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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페촐트의 시네마일까. 우리의 인생일까, <미러 넘버 3>

크리스티안 페촐트의 ‘원소 3부작’을 완성하는 마지막 작품. 베를린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라우라(파울라 베어)는 남자 친구와 함께 내키지 않는 여정에 오른다. 그녀는 길 한가운데에 서 있던 이방인 베티(바르바라 아우어)와 시선을 주고받는다. 이윽고 불의의 사고로 남자 친구는 현장에서 즉사하고, 라우라는 베티의 손길에 의식을 되찾는다. 라우라가 베티와 함께 머물기를 간청하면서, 그리고 베티는 마치 그녀를 오랜 시간 기다리기라도 한 듯 라우라를 집 안으로 들이면서 둘은 기묘한 돌봄의 관계를 맺는다. 그녀는 베티의 보살핌 속에 먹고, 입고, 자전거를 타고, 피아노를 연주하는 새로운 삶에 정착하려 한다. 그러나 그곳의 가구들은 어딘가 늘 고장 나며, 베티의 남편과 아들이 라우라를 대하는 태도는 이 임시적 모녀 관계에 숨겨진 다른 의도가 있음을 넌지시 드러낸다. <미러 넘버 3>는 사고에서 깨어난 라우라를 지극정성으로 돌보는 표층의 서사와 베티 가족이 비밀스레 공유하는 상실의 기억이 촉발한 불안의 기류가 팽팽하게 공존하는 영화다. 죽음이 남긴 공백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낯선 이들이 인력과 척력을 오가며 빚어내는 미묘한 긴장감은 미니멀한 서사에 무한의 깊이감을 더한다. 전작 <운디네>와 <어파이어>에서 물과 불의 형상을 각각 설화적, 우화적으로 치환하여 자연의 섭리를 되짚어보려 했던 페촐트는, 모리스 라벨의 음악을 제목 삼아 바람과 공기를 두 여인의 인생 속으로 불어넣는 실험을 감행했다. 신체의 재활과 기억의 재림 사이에서 발생하는 불협화음 위로 피아노의 선율이 청아하게 울려 퍼진다. 미지의 순간에서 오랜 시간 염원해온 사건으로의 도약. 이것은 페촐트의 시네마일까, 우리의 인생일까.

[특집] 한류를 이어가기 위해 AI 인력을 키워야, 김홍천 KAFA 영화인교육팀장, 양정화 프로듀서

지금 전세계에서 분야를 막론하고 AI(Artificial Intelligence)만큼 자주 언급되면서도 정확히 알기 어려운 화제가 있을까. 자고 일어나면 저만큼 훌쩍 앞서가는 까닭에 AI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 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것과 영화가 부딪치는 지점에 대해서는 찬찬히 살펴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9월20일 부산에서 열리는 ‘2025 KAFA AI Film Showcase’는 그런 시도에서 마련됐다. 이곳은 AI 영화 교육을 책임지는 이와 현장에서 AI 콘텐츠를 만드는 이까지 모두 모여 AI 영화를 향한 고민, 성공과 실패의 흔적, 그럼에도 감각되는 거센 흐름에 관해 고백하는 공간이다. 이번 쇼케이스를 책임진 김홍천 영화진흥위원회 한국영화아카데미 영화인교육팀장, 그리고 양정화 크리에이티브망고 프로듀서 및 공동설립자를 만나 AI 영화에 대해 들었다. - 올해 KAFA 첨단영화제작교육과정에서 AI 영화 제작을 결심한 계기는 무엇인가. 김홍천 ‘교육’과 ‘제작’이 결합한 모델이 바로 KAFA의 전통이다. 이런 전통을 살리면서도, 최근의 화두는 AI이니까 AI를 활용해서 영화를 만들어보자고 생각했다. 제작 교육 과정에서 어떻게 차별점을 둘지 고심하다가 잘하는 곳과 함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MBC C&I가 제작한 <아트인더월드>와 <마테오>의 이진호, 양익준 감독이 교육생 선발 및 멘토링에도 참여해주었다. 하지만 AI 영화 교육 및 제작에 배정된 예산이 1억원밖에 안된다는 점은 어려움으로 남았다. - 교육 과정에서 인상적인 부분이 있었나. 양정화 비록 AI 관련 수업이지만 여전히 시나리오에 포커스를 두고 교육하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AI 기술은 빠르게 변한다.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도 어제 안되던 것이 오늘은 갑자기 되기도 하고 룩(look)이 바뀌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번 교육 과정을 지켜보면서 ‘영화의 본질은 역시 시나리오’라는 생각을 했다. 김홍천 기술은 배우면 따라갈 수 있지만 이야기가 없거나 별로면 좋은 콘텐츠가 나오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의 트리트먼트 정도는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교육생을 선발했다. - 그렇게 완성된 작품들에서 엿보이는 경향성이 있다면. 김홍천 처음 교육을 진행할 때 AI만으로 작업을 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많은 교육생들이 실사 촬영도 하고 있었다. AI에서의 일관성 문제나 연기 중 세밀한 표현 등을 구현하기 위해 여전히 실사 촬영도 필요했다. 이렇듯 인간과 AI의 작업을 섞은 하이브리드 작업 방식이 많았다는 점이 의외의 지점이었다. - 첨단영화제작교육과정을 통해 느낀 AI의 의미는 무엇인가. 김홍천 1984년에 KAFA가 생긴 이래 아카데미의 장점은 봉준호 감독 같은 비전공자가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AI 영화 역시 영화제작 경험이나 현장 경험이 없어도 영화를 만들 기회를 준다. 또 청소년이나 시니어도 쉽게 접근할 수 있고, 투자를 받기 힘든 연출가도 영화를 만들 수 있다. AI는 개인의 삶에서도 영화 찍기를 둘러싼 비용을 줄여준다. 전통적인 방식의 영화 촬영에서 개인은 적성이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닫다. 반면 AI는 쉽게 시도할 수 있어서 자신의 방향성을 일찍 설정할 수 있다. 이제 AI는 영화를 만들기 위한 일종의 테스트베드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양정화 AI는 촬영 윤리의 측면에서도 확실한 이점이 있다. 예를 들어 동물 신을 촬영할 때 동물 학대가 이뤄질 위험이 없다. 또 섹슈얼한 장면, 환경 침해적 요소가 있는 장면을 촬영할 때도 윤리적 문제가 터져나올 가능성이 적다. - 이번 KAFA AI Film Showcase에서 특히 주목할 부분은 무엇인가. 김홍천 보통의 영화제작 과정에서 제작사는 영화 만드는 노하우를 홀로 간직한다. 하지만 우리는 교육 사업을 통해 하나의 랩을 구성하여 교육의 결과를 공동의 자산으로 축적하고 공유했다. 그 내용을 이번 쇼케이스 중 ‘컨퍼런스’ 코너에서 나누려고 한다. 그것이 가장 큰 의의다. 프리프로덕션은 어떻게 진행되는지, 의상은 어떻게 구현했는지, 그런 세부적인 부분까지 논의하려 한다. 또한 이번 첨단영화제작교육과정에서 시나리오를 AI로 구현하는 과정에 우리만의 강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점들도 콘퍼런스에서 나누면 좋을 것이다. - 최근 AI에 대한 영화인들의 인식은 어떤가. 양정화 무조건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AI는 창작자 입장에서 장점이 극대화되기도 하고, 제작비에 대한 이점 역시 있으니까 이제 다들 배우려고들 한다. 김홍천 PD들이 특히 관심이 많은 것 같다. 연출부터 제작까지 거시적으로 전 과정을 파악해야 하는 PD들한테 특히 선호될 수도 있을 것 같다. - AI 영화제작 과정 중에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양정화 먼저 적절한 프롬프트를 넣어 이미지를 일관성 있게 쭉 가져가는 것이 중요하다. 아직은 기술적인 한계가 있기 때문에 실사영화와 다른 부분이 있다. 시나리오를 써도 기술상 구현이 안되는 부분이 있다. 그 부분을 빠르게 파악해서 방법을 고민하는 것, 적합한 방식을 찾아서 작업하는 것이 관건이다. 최근에는 이 부분을 해결하기 위해 AI와 실사를 결합하는 경향도 있다. 여러 방법을 통틀어 적당한 제작 방식을 판단하는 것이 중요하다. - AI를 활용해도 처음 생각과 다른 결과물이 종종 나오나보다. 양정화 그렇다. 자기 마음대로 안된다. 프롬프트를 알고 자기만의 노하우가 있어도 컨트롤이 안되는 부분이 있으니까. 물론 실사영화라고 처음 생각과 100% 일치하는 건 아닐 것이다. AI의 경우에도 제작 과정을 완벽히 컨트롤하지 못하는 가운데 연출자가 처음 생각했던 것과 다른 결의 이미지나 영상이 만들어질 수 있다. - AI 영화제작에도 우연이 개입한다는 점이 흥미롭다. 양정화 AI는 대화형 미디어인 것 같다. 그래서 영화를 만들며 자기가 원하는 것과 실제로 구현된 것 사이에서 타협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이것이 AI 영화의 특징이나 아이덴티티가 아닐까. AI를 단순한 도구로 볼 수도 있지만 일을 맡기는 위임 관계로도 볼 수 있다. 창작자와 대화하며 협업하는 구조가 AI 영화만의 특징이 아닐까 싶다. - AI 영화의 미래를 어떻게 보나. 김홍천 앞으로는 VFX 아티스트처럼 AI 아티스트가 영화, 드라마 등 어디에나 있을 것 같다. 반면 실사영화는 AI 영화에서 느끼는 불편함이 없기 때문에 당분간은 하이브리드 형태로 갈 것 같다. AI 영화는 한류의 측면에서도 중요하다. 지금 한국영화가 한류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미래를 생각할 때 지속적으로 한류를 이어가기 위해선 AI 인력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양정화 자라나는 세대는 이것을 레거시미디어로 바라보는 데까지 나아갈 것 같다. - AI 영화에 남겨진 과제는 무엇일까. 김홍천 프랑스에 AI 영화제를 운영하는 제작사가 있는데, 시간이나 비용을 절감하는 것이 아니라 AI만이 할 수 있는 미학적 표현을 찾는 데 주안점을 둔다고 들었다. 경제적인 요소를 떠나 AI만이 구현할 수 있는 미학적인 부분분이 발굴된다면 장르로서 AI 영화가 자리 잡을 수 있을 것 같다. 양정화 가령 홍상수 감독님의 영화를 AI로 만들기는 어렵다. 지금까지는 아무래도 SF나 비주얼이 압도하는 장르일 때 AI 작품의 러닝타임을 견디기 수월했다. 반면 미스터리나 스릴러 장르는 인물의 표정과 호흡에 집중한 채 관객이 견뎌야 하는 순간이 있다. 이런 일상성의 영역을 어떻게 잘 구현하느냐가 앞으로 AI의 과제일 것 같다. 여전히 AI의 질감 자체를 불편하게 생각하는 관객도 있는데, 이것은 시간이 필요한 부분이라고 본다. 2025 KAFA AI Film Showcase, 9월20일부터 21일까지 열려 한국영화계의 주요 기관과 영화인이 모여 AI 영화의 오늘을 조망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와 MBC C&I가 손잡고 ‘2025 KAFA AI Film Showcase’를 개최한다. 쇼케이스는 9월20일부터 21일까지 부산 해운대구의 영진위 2층 표준시사실 및 KOFIC CAFE에서 열린다. 한국영화아카데미(KAFA), 크리에이티브망고, 로카(LOCA)가 주관하고 문화체육관광부가 후원한다. 최근 영화계의 AI 바람을 눈여겨보던 영진위는 지난 4월 MBC C&I와 ‘AI 기반 영화·영상 인재양성 및 제작 활성화 협약(MOU)’을 맺었다. 제1회 대한민국 AI 국제영화제 대상작인 <마테오>의 제작지원을 담당한 경험이 있다는 점이 영향을 미쳤다. 이번 쇼케이스는 협약의 연장선에서 기획했다. 행사는 올해 KAFA에서 진행된 첨단영화제작교육과정의 성과를 나누는 자리이기도 하다. 이 교육은 그간 3D, VR, XR 등 시대에 따라 각광받는 기술을 다뤄왔는데, 올해는 AI에 초점을 맞췄다. 13명의 교육생이 총 5편의 작품을 완성했다. 그중 <시구문>은 올해 서울 국제 AI 필름 페스타에서 ‘필름 콘텐츠’ 부문 대상을 받으며 화제가 됐다. 그외 <낙하의 조각> <벌레> <안개주의보> <아틀란티스의 꿈> 등이 ‘AI 콘텐츠 스크리닝’ 코너를 통해 관객과 만난다. SF, 판타지가 주를 이룰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사극, 호러, 드라마 등 다양한 장르를 포괄한다. 또 <조선의 앨리스> 등 MBC C&I AI 콘텐츠랩을 통해 제작된 10편 이상을 묶은 쇼릴도 상영된다. 두번에 걸쳐 이뤄지는 콘퍼런스에서는 AI 영화를 만든 영화인들이 경험과 고충을 나눈다.

[김사월의 외로워 말아요 눈물을 닦아요] 평범한 것들을 품에 안고

일본의 정리 전문가 곤도 마리에가 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 넷플릭스 프로그램에서 그녀는 물건을 가슴팍에 기대듯 안아보며 자신의 기분을 감지하곤 합니다. 아직도 두근거리듯이 좋아하는 마음이 들면 물건을 계속 간직하고, 좋아했지만 미련 때문에 가지고 있는 거라면 과감히 버리며 빈 공간을 만들자는 겁니다. 제가 아직도 두근거리는 물건은 아끼는 향수와 사연이 있는 운동화, 몇장의 시디 정도일 것 같습니다. 뭐랄까, 혈기 왕성하던 시절보다는 두근거리는 마음이 쉽게 들진 않아서 물건 정리와 버리기에 수월해지는 지점이 있긴 합니다. 그러니까 전반적으로 정열이 몸에서 빠져나가고 있는 겁니다. 욕구가 적어지고 포기가 빨라졌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는 저더러 식물 같아졌다고 놀렸습니다. 예전엔 욕망에 들끓더니 지금은 너무 차분하다고요. 맞는 말 같기도 했습니다. 발끈하는 시늉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솔직히 그럴 기운조차 없었습니다. 그냥 바람 빠진 사람처럼 멍청하게 웃고 말았습니다. 어딘가 가지 않으면, 뭔가를 사지 않으면, 그걸 먹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이 몸이 근질근질하던 시절이 저에게도 있었습니다. 요즘은 약속이 취소라도 되는 날이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네요. 품에 안아봐도 설레지 않는 게 제 인생이라면, 이거 참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이런 저에게도 설레던 물건에 대해 기억이 하나 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전생 같지만 2017년 즈음에 저는 유럽에서 작은 공연들을 다니며 해외 진출의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스페인에서 두번 공연했는데, 그때마다 와준 관객이 있었습니다. 그는 제게 초콜릿과 손편지를 건넸습니다. 편지를 펼쳐보니 작은 영어 글씨가 빡빡하게 눌러 쓰여 있어서 종이가 울퉁불퉁했습니다. 저는 마음이 부풀어 올라 어쩐지 그걸 읽다 말고 선물이 든 꾸러미에 편지를 넣어두었습니다. 집에 도착해서 샤워하고 나서 편안한 상태에서 내용을 음미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지요. 길었던 일정을 마치고 집 근처 지하철역에 도착했을 때였습니다. 그제야 전철 선반에 편지가 든 꾸러미를 두고 내렸다는 걸 알았습니다. 전철 문은 이미 닫히고 있었습니다. 깜짝 놀라서 분실물 신고를 하고 여기저기 방법을 수소문했지만, 슬프게도 그 꾸러미는 지금까지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날 반나절을 흐느끼며 침대 속에 파묻혀 그걸 가져간 사람의 앞으로의 인생을 심하게 저주했습니다. 편지를 준 사람의 모습도 해외 공연의 경험도 흐릿해졌지만 읽지 못하고 사라진 편지에 대한 안타까움은 아직까지 가슴속에 선명히 남아 있습니다. 어쩌면 그때 받은 편지를 제가 읽어버렸다면 이토록 강렬하게 기억에 남아 있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이제 와서 하는 이야기지만요. 얼마 전에 친구와 사소한 일로 말다툼을 했습니다. 화해했지만 찜찜함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하필 가는 방향이 같아 우리는 말없이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알아차렸습니다. 저의 백팩 어깨끈에 걸어두었던 손수건이 사라졌다는 걸요. 상당히 먼 거리를 걸어왔기에 어디서 떨어졌을지 모를 일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분명 피곤해하고 있을 이 친구를 두고 길을 되돌아가야 할 것을 생각하면 ‘그냥 포기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습관적인 체념이 올라왔습니다. 이 손수건은 약 4년 전에 서울환경연합에서 후원자에게 리워드로 주었던, 쉽게 말해 운동권 판촉물 같은 것이었습니다. 네 모서리에 파스텔 색깔의 실로 수가 놓여 있는 하얀색 손수건입니다. 주신 분께는 죄송하지만 솔직하게는 대단히 예쁘다기보다는 수수한 모양새가 귀엽다, 정도로 생김새를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만듦새와 사용감이 저에게는 딱 알맞아서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오래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열차 화장실에서 빨래해도 행선지에 도착하면 다 말라 있을 정도로 얇은 이것은 저의 가방 앞주머니에 항상 꽂혀 있었습니다. 생각해보니 제가 연말 공연 MD로 손수건을 제작한 적이 있었는데 이런 일상에서 영감을 받은 것도 같습니다. 아무튼, 손수건을 들고 다니면 공중화장실에서 손을 씻을 때 종이 타월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나름의 뿌듯함을 느낄 수 있고, 야외에서 (저를 포함한) 누군가가 실수로 뭔가를 쏟았을 때 가방에서 슥 꺼내서 멋지게 상황을 정리할 수도 있습니다. 어디 기댈 곳이 없어서 길거리에서 눈물이 줄줄 날 때면 세상의 모서리에 숨어서 코를 풀며 울고는 손수건을 구겼습니다. 되돌아보면 이 손수건은 제가 살아 있다는 이유로 흘리고 있는 것들을 군말 없이 받아내고 있었습니다. 이런 이야기까지 친구에게 전할 순 없었지만, 뜻밖에도 그 애는 왔던 길을 되돌아가며 같이 손수건을 찾아보자고 했습니다. 무언가를 잃었는데도 신기하게 기운이 나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길바닥에 손수건처럼 보이는 것들에 설레어 다가갔다가 실망하는 일을 반복했습니다. 몇번의 횡단보도를 건너면서도 보도블록 위는 유난히 깨끗한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어느새 다퉜던 감정은 잊고 원래 왔던 길의 반 이상을 되돌아와 있었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축 늘어진 동물처럼 도로변에 떨어진 하얀 그것을 발견했을 때, 저는 뛰어가 손수건을 잡고 품으로 가져가 꽉 껴안았습니다. 오랫동안 평범하게 제 옆에 있어준 그것들엔 저는 맡을 수 없는, 저의 냄새 같은 것이 은은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김신록의 정화의 순간들] 흐물거리고 흘러넘치는 거대한 요괴의 몸뚱이

90살 넘은 어떤 할머니께서 접시에 담긴 홍시를 스푼으로 떠서 맛있게 드시며 ‘이런 귀한 건 없어서 못 먹어’ 하는 영상이 릴스에 떴다. 영상을 찍고 있는 딸이 지난해 가을 냉동실에 얼려두었던 홍시를 올여름 날 더울 때 하나씩 꺼내드린 것인데, 홍시도, 할머니의 입 모양도, 얼굴도, 기분도, 영상을 찍는 딸의 목소리도, 영상을 보는 내 눈도 마음도 다 같이 흐물흐물 녹아내린다. 바쁠수록 돌아가라는 말을 받들어… 1인극이라는 바쁘고 중요한 일을 앞두고 릴스며 쇼츠를 평소보다 더 많이 본다. 주여. 릴스를 보더라도 연습실 바닥에 앉아 다리라도 찢으면서 보겠습니다.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아멘. 그러다가 눈이 침침해지고 마음이 울적해지면, 급히 공연장으로 간다. 무대 위에 선 퍼포머의 몸을 보면서 ‘보디 더블링’이라도 하려는 것이다. 마침 연습실이 대학로여서 한성대입구역 근처에서 공연한 황수현 안무가의 <싱크 디 싱크>(sync de sync)를 보러 갔다. 두 무용수가 ‘갑자기, 튀어나오는, 무더기들이, 끌어당겨, 거부할 수, 없는, 형체들이, 산발적으로, 솟구치는, 덩어리들이, 미친 듯이, 떼로, 몰려드는, 기운들이, 갑자기…’라는 분절적인 말들을 마치 찬트처럼, 혹은 주문처럼 리드미컬하게 반복하며 서로를 향해 다가간다. 두 몸의 거리가 점점 좁혀지더니 결국 정면으로 맞닿고 두 입술이 부딪힌다. 두 입술은 말을 멈추지 않고 서로 밀착한 채 맞닿은 서로의 입안으로 계속 말을 던져넣는다. 와중에 두 몸은 여전히 서로를 향해 거리를 좁히려던 욕망을 계속 유지하고 있어서 두 몸과 입술은 서로 덩어리져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다. 서로 막힌 두 입술 사이에서 말은 더이상 말의 꼴을 갖추지 못하고 읍읍 소리가 됐다가 이내 쯥쯥 쪽쪽 삑삑 소리로 전환된다. 두 무용수는 말하기 근육에서 입술 흡착하기 근육 혹은 소리내기 근육으로 움직임과 감각의 집중을 집요하게 옮겨간다. 단어는 소리로 숨으로 움직임으로 전환되고 말하기는 키스하기로 이행된 듯 보이지만, 말도 키스도 사회적인 의미 이전의 움직임의 감각과 힘을 여전히 잃지 않고 있으므로 의미나 스토리, 감정으로 완전히 이행되거나 포섭되지 않는다. 그 장면은 어떤 면에서는 키스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여전히 입술 빨아당기기라는 움직임이거나 쯥쪽삑 소리내기인 것이다. 감각의 전환 혹은 행위의 이행은 매끄럽고 유려하기보다는 오히려 부르트고 찢어지는 방식으로 일어난다. 서로 막힌 상대의 입안으로 말을 던져넣다가 정말로 정말로 더이상 조음이 안되고 숨이 막히는 순간에야 움직거리는 입술과 혀와 목구멍으로 집중이 옮겨간다. 그리고 그 움직거림을 끝까지 밀어붙이다가 삑삑거리고 쯥쯥거리는 소리가 나오면 그제야 그 소리를 수용하고 그것으로 집중을 옮겨간다. 다음이 이전을 찢고 들이닥치는 형국이다. 사실 이미 연습을 통해 다음이 올 것을 알고 있음에도 두 무용수는 끝까지 버티다 버티다 다음이 진짜로 틈입하고 나서야 지금 막 침범한 낯선 감각을 수용하고 실시간의 탐색에 나선다. 스코어는 이미 예비한 것임에도 그 수행은 예비되지 않은 방식으로 일어나기를 집요하게 추구하는 것, 그 일이 진짜로 닥치고 나서야 다음으로 옮겨가는 버티기의 힘이랄까? 예비했으나 예비되지 않은, 그럼으로써 살아 있는 가능성의 순간을 계속해서 열어젖히려는 시도는, 수행을 기반으로 한 예술가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붙잡으려는 핵심이 아닐까. 물론 자기만의 방법론은 모두 다르겠지만. 이 버티기에 비견할 만한 나의 방법론은 뭘까 떠올려보니 어느 철학 논문에서 읽은 ‘의지는 욕망의 경합’이라는 문구가 떠오른다. 욕망은 사람만 갖는 것이 아니고 사물도 사상도 근육도 소리도 공기도 기억도 생각도, 즉 존재하거나 일어나는 유무형의 모든 것은 스스로의 행위를 지속하려는, 혹은 자신의 특성을 발현하려는 욕망을 갖는다. 이런 의미라면 욕망을 ‘힘’으로 대체해 이해해도 무방할 것 같다. 예를 들면 지금 노트북 옆에는 토마토바질에이드가 담긴 투명 유리잔이 놓여 있다. 컵 안의 얼음은 녹아내리려는 욕망을, 나는 계속해서 키보드를 두드리려는 욕망을, 노트북 스크린에 타이핑되고 있는 활자들과 나의 생각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단어와 문장을 이어가려는 욕망을 경합하고 있다. 얼음이 너무 녹으면 에이드가 너무 희석될 테니 시간에 대한 감각 혹은 관념이 개입하고 밍밍한 에이드가 얼마나 맛이 없는지를 아는 나의 기억이 개입해 글쓰기를 잠깐 멈추고 컵을 들어 올리게 만든다. 하지만 나의 눈동자와 뇌는 여전히 타이핑되고 있던 노트북 화면에 고정되어 있고, 다음 문장으로 생각을 이어간다. 여기에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음악과 주변 다른 손님들의 대화 소리는 공기를 진동시켜 내 고막을 울리려는 욕망, 즉 힘을 갖고 있고, 나의 뇌는 비교적 균일한 에너지와 주파수로 반복되는 이 소리를 백색소음으로 인식하려고 힘을 쓴다. 덕분에 나는 집중력이 높아지고 이 단어를 적어넣고 싶다. 땡큐. 방금 내가 앉은 바 테이블 통창 너머로 택시가 불법 유턴을 한다. 저 택시의 혹은 택시 기사의 불법 유턴 욕망은, 전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이 글쓰기를 뚫고 한 문장을 차지하고야 만다. 욕망은 실시간으로 서로 부딪히고 밀어붙이면서 예상치 못한 길을 내며 서로를 엎치고 밀치며 나아간다. 그러므로 이 순간에 관여하고 있는, 될 수 있으면 많은 행위자의 욕망을 서로 경합시키는 것이 연기의 역동과 밀도와 돌발성을 만들어낸다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그럴 때 행위자들은 울퉁불퉁하게 서로 머리를 들이밀며 거대한 몸집으로 연결된다고 믿는다. 연결은 1:1로, 직선적으로, 안정적이고 논리적으로 일어나는 대신, 어떤 식의 동시다발적인 침범을 통해 서로를 먹어치우고 배설하고 죽이고 낳으며 부패하고 스미며 일어나는 것 같다. 마치 전장에서의 전투처럼. 과거 교회였던 곳을 공연장으로 개조한 TINC(This is Not A Church)는 관습적인 극장과는 달리 한쪽 벽면 전체에 걸쳐 있던 가슴 높이의 창문들을 그대로 살려놓은 것이 특징적이다. 저녁 7시에 시작된 공연은 일몰과 함께 어스름을 거쳐 어둠 속에서 끝이 났다. 무용수의 움직임과 소리와 말은 각자의 밀도로 존재하면서도 ‘개와 늑대의 시간’처럼, 서로를 침범하고 서로로 이행되고 유동한다. 이전에는 목사님이 서 계셨을 단상과 그 단상으로 오르는 계단을 객석 삼아 줄줄이 앉아 있던 관객들과 맞은편에 접이식 의자를 깔고 앉은(이전이었다면 신도들이 단상을 바라보고 앉아 있었을 자리에 앉은) 관객들이 가운데 두 무용수 너머로 서로를 바라본다. 공연 시작 전 서로를 훑어보고 지인에게 손 흔들던 사람들이 어스름을 거쳐 어둠이 찾아들 때쯤에는 피아를 구분할 수 없이 덩어리진 채 언덕처럼 산처럼 웅크리고 있다. 객석도 무대도 윤곽이 흐려진 채 뒤섞여 건물 전체가 하나의 흐물거리고 흘러내리는 거대한 몸뚱이처럼 느껴진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에 나왔을 법한, 계속해서 주변을 집어삼켜 몸집이 커지고 모양이 변하면서 흘러내리며 이동하는 요괴의 몸뚱이처럼. 공연예술이든 영화예술이든, 한 공간에 일정 시간 동안 다른 사람과 함께 갇혀서 무엇인가를 체험하는 경험은 궁극적으로 이런 감각을 위한 것이 아닐까. 서로의 외피와 경계가 허물어지고 너와 나 사이, 사람과 사물 사이, 의미와 형식 사이, 안과 밖 사이의 경계가 흐물흐물해져서 결국 서로 이상한 뒤섞임을 경험하게 되는 그런 순간. 그런 순간을 나누고 싶어서 OTT가 활성화되고 모두가 바쁜 현대사회에서도 우리는 미리 티켓을 사서 시간에 맞춰 한자리에 모여 나가라고 할 때까지 버티고 앉아 있는 게 아닐까. 때로는 내가 왜 집에 안 있고 여기까지 와서 고작 이런 걸 보고 있나 싶다가도 운 좋으면 정말 내가 허물어지고 흐물거려져서 내 옆 사람 손을 다시 잡게 되는 그런 시간을, 내가 방금 본 이 아름다운 순간을 나 말고 또 어떤 사람들이 봤나 싶어 극장 안을 슥 둘러보게 되는 그런 순간을 만나기도 한다. 어쩌면 축제나 박람회도 마찬가지 아닐까. 정해진 기간에 특정 공간이나 지역에 사람들이 한꺼번에 모여 열기와 체취를 나누며 커다란 덩어리로 일렁이고 흘러내린다. 올해 서울국제도서전은 말 그대로 발 디딜 틈이 없었고, 얼마 전 열린 군산북페어 2025도 성공적이었던 모양이다. 프리즈 서울에 들뜬 사람들이 삼성동으로 한남동으로 을지로로 삼청동으로 무리지어 흘러다닌다. 9월에는 다른 해보다 조금 빨리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도 열린다. 9월17일~26일, 부산국제영화제를 보러 국내외의 많은 영화인들, 언론인들, 관객들이 부산으로 모여들겠지. 나도 <프로젝트 Y>에 참여한 덕에 영화제에 초청받았다. 같은 날 서울에서 열리는 <문학주간2025 도움-닿기: 김명순의 첫 번째 100주년> 행사에서 시 낭독을 하기로 미리 약조한 바람에 개막식에는 참석을 못하지만 다음날 열리는 커비컬렉션 및 기타 행사 참석차 얼싸절싸 부산으로 향하게 됐다. 해운대와 남포동 일대에 모인 사람들이 극장 안팎에서, 영화 안팎에서 서로 흐물흐물 뒤섞이며 거대한 요괴의 몸뚱이로 걸어다니겠지. 걸어다니는 곳마다 더 많은 주변을 삼키고 몸집은 더 커지고 더 흐물흐물해지고 더 흘러내리고 결국엔 흘러넘쳐서 서울 극장에도 더 많은 관객들이 찾아들겠지. 위 몇 단락을 쓰는 동안 시간은 2주 넘게 흘러 나는 무사히 <프리마 파시> 첫 공연을 올렸다. 공연을 준비하면서 나는 말이 아니라 몸으로 격파해내야만 만날 수 있는 세계까지 가보고 싶었다. 그럴 때라야 무대와 객석이, 텍스트와 현실이, 너와 내가 서로를 찢고 침범해서 극장 전체가, 공연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연결의 전장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앞으로 20여회의 공연이 남았고 나는 정말로 그런 세계를 만나고 싶다. 우리가 흐물흐물 뒤엉키고 뒤섞이는, 이야기 너머로 극장 너머로 나 너머로 녹아내리고 흘러넘치는 그런 세계를. 9월 한달, 여기저기서 이렇게 저렇게 당신들과 뒤섞일 생각에 벅차고 설렌다. <씨네21> 독자 여러분, 우리 어디선가 곧 만나요!

BIFF #8호 [인터뷰] 자매 서사의 문이 열린다 , <두 번째 아이> 유은정 감독

유은정 감독의 두 번째 장편이 세상에 나오기까지는 몇 번의 중요한 전환점이 있었다. 먼저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2017)와 <윤희에게>(2019)를 만든 박두희 프로듀서와의 만남. 2019년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인연을 맺은 두 사람은 “<판의 미로>(2006)처럼 아이들이 주인공인 서정적인 판타지”를 만들자고 의기투합했다. 이후 배우 임수정이 “다른 세계, 다른 차원에 대한 이야기”라는 매료되어 합류했고, “여성영화에 힘을 실어주고 싶다”라는 오랜 바람을 안고 제작까지 겸하게 됐다. 적은 예산으로 구현하기 힘든 마술적이고 독창적인 비주얼 작업에는 VFX 기업 오아시스가 투자 형태로 참여하면서, 제작자, 주연배우, 특수효과팀이 모두 프로듀서로 이름을 올리는 독립영화계의 보기 드문 협업이 성사됐다. 이들을 한데 모은 시나리오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다면? 만약 그가 다른 차원의 ‘검은 공간’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다면?”이라는 상상에서 출발했다. 데뷔작 <밤의 문이 열린다>(2019)에서부터 사후 세계의 개념과 이미지를 탐구해 온 유은정이 <두 번째 아이>에서 제시하는 것은 여자아이들의 흥미진진한 모험담이며 다차원의 세계를 포섭하는 판타지 크리처 호러다. 극 중 언니(유나)를 너무나 좋아하는 동생(박소이)처럼, 자매의 존재를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감독은 “언니도 언젠가 나를 떠날지 모른다는 공포”를 은은하고도 일상적인 수준으로 느끼면서 살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났을 때 남겨진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나름의 답을 지금부터 준비하기 위해서, <두 번째 아이>는 모래와 어둠 속에 우리를 묶어 둔 채 쉬이 세상 밖으로 돌려보내지 않을 영화가 됐다.

BIFF #7호 [화보] 반환점을 돌아도 열기는 계속된다

드디어 반환점을 돌아 완주를 향해 달려가는 칙칙폭폭 BIFF 열차. 주말이 다 지났는데도 현장의 열기만큼은 불타는 월요일이다. 지치지 않고 영화제를 즐기는 관객들의 열정은 거세게 부는 바람마저 막을 수 없다. 마카오, 대만, 홍콩을 가로지르는 범-동아시아 퀴어 로맨스 영화 <걸프렌드>의 감독과 출연진 6인방이 전부 한자리에 모였다. 이들의 이번 정착지는 부산국제영화제! 왼쪽부터 배우 밍치 첸, 배우 나탈리 쉬, 배우 제니퍼 유, 트레이시 초이 감독, 배우 엘리즈 라오, 배우 엘리자베스 탕, 배우 피시 리우.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시 조찬모임>의 포토콜을 보기 위한 오후 네시의 하늘연극장은 팬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2층과 3층까지 가득 메운 관객을 위해 손을 뻗은 배우 이진욱(왼쪽부터), 임선애 감독, 배우 금새록, 배우 유지태. 하늘연극장에서 팬미팅의 열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새의 선물』,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로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소설가 은희경의 마음을 사로잡은 영화는 바로 미야케 쇼 감독의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평소 그의 문학세계를 사랑했던 독자들과 함께 영화의 전당 시네마테크에서 영화와 소설 각자의 세계를 펼쳐나가는 시간을 가졌다. 30분을 꽉 채운 토크 행사 막바지, 저스틴 H. 민과 팬들이 부산국제영화제의 서른 살을 축하하는 마음으로 손을 모았다. 언젠가 다른 작품으로, 어쩌면 액터스 하우스 무대에서 다시 만날 것을 기대하며 저스틴 H. 민이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한국 관객에게 받은 따뜻한 마음에 보답하며 살겠습니다.” 김진유 감독의 신작 <흐르는 여정> 주연 배우로서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은 저스틴 H. 민은 영화의전당 시네마운틴 6층에 마련된 아주담담 라운지에서 팬들을 만났다. “어머니가 편찮으셔셔 인간의 생로병사에 대해 고민하던 시기에 이 작품을 만났다”라며 신작과의 인연을 돌이킨 그는 대표작 <애프터 양>부터 최근 화제가 된 예능 프로그램 <데블스 플랜: 데스룸> 출연 경험까지 되새기며 ‘흐르는 여정’ 위에 선 소회를 전했다. “인생과 커리어에 있어서 이루고 싶은 건 다 이룬 것 같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어떤 과제든 행복하게 맞이하겠다.”

[인터뷰] 이토록 사실적인 열정, <어쩌면 해피엔딩> 배우 신주협

최근 뮤지컬 <니진스키> <데카브리>, 드라마 <무인도의 디바> <졸업> <노무사 노무진>, 영화 <검은 수녀들>까지 2017년 뮤지컬 <난쟁이들>로 데뷔한 이래 배우 신주협은 다매체에서 열의 있는 행보를 펼쳐왔다. “연기를 시작할 때부터 경계 없이 활동하고 싶었다”는 그는 그 꿈을 현실로 이어갈 수 있음에 감사함을 전했다. 영화 <어쩌면 해피엔딩>은 두 번째 올리버 도전기다. 2018년 재연된 동명 뮤지컬에서 처음 사람과 흡사한 ‘헬퍼 봇-5’ 올리버 역을 연기한 그는 스크린에 전보다 더 사실적이고 섬세한 로봇을 불러냈다. - 영화 제안을 받았을 때를 어떻게 기억하나. 처음에는 거절했다. 큰 사랑을 받는 작품이니 욕심 내면 안된다고, 그러다가 체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주변에서 용기를 많이 줬다. 올리버라는 좋은 캐릭터를 영화로도 보여줄 기회이니 해보는 게 어떻겠냐는 응원에 부담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짧은 준비를 거쳐 14회차 정도 찍는 동안 영화로 어떻게 만들어질지 궁금했는데 완성본을 보니 안심이 됐다. 모두가 주어진 여건 안에서 최선을 다한 덕분이다. - 올리버는 조금 따뜻해진 바람에 오늘 하루를 기대하는 긍정형이다. 그의 이런 성격은 떠나간 주인 제임스(유준상)로부터 비롯된 게 아닐까 싶었다. 올리버의 성격을 처음 파악할 때부터 생각한 건데, 로봇은 주인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자신을 세팅하지 않나. 주인이 어떻게 훈련하느냐에 따라 각 집안의 로봇이 조금씩 다르기도 하고. 다정하고 아날로그적인 감수성을 가진 제임스에게 올리버가 큰 영향을 받았을 거다. 그래서 기계적인 느낌이 덜 나는 로봇을 올리버의 특징으로 잡았다. - 찰리 채플린 같은 무성영화 시대의 배우처럼 보이기도 했다. 사람다움과 로봇스러움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는 데 고민이 많았을 것 같다. 그 지점이 정말 어려웠다. 더 로봇 같게 할지 아니면 사람처럼 할지를 놓고 이원회 감독님과 신마다 의논했다. 그래도 관객이 이 영화를 로봇들의 이야기라는 걸 감각하며 따라가도록 로봇의 뼈대는 늘 신경 써서 유지하려고 했다. 이를테면 미묘하게 분절적인 움직임과 대상을 정확히 타기팅한 시선들을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 반면 제임스를 찾아 다른 헬퍼 봇인 클레어(강혜인)와 제주도로 떠나는 시퀀스에선 작정하고 사람인 척하는 로봇을 연기해야 했다. 여행 중인 사람 커플로 위장한 올리버와 클레어가 둘의 첫 만남 스토리를 짓는 환상적인 순간이 이어진다. 한 카페를 빌려 새벽 동안 찍었는데 끝나니까 6시쯤이었다. 이 시퀀스는 비교적 수월하게 넘겼지만 <어쩌면 해피엔딩>이 참 어려운 작품이라는 걸 다시 한번 체감했다. ‘로봇이 사랑을 느낀다’라는 비현실적인 전제를 내가 먼저 받아들이고 관객도 설득해야 하니까 말이다. 공연할 때 나름의 구체적인 이유와 타당성을 만들어두어서 이번에 바로 들어갈 수 있을 줄 알았으나 다시 또 예전만큼의 애씀이 필요했다. 또 뮤지컬에서는 노래의 힘을 크게 빌릴 수 있는데 영화에서는 그렇게까지는 할 수 없다 보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면이 있었다. - 제주에서 클레어가 염원하던 반딧불이를 함께 보면서 서로를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을 확인한다. 식물이 가득한 수목원에 직접 들어가서 찍으니 확실히 몰입이 잘됐다. 혜인 배우와 나도 그만큼 더 예민하게 반응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좋았던 건 따뜻한 실내라는 점이었다. (웃음) 겨울에 촬영해 야외 신들이 쉽지 않았다. 영하 십몇도까지 떨어진 날에 올리버가 고장난 차를 미는 신이 있었는데 눈물이 날 만큼 추웠다. 특히 올리버의 둥근 손가락을 표현하기 위해 씌워진 실리콘의 감촉! 떼면 굳어져버려 계속 끼고 있었는데 아찔하게 차가웠다. - <나의 방 안에> 시퀀스에서는 고서적과 LP판, 앤티크한 가구 등으로 채워진 올리버의 방을 구석구석 비춘다. 올리버의 아날로그적인 취향을 단번에 알 수 있어 인상적이었다. 세트를 보자마자 내가 생각해왔던 실제 올리버의 방과 흡사해 기분이 좋았다. 찍는 동안에는 아무래도 무대에서의 <나의 방 안에>가 많이 떠올랐다. 그때의 것을 얼마만큼 가져오고 무엇을 뺄지를 고민했다. 사실 이러한 고민은 작품 내내 이어졌다. 한 공연을 몇십번 올리면 내 몸에 축적되는 무언가가 있는데 그 느낌은 살리되 디테일한 부분들은 거의 바꿨다. 무대의 동선과 표현법이 영화의 그것과는 분명 다르니까. 카메라 앞에서는 자연스러움을 위해 좀더 작게 움직이고 연기할 필요가 있었다. - 이 시퀀스에서 “나의 방 안엔 날 즐겁게 하는 걸로 가득 차 있어”라고 말하는 올리버를 보면서 궁금해졌다. 실제 집은 어떻게 꾸몄나. 올리버의 방처럼 전체적으론 우디 톤인데 공간별로 분위기가 극과 극이다. 서재는 맥시멀하다. 그동안 했던 작품들의 대본, 취향인 소설과 인문학 책들로 꽉꽉 채웠고, 책상에는 컴퓨터와 프린터, 각종 필기용품이, 바닥에는 러그까지 깔았다. 내가 자주 쓰고 익숙한 것들이 손에 닿을 거리에 있을 때 편안함을 느끼고 공부도, 연습도 잘된다. 반면에 거실에는 북 선반 하나만 있다. 밥 먹고 쉬는 데는 뭐 하나 걸리는 것 없이 깔끔하길 원했다. - 영화 취향도 궁금하다. 영화도 뮤지컬 장르를 즐겨 보는 편인가. 고어나 호러 빼고 다 잘 본다. 그런데 <서브스턴스> <미드소마> 다 재밌게 보긴 했다. (웃음) 쉴 땐 극장에 자주 가는 편인데 연희동의 라이카시네마를 좋아한다. 거기서 본 <애프터썬>이 기억에 남는다. 시간나는 대로 연상호 감독님의 신작 <얼굴>을 보러 가려 한다. - 올해도 무대와 스크린을 부지런히 오갔다. 더 보여줄 작품이 있다면. 11월5일부터 플러스씨어터에서 열리는 뮤지컬 <난쟁이들>에 출연한다. 올해 이 작품이 10주년이 되었고 내 데뷔작이라 여러모로 의미가 깊다. 내년 초엔 앨범을 낼 계획도 있다. 뮤지션들과 함께 만드는 밴드 음악이고 작사와 작곡을 직접 해서 평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곡 안에 담았다. 그리고 이제 추워질 일만 남았는데, 12월에 내 생일(12월1일)이 있다. 그래서 겨울은 항상 내게 좋은 느낌을 준다.

BIFF #6호 [스페셜]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희망, 마스터클래스 ‘세르게이 로즈니차, 증언의 방식: 바라보고 기억하다’

세르게이 로즈니차. 이 이름의 무게는 우리가 사는 현실의 풍경이 전쟁의 이미지로 휩싸이고 있는 지금, 더 무겁다. 1964년 벨라루스에서 태어나 우크라이나 키이(우?)에서 자란 그는 2000년 무렵부터 꾸준히 인류의 폭력을 다큐멘터리로 목도하고, 극영화로 전환해 왔다. 비극의 현장을 비극 그 자체로 진술했던 그의 마스터 클래스 제목이 ‘증언의 방식: 바라보고 기억하다’임은 세르게이 로즈니차의 경력을 일약 압축한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레닌그라드 포위전에서 발생한 인간들의 고통과 시체 더미를 보여준 다큐멘터리 <봉쇄>(2005), 한 러시아 트럭 운전사의 시선을 빌려 인간의 갖은 악행을 로드 무비 형식으로 풀어낸 극영화 <나의 기쁨>(2010) 등 세르게이 로즈니차의 세계는 늘 우리의 비극적 감각을 일깨우는 파문으로 이어져 왔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아이콘 섹션에 초청된 그의 신작 <두 검사>(2025) 역시 1937년 스탈린 체제의 권위적 부조리를 다루며 사회 비판적 요소를 극의 중핵에 둔다. 올해 칸영화제 경쟁부문 상영이자 프랑수아 샬레상 수상작이기도 하다. 다만 <두 검사>의 이야기는 단지 과거의 재현에서 끝나지 않는다. 세르게이 로즈니차가 마스터 클래스에서 밝힌 대로, 그가 역사를 통해 환기하는 사실은 트럼프와 푸틴의 시대를 사는 현재의 우리가 마주한 상황이기도 하다. 극영화 <돈바스>(2018)로 칸영화제 주목할만한시선 감독상, 다큐멘터리 <바비 야르 협곡>(2021)으로 칸영화제 골든아이 다큐멘터리 부문 심사위원특별상을 받았다는 수상 실적만으로 그의 사유를 축약하는 일은 마땅치 않을 것이다. 9월20일 16시부터 17시 30분까지 진행된 마스터 클래스 ‘세르게이 로즈니차, 증언의 방식: 바라보고 기억하다’에선 그가 영화를 대하고, 현실을 만드는 형식에 대해 더 깊숙하게 청취할 수 있었다. 하나의 질문에 30분 이상의 답변이 이어질 만큼 자기 연출론의 확고한 신념을 가진 그의 말을 몇 가지 키워드로 기록했다. 수학과 영화, 논리의 집 ‘증언의 방식: 바라보고 기억하다’라는 제목은 결국 ‘성찰’이라는 영역에 닿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 영화는 우리가 증언하는 일에 대한 일종의 성찰에서 출발했다. 우선 개인적인 이야기부터 시작하자면, 난 젊을 때 수학이란 독에 매료됐었다. (그는 키이 공과대학에서 응용수학을 전공했다. - 편집자) 지금 돌아보면 으레 말하는 ‘AI'의 논리를 공부하고 싶었던 것 같다. 특정한 논리 구조를 만들어 그 안에서 계속하여 생각하는 방식이다. 이후엔 모스크바 러시아국립영화학교에서 극영화를 배우긴 했으나, 영화 만들기도 수학과 유사하다고 느꼈다. 영화 역시 특정한 하나의 수학적 모델, 통찰의 기구라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아카이브 푸티지 영화를 만들 때, 실제로 필름을 만지는 작업보다 우선하는 일은 이 영화만의 논리적 개념을 설정하는 것이다. 특정 주제를 하나의 논리적 축으로 삼고, 이것을 어떻게 풀어낼지에 대한 내러티브를 정한다. 극영화라면 카메라가 어떻게 움직일지, 어떤 제한을 둬야 할지 정한다. 스스로 설정한 제약에 따르면 각 시퀀스의 카메라 위치는 마치 수학 공식의 답처럼 유일해진다. 왜냐, 영화란 결국 만드는 이가 구축한 진술(statement)이다. 당신이 영화의 시작과 끝을 분명하게 정했다면 그 과정은 특별히 신경 쓸 부분이 아니다. 중요한 바는 연출자의 개인적 진술에 마땅한 책임이 따른다는 점이다. 다큐멘터리라는 관찰의 윤리 픽션과 다큐멘터리는 다르다. 분명하다. 픽션에서 연출자는 원하는 모든 일을 할 수 있다. 반면에 다큐멘터리엔 분명한 윤리적 기준이 존재한다. 카메라 뒤에 서서 어떤 것을 목격하고, 어떤 것을 목격하면 안 될지 고심해야 한다. 단순히 무지한 목격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즉 다큐멘터리는 매우 위험한 도구다. 논픽션의 카메라는 일상에서 우리가 바라보는 현실과 정보를 고정하고, 다큐멘터리에 출연한 이들의 삶을 바꿀 수도 있다. 다큐멘터리는 그저 기록하는 방식이 아니다. 현실을 촬영하거나 편집하면 그 순간부터 영화 속의 현실은 오직 당신과 현실의 관계 속에서 작동한다. 하이젠베르크가 말한 불확정성의 원리처럼 관찰이 대상에 영향을 미친다. 종종 다큐멘터리스트들은 본인의 영화에 대해 ’내 눈앞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고 정의하지만, 한편으로 이 주장은 모순적이기도 하다. 결국 다큐멘터리 역시 영화를 만드는 이의 해석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내 다큐멘터리엔 특정 인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일이 거의 없다. 대부분 군중을 주인공으로 둔다. 타인의 삶에 개입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회피하고 싶기도 했고, 자신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내가 남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기 때문이다. <봉쇄>에서 다룬 레닌그라드 포위전으로 실제 수백만 명의 사람이 잔혹하게 죽었다. 그 이후 만들어진 수많은 영화는 ‘이런 전쟁도 있었지만, 결국 우리는 승리했다’라는 식의 양상을 드러냈다. 대신 나는 친구가 보여준 6시간짜리의 영상을 보고 3년 동안 고민했으며, 결국엔 그저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영화로 만들고자 했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은 영하 30도의 사회가 어떻게 파괴됐는지를. 다만 기존 푸티지에 없던 소리를 추가하는 방식으로 나만의 영화를 만들었다. 예를 들어 한 여성이 죽은 아이를 안고 오는 장면에서 난 사람의 울음소리를 맞춰 넣지 않고, 바람 소리를 추가했다. 희망은 영화 바깥에 있다 내가 만든 영화들 속에 희망이 존재할 순 없다. 홀로코스트를 보여줄 때 대체 어떤 희망을 말할 수 있겠는가. 대신 그 영화 안팎에 어떠한 희망이 있다면 그건 내가 ‘이런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가능성’에 있을 것이다. <두 검사>도 마찬가지다. 이 영화를 만들어 나를 포함한 우리가 성찰할 수 있고, 지금 우리의 사회에 과거의 악행이 반복되지 않도록 논의할 가능성이 있다면, 바로 그곳에 희망이 있다. 다행히 영화를 만드는 동력이 떨어지진 않는다. 어떤 영화를 만들 땐 이미 다음 영화의 주제가 정해진다. <두 검사>의 아이디어는 이전에 만든 다큐멘터리 <재판>에서 시작됐다. 국가에 저항한 일련의 지식인들에 대해 스탈린 체제가 어떤 방식의 재판으로 사회를 분열시켰는지를 더 말하고 싶었다. 때론 하늘이 영화 만들기를 도와줄 때도 있다. 꿈속의 누군가가 “어디에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푸티지가 있다”라고 말했고, 그 꿈을 따라갔더니 실제로 소련이 남긴 네거티브 필름을 찾은 적도 있다.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칼 융이 말한 ‘동시성’(synchronicity)의 이론 같다고 느낀다. 설명하기 어려운 일이긴 하다. 다만 내가 특정한 방향을 잡고 항해한다면 결국엔 그에 맞는 파도가 온다고 생각하며 영화를 만들고 있다.

BIFF #6호 [경쟁]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용감하다, <허락되지 않은> 하산 나제르 감독 인터뷰

“영화인이라면 언제나 방법을 찾을 수 있다.”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 올해의 아시아영화인상 수상자 자파르 파나히 감독은 이란 정부의 검열과 제작 금지 처분에도 창작을 지속한 여정을 한 마디로 압축했다. 역시 이란 출신인 하산 나제르 감독은 거장의 묵직한 격언을 내면화한 신작 <허락되지 않은>으로 경쟁 부문에 이름을 올렸다. 다큐멘터리와 픽션이 혼재된 이 작품은 어린이들이 출연하는 한 편의 영화 촬영 과정을 따라간다. 아이들이 그린 찬란한 꿈 사이로 어른들이 처한 현실이 고개를 들 때, 이 금지된 프로젝트의 맥박은 조용히 그러나 선명히 뛰기 시작한다. - 이 영화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를 기리는 문구로 시작한다. 그는 당신에게 어떤 존재인가. 키아로스타미의 영화는 내게 단순함의 아름다움, 세심한 관찰법, 그리고 판단 없이 타인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방법을 가르쳐줬다. 그의 정신을 받들어 <허락되지 않은>에도 이란 젊은 세대의 목소리를 여과 없이 담아 그들의 꿈과 두려움, 그리고 고군분투를 포착하고 싶었다. 영화로써 세상에 용기 냈고, 인간을 향한 깊은 공감을 보여준 키아로스타미에게 이 영화를 바치는 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 키아로스타미의 작풍을 연상시키는 요소들도 활용했다. 차 안 대화 신이 많은데, 인물들의 얼굴보다는 차창 밖 풍경을 더 적극적으로 비췄다. 관객이 멀리서나마 배우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들이 살아가는 세계를 상상하게 하고 싶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때로 푸르고, 황금빛이다가, 먼지가 자욱해지기도 한다. 이것은 인물들이 지나온 여정과 운명을 상징한다. 한편, 아이들의 인터뷰 장면은 한쪽에만 조명이 비치는 어두운 방에서 찍었다. 그 빛으로 제약 속 희망을 말하고자 했다. 영화 속 모든 장소, 조명, 음향은 이렇게 의도적으로 설정했다. 관객이 이 영화가 바탕을 둔 환경을 체험할 수 있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위험이 따르는 현장이었지만 친밀하고 진정성 있는 영화적 경험을 창출할 수 있었다. - 영화를 채우는 다양한 출신과 배경의 어린이들은 어떻게 만났나. 캐스팅은 이 영화의 핵심이자 가장 어려운 과제였다. 영국에 거주하는 외부인으로서 공식 촬영 허가 없이 이란 전역을 오가는 일은 상당히 위험했다. 그럼에도 아이들의 성격과 참여 의사를 파악하기 위해 현지에서 짧은 인터뷰를 몇 차례 진행했다. 이후 소규모 그룹을 선발해 그들을 3일간 모았고, 그 자리에는 항상 영화의 취지를 이해한 보호자들이 동석했다. 비밀리에 촬영할 때는 그 장소가 외부에 노출되면 안 되었기에 상호 간의 철저한 신뢰, 준비, 안전 관리가 필수적이었다. 다행히 마지막까지 아이들의 안전을 지키면서 다양한 목소리를 모을 수 있었다. - 아이들이 어른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결코 준비된 시나리오 같지 않았다. 맞다. 영화 속 제작진이 묻는 말에 대한 아이들의 답변은 완전히 즉흥적이었다. 아이들이 안정감을 느끼며 자유롭게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특정한 내용을 말해달라고 절대 지시하지 않았다. 그들이 한 말은 모두 질문을 들은 순간 나오는 진솔한 반응이었다. 그게 이 영화가 추구한 이야기 구조를 비껴갈 여지가 있었음에도 아이들에게 충분한 시간을 줬다. 필요하다면 질문을 조정해 가며 그들의 세계로 들어가 보려 했다. - 아이들은 영화 속 영화의 주인공들이기도 하다. 노란 꽃밭 신을 포함해 영화 속 영화를 이질적 화면비, 색감, 질감으로 구현한 목적은. 영화 속 영화가 그 자체로 독자적이면서도 본편 서사와 연결될 수 있도록 신중히 차이를 만들고자 했다. 아이들의 목소리와 경험을 중심에 두되 그들이 상상하는 세계로의 전환을 암시하기 위함이었다. 아이들의 내면을 다차원적으로 탐구하는 데는 색채 역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예를 들어 한 소녀는 여러 색상이 어우러진 칵테일과 함께 등장하는데, 이는 그녀가 다채롭고 생동감 넘치는 삶을 위해 이란을 떠나 다른 나라로 여행을 떠나고 싶어 한다는 바람을 보여주기 위한 선택이었다. - <허락되지 않은> 속 감독 캐릭터가 완성하고 싶었던 영화에 관한 힌트도 듣고 싶다. 혹시 그것이 언젠가 당신이 만들고 싶은 작품인가. <허락되지 않은> 속 감독의 삶은 내 삶과 여러모로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그가 곧 나 자신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내가 직접 그 인물을 연기하지 않은 이유는 그의 여정이 진정성 있게, 이야기에 충실하게 보일 수 있게 연출하는 일에 더 집중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당신이 추측한 대로 그가 만들고 싶어 하는 영화의 각본은 언젠가 내가 해내고 싶었던, 그러나 허가받지 못한 프로젝트의 면면과 닮아있다. 나는 이란 이야기를 스크린에 옮길 때마다 두렵다. 이 작품이 과연 국경을 넘을 수 있을지, 안전하게 상영될 수 있을지 긴장한다. <허락되지 않은>에도 표현의 자유를 향해 투쟁하는 동안 느낀 두려움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어난 용기가 묻어있다. - <허락되지 않은>에는 흥미로운 레이어가 하나 더 있다. 바로 여성 조감독 캐릭터가 겪고 있는 남편과의 갈등이다. 판사 앞에서 조정을 거치는 두 사람의 모습을 파편적으로 보여줬는데, 이를 아이들의 오디션 장면과 계속해서 교차시킨 까닭은. 영화 속 한 대사가 말하듯 “우리 삶이 어린 시절을 반영한다는 사실을 안다면 어린이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도 알 것이다.” 어른들은 과거의 영향으로 삶에 이런저런 제약을 겪는 반면 아이들은 여전히 꿈꾸고, 자유롭게 자신을 표현한다. 관객이 교차 편집된 화면을 통해 세대 간의 대조와 연속성을 동시에 목격하기를 바랐다. - 이 ‘허락되지 않은’ 작업을 거쳐 영화를 공개하는 소감은. 이 영화를 만들면 앞으로 다시는 이란에서 영화를 만들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렇지만 이 작업은 나 자신을 온전히 표현하고, 내게 중요한 주제를 탐구할 기회를 줬다. 나처럼 ‘허락되지 않은’ 작업을 하는 창작자들은 창작에 따른 위험보다 발언의 필요성을 더 크게 느끼는 사람들이다. 이란에 거주하면서 허가 없이 영화를 만드는 존경받는 감독들은, 위험에도 불구하고 창의성과 용기를 발휘해 계속해서 영화를 제작할 방법을 찾아내 왔다. 그들을 깊이 존경한다. 나는 이란에 거주하지 않기 때문에 상황이 조금은 다르다. 내 경우 이란에 입국할 때마다 누군가의 감시를 받고 있다. 그 현실이 내 영화에 드러난다. 그런데도 목소리를 잃은 이들에게 목소리를 돌려줘 진실을 기록하고 싶다는 열망이 나를 움직인다. <허락되지 않은>은 이란과 이란 아이들의 경험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자유, 정체성, 용기, 그리고 자신의 목소리가 들리길 바라는 욕망이라는 주제는 보편적이다. 한국 관객들도 이 영화의 조용하고 관찰자적인 스타일에 공감하며 사회적·개인적 제약을 헤쳐 나가는 젊은이들의 삶을 되돌아보기를 희망한다. Director’s Box 1979년 이란에서 태어난 하산 나제르 감독은 열아홉부터 영국에 살고 있다. 그는 애버딘대학교에서 영화를 공부하며 작업을 신작했고, 실제 현실을 바탕으로 한 사회비판적 드라마를 그리는 데 능숙하다. 그가 떠나온 이란도 자주 그 배경이 된다. 그의 인물들은 구조적 모순 앞에 무너지다가도 개인성을 회복하려는 욕망을 안고 있다.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건 <위너스>(2022). 이란의 어느 작은 마을에서 생계를 위해 일하는 어린이들이 주인 모를 트로피를 발견하면서 시작되는 이 영화는 세계 유수의 영화제 및 시상식에서 주목받았으며, 영국이 아카데미 시상식 국제 장편영화상 부문 공식 출품작으로 선정한 작품이기도 하다.

BIFF #5호 [화보] We're Goin' Up, Up, Up, It's Our Moment!

따가운 땡볕과 촉촉한 가을비가 교차하더니 해가 지자 완연한 가을바람이 불어왔다. 변화무쌍한 날씨만큼이나 다채로운 영화인과 관객들이 부산국제영화제의 4일차를 가득 채웠다. 오늘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한국에 최초로 상륙한 <케이팝 데몬 헌터스> 싱어롱 상영회! 헌트릭스의 주제가 ‘Golden’의 가사처럼 ‘바로 지금 우리의 순간’들을 포착했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 스페셜 싱어롱 상영 드디어 우리도 만났다! 넷플릭스 역사상 최다 시청 기록을 세우고 북미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한 올해 최고의 센세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국내 최초 싱어롱 상영회가 20일 저녁 8시 동서대 소향씨어터의 밤을 뜨겁게 달궜다. 극중 악령 보이그룹 ‘사자보이즈’의 ‘소다 팝’이 스크린을 채우자 객석의 어깨가 저절로 들썩인다. 마 리를 소다 팝! 전 세대를 사로잡은 ‘케데헌’ 열풍이지만, 오늘을 누구보다 기다렸을 어린이 관객들. 생애 첫 부산영화제의 기억을 안고 미래의 씨네필로 자라나기를. 우리들의 작은 역사, 미래를 부탁해! 오후 12시 30분 영화의전당 시네마테크. 한국 영화의 미래를 이끌 신예 여성 감독 5인이 선배 감독의 작품을 직접 선정해 대화를 나누는 ‘우리들의 작은 역사, 미래를 부탁해!’의 첫 문이 열렸다. 장편 데뷔작 <남매의 여름밤>(2020)으로 영화계를 놀라게 했던 윤단비 감독의 ‘원픽’은 박찬옥 감독의 <질투는 나의 힘>(2002). “선배 감독님의 ‘비기’를 배우고 싶었다”는 윤단비 감독의 눈이 배움의 열의로 빛났다. 가르침과 배움은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는 법. 박찬옥 감독은 “<남매의 여름밤>의 실내 장면 연출에서 오히려 내가 큰 영감을 받았다”고 화답하며 따뜻한 존중의 순간을 만들어냈다. 오픈토크 <짱구> “남자라면 누구나 평생 기억하고 싶어하는 여신 같은 존재”. 배우 정수정이 연기한 ‘민희’에 대한 설명이다. 지난해 <거미집>(2023)으로 제33회 부일영화상 신인여자연기상을 거머쥐었던 그가 신작 <짱구>에서는 또 어떤 새로운 얼굴을 보여줄까. 객석의 기대감이 광장을 가득 메웠다 배우 정우를 세상에 알린 영화 <바람>(2009)이 스핀오프작 <짱구>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감독 겸 주연이다. 학창 시절의 방황을 뒤로하고 영화배우의 꿈을 안고 서울로 향하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그린 <짱구> 팀이 무대에 올라 관객들을 향해 힘찬 인사를 건네고 있다. 야외무대인사 <로맨틱 어나니머스> 가을바람에 실려 온 달콤한 로맨스. 한일합작 넷플릭스 시리즈 <로맨틱 어나니머스>의 주역 한효주, 오구리 슌, 그리고 츠키카와 쇼 감독이 영화의전당 야외무대에 올라 팬들의 환호에 화답하고 있다 “지금 계절과 꼭 어울리는, 초콜릿처럼 따뜻하고 달콤한 이야기”라고 작품을 소개한 <로맨틱 어나니머스> 팀이 팬들과 함께 셀카를 찍고 있다. 칸과 베를린의 비밀이 부산에서 열렸다. 세계 최고 영화제를 이끄는 트리샤 터틀 베를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과 크리스티앙 쥬느 칸영화제 부집행위원장이 ‘아주담담’ 행사에서 마주 앉았다. 축제를 만드는 사람의 뒷이야기는 물론 축제를 즐기는 사람을 위한 상영작 선택법과 예매 꿀팁까지. 성골 씨네필들이 갈망하던 정보들이 쏟아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