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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1997)

[인터뷰] 뜨거운 나날을 맞이하며, <아름다운 우리 여름> 최하늘 작가, 정다형 감독

네 아이를 동시에 잉태하는 일은 100만분의 1의 확률로 여겨진다. 네 쌍둥이는 삶과 죽음을 사이에 두고 10대의 어느 날 헤어진다. <아름다운 우리 여름>은 아름(유영재), 다운(손상연), 우리(김민기) 형제가 쌍둥이 나라(김소혜)를 잃고 첫 여름을 나는 이야기다. 상실과 이별, 이후 필연적으로 다가오는 자기혐오라는 문제를 따뜻한 감성으로 만져낸 최하늘 작가와 정다형 감독. 두 신진 창작자는 “드라마가 삶에 주는 용기”를 믿는다고 말한다. - 어떤 과정을 거쳐 오펜(O’PEN) 당선작 <아름다운 우리 여름>이 영상화했나. 정다형 한해 30편 정도의 당선작 중 영상화는 10편 내외로 이루어진다. 스튜디오드래곤 소속 연출자는 대본 중 1~3순위를 지정하는데 <아름다운 우리 여름>은 내게 0순위였다. 인물들의 이름으로 되어 있는 제목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아름다운 우리 여름’을 보내려면 아름답지 않은 시절도 견뎌야 한다는 역설적인 메시지가 제목부터 내용까지 관통하도록 쓴 건 작가님이 유일했다. 예산, 세일즈, 흥행 등 현실적인 조건으로 제작 여부가 결정되는데 이 각본은 기획 포인트 역시 뚜렷했다. 최하늘 결말이 포함된 8부작 기획안을 제출해 당선되었고 최종적으로 2부작 제작·방영이 결정되어 지난 6개월간의 다시 쓰기 과정이 있었다. 전년도 오프닝 작품이자 감독님 전작인 <복숭아 누르지 마시오>를 보니 왜 우리 두 사람을 매칭했는지 바로 알겠더라. 나도 한 감수성 한다고 생각했는데 감독님의 감수성과 섬세함은 정말 독보적이다. (웃음) 감독님은 다섯 주인공 각각에 대한 질문지를 써주셨고 나는 내가 창조한 인물들이 되어 답해야 했다. ‘쌍둥이는 서로의 연애를 목격한 적 있을까요?’, ‘나라의 플레이 리스트에는 어떤 노래가 있었을까요?’ 서로 문답을 주고받으며 인물들을 생각하니 이야기 속 아이들에게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 쌍둥이 여동생을 잃은 세 형제(아름, 다운, 우리)가 가정의 붕괴로 고통받는 소녀 여름(장규리)을 만나는 이야기다. 최하늘 가까웠던 지인을 자살로 떠나보낸 적이 있다. 그의 마음, 그리고 남겨진 사람들의 마음을 고루 쓰다듬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사별 후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옆집 사는 여름이 역시 부모의 이혼과 재혼으로 자신이 혼자 남겨졌다고 생각하는 아이다. 서로 다른 이유로 세상에 남겨진 사람들이 운명처럼 서로를 알아보고 연대하는 것에 핵심이 있다고 보았다. 정다형 그래서 고독에 대한 이해나 나름의 철학이 있는 배우를 캐스팅하는 것이 중요했다. 오디션 과정에서 내면에 관한 질문을 많이 했고 그에 진솔하게 부딪혀오는 배우들에 끌렸다. 작가님에게도 비밀로 지키고 있지만 20대 초중반인 그들 또한 삶에서 누군가를 잃어본 경험이 있었다. 대본과 공명하는 개인사에 관해 묻고 찬찬히 대화를 나누며 캐스팅을 결정했다. - 늘 그렇듯 단막극은 이제 막 시작하는 신인급 배우들에게 소중한 기회다. 최하늘 개성이 다른 세 쌍둥이 남자 이야기를 하고 싶은 마음이 각본의 착상이었다. 예능프로그램 <슈퍼맨이 돌아왔다>의 대한, 민국, 만세처럼. (웃음) 학원물인 만큼 여학생들이 한번쯤 짝사랑해본 유형별 이상형의 남자면 더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에 감독님은 어른스러운 모범생 첫째, 장난기 많고 스포티한 둘째, 아리송하고 비밀스러운 셋째 역에 꼭 맞는 배우들을 찾아와주셨다. 정다형 다섯 주연배우가 모두 내 새끼 같고 소중하다. (정 감독의 핸드폰 배경은 다섯 배우를 나란히 두고 찍은 사진이다.) 나라 역의 김소혜는 촬영 시작 전 혼자 로케이션을 돌아다니면서 나라의 마음을 상상하고 편지를 써서 주었다. “나라는 고개를 들어 빛을 마주할 것이다. 자연스럽고 싶던 것에 자연스러워질 것이다. 그곳에서 뜨거운 나날을 뜨거운 마음으로 흠뻑 만끽할 것이다”라고. - 오는 9월14~15일 방영된다. 가장 좋아하는 장면과 관람 포인트를 소개한다면. 최하늘 세 쌍둥이 앞에서는 티 내본 적 없지만 나라와 이별하고 잠을 자지 못해 수면제로 버티는 엄마 혜진(신은정)의 모습이 나온다. 2부 후반에 모종의 발견을 계기로 처음으로 편안하게 잠드는 그의 표정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정다형 아름, 다운, 우리, 여름과 세상을 떠난 나라가 다 함께 모이는 장면이다. 물론 리얼리티에서는 불가능한 판타지다. 그 친구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조금도 드라마 같지 않고 현실의 가족처럼 느껴졌다. 구성원을 먼저 떠나보낸 적 있는 유가족이라면 누구나 느낄 감정, ‘다시 만났으면 좋겠다’라는 바람이 가장 잘 보이는 이 장면이 시청자에게도 소중하게 다가가길 바란다. 작업 시 나의 필수템 최하늘 이어폰. 작품을 쓸 때 그에 어울리는 분위기의 음악을 들으면 감정에 몰입한다. 이번 작품을 쓰면서는 선우정아의 <도망가자>를 많이 들었다. 정다형 연필과 노트. 기록하는 걸 좋아한다. 현장에서 ‘오늘은 날씨가 어땠고 배우가 어떤 행동을 했는데 그게 귀여웠다’라고 적어놓으면 다음 회차에 슬쩍 비슷한 장면을 넣어본다. 나를 자극한 다른 작품 최하늘 2005년 드라마 <태릉선수촌>의 대사. 유도 후보 선수였던 민기가 양궁 금메달리스트 수아에게 “저렇게 멀리 있는데 어떻게 10점을 쏜 거냐” 물었을 때 수아가 대답한다. “그냥 판때기잖아”. 정말 어려운 일을 하고 있는데도 어렵게 생각하지 않는 마음가짐이 너무 좋아서 한동안 프로필 문구로 삼았던 대사다. 정다형 “텔레비전은 재즈다”라는 문장. 방송 PD 출신인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쓴 책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에서 읽었다. 영상화 과정에서 발생하는 현실적인 한계들을 극복하며 즉흥적으로, 동시에 가장 진실되게 찍는 사람이 되고 싶다.

[비평] 누벨바그의 유령과 멜랑콜리, 이지현 평론가가 바라본 <국외자들>

영화 <국외자들>(1964)이 촬영될 즈음의 상황을 되짚는다. 당시 혁명적이었던 누벨바그의 열기가 시들면서 극장가에는 다시 전통적인 방식의 프랑스영화가 대두되고 있었다. 당시 누벨바그 작가들의 상황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400번의 구타>(1959) 후 프랑수아 트뤼포는 대중과 점차 멀어졌고, 알랭 레네의 신작 <뮤리엘>은 특별한 관심을 받지 못했다. 자크 리베트의 경우에는 <파리는 우리의 것>(1961)이 실패한 이후로 완전히 창작을 멈춘 상태였다. 그나마 에릭 로메르가 텔레비전용 저예산영화를 지속적으로 선보였지만, 그의 방식은 지극히 장인적인 모델에 가까웠다. 장뤼크 고다르는 자신의 동료들과 비슷한 처지에 속해 있었다. <네 멋대로 해라>(1960) 이후에 그는 <작은 병정>(1963)을 작업했지만, 이 작품은 알제리전쟁에 대한 언급 탓에 3년간 검열 중이었다. 그사이에 <여자는 여자다>(1961)와 <기관총부대>(1963)가 개봉했지만 흥행에는 실패했다. 물론 <경멸>(1963)은 예외라 할 수 있지만, 이 작품이 브리지트 바르도의 출연작 중 가장 적은 관객을 동원한 작품이란 사실은 상기되어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국외자들>을 작업하던 시기에 고다르는 사라지는 누벨바그의 불꽃을 되살려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캐스팅으로부터 시작되다 새 영화 <국외자들>을 위해 고다르가 가장 먼저 취한 행동은 캐스팅이었다. 이 작품을 위해서 그는 안나 카리나와 재회했다. 이 영화에는 총 세명의 주연배우들이 등장하는데, 단언컨대 오딜 역의 그녀가 가장 돋보인다. 우둔하지만 아름다운 인물인 오딜은 두명의 다정한 사기꾼들에게 휩싸여 있다. 먼저 사미 프레이가 연기하는 프란스는 항상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는 착한 늑대 같은 캐릭터로, 그는 이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인 ‘9분45초보다 더 빨리 루브르 뛰기’를 제안하는 장본인이다. 그리고 클로드 브라소가 연기하는 아르튀르가 등장한다. 언뜻 매우 불량하고 죄질이 나빠 보이는 이 캐릭터는 실상 어린양에 더 가깝다. 삼촌의 나쁜 요구에 항의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총을 들고 그는 도둑질에 뛰어든다. 이렇게 세 인물이 만나서 영화의 이야기가 성사된다. 그들은 파리 근교의 어느 저택에 숨겨진 다량의 현금을 훔치기 위한 계획을 도모하는데, 만약 그들 중 한명이 빠졌다면 이루어지지 못했을 계략이다. 고다르가 즐겨 사용한 코지프스키식 의미론에서 빌려서 표현하자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는 울지 않는다. 즉, 이 셋의 만남은 운명이나 다름없다. 이들은 서로 부딪히고 온갖 다양한 포즈를 지으면서 사건의 본질에 점점 더 다가간다. 그리고 이들 사이에 제3자인 고다르의 목소리가 개입한다. 배우들의 아름다움에 빠져서 영화를 보다가도 감독의 목소리가 들리면 관객들은 꿈에서 깬 듯 이야기에서 멀어진다. 일부 관객들은 이 때문에 이 영화에 대한 호불호를 논하기도 한다. 간혹 아주 다른 소설의 줄거리가 플롯 사이에 끼어들 때도 있다. 대표적으로 거짓말쟁이 인디언에 대한 이야기가 그렇다. 이 일화를 전달하는 프란스의 얼굴은 카메라를 정면으로 빤히 쳐다보고 있다. 그런 그를 오딜은 사랑스럽게 여긴다. 이들의 관계는 마치 “이것은 영화다”라고 직언하는 듯 보인다. 영화에서 소개되는 인디언 서사는 미국의 소설가 잭 런던이 쓴 것인데, 이 이야기를 통해 프란스는 처음으로 오딜에게 관심받는다. 뒤이어 그는 자신이 상상한 ‘니스에서 이탈리아 배를 타고 아메리카 대륙으로 갈 것’이라는 아이디어를 그녀에게 들려주지만, 그녀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어쩌면 오딜이 사랑하는 것은 오직 타인의 이야기뿐인 것 같다. 프란스는 이 에피소드를 거치면서 무언가를 깨닫는다. 전달된 이야기의 방식, 시네마의 오류를 깨닫는다. 그런 의미에서 주인공들의 회합 장소가 영어를 가르치는 어학원이란 점은 의미심장하다. 현대의 모든 것은 세월과 함께 자동적으로 고전이 된다는 T. S. 엘리엇의 명언을 설파하는 그곳의 풍경은 간혹 <영화의 역사(들)>(1988~98)의 극영화 버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고 이 장소에서 온갖 부차적인 요소들이 두드러진다. 영화는 뜬금없이 토머스 하디의 시를 글자로 보여주거나 셰익스피어의 문장을 주인공의 입을 통해 발음한다. 무언가를 보여주며 다른 요소를 연결시키고, 또 다른 것을 말하며 여타의 것을 재현하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배우들의 얼굴은 영화를 유일하게 관통하는 통합의 요소가 된다. 파편화된 몽타주를 공간화시키는 이미지들의 존재, 이 장치가 모든 흩어진 사건을 한데 묶는다. 어쩌면 이 점이 고다르의 후기 작품과 이 영화의 진짜 차이점일 수도 있다. 주크박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발판으로 춤추는 인물들, 예술작품이 지워진 루브르를 흘러가듯 뜀박질하는 캐릭터들, 그리고 그들이 발딛고 선 파리 곳곳의 풍경이 도달하는 장소가 오쟁빌이란 점에 주목한다. 이곳이 파리 시내가 아니라 외딴 근교의 모래바람 휘날리는 장소라는 점은 흥미롭다. 오쟁빌의 저택에는 미국 소설에서 소개된 어느 도둑의 이야기가 재현되고 있다. 그곳의 여주인장은 현금을 눈앞에 쌓아두고 감추지 않는 방식으로 비밀스런 재화를 보관하는 중이다. 오딜은 말로만 전해지던 그 비법을 직접 눈으로 목격한다. 만일 그녀가 어학원에서 서사의 초월적인 힘을 경험하지 못했다면 영화는 결코 클라이맥스에 도달하지 못했을 것이다. 단언컨대 고다르가 제작사인 컬럼비아 픽처스를 위해 여주인공과 누아르 다음으로 준비한 것은 웨스턴의 방식이다. 파리 시내에서 볼 수 없는 한적함을 머금은 교외의 어느 장소에서, 영화는 점차 인디언의 공격에 대항하는 서부극의 대목과 점점 더 가까워진다. 누구나 총을 들고 다니는 현실판 오케이목장을 지키는 것은 짖지 않는 개 한 마리뿐이다. 여러 오마주의 원전 이 영화가 고발하는 미국식 대중영화와 텔레비전의 성공 비밀에 대해 말할 차례이다. 우리는 그것을 통해 누벨바그의 유령을 떠올린다. 말하자면 이 작품이 루브르를 찬양하는 이유는 그곳에 보존된 예술이 아니라 그 건물의 말끔한 외양 때문이다. 이 점이 영화를 끊임없이 멜랑콜리하게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를 이중적으로 오마주한 <몽상가들>(2003)과 <펄프 픽션>(1994), <아비정전>(1990)의 특정 장면은 패러독스에 가깝다. 우리는 다시금 <영화의 역사(들)>를 생각한다. 그 영화가 중시하는 영화의 죄목, 무언가를 반사한 죄와 전쟁 이후에 너무 늦게 도착한 원죄에 대해 상기한다. 그럼에도 오딜을 통해 매력을 느끼는 것, 그것이 고다르의 유일한 창작방식일 것이다. 끊임없이 불우한 이미지를 통해 관객을 유혹하는 그의 방식, 아마도 시네마의 본질을 작품은 에둘러 표현하는 것 같다. 장르영화와 텔레비전 영상의 유치찬란한 발상, 그리고 누벨바그의 흑백에 가까운 모노톤의 기억을 상기한다. 몇몇의 아이콘과 날카로운 이미지로 남을 <국외자들>의 발견은 그런 맥락에서 근원적이다. 어쩌면 그 피상성만이 이 영화가 고발하는 진짜 서사일 수도 있다. 수많은 가짜와 가상의 이야기들, 이제 이 작업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시네마스코프는 컬러로 채색될 것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마음의 작업을 수행하기만 하면 된다. 과거의 이미지들과 함께 자유롭게, 그저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

“우리 사진을 지우는 것만이 답인가요?”, 중고등학교 교사 11인이 말한 교실 속 딥페이크 성범죄

2019년 2월, 익명 메신저 텔레그램에 개설된 단체 채팅방을 통해 불법 음란물을 생성하고 거래한 N번방 사건이 전국을 뒤덮었다. 미성년자 성착취, 협박, 영상물 무단 유포, 불법 촬영물 대규모 공유 등 인면수심의 범죄가 일상을 침범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지금, 과거보다 훨씬 더 교묘하고 은밀한 형태의 디지털성범죄가 고개를 들었다. 가족, 친인척, 학교 선생님과 친구 등 주변인의 이미지를 무단 도용한 범죄자들이 포르노 이미지를 생성하고 그것으로 금전 거래까지 도모한 사실이 밝혀졌다. 이번 딥페이크 성범죄의 쟁점은 10대 청소년 가해자가 대다수라는 점이다. 경찰청 보고에 따르면 지난 1월1일부터 9월25일까지 딥페이크 성범죄로 검거된 피의자는 총 387명, 그중 10대가 324명으로 가장 높은 비중인 83.7%를 차지했다. 10살 이상 14살 미만의 촉법소년도 66명(17.1%)이나 된다. 5년 전, 디지털성범죄의 피해자가 10대 청소년으로 내려온 것을 넘어 이제는 가해자까지 학교 내에서 발생하고 있다. 아는 사람의 친근한 얼굴을 인간존엄을 짓밟는 포르노로 활용하는 왜곡된 성관념은 무너진 공동체의식에서 비롯한 것일까, 아니면 짧고 자극적인 영상 범람에 길들여진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의 이면이 뒤늦게 드러나는 것일까. 온라인상에서 많은 사람들이 부르짖는 인문학의 결핍이 참혹한 또래 문화를 만든 것일까. 죄의식 없는 놀이터의 구조를 파악하기 위해 그곳을 찾는 이들을 들여다봐야 한다. <씨네21>은 7개 중학교, 4개 고등학교 교사들의 이야기를 경청하여 현재 10대 청소년의 비디오 리터러시를 들여다보았다. 이 세대가 공통적으로 지닌 어떤 문화적 태도가 딥페이크 기술을 만나 거대한 범죄를 낳았는지, 어떻게 어른들이 아이들을 보호하는 데에 실패했는지 교실 내의 풍경을 면밀하게 분석한다. 기사에 인용된 모든 응답자의 발언은 익명으로 기재한다. 급변한 디지털 환경을 따르지 못하는 교육 현재 1020세대는 영상을 편리하게 활용하는 만큼 그것의 제작에도 매우 익숙하다. 유튜브에서 공부 타임랩스, 등굣길 겟 레디 위드 미, 시험기간 브이로그 등 특정 주제가 암묵적으로 10대 크리에이터의 주요 장르로 인식될 만큼 영상 제작의 진입장벽은 낮다. 오직 여가 시간의 환경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2022년 서울시교육청은 디지털 매체를 이용한 수업을 늘리기 위해 중학교 학생과 교원 전원에게 1인 1스마트기기를 지급하는 사업을 추진했다. 스마트기기가 같은 ‘교실 구성원 모두에게’ ‘공식적인 루트로’ ‘동등하게 보급’되다 보니 청소년들의 소셜미디어 활동과 온라인 세계의 진입은 장벽 없이 수월하게 이루어졌다. 스마트기기 보급 사업은 2020년 코로나19 사회적 거리두기를 기점으로 디지털기기 보유가 힘든 청소년을 대상으로 부분 지급되었던 것을 바탕 삼아 발전했다. 지자체 교육청은 모든 청소년이 가정의 경제적 상황에 영향을 받지 않고 교육받을 수 있는 동등한 권리를 보장하고자 했지만, 기술과 기기 활용에 뒷받침되어야 할 윤리적 교육의 부재는 의도와 달리 범람하는 영상에 청소년들을 무차별적으로 노출시켰다. 틱톡, 릴스, 쇼츠 등 짧고 임팩트 강한 숏폼 콘텐츠가 아이들의 여가 시간을 채운다면, 스마트기기를 동반한 디지털 교육 환경과 영상 제작 과제 등이 아이들의 수업 시간을 담당한다. 하지만 이를 문제의 근원으로 지목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지식정보사회에서 디지털 기술은 일종의 생존 능력이자 자기 표현 방식이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이 기술을 자연스럽게 터득할 여건을 조성해주는 것은 타당하다. 다만 학교 내에서 진행되는 대부분의 디지털 리터러시 교육이 학생들의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고 이미 제작된 교육부 영상을 시청하는 데 그쳐 중요도 높은 기술의 이면을 간과하고 만다. 중등교사 A씨는 디지털 리터러시 교육 부족의 핵심을 예산 문제로 짚었다. “예산이 넉넉하면 반에 한명씩 외부 강사를 초청해 심도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눈맞춤하는 수업을 진행할 수 있지만 그런 학교가 많지 않다. 대부분 특정 주제로 제작된 영상을 전 교실에 송출하는 식이다. 이때 교사들도 아이들이 교육 영상을 보도록 지도하는 데 그친다. 각 교실 선생님을 따로 교육하여 강사 양성에 힘쓰면 좋겠지만, 생명존중 교육, 자살 예방, 안보 교육 등 법정 교육이 너무 많아 현실적으로 어렵다.” 일방적인 교육 방식도 문제지만 교육 콘텐츠의 내용도 적극적인 보완이 필요하다. “아이들이 의무교육 영상을 잘 안 보기도 하지만 오히려 아이들이 안 봐서 다행이다 싶은 아쉬운 수준이 대부분이다. 이를테면 디지털성범죄 교육 영상에 피해 사례를 재연하는 짧은 드라마가 포함돼 있는데 아이들의 집중을 유도한 것인지 피해 내용을 너무 자극적으로 다루었더라. 아이들도 주요 메시지보다 재연 영상만 기억할 것 같았다. 디지털성범죄 예방의 목적이 무엇인지, 아이들이 직면한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를 현실적으로 살피고 적용하는 과정이 시급하다.”(중등교사 B씨) 성인지감수성 격차가 낳은 분열 디지털성범죄 교육, 정보 교육 등이 (간신히라도) 이뤄지지만 그것을 학습하는 사람이 마음을 닫으면 이 또한 무용지물이다. 총 11개 중고등학교 교사를 취재한 결과 한곳을 뺀 10군데에서 “디지털성범죄 수업의 남학생·여학생의 반응이 완전히 갈린다”라고 답했다. 구체적인 상황은 다음과 같다. 중등교사 C씨는 “교실에서 성범죄 주제를 다룰 때 여학생들이 발언하는 경우가 이전보다 더 많아졌지만 신난 듯 이야기하는 남학생들과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라고 말했다. 교실 내 발언권이 기울어진 경우도 종종 목격된다. 부모 대상의 패륜적 표현이나 성적 농담을 큰 목소리로 구전하는 남학생들 모습에 여학생들이 직접 저지하는 경우는 드물지만, 디지털성범죄 교육 시간에 “피해자가 여성이라고 말하는 게 불쾌하다”는 남학생들의 집단적 불만은 곳곳에서 자연스레 제기된다. “젠더 이슈, 성평등 등을 거론하는 순간, 선생님이나 강사가 있어도 적대감을 드러내는 데 거침이 없다.”(중등교사 D씨) 이번 취재를 계기로 몇몇 응답자 교사들은 교실에서 딥페이크 성범죄 문제를 학생들과 토론하고 후일담을 전해주기도 했다. 남녀 학생의 판이하게 다른 반응은 여기서도 동일했다. 중등교사 E씨는 “성범죄 이야기가 나오는 순간 여학생들이 ‘범죄’에 무게를 싣는 반면, 남학생들은 ‘성’에 집중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여학생이 전반적으로 무성한 소문과 뉴스를 자신의 일처럼 느낀다면 남학생은 문제점을 비난하면서도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딥페이크 범죄를 왜 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에는 교실 내 구성원 모두가 동의하지만, 그 의견의 귀결 과정에선 극명한 차이가 드러났다. 또래 피해자의 상황을 공감하는 측면이 있는 한편 “지인으로 딥페이크 합성을 해봤자 성적으로 흥분되지 않는데 쓸데없이 왜 하는지 모르겠다”라는 의견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도덕적 기준을 성별로 나누어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대다수의 응답자인 교사들이 이러한 인식 차로 인해 딥페이크 성범죄 교육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요컨대 각 학생의 성인지감수성 차이를 줄여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환경을 만든 기성세대의 책임 오직 아이들만 문제일까. 청소년이 가해자가 되고, 또 미성년 피해자가 속출한 데에는 분명 어른들의 책임도 있다. 고등교사 F씨는 “OTT에 범람하는 선정적인 콘텐츠가 미성년자 유저 비율이 높은 숏폼 플랫폼에 흘러들어오는 상황에서 요즘 아이들은 이상한 것을 많이 보고 자란다고 비난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라고 지적했다. 이어 “유튜브는 저작권 침해같이 사유재산 침해로 이어지는 문제는 적극 규제하면서 미성년자에게 유해한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콘텐츠는 왜 방치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제도적 미비도 지적됐다. 현재 학교마다 학교폭력, 교내 도박 등 다양한 사회문제를 즉각적으로 신고할 수 있는 스쿨 폴리스 제도가 있다. 인근 관할 경찰서에서 각 학교를 전담하는 경찰을 배정해 사건을 집중 조사하도록 마련한 제도다. 이에 대해 중등교사 G씨는 “실제로 문제가 생기면 스쿨 폴리스가 아이들의 문제를 얼마나 적극적으로 해결할지 확신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학교에서 딥페이크 성범죄 미수 사건을 맞닥뜨렸던 교사 G씨는 “경찰에서 진범을 잡기 어렵다는 말만 반복하거나 피해자에게 상황을 반복해 진술하게 하는 모습 등이 총체적으로 불신을 높였다”고 설명했다. 청소년의 죄를 따져 묻기 전에 아이들이 선택하지 않은, 기성세대가 만든 시스템에 어떤 구멍이 있는지, 그런 위험이 방치된 숨은 이유는 무엇인지 들여다봐야 한다. 에필로그 <씨네21> 취재에 응한 한 교사는 딥페이크 성범죄에 관한 토론 중 한 학생이 <씨네21>에 꼭 보내고 싶다고 한 메시지를 전해주었다. “N번방 사건에 대한 반응과 비교했을 때, 이번 딥페이크 사건에는 사람들이 관심이 별로 없는 것 같다. 비슷한 문제라고 무뎌진 것일까? 문제는 제대로 해결되고 있나? 아무도 그 답을 알려주지 않는다. 어른들은 사진을 보면서 과거를 추억하지만, 우리는 그것들을 조용히 지운다. 어른들이 조금만 더 적극적으로 나서주면 좋겠다.”

‘2번 클릭 1초 만에, 딥페이크 합성물을 만들다’, 영화기자의 딥페이크 체험기

9월24일 토요일 오후 9시 - 어딘가 어색하지만, 불쾌하지만, 분명 나였다 스마트폰을 메신저용으로 들고 다니는 내게 딥페이크는 고난도의 작업이라고 생각했다. 딥페이크란 말을 들으면 최신판 <혹성탈출> 시리즈의 주인공 시저가 복잡한 프로그램 실험 끝에 완성되는 광경이 머릿속에 펼쳐지기도 한다. 딥페이크 콘텐츠를 직접 만들어보자고 결심하자 피로감이 몰려왔다. 포토숍을 처음 배우던 시절처럼 수많은 기능 쓰는 법을 익히고 이거 눌러라 저거 눌러라 하는 지시에 따르다 보면 내 일이 될 것만 같았다. 어쨌든 일단 시작. 그러나 대표 앱 하나를 알지 못해 아이폰 구글 앱스토어에 딥페이크를 검색했다. 광고를 제외하고 맨 상단에 올라온 리페이스(Reface)가 제일 유명하다 싶어 선택했다. ‘전세계에 1억5천만 창작자들로 구성된 리페이스 커뮤니티에 가입하세요… 자신만의 트렌드 콘텐츠를 만들어보세요.’ 눈에 띄는 마케팅 문구 곁에 비윤리적인 제작과 유포에 대한 경고성 멘트는 따로 없었다. 설치 뒤 앱을 켜니 성인 남성의 얼굴이 여성, 아이의 얼굴로 계속 바뀌는 첫 화면이 떴다. 하단엔 ‘너의 얼굴로 AI 콘텐츠를 만들어보라’는 문구가 박혀 있었다. 그러한 페이스 체인지 페이지는 4번 더 이어졌다. 왠지 그 얼굴들과 눈을 마주치기가 싫어 빠르게 넘겼다. 기본 홈에 들어갔지만 사용법을 몰라 메인으로 보이는 하단의 ‘FaceSwap’를 눌렀다. X 타래처럼 아래로 길게 이어지는 FaceSwap에서 예시 템플릿 이미지가 유독 현란한 ‘Treding Videos’가 눈에 들어왔고 ‘See All’을 눌러 전체로 이동했다. 그러자 화려한 ‘움짤’들이 눈앞에 나타났다. 배나 허벅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채 섹시 댄스를 추는 어린 아시아 여성, 비키니를 입고 가슴이 강조되는 포즈를 취하는 젊은 백인 여성, 울음을 터뜨린 여자아이까지…. 화면을 아무리 아래로 내려도 유사 영상만 끝없이 나타났다. 마치 어딘가에 갇힌 것처럼 답답했다. 어쨌거나 제작이 목표였으니 템플릿을 하나 골랐다. 타이트한 흰색 셔츠에 딱 붙는 짧은 치마를 입은 아시아계 여성이 엉덩이를 강조하는 춤을 추는 영상이었다. 내 앨범에 접속해 내 얼굴 사진 한장을 골랐다. 사진 편집 단계에서는 꽤 망설였고 이때부터 심장이 크게 뛰었다. 오른쪽 하단의 ‘선택’을 누르는 순간, 어쩐지 지금 업로드한 이미지가 아까 보았던 예시 중 하나로 올라갈 것만 같았고 그걸 보는 누군가의 뒤통수가 머릿속에 선명해졌다. 마음을 다독이며 ‘선택’을 누르자 다행히 ‘Choose a face’ 창이 나타났다. 그 안엔 얼굴을 크게 키워 편집한 내 사진이 들어가 있었다. ‘Swap Face’ 버튼을 누르자 1초 만에 완성 페이지로 넘어갔다. 허무하고 어이없었다. 눈앞에 보이는 최종 파일 속 여자의 얼굴은 어딘가 어색했지만 분명 나였다. 14초 동안 내 얼굴의 여성은 쉬지 않고 엉덩이를 흔들었다. 어떠한 제동도 걸리지 않는 과정에 무척 당혹스러웠다. 9월25일 일요일 오후 - 3시 가짜 <씨네21> 표지로 동료들을 속이다 자기 전에 하지 말걸 그랬다. 나와 친구들의 딥페이크 음란물이 텔레그램 방에서 떠도는 악몽을 꾼 다음날 오후, 딥페이크로 가짜 <씨네21> 표지를 만들어보기로 했다. 이번에 쓸 앱은 ‘페이스 스와퍼’ (FaceSwapper). 앱 미리보기를 둘러볼 땐 ‘마법 같은 원클릭 얼굴 교체 기술’, ‘창의적이고 재미있는 얼굴 교체 여행’ 같은 낭만적인 마케팅 문구가, 앱을 실행할 땐 ‘가벼운 장난, 끝없는 즐거움!’ 같은 달콤한 멘트가 눈에 걸렸다. 경고성 멘트는 역시나 없다. 누구도 책임을 묻지 않는 광장. 청소년들이 당사자 합의 없이 합성물을 제작하는 행위를 아무런 죄의식 없는 놀이로 인식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페이스 스와퍼는 메인 홈에 템플릿이 있다. 가슴이 부각된 의상을 입은 젊은 여성의 영상물이 상위를 차지하고 그것들이 얼마나 ‘좋아요’를 받았는지 숫자로 표시된다. 여성들은 쉽게 평가받고 있었고 ‘비키니’ , ‘미인’ 같은 성적 대상화의 단어들이 강조되어 있었다. 다시 표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미리 저장해둔 여성배우 A의 기존 단독 표지 이미지를 선택한 뒤 여성배우 B의 패션 화보 사진을 가져왔다. 그리고 4초 만에 완성. 완성된 가짜는 놀라울 정도로 진짜 같았다. 어떠한 이물감도 느껴지지 않고 확대해봐도 어색함이 없다. 얼굴을 가리는 머리카락과 합성한 이목구비가 조화롭게 어울려 디테일하기까지 했다. 이 이미지를 동료 기자들 단톡방에 공유해보기로 했다. 빠르게 눈치채긴 했지만 동료들 역시 속았다. 이는 누구든지 가짜 <씨네21> 표지를 만들어 유포할 수 있고 얼마든지 악용할 소지가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내친김에 페이스 스와퍼의 3일 무료 구독 서비스까지 신청했다. 무한 저장 혜택을 받다 보니 사진첩에 딥페이크 합성물이 순식간에 50개가 쌓였다. 그런데 이상하다. 본인 인증이나 성인 인증 절차가 전무하다. 실제 딥페이크 범죄 발생 시 진범을 찾기 어렵고 설사 찾더라도 혐의 입증이 어려운 현 상황을 돌아보면 무책임한 서비스 운영 방식이 결코 이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않단 걸 알 수 있다. 딥페이크 성착취 엄벌 촉구 시위가 열리고 매일같이 관련 문제가 터져나오고 있는 요즘, 궁금해진다. 윤리적 질문을 외면한 채 나 몰라라 손놓고 있는 앱은 정말 결백한가?

어린이와 가족을 위한 콘텐츠에 주목을 BAFTA TV상, 어린이·청소년을 위한 작품을 치하하는 수상 부문 포함하기로

영국영화텔레비전예술아카데미(BAFTA)가 2025년부터 어린이·청소년을 위한 작품을 치하하는 수상 부문을 시상식 중계에 포함하기로 했다. 공식 보도에 따르면 BAFTA는 어린이 영화 각본상, 어린이 비영화 각본상, 어린이 제작팀상 등 세 카테고리를 BAFTA TV상에 포함해 수상자를 발표한다. 이 결정은 <플레이스쿨>의 전 진행자 플로엘라 벤저민, <닥터 후>의 작가 러셀 T. 데이비스, <텔레토비> 등 다수의 어린이 TV프로그램 히트작을 만든 베테랑 제작자 앤 우드 등 업계 인사들의 지속적인 캠페인에 대한 BAFTA의 응답으로 보인다. 일간지 <가디언>은 이번 결정이 BAFTA가 2011년에 폐지한 어린이 TV 시상식을 일부 대체할 것이라 해석했다. 지난해 9월 ‘어린이·가족영화상’의 신설도 공표했고 이 또한 BAFTA 영화상 방송 중계에 포함될 계획이다. 이 계획에 따르면 올해 개봉한 디즈니·픽사의 흥행작 <인사이드 아웃2>는 내년 BAFTA 영화상 장편애니메이션상과 어린이·가족영화상 두 부문 후보에 오를 수 있다. BAFTA 게임상 또한 가족상 부문이 추가될 예정이다. BAFTA의 의장 세라 풋은 “영화, 게임, 텔레비전은 문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특히 어린이들을 위한 스토리는 따뜻한 창의성을 통해 만들어진다”라고 언급하며 “어린이와 가족을 위한 콘텐츠에 대한 주목을 더욱 확대할 수 있기를 바란다”라는 취지를 역설했다. 앤드루 밀러 BAFTA 청소년 자문 그룹 의장은 “어린이·청소년 영화산업은 다양한 교육적인 스토리텔링을 선도하며, 그간 많은 창작자가 이 분야에서 경력을 쌓았다”고 전했다. 50년 이상 어린이와 청소년의 복지에 헌신한 공로로 올해 초 BAFTA 펠로십을 수상한 플로엘라 벤저민도 “지금 어린이들은 성인용 콘텐츠에 쉽게 노출되고 있다. BAFTA가 어린이·청소년을 위한 작품이 좀더 대중의 주목을 받도록 노력하고, 관련 제작자들에게는 영감을 주기 위해 지원하는 모습을 보게 돼 기쁘다”라고 말하며 BAFTA의 결정을 지지했다. BAFTA는 수년간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연중 운영해왔다. BAFTA의 이번 결정이 전세계 영화, TV 시상식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04년부터 20년간 <씨네21>에 필자로 함께한 손주연 런던 통신원의 마지막 기사입니다. 긴 시간 <씨네21>에 런던 이야기를 들려준 손주연 통신원에게 깊은 감사를 전합니다.

[인터뷰] 다음 세대에 횃불을 건네는 이야기, <파친코> 시즌2 쇼러너 수 휴

전쟁 중의 로맨스, 재일 한국인과 일본인의 드문 우정, 시대를 거듭하며 이어지는 가족의 유산까지. <파친코> 시즌2에선 국적과 세대, 역사적 비극을 넘나드는 사랑의 물결이 더욱 세차게 흐른다. 2022년 <파친코> 시즌1 성공에 이어 시즌2를 이끈 쇼러너 수 휴에겐 “원작 소설 이상의 디테일이 필요한 작업”이었다. <파친코> 시리즈 이후 Apple TV+와 계약을 맺고 신작 작업에 착수 중인 그는 지금 할리우드 드라마 시장이 주목하는 프로듀서이자 작가다. 작가방에서 이력을 시작해 작품 제작의 전반을 아우르는 쇼러너, 총괄 프로듀서(EP, Executive Producer), 크리에이터 등 다양한 직함을 넘나들게 된 수 휴와 <파친코> 시즌2에 관해 화상으로 대화를 나눴다. - 이민진 작가의 소설 <파친코>를 영상 작업으로 각색하는 데 핵심 역할을 맡았다. 원작 소설에 충실하면서도 이를 넘어서는 확장력을 갖기 위해 시즌2에선 어떻게 접근했나. 시즌1은 책이 지닌 선형적 내러티브 구조를 없애고 과거의 중심 주인공 선자(김민하)와 현재의 손자 솔로몬(진하)이 교차하는 구성에 초점을 맞추기로 한 점이 핵심이었다. 이번 시즌엔 솔로몬이 작가들의 주요 과제가 됐다. 왜냐하면 원작에선 초반이 세부적으로 묘사되고 선자가 중년에 이르면 전개 속도가 매우 빨라진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이후는 마치 삶이 주인공들을 쏜살같이 휩쓸고 지나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파친코> 시즌2 역시 이를 따르기로 했지만 그래도 소설보다는 속도감을 늦추려 했다. 훨씬 더 많은 디테일을 상상하는 작업이었다. 시즌1을 작업하다 막힐 때면 이삭(노상현)의 행방불명 후 시장에서 김치를 파는 선자의 모습으로 에피소드가 끝나는 것을 복기하곤 했는데, 시즌2의 실마리 역시 언제나 마지막 장면을 생각할 때 가닥이 잡혔다. 사람들이 시즌2는 좀더 쉬울 거라고 하지만 이번에는 각본 작업은 물론이고 프로덕션도 쉽지 않았다. 완전히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기 때문에 모자수의 집과 파친코, 회사 등을 제외하면 세트를 모두 새로 지었다. - 선자가 상복을 입고 더 그래스 루츠의 에 맞춰 춤추는 시즌2의 오프닝 시퀀스 타이틀도 정서적으로 강력한 울림을 준다. 어떻게 나온 결과물인가. 이 장면은 놀랍게도 오프닝 시퀀스를 위해 따로 시간을 빼서 찍은 게 아니다. 대부분의 배우들이 실제로 자신의 촬영 분량을 찍고 있을 때 잠깐 다른 스튜디오로 와 찍은 것이다. 특히 이삭의 죽음 후 상복을 입은 김민하 배우가 스튜디오에 등장해 즐겁게 춤을 출 때는 그 자체로 너무나 많은 정서적 레이어가 형성되어 강력한 오프닝이 나올 거라고 현장에서 직감할 수 있었다. 배우가 작중 현실을 살다가 곧바로 뛰쳐나와 오프닝 시퀀스를 찍은 것이 오히려 훨씬 도움이 된 경우다. - <파친코> 시리즈를 작업한 작가들의 방은 다양한 국적, 젠더, 인종의 멤버로 구성된 것으로 알고 있다. 시즌2의 캐릭터에 깊이를 더하는 과정에서 주로 어떤 논의를 했나. 일단 우리의 진짜 마음을 쓰는 것이 중요했다. 작가들의 성스러운 방에서는 다양한 헤리티지와 가족적 배경을 가진 작가들이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부터 교감을 출발한다. 개인적인 기억을 꺼내 서슴없이 아이디어를 내놓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의 작가방, 그리고 현장의 모니터 옆에는 언제든 흐르는 눈물을 닦을 수 있는 휴지가 있었다. 여러 나라에서 온 크루들이 서로에게 배우는 협업 환경이 <파친코> 시리즈의 힘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또 극의 가장 중심 캐릭터인 선자의 선택과 방향성을 논의할 때 ‘슬라이딩도어’ 기술을 동원했다. ‘선자라면 당연히 이렇게 할 것’이라고 쉽게 단언하지 않고 ‘만약 선자가 이런 방향으로 간다면? 이런 상황을 마주한다면?’ 하는 식으로 인생의 여러 가능성을 계속 던지고 답해보는 식이었다. - 멜로드라마의 줄기 속에서 가족간 세대간의 갈등과 결합이 시즌2 서사의 주요 골자를 이룬다. 주제적으로 고려한 점이 있나. 이번 작업을 하면서 무척 중요하게 생각한 부분이다. <파친코> 시즌2의 멜로드라마성을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관문으로 이해해주어 고맙다. 이번 시즌을 만들 때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다음 세대에 횃불을 건네는 이야기로 읽혀야 한다는 것이었다. 선자만큼이나 노아와 모자수, 그리고 솔로몬이 중요하고 그들이 쇼에서 더 많은 공간을 차지하는데 그것이 사랑 이야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길 바랐다. - 올해 에미상 시상식에서 일본 역사극 <쇼군>이 18개 부문 수상과 더불어 아시아 최초 여우주연상 수상자(<파친코>에 출연한 배우이기도 한 안나 사와이)를 배출했다. 한국어, 일본어, 영어를 사용한 <파친코>가 등장한 이후의 현상으로 읽자면, 확실히 미국을 비롯한 글로벌 시장에서 아시아권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의 자막을 전보다 덜 낯설게 받아들인다는 증거도 된다. 매우 고무적인 성과라 생각한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아직도 자막이 들어가는 시리즈물, TV 작업의 어려움을 업계 실무자들은 선명히 체감하고 있다. 봉준호 감독이 1인치의 장벽을 크게 무너뜨리긴 했지만 말이다. 다국어 스토리를 텔레비전에 적용하고, 국제적 출연진과 함께 작업하며, 촬영장에서 문화적 차이를 수용하는 일에는 많은 조심성과 노력이 필요하다. 일본어, 한국어, 영어로 촬영된 <파친코> 시리즈는 4대에 걸친 한국 이민자 가족이 겪는 사랑과 상실의 복잡한 감정을 좇는다. 이때 결국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것은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는 보편적 메시지를 제작진이 얼마나 정확히 인식하고 그 토대를 탄탄히 세우는가 하는 점이다. 내게 <파친코>의 경험은 우리가 때로 수천 마일 떨어진 상태에서도 캐릭터와 이야기에 대해 원활히 논의할 수 있던 경험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때마다 이 이야기의 힘을 실감할 수 있었다. 특정한 문화적 맥락과 그로부터 생겨난 언어적 복잡성이 스토레틸링을 얼마나 풍부하게 하는지, 결과적으로 풍부한 이야기가 얼마나 보편적인지 알게 되었다.

[기획] 부산, 로케이션 이상의 글로벌 영화제작 거점으로 - 설립 25주년 맞이한 부산영상위원회의 현재와 미래, AFCNet 20주년 세미나

부산영상위원회가 창립 25주년을 맞은 올해. 부산영상위원회가 의장을 맡고 있는 아시아영상위원회네트워크(AFCNet) 역시 20주년을 맞이해 부산국제영화제 기간 중 이를 기념하는 세미나와 리셉션이 열렸다. 아시아콘텐츠&필름마켓(ACFM) 기간 중 마켓 행사장 내에서 진행한 이번 행사들은 변화하는 글로벌 프로덕션의 환경과 AI 시대에 대한 뜨거운 관심 속에서 부산과 해외 영화인들이 만나는 네트워킹의 장으로 거듭났다. ACFM 현장, 그리고 세미나를 전체적으로 기획한 강성규 부산영상위원회 운영위원장과 AI 세션을 준비한 양종곤 부산영상위원회 사무처장의 인터뷰를 함께 전한다. 부산영상위원회가 AFCNet 설립 20주년을 맞아 지난 10월7일 오전 특별 세미나를 개최했다. 6일부터 부산 벡스코 제2시전시장에서 문을 연 ACFM의 일환이다. AFCNet은 아시아 내 필름 커미션 및 촬영 지원 기구로 이뤄진 국제 네트워크로, 현재 19개국 49개 기관이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의장을 맡은 부산영상위원회가 주도해 꾸린 이번 특별 세미나에선 변화하는 글로벌 영상 분야의 전망이 핵심 주제로 떠올랐다. 영국 미디어 경영 컨설팅 회사인 올스버그·SPI의 레온 포드 대표이사가 ‘변화를 앞서가기: 영상위원회 미래에 대한 통찰’을 주제로 기조 발제를 맡았다. 레온 포드는 세계 각국 영화산업 분야의 다양한 조사와 연구를 시행해온 전문가이자, <스크린 인터내셔널>의 기자로 15년간 활동했다. 기조 발제는 인센티브 유인책이 세계적 추세인 점을 주목했다. 인센티브제도는 특정 지역에서 영화나 영상을 촬영하며 쓴 제작비의 일부를 해당 도시가 현금 형태로 제작자에게 되돌려주는 것을 의미한다. 레온 포드 대표이사는 부산 또한 글로벌 콘텐츠가 공략할 현지화 작품의 성공적 유치를 위해 영화 로케이션 인센티브제도를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보고서에서 밝힌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프로덕션 인텐티브 비율 현황에 따르면, 한국이 20~25%, 일본이 50%로 각각 최저와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이어 캐나다 앨버트주 캘거리시의 성공적인 사례도 소개됐다. 캘거리경제개발공사 창조산업 부사장 루크 아제베도는 캘거리 지역에 촬영한 영화의 사례를 토대로 필름 커미션의 역할과 성공 사례를 발표했다. 드라마 <라스트 오브 어스>의 촬영 유치로 1800억원이 넘는 지역 경제효과를 얻은 캘거리시는 이를 계기로 1천만달러의 인센티브 상한선을 없애고 지역 인력 창출 및 물품 구입 등 조건을 충족하면 소비 금액의 22%를 금액 제한 없이 돌려주는 전략을 세웠다. 루크 아제베도 부사장은 인센티브 금액 외에도 인프라 홍보가 중요하다면서 “부산국제영화제 기간 중 부산을 찾는 해외 관계자들과 시 차원에서 도시의 특징적 경관을 소개하는 팸투어 등을 적극 유치하고 숙박 및 레스토랑 산업과 연계한 서비를 확장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올스버그·SPI는 OTT 시장의 급격한 팽창과 숏폼 등의 증가에 대응하는 방안으로 현지화한 제작 전략을 세워 글로벌 스크린 콘텐츠에 대한 투자를 늘릴 것을 강조했다. 특히 앞으로는 중남미, 사하라사막 이남 이프리카, 중동 및 동유럽 등이 콘텐츠의 성장을 주도할 것이라는 전망을 밝혔다. 이들이 발표한 전세계 영화, 다큐멘터리, 텔레비전 제작 부문의 지속 가능한 성장을 촉진하기 위한 성공적 정책의 7가지 원칙은 (1) 프로덕션 인센티브 (2) 지역 인력 수용 능력 (3) 인프라 개발 (4) 영화 친화성 (5) 다양성, 형평성 및 포용성 (6) 지속 가능성 (7) 파트너십이다. 아시아 주요 촬영 지원 기관에서 모인 5명의 패널이 ‘변화에 대한 적응: 영상위원회 전략의 다양하고 선제적인 접근’이라는 주제로 종합 토론을 진행했다. 좌장은 레온 포드 대표이사가 맡고, 양종곤 부산영상위원회 사무처장, 세키네 루리코 일본영상위원회 사무총장, 모한나드 알 바크리 요르단왕립영상위원회 대표이사, 텐진 겔첸 부탄국립영상위원회 프로그램 오피서, 캘거리경제개발공사 창조산업의 루크 아제베도 부사장이 패널로 참여했다. 세액공제와 행정 지원책 등 각국이 집중하는 촬영 유치 강점 및 현실적인 고민이 다양하게 거론됐다. 양종곤 사무처장은 “상대적으로 인센티브는 약하지만 부산영상위원회만이 주력할 수 있는 지역 로케이션 유치의 강점을 찾으려고 한다”면서 “작가 지원, 부산 지역 자체 펀드 조성 등을 통해 부산 지역 제작사를 지원해 지역 스토리텔링을 보강”하는 방안을 설명했다. 부산아시아영화학교를 통한 프로듀서 배출, 디지털 로케이션의 최전선으로서 갖춘 촬영 시설 경쟁력에도 방점을 찍었다. 또 양종곤 사무처장은 K콘텐츠 열풍을 바라보는 해외 패널의 질문에 한국영화 산업의 명과 암을 두루 짚었다. 그는 “한국 시장은 자국 영화 비율이 높지만 제작 작품 수가 코로나19 이후 급감했고 신규 투자도 동결됐다. 이에 프로듀서들은 해외 공동제작 전망을 적극적으로 내다보고 있다”면서 “규모에 상관없이 여러 나라의 합작 프로젝트, 아시아 지역의 국제 공동제작 비즈니스 미팅에 부산 역시 활발히 대응할 것“이라고 예고했다. 이날 세미나가 마무리된 이후 부산영상위원회는 25주년을 맞이한 부산 로케이션 이니셔티브(BLI)를 발표했다.

[리뷰] 종말의 이미지가 소생하는 엄숙한 생(生)의 감각, <룸 넥스트 도어>

베스트셀러 작가인 잉그리드(줄리앤 무어)는 신간 출판 기념 사인회에서 옛 친구 마사(틸다 스윈턴)의 근황을 듣는다. 유력 언론에서 종군기자로 이름을 날리던 마사가 현재 수술로도 손쓸 도리가 없는 자궁경부암 3기 환자라는 것. 해후한 두 친구는 이후 병실과 집을 왕래하며 소식이 두절된 채 살아온 수십년의 공백을 끝없는 대화로 채운다. 언제나 말하는 쪽은 마사고, 듣는 쪽은 잉그리드다. 여느 때처럼 마사와 만나 영화 상영을 기다리던 잉그리드는, 마사가 자발적, 적극적 안락사를 결심한 것을 알고 충격에 빠진다. 게다가 마사는 스스로 끝을 선택한 날 잉그리드가 자신의 옆방에 머물길 바란다. 전장을 누비던 시절부터 수차례 죽음의 위기를 직면했지만 그럴 때마다 동행이 존재했다는 이유다. 결국 잉그리드는 마사의 제안을 수락하고 함께 지낼 뉴욕 교외의 별장으로 여행을 떠난다. <룸 넥스트 도어>는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첫 영어 장편영화다. 스페인을 떠난 알모도바르의 영화는 신기하리만치 대사량이 적고, 텔레노벨라풍의 서사 전개도 전에 비해 두드러지지 않는다. 심지어 이 작품은 그의 40여년의 감독 경력 중 많지 않은 소설 원작(시그리드 누네즈의 <어떻게 지내요>)의 작품이다. 일견 알모도바르의 자장에서 비껴난 작품처럼 보이지만 <룸 넥스트 도어>가 알모도바르의 연출작임을 알아채는 데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터다. 가장 확실한 알모도바르의 인장은 역시 컬러 팔레트다. 알모도바르 영화 속 스페인이 실제 스페인이기보단 알모도바르식 스페인이었듯 이번 영화 속 뉴욕은 우디 앨런이나 노라 에프런 영화에서 본 뉴욕과는 거리가 먼 강렬한 원색으로 가득 차 있다. 특히 먼셀의 20색상환에 입각해 철저히 보색 대비를 맞춘 듯한 틸다 스윈턴과 줄리앤 무어의 의상을 주시하면 더욱 흥미로운 감상이 될 것이다. 그간 앙리 마티스나 파블로 피카소의 화풍에 비유된 알모도바르의 영화가 이번 작품에서 직접적으로 인유하는 화가는 에드워드 호퍼다. 호퍼의 그림은 영화에 직접 등장하는 것은 물론 후반부 결정적인 장면에 배우의 몸으로 직접 육화되며 잊을 수 없는 여운을 남긴다.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근작 <페인 앤 글로리>(2019), <패러렐 마더스>(2021) 등을 통해 질병과 전쟁이 말미암은 죽음의 그림자 앞에서 서로 다른 세대에 놓인 인물이 혈연을 어 유대하는 과정을 담아왔다. <룸 넥스트 도어> 또한 앞선 두 장편영화와 함께 ‘죽음 3부작’으로 묶일 법하다. 시한부판정을 받은 마사와 엄마와 거리를 두는 딸 미셸, 베트남전쟁과 이라크전쟁 등 미국의 패권 추구가 앗아간 무고한 생명들과 생존자에게 야기한 불안, 코로나19 팬데믹과 전세계적 기후 위기까지 <룸 넥스트 도어>는 알모도바르의 그 어떤 영화보다 멸망 앞에 선 자들이 느끼는 공포와 불안으로 즐비하다. 하지만 제81회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한 이 비범한 영화는 단지 종말을 고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죽음의 이미지를 앞세워 삶의 존엄을 성찰하고 예정된 정지 앞에 굴복하지 않는 인간이 통렬히 깨우치는 생의 감각을 섬세히 들여다보는, 존재 그 자체의 가치를 일깨우는 노장의 걸작 이다. close-up 영화엔 틸다 스윈턴과 줄리앤 무어가 수십년간 보여준 명연기를 오마주한 듯한 숏이 내내 등장한다. 아픈 친구의 훌륭한 대화 상대가 되는 잉그리드는 <싱글맨>의 찰리와 겹치고, 딸과 평생 가까워지지 못한 마사는 <케빈에 대하여>의 에바와 포개진다. 꽃을 사들고 뉴욕 거리를 가로지르는 줄리앤 무어의 숏은 <디 아워스>의 오프닝 시퀀스와 조응한다. 틸다 스윈턴은 이번 작품에서도 흥미로운 1인2역을 시도하는데, 분장한 모습이 <어댑테이션>의 영화사 간부 발레리와 놀랍도록 닮아 있다. check this movie <멋진 하루> 감독 이윤기, 2008 스윈턴이 절정의 액션을 하면, 무어가 진심어린 리액션을 한다. 서로의 호흡을 그대로 받아 돌려주는 두 배우의 연기는 두 연인의 탁구 랠리 같은 대화 시퀀스로 꽉 찬 영화 <멋진 하루>를 떠올리게 한다. 두 작품은 영화를 볼 땐 말을 거는 쪽의 얼굴에 집중하지만, 보고 난 후엔 말을 듣던 쪽의 얼굴이 잔상으로 남는다는 점에서도 어울리는 한쌍이다.

[남다은 평론가의 RECORDER] 정직한 교환, 마침내 한 사람의 얼굴

지난 8월 개봉한 <리볼버>는 관객 24만명을 동원했다. 평단의 반응 역시 뜨거운 편은 아니다. <씨네21>(1471호)은 이에 대한 “자그마한 항변”으로 ‘<리볼버>는 문제작인가?’라는 기획을 마련했는데, 김영진 평론가의 글을 제외하고는 다소 소극적인 방어처럼 읽힌다. 10월 초, 부일영화상은 <리볼버>에 최우수작품상을 수여했다. 영화제에서의 수상이 언제나 작품의 진가를 알아본 결과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부당하게 평가절하된 <리볼버>의 경우라면 반갑고 다행스러운 일이다. <리볼버>가 ‘2024년의 영화’로 앞으로 더 말해지길 희망하며, 이 작품이 안긴 잊을 수 없는 감동을 뒤늦게 싣는다. <리볼버>를 향한 비판 중 일부는 액션은 미약한데 말은 지나치게 많다는 점을 지적한다. 장르물로서 대사가 과하게 설명적이라는 것이다. 오승욱 감독도 이 영화가 ‘대화의 영화’라고 여러 인터뷰에서 밝혔다. 그러나 그가 영화의 축으로 삼은 ‘대화’가 서사의 세세한 전달을 목표로 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인물들이 내뱉는 대사는 행동의 원인이나 심리, 영화가 생략한 시간의 일들을 명징하게 제시하는 데 복무하지 않는다. 요컨대 우리는 하수영(전도연)이 임석용(이정재)과 앤디(지창욱)의 제안 혹은 협박을 덜컥 받아들이는 내적 계기나 감옥에서 그가 겪은 변화, 정윤선(임지연)이 하수영을 끈질기게 맴도는 진짜 이유, 임석용이 두 여자와 맺은 관계 등을 내밀하게 알지 못한다. 인물들의 대화가 그들 각자의 욕망을 지시한다고 해도, 그 수준은 피상적이다. 이 영화는 서사의 인과율과 개연성을 빈틈없이 드러내는 데 힘을 쏟지 않는다. <리볼버>를 즐기지 못한 이들은 그러한 면모를 이 영화의 허술함과 허세, 혹은 지루함의 근원으로 보는 것 같다. 나는 달리 느낀다. <리볼버>가 오승욱의 말대로 ‘대화의 영화’라면, 그건 이 세계가 대사로 기술된다는 뜻이 아니라, 대화 ‘장면’으로 이루어진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둘은 엄연히 다르다. 일반적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대화 장면은 두 인물이 시선을 교환하며 말한다는 설정을 숏/리버스숏의 교차로 재현한다. 영화사에서 관습이 된 이 규칙은 오늘날, 대체로 기계적으로 적용되어 내러티브의 평범한 도구로 기능하거나 더러는 균열과 해체의 대상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것을 미지의 영역으로 새삼 탐색하는 작품들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숏/리버스숏의 연쇄로 구성된 대화 장면이 이를테면 얼굴의 크기와 표정, 시선의 방향, 카메라의 위치, 숏의 길이처럼 물질적 세부와 운동의 미세한 차이들을 예민하게 운용한 결과이며, 대사, 나아가 서사를 초과하는 영화적 쾌감의 지평이 될 수 있다는 점은 더이상 대담히 시도되지도, 섬세하게 다뤄지지도 않는 것 같다. <리볼버>가 ‘대화의 영화’라는 점은 이 맥락에서 이야기되어야 한다. 이 작품의 감동은 이제는 통념이 되어버린 대화 장면의 구도를 묘수를 부리지 않고 충실히 수행하는 과정만으로, 아예 영화의 뼈대로 삼아 전진시킴으로써 독자적인 내적 질서를 성취해낸다는 사실에 있다. 이 영화에서 대화 장면의 구조는 인물들의 말을 전달하는 기법을 넘어 세계를 대하는 태도에 이른다. 이처럼 특별한 일은 어떻게 가능해진 걸까. 도입부, 하수영이 출소 후, 한 아파트를 올려다보는 모습 다음으로 그의 2년 전 상황이 등장한다. 그중 가장 강렬한 대목은 하수영이 임석용, 앤디, 그리고 변호사와 이야기를 나누는 차 내부 장면이다. 하수영은 개인 뇌물 수수 혐의를 인정하고 경찰 옷을 벗는 조건으로 변호사가 제안한 위로금 7억원과 이스턴 프로미스 경호실 이사 자리만이 아니라, 앞 장면에서 부푼 마음으로 돌아보던 신축 아파트 입주를 내건다. “내가 다 뒤집어쓰죠. 됐어요. 여기서 끝내요.” 이 장면의 힘은 하수영의 머뭇댐 없는 자세에서 비롯된다. 그가 이 장면의 리듬을 주관한다. 앞좌석에 앉아 하수영을 힐끗거리거나 겨우 뒤돌아보며 간보던 두 남자의 궁색한 얼굴은 처음부터 끝까지 정면을 향하며 결정의 주체가 되는 하수영의 얼굴과 대비된다. 하수영의 얼굴이 그들보다 더 도덕적이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그의 방식이 우회로를 마련하지 않고 직진한다는 점에서, 그가 가장 불리한 상황에 위치함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더 강력해 보인다. 여기서 하수영이 주시하는 건 그 자신의 심리적 동요가 아니라, 이들 사이에 생긴 약속이다. 그가 이 대목에서 수용한 건 더러운 대가가 아니라, 정당한 교환의 약속이다. 여기가 <리볼버>의 근원이다. 상황은 하수영의 예상과 다르게 흘러간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그는 죄수복을 입은 채, 변호사와 접견하며 감옥에서 버텨야 할 2년을 체념적으로 곱씹는다. 홀로 다 뒤집어쓰겠다고 선언하던 하수영의 화려한 얼굴은 오간 데 없고 상처 입은 무력한 얼굴이 프레임을 겨우 버틴다. 그 피폐한 얼굴이 교도소 면회실로 디졸브되면, 임석용과 하수영이 마주 앉는다. 이 장면은 둘의 정면과 측면 얼굴, 어깨를 걸고 찍은 숏/리버스숏, 투명한 막을 사이에 둔 투숏을 망라하는 대범한 구성과 화면을 채운 두 얼굴의 미묘한 변화로 사회와 격리된 무색무취의 면회실을 인물들의 굴곡진 시간과 내면이 응축된 ‘영화적’ 장소로 변모시킨다. 서로를 바라보는 하수영과 임석용의 투숏이 ‘모든 걸 잊겠지만, 당신이 한 짓은 용서하지 않겠다’라는 하수영의 말과 함께 그들 각각의 측면 숏으로 단호히 분리되고, “어느 날인가 썰물처럼 과장님에 대한 감정이 사라져버렸어요”라며 빤히 정면을 향하는 하수영의 얼굴로 이행될 때, 임석용의 반응 숏은 그런 하수영의 숏을 똑바로 응시하지 못한다. 그러니 묻게 된다. 갇힌 자는 누구일까. 출소까지 남은 시간, 65일을 또박또박 상기하는 하수영의 표정은 묘한 미소를 삼키며 움찔댄다. 그것은 우위를 점한 얼굴, 더이상 잃을 게 없는 얼굴, 과거가 아닌 미래를 향한 얼굴, 죗값을 치른 얼굴, 임석용과의 질긴 투숏에서 벗어난 얼굴, 그러니까, 이제 약속의 실현만을 앞둔 얼굴이다. 그것은 앞서 화장으로 치장한 하수영의 얼굴에서 초라하게 퇴행한 것이 아니라, 무섭게 자유로워진 것이다. 미련 없이 개운한 이 얼굴은 임석용의 불투명한 얼굴을 이긴다. 하지만… 이 장면의 귀결은 쓰라린 실패다. 장면의 끝, 교도소 텔레비전에서는 임석용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전해진다. 하수영이 그곳에서 견딘 2년이라는 시간, 면회실 장면이 숏/리버스숏으로 품격 있게 진전시킨 그의 얼굴은 초기화된다. 우리가 영화 시작에 본 하수영의 표정 잃은 얼굴의 정체는 그것이다. <리볼버>의 모든 장면은 하수영이 차에서 세 남자와 협상한 장면과 출소를 얼마 안 남기고 그 약속이 기약 없이 깨졌음을 깨달은 장면에 대한 반응이다. 이제 하수영의 목표는 단 하나, 파기된 약속을 되찾는 일이다. 그가 경찰 신분으로 거래한 돈은 부패한 뇌물이지만, 적어도 수감 생활을 마치고 집요하게 환기하는 7억원과 아파트는 합당한 교환의 산물이다. 그것은 돈이기 전에 약속이다. 하수영이 가장 자주 꺼내는 단어는 ‘약속’이고 가장 싫어하는 말은 ‘각오’다. ‘약속을 지켜.’ 그에게 그 말은 무언가를 각오한 요구가 아니라, 온당한 권리의 주장이다. 그러나 그 권리를 행사하는 일은 왜 이토록 고되어야 하는가. 하수영은 ‘정당한 교환’을 보장한 남자들의 음성 녹음 파일마저 지워진 상태에서, 그야말로 맨몸 하나로 싸워야 한다. 아무런 증거 없이 그는 홀로 약속을 복구해야 한다. 하수영이 교도소에서 나와 민기현(정재영), 신동호(김준한), 정윤선, 조 사장(정만식), 앤디 등과 이룬 숏/리버스숏의 연쇄는 그저 소통이나 시선 교환 같은 것이 아니라, 거처도, 돈도, 증거도 없는 자가 자기 얼굴과 육체만으로 상대와 승부를 보는 형식이다. 하수영이 약속에 한발 한발 접근하기 위해 구축한 ‘주고받음’의 질서다. 큰 약속에 다가가는 작은 약속들의 운동. 하수영에게는 과거의 약속을 되찾는 일만큼이나 그의 행로 일부가 된 상대와의 약속, 이를테면 정 마담에게 사례할 2천만원을 잊지 않는 일 또한 중요하다. 하수영이 앤디를 기어코 찾아간 건 7억원을 받기 위해서지만 삼단 봉으로 그의 발목을 내려친 건 그가 종업원의 피가 섞인 위스키를 마시면 돈을 주겠다는 말을 어겼기 때문이다. 리볼버로 상대를 손쉽게 제거하지 않고 약속에 닿을 때까지 손바닥에 피가 맺히도록 삼단 봉만 휘두르며 이 교환의 질서를 지켜내는 일, 액션과 리액션을 모두 살려두는 일, 그것은 하수영이 자신에게 부여한 임무이자, 이 영화의 마음가짐이다. 살해 행위는 여기 섣불리 들어서면 안된다. 죽음은 교환이 아닌 삭제이며, 그것은 결국 복수극의 열망일 것이다. <리볼버>는 리볼버를 내내 장착하면서도 복수극을 원하지 않는다. 리볼버는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으로 사람을 살해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거듭 상기하기 위해 이 세계에 존재한다. 정 마담의 차가 어둠 속 산길 한가운데, 휠체어를 탄 채 하수영을 기다리는 앤디와 맞닥뜨린 대목에서 하수영은 말한다. “확, 밀어버려!” 그 순간은 짓궂은 농담처럼 지나가고 하수영은 다시 삼단 봉을 들고 앤디 앞에 서지만, 그 말을 내뱉던 순간, 하수영의 얼굴에 일어난 묘한 생기, 거기 내비친 일탈의 욕망은 결국 실현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짜릿한 잔상을 남긴다. 하수영은 약속의 행로를 농락하는 어리석은 이들을 완전히 제거하는 대신, 그들의 활동성을 무력화하는 길을 택한다. 앤디, 신 형사, 조 사장, 그리고 건달들은 훼손된 신체로 널브러지거나 겨우 움직여 퇴장한다. 그들은 사악하기보다는 우스꽝스럽게 그려진다. 하수영이 하는 일은 정의롭지 않은 이들을 처벌하는 행동이 아니라 자신의 질서를 방해하는 이들의 소란함을 중지시키는 행위다. 죽음을 불러들이지 않으려는 영화의 선택과 관련해 일련의 대목들도 달리 물을 수 있을 것이다. 황정미의 죽음을 충분히 설명하지 않는 설정은 이처럼 비밀스러운 죽음이 하수영의 서사에서는 제대로 작동할 수 없음을 우회적으로 주장하는 방식이 아닐까. 임석용이 총탄에 맞아 쓰러지는 플래시백의 다소 난데없는 삽입과 과잉된 스타일은 이처럼 극적인 죽음의 분위기가 하수영의 여정에는 함부로 개입할 수 없음을 간접적으로 지시하는 방식이 아닐까. 하수영은 곁눈질하지 않고 자신의 질서를 밀고 나간다. 그 길에서 남자들은 결국 쓸모없는 장애물이지만, 정윤선만은 여러 면에서 의아하고 이질적이다. 표면적으로는 그 역시 다른 남자들처럼 자신의 욕망과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이 영화에서 여타의 인물들과 가장 번잡하게 얽힌 인간이다. 전남편의 빚, 하수영의 집문서, 그에게 받을 2천만원 등 정윤선이 이 사슬에서 도망치지 않는 이유는 제시되지만, 전남편과의 구체적인 사연은 설명되지 않고, 결말에 이르도록 그가 하수영에게 보상받는 장면은 등장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그는 실질적 이득 없이 사슬을 요란하게 흔드는 동시에 거기 기꺼이 속한다. 하수영이 화종사에서 황정미의 인감을 손에 쥔 후, 한밤 산길에서 앤디, 건달들, 신 형사, 조 사장을 대면하는 클라이맥스는 정윤선의 박쥐 같은 행동이 낳은 결과다. 그 클라이맥스는 하수영을 남자들과의 싸움으로 밀어넣어 위협하지만, 이들을 한꺼번에 해치우는 기회를 마련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이 클라이맥스에서 하수영은 앤디의 목숨을 쥐고 최후의 교환에 성큼 다가선다. 그러니 정윤선은 하수영의 질서를 추동하는 조력자인가, 흩뜨리는 배신자인가.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하수영이 신동호의 차에서 내려 그를 쳐다보는 모습은 신 형사를 만나러 술집에 들어서는 정윤선의 뒷모습으로 이어진다. 이 장면은 정 마담이 신 형사에게 약점을 잡혀 하수영의 정보를 제공한다는 사실을 일러준다. 정황상 신동호와 정윤선은 주종 관계지만, 흥미롭게도 정 마담의 천박한 태도는 신 형사의 허영을 교묘히 부각하며 그와 겨룬다. 결정적 국면은 장면 끝에 나온다. 신 형사가 하수영을 다루는 법에 대해 “열개를 말하면 아홉개는 진실”이어야 한다며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충고하자, 정 마담은 신 형사가 죽은 임석용의 말을 반복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더없이 한심해하는 표정으로 대꾸한다. “따라 하려면 제대로 해라.” 이 장면의 흐름은 여기서 끊긴다. 정 마담의 비아냥에 대한 신 형사의 반응 숏은 마치 의도적으로 삭제된 것처럼 부재한다. 정 마담의 조롱에 신 형사의 허세는 대응조차 하지 못할 만큼 약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영화는 이 장면의 우위를 정윤선에게 부여한다. 그러고 보면 정윤선의 말은 신 형사만이 아니라, 누아르 속 남성성을 어설프게 ‘흉내내는’ <리볼버>의 남자들을 겨냥한 논평으로 들리기도 한다. 누아르를 모방하는 남성성의 세계에서 하수영의 무기가 리볼버 대신 손에 쥔 삼단 봉이라면, 정윤선의 그것은 모호한 입장을 지속함으로써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않는 자의 눈이다. <리볼버>는 공격보다 방어의 힘을 믿는 세계다. 하수영은 삼단 봉을 먼저 들지 않고 리볼버를 무작정 겨누지 않는다. 목적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온몸으로 단계를 하나하나 밟아야 한다. 이 영화의 숏/리버스숏의 구조는 그 단계를 주시하고 보존하려는 과정이다. 하수영이 리볼버를 꺼리는 이유 중 하나는 그것이 방아쇠를 당기는 손짓 하나로 멀리서도 단번에 여러 명을 제압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클라이맥스에서 그가 숲에 들어간 건 도로 한복판의 불빛 아래에서는 야구 방망이를 휘두르는 건장한 건달 셋과 리볼버 없이 대결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숲속의 어둠에 숨어서야 그는 비로소 삼단 봉으로 남자들을 차례로 한명씩 기습할 수 있다. <무뢰한>에서 형사 정재곤(김남길)을 감싼 어둠은 그의 내면이나 그가 속한 세계의 상태를 형상화한 분위기다. 하지만 <리볼버>에서 내내 정면을 주시하던 하수영의 얼굴을 가리는 숲의 어둠은 스타일이 아니라 대결의 단계를 오롯이 받아들이려는 육체의 선택이다. 그 육체가 끝내 지켜낸 앤디의 휠체어를 밀고 혼신의 힘으로 언덕길을 오른다. 이제 거의 다 온 것이다. 아무것도 남겨지지 않은 허허벌판에서 하수영은 자신의 원칙을 고수하며 홀로 여기까지 왔다. 이 장면에서 하수영이 밀어올리는 무게는 그 자신의 자존감이기도 하다. 그레이스(전혜진)가 혼자 나타나 하수영에게 돈가방을 건넨다. 하수영은 그 휠체어를 끌고 가파른 길을 잘도 올라왔는데, 어쩐 일인지 그레이스는 평지에서도 휠체어를 이동시키지 못한다. 그레이스가 분노를 참으며 안간힘을 다해 휠체어를 밀어보려 애쓰는 동안, 하수영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 뒤에서 가방 속 돈을 센다. 마치 잠금장치를 걸어둔 듯, 한자리에서 멈춰버린 휠체어는 이후 그레이스와 앤디의 모자 관계가 밝혀지는 계기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화면 한 귀퉁이에서 지폐를 세는 하수영을 위한 것이다. 최종적인 교환은 정확히, 공정하게 이루어졌는가. 정당한 교환은 마침내 완수되었는가. 휠체어가 지연한 건 하수영이 그 사실을 확인하고 승인하기 위한 시간이다. 가방을 챙겨 떠나려던 하수영은 앤디와 그레이스에게 되돌아와 리볼버를 겨눈다. “나는 불행했던 당신 과거 이용하지 않을 거고, 오늘 있었던 일은 깨끗이 지울 거야.” 7억원이 담긴 가방이 아니라, 하수영의 다짐이 이 기나긴 여정에 마침표를 찍는다. 그는 약속의 주체가 되어 이 행로를 완료한다. 휠체어는 겨우 더디게 움직이기 시작하고, 하수영이 이들을 가볍게 스쳐 지나간다. 그는 더이상 뒤쫓지 않는다. 하수영의 얼굴이 아닌 그 움직임의 광경이 고요한 부감으로 담긴다. 이 순간 영화는, 하수영은, 운명처럼 짊어지던 숏/리버스숏의 질긴 굴레에서 벗어난다. 그리하여 하수영이 이른 곳은 어디인가. 비 내리는 부둣가, 소주와 꽁치구이를 파는 노점에 하수영이 앉는다. 여자 상인이 커다란 컵에 내어준 소주를 마신 후, 하수영은 가방에서 돈다발을 꺼내 여인 앞에 내려둔다. 지난 장면들에서 상대의 얼굴을 뚫어지게 주시하던 하수영의 눈은 어쩐 일인지 아래로 향해 있다. 느슨한 투숏 안에서 하수영의 얼굴을 처음으로 가만히 쳐다보던 여인은 5만원 한장만 집어든 다음, 소주 한잔을 더 따라준다. 이 대목을 마주하는 동안, 하수영의 마지막 장소가 그가 그리 갈구하던 아파트가 아닌, 허름한 노점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깨닫는다. 정당한 교환을 좇아 맹목적으로 내달리던 하수영의 길이 도착한 곳은 정직한 교환의 자리다. 과한 보상도 미진한 대가도 아닌, 정당함이나 정확함과도 다른, ‘정직한’ 교환의 존엄성. 말없이 상대를 응시한 후, 소주를 따르고 꽁치를 굽고 지폐 한장만을 빼가는 이 여인의 측면에 닿기 위해 하수영은 앞만 보고 견뎌온 것일까. 두 여자의 모습을 정윤선이 아주 멀리서 물끄러미 바라본다. 세 여자 사이의 더는 가까워질 수 없는 거리감, 그러나 아득하게 연결된 선이 이 순간의 평온을 예의를 갖춰 지속시킨다. 황정미의 행방을 묻던 하수영에게 무당은 “승냥이 같은 년”이라고 힐난했다. “승냥이”의 눈빛으로 해야만 했던 일들, 개척해야만 했던 행로에서 하수영의 얼굴은 마침내 해방되었나. <리볼버>의 끝에서 우리는 여전히 거처가 없는 얼굴,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얼굴을 본다. 의미와 고통과 분노와 사명, 그리고 지난 시간을 모두 내려놓은 얼굴, 피로와 고독만 남았으나, 결국 책임을 다해 자기 힘으로 살아남은 한 사람의 얼굴이 여기 있다.

[장윤미의 인서트 숏] 흔들리는 카메라

10년 전에는 주인공의 눈물을 찍는 것도 주저했다. 한 병역거부자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있을 때다. 그는 병역거부 선언을 하고 몇 개월간의 경찰 조사, 몇 차례의 재판까지 충실히 겪은 뒤 최종 선고일을 맞았다. 최후진술을 마친 그는 법정에서 나오자마자 갑자기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긴장이 풀리자 홀가분함, 슬픔, 그동안의 고생스러움과 앞으로의 고난 등이 떠오르면서 온갖 복잡한 감정이 밀려왔을 것이다. 어쩌면 영화의 클라이맥스가 될 순간이었다. 그러니 가까이 다가가서 찍어야 하는데, 그의 곁에 서 있어야 하는데, 하지만 나는 그와 거리를 두고 선 자리에서 발을 떼지 못했다. 안 찍을 수는 없어서 주저하다가 어정쩡하게 담고 말았다. 첫 작업이었고, 다큐멘터리 윤리 같은 건 생각해본 적이 없던 시절이었다. 상황을 겪고 나서야 자문해보기 시작했다. 나는 왜 그가 눈물을 흘릴 때 카메라 드는 걸 주저했던 걸까? 누군가의 아픔, 괴로움, 고통 같은 것을 찍을 때면 유독 카메라가 흔들린다. 촬영 대상의 아픔을 이용하는 것 같아서, 또 그렇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 그래서 그런 것 같다. 사실 내 마음을 정확히는 모르겠다. 반사적인 망설임이다. 기록한다는 명분이 있을 때도 개운치는 않다. 그러니까 그런 내 마음은 알겠는데, 가끔은 그만 주저하라고 스스로를 타박한다. 반드시 포착해야 할 상황에서도 카메라를 올렸다 내렸다, 물러났다 다가갔다 하다가 이도 저도 아닌 장면만이 남을 때면 더욱. 물론 그 주저하고 흔들리는 카메라마저 때로는 영화의 정서를 형성하는 전략이 된다는 것도 알고 있다. 이렇게 창작자의 욕망은 참 복잡하다. 그래서 다시 스스로를 의심한다. 카메라를 드는 일은 곧 방황의 시작이다. 작은 캠코더 하나 들고 찍을 때 신체가 확장되며 더없는 자유로움을 느낀다고 말한 적도 있지만, 실은 온전히 자유로운 상황은 극히 드물다. 새삼 그 사실을 더욱 깨닫는 요즘이다. 상대가 비인간동물이면 방황은 더 심해진다. 그러해야만 하고. 축산동물이라 규정된 존재들을 찍기 시작하면서 어떻게 촬영할지에 대한 고민이 많다. 관련한 고민은 몇 차례의 변화를 겪었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학대받는 동물의 이미지는 내게 한편으로는 화나고 슬프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불편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알려야 한다는 목적만을 앞세워 정작 그 동물에 대한 존중은 간과하는 것 같았다. 고통만 부각되고 당사자는 사라지는 일종의 대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대상화하지 않은 동물 이미지를 찾기가 더 어렵다마는.) 그러다 동물운동을 접하면서 생각이 좀 변했다. 작은 실천이라도 해보고자 활동을 시작했는데 고통의 이미지가 어쩌고 했던 한때의 내 고민이 한가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감금당하는 동물의 삶이 얼마나 비참한지 몰라서, 그들이 죽고 싶지 않아 하는 걸 못 봐서, 이 문제에 덜 절실해서 내가 그런 우아한 고민이나 했던 것이다, 하고. 잔인한 장면이 많대서 계속 피했던 다큐멘터리 <도미니언>도 결국 보았다. 그리고 한동안 영화 장면들에 시달렸다. 나는 주로 개농장을 찾아다니는 활동을 했다. 좁은 뜬장에 갇혀 사는 개들을 직접 보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왜 어떤 동물은 이렇게 살아도 된다고 여길까? 어느 순간부터 나는 현장에서 좀더 비참해 보이는 장면을 찾고 있었다. 인간의 감정에 즉각적으로 호소하고 싶었다. 그래서 개들의 가여운 모습을 부각했다. 어쨌든 조작하는 것은 아니니까, 괜찮았다. 그러다 언젠가부터 나는 또 흔들리기 시작했다. 동물의 비참함을 알려야 한다는 절박함에 빠져 있다가도 거기서 조금 빠져나와 이미지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이 늘어난 것이다. 영화를 만들겠다고 결심한 이후부터다. 저널리즘의 영역과는 달리 그저 동물의 현실을 담는 것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무엇. 영화적인 것이라 할 무엇. ‘어떻게 동물을 좀 다르게 찍을 수 있을까?’ 동물의 고통 앞에서 이런 고민이 욕심 같지만 해야만 했다. 여전히 동물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인간의 잔혹성을 자각할 만한 이미지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설령 동물의 몸이 훼손된 장면일지라도. 그런 이미지가 아니었다면 내가 동물운동에 붙들리지도 않았을 것이고.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다. 마음이 힘들어지는 고통의 이미지는 다들 피하고 싶어 한다. 그러면서도 축산동물의 현실은 알 만큼 안다고 여긴다. 어떻게 환기해줄 수 있을까. 그걸 위해 영화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우리 영화에 등장하는 동물운동가 김영환은 이런 말을 해주었다. “고통스러우냐 아니냐는 식으로만 보여주면 거기에 무뎌지기 쉬워요. 직접 겪는 것이 아니라서요. 당사자가 겪는 고통은 그 종류에 따라 점점 더 민감도가 커지기도 하지요. 그렇다면 (보는 사람이) 안 무뎌진다는 건 뭐냐, 일단 머릿속에 계속 담고 있어야 된다는 거잖아요. 계속 이 존재를 생각하면서 떠올려야 되잖아요. 계속 재생될 그 무엇. 끊임없이 리마인드시키게 되는, 그러다 나로 하여금 비로소 사유하게 만드는 것 있잖아요. 수동적으로 텔레비전 보면서 ‘잘 봤다, 끝’ 이게 아니고 내가 발견하지 못한 무엇이 있다, 끝끝내 다 포착하지 못할, 즉 개체성이 있다고 느끼게 하는 것 있잖아요.” 이미지 속 대상에 대해 ‘잘 알겠다’가 아닌 ‘다 알 수 없다’고 느끼는 영역을 만들어내는 것. 어쩌면 이게 존중의 시작일지도 모르겠다.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동물운동을 접하기 전 피상적인 고민을 할 때와는 분명 달라졌다. 닭이 처한 처절한 현실을 드러내면서도, 그 이미지 속 닭이 소외되지는 않는 분명 더 나은 촬영과 재현의 방식이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걸 고민하는 게 우리의 일일 테다. 아직 현실은 영화나 드라마 촬영 현장에서 비인간동물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 걸 의무화하는 걸로도 벅차다. <도미니언>처럼 축산업 현장을 고발하는 다큐멘터리도 여전히 부족하다. 그래도 언젠가는 비인간동물에게도 인간을 촬영할 때 발생하는 온갖 복잡한 윤리적인 고민을 보편적으로 적용하는 날이 올 거라고 믿으며, 거기에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