으로도 두 사람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흑백 화면 속 좁은 연극 연습 무대 위 두 사람은 서로를 동경한다. 초현실적인 <온 더 타운> 뮤지컬 신에서 멀어졌다 가까워지기를 반복하며 끝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고백하는 번스타인에게 펠리시아는 따뜻한 위로를 건넨다. 번스타인의 양성애 성향을 묵인하고 갈등하는 컬러 화면에서 펠리시아는 번스타인과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애초에 번스타인이 바빠 만날 일도 많지 않은 데다 중요한 대화는 자녀들을 통해 전한다. 번스타인이 거대한 대서사시 <미사>를 완성하는 순간에 펠리시아는 수영장에 몸을 던져 깊이 잠수해 귀를 막는다. <마에스트로 번스타인>은 <스타 이즈 본>으로 성공적인 감독 데뷔를 이룬 브래들리 쿠퍼와 전기영화 전문 작가 조시 싱어가 각본을 썼다. 조시 싱어 전기영화의 주인공은 사회와 갈등하면서도 신념을 지키며 도전하는 인물이 주를 이룬다. <스포트라이트>에서 <보스턴 글로브> 내 ‘스포트라이트’ 팀은 지역사회와 종교 역사에 뿌리 깊이 내린 악을 고발하는 언론 자유와 기자 정신을 의심하지 않는다. 베트남전쟁의 추악한 비리가 담긴 펜타곤 페이퍼를 손에 쥔 <워싱턴 포스트> 신문 발행인 캐서린 그레이엄(메릴 스트리프)은 가부장제가 지배하던 1960년대 미국 사회의 고정된 성 역할을 깨트리고 자유와 정의를 위해 평생 다시 하지 못할 용기 있는 결정을 내린다. <퍼스트맨>의 닐 암스트롱은 숱한 정치적 회의론과 동료를 잃는 슬픔, 자신의 목숨마저 위험했던 제미니 우주선 탐사를 극복하고 달에 착륙하여 인류에게 위대한 도약을 선사한다.레너드 번스타인은 어떨까. 그는 매카시즘이 횡행하던 미국 사회에서 당당한 공산주의자였고 양성애 성향을 숨기지 않았으며 펠리시아 역시 사회적 투사였다. 하지만 그들은 예술인이었다. 단 하나의 대사건과 업적으로는 조명할 수 없을 정도로 믿기 힘든 경력의 탑을 다방면에 쌓아올린 거장이었다. 번스타인은 시뻘건 용광로처럼 주위의 모든 것을 집어삼켜 천재적인 창작의 결과물을 제련해냈다. 디오니소스적인 삶을 살았던 그에게 절제와 고민, 갈등은 중요한 개념이 아니었다. 동시에 그는 이상적 가정을 형성하고 이성애에 충실하여 아내를 보살폈으며 가정을 홀대하지 않았다. 펠리시아는 번스타인에게 상처받았지만, 그의 비범함에 경의를 표했다. 아이러니하다. 상반된 답을 준다. 계속 질문하게 만든다. 이 파토스의 영역을 극으로 옮기는 데 탁월한 인물이 브래들리 쿠퍼다. <스타 이즈 본>에서 자기 파괴적이고 늙은 컨트리 가수 잭슨 메인을 연기하기 위해 1년 이상 음악을 배워 고유의 보컬 톤까지 개발한 그는 번스타인의 삶을 위해 지휘자 야니크 네제새갱에게 교습을 받고 가즈 히로에게 6시간 이상의 분장을 받아 20세기의 문제적 인물을 완벽히 소화했다. 마침내 둘의 갈등이 폭발하는 장면에서 펠리시아는 “당신의 진심은 새빨간 거짓말이야. 생기란 생기는 다 빨아들여서 남은 사람조차도 자기 본모습을 지키고 살 수가 없어. 자신을 사랑하고 인정하지 않는 사랑을 사랑하고 인정하다 보면 그래”라며 울분을 토한다. 그러나 번스타인의 성스러운 말러 교향곡 2장 성당 지휘를 지켜본 펠리시아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혼신의 지휘를 펼치고 땀범벅이 되어 돌아온 그를 끌어안고 감격한다. 강력한 예술의 최면이자 불가사의한 사랑의 힘이며, 논리나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망각의 영역이다. <마에스트로 번스타인>은 그래서 혼란스럽고도 아름다운 레너드 번스타인의 전기영화가 된다.

[기획] 뉴비가 덕질을 시작하고, 캐해에 열중하고 - 2023년, 왜 애니메이션이 이토록 열광적인 관심을 불러모았을까

2023년 영화시장의 승자는 단연 애니메이션이다. 지나치게 단호해 보이는 문장이지만 여러 근거가 있다. 먼저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에 따르면 2023년 1월1일부터 12월27일까지 해외영화 박스오피스 1·2·3위 모두 애니메이션이 차지했다. 1위 <엘리멘탈>(누적관객수 724만명), 2위 <스즈메의 문단속>(557만명), 3위 <더 퍼스트 슬램덩크>(479만명)가 이에 해당한다. 북미 열풍을 일으킨 주역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가 240만명으로 8위를,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신작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가 201만명으로 9위를 차지했으니 톱10의 절반이 애니메이션이다. <존 윅4> <오펜하이머> <아바타: 물의 길>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ume 3> <미션 임파서블: 데드 레코닝 PART ONE> 등 2023년 국내 개봉한 박스오피스 10위권 안팎의 해외 실사영화를 생각하면 쟁쟁한 경쟁 속에 애니메이션이 우뚝 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극장의 작품 상영 빈도를 나타내는 상영점유율이나 직접적 소비를 판단할 수 있는 좌석점유율도 크게 다르지 않다(표1·표2 참조). 여기서 <씨네21>은 질문을 건네보기로 했다. 극장의 침체기가 장기화된 와중에 관객들은 왜 애니메이션을 선택했을까. 볼거리, 즐길 거리, 경험할 거리가 다양해진 지금, 애니메이션이 부상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 이 풍경이 2023년만의 것은 아니다. 애니메이션은 두터운 마니아층의 충성도 높은 사랑을 받아온 장르다. 하지만 전반적인 영화시장의 약세에도 유독 굳건해 보이는 까닭을 찾아보고자 한다. 최근 2~3년간 시나브로 차곡차곡 쌓여서 2023년에 두드러진 이 태동을 문화현상적으로 분석했다. 진입장벽이 낮아지고 접근성이 높아지다 열풍이고 강세다. 유행이고 트렌드다. 애니메이션이 콘텐츠 시장의 캐시카우 역할을 톡톡히 이행한 2023년, 많은 사람들이 애니메이션 열풍을 주목했다. 하지만 동시에 의문도 따른다. 모든 연령대 관객을 아우를 수 있어 누구나 쉽게 진입할 수 있다는 게 애니메이션의 본래 특성이자 장점인데, 왜 이 선택을 특별하게 해석해야 하는 것일까. 언뜻 당연해 보이는 목표 수행 앞에서 이 지표와 양상을 정리하는 게 중요한 이유는 그 이전과 다르게 나타나는 변화 때문이다. 2023년을 시간순으로 돌아보자. 1월4일 개봉한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상영 초반까지만 해도 원작 만화 <슬램덩크>의 향수를 가진 독자 중심으로 화제가 됐다. 30여년 전 <슬램덩크>의 폭발적인 에너지와 건강한 스포츠 정신을 경험한 이들이 스크린으로 확장된 세계를 궁금해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개봉 4주차까지만 해도 3040세대가 흥행을 주도했지만 5주차부터 1020세대의 진입이 빠르게 증가했다. 일종의 역주행이다. SNS를 통한 관람 인증과 자체 홍보에 강한 세대적 힘을 빌리면서 영화는 동심원을 크고 넓게 펼쳐갔다. 원작 만화에 대한 어렴풋한 기억을 가졌거나 이전까지 제목만 얼핏 들어봤던 일명 ‘뉴비’(신입)들이 그 세계관으로 기꺼이 들어서기 시작한 것이다. 콘텐츠의 생명력을 연장하기 위해 새로운 사람의 유입이 필연적인 것을 생각하면 1년간의 전례 없는 장기 상영의 바탕엔 결국 팬덤의 세대 전환과 주요 소비 방식에 변화가 있었단 걸 알 수 있다. 이러한 흥행은 <슬램덩크> 원작 만화와 TVA 시리즈로 관심을 돌리는 효과를 내기도 했다. 2023년 1월10일부터 2월10일까지 한달 동안 원작 만화 판매율이 2299% 증가했고, 왓챠의 TVA 시리즈는 2022년 4분기 대비 2023년 1분기 동안 시청시간은 11배, 시청유저는 8배 증가했다. 3월에 개봉한 <스즈메의 문단속> 또한 10대의 힘을 받았다. 국내에도 팬덤이 큰 신카이 마코토 감독 작품이라 이견 없는 흥행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그 전진 방식이 이전과는 사뭇 다르다. 아름답고 생동감 있는 신카이 마코토 감독 특유의 스타일을 전면으로 이야기하던 것과 달리 <스즈메의 문단속>은 숏폼 플랫폼 틱톡과 흥행의 궤를 함께했다. 열려 있는 모든 문을 닫아버리는 유쾌한 챌린지는 숏폼 참여율이 높은 10대 사이에 유행처럼 번져갔고, 하나의 놀이 문화로 자리 잡았다. 원작 안에서 작품을 디테일하게 파고들며 메시지를 분해하던 이전과 달리 애니메이션을 가벼운 게임으로 전환해내는 문화 태도는 실제 재난을 소재 삼은 무거운 영화 분위기에도 어린 연령층이 쉽게 관람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즉 콘텐츠 가변성을 예리하게 찾아내고 2차 문화로 파생시키는 세대적 근육에 힘을 얻은 셈이다. 6월에 개봉한 <엘리멘탈>의 흥행은 한국에서 더 재미있는 해석을 낳는다. 세계 시장에서 아쉬운 성적을 거두는 동안 국내에서 뒷심을 발휘하며 흥행에 박차를 가했기 때문이다. 입소문이 만든 기적. 역주행의 아이콘. 다양한 별명이 <엘리멘탈>을 설명하지만 과연 그것 때문만일까. 영화의 주요 소비층인 20대의 스테디한 관심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와 트위터에서는 불의 종족 앰버와 물의 종족 웨이드를 두고 MBTI를 유행처럼 추측했다. 앰버와 웨이드 중 어디에 더 가까운지 이야기하는 상황도 적잖게 목격됐다. MBTI 과몰입 시대에 ‘캐해’(캐릭터 해석)당하기를 좋아하는 Z세대들은 MBTI의 바다에서 콘텐츠를 활용하며 세계관을 확장했고, 각자의 경험과 사례를 덧붙여 설득력 높은 주장을 부지런히 완성했다. 오로지 MBTI 과몰입만이 <엘리멘탈>의 흥행을 설명할 수는 없다. 그 안에는 더 세세하고 복잡한 알고리즘이 반영돼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를 개입시킬 가능성과 참여할 수 있는 여지를 열어두는 것은 그것을 재빠르게 낚아채는 20대 관객에게 보다 유효하다. 이전보다 가깝게, OTA가 만든 변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가 200만명을 달성하고 <명탐정 코난: 흑철의 어영>이 같은 날 개봉한 <미션 임파서블: 데드 레코닝 PART ONE>을 꺾고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는 동안 극장 밖에서도 애니메이션 붐은 이어졌다. 특히 <최애의 아이>는 괄목할 성과를 거뒀다. <진격의 거인> <주술회전> <귀멸의 칼날> 등 이미 거대 규모의 팬덤이 형성돼 있는 초대형 작품이 아닌, 처음으로 한국 시청자에게 얼굴을 알린 작품이 왓챠 2023년 TV애니메이션 전체 인기 순위 2위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3·4·5위에 차례로 등극한 <주술회전> <진격의 거인> <스파이 패밀리>가 신규 시즌으로 대중의 자동적인 선택을 받았다면, <최애의 아이>는 첫만남에 강렬한 호응을 얻은 것과 같다. 문성욱 왓챠 편성운영팀장은 “최근 1~2년 사이 전반적으로 애니메이션 시청수가 늘었”다며 “애니메이션 수요층의 증가로 새로운 작품에 대한 낯섦이 덜해졌”다고 전했다. 애니메이션과 시청자 사이의 거리감 변화는 2023년 애니메이션 부흥의 주요 요소이기도 하다. 이제부터 OTT가 시리즈 애니메이션을 넘어 극장용 애니메이션까지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애니메이션 산업 지형도를 어떻게 바꾸고 있는지 설명해보고자 한다. 먼저 용어 정리가 필요하다. 기존에는 TV시리즈 애니메이션을 TVA(Television Animation), 비디오 애니메이션을 OVA(Original Video Animation)라 일컬었다. 각 용어는 텔레비전과 비디오 등 플랫폼 형태로 특정되었지만 OTT에서 재생되는 애니메이션을 가리키는 단어는 따로 만들어져 있지 않다. 이에 따라 <씨네21>은 OTT로 유통되는 애니메이션의 특징을 반영한 언어를 제안하기 위해 ‘OTA’(OTT Based Animation)라고 칭하고자 한다. OTA는 유아용이나 가족용이 아닌, 성인을 주요 타깃으로 삼은 애니메이션을 가리키며 OTT 플랫폼으로 접근 가능한 유통구조까지 반영한다. 다시 돌아와 OTA를 통해 애니메이션에 진입하게 된 시청자는 다양한 장르의, 다양한 소재를 다룬 작품에 자연스레 노출된다. 어떤 디바이스에서건 장소와 상관없이 재생할 수 있다는 OTT의 일상성과 편의성을 생각하면 그만큼 애니메이션의 접근성이 높아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애니메이션 수요 증가를 확인한 왓챠는 더 넓고 낮은 진입을 촉진하기 위해 <스킵과 로퍼> <쿨하고 바보 같은 남자> 등 로맨스물과 <야무진 고양이는 오늘도 우울> 등 잔잔한 일상물을 확대 편성했다. 애니메이션이 경계를 넘어서는 장면을 대중이 직접 확인하는 것도 OTA의 특성이다. 한국 넷플릭스 비영어권 TV 톱10에 실사 시리즈와 겨눠 이름을 올리는 애니메이션도 생겨났다. <주술회전> 2기는 7주 연속, <스파이 패밀리> 2기는 3주 연속, <최애의 아이>는 2주 연속 상위에 랭크됐다. 이러한 풍경을 목격하게 된 사람들은 은연중 애니메이션이 영화·드라마와 동등한 선택권, 동등한 권위를 지녔다는 것을 시나브로 수용하게 된다. 이제는 애니메이션을 ‘하위 분류화’하지 않는 대중적 인식으로까지 가닿을 수 있던 배경이라 볼 수 있다. OTT의 보편화가 가속화된 코로나19 시기를 기점으로 ‘오타쿠’라는 용어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았다. 소셜 빅데이터를 분석하는 썸트렌드 조사 결과, 코로나19 발발 직전 해인 2019년 1월1일부터 12월31일까지 온라인 커뮤니티, 블로그, 트위터, 인스타그램에 등장한 오타쿠 관련 용어는 ‘사회성’ ‘샤워’ ‘과몰입’ ‘말투’ ‘소리’ ‘게임’ ‘일본어’ 등으로 나타난다. 그중 ‘과몰입’이 13만929회로 1위를 차지했다. 오타쿠에 관한 특정 이미지를 제시하지는 않았지만 단어를 종합해봤을 때 부정적 뉘앙스를 감지할 수 있다. 그리고 4년이 지난 지금, 2023년 1월1일부터 12월27일까지 조사한 결과, 오타쿠와 관련한 단어로 ‘친구’ ‘카페’ ‘슬램덩크’ ‘갓생’ ‘갓반인’ ‘행사’ ‘이벤트’ ‘문화’ ‘취향’ 등이 등장한다. 이중 ‘친구’가 15만3331회로 가장 많이 언급됐으며, ‘갓반인’은 6만5422회로 10위 안에 든다. 종합하면 이렇다. 시간을 쪼개 좋아하는 것에 마음을 들이는 사람. 남들보다 부지런하게 문화를 즐기는 사람. 작품 밖에 머물지 않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체화하고 경험하는 사람. 오타쿠에 대한 이미지가 건강하고 친근하고 가깝게 변한 것은 그만큼 그것의 의미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절대다수가 상대적으로 더 존중받기 쉬운 세상의 흐름을 생각하더라도 그렇다. 언급량도 절대적으로 늘었다. 올 한해 오타쿠라는 단어가 언급된 것은 총 427.4만회다. 125.8만회에 달하는 2019년에서 3배가량 증가했다.(썸트렌드) 사람들은 이제 자신을 장난스럽고 가볍게 오타쿠라 칭한다. 그것이 자신을 해하지 않는 것이라 알기 때문이다. 각광받는 OTA 작품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OTA를 즐기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대중은 애니메이션과 가까워진다. 미묘한 거리를 만들었던 선이 조용히 지워지고 있다. 1020 남성에서 2030 여성으로 애니메이션 시장에 두드러지는 또 다른 변화는 바로 성별 분포, 연령 분포의 이동이다. 오랫동안 신카이 마코토 감독과 함께해온 영화 수입사 미디어캐슬의 강상욱 대표는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전작인 <너의 이름은.>과 <날씨의 아이>는 1020 남성 관객층이 주를 이루었던 데 반해 <스즈메의 문단속>은 여성 관객이 압도적”이라고 설명했다. 왓챠 또한 자사의 영화평 기록 및 영화 추천 앱인 왓챠피디아를 통해 애니메이션으로 향하는 여성들의 움직임을 읽었다. 문성욱 왓챠 편성운영팀장은 “이전에는 애니메이션이라 하면 대체로 남성향 애니메이션이나 소년성장물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왓챠피디아를 통해 새로운 수요를 읽고 여성을 타깃으로 한 작품들을 편성하거나 관련 작품을 추천해 유입을 연결시킨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2023년 해외영화 박스오피스 1·2·3위를 차지한 <엘리멘탈> <스즈메의 문단속>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모두 여성 관객의 비중이 월등히 높게 나타났다. CGV·메가박스 기준, 여성 관객의 비율은 다음과 같다. <엘리멘탈>은 68%와 65.9%, <스즈메의 문단속은> 56%와 56.3%,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64%와 58.8%. 연령대에서도 공통적으로 20~30대 관람 비중이 높았다. 2030 여성이 극장 전반의 주요 소비층으로 두드러지는 만큼, 이들의 선택을 받는다는 것은 결국 대중적 범주에 들어서는 것을 넘어 시장 내의 실질적인 파이를 키울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전정현 CGV 콘텐츠편성부장은 20대 여성 관객의 가장 두드러지는 지점으로 자발성을 꼽았다. “여성 관객은 체험형 상영과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누가 시키지 않아도 그와 관련된 인증과 후기로 반응한다”며 문화적 촉매제로서 여성 관객이 어떤 긍정적 기능을 이행하는지 설명했다. 마케팅적 관점에서 20대 여성 관객을 공략할 때 성공적인 작품 흥행을 기대해볼 수 있다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유독 여성 관객 팬덤이 부각된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N차 관람 비중은 약 20%에 달한다. 5%가량의 평균 N차 비율보다 4배가량 높은 수치다(CGV 기준). 2023년 더현대서울 팝업 매출 순위에서도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9억8천만원의 수익을 달성하며 3위를 차지했다. 1위 아이돌 제로베이스원(13억5천만원), 2위 빵빵이(12억8천만원)가 비 영화 콘텐츠라는 걸 감안하면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영화 콘텐츠로서 독보적인 수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타쿠적 문화 소비에 기반을 둔 여성 관객들이 팬덤 생태계를 체계적으로 구축하고 운영하는 저력은 어디에 있을까. 팬덤 활동도 기술적으로 발전한다. 좋아하는 배우에게 편지를 보내던 세대는 일대 다수로 메시지를 교환하는 세대로 바뀌었고, 좋아하는 아이돌 얼굴로 펜 띠를 둘둘 말던 기술은 오늘의 포토카드(포카) 문화로 발전했다. 하지만 팬덤 활동의 본질은 변치 않는다. 좋아하는 것을 선정하면(덕통사고) 그것에 몰입하고(과몰입), 그들이 내 옆에 있는 듯한 물성들을 직접 만들어나가는(2차 창작물) 덕질의 문화적 유전자는 세대를 거쳐 고유하게 보존돼왔다. 이렇게 극장 밖에서, 콘서트장 밖에서, 무대 밖에서 은연중에 비슷한 경험을 전수하고 전수받은 여성들은 일종의 덕질 패턴을 체화하게 된다. 누가 정한 규칙이 있는 것도 아닌데 2030 여성 팬덤이 비슷한 수준의 적극성과 자발성을 띠는 이유이기도 하다. 심지어 트랜스 미디어적 변화도 있다. 애니메이션의 허들이 낮아지면서 각 분야에서 모여든 팬덤이 다양한 방식으로 융화되며 계속해 즐길 거리(일명 떡밥)를 생산하는 것이다. 아이돌을 좋아하던 이가 애니메이션 장르에 들어와 기존 방식대로 생일 카페를 열고, 게임을 하던 것처럼 애니메이션을 분석하면서 팬들은 자연스레 장르에 정착할 이유를 갖게 된다. 단순히 극장가를 점유해온 모집단이 애니메이션을 좋아하게 됐기 때문에 그 파이가 커진 게 아니다. 좋아하는 것을 자유롭게 상상하고 활용할 줄 아는 문화적 기술을 지닌 여성들의 저변이 확대되었기에 극장가에도 애니메이션 열풍이 불어올 수 있었다. 변화의 물결은 (극장, 혹은 영화산업) 바깥으로부터 시작된다. 극장의 위상 변화라는 필연적인 태풍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멀리 바라보는 시야가 필요하다.

[기획] 피터 팬과 찰리 사이의 웡카

※본 글에는 영화의 내용을 직간접적으로 노출하는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로알드 달은 내가 손가락 안에 꼽을 만큼 좋아하는 작가다. 타계한 지 30년이 넘도록 여전히 전세계 어린이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이 작가가, 사실은 나만 알고 싶은 작가라는 사실이 새삼 머쓱하긴 하다. 나는 그의 성인용 단편소설집 <맛>이 우리나라에서 잠깐 절판됐을 때 그 책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몹시 다행스럽게 여겼을 정도로 그의 글을 좋아한다. (당연하게도, 하지만 굳이 멋 부릴 말도 없어 있는 그대로 표현하자면) 로알드 달은 기본적으로 글을 잘 쓴다. 그의 글에는 통쾌함을 선사하는 시니컬한 유머가 유유히 흐르며, 경쾌하고 악랄하고 뻔뻔스러우면서도 능청스러운 문체는 그의 이야기 속 등장인물들을 꼭 닮아 있다. 어렸을 때 언니가 영어로 된 로알드 달의 책을 읽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언니는 당시 아직 국내 번역 전이던 <찰리와 초콜릿 공장>에 이어 등 로알드 달의 책을 차례로 탐독했고, 아직 글자가 빼곡한 책을 읽을 수준이 안됐던 나는 언니가 전해주는 이야기로 로알드 달이 만든 환상의 세계를 전해 들었다. 물론 어린이였던 언니 역시 내게 자세한 줄거리를 시시콜콜 말해줬을 리는 없다. 그저 ‘너무 재미있다’라는 주된 평과 더불어 ‘초콜릿 공장에 초대받은 소년의 이야기’ 정도가 내가 얻은 정보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비밀에 싸인 초콜릿 공장을 방문할 자격이 주어지는 초청장을 딱 다섯개의 초콜릿 안에만 넣는다’라는 웡카의 마케팅은 어린 내가 생각해도 너무나 환상적이었다. 그래서인지 어린 시절 내내 나는 초콜릿을 사먹을 때마다 초콜릿 봉지 뒷면에 비밀스러운 무언가가 들어 있지 않을까 상상하며 속지 앞뒷면을 꼼꼼히 살피곤 했다. 그러다 뜻하지 않은 불쾌한 횡재를 맞이한 경우도 있다. 중1 때, 지금도 굴지의 제과 업체인 모 회사의 대표 초콜릿에서 살아 있는 구더기를 발견한 것이다. 초콜릿을 먹으며 책을 읽다가 우연히 초콜릿으로 시선을 옮겼을 때, 그곳엔 웡카의 금빛 초대장 대신 구더기가 대롱거리며 몸을 배배 꼬고 있었다. 나는 즉각 초콜릿 껍데기 뒷면에 적힌 소비자 보호실의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고, 그로부터 1년 동안 그 회사에서 분기별로 작은 종합 과자 세트와 달력을 받았다. 그 정도면 꽤 달콤한 보상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어린 마음에도 내가 받는 작은 과자 상자들이 구더기의 출현을 묵인하는 대가라는 생각에 기분이 썩 개운치만은 않았다. 지금까지도 생생한 구더기의 잔상은 환희보다는 몸을 움츠러들게 하는 기억이다. 어쨌든 내가 성장하는 동안 제과 업계는 매혹적인 마케팅으로 어린 소비자들을 유혹했다. 유행하는 만화 캐릭터의 씰이나 특정 연예인의 사진을 사은품으로 넣어 파는가 하면, 음료수 병뚜껑 안쪽에 새겨진 일련번호로 해외 여행권이나 신형 자동차를 경품으로 주는 마케팅도 등장했다. 한번도 당첨된 적은 없지만 혹하는 마음에 이왕이면 그런 행운의 요소가 있는 제품을 집어든 걸 보면 확실히 그런 마케팅은 소비자의 충성심리를 자극하기에 충분한 요인이었나 보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도 한참 동안 제과 업체가 주관하는 경품 응모는 나의 취미 생활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끝내 완성하지는 못했지만 20대 후반에 쓰던 시나리오 중에는 과자 회사의 비리를 다룬 작품도 있었다. 희망찬 포부와 함께 거대 제과 회사에 입사한 젊은이가 회사의 비리를 알게 된 후, 동료와 함께 비리를 밝혀내며 끝까지 정의의 편에 서서 꿈과 사랑을 동시에 얻는다는 이야기였다. 다소 뜬금없긴 해도 이런 경품 응모 습관이랄지, 시나리오에 과자 회사가 소재로 사용된 계기 따위는 모두 로알드 달의 영향, 특히 어려서 접한 <찰리와 초콜릿 공장>에 빚을 지고 있다. ‘빚’이라는 단어는 폴 킹 감독의 <웡카>를 이해하기에도 더없이 좋은 단어지만 그전에 웡카라는 인물부터 살펴보자. 로알드 달의 원작, 그리고 팀 버튼의 <찰리와 초콜릿 공장>에서 착하고 순수한 소년 찰리보다 윌리 웡카가 더 매력적인 캐릭터라는 점은 두말할 나위 없는 사실이다. 로알드 달의 원작 속 윌리 웡카는 천진함 속에 감춰둔 잔혹한 장난기로 못된 아이들과 부자 어른들에게 천연덕스럽게 응징을 내리는 인물이며, 팀 버튼 영화에서 조니 뎁이 그려낸 윌리 웡카도 원작의 노선을 따른다. 버릇없거나 태도가 좋지 않거나 텔레비전만 보거나 너무 부자라서 속물인 모든 아이와 어른이 웡카의 타깃이다. 그렇게 한심하고 못된 인물들이 하나씩 제거된 끝에 <찰리와 초콜릿 공장>에는 그야말로 찰리와 초콜릿 공장만 남는다. 착하고 순수하며 예의 바르고 상냥한, 무엇보다도 ‘가난한’ 찰리, 그리고 그가 얻게 되는 거대한 초콜릿 공장 말이다. 결과론적으로 보면 웡카가 벌이는 모든 일들은 찰리를 무대 위로 올리기 위한 작업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폴 킹의 <웡카>에는 우리가 익히 아는 윌리 웡카가 없다. 이 영화에서 우리가 만나는 건 악마적인 장난기로 가득한 번뜩이는 눈매의 웡카가 아니다. 관객이 마주하는 건 맑은 눈에 해사한 웃음, 꾸밈없는 목소리를 지닌 청년 웡카다. 다채롭고 화려한 색채와 자연스러운 음성의 노래들로 채워진 영화는 마치 한판의 초콜릿 상자 같다. 그러나 겉껍질을 벗겨내고 현실적인 시선으로 살핀다면 <웡카>를 통해 우리가 확인하는 청년 웡카의 이야기는 그렇게 낭만적이지 않다. 윌리 웡카는 꿈이라는 굴레를 등에 업고, 부패한 기성세대가 관료적으로 조직해놓은 단단하고 질척한 현실에 맨몸으로 부딪혀야 하는 고단한 청년으로 그려진다. 내용으로만 보면 이 영화는 부당거래로 거액의 빚을 진 청년이 다른 피해자들과 함을 합쳐 거대한 카르텔로 연결된 부패 권력을 뒤엎는 내용이다. 청운의 꿈을 안고 들어선 도시에서의 첫날 밤, 나쁜 꾐에 빠져 수상한 여관방에 들어서면서부터 청년의 불행은 시작된다. 후에 친구가 되는 누들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웡카가 글을 읽지 못해 부당한 계약서에 사인하는 장면은 불공정 계약에 실수로 엮이는 안타까운 청년을 연상시킨다. 지하 세탁소에 사는 사람들도 어쩌다 찾은 여관에서 맺은 부당 계약으로 평생 노예에 다름없는 신세다. 말 그대로 창살이 존재하는 방에 갇혀 그들은 각자의 신세를 한탄하지만 희망을 버린 채 현실을 그저 받아들인다. 공교롭게도 웡카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빚’과 관련돼 있다. 웡카와 누들, 지하 세탁소에서 지내는 동지들은 물론이거니와 웡카의 숙적인 움파룸파까지도 모두가 거액의 빚을 진 채무자들이다. 빚의 의미를 조금 더 확대해보면 끊을 수 없는 초콜릿에 빚을 져 비리를 눈감는 수도자들과 주교, 비리를 수행하는 경찰서장도 자유롭지 못하다. 모두들 각자가 진 빚 때문에 고군분투한다. 그러나 이미 체념에 익숙한 현실 세계의 사람들과 웡카가 다른 건 절대로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마치 혼자만의 세계에서 공중부양하는 것처럼 마법사 웡카는 현실에 발을 딛지 않는다. 그는 끝없이 꿈을 지향하고 과감한 모험으로 꿈을 실현시킨다. 엄마가 생전에 남긴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 세상을 떠난 엄마의 현현이 좌절되는 게 유일한 낙담인 이 문맹 청년은 어쩌면 피터 팬과 찰리 사이에 위치한 인물로 보이기도 한다. 의아할 정도로 순수하고 이타적인 그의 모습은, 우리가 언젠가 보게 될 후속 편에서의 웡카가 어떻게 해서 희대의 악동으로 변해가며 주변 사람들을 조금씩 응징하는 모습으로 성장해갈지 기대감을 품게 한다. 당신이 영화 속 슬러그워스의 말대로 “좋은 초콜릿은 단순하고 소박한 맛이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라면, 모든 게 쉽고 낭만적인 <웡카>의 무지갯빛 초콜릿이 입맛에 맞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한번쯤 현실에서 발을 떼 잠시나마 둥둥 떠오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지 않을까? 게다가 영화 속에는 담백하고 꾸밈없는 맛도 분명히 존재한다. 이 영화에서 가공되기 전의 초콜릿처럼 진하고 소박한 건 다름 아닌 웡카 그 자신과 웡카를 연기한 티모테 샬라메의 선한 표정과 부드러운 음성이니까.

[특집] 미드, 영드, 일드, 중드 몰아보길 즐기는 해외 드라마파

<경경일상> 卿卿日常, 2022 감독 조계진 출연 백경정, 전희미 로맨틱코미디를 좋아한다면 놓치기 아까운 중국 고장극. 혼인동맹을 위해 여러 지역에서 젊은 여자들이 신천으로 보내진다. 이미(전희미)는 한미한 제천 출신으로, 혼인을 통해 신분 상승을 꿈꾸기보다 어서 집에 돌아가 가족들과 맛있는 음식을 먹겠다는 생각뿐이다. 곧 탈락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기대와 달리, 이미는 6소주 윤쟁(백경정)의 측실부인이 된다. 윤쟁은 권력 쟁탈을 위해 암암리에 힘겨루기를 하는 이복형제들 사이에서 자신의 능력을 죽이고 지내는데, 이미는 이런 차분한 윤쟁의 태도와 모종의 오해 때문에 그가 곧 죽으리라고 예상하고 기뻐한다. 남편이 죽기를 기다리며 이미는 신천에서의 삶을 시작한다. 여자들이 넘쳐나는 후원에서, 여자들은 서로 경쟁하는 만큼이나 서로 돌보고 어울린다. 갈등은 존재하지만 이겨내지 못할 어려움은 없다는 식의 판타지가 <경경일상>을 보는 안온한 즐거움의 한복판에 있는 셈이다. 총 40부작으로 중국 드라마 입문자에게도 추천한다. /이다혜 어디서? 넷플릭스, 티빙, 웨이브, 왓챠에서 볼 수 있다. <슬로 호시스> Slow Horses, 2022~ 감독 제임스 호위, 제레미 러버링, 사울 메츠스타인 출연 게리 올드먼, 잭 로던, 크리스틴 스콧 토머스 영국 첩보 조직 M15에서 좌천되고 도태된 요원들이 슬라우 하우스에 모인다. 명목상으론 하나의 지부이긴 한데 좁고 오래된 방에 모여 허드렛일이나 한다. 리더인 잭슨 램(게리 올드먼)은 사무실에서 담배를 뻑뻑 피우며 부하들에게 화만 낸다. 그러나 젊은 요원 리버(잭 로던)가 합류하며 잭슨 램의 진가가 드러난다. 무협지의 클리셰처럼 만두나 축내던 옆집 아저씨가 왕년의 무림 초고수였다는 식의 전사가 밝혀지고, 슬라우 하우스에 엮인 거대 서사의 층이 겹겹이 쌓이며 몰입을 이끈다. 무엇보다 탁월한 <슬로 호시스>의 매력은 속도다. 첩보물 하면 떠오르는 재빠른 전개는 아주 가끔 일어난다. 많은 순간은 인물들이 걷고, 대화하고, 담배 피우고, 식사하며 교류하는 일에 할애된다. 첩보원도 인간의 직업일 뿐이며 그 속엔 지리멸렬한 일상이 병행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요약본으론 느낄 수 없는 고유의 유장함을 정주행으로 맛보길 권한다. 시즌3까지 공개됐고 시즌5까지도 이어질 예정이다. /이우빈 어디서? Apple tv+에서 시청할 수 있다. <아이 메이 디스트로이 유> I May Destroy You, 2020 감독 미카엘라 코엘 출연 미카엘라 코엘, 웨루체 오피아, 파아파 에시에두, 아믈 아민, 마루네 조티 OTT 시대에 ‘텔레비전 지니어스’의 계보가 있다면 반드시 들어갈 이름들이 있다. <애틀란타>의 도널드 글로버, <플리백>의 피비 월러브리지, <마스터 오브 제로>의 아지즈 안사리, 그리고 미카엘라 코엘이다. 이들은 자전적 이야기를 드라마화하여 각본과 연기를 겸하고 연출까지 해내는 다차원의 실력자다. 그중에서도 코엘은 단일 시리즈인 <아이 메이 디스트로이 유>로 최신 텔레비전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이름으로 호명된다. 어느 새벽, 작가 아라벨라(미카엘라 코엘)는 친구들의 부름에 런던 중심가의 펍으로 향한다. 술을 마시고 남자들과 가벼운 플러팅을 즐기던 그녀는 다음날 아침, 깨진 핸드폰과 이마에 깊게 팬 상처를 발견한다. 대범한 내러티브를 통해 성적 동의와 트라우마, 회복적 정의에 대해 말하고 피해자의 삶을 재건하는 데 관심을 두는 이 작품을 해외 드라마 팬들에게 1순위로 추천하고 싶다. /남지우 객원기자 어디서? 웨이브에서 볼 수 있다. <러브 앤 아나키> 시즌1 Kärlek & Anarki, 2020 감독 리사 랑세트 출연 이다 엥볼, 비에른 모스텐 경영 컨설턴트로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아온 소피(이다 엥볼)의 성욕 해소법엔 특별할 게 없다. 핸드폰으로 포르노를 보며 자위하는 것인데, 그 시도 때도 없음이 문제를 일으킨다. 스톡홀름의 저명한 출판사 ‘룬드&라거스테트’에 출근한 첫날. 직원들이 모두 귀가했음을 확인한 소피는 사무실에서 자위하다가 젊은 IT 기사 막스(비에른 모스텐)에게 들키고 만다. 소피는 자신의 모습이 담긴 막스의 핸드폰을 빼앗으며 핸드폰을 다시 찾고 싶다면 그도 사무실에서 ‘미친 짓’을 할 것을 명령한다. <러브 앤 아나키>는 황당한 일탈로 권태로운 일상을 지탱하는 두 인물을 통해 현대 도시에서 인간다움이란 무엇인지를 다시 묻는 드라마다. ‘나 대신 해주는’ 두 사람의 아찔한 행동들은 강력하고 설득력 있으며 현실적이지만 개인 성향에 따라 그들의 몽매한 윤리관에 불편함을 느낄 수 있다. 스웨덴 드라마가 그리는 작은 아노미 상태는 평범한 휴일을 도끼로 내려찍는다. /남지우 객원기자 어디서?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다. <끝없는 밤> Todo Dia a Mesma Noite, 2023 감독 줄리아 레젠데, 캐럴 미넴 출연 델모 페르난데스, 파울로 고르굴로, 레오나르두 메데이루스, 에롬 코르데이로 2013년 1월27일 오전 2시. 브라질의 대학도시 산타마리아의 나이트클럽에서 화재가 발생해 242명이 사망한다. 11년 전 브라질에 깊은 상처를 남긴 ‘키스 나이트클럽 참사’를 다룬 <끝없는 밤>은 5부작 구성을 통해 사회적 참사의 보편적 생애 주기를 정확하게 따라간다. 인간적 실수, 의도적 법 위반, 그리고 많은 사람이 모인 곳에서 사고가 발생한다(1화). 언론이 속보를 전하고 희생자 가족들은 현장과 병원을 오가며 죽거나 다쳤을 이들을 찾는다(2화). 국가는 애도를 주도함과 동시에 수사를 시작한다(3화). 법적 다툼이 이어지지만, 책임자들은 때때로 처벌을 피한다(4화). 생존자들은 삶의 회복을, 유가족들은 정의를 향한 투쟁을 시작한다(5화). 걸출한 사회파 재난 드라마로 꼽히는 <체르노빌>에 비하면 여러 면에서 투박하다는 인상을 주지만, 세월호 참사를 지나왔고 이태원 참사를 겪고 있는 한국 오디언스와 공명하게 될 드라마다. /남지우 객원기자 어디서?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다. <오마메다 토와코와 세명의 전남편> 大豆田とわ子と三人の元夫, 2021 감독 나카에 가즈히토 출연 마쓰 다카코, 마쓰다 류헤이, 오카다 마사키, 이치카와 미카코 결혼식 하객으로 참석한 토와코,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은 그녀를 다른 성으로 호명한다. 혼인을 하면 여성이 남편의 성을 따라가는 일본의 관례상 오마메다 토와코는 세번의 결혼으로 세개의 성을 가지게 된 것이다. 건축사무소 대표로서 여러 사람과 마주치고 또 전남편들과도 교류하고 지내는 토와코의 끝사랑이 누구인지를 찾는 러브 코미디 같지만, 이 드라마의 실상은 군상극에 가깝다. 영화 <괴물>의 시나리오작가 사카모토 유지의 드라마 중 코미디 성격이 가장 강한데, 소동의 중심에는 ‘인간관계의 수고로움과 복잡성’이 숨어 있다. 해설적인 제3자 내레이션과 사소한 사건이 반복되는 전개가 어색할 수 있지만, 딱 2화까지만 참고 보시길 권한다. “혼자서도 씩씩하고 싶지만, 누군가가 아껴줬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토와코가 친구, 동료, (심지어) 전남편들과 얽히며 허둥지둥, 그러나 씩씩하게 앞장서는 모습에 함께 나아가고 싶어지니까. /김송희 칼럼니스트 어디서? 웨이브에서 볼 수 있다.

[비평] 사실의 빈틈에서 관객이 마주하는 것들, <추락의 해부>

“궁금한 게 뭐야?” 블랙아웃의 화면 위로 던져진 첫 질문이다. 산드라(잔드라 휠러)의 입을 빌려 쥐스틴 트리에가 관객에게 던지는 질문. 성공한 한 여성의 남편이 의문의 추락사로 세상을 떠난다. 하지만 이 사건은 관객을 유혹하는 미끼일 뿐이다. 미끼의 떡밥으로 배를 채울 수 없듯,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결코 충족되지 않는다. <추락의 해부>에서 가장 매력적인 부분은 이 궁금증을 관객 자신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지도록 한다는 데 있다. 나는 무엇을 믿는가, 라는 질문을 던질 때, 우리는 각자의 서사를 완성할 수 있다. 결국 <추락의 해부>를 완성하는 것은 관객의 몫이다. 빈틈, 진실의 자리 작가 산드라와 그 작품 세계에 대한 논문을 준비 중인 학생 조에(카미유 루더퍼드)의 인터뷰는 사뮈엘(사뮈엘 테이스)이 음악을 크게 틀면서 중단된다. 하지만 사뮈엘은 (그것이 자살이든 타살이든) 죽음을 통해 자신이 중단시킨 인터뷰를 지속시킨다. 그르노블에서 다시 만나 인터뷰를 하겠다던 약속은 그렇게 지켜진다. 조에와 인터뷰에서 산드라는 좀처럼 주도권을 잃지 않고 마치 답할 것과 답하기 싫은 것을 취사선택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지만, ‘삶의 법정’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조에라면 결코 알아낼 수 없었을, 조에 앞이라면 산드라가 결코 밝히지 않았을 삶의 편린들이 낱낱이 까발려진다. 그것도 조에가 실패한 녹음의 형태를 통해서 말이다. 삶의 법정에서 진행되는 가혹한 인터뷰에서 산드라가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외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추락의 해부>의 법정에서 이뤄지는 공방전은 상당한 흡인력이 있다. 2시간30분 정도의 러닝타임이 그리 길게 느껴지지 않는 까닭도 법정에서의 논쟁이 그만큼 치열하다는 방증이다. 그런데 이 법정 장면에서 이상한 점은 산드라가 사뮈엘에게 물리적인 힘을 가해서 죽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타살과 자살의 가능성을 각각 주장하는 두 전문가의 진술이 차례로 이어질 때 이미 어느 정도 판가름나는 데도 불구하고(두 증언에 비교해보면 타살의 가능성은 현격히 낮은 것처럼 보인다), 영화의 전개 방향은 산드라가 범인일 가능성을 높여나가려 한다는 점이다. 이를 위해 <추락의 해부는 두 전문가의 진술 이후 사뮈엘의 죽음이라는 ‘표면적인 추락’에서 산드라라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한 여성을 추락시키는 것으로 방향을 전환한다. 정신과 상담의의 진술과 녹음 파일 등을 통해 검사가 보여주려는 것은 산드라가 사뮈엘을 죽였다는 증거의 제시가 아니다. 그는 사뮈엘에겐 자살의 이유가 없다는 것, 그리고 산드라의 부도덕성을 부각하며 타살에 걸맞은 진실을 만들어내려 한다. 사뮈엘의 녹음 파일이 재생되는 장면은 30분 이상의 러닝타임을 차지할 만큼 영화에서 중요한 지위를 갖는다. 녹음 파일에 담긴 산드라는 외도한 여인이자 양성애자이고, 심적으로 위축된 남편을 거칠게 몰아세운 냉혹한 부인이며, 아들의 양육도 남편에게 미룬 이기적이고 괴물 같은 엄마에다, 작가가 되고 싶은 남편의 꿈마저 빼앗은 표절 작가다. 검사의 주장의 대부분은 산드라의 부도덕성에 집중하며, 부부의 갈등은 산드라 탓이다, 라는 가설을 주장한다. 대부분의 영화가 그렇듯, 영화의 한 장면은 그 순간만이 아니라 그를 통해 유추할 수 있는 더 많은 삶의 국면을 제유적으로 대변하기 마련이고, 그렇기에 서로를 날카롭게 상처내던 말다툼이 그날 하루의 예외적인 사건이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두 사람의 대화 속에 담긴 사실이 부부로서 함께 살아온 삶 전부를, 그리고 산드라라는 인물 전체를 대변한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사뮈엘의 죽음을 둘러싼 논쟁은 표면적으로 드러난 몇몇 사실을 두고 벌이는 해석의 대결이다. <추락의 해부>의 법정에서 펼쳐지는 논쟁의 매력은 법정 스릴러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사뮈엘의 추락사의 원인(그는 어떻게 죽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는 과정보다는, 산드라의 삶에서 발견된 사실의 편린을 바탕으로 각자의 서사를 만들려는 산드라(와 뱅상)와 검사(와 그의 동료들)간의 대결에 있다. <추락의 해부>에서 ‘작가 산드라’와 가장 닮은 이는 그녀의 유죄를 주장하는 검사(쪽 사람들)처럼 보인다. 검사는 산드라의 삶에서 발췌한 사실들을 바탕으로 ‘살인자 산드라’라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는 서사를 써내려간다. 중요한 것은 발췌된 사실에 허구적 상상(또는 해석)을 덧붙이며 완결된 서사를 완성하는 과정이 작가 산드라의 작품 세계에서 그리 멀리 있지 않다는 점이다. 어디까지가 허구고, 어디까지가 현실인지 구분할 수 없는 작품을 써왔던 산드라는 검사의 서사 앞에서 작가에서 등장인물로 위치가 전환된다. 산드라는 검사의 서사에 결코 동의할 수 없겠지만, 그것은 모친의 죽음을 다룬 산드라의 첫 번째 소설을 극도로 싫어했던 아버지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그녀는 아버지와의 불화를 소재로 두 번째 소설을 쓴다). 산드라(와 뱅상)는 검사가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창작한 ‘허구의 세계’ 또는 ‘살인자 산드라’라는 인물 앞에서, 자신이 그런 사람이 아님을 증명하는 또 하나의 서사를 완성해야 한다. <추락의 해부>에서 쥐스틴 트리에는 사뮈엘의 죽음이 추락사인지 아니면 살인에 의한 것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결정적 단서를 미리 제공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우리가 지켜보아야 하는 것은 법정 스릴러의 범인을 밝혀나가는 과정이라기보다는, 각자의 논리와 해석으로 사실의 암흑 지점, 또는 사실과 사실 사이에 놓인 빈틈을 각자의 서사로 완성해나가는 과정이다. 사뮈엘의 죽음에 대해 각자가 완성한 허구적 가설로서의 서사는 진실의 이명이다. 시각에 손상을 입은 다니엘(밀로 마차도 그라네르)이 세상을 제한적으로 경험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진실은 불완전한 모습으로 우리 앞에 출현한다. 그것은 완전무결하기보다는 언제나 빈틈을 가지고 우리의 판단을 기다린다. 산드라와 사뮈엘이 영어라는 타협의 언어로 의사소통해야 했던 것처럼, 그리고 영화 속 인물들이 프랑스어, 영어, 독일어 사이에서 불완전하게 서로의 생각을 표현하거나 타인의 의사를 전해 들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면에서 잔드라 휠러의 연기는 가히 압도적이다. <추락의 해부>의 잔드라 휠러의 얼굴은 의뭉스럽기만 한 진실과 닮았다. 흐릿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는 진실의 형상. 잔드라 휠러는 다채로운 표정을 얼굴에 새기기보다 법정에 입고 나온 무채색의 옷만큼이나 단조로운 표정 연기를 보여준다. 특히 사뮈엘이 녹음한 사운드가 법정을 채울 때 산드라의 (무)표정 연기는 단연 압권이다. 만약 산드라의 그 무채색의 얼굴이 없다면, 그것을 뚫고 터져나온 두번의 울음, 그리고 자신이 남편의 작품을 표절했다는 검사의 주장에 일그러진 얼굴로 외투를 벗어젖히는 찰나의 순간에 기꺼이 ‘그녀의 편’이 되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흡인력이 그토록 강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쥐스틴 트리에는 또 다른 한편에 관객이 그녀의 도덕성을 의심하게 하는 관계를 배치한다. 뱅상과의 관계. 영화는 산드라와 뱅상의 관계에 대해 우리가 보는 것 이상의 설명을 덧붙이지 않고, 보이는 것 그 자체로 남겨두지만, 그럼에도 재회의 순간부터 흘렀던 에로틱한 텐션은 남편의 정신 상담의의 증언이 있던 날 밤 두 사람이 함께 술을 마시는 장면(이 장면의 마무리는 어떤 상황이 뒤에 전개됐을 것만 같은 느낌을 강하게 준다)을 거쳐 무죄가 선고된 날의 식사 장면까지 계속된다. 빈틈, 관객의 자리 산드라는 타인(주로 가족)의 실제 사건을 소재로 한 소설로 성공한 작가다. 모친의 죽음, 부친과의 불화, 그리고 아들의 사고가 산드라의 소설에 끌려나온 현실의 일부다. 하지만 법정에서 산드라는 타인이 자신의 현실의 일부를 서사로 완성해가는 과정을 지켜봐야 한다. 물론 산드라(와 뱅상)는 그 서사에 맞서 또 다른 서사를 주장하지만, 이 두 경우 모두에서 산드라는 작가라기보다는 등장인물에 가까운 위치로 추락한다. 산드라는 자신의 삶을 더이상 자신의 것으로 주장할 수 없다. 산드라는 뱅상과 재판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법정에서 할 말과 해서는 안되는 말을 지시받는 위치에 선다. 쥐스틴 트리에는 그렇게 걸러진 말들만 떠들어야 하는 산드라의 입을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담는다. 녹음 파일이 법정에 재생되는 장면에서 쥐스틴 트리에는 여러 방식의 마스킹을 통해 사방이 꽉 막힌 좁은 프레임을 활용하고, 그로 인해 산드라는 옴짝달싹하지 못한 채 갇힌 듯한 느낌을 준다. 법정에서 산드라는 방청객에 앉아 있는 다니엘쪽으로 곧잘 시선을 돌리는데, 그때마다 등장하는 다니엘의 시점숏(또는 오더더숄더숏)은 산드라를 중심인물로 하는 ‘서사 대결’의 승자를 판단하는 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게 해준다. 영화 초반부에 산드라를 인터뷰하던 조에는 현실의 사건인 아들의 사고를 묘사하는 것이 독자를 불편하게 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묻는다. 하지만 관객은 이에 대한 산드라의 대답을 제대로 들을 수 없다. 영화는 다니엘이 스눕을 씻기기 위해 물을 트는 장면으로 잠시전환한 후, 다시 인터뷰 현장으로 되돌아가 독자는 자신이 쓴 책 속으로 들어간 거라고, 독자가 책의 일부가 되는 것이라고 말하는 산드라의 모습을 비춘다. 쥐스틴 트리에는 이 짧은 편집을 통해 다니엘이 청각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정도로만 우리에게 그 현장의 소리를 듣게 함으로써 관객과 다니엘을 등가적으로 위치시킨다. 중요한 것은 독자의 자리에 대한 산드라의 생각이 쥐스틴 트리에가 <추락의 해부>에서 구현하려는 관객(또는 독자)의 자리를 지시한다는 점이다. 쥐스틴 트리에는 독자가 책의 일부가 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사뮈엘이 유언처럼 건네준 이야기를 법정에서 증언하는 다니엘의 모습을 제시한다. 그렇게 법정의 청자(또는 독자)였던 다니엘은 서사의 일부가 된다. 아니, 사뮈엘과 산드라를 주인공으로 하는 또 다른 서사를 완성한다. 관객은 다니엘의 ‘판단’에 동의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관객이 다니엘의 증언의 진위 여부를 따지는 그 순간, 관객 스스로가 다니엘과 동일한 자리에 서게 된다는 점이다. 모든 것을 눈으로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는 세상, 자명한 사실로 가득한 세상이라면 진실은 아무 가치도 없을 것이다. 사실에서 보이지 않는 암흑 지점, 또는 사실과 사실 사이의 틈이야말로 진실이 거주하는 장소다. 그 빈틈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 하는 것은 오로지 스스로 판단해야 하는 몫이다. 청자, 또는 독자로서 다니엘에게 부여되었던 과제는 영화의 종결 이후 관객의 몫이 되고, 관객은 그렇게 영화의 일부가 된다. <추락의 해부>에는 다섯번의 플래시백, 또는 시각적 번역(재연) 장면이 등장한다. 이 장면들은 과거의 한순간을 회상하는 누군가의 기억이라기보다 누군가가 이야기하는 상황을 시각적으로 번역(재연)하는 쪽에 더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 특히 네 번째 장면, 그러니까 사뮈엘이 녹음한 파일이 법정에서 재생되는 장면에서 드러나듯, 시각적 재연은 사운드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 이상을 넘어서지 않으려 한다. 녹음 파일의 내용을 시각적으로 번역하는 것은 사운드만으로 산드라와 사뮈엘의 역할이 명확히 구분될 때까지로 한정된다. 산드라와 사뮈엘 사이에서 어떤 폭력적 상황이 발생하는 순간 시각적 재연이 중단된다. 사운드는 어떤 폭력적 상황이 있었음을 알려줄 뿐, 구체적으로 누가 누구에게 어떤 행위를 했는지까지는 알려주지 않기 때문이다. 뱅상은 빈칸은 빈칸으로 놔두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법정에서 사뮈엘의 죽음에 관련된 빈틈을 채우는 것은 그 역시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다니엘 앞에 놓인 가장 큰 빈틈은 사뮈엘이 어떻게 죽었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왜 죽었는가, 하는 것이다. 그는 이 빈틈을 마주하며 사뮈엘이 유언처럼 남긴 이야기를 떠올린다. 또는 지어낸다. 다섯 번째 시각적 재연에서 사뮈엘의 얼굴에 다니엘의 음성이 겹친다. 우리는 그 진술이 사뮈엘의 것인지 다니엘의 것인지 확정할 수 없다. 마치 마지막 증언 전까지 무엇이 진실인지 확신할 수 없었던 다니엘처럼 말이다. 관객은 다니엘과 사뮈엘 사이, 그리고 산드라의 무죄선고 이후 다니엘이 보여주는 눈물과 미소 사이의 빈틈 속에 위치한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그 빈틈이 관객, 또는 독자의 자리다. 텔레비전에서 방송되는 한 대담 프로그램의 진행자는 산드라가 쓴 소설의 한 구절을 인용한다. “허구가 현실을 부수도록 지난 흔적을 감추는 게 나의 일이다.” 산드라는 침대에 걸터앉아 그 특유의 무표정으로 자신이 한 말을 되돌려받는다(만약 다니엘의 증언이 허구였다면, 그는 산드라의 이 신념을 가장 완벽하게 구현한 인물일 것이다). 재판은 끝났고, 산드라는 이겼다. 하지만 산드라는 작가로서 이 신념을 계속 지켜나갈 수 있을까? 허구를 통해 현실을 부수던 자에서 허구에 의해 현실이 부서지는 경험을 된 이후에도 산드라는 과거와 똑같은 세계관을 갖는 작가로 남을 수 있을까? 작가로서 산드라가 어떤 세계를 그려나갈지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제 그녀가 누군가를 꼭 안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재판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산드라는 다니엘과 대화를 나눈다. 비록 짧은 대화였지만, 영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이뤄진 첫 대화다.

[기획] 틀을 벗어난 작품에 찬사를, 제74회 베를린국제영화제

베를린영화제 하면 으레 정치적이란 딱지가 붙지만 올해만큼 정치 이슈가 들끓었던 적도 드물다. 우선 영화제 시작 전부터 극우 정당 AfD(독일을 위한 대안) 의원들의 초대 여부에 대해 논란이 일었다. 최근 독일의 극우당 지지율이 20%로 오르면서 위기의식을 느낀 수십만명의 시민들이 주말마다 거리로 나서 극우 반대 시위를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베를린영화제측은 결국 AfD 의원들을 초대하지 않는 것으로 일단락지었다. 2월24일 시상식에서는 팔레스타인에 연대한다는 발언, 팔레스타인에 대한 학살이라는 발언도 나왔다. 수상자 가운데엔 서슴없이 “독일은 이스라엘에 대한 무기 공급을 중단하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었다. 게다가 시상식 후 베를린영화제 공식 인스타그램 채널엔 반유대적인 포스팅이 올라왔다. 급기야 베를린영화제측은 공식 입장이 아니라 해킹당한 것이라는 해명 글까지 내놓았다. 장르를 넘어 독특한 세계를 펼치다 1980년대 아일랜드 막달레나 수녀원의 인권침해를 다룬 개막작 <스몰 싱스 라이크 디즈>에 대한 호평이 이어지는 가운데 영화제 초반은 순항했다. 그러나 중반쯤부터 예년의 수준에 못 미치는 영화들이 많다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일간 <프랑크푸르트 룬트샤우>는 “칸영화제, 베니스국제영화제와의 격차가 더 벌어졌다”고 한탄했다. 일간 <쥐트도이체차이퉁>은 “몇개의 하이라이트 작품은 경쟁부문이 아닌 다른 부문에 숨겨져 있었다”고 평했다. 하지만 개성이 강한 영화들이 없진 않았다. 경쟁부문엔 환경, 여성주의, 노인문제, 이주, 동물, 인권, 식민지를 주제로 한 다양한 장르, 즉 다큐멘터리, 코미디, 역사, 멜로드라마, SF, 심리 공포 영화까지 포진해 있었다. 수상작은 여느 때와 같이 예상을 빗나가는 경우가 더 많았다. 낮은 평점을 받거나 관심을 받지 못했던 영화들이 수상한 것이다. 심사위원단은 기존 틀을 벗어나는 실험적 영화들에 손을 들어줬다. 경쟁부문 영화들에겐 약간의 공통점이 존재했다. 빙의와 화신 기법으로 환기를 불러일으킨 영화들이 눈에 띄었고 황금곰상을 받은 <다호메이>도 그런 유의 영화였다. 다호메이(1797~1858)는 현 베냉에 존재했던 왕조의 이름이다. 영화는 26점의 문화재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여행과 학생들의 토론 등 두 부분으로 나뉜다. 앞부분은 쇳소리가 섞인 무시무시한 목소리 사운드를 입혀 식민지 약탈 예술품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뒷부분은 반환된 유물을 맞이하는 베냉 대학생들의 열띤 토론이 이 영화의 주제를 관통한다. 영화 산업지 <스크린>은 “식민주의로 인한 피해 복구는 약탈된 유물 몇점을 돌려받는 것처럼 간단치 않다는 것이 분명해졌다”고 썼다. 감독상을 수상한 <페페>도 독특한 다큐멘터리영화다. 죽은 하마 페페의 굵고 갈라지는 이상한 목소리가 극을 끌고 간다. 아프리카 나미비아에 살던 하마가 어떻게 콜롬비아까지 와서 군집을 이루고 살다가 사살당하는가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럼에도 분위기는 밝고 코믹적인 요소를 갖췄다. 독일 일간 <타츠>는 “<페페>는 하마의 일대기와 삶과 죽음의 철학적 질문 사이를 오가며 꿈과 현실 사이의 경계를 허물어버린다”고 평했다. 프랑스산 SF영화 <디 엠파이어>에서도 빙의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선한 외계인과 악한 외계인이 작은 마을 사람들에게 빙의해 대결하는 해프닝은 비현실적이고 부조리해서 저절로 코믹적 요소가 갖춰진다. 기발하고 기존의 영화문법을 훌쩍 뛰어넘어 황당무계하기까지 하다. 외계 우주선은 바로크 시대 유럽의 대성당 모습을 갖추고 바흐를 변형한 음악과 안무도 영화의 독특한 미학에 한몫한다. 평단의 호불호가 극히 갈렸으며 낮은 평점을 받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심사위원상을 거머쥐었다. 죽음과 삶에 대한 시선으로 또한 이번 영화제엔 죽음을 다룬 영화가 많았다. 특히 죽음뿐 아니라 노인문제까지 다룬 독일영화 <다잉>, 이란영화 <마이 페이버릿 케이크>는 영화제 내내 높은 별점을 받으며 관객의 호응을 얻었다. <다잉>은 뿔뿔이 흩어져 화합 불가능한 독일 가족 이야기를 세 사람의 시각으로 풀어낸다. 세 시간 러닝타임에 텔레비전 미니시리즈처럼 다양하고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 <다잉>은 삶, 죽음, 중독, 예술에 대해 이야기한다. 독일 소도시에서 치매로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한 아버지, 중병을 앓는 어머니, 베를린에서 오케스트라 지휘자를 하고 있는 아들, 알코올중독에 빠진 딸. 이 네명을 주인공으로 각 챕터에서 이들의 시각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영화제 기간 동안 높은 별점으로 금곰상 후보에 올랐었으며 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했다. <스크린>은 “매티아스 글래스너의 작품 중 가장 인상적이다. 영화는 살아남기 위한 전략처럼 느껴진다”고 썼다. <마이 페이버릿 케이크>를 연출한 이란의 영화감독 마리암 모그하담, 베타쉬 사나에하 감독은 이란 당국의 출국 금지로 인해 영화제에 불참했고 도리어 이 소식으로 인해 관심을 모았다. 영화는 오랜 싱글 생활을 청산하고 파트너를 찾아나서는 70살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 가벼운 코미디물이다. 노년이 겪는 외로움을 벗어나 공감과 기쁨을 찾는 순간을 유머로 풀어냈다. 배경이 이란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일거수일투족이 아슬아슬하게 그려진다. 영화산업지 <스크린>은 “이 영화는 삶과 죽음의 기쁨과 부조리함을 재치와 유머로 포착한다”고 표했다. 나치에 저항운동을 하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간 젊은이의 이야기를 다룬 <프롬 힐데, 위드 러브>도 영화제 내내 수상작 후보로 거론됐지만 최종적으로는 수상에 실패했다. 영화는 젊은이들의 사랑과 열정으로 빛나는 여름날의 기억과 출산 뒤 사형수로 살아가는 임산부의 어두운 현실을 번갈아가며 보여준다. 감옥에서 출산과 육아를 하는 힐데에게 행복했던 과거의 기억이 하루하루 버팀목이 되었다고 영화는 역설한다. <할리우드 리포트>는 “안드레아스 드레젠 감독은 힐데의 삶의 빛과 어둠의 균형을 맞춤으로써 공포 가운데서도 희망과 인간성을 찾아낸다”고 썼다. 각본상을 수상한 <더 데빌스 배스>도 자살과 죽음을 다룬 개성 강한 영화다. 1750년 오스트리아에 있었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갓 시집 온 아그네스는 남편과 시어머니에게 적응하지 못해 깊은 우울에 빠지고 결국 신경쇠약증에 걸린다. 괴로워하는 아그네스가 목이 잘린 시신을 옆에 두고 넋 놓고 바라보는 장면이 있다. 어린이를 살해한 뒤 고해성사를 하기만 하면 용서받을 수 있다는 신념 때문에 종종 일어나는 일이었다고 한다. 당시 자살이 구원될 수 없는 죄악으로 여겨졌기에, 죽고 싶어도 자살하지 못하는 여성들이 어린이 살해를 마지막 방책으로 택했다는 사실은 억압적인 사회 분위기를 잘 나타내는 것이다. 이국적 분위기의 향연 여성 해방을 주제로 한 영화 중엔 네팔영화 <샴발라>가 주목할 만하다. 아름다운 미장센과 이국적인 풍습, 일처다부제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수작이다. 주인공 페마가 길을 떠나 어려움을 겪으며 변화하는 로드무비이자 성장영화이기도 하다. 페마는 임신한 몸임에도 오해로 인해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찾아 떠나고 그 과정에서 더 중요한 것을 깨닫는다. 베를린 방송인 <에르베베>는 “<샴발라>는 불교와 삶에 대한 불교적 시각을 보여준다. 기억에 오래 남을 이미지와 함께 연기도 좋고 연출도 훌륭한 영화”라고 호평했다. 경쟁부문 밖에서 가장 관심을 모았던 영화는 파노라마 부문의 <노 아더 랜드>다. 가장 시의적인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를 다뤘고, 다큐멘터리상을 수상하며 주목받았다. 영화에선 웨스트뱅크 남쪽의 마을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이 쫓겨나는 상황이 담겨 있다. 시상식에 오른 바셀 아드라 감독은 “가자 지역에서 수십만명이 죽어가는 상황에서 이렇게 있는 상황이 괴롭다”고 전했다. 세계의 거울과 창이 되어줬던 황금곰 파티가 끝났다. 베를린영화제의 5년 임기를 마친 공동 집행위원장 카를로 카트리안과 마리에테 리센벡은 박수를 받으며 떠났다. 내년엔 후임 집행위원장 트리시아 터틀이 영화예술부문과 조직부 모두 떠안아야 한다. 현재 독일 언론에선 영화제 이후 시상식 때 발언과 공식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반유대주의 구호를 둘러싼 논쟁이 뜨겁다. 이 상황은 어떻게 수습될 것인가. 그 과정에서 어떤 상흔도 없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