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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1997)

토마스 엘새서의 <디지털 시대의 영화>

저명한 영화학자 토마스 엘새서가 편집한 <디지털 시대의 영화>의 원제는 <영화의 미래>(Cinema Futures)이고, 그뒤에는 ‘카인, 아벨 또는 케이블?’(Cain, Abel or Cable?)이란 부제가 달려 있다. 엘새서에 따르면 성경에 나오는 반목하는 형제 카인과 아벨은 각각 텔레비전과 영화를, 그리고 케이블은 이 두 미디어가 뉴미디어로서 맞이하게 될 변형 혹은 재형성화를 가리킨다. 이쯤만 말해도 이 책이 과연 무엇을 그 주요 논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인가를 알아채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 같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 있다면 부제 뒤에 붙은 물음표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카인’과 ‘아벨’, 그리고 ‘케이블’ 사이의 관계에 대해 단정적인 논의를 펼치는 책이라기보다는 그 관계에 대해, 그리고 심지어는 비유 자체에 대해 조심스럽게 사려 깊은 의혹을 던지는 책이다. 디지털이라는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세를 얻어가자 많은 사람들이 떠들썩한 목소리로 미디어의 미래를 미리 내다보려 했다. <디지털 시대의 영화>의 편집자인 엘새서는 영화의 현재와 미래를 이야기하면서도 예단된 미래로 곧장 나아가려는 성급함을 반대한다. 편집자의 그런 진중함이 아마도 이 책의 첫째 미덕일 듯싶다. “그래서 낡은 것과 새로운 것에 대해 논의하면서, 나는 현재와 미래에 대해 어떤 일이 발생할 것인가를 평가하기 위한 척도를 얻기 위해서 무엇보다 역사적인 전망이 필요한다고 생각한다”는 문구를 서론에서 인용했듯이, 엘새서는 현재와 미래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역사를 경유해야 한다는 태도를 취한다. 그래서 그는 ‘디지털 시대의 영화’를 이야기한다는 이 책에서 이른바 영화의 ‘기원’이라고 불리는 지점으로, 즉 루이 뤼미에르에게로 ‘돌아간다’. 그리고는 뤼미에르를 우리가 흔히 가정하게 되는 어떤 유의 영화의 역사가 아니라 그가 실재했던 역사 속에 존재하게 하려고 고투한다. 엘새서는 뤼미에르를 영화적 리얼리즘의 대부가 아니라 오히려 가상성(virtuality)의 선조와 산파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자리매김한다. 이른바 미디어의 고고학을 흥미롭게 펼쳐놓는 ‘루이 뤼미에르: 영화 최초의 버추얼리스트?’라는 앨세서의 글은 그 과거에 대한 탐구가 어떻게 현재에 대한 사고와 만나는가를 잘 보여준다. 아울러 디지털이 현재의 영화와 텔레비전에 대해 ‘사유’하게 해주는 도구라는 요점을 단 그의 또 다른 글 역시 일독할 가치가 충분하다. 엘새서 같은 영화학자들 외에 저널리스트, 작가, 영화감독 등 다양한 활동분야에 속해 있고 또 다양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 이들이 필자로 참여한 책이니만큼 <디지털 시대의 영화>는 사실 영화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결론이 명백한 어느 하나의 길로 인도해주진 않는다. 그래도 그 다양한 스펙트럼에 속한 글들이 한데 모일 수 있는 지점이 있다면, 그것들 모두가 급격한 변화를 겪는 이 시대에도 여전히 가장 흥미로운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기회를 마련해주기 때문일 것이다. 홍성남/ 영화평론가 gnosis88@yahoo.com

월드컵 열풍 속 흥행호조, <해적, 디스코왕 되다> 김동원 감독

월드컵 열풍으로 파리 날리던 극장가에 <해적, 디스코왕 되다>가 뜻밖의 바람을 몰고왔다. 개봉 첫 주말인 지난 6월8∼9일 이틀 동안 전국 51만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스타 파워가 센 것도 아니고, 감독도 신인이고, 80년대로 보이는 복고적 시대배경에 멜로와 코미디와 춤이 두서없이 어울려 딱히 장르를 구분하기도 애매한 이 영화의 흥행은 뜻밖이다. 김동원(28) 감독의 말마따나 “순진하고 솔직한” 영화의 모습이 그 비결인 듯하다. 복고적인 영화의 분위기와 달리 긴머리에 벙거지 모자를 눌러쓴 김 감독은 요즘 젊은이들 같았다. 얘기 도중 “이거 말 되나요?” 하며 곧잘 웃는 표정에서 재기가 읽혔고, 가끔씩 20대 답지 않게 속깊은 말을 하기도 했다. 포항에서 태어난 그는 ‘포스코문화’의 세례를 받고 자랐다. 학창 시절 서울에서 화제가 되는 영화나 연극이 포항제철소 직원들을 위해 바로바로 포항에 내려왔고, 그때마다 포철 직원들 틈에 끼어서 구경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텔레비전에서 봤던 한 한국영화가 그의 진로를 결정했다. “영화는 재밌든 재미없든 나름의 법칙으로 만드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영화를 보니 나도 저것보다는 잘 만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감독이 되자고 마음먹고는 고교 졸업 뒤, 해병대를 갔다와서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 이곳저곳 워크숍에 참여하다가 서울예대에 들어가서 졸업작품으로 98년에 만든 단편이 였다. 그걸 장편으로 확대한 <해적…>으로 김 감독은 데뷔하자마자 흥행감독이 됐다. 한번 한 얘길 다시 하면서 데뷔한다는 게 드문 일인데. 장편 준비하면서 포기해버려? 그런데 버릴 수가 없었다. 자기 자식 못 버리듯. 이건 내가 해야 해. 세편은 해봐야 감독을 알 수 있지 않을까. <해적…> 하면서 많이 배웠다. 25억원짜리 과외였다. 한번 더 해보면 좀더 배우고, 세 번째는 홈런 날려야지. 후회없는 영화. 물론 <해적…>도 후회는 없지만 연출에 부족한 부분이 있으니까. 80년대에 대한 특별한 인상이 있나. 그런 건 아니다. 장편 만들면서 현재의 이야기로 해보려는 생각도 했다. 원조교제도 나오고, 춤은 힙합 추고…. 그런데 자신이 없더라. 나는 자신없으면 못한다. 디스코가 좋고 옛날 이야기가 더 편하다. 왜 그런지 모르겠다. 왜 힙합이 재미없지? 코미디도 구봉서, 이기동 그런 분들의 만담 같은 개그가 좋다. 구조나 형식이 요즘 코미디와 비교가 안 된다. 예술이다. 영화도 고전이 좋고, 요즘 건 재미없다. 그때면 10살 무렵인데 디스코 췄나. 영화의 춤은 디스코라기보다 그냥 춤이다. 차차차를 변형한 것도 있고, 그냥 내가 하고 싶은 춤을 연출한 거다. <토요일 밤의 열기>를 장편 준비하면서 봤는데 너무 시시했다. 그러니까 80년대라는 건 과거라는 이미지의 추상형에 가까운 것인가. 그때 재밌게 기억되는 것들을 집어넣었다. 서울우유 병 같은 거. 베지밀은 병이 나오는데, 우유는 왜 병이 안 나오지? 병이 팩보다 느낌이 좋은데. 그런 게 사라지는 데 대한 아쉬움 같은 거다. 이사할 때 뒤에서 이삿짐 밀어주는 정서, 지금은 없다. 너무 삭막하다. 죽일 때도 열번, 스무번씩 찌르고. 나는 <친구> 재미없게 봤다. 초반 30분만 재밌었다. 뒤는 억지 같았다. 내 영화도 마찬가지겠지만. 처음에 단편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 어떤 점에 끌렸나. 이야기 자체가 특이하고 재밌었다. 교복입고 나와서 춤추고 싸우고. 춤과 액션이 있고, 싸움꾼이 춤으로 여자를 구한다…. 650만원을 여기저기서 빌려서 찍다보니까 이렇게 할 게 아니다 싶었다. 또 시나리오는 더 길게 해야 할 이야기인데. 그래서 장편을 했다. 그러다보니 내 20대가 <해적…>과 함께 갔다. 이대근의 첫사랑이 해적의 어머니라는 건 좀 무리 아닌가. 장편 시나리오 작업 하면서 마지막 부분이 잘 안 풀렸다. 해적이 디스코경연대회에서 1등을 해서 봉자를 구한다는 설정은 무리라고 생각해서 처음부터 배제했다. 1주일 만에 디스코왕이 된다는 건 웃기지 않은가. 마지막까지 고민하다가 엄마가 나와서 말도 안 되는 장난을 해결해준다는 발상이 떠올랐다. 어색할 수는 있지만 귀엽게 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단편에선 해적이 막춤을 춰서 1등을 한다. 단편에는 그런 게 많았다. 마지막에 서울이 올림픽 개최지로 확정된다는 소식을 듣고 “그럼 우리나라가 잘살게 되는 거야?”라는 희망적인 대사로 끝낸 것도 지금 보면 창피하다. 너무 얄팍한 것 같다. 자료조사하다가 81년에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걸 발견하고 넣은 건데. 그래서 장편에서는 솔직하게 간 거다. 나는 80년대 모른다. 그냥 해적이 춤을 잘 춰서 1등상을 받는 걸로 했으면 안 될 이유가 있나. 나는 어설픈 게 좋다. 약간 뒤떨어지고, 잘 넘어지고, 바보 같고. 해적이 1등 해서 봉자와 끌어안고 그런 건 어색하다. 물론 춤의 비주얼을 <울랄라 씨스터즈>처럼 했다면 관객이 더 좋아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물랑루즈>처럼 못할 바에는 어설프게 가는 게 더 낳지 않은가. 다음엔 잘해야지. <물랑루즈>처럼. (웃음) 처음부터 컨셉을 어설픈 걸로 잡았다. 데뷔작이니까 솔직하게 하자. 나름대로 실험도 해보고 싶었다. 드라마도 기승전결이 아니라, 처음부터 파동치는 형태로 했고. 딴에는 젊은 감독답게 한 건데, 봐주는 사람들이 다른 의미에서 어설프다고 한다. 의도적으로가 아니라 진짜로 어설프다고. (웃음) 준비중인 다음 영화가 있다는데, 거기에도 춤과 액션이 있나. 있다. 어설픈 느낌을 지워서 보는 이들이 “저 감독 맞아?” 하게 할 거다. 영악하게, 하나도 안 순진하게 할 거다. 그런데 <해적…>은 내가 50살쯤 돼서 봐도 기분이 좋을 것 같다. 꼼수를 안 부린 것 같아서 좋다. 모르는 걸 아는 척하지 않고. 이대근의 졸개로 나오는 주명철씨가 지나가는 여자를 보고 “아름답소!” 하는 대사는 압권이다. 나는 배우들의 애드리브를 많이 존중해준다. 그러다보니 단역들끼리 경쟁이 심했다. 쟤가 저렇게 재밌게 해? 나도 뭔가 하자. 그런 식이었다. 촬영 전에 스스로 뭔가를 궁리해서 가지고 온다. 주씨도 그랬다. 들어보니 재밌어서 하자고 했다. 그뒤부터 촬영장에서 유행어가 됐다. 믹싱, 편집하는 분들이 작업 중간중간에 “아름답소!”를 연신 외치고, 다른 스탭들도 지나가는 여자 보고 또 그러고. 똥장면이 유달리 많고 실감난다. 마지막에 해적과 성기, 봉팔 셋이서 똥 푸는 장면은 진짜 똥으로 했다. 진짜 똥을 퍼봐야 연기가 실감날 것 같아서였다. 그 장면을 맨 먼저 찍었다. 그때 미술팀이 진짜 똥을 보고나서 가짜 똥을 만드는데 너무 실감나는 거였다. 똥장면을 일부러 많이 넣자는 생각은 없었다. 처음에 봉팔 아버지가 똥차 밀다가 사고나는 건 이야기의 시작이니까 뺄 수 없고, 그뒤에 봉팔이 혼자 푸는 건 봉팔의 고생을 표현한 거고, 마지막에 셋이 푸는 건 우정이고. 어떤 영화를 좋아하나. 외국영화는 잘 안 본다. 이장호, 배창호, 이명세 이 라인을 좋아한다. 이 라인이 이명세에서 끊겼다. 그게 참 안타깝다. 봉준호 감독의 <플란다스의 개> 연출부 일을 했는데, 기회만 됐다면 이명세 감독 밑으로 갔을 거다. 배창호 감독 영화 중엔 어떤 게 제일 좋은가. <기쁜 우리 젊은 날>이다. 놀이터에서 안성기가 최불암에게 안겨 엉엉 우는 장면, 너무 좋다. 실험도 많았던 것 같다. 안성기가 김서린 안경으로 황신혜를 보는 건, 아마도 김서린 안경을 카메라에 걸고서 찍었을 텐데 재밌지 않은가. 밝고 따뜻한 영화를 좋아하나. 그런 편이다. 나는 매우 긍정적이다. 농담을 막 던지면서 그 안에 숨겨진 진실을 드러내는 것. 어떤 사람이 곧 죽는데, 가족들 다 모인 자리에서 “슬퍼하지 말아라, 음악을 틀어라” 하는 거. 나도 그렇게 죽을 것 같다. 죽을 때도 웃는 게 좋다. 얻어터져도 웃고. 나는 어떻게든 재밌게 살아보려고 노력을 많이 한다. 어설프든 세련됐든…. 다른 인터뷰 기사를 보니까 제일 싫어하는 게 ‘무서운 여자들’이라고 했던데. 여자들 무섭다.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자기 관리를 잘하고, 더 이성적이지 않나. 영화평론가도 유지나, 심영섭 무섭다. 변영주 감독 무섭다. 남자보다 여자 좋아하고, 말은 또 얼마나 잘하나. 여자들한테 많이 당한 것 같다. 여자들이 나를 보면 보호해주고 싶은가보다. 편안해하고 그러는데 나중에 보면 당한 게 많다. 여자들은 심중을 모르겠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남자들은 알기 쉽지 않은가. 꼭 하고 싶은 영화가 있다면. 사랑영화, 슬픈 사랑이든 웃기는 사랑이든. 여자들 무섭다면서. 안 무서운 여자 골라서. <정사> 보면서 이재용 감독 되게 부러웠다. 내가 저런 거 해야 하는데. <지독한 사랑> 보고서는 내가 <지독한 사랑2>를 찍고 싶었다. <기쁜 우리 젊은 날>도 사랑 이야기이고. 나는 보고나서 어떤 장면이 오래도록 각인되는 영화가 좋다. <봄날은 간다>에서 유지태가 택시 타고 강원도까지 가고 이영애가 기다리고 그런 장면. <해적…>에서 관객이 오래 간직했으면 싶은 장면이 있다면. 봉자가 디스코경연대회 전날 밤 이불에서 혼자 구르는 장면이 있다. 뭔가 되게 바라면서 엉뚱한 짓을 하는 게 사실적이지 않은가. 그때 창가에 비치는 초승달은 이명세식 표현주의이고. 이 초승달은 이명세 감독에 대한 오마주다. 홍상수식 사실주의와 이명세식 표현주의의 중간단계쯤? 말이 되나? 아쉬운 건. 좀더 영화적으로 만들었어야 하는데. 25억원을 들였으면 그만한 상품을 만들어야 하는데, 상품을 잘 만든다는 건 아직도 고민해야 할 부분이다. 영화라는 매체가 참 애매하다. <포레스트 검프> 같은 것도 너무 짜여져 있으니까 재미가 덜하다. 뭐가 답인지 잘 모르겠다. 정말 대중영화라면 할리우드 같은 상품을 내놔야 했겠지만…, 왠지 그런 건 잘 안 할 것 같다. <복수는 나의 것>을 보니까 영화적 표현기법을 쓰는 솜씨가 대단하더라. 그런데 그런 건 앞으로 다른 감독들도 잘할 것 같다. 이제는 철학의 문제인 것 같다. 내가 뭘 하는지, 뭘 좋아하는지, 내가 이 색을 좋아하는데 왜 좋아하는지 확실히 아는 것. 그게 최고의 철학 아닐까. 어떤 제작자가 영화를 하려면 개똥철학이라도 있어야 한다고 했다. 영화라는 건 참 고급예술 같다. 글 임범 isman@hani.co.kr·사진 이혜정 hyejung@hani.co.kr

아! 너무 일찍 져버린 꽃이여, <로빙화>

아무도 믿어줄 사람이 없을지 모르지만, 난 중학교 2학년 때까지 축구선수였다. 건빵과 우유를 간식으로 먹을 수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중학교 축구선수 생활은 그런 이유로 시작되었다. 그랬다, 중학교 때 ‘축구선수였다’는 사실은, 실은 가난하고 먹을 것이 부족했던, 남의 집에 고구마라도 몇개 들고 가 마당에서 텔레비전을 훔쳐보아야 했던 내 어린 시절의 슬픈 이력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지금 온 나라는 월드컵 열기에 휩싸여 있고, 난 문득 옛날 생각에 빠지곤 한다. 그런 어린 시절에 대한 강렬한 회상과 지독한 감정이입을 허락한 영화가 있다. 내가 <로빙화>를 본 것은 김종학 프로덕션에서 인형작가인 이승은, 허허선 부부의 <엄마 어렸을 적엔>란 소재로 극장용 애니메이션을 기획하고 있던 시절이다. 일산 스튜디오에서 자료를 모색하던 중 그만 기획 스탭 앞에서 펑펑 울어버리고 말았다. 원래 눈물이 많은 탓도 있지만 가슴이 저려오는 한폭의 수채화 같은 영화 앞에 감전되고 말았던 것이다. <로빙화>는 차밭 한구석에서 봄이 되면 피어나는 아주 아름다운 꽃이다. 아름답지만 너무도 생명이 짧은 이 꽃의 생장과 죽음을 은유로 <로빙화>는 천재적인 미술 재능을 지닌 한 소년의 삶을 애달프고도 서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내가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낸 소작농의 아들이어서인지 영화 속 주인공인 고아명은 나의 어린 시절을 너무도 강렬하게 떠올려준다. 고아명은 가난한 농사꾼의 자식이다. 천재적인 미술 재능이 있었지만 부잣집 아들의 농간으로 사생대회 학교대표에서 떨어지게 된 고아명은 “부잣집 애들은 뭐든지 잘해요”라며 울부짖는다. 그런 자기 분노는 나의 슬픈 어린 기억들을 대신 외쳐주는 카타르시스를 던져주었다. 이후, 그림 연습을 위해 황소 얼굴에 진흙 바르기, 생강 훔쳐먹기 등의 영상은 어린 추억이 아직 내 마음속에 일렁거리고 있음을 알게 해주기에 충분했다. 이렇듯 뒤늦은 영화입문에서 만났던 강렬한 기억들을 가지고 난 영화업계에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독립영화 워크숍 6기에 최고령 입학을 필두로 업계 이곳저곳 현장을 열심히 뛰어다닌 지 12년, 마당발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니 늦바람이 무섭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 형국이 되었다. 이 늦은 시작은 앞으로도 제2기 영화진흥위원으로 남보다 할 일이 많은 이유이기도 하다. 요절한 천재미술가 ‘고아명’과 누나 ‘고아매’, 하늘나라에 간 엄마 설정이 <로빙화>라면 천진난만한 ‘길손’과 눈이 보이지 않는 ‘감’이 그리고 하늘나라에 있는 엄마가 그려내는 잔잔한 이야기가 <오세암>이다. <오세암>이 정채봉 원작동화를 바탕으로 했지만 기획을 마치고 나서 문득 생각해보면, 두 작품이 이처럼 닮은꼴일 수가 없다. <로빙화>를 보고 “나도 꼭 이런 영화를 만들어야지”란 각오를 한 것이 나도 모르게 <오세암>이란 극장용 애니메이션에 참여하게끔 만들어준 것이 아닌가 싶다. “별들은 말이 없고, 인형은 엄마를 닮았네 하늘의 눈은 반짝이고 엄마의 마음은 로빙화 차밭에 꽃이 피어 엄마는 즐거워 하시네 엄마의 모습 생각하니 눈물은 로빙화네 눈물은 로빙화 됐네” “난 저 산처럼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서 세계에 보여주고 싶다”던 주인공 아명의 속삼임이 아직도 내 귓전에 맴돌며 나를 영화로 이끈다. 아! 아! 내 로빙화여….

<묻지마 패밀리> O.S.T

장진이 기획한 <묻지마 패밀리>는 세편의 중편을 한데 모으고 있다. 다 다른 영화지만 배우를 비롯하여 서로 연결되는 고리들을 가지고 있다. 장진의 기획력. 감독은 다 다르다. 박상원, 박광현, 이현종 세 감독 모두 신인이다. 색깔도 모두 다르다. 박상원이 감독한, 시리즈의 첫 번째 영화인 <사방에적>은 장진 냄새가 가장 짙게 풍기는 작품이다. 시나리오가 탄탄하다. 이 영화는 장르영화적 클리셰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장진이 그걸 가지고 논다. 두 번째 영화는 박광현이 감독한 <내나이키>. 세 작품 중 가장 감각적이고 자연스럽다. 8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세 번째 영화는 이현종 감독 작품인 <교회누나>. 연애영화다. 이렇게 다 다른 색깔을 지닌 영화지만 음악은 한 사람이 맡아 했다. 한재권. 그는 이미 여러 번 소개했다. <킬러들의 수다>에서, 그리고 <피도 눈물도 없이>에서.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소화할 수 있는 영화음악가. 이번에도 그런 면모를 보여준다. 세편의 영화 가운데 음악적으로 가장 탄탄한 영화는 <사방에적>이다. 마지막 박자에서 오픈되며 반복하는 하이 햇 심벌과 업비트로 시작하는, 우리의 귀에 조금은 익숙하지만 여전히 긴장감을 주는 테마, 그리고 냉혈적인 느낌의 쿨 브라스 섹션과 워킹 베이스 프레이징이 어우러진 메인 테마는 상당히 공을 들인 트랙이다. 왠지 복도 신에 잘 어울릴 것 같은 이 음악은 브라스도 시원하고 장르영화적 진행을 음악적으로 암시하고 유도하는 기능을 잘 수행하고 있다. 다른 트랙들도 영화 속에서 적절히 등장하면서 분위기를 살려주고 있다. 두 번째 영화의 음악은 조금 시간이 부족하지 않았나 싶은 느낌을 준다. 메인 테마를 연주하는, 어눌한 느낌의 아코디언 소리를 내는 신시사이저는 즐거운 기분으로 추억을 다루고 있는 이 영화의 우스꽝스러움과 잘 어울린다. 그런데 그 이외의 트랙들은 그보다 덜 인상적이다. 어딘지 이런 분위기의 텔레비전 미니시리즈를 연상시킨다. 옛날 느낌을 내기 위해서는 동요 <땡그랑 한푼>이 편곡되어 실려 있다. 전체적으로 코믹하다. 그런데 전체적으로 미디 작업한 분위기가 조금 많이 난다. 1980년대 초반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해서 당대의 사운드를 차용할 필요는 없지만, 당시의 기분을 되살리는 일이 매우 중요하게 작용하는 영화인 만큼 최소한 그때의 사운드와의 관련성 정도를 깊이 고민해보는 작업은 필요했을지 모른다. 세 번째 영화는 교회에서 만난 누나를 사랑하는 어느 이등병의 휴가기이다. 교회 종소리와 교회 오르간 소리를 동원해 교회의 느낌을 살리고 있다. 영화의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밝고 코믹하다. 그렇지만 연애영화이므로 감상적인 느낌도 살려주어야 하고 그렇다고 해서 상쾌함을 잃어서도 안 된다. 조금은 복합적이라 할 이런 분위기의 영화에 어울리는 음악을 만들기는 생각보다 쉽지 않다. 한재권은 그 중간 어딘가에 있는 접합점을 그리 어렵지 않게 찾아내고 있다. 그런데 역시 급하게 만든 듯한 느낌이 있다. 평범한 라인 바깥을 생각해볼 겨를도 없이, 그냥 분위기를 따라가 주고 있다. 하긴, 우리나라의 영화음악가들(외국도 거의 마찬가지겠지만)처럼 서둘러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또 있으랴. 오늘 테이프 가져다주면서 내일까지 해내라는 식이니. 장르영화의 경우는 어차피 클리셰들의 연쇄들을 어떻게 잘 짜맞추어 내느냐가 관건이므로 공동작업이 필요하다. 영화음악 분야가 점점 공장도 생산라인을 갖추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닌가 싶다. 성기완/ 대중음악평론가 creole@hitel.net

링으로 되살아온 김득구 영화 <챔피언>

권투선수 김득구(1955~82)의 삶을 영화로 옮긴 〈챔피언〉의 개봉(28일)을 한 주 앞두고 ‘섀도복싱’(단독연습)으로 몸을 풀고 있는 곽경택(36·오른쪽 사진) 감독을 라커룸에서 만나봤다. 미리 엿본 〈챔피언〉에는, 그가 1970년대의 도시공간을 사실적으로 재현한 〈친구〉의 감각이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또 20년 전 링에서 숨져간 권투선수의 삶이 정말 그랬을 법하게 구체성을 얻고 있었다. 김득구(유오성)의 한맺힌 삶이 스크린에서 되살아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곽 감독의 실사구시 정신 덕분이다. “〈친구〉가 끝나자마자 〈챔피언〉의 시나리오를 쓰는 일부터 시작했습니다. 〈친구〉 때문에, 언론사 인터뷰는 물론이려니와 심지어는 광고 출연 제안까지 들어왔습니다. 이럴 때 잘못하면 야전에 있어야 할 사람이 파티에 익숙해지는 일이 생기겠다 싶어서 다음 작업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그래서 무작정 조감독들과 함께 김득구의 고향인 강원도 고성군 거진으로, 밥 지어 먹고 텐트 치거나 민박하면서 고등학생 식의 ‘캠핑’을 떠났습니다. 그때 거진에 일주일 묵으면서 〈챔피언〉의 초고를 완성했죠.” 그러나 〈챔피언〉의 시나리오가 영화답게 되기까지는 그뒤 적어도 세 번의 결정적인 만남을 거쳐야 했다. 첫번째 만남은 김득구의 고향인 고성군 거진읍 반암리에 도착했을 때 닥쳐왔다. 곽 감독 일행은 먼저 그의 무덤을 찾아보기로 했다. 일행은 동네에서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무작정 김득구의 무덤이 어디 있는지 아느냐고 물었다. 이때 곽 감독은 ‘소름이 쫙 끼치는’ 답을 들었다. “내가 김득구 형이오.” 김득구와 배다른 큰형인 그분은 처음엔 김득구의 무덤에 함께 가려 하지 않았다. “바로 코앞”이라며 손짓으로 알려줄 뿐이었다. 그러나 곽 감독 일행이 산꼭대기까지 헤매다 끝내 못 찾고 다시 내려오자, 그는 “내가 하도 (산소에) 안 올라오니까 나 오라고 그러는구먼!” 하면서 김득구의 무덤을 직접 안내했다. 그날 곽 감독 일행은 오징어회에 소주를 마시며 김득구의 큰형으로부터 그의 어린 시절을 절절하게 들을 수 있었다. 초고를 좀더 영화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곽 감독은 연세대 상남경영관에서 2고를 썼다. 이때 결정적인 자료를 제공한 건, 그가 김득구의 삶을 영화로 만든다는 기사를 보고 나타난 어느 스포츠 신문의 기자였다. 그는 신문사의 선배가 김득구로부터 입수한 그의 낡은 대학노트를 한 권 들고 나타났다. 곽 감독은 이 노트의 첫 장을 넘기며 다시 한번 전율이 온몸을 감싸는 체험을 했다. 노트 첫 장 상단엔 이런 문구가 쓰여 있었다. “나에겐 최후까지 싸울 용기와 의지가 있노라.” ‘용기’와 ‘의지’라는 낱말엔 볼펜으로 덧칠까지 돼 있었다. 곽 감독은 20년 전 링에서 숨을 거둔 가난한 권투선수가 남긴 대학노트의 낡은 책장들을 넘기며 울음을 삼켰다. 거기엔 길창덕의 인기 만화 꺼벙이를 베낀 낙서에서부터 영어 단어를 연습한 흔적까지, 주먹 하나로 삶을 헤쳐온 이의 고독한 기록이 오롯이 남아 있었다. “아마도 외국에서 경기를 치를 때 최소한의 인사 같은 건 해야 하니까, 그런 영어 단어를 연습한 거 같습디다.” 노트 마지막 장에 남아있는 다른 사람의 필적은 “열쇠를 …에 두고 가라”는 내용이었다. “체육관에서 김득구 선수가 제일 늦게까지 남아 연습하다 마지막에 갔다는 뜻이죠.” 김득구의 노트가 시나리오를 좀더 생생하게 만들긴 했지만, 곽 감독의 성에는 차지 않았다. “비주얼의 신뢰도가 떨어지면 영화엔 치명탑니다. 캐릭터가 설득력이 없어져 버리고, 나아가 영화 전체에 믿음이 가지 않고, 재미가 없어지는 거 아니겠습니까.” 〈친구〉에서 낡은 철대문의 부식도까지 꼼꼼하게 챙겼던 곽 감독의 장인정신은 〈챔피언〉에서도 바래지 않았다. 소품 담당자로부터 “곽 감독이 1970~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또 만들면 다신 같이 하지 않겠다”는 말을 들어가면서도 그는 권투경기장에 울려퍼지는 낡은 ‘공’과 김득구의 운동화 끈 색깔까지 챙겼다. 그 결과 〈챔피언〉은, 텔레비전에 한번 비치기 위해 아나운서와 해설자 뒤에서 몸싸움 벌이는 관객들의 모습에서, 진수성찬 오층금탑처럼 촌스럽기 그지없는 한국 챔피언 트로피와, 사천왕처럼 권투체육관에 내걸린 챔피언벨트 맨 권투선수들의 빛 바랜 사진에 이르기까지, 70~80년대 권투경기의 풍물을 기록영화 이상의 꼼꼼함으로 되살려냈다. 그래도 곽 감독은 불만스런 게 있었다. “어떤 사람을 영화에서 캐릭터로 만들 땐, 피상적인 걸로는 안 됩니다. 그 사람의 목소리, 버릇, 걷는 폼, 마 이런 걸 구체적으로 얘기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되는 겁니다. 김득구의 그런 걸 아는 사람을 찾아야 했죠.” 뭔가 미진한 2고를 좀더 다듬어 3고를 쓰기 위해 취재에 박차를 가할 때였다. 모든 얘기가 김득구의 친구이자 그 자신 권투선수로 한국 챔피언까지 올랐던 이상봉이란 인물로 모아졌다. 사람들로부터 “그 얘긴 이상봉씨가 정말 잘 알텐데…”란 답이 계속 돌아온 것이다. 그에 관한 소식은 그가 영등포에서 육체미 체육관을 하다 아이엠에프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는 정도였다. 스태프는 영등포 일대의 모든 육체미 체육관에 전화를 돌렸다. “사장님 계십니까? 혹시 이상봉씨라고 모르십니까?” 이 두 마디가 전화 취재의 모든 메뉴였다. 이씨가 오스트레일리아에 있다는 건 백여 통의 전화를 돌린 뒤 알게 됐다. 곽 감독은 그 다음날 바로 오스트레일리아행 비행기를 탔다. 지난해 9월의 일이다. 그로부터 〈챔피언〉의 김득구는 몸가짐과 습관과 즐겨 불렀던 노래와 말투와 삶의 잔잔한 고뇌 따위를 얻게 됐다. 김득구가 조용필의 〈정〉을 개사해 즐겨 불렀다는, (영화에선 유오성의 나지막한 목소리로 깔리는) “권투란 무엇일까/ 때리는 걸까/ 맞는 걸까/ 때릴 땐 꿈속 같고/ 맞을 땐 지옥 같아” 하는 노래에서부터, 김득구에 관한 숱한 디테일이 이상봉씨로부터 나왔다. “이때부터 시나리오에서 ‘내레이션’으로 처리했던 부분들이 거의 없어지고 대사로 바뀝니다.” 내레이션이 대사로 바뀐다는 건 그만큼 캐릭터가 생생하게 자기 모습을 그려 보여준다는 의미다. 비운의 권투선수를 스크린에 불러들이는 지노귀굿에 혼신의 힘을 다 쏟았던 곽 감독은 〈챔피언〉 후반작업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벌써 다음 작업에 들어간 상태다. “다음 작품은 코미디입니다. 죽은 이의 삶을 그리는 작업은 사실 제게도 매우 힘겨웠습니다. 그래서 저 자신도 좀 부추길 겸 코미디를 할 겁니다.” 곽 감독은 부산고 동창인 양중경(36) 대표와 함께 차린 제작사 진인사 필름에서 다른 감독의 작품을 제작하는 일에도 관여한다. 박흥식 감독의 〈연〉이 그 첫 작품이다. “남의 작품 뒷바라지하는 건 처음이지요. 그동안 엄마 노릇만 했다면, 아버지 노릇도 한번 해보는 거죠.” 글 이상수 기자leess@hani.co.kr △ 1982년 링에 쓰러진 뒤 마지막 힘을 다해 일어나려던 김득구 선수의 모습(위·한겨레 자료사진)

저작권 연장하면 영화복원 득일까 실일까

저작권 보호가 고전 영화들을 되살리는 일에 득이 될까, 실이 될까. 저작권 문제가 할리우드 스튜디오들은 물론, 비디오 및 디브이디 업계와 텔레비전 방송 등을 망라하는 핫이슈로 떠올랐다. 최근 대법원이 1998년 의회에서 통과된 저작권 연장법안을 재검토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98년 지적 재산권 보호기간을 75년에서 95년으로 20년 연장한 소니 보노 법안에 대해 한 인터넷 자료수집가가 소송을 제기하면서 열띤 논쟁에 불을 붙인 것이다. 대법원의 재검토 결정은 20세기 예술인 영화 분야에서 특히 민감한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만약 대법원이 저작권 연장을 뒤집는다면 무성영화 시대와 초기 유성영화 시대에 만들어진 거의 모든 미국영화들의 저작권이 소멸돼 누구나 비디오제작과 인터넷을 통해 맘대로 유통하고 사용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영화계가 경험하지 못한 대규모 개방이 이뤄지는 셈이다. 현재 연장 찬성론자와 반대론자의 의견이 팽팽히 맞서고 있는데 공교롭게도 이 논쟁의 한가운데 서 있는 작품은 프랭크 캐프라 감독의 〈멋진 인생〉이다. 양쪽 모두 이 영화의 사례를 들어 각기 설득력 있는 주장들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저작권 연장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만약 이 영화의 저작권이 종료되지 않았다면 아직도 이 영화는 먼지가 수북이 쌓인 채 스튜디오 자료실에서 썩고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개봉 당시 흥행에 실패해 잊혀졌던 영화가 저작권 종료 뒤 티브이를 통해 방영되면서 재발견됐고, 크리스마스 시즌 최고 인기영화로 자리잡게 되었다는 것이다. 저작권이 소멸되면 많은 사람들에게 노출돼 재발견될 기회를 잡을 수 있다는 논리다. 반면, 연장 찬성론자들은 비디오제작사들이 너도 나도 복사판을 남발하는 바람에 시장이 질나쁜 캐프라 영화로 넘쳐나 오히려 대중화에 방해가 됐다고 주장한다. 저작권이 풀려도 최상의 화질을 보장하는 원본 네거티브는 저작권을 지녔던 스튜디오 소유이기 때문에 비디오업자들은 손에 넣을 수 있는 35㎜, 혹은 16㎜ 프린트에서 비디오를 뜰 수밖에 없다. 〈멋진 인생〉은 스튜디오 쪽이 영화 속에 사용된 음악을 꼬투리 잡아 저작권을 갱신하는 데 성공했고 그런 뒤에야 많은 돈을 들여 작품을 복원하고 고화질의 비디오와 디브이디를 출시했다. 〈멋진 인생〉은 지금도 매년 75만장 가량의 비디오가 팔려나갈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는데 이는 여러 가지 복사판이 나돌 때의 판매고를 훨씬 웃도는 것이다. 저작권만이 높은 화질을 보장해 오히려 관객들을 증가시킨다는 논리이다. 저작권 문제는 특히 상업성은 떨어지지만 보존 가치가 큰 흑백영화들의 복원과 관련해 많은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연장 찬성론자들은 고전영화의 경우 제대로 복원을 하려면 최소한 2만5천달러에서 25만달러가 드는데 자본회수가 보장되지 않을 경우 가뜩이나 자금조달에 어려움을 겪는 영상자료원이나 이윤을 추구하는 스튜디오들이 투자를 꺼리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반대론자들은 이는 스튜디오들의 연막에 불과하며 디지털시대에 좀더 싼 값에 복원할 수 있는 방법들이 얼마든지 있다고 반박한다. 오히려 저작권 연장은 상업성이 떨어지는 영화들이 재발견되고 사람들에게 노출될 기회를 박탈한다는 것이다. 영화의 저작권 문제는 올 가을 집중 논의돼 이르면 올해 말, 늦어도 내년 초에는 결판이 날 예정이다. 로스앤젤레스/이남·영화 칼럼니스트

“그땐 스틸이 영화가 제작중이라는 증거물이기도 했어”

2000년 4월8일부터 15일까지 8일간에 걸쳐 열린 이탈리아영화제 IMMGINI DAL FESTIVAL(14회)을 찾은 관객은 색다른 전시회를 경험한다. 먼 나라 한국으로부터 왔다는 한 스틸작가의 전시회장, 그 나라의 먹거리인 무, 배추, 오이, 고추, 마늘 등이 놓여 있는 세트 가운데, 디자이너가 남대문에서 직접 공수했다는 고운 한지 위에 한국영화 스틸들이 차곡차곡 전시돼 있었다. 스틸 인생의 계기가 된 <유관순>(감독 윤봉춘, 1948), 한국 최초의 입체영화였던 <임꺽정>(감독 유현목, 1961)과 <몽녀>(감독 임권택, 1968), 최초의 시네마스코프영화인 <생명>(감독 이강천, 1958, 안양종합촬영소 1기생)을 비롯한 16개 작품 64컷의 스틸이 전시된 전시회장 안은 벽안의 관객으로 발디딜 틈 없이 북적였다. 지난 5월28일 63빌딩 별관 코스모스홀에서는, 50여년간 한국영화의 스틸을 찍어온 백영호 선생의 팔순 잔치 및 기념 사진전이 열렸다. 그날은 지방선거를 위한 선거 사무소가 일제히 문을 연데다, 마침 칸영화제에서 돌아온 세명의 승전 노병을 위한 축하파티가 있던 날이어서 오랜 지기들만이 자리를 빛낸 조촐한 잔치였다. 심우섭 감독은 축하 인사말에서 “20년이 지난 뒤에도 백 선생의 사진전을 감상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고희를 기념하는 사진전을 시작으로 10년간 꼬박 8번의 전시회를 가진 바지런한 백영호 선생을 향한 더없이 적절한 ‘칭찬’이자 ‘격려’였다. 48년 윤봉춘 감독의 <유관순> 촬영현장에서 카메라를 든 이후 지금껏 100여 작품 5만여컷의 스틸을 찍었으며, 한국영화인 최초로 유럽에서 한국영화 사진전을 연 바 있는 살아 있는 한국영화의 역사책, 백영호의 그 치열한 사진인생, 영화인생 속으로 들어가본다. 편집자----- 인터뷰를 할 때면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 바로 “스틸이란 무엇인가?”야. 요즘이야 영화가 개봉되기 훨씬 이전부터 영화의 줄거리와 배우 인터뷰, 대표적인 장면 등이 인터넷이나 텔레비전을 통해 소개되니까 포스터와 팸플릿이 중요한 대접을 받지 않지. 하지만 50년대 영화판에선 포스터와 전단지가 유일한 홍보수단이었어. 하나 더 들자면 극장에 붙이는 배우들 사진 정도였지. 홍보물이야 그 정도였지만, 스틸이 쓰이는 목적은 따로 있었어. 지금도 마찬가지겠지만, 유명 감독과 유명 배우 이름이 박힌 시나리오 앞에선 투자자들이 앞다투어 돈을 내놓지만, 그렇지 않은 감독들은 투자를 받기가 곤란했어. 물론 시나리오가 탄탄하고, 중요 배우들을 골라 섭외해놓으면 투자를 받는 데 별 무리가 없었지만, 문제는 투자자들의 의심이었지. 실제로 영화 속에 그 배우가 등장하는지 크랭크인 일정에 맞춰 영화가 제작되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확인받고자 했어. 따라서 현장 사진이 증거물로 채택되곤 했지. 영화의 내용뿐만 아니라 촬영현장의 분위기와 주요 사건까지 담아내는 스틸을 통해 현장에 직접 오지 않고도 제작상황을 가감없이 전달받을 수 있었으니까. 그러다보니, 하루 일정이 끝나면, 다른 스탭들은 쉴 채비를 하는데, 스틸맨들은 부지런히 그날의 현장을 담은 사진을 현상해야 했어. 제작사와 투사사에 넘길 사진들이었지. 밤 늦게까지 가정집에 딸린 암실에서 사진과 한바탕 싸움을 하고 나면 희뿌옇게 날이 밝았지. 그럼 한숨도 못 자고 현장에 나가야 했고. 영양주사 맞으며 윤봉춘 감독의 <유관순> 찍어 스틸을 처음 찍은 작품은 윤봉춘 감독의 48년작 <유관순>이었지만, 내게 ‘이게 진짜 스틸이다’라고 느끼게 한 작품은, 수도영화사 안양종합촬영소 1기생인 이강천 감독이 만든 최초의 시네마스코프영화 <생명>(1958- 이 숫자는 실제 제작연도라기보단 검열을 통과한 연도라고 보는 것이 적당함. 편집자)이었어. 제목처럼 그 영화를 통해 스틸맨으로서의 생명을 얻었다면 말장난일까. 내겐 첫 영화 못지않은 감회를 안겨주었지. 실은 무척 고된 일정의 연속이었어. 그 영화 끝나고 한동안 ‘영화란 이렇게 힘이 드는 작업인가’하고 치를 떨기도 했으니까. 일주일간 잠자리 근처에도 못 가고 작업을 해댈 땐, 걱정이 된 감독이 나서서 영양주사를 맞춰 줄 정도였지. 그 일이 끝나고, 2기생들의 작품인 <낭만열차>(1959)를 찍을 땐 일이 너무 수월한 거야. 도대체 어떤 게 영화의 진짜 얼굴인지 분간이 안 가더라고. ‘그래, 그럼 어디 다시 한번 해보자’라는 생각에 3회 작품 <애정>(초기의 제목, 나중에 어떻게 바뀌었는지는 모름. 을지극장 배급 검열까지 받음)과 4회 작품인 <지옥은 만원이다>에 연속으로 참여했어. 4회 작품이 끝나고, 이번엔 미 국무성에서 안양촬영소를 빌려 <고요한 한국의 아침>이라는 국방 홍보영화를 찍을 때 함께 작업을 했어. 그때 미국이 얼마나 세심하게 영화를 찍는지 놀란 사건이 하나 있었어. 크랭크업을 한 뒤 촬영단이 모두 미국으로 철수를 했는데, 신 하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다시 한국에 돌아온 거야. 아이들이 와글와글거리는 장면이었는데 불과 1∼2분짜리 신이었거든. 그 꼼꼼함과 완벽성에 혀를 내두를 정도였어. 그 영화를 끝으로 안양촬영소는 계속된 재정난을 이기지 못하고, 수도영화사 사장이었던 홍찬의 손을 떠나 신상옥 감독에게 넘어갔지. 안양촬영소가 부도 처리되기 직전 나는 이미 프리랜서를 선언하고, 충무로로 나온 상황이었어. 안양촬영소 기술스탭으로 월급 삼만환을 받으며 호기롭게 시작했던 내 첫 직장생활은 그렇게 막을 내렸지. 충무로에 발을 들여놓을 땐 그렇게 어려운 생활이 기다리고 있을 줄 몰랐어. 하루종일 충무다방에 죽치고 앉아, 혹시나 아는 감독이 들어올까, 작품을 맡기지 않을까 기다리던 나날이 계속됐고, 신접살림이 꾸며진 집으로 돌아갈 땐 국수 한 다발을 끼고 들어가는 걸 다행으로 여길 정도였지. 해질 무렵의 햇살 한줄기에 매혹되다 사진과 처음 조우한 날을 기억하라고 하면, 첫 촬영 장소가 떠오르는 게 아니라 조그맣고 허름한, 어린 시절의 가게 하나가 떠올라. 보통학교를 다닐 때였어. 주전부리를 사러 가게집엘 갔는데, 해질 무렵이라 가게 안이 어두컴컴했지. 아직 한 가닥 남아 있던 햇살이 판자 틈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데, 그 순간 이상한 광경을 본 거야. 길가에 지나가는 사람이 거꾸로 된 모습으로 벽에 비치는 거야. ‘이상하다, 아 참 이상하다’ 싶었지. 그 나이에 뭘 알겠어. 그냥 고개만 갸우뚱하고 말았지. 그게 사진의 원리라는 건 알게 된 건 열여덟살 먹고 나서였어. 일제 치하에 일본인이 경영하던 사진관에 우연히 문하생으로 입문하게 됐지. 어려운 형편에 카메라를 만질 기회조차 없던 나에게 운명적인 기회가 다가온 거지. 3년인가 4년인가 일하는 동안, 웬만한 종류의 카메라는 거뜬히 조작할 수 있는 실력을 쌓게 됐어. 실력을 인정받게 되자 일본으로, 만주로 원정 촬영을 가기도 했어. 바쁜 나날이었지만 돈만 모이면 조그마한 사진관을 차려야겠다는 부푼 꿈이 있던 시절이었어. 그러던 중 징용병으로 발탁이 됐지. 2차대전에 뒤늦게 가담한 소련으로 인해 다급해진 일본이 인정사정 보지 않고 징병을 하기 시작했거든. 불과 몇달에 불과하지만 함경북도 회령의 비행대대로 투입되어 비행기 조립과 정비를 도맡게 됐지. 기계를 만질 수 있게 된 건 오히려 내게 도움이 됐어. 회령에 머물던 대대가 청진까지 진격했다가 소련군의 기세에 밀려 두만강까지 후퇴, 다시 길주로 빠져서 원산으로 돌아오기까지의 일정의 한마디로 죽음의 여정이었어. 수용열차에서 사흘, 나흘 굶기는 보통이었고, 대전에 도착해서야 비로소 주먹밥 한 덩어리를 맛볼 수 있었지. 구술 백영호/ 스틸작가54년간 영화현장 사진에 몸담음<유관순> <생명> <임꺽정> <만다라> <바보사냥> <바보선언> <아다다> 등 100여 작품 5만여컷의 스틸작업정리 심지현 simssisi@dreamx.net·사진 정진환 jungjh@hani.co.kr

아르노프스키 의 영상에 새긴 ‘낙서’ 두편

파격적이고 강렬한 영상으로 주목받고 있는 미국 감독 대런 아로노프스키(33)의 데뷔작 〈파이〉와 두 번째 작품 〈레퀴엠〉이 12일 한꺼번에 개봉한다. 수입사 미로비젼은 직영극장 미로 스페이스 개관 기념작품으로 〈레퀴엠〉을 개봉하고, 매일 마지막회에는 〈파이〉를 상영한다.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난 아로노프스키는 그래피티(낙서, 문자벽화)를 그리며 십대 시절을 보내다 영화와 애니메이션을 공부하기 위해 하버드에 진학한다. 대학 1학년 때 우연히 도서관에서 자신의 출생지 지명이 눈에 띄어 읽기 시작한 허버트 셀비 주니어의 장편 〈브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로 인해 그는 셀비의 작품을 영화로 만들겠다는 갈망을 품는다. 그의 두 번째 작품 〈레퀴엠〉(원제 : Requiem for a Dream)은 셀비의 원작 소설을 소원대로 셀비와 함께 각색한 것이다. 하버드 영화과 졸업반 때 만든 〈슈퍼마켓 스위프〉(출연 숀 굴레트)로 전미학생아카데미상을 받은 그는 5년 뒤인 1996년 단짝인 숀 굴레트와 함께 〈파이〉를 구상해 98년 완성한다. 친구들에게 6만달러를 빌려 만든 〈파이〉는 그해 선댄스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하며 흥행에도 성공해 350만달러를 벌어들였다. 이어 99년 작업에 착수해 2000년 완성한 두 번째 작품 〈레퀴엠〉으로 아로노프스키는 현란하고 극단적인 스타일리스트로서 자신의 입지를 확고하게 다졌다. 두 편의 성공에 힘입어 아로노프스키는 현재 배트맨의 다섯 번째 연작인 〈배트맨 : 이어 원〉(주연 커트 러셀)의 감독을 맡아 촬영을 마치고 후반작업중에 있다. 그가 매만진 배트맨이 어떤 모습이 될지는 뚜껑을 열어봐야겠지만, 일단은 독립영화에서 출발해 할리우드 주류 감독으로 매끄럽게 편입해 들어간 경우라 할 수 있다. 중독된 영혼을 위한 '레퀴엠' 혼자 사는 세라 골드파브(엘런 버스틴)는 초콜릿 먹으며 텔레비전 다이어트 강의 쇼를 보는게 유일한 낙이다. 어느 날 이 쇼의 출연 제으를 받고 들뜬 세라는 젊은 시절 입던 빨강 드레스가 맞지 않자 알약을 복용하는 위험한 살빼기를 감행한다. 세라의 외아들 해리(자레드 레토)는 어미의 분신과도 같은 텔레비전을 거듭 팔아치우며 마약 살 돈을 마련한다. 해리와 여자친구 매리언(제니퍼 코넬리)은 해로인에 빠져 달콤한 환상을 즐긴다. 알약의 복용횟수를 늘려가던 세라는 약물중독자로 변해 오지 않는 방송사의 연락을 애타게 기다리며 폐인으로 변해간다. 해리는 마약 값을 벌기 위해 친구 타이런(말론 웨이언스)과 마약딜러로 나서지만, 타이론은 거대한 조직에 짓밟히고 해리는 팔이 썩어들어간다. <레퀴엠>은 환상에 중독된 영혼을 위한 진혼곡이자, 깨어진 꿈의 잔해에 그린 암울한 그래피티다. 대중매체의 성공신화에 중독되든 약물에 중독되든 주입된 환상은 깨어날 때 환멸로 변한다. 감독은 여름·가을·겨울(봄은 없다!)로 구성된 세 장에서 세라, 해리, 메리언 세 인물이 예정된 파멸을 향해 치닫는 과정을 잔인하리만큼 정교하게 교차편집해 보여준다. 여기에 헤로인 흡입-아드레날린 분비-동공 확대를 묘사한 상업광고 같은 화면을 후렴처럼 되풀이해 보여줌으로써 작품에 독특한 리듬감과 색깔을 입혔다. 크로노스 현악사중주단이 연주한 클린트 맨셀의 고전풍 소품은 신경질적인 현의 떨림을 더해가며 중독의 덫에 걸린 현대인의 운명을 애도한다. 그러나 '마약 반대'의 메시지가 너무 강렬한 나머지 현대인을 중독으로 몰고 가는 매커니즘에 대한 통찰은 상대적으로 가난해 보이는 면이 없지 않다. “극단적 영상이 관객을 중독시키는 영화”라는 찬사와 더불어 “흥분제에 대한 영화학과 학생의 습작 같다”는 혹평을 동시에 받은 건 이 때문일 것이다. 이성의 한계값 파이 아로노프스키의 데뷔작이자 출세작인 〈파이〉는 어느 천재 수학자의 이성과 광기에 관한 이야기다. 여섯 살 때 “태양을 똑바로 쳐다보지 말라”는 엄마의 말을 어기고 태양을 직시한 맥스 코엔(숀 굴레트)은 수학에 천부적인 머리를 지녔다. 모든 현상의 배후에는 수학의 언어가 숨어 있다는 뉴턴적인 세계관을 지닌 맥스는 세 부류의 사람과 부닥친다. 첫 번째는 그의 천재성을 주식투자에 이용해 일확천금을 노리는 무리이고, 두 번째는 유대교 신비주의인 카발라에 나오는 신비의 숫자 216의 비밀을 캐려는 무리들이다. 세 번째 부류인 스승 솔은 진리의 빛을 본다는 행위 자체가 광기와 죽음으로 인도하는 길이라고 믿는 사람이다. 한 대목도 중복되거나 순환하지 않고 무한히 이어지는 값을 지닌 ‘파이’는 인간의 이성이 다다를 수 없는 한계를 상징한다. 초현실주의적 분위기에 공상과학과 미스터리의 요소를 배합한 이 실험적 흑백필름에서 감독은 “태양을 본다”는 은유적 행위를 통해 이성의 끝간 데를 보여주려 한다. 이상수 기자leess@hani.co.kr (사진 : <파이>에서 천재적인 두뇌의 소유자 맥스는 세상 어디에나 숫자로 풀 수 있는 일정한 패턴이 있다고 믿으며 암호해독에 골몰한다.)

해외신작 <어바웃 어 보이>

“나는 인생이 텔레비전 쇼라고 생각해. 나는 윌 쇼의 주인공이고 윌 쇼는 앙상블 드라마가 아니야.” 38살의 노총각 윌(휴 그랜트)은 남들, 특히 여자들과 어떤 약속도 하기 싫어한다. 뭘 기대하기도 싫고, 기대받기도 싫다. 즐길 수 있으면 그만이다. 부모가 물려준 유산으로 CD, 비디오, 각종 전자제품에 묻혀 살면서 여러 여자를 전전하는 윌은 스스로를 ‘섬’ 중에서도 매일같이 파티가 열리는 ‘이비자섬’이라고 말한다. 성장이 결혼해서 가족을 꾸리는 것이라고 말해본다면, 이 친구는 분명히 성장을 거부하고 있는 또 다른 피터팬이다. 구속감 없이 연애하기 좋은 상대가 미혼모라는 판단 아래 미혼모 클럽에 찾아간 윌은 미혼모 피요나(토니 콜레트)의 12살짜리 아들 마커스(니콜라스 홀트)를 만나게 된다. 마커스는 학교에서 힘센 아이들에게 놀림당하고, 집에서는 외로움을 못 이겨 소파에서 우는 엄마 피요나와 대면하며 힘겹게 산다. 윌은 피요나 아닌 다른 미혼모 레이첼(레이첼 와이즈)에게 다가서기 위해, 레이첼 아들과 친구인 마커스를 잘 대해주지만 그러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세계관이 변하기 시작한다. 닉 혼비의 베스트셀러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 <어바웃 어 보이>를 두고 <뉴욕타임스>는 ‘어바웃 투 보이’라는 제목이 더 적절하다고 썼다. 성장을 거부하는 38살짜리 ‘피터팬’이 12살짜리 ‘길 잃은 소년’을 만나, 서로의 성장을 돕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아주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지만, <아메리칸 파이>의 감독인 웨이츠 형제의 연출이 따듯하고 정겹다는 평단의 반응과 함께 영국 개봉 당시 <패닉 룸>을 누르고 2주 연속 흥행 1위를 차지했다. <노팅힐> <브리짓 존스의 일기> 등 흥행작을 내놓았던 영국 워킹타이틀필름과 유니버설의 파트너십이 또 한번 개가를 올린 영화다.임범