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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1997)

영화평론가 정성일, 칸으로부터의 두번째 편지(1)

과거는 항상 지나간 다음에 놓쳤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사람들은 현재를 증오한다. 그러니 남은 길은 하나밖에 없다. 미래를 향해서 나가는 것이다. - 장 뤽 고다르 <옛 장소> 중의 보이스 오버 그러니까 우리는 나침반을 잃으면 안 된다. 다시 한번 물어보자. 지금 영화의 질문은 무엇인가? 칸에서, 2002년 5월에, 해변에 젖가슴을 내놓고 누워 있는 여인들 저편의 바다 위에 신기루처럼 떠 있는 유럽 부르주아들의 유람선을 바라보면서, 방금 보고 나온 영화의 제목을 떠올리며, 딱딱한 밀가루 빵 안에 쑤셔넣은 햄과 야채와 마요네즈의 비빔범벅을 먹으면서, 내가 물어보는 것은 여전히 그것이다. 당신들은 칸을 왕오천축국전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또는 여기서 모든 사람은 손오공이다. 또는 저팔계이거나 사오정이다. 또는 요물들과 괴수들의 아비규환이다. 나는 현장법사가 되고 싶다. 그러나 그래봐야 (칸영화제 집행위원장인) 질 자콥 손바닥 안의 놀음이다. 또는 영화를 발명했다는 자부심에 찬 유럽세계 안으로의 참혹한 여행이다. 그저 홀린 채 눈멀어서 아무리 아름다운 찬사를 늘어놓고 미사여구를 바쳐도 숨길 수 없는 사실. 여기는 제국주의가 벌여놓은 파티에로의 초대이다. 그 안에서 영화를 생각해야 한다는 끔찍한 사실을 배우고 인정하고, 그래서 거기서 다시 우리의 질문을 떠올려야 한다. 칸, 여기는 나의 슬픈 열대이다. 중국으로부터 그렇게 멀리, 또는 자기-오리엔탈리즘 이런 제기랄!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었다. 다이 시지에의 <발작과 중국인 재봉사소녀>(Balzac et la Taillleuse Chinoise, 주목할 만한 시선)을 보면서 투덜거렸다. 이 영화는 내가 올해 칸에서 처음 본 영화였다. 다이 시지에는 1989년 <중국, 나의 고민>으로 데뷔하였고, 나는 이 영화를 좋아한다. 그리고 14년 만에 본 그의 네 번째 영화는 이미 자기를 잃어버린 영화였다. 1972년 문화혁명 시절 하방된 두 ‘인텔리’ 청년은 거기서 똥지게를 짊어지고 산길을 올라야 하며, 탄광 안에 들어가서 하루종일 돌을 쪼아야 한다. 한 청년은 바이올리니스트였고, 다른 청년은 치과 인턴수업을 받던 중이었다. 그들은 무서운 마을 촌장을 속이면서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곡을 마오쩌둥 수석을 찬양하는 곡이라면서 연주하고, 때로는 몰래 숨겨놓은 발자크의 프랑스 소설을 읽는다. 그런 어느 날 이 마을에서 재봉사로 일하는 할아버지의 손녀와 사랑에 빠지고, 그들은 하방당한 이 산 속에서 첫사랑을 나눈다. 그 소녀는 발자크의 소설을 그들로부터 들으면서 도시의 생활을 그리워한다. 그리고 소녀는 점점 발자크에 심취한 나머지 도시로 짐을 싸들고 도망친다. 그 이후 그들은 다시는 만나지 못하고, 어른이 되어 다시 만난 바이올리니스트와 치과의사는 텔레비전에서 양자강에 댐 공사를 하면서 물에 잠기는 옛 하방된 고장의 풍경을 보면서 추억에 잠긴다. 물이 차오르고 무중력 상태에서 책을 읽고 바이올린을 켜는 두 사람 옆에 앉아 있는 중국인 재봉사 소녀를. 이건 어디서 많이 본 이야기이다. 그렇다. 첸카이거의 <황토지>와 <아이들의 왕>을 서로 반씩 끌어들여서 만들어낸 이야기를 온통 감상주의와 중국 깊은 심산유곡의 풍경을 무대로 그려낸다. 물론 화면은 아름답고, 이야기는 달콤하다. 또는 다이 시지에 자신의 기억도 일부 들어간 것처럼 보인다(이 영화는 자신의 자서전 소설을 영화로 옮긴 것이다). 그러나 그 기억 속에서 역사와 함께 중국의 지금도 증발해버렸다. 행복한 하방? 지금 파리에 산다고 해서 문화혁명이 첫사랑으로 기억되는 것은 지아장커를, 왕샤오슈아이를, 허이를, 류쉐창을, 로우예를, 장밍을, 포스트 천안문세대를 능멸하는 짓이다. 이스라엘에서 팔레스타인으로, 또는 그 역; 아모스 기타이와 엘리아 술레이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은 우리가 설명할 수 있는 학살이 아니다. 중동의 문제는 복잡하고, 나라마다 서로 다르게 얽혀 있는 이해관계와 한편으로는 석유문제로 국제적인 관계가 끌려들어오고, 거기에 유대인 문제와 성지순례의 의미에 대한 질문에 겹쳐지면 영화를 보면서 이야기 자체를 놓치게 된다. 그러니까 영화를 보면서 이런 순간들이 가장 절망스럽게 여겨진다. 또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영화를 보아야 한다. 모든 영화는 재미있어야 한다고? 영화는 이해하기 쉬운 예술이라고? 영화는 대중을 즐겁게 해야 한다고? 영화제는 그런 질문들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여주는 자리이다. 영화 속의 서로 다른 문화와 서로 다른 나라의 역사가 그 반대로 우리의 영화가 가진 편협성을 물어볼 것이다. <집으로…>를 보면서 이란의 관객은 얼마나 그 할머니가 낯설게 보이겠는가? 차도르도 두르지 않고, 남편이 거느렸던 다른 아내들과도 헤어진 채 혼자 살다니! <친구>를 보면서 아프가니스탄의 관객은 얼마나 신기하겠는가? <로스트 메모리즈>를 보면서 알제리의 관객은 그 이상한 식민지의 역사 앞에서 얼마나 괴이하겠는가? 나는 이스탄불의 영화를 보면서, 아르헨티나의 영화를 보면서, 부르키나파소의 영화를 보면서 부끄러워진다. 헐리우드와 유럽, 동남아시아의 영화들로부터 한 걸음만 나가면 문맥을 놓치고야마는 영화들과 수없이 만나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영화를 통해서 세상에서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을 배워야 한다. 올해 경쟁에 온 두편의 영화, 아모스 기타이의 이스라엘영화 <케드마>(Kedma)와 엘리아 술레이만의 팔레스타인영화 <신의 간섭>(Yadon Ilaheyya)은 우리를 난처하게 만드는 영화이다. <케드마>는 한마디로 전쟁영화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전쟁이 더이상 스펙터클이 아니다. 1948년 5월4일 오후 4시 케드마라는 배를 타고 나치 학살로부터 살아남은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의 건국을 위해서 약속의 땅을 찾아온다(배 이름인 케드마는 ‘동양으로’라는 뜻이다). 그러나 여기서 유대인 이민자들을 기다리는 것은 영국 군인들의 총알이며, 그들은 하선하자마자 총을 들고 터키인들과 싸워야 한다. 아모스 기타이는 여기서 전쟁을 무대처럼 다룬다. 카메라는 총알을 뒤따르거나 또는 그 반대로 시체를 애절하게 바라보지 않는다. 그 대신 총을 든 이민자들을 따라가면서 이름없이 죽어가는 그들을 무심하게 쳐다본다. 그의 주인공은 계속 옮겨가고, 그 중심에 있던 인물들은 어이없이 죽거나 그 반대로 용기있게 죽는다. 그렇게 폭탄이 터지고 총알이 쏟아지는 사이를 송아지 한 마리를 끌고 터키 할아버지는 시장에 가야 한다면서 가로 질러간다. 이민자들은 총을 쏠 줄도 모르면서 전장터를 뛰어다니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그렇게 멀다. 이들은 정말 신의 축복을 받아 이 땅에 온 것일까? 이 전쟁을 아모스 가타이는 알레고리로서 그려낸다. 그건 영화적으로 그렇다는 말이 아니라 정말 그렇다는 뜻이다. 여기에는 성서적인 언어의 세계관, 그것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으면서 싸웠던 시대에 대한 신학적 시선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전장터의 장면들은 정말 어떤 영화에서도 보지 못했던 이상한 비사실주의가 있다. 그건 과장도 없고, 그렇다고 상징도 없이 그저 벌어지는 전투를 그대로 재현하는 데도 그 모든 것을 역사 안에서 실현되는 테제로 어떤 영웅주의도 없이 피와 살을 승화시킨다. 브레히트적인 전쟁영화? 자꾸만 다시 생각나는 마지막 장면. 또다른 전선으로 가기 위해 지쳐서 트럭에 몸을 실은 이민자들을 바라보면서 노인은 <탈무드>의 구절을 혼자서 외쳐댄다. 그러나 그 말에 귀기울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노인도 그저 계시처럼 쉰 목소리로 읊는다. 카메라는 노인을 따라 일렬로 늘어선 트럭을 따라 수평 트래킹으로 한없이 오간다. 어둠이 내리고, 트럭은 다른 전장터를 향해 떠난다. 아모스 기타이는 그 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본다. 저 슬픈 시선과 기억을 찾아가는 장면 사이에서 화해는 없다. 그들은 살아본 적이 없는 땅에 와서 그곳이 자신의 고향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전쟁이라고 아모스 기타이는 생각한다. 목소리와 이미지, 낭송하는 마뇰 드 올리베이라의 연애극 <마뇰 올리베이라>는 여전히 위대하다. 그를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의 영화는 보아야 할 영화가 아니라 들어야 할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영화는 이인칭의 서간문체의 우주이기 때문에, 그 영화 속의 질서들이 쉽게 붙들리지 않는다. 화면을 아무리 바라보아도 이 사람과 저 사람의 관계를 알기 힘들다. 그래서 화면을 지켜보면서 정말 주의를 집중해서 들어야 한다. 그건 이번 영화 <불확정의 원리>(O Principio da Incerteza, 경쟁부문)에서도 다시 반복된다. 그는 마치 편지를 낭송하듯이 사건을 전개시킨다. 때로는 느리지만, 그러나 화면은 거의 변한 장면이 없는데도 사건 사이의 점핑이 벌어질 때가 있다. 사건은 낭송을 통해서 이미 벌어진 것이고, 화면은 그 결과인 것이다. 사건없이 원인과 결과가 그저 단 하나의 장면으로 이어질 때, 그 안에서 이야기와 인물 사이의 결정 불가능한 바깥이 생겨난다. 그리고 올리베이라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심술을 부리기로 작정한 것 같다. 그는 아홉명의 인물을 내세운 다음 그들에게 이름과 별명을 함께 붙이는데, 이제 그 이름과 별명을 뒤섞어서 부른다. 우리는 영화에서 인물의 호명이 의외로 쉽게 기억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곤 한다. 또는 영화에서 등장인물들을 대부분 얼굴을 보고 기억할 뿐이며, 이름을 그저 지나친다. 그러나 올리베이라의 영화에서는 그럴 수 없다. 이름과 인물이, 한 인물에 두개의 이름이 뒤따라가거나 화면과 관계없이 불릴 때, 거기에는 불확정이 가져다주는 고정점의 붕괴가 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올리베이라의 영화에서는 잘 듣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들으며 이야기를 구성하면서 눈앞에 보이는 인물을 따라가야 한다. 보이는 것을 무력하게 만들고, 활동사진의 전통에서 축음기의 세상으로 이끄는 올리베이라는 여전히 신기한 영화를 만든다. 두명의 늙은 형제 다니엘과 토르카토가 나누는 이야기에서 영화는 시작한다. 둘은 같은 이야기를 하는데, 문제는 같은 이야기를 서로 다른 관점에서 번갈아 하니까 이제 영화는 여기서 잘못 기대는 순간 두리번거리게 된다. 그들의 관심은 동갑내기 가문의 아들이자 상속자인 안토니오와 그 집의 하녀의 아들 호세이다. 두 사람은 어린 시절부터 친구이지만, 그러나 동시에 카멜리아를 사랑한다. 천사 같은 카멜리아. 그 둘은 한 소녀를 사이에 두고 갈등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화면에서는 호세의 갈등만 보여지고, 안토니오의 갈등은 말로 들어서 알아야 한다. 그런데 그 갈등에 대한 다니엘과 토르카토의 견해가 다르다. 더 난처한 점.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성처녀 카멜리아는 남자들의 게임의 규칙 속에서 음란한 연애극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그런데 그것도 듣고서 알아야 하며, 영화에서는 만찬의 장면만이 이어진다), 그 희생을 감내하는 대신 교활하게 변해간다. 그런데 그것도 그렇다고 말하는 다니엘의 생각일 수도 있다. 또는 어쩌면 착각일지도 모른다는 암시를 계속하던 올리베이라는 마지막에 정반대의 인물이 되어버린 카멜리아를 보여주면서 끝낸다. 여기서 올리베이라는 다시 그의 원래의 무대, 그러니까 <프란치스카>(1980), 혹은 <아브라함의 계곡>(1993)의 수수께끼처럼 얽혀들고 그 안에서 운명을 결정해야 하는 여자들의 선택에 대한 구원없는 진행, 또는 아름다운 부르주아 질서 안으로 초대한다. 그 두 가지는 사실 올리베이라가 보기에는 한 가지이다. 왜냐하면 부르주아들의 세상에서 사랑은 거래이고, 그 안에서 남자들이 이윤을 남기려 드는 동안 여자들은 종교에 자신을 바치기로 결정하면서 갖는 그 덧없는 희망이, 거래와 희생이라는 모습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올리베이라는 우리 시대에 19세기적인 상상력을 갖고 거슬러올라가서 다시 생각해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영화가 종종 산문적이고, 때로는 낭독을 통해서만 숨겨진 질서와 음모의 주사위가 던져지는 순간 우리는 이제 더이상 영화관의 관객이 아니라 이미 사라져버린 규방문학의 신기한 세상으로 불려온 것이다. 여자들은 항상 진다. 그러나 그 패배 안에서 남자들은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그럼으로써 올리베이라는 불확정의 원리 속의 예정조화를 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포르노에 관한 포르노, 또는 카트린 브레이야의 <아메리카의 밤> 칸은 거의 대부분 엄숙하게 진행된다. 공식 저녁시사는 무조건 정장에 남자들은 나비 넥타이를 매야 하고, 영화관람은 자기가 쥔 카드가 무엇이냐에 따라 입장순서가 바뀐다. 경쟁부문의 감독들은 리무진을 타고 거만하게 나타나서 환호하는 관객을 향해 손을 흔든다. 그러나 거기서 좀 떨어진 노가힐튼에서 진행되는 감독 주간(Quizainne des Realisateurs)에 가면 갑자기 다른 영화제에 온 것처럼 활기가 넘친다. 감독 주간은 프로그래머도 다르고, 상영관도 서로 다르다. 그래서 감독 주간에 가면 항상 프로그래머가 감독과 올라와서는 한마디 던진다. “여러분들, 여기서는 나비 넥타이도 필요없고, 정장도 필요없어요, 그렇죠?” 그러면 젊은 관객은 일제히 박수와 발을 구르는 환호로 대답을 대신한다. 바로 그 감독 주간의 올해 개막작은 카트린 브레이야의 <섹스는 코미디>(Sex is Comedy)이다. 그녀를 ‘악명높게 만든’ <로망스 X> 이후(<나의 언니에게>를 경유하여) 2년 만에 만들어진 이 영화는 일종의 후일담이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 것. <섹스는 코미디>는 <로망스 X>의 후일담이 아니라 그 영화를 만든 과정의 후일담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영화에 관한 영화이자 자기 영화의 자서전이다. 빙빙 돌려 말할 것 없이 한국식으로 말하면 ‘프랑스판’ <빤스벗고 덤벼라>이다. 여자감독(안 파리요)은 지금 신경이 곤두서 있다. 지금 섹스장면을 찍어야 하는데 여자는 신인이라서 가능하면 조금만 벗고 쉽게 끝내고 싶어하고, 남자는 이미 짜증을 내면서 그저 출연료를 받았으니 하면 될 거 아니냐는 투다. 바닷가의 모래 언덕에서 사랑을 느끼는 두 사람을 찍는 한여름 장면이 지금 벌벌 떨면서 한겨울에 진행되는 중이다. 여자감독은 이들을 데리고 세트장으로 들어간다. 소품을 담당하는 스탭이 섹스장면에 사용될 인조 ‘자지’를 다섯 종류로 가져와서 감독의 허락을 받는다(이런 장면이 나올 때마다 높아지는 여자들의 웃음소리. 그 반대로 영화에서 여자의 ‘보지’가 나오면 갑자기 심각해지는 남자들의 침묵). 그중 하나를 선택하고, 그걸 남자배우는 팬티처럼 입고 이제 섹스장면을 찍어야 한다. 끊임없는 엔지장면의 연속. 감독과 배우들과의 사이는 야수처럼 으르렁대면서 어르고 달래고 소리지르고 속이고 어떻게 해서든지 서로가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든다. 카트린 브레이야는 영화에서 단 하나의 장면을 만들기 위해 벌이는 심리적인 포르노를 만들어낸다, 영화감독은 배우들이 옷을 벗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을 벗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것을 벗지 않기 위해 배우들은 버티는 것이다. 그걸 영화감독은 끈질기게 설득하고 영화 속의 인물 안으로 들어오게 만들기 위해 말 그대로 쥐어짠다. 영화현장을 찍는 영화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것은 영화 속의 영화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이다. 그건 심리적 한계선을 넘는 섬광 같은 선물이다. 그리고 <섹스는 코미디>의 마지막 순간 마침내 섹스를 하고 울음을 터트리는 여배우의 얼굴에서, 그 눈물에서, 그 치밀어오르는 울음소리에서, 영화 속의 감독이 기어이 그걸 얻어내는 순간 카트린 브레이야도 바로 그 마법의 순간을 얻어내고야 만다. 브라보! 이 영화는 카트린 브레이야의 의심할 바 없는 최선의 ‘내면적’ 포르노이다. 사진설명 1. <발작과 중국인 재봉사소녀> 2. <신의 간섭> 3. <불확정의 원리> 4. 감독 주간에서의 포럼. 영화 상영과 함께 항상 포럼이 열리는 곳이다. 뒤에 Quinzaine des Realisateurs라고 쓰여 있는 천막이 감독 주간 포스터다. ▶ 제55회 칸의 한국영화들, 열띤 취재공세 ▶ 전세계 주요 언론들의 경쟁부문 상영작들에 대한 별점 ▶ <죽어도 좋아> 리뷰 - 올리비에 세그레 ▶ 영화평론가 정성일, 칸으로부터의 두번째 편지(1) ▶ 영화평론가 정성일, 칸으로부터의 두번째 편지(2) ▶ 영화평론가 정성일, 칸으로부터의 두번째 편지(3)

영화평론가 정성일, 칸으로부터의 두번째 편지(2)

칸의 2002년의 질문(1); 디지털 도그마의 시대? 물론 라스 폰 트리어와 그의 ‘디지털’ 친구들은 올해 칸를 찾지 않았다(토머스 빈터베르그의 신작이 다시 한번 크로와제트를 밟을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했지만 오지 않았다). 그 대신 경쟁부문에 네편의 디지털영화가 차례로 등장하였다. 마이클 윈터보텀의 과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 그리고 알렉산더 소쿠로프의 <러시아 방주>와 지아장커의 <알지 못했던 기쁨-(중국어제목) 모든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이 떠돌며(任逍遙)>이다. 이 네편의 영화들은 네개의 서로 다른 주제와 네 가지 다른 스타일을 갖고 우리에게 네개의 새로운 영화를 보여주었다. 마이클 윈터보텀의 맨체스터 뉴웨이브록의 ‘디지털’ 연대기 섹스 피스톨 따위는 신경 쓰지마! 여기 조이 디비전이 있잖아, 라고 노래부르며 마이클 윈터보텀은 을 레이브 파티 열듯이 광란에 차서 펼친다(이 영화의 제목을 번역하려고 애쓰지 마실 것. 그룹 해피 먼데이의 노래 제목이다). 우선 마이클 윈터보텀의 영화이기 때문에 정리하고 넘어가자. 이 영화는 <쥬드>나 <사라예보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오히려 그의 데뷔작인 <버터플라이 키스>와 (U2의 노래에서 가져온) <당신이 있거나, 아니면 없거나>의 사이 그 어딘가에 놓인다. 게다가 촬영이 (빔 벤더스의 오랜 동료인) 로비 뮐러이다!(어때, 갑자기 보고 싶지?) 영화의 주인공은 토니 윌슨. 케임브리지에서 영문학을 공부한 다음 일찌감치 공부는 작파하고(!), 맨체스터의 그라나다 텔리비전방송사 시사 프로그램 진행자이자(영국 펑크 인디 레이블로 그 유명한, 그러니까 우리나라로 치면 ‘드럭’ 레이블쯤 되는) 드림팩토리 레코드사의 대표가 되었던 토니 윌슨의 20년간의 기록이다. 첫 장면. 마치 오래된 필름으로 보듯이 토니 윌슨은 행글라이더를 타고 날아오르려고 하지만 계속해서 처박힐 뿐이다. 그는 투덜대며 돌아간다. 마치 예고된 이카루스의 운명과도 같은 시작. 그러니까 시대적으로 이 영화는 그램록의 연대기였던 <벨벳 골드마인>의 속편이다! 1976년 7월4일 맨체스터에서 14명을 앞에 앉혀놓고 섹스 피스톨즈가 첫 공연을 한다(페이크 다큐멘터리 장면). 그리고 버즈 콕스의 공연이 펼쳐진다. 토니 윌슨은 중얼거린다. “이건 역사적이야!” 그 앞에 이안 커티스가 나타나고, 그는 조이 디비전을 만들어 펑크-뉴웨이브록의 새로운 장을 연다(참고로 나의 열광을 참아주실 것. 나는 조이 디비전의 열혈팬 중 한 사람이다. 룰라랄라 신나라!). 그러나 잘 알려진 것처럼 이안 커티스는 미국 공연을 앞두고 그만 자살한다(나는 영화가 여기서 끝날 줄 알았다. 그런데 시계를 보니 아직도 52분이 남았다). 토니 윌슨은 카메라를 보고 “이제 여기서 제 인생의 일부가 끝났죠”라고 친절하게 설명까지 해준다. 그리고 조이 디비전 멤버들이 뉴오더를 결성하고 뉴웨이브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면서 달려간다. 마지막 장면은 1992년 하시엔다 클럽이 문을 닫으면서 이제 공연과 연주의 시대는 끝나고 레이브-테크노의 춤의 시대가 열렸음을 선언하면서 막을 내린다. 카메라는 다큐멘터리와 MTV와 인터뷰와 라이브와 (펠리니를 연상케 하는) 상징적인 엑스페리먼털 바로크 이미지 사이를 넘나들면서(으잉! 그런데 이게 무슨 소리야? 하지만 일단 믿으시라. 보면 안다) 로비 뮐러의 카메라는 거의 신들린 것처럼 토니 윌슨의 기행을 쫓아가고, 실제 다큐멘터리와 영화장면을 디지털 촬영의 화질을 이용해서 절묘하게 서로 합성한다. 게다가 대사의 유머들은 거의 펑크 가사 수준이다. 심지어 나중에 등장인물들이 몰리고 시간은 부족하자 토니 윌슨은 카메라를 향해 한마디 한다. “이 사람들도 모두 찍어놓았으니, 그 부분은 DVD에서 보세요.” 그러나 마이클 윈터보텀이 진짜 놓치지 않은 것은 토니 윌슨이 진심으로 펑크와 뉴웨이브의 지지자였으며, 그는 마음으로부터 자신이 조이 디비전을 통해서 마치 조지 마틴이 비틀스의 역사에서 했던 역할을 하고 싶어했다는 그 속마음을 찍으려고 달려든다. 그는 매우 무모하고 자기 생활이 무너진 채 섹스와 마약 속에서 살아갔지만, 그러나 그가 음악에 대해서 갖고 있는 사랑과 감식안은 거의 본능적이다. 그가 버즈 콕스의 음악을 듣고 오는 날 친구의 방에 걸려 있는 핑크 플로이드와 레드 제플린의 대형 브로마이드를 찢어버리라고 말하는 대목은 이상한 감동이 있다. 아직은 1976년의 일이다! <트레인스포팅>보다 훨씬 유쾌하고, <벨벳 골드마인>보다 좀더 홍익대 앞 세대들을 흥분시킬 만한 ‘원샷’! 하지만 당신이 맨체스터 뉴웨이브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펫 숍 보이즈의 팬이거나 U2의 세대라면 피하실 것. 정중한 나의 충고이다. 그런데 참 나 영화평론가 맞아? < 마이클 무어의 사우스 ‘화염병’ 파크 칸은 다큐멘터리에 대해서 항상 일정한 거리를 지켜왔다. 그래서 마이클 무어의 <컬럼바인을 위한 볼링>(Bowling for Columbine, 경쟁부문)이 경쟁에 온다는 사실이 알려졌을 때 모두들 의아하게 생각했다. 이건 46년 만의 일이기 때문이다(그런데 그해 56년에 이브 귀스토와 루이 말이 만든 다큐멘터리 <침묵의 세계>는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게다가 9월11일 ‘이후’ 세계화가 흉흉하게 진행되고 있는 지금 마이클 무어의 영화는 칸에 온 화염병이다. 부시는 국회에서 국방비를 올리며 승승장구하고 있고, 그 덕에 무기장사꾼들은 떼돈을 벌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이미 <로저와 나>에서 제너럴 모터스 회장과 한판 승부를 한 마이클 무어는 여기서 콜로라도주의 덴버에 있는 컬럼바인학교에서 벌어진 1999년 4월20일 총기난사사건을 찾아간다. 학교에 총기를 들고 와 무고한 12명의 친구들과 선생님을 그냥 재미로 쏴죽인 이 사건은 마이클 무어를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고 고백한다. 마이클 무어의 질문은 항상 단순명쾌하다. 시작하자마자 미국의 단순-무식-과격한 폭력의 무감각함을 편집해서 보여준 도입부는 이번 칸에서 가장 웃긴 5분이다. “지금 지구상에서 모든 나라가 같은 음악을 듣고, 같은 영화를 보고, 같은 텔레비전을 보는데 왜 미국에서만 이렇게 총기사건이 나는 것일까? 미국인들은 정말 총에 미친 인간들일까?” 마이클 무어의 화염병 혹은 <컬럼바인을 위한 볼링> 마이클 무어는 카메라를 들고 사람들을 찾아나선다. 그래서 우선 동네 학교부터 뒤진다. 학생들은 학교에 총기를 가방이나 셔츠에 넣고 등교하고, 자랑스럽게 보여준다. 등교할 때 정문에서 검색하지만, 학생들은 어떻게 옷을 입으면 무사통과하는지를 너무 잘 알고 있다. 한 귀엽게 생긴 고등학생은 옷에서 12정의 총기를 꺼내 보이며 자랑스럽게 웃는다. 그는 마지막에 거의 M60 수준의 무반동 총기까지 꺼내든다. 그래서 총기 가게에 가서 시치미 뚝 떼고 총기를 구입해보니 아무 문제도 없다. 미국인들은 이게 우리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 “일년 동안 같은 영어를 쓰는 영국에서 68건, 캐나다에서 165건의 사건이 벌어진 동안 미국에서는 1만1127건의 총기사건이 벌어졌다.” 그래서 마이클 무어는 미국과 호수 하나만 넘으면 마주 보는 캐나다의 마을을 찾아간다. 또는 독일과 일본의 사례를 비교한다. 그는 닥치는 대로 찾아간다. 그리고 컬럼바인 총기사건 이후 텔레비전 앞에 나온 미국의 ‘꼴통’ 보수들의 인터뷰를 모아본다. 그들은 할리우드와 로큰롤, 그리고 인터넷이 문제라고 한탄한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인더스트리얼 록의 괴인 마릴린 맨슨을 지목하며, 오늘날 십대들이 이 모양이 된 게 저놈 때문이라고 입을 모은다. 그래서 마이클 무어는 마릴린 맨슨을 찾아가 이게 다 당신 때문이라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다. 그러자 마릴린 맨슨은 가죽바지에 머리를 쓸어올리며 한쪽 눈에 개눈을 한 그 눈동자를 깜빡거리며 점잖게(?) 한마디한다. “누군가 공격하기 쉬운 사람을 찾아야 했겠죠. 아니면 자기들이 그 이유의 대상이 될 테니 눈에 보이는 이유를 대야 한 거죠.” 그래서 마이클 무어는 전국라이플연맹(NRA)의 회장인 (영화배우) 찰턴 헤스턴을 찾아가기로 작정한다(나중에 인터뷰에 의하면 이런 ‘대단하신 분’이 설마 자기를 만나줄까, 하고 그냥 밑져야 본전으로 찾아갔다고 한다) 찰턴 헤스턴이 연맹에서 총기업자들과 보수 우익세력들을 앞에 놓고 미국의 정신은 자신을 지키고 가족을 지키는 라이플에서 온 것이라고 연설하는 동안 바깥에서 총기난동사건으로 죽은 아이들의 반대시위를 마이클 무어는 교차편집을 통해서 마치 권투선수의 펀치가 오가는 것처럼 보여준다. 그리고 마침내 찰턴 헤스턴을 만난다. 그는 자기의 주장을 끝까지 굽히지 않는다. 화가 난 마이클 무어는 컬럼바인에서 죽은 소녀의 사진을 꺼내들고 이 소녀의 얼굴을 마주보라고 외친다. 말을 더듬는 찰턴 헤스턴은 주춤 뒷걸음질치다가 결국에는 아무 말도 못하고 집안으로 슬그머니 추한 뒷모습을 보이면서 도망친다. 마이클 무어는 그걸 끝까지 지켜보다가 그의 집 앞에 소녀의 사진을 두고 나온다. 이 장면은 정말 가슴이 미어진다. 또는 내 비디오 라이브러리에 있는 <벤허>의 비디오를 집에 돌아가자마자 망치로 두들겨 부술 거라고 수십번을 맹세하게 만든다. 마이클 무어는 여전하고, 이 영화는 그의 진심이 담긴 영화이다. 안 잊혀지는 시퀀스. 이 영화에서는 미국은 이렇게 살아온 나라입니다, 라는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과 함께 이민의 역사를 보여준다.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인디언들이 친절하게 손을 내밀자 백인들은 아이, 무서워(!)라고 외치며 일제히 총을 들고 나와 모조리 쏴죽이고, 일손이 부족하자 아프리카에 가서 흑인들을 총을 들고 무더기로 잡아오고, 그게 금지되자 두건 뒤집어쓰고 죽이고, 그저 비명을 지른 다음 바로 총을 든다. 이 역사를 마이클 무어는 <사우스파크> 팀에게 맡겼고, 그들은 10분 분량의 올해 가장 정치적인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다. 정말 이건 무진장 웃기지만, 그러나 웃기에는 너무 잔인하다. 시사실의 풍경. 이 영화를 보면서 프랑스 기자들은 정말 마음놓고 웃는다. 그가 모아놓은 무서운 장면들 위에 마이클 무어의 보이스 오버는 배꼽을 잡게 만드는 유머를 줄창 섞어놓기 때문이다. 그건 독일의 유대인 학살과 일본의 난징 학살사건 기록필름에서조차 그러했다. 그러나 뒤이어 프랑스, 라는 자막과 함께 알제리에서의 학살이 보여지는 순간 시사실은 멈칫 했다. 나는 알제리 학살의 기록필름은 처음 보았는데 그건 마치 광주 같았다. 저 잔인한 학살의 역사. 사진설명 1. 상영관 중 하나인 아케이드 극장에서 영화를 보기 위해 줄 선 사람들. 칸영화제 포스터와 개막작인 <할리우드 엔딩>의 포스터가 보인다. 2. 3. <알지 못했던 기쁨> 4. <컬럼바인을 위한 볼링> 5. ▶ 제55회 칸의 한국영화들, 열띤 취재공세 ▶ 전세계 주요 언론들의 경쟁부문 상영작들에 대한 별점 ▶ <죽어도 좋아> 리뷰 - 올리비에 세그레 ▶ 영화평론가 정성일, 칸으로부터의 두번째 편지(1) ▶ 영화평론가 정성일, 칸으로부터의 두번째 편지(2) ▶ 영화평론가 정성일, 칸으로부터의 두번째 편지(3)

전세계 주요 언론들의 경쟁부문 상영작들에 대한 별점

전세계 주요 언론들의 경쟁부문 상영작들에 대한 별점 매체이름/국가(평론가이름) 마리조와 그녀의 두 연인 케드마 컬럼바인을 위한 볼링 전부 아니면 꽝 종교의 시간 불확정성의 원리 24시간 파티피플 펀치 드렁크 러브 악마숭배자 카이에 뒤 시네마/프랑스(샤를 테송) ★ ★★★   ★★★★ ★★★★ ★★★★ ★ ★ ★★★ 프리미어/프랑스(올리비에 드 브륀) ★ ★★★ ★★★ ★★ ★★  ★ ★★ ★★ ★★★ 스튜디오/프랑스(파스칼 메리고) ★ ⊙ ★★ ★★★ ★★ ⊙ ★ ★★★ ★ 르 누벨 옵제바퇴르/프랑스(파스칼 메리고) ★★★ ★ ★★★ ★★★ ★★★ ★★  ★ ⊙ ★ 르 파리지앵/프랑스(피에르 바바세르) ★★★★ ★★ ★★★ ★★★ ★★★ ★★ ★★ ★★ ★ 렉스프레스/프랑스(에릭 리비오) ★ ★ ★★★ ★★★ ★★   ★★ ★★★ ★ 포지티브/프랑스(필립 루예) ★★ ★ ★★ ★ ★★★★ ★★★ ★★ ★★★ ★ 시놉시스/프랑스(로랑 델마) ★★★★ ★ ★★★ ★★ ★★★ ★★★★ ★ ★ ★★★ 라 크루아/프랑스(필립 로예) ★★ ★★ ★★ ★★ ★★★ ★★ ★ ★★ ★ 텔레라마/프랑스(니콜라스 쉬머킨) ★★ ★★★ ★★ ★★★★ ★★★ ★★★★ ★★ ★★★ ★★ 뤼마니테/프랑스(장 로이) ★★★ ★★★ ★★★ ★★  ★★ ★★ ★ ★★ ★★★ 르페라주/프랑스(니콜라스 쉬머킨) ⊙ ★ ★★★ ★★★  ★★ ★★ ★ ★★★ ⊙ 르몽드/프랑스(사뮤엘 블뤼멍펠드) ⊙ ★ ★★ ★★   ★★★ ★ ★★★★ ★ 드 모르겐/벨기에(얀 테머만) ★★ ★ ★★★ ★★ ★★ ★ ★★★ ★★★ ★★ 토론토 글로브 앤 메일/캐나다(리암 레이시)   ★★ ★★★ ★★ ★★ ★★★ ★★ ★★★ ★★★ 위크엔드 아비슨/덴마크(보 그린젠슨) ★★ ★★★ ★★★ ★★★ ★★ ★★ ★★ ★★ ★ 필름 딘스트/독일(마그렛 쾰러) ★★ ★★ ★★★ ★★★★ ★ ★★ ★★ ★★★ ★ 이스라엘리 브로드캐스팅/이스라엘(댄 페이너루) ★★★ ★★ ★★★ ★★  ★★★ ★★ ★ ★★ ★ 일 메사게로/이탈리아(파비오 페르제티) ★★★ ★★★ ★★★ ★★★ ★★★★ ★★ ★★ ★★★ ★★ 디아리오 ABC/스페인(오티 로드리게즈 마르샨테) ★★ ★ ★★★ ★★★★ ★ ★ ★★★ ★★ ⊙ 가디언/영국(데렉 말콤) ★★ ★★ ★★★ ★★★★ ★★★ ★★ ★★★ ★★★ ⊙ LA타임스/미국(케네스 튜란) ★★ ★★ ★★★   ★★★   ★★ ★★★★ ★ 매체이름/국가(평론가이름) 10 성스러운 중재 스파이더 달콤한16 러시아방주 슈미트에 관하여 과거가 없는 남자 알지 못했던 기분 아들 카이에 뒤 시네마/프랑스(샤를 테송) ★★★★ ★★★ ★★★ ★★ ★★★★ ⊙ ★★★ ★★★ ★★★ 프리미어/프랑스(올리비에 드 브륀) ★★ ★★★ ★★★★ ★★ ⊙ ★★ ★★★ ★★★★ ★★ 스튜디오/프랑스(파스칼 메리고) ★★ ★★ ★★ ★★ ★★ ★ ★★★ ★ ★★★ 르 누벨 옵제바퇴르/프랑스(파스칼 메리고) ★★★ ★★★ ★★ ★★ ★ ⊙ ★★★★ ★ ★★★ 르 파리지앵/프랑스(피에르 바바세르) ★★ ★★★ ★ ★★★ ★ ★ ★★★★   ★★★ 렉스프레스/프랑스(에릭 리비오) ★★★ ★★★ ★★★★ ★★★ ⊙ ★ ★★★★ ⊙ ★★★ 포지티브/프랑스(필립 루예) ★★★ ★★★ ★★★★ ★★ ★ ★ ★★★★ ★★★ ★★ 시놉시스/프랑스(로랑 델마) ★★★ ★ ★ ★ ⊙ ⊙ ★★★★   ★★★★ 라 크루아/프랑스(필립 로예) ★★ ★★★ ★ ★★ ★ ★★ ★★★★ ★★ ★★ 텔레라마/프랑스(니콜라스 쉬머킨) ★★ ★★★★ ★★ ★★ ⊙ ★ ★★★★     뤼마니테/프랑스(장 로이) ★★★ ★★★ ★ ★★ ★★ ★ ★★★★ ★★ ★★★ 르페라주/프랑스(니콜라스 쉬머킨) ★★★ ★★ ★ ★ ★ ⊙ ★★ ★ ★ 르몽드/프랑스(사뮤엘 블뤼멍펠드)   ★★ ★★ ★★   ★★ ★★★★ ★★ ★ 드 모르겐/벨기에(얀 테머만) ★ ★ ★★ ★★★ ★ ★★★   ★★ ★★★ 토론토 글로브 앤 메일/캐나다(리암 레이시) ★★★ ★★ ★★★ ★   ★★★   ★★★ ★★★ 위크엔드 아비슨/덴마크(보 그린젠슨) ★★★ ★★★ ★★★ ★★★ ★ ★★★   ★★ ★★ 필름 딘스트/독일(마그렛 쾰러)   ★★ ★★ ★★ ★★★ ★★★   ★ ★★ 이스라엘리 브로드캐스팅/이스라엘(댄 페이너루) ★★★★ ★★★   ★★★ ★★★ ★★★   ★★ ★★★ 일 메사게로/이탈리아(파비오 페르제티) ★★★ ★★ ★★★ ★★★ ★★★ ★★★   ★★ ★★★★ 디아리오 ABC/스페인(오티 로드리게즈 마르샨테) ★ ★★ ★ ★★ ★ ★★★   ★ ★★★★ 가디언/영국(데렉 말콤) ★★★ ★★★ ★★★ ★★★ ★★★ ★★★★ ★★★★ ★★★ ★★★ LA타임스/미국(케네스 튜란)   ★★★ ★★ ★★★★   ★★★★   ★★ ★★★★ 5월 23일까지 상영된 영화들까지의 집계 ★★★★ Excellent ★★★ Good ★★Average ⊙Bad 공백 보지 않았음 ▶ 제55회 칸의 한국영화들, 열띤 취재공세 ▶ 전세계 주요 언론들의 경쟁부문 상영작들에 대한 별점 ▶ <죽어도 좋아> 리뷰 - 올리비에 세그레 ▶ 영화평론가 정성일, 칸으로부터의 두번째 편지(1) ▶ 영화평론가 정성일, 칸으로부터의 두번째 편지(2) ▶ 영화평론가 정성일, 칸으로부터의 두번째 편지(3)

액션.코미디.섹스 소재의 블랙스플로이테이션 영화 부활

더 대담하게, 더 자극적으로1970년대를 풍미했던 블랙스플로이테이션영화가 미국 대중문화의 중심부로 다시 진입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고 5월26일치 가 보도했다. 블랙스플로이테이션(blaxploitation)영화란, 흑인 관객을 겨냥해 기획 마케팅된 저예산 장르. 1970년부터 1979년까지 250편 가까이 양산된 블랙스플로이테이션영화는 요란한 패션의 흑인 캐릭터들이 도시를 배경으로 펼치는 속도감 있는 액션과 코미디, 섹스를 주된 내용으로 삼았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블랙파워를 실현시킨다는 태도로 아프로-아메리칸 관객의 환호를 샀다. 1990년대 말에는 쿠엔틴 타란티노의 <잭키 브라운>과 존 싱글턴이 리메이크한 <샤프트> 등이 블랙스플로이테이션의 전통을 복원하기도 했다.는 1970년대풍 도시 이미지와 음악이 텔레비전과 영화에 빈번히 등장하고 블랙스플로이테이션의 캐릭터, 테마, 패션이 30년 만에 유행을 타고 있는 현상에 주목했다. 모피 코트를 걸친 농구선수와 70년대 펑크(funk) 음악에 맞춰 춤추는 치어리더가 등장하는 나이키 광고, <샤프트>의 주제가가 코러스를 반복하는 버거 킹 광고 샤킬 오닐 편은 단적인 사례. 무엇보다 블랙스플로이테이션영화의 유산은 신작영화들에 영감을 불어넣고 있다. 이중 가장 먼저 관객의 테스트를 받을 작품은 5월31일 개봉한 <언더커버 브라더>. 도탄에 빠진 대중문화 속 흑인의 이미지를 구원하는 흑인 영웅 이야기를 그린 이 영화는 블랙스플로이테이션 장르의 패러디로서 인터넷 플래시애니메이션으로 먼저 제작된 뒤 프로듀서 브라이언 그레이저의 손으로 영화화됐다. 온라인 버전에서는 블랙 뮤직을 오용했다는 죄목으로 백인 래퍼 에미넴을 사살하는 등 과격한 설정이 있었으나 영화에서는 공격성이 완화됐다는 평. 7월에 개봉하는 <오스틴 파워 인 골드멤버>에도 블랙스플로이테이션 장르에서 빌려온 캐릭터가 등장한다. 1975년으로 돌아간 오스틴 파워즈가 재회하는 롤러스케이트 디스코 클럽의 폭시 클레오파트라는 블랙스플로이테이션영화의 유명한 캐릭터에 바치는 오마주다. 한편 할리 베리의 새 영화 <폭시 브라운>은 블랙스플로이테이션의 고전 <폭시 브라운>의 리메이크다. 오리지널 <폭시 브라운>은 마약을 파는 형제와 형사 애인 사이에서 갈등하다 창녀로 위장해 마약밀매 조직에 숨어든 폭시가 범죄자들에게 들켜 강간당하고 헤로인을 강요받는 시련을 겪은 뒤 우두머리 중 한명을 거세함으로써 복수한다는 자극적 스토리라인을 가진 영화다. 신세대 감독들이 블랙스플로이테이션 장르에 매료되는 이유는 무엇보다 특유의 파워와 대담한 표현력 때문이다. <폭시 브라운>의 프로듀서 마커스 모튼은, 힙합문화와 비디오가 1970년대에 태어나지도 않았던 젊은 관객조차 블랙스플로이테이션영화의 매력을 이해할 수 있는 조건을 제공해 주었다고 와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한편 USC에서 영화-텔레비전 비평을 가르치는 토드 보이드 교수는 “쿠엔틴 타란티노의 성공은 그가 블랙스플로이테이션영화를 포용했다는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며 블랙스플로이테이션이 사라졌던 유행이라기보다 반복적으로 미국 대중을 사로잡는 장르임을 강조했다. 30년 전 주류 할리우드 안에 처음으로 흑인 영화인들의 자리를 확보하고 아프리칸-아메리칸 대중의 욕망을 해소시켜 주었던 블랙스플로이테이션영화의 에너지가, 변화한 대중문화 환경에서 어떤 형태로 재현될지 지켜볼 일이다. 김혜리

영화평론가 정성일, 칸으로부터 세 번째 편지(3)

<거울 속의 여자들>, 일본의 또다른 행방불명 요시다 요시시게의 13번째 영화이자 15년 만의 신작 <거울 속의 여자들>(鏡の女たち, 공식비경쟁 초대작) 은 기대와 불안을 동시에 안고 기다린 영화이다. 오시마 나기사, 이마무라 쇼헤이, 시노다 마사히로와 함께 60년대 일본영화의 전투의 계절에 등장한 이 감독의 과격하기 짝이 없는 <에로스+학살>(1970)은 내가 정말 좋아하는 영화 중의 한편이다(이 영화는 오시마 나기사의 <감각의 제국>의 바로 그 이야기를 마치 알랭 레네의 <지난해 마리엥바드에서>처럼 만들었다). 그러나 80년대에 만든 두편의 영화 <인간의 약속>(1986)과 <폭풍의 언덕>(1988)은 한편은 너무 진지해서 따분하고 다른 한편은 너무 아름다워서 지루한 영화이다. 요시다의 영화는 종종 요기(妖氣)에 넘쳐난다. 또는 요시다는 그것이 영화의 매혹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역사를 다루거나, 문학소설을 영화로 만들거나, 멜로 드라마를 끌어들일 때조차 항상 거기에는 알 수 없는 요사스러움이 우리를 휘어감는다. 그건 <거울 속의 여자들>에서조차 그러하다. 첫 장면은 요시다의 세계로 안내하는 미로이다. 도쿄의 어느 화사한 여름날, 텅 빈 거리에 단정하게 자리잡은 카메라는 불협화음의 선율과 함께 거울 위를 걸어가듯이 조심스러이 한 여자를 쫓아간다. 거리의 침묵은 거의 절대적이어서 거기 그렇게 미로 속으로 미끄러지듯이 걸어가는 여인을 감싸안는다. 이 짧은 3분은 정말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요시다의 영화를 보면서 길을 잃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할머니 아이(愛)는 24년 동안 딸을 기다리면서 이사도 가지 않고 있다. 24년 전 딸은 20살에 가출했다가 4년 만에 돌아와서 손녀 나츠키(夏來)를 낳고 실종되었다. 그녀의 여름 외출은 그 딸을 찾았다는 연락이 와서 그녀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그런데 그 딸을 만나서 마사코(正子)라는 다른 이름으로 살아가면서 기억상실증에 걸려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할머니는 미국에 있는 손녀에게 연락을 해서 불러들이고, 딸 마사코를 집으로 초대한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단지 이상하게도 마사코는 히로시마만을 기억한다. 할머니는 딸을 히로시마에서 낳았다고 말하고, 마지막 희망을 안고 딸과 손녀를 데리고 히로시마로 여행한다. 그러나 동시에 히로시마는 할머니가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기억, 그러니까 1945년 8월6일 원폭이 떨어지던 날 벌어졌던 기억을 찾아가는 길이기도 하다. 요시다 요시시게는 자신의 노트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폭에 대해서 그것을 그릴 권리가 우리에게 있는 것일까? 1945년 8월6일 오전 8시15분, 그 순간을 경험한 사람들은 모두 죽은 자가 되었다. 그 사라진 사람들이야말로 원폭을 묘사할 정당한 권리를 가진 자들이며, 지금 살아남은 우리는 그것을 허락받지 못했다.” 그 허락을 위해 요시다는 거울로 우회한다. 온통 거울의 이미지에 가득 차서, 때로 거울에 비친 할머니를 비치는 거울의 딸을 보는 손녀의 삼면경(三面鏡)의 구도는 그녀들의 서로 다른 세 세대를 그 내면에서 반영하는 것이다. 그녀들의 분열하는 이미지를 하나로 묶어내는 것은 히로시마이다. 또는 서로 다른 세대의 일본인들을 하나로 만드는 것은 히로시마이다. 여전히. 히로시마에로의 여행은 동시에 지금 일본을 살아가는 일본인들의 마음 속으로의 여행이기도 할 것이다. 풍경들은 조형적인 구도 안에서 죽은 것처럼 침울하고, 황량한 모래언덕을 따라서 기억 속에서 떠오르는 아이는 세명의 여자 사이의 기억 속을 오간다. 행방불명된 딸과의 만남 속에서 이미 결정된 엔딩을 쫓아갈 것이라고 생각되었던 영화는 진행되면 될수록 점점 더 이야기는 부서져나가고, 그 안에서 거울의 이미지가 중심이 되어간다. 결국 영화와 거울 사이에서 길을 잃는 것은 다시 한번 우리다. 한 가지 생각할 점. (베를린에 온) 미야자키 하야오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뒤어어 (칸에서 유일하게 공식부문에 선정한 일본영화인) 요시다의 영화에서도 행방불명이 그 중심의 테마가 되었다. 서방세계는 무언가 일본에서 행방불명된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행방불명이라는 개념이란 무엇인가? 지아장커의 <임소요>, 아름답지 않은 중국의 고통 허우샤오시엔은 화어권 영화의 다음 세대를 왕가위와 지아장커라고 불렀다. 왕가위는 새로운 중국영화를 지아장커라고 말했다. 장이모는 다음 세대의 영화를 지아장커에서 보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지아장커만이 중국영화에서 처음으로 중국을 아름답지 않게 찍는 방법을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칸은 (소문으로 들리던) 첸카이거, 장이모, 티엔주앙주앙의 새로운 영화를 모두 거절하고 올해 경쟁부문에 지아장커를 초대하였다. 이 결정은 칸와 중국 천안문세대의 영화와의 첫 연애의 시작이다. 지아장커의 세 번째 영화 <임소요>(任逍遙, Ren xiao yao; 칸 상영제목 Unkown Pleasures, 경쟁부문)는 아름답지 않은 중국의 고통스러운 질문을 계속한다. 베이징보다는 몽골에 가까운 신도시 따퉁은 중국의 어디서나와 마찬가지로 근대화의 물결에 휩쓸려 살아간다. 아무 일도 없이 학교도 그만두고 거리를 어슬렁거리는 시아오 진과 빙빙은 할 일이 없다. 빙빙은 학교에서 우등생이고, 지금 진학시험을 앞둔 여자친구 유안유안과 가끔 비디오방에 가서(중국에도 비디오방이 있다! 게다가 그 비디오방은 공공연한 연애장소이다) 키스를 하거나 손을 만지는 것이 고작 중요한 일과이다. 시아오 진은 경극 구경을 갔다가 거기서 차오차오라는 여자를 만난다. 차오차오는 기둥서방에게 몸 주고 돈 뜯기면서 몽고왕주 상품 쇼무대에 댄서로 오르며 먹고산다. 빙빙의 엄마는 그에게 말썽이나 부릴 바에는 군대에나 가라고 구박하고, 시아오 진은 차오차오 주변을 맴돈다. 차오차오는 병원에 입원한 아버지를 위해 계속 돈을 벌어야 하는 소녀가장이다. 아무것도 되는 일이 없다. 시아오 진은 차오차오가 임신중절 수술을 한 다음날 그녀와 첫 키스를 한다. 빙빙은 여자친구에게 진학시험이 끝날 때까지 만나지 말자는 통보를 듣는다. 그래서 군대에 가려고 신체검사를 했지만, 간염으로 판정이 나서 불합격 통지를 받으면서 의사로부터 전염성이 강하니 애인이 있으면 절대 접촉하지 말라는 충고를 듣는다. 차오차오는 기둥서방을 떠나지 못한다. 왜 그러냐는 시아오 진의 질문에 그가 자기의 고등학교 선생님이자 첫사랑이었다고 대답한다. 차오차오의 기둥서방은 어느 날 객사하고, 이제 돈 벌 길이 없는 그녀는 몸을 파는 일에 나선다. 그녀의 첫 번째 손님은 시아오 진의 아버지이다. 시아오 진은 여기를 떠나겠다고 빙빙에게 말한다. 그리고 떠나기 전에 크게 한탕 하자면서 몸에 가짜 폭탄을 감고 은행에 들어가 큰돈 한번 벌자고 말한다. 둘은 오토바이를 타고 달려가 은행에 들어가서 돈을 내놓으라고 외치지만 마침 그 자리에 있던 공안원에게 빙빙은 체포된다. 그걸 보고 도망친 시아오 진은 베이징으로 가는 고속도로에서 고장난 오토바이를 버리고 남의 차에 무조건 올라탄다. 멀리서 번개가 치고 하염없이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그 시간에 경찰서에 잡혀간 빙빙은 은행을 터는 죄가 사형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을 듣는다. 그리고 공안원은 구석에 가서 노래나 부르라고 말한다. 빙빙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언젠가 노래방에서 여자친구와 불렀던 유행가를 부른다. “아무리 어려움이 와도 헤쳐갈 거야, 아무리 힘들어도 같이 할 거야, 자존심은 나의 힘….” 그들의 나이는 2001년 19살이다. 장자의 성어에서 가져온 이 영화의 제목은 인생의 기쁨을 찾기 위해 완전한 자유를 찾아가자는 것이지만, 그러나 동시에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또는 가라오케에서 불려지는 (지금 중국에서 가장 히트한) 유행가 제목이기도 하다. <임소요>는 어떤 의미에서 <소무>의 속편이며(<소무>에 나온 왕홍웨이가 소무라는 이름으로 이 영화에서 시아오 진과 빙빙의 동네 양아치 형으로 나온다), 역사의 연대기를 따라갔던 지아장커가 다시 일상생활 속의 전투로 돌아왔음을 보여주는 영화이다. 또는 <소무> ‘다음’ 세대의 영화이다. 지아장커는 두 소년과 서로 다른 두 소녀의 만남과 이별, 사소한 다툼과 진심을 다한 수줍은 사랑을 그리는 척하면서 따퉁이라는 도시의 가혹한 일상생활을 그려낸다. 여기서는 아무것도 잘되지 않는다. 그저 모든 소년, 소녀들은 여기를 떠나고 싶어하지만 나갈 길이 없다. 베이징까지는 고속도로가 만들어지고, 이제 근대화의 속도는 더욱 빨라지고 집을 떠나는 아이들은 더 많아질 것이다. 그들의 부모들은 아무것도 해줄 것이 없으며, 거리는 황폐하기 짝이 없다. 그 안에서 그들의 악전고투는 이미 준비된 패배이며, 무기력한 나날은 그들의 하루를 매일 죽여나간다. 그 삶을 지아장커는 유릭와이의 디지털 카메라를 통해 일상의 순간들을 잡아나간다. 거리에서 캐스팅된 것이 분명한 인물들의 생생함과 우연히 카메라의 구도 안으로 들어온 인물들, 한없이 이어질 것처럼 버티어 선 카메라, 또는 시아오 진과 빙빙의 오토바이를 따라 거리를 질주하는 화면들, 그리고 쉴새없이 화면 안으로 밀고 들어오는 거리의 소음들과 텔레비전의 숨가쁜 새로운 소식들이 지금 중국적(the Chinese)인 것의 정체성을 물어본다. 내 생각으로 <임소요>는 (미학적으로 말한다면) 허우샤오시엔의 <동년왕사>와 왕가위의 <아비정전> 그 사이 어딘가에 있는 영화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는 그들 영화가 없는 것이 있다. 이 영화는 참기 힘든 슬픔과 끓어오르는 분노로 때로 탄식하게 만든다. 중국에서 이제 도착한 신-신세대(新-新世代, post-new generation)의 삶을 담는 것은 지아장커의 목표가 아니다. 그 반대로 여기서 그들은 이미 도착했는데 중국은 아무것도 준비되어 있지 않을 때, 그들이 어떻게 ‘이미’ 부서져나가는지를 그리는 것이다. 그렇다. 지아장커의 영화에서 모든 것은 항상-이미 도착하였다. 지아장커는 디지털 리얼리즘이라고 불릴 다큐-픽션의 미학을 끌어들이면서, 동시에 그의 영화적 유머도 훨씬 성숙했음을 보여준다. 이를테면 빙빙과 여자친구가 좁은 복도를 지나 비디오방에 갈 때 옆방에서 들리는 영화의 사운드는 <화양연화>이다. 또는 시아오 진과 차오차오가 음식점에서 밥을 먹으면서 나눈 대화. “내가 미국영화를 보았는데, 거기서 둘은 서로 사랑한다고 말한 다음 바로 벌떡 일어나 손들어! 라고 외치는 영화가 있어”라는 대목이 끝나면 테크노 클럽에서 (<펄프 픽션>의 우마 서먼의 헤어스타일과 자세로) 춤을 추는 차오차오가 보여진다. 그걸 칸에서 보는 순간 그 느낌은 참으로 이상한 데자뷰였다. 왜냐하면 정확하게 10년 전 바로 여기 칸에서 타란티노는 바로 그 <펄프 픽션>으로 황금종려상을 가져갔기 때문이다. 지아장커는 현실 안에 들어와 있는 영화의 의미, 또는 서방세계 영화의 미학이 중국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그리는 영화에서 중국적인 것과 어떻게 만날 것인가를 물어보는 데까지 밀고 나아간다. 이 영화의 가장 아픈 장면. 빙빙은 비디오방에서 여자친구 유안유안과 매일 <서유기> 애니메이션을 본다. 빙빙은 그걸 보다가 중얼거린다. “나는 손오공이 부러워, 그는 부모로부터 벗어나서 자유롭게 어디든지 갈 수 있잖아.” 그러나 우리가 보는 <서유기>의 화면은 손오공이 부처님 손바닥 안에서 꼼짝 못하는 장면이다. 그들은 누구도 중국의 가혹한 현실 앞에서, 자본주의의 손바닥 안에서, 내일 없는 이 근대화의 속도 위에서, 아마 어떻게 해도 꼼짝 못할 것이다. 그걸 지아장커는 참담한 심경으로 보여준다. <아들>, 그리스 고전 비극의 윤리학 카메라는 돌진하듯이 달려간다. 핸드헬드 카메라가 주인공과 동행하듯이 달려가서 선반을 멈춰 세운다. 장 피에르와 뤼크 다르덴 형제의 다섯 번째 영화 <아들>(Le fils, 경쟁부문)은 그렇게 시작한다. 그건 그들의 전 영화 <로제타>와 똑같은 시작이다. 올리비에는 소년원에서 나온 아이들의 재활교육을 위해서 목공 작업을 가르치는 일을 한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소년이 이 학교에 온다. 올리비에는 그 아이를 맡기를 거부한다. 하지만 자꾸만 올리비에는 이 아이의 뒤를 따라다닌다. 그의 이름은 프란시스. 차에서 라디오를 훔치다가 그만 아이를 죽이고 5년 동안 감옥살이를 했다. 올리비에는 프란시스를 한눈에 알아본다. 그가 자기 아이를 죽인 소년이라는 것을. 그는 초조함에 터질 듯한 심정이 된다. 지금은 이혼한 아내가 찾아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린다. 그녀에게 털어놓자 아내는 올리비에에게 눈물을 흘리면서 그런 아이를 가르치는 당신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하고는 떠난다. 올리비에는 목재를 가지러 멀리 떨어진 그의 친척의 벌목원에 프란시스를 데려간다. 올리비에는 지금 아들의 복수를 할 것인지, 말지를 결정해야 한다. 영화는 시작하고 나서 올리비에가 왜 프란시스에게 그렇게 대하는지를 알 수 없게 진행한다. 그럼에도 다르덴 형제의 카메라는 올리비에의 곁에서 시종일관 숨막히게 쫓아다닌다. 우리는 올리비에와 프란시스의 이야기를 알 때까지 영화가 시작하고 40분을 기다려야 한다. 이제 올리비에와 프란시스의 자식을 죽인 원한과 복수의 사이를 알게 되었을 때, 그러나 올리비에를 알지 못하는 프란시스가 그를 따라 벌목원으로 먼길을 함께 동행할 때, 다르덴 형제는 이 순간 이 현대의 드라마를 마치 고대 그리스 비극과 같은 것으로까지 우리의 정서를 고양시키고, 그 비극을 정화한다. 올리비에는 마침내 복수를 하고 아들의 영혼을 달래며 손을 피로 적실 것인가? 아니면 그를 결국에는 용서할 것인가? 그 오래된 주제. 또는 유럽의 두개의 전통의 대립. 구약성서의 무서운 아버지와 신약성서의 착한 아들. 인과응보와 용서. 아버지의 아들의 죽음에 대한 대답. 또는 법과 정의의 저 유명한 결정불가능성.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리비에는 그 어느 한쪽을 택해야만 한다. <아들>은 현대의 살인사건 속에서 수천년의 역사를 반복하며 내려온 비극의 기원을 끌어낸다. 그 안에서 우리는 올리비에를 재판해야만 한다. 이 이중의 재판은 결국 다시 한번 우리에게 윤리학을 물어볼 것이다. <과거없는 남자>, 실직 노동자들을 위한 동화 아키 카우리스마키가 그의 주력부대를 이끌고 돌아왔다. 그의 <과거없는 남자>(Mies vailla menneisyytta, 경쟁부문)는 기복이 심한 그의 영화 중에서 최고의 작품들, 그러니까 <성냥공장소녀>와 <흘러가는 구름>에 비견할 만하다. 그 자신의 말에 의하면 이 영화는 <천국의 그림자>(1986)와 <아리엘>(1988), <성냥공장소녀>(1990)으로 완성한 헬싱키 삼부작에 이어 이제 <흘러가는 구름>(1996)으로 다시 시작한 ‘새로운’ 헬싱키 삼부작의 두 번째 영화이다. 그의 영화는 예전보다 더욱 간결해졌고, 그 유머는 더욱 날카로워졌다. 영화의 화면들에는 별다른 장식이 없으며, 그 안에서 인물들은 최소한의 동선만을 따라 움직인다. 카메라는 별다른 이동이 없고, 조명은 대부분 인물을 고립시킨다. 그들의 표정은 굳어 있으며, 거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화를 액션영화라고 불러야 한다면 그건 그가 인물들의 마음을 오직 그들의 행동을 통해서만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는 영화를 결코 형이상학적 관념이나 상징적인 세계에로 몰고 간 적이 없다. 그러나 카우리스마키의 등장인물들은 예외없이 세상의 사슬로부터 풀려나서 이미 의미를 잃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말을 써야 하는 알레고리의 인물들이다. 그들은 왜 그 사슬로부터 풀려난 것일까? (카우리스마키의 말에 의하면) “90년대 초 디플레이션은 많은 사람들을 실직상태로 만들었고, 그들은 자신들이 살던 세상보다 훨씬 나쁜 계급의 세상으로 떨어져만 했습니다. 더 불행한 것은 그들이 더 좋아질 가능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말했습니다. 내가 지금 그들을 위한 영화를 만들지 않으면 거울을 볼 때마다 부끄러울 거야.” 새로운 헬싱키 삼부작을 만들면서 그는 이 영화들이 실직 당한 노동자들을 위한 동화가 되기를 바랐다. 그 소망은 단지 헬싱키의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전세계 노동자들의 동화가 될 것이다. 영화는 한 남자의 여행으로 시작한다. 그는 낯선 역에 내려서 벤치에서 노숙한다. 그러나 운 나쁘게도 깡패들이 나타나 그를 털어가면서 죽도록 때린다. 또는 실제로 거의 죽었다. 병원에서도 그의 심장박동기는 멈추었다. 그런데 그가 얼굴에 붕대를 두르고 벌떡 일어난다. 잠깐, 이 영화는 괴기영화가 아니다. 일어난 것까지는 좋은데 그는 과거를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그는 갈 곳도 없고, 그래서 자기를 구해준 홈리스 실직자들의 무리에 섞여 지낸다. 이들을 위해 매일 찬송가를 부르고 한끼 밥을 무료로 제공하는 구세군 밴드가 이 동네를 찾아온다. 남자는 이 밴드의 여자를 사랑하고, 그리고 그녀와 조심스럽게 데이트를 한다. 그런 그가 새로운 직장을 찾기 위해 면접을 갔다가, 은행 통장이 있어야 한다는 말을 듣고 계좌를 만들기 위해 은행을 찾아간다. 그러나 마침 체불임금을 주기 위해 은행을 털기 위해 온 사장과 마주치고, 여차저차해서 남자는 경찰에 불려가 자기 신원을 알게 된다. 그래서 찾아간 집에서 아내로부터 자기는 이미 이혼당했으며, 실의에 찬 나머지 떠돌던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를 다시 반겨줄 홈리스들의 동네로 돌아오고, 그는 마침내 구세군 밴드의 여자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이 추락의 드라마를 카우리스마키는 건조하게 끌고간다. 명백히 장 르누아르의 30년대 인민전선 시대의 공동체에 대한 환상이 이 영화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으며, 또는 홈리스들이 모여 사는 동네는 장 비고의 <아탈랑트>를 연상케 하는 시적인 기분이 있다. 별다른 장식은 없지만 등장인물들은 생생하게 살아서 움직인다. 대부분 말이 없고, 그들의 표정은 항상 우울하다(영화 속에서 단 한번도 웃는 얼굴을 보지 못한다). 그러나 그 안에서 저 어이없는 상황과 대사들은 비통하지만 진짜 웃긴다. 특히 은행강도장면. 또는 단순함과 항상 일정 정도의 거리만큼 카메라에서 떨어져 있는 인물들이 그의 영화를 브레히트적인 무대로 이끌고 간다(그런데 그게 그렇게 단순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카우리스마키가 98년 느닷없이 ‘무성영화’ <유하>를 찍었던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의 영화에는 이상하게도 무성영화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들의 황량한 세상을 카우리스마키는 낡은 테크니컬러의 색조로 재현해내서 다시 한번 그들에게 희망을 안겨주는 다채로운 색상의 풍요로움을 주고 있으며, 대부분 디프 포커스로 촬영된 실내장면들은 그들의 마음의 넉넉한 너비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들이 사는 세상은 (영화의 표현을 빌리면) “좇 같은 자본주의”이지만, 그래도 살기 위해서는 “하여튼” 사랑이 필요하다. 그 중간에 심심찮게 등장하는 구세군 밴드의 노래는 가난한 자들의 사랑의 발라드이며, 구원의 소리이며, 천사들의 재림이며, 찬송가 로큰롤이며, 무엇보다도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대신 온 가라오케 밴드이다. 더이상 추락할 수 없는 장소까지 떨어진 남자에게서, 비로소 과거의 온갖 시름을 던져버리고, 카우리스마키는 다시 시작하자고 말한다. 더이상 잃을 것이 없다는 것. 과거를 돌이킬 필요가 없다는 것. 그런데 잠깐. 그들이 다시 시작하는 곳은 어디인가? 집도 없고, 돈도 없고, 직장도 없고, 함께 살면서 사랑을 노래한다. 그들이 단결하여 한발만 더 내딛으면 그들의 천국이 열릴 것이다. 여기에는 공동체 정신이 있으며, 카우리스마키는 그들의 우정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새로운 헬싱키 삼부작은 이상하게도 상황은 점점 더 비극적인데, 마지막 엔딩은 점점 더 희망적이 되어간다. 희망, 그 말이 중요하다. 이제 한발만 더 내딛으면 된다. 아직 세상은 끝나지 않았으며, 그들은 패배한 것이 아니다. <되돌이킬 수 없는>, 악마의 영화 모두들 가스파르 노에의 <되돌이킬 수 없는>(Irreversible, 경쟁부문)을 기다렸다. 이 영화의 인터뷰 기사는 첫 시사 때까지 그 내용을 밝힐 수 없다는 난처한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번 칸에 온 모든 영화 중에서 유일하게 이 영화만이 별표 표시가 달려 있다. 소개의 글을 옮기면 “이 영화에는 당신을 불편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이다. 또한 공식시사도 심야 12시 반으로 잡혀져 있었다. 무언가 사고칠 준비가 된 영화. 98년 <모든 것에 대항하는 유일한>으로 판타스틱영화제에서조차 기겁을 하게 만들었고, 모두들 “한번은 봐야 할, 그러나 두번은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영화로 불린 데뷔작을 만든 감독의 두 번째 영화이자 첫 번째 칸 입성작. 그는 다음 영화까지 4년을 침묵하였고, 칸에서 지구상 최초의 시사가 마련되었다. (혹시 이 영화를 보실 분들은 이하를 읽지 마실 것. 이 내용은 당신이 이 영화를 볼 때 스포일 리뷰가 될 것이다.) 영화의 이야기는 간단하다. 한 할아버지가 딸과 섹스한 생각을 멈출 수 없다고 고통스럽게 고백한다.- 게이 클럽에 마르쿠스가 찾아가 한 남자를 찾는다. 그리고 그를 얼굴이 부서지도록 철제 소화통으로 짓이긴다.- 마르쿠스가 친구들과 한 남자를 찾는다.- 마르쿠스가 연인 알렉스가 강간당해서 병원에 실려간 것을 발견한다.- 알렉스가 파티에서 혼자 돌아오다가 강간당한다.- 알렉스가 혼자 파티를 떠난다.- 알렉스와 마르쿠스가 다툰다. - 알렉스는 자신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알렉스와 마르쿠스가 서로 사랑한다. - 알렉스는 잠에서 깬다.- 알렉스는 행복하게 어느 공원 정원에 누워 있다. 가스파르 노에는 강간과 복수의 이야기를 시간을 거슬러올라가면서 뒤쫓는다. 그는 이 시간의 역전극을 따라가며, 미친 듯이 달린다. 마르쿠스가 게이 클럽을 뒤지는 장면은 지옥도를 방불케 하며, 그 어둠침침한 공간에서 온통 붉은색 조명으로 가득 찬 곳에 우리를 빙글빙글 도는 카메라와 함께 20분 동안을 말 그대로 처넣는다. 그저 보시의 저 악마도 속을 헤매고 있다고 밖에는 달리 할말이 없다. 아니면 프란시스 베이컨의 그림들처럼 그곳에서 인간은 모두 고기가 되어 널려 있다. 저 무시무시한 느낌은 아마도 그를 이탈리아 난도질영화나 스페인 호러영화의 전통에도 비견할 만큼 끔찍하다. 또는 정말 좀더 심하다. 가스파르 노에는 단지 이미지가 무시무시하다는 차원을 넘어서서 그는 우리의 심리적인 한계선에 도전한다. 마르쿠스의 애인 알렉스가 지하도에서 강간을 당할 때, 모니카 벨루치의 저 처절한 비명소리와 안간힘을 떠는 벌거벗긴 육신을 가스파르 노에는 단 한 군데에 멈춰 서서 시종일관 정면으로 지켜본다. 그는 그 강간의 과정을 단 한번의 편집도 없이 시작에서 끝까지, 그리고 끝에서 다시 끝까지를 모두 담는다. 그녀는 강간당하고 그 자리에서 얼굴을 짓이김당한다. 강간당하는 그녀는 카메라를 향해 구해달라고 내내 손을 내밀고, 그 손은 금방이라도 화면을 넘어 나에게 와닿을 것 같다. 아, 무기력한 관객의 자리. 또는 폭력에 대해서 무기력한 우리. 영화 전체를 14컷으로 찍은 이 영화는 앞에서 보면 큰일난다. 왜냐하면 카메라는 빙글거리고 돌고 있으며, 인물들은 시종일관 고함을 지르고, 시네마스코프의 화면은 너무 넓고, 클로즈업들은 당신을 질리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끝난다면 가스파르 노에는 그저 스캔들을 위해서 온 것에 불과할 것이다. 나를 가장 놀라게 만든 것은 이런 사악하기 짝이 없는 악마의 영화를 만들고 난 다음 마지막 순간에 우리에게 천사처럼 아름다운 장면을 준비한 것이다. 그 순간 누구라도 행복한 유포리즘을 볼 만큼 따사로운 장면이 나올 때, 가스파르 노에는 마지막 대사를 들려준다. “시간은 모든 것을 망친다.” 영화의 여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일단 나는 여기서 숨을 돌려야 한다. 늑대의 시간은 끝이 났고, 5월26일 칸의 아침 날씨는 맑다. 이제 6시간 뒤면 서울로 떠나는 박은영 기자에게 나는 이 디스켓을 넘겨야 한다. 나는 여기에 내가 칸에서 본 영화들의 일부분을 담았을 뿐이다. 그러니 이것이 모든 것이라고는 오해하지 말 것. 세상의 욕망은 끝이 없고, 갈증은 더욱 재촉할 것이다. 그러니 이 모든 갈증을 달래고, 욕망을 채우는 길은 하나밖에 없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당신이 진정 칸에서 행복해지고 싶으면, 당신의 영화를 이곳에 가져와야 할 것이다. 이곳은 영화를 창조하는 이들에게 신의 자리를 허락하는 곳이다. 생각해보라. 내년 칸에는 무슨 영화가 올 것인가라는 헛된 예언을 하는 대신, 내년 칸이 당신의 영화를 기다리고 있다고. 나의 일기는 끝나지 않았으며, 영화를 찾으러 가는 나의 여행은 계속될 것이다. 나는 내년에 당신의 영화를 보고 시파. 진심으로‥‥. ▶ 영화평론가 정성일, 칸으로부터 세 번째 편지(1) ▶ 영화평론가 정성일, 칸으로부터 세 번째 편지(2) ▶ 영화평론가 정성일, 칸으로부터 세 번째 편지(3)

[해외평단의 임권택 읽기]미셸 프로동의 특별기고

그 거장은 이렇게 발견되고 인정받았다 장- 미셸 프로동/ <르몽드> 기자 한국영화의 발견, 특히 그 양적인 중요성에서뿐만 아니라 작품성, 또 다뤄지는 주제의 폭넓음에서 동시에 한국영화의 최중심 인물인 임권택 감독의 발견은 프랑스나 유럽의 시네필들에게는 비교적 최근에 이루어졌다. 몇몇 영화제들의 개척자적인 활동들에 경의를 표해야 할 것이다. 1982년 페사로영화제가 한국영화를 전반적으로 소개했고 낭트의 3대륙 영화제는 1986년 첫 시도를 한 뒤 1989년 임권택 감독의 회고전을 처음으로 조직했다. 다음 단계는 1993년 파리의 퐁피두 센터가 주최한 대대적인 한국영화 회고전이었다. 이 회고전은 <만다라>의 임권택 감독이 한국영화에서 차지하는 중요한 위치를 가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같은 해에 한국에서 개봉된 <서편제>가 이 퐁피두 센터에서 소개된 다음 프랑스에 처음으로 상업적인 배급망을 통해 개봉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이 회고전을 준비한 프랑스쪽 인사들과 이들과 협력한 한국의 영화계 인사들의 공동 노력은 많은 프랑스 비평가들이 서울을 방문할 기회를 제공했다. 나 역시 이 그룹에 포함되는 행복을 누렸다. 이렇게 나는 서울의 영상자료원에서 10여편에 달하는 임권택 감독의 영화를 보고 이 감독의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발견은 감독을 만나고 인터뷰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이 여행 뒤 <르몽드>뿐만 아니라 프랑스에서 한 감독이 작가로서 인정받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다른 주요 언론매체들, <카이에 뒤 시네마> <리베라시옹> <텔레라마> 등에서 여러 기사들이 발표됐다. 이는 (프랑스에서) <판소리 여가수>란 타이틀로 개봉된 <서편제>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이 과정을 통해 임권택 감독의 작품세계를 인정하기 위한 중요한 진전이 이뤄졌다. 나 개인적으로는 현대영화의 주요한 예술가로 생각하는 임권택 감독 작업의 진보과정을 지켜볼 수 있는 특혜를 누렸다. 내가 일하는 일간지(<르몽드>)에서 그의 새 영화들을 좀더 폭넓은 방식으로 소개할 수 있었다. 이렇게 나는 이 감독의 특출난 창조적인 에너지와 그의 연출에서의 예술적인 가치를 강조할 수 있었다. 또 임권택 감독의 영화는 한국을 잘 알지 못하는 외국인들에게 한국의 여러 측면을 발견할 수 있게 하는 유례없는 기회를 제공해준다. 즉, 한국의 과거사나 현대의 사회적 현실, 아니면 한국인이 갖는 영적인 세계와의 관계, 또 일상적인 생활습성들과 문화 등이 그의 영화세계에 포함돼 있다. 특히 프랑스에서 임권택과 같은 위대한 감독에 대한 인정이 이뤄지는 데는 복합적인 요소들이 작용했음을 강조하고 싶다. 먼저 부산국제영화제를 선두로 한국에 존재하는 영화제들은 유럽 시네필들과 한국의 예술가들(그리고 아시아의 예술가들)간에 좀더 정기적인 유대관계를 맺을 수 있게 했다. 또 임권택 감독의 작품들처럼 주요 작품들이 인정을 받게 되는 데는 피에르 리시앙과 같은 ‘영화의 안내자’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다른 측면에서는, 한국 문화를 프랑스에서 수호하는 역할을 맡아 언론매체들과의 협력관계에서 매우 적극적인 활동을 펴고 있는 주프랑스 한국문화원 손우현 원장의 역할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2000년 칸영화제에 초대된 <춘향뎐>이 비평계의 호응을 얻어낸 점과, 또 세계 최고의 영화제를 자임하는 칸영화제가 임권택 감독이 100번째 작품을 만들기 얼마 전에 마침내 이 감독을 초대하기로 결정한 것은 임권택 감독으로 하여금 상당한 반향을 누릴 수 있게 했다. <춘향뎐>이 DVD로 출시된 것은 이 감독이 인정받은 점을 보여주는 증거이면서 동시에 인정의 범위를 넓히는 수단의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특히 지적해야 할 것은 시네마테크 프랑세즈가 주최한 임권택 감독 회고전의 결정적인 역할이다. 프로그래머인 장 프랑수아 로제의 결정적인 활동에 힘입어 준비된 이 회고전은 세계에서 가장 명망높은 영화기구 중 하나인 시네마테크 프랑세즈가 위대한 작가로서 임권택 감독의 위치를 인정했음을 보여준다. 올해 칸영화제에 <취화선>이 초대된 점, 또 대단한 비평계의 호응을 얻은 점, 파테라는 가장 큰 영화제작 배급사를 통해 프랑스에 배급이 결정된 점, 마지막으로 상을 받은 점 등은 유쾌하고 정당한 방식으로 진행된, 임권택 감독이 프랑스에서 발견되고 인정받는 과정에서 새로운 단계가 열렸음을 알려준다. 그의 엄청난 재능에 상응하는 위치를 프랑스에서 얻는 데 기여할 수 있는 즐거움을 누린 프랑스 비평가들은 임권택 감독이 감독상을 수상하며, 비평가들에게 감사의 말을 던진 순간 진한 감동에 빠졌다. 장-미셸 프로동은 <르포앵>(Le Point)의 편집장을 거쳐 현재 <르몽드> 영화담당 기자로 일하고 있다. 한국영화와 아시아영화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이 분야의 원고를 도맡아 쓰고 있으며, 등의 저서가 있다. ▶ 임권택을 바라보는 다섯개의 시선 ▶ 미셸 프로동의 특별기고 ▶ <르몽드> 장 프랑수아 로제 ▶ <리베라시옹> 필립 아주리 ▶ 샤를 테송의 <춘향뎐>론 ▶ 데이빗 제임스의 ‘임권택: 한국 영화와 불교’ ▶ 사토 다다오의 ‘한국 영화와 임권택’ ▶ 임권택 감독 인터뷰

신인감독 8인 (8) - <크랙>의 김태균 감독

그는 왜 감독이 되었나 군대에서 병장이 꿰어차는 ‘TV채널 선택권’ 덕분에 어느 날 병장 김태균은 텔레비전에서 단편영화 한편을 보게 된다. 무릇 군인이라면 채널을 고정시키곤 하는 쇼·오락프로가 아닌 EBS의 단편영화극장이 그날 병장 김태균이 선택한 프로그램. 거기서는 마침 스스로를 존 레넌의 환생이라고 믿는 남자에 관한 장준환 감독의 단편 이 나오고 있었고, 그 영화를 보면서 김태균은 내무반 TV 앞에서 영화라는 매체의 힘을 발견했다. 입대 전 대학에서 학생운동을 했던 그는 그당시 문화운동에 관심이 많았는데, 그를 위한 한 소통방식으로서 영화가 적합하리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거기에 “저런 단편은 나도 만들 수 있겠다”라는 자신감이 보태져서 제대 뒤 김태균은 <씨네21>에 난 광고를 보고 한겨레문화센터 영화제작학교를 들어갔다. 복학생이 별거 다한다는 얘기까지 들으며 학교에 영화제작동아리도 만들었고, <이방인의 꿈> <줄서기> 등 단편을 만들었다. 상업영화판에 발을 디딘 건 곽경택 감독과 만나면서. 동아리에서 단편상영회를 준비하던 중 <영창이야기>를 섭외하다가 곽경택 감독을 만났고, <억수탕>의 조감독으로 충무로 상업영화 일을 시작했다. 이후 <닥터K> <세이 예스> 등의 조감독을 하며 김태균은 장편 상업영화로 자기 이야기를 하는 방법을 서서히 물색해왔다. 그는 왜 <크랙>을 연출하는가 <억수탕> 때 제이콤의 프로듀서였던 현 씨앤필름 이창준 PD가 <크랙>의 감독으로 그를 강력추천했다. 이창준 프로듀서와 김태균 감독은 <억수탕> 때부터 알고 지내며 서로의 영화적 감수성을 훤히 들여다보는 사이. <크랙> 프로젝트에 대해 이 프로듀서는 “곽경택 감독과 함께 일했고 <세이 예스>도 했던 김태균이 이 작품에는 딱이다”라고 했고, 김태균 감독이 이에 “내 역량을 넓혀나가기 좋은 작품”이라고 맞장구를 쳐 손을 잡았다. 신인감독으로서 잘 갖춰진 시스템의 관리와 보호를 받는 기회도 놓치기 싫었다. 애초에 영화를 문화운동의 일환으로 받아들이긴 했지만, 충무로에서 일하면서 언제부턴가 “좀더 많은 대중 앞에서 사람에 대한 고민을 담보하는 장편영화를 만들어 보이겠다”는 결심을 했던 터. 일견 통속적으로 보이는 <크랙>의 내러티브에 대해 그는 ‘사람 이야기’라고 말한다. 그가 손수 이름붙인 <크랙>의 장르는 ‘로맨틱 스릴러’. “사람의 감정 중 가장 강렬한 게 사랑인 것 같다. 그것을 인물의 감정이 극대화되는 스릴러 장르에 끌어오고자 한다. 굳건해 보이는 사랑으로 맺어진 관계들이 사실은 너무나 깨지기 쉬운 것임을 보이며 이기적이고 모순적인 인간감정을 드러내고자 한다”고 그는 말한다. 그가 좋아하는 영화는 코언 형제의 <파고>와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 얼마 전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를 극장에서 보고 김태균 감독은 “아, 바로 내가 하고 싶은 것이다!”라고 내심 탄성을 내질렀다고 한다. 전혀 그런 일이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상황에서 조금씩 인물들간의 관계가 무너져가는 이야기. 멜로문법으로 시작해 스릴러로 끝나는 이야기. 충분히 장르적인 기법을 이용하면서 관객과 두뇌싸움을 하는 영화. 김태균 감독이 <크랙>에서 해 보이고 싶은 바로 그런 모든 것이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에서 세련되게 이루어져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그의 사기를 꺾지는 않는 모양이다. 그의 ‘내 인생의 영화’ 이야기는 곧 “<크랙>이 바로 그런 영화가 될 것이다. 기대해달라”는 밝은 자기다짐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최수임 sooeem@hani.co.kr · 사진 정진환 jungjh@hani.co.kr Synopsis 평화로운 전원주택단지. 소설가 겸 변호사로서 여유로운 생활을 하고 있는 남자 성재와 그의 아내 윤미 부부네 옆집에 어느 날 미모의 낯선 여자 지영이 이사를 온다. 아내 윤미와 달리 싱그러우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어두움이 배어 있는 지영의 매력에 성재는 서서히 빠져든다. 성재와 지영이 자연스럽게 친해진 사이, 돌연히 지영의 남편이 나타난다. 성형외과의인 지영의 남편 유식은 알고보니 성재의 고등학교 동창. 성재는 아내에 대한 죄책감과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 다가오는 유식으로 인한 압박감에 시달린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지영을 쫓는 그의 시선은 멈출 줄 모른다. 성재와 윤미, 지영과 유식, 두 부부의 관계는 점점 그 틈새가 커져가고 어느 날, 성재의 집 욕실에서 시체 한구가 발견된다.▶ 신인감독 8인 (1) - <이중간첩>의 김현정 감독 ▶ 신인감독 8인 (2) - <중독>의 박영훈 감독 ▶ 신인감독 8인 (3) -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줘>의 모지은 감독 ▶ 신인감독 8인 (4) - <거울 속으로>의 김성호 ▶ 신인감독 8인 (5) - <빙우>의 김은숙 감독 ▶ 신인감독 8인 (6) - <동정없는 세상>의 김종현 감독 ▶ 신인감독 8인 (7) - <첫눈>의 이혜영 감독 ▶ 신인감독 8인 (8) - <크랙>의 김태균 감독

<후아유> 사이버 공간에 펼쳐진 남성 중심의 낡은 연애담

● 폴 발레리였나? 맞다. 폴 발레리였다. 하여간 이 남자가 언젠가 흥미로운 낙서를 한 적 있다고 한다. 정확한 인용은 어렵지만 대충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는 꿈속에서 하나의 직선을 봤는데, 직선 위에는 A와 B라는 점이 있었다. 발레리는 그들에게 오르탕스와 앙리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다음과 같은 간단한 법칙을 만들었다. 앙리는 오르탕스가 가까이 있을수록 더욱 그녀를 사랑하게 되고, 오르탕스는 앙리가 멀리 있을수록 그를 더욱 사랑한다는 것이다. 가끔 나는 이 간단한 법칙을 컴퓨터에 입력하고 약간의 변수를 뿌린 뒤 어떻게 되는지 관찰하고 싶어진다. 잘하면 작가 따위의 귀찮은 매개체 없이도 괜찮은 러브스토리가 나올지도 모른다. 여기서 재미있는 건 발레리가 오르탕스와 앙리에게 붙여준 간단한 성격이다. 그가 자신의 로맨스에 대한 남녀의 일반적 반응이라고 믿었던 것을 여기에 대입했다고 믿어도 될까? 다시 말해 남자는 상대방의 육체적 현존이 강할수록 더 강한 애정을 느끼고 여자는 상대방이 로맨스의 대상으로 추상화되었을 때 더 강한 애정을 느낀다는 법칙 말이다. <후아유>에서도 이런 법칙은 그대로 통용된다. 이 영화의 주인공 인주/별이와 형태/멜로는 오르탕스/앙리 커플과 거의 똑같은 규칙에 따라 움직인다. 인주는 눈앞에 있는 형태보다 얼굴도 볼 수 없는 멀리 있는 존재인 멜로를 더 좋아한다. 하지만 형태에게 진짜로 관심이 있는 존재는 인터넷상의 별이가 아니라 그의 눈앞에 존재하는 인주다. 물론 우린 이들의 다른 반응이 가지고 있는 정보차에 기인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사전 조건을 다르게 입력했다고 해도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을 것 같다. 만약에 인주가 처음부터 이런 사각관계의 정체를 꿰뚫고 있는 쪽이었다고 해도 여전히 그가 관심을 가지는 쪽은 멜로였을 거다. 왜? 그게 로맨스의 재미있는 점이다. 우린 로맨스와 로맨스의 대상을 이상화시키고 순수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적어도 섹스나 결혼과 같은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대상보다 로맨스 자체에 더 신경을 쓰는 사람에겐 이런 경향이 강하다. 이게 정말 성적 차이인지는 모르겠다. 인주 & 형태와 반대되는 경우도 꽤 많이 봤으니까. 멀수록 더 자극적인 로맨스도 있다 로맨스에 더 치중하는 사람들에겐 원거리 로맨스가 더 자극적이다. 원거리의 로맨스는 당사자들의 상상력을 자극시키며, 우리가 가진 불쾌한 단점들을 사전에 봉쇄한다. 애정 표현의 전달 과정이 불편하면 불편할수록 이들의 로맨스는 더 ‘순수해지며’ 그 결과 더 강도도 높아진다. 19세기까지 가장 화끈한 러브스토리의 반 이상이 서간체였다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우리 시대에서는 인터넷의 가상세계가 굼벵이 편지를 대신해 이런 순수화의 필터가 되어준다. 인터넷은 실제로 존재하는 인물의 육체처럼 불쾌한 것들을 사전에 제거해주면서도 은근히 기능이 많다. 아니, 요새 같은 브로드밴드 시대엔 순수주의자들을 불안하게 할 정도로 기능이 많다. 몸을 직접 부딪히지 않을 뿐이지, 데이트에서부터 섹스까지 할 수 없는 게 없으니까. 물론 익명성도 이제는 선택이다. <후아유>의 세상은 선배영화 <접속>의 세계와 다르다. <후아유>의 연인들은 이제 육체를 가지고 있다. 디지털 정보들로 구성된 이미지와 사운드의 결합에 불과하지만 분명 육체는 육체다. 다행히도 이 육체는 화장실에 갈 필요도 없고 잘 때 코를 골지도 않고 쓸데없이 몸을 부대끼며 옆사람을 귀찮게 하지도 않는다. <후아유> 게임의 아바타는 컴퓨터의 전원만 끄면 사라진다. 인주/별이에게는 딱 좋을 정도의 존재감이다. <후아유>에서 인주의 이야기는 비교적 전통적이다. 약간의 갈등을 겪는 동안 인주는 가상 캐릭터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나 실제 인물에게서 사랑을 찾는다. 비교적 건강한 결론이다. 물론 건강하다는 것은 인주라는 사람의 신체적/정신적 건강에 좋은 선택이라는 이야기지, 특별히 절대적으로 옳은 일이라는 말은 아니다. 왜 건강함이 늘 유일하게 올바른 선택이어야 할까? 물론 건강한 선택이 나쁘다는 것도 아니다. 적어도 인주의 삶은 이전보다 평탄해질 것이며 그 사람의 삶도 비교적 현실적인 단계로 올라갈 것이다. 하지만 형태/멜로의 이야기는 그것과 다르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형태는 별이에게만 만족할 수 없다. 가장 큰 이유는 형태가 인주라는 자연인에 대한 정보를 훨씬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형태는 자기가 온라인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람이 화장품 모델 같은 미모에, 구식 순정만화에 등장해도 이상하지 않을 성격과 과거를 지닌 전직 수영선수라는 걸 안다. 이걸 알면서도 이 친구가 과연 도시 저편에서 조종받는 이미지 조각에 만족해야 할까? 천만의 말씀이지. 잠깐, 여기 우리가 쉽게 놓치는 것이 하나 있다. 형태가 자연인 인주에게 별 문제가 없는 건 특별히 형태가 현실적인 인물이어서가 아닌 것 같다. 암만 봐도 인주에게는 이상적인 로맨스에 특별히 대단한 방해가 될 만한 불편한 요소가 적다. 성격에서부터 외모에 이르기까지, 인주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은 로맨스에 맞게 얌전하게 재단되어 있다. 처음부터 인주는 로맨스를 위한 버추얼 캐릭터다. 특별히 필터가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인터넷의 필터는 인주라는 인물과 로맨스를 트는 데 방해가 된다. 시치미를 뚝 떼고 무장 해제된 상대방한테서 여벌 정보를 끌어내며 수작을 거는 기회를 제공해준다는 걸 빼면 말이지만. 결국 이런 식의 기성품 로맨스는 버추얼 게임일 수밖에 없다. <후아유>의 러브스토리가 소재가 가지고 있던 가능성에 비해 약하게 느껴졌던 이유는 이 영화가 모범적인 장르물이었다는 데 있는 것 같다. 모범적인 장르물인 것은 그 자체로 문제가 아니지만 현실과 가상세계의 갭을 다루는 영화에서 현실의 힘이 약하다면 그건 꽤 큰 문제다. <접속> <유브갓 메일> <후아유>의 밥맛 없는 남자들 지금까지 내가 본 세편의 온라인 러브스토리인 <접속> <유브갓 메일> <후아유>에서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그게 초반이건 중반이건 결말이건, 늘 한쪽이 다른 쪽의 정체를 먼저 알아내고 그것을 관계맺기의 무기로 이용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게 또 무슨 우연인지, 세 영화 모두 그런 무기를 쟁취한 사람들이 모두 남자다. 이 세 남자들 모두가 나에겐 상당히 밥맛으로 보였다는 걸 고백해야겠다. 내가 케이틀린 켈리였고 막판에 내 인터넷 데이트 상대가 조 폭스였다는 걸 알았다면 ‘당신이기를 바랐어요’ 따위의 간드러진 고백 따위를 하는 대신 그 남자의 얼굴에 주먹이라도 한방 날리고 나왔을 것이다. <접속>의 동현도 짜증나기는 마찬가지. 멀리서 수현을 바라보는 그 친구의 모습은 거의 간접 추행처럼 느껴진다. 형태는 어떻게 보면 그중 가장 악질이다. 조 폭스와 동현의 연애담은 적어도 시작할 때는 공평한 게임이었다. 그들이 상대방의 정체를 먼저 알아낸 것도 그렇게 음모의 결과는 아니다. 하지만 형태는 게임 시작부터 자신의 사각관계를 꿰뚫고 있었다. 나중에 이 친구가 공식을 따라 ‘진지한 감정’을 느낀다는 사실도 이 관계의 악독함을 특별히 가려주지는 않는 것 같다. 하긴 그게 죄책감이라는 드라마의 도구를 제공해주긴 하지만 <후아유>는 그렇게까지 캐릭터의 내면이 깊이있게 묘사된 영화도 아니다. 형태가 인주에 비해 정보를 더 많이 가지고 있었던 이유는 그가 이들의 연애장소인 <후아유> 게임의 개발자였기 때문이다. 형태가 몇달째 땡전 한푼 못 만지는 친구라는 사실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그는 그들의 세계에서 유산계급이다. 그는 그들이 만나는 세계를 통치하고 그 세계의 신민들인 베타 테스터들의 모든 온라인 자산을 관리한다. 어떻게 보면 인주와 형태의 관계는 지젤과 알브레히트의 관계보다 더 불공평하다. 결국 <후아유>의 이야기는 외양이 어찌됐건 변장한 귀족 청년이 가난한 시골 처녀를 농락하는 이야기와 특별히 다르지도 않다. 물론 내가 인주였다면 형태의 정체를 알자마자 주먹부터 날리고 봤을 것이다. 정말 그랬다면 형태에게도 좋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형태의 정체가 밝혀지자 분노한 인주는 외친다. “이게 너에게는 게임이니?” 흠… 인주는 논점 근처에는 갔는데, 논점의 정곡을 찌르고 있지는 않다. 게임이라는 것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다. 애당초부터 이들의 연애 무대인 <후아유>는 게임이고 두 사람 모두 서로에게 게임 파트너였다. 순수한 연애라는 것도 사실은 게임이다. 전통적인 연애담에서 게임을 하는 사람들은 주인공인 두 연인들이고, 진지하게 인생을 생각하는 쪽은 여자주인공이 억지로 결혼해야 하는 나이든 뚱보 아저씨다. 두 연인들이 자기네 감정이 주는 쾌락을 좇는 동안 그 뚱보 아저씨는 후손을 낳아줄 실팍한 엉덩이의 젊은 여자와 결혼에 따른 감세 효과를 진지하게 계산하고 있었을 테니까. 그렇다고 여러분이 두 진실한 연인들을 경박하다고 밀어붙이지도 않을 테니, 게임이 게임이라는 이유로 박해당할 이유는 없다. 진짜 문제는 이 러브스토리가 불공정 게임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불공정함이 지젤과 알브레히트 때와 특별히 다르지도 않은 성적 권력의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는 건 더욱 불편하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물론 대비할 방법이 있다. 사랑과 전쟁은 모든 것들이 용납되는 게임판이다. 결국 여기서 처참하게 망가지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가 끌어올 수 있는 소스는 모두 가져와 활용해야 한다. 사이버 스페이스에서 진지한 연애를 할 생각이라면 그 세계에서 단순히 소극적인 사용자로 안존하며 만족하지 말기를. 방심하다간 언젠가 디지털 알브레히트에 넘어가 디지털 윌리가 될지도 모른다. 물론 여러분이 예쁘게 디자인된 텔레비전 광고에 혹해서 순식간에 상대방의 모든 것을 용서해버리는 단순한 성격의 사람이라면 이런 경고도 필요없겠지만. 듀나 djuna0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