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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 영화제 | 아메리카의 드림 누아르

“미국영화는 고전적 예술이다. 그렇다면 왜 가장 찬미할 만한 것, 즉 이런 저런 감독의 재능뿐 아니라 그 시스템의 천재성을 찬미하지 않는가?” 앙드레 바쟁의 이같은 말을 오늘날 미국영화에 적용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판단일까? 할리우드의 오랜 장르 전통을 높이 평가한 그의 말은 40여년이 지난 지금도 그릇된 것이 아니다. 적어도 올해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오른 5편의 미국영화는 프랑스 평론가의 혜안을 뒷받침한다. 개막작인 바즈 루어먼의 <물랑루즈>는 버스비 버클리, 빈센트 미넬리의 뮤지컬 전통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영화이다. 드림웍스의 애니메이션 <슈렉>은 어떤가? 디즈니에서 비롯된 귀엽고 예쁜 캐릭터들이 없었다면 <슈렉>의 못생긴 주인공이 돋보일 수 있었을까? 여기에 조엘 코언의 <거기에 없던 남자>, 데이비드 린치의 <멀홀랜드 드라이브>, 숀 펜의 <서약>은 필름누아르의 역사와 떼놓고 생각하는 게 불가능한 작품들이다. 올해 칸 경쟁부문의 미국영화들은 같은 이야기를 되풀이하면서 영화 속 인물의 깊이를 만들어냈다. 그들은 반복되는 행동과 중첩된 이미지만으로 거대한 의미가 배어나오는 영화를 만들었고 그로 인해 올해 칸은 미국영화의 저력을 확인하는 자리가 됐다. 영화제 기간 동안 가장 좋은 평가를 받은 영화들이기에 조엘 코언과 데이비드 린치의 감독상 공동수상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영화가 개인예술의 차원을 넘어선 어떤 지점에 있다는 걸 보여준 예이기도 하다. 회색공간 속 이발사의 추락 - 코언의 <거기에 없던 남자> 조엘 코언의 <거기에 없던 남자>(The Man Who Wasn’t There)는 40년대 필름누아르의 분위기를 의도적으로 재현한 작품이다. 물론 코언 형제에게 이런 시도가 처음은 아니다. <분노의 저격자> <밀러스 크로싱> <파고>로 이어지는 범죄영화에서 그들은 장르의 규칙을 자유자재로 넘나들었다. 지난해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를 자기식으로 해석한 유쾌하고 화사한 뮤지컬 <오 형제여, 어디에 있는가?>를 내놓았던 코언 형제는 <거기에 없던 남자>에서 다시 한번 <파고>의 회색공간으로 회귀했다. 흑백으로 찍은 이번 영화에서 중심에 놓인 인물은 에드 크레인이라는 이발사다. 빌리 밥 손튼이 연기한 이 사람은 하얀 가운을 입은 채 시종 아무 표정없는 얼굴로 등장한다. 배경은 1949년 여름 캘리포니아 북쪽 소도시, 크레인은 하루 종일 손님들 머리만 쳐다보는 무료한 일상에서 벗어나길 바라는데 어느 날 이발소를 찾은 한 남자가 드라이크리닝을 하는 기계가 떼돈을 벌어줄 거라며 바람을 넣는다. 1만달러만 있으면 지긋지긋한 이발소 생활을 청산할 수 있다고 생각한 크레인은 아내가 바람핀다는 사실을 알고 아내의 정부이자 그녀의 직장상사(제임스 갠돌피니)에게 협박편지를 쓴다. 1만달러만 내놓으면 사실을 눈감아주겠다는 협박은 제대로 먹혀 원하던 돈을 얻지만 크레인은 아내의 정부에게 꼬리를 밟힌다. 정부는 크레인을 불러놓고 “당신은 대체 어떤 종류의 인간이냐”며 화를 낸다. 아내의 부정을 이용해 돈을 벌려던 크레인의 행동은 <파고>에서 아내를 납치해 한몫 잡으려던 남자와 비슷하다. 사소한 이기심과 돈에 대한 집착이 예상치 못한 결과로 이어지는데 <거기에 없던 남자>의 크레인은 우발적으로 아내의 정부를 죽이고 만다. 남자가 죽자 엉뚱하게도 아내가 살인범으로 몰리고 억울한 아내는 자살을 택한다. 한번 나쁜 길로 들어선 크레인의 삶은 꼬일 대로 꼬여 엉킨 매듭을 풀 수 없는 상황에 이르고 만다. 줄거리로 보면 <파고>와 흡사하지만 <거기에 없던 남자>를 이끄는 것은 탐정의 시선이 아니다. 코언 형제는 여기서 평범한 어떤 남자의 자그마한 욕망과 그로 인해 비롯된 아찔한 추락을 그린다. 그들은 이것이 “<포스트맨은 벨을 두번 울린다> <이중배상> <밀드레드 퍼스> 등의 원작소설을 쓴 하드보일드 작가 제임스 M. 케인의 세계에서 따온 것”이라고 밝혔다. 범죄소설이면서 갱이나 형사가 아니라 일상적인 인물이 주인공이라는 사실이 코언 형제의 의도와 부합한 것이다. 어쨌든 <거기에 없던 남자>는 ‘에드 크레인의 초상’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캐릭터 탐구에 충실한 영화이면서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게끔 대상과의 거리를 유지한 작품이다. 기자회견장에서 에드 크레인을 연기한 빌리 밥 손튼은 “험프리 보가트에게 영감을 많이 얻었다”고 말했다. 마음은 천국과 지옥을 오가면서도 어떤 표정 변화도 보이지 않는 태도도 그렇지만 장면마다 담배를 피는 설정에서도 험프리 보가트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프랑스의 <프리미어> <텔레라마> <렉스프레스> 등이 이 영화에 최고평점을 줬으며 <포지티프>의 미셸 시망도 별 4개를 헌사했다. 악몽과 유머의 뫼비우스 띠 - 린치의 <멀홀랜드 드라이브> <거기에 없던 남자>가 그리는 것도 아메리칸 드림의 허상이지만 이 분야의 독창성 면에서 데이비드 린치를 능가할 감독을 찾기란 쉽지 않다. 코언이 아주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방식으로 장르의 틀을 빌린 반면 린치는 <이레이저 헤드> 시절부터 개척한 자기만의 스타일로 미국의 악몽을 보여준다. 신작 <멀홀랜드 드라이브>(Mulholland Drive)는 린치가 <블루 벨벳> <트윈픽스> <로스트 하이웨이>의 세계로 돌아갔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필름누아르와 공포영화의 경계에서 우리가 현실이라 믿는 평화로운 세계가 얼마나 무시무시하고 불안한 것인지 설파했던 린치는 이번 영화에서 할리우드를 동경하던 어떤 여인의 몰락에 초점을 맞춘다. 영화가 시작되면 한쪽에 ‘할리우드’라는 간판이 걸려 있고 다른 한편으로 대도시 LA의 야경이 보이는 한적한 비탈길을 달리는 리무진이 시야에 들어온다. 리무진 뒷좌석에 앉은 검은 머리 미인이 영문을 모른 채 살해되기 직전 마주 오던 자동차가 리무진을 들이받는다. 우연한 충돌사고로 목숨을 건진 여자는 언덕 아래 아담한 집에 몰래 숨는다. 이때 화면이 바뀌면 이제 막 LA 공항에 내린 또다른 여자가 등장한다. 금발머리에 귀엽고 천진난만한 표정의 그녀는 배우가 되기 위해 LA에 도착, 휴가 동안 집을 비운 숙모댁을 찾는다. 물론 그 집은 사고를 당한 여인이 숨은 곳. 금발 여자는 숙모집에 숨어 있는 그녀가 기억상실증에 걸려 있다는 걸 깨닫고 그녀의 기억을 되찾아주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흩어진 단서들을 좇으며 두 여자는 대도시 LA를 움직이는 알 수 없는 거대한 힘과 마주친다. 영화는 검은 머리 여인이 자기 이름을 기억하지 못해 리타 헤이워스 주연의 <길다> 포스터를 보며 “내 이름은 리타”라고 말하는 순간, 명백한 필름누아르의 표식을 드러낸다. 두 여인이 악의 정체를 향해 한발씩 다가설 때마다 그들 내부의 비밀이 하나둘 밝혀지며, 치명적인 유혹이 끝없는 타락을 향한 입구가 된다.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원래 미국 방송사 <`ABC`>에서 미니시리즈로 제작하기로 했던 작품이다. 그러나 <`ABC`>가 파일럿 프로그램을 보고 제작을 포기한 탓에 프랑스의 카날플러스가 인수해 영화로 만들어지게 됐다. 린치는 이번 영화에서도 붉은 베일 뒤의 난장이를 등장시킨다. <트윈픽?gt;와 <로스트 하이웨이>에서 그랬듯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초현실적인 힘을 지닌 악마이다. 수수께기를 던져놓고 추리가 진행되는 동안 관객의 상상을 뛰어넘는 의외의 답을 내놓는 전개방식도 전작의 연장선에 있다. 이번 영화의 플롯 역시 뫼비우스의 띠처럼 앞뒤가 뒤틀려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미로이다. 그러나 좀처럼 어둠에서 벗어나지 않던 <로스트 하이웨이>와 달리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밝고 화사하며 유머러스한 면까지 있다. 여전히 악몽이긴 하나 린치의 이번 영화에는 누구나 한번쯤 이루고 싶은, 허망하지만 매력적인 꿈이 있다. <스크린 인터내셔널>의 에마뉘엘 레비는 “린치의 컬트팬들을 만족시키겠지만 비평가와 관객은 찬반양론으로 나뉠 영화”라고 말했는데 한 가지 덧붙이자면 전작 <스트레이트 스토리>와 함께 린치의 팬을 늘리는 데 기여할 영화이기도 하다. 잊어버려, 제리 블랙 - 숀 펜의 <서약> 수상작에 끼지는 못했지만 숀 펜의 <서약> 역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영화이다. <인디안 러너>와 <크로싱 가드>를 연출, 감독으로서도 재능있다는 평가를 받은 숀 펜이지만 세 번째 영화에서 그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팀 로빈스의 대를 이을 만한 깊이있는 연출력을 보여준다. <서약>의 주인공은 잭 니콜슨이 연기하는 은퇴 직전의 형사 제리 블랙이다. 내일이면 경찰배지를 반납할 제리 블랙은 살인사건 현장에 나간다. 희생자는 8살된 여자아이. 처참하게 난자당한 시신을 목격한 제리 블랙에게 희생자의 부모를 만나 딸의 죽음을 알리라는 임무가 주어진다. 그는 딸의 살해 사실을 듣고 오열하는 부모에게 반드시 범인을 잡겠노라 맹세한다. 용의자는 의외로 쉽게 잡히지만 경찰서에서 자살하고 만다. 사건수사는 그것으로 종결되지만 제리 블랙의 마음은 편치 않다. 은퇴한 뒤에도 그는 수사망을 피해 잠적한 진범이 있을 거란 의심을 지우지 않는다. 제리 블랙은 어린 여자아이를 노린 범인이 조만간 나타나리라 여기며 다음 범행장소로 예상되는 마을 입구 주유소를 사들여 길목을 지킨다. <서약>은 제리 블랙의 강박관념이 ‘미친 짓’이 아니라는 걸 암시하지만 등장인물들은 누구도 그의 말을 믿지 않는다. 진실은 영영 밝혀지지 않고 제리 블랙은 모든 이의 기억에 한낱 ‘미친놈’으로 남을 뿐이다. 형사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수많은 영화가 있지만 <서약>(Pledge)은 선악대결이나 액션이 아니라 선의를 인정받지 못하는 어떤 인간에 집중하는 영화이다. 필름누아르의 탐정과 형사들이 겪는 쓸쓸한 말로라고 할까? <서약>에서 잭 니콜슨은 팜므파탈의 유혹을 받지 않는다. 그러기엔 이미 너무 많이 늙었고 힘도 없다. 대신 그는 가족을 갖고 싶어한다. 예쁜 딸과 함께 사는 외로운 여인(로빈 라이트 펜)을 만났을 때 남자는 그것이 이뤄질 거라 기대한다. 그러나 평화와 안식을 얻었다고 생각한 순간 그의 인생은 양심과 의무감에 발목잡혀 순식간에 곤두박질한다. 그리하여 영화의 오프닝과 엔딩을 장식하는, 폐허가 된 주유소에서 정말 미친 사람처럼 웃는 잭 니콜슨의 표정은 잊기 힘든 이미지이다. 로만 폴란스키의 <차이나타운>에서 탐정이었던 잭 니콜슨이 맞는 이 비극적 종말은 “잊어버려, 제이크. 여기는 차이나타운이잖아”라는 대사를 되씹게 만든다.칸=글 남동철 기자·사진 손홍주 기자·통역 이수원 ▶ 제 54회 칸 영화제 ▶ 수상 결과 ▶ 문 밖의 화제작들 ▶ 찬밥신세 된 영국과 독일영화들 ▶ 칸 마켓의 한국영화들 ▶ 황금종려상 <아들의 방> 감독 인터뷰 ▶ 심사위원대상 <피아노 선생님> 감독 & 배우 인터뷰 ▶ 아메리카의 드림 누아르 ▶ <거기에 없던 남자> 감독 조엘 코언 & 에단 코언 ▶ <멀홀랜드 드라이브> 감독 데이비드 린치 ▶ <서약> 감독 숀 펜 ▶ 3인의 거장, 세가지 지혜 ▶ <나는 집으로 간다> 감독 마뇰 드 올리베이라 ▶ <붉은 다리 밑의 따듯한 물> 인터뷰 ▶ <알게 되리라> 감독 자크 리베트 ▶ 아시아 작가주의 최전선 ▶ <거기 몇시니?> 감독 차이밍량 ▶ <밀레니엄 맘보> 감독 허우샤오시엔 ▶ <간다하르> 감독 모흐센 마흐말바프

칸 영화제 | <붉은 다리 밑의 따듯한 물> 인터뷰

프로듀서 이노 히사,주연 야쿠쇼 고지,시미즈 미사 이 영화는 원작소설이 있다. 영화를 만든 동기는? 이노 히사 다른 감독들과 마찬가지로 이마무라도 촬영장에서는 활기가 넘치고 행복한 모습이다. 그는 <간장 선생>을 마친 뒤 곧 차기작을 생각했다. 여러 영화를 구상했는데 그중 이번 영화를 선택해 나오토(다른 제작자)와 함께 일하기로 했다. 준비 단계를 거친 뒤 지난해 9월 초 촬영에 들어갔다. 원작은 전 <도쿄 AP> 기자였던 헨미 요의 중편소설이다. 헨미 요의 글이 자아내는 향은 이마무라 영화의 그것과 흡사하다. 감독도 촬영 때 시간이 나면 그의 글들을 많이 읽는다. 이마무라 영화의 여성은 항상 매우 강하고 두드러진 인물들이다. 60년대 영화들에서는 살인에 대한 욕구가 보이기도 한다. 이번 영화의 여자 주인공은 어떻게 만들었나? 감독의 다른 영화들을 참고했는가? 시미즈 미사 1997년 칸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우나기>가 이마무라 감독과의 첫 영화였다. 당시 감독의 정신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그의 영화들을 빠짐없이 봤는데 일단 촬영장에 들어서니까 머릿속이 하얗게 되더라. 감독은 내가 자유롭게 연기할 수 있도록 해줬다. 나는 지금 미국에 살고 있는데 어느 날 감독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는 “부탁한다”라는 의미의 딱 한마디만 했다. 당시 나는 임신 5개월이어서 감독에게 괜찮겠느냐고 물었더니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고 했다. 임신한 모습대로 찍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승낙했다. 인물을 만들기 위한 특별한 준비는 없었고 일반적으로 내가 연기하는 방식대로 했다. 프랑스사람들은 출산 때 ‘물을 잃어버린다’라고 표현한다. 영화에서 물의 의미는 종교나 신화에 관련되는가? 시미즈 미사 영화에 물이 많이 나온다. 주로 여주인공의 쾌락과 욕망을 표현할 때 물이 등장한다. 그런데 임산부의 뱃속에는 양수라는 물이 있다. 따라서 물은 쾌락이나 욕망의 상징을 넘어 뱃속에서 생겨나는 생명을 상징하기도 한다. 물의 상징성은 애매모호하지만 이미 영화 스토리에도 이런 측면이 잠재해 있다. 강가에서 물고기들이 이런 생명력에 유인되는 모습이 그것이다. 이 장면은 원작소설에도 나온다. 영화에 대한 언론의 관심이 지대한데 이를 알고 있는가? 수상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가? 이 영화에는 유머가 많이 녹아 있는데 연기하기가 힘들었나? 야쿠쇼 코지 수상은 오늘 시사회 뒤 관객의 반응, 그들이 기뻐하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다. 유감스럽게도 감독이 오지 못해 불안한 감이 없지 않다. 감독이 이 자리에 있었더라면 혼자라는 느낌이 덜했을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오늘 저녁 반응이 좋기를 바랄 뿐이다. 감독이 원했던 것은 미치도록 정열적으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철저하게 사랑하는 모습을 보고 관객이 재미, 어색함, 불안감을 느끼기를 바랐다. ‘물’의 의미를 ‘성’과 관련시켰고, 부활과 생명의 상징이라고 했다. 그런데 물을 잃어버리는 것은 하나의 상실 아닌가? 시미즈 미사 오해해서는 안 된다. 극중인물은 임신한 것이 아니다. 촬영 때도 나는 임신한 사실을 감추기 위해 적합한 의상을 찾아다녔다. 결말에서 여주인공이 물을 내뿜는 신은 양수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쾌락의 극치를 상징하고 원천으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아오야마 신지나 구로사와 기요시, 이마무라 쇼헤이 사이에 연기지도의 차이가 있다면? 야쿠쇼 코지 이마무라 감독은 다른 감독에 비해 촬영기간이 2배에서 3배 정도 더 길고 리허설도 더 많이 한다. 연출이나 카메라의 위치 설정은 배우를 관찰하면서 촬영도중에 행해진다. 반면 다른 감독들은 배우들의 몸짓을 관찰한다고 하더라도 이미 미리 구상한 신에 맞추어 촬영에 임한다. 영화에서 강변의 부랑자는 감독을 대신하는 듯하다. 욕망, 생명, 성 외에 중요한 게 없다는 의미인가? 이노 히사 그렇다. 거지를 맡은 배우는 기타무라 가주오인데 감독과 매우 닮은 인물이다. 그의 대사는 감독이 자신의 경험을 반영해 직접 쓴 것들로, 감독이 관객을 향해 말하고 설명하는 것이라고 보면 된다. 감독의 말은 아니지만 원작자인 헨미 요의 정신이 녹아 있는 구절을 읽어 보겠다. 두 작가가 작품세계의 향이 흡사하기 때문에 인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일상적인 정념과 본능을 과장과 뻔뻔함 없이 그리고 싶었다. 일상적인 정념과 충동은 나의 적이자 동지이다. 그러니 항상 포로인 내가 어떻게 그 충동에 저항할 수 있겠는가?” ▶ 제 54회 칸 영화제 ▶ 수상 결과 ▶ 문 밖의 화제작들 ▶ 찬밥신세 된 영국과 독일영화들 ▶ 칸 마켓의 한국영화들 ▶ 황금종려상 <아들의 방> 감독 인터뷰 ▶ 심사위원대상 <피아노 선생님> 감독 & 배우 인터뷰 ▶ 아메리카의 드림 누아르 ▶ <거기에 없던 남자> 감독 조엘 코언 & 에단 코언 ▶ <멀홀랜드 드라이브> 감독 데이비드 린치 ▶ <서약> 감독 숀 펜 ▶ 3인의 거장, 세가지 지혜 ▶ <나는 집으로 간다> 감독 마뇰 드 올리베이라 ▶ <붉은 다리 밑의 따듯한 물> 인터뷰 ▶ <알게 되리라> 감독 자크 리베트 ▶ 아시아 작가주의 최전선 ▶ <거기 몇시니?> 감독 차이밍량 ▶ <밀레니엄 맘보> 감독 허우샤오시엔 ▶ <간다하르> 감독 모흐센 마흐말바프

지상 최대의 홍보작전

1억4천만달러를 상회하는 단일 스튜디오 최대 제작비, 할리우드 평균치의 두배인 6천만달러에 달한다는 소문이 나도는 마케팅비용, 시사회 한번에 500만달러를 투자한 사상 최대의 호놀룰루 정켓, 그리고 이 모든 엄청난 숫자놀음 속에서 상승한 디즈니 스튜디오의 주가까지. 지난 5월25일부터 나흘간 계속된 미국 전몰장병기념일 연휴의 할리우드는 숨을 죽이고 긴 소문 끝에 극장가에 상륙한 <진주만>의 개봉 주말 흥행결과를 주목했다. 예닐곱편의 오락성 높은 영화들 사이에 끼어 드느니 한편의 골리앗과 맞붙는 것이 낫다는 할리우드의 속설에 따르자면, 용감하게 맞불을 놓는 영화가 있을 법도 했건만, 이번에는 그런 모험을 감행한 용감한 라이벌 스튜디오도 없었다. 문제는 성공이냐 실패냐가 아니라 얼마나 큰 성공이냐였던 셈이다. 나흘 연휴가 끝난 5월29일 최종 집계된 <진주만>의 흥행수익은 7520만달러(3일간 6천만달러). 전국 3214개 상영관에서 거둬들인 이 액수는 일단 히트한 전편의 후광을 업을 수 있는 속편이 아닌 영화로서는 사상 최고 기록을 세웠으며 디즈니 스튜디오의 최고기록인 <토이 스토리2>의 기록도 깼다. 그러나 역대 오프닝 기록을 경신하거나 개봉 전에 몇몇 낙관적 분석가들이 기대한 8천만달러 이상의 수입에는 미치지 못했다. 역대 최고의 개봉 주말 흥행 기록을 보유한 영화는 1997년 3281개관에서 3일 동안 7200만달러, 나흘간 9020만달러를 번 <쥬라기 공원2>. 한편 <진주만>의 기록은 세 시간에 육박하는 매머드급 영화들 중에서는 단연 선두. 긴 상영시간 때문에 하루 3회밖에 틀지 못하는 핸디캡을, 약 6400벌(<버라이어티> 추정치)의 프린트를 뿌리는 융단폭격 전법으로 보완한 <진주만>은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3060만달러, <타이타닉>의 2758만달러 오프닝 기록은 멀찌감치 따돌렸다. 한편 이미 개봉해 순항중이던 <슈렉>과 <미이라2>는 <진주만>에 밀려 박스오피스 순위에서 한 계단씩 내려앉았으나, 연휴 동안 각각 약 5420만달러, 1910만달러를 벌어들이며 선전했다. <슈렉>을 제작한 드림웍스의 배급담당 짐 타프는 “스타일과 소구층이 달라 걱정할 것이 없다”는 여유를 부렸으며 <미이라2>를 배급하는 유니버설의 대변인 역시 “<진주만> 쇼크를 예견하고 개봉을 앞당겼다. 이미 개봉 4주째로 타격은 크지 않다”는 여유있는 입장을 밝혔다. <진주만> <슈렉> <미이라2>의 빅3가 이번 연휴에 거둔 총흥행수익은 약 1억5천만달러. 이로써 할리우드는 또 한번 역대 주말 박스오피스 기록을 새로 썼다. 이미 누적수입 1억7천만달러를 넘겨 2억달러 고지 선점이 확실시되는 <미이라2>를 선두로, <진주만>과 <슈렉>도 2억달러를 무난히 상회하는 미국 내 흥행기록을 세우리라는 것이 현지 박스오피스 분석자들의 관측이다. 2000년의 경우, 미국 내 흥행 2억달러를 넘어선 영화가 3편에 그쳤던 것을 상기하면 올 할리우드의 초여름은 희망적이다. 이제 남은 관심사는 항공모함급 마케팅 전략을 선택한 <진주만>이 얼마나 높은 파고를 얼마나 오래 지속할 수 있는가의 문제. 사이즈 제일주의 마케팅이 자충수가 될 수 있음은, 근 1년에 가까운 홍보가 기대치를 지나치게 높이는 바람에 용두사미식 흥행에 그친 1998년 <고질라>의 예가 입증한 바 있다. 한편, 비밀주의 마케팅으로 관객을 애태우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는 워너브러더스의 와 <진주만>의 흥행 양상을 비교해보는 것도 올 여름의 또다른 구경거리가 될 듯싶다. 김혜리 기자

이란영화, 이번엔 본토회복

이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아내> 등 자국영화 흥행호조로 영화계 활기 이란영화에 봄이 올 것인가. 해외 유수영화제를 주요 창구로, 20세기 후반 예술영화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온 이란영화가 이제 자국 내에서도 폭넓은 지지와 지원을 받으며 제2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뉴스위크>는 최근 이란에서 열린 <달빛 아래서>(Under the Moonlight)의 시사회 풍경을 스케치하면서, 이란영화가 해외영화제뿐 아니라 자국 내에서도 ‘붐’을 일으키고 있다고 보도했다. 올 칸영화제에 초청 상영됐던 레자 미르카리미 감독의 <달빛 아래서>는 성직자들을 다룬 최초의 독립영화. <뉴스위크>는 시사회에 참석한 수십명의 이란 성직자들도 웃음과 박수로 호응을 보냈다고 보도했다. 이 영화는 성직자들 사이에서는 ‘신성을 모독했다’고,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너무 종교적’이라고 비난을 듣고 있지만, 이란 개봉 여부는 아직 결정되지 않은 상태. 현재 이란관객 사이에서 최고의 인기를 얻고 있는 작품도 역시 이란영화인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아내>(My Favorite Wife)로, 이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들은 관객으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 이런 히트작의 양산과 함께, 1983년 이란 박스오피스에서 10%에 불과하던 이란영화가 2000년에는 절대다수인 90%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급성장은 이란 대중의 기호가 달라졌다기 보다 이란 정부의 태도가 달라졌기 때문에 가능해진 것이다. <뉴스위크>가 일등공신으로 지목한 이는 모하메드 하타미 이란 대통령. 그는 문화부 장관에 취임한 83년부터 영화제작과 투자, 배급을 지원하는 단체를 만드는 등 꾸준히 영화산업을 육성해왔고, 대통령으로 취임한 97년 이후 영화검열 관련 규정을 크게 완화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80년대에는 여자가 달리는 것도 검열에 걸렸지만, 이제는 누드와 섹스 정도가 금지대상. 하지만 아직 낙관할 만한 상황은 아니다. 자파르 파나히의 <순환>을 비롯한 해외영화제 수상작들이 ‘뚜렷한 이유 없이’ 개봉 허락을 받아내지 못하고 있는 것. 정부의 영화 기자재 독점 수입과 열악한 극장 환경 등도 걸림돌이 되고 있다. 하지만 이란감독들은 이제 해외영화제뿐 아니라 자국 관객을 겨냥한 영화들을 치열하게 만들고 있고, 관객의 바람도 절실해진 만큼, 이란이 인도에 이은 자국영화의 왕국이 될 날도 머지 않은 것 같다. 박은영 기자

[간장선생] 보는 환자마다 간염이란다

지긋이 나이든 의사 선생님은 차림새부터가 심상치 않다. 하얀 양복, 하얀 중절모, 검은 나비 넥타이, 그리고 검은 가방은 태평양전쟁의 후방기지 구실로 피폐한 바닷가 마을 한복판을 누비기에 왠지 어색하다. 게다가 그는 머리 속으로 중얼거리며 끊임없이 달린다. “의사는 발이 생명이다. 한 다리가 부러지면 다른 다리로 달리고, 두 다리가 부러지면 손으로 달리고, 죽기살기로 달리고 또 달리고 죽을 때까지 달려야한다.” <간장 선생>의 기묘한 주인공 아카기 선생이 배고픔과 노동에 지친 마을 환자를 돌보는 마음씨는 이처럼 극진하고 한결같다. 너무 올곧아서 재미없다 싶은 인물이지만 머리가 아니라 발이 의사의 생명이라는 지론이 범상치 않다. 도쿄대 의대 출신의 그는 보는 사람마다 간염 진단을 내리는 바람에 돌팔이라고 오해 받는데, 무더기 간염 진단의 진위가 밝혀질 무렵 영화는 새로운 전선을 만들며 흥미를 더해간다. 그 한쪽이 아카기 선생과 한가족처럼 지내는 인물들인데, 한결같이 문제적 인간이다. 천진함과 관능미를 동시에 가진 처녀 소노코는 게이샤였던 어머니의 평소 가르침에 따라 딱 한명의 사랑하는 남자를 빼놓고는 절대 공짜로 자지 않는다. 소노코는 아카기 선생의 조수로 일하게 되는데 점차 중년의 그를 `딱 한명의 남자'로 여기게 된다. 우메모토는 승려이지만 지독한 술꾼에 매춘부 출신의 여인을 아내로 두고 있고, 토리우미는 뛰어난 외과의사이지만 몰핀에 중독돼 흐느적거리며 산다. 또 일본군 장교들의 전용술집을 운영하는 마담 토미코는 소노코에게 서슴없이 매춘을 알선하는 장사꾼이지만 아카기 선생 일행이 위기에 처했을 때 온몸을 던져 구해내는 정의로운 속내를 갖고 있다. 이들의 반대쪽 무리는 군국주의와 속물근성, 변태로 뒤범벅된 일본군 장교들로 간염이란 전염병을 일으키는 병균 같은 존재로 그려진다.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75)의 <간장 선생>은 경쾌한 유머로 일관하지만 그 속에서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느낄 수 있다. 마약과 매춘과 파계를 정당한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는 구도 때문이다. 이 긴장을 유머와 부드럽게 조화시키는 건 인생의 황혼기에 선 감독의 넉넉한 시선이다. 감독은 돌팔이라 오해받을지언정 병의 근원을 꿰뚫어보는 또 다른 아카기 선생이 되어 `진짜 아름다운 삶은 이런거야'라고 백일몽같은 장면을 과감하게 펼쳐보인다. 이런 근거는 <나라야마 부시코>(1983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보면 분명해진다. 늙은 부모를 내다버리고, 음식을 훔친 일가족을 생매장해야 자기 생존이 가능한, 인간의 잔혹한 실체에 대한 탐구는 충격적이었다. 또 동물의 그것과 다를 바 없이 묘사된 인간의 성관계는 처절했다. <우나기>(1997년)에서 인간의 관계맺음에 대한 짙은 회의는 여전했지만 차분한 화면 속에 조그만 희망을 담더니, <간장 선생>(1998년)에 이르면 인간사의 온갖 풍파를 오래도록 지켜봐온 거장의 지혜로운 숨결이 샘솟는다. <간장 선생>에 여유로 녹여낸 그 정신은 올해 칸영화제 경쟁작으로 내놨던 <붉은 다리 밑의 따뜻한 물>에서 절정을 이뤘다. 현인같은 노숙자를 통해 인간의 굴레를 비웃는 유머는 더욱 거리낌없어졌고, 절로 웃음짓게 만드는 정사 장면을 통해 순수한 쾌락은 가능하다며 이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았다. 그러니까 <간장 선생>은 비극적인 <나라야마 부시코>와 낙천적인 <붉은 다리…>의 먼 거리를 잇는 징검다리다. 16일 개봉. 이성욱 기자lewook@hani.co.kr

사랑이 지나가다, 전율과도 같이…

아무것도 몰랐다. 길은 그저 뻗어 있는 것이고, 그 길을 따라서 곧바로 가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아니 생각조차 않은 채 지금껏 그렇게 왔다. 그러다 그 길에 누군가 뛰어들었다. 손을 흔들지도 않았다.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다. 잠시 세워줄까 말까 고민하게 만든 것도 아니다. 그저 더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끔, 다른 길로 비켜갈 수도 없게끔, 길을 막고 뛰어들었다. 늙지도 젊지도 않은 나이 마흔여섯, 그렇게 사랑 하나가 찾아왔다. 우리 안의 성재, 우리 안의 신우 지난 5월27일 종영한 KBS 주말드라마 <푸른안개>(연출 표민수, 극본 이금림)는 이렇게 어떤 불편도, 고민도 없이 살아오던 40대 남자가 어느날 불쑥 뛰어든 20대 여자와 사랑에 빠지면서 겪는 일을 담아낸 드라마다. 방영 전부터 ‘20대 여자와 40대 남자의 불륜’이라는 선입견 속에 ‘원조교제’ 같은 비적절한 단어가 자주 언급되기도 했고, 가족시간대인 주말 저녁에 적합하지 않다는 비난의 글이 쏟아지기도 했으며, 난데없이 드라마 게시판이 시청소감이 아닌 “유부남을 사랑했습니다” 같은 식의 수기들로 빽빽이 채워지기도 했다. 그러나 <푸른안개>는 단순히 “천하에 할 짓이 없어, 딸 같은 여자와 바람을 피우나”식의 용서 못할 불륜이나 “나이, 결혼여부가 상관있나, 두 사람이 사랑하는데”식의 사랑예찬론으로 결론내릴 수 있는 드라마가 아니다. 그것은 이 순간에도 우리 중 하나는 아빠의 외도를 알게 된 어린 딸일는지도, 새파랗게 어린 여자에게 남편을 뺏겨버린 마흔둘의 경주(김미숙)일는지도, 무기력하던 삶에 청량제 같은 사랑을 만난 40대의 성재(이경영)일는지도, 사랑의 열병을 앓는 스물셋의 신우(이요원)일는지도, 혹은 주변의 사랑을 자기멋대로 평가하는 방정맞은 관찰자들일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엄마를 버리고 젊은 언니와 오피스텔에 둥지를 틀고 미소짓는 아빠를 평생 용서하지 않으리라 다짐한 적이 없었는지, 내 삶을, 내 가정을 한순간에 무너뜨린 남편의 행복을 어떤 식으로든 부수어버리고 싶지는 않았는지, 겁많은 자신에게 달려든 겁없는 청춘을 감히 거부할 수 있었는지, 사랑하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럴수록 누군가에게 더욱 빠져들게 되지는 않았는지, 아니면 그 진정성 따위는 관심없이 사랑에 빠진 이들을 공격하며 구석으로 내몰지 않았는지. 이 물음들에 다 자신할 수 없기에 우리는 이 불륜의 드라마로부터 자유로울 수만은 없다. 불륜, 잔인한 시험 <푸른안개>는 단순히 ‘불륜’을 소재로 취해 자극적으로 어필해 보겠다는 안방극장의 닳고 닳은 돌림노래는 아니다. 그보다는 ‘불륜의 딜레마’에 빠진 가련한 인간에 대한 연민이며, 소유욕이 탄생시킨 결혼제도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고, 사랑의 유무에 대한 가슴아픈 실험이다. 특히 드라마 전반을 통해 확인되는 ‘불륜의 딜레마’는 보는 내내 우리를 괴롭힌다. 신우가 성재에게 처음 끌렸던 순간은 딸의 전화를 자상하게 받는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머리 희끗한 성재가 신우에게 빠져든 것은 싱그러운 젊음과 당당하고 겁없는 삶의 태도였다. 그런 두 사람이 사랑에 빠졌다. 무언가를 ‘원조’받는 것도 아니고, 싱싱한 육체를 탐하지도 않았다. 몇번의 포옹, 한번의 입맞춤, 함께 차를 마시고, 밥을 먹고, 어깨를 마주하고 길을 걸은 것뿐이다. 두 사람 모두가 사랑에 자유로운 상태라면 상관없겠지만 가정을 가진 성재는, 의도치 않았다 해도, 많은 이들을 아프게 한다. 진심으로 사랑하지만 주변에서는 ‘불륜’이라 말한다. 성재가 신우에게 이 사랑의 진정성을 증명해보일 방법은 가정을 버리는 것뿐이다. 그러나 성재가 이혼을 결심한다는 것은 다정한 아빠의 역할 역시 포기함을 뜻한다. 주변의 공격에 신우의 생기로움 역시 서서히 빛을 잃어간다. 그 순간, 두 사람은 서로가 가장 사랑했던 모습에서 가장 동떨어진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사랑을 찾으면 완전할 것 같았던 두 사람이 결국엔 불완전의 상태에 이르고 마는 ‘불륜의 딜레마’. 이렇게 드라마는 ‘나약한 인간에게 찾아든 잔인한 시험’을 자행하는 것이다. 이런 딜레마로 내모는 ‘불륜’의 전제는 ‘결혼’이다. 일부일처제의 결혼이란 제도가 생겨난 이후 수천년 동안 불륜의 씨앗은 우리의 피 어디쯤 돌고 있는 유전자일는지 모르겠다. 경주의 아버지도, 신우의 어머니도, 성재도 피할 수 없었던, 어쩌면 딸인 주희도 빠질지 모르는 ‘슬픈 유혹’은 결혼의 성스런 약속과 책임이라는 다소 무거운 안전띠를 두르고 있어도 늘 부상의 위험이 도사리게 마련이다. 그러나 역으로 사랑이 충만하던 시기의 연인에게 ‘결혼’은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방패막이다. 어차피 완벽한 소유는 불가능한 것이지만 우리는 한 영혼을 가장 가까이 묶어둘 수 있다고 자위하며 기꺼이 결혼반지를 교환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내 몸 구석구석이 규범들과 책임에 휩싸여 조금씩 회색으로 굳어져간다고 느꼈을 때, 오래 전 알았던 그러나 잊고 살았던 아릿한 감각이 손끝부터 전해져 올 때.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다고, 부상당하지 않을 거라 감히 자신할 수 있을까? 사랑, 잃어버린 삶의 보상 성재는 신우와의 사랑을 통해 잃었던 자아를 찾아 어릴 적 꿈이었던 책방 주인이 되고 신우는 그 사랑으로 성숙한 여인이 되어 또다른 불륜의 예비자를 잉태하며, 가볍게 살아오던 민규는 사랑의 무거운 존재감을 느낀다. 그리고 불행히도 경주는 많은 것을 잃는다. 물론 드라마의 결론만을 보자면 모두들 무사한 선에서 안전하게 귀착했다는 오해를 지울 수 없다. 그러나 이 드라마에서 결론은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고, 모든 이를 만족시킨다는 건 애초부터 불가능했는지 모른다. 하여 표민수 감독과 이금림 작가가 선택한 결론은 어쩌면 현실에서 일어나기 힘든 판타지 같은 것이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결론 대신 정의할 수 없는 삶의 숙제들을, 사랑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한 삶을 살고 난 뒤에도 못 얻을지 모르는 사유들을 제시한다. 어차피 열정적인 사랑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내 삶을 뒤흔들 극적인 일은 더이상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안주하며 사는 우리에게 <푸른안개>는 누구에게나 사랑은 교통사고처럼 닥칠 수 있다는 것을 예고하는,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이 ‘안개’임을 일깨워주는 드라마이다. 백은하 기자 lucie@hani.co.kr “사랑하지 않는 것, 그것이 불륜이다”... 표민수 PD 인터뷰 3개월 촬영 동안 더부룩하게 길렀다는 긴머리의 자취를 찾아볼 수 없게 다시 깔끔한 모습으로 나타난 표민수 PD는 노희경 작가와 짝패를 이루어 축복받지 못한, 그러나 비난할 수 없었던 사랑을 세심한 영상에 담아냈다. <은실이>의 이금림 작가와 함께한 <푸른안개>에서는 전작보다는 우회적이지만 한층 깊어진 연출을 선보였다. <거짓말> <슬픈 유혹> <바보같은 사랑>, 이번 <푸른안개>까지 늘 정상적인 사랑보다는 사람들이 ‘불륜’이라고 칭할 만한 사랑을 그렸다. 한회, 한회 많은 질문과 고민을 스스로에게 하며 <푸른안개>를 끝내고 보니 ‘힘든 사랑만 사랑인가’ 하는 생각도 드는 것이 사실이다. 아마도 힘든 사랑에 대한 연민이 많아서 그럴 거다. ‘불륜’(不倫)은 윤리가 아니라는 건데, 인간이 사랑하지 않는 것이 사랑하는 것보다 불륜이 아닌가? 어떻게 이야기를 시작하게 되었나. <거짓말>에서 윤여정씨 대사 중에 “이왕 늙을 거면 몸따라 마음도 늙지 마음은 청춘인데 몸만 늙는 게 서글퍼…. 그때 그 나이에 내가 가졌던 꿈들 그 생기발랄했던 모습들, 호기심, 설렘, 작지만 내깐에 아팠던 기억들 왜 그리 또렷한지…” 이런 게 있었다. 왜 사람들이 젊음에 대한 희구를 가지고 있는지, 계절은 겨울이 와도 봄이 온다는 기대가 있는데 사람에겐 한번 지나간 계절은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는 게 슬퍼서 그런 건지, 그게 인간의 본성이라면 일부일처제가 잘못된 건지. 이런 의문들을 진지하게 이야기해보고 싶었고 이런 것에 대한 대화를 이끌어내고 싶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게 젊고 아름다운 여자이고 중년의 남자이다보니 그런 문제의식이 잘 보이지 않았던 것도 같다. 사회적 통념이 생각보다 높다는 것을 알았다. 성재와 경주의 부부관계는 얼핏 큰 문제가 없어보였다. 문제가 터지고 난 다음에 문제를 인식하게 된 경우다. 15년 같이 산 부부의 ‘서걱거림’, 존중, 예절이란 허울의 냉정함과 무심함. 스스로 인식하지 못한 채 변질돼온 관계. 그러나 이런 문제는 신우가 나타나지 않았으면 인식조차 불가능했을 것이다. 전작에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신우와 성재는 입맞춤 이상의 육체적 접촉이 없다. 육체관계를 가지고 나면 쉽게 허탈감이 올 것 같았다. 이 사랑도 마지막이 아닐 텐데 모두 안정된 자리로 돌아가려는 회귀본능을 금방 느끼면 어쩌나. 그저 함께 있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는, 저렇게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힘들고 어려운 일이구나, 그런 걸 보여주고 싶었다. 결론에 만족하나? 일본영화를 보면 이런 경우 대부분 동반자살이라는 방법을 택하기도 하는데. 그래도 죽지않고 살아야 한다는건, 물론 현실과의 타협이라고 보는쪽도 있지만, 그만큼의 이유가 있을것같다. 이런 어려운 사랑을 주고, 그것을 극복하게 만든다는건 그 이후 삶의 보상이 있을거란거다. 그게 뭔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숙제를 풀기위해 <푸른안개>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숙제만 더 많이 얻은것 같다. 그러나 다시 한번 더 해보고싶다.

사랑이 간다, 무심히 봄날 소리는 남고...

“소리를 찾는 사운드 엔지니어와 지방 방송국 아나운서가 자연의 소리를 채록하는 일 때문에 만나 좋아하고 헤어지고 서로를 잊어가는 이야기다.” 에서 죽음과 사랑에 관해 고요히 사색했던 허진호 감독은 신작 <봄날은 간다>에 대해 간략히 설명했다. 이영애, 유지태씨를 주연으로 세워 지난 2월 촬영에 들어가 벌써 70% 가량을 찍었다. 5일 처음 공개된 5분 가량의 프로모션 테이프에는 멜로 장르의 새 장을 열었던 감독 특유의 잔잔한 서정이 전면에 깔리고 있었다. 에서 조용한 죽음으로 인연을 끊어야했던 사랑이 이번에는 그냥 무심해지는 마음으로 식어간다. 전작에서 사진이 주요하게 등장했다면 이번에는 소리다. “를 믹싱할 때 아주 작은 소리가 잘못 들어가도 그 장면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때 바람소리, 비소리 등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작은 소리를 영화 속에서 어떻게 부각시킬까 하는 고민에서 주인공의 직업이 떠올랐다.” 이날 일본의 메이저 영화사 쇼치쿠와 홍콩의 어플로즈 픽처스가 <봄날은 간다>의 제작사인 싸이더스(대표 김형순)와 투자협정을 맺었다. 투자지분의 40%를 차지한 쇼치쿠는 일본과 해외 배급을, 15%의 어플로즈는 중국·홍콩·대만의 배급을 맡기로 했다. 김형순 싸이더스 대표는 “사전 기획단계에서부터 해외쪽과 투자와 배급을 나눠 맡았다는 데 의미가 크다”며 “갈수록 제작비가 커지는 현실에서 한국 시장만을 겨냥해서는 손익분기점을 맞추기가 어렵기 때문에 외국과의 공동투자로 위험을 분산시키고 국내외에서 동시에 개봉하는 잔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어플로즈의 공동대표이자 <첨밀밀>로 유명한 천커신(진가신) 감독의 말처럼 일본과 홍콩 양국은 이번 제작참여가 전적으로 허 감독에 대한 신뢰 때문이라고 밝혔다. “공동투자로 위험을 줄이고 새로운 문화적 주체를 만드는 아시아영화의 르네상스가 우리의 목표다. 한국, 타이, 홍콩이 그 선두주자다. 이번에 투자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허 감독 때문이다. 는 내가 가장 감동적으로 본 영화였고, 그 뒤 허 감독과 친구처럼 지내면서 신작 제작에 참여하게 됐다.” 글 이성욱 기자lewook@hani.co.kr 사진 서정민 기자westmin@hani.co.kr

<마이너리그>를 읽는 아저씨의 십계(十戒)

신현준/ 아저씨 http://homey.wo.to 책을 읽고 나서 ‘무언가 찜찜하다’고 생각하지 말라. 의미를 찾으려 한다고 해도 복잡하게 머리 굴리지 말라. 21세기의 멘털리티는 ‘세상에는 아무리 끔찍한 사건이 발생해도 나는 심심하다’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I. 이 책(은희경 저, <마이너리그>)을 다룬 TV프로그램을 보지 말라. 만의 하나 재방송을 하더라도 절대로 보지 말라. <긴급구조 119>나 <리얼 스토리> 식의 ‘재연’장면을 보면 책 읽고 싶다는 생각이 싹 가신다. 심지어는 개그맨이 나와서 등장인물 4명의 성격을 분석해주는 장면까지 있다. 그렇다고 방송국과 PD들을 원망하지는 말고, 우아하고 품격있는 교양 프로그램을 지상파 방송에 마련해주는 배려에 감읍하라. Ⅱ. 출판사가 ‘김영사’나 ‘황금가지’같이 돈독 오른 데가 아니라 ‘창작과 비평사’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놀라지 말라. “대학교 다닐 때 ‘사구체 논쟁’(생물학 논쟁 아님)을 공론화했던 그 잡지 맞아?”라고 묻지도 말라. 당신이 그동안 한국사회 전반의 변화, 특히 특히 문화산업의 숨가쁜 변화에 둔감했음을 고백하는 것밖에 안 된다. Ⅲ. 책의 전반부를 읽다가 “영화 <친구>랑 비슷하네”, “복고 바람에 편승했네”라고 주접떨지 말라. 작가의 깊은 뜻이야 알 수 없는 것이니 ‘운대가 맞아떨어졌을 뿐’이라고 생각하라. ‘우리네 구질구질한 삶을 본격문학에서 다뤄주는 게 어디냐’라고 자위하는 편이 정신건강에 좋다. Ⅳ. ‘여자가 감히 남자의 세계를 다루다니’라는 식의 반응은 시대착오적이니 내던져버려라. 책에서도 묘사되고 있는 한국 중산층 가정에서 남녀간 세력관계를 고려하라(때로 담력을 길러주는 부분도 있다). 그래도 찜찜하다면 당신은 한국문학계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전혀 감을 못 잡는 사람이다. 그러지 말고 사춘기로부터 중년에 이르는 남자의 심리를 치밀하게 묘사하는 작가의 무르익은 글솜씨에 탄복하라. V. ‘웃기려고’ 쓴 대목에서는 마음놓고 키득거려라. 마라톤을 하면서 내뿜는 입김을 “식인종의 도시락처럼”(83쪽)이라고 비유한 부분이나 “(여자) 팬티 앞부분에… ‘닦고 조이고 기름치자’라고 씌어 있다 해도 믿을 판이었다”(187쪽)라고 표현한 부분에서 ‘오버한 것 아냐’라고 생각하지도 말라. 세파에 시달려 유머감각이 마비된 자신을 원망하면서 스포츠신문에 연재되는 ‘개그펀치’나 ‘에로비언 나이트’ 읽듯이 읽어라. 유치함을 드러내는 게 작중인물인지 작가인지 판단하기 힘드니 페이스에 말려들 필요 없다. Ⅵ. 한국정치사의 격변의 와중에서도 주야장천 ‘놀고 있는’ 주인공들의 행태에 분개하지 말라. 이제 그런다고 ‘쿨’하게 봐주는 사람(특히 여자) 없다. ‘경직된’, ‘무거운’, ‘촌스러운’ 사람으로 찍히지 않으면 다행일 뿐이다. 하긴 ‘치열하게 살았다’는 사실을 내세우는 사람치고 멀쩡한 사람 없는 요즘 세상이다. Ⅶ. 책을 읽고 나서 ‘무언가 찜찜하다’고 생각하지 말라. 책에서 의미를 찾는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 의미를 찾으려 한다고 해도 복잡하게 머리 굴리지 말라. 21세기의 멘털리티는 ‘세상에는 아무리 끔찍한 사건이 발생해도 나는 심심하다’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어떤 아저씨가 얘기했던 ‘새털처럼 가볍게, 강물처럼 유유히’라는 삶의 신조를 견지하라. Ⅷ. 작가가 ‘마이너리그’라고 묘사한 삶이 “기껏해야 ‘주류 코리안들의 표준적 삶’에 지나지 않는다”고 핏대 세우지 말라. 사상서나 이론서에서 마이너, 마이너리티에 관한 정의를 따옴표 치고 인용하면서 “마이너란 이류가 아니라…”라고 했다가는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는다. 마이너의 자의식을 가지고 마이너를 정의하려는 순간 당신은 이미 마이너가 아니다. 자신이 마이너, 아웃사이더, 인디사이더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면 특별히 신중해야 한다. Ⅸ. 책을 읽는 데는 넉넉잡고 두 시간이면 떡을 치지만, 대여점을 이용할 생각은 하지 말라. 십중팔구 ‘대여중’일 것이다. 이 책 빌려간 사람은 여기서 묘사된 남자들의 속물적 모습을 보고 통쾌해 할 아줌마들이 대부분일 것이고, 이들 대부분은 연체에 도가 통한 사람들이다. X. 이상의 이야기를 작품에 대한 야유나 비아냥으로 듣지 말라. 이 책은 ‘이런 세상에서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고 살면 안 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따지고 보면 이제까지도 그렇게 살아왔다’고 주장한다. 그냥, 적당히, 대충 즐기면서 살아라. 일년 전쯤 이 지면에 어떤 아저씨가 썼던 ‘6월의 자식들’ 따위의 글은 잊어버려라. 그 아저씨도 이 책의 150쪽 근처를 읽으면서 ‘내가 쓴 글을 깡그리 잊어버리고 싶다’고 말할지도 모르니까.

반성을 회의(懷疑)함

텔레비전을 보려고 쇼파에 길게 누워 있는데 벽에 걸었던 달력이 툭하고 떨어진다. ‘저게 이유없이 왜 떨어졌지?’ ‘못을 잘못 박았나?’ ‘허어, 정말 이상한 일일세….’ 얼른 일어나 무엇이 잘못됐는지 살펴보면 되는데 꼼짝하기 싫은 나는 그냥 그 자세로 계속 궁리만 하였다. 궁리만 한 게 아니고 벽이며 못이며 달력에다 대고 화까지 냈다. 혀를 차며 신경을 끄고 텔레비전을 보다가 무슨 미국 방송의 한 장면이 순간, 깨우침을 얻게 하였다. 라고 하기엔 좀 거창하고 많이 반성하게 했다. 그 장면은 한 건전하게 생긴 미국의 바른생활 아저씨 하나가 창고에서 공구함을 가지고 집안으로 들어와 땀을 뻘뻘 흘리며 집안의 선반과 창틀을 보수하는 장면이었다. 그때 난 아, 저게 미국의 프론티어정신, 존 웨인과 게리 쿠퍼 아저씨들의 정신, 그 정신의 생활화가 바로 저것이구나 하면서 뭔지 모를 의기충천함에 벌떡 일어나 떨어진 달력을 줍고 못질했던 곳을 찾다가 깜짝 놀랐다. 분명히 벽에다 못을 대고 망치질을 했는데 그 깊이가 곰보자국보다 더 얕아서 하마터면 못질한 곳을 찾지 못할 뻔했다. 속으로 못 끝에다 접착제를 발라도 이거보단 낫겠다 하는 생각이 얼핏 스쳐 지나갔다. 나는 다시 화면 안에 꼼꼼하게 식탁과 선반을 보수하는 그 미국인의 근면성을 보면서 얼굴을 붉혔다. 참고로 내 얼굴이 붉어질 때는 부끄러워서 붉어지기도 하지만 전혀 아무 일도 없는데 얼굴이 저 혼자 붉어지기도 한다. 아무튼, 그런데 생각해보니 매번, 비숫한 장면을 볼 때마다 그런 반성을 했던 것 같다. 그러니까 그 전에도 반성은 많이 했었다. 문제는 반성이 아니고 실행력이었다. 늘 이런 생각을 머릿속에 가지고 다니다가 어느날 내 스스로에게 실행력을 보여줄 기회가 생겼다. 차를 타고 가는데 한쪽 바퀴에서 덜덜덜거리며 이상한 소리가 났다. 느낌상, 한쪽 바퀴에 무언가 달라붙은 것 같았다. 평소라면 바퀴에 삽자루가 꽂혀 있어도 귀찮아서 그냥 집까지 가는 나로선 그때 문득 그 ‘반성했던 것’이 떠올라 차를 후미진 길 한쪽에 세웠다. 내려서 보니까 아닌 게 아니라 엄지 굵기의 나사 하나가 박혀 있는 게 보였고 나는 몇년 전부터 뒤트렁크에 고이 모셔놓고 한번도 꺼내보지 않던 공구함을 열었다. 그때가 새벽 3시가 조금 넘었을 때였다. 주변엔 인적도 차도 없이 고요하기만 했다. 나는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그 미국인 아저씨의 이마에 맺힌 땀을 상기하면서, 또한 반성하면서, 그 시간 그곳에서 아주 깊게 박힌 나사못을 빼려고 안간힘을 다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 하다가 포기할 만도 했는데 고비 때마다 그 아저씨의 이마에 맺힌 땀을 또다시 떠올렸다. 그러다가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아주 깊숙이 박혀 빠질지 모르던 나사못이 쓩하고 빠져나갔다. 뿌듯했다. 해냈다는 성취감에 돌아서는데, 갑자기 푸우우 하는 소리를 내며 타이어의 바람이 걷잡을 수 없이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당황한 나는 허겁지겁 새는 곳을 막으려고 손을 갖다 됐지만 타이어는 만화처럼 ‘쭈우욱’ 하면서 오그라들었다. 인적도 없고 차량도 없었다. ‘가만,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그 새벽에 내가 한 짓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그런 굵기의 나사못을 빼면 바람 빠지는 게 당연한 거였다. 철퍼덕 철퍼덕 소리를 내며 완전히 가라앉은 차를 조금씩 몰고가 겨우 문닫힌 자동차 정비업소 앞에 세워놓을 수 있었다. 집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반성도 자주 하면 습관이 되고, 습관화된 반성이 내용없이 내 의식을 지배하고 있었고, 그 관성화가 엉뚱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생각에 낄낄거리다가 그래도 너무한 거 아냐, 하면서 스스로 내 상태를 심각하게 생각해봤다. 그러면서 이 세상의 모든 반성적 행위들, 칼럼이며 일기장이며 고해성사며 자정선언이며 책임을 지고 사퇴하는 것이며 고발이며 조롱과 풍자 등을 생각해보았다. 확실히 반성과 실행 사이에 무엇인가 필요한 것이 있었다. 택시를 타고선 내 차가 서 있는 곳을 힐끗 쳐다보았다. 내 차는 현대차인데 대우서비스센터 앞에 놓고 온 게 보였다. 김지운/ 영화감독·<조용한 가족> <반칙왕>

꿈 깨지 말란 말이야

스스로 유폐된 늙은 천재가 늘그막에 어린 천재를 만나 다시 꿈을 꾸고 작품을 쓰게 된다는 <파인딩 포레스터>를 보고온 날, 아줌마는 타이프라이터 자판 위를 날아다니는 영화 속 주인공의 손가락을 부러워하며, 걸레나 쥐어짜는 데 꼭 알맞은 자신의 무능한 손가락을 새삼 흘겨보았다. 비록 스물세살에 경천동지할 고전을 펴낸 윌리엄 포레스터 같은 천재 되기는 이미 물건너간 아줌마라 할지라도, 남 손가락질하는 데 한없이 재빠르고 자기 생각 그려내는 데 한없이 굼뜬 손가락을 원망할 자격은 있는 것이다. 스크린에다 꿈의 빛을 쏘아대는 영사기처럼, 지면에다 값진 지혜를 쏟아내야 할 두뇌는 아줌마 짐많은 어깨 위에서 어찌 그리 하는 일이 없단 말인가. 회색 뇌세포가 손가락에 어떤 교시도 내려주지 않는 채 무늬만 머리인 척하는 바람에, 마감날 <씨네21>을 만날 초상집으로 만들어놓는 게 아줌마의 실체다. 그러고서도 마치 영화 속에서처럼, 타임아웃 직전의 프리드로 투샷을 고의로 망친 농구천재인 척, 다 그럴 만하니까 그런 척, 허세를 부리고 살아왔던 거다. 그래, <파인딩 포레스터>의 열여섯살 천재소년 자말 보기 부끄러워서라도, 글 못쓰는 손모가지를 분질러 버려야지, 아줌마는 그렇게 수천번 결심했다. 주인의 손가락질을 한몸에 받고 자존심 상한 아줌마 손가락은, 그날 밤 자괴감에 밤새 활자 하나 두드리지 못하고 자살책 삼아 독약 같은 담배나 작살낼 뿐이었다. 아줌마 손가락이 언제 자판 위로부터 철수하는가 하는 시기문제는, 포레스터나 월러스 같은 천재작가의 재촉없이도, 미리 예정돼 있기는 했더랬다. 평소 영감 등짝이나 되는 듯이 북북 긁어댔던 신용카드 복권이 맞으면 자판쪽에서 더 있으라고 붙잡아도 당장 철수한다는 것이었는데, <파인딩 포레스터>에서 제대로 된 손가락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본때 있게 보고난 뒤, 철수일정을 조금 앞당기기로 했다는 얘기다. ‘똥물 같은 글’ 쓴다는 소리 듣는 주제에 이제는 돌아가 설거지통 안에 푹 잠긴 손가락이 되더라도 싸지 뭘. 그런 비장한 각오로 한자도 안 쓰고 새아침을 맞은 아줌마, <씨네21>이 걸어온 전화통으로 있는 볼기 없는 볼기 다 얻어맞고나서 지가 쓰네 못 쓰네 잘난 척할 계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지가 천재 아닌 줄 언제는 몰랐나. 영화보고 와서 감상문 쓰랬지, 쓸데없이 천재 주인공하고 지하고 비교하면서 열등감 느끼고 오랬나.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니 그렇게라도 얘기해야 김영하씨가 말했던, 원고료를 타내 생활비에 보태려는 ‘가증스런 잔머리’를 들키지 않을 수 있지 않겠는가. 좌우당간 그날도 아이들 유치원비 버느라고 한숨도 자지 않은 상태로 주중 오후의 극장을 찾은 아줌마는, 앉아 있으면 알아서 잠깨워줄 <진주만>을 보고 싶다는 유혹을 애써 뿌리치고 뭐가 좀 있어보이는 <파인딩 포레스터> 표를 끊었다. 객석은 추울 정도로 텅 비어 있었는데, 시간대가 그래선지, 40년째 은둔생활하는 대작가 따위야 관심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흑인배우들이 출렁거리는 반흑인영화여선지는 알 길 없었다. 언젠가 주워들었던, 우리나라에서는 흑인들이 나오는 책이나 영화는 전혀 장사가 안 된다는 얘기가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뭘 좀 배우려는 자세로 보면 정신이 퍼뜩 들고, 잠 안 자고 가서 보면 진짜 졸린 영화 <파인딩 포레스터>는 아닌 게 아니라 꿈을 잊어버린 자들이여, 꿈꾸라고 옆구리를 찌른다. 말 그대로 ‘보이스, 비 앰비셔스’다. 그런데 경험칙으로, 꿈을 꿀 수 있는 건 자유가 아니라 능력인 것 같다. 꿈꾼다는 건 갈고 닦지 않으면 안 되는 기술인 것이다. 꿈을 꾼다는 건, 또 희생을 뜻하기도 한다. 꿈을 꾸는 사람은 꿈의 그늘에서 살 줄도 알아야 한다는 알렉스 헤일리의 말처럼, 버릴 건 버려야 한다. 포레스터가 익숙해진 은둔생활을 버리고, 월러스가 작가로서의 자부심을 위해 농구선수로서의 자부심을 버리듯이. 아줌마도 요즘 치열하게 꿈을 꾼다. 물론 대부분이 복권 맞는 개꿈이긴 하지만, 개중에 쓸 만한 꿈도 섞여 있다.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해보겠다는 것. 직장에 다니거나 방 안에 틀어박혀서 남이 주는 일거리 받아다가 시키는 대로 해주고 먹고사는 ‘브롱크스적 삶’을 벗어나는 것. 대작가는 자전거 바퀴에 바람을 넣는 간단한 동작 하나로 세상과 다시 만나지만, 아줌마가 세상과 새로 접하는 방법은 십수년 직장사회의 ‘소모품’으로 길들여진 사고방식을 탈탈 벗어던지고 알정신이 되는 거다. 그러기 위해 아줌마가 버릴 것? 아직 잘은 모르지만, 그중의 하나는 아마 원고료를 타내 생활비에 보태려는 ‘가증스런 잔머리’일 수도 있을 거 같다. 최보은/ 아줌마 choi0909@hani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