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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1997)

윌로씨에게 생긴 일, 웃음과 비애의 카오스

◈ 어느 작가가 자작(自作)에 대해 말하는 것을 우리는 어느 정도나 믿을 수 있을 것인가? 일차적으로 작품의 의도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작가로부터 이야기를 듣는 것이 어느 정도는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그 의도라는 것이 완성된 작품에서 잘 나타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이를테면 작가의 의도에도 불구하고 전혀 다른 것을 우리가 작품에서 발견한다면 우리는 그때에도 작가의 의도를 최우선의 것으로 생각해 그것에 따라야만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물론 오늘날 작품 해석의 권한을 여전히 작가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확실히 ‘촌스러운’ 생각일 것이다. 하지만 작가의 의도와 비평적인 해석간에 엄청난 격차가 존재한다면 그 또한 심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이런 경우 대개 작가 스스로 통제하지 못한 어떤 부분이 작품에 스며들게 돼서 생기는데 이러한 ‘과잉의 부분’은 그 자체로도 충분히 우리의 흥미를 자극한다. 낡은 세계관, 혁명적 스타일 자크 타티는 자신이 얼마나 혁신적인 영화를 만들고 있는지를 정작 자신은 깨닫지 못한 인물이었다. 물론 이것은 그가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를 전혀 몰랐다는 뜻은 아니다. 자신의 프티부르주아적인 세계관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방법론에 충실함으로 인해 전례없는 영화형식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그처럼 낡은 세계관을 가지고 있던 인물이 그런 영화를 만들어낸 것은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거의 기적처럼 보인다. 그리하여 1967년 그가 ‘괴작’ <플레이타임>을 발표했을 때 자크 리베트는 “이 영화는 자크 타티에임에도 불구하고 혁명적이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타티는 1950년대 프랑스영화계에서 일종의 대안적 흐름을 짊어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로베르 브레송과 자주 비견되곤 하지만 두 사람의 기질 및 배경의 차이를 감안하면 그의 위치는 더욱 특이한 것으로 비친다. 확실히 그에게는 브레송 같은 문학적 교양도 그렇다고 종교적인 엄격성도 없다. 따라서 영화가 굳이 개인적인 표현이어야 한다는 신념도 강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물론 그에게도 ‘장인적인 완고함’이라 할 만한 것이 있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반드시 ‘자크 타티’라는 인물에 귀속돼야 하는 그런 유의 것은 아니다). 자크 타티는 1907년 파리의 교외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원래 러시아 출신으로 할아버지대에 파리로 이주했다고 하며 그래서 그의 본명은 자크 타티셰프이다. 부친의 직업은 액자 제조가로 비교적 유복한 편이었다고 한다. 타티는 어렸을 때부터 스포츠에 열광했다고 하는데 특히 럭비와 테니스는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한다. 관찰력이 뛰어났던 그는 여러 스포츠의 동작을 팬터마임으로 해보여 주위 사람들을 웃겼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어 직업적인 엔터테이너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30년대 초에 그는 뮤직홀에서 정식으로 공연을 하기 시작해 상당한 인기를 끌게 되는데 몇년 뒤에는 뮤직홀에서 번 돈으로 단편영화를 제작하기도 한다. 이때 만든 영화가 르네 클레망이 연출하고 타티가 주연을 맡은 <왼쪽을 주의하라>(1936)였다. 2차대전에 하사관으로 참전했던 그는 전쟁터에서 돌아온 뒤 직접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하고 주위의 친구들을 불러모으기 시작한다. 이렇게 하여 만들어진 것이 바로 <축제의 날>(1949)이다. 아주 적은 예산에다가 몇명을 제외하면 영화 경험이 전무한 스탭들을 모아 만든 이 영화는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어 타티로 하여금 영화에 본격적으로 진입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해주었다. 프랑스의 어느 시골 마을을 무대로 한 이 영화에서 타티는 주인공인 우편배달부 프랑수아 역을 맡았다. 영화는 마을의 축제를 위해 만들어진 임시 영화관에서 미국의 발달된 우편배달 시스템에 관한 영화를 본 프랑수아가 자기 혼자 힘으로 미국식으로 편지를 배달하겠다고 나서지만 결국 죽도록(?) 고생만 한다는 이야기이다. 미국인들은 스피드와 규칙성을 모토로 해서 오지에는 심지어 헬리콥터까지 동원해 우편을 배달하지만 교통수단이라곤 고작해야 자전거 한대밖에 없는 프랑수아로선 아무리 열심히 뛰어봐야 한계가 뻔한데다 오히려 사고만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타티는 자신의 트레이드 마트가 되는 어설픈 몸동작을 이 영화에서 유감없이 보여주지만, 허술하긴 하지만 플롯이라 할 만한 것을 가지고 있는 이 영화는 그런 점에서 아직 본격적으로 타티가 자신의 세계를 만들었다고 하기는 힘든 작품이었다. 하지만 2차대전 직후의 프랑스인들이 미국에 대해 가지고 있는 선망과 질시의 감정이 잘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는 역시 흥미로운 작품이라 해야 할 것이다. 과묵한 윌로씨 태어나다 1953년 초에 개봉된 <윌로씨의 휴가>는 ‘타티적 우주’가 최초로 제시된 작품일 뿐 아니라 타티 자신이 만들어내 대중적인 캐릭터가 된 윌로씨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이 본격적으로 타티적인 세계를 보여준다고 말하는 것은 먼저 그 줄거리를 요약하는 것이 가능하지도 않거니와 필요하지도 않다는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노르망디 해안의 어느 휴양지로 일단의 사람들이 휴가를 위해 몰려오고 영화의 끝에서 그들은 다시 원래 왔던 곳으로 돌아간다. 굳이 이야기라고 할 만한 것이 있다면 이 휴가기간 동안 사람들은 타티, 즉 윌로씨 때문에 몇번의 해프닝을 겪게 되지만 하지만 그것도 훗날까지 기억할 만한 중요한 일은 물론 아니다. 영화는 그저 여름철 해변가에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들을 별다른 연관성 없이 그저 나열하듯이 보여주는 것 같다. 그리고 이것이 물론 이 영화의 비범한 매력 중 하나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느슨함은 정확히 휴가객들의 정신상태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확장하자면 별다른 생각없이 영화관에 간 관객의 심상이기도 할 것이다. 휴가의 초반에는 약간의 기대감을 가질지도 모르지만 시간이 가면 갈수록 우리는 반복의 시간감각 즉 권태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말의 정확한 의미에서 어떤 목적을 지향하는 휴가라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휴가의 시간은 노동의 시간처럼 기복이 심한 시간이 아니다. 바쟁이 이 영화가 개봉될 당시에 지적했듯이 타티가 그리는 휴가 중의 세계는 “스톱워치로 재는 것이 가능한 그런 부조리한 속도로 진행”하는 것이다. ‘타티적 우주’의 두 번째로 중요한 요소는 그것이 보여지는 어떤 것 즉 풍경(landscape)인 것 이상으로 들려지는 것 즉 음장(soundscape)이라는 점이다. 영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 특별히 중요하지도 않은 대사를 포함한 온갖 소리들이 놀랄 만한 명확성과 함께 전달된다. 기차역의 안내방송, 해변가의 바람소리, 놀고 있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등등. 특히 타티의 놀라운 점은 인물의 대사에 결코 특권적인 지위를 부여하지 않고 영화를 구성하는 여러 사운드 요소 중 하나로 다룬다는 점이다. 보통의 영화에서라면 대사는 인물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수단이 된다. 하지만 현실에서 듣는 여러 소리 중 하나와 다름없이 다루어진다면 그것은 ‘말’이라기보다는 ‘소리’에 가까운 것이 되고 이것은 확실히 놀라운 체험이라고 할 만하다. 과연 이 영화에서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는 대개 진부하기 그지없는 것이고 더 흥미로운 것은 윌로씨 자신은 영화의 앞에서 호텔에 체크인할 때 “윌로”라고 짤막하게 자신의 이름을 밝히는 부분을 제외하면 전혀 대사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윌로씨를 좀더 잘 표현하는 청각적 기호는 오히려 그의 낡은 자동차가 내는 기괴한 마찰음이다. 휴가지에 윌로씨가 도착했음을 호텔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알리는 역할을 하는 것도 바로 이 자동차가 내는 소리인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의 물리적 현존을 감지하는 데 청각적 체험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이 영화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것이다. 현실은 이미지의 덩어리인 것 이상으로 소리의 덩어리인 것이다. 윌로를 넘어, 현실을 닮은 코미디를 꿈꾸다 1958년에 타티의 세 번째 장편영화인 <나의 아저씨>는 그를 부동의 인기감독으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윌로씨의 캐릭터를 대중의 사랑을 한몸에 받는 존재로 만들어주었다. 미국을 비롯한 외국에서도 그의 영화는 상당한 관객을 끌어들일 정도가 되어서 그는 국제적인 명성도 동시에 획득했다. 이 영화는 파리를 무대로 아직도 전통적인 삶의 방식이 남아 있는 윌로씨가 사는 중하류층의 거주지역과 현대적인, 더 정확히는 기계화된 삶의 방식이 지배하는 중상류층의 지역을 대비시키고 있다. 윌로씨는 누나가 사는 부자동네에 갔다가 기계들을 제대로 다룰 줄 몰라 한바탕 곤경을 치르게 된다. 날로 기계화되는 현대적인 삶에 대한 비판이라 할 수 있는 이 영화는 그런 점에서 타티의 세계관이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윌로씨가 몸담고 있는 옛날 방식의 삶에 대한 노스탤지어로 가득 차 있는 이 영화는 타티의 영화 중 가장 센티멘털하고 ‘따뜻한’ 작품으로 그런 만큼 상당한 대중적인 호응을 받았던 것이다(심지어 외국어영화상이지만 아카데미상까지 받았던 것이다!). 60년대 들어 타티는 그동안의 성공을 발판으로 야심적인 프로젝트에 착수하게 된다. 코미디는 코미디이되 가장 현실에 근접한 그런 코미디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리고 타티는 당시 윌로씨라는 캐릭터가 지나치게 성공을 거둔 것에 대해서도 불만을 느끼기 시작했다. 감독인 그보다 윌로씨가 훨씬 유명해짐에 따라 관객이 그의 영화를 보러 오는 것이 아니라 윌로씨를 보기 위해 온다는 것이 명확해진 것이다. 그에 따라 이 신작에서는 윌로씨의 캐릭터가 전의 두 작품에 비해 훨씬 비중이 약해지게 된다. 이 영화는 무엇보다도 파리 시내의 한 구역을 그대로 재현한 세트를 필요로 했기 때문에 그의 전작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큰 제작비를 필요로 했다. 게다가 그는 이 영화를 70mm 시네마스코프에 스테레오로 녹음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결국은 사재를 쏟아붓고도 모자라 빚까지 지면서 겨우 제작비를 마련한 그는 1967년에 <플레이타임>을 완성하게 된다. 영화는 그의 기대와는 달리 참담한 흥행실패를 기록하고 말았다. 아마도 2차대전 이후 프랑스영화계의 최대의 흥행실패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여서 타티는 이때 진 빚으로 죽을 때까지 허덕였다고 한다. 흥행실패에는 타티 자신의 책임도 어느 정도 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개봉 당시 이 영화가 최적의 상황에서 상영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70mm 및 스테레오 사운드 설비가 된 극장에서만 개봉을 허용했기 때문이다. <플레이타임>은 왜 흥행에 실패하고 만 것일까. 우선은 윌로씨를 보고싶어하는 관객의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못한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윌로씨는 물론 이 영화에도 등장하지만 특별히 다른 인물에 비해 비중있게 다루어지지 않는다. 그냥 여러 인물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사실 이 대목은 어찌 보면 관객의 그간의 오해에 어느 정도 원인이 있다고도 할 수 있는 것으로 전작에서도 결코 윌로씨가 통상적인 의미에서는 주인공이라고 하기 힘듦에도 불구하고 관객은 그가 주인공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 흥행실패의 또다른 원인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타티가 관객의 능동성을 너무 과대하게 평가했다는 점이다. <플레이타임>은 무엇보다도 그 정보량의 과다로 보는 사람들을 질리게 하는 작품이다. 다양한 시각적 정보들이 70mm 와이드 스크린의 프레임을 꽉 채우고 있을 뿐 아니라 화면의 전경과 후경을 나누어 다른 사건이 진행되고 있음을 동시에 보여준다. 거기다가 밖에서 훤히 들여다보이는 최신식 아파트를 설계해 일종의 멀티스크린 효과까지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이쯤 되면 관객은 어디에 시선을 두어야 할지 모르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윌로씨가 이번에는 어떤 ‘사고’를 쳐서 우리를 웃겨줄 것인가를 기대하던 관객은 도대체 무엇을 보고 웃으라는 것인지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실 어찌 보면 <플레이타임>은 바쟁류의 ‘의미의 민주주의’의 전범이 될 만한 영화이다. 화면에 비쳐지는 것들간에 일종의 서열구조를 만들고 그리하여 자연스럽게 관객이 지배적인 의미를 추출해내도록 하는 것이 통상적인 영화 의미의 생성과정이라고 한다면 이 영화는 어떠한 의미에도 특권적인 지위를 부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가히 혁신적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어쩌랴. 대다수의 일반 관객에게는 의미의 민주주의라는 것이 아직은 ‘의미의 카오스’로밖에 비치지 않는 것을. 관객은 자신들에게 지워진 무거운 짐을 끌어안고는 곤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던 것이다. <플레이 타임>, 너무 일찍 온 미래 60년대 영화 중 <플레이타임>과 비견할 만한 작품으로는 스탠리 큐브릭의 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당대의 첨단 테크놀로지를 과감하게 도입했다는 점, 그리고 당시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던 미래적 상상력을 충실하게 투영하고 있다는 점 등에서 확실히 두 작품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에는 있으되 <플레이타임>에는 없는 것은 다름 아니라 당대의 관객이 호흡하고 있는 시대적 공기라고 부를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큐브릭이 의도했든 아니든간에 에는 확실히 당대의 카운터컬처의 초월론적인 부분과 조응하는 요소를 가지고 있었고 그것이 이 영화의 컬트적인 인기를 가능케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에 비해 <플레이타임>이 보여주는 푸른 색조가 감도는 미래형의 고층건물이 만들어내는 기하학적인 미학은 당시의 사회적 상황에서는 너무 난데없는 것처럼 비쳤던 것이다. 마치 외계에서 날아온 이름모를 유성처럼. 영화사적으로 보아 타티가 맥 세네트에서 시작되어 버스터 키튼, 해리 랭든 등으로 이어지는 벌레스크적인 코미디의 전통에 속한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런 유의 코미디에서 자주 목도하게 되는 몸동작에 대한 과도한 집착 등은 타티에게도 그대로 발견된다. 하지만 타티는 이런 전통을 자기 식으로 수정해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타티가 이들 선배들과 결정적으로 다른 대목은 그에게 ‘판타지적인 부분’이 전적으로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다. 결정적인 대목에는 주저없이 비현실적인 상황을 만들어내던 이들과는 달리 타티는 ‘있을 것 같지 않은’ 부분은 철저히 배제한다. 어느 비평가는 그리하여 타티가 이들에 비해 “훨씬 상상력이 없는 작가”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상상력의 결여는 역으로 말하면 타티의 세계가 현실에 대한 엄밀한 관찰하에 구성된 것이라는 것을 입증해주는 것일 게다. 그의 코미디의 핵심은 말하자면 현실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을 그 논리적 극단까지 몰고 간다는 데에 있다. 그리하여 타티의 세계는 자세히 관찰했을 때 우스꽝스럽지 않은 것은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새삼 일깨워준다. 고다르가 말한 대로 그는 “문제가 전혀 없는 곳에서 문제를 발견하고 마는 것이다”. 그리하여 최종적으로는 ‘성공적인 코미디’가 관객에게 주어야 할 안전한 거리감까지 무너지는 지경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즉 영화 속의 상황에서 어느 정도 관객이 격리돼야 하는 데도 실제로 관객 자신도 코미디의 한 부분이라고 느끼기 시작하면 그것은 결코 보통의 관객에게 웃음을 자아낼 수 있는 상황은 아니게 된다는 것이다. ‘나도 윌로씨처럼 사실은 부적응자일 수 있다’는 깨달음은 결코 즐거운 체험은 아닐 것이다. 거기다가 타티가 자신은 ‘재미있는 영화를 만든다’고 호언하면서 장인적인 자부심을 겉으로 내세우면서도 실제 행동에서는 예술가의 그것에 가까운 행태를 보여주었다는 것도 그에 대한 몰이해를 더욱 부채질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영화에 시네필들이 열광하는 것에 어리둥절해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영화가 어떤 상황에서 상영되는가에 대해 극히 까다롭게 굴었던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역설은 그가 낡은 프랑스적인 것에 집착하는 그런 기질의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마치 인디펜던트 감독처럼 작업을 해야만 했던 그런 상황의 결과로 빚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하지만 바로 이러한 역설이야말로 그로 하여금 영화사상 가장 급진적인 코미디를 만들도록 했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우울한 말년, 윌로보다 먼저 가다 <플레이타임>으로 빚더미 위에 올라앉았던 타티는 그 이후 <트래픽>(1971), <퍼레이드>(1974) 등 두편의 영화를 더 만들게 된다. 윌로씨를 다시 중요한 인물로 배치하는 등 예전의 인기를 되찾기 위해 나름대로 ‘타협한’ 구석들이 보이는 이 영화들은 하지만 예전의 성공을 반복하지는 못한다. 그는 말년에 텔레비전 스튜디오를 무대로 한 <컨퓨전>이란 작품을 만들려고 했지만 결국 제작비를 모으는 데 실패해 촬영에 들어가지는 못했다. <컨퓨전>에서 그는 윌로씨를 등장시킨 다음 바로 죽일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만든 이 캐릭터에 대해 갖고 있던 묘한 애증관계를 완전히 청산할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를 죽이기 전에 그 자신이 먼저 죽고 만다. 그는 1982년 쓸쓸히 세상을 떠나고 말았던 것이다. 1970년대 초반 파리에 머물던 영화평론가 조너선 로젠봄은 타티와 인터뷰한 것을 계기로 그의 조수가 되어 잠시 동안이나마 <컨퓨전>의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한 경험을 감동적으로 술회하고 있다. 매일 그의 사무실에 가서 그가 말하는 영화의 아이디어를 듣고 함께 토론하면서 정리하는 일을 했다고 한다. 어느 날 드디어 이 영화에서 윌로씨를 죽일 결심을 한 타티는 그 상황을 그에게 설명한다. 텔레비전 스튜디오에서 생방송으로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도중에 방청객으로 가 있던 윌로씨가 방송사에 잠입한 테러리스트가 쏜 총탄에 잘못 맞아 죽는다는 것이다. 생방송 도중이므로 이 사고는 시청자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은밀하게 처리돼야만 한다는 것이다. 카메라 위치를 이리저리 따져본 타티는 결국에는 고개를 젓는다. “역시 돈이 너무 많이 들겠는데.” 그리고는 로젠봄에게 “오늘은 그만 됐네. 돌아가게”라고 말했다. 창 밖을 멍하니 응시하면서 로젠봄의 표현에 의하면 타티는 ‘슬라브적인 멜랑콜리’에 빠져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번 우울에 빠진 타티에게 더이상 말을 거는 것은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임재철/ 영화평론가·<필름컬처> 편집주간marienbad@hanmail.net

2001 신인감독 10인의 출사표 - 김영

▒감독이 되기까지 김영(34) 감독의 영화에 대한 사랑은 무대예술에 대한 동경에서부터 시작했다. 오페라, 연극, 발레 등 무대 위의 퍼포먼스를, 그는 어린 시절부터 폭넓게 감상하며 무대 위에 서기를 바랐다. 그러나 ‘재주’가 모자란다는 생각에 무대 위에 오르는 대신 공연이 끝나면 무대 뒤로 가 여러 가지 장치며 의상을 만져보는 데 만족하곤 했다. “나는 항상 스탭이구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그는 스탭의 기질이 있었노라고 말한다. 무대를 사랑하던 소녀는 대학 3학년 때 1년을 휴학하고 떠난 장장 8개월의 유럽 배낭여행에서 영화의 매력을 ‘발견’한다. 케임브리지 ABC 시어터에서 본 빔 벤더스의 <베를린 천사의 시>와 카우프만의 <프라하의 봄>에 그는 그 어느 것보다 더 깊이 빠져들었던 것이다. 여행에서 돌아온 그는 ‘또 하나의 문화’의 어린이캠프에 교사로 참여해 변영주, 홍효숙 감독과 인연을 맺는다. 그리고 그들의 소개로 들어간 독립영화집단 ‘바리터’에서 16mm 영화찍기에 대한 ‘수업’을 시작한다. 이때 그가 촬영보조로 참여한 작품이 김소영 연출, 변영주 촬영의 <작은 풀에도 이름있으니>. 사무직 여성노동자들의 애환을 담은 단편이다. 대학졸업 뒤 영화아카데미에 입학해 처음으로 자신의 작품을 만든 그가 충무로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1994년이었다. 김홍준 감독 <장미빛 인생>의 연출부로 일하며 기록을 담당했고, 1999년에는 이창동 감독 <박하사탕> 연출부에서 김현진씨와 함께 공동 조감독을 했다. 데뷔작 <쥬크박스>에 대한 구상은 우연히 시작됐다. 2000년 3월 차를 타고 길을 지나다 우연히 음치클리닉 간판을 본 순간 노래강사와 노래 못하는 이들의 이야기가 떠오른 것이다. 5월, 그곳엘 찾아가서 주인공의 모델이 된 여강사를 만나고, 여름 이 아이템을 자신의 데뷔작감으로 점찍는다. 김영 감독은 현재 <쥬크박스>의 시나리오 작업을 계속하고 있는 중이며 영화사 ‘KM컬쳐’와는 지난해 6월 1차 계약을 맺은 상태다. ▒어떤 영화를 만들것인가 “너는 장사영화를 할 거야”, 어느 선배의 말은 김영 감독의 영화스타일을 반은 맞히고 반은 못 맞힌 말이다. 반대로, 김홍준 감독과 이창동 감독의 연출부를 거쳤다는 이유로 그에게서 작가영화적 기질을 점치는 이들도 많다. 정작 그 자신은 “어떤 식으로 표현하든 얘기하는 콘텐츠가 중요하다”고, “영화는 수용자에게 다가갔을 때 완성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이야기’와 ‘만남’은 ‘변혁’에 대한 꿈과 맥이 닿아 있다.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변혁의 가능성이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 조금씩이라도 진보할 수 있다면, 가치관에 위배되지 않는 한도에서 어떤 식으로 포장이 돼도 상관없다.” 88학번인 그는 대학 시절 “운동을 직접 하지는 않았지만 고민은 늘 하던 회색인”이었다며, 그 고민이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했다. 첫 영화 <쥬크박스>에 담고 싶은 건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가벼운 터치”. ‘성공적으로’ 작품을 계속 만들 수 있게 되다면, 사회성 있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이야기’를 중시한다지만, ‘이미지’에 대한 미학적 욕심 역시 만만치 않다. 그는 “기지발랄하면서도 깊이있는” 라스 폰 트리에와 키에슬로프스키를 좋아하며, “윗세대보다는 덜 뮤직비디오 세대이고 아랫세대보다는 훨씬 더 텔레비전세대”인 자신이 이미지 세대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이미지 언어를 얼마나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느냐가 나의 과제 중 하나다. 하지만 이미지만 난무하는 영화가 아니라 이미지와 이야기가 함께 살아 있는 영화가 내가 목표하는 최고 도달치이다.” <쥬크박스>는 작지만 자신있는 그 첫 번째 실험이다. ▒<쥬크박스>는 어떤 영화 <쥬크박스>는 음치클리닉의 여자강사가 자신의 ‘크리닉’을 찾은 노래 못하는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자신도 성장하고 그들도 ‘치료’한다는 이야기. 노래를 못한다는 것 자체가 이 우화 같은 작품에서 소외의 한 상징이다. 영화는 ‘어른들의 성장’을 이야기하며 ‘소외된 사람들의 웃음과 눈물’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 이 사회는 꼭 무엇인가를 잘해야만 살 수 있는 사회인가, 라는 질문도 영화속에 던져 넣었다. “아니다”라고 말하고 싶어 남자학생 한명은 끝까지 음치에서 구제하지 않을 생각. 처음에 70년대 ‘이류’ 통기타 가수 출신의 40대 아줌마 강사로 설정했던 주인공은 실제 모델을 만나 본 뒤 결혼을 할까말까 고민하는 20대 후반 여성으로 바꿨다. 스타급 배우 중 피아노 연주와 노래실력을 갖춘 ‘누군가’의 캐스팅을 생각하고 있다. <박하사탕>의 이재진씨가 음악을 맡고, 크리닉 ‘교재’로는 대중적인 가요와 팝을 다양하게 선정할 예정이다. 여주인공의 테마송은 창작곡으로 마련한다. 시나리오 작업 외에 현재 스탭이 일부 구성된 상태인 이 작품을 김영 감독은 가을쯤 크랭크인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다. 최수임 기자sooeem@hani.co.kr

아비드는 가라!

주현이란 이름만큼 예쁜 언니를 기대하고 들어선 분당의 자그마한 오피스텔에는 염색도 하지 않은 검은 머리를 어깨에 닿을 만큼 기른 ‘그’가 앉아 있었다. “뭘로 드실래요? 음료수랑 녹차랑 커피 있어요.” 예쁜 언니가 전혀 안 부럽다. 작업실을 둘러보니 금방 정리를 마친 듯하다. 7평 남짓한 룸 안에 빼곡이 들어선 컴퓨터와 비디오 세트, 35인치 텔레비전, 편집기기 등에 둘러싸인 그는 오히려 편안한 눈치다. 가만히 보니 서른을 두해나 넘긴 노총각답지 않게 동안의 얼굴을 지녔다. 취미가 MTV 보기과 음악감상이란다. 학창 시절 제일 싫어하는 과목이 음악이었음을 생각하면 이런 변화가 자신에게도 신기하다. 자신있었던 과목은 과학. 그냥 논리적인 해결과정이 좋았다. 중학교 올라가 자신의 돈으로 마련한 컴퓨터에 빠진 탓도 컸다. 또래들이 오락실과 분식집을 전전하며 놀거리를 찾을 때, 그는 컴퓨터가 가져다주는 신기함을 남 몰래 즐기고 있었다. 그러다 평소에 즐겨보던 월트 디즈니의 애니메이션들이 컴퓨터로 제작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애니메이터 툴과 그래픽 프로그램에도 흥미를 느낀다. 영상에 대한 끊이지 않는 열정은, 그러나 대학의 전공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그의 방황은 경제학과를 출발해 중문과를 경유하여 영화과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이어진다. 영화과에 들어가자 남들보다 느린 출발을 만회라도 하려는 듯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다. 데뷔작격인 <회전>(1997)으로 독립단편영화제의 장려상을 수상하자 영화감독에의 길이 조금씩 보이는 듯했다. 졸업 뒤 그는 오랫동안 염두에 두었던 애니메이션 공부를 시작한다. 영화진흥위가 막 운영하기 시작한 애니메이션 아카데미에 1기생으로 들어가 ‘움직이는 모든 것’을 컴퓨터로 표현해 보았다. 영화작업을 할 때와는 조금 다른 느낌. 프레임과 프레임 사이를 더욱 꼼꼼히 살피게 되었고, 그만큼 디테일한 부분을 처리하는 데 능숙해지게 되었다. 하지만 영화작업의 백미는 역시 장편. 임상수 감독과 함께한 장편 작업은 그동안 자신이 좁은 우물 안에 갇혀 있었음을 깨닫게 한 계기였다.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영화는 대개 아비드 편집기를 거치나 이번 <눈물> 편집의 경우에는 자신이 직접 조립한 편집용 PC로 편집을 마쳤다. 그간 단편작업하면서 쌓은 실력이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모든 가능성을 검토하겠다는 감독의 말에 시험삼아 시작한 일이 무서운 결과를 낳았다. IBM 범용 DV(Digital Video) 캡처카드에다 Adobe Premiere 5.1c 등의 편집용 소프트웨어를 장착하는 등 시스템 구축에 든 돈은 2천만원이 채 안 됐다. 아비드 장비를 갖추려면 몇배의 돈이 들어갔을 작업이었다. 테스트 결과를 꼼꼼히 살펴보던 감독의 입에서 ‘OK’ 사인을 받아내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제 고가의 장비를 더이상 사용하지 않고 간단한 파일 관리만으로도 손쉽게 편집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한때 기기 가격과 작업 방식에 회의를 갖던 충무로에 큰 충격을 안겨준 ‘사건’이었다. 그는 이제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온 기분이란다. 단편을 몇편 더 찍을 것이다. 감독 데뷔는 하늘에 맡긴다고 했다. 좋아하는 일에 뛰어든 이상 천천히 자신을 쌓아가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덧붙인다. 이제 시작이다. 심지현/ 객원기자simssisi@dreamx.net 사진 오계옥 기자klara@hani.co.kr 프로필 1970년생 91년 한양대 연영과 입학 99년 영화진흥위 애니메이션 아카데미 1기 수석 입학 <순환>(1996), <회전>(1997), (1998) 등 단편 다수 97년 <회전>으로 23회 한국 독립단편영화제 장려상 입상 <질주>(1999) 옵티컬 디자인 <눈물>(2000) 편집

잊어버린 유리아이를 찾아서

<디즈니랜드>란 제목의 프로그램을 기억하시는 분들이 계신가요? 디즈니사의 자사 작품 재활용 프로그램쯤 되는 쇼였습니다. 디즈니사에서 만든 장편영화들은 2부작으로 변형되어서, 애니메이션들은 적당히 재편집된 꾸러미 모양으로 이 쇼를 통해 방영되었습니다. 당시까지만 해도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구하기가 매우 힘들어서 이 쇼를 통해 <신데렐라>나 <백설공주> 클립만 하나 나와도 굉장히 신기해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들 중 몇몇 영화들은 기억해두면 꽤 유익한 작품들이었습니다. <페어런트 트랩>의 오리지널 버전이니, <명탐정 디씨>의 오리지널 버전이니 하는 것들이 다 여기를 통해 방영되었으니까요. 물론 그중에는 원래부터 텔레비전영화로 제작된 오리지널도 있었습니다. 국내에서는 오래 전에 비디오로 출시된 특수학교 교사 이야기인 <에이미>와 같은 작품이 기억나는군요. 하지만 오늘 이야기할 작품은 다른 영화입니다. 아마 어렸을 때 한번 보고 저처럼 꽤 오랫동안 기억속에 품고 있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한번 기억을 되살려 보세요. 이 영화는 한 소년과 그의 가족이 시골 마을로 이사오면서 시작됩니다. 소년은 어느 날 밤 밖에서 이상한 불빛을 보고 따라가다가 이네스라는 소녀 유령과 그 소녀의 개 유령을 발견합니다. 유령은 자신의 영혼이 안식을 찾으려면 ‘유리 아이’를 찾아야 한다고 말하죠. 소년은 친구가 된 이웃 소녀와 함께 ‘유리 아이’의 미스터리를 풀기 시작합니다. 이 영화가 당시 아이들에게 남긴 인상이 굉장히 강했다는 사실을 제가 알게 된 건 인터넷 시대가 돼서였습니다. 전 귀신들린 집이나 유령이야기에 관심이 많기 때문에 이런 부류의 사이트나 리스트에 종종 드나들었는데, 꼭 그럴 때마다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을 만났거든요. “혹시 <디즈니랜드>에서 방영했던 어린이영화 기억나세요? 새로 이사온 집에서 주인공 남자애가 소녀 유령을 만나는 이야기였는데?” 대답도 대부분 같았습니다. “아, 저도 기억나요. 하지만 제목이 뭔지는 저도 모르겠군요.” IMDb가 잠시 ‘잃어버린 영화 찾기’를 했을 때 가장 많은 문의가 들어온 영화 역시 바로 이 작품이었습니다. 이제 어른이 된 사람들이 오래 전에 잃어버린 어린 시절의 기억을 짜맞추다 이 어린이영화의 정체에 갑자기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죠. 그러고보니 하이텔에서도 이 영화에 대한 질문을 서너번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렇다면 이 영화의 제목은 무엇일까요? <유리 아이>(Child of Glass)였습니다. 78년 작품이었어요(문화적 활동이 활발한 젊은 사람들이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간직하기 딱 좋은 때 나온 영화죠). 어린이 공포소설로 유명한 리처드 펙이라는 작가의 소설 를 원작으로 삼은 영화였답니다. 이 영화에 나오는 이웃집 소녀 블로섬은 나중에 펙의 고정 캐릭터가 된 모양입니다. 이 영화를 찾아 헤맸던 사람들 중 78년 이후 이 영화를 다시 본 사람들은 거의 없을 겁니다. 비디오로 출시된 작품은 아니니까요. 어떻게 보면 이 영화 자체가 유령이었죠. 존재하는 영화로 남아 있는 대신, 희미한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뇌 속에 숨어 있다가 툭 하면 튀어나오는 그런 유령 말입니다. djuna01@hanmail.net

제23회 클레르몽 페랑 영화제

◆클레르몽 페랑 영화제 2월3일 폐막 대상은 <당신에게 할 말이 있다> 프랑스 중부지방에 자리한 작은 도시 클레르몽 페랑에서 1월26일 저녁에 9일간 열리는 제23회 국제단편영화제가 막을 올렸다. 밖은 비바람이 심하여 몹씨 을씨년스러웠지만 행사의 주무대인 문화의 집 ‘장 콕토’ 실내는 1천석이 넘는 객석을 꽉 채울 만큼 많은 사람들로 들끓었다. 개막식은 같은 프로그램을 8시30분과 10시30분에 반복하는 것으로 두번에 걸쳐 진행됐는데, 나는 두 번째 개막식에 참석했다. 행사는 겉치레가 전혀 없이 심사위원들에 대한 짧은 소개와 주최자쪽의 영화제 절차에 대한 설명으로 간단히 끝났다. 그 대신 이 영화제 특유의 퍼포먼스가 펼쳐졌다. 주인공들은 일자리를 찾지 못한 젊은 감독들이었고 이들은 이 지역의 실업자들을 대신하여 자신들이 처해 있는 비참한 현실에 울분을 터트리면서 독립영화의 사회적 중요성과 시민연대 및 정부 지원의 필요성을 큰 목소리로 강조했다. 클레르몽 페랑, 세계 단편영화의 수도 영화제쪽은 5년 전부터 지역의 젊은이들에게 발언할 기회를 주자는 뜻에서 개막식 무대를 이들에게 내주고 있다. 하기야 클레르몽 페랑 영화제가 젊은이들의 성토로 시작됐다는 걸 생각하면 이런 개막행사는 어쩌면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현재 영화제의 주역들인 앙투완 로페, 로즈 고낭, 자크 큐틸, 조르즈 불롱 등도 23년 전에 대학 강당을 무대로 당시 정부의 무관심과 차별대우에 잊혀져가던 단편영화를 살려내자는 유명한 선언문을 읽으면서 성토를 했고 그에 자극받은 관객과 정부가 이들의 손을 들어주어 영화제의 토대가 닦였다(이 영화제의 역사에 대해선 1999년 <씨네21> 190호에 자세히 썼기 때문에 여기선 빼겠다). 어디나 국제영화제들이 공동으로 안고 있는 문제는 세 가지로 집약될 수 있다. 수준 높은 싱싱한 프로그램을 만들어 충분한 관객을 동원하고 이름난 전문가들의 관심을 많이 끄는 일이다. 그런데 <르 몽드>의 장 미셸 프로동 기자는 클레르몽 페랑 영화제는 이 세 가지에서 다 성공한, 사실상 “세계 단편영화의 수도”라고 긍정적 평가를 했다. 정말이지 클레르몽 페랑에 가면 새로운 흐름을 가늠케 하는 다양한 성향의 수작들이 너무 많아 정신을 못 차릴 정도다. 올해만도 50개국에서 뽑아온 400편의 영화가 올해 새로 생긴 2개의 시사실까지 합쳐 10개의 상영장에서 시사됐다. 클레르몽 페랑 영화제는 10회까지 국내영화제였다. 그러다 13년 전 국제영화제가 되면서 경쟁부문이 프랑스 국내 및 국제경쟁, 두개로 늘어났다. 국내 경쟁부문에는 올해 600편이 출품신청을 해왔다. 그중 경쟁에 뽑힌 영화는 60편이었다. 올해의 국내 대상은 프레데리크 펠 감독의 네 번째 영화 <부인의 조각들>에 돌아갔다. 한 노인이 부인이 죽자 자신의 과거를 지워버린다는 이야기다. 프랑스 단편영화가 성장한 배경은 시사회장 밖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필자는 영화제 동안 이 지역 공산당에서 조직한 단편영화 지원정책에 관한 세미나에 유일한 외국인으로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는 프랑스의 국보보존 문제와 탈중앙집정제의 정책을 담당하는 미셸 듀프 정무차관이 참석한 가운데 단편영화 배급사, 전 칸영화제의 비평가주간 책임자였던 장 로아, 철도 노조와 전기ㆍ가스 노조의 대표들이 발제자로 초대되어 단편영화의 구원책을 진지하게 논의했다. 프랑스 노동자 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던 주요 영화들에 대한 신간 책자도 한편에서 팔리고 있었다. 클레르몽 페랑의 지금 시장은 사회당 출신이며, 어느 일간지에 실린 글대로라면 클레르몽 페랑시는 이 지역에서 만들어지는 영화의 제작지원에 앞장 서고 있다. 한국영화 3편 경쟁부문 진출 한편, 국제 경쟁부문에서는 모두 1650편이 참가신청을 해왔다. 결국 77편이 선정됐고, <자화상>(이상열), <지우개 따먹기>(민동현), <엔조이 유어 섬머>(이형곤) 등 한국영화 3편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올해 신설된 온 라인 와나두 부문에 <망막>(김은경)이 올랐다. 이 부문은 이메일 서비스업체 와나두 시청각이 프랑스 텔레콤과 공동으로 운영하고 있다. 그밖에 단편애니메이션 <언년이>(유진이)가 비경쟁인 어린이영화부문에 초청됐다. 국제경쟁의 대상은 그리스 출신의 여감독 카타리나 필리오투의 두 번째 영화 <당신에게 할말이 있다>에 돌아갔다. 결혼생활 20년이 지난 어느 날 부인의 순간적인 외도로 생기는 부부간의 애정 문제를 다룬 영화다. 국제부문의 심사위원은 콘스탄틴 브론지트(감독, 러시아), 와시스 이오프(배우·작곡가, 세네갈), 황규덕(감독·교수, 한국), 세드리크 칸(감독·시나리오 작가, 프랑스), 도리스 클로스터(사진작가·기자·교사, 미국)였다. 클레르몽 페랑 영화제에는 다른 영화제서 볼 수 없는 대규모 단편영화 시장이 있다. ‘제2의 칸’으로 불리는 이곳의 필름 마켓은 16년 전에 문을 열었고 영화제 기간 5일 동안 900편의 영화가 25개의 국제배급사들을 통해 소개된다. 한국에서는 2년 전부터 미로비전이, 인디스토리가 지난해부터 참가하고 있다. 올해에는 진흥위원회의 지원으로 두 회사가 같이 큼직한 자리를 마련하여 상당한 분량의 단편영화를 소개했다. 아직 그 성과에 대해 말하긴 이르지만 스페인의 카날 플러스와, 아르테 방송사, 미국의 아톰필름 등이 구체적인 관심을 보였고, 단편채널을 갖고 있는 일본의 위성방송 TV Man Union은 올 봄에 한국의 단편영화를 대대적으로 방영할 계획이다. 그리고 한두 영화제에서도 한국단편회고전을 개최하고 싶다는 뜻을 밝혀왔다. 클레르몽 페랑=임안자/ 해외특별기고가 클레르몽 페랑 영화제 국제경쟁부문 수상작 대상 <당신에게 할말이 있다>(Ela Na Sou Po) / 카타리나 필리오투 / 그리스 심사위원 특별상 <불려지기를>(To Be Called For) / 안나 멜리키안 / 러시아 관객상 <릴리>(Lilly)/ 마르완 하메드/ 이집트 리서치 상 <누군가 무엇을 죽였다(혹은 최후의 순수성)>(Alguien mato algo(o la ultima inocencia)) / 호르헤 나바스 /콜롬비아 음향창작상 <복사 전문점>(Copy Shop) / 비르질 비드리히 / 오스트리아 아톰필름상(최우수 애니메이션상) <아버지와 딸>(Father And Daughter) / 미카엘 두도크 데 비트 / 네덜란드ㆍ영국 촬영상 <튼 손을 위한 온구엔토>(Ungliento Para Manos Agrietadas) / 세자리 자보르스키 /베네수엘라 청년상 <누군가 무엇을 죽였다(혹은 최후의 순수성)>(Alguien mato algo(o la ultima inocencia)) / 호르헤 나바스 /콜롬비아 카날 플러스상 두려울 것 없다(Nicego Strasnego) / 울리아나 쉬키나 / 러시아 에퀴메니상 서머타임(Summertime) / 안나 루리프 / 스위스 와나두 단편상 필요한 어떤 방법으로도(By Any Means Necessary) / 에밀리 맨텔 / 영국 나쁜 동물들(Bad Animals) / 대비드 버드셀 / 미국 와나두 관객상 최종적 결말(The Showdown) / 마시모 가라티 코스타/영국 기자상 서머타임(Summertime) / 안나 루이프 / 스위스

클레르몽 페랑에서 만난 한국영화

올해의 여러 회고전 가운데 국가별 행사는 스페인(16편)과 한국(22편)전 두 가지였는데, 관심의 초점은 한국이었다. 1992년 유럽에서 최초로 열렸던 페사로영화제의 장편 회고전에 비할 수 있는 단편영화사의 획기적인 사건으로 봐도 틀린 말은 아니다. 이번 행사를 준비한 로페와 고낭에게 회고전을 열게 된 동기를 물어봤다. “클레르몽 페랑 영화제에 소개된 한국 작품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최근 수상까지 할 정도로 수준이 높았다. 지난해에 한국에 들렀을 때 한국영화의 넘쳐나는 에너지와 자국의 영화를 지키려는 영화인들의 굳은 의지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스크린쿼터 문제만 해도 프랑스에선 텔레비전 쿼터에 그치지만 문제를 바라보는 데 두 나라 사이에는 공통점이 많다고 생각했다. 단편영화가 1년에 400편씩 나온다는 데도 놀랐다.” 이번 회고전이 크게 성사된 데는 진흥위원회의 지원이 큰 도움이 됐다. 유길촌 진흥위원장은 20여명의 젊은 감독들 그리고 영진위 국제부의 직원 두명을 데리고 현지를 방문하여 영접에서 외교 문제까지 열심히 뒷바라지를 해줬고, 그 결과 영화제 참가자들과의 대화가 만족할 만큼 잘 이뤄졌다. 아무튼 감독, 배우, 제작자, 배급자 등 50명에 가까운 단편영화인들이 클레르몽 페랑에 갑자기 한국 바람을 일으켰다. 한 가지 아쉬웠던 건 한국영화의 토론장에 초대된 발제자의 준비가 미비해 기대했던 만큼의 효과를 보지 못한 점이다. 한편 한국에서 처음으로 심사위원으로 참가한 황규덕 감독은 “요즘 이곳 술집이나 식당에 들르면 사람들이 한국영화에 대해 말하는 걸 자주 듣게 된다. 한국영화에 대한 열기를 피부로 느낀다. 한국영화는 이제 국제무대에 오를 준비가 돼 있는 듯하다”고 말했다. 영화진흥위원회 부설 영화아카데미 교수이기도 한 황 감독은 “이번 영진위의 도움은 단편영화의 국제진출 차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고 자평 아닌 자평을 더하기도 했다. 그의 눈에 비친 클레르몽페랑은 어땠을까. “이곳 관객의 열성은 부산영화제와 비슷하다. 그러나 유치원생에서 노인에 이르는 여러 세대가 어울리는 진풍경은 부산에 없다. 그게 너무 부럽다.”

김홍준·정성일의 종횡4담 [2] - 문화산업

문화산업론은 비만, 영화문화는 발육부진 한국영화에 관한 담론을 지배해온 문화산업론은 인터넷 비지니스의 활황과 더불어, 더욱 기세를 떨치고 있다. 그러나 과연 영화문화는 어떤 발전을 이루었는가. 미진한 미학적 성취, 진정한 시네마테크와 필름아카이브의 부재, 대학 영화관련 학과의 과다와 영화학의 부진이 빚는 극심한 불균형 등 한국 영화문화의 왜소화를 초래한 주범은 혹시 문화산업론이 아닌가. 김 | 한국영화계를 과연 문화산업이 지배하고 있는지부터 의문을 제기하고 싶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한국영화가 자본주의적 사고를 하기 시작한 것도 90년대라고 생각한다. 그 이전 제작시스템은 식민지 반봉건사회 비슷한 것 아니었나 싶다. 때론 국가독점자본주의 성격도 있었지만. 반면 지금의 한국영화 현실은 문화적인 양상에서마저도, 후기 자본주의적 모습이 보인다. 자본주의적인 사고를 한다는 것이 꼭 그 산업이 완숙한 단계에 진입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지금 한국영화의 문제를 문화산업론으로 파악하는 것은 논지를 흐릴 수도 있다. 강력한 의지나 합의의 도출에 의해서 문화산업적인 방향으로 한국영화가 양성된 게 아니라 우연적이고 우발적인 요소의 모임에 따라 흘러왔고, 오히려 그런 것은 한국영화를 만들어가고 담론을 형성해가는 개개인의 역할과 일들이 모여서 된 결과다. 산업적 영역에서 보면 한국영화가 보이고 있는 여러 징후들을 생각할 때 너무 단기적인 것 아닌가, 하는 우려를 저버릴 수 없다. 여러 자본이 유입되고 제작이 활성화된다거나, 기획만 좋으면 돈없어 영화 못 찍을 일 없어졌고, 배급과 마케팅망을 확대시켜 수익을 극대화한다든지 하는 것은, 순전히 산업적인 차원에서만 보면 발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상한 건 전체적으로는 에너지가 있고 다이내믹하고 기도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하나하나는 허약하다는 점이다. 그래서 한국영화의 구석구석에 박힌 사람들이 혼란스러워 한다. 이건 일종의 미스터리다. 부분은 부정적이고, 비효율적이고, 비합리적인 게 많은데, 왜 전체는 잘되는 모습으로 느껴질까. 정 | 많은 점에서 홍준이 형이 영진위 위원이기 때문에 모든 변화의 폭풍, 그 핵에 있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것 같다. 그 자리에서 본 관점일 거다. 난 다른 견해다. 같은 견해에 대한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겠지. 거칠게 표현하자면, 한국영화산업에도 정교하게 평균이윤율저하의 법칙이 적용되고 있다. 자본이 커진다 해도 이윤이 약속되는 건 아니고 더 많은 노동을 가져간다. 70년대 한국영화는 영화자본가들의 해방구였고 80년대에 기업과 처음 만났다. 기업의 논리가 영화산업에 작용하게 됐고, 영화가 미디어산업이 되고, 텔레비전, 케이블과 비디오 등과 접합되는 순간, 방치됐던 이 시장이 정교한 방식으로 잉여가치를 만들며 움직이는 과정에서 개인이 느끼는 허탈함, 박탈감은 당연한 것이다. 더 커다란 문제는 한국영화산업이 100만, 200만명의 관객을 동원하고 있다고 해서 새로운 잠재관객을 끌어들였다고 생각한다는 거다. 난 반대다. 그건 영화가 특정관객의 문화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럴 때 문화산업은 황혼기를 맞는다고 생각한다. 더이상 젊은이들에게 관심없는 문화가 되면서부터, 에너지가 빠져나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인상적인 풍경은, 90년대 초에는 영화관을 문제삼지 않았지만, 90년대 후반엔 영화가 나빠도 좋은 영화관을 찾는다는 것이다. 영화관의 분위기, 거기서 쓰고 싶은 시간이 중요해지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IMF가 다가오기 전에 사람들이 누렸던 그 레저타임을, 더이상 소비할 수 없어서 후퇴하였으나 전과 같은 방식으로 소비하고픈 욕망의 허영이란 느낌을 받는다. 사실 레저라는 것은 노동시간과 레저시간 사이에 미묘한 접점 사이에서 마련된다. 일반 노동자들이 소비할 수 있는 접점이, 영화보고 밥먹고 데이트하고 주차비내고 하는 정도의 수준으로 결정된 것이다. 문제는 이 산업을 주도해야 할 젊은이들이 놀거리는 많아졌다는 사실이다. 교회를 제외하면 서울 거리를 새벽까지 밝히고 있는 곳은 게임방뿐이다. 90년대 초반엔 비디오방이었다. 빠른 속도로 옮겨온 것이다. 젊은이들이 욕망을 소비하는 그 구조가 구멍가게 수준이 아니라 거대한 산업자본이 되어가고 있는 지금, 영화는 거꾸로 허약해지고 있다. 90년대 초반에는 타르코프스키, 키아로스타미, 키에슬로프스키의 영화를 개봉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더이상 볼 수 없다. 연말에 영화베스트 10을 뽑기도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이제는 영화 애호가들이 좋은 영화를 볼 수 있는 곳이 영화제뿐이다. 영화제는 거꾸로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해방구가 아니라,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게토가 되어버린 느낌이다. 한국의 영화산업은 너무나 자본주의적이다. 김 | 정확한 지적이다. 내 관점은 산업과 문화를 동시에 진흥한다는 모순된 직무 때문에 개별사업에 적용하는 방법을 찾는 입장이라 그랬던 것 같다. 영화제가 게토가 되고 있다는 것도, 맞는 말이다. 영화산업과 유착해 예술영화 마케팅의 초석이 되는, 시장에서 힘을 얻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그런 게 뉴욕영화제나 칸영화제의 기능이다. 그렇지 않은 대부분의 영화제는 산업의 논리에서 소외된 영화들의 해방구다. 흥미로운 변화가 한 가지 있다. 영화제는 대부분 작품 상영료를 안 줘왔다. 판권 소유자도 영화제가 그 영화의 마케팅의 가치를 높여주고 홍보효과도 있으니까, 별도의 비용을 요구하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부천영화제도 그랬고. 그런데 점점 그럴 수 있는 영화가 줄어든다. 그건 두 가지 이유에서다. 영화제가 너무 많다는 거다. 괜찮은 영화는 일년 내내 영화제를 돌아야 하는데, 보도자료와 프린트 발송 등 잔일이 너무 많아서, 영화제 전담기자를 두어야 할 판이란다. 두 번째 이유는, 부가가치를 되돌려 받을 수 있는 틈새시장이 줄어들었다는 거다. 영화제 관객 이상의 볼륨을 기대할 수 없는 거다. 예컨대 어떤 영화제에서 어떤 영화를 500명이 봤다면 그게 그 나라에서 볼 만한 사람이 다 봤다는 거다. 영화제 출품이 마케팅의 종착역이라고 생각하는 관계자들이 많아지고 있다. 그건 전세계적인 현상이다. 한국영화가 문화로서 산업으로서 과연 희망이 있느냐는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단편 제작이 늘어나고, 영화관련학과도 늘어나고, 해외영화제 출품도 잦아지고, 해외시장에서도 제작비를 도울 만한 회수가 가능해지고, 공공기관이 영화진흥정책도 운영한다. 영화제에서 만난 다른 아시아 영화인들은, 이런 한국영화계를 선망의 눈길로 바라본다. 하지만 영화 문화 차원에선, 낙관할 수 없는 조짐들이 보인다. 영화는 속성상 상업영화의 시스템 속에서 만들어진다. <시민케인> <집시의 시간> <화양연화> <전함 포템킨>도 어떤 의미에선 상업영화로 만들어졌고, 당대 관객에겐 오락의 수단이고 제작자들에겐 이윤추구의 수단이었을 거다. 상품으로서 생명이 끝난 뒤에 예술로서의 새로운 평가를 하는 것이, 상업영화 시스템 속에서의 속성이다. 그렇다면 한국영화, 90년대 후반 2000년대 초반의 영화들 중에는 어떤 영화가 당대를 증언하고 반영한 영화, 예술의 진정성에 대한 증거로 후대에 살아남을까. 퇴보하고 있다는 느낌이 많이 든다. 우리가 그토록 규탄해 마지않았던 낡은 질서가 지배했던 70, 80년대 영화들 가운데 지금 의미있는 작품으로 남은 것들을 생각하면 과연 지금이 발전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최근 EBS에서 <한국영화걸작선>이란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데, 난 60년대가 한국영화의 전성기였다는 걸 믿지 않았다. 한국영화의 전성기가 아니라, 한국의 오락산업이 유일하게 영화였다. 산업으로 볼 수 없었다. 그런데 60년대는 한국영화가 행복하게 만들어지고 행복하게 만났더라. 지금 한국영화가 활발히 만들어지고 있지만 그것이 권력 때문인지 시장의 요구 때문인지, 예술적인 영화와 상업적인 영화의 분명한 이분법이 존재한다. 60년대에는 잘 만든 영화와 못 만든 영화가 있었을 뿐이다. 지금이 한국영화의 중흥기라고 하지만, 그런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독립영화의 활성화나 다변화, 또 디지털 키드들에 의해 주도될 새 시대의 영상문화가 이러한 상업영화의 헤게모니를 흔들고, 우리가 생각하는 넓은 의미의 영화라는 것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 문화적인 역할을 하는 데 힘이 될지는 아직 지켜봐야 될 일이다. 정 | 지금 이 세대들이 헤게모니를 만들어가는 그 중심점으로 들어왔다. 영진위에 들어간 분들을 개인적으로 알고 있다. 홍준이 형, 장산곶매('여기서 방점은 장산곶매에 붙습니다'라고 강조)였던 이은, 이용배씨, 함께 일했던 이연호씨 등등. 이 사람들이 이전 영진공에 비하면 합리적이고 올바르게 의사결정을 하고, 투명하게 진행하고 있지만, 왜 관객들을 위해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가. 중요한 건 그 영화문화의 질을 끌어올릴 수 있는 건 관객이고, 관객이 영화를 올바르게 사랑해줄 때 좋은 영화가 만들어지고 다양한 문화가 형성된다는 점이다. 지금 의사결정은 당장의 산업부흥에 모든 방점이 찍혀 있는 것 같다. 지적한 문제에 대해선 공감한다. 그런데 한국영화가 허약해져가는 것은, 안정된 구조 속에서 점점 더 독점자본화돼 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걸 정부가 지원한다? ‘영화’를 떼면, 정경유착이다. 다소 심한 표현을 한 것일 수 있지만, 영화를 보고 사랑하는 사람의 입장에선, 아무 혜택도 못 받고 있다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뇌관을 건드린 건가. 김 | 전적으로 동감한다, 개인적으로. 위원이 위원으로서 일할 때 개인적인 성향이나 관객으로서 누리고 싶은 혜택이 우선시되는 배경을 만들어내는 것은, 그것에 대한 사회적 합의다. 공적 자본을 집행하는 기관이기 때문에. 영진위가 지금 형태로 개편된 것은 정부의 지원이 따르는 것에 대한 암묵적인 동의는, 선언적으로 영화산업과 문화를 진흥한다는 것이다. 암묵적인 동의의 상당부분이 산업에 방점이 찍혀 있을 것이고, 사회적 합의가 언론과 기관과 개인을 통해 영화계 전체의 의견으로 진흥위원에 도달해 오는데, 그중 산업의 논리와 산업의 목소리가 크다. 개인적으로는 산업의 논리라는 큰목소리에 짓눌려 정말 해야 하는 영화문화를 위한 일들을 할 여력마저도 박탈당하는 것을 막아내는 데 급급했던 것 같다는 반성을 해본다. 여기서 애매한 문제가 발생한다. 위원들끼리 합의해서 만들어내면 되는 것일까. 그럴 수만 없는 것이, 여러 가지 복잡한 이해관계 속에서의 어려움 때문이다. 책임 회피일 수도 있지, 구체적으로 발현되는 것은 정책을 통해서다. 새롭고 다양한 방식의 충분한 지원이 있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수혜자가 될 사람들이 그 자신이 수혜자라는 걸 알고 받아가 주는 일이다. 수혜의 차원이 아니라 권리의 차원에서 주장하기 위해서는, 면밀하게 정보를 수집하고 자료를 확보하고 논리를 개발하고 무엇보다 결집된 힘을 갖고 목소리를 키워야 한다. 정 | 정견 발표같다. 산업논리 속에서 낭만적인 영화광들의 전투를 보는 것 같아 매우 마음아팠다는 얘기다. 문화산업론을 얘기하면서 한국영화를 언급할 수밖에 없다. 지난 한해 동안 내가 좋아한 영화들은, 물론 내 안목이 절대적이란 건 아니지만, 공통적으로 흥행에 실패했더라. 한국에서 만들어지는 영화의 담론들이 예전에는 문제의식을 갖고 끊임없이 질문을 끌어내고 던졌으나, 최근의 공통적인 특징은 흥행의 경기장에 들어섰다는 것이다. 산업의 10종 경기에서 승리한 자만이 모든 것을 얻는다는 거다. 이 힘의 논리가 해외에 한국영화를 알리는 데도 적용된다. 한국에서 흥행한 영화들을 주목하고 또 가져간다. 한국 대중에게 선택받은 영화를 통해 한국을 읽으려는, 알 수 없는 카르텔이 형성되고 있다. 이런 시선이 한국영화산업 속에서 흥행을 부추긴다. 더욱더 위험한 것은, 이 산업이 팽창하는 가운데, 젊은 친구들이 영화를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독립영화가 제 수명을 다하고, 어느 날 인디영화가 출현했다. 한국의 독립영화는 단순히 인디영화라고 하기엔 부족한 역사성이 있지 않었다. 그러나 이젠 그런 역사성이 사라져간다는 것이다. 이런 영화들을 만드는 이들의 공통점 중 하나는 영화제를 통해 뜨고 주류영화로 가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자극적인 제목을 붙이고, 충격적인 소재를 끌고 들어와, 하여튼 눈에 들려 한다. 언론이 호들갑을 떨면 대중이 몰리고, 반응을 얻으면 제작자가 컨택해 오는데, 영화 만드는 이들이 게임의 규칙을 너무 잘 알고 있다. 영화에 대한 담론들은 대중의 욕망에 관한 담론들, 산업에 대한 담론들이 돼가고 있다. 누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게 할 수 있을까. 정책에 적잖은 기대를 했고, 정책결정자들의 이름에 기대했다. 아직 희망을 버리진 않았다. 단순간에 이뤄지지 않는다는 건 80년대의 교훈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노력들이 더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 | 우리나라의 영화에서 정책이란 것, 영진위라는 것은 그만큼의 판도를 결정지을 만큼의 권력을 갖고 있는지. 약하다. 여기에 힘을 실어줄 수 있는 사회적 합의가 부족하다는 것도 있고, 정책 자체가 명백한 철학과 오랫동안 축적돼온 시행착오를 바탕으로 결정되는 게 아니라, 지금부터 시행착오를 저지르며 배울 수밖에 없는 입장에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 그런 시행착오만이 확대돼 보여지고 이야기되는 건 아닐까. 정 | 아버지가 없었는지, 나약한 아버지가 있는지, 모르겠다. 분명한 건 그 아버지가 죽지 않고 계속 형들을 호명하고 있다는 거다. 그 형들이 우리가 타협하길 바라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어떤 방식으로 아버지와 작별할 것인가, 물리쳐버릴 것인가에 대해서 자꾸만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이 형들이 사소한 것들에 사로잡혀 아버지와 싸우지 않는다. 요즘 한국영화가 보이는 두 가지 공통적인 특징은, 사소한 것에 대한 질문, 그리고 주인공들의 죽음에 대한 나르시시즘이다. 죽는데 주변 사람들이 말리지 않는 모습들이다.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이 병장이 불현듯 자살했다. 감독은 이들을 만나게 해주려 했다지만, 살아도 상관없는 사람을 기어이 죽였고, 그것에 대해 대중은 침묵을 지킨다. <비천무>에서 주인공은 하여튼 죽는다. 부모는 아들의 장래를 걱정하지 않고. 아들은 부모의 죽음을 보면서 저항하지 않는다. <리베라 메>에서 주인공은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간다. 또 한명의 소방관도 그저 나르시시즘을 느끼듯이 죽음을 받아들인다. <박하사탕>은 더할 나위 없이 죽음으로 시작한다. 한편으로는 단절을 요구하는 대중의 욕망이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새롭게 시작하기에는 용기가 없어 보인다. 사소한 고민에 끈질기게 매달려 거꾸로 큰 고민을 잊고 있다. 이것이 지금 한국영화의 시대정신이 아닌가. 영화와 영화인들 사이에 침묵의 합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치지 못한다. 요즘 유행처럼 이야기지어진 ‘일상성’이, 지금 영화를 하고 있는 우리의 시대정신은 아닌가. 흥행에 성공한 영화들은 죽음을 바라고, 제작자들은 관객이 그걸 바란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것들이 한국영화에만 나타나는 특별한 징후다.

고어, 자극보다 풍요로운

아마 앞으로 전 의 금요일 자정에 방영했던 호러영화들에 대해 꽤 자주 이야기할 겁니다. 정말 좋아했던 시간대였으니까요. 요새 그 시간대에 호러영화를 방영하지 않는다는 게 서글퍼질 지경입니다. <트왈라이트 존>의 영화판 도입부에 나오는 노래 기억하세요? 대충 이렇게 시작되지요. ‘금요일 밤 호러영화가 없으면 무슨 재미로 사나.’ 네, 그 기분 이해합니다. 이해해요. 그때 굉장히 많은 영화들을 접했고, 돌이켜 생각해보면 제 영화 취향을 결정한 것들도 그런 영화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좋은 영화들만 했던 시간대는 절대로 아니었지만 규칙적으로 보다보면 거둘 수 있는 수확은 엄청났습니다. 조지 로메로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도 그런 영화들 중 하나였습니다. 습관적으로 신문 텔레비전 프로그램 안내란을 뒤적거리다 그 제목을 발견하고 얼마나 기뻤는지. 당시는 꽤 어렸을 때라 호러영화에 대한 제 지식이 그렇게 대단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전 조지 로메로가 누군지 알았고, 그의 첫 영화가 얼마나 중요한 영화인지도 알았으며, 결정적으로 그 작품이 ‘ne plus ultra’의 평판을 들을 만큼 자극적인 호러영화였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었었거든요. 하여간 그날 밤 전 완전무장을 했습니다. 불을 끄고, 이불을 뒤집어쓴 뒤, 겁먹을 때 쓰려고 봉제인형들을 잔뜩 안에 끌어다놓았죠. 준비가 끝나자 전 당시 제가 전용으로 쓰고 있던 고물 흑백 텔레비전을 탁 켰습니다. 어땠냐고요? 솔직히 실망했었답니다.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은 제가 생각했던 것만큼 자극적인 영화는 절대로 아니었습니다. 말이 ne plus ultra죠. 토드 브라우닝의 <드라큘라>도 왕년의 ne plus ultra였다는 걸 아세요? 자극적이기는 그 몇주 전에 보았던 여대생 기숙사에 뛰어든 살인마 영화가 훨씬 더했습니다. 혹시 잘린 게 아닐까 생각도 해봤습니다. 하지만 버전은 잘린 부분이 전혀 없었습니다. 있었어도 아주 작은 부분이었겠지요. 적어도 그때 제가 보았던 버전은 국내 비디오 출시 버전보다 훨씬 멀쩡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비디오 버전이 왜 그렇게 찢겨져 나갔는지 아직도 모르겠어요. 그래도 전 고전에 대한 예우는 늘 차리는 터라, ‘그래도 좋은 영화이긴 했어’라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웠습니다. 근데 진짜 경험은 그때부터 시작되더군요. 지금까지 제가 보았던 로메로의 어두컴컴한 비전이 구렁이처럼 슬금슬금 기어나오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 축축한 불쾌함은 그뒤로 거의 일주일 동안이나 저를 괴롭혔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공포와 불쾌함의 정의에 대해 생각하고 제가 그때까지 보았던 공포영화들을 ‘분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이 느긋하게 저에게 전해주었던 그 축축하고 황량한 느낌이 서서히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그 일주일 동안 제가 느꼈던 불안한 불쾌함은 이 영화가 처음 개봉되었을 당시 관객이 느꼈던 자극보다 훨씬 풍요로운 것이었을 겁니다. 당시 사람들은 그때까지만 해도 경악스러웠을 고어의 자극에 정신이 나갔었을 테니 다른 생각이 들 리 없었겠죠. 그 잔혹한 껍질을 벗겨내고 밑의 좀더 미묘한 공포의 뉘앙스를 즐기는 것은 저 같은 후대 관객의 몫이었습니다. djuna01@hanmail.net

진실과 재미, 그 힘겨운 줄타기

역사적 사실과 극적 재미 사이에서 힘겨운 줄다리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 실화를 소재로 한 영화의 운명인가보다. 최근 러시아 잠수함을 배경으로 한 영화 도 이런 딜레마에 부딪혔다. 이 영화는 크랭크인을 눈앞에 두고, 영화의 모델이 된 러시아 선원들의 거센 반발을 사고 있다. 최악의 경우 법적 싸움으로까지 이어질 태세다. 해리슨 포드와 리암 니슨이 출연하고 캐스린 비글로가 연출하는 는 1961년 소련 최초의 원자폭탄 보유 잠수함이 원자로 이상으로 항해중에 위기를 맞았던 실제 사건을 다루고 있다. 이 잠수함의 선장 니콜라이 자테예브의 자서전을 토대로 작업한 시나리오가 지난해 겨울 생존 선원들에게 건네진 것이 사건의 발단. 이들은 할리우드가 자신들의 이야기를 심하게 왜곡하고 캐릭터 묘사에서도 러시아인에 대한 스테레오타입에 천착했다며, 불쾌감을 표시했다. “우리를 멍청하고 무례한데다 경보가 울리는 순간에도 술에 취해 카드게임을 하고 있었다고 묘사했다”는 것. 러시아 NTV도 “시나리오상에서 러시아 선원들은 ‘바다’나 ‘잠수함’보다 ‘보드카’와 ‘마시자’는 단어를 훨씬 많이 사용한다”고 보도했다. 생존 선원들은 시나리오가 수정되지 않을 경우, 제작중단을 요구하는 법적대응을 벌일 것으로 보인다. 실화를 영화화하는 과정에서 사건 관계자들과 제작진 사이에 논쟁이 벌어진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은 2차대전을 지나치게 미국적으로 해석해 비난을 샀으며, 베트남전쟁을 그린 <우리는 한때 군인이었다>는 베트남 참전자들로부터 좋지 않은 여론을 불러일으켰다. 언제나 그렇듯 할리우드는 담담하다. 의 제작진도 이 논란을 기화로, 오히려 촬영 스케줄을 다잡고 의욕을 과시하고 있다. 공동제작사인 <내셔널 지오그래픽 텔레비전>은 “이 작품은 처절한 생존 실화를 밀도있게 담아낸 드라마로, 뒷받침하고 있는 자료도 방대하다”고 밝혔다. 믿거나 말거나.

제12회 유바리 국제판타스틱영화제

<리베라 메> 일본 극장 입성 준비 삿포로 공항에서 버스를 타고 약 한 시간 걸려 도착한 유바리라는 작은 도시는 처음부터 영화적인 볼거리로 눈길을 잡아끌었다. 슈파로 호텔 사이로 난 좁은 도로엔 낮은 상점 건물들마다 온통 지금은 추억의 영화로 자리잡은 오래된 영화들의 그림 간판들이 걸려 있는 것이다. 거기에는 찰리 채플린, 존 웨인, 마릴린 먼로, 알랭 들롱, 장 가뱅에서부터 일본의 미후네 도시로와 이시하라 유지로 등에 이르기까지 꽤 많은 옛 스타들이 지극히 고풍스런(?) 터치로 그려져 있었다. 하지만 이런 풍경만을 보고서 과연 이곳은 영화와 관련된 도시 같다고 생각하고 있을 시간은 그리 오래 가지 않는다. 이 거리를 조금 둘러보면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되는데, 유바리 키네마 거리(夕張キネマ街道)라는 이름이 붙은 이곳에 아이러니하게도 시네마, 즉 영화관이라곤 도통 눈에 들어오질 않는다는 것이다. 게다가 눈 속에 잠긴 이 도시의 지나친 고요함마저 떠올리면, 정말이지 이곳이 국제영화제가 열리는 곳이 맞을까, 라는 의문이 고개를 들기에 이른다. 초행자의 이런 추측에 올해로 벌써 열두해째를 맞는 유바리 국제판타스틱영화제는 실제로도 국제영화제라기엔 아주 소박하기만 한 자태로 응수해주었다. 예컨대, 정식 영화관이 아니라 문화스포츠센터나 호텔의 강당 같은 장소에 임시로 자리를 마련해 영화를 상영한다는 점이나 번듯한 영화제 데일리조차 발행하지 않는다는 사실 등은 유바리영화제가 한국에서 개최되는 여타 국제영화제들과 비교해도 규모면에서 크지 않은 수준임을 일러주었다. 북한영화 만났다 공식초청 부문, 영 판타스틱 경쟁 부문, 디지털 시어터 부문, 판타스틱 오프 시어터 부문, 판타스틱 비디오 페스티벌 등으로 짜여진 이 영화제의 프로그램 가운데에서 외형적으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아무래도 공식초청 부문일 터. 이 부문에서 선보인 17편의 영화들 가운데에는 한국 관객에게는 이미 잘 알려진 ‘판타스틱’ 영화들이 다수 포진해 있었다. 올해 영화제의 개막작인 <프루프 오브 라이프>와 폐막작인 을 비롯해, <나인 야드>와 <치킨 런> 등의 할리우드영화들이 이미 한국의 관객에게 정식으로 인사를 했던 작품들인 것. 사미르 마흐말바프의 <칠판> 같은 경우도 부산영화제를 통해서 소수나마 한국 관객의 눈을 거쳐간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공식초청 부문의 식단이란 게 일본 관객에게는 어떤지 몰라도 적어도 한국인이 봤을 땐 당연하게도 다채롭고 푸짐한 성찬(盛饌)처럼 느껴지진 않는다. 이 부문에서 특기할 것으로는 북한영화 <태권도 여인 소미>(1997)가 상영되었다는 점을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고려 시대를 배경으로 소미라는 이름의 여주인공이 무예를 연마해 결국 부모와 스승의 원수를 갚는다는 내용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 북한판 무술영화는 <민족과 운명> <임꺽정> 등 북한에서 주로 시대극과 역사영화를 만들었던 장용복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최근 일본을 강타하고 있는 한국영화의 열풍은 약 1만6천명 정도의 인구가 살고 있는, 홋카이도의 이 아담한 도시라고 해서 그냥 비켜가진 않았다. 양윤호 감독의 ‘파이어 액션영화’ <리베라 메>가 공식 초청 부문에 초대돼 일본 관객에게 또 한번 한국영화에 대해 강한 인상을 심어주었던 것. 이 영화의 상영장인 문화스포츠센터를 가득 메운 일본 관객은 영화의 흥미도 흥미려니와 무엇보다도 CG 도움없이 ‘불’을 연출해내는 솜씨에 놀라워하는 눈치들이었다. 유바리에서 보여준 <리베라 메>의 선전(善戰)은 이 영화가 일본 극장가에 공식적으로 입성하는 데에도 유리한 위치에 서게 해줄 전망이다. 제작사쪽에서는 일본 개봉까지 남은 기간 동안 영화의 드러나는 약점들을 보완할 것이라고 한다. <다크 엔젤>,<버서스> 관심 끌어 유바리에서 선보인 할리우드영화들 가운데 아직 한국 관객에게 공개되지 않은 것으로 <다크 엔젤>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이 영화는 제임스 카메론이라는 이름이 주는 묵직한 중량감 때문에라도 관객의 관심을 끌어모은 영화이기도 했다. 그러나 제목 뒤에 굳이 ‘제임스 카메론이 만든’(Created by James Cameron)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는 이 영화 <다크 엔젤>은 실은 제임스 카메론이 ‘연출’한 것도, 또 그의 ‘영화’도 아닌 그런 작품이었다. 더 정확히 부연설명하자면, 그것은 카메론이 제작 총지휘와 공동각본을 맡아서 제작된 텔레비전 시리즈 <다크 엔젤>의 첫 에피소드였던 것이다. 영화는 미래의 2009년에서 시작한다. 어느 연구소에서 유전자 조작을 통해 태어나고 양육된 12명의 아이들이 연구소 탈출을 감행한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사살되고 단 한명만이 살아남는데, 그 생존자는 맥스라는 여자아이였다. 이제 영화는 10년 뒤, 그 본격적인 무대인 2019년으로 넘어온다. 보통 인간보다 훨씬 뛰어난 신체적 능력을 가졌고 또한 미모도 출중한 소녀 맥스는, 억압과 빈곤, 부패로 가득한 세계에서 정의로운 ‘검은 천사’로 자라난다. 2019년이라는 시간적 배경과 유전자 조작의 모티브는 각각 <다크 엔젤>이 <블레이드 러너>와 <엑스맨>의 요소를 흡수·융합한 영화임을 일러준다. 그렇듯, 영화는 암울한 미래세계에 대한 풍경과 맥스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자주 왔다갔다한다. 문제는 영화가 그 두 이슈 사이를 어정쩡하게 왕복하다가 정작 카메론적인 스펙터클조차도 보여주지 못한다는 점이다. 곧 다음 이야기가 뒤를 이을 테니 속단하기는 이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다크 엔젤> 시리즈의 첫 편은 적당한 맛보기 정도로 끝나고 만다. 아마도 이 영화제에서 가장 많을 수를 차지할 일본영화들 가운데 특히 ‘인상적인’ 영화는, “네오 인디펜던트의 기수”라는 다소 모호한 말로 소개된 기타무라 류헤이 감독의 <버서스>(Versus)였다. 영 판타스틱 경쟁 부문에 초대된 이 영화는 정말이지 숨쉴 사이를 주지 않고 전개되는 영화다. 처음서부터 끝까지 영화는, 아니 영화 속 인물들은 싸우고 싸우고 싸우고 또 싸운다. 그것도 그냥 싸우는 것이 아니라, 얼굴에 피를 흠뻑 묻혀가면서 싸운다. 목이 잘리는 것은 예사이고, 몸통에 구멍이 뚫리는 잔인한 장면도 자주 나온다. 감독의 잔인무도한 재기가 돋보이긴 하지만 그 대신 영화는 전체적으로 호흡 고르기에 실패했다는 느낌도 준다. 2시간 정도의 러닝타임 내내 싸움만 반복되니 후반부로 갈수록 너무 길다는 인상을 받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여하튼 <버서스>는 일본 인디펜던트 고어영화(이런 말이 있는지는 사실 잘 알 수 없다)의 현재를 보여주는 것 같아 흥미로웠다. 가끔씩 치밀어오르는 욕지기를 잘 참기만 한다면. 디지털, 전진 또 전진 0과 1의 조합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테크놀로지는 다른 많은 영화제들에서처럼 유바리영화제에서도 작으나마 한 자리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디지털 시어터’(Digital Theater)라 명명된 이 부문은 영화와 디지털을 어떻게 연결해볼 수 있을까를 모색해보는 자리였다. 물론 디지털과 관련한 섹션이 올해 처음 마련된 것은 아니었다. 지난해에도 유바리에서는 ‘디지털 시네마 프리젠테이션’이란 부문을 통해 디지털의 현재를 조망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고 한다. 지난해 디지털 섹션이 주로 미완성 필름과 견본 필름들만을 그저 ‘전시’(Presentation)하는 데 그쳤다면, 올해 디지털 섹션은 그보다 조금 더 심화된 실험을 해보였다. 일본의 통신회사인 NTT의 기술 협조를 받아 도쿄에서 디지털 신호를 전송하고 그 신호를 받아 유바리에서 단편애니메이션들과 실사영화들을 보여주는, 새로운 상영방식을 선보였던 것이다. 올 유바리영화제에서 이 디지털 시어터 부문을 기획한 사타니 히데미(수플렉스 영화사의 프로듀서)는 영화에서 디지털을 본격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지금부터 시작이라며 앞으로 디지털을 열심히 알리는 작업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현재 이야기되는 디지털 논의와 관련해 아주 중요한 말을 던졌다. “현재는 디지털이라는 단어를 쫓는 데만 너무 급급하다. 하도 디지털, 디지털, 하고 소리만 시끄러우니 이건 마치 디지털에게 오히려 이용되는 것만 같다. 아무래도 그건 아니다. 디지털을 아날로그와 어떻게 잘 이용할 것인가, 디지털을 왜 이용할 것인가를 잘 알고 이용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를테면, 무조건 제작비를 삭감하기 위해 디지털을 이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다.” 이 말을 듣고 그럼 당신은 디지털의 주요 목적이란 무엇이냐고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그는 너무 어려운 질문이라며 상당히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어쩌면 이야말로 솔직한 정답이 아니겠냐는 생각도 들었다. 디지털은 아직 우리가 모색하고 있는, 진행중인 무엇일 테니까 말이다. 유바리 = 홍성남/ 영화평론가 antihong@hitel.net ▶ 웹 애니메이션 <아치와 씨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